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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습니까?"

제르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잠은 제대로 잤다.

문제는 증강현실 속에서 몇 번이나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정신보호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더라도, 열 번에 가깝게 죽음을 맞이하자 누적된 고통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너무 심취해버렸군.'

처음에는 레벨설정만 해놓은 아바타로 전투를 벌였지만, 나중에 이르러선 아예 여러 레벨의 아바타를 설정해놓고 전쟁터의 어지러운 상황까지 연출시켰다.

'대략 정예기사 정도.'

현재 내 수준을 보면 그렇다.

정예기사와 1:1을 겨룰 수 있는 수준. 다만, 정면대결을 고집하지 않으면 그 이상의 상대도 가능할 것 같았다.

"괜찮다. 좀 뒤척였을 뿐이니."

얼굴을 털며 바깥으로 나가자, 마을의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모두 프렐류드 숲의 주민들이다.

그들은 파간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앉아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북방의 민족들은 모두 파간을 숭상하며, 그를 신처럼 여긴다.

"숲을 지키던 파간과 죽은 사람들을 기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제르민이 말했다.

그간 브리저튼 후작으로 인해 치르지 못한 장례식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신성한 의식이 끝나자, 주민들이 일어나 이번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우호적인 눈빛.

파간과 함께 동행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브리저튼 후작을 죽이고 병사들을 가둬놔서?

의식 중이던 두 아이가 흰색의 꽃을 든 채 내게로 다가왔다.

테베우스에게서 구해냈던 아모라, 아피르였다.

두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꽃을 건넸다.

"내게 주는 것이냐?"

내가 묻자 아모라와 아피르 모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흰색의 꽃.

죽은 이들의 영혼이 이 꽃에 깃든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바라며 주는 꽃입니다. 보통 가족이나 동반자에게 주는 게 맞지만, 저 아이들은 모두 잃었으니까요."

그래서 내게 주었다.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의 표시이리라.

"물론, 영원히 함께하자는 뜻도 있기는 합니다만······."

작게 중얼거린 제르민이 미소지어보였다.

꽃을 받은 라인하르트의 모습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찌해야할지 반응조차 못 하고 있지 않은가.

타인에게서 받는 선의가 아직은 어색한 것이다.

허나 익숙해져야할 일이었다.

'계속해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십시오.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라인하르트는 조금씩 주변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그에 맞게 변해갔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

제르민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 폐쇄적이었던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영역에 단 한 명도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그가,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잠시 후 두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라인하르트를 껴안았다.

"허, 무엄한 녀석들이로군."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마음대로 껴안다니.

"두 아이의 후견인이 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궁으로 데려가자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나면, 이 숲에 학교를 세우는 것도 좋겠지요. 프렐류드의 숲은 개방적인 곳이니까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숲이 남아있을 것 같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제르민은 솔직하게 답했다.

모르겠다.

어쩌면, 이 숲 자체가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에 성공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북벌을 실패하게 만들어야 한다.'

허나 그의 취지에는 공감하는 편이었다.

북방은 제국의 염원과도 같은 장소였다.

북방에 존재하는 광산들은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야만인이라고 하여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또한 카를로스 대공은 착각하고 있었다.

북방의 민족들은, 절대로 지배되지 않는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움직일 것이다.

그로 인한 손실은 제국 1년 재정의 20%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대흉년을 겪으면 그 비율은 더욱 늘어난다.

결국 북방은 독립하고, 하나로 뭉치며, 제국을 압박해오기 시작하겠지.

다시 한 번 그 지옥을 겪을 수는 없었다.

"제르민. 파르셸 행정관으로부터 받은 '악마의 죽음'의 양이 얼마나 되지?"

"오크통 스무개 분량이었습니다."

"200만 명이 동시에 흡입 할 수 있는 양이로군."

달리 말하면 20만의 병사들이 열 번 흡입할 수 있는 양이다.

'슬슬 재고가 떨어지고 있었겠지.'

악마의 죽음은 중독성이 다른 마약보다 현저히 높다.

재고가 떨어지면, 병사들이 무슨 짓을 일으킬지 모른다.

대량으로 공급을 하려는 걸 보니 성지의 주변에 머물며 지낸 시간 동안 재고를 거의 탕진한 모양이었다.

더불어, 본격적인 성지 공략을 위한 공급이기도 할 것이었다.

"전부 태워라."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다른 항복한 도시에도 이와 비슷한 마약 유통처가 존재할 터.

'위치는 알고 있다. 찾아서, 태우기만 하면 될뿐.'

카를로스 대공이 빠른 북벌을 위해 투여한 악마의 죽음.

이것이 그의 발목을 잡으리라곤 지금쯤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약물 유통에 대한 꼬리자르기가 시작됐을 때, 오크통이 저장된 위치들에 대하여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니 전부 찾아내 태운다면 저들은 안쪽에서부터 자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면 성지로 향하는 길이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리라.

7대 신비.

북방의 수호신.

'용.'

그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

***

카를로스 대공의 인상이 구겨졌다.

"테베우스가 죽었다고?"

"예. 대공각하. 패트릭, 크로우와 함께 묻혀있었습니다."

한참이나 소식이 없어 보낸 다른 추적대였다.

그들이 돌아와 전한 소식은 쉽사리 믿기지 않는 내용이었다.

테베우스가 죽었다.

패트릭과 크로우를 함께 보냈음에도, 죽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자 보낸 이들이었다. 크로프트를 상대하고, 설령 여의치 않다면 충분히 빠질 수 있는 구성으로 보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했다.

"크로프트만 있던 게 아니었군."

"예. 최소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 그리고 파간이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마법사의 흔적과 파간의 흔적은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저런 구성이라면, 전멸한 것이 이해는 되었다.

"······ 멍청한 녀석."

쯧, 카를로스 대공이 혀를 찼다.

테베우스는 자식들 중에서도 머리가 가장 나쁜 녀석이었다.

그래서 후방으로 빼둔 건데 결국 사단이 나버렸다.

다시 인원을 편성해야 할까?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의도를 갖고 북방에 온 건 확실해보였다.

황실에 서신을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다.

빌어먹을 데우스가 황태자 궁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렸다.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게다.

아니면 정말로 황제 데우스도 이번 일에 대해선 아예 모르고 있거나.

'의도가 무엇이냐, 라인하르트.'

읽히지가 않는다.

원래라면 세상에서 가장 읽기 쉬운 놈이었을 텐데.

"대공각하. 큰일입니다."

순간 천막을 열어젖히며 기사 한 명이 급하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악마의 죽음'이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다."

"유통이 늦는다는 말이냐?"

"아닙니다. 아예 입고 자체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의문은 곧이어 풀렸다.

"대공각하! '어스름의 굴'이 습격당했습니다!"

"'얼음 사원'도 습격당했습니다."

속속들이 들어오는 소식들.

습격 자체는 큰 일이 아니다.

그곳에 주둔하는 병사라고 해봐야 몇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모두 '악마의 죽음'을 저장해둔 중간 도시라는 점이었다.

습격당하고, 악마의 죽음이 전부 타버렸다는 그 소식에, 카를로스 대공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체 어떤 놈이······."

쿠릉!

그의 주변으로 거센 돌풍이 불어왔다.

천막이 날아가고, 주변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허공을 날았다.

콰릉! 콰르르릉!

번개가 몰아치며, 카를로스 대공의 전신에 전격이 휘몰아쳤다.

절대영역 '성역'이 발동된 것이다.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절대적인 권능!

휘하의 소드마스터들조차 두려움에 떨며 거리를 벌렸다.

'박살을 내주마.'

설령 그게 황제나 신이라고 할지라도.

카를로스 대공의 두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 용(1) > 끝

"아, 아파! 아프다고!"

"살려줘! 제발 살려줘!"

"미안해! 죽여서 미안해!"

시간이 지날수록 병사들에게서 금단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픔을 호소하거나 환각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병사들까지 나오는 지경.

금단현상이 심한 병사들만 따로 격리조치를 취하고는 있지만 이대로 계속가다간 사기가 바닥을 칠 터.

사기가 떨어지면, 성지의 공략은커녕 역으로 사냥당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간유통 도시가 공격을 당했다.

선택의 기로였다.

당장 성지를 공략하거나, 후퇴하거나.

'약의 보관 장소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가.'

보관 장소를 아는 이는 극소수다.

그들 중 하나가 배신을 했다면 가능한 일이다.

배신자를 색출하고 새롭게 유통망을 구축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공격하면 성지는 차지할 순 있겠지만 북벌은 실패할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배신을 했다면 가능한 일이다.

결국 카를로스를 포함한 귀족들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결정했다.

배신자를 색출하고 새롭게 유통망을 구축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성지를 애워싸고 있던 거대한 인의 장벽이 48일만에 걷힌 날이었다.

공격하면 성지는 차지할 순 있겠지만 북벌은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허허벌판이 된 그 공백의 사이를, 한 마차가 여유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제르민은 마차를 몰면서도 지금 보이는 장면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흔적도 없이 증발한 것만 같은 20만의 병사들.

당장 성지를 공략하거나, 후퇴하거나.

결국 카를로스를 포함한 귀족들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결정했다.

'약의 보관 장소를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가.'

보관 장소를 아는 이는 극소수다.

성지를 애워싸고 있던 거대한 인의 장벽이 48일만에 걷힌 날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배신을 했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허허벌판이 된 그 공백의 사이를, 한 마차가 여유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배신자를 색출하고 새롭게 유통망을 구축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제르민은 마차를 몰면서도 지금 보이는 장면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절대로 물러날줄 모르던 카를로스 대공을, 직접 마주하지도 않고 후퇴시켰다.

황제 데우스도 하지 못한 일을 라인하르트가 해낸 것이다.

"약의 보관장소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마차 안에서 크로프트가 물었다.

그간 묻지 않았던 이유는 약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다.

"전쟁도 결국 인간이 치르는 것이다. 카를로스 대공이 항복했다고 침략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지."

전쟁을 벌이면 완전히 짓밟아놓는 게 카를로스 대공이다.

가문끼리 전쟁을 벌여도 절대로 회생이 불가능하게끔 아예 멸문을 시켜놓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그가, 뒷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북방의 도시들을 그저 '항복'했다고 하여 남겨둔다는 건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 약을 숨긴 채 위장할 도시가 필요했던 거로군요."

"그래. 항복한 도시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

파르셸 행정관이나 숲의 주민들에게만 물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 항복한 도시 중, 성지와 대륙을 잇는 중간유통망만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허나 말이 쉽지 결코 쉽지 않은 방식이었다.

먼저 전체적인 맥락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했다.

