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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8

***

콰장창창-

대포알처럼 튕겨나가며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인상이 구겨졌다.

휘몰아치는 방벽과 바람 칼날의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보통 사람이었다면 뼈가 으스러졌을 충격이 이어졌다.

검을 그냥 놔 버리지 않았더라면 손목 정도는 진작에 부러졌으리라.

물론, 이안이 인상을 구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작부터 최종 페이즈인 건 진짜 선 넘었지.'

이 망령 거인, '관문을 지키는 자'는 게임에서도 싸운 적이 있는 네임드 몬스터였다.

그리고 놈의 첫 번째 페이즈는 물리적인 공격이 전부였다.

마을 밖으로 나간 것도 놈의 대검에 쑥대밭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였을 뿐.

이안은 게임에서 했던 것처럼, 놈의 갑주를 차근차근 부수며 최대한 안전하게 전투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저놈이 곧바로 최종 페이즈에서나 쓰던 스킬들을 쏟아내기 전까지는.

물론, 그도 변수를 어느 정도는 대비하고는 있었다.

저건 애초에 여기서 출몰하는 놈이 아니었던 데다가.

"찬탈자여-!"

게임에선 한 적도 없던 저런 개소리를 지껄여 댔고. 결정적으로 전투 시작과 동시에 퀘스트까지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시작과 동시에 최종 페이즈로 넘어가는 수준이란 것까진, 예상할 수 없었다.

지금까진 그저 새로운 공격 방식이 튀어나온다거나, 단계가 빠르게 올라가는 정도의 변수가 전부였었으니까.

촤아아악- 쿠웅-!

구르던 몸이 나무 둥치에 부딪히며 멈췄다.

속에서 피비린내가 치미는 걸 느끼면서도, 이안은 팔다리의 감각을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전부 움직일 수 있었다.

'멀리까지도 튕겨 나왔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내리찍었던 대검을 치켜드는 관문을 지키는 자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 하거나- 증명 하라-!"

놈이 이안을 돌아보며 포효했다.

타오르는 듯한 푸른 안광.

오냐, 해 주마. 씹새야.

입에 고인 피를 탁 뱉은 이안이, 아공간에서 사령 술사의 지휘봉을 꺼내 들며 일어섰다.

#080화

끼아아아아-

달리기 시작한 이안의 귓가로 귀곡성이 메아리쳤다.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이안이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꺼내든 이유는, 당장은 그것밖에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에게 단죄의 검보다 좋은 무기는 없었고.

저 망령은 코어라 할 수 있는 두개골을 제외하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비정형의 마물이었다.

갑주를 먼저 벗기는 것은 코어를 찾아내기 쉽게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곧바로 최종 페이즈로 넘어간 지금은 여의치 않아 보였다.

적어도 단죄의 검 없이는.

저놈을 피해 검을 찾으러 뛰어다닐 수는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마법뿐이었다.

'…마법만으로 싸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때, 관문을 지키는 자가 그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불과 몇 걸음 만에 도약한 놈이 대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콰아아-

검신을 타고 번지는 짙푸른 색의 오염된 마력.

검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안은 속도를 줄이며 회피할 준비에 들어갔다.

다음 순간, 놈이 착지와 함께 대검을 내리찍었다.

콰과과과과과-

충격파가 흙먼지와 눈을 사방으로 튀기며 몰려들었다.

'아무리 산맥 주변만 돌아다니는 놈이라도, 이런 위험한 마물은 토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며, 이안이 몸을 날렸다.

전신을 휘감은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콰르르르-

충격파가 사그라들었다.

폭격이라도 당한 것 같은 흔적.

하긴, 이런 괴물을 토벌하려면 최소한 성기사급 지휘관이나 상위 마법사. 그도 아니라면 격을 쌓은 야만 전사가 동원되어야 할 터였다. 보통 병사들은 그저 고깃덩이가 될 테고, 언데드로 되살아날 뿐이리라.

거기다 이놈은 본래 아히고른 산맥 인근을 배회하는 망령이었다.

자신처럼 아직 거인 왕국이 존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 나간 언데드 군단을 부리면서.

그리고 산맥엔 무수한 망자가 파묻혀 있었다.

그래서 게임에서의 놈은, 거의 무한대로 망자를 일으켜 댔다.

그런 부분에선 지금이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여긴 눈 덮인 산속도 아니고, 놈이 이끌고 온 수십 마리의 언데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이놈이 산맥과는 거리가 먼 이곳에 나타난 건, 아마도 이안의 손에 새겨진 문양 때문일 터였다.

'찬탈자 어쩌고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저놈이 지킨다는 관문이, 산맥 지하의 유적이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래서 내가 왜 찬탈자인 건데.

답 없는 의문을 뇌까리며, 이안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콰르르르-

허공에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라, 대검을 회수하는 관문을 지키는 자에게 날아들었다.

놈이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실 가려야 할 얼굴 따윈 존재하지도 않건만.

저 정신 나간 망령은 정말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는 듯, 방어 자세를 견고히 했다.

콰과과광-

폭발과 함께 놈이 밀려났다.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달리며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적색은 반감이고 청색은 면역이었던가.'

치켜든 마법봉 끝에 어느새 잿빛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파치칫- 파칫-

그 사이로 번지던 푸른 스파크가, 이윽고 뇌전 자락이 되어 줄기줄기 번졌다.

폭발이 가라앉을 때쯤 주문을 완성한 이안이 마법봉을 내뻗었다.

콰치치치칙-

번개 돌풍이 망령 거인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짙푸른 안광이 드러났다.

"■■하군…!"

소리친 망령이 얼굴 앞을 가렸던 팔을 그대로 내뻗었다.

슈화악-!

그림자가 솟구치듯 놈의 발아래에서 치솟은 오염된 마력이 돌풍과 맞부딪혔다.

콰지지지직-!

눈부신 섬광. 뇌전 줄기가 마력을 찢어발기며 흩어졌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몸이 아니라 마력으로 막은 것만 봐도, 약점이 바뀌진 않은 건데.'

이 정도 거리에선 저놈의 방어를 뚫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전격 계통의 회색 마법은 시전 시간이 너무 길었다.

시발, 결국은 또 근접전인가?

"찬탈자여-!"

그 순간 망령이 다시 돌진하기 시작했다.

놈의 움직임은 둔중해 보이지만, 사실 어지간한 인간이 전력 질주하는 것보다도 빨랐다.

작은 건물만 한 거인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사정거리 까진 두세 걸음쯤.'

그때 주문이 완성됐다.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일렁이고.

콰아아아-!

거대한 화염 장벽이 놈의 앞을 막아서며 솟구쳤다.

주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안은 곧바로 혼돈력을 더해, 중급 청색 마법인 빙하 방벽을 시전했다.

멈추지 않고 화염 장벽을 통과하려던 관문을 지키는 자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솟아오른 얼음의 성벽에 어깨를 들이받았다.

쿠웅-

빙하 방벽 한복판에 균열이 일었다.

혼돈력을 섞지 않았다면 지휘봉의 증폭을 받았더라도 저 돌진을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콰르르르-

화염 장벽이 망령을 뒤덮었다.

이안이 다음 마법을 펼쳤다.

콰아아아아-!

아스콜드에게 일격을 먹였던 중위 적색 마법, 일점 폭발.

화력이 집중되는 범위가 적어서 움직이는 적을 명중시키기는 쉽지 않지만, 지금처럼 거대하고 멈춰 선 적을 상대로는 강력한 화력만을 선보일 수 있었다.

"우오오오오-!"

불길 속에서 놈이 울부짖었다.

그 사이, 이안은 쉴 틈 없이 다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상 앞의 마법들은 모두, 이 주문을 완성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으니까.

파치칫- 치칙- 파치치치-

마법봉의 끝부분부터 피어오른 전격이 줄기줄기 번졌다.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차오른 번개가, 마법봉을 고치처럼 휘감고 흘러내려 이안의 팔목까지 세를 불려 갔다.

전격이 뿜어내는 빛이 점점 더 눈부시게 밝아지던 그때.

"결코 ■■■ ■ 없으리라!"

마력이 가득 담긴 포효를 토해내며, 불길에 휩싸여 있던 망령이 몸을 비틀었다.

콰과과과-

땅을 파헤치며 밀려든 대검이 빙하 방벽을 산산조각내고, 그 너머의 이안을 쪼개 버릴 듯 치솟았다.

"...!"

푸-화악-!

이안이 눈을 치켜뜬 것과, 일순간 눈에 보일 정도로 맹렬하게 휘몰아친 돌개바람이 그를 날려 버린 것.

그리고 마법봉에 맺힌 전격이 터져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극도의 위기감 속. 이안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그 모든 변화를 전부 인지했다.

대검에 실린 마력이 바람결을 찢어발기며 굵은 호선을 그리고, 마법봉을 떠난 연쇄 번개가 꽃을 피우듯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콰직-!

호선이 솟구치는 이안의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풍압만으로도 각반이 찢기고, 그 안의 허벅지에서도 피가 튀었다.

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며 멀어졌다.

이안은 그 모든 상황을 느리게 재생하는 영상처럼 눈에 담았다.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눈송이들.

그리고 그 너머, 작달막한 시골 마을이었을 폐허의 전경이 드러났다.

한복판의 반파된 집으로 드글드글 몰려드는 언데드들.

놈들 사이, 동굴을 지키는 곰처럼 날뛰는 테사이아가 보였다.

주위에 쌓인 뼈 더미도.

후웅-

몸이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 짧은 사이. 테사이아는 언데드 병사 하나의 팔뚝을 후려쳐 부숴 버리고,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었다.

휙 날아오른 그림자 매가, 지붕 위에 선 언데드의 두개골에 자신의 몸을 들이받았다.

'피가 꽤 부족할 텐데. 애쓰는군.'

생각하며 한 바퀴를 더 돈 그때, 어느새 언데드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린 테사이아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의 입 모양이 느리고 또렷하게 각인됐다.

-언제 와, 이 망할 짐승아!

그리고 그 짐승은 지금, 목책 바깥에 있었다.

후웅-

허공에서 몸이 또다시 한 바퀴 돌았다.

아무리 최대치로 증폭했기로서니, 시전자를 아예 날려 버리는 건 너무 과하지 않나?

새삼 생각하며, 이안은 샬롯을 눈에 담았다.

가뜩이나 새카만 그녀는, 먹물 같은 체액을 잔뜩 뒤집어써 번들거리고 있었다.

앞에는 양팔이 다 잘린 거인 전사가 쓰러져 있었고.

그녀는 한 자루는 어디다 팽개쳤는지, 한 자루의 칼만 손에 쥔 채로 놈의 목을 내리치고 있었다.

거인 전사의 목 두께는 나무 둥치에 필적해서, 한 번에 잘라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튄 검은 체액이 주변의 눈밭과 살롯의 전신을 점점 더 검게 물들였다.

쉬아아아-

귀곡성에 섞여 귓가를 울리던 바람 소리가 잦아들었다.

비상이 끝났다. 남은 건 추락뿐.

그 순간 이안은, 자신을 날려 보냈던 돌개바람이 아직 전부 흩어진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센 바람이 마치 바람 칼날처럼 그의 전신을 감싸 안고 있었다.

비슷한 속도로 떨어지던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로 역행했다.

추락사할 걱정은 없겠네.

거기까지 생각한 이안은, 문득 미구엘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그가 항상 발목에 숨기고 다니던 부적을.

'그걸 쓰면 바람이 멀리까지 날려 준다고 했었지. 그때도 어떻게 착지하는 건지 궁금했었는데.'

어쩌면 그 부적에 새겨진 마법은 가장 높은 수준의 휘몰아치는 방벽 이었는지도 몰랐다.

사용자를 그저 한순간 지켜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위험으로부터 이탈시켜 주는.

언젠가 본 스카이다이빙 영상의 한 장면처럼 자세를 다잡은 이안은, 비로소 눈부시게 빛나는 아래쪽을 바라봤다.

빙하 방벽과 화염 장벽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대검을 타고 번진 연쇄 번개가, 관문을 지키는 자의 전신을 질주하고 있었다.

파치치치치칫-

두꺼운 갑주는 수천 가닥의 전격 앞에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전신을 뒤덮은 뇌전이 한 번 번쩍일 때마다 망령의 덩어리가 뭉텅이로 증발하는 게 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놈의 짙푸른 안광이 놀라움과 고통을 머금고 휘청였다.

비로소 이안은 쥐고 있던 마법봉을 놈을 향해 내밀었다.

파직- 파지직-

마법봉을 중심으로 돌개바람이 휘몰아쳤다. 푸른 스파크가 결을 따라 번지고, 말려 들어간 눈송이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주문이 완성될 때쯤엔 추락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관문을 지키는 자를 고치처럼 뒤덮었던 전격도 반 이상 흩어진 채였다.

완성된 번개 돌풍이 뻗어 나갔다.

파지지직-

새파란 뇌전을 가득 머금은 돌풍이, 이번에는 오염된 마력에 막히는 일 없이 놈에게 도달했다.

파치치치칫-!

눈부신 섬광과 함께, 전격이 망령의 전신을 휩쓸었다.

흩어지던 연쇄 번개가 다시 빨려들어 망령의 덩어리를 태웠다.

휘아아악-

뒤이어 다시 한번 몰아친 돌개바람이, 추락하던 이안의 몸을 낚아채듯 솟구치게 했다.

이안이 가볍게 착지했다.

한쪽 허벅지에서 저릿한 느낌이 번졌다. 이안이 인상을 살짝 찌푸릴 찰나 핑, 현기증이 일었다.

단시간에 마력을 다량으로 소모했을 때 흔히 일어나는 반작용.

'내일은 앓아눕겠군.'

생각하면서도, 그는 화염구를 연달아 만들어 냈다.

화르르르-

화염구들이 완성과 동시에 뻗어 나갔다.

관문을 지키는 자는 여전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감전당하고 있었지만.

이런 순간일수록 마무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그는 지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쾅-! 콰광-! 쾅!

폭발이 연달아 이어졌다.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관문을 지키는 자의 몸이 연기처럼 터져 나갔다.

철그렁- 철컹-

걸치고 있던 갑옷들이 폭발에 휩쓸려 튕겨 나갔다.

폭발이 이어질수록 놈의 크기가 점점 더 작아졌다.

이안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쉬지 않고 화염구를 만들어 날려 댔다.

치명타를 입은 적을 마무리하는 건, 시전 속도가 짧고 단순한 마법일수록 좋았다.

쾅-! 쾅!

마침내 그가 멈춰 섰을 때, 관문을 지키는 자는 검은 진흙을 뭉쳐 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허리 어름까지 오는 놈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다시 화염구를 만들어 냈다.

콰앙-!

검은 덩어리가 폭발에 휩쓸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밭에 흩뿌려진 점액 같은 잔해가 이내 연기가 되어 증발했다.

흩어지고 남은 잔재 사이로, 커다란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두개골.

눈구멍에 맺힌 푸른 안광이 일렁이고, 놈의 턱뼈가 달싹였다.

"훌륭…■■…. 찬탈자여…."

마법봉을 툭 떨군 이안이, 대꾸도 하지 않고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닝글로슬의 난쟁이 장인이 만든 희귀 등급의 제국제 단검.

"■■… 영원한… 왕국이여…."

콰직!

역수로 쥔 단검이 놈의 두개골 한복판에 떨어졌다. 거미줄 같은 균열이 일면서, 그 사이로 짙푸른 마력이 연기처럼 번져 나왔다.

푸화악-!

한 번 더 내려치자 비로소 두개골이 부서졌다.

모든 구멍에서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절규에 가까운 귀곡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푸른 빛 한 줄기가 이안의 손아귀로 빨려들었다.

"...?"

이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공명이 순식간에 잦아들고 있었다.

문양 내부의 마력이 잠든 것처럼 고요해졌다.

퀘스트 완료 창이 이어졌다.

자격의 증명.

"찬탈자의 자격을 증명했다… 이건가?"

읊조린 이안이 덩그러니 남겨진 거인의 두개골을 내려다보았다.

후두둑, 발아래의 눈에 검붉은 동심원이 번졌다.

코피였다. 이어진 지독한 현기증에 주저앉은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손끝에 닿는 사령술사의 지휘봉을 움켜쥐었다.

귓가를 스치는 귀곡성. 곧바로 마법봉을 아공간에 쑤셔 넣은 그가, 흐르는 코피를 문질러 닦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역시…. 마법만 가지고 싸우는 건…."

나 같은 반쪽짜리가 할 짓은 못 되네.

생각하며, 이안은 몸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기절하고 싶었지만, 마을의 전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081화

광분해 날뛰던 언데드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푸른 안광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뭐야, 왜들 이래?"

테사이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퍼석-

언데드 하나의 두개골을 후려친 샬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슨 상관이지? 그냥 다 처리하기나-"

끼- 아아아악-

끄오오오오-

언데드들이 절규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덜그럭대는 뼈 소리가 사방에서 이어졌다.

빠각!

잠시 고개를 갸웃한 샬롯은, 곧바로 다시 놈들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기 시작했다.

언데드들이 다시 달려든 건 그 직후였다.

하지만 놈들의 움직임은 광분했다기보단 혼란에 휩쓸려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샬롯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건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콰직-! 빠각!

난폭할 뿐 별것 아니던 놈들은, 움직임까지 어설퍼진 후로는 더더욱 둘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십여 마리의 언데드들이 뼈 더미로 되돌아갔다.

남은 건 불과 서너 마리.

퍼석!

한 놈은 샬롯의 주먹에 머리가 박살 났다.

빠각-!

또 한 놈은 달려든 테사이아의 양손에 두개골이 으스러졌다.

그사이 샬롯이 다른 한 놈을 더 박살 냈고.

빠각-

마지막 놈은, 뒤통수를 뚫고 파고든 단검에 푹 고개를 떨궜다.

파스스-

안광이 증발하고 뼈만 남은 몸이 우수수 허물어졌다.

샬롯과 테사이아는 이미 놈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 선, 단검을 던진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들 했다."

폐허의 전경을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테사이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고생은 이안이 가장 많이 한 것 같은걸."

이안은 전투가 위험하고 격렬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눈이 섞여 진흙처럼 변한 흙이 온몸에 범벅이었고, 머리는 산발. 입가에는 피가 찐득하게 늘어 붙은 데다, 각반은 찢겨 나가 덜렁댔다. 그 아래로 드러난 두툼한 내복은 핏물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건 그렇지."

절뚝대며 걸음을 옮기던 그가, 이내 샬롯을 돌아보았다.

"난 쉴 거다. 테사가 내 곁으로 오지 못하게 해. 피를 많이 흘렸으니, 참기 힘들 거야."

샬롯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테사이아는 이미 이안의 허벅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가 남은 번들대는 붉은 눈에 갈증과 욕망이 뒤엉켰다.

꾹, 샬롯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알았다. 그렇게 하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대로 테사이아의 얼굴을 후려쳤다.

빠악-!

"아악!"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른 테사이아가, 성난 짐승처럼 자세를 잡으며 샬롯을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야? 미쳤니?"

"한 번만 더 이안을 보면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송곳니를 전부 뽑아 주지. 다시 자랄 때마다 계속."

"이건 그냥 어쩔 수 없는 현상이거든? 네가 게으름을 피워서 힘을 너무 많이 썼단 말이야! 쥐라도 한 마리 잡아 주고 지랄하든가!"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둘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모닥불로 걸어간 이안은, 모포를 꺼내 펼쳤다.

"...."

그는 모포 안으로 기어 들어가, 곧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안! 이 짐승이 한 짓은 절대로 그냥… 이안?"

"…?!"

서로에게 악다구니를 쓰던 뱀파이어와 수인이, 뒤늦게 그를 돌아보며 눈을 치켜떴다.

그가 기절하듯 잠든 것임을 깨달은 둘의 얼굴에 안도가 스친 것도 잠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샬롯이, 이안의 모포를 등지고 앉아 테사이아를 노려보았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눈빛.

손에 쥔 검을 까딱이는 채였다.

"그렇게 안 봐도,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거 없거든?"

콧방귀를 뀐 테사이아가 몸을 돌렸다. 샬롯이 덧붙였다.

"어딜 가는 거지?"

"쥐 잡으러 간다. 버리고 가지 않을 테니까, 조용히 주인님이나 지키고 있으렴. 야옹아."

"...."

비로소 폐허가 된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송이들만이, 소리 없이 마을을 감싸 안았다.

***

악몽의 잔재는 빠르게 흩어졌다.

지끈거리는 두통. 약간의 현기증과 무기력함을 느끼며, 이안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

다음 순간, 그는 그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머리가 모포 옆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두개골 위에 피부만 씌워 놓은 것 같은 끔찍한 몰골.

텅 빈 눈구멍 너머의 어둠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

거인의 머리통을 잠시 내려다본 이안이, 이윽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걸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신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못 박아 둬야겠다고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머리통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단죄의 검이 놓여 있었다.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샬롯이나 테사이아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심지어 반쯤 부서진 커다란 두개골도 그 옆에 있었다.

어제 그가 죽인 관문을 지키는 자의 잔해였다.

'무슨 트로피처럼 전시해 뒀군.'

