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교체했음에도, 일행의 이동 속도는 그다지 빨라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갑에 새겨진 마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말이 달리면 마력 소모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시험 삼아 달려 본 결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마석들이 빛을 잃었다.
최소 세 가지 이상의 마법이 새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짐가방에 남아 있던 마석은 고작해야 사흘 남짓 달리면 동날 분량.
상단에서 온 추적자 놈들은 마석을 말 그대로 물 쓰듯이 하면서 그들을 따라왔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이안은 속도 대신 이동 시간만 늘리기로 했다.
사실, 의미는 만약의 상황에 더 빠르고 멀리 도주할 방법이 생긴 것만으로도 충분히 있었다.
미구엘은 여기에 한 가지 제안을 더했다.
"시간도 벌었고 더 오래 이동할 수도 있게 됐으니, 여기선 조금 돌아서 갑시다."
"얼마나?"
"내 기억이 맞으면, 북동쪽으로 질러가면 영주성 인근을 지나야 한단 말이오. 별일 없으면 다행이지만, 있으면 난리가 날 거요. 그러니 우회해서 갑시다. 번 시간만큼 다시 쓰면, 충분할 거요."
"중간에 들키면 영지를 넘나들면서 튀고?"
"바로 그거요. 이젠 뿌리칠 수도 있잖소. 형씨도 영원히 싸울 순 없으니까. 피할 건 피해야지. 여기만 지나면 버려진 땅이오. 거긴 흉지 천지이니 여기보단 안전하겠지. …거길 안전하다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너도 드디어 사람이 마물보다 무섭다는 걸 깨우쳤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도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다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조용한 전진이 시작됐다.
마부석의 미구엘은 제국제 석궁을, 그 뒤에 기대앉은 루시는 단검을 질리지도 않고 만지작댔다.
이안은 구석에서, 갑각 같은 재질의 회색 가시에 가죽 띠로 손잡이를 만들고 있었다.
동굴 거미 여왕의 독니였다.
이건 심지어 정보 확인이 가능한 무기였는데, 무려 4레벨의 마비독을 머금고 있었다.
4레벨이면 순간적으로 이안도 마비시킬 수 있는 수준.
수치상 최대 5번에, 따로 독을 보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적을 상대할 때 훌륭한 보험이 되어 줄 터였다.
단검을 완성한 이안은 독니를 아공간에 넣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짐가방에서 식량과 붕대, 양초 따위를 꺼내 작은 배낭에 꼼꼼히 눌러 담기 시작했다.
그 영문 모를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루시가, 이윽고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구엘."
"엉?"
"미구엘은 의뢰가 끝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허! 빨리 침 뱉어! 빨리!"
어깨를 들썩인 미구엘이 재빨리 외치고는 밖으로 가래침을 뱉었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 한 루시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미구엘이 입맛을 다셨다.
"재수 없는 말을 하면, 빨리 침을 뱉어야 해. 일종의 액땜이지."
"액땜은… 왜 하는 건데요."
"잘 들어라, 루시. 용병들 사이에는 의뢰 도중에 절대 하면 안 되는 말들이 여럿 있어. 내뱉거나 대답하기만 해도 재수가 옴 붙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는 말이지."
"그건, 저주라고 부르지 않나요?"
"거의 비슷해.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도 많지만, 내 말 믿어라. 그렇게 무시한 인간들, 다 죽었으니까."
"제 질문이 그런 거였다고요?"
"그래. 이번 의뢰가 끝나면 뭔가를 하겠냐고 했지? 이 질문에 대답한 순간 저승에 한 다리쯤 걸쳤다고 보면 돼. 비슷한 말로 고향에 돌아갈 거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 자식들이 기다린다가 있지."
미구엘이 진지한 얼굴로 루시를 돌아보았다.
"이런 말은, 의뢰가 끝난 후에나 하는 거다. …사실, 넌 알 필요 없는 것들이지만."
"미구엘은 아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특히 미신에 대해서는."
"네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듯이, 나도 그렇거든."
"하지만 제 저주는 진짜인걸요. 지금까지 이걸 피해간 건 언니를 포함해서 세 분뿐이에요."
"나랑 저 형씨? 그럼 필립은?"
"필립은… 그 정도는 아니에요."
푸학, 웃음을 터뜨린 미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내 말이 그 말이다. 난 불운을 몰고 오는 행동은 절대 안 해. 그 덕에 아직 살아있는 거고."
"…이해했어요."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몸을 낮춰 등받이에 턱을 얹었다.
"전 그냥, 절 데려다준 후에 갈 곳이 없다면 함께 남아 주실 수 없나 해서 여쭤본 거예요."
"엥…? 화로의 사원에?"
"거기에도 고용인들이 있다던데요. 제가 부탁하면 미구엘이랑 이안 님도 지내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미구엘의 옆얼굴을 올려다 본 루시가 덧붙였다.
"나중에 제가 다시 세상에 나올 때, 같이 나올 수도 있고. 미구엘은 훌륭한 길잡이니까."
"흐음… 아니 뭐… 사실 딱히 갈 곳이 정해진 건 아니긴 한데."
턱을 어루만지는 미구엘의 입술 끝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 형씨는 안 남겠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나 원한다면 남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재수 옴 붙는다더니. 그거면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
어느새 정리를 끝내고 한쪽 벽면에 기대앉은 이안이 되물었다.
미구엘이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끝을 흐렸잖소. 이건 대답한 게 아니지. …그래서,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난 당연히 떠날 거다. 그렇게 봐도 달라질 건 없어. 루시."
"…어디로 가실 건데요?"
루시가 입술을 꾹 누르며 물었다.
이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글쎄… 어디든 가겠지."
"...."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미련 남길 시간에 연습이나 해. 그날 이후로, 아직 불씨도 못 만들어 내고 있잖아?"
"…알았어요."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시무룩했다.
미구엘이 슬쩍 중얼댔다.
"거, 말 좀 곱게 하시지. 애 기죽게…."
"곱게 갈아 줄까?"
"…혼잣말이었소. 혼잣말."
미구엘의 뒤통수에 대고 콧방귀를 뀐 이안은, 이내 비스듬하게 드러누웠다.
"명상할 거니까, 싸워야 될 일 아니면 깨우지 마라."
"알겠소."
잠시 어둑어둑한 하늘을 눈에 담은 이안이, 명상을 활성화했다.
주위의 잡음이 사라지면서, 의식이 내면으로 침잠했다.
행선지에 대한 상념이 이어졌다.
이번 의뢰가 끝나고 어디로 갈지는, 그도 아직 제대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이미 게임에서의 흐름과 그의 여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벨 론데와 루 사드를 거쳐 북부로 갔고. 산맥 지대와 버려진 땅을 거쳐 화로의 사원으로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순서가 어그러진 셈.
'그럼 아예 역순으로 움직이면…?'
이안은 심상에 지도를 떠올렸다.
화로의 사원에서 버려진 땅으로. 그리고 산맥을 거쳐 루 사드로 향하는 선이 어렴풋이 이어졌다.
그럴듯하지만, 변수는 여전히 많았다.
특히 버려진 땅이나 산맥 지대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데다 툭하면 눈보라에 얼어 죽는 바람에 많은 퀘스트를 건너뛴 지역이었다.
물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공략집을 보고 난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겪어 본 적은 없는 상황을 여럿 마주하게 될 터.
'…각오 단단히 하고 움직여야겠군. 기억도 열심히 되새기고.'
그 과정에서 죽지만 않는다면, 제국에 들어설 때쯤엔 게임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있으리라.
'만약 루 사드까지 포인트를 쓰지 않고도 버틸 수 있다면… ...?'
이안은 문득 생각을 멈췄다.
감각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이이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다.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새하얀 눈밭 위. 어둠 너머까지 끝도 없이 펼쳐진, 가지만 앙상한 흰 나무들.
'이건 또 뭐야…?'
#058화
미간을 찌푸리려던 이안은, 비로소 자신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이 지랄이군.
게임이었다면 일종의 이벤트 컷 신에 불과했을 상황이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은 결코 그렇게 맘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정신이 붕괴할 뻔한 이후로는 더더욱.
'대체 어떻게 저항력을 무시하고 의식을 가로채는 거지. 그만큼 강한 놈이라는 건가…?'
어둠이 물결치듯 일렁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이안의 생각이 뚝 멈췄다.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종종 느껴지던, 바로 그 시선.
너구나.
이안은 내심 읊조리며, 물결치는 어둠을 노려보았다.
-…오라.
메아리 같은 속삭임이 번졌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와 노파의 가래 낀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묘한 목소리.
-내게로 오라… 선택받은 자여.
이어진 속삭임에, 이안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또다시 안타까워졌다.
코웃음을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택받은 자라니. 진부하기 짝이 없는 멘트였다.
-불멸이 너를 기다릴지니….
심지어, 불멸?
유혹이라기보단 오히려 구애하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어둠을 노려보며 뇌까렸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면 되는데?
정체만 드러내 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 방금, 목소리가 나온 건가?
이안이 순간 어리둥절해 한 그때.
파도치던 어둠도 문득 고요해졌다.
적막은 잠깐이었다.
-운명이 너를 기다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속삭임이 이어졌다.
방금 너도 당황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목소리를 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보다 주위의 풍경이 흘러내리는 것이 더 빨랐다.
모든 감각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어둠.
"...."
이안은 비로소 눈을 떴다.
새카만 하늘.
방금 본 환영이 그 위에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 어설픈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게임에서 겪어 보지 못한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그도 모르는 어떤 특정한 조건을 만족 시켰거나, 어쩌면 또 다른 타락자 전용 이벤트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그의 내면에는 타락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혼돈력이 버젓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모든 걸 확실하게 해 줄 퀘스트 창이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이런 방식은 게임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그때와 같다면 이벤트 컷 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의문의 어둠이 도사린 장소에 가까워지다 보면 다시 시작될 테고.
퀘스트 창은 놈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난 후에야 만들어지리라.
'…그럼, 방금 그것도 그래서 시작된 건가?'
이안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눈 덮인 숲. 북부로 향하고 있으니,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계속 북부로 향하기만 해도, 또다시 그 진부한 놈이 보내는 환영을 보게 될 터였다.
…다음번엔 정체를 드러내 줬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던 이안은, 뒤늦게 건너편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를 깨닫고는 미간을 좁혔다.
"안 잤냐?"
"잠이 안 와서요."
담담하게 대답한 루시가, 이내 덧붙였다.
"방금 그거, 뭐였어요?"
너도 뭔가 느낀 거냐.
눈을 끔뻑인 이안이 되물었다.
"뭐 같아 보였는데."
"전혀 모르겠어요. 그냥,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안 님 주위로 뭔가 아른거리는 것처럼 보였고. 그러다가 이안 님이 마력을 내뿜으셨는데… 이것도 느낌이에요. 그렇게밖엔 설명할 수가 없어서요."
루시의 설명은 거의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들렸다.
본인도 자신이 느낀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모양.
오히려 그래서 더 전형적인 마법사의 화법처럼 느껴졌다.
뭔가 눈을 뜨긴 한 것 같은데….
속으로 읊조린 이안이 입을 열었다.
"환영을 봤다."
"환영… 이요?"
"정체는 모르지만. 보나 마나, 세상에 미련이 남은 고대의 원혼 같은 거겠지. 날 부르더군. 흔히들 말하는, 어둠의 속삭임이란 거다."
"...! 책에서 읽은 적 있어요. 마법사들은 의식의 경계를 허문 존재들이라, 그만큼 어둠과 광기의 유혹에 노출될 일이 많다고요."
"…넌 대체 무슨 책을 읽고 산 거냐."
"버논 오라버니의 서고에서요. 언젠가부터 마법이나 신비와 관련된 책들을 수집하셨었거든요. 다 읽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아하…."
왕국에 어둠이 깃들었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나름대로 조사를 했던 거군.
루시와 관련된 자료도 모았다는 걸 보면, 버논은 그의 생각보다 꼼꼼한 성격이었는지도 몰랐다.
하긴. 성기사인 누이와 신의 은총을 받은 사촌 사이에 끼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노력이 이런 식으로 빛을 발하리라고는 본인도 알지 못했겠지만.
"…아무튼, 아예 틀린 얘긴 아니야. 더 강한 힘과 지식을 위해서라면 넘지 말아야 할 선도 넘고 마는 게, 마법사란 족속들이니까."
"이안 님도, 그러셔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덧붙였다.
"다만 악마나 공허에 영혼을 팔 만큼 멍청하진 않을 뿐이지."
그런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는, 게임을 통해 지긋지긋하게 경험했으니까.
"저한테도, 그런 유혹의 순간이 있을까요."
"있겠지. 네 재능의 크기만큼, 네가 느끼게 될 유혹도 커질 거다."
이 세계에선 재능이 빛날수록 타락의 그림자도 더 짙게 드리우는 법이었다.
"어둠의 유혹에 넘어가면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으면 돼. 그러면 최소한 최악의 결정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거다. 경이 그랬듯이."
"마법사가 된다는 건… 제 생각보다 무서운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뭐든 마찬가지다. 네가 루 엔테르를 섬기게 되더라도, 또 다른 유혹이 있을 테니까."
루시의 눈이 순간 커졌다.
"제가 사제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될 수 있어. 어쩌면 성기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네 몸엔 기사 가문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
"...."
루시의 입이 설핏 벌어졌다.
그렇게 많은 선택권이 있으리라 믿기 힘든 눈치.
하지만 이안이 볼 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루시는 아직 어리고, 그녀의 재능은 사제들의 눈길도 사로잡을 테니까.
어쩌면 메브가 원한 건, 루시가 마법사가 아니라 사제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결정은 루시의 몫이겠지만.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야. 이번 여정이 무사히 끝난 후에 시작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렇겠죠. 제국으로 가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안의 낯이 순간 굳어졌다.
루시를 돌아본 그가 내뱉었다.
"그럴 일은 없다. 절대로."
"...?"
루시가 당황한 듯 눈을 끔뻑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제국에 끌려가면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꿈에도 알지 못할 테니까.
"제가 괜한 소릴 했나 봐요. 다시, 환영 얘기로 돌아갈까요?"
"돌아가긴 뭘 돌아가."
잠이나 자라, 늦었다. 하고 말을 맺은 이안이 벌떡 일어섰다.
"으응…?"
꾸벅꾸벅 졸던 미구엘이 곁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고는 잠이 확 깬 듯 눈을 치켜떴다.
"조용하다 싶더라니."
"아니, 그,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소. 좀 깊이."
"입가의 침이나 닦고 말해."
핀잔을 준 이안이 턱짓했다.
"넘어가서 자라. 내가 몰 테니까."
"어, 그래도 되겠소…? 그럼, 몇 시간만 부탁 드리겠소."
미구엘이 어물쩍 뒤로 넘어갔다.
고삐를 쥔 이안은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
루시의 시선에도 더는 입을 여는 일 없이, 밤새도록.
***
"어윽…."
도망치던 용병이, 등에 볼트가 박힌 채 쓰러졌다.
겨누고 있던 석궁을 내린 미구엘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처리했소."
"그래."
마차 앞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휙휙 끌어내던 이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대꾸했다.
며칠간 이어진 평화로운 여정의 종지부를 찍은 건, 한 무리의 용병들이었다.
달려오며 찾았다고 소리치더니, 대뜸 쇠뇌부터 쏴 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죽음으로 그 경솔한 행동의 대가를 치르게 됐다.
"괜찮냐, 루시?"
주위를 휘휘 둘러본 미구엘이 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다행이군. 미친놈들, 애가 맞으면 어쩌려고."
미구엘이 혀를 차는 사이, 이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출발해."
주인 잃은 말들과 시체들을 뒤로한 채, 마차가 다시 나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 고삐를 쥐고 있던 미구엘이 이윽고 내뱉었다.
"저놈들, 예전 그 용병들처럼 우리 신원을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소."
"그래. 그냥 본 순간 확신했던 거지."
"염병할. 이 정도면 다들 우릴 알고 있는 거요. 현상금이 얼마인지나 물어볼걸."
"예정된 일이었어. 요란 떨지 마라."
이안은 평소처럼 태연했지만.
미구엘은 침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서서히 목을 옥죄여 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 선명하고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영주군까지 따라붙는 거 아닌가 모르겠소."
"그러겠지. 내 생각엔, 길목을 지키고 있을 것 같은데."
"제기랄… 병사들 피는 보고 싶지 않은데."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네 피를 보는 건 괜찮고?"
"의미가 다르단 얘기요. 용병 놈들이야 돈만 받을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하는 놈들이니 상관없지만. 병사들은 아니잖소. 죄라고는 영주의 명령에 따른다는 것밖엔 없지. 대부분, 영문도 모르고 까라니까 까러 온 자들일 거요."
"호오…."
이안이 탄성을 흘렸다.
네가 그런 생각도 할 줄 아냐는 듯한 반응이었기에, 미구엘은 콧방귀를 뀌고는 덧붙였다.
"뭐, 칼 밥 먹고 살면서 불법적인 일도 여럿 한 건 사실이지만. 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살아왔단 말이오. 앞을 가로막는 자들과 싸우는 거야 별수 없지만. 그저 자기 의무를 다할 뿐인 자들까지 죄다 죽이는 게 좋을 리 없잖소."
게다가 이안의 성격을 미뤄 봤을 때, 그는 자신에게 덤비는 자들의 사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죄다 죽여 버릴 것이 분명했다.
메브는 그를 기사보다 더 기사 같은 용병이라 했지만.
미구엘이 본 이안은 용병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용병이었다.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리 있는 지적이군."
"엉…?!"
그래서 이어진 이안의 대답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안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놀라지? 내가 사람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놈처럼 보이냐?"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물론 이안이 동조한 건 그런 감정적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머잖아 필시 대규모 추적대를 마주치게 될 터.
그때 앞을 가로막는 자들의 절대적인 숫자를 좀 줄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경험상, 아무리 약한 놈들이라도 숫자가 많아지면 예상 못 한 변수를 만들어내곤 했으니까.
물론,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미구엘은 눈만 끔뻑일 따름이었다.
이안이 덧붙였다.
"네 말대로 병사들 대부분은 까라니까 까는 걸 테니까. 의무감을 넘어서는 공포를 한두 번만 심어줘도, 알아서들 몸을 사리겠지."
"그야… 그렇겠지만. 그게 쉽겠소?"
이쪽은 달랑 셋인데.
이안의 태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기들이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지 뭐."
"...?"
뒤를 돌아본 미구엘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로브를 걸치고 후드를 깊이 눌러쓴 이안이, 그 위에 시녀에게서 받아 온 망토까지 걸친 채 서 있었기 때문이다.
품을 뒤적인 이안이 이윽고 웬 마법봉까지 꺼내 들었다.