약과 연관지어 보관장소를 찾아낸 뒤, 다른 도시와의 연결점도 단번에 파악하는 기술은 숙련자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도 결국 인간이 치르는 것이다.'

크로프트는 그 말을 곱씹었다.

가장 기본이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이들이 전쟁에서 망각하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전쟁은 인간이 치른다.

전쟁을 지휘하는 지휘자를 분석하면 다음 행동이 보이기 마련이다.

적이 치른 전쟁을 돌이키며 이유를 따지고 보이지 않는 약점부를 공략한다.

전쟁에 이골이 난 백전노장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든 수다.

아니, 생각은 하더라도 실행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보통은 물자보급만 차단하려 할 테니까.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결단력마저 갖추고 있었다.

모든 도시의 약을 태우는데에는 7일이면 충분했다.

약만 태우면 되는 일이니, 쓸데없이 전투를 벌일 필요도 없다.

인원을 분배해 순식간에 처리한 것이다.

평생을 궁에만 있었던 황태자가 이런 전술은 어디서 익힐 것일까.

'무영창의 마법도, 전장을 보는 눈과 전술도, 천재적인 재능도······.'

파고 또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같다.

그중 가장 놀라운 건 숲에 도착한 이후로 일취월장한 라인하르트의 검술실력이다.

심지어 자신을 상대로 일격을 거의 막을뻔하기까지 하였다.

'대련에서 내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고 검을 뽑았지.'

오늘 아침의 일이다.

매일 이뤄지는 검술지도.

대련으로 끝내지만, 라인하르트는 자신을 상대로 여태껏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조차 못했다.

그런데 오늘, 라인하르트가 움직였다.

자신의 기세를 읽고 검을 펼쳐들며 일격을 막을 뻔했다.

'1황자 라우넬도 거기까지 도달하는데 1년이 걸렸건만.'

자신의 기세에 먹히지 않고, 반격의 의도를 갖는 데에만 1년이 걸렸다.

반면 라인하르트는 한 달이다.

아니, 정확히는 한 달도 아니다.

계속해서 이동하며 제대로 된 검술지도는 해주지도 못했으므로.

만약 제대로 검술을 지도한다면······.

'모든 황자들을 압도하는 재능이다.'

황자들뿐만이 아니라, 자신조차도 넘어서는 재능이다.

욕심이 생겼다.

기본기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제자'로 만들고픈 욕심이.

수많은 기사와 황자들을 가르쳤지만 단 한 명도 그는 제자로 들이지 않았다.

그의 유파는 오직 한 명만이 이을 수 있었다. 일인전승의 천 년 전통을 지닌 고대유파의 계승자가 바로 크로프트였다.

성에 차지 않았고, 악랄한 방식 탓에 굳이 제자를 두지 않았지만, 라인하르트라면 계승자의 자격으로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도착했습니다."

순간 들려온 제르민의 음성이 모두를 현실로 데려왔다.

바깥을 보자 마차의 바로 앞에, 거대한 성지(聖地)가 있었다.

수많은 돌탑이 쌓이고 쌓여 벽을 이룬 곳.

제국의 성벽에 비하면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쉽사리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돌 무더기에서 과다한 양의 방사능이 검출되었습니다.]

[방어모드로 전환합니다.]

방사능을 품은 돌.

성지 안에 존재하는 돌로 지은 돌탑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자가 손을 대거나, 들어오려 한다면 그 즉시 목숨을 빼앗았다.

오직 정해진 길로 들어와야만 저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파간들.'

돌탑의 위에 서있는 파간들.

그들은 이미 방사능에 노출된 변형인간이다.

시선을 돌려, 창을 쥔 채 마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마차에 있던 파간이 내리자 그들의 시선이 단번에 바뀌었다.

"융?"

"융!"

"융께서 오셨다! 문을 열어라!"

에디스의 친구인 파간의 이름이 아무래도 융인 모양이었다.

같은 파간일지라도 융은 조금 더 특별한 존재인지.

융을 본 다른 파간들이 짧게 고개를 숙이곤 문을 열었다.

'이곳이 성지.'

나는 미소를 지었다.

북방의 성지에 직접 오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궁에 갇혀있었어야만 하니까.

몇 개의 문이 열리며 안으로 들어가자 더욱 많은 전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 파간이 너무 많습니다."

에디스의 말마따나 파간이 너무 많았다.

육체변형을 일으킨 전사들.

의도적으로 숫자를 늘린 것이다.

성지의 중심부에 다다라서야,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거대한 동굴.

[경고.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동굴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비인가 나노머신들에 의해 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에너지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중입니다.]

[나노머신들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순간 반경 30km가 피폭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용의 머리처럼 생긴 거대한 동굴 안으로, 전사들이 수시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열 명 중 아홉은 동굴의 입구에서 즉사했다.

단 한 명만이 더 안으로 들어가, 육체변형을 통해 힘을 얻었다.

죽은 시체들도 부풀거나 터지며 가스를 배출했다.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수준의 광경.

"융, 드디어 오셨군요. 위대한 전사시여."

치렁치렁하게 목걸이를 단 한 여자가 지팡이를 든 채 다가왔다.

그녀는 융을 보곤 환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융의 표정은 굳어버린 채였다.

"그런데 왜 제국의 악마들과 함께 오신 거죠? 아, 인질인가요?"

"지금, 뭘 하는, 거냐? 성녀."

그녀가 바로 성녀였다.

성녀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반격의 때입니다. 저 간악무도한 제국의 악마들이 도망치고 있어요. 우리는 놈들의 뒤를 잡아야 합니다."

"미쳤, 군."

도망친 게 아니다.

약의 공급을 위해 잠시 물러난 것이다.

지금 저 뒤를 잡으려고 했다간, 역으로 몰살당하겠지.

"위대한 전사시여. 우리에게 힘을 보태주시옵소서. 제국의 악마들을 몰살시켜야 합니다. 신께서, 제게 신탁을 내렸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다.

전쟁이 모두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신탁이라는 이름으로 전사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열에 아홉을 죽이고, 남은 한 명의 수명을 담보삼아 파간을 만들어서.

"신이라는 것이 다 자살하라는 신탁이라도 내린 모양이군."

"······ 감히 인질 주제에 말을 해?"

성녀의 표정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너희가 말하는 악마들은 힘을 잃어서 후퇴한 게 아니다. 지금 뒤를 치려 들었다간 진짜 악마를 보게 될 거다."

"저 어린 악마는 누구죠, 융?"

융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곤 잔뜩 힘을 주어 말했다.

"성자(聖子)."

성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 라고요? 융, 미치신 겁니까? 어떻게 제국의 악마가 성자일 수가 있다는 거죠?"

성자.

성녀가 선택받아 신의 의도를 전하는 자라면, 성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자리에 오른 이를 뜻하는 말이었다.

홀로 오롯이 거룩하기에 그 위치는 파간이나, 성녀보다도 높다.

성녀가 반발했으나 융은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보았기 때문이다.

마나의 역행을 격으며 폭주한 여자를 치료하는 모습을.

친구 에디스의 염원이 불러낸 기적을.

의지만으로 마나를 일으켜 상대를 죽이는 모습을.

마나는 신성한 것이다.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그 기둥을 마음껏 다룰 수 있는 자.

그자는 성자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20만 제국의 병사들을 전투 없이 물렸다.

자격과 지혜를 갖췄으니 이는 분명 성자였다.

"융. 아무리 그대가 위대한 전사의 일원이라 해도,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말입니다. 저 악마들을 당장 죽이십시오."

성녀의 주변으로 파간들이 몰려들었다.

그 숫자가 족히 백을 넘어갔다.

성녀의 얼굴이 더욱 표독스러워졌다.

"융. 지금이라도 철회하고 악마들을 죽인다면, 용서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악마에게 세뇌라도 당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성자는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감히 그 거룩한 단어를 악마 따위에게!"

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겠다는 의지.

그나저나, 성자라.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내가 성자의 자격을 증면하면 되는 일 아닌가?"

"닥쳐라, 악마야. 네 따위가 자격을 증명한다고?"

"그래. 마침 자격을 증명할 방법이 저기에 있지 않나."

동굴을 가리켰다.

수많은 전사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가고 있는 저 장소.

"하! 설마 성지 안에 악마가 발을 들이겠다는 소리냐?"

"전하, 아니될 말씀이십니다."

크로프트 역시 결사반대의 입장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그시, 성녀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성녀는 생각했다.

위대한 전사 융이 성자를 언급했다.

절대로 좌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사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진 않았다.

성지로 들어가는 것.

감히 제국의 어린 악마 따위가 전사들도 힘들어하는 성지에 도전한다.

백중 백 죽을 것이다.

그야말로 자살행위.

곧이어 성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좋다. 비록 신성에 반하는 일이나, 신께서 허락하셨다. 저 악마에게 직접 벌을 주시겠다고 말이다."

< 용(2) > 끝

신과 실시간으로 소통이라도 하는 걸까?

나와 제로처럼 말이다.

아니라면 저토록 빠른 허락이 가능할 리 없었다.

'광기가 느껴지는군.'

매우 익숙한 눈빛이다.

전사들도, 성녀도 하나같이 미쳐서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보급 없이 갇혀있었으니.

저장된 식품이라고 해봤자 저 많은 전사들의 수요를 감당할 수준은 못됐겠지.

그나마 나는 배는 안 굶주리고 미쳤었다.

하지만 굶주림으로 인한 광기는 숱하게 봐왔다.

대흉년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배고픔에 시달렸을 때.

자식을 팔고, 먹고, 같은 인간을 습격해 해체하던 시절이었다.

귀족들은 비축한 식량을 풀지 않았다.

스스로의 사리사욕을 위해 더 모멸차게 수탈했으며, 먹는 입을 줄이고자 전쟁에 기름을 부었다.

"왜 대답이 없지? 겁이라도 먹은 게냐?"

자식을 팔고, 먹고, 같은 인간을 습격해 해체하던 시절이었다.

"왜 대답이 없지? 겁이라도 먹은 게냐?"

귀족들은 비축한 식량을 풀지 않았다.

성녀의 비웃음이 커졌다.

스스로의 사리사욕을 위해 더 모멸차게 수탈했으며, 먹는 입을 줄이고자 전쟁에 기름을 부었다.

전사들 역시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반가운 광기라서 잠시 추억에 젖어있었을 뿐이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저 성지에 들어가서 살아오면 인정해주는 건가?"

"오냐. 열 발 자국만 안으로만 들어가도 네가 성자임을 인정해주마."

열 발자국은커녕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전사들이 성지로 향하며 즉사하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

'열 명 중 한 명만 파간이 된다.'

