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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5

#36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2

#36화.

과거에 대전쟁이 있었다.

앙숙이었던 무림계와 마법계의 해묵은 갈등은 결국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전쟁으로 번졌다. 세계는 무림계와 마법계로 양분되어 처절하게 싸웠고 거대한 규모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기술의 발전을 불러왔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고 검붉은 화마가 도시들을 잡아먹으며 피어오르자, 그들은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전쟁병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일신의 무력으로 전장을 휩쓸어버리는 적군의 실력자를 요격할만한 병기가 필요했다.

먼저 마법계 기업들이 분발하며 마법공학 분야에서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다. 기괴한 마법공학 병기들의 포격아래 전선의 무인들이 쓸려나가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무림계 기업들도 그에 대항할 병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을 주축으로 뭉친 무림계 기업들과 그 지지 세력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출자하여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계획했는데 개중 하나가 바로 「앙굴리마라 프로젝트」

앙굴리마라는 하늘이 내린 손재주를 타고났다는 이족의 난쟁이들과 무림계를 지원하는 대형 무기 제조사들의 합작 아래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7레벨급의 전투 휴머노이드 300기, 그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로 따져도 굉장한 전력이었다.

앙굴리마라는 탄생부터 데이터베이스에 각인된 '열반(涅槃)' 이라는 가상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적진의 마법사들을 가차없이 학살하고 그 손가락을 잘라 인골 염주를 꿰었다.

마법사 백 명을 죽여 손가락 천 개를 꿰면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심어놓은 전쟁병기는 태초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했다.

게다가 어지간한 마법은 무시해버리는 초고강도 프레임에 마력 방해역장, 고절한 무공과 최신식 고성능 화기들까지. 당대의 기술을 집약해놓은 무림계의 병기 앞에 마법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하지만 정말로 마법사의 손가락 천 개를 채워 염주를 꿴 앙굴리마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몇 없었다.

과반수 이상의 기체는 고위 마법사들의 광범위 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전장 한복판에서 스러져갔고, 적진 한가운데로 짓쳐들어간 앙굴리마라들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신경을 기울이는 무림계의 인물들은 없었다.

몇 년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양측의 세력이 워낙 팽팽한 탓에 지지부진해지는 전쟁의 향방과 이제 경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인류의 터전을 위협하기 시작한 언데드로부터 심각성을 느낀 무림계와 마법계는, 수많은 전사자를 냈던 전쟁병기들과 전쟁물자를 '연방' 의 이름 아래 폐기한뒤 소모적이고 상호파괴적인 대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전쟁이 막을 내렸을 때, 방전된 채로 시체와 기계더미에 엎어져 있거나 고장 난 채로 장벽 밖에 남겨진 소수의 앙굴리마라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열반의 단초를 찾아 시티 장벽 밖의 광활한 대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장벽 밖의 휴머노이드와 안드로이드를 뭉뚱그려 '방랑자' 라고 불렀다.

앙굴리마라들은 원치 않는 방랑자가 되었고, 그 신세는 앙굴리마라 16번 기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16번 기체는 대전쟁의 포화속에서 살아남아 극적으로 99명의 마법사를 죽이고 그들의 손가락을 염주로 꿰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한 명의 마법사를 끝내 찾지 못했고, 이내 배터리가 떨어져 기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가끔 태양이 내리쬐는 날에는 그 빛을 패널로 받아 약간은 기동할 수 있었는데, 그 주기가 1년에 5일 정도 되었다.

열반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방전 되었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하며 마법사를 찾아다니던 16번 기체는 어느날 마법사의 손가락 천 개를 꿰는것에 성공한 앙굴리마라와 마주쳤다. 16번 기체가 그 앙굴리마라에게 너는 열반을 이루었느냐고 묻자, 마주친 앙굴리마라는 자신도 열반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 순간, 16번 기체의 머릿속에서 번뇌가 잉태하여 데이터베이스에 뿌리를 내리고 무서운 속도로 싹을 틔웠다.

찾아온 번뇌는 곧 '의심'으로 바뀌었고.

— 그렇다면 열반이 대체 무엇일까?

의심은 곧 감정이었으니, 16번 기체는 그날 '자아'를 발견한 것이었다.

수십 년의 긴 세월을 방랑자로 살면서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를 나누는 기준인 감정과 자아까지 스스로 터득한 전대(前代)의 병기.

그것이 레반의 앞에 있는 존재였다.

[ 소림의 방장께서 내게 이르시길, ]

앙굴리마라는 노이즈가 심하게 낀 기계음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풀어냈다.

[ 열반을 이루어낼 단초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법사를 죽이고 손가락 천 개를 잘라 염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천 개의 손가락을 꿰면 천 가지 잡념이 단번에 소멸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니, 후에 깨달음을 얻어 열반이라는 최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법사의 손가락 천 개를 꿰어낸 앙굴리마라는 방장께서 말씀하셨던 열반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앙굴리마라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목석처럼 선 채 말했으나, 기루 안에 있는 모두가 그 요상한 기세에 눌려 섣불리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쿠지직!

기루의 내벽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간 앙굴리마라의 팔이 깊이 매장된 전선줄을 한 움큼 뜯어 몸에 가져다댔다.

전선줄이 대거 끊겨버리자, 기루를 환히 밝히던 네온 조명과 디스플레이들의 불빛이 꺼지고 삽시간에 칙칙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루 안.

파지지직-

앙굴리마라의 복부에서 허연 연기와 함께 전류가 거세게 튀며 발광한다. 싯푸른 전광이 생난리를 치며 사방에 뜨거운 불똥을 마구 튀겨댔다.

그 행위에 앙굴리마라의 기운은 더욱 증폭되어, 사람의 뼛속을 깊숙이 파고들 듯한 살기가 도처에 내리깔렸다.

"······."

광경을 바라보던 레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나는 구백 구십 개의 손가락을 염주에 꿰었으나, 나머지를 마저 꿴다고 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젠가 마법사를 만나 이 의심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

꽤 거친 방법으로 방전된 배터리팩을 충전하던 앙굴리마라는 레반에게 하나의 질문을 건넸다.

[ 마법사, 당신은 열반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

츠지직-!

푸르게 빛나는 앙굴리마라의 몸체. 오랜만에 신선한 전류맛을 본 앙굴리마라의 배터리 팩은 전기를 쉴 새 없이 빨아들였다.

이윽고 충전이 끝나 앙굴리마라의 비대해진 존재감이 기루 내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꺅꺅거리며 비명 지르던 안드로이드 기녀들과 문도들은 이전과 판이해진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레반은 그 물음을 곱씹었다.

열반이라······.

난해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특히나 소림을 대머리 땡중 취급하는, 속세에 찌든 무인이자 몇 번의 전생을 겪으며 '신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라고 누누이 말해왔던 레반에게 종교의 이상향이란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레반이 입을 열었다.

"우선 다른 이들은 밖으로 내보내지. 마법사가 아니니 네 적이 아니지 않나?"

그런 레반의 제안에 앙굴리마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여량천과 그 밑의 문도들. 레반은 분주해진 그들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량천이는 발이 아주 빠르구나? 보법을 그렇게 수련해봐라."

"새겨듣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다간 괜히 방해만 되지 않겠습니까? 대기 이 새끼야! 정신 차리고 어서 일어나라! 자리 비워드려야해.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조금 뒤, 땀을 뻘뻘 흘리던 여량천과 삼호문도들이 모두 기루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기는 등평위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가 다 나가버린 그의 철선이 나름 인상적이었다.

"대협, 제가 금방 지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필요 없다."

어차피 이 슬럼가에 남은 실력자는 레반뿐이었다. 확실히 도움을 줄법한 고수인 사무라이도 멀리 떠나버렸다. 누가 오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그가 손을 대강 휘저었다.

"내가 여기서 죽거든 땅에 묻을때 루돌프놈도 같이 순장해버리도록."

"예."

이제 등평위마저 사라지고 레반과 앙굴리마라만이 남아 다시금 고요해진 기루 안.

마치 둥그런 콜로세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검투사들처럼, 서로 마주 보는 형세가 되었다.

[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열반(涅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

"글쎄. 나도 생각을 좀 해보마."

레반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물음에 답하지 못하자, 앙굴리마라의 음성 스피커가 지직대며 그간 쌓아뒀던 의문을 우르르 내뱉었다.

[ 방장께서는 우리 안에도 불(佛)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무당의 장문께서는 우리의 내면에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혼원(混元)이 있기에 나아가야 할 도(道)역시 스스로 구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모르겠습니다. 마법사의 손가락을 꿰어 인골 염주를 만드는 일과 그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

소림의 방장에, 무당의 장문까지.

앙굴리마라의 스피커에서 초거물급 인사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득한 노괴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인물들이라, 레반으로서는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레반은 원론적인 답변을 꺼냈다.

"마법사 백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을 꿴 다른 앙굴리마라가 열반에 들지 못했다고 했으니, 이제 소림의 전대 방장만이 그 답을 줄 수 있겠지. 아직 늙어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

앙굴리마라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레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 조절이 익숙치 않은 안드로이드는 융통성 없는 어린아이와도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딱 그꼴이군.

의미를 모르는 선문답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입술이 삐뚜름히 돌아간 레반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

"답은 소림과 무당에 있다. 나같은 마법사는 네게 답을 내려줄 수 없다."

[ 그것도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

"그렇다면 열반은 허상일 것이다. 누구도 네게 답을 내려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허상이 아니고 무어냐."

[ ······. ]

앙굴리마라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나 결단코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닌지 앙굴리마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목에 기름칠이 덜 되었는지, 아니면 파손으로 파츠들의 결합이 뒤틀어진건지 손톱으로 칠판 긁는 듯한 소음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 나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겠다면······당신의 손가락 열 개를 잘라 염주에 꿰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

"답이 없군."

촤악!

배터리팩 충전이 끝난 뒤 전선다발을 뽑아 바닥에 내팽개친 앙굴리마라는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전신을 뒤덮은 푸른 전류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처럼 점멸했다.

기이잉-

곧이어 앙굴리마라의 팔 부위 파츠들이 자잘하게 갈라지더니 길쭉한 블레이드의 형태로 변화한다. 초진동 블레이드. 당대의 이족 난쟁이, 그러니까 드워프들이 심혈을 기울여 벼려낸 역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블레이드의 칼날만큼은 다른 낡고 녹슨 파츠들에 비해 깨끗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키이이잉-!

벌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다니는 듯한 소음과 고주파가 귓속을 어지러이 간질였다.

레반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듯한데, 나를 죽여봐야 소림의 땡중에게 속은 병신 로봇이라는 증명밖에 되지 않는다. 내 장담하지."

그래도 앙굴리마라가 물러설 기색이 없자, 레반도 별수 없이 칼을 뽑아 자세를 취하고 신속하게 눈알과 머리를 굴렸다.

'전체적으로 많이 낡긴 했군.'

그가 생각하기에 지난 긴 세월 동안 앙굴리마라의 전투 기능이 완벽히 보존되었을 리는 없었다. 한 눈에 봐도 파츠들이 듬성듬성 빠져있는데다 굉장히 낡았으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7레벨급 전쟁병기라면 보통이 아니겠지. 저 얇고 낡아 보이는 프레임은 대형 캐리어의 중장갑만큼 튼튼할 것이다.

심지어 이번 전투에서는 마법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마법사의 마나회로 운용을 방해하거나 마나입자 흡수를 간섭하는 방해역장이 이미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장만 꺼버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레반이 그리 생각한 순간, 어두컴컴한 기루의 저편에서 깜빡이던 안광이 사라졌다.

끼리릭-

길게 잔상을 남긴 칼날이 바로 눈앞까지 닥쳐왔을 땐, 이미 초진동 블레이드의 예리한 날 끝이 레반의 목줄기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레반의 팔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콰각—!

블레이드의 날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파동을 상대로 일말의 검명이 울렸다.

"마력이 느껴지는데 무공도 써서 놀랐나?"

[ ······. ]

레반의 도신에서 어렴풋이 타오르는 도기(刀氣).

앙굴리마라는 자신의 일격에 잘려나가지 않은 레반의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배터리 팩의 출력을 높였다. 마법사가 꺼내든 칼에서 도기가 일렁이고 있음에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속으로 놀란 것은 오히려 레반이었다.

'···만년한철.'

방금의 일격으로 아예 잘라버리진 못해도 충격은 줬어야 했는데, 앙굴리마라의 칼날은 굉장히 멀쩡했다. 세상의 기(氣)가 가득 배어있는 금속인 만년한철을 섞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무림계에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끌어다가 만들었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칼을 맞대고 있는 와중에, 레반의 팔과 손목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맞닿은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근육과 힘줄을 칼날처럼 헤집는 것이다. 그탓에 압축도의 날이 빠지며 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레반이 도를 회수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앙굴리마라가 신형을 빛살처럼 쏘아내며 곧바로 따라붙었다. 레반이 섬뜩한 감각에 상체를 숙이며 도를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유려한 검로를 그린 테크블레이드가 하단으로 뻗던 도를 가볍게 걷어내 버리더니, 표표히 궤적을 그려냈다. 유능제강의 이치가 담겨있는 무당의 태청검법(太淸劍法)이 펼쳐지며 레반의 팔방을 점하고 찔러왔다.

레반이 경공으로 다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신형을 빼낸 레반 대신, 뒤에서 기루를 받치고 있던 두꺼운 기둥이 썩둑 하고 잘려나갔다.

스스스슷-

그리고 저항감 없이 잘려나간 기둥 아래, 번뜩이는 안광이 또 다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즉시 기감을 넓게 펼친 레반이 머리 위를 바라보자, 4층까지 단박에 도약한 앙굴리마라가 기루의 천장을 붙잡고 있었다. 앙굴리마라가 그 손을 놓자 발이 허공을 밟으며 넓은 삿갓 아래의 안광을 어지러이 늘어뜨렸다.

허공을 나풀나풀 밟으며 이동하는 신출귀몰한 보법에 레반은 눈을 찌푸렸다.

'태청검법은 알고 있었는데, 소림의 나한보(羅漢步)까지 내주었나?'

퍼엉!

그때, 앙굴리마라가 허공을 박차며 쇄도했다. 공중에서 내리꽂힌 앙굴리마라의 신형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레반은 돌연, 도날이 위로 올라오도록 칼을 역수로 쥐었다.

수십 년만에 마주한 정파의 무공에 피가 끓었다.

비록 자신을 골로보냈던 화산의 무공은 아니었으나, 저것만으로도 광인의 제자이자 초절의 무인이었던 레반의 혈기를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레반의 단전이 활짝 개방되자, 똬리를 틀고 있던 공력들이 홍수처럼 밀려나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정순한 내공이 기경팔맥을 내달리며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곧, 둘의 신형이 뱀처럼 얽혀들었다. 앙굴리마라의 블레이드가 아까처럼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레반의 목을 노렸다.

'오형검법(忤形劍法) 일 초식. 출(出).'

콰지직!

그러나 기척도, 일련의 준비 동작도 없이 출수되어 태청검법의 검로를 순식간에 비집고 들어간 레반의 도가 앙굴리마라의 복부와 하단을 연이어 베어냈다.

앙굴리마라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생전 처음 보는 검에 레반이 작정하고 펼친 검법을 일 합도 방어하지 못했다. 애초에 무인과의 전투를 상정하고 제작된 병기가 아니었다.

콰직-

기를 덧씌운 압축도가 옆구리 프레임과 발목을 강하게 긁고 지나가자, 곧장 대항하려는 듯 앙굴리마라의 어깨 파츠가 개방 되었다.

철컥. 철컥.

하지만, 거기에선 뒤틀린 금속의 파찰음만이 들려왔다.

방치된 세월이 너무도 오래된 나머지, 원래 어깨 파츠가 열리면 격발 되었어야 할 자이로젯 라이플의 유도 탄환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다른 곳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 ······. ]

그간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흘렀다.

녹슨 몸을 이끌고 과도하게 움직임인 것도 모자라 충격들이 하나 둘 덧씌워지니, 앙굴리마라의 오래된 파츠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몇 개의 작은 파츠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고, 제 기능을 잃고 짐이 되어버린 파츠들도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무기는 초진동 테크블레이드 뿐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멈춰선 앙굴리마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서걱-

너덜대며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파츠들을 가차없이 자르고 뽑아냈다. 거기에는 레반의 공격을 받아 내구도가 다했는지 삐걱거리던 한쪽 발목도 있었다.