현실감을 단숨에 돌아오게 만들기엔 충분한 광경이었다.

쓴웃음을 지은 이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한참은 잔 것 같은데도 여전히 기운이 전혀 없었다. 두통과 현기증.

몸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마력 탈진 증상이었다.

게임 캐릭터였을 시절의 자신에게 새삼스러운 미안함이 들었다.

툭하면 마력을 죄다 갈아 넣고 마력 탈진 상태에 빠뜨렸었으니까.

이런 줄도 모르고, 비실댄다고 욕만 했었다니.

'…그 업보까지 돌려받는 건지도.'

생각하며 고개를 든 이안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지붕과 모닥불이 있는 야영지 건물의 경계선 너머, 새하얗게 변한 마을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절한 후로도 한참 더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아직 하늘에 구름이 덮여 있어 녹지 않은 건지, 이제 여기까지 설원 지역이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되면 느낌이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당장은 상념이 싹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광경이었다.

"어머. 잘 잤어, 이안?"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늑대 로브를 푹 눌러쓴 그녀가, 양손에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들을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한나절쯤?"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온 테사이아가, 모닥불 옆에 나뭇가지를 우르르 떨어뜨렸다.

가지 몇 개를 다시 집어 들어 눈을 털고 마구잡이로 부러뜨리는 그녀를 보며 이안이 피식댔다.

"용케도 기운을 회복했군. 내 피도 안 빨았고 말야."

"정말 군침이 돌긴 했지만, 잘 참았어. 대신 마을을 뒤져서 쥐를 몇 마리 먹었지."

"샬롯이 감시를 잘했나 보군."

"네 충실한 야옹이는 물론 해 뜰 때까지 잠도 안 자고 감시했지만. 그게 아니어도 참았을 거야. 잘못하면 네가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얹은 테사이아가 그 옆에 앉았다.

"어쨌든, 난 네 부탁을 훌륭하게 완수했어. 이안."

그녀가 뽐내듯 양팔을 들었다.

이안은 그제야 그녀 등 뒤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마른 풀을 질겅대는 말들은, 아주 평온해 보이는 상태였다.

"그래. 고생했다."

테사이아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내 그녀가 활짝 미소 지었다.

"정말 그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역시 그렇지?"

낮이라 그런지, 뱀파이어보단 그저 요정처럼 보이는 미소였다.

딴에는 노력하고 있다, 이거지.

피식한 이안이 덧붙였다.

"샬롯은?"

"뭘 좀 잡아 오겠다던데. 모르겠어, 알아서 오겠지. 네 야옹이니까."

"…그렇군."

사냥이라도 가나 건가? 설마 또 마물을 들고 오는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이안은 옆의 짐가방에서 수통과 육포를 꺼냈다.

상당히 좋은 가죽 부대 수통이었는데, 이것도 닝글로슬에서 의뢰의 보수로 받은 물건이었다.

테사이아가 나른한 얼굴로 짐가방에 기대 누웠다.

물로 입을 축이고 육포를 뜯어 입에 넣은 이안이, 말없이 턱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려면 입맛이 없어도 먹어 둬야 했다.

지난밤의 기억이 절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슬슬 조금씩 빡세지기 시작하네.'

이안은 간만에 게임일 때부터 이어져 온 자신의 고질적인 약점을 실감했다.

소위 말해 압도적 한 방의 부재.

온갖 잡다한 스킬을 익히고, 능력치를 괴상하게 분배한 결과였다.

초반부. 한 번 해 본 경험. 그때는 없었던 동료나 자원 등 여러 요소가 더해져, 지금까진 어찌어찌 잘해 내고 있지만.

결국은 그래 봐야 망캐. 잘 쳐 줘야 잡캐였다.

관문을 지키는 자를 죽이려 쏟아부은 마법이 몇 개인지. 화력을 높이기 위해 마력을 더 많이 갈아 넣는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여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쨌건 관문을 지키는 자는 상대할 만한 위험이었고. 게임과 비교해서도 훨씬 수월하게 잡아냈다.

레벨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그때는 몇 번이나 죽어 가며 재도전한 끝에 아슬아슬하게 죽였었으니까.

게다가 아직도 남은 포인트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

'그냥 아끼지 말고 다 써야 하나.'

잠시 갈등한 이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통장에 여윳돈을 남겨 두듯. 능력치와 스킬 포인트는 항상 어느 정도 여유를 둬야 했다.

공허로 빨려들어 가거나 샬롯 같은 예상 못 한 강적을 만났을 때처럼, 급하게 능력치를 올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야 했으니까.

웬만하면 지능과 정신력 이외의 능력치는 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예상 못 한 위기가 오면 어쩔 수 없이 또 그래야 하리라.

스킬도 그랬다. 그가 가진 것들로 해결할 수 없는 수준의 저항력이나 전투력을 가진 적이 언제 튀어나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스킬 트리를 조금씩 넓혀가야 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속성의 스킬을 다 익히기로 한 이상 더더욱.

당장은 화력은 적색, 수비는 청색, 공수 보조는 회색, 비전은 다용도로 컨셉을 잡고 사용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회색의 화력이라든가 청색의 보조. 어쩌면 거의 올리지 않고 방치한 갈색이 필요한 순간도 생길지 몰랐다.

'외길만 걸었으면 할 필요도 없는 고민인데.'

이미 주워 담기엔 너무 많이 엎질러졌지.

짧게 혀를 찬 이안이 씹고 있던 육포 조각을 삼켰다.

물론 검술도 포기할 수 없었다.

어이없게도, 갈수록 실력이 좋아지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스콜드를 상대할 때도 그랬고.

관문을 지키는 자와 싸움을 시작한 순간에도 놈의 대검을 흘려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시도하진 않았지만.

어쨌건, 육탄전은 앞으로도 포기할 수 없는 분야였다.

이미 투자한 자원이 너무 많았다.

다른 클래스들과 달리 물리 공격과 관련된 스킬은 공용 스킬을 제외하곤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지금까지 그랬듯 실전을 통해 계속 실력을 쌓아나가야 할 터였다.

네임드를 넘어 보스급 적을 상대로도 계속 먹힐 수 있을 만큼.

'신경 쓸 거 많아서 참 좋네.'

속으로 비아냥대며 육포를 다시 집어 든 그때, 발걸음 소리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일어나 있었군, 이안."

샬롯이었다. 어깨에 웬 암사슴을 짊어진.

"정말 사냥을 나간 거였군."

이안이 육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눈밭 위에 목이 꺾인 사슴을 툭 떨어뜨린 샬롯이 덤덤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피를 제법 흘렸으니까. 신선한 고기를 먹어야 회복이 빠른 법이다."

이안의 표정이 묘해졌다.

"뜻밖이군. 둘다 날 이렇게 극진하게 보살필 줄은 몰랐는데."

"당연한 일이다. 네가 가장 강한 마물을 죽였으니까. 네가 싸운 흔적들을 봤다. 어떻게 싸운 건지 알 수도 없더군."

"그래서 샬롯, 내 껀?"

테사이아가 끼어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샬롯이, 허리에 매달아 둔 걸 던졌다.

"귀여운 토끼네."

가볍게 받아든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이안이 흘깃 보니, 토끼는 심지어 아직 살아 있었다.

말 그대로 숨만 붙어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밤까지 잘 살려 둬라."

"당연하지. 아직 살아 있을 때 먹어야 그나마 먹을 만하다구. 죽은 뒤에 시간이 좀 지난 건, 솔직히 말해서 끔찍한 맛이야."

테사이아가 부드러운 손길로 토끼를 쓰다듬었다.

그사이, 단검을 뽑아 든 샬롯은 사슴을 해체하고 있었다.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듯,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분리하고 관절과 근육을 따라 토막 내는 일련의 과정이 아주 빠르고 매끄러웠다.

"피를 빼진 않겠다. 그게 네가 회복하는 데 더 좋을 테니까."

"그런 건 사냥꾼 마음이지. 요리는 엉망이어도 해체는 잘하는군."

"부족에서부터 익힌 기술이다. 수인은 자식에게 가장 먼저 사냥부터 가르치지. 그걸 다루는 법도."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이안이, 나뭇가지 몇 개를 주워 이리저리 줄로 묶었다.

고기를 얹을 틀이 뚝딱 만들어졌다.

샬롯이 단검으로 허벅지 살을 크게 도려내 나뭇가지에 뀄다. 내장도 하나 뀄는데, 간이었다.

"회복에 가장 좋은 것들이다."

곧 불 위에 얹은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건너편에 앉은 샬롯은 심장과 고기를 생으로 씹어먹었다.

익힌 음식만 먹는 줄 알았더니, 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생충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건 몸속에서 다 소화될 거다."

"…글쎄다."

이안은 고기와 내장 모두 바싹 익혀 먹었다.

간도 되어 있지 않고 누린내도 꽤 났지만, 그래도 충분히 먹을 만했다. 짐가방 어딘가에 보수로 받은 암염 통이 있지만, 굳이 꺼내려 하지 않았다.

보존 식량에 비하면 이 누린내조차 호사였다.

"고기가 꽤 남았는데, 마차에 싣고 가겠느냐?"

"좋은 생각이군. 날이 이래서 금방 상하지도 않을 테니, 실어 둬라."

"알겠다. 그럼 하루 더 쉬고 출발할 건가?"

"아니. 준비해서 바로 출발하지. 이동하면서 쉬면 돼."

#082화

고기를 남기지 않고 먹어 치운 이안은, 곧바로 방한 바지와 거의 다 부서진 각반을 벗었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이라 아깝긴 했지만, 버릴 수밖에 없었다.

허벅지를 가로지르는 상처는 벌써 딱지가 앉아 아물고 있었다.

'회복력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은데.'

샬롯이 남은 고기와 야영지를 정리하는 사이.

아공간에서 여분의 방한복과 각반을 꺼내 갈아입은 이안은, 한 번 더 몸 상태를 점검하고는 단죄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거, 내가 찾아냈어."

이안을 구경하던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네가?"

"응. 이안 냄새가 나기도 하고, 그 칼에선 뭔가 역겨운 느낌이 들거든."

"들지도 못하더군. 그래서 내가 옮겼다."

말 고삐를 점검하며 샬롯이 덧붙였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들, 이러니저러니 해도 슬슬 쿵짝이 맞아 가는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나중에 어찌 되건, 당장은 삐걱대더라도 서로 호흡을 맞춰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 얼음 숲에 있는 망령이 어떤 놈이건,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니까.

"난 당분간 안 싸울 거다."

마차에 오른 이안이 말했다.

떠날 채비를 거의 끝낸 샬롯이 그를 돌아보았다.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어. 하루 이틀에 회복할 수준이 아냐."

"…어제 같은 괴물이 또 습격하면 어떻게 해?"

기어 올라온 테사이아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그놈 수준의 마물은 안 나올 거다.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무슨 자격?"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고."

샬롯을 돌아본 이안이 덧붙였다.

"그러니 당분간은 너와 테사가 싸워야겠다. 네가 주로 싸워야 할 거야."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

마부석에 오른 샬롯이 대답했다.

오히려 묘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

그녀가 마차를 돌리며 덧붙였다.

"어제 같은 강한 마물이 습격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싸워 보고 싶군, 얼마나 강할지."

거인 전사를 난도질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피식한 이안이,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내뱉었다.

"그리고 다신 내 머리맡에 마물의 머리를 가져다 놓지 마라, 샬롯."

"...."

"시체도 안 돼."

건물 밖으로 나온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눈 덮인 폐허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들어온 반대쪽의 출구로 향하면서, 샬롯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럼 발치에 가져다 놓는 건? 그것도 안 되겠느냐, 이안?"

"그거, 진지하게 묻는 거냐?"

"그렇다만…."

"하…."

시답지 않은 대화와 함께, 마차가 버려진 마을을 벗어났다.

새하얀 설원이 어느새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

"예쁘네. 어딜 봐도 온통 하얗고."

주위 풍경을 응시하며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마차는 설원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길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눈이 쌓이고 있었다.

그나마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안은 시간 대부분을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명상의 레벨이 높은 덕분에,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아도 명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테사이아는 그런 그를 신경도 쓰지 않고 떠들어 댔다.

"이안을 따라오길 잘했다니까."

"팔자가 좋군. 소풍이라도 가는 모양이지."

샬롯이 심드렁하게 비아냥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테사이아의 말에 대꾸하는 건 대부분 그녀였다.

"네가 뭘 알겠니, 야옹아."

테사이아가 혀를 찼다.

"난 한 번도 주변 경치가 어떤지 제대로 즐겨 본 적이 없어. 도시를 맘 편히 거닐어 본 적도 없지.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세상 한복판에 떨어져서 혼자 살아남는 게 어떤 건지, 네가 알기나 해?"

…잘 알지.

이안이 속으로만 대꾸하는 가운데, 샬롯의 코웃음이 이어졌다.

"건방진 소릴 하는군. 수인으로 대륙에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지."

"어떤 건데?"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너도 봤으니 알 텐데."

"그건 네가 무섭게 생겨서 그런 게 아닐까, 샬롯?"

"난 수인의 기준에선 충분히 아름다운 편이다. 거기다 특출나게 강하기까지 하지."

"그래. 하긴, 네 털은 부드럽긴 해. 윤기도 흐르고. 가죽을 홀랑 벗기고 싶달까."

테사이아가 로브 자락을 흔들었다.

"이 녀석처럼."

"...."

샬롯이 나지막이 그르렁댔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말을 이었다.

"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거야. 이안을 따라다니면서.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 빌어먹을 흡혈귀들도 전부 죽일 수 있겠지."

그녀의 시선이 주위의 설원과, 눈꽃이 핀 것처럼 솟은 나무들을 차근히 훑었다.

"내 진짜 자유는 그때부터 시작될 거야. 난 제국 곳곳을 돌아다닐 거고. 요정들이 모여 산다는 남부로도 갈 거야. 그들이 날 받아 주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저 확인하고 싶은 거니까. 내가 한때 누구였는지."

"...."

"그것만 알고 나면 안전한 변방으로 숨어들 거야. 거기서 나만의 은거지를 꾸리고 평온한 여생을 보내겠지."

그녀의 말투는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낭랑했다. 사실 본인도 그렇게 되리라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그러길 바라는 마음일 뿐.

그 사실을 눈치챈 이안은, 굳이 눈을 뜨지 않았다.

계속 자신과 함께하다 보면 결국은 그녀가 흡혈 일족 최후의 생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요정들에게 버림받은 후엔, 영원한 존재론적 고독에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굳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현재로선 끝내 자신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사실 역시.

"꿈같은 소릴 하는군. 저주받은 마족 주제에."

대신 핀잔을 준 건 샬롯이었다.

테사이아가 정곡을 찔린 듯 미간을 좁혔다.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냐."

"그렇다고 네가 마족이란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귀쟁아. 그딴 말은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에 불과해."

"…훌륭한 조언이네, 샬롯. 싸우다 죽는 게 삶의 목표인 미친년이라 그런가. 아주 현실적이야."

옆에 놓인 육포를 집어 든 샬롯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그건 가장 아름답고 명예로운 결말이다. 늙어 죽는 수인만큼 추한 건 없으니까. 싸우지도 사냥하지도 못하고, 그저 짐만 될 뿐이지."

"그래서 그 못생긴 인간의 뒤나 닦아 주며 산 거야?"

"뭐라고…?"

"난 네가 그 새카만 것들과 어울리는 것도 지켜봤어, 샬롯. 말 안장에 앉아서 거드름이나 피워 대는 게, 네가 떠들어 대는 전사의 삶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쳤다.

"영광스럽게 싸우다 죽고 싶다면서, 황금은 좋았던 모양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마라. 귀쟁아."

샬롯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테사이아가 미소 지었다.

"정곡을 찔렸나 봐. 부끄러워할 것 없어. 내가 본 인간들은 대부분 목숨 건 싸움보단 황금을 더 좋아했으니까. 날 붙잡았던 놈들도, 날 데려가면 황금을 궤짝으로 줄 거라며 좋아했었지."

"상단의 덕을 여럿 본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난 내 책임과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황금 따위, 내겐 별다른 의미도 없어."

"책임? 의무?"

"너희 귀쟁이들은 지킬 줄 모르는 명예지."

잠시 말을 멈췄던 샬롯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테사이아와 이안에겐 말해도 상관없다 여긴 것이리라.

"전사들은 성년이 되면 세상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한다. 일족의 번영을 위해서."

"그러니까, 널 위해 돈을 번 게 아니란 거야?"

"너희 귀쟁이들 덕분에 시작된 전통이지. 하지만 우리 수인은 고향을 잃었을 뿐, 뿌리까지 잃지는 않았다. 새로운 터전을 꾸렸지.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 땅이다. 아직은 작고, 비루하지만."

이안의 뇌리로, 게임에서 스치듯 본 적 있는 대사가 떠올랐다.

남부 외곽 깊숙한 곳 어딘가에 수인들의 도시가 있다는.

동시에 수인 용병들의 특출나게 비싼 몸값도 떠올랐다.

그게 그저 드물어서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번 돈은 대부분 일족을 위해 쓰였다. 땅을 구매해 영지를 넓히고, 다음 대의 전사를 키워내는 데에. 내 의무는 몇 년 남지 않았었다. 그 후엔 미련 없이 상단을 떠났을 거야. 그저 전사로 살았겠지.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기 위해서."

"그럼 네 일족은 지금, 굶고 있는 거야? 네가 여기 있어서?"

"멍청한 소릴 하는군. 세상에 나가 있는 일족의 전사는 나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더는 그것을 짊어질 필요가 없어진 후에도."

"아항…."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마족다운 미소를 지었다.

"아쉽겠어. 그 신성한 의무를 다하기 전에 이안의 애완 고양이가 되었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흔한 일이다. 많은 전사가 의무를 다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니까. 이렇게 꼬리가 잘리는 일은 드물겠지만. 나는 그런 운명도 받아들였다. 너와 달리."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이안과 함께 목숨 건 전투를 이어나갈 것이다. 꼬리를 되찾기 전에 죽게 될지라도 상관없어. 전사로서는 오히려 명예롭겠지."

"그래. 너 혼자 많이 죽으렴.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을 테니까."

"그게 축복일 것 같나?"

샬롯이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넌 영원히 낮과 밤을 다른 얼굴로 살아가야 하고, 그 저주받은 갈증과 충동에 시달릴 텐데도?"

"...."

테사이아가 순간 입을 뻐끔거렸다.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그녀도 아직 알 도리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뭐, 적당히 살다가 죽으란 얘기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렇게 핀잔을 주는 것뿐이었다.

샬롯이 어깨를 으쓱였다.

"살기 싫어지면 언제든 말하란 얘기다. 기꺼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할 테니까."

"그 축복은 내가 먼저 선사해 줄게. 아, 물론 우리 일이 다 끝난 다음을 얘기하는 거야, 이안."

"죽고 싶다는 말을 길게 하는군."

"...!"

이안이 대답할 줄은 몰랐는지, 테사이아가 숨을 들이켰다.

"깨어 있었어? 자는 줄 알았더니."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면서, 내가 푹 자길 바란 거냐?"

헛웃음을 지은 이안이 눈을 떴다.

"너희 둘은 한 몸이다. 잊지 마."

"저 미친 야옹이가 자꾸 싸우다 죽고 싶어 하는데, 그것까지 어쩔 순 없잖아. 이안."

"그럼 같이 죽을 수밖에."

"뭐…?"

테사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이안이 태연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싫다면 네가 샬롯의 뒤를 지켜. 죽이려 들 게 아니라."

테사이아가 입술을 비죽이는 가운데, 이안이 샬롯을 돌아보았다.

"너도 그놈의 명예로운 죽음 타령은 적당히 해라. 나도 죽고 싶은 생각 따윈 없으니까."

"…그러지."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다시 눈을 감았다.

너희 둘은 생각보다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그렇다는 이야기는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였다.

이안은 다시 명상을 활성화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와 달리, 내면 저 깊은 곳까지 의식을 내던졌다.

불필요한 감정과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

백색 마경이리란 소문과 달리, 한밤중의 습격은 생각만큼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뜻밖에도 이안의 손아귀에 새겨진 문양 덕분이었다.

관문을 지키는 자를 죽인 이후로, 전과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양이 공명할 때면 인근에 여지없이 고대 거인 왕국의 망령들이 등장했지만.

놈들은 전처럼 다가오지 않고,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거슬리는데, 가서 다 죽이고 와도 되겠느냐?"

"이건 나도 야옹이 말에 동감이야. 저것들, 기분 나빠."

샬롯과 테사이아는 불쾌해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덤비지 않는데 굳이 싸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저것들 대다수는 경험치도 주지 않는 놈들이었다.

"힘들 아껴라. 야영지 근처로 접근하는 놈들만 처리해."

물론 설원의 모든 마물이 거인 왕국의 잔당들인 건 아니었다.

기괴하게 변이된 들짐승들부터, 오거 같은 토착 마물들도 모습을 드러냈고. 거인 왕국과는 관계없는 언데드와 망령들도 출몰했다.