끝에 보라색 정수가 박힌, 불길하게 생긴 거무튀튀한 마법봉이었다.
미구엘이 멍하니 물었다.
"그건 또 뭐요…?"
"지하 무덤의 흑마법사가 쓰던 마법봉이다."
"뭐라고…? 아니, 그 저주받을 물건을 계속 가지고 다니셨소? 어디에? 또 그, 허공에서 물건을 숨기는 마법이오?"
"그런 셈이지."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하며 마법봉 끝에 박힌 정수를 분리했다.
"흑마법사의 마법봉이라고요? 우와."
루시가 탄성을 터뜨리며 뻗은 손을, 이안이 쳐냈다.
"이건 저주가 서린 물건이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
"…저주까지 서려 있다고?"
미구엘을 슬쩍 돌아본 이안이 피식댔다.
"걱정 마라. 이건 쥔 사람한테만 영향을 끼치는 저주야. 어쨌든…."
그가 양팔을 슬쩍 펼쳤다.
"이만하면 내 정체를 들킬 일은 없어 보이는데."
"어…. 확실히, 검의 달인 같아 보이진 않소만."
비로소 이안의 생각을 짐작한 미구엘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소? 촌놈들 겁주는 데 마법만 한 게 없는 건 사실이지만. 마력을 아껴야 한다고 하셨잖소."
"그럼 그냥, 하던 대로 앞을 막는 것들은 죄다 죽이면서 갈까? 그것도 효과는 충분히 있을 텐데."
"아,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니오."
입맛을 다시던 미구엘은, 이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형씨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오. 난 그냥 하던 대로 따를 테니까."
뭐가 됐건, 무고한 자들까지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059화
"이런, 염병할."
완만하게 굽이진 길을 나아가던 미구엘이 마차를 황급히 멈췄다.
잎이 거의 떨어진 나무들 너머, 언덕 위의 전경이 설핏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마부석에서 뛰어내린 그가 살금살금 전진해 언덕 위를 살폈다.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이 검문소.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열 명이 넘는 병사들이었다. 죽 늘어선 목책 사이. 기사로 보이는 지휘관이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저 작자들이 기다리는 게 우리 같소."
마부석으로 돌아온 미구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위치를 눈치챘나?"
"아직. 하지만 이 앞으로 나가면 어디로 가도 결국 들킬 거요."
"그럼 별수 없지. 기다려라."
부스럭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미구엘이 뒤를 돌아봤다.
그들이 탄 짐 마차는, 며칠 사이 모습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좌우와 후방의 칸막이가 한 칸씩 높아진 것이다.
지나가다 발견한 버려진 마차를 분해해 덧댄 방호벽이었다.
혹시 모를 발사체는 물론, 내부가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여러모로 전보다 눈에 띄는 형태가 되었지만.
어차피 이 인근의 병사나 용병들은 다 그들을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있었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후…."
이안이 채비를 끝냈다.
얼굴이 보이지 않게 깊이 눌러쓴 잿빛 로브. 망토도 안감이 겉으로 드러나게 뒤집어 입었고, 손에는 마법봉까지 움켜쥔 채였다.
"형씨를 아는 사람이 봐도, 동일 인물이라곤 생각 못 할 거요."
미구엘이 덤덤하게 내뱉었다.
마부석으로 넘어오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할 건 별거 없다, 미구엘."
마부석 등받이 위에 걸터앉은 그가 덧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길을 따라 달리기만 하면 돼."
"그… 어떻게 하실 건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 주시지 않겠소?"
"별 도움 안 될 텐데. 그냥 쫄지 말고 달려라. 멈칫대다가 마차가 전복되기라도 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이안의 왼손에는 어느새 마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전에 쓰던 정수보다 훨씬 작아서, 손가락 사이에 굴러다녔다.
미구엘은 알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사령술사의 지휘봉은 스킬 데미지를 크게 올려 주는 대신, 마력 소모량도 3배나 높여 버리는 엄청난 마이너스 옵션이 붙어 있었으니까.
끝에 정수를 장착해야 사라지는 조건부 페널티였다.
물론 마이너스 옵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지만….
"하… 알겠수."
마석을 꾹 움켜쥔 이안이 턱짓했다.
"그럼, 출발."
"내가 어쩌다 이런… 에라이…!"
미구엘이 될 대로 되라는 듯 고삐를 후려쳤다.
다각, 다각, 다그닥- 다그닥-
언덕을 오르는 전마들의 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오르막이라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속도.
마갑에 박힌 마석들의 빛이 점점 선명해졌다.
"아, 아니, 저런 미친...?"
달려오는 마차를 발견한 병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느슨하게 기대앉아 있던 지휘관이 허둥지둥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석궁을 든 병사들이 마차를 겨눴다.
루시가 있는 이상 절대 진짜로 쏠 리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미구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삐를 당기면 안 돼. 쫄지 말자. 쫄지… 시부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또다시 뇌리를 스쳤다.
이게 다 그 병신 같은 아겔 란 기사들 때문이었다.
조용히 따라왔다면 이런 개 같은 상황은 겪고 있지 않았을 텐데.
"속도 늦추지 마라. 계속 달려."
이안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웅웅 울리는 목소리.
마력이 담겼다는 증거였다.
"다시 한번 말한다! 당장 마차를 멈춰라!"
지휘관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이 벌떡 일어선 건 그때였다.
그가 보란 듯 양팔을 펼쳤다.
로브와 망토가 부자연스럽게 일렁이고, 그의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마력의 파장이 번져 나갔다.
의도적으로 마력을 내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적어도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마, 마법사...? 마법사가 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당황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미구엘의 귀까지 파고들었다.
이안이 마법봉을 내뻗은 건 그 직후였다.
콰르르르르-!
"...!"
언덕 위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눈부시게 치솟아 오르자,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
콰르르르-
"우와아아악-!"
"어, 어머니...!"
초소가 아수라장이 됐다.
병사들이 후끈하게 밀려드는 열기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개를 위로 꺾은 채 불의 장벽을 망연자실하게 올려다보던 지휘관이, 뒤늦게 입을 달싹였다.
"다들 당장 뒤로- 어어억?!"
쿠구구구-
그의 외침은 끝을 맺지 못했다.
지진이었다.
휘청댄 그가 바닥에 넘어졌다.
주위의 땅이 움푹 파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흙이 한 지점을 향해 모여드는 중이었다.
초소 한복판의 땅이 위로 불쑥 솟아오르고 있었다.
서 있던 병사들이 굴러떨어지고, 목책들이 우수수 넘어졌다.
입을 뻐끔대던 지휘관이 간신히 다시금 목소리를 냈다.
"다, 다들 물러나! 물러나라!"
필사의 외침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루 솔라여… 저희를 굽어살피시고…."
"살려 줘. 제발 살려...!"
바닥에 넙죽 엎드려 기도를 올리는 자부터 벌벌 떨며 땅을 기는 자들이 태반이었으니까.
푸화악-!
돌풍과 함께, 불길 한복판에 구멍이 뻥 뚫린 건 그 직후였다.
그 사이를 쏜살같이 지나친 마차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날듯이 타 넘었다.
"마, 막아야...!"
본능적으로 읊조리며 마차를 쫓던 지휘관의 눈길이 얼어붙었다.
멀어지는 마차 주위로 연달아 피어오르는 거대한 불덩이들.
그에게 남은 일말의 의무감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쾅-! 콰광! 쾅-!
쏟아진 불덩이들이 언덕 중턱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폭발했다.
병사들과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지휘관의 뒤로, 불의 장벽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었다.
***
"으… 으하하! 해냈소!"
미구엘이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뒤늦게 흥분이 밀려오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좋댄다, 새끼.
속으로 중얼댄 이안이 마부석 등받이에 털썩, 걸터앉았다.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손에 쥔 마석이 텅 비어 있었다.
'죽이지 않는 게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니. 어이가 없군.'
헛웃음을 지은 그가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아공간에 쑤셔 넣었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귀곡성이 잦아들었다.
지휘봉에 깃든 원혼의 저주였다.
높은 정신력과 저항력 덕분에 아무런 영향도 없었지만, 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울렸다.
"대단하셨소, 형씨! 대마법사 흉내가 아니라, 정말 대마법사 같았단 말이오!"
"소리 그만 질러라. 머리 아프다."
후드를 벗고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푼 이안이, 이내 턱짓했다.
"적당히 달리며 속도도 줄이고. 마석 닳는다."
"아, 맞다. 그렇지. 알겠수."
"배… 백마법사...!"
루시가 불쑥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이 자신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응?"
"좀 전에… 적색 마법만 쓰신 게 아니잖아요...!"
"아니, 그건…."
"엥? 정말로?!"
끼어든 미구엘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형씨가, 그 전설의 마법사란 말이오? 정말로?"
"확실해요…! 확실하다고요…!"
"확실은 무슨. 전혀 아니거든."
코웃음 친 이안이 내뱉었다.
루시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여러 색의 마법을 쓰셨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게 내가 백마법사란 뜻은 아니야. 애초에 별로 대단한 마법들도 아니었고."
이안이 루시와 미구엘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덧붙였다.
"이건 그냥 일종의 영업 비밀, 비장의 한 수 같은 거다. 그러니까 착각들 하지 마."
"…알았어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이안을 빤히 올려다봤다.
"이안님의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나도 마찬가지요, 형씨."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빛들.
"하… 그래. 마음대로들 생각해라.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진짜 그런 거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난 그냥 레벨만 높은 망캐일 뿐이거든?
혀를 찬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연기가 치솟는 언덕이 어느새 한참 멀어지고 있었다.
아마 오늘부로, 변방에 마법사에 대한 괴담 하나가 추가될 터였다.
이윽고 미구엘이 이성이 좀 돌아온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든 생각인데. 저런 검문소를 한둘은 더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소."
"별수 없지. 그래도 그러고 나면, 우리 앞을 막으려는 병사들은 없어질 거다. 물론…."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도 쫓아오는 놈들과의 싸움은, 절대 피할 수 없겠지만."
"시부럴… 벌써 코에서 쇠 냄새가 나는 것 같네."
미구엘이 중얼댔다.
이안은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슬슬 차라리 빨리 죄다 몰려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라.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말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
"그래서, 이 보고서의 내용들이 다 사실이다?"
책상 앞에 앉은 랜디스 백작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앞에선 기사, 제이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초소가 파묻히고 불바다가 됐습니다. 엄청난 마법사라고 다들 벌벌 떨더군요. 게다가 그자들이 탄 마차가 상당히 빨랐답니다. 앞을 막는 건 자살 행위고 뒤를 쫓을 수도 없으니, 철수하게 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겁 많은 놈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 보고서 대로면 엄청난 마법사인 것 같던데.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진 모르지만, 나한테 경고를 보낸 것 같단 말이야. 아직까진 자비를 베풀고 있지만, 앞을 계속 막으면 다 죽이겠다고 말이지."
"그럼, 병사들을 물릴까요?"
"그래. 계속 내보냈다간 나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테니까."
물론, 그 건방진 놈들을 그냥 보내겠단 뜻은 아니었다.
랜디스 백작이 넌지시 덧붙였다.
"그자는, 기다리고 있나?"
"물론입니다."
"들어오라 하게."
제이미 경이 문을 열고 손짓했다.
곧 건장한 체구의 북부인이 걸어 들어왔다.
때가 반질반질한 갑옷과 검집.
이 하이람시에서 가장 실력 있는 용병이자, 우베 용병단의 우두머리인 우베였다.
"용병들의 분위기는 어떤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백작이 물었다.
우베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들 이를 갈고 있습니다. 놈들 손에 죽은 동료가 꽤 있어서요. 거기다 나슬란에서 넘어온 놈들이 엄청난 속도로 따라가고 있단 얘기까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 남의 영지를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그 빌어먹을 제국 놈들과 아겔 란 촌놈들. 나도 거슬리던 참일세."
백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그놈들을 저지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속 좁은 놈들에게 한마디라도 했다간, 영지로 물건을 공급하지 않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놈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싶단 말이지. 영애의 몸값을 깎아 달라고 애원하는 꼴을 볼 수 있으면 더 좋고. 아마 폐하께서도 기꺼워하시겠지."
납치범들은 어느새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끼치고 있었다.
아겔 란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와중이기 때문이다.
그 소녀를 이쪽에서 먼저 손에 넣는다면, 몸값은 물론이고 국왕 폐하의 총애까지 받을 수 있으리라.
"맡겨만 주십시오. 말 잘 타고 실력 있는 놈들로 서른은 추려 뒀습니다."
우베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납치범들을 잡아 족치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부하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겔 란의 기사들을 따라 건너온 옆 동네 용병단 놈들 때문이었다.
나슬란 영주의 총애를 받으며 덩치를 불린 놈들은, 그의 용병단과 알게 모르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마 이번 일을 성공시키는 쪽이, 벨 론데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리라.
"잘됐군. 본론으로 넘어가지."
백작이 영지의 지도를 펼쳤다.
거기에는 납치범 일당의 이동 경로와, 나슬란에서 넘어온 추적자들의 경로가 꼼꼼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납치범 놈들은 버려진 땅으로 가고 있는 것 같더군."
"...!"
"자살이라도 하려 한단 말씀이십니까?"
제이미는 물론 우베도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그 마법사를 믿고 그러는 거겠지. 마법사에 검의 달인이면, 그 저주받은 땅을 돌파해 북부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늘이 돕는다면 말이죠."
제이미가 읊조렸다.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믿기 힘들었네만. 그게 아니면 이 동선을 설명할 방법이 없더군. 우리에게 다행인 건, 놈들이 빙 돌아가고 있다는 걸세."
백작이 손가락으로 하이람시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직선을 그렸다.
"우리가 앞질러 가서 놈들을 기다릴 수 있어."
국경 너머의 버려진 땅으로 이어지는 강가. 계곡 끄트머리.
"가능하다면 놈들이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잡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지휘는 제이미 경에게 맡길 걸세. 대기하고 있게나."
고개를 끄덕인 우베가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자, 백작이 제이미 경을 바라보았다.
"기병 스물을 붙여 주지. 희생은 되도록 저쪽에서 나오면 좋겠군."
우베 용병단은 유용하지만, 동시에 거슬리는 자들이었다.
갈수록 덩치가 커지면서,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르는 상태가 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그 숫자를 조금 줄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우베가 죽으면 더 좋고.
"만약 납치범들이 끝내 버려진 땅으로 넘어간다면…."
지도를 툭툭 두드린 백작이 덧붙였다.
"해가 지기 전에는 기병들을 이끌고 빠져나오도록 하게."
"용병단은, 남겨 둘까요?"
"저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걸세. 자존심이 걸렸으니까. 권유해 보고, 통하지 않으면 그냥 둬. 아마 천칭 상단 놈들과 촌놈들도 포기하지 않을 테니, 그쯤 되면 다들 죽은 목숨이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제이미 경이 몸을 돌렸다.
홀로 남은 백작이,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길어야 사흘이면, 이 모든 소란의 결과를 알 수 있게 되리라.
"돈과 자존심을 다 얻거나… 다 죽겠군. 상관없지.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납치범들이 살아서 도주하는 결말은,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060화
산기슭 한복판.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을 이동하던 짐 마차 앞에, 마침내 산의 반대편 얼굴이 펼쳐졌다.
"…그래. 다행히 보이긴 하는군."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던 미구엘이 손을 들었다.
굽이지고 완만하게 이어진 계곡들과 능선 너머.
산기슭에 가려진 창백한 푸른 빛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저 강이 국경이오. 이 길을 따라 쭉 돌아 내려가서 저길 건너면… 어라."
시선을 옮기며 말하던 미구엘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경치를 내려다보던 루시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저 너머부터가 버려진 땅이긴 한데. 내 기억이랑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수염 난 볼을 긁적인 미구엘이 덧붙였다.
"내 기억에는 강가를 따라 길이 있고, 그 옆으론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단 말이지. 숲은 그 황무지 너머에나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강 건너에 바로 숲이 보이네."
"...."
루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강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희끗희끗한 땅과 나무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무들이… 자란 거 아닐까요?"
"고작해야 10년 정도 만에?"
"버림받은 땅이라며."
이안이 툭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게다가 저건 내가 보기엔…."
읊조리는 그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보기엔, 뭐요?"
"…아니, 너희가 알아서 좋을 거 없을 것 같군."
이내 시선을 거둔 이안이 등받이에 머릴 기댔다.
한숨 쉰 미구엘이 이내 읊조렸다.
"하긴, 뭐. 모르는 게 약이오. 여기까지 온 마당에, 불길하다고 돌아갈 것도 아니고."
루시는 그런 미구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워낙 험악한 인상에다 수염이 많아서 티가 나지 않을 뿐, 처음에 비해 많이 야위고 푸석해진 얼굴.
한 번도 내뱉지는 않았으나, 루시는 그가 지칠 대로 지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엔 별반 달라진 게 없었지만, 항상 앞장서 길을 헤쳐 온 그가 지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앉고 눕는 것밖에 하지 않는 그녀조차 힘든데, 이들은 오죽할까.
'결국은, 다 나 때문이야.'
루시는 또다시 같은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저 짐일 뿐이다.
그 사실이 점점 더 그녀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리고 약하다는 건 결코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이안과 미구엘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더욱,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염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말이 될 뿐일 테니까.
"...."
그래서 루시는 그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불덩이는커녕 불똥도 튀지 않는 손아귀.
그 사실이 야속함을 넘어,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하고 말 거야. 할 수 있어.'
이를 악문 루시가 다시 온 정신을 집중하는 사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다만."
등받이에 뒤통수를 기댄 채로, 이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가 낙오하는 순간이 있더라도, 멈추지 말고 달려라."
"…갑자기 또 뭔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시오?"
미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느낌이 안 좋아. 요 며칠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 보통 이럴 땐, 큰 게 오더라고."
"형씨 제발 좀…. 하아…."
미구엘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재수 옴 붙을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따라오는 놈들도 이제 우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 나만 없으면 루시를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놈도 분명히 있겠지."
"...."
"그러니까 뭔 일이 생겨서 내가 떨어져 나가도, 멈추지 말고 달려라. 만약 마차가 박살 나더라도…."
이안이 옆에 놓인 배낭을 들어, 미구엘에게 휙 넘겼다.
"루시를 안고 말을 타고 튀어. 이 안에 든 거면 며칠은 버틸 거다."
그제야 얼마 전에 그가 준비한 배낭의 용도를 알게 된 미구엘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럼… 형씨는?"
"죽을 생각으로 하는 말 아니니까, 그따위 목소리 내지 마라."
"아, 그런 거였소?"
"난 상황을 마무리하고 따라갈 거다. 그러니 어떻게든 도망쳐. 그리고 정 목숨이 위험해지면… 부츠에 넣고 다니는 그걸 쓰고."