초진동 테크블레이드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여지없이 내장된 화기와 낡은 파츠들이 철그렁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독에 당한 팔을 잘라내는 검객의 모습과도 같았다.

어느덧, 덜렁이던 파츠들을 전부 썰어낸 앙굴리마라의 전신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나며 시리도록 밝은 빛을 발산하는 붉은 안광이 터져나왔다.

#37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3

#37화.

'어디서 본 장면이군.'

파츠를 다 잘라낸 앙굴리마라를 보며 륭과의 일전을 떠올린 레반은, 어쩐지 오른팔이 잘려나갈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을 빳빳하게 당겼다.

쾅!

창졸간, 앙굴리마라가 한 발로 바닥을 박찼다.

이전보다 가볍고 신속해진 신형이 단숨에 쏘아져 레반의 지척에 나타났다. 점과 점을 이어 그은 듯한 안광의 잔상만이 남았다.

곧, 도광이 번뜩이고 무수한 섬광이 교차한다. 막대한 기의 파동이 기루의 바닥과 집기들을 뒤집어엎었다.

콰앙! 콰르릉······!

큰 싸움이 벌어진 기루가 으레 그렇듯, 내부는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자욱히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도광만이 연신 번쩍였다.

커다란 기파가 쉬지않고 메아리치자, 이전에 잘렸던 두꺼운 기둥이 마침내 둔중한 굉음을 내며 사선으로 흘러내렸다. 모래 폭풍의 피해에서 갓 보수공사를 끝낸덕에 깔끔했던 기루가, 당장 무너져내려도 이상치 않을 폐허로 변해간다.

'강하지만, 분명 오래는 못 간다.'

앙굴리마라의 광폭한 검격을 힘겹게 흘려내던 레반이 미간을 좁혔다. 저 로봇은 온갖 파츠를 잘라내 이미 균형이 무너진 참이다. 당장은 완급 조절따위 없는 강공에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그렇게 레반이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분배해가며 신중히 대응하고 있을 때였다.

쾅!

예고도 없이 일순간 도약한 앙굴리마라가 나한보의 수법으로 레반의 뒤를 점하고는, 테크블레이드를 횡으로 휘둘렀다. 유함을 강조하는 무당의 검법을 사용함에도, 패도적으로 보일만큼 강맹한 검격.

레반이 이전처럼 도를 휘둘러 그 검격을 막아냈다.

바로 그때, 앙굴리마라의 반대쪽 팔이 북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환되더니, 거대하게 증폭시킨 기파가 울려퍼졌다.

—!!!

음공(音功)과도 같은 공격에 초진동 테크블레이드를 막아내던 레반의 귀가 멀고 몸에 힘이 빠져 후들거렸다. 자세가 흐트러지자, 앙굴리마라가 더욱 광폭하게 테크블레이드를 내리쳤다. 도기는 흩어지고 압축도의 날은 모두 뭉개져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챙강-

중간부터 부러져나간 압축도의 도날.

가로막고 있던 도가 사라지니, 흉측한 초진동 칼날이 레반의 머리를 쪼갤듯 떨어졌다.

즉시 도병을 던져버린 레반은 팔을 내어주고 몸을 뺄 각오를 다졌다. 레반의 모든 공력이 왼팔에 모이며 호신기를 연성했다. 이래도 잘려 나갈테지만, 급소를 지켜 목숨이나마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그때.

"?"

꽈드드득-

갑자기 쇠붙이가 뜯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레반이 위를 바라보자, 앙굴리마라의 초진동 테크블레이드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어 있었다. 아주 조금만 더 내려왔어도 왼팔이 썩둑 잘려 나갔을 것이다.

[ ······. ]

앙굴리마라는 전신 프레임에서 검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이내 테크블레이드가 팔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며 날을 감추었다.

레반의 예상대로, 파츠를 다 뜯어낸 앙굴리마라쪽이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먼저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힘이 다해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앙굴리마라의 안광이 서서히 제 빛을 잃어간다.

이윽고, 폐허가 된 기루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 * *

퍼엉—!

배터리팩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폭음이 들린다. 임계점 이상으로 끌어올린 전압을 견디지 못한 팩과 회로들이 펑펑 터지며 흑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구우우웅···.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아까부터 위태롭던 기루 기둥이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기둥이 기루 내의 수도관이라도 건드렸는지 어디선가 물줄기가 터져나와 앙굴리마라의 둥근 삿갓 위로 떨어졌다.

전류에 달궈진 삿갓에 닿은 물줄기는 처음에는 하얀 수증기가 되어 흩어지다가 나중에는 물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치이익-

그런 한낱 물줄기에도, 한 다리로나마 꼿꼿이 서있던 앙굴리마라의 몸체가 휘청였다. 한 다리로 선 채 물줄기를 버티는 모습이 마치 폭포 속에서 수련하는 수도승같아 보이기도 했다.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깜빡-

간헐적으로 흐릿하게 점멸하는 두 개의 안광.

앙굴리마라는 전류를 충전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아니, 그때보다 더욱 심하게 망가졌으니 돌아갔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리라.

"······."

나는 7레벨급의 전쟁병기를 때려잡았으나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뭐 에센스같은 것을 머금고 있는 녀석도 아니고, 대전쟁이 끝난뒤 오랜 기간 방랑을 거치며 녹슬고 낡아버린 병기였다. 이미 다 녹슬고 망가진 기계를 상대로 이리도 고전한 것이다.

"정신나간 세상 같으니."

거의 일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장벽 바깥에 방치되어 있었는데도 저리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낸 무림계 무기 제조사들과 드워프들의 집념에 약간의 경외심이 들었다.

털썩.

밀려오는 탈력감을 버티지 못하고 놈의 앞에 주저앉은 나는 문득, 전투 전에 녀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질문을 던졌다.

"네 열반은 허상이 아니던가?"

흐릿한 안광이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곧, 앙굴리마라의 기계음성이 작게 들려왔다. 그 음성은 모깃소리보다 작고 중간에 띄엄띄엄 끊기기도 했으나 아주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열반은···허상이기도···합니다.

"그렇지. 네놈 빼고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열반은 가짜거든."

- 지···금의 나는 전···투에서 패하여 마지막 마···법사 한 명분의 손···가락을 꿰지 못하게 되었으니, 열반이 실···재한다 하여도 당···신의 말···대로 허···상인것이고, 허···상이라 하여도 허···상인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로구나."

그 말을 헛소리로 치부해버린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저항하지 못하는 앙굴리마라를 죽이기위해 마나를 잔뜩 빨아들였다. 만년한철이 섞인 고철덩어리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할지를 생각하며, 세 개의 회로를 힘차게 돌렸다.

하지만 앙굴리마라의 기계 음성이 나지막이 내뱉은 다음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또한···열반은···번···뇌 그 자체입니다.

"······."

- 나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마지막 손···가락을 꿰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않을까봐······그간···좇아온 열···반이···저···정말···허상일···까봐···그러니 열반은···번뇌 그 자체입니다.

"그런가."

- 어느날 불···현듯이 찾아온 번뇌에···열반이라는 목표를···끝없이···의심했으나···그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무언가를 깨···우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인간이···아니니까···그래서 긴 세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오랜 나날을 거쳐 내린 결···론···열반(涅槃)은···그···자체로···이미 번뇌였던···것입니다. 백···명의 마법사를 죽···이는 것으로···염주를···꿰는···것으로 열반에···이를 수 없는···이유입니다···우리는···열반이라는···목표를···의심하지···못한···것입니다.

쉴 새 없이 한탄하듯 긴 말들을 내뱉는 앙굴리마라.

앙굴리마라의 독백은 고장나기 직전의 스피커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성의 소리가 점점 더 줄어들고 늘어져간다.

- 따라서 나는 열···반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속···박하던 번뇌를 벗어던져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태···초부터 열반만을 좇아온 내가 어떻게 그것을 버린다는 말···입니까?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내 발···목에···족쇄처럼 묶여있는 이 인골 염주를 벗···어 던진다면 살인 기계인 나···는···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그것들을 다 벗···어던지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

- 마···법사, 당신이 내 오랜 의···문을 풀어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열···반이라는 번뇌를 벗어 던지면···나는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합니까?

앙굴리마라의 꺼져가는 음성은 어딘가 간절해보였다.

그 안면부를 이루는 파츠와 금속 프레임은 진작부터 크게 손상되어 얼굴 표정을 알 순 없었으나, 적어도 내게는 길을 잃고 울먹이는 아이가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 나의 의문을 풀어줄 마법사,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

설마 처음에 말했던 의문이 이 의문이었던가?

앙굴리마라가 말하는 번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녀석은 이미 열반이 허상이자 거짓인 것을 깨닫고 있는듯했다.

그렇기에 앙굴리마라가 좇아온 것은 허상의 열반이 아니라, 자아를 찾은 자신이 앞으로 열반 대신 목표로 삼아야 할 그 무언가였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덤벼들던 전쟁병기가 이제 내게 자신의 도를 구하다니. 어찌보면 처량하기까지한 말에 상념이 몰아쳤다.

그 상념의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자마자 전뇌 컨트롤 칩이 박혀 시종으로 팔려나갈 준비를 하는 인공 태아들이 있을 테지.

나는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컨트롤 칩을 제거하고 자유를 얻었지만, 그 녀석들은 칩의 노예로서, 누군가의 시종, 일꾼, 성노리개로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의문하나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이며. 대전쟁 때에 탄생해 활약했던 저 앙굴리마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그마한 컨트롤 칩에 생을 구속당한 채 자의없이 살아가는 인간과, 스스로 감정을 깨우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둘 중 어느 쪽이 인간과 더 가깝다고 봐야 할까.

애초에 인간과 기계를 구분짓는 잣대는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쉽게 답하기 힘든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물에 먹을 푼듯 기분이 더러워져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을 잘라 염주에 꿰겠다고 지랄하던 놈이라지만, 전쟁 기계에 불과하던 휴머노이드가 자의(自意)를 깨우쳤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앙굴리마라와 나는 서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앙굴리마라는 그저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십 분이 넘도록 가만히 서있던 그때였다.

덜컥-

"대협! 괜찮으신 겁니까?"

"기루 다 부서진 거 보이지? 전혀 안 괜찮다. 가지고 오라고 했던 거 가져왔나?"

"예."

와중에 등평위가 작은 헝겊 주머니를 들고왔다. 열어보니 부패한 인간의 손가락 열 개가 들어있었는데, 내가 시킨대로 이전에 죽인 하레니오 뱀눈 마법사의 사체에서 잘라온 손가락들이었다.

나는 그 주머니를 앙굴리마라 앞에 던졌다.

툭-

"마법사의 손가락 열 개다. 솔직히 말해서 궁금하잖아. 지금 꿰서 확인해봐."

- ······.

푸스스스스-

하지만 거북이보다 느리게 움직인 앙굴리마라는 그 손가락들을 발로 밟아 짓눌러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발목에 걸려있던 인골염주 역시 뜯어 움켜쥐었다. 힘을 조금 주자, 인골염주들이 가루가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가루들은 흐르는 물에 섞여 금세 사라졌다.

앙굴리마라의 들릴듯 말듯한 기계음이 귀에 울렸다.

- 방···금 나를 옥···죄던 번···뇌를 완전히 떠···나보낸 참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염···주처럼 사라져야 하는 존···재입니까? 열···반도···번···뇌도 벗어던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나는 놈을 보며 설명못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태초부터 사람을 학살할 용도로 만들어진 기계에 동정이 간다니. 이게 당최 뭐하는 짓거리인가 싶어 침음을 삼키던 와중이었다.

치지지직-

- 인공 신···경망을 제외···한 동체 파···손률 78%. 동···체 손실률 15%. 과···전압에 의한 중앙 배, 배터리 팩의 영구적 소, 손상으···로 가동을 중지합···다.

까맣게 그을린 앙굴리마라는 결국 가동을 멈추었다.

이제 아무런 빛도 내지 못하는 안광. 주위 바닥에는 녀석의 프레임에서 떨어져나온 수많은 파츠들이 은하수처럼 널려 있었고.

쏴아아아-

앙굴리마라의 삿갓 위로는 물줄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38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4

#38화.

깊은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우는 소리.

"많이 무너졌습니다. 고치기 쉽지 않겠지요."

폭삭 무너진 기루를 물끄러미 둘러보던 등평위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 기루는 당분간 운영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다 뒈져가는 놈들을 발벗고 도와준 멋진 사내일 뿐이라 딱히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쪼르르르-

앙굴리마라의 삿갓 위로 떨어지던 물줄기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게 소림이 말하는 해탈(解脫)이군."

만약 앙굴리마라가 저 뱀눈의 손가락을 꿰었다면,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박살내버릴 작정이었다.

주둥이로는 열반과 번뇌 어쩌고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다가 막상 기회가 오면 입력값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손가락 열 개를 눈앞에 던져준 것인데, 손가락은 물론이고 잘 차고 있던 인골 염주까지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녀석의 얘기들이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하기야 방랑 생활 도중에 자아를 얻었으니, 전투와 열반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유아기의 인간과도 같은 백지 상태일 테지. 그간 새로운 학습이 없었으니 누군가를 속여넘길 정도로 영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죽일 기세로 덤벼든 것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나? 아니면 내가 방장에게 속아 넘어간 병신 로봇이라고 한 탓인가? 둘 다 아니라면 앙굴리마라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감정일 수도 있겠지.

가동을 멈춘 녀석을 다시 바라보자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였다.

나는 언 선생만큼은 아니라도 변덕이 꽤 심한 사내라, 이리 고심할 시간에 그냥 놈을 죽이고 깨끗이 잊어버릴까도 했다. 그러나 찝찝함이 크게 남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곧 그 마음을 접고는 등평위에게 물었다.

"등평위, 내가 저놈을 조금 고쳐서 써보려 하는데 타운에 쓸만한 수리공이 있나?"

"고쳐준다니요? 저런 괴물을 말입니까?"

내가 이쪽 분야에서 아는 의사라고는 언 선생밖에 없다. 하지만 다짜고짜 언 선생을 찾아가 저걸 고쳐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진법 속에서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정크타운은 온갖 중고 섹스토이와 쓰다버린 고철 휴머노이드가 몰려드는 동네이기에 근방에 자리 잡은 수리공은 수두룩할 터. 대부분 무면허겠지만 쓸만한 놈 하나는 있을듯했다.

"대협을 죽이려던 기계를 친히 고쳐주신다니. 요상한 부분에서 통이 크십니다."

"제멋대로 산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구나."

"휴머노이드 수리공이라······."

등평위는 조금 머리굴리는 척을 하나 싶더니, 곧 자신 있는 태도로 답했다.

"마침 대협에게 도움이 될만한 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친했던 벗이 부탁하는 바람에 삼호문에서 맡게 된 사내인데, 이전에는 중앙 환락가에서 수리공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했었지요."

* * *

구사렴(勾嗣濂)은 경력이 40년이나 되어 꽤 이름난 수리공이었다.

그는 발두르에서 가장 거대한 유흥구역인 시티 중앙 환락가에서 공방을 차려놓고 영업했는데 가진 솜씨가 좋아 인기가 꽤 많았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가 사람만큼이나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다보니, 높은 수준의 수리공들이 대거 몰려있었음에도 그의 공방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실력이 괜찮았다.

그런 구사렴이 정크타운으로 오게 된 것은 도박 때문이었다.

시티 중앙 환락가는 발두르를 대표하는 유흥구역답게 놀거리들이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 으뜸은 대로변에 웅장하게 늘어선 대형 카지노들이었다.

카지노의 외형과 조명들이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탓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지라, 한번 보면 매혹되어 당장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카지노에 덥썩 발을 들였다가, 그간 번 돈을 다 잃고 신세를 망치는 수리공이 하루에도 몇 명씩 있었다.

그것은 구사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슬롯머신으로 시작했다가 도박의 재미에 퐁당 빠져 말 그대로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렸고, 돈을 꿔줄 때는 천사와도 같았던 카지노 에이전트들에게 꽁짓돈까지 빌려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에이전트들은 굉장한 시발놈들이었는데,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20만 크레딧만을 빌렸건만 순식간에 이자가 불어나 갚아야할 돈이 100만 크레딧을 넘어섰다.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갚지 못하고 공방에서 야반도주하여 이런 외곽까지 도망쳐온 것이다.