물론 대부분은 샬롯의 몸풀기 상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 그녀가 상대할 수 없는 비정형의 마물들은, 반대로 테사이아에게 맥을 추지 못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망령처럼 물리적으로 타격을 입히는 게 거의 불가능한 것들을 맨손으로도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 사역마들은 놈들을 씹어먹기까지 했다.

"어떻게 망령을 맨손으로 잡는 거지?"

"모르겠어. 그냥 되던데?"

본인도 모르는 이유를 굳이 알아내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그저 마족이 가진 능력 중 하나이리라 대충 결론 내렸다.

어쨌든 망령 같은 놈들은 처리하기 귀찮은 상대였으니, 대응책이 하나 더 생긴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손톱만 하게 이어져 있던 산봉우리들이, 어느새 정상을 보려면 고개를 들어야 할 만큼 가까워졌다.

바람이 칼날을 머금은 것처럼 차가웠다.

"말머리를 돌려라, 샬롯."

문득 옆을 돌아본 이안이 내뱉었다. 눈과 바위, 가지만 남은 나무만 드문드문 이어진 황량한 계곡.

"사람이 오간 흔적이 전혀 없군. 길도 없고."

"그러니 제대로 찾은 거지."

"동감이다."

덤덤한 대화와 함께, 마차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알 수 없는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083화

계곡에 쌓인 눈은 의외로 그다지 두껍지 않았다. 바퀴에 두른 사슬 고리가 효과가 있는지, 마차는 미끄러지거나 바퀴가 빠지는 일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과 오르막. 거기다 산맥 인근을 따라 곡선을 그리고 있어, 이 계곡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외부에선 절대 저 안을 볼 수 없게 일부러 감춰 둔 것 같네.'

이런 인위적인 느낌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 세계는 게임이었고, 온갖 작위적인 장치들이 뒤섞여 있으니까. 이런 걸 따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게임이 현실이 될 수 있는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땅이 융기하는 과정에서 앞뒤는 오히려 가라앉는 경우도 많으니까. 산과 산 사이에 이런 구불구불한 계곡과 저지대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예 억지는….'

…내가 이런 걸 어디서 보고 기억하는 거지.

피식한 이안이 잡념을 떨쳤다.

어쨌건, 이제는 계곡 내부에서도 밖을 볼 수 없었다.

좌우로 솟아 이어진 산기슭이, 이 너머는 외부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라고 미리부터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숲이군."

내리막을 지나 이어진 오르막의 끝에 도달한 순간, 샬롯이 내뱉었다.

"신기하네. 마법 같아."

테사이아의 탄성이 이어졌다.

아무런 전조도 없다가, 갑자기 계곡이 끝나면서 숲이 나타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은 그걸 가능하게 한 지형적 특수성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그저, 계곡 끝부터 시작된 잿빛의 숲에 멈춰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군.'

하얗게 덮인 눈과 그 위로 앙상하게 솟은 나무들.

귀가 울리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적막함까지.

환영 속에서 본 숲의 전경 그대로였다.

"…진짜 뭔가 마법이 깃든 숲 같아, 이안. 기분이 이상해."

숲을 응시하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이안도 그녀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마차는 두고 가야 할 것 같다, 이안."

나무들의 간격을 가늠한 샬롯이 말했다.

이안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진입 전에 정비는 필요하니까. 겸사겸사 모닥불도 피워라."

숲과 계곡 사이엔 경계선처럼 꽁꽁 언 개울이 있었다.

샬롯이 그 앞에 마차를 세웠다.

나뭇가지를 꺾으러 계곡으로 달려간 테사이아가 이내 소리쳤다.

"이안! 여기 뭔가 있어!"

"...?"

짐가방을 챙기던 이안이 그녀의 손짓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여기 봐. 뭔가 적힌 돌이 있어."

뽐내듯 말한 테사이아가 나무 아래의 눈을 파헤쳤다.

반쯤 튀어나와 있던 비석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오래된 듯 낡아 보였지만, 표면에 새겨진 글자만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뒤따라온 샬롯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 처음 보는 문자인데."

"그러게. 혹시 알아보겠어, 이안?"

테사이아가 고개를 돌렸다. 비석을 응시하던 이안이 내뱉었다.

"대충은."

"역시. 이안은 알아볼 줄 알았어. 전에 그 유령 거인이 하는 말도 알아듣는 걸 봤거든.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는 건데?"

샬롯도 궁금한 듯 그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이안이 말했다.

"이건 경고문이다. 여기서부턴 용의 권역이라는군. 이름도 쓰여 있는데… 이건 못 알아보겠어."

"용…? 용이라고?"

샬롯의 눈이 커졌다.

테사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숲에 용이 있단 얘기야? 어쩐지, 느낌이 안 좋더라. 당장 나가자, 이안."

샬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용이 뭔지는 아나 보군."

"그러게…? 듣자마자 그냥 무시무시하다는 생각부터 들었어."

테사이아가 얼떨떨하게 읊조리는 가운데, 샬롯이 이안을 돌아봤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상대가, 설마 용인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내 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가 되겠군."

"애석하게도 그렇진 않을 거다."

아마도.

뒷말을 삼킨 이안이 턱을 긁적였다. 그가 알기로, 대륙에 남은 용은 단 두 마리였다. 나머지는 오래전에 흑해 너머로 이주했다고 했다.

둘 중 한 마리에게 직접 들은 말이었고, 현실이 된 지금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게다가 다른 한 놈하고는 싸웠었지. 그것도 그놈의 둥지에서. 오래 산 용은 둥지가 여럿이라고는 하지만….'

이안의 시선이 황량한 숲으로 향했다.

두 용 모두, 이런 곳에 굳이 둥지를 만들어 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전부야? 여기 적힌 글자들은 그것보단 길어 보이는데."

"대충, 허락받지 않은 자가 발을 들이면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란 내용이다."

"왜 대충이야?"

"전부 읽을 수는 없었으니까."

"…아."

"친절한 용이군. 침입자를 위한 글귀까지 남기다니."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용과 싸울 수 없다는 게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었다.

진짜 용을 마주하면 생각이 좀 달라지겠지만.

"미리 겁을 먹고 돌아가길 바란 건지도 모르지."

심드렁하게 말한 이안이, 테사이아에게 장작을 가져오라 덧붙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마차에서 짐가방을 내리는 사이, 돌아온 테사이아가 땔감을 우르르 떨어뜨리며 말했다.

"정말 저걸 보고도 들어갈 셈이야? 저 안에 있는 게 뭐건, 결국 용과 관련된 존재란 얘기잖아."

"이왕이면 보물도 있으면 좋겠군."

테사이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는데, 보물이 무슨 소용이야?"

"그건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난 초대를 받고 여기 온 거야. 거기다 우린 이미 저 숲에 한 번 발을 들인 적도 있다."

"응…? 언제?"

"버려진 땅에서."

테사이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안이 말들을 마차에서 분리 중인 샬롯을 돌아보았다.

"나랑 저 녀석이 싸웠던 숲."

"아, 거기. 기억나. 그런데…."

테사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긴 여기서 엄청 멀잖아. 이 숲이 그렇게까지 크다고?"

"아마도."

이안은 심드렁하게 잿빛 숲을 돌아보았다.

이 안에 도사린 게 뭐건, 권역 근처에서만 힘을 쓸 수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숲을 계속 넓혀간 것이리라.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를 찾아 불러들이기 위해서.

'그놈이나 그 망령 거인 놈이나, 알아먹지 못할 소리만 해 댔지만….'

자세한 사연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이 숲에 도사린 놈도 상당한 경험치를 주리란 것과 퀘스트의 보상이 스킬 포인트라는 사실이었다.

이 보상 하나만으로도 이유로는 충분했다.

"그래… 내가 뭐라고 말해도 달라질 건 없단 거네."

테사이아가 체념한 듯 읊조렸다.

그녀가 모아 놓은 땔감에 불덩이를 던져 불을 피운 이안이, 다가오는 샬롯과 테사이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난 날 불러들인 놈과 싸우게 될 거다. 그 과정에서 너희 둘까지 신경 쓰지는 못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희 둘은 서로를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해라. 하던 대로."

"이 귀쟁이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군."

"있을걸. 지금까지 그랬듯이."

테사이아의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샬롯이 머리에 쓴 모자를 벗었다.

이안이 그녀의 머리를 문득 바라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털이 길었네, 야옹아."

샬롯의 귀 사이 한복판. 정수리부터 뒷목으로 이어지는 털이 눈에 띄게 길게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샬롯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건 갈기다. 수인의 우월한 체질을 증명하는 변화지. 몸이 추위에 적응하고 있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목덜미와 손목 근처에도 털이 풍성하게 길어지고 있었다.

"다 자라면 만지는 맛이 날 것 같은데. 수인은 원래 다 그래?"

테사이아가 덧붙였다. 샬롯이 어깨를 까딱였다.

"아마도.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군. 나도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이렇게 갈기가 자란 건 처음이다."

"다 자라면 쓰다듬게 해 줘."

"그러고 나서 네 손목을 잘라 버려도 된다면."

"그러지 뭐, 붙이면 그만이거든? 아픈 거야 참을 수 있어. 약속했다, 야옹아."

놀리듯 미소 지은 테사이아가 일어섰다.

이안의 시선에 그녀가 덧붙였다.

"토끼라도 찾아볼게. 그냥 들어가는 건 불안해서."

"그 몸으로?"

"괜찮아. 해가 가려져서 그런가. 몸 상태가 나쁘지 않거든."

"한 시간 안에 돌아와라."

고개를 끄덕인 테사이아가 휑하니 멀어졌다.

저거, 저대로 튀는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한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도망쳐 봐야, 그녀가 갈 곳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끝내 또 다른 심판자에게 붙잡히게 되리라.

그런다면 언젠가 루 사드에서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땐,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겠지.'

그것도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슬슬 저 녀석에게 정이 붙기 시작한 지금은 더더욱.

옆에서 쇳소리가 이어졌다.

샬롯이 육포를 입에 문 채 자신의 쌍검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이안은 그녀의 모습을 새삼 눈에 담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화려하고 깔끔한 상단 경호병의 모습은 이미 오간 데 없었다. 야전에서 오래 구른 능숙한 수인 용병만이 존재할 뿐.

장착한 장비들이 전체적으로 누더기로 변했다는 것도, 그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에 한몫했다.

"샬롯."

"응?"

"네 마법 무구, 아직도 주문을 쓸 수 있는 상태냐?"

"흉갑과 전투화에 새겨진 주문은 아직 무사하다. 하지만 마석이 없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그 안에 굴러다니는 마석을 집어 든 그가 샬롯에게 던졌다.

"이걸 써라. 마력이 가득하진 않으니까, 아껴 써야 할 거다."

"…사양하지 않겠다."

샬롯이 마석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지켜본바, 그녀는 수비적인 측면에 약점이 있었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제압할 방법도 없었다. 그런 약점들을 보완해 주는 게, 그녀가 가진 마법 무구의 역할이었다.

그러니 예전만 하진 않더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리라.

"아, 그래. 이것도 있었군."

이어 이안이 꺼낸 것은 톱날이 돋은 것 같은 형태의 기형 검이었다.

샬롯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건… 카일이 쓰던 비늘 검이군."

"그래. 그놈의 유품이지."

이안이 손잡이의 한 부분을 움켜쥐었다.

화륵, 검날을 타고 번진 불길이 이내 흩어졌다.

"당장 쓸 수 있는 건 이 주문 하나뿐이지만."

"…건방진 놈이었다. 자신이 검의 달인이라 생각해서 단련을 게을리했지."

애도하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차라리 네가 쓰는 게 더 가치 있을 것이다, 이안."

"네가 쓸 생각은 없고?"

"전혀."

그렇다면야.

비늘 검을 다시 아공간에 넣은 이안은, 짐가방에서 보존 식량과 붕대, 간이 침낭 따위를 하나씩 꺼내 봉인함에 차곡차곡 넣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대비는 해 둬야 했다.

"…뭐야, 그걸 계속 가지고 다니고 있었어?"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손에 토끼 한 마리를 움켜쥔 그녀가 질색하는 얼굴로 다가왔다.

"물건을 보관하기 편하더군."

이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샬롯의 시선에, 그가 어깨를 까딱이며 덧붙였다.

"이 녀석이 갇혀 있던 상자다. 용병들에게 붙잡혀 있던 걸 내가 구했었지."

"그때도 말했지만,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어. 그 머저리들은 널 만나지 않았어도, 분명히 다른 헛짓을 했을 거라고."

이제 와선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봉인함까지 아공간에 돌려놓은 이안이, 샬롯이 풀어 둔 말들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함께한 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놈들이었다.

"저 녀석들을 풀어 주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힘들 거다. 계곡을 나간다 해도, 머잖아 마물들의 먹잇감이 되겠지."

"그럼 그냥 타고 들어가는 게 낫겠군. 저 안에서 죽더라도, 원수는 갚아 줄 수 있을 테니까."

"...."

샬롯이 괴상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마물 인간 할 것 없이 수틀리면 목부터 날리고 보는 이안이, 고작 말의 복수를 운운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훌쩍 말 안장에 올라탄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준비 끝나면 타라. 바로 들어갈 거니까."

***

숲은 고요했다.

짐승 소리는 물론이고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게 얼어붙은 공간처럼 느껴졌다.

다각, 다각-

적막을 깨뜨리는 건 두 마리 전마의 발굽 소리. 그리고 녀석들의 겁먹은 숨소리뿐이었다.

"…이상해."

샬롯의 뒤에 탄 테사이아가 문득 내뱉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밖이 안 보여."

이안도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 그대로였다.

그들이 들어선 계곡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다란 나무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나무줄기 중간중간 새겨진 눈동자 모양의 자국들이 그들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왜 둘 다 아무 말도 안 해?"

덤덤한 얼굴의 샬롯과 이안을 번갈아 본 테사이아가 이윽고 물었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말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궁금하잖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고대 마법인가?"

"시작은 그랬을지도."

대꾸한 건 이안이었다.

그가 다시 앞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숲은, 마경이다."

"마경…?"

"그래. 그게 아니면 네가 벌써 그 모습이 될 리 없겠지."

"...!"

테사이아가 그제야 자신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입가를 씰룩대자,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돋아났다.

"아직 밤이 아닐 텐데…?"

먹구름 자욱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도, 어느새 붉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이 태연하게 말했다.

"여긴 세상의 법칙을 뒤틀어 버릴 정도로 타락한 땅인 거다. 너 같은 마족에겐 오히려 천국 같겠지."

"어쩐지. 갑자기 기운이 난다 싶었어."

읊조린 그녀가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토끼를 집어 들어 단숨에 깨물었다. 전투를 준비하는 건지, 치미는 어두운 욕망을 가라앉히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됐건, 여기 있는 놈이 타락해 버렸다는 건 확실하군.'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정표도 없는 숲이지만, 그는 자신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손아귀의 문양이 계속 울리고 있었으니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 잦아드는 울림이었다.

이것도 게임의 시스템이 나름의 현실성을 갖춘 것이리라.

'…이러는 걸 보면, 게임에선 퀘스트 없인 들어올 수도 없는 장소였을지도.'

이안은 착실하게, 그러나 방심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손아귀의 울림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울림 이상의 변화가 느껴진 건, 그렇게 몇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음…?"

이안이 문득 손을 내려다본 순간.

겁에 질린 숨소리를 내던 말이 멋대로 멈춰 섰다.

테사이아와 샬롯이 탄 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안은 고삐를 후려치지 않았다.

손아귀의 문양이 강렬하게 공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구구구-

지축이 울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

이안의 눈이 커졌다.

지하로 통하는 거대한 동굴이, 말 그대로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084화

쿠르르….

떨림이 잦아들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동굴은, 웬만한 관문 못지않게 거대했다.

종유석이 돋아 있는 천장과 달리, 그 아래로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한 칸 한 칸이 아주 넓고 얕은 계단이었다.

내부에서 휘어지는 듯,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지하에 공간이 숨겨져 있었다니. 숲은 침입자를 걸러내는 용도였던 거군."

말에서 내린 샬롯이 읊조렸다.

이안은 동굴 너머의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허리에서 울림이 번졌다.

그가 단죄의 검을 내려다보는 사이.

"갈수록 더 불길하네. 끝없이 이어진 숲에, 이제는 지하로 통하는 동굴이라니."

"마족 주제에 참 겁이 많군."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건 너 같은 짐승이나 가능한 일이야. 이런 마법을 부릴 정도의 마법사라면, 엄청나게 강할 거라고."

"내가 아는 가장 강한 마법사는 이안이다."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테사이아와 샬롯이 동굴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샬롯에게 고삐를 잡힌 말은, 콧김을 뿜으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초대받지도 않았는데 잘도 들어가는군."

말에서 내린 이안이 말했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그러게. 못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어. 여기가 부정한 땅이라서 그런 것 같아. 아무런 제약도 없어진 거지."

설득력 있는 말이군.

생각한 그때, 허리의 검이 다시 한번 울렸다.

미간을 좁힌 이안은, 결국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옅은 신성력이 검신에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이 뽑아 든 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날에 맺힌 빛이 점점 더 짙어졌다.

"...?"

찬란하게 빛나던 푸른 빛이, 이윽고 검날에 스며들듯 옅어졌다.

검 내부에 신성력이 가득한 것이 느껴졌다.

가볍게 검을 흔들자, 푸른 빛이 흐릿한 궤적을 그리며 바스러졌다.

그래, 학습이란 걸 하셨다 이거지.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아무래도 이 광경을 티르 엔이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의 예비 성물과의 연결이 느슨해진 것을 느끼고, 주목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엄정한 여신은 그들이 지하에 들어가면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될 것을 염려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미리 신성을 내릴 이유가 없었다.

이 정도 신성력이라면 단죄의 일격을 한 번은 쓸 수 있을 테니까.

'뭐, 나야 고맙지.'

이안은 검을 검집으로 되돌렸다.

빛이 검집에 완전히 가려지고, 신성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은 들고 다니기만 해도 신성력이 줄줄 새어 나갈 테니, 필요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뽑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안! 빨리 들어와! 여기에도 뭔가 적혀 있어!"

그때, 계단 몇 개를 내려간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말고삐를 쥔 이안도 지하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는 겉에서 보던 것보다 더 높고 넓었다. 그리고 싸늘했다. 숨을 쉬면 폐가 얼어붙을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넓고 얕은 계단을 내려간 이안이, 둘의 곁에 나란히 섰다.

"호오…."

그의 입에서도 나지막한 탄성이 흘렀다.

테사이아의 말대로, 높다란 벽면에 고대 북부어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갔다.

"뭔데. 혼자만 알지 말고, 같이 알자."

테사이아가 붉은 눈을 빛냈다. 턱을 긁적이며 이안이 말했다.

"용의 이름은 여전히 못 읽겠군. 그 아래에는 한때 나의 둥지였던 이 지하 궁전을, 유일한 맹약자이자 한때의 반려인 여왕에게 선물한다고 쓰여있다. 그러니까 이건… 선물에 동봉한 편지인 셈이지."

"편지…?"

이안은 대꾸하지 않고 벽면의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비로소 조각나 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이름을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용.

공허의 힘을 연구했다던 고대 거인 왕국의 여왕.

그를 찬탈자라 부르던 망령.

"여기가, 여왕이 공허의 힘을 연구했다던 별궁인 거군."

이안이 툭 내뱉었다.

테사이아와 샬롯이 그를 주목했다.

"그 위치가 알려지지 않은 건, 용의 권역의 땅속에 감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던 거고. 어쩌면…."

이안의 시선이 계단 너머의 어둠으로 향했다.

"여왕이 이곳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여왕이…? 거인 여왕을 말하는 거냐?"

"최후에 대한 기록이 모호하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쿠르르-

이안이 말을 끝내기 전에, 동굴 전체가 또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비틀댄 일행이 자세를 낮추는 가운데, 침침하던 장내가 순식간에 더 어두워졌다.

"...!"

동불 입구가 다시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의 눈이 빠르게 어둠에 적응했다.

흙이 내부로 밀려 들어오는 불상사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동굴의 그것과 같은 재질의 검푸른 석벽이 입구를 완전히 막았다. 진동이 가라앉았다. 지하 깊은 곳에서 번지는 희미한 빛만이 계단의 어둠을 간신히 밝혔다.

다행히도, 일행 중에 이 정도 어둠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건 말 두 마리뿐이었다.

석벽을 응시하던 테사이아가 이윽고 입을 달싹였다.

"우리… 갇힌 거야?"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주황색과 붉은색 눈동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달라질 건 없다. 어차피 빈손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횃불을 켜 말 안장에 고정한 이안이 선두로 나섰다.

계단은 한참을 이어졌다.

점점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고, 그럴수록 오감이 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공간을 다루는 고대 마법이 깃든 공간이라는 증거였다.

용의 둥지였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장이 점점 높아졌다.

손아귀의 문양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보채지 마라. 가고 있으니까.'

이렇게 쳐 부르면서, 대체 왜 찬탈자라고 부르는 거야?

혀를 찬 이안이, 푸르스름한 어둠 속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

계단은 지금 여기가 어디쯤인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쯤에야 끝이 났다.

"지하 궁전이라더니… 빈말이 아니었군."