"...!"
순간 숨을 멈췄던 미구엘이, 이윽고 내뱉었다.
"알고 계셨소?"
"무슨 일이 생기면 발목부터 더듬대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
코웃음 친 이안이 말을 이었다.
"어떤 놈들이건, 루시까지 상하게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넌 아니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오면 그걸 쓰고, 알아서 화로의 사원까지 찾아와."
"그럼, 루시는…?"
"내가 되찾아 오면 돼. 그런 의미에서 네가 오래 튈수록 내 일이 편해지겠지. 안 잡히면 더 좋고."
"...."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얘기하는 거다.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어."
미구엘이 피식, 체념 섞인 웃음을 흘렸다.
"형씨가 그렇게 말하면, 꼭 그런 일이 일어나던데 말이오."
"그러니까 더더욱 명심해. 아무도 죽지 않을 방법이니까."
"대신… 루시가 좀 괴로울 거요."
"그 정돈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 거다. 보기보다 강한 녀석이야."
최악의 상황에선, 저마다 조금씩은 희생해야 하는 법.
일견 냉정해 보이지만 루시에 대한 믿음이 깔린 이안의 말에, 미구엘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잠깐의 적막.
적막을 깨뜨린 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륵-
"...!"
루시의 손아귀에서 작은 불길이 피어오른 것이다.
루시의 눈이 커졌다.
이안과 미구엘도, 동시에 그녀의 손아귀로 시선을 돌렸다.
"해… 해냈다…! 해냈어요…!"
눈동자의 떨림을 숨기지 못한 채, 루시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뭐, 당연히 해낼 줄 알아서 놀랍진 않다만. 축하한다, 인석아."
미구엘이 말과 달리 헤벌쭉 웃음 짓는 가운데, 이안이 턱을 까딱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
"어쩌다 보니… 됐어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났는데, 갑자기 될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푸스스-
불길이 사그라든 건 루시가 대답한 직후였다.
허망하게 손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이안이 웃음 지었다.
"아무래도, 네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 같은데."
"감… 정이요?"
"추측일 뿐이야. 아직은 불안정하니까. 어지럽진 않고?"
"네. 저번엔 그랬었는데…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호오…."
이안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사실, 그는 루시에게서 전혀 마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불길을 일으키고 있는 도중에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마력이 맺혀 있지 않았다.
'대기 중의 마력을 곧바로 끌어다가 연소시키는 건가.'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를 알 수 없어서 더더욱.
…이래서 원소 친화력이나 마력 혈맥 같은 특성을 찍었어야 했던 거군.
생각하며 루시의 머리를 헝클이던 이안의 손길이, 이윽고 멈췄다.
마차 뒤. 얕게 이어진 계곡을 돌아본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어쩐지, 지금 말해 놓고 싶더라니."
이런 의미에선, 육감도 쓸모 있는 특성이라고 해야 할까.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설마."
"그래. 마차 속도를 올려라, 미구엘. 마석도 미리 준비해 놓고."
"그, 마석 여분은 이제 한 번 더 쓸 분량밖에 없소."
"그거면 충분해. 길어야 한나절이면 판가름이 날 테니까."
내뱉은 이안이 몸을 일으켰다.
저만치의 능선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일련의 기수들이,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
"낙마하지 않게 조심들 해라! 다 와서 자빠지면 그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으니까!"
"거, 기사 나리들, 길 트쇼!"
마흔이 넘는 기수들이 맹렬한 속도로 멀어졌다.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샬롯의 엉덩이가 안장 위에서 들썩였다.
돌진을 시작한 건 아겔 란의 기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용병들 뿐.
그녀를 비롯한 천칭 상단 무리는, 아직 하비에르의 마차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
혀를 날름댄 샬롯이 올레그와 하비에르를 돌아보았다.
하비에르의 눈빛은 고요했다.
추적하는 동안에는 그토록 열성적이었건만. 막상 일이 시작된 지금은 오히려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또한 상인 특유의 습관이리라.
"카일과 케네스를 죽인 자들이라는 걸 잊지 말게. 흥분해서 앞장서지 말고, 사냥개들을 이용해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해. 되도록이면 더 이상의 손실은 보고 싶지 않군."
"…예."
"알겠습니다."
샬롯과 올레그가 대답했다.
"강 너머까지 가지도 않았으면 좋겠군. 물론 난 저 저주받은 땅엔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을 걸세."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 말고 이쪽에서 기다리십시오."
태연하게 내뱉은 올레그가 샬롯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덧붙였다.
"목표물은 저희가 반드시 되찾아 올 겁니다."
"가능하다면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게."
기수들을 쫓던 하비에르의 시선이 이윽고 멈췄다.
그들이 마차를 거의 따라잡았다.
"곧 시작되겠군. 합류하게."
샬롯이 기다렸다는 듯 고삐를 쥐어 들었다.
하비에르가 덧붙인 건 그때였다.
"샬롯. 우리 목표가 무엇인지, 잊지 말거라."
"...."
당신의 목표겠지.
생각하며 고개만 까딱인 샬롯이 그대로 달려나갔다.
호위병들의 절반이 그녀와 올레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올레그."
하비에르의 마차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샬롯이 입을 열었다.
올레그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검의 달인?"
"그래. 놈은 내 거야. 그러니까 계집애는 네가 챙겨라."
"나야 상관없지. 계획은 있고?"
"상황을 봐서, 내가 놈을 낚아챌 거다. 그전까진 너도 나서지 마. 그 이후론, 알아서 하고."
"단주가 싫어하실 텐데."
"좇까라 그래. 애초에, 난 나보다 약한 인간의 말은 듣지 않아."
"그래, 그래. 넌 너보다 강한 돈의 말을 듣지."
샬롯이 으르렁댔다.
웃음을 터뜨린 올레그가 보란 듯 간격을 벌렸다.
"사냥개들이 마차를 물어뜯게 거리 잘 유지해! 상단주의 명령을 잊지 마라!"
부하들이 그들을 앞질러 달려갔다.
올레그를 노려보던 샬롯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인간들이 자신을 이해하리란 기대는 한 적도 없었다.
그녀가 하비에르의 역겨운 속내를 알면서도 그의 곁을 지키는 건, 물론 돈 때문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야성을 마음껏 분출하고도 뒤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그에 못지않게 큰 이유였다.
그녀의 본능은 언제나 사냥과 혈투를 원했다.
끝내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를 만나 목숨을 잃게 될지라도.
'…후회는 없지. 꼬리만 잃지 않는다면야.'
"마차로 붙어!"
"저놈부터 떨어뜨려!"
어느새 용병들의 외침이 가까워졌다.
샬롯은 흥분을 억누르며 마차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마차의 칸막이 위에 곡예하듯 올라선 검은 머리의 사내, 이안 호프를.
휙-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창대를 아무렇지도 않게 피한 그가, 오히려 손을 뻗어 창대를 움켜쥐었다.
"어, 어억…?!"
균형을 잃은 용병이 그의 손짓에 딸려 들어갔다.
이안이 창대를 놔버린 건 그 직후였다.
"으, 으아악-!"
낙마한 용병이 땅을 굴렀다.
그의 몸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콰직!
달리는 말에 짓밟혀 꿈틀대는 놈을 바라본 샬롯이 눈을 빛냈다.
'시작부터, 마음에 드는데?'
그사이 훌쩍 몸을 날린 이안이, 낙마한 용병의 말에 올라탔다.
"이아아아안-!"
누군가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번쩍이는 갑옷.
아겔 란의 기사였다.
"이 더러운 배신자! 우리가 네놈을 얼마나 믿었는데!"
그를 돌아본 이안의 얼굴에 조소가 번졌다.
그의 목소리가, 샬롯의 예민한 귀를 파고들었다.
"난 믿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이노오오옴-!"
기사가 달려들었다.
이안은 위태로워 보이는 자세로 그의 일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손에 쥔 검을 휘둘렀다.
결코 닿을 거리가 아니건만.
콰직-!
스쳐 지나간 기사의 몸이 크게 휘청댔다.
그의 갑옷 등 부분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마법…? 마법 무구…?'
샬롯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녀가 마차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이안을 관찰하는 건, 하비에르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전희였다.
맛있는 요리일수록, 그 맛을 확실히 음미할 수 있을 때까지 아껴 먹어야 했다.
피슉-
"으악...!"
"마차 앞으로 나가지 마라! 마부 놈이 쏘는 석궁, 장전이 빨라!"
샬롯은 마차 앞쪽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안에게 점점 더 빨려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직-!
'손속은 단호하고….'
"이런 미친, 죽어억…?!"
서걱-
'과감한 움직임도 마다하지 않는군. 무모해 보일 정도야.'
그녀는 이안과 그의 손에 죽어 나가는 용병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검의 달인은 절대 아니야. 하지만… 그래서 더 신기하군. 저놈은 대체 뭐지…?'
샬롯이 혀를 날름거렸다.
입안에 점점 더 군침이 돌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눈빛은 점점 더 섬뜩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안을 강자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적어도 이게 전부는 아닐 거야. 카일과 케네스가 당할 만한 뭔가를 숨기고 있겠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오로지 이안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서 기다리던 무리의 존재를 곧바로 눈치채지 못한 것은.
"…저것들은 또 뭐야."
문득 전방을 돌아본 이안이 읊조리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샬롯은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달려오는 수십 명의 기수들.
"길을 막아! 간격을 벌려라!"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의 외침이 들린 순간, 샬롯은 비로소 비죽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녀에겐 오히려 깜짝 선물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안의 진면목을, 더 빨리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061화
머릿수를 겨우 좀 줄여 놨더니.
이안은 달려오는 무리를 눈에 담으며 혀를 찼다.
저것들이 아니라도, 사실 상황은 보이는 것만큼 좋지는 않았다.
그가 과격하게 싸운 건, 단지 적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였을 뿐.
마상 전투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고, 낙마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도 여러 번 있었다.
소모품에 불과한 놈들을 상대하는 것임에도 그랬다.
제국의 기병들과 친위 기사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기만 했다.
그를 관찰하면서 힘이 빠지길 기다리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을 뿐, 그의 육감은 지금도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전에 만난 두 놈에 필적하는 실력자들도 섞여 있는 것이리라.
적어도 그 수인은 확실히 있었다.
'이름이 샬롯이랬나.'
그녀는 처음 몇 분을 제외하곤 눈에 띄지조차 않았다.
이쪽에서 볼 수 없도록 위치를 옮겨 다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만 신경을 쏟을 수는 없었다.
저 검은 기병들은 개개인의 실력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숫자가 많고 방심하고 있지도 않았다.
물리적인 전투만으로 전부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아무리 능력치가 꽤 높고 근접전에 더 도움 되는 특성을 가졌다 해도, 본질은 마법사인 그의 물리 전투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들이 마차를 전복시키려 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만큼, 마차가 부서지면 루시가 다칠 수도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시간도 그들의 편이었다.
버려진 땅이 가까워질수록 조급해지는 건 저들일 테니까.
지켜보던 놈들도 계곡을 빠져나갈 때쯤엔 결국 이쪽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이안이 생각한 승부처는 그때였다.
저 불청객들이 나타나기 전까진.
"이런 시부럴...!"
석궁을 만지작대던 미구엘이 결국 고삐를 당겼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마법 걸린 마갑을 걸친 말들이라 해도, 저 한복판을 무작정 뚫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면에서 달려온 놈들은 마차가 가까워지자 계곡 좌우로 산개하면서 말머리를 반대로 돌렸다.
기마술이 능숙한 자들이었다.
뒤따르던 추적자들이 그렇듯, 기사와 용병이 뒤섞인 무리.
'하이람 놈들이군. 마법사가 있단 걸 알 텐데. 대비책은… 아, 그래. 석궁이군.'
이안은 마차 측면에 바짝 붙으며 생각했다.
제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도 마법을 완성 시키지 못하면 무력하다.
번갈아 쏴 대는 석궁은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나 한텐 별 의미 없겠지만.'
후방의 추적자들은 불청객들의 등장에 간격을 벌렸다.
자신들의 영역을 확실히 확보하려는 의도.
곧 양측이 시선을 교환했다.
흉흉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질적인 측면에선 제국인들이 섞인 후방이 앞서겠지만.
이안이 여럿을 죽인 덕에,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새로 합류한 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우린 잡아 놓은 물고기 취급이군.'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속도가 느려지긴 했으나 어쨌든 마차는 계속 달리고 있었으니까.
단숨에 포위망을 뚫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 교착 상태를 앞장서 깨뜨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하이람의 기사이자 영주 권한 대행인 제이미라 하오!"
선두 쪽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이미가 뒤를 돌아본 채 소리치고 있었다.
"당신들은 허가받지 않은 교전을 벌이고 있소! 그 마차에 탄 자들은 영지의 자산을 여럿 불태운 범죄자들이니, 우리가 연행해야겠소! 물러나시오!"
"저들은 아겔 란에서부터 도망쳐 온 자들이오! 먼저 추적을 시작한 것도 우리이며, 아겔 란의 일이니 외부인은 빠지시오!"
대답은 좌측에서 튀어나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본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친위기사단의 조나단. 항상 그에게 열렬한 동경의 눈빛을 보내던 자였다.
물론 다시 만난 지금은, 적의를 넘어 살의 가득한 눈빛만 보냈다.
"여긴 벨 론데요! 이건 무력 침범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명심하시오! 그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 알고 계시리라 믿겠소!"
제이미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껄껄대는 웃음소리가 이번에는 우측에서 이어졌다.
거대한 체구를 가진 천칭 상단의 호위병, 올레그였다.
"우린 제국의 라르무트 전하의 명령으로 이곳에 있소! 제국의 뜻에 반하는 것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일인지도, 잘 알고 계시겠지?"
"당신들이 천칭 상단의 고용인들임을 이미 알고 있소! 라르무트의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사실은 증명된 바 없으니, 절차를 거치시오!"
언쟁이 점점 격해졌다.
이안이 마부석 옆으로 다가갔다.
"아주 지랄들이 났네. 시부럴…."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대던 미구엘이 그를 돌아보았다.
"이러다 지들끼리 싸우겠소."
"당장은 안 그럴 거다. 우릴 붙잡은 뒤에나 그러면 모를까."
이안이 속삭이듯 대꾸했다.
아무리 이 세계에 멍청한 인간들이 많다 해도, 이런 순간에까지 서로에게 칼을 겨눌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터였다.
원수의 원수는 친구라는 말이 있듯, 이 말싸움의 끝에는 적당한 합의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에겐 충분히 의미 있는 정보였다.
그는 작은 균열도 커다랗게 만들 방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염병… 그럼 여기가 정말 내 무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신 놓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계획이라도 있으시오?"
"대충은. 넌 강을 건널 생각만 해라. 만약의 경우엔 마차를 버리는 것도 항상 염두에 두고."
이안이 마부석 뒤에 고개를 내밀고 있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턱짓에, 미구엘이 옆에 놓여 있던 배낭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렇게 되면, 넌 미구엘과 같은 말을 타라. 루시."
"네."
"강을 건너고 나선? 보아하니 끝까지 따라올 것 같소만."
미구엘이 덧붙였다.
시선을 돌린 이안이 내뱉었다.
"그건 그때 다시 얘기해. 준비해라."
미구엘의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고삐를 팔뚝에 걸친 그가 황급히 석궁을 움켜쥐었다.
양측의 대화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선은, 협력하에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것으로 결정하겠소!"
제이미가 화답하듯 외쳤다.
"협력의 증표로 귀하들에게도 중요한 정보를 하나 전달하겠소!"
"말씀하시오!"
"저들 무리에 마법사가 있소!"
"마법사라고…? 그럴 리가!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방심을 유도한 건가? 벨 론데에서 추가로 합류한 공범이라도-"
추적자들이 술렁댔다.
좋아. 그게 나라는 건 안 들켰군.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검을 고쳐 쥐었다.
슬쩍 고개를 숙인 그가 바람 칼날을 시전하는 사이.
"입씨름 끝나셨다! 뭐 하냐 새끼들아! 덮쳐!"
용병단장인 우베가 소리쳤다.
눈싸움을 벌이던 하이람 용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선회했다.
나슬란의 용병들도 이에 질세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의 목표는 마차라는 점이었다.
이안을 하이람의 용병들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일 터.
"시부럴...!"
미구엘이 고삐를 후려쳤다.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지고, 이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용병들을 눈에 담았다.
신경이 팽팽하게 곤두서면서,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솟았다.
"흐럇-!"
선두의 용병이 도끼를 내지른 건 그때였다.
이안의 몸이 뒤로 눕듯 꺾였다.
그는 얼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도끼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용병의 목덜미를 훑을 뿐.
늘어져 있던 팔이 채찍처럼 뻗어 나갔다.
서걱-
검신을 타고 예리하게 뿜어진 바람이 용병의 목을 갈랐다.
놈의 머리가 그대로 앞으로 날아가고, 목에서 피가 치솟았다.
"미친…?!"
뒤따르던 용병들이 경악성을 토해내며 달려들었다.
그들의 눈에는 두 기수가 교차하자마자 한쪽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이안의 눈동자가 좌우에서 달려오는 둘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몸이 인식과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왼쪽에서 떨어지는 칼을 검날을 비스듬하게 들어 흘려내면서, 동시에 안장에서 떨어지듯 몸을 틀어 오른쪽에서 찔러오는 창을 피했다.
뒤이어 다시 안장 위로 올라오면서 지나치는 말의 옆구리를 예리하게 긁어냈다.
키히히잉!
옆구리가 터진 말이 그대로 나뒹굴면서 기수를 땅에 처박는 사이.
이안의 시선은 이미 창 든 용병의 뒤통수로 향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따끔거리더니, 망령화한 늪지의 원한이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둘을 죽였지만 쉴 틈은 없었다.
고삐를 당기며 말머리를 돌린 이안이, 안장 위에 발을 얹었다.
관성을 이기지 못한 말이 비틀대며 미끄러지고, 뒤이어 또 다른 용병이 가까워졌지만.
이안의 시선은 마차에 올라타려 하는 놈들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용병이 검을 후려치려는 찰나, 이안이 안장에서 그대로 뛰어올랐다.
바람이 그를 떠밀고, 몇 미터나 떨어져 있던 마차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으앗?!"
마차에 막 매달린 용병이 그를 돌아보며 눈을 치켜떴다.
팔을 치켜들며 검을 역수로 쥔 이안이, 놈의 등에 그대로 검을 찔러넣었다.
콰직!
"커헉…!"
용병과 칸막이를 동시에 꿰뚫은 이안이, 검 자루를 지지대 삼아 손을 뻗어 칸막이 위를 움켜쥐었다.