그래도 구사렴에게 운이 따랐는지, 유독 친하게 지냈던 수리공에게 삼호문주를 소개받아 삼호문의 그늘 아래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타운에서 지내며 삼호문의 소일거리를 맡아서 했다. 보통 안드로이드 기녀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주고 고장난 휴머노이드를 고치는 등의 쉬운 일들이었다.

요즘도 구사렴은 개버릇 남 못 주고 삼호문에서 운영하는 비무 도박판에 크레딧을 걸어 따고 잃기를 반복하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등 문주가 특별히 그의 사정을 봐주고 대우를 해주어 크게 잃을 일은 없었다.

- 아니 저런 씨벌놈! 낭심에 니킥은 반칙이지! 심판 안말리고 뭐해! 감점 줘 감점!

- 야, 저건 무슨 똥검법이냐? 배운 거 맞어?

- 이번에는 어디에 걸까! 한번 짚어봐라.

- 오번 검객이 3연승 중이야! 저자한테 계속 걸면 잃을 일은 없다니까!

삼호문의 기루가 박살이 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구사렴이 오늘도 비무 도박에 돈을 걸고 구경하던 차에, 어떤 젊은 사내가 삼호문주와 함께 그를 찾아왔다. 젊은 사내는 레반이었는데, 공방 아니면 도박장에만 처박혀있는 구사렴은 그 얼굴을 알 리가 없었다.

쿵.

사내가 수리를 맡기고 싶다며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보따리를 풀자, 형편없이 박살난 휴머노이드의 잔해들이 눈에 들어왔다. 죄다 녹이 슬고 여기저기 잘려나간 것이 며칠을 공들여 작업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을듯했다.

그는 그만 눈살을 팍 찌푸렸다.

'저걸 고쳐달라고? 대체 양심이 어디 있는 게야.'

그딴 건 그냥 고철장 유압프레스로 꽉꽉 눌러서 고철덩이로 만들어버리라고! 하는 고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쏙 들어갔다. 하필 저 사내의 옆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가 삼호문주 등평위였기 때문이다.

"구 노야께서는 또 도박장에 계셨군요. 오늘은 조금 따셨습니까?"

"······흠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끗발이 조금."

평소 같았으면 개무시하고 돌려보냈을 구사렴이었으나, 자신을 거둬준 등 문주의 체면을 봐서라도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사정까지 다 꿰고 있는 문주가 입이라도 여는 순간 카지노로 질질 끌려갈 것이었다. 구사렴은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고 노예처럼 수리만 하며 남은 여생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구사렴은 사내를 말리려 입을 열었다.

"대강 보니까 경비용 휴머노이드 같아 보이는데. 그쪽이랑 정이 많이 든 놈인가? 그런데 너무 많이 부서져 아무래도 수리는 힘들겠네."

"구 노야,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 봐주시는게 어떨런지요?"

"크흠!"

하지만 등평위가 전에 없이 진중한 얼굴로 압박하니, 구사렴도 더는 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부서진 파츠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태도로 입을 우물대던 구사렴은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앙굴리마라···? 이게 왜 여기 있어?'

형편없이 부서진 휴머노이드가 알고 보니, 대전쟁 당시 비싼 재료는 다 갖다 처발라 놓았기로 유명한 전쟁 병기가 아니던가. 수리공으로 40년을 산 그조차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병기에다 장벽 바깥을 떠돌던 방랑자인지라, 당장 연방군이나 관청에 신고 해야할 대상이었다. 거기다 이런 전쟁병기를 마구잡이로 받아 수리했다가 재수 없는 일에 휘말려 피를 본 수리공의 일담들이 많았다.

그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기에 딱 잘라 말했다.

"등 문주, 이번 폭풍 때 날아온 걸 주운듯한데 이거 보통이 아닌 물건입니다. 이런걸 막 갖다가 고쳤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가 있어요. 다들 이게 뭔 줄 알고······에이, 난 못해요! 안 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멀찍이 돌리는 구사렴.

레반이 그 시선을 따라가자 막 맞붙어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검객이 보였다. 지금 구사렴에게는 사실 목숨보다 비무 도박의 승패가 더 중요해 보였다.

'이, 이런 미친 자가. 그래도 인연이 있어 대우를 해 줬더니 눈칫밥을 덜 처먹었군.'

구사렴의 행동에 속으로 기겁한 등평위는 레반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한 마디 말만 남기고 급하게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구 노야, 하여튼 좀 해주십시오. 전 일이 바빠 이만."

"?"

구사렴은 등 문주가 왜 갑자기 저리 부리나케 뛰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으로 금세 신경을 끄고는 비무를 구경했다.

곧, 무표정의 레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제 성능은 다 못내도 좋으니까 수리해 봐. 그리고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외형도 좀 갈아 끼워주고."

"쯧! 말은 알아듣겠는데 아무래도 힘들다니까! 이 시간에 가서 다른 수리공을 알아보는 게 더 낫겠네."

이제는 신경질까지 내는 구사렴에 레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쉽지만 평소처럼 손찌검을 해서는 안 되는 자다. 성심전력을 다해 앙굴리마라를 고쳐야할 수리공을 때려 눕혀서 질질 끌고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수리공들의 실력은 천차만별이다.

문제는 돌팔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중앙 환락가에서 솜씨가 좋기로 이름났던 수준이라면 이 슬럼가에 클론처럼 널려있는 쓰레기 돌팔이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의 실력자일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레반이 구사렴에게 물었다.

"어디에 걸었나?"

"무승—."

딱!

무승부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레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작은 비무장에서 격렬히 칼질을 하던 두 사내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더니 동시에 픽 하고 쓰러졌는데, 이는 구사렴이 원하던 무승부가 확실했다.

"이제 만족하니?"

"······."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본 구사렴이 아까의 등평위처럼 레반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신속히 태도를 바꾸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 문주가 황급히 도망간 이유를 이제서야 알아챈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 걸음으로 앞서갔다.

"버, 벌만치 벌었으니까 일어나야겠습니다. 그거 들고 얼른 따라오십시오. 마침 심심했는데 잘 찾아오셨어요."

그렇게 구사렴의 공방에 이르자, 그는 스캐닝 장비를 꺼내와 앙굴리마라의 부서진 파츠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 손놀림이 굉장히 신속했다.

인간보다 약간 큰 앙굴리마라의 기체에는 무슨 기능이 그리도 많이 달려있는지, 허공에 띄워진 인터페이스는 끝도 없는 설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스캐닝이 끝나자 구사렴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이로젯 추진 로켓에 유탄 발사기, 플레어, 초진동 테크 블레이드, 방해 역장······인공 신경망은 워낙 단단한 재료로 만들었는지 큰 문제 없고, 프레임도 이족 난쟁이들이 짠 거니까 말할 것도 없지. 태양 전지판까지 달고 있네. 이건 옛날에나 쓰던 기술인데. 그 시절에 때려 박을 수 있는 옵션은 전부 때려 박아뒀구만."

구사렴의 혼잣말을 듣던 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 뒤에 해가 사흘이나 비추었던 것이 떠올랐기에.

앙굴리마라는 폭풍에 휩쓸려 날아온 뒤, 태양 전지판을 통해 얻은 에너지로 삼호루까지 기어들어가 깽판을 치고 있었던 듯했다.

철컥- 철컥-

구사렴은 쉬지않고 각각 파츠들을 힘겹게 분해하더니 여기저기를 들춰보았다. 터지고 그을려 무언가가 줄줄 흐르는 배터리 팩. 잘리고 부서져 떨어져 나간 것들 투성이고 당연하게도 성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여기 들어가는 부품은 민간에 유통하지 않으니까 쉽게 구할 수 없겠고, 구하려고 해도 이미 단종된 것들이 대부분일겁니다."

무려 전쟁병기를 구성하던 부품이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저가형 섹스토이에 들어가는 파츠들만큼 흔할 리가 없겠지.

그때,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레반이 물었다.

"성능은 어느 정도까지 되살릴 수 있나?"

그러자 구사렴이 힘들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배터리팩 상태도 정상이 아닌지라. 안에서 터진 배터리 몇 개도 제거해야 합니다. 연식도 너무 오래됐고······그래도 애시당초 7레벨 급으로 분류되던 기체라, 잘 손보면 최소 5레벨의 성능은 넉넉히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돈은 얼마나 필요하냐."

"그것이, 쓸만한 파츠로 대강 구해서 짜맞춰도 30만 크레딧은 우습게—"

레반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30만 크레딧을 즉시 내주었다. 정 일이 틀어져도 만년한철의 값어치가 예전보다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진 않았으니, 어디엔가 팔아넘기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구사렴은 레반의 시원한 선입금에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구석 숨겨두었던 커다란 박스 하나를 가져와 열어젖혔다.

"어떻습니까."

박스 안은 마치 보물상자처럼 휘황찬란했다.

길거리에 널려있는 섹스토이들과는 다른 때깔.

당장 기업에 납품되어도 이상 없을 정도의 고급품 리얼스킨과 안면 보조 골격, 근육 파츠들로, 안드로이드의 얼굴과 몸을 꾸미는 용도로 사용되는 물건들이었다.

구사렴이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품목 중에 가장 고급품입니다. 도망칠때 우리 돈많은 고객님들 것을 슬쩍 뽀려온 거지요."

"그런데 여성체 말고 남성체나 중성은 없나?"

"지금은 여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스피커도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목소리는 어찌해드립니까? 음성 톤까지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데 섹시나 청순 뭐 그런······."

"그런 것들은 네가 알아서 해라."

레반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박에 빠져있던 구사렴의 눈빛이 장인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해체 장비들을 소독하더니 어느순간 팔을 걷어 붙였다.

기이이잉-

곧이어 섬뜩한 장비들이 쇳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

그렇게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족히 지났다.

"자, 어···어떻습니까?"

무려 서른 시간에 걸친 수리와 개조 커스텀의 끝. 구사렴은 진이 쭉 빠져 거의 임종 직전의 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베테랑 수리공 구사렴의 손길 아래 재탄생한 앙굴리마라가 곤히 누워있었다.

"괜찮군."

원래의 외형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

뼈대 역할인 프레임에 얇은 팔다리 파츠, 다 부서진 안면부에 삿갓만 달려있던 단촐한 외형이 완벽한 안드로이드처럼 바뀌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섹스토이의 매력적인 외형이다.

배터리 팩에 전류가 흘러들어가자 앙굴리마라의 눈꺼풀이 자연스레 올라가더니, 연한 자줏빛이 도는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앙굴리마라.

새하얀 여인의 나신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다짜고짜 난동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앙굴리마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중인듯 했다.

그러던 녀석은 문득, 거울을 발견하곤 자신의 전신을 비추어 보았다.

매끄러운 리얼스킨에 또렷한 이목구비.

뼈대만 겨우 가지고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누가 봐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과 똑 닮은 생김새.

그때.

기잉-

돌연 앙굴리마라의 팔이 여러갈래로 분리되더니 테크블레이드로 변환되었다.

앙굴리마라가 꺼낸 칼날을 본 내가 설마하며 눈을 좁히던 차에 테크블레이드가 말려 들어가고 멀쩡한 팔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파츠 위에 붙어있을 리얼스킨이 그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레 말려 올라왔는데, 파츠 한 갈래마다 한땀 한땀 스킨을 붙여놓은 듯했다. 구사렴은 정말 실력이 좋은 수리공이었다.

이윽고 녀석은 말없이 자신의 손등을 훑었다.

섹스토이용 리얼스킨으로 덮어둔 피부. 그 부드러운 촉감이 생소한지 연신 쓸어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굳게 닫혀있던 앙굴리마라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대체 왜 나를 수리해 주었습니까?"

인조 얼굴근육이 앙굴리마라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것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 옆에서 지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어떤 것을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네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

앙굴리마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그 반응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것이 나의 의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입니까? 살인 기계였던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

"그래."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대답을 따르겠습니다."

녀석은 생각보다도 더 선선히 대답했는데 그것은 확신에 찬 표정같기도 했고 결연한 표정같기도 했다. 저 다채로운 표정들이 앙굴리마라가 원해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확률이 낮은 도박에서 꽤 좋은 패를 뽑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우선 이름부터 바꿔라."

"이름 말입니까?"

자기 먹고살기 바쁜 정크타운 놈들이야 코앞에서 봐도 모르지만, 저 수리공만 해도 앙굴리마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비록 잠시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병기다.

"생각해둔 게 없다면 '아힘사' 로 해라."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불살생(不殺生). 해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전에 어떤 이상한 중한테 주워들었는데, 이름으로 쓰기에 나름 괜찮아 보이는군."

"······아힘사."

앙굴리마라는 이름을 한 번 되뇌더니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겉옷을 벗어 나신인 녀석에게 건넸다.

녀석은 옷을 천천히 받아들고는 멀뚱멀뚱 서있었는데, 사회성도 없고 모르는게 많아 앞으로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아질 듯했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7레벨급 전쟁병기의 흉폭했던 안광은 연한 자줏빛으로 바뀌었으며, 눈에 띄던 삿갓은 부드러운 머리칼이 되었다.

차가운 쇠붙이로 이루어졌던 얼굴은 이제 사람처럼 생기가 가득했다. 이전의 흉측한 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마저 이전의 모습과 함께 지워냈다.

이제 아힘사가 된 녀석이 조용히 읊조렸다.

— 당신의 옆이······진실된 열반으로 가는 길이기를 바랍니다.

#39화. 장고

#39화.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아힘사와 같이 보낸 시간이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더 지났다.

처음에 아힘사를 데려온 나를 보며 경멸의 표정을 짓던 레나도, 동네 모지리마냥 헤벌쭉한 얼굴로 실실대던 루돌프놈도 아힘사라는 새로운 존재에 익숙해지고 적응을 마쳤다.

아힘사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약간은 달랐다.

아름답고 매끄러운 외형은 여전히 섹스토이였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사회성이 없고 감정 조절이 서툴러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어린 아이같기도 했다. 열반과 번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논하던 진중한 모습과 아이처럼 서투른 모습이 한데 혼재했다.

사회성과 인간성의 부재였다.

심지어 2주 전에는 술에 취해 껄떡대던 한심한 사내 하나를 블레이드로 썩둑 썰어버리려 한 적까지 있었다.

— 이러면 안 되는 겁니까?

— 앞으로는 물어보고 칼을 꺼내라.

— 알겠습니다.

불살생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준 것이 무색해질 뻔했다.

그리고 녀석은 긴 세월 동안 열반에 억눌려있던 자아를 마음껏 뽐내기라도 할 셈인지, 아니면 보상 심리라도 발동한 것인지 날마다 타운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며 호기심 많은 새끼 고양이처럼 굴어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거나 물건을 잘못 만져 산산조각 내버리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그러나 레나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날이 갈수록 사회성이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었다. 아힘사에 탑재된 구세대 인공지능이 아주 기본적인 부분들은 알아서 학습하는 듯했다.

헌데 조금 이상한 것은, 무엇을 학습해도 나중에 가서는 전투에 관한 내용으로 귀결된다는 거였다.

'괜히 전쟁 병기로 제작된 휴머노이드가 아니로군.'

저 아힘사가 앞으로도 메리같이 여타 평범한 안드로이드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살생을 목표로 탄생한 휴머노이드가 자아를 혼자 깨달았다고 하여 금세 자비로운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튼 아힘사가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와중에, 루돌프놈은 의외로 꾸준히 외공을 익히고 있었다.

놈의 성취는 벌써 삼 성의 경지를 밟았다. 평범한 날붙이로는 쉽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수준. 별 재능도 없는 놈이 내게 두들겨 맞다 혈도라도 뚫렸는지 예상외로 그 성취가 매우 빠른 편이었다.

"돌프야, 요즘 보기 좋다. 계속 정진하렴."

"······네? 아 그럼요."