치사율 90%.

하지만 이는 기본적인 숫자였다.

얼마나 깊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파간의 질도 달라진다.

첫 한 발을 들인 채 멈추면 제대로 된 파간이 될 수 없다.

최소 열 발자국은 들어가야 파간이라 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스무발자국을 넘어가면 '전사 파간'이라 불리며, 작은 도시를 지키는 수문장이 된다.

서른발자국을 넘기면 '대전사 파간'이라 불리며, 성지를 지키는 수호자로 임명된다.

그리고 마흔발자국을 넘기면 '위대한 파간'이라 불리며, 북방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

허나 위대한 파간이 되는 숫자는 만 명 중 한 명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다. 위대한 길에 들어서고자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

북방을 수호하는 위대한 파간은 오직 모든 상황에서 자유의지로 움직일 수 있기에, 성지를 지키는 전쟁의 참여유무조차도 자유였다.

현재 북방에 존재하는 위대한 파간의 숫자는 다섯.

그중 한 명이 융이었다.

'위대한 전사가 악마를 성자라 언급하셨다. 바로잡지 않으면 분열이 생길 터.'

성녀는 제국의 악마를 바라봤다.

저 악마가 무슨 수를 써서 융을 회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절대로 성공하지 못해.'

막상 성지의 앞에 서면 그 위대함에 겁을 먹고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사라면 파간이 되는 걸 명예롭게 여겨 죽음도 불사하지만 저놈은 제국의 악마였다.

제국의 악마 따위가 전사의 명예를 알 리 없지 않나.

그나마 걸리는 게 있다면 다른 이들이다.

저 젊은 악마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지만, 그 주변의 이들이 모두 하나같이 범상찮은 기운을 풍겼다.

"물론, 당연히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선 안 된다. 성자는 오롯이 자신만의 격을 쌓은 존재. 혼자서 도전해라."

"전하.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제르민이 간곡하게 요청했다.

근심가득한 얼굴.

대부분의 전사들조차 버티지 못한채 즉사해버리는 동굴의 안으로 걸어간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려야 했다.

에디스도 고개를 저었다.

"자살행위입니다. 8서클의 마법사인 저조차도 저 안에 들어가면 살아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일반인도 느껴질 정도였다.

저 성지 안에 깃든 위험한 마나가 말이다.

위험하다.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다.

저 마나는, 오직 인간을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저런 마나들이 뭉쳐있는 현상에 대해 그는 알고 있었다.

"전하, 킬링필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9서클의 마법이라 불리는 그것 말인가?"

"맞습니다. 고대의 '용'들이 사용했으며, 오직 9서클의 마법사만이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지던 절대영역이 바로 '킬링필드'입니다. 그저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명을 죽이는 죽음의 대지지요."

"저 동굴 안이 킬링필드다?"

"예."

에디스는 확신했다.

저건 마법이다.

그것도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9서클 마법 킬링필드다.

8서클 마법사이며 마탑주인 에디스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조차도 저 안에 들어가면 열 발자국이나 겨우 버틸까 싶었다. 수십 겹으로 마나벽을 쳐도 그 정도가 한계이리라.

도움을 주는 것도 차단되었으니 라인하르트 혼자서 저 안으로 들어가면 즉사할 것이다.

말려야 한다.

안 된다면 기절이라도 시켜서 빠져나가야 했다.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다지만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라인하르트와 딸을 무사히 내보내리라.

에디스가 숨을 가다듬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셨습니까?"

그때, 처음에는 막아섰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과거 라인하르트가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대공이 숨기려했던 것.'

카를로스 대공이 그림자를 색출하고, 성지의 침략을 미루면서까지 취하고자 했던 것.

그게 바로 저 동굴 안에 있는 무언가라면?

북방의 전사들조차 살아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의 대지. 그 안에 있는 것을 몰래 빼돌리고자 시간을 끈 것이었다면?

······ 그 방법을, 라인하르트 황태자도 알고 있다는 건지.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이었다. 전하께선 알고 계셨다.'

카를로스 대공이 취하고자 하는 것을 빼앗을 작적으로 북방에 온 것이다.

에디스의 손녀를 치료한다는 명목하에.

이제와서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이 목표였다면 그간 라인하르트가 보인 행보가 이해되었다.

크로프트는 라인하르트의 눈을 마주했다.

자신감 가득한 표정.

흔들리지 않는 눈빛.

과거의 흐리멍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때로는 저런 자신감이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방법이 잘못되어 라인하르트가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 또한 이곳에 묻혀야만 했다.

'살 만큼 살았으니, 내가 죽는 것은 걱정되지 않으나.'

라인하르트는 희망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사지로 몰 수는 없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저 동굴 안에 도전하는 게 낫다.

"크로프트. 나를 믿지 못하겠나?"

하지만.

믿고 따르기로 했다면, 주인의 선택 또한 존중해야 옳다.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크로프트는 결단을 내렸다.

"··· 믿고 따르겠습니다."

라인하르트의 결정에 따르겠노라고.

라인하르트가 여태껏 보여준 이적들. 그 신비한 재능들의 가능성을 믿었다.

설령 라인하르트가 잘못된다면 이곳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저 성녀.

저 성녀의 목만큼은, 반드시 베어버리리라.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냐? 내가 무서워라도 할 줄 알고?"

성녀가 몸을 잘게 떨었다.

크로프트의 살기를 읽은 탓이다.

에워싼 파간들도 동요했다.

―강자.

강자의 기척.

크로프트에게서 느껴지는 힘의 깊이.

그 깊이는, 마치 무저갱과도 같았다.

위대한 전사라 불리는 존재들보다도 더 깊어보였다.

제국의 악마들 중 특출난 이들조차도 저런 기운을 풍기진 않았다.

―마왕······.

꿀꺽!

긴장한 파간들이 본능적으로 무기를 들고 겨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저 힘이야말로 마왕이라 불릴만 했다.

본능이 강화된 파간들만이 크로프트를 알아보고 전율하였다.

"그럼 다녀오지."

나는 가볍게 산책이라도 다녀올 것 같이 말했다.

제르민과 에디스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눈빛이지만 크로프트가 믿음을 보냈다. 자신들 또한 그저 믿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조심하세요."

웬일로 카이첼이 걱정어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곳은 정상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에픽. 그것도 상당한 레벨의.'

어쩌면, 태고의 에픽 중 하나가 이곳에 잠들어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두 태고의 에픽이 맞붙는 셈이다.

누가 이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엄청나게 전투적인 에픽이야. 대체 어쩔 셈일까?'

입구에서부터 저런 죽음의 마나를 풀풀 풍겨대는 걸 보니, 상도덕 없는 에픽임에는 분명해보였다.

저런 에픽은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왜 굳이 죽을지도 모르는 길로 들어서는 걸까.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지만, 태고의 에픽만이 가진 자존심 대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래 자기자아가 강한 에픽들은 서로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라고 하니까.

그녀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 정도로 부릴 자존심 같은 건 없어서 다행이었다.

"비켜라."

툭.

발걸음을 옮겼다.

성녀가, 파간들이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라인하르트가 움직였다.

마침내 동굴 앞에 섰을 때,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울 거다. 포기하고 싶겠지.'

성녀의 비웃음이 더욱 커졌다.

동굴 앞에서 멈춰선 걸 보니 이제야 겁을 먹은 모양이다.

자. 포기를 외치며 울며불며 매달릴 시간이다.

자신은 성자가 아니라고, 그냥 흔한 악마새끼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살려줄 용의는 있었다.

'살려달라고 해라. 속죄하겠다고 해!'

성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이내.

툭.

"······!"

"흐읍!"

제르민은 아예 고개를 돌렸다.

라인하르트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이다.

허나 육체변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에 성녀가 이맛살을 구겼다.

'운이 좋은 녀석이로군. 그래도 이제 고작 첫 걸음이다. 한 발, 한 발이 죽음과도 같이 느껴지겠지.'

열 발자국.

그 정도는 가야, 파간의 힘을 얻는다.

하지만 한 발, 한 발 움직이는 게 지옥이라고 모든 파간이 말했다.

저 안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숙련된 전사조차도 발을 옮기길 꺼려할만큼.

투욱-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한 발자국을 더 옮겼다.

툭.

툭.

바닥을 차는 소리와 함께, 거침없이 나아갔다.

"뭐··· 야···?"

멈추지 않는다.

거리낌이 없었다.

그냥 걷고 있었다.

아무런 육체변이도, 아무런 생체기조차도 생기지 않는다.

체질에 적합한 육체라도 약간의 변이는 생기기 마련인데.

그렇게 열 발자국.

"말도 안돼······!"

성녀가 목놓아 외쳤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더욱 놀라운 건, 열 발자국을 가서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무발자국.'

전사 파간이라 불리는, 도시의 수호자의 격을 갖게 되는 구간.

역시나 라인하르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해!'

서른 발자국.

대전사, 성지의 수호자라 불리는 구간.

하지만 성녀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나아간다.

······ 그렇게, 마흔 발자국.

"아."

"경배하라."

파간들이, 무릎을 꿇는다.

모든 전사가 경외하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곳에서, 위대한 전사가 탄생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마흔 발자국을 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더, 더욱, 깊숙하게.

이윽고.

"······."

모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 용(3) > 끝

[사용자 보호 모드로 전환됩니다.]

[보호 모드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남은 사용자 보호 시간 37분 12초]

[경고. 고농도 방사능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고. 지속시간 내로 탈출을 권합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제로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그러자 친절하게 눈앞으로 남은 시간을 띄우며 벗어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시시각각 줄어드는 시간.

'충분하다.'

거침없이 발길을 옮겼다.

'기동하고 있는 한, 방사능으로부터 완전히 나를 지킨다고 하였지.'

과거 제로가 했던 말들.

그 자신감을 믿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인류를 구하고자 만들어진 인공지능 머신.

그것이 제로인 탓이다.

물론 제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짓이었다.

눈앞에서 전사들이 육체변형을 일으키며 죽어나가는 걸 보았으니까.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라도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일 생각은 못하리라.

그것이 제로인 탓이다.

어지간히 담이 큰 사람이라도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일 생각은 못하리라.

물론 제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짓이었다.

'용을 취하지 않으면 어차피 죽는다.'

눈앞에서 전사들이 육체변형을 일으키며 죽어나가는 걸 보았으니까.

카를로스 대공에게 죽거나 말피엘에게 죽을 것이다.

아니면 바알의 말마따나 위업으로 선정되어 갑작스럽게 변고를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용을 취해야만 카를로스 대공의 힘을 빼놓고, 말피엘로부터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말피엘이 용의 존재로 인해 카를로스 대공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가 절반만 사실이라도 용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으므로.