펼쳐진 광경에 이안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여왕에게 이 지하 궁전을 선물한 용이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사랑꾼이었음은 분명했다.

왕성의 내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높다란 천장. 대회관으로 보이는 기다란 광장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었고, 좌우로는 또 다른 방으로 보이는 높다란 관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직선으로 쭉 뻗은 기둥과 통로들.

규모로 봐선, 거인족의 눈에도 충분히 웅장해 보였으리라.

적어도 게임에서 본 거인 군단의 유적지보다는 훨씬 크고 화려했다.

바닥 외곽을 따라 은은하게 번지는 옅은 푸른 빛이, 계단을 밝히던 광원의 정체였다.

절대 밝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지하 궁전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대단한 유적이군."

샬롯조차 탄식을 흘렸다.

이안의 시선이 대회관 중앙을 가로지르는 대로 너머로 향했다.

대문이 활짝 열린 관문. 그 너머로 푸르스름한 마력이 번져 나왔다.

-내게로 오라. 맹약자여.

귓가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저것들 보여? 엄청 정교해."

궁전을 돌아보던 테사이아가 손짓했다.

대로 좌우로, 크고 작은 얼음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큰 것은 거인 병사였고, 작은 것은 인간과 난쟁이 병사의 조각이었다.

하나같이 거인 왕국의 복식과 무장을 섬세하게 재현하고 있었다.

"녹지도 않았고.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아."

"…그래. 정말 그렇게 될 것 같군."

내뱉은 이안이 말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갸웃한 테사이아가 뒤늦게 그를 돌아보았다.

"농담이 아닌 거지?"

"그래. 그러니까 너희도 타라."

내뱉은 이안이, 정면 저 멀리에 열린 관문을 가리켰다.

"우린 저 너머로 갈 거다."

"이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고…?"

"멋지군."

샬롯이 말에 오르고, 테사이아도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안이 가볍게 고삐를 쳤다.

말이 대회관 한복판의 대로를 천천히 나아갔다.

시간은 물론이고 공기마저도 얼어붙은 것 같은 공간이었다.

일렁이는 건, 오로지 저 관문 너머의 푸르스름한 마력뿐.

-서두르라, 맹약자여. 불멸이 머지않았다.

속삭임이 선명해졌다.

그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샬롯도 테사이아도, 속삭임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안은 회관 좌우에 늘어선 정교한 얼음 조각들을 차근차근 눈에 담으며 나아갔다.

한때는 살아있었던 존재들이 틀림 없었다. 어떻게 만들어 낸 것인지는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어쨌건, 아무 일도 없이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진 않네.'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고삐를 후려쳐 달려나가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지금의 아슬아슬한 평화를 깨뜨리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너머에… 뭔가 있어."

테사이아가 속삭였다.

샬롯의 눈에도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여 일렁였다.

"용만큼은 아니라도, 기대되는군. 고대의 존재들과의 전투라. 전의 거인보다는 강했으면 좋겠는데."

"아마도 그건 확실할 것…."

읊조리던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저 먼 관문 너머로 향했다.

귓가로 다급한 속삭임이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여왕이 깨어났다, 맹약자여. 서두르라….

뭔가 더 말하려는 듯한 속삭임이 칼로 자른 것처럼 끊어졌다.

대신, 전혀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기어코 짐의 궁전에 발을 들였구나, 찬탈자여…!

이어진 건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소녀와 노파의 목소리가 겹쳐진 것 같던 이전의 속삭임과 달리, 얼음장 같은 분노를 머금은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불멸의 힘은 짐의 것일지니…! 네 야망은 한낱 미몽으로 끝나게 되리라. 찬위는, 불허하겠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지만 깊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까득, 까드득- 투두둑….

사방의 조각상들이 태엽 인형처럼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얼음에 균열이 이는 소리.

고대 거인 왕국의 수호병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달려!"

외친 이안이 고삐를 후려쳤다.

말이 기다렸다는 듯 질주하고, 샬롯의 말도 그 뒤로 따라붙었다.

쿠구구구-

저 멀리, 관문 좌우에서 얼음 파편이 뒤섞인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좌우로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이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대문의 크기와 두께는 멀리서 봐도 심상치 않았다. 이 공간이 그렇듯, 저 문에도 분명 마법이 새겨져 있을 터.

문이 완전히 닫힌다면 물리적으로 다시 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게 분명했다.

'시간제한까지 있다, 이거지. 개 같네.'

게임에선 이런 경우에 보통, 시간을 맞추지 못한 순간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사라졌다. 퀘스트를 포기하거나, 세이브를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재도전해야 했다.

지금은 둘 다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서두르라, 맹약자여…!

다급한 속삭임이 울려퍼졌다.

-내 힘은 여왕이 주문을 사용할 수 없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고작이다…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는 할 수 없으니, 그대의 능력으로 난관을 돌파하라…!

알아서 오란 얘길 길게 하네.

이안이 헛웃음을 지은 그때.

쿠웅-

거인 수호병 하나가 대로 위로 올라섰다.

전에 본 관문을 지키는 자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둔탁한 움직임.

하지만 덩치는 비슷했고, 길을 막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단죄의 검을 뽑으려던 이안은, 이내 멈추고는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카일의 비늘 검이었다.

'신성력을 그냥 쓰긴 아깝지.'

생각하며, 그가 등자에서 발을 뺀 순간이었다.

"이안! 속도를 늦추지 마라!"

뒤에서 샬롯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뒤에서 돌풍이 휘몰아치고, 전신에 바람을 두른 샬롯이 엄청난 속도로 그의 머리 위로 솟구쳤다.

"야! 나 혼자 어쩌라고!"

엉겁결에 고삐를 잡은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물론 샬롯은 그 외침에 대꾸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쌍검을 움켜쥐며 맹수처럼 뿜어져 나간 그녀가, 그대로 거인 수호병의 몸통 한복판에 틀어박혔다.

푸화악-!

한 박자 빠르게 돌풍이 휘몰아쳤다.

수호병에게 타격을 줄 수는 없었지만, 균형을 잃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풍압이었다.

조각상이 둔탁한 움직임으로 넘어지는 가운데, 허공에 잠시 부유한 샬롯이 몸을 휘돌리며 재차 허공을 박찼다.

그녀의 마법 무구에 박힌 마석들이 번쩍이고,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샬롯이 수호병에게로 떨어졌다.

콰지직-!

교차해 내뻗은 쌍검이 수호병의 거대한 머리를 후려쳤다.

놈의 머리에 균열이 일었다.

하지만 박살 낸 것은 아니었다.

몸을 움츠리며 착지한 샬롯이 그대로 다시 팔을 치켜들었다.

날 끝부분이 앞으로 튀어나온 쌍검이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콰직! 꽈지직!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사이, 이안은 쓰러진 수호병의 팔을 뛰어넘으며 질주했다.

'아슬아슬한데.'

이안의 시선이 대로 좌우를 훑었다.

잠에서 깨어난 수호자들이 대로를 향해 둔탁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십. 뒤에서 따라붙는 것들까지 합하면 백 마리는 가볍게 넘어설 터였다.

상대하지 못할 숫자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이 순간에도 저 대문이 닫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회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이 안에 완전히 고립되는 것이라면….

"이안, 계속 달려라!"

샬롯의 외침이 이어졌다.

뒤를 돌아보자, 테사이아가 모는 말 위에 선 샬롯이 보였다.

테사이아는 그저 고삐만 쥐고 있을 뿐, 사실상 말이 저 혼자 전력으로 질주하는 상태였지만.

샬롯은 그 거친 질주에도 전혀 균형이 흔들리지 않았다.

샬롯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은, 그녀도 자신과 같은 생각임을 깨달았다.

"뭔데?! 둘만 알지 말고 나도 알려 줘!"

이안과 샬롯이 고개를 까딱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외쳤다.

턱, 그녀의 어깨에 발을 얹으면서 샬롯이 내뱉었다.

"넌 싸울 준비나 해라."

"그러니까… 아욱?!"

테사이아의 몸이 순간 구부러졌다. 그녀의 어깨를 밟고 뛰어오른 샬롯이, 포물선을 그리며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떨어질 뻔했잖아! 이 짐승아!"

한순간에 발 받침대가 된 테사이아가 소리치는 가운데, 샬롯은 대로 위로 올라오는 인간과 난쟁이 수호병들을 향해 포탄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장창-!

얼굴 앞을 교차해 가린 쌍검이 수호병들을 사방으로 튕겨냈다. 깨진 얼음 조각들이 비산하고, 그 와중에도 바닥을 구르며 안전하게 착지한 샬롯이 질주를 이어갔다.

말 없이도 말을 탄 것과 비슷한 속도였다.

'…즐기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샬롯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며 이안이 입맛을 다셨다. 과감한 걸 넘어 무모한 짓거리였지만, 지금은 그녀를 말릴 때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어느새 대문이 반 이상 닫히고 있었으니까.

그 너머에 맺힌 마력의 장막이 소리 없이 일렁였다.

이안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일렁였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와 말을 감쌌다. 샬롯과 뜻이 통한 이상, 일행을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이안은 멈추지 않고 내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샬롯이 온 몸을 던져 막아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호병들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아껴 쓰라는 말이 무색하게, 샬롯은 마법 무구의 능력을 전부 다 끌어 쓰고 있었다.

-무의미한 저항이다, 찬탈자여…!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하는 짓으로 봐선 둘이 한 몸 같은데. 여왕이 악마를 사로잡기라도 한 건가? 악마가 날 부른 거고?'

타락자가 미친 짓을 하는 건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거군.

콰아아-

이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다가선 거인 수호병이 거대한 대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샬롯은 반대쪽에서 인간 수호병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어느새 수호병들은 그녀 혼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이안이 고삐를 후려칠 찰나.

콰직-!

대검이 휘몰아치는 방벽을 단숨에 찢어발기고 그의 뒤통수를 스치며 떨어져 내렸다.

양단되어 처박혔던 말이, 단면에서 피와 내장을 흩뿌리며 튕겨 올랐다.

이를 갈며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눈에 마력이 휘몰아쳤다.

화르르륵- 콰과과광-!

피어오른 화염구가 수호병에게 연달아 날아가 폭발했다.

그사이 이안이 자세를 다잡을 찰나.

푸화악-!

피 보라를 뚫고 튀어나온 샬롯이 이안의 갑옷 뒷덜미를 낚아채며 내달렸다.

"네 말의 복수는 내가 하겠다."

내뱉은 그녀가, 그를 힘껏 내던졌다.

#085화

'뭐 이렇게 터프해?'

탄환처럼 날아가면서, 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바람 칼날을 시전했다.

포물선을 그리던 그의 궤적에 다시 가속도가 붙었다.

"이안만 던지면 어쩔 건데! 우리는?"

테사이아의 외침이 이어졌다.

"우린 끝까지 싸운다!"

"야이, 미친-"

샬롯이 포효하는 가운데, 닫히고 있는 대문의 틈이 가까워졌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치닫고, 허공에서 비튼 이안이 그 사이를 통과했다.

촤아악-

마력 장막을 단숨에 통과한 이안이 바닥을 구르며 착지했다.

-비정한 결단이구나, 찬탈자여…! 네 야망의 크기를 알겠노라…!

웅웅, 온몸을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안은 비늘 검을 고쳐 쥐며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여왕의 알현실이었다.

높다란 단상 위. 벽면을 따라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왕좌가 눈에 들어왔다.

잿빛 미라 같은 모습으로 그 위에 앉은 거인 여왕의 모습도.

머리에 얹은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황금 왕관. 목에 건 목걸이에는 거대한 보라색 보석이 빛을 머금고 일렁이고 있었다.

이안의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또 다른 퀘스트 창이 이어진 건 그 직후였다.

찬탈자의 선택.

그 순간 목걸이의 보석에서 빛이 번졌다.

익숙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여왕의 주문을 봉인하겠다, 맹약자여… 내 힘이 다하기 전에 왕좌를 찬탈하라….

보석의 빛이 잦아들었다.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건방지구나, 악마야. 불멸의 힘도 불사의 왕국도 오로지 짐을 위한 것인즉…!

"…지하에서도 심심할 틈은 없었겠군."

퀘스트 창을 닫으며 이안이 읊조렸다.

쿵, 대문이 완전히 닫혔다.

단상 앞, 중무장한 채 도열한 친위병 조각상들이 대검을 늘어뜨렸다.

이안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순간.

쿠웅- 쿠웅-

대검을 움켜쥔 친위병들이 돌진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둔탁한 움직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밖의 수호병들이 그랬듯 자연스럽고 기민해질 터였다.

콰르르-

물론 그렇게 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돌진하는 친위병들의 한복판으로 화염 장벽이 치솟았다.

평소보다 훨씬 작은 크기.

증폭이 더해지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그랬다.

'적색은 잘 안 먹히는 공간이라 이거지.'

이안은 장벽을 뚫고 나온 친위병을 향해 몸을 날렸다.

화르르륵-

주위로 피어오른 춤추는 불꽃이 놈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어진 폭발. 그 사이를 뚫고 솟구친 이안이, 바람 칼날이 맺힌 비늘 검을 힘껏 내리쳤다.

카드드득-

친위병의 목덜미가 푹 파였다.

얼음 내부로 새카만 내골격이 설핏 드러났다.

'일단 하나는, 확인.'

검을 뽑아 물러나면서, 이안이 눈을 빛냈다.

저놈들과 싸워야 한다는 걸 직감한 순간부터,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헛된 발버둥을 치는구나, 찬탈자여…! 네놈은 끝내 죽음을 맞이할 것인즉. 왕좌를 탐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여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네 왕좌에 전혀 관심 없거든?

생각하며, 이안은 다시 거인 친위병들의 한복판으로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대검들을 몸을 날려 피한 그가, 처음 자신이 공격했던 친위병을 향해 재차 솟구쳤다. 불길을 머금은 비늘 검이, 내골격이 드러난 목덜미를 향해 다시 한번 뻗어 나갔다.

카드득-

목을 단숨에 잘라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실망한 기색 없이, 검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쥔 채 친위병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다음 순간 놈이 그를 떨쳐 내려는 듯 손을 휘저었다. 훌쩍 놈의 어깨로 뛰어오른 이안이, 손길이 지나치자 다시 검 자루를 붙잡고 매달렸다.

쒸에에엑-

그런 그를 향해 또 다른 친위병이 대검을 휘둘렀다. 화륵- 비늘 검에 불길이 치솟고, 이안이 친위병의 가슴을 박차며 검을 뽑았다.

콰지직-!

날아든 대검이 그대로 친위병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두꺼운 얼음 갑옷에 균열이 가고, 주위로 얼음 가루가 흩날렸다. 균형을 잃은 친위병이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바닥을 굴러 착지하며 그 모습을 돌아본 이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이게 공략법이었네.'

대회관을 가로지르면서도 느꼈지만, 이놈들은 방어력과 저항력이 지나치게 높았다. 등장 시기에 맞지 않는 수준이었다. 다른 공략법이 있으리란 생각이 든 건 당연한 수순. 게다가 이놈들은 지성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골렘에 가까웠다.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추측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현실이 되고 나서도, 게임에서 있었던 공략 요소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단 말이지.'

이어지는 둔탁한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이안은 쓰러진 친위병을 향해 달려갔다.

친위병들이 무감정한 움직임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곧바로 왕좌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여왕이 위기에 처했다고 느끼면, 이 친위병들이 어떤 식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할지는 그도 예상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여왕 본인이 움직이기 시작할지도 몰랐다.

당장 확실하게 전력을 줄일 방법을 앞에 두고, 또 다른 도박 수를 더할 필요는 없었다.

-짐을 방해하지 말라, 악마여. 네 방해는 찬탈자의 고통으로 돌아올 뿐이니. 그 후엔 네놈에게도 길고 긴 고통을 약속하리라.

그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동안에도, 여왕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시간이 많지 않다, 맹약자여…! 여왕이 주도권을 되찾는다면 대업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어서 저들을 뚫고 왕좌로 오라…!

반면 악마의 속삭임은 점점 더 다급해졌다.

말하는 걸 보니 아직 살만한 것 같은데.

속으로만 대꾸하며 쓰러진 친위병의 위로 올라탄 이안이 다른 친위병들을 돌아보았다.

대검들이 고요한 공기를 찢어발기며 떨어져 내렸다.

이안이 몸을 날렸다.

콰앙! 콰직!

쓰러진 친위병이 난자당했다. 갑옷이 전부 으스러진 놈은 뼈대를 거의 다 겉으로 드러낸 채였다.

친위병들이 대검을 회수하기 전에 되돌아온 이안이, 훤히 드러난 놈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바람 칼날. 예리한 바람에 불길이 뒤엉켰다.

콰드드득-

친위병 하나의 목이 몸에서 분리됐다. 머리를 잃은 놈의 몸이 잠시 꿈틀대다가, 이윽고 잦아들었다.

본능적으로 상태창을 확인한 이안의 눈이 순간 빛났다. 경험치가 올라 있었다.

'보스전은 보스전이란 말이지…?'

그의 시선이, 대검을 회수 중인 다른 친위병에게 향했다.

두 번째를 처치하는 건 처음보다 더 쉬웠다. 친위병들이 공격을 준비하길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맞춰 돌진했다. 다른 친위병들의 대검이 이안이 매달려 있던 놈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이안은 갑주가 으스러진 채 쓰러진 놈의 위로 올라탔다. 곧 또 한 번 대검들이 쏟아졌다.

훤히 드러난 목덜미. 비늘 검의 주문을 사용한 건, 놈의 목을 썰어 내는 한순간으로 충분했다.

-제법 재주는 있다만, 네 야망은 불가능한 것이다, 찬탈자여. 이 악마는 짐의 조각난 영혼에서 짐의 야망과 광기를 먹고 태어난 존재인즉…! 끝내 짐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며, 오로지 짐만이 이 악마를 다스릴 수 있느니라…!

-여왕의 기만에 흔들리지 말라, 맹약자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그대는 나를 품을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대 없이는 아무런 야망도 이룰 수 없음이니…!

번갈아 가며 더럽게 말 많네.

생각할 찰나, 문득 여왕의 목걸이에서 마력의 파장이 일었다.

-겁 먹었구나, 악마야. 네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여왕의 웃음소리.

친위병들의 전신에서 냉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 가시가 치솟고, 휘두르는 검격에 서리 칼날이 흩날렸다.

'2 페이즈인 건가.'

하지만 대응은 간단했다.

이안은 혼돈력을 섞어 화염 장벽을 펼쳤다.

날아들던 서리 칼날이 그의 몸에 닿기 전에 녹아 흩어지고, 얼음 가시도 빠른 속도로 녹아내렸다.

이안은 마력을 아끼지 않고 불을 지르며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친위병의 목이 달아났다.

-멈추지 말라, 맹약자여…! 여왕의 주문은 다시 봉인하였으니, 우리의 승리가 머지 않았다…!

악마의 속삭임과 함께 목걸이의 마력이 잦아들었다.

친위병들을 감싼 냉기도 흩어졌다.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전투를 이어 나갔다.

친위병의 숫자가 줄자 하나를 처치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늘었다. 이안은 놈들의 사이를 오가며, 놈들이 서로에게 비슷한 타격을 입히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목이 먼저 달아났다.

이제 남은 건 고작 둘이었다.

그사이, 여왕의 목걸이가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 찬탈자여. 놈은 자유를 손에 넣고자 그대를 이용하는 것일 뿐…! 악마가 끝내 네 영혼을 삼키리라…!

여왕의 목소리에 위기감이 묻어났다. 악마의 속삭임이 기다렸다는 듯 이어졌다.

-듣지 말라, 맹약자여. 여왕이야말로 이 순간에도 용의 마력으로 내 영혼을 녹이고 있으니. 그대가 아니라면 나는 끝내 소멸하고, 불멸의 정복자가 다시 대륙을 피로 물들이리라…!

지들끼리 난리가 났네.

난도질 끝에 또 하나의 친위병을 처리한 이안이 숨을 헐떡이며 코웃음 쳤다.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따위는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느새 친위병이 단 한 마리만 남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쾅!

마지막 친위병의 가슴팍에 폭발이 일었다. 이어, 이안은 놈의 발아래 일점 폭발을 시전했다. 폭발에 휩쓸린 친위병이 쓰러졌다. 놈의 머리로 춤추는 불꽃을 퍼부은 그가, 균열이 잔뜩 일어난 목을 연달아 후려쳐 끝내 잘라냈다.

비늘 검에 일렁이던 불길이 잦아들더니 이윽고 완전히 꺼졌다.

자루에 박힌 마석이 빛을 잃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서 있는 친위병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전부 난도질당하고 목이 잘린 얼음 조각이 되어 널브러졌다.

이안의 시선이 비로소 왕좌로 향했다.

남은 건 그 위에 걸터앉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여왕뿐이었다.

바싹 말라붙은 여왕의 얼굴에는 안광조차 맺혀 있지 않았다.

육신은 그저 영혼을 담아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듯이.

-끝내 비극이 일어나겠구나… 찬탈자여, 나의 병사들은 결코 네 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여왕의 목을 베어라, 맹약자여….

