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권에서 계속>
9권
제29장 뿌리 깊은 나무는 뿌리부터 말려 죽여라
1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을 잇는 세텔라드 북부 교역로.
세텔라드 산맥을 관통하는 이 산길을 십여 대의 마차가 지나고 있었다. 마차 위로 온갖 물품들이 가득 실려 있고 그 주위를 백여 명이 넘는 기마병과 보병들이 호위한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목과 손이 묶인 오크와 엘프, 드워프 들의 행렬이었다. 저마다 허름한 옷가지만을 걸친 채 생기 잃은 눈으로 힘없이 마차 뒤를 따른다.
대열 앞의 가장 화려한 마차, 그곳에서 보석으로 치장한 통통한 중년 사내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호위에게 소리쳤다.
"이보게! 좀 더 속도를 높일 수 없겠나?"
무장을 갖춘 사내가 말을 몰고 다가와 정중히 말을 건넸다.
"노예들의 체력을 고려하면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값이 떨어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드라그 님?"
마차에 탄 중년 사내, 마울 상단 소속의 상인인 드라그는 인상을 쓰며 입을 닫았다.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 사이의 교역을 주로 하는 마울 상단은 온갖 귀중품이며 특산품도 물론 다루지만, 가장 큰 교역품은 역시 이종족 노예들이었다.
드라그가 초조해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으음, 그건 그렇지만... 이 근처에서 습격을 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호위 임무를 맡은 용병대 대장, 룸다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스트라샌드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프리지안 도적단이라도 이 정도 병력을 상대로는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역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 에잉!"
혀를 차며 드라그가 마차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도적단은 무슨 도적단인가? 그저 야생화된 노예들, 몬스터나 다름없는 것들이거늘!"
룸다드는 고개를 저으며 마차에서 조금 떨어졌다. 용병대의 다른 사내 하나가 룸다드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야생화된 노예라며 하찮게 볼 수 없습니다, 룸다드 님. 소문에 따르면 그놈들은 정말 인간 도적단처럼 영리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하니까요."
룸다드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나도 알고 있다네. 스스로 프리지안 해방단이라 이름까지 붙이는 놈들인데 몬스터 취급이 가당키나 한가?"
프리지안 도적단.
이것은 서너 달 전부터 세텔라드 산맥 전역에 출몰하는 유명한 도적단의 이름이었다.
전원 오크나 엘프, 드워프 등의 이종족 노예들로만 이루어진 이들이 스스로를 프리지안 해방단이라 칭하며 상행 중인 노예 거래 상단을 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종족 입장에서야 동포들을 구하고 불의한 재물을 되찾는 것이겠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사유 재산을 탈취당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도적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병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윗분들이야 그냥 몬스터 취급을 하고 있다지만, 아무래도 보통 놈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이름난 그란 용병대도 놈들에게 당했다잖습니까?"
"그러게 말이다. 노예로 살던 놈들이 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리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건지...."
저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그리 의문점이 없었다. 원래 어쩌다 탈출한 노예들이 먹고살 길이 없어 인근 산속에 숨어 살며 행인들을 습격하는 일은 제법 있었으니까.
그리고 서너 달쯤 전부터 무슨 유행이 불었는지 대륙 전역에서 이종족 노예들의 대탈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 노예들은 전부 오지로 도망쳐 행방을 감추었으니, 몬스터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것들이 도적단을 꾸리고 인간을 습격했을 거라는 추측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저 프리지안 도적단의 행보였다.
저들은 이종족 노예들로 이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철저히 전략적으로 움직여 가장 방어가 취약한 장소를 노린 뒤, 엄중한 호위를 받는 상단의 용병대를 너무도 쉽게 와해시키고 노예와 물품을 털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데 그 움직임이 실로 제대로 훈련받은 군대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교했다.
"심지어 왕국의 추적조차도 그놈들을 잡지 못했다는데, 이건 뭐 몬스터 정도가 아니라 유명한 산적이나 도적단 못지않잖습니까?"
프로지안 도적단의 피해가 속출하니 당연히 차탄 공국이나 그라임 왕국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군대를 동원해 세텔라드 산맥 외곽을 훑으며 소탕 작전을 몇 번이나 펼쳤다.
하지만 전혀 성과가 없었다.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놈들은 기괴할 정도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흔적은 남겼다. 하지만 아무리 추적해 봐도 항상 오지 안쪽에서 모든 자취가 뚝 끊겨 버리는 것이다.
상식 밖의 일이었다. 몬스터들이 들끓는 저 세텔라드 산맥의 험지에서 노예들이 살아남았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 해도 거기 서식하는 이상은 분명 자취를 남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바운티 헌터를 고용해 추적하고 마법사를 동원해 아무리 탐지를 해 봐도 놈들의 근거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찾는 것은 언제나 잠깐 머물고 간 야영지의 흔적뿐이었다.
오죽하면 이름난 바운티 헌터, 다운트가 이런 발언마저 하며 포기 선언을 했을 정도였다.
-말도 안 돼! 이놈들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져 산맥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다가 다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지 않은가?
룸다드가 경계 어린 눈으로 대열 뒤의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이해하기 힘들단 말이지. 오크 검투사 놈들이 있으니 전투에 익숙한 것이야 이해한다손 쳐도 대체 뭔 수로 군대의 탐색마저 피하는 건지...."
용병대에서 뼈가 굵은 룸다드도 군대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자신은 전혀 없었다. 뒤따르던 용병 사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놈들도 나름대로 필사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저 같아도 제 형제나 가족이 저런 꼴을 당하고 있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하려 할 것 같습니다만."
룸다드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용병 사내를 바라보며 그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꼭 놈들이 사람인 것처럼 말하는군."
"으음, 하지만 몬스터가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않잖아요, 절대? 짐승도 제 새끼 정도야 챙깁니다만 동족까지 챙기진 않습니다."
용병 사내가 머리를 긁으며 멋쩍게 대꾸했다. 룸다드는 빤히 사내를 바라보다가 그냥 말 머리를 돌렸다.
지위상 일단 한 소리 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도 용병 사내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칼 밥 먹는 이가 상대해야 할 적의 전력을 과소평가하면 그 대가는 자신의 목숨으로 지불하게 되는 법이다. 그리고 룸다드가 파악한 프리지안 도적단의 행보는 결코 흉폭한 몬스터 무리가 아니었다. 보통 몬스터 대하듯 대하다간 분명 황야에 뼈를 묻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속내를 남들 앞에서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상인들 앞에선 그런 티는 내지 말게나. 불쾌하게 여길 게야."
슬쩍 핀잔을 던지며 룸다드는 앞쪽 마차를 손가락질했다. 안에 탄 드라그와 다른 노예 상인들의 성난 목소리가 밖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어! 권왕이란 작자는 노예 따위를 사람 취급하질 않나, 가축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뭘 안다고 동포를 해방한다고 설쳐 대?"
"그러게 말이오. 뭣도 모르는 것들이 쓸데없이 선동되어서 질서나 어지럽히고 말이야, 에잉!"
"얌전히 말만 잘 들으면 어련히 잘 키워 주고 먹여 줄 건데 뭐가 그리 나쁘다고...."
시끄러운 상인들의 마차 뒤를 따라 상단 행렬은 계속 길을 갔다. 산속의 해는 짧은 법, 세텔라드 산맥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점점 해가 뉘엿뉘엿하게 저물어 간다.
그렇게 막 행렬의 선두가 고갯길을 넘어갈 때였다.
휘이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동시에 수십 대의 화살이 일제히 날아와 말을 탄 호위들에게 향했다.
"커억!"
"으악!"
"컥!"
순식간에 호위 세 명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헉!'
룸다드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쓰러진 이들 대부분은 체인 메일과 방패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어떤 습격이건 선공은 화살로 하는 것이 정석인 바, 그래서 미리 충분히 대비를 했다. 그런데 이 화살들은 무장한 용병의 갑옷 틈새를 정확히 관통해 있었다.
'이 정도면 정규 궁사 훈련을 받은 수준인데?'
투기장에서 활 쏘는 검투사 봤나? 오크 검투사들은 결코 궁술은 훈련받지 않는 것이다. 이종족 노예들로 이루어진 프리지안 도적단에게 이런 활솜씨가 있을 리 없었다.
'설마 그놈들이 아닌가?'
혼란 속에서도 룸다드가 고함을 질렀다.
"적습이다! 모두 대열을 갖춰라!"
미리 훈련한 대로 용병대와 호위대가 발맞춰 빠르게 대열을 짰다. 방패를 들어 마차를 호위하며 노예들을 둘러싼 채 원진을 구축한다. 이렇게 하면 노예들의 이탈도 막을뿐더러, 만약 저들이 프리지안 도적단일 경우 화살 공세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용병들을 노리다 동족에게 화살을 꽂을 수는 없을 테니까.
과연 용병들이 대열을 갖추자 화살 비가 뚝 끊겼다. 대신 나무 여기저기서 활을 든 이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남녀, 특히 여성 비율이 높은 그들을 보며 룸다드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전원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래도 뾰족하게 나온 양쪽의 긴 귀는 저들의 정체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에, 엘프? 엘프가 어떻게 활을 다루는 거야?'
동시에 나무 등치 아래에 숨어 있던 한 무리의 병력이 요란한 외침과 함께 일어났다.
"우리는 프리지안 해방단!"
"억압받는 동포들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일어섰다!"
이들 역시 나무 위 엘프들처럼 복면으로 눈 아래쪽을 가리고 있었다. 덮고 있던 수풀을 밀어 던지며 수십 명의 중무장한 오크와 드워프 무리가 상단 행렬을 덮쳐 갔다.
"형제들이여! 고통받는 동포를 구하자!"
"와아아아아!"
상인들과 용병들이 동시에 외쳤다.
"몬스터다!"
"프리지안 도적단이다!"
☆ ☆ ☆
산길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거대한 도끼며 대검을 휘두르며 흉폭한 인상의 오크들이 용병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빈다. 외곽에선 할버드와 배틀 해머 등으로 무장한 드워프들이 대열을 짠 채 압박을 가한다. 머리 위로는 연거푸 화살이 날아온다. 나무 위에 오른 엘프들이 연달아 사위를 튕길 때마다 비명이 아우성친다.
"으악!"
"크아악!"
수하들의 비명 속에서 룸다드가 절규하듯 외쳤다.
"세이어시여! 저 흉폭한 놈들로부터 우리를 가호하소서!"
인간들끼리 싸울 때는 보통 투신 아레스의 이름을 부르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나 몬스터일 땐 인류의 신, 세이어의 가호를 찾는 것이 기사나 용병들의 입에 밴 습관이었다.
세이어의 가호를 외치며 룸다드가 검을 뽑았다. 할버드를 든 드워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룸다드가 이를 갈며 검을 내리쳤다.
"죽어라!"
"죽지 마라!"
상반된 대꾸를 돌려주며 드워프가 할버드를 휘둘렀다. 섬광이 눈앞에 번쩍이며 룸다드의 가슴팍에서 피가 솟구쳤다. 고통 속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며 룸다드는 의식을 잃었다.
"크어어...."
쓰러지는 룸다드를 보며 드워프, 카다마이트는 힐끔 상대의 안위를 살폈다. 절묘하게 급소를 피한 덕에 중상이지만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다. 굉장히 고도의 기법이지만 오러 유저인 그에겐 별로 힘든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용병 하나를 베며 회색 피부의 오크 하나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이, 카다...."
"으익! 본명 부르지 마쇼!"
카다마이트가 펄쩍 뛰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레이 오크,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이 뜨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여하튼 이놈들 안 죽이는 것 맞지?"
"맞소."
현재 이종족 군세, 프리지안 해방단은 용병들을 상대로 살기를 뿌리지 않았다.
이미 며칠간이나 몰래 상단의 뒤를 따르며 상황을 정탐한 후다. 마울 상단 놈들은 살려 둘 가치도 없는 말종이었지만 룸다드가 이끄는 이 룸 용병단은 좀 달랐다.
'오면서 보니까 애들이 인성이 꽤 괜찮더라고.'
룸 용병대는 딱히 노예들에게 가혹하게 굴지도 않았고, 간간히 식사에도 신경 써 체력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상인들이 노예를 막 굴리려 할 때 말려 주기도 했다. 대륙 전체에 퍼진 이종족에 대한 인식 변화, 그것의 영향으로 예전처럼 막 대하기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들이 조금씩 생겨난 것이다.
'이런 인간들은 살려 둬야 그만큼 돌아오는 법이지.'
노예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이들은 모두 참살당하지만, 온화하게 대한 이들은 모두 살아남는다. 이런 사실이 퍼져 나가면 그만큼 다른 노예들에 대한 대우도 완화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채찍질을 하려 해도 한 번은 더 생각하게 될 테니까.
물론 그래 봤자 절대 다수는 여전히 예전처럼 행동하겠지만, 원래 변혁이라는 것은 이런 사소한 데서부터 출발하는 법이다.
"크억!"
"으악!"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용병들의 숫자가 점점 늘었다. 하지만 부상자는 있을지언정 사망자는 없었다. 이 이종족 전사들과 용병들의 실력 차는 그야말로 극심해서, 생명에 지장 없이 쓰러뜨리고도 상황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프리지안 해방단은 사실 도망친 노예들로 이루어진 이들이 아니었다.
드워프 오러 유저 카다마이트와 말로이드, 오크 오러 유저 하다툼에 단하임 일족의 족장 렐하드,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각 종족의 최정예들로 모인 이들인 것이다.
이것이 그라임 왕국과 차탄 공국이 이들을 찾지 못하는 이유였다. 노예 상단 털 때마다 다이만 터미널의 공간 포털을 이용, 그랜드 포지나 안타레스 백국으로 날라 버리는데 무슨 수로 흔적을 찾겠는가?
나무 위에서 렐하드가 소리쳤다.
"제3열, 사격 개시!"
엘프들이 순차적으로 계속 화살을 쏘아 댔다. 그때마다 화살이 정확히 용병들의 갑옷 틈을 노리고 허벅지며 어깨를 관통한다.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전투 불능에 빠지기엔 충분한 부상이다.
실로 놀라운 솜씨였다. 화살 자체야 누구나 쏠 수 있겠지만, 그게 과녁을 맞히게 되기까진 오랜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자리의 엘프들은 누구나 일류 궁사와 같은 활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화살을 당기며 렐하드가 속으로 웃었다.
'정령력이 늘어서 그런가, 이제 이 정도 거리에서 맞히는 건 일도 아니군.'
바람의 정령과 소통하며 바람의 결을 읽을 수 있는 엘프들은 전통적으로 타고난 궁사였다. 왜곡되기 전의 옛이야기 속에선 항상 엘프 하면 활이란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잊힌 진실, 하지만 세계수가 부활하며 엘프들의 궁술에 대한 감각 역시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전투가 한창 이어질 때였다. 대열 저편에서 오크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라악!"
"응?"
말로이드와 하다툼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별 볼 일 없는 줄 알았던 용병대에 오크 전사를 쓰러트릴 기량을 갖춘 이가 있었던가?
뒤이어 드워프 전사의 비명도 들렸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오크와 드워프 전사들, 그들 뒤로 십여 명의 기사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용병들과 달리 갑옷부터가 번들번들 윤기가 돌고 있었다.
"역시 나타났구나! 도망 노예 놈들!"
기사들은 하나같이 불길이며 뇌전이 일렁이는 장검을 들고 있었다. 오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말로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검사로군!"
이들은 마울 상단이 특별히 초빙한 차탄 공국의 기사들이었다. 상업을 국가의 근원으로 삼는 차탄 공국은 적절한 대가만 지불하면 이렇게 기사들도 상단의 업무에 참가시키곤 하는 것이다.
원래 기사라 하면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 아무리 명령이라도 고작 일개 상단 호위에 나설 리 없다. 하지만 차탄 공국의 기사들은 그 국민성상 명예라든가 긍지라든가 하는 개념이 상당히 약해서 이런 일이 꽤 잦았다.