그리고 시기의 차이일뿐 어차피 죽는다면, 내 스스로 선택하고 도전하다가 죽고 싶었다.

'속이 매스껍군.'

문제는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위액이 역류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제로는 모든 에너지를 오직 방사능의 침입을 막는데 사용했다.

미세한 방사능이라도 유입되는 순간 인체에 치명적이었으니.

그 공백으로 인해 어지럼증상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애써 고개를 털며 몇 걸음을 더 걷자, 어느새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위대한 전사의 영역을 넘어섰다.'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동굴을 깊게 들어갈수록 파간의 급이 결정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위대한 전사. 북방에도 몇 없다는 명예로운 존재들.

열 걸음을 한참 넘겼으니 성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이쯤하고 돌아간다 하더라도 소기의 성과는 이룬 셈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을 보는 게 내 목표였으니.

계속해서 걸어, 대략 100걸음 정도를 넘어가자 허허벌판이었다.

입구에 쌓여있던 시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도달한 전사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는 방증이었다.

[방사능 수치가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주의를 바랍니다.]

온갖 가스 같은 것들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올 지경이었다.

도저히 이 이상은 인간이 가라고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카를로스 공작은 성역을 강화해서 들어온 건가?'

그래서 카를로스 대공이 용을 취한 방식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다.

깊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인간은 끝까지 닿는게 불가능할 것 같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그의 장기인 '성역'이다.

자신의 주변을 성역화시켜, 그 무엇의 침입도 불허하는 권능.

하지만 제아무리 성역이라도 이 방사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을 터였다.

이곳의 방사능은 나노머신으로 정화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말인 즉, 성역 또한 마나라면 결국 방사능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소문대로 리치와 밀접한 관계여서 가능했을지도 모르지.'

리치.

자신의 생명을 따로 저장하여, 영원불멸하는 존재.

리치나 언데드와 같은 흑마법은 오래전에 사장됐다.

하지만 카를로스 대공이 리치와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은 있었다.

그 리치를 이용해 성지의 '용'을 취했을 가능성은 있었다.

죽은 자를 이용해 성지를 공략한다. 가능할 법한 발상이다.

정말로 리치가 실존한다면 말이다.

뭐가 됐든, 카를로스 대공이 용을 취했다면 나 또한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사······려저······."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지하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했을 때 그 옆에 놓인 '살뭉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살뭉치였다.

뭉게지고 터져서 눈, 코, 입이 제대로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말을 하고 있었다.

'허.'

놀라운 일이었다.

여기까지 들어와서 살아있는 것을 만날 줄은.

저들이 말하는 파간의 기준을 한참 초과한 영역.

족히 천 걸음 이상은 들어온 곳이었다.

위대한 전사도, 성지를 발견한 이래 그 누구도 닿지 못했을 이 장소에 살아있는 인간이라니.

그야 형체는 인간과 거리가 멀었지만.

거의 슬라임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너는 누구냐?"

"나··· 느······."

분명히 인간이었다.

하지만 살뭉치는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하루이틀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는 게 상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시시각각 줄어드는 중이었다.

사용자 보호모드가 꺼지면 순식간에 내 육체도 변형될 것이다.

용을 취해 돌아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무시하는 게 상책이었다.

허나, 가만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보였기 때문이다.

[방대한 양의 비인가 나노머신이 생명을 유지하는 중입니다.]

엄청난 양의 나노머신이.

나노머신은 살뭉치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단순히 배회만 하는 게 아니라 방사능으로부터 살뭉치의 '생명'을 유지시켰다.

그 양은 8서클의 대마법사 에디스보다도 많았다.

하여, 나는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살아있는거지?"

이렇게 아득바득 살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본래의 몸조차 잃어버린 채 억지로 버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육체변이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받고 있을 텐데도 저 살뭉치는 삶을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의지에 이끌렸다.

"궁···극······."

궁극?

마지막. 끝. 벽을 넘겠다는 의미일까?

"데려다··· 줘······."

"동굴의 끝까지 데려다달라는 말이냐?"

"······."

살뭉치가 기력을 다한 듯 말을 멈췄다.

긍정이다.

살기 위한 의지보다도, 동굴의 끝을 보겠다는 열망이 더 큰 듯싶었다.

무엇이 그를 이 동굴로 이끌었을까.

무엇이 그를 계속해서 나아가게 하는가.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낭비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추잡스러운 게 말을 걸었다며 걷어찼을 것이다.

혐오스럽다는 표정과 함께 저 멀리 치워버렸겠지.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나는 발을 뗐다.

살뭉치를 무시하고, 용에게 닿기 위하여.

하지만 이내 멈춰섰다.

등을 돌려, 한숨을 내쉬며 살뭉치를 들어올렸다.

"··· 넌 나보다 강한 놈이군."

나는 강하지 못했다.

결국 광증을 이겨내지 못했으므로.

제아무리 제로가 뇌를 누른 탓이라고는 하나, 마지막에 이르러선 나 스스로도 광증에 몸을 맡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죽이고, 또 죽이며, 대륙을 피로 물들였다.

세상을 그저 저주하기만 했다.

하지만 살뭉치는 이런 형체가 되고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목표를.

모두가 죽어버린 이 지옥과도 같은 장소에서 셀 수 없이 오랜시간동안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 의지에 예의를 표했다.

내가 해내지 못한 걸 해낸 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경의였다.

생명이 꺼져가고 있음이 느껴졌지만 적어도, 끝을 보게 해줄 순 있으리라.

'가볍다.'

살뭉치는 가벼웠다.

한 손에 든 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쿵!

문을 밀고 당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노머신을 빨아들인다. 이 안에 방사능을 뿜어내는 게 있다.'

오러나 마법으로도 문을 강제로 열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강력한 마법. 권능 같은 것에 의해 문은 지켜지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마도 이 너머가 성지의 끝일 것이다.

다 와서 멈출 순 없었다.

[마스터. 문의 가운데에 손을 올려주십시오.]

그때였다.

방법을 구상하고 있을 때 제로가 말했다.

천천히 철문의 중심부에 손을 대자 틱- 소리와 함께 철문의 내부에서 톱니가 맞춰졌다.

[보안코드 해킹을 시작합니다.]

틱. 티리리릭.

묘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푸른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해킹이 완료되었습니다.]

끼이익.

철문이 비명을 내지르며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제로의 기능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도 가능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만능의 열쇠가 따로없군.'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인생이라고 했던가.

머릿속의 벌레.

매일같이 원망하던 그 벌레가, 지금은 내 오른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잘하면 황궁비고도 열 수 있겠는데.'

황제만이 열 수 있도록 온갖 장치가 되어있는 문.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철문도 그 황궁비고에 비견되는 수준이었다.

몰래 열 수만 있다면 비고 안에 있는 또 다른 정령무기도 가지고 나올 수 있을 터.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드디어 도착했구나."

문의 내부.

거대한 크리스탈의 위에, 한 흑발의 남자가 있었다.

크리스탈 곳곳에 튀어나온 선들이 남자의 신체와 연결돼 있었는데, 상반신만 존재할뿐 하반신은 잘려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남자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나를 바라봤다.

아니,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살뭉치에게 가 있었다.

"마왕이여, 우리의 내기가 천 년만에 막을 내렸다."

······ 마왕?

설마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살뭉치를 마왕이라고 부른건가?

백은의 마왕이라 불렸던 카이첼처럼, 마왕이라 불린 존재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북방에서 마왕이라 불린 자는 천 년 동안 단 한 명뿐이었다.

천 년전 북방을 유일하게 통일했다 전해지는 '마왕 가프'가 바로 그였다.

4황비가 마왕 가프의 피를 이은 전승자였으니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살뭉치가 정말 마왕 가프라면, 어마어마한 양의 나노머신이 설명이 됐다.

남자가 말했다.

"나는 결국 너를 죽이지 못했고, 너 또한 나를 죽이지 못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무승부겠으나······ 그래도 내게 닿은 그 노력만큼은 인정해주마."

남자의 눈이 가라앉았다.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다, 가프."

부르르르!

살뭉치가 거세게 흔들렸다.

비록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감동은 절로 느껴졌다.

남자의 말을 듣고, 나 또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왕 가프!

혹시나 했는데 정말 마왕 가프였다.

'용.'

그렇다면 저 남자는 용일 것이다.

마왕 가프가 용과 대결을 펼쳤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북방의 전설로 전승되고 있었다.

그 대결이 천년동안 지속되고 있었다는 뜻.

무엇보다 성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허나 용의 눈에 나는 없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로 일관했다.

하지만 저 용을 본 순간부터 내 인상은 펴지지가 않았다.

무시를 당해서가 아니다.

이건 숨길 수 없는 거부반응이다.

하늘 아래 같이 있을 수 없는 이를 만났을 때의 현상이었다.

그도 그럴 게.

"······ 말피엘."

저 빌어먹을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용(4) > 끝

―슬프군.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이란 건.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나를 자신의 무대에 올려놓고 광대처럼 죽인 게 바로 말피엘이었다.

모두를 선동하고, 제국을 갉아먹으며,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만든 게 저놈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짜증나는 건 말피엘의 오만방자한 태도다.

나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그저 자신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광대일 뿐이라는 그 빌어먹을 생각이 몸 전체에서 절절하게 흘러나왔다.

모든 걸 걸었음에도 발끝에도 닿지 못했다.

모든 걸 잃었음에도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비참한 광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를 부르는 거냐, 심부름꾼?"

용이 말했다.

이름을 듣고 반응한 것이다.

헌데, 심부름꾼이라.

듣기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저 용은 어쨌든 확실히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가프를 데려온 심부름꾼으로서 말이다.

이걸 좋아해야할지 나빠해야할지.

이내 용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쉽지만, 내 이름은 말피엘이 아니니라."

······ 확실히.

얼굴만 같지,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헌데, 심부름꾼이라.

이내 용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듣기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저 용은 어쨌든 확실히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 가프를 데려온 심부름꾼으로서 말이다.

"아쉽지만, 내 이름은 말피엘이 아니니라."

······ 확실히.

이걸 좋아해야할지 나빠해야할지.

얼굴만 같지,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다.

비슷하긴 해도 눈앞의 용과 말피엘은 지닌 기품이 완전히 달랐다.

타고난 기품은 쉽게 바뀌지 않는법.

말피엘은 눈앞의 용보다 훨씬 가벼웠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지 못하면 말라죽는 병에 걸린 중증의 환자였으니까.