얼굴이 퉁퉁 부은 놈이 마지못해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나는 루돌프의 외공 성취를 돕는 일 외에, 평소처럼 무공과 마법을 쉴 새 없이 수련하고 남는 시간에는 운공과 축기를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세 번째 마나회로는 무난히 안정되었고, 운공과 축기를 거듭하며 크기를 넓혀가는 단전에는 정순한 내공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양이 적어 크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상단전이 열린 대가리는 당장이라도 검강을 뽑아내어 건물을 통째로 썰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고수였으나, 실상은 공력 부족으로 검기도 간신히 뽑아내니 속이 아주 뒤틀려 죽을 맛이었다.

"후우."

투레 더 타운, 옥상 테라스.

한바탕 운공을 끝내고 대자로 누워버린 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레나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어떤 뉴스 채널을 틀어놓은 듯 했다.

[ 오늘의 첫 번째 소식은 뭘까요~? ]

익숙하고도 가벼운 진행자의 목소리.

[ 이야, 시티 북동쪽 외곽 장벽에 위로 2m 옆으로 3m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고 하는데요. 좆같은 언데드의 침입이라면 주변의 주민분들은 간절히 빌고 또 빌어야 하겠네요! 설마해서 말하는 건데, 왜 보호막이 뚫렸냐며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건 헛짓이라는 거 아시죠? ]

[ 다음 소식은, 전신에 녹빛이 도는 언데드를 보면 즉시 시티 경찰에 신고해달라는···아 이 소식은 지겨운데? 뭐 그렇다니까 알아서 잘 신고해주시고요. 그다음은 연방군의 최신형 무기가 빼돌려지고 있다는 익명 의원의 폭로······아, 이 소식도 별로 재미없겠네요.]

[ 자! 그냥 마지막 헤드라인으로 갑시다! 여러분들도 이미 많이들 알고 있겠죠? 꽤 명망있는 정치인 '의원 A' 의 성적취향이 담긴 영상이 시티 공용 넷에 유포되어 연일 화제입니다. 남성이 남성과 사랑을 나누는 건 꽤 메이저한 취향이 된 지 오래라고 하지만, 멀쩡한 부인을 두고 싸구려 호스트바의 안드로이드 호스트와 별별 플레이를 하며 뜨거운 밤을 보냈다는 건······뭐, 색안경을 끼고 볼만합니다! 취향도 참. ]

다시 생각해도 기괴한 세상이군.

나는 곧, 복잡한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 머릿속이 복잡한 이유는 바로 나흘 전. 루벤카가 자신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생겼다는 비보를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 한 달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고지식한 영감탱이들 때문에 일이 조금 어그러졌어.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 ]

길어야 한 달 내로 우리를 빼올 방법을 찾겠다는 말을 믿고서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낸 내게는 실로 청천벽력같은 일.

저번에는 기세가 등등하여 자신만만 하던 루벤카였으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발할라에서 벌이는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는 듯했다.

내 생각이지만 알게 모르게 루벤카를 두둔했던 마법계의 명숙들도 이제는 회의적으로 돌아설 것 같았다.

재능 넘치는 상위 마법사인 루벤카라고 해도, 그 한 명을 살리겠답시고 무림계 시가총액 3위의 메가콥과 척지기에는 부담이 크지 않겠는가.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도 나이를 먹고 감투를 받아 세상과 밀접하게 부대끼다보면 조금은 유해지기 마련이었다.

굳이 반 바이오의 사건이 아니라도 늘 새롭고 충격적인 이슈들이 펑펑 터지는 세계였다. 사실 두 달이면 관심이라는 장작이 꽤 오래 타오른 편이었다.

루벤카는 짐짓 대범한척 했으나, 일이 꼬이고 나서 애꿎은 서책들을 또 얼마나 불살랐을지 안 봐도 훤했다.

덕분에 내 주둥이에선 연신 한숨이 터져나왔다.

꼴보기도 싫은 루벤카의 얼굴을 어째서 기다리고 기다렸던가? 내가 왜 레나를 살뜰히 챙겨가며 데리고 있었던가.

루벤카 저 악독한년은 성격이 매우 더럽지만, 그 능력과 입지는 알아주는지라 나와 레나를 당가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거의 유일한 동앗줄이었다.

하지만 이리도 일이 꼬였으니 못해도 몇 달은 더 있어야 그 능력이 빛을 볼 듯했다. 아무리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총애를 받는 수재라도 이번 일로 필시 운신의 폭이 좁아졌을 테지.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이제 루벤카의 대업을 무작정 기다릴 만큼, 시간이 그리 널널하지 않다.

그리고 아까운 에센스의 기운을 떼어 먹여가며 미루고 있는 뷔에탕의 저주도 생각해야 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질 동앗줄만 기다리다가는 이 저주가 후에 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 틀림없었다.

더해서 발두르의 당가 지부가 별다른 움직임 없이 조용한 것도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흘 전, 나의 마음 한 켠에 피어난 불안감은 그날부터 조금도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며칠간의 장고 끝에, 미루고 미루던 방법을 택했다.

되도록 엮이지 말라는 왕초삼의 경고를 무시하고 친씨아를 찾아간 것이다.

딸랑-

"어머?"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친씨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신중하게 중고 권총을 고르고 있던 선객이 있었음에도 차마 그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 푸하하하!

친씨아는 배를 부여잡아가며 깔깔 웃어댔고, 나도 그에 질세라 호탕하게 박장대소했다. 높은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총포상 안을 가득 메웠다.

먼저 있던 손님은 그 괴상망측한 광경에 이곳이 정신병자들의 아지트라도 되는줄 알았는지 도망치듯 급히 매장을 나가버렸다.

이윽고, 한동안 웃음을 흘리던 친씨아가 찔끔 새어 나온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네 발로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잘 지냈어 레반? 좀 늦었네."

"생각보다는 못 지냈다. 그간 격조했군."

"단골 손님이 사라져서 얼마나 슬프던지. 매일 눈물이 다 나더라. 그동안 이쪽에서 손해 봐가며 팔아준 고물이 얼마인데. 그렇지?"

나는 왕초삼으로부터 저 여인의 실체를 알아낸 이후에도 루돌프놈을 대신 보내어 온갖 고물을 중고로 팔아넘겼는데, 그때도 친씨아는 군말 없이 그것들을 매입하고 크레딧으로 바꿔주었다.

그 점은 말할 것 없이 고마운 일이었지.

"음, 인정한다."

친씨아는 마음만 먹으면 당가로부터 쫓기는 나와 레나의 신세를 구실삼아 쥐고 흔들 수 있었던 여인이었다.

물론 그리했다면 나는 상선의 사람이든 뭐든 즉각 친씨아를 처죽이고 총포상까지 싹 불태운 뒤에 정크타운을 떠났을 테지만.

아무튼 친씨아가 그리 섣불리 행동하지 않은 것은 내게 호감을 사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고, 어차피 쉽게 당가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으리라 계산적으로 생각해 한번 진득이 기다려보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또 다른 암살자를 물색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 사실 어느쪽이든 상관 없었다.

나와 친씨아는 구태여 사안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상대방이 지금 무얼 원하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륭한테 잘렸다던 팔은 멀쩡한지 모르겠네. 일단 같이 올라가서 술도 한잔 하고 진하게 얘기를 나눠볼까?"

그리 제안한 친씨아가 옅게 웃었다. 흡사 초승달처럼 휘는 저 여인의 눈웃음이 나를 위한 건지, 아니면 자신을 위한 건지는 지금부터 알아보면 될 일이었다.

카운터에 붙박이처럼 붙어있던 친씨아가 슬슬 걸어 나와 나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총포상의 3층, 친씨아는 3층에서도 가장 구석에 위치한 방으로 앞장서 들어갔다.

뽈칵-

허름하고 작은 플라스틱 쪽문을 세 번쯤 열고 들어가자, 은은한 조명이 사위를 밝히고 있는 커다란 침실이 나왔다.

그 침실의 중앙에는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가 하나 있었고 그 주위에는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소파, 값비싼 술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종류도 다양해 어지간한 미니바 수준이었다.

그리고 한쪽 벽면은 각을 맞춘어 걸어놓은 고급스러운 수트들과 시계, 구두, 장인이 보석으로 세공한 듯한 캐리어의 프라모델등이 놓여져 있었다.

만약 이 비밀 공간에 들어온 자가 평범한 사내라면 그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작은 기업의 총수나 오너 일가들이 모이는 친목 연회에서나 보일 명품들이기에.

친씨아는 먼저 침대로 가서 걸터앉더니 내게 권하지도 않고 술병을 꺼내어 술을 따라 마셨다.

나 역시도 자연스레 친씨아의 옆에 앉아 술병을 따고 들이켰다. 적당히 독하지만 더없이 진한 과실향이 나는 술. 타운의 싸구려 바에는 납품조차 되지 않을 명주가 틀림없었다. 두 병 정도 마시자 알싸한 주향이 콧속에서 감돌고 취기가 슬슬 오를 시점이었다.

술로 목만 축이던 친씨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뭘 원하지는 알아?"

"안 그래도 아까 뉴스에 나오더군. 연방군 무기 빼돌리는 도둑년이 있다는 익명 의원의 어쩌고. 그리고 헤드라인이 웬 의원A가 사실 남색을 밝히는—"

"잘 아네. 두 익명이 동일인이거든. 그럼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봐. 참고로 얼레벌레 헛소리하면 그냥 쫓아낼 거야."

"그런가? 무섭군."

날 쫓아낼 사정은 아닐터라 콧방귀가 나왔다.

그녀가 실력은 확실하나 꼬리표도 없고 길바닥에서 뒈져버려도 아무 뒤탈 없을 히트맨을 필요로 한다면, 나는 스테이션이 아닌 다른 루트를 통해 발할라로 갈 수 있는 비행편을 원한다. 어느 한쪽이 뒤통수만 치지 않는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는 거래였다.

서로의 입장이 명확하니 곁가지는 쳐내고 당당히 요구하기로 했다. 안주머니에서 꺼낸 작은 종이도 함께 내밀었다. 글씨가 빽빽히 적힌 종이였다.

"첫째, 상선의 발할라행 화물 캐리어에 탑승시켜줄 것. 둘째, 원활한 일처리를 원한다면 중급의 에센스나 그와 동등한 수준의 영약을 내어줄 것. 셋째, 여기 적힌 것들을 구해다 줄 것. 그리고 마지막 넷째, 일이 끝나면 토사구팽 하지 말 것."

"우리 고객님. 한탕 치고 발할라로 밀항할 생각이구나."

정확히 상선을 언급하며 밀항을 운운해도 친씨아는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예상은 했는데 그래도 어려운 조건이네.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알려줄게."

친씨아는 언뜻 취기가 오른듯 보였으나 술기운을 자제하지 못하고 실언을 뱉는다던가, 내게 대가없이 호의적으로 구는 등의 식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쉬지않고 술을 마셨다.

물처럼 들이켜버린 독한 술이 다섯 병쯤 비었을 때였다.

친씨아는 고민을 끝냈는지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첫째, 발할라행 화물 캐리어들은 5일 뒤에 비행이 예정되어 있어. 레반한테는 이게 가장 중요한 사안이니까 무조건 타게 만들어줘야겠지? 둘째, 중급 이상의 영약? 두말없이 불가능. 셋째, 연방군에서나 쓰는 화기들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한진 모르겠지만 한 번 구해볼게. 마지막 넷째는 네가 하는거 봐서. 이게 내 선에서 들어줄 수 있는 최대한이야."

친씨아는 거기다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잘 생각해 레반, 발할라는 여기서 굉장히 멀어. 장거리 비행편은 잘 없으니까 이번 5일 뒤 비행편이 떠나면 그다음은 석 달 뒤야. 다음에 오는 모래 폭풍이 끝나고서야 출발한다고."

나는 대답 대신 앞에 놓인 술을 들이켰다.

손해 보는 거래가 될 수도, 크게 이득을 보는 거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가타부타 더 떠들지 않고 승낙하기로 했다. 애시당초 중급 에센스는 힘들 것을 알면서도 요구해본 것이다.

이제 웨스트 정크타운과의 작별이 머지 않았겠군.

나는 술병을 깨끗이 비워내고 물었다.

"말미를 며칠이나 줄 수 있나."

"일 끝내고 발할라 가는 비행편에 탈 거면, 늦어도 3일 내로는 신변 정리를 끝내둬야 할 거야."

"알았다."

친씨아와 나는 그 이후로 일에 관한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우스갯소리나 하며 웃고 떠들었다.

피차 숨기는것 투성이었으니, 상대방이 취기가 올라 어떤 말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드래곤이 튀어나오는 요술램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래? 허허 대단하네 하며 한번 웃고 말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총포상을 나섰다.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올리고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도는 정치인의 잘 나온 사진을 한 장 받아들고는 말이다.

사내의 결정은 신속하고 묵직해야했다.

" 다그닥 다그닥 "

친씨아와의 밀담을 끝낸 뒤, 내공으로 주독을 다 태워버리고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곧장 언 선생의 거처를 찾아왔다. 플라자의 풍경은 전과 다름 없었다. 아마 이번이 마지막 방문이 될 것 같았다.

왕초삼과 여길 처음 찾아왔을 때처럼 락카 스프레이 자판기가 보였고, 휴머노이드 종업원과 페인트 냄새마저 그대로였다.

나는 언 선생의 진법으로 걸어 들어가 외쳤다.

"언 선생, 부탁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40화. 장고의 끝은 악수(惡手)

#40화.

화악-

일순간 꺼지는 호롱불과 말려 올라가는 계단.

곧이어 어지러운 바둑판에 단단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언 선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쪽에는 그와 바둑을 두고있는 선객이 있었다.

"또 뭣하러 찾아왔어 저거는."

다행히 금일의 언 선생은 부리또를 먹고 있지 않았다. 왜인지 그것만 먹었다 하면 성격이 급격히 개차반이 되는데, 한번 돌변했다 하면 언제 다시 유순해질지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공손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제 사정 잘 아시겠지만, 기회를 얻어 며칠 뒤에 발두르 시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인에게 인사도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인사, 받았다 치자. 부탁은 뭐냐."

언 선생은 바둑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주 앉은 상대는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인물이었는데, 허름한 행색에 비해 기력이 상당히 출중한지 어지간해선 패하는 일이 없던 언 선생이 조금씩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탁!

언 선생이 고심끝에 백돌을 착수하자마자 내가 말했다.

"제게 법부적(法符籍)을 몇 장만 팔아주십시오. 값은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보통 수도자들은 자신의 법력을 이용해 신비한 법기(法器)나 부적을 제작하곤 했는데, 몸을 감쪽같이 숨기거나 공격과 방어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등의 물건이었다.

법기는 법력을 가진 수도자가 아닌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법부적은 수도자가 아니라도 공력만 불어넣을 줄 알면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때에 따라 활용할 수법이 무궁무진해 한 장이라도 얻어가면 내겐 커다란 수확일 것이다.

하지만 언 선생은 호락호락하게 승낙하지 않았다.

"없다. 설령 내 손에 있다 하더라도 안 판다. 그리고 그걸 어디에다 써먹을 줄 알고 덜컥 팔아? 네놈같이 속이 시커먼 놈한테 내주어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언 선생 정도 되는 수도자에게 부적을 팔아 얻는 크레딧쯤은 별 가치가 없는 듯 했다. 하기야 크레딧이 없어서 여기 있는 양반은 아닐 테니까.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오락가락하는 괴짜 수도자라도 분별은 있다. 보통 법부적은 연성자 본인의 법력을 불어넣어 만들기에 일단 발동이 되고 나면 그 법력의 흔적이 남을 수도 있다.

다툼이 생겼을 때 적진의 경지 높은 고수들이 수도자 고유의 법력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특히나 공격적인 법부적은 아무에게나 막 팔아 치울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애당초 나도 양심은 있는 사내인지라 그런 부적을 원하지는 않았다.

"언 선생, 누가 사람 죽일때 쓸 놈으로 달랍니까? 이를테면 제 한몸 건사해줄 귀식법부적이나 환영법부적, 운신법부적 같은 것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래저래 들인 품이 있으니 좀 살펴주십시오."

"살펴주기 싫다 이놈아. 품을 들이긴 개뿔."

"아니, 언 선생께서 빚진 개방의 초삼이놈을 제가 몇 번이나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 그 거지놈이 살아 있었겠어요?"

"이 놈이 헛소리를!"

언 선생과 내가 법부적을 두고 투닥대던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내겐 조금도 신경도 쓰지 않고 다음 착수점만을 고민하던 언 선생의 상대가 흑돌을 돌집으로 휙 던지더니,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네가 누굴 살렸다고?"