마차 속에서 그라드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흐흐, 언제까지고 네놈들이 설치게 내버려 둘 줄 알았느냐!"
마검사들이 검을 뽑고 자신만만하게 이종족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나라답게 다들 값비싼 마갑으로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마검사들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얌전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말로이드가 자신의 대검을 매만지며 비릿하게 웃었다.
"우리가 왜 투항을 해야 하지?"
"노예들답게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당장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이거늘!"
마검사 중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걸친 갑주는 평범한 기사는 상대도 되지 않는 강력한 근력과 반사 신경, 그리고 방어력을 제공해 주는 뛰어난 마갑이었다. 이런 마갑을 걸친 차탄 공국의 기사들이라면 일개 병사 수십 명을 일거에 참살할 수 있는 것이다.
"네깟 놈들이 우리 상대가 될 것 같으냐?"
마검사들이 마갑의 마법을 발동시키며 육체 능력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막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을 때였다.
말로이드 옆에 서 있던 카다마이트가 할버드를 높이 치켜들었다.
"안 될 건 또 뭔데?"
우우웅!
선명한 적갈색 오러가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허억?"
마검사의 눈동자에 당혹과 경악이 사이좋게 스쳐 지나갔다. 뿐만이 아니었다. 하다툼도 말로이드도 각자 블레이드 오러를 끌어 올렸다.
"이건 대체!"
투구 속 마검사의 눈동자 위로 세 줄기 블레이드 오러가 선명히 비친다. 마검사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뭐, 뭐야!"
"뭐긴."
실소를 흘리며 카다마이트가 몸을 날렸다.
"네 죽음이다."
서걱!
단 일격에 마검사의 몸이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길게 갈라졌다. 강력한 마법의 보호가 깃든, 아다만티움을 섞어 만든 그 튼튼한 갑옷이 일격에 쪼개진 것이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마검사가 좌우로 갈라져 바닥을 나뒹군다.
"으, 으히히힉!"
뒤에 서 있던 마검사 하나가 공포로 인해 괴이한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말로이드와 하다툼도 몸을 날렸다. 블레이드 오러를 흩뿌리며 세 오러 유저가 마검사들을 향해 잔혹한 참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차탄 공국의 기사들, 이들의 장비는 분명 수준 높고 값비싼 것이었다.
얼마나 값비싸냐면... 유서스가 쓰는 마갑 엘드라드의 장신구 하나 정도 가격?
애초에 마검사가 날고 기어 봤자 마검사일 뿐이다. 대륙 최강의 마검사로 위명이 자자한 황금기사가 오러 유저 수준인데 이들의 수준은 그 황금기사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반면 이 자리엔 제대로 된 오러 유저만 무려 세 명이나 있다.
상대도 되지 않았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차탄의 마검사들은 모조리 피 웅덩이에 몸을 뉘였다. 용병들과 달리 이놈들은 딱히 노예들에게 잘해 주지도 않았고, 또한 동료를 죽이기까지 했다.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마검사들이 맥없이 쓰러지자 용병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으어어...."
"기사님들마저 당하다니...."
용병들이 하나 둘 뒷걸음질 쳤다. 드워프나 오크가 오러를 쓰는 것은 이제 별로 신기하지 않았다. 안타레스 백국에 그런 놈들 많다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하지만 하필이면 자신이 그런 놈들을 만나게 될 건 또 뭔가? 용병들 모두가 자신의 재수 없는 팔자를 저주할 때였다.
나무 위에서 렐하드가 고함을 질렀다.
"항복하라!"
용병들이 주저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렐하드가 다시금 소리쳤다.
"아니면 도망가고 싶은 자, 도망쳐라! 쫓지 않는다!"
그러자 용병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기사야 도망이 항복보다 더한 수치겠지만, 용병 입장에서 항복과 도주는 꽤 의미가 다르다. 항복은 일거리에서 손 떼는 무책임한 짓, 하지만 도망은 최선을 다했지만 힘이 달려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걸 아는 렐하드가 적절한 타이밍에 소리를 질렀고, 기다렸다는 듯 용병들이 하나 둘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 자리엔 상인들과 이종족 노예들 외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마차 속에서 그라드와 다른 노예 상인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이놈들! 내가 네놈들에게 얼마를 주었는데?"
"무책임한 놈들!"
"당장 돌아오지 못할까!"
고함치는 상인들의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덮어 간다. 차가운 불길을 눈에 담은 오크 전사들의 그림자였다. 서서히 다가오는 오크들을 보며 상인들이 사시나무처럼 떨어 댔다.
"으으으...."
잠시 후, 마차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 ☆ ☆
엘프들을 이끌고 렐하드가 나무에서 내려왔다. 세계수에서 생활하는 이들답게 나무 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평지를 걷듯 수월하게 바닥에 착지하며 렐하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상당한 용병들을 제외하고, 더 이상 그 자리에 살아 있는 인간들은 없었다. 평소 해 온 대로 몇몇 오크와 드워프들이 잽싸게 마차에 올랐다. 이 상단 행렬이 운송하고 있는 것은 이종족 노예뿐만이 아니었다. 값비싼 귀중품과 특산품의 물량도 상당했다.
말로이드가 입을 열었다.
"식량만 빼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그렇소. 평소대로."
렐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그동안 습격해 빼앗은 상단의 물품 중, 식량을 제외한 다른 귀중품들은 전부 인근의 가난한 인간 마을에 뿌리고 있었다.
물론 가난하게 사는 인간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우러나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같은 동포도 아니고, 아무리 상관없는 이들이라지만 노예 취급하던 인간과 같은 종족인데 밥 좀 굶고 산다고 불쌍하게 여기진 않는다. 저쯤 되면 자비로운 게 아니라 배알이 없는 쪽에 가깝다.
그저, 그 많은 짐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이만 터미널을 통과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다이만 터미널의 위치는 오지 한복판이다. 오러 유저와 일족의 최정예들이 호위한다 하더라도 이동 도중 심심찮게 몬스터에 의한 피해가 발생하는 험지 중의 험지다. 느긋하게 짐마차 끌고 갈 만큼 만만한 곳이 절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비밀 유지를 해야 하니 주변 몬스터를 토벌한다든가 해서 길을 닦아 놓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들고 가지도 못할 거, 이렇게 환심이라도 사 두는 게 낫지."
짐을 풀어 재포장하는 이들을 보며 카다마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프리지안 해방단은 세탈라드 산맥 인근의 가난한 이들에겐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다.
황금을 최선의 가치로 삼는 차탄 공국답게, 부의 격차 역시 대륙에서 제일가는 수준이었다. 다른 나라도 귀족과 평민, 농노의 생활수준은 엄청나기 마련이지만 차탄 공국은 특히나 심했다. 차탄 공국의 빈민이 되느니 차라리 오크 노예가 되는 것이 낫다는 농담마저 돌 정도였다.
귀중품을 아낌없이 뿌린 덕에 세텔라드 인근의 평민들에겐 더 이상 오크나 드워프, 엘프는 노예 종족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보살펴 주는 성자나 다름없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다른 지역에도 소리 없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말로이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살짝 양심이 찔리긴 하지만 말이지... 성자는 무슨?"
"뭐, 상관없잖소? 어쨌거나 결과는 좋으니까."
렐하드가 빙그레 웃었다. 하다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지도 못할 것 갖다 주니 저리도 좋아한단 말이지? 참 인간들은 신기해."
그러는 동안 마차 위의 짐들이 대부분 재포장을 마쳤다. 프리지안 해방단이 활동한 지도 어언 석 달째, 중간에 하다툼이 전쟁으로 잠깐 빠지는 일을 제외하곤 항상 손발 맞춰 움직이던 이들이었다. 다들 익숙한 손놀림으로 인근의 인간 마을에 나누어 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문득 렐하드가 카다마이트에게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카다마이트, 오러 쓰는 거 들키면 안 되는 것 아니었소?"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들이 오러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나 카다마이트는 유명한 오러 유저, 테츠발트 경을 해치운 데다가 그 장면을 영상 크리스탈로 많은 귀족에게 보인 바 있다. 오러의 색상이나 외모가 꽤 알려져 있는 것이다.
괜히 이들이 복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안타레스 백국과의 관계가 들통 나게 된다.
하지만 카다마이트는 태연한 태도였다.
"구원자께서 말씀하시길, 급하다 싶으면 그냥 쓰라 하셨소. 우기면 장땡이라나?"
"그래도 되는 거요?"
"조금 더 지나면 오러 안 써도 어차피 못 우기니까 상관없댔소."
"그렇구만."
렐하드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하다툼은 여전히 '뭔 소리여?'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마차 위의 짐을 재포장하는 한편 다른 이들은 묶여 있는 이종족 노예들의 줄을 끊어 주고 있었다. 목과 손에 굳건히 묶인 오랏줄에서 풀려날 때마다 묶여 있던 오크와 엘프, 드워프 들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모두의 구속이 풀리자 탈카타가 우렁차게 외쳤다.
"자! 동포들이여! 자유의 땅으로 갑시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다.
이제껏 몇 번이나 동족들을 구해 냈지만, 그때마다 이종족 노예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그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너무도 오랫동안 노예 생활에 젖어 있던 이들.
그들의 부모의 부모의 부모 대부터 노예였던 이들.
'그런 이들이 바로 자유를 깨닫기가 무리지. 나 역시 그러하지 않았는가?'
푸른 곰 부족에서 오크의 전통을 접한 탈카타는 더 이상 자신이 레펜하르트의 노예라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다.
물론 레펜하르트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 그는 자신을 구해 주었고, 노예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노예의 충성이 아닌, 멘토를 향한 자유로운 오크로서의 충성이었다. 탈카타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충성이었다. 이 차이는 겉보기엔 다르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자, 어서 백국으로 돌아가야지.'
그렇게 탈카타가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뒤늦게 등 뒤에서 환호가 터졌다.
"와아아아!"
"자유다!"
"이젠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풀려난 노예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크들도 엘프들도 드워프들도, 모두가 자유로워진 손발을 매만지며 마음껏 해방을 만끽한다. 이들은 그저, 너무 감격한 나머지 반응이 늦었을 뿐이었다.
"어어...."
탈카타는 당황하며 저들을 바라보았다. 그뿐 아니라 카다마이트도 말로이드도, 렐하드와 하다툼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행했던 모든 일들, 모든 소문들, 그것들이 드디어 대륙의 다른 동족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삶만이 최선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이 운명이라 여기며 순종하던 동족들이 드디어 변화하기 시작했다.
탈카타는 눈을 껌벅였다. 순간 가슴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기쁨 속에서 흘리는 저들의 눈물은....
"에이 씨, 왜 주책맞게 나까지 눈물이 나려고 하지...."
분명, 자유를 아는 자들의 눈물이었다.
2
초여름의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안타레스 백왕성의 앞뜰.
뜰 한가운데 선 푸른 곰 부족의 세 번째 투사, 타시드가 소리 높여 외쳤다.
"러스! 자네는 틀림없는 내 친우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난 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터질 듯한 녹색의 근육질 어깨 위로 투기가 피어오른다. 투기 속에서 타시드가 참마도, 다카르를 뽑아 들었다. 야수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칼날이 햇살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하지만!"
타시드의 전신에서 숨길 수 없는 살기가 터져 나왔다.
"지금은 우정을 잊겠다!"
분노와 증오가 담긴 타시드의 눈빛이 눈앞의 인간 사내, 러스에게 향했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를 향해 집중되었다.
우우웅!
굉음과 함께 청록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다카르의 검신을 타고 올라 창공을 꿰뚫을 듯 솟구쳤다.
흔들림 없는 빛을 발하는 찬란한 타시드의 블레이드 오러를 바라보며 러스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타시드...."
처연한 어조로 러스는 친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양손을 들었다. 러스 역시 오러를 끌어 올렸다.
화르륵!
푸른 오러가 불길처럼 피어올라 손가락 마디마디를 휘감고 양손을 가득 감쌌다.
"나 역시 그대에게 우정을 가지고 있지만...."
오러의 불길을 일렁이며 러스가 자세를 낮췄다.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한 야수처럼 전신이 팽팽히 당겨진다. 눈빛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러스가 신념 가득한 눈빛을 빛냈다.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타시드의 살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살기! 실로 엄청난 살기!
하지만 그 살기는 러스를 묘하게 비껴가고 있었다. 분명 러스 쪽으로 흘러가고는 있지만, 정확한 목표는 러스가 아니었던 것이다.
러스의 왼손에 들린 희고 둥근 물체, 그것을 향해 맹렬한 살기를 퍼부으며 타시드가 악을 써 댔다.
"우정의 이름으로 말한다! 러스! 당장 그 저주받은 물건을 치워라!"
그것은 비누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좀 씻어라, 이 오크야! 도대체 1년이나 목욕 안 했다는 게 말이 되냐!"
오러를 더더욱 끌어 올리며 러스도 악을 써 댔다.
조금 전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러스와 타시드는 신 나게 대련을 하며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대련을 마친 뒤 수건으로 땀을 닦을 때였다.
문득 러스가 인상을 썼다. 타시드가 쓰고 난 수건, 그것이 무슨 걸레처럼 새까매져 있었던 것이다.
기가 차 러스가 물었다.
"...타시드, 언짢아하지 말고 대답해 주게. 대체 언제 목욕했나?"
타시드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작년 여름!"
러스가 발작했다.
"크악!"
기가 막혔다. 둘은 단순히 검술만을 겨룬 것이 아니라 맨손 체술이며 그라운드 기술 등, 거의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해 왔다.
'내가 지금 1년 넘게 목욕 안 한 놈이랑 뒹굴었었단 말이냐!'
당장 러스는 부엌으로 달려가 비누를 들고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사태가 일어났다.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오크들은 언제나 물이 귀하며, 그렇다 보니 목욕을 잘 하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드물게 보이는 샘은 일족의 목을 축일 귀중한 수원水原, 감히 거기에 몸을 담그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오크들은 물에 몸을 담그는 행위를 질색하곤 했다. 타시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타시드가 버럭 성을 내며 소리쳤다.
"대초원의 아들을 모욕할 셈인가!"
"아니, 목욕시킬 셈이다. 야! 너 그러다 병 생겨!"
건조한 초원 지대에서야 1년에 한 번씩만 목욕해도 별문제 없었겠지만, 기후가 달라졌으니 여기서는 자주 몸을 씻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타시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린 성자님께 치료받으면 된다!"
"...적어도 목욕이 필요하다는 자각은 있구먼."
말하는 걸 보니, 목욕 안 하면 병 생길지도 모른다는 건 아는 것 같다.
"그걸 알면서도 싫다고 버티고 있냐? 네가 애냐?"
"가끔은 현자도 아이에게 배우는 바가 있는 법이다!"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는 꼴이, 슬슬 제정신도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 친구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여기선 강압적으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우정인 법!
흥분한 타시드를 차분히 바라보며 러스가 힐끔 등 뒤로 질문을 던졌다.
"물 다 끓었습니까, 아틸카?"
오러를 끌어낸 채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그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거대한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목욕통 밑에선 주술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라 통에 담긴 물들을 데우는 중이었다.
목욕통 안에 손을 집어넣은 아틸카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화답했다.
"적절하게 따듯하군. 묵은 때를 벗기기에 최적의 온도야."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베지 않는 트롤들은 나무를 때어 불을 피우는 일이 거의 없다. 죽은 가지들을 모아 식사를 준비하거나 어둠을 밝히기 위해 화톳불을 피우는 정도다. 도자기나 유리 등을 구울 때처럼 많은 화력이 필요한 일은 전부 이처럼 주술의 불꽃으로 해결하곤 했다.
아틸카의 답변에 러스가 눈을 빛냈다.
"자, 포기해라, 친구!"