그래도 눈앞의 용은 말피엘과 같은 관심종자의 기질은 없어보였다.

용이 이어서 말했다.

"허나 얼굴이 유사해서 한 착각이라면, 내 피로 만들어진 또 다른 타입의 '용'이겠지. 이 잘 빚어진 용안은 인세에선 찾아볼 수 없을 테니."

재수가 없다는 점에선 같은 것 같았지만.

허나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되물었다.

"너는 정말 용인가?"

"왜, 내가 용이라서 실망이라도 했느냐?"

실망한 건 아니다.

나는 여태껏 용이 생명체가 아닌 일종의 무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방사능을 배출하는 핵무기.

일전 제로가 보여줬던, 찬란한 문명을 모조리 박살내버린 그런 무기의 한 종류라고.

하지만 눈앞의 용은 분명히 살아숨쉬고 있었다.

핵무기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용이 피식 웃었다.

"용은 거창한 게 아니다. 열 두 위업의 달성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뿐. 일종의, 신의 대리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신의 대리자.

문득, 신성교가 떠올랐다.

신의 교리를 설파하는 그 교단은 가장 먼저 말피엘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말피엘은 엄청난 속도로 세를 불렸다.

어쩌면 신과 말피엘, 그리고 신성교 모두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열 두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누가 만들었다는 거냐?"

하지만, 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제로를 얻고 그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신성교를 비롯한 온갖 교단들은 신성력이 신의 힘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나노머신을 비틀어 사용할 뿐이다.

위업을 주고 달성하면 힘을 부여한다는 이야기도, 그 주체가 '신'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초월적인 누군가.

혹은 악마에 가깝다.

신성교가 말하는 그 공명정대하고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말피엘에게 굳이 힘을 줬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용은 하늘을 가리키며 단정지었다.

"신."

······ 기대를 벗어난 대답이다.

신이 자신의 위업을 실천시키고자 만든 게 용이라는 뜻이다.

나는 재차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열 두 위업을 모두 달성하면 어떻게 되지?"

"신격을 얻는다. 신이 될 수 있다. 나도 열 개 뿐이 이루지 못했지만, 아쉬운 일이지."

신이 된다.

정말 그럴까?

말피엘은 신이 되지 못했다.

12가지의 위업을 모두 달성했음에도.

신과 같은 힘은 얻었지만, 분명히 신은 아니었다.

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허나 나는 굳이 그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열 한 번째 위업이 가프를 죽이는 것이었나보군."

"그래. 내 열 한 번째 위업의 대상은 가프였다. 우리는 십 년이 넘도록 싸웠고, 가프는 내 하반신을 베어냈지만 그로 인해 저주에 걸렸다. 결국 우리는 마지막 내기를 시작했지."

내기가 시작되고 천 년.

용이 있는 곳은 성지로 변했다.

수많은 전사들이 도전해 죽고, 파간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선 용도 신의 피조물이라 할 만 하였다.

자신이 만든 시련에 따라 힘을 주거나 죽이기도 했으므로.

그리고 가프는 용에게 닿고자 천 년간 이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용은 어떻게 만들어지지?"

"궁금한 게 많구나, 심부름꾼이여. 허나 천 년만에 대화가 통하는 상대다. 내 흔쾌히 대답해주도록하마."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용이 이어서 말했다.

"나도 모른다."

"······."

"확실한 건, 많은 위업을 달성한 용의 피로 같은 타입의 용을 만들어낸다는 것뿐이니라. 네가 나와 비슷한 용을 보았다면 그런 이유일 터."

일종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말피엘이 지금 눈앞에 있는 용을 본따 만든 존재라면, 왜 그토록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노력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독창성 없는 복사판이 진짜가 되려고 발버둥친 게다.

카를로스 대공이 이 용을 가졌다면, 정작 원본에게는 덤비지 못한 비운의 가짜라고 할 수 있었다.

실상은 불쌍한 녀석이었다. 물론 동정심은 전혀 가지 않았다.

용이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눈이 마치 뱀처럼 변했다.

"그런데 의문은, 너에게서도 미약하게나마 동족의 향이 느껴진다는 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용은 번식이 불가능한데."

"내게서 용의 냄새가 난다는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일이다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이다. 너는 분명히 용의 피를 이었군."

용이 확언하였다.

내게서 용의 냄새가 난다면 이는 황실의 피 때문일 터였다.

제국을 세운 절대자.

그에 대해선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다만, 그는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최강자로 알려져있었다.

제국을 세운 게 용이라는 뜻이고, 황실은 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용은 번식이 불가능하다며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30%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용자 보호모드의 남은 시간 7분 30초.]

[탈출하십시오.]

그러나 더는 문답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잔여 에너지가 부족하다.

이제 슬슬 나가야 했다.

'칼리번처럼 지배할 순 없나?'

하지만 이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나갈 순 없었다.

정령 칼리번의 때처럼, 저 용을 취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엄청난 힘이 될 것이었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용.

하물며 말피엘의 원본이라면 말피엘을 상대할 좋은 수가 되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등장할 때 찍어눌러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관리자권한의 등급이 부족합니다.]

[A.I가 특급의 프로세스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대상 '용'의 지배를 위해선 관리자권한 등급을 1등급까지 상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5등급의 관리자권한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하지만, 저 용 역시 A.I라는 건 알게 됐다.

'용이 A.I라면 말피엘 또한 A.I일 가능성이 높다.'

아주 중요한 정보였다.

관리자 권한의 등급상향으로 용의 A.I를 다룰 수 있게 된다면, 필시 말피엘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이제 내 차례다."

궁금증을 풀어주었으니, 자신이 원하는 것도 이루겠다는 말이었다.

용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소름끼치는 뱀과도 같은 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천 년의 기다림도 의미가 있었다. 가프여, 네가 내 다리를 가져와주었구나."

그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 문답 몇 번 해줬다고 다리를 잘라가겠다는 건가?

"최종 승리자는 결국 나다. 가프. 완전해진 육체로 이번에야말로 신이 되리라."

그 순간 어마어마한 숫자의 방사능을 품은 나노머신이 그의 주변으로 일어났다.

바깥에 있는 숫자와는 비교도 안 되는 밀도.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뻔히 보였다.

"얌전히 보내줄 생각은 없나보군."

"걱정마라. 죽어서 내 다리가 되는 건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니."

내가 용의 피를 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자 용의 두 눈에 탐욕과 광기가 머물렀다.

나를 죽여 자신의 잃어버린 하반신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살면서 들은 말 중 기분 더럽기로는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말이었다.

내가 하반신이라니.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경고. 잔여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경고. 탈출하십시오.]

용언.

용의 말에 깃든 힘은 절대적이다.

그 힘은 전설이었다. 9서클 대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을, 용은 숨쉬듯이 사용할 수 있었다.

"죽어라."

동시에, 압도적인 양의 나노머신이 나를 덮쳐들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29%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28%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경고. 남은 에너지 잔량이 27%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빠르게 떨어지는 에너지.

저 용언을 막기 위해 제로가 에너지를 방출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0%가 되면 제로가 멈추고 나 역시 죽겠지.

크리스탈에서 튀어나온 선들이 내 몸을 옥죄었다.

빠져나가야하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버티는 게 고작.

그렇다고 넋놓고 용의 하반신이 될 수도 없는 노릇.

"······ 오호라."

즉사의 용언을 견뎌내는 나를 보며 용이 흥미롭다는 눈빛을 던졌다.

보통이라면 말 그대로 그 자리에서 죽어야 했다. 평범한 인간이 견뎌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제로가 기동하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이다.

즉사의 용언을 비트는 상대라니.

"역시 평범한 인간은 아니로구나. 하기야, 용의 피를 이었으니 당연한 소리겠지. 더욱이 좋다."

용의 두 눈에 흥미가 생겼다.

비틀고 쳐내도 한계가 있는 법.

어디까지 막아내나 궁금해졌다.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죽어라."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죽어라."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죽······ 흠?"

잔여에너지가 3% 아래로 떨어졌다.

죽음이 다가옴에 따라 공포를 느낄 만도 하지만 나는 그저 웃고 있었다.

"실성이라도 한 거냐?"

"웃겨서 말이다. 패배자 주제에 승리자인 척 하는 꼴이."

용은 가프에게 패배를 선언했지만 저 태도를 보아하니 제대로 승복하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언행불일치의 끝판이다.

용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않느냐. 내기라고 했지만, 너는 버러지같이 기다린 게 전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기서 죽음을 기다릴뿐이었던 벌레 주제에, 가프와 네가 같은 선상에서 '내기'를 했다는 게 좀처럼 믿겨지지가 않아서 말이다."

가프는 아니었다.

가프는 천 년동안 쉬지 않고 싸워왔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목표를 이루고자.

반면에 저 용이 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내기'를 한 것인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싸구려 도발이군. 그런 도발에 넘어갈 것 같나?"

"도발이라니. 나는 너와 가프가 같은 격이 아니라고 말한 것뿐이다. 10년을 싸운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도망친 벌레에 불과하다는 게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곳에 천년간 꼭꼭 숨어있지도 않았겠지."

"··· 겁을 상실했구나."

[경고. 특급 프로세스 '용언'이 실행됩니다.]

[잔여 에너지가 1% 이하입니다.]

[피하십시오.]

"죽어라."

인상을 굳힌 용이 용언을 발동했다.

1%도 채 남지 않은 에너지.

그 순간이었다.

"내가 이겼다, 용."

가프.

쥐고 있던 살뭉치가, 내 손으로 빨려들어왔다.

< 용(5) > 끝

알고 있었다.

용이 가프의 이름을 불렀을 때부터, 가프에게서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손을 타고 전해지는 감정은 환희와 기쁨, 그리고 역겨움이었다.

앞의 두 감정은 몰라도 마지막 감정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이를 볼 때의 역겨움. 불쾌함.

내가 말피엘을 볼 때의 감정과 비슷했던 탓이다.

'통했다.'

마지막 수가, 먹혀들었다.

일부러 도발하여 가프를 깨우는 작전이 성공했다.

천 년 전 용과 싸웠고 최소 무승부를 이뤄냈다면, 비록 지금의 모습은 살뭉치와 다를 바가 없으나 가공할 나노머신을 품은 그의 '의식'을 깨워 이 상황을 타파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급 프로세스 '폭식'을 포함한 비인가 나노머신이 대량 유입되었습니다.]

[지배가 불가능합니다.]

[자율신경 A.I로 작동하는 나노머신입니다. 특정한 조건에서만 움직이도록 조정되어, 외부에서의 강제개입이 불가능한 A.I입니다.]

