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EMPNAN / Chapter 1 - 1

EMP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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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

황제 라인하르트

그를 칭하는 수식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찡그린 폭군.

그리고 전쟁광.

그 이름처럼 끊이질 않는 전쟁 탓에 백성들은 굶주렸다.

피와 공포로 얼룩진 정치. 빈곤과 기아가 판을 쳤다.

하지만 악마 같은 황제도 결국 인간이었다.

영웅 말피엘의 반역이 성공하며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제국 전역에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황제 라인하르트의 죽음에 열광했다.

단 한 명도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머리가 아프다.'

왕좌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는다.

몸을 비틀며 애써 고통에 저항해본다.

하지만 이가 악물리는 이 두통은 도무지 적응되질 않았다.

'이 빌어먹을 벌레.'

머릿속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전세계를 뒤져 찾은 고명하다는 의원도, 성녀와 성황에 의한 신성력 치료도 모두 부질없었다.

증세가 완화되기는커녕 악화만 되어갔다.

오직 한 경우.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전장만이 이 고통을 잊게 했다.

덕분에 제국의 영토는 번영했다.

자그마치 대륙의 절반을 제국의 지배하에 두게 된 것이다.

감히 그 어떤 황제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

찬사받고 찬양받아 마땅할 일이건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폭군 라인하르트. 죽어 마땅한 황제여."

말피엘.

인간과 신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맨손으로 대괴수 히드라를 쓰러트리고,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배로스를 산 채로 잡아내 불멸의 몸을 얻은 자.

인간 최초로 신들에게서 '발할라'의 칭호를 이어받은 대영웅, 살아있는 신화!

진짜 인외의 괴물은 저놈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나와 대조적인 삶을 사는 그가 어느덧 내 앞에 당도했다.

"······ 네놈 면상을 보니 더욱 머리가 아프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황궁은 핏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었다.

저 괴물 같은 말피엘에게.

하여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혈입성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다 죽였나?"

황궁은 이미 말피엘의 손아귀에 넘어간 상태였다.

그를 따르는 수많은 귀족과 병사들은 굳이 피를 보지 않아도 내 목을 내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말피엘은 개미 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다.

"깨끗한 인간이 이 황궁에 남아있을 리 없으니까."

"허, 칭송받는 대영웅이 할 말은 아닌 듯한데."

"청소가 필요하다. 이 썩어빠진 제국을,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선."

그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왜 죄 없는 아이들까지 죽였는지 그건 따로 묻지 않았다.

나도 미쳤지만, 저놈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가짜 정의로 위선을 일삼았다.

정의라는 이름의 결벽증 환자. 그것이 말피엘이다.

"어차피 내가 죽인 거로 기록될 테니, 속은 편하겠군."

미친 황제가 혼자 죽기 싫어서 아이들까지 죽였다!

뻔한 내용의 가십.

안 봐도 그려진다.

말피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지."

확실히.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명확하게 갈렸다.

나는 최악의 폭군으로, 말피엘은 그런 폭군을 죽인 구세주로 기억되리라.

'미친 괴물 새끼.'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대륙 제일의 소드마스터도, 8서클의 대마법사도 저 말피엘 한 명을 막지 못했으니까.

그야말로 1인 군단.

'12위업을 달성하기 전에 죽였어야 했는데.'

신에게 인정받은 자만이 행할 수 있다는 열두 위업의 수행.

인류역사상 한 명도 성공한 적 없다는 그걸 말피엘은 보란 듯이 성공해버렸다.

불멸의 몸으로 죽지도 않으니 이길 턱이 있나.

"악마 황제 라인하르트를 죽여라!"

"대영웅 말피엘을 따라라!"

한 박자 늦게 수많은 민중들이 농기 따위를 들고 궁에 들어왔다.

분노만이 가득한 눈빛.

"슬프군.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란 건."

말과는 달리 말피엘의 입은 웃고 있었다.

쿠릉!

콰지지직!

동시에 궁을 가득 채울 정도의 엄청난 전격이 말피엘에게 몰려들었다.

뇌신 강림!

열두 가지 위업을 달성한 반인반신 말피엘의 본모습이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

그야말로 쇼맨십이다.

자신의 신화적 업적을 만인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전형적인 관심병자의 행태였다.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머릿속의 벌레가 나를 미치게 만든 걸까, 이것이 내 본성인 걸까.'

벌레가, 고통이 없었어도 나는 미쳤을까?

아니면 이 광증이야말로 내 본성이었을지.

그 순간.

콰르르릉!

말피엘이 전격을 화살처럼 모아 내게로 쏘아냈다.

꽈아아아아아앙!

***

[··· 충전 완료.]

[······ '나노머신 Zero'가 기동하기 시작합니다.]

< 나노머신 Zero > 끝

"허억!"

발작을 일으키며 상체를 곧추세웠다.

미친 듯이 흘러나오는 식은땀.

끔찍한 악몽이라도 꾼 기분이다.

"라, 라인하르트님. 괜찮으십니까?"

황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제 육십 대를 넘겼을 왜소한 몸집의 노인.

"······ 제르민?"

"예. 전하. 제르민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도 많이 아프십니까?"

오늘도 많이 아프냐는 말.

괜찮냐는 말.

오랜만이었다. 누군가를 나를 걱정해주는 건.

황제에 즉위한 이후 그 누구도 내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살려달라거나, 저주한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어봤어도.

하지만, 왜 제르민이 내 앞에 있단 말인가.

―괜찮습니다, 전하. 전하의 본성은 누구보다 착하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책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많이 아프냐는 말.

하지만, 왜 제르민이 내 앞에 있단 말인가.

괜찮냐는 말.

―괜찮습니다, 전하. 전하의 본성은 누구보다 착하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자책하지 마십시오.

오랜만이었다. 누군가를 나를 걱정해주는 건.

황제에 즉위한 이후 그 누구도 내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제르민은 죽었다.

살려달라거나, 저주한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어봤어도.

내 손으로 죽였다.

광증이 돋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건만.

'죽은 뒤 온다는 지옥이 이곳이라면 나쁘지 않군.'

유일하게 나를 믿어주고 걱정해주던 사람.

죽기 직전까지 나만 걱정해주던 내 편.

사무치게 미안하고, 반가웠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없던 기운도 나는 것 같군."

"예······?"

묘한 얼굴. 못 볼 거라도 본 듯하다.

하지만 정말로 기운이 났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머리도 아프지 않았다.

아, 죽었으니까 안 아픈 게 당연한가?

"미안하네. 짐이 많이 부족해서."

"아,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대가 짐을 욕해도 괜찮을 정도로 아주 멀쩡해."

"제, 제가 전하를 어찌······!"

호들갑은.

하지만 그냥 한 말이 아니다.

지금의 내 정신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두통도 없고 머릿속의 벌레도 느껴지지 않는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개운한 감각.

이럴 거면 진즉에 죽을 걸 그랬다.

"한 번 해보게. 짐에게 하고 싶은 욕이야 한, 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런 불경한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허, 괜찮다니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는가?"

"······ 오늘은 평상시와 좀 다르시군요."

평상시?

하기야 제르민이 나를 돌보던 시기가 어언 20년 전이다.

당시의 나는 모든 게 불만인 철없는 황태자였을 따름이다.

오히려 황제이던 시절보다 더 막살았다.

황제가 되고 나선 미친 듯이 주변국과 전쟁만 벌였으니.

제르민의 눈가에 한 줄기 빛이 떠올랐다.

"좋습니다. 불문에 부치시겠지요?"

"그럼."

"절대로 딴소리하기 없기입니다?"

"당연하다마다."

스읍. 제르민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얼마나 대단한 욕을 할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쳐다보던 내게 제르민이 말했다.

"··· 베르사유 백작 영애께서 오고 계십니다. 슬슬 준비하고 내려가시지요."

"베르사유?"

"이런, 역시 잊고 계셨군요."

"아니······."

잊지 않았다.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와 오찬을 먹었던 기억.

어린 시절 겪은 끔찍했던 일임은 분명하지만, 어디까지나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지옥이 아니라 현실이란 말인가?'

현실이라면,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의미일 테다.

과거로의 회귀라니.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천하의 황제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을 믿을 리 만무.

한데 이 미치도록 생생한 현실감은 지금이 꿈도, 지옥도 아님을 시사하고 있었다.

'말피엘에게 죽은 뒤 과거로 돌아왔다고?'

어떻게 이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뺨을 잡아당겼다.

아프다.

어이가 없었다.

만약, 정말로 20년 전으로 돌아온 거라면······.

지금은 내가 황제가 되기 전, 광증(狂症) 돋은 황태자일 시절일 터.

모든 게 최악이던 그 시간대였다.

[뇌 활성도 6.3%]

[생체 스캔 시작···.]

[노폐물을 분해하여 단백질로 재합성 중······.]

그 순간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누구냐?"

"예?"

제르민에게는 안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다시 광증이 도지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노머신 Zero'입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답이 들려왔다.

'나노머신 제로?'

듣도 보도 못한 이름.

적어도 제국 내에 저런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다.

"마법사인가? 어디서 말을 거는 거지?"

[저는 마스터의 전두엽과 측두엽 사이에 있습니다.]

전두엽과 측두엽 사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확실한 건 머릿속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법적인 것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 머릿속을 휘젓던 그 벌레일 가능성도 있었다.

"······ 전하."

동시에 제르민이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본다.

후. 저런 눈빛은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걱정하지 말게. 잠결이라 환청이 들린 모양이니."

"약속을 미룰까요?"

"아니야. 그보다······ 오찬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오찬까지 두 시간 남았습니다."

"그럼 30분 뒤에 준비하도록 하지. 그때까진 혼자 있고 싶군."

30분이면 충분하다.

내 진지한 표정을 읽은 제르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30분 뒤에 시녀들을 보내도록 하지요. 혹시나 문제가 있다면."

"그래.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말하도록 하겠네."

제르민이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고 그가 나가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내 표정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게 네놈이냐?"

싸늘하기 짝이 없는 어조로 묻자.

[그렇습니다.]

놈이 답했다.

미친.

소름이 돋았다.

수십 년간 나를 괴롭히던 존재가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 것이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제발 그만두라고 울부짖을 때조차 나타나지 않더니, 과거로 돌아온 지금 뜬금없는 순간에 나타났다.

원망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리라.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엇나간다.

흥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광증이, 내 머릿속에 있는 벌레가, 거짓이나 망상이 아닌 진짜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으므로.

[강력한 전기자극으로 충전이 완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전기. 떠오르는 건 말피엘의 마지막 공격이었다.

뇌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번개의 화살을 쏘아낸 덕분에 충전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만, 오랜 시간 방전된 채 방치되어 마스터의 신경섬유다발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노머신 Zero'가 이전보다 더욱 튼튼하게 마스터의 신경세포를 재생시켰습니다!]

잘난 듯이 이야기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내게는 의문인 단어들뿐이었다.

허나 의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신경섬유다발이라는 걸 짓누르면 어떻게 되지?"

[측두엽과 전두엽이 손상되어 자극에 예민해지며, 인지 기능과 기억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죽이거나 그릇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단 말이냐? 나의 천성과는 관계없이?"

[Yes.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때때로 정신분열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뇌의 신경과 변화'에 관한 관련 논문을 참고하십시오.]

"아······."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 자체가 내 착각이며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의 벌레가 영향을 끼쳐 그릇된 판단을 내린 것이라면?

나의 광증이, 광기가 온전히 나로부터 나온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죽이고 싶었다.

머리를 갈라 벌레를 꺼내 죽이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럴진대.

막상 벌레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벅차오르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는 악마다. 태어났을 때 죽였어야 했어!

―저주받은 황태자!

―차라리 태어나지를 말지!

수많은 원망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직도 생생하다.

광증에 잡아먹힌 뒤로 기억나는 건 저런 원망 어린 말들뿐이었다.

때때로 정신이 돌아올 때 나는 내가 저지른 일들을 보고 후회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여, 침을 꿀꺽 삼킨 채 물었다.

"짐이 다시 미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냐?"

[Yes! 마스터가 건강할 수 있도록 정신과 육체 모두를 저 '나노머신 Zero'가 평생 전심전력으로 서포팅하겠습니다.]

"짐이······ 다시 살아도 된다는 말이냐?"

과거로 돌아왔다한들 내게 무슨 자격이 있을까.

수십, 수백만을 죽인 폭군인 내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살아도 되는 걸까?

그런 나의 걱정이 무색할만큼.

[Yes!]

나노머신의 대답은 명쾌하기 그지없었다.

< 돌아오다. > 끝

어릴 적부터 이 빌어먹을 광증으로 인해 나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깊게 사고하고 선택하려 하면 순식간에 이성의 끈이 끊겼다. 정신이 돌아왔을 땐 항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최대한 얕게. 1차원적인 생각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게 전쟁이었다.

누군가는 가장 복잡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테지만, 황제는 '명령'하는 존재다.

복잡한 명분 따위는 내려놓고 내가 그렇게 하겠다 하면 자연스럽게 정복이 이루어졌다.

명분이니 자비이니 하는 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이길 수조차 없다.

'전쟁만이 나의 유일한 통치 방법이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제국.

가만히 놔두면 곪아 터질 터.

전쟁만이 제국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수이기도 했다.

명분 없는 전쟁을 좋아하는 귀족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마음껏 사리사욕을 챙겨도 모든 화살은 내게로 돌아오는 탓이다.

역대의 황제들은 역사에 자신이 폭군으로 기록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언제나 귀족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화살이 돌려지는 것을 피해왔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귀족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모든 화살을 내게로 돌린 채 전쟁을 승인했다.

내게 화살이 돌려지자 귀족들은 비축해둔 힘을 풀어 날뛰기 시작했고.

그 결과 악마 황제, 폭군이라 불리게 됐다.

물론 말피엘과 같은 괴물이 출현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영웅왕 말피엘의 출현으로 인해 귀족들은 미련 없이 황궁의 문을 열어젖혔다.

'나를 제물로 바치면 자기들은 살 수 있을 줄 알았겠지.'

말피엘은 그런 귀족들도 모조리 잡아 죽였다.

더러운 피가 흐른다며 갓난아기까지 전부 말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니 않나.

정말로 그랬다.

'다시 살아보란 말이냐.'

벌레 주제에 황제인 내게 다시 살아보라 말한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세상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휘둘리며 살지 않으리라.'

그게 광증이 되었든, 귀족들이 되었든 간에.

온전한 나의 삶을 살 것이다.

오롯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린 게 너냐?"

[의미 불명. 나노머신 Zero에는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없습니다.]

벌레가 아니라면 누가?

신이라도 개입했단 말인가?

"언제부터 내 머릿속에 있었던 거지?"

[불명. 알 수 없습니다. 자가발전 프로그램이 뇌의 전기자극으로 미약하게 움직인 것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자극은 16년 전입니다.]

내가 3살일 때 처음으로 자극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내 첫 기억이 3살부터 시작하니 얼추 맞는 듯했다.

그 전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른다는 의미.

"어디서 온 게냐?"

['나노머신 Zero'는 한국과학기술원의 박문식 과학자에게서 탄생했습니다.]

"박문식? 생소한 이름이로군."

[마스터. 저에 대한 기본정보 및 사용법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이하려고 합니다. 마스터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해보아라."

이미 나를 수십 년간 괴롭힌 벌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상대가 내게 적의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적어도 제로는 과거와 다른 관계를 갖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내 승인이 필요하다면,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지잉.