여왕의 탄식과 악마의 속삭임이 번갈아 이어졌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스쳤다.

정말 왕위 찬탈자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지하 동굴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 치곤, 정작 보스전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이안은 왕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왕이 독백하듯 읊조렸다.

-왕국의 군단이 왕을 잃은 슬픔으로 눈을 뜰 것이다. 짐이 억눌러온 혼돈이 범람할 것이며, 짐의 반려가 죽음을 거슬러 돌아오리라. 끝내는 악마가 네 영혼을 삼켜 대륙을 피로 물들일지니….

저주나 다름 없는 말들.

단상을 올라 왕좌 앞에 선 이안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이 안에 갇혀만 있어서 모르나 본데. 이미 다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새삼스럽지도 않지. 게다가…."

비늘 검을 쥔 이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넌 결국 모든 통제력을 잃게 됐을 거다, 여왕."

-그게 무슨 의미지…?

"내가 이미 겪어 본 것들이 있단 얘기지."

내뱉은 이안이 검을 떨치듯 휘둘렀다. 검신을 타고 번진 바람 칼날이 여왕의 목을 갈랐다.

허무할 정도로 단숨에 잘려나간 머리가 왕좌 아래로 떨어졌다.

원통함이 가득 담긴 귀곡성이 장내에 메아리치고.

퍼석-

단상에 떨어진 머리가 그대로 재가 되어 허물어졌다. 귀곡성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황금 왕관이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푸스스스-

여왕의 몸도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목걸이가 떨어져, 이안의 발치로 굴러왔다.

팬던트 한복판에 박힌 주먹만 한 보석에서, 출렁이는 파장이 번졌다.

-휼륭하도다… 맹약자여…!

"그래. 너도 훌륭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놈 때문에 먼 길을 오게 되긴 했지만, 어쨌든 쏠쏠한 보상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친위병은 물론, 방금 죽인 여왕도 적지 않은 경험치를 줬다.

이 녀석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편하게 해낼 수 없었으리라.

-불멸의 힘과 권능이 네 앞에 있노라. 이제 나를 들어 맹약의 증표를 내보이라…! 새로운 왕좌의 주인으로 거듭날지니…!

악마의 목소리는 아주 달콤하고, 동시에 강대한 마력을 머금고 있었다. 웬만한 자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홀리고 말았을 수준이었다.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지."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난 왕좌나 불멸의 힘 따위엔 관심도 없어. 네 약속을 믿은 적도 없고."

-뭐라고…?

악마의 목소리가 의아해졌다.

-하지만, 맹약을 맺었지 않느냐?

"내가 널 찾아가겠다 했지. 그리고 그 맹약은 지켜졌다. 너와 나 사이엔, 이제 남은 약속 같은 건 없어."

보석 표면의 광채가 휘청댔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고대 거인 왕국과 막대한 공허의 마력을 손에 넣을 기회를 거절할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한 적 없었을 테니까.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경험치. 그리고 퀘스트 완료 보상."

-퀘스트…? 그게 무슨…?

비늘 검을 떨어뜨린 이안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푸른 신성이 맺힌 검날이 서늘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단죄의 검을 양손으로 쥔 이안이 한 걸음 물러서며 내뱉었다.

"널 죽이면 얻게 될 것들이지."

검에 담겨 있던 신성력이 한순간 눈부시게 타올랐다.

단죄의 일격. 티르 엔의 신성력이 응축된 푸른 호선이, 보라색 보석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아- 아아아아악!

여왕의 그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쩌저적, 보석 표면에 균열이 일고 다음 순간 완전히 박살 났다. 그 내부에 고여있던 오염된 마력이 신성력에 닿아 타들어 갔다. 그 안에 담긴 영혼도.

-아아아… 아아아아악-!

비명이 악에 받친 울부짖음으로 변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잦아드는 푸른 섬광 사이.

푸화악-!

보석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 검은 마력이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

#086화

이안의 눈이 커졌다.

피할 틈도 없었다. 완전히 그를 집어삼킨 마력 덩어리가, 순식간에 그의 시야를 가리고 사지를 옭아맸다. 뒤이어 몸의 모든 구멍으로 오염된 마력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감히 날 속이고 배신하기까지 하다니…!

이안의 뇌리로 악마의 절규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는 네놈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내 반려이자 그릇으로, 영원히…!

마력에 담긴 끈적한 광기와 탐욕. 불같은 분노와 배신감이 이안의 정신을 휩쓸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곧바로 이성을 잃고 미쳐 버렸을 막대한 감정의 해일.

-이젠 내가 네놈을 사로잡을 것이다…! 네 영혼은 영원히 내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니!

오염된 마력이 더 거세게 밀려들었다. 이안의 몸속을 가득 채우려는 모양이었다.

이안의 내면 어딘가에서 꿈틀대는 맥동이 번진 건 그때였다.

심상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혼돈의 파편이 울부짖고 있었다.

-네놈의 육신은 이제 내… …?

악마의 절규가 순간 잦아들었다.

지금쯤 이안의 온몸에 오염된 마력이 넘쳐흘러야 하건만.

아무리 마력을 밀어 넣어도 넘쳐흐르긴커녕 가득 채울 수도 없었다.

무언가가 오염된 마력을 끝없이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

혼돈의 파편이었다.

-이건…? 아니, 웃기지 마라…!

포효한 악마가, 마력과 함께 자신의 영혼을 이안의 육체로 밀어 넣었다.

폭포수를 역행하는듯한 저항력.

이안의 몸속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마력에 휩쓸리는 이안의 영혼이 조금도 오염되거나 물들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단단함을 넘어 이질적인 느낌마저 드는 영혼.

오염된 마력을 끝없이 빨아들이던 혼돈의 파편이 심장이 맥동하듯 울리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작디작은 파편에서 혼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오염된 마력은 물론 악마의 영혼마저도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휩쓸려 밀려났다.

악마를 놀라게 한 것은, 이안의 육체에서 튕겨 나갔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수한 혼돈을…?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나, 한낱 필멸자가…?

"…나도 궁금해하던 부분이군."

이안이 내뱉은 건 그때였다. 이안을 뒤덮은 마력이 당혹스럽게 출렁댔다.

악마의 마력은 이제 조금도 그의 육체를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전신을 움켜쥔 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쨌든…."

이안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흰자위 전체가 선명한 보랏빛으로 일렁였다. 그의 시선이 마력 덩어리 한복판, 악마의 영혼을 꿰뚫듯 응시했다.

"…네놈이 내 몸을 차지할 방법은 없는 것 같군."

-네놈은 설마…. 혼돈, 혼돈의…?

악마가 더듬댔다. 그사이 이안은 전신에 넘실대는 혼돈력을 단죄의 검에 밀어 넣었다. 아직 남은 푸르스름한 신성력의 잔재가 짙은 남색으로 물들며 피어올랐다.

티르 엔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개하겠지만.

어차피 그녀의 시선은 마경의 이 깊은 지하까지는 닿지도 않았다.

투두두둑-

팔에 힘을 주자 팔을 옭아맨 마력이 떨어졌다. 머리 위로 치켜 올라간 단죄의 검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쉬학-

남색 호선이 오염된 마력을 가르고, 그 한복판의 영혼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찰나의 적막.

세로고 길게 이어진 궤적이 폭발하듯 벌어졌다. 악마의 찢어지는 비명. 뭉쳐 있던 마력이 물풍선이 터지듯 흩어졌다.

-아, 안 돼…! 이렇게는…! 이렇게는…!

악마의 허망한 단말마가 허공에 메아리쳤다. 쩌적, 왕좌 옆의 허공에 균열이 일었다. 깨진 공간의 틈 너머로 보랏빛이 너울거렸다.

쉬하아아아-

사방에 자욱한 마력과, 타락자의 영혼에서 태어난 악마가 공허로 빨려 들어갔다.

한없이 멀어지던 비명이 한순간 칼로 자른 듯 끊어졌다.

공간의 균열이 사라졌다.

'…여왕은 그냥 사라지던데, 왜 저놈만 공허로 빨려 들어간 거지.'

생각한 순간, 눈앞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더는 이어지는 퀘스트가 없었다.

확인 창을 닫은 이안이 잠시 숨을 골랐다.

전신을 뒤덮었던 혼돈력이 파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혼돈의 파편은 다시 고요해졌다.

아까 전, 파편이 오염된 마력을 빨아들인 건 이안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이안의 몸속에 다른 불순물이 끼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파편이 멋대로 작동했었다.

'설마, 이 안에서 뭐가 태어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이안은 파편이 아주 조금 더 커진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사실 그는 이 파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혼돈력도 마찬가지였다.

태초의 힘이며, 게임에서 캐릭터를 타락시키면 다룰 수 있게 되는 힘이라는 것. 다른 힘과 어떤 식으로든 섞일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지식의 전부였다.

혼돈의 파편을 계속 키우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혼돈력을 다루다 보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다.

딱히 관심을 두지 않은 건 타락 DLC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세계관이나 설정, 악역과 조연 캐릭터들의 뒷사정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1회차 플레이에 신경 쓸 콘텐츠는 아니었다.

'…어쨌든, 최악의 결말 같은 게 기다리진 않겠지. 그래도 엄연히 플레이어에게 주어진 힘인데.'

어차피 지금에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중요한 건 덕분에 예상치 못한 기습을 무사히 넘겼고, 경험치와 퀘스트 보상까지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었다.

대충 결론 내린 이안은 비로소 단죄의 검을 회수하며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은 장내.

닫힌 대문 너머도 고요했다.

전투가 끝났거나, 둘 다 죽은 것이리라. 후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

몸을 돌린 이안은, 단상 아래 떨어진 왕관을 집어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

여왕의 머리에 있을 땐 족두리처럼 보였건만.

그의 머리통 정도는 그냥 통과시키고도 남을 크기였다.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한 능력은 없는, 전리품.

하지만 이안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꽤 비싸게 팔 수 있겠군."

이건 고대 거인 왕국이 북부의 지하에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의 손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물이었다.

이만한 전리품이라면 자치령 사령부나 루 솔라 교단. 그도 아니라면 제국 황실에라도 비싼 값에 팔아넘길 수 있으리라.

게임에서도 공허나 고대 문명과 관련된 전리품은 그런 식으로 팔아먹을 수 있었으니까.

설사 그들을 통하지 않더라도 팔아 치울 길은 많았다.

딱 봐도 순금으로 만들었으니까.

중간중간 박힌 보석들도 전부 진짜일 터였다.

이 값만 받아 낸다 하더라도, 제국제 마법 무구를 몇 개는 살 수 있으리라.

"슬슬 장비 빨도 필요해지고 있으니까…."

왕관을 아공간에 넣은 이안이 다시 장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측면의 벽 구석에 솟은 또 다른 대문에 멈춘 순간.

쿠… 구구구구….

알현실의 정문이 느릿느릿 열리기 시작했다.

수인과 흡혈 마족의 모습이 그 사이로 드러났다.

이안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샬롯이 먼저 장내로 들어섰다.

"호오… 대단하군…."

그녀의 모습은 대회관에서의 전투도 녹록지 않았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한쪽 볼에 가로로 길게 새겨진 새로운 상처. 쌍검 중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검집만 남았고, 새로 맞춘 방어구도 곳곳에 구겨지고 찢겨 나갔다.

견갑과 팔목 보호대, 허벅지까지 이어진 각반이 특히 그랬다.

안에 받쳐 입은 누비옷조차 갈기갈기 찢긴 한쪽 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부상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 많은 것들을 전부 홀로 상대했다니…."

그저 널브러진 친위병들의 잔해를 눈에 담으며 감탄할 뿐.

그 옆을 한심하다는 듯 노려보며 지나친 테사이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이안을 바라보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안."

그녀의 행색 역시 남루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늑대 로브는 곳곳이 찢어지고 구멍이 나서 너덜댔고. 안에 받쳐 입은 옷들은 죄다 찢어져서 새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 너희도."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테사이아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무사해 보여?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몇 번이나."

"엄살이 심하군. 그 정도론 죽지도 않는 주제에."

샬롯의 핀잔에 테사이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거의 다 너 때문에 그런 건데, 엄살? 이안, 쟨 그냥 광전사야. 도망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군다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잘들 하고 있군."

"뭐라고…?"

이안은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의 테사이아를 지나치며 덧붙였다.

"밖의 조각상들은 전부 해치웠나?"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갑자기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멈춰 버리더군. 덕분에 네가 이겼다는 걸 알았다."

그것들이 멈춘 건 여왕이 죽고 나서일까, 아니면 악마가 죽고 나서일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테사이아의 첨언이 이어졌다.

"그전까진 난리도 아니었어. 갑자기 칼에서 고드름이 튀어나오질 않나 얼음 가시가 치솟질 않나. 저 미친 야옹이만 신났었지."

여왕의 마법이, 대회관의 경호병들에게도 적용되었던 모양.

이안이 무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이, 샬롯이 덧붙였다.

"말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적이 너무 많았다."

"테사이아가 피를 빤 건 아니고?"

"그것도 맞다."

"야, 그건 어쩔 수."

"하지만 그땐 이미 죽은 상태였고, 귀쟁이도 부상을 당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

끼어들었던 테사이아가 입을 뻐끔댔다. 샬롯이 자신의 입장까지 대변해 주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하지 못 한 일은 아니야."

"복수는 제대로 해 줬다. 그거면 그 녀석들에게도 위안이 되겠지."

"그래서, 정말 여기 여왕이 잠들어 있기라도 했던 거야?"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타락했더군. 그래서 죽였다."

"대단한 업적이군. 왕 살해자라."

샬롯이 탄성을 흘렸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오해를 사기 딱 좋은 말이군.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마라."

"그런데 어디 가, 이안?"

참 빨리도 묻는다.

알현실 측면의 문 앞에 멈춰 서며, 이안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나가는 길을 찾아야 되거든."

"뭐라고…?"

테사이아가 순간 헐떡댔다.

"영원히 여기 갇힐 수도 있단 말이야?"

이안은 대답 대신 문을 밀기 시작했다.

벽을 미는 것 같은 묵직함.

쩍, 쩌적….

오랜 시간 열린 적 없는 듯, 문틈 사이로 얼음 깨지는 듯한 소리가 번졌다.

이안은 양팔에 더 힘을 줬다.

여왕과 악마를 죽이고 나서도, 동굴 입구가 움직일 때 느껴지던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굴 입구는 아직도 지하에 묻혀 있으리란 의미였다.

그러니 다른 통로를 찾아야 했다.

넓은 궁전이니, 샅샅이 뒤지다 보면 하나쯤은 더 있을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엔 갈색을 찍을 수밖에. 지각 변동까지만 익히면, 어떻게든 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쿠… 구구구….

다행히, 그런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한 문틈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흘러들었다.

'…어디로 이어지는 거지?'

이안이 미간을 좁히는 사이, 잽싸게 달려온 테사이아가 물었다.

"길이네? 나갈 수 있는 거야?"

"그건 가 봐야 알겠지."

내뱉은 이안이 다시 몸을 돌렸다.

테사이아가 눈을 끔뻑였다.

"길을 찾아 놓고, 또 어디 가?"

"궁전을 뒤질 거다."

걸음을 옮기며 대답한 이안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냈다.

"너흰 쉬면서 상처를 치료해."

샬롯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전리품을 찾으려는 거냐?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뭐, 그럼 그러던가."

테사이아가 의욕 없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여기 뭔가 대단한 보물이 묻혀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있길 바라는 게 좋을 거다."

"왜?"

"여기서 얻은 전리품은 너희한테도 나눠 줄 거니까."

"...!"

눈을 치켜뜬 테사이아가, 곧바로 은발을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

파라락-!

"이안, 저 안쪽 방에 이런 돌이 잔뜩 쌓여 있어."

"마력이 다 빠져나간 마석이군."

"…쓰레기란 뜻이야?"

"바로 그거다."

파라락-

"이안, 저쪽엔 이런 뭔가 있어 보이는 책이… 어…?"

"다음부턴 들고 오는 동안 바스라 지는 건 그냥 버려라."

"...."

안에서부터 시작된 전리품 수색은 소득 없이 이어졌다. 지하 궁전은 정말 여왕의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인 모양이었다.

알현실 옆에 따로 위치한 침실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고. 이어진 여왕을 섬기는 마법사들의 휴식 공간. 창고. 연구실. 서고 따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나긴 시간을 놓여 있던 물건들은, 썩지도 않고 그저 빛 바란 채 삭아버렸다.

서고의 수많은 양피지와 책들은, 대부분 건드리기만 해도 툭툭 바스러졌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도 건질 건 없었다. 하나 같이 불길하게 생긴 원시 상형 문자와 이안도 알아볼 수 없는 어려운 고대 북부어, 기호와 도형 따위가 빼곡했다.

심지어 방패로 써도 될 만큼 컸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몇 권 챙긴 게 소득의 전부였다.

공허의 힘을 연구할 때 쓰인 것으로 보이는 실험 도구들도 상태는 마찬가지였고, 창고마다 산처럼 쌓인 마석들은 마력이 모두 흩어진 돌 더미에 불과했다.

이안은 딱히 실망하지 않고 수색을 이어나갔다.

이미 충분히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이건 그저 혹시 모를 추가적인 보상을 놓치지 않기 위한 절차였다. 이런 본격적인 던전에 발을 들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흠."

얼핏 보면 고문실 같은, 인간과 난쟁이를 대상으로 흑마법을 실험한 듯한 연구실과 불길한 주문 회로가 잔뜩 새겨진 용도를 알 수 없는 방 따위가 스쳐 지나갔다.

"북부 거인 왕국이 끔찍하게 타락했었다는 건 확실히 알겠군."

샬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저 조각상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들 중에 마법사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마법사는 다 죽였겠지."

"...!"

"여왕은 힘에 대한 집착이 엄청났다. 공허의 비밀을 공유한 마법사들을 살려 둘 리가 없지. 다 죽였거나, 어쩌면 더 큰 힘을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버렸을지도."

"설득력 있는 말이군…. 역겨운 주문쟁이 다운 방식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네가 역겹단 얘긴 아니다, 이안."

"뭐, 틀린 말은 아니야. 나도 예외는 아니고."

이안은 다른 부분에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진 공허의 힘을 끌어다 쓰면서 유지했다고 쳐도, 왜 아직도 어두워지질 않는 거지?'

궁전을 밝히는 광원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죄의 검도 여전히 침묵했다.

여기가 엄청나게 깊은 땅속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마경이 아직 깨지지 않은 거라면, 여왕이나 악마가 아닌 다른 동력원이 있다는 얘기였다.

물론,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벽을 부수고 다닐 생각까진 없었다.

최악의 가정이지만, 이 지하 궁전 역시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풀겠답시고 들쑤시다 궁전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그보다 더한 개죽음은 없으리라.

'뭐, 용의 둥지였다니까. 용의 비전 같은 걸 수도 있겠지….'

파라락-

그때, 입구 근처의 통로들을 수색하러 간 테사이아가 돌아왔다.

이번엔 아예 빈손이었다.

"말도 안 돼. 이 넓은 공간에 쓰레기밖에 없다니…."

그녀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탐욕은 확실히 귀쟁이의 본성인 모양이군."

"난 그냥 내 걸 가져보고 싶은 것뿐이거든? 내 소유물이라고 할 만한 게 이 누더기뿐이란 말야."

샬롯이 뭐라 반격하려는 찰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저 앞도 다 허탕인 거냐?"

"여기보다 더해. 거긴 병사나 하인들이 쓰던 공간 같아. 낡아빠진 고철덩이들이 놓인 방 같은 거나 몇 개 있는 게 전부야. 내가 볼 때 여긴-"

"…고철덩이들이 놓인 방이, 몇 개나 있다고?"

이안이 말을 잘랐다.

테사이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확히는 세 개야. 둘은 거인들이 쓰던 걸 방 같고. 하나는 인간이나 난쟁이들이 쓰던 공간 같은데."

"...!"

샬롯이 이안을 돌아보는 가운데, 테사이아가 해맑게 덧붙였다.

"거인들은 정말 인간이랑 난쟁이를 노예로 부렸나 봐. 큰 것들이랑 작은 것들을 완전히 분리해 뒀어. 큰 것들 방은 화려한데, 작은 것들 방은 초라하고."

"그렇군. 그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테사이아를 마주 보았다.

"그 초라한 방으로 안내해라."

"...?"

#087화

초라하다는 건 궁전의 다른 방을 기준으로 한 이야기였다.

사람 백 명은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공간에, 온갖 병장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변색되고 삭아 버린 것 같긴 했지만.

"멋지군…."

샬롯이 감탄한 얼굴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빛에,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뒤져 봐라."

샬롯이 재빨리 달려 나갔다. 발걸음에 생기가 돌았다.

"저러면서 나한테 탐욕 어쩌고 하다니. 참나."

반면 테사이아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이안이 내뱉었다.

"무기에는 관심이 없나 보군. 전의 그 심판자는 잘만 쓰던데."

"불편해. 쓰고 싶지도 않고. 아무래도 난, 그냥 요정일 시절에도 무기를 다루진 않았던 것 같아."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요정은 상상이 안 되는데…."