[분리하여 배출할 수 있습니다.]

[공생할 경우 마스터의 신경계를 공유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입니다. 현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일시적인 '공생'을 추천합니다.]

'폭식.'

하지만, 살뭉치가 손 안으로 빨려들어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가프의 권능.

빨려들어온 살뭉치가 용언이 담긴 나노머신을 전부 먹어치운 것이다.

백은의 마왕이 건넨 사이오닉 에너지처럼 오직 북방의 마왕만이 지녔던 나노머신의 특수한 성질이었다.

[공생할 경우 마스터의 신경계를 공유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입니다. 현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일시적인 '공생'을 추천합니다.]

하지만, 살뭉치가 손 안으로 빨려들어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빨려들어온 살뭉치가 용언이 담긴 나노머신을 전부 먹어치운 것이다.

'폭식.'

가프의 권능.

백은의 마왕이 건넨 사이오닉 에너지처럼 오직 북방의 마왕만이 지녔던 나노머신의 특수한 성질이었다.

하지만 지배가 불가능하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나노머신.

[자율신경 A.I로 작동하는 나노머신입니다. 특정한 조건에서만 움직이도록 조정되어, 외부에서의 강제개입이 불가능한 A.I입니다.]

'폭식.'

[분리하여 배출할 수 있습니다.]

가프의 권능.

[공생할 경우 마스터의 신경계를 공유하여 자율적으로 움직입니다. 현상황의 타개를 위해서 일시적인 '공생'을 추천합니다.]

백은의 마왕이 건넨 사이오닉 에너지처럼 오직 북방의 마왕만이 지녔던 나노머신의 특수한 성질이었다.

하지만, 살뭉치가 손 안으로 빨려들어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배가 불가능하다.

빨려들어온 살뭉치가 용언이 담긴 나노머신을 전부 먹어치운 것이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나노머신.

바알과는 달리, 가프는 자신의 권능을 온전히 나에게 이양하였다.

하물며 그의 의지는 A.I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현상황의 타개.

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제로는 '일시적인 동맹'을 추천하고 있었다.

지배 불가능한 가프의 나노머신을 계속해서 몸안에 두는 건 독이라고 판단한 듯싶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제로가 맞겠으나, 제로도 모르는 게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이다.

천 년넘게 쌓인 가프의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용에 대한 분노, 복수심, 반드시 죽이고자하는 살해의 감정!

그를 위해 가프는 내게 자신의 전부를 던졌다.

"······ 깨어났느냐? 가프여."

용의 움직임이 멈췄다.

자신의 용언이 '먹힌' 것을 느낀 탓이다.

천 년 전 질리도록 상대해보았던 가프의 권능, 폭식의 출현이었다.

북방의 마왕은 자신에게 닿는 모든 사사로운 기운을 먹어치우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용언과 마법, 물리적인 충격까지 모조리 먹어치우는 그 권능 때문에 용은 가프에게 하반신이 잘려나가는 굴욕을 겪었다.

'놀랍군.'

그래서 놀랍다.

그 무적의 권능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저 인간의 몸은 그것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다.

가프의 권능을 담기엔 너무 연약했다.

즉시 터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릇이 가프의 권능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가프의 권능을 담아낼 용량을 지녔다고?'

그릇의 크기가 미친 듯이 크다면 가능한 일이겠으나, 온전한 용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을 거의 인간에 가까운 녀석이 해낸다?

그릇에 담을 수 있는 용량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다.

또 다른 그릇 하나를 추가해 늘릴 수는 있으나, 원본의 크기 자체를 늘리진 못한다.

그리고 권능은 원본의 그릇에만 담기는 것이었다.

원본 그릇의 크기 자체가 크지 않다면 담는 것도 불가능하다.

마왕이라 불렸던, 무려 열한 번 째 위업으로 선정된 가프의 권능을 온전하게 담아낼 그릇을 지닌 인간이라니.

'그건 나도 불가능하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용조차도 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용은 강력하지만 중심이 되는 용량의 그릇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위업을 달성할 때마다 용은 다른 권능이나 능력을 더할 수 있는 '추가 용량'을 얻는데, 새롭게 그릇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일뿐 '중심 용량' 자체는 늘지 않기 때문이다.

'놈을 취하면 가프의 권능과 막대한 용량을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용이 강해지는 방법은 위업 달성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하며 얻은 열 개의 그릇.

그 그릇을 '바꿔끼우는' 것이다.

바로, 심장이었다.

용은 자신의 것을 포함한 열 한 개의 심장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추가로 얻은 심장은 바꿔 낄 수 있다.

그래서 보통은 위업을 달성한 대상의 심장을 취하는 것으로 강해져왔다.

저 막대한 양의 용량과 권능을 지닌 심장으로 하나를 채워넣는다면 순식간에 12개의 모든 위업을 달성하고 신격을 얻을 수 있을 터.

'죽였으면 큰일 날 뻔했군.'

용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가프의 권능을 이었다고 해도, 놈은 가프가 아니다.

게다가 무적의 권능을 지닌 가프도 결국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강력한 저주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 인간의 형체를 잃었다.

권능은 생명을 유지시킬뿐이었다.

권능을 초과하거나, 지속시간을 넘어선 공격에 대해선 도리어 무방비해지는 셈.

이미 천 년 전에 지겹도록 겪어보지 않았던가.

"때론 분에 넘치는 선물이 독이 되는 법이지."

푸시이익.

크리스탈과 연결 된 선들이 떼어졌다.

곧이어 막아두었던 '저주'가 사방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멍청한 녀석. 힘을 넘겼지만 내 '봉인' 역시 깨졌다. 고작 그런 인간에게 힘을 넘긴 자신의 우둔함을, 땅을 치며 후회해라, 가프. "

가프는 용을 이곳에 봉인해두었다.

동굴 바깥으로 저주가 퍼져나가지 못하도록.

용이 이곳에서 움직일 수 없도록.

하지만 가프가 권능을 넘기며 봉인 역시 해제되었다.

"세상을 저주하는 고룡의 진짜 힘을 보여주마."

북방 전체를 가라앉게 만들 막대한 에너지.

동굴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 저주로 말미암아, 저 인간은 심장을 제외한 모든 걸 잃을 것이다.

다리가 아깝지만 봉인이 해제됐다면 움직이는 정도야 어렵지 않았으니.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군.'

그리고 나는 저 용이 힘을 모으는 장면이 왜인지 익숙했다.

말피엘이 전격을 모아 나를 죽이고 궁을 날려버릴 때.

유일하게 놈이 무방비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온 힘을 집중해 쏘아내는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만큼 강력했지만, 그러기 위한 몇 초의 시간 동안 공백이 생겼다.

다른 것들에 대한 '제어'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지금이다.'

그건 바로, 나를 옥죄고있는 크리스탈의 '촉수'들이었다.

[해킹이 완료되었습니다.]

['촉수'에 대한 제어권한을 획득했습니다.]

용을 제어하거나, 방사능이 저장된 저 크리스탈 자체를 어찌할 순 없지만, 지금의 관리자 권한으로도 이 촉수 정도는 해킹할 수 있었다.

"······ 뭐?"

나를 옥죄던 촉수들이 순식간에 물러나며, 이번에는 반대로 용을 옥죄었다.

용을 감싸며 떼어진 선의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용도 당황하고 말았다.

하기야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신의 촉수가 도리어 자신을 공격하는 형상이라니.

방출하여 공격하려던 용의 기색이 강제로 멈췄다. 저주를 방출하던 구멍이 자신의 촉수로 인해 다시 막혀버린 탓이다.

"나를 따라라. 내 말을 들으란 말이다!"

촉수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용이, 이를 갈며 외쳤다.

한순간 보인 틈.

그 틈 덕분에 촉수에 대한 권한을 온전히 내가 가져올 수 있었다.

피식 웃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두 번이나 다리를 잃은 기분은 어떻지? 나는 겪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만."

용도 망각한 게 있었다.

비록 상대가 가프가 아닐지라도,

그 역시 천년 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라는 것이다.

촉수에 의지하여 움직이는 몸. 하반신이 잘린 용은 자신의 흐르는 힘을 크리스탈에 저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성기의 힘을 모두 잃은 껍데기뿐인 용.

말피엘과 비교하는 게 민망할 수준이었다.

촉수의 제어권한만 가져올 수 있다면 놈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나마 대항 가능한 용언조차도 폭식에 먹혀버렸으므로.

"넌······ 뭐냐,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게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막아서던 촉수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켜준다.

용과 나와의 거리는 다섯발자국도 채 남지 않았다.

"모든 마나여. 저놈을 죽여라."

정말 멍청한 놈이다.

나노머신에 의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건지.

차라리 물리적인 공격을 하는 게 효과가 있을 터이나, 저 멍청한 용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용이라고 전부 똑똑한 건 아닌가보군.'

차라리 땅을 엎어 생매장을 시킨다면 나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삼일만 가둬두어도 탈수현상으로 죽을 텐데.

"오지마라."

지금, 용은 겁을 먹었다.

처음이었다. 이만한 미지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용이야말로 가장 큰 신비이며 미지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넘어선 신비를, 용은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앞에 다다른 인간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멈춰······!"

"가프가 안부 전해달라는군."

촤아아아악!

손을 댄 순간, 가프의 '폭식'에 의해 용은 지워지기 시작했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용과 크리스탈 전부를.

하지만, 용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용의 의식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이 몸을 차지하겠다.'

폭식에 의해 먹힌 육신을 포기하고, 찰나의 순간 용은 자신의 영혼만을 살려내는데 성공했다.

부동영역에 존재하는 용의 영혼은, 폭식과 함께 흡수되어 인간의 인지영역까지 순식간에 다다르는 중이었다.

'다 이긴 줄 알았겠지. 그렇게 방심하고 후회해라.'

순간의 기지였으나 차라리 잘됐다.

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몸을 차지하는 게 훨씬 나았다.

가프의 권능과 자신을 먹어치워도 멀쩡한 '그릇'이라니.

중심이 되는 그릇의 용량이 얼마나 큰지 상상도 되지 않을 지경이다.

'허.'

허나, 들어온 뒤에야 알았다.

'우주와도 같구나.'

이 몸의 그릇의 크기가 감히 우주와도 같다는 것을.

감히 신의 그릇이라 칭할 수 있으리라.

그 대해 같은 크기에 놀라면서도 용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의 그릇에 비하면, 위업달성은 애들 장난과도 같았다. 이 몸을 차지하고 단련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신의 격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용은 인간의 인지영역의 중심부에 다다라서야 헛된 희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뭐냐.'