뇌가 간지러운 느낌과 함께 약간의 울렁거림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헛구역질을 하고 난리를 피우겠지만 내게는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었다.

[프로토콜 변환 완료. 프로그램에 기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단어를 재조합합니다. 언어 변환 완료까지 3초. 2초. 1초.]

"으음."

약간의 신음과 함께 몸을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뇌에 강제로 주입된 '기억'이 있었다.

나의 기억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질적인 내용.

마치 누군가가 뇌의 주름 하나하나에 글자를 새겨넣은 기분이었다.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핵전쟁? 방사능? 지금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은 무슨 마법이더냐?"

문제는 내용이다.

지식을 주입했다고 해도 그걸 이해하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내가 아는 대륙과 전혀 다른 황금빛의 도시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메테오라도 떨어진 것 같이.

[마법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나노머신 Zero'는 방사능에 오염된 인류를 건강하게 복원하고자 만들어진 나노머신의 프로토타입입니다.]

"지금 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는 저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건축물들이······ 정말로 존재했던 것이라고?"

황궁보다도 크다.

대륙에서 가장 높다는 신성교의 탑보다도 더욱 큰 것 같았다.

그런 건축물이 셀 수 없이 많았다.

[Yes. 인류의 건축물은 하늘 너머까지 닿았습니다.]

"그렇게 높고 거대한 것들이 단번에 쓸려나갔다?"

[그것이 바로 핵의 두려움입니다. 세계전쟁으로 인해 수천 년간 이룩한 인류문명의 총아는 고작 십여 분만에 전부 쓸려나갔습니다.]

대륙을 단번에 파멸로 몬 전쟁 병기.

저 핵이면 불멸의 말피엘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핵이라는 걸 만들 수는 없나?"

[그에 대한 정보는 입력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쉽군.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게 이런 걸까.

하지만 몇몇 중요한 정보들을 알게 됐다.

'나노머신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

왜, 무슨 이유로 나노머신이 이 세계에 떨어졌고 내게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원히 고통만 주는 게 아닌 내게 도움이 되는 거라면, 그게 무엇이든 나는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설령 그것이 철천지의 원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스터. 제게 주어진 권한만으로 마스터의 몸을 온전하게 치료하기 힘듭니다. 뇌와 몸에 쌓인 독극물을 정화하고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선 마스터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나노머신은 오직 인간의 치료를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 몸에는 수많은 독기가 쌓여있었다.

진정과 진통을 위해 매일 복용하던 마약들이 몸을 썩게 만들고 있다.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 기로였다.

나노머신이 전해준 정보를 온전히 믿을 것인가?

믿을 수는 있는 존재인가?

하지만 나노머신이 내게 전해준 정보에는, 나노머신 스스로가 파멸하여 배출되도록 하는 '명령어'도 포함되어있었다.

내 명령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진짜 적이라면 자신의 약점까지 내게 전달하지는 않았을 터.

"······ 승인한다."

나는 내 머릿속의 벌레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반신반의. 벌레가 약에 찌든 이 몸뚱어리를 고칠 수 있을지도 궁금했던 것이다.

"하아······."

멋들어지게 꾸며진 정원의 식탁에 앉아,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와의 오찬이라니.

누가 들으면 부럽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시집 잘 가는 게 귀족가 사교계 여자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으니, 만에 하나 성사만 된다면 인생이 피는 거라고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떠들었을 테다.

'하필이면 라인하르트라니.'

문제는 그 대상이 '라인하르트'라는 것이었다.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미친 황태자.

정신병자, 여색에 미친 바람둥이, 피만 보면 환장하는 혈귀 등등······.

"이사벨라 아가씨, 들으셨어요?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얼굴에 주름밖에 없대요. 매일 인상을 찌푸려서. 인상을 안 찌푸린 걸 본 사람이 없다던데요?"

"시끄럽다. 그리고 사람을 외관으로 판단하는 건 나쁜 버릇이야."

재잘거리는 레인즈의 말을 애써 한 귀로 흘렸다.

이사벨라는 일반적인 귀족가의 아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처럼 시집 잘 가서 잘 살았네~ 라는 말을 듣기보단, 이사벨라 본인이 잘나서 잘 산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다른 아가씨들처럼 꽃꽂이나 만드는 그런 취미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검을 좋아했고, 기사를 동경했다.

고귀한 기사라고 품평이 자자했던 아버지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왕 만난다면 그런 품격있는 남자였으면 했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의미에서 완전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 지금은 남자를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집안 어른들의 강요에 못 이겨 억지로 나온 자리였다.

'문제 있는 것들끼리 잘 만나보란 뜻이겠지.'

집안의 어른들은 이사벨라에게 하자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꺼리는 황태자에게 자신을 이렇게 내던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이 자리가 너무 싫었다.

정략혼의 산 제물로 바쳐진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탓이다.

'최대한 좋게 거절하자.'

좋게. 최대한 웃으며 거절하는 거다.

비록 약속시간은 지났지만, 먼 곳에서 달려온 자신보다 늦는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는 안 되지만!

입꼬리를 억지로 말아올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정원을 지키던 병사들이 나팔을 불며 요란을 피웠다.

저 나팔을 왜 들고 있나 했더니 설마 이러려고 그런 거였나?

자신의 위세를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그런 유치한 생각은 아니겠지?

"아······."

쓸데없이 요란하다.

애써 올린 입꼬리가 내려왔다.

이런 남자, 안 봐도 뻔하다.

그 순간이었다.

"언제부터 황금 기사단이 광대가 된 거지?"

< 정오의 오찬 > 끝

"우웁!"

몸을 닦이러 들어온 시녀들이 문을 열자마자 헛구역질을 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역겨운 냄새에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곤, 표정을 굳힌 채 엎드려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그 역겨운 냄새의 진원지가 나임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상체를 드러낸 채 옷을 벗어놓고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였다.

전신에서 흘러나온 검은색 땀이 의복을 절여버린 탓이다.

나노머신에게 몸을 치료하길 승인한 지 정확히 십여 분만에 벌어진 일.

"아아······."

내게서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자 두 시녀가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고작 헛구역질 좀 한 것 가지고 살려달라니.

예전의 내가 이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기야.'

이때의 나는 짜증의 집합체였다.

참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말종.

끊이질 않는 두통과 셀 수 없이 많은 약에 절여져 정신도 몸도 온전하지 못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아마도 신경질을 부리며 시녀의 머리카락을 전부 밀어버렸을 것이다.

심하면 죽이거나.

물론, 이때엔 몰랐다.

'나중에 알았지. 내가 먹는 약 중에 광증을 더 도지게 만드는 게 있었다는 건.'

정신착란과 환각 증세를 더욱 심하게 만드는 마약이 있었다.

그걸 정신안정제라고 속이며 먹인 인물은 다름 아닌 내 동생 중 한 명이었다.

3황자.

정확히 말하자면 3황자의 어미인 조세핀 황비의 짓이었다.

이제 고작 여덟 살인 3황자는 아직 그렇게까지 악랄하진 못했으므로.

의도는 뻔했다.

내 광증을 극대화해 폐위시키려는 수작질인 게다.

가문의 후광만을 믿고 다시 황태자 구도를 짜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조세핀 황비는 모르고 있었다.

극대화한 광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이성적이지 못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몰랐던 게 분명했다.

알았다면 약이나 몰래 넣는 게 아니라 내 손발부터 잘랐을 것이다.

"괘념치 않는다."

그래서 말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정신이 너무나도 멀쩡했으므로.

평범한 공기마저 상쾌하다.

숨을 마시고 내쉬는 게 이토록 편안했던 적이 있던가.

내 기억상으로는 처음이었다.

'엄청나군.'

나노머신의 성능은 확실했다.

고작 십여 분만에 몸의 독기를 상당 부분 빼냈다.

몸이 가볍다. 가벼워서 날아갈 듯했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그럴진대 고작 헛구역질 정도야.

"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괘념치 않는다고 말했을 터인데."

"저, 정말 용서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일어나거라. 씻는 게 늦어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를 기다리게 한다면 그건 다 너희 잘못이다."

겁에 질린 토끼와 같은 눈으로 두 시녀가 일어났다.

변덕이 심한 황태자가 용서한다고 말한들 믿기 힘들 것이다.

이윽고 시녀들이 쭈뼛거리며 물이 가득 찬 대야를 가져왔다.

내가 흘린 오물을 씻겨내고, 한참을 닦아낸 뒤이야 시녀들은 나뭇잎에 말린 약재를 공손히 내밀었다.

갖은 약재들이 저 안에 들어있었다.

조세핀 황비가 몰래 섞어 넣은 독약도 함께.

꿀꺽!

거침없이 삼켰다.

'갑자기 먹지 않으면 의심을 살 테니.'

물론 조세핀 황비가 두렵진 않다. 그녀의 야욕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나의 뒤를 봐주는 귀족세력들이다.

지금의 온건한 원리원칙주의자인 황제가 아니라, 새로운 미친 황제를 내세워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진짜 악마들.

'또다시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다.'

적은 많다.

귀족도, 말피엘도 해결하기 힘든 과제다.

구태여 황비에게까지 경각심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

어그적 씹어 넘기자 목을 타고 약재가 내려갔다.

그와 동시에.

[도파민 분비를 방해하는 물질과 신체에 해로운 성분을 감지했습니다. 분해하여 배출합니다.]

나노머신 제로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가슴팍이 촉촉해진다. 노폐물이 배출되고 있었다.

'역시나.'

오랫동안 몸에 쌓인 노폐물도 제거할 수 있다면, 들어오는 성분은 그 즉시 없앨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예상이 맞았다.

나노머신의 성능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수많은 명의도, 심지어 성녀나 성황조차도 뛰어넘는 치유력.

이를 잘 활용한다면 나 스스로가 벽을 넘을 가능성조차 있지 않을는지.

"어맛! 땀이······."

의복이 재차 젖자 시녀들이 난리를 피웠다.

하필이면 배출된 부위가 양쪽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쪽이었는지라 더욱 눈에 띄었다.

대비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촉촉해졌다.

이에 나도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많고 많은 부위 중에 저 두 곳이란 말인가.

[노폐물을 땀샘이 가장 많은 곳으로 배출하는 게 효율이 높습니다.]

땀샘은 땀이 나오는 몸의 구멍이다.

말하자면,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쪽에 땀샘이 가장 많다는 건데.

"······ 배출되는 부위를 바꿀 순 없나?"

[변경 가능합니다.]

이건 꼭 바꿔야겠다.

"예?"

"아니다. 다시 씻어야겠군."

시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조금 늦을 것 같았다.

***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팔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이런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병사들의 환영식을 보고 도리어 뿌듯 해했다.

'놀리고 있는 건지도 몰랐지.'

저 멀리, 3황자가 사는 '황금사자궁'의 꼭대기.

정원을 내려다보며 실실 웃고 있는 어린 3황자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조세핀 황비도 있었다.

호들갑을 떨며 내가 차이는 걸 구경하려는 것이다.

베르사유 백작 영애의 성격을 미리 파악한 뒤 쳐놓은 그물.

그녀, 이사벨라는 유세를 떨거나 오만한 것을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황금 기사단이 광대가 된 거지?"

하여 말했다.

일반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기사다.

그것도 무려 제국 서열 3위의 황금기사단이었다.

"예? 저, 저희는······."

"평화가 너무 길었나 보군. 제국의 보배라 불리는 기사단이 광대 짓이나 하고 있다니. 아니면 옷 바꿔입기 놀이라도 하는 건가?"

기사단 단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지금은 태평성대였다.

30년간 이렇다 할 전쟁 한 번 겪지 않았다.

덕분에 검은 녹슬고 이상한 명예욕만 커졌다.

흔히 말하는 기사도다.

그런 기사도를 모욕했으니 얼굴이 굳을 수밖에.

물론 저들은 내가 아예 못 알아볼 거로 생각했겠지만.

"······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황태자 전하."

"지나치다? 내게 하는 말인가, 알베르토 기사단장?"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흠칫했다.

내가 설마 자신의 이름까지 알 줄은 몰랐겠지.

물론 과거 이때의 나는 몰랐다.

조세핀 황비와 3황자의 목을 벨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저희는 전하의 반년만의 외유를 진심으로 축하했을 뿐입니다."

"일반병사의 옷을 입고 말인가?"

"그건······."

일반병사와 옷을 바꿔입는 기사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 축하를 위해 바꿔입었다?

개가 짓는 소리다.

"알베르토 기사단장. 전장에선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병사는 목을 잘라야 한다. 왜인 줄 아나?"

"··· 왜, 입니까?"

"병사가 생각이라는 걸 갖게 되면 전쟁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되지. 그런 병사는 지휘체계를 무너트리고, 나아가 전쟁을 패배하도록 만든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으니 목을 잘라도 할 말이 없다는 의미다.

하물며 그게 사령관을 욕보이는 광대 짓이라면 사지를 잘라 개에게 먹여도 부족하지 않다.

"지금은 전시가 아닙니다,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 무슨 전쟁을 아신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알다마다.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그 지옥을 어찌 모르겠나.

그 지옥을 웃으며 헤쳐온 게 나라는 사람인데.

도리어 모르는 건 저들이다.

30년이 넘는 평화.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귀족가의 자제들.

작금에 이르러서 기사란, 놀고먹는 빈대와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다.

황태자라는 이름이, 나의 존재가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정식으로 책봉된 황태자의 면전에서 고작 기사단장 따위가 대드는 건 다른 왕국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황제가 되고 나선 더더욱.

스릉!

"헛!"

나는 알베르토의 옆에 선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빠르지도 않은 동작.

기사가 목숨처럼 여겨야 할 검을 고작 내게 뺏기다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검을 뺏겨 어쩔 줄 몰라하는 저 표정도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이딴 게 기사라.

나는 알베르토 기사단장에게 검을 겨눈 채 말했다.

"검을 들어라, 알베르토 기사단장.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 버르장머리를 고쳐주마 > 끝

정적.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검을 들어라?'

알베르토 기사단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반년이 넘도록 궁에 칩거한 황태자.

광증이 더 심해져서 강제칩거 당했다는 소문만 파다했다.

이를 계기 삼아 궁 내부에선 황태자의 책봉을 다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죽은 황후가 아니었다면, 황후에 대한 황제의 진실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 미친 황태자는 책봉은커녕 단두대에 목이 잘렸을 터.

아무런 재능도 갖지 못한 무능력자.

군주가 지녀야 할 덕목에 들어맞는 게 단 하나도 없다.

황태자가 제국을 다스리면 필히 제국은 망할 것이다.

오죽하면 황제가 직접 임명해 황태자를 따르던 서른 명의 '황룡 기사단'도 이제 고작 세 명만 남았을 따름이었다.

직속 기사단마저도 황태자의 자질에 실망하고 대부분 떠나갔으니, 그 실력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너무 오냐오냐 자란 탓이다.'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약에 찌들어 피골이 상접한 몸.

제대로 검이나 휘두를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자격 없는 황태자라지만 그래도 황태자였다.

강하게 나오면 져줄 수밖에 없으니 자신이 진짜 강한 줄 아는 거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기사에게 검을 겨눌 생각을 하겠는가.

'적당히 놀아줘야겠군.'

아무리 알베르토가 황금기사단의 단장이라도 이곳은 황궁이다.

보는 눈이 있으니 적당히 맞춰줄 필요는 있었다.

"······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짐이 황태자이기 때문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검술시연'이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대련이 아닌 검술시연.

황태자의 춤사위를 그저 막으며 지켜보겠다는 말.