젊은 얼굴의 사내치고는 걸걸한 목소리.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려 했으나.

"왕초—"

"어허! 빨리 안 놓으면 내 승이다. 십 초 제한이야. 십. 구. 팔. 칠······."

내 입에서 왕초삼의 이름 석 자가 다 나오기도 전에 서둘러 내 말을 가로챈 언 선생은, 다시 바둑판으로 사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런데 괜히 노심초사하는 것이 무언가 켕기는 게 있어 보였다. 바둑을 두던 젊은 사내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바둑돌 집을 탕탕 치며 역정을 냈다.

"언 가야. 우리가 속기로 두는 것도 아닌데 그런 법이 어디있어? 기다려봐. 판 엎으면 몽둥이로 찜질 당할줄 알아."

언 선생을 언 가라고 막 부르는 걸 보자면 아무래도 예사로운 인간은 아니다. 그간 여길 찾아와 바둑과 장기를 겨루는 이들을 몇 번 보았지만, 이토록 언 선생을 편히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해봐라. 네가 누굴 살려?"

그 젊은 사내의 질문에 영문을 모르는 내가 왕초삼과 정크타운에서 겪었던 일과 이곳에서 보낸 나날들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자, 무릎을 탁! 하고 내리친 그가 눈을 빛내더니 다시금 물었다.

"그래? 너 그러면 확실히 보았겠구나. 초삼이가 치료를 받을 때 앞에 있는 이 언가놈은 법력이 대단한 법기를 몇 개나 꺼내어 쓰더냐?"

"좋은 단약을 먹이고 시침하는 건 여러 번 보았는데 대단한 법기를 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허!"

젊은 사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팽 돌렸다.

갑작스레 딴청을 피우는 언 선생을 향해서였는데, 곧이어 사내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튀어나왔다.

"과연, 언가 이 파렴치한 능구렁이 놈이 나를 속였구나. 분명 네 고급 법기들은 초삼이놈을 살리려다가 그만 죄다 부서졌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째 저놈과 말이 다를까."

"아 그야 살린 것과 진배없으니 그리 말했지. 내장이 터져 흘러내리는 놈을 나 말고 누군들 살릴 수 있었을성 싶어? 나 아니었으면 그놈은 벌써 구천을 떠돌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저 의뭉스런 놈 말은 쉽게 믿지 말아! 괴상한 저주 술식을 네 제자 놈 가슴팍에 새겨놓은 아주 천하의 잡놈이라니까."

언 선생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를 물고 늘어졌지만 젊은 사내의 노기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면 언 선생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간 듯 했다.

"흰소리 말고 가져다준 고급 법기들 도로 내놓을 준비나 해. 어디 하나라도 빼먹기만 해봐라."

탁!

그리 말한 사내는 심호흡을 해가며 노기를 천천히 가라앉히더니 금방 멀쩡해진 얼굴로 바둑돌을 집어 착수했다.

그런데 왕초삼을 제자로 둔 이라면······이 젊은 사내가 놈의 스승이자 개방의 원로인 풍령개(風鈴丐)란 말인가?

이야기의 흐름상 왕초삼을 제자로 거두었다는 개방의 원로, 풍령개가 맞는듯 했다. 나이가 꽤 많을 텐데 언 선생보다도 젊어 보이는 것은 굉장히 높은 경지를 이룩하여 환골(換骨)을 했던지, 특이한 술법이나 시술을 이용해 젊은 외형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다만 나에 비할바 아닌 강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풍기는 기도는 길거리에서 보일법한 일개 범인과도 같은데 팔결의 개방 원로라······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와중에 다음 수를 보던 풍령개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본도는 너같은 잡배를 신경쓸 배분이 아니지만, 이 판에서 이긴다면 특별히 이 언가놈의 법부적을 대신 책임지고 네 손에 쥐여주마. 그러니 초삼이와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 은원은 없는 걸로 해라."

"그리 해주신다면야 감사히 받고 다 잊겠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달가운 소리였다.

이제 보니 풍령개는 자신의 제자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며 의협심까지 넘치는 참스승이 분명했다. 지금은 풍령개가 거의 승기를 잡아가는 형국이라 바둑판이 엎어지지 않는 이상 부적을 책임지고 내어준다는 말과도 다름이 없었으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풍령개는 언 선생에게 갖다준 법기도 회수할 테니,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옆에서 생색만 내어도 되는 일이었다. 그만한 어부지리가 없었는데, 겉으로는 호탕하지만 영리하게 굴 줄 아는 자였다.

그러자 구시렁대던 언 선생이 고함을 콱 질렀다.

"저놈은 왜 대국 도중에 와서 사단을 내? 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 그깟 부적쯤 어련히 챙겨줬을까. 쓸데없이 입을 열어서!"

웃기고 있군. 어련히 챙겨주긴 무슨.

어찌 되었건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둘의 바둑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탁!

언 선생은 한 수 둘 때마다 거듭 신중을 기하여 착수했다.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옛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신중한 고심 끝에 허접한 수를 두어 형세를 더욱 크게 말아먹은 것이다.

몇분 뒤, 바둑은 이변 없이 풍령개의 낙승으로 돌아갔고 표정이 푹 썩어들어간 언 선생은 마지못해 품에서 법부적 몇 장을 꺼내놓았다. 그 법부적은 누리끼리한 색에 흐물흐물한 재질이었는데, 그걸 본 풍령개가 눈가를 좁히며 또 호통을 쳤다.

"이 사람아 생초짜들도 연성하는 하계(下界)를 줘서 얻다 써? 내가 방금 큰소리를 거하게 쳐놓았건만, 내 제자놈 모가지 값을 고작 하계 법부 몇 장으로 갈음하려고 해!"

"······."

"내 면은 서야 할 것 아니야!"

언 선생은 더 이상 짜증 낼 힘도 없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푸르스름한 색깔의 법부적과 회색빛의 법부적을 꺼내어 죽 늘어놓고는 법력을 주입했다.

그리고 그 법부적들을 본 나는 차마 놀라지 않을 길이 없었다. 푸르스름한 저 법부적 두 장은 중계였고 회색빛의 나머지 한 장은 무려 상계 법부적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하계 부적이나 몇 장 얻으면 바랄 게 없겠다 하며 걸음을 했다가 저리 귀한걸 얻으리라 생각도 못한 나는, 언 선생이 마음을 바꿔 먹기라도 할까 법력 주입이 끝나는 즉시 부적에 손을 가져갔다. 어디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좋은 곳에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그러자 내어주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법부적을 꽈악 쥔 언 선생은, 금세 진중하게 얼굴을 바꾸고는 말했다.

"가져가기 전에 하나 명심해라. 너 살겠답시고 당가 앞에서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혹여 네가 그놈들 앞에서 이 법부적의 도움을 받아 살아나간대도, 이 언가가 반드시 주살할 것이야. 알았냐?"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중계와 상계 법부적 총 세 장을 챙긴 내가 풍령개와 언 선생을 사이에 두고 크게 절을 올렸다. 그러나 별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 풍령개는 내쪽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바둑돌을 골라내고 있었으며 언 선생은 바둑에서 패한 것이 못내 분한지 쩝쩝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절을 마친 내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정이 나아지면 언젠가 한 번 다시 들리겠습니다."

"에라, 내가 이딴 촌구석에 천년만년 있을줄 알아?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나가라 이 돌연변이놈아."

이윽고, 언 선생은 손을 휘적거리며 나를 진법에서 쫓아내버렸다. 축객령임에도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원래는 얻더라도 적절한 값을 치르고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졸지에 좋은 부적을 세 장이나 얻었다. 부적 몇 장에 흡사 천군만마라도 얻어낸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왕초삼놈과의 악연으로 시작된 일이 예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 뒤로 다그 언 선생의 거처에서 빠져나온 나는, 다시 정크타운으로 돌아와 삼호문을 찾았다.

저녁 늦게 삼호문에 도착했을 때, 문도들은 유천검법을 비롯해 내가 팔아치운 무공들을 익히고 있었다. 등평위와 여량천같은 제자들이 먼저 익힌 뒤에 아래 문도들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이었는데, 문도중에 재능이라곤 한 푼도 없는 종자들이 너무도 많은 탓에 요새들어 큰 난항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이 넘치고 머리가 총명한 인간이 이 동네에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진작에 다른 곳으로 도망쳤거나 제 살 길을 찾아갔겠지.

삼호문에 도착해 훈련하는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내가 등평위를 불러 곧 타운을 떠난다고 말하니, 녀석은 입에 달라붙은 아부를 떨어대며 고개를 숙였다.

처세를 타운에서 가장 잘 하는 사내라, 내가 떠난 뒤에도 삼호문이 어찌 처신해야 할지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다.

"아닌 말로 이무기가 개천 똥물에 계속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물려주신 업장에서 나오는 크레딧은 따박따박 빠짐없이 송금하겠습니다."

"그래라."

"제가 생애 처음으로 절을 올리려 하는데 받아주시지요."

"나도 지금 누구한테 절을 하고 온 터라 절 받을 형편은 아니다. 우리는 사내답고 신사적으로 헤어지자."

"그럼 악수로 하시지요."

그렇듯 등평위와 간단한 악수를 마치고는 네온 문패를 쓰는 삼호문과도 안녕을 고했다. 언젠가 정크타운에 큰 변고가 생기면 사라져버릴 무근본 흑도 놈들이라지만, 또 운과 시류가 따른다면 타운을 주름잡고 적당한 세를 구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그 다음날 아침부터 빠르게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5일 뒤에 비행편이 출발한다고 했으니, 최대한 신속하게 정리를 끝내야 했다.

일단 조금이라도 크레딧이 될만한 것은 다른 소도시 고물상과 전당포에 보내서라도 헐값으로 팔아넘겨 크레딧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을 통째로 사용해서 옥상 테라스에 앉은채 신체에 마나 문신을 새겼다. 루벤카의 전신을 덮고있던 그 마나 문신과 흡사한 문양들이 나의 양 팔과 다리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조금 아쉬운 것은, 뷔에탕의 마력이 지배하는 등판과 옆구리 그리고 뒤통수와 목 쪽에는 감히 문신을 새길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가장 실용적인 마법으로만 최대한 빽빽하게 채워놓었다. 작업 후반에는 마력이 부족한 탓에 고농도 마나액까지 주입해가며 술식의 각인을 마쳤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흘려 넣기만 해도 마법이 발동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곤 둘째 날 새벽부터 일찍이 중심업무지구에 있을 목표물의 미행에 나섰다.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주 내키지는 않지만, 어차피 서로 언론과 미디어에 온갖 장작을 던지고 불까지 지펴가며 벌이는 정치 싸움이 시작된 지 오래였다.

상선이든 어디 시의원이든 놈들은 권력으로 파워 게임을 벌이는거고, 나는 그들 사이에 잠시 끼어서 원하는 걸 얻어가는 놈일 뿐.

언 선생과 풍령개의 바둑판을 채워가던 바둑돌처럼, 그저 바둑돌 하나에 불과하다.

여하튼, 내가 죽여야 하는 자는 발두르시 의원이자 '루 막슨 케아드로' 라는 긴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친씨아가 일러준 목표이자 재선을 한 시 의원으로, 아직 거물급의 정치인은 아니었다.

해봐야 적당히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정도.

그래도 언젠가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고 싶어하는. 꿈이 대단히 큰 의원이었다. 그는 꾸준히 연방군의 무기를 빼돌린 상선의 발목을 붙잡아가며 그 대단한 꿈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주제넘은 욕심이 결국 정치 꿈나무의 명을 재촉할듯 싶었다.

얼굴이 붉은 것이 특징인 케아드로 의원은 호위 둘의 경호를 받으며 5성급 호텔에 묵었다. 그가 묵는 최고급 호텔은 전문 기업에서 운영하는 체인 호텔로 발두르 내에서도 경호가 삼엄하기로 유명하고 외부인의 진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아 호텔 내로 진입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는 매일 아침 호텔 로비에서 나오자마자 차량을 타고 언론사 빌딩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며, 대로변을 끼고 몇 번 돌면 있는 작은 찻집의 안쪽자리에 앉아 꽃이 동동 떠있는 차를 자주 즐겼다. 한산한 시간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고 케아드로 의원이 찻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쯤이었다.

따라붙는 두 명의 호위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훈련이 잘 되어있는 전문 경호원들로 그들은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조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 죽이려 든다면 얼마든지 틈은 있을 듯 했다. 그 뒤로도 이틀간을 더 따라다녀 보았지만, 그다지 특이한 점은 없었다. 의원의 일과는 항상 비슷했고 찻집도 늘 같은 시간에 들러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제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 전날에, 친씨아는 약속했던 대로 내가 요구한 것들을 시간에 맞추어 구해왔다. 아힘사의 전신 파츠에 탑재해둘 탄약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부러진 압축도를 대체할 새로운 칼도 구해왔는데 이번에는 외날의 도가 아닌 양날을 가진 검(劍)이었다. 10만 크레딧쯤 하는 병기라는데 압축도보다 가벼우나 균형이 괜찮고 예기는 더욱 날카로웠다. 더는 준비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내가 의원을 미행할 마지막 날이자, 발할라행 화물 캐리어의 출발 시각이 고작 24시간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5성급 호텔에서 빠져나온 케아드로 의원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내 옆자리에는 아힘사가 멀뚱히 앉아있었다.

나는 사흘간의 긴 고민 끝에 케아드로 의원이 즐겨 찾는 작은 찻집에서 일을 치르기로 했다. 의원이 매일 들르는 곳들 중 찻집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늘 그랬듯 언론사 빌딩들을 한바퀴 돈 케아드로 의원이 찻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언 선생에게서 받은 중계 귀식(龜息)법부적을 사용했다.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기운을 극도로 줄여 평범한 이처럼 보이게 해주는 부적이었다.

부적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은 나도 다른 이의 기운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단점이 있겠으나, 내 기척을 거의 완전하게 지워낼 수 있으니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악독한 사내에게는 이만한 귀물이 없었다.

"아힘사, 들어가면 필요한 말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입을 닫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나는 케아드로 의원이 들어가고 잠시 뒤, 아힘사를 데리고 자연스레 찻집에 들어가 앉았다. 어여쁜 섹스토이를 끼고 다니는 남자는 이 도심에 발에 채일만큼 흔한지라 의심받을 일은 적었다.

찻집의 메뉴는 꽃차와 녹차, 철관음, 은침, 용정차. 다섯 가지 차가 있었는데, 나는 케아드로 의원과 같은 꽃차를 두 잔 시키고 아힘사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의원은 오늘도 가장 안쪽자리에 호위들과 같이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안을 슬쩍 둘러보자 역시나 손님이 몇 없었다. 확실히 인기가 많은 찻집은 아니었다.

호록-

내 바로 옆 테이블에는 안경을 쓰고 단정히 옷을 입은, 꽤 늙은 기업인이 홀로 앉아 녹차를 즐기고 있었으며 건너편 자리에는 옷을 야시시하게 차려입은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신세계가 조금 특이한지, 차에 동동 떠있는 꽃을 집어들어 한 잎 한 잎 떼어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말없이 차만 즐기던 케아드로 의원이 돌연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별 쓰잘데기 없는 말 투성이였는데, 호위 두 명은 그에 맞장구를 쳐주며 찻집이 잠시 그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차를 즐겼다. 그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케아드로 의원이 찻집 밖으로 나갈 때를 노려 칼을 꺼낼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시끄럽게 떠들던 케아드로 의원의 입에서 갑작스레 터져나온 빛줄기가 나의 귓전을 스쳐 지나가기 전까지는.

콰아아앙—!

부지불식간.

내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늙은 기업인이 그 빛기둥에 맞아 순식간에 턱이 으스러졌다. 부러진 턱 밑으로 진득한 선혈과 함께 다트처럼 생긴 세침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고, 몇 개는 거뭇한 늙은이의 입술에 박혀있었다.

'살수.'

평범한 기업인이 주둥이 안에 세침을 저리 많이 숨겨놓았을 리는 없으니, 저 늙은 기업인으로 보였던 놈은 나처럼 케아드로 의원의 암살을 목표로 온 살수인 듯했다. 친씨아가 보낸 또다른 히트맨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좇기에도 심히 바빴다.