타시드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목욕통을 바라보았다. 오크 장정 두어 명은 충분히 들어갈 듯한 커다란 통, 그곳에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지금 타시드의 눈에 그 모습은, 지옥의 뚜껑이 열려 유황불 연기를 피우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검자루를 힘차게 쥐며 타시드가 고개를 저었다.
"푸른 곰 일족의 전사에게 포기라는 단어는 없다!"
뭔가 말은 그럴듯한데, 그래 봤자 목욕하기 싫다는 소리다. 러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에휴...."
생사대적을 만난 듯 투지를 끌어 올리는 타시드를 보며 러스는 머리를 긁었다. 그와 타시드의 기량은 큰 차이가 없었다. 저렇게 싫다고 난동을 부리면 러스의 힘으로 제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물론, 러스에겐 해결법이 있었다.
"아틸카."
물 끓여 놓고 재밌다는 듯 지켜보고 있는 장신의 트롤을 향해 러스가 협조 요청을 건넸다.
"도와줘요."
"기꺼이!"
안 그래도 아틸카 역시 슬슬 저놈 좀 씻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틸카가 팔뚝을 걷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주술을 써 전신을 강화하기까지 했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찼네...."
주술적인 가락을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흉악한 인상의 트롤을 보며 타시드가 절망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아틸카! 당신마저도!"
"무슨 사람을 배신자 취급하고 그러나. 처음엔 좀 겁나겠지만 일단 시작하고 나면 자네도 즐기게 될걸세."
긴 팔을 좌우로 풀며 능글맞게 대꾸하던 아틸카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다보니 뭔가 뉘앙스가 미묘하구먼."
우측의 러스와 좌측의 아틸카가 먹이를 사냥하듯 포위망을 좁혀 온다. 타시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을 흘렸다.
"아아, 아버지 라트여, 나를 가호하소서!"
타시드가 기합을 터트리며 몸을 날렸다.
"크어어어!"
쓴웃음을 흘리며 러스와 아틸카도 마주 몸을 날렸다. 요란뻑적한 타격음이 백왕성의 앞뜰을 가득 메웠다.
딱! 딱! 우당탕탕!
물론 상황은 대단히 쉽게 끝났다. 현재 아틸카는 러스와 타시드가 합공을 해야 겨우 감당할 만한 강자였다. 물론 둘의 재능이 워낙 출중하니 몇 년 내에 따라잡히겠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아틸카의 기량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런 아틸카가 러스와 손잡고 타시드를 몰아붙이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러스의 관절기가 타시드의 양팔을 제압했다. 아틸카의 주술이 스피리츠 웨폰이 걸린 참마도, 다카르를 타시드로부터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무장 해제된 타시드를 바라보며 러스가 히죽 웃었다.
"자, 씻자, 친구."
"으어어어...."
용맹한 오크 투사의 눈빛에 두려움이 감돌았다.
3
시리스와 함께 백왕성의 회랑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앞뜰을 바라본 레펜하르트의 눈에 괴이한 광경이 들어왔다.
"응?"
짧은 반바지만 걸친 차림으로 타시드가 앞뜰의 기둥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표정이 대단히 절박한 것이, 마치 절벽에 매달려 있는 실족자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아틸카와 러스가 그런 타시드의 허리와 다리를 붙잡고 열심히 당기는 중이었다.
"싫어! 싫어! 싫어!"
"네가 무슨 고양이냐! 기둥에 손톱 좀 세우지 마!"
호통을 지르며 러스가 억지로 타시드의 두 팔을 기둥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소리쳤다.
"이빨로 기둥 물지도 말고! 재주도 좋다, 뭔 수로 이빨로 오러를 끌어 올린 거야?"
버둥대는 타시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다란 철제 통을 번갈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우뚱 숙였다.
"뭐야? 오늘 저녁 메뉴는 타시드탕인가?"
실소를 흘리며 시리스가 대답했다.
"타시드 목욕시킨대요."
"오!"
안 그래도 저놈의 오크들, 어떻게 목욕시키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화색이 되어 레펜하르트가 러스와 아틸카, 두 사람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힘차게 세웠다.
'잘했어!'
주걱턱을 움직이며 아틸카가 빙그레 웃었다.
'별말씀을!'
자신의 멘토이자 은인, 레펜하르트에게마저 배반당한 타시드가 괴이쩍은 신음을 흘려 댔다.
"으갸으갸으아아!"
둘은 열심히 타시드를 통으로 끌고 갔다. 그렇게 타시드가 속절없이 지옥의 입구(?)로 끌려갈 때였다. 회랑 반대편에서 오크 여인 한 명이 앞뜰로 걸어 나왔다. 날렵하면서도 탄탄한 체구에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 푸른 곰 부족의 대모 스탈라였다.
"응? 이 양반들 뭐해?"
스탈라를 본 타시드가 화색이 되어 소리쳤다.
"대모님! 도와주...."
순간 타시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왠지 대모님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묘하게 피부가 뽀샤시한 데다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투사라곤 하지만 스탈라 역시 여성,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뺨을 매만지며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 티가 나나? 아유, 인간들의 비누란 거, 정말 좋더라. 거봐, 남편. 남편도 목욕하니까 참 좋잖수?"
타시드의 시선이 스탈라의 등 뒤로 향했다. 그곳에 웅장한 체구의 오크 투사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채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허허허...."
타시드와 칼켄이 눈을 마주쳤다. 절망 속에서 타시드가 물었다.
"족장님... 이제... 끝인 겁니까?"
"아들아, 영원한 더러움은 없는 법이지."
그 비장한 목소리는 러스와 아틸카조차 잠시 숙연케 할 정도였다. 물론 그 비장미는 이어진 스탈라의 말 때문에 바로 깨져 버렸지만.
"뭐 하니? 어서 안 씻기고?"
"러스! 우정의 이름으로 간청한다! 제발 이 손을 풀어 다오!"
"우정의 이름으로 답하노니, 타시드. 자넨 슬슬 씻을 때가 되었다네."
풍덩!
요란한 물장구 소리와 함께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다. 남은 것은 뜨끈한 통 안에 앉아 하염없이 허망한 표정을 짓는 오크 청년뿐이었다.
"야, 그렇게 더럽혀졌다는 표정 좀 그만 지을래? 사실은 깨끗해진 거거든?"
소리치는 러스와 마냥 고개를 돌리는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평화롭구먼."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평화롭네요. 오늘은 그 이상한 여자도 엘븐 포레스트 가 있으니까."
"응?"
"아, 아녜요. 아무것도."
☆ ☆ ☆
시리스와 함께 레펜하르트는 백왕성 3층으로 향했다. 3층 외곽에 위치한 커다란 방, 그곳은 알 포트를 위해 마련해 놓은 성내의 신전이었다.
그곳에 들어서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보게, 마켈린."
알 포트의 성물이 걸린 단상, 그 위에서 백발이 성성한 드워프 하나가 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 으엑?"
민둥민둥한 턱을 드러낸 드워프 노인이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보더니 가슴을 쓸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 놀랬잖습니까, 구원자시여."
드워프 노인, 마켈린의 손에 들린 북실북실한 털뭉치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수염 손질 중이었나? 이거, 미안하게 됐군."
바로 사과하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니, 마켈린 님. 그 수염, 드워프들은 알 포트께서 내려 준 거란 걸 다 알고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그리 놀라세요?"
드워프들이 마켈린의 수염에 경의를 보이는 것은 그들조차도 구별할 수 없는 신께서 내리신 성물이라서이지, 그게 진짜 마켈린의 수염이 아니란 걸 몰라서가 아니다.
신성한 수염을 잽싸게 붙인 뒤 마켈린이 혀를 차며 대꾸했다.
"시리스 양. 그대의 옷은 태어날 때부터 입고 나온 것이 아니지만 벗고 있을 때 누군가가 보면 당연히 놀라지 않겠소?"
레펜하르트나 시리스는 드워프가 아니니 괜찮지만, 같은 드워프끼리 민둥턱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그런 문제예요?"
묘한 데서 종족 간의 문화 차이를 느끼며 시리스는 혀를 찼다. 나름 드워프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의관을 단정히 한―그러니까 붙인 수염을 자연스럽게 다듬었단 소리다― 마켈린이 레펜하르트에게 자리를 권했다. 신전 안쪽 테이블에 둘러앉은 뒤 마켈린이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상의할 일이 있네, 마켈린."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차탄 공국을 공격해야 할 때가 됐어."
대륙에서 제일가는 상업 국가, 차탄 공국.
그라임 왕국과 크로방스 왕국, 바실리 왕국, 라스틸 공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쥬란 강을 통해 신성 바슈탈론 제국과 할라인 왕국, 테이칸 왕국과도 교역하는 차탄 공국은 그야말로 대륙의 모든 물산이 오가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그런 만큼 노예 매매 역시 대부분 차탄 공국 수도, 제플린을 통해 거래되고 있었다.
엘프는 워낙 수명이 길어 제플린에서 밖에 생산되지 않는 주요 특산품이다. 드워프 역시 부락 단위여야 노예로서 쓸모가 있는 특성상, 제플린의 중개가 있어야 제대로 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드워프 노예는 보통 마을이나 일족 단위로 단체 구매를 해야 하는 만큼 오가는 액수도 컸다. 믿을 만한 중개 상인이 있어야 안심하고 거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크들 역시 제플린을 통하는 숫자가 상당하며, 워낙 유동 인구가 많다 보니 연금술사 길드 역시 규모가 컸다. 힐링 포션의 구매자가 많은 만큼, 제플린에 붙잡혀 있는 트롤들의 숫자도 대륙에서 가장 많았다.
"그동안 손 닿는 대로 많은 이들을 구해 냈지. 슬슬 자리를 잡기도 했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제플린을 공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차탄 공국, 특히 수도 제플린에 묶여 있는 이종족 노예의 숫자는 엄청나다. 그곳의 동포들만 해방해도 백국의 이종족 숫자가 단숨에 두 배 이상 치솟을 것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수가 적은 엘프들을 대량으로 구해 낼 수가 있다.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플린의 상인들이 몰락하면 대륙 전체의 노예 매매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전생 때도 제국을 세우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이 이거였지."
선공을 거의 하지 않았던 레펜하르트가 유일하게 먼저 공격한 나라가 바로 차탄 공국이었다. 다른 나라는 대화를 통해 어떻게든 그의 뜻을 이해해 주길 기다렸지만, 차탄 공국만큼은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원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곳만큼은 결코 좌시할 수 없지요."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제플린의 수도 방위 능력이나 병력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겠군요."
"대충은 알고 있다네. 시기가 다르니 조금 오차가 있긴 하겠지만."
어차피 전생에서 한번 털어 본 곳이니만큼, 레펜하르트도 제플린에 대한 꽤나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사육 시설까지 갖춘 대규모 엘프 경매장이 둘, 엘븐하임과 엘로인. 유통을 맡은 엘프 경매장이 넷, 대규모 오크 경매장이 열둘이고 드워프 경매장이 일곱 곳이지. 연금술사 길드는 한 곳이지만 규모가 커서 잡혀 있는 트롤의 숫자도 쉰 명 정도는 될 걸세. 아틸카가 예전에 조사해 뒀더군. 너무 위험해 여태껏 손을 못 댔다고 하던데."
마켈린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제플린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륙 제일의 상업 도시이며 인구만 이십만에 가까운 대도시, 유동 인구도 십만이 넘으며 수많은 용병대와 상단 호위대가 오가는 제플린은 그 인구 자체로도 강력한 철옹성이다.
"일만의 정예병에 마검사만 천 명이 넘는다. 역시 돈 많은 나라라 비싼 마도구를 막 뿌린다니까."
왕실 근위대 역시 마검 정도는 전원 착용하고 있으며, 마갑과 마검으로 중무장한 왕실 직속 차탄 기사단의 경우라면 타국의 이름난 기사단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차탄 공국 최강의 전력, 넷이 모이면 오러 유저 하나를 감당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제플린 나이츠쯤 되면 감히 마검사라 폄하할 수 없는 수준이다.
수도 방비 수준으로만 보면 신성 바슈탈론 제국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워낙 값비싼 물건이 대량으로 오가는 요충지인 만큼 제플린은 군사력에도 어마어마한 액수를 투자하고 있었다.
"단지 군사 편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아 제국 수도에 비해 통제력은 약한 편이지. 하지만 까다롭다는 건 틀림없다네."
레펜하르트가 설명을 마치자 마켈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랜드 포지의 수장으로서, 그 역시 동족들이 가장 많이 붙잡혀 있는 차탄 공국에 대해 언제나 신경은 쓰고 있었다. 하지만 힘에서 상대가 안 되기에 이제껏 어떻게 손을 못 썼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현재의 안타레스 백국으로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문득 마켈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 때엔 어떻게 공략하셨습니까?"
"그땐 별로 안 어려웠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제플린 왕궁에 미티어 하나 떨어트려서 수뇌부 전멸시켜 통제력을 빼앗고... 그다음에 환영술로 도시 내에 언데드가 창궐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혼란을 끌어냈지. 대부분 마검사로 이루어진 차탄 기사단은 그냥 AMP 쇼크웨이브 터트려서 처리했고... 수도 방위군은 헬 오브 더 월드로 그냥 악마 좀 불러서 해치웠다. 그 틈에 다른 이들이 동포들 구출했고. 우리 편 피해가 전무한 깔끔한 공략이었지."
마켈린과 시리스가 입을 쩍 벌렸다. 시리스가 물었다.
"레펜하르트 님."
"응?"
"그 헬 오브 더 월드란 거, 악마 일만 개체 소환하는 거죠?"
"응."
마켈린도 물었다.
"그 미티어라는 거, 대체 범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때그때 다른데? 제플린에 떨어트렸던 건 왕궁 소멸시키고 근처 거리 두어 개 정도 같이 휘말린 정도였던 것 같아."
"...."
일만의 악마를 부르고 하늘의 별로 떨어트려 왕궁을 통째로 소멸시키고 도시 안을 좀비로 가득 채워?
마켈린과 시리스는 둘 다 기가 차 헛웃음을 흘렸다. 듣고 있자니 참, 상대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제플린 시민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시리스가 더듬거리며 질문했다.
"대체 인명 피해가 얼마나...."
"한 일만 명쯤?"
"어, 생각보다는 적네요? 인구 이십만의 대도시에서 일만이면 저지른 짓에 비해 그리...."
시리스가 표정을 좀 풀려 할 때, 레펜하르트가 딴청을 피우며 작게 말을 덧붙였다.
"...살아남았던 것 같은데."
"...."
마켈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훌륭한 마왕이셨군요."
"아니, 그게 우리 편 피해를 최소화하려다 보니...."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레펜하르트를 향해 맹렬히 눈을 흘기고 있었다. 저런 짓을 해 놓고 뭐? 마왕으로 불리긴 억울해?
"아니, 그게...."
레펜하르트가 뺨을 긁었다.
사실 저때도 저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생 때는 지금처럼 정보를 미리 알고 있어 오지에 사는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을 모두 합류시킬 수가 없었다. 칼켄이나 스탈라가 이끄는 오크 전사들이라든가 이니야의 스티리아 일족처럼 오지의 강력한 엘프들, 그리고 아틸카의 트롤들도 없던 시절이었다. (저들은 모두 안타레스 제국이 세력을 넓힌 다음에야 합류한 이들이다.)
믿을 만한 전력은 그랜드 포지와 단하임 일족, 그리고 시리스와 타시드뿐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노예로 살아가다 간신히 구출된 약한 이들뿐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선 레펜하르트가 본격적으로 힘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억울한 부분은....
"어이, 마켈린. 저 작전, 자네가 세운 거였거든?"
"엑? 그랬습니까? 거참, 내 성격이 그렇게까지 변했었나?"
마켈린이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당시라면 자신도 저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이쪽 힘은 모자라고, 상대는 강력하니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 피를 볼 각오를 했을 법도 하다.