위로 올라서며 검을 뽑아 들자, 바들대던 용병이 그대로 떨어졌다.
피슉-!
볼트가 이안의 귓가를 스쳤다.
"쏘지 마라! 활을 쏘는 놈은 내 손에 뒈진다!"
올레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대신 말해 줘서 고맙군.
생각하며 칸막이 위로 올라선 이안이, 반대편에서 마차 안으로 다리를 디밀고 있는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런 시발…!"
다급하게 검을 막으며 휘청댄 놈이, 마차와 나란히 달리던 자신의 말 안장으로 간신히 뛰어내렸다.
이안은 놈에게 다시 한번 늪지의 원한을 보냈다.
원한이 처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피를 빨고는 놈에게로 향했다.
"조심해요!"
루시가 비명을 지른 건 그때였다.
마차 꽁무니에 올라탄 놈이 이안의 뒤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퍼엉-
"마법…?!"
놈의 얼굴에서 불꽃이 튀었다.
폭발이란 단어가 무색한 반짝임이었지만, 놈을 순간 당황 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콰직-!
이안이 검을 휘두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머리가 반쯤 썰린 용병이 목석처럼 뒤로 넘어졌다.
"계집애가 마법사다…!"
"꼬마가 마법을 쓴다! 다들 조심해!"
용병들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안이 손을 뻗은 채로 굳어 있는 루시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용병들의 외침 그대로였다.
방금의 불길은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다.
놀람을 추스른 루시도 마주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이런 염병할…!"
미구엘의 탄식이 이어졌다.
어느새 옆으로 따라붙은 용병 둘이 말을 향해 창을 뻗고 있었다.
마갑의 마석들이 번쩍인 건 그 직후였다.
푸확-!
이어진 마법은 이안에게도 익숙한 방어 마법이었다.
휘몰아치는 방벽.
"으억?!"
자세가 흐트러진 용병들이 당황할 찰나, 두 발의 볼트가 연달아 놈들의 어깨와 가슴을 꿰뚫었다.
이어지는 비명.
"루 솔라여… 시부럴…!"
미구엘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석궁을 재장전했다.
"...!"
그 모습을 끝으로 다시 마차 옆면을 돌아본 이안이 몸을 날렸다.
한번 마차로 달라붙기 시작한 용병들은, 말 그대로 온몸을 던져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두 용병단 간의 자존심 싸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안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몸을 움직여 달라붙는 놈들을 쳐내고, 쿨 타임이 돈 늪지의 원한을 날려 보낼 뿐.
마차 외벽이 붉게 물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차로 다가가는 용병들이 겁에 질렸다.
이안의 움직임은 화려하거나 세련되긴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더 투박하고 거칠어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원초적인 두려움을 선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세만큼은 엄청나군…."
"소문이 잘못됐군. 저만하면 광전사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지켜보던 천칭 상단의 호위병들이 탄식을 흘릴 정도였다.
"하아… 하아…."
정작 이안의 눈빛은 침착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싸우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착실히 혼란의 씨앗을 흩뿌리고 있었다.
"뭐, 뭐야?! 왜 날 노려봐?!"
그리고 마침내, 그 씨앗들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우, 우와아아악-!"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몇몇이, 괴성을 지르며 같은 용병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늪지의 원한이 심은 저주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었지만, 용병들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하이람의 용병과 나슬란의 용병들이 뒤엉켜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순식간에 극단으로 치달았다.
"시벌, 내 이럴 줄 알았지! 뒤통수나 치는 비겁자 새끼들아!"
우베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나슬란의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할 소릴…! 하이람 놈들이 뒤통수를 쳤다! 존을 죽였어!"
용병들끼리 칼부림이 시작됐다.
이미 동료들의 죽음과 칼부림으로 흥분한 터라, 더더욱 서로를 공격하는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아니, 이게 대체 뭔…."
미구엘의 얼굴에 당혹이 번졌다.
마차에 달라붙은 마지막 용병을 던져 버린 이안이 소리친 건 그때였다.
"속도 올려! 당장!"
"아, 알았수…!"
미구엘이 고삐를 후려쳤다.
말들이 발작하듯 내달렸다.
마갑에 박힌 마석들이 번쩍였다.
마차가 순식간에 용병 무리들과 거리를 벌렸다.
"제국에 가면, 꼭 가장 좋은 마갑부터 구해야겠군."
읊조리며, 이안이 마부석에 올라섰다.
앞을 막고 달리던 하이람 기병들이 가까워졌다.
당황이 역력한 얼굴들.
그들 역시 황급히 고삐를 후려쳤지만, 마법의 도움을 받는 전마들 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검을 움켜쥔 이안이,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것처럼 자세를 낮췄다.
"히이이익…!"
마차 바로 앞, 뒤를 힐끔대는 기병들이 숨을 삼켰다.
피범벅이 된 채 검을 움켜쥔 이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가 말과 마차 사이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벌인 짓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이들 중에 아무도 없었다.
"으아아아-!"
이안이 뛰어오르는 것보다, 기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물러나는 게 더 빨랐다.
마차가 기병들을 앞질렀다.
"보, 보인다…!"
비로소 미구엘의 눈이 커졌다.
앞을 가로막은 자들이 사라지면서, 저 멀리 펼쳐진 강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혈투를 벌이느라 계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그였다.
"계속 달려라. 이제 시작이니까."
그러나 숨을 고르는 이안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화색이 돌던 미구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짐칸에 한 발을 걸친 채 뒤를 응시하던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놈들이 온다."
하이람 기병들 너머.
검은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062화
"이런, 시부럴…!"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본 미구엘이 탄식했다.
그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형씨, 급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거, 언제 쓰실 거요…? 아무리 형씨라도 칼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소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이안이 기병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덧붙였다.
"강까진 얼마나 걸리지?"
"십 분…? 그보다 조금 더 빠를 수도 있소."
"어떻게든 다리까지 가라."
"그다음은?"
"…죽여야겠지."
어떻게? 거기까진 이안도 확실히 생각하지 않았다.
세세한 계획까지 세우기엔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변수도 많았다.
다만 지금 마법을 써서 좋을 게 없다는 건 확실했다.
여기서 추적자들이 도망치면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고, 다음번엔 마법사를 상대할 준비까지 철저하게 해 올 게 분명했다.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이 천칭 상단에도 알려지리란 건 덤이었다.
제국에 발을 들이지도 않은 시점에, 제국의 거대 상단에 정체를 노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마법은 강 건너에서.
그리고 그가 마법사라는 걸 아는 자들은 전부 죽여야 했다.
"알겠소. 그럼 어떻게든… 이런."
고삐를 후려치던 미구엘이 인상을 구겼다.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마갑의 마석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하필 지금… 시간 좀 끌어 주시오."
내뱉은 미구엘이 달리는 말의 등 위로 위태롭게 올라탔다.
마석들은 하나하나 손수 갈아 끼워 줘야 했다.
"말처럼 쉽진 않은 일인데…."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마차 뒤로 걸음을 옮겼다.
로브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박혀 있던 루시가 그를 바라보았다.
뭘 미안해하고 난리야.
심드렁하게 피식댄 이안이 후면 맨 위 칸막이를 검 무게추로 후려쳤다.
많은 이들이 오르내리며 덜렁대던 판자가 떨어져 나갔다.
저번에 증축한 판자.
그래도 아직 밖에선 미구엘의 뒤통수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낮아진 칸막이 위로 훌쩍 올라섰다.
발을 굴러 내구성을 확인한 그는, 이윽고 하이람 기병들을 다 따라잡은 상단 기병들을 바라보았다.
검은 갑옷과 투구. 마갑.
전에 만났던 놈들과의 차이점이 비로소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판금과 사슬을 정교하게 이어붙인 건 같았지만, 어디에도 마석이 박혀 있지는 않았다.
'그래. 아무리 제국의 거대 상단이라도, 모든 경호병에게 마법 무구를 제공할 순 없겠지.'
인공적으로 제작한 마법 무구는, 당연히 엄청나게 비쌌다.
갑옷에 마석 박힌 놈들만 조심해야겠군.
생각하며, 이안은 보란 듯 단죄의 검을 고쳐 쥐었다.
단죄의 검은 피와 기름으로 번들대고 있었지만, 여전히 예리했다.
"...?"
그때, 기병들 사이로 누군가 앞서 나왔다.
커다란 덩치와 민머리.
한쪽 눈 아래로 고대어 문신이 새겨진 자였다.
갑옷과 마갑에 박힌 마석과, 등에 멘 커다란 양날 도끼가 반짝였다.
이안은 등 뒤로 왼손을 넘겨, 아공간에서 투척용 단검을 네 자루 꺼내 들었다.
세 자루는 가슴 밴드의 빈 단검집에 끼워 넣은 그가, 마지막 한 자루는 역수로 쥔 채 놈을 바라보았다.
"거, 눈빛 한번 살벌하군."
웃음 지으며 말한 대머리가 턱을 까딱이며 덧붙였다.
"난 올레그다. 네가 죽인 카일과 케네스의 동료지."
"동료들 뒤를 따라가고 싶어서 왔나?"
이안이 내뱉었다.
딱히 말을 섞고 싶진 않았지만, 시간을 끌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마차 속도가 줄었으니, 저놈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럴 생각은 없다. 딱히 죽은 놈들의 복수를 할 생각도 없고. 널 죽이는 건 내 역할도 아니야. 다만…."
그가 허리춤에서 기역 자로 꺾인 쇳덩이를 꺼냈다.
표면에 검게 음각된 문양들이 설핏 드러났다.
…저거, 부메랑인가?
이안이 인상을 찌푸린 그때.
"나도 맛은 좀 보고 싶긴 하군."
동시에 그가 부메랑을 쥔 손목을 가볍게 털었다.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부우웅-!
다음 순간, 은색 원반처럼 회전하는 부메랑이 이안의 코앞에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
까앙-!
이안이 부메랑을 발작적으로 쳐냈다. 하필, 휘몰아치는 방벽도 펼쳐 놓지 않은 채였다.
튕겨져 나간 부메랑이 그대로 허공을 선회해, 올레그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마법 부메랑이라니, 시발.
"으하! 인사치곤 나쁘지 않지?"
웃음 지은 올레그가 다시 한번 손을 털었다.
이번에 노린 건 그가 아니었다.
"...!"
부메랑이 마차 옆을 곡선을 그리며 지나치는 것을 본 이안의 눈에 핏발이 돋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채앵-!
그가 내던진 단검이 부메랑과 부딪혔다. 궤적이 꺾인 부메랑이 땅에 박혔다.
'정말 맞을 줄이야.'
이안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올레그의 탄성이 이어졌다.
"저걸 맞추다니…? 으하! 방금 네가 금화 몇 개짜릴 날려 버린 건지 모를 거다!"
순수한 감탄에 가까운 목소리.
거참 짜증 나는 새끼군.
혀를 차며 다시 앞을 바라본 이안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또 다른 기수가 맹렬한 속도로 올레그를 따라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털. 고양잇과의 무언가를 닮은 얼굴. 샬롯이었다.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올레그를 죽일 듯 노려본 그녀가, 이윽고 이안을 올려다봤다.
주황색 눈동자가 슬쩍 휘어진 것도 잠시.
"...!"
샬롯이 안장에서 솟구쳤다.
하늘로 치켜든 양손에, 어느새 송곳니 같은 형태의 쌍검이 쥐어져 있었다.
'이런 미친…?'
이안이 검과 단검을 교차해 내민 것과, 샬롯이 그를 덮친 건 거의 동시였다.
콰장창-
그녀에게 짓눌린 이안이 마부석 뒤까지 밀려 나가 처박혔다.
교차한 검이 수인의 양팔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뭔 힘이 이렇게….'
이안은 이를 악무는 사이.
고요하게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샬롯이 혀를 날름댔다.
"미리 말하지. 넌 내 거다."
"…하."
또 다른 미친년이군.
이안의 얼굴에 헛웃음이 번진 순간.
퍼엉-!
작은 폭발과 함께 샬롯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 틈에 이안이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묵직한 무게감.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고 뒤로 물러난 샬롯이, 구석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너한텐 관심 없으니까, 찌그러져 있어라. 꼬마."
"있어야 할걸요?"
내뱉은 루시가 로브 아래에서 단검을 쥔 손을 들었다.
단검은 샬롯을 겨누지 않았다.
"당장 내리지 않으면, 자결할 거거든요."
자신의 목 앞에 단검을 댄 채, 루시가 내뱉었다.
"뭐라고?! 너 제정신이냐? 그거 당장 안 내려?"
말 위에서 낑낑대던 미구엘이 경악한 외침을 토해냈다.
샬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한 번에 성공할 자신 있어요."
루시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녹색 눈.
"…이래서 라르무트에서 탐을 내는 건가."
읊조린 샬롯이 이안을 바라보았다.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네 고용주가 죽겠다는데."
"샬롯! 당장 내려와!"
올레그의 외침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난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편이라서. 걱정 마라, 루시.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줄 테니."
루시를 돌아본 그가 덧붙였다.
"천칭 상단은 물론이고, 라르무트도 전부 죽여 주마."
"하…!"
샬롯이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르릉대는 숨소리를 낸 그녀가, 언제 웃었냐는 듯 싸늘해진 얼굴로 내뱉었다.
"두 번은 안 통한다. 꼬마야. 또 방해하면 그땐 내 손으로 죽여 주지. 난 네년이 어떻게 되건, 관심도 없어. 지금은 그냥 산통이 깨져서 물러나는 거다. 그러니까…."
쏘아붙인 샬롯이 다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다음번엔 끝까지 싸우자. 이안."
"…원한다면."
뒤로 펄쩍 뛰어오르며 검을 회수한 샬롯이 칸막이 위에 착지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발톱 같은 칼날이 달린 꼬리 갑주가 흔들렸다.
이안을 잠시 바라본 샬롯이 마차 뒤로 훌쩍 뛰어내렸다.
'혼자만의 사냥이라도 즐기는 건가….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수인들은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이안은 헛웃음을 삼켰다.
수인은 게임에서도 아주 드문 존재들이었다.
수인 용병은 특히 그랬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능력치가 아주 높았고,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능력치 보너스를 받는 야성 특성까지 가지고 있었다.
복종하게만 만든다면 플레이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만드는 방법이 쉽지는 않았지만….
"…칼 내려라."
루시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내뱉었다.
목 앞에 계속 칼을 대고 있던 루시가 비로소 팔을 늘어뜨렸다.
"좋은 협박이었어. 잘했다."
"협박 아니었어요."
"알아. 그러니까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압수당하고 싶지 않으면."
싸늘하게 덧붙인 이안은, 재빨리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고는 칸막이 위로 올라섰다.
샬롯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슬금슬금 마차로 접근하던 검은 기병들이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올레그가 감탄하듯 말했다.
"대단하군. 샬롯이 첫 시도에 실패하는 건 별로 본 적이 없는데."
이안은 어깨만 으쓱였다.
마차의 속도가 다시 빨라진 건 그때였다.
멀어지는 마차 꽁무니로 재빨리 달려온 올레그가 소리쳤다.
"이봐. 너희는 어차피 실패할 거다. 내가 지금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것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지."
어깨를 으쓱인 그가 덧붙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희생은 좀 나오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되물었다.
올레그가 미소 지었다.
"피차 쓸데없는 피는 그만 보자는 얘기지. 항복해라. 대신 네가 받기로 한 보수의 두 배를 주지. 그리고 천칭 상단에서 일해라. 너 정도의 실력이면 단주도 좋아할 테니까."
덩치는 산만 해서. 속엔 너구리가 들어앉았군.
생각과 달리, 이안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하지만 보수의 두 배를 지불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하. 그게 얼마건 상단 입장에선 푼돈일 거다. 내가 장담하지."
"내가 받기로 한 보수는 돈이 아니거든."
"...?"
"난 목숨을 받기로 했다. 그 두 배라면 두 개의 목숨을 받아야 하는데. 아, 그래."
이안이 턱짓했다.
"너와 샬롯의 목숨을 준다면, 고려해 보지."
그 순간 올레그의 미소가 사납게 돌변했다.
"뒈지고 싶단 말을 어렵게 하는군. 호의를 이딴 식으로 갚다니."
"시간을 좀 벌어야 했거든."
덜컹, 그 순간 마차가 기울어지고, 이안이 마차 안으로 내려갔다.
"강가에 다 와서 말이야."
"...!"
마차가 좁다란 돌다리 위로 올라서는 가운데, 올레그가 황급히 속도를 줄였다.
강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다리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들 사이에서 일시적인 병목 현상이 일어났다.
"조금 더 거리를 벌려야겠군…."
읊조린 이안이, 이윽고 아공간에서 기다란 창을 꺼냈다.
케네스가 쓰던, 천칭의 미늘창.
비싼 물건이긴 했지만.
그가 쓰기엔 무겁고 각인도 되어 있지 않아서, 여러모로 계륵 같은 녀석이었다.
창대의 도끼날이나 내장된 마법도 물론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끝의 창날만 예리하게 돋아 있으면 충분했다.
기병들이 줄지어 다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둘씩 달릴 수도 있는 폭이었지만, 안전상의 이유 때문인지 일렬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잘될지 모르겠는데…."
중얼거리며 바람 칼날을 시전한 이안이, 투창 자세를 잡았다.
내뻗은 왼손으로 조준 지점을 가늠한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기병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창을 내던졌다.
쒸아악-!
창대에 실린 바람이 폭발하듯 회전했다.
퍼억-!
창대에 꿰뚫린 기병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면서 바로 뒤를 따르던 기병까지 같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심지어 둘 다, 천칭 상단의 기병이었다.
"…되네."
읊조린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감시를 부탁한다. 너무 가까워지면, 불러라. 충분해 보이지만."
"네…!"
루시가 재빨리 달려왔다.
이안은 비로소 마부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탓에 머릿속이 다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와중에도 다리와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다리였다.
아마도 고대 문명의 유산.
짙은 남색의 강물은 제법 깊이가 있어 보였다.
적어도 이 날씨에 맨몸이나 말을 타고 헤엄쳐 건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행하셨소. 하, 저승 문턱을 몇 번은 건넌 것 같네."
그가 기대앉자 미구엘이 내뱉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한고비 넘긴 것일 뿐, 추격을 따돌린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은 어떻게 이어지지?"
"저 숲 옆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지는 거요. 원래는 여기가 죄다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젠 나무에 가려져서 저 안쪽부턴 길이 보이지도 않는군."
"그래…."
이안은 강 건너의 숲을 바라보았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잿빛 나무들이 높고 듬성듬성하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시야를 가리기엔 그걸로도 충분해 보였다.
게다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이거, 전에 봤던 환영이랑 너무 비슷한데.'