자신의 부동영역에 존재하는 영혼이, 지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날 지워내는 것이냐?'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지워내기까지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곧이어 그의 앞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거대한 빛과도 같은 존재.

'신?'

왜 인간의 영역에 신이 존재하는가.

허나, 처음보는 신이었다.

신이 맞는건지 아닌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동영역에 있는 자신의 영혼을 지워내는 존재라면, 그것은 신일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지우는 것이냐.'

그들의 위업을, 심부름을 평생 해온 자신이다.

열 개의 위업을 달성한 용은 용들 중에서도 흔치 않았기에.

진정한 '용'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왜.

신이시여. 왜 제가 아닌 인간의 편을 드십니까?

'아아.'

지워진다.

사라져간다.

자신의 존재가. 기억이. 모든 것들이.

[A.I '용'의 데이터가 삭제되었습니다.]

< 용(6) > 끝

검을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어느 강자와의 싸움에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긴장감.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토록 피가 말리는 기분을 느낀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

크로프트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경지에 이른 검사인 그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는 상황.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하여 그는 모든 영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크로프트뿐만이 아니었다.

성지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

위대한 전사의 탄생을 경배하던 파간들과 성녀까지도 모두가 침묵한 채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왜, 나오지 않으시는 겁니까?"

참다 못한 제르민이 물었다.

라인하르트가 성지에 들어가고 벌써 십여분이 지났다.

40걸음을 걸으면 위대한 전사가 되며, 100걸음을 걸으면 끝을 본다 전해지는 성지다.

5분 내로 나와야 정상인 라인하르트는 들어간지 10분이 훨씬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성지에 들어가고 벌써 십여분이 지났다.

하지만 제르민의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40걸음을 걸으면 위대한 전사가 되며, 100걸음을 걸으면 끝을 본다 전해지는 성지다.

몰랐기 때문이다.

5분 내로 나와야 정상인 라인하르트는 들어간지 10분이 훨씬 지났음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성녀도, 파간도, 그 누구도.

성지가 사실 얼마나 긴지, 그 끝은 어디인지,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제르민의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몰랐기 때문이다.

성녀도, 파간도, 그 누구도.

당연히 대답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보내지 말아야 했던가.'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객관적으로 차갑게 생각하면 말렸어야 했다.

절대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섰어야 하였다.

성지 안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저주.

그것은 크로프트도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강력하여, 자신도 들어가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

그런 곳에 황태자를 들여보냈다. 미치지 않고서야, 죽으라고 보낸 것과 뭐가 다른가.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크로프트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라인하르트의 그 선명한 눈빛을 마주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라인하르트 전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 책임을 다하리라.

성녀를 죽이고, 자신 역시도 죽겠다.

쿠릉!

그때였다.

성지가 광음을 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지의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흔들림은 주변 전역에 여파를 만들었다.

"신께서 노하셨다!"

성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성지의 주변에서 지진이 일어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이가 들어와서 노하신 게 분명하다!"

제국의 악마 따위가 성지에 발을 들였으니, 신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당장에 저 입을 베어버리고 싶지만 크로프트는 그녀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저주를 막는 동굴 입구의 마나벽이 얇아지고 있습니다."

에디스가 말했다.

8서클의 마법사인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러할 것이다.

크로프트가 보기에도 성지의 입구에 묶인 저주가 풀려나려고 하고 있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지?"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도 30분이 고작입니다."

30분이 넘으면 마나벽이 뭉게지고, 저주가 세상에 방출된다.

이곳에 모인 3만의 전사들이 모조리 몰살당할 터.

뿐만 아니라 북방의 전역이 저 저주로 물들 터였다.

20만 제국의 병사들, 제르민과 에디스, 카이첼, 그리고 라인하르트까지.

그 영향에서 절대 자유롭지 못하리라.

'전하.'

크로프트는 오러를 방출했다.

모든 오러를 방출시켜, 자신의 몸을 감싼 뒤.

"크, 크로프트경?"

"어딜 가시는 겁니까!!"

성지의 안으로, 몸을 날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막무가내로 가는 걸 혼자 보내서는 아니 됐다.

그렇게, 첫 걸음.

"큽!"

발을 뗄 수가 없다.

첫 걸음부터 저주가 전신을 옭아메려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것을 베어내고 막아낸다는 오러를, 저주는 빠르게 갉아먹고 있었다.

오러가 저주에 침범당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것이 성지의 시련.

수많은 전사들의 목숨을 앗아간, 라인하르트도 겪었을 저주의 무게.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목숨은 부지할 것이다.

하지만.

툭.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크로프트는 움직였다. 발을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열 걸음에 다다르자 그를 감쌌던 오러가 거의 소진되었다.

태양과도 같이 밝게 빛났지만 지금은 연기와 같이 사라졌다.

스무걸음을 넘어가자 오러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서른걸음, 신체의 내부를 지탱하던 모든 힘이 마침내 끊겼다.

그리고 마흔걸음에 다다르자 신체변형이 시작됐다.

손과 발이 부풀어 오른다.

얼굴이 팽창하는 게 느껴진다.

'100걸음보다 더 멀구나.'

40걸음을 걷고 나서야, 이 앞의 동굴이 훨씬 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질 않는 동굴.

위대한 전사들이 이곳에서 포기하는 건 바로 저 끝없는 동굴에 절망해서다.

어차피 끝에 닿지 못하리라 확신해서였다.

돌아가지 않으면 죽는다······.

'내 생명에 미련은 없느니.'

있었다. 그도 사람인 이상 자신의 목숨에 미련이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버렸다.

모든 걸 버렸다.

모든 걸 내려놓았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궁극에 닿는 것.

자신의 목숨을 바쳐, 라인하르트를 구해내면 그만일뿐.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심장에 남아있던 미약한 오러가 마치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모든 걸 쳐내고 오직 하나의 목적만이 남자, 그 작은 오러는 들불처럼 일어나 재차 크로프트의 전신을 감싸나갔다.

그 오러는 이전보다 훨씬 강렬했으며, 더욱 선명했다.

'웃기는군.'

크로프트는 이 상황에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진정으로 모든 걸 버리고 나서야 벽을 넘을 수 있단 말이냐.'

자신의 모든 미련을 털어낸 순간 넘어선 벽.

소드마스터에 오른 이후 수십년을 바쳤지만 절대로 넘어설 수 없었던 벽.

그저 꿈이겠거니, 자신의 한계겠거니 생각하며 포기했다.

결코 넘을 수 없음에 좌절하며 희망을 접어버렸다.

그런데 그 벽이, 지금 허물어졌다.

그것은 마법사들이 꿈에 그리는 9서클의 경지와 같았다.

전설로만 화자되는 경지.

소드 엠페러.

'보인다.'

벽을 넘자, 그의 눈에 마나가 보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마나들.

'저게······ 마나라고?'

하지만, 곧이어 그는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마나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벌레들이 날개를 푸닥이며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인 모습.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

크로프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세상은, 자연적이지 않다.

인공적이다.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의 부분이 활성화 된 기분이었다.

뇌가 열린 것 같은 느낌.

새로운 게 보이고, 느껴지며,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허나.

'지금은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크로프트는 상념을 지운 채 성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벽을 넘었다고 해도, 이 저주는 장시간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백 걸음, 천 걸음, 마침내 크로프트가 문 앞에 섰다.

하지만 이미 그의 형체는 돌연변이처럼 변이한 이후였다.

온 몸이 짖뭉게지고, 모든 털이 빠졌으며, 하얀 피가 전신의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상태.

이제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사고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를 내며, 한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전······ 하."

남자, 라인하르트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가 변했다.

전혀 다른 생물을 접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혹여나 착각한 것일까.

지쳐 쓰러져서 환각이라도 보는 것일는지.

"고생했다. 크로프트."

라인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스르륵. 동시에 수마가 밀려들었다.

"이 앞은 내게 맡기고 쉬어라."

크로프트는 그 수마에 몸을 맡겼다.

[축하합니다. 경계를 넘은 자여.]

[그대는 '??? 번 째 위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대의 격에 알맞은 용을 배정하는 중입니다.]

[배정이 완료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

······ 의외였다.

크로프트가 성지 안으로 들어오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온다는 것을, 사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미친 황제.

죽여야만 하는 역적.

모두가 울부짖으며 나를 저주하기 바빴으므로.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오는 상황?

처음이었다.

그래서 한참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문앞에 쓰러진 크로프트를 보곤 당황하고 말았다.

용을 상대할 때조차 하지 않던 당황을 쓰러진 크로프트를 보고 한 것이다.

'왜?'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왜 크로프트가 이곳에 있는가'였다.

동굴 안으로 숨은 건가?

아니면 누군가를 좇아서 들어온 걸까?

'나를 구하러 들어왔다?'

허.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확신이 없었다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뭐가 걱정이 되어서 나를 믿지 못하고 들어온 것인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짓이다. 자살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허나,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제로. 치료할 수 있겠느냐?'

[방사선에 노출된 시간이 짧아, 가능성이 1%로 없진 않습니다.]

[자율신경 A.I '폭식'의 도움을 받으면 생존확률이 10%로 상승합니다.]

생존할 수 있는 확률이 있다.

그거면 족하다.

손을 대자 폭식이 방사능을 먹어치웠다.

이어 사이오닉 에너지가 담긴 비인가 나노머신을 크로프트의 체내에 쑤셔넣자, 제로가 손상된 부위의 치유를 시작했다.

임시방편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혈색이 돌아왔다.

[세포가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자연치유력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류코드에 포함되어있지 않습니다.]

혈색이 돌아오고, 머리가 자라나며, 새살이 돋고 있다.

장애물을 제거한 것만으로도 크로프트 혼자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마나샤워.'

이 현상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마법사나 검사가 일정한 벽을 넘으면 겪는 마나샤워현상.

이로 인해 그들은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마나샤워와도 거리가 멀었다.

아예 재창조되고 있었다. 모든 몸의 세포가.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운 수준이다.

나노머신의 양도 훨씬 많아졌다.

어쩌면,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크로프트를 들쳐엎고 바깥으로 나갔다.

"······!"

바깥으로 나가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멍청한 표정의 성녀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나의 귀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제국의 악마가, 성지에 도전하여 보기좋게 성공했으니까.

허나 그녀도 내가 성지의 끝에 도달해 저들이 모시는 신을 만났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나는 성녀와 전사들을 향해 말했다.

"꿇어라."

쿠오오오오!

그 순간, 거대한 검은색 용의 형상이 내 머리 위로 생겨났다.

용의 전신. 신화에서 전승되어온 그 모습 그대로.

모두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특히 성녀의 두 동공의 흔들림은 지진이라도 난 것만 같았다.