자신들을 '광대' 취급한 것에 대한 복수다.

"기사의 명예를 걸고 그 말, 지킬 수 있나?"

가장 명예 없는 자가 기사의 명예를 운운한다.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걸지요."

이만한 안전자산이 어디있겠나.

저 엉성한 자세를 보라.

제대로 된 격식조차 갖추지 못한, 그저 힘에 의지해 검을 들고 있는 자세였다.

마치 검술이라곤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기본기도 안 닦여있군. 3황자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해.'

그에 반해 자신이 모시는 3황자는 어떻던가.

나이가 어린 것만을 제외하면 천재 중의 천재였다.

고작 여덟 살의 나이에 기사 후보생을 이길 정도의 실력.

황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마법도 벌써 2서클을 달성했다. 그것도 만 명 중 한 명뿐이라는 '빛' 속성 친화력을 가진 채로.

'소문보다 더 최악이다.'

적당히 맞장구나 쳐주다가 물러나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후웅.

위에서 아래로 찍어내리는 종베기.

보인다. 느려터진 저 검은 어린아이도 막을 수 있을 듯했다.

이에 검을 들어 막자, 그대로 황태자의 검이 물 흐르듯 떨어졌다.

손아귀에 검을 쥘 힘조차 없던 걸까?

투악!

순간 알베르토의 몸이 뒤로 밀렸다.

예상하지 못한 몸통박치기다.

정확히 두 발자국 밀려났다.

"움직였군?"

알베르토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검술 대련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검을 들라고 했지, 검으로 싸운다고 말한 적은 없다만?"

"이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짐이 기사로 보이는가?"

기사도는 예법이고 예의이다.

그것은 기사가 아니라도 지켜야 할 도덕 같은 것이었다.

예컨대 검의 대결에서는 검만 쓰는 것 같은 암묵적인 약속 말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의 자질은 아니었다.

진정한 기사도라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알베르토가 입을 열었다.

"······ 검을 드십시오."

"검의 대결을 고집하겠다? 참으로 기사다운 친절이군."

대놓고 놀리듯 느릿하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든다.

그 특유의 건방짐까지 더해져 화를 억누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허나 방심은 한 번이면 족하다.

곧이어 시작된 대련.

공격하는 쪽은 여전히 황태자 쪽이고, 알베르토는 방어만을 고집했다.

채엥!

횡베기. 막는다.

이후 들어오는 검 역시 비스듬하게 쳐낸다.

막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검술에 무지하다'는 편견이 시시각각 깨지고 있었다.

집요하게 치명상만을 노리는 검.

한 번 허용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부위만을 노리고 있다.

그것도 진심으로.

'제국의 검술이 아니다.'

제국은커녕 어느 왕국에서도 저런 살기 넘치는 검을 가르치진 않는다.

그런 검술이 존재한다면 그건.

'용병. 용병의 검술이다.'

질 낮은 용병들이나 배우는 그런 검술임이 분명했다.

대체 어디서 저런 검술을 배운 거지?

용병이 황궁에 들어온 일은 없었다.

더불어 황태자와 접선할 수 있는 용병은 더더욱 없었다.

게다가 더욱 큰 문제는 황태자의 검이 점점 더 빠르고, 정교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뀌었다.'

기세가.

눈빛이.

먹이를 노리는 사자, 감정 없이 적을 짓밟는 제왕의 얼굴이다.

"흐읍······!"

그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알베르토가 검을 휘둘렀다.

다가오는 황태자를 향해.

기사도를 가르쳐주겠다는 목적조차 잊은 채로.

채엥!

부딪힌 검이, 날아갔다.

누구의 검이 날아갔는가.

"다, 단장님······!"

기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황태자의 얼굴에 가느다란 선혈이 생겼다.

제아무리 자격 없는 황태자라 할지라도, 이곳은 황궁이다.

황태자의 얼굴에 손상을 입혔으니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일.

하지만, 알베르토 단장의 정신은 그렇게 온전하지 못했다.

'검이······.'

검이 날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 화단의 정중앙에 떨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체적인 우위도, 검술에 대한 이해도 자신이 월등하건만.

왜 진 거지?

아니, 왜 공격한 거지?

순간적으로 보였던 포식자의 얼굴.

아직도 환각을 본 것인지, 진짜였던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도, 방어만 하겠다는 말도 무엇 하나 지켜진 게 없군. 심지어 기사가 검까지 놓았다?"

어느새 말려진 입꼬리.

놀리는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토는 입이 두 개라도 말할 자격이 없었다.

말마따나 내뱉은 말 중 지킨 게 없기 때문이다.

초짜와 같이 움직이는 황태자를 상대로 검을 놓기까지 해버렸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얼굴에 작은 생체기까지 냈다.

아무리 자격 없는 황태자라지만 적당히 놀리는 것과 직접 상해를 입힌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것도 황궁 내에서.

그가 마음 먹기에 따라 파면은 고사하고 목숨줄 부지하기도 어려울 수 있는 일.

빠드득!

"······ 용서해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결국 알베르토는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

어찌할까.

예전이라면 분을 못 이겨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정신은 놀랄 만큼 냉정했다.

'몸이 가볍다.'

기분만이 아니었다.

나노머신의 치유력에 의해 내 몸은 건강을 되찾고 있었다.

3황자와 조세핀 황비의 취향에 의해 꾸려진, 허울뿐인 기사단이라 하더라도 기사는 기사다.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기사를 상대로 선전을 한 거다.

'용병왕의 검술을 봐두길 잘했군.'

모든 게 허약했던 나지만, 그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했다.

바로 눈이다.

유독 발달한 이 눈으로 나는 수많은 이들의 전장을 지켜봤다.

그중에는 이름난 검술가도, 심지어 소드마스터나 용병왕도 포함되어있었다.

예법을 중시하는 작금의 검술은 실전에 특화된 용병왕 카르발의 검술을 당해낼 수 없다.

아무리 천대받는다고 하더라도 전장에서 먹히는 건 고리타분한 기사의 검보다 격식 없는 용병들의 검술이었으므로.

게다가.

'세상이 잠깐 느리게 보였다.'

단순히 눈이 좋은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그로 인해 나는 잠깐이나마 알베르토를 압도할 수 있었다.

그 짜릿한 기분이, 흥분이 아직도 가시질 않았다.

[순간 뇌 동시 영역 활성도 12.2%]

[뇌의 활성 기능이 확장됐습니다.]

뇌의 활성 기능?

처음 깨어났을 때에도 뇌 활성도라는 말을 언급했다.

그게 무엇이기에 확장이 되었다는 건지.

내 궁금증을 알아차린 듯 나노머신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평범한 인류의 뇌는 10%만 활용됩니다. 하지만 나노머신 Zero는 뇌의 기능을 확장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발되었습니다.]

[뇌의 기능이 확장되면 자체 치유력이 높아지며 신체의 능력이 한계를 돌파합니다. 이로 인해 방사능을 비롯한 온갖 오염물질에 궁극적인 면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몸의 가벼움을 떠나 더 활력이 넘친 건 이 때문이었나.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12.2%의 뇌가 활성화되어서 이 정도라면 그 이상은 어떨까.

20을 넘기고, 30을 넘기면 또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에 대한 설명은 없군. '

하지만 나노머신도 방금 전 내가 겪은 현상에 대해선 설명이 없었다.

누락한 건지, 나노머신조차도 모르는 현상인지는 차차 알아보면 될 일.

"일어나라."

그보단 알베르토의 처후를 정해야만 했다.

"하, 하오나······."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물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광증이 없더라도 당하고만은 못 사는 성격.

게다가 3황자와 조세핀 황비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이다.

내 광증이 완전히 치료됐음을 알릴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무릎을 굽혀 알베르토 기사단장과 눈을 맞췄다.

"흠, 좋다. 그대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면 벌을 주도록 하지."

알베르토의 두 눈에 공포가 서렸다.

미친 황태자. 자칫하면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아직 적당히 '미쳐있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 스스로 정해보아라. 명예를 잃은 기사가 무슨 벌을 받아야 할지."

"그, 그게······."

자신에게 줄 벌을 스스로 정하라는 것.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작게 정한다면 작게 정한대로, 크게 정한다면 크게 정한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알베르토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과거의 그 무능력한 황태자가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저 눈. 단순히 미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다.

백전의 노장에게서나 엿볼 수 있는 눈. 하지만, 궁을 나간 적조차 없는 황태자가 그럴 리가 없었다.

착각일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답답해 죽겠군."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었다.

평화에 찌든 이때의 제국은 지금의 내가 봐도 답답함 그 자체였다.

자기가 저지른 일의 대가조차 모르는 이런 어중이떠중이가 황실의 기사단장 중 한 명이라니.

콰득!

"끄흡······!"

그대로 내리 찔러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냈다.

알베르토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신음을 죽이며 버텨냈다.

"가져가거라."

뚝뚝 피가 흐르는 새끼손가락을 건네자, 알베르토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감사··· 합니다."

"꺼져라."

잘린 손가락을 든 알베르토가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쇼는 이정도면 됐다.

그렇게 혀를 차고 고개를 저으며 눈길을 돌리자.

"······."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

이사벨라가 서리한보다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

―죽어서도 너를 원망할 것이다, 라인하르트.

< 서리한 > 끝

―죽어서도 너를 원망할 것이다, 라인하르트.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

저 차가운 눈빛을 보자 그날의 참상이 내 머릿속을 채웠다.

그녀는 사지가 잘린 채 불에 타 죽었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념을 이어나간 탓에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숙청당했다.

전쟁 반대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백성들의 편에서 봉기를 들었던 '성녀 이사벨라'가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였기에.

그녀를 보고 있자니 입안이 썼다.

내가 황제에 즉위한 뒤 과거의 일을 그대로 진행한다면 그녀는 큰 걸림돌이 된다.

수 없는 황제 암살 기도, 궁의 화재사건, 심지어 20만 백성들을 결집해 반란을 주도하던 주도자급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므로.

물론 훗날의 이야기다.

작금의 그녀는 평범한 백작가의 영애일 따름이었다.

어른들의 욕심에 의해 팔려 나온 가련한 여자.

'여전히 아름답군.'

과거의 나는 그녀를 보곤 한 눈에 반했다.

반년 만에 황태자궁의 칩거를 깨고 나온 건 오직 그녀를 보기 위함이었다. 아버지의 명령, 공작들의 권유도 상관없는 나의 의지였다.

어렸을 때 무도회장에서 같이 춤을 추었던 소녀.

너무 어렸던 터라, 그녀는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몰아붙여서 결국 뺨을 맞았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됐더라?

'뺨을 맞고 기억이 끊겼지.'

광증이 도졌다. 급격한 흥분이 이성의 끈을 끊어버린 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피바다였다.

누구의 피?

놀랍게도, 내 피로 흥건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시녀 레인즈는 훈련받은 검사였다.

주인의 위험을 감지하고 나를 베어낸 것이다.

이후 레인즈는 처형당했으며, 이사벨라와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가 되었다.

이사벨라의 집안도 3년 치 세금을 모조리 헌납할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가문 역시 몰락해버렸다.

"미안··· 으음. 미안하다. 몹쓸 모습을 보여줘 버렸군."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런데 사과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본능적인 저항이 있었다.

사과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서일까.

"······ 괜찮습니다."

내가 사과하자 의외라는 눈빛과 함께 그녀도 화를 삭였다.

베르사유 백작령과 황도는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달려도 한 달은 걸리는 거리.

그 거리를 달려와 처음 보는 게 피와 살점이라면 불편한 게 당연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쩡한 정신으로 그녀를 대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오는 길에 불편함은 없었는가?"

"황실에서 보내주신 마차 덕에 편안히 올 수 있었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딱딱한 말투와 표정.

그녀도 이 자리가 여간 불편한 것이리라.

나만 불편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편안했다면 다행이군. 먼 길 오느라 피곤하고 배도 고플 텐데, 더 식기 전에 맛만 좀 보도록 하지."

상 위에는 수프와 크림, 그리고 곁들임 요리가 30가지나 놓여있었다.

그것을 보니 미칠 듯이 배가 고파졌다.

절로 침이 고이고 동공이 확장된다.

꼬르르르륵!

배에서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왜 이러지?'

고작 반나절 굶었다고 몸이 보일 반응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당황스럽지만 몸은 음식을 원하고 있었다.

평생 겪어본 적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말이다.

"음!"

자리에 앉아 냅킨을 두르고 빵을 한 조각 입에 털어 넣은 순간 저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맛있다. 단순히 맛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허한 게 채워지는 감각.

황실 요리사가 바뀌었나?

아니다. 그대로다.

그럼 허기져서 맛있게 느껴지는 건가?

손이 바빠진다. 입도 바빠졌다.

"······."

이사벨라는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로 가만히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3일 동안 굶긴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게걸스럽다는 표현이 맞다. 귀족의 식사예법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태자라는 것이다.

방금 전 피를 보았는데도 식욕이 넘쳤다.

미친 황태자라는 위명에 걸맞으나.

'······ 맛있게 먹네.'

그렇다고 하기엔 진심으로 식을 즐기고 있었다.

꿀꺽!

황실의 요리가 대체 얼마나 맛있기에 매일 먹을 터인 황태자도 저리 즐길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이사벨라는 궁금해졌다.

그러나 참아야 한다.

그녀 역시 식을 즐겼지만 장소가 장소였다.

우걱! 우걱!

맛만 좀 본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이 저렇게 맛있게 음식을 털어 넣은 장면을 이사벨라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귀족들은 예법이니 뭐니하며 깨작깨작 먹는 게 유행이었다.

덩어리째 입안 가득 씹는 건 금기시되고 있었다.

그 금기를 황태자는 너무나 맛있는 모습으로 깨버리고 있었으니.

'참아야 해, 이사벨라.'

순식간에 서른 가지의 음식이 거의 동을 보였다.

이윽고 라인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왜 안 먹냐는 눈빛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동시에 그의 포크가 그녀의 앞에 있던 빵으로 향했다.

'아······.'

어차피 안 먹으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마지막 남은 빵마저 다 먹어치운 라인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저 멀리서 뿌듯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요리사를 향해.

"더 내어와라. "

"예!"

이사벨라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

황금 기사단의 단장, 알베르토는 잘린 새끼손가락을 움켜쥐며 복잡한 눈빛을 했다.

"너무 티나게 져주신 거 아닙니까, 단장님?"

"크큭, 그래도 황태자의 얼굴에 상처를 냈으니 조세핀 황비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단장님도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진짜 같이 연기를 하시는지."

단원들이 시끄럽다.

잘린 손가락이 괜찮냐고는 안 물어보고 온통 저 이야기뿐이다.

'진짜 같은 연기?'

연기가 아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진짜다.

검을 맞대며 어느 순간 알베르토는 라인하르트에게 압도되었다.

현 황제에게도 보이지 않던 진짜 포식자의 눈빛.

백전노장이나 먹이사슬 최정상에 있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위압감을 알베르토는 미친 황태자에게서 느낀 것이다.

착각이라 생각하지만 잊히지 않는다.

무엇보다 라인하르트는 그에게 '자비'를 보였다.

마치 '넌 내게 빚을 진 거다'라고 말하듯, 말끔하게 새끼손가락 하나만 잘라냈다.

깔끔한 단면. 오염도 되지 않아 신성력으로 붙이면 별 탈이 없을 수준이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검술도 진짜였다.

격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오직 실전에만 특화된 검술이었기에 그리 느낀 것뿐이다.