바닥에 눈이 깔려 있지 않다는 것만 빼면, 사실상 똑같은 수준이었다.
물론 이런 황량한 침엽수림이 이곳에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연관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도, 저 숲엔 뭔가 도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불길한 감각이 전해졌으니까.
"…형씨도 지금,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 거요?"
미구엘이 불쑥 덧붙였다.
이안의 시선에, 그가 입맛을 다셨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형씨의 그 대비책이 있잖수. …지금이 또 써먹을 순간인 것 같은데."
"저 숲으로 들어가자고? 이걸 끌고 들어갈 수는 있고?"
"확실한 건 가 봐야 알겠지만. 어지간해선 가능할 거요. 대신 속도는 좀 줄겠지. 그 부분은 차라리 잘된 일이오. 이게 마지막 마석이니까. 어쨌든."
미구엘이 앞을 턱짓했다.
"딱 봐도 저주받은 숲이니, 저자들도 못 따라오지 않겠소?"
"글쎄… 그래 주면 좋겠지만."
전부 따라올 것 같은데.
턱을 어루만지며 읊조린 이안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악의 제안은 아니군. 오히려 싸우기엔 편해질 테니까."
그가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의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밤이 되기 전에 나올 수만 있다면 말이지."
"그야… 그렇겠소만. 그냥 길로 달리면, 결국엔 일이 더 복잡해질 거요."
"그럼 그렇게 해. 대신… 난 잠시 내려야 할 것 같군."
"내리신다고? 말이야 빼앗는다 치고, 어떻게 따라오시려고?"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안이 모를 리 없건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최대한 잡히지 마라. 다시 관도 쪽으로 나올 수 있게, 방향도 잃어버리지 말고."
"어… 형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때 마차가 다리를 건넜다.
강줄기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돌아가고, 이내 듬성듬성 솟은 나무들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공기가 무거워진 느낌이 들었다.
막상 앞에서 보자 영 내키지 않는지, 숲을 꺼림칙하게 바라보던 미구엘이 말했다.
"충분히 들어갈 수 있겠소."
"강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면 들어가라."
"…알겠소."
마차가 속도를 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대가 뒤따라 강을 건넜다.
그때 일행은 이미, 속도를 줄이고 말 머리를 돌리는 중이었다.
"하… 루 솔라여, 부디 굽어살피소서."
온 진심을 담아 읊조린 미구엘이, 어둑어둑한 숲을 향해 고삐를 내리쳤다.
추적대가 그 자리에 도착했을 때, 마차는 이미 숲의 그림자 저 너머로 흐릿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
"루 솔라 맙소사…. 저길 정말 들어가다니."
천칭 상단의 기병들이 숲을 따라 늘어선 가운데.
뒤늦게 도착한 제이미가 탄식했다.
"추적을 뿌리치자고 자살을 선택하다니."
잿빛 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진 숲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주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추적대의 숫자도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되찾는다. 진입해."
그때, 올레그가 숲으로 들어갔다.
상단의 기병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저런…."
제이미가 탄식하는 그때.
"돌아갈 자들은 돌아가라. 우리는 반드시 영애를 되찾아야 한다. 배신에 대한 복수 역시."
아겔 란의 친위 기사들 중 한 명이 용병들에게 내뱉고는 숲으로 들어섰다.
조나단. 직접 나슬란 용병들의 우두머리를 베어, 용병들끼리의 내분을 끝낸 자였다.
용병들의 피해는 양쪽 다 막심했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이대로 가면 우린 그냥 다 망하는 거라고…!"
"시발…. 가자! 가!"
아겔 란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슬란의 용병들이 욕설을 토해내며 달려나갔다.
"나리, 설마 이대로 돌아가시려는 거 아니시겠죠?"
우베가 제이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도 살기가 넘실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열 명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그에 비해, 제이미가 이끌고 온 기병들은 단 하나가 줄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이 칼받이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대로 돌아간다면, 용병 대장으로서의 입지가 무너질 터.
"...."
제이미가 선뜻 대답하지 않자, 우베가 인상을 구겼다.
"시발, 마음대로 하십시오! 우린 들어갈 겁니다!"
제이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귓가에 백작의 명령이 메아리쳤다.
그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그 결과, 그가 이끄는 기병이 추적자들 중에서 가장 많았고, 납치범들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지금까지 그랬듯, 저들끼리 머릿수를 줄이도록 추격을 이어간다면.
'…최후에 웃는 건 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속삭임처럼 귓가를 울렸다.
"나리, 돌아갈까요?"
"…아니."
눈을 뜬 제이미가 고삐를 쥐었다.
"우리도 들어간다."
추적대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전부 들어왔군.'
저 멀리 이어진 나무 위.
나뭇가지 위에 앉은 이안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달라질 거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마지막 남은 마석을 쥔 이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애석하게도, 난 이런 흉지에서 싸우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거든.'
#063화
숲은 부자연스럽게 어둡고 고요했다.
추적자들은 마차의 움직임을 쫓으면서도, 쉴 새 없이 주위를 경계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선 눈빛들.
샬롯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지금의 긴장감을 즐기고 있긴 했지만, 어쨌건 뭔가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 예감이 구체화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콰르르르-
그들로부터 멀지 않은 앞에,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은 것이다.
정확히는, 불의 장벽이었다.
키히이잉-!
눈부신 빛에 놀란 말들이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몇몇은 바닥을 구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자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저게 뭔…?"
"불? 불을 질렀다고?!"
다들 넘실대는 불길의 장막에 넋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주문쟁이 계집애의 짓이군! 이런 식으로 추적을 따돌리려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불을 지르다니. 다시 숲을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건가…?"
불의 장벽은 주위의 나무들을 마구 불태우고 있었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삐죽 솟은 나무들과 버석버석한 풀.
그제야 몇몇은, 이 숲이 불이 옮겨붙기에 딱 좋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우회해서 가면 돼. 다들 정신 똑바로-"
올레그가 말을 잇던 순간이었다.
콰르르르-
또 한 번 불길이 치솟았다.
이번엔 첫 장벽으로부터 비스듬한 측면이었다.
첫 장벽의 불길은 잦아들고 있었지만, 나무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금 저주를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소. 느낌이 좋지 않아. 지금이라도 추적을 포기하고 돌아갑시다."
"겁쟁이들! 나갈 놈들은 마음대로 해라! 우린 계속 갈 거니까!"
추적자들이 두 부류로 나뉜 가운데.
샬롯은 여전히 떨리는 눈으로 불의 장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놈이다…!'
그녀만이 저 불길을 만들어 낸 것이 이안이라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근거는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직관을 믿었다.
'마검사였다니…!'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
심지어 저런 마법을 펼칠 정도라면, 카일과 케네스가 당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샬롯이 이 숲에서 끝내 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을 쫓아야겠다고 내심 결정한 그 순간.
콰르르-
또다시 불기둥이 솟았다.
이번에는, 저 먼 후방이었다.
"아니…? 저런… 미친…?"
"저긴 우리가 왔던 길 같은데…?"
후퇴할 준비를 하던 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숲에 붙은 불은 생각보다 빠르게 번진다.
저런 불의 장벽이라면, 순식간에 주변의 나무들을 불태우며 번져나갈 터.
"...!"
샬롯이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치켜뜬 건 그 직후였다.
그녀의 꼬리가 빳빳해지는 가운데.
"제기랄. 뭔진 몰라도, 우릴 가둬 놓고 태워 죽이려는 거군. 따라와라! 아직 길이 있을 때, 여길 빠져나갈 거니까!"
한발 앞서 상황을 파악한 올레그가 말 머리를 돌렸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측면에서 불길이 치솟은 건 그때였다.
콰르르르-
"젠장…! 다들 따라와!"
올레그가 고삐를 후려쳤다.
상단의 경호병들이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오로지 샬롯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희열이 번지고 있었다.
'놈이 아직, 이곳에 있다…!'
그 계집애를 되찾는 건 이미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안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제국인들을 따라라! 여기서 타 죽고 싶지 않으면…!"
"다들 넋 빼고 있지 말고, 움직여!"
비로소 상황을 파악한 다른 이들도 올레그의 뒤를 따르려 했다.
화르르륵-
허공에 수많은 화염구들이 피어오른 건 그 직후였다.
화염구들은 만들어짐과 동시에 그들의 한복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쾅! 콰광-! 쾅!
"아아악-!"
"미친! 다들 물러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폭발에 휘말린 인마가 전신에 불이 붙은 채 내달리고, 삽시에 두 무리로 갈린 추적자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샬롯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반대로 우리를 사냥하려는 거야.'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
높다란 나무 위.
'역시, 화염 장벽은 마법봉 없이도 마력 소모가 장난 아니군.'
이미 한참 전에 비어 버린 마석을 던져 버린 이안이, 아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샤아아-
망령화한 늪지의 원한이 나무 아래의 기병에게로 뻗어나갔다.
놈이 저주를 심어 넣는 사이.
타탓-
단검을 역수로 뽑아 든 이안이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 위를 날듯이 내달린 그가, 이윽고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무리에서 떨어진 용병의 등 뒤.
이안은 말의 엉덩이 위에 착지함과 동시에 단검을 내리찍었다.
"꺽…!"
목덜미를 깊이 파고든 검에, 용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뭘 멍하니 보고 있어? 따라와 새꺄! …이봐? 어이?"
동료가 그의 죽음을 눈치챘을 때, 이안은 이미 나무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혼돈력을 한 방울 머금고 증폭된 바람 칼날 덕에, 그의 움직임은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빨랐다.
그의 반사 신경으로는 넘어지지 않는 게 고작일 정도였다.
이안의 시선이 전장을 훑었다.
'역시, 혼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불만한 게 없군.'
이 저주받은 숲의 주인은 물론 분노하겠지만.
'…지금은 나도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거든.'
콰직-!
또 한 명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단검을 틀어박은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옆. 눈을 치켜뜬 채 그를 지켜보는 기사.
"반가워. 제이미 경."
"네, 네놈은…?"
"선물을 하나 주지."
손가락에 늪지의 원한이 되돌아왔음을 확인한 이안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불길한 감각이 제이미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게 무슨…?"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원한이, 눈을 치켜뜨는 제이미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이안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솟구쳤다.
자신이 저주에 걸렸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제이미가 소리쳤다.
"위! 위다! 그 미친 검귀 놈이 이곳에 있다-!"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그의 시야가 녹아내리고 뒤섞이기 시작했다.
치솟는 불길과 날뛰는 악귀들.
제이미가 그렇게 착란 상태에 빠져드는 사이.
"석궁! 석궁을 쏴!"
"저기다!"
그의 외침을 들은 추적자들이 비로소 위를 올려다보았다.
매캐한 연기와 불길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사이, 희끗한 형체가 내달리고 있었다.
피슈슉-
석궁을 든 자들이 일제히 볼트를 퍼부었다.
하지만 한 발도 이안을 스치지 못했다.
그들이 허둥지둥 재장전을 준비할 때, 이안은 이미 그들의 시야 밖으로 멀어진 뒤였다.
'어딜 빠져나가려고.'
그가 향한 건 불길을 피해 우회하는 올레그와 검은 기병들 쪽이었다.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그의 마력에 한 방울의 혼돈력이 섞였다.
화르르륵-
불과 몇 초 만에 주문이 완성됐다.
수많은 춤추는 불꽃들이 피어올랐다.
그것들을 올레그가 달려가는 방향으로 일제히 쏘아 보내면서, 이안은 낮은 나뭇가지로 뛰어내렸다.
콰과과광-!
"피해! 나무가 쓰러진다!"
"이런 제기랄-!"
폭음과 비명. 날뛰는 말들.
폭발을 피한 검은 기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선회했다.
지켜보던 이안은 곁을 스쳐 지나가는 한 놈에게 늪지의 원한을 보내고는 비로소 몸을 돌렸다.
불길은 성실하게 번지고 있었다.
이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연기에 휩싸인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마경이 따로 없군.'
타락자나 마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다 해서, 힘에 취하거나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이미 지쳐 있었고, 적들은 아직도 많았다.
심지어 네임드급이라 할 만한 놈들을 죽인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건, 게임에서는 물론 공략글에서도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추적자들의 수준으로 봐선, 게임에선 오로지 도주하는 것만을 상정하고 만든 퀘스트였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섬멸이 아니라.
그러니까 지금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
'어쩌면, 그걸로도 부족할지도.'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마족이나 타락자가 아니라, 인간들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결과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으, 으아아…!"
"이, 이런 시발! 다니엘이 미쳤다!"
추적자들 사이에서 혼란이 이어졌다.
착란 상태에 빠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서로를 향해 칼과 창을 겨눴다.
늪지의 원한은 마물이나 마족들에겐 별 쓸모가 없지만, 인간을 상대할 땐 더없이 유용했다.
지금 같은 난전에서는 특히 더.
이안은 그 사이를 누비며 쿨 타임이 돌아올 때마다 늪지의 원한을 보내고, 혼란에 빠진 자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천칭 상단 무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그는 전진을 멈춘 채 착란 상태에 빠진 자들과 대적하고 있었다.
물론, 이 상황을 영원히 반복할 수는 없었다.
쩌엉-!
"기다리고 있었다, 이안."
이안의 기습을 막아낸 기사가 내뱉었다.
아겔 란의 기사, 조나단.
"다시 만나서 나도 반갑군."
이안이 뒤로 훌쩍 물러나며 내뱉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조나단이 검을 고쳐 쥐었다.
"뻔뻔하구나, 배신자. 이런 짓을 하고도 여신께서 용서하실 것 같으냐?"
"용서하고 말고도 없지. 난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읊조린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사실, 루 솔라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도 없어."
"그럴 줄 알았다…! 이 더러운 타락자야!"
조나단이 울부짖으며 내달렸다.
결론이 왜 타락자야?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자세를 다잡았다.
콰직-!
승부는 일격에 결정 났다.
조나단은 휘몰아치는 방벽에 막혀, 검을 내려치지도 못했다.
"커… 헉…!"
단죄의 검이 흉갑을 꿰뚫었다.
조나단이 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입에서 피가 왈칵 토해졌다.
"믿… 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그냥 날 찾아와서 물어봤어야지. 이런 멍청한 짓을 벌일 게 아니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안이 검을 뽑자 조나단이 그대로 쓰러졌다.
한때나마 알던 자의 목숨을 빼앗는 건, 뒷맛이 좋지 않았다.
시신을 내려다보며 다시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한 것도 잠시.
"...!"
이안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일렁이는 불길 너머.
부하 몇을 이끌고 달려가는 올레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발광하는 자들을 다 처리한 모양.
당장 쫓아야 했지만, 이안은 그 너머의 광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불길을 따라 솟구치던 연기가, 옆으로 느릿느릿 선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처럼.
그 사이로 오염된 마력이 물감처럼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인데.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본 이안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
연기가 자욱한 하늘은 밤이나 다름없이 어두웠다.
그의 숨결이 비로소 다급해졌다.
이대로면 올레그는 오염된 마력에 휩쓸리기 전에 이 지역을 빠져 나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몸을 날릴 수 없었다.
"…?!"
섬뜩한 한기.
고개를 돌린 이안이 본 건, 어느새 지척까지 쇄도한 샬롯의 주황색 눈동자였다.
그녀가 내뱉었다.
"드디어 잡았다."
뒤로 젖혀져 있던 그녀의 양손이 섬뜩한 곡선을 그릴 찰나.
푸확-!
휘몰아치는 방벽이 그녀의 돌진을 한순간 저지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샬롯의 미간으로 단도를 던지면서, 동시에 춤추는 불꽃을 시전해 발사하고, 뒤로 몸을 날리며 얼음 감옥을 연달아 펼쳤다.
그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이어졌다.
이안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전장을 넓게 사용한 건, 저 미친 수인에게서 자신의 위치를 최대한 오래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안은 다른 추적자들을 전부 죽이기 전까진 그녀와 싸울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를 포기할 일도 없어 보였으니, 다른 놈들을 전부 정리한 후에 맞부딪히려 한 것이다.
물론 그 전에 조우할 경우도 대비해 두었고, 그게 방금 선보인 일련의 반격이었다.
퍼버버벙- 쩌저적-!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면서, 이안은 춤추는 불꽃의 폭발 위로 얼음 감옥이 뒤덮이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혼돈력을 섞어 바람 칼날과 화염 걸음을 연달아 시전했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피어오른 불꽃이, 이어진 바람을 머금고 더 거세게 치솟았다.
첫 번째 챕터의 수많은 마물 소굴을 불바다로 만든 마법 연계.
불길이 시야를 가릴 만큼 치솟는 것까지 확인한 이안이, 비로소 앞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올레그의 뒷모습이 아니라, 부풀듯 솟아오르는 거대한 살덩이였다.
인간과 말을 가리지 않고 조각난 시체와 살점, 내장들을 마구 뭉친듯한 끔찍한 형태.
심지어 스스로 증식해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시발…!?"
"마물…! 마물이다…!"
공포에 질린 말 울음소리와 낙마한 자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곳곳에서 시체가 뭉쳐 만들어진 덩어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안은 가까워지는 살점 덩어리를 올려다보았다.
2미터를 훌쩍 넘기는 덩치. 마치 살점으로 빚은 아메바 같았다.
몸통이라 부를만한 부위에 세로로 쭉 찢어진 구멍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이어졌다.
"운명을… 받아… 들여라…."
말까지 한다고?
다음 순간, 덩어리에서 무언가가 채찍처럼 뻗어 나왔다.
몸을 틀면서, 이안은 곁을 스쳐 지나가는 그것을 눈에 담았다.
시체 조각이 덕지덕지 박힌 촉수.
"아- 아아악-!"
저만치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촉수에 칭칭 감긴 기사 하나가 덩어리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손을 내뻗은 채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몸이, 늪에 잠기듯 덩어리 속으로 흡수됐다.
경련하던 손끝이 사라졌다.
촤르르르-
이안 앞의 덩어리에서 대여섯 개의 촉수가 연달아 튀어나온 건 그 직후였다.
"선택… 받은… 자여…."
"진짜 너였냐…?"
이안이 헛웃음을 짓는 사이.
콰장창-!
얼음 감옥을 박살 내며, 샬롯이 솟구쳤다.
갑옷의 마석이 번쩍였다.
허공에서 핑그르 몸을 돌린 그녀가, 잠시 부유하듯 멈춰 섰다.
타오르듯 일렁이는 주황색 눈동자가 단숨에 이안을 찾아냈다.
"이아아아아안-!"
쌍검을 움켜쥔 채 포효한 그녀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064화
올레그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회전하는 연기가 장벽처럼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장벽에서 오염된 마력이 물씬 느껴졌다.
"하…."
쫓아가기에는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 이안이, 바람 칼날을 두른 채 쇄도하는 샬롯을 눈에 담았다.