"하여튼, 지금은 그때만큼 마력이 높지 않으니까 저렇게는 못하고... 또 할 수 있어도 저랬다가는 엄청나게 반감을 살 테니 다른 방법을 찾고 싶네."
"그렇군요...."
마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수염을 쓰다듬었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몇 가지 떠오르는 거야 있습니다만...."
"어떤?"
레펜하르트의 물음에 마켈린이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생각에는 구원자께서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의아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마켈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요. 저보다 더 전문가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을 상대하는 법은 인간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 ☆ ☆
카를은 오늘도 집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의 서재에 앉아 온갖 서류를 빠르게 처리하는 그 모습은 과연 일국의 재상에 걸맞은 것이었다.
하지만 어색한 광경도 있었으니, 그는 한 손으론 사인을 하며 반대 손으로는 열심히 묵직한 아령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로 몸 만들 시간이 영 나질 않아서요."
주군을 맞이하며 카를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흘렸다.
"자네, 몸이 상당히 좋아졌군."
안 그래도 신장 185센티미터에 기사다운 탄탄한 몸을 지녔던 카를이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로부터 맨투맨으로 강습을 받아 온 지금, 카를은 떡 벌어진 어깨에 두꺼운 팔뚝, 풍성한 수염을 지닌 우락부락한 외모로 변해 있었다.
일하는 것만 보면 일국의 재상이 아니라 산적 두목이 하루의 수입을 셈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일단 앉으시지요. 차라도 한잔 드시겠습니까?"
찾아온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향해 카를이 자리를 권했다. 과연 좋은 혈통의 귀족답게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귀족다운 우아함이 묻어 나온다.
"고맙네. 차는 필요 없다네."
레펜하르트도 우아한 태도로 화답하며 자리에 앉았다. 명색이 일국의 황제였던 이답게 레펜하르트도 원하면 언제든지 귀족다운 우아함을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시리스는 고상 떠는 두 근육 떡대들 사이에 끼어 소름에 몸을 떨었다.
"우에에...."
"응? 왜 그래, 시리스?"
"아뇨, 아무것도."
소파에 마주 앉아 카를이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절 찾으셨는지?"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러니까 제플린을 공략하시고 싶다 이 말씀이군요."
"그렇다네. 마켈린이 말하길, 아무래도 자네가 좀 더 적합할 거라 하더군."
"뭐, 아무래도 드워프인 마켈린 공보다야 제가 적임자이긴 하겠지요."
쓴웃음을 지으며 카를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플린을 점령하는 게 아니라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을 빼돌리겠다는 말씀이시죠? 안타레스 백국의 정체는 숨기고?"
"그렇다네. 되도록 인명 피해가 적은 방향으로 해결하고 싶은데 제플린의 세력은 만만치 않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닌지라...."
근심 어린 어조로 중얼거리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카를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응?"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카를을 바라보았다.
카를, 한때 왕위 계승자 카르사스였던 그라면 차탄 공국과 제플린의 힘은 레펜하르트보다도 더 정확히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저렇게 자신만만하다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점령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리어 반문하며 카를이 의아해했다.
"단순한 노예 빼돌리기, 즉 게릴라전을 원하시는 것이라면 지금 안타레스 백국의 힘으로도 충분합니다."
"게릴라전이 정규전보다 더 쉽다는 의미인가?"
"현재 안타레스 백국의 상황이라면 그렇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카를이 입을 열었다.
"현재 안타레스 백국이 보유한 오러 유저만 몇 명인 줄 아십니까? 인간 오러 유저가 둘에 오크 오러 유저가 일곱, 드워프 오러 유저가 셋에 엘프 오러 유저가 한 명입니다. 게다가 아틸카 공 같은 경우는 궤가 다를 뿐, 오러 유저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지요."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그 역시 저 정도쯤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인간 오러 유저의 숫자는 그 다섯 배 이상일세."
대단한 숫자인 것 같지만, 네 종족의 힘을 모두 합쳐서 고작 저 정도라는 것은 저들이 얼마나 몰락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그야 종족 단위로 보면 그렇지요. 하지만 국가 단위로 보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대륙 최강국인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오러 유저 숫자가 열하나,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안타레스 백국보다 더 많은 오러 유저를 보유한 나라는 대륙에 없습니다."
사실 안타레스 백국의 공격력은 이미 어지간한 강국 수준이다. 수는 적지만 정예 병력의 질이 대단히 높은 만큼, 전격전이나 침략 전쟁에 있어선 대륙의 강국인 그라임이나 할라인도 안타레스 백국을 상대하기 힘든 것이다.
병력의 절대적인 숫자가 적다 보니 방어력이 워낙 낮아 타국의 영토를 점령할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약탈전이라면 지금의 힘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카를의 설명이었다.
"마법 전력이 심각하게 약하다는 게 문제라서 일단 그쪽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만, 뭐 이건 엘프들의 정령술로 어느 정도 메꾸어지고. 하여튼 현재 안타레스 백국은 병력 수는 적지만 정예군이 많고 일당백의 초인이 득실거리며 공간 포털을 이용한 엄청난 기동성을 지니고 있지요. 게릴라전 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넘치는 카를의 설명에도 레펜하르트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도 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이종족을 구출할 수 없느냐가 아니라, 그 와중에 입을 아군의 피해였다.
"그렇다 해도 제플린의 군사력은 만만치 않아. 일만의 정규군은 그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지."
그러자 카를이 피식 웃었다. 과연 레펜하르트는 통치자이지 전략가는 아니다. 제플린의 군사력이 일만이라 해서, 그 일만 명을 전부 상대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게릴라가 뭐하러 모든 정규군을 다 상대합니까? 마주치는 적만 처리하면 그만인 것을."
일만의 적을 일만이 아니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전술이고 전략이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가능하겠는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사전 작업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으니까요."
단순히 주군의 명령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는 더 이상 이종족의 고통을 두고 볼 수가 없는 처지다. 이미 드워프들은 그에게 있어 남이 아니며, 다른 이종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차탄 공국, 그리고 제플린은 대륙 전역에 깊게 뿌리내린 노예 제도의 핵심이나 다름없으니, 조만간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잡한 안타레스 백국의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짬을 내서 차탄 공국의 이종족 노예들을 구하기 위한 밑 작업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다.
차갑게 웃으며 카를이 말을 맺었다.
"뿌리 깊은 나무를 쓰러뜨리려면, 뿌리부터 말려 죽여야 하는 법이지요."
제30장 자유의 신호탄
1
인구 이십만의 대륙 최대 상업 도시 제플린.
온갖 행상과 상단이 오가는 제플린의 북문을 세 사람이 지나고 있었다. 후드를 머리까지 드리운 거구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린 두 명의 크고 작은 이들이었다.
자고로 벌건 대낮에 얼굴 가리고 다니는 놈들은 반드시 뒤가 구린 놈인 법이다. 하지만 제플린 북문의 경비대는 굳이 이들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신분증 검사조차 없었다. 돈이면 장땡인 나라의 수도 경비대답게, 1인당 은화 다섯 닢으로 깔끔하게 통과가 되었던 것이다.
북문을 통과한 뒤 힐끔 뒤를 보며 러스가 혀를 찼다.
"아니, 이래도 되나? 아무리 그래도 수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자들일 텐데...."
그러자 뒤를 따르는 작은 체구의 소년, 실란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제가 말했잖아요. 이 나라는 돈이면 다 된다고."
앞장 선 거구의 남자,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안 들키고 잘 통과했으니 된 것 아냐?"
슬슬 레펜하르트는 물론이고, 실란과 러스도 상당히 유명해졌다. 혹여나 그들을 알아볼 이가 있을까 싶어 다들 얼굴을 가린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신분을 감추는 것은 필수 중의 필수였다.
물론 남들 다 얼굴 드러내는데 그들만 감추고 있으면 오히려 더 눈에 뜨이겠지만....
"...저는 더 수상해 보일 거라 생각해서 반대한 것인데, 별로 수상할 것도 없었군요...."
인파 속에서 걸음을 옮기며 주위를 바라보던 러스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후드로 머리를 덮은 레펜하르트 일행은 이 인파 속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뒤 구린 놈들이 많은 건지, 어차피 인파의 절반은 후드나 덥수룩한 수염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신분증 대신 뇌물로 북문을 통과했음은 물론이다.
"아니, 저러고도 경비대에서 안 잘리나?"
실란이 대수롭잖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게 원래 이런 나라라니까요?"
레펜하르트도 실란도, 저번 제플린 방문 때 워낙 못 볼 꼴 많이 봐서 그런지 이 정도는 이제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차탄 공국을 처음 방문한 러스만 컬처 쇼크를 못 이기고 여전히 기막혀하고 있을 뿐이다.
거리를 걸어가며 레펜하르트가 차분히 러스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저들 대부분은 범죄자 출신 용병들이거나 밀수꾼들이다. 진짜 중요한 상업 지구 쪽은 이렇게 얼굴 가리고 못 들어가지."
빈부 격차가 심한 곳답게, 제플린은 같은 성내에서도 치안이 심각하게 차이 나는 것이다. 현재 레펜하르트 일행이 들어온 북문 지구는 제플린에서도 슬럼으로 취급되어 싸구려 창녀촌이나 술집, 가난한 행상들이 들락거리는 지역이었다. 반면 서문 쪽의 상업 지구는 돈 많은 상인들의 저택이나 상회가 위치한 곳.
"거긴 오히려 다른 나라의 성문보다도 더 엄중하게 경계를 하지. 당연히 뇌물 따윈 통하지도 않고."
부유한 자는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지켜 주지만, 가난한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이것이 대륙 최대의 상업 도시로서 흥하는 제플린의 실태였다.
"어차피 우리는 그쪽은 갈 일이 없으니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후드를 살짝 걷어 올려 해의 위치를 본 뒤,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하여튼 잘 잠입했으니 이제 해가 지길 기다리면 되겠군."
세 사람은 그렇게 거리를 가로질렀다. 목적지인 북문 지구의 여관, '샌드 더스트'로 향하는 것이었다. 북문 지구의 여관 대부분이 그렇듯 샌드 더스트도 허름하고 숙박비 싸며 신분 따위 조사 안 하는, 범죄자를 위한 완벽한 숙박 장소였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레펜하르트 일행에게 대단히 적합한 곳이다.
걸음을 옮기며 실란이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잠입해 있다고 했죠? 다들 무사할까요?"
인간인 실란과 러스, 레펜하르트는 지금 제플린에 들어왔지만, 이종족들은 이미 카를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제플린 곳곳에 침투한 후다.
실란 뒤를 따르던 러스가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직까지 제플린이 불바다가 되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다들 무사한 것 같지?"
☆ ☆ ☆
제플린에서도 유서 깊고 대륙 전역에서도 가장 융성한 엘프 전문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 그곳에서 지금 새까만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연기 사이로 앙칼진 외침이 터져 나왔다.
"또! 또 태웠어! 도대체 네년은 할 줄 아는 게 뭐니!"
흑연의 근원지는 엘븐하임의 드넓은 주방, 그중에서도 빵 굽는 오븐이었다. 그곳에서 한때 밀가루 반죽이었던 것이 새까만 숯이 되어 '나는 더 이상 사람 먹을 물건이 아니오.'라고 강렬히 주장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오븐 앞에서 한 엘프 여인이 굴욕으로 몸을 떨며 고개를 숙인다. 보랏빛 머리칼에 순백의 피부, 날씬한 몸매에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인이었다.
엘븐하임의 교관이자 엘프 노예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중년의 인간 여인, 클라라가 혀를 찼다.
"젠장, 엘프치고 특이하게 가슴이 커서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는 년인데, 도대체 왜 저리 실수가 잦은 거야?"
저 가슴 큰 엘프 계집이 엘븐하임에 들어온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지나가는 행상에게 거의 후려치다시피 해 사들였다는데, 특유의 몸매 덕에 희소가치가 있어 경매주 라르크도 꽤나 흐뭇해했던 계집이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상품으로 팔기 위해 노예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는데, 도대체가 이 엘프 계집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요리를 시키면 숯으로 만들고 빨래를 시키면 걸레로 만들고 바느질을 시키면 바늘을 부러뜨리고 마사지를 시키면 멍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 하니 남자를 즐겁게 하기 위한 밤일 교육은 아직 입문도 못 시켰다.
"네년 팔에 달린 건 손이 아니라 앞발이냐? 정말 정신 안 차릴래?"
"...."
버럭버럭 화를 내는 클라라를 보며 새끼 교관이 슬그머니 물었다.
"징벌방으로 넣을까요?"
징벌방은 말을 듣지 않는 엘프들을 '정신교육'시키기 위한 곳이다. 참고로 저 '정신교육'의 골자는 바로 '매에는 장사 없다.'였다.
"으음...."
클라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징벌방은 반항적인 엘프들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곳이다. 하지만 엘프 교관으로 뼈가 굵은 그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보랓빛 머리의 엘프는 절대 반항해서 저렇게 실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정말 살림 쪽에 눈곱만큼도 재능이 없는 것이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아닌 이상, 징벌방으로 넣어 봐야 별로 나아질 것도 없다. 괜히 재수 없으면 흉터 생겨서 상품 가치만 떨어지지.
"흥, 그냥 밥이나 굶겨. 배 곯아 보면 정신 좀 차리겠지."
씩씩대며 클라라가 발길을 돌렸다. 새끼 교관이 엘프 여인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따라와라, 323번!"
323번이라 불린 보랏빛 머리의 엘프 여인이 힘없이 뒤를 따른다. 엘프 여인을 숙소에 집어넣고 철창을 잠갔다. 323번이 말없이 자신의 침상으로 향했다. 마주한 침상, 그곳에서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비슷한 표정으로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저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 역시, 323번 못지않게 손재주가 서툴러 며칠째 혼이 나는 처지인 것이다.
새끼 교관이 혀를 찼다.
"저년도 그렇고 324번도 그렇고, 그날 팔려 온 것들은 이상하게 서툴단 말이야."
툴툴대며 교관은 다시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쪼그려 앉아 있던 324번,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시무룩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싸늘하고 강인한 눈빛이 은색 눈동자 위를 맴돈다.
그녀가 맞은편을 향해 차갑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교육도 훌륭히 실패했네요, 이니야 씨."
이니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네요, 시리스 양."
시리스와 이니야가 이곳, 엘븐하임에 잠입한 것은 보름 전의 일이었다. 다른 엘프 노예들을 안쪽에서 이끌기 위해 노예인 척 팔려 들어온 것이다. 물론 여성의 몸으로 노예로 팔리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꽤 위험한 일이긴 하다. 당연히 레펜하르트도 초반엔 결사반대를 외쳤다.
그러나 오러 유저인 이니야와 시리스의 정령술이라면, 맨손으로도 자기 몸 건사하기엔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반대했던 레펜하르트도 결국 시리스의 굳은 의지 앞에 계획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문제였던 것은 엘프 여성 노예라면 당연히 밤일에 대한 교육도 받게 될 것이라는 건데, 이건 시리스가 해결했다.
그녀는 엘븐하임에서 유년기를 보낸 바가 있다. 엘븐하임의 노예 교육 시스템에 대해 빠삭하단 소리다. 처음부터 기초적인 노예 교육을 계속 서툴게 일관한다면, 밤일을 가르치거나 하기 전에 충분히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걱정했던 건, 이니야 씨가 과연 안 들키고 '서툰 척'을 할 수 있을까 였는데... 생각보다 잘하시는군요."
단순히 서툰 척으로 교육을 미룰 수 있을 만큼 엘븐하임 교관들의 눈썰미는 만만치 않다. 저들은 몇십 년을 엘프 노예를 교육시켜 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것이다. 반항기를 보이는지 아닌지쯤은 바로 알아채 버린다.
"저야 이미 이곳에서 같은 교육을 받아 보았으니 어떻게 하면 안 들키는지를 알지만... 이니야 씨가 해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리스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때마다 이니야의 안색이 조금씩 창백해진다. 문득 시리스가 의심쩍다는 표정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음, 정말 '서툰 척'한 것 맞죠? 이니야 씨? 정말 '서툰' 게 아니라?"