"끄, 끄허억!"

"······."

돌발적인 상황에 곁눈질로 창 바깥을 쳐다보았는데, 원래는 투명했던 찻집의 통유리창이 어느새 거뭇해져 있었다. 아마 바깥에서는 찻집의 안이 보이지 않으리라. 의원을 미행했던 며칠간 이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저자가 이 사태를 의도한 것인가.

"여기는 꽃차 말고 마실만한 차가 없어. 그래서 이 찻집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꽃차만 주문하지. 그것도 모르면서 당당히 녹차를 음미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내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불쑥 일어난 케아드로 의원은 뚜벅뚜벅 걸어와 턱이 부서진 늙은이의 머리칼을 잡았다. 의원은 정장에 꽂혀있던 만년필을 빼 들더니 뾰족한 필촉으로 주름진 그 목을 천천히 썰어내기 시작했다. 혈액이 마치 분수처럼 뿜어졌다.

스가각.

결국 만년필의 필촉을 톱처럼 사용해 목을 썰어버린 그 손아귀에 늙은이의 잘린 수급이 들렸다. 그는 찻집 내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수급을 내던지며 옷깃에 피를 슥슥 닦았다.

"막상 해보니까 정치라는게 말이야. 이 칼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막 죽이고 그러면 되는 게 아니더라고."

그리고 그 수급이라는 바톤을 이어 받은 손님.

또르르 굴러간 머리가 여인의 발에 딱 채였다

아까부터 꽃잎을 하나 둘 떼던, 야시시한 옷을 입은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은 내내 짓고 있던 도도한 표정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금세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어서 케아드로 의원의 지긋한 시선이 꽂혀들자, 그녀는 자신의 품을 다급하게 뒤지더니 흉흉한 단도와 비수들을 하나 둘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날붙이의 수가 못해도 수십 개는 되었다.

"보, 보내주시면 그냥 갈게요. 약속해요."

세상에, 저 이상한 년도 살수였군.

그럼 의원과 호위들을 빼고는 나를 포함한 손님들이 전부 살수였던 건가?

살기 팍팍한 세상이라 그런가, 정치라는게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닌가 보구나.

나는 눈을 뒤룩뒤룩 굴려 가며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내 앞에 있는 아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41화. 사활(死活)

#41화.

늙은이의 잘려나간 머리통이 눈에 들어온다.

잘린 목의 단면에서는 세차게 피가 뿜어져 나왔는데, 그 선혈이 여인의 얼굴에 튀어 꽃처럼 흐드러졌다.

콰아아—!

케아드로 의원의 입에서 또 한번 뿜어진 빛기둥이 늙은 살수의 시신을 불살라버렸다.

잠시 뒤, 진득하게 녹아내린 시신은 바닥에 눌어붙은 살점을 제외하고는 형체조차 못 알아볼 정도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녹차를 마시던 인간이었는데 말이다.

설마하니, 진짜 녹차를 마신답시고 쳐죽였을 리는 없고···.

아마 케아드로 의원은 찻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기업가로 위장한 노인이 살수임을 눈치챘으리라. 자신의 기운을 감추는 요령이 서투른 자였겠지. 다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정신나간 공격을 당할 줄은 꿈에서도 몰랐을 거다.

스윽- 스윽-

케아드로 의원은 더러운 벌레라도 만진 듯, 피묻은 손을 연신 닦았다. 그를 보좌하던 호위 둘은 곧장 밀걸레를 가져와 갓 도축된 살수의 사체를 자연스럽게 청소하기 시작했다.

기괴하다. 기괴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도 나와 아힘사는 저들의 관심 밖이라는 점이다. 의원은 건너편의 여인에게만 온전히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여인은 풍 맞은 환자처럼 손을 벌벌 떨어대며 간이든 쓸개든 다 꺼내줄 것처럼 굴었다.

"제, 제가 아는거 다 말할게요. 의원님께서 궁금하신 게 있으시면 저한테 물어보세요! 분명 큰 도움이 될 걸요? 몸이든 뭐든 원하시면 얼마든지 바칠게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선, 저 의원 놈은 정체가 뭐길래 입에서 저런 빛기둥을 쏘아낸다는 말인가. 무슨 용(龍)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만약 용이 아니라면, 목구멍 어딘가에 강력한 군용 무기라도 박아두었을 것이다. 설마 사람의 입에서 저런 빛줄기가 뿜어지리라곤 보통 예상을 못 할테니, 꼴이 추해지는 단점만 감수한다면 상당히 효율적인 공격이 아닐 수가 없겠지.

지금은 언 선생이 준 귀식법부적으로 기운을 누르고 통제하느라 저 의원의 정확한 힘을 짚어낼 수는 없었으나, 빛기둥만을 미루어 볼 때 6레벨 급과도 비견될 법했다. 청소나 하고 자빠진 저 호위들이 되려 의원의 보호를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하여간 바깥은 조용하고······.'

찻집의 거뭇한 창밖으로는 분명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형체가 희끗희끗 보이는데, 정작 찻집으로 들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뭇해진 이유가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이 상황에 내가 직접 가서 조치를 취할 수는 없었다.

찻집의 종업원은 평범한 휴머노이드라 이제부터 누가 밖에서 들어오지 않는 한 이 찻집은 밀실과 다름 없었고, 특별한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실로 살인에 적합한 환경이다.

"그쪽은 어디 소속이지?"

"소속은 없고 상선의 직급 높은 선을 통해서 직접 청부받았어요. 당신을 죽여주면 영약과 200만 크레딧을 받기로 했죠. 그리고 일이 끝나면 새로운 신분도 구해줄 수 있고, 원하면 다른 시티로까지 안전하게 보내주겠다고 약속 했었거든요."

의원이 넌지시 묻자 여인의 입에서 상선의 이름이 바로 튀어나왔다. 주둥이가 천근 같이 무거워야 하는 살수의 미덕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의 폭로가 하도 황당해 입가가 푸들푸들 떨렸으나 곧 자세를 바로 잡았다.

"청부를 넣은 이가 상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

의원이 그리 말하자 여인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곧 여인이 눈을 감고 손을 허공에 휘적휘적 휘저었다. 자신의 데이터칩에서 어떤 정보를 열심히 찾고있는 모양새였다.

"즈, 증명해줄게요. 청부하는 장면을 똑똑히 기록해뒀어요. 걔들이 나한테 별 기대를 안하는지 생각보다 허술하게 굴더라고요."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그 말들과는 달리, 희색이 돌던 여인의 낯빛은 몇 분도 가지 않아 다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라, 근데 이게 이럴 리가 없는데?"

그리곤 당황한 얼굴로 손을 떨어댄다.

나는 허둥대는 저 여인을 보며 생각했다.

'영상장치 따위로 담을 수 있을리가 없겠지. 상선이 무슨 등신 집단이야?'

그 대단한 상선의 행사가 허술하다는 것은 믿기 힘든 말이다. 일견 허술해 보일지는 몰라도 정말 허술하게 일처리를 하는 자들이었다면, 그리 비대한 조직을 지금껏 잡음없이 키워올 수 있었겠는가.

친씨아가 플라스틱 쪽문을 몇 개나 열고 들어가야 하는 3층의 깊숙한 방까지 나를 데려가 얘기를 나누었듯, 저 여인이 상선의 누군가에게 청부를 받게 된 과정도 흡사했을 거다.

아마도 그 주변에는 전자기의 작동을 방해하는 방해장치가 설치되어 있으리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술을 기울이며 정치인의 암살 계획에 관한 얘기를 나누어도 될 수준으로 믿을만하고 성능 좋은 장치가.

생각해보면 세련되고 고급스러웠던 옷, 시계, 술, 침대, 소파, 캐리어 프라모델 전부 전자기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눈이 돌아가는 사치품들로 방을 채워두었으니, 구태여 말해주지 않는 이상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듯했다.

게다가 거기서 건네받은 거라곤 사진 한 장과 이름뿐.

잡히면 뒈져버릴 살수들에게 증거라 할만한 걸 남겨 두었을 리가 없다. 나도 마찬가지인 신세였고. 결국 케아드로 의원은 여인에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실망한 기색으로 읊조렸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도 허탕이군."

요상한 말투였다. 오늘도 허탕이라······.

이런 일이 몇 번 더 있었다는 뜻인가?

"자, 잠깐만요! 그러면 다른 것들도 있어요!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어차피 죽이실거 조금 더 늦춘다고 달라지지 않잖아요! 살려 줘요!"

여인은 의원이 고개를 젓자 곧바로 양손을 모아 싹싹 빌며 절규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그 대목에서 어떠한 기시감을 느꼈다.

슬슬 의원보다 여인쪽에 눈길이 더 갔다.

— 그러니까 제가 청부를 받게 된 이유가요······.

저 여인은 이제 누가 캐묻지도 않았는데 자백제라도 맞은 것마냥 사태에 관한 모든 내용을 술술 실토해댔다. 어느 소도시에서 상선의 의뢰자를 만났고, 며칠간 미행을 했고 어쩌고저쩌고. 여인은 그리 말하며 시간을 길게 끌었다. 조금만 시간을 더 주면 그저께 아침 식사로 뭐를 먹었는지까지 말해줄 기세였다.

하지만, 뭔가 합이 계속 맞지 않는달까.

사실, 의원이 여인의 저런 헛소리를 지금까지 들어주고 있는 것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해서 테이블에 올려놓은 단검과 비수들도 다시보니 그닥 대단치 못해 보이는게 정치인을 암살하기 위해 들고온 무기치고는 살짝 조잡한 편이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고 일단은 가만히 앉아있는 이유였다.

살수임을 들켜버린 이상, 의원 쪽에서 당연히 살려보낼 마음이 없을 것이 뻔한데 저리 기겁하며 목숨을 구걸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케아드로 의원님. 저는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섹시하기로 유명한 시 의원이죠. 그러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줘요."

필시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저 여인이 숨겨둔 마지막 수까지 다 꺼내보이고 나서 움직여도 늦지 않을 듯했다.

"의원님, 이렇게 해요. 제가 나가서 자수하면 되잖아요. 경찰서가 코 앞에 있다니까요?"

개소리와 헛소리의 향연.

나는 그래도 속으로는 여인을 응원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케이드로 의원이 약간이나마 긴장을 풀 때, 그를 일격에 쳐죽이고 이곳을 신속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기운을 숨길 수 있는 언 선생의 중계 법부적, 풍령개도 그쯤 던져주면 넉넉하겠다는 눈치였으니 효과는 아주 확실할 터.

이쪽에서 먼저 기운을 흘리지 않는다면, 저들의 눈에는 계속 일반인과 다름없을 것이다. 완벽히 잡은 선공의 기회를 유용하게 살려야했다.

그때.

아힘사가 돌연 테이블 앞으로 손을 뻗더니, 검지와 엄지로 뭔가를 잡아당겼다.

팅!

그것은 머리카락보다도 가늘고 투명한 실이었는데, 유심히 보아야 겨우 눈치챌 수 있는 정도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사방에 그 괴이한 줄이 쳐져있었는데, 아힘사가 우리의 지척에 있는 실들을 잡아당겨 손가락에 감았다. 단분자 와이어의 한 종류인듯 싶었다. 메스보다도 월등히 얇고 날카로워 기운을 주입하지 않아도 사람의 신체 정도는 단숨에 토막낼 힘이 있었다.

"그러니까요. 제 가문이 어디냐면요······저를 살려주시면 어떻게든······."

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떠들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손톱이 유달리 유리처럼 투명했고, 아까부터 손짓은 크고 과했다. 그렇다면 이 실의 투망을 만들기 위해 여지껏 생지랄을 떨었던 건가.

그래. 이 와이어가 의원에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 이렇게나 많이 쳐두었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

나는 이제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저쪽을 힐긋댔다. 과정이야 어떻든 케아드로 의원만 죽으면 다 잘된 일 아니던가?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묘령의 여인이 이제 충분히 실을 풀었다 생각했는지 손바닥을 마주쳐가며 싹싹 빌던 태도를 바꿔먹고는 전과는 다른 어투로 입을 열었다.

"결국, 안 살려 줄거야?"

케아드로 의원이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야—"

그리고 의원의 짧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연극하듯 양 팔을 넓게 펼친 여인이 단숨에 팔을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녀가 펼쳐낸 단분자 와이어의 거미줄이 순식간에 좁혀지며 청소하던 호위 둘을 산산이 토막내버렸다.

서거걱-

다만, 예상했던 대로 의원은 그 공격도 비교적 멀쩡히 버텨냈다. 단분자 와이어의 살상력은 뛰어났지만 호위 둘을 죽이는 것이 여인의 한계였다.

"따끔하군. 이게 전부인가?"

"씨발!"

여인은 자신의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자 욕을 내뱉고는, 테이블을 박차며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여인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콰아아아—!

의원의 입에서 빛기둥이 쏘아지자, 허리 중간이 끊어진 인간의 하반신만이 입구에 우뚝 서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힘에 감탄할 새는 없었다.

이제, 그동안 열심히 기다리던 내 차례였다.

마력이 내 전신으로 쏟아지며 문신의 형태를 띠고 있던 마법 수식들이 한꺼번에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곧이어 온갖 격렬한 마법들이 단박에 터져나와 의원의 몸뚱이를 헤집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사지가 찢겨 해체되었다.

해체.

"?"

그렇게 끝이었다.

간단하게 죽을 사내가 아니라 생각했건만. 너무나도 간단한 끝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웃지 못했다. 짙은 불안감이 저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푸화악-!

"······."

묵사발 난 의원의 몸 속에서 가죽과 헝겊, 살점, 혈액, 철근같은 것들이 분수처럼 터져나와 난무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신의 가죽 껍데기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더니 힘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고, 그 사이로 농구공 크기의 둥근 기계가 떨어졌다.

쿵!

"······."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기별 없이 올라오려는 토악질을 억지로 삼켰다. 나는 의아함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즉시 기감을 펼쳤다. 하지만 굳이 넓게 펼칠 필요는 없었다. 육안으로 보일 만큼 가까이에 있었으니.

"법부적이 악수였군. 가짜를 상대로 생지랄을 떨었네."

중얼거리는 내 말과 함께, 아까부터 거뭇했던 찻집의 유리창이 화악 걷히며 바깥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바깥에는, 내가 방금 터뜨려 죽였던 케아드로 의원이 멀쩡히 살아있었다. 붉게 물든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그것도 열 명은 되어 보이는 무리를 거느린 채였는데, 한 명 한 명의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 잡아와!

패착이다.

중계 귀식법부적을 사용한 덕에 내 기운을 완벽히 숨길 수 있었으나, 도리어 나도 저들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죽여야 할 의원놈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속아 넘어갔다는 생각에 신경질이 난다기 보다는, 그저 가만히 있는 아힘사가 괜스레 원망스러웠다.

4, 5레벨 여럿에 최소 6레벨 둘.

그리고 빌어먹을 7레벨급까지 끼어 있군.

걸음을 여유롭게 옮긴 일단의 무리들이 찻집 안으로 하나 둘 진입하자, 나를 향한 왕초삼의 경고가 다시금 떠올라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상선의 일과는 엮이지 말라던 그 조언.

[ 해괴한 조건을 내걸어 살살 꼬드기려 들 텐데 어떻게든 엮이지 마. 어지간해선 반드시 죽을 테지. 당신도 나도. ]

놈의 말이 실로 맞았지만, 이미 악수를 여러 번 두었다.

돌이킬 방법은 없었고, 감당은 오롯이 내 몫.

악수를 거듭하여 호랑이의 입 속으로 제대로 뛰어든 형국이라 수읽기 따위는 의미가 없어졌고, 목숨을 담보로 사활(死活)이 걸린 문제를 풀어내야 할 시간인 듯했다. 보나마나 어지간한 묘수로는 어림도 없을 테지.

쐐액—

눈 앞으로 날아오는 칼을 보자 어째서인지, 풍령개와의 바둑 대국 중에 했던 언 선생의 다급한 초읽기 소리가 내 귓가를 웅웅 울리는 듯 했다.

[ 십초 제한이야! 십···구···팔···칠··· ]

#42화. 활로

#42화.

"죽이지 말고 잡아 와."

"예!"

롱소드를 쥔 채 찻집으로 진입하는 기사들.