피부가 저릴 정도의 살의.
그나마 다행인 건, 살덩이의 관심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촉수들이 그가 아니라 샬롯을 향해 뻗어나갔다.
시선은 여전히 이안에게 고정한 채, 샬롯이 허공에서 궤적을 틀었다.
이안도 종종 활용하던 방식.
'…나랑 싸우던 놈들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서거걱-
그녀의 쌍검이 거침없이 촉수들을 썰어 댔다.
잘려 나간 촉수는 땅에 떨어져도 죽지 않고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그사이, 이안도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았다.
화르르륵-
연달아 피어오른 불덩이가 뿜어져 나가고, 휘몰아치는 방벽과 서리 방패가 연달아 시전됐다.
샬롯은 아까처럼 맞아 주지 않았다.
묘기 부리듯 몸을 틀어 날아드는 불덩이를 모조리 피한 그녀가, 쌍검으로 서리 방패를 내리찍었다.
콰장창-!
방패가 폭발할 틈도 없이 박살 났다.
뒤에서 손아귀에 냉기를 가득 머금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푸확-!
냉기 파동. 샬롯의 주위로 돌풍이 휘몰아친 건 그 직후였다.
이안과 샬롯이 동시에 튕겨져 나갔다.
'휘몰아치는 방벽까지…?'
하위 회색 마법은 다 들어 있는 건가.
생각하며 착지한 이안이 고개를 들었을 때, 샬롯은 이미 그의 코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이안이 황급히 검을 들었다.
연달아 이어진 두어 번의 충돌.
물러나는 이안의 발걸음을 따라 불길이 치솟았지만, 샬롯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 냈다.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에는 주체할 수 없는 야성과 희열이 뒤엉켜 있었다.
지금 이 일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안이 어떻게 여러 색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저 지금 이 전투를 즐기고, 그를 죽일 생각뿐.
쌍검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방어를 도외시한 저돌적인 공격의 연속.
갑옷의 마석이 쉴 새 없이 번쩍이면서 그녀의 움직임을 보조했다.
이안에겐 반대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여러 요인이 복합된 결과였지만, 동시에 상성의 문제이기도 했다.
'게임에서도 암살자한텐 쥐약이었는데. 회색 마법까지 쓰는 수인 암살자라니….'
무기를 맞부딪칠수록 모든 게 더 확실해졌다.
힘과 속도, 체력, 전투 기술에 이르기까지.
이안이 야성을 드러낸 그녀를 앞서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었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달은 와중에도 언제나 샬롯이 더 빨랐고.
일격 일격에 실린 무게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공세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실수하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치명상을 입게 되리라.
그나마 앞서는 요인은 마법이겠지만.
샬롯은 그가 마법을 시전할 틈을 조금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단죄의 일격은, 물론 사용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안의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들이 늘어 갔다.
펑-!
이안이 간신히 피어 올린 화염구가 샬롯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폭발했다.
샬롯은 오히려 폭발의 반경에 머리를 들이밀면서 이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슴팍에 끝까지 교차한 팔 끝, 쌍검이 섬뜩한 예기를 흩뿌렸다.
쩌엉-!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궤적 사이로, 이안이 간신히 검을 밀어 넣었다.
교차된 검날이 목 좌우에서 멈췄다.
날 앞부분으로 이어진 곡선이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벨 듯했다.
이안은 왼팔을 자신의 검날에 가져다 대며 버텼다.
하지만 샬롯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려난 건 이안이었다.
이내 그의 등에 딱딱한 기둥이 닿았다. 나무 둥치였다.
퇴로가 막혔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섬뜩한 예감이 이어졌다.
콰직-!
날아든 꼬리 갑주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이안의 귀 끝을 살짝 잘라내며 둥치에 박혔다.
이게 여기까지 길어지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교차한 검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샬롯의 주황색 눈에 희열과 전율이 번졌다.
곧 이안의 목을 베리라 확신한 것이리라.
이런 순간에조차, 이안의 정신력은 제 역할을 다했다.
그는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았다.
다만 주마등처럼 밀려드는 정보들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일렁이는 잿빛 장벽. 더 이상 비명도 들리지 않는 숲. 타들어 가는 나무와 매캐한 연기. 어기적대며 기어 오는 살덩이. 이 광경이 펼쳐지기 직전에 빠져나간 올레그. 뒤따르던 부하 넷. 그를 기다리고 있을 미구엘과 루시. 목을 노리는 단검과 되돌아가는 꼬리.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진 주황색 눈동자. 그리고 곧 다가올 죽음.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의, 죽음.
"...."
그 모든 것들이 스쳐 간 찰나의 순간, 이안은 결정을 내렸다.
그는 샬롯의 눈을 응시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는 힘 수치를 하나씩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두 팔로 전해지는 압력이 견딜 만하게 느껴질 때까지.
다신 하지 않을 줄 알았던 선택이지만,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
이윽고 샬롯의 눈이 커졌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지만,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게 틀림없었다.
조금씩 그녀의 검을 밀어내던 이안이, 이윽고 이를 악물었다.
쩌엉-!
샬롯이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검을 내리친 이안은, 올린 힘 수치의 절반만큼을 민첩성에도 투자했다.
필요한 작업이었다. 지능과 정신력이 그렇듯, 힘과 민첩성은 언제나 최소한의 균형을 맞춰 줘야 했다.
효과는 이번에도 즉각적이었다.
모든 감각이 한 꺼풀 더 선명해지는 느낌.
"...."
샬롯은 어떻게? 따위의 흔히 할 법한 탄성은 내뱉지 않았다.
그저 감탄하듯 이안을 바라보고는 양손의 검을 고쳐 쥐었다.
이안도 우묵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의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 직후였다.
쒸에엑-!
파공음. 살덩이의 촉수가 이안과 샬롯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안과 샬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그들을 노리던 촉수가 조각나 떨어졌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살덩이에게로 달려들었다.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검격이 연달아 이어졌다.
수십 조각으로 잘려나간 육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꿈틀대는 살점 한복판에서, 이안과 샬롯은 다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쉬학-!
먼저 움직인 건 샬롯이었다.
여전히 저돌적인 공세.
하지만 전처럼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안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고도의 집중 상태 속에서, 자신의 움직임이 더 빠르고 정교하고 강해졌음을 실감했다.
샬롯의 공격을 몇 차례 막아낸 그가, 그녀가 검을 회수하는 틈을 노리고 반격을 시도했다.
푸확-!
이안의 팔이 휘몰아치는 방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 사이를 파고드는 샬롯의 움직임이 여전히 선명하게 인식됐다.
그는 밀려나는 힘을 고스란히 이용해 샬롯과 거리를 벌렸다.
그녀를 따라 한 움직임.
그러면서 그사이에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하기까지 했다.
하위 마법에 불과할지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선 고위 마법만큼이나 유용했다.
푸확-!
달려들던 샬롯이 돌풍에 가로막혔다. 그 사이로 화염구가 뿜어지고, 폭발과 거의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이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카드득-
샬롯이 이안의 검을 막아냈다.
그건 달라진 전투의 양상을 증명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역으로 그녀를 밀어붙이면서, 이안은 어떻게 더 빨리 주문을 완성시킬 수 있었는지를 생각했다.
시전 속도는 정신력과 지능 수치의 영향만을 받는 줄 알았는데.
인식부터 시전까지의 과정이 한층 더 매끄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럼 모든 능력치가 서로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일까?
현실이 된 지금은 충분히 가능할 법한 가정이었다.
푸확-!
그때 샬롯의 전신에서 돌풍이 터져 나왔다.
이안을 밀쳐내고 소리 없이 포효한 그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몸을 날렸다.
여유가 사라진 얼굴.
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희열로 가득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내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이안은 그녀의 장단에 오래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이 전투를 충분히 끝낼 수 있었으니까.
콰직-!
달려든 샬롯이 이안을 덮쳤다.
교차된 쌍검 사이를 단죄의 검이 깊이 막아냈다.
다만 이번에는 한 손이었다.
이안의 왼손은 샬롯의 옆구리로 향해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조악한 형태의 회색 단검. 그 삐죽한 끝부분이 샬롯의 옆구리, 판금과 사슬의 이음매 사이를 정확히 찔렀다.
거미 여왕의 독니.
"...!"
샬롯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독이 번지면서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으리라.
이윽고 이안이 그녀의 몸을 걷어차 밀어냈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샬롯이 쓰러졌다.
"하아… 하아…."
비로소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안이 그 앞으로 다가섰다.
샬롯은 이 순간에도 검이 아니라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공포 대신, 오히려 기묘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모든 걸 선보였으니 죽어도 괜찮다, 이건가.'
이안에겐 이해되지 않는 사고방식.
다만, 그녀의 그런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내내 최악의 방해자였고, 끝내 그가 능력치 포인트까지 사용하게 만들었으니까.
만족스러운 죽음을 선사하는 건, 그에 합당한 대가가 아니었다.
죽음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나 최고의 형벌인 법.
이안의 눈동자가 스르륵, 그녀의 하반신으로 돌아갔다.
'게임에서 수인 용병을 복종시키는 방법이… 이거였지.'
그의 시선이 축 늘어진 샬롯의 꼬리 갑주로 향했다.
수인의 꼬리는 그들이 타고난 야성의 상징이자 자부심.
'이걸 자르면 야성이 거세되었다는 뜻이라던가….'
별거 아닌 서브 퀘스트를 주던 수인 NPC의 대사가 떠올랐다.
제국 귀족의 노예였던 자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꼬리를 자른 귀족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고민은 거기서 끝났다.
"...!"
이안이 꼬리를 툭 발로 찬 순간, 샬롯의 눈동자에 파장이 번졌다.
경악과 불신.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눈에 공포가 번졌다.
이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나한텐 목숨이 가장 소중하거든. 그걸 빼앗으려 했으면… 너도 가장 소중한 걸 걸어야지."
"...!"
샬롯의 눈빛이 휘청댔다.
이안이 검을 들었다.
콰직-!
"...!"
온 힘을 다해 내리친 칼에, 그녀의 꼬리 절반이 잘려 나갔다.
샬롯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남은 꼬리 단면에서 피가 흘렀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잘린 꼬리를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려 유일 등급의 장신구였다.
샬롯의 야성.
보유 능력치는 하나였다.
수인, 샬롯의 복종.
…복종?
"...."
이안은 샬롯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하던 생기와 야성, 희열은 자취를 감췄다.
그저 망연자실하게 이안의 손에 들린 자신의 꼬리를 바라볼 뿐.
…그렇단 말이지.
코웃음 친 이안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었다.
'밤새 여기 있을 순 없어. 나가야 돼.'
지금쯤 올레그가 마차를 따라잡았을지도 몰랐다.
다른 장소에도 마물이 기어 나오고 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저런 살덩이를 만들어 내는 놈의 영역이라면, 그 어떤 악몽 같은 상황도 현실이 될 수 있었다.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당장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안은 연기의 장막을 따라 내달렸다. 엄청난 양의 오염된 마력이 뒤엉킨 결계였다. 당연히 빈틈 따윈 없었다.
'저것들을 다 죽이면, 길이 열릴까?'
멈춰 선 이안은, 꿈틀대는 살덩이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은 가만히 멈춰선 채였다.
마치 그를 기다리듯이.
그때, 예의 그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번져나갔다.
모든 살덩이가 동시에 말하고 있었다.
"운명을… 거부하지…."
"그래. 받아들이겠다."
이안이 내뱉었다.
일순간 목소리가 끊어졌다.
당황한 것처럼 느껴지는 적막.
이안이 덧붙였다.
"내가 네놈을 찾아가겠다. 그러니까 당장 길을 열어."
"나를 찾아오리라… 맹세… 하겠느냐…?"
"맹세하지. 난 어차피 북부로 가고 있다. 의뢰를 끝내면 네놈을 찾아가마."
그리고 네놈의 대갈통을 박살 내 주지.
이안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솨아아아-
살덩이들에게서 잿빛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마력은 곧 거대한 문양으로 바뀌었다.
"맹약은… 체결… 되었다…!"
다음 순간, 이안의 왼손 손아귀에도 같은 문양이 새겨졌다.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얼어붙은 심연.
이안은 더 보지 않고 창을 껐다.
당장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콰아아아-
장막의 흐름이 거세졌다.
살덩이들이 우르르 허물어지고, 나무의 불길들이 일제히 꺼졌다.
연기 장막이 흩어졌다.
숲의 전경이 비로소 드러났다.
일행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찾아내는 것은, 뜻밖에도 전혀 어렵지 않았다.
저 너머, 주황빛이 밤하늘을 밝히며 넘실대고 있었으니까.
숲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한 직감.
"…루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이안은 불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065화
불길이 점점 선명해졌다.
여러 나무들에 붙은 불길은 주위로 옮겨붙지 않고, 그저 밝고 맹렬하게 타오르고만 있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대변하듯이.
불길의 인근까지 달려간 이안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상단 경호병의 얼굴이었다.
그는 말에서 떨어졌는지 불길을 등진 채 내달리고 있었다.
"여기 악마가- 악마가 있-"
콰아아아-!
눈부신 불기둥이 그를 집어삼킨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이 근처에 당도할 때쯤 불기둥이 잦아들고, 안에서 숯덩이가 된 시신이 허물어졌다.
그 너머로, 주저 앉은 루시의 얼굴이 드러났다.
거칠게 나부끼는 로브.
위로 삐죽 솟은 머리칼.
노란색과 주황색이 뒤엉켜 일렁이는 눈동자.
그리고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언제나 무표정한 그녀가 저런 표정이 된 이유를 알아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
주저앉은 그녀의 바로 앞에, 미구엘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주위는 피로 흥건했다.
팔이 잘렸기 때문일 터였다.
루시는 팔목 아래, 팔뚝 중간이 잘려나간 미구엘의 왼팔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출혈을 조금이라도 멈춰 보려는 생각일 터.
"...!"
루시의 시선이 이안 쪽으로 득달같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발작적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이어진 섬뜩함에, 이안은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
불기둥이 바로 뒤에서 치솟았다.
그조차 뜨겁다 느낄 정도의 열기.
바닥을 구른 이안이 자세를 다잡으며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휘청댔다.
"이, 이안님…?!"
"그래. 나다."
"제가, 제가 무슨 짓을."
불기둥이 단숨에 흩어지고, 주위의 나무들을 태우던 불길이 힘을 잃었다.
루시가 입술을 떨며 내뱉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사과할 필요 없다.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일어선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조건 반사적으로 저지른 행동에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윈 없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미구엘, 미구엘이…!"
루시가 비로소 눈물을 왈칵 쏟으며 내뱉었다.
이안은 주변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가가, 미구엘의 상태부터 살폈다.
팔뚝 중간 쯤부터 깔끔하게 잘려나간 왼팔.
왼쪽 어깨부터 명치까지 찢겨진 가죽 갑옷.
그 사이에서도 피가 배어 나왔다.
미구엘의 눈이 가늘게 뜨인 건 그때였다.
"…형씨."
"말 하지 마라."
"계획대로… 못 했소…."
"그건 딱 봐도 알아."
미구엘이 웅얼댔다.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이안은 루시가 움켜쥐고 있는 미구엘의 잘린 팔 단면을 바라보았다.
피가 아직도 흘러 나오고 있었다.
당장 출혈을 멈추고 감염도 막을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네 팔을 불로 지질 거다. 견디지 말고, 그냥 기절해."
이안이 손아귀에 화염구를 피워 올리며 내뱉었다.
미구엘의 창백한 입술이 간신히 달싹였다.
"시부럴…."
이안은 곧바로 화염구를 움직여, 미구엘의 팔 단면에 가져갔다.
"...!"
살 타는 냄새. 잠시 바들대던 미구엘이 이내 축 늘어졌다. 차라리 기절한 게 다행이리라.
필요 이상으로 많이 타지 않게 최대한 정교하게 처리한 이안이, 화염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다행히 출혈은 멈췄다.
"계속 잘 들고 있어라."
"…네."
자신이 아픈 것처럼 눈물 흘리던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일어선 이안은, 멀지 않은 곳에 전복된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는 처박히듯 뒤집혀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아래에 깔린 것들은 거의 무사했다.
이안은 그 아래를 뒤져 배낭을 집어 들고는 다시 돌아왔다.
"그대로 들고 있어라."
배낭을 뒤적인 이안이 익어버린 단면에 천을 대고는, 주위를 붕대로 압박해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턱짓했다.
"천으로 몸의 피를 닦아."
루시가 재빨리 움직였다.
손이 이미 피투성이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구엘의 가슴팍에 번진 피를 닦아냈다.
이안은 그제야 루시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는 걸 눈치챘다.
당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이안은 비로소 제대로 드러난 가슴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히 그리 깊지 않아서, 벌써 피가 응고되고 있었다.
아마 팔로 공격을 막아내며 쓰러진 덕분일 터였다.
비록 손은 날아갔지만. 몸이 두 쪽 나는 것보단 나은 결과였다.
"하늘이 도왔군."
미구엘의 가죽 갑옷을 벗기면서, 이안이 덧붙였다.
"올레그가 이랬나?"
"…네."
"놈은?"
루시가 대답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저만치에 널브러진 커다란 숯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말과 함께 통째로 타 버린 올레그였다.
도망치다가 숨이 끊어진 모양.
인마 모두, 걸치고 있던 마법 무구만이 그나마 형태를 보전하고 있었다.
타 죽은 시체는 저 하나가 전부가 아니었다.
곳곳에 숯덩이가 된 말과 인간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고통스러웠겠군. 잘 했다."
내뱉은 이안이 미구엘의 가슴 상처 위에 천을 덧댔다. 출혈이 거의 멎어서, 감염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상처에 붕대를 감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왜 계획대로 못 한 거냐."
"그게… 저 사람들의 상태가 이상했어요."
루시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달려와선 마차를 넘어뜨렸죠. 그러면서 비명과 고함을 지르고, 마구 욕을 해 댔죠. 미구엘이 저를 안아 들면서 그랬어요. 저 사람들, 눈이 돌았다고."
"눈이?"
"정말 그랬어요. 눈가에 핏줄이 튀어나오고, 눈이 번들댔거든요."
"…오염된 마력에 중독된 거군."
이안은 멀어지던 올레그와 연기 장막, 그리고 번지던 오염된 마력을 떠올렸다.
결계가 완성되기 전에 통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오염된 마력을 온몸으로 머금은 모양이었다.
오염된 마력은 종류에 따라 다양한 상태 이상을 유발했다.
공포, 착란, 광분 등등.
아까 본 자의 정신 나간 얼굴이, 단지 루시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저자가 저한테 소리쳤어요. 다 너 때문이라고. 그냥 죽여 버리겠다고. 저는 단검을 뽑으려고 했고, 미구엘이 막았죠. 그리고…."