이니야의 안색이 점점 더 굳었다. 시리스가 침상에 몸을 기대더니 설마 하는 어조로 말했다.
"음, 그럴 리가 없지. 그런 멋진 요리도 한 분인데 설마 그럴 리가...."
이니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년, 눈치 깠어!'
잽싸게 이니야가 화제를 돌렸다.
"그, 그러고 보니 슬슬 날짜가 되었네요. 오늘이죠?"
시리스도 표정을 진지하게 바꾼 뒤 창살이 쳐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가 조용히 뇌까렸다.
"네, 오늘이에요."
그러자 숙소의 다른 엘프 여인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엘프 여인들이 시리스와 이니야에게 다가오며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 정말 우리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정말 안타레스 백국에서 우리를 구해 주는 건가요?"
"이렇게 노예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이니야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동포들이여. 그대들은 곧 구원받을 겁니다."
비록 요 근래 많이 망가지긴 했지만, 어쨌건 이니야는 몇십 년간 스티리아 일족을 이끈 수장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엔 확실히 수장다운 권위가 있다.
엘프 여인들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간다. 다들 기쁜 기색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기대감 부푼 표정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보며 시리스는 새삼 감탄했다.
이제껏 그녀가 구했던 동족들과는 전혀 다르다. 안타레스 백국에 도착해서도 노예가 아닌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들과는 전혀 다르다.
똑같이 노예로 살아가는 처지였지만, 이들은 이미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대단하네. 정말 카를 씨 말대로잖아?'
☆ ☆ ☆
카를은 설명했다.
"현재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은 너무도 체제에 적응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그들의 의식을 각성시킬 필요가 있어요."
그동안의 경험으로 레펜하르트 일행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경매장을 무너트리고 족쇄를 부순 뒤 '자, 이제 그대들은 자유다!'라고 외친다 해서 노예들이 바로 호응해 주지는 않는다는 걸.
내부로 잠입해 노예들을 봉기시키기 위해선, 일단 그들이 현재 삶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자유에 대해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드워프들 경우에는 내부 호응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락 단위여야 노예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드워프의 특성상, 저들은 비교적 문화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 역시 많이 남아 있지요. 드워프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원래 자유민이어야 하며, 비록 현재 노예의 처지이긴 하지만 언젠가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자각이 있습니다."
연금술사 길드에 잡혀 있는 트롤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유롭게 살다가 사로잡힌 상태이니 당연히 노예라는 자각이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역시 오크와 엘프입니다."
차탄 공국의 노예상들은 노예 매매의 스페셜리스트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노예가 아닌 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데 도가 튼 작자들이란 소리다. 그들의 조교 방식과 정신교육은, 설사 이종족이 아닌 자유롭게 살던 인간이라도 자신이 원래 노예였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충분할 만큼 가혹하다.
"오크 검투사들은 그래도 전사의 긍지가 있어 타시드 경의 말에 따랐지요. 그리고 야성이 보존된 만큼 분노할 줄도 압니다. 하지만 농업용 오크나 엘프들은 많이 달라요."
그들은 스스로가 노예임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사람은 무릇 환경에 지배되는 법이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세상이, 그들이 노예라 주장하고 있으니 감히 노예가 아닌 자신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사전 작업을 좀 해 뒀습니다."
그 방식은, 레펜하르트나 시리스 입장에서는 조금 어이없는 것이었다. 시리스가 귀를 의심하며 재차 물었다.
"동화책요?"
"그래요, 시리스 양. 동화책입니다."
"아이들이 읽는, 그 동화책?"
카를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냥 동화책은 아니지요. 현재 변질되어 버린 옛 설화나 이야기들, 그것들을 이종족들에게 들은 대로 원본화하여 배포했습니다."
현존하는 설화나 동화가 인간 위주로 변했다는 것은 이미 시리스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원본으로 바꾸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의아해하는 시리스를 보며 카를이 말을 이었다.
"별 상관없어 보이겠지만, 사실 이게 영향력이 꽤 됩니다."
카를이 배포한 것은 모든 동화들의 원전, 제대로 이종족들이 활약하는 원래의 이야기였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지만, 사실 그동안의 동화책들은 뭔가 어색한 점이 컸죠. 저도 어릴 적 이야기 들으면서 의문을 느꼈을 정도니까."
잠든 공주를 지키는 일곱 명의 어린아이는 제대로 드워프가 되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광산에서 돌을 캐고 저희들끼리 살아가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인간 어른으로 만들면 공주가 침대 일곱 개를 붙여서 자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드워프라면 모든 스토리가 납득이 가게 변한다. 미녀 정령사도 엘프가 되면 납득이 간다. 팔다리가 잘리는 부상을 입고도 하룻밤만 자면 나아 버리는 용맹한 전사의 이야기도 트롤이 주인공이라면 어색할 것이 없다. 근육만 숭상하는 야만인들의 이야기는 오크가 되면 훨씬 쉽게 이해가 간다.
"어느 누구도 동화책에는 신경 쓰지 않지요. 실제로 여러분도 신경 쓰지 않았잖습니까? 동화는 고작해야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나요?"
"엘프들에게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들려주는 것은 어른들이거든요."
대부분의 엘프들은 하녀나 성노로 쓰인다. 그리고 아이들을 보는 유모로도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엘프들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동화책 역시 열심히 외워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을 달래고 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제플린의 엘프 노예 경매장 전 곳에 이 동화책들을 흘려 넣었지요. 물론 혹시나 수상하게 여길까 봐 소가 노래하고 당나귀가 바이올린 켜는 그런 식의 동화책들 사이에 끼워 넣었습니다."
가축을 의인화하나 노예를 의인화하나 별 차이를 못 느낀다. 역시 아이들 보는 동화책답게 유치하다고 여길 뿐이다. 이것이 현 시대 인간의 사고방식.
"당연히 인간들은 읽어 봐야 별 느낌 못 받겠지만...."
카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사자들에겐 꽤 느낌이 다를 겁니다."
2
불야성不夜城이라고까지 불리는 대륙 최대의 상업 도시, 제플린.
하지만 그 제플린이라 할지라도 정말 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가 짐과 동시에 도시의 기능이 멈추는 다른 도시와 달리 제플린은 분명 밤새도록 온갖 상인들과 유동 인구로 북적거린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정이 넘어가면 확실히 어둠이 제플린 이곳저곳을 뒤덮기 마련이다.
특히 건물 사이사이의 좁은 골목은 횃불 없이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대로의 가로등이나 달빛 정도로는 이 복잡한 도시의 건물 사이를 누빌 수는 없는 것이다.
복잡한 건물 그림자 사이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각지대, 단 몇 걸음만 들어가도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짙은 어둠이다.
깊은 새벽, 레펜하르트와 러스, 실란은 그 골목의 어둠을 따라 빠르게 제플린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야경대가 오가고 채 잠들지 않은 몇몇 행상들이 숙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이동하는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은 어떤 광원의 도움 없이 어둠을 누비고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와 러스야 오러 유저의 기감이 있으니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실란조차도 마치 대낮인 양 자연스럽게 어두운 골목을 달리며 발 한번 헛디디지 않고 있었다.
실란이 문득 자신의 눈가를 매만지며 혀를 내둘렀다.
"이 마법, 정말 신기하네요. 불을 밝히지도 않고 사물을 이리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다니."
밤눈이 어두운-이라기보다는 그냥 정상적인 인간의 밤눈을 지닌 실란을 위해 레펜하르트가 특별히 마법을 걸어 준 것이다. 보통 어둠을 밝히기 위한 마법은 라이팅 계열 정도가 전부인데, 특이하게도 레펜하르트가 걸어 준 마법은 어둠 그 자체를 꿰뚫어 보게 해 준다.
"마법사들도 제법 알고 지냈는데, 이런 마법은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인프라 비전은 원래 엘프들의 것이라 인간 마법사들에겐 그 개념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
앞장서 달리며 레펜하르트가 작게 대꾸했다. 실란이 주위를 힐끔거렸다.
"확실히 은밀한 행동을 하기에 최고의 마법인 것 같아요. 하지만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는 건 좀 불편하네요."
"적외선 시야가 원래 그렇지, 뭐. 그래서 전투 시에는 되도록 안 써, 나도."
"...적외선?"
"그냥 사물의 온도를 본다고 이해해. 또 고대어를 써 버렸네."
"...온도를 봐요?"
"아, 그냥 좋은 마법이거니 해, 그럼."
살짝 실소하며 레펜하르트는 말을 끊었다. 지금 느긋하게 마법 강론이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니까.
한참을 그렇게 어둠에 몸을 숨기며 달리던 레펜하르트 일행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구획을 지나며 제플린 중심 거리까지 도착한 것이다.
골목의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러스가 대로를 살펴보았다.
"몰래 이동하는 것은 슬슬 한계군요, 형님."
대로 저편에 흐릿하게 보이는 커다란 궁성, 바로 차탄 왕궁이었다. 북문 거리를 벗어나 상업 거리를 횡단해 귀족 거리까지 도착한 것이다.
복잡한 건물들이 어지럽게 세워져 있던 북문이나 상업 거리와 달리, 왕궁 근처는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크고 화려한 저택 거리에 좁은 골목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길목이 대로 수준으로 훤하게 뚫려 있다. 몸을 숨길 어둠 자체가 없는 것이다. 모든 시야가 확실하게 드러나 사각 지대 따윈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레펜하르트는 조심스레 왕궁 거리를 살펴보았다.
"역시 여기서부터는 경계가 철저한데."
일국의 왕성이 위치한 곳이니만큼 치안이나 경계는 그들이 통과했던 북문 거리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도로마다 중무장한 병사들이 세 명씩 짝지어 경계를 돌고 있고 사거리마다 고정된 장소에서 경비들이 혹여나 있을지 모를 불량배들의 발호를 확실히 막겠다는 듯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하나같이 중장비에 차탄 기사단만은 못해도 마법기 역시 어느 정도 착용하고 있는 듯했다. 왕성 근처를 경비하는 만큼 정예만을 배치한 것이다.
개판 5분 전인 북문 경비대와 비교하니 참 심각할 정도의 격차가 느껴진다.
실란이 문득 혀를 찼다.
"저 병력 10분의 1만 빼내서 다른 지역에 배치했으면 제플린 치안이 두 배는 좋아졌을 텐데."
"대신 이 지역 보안이 조금 위태로워졌겠지. 없는 놈 치안 두 배로 챙겨 주느니 자기 집 보안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게 가진 놈들이 당연히 취할 행동 아니겠냐?"
무덤덤한 말투로 대답하며 레펜하르트가 러스에게 눈짓했다.
몰래 접근하는 건 여기까지.
이제부터는 무력행사가 필요하다.
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풀었다.
"바로 갈까요, 형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어 만류했다.
"아직. 저놈들은 쓰러지면 자동으로 신호가 가게 되어 있다."
저들이 착용하고 있는 마도구 중에는 경비가 미처 연락을 취하기도 전에 쓰러지는 것을 대비, 경비의 의식과 연동해 이상이 생길 경우 신호를 보내는 방식의 기물도 있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의 왕성에서도 비슷한 경비 체제를 갖추고 있기에 러스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변형된 알람 마법이군요. 그럼 어떻게?"
"내가 처리한다."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실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마법을 쓰려고요? 일국의 왕성이라면 마법 사용에 따른 검색 결계도 설치되어 있을 텐데요? 걸리지 않을까요?"
마법에 의한 암살을 막기 위해, 모든 왕성에는 마법 사용을 감지하는 결계 설치가 필수다. 고위 성직자인 실란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차탄 왕궁 역시 예외는 아닐 터.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난 안 걸려."
수인 맺기를 끝마친 뒤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언령을 준비했다. 실란이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만만하네요."
레펜하르트가 오러만큼이나 마법에 대한 조예 역시 깊다는 것은 이제 실란도 잘 알고 있으니 딱히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잘난 척하다가 또 사고 치는 것 아녜요?"
저 인간이 잘난 척하다가 일 터진 게 어디 한두 번이어야지? 미덥잖다는 눈빛을 보내는 실란의 모습에 레펜하르트는 잠시 울컥했다.
'이래 봬도 내가 한때는 대륙을 떨쳐 울렸던 10서클 대마법사였는데!'
그러면서 은근슬쩍 상황을 검토해본다.
'...라지만 그런 것치곤 사실 그동안 실수가 많긴 했지? 음,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자.'
잠시 후 레펜하르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확실해. 안 걸려."
레펜하르트의 전신으로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안개처럼 은밀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력에 의한 흐름을 훼방 놓는 간섭 마력장이었다.
대놓고 흐름을 가로막는 방식이라면 연락이 차단된 시점에서 뭔가 눈치를 채겠지. 하지만 지금 레펜하르트가 사용하는 방식은 철저히 차탄 왕궁의 마법 스타일에 맞춰 중간에 정크 신호를 끼워 넣는 방식이었다. 이 일대에 설치된 마법 결계를 속속들이 알아야 가능한 수법이라 어지간한 대마법사라도 불가능하겠지만....
'대륙의 왕성치고 내가 모르는 방식의 마법 결계는 없으니까.'
이미 그는 전생에 모든 왕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바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전생에서도 한번 해 봤던 짓이다.
'물론 그때는 아예 간섭 마력장으로 제플린 전역을 뒤덮어 버렸지만 지금 마력으로는 택도 없는 소리고.'
그래도 반경 10여 미터 정도를 뒤덮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마력장이 왕성 앞의 대로를 서서히 잠식해 간다.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여전히 굳건한 얼굴로 자신의 경비 지역을 살펴볼 뿐이었다. 이들은 분명 정예병이었고 군기 역시 확실했지만, 마법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마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간섭 마력장을 감지할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눈짓을 했다.
"가자, 러스."
"네, 형님!"
두 사내가 표범처럼 골목을 뛰쳐나갔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두 사내가 단숨에 대로를 가로지른다. 한 걸음에 10여 미터씩 죽죽 거리를 좁히는 그들을 보며 경비와 보초들이 안색이 굳어 창을 겨누었다.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놀란 와중에도 3인으로 구성된 경비들은 빠르게 대응했다. 둘은 바로 습격자를 향해 공세를 취했으며 연습한 대로 남은 한 명이 연락용 폭죽을 터트리기 위해 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훨씬 빨랐다.
"흡!"
짧은 호흡과 함께 어느새 경비의 코앞까지 도달한 러스가 가벼운 펀치를 날렸다. 단순한 잽에 가까운 펀치였지만 그것이 오러 유저의 정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격에 경비의 의식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끄어어....'
뒤이어 러스는 팔꿈치 돌려 찍기와 끊어 차기의 이연타로 나머지 경비들도 침묵시켰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 이미 레펜하르트도 혼절한 보초들을 정중히 초소 벽에 눕혀 주고 있었다. 그 짧은 사이 여섯 명의 경비와 보초들이 모조리 쓰러진 것이다.
분명 이 경비병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경계도 똑바로 했고 방심하지도 않았으며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빠르게 대처했다. 허구한 날 창 들고 조는 동네 경비들에 비하면 실로 프로페셔널한 이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절대적인 실력 차 앞에선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오러 유저와 일반 병사에게는 그 정도의 벽이 존재하니까.
그렇게 감시를 무력화시키며 레펜하르트 일행은 왕성을 향해 전진했다. 두어 번 정도 비슷한 짓거리를 되풀이하고 나니, 커다란 차탄 왕궁의 성벽 아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높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러스가 중얼거렸다.
"용케 작전대로 여기까지는 도착했군요."
실란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든 채 대꾸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죠."
여기서부터는 차탄 왕성 본역.