이안은 게임 속 요정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오만하고 동시에 잔혹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이종족들에겐 특히 더.

쇠나 두드리는 땅딸보라든가 누린내 나는 예비 마족, 돈 밝히는 들창코 등등.

그가 아는 이종족을 비하하는 욕 대부분은, 요정에게 배운 거였다.

"뭐, 알아서 해라."

이안은 다양하게 거치된 병장기들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겼다.

설정대로면 고대의 물건들이건만.

정보창을 확인할 수 있는 몇몇 물건들은, 내구도가 다했을 뿐 본래의 성능은 웬만한 이 시대 물건들보다 뛰어났다.

'제국을 제외하면 오히려 이때 기술력이 더 앞서는 것 같은데….'

하긴. 문명이 오히려 쇠퇴하는 건 본래 세상의 역사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던 일이었다.

수많은 전쟁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선 더더욱 잦았으리라.

번영했던 고대 왕국의 문명이 현 제국에 비견되는 수준이라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게임 속 유물들이 그렇게 뛰어난 능력치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제국의 기술자나 마법사들이 고대의 주문이나 기술을 연구할 이유도 없을 테고.

"…호오."

잡생각을 이어가던 이안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거치대에 툭 얹어져 있는 단검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변색은커녕, 날의 예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양날 단검이었다.

날 표면에 묘한 문양이 일렁였다.

이안은 뭔가의 뼈로 만든 듯한 거무스름한 손잡이를 쥐었다.

정보창이 이어졌다.

고대의 운철 단검.

유물치곤 낮은 희귀 등급인 데다 특별한 마법이 새겨져 있지도 않았지만.

대신 공격력과 내구도가 특출나게 높았다. 내구도 감소 보정에 공격 시 장비 파괴 확률까지 옵션으로 붙어 있었다.

수리 불가능 옵션도 붙어 있었지만, 이건 유물들에 거의 다 기본적으로 붙어 있는 페널티였다.

'훌륭하군.'

기존의 단검 집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안은 냉큼 아공간에 운철 단검을 챙겨 넣었다.

그 후로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괜찮은 장비를 하나 건진 것만으로도 이미 소득은 충분했다.

"쓸 만한 물건을 찾았다, 이안."

샬롯이 다가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커다란 외날 도끼를 양손으로 든 채였다.

"너랑 참 어울리게 생겼네, 야옹아. 아주 무식해 보여."

테사이아가 비아냥댔다.

샬롯이 콧방귀를 뀌었다.

"귀쟁이다운 처참한 안목이군."

이안의 앞에 선 샬롯이 그에게 도끼를 내밀었다.

도끼는 보이는 것만큼 묵직했다.

넓고 길게 뻗은 외날. 날 하단은 길게 이어져, 자루의 절반 이상을 가릴 정도로 컸다.

자루를 쥔 손을 충분히 지킬 수 있을 수준. 거기다 자루까지 통째로 금속이었다.

"호오."

놀랍게도 이것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희귀 등급인 고대 장인의 전투 도끼.

엄청나게 높은 공격력에, 무기임에도 방어력까지 올려 줬다. 내구도도 기본적으로 뛰어난데, 거기다 내구도 회복 옵션까지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루를 따라 새겨진 고대어 주문이 보였다. 마석을 장착할 필요가 없는 걸 보니, 대기 중의 마력을 머금으며 작동하는 종류인 모양이었다.

옵션이 하나인 주제에 희귀 등급인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것도 이 주문 덕분일 터.

"훌륭하지 않나?"

샬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쓰기엔 너무 무겁군."

"그런가…."

샬롯의 귀가 살짝 처질 찰나.

"나보단 네게 어울릴 것 같은데."

"...?"

이안이 그녀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샬롯이 눈을 끔뻑였다.

이안이 그녀의 빈 검집을 턱짓했다.

"어차피 검도 한 자루 부러졌으니까. 이걸 다룰 수 있다면, 네가 써라."

"허…."

이안이 건넨 도끼를 받아든 샬롯이,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멍한 눈길로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뒤이어 한 손으로 자루를 쥔 그녀가, 옆으로 슬쩍 팔을 휘둘렀다.

그녀에게도 무거워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눈치.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미소 짓던 그녀가, 퍼뜩 정신이 든 듯 이안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런 귀한 걸 내게 줘도 괜찮겠느냐?"

"어차피 난 있어도 안 써. 네가 안 쓰면 팔아 치울 거다. 돈으로 받고 싶나?"

"그럴리가…."

꾸욱, 도낏자루를 쥔 털로 뒤덮인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도끼를 응시한 샬롯이 다짐하듯 내뱉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 이안."

"말도 안 돼…. 또 저 짐승만 선물을 받다니."

테사이아가 탄식했다.

"원래 행운은 기대하지 않은 자에게 돌아오는 법이지."

보란 듯 도끼를 어깨에 걸친 샬롯이 그녀를 느긋하게 지나쳤다.

짤막한 꼬리가 흔들렸다.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테사이아가 홱 고개를 돌렸다.

"생각이 바뀌었어, 이안. 나도 이 안에서 뭔가…."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끊어졌다.

주위를 은은하게 밝히던 광원이 한순간 사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쿠르릉….

저 먼 곳에서부터 번지는듯한 낮은 진동. 푸스스, 궁전의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지진이 잦아들었다. 다시 주위가 은은하게 밝아졌다.

굳어 있던 테사이아가, 눈동자만 굴려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거, 설마?"

"…여유를 너무 부렸군."

무표정해진 얼굴로 내뱉은 이안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

알현실로 돌아온 일행은, 곧바로 옆의 컴컴한 통로로 접어들었다.

어디로 이어진 길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횃불에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살펴본바, 이곳 외에 다른 길은 결국 없었을 뿐만 아니라.

쿠르릉….

심연이 뒤척이는 듯한 나지막한 진동이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진동이 지하 궁전과 통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사실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여길 벗어나야 할 이유로는 차고 넘쳤다.

'…이래놓고 막다른 길인 건 아니겠지.'

이안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지하 궁전이 그랬듯, 이 통로도 게임에서 경험해 본 적 없는 길이었다.

이 세계에서 무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가 새삼 와닿았다.

지하에 매몰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 따윈, 지금까지 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만약 길이 막혀 있고 궁전도 무너진다면… 해 볼 수 있는 발악은 다 해 볼 수밖에.'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이런저런 계획을 쉴 새 없이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물론, 모두가 그처럼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과 맞서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죽는다고…? 아니, 난 그냥 죽지도 못하잖아. 여기 영원히 산채로 파묻히게 되는 건가? 미라처럼 바짝 말라 가면서? 그건 안 돼. 얘들아, 부탁할게. 만약 그런 순간이 온다면 차라리 너희 손으로 날 죽여 줘. 아니? 난 죽고 싶지 않아. 이안, 이안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이안은 언제나 답을 찾아내니까. 이안, 그렇지? 제발 대답 좀-"

입술만 달싹이던 테사이아의 중얼거림이 점점 커졌다.

궁지에 몰리자 마족 특유의 광기를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주황색 눈동자가 결국 그녀를 노려보았다.

"입 좀 닥쳐라, 귀쟁아."

테사이아는 평소처럼 날카롭게 받아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의 떨림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샬롯을 마주 보았다.

"무서워서 그래, 샬롯. 넌 죽음이 두렵지 않겠지만, 난 아냐. 죽고 싶지 않아…."

"...."

샬롯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녀가 내뱉었다.

"적어도 너 혼자 외롭게 죽지는 않을 거다, 귀쟁아."

"...."

"너 혼자 이 깊은 심연 속에 살아남을 걱정은 하지 마라. 그 전에 내가 안식에 이르도록 도와줄 테니."

"안식…? 죽음이?"

"수인은 그렇게 여기지. 루 솔라께서도 그리 말씀하셨고."

"마족인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모르지. 하지만 네 영혼이 설사 공허를 떠돌게 된다 해도, 산채로 억겁의 시간을 파묻혀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하긴, 그래. 그것보단 죽는 게 낫겠지. 알았어. 그 순간이 오면 시원하게 한 판 붙자. 야옹아."

"…붙자고?"

"넌 싸우다 죽고 싶다며? 나도 네 소원 하나 들어주지 뭐."

선심 쓴다는 듯한 말투.

샬롯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하지만 난 이왕이면 이안의 손에 죽고 싶다."

"사실은 나도. 이안은 안 아프게 죽여 줄 것 같아."

"그 기회는 다음에 주도록 하지."

대답한 이안이,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았다.

"지금은 저 앞에 있는 계단을 오를 준비부터 해야 할 것 같으니까."

"...!"

샬롯과 테사이아의 시선이 저 먼 어둠 너머를 훑었다.

기나긴 어둠 끝에, 한 칸 한 칸이 높은 계단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방금 한 말은 취소할게. 난 안 죽을 거야."

내뱉은 테사이아가 은발을 펄럭이며 앞서갔다.

서로를 돌아보며 짧게 피식한 이안과 샬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안과 샬롯은 한 칸의 높이가 무릎보다도 높은 계단을 올랐다.

이안은 물론이고 샬롯의 숨결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지치는 게 당연했다.

숲에 발을 들인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휴식다운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를 뿐.

"여기야. 여기."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덧 계단이 끝나고 있었다.

웅웅, 문득 단죄의 검이 낮게 울었다.

비로소 티르 엔의 시선이 닿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이안이 계단 끝에 섰다.

"이거 문 맞지? 생긴 건 그런데, 밀어도 안 열려."

테사이아가 앞에 높다랗게 솟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 궁전과 달리, 검은색에 가까운 돌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문 옆에는 이안보다도 큰 기둥이 하나 불쑥 솟아 있었다.

"기관 장치인가…."

이안이 그 앞으로 다가갔다.

샬롯이 눈치껏 뒤를 따랐다.

"뭐야. 그게 그냥 장식이 아니었어?"

테사이아도 얼떨떨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안이 레버 아래의 틈을 내려다보았다. 흙먼지가 뒤덮여 있었다.

"내가 밀면, 힘껏 당겨라."

이안이 레버를 힘껏 밀었다. 좌우에 선 샬롯과 테사이아도 온 힘을 다해 함께 당겼다.

끼기긱… 끽… 철컥.

불편한 소리를 내며 움직인 기둥이, 이윽고 반대편으로 비스듬하게 밀려나 멈췄다.

철컥철컥, 드드드드드-

낡은 태엽과 도르래가 맞물리고 돌아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푸스스-

흙먼지와 함께, 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기대와 달리 빛이 스며들지는 않았다.

칙칙한 어둠. 아직도 땅속이었다.

쿠구궁….

이윽고 낮은 울림과 함께 문이 완전히 열렸다.

이안은 문 너머로 드러난 광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또 다른 유적 내부였다.

"여긴 또 어디…."

읊조리던 테사이아가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검지를 입술에 댔기 때문이었다.

둘에게 눈짓을 보낸 이안이, 조심스럽게 문 너머로 걸음을 내디뎠다.

퀴퀴한 고인 공기.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듯한 넓은 적막.

여긴 그들이 지나온 통로와 마찬가지로 광원이 전혀 없었다.

꺼져 가는 횃불만이 주위를 간신히 밝혔다. 이안에겐 그 정도 빛이면 충분했다.

한 걸음 더 나온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벽면 한복판이었다.

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위치.

'비밀… 통로?'

이안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인족 유적 특유의 높은 천장.

몇 미터 앞에 돌기둥이 보였다. 아무런 장식이나 무늬도 없었고, 꽤 넓은 간격을 두고 좌우로 이어졌다. 저 먼 건너편에도 똑같은 기둥이 보였다.

묘하게 낯익은 광경이었다.

'…설마.'

기둥을 따라 이어지던 이안의 시선이 멈췄다. 저 멀리, 닫혀 있는 거대한 대문이 보였다.

대문 한복판에는 망치를 뒤집어 놓은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런 비밀 통로가 있었다고…?'

아히고른 산맥에는 거인 군단과 군단장이 잠든 지하 유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군단을 상징하던 문양이 바로 저 망치였다.

그들이 나온 이곳이 거인 군단 유적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여긴 던전 어디쯤인-'

쩍.

빙하에 균열이 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굳어졌던 이안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줄지어 이어진 기둥 끝에 솟은 거대한 의자.

그 위에 얼어붙은 거대한 실루엣.

쩌적.

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다시 한번 이어졌다.

실루엣 너머로 피어오르기 시작한 푸른 안광까지 확인한 이안의 입가에, 비로소 헛웃음이 번졌다.

'이런 시발….'

군단장이 깨어나고 있었다.

#088화

"하…."

탄식은 짧았다.

들고 있던 횃불을 툭 바닥에 던진 이안은, 걷느라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흉갑의 끈을 바짝 조였다.

스르릉-

단죄의 검이 잦아드는 횃불의 불빛을 반사하며 뽑혀 나왔다.

"이안. 갑자기 칼은 왜 뽑아?"

문 너머에서 지켜보던 테사이아가 참지 못하고 속삭였다. 이안이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대답했다.

"봉인된 거인이 있다. 깨어나고 있어."

"뭐라고…?"

테사이아의 눈이 커졌다.

이안이 덧붙였다.

"너희는 물러나 있어라. 지치고 부상당한 몸으로 상대할 놈이 아닌 것 같으니까."

"어, 응. 네 뜻이 그렇다면-"

"지치고 부상당한 건 너도 마찬가지다, 이안."

문밖으로 성큼 걸어 나오면서 샬롯이 내뱉었다.

흐릿한 어둠 사이로 그녀의 주황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나도 너와 싸우겠다."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안이 맘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테사이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괜찮다잖아, 야옹아…. 난 지금 엄청 배고픈 상태라고. 여기서 더 힘을 쓰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단 말야."

"그럼 넌 빠져라, 귀쟁아."

"네가 싸우는데 내가 어떻게 빠지냐고. 이 미친 짐승아…."

체념하듯 중얼댄 테사이아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안이 바라보는 어둠 너머, 흐릿하게 번지는 푸른 안광을 확인한 그녀가 탄식했다.

"얼어… 있는 거야?"

"그래. 저 얼음이 봉인 같군."

쩌적, 이안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균열이 번지는 소리가 났다.

그 짧은 사이 이미 바람 칼날과 휘몰아치는 방벽을 시전한 이안이, 잿빛 마력이 맺힌 눈으로 샬롯을 돌아보았다.

"네 방식은 알지만, 저놈은 심상치 않다.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라."

장비들을 몸에 맞게 재조정하며,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지."

"그런 건 걔가 아니라 나한테 말해야 돼, 이안. 쟨 싸우기 시작하면 기억도 못 한다고."

"그럼 너도 신경 써라."

무심하게 대답하며, 이안은 주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치직, 치지직-

단죄의 검을 타고 푸른 스파크가 번지기 시작했다.

저 너머, 거인 군단장의 모습이 얼핏 얼핏 드러났다.

다른 거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 놈을 뒤덮고 있는 몇 센티미터 두께의 얼음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점점 더 크게 번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일렁이는 푸르스름한 안광.

'게임이랑 똑같네, 시발….'

과거의 기억이 절로 뇌리를 스쳤다. 그때 이 지하 유적에 발을 들인 건, 북부에서의 스토리를 반 이상 진행했을 무렵이었다.

트라벨가에서 여러 퀘스트를 해결하고, 북부의 지휘관 중 하나인 루카스의 신뢰를 충분히 얻은 후.

그에게서 산맥 깊숙한 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적의 입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인력 부족을 비롯한 여러 이유들 때문에 탐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그곳을 탐사한 건, 당연히 그때까지만 해도 게임 캐릭터였던 그. 이안 호프였다.

그리고 그는 탐사뿐만 아니라, 산맥을 배회하는 정예 마물들과 지하 유적에 잠들어 있던 군단장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지하 유적에 이런 비밀 통로가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위치상으론 지하 궁전에서 엄청나게 먼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산맥 지하에 그런 통로가 이어져 있다니.'

지하 궁전으로 인도하는 퀘스트인 '얼어붙은 심연'은 조건부 퀘스트가 분명했다.

하지만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지하 궁전에 발을 들일 방법이 숨겨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흔히 말하는 숏컷. 보스 룸으로 직행할 수 있는 지름길로.

그가 군단장의 방으로 나왔듯, 여기서 출발하면 여왕의 알현실에 곧바로 도착하게 됐을 테니까.

물론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플레이어가, 최소 한 번은 게임 오버 당하게 만들려는 악랄한 의도도 있을 터였다.

'악마가 여왕을 봉인한 상태도 아닐 테니까, 내가 싸운 것보다 더 어려웠겠지.'

여왕의 지원을 받는 친위병들은 엄청나게 까다로운 상대였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여왕 본인과도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면 악랄한 걸 넘어 악의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게임에는 어차피 그런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이안은 그보다는 수월한 전투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달가울 수는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게임도 아니었고, 게임 오버 당한 후에 다시 도전할 기회 같은 것도 없었다.

'그나마 이건 겪어 본 보스전이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치치치치칫-

어느새 검신에 맺힌 번개가 잔뜩 응축된 채로 눈부시게 명멸했다.

샬롯도 전투 준비를 끝냈고, 테사이아도 언제든 뛰어오를 수 있게 낮은 자세로 기다렸다.

이안은 팔을 살짝 들어 그들이 움직이지 않게 저지했다.

아직 봉인이 다 풀리지 않았으니까.

저 얼음은 평범해 보이지만, 외부의 모든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지금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법을 날리면서 실험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저 봉인이 깨진다고 해서, 군단장이 곧바로 미쳐 날뛰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봉인된 부작용인지, 게임에서도 놈은 한동안 아주 둔하게 움직였었다.

경직 상태일 때 최대한 많은 공격을 퍼부어서 체력을 빼놔야 한다는 걸, 그때의 이안은 두 번의 죽음을 통해 배웠었다.

'이번엔 이왕이면 아예 죽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진심으로 생각하며, 이안은 언제든 튀어나갈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망국의 군단장은 단순한 패턴을 가졌지만, 그걸로도 충분할 만큼 강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그는 물론이고 누가 죽게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행은 모두 지쳤고, 저 뒤편의 닫힌 대문 너머에는 수백의 거인 군단이 잠들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진짜 죽었고, 되살아난 놈들은 수십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놈들이 깨어나 합류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최대한 빨리 군단장을 처리해야 했다.

'이왕이면 전투 망치를 꺼내 들기 전에.'

빠각- 쿠르르르-

단말마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군단장을 감싸고 있던 얼음이 완전히 깨져 허물어졌다.

동시에 눈앞에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망국의 대장군.

퀘스트 창 너머로 반개한 푸른 안광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타타탓-!

이안이 쏘아진 화살처럼 달려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혼돈력을 머금고 증폭된 바람 칼날이 그의 무거운 발걸음을 보조했다.

단죄의 검에 가득 맺힌 전격이 허공에 새하얀 선을 아로새기며 뻗어 나갔다.

쿠구구구-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는 군단장의 모습이 비로소 선명해졌다.

거대한 덩치. 빛이 바랜 두꺼운 전신 판금 갑옷. 양쪽 허리춤에 찬 두툼한 쌍검. 등에 멘 전투 망치의 자루가 한쪽 어깨너머로 삐죽했다.

투구조차 쓰지 않은 머리는, 거대한 두개골 위에 잿빛 찰흙을 얇게 펴 바르고, 그 위에 수염을 대충 붙인 것 같은 끔찍한 몰골이었다.

반개한 눈구멍에서 일렁이는 푸른 안광은,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음을 증명하듯 흐릿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저 머리통이, 군단장의 약점이었다.

'한 방에 죽어 줬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번 생각하며 달려간 이안이, 놈의 머리로 검을 내뻗었다.

꽈릉-!

빛의 검처럼 보이던 검날에서 굵은 벼락이 토해졌다. 어둠을 단숨에 가른 번개가 군단장의 머리를 관통했다. 푸른 안광이 일순간 출렁이고.

콰치지지지직-!

수천 마리의 실뱀처럼 터져 나온 번개 자락이 군단장의 머리에서 시작해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혼돈력을 잔뜩 머금고 증폭된 연쇄 번개.

그나마 혼돈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위력이었다.

"크오… 오오오오-!"

군단장의 얼어 붙은 입에서 고통과 혼란이 뒤섞인 함성이 쩌렁쩌렁 터져 나왔다.

이안은 곧바로 다음 주문을 준비하면서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다른 거인들이 그렇듯, 군단장 역시 저항력이 높았다. 적색과 갈색은 반감에, 청색은 면역. 그나마 저항력이 낮은 건 회색뿐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공격용으로 익힌 전격 계열 회색 마법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공격용 회색 마법은 시전 시간이 길어서, 급박한 전투에서 사용하기 쉽지 않았다.

'가진 자원 안에서 최선을 다해 볼 수밖에.'

치치치칙-

연쇄 번개가 군단장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갈 때쯤, 번개 돌풍이 완성 됐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군단장을 향해, 새파란 뇌전 자락을 가득 머금은 돌개 바람이 밀려들었다.

파-치치치치칙-!

또 한 번의 눈부신 점멸.

감전 당하며 울부짖는 군단장의 머리로, 이번에는 이안이 쇄도했다.