'여태까지 미친 척을 하고 있던 건가?'

어쩌면, 황태자는 그저 '미친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왜?

황태자로 책봉됐으니 차기 황제 자리가 확정된 상황이다.

어지간한 구설에 휘말리지 않는 한 책봉된 사실이 사라질 리 없었다.

'젠장. 모르겠군.'

골이 아파 왔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온다.

분명한 건 그가 예전의 그 '미친 황태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광증이 나은 건지, 아니면 여태까지 미친 척을 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후자라면······.

꿀꺽!

'잠자던 용이 깨어났다······.'

***

일과가 끝났다.

방에 들어와 창밖을 보니 벌써 저녁이다.

거의 반나절 동안 먹기만 한 것이다.

이사벨라에게는 미안한 일이었다.

[골밀도가 높아집니다.]

[근섬유의 생산이 가속화됩니다.]

[필요 없는 지방을 태워 배출하기 시작합니다.]

[잉여 포도당을 저장합니다.]

제로는 내가 굳이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사이에 살이 제법 붙은 기분이다.

내가 생각해도 가공할 폭식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폭식의 원인이 무엇이냐?"

[뇌가 평균 이상으로 활성화되면 상당량의 포도당을 요구합니다. 포도당은 주로 빵이나 초콜릿 같은 탄수화물과 당에 많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어쩐지 유독 빵에 집착이 가더라니.

몸이 부족한 것을 원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럼 뇌를 활성화할 때마다 폭식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섭취하고 남은 에너지를 지방으로 남기는 대신, 제 분신들이 여분의 포도당을 저장하여 효율을 극대화합니다. 다만, 현재 마스터의 육체는 근육량이 많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한동안은 최대한 많이 먹을 것을 권합니다.]

과거의 나는 맛이라는 것에 무지했다.

약에 찌들면 감각이 죽는다. 그중 가장 많이 도태되어 사라지는 게 미각이다.

배가 찰 정도만 먹고, 그마저도 끼니를 거의 챙기지 않았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만 했다.

'나의 것, 나의 힘을 키워야 한다.'

오늘 확실히 느꼈다.

이 황궁에 온전히 나의 것은 거의 없다는 걸.

제르민을 제외하면 내 편이 없다.

하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황룡기사단. 나의 직속기사단인 그들이 있었지.'

황제의 아들은 나를 포함해 다섯이다.

그리고 황제는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지키도록 직속기사단을 임명해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

내로라하는 강자들로 이루어진 서른의 황룡기사단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기사단보다 그 기술과 힘이 강력하지만, 지금은 해체되다시피 하였다.

기사단을 나가거나, 스스로 전출을 희망해 다른 지방으로 떠난 게 대부분이다.

궁에 남은 황룡기사단의 숫자는 아마 손에 꼽힐 터.

그리고 남아있는 기사들조차도 내 행보에는 관심이 없었다.

반년 만에 궁을 나선다고 하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공작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유일한 기사들.'

당연하다.

첫 황자가 태어날 때 처음으로 만들어진 기사단.

그 상징성을 위해 고르고 골라 뽑은 인재들.

실력만이 아니라 성정도 보았기에 청렴하기 짝이 없었다.

외골수 집단은 함부로 건드는 게 아니다. 하물며 황룡기사단의 단장은 황제가 아직도 신임하는 자였다.

그는 내가 황제가 된 이후 궁을 떠났다.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남아있었다면, 말피엘이 그토록 쉽게 궁으로 들어오진 못했으리라.

'황실을 수호하는 다섯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왕의 호칭이 허락된 검왕 크로프트 경.'

다섯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그가 황제의 직속근위대도 아닌 내 직속기사단의 단장으로 있었다.

검왕의 칭호마저 거머쥔 그는 대륙의 열 손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다.

감히 황제가 있는 황실에서 왕의 칭호를 달 수 있는 자는 그가 유일했다.

'그가 나의 편이 된다면 확실한 카드 하나를 쥐는 셈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실망을 넘어 나를 혐오하고 있을 테니.

하지만, 해내야만 했다.

황제마저 주무르는 두 공작의 입김에서 벗어나려면 말이다.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나를 황제로 만든 건 그 두 명의 공작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나의 광증을 이용해 전쟁을 부추겼다.

만약 내가 멀쩡하다는 걸 확신하면 그 순간 다른 황자를 나의 자리에 앉힐 것이다.

'황제는 5년 뒤 그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온다.'

그리고 나를 황제의 자리에 앉힌 뒤 죽는다.

멍청했던 나는 나중에야 두 공작에 의해 죽은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금의 제국은 황제가 아닌 그 두 공작과 전쟁을 찬성하는 귀족들의 것.

오래된 평화로 인해 힘을 키우고 축적한 그들의 것이었다.

'바꿔야 한다.'

미래를.

나의 가치를.

그러기 위한 첫 단추가 바로 검왕 크로프트였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내야만 하는 첫 번째 위업인 셈이었다.

***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거울을 보곤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 이건 대체?'

< 검왕 크로프트 > 끝

어제와는, 내 기억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거울 속의 나 자신.

키가 커지고 혈색이 돌아왔다. 피부에 났던 온갖 문제들이 말끔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뿐만인가.

하루아침에 머리카락과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잠들었다가 깨어난 사람 같지 않은가.

검은색 머리칼과 턱수염.

어머니의 유산이자, 나를 악마라 불리게 만든 그 저주받은 색깔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마스터께서 잠드신 동안 세포재생을 30배 촉진했습니다.]

나노머신 제로에 대한 기본정보에는 세포재생에 관한 것도 있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세포이고, 그 세포의 재생을 돕는 게 나노머신 제로의 역할이다.

또한, 인간의 몸은 대략 3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루에 재생되는 세포는 3,300억 개였다.

질량 기준 80g에 해당하는데 그 30배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고개를 돌려 침대를 바라봤다.

침대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아침부터 시끄럽겠군."

미친 황태자가 흑마법에 손댔다는 소문이 추가로 더 퍼질 것만 같았다.

물론 나를 향한 가십은 셀 수 없이 많다.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마스터. 폐와 위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기들이 원래의 기능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골격계와 근육, 심장과 간의 기능을 되돌리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하루 만에 해내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기라도 하는 말투다.

도리어 놀란 건 나였다.

"지금 상태보다 더 좋아질 수가 있단 말이냐?"

숨을 쉬는 게 이토록 편안했던 적이 없다. 몸의 가벼움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 바깥으로 나가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이건만.

이보다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마스터. 더욱 많은 영양분 섭취를 권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로군."

비록 이름뿐이긴 하지만 나는 황태자다.

이곳은 제국의 황실이고, 음식은 썩어날 만큼 많았다.

'앞으로 2년간은 모든 것이 부유하고 비옥할 터.'

하지만 2년 뒤 대륙 곳곳에 대흉년이 찾아오며 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현황제가 선위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히며, 이사벨라의 가문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몰락한 것도 바로 대흉년 때문이었다.

신성교는 신이 노해서 대륙 각지에 대흉년이 찾아온 거라고 선전했지만, 이미 그 전부터 대흉년을 예견한 사람은 있었다.

'일개 학자의 말을 그 누가 귀담아들었겠나.'

나중에야 그 학자의 말이 맞았다는 게 증명되었으나 이미 늦을 대로 늦은 상황.

하지만 미리 준비하면 피해를 최소화할 순 있을 것이다.

적어도 현재의 나는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으므로.

"제르민, 밖에 있느냐?"

"예. 전하."

"들어오거라."

곧이어 문을 열고 들어온 제르민의 눈이 달덩이처럼 커졌다.

빠르게 문을 닫고는 그가 말했다.

"저,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침대의 참상과 내 오물을 끼얹은 것만 같은 모습을 바라보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걱정하지 마라. 몸이 회복되어가고 있는 과정이니."

제르민은 믿을 수 있다.

이 거지 같은 황실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였다.

사실대로 말하자 제르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어 내 눈을 본 제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 다른 시녀들이 오기 전에 먼저 치우겠습니다."

시녀 중에는 내부의 비밀을 바깥으로 전하는 첩자가 있었다.

제르민이 아무리 골라내도 병마처럼 계속해서 생겨나는 악성 종자들.

굳이 이상한 소문을 더 더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제르민이 능숙하게 움직이며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짐도 돕지."

"가만히 계시는 게 돕는 겁니다."

"······."

"··· 창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창문을 활짝 열자 상큼한 공기가 내부를 순환했다.

제르민은 오물이 묻은 침대보와 오염된 카펫을 한쪽에 몰아놓고는 이마를 훔쳤다.

동시에 왼손으로 원을 그리며 마법을 영창하였다.

"바람이여."

1서클, 가장 간단한 마법 중 하나인 바람을 유도하는 마법.

마나를 깨달은 자가 제일 먼저 배운다는 기초 속성마법이었다.

제르민은 원을 두 번 더 그렸다.

"휘몰아치며 거세게 불지어다."

2서클, 바람의 방향을 다룰 수 있게 되며 3서클은 바람의 세기를 강화한다.

휘이이이이잉!

덜컹! 덜컹!

창가가 흔들릴 만큼 강하게 불어온 바람이 방 내부의 모든 먼지와 머리카락을 바깥으로 가져갔다.

광증 탓에 방에 있는 거라곤 침대와 거울뿐이었으니 더 날아갈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을 나는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대가 마법사였다는 걸 까먹고 있었군."

제르민이 너털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허허, 엄밀히 말하면 저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꼭 마탑에 이름을 올려야 마법사인가?"

"당연하지요. 3서클 마법사는 마법사로 취급하지도 않지 않습니까?"

그저 마나를 깨달았다고 해서 마탑에 이름을 올려주진 않았다.

마탑에 이름을 올려 정식마법사로 취급되는 건 4서클부터였다.

마탑의 기초과정을 모두 수료하면 달성할 수 있다는 4서클이지만, 이 역시도 재능이 없는 자는 닿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리고 제르민은 3서클까지 익힌 상태였다.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있다고 들었는데.'

제르민은 대대로 황실의 집사를 역임하는 가문이었다.

집사 역할을 하는데 그만하면 충분하다며 가문에서 3서클까지만 수료하도록 한 것이다.

그때 제르민의 나이가 열다섯이었다.

열다섯에 3서클 마법을 익혔다면 재능이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이후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필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다시 마법을 배워보고 싶은 마음은 없나?"

"전하. 이제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는 전하만 건강하시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과연 그럴까.

나이가 들었다고 욕망이 없어지는 건 아닐진대.

하물며 재능을 억지로 포기하고 원치 않던 집사의 역할을 일임받았다.

마냥 좋았을 리만은 없었다.

'제르민이 계속해서 건강했으면 좋겠군.'

제르민의 흰색 머리칼과 주름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프다.

마음 같아선 나노머신을 나눠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노머신은 내게서 배출되는 순간 파멸된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그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고 싶었다.

건강은 기본이고 포기했던 꿈도 이뤘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이곳을 떠날 제르민이 아니었기에 방법을 달리할 필요는 있었다.

"제르민, 짐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겠나?"

"마법을······ 말입니까?"

"그래. 혹시 아는가, 짐이 마법에 재능이 있을지."

"전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전하께선 마나에 대한 재능이······."

제르민이 끝말을 삼켰다.

마나에 대한 재능.

그것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

그리고 황제의 아들이라면 모두 태어난 그 순간 온갖 검사를 받게 되어있었다.

다른 네 명의 황자는 찬란한 마나의 재능을 타고났는데, 오직 나만 유일하게 마나의 재능이 없이 태어났다.

무능력한 황태자, 마나의 축복조차 받지 못한 반푼이.

황제가 악마에게 조정당해 나를 황태자로 책봉했다는 소문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리고 재능이 없는 자는 마법을 배워도 소용이 없다는 게 정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막 내뱉은 말은 아니었다.

―안타깝군요. 허무(虛無)의 속성은 한 시대에 몇 태어나지 않는 재능. 일찍이 알아봤더라면 능히 마탑의 최상층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무려 마탑주가 한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니리라.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르민이 바람의 마법을 영창 하던 그 순간 내게는 보였다.

제르민이 왼손으로 그린 원.

마나로 만들어져 일반인은 볼 수 없는 게 정상인 그 원이.

손끝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는 그 감각이!

"바람이여."

휘이이이잉.

다시, 바람이 분다.

나를 바라보는 제르민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이게······ 되는군.'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바람의 흐름.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이 바람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마법을 배우지도 않은 내가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학이, 마탑이 휘청일 소식이었다.

[비활성화한 나노머신의 유입을 확인했습니다.]

['유도만능줄기세포'와 결합 된 비인가(非認可) 나노머신입니다.]

[지배하여,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스터, 승인을 부탁드립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비인가 나노머신?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설마, 지금 내 손끝에 모인 이 '마나'들이 또 다른 나노머신이란 뜻인가?

< 허무(虛無)의 마나 > 끝

조세핀 황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감히 그딴 무능력한 황태자에게 무릎을 꿇어? 그러고도 네놈이 3황자를 모시는 기사라고 할 수 있는 게야?"

"죄, 죄송합니다, 황비님."

알베르토 기사단장은 고개를 숙였다.

신성력으로 붙인 새끼손가락이 아직도 저릿하건만.

하지만 얼굴은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다.'

자고 일어나니 어제의 일이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걸 테다.

하지만 자신이 무릎 꿇은 거로 질책할 생각이었다면 어제 불러 경을 쳤겠지.

'이사벨라 영애 때문이군.'

베르사유 백작가의 이사벨라 영애.

현 시각, 그녀가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란 듯이 라인하르트 황태자와 궁의 정원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세핀 황비는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괜한 화풀이.

그 대상이 자신이 된 거다.

"네놈 때문에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가 그딴 무능력한 황태자에게 관심을 가진 게 아니냐?"

사교계에서 이사벨라는 독특하면서도 유명하다.

꺾을 수 없는 꽃, 도도한 장미.

그 외견만큼이나 수많은 고위귀족가로부터 추파가 던져졌지만, 하나같이 매정하게 차버리기로 유명했다.

그 과정에서 알려진 게 있다면 허례허식을 미친 듯이 싫어한다는 것.

이사벨라의 성격을 이용해 황태자에게 망신을 주려 했던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조세핀 황비가 손가락을 깨물었다.

'광증이 치료된 건가?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분명히 약은 먹고 있다고······.'

광증을 더욱 유발하는 약.

그 약을 꾸준히 먹는 이상 광증은 치료되기 힘들다.

하지만 멀쩡하게 바깥으로 나와 티타임을 즐길 정도면, 예전과 같이 아주 미쳐버린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폐하께서 다시 놈에게 관심을 두게 해선 안 돼.'

광증이 심해지며 황제의 관심도 황태자에게서 멀어져갔다.

황태자가 반년간 궁에 칩거했음에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베르사유 백작가와의 혼담도 귀족들의 입김에 못 이겨 마지못해 승낙한 것. 황비 역시 이에 힘을 보탰다.

그런데, 황비가 바라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고작 하루다.

권위에 흔들리지 않는 별종 이사벨라가 대관절 황태자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남아있는 건지.

아니면 그래도 '황태자'이기 때문에 순종적인 척이라도 하는 걸까?

'소문과 달리 이사벨라도 여우였던 게야. 그러면서 혼자 도도한 척이란 척은 다 했구나. 가증스러운 년 같으니.'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

모든 귀족가의 여식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가장 비싸게 쳐줄 남자를 찾고 있던 게 분명했다.

"저, 황비님."