이곳부터는 경계의 강도가 차원이 달라진다. 강력한 마법 방호망에 오러 유저를 대비한 여러 마도구들이 설치되어 있을뿐더러, 차탄 공국의 이름 높은 오러 유저, 왕성 기사단장 클라트 경 역시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러스가 굳은 얼굴로 뇌까렸다.
"아무리 저나 형님이라도, 오러를 쓰지 않고 이 안까지 진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러스와 실란이 동시에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들었던 작전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여기까지 진행하면 그다음은 자신이 알아서 한다고만 들었다.
호기심 어린 눈동자들을 직시하며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진입할 생각도 없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은 혼란뿐이니까."
레펜하르트가 품에서 주먹만 한 석상 세 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들기 좋게 손에 쥐며 싱긋 웃는다.
"아무리 강력한 결계나 오러 유저의 기감이 있다 해도 그냥 짱돌 던지는 걸 막을 방법은 없거든?"
성벽 너머를 겨냥한 뒤 레펜하르트가 석상을 던졌다.
휘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석상이 저 높은 성벽을 가뿐히 넘어갔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가공할 육체로 이 정도 투척은 일도 아닌 것이다.
"잘 날아가는구먼."
히죽거리며 레펜하르트가 남은 석상 두 개를 마저 던졌다. 역시나 바람을 가르며 석상이 성벽을 넘어 어둠 저편으로 모습을 감춘다.
실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대체 저게 뭐예요?"
대답은 레펜하르트가 해 줄 필요가 없었다. 금세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니까. 레펜하르트가 아닌, 성벽 너머 왕궁의 대정원에서.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우렁찬 외침이 들려온다.
"크라라라라!"
그동안의 경험으로 러스도, 실란도 바로 알아들었다. 던전 같은 곳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외침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저것은 분노한 악마의 외침이었다.
☆ ☆ ☆
고요에 휩싸여 있던 차탄 왕궁은 발칵 뒤집어졌다.
드넓게 조성되어 있던 아름다운 왕궁 정원, 그곳에서 끔찍한 포효가 터져 나온다.
"크라라라!"
포효의 주인공은 흑사자에 거인의 상체를 달아 놓은 듯한 외모의 대악마, 세피아탄이었다. 거대한 칼날을 좌우로 휘두르며 세피아탄이 분노에 차 불길을 토해 낸다. 불길의 강이 정원을 가로지르며 자욱한 연기의 벽을 드리운다.
한참 잠에 빠져 있던 왕실 근위대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아, 악마다!"
아무리 훈련이 잘된 병사들이라 해도 인간인 이상 이런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겁지겁 지휘관들이 병력을 지휘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런 지휘관들 본인조차도 제대로 무장조차 갖추지 못했을 정도이니 오죽할까.
게다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진짜 날벼락도 떨어지고 있었다.
우르르릉!
세피아탄이 나타난 정원 근처, 그곳에서 또 다른 악마가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거대한 푸른 도마뱀의 형상을 한 이계의 악마, 제타렐이 뇌전을 사방에 뿌리며 파괴의 향연을 즐기는 중이었다.
"크아아!"
우르르릉!
포효가 터질 때마다 뇌성이 울린다. 그리고 그때마다 푸른 전격이 허공을 가로질러 왕성 여기저기를 때려댄다.
번뜩이는 섬광 사이로는 박쥐 같은 날개를 단 붉은 체구의 악마, 피엔드가 대검을 들고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붉은 핏물이 튀어 올랐다.
"크하하하하!"
통쾌한 듯 웃음을 터트리며 세 악마들은 마음껏 차탄 왕궁을 유린했다.
이계의 악마로서 작은 석상 안에 봉인당하는 굴욕을 맛봐야 했던 이들이었다. 너무도 오랜 세월 갇혀 산 탓에 고위 악마로서의 지성이나 이성은 사라진 지 오래. 그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분노만이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들을 노리며 가차 없이 파괴의 힘을 휘둘러 댄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왕성 시종들이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고 그 사이로 병사들의 절규가 아우성쳤다. 불길이 치솟고 대지가 흔들린다.
뒤늦게 무장을 갖추고 나타난 차탄 왕궁 기사단, 저들의 단장인 클라트 경이 세 악마를 바라보며 치를 떨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악마들이!"
클라트 경은 검을 뽑아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악마를 소환하는 수법은 최소 7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만이 가능하다. 특히나 저 정도의 대악마라면 대마법사쯤은 되어야 소환할 수 있다.
'그런데 심지어 세 개체나?'
게다가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는 이곳에서 악마를 소환할 정도의 마법진이 구성되었다면 알람이 울리지 않을 리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어쨌거나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다. 클라트 경이 검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부우우웅!
눈부신 붉은 오러가 밤의 어둠을 찢어발긴다.
클라트 경이 몸을 날렸다.
"꺼져라! 무엄한 악마 놈!"
오러의 잔광이 밤하늘 위를 길게 수놓는다. 클라트 경의 전신이 공간을 좁히며 붉은 거구의 악마, 피엔드의 정면으로 쇄도해 갔다.
막 좌우로 검격을 뿌리던 피엔드가 경각심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크라라!"
피엔드가 외침을 터트렸다. 악마의 대검이 불길을 머금은 채 클라트를 향해 길게 뻗어 나갔다.
허공에서 손을 뻗어 클라트는 충격파를 날렸다. 오러를 응축했다 터트려 그 파문을 내뿜은 것이다.
퍼펑!
폭음과 함께 대검에 휩싸인 불길이 모조리 날려 가 버렸다. 동시에 클라트가 충격파의 반동으로 허공에서 몸을 뒤틀었다. 악마의 대검이 클라트를 빗맞히고 허공으로 비껴나간다.
순간 클라트가 검을 고쳐 쥐며 비기를 날렸다.
"블러드 레인!"
수십 줄기의 참격이 피엔드의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피의 비라는 명칭 그대로, 붉은 오러가 소나기가 되어 강타한다. 거친 붉은 피부가 찢기며 악마의 그것임을 증명하는 푸른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아아악!"
고통을 느끼며 피엔드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피엔드의 비명에 다른 두 악마도 놀란 듯 잠시 살육을 멈추고 클라트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잠시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클라트가 고함을 질렀다.
"왕실 근위대! 대열을 갖춰라! 1대대는 왕족들을 피신시키고 2대대는 병사들을 이끈다! 3대대는 나를 따라라!"
클라트 경의 굳건한 외침에 흔들리던 기사며 병사들의 움직임이 안정화되었다. 다들 정신없는 와중에도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레펜하르트 일행은 성벽 위에 몸을 숨긴 채 정원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실란이 날뛰는 악마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건 또 어디서 구했어요?"
가끔 고대의 기물 중에 이계의 악마가 봉인된 아티팩트가 있다는 소문 정도는 실란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나게 희귀해서 전문적인 던전 탐사가라 할지라도 평생 한 번 보기 힘들 정도인 것이다.
"어디긴? 우리가 턴 던전이 한두 개냐?"
"아, 하긴...."
실란은 바로 납득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레펜하르트와 함께 털어 댄 던전 숫자는 족히 수십이었다. 전문적인 던전 탐사가 십여 명이 평생 턴 던전 숫자보다도 오히려 많은 것이다. 그만큼 무식하게 털어 댔으니 없는 것이 도리어 이상했다.
"제어도 안 되고 너무 위험해서 팔지도 못할 물건이었는데, 잘 써먹는 거지, 뭐."
작게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상황을 지켜보았다.
초반에는 정신없이 유린당하던 왕궁 기사단이었지만 클라트 경이 참전한 이후로는 빠르게 대열을 정비, 착실하게 악마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휴우, 그래도 클라트 경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
레펜하르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일군 참상이라지만, 불필요한 희생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저들을 잠시 왕궁에 묶어 두는 것뿐.
그런 의미에서 클라트 경은 레펜하르트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해 주고 있었다.
'역시 차탄의 유일한 기사.'
제대로 된 기사는 차탄 공국에 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차탄 공국의 기사들이 엉망이라는 소리다.
기사다운 긍지나 명예보다는 실리를 우선하고, 본신의 실력보다는 더 좋은 마검이나 마갑만 찾아 대는 것이 차탄의 기사들이라는 편견이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데, 사실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100퍼센트 사실이었다. 애초에 차탄 공국의 국민성 자체가 저 모양인데 기사라고 뭐 다를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클라트 경은 달랐다.
그는 기사다운 명예와 긍지를 알며, 마도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순수한 실력으로 오러 유저의 경지에 다다른 자였다. 아무리 썩어 빠진 나라라도 인물은 나게 되어 있다는 살아 있는 증거랄까?
마도구를 거부한 탓에 마법기사단 제플린 나이츠에 속하지 못하고 차탄 기사단장을 맡고 있을 뿐, 클라트 경은 누구나 인정하는 공국 최강의 기사였다.
어쨌거나 그 클라트 경의 지휘 덕에 차탄 기사단들은 차분하게 악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세 악마들의 무력 역시 만만치 않아 전투가 쉽게 마무리될 기색은 아니었다.
장기전, 그야말로 레펜하르트가 기대했던 대로다.
'좋아, 이걸로 당분간 정신이 없겠지.'
차탄 기사단을 상대하던 피엔드가 분노로 몸을 떨며 전신의 마력을 개방했다.
"크라라라!"
개방된 마력이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차탄 왕궁의 상공을 붉게 물들였다. 제플린 시내 어디에 있든지 눈뜬 이라면 보지 않을 수 없을 거대한 불기둥이었다.
레펜하르트가 러스와 실란에게 눈짓을 했다.
"신호탄이 올라갔다. 빨리 움직이자고."
러스가 실소를 흘렸다.
"신호탄 한번 화려하기도 하군요."
성벽에서 뛰어내리며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좋잖아. 설마하니 저렇게 거창한 걸 신호탄이라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니."
3
무릇 노예라는 것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 재화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적이나 강도들에게 가장 기피되는 탈취 대상이 노예인 것도 사실이다.
금이나 보석처럼 부피가 작지도 않으며, 발이 달려 있어 언제 도망갈지 모르니 운반 및 보관에 있어서도 훨씬 까다로울뿐더러, 혹여나 제대로 탈취해 제값 받고 판다 해도 입이 달려 있으니 바로 자신들의 정보를 유출해 버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저 원래 어디어디 노예였는데 그 사람들이 훔쳤습니다.'라는 식으로.
이왕 위험부담 안고 도둑질을 할 거라면 보다 편한 대상이 널려 있는데 굳이 노예 경매장에서 노예를 훔치겠다는 발상을 하는 이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덕분에 제플린 서부지구에 위치한 오크 전문 노예 경매장 '오드란'의 경비 태세는 그야말로 간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사실 오드란의 경비 태세는 철통같았다. 오드란의 금고와 주인 가족의 거처는.
하지만 오드란의 경매장주는 오크 노예들을 보관해 놓은 숙소의 경비까지 인건비를 투자하진 않았던 것이다. 사나운 오크 검투사도 아닌 농업용 오크들이 감히 도망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디노드, 오크 노예 숙소의 경비를 맡고 있는 이 20대 청년은 눈앞에서 숙소 문이 열릴 때까지도 아무런 경각심을 느끼지 못했다.
"응?"
분명 두꺼운 자물쇠로 잠겨 있던 나무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오크 노예 몇 명이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디노드는 혀를 차며 손짓을 했다.
"이런, 자물쇠가 고장 났나? 이놈들아!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지 왜 밖을 기웃거려? 무슨 구경났냐?"
생각해 보니 구경이 나긴 났다. 짙은 어둠이 깔렸어야 할 제플린 시가지의 하늘, 그 위로 화광이 흐릿하게 비치고 있었으니까.
'저기면 왕궁 근처인데... 무슨 일이지?'
그렇게 멍하니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크들이 들어가긴커녕 오히려 디노드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슬그머니 접근해 오는 오크들을 바라보며 디노드가 인상을 썼다.
"아, 이 멍청한 놈들. 말귀도 못 알아듣나? 나니까 눈감아 주는 거지 다른 사람이 보면 큰일 나! 어서 들어가라고!"
손까지 휘저으며 디노드는 노예들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던 중 문득 디노드는 어색함을 느꼈다.
'어라?'
앞장선 오크 노예 하나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아니, 웃는 것뿐 아니라 태연스럽게 입까지 연다.
"이 친구, 그래도 마음씨는 착하군."
뒤에 선 다른 오크 장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친구였습니다. 정도 많았고."
오크어로 나눈 대화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노예들이 보일 태도는 아니었다. 그제야 디노드가 경각심을 느끼고 창을 고쳐 잡았다.
"어? 뭐, 뭐야?"
순간 디노드는 눈앞 가득 뭔가가 뒤덮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앞장선 오크의 두꺼운 주먹이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경비병을 앞장선 오크, 잘카토가 잽싸게 부축했다.
"영차! 이 친구는 심성이 괜찮으니 그냥 이대로 기절만 시켜 놓아도 되겠지."
뒤에 선 또 다른 오크가 손짓을 했다.
"모두들 나와!"
숙소에서 한 무리의 오크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겁먹은 표정이 역력한 오크들이었다.
이들뿐 아니라 다른 숙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었다. 숙소 안쪽에서 문을 부수고, 어설픈 경비를 쓰러뜨리며 수많은 오크들이 두리번거리며 숙소 밖으로 조심스레 걸어 나온다.
"나, 나가도 되는 건가...."
"이러다가 혼날 텐데...."
"혼나는 거 아프다...."
"아픈 거 싫다...."
대부분 겁먹고 움츠린 이들, 별로 탈출에 대한 열망이 보이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오크들은 달랐다. 사나운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며 선두에 선 오크들이 호통을 쳐 댔다.
"따라와라!"
"무엇을 겁내는가!"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선두의 오크들이 호통을 치자 그제야 오크들의 표정에 공포 대신 분노가 떠오른다. 그동안 그들이 당해 온 학대와 고통, 그것을 떠올리며 순박하기만 하던 얼굴에 굳건한 의지의 빛이 드러난다.
"나, 난 가겠다!"
"나도 간다!"
"이렇게는 못 산다!"
다른 무리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차분히 인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잘카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카를 공 말대로군.'
☆ ☆ ☆
카를은 설명했다.
"동화책 등으로 사전 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노예들이 전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나 오크들은 말이죠."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영리하다. 게다가 노예로서의 용도상 농업용 오크들에 비해 머리가 트인 편이다.
엘프는 주로 하녀나 시종으로 쓰이는 법, 인간과 직접적으로 접하며 인간의 수발을 드는 용도로 쓰인다. 부족 단위로 모여 있는 드워프만은 못하겠지만 그저 단순하게 반복 작업만 시키는 오크들에 비하면 이래저래 기본적인 교육은 받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작업도 해 놓았습니다."
카를이 서류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 때문에 차탄 공국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노예들이 헛바람 들까 싶어서겠지요. 그래서 더더욱 매섭게 노예들을 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레펜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그럼 오히려 반감만 높아질 것 아닌가?"
"그렇죠. 하지만 그렇다 해서 노예 주인 입장에서 노예들을 온화하게 대할 수도 없습니다. 온화하게 대한다고 해서 노예들의 충성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온화하게 대하고, 노예들의 복지를 좀 더 신경 써서 살기 좋게 해 주면 과연 노예들의 충성심이 높아질까?
대답은 '아니다'이다.
물론 몇몇 노예들은 감격해서 충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노예들이 그럴 것이라는 판단은 지나치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랬다면 차탄 공국이 여태껏 노예 매매 시장의 메카로 군림하지도 못했겠지요."
노예는 어찌 되었건 불합리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아무리 온화하고 자비롭게 대한다 한들 노예가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주인에게 충성할 수는 없다. 오히려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에 의문을 품으면 품었지.
"잘해 주면 더더욱 기어오른다는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애당초 노예의 삶 자체가 불합리한 이상 족쇄를 완화해 보아야 소용없지요. 그리고 그 사실은 차탄 공국도 잘 알고 있습니다."