이안은 머리 위로 치켜든 단죄의 검을 힘껏 내리쳤다.

콰직-! 카드드득-

군단장의 왼쪽 이마에 박힌 검날이, 눈과 광대뼈를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바람 칼날이 더해진 와중에도 바위를 자르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 저항감을 더는 이겨낼 수 없을 때쯤, 이안은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앞의 것들과 달리 시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회색 마법, 진공 폭발.

퍼억-!

무형의 폭발에 군단장의 거대한 머리가 뒤로 튕겨 나갔다. 검이 할퀴고 폭발한 그의 얼굴에서 피부 조각들이 후두둑 튀어 올랐다.

그 아래로 드러난 눈구멍에서, 푸른 안광이 타올랐다.

"우- 오오오오-!"

놈의 포효는 분노 보다는 당혹에 가까워 보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불청객의 존재를 느끼고 봉인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맹렬한 공세에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었으니까.

본능적인 당혹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전투 의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푸확-!

놈의 전신에서 마력의 파장이 터져 나왔다.

아직 남아 번쩍이던 뇌전 줄기들이 단숨에 흩어지고, 진공 폭발의 여파로 뒤로 튕겨 나가던 이안의 미간도 구겨졌다.

'이걸 벌써 쓴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그는 서리 방패를 시전하고 있었다.

물론 얼음 방패가 그의 앞을 완전히 가리는 것보다 파장이 그를 훑고 지나가는 게 더 빨랐다.

콰직-

얼음 방패를 두른 이안이 어깨부터 떨어졌다.

그의 몸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높은 저항력 덕분에 몸까지 얼어붙지는 않았지만, 갑옷을 비롯한 장비들 위로 서리가 맺혀 있었다.

파장이 훑고 간 땅바닥에도 새하얀 얼음이 맺혔다.

냉기 파장. 아니, 냉기 물결에 가까운 마력 폭발이었다.

'역시, 한 번엔 안 되는군.'

혀를 찬 이안이 사지를 움직여, 표면에 맺힌 얼음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빨리 상태 이상에서 벗어나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타타탓-

그의 뒤로 거뭇한 인영이 쏜살같이 가까워진 건 그때였다.

슈확-!

몸을 일으키는 이안의 머리 위를 뛰어넘고 서리 방패의 가장자리를 박차며 솟구친 건, 거대한 전투 도끼를 양손으로 움켜쥔 샬롯이었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진 이안의 공세가 끝났음을.

그걸 넘어 군단장이 반격까지 시작했음을 깨달은 순간 비로소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캬오오오오-!"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큰 군단장을 향해 포효하며,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일어서던 군단장의 안광이, 자신에게 쇄도하는 샬롯에게로 향했다.

쒸에에에엑-!

도끼가 파공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군단장이 팔을 들어 그 앞을 막았다.

콰직-!

두꺼운 팔뚝 보호대 한복판이 움푹 구겨졌다. 군단장의 몸이 뒤로 밀려나, 놈이 앉아있던 거대한 돌의자에 부딪혀 휘청댔다.

비스듬하게 뒤로 넘어가는 군단장의 팔뚝에 매달리듯 착지한 샬롯이, 재차 도끼를 치켜 들었다.

콰직-! 콰직-!

그녀가 포효하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처음 사용하는 것임에도, 평생 도끼를 휘둘러 온 야만 전사 같은 익숙한 움직임.

도낏자루를 쥔 손과 새카만 털이 올올이 뒤덮인 팔뚝에 근육이 터질 듯 부풀었다.

콰직-! 콰드득-!

멈추지 않고 이어진 도끼질에 군단장의 팔에 덮인 두꺼운 갑주가 구겨지다 못해 찢겨 나갔다.

그 아래로 잿빛 피부가 드러났다.

콰직-!

기어코 그 위로도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군단장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피부에 도끼가 후려친 자국이 고스란히 남았고, 그 아래의 돌덩이 같은 새카만 속살과 근육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고통까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으- 오오오오오-!"

의자에 기댄 자세 그대로 포효한 군단장이, 반대쪽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강철보다 단단한 잿빛 손아귀가 그대로 샬롯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대포알처럼 튕겨져 나간 샬롯이, 대각선에 위치한 기둥 하나를 몸으로 부숴버리고는 그 너머까지 날아갔다.

퍼억-!

그녀가 벽면에 처박히기 전에 낚아챈 건 은빛이 넘실대는 덩어리였다.

은빛 머리칼은 충격을 단번에 흩어 버리진 못한 듯 튕겨 나가 허공을 핑그르르 돌고는, 이윽고 기둥 옆에 수직으로 착지했다.

그대로 기둥을 박차고 날아오른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이 미친 짐승아! 반격 당하기 전에 몸을 빼라고!"

그녀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샬롯을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은빛 매가 샬롯을 낚아챈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익숙한 듯 반항하지 않고 매달린 샬롯이, 입에 머금은 피를 뱉었다.

부러진 이빨 몇 개가 피에 섞여 흩어졌다. 아물었던 한쪽 얼굴의 상처가 다시 터져서, 그녀의 얼굴 한쪽 면을 붉게 물들였다.

"이번 건 예상을 못 했다."

"이안이 한 말 기억 안 나? 한 대라도 잘못 맞으면 죽는댔잖아. 그리고 네가 죽으면 나도 죽어."

"알고 있다. 그리고 방금은, 시간을 벌려고 한 거다."

"시간?"

"그래. 이안이 다음 공격을-"

콰르릉-

샬롯의 말을 자르며, 대기가 울렸다.

테사이아는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군단장 쪽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뇌전을 두른 단죄의 검.

검자루를 역수로 쥔 이안이 놈의 코앞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샬롯을 떨쳐내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으려던 군단장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빛의 검을 노려보았다.

콰직-!

뼈가 훤히 드러난 눈구멍으로 단죄의 검이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반대편 안광이 일순간 흔들리고.

쿠르릉.

몸속에서 터져 나온 새파란 전격에, 군단장의 머리가 튕겨 나가듯 뒤로 젖혀졌다.

머리의 모든 구멍에서 일순간 푸른 빛이 번쩍였다.

파치치칫-

연쇄 번개가 군단장의 머리 속에서부터 번지기 시작했다.

군단장의 거대한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푸스스 잦아드는 놈의 안광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치웠나…?'

#089화

사그라들던 안광이 폭발하듯 분출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경련하며 축 늘어지던 군단장의 전신에 순식간에 힘이 되돌아왔다.

동시에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의 울림.

'이런, 시발.'

인상을 구긴 이안이 놈의 가슴을 박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크… 오오오오-!"

콰아아아-

군단장의 전신에서 냉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냉기를 잠시 막아내던 휘몰아치는 방벽이 찢겨나갔다.

쩌저적,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는 이안의 전신에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인상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이안은 포효하며 일어선 군단장을 바라보았다. 놈이 등에 멘 거대한 전투 망치를 뽑아 들고 있었다.

'…결국 저걸 뽑는군.'

이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

게임에서 군단장의 전투 페이즈는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봉인에서 풀려난 직후의 맨손. 그리고 허리춤의 쌍검을 뽑아, 냉기 칼날과 충격파를 날려 대는 2단계.

마지막이 저 전투 망치였다.

전신에 냉기 폭풍을 두른 채로 접근하는 플레이어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망치로 후려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파훼하기 쉽지 않은 강력한 패턴이었다.

저 망치에 정타를 얻어맞으면 즉사였으니까.

전투 망치의 크기로 미뤄 볼 때, 현실이 된 지금도 결과가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쿵.

군단장이 힘껏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일어서려던 이안은 다리가 편하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위에 번진 서리가 전투화와 각반, 그리고 그가 땅에 딛고 있는 장갑 표면까지 뒤덮여 있었다.

시린 한기가 뒤늦게 전해졌다.

'염병하네, 진짜.'

이안이 힘껏 팔다리에 맺힌 얼음을 떨쳐내는 그때, 군단장의 시선이 문득 옆으로 돌아갔다.

놈의 안광이 분노로 타올랐다.

타타타탓-!

샬롯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단장의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려는 모양.

하지만 지금은 아까와는 상황이 달랐다.

"멈춰!"

이안이 소리쳤다. 하지만 샬롯의 귀에는 제대로 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이미 군단장의 주위로 휘몰아치는 얼음 폭풍으로 접어든 후였으니까.

쩍, 쩌적-

샬롯의 돌진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녀의 전신이 얼어붙고 있었다.

갑옷의 표면뿐 아니라, 그녀의 검은 털 위로도 성에가 맺혔다.

"크- 아아아아-!"

샬롯이 포효하며 돌진을 이어 갔다.

그녀의 몸을 덮던 얼음이 깨져 나갔다.

'죽고 싶은 것처럼 싸운다더니.'

생각하면서도, 이안은 쉴 틈 없이 빙하 장벽을 시전하고 있었다.

군단장이 머리 위로 전투 망치를 치켜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샬롯은 물러서거나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미 그게 가능하지 않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군단장이 저 망치를 내려치면, 다음 순간 남은 건 한때는 샬롯이라 불렸던 얼어붙은 고기 파편뿐일 터.

쩌저저적-

이안이 샬롯과 군단장의 사이로 손을 내뻗었다.

두꺼운 얼음 장벽이 순식간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일격으로부터 샬롯을 완전히 보호할 만큼 솟아오르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파라라락-!

쏜살같이 뻗어나가는 출렁이는 은빛 덩어리가 시야에 들어온 건 그 직후였다.

이안은 그제야, 이대로면 샬롯이 죽으리라 생각한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콰지지직-!

힘껏 내리친 전투 망치가 아직도 솟구치는 중인 빙하 방벽을 깨부수며 떨어져 내렸다. 테사이아가 샬롯을 낚아채 집어 던진 건 거의 동시였다.

그 과정에서 일순간 느려진 테사이아의 몸을, 방벽을 깨부수며 떨어진 망치가 스치고 지나갔다.

쿠우웅-!

바닥을 친 망치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말려든 흡혈 요정을 바닥에 한차례 처박고, 벽면까지 단숨에 날려 버리기 충분하고도 남는 위력이었다.

콰드득-!

벽에 함몰된 것처럼 처박힌 테사이아에게서 끔찍한 소리가 터졌다.

"테사…?!"

똑같이 벽에 처박혔으나 별것 아닌 충격만을 받았던 샬롯이, 그제야 눈을 치켜떴다.

벽에 박혀 있던 테사이아가 너덜너덜해진 모습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입은 충격을 증명하듯 사방으로 튄 핏방울들이, 평소처럼 곧바로 그녀에게 모여들지 못하고 그저 흘러내렸다.

샬롯은 더 볼 것도 없이 테사이아를 향해 내달렸다.

방금 그녀가 자신을 살렸음을 모를 리 없는 그녀였다.

촤아악-

미끄러지듯 멈춰선 샬롯이 테사이아를 붙잡아 들었다.

온몸의 뼈가 다 으스러지고 살이 터진 끔찍한 몰골.

의식을 잃은 듯, 샬롯에게 붙잡히고도 잠깐 꿈틀댄 게 전부였다.

"제기랄…."

탄식한 샬롯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아귀를 그은 그녀가, 테사이아의 으깨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 넣었다.

그녀는 테사이아가 이런 상태에서도 죽지 않음을. 시간이 많이 필요할 뿐, 충분히 본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빚의 문제였다. 평생 마족 취급을 받으며 살아 온 수인에겐 그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존재인 진짜 마족에, 심지어 원수나 다름없는 요정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목숨까지 빚지고도 가만히 버려둘 수는 없었다.

테사이아의 으스러진 목덜미가 꿀렁댔다.

하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본능의 발현일 뿐이었다.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의식이 있다 한들, 눈알이 다 터지고 온몸이 다 으스러진 상황에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콰아아-

번질 리 없는 후끈한 열기와 함께 등 뒤가 대낮처럼 밝아진 건 그때였다.

"...?!"

뒤를 돌아본 샬롯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한 차례 더 망치를 내려친 군단장의 모습. 그리고 그 망치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안의 검에서 물결처럼 넘실대며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샛노란 화염.

화염 해일이 군단장의 냉기 폭풍과 맞부딪치면서, 오히려 화염 폭풍이 되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선 이안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군단장을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흉흉하게 번뜩였다.

콰르르르-

장내를 얼어붙게 하던 냉기가 어느새 완전히 열기로 바뀌었다.

"...!"

넘실대며 사방으로 번지는 불의 물결이 자신 쪽으로도 가까워지자, 눈을 치켜뜬 샬롯이 테사이아를 안아 들며 몸을 날렸다.

군단장과 이안으로부터 가장 먼 기둥 뒤에 몸을 가린 그녀가, 기둥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전장을 돌아보았다.

지금부터는 그녀가 끼어들 영역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

화염 폭풍이 제멋대로 날뛰게 풀어 둔 채, 불길이 휘몰아치는 검을 움켜쥔 이안이 솟구쳤다.

***

'이게 되네.'

무표정하게 군단장의 얼굴을 노려보는 것과 달리, 이안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냉기 폭풍을 상쇄하기 위해 임기응변으로 펼친 화염 해일이, 생각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기를 중화시키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화염 폭풍으로 승화될 줄이야.

그의 검에 휘몰아치는 불길도 마찬가지였다.

바람 칼날을 따라 넘실대면서, 불의 검을 움켜쥔 것처럼 변한 것이다.

'전에 할 땐 잘 안 됐었는데.'

이안은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했던 적이 있었다.

바람 칼날이나 휘몰아치는 방벽에 불길이 맺히게 만들 수 없을까 싶어, 화염구나 화염 방사를 더해 본 것이다.

물론 그때는 폭발에 바람이 흩어지거나 불길이 사그라들 뿐이어서, 더는 시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화염 해일은 아니었다.

'화력 부족이었나? 아니면 불길의 성질이 다른가?'

어쩌면 마법에 담긴 마력량의 차이 때문일지도.

어느 쪽이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놀랐냐, 새꺄."

코앞까지 다가온 군단장의 안광을 노려보며 내뱉은 이안이, 검을 놈의 드러난 눈구멍을 향해 내뻗었다.

콰르르르르-

검신에 맺힌 불길이 군단장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잡아먹으며 타올랐다. 일렁이던 안광이 바스러지고, 검날이 군단장의 눈두덩이를 파고들었다.

놈의 저항력 따윈, 지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전투 망치를 꺼내 들었다는 것 자체가, 놈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으니까.

"오오오오-"

군단장의 입에서 고통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안은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의 눈두덩이에 깊숙이 박힌 검날이 붉게 달아올랐다.

콰아아아아-

뒤이어 샛노란 불길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혼돈력을 머금은 화염 방사. 불길은 군단장의 뒤통수를 뚫고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대신 놈의 몸속으로 뻗어나가, 내부를 산 채로 불살랐다.

콰르르르르-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군단장의 벌어진 입에서 불길이 혓바닥처럼 넘실댔다.

놈의 전신에서 끊임없이 번져 나오던 냉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안은 마지막 한 가닥의 불길까지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푸스스….

불길이 잦아들었다. 냉기 폭풍을 타고 휘몰아치던 불길이 사방으로 바스러지며 수많은 불똥을 허공에 흩뿌렸다.

남은 건 벌겋게 달아오른 단죄의 검과, 군단장의 모든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뿐.

철크렁-

구단장의 손아귀에서 전투 망치가 떨어졌다.

서 있던 군단장의 몸이, 이안이 매달린 앞쪽으로 통나무처럼 기울어졌다.

재빨리 뒤로 몸을 날린 이안이 바닥을 굴렀다.

쿠웅-

군단장이 쓰러졌다. 그대로 일어선 이안은,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단죄의 검을 움켜쥔 채 놈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가 양손으로 움켜쥔 검을 치켜들었다.

콰직! 콰직!

이안은 군단장의 목을 연달아 내리쳤다.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내는 듯한 감촉.

콰득-

마침내 군단장의 머리가 완전히 몸에서 분리됐다. 푸학, 놈의 전신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와 허공에 넘실대는 불씨를 꺼뜨리며 증발했다. 오싹한 한기가 이안의 전신을 핥고는 흩어졌다.

"하아… 하아…."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이안이 굽혔던 허리를 들었다.

불씨까지 모두 꺼지면서 상대적으로 더 어두워진 시야 한복판에,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뒤이어 레벨 업을 알리는 확인 창이 이어졌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1년 반 가까이가 지난 지금, 비로소 레벨이 하나 오른 것이다.

동시에 그건 곧, 상위를 넘어 고위 마법을 익힐 수 있는 영역에 첫발을 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게임이었을 때는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영역.

하지만 이안은 큰 기쁨이나 희열에 휩싸이지 않았다.

"...."

그저 숨을 고르며 눈을 감은 채, 청각에 온 정신을 집중할 뿐.

군단장의 죽음을 깨달은 거인 군단이 눈을 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뒤통수였다.

다행히도 거인의 포효나 발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들리는 건 자신의 펄떡대는 심장 소리와,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수인의 숨결뿐.

"후…."

비로소 검을 회수한 이안이 비틀댔다.

집중력을 너무 오래 유지하고 마력을 소모한 여파가, 비로소 밀려들었다.

게임에선 레벨이 오르면 체력과 마력이 일정 비율로 회복되었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런 징후를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한 피로감뿐.

"…끝났다. 나와라."

비틀대며 걸음을 옮기던 이안이 내뱉었다.

기다렸다는 듯 샬롯의 길고 단단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안, 아까는-"

"날 구하려고 한 거지. 알고 있다. 테사는?"

"…회복되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의식은 없지만."

이안은 샬롯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음을 느꼈다. 아주 희미했지만, 평소 테사이아를 대할 때의 냉랭한 말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건가.

"그래. 야영지를 꾸릴 거다. 그 녀석도 회복해야 하고… 나도 한계니까."

내뱉으며, 이안은 아공간에 손을 넣었다.

내부를 거의 가득 채우고 있던 커다란 고서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아공간 구석, 땔감으로 쓰기 위해 미리 챙겨 둔 나뭇가지들도 전부 꺼냈다.

화륵-

이안이 던진 불덩이가 고서에 떨어졌다.

학자나 마법사에겐 하나하나가 대단한 가치를 지녔을 거인 여왕의 연구 기록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이어 아공간에서 봉인함을 꺼낸 이안이 모포와 붕대, 보존 식량을 대충 꺼내 샬롯에게 건넸다.

테사이아에게 모포를 덮어주며 샬롯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 내가 불침번을 서겠다. 쉬어라, 이안."

"저 문이 열리거나, 뭔가 다가오는 소리가 나면 바로 깨워라."

"그러지."

생각할 것들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여력이 없었다.

깨우란 말이 무색하게, 이안은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심연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안은 소리 없이 눈을 떴다.

싸늘하고 칙칙한 공기와 흐릿한 어둠.

모닥불의 온기가 아직도 느껴졌다.

한나절은 기절할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정신이 맑았다. 몸도 푹 쉰 것처럼 상쾌하고, 마력 소모의 후유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레벨 업 덕분인가…?'

게임일 땐 즉각적으로 회복되던 체력과 마력이,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 회복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 됐건 나쁜 일은 아니었다.

아직 지하 유적 내부였으니 더더욱.

"…일어났군."

그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샬롯의 잠긴 목소리가 번졌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직 깨어 있었다. 물론, 주황색 눈동자에 피로가 덕지덕지 묻어 있긴 했지만.

"내가 얼마나 잤지?"

"몇 시간. …어쩌면 그 이상. 사실, 전혀 모르겠군."

샬롯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피식한 이안은, 자신이 덮고 있던 모포를 그녀의 모포 위에 얹었다.

"자라. 반나절 뒤에 깨워 줄 테니."

"알겠다…."

샬롯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녀의 숨결이 곧바로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군.'

이안은 잦아드는 모닥불에 나뭇가지와 책을 더 얹었다. 땔감이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지하에서 이렇게 불을 피워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뒤늦게 이어졌다.

하지만 숨 쉬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여전히 공기가 싸늘한 걸 보니 모종의 환기 시설이 갖춰져 있는 모양이었다.

겉보기론 전혀 알 수 없었지만.

"...."

이안은 여전히 미동도 없는 테사이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에는 가죽만 덮인 연체동물 같더니, 이제 거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입가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남은 걸 보니, 샬롯이 피를 더 먹인 모양이었다.

'눈 뜨자마자 미쳐 날뛰는 걸 볼 일은 없겠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수통과 육포를 집어 들었다.

아무리 체력이 회복되었더라도 먹어 둬야 했다.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이면서, 이안은 저만치에 쓰러진 군단장의 시신을 돌아보았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이한 고대 거인의 시신은, 다시 봐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 지하 궁전에 발을 들인 이후의 기억이 전부 그랬다.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겠냐고….'

생각해 보면 왕 살해자라는 샬롯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고대 거인 왕국은, 이제 정말 완전히 멸망해 버린 셈이었으니까.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곱씹었다. 광기에 뒤덮인 망령들이 북부 장벽으로 몰려들던.

'…여왕이 통제력을 잃어서 생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때는 끝내 여왕이 악마를 흡수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면 거꾸로, 그녀에게 봉인된 악마의 반란이 성공했던 걸지도.