루시가 미구엘의 창백한 얼굴을 돌아보며 숨을 골랐다.
떠오르기 괴로운 모양.
이안이 충분하다고 말하려는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 님의 말씀이 맞댔어요. 전 칼을 들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그러면서 이걸 쥐여 줬어요."
루시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로브에 문질러 닦고는 내밀었다.
고대어가 빼곡하게 새겨진 손바닥만 한 부적이었다.
안에 응축된 마력이 느껴졌다.
"이걸 쓰면 저를 멀리 날려 보내줄 거라고요. 거기가 어디든 안전한 곳에 숨어서 아침을 기다리라고. 그럼 이안 님이 찾으러 올 거라고요. 시간을 끌 테니, 이 부적 양쪽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랬죠. 그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어요."
"…널 살리려고 올레그와 맞섰다고?"
이안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어요. 첫 공격은 막았죠. 하지만 두 번째에… 이렇게 됐어요. 전 도저히 이 부적을 쓸 수 없었어요. 저자가 다시 치켜드는 피 묻은 도끼만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다음은 말 안 해도 돼. 주위만 봐도 충분히 알겠으니까."
"…저 사람의 말이 전부 틀린 건 아니에요. 전부 저 때문인 건 사실이니까."
루시가 눈물을 꾹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구엘이 이렇게 된 것도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마법을 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볼 땐 이놈이 이렇게 돼서 네 마법이 더 강해진 것 같은데."
내뱉으며 붕대질을 마무리한 이안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네가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놈이 산 거고."
어디까지나, 아직은. 평소라면 내뱉었을 뒷말을 삼킨 이안이, 이윽고 덧붙였다.
"잘했다는 얘기다. 루시."
"...."
입술을 질끈 깨문 루시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주위의 나무에 붙은 불길들이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했다.
이안은 그녀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울도록 놔둔 채 미구엘의 옷을 대충 다시 입히고, 마차로 향했을 따름이었다.
돌아온 그의 품에는 부서진 잔해들이 여럿 들려 있었다.
"여기에 불 좀 붙여라. 주위에 붙은 불은 끄고. 이놈이 깨어날 때까진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네. 네에…."
대답한 루시가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눈과 머리칼이 일렁였다.
화륵, 이안이 모아 놓은 잔해에 불이 붙었다.
뒤이어 눈을 감고 숨을 고르자, 일대의 나무에 타오르던 불길들이 일제히 잦아들었다.
일렁이던 머리칼이 가라앉았다.
'저런 건 나도 못 하는데….'
어이가 없군.
내심 읊조리며, 이안은 마차에서 침구와 로브, 망토 따위를 되는대로 찾아냈다. 흙과 재로 범벅인 것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달라고?"
모닥불로 돌아온 이안이, 손을 내미는 루시를 보며 물었다.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건넨 침구들을 받아든 그녀는, 미구엘의 온몸을 말 그대로 꽁꽁 싸매기 시작했다.
지극 정성이군.
이안이 결국 피식댔다.
"숨 막히지 않게 잘해라. 네 것도 남기고."
"여기 같이 들어가서 자면 돼요."
"그러든가."
심드렁하게 내뱉던 그의 미간이 문득 좁아졌다.
그의 고개가 숲의 어둠 너머로 돌아갔다.
"...!"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어둠을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이, 얼어붙듯 무표정해졌다.
뒤이어 어둠 너머로, 비척대는 인기척이 드러났다.
"…내 꼬리."
쌍검을 움켜쥔 샬롯이었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중얼대던 그녀가, 이안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내 꼬리…! 내놔…!"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루시의 눈빛이 타오르려는 찰나.
"넌 그냥 있어라."
손을 들어 저지한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아 들며 일어섰다.
앞으로 나선 그가, 달려오는 샬롯을 우두커니 마주 보았다.
"...!"
악에 받친 듯 이안을 노려보던 샬롯의 눈빛이, 이윽고 흔들렸다.
내달리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안에게 멀지 않은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는, 빙판을 걷는 것처럼 주춤대기까지 했다.
"...."
이안을 바라보는 샬롯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움찔대며 일그러지는 얼굴.
자신의 꼬리를 잘라 낸 자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영혼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저벅.
이안이 한 걸음 내디딘 건 그때였다.
멈춰 선 샬롯이 몸을 떨었다.
전신의 털이 곤두선 것 같았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철그렁.
샬롯의 쌍검이 땅에 떨어졌다.
고양의 앞의 쥐처럼 몸을 떨던 그녀가, 이윽고 주저앉았다.
샬롯의 눈동자에 공포와 굴욕이 뒤섞였다.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차라리… 죽여라…!"
수인의 관점에선, 그녀가 공포를 이겨내고 목소리를 낸 것만으로도 감탄했을 일이었다.
물론 이안은 그런 사실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앞에 멈춰 선 채, 공포에 젖은 주황색 눈동자를 내려다볼 뿐.
"그 전에."
이윽고 이안이 입을 열었다.
샬롯이 움찔대며 그의 입을 주목했다.
"네 고용주를 내 앞에 끌고 와라. 말만 할 수 있는 상태면 돼. 그리고 다른 놈들은 전부 죽여. 놈들의 목도 가져와라. 빠짐없이, 전부."
"...!"
샬롯의 눈이 커졌다.
이안은 추적자들을 멀찍이 뒤따르는 검은 마차의 존재를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왕이면, 마차도 챙겨 와. 타고 갈 게 필요하니까."
"그러면… 꼬리를… 돌려줄 거냐…?"
샬롯이 더듬대며 물었다.
이안이 코웃음 쳤다.
"네 꼬리가 고작 그 정도의 가치밖에 없진 않을 것 같은데."
"...."
"네가 저지른 짓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부족하지."
"제… 기랄…!"
샬롯이 분한 듯 씹어 뱉었다.
하지만 이안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을 터였다.
꼬리를 되찾아야 하니까.
뿌득.
이윽고 샬롯이 자신의 쌍검을 부러뜨릴 것처럼 집어 들었다.
분한 표정과 달리, 그녀는 이안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내뱉었다.
"내일… 돌아오겠다…."
샬롯이 도망치듯 어둠 너머로 몸을 날렸다.
검을 회수한 이안이 모닥불로 돌아왔다.
"방금… 뭐였어요…?"
멍한 얼굴로 지켜보던 루시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뒤처리는 깔끔하게 해야지."
"그게 아니라.... …아니에요."
루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일 터.
피식한 이안이 턱짓했다.
"자라. 네 말대로 미구엘한테 체온도 나눠 주고."
"네. …감사해요, 이안 님."
"뭐가."
"전부 다요."
그 말을 끝으로, 루시가 로브와 망토 뭉치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가 미구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진짜 부녀지간 같군.
생각하며, 이안은 미구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창백한 얼굴.
하지만 호흡은 훨씬 안정된 상태였다.
'…적어도 당장 죽진 않겠네.'
생각하며, 그는 미구엘의 행동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자기 희생이라니.
평소의 겁 많은 성격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루시에게 그만큼 정이 든 것일까.
무슨 이유건, 숭고한 결단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타심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이 세계에선 더더욱.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피식댄 이안이 모닥불에 마차 파편을 몇 개 더 던져 넣었다.
비로소 지독한 두통과 현기증, 피로가 몰려 들었다.
온몸이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아무리 맹약을 맺었다 해도, 정체도 모르는 고대 망령의 권역에서 모두를 무방비 상태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 차가운 맥주 한 잔 마실 수 있음 소원이 없겠다, 진짜…."
읊조리며, 이안은 배낭에서 꺼낸 육포를 억지로 입에 물었다.
그야말로 긴 하루였지만, 밤은 이제 시작된 참이었다.
#066화
"으으…."
미구엘이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미구엘…? 미구엘! 정신이 들어요?!"
루시의 외침이 이어졌다.
미구엘이 힘겹게 눈을 떴다.
루시의 얼굴을 바라본 그의 얼굴에, 이윽고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여기가 저승은 아니구만."
"아니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이안이 그의 곁에 주저앉았다.
미구엘의 미소가 짙어졌다.
부르튼 입술이 갈라지면서 피가 맺혔다.
"형씨를 봤는데. 그것도 꿈이 아니었나 보군."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라. 네 꿈에 내가 왜 나와?"
혀를 찬 이안이 그의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미구엘이 이 와중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열은 별로 없군."
"…좋은 의미인 거죠?"
루시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이놈의 상처가 감염되지 않은 것 같단 얘기지."
"흐흐… 죽을 거면 진작 죽지 않았겠소."
"주둥이 놀리는 거 보니, 살 만한가 보네."
"이 정도야 뭐…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소?"
"한나절 좀 넘게. 루시한테 고마워해라. 그 녀석이 널 살렸으니까."
이안이 일어섰다.
미구엘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향했다.
"고맙다. 안 도망가 줘서."
"원래는 미구엘이 가는 거였다면 서요. 고마워하지 마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무슨 소리냐. 다 나 마음 편하자고 한 결정인데. 그런데…."
마른 혀로 입술을 축인 그가 말을 이었다.
"왜 내 몸을 묶어 둔 거냐?"
"춥지 말라고 덮어 둔 거예요."
"이건 거의 결박한 수준인데."
루시가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표정 변화에 놀란 듯 눈을 끔뻑인 미구엘이, 이내 마주 미소 지었다.
"내가 준 부적은, 너 가져라. 언제 쓸 일 있을지 모르니까."
"아니에요. 이건 미구엘이…."
"주접 그만들 떨고 앉아라. 먹어야 하니까."
되돌아온 이안이 말을 잘랐다.
그의 손에는 작은 냄비가 들려 있었다. 리우렐가의 시녀가 챙겨 줬지만, 여정 내내 한 번도 쓴 적 없던 물건이었다.
그 안에서 고소한 냄새가 번졌다.
"제가 먹일게요."
"그래라."
루시가 냄비를 받아드는 사이, 미구엘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한 공터. 사방에 그대로 널브러진 숯덩이가 된 시신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전부 다 꿈이 아니었군."
읊조린 미구엘이 왼팔을 들었다.
팔꿈치 아래로 절반이 비어 있었다.
"이것도 꿈이 아니고."
"애석하게도."
이안이 내뱉었다.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신기한 걸 하나 알려 드리겠소. 분명히 손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군. 있지도 않은 손이 욱신거려."
덤덤하게 내뱉은 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제 활은 못 쓰겠소."
"…미안해요, 미구엘."
대답은 루시에게서 나왔다.
그녀가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미구엘이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미안할 건 아니다. 거, 별거 아니야. 세상에 외팔이가 어디 한둘인가. 난 그냥 손만 하나 없는 거니까, 엄밀히 말해선 외팔이도 아니고. 응? 안 그렇소, 형씨?"
"그래. 우는 건 좋은데, 그건 먹이면서 울어라."
이안이 턱짓했다.
루시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냄비 안에 담긴 스튜를 한 스푼 떠서 미구엘의 입에 가져갔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서, 미구엘은 물론 이안도 피식댔다.
결국 루시도 웃음을 지어 버리고는, 열심히 미구엘의 입에 스튜를 떠넣었다.
꽤나 따스한 광경이었다. 저주받은 숲 한복판, 타죽은 시체들 사이만 아니었다면.
"맛이 예술인데. 형씨, 요리도 할 줄 아셨소?"
"그냥 있는 거 다 넣고 불려서 끓인 거다."
"진작 이렇게 먹을 걸 그랬소. 흐흐…."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웃음 짓던 미구엘이, 문득 덧붙였다.
"고맙수. 살려 줘서."
"...."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슬슬 주접이 도를 넘고 있었다.
"형씨가 치료해 주신 거잖소."
"입 닫아. 네가 빨리 회복되어야 떠날 수 있으니까. 여기서 며칠씩 묵게 하면 그냥 죽여서 파묻고 갈 거다."
"이 정도는 반나절이면 너끈해질 거요. 그나저나…."
이젠 거의 뼈대만 남은 마차를 돌아본 미구엘이 덧붙였다.
"이동은 어떻게 하실 거요? 걸어가긴 쉽지 않을 텐데."
"걱정 마라. 방법이 생길 테니까."
"...?"
미구엘이 그 말의 뜻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나서였다.
다각- 다각-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검은 마차를 발견한 것이다.
"추적자가 더 있소…!"
"진정해라.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마차니까."
"...?!?!"
***
검은 마차가 공터 앞에 멈췄다.
말없이 짐칸으로 넘어간 샬롯이 마차 밖으로 뭔가를 연달아 집어 던졌다.
"...."
전부 사람의 머리였다.
천칭 상단의 경호병과 고용인들.
"읍… 으읍…!"
뒤이어, 그녀가 눈과 입을 가리고 사지를 결박한 남자를 집어 던지듯 마차 밖으로 밀어냈다.
샬롯이 그를 질질 끌고 이안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미구엘과 루시를 일별한 그녀가 내뱉었다.
"약속대로… 했다."
"약속이라니."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명령이겠지."
"...!"
샬롯이 이안을 노려봤다.
상단 놈들을 죽이면서 어느 정도 지난밤의 충격에서 벗어난 모양.
하지만 날 선 눈빛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안과 시선을 교환한 지 불과 몇 초 만에, 샬롯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제기랄… 그래… 명령대로."
이안은 축 늘어진 그녀의 꼬리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꼬리는 반도 남지 않았고, 끝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중년인에게로 돌아갔다.
왜소한 체구. 몸 곳곳에 험하게 다뤄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안은 그의 눈을 가린 천과 입에 쑤셔 박은 천을 빼냈다.
남자가 샬롯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샤, 샬롯…! 왜 배신한 것이냐! 왜?"
오, 첫 마디가 이거라니.
한쪽 눈썹을 치켜든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샬롯에게로 향했다.
"혹시, 연인 관계였나?"
"무슨 개소…! …절대 아니다."
반사적으로 내뱉다 움찔한 샬롯이 덧붙였다.
그녀가 경멸하듯 중년인을 내려다보았다.
"난 이런 나약하고 음습한 인간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오히려 혐오하지."
"...!"
그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샬롯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네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비에르. 통탄할 일이 많군. 널 내 손으로 죽이지도 못하다니."
"샤… 샬롯…."
하비에르가 탄식했다.
이안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지금이 사랑싸움이나 할 때는 아닐 텐데. 하비에르."
"이안…! 이안 호프…!"
그제야 눈을 치켜뜬 하비에르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살려 주게! 돌려보내 준다면 더는 자네 일에 관여하지 않겠네! 아니, 상단의 이름으로 보상금도 주겠네!"
"이제야 좀 상식적인 대답이 나오는군. 너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지, 진심일세…!"
"그래서, 여기서 일어난 일은 상단에 얼마나 알렸지?"
"그, 그게...!"
하비에르의 눈에 갈등이 스쳤다.
어떻게 대답해야 살 수 있을지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이안은 어떤 대답을 내놓건 살려 줄 생각이 없었지만.
"네 이름까진 알리지 않았다. 이 음흉한 놈은, 혹시 상단의 다른 단주가 공을 가로채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샬롯이 대답을 가로챘다.
하비에르의 얼굴에 또 한 번 배신감이 번졌다.
"아, 그래. 좋아. 그럼 너랑 더 대화할 필요도 없겠군."
"...."
"사실, 누가 알게 된들 믿지도 않겠지. 나 같은 일개 납치범이 어떻게 천칭 상단의 정예를 모조리 죽이겠어."
"나, 나는 강철 금고에 보관 중인 돈이 아주 많아! 내 개인적인 돈이라 상단과도 관계없지! 살려만 준다면 전부 주겠네! 보관 중인 금화가 천 개가 넘어!"
"그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인데."
이안의 시선이 하비에르의 결박된 손으로 향했다.
그가 중지에 끼워진 굵은 반지를 억지로 뽑아냈다.
"이게 그 열쇠인가?"
"...!"
하비에르의 눈이 커졌다. 너 같은 촌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
이안이 미소 지었다.
"이 돈은, 내가 나중에 제국에 가게 되면 유용하게 써 주지."
"그, 그건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그래도 기꺼이 내주겠지. 다만, 수수료를 삼 할이나 받아 가겠지만. 내 말이 틀렸나?"
"...."
하비에르가 굳어졌다. 반지를 보란 듯 흔들어 보인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네가 이자를 처리해라."
"...!"
"애도 있으니 안 보이는 곳에서 끝내."
눈이 커진 것도 잠시.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녀가 하비에르를 내려다보았다.
하비에르가 침을 삼켰다.
"샤, 샬롯. 잠깐만, 내 말을-"
샬롯이 꽥꽥대는 하비에르의 얼굴을 움켜쥐고는 질질 끌고 갔다.
은근히 단순한 녀석이군.
생각하며, 이안은 홀가분하게 몸을 돌렸다.
이제 그들을 쫓는 추적자들은 전부 처리한 셈이었다.
더는 아무도 그들을 쫓지 않으리라.
'일종의… 성과급도 챙겼고.'
이안은 반지를 아공간에 넣었다.
금화 천 개 이상이라니. 수수료를 떼더라도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제도에 가면 돈방석에 앉겠군.'
생각하며 모닥불 앞으로 돌아온 이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미구엘과 루시의 시선에 미간을 좁혔다.
"뭐."
"저 수인, 어떻게 된 거요? 형씨를 죽이려던 거 아녔소?"
"그랬지. 그리고 내가 이겼다."
그 과정에서 추가 능력치 포인트를 엄청나게 썼지만.
이안은 짧게 입맛을 다셨다.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어쨌든 또다시 망캐의 길로 몇 걸음 더 깊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힘이 강할 터였다. 이러다 정신력 다음으로 높은 능력치가 지능이 아니라 힘이 될지도 몰랐다.
힘보다 낮을 뿐, 민첩성도 만만치는 않았고.
"싸워서 이긴다고 명령을 따르게 되면, 형씨는 지금쯤 군단을 거느리고 있으실 것 같소만…."
"저러는 건 꼬리를 잘라서다."
"꼬… 리요?"
루시가 되물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인은 자신의 꼬리를 자른 자에게 복종하게 돼. 지워지지 않는 두려움이 영혼에 새겨지지."
"…그럼, 계속 함께 다니게 된다는 건가요?"
루시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이안은 꺼림칙한 표정인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그냥 죽이길 바라나?"
"엉…?"
"내가 저걸 살려둔 건, 단지 저게 더 큰 고통을 주리라 생각해서일 뿐이야. 겸사겸사, 후환도 제거하고. 다 끝났으니 묻는 거다."
이안의 담담한 시선에, 오히려 미구엘이 당황했다.
이안이 진심으로 묻고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는 천칭 상단의 추적자들에게 손을 잃었으니까.