차탄 공국이라고 호되게 구는 것이 반감을 산다는 것을 몰라서 저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노예제 자체가 모순이 있는 이상, 저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 그렇다면 그보다 더 큰 본성인 '생존'에 위협을 주어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만이 노예 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덕분에, 현재 차탄 공국의 노예들은 꽤나 반감이 올라간 상태지요."
사람이란 환경에 적응하는 존재다.
그리고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인간이건 이종족이건 그리 다르지 않다.
"현재 노예들은 이미 자신들의 삶에 적응해 버렸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가혹하기 그지없는 삶이라지만 그들에겐 평범한 하루일 뿐. 하지만 그 평범한 하루가 더더욱 가혹해진다면? 우리가 보기엔 똑같이 가혹한 삶이겠지만 노예들이 느끼기엔 삶에서 느끼는 고통이 완연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딱딱한 빵 세 덩이로 하루를 연명하는 것은 일반인이 보기엔 너무도 가혹한 삶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순하게 생각한다. 딱딱한 빵 세 덩이가 두 덩이로 준다 한들 어차피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그들에게 딱딱한 빵 한 덩이가 줄어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 침범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한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면 결국 노예들은 또다시 변한 일상에 적응하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 생각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요. 지금이라면 보통 노예들이라도 자신의 삶에 충분히 불만을 품고 있을 겁니다."
씨익 웃는 카를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자네가 일부러 제플린의 노예들을 가혹하게 대하도록 조종했다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노예 주인들에겐 선택지가 저것뿐이니까요. 저는 그저 사람을 부려 노예 주인들의 불안감을 살짝 부추겼을 뿐입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그 시기가 이쪽에 유리할 때 일어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즉, 저 카를의 짓거리 덕에 제플린의 노예들은 평소보다 더욱 가혹하게 학대받게 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뭐,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함이니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안 그렇게 봤는데 카를 자네, 은근 악랄하군...."
기가 찬다는 레펜하르트의 말에 카를이 슥슥 뒷머리를 긁었다.
"이 정도는 그냥 왕족 교양 수준인지라...."
그렇다. 분명 카를은 선하고 정의로운 성품의 소유자이지만 동시에 왕족으로 태어나 제왕학을 익힌 자이기도 한 것이다. 딱히 카를이 나쁜 마음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저 정도의 뒷공작은 카를 입장에선 그다지 권모술수랄 것도 없다.
"하여튼, 지금 시기라면 야성을 잃은 오크 노예들이라도 이쪽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호응을 해 줄 겁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잠깐 뭔가를 계산하더니 카를이 수치를 내놓았다.
"적어도 한 10퍼센트 정도는 적극적으로 봉기에 가담할 것이라 예상됩니다."
"저렇게 하고도 고작 10퍼센트?"
실망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카를이 피식 웃었다.
"평생을 세뇌당한 이들이 고작 몇 달 삶이 힘들어졌다고 다 때려치우겠다는 각오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한 10퍼센트는 어디까지나 적극적 호응입니다. 소극적 호응, 앞으로 나서지는 않아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도 않는 경우라면 충분히 대다수를 차지할 겁니다. 애초에 노예의 삶이, 적극적이 될 수가 없을 테니까."
"적어도 대세를 따르는 분위기는 만들 수 있다 이거군."
"네, 중요한 것은 결국 리더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로 나뉘는 법. 이제까지는 이끄는 자가 노예 주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르겠지요."
카를이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소극적 호응을 하는 90퍼센트라면, 반드시 나머지 10퍼센트를 따르게 될 테니까요."
☆ ☆ ☆
숙소 앞 광장을 수백의 오크들이 달리고 있었다. 대부분 노예로 살아가던 힘없는 오크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이들은 달랐다.
"진정한 오크가 되고 싶으냐!"
"진정한 전사가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뛰어라!"
마치 양떼를 모는 목동처럼 격려와 호통을 치는 이 오크들은 모두 노예가 아니었다. 카를의 책략에 따라 미리 경매장 안에 잠입한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이었다.
아무리 깊은 밤이라지만 이 정도 대규모 인원이 움직이는데 못 알아차릴 리가 없다. 다른 곳에서 경비를 서던 경매장 내부 병력들이 화들짝 놀라 중무장을 한 채 이들에게 달려왔다.
"뭐냐?"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왜들 저러지?"
"돌림병이라도 돌았나?"
칼과 방패, 갑옷으로 중무장한 삼십여 명의 병사들은 앞마당 저편에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발견하고 당황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소리를 쳤다.
"이놈들! 당장 그 자리에 서지 못할까!"
아무리 수적으로 열세라지만 저 오크들은 언제나 하찮게 여기던 노예 무리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을 한 반면, 저쪽은 낡은 천으로 간신히 비부나 가린 처지가 아닌가? 그래서 대장은 저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째 오크들의 진군이 멈추질 않았다.
맨손, 맨발에 무기는 고사하고 이쑤시개 하나 들지 않은 놈들이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계속해 자신에게 달려온다.
"당장 멈추지 않으면 내 검 맛을 보게 될 것이다!"
겁을 주기 위해 대장이 롱 소드를 길게 뽑았다. 순간 선두의 오크, 잘카토가 양손을 허공에 뻗으며 고함을 질렀다.
"와라, 나의 맹우여!"
쌔애액!
차가운 파공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눈부신 은빛의 원이 호선을 그리며 경매장의 높은 담장 위로 날아오른다. 은빛 섬광이 순식간에 잘카토의 손아귀에 잡힌다.
그것은 두 자루, 찬란하게 빛나는 백색의 검이었다. 병사들이 아연실색해 소리쳤다.
"뭐야?"
"무기가 제멋대로 날아왔어?"
"막 빛도 나는데?"
저 기이한 현상은 더 이상 대륙의 인간들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다. 비록 직접 보진 못했지만 풍문으로는 충분히 들은 바가 있다.
대장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저 사술은? 안타레스 오크다!"
크로방스 내전과 안타레스 백국에 대해서는 이제 이종족 노예들 사이에서조차 그 소문이 퍼질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으아아...."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안타레스 오크라 명명된 저 새로운 품종(?)의 오크들은 한 놈이 이름난 기사 대여섯을 가뿐히 상대할 정도의 가공할 몬스터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크와는 전혀 다른 존재. 제플린 시내에서 건달이나 상대하던 그들의 상대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지휘관답게, 대장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진정해라! 아무리 안타레스 오크라도 고작 한 놈이다! 별것 없어!"
그때였다.
잘카토의 뒤를 따르던 십여 명의 오크들이 일제히 손을 쳐든 것은.
"오라!"
"나의 맹우여!"
"나의 검, 나의 친우여!"
담장 위로 십여 개의 섬광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밤하늘을 밝히는 은은한 섬광의 물결, 그 속에서 잘카토가 검을 치켜세우며 호탕하게 외쳤다.
"모두 베어라!"
"크아아아아!"
선두에 선 푸른 곰 부족의 오크들이 맹수처럼 병력을 덮쳐갔다.
검과 방패가 맞부딪치고 불꽃이 튀었다. 요란한 금속음 사이로 연달아 피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기만 들었을 뿐, 여전히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감히 병사들이 따라갈 수준이 아니었다. 푸른 곰 일족의 최정예, 검과 영혼을 소통해 전사의 이름을 받은 이들과 동네 경비병을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이야기다.
잘카토의 쌍검이 대장의 양 옆구리를 깊숙이 찔러 갔다. 대장이 피 섞인 가래를 토하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크으... 대체 어떻게 안타레스 오크가 이 안까지...."
검을 뽑아 들며 잘카토가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안타레스 오크가 경매장 안에 잠입했는지가 궁금하다는 건가? 애초에 그런 쪽 대비는 전혀 하지도 않은 주제에?
"네놈들이 우릴 금화 다섯 닢에 샀지."
잘카토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푸른 곰 부족의 전사, 마타루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약속된 신호탄, 화광이 충천한 하늘을 보며 마타루가 입을 열었다.
"슬슬 다른 분들도 빠져나올 때겠군. 어서 합류하세."
☆ ☆ ☆
"히이익!"
"으에엑!"
흔들리는 화톳불 빛 사이로 공포에 질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복도며 회랑을 따라 인간들이 정신없이 도망을 친다.
새하얀 안개가 그들 뒤를 쫓고 있었다.
사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깔리는 안개, 그것에 접한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화려하게 꽃을 피운 화단이 새하얗게 서리가 끼어 부서져 간다. 굳건하던 기둥이 얼음이 끼며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대리석 바닥과 천정 위로 냉기의 권세가 해일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얼려 버린다.
그 안개의 중심지에 그녀가 있었다.
보랏빛 머리칼에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를 지닌 놀라운 미모의 엘프 여인.
냉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그녀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때마다 냉기가 허공을 휘달리며 인간들을 덮쳐 갔다.
모두 엘프 노예 경매장, 엘븐하임의 거주자들이었다. 평소에는 엘프들을 상대로 왕처럼 군림하던 이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의 표정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으아아!"
"마녀다! 얼음의 마녀다!"
저 마녀에 의해 벌써 경매장의 절반 이상이 얼어붙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저 마녀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그저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모두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린다. 그야말로 전설 속 죽음의 여신이 현현한 것만 같다.
그리고 저 죽음의 여신은 결코 자비가 없었다.
"살려 주...."
"제발 목숨만은...."
아무리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마녀는 죽음의 그림자를 거두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생명을 앗아 간다는 것에 조금의 거리낌조차 없는 모습으로 냉기를 흩뿌릴 뿐이었다.
마녀가 계속 걸음을 옮긴다.
이미 한기가 지배하는 건물 곳곳에는, 처절한 표정을 지은 얼음 동상들이 수십 개씩 생겨 있었다. 채 얼어붙지 않은 장소에서는, 벽에 가로막혀 도망조차 치지 못한 이들이 저 얼음의 마녀를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이빨만 딱딱 부딪치고 있을 뿐.
"아아...."
"으어어...."
끔찍한 광경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엘프의 모습을 했고 상대가 평소 엘프들을 가혹하게 대했던 인간이라 한들, 사람의 생명을 앗는 것에 어찌 저리도 무감각할 수 있단 말인가?
사아아!
냉기가 대지를 휘달린다. 군마처럼 질주하며 인간들의 머리 위를 뒤덮는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냉기가 덮치는 속도가 두 발보다 빠르다. 외마디 절규와 함께 도망치는 사람들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얼어붙는다.
사방이 얼음으로 반짝거리는 아름다운 죽음의 대지.
그 위에 서서 이니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요염하게 입술을 슬쩍 핥았다.
"이걸로 대충 정리되었네. 역시 다수를 상대할 땐 이 수법이 제일 잘 먹힌다니까."
이 가공할 냉기의 안개는 바로 이니야가 자신하는 오러 운용법 중 하나인 '북해의 숨결'이었다.
어둠과 물의 정령력을 이용해 강렬한 냉기를 피운 뒤, 그것을 이니야 자신의 은빛 오러와 결합한다. 그리고 그 냉기를 띤 오러를 입자화해 안개처럼 퍼트려 효율적으로 범위 내에 냉기를 공급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냉기를 뿜어낼 뿐이면 도중에 상당량의 냉기가 소실되지만 이렇게 하면 거의 손실 없이 냉기를 전달할 수 있다.
정령력을 다루는 것도 그렇지만, 오러를 입자화한다는 것은 사실 어지간한 오러 유저라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기술이었다. 심지어는 뭐든지 두세 번 보면 척척 따라 하는 러스조차도 이 수법만큼은 따라 하긴커녕 설명 다 듣고 죽어라 연습해 대는데도 아직 구현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니야가 오러 운용에 있어서 극의에 달했다는 증거다.
이니야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따라 탈출한 수십 명의 엘프 여인들이 보였다. 그녀의 오러 조절력은 실로 절묘해, 이 가혹한 냉기는 엘프 여인들에겐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 다들 주위를 둘러보며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다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니야는 살짝 기감을 끌어 올렸다. 꽤나 익숙한 느낌, 이내 중년 나이의 아낙네 한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기둥 뒤에 숨어 벌벌 떠는 아낙을 보며 이니야가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어머나, 클라라 교관님이시네?'
빵 하나 제대로 못 굽는다며 엄청 자신을 긁어 댔던 바로 그 인간 여인이 아닌가? 물론 표정은 그때와 전혀 딴판이지만.
피식거리며 이니야가 손을 들어 올렸다. 냉기의 안개가 손끝에서 흘러나와 여인에게 쇄도한다. 여인이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터트렸다.
"사람 살...!"
비명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여인이 반짝거리는 얼음 동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게 또 한 명의 인간을 장기 보관 가능한 상태로 만든 뒤 이니야가 혀를 찼다.
"오버하긴. 죽는 것도 아닌데."
그때였다.
이니야 뒤에서 갈색 피부의 엘프 소녀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니야 씨?"
"응? 왜 그러나요, 시리스 양?"
의아해하며 이니야가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시리스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이니야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죽는 것도 아닌데...라는 소릴 들은 기분이...."
"그 소리 했는데요?"
"...그럼 혹시 이 사람들, 살인 피하려고 이렇게 얼린 건가요?"
이니야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물론이죠. 레펜하르트 님이 되도록 살생은 피하라 하셨잖아요? 전 그분 말을 거역할 생각은 없답니다."
방실방실 웃고 있는 이니야를 보며 시리스가 이마를 짚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기... 이렇게 얼려 놓으면 다 죽을 텐데요?"
"엥? 도로 녹이면 되잖아요?"
"엘프랑 달리 인간은 얼렸다 녹이면 그냥 죽어요...."
정령 친화력이 강한 엘프는 열기나 냉기에 대해서도 인간보다 훨씬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라면 얼음 속에 갇힌 시점에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겠지만, 엘프는 그 경우 냉기와 동화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엘프 역시 육신을 지닌 존재이니만큼 그대로 계속 놔두면 결국은 죽겠지만, 적어도 사나흘 정도 얼어붙은 상태라면 뜨거운 물에 담글 경우 충분히 원 상태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니야는 북해에서 살며, 차가운 바다에 빠져 얼어붙은 동족들을 수없이 그렇게 건져 살린 경험이 있는 것이다.
이니야가 눈을 깜빡이며 반문했다.
"에? 그래요?"
"...역시 몰랐군요... 어쩐지...."
시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두 자릿수로 대량 학살을 일으키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처음에는 엘프 수장답게, 동족을 학대한 자들을 응징하는 단호한 태도인 줄 알았는데, 그걸 감안해도 표정이 너무 태연했던 것이다.
안색이 창백해진 이니야가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잘 보니, 구출한 수십 명의 엘프 여인들 모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까진 그냥 그녀의 강력한 무위에 감탄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잘 보니 어째 분위기가 다르다.
그래, 다들 천하의 엽기 살인마를 바라보는 듯한 눈이랄까?
손가락을 꼬며 이니야가 겁먹은 목소리로 시리스에게 물었다.
"...혹시 저 사람들, 다 죽는 건가요, 그럼?"
"아직은 그럭저럭 숨이 붙어 있겠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쿨럭! 나 돌아갈래요! 돌아가서 다 녹이고 올 거야!"
그리고, 잠시 이니야가 얼어붙은 인간들 모두 해동시키겠다며 날뛰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런 실수로 레펜하르트의 미움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상황이 느긋하게 얼음 석상 밑에서 불 피우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는 않다. 노예들 데리고 탈출해야 할 판에 그런 헛짓거리 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시리스가 저택 전체에 불을 질러서 자연 해동(?)되게 만들겠다며 간신히 이니야를 달랬다. 그리고 샐러맨더로 저택 여기저기 불을 지른 뒤 노예 엘프들을 이끌고 다시 경매장 외곽으로 향했다. 엘프 노예들이 뒤를 따르며 작게 수군거렸다.
"그런데 시리스 님, 불 질러서 얼음 녹을 정도면 이미 살아남긴 그른...."