"닥치거라. 네놈은 말을 할 자격조차 없다."

"······."

알베르토가 입을 닫았다.

황태자의 실력과 광증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지만, 원천봉쇄당했다.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는 것.

황태자가 실력을 감추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흥, 오늘은 빛의 마탑에서 사람을 보내오는 날이다. 내 아들, 카르몬의 빛나는 재능이 발휘되는 날이지."

그러거나 말거나 황비는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은 빛의 마탑에서 사람을 보내오는 날이다.

많은 귀족이 모여, 3황자 카르몬의 성장을 지켜보며 축하하는 영광스러운 날.

'폐하께서도 계신 자리. 확실하게 각인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엔 황제도 포함되어있었다.

***

"전하, 정말 제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겁니까?"

이사벨라가 찻잔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쳐다보며 어렵게 물었다.

본래라면 오늘 떠나기로 되어있지만, 그녀는 아직도 황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혼담, 없던 거로 하지.

오찬에서 황태자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좋게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황태자 쪽에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인 것이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그러려니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의 말이었다.

―대신 '3일간'만 적당히 짐의 맞장구를 쳐줬으면 하는데.

3일간 궁에 머무르며 같이 차나 마셔달라는 말.

혼담이 폐기되었다면 당연히 이사벨라는 떠나는 게 맞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녀가 궁에 머물길 바랐다.

―물론 그대도 얻을 게 있어야 하니, 짐이 그대의 '친구'가 되어주지.

더 가관인 건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는 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인 양 떠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황태자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 3일만 참자, 이사벨라.'

더러워도 이곳은 황궁이고 상대는 황태자다.

3일이 지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거다.

"되다마다. 왜, 보는 눈이 신경 쓰이나?"

황태자궁의 2층 정원.

다른 궁에서도 충분히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중간중간 피부가 아려오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예. 왠지는 모르겠지만, 적대적인 시선이······."

"신경 쓰지 마라. 짐을 시샘해서 보내오는 시선이니."

후룩!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라인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 봤다.

오늘도 날씨가 좋았다.

그리고 당장은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사벨라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은 생각할 것이다.

황태자의 광증이 나은 건가?

정말 황태자가 달라진 걸까?

··· 라고.

내가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선 보여주는 게 최고였다.

남에게 '나는 괜찮다'라고 말한들 믿을 리 없으니까.

고양이 못지않은 호기심을 가진 게 인간이라는 동물.

소문은 금세 퍼지리라.

이후 사람들은 스스로의 믿음에 따라,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해석하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미쳐있다고 확신하는 자는 그저 잠시의 변덕으로 치부하겠으나, 일말의 희망을 품은 자는 반드시 확인하려 들 터.

내 궁극적인 목적은 검왕 크로프트였다.

그의 귀에 소문이 들어가게 만드는 것.

찌는 던져졌다. 과연 원하는 물고기가 물릴 지.

'사람이 하루만에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그리고 그 모습을 이사벨라가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담았다.

완전 다른 사람이 됐다.

키도 조금 큰 것 같고, 어제는 없던 살도 붙었다.

분위기도 마찬가지. 어제와 달리 여유가 넘친다.

하루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그때 황태자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가 재빨리 손을 내렸다.

"손은 안 감춰도 된다. 그 굳은살은 숨겨야될 게 아니라 영광의 증표이지 않느냐."

"······!"

진심으로 놀랐다.

자신의 손바닥에 난 굳은살.

몰래 검술을 익히다가 생긴 것들이었다.

의도적으로 감췄기에, 아무도 몰랐다.

이런 자리에서 만난 남자라면 더더욱.

그녀의 굳은살을 알아본 건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처음이었다.

"'친구'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 귀족가의 여식이 검을 익히는 게,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더욱 그녀는 냉정해졌다.

지금의 시대, 이 평화의 시대에 검은 온전히 남자의 상징이 되었다.

여자가 검을 익히는 걸 수치로 생각했다.

가문의 어른들도 모르는 비밀.

"짐은 멋있다고 생각한다.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단순한 성별의 차이로 재능을 썩히는 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지."

··· 그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후벼 파고 있었다.

멋있다고?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

예쁘다거나, 아름답다는 말은 질리도록 들어봤어도.

멋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헌데 그 말이 '미치광이 황태자'에게서 나올 줄은.

'달라······.'

이제야 알겠다.

황태자는 일반적인 귀족들과 개념의 궤가 다르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건 아닐까.'

작금의 시대에 귀족가의 여식이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멋있다'고 품평하는 황태자라면, 자신이라도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 그런 남다른 사고방식 탓에 이상한 소문이 생성되고 돈 것이라면?

'같은 처지네.'

자신과 같은 처지다.

남다른 세계관.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이 세계에, 조금이라도 다른 행동을 보이면 '치부'라고 여기는 이 세계에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고.

그렇게 혼자 삭이고 있었는데, 동지를 만난 기분이다.

"얼굴 뚫리겠다."

"예? 아······."

너무 뻔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그때였다.

휘이잉-!

쿠웅!

하늘에서 빛이 터진다.

황홀할 정도로 밝은 빛의 무리.

"빛의 마탑 사람들이로군."

"빛의 마탑이라면, 설마 마탑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마탑.

그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탑이라는 건 대륙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3황자 카르몬의 성장확인차, 황비에 대한 예우차 들린 것이리라.

더불어 카르몬을 띄우기 위함도 있을 터.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아악!

하늘에서 불꽃이 인다.

그 뒤로 태풍이 치고, 얼음꽃이 사방을 수놓았다.

"빛의 마탑만 온 게 아닌 것 같군요······?"

"전부 왔다."

자신을 제외한 4황자들.

각각 화염, 바람, 빛, 얼음 속성의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 마탑에서 동시에 행차를 한 것이다.

우연이라고 치기엔 공교롭다.

아마도 모든 황자와 황비가 경쟁을 위해 무리하여 부른 것일 터.

'기억난다.'

본래라면 이날 나는 황태자궁에 갇혀있어야만 했다.

광증이 도져 이사벨라를 덮치려고 했으니, 황제의 명에 따라 밖에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마법적인 재능이 없던 내게 후원하는 마탑도 있을 리 만무했다.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행사다.

'왜인지 제로에게서도 제대로 된 언급이 없다.'

비인가 나노머신을 지배하여 활용하겠다는 말에 나는 승인했다.

주변의 마나를 모조리 빨아들인 제로는 그 뒤로 비슷한 말만 내뱉고 있었다.

[해석 중······.]

[비인가 나노머신을 해석 중입니다.]

[자가복제 바이러스를 발견, 관리자의 권한으로 바이러스를 제거합니다.]

[제거 완료.]

['유도만능줄기세포'의 인자를 이식합니다.]

[엑세스 완료. 비인가 나노머신의 지배에 성공합니다.]

[모든 비인가 나노머신의 지배까지 16% 남았습니다.]

거의 다 됐다.

완료되면 무슨 현상이 일어날지 궁금할 지경.

그 순간이었다.

척. 척.

기사들이 내 정원으로 침입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나, 그게 가능한 자들이었다.

"황실근위대가 내게 무슨 일이지?"

무려 황제의 직속근위대다.

근위대장이 나를 보며 무겁게 말했다.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나를?"

"예. 함께 '행사'에 참여하길 바라고 계십니다."

행사라.

지금 저 마탑들이 모인 걸 행사라고 하는 건가?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비록 어제 내 광증이 도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갑작스럽다.

아버지. 황제는 내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탓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하루만에 변심하여 나를 부를 리가 없을 텐데.

'조세핀 황비.'

그녀가 압력을 넣은 것이리라.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나를 불러 3황자와 비교시키며 황제의 이목을 끌려는 수작 같았다.

무능한 황태자와 유능한 황자들.

그저 구경꾼으로 전락시키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평화롭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장난질도 평화가 보장되니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 광기가, 지옥이 뭔지도 모르는 작자들.

예전의 나였다면 그 의도조차 읽지 못한 채 멍청이처럼 당해줬겠지.

회귀한 지금, 죄인처럼 끌려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차는 마저 마시고 가겠다 전하라."

"당장 모셔오라는······."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당장 나를 데려오라고?"

"······."

"황제폐하의 말을 멋대로 해석하고 지어낼 권한이 그대에게 있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알아서 가겠으니 돌아가라."

근위대장이 입을 닫았다.

데려오라고만 했지, 정확히 언제 데려오라곤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말렸다. 근위대장의 눈빛이 혼란해졌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곤 전혀 생각도 못했다는 듯이.

"맛이 좋군."

나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황비의 장난질에 어울려주긴 힘들 것 같다고.

< 마탑 > 끝

본래 3황자 카르몬의 성취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여덟 살의 나이에 2서클을 달성한 불후의 천재.

빛의 속성이라는 흔치 않은 친화력까지 가졌으니 치하 해 마땅하다.

빛의 마탑을 초청하고, 축제를 벌일 생각이었으나, 그 꼴을 다른 황비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감히 카르몬의 무대를 망쳐······!'

조세핀 황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른 황비들에게 카르몬의 2서클 진입을 자랑했던 입이 방정이었다.

황태자의 재책봉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제 아들을 그 자리에 올리려고 혈안이 된 게 그녀들이었다.

그런데 빛의 마탑을 초청해 황제 앞에서 축제를 벌인다?

하물며 황실 황가의 피를 이은 후손은 모두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 여덟 살에 2서클 정도는 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게 갖가지 이유로 네 마탑이 같은 날 도착하게 된 것이다.

'카르몬이 가장 눈에 띄어야 해.'

이제는 누가 더 황제의 눈길을 끄느냐의 싸움이 됐다.

그저 빛의 마탑을 초청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알베르토.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황비님."

일렬로 정렬된 황금 기사단.

서른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기사들이 완전무장한 채 일렬로 늘어서 있다.

3황자 카르몬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려면 입장할 때부터 압도해버려야 한다.

시선이 멀게 만들어 다른 황자는 보이지도 않게끔.

그러기 위한 기사단이다.

조세핀 역시 한껏 단장한 채 황금빛 경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같이 불편한 옷가지는 끔찍이 여기는 그녀지만, 카르몬을 황태자로 책봉시키기 위해선 불길 속으로라도 뛰어들 수 있었다.

"카르몬 전하. 옷 단장은 끝나셨습니까?"

"예, 어머니."

곧 시녀들과 함께 옆 방에서 카르몬이 뒤뚱거리며 나타났다.

카르몬 역시 황금빛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여기에 진짜 사자의 갈기를 덧대 만든 황금 사자의 투구를 쓰고, 미스릴로 지어 만든 검까지 착용하자 태가 났다.

"멋있으십니다, 전하."

"어머니도 멋있으세요."

준비는 끝났다.

조세핀 황비가 알베르토 기사단장을 바라봤다.

"가자꾸나."

전장에 출전하는 출정식이 이러할까.

비장한 표정으로 사자궁을 나섰다.

황궁의 입구. 그 앞에 준비된 자리에 마탑의 사절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자 보낸 고위급 마법사들.

단순히 황제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압도하여 친밀한 관계를 쌓아놓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카르몬 전하 납십니다!"

부우-!

병사와 기사들. 도합 백에 달하는 행렬이 황궁 입구로 닿았다.

하지만 입구에 도착한 조세핀 황비는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 여우 같은 년들이······!'

다른 황비들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눈에 띄냐의 싸움.

그녀처럼 난리를 피우며 등장하진 않았지만, 확실한 색깔을 가지고 각자의 위치한 자리한 황비와 황자들.

그들 모두 자신의 기사단을 대동한 채 견제하는 분위기를 풍겨댔다.

"와, 황실은 진짜 대단하군요. 어지간한 서커스단보다······."

"제발 쉿!"

마법사들 중 하나가 눈치 없이 입을 열다가 주변 마법사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황자가 등장할 때마다 볼거리가 생긴다.

어지간한 서커스단을 보는 것보다 더 재밌었던 탓이다.

그 소리를 못 들은 다른 황비들은 조세핀과 카르몬을 보며 뇌까렸다.

"광대가 따로 없구나. 역시 시골 귀족 출신이라 그런지······ 쯧."

"어린 것이 천하기까지 하군."

2황비와 4황비.

유일하게 1황비만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3황비인 조세핀은 애써 못들은 채 했다.

자신을 욕하면 그들 스스로에게 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정말로 모르는 걸까.

그렇게 황제를 제외한 모두가 모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도 없었다.

마법적인 재능도 없는 그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황태자를 후원하는 마탑도, 기사단조차도 없으니까.

'그래도 미리 손을 써놨으니, 황태자도 자리하겠지.'

그러나 조세핀 황비는 황제에게 언질하여 황태자도 자리하도록 하였다.

라인하르트, 그 무능력한 황태자가 재능 넘치는 황자들을 보며 절망하도록.

더욱 고립되도록 말이다.

혹여나 이성을 잃고 또 미쳐 날뛴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오늘은 카르몬의 날이다.'

황태자는 문제가 아니다.

다른 황자들?

3황자와 4황자는 나이 차이가 없다.

하지만 1황자와 2황자는 다 큰 성인이었다.

황태자 재책봉을 한다면 이미 성인인 그 둘에게 쟁점이 가겠으나, 카르몬이 그 둘에 못지않음을 알리는 날.

동갑인 4황자?

아직 어미 젖도 떼지 못한 그런 놈과 카르몬은 질적으로 달랐다.

경쟁하려면 1황자나 2황자와 해야 했다.

1황자는 검의 천재다.

고작 열아홉의 나이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조만간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검과 자신에게 화염을 덧씌워 각성하면 소드마스터와도 일전을 겨룰 수 있을 정도라고.

2황자는 마법의 천재였다.

열일곱의 나이로 바람 계통 마법을 무려 6서클 대성했다.

재능이 넘치는 천재도 서른을 넘겨야 닿을 수 있다는 그 영역을 13년이나 빠르게 당겨 닿은 것이다.

'모두 평범하기 짝이 없는 원소 속성일 뿐.'

카르몬은 그들에 비하면 아직 검술 실력도, 서클도 낮지만, 대륙에서 가장 보기 힘들다는 빛계통 속성의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것보다 보기 드문 것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

황제라고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때였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왜 여길······?"

웅성거리는 소리.

조세핀 황비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황실근위대가 직접 발을 옮겼으니 처음부터 라인하르트에게 거부 권한은 없었던 셈이다.

그야말로 황실근위대에 잡혀 오는 형국.

자신의 기사단에게조차 버림받은 황태자에게 어울리는 형벌이다.

마법사들도 웅성거렸다.

"저분이 그 라인하르트 황태자?"

"다른 황자들과 달리 행렬이 소박한데?"

"그러네. 세 명?"

따로 보낸 근위대는 어디 가고 황태자는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는 베르사유 백작가의 영애가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저, 저분이 왜?"

"허······."

조세핀 황비의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잡아 오라는 근위대가 왜 없는지 알겠다.

기사단을, 대동했기 때문이다.

비록 한 명이지만, 그 한 명만으로도 기사단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을 데려온 탓이다.

"······ 크로프트 경."

황룡 기사단의 기사단장.

최강의 소드마스터이며 검왕이란 칭호가 허락된 남자.

궁에 있으나, 대외활동은 전혀 하지 않던 그가.

황태자라면 이를 갈던 그가.

··· 지금 라인하르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이 따갑군.'

이런 시선, 익숙하다 못해 평상시의 일이었다.

여유롭고 능숙하게 나는 그 시선을 가로질렀다.