자신이 그러라고 말한다면, 이안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저 수인을 죽여 주리라.
이윽고 미구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 복수는 여기 루시가 다 해줬소. 그리고 저 수인 빼곤 전부 죽었잖소? 형씨 명령에 복종한다면야, 뭐. 다만 신경 쓰이는 건 있소."
어깨를 으쓱인 그가 덧붙였다.
"형씨를 두려워한다면, 그냥 도망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 말이오. 평생 형씨를 안 마주치면 그만인 거잖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대답한 건 샬롯이었다.
마차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모닥불 앞으로 다가왔다.
방금 튄 피가 그녀의 얼굴 털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린 꼬리를 두고 도망치는 건 수인의 가장 큰 수치다. 그런 건 더 이상 수인이라 할 수도 없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내뱉으며 모닥불 옆에 선 그녀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꼬리가 잘린 수인은, 꼬리를 되찾거나 꼬리를 자른 자를 섬길 수밖에 없지. …이 비밀을 아는 인간은, 이제 많지 않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 모양.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거기까진 몰랐다. 덕분에 알게 됐군."
"뭐라고…?"
샬롯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다 알고 내 꼬리를 자른 게 아니란 말이냐?"
"그게 수인에게 최악의 형벌이란 것만 알았지. 덕분에 네 꼬리의 가치가 더 올라갔군."
"그럴 수가…."
"그런 의미에서, 여기 이 둘에게 허튼짓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그 순간 네 꼬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테니까."
이안이 샬롯의 망연자실한 눈을 마주 보았다.
"물론, 나한테서 도망치지도 못할 거고."
"제기랄…."
샬롯이 가르릉대는 숨소리를 냈다.
그런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미구엘이, 이윽고 헛웃음을 지었다.
"재미있고만, 이젠 예비 마족까지 동행하게 되다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나는 루 솔라를 섬긴다…!"
샬롯이 으르렁댔다.
예비 마족은 수인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선입견이었다.
그들이 본래 섬기던 신을, 인간들의 신이 공허의 변방으로 유폐시켰기 때문이다.
포악하며 잔인한 신이라는 이유였다.
인간과 대적하다 몰락한 종족의 흔한 말로이기도 했다.
인간과 같은 신을 섬기는 다른 종족들과 달리, 수인은 아직도 공허에 갇힌 신을 섬긴다는 소문이 팽배했다.
물론 이안이 알기로도, 그게 아예 헛소문인 건 아니었다.
"어디다 이를 드러내는 거지? 송곳니 다 뽑히고 싶냐?"
"...."
잠깐의 긴장감은 이안의 한마디에 바로 끝이 났다.
시선을 돌린 샬롯이 이안의 뒤편에 주저앉았다.
루시와 시선을 교환한 미구엘이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동안 별의별 꼴을 다 본 덕인지, 벌써 적응을 끝낸 모양이었다.
"그럼… 슬슬 다시 출발할 준비만 하면 되겠소."
이윽고 미구엘이 덧붙였다.
이안이 그를 턱짓했다.
"너만 괜찮아지면."
"그러니까, 갑시다."
"벌써 가자고?"
"팔이 잘린 거지 다리가 잘린 건 아니잖소. 몸이 좀 쑤시긴 한데,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오."
끙, 침음하며 일어선 미구엘이 이내 덧붙였다.
"충분할 것 같소. 마차는 한 손으로도 몰 수 있으니까, 갑시다. 여기서 또 밤을 보낼 순 없잖소."
"하루만 더 쉬어요. 이제 쫓아오는 사람들도 없잖아요. 그러다 상처가 덧나면, 그게 더 큰 일이라고요."
루시가 반대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야. 가다가 송장 치울 순 없지."
"괜찮다니까 그러시네…."
"그러니까, 넌 뒤에 타서 길잡이나 해라."
"엥? 그럼 마차는 누가 몰고?"
이안이 대답 대신 샬롯을 돌아보았다.
샬롯이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나보고, 마부를 하란 말이냐?"
"정확히 알아들었군. 길잡이는 미구엘이니까, 이놈이 가라는 대로 마차를 몰아라."
"...."
샬롯의 시선이 미구엘에게로 향했다.
미구엘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잘해 보자고. 이름이, 샬롯이랬나?"
"이런… 젠장할…."
귀를 부르르 떤 샬롯이, 이윽고 벌떡 일어나 마차로 향했다.
제국 상단의 상단주 직속 호위병에서 마부로 전락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일행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차 때깔 한 번 죽이는군. 하다못해 마차조차 제국제가 더 좋다니. 기가 막힌 일 아니오?"
검은 마차의 짐칸.
피 묻은 바닥에 모포를 깔고, 그 위에 로브와 망토를 덮은 채 편안하게 기댄 미구엘이 웃음 지었다.
하비에르가 앉던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은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확실히, 편하긴 하군."
어깨에 기댄 루시를 확인한 미구엘이 이안과 눈빛을 교환하고는 미소 지었다.
"출발해도 될 것 같은데? 다시 관도로 나갈 거니까, 말 머리부터 돌리라고. 샬롯."
"...."
대답 대신 낮게 그르렁댄 샬롯이 고삐를 후려쳤다.
마차가 잿빛 숲을 가로질렀다.
그 후로 더 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려진 땅을 건넌 일행은, 무사히 북부 외곽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067화
루 사드 왕국, 글루미르.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크고 부유한 이 영지는 마족, 그것도 흡혈 일족이 지배하는 땅이었다.
글루미르 외곽에 위치한 미로 저택이 바로 그들의 본거지였다.
제국 양식으로 지은 3층짜리 대저택. 미로 저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저택에 딸린 거대한 정원이 미로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저택 역시 보기와 달리 어둡고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저택을 몇 번 방문해 본 이들 조차, 잠깐 방심하면 길을 잃을만큼.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대륙을 통틀어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미로 저택의 주인인 니그리안테 백작 부인과 마주 앉은, 후드를 눌러쓴 사내도 그중 하나였다.
"부인께서 잃어버린 어린 양은, 되찾으셨습니까?"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로브에는 금실로 커다란 원이 수놓아져 있었다.
루 솔라의 상징.
하지만 백작 부인은 문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흡혈 일족은 제국과 교단에 복속된 지 오래였다.
불로와 불사의 비밀을 연구하는데 협조하는 것을 대가로, 그들은 제국과 가장 가까운 변방 왕국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는 바로 그 부분을 관리하는 자였다.
"애석하게도… 아직이에요. 사제님."
결론부터 말한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홀리게 될 미소였지만, 사제라 부르는 눈앞의 이 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되어가는 모양이더군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실험체가 될 거예요. 단지 요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생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쳐 있는 것 같거든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부인은 긴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더욱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 자는 루 솔라의 광신도였다.
원한다면 미로 저택 전체를 빛으로 뒤덮어 버릴 수도 있는.
부인이 그의 정체와 얼굴을 밝히려 애쓰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오히려 안전한 법이었다.
"얼마 전, 벨 론데에서 그 아이의 행적을 발견했어요. 일족의 심판자를 파견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부인께는 다행스럽게도, 우리 계획에 작은 차질이 빚어진 상태입니다."
우리가 정확히 누구를 뜻하는지는 부인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의 계획은 얼핏 알고 있었다.
"변방에 더 짙은 어둠이 깃들게 할, 그 계획 말씀이시군요."
"빛이 더 밝고 찬란하게 빛나기 위한 계획이지요."
사내의 정정에 부인은 미소로 화답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달라질 것은 없을 겁니다. 여신께선 예상할 수 없지만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주시는 법이니까요."
"부디 잘 해결되시길 바라요."
내뱉으며, 부인은 가장 미친 건 광신도가 아니라 루 솔라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역겨운 빛의 여신은, 신도들이 그저 자신을 열성적으로 섬기기만 한다면 무슨 짓을 벌여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눈앞의 이 사제에게 그토록 강대한 신성을 내려줄 리가 없었다.
"그리될 겁니다. 부인께서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반년의 기한을 더 드리겠습니다."
내뱉은 사제가 일어섰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다음엔… 새로운 양이라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기꺼이."
사제가 몸을 돌렸다.
부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그가 문을 나선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서랍에서 소녀의 피로 담근 혈주를 꺼내며, 그녀가 읊조렸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
사실, 그녀는 사제가 말한 변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겔 란의 구원자이자 벨 론데의 학살자. 그저 이름만이 알려진 출신 불명의 용병.
일족이라 부르고 싶지도 않은, 그 이종족 실험체 계집의 행적을 추적하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부디 더 어지럽혀 주길."
저들이 일족의 귀중한 진혈을 탐낼 여력이 없도록.
진심을 담아 기원하며, 부인은 혈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
내쉬는 숨결에 입김이 서렸다.
의자에 축 늘어진 이안의 얼굴에는 홀가분함이 감돌았다.
이제 몇 시간이면 화로의 사원에 도착할 터였기 때문이다.
루시와 미구엘을 그 안에 넣어주기만 하면. 이 길고 긴 의뢰도 마침표를 찍게 되리라.
그리고 나서는 곧바로 인근의 마을부터 들를 생각이었다.
재정비와 휴식도 필요했지만, 뜻밖에도 가장 급한 건 목욕이었다.
몸에서 하수구 냄새가 났으니까.
"아무래도, 라르무트에선 하비에르를 믿지 않은 모양이군."
문득 샬롯이 내뱉었다.
이안이 눈동자만 움직여 그녀의 뒤통수를 올려다보았다.
"알아듣게 말해."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뭐라고…?"
자세를 바로 한 이안의 미간이 이내 구겨졌다.
관도를 따라 이어진 언덕 중턱에, 모닥불을 피운 채 기다리는 판금 갑옷 차림의 사내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 넷. 둘은 기사였고 둘은 종자로 보였다.
"저자들이 우릴 기다리는 건진 어떻게 알고?"
그들을 보고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린 미구엘이 물었다.
샬롯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문장이 보이지 않나? 벼락 기사단이다."
"벼락… 기사단?"
"라르무트의 친위 기사단이지."
"이런 염병할… 다 끝난 줄 알았더니."
미구엘이 탄식했다.
이안의 미간도 절로 구겨졌다.
라르무트는 루시가 루 엔테르의 은총을 받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행선지를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 소식을 듣자마자 만일을 대비해 최정예 기사들을 파견한 모양이었다.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사원에 도착하기 전에 루시를 가로챌 생각이리라.
루시를 손에 넣으려는 의지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철저할 줄이야.
'역시 통수는 방심한 순간에 맞는 건가….'
이안은 게임에서 벼락 기사단과 싸워 본 적이 있었다.
미쳐버린 채로도 마경이 된 성을 지키던 중간 보스들.
당연히 끔찍하게 강했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숫자는 그때보다 훨씬 적지만, 그렇다 해도 강할 게 분명했다.
지친 상태로 상대한다면 더더욱.
마차를 발견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기사들을 눈에 담던 샬롯이 이윽고 웃음 지었다.
"멋지군. 벼락 기사단이라니."
"지원군이 와서 신나셨나 보군."
미구엘이 비아냥댔다.
샬롯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저들이 날 살려줄 것 같나?"
"...? 멋지다며."
"멋진 죽음이 될 거란 얘기다. 이 꼴로 오래 사느니, 저들과 싸우다 죽는 게 훨씬 아름답겠지."
"...."
"저들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들이다. 게다가 회색 마탑의 정수가 담긴 무구로 무장하고 있지. 결말은 정해져 있겠지만, 아름다운 전투가 될 거야."
미구엘이 말문이 막힌 듯 입만 뻐끔댔다.
이안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결말을 정해?
"싸워 보기도 전에 죽을 생각부터 하다니. 꼬리가 잘리더니 야성도 잃었나 보군."
샬롯이 발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내 야성은 무사하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제아무리 강자라도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지면 죽어."
천천히 목을 풀면서, 이안이 샬롯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게 내가 아는 사실이다."
"...."
이번엔 샬롯이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됐다.
이안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수치스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이안의 눈빛은 전혀 삶을 포기한 자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투사의 눈빛.
"마차를 멈춰라!"
그때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말에 올라탄 기사들이 옆구리에 장창을 끼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 둘뿐임에도 이안의 육감이 경고를 보냈다.
'졸라게 세다 이거지.'
이안은 몸을 일으키며 내뱉었다.
"미구엘, 전투가 시작되면 우회해서 언덕을 넘어라.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사원으로 가."
"아, 알겠수…."
기사의 목소리가 재차 이어졌다.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 준 네놈들의 저력에 찬사를 보내마! 하지만 여기까지다! 순순히 영애를 넘긴다면 고통 없는 죽음을 약속하지!"
거참 기사다운 짓거리군.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마차 옆으로 뛰어내렸다.
그의 뒤로 쌍검을 뽑아 든 샬롯이 몸을 낮춘 채 착지했다.
마차 앞으로 나서는 둘의 모습에 기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는 거군."
생각을 바꾼 듯 말에서 내린 그들이 창을 던지고는 검을 뽑았다.
파치칫, 갑옷을 타고 번진 푸른 스파크가 검을 타고 흘렀다.
이안과 샬롯의 전신에도 바람이 휘몰아쳤다.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기사들의 걸음도 빨라졌다.
이윽고 양측이 서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충돌이 임박한 순간.
화르르르-!
"...?!"
그들 사이로 샛노란 불의 장벽이 피어올랐다.
눈을 치켜뜬 이안이 멈춰 서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네가 한 거냐는 눈빛.
이안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이건 마법이 아니었다.
신성력을 연료로 타오르는, 성화.
권능을 발현한 자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덕 정상에 신성력을 머금은 기수가 팔을 치켜들고 있었으니까.
그 좌우로 서른이 넘는 기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를 멈추시오!"
사제복을 걸치고 손에는 메이스를 움켜쥔 자들이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소리쳤다.
'루 엔테르의 사제들이군.'
이안이 검을 늘어뜨렸다.
사제들은 반으로 나뉘어 절반은 마차를 호위하고, 절반은 두 기사를 포위했다.
사제 중 하나가 말했다.
"무기를 거두시오. 여긴 타오르는 여신의 권역이오."
치칫- 파치칫-
기사들은 여전히 푸른 전격이 맺힌 검을 움켜쥔 채 사제들을 돌아보았다.
"우린 라르무트 영공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왔소. 그대들이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이라 하나, 무관한 공무를 방해할 권리는 없소."
"무관하지 않소. 여신의 은총을 받은 아이가 관계된 이상."
"그대들이 우리를 염탐하는 걸 알면서도 놓아둔 것은, 어디까지나 자비를 베푼 것이었소. 하나,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영공 전하의 진노가 사원으로 향할 것이오."
노골적인 협박.
그에 대답한 건 사제가 아니었다.
"그대들은 영공께서 왜 그대들을 사원이 아닌 이런 장소에서 기다리게 한 것인지 까진 헤아리지 못한 모양이군요."
여인의 목소리.
사제들이 간격을 벌리고, 로브를 눌러쓴 여사제가 앞으로 나섰다.
성화를 일으킨 장본인.
그녀가 눌러 쓴 후드를 벗으며 내뱉었다.
"가서 영공께 전하세요. 루 엔테르를 섬기는 체르윈 아스트레이아가 기꺼이 기다리고 있겠다고."
금발과 붉은 눈이 드러났다.
"아, 아스트레이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마마…!"
탄식한 기사들이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미 검에 맺힌 전격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눈앞의 이 여사제가 제국 황실의 직계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다른 의미로 놀라워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로의 성녀. 실물을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게임에서 화로의 사원에 들른 3 챕터 중반부, 그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꺼져가는 성화를 되살리기 위해 화로의 불씨에 자신의 몸을 바친 것이다.
덕분에 화로의 불길은 되살아났지만, 사제들은 광기에 빠졌다.
성녀의 유지를 이어받는다며 인간을 바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제물 의식의 종지부를 찍은 건, 물론 이안이었다.
그는 모든 사제를 죽이고 화로의 성화를 꺼뜨렸다.
루 엔테르의 신격을 떨어뜨린 것이다.
대륙을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은 결과라는 사실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젠 사라진 미래겠지만.'
그사이, 기사들이 물러났다.
루시와 미구엘이 사제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체르윈이 말에서 내렸다.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불씨의 운반자여. 화로의 사원이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상대의 종족과 신분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 정중한 태도였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루시에게로 향했다.
"반갑구나. 오래 기다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시페르 애쉬 리우렐이에요."
루시가 깍듯이 인사했다.
루시페르라고…? 생각하며 이안이 미구엘과 시선을 교환하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저는 이제 바로 사원으로 가게 되나요?"
"그래. 너는 나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하게 될 거란다. 장차 내 역할을 이어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저는, 마법을 배우고 싶은걸요."
"놀랍게도, 타오르는 여신의 신성은 적색 마법과 비슷한 부분이 많단다. 나도 여신의 뜻을 섬기기 전엔 적색 마법사였어. 중요한 건, 네가 내면의 열정을 잃지 않는 것이지."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고, 사제들의 호위 아래 사원으로 향했다.
미구엘이 마차와 나란히 걷는 체르윈을 문득 돌아보았다.
"그, 그런데 저희가 오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요?"
"한 달여 전쯤,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화로의 불씨가 운반되리라고요."
"신탁이요…? 여신께서 직접…?"
미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주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한 달여 전이라면, 그가 퀘스트를 받은 시점과 겹쳤으니까.
'어지간히 절박했던 모양이군. 하긴, 신격이 추락하고 있었을 테니.'
"제국의 기사들이 마을에 머무는 것을 보면서, 저들이 불씨를 가로채려 한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죠. 축객령을 내릴 명분이 없어 지켜보기만 했을 뿐.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미구엘이 다시금 눈치를 살폈다.
잠시 머뭇거린 그가 덧붙였다.
"사원에 들어가면, 저랑 루시는 당분간 나올 수 없는 겁니까?"
"견습 기간에는 사원 외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이 철칙이니까요."
"어… 그럼… 사원에는 내일 가고, 마을에 먼저 들르면 안 되겠습니까?"
"...?"
체르윈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미구엘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꿋꿋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 긴 여정이 끝났는데, 술 한 잔도 하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어서 말입니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회식을 챙긴다고?
#068화
"...."
체르윈이 눈을 끔뻑이는 가운데.
"그렇다면, 제가 호위하며 마을로 모시겠습니다!"
"저도…! 새 불씨를 모시겠습니다!"
득달같이 돌아본 사제들이 연달아 소리쳤다.
거의 모든 시간을 사원에서 보내는 그들의 삶은, 기본적으로 금욕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로가 꺼져 가던 요즘은 더더욱.
사제들의 뜨거운 눈빛에, 체르윈이 결국 웃음 지었다.
"그럼, 다 같이 가도록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