어느 쪽이건 만약 그렇다면, 이안이 여왕과 악마를 모두 죽인 지금은 그때와 같은 대규모 전투는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북부가 맞이하게 될 미래 역시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식사를 끝낸 이안이 일어섰다.

이제 미뤄 뒀던 일들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090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안은 상태 창과 스킬 창을 차례로 확인했다.

추가 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퀘스트가 아닌 레벨 업으로 포인트를 얻었다는 사실에, 어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작은 기쁨이 샘솟았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찰나에 불과한 감흥이었다.

"...."

모든 창을 닫으며 군단장의 시신을 지나친 그는, 놈이 앉아 있던 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여왕의 왕좌가 그러했듯, 특별할 것 없는 의자였다.

상형 문자와 기호, 도형으로 이루어진 고대 주문 회로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내부에서 여전히 희미한 마력이 느껴졌다.

'지하 궁전이랑 동력원이 같은 건가…?'

이안은 새삼, 거의 무한대에 가까워 보이는 마력의 원천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몰라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력의 황혼기인 지금은 더더욱.

'용의 힘을 쓴댔지… 설마 정말 용이 동력원이기라도 한 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장 떠오르는 추측은 그것뿐이었다.

용은 살아 있는 마력 덩어리 같은 존재였으니까. 오래 산 용의 유해 같은 것에서 마력을 뽑아내고 있는 거라면, 이런 유적을 천 년도 넘게 유지시킬 수 있으리라.

'언젠가 용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반드시 그놈의 마력의 근원을 찾아내야겠군.'

마력의 제약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세계가 끝나는 순간까지 살아남는 것도 더 이상 막연한 목표는 아닐 터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용의 근원을 손에 넣어도 그걸 그가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자에서 더는 건질 게 없다는 걸 확인한 이안은, 주변을 한차례 돌아보고는 군단장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영혼은 물론 품고 있던 마력까지 모두 잃은 군단장은, 아주 오래된 미라처럼 변해 있었다.

"흐음…."

절그럭, 이안은 놈의 허리춤에서 쌍검을 분리해 냈다.

거의 그의 키만 한 칼이었다.

날이 끝부분에서 살짝 휘어지는 외날 검.

심지어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군단장의 대검.

'인간에겐 양손 검이다, 이거지.'

무려 유일 등급. 몇 가지 능력치 보정에, 냉기 칼날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면이 넓적한 날을 검집에서 뽑아 쥐어 본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검집에 되돌렸다.

억지로 쓰라고 한다면 아예 못 쓸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몸처럼 휘두르는 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걸로 누굴 후려친다면 베는 게 아니라 때려죽이는 것이 되리라.

'비슷한 걸 무슨 만화 같은 데서 본 것 같은데….'

생각하며, 이안은 검 하나를 아공간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두 개를 다 넣을 수는 없었다.

사실 검의 크기를 봐선, 하나라도 들어가진 것이 기적이었다.

다음은 전투 망치였다.

이건 도저히 인간이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군단장조차 양손으로 쥐고 둔중하게 휘둘러 대던 물건이니, 더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것도 정보를 볼 수 있다고…?'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군단장의 전투 망치. 유일 등급이었고, 충격파 스킬이 옵션으로 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이걸 대체 누가 쓸 수 있단 거지. 거인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은데.'

획득 가능한 전리품은 그 정도였다. 갑옷은 정보 확인도 불가능했고, 벗겨 봐야 쓸 수도 없었다.

정수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생한 보람이 없진 않네. 왕관에 단검에 대검에, 스킬 포인트에….'

거기다 혼돈의 파편도 커졌고, 군단장을 죽인 보상으로 냉기 저항력도 조금 올랐다.

추가적인 저항력은 스킬 포인트보다도 드문 보상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챙겨 가야겠지."

이안은 군단장의 잘린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비쩍 말라서인지 덩치에 비해선 작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들고 다닐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봉인함에 잘 구겨 넣으면 어떻게든…."

군단장의 머리를 양손에 든 이안이 중얼댈 때였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테사이아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켰다.

눈을 끔뻑이는 그녀의 표정은, 말 그대로 얼떨떨해 보였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주위를 돌아보던 그녀의 시선이, 이윽고 이안에게서 멈췄다.

"멀쩡해 보이는군."

이안이 내뱉었다.

크게 말하지 않았음에도 목소리가 웅웅 울리면서 번져 나갔다.

"그러게.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야."

그녀가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즉사하고도 남았을 상태였으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깨를 으쓱이는 이안을 잠시 바라본 테사이아가, 이윽고 덧붙였다.

"그런데 그 머리는 왜 들고 있는 거야, 이안?"

"전리품으로 들고 갈 거다."

이안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테사이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거, 샬롯한테 배운 거야?"

"...."

***

"뭐, 그래도 아예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아니네."

이안이 봉인함에서 꺼내 건네준 옷을 걸치면서, 테사이아가 내뱉었다.

눈을 뜨자마자 어떻게 된 거냐며 떠들어 댄 그녀는, 결국 이안의 입에서 그 후의 전말을 끄집어냈다.

물론 아주 간소화된 얘기였지만.

테사이아는 또다시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떠들어 댔다.

아예 적막한 것보다는 나쁘지 않아서,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이는 식으로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부지깽이로 쓰던 단죄의 검 검날을 더러운 천으로 닦아 내면서.

티르 엔의 신도들이 봤다면 참담한 심정이 되었을 행동이었지만, 이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랑 함께 다니려면 목숨이 두어 개여도 부족할 것 같아, 이안."

테사이아가 문득 말했다.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악의 없는 얼굴.

"그렇잖아. 타락자에 마물에 마족에… 이젠 네 손으로 고대 거인인지 뭔지 하는 것들까지 죄다 죽여 버렸으니까."

"마족은 내가 아니라 널 따라온 놈이었던 것 같은데."

"물론 그렇지만… 이러다 언젠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아니라, 여기 이 야옹이가."

테사이아가 잠든 샬롯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툭툭 쳤다. 샬롯은 입맛을 한 번 다셨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테사이아를 바라보던 이안이 툭 내뱉었다.

"그래서, 후회하냐?"

"뭘 후회해?"

"날 따라온 거."

"그건 아니야. 그러지 않았다면, 난 이미 예전에 루 사드로 끌려갔을 테니까."

"...."

이안은 그녀가 애초부터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스스로 심판자를 이겨 낼 힘을 키울 수 있으리란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악점이 명확할 뿐, 어떤 의미론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되었으리란 사실도.

그녀가 선택한 일이었고, 동시에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끝내 반드시 그의 손에 죽게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생존이란 측면에선 최악의 결말은 피한 셈이었다.

물론 끝까지 그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널 떠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안. 혼자서 저런 거인을 상대하는 전사… 아니, 마법사… 아니, 아무튼. 대륙에 너보다 강한 존재가 과연 있을까 싶거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그래도 뭐, 네 뒤에 잘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안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긍정적이군. 어떤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데."

"지금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미래는, 루 사드로 다시 잡혀가는 게 아니라 네가 내 목숨을 노리는 거야."

테사이아가 차분한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난 네가 제일 무섭거든. 물론, 제일 맛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덕분에 편하게 욕망을 억누를 수 있지."

약발이 잘 먹힌다니 다행이군.

피식한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당장은 저 문밖에 있는 것들부터 무서워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린 아직 유적을 나간 게 아니니까."

"…문밖?"

테사이아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밖에, 뭐가 더 있어?"

"봐서 알겠지만, 저놈은 군단을 이끄는 대장이었다. 그런 놈이 혼자 이곳에 묻혀 있었을 리가."

"...."

테사이아의 입이 벌어졌다.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또 목숨 건 싸움을 하게 될 수도 있겠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때였다. 샬롯이 푸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반나절까진 안 된 것 같은데."

이안의 말에, 샬롯이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쉬었다."

"뭐라는 거야. 살이 쪽 빠졌는데."

테사이아가 비웃듯 말했다. 그녀를 슬쩍 돌아본 샬롯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머, 샬롯. 그게 전부야? 내가 또 네 목숨을 구했는데?"

"네 입가에 묻은 피가 누구 것일지 생각해라. 그만하면 빚은 충분히 갚은 것 같은데."

이안은 군단장의 머리를 봉인함에 담아 아공간에 넣었다.

움직일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일행이 높다란 대문 앞에 섰다.

질렸다는 듯 문을 올려다 보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이제 거인이라면 지긋지긋해. 다신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만큼."

"그 부분은 나도 동감이야."

내뱉으며, 이안은 대문을 힘껏 밀었다.

테사이아의 염원 덕분인지, 이어진 방마다 놓인 석관들은 단 하나도 움직이거나 열리지 않았다.

군단장을 잃은 거인 군단은, 끝내 깨어나지 않았다.

"…뭔가 꺼림칙한데."

읊조리면서도, 이안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몇 시간 후.

쿠구구구….

느릿느릿 열리는 대문 너머로, 햇빛이 스며들었다.

폐를 얼릴 듯한 한기도.

"햇빛이 반가운 날이 있을 줄은 몰랐어."

망토의 두건을 눌러쓰면서, 테사이아가 읊조렸다.

문밖으로 나서며 샬롯이 피식댔다.

"마족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소릴 하는군."

"입들 다무는 게 좋을 거다."

이안이 말을 잘랐다.

샬롯과 테사이아를 돌아보며, 그가 덧붙였다.

"여기서 무사히 내려가려면, 말할 힘도 아껴야 할 테니까."

아공간에서 설표 망토를 꺼내 목에 두른 이안이, 유적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흰색과 검푸른 색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이, 거친 바람과 혹한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

"후…."

소년, 아스켈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슬슬 숨소리를 조심해야 할 시점이었다. 귀 밝고 겁 많은 짐승들을 죄다 쫓아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깨에 걸치고 있던 활을 꺼내 들면서, 아스켈은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앙상한 나무와 바위, 창백한 눈이 덮인 산기슭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둘러야겠네."

눈을 한주먹 문 그가 읊조렸다.

이른 아침에 마을을 나섰건만.

어느새 해가 중천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제 꿈이 좋았으니까. 오늘은 허탕은 아닐….'

생각하던 아스켈의 고개가, 득달같이 계곡 위로 돌아갔다.

버석대는 발소리들이 귓가를 스쳤기 때문이다. 짐승이 내는 소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스켈은 판단과 동시에 움직였다.

근처의 바위 뒤로 달려간 그는 재빨리 퇴로를 살피고, 몸을 숨긴 채 계곡을 노려보았다.

곧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아스켈의 눈이 커졌다.

짐승이 두 발로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는 늑대 털로 만든 망토를 두르고, 그 아래로는 인간처럼 갑옷까지 걸치고 있었지만.

갈기가 풍성하게 돋은 얼굴은 분명 육식동물의 그것이었다.

저건 가면 따위가 아니었다.

두 발로 걸으며 사람 말을 하는 짐승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린 아스켈이, 속으로 탄식했다.

'마족…!'

그 옆에 걷는 회색 머리칼의 여자도 괴상하긴 마찬가지였다. 핏기없는 창백한 피부. 끝이 삐죽 튀어나온 귀. 심지어 이 산속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앞장선 흑발의 남자는 인간 같았지만, 얼굴에 표정이 전혀 없었다.

사람 가죽만 뒤집어쓴 것처럼.

결정적으로, 저긴 산맥 쪽이었다.

산맥에서 온 자들이 평범한 인간일 리 없었다.

'어떻게 대낮부터 돌아다니는 거지…?'

생각하며, 아스켈은 바위 뒤에 바싹 몸을 숙였다. 숨을 느리게 쉬면서 기척을 최대한 죽였다.

저벅- 저벅-

괴인들의 발소리가 아스켈이 숨은 바위 근처를 지나쳤다. 숨을 참고 있던 아스켈은, 그들이 지나치고 나자 비로소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두 괴인이 멀어지고 있었다.

'…둘?'

아스켈이 굳어졌다.

"도적이라도 있는 건가 했더니."

위에서 그르렁대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번진 건 그 직후였다.

"헉…!"

숨을 삼킨 아스켈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었건만.

어느새 그 새카만 마족이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주황색 눈동자 한복판.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아스켈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여기 숨어서 뭘 하는 거지?"

#091화

"...."

시선에 담긴 살의에 얼어붙은 것도 잠시.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고저 없는 싸늘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바위 옆으로 다가온 검은 머리의 남자가 아스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토 사이로 검 자루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 곳곳에 튄 핏자국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심연처럼 검은 눈으로 아스켈을 바라보며, 남자가 물었다.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었지?"

역시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아스켈은 활을 힘껏 움켜쥐었다.

죽더라도 벌벌 떨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은 다 하고, 그걸로 부족하다면 싸우다 죽어야 했다.

아스켈이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내뱉었다.

"당신들을 피해서… 숨어 있었습니다."

물론, 말투가 조금 공손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남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숨어?"

"역시, 구린 게 있는 놈이군. 그게 아니라면 숨을 이유가 없지."

마족이 그르렁대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여길 내려가면 도적떼라도 숨어 있나? 네 신호를 기다리면서."

"그게 무슨…."

어리둥절하게 읊조리던 아스켈은, 이내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위험한 곳에서 도적질을 하다간 굶어 죽거나, 마물의 먹이가 될 겁니다."

"그럼 왜 숨었지?"

"산맥 쪽에서 오셨으니까요. 저기서 넘어오는 건 괴물들뿐이니까."

"우리도 그런 괴물이라고 생각한 거군. 그래서 숨어 있었던 거고."

남자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마족을 곁눈질 한 아스켈이 되물었다.

"아니십니까?"

"당연하지. 우린 용병이다.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야."

"...."

아스켈이 눈을 깜빡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지금 같은 겨울에는 더더욱.

산맥 인근은 숙련된 전사도 쉽게 목숨을 잃는 위험한 곳이었다.

"또 야옹이 때문에 오해가 생긴 거네. 하긴, 누가 안 그러겠어."

맨발의 요정이 비웃듯 말했다.

마족이 송곳니를 드러내는 가운데, 남자가 아스켈을 내려다 보며 덧붙였다.

"숨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럼 넌 왜 여기 혼자 있지?"

"사냥을 하러 온 겁니다."

"믿기 힘든 말이군. 네 말대로 여긴 위험한 곳인데. 너 같은 꼬마가 혼자 사냥이라니."

잠시 미간을 찌푸린 아스켈은, 그냥 툭 터놓고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숨길 얘기도 아니었다.

이들이 인간이건, 아니건.

"전 꼬마가 아닙니다. 그리고 마을 근처엔 사냥감이 별로 없습니다. 씨가 말랐죠. 여기 위험한 대신, 사냥할 게 제법 있고요."

"다른 어른들은 뭘 하고?"

"어른들은 어른들의 일이 있죠. 전 아직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거기 끼워 주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겁니다."

"배포가 대단한 녀석이군. 마물을 마주치면 어쩌려고."

"숨거나 도망치면 됩니다. 전 발도 빠르고, 이 근방도 훤히 꿰뚫고 있거든요."

지금은 허무하게 붙잡혔지만.

아스켈이 뒷말을 삼키는 사이, 마족과 눈빛을 교환한 남자가 어깨를 까딱였다.

뭔지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아스켈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그냥 죽이거나 잡아먹으려는 거라면, 이렇게 계속 말을 걸 이유가 없을 터였다.

맨발의 요정이 그의 앞으로 다가선 건 그때였다.

"반가워. 난 테사이아라고 해."

"…아스켈 입니다."

"그래. 아스켈.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싶네. 우린 지금 지치고 피곤한 상태거든. 어젯밤에 고생하기도 했고. 그러니까, 우릴 네 마을로 안내해 주지 않을래?"

"...."

아스켈의 얼굴이 굳어졌다. 느슨해졌던 경계심이 다시 바짝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테사이아라 밝힌 요정과 흑발 남자, 그리고 검은 털 마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이윽고 아스켈이 결연하게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머. 왜…?"

"제가 사는 마을은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은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을 초대하면 제 책임이 되죠. 그런데 솔직히 전 여러분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을로 모시고 갈 수도 없고요."

"...."

적막이 내려앉았다.

아스켈을 빤히 응시하던 남자가 이윽고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목을 움츠린 아스켈의 머리를, 그가 가볍게 헝클였다.

"똑 부러지는 녀석이군."

"...?!"

아스켈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 그가 몸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 너머론 갈 필요 없을 거다. 거긴 지금 사냥할 상태가 아니니까."

남자가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아스켈의 옆으로 마족이 뛰어내렸다.

그녀가 아스켈에게 뭔가를 내밀며 말했다.

"나는 수인이다. 마족이 아니라. 하지만 나도 오해했으니 이번엔 용서해 주마."

"...."

엉겁결에 받아든 아스켈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육포 조각이었다.

"강단 있는 놈이군."

"그러니 이런 곳을 혼자 다니겠지. 전사의 자질을 타고난 거다."

아스켈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멀어지는 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스켈만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간다고…? 정말 이대로 그냥 가는 거야, 이안? 잘 설득해 보면 되잖아."

눈을 치켜 뜬 테사이아가 소리쳤다.

대답한건 마족, 아니 수인이었다.

"쓸데없는 수작 부리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라, 귀쟁아. 대답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아니… 하아."

짧게 한숨 쉰 테사이아가 아스켈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이해하지만, 우린 괴물들과 싸우는 쪽이야. 특히 저기 이안은 괴물 전문가지."

"...."

"우리가 산맥에서 어떤 것들을 죽이고 돌아가는 길인지 네가 안다면 이런 오해는 없을 텐데."

입맛을 다신 테사이아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뭐, 별수 없지. 잘 지내렴, 꼬마 사냥꾼아."

그녀는 몇 걸음 만에 아쉬움을 떨쳐낸 듯,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앞서가는 일행의 뒤를 쫓아갔다.

"...."

잠시 눈을 깜빡인 아스켈은, 이윽고 육포를 입에 물며 몸을 돌렸다.

긴장이 풀려서 다리가 후들댔지만,

어쨌거나 하려던 일은 해야 했다.

아스켈이 계곡 정상에 오른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

드러난 계곡 반대편의 광경에, 아스켈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끄트머리만 조금 남은 육포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반 토막 나거나 내장을 흩뿌린 채 죽어 있는 오거들. 뭔가가 폭발한 듯한 흔적과 흩어진 뼛조각들.

변이된 들짐승과 구울, 심지어 하피로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사방에 계곡 곳곳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인근의 모든 마물들이 모여들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다.

한쪽 구석, 다 타서 이제는 연기만 흐릿하게 뿜고 있는 모닥불의 흔적까지 눈에 담은 순간.

아스켈의 뇌리로 비로소 테사이아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에 고생했다는. 그리고 괴물을 상대하는 전문가라는.

"…설마."

비로소 그 말이 전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맥에서 온, 마물 사냥꾼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아스켈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

이안은 가쁜 숨을 내쉬는 북부인 소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의 산비탈을 구르듯이 그들을 쫓아 달려온 것이다.

나리, 나리, 하고 소리치면서.

"그래서, 무슨 볼일이냐?"

이안이 툭 내뱉었다.

아스칼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예…?"

"왜 따라왔냐고. 소리까지 지르면서."

"아,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아스켈의 땀범벅인 얼굴에 옅은 당황이 스쳤다.

"…산 반대편을 봤습니다."

이윽고 일어선 아스켈이 말했다.

이안과 샬롯, 테사이아를 번갈아 본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제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사과나 하려고 온 거냐?"

"아뇨. 그게… 여러분들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단 오긴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 망설여집니다. 저 혼자 결정하고 말할 문제가 아니라서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대로 해라. 할거면 하고, 말 거면 마는 거지."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묘한 미소를 지은 샬롯과 반가운 얼굴로 손을 까딱이는 테사이아가 그의 뒤를 따랐다.

아스켈이 재빨리 이안의 옆으로 따라왔다.

"사실, 부탁 드릴 게 있습니다."

"의뢰."

"네…?"

"부탁이 아니라 의뢰라고. 나는 용병이다.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자원봉사자가 뭐죠…? 아무튼, 의뢰할 일이 있긴 합니다만. 그 전에 먼저 마을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 악, 왜 때려?"

끼어들었다 샬롯의 손바닥에 입수를 얻어맞은 테사이아가 눈을 부라렸다.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린 못 믿는다더니. 네 이름을 걸고 초대해야 하는 거 아니냐?"

"맞습니다. 같이 가 주신다면, 여러분들은 제 손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마물을 전문적으로 사냥하시는 용병단이란 걸, 이제는 믿습니다."

"농담한 거다. 앞장 서서 길이나 안내해."

"아, 네."

아스켈이 재빨리 앞장섰다.

그래, 사냥을 부탁할 마물이 있나 보군.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의뢰가 급하진 않았지만.

일행 모두 지쳤고, 여정을 이어가기 위한 재정비도 필요했으니까.

게다가 여기가 정확히 어디쯤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고, 트라벨가까지는 아직도 꽤 멀리 떨어져 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의뢰를 몇 개 처리해 주다 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들이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따듯한 음식과 잠자리가 기다릴 테니까.'

솔직히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