이사벨라는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내 '맞장구'에 보조를 맞췄다.

크로프트는 여전히 굳어있는 표정으로 옆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크로프트가 이토록 빠르게 나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제르민이 무릎을 꿇으며 부탁하더군.

근위기사단을 물려낸 검왕 크로프트가 말했다.

제르민.

그가 찾아와 무릎을 꿇으며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나서지 않았을 거라고.

황실근위대가 찾아온 즉시 제르민은 이 속에 얽힌 '정치'를 읽었다.

또다시 나를 희생양 삼아 황비들이 축제를 벌일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허나 나는 너의 광증이 나았다는 걸 믿지 않는다. 또 변덕에 지나지 않겠지.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수십, 수백, 수천 번 실망하고 난 다음에야 답이 없다는 걸 알았다.

황제의 명만 아니었다면 검왕 크로프트는 궁에 남아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르민에게 말했다. 내 눈앞에서 다시 광증이 도진다면 네놈의 목을 날려버리겠다고. 제국이, 황제 폐하께서 네놈으로 인해 멸망할 순 없지 않으냐?

크로프트는 모두 알고 있었다.

현재의 제국이 누구의 것인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이 나를 꼭두각시로 세우고 무슨 짓을 할지조차도.

결국 내가 황제에 즉위하자 크로프트는 제국을 떠났다.

마지막 억제제가 사라지자, 귀족들은 대놓고 날뛰었다.

크로프트는 귀족들조차 두려워하는 검사.

그가 있어서 이 가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거였다.

크로프트가 동행하는 건 나를 보필하기 위함이 아닌, '만에 하나의 상황에서 목을 베어버리기' 위함이었다.

살벌하지만 나도 동의했다.

또다시 이성을 잃고 광증에 끌려다니는 삶을 살 바에야, 죽는 게 나았으므로.

"황태자는 대외활동은 아예 안 하는 거 아니었어?"

"소문보다 훨씬 잘 생겼네."

"인상도 안 찡그리고 있는데?"

나를 보는 마법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럴 수밖에.

대외적인 활동을 책봉식 이후 아예 하지 않았으니 오직 소문으로만 나를 접했을 터다.

그리고 그 소문은 굉장히 악의적이었을 것이고.

마탑의 얼굴들이 모두 모인 자리.

본래라면 자신이 후원하는 황자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들의 시선은 오직 나에게로 모였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황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옆으로 조금 더 떨어지면 황비들의 자리다.

그녀들은 내 거침없는 행보에 당황하거나 의아해하고 있었다.

'폐하의 눈도 못 마주치던 황태자가······.'

폐하의 옆자리에 저토록 당당하게 앉는다니.

'허세인가?'

'미친 거지. 또 광증에 먹힌 게 분명해.'

어차피 허세이리라.

황제가 나타나면 꼬리를 말고 바닥만 내려다보기 바쁠 것이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황비들의 눈을 마주했다.

실로 오래간만이다.

아직도 저들의 비명이 귓가에 생생했다.

모두 직접 목을 베어버렸는데.

'덕분에 공작들을 견제할 황족의 힘이 모두 사라져버렸지.'

두 공작의 음해에 홀려버렸다.

오랜 시간 나를 무시하던 황비들에 대한 감정이 폭발해버린 결과였다.

지금 생각해도 진저리쳐질 만큼 아둔하고 멍청한 짓이었다.

죽여선 안 된다. 차라리 빼앗으면 몰라도.

"황제 폐하 납시오!"

부우우우우!

수많은 나팔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백의 기사들과 함께 자리한 황제가 손을 들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성왕, 평화의 수호자 데우스.

······ 그 이름에 얽매여 모든 것을 방관한, 방만한 황제.

과거의 나는 그가 두려웠다.

아무 감정 없는 눈빛이, 나를 바라보는 무저갱 같은 저 두 눈이.

그의 앞에만 서면 잔뜩 위축되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입도 뻥끗 못한 채 병신 같이 굴었다.

하지만 이제 알겠다.

전혀 두렵지도 않았다.

나는 진심을 담아서 말을 전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아버지."

그와 동시에.

[모든 비허가 나노머신의 지배가 끝났습니다, 마스터.]

< 오래간만입니다, 아버지 > 끝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시선은 결코 나를 보지 않는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푸훕!"

조세핀이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았다.

다른 황비들도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의 관점에서 나는 자신의 치부 같은 존재.

성왕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암운 그 자체일 테니.

'그대로시군. 성왕, 그 같잖은 이름에 목을 매어 혼자 고귀한 척하는 건.'

오히려 과거의 기억과 같아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대륙의 평화를 수호한 평화의 수호자로서 그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황후의 자리를 10년이 넘도록 비워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본래라면 황비 중 한 명을 황후로 승격하여 국정을 주도하겠지만 '자신의 청렴결백함'과 '황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그 애달픈 심정을 떨쳐내지 못해 그저 빈자리로 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소리. 짜고 치는 쇼다.

이미지는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성왕 데우스만큼 자신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구축해낸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크로프트 경. 그대가 이런 자리에 나오다니, 의외로군."

오직 제국 제일의 검사 크로프트만을 신경 쓸 따름이었다.

크로프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폐하의 빛나는 존안을 뵈니 답답한 속이 뚫리는 것 같습니다."

"나이만 는 게 아니라 아부도 늘었구려."

"흰머리도 많이 늘었습니다."

"소드마스터도 세월을 피해가긴 어려운 모양이로군."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찬 데우스가 시선을 돌렸다.

이어 황족들이 앉아있는 중앙 구령대에 올라 그가 말했다.

"긴 여정이었을 텐데, 고생 많았소."

동시에 네 마탑의 마탑주들은 넙죽 허리를 접었다.

"아닙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대륙 반대편에 있더라도 달려왔을 겁니다!"

"폐하를 뵙는데 거리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눈을 빛내며 떠는 아부들.

네 명의 마탑주. 모두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이다.

8서클의 마법사는 대륙 전체로 따져도 이십 명 안팎.

그중 네 명이 이곳에 모였다.

콧대가 높기로 유명한 자들이지만 상대는 제국의 황제다. 마탑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는 '큰손'이시니 더 말해 무엇할까.

'어차피 대흉년이 지나고 마탑에 대한 후원이 끊기면 미련 없이 돌아설 자들이다.'

민초의 고생보다 자신의 연구가 더 중요한 게 마법사다.

연구실적으로 먹고사는 게 그들이니 이해는 한다지만, 고작 한 해 지원을 끊었다고 황궁에 있는 마탑의 마법사들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듣자 하니, 황자들의 성취를 짐에게 확인시켜주고 싶다고 하더군."

황제 데우스의 눈이 다른 황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데우스의 눈에 일말의 감정이 깃들었다.

그때 조세핀 황비가 끼어들었다.

"폐하. 오늘은 주최자인 카르몬 전하의 성취부터 확인하심이 어떠신지요?"

확인의 순서 또한 중요했다.

처음을 누가 장식하느냐, 그것만으로도 가산점이 추가 될 수 있었다.

속이 뻔히 보이는 그녀의 언행을 다른 황비가 지켜볼 리 없었다.

"폐하. 황실의 존엄을 위해선 서열대로 하셔야 합니다."

2황비가 즉시 받아쳤다.

1황자에게 선수를 줄 수는 있어도 3황자에게 선수를 빼앗길 순 없다는 듯.

오래된 기 싸움이다.

황후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둔 황제의 탓이기도 하였다.

"······ 1황자부터 확인토록 하지."

그리고 서열대로라면, 1황자가 아닌 나부터겠으나 황제의 시야에는 이미 내가 없었다.

화아악!

전신에 화염을 강림시킨 1황자가 중앙에 비치된 시연대 위로 올랐다.

1황자. 화염의 마탑이 후원하는 불세출의 천재.

그의 피닉스 기사단 역시 제국 최고의 실력자들만 모인 최강의 집단이었다.

그를 따라 열 명의 피닉스 기사단원이 뒤따라 올라왔다.

대련의 형식으로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채앵!

실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검과 검 사이의 간극이 없다.

현란하기 짝이 없는 검술로 순식간에 기사단원들을 베어 넘겼다.

최소연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다운 모습.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끼아아아악!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불꽃이, 피닉스의 형상을 만들며 날개를 활짝 폈다.

"아···! '피닉스의 고리'를 완성하셨군요!"

화염의 마탑주가 감탄을 내뱉었다.

피닉스의 고리. 화염의 마탑이 개발해낸 최상급의 서클 단련법.

피닉스를 강림시켜 각성한 1황자의 전신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바로 전에보다 두 배는 빨라진 속도로 순식간에 열 명의 기사단원을 모두 쓰러트렸다.

짝짝짝!

1황비가 손뼉을 쳤다.

짝짝짝짝!

"대단하십니다, 전하!"

"소름이 돋았습니다!"

남은 기사단원들과 화염마탑의 마법사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허나 허식으로 치는 박수가 아니다.

저 실력은 진짜였다.

'노력하는 천재.'

1황자의 무서운 점이다.

불세출의 천재가 노력까지 한다.

하루도 쉬지 않고, 단련만을 고집하니 저 나이에 저런 실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2황자의 차례였다.

2황자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둘렀다.

"바람이여, 연쇄하며 강하게 불지어다."

쿠릉!

천둥이 치며 소용돌이가 2황자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허나 6서클의 바람 마법 치고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다.

"세, 세 개······!"

"태풍 세 개를 동시에 조종한다고?"

문제는 그 숫자였다.

3개의 태풍을 동시에 만들어 조종하는 것.

이는 일반적인 6서클 마법사도 힘든 것이다.

마나가 비정상적으로 많고, 여기에 마나 감응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높아야 겨우 가능한 신기.

그것을 저런 귀찮다는 표정으로 해내고 있다니.

"······ 조만간 7서클에 드시겠군요."

바람 마탑의 마탑주가 감탄했다.

7서클. 대륙에도 50명이 채 안 된다는 그 숫자를 고작 스물도 되지 않은 나이에 담으려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재능인가······.

황실의 미래가 참으로 밝았다.

빠드득!

유일하게 이를 악무는 자라면 조세핀 황비일 것이다.

1황자도 2황자도 상상 이상의 재능을 보여줬다.

설마 벌써 저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괜찮다. 카르몬 전하는 빛의 인도자. 1황자와 2황자는 절대로 닿을 수 없는 그 경이에 있으니.'

빛이란 무엇인가.

희망이다. 경이(驚異) 그 자체였다.

카르몬은 빛의 인도자가 될 자격을 쥐고 태어났다.

그녀의 눈빛을 받은 카르몬이 시연대 위로 올라갔다.

쿵!

"아···!"

갑옷이 거치적거려 볼썽사납게 넘어졌다.

하지만 이내 일어난 카르몬이 흙이 묻은 다리와 얼굴을 털어내곤 씩씩하게 조세핀 황비를 향해 웃어 보였다.

"빛이여."

카르몬의 주변으로 빛의 마나가 모여든다.

하나, 둘, 빛은 점점 더 카르몬의 주변을 밝혔다.

이제 2서클.

빛을 부르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 정도밖에 못 하지만.

"빛이여, 더욱 찬란하게 춤출지어다."

카르몬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더욱 찬란하게. 3서클에 도달해서야 가능한 '강화'의 주문을 외운 것이다.

"이, 이중중첩······!"

허나 마법사들은 그게 문제가 아님을 단번에 알아봤다.

카르몬이 두 번 '빛이여'란 말을 언급하지 않았나.

마나는 언어에 깃든다. 언어의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허나 이런 마법적 언어에도 금기가 있었다.

이중중첩.

동시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그 결과는 '폭주'로 이어진다.

기초이며 반드시 지켜야할 금기사항.

긴장한 나머지 카르몬이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그저 단순한 폭주라면 별 일 없겠으나 욕심까지 부렸으니 그 여파가 적을 리 만무.

후우우우우!

빛의 무리가 순식간에 팽창한다.

"아······."

조세핀 황비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카르몬의 모든 구멍이란 구멍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 막으세요! 마탑은 뭘 하는 겁니까!"

"빛이여, 진정할지어다!"

"빛이여, 원래대로 돌아올지어다!"

빛의 마탑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미 명령이 입력된 마나를 더 강한 마나로 찍어누르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어, 어머니."

"카르몬 전하!"

"아, 아파요··· 아아."

고작 여덟 살.

어린 몸에 강대한 마나들이 찍어누르니 그 고통은 배가 됐다.

이대로면 터져버릴 것이다.

그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빛의 마탑도 이렇다 할 해결책을 못 내고 있었다.

다른 마탑 역시 마찬가지다.

속성이 다른 마나가 간섭하면 오히려 폭주가 더 강해진다.

"어떻게 좀 해보란 말입니다!"

"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빛의 마탑주까지 나섰다.

하지만 폭주는 멈추지 않았다.

[비인가 나노머신의 폭주를 확인.]

그 순간 뇌를 울려오는 한 마디.

['비인가 나노머신'은 '유도만능줄기세포'와 결합해 한 가지 명령어를 따르도록 프로세스 되어있습니다.]

[저와 같은 A.I적 지능은 없지만 그 대신 외부를 돌며 명령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명령 중첩으로 폭주한 나노머신의 경우, 현재 지배에 성공한 나노머신들을 활용해 '강제흡착'할 수 있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저 폭주를 잠재울 수 있다는 의미다.

"아파, 아아! 아프단 말이야!"

카르몬이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을 벅벅 긁었다.

"전하···!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멈춰주세요!"

조세핀 황비가 눈물을 흘리며 구걸하기 시작했다.

비록 조세핀 황비는 꼴도 보기 싫지만.

카르몬은 죄가 없다.

'승인한다.'

[마스터의 승인을 확인했습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통해 투명한 마나, 나노머신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배출된 나노머신들은 빠르게 공기를 타고 날아올라 카르몬에게 닿았다.

폭주한 카르몬의 마나를 '흡착'시킨 뒤, 유유히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강제흡착'한 비인가 나노머신에 대한 지배를 시작합니다.]

[지배가 완료되었습니다.]

폭주해서인지, 오히려 지배하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곧 심장을 채운 나노머신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게 느껴졌다.

'······ 1서클.'

동시에 깨달았다.

마법적 재능이 없다고 천시받던 내가, 1서클을 이루었음을.

"어어···?"

"포, 폭주가?"

"폭주가 멈췄습니다!"

빛의 마탑 마법사들이 외쳤다.

갑작스럽게 폭주가 멈추더니, 빛의 무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의 마탑 마법사님들.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할지.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말만하세요.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습니다."

조세핀 황비가 고마움을 전했다.

"그, 그게······ 다행입니다, 황비님."

하지만 빛의 마탑 마탑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일 따름이다.

그들로 인해 폭주가 멈춘 게 아님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가?

빛의 마탑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마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비정상적이군."

"이중중첩에 마나폭주 현상까지 일어났어. 그걸 어떻게 막아?"

"허무의 마법사라면 모를까······."

"그건 마법사들이 지어낸 허상의 속성이잖아."

마법사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마탑의 얼굴들. 방금 전 폭주의 진화에 이상이 있음을 모두 알고 있었다.

"폭주를 멈춘 건 빛의 마탑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를 지적하듯, 누군가가 나섰다.

그가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절대로 나설 리 없는 이가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조세핀 황비님께서 진정으로 고마워해야할 사람 또한 그들이 아니지요."

제국 제일의 검사, 검왕 크로프트!

절대적인 공신력을 지닌 그의 발언에 모두가 침묵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동시에, 크로프트의 두 눈이 내게로 향했다.