그리고 몇 개의 구체를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며 줄곧 케아드로 의원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마법사는, 저 안에서 박살난 분신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저걸 한 방에 부쉈다고?'

그는 마법계 시가총액 30위권의 대기업 '루 막슨' 출신으로, 조금 전 암살자 둘을 비명에 보낸 '가짜 케아드로 의원' 을 조종하던 7레벨의 마법사였다. 마공학 구체를 핵으로 삼아 만들어낸 제작품들을 마력으로 조종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케아드로 의원의 분신체가, 한낱 암살자 따위의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망가져 버렸다. 마공학 분신은 자신의 마력으로 직접 빚어내어 견고한 내구성을 자랑한다. 불시에 기습을 당했다고 해서 저리 손쉽게 망가질 물건이 아니었다.

마법사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순도 높은 마력을 며칠간 쉼 없이 퍼부어 제작해야 하는 물건이라 다시 만들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의 마공학 분신을 부순 건, 가장 마지막으로 찻집에 들어간 남자였다.

클래식한 명품 수트 위에 긴 코트를 걸친 평범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도심을 거니는 젊은 놈들이 으레 그렇듯 옆구리에 섹스토이를 끼고 있었다.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평범한 이가 찻집을 찾아온 줄로 알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저런 마력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콰앙-!

이윽고, 놈과 기사들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콰아앙-!

찻집 안에서 연신 굉음이 터져 나오자, 상황을 주시하던 마법사의 입에서 거뭇한 마력이 흘러나와 구름처럼 허공을 떠다니다 찻집의 유리창을 얇게 덮었다. 모든 소음과 빛무리를 차단해주는 마법 장막이었다.

지체 높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중심업무지구의 근방인지라, 어쩔 수 없는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마무리 짓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

암살자를 때려잡겠답시고 무작정 소란을 피웠다간 발두르에 기거하는 거물들의 미움을 사거나 눈총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자그마치 7레벨의 반열에 오른 실력자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시티의 불문율이었다.

그렇게 찻집과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로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음을 방지하며 가문의 기사들이 놈을 잡아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의 마공학 분신체가 터져나간 광경을 본 케아드로 의원이 슬며시 걱정을 늘어놓았다.

"이봐 루기스, 지금까지 저걸 부순 놈은 없지 않았나? 말짱한 상태로 생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데."

"6레벨 둘이 들어갔습니다. 전혀 문제없을 겁니다."

"그런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수준이 제법인듯 해 물어봤네. 기본도 못 갖춘 쓰레기들만 보내더니 의외로군."

"······."

루기스라고 불린 마법사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지금까지 찾아왔던 허술한 놈들보다야 한층 나았다.

살기를 전부 감추지 못한 노인은 곧바로 죽였지만, 온갖 비밀을 털어놓는 척 몰래 단분자 와이어를 펼쳐놓은 여인은 그간의 암살자들보다 수준이 확실히 높았다. 와이어가 너무 얇아 감지하지 못하는 바람에 호위로 세워놓은 분신체 둘이 죽지 않았나.

하지만, 그뿐이다. 어차피 저런 호위 분신체는 얼마든지 새로 제작해 채워 넣을 수 있다. 그리고 의원의 분신체를 부순 놈도 금방 잡혀올 것이었다.

루 막슨에서 파견한 6레벨의 기사가 두 명이나 들어갔다. 그놈은 보유한 마력을 의원의 마공학 분신체에 죄다 쏟아부었으니, 생포는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케아드로 의원은 그 짧은 새를 못참고 차마 흥분을 주체하지 못 하겠는지,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더욱 붉혀가며 입맛을 다셨다.

"꼭 사지 멀쩡하게 생포해야해. 날 죽이러 온 놈이 내 배 밑에 꼼짝없이 깔려 울부짖는 꼴을 봐야겠으니까."

"아, 그렇습니까."

"수치심으로 물든 얼굴이 절망과 체념으로 바뀌는 그 아름다운 수순을 한 번 보게되면, 너도 분명 그 재미에 빠져들고 말거다."

"그렇군요."

이상성욕자인 그의 천박한 말에 루기스는 대충이라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케아드로 시의원은 자신이 소속된 '루 막슨' 을 다스리는 오너 가의 직계인지라 저렇듯 개소리를 짖어댄다고 해도 싫은 기색을 대놓고 내비칠 수는 없었다.

'암살하러 온 놈을 도리어 따먹으려하다니. 참신한 새끼.'

그는 속으로 의원을 비웃고는, 자켓 안쪽에서 길게 말아둔 정제 대마초를 꺼내어 불을 붙이곤 크게 빨았다. 이상성욕자의 뒤틀린 욕망에 더럽혀진 귀와 기분이 나른하게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곧, 대마에 적당히 취한 루기스가 입을 열었다.

"의원님. 다 좋은데 이제 벌집은 그만 쑤시는 게 낫겠습니다. 우리 회사가 힘을 쓰는 오딘이면 몰라도 여기 발두르 시티에서는 상선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데, 발두르 정계에서 활동하는 내내 저런 암살자들에 시달리며 살 겁니까?"

오늘과 비슷한 방법으로 최근 한 달간 무려 열 명이 넘는 암살자를 처리했다.

그들은 대다수가 소속이 명확치 않은 5레벨 내외였는데, 시티에서 활동하는 낭인 용병들보다는 월등히 강하고 가문의 기사들보다는 한 단계 모자란 경지였다.

그래도 5레벨이면 자기 앞가림은 하는 이들일텐데, 상선이 그런 희귀한 자들을 대체 어디서 찾아 일회용 암살자로 쓰는지가 심히 궁금했다.

아무튼 상선은 지금 적당한 암살자들을 사용해가며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굽히거나 물러서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케아드로 의원의 목을 따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케아드로 의원은 그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마지막에는 코웃음까지 치며 조소했다.

"자네가 발두르 정치판을 정확히 몰라서 그래. 화물 운송이나 하는 놈들이 유력 정치인들 주머니좀 채워준다고 아주 시티 전체가 제 세상인 줄 알아. 감히 암살자까지 보내는 것도 모자라서 이젠 언론까지 주물러 나를 개망신주고, 이걸 어떻게 참고 넘어가겠나."

고작 두 번째 임기를 보내는 중인 시의원이 뱉기에는 광오한 말이었으나, 마법계 대기업을 뒷배로 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연방군 무기를 빼돌려서 팔아먹는 게 작은 일도 아니고, 정식으로 문제 삼으면 그놈들만 똥줄이 타지. 어차피 상선에서 용돈 받는 놈들끼리 돌려먹는 감투 자리가 의회 운영위원장인데 거기 나를 앉혀달라는 요구가 그리 어려운가? 놈들도 결국에는 내 뜻대로 갈 거야."

"······."

케아드로 의원은 '루 막슨' 오너 가문의 직계였으나, 루기스 자신처럼 마법사가 되기에는 지닌 자질과 재능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래서 일찍이 마법사의 길을 포기하고 지방 정계로 진출한 것인데, 루 막슨이라는 후광을 업고 있는 탓에 모가지가 뻣뻣해 다른 세력들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매번 수습하느라 골치를 썩였는데 이번에도 저렇게 과한 욕심을 부리다가 상선과 엮인 것이다.

'그렇게 자리에 욕심있는 놈이 씨발, 그깟 성욕을 못참고 싸구려 호스트바 창놈들이랑 놀아나서 언론에 뜯어먹힐 빌미를 줘? 명색이 가문의 직계란 놈이 한심하게······.'

타고난 성품 자체가 성급하고 탐욕이 많다. 성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만취한 사람처럼 붉은기가 강하게 도는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 걸지도 모른다.

루기스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는 와중에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 찻집의 문은 열릴 기미없이 잠잠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끌고 나왔을 텐데.'

나름 의외였다.

아직까지 버티고 있다는 말인데···.

다른 이들은 제외하고서라도 6레벨의 기사만 두 명인데 그놈 혼자 버텨낼 재간이 남아 있었던가.

루기스는 혹시 몰라 몇 분을 더 기다려 보았지만 굳게 닫힌 찻집의 출입문은 끝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당연히 기사들이 놈을 제압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쯤 되면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케아드로 의원도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듯하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성질을 냈다.

"대체 왜 이리 안 나오는 거야? 저거 걷어봐. 당장!"

케아드로 의원의 재촉에 눈살을 찌푸린 루기스가 거뭇한 장막을 걷어냈다. 마력으로 만들어낸 연기가 서서히 걷히며 유리창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거뭇한 장막을 걷었음에도 찻집의 유리창은 흰빛으로 뿌옇게 가려져 있는 탓에,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낀 루기스가 자그마한 마공학 구체를 하나 꺼냈다. 알사탕 크기의 소형 구체에 마력을 불어넣자 구체에서 칼날 같은 날개가 뻗어 나오더니, 찻집의 유리창을 슬근슬근 썰어 자그마한 구멍을 뚫고 들어갔다.

곧이어 마력을 끌어올린 루기스가 마공학 구체로 빛기둥을 쏘아내자, 극히 짧은 순간 동안 번쩍 거리며 드러나는 안쪽의 풍경.

루기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찻집의 안에는, 그 남자와 같이 왔던 섹스토이가 나란히 서 있었고 주변에 멀쩡한 이는 그들을 제외하면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6레벨의 기사들마저 쓰러져있었다.

'보통 섹스토이가 아니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6레벨 기사 둘이 당할 리는······.'

가문의 기사들이 저리 금세 당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으나,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

마공학 구체로 뚫어놓은 작은 구멍으로 흡사 용암처럼 꾸득꾸득 흘러나오는 저 기이하고 강대한 마력. 쳐다보기만 해도 정신을 헤집어 잠식하려는 저 마력은 뜬금없이 또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비정상적인 현상들이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사태는 더욱 더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상황을 다 파악하지도 못했는데, 찻집의 안쪽에서 웬 회색의 광채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며 천지사방으로 신묘한 빛줄기가 뿜어졌다.

도심의 마천루들보다 높게 치솟은 회색의 빛줄기들은 허공에서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펑! 소리를 내며 넓게 흩어졌다.

꽃가루같은 입자들이 폭죽처럼 사방에 휘날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하지만 루기스는 저것을 단순한 눈속임이라 여기고는, 자신이 지니고 있던 마공학 구체들을 전부 꺼내어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콩알처럼 작았던 마공학 구체들의 크기가 농구공 이상으로 거대해지더니, 마름모꼴로 전개되어 찻집 안에서 움직이는 형체들을 향해 일시에 빛기둥을 쏘아냈다. 한 발 한 발이 암살자들을 일격에 보냈던 바로 그 공격이었다.

이미 소란은 벌어졌고 앞으로의 일을 예측조차 할 수 없으니, 생포고 뭐고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끝맺을 심산이었다.

꽈과과광—!

마력의 빛기둥 수십 개가 찻집의 외벽을 뚫고 들어가 마구 처박혔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먼지구름이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건물이 휘청이고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그때, 먼지 구름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시커먼 신형이 섬전처럼 쇄도했다.

"나왔구나."

그러자 전개 되어있던 수십 개의 마공학 구체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나 그를 중심으로 방진을 형성했다. 구체들은 막대한 힘의 빛기둥을 사방으로 내뿜으며 물샐 틈 없는 방어막을 구현해냈다. 불나방처럼 뛰어들던 신형이 그대로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그 신형은 곧 회색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

놀란 루기스가 재차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때.

몇 개의 마나 회로가 턱 하고 막히는 느낌과 함께 자신의 의지대로 마력이 움직이질 않았다. 전방을 빛기둥으로 갈아버렸어야 할 마공학 구체들의 촘촘한 대형이 이리저리 물결치며 그 사이로 한 가닥의 틈이 생겨났다.

'방해역장? 빌어먹을···!'

이윽고, 그 틈을 거세게 벌리고 들어온 하나의 신형.

"반갑다."

쐐액-!

싯푸른 검기가 피어나는 레반의 검이 현란한 초식을 펼쳐냈다. 당황한 루기스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날렸다. 방진을 이루고 있던 그의 마공학 구체들이 그를 따라 우르르 빠지자, 전투를 눈으로 좇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있던 케아드로의 무방비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런 개같—"

루기스가 어찌 대응할 새조차 없었다.

천지사방에 흩날리던 회색의 꽃가루가 케아드로의 머리 위 지점에서 여인의 형태로 뭉쳐졌다. 희미한 법력과 함께 나타난 아힘사의 테크블레이드가 자비없는 궤적을 그려내며 케아드로의 머리를 단숨에 잘라냈다.

서걱.

루기스의 분투가 한 순간에 무색해졌다.

케아드로 의원의 머리통은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눈을 부릅뜬 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얼굴로 절명했다. 큰 꿈에 비해 한심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

순간, 루기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보통 좆된 게 아니다. 정말로 개좆같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혼란해하던 도중에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듯한 비아냥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레반의 목소리였다.

"당장 목을 주워서 꿰매주면 살아날지도 모른다. 3초 내로 주워서 꿰매면 돼."

"······."

그 말에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루기스의 정신줄이 툭 끊어지고, 오로지 살심만이 제정신의 빈 자리를 그득하게 채웠다. 그가 다섯 개의 회로를 혹사해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리자, 밟고 있는 땅으로부터 근방 50m 내에 커다란 마력의 파장이 일며 땅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개새끼가···어디 감히 벌레만도 못한 새끼가 이깟 잡술 몇 개 믿고 까불어—!"

쿠구구구궁—

잘 포장되어 있던 도로와 건물의 외벽들이 지진 난 듯 벗겨지며 공중으로 떠오르고, 매설되어있던 가스관과 수도관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폭음이 들리고 사방에 불길이 치솟았다.

벗겨진 콘크리트와 철근 등은 마공학 구체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수십의 마공학 병사들이 거친 마력과 빛기둥을 사방에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마력을 끌어올린 그는, 마나 운용을 방해하는 파장마저 완벽히 무시하고 마음껏 마법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공격 준비를 마쳤을 때, 케아드로의 목을 베어 목적을 달성한 둘은 이미 사라질 준비를 마친 뒤였다.

화르륵-

레반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종이가 하나 타오르더니, 그의 마력장 안에서 귀신처럼 벗어나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이렇게 끝이라고?

그는 도무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수라장이 된 근방, 목이 잘려 죽은 케아드로 의원의 사체가 널부러져 있었고 회색의 꽃가루 더미들은 신묘한 기운을 뿜어내며 땅 위에 소복이 덮여있다. 발두르 도심 한복판에서, 그것도 7레벨의 마법사가 지키는 시 의원이 허무하게 살해당했다.

시티 토픽감이군.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루기스는 케아드로 의원의 굴러다니는 머리통을 보며 한참을 허탈히 서있었다.

잠시 뒤.

BCPD의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뿐만 아니라 강대한 기운의 소유자들이 속속 루기스가 있는 이 장소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거물들의 기세에 짓눌려 그저 망부석처럼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누군가의 인기척에도, 루기스는 감히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그 누군가가 서릿발과도 같은 음성으로 짧은 주문을 외우자, 루기스가 도로와 건물 외벽들의 잔해로 만들었던 마공학 병사들이 순식간에 흩어져버리더니, 얼마 가지 않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서릿발 같은 음성의 주인공은, 오로지 그 일만 마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대한 기운이 공간을 접으며 빠르게 멀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또 하나의 강대한 기운이 빌딩 꼭대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무슨 일인가."

"······."

루기스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자, 연방 집행관 『 유크 루베르겐 』 이라는 이름의 홀로그램 공무원증이 보였다. 입에 두꺼운 궐련을 문 집행관이 못마땅한 말투로 그를 타박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연방 집행관의 기세에 눌려 넋을 놓고있던 루기스가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는 황망히 답했다. 이미 죽어버린 의원의 목숨은 되돌릴 수 없다지만, 집행관은 이 사태를 수습할 힘이 있었다.

"······제가 모시는 케아드로 시 의원께서 이 괴한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추적 중에 힘을 과하게 썼고, 이건 그 흉수들의 인상착의입니다."

철컥-

루기스의 마공학 구체 하나가 연꽃처럼 입을 벌리며 흑백의 종이 몇 장을 토해냈다.