"쉿!"
"어머나? 뭐가 쉿인가요, 시리스 양?"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니야 씨."
"...?"
☆ ☆ ☆
이니야와 시리스, 엘프 여인들은 그렇게 엘븐하임 외곽으로 달려갔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경매장 후문이 보였다.
후문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병력이 도열하고 있었다. 경매장을 지키던 경비 병력이다. 원래대로라면 저들이 집결하기 전에 빠져나갔어야 하는데, 중간에 이니야가 헛짓거리를 한 탓에 시간이 지체된 모양이었다.
앞에 선 경비대장이 엘프 무리들을 바라보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양 볼이며 수염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정도다.
검을 뽑아 겨누며 경비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이 간악한 놈들! 무기도 없는 일반인을 가혹하게 살해하는 걸로 모자라 저택에 불까지 지르다니!"
이니야가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윽...."
확실히 지금 그녀의 등 뒤에는 화광이 충천한 밤하늘이 예쁘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냥 불만 질렀으면 모르겠는데, 그 속에 얼음덩이들이 가득 쌓여 있으니 불빛이 얼음에 산란되어 정말 예쁘게 반짝인다.
자기도 모르게 이니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잠깐, 그러고 보니 지금 누가 누굴 탓하는 거야?"
지금 엘프들을 마음껏 노예로 붙잡고 사육하며 학대해 온 놈들이 고작 집에 불 좀 질렀다고 간악하니 어쩌니를 논해?
뭐, 이니야가 실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레펜하르트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 저들에게 미안해할 이유는 절대 없는 것이다.
경비 대장이 손을 들었다. 신호에 따라 병사들이 모두 창칼을 뽑아 들고 전투 자세를 갖추었다.
위엄을 담아 경비 대장이 소리쳤다.
"주제도 모르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두 폐기 처분하겠다! 얌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어라!"
호통이 터지자 엘프 여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자유에 대한 자각을 했다 해도 오랜 세월 몸에 익은 관습은 무서웠다. 평생 주입되어 온 노예근성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니야와 시리스는 무릎 꿇지 않았다.
"무릎이라...."
이니야가 차분한 눈으로 오른손을 늘어트렸다. 동시에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어?"
경비 대장이 멍한 음성을 흘렸다. 갑자기 눈앞이 번쩍하며 뭔가가 시야를 가득 덮은 것이다. 도대체 뭔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어리둥절해하며 경비 대장은 눈앞의 보랏빛 머리칼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어색함을 느꼈다. 왠지 저 보랏빛 머리칼의 엘프가 아까보다 부쩍 키가 커진 것 같다?
그때 등 뒤에서 부하들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장님...."
"다, 다리가...."
"응? 다리?"
멍하니 경비 대장은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자신의 굳건하던 두 다리, 그것이 무릎부터 뎅겅 잘려 있다는 것을.
고통은 없었다. 절단면이 새하얗게 얼어붙어 있어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자신의 다리가 아니라, 그냥 썰어 놓은 돼지고기처럼 보인다.
한참 후에야, 경비 대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동시에 시리스와 이니야가 몸을 날렸다.
"샐러맨더!"
양손에 불꽃을 휘감은 채 시리스가 빠르게 병사들 사이로 돌진해 갔다. 병사들이 당황하며 진형을 짜 그녀를 막아섰다.
다른 곳의 경비대 같았으면 대장이 당한 순간 모든 전의를 잃고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엘븐하임은 엘프 노예 경매장, 워낙 비싼 물품을 다루는 곳이다 보니 경비 병력의 수준 역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냥 어설프게 칼질 좀 배운 젊은 놈들 대충 창 쥐여 주고 세워 놓는 오크 경매장과는 차원이 다른 정예병인 것이다.
물론, 그래 봤자 결과는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시리스가 양손을 좌우로 떨쳤다. 불도마뱀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연달아 폭음이 울리며 병사들이 허공으로 날려 간다. 그렇게 병사들 사이로 파고든 뒤 시리스는 맨손 체술로 연달아 병사들을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때리고 꺾고 넘어트리고 메친다. 무기 하나 없는 적수공권인 시리스였지만, 그녀의 혈맥에 파고든 정령력은 어지간한 프리스트의 강화 신성 주문을 능가했다. 가냘픈 작은 소녀의 몸으로 거구의 장정을 붙잡아 던져 버리는 그 광경에 병사들의 사기는 순식간에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니야는, 굳이 적들 사이로 파고들지도 않았다.
사아아아....
섬뜩한 냉기를 전신에 휘감은 채 그녀는 오만하게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의 여왕, 북해를 지배하던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런 잡병들을 상대로 굳이 발을 놀릴 필요도 없다.
"흥!"
이니야는 오른손을 들어 손칼의 형태를 취했다. 은빛 오러가 찬란히 솟구치며 한 자루 칼날로 화했다. 가공할 파괴의 힘과 섬뜩한 냉기를 동시에 지닌 그녀만의 블레이드 오러, 이니야가 가볍게 손을 떨쳤다.
사아악!
섬광이 스치는 곳마다 모든 것이 베이며 얼어붙는다. 검도 방패도, 금속 갑옷도 전혀 소용없다. 전부 치즈처럼 간단히 썰리며 딱딱하게 얼어붙는다.
"레펜하르트 님은 되도록 살생을 피하라 하셨으니...."
한 번의 횡 베기로 다섯의 병사들이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신세가 되었다.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는 않겠다."
이니야가 다시 한 번 손을 휘둘렀다. 또다시 다섯 명의 병사들이 평생 박수를 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사람이라면 왼손 없이 오른손만으로는 절대 박수를 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세 번 손을 휘두르고 나니 더 이상 서 있는 병사는 없었다. 모두 자신의 팔다리가 얼음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뒹구는 걸 보며 경악하다 기절해 버렸다.
뭔가, 차라리 죽이는 것만도 못한 꼴로 만드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지만 적어도 이니야는 진지했다. 워낙 가혹하게 살아온 스티리아 일족에게 팔다리 하나 날아가는 것쯤은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는 것이 오지의 사고방식이니까.
상황을 정리한 뒤 이니야가 시리스를 돌아보았다.
"다친 데는 없나요, 시리스 양?"
옷자락을 털며 시리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이 정도로 다칠 만큼 약하진 않아요."
'까칠하긴.'
이니야는 입을 삐죽였다. 역시 저 꼬맹이 마음에 안 들어!
그때 경매장 후문 저편에서 작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똑! 똑!
동시에 굳건히 잠겨 있던 후문의 자물쇠가 열리며 가냘파 보이는 엘프 여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이니야와 시리스, 그리고 다른 엘프 노예들을 바라보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아르니라고 합니다. 약속했던 대로 여러분을 안내하기 위해 왔어요...."
그녀의 목에는 노예임을 증명하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엘븐하임에서 사육되는 노예가 아니라, 정식으로 외부에 팔린 노예라는 증거.
그녀는 이니야나 시리스처럼 안타레스 백국에서 제플린으로 잠입한 것이 아닌, 원래부터 이곳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엘프였던 것이다.
☆ ☆ ☆
제플린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사전 작업을 하던 카를이 가장 골치 아팠던 부분은 바로 경매장 외부의 이종족 노예들이었다.
노예 경매장에 모여 있는 이들이라면 어떻게든 데리고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외부로 팔려 각자 주인을 가진 노예들은 영 손쓰기가 쉽지 않았다.
노예들을 구하기 위해선, 적어도 그들 스스로가 자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따라나선다는 전제 조건이 필수였다. 아무리 안타레스 백국의 이종족들이 강력하다 해도 제플린의 노예 숫자는 너무나 많고, 그들 모두를 강제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여러 사전 작업으로 내부 호응을 유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경매장 내부, 비슷한 처지가 많이 모여 있으며 확실한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노예들에 한해서라면.
하지만 이미 팔려 버린 노예들에게까지 그들의 삶을 자각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소수의 엘프 노예들을 구출할 때, 그녀들은 모두 또 다른 주인을 만났다는 심정으로 시리스를 따랐지 딱히 자유 의식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정도의 대규모 해방 작전을 꾀하려면 적어도 그 노예들 개개인이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다는 최소한의 자각은 가지고 있어 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두 달 사전 작업을 해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 부분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레펜하르트 님이 미리 사전 작업을 해 두셨더군요?"
"응? 내가 뭘 했는데?"
감탄 섞인 카를의 질문에 레펜하르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를도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 노예들 교육시키는 방법, 레펜하르트 님이 유행시킨 것 아니었습니까? 시볼트 회주 말로는 그렇다던데...."
"아, 그거?"
그제야 레펜하르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몇 년 전, 차탄 공국을 방문했을 때 시리스를 구하면서 이런저런 엘프 노예들도 함께 구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노리고 그들을 교육시키라며 은근슬쩍 시볼트에게 압력을 넣기도 했다.
과연 레펜하르트 예상대로, 노예일 뿐인 이들을 교육시켜 놓으니 다들 머리가 트여 부려먹을 수 있는 용도가 훨씬 늘어나게 되었다.
상인 입장에서 회계사를 고용하는 것은 많은 봉급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일을 노예가 대신할 수 있으면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노예가 이런저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 훨씬 인건비 절감에 도움이 된다.
이래저래 행보가 바쁘다 보니 레펜하르트는 반쯤 잊고 있었지만, 그 이후 차탄 공국, 특히 제플린 내에서는 노예들을 교육시켜 인건비를 절감하는 것이 꽤 유행처럼 퍼져 있었다. 지금 카를이 짚은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뒷조사를 해 보니 기대 이상으로 제플린 내의 이종족 노예들의 호응도가 높더군요. 이미 저희들끼리 몰래 만나 가며 뭔가 변화가 생기길 기대하는 움직임이 제법 있습니다. 물론 그들끼리만 들고 일어난다고 해 봐야 미래가 없어 아직까지는 모여서 서로 하소연하는 정도 수준인 듯하지만요."
덕분에 그들 역시 봉기가 일어나면 충분히 호응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카를의 말이었다. 이미 비밀리에 서신이 오가고 있으며, 뜻을 함께하는 오크며 엘프, 드워프 노예들이 상당히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걸로 제플린의 분산된 노예들을 구출하는 것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부분도 해결할 수 있었고요."
저 노예들이 자발적으로 안타레스 백국에 호응해 준다는 것은 단순히, 구출할 수 있는 노예의 숫자가 늘었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덕분에 제플린 내부에 믿을 만한 다수의 아군이 생겼지요."
안타레스 백국에서 제플린 내부로 병력을 잠입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안타레스의 이종족 전사들이 최정예라고는 해도, 무기도 갑옷도 없이 중무장한 병사들을 상대할 정도로 강한 자들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다.
"내부의 샛길을 안내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파악해 주며, 또한 탈출한 이들의 무장을 책임져 줄 외부의 인력으로 이들만큼 좋은 이들도 없지요."
☆ ☆ ☆
아르니는 원래 제플린의 이름난 상단에서 살아가던 엘프 노예 중 하나였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단순한 하녀로 저택에서 봉사하며 주인이 원하면 침실로 끌려들어 가는 삶을 살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물론 주인이 원하면 침실로 가야 한다는 점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업무 자체는 단순한 하녀가 아니었다.
요 근래 제플린에 불어온 기이한 유행, 노예를 교육시켜 쓸모 있게 만든다는 그 유행 덕에 그녀는 지금 라타룬 상단의 하급 경리이며 동시에 창고 물품 관리자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경리 일을 제대로 하려면 단순히 숫자만 잘 계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니 만큼 전반적인 기초 교양은 모두 익힐 필요가 있다.
덕분에 아르니는 엘프이면서도 인간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바뀐 삶을 살아가며 조금씩 의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도 모두 할 수 있었다.
인간이 느끼는 일은 그녀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왜 그녀는 노예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노예인 자신과 인간인 저들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처음에는 그것은 아주 작은 의문이었다. 일에 지쳐 피로 속에 침상에 몸을 뉘일 때 아주 가끔씩 떠오르는, 실로 작디작은 스스로에 대한 질문.
그 의문이 가슴 속에서 부풀어 오른 것은 크로방스 내전의 소문이었다.
마치 신화나 전설 속의 엘프처럼 살아가는 동족의 이야기.
스스로의 의지로 생각하고 움직이며 인간을 상대로 당당히 맞서는 이들의 소문은 아르니의 의문을 점점 더 키워 나갔다. 그녀는 무심코 다른 엘프 노예에게 자신의 의문을 흘렸다.
왜 그녀는 노예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은가?
노예인 자신과 인간인 저들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건가?
놀랍게도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르니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의문을 흘렸던 다른 엘프 노예, 그녀 역시 아르니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또한 아르니는 또 다른 사실 역시 알 수 있었다.
제플린 내에 그녀처럼 의문을 가지는 노예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가끔 몰래 서로 만나며 친분을 쌓고 있었다는 것을.
아르니가 대화한 엘프 노예는, 그녀처럼 다른 상단에서 교육을 받고 물품 관리에 종사하던 이였다. 딱히 우연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근 제플린 시내에 번진 저 '노예 교육열'은 꽤 유행이 과열되어, 어지간한 노예들은 대충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제플린 내에서는 이제 교육을 받지 않은 노예들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다.
제대로 교육받아, 현실에 의문을 품은 노예들.
그들은 틈나는 대로 모임을 가졌다. 대부분 엘프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오크도 있었다. 뭐, 모임을 가진다고 딱히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의문을 품을 만큼 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상이 얼마나 꽉 짜여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그들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저 망상 속에서 존재하지 않을 희망을 꿈꾸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
그럼에도 그들은 모임을 유지했다. 적어도 같은 처지와 만남으로써 심적인 위안은 얻을 수 있기에.
그런 그들에게 변화가 온 것이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은밀하게 그들에게 접근한 한 엘프, 안타레스 백국의 엘프라 자신을 소개한 렐하드란 인물에 의해서.
"이쪽이에요!"
골목을 달리며 아르니는 빠르게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 짧은 다리를 바삐 놀리며 어둠을 가른다.
아르니가 가리킨 곳은 그녀가 속한 상단의 창고, 자신이 관리하는 무기 창고였다. 드워프들이 모이자 아르니는 빠르게 자물쇠를 따고 창고를 열었다. 수많은 무기들이 가득 진열된 창고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드워프들이 희희낙락하며 무기며 갑옷들을 집어 들었다.
"호오, 이거 인간치곤 꽤 잘 벼린 검이로군."
"이 장검도 꽤 괜찮은데?"
"하지만 갑옷은 사이즈가 안 맞아."
"팔다리 부위는 버리고 어깨랑 가슴 부위만 쓰면 되잖소."
드워프들이 허겁지겁 무장을 갖췄다.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었지만 무기는 전원에게 주어질 만큼 충분히 많았다. 애초에 아르니가 이 날을 위해 일부러 숫자를 맞췄으니까.
'무기는 제대로 전달했어! 이제 다음은....'
아르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의 위치를 확인했다. 지금쯤 다른 곳에서도 무기 창고가 열리고 있을 터였다. 연락을 취한 다른 노예들도 그녀처럼 엘프며 오크, 드워프들을 이끌고 있을 테니까.
"후후, 검을 드니 오랜만에 피가 끓는구먼."
중무장을 한 드워프 사내가 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빛냈다. 조금 전까지 노예 신세였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활발한 태도였다. 평소 드워프를 본 적이 없던 아르니로서는 놀라울 정도였다. 자신은 지금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드워프들이 무장을 끝내자 거리로 나섰다. 아르니도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제플린 곳곳에서는 붉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사이로 수많은 노예들이 자유를 향해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뿐이었다. 제플린 시내에 이토록 많은 노예들이 있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아르니를 향해 드워프 사내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자, 우리도 갑시다, 엘프 처자."
"네!"
아르니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되돌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공포가 공존한 채, 붉게 상기된 얼굴로 아르니는 열심히 그들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