< 폭주 > 끝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나란 보이지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 마나가 아니라면 느낄 수조차 없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고위의 마법사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건만.

단 한 명, 크로프트는 달랐다.

그는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두둔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설령 알아봤다고 할지라도 그가 나를 챙길 이유가 하등 없을진대.

―황태자란 끊임없이 시험받는 자리다.

떠오른다.

황태자 책봉식이 있던 그 날, 내 성인식이 치러진 5년 전 그가 한 말이.

이후 그는 나의 '황태자가 지녀야 할 자질'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당연하게도 단 하나의 통과조차 이루지 못했다.

수십, 수백 번.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다.

'시험. 이건, 마지막 시험이로군.'

크로프트는 알아차린 것이다.

제국 제일이라고 불리는 그는 검술 실력만 뛰어난 게 아니다.

그의 '직감' 또한 무섭도록 정확하다.

황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나를 지목했다는 건 자신에게 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짓.

크로프트는 확신한 채 내게 문제를 던졌다.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거미줄과 같은 문제를.

"크로프트 경.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제 아들의 폭주를 막은 게 빛의 마탑이 아니라면 누구란 겁니까?"

단상을 뛰어 내려와 카르몬을 품에 안은 조세핀 황비가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는 것일까.

"― 라인하르트 전하. 전하께선 카르몬 황자님의 폭주를 막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확정을, 지었다.

물론 쉽게 빠져나갈 순 있었다.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크로프트의 착각으로, 미친 황태자가 그럴 리 없지 않으냐는 우스갯소리로.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되는 것이다.

"황태자가 한 거라고?"

"마탑주도 막지 못한 폭주를 어떻게 막는단 말이냐."

"설령 막을 수 있더라도 하지 않겠지."

황비를 포함한 황족들이 수군거렸다.

무능력한, 자격 없는 황태자.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들.

만약 가능하더라 하더라도, 미친놈이 3황자를 구하는 데 그 힘을 썼을까.

허나.

"그게."

나는 되물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인가?"

무엇이 이상하냐고.

"형이 동생을 구하는 게, 정녕 이상한 일이냐고 물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왜 그런 걸 묻느냐고.

순간 크로프트의 두 눈에 이채가 지나갔다.

예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답일 테지.

황제가 있는 자리. 이런 식으로 몰아붙인다면 광증이 도져야 정상이었을 테니까.

'피할 수 없다면 기회로 삼아라.'

나는 과거의 멍청하며 미쳐있는 내가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황제였다.

대륙의 절반을 정복한 정복왕, 피의 황제라고 불리었던.

나는 이 자리에서 결정해야만 했다.

피하던가, 피하지 않던가.

피하면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

내실을 다지고 귀족들에게 한 방 먹일 시간을 벌게 된다.

여전히 미친 황태자로 남겠지만 여유는 생기리라.

하지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면 귀족들의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내가 그들이 생각한 말이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은 가차 없이 나를 폐위시킬 것이다.

그리곤 더욱 말을 잘 듣는 말을 고르겠지.

현 황제에겐 그들을 막을 힘도 명분도 없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크로프트를 얻을 수 있다.

문제를 던졌다는 건 완전하게 나를 놓지 않았다는 방증.

당장 내 편으로 돌릴 수는 없겠으나 '여지'는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없는 나만의 무기가 있었다.

'승산이 있다.'

하여,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만한 무대가 준비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이 무대를 기회로 삼을 준비가 나는 되어있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전하."

크로프트가 얕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처음으로 그의 시험에 통과한 것 같았다.

그래 봤자 -999점에서 +10점 정도 득점한 셈이겠지만.

그를 얻으면 황룡기사단을,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귀족과 황족, 더 나아가 그 미친 괴물 말피엘의 등장까지 생각한다면 충분히 감수할만한 도박이었다.

"······ 빛의 마탑 마법사들은 대답하세요. 저 말도 안 되는 말이 사실입니까?"

조세핀 황비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빛의 마탑 마법사와 마탑주는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마탑주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답했다.

"가, 갑자기 폭주가 멈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중중첩으로 인한 마나폭주는 연구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황태자께서 폭주를 멈추셨다고 단정 지을 순······."

마나란 무엇인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왜 존재하는지 마법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고작 이중중첩으로 폭주하는 상황이 왜 만들어지는지조차도.

진리의 탐구니 뭐니 떠들며 연구비만 축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명령어의 중첩에 의한 폭주라.'

그러나 나는 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들이 '마나'라 부르는 게 '나노머신'임을 알고 있었다.

나노머신은 본래 이세계의 인간이 만든 것.

그런데 비인가 나노머신이 오류를 범한 채 복제되어 세계에 풀어졌다. 심지어 그것을 우리는 '마나'라 부르며 명령어를 입히고 사용하고 있었다.

대륙을 절반이나 정복한 시점에서도 이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라는 뜻이다.

이것은 무기이며, 동시에 독이다.

쉽게 뱉었다간 이단으로 몰려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허나 은밀하게 다룰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것이 되리라.

'폭주한 나노머신은 훨씬 더 쉽게, 더 많이 지배된다.'

제르민의 마법을 보고 따라 했을 때보다 폭주한 나노머신을 흡착하는 게 효율이 100배는 좋은 것 같았다.

이것을 나의 무기로 삼는다.

"나는 폭주를 완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폭주를 완화한다······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빛의 마탑 마탑주가 차분하게 물어왔다.

다른 마법사들도 무척이나 흥미가 동한 눈빛이다.

지적탐구심. 마법사라면 모두가 지닌, 미지에 대한 동경과도 같았다.

다른 황자들의 시연 때보다도 집중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더욱 자연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잘은 모른다. 그저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니."

10중 1만 던져도 충분하다.

모든 사실을 굳이 내 입으로 내뱉을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상상력이다.

상상력만큼이나 나를 거대하게 만들어줄 요소는 없으므로.

"그럼 카르몬 황자님을 치료한 게 황태자 전하라는 거야, 아닌 거야?"

"하지만 크로프트 경께서 말씀하셨잖아."

"8서클 마법사들도 못 잡아낸 걸 검사가 알아차리는 것도 이상하잖아."

"아 씨, 진짜 뭐지?"

마법사들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했다.

궁금증이 생기면 눈치를 안 보기로 유명한 게 그들이었다.

황궁이라고 그 기질이 달라지진 않는 모양.

"누가 이중중첩으로 폭주해보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명령의 이중중첩은 금기다.

크든, 작든, 폭주하면 자칫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모험을 할 마법사가 있을 리 만무.

하지만 눈앞에서 본 것이 있으니 그들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폭주완화는 성녀도 가능하지 않나?"

"그럼 신성력 계통인가?"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그리고 신성력 치료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게 요즘 학계의 정설이야."

"남부지방에서 전해 내려온다는 토테미즘은 어때? 주술사가 토템으로 폭주를 치료했다는 기록이······."

"9서클? 마나의 지배자는 멀리서도 폭주를 치료할 수 있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들.

그만큼 답이 없다는 뜻이다.

그때, 한 마탑주가 나섰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것 또한······ 완화하실 수 있으십니까?"

얼음의 마탑 마탑주.

그가 다가와 왼손을 걷었다.

얼음처럼 얼어있는 손.

[폭주한 비인가 나노머신을 확인했습니다.]

[현재 다른 나노머신들에 의해 얼려있는 상태입니다.]

[오랜 기간 폭주한 나노머신입니다. 완화와 흡착을 위해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근접하여 흡착할 경우 효율이 200% 상승합니다.]

[현재 있는 나노머신의 양으로는 최대 0.9%의 흡착만이 가능합니다, 마스터.]

"폭주한 마나를 몰아넣고 10년 넘게 봉인하고 있습니다."

8서클의 위대한 마탑주 조차도 봉인이 고작인 게 폭주였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내게 보이는 건 소란을 확실하게 잠재우겠다는 의미였다.

그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나는 고민했다.

완화와 흡착을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제로의 말.

당장 저 폭주한 나노머신을 모조리 흡수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러나 모두가 숨죽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0.9%.

적은 양이다.

카르몬과 달리 무려 8서클 마법사의 폭주한 마나였다.

절대적인 양과 질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그의 왼손 위에 손을 얹었다.

[강제흡착을 시도합니다.]

[폭주한 비인가 나노머신의 바이러스를 제거 중입니다.]

체내의 나노머신이 움직이며 폭주한 비인가 나노머신을 내 체내로 흡입했다.

이후 제로가 바이러스를 제거하고, 지배해나갔다.

[폭주한 나노머신의 0.9%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마스터, 이 이상의 실행은 불가능합니다.]

고작 0.9%임에도 심장의 고리가 절반이 찼다.

1.5서클에 해당하는 마나량.

고작 하루 만에 이만한 양을 채운 건 기적과도 같은 일.

엄청난 포만감이 느껴진다. 이 이상 억지로 하면 반대로 폭주하는 건 내 몸일 터였다.

"별 변화가 없는데?"

"역시 거짓이었나 보군."

"쯧, 그러면 그렇지."

황가의 사람들은 혀를 찼다.

손을 댔음에도 이렇다 할 변화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음탑의 주인은 달랐다.

"어······."

그가 몸을 잘게 떨었다.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전히 팔은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죽어있던 감각이, 손끝이.

미약하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폭주한 마나를 몰아넣고 10년이 넘도록 움직이지 못한 왼팔이다.

"감사드리옵니다, 전하."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 아닙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이 치료되는 것보다, 폭주완화의 실마리를 잡은 걸 더욱 감동스러워 하고 있었다.

'얼음탑 마탑주의 손녀가 폭주로 죽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 왼팔은 손녀의 폭주를 치료해보고자 자신의 몸으로 실험한 대가일 것이었다.

이윽고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정말 폭주를 완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

얼음탑의 마탑주조차 확언했다.

모두의 눈빛이, 특히 마법사들의 눈빛이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영원토록 풀리지 않던 폭주의 비밀.

그것을 풀어낼 사람이 눈앞에 있다!

열광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정반대의 불편한 기색을 비치는 자들도 있었다.

황가의 사람들.

특히 조세핀 황비가.

크로프트와 마탑주가 공인한 상태.

이를 부정했다간 카르몬 황자의 이미지까지 실추될 터.

"··· 고맙습니다, 라인하르트 전하."

말만 하고 넘어갈 속셈인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완화일뿐, 지속해서 내게 치료를 받아야 한다. 안 그러면 죽을 테니."

"아······."

조세핀 황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얼음탑의 마탑주도 증상만 완화되었을뿐 완치되진 않았다.

직접 보았으니 믿을 수밖에.

물론, 카르몬은 이미 완치된 상태였으나 그것을 굳이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카르몬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게 그녀였다.

나는 지금, 그녀의 심장을 쥔 것이다.

뿐만인가.

"······."

성왕 데우스.

철저하게 나를 외면하던 그가, 처음으로 내게 시선을 던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라앉을 것만 같은 눈빛.

허나 나는 이미 무저갱보다 더 깊은 심연을 겪고 왔기에.

저 눈이, 마주하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 활약 > 끝

처음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 마주 보는 것 또한 처음인 듯싶었다.

'짐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먹과 같이 검은 눈, 새까만 검은색의 머리카락.

황후를 그대로 빼닮은 특징들.

반면 자신과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게 라인하르트였다.

라인하르트는 다른 황자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모든 게 느렸다.

말을 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모든 게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황태자다.

―저 정도면 자폐아 아니야?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래.

황실의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황후가 죽고 난 다음부턴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황제 데우스 역시, 그런 라인하르트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

자신의 눈만 마주쳐도 우는 저 아이를 귀족들의 요구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시킨 다음부턴 더더욱.

'이처럼 또렷했던가?'

그가 기억하는 라인하르트의 눈은 항상 탁했다.

흐릿하고 기운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인하르트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피하지 않는다.

되려, 여유마저 지녔다.

저런 특유의 눈빛을 한 자들을 안다.

그것은 한 번,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랐던 인간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정점에 올랐던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그러한 눈빛을, 라인하르트가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데우스는 침묵했다.

이 모든 과정을 묵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또한 한순간의 변덕일 터.'

그러나 사람은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다.

선천적으로 지녀온 저러한 특성은 특히 그렇다.

잠깐 완화될 수는 있으나 완치되지는 않는 것이다.

폭주를 완화하는 능력도, 어쩌면 저 광증으로 인해 생긴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 아무런 능력도 없던 황태자보단 낫겠으나.

"소란스럽군."

황제는 이 상황을 한 마디로 축약했다.

시끄럽고 어수선하다고.

이어, 그가 황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의 행사는 짐에게도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제국의 장래가 밝구나. 특히 1황자, 라우넬이여."

1황자, 라우넬.

피닉스 기사단을 이끄는 무장으로서 최강의 재능을 지닌 자.

들뜬 표정으로 라우넬이 데우스에게 시선을 겨눴다.

그러자 데우스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오직 수련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고 들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폐하!!"

"특별히 황궁비고를 개방하겠노라. 원하는 것을 하나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쩌렁쩌렁. 궁 전체에 1황자 라우넬의 들뜬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황제의 칭찬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다.

게다가 황궁비고라면 대륙의 모든 보물 중에서도 최고의 것만을 모아둔 창고다.

수백 년간 쌓인 보물들.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은 철벽의 보안이 이루어진 곳!

거기서 원하는 것을 하나 마음대로 가져가도 된다니, 심장이 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2황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2황자, 카잔. 여전히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이로구나."

"아닙니다, 폐하. 제겐 무엇을 주실지 지금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직설적인 성격도 여전하구나. 좋다. 특별히 '바람의 보옥'을 선물하마. 7서클에 오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폐하!"

설마 그것을 내어줄 줄은 몰랐다는 듯 카잔의 두 눈이 커졌다.

바람의 보옥은 초대의 황제가 정령왕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는 보물 중의 보물.

정령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지금, 인류에게 남아있는 정령의 물건 중 최고의 보물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어서 의원에게 진찰 중인 카르몬을 보며 황제가 말했다.

"3황자, 카르몬. 욕심을 부렸지만, 노력이 가상하다. '빛의 탐구자'라 불리는 지팡이를 들고 정진한다면 이와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 같은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폐하."

조세핀 황비가 고개를 숙여 답했다.

카르몬은 기절해 답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두 황자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보상 같지만, '빛의 탐구자'는 아직 황실에서도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 못한 물건.

그 비밀을 밝혀낸다면 오히려 저 둘의 보상보다도 좋을 수도 있었다.

마지막.

시연조차 하지 못한 4황자는 울먹거리는 표정이었다.

"4황자의 성취는 짐이 따로 확인하겠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말라."

"네······."

"대신 '북해궁'에서 가져온 '얼음새의 알'을 주겠다. 잘 보듬어 키우도록."

"앗! 좋아요!"

어린 4황자의 얼굴이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활짝 펴졌다.

얼음새는 대륙에 얼마 없는 '신화종'의 짐승.

정령의 마지막 흔적이라 일컬어지는 괴수다.

보듬어 키울 수만 있다면 어느 보물에도 꿀리지 않는 것이다.

황자들의 선물식은 끝이 났다.

"그리고."

하지만, 아직 한 명이 남아있었다.

"황태자, 라인하르트여."

이곳은 황가의 사람만이 아니라 마탑의 주인들도 있는 자리.

아무리 말이 많은 황태자라도 황제가 직접 책봉하지 않았던가.