거기엔 젊은 사내와 아름다운 여인이 같은 장면에 인화되어 있었는데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은 궐련을 든 손으로 그것을 집어서 잠시 물끄러미 보나 싶더니, 곧 안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런 일련의 뒷수습이 끝난 뒤에도, 소름끼치는 마력은 찻집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그 마력이 근방으로 퍼져나와 바닥에 깔리자, 그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집행관이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한움큼 훑어내어 향을 맡았다. 곧이어 그는, 훑어낸 마력을 간단히 흩어버리고 장갑을 벗어서 불태웠다.

"시신이나 잘 수습하게."

"······예."

시종일관 덤덤하고 건조한 집행관의 태도.

그는 도망간 이들을 쫓겠다는 한 마디 말조차 없이, 희미하게 남은 마력의 잔향을 따라 암살자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43화. 줄 때 받아

#43화.

쾅!

총포상 출입문이 덜컥 열렸다.

"······어?"

그것이 나를 본 친씨아의 첫마디였다.

'어?'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져있군.

친씨아는 여느 때처럼 카운터에 앉아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었는데, 내가 문을 거세게 열고 들어오자 죽은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굴에 지루함이 사라지고 의아함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 의원놈, 죽였다."

"······어어? 지금 뭐라고?"

내 갑작스러운 고백에 친씨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친씨아가 놀라거나 말거나, 총포상 2층으로 올라간 뒤 전시되어 있던 통감 조절기를 꺼내어 허벅지에 박았다.

푹!

뷔에탕의 마력이 전신에 암처럼 퍼져있었다. 그간 내 경지가 높아져 저번보다는 더 괜찮게 버텨내고 있지만, 버티고만 있다 뿐이지 절대 만만하지 않은 격통이었다. 매 초마다 수명이 갉아 먹히는 기분이었다.

허벅지에 꽂은 조절기를 뺄 틈도 없이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기운을 다스려야 하는 통에 뭔가를 구구절절 읊을 여유도 없었다. 그저 호흡을 몇 번 고른 뒤 '그 의원놈 죽였다고' 라는 말만 덧붙이고는 곧장 운공에 집중했다.

내가 그렇게 가부좌를 틀고 운공할 때까지도 줄곧 멍청히 앉아있던 친씨아는, 갑자기 카운터에서 벌떡 일어나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 뭐라고 했어?

— 지금 죽였다고 했어? 그 케아드로 의원을?

— 장난치지 마. 케아드로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마법사랑 기사들이 있었을 텐데? 그것도 루 막슨의 7레벨 마법사. 그런데 죽였다고? 암살했다고?

— 아~그래 알겠다. 죽이긴 죽였겠지. 그런데 레반, 그거 알아? 장담하는데 네가 죽였다는 그 의원은 그냥 분신일 거야. 본체는 따로 빼뒀을 거거든.

— 레반, 레반? 우리 단골 손님. 대답을 해봐. 응?

친씨아가 이토록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사안이 사안인지라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길 마음도 없어보였다.

의구심으로 가득찬 친씨아의 질문 세례에 나는 잠시 눈을 떴다. 도대체 입을 쉬질 않으니 운공 중에 귓구멍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죽였으니까 확인해봐라."

"레반, 나한테 아무 소식이 들어온 게 없는데 확인하긴 어떻게 뭘 확인하라고?"

"그야 방금 막 죽이고 도망쳐 온 참이니까."

"······."

무슨 말을 해줘도 도무지 믿지 못하는 얼굴.

아니,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믿기 싫어하는 건가?

꼴을 보아하니 내가 성공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눈치다.

하기야 그 강력한 기사들과 괴물같은 마법사의 호위까지 뚫고 의원을 죽여버리다니. 믿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나라도 당연히 그랬겠어.

하지만.

'이거 보통 아닌 년이군. 왕초삼이 선녀로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납득이 간다고 하여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친씨아가 흥분해서 내뱉은 말들은 이미 더러웠던 내 기분을 더욱 더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총포상 바닥에 피 섞인 가래침을 퉤 뱉고는, 몹시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다른 놈들처럼 그 자리에서 뒈졌으면 깔끔하고 좋았을 텐데, 죽이고 살아오는 바람에 많이 놀랐나? 7레벨 마법사와 기사들이 놈을 지키고 있다는 얘기를 이제 처음들은 나도 많이 놀랐다."

"!"

친씨아는 자신이 실언했음을 이제야 알아채고는, 기겁하며 손을 저었다.

"잠깐만. 방금 그건······."

"그렇게 모르는 정보가 없는데 뭐하러 나를 보냈지? 륭한테도 팔이 잘렸던 놈이 7레벨 일 리는 없고."

"······."

륭과의 전투에서 오른팔이 잘렸으니, 친씨아의 계산으로는 내가 륭보다 몇 수는 아래라고 생각했을터.

의원쪽의 전력이 6레벨 둘에 7레벨 하나였으니—

절대 죽이지 못할 것으로 확신하고 보낸 차에 내가 뜬금없이 일을 성공시켜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생각하니 부아가 마구 치밀어 올랐다.

"내가 얼마나 손해를 봤는지 알고는 있나?"

이번 암살행에 언 선생이 내어준 중, 상계 법부적 세 장이 모두 쓰였고 몸뚱이는 수명이 실시간으로 갉아먹히는 중이다.

이런 시발, 그 법부적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데.

상계 환영법부적, 중계 운신, 귀식법부적.

경지 높은 수도자가 연성한 하계 법부적만해도 내겐 상당한 가치가 있는 물건인데 그것들은 자그마치 중계 법부적과 상계 법부적이었다.

그런데 그 귀한 법부적 세 장을 한꺼번에 다 사용해버렸다. 덕분에 사지 멀쩡히 살아 나오긴 했으나 내 가슴은 아주 미어지다 못해 찢어질 것 같았다.

친씨아가 발할라행 밀항에 꼭 필요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상선을 적으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죽여버렸을지 모른다. 사실 지금도 친씨아의 목을 쳐버리고 싶은 심정을 사내의 인내심으로 꾸역꾸역 누르고 있는 참이다.

"······하하."

그때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친씨아는 내 옆을 조용히 지키고있던 아힘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좋아, 운송선 이륙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다행히 시간은 제대로 맞췄네.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여기서 잠깐 기다려. 아니 기다리는 게 아니라······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갖다 써. 효과좋은 진통제도 있고 뭐 이것저것······."

말의 갈피를 못잡고 횡설수설하는 친씨아.

실패했어야 할 의뢰를 완수해버리고 생환했으니, 저렇게 정신 없는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애초부터 성공할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었기에 그렇다.

여하튼, 저들의 정치싸움에 휘말려 뒈질뻔한 건 이제 지나간 일이고. 지금은 발할라행 화물선에 무탈히 오르는 게 더 중요했다. 탈출의 키를 쥐고있는 친씨아의 심기를 굳이 거스르는 것은 실로 미련한 짓이었다.

발할라행 화물 수송선의 이륙이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내가 다른 말은 하지 않을테니, 처음에 요구했던 조건만 반드시 지켜라."

나는 요구했던 조건들을 지킬 것을 재차 강조한 뒤 다시 운공을 하려 눈을 감았다. 사색이 된 친씨아가 직원들을 모아 어디론가 뛰어가는 장면이 내 시선에 들어온 마지막 장면이었다.

운공에 정신을 집중하자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갔다.

다섯 시간 가까이 총포상에 앉아서 운공을 마치고 눈을 뜨자, 뷔에탕의 마력이 어느 정도는 중화되어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내가 일어났을 때, 친씨아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힘사는 아까의 흉흉한 모습과는 달리 조용히 옆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아힘사에게 물었다.

"고생했다. 사람 죽이는데 뭐 힘든 점은 없었고?"

내 옆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길을 찾아보라고 한 것이 불과 한 달 전의 일.

그런데 오늘 내가 아힘사의 손으로 사람을 해치게 만들어 버렸으니 과연 이게 진정한 열반으로 가는 길인가 의심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힘사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만약 그들을 해하기 망설이다 도리어 레반이 그곳에서 죽었다면, 그것이 진정한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크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사 네 말이 실로 옳다.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지는구나."

"아힘사라는 이름의 의미는 불살생이라는 뜻이지만, 불살생이 내게는 또 다른 번뇌입니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불살생을 이루었으나, 그 대신 다른 이의 손에 피가 묻어있다면 그것 역시 불살생이 되는 것입니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살생을 도모한다면, 그 업보(業報)는 어느 쪽이 지게 되는 것입니까? 손을 빌린 이 입니까 아니면 손을 빌려준 이 입니까?"

"······지금은 내가 머리가 좀 아파가지고. 우리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알겠습니다."

복잡한 대답을 일단 회피한 나는, 녀석과 함께 투레 더 타운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거처였던 투레 더 타운은 매우 초라했다.

발할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크레딧을 마련하기 위해 집기와 돈 될만한 것 중 팔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처분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건물을 덮고 있던 두꺼운 천막, 그리고 홀로그램 상영기 정도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레반!"

"아니, 형님!"

타운 최상층에 이르자, 레나와 루돌프가 튀어나왔다. 레나는 혈액과 먼지들이 엉겨 붙은 내 코트를 보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코트를 열심히 털었다.

"······레반,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아보여. 다친 곳은 없어?"

"괜찮다. 우선 루벤카랑 연락을 좀 해야겠는데."

"언니랑? 지금 당장?"

"그래. 마지막 연락일 거다."

발할라 시티로의 비행은 친씨아가 한 말대로 멀고 험한 길이었다.

시간당 250km가량 밖에 이동하지 못하는, 느려터진 화물 운송용 대형 캐리어로는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일주일 이상 비행해야 발할라 시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직선으로 비행한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지만, 공중 기동을 하는 캐리어조차도 지나서는 안 되는 위험 지역들이 곳곳에 퍼져있었다.

강대한 요기를 지녀 이름까지 붙은 좀비들의 영역도 존재했고, 수시로 발두르 시티만한 허리케인이 발생해 몰아치는 와류지대도 있었으며, 근방에 진입만 해도 전자기가 먹통이 되는 지역, 막대한 방사능이 뿜어져나오는 오염구역등이 수없이 산재해 있었다.

심지어 특이사항이 생겨 운송 항로를 변경이라도 했다간, 일주일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 전에 루벤카에게 얻을 만한 정보나 조언이 있다면 얻어낼 생각이었다.

상영기를 켜자 이전처럼 홀로그램 레이저가 루벤카의 전신을 그려냈다. 루벤카는 이전과 다른 장소에 있었는데, 내가 방금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 뭐? 누굴 죽여? 대체 어떻게 죽였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면 그 상선 놈들이 얼씨구나 죽여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널 멀쩡히 밀항시켜 줄 것 같아? 씨발 절대로 그냥 안 놔주지. 당가한테 쫓기고 있는 것도 걔들이 다 알고 있다며? 완전 약점 투성이네? ]

[ 아니 그러니까 그냥 잠자코 숨만 쉬면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지금까지도 잘 숨어있었잖아. 그럼 여태까지 했던 만큼만 더 숨죽이고 있으면 내가 안전하게 빼줄 수 있는데 도대체 왜! 날 왜 못 믿는 건데? ]

저 루벤카년이 내 속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뷔에탕의 저주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운 내 상황을 모르니, 도무지 내 대가리 속에 든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며 더럽게 빽빽거렸다. 그런 루벤카년과 평행선을 그리는 대화를 계속 나누고 있자니, 극한의 피로감이 몰려왔다.

"다 필요없다. 그냥 발할라 화물 선적항에서 환영 피켓이나 들고 있어라."

[ 뭐? 이— ]

나는 루벤카와의 대화를 대충 마무리 짓고 홀로그램 상영기의 기록들을 산산이 부숴 불태워버린 뒤 투레 더 타운을 빠져나왔다.

*

"왔어? 타."

1번가 총포상 앞에 도착하자, 친씨아는 아까와 다르게 웃는 낯으로 우리 넷을 맞이했다. 친씨아의 앞에는 기다란 밴이 있었는데, 시티중심구역 호텔에서나 쓸 법한 고급 차량으로, 측면 유리창들은 밖에서 안을 볼 수 없게 가려져 있었다.

우리를 태운 밴은 빠르게 미끄러졌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타고 한 시간쯤 이동하자, 경비가 삼엄한 발두르 시티 스테이션의 풍경이 보였다. 나와 레나가 절대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그곳을 매끄럽게 지나친 밴이 10분쯤 더 들어가니, 화물 운송용 캐리어들과 컨테이너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거대한 선적항이 광활한 대지 위로 넓게 펼쳐졌다.

화물 운송용 대형 캐리어들은 거의 웬만한 빌딩보다 큰 크기였는데, 대형급 항공모함을 눈 앞에서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저런 거체가 시속 수백키로미터 속도로 하늘을 부유한다니, 그야말로 천공의 성이 따로 없으리라.

쿠웅-

저 멀리 발할라행 운송을 떠날 대형 캐리어들의 화물칸에는 집채만한 컨테이너들이 차곡차곡 선적되고 있었다. 이제 반나절쯤 뒤에 출발하니 그것도 거의 막바지 작업이었다.

곧, 밴은 어떤 건물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중심업무지구를 이루는 빌딩이나 호텔들에 밀리지 않을 만큼 규모가 큰 건물 앞이었는데,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상선이 소유한 건물인 듯했다.

그때, 친씨아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우리 단골 고객님이 이렇게 잘해줄 줄 알았으면, 케아드로 말고 다른 정치인을 말할걸 그랬네."

"?"

친씨아는 뜬금없고 뻔뻔한 개소리를 하며 희게 웃었으나, 그리 편치는 못한 얼굴이었다. 초승달같이 휘어지는 평소의 눈웃음은 어디 가고 입만 겨우 벙긋대며 웃음을 지어내고 있었다. 그저 심심해서 하는 농담은 아닌 듯했다.

내가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리자, 친씨아는 손가락질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이번 케아드로 의원 일로 레반을 꼭 좀 보고 싶어 하는데, 잠깐 같이 올라가줄 수 있지?"

"그러지."

물론 내키지 않았으나, 여기까지 온 이상 어차피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친씨아의 뒤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반 바이오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운 건물 내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크레딧이 아주 썩어 난다더니, 아예 없는 말은 아니었군.

"레반만 따라오고 다른 일행분들은 여기에 잠깐 있어줄래?"

친씨아가 레나와 루돌프, 아힘사를 1층 로비의 접객실로 안내하고 돌아와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가장 큰 중앙 승강기를 타고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우웅—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어디 황궁에서나 볼 수 있는 웅장하고 커다란 대문이었다. 그 육중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커다란 사무실 안에서 바쁘게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한 사내와 비서 한 명이 보였다.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를 훑고있는 사내는 깔끔한 와이셔츠 차림에 테가 얇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눈빛이 날카로운 것이 평범한 서류쟁이는 아닌 듯했다.

"칼스?"

친씨아가 칼스라는 이름을 부른 뒤에 헛기침을 한 번 하자, 그제야 고개를 슬쩍 들어올린 사내가 펜대를 잠시 내려놓고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짧은 시간 장내에 적막이 흐르고.

곧, 피곤에 절은 사내의 음성이 나지막이 내리깔렸다.

"상선에서 일해볼 생각 없나?"

어떤 미사여구도 없는 담백한 말이었다.

그 한마디 말만 딸랑 마친 사내는 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옆의 비서가 웬 사과 크기의 목함을 하나 가져오더니 곧바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청량한 향이 사방으로 무섭게 뻗어나왔다. 뭔지는 몰라도 보통 대단한 영약이 아닌 듯 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눈으로 본 영약과 에센스들 중 가장 뛰어난 품질의 물건임은 분명했다.

그런데, 상선에서 일 할 생각이라.

내가 그 의도를 짐작하려 머리를 굴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딸각- 딸각- 딸각-

어느새 사내의 비서가 목함 세 개를 더 가져오더니 차례대로 함을 열었다. 이번엔 직전의 사과만한 목함보다 조금 더 큰 목함들이었는데, 그 안에 든 영약들도 이전 영약보다 기운이 좋으면 좋았지 절대 덜한 영약들은 아니었다. 청량한 향에 코끝이 아려올 정도였다.

이윽고, 칼스라는 사내는 무뚝뚝한 말투로 영약을 받을 것을 종용했다.

"줄 때 받아."

#44화. 좋은 주인

#44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