그냥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제국의 근간이 무너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카르몬의 폭주를 멈추고, 얼음탑의 마탑주를 치료하는 과정이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줄 것인가.

폭주를 멈추는 능력은 다른 황자들이 보여준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골방의 마법사들에게는 신기한 장면이겠지만 황제란 무릇 모든 신비를 다룸에도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저 정도의 신비야 질리도록 보았지만.

'상이라.'

황태자에게 상을 주는 것 자체는 처음이었다.

이 자체가 데우스에겐 가장 큰 신비였다.

그래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어야 하는가, 주지 말아야 하는가.

주어야 한다면 무엇을 주어야 하는가.

'그게 좋겠군.'

***

다음날.

약속한 3일째, 이사벨라가 떠나가는 황궁마차에 몸을 실었다.

"전하. 저희는 계속 친구인가요?"

친구란 어감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그만큼이나 가까웠던 인물도 없었거니와.

그나마 친구 같은 인물이라면 제르민이 전부였다.

"그대가 약속을 지켰으니 나 또한 약속을 지켜야겠지."

계속 친구 하자는 소리다.

과거 백성들에게 성녀라고 불리었던 그녀다.

검의 성녀. 소드마스터 중 여자는 그녀를 포함한 두 명뿐이었다.

제대로 검을 배웠다면 더 빠르게 최강자로 거듭났을 것이다.

게다가 베르사유 백작가도 대흉년과 내게 상처를 낸 일만 없었다면 충분히 중앙정계로 입문할 만큼 세력이 좋았다.

아마 그것도 조만간이리라.

불모지와 같은 황실. 이렇게라도 '내 편'을 만들어둬서 나쁠 건 없었다.

"편견에 지지 마세요, 전하. 전하께선 그 누구보다도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뭐지, 저 눈빛은.

지난 삼 일간 옆에서 나를 지켜봐 온 영향인지,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도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차갑기 그지없던 눈은 온정이 가득했다.

서로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우는 동지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대 역시."

"······ 감사합니다, 전하."

무언가를 결심한 눈빛이다.

맞서 싸우겠다는 투쟁의 결연함이 느껴졌다.

지난 3일간의 내 행동을 보아오며 중요한 것을 깨달은 듯.

잘 지내라는 말을 서로 주고받은 후, 이사벨라가 마차에 몸을 완전히 실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되겠지.'

과거 최악이던 일들이 없던 것이 되었으니 이사벨라와 베르사유 백작가는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

그들이 중앙정계에 입문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사교계에 오르게 되면 더 빨리 만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보는 눈이 늘고 있군.'

나를 보는 눈들.

여러 이유와 견해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마법사도 있었다.

아직 마법사들이 황실을 떠나지 않았다.

저들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황자들과 시간을 때우기 위함이 아니다.

마법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계산적인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황궁에 남아있겠는가.

'폭주를 완화할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싶겠지.'

하나, 둘, 은근슬쩍 내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게 보인다.

내가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이미 납치당했을 것이다.

아니, 이곳이 황궁만 아니었다면 황태자건 뭐건 일단 납치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조바심을 이용하며, 선을 대고 소문을 부풀릴 계획이었다.

이후 서로의 이해가 맞는 자들이 나를 만나길 바랄 것이다.

이는 황실과 귀족들 그 누구의 힘도 닿지 않는 '온전한 나의 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를 위해 나는 산책을 하는 척, 어딘가를 들르는 척, 일정한 루틴을 만들어 마법사들에게 접촉할 기회를 줄 계획이었다.

허나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카르몬을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조세핀 황비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

그리고.

'······ 귀찮은 걸 선물받았군.'

황제의 하사품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태자, 라인하르트여.

설마 나를 부르며 다른 황자들과 같이 행상을 진행할 줄이야.

의외이긴 하였으나 마탑들의 시선이 신경쓴 것이리라.

―특급 죄수동의 열쇠를 하사 하마.

문제는 내용이었다.

열쇠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권한이다.

하필이면 특급 죄수동의 관리 권한을 내게 맡긴 것이다.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곳.'

황실의 사람이라면 연관되어지는 것조차 꺼려하는 지옥불구덩이 같은 곳이었다.

그런 곳을 내게 준 황제의 저의가 무엇인지.

황제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의도가 숨어있다.

예컨대 1황자에게 황궁비고를 열어준 건 안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2황자에게 바람의 보옥을 준 것도 열정과 탐구심을 보려는 것이었다.

둘 다 그게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내게는 특급 죄수동의 열쇠를 줬다.

'미친놈에게 미친놈들의 관리를 맡긴다. 재미있군.'

서로 죽여서 가장 강한 미친놈만 살아남으라는 뜻인가?

아니다.

황제는 나를, 나의 가치를 시험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시궁창이겠으나.'

절로 미소가 배어나왔다.

쥐어준들 다른 황족의 반발이 나올 리 만무한 시궁창.

적당한 시험장소로 내던진 것 뿐이겠으나.

'내게는 가장 큰 선물이지.'

이 죄수동의 열쇠야말로, 다른 황자들의 선물보다 훨씬 값진 보물이었기에.

< 논공행상 > 끝

"떠나기 아쉬우세요, 아가씨?"

옆에 앉은 레인즈가 한쪽 입가를 말아 올리며 묻자, 이사벨라는 대차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야, 레인즈."

"어머나. 그런 게 뭘까요?"

레인즈의 놀림에 이사벨라는 입을 꾹 닫았다.

하지만 이사벨라의 눈은 황궁이 있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황궁에서 홀로 외로이 싸워가고 있을 한 남자.

벌써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을 그 남자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라면 진즉에 포기했을 거야.'

어떻게든 깔보고 낮잡아보려는 황실 사람들의 의도가 느껴졌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유유히 빛나고 있었다.

수많은 악의적인 소문과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만약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편견에 맞서 싸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이를 본능적으로 배척한다. 짓밟고 뭉개려고 든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알려주었다.

'여유.'

그것은 여유다.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자신에 대한 확고한 의지!

지난 3일간 이사벨라는 라인하르트에게 편견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웠다.

"결심하신 건가요, 아가씨?"

이사벨라의 표정을 읽은 레인즈가 염려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제가 언제나 옆에 있을게요."

"고마워. 힘이 난다."

"넘어야 할 산은 많지만,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요?"

"내가 기사가 되는 걸 모두 반대하시겠지. 어머니도."

"··· 머리 정도는 밀릴 수도 있겠네요."

여자가 기사가 된 기록이 없는 건 아니다.

검을 배워선 안 된다는 법도 없다.

하지만 둘 다 사회적으로 터부시되고 있었다.

그런 사회적 편견에 이사벨라는 맞서 싸울 것이었다.

포기하려 하였으나, 라인하르트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자신보다 더한 상황에 있는 그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고작 자신의 성별 때문에 포기한다면 그는 웃어버릴 터였다.

―제대로 된 검을 배우고 싶다면 마안의 용병 '사밀리아'를 찾아라. 남성 위주의 의례식 검술이 아닌 너에게 맞는 맞춤형 검술을 배울 수 있게 될 거다.

힌트까지 얻었으니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더 강해져서, 당당해진 모습으로 만나러 가자.

저 외로운 황태자에게,

한쪽 팔 정도는 지탱해줄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 따위는 모두 흘려버렸다.

편견도 고쳐잡았다.

그러자 그를 괴롭히는 황실에 대한 짜증이 치밀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께서 미친 게 아니야. 미친 건 황실일 뿐.'

'미친 새끼······!'

조세핀 황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쌍욕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상대가 상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황이 상황이었다.

"황비,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구려?"

"아, 아닙니다, 저언하. 저어언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언제든지 불편하면 말씀하시오. 내 미련 없이 떠나줄 테니."

"호··· 호호! 어찌 제가 감히 황태자 전하를 불편해하겠사옵니까. 언제든, 제집이라 생각하고 찾아오시지요."

목에 핏줄이 돋는다.

순간 칼이 어디 있나 위치를 확인했다.

마침 벽에 걸린 박제된 사슴이 눈에 들어왔다.

저 뿔 장식을 뽑으면 긴 레이피어가 나온다.

레이피어롤 뽑아서 당장이라도 찔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카르몬을 위해서라도.

아들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라인하르트였으니까.

"제집이라. 그런 말까지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 좋소이다. 마음 내키면 와서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하겠소."

제발 그러지 마라.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러는 거다.

얄미워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이른 아침. 사자궁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온 라인하르트다.

아무리 같은 황실 사람이라도 미리 허락을 구하고 들어와야 정상이건만.

예의가 없다며 면박을 줘도 이상하지 않지만 카르몬의 치료를 위해서라니 할 말이 없었다.

복도를 거닐며 라인하르트가 감탄했다.

"그나저나, 사자궁이 내 궁보다 훨씬 세련됐군. 예술적 감각이 심상치 않아. 황비가 직접 꾸민 것들이오?"

"그렇습니다, 전··· 아, 그건 만지시면."

쨍그랑!

500년 전 천재 공예가 아틀뤼엥이 직접 빚어 만든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그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

조세핀이 직접 주인을 찾아가 담판을 지어 가져온 예술품 중의 예술품이건만.

"이런. 내 궁에는 없는 것들이기에 무심코. 미안하오. 그런데 이런 건 보통 떨어지지 않게 붙여놓지 않소?"

"아아······."

조세핀이 비틀거렸다.

빈혈이 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이 그림도 훌륭하구려. 그런데 이건 무슨 버튼이지?"

"안 됩니······!"

툭.

비명을 내질렀지만 늦었다.

그림 밑에 달린 붉은색 버튼.

쫘아악!

그 버튼을 누르자 그림이 눌리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현시대를 풍미하는 최고의 화가, 일명 '파괴의 화가'라고 불리는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의 얼굴도, 이름도 알려진 적이 없지만 모두가 그를 최고라고 여기는 이유는 단지 화풍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언제든 없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인간의 욕심이나 호기심에 의해 작품이 분쇄되어 파괴되도록 항상 장치를 마련해놓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모두가 자연스럽게 즐기는 것.

본연 그대로 놔두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하여, 구하기도 힘들고 경매시장에 나타나면 경이로운 가격에 팔려나간다.

조세핀이 직접 암시장까지 내려가 힘들게, 정말 힘들게 구해온 작품이었다.

망연자실.

조세핀 황비는 분쇄된 그림을 보며 벽에 기대 반쯤 주저앉았다.

'누가 저자를 죽여다오······.'

예술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복도를 거닐 때마다 그들의 세계를 감상하며 상상하는 게 그녀의 낙이었건만.

그 낙을, 지금 황태자가 부숴버렸다.

"미안하군. 내 궁은 이런 게 없어서 무심코. 아무래도, 치료는 다음에 하는 게 낫겠구려."

"괘, 괘괜찮, 쿨럭, 습니다, 전하."

억지로 벽을 짚고 일어난 그녀가 사람을 불렀다.

"게 누구 없느냐."

"예, 마님."

"치우거라. ··· 조각은 따로 모아두고."

"예."

근처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목소리를 듣고 찾아들었다.

당장 이놈을 반으로 갈라 밖으로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겨우 참아낸 조세핀 황비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치워둘 것을 명했다.

겨우 카르몬의 방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몬을 본 그녀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깨어나질 않습니다. 황실의원도, 빛의 마탑주도 원인을 모르겠다고만 합니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카르몬은 잠들어있었다.

폭주를 일으킨 다음부터 통 깨어나질 않는다는 말이다.

['강제흡착'에 의해 잃어버린 비인가 나노머신이 육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남은 비인가 나노머신들이 주변의 나노머신을 끌어들여 부족해진 부분을 채우는 중입니다.]

[완전복구까지 앞으로 20시간.]

나는 카르몬의 손을 쥐어보았다.

제로의 말에 따르면, 20시간이면 깨어난다는 것이다.

몸속의 마나를 내가 강제로 뺏어가,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뜻이었다.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복구하는데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허나 그 외에 큰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큰 일이군."

"왜, 왜 그러십니까, 전하. 혹시 카르몬 전하에게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주 큰 문제가 있지. 오늘이 고비겠어."

"아아!"

또다시 비틀거린다.

[빈혈은 산소결핍과 철 결핍 때문에 일어납니다. 참고로 철분이 풍부한 음식은 소고기, 계란 노른자, 시금치, 브로콜리 등이 있습니다.]

때때로 제로는 묻지 않아도 주변을 해석하여 정보를 내놓았다.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지식이라면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하. 카르몬 전하를 살려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지. 그런데 괜찮겠소?"

"예?"

"내가 카르몬의 치료를 맡아도 정말 괜찮겠냐 물었소."

표정을 지운 채, 물었다.

이 한 마디에는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있었다.

나는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는 의미심장함.

조세핀 황비의 표정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요 며칠간, 약을 보내지 않았더구려."

"약이요?"

"황비가 보낸 약이 있지 않소. 내 광증을 낫게 하려고 직접 손을 써주었다고 들었는데?"

반대다.

조세핀 황비는 내 광증을 더욱 유발하고자 마약을 보냈다.

정신을 헤집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마약, '악마의 속삭임'을.

강력한 중독성으로 인해 한 번 손대면 폐인이 되어버린다는 그것을.

하지만 나는 굳이 사실을 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혼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밀리에 진행한 일. 내가 알고 있으리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겠지.

지금쯤 '대체 누가 황태자에게 말을 한 건가?'라는 사고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정말 황태자가 알고 있는 건가?'하는 의심이 끊이질 않을 터.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 봐도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묻겠소. 내가, 카르몬의 치료를 맡아도 되겠소?"

내 말의 저의를 깨달은 그녀의 눈가에 파도가 쳤다.

인정하고, 꿇어라.

그것이 카르몬을 살릴 유일한 길이니.

"······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무릎을 꿇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그것이 나를 향한 원망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아들을 살리기 위한 모정이 깊다는 것이다.

족쇄. 그리고 목줄까지 확실하게 매었다.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제발 제 아들만은 살려주시옵소서!

―부탁드립니다, 형님! 저를 죽이시고 어머니만은 살려주세요!

나는 과거, 둘의 목을 베었다.

끈질기게도 나를 괴롭혔던 조세핀은 카르몬이 보는 눈앞에서 목을 베어, 성 앞에 걸어놓았다.

몸뚱어리는 개에게 먹였다.

머리가 맑아졌기 때문인가.

광증과 광기로 휩싸였던 그때의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다.

입안이 썼지만,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것이다.

"맨입으로는 곤란하지."

물론 그냥 좋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죽이지 않겠다는 거지, 얌전히 놔준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므로.

"제가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흠. 글쎄. 그대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나 혼자서도 얻을 수 있는 것들이오."

사실이다.

그녀가 구할 수 있는 건 나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딱 하나 내가 구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저게 괜찮겠군."

"저, 저건, 폐하의 하사품······."

빛의 탐구자.

황제가 3황자 카르몬에게 직접 하사한 하사품.

그게 침대 옆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에서도 아직까지 저 지팡이에 얽힌 비밀을 풀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 지팡이 안에 든 비밀이 뭔지.

"당연히 폐하의 하사품을 내가 가져갈 순 없지. 잠깐 빌리겠다는 것이오."

"······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치료를 시작하겠소."

치료를 하는 척 손을 잡곤 빛의 탐구자를 바라봤다.

'다시 돌려주진 못하겠군.'

부숴야 했으니까.

진짜 내용물은 저 지팡이 안에 들어있다.

위대한 빛의 마법사와 그를 따르던 정령의 흔적이.

< 빛의 탐구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