폭식이 용을 먹어치운 후, 나는 용의 형상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용의 피부와 폭식이 결합해 세상 어느 것보다 단단한 절대적인 갑옷을 손에 넣었다.

갑옷은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알아서 재생되고 먹어치운다.

일종의 공생관계.

북방에서 얻은 가장 값진 보물이었다. 황궁비고에서도 이런 건 보지 못했다.

그러니, 꿇어라.

"내가 너희의 신일지니."

경배하라.

무릎을 꿇고, 고개를 낮춰, 내 발에 입을 맞출 지어다.

< 경배하라 > 끝

악마가 미친 게 분명하다.

꿇으라니. 신이라니!

사악한 술수를 사용하여 성지를 돌파한 게 틀림없었다.

제국의 악마들이 성지를 노리고 있다는 건 성녀 역시 아는 사실이었기에.

'대체 무슨 수를 사용한 거냐.'

찾아내야 한다.

밝혀야만 했다.

"신내림이 치유된다······."

"오오.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파간을 비롯한 전사들의 눈에는 다르게 비쳤나 보다.

단순히 악마만 나왔다면 이런 반응까진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성지로 들어간 노인은 과도한 신내림을 받은 탓에 죽어가고 있었다.

신체가 변형되고 하얀색의 피 칠갑을 했으니 얼마 못 가 죽으리라.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럴진대.

변형이 사라지고, 피부와 털 따위가 재생되며 원상으로 복구되어가는 중이다.

'재생되고 있어?'

아니, 단순한 원복조차도 아니었다.

"진정으로 신을 받았다."

"신의 축복이다."

······ 젊어지고 있었다.

얼굴의 주름이 사라지며 탱탱한 피부가 자리 잡았다.

흰색의 머리칼은 원래의 강렬한 노란색으로 되돌아갔다.

신의 축복.

북방에선 마나샤워라는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신의 축복을 받아 젊음을 되찾은 전사에 관한 이야기는 간간이 존재해왔다.

하물며 제국의 젊은 악마는 성지에서 신과 함께 나타났다.

검은색의 용.

모든 상황이, 저 악마를 '신'으로 만들고 있었다.

위대한 전사도, 성자도 아닌 그 이상의 존재로 말이다.

'성지의 끝에 도달한 자. 시련을 마주하여 돌파한 자만이 신을 얻는다.'

천 년전부터 전해져내려온 전설이다.

성지가 출현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을 마주하고자 성지에 도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구에서 죽었으며, 고작 40걸음 이상을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

그마저도 위대한 전사라고 추앙받는 판이다.

오직 성녀만이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성녀는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성지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전승되어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신화를 더욱 신화답게 만드는 게 바로 그녀의 역할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닌 모든 성녀가 그래왔다.

'신을 얻은 자는 파간을 치료하고 다스릴 권능을 지닌다······.'

천 년 동안 전승되어온 신화.

아무도 이룩한 적 없으나, 성지에 끝에 다다라 신을 얻은 자는 파간을 치료하고 다스릴 힘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성지에 들어가 힘을 얻은 파간의 생명은 극히 짧다.

길어야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죽는다.

위대한 전사라 칭해지는 이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마나로 말미암아 생명을 연장하지만 성지의 독은 그 마나를 소모하게 만드는 탓이다.

치료할 방법은 없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파간은 신격화되어 떠받들어지는 것이다.

유일한 희망, 언젠가는 신과 함께 나타날 '신성자'의 출현만을 기다리며.

신성자의 출현은 구원이었다.

머지않은 죽음을 기다릴뿐인 파간들에게 있어서, 자신을 치유할 권능을 지닌 신성자는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할 존재였다.

"신이시여."

"받들겠나이다."

전사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파간들도 조심스럽게 예를 다했다.

위대한 전사, 융 또한 마찬가지다.

결국 남은 건 성녀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라인하르트를 '악마'로 규정했던 그녀다.

'제국의 악마가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단 것이냐.'

천 년 동안 제국은 시시탐탐 북방을 노려왔다.

하물며 이번 전쟁에서 북방이 입은 타격은 적지 않은 수준이다.

수많은 전사가 죽었다. 마을의 아낙들도, 어린아이들도 무참하게 죽였다.

헌데 그 원흉인 제국의 인간을 신으로 받들란 말인가?

수십만의 희생은 그럼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싸워야한다.

죽여야한다.

제국을. 악마들을.

도망치는 놈들의 뒤를 잡아, 몰살시켜버릴 생각이었는데.

"······ 모시겠습니다."

굴욕이고, 굴종이지만.

모든 신의 증거를 들고 나온 저 자를 몰아낼 명분이 없다.

성녀는 이를 악물며 몸을 낮췄다.

성지에서 새로운 신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운이 좋았군.'

신이 된 순간, 나는 미소지었다.

크로프트의 '마나샤워'가 저들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 알 것 같았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자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다.

그 죽음을, 파간의 앞에서 나는 극복해보였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한 거라곤 방사성 물질을 체내에서 제거한 것뿐이지만, 덕분에 크로프트의 마나샤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방사성 물질은 돌연변이를 일으켜 힘을 주지만 가능성을 막는다.'

급격하게 체급을 불려 힘을 주기는 하지만, 이는 체내 나노머신에 변형을 일으켜 생명력을 소진시키는 것에 불과했다.

변형된 나노머신은 방사성 물질을 정화하고자 에너지를 전부 사용하게 되고, 머지않아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체내에 흡수된 나노머신은 복제되지 않는다.'

또 하나 알아낸 게 있다면 인간이 몸에 흡수한 나노머신은 대기의 나노머신과는 달리 '자가복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대기의 나노머신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복제하며 늘어난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에 흡수된 순간부터 복제를 멈추고 신체의 회복이나 기능향상 따위를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몸과 일체화한 나노머신이 전부 소모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노머신은 본래 한 가지 이상의 명령은 수행하지 못하는 게다.'

몸으로 들어온 다량의 방사성 물질.

그것을 없애기 위해 체내의 모든 나노머신이 움직인다.

그러니 방사성 물질을 폭식으로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자정작용이 일어나 회복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신이 되는 게 낫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저들의 신이 맞다.

어차피 이상한 놈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으니 내가 신이 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리라.

'가프가 아니라 용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참 웃기는 일이었다.

체내의 나노머신을 망가트려 힘을 주는 존재가 신이 되고, 정작 그 체계를 정상으로 되돌려줄 힘을 지닌 '가프'는 마왕으로 배척받았다.

애당초 용을 봉인해 방사능이 퍼지지 않도록 한 것도 가프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북방의 절반은 방사능에 절어 인간이 살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었을 터.

저들이 떠받들고 모셔야할 존재는 용이 아니라 가프인 것이다.

때마침 가프의 권능을 내가 이었으니, 원래 주인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나는 발을 들었다.

그리고.

"······!!"

꽈아악.

성녀의 머리를, 밟았다.

성녀의 전신이 모욕감에 떨렸지만 확실하게 누가 위인지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이후, 나는 성녀의 머리를 밟은 채 파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북방 전역에 알려라. 너희들의 신이 이곳에 있음을."

단순히 성지의 신이 된 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북벌을 막기 위해선 북방 전역에 내 존재를 알릴 필요가 있었다.

천 년 전, 가프의 출현을 제외하면 북방은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다.

설령 성지라고 해도 제대로 된 전사들을 출자하지 않고 눈치만 보는 중이었다.

'최정예의 전사들은 이곳 성지에 없다.'

위대한 전사, 융과 같은 파간이 아예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카를로스 대공이 빠르게 북방을 정벌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들이 현상을 깨닫고 뭉치기 전에 성지를 중심으로 각개격파하려는 것이다.

금지된 마약까지 사용해가며 몰아붙인 까닭이다.

허나 성지에서 신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모두가 간과하진 못할 터였다.

특히 수많은 파간들.

"너희들을 구원하고자 내가 찾아왔음을."

그들을 구원할 존재가 이곳에 있었으므로.

***

『북방의 군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꽈아악.

받아든 전서를, 카를로스 대공이 구겨쥐었다.

성지의 너머에 있는 북방의 거대 민족들. 그들의 주인은 스스로를 '군주'라 부르며 북방의 정통한 주인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일곱이고, 뭉치지만 않으면 각개격파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움직여 힘을 합치면 상황은 달라진다.

『황실에선 여전히 이야기가 없습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북방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계속 부정하고 있습니다.』

『황궁에 정령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정령의 주인을 찾기 위해 대륙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약의 공급이 미뤄지고······.』

화르륵!

모든 전서를 태워버렸다.

카를로스 대공의 두 눈엔 분노가 가득했다.

'핑계도 좋구나. 정령이라니.'

황실은 정령을 핑계로 제대로 된 답변조차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정령이라니. 사라진 신비가 하필 황궁에 왜 나타난단 말인가.

정령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핑곗거리는 잘도 만들어 내었다.

도리어 황제는 '제정신이 아닌 황태자가 북방으로 향했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논지로 대공을 압박하고 있었다.

황태자가 북방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 이상, 이곳에서 라인하르트를 죽여도 별 탈은 없겠으나 십 년 넘게 공들인 말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직접 제거하길 바라는 거냐, 데우스.'

정령은 핑계다. 북방에 있는 것도 황태자가 아니다.

만약 그런 존재가 있다면, 직접 죽여 기강을 세우라는 뜻이다.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라인하르트의 독단이라는 소리인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북방의 머저리들이 성지로 모여들고 있다. 왜?'

알 수 없다.

몇몇 군주들이 급히 움직이는 탓에, 제대로 정보를 취합할 시간도 없었다.

뭉치기 전에 공격해야하지만 약의 공급이 늦춰진 상황.

시간을 지연하면 불리한 건 이쪽이다.

"'데이몬'을 불러라."

결국 카를로스 대공은 최후의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

7군주, 샨은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검은 면사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이자가 신이었다.

성녀가 인정하고 위대한 전사 '융'의 보증을 받은 인물.

파간을 치료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신이 성지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 샨은 믿지 않았다.

성녀의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두렵지 않느냐?"

거대한 거구.

괴물 같은 얼굴로, 샨이 물었다.

샨은 '위대한 다섯 파간' 중에 일인이었다.

군주들 중에선 유일하게 파간이며 그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곱 군주 중 가장 빨리 성지에 도달한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파간이 된 이후로 '재생의 권리'를 잃었다.

다치면 재생되지 않는다.

벗겨진 피부와, 상처들은 도저히 그를 인간으로 보기 힘들게 만들었다.

북방의 사람들도 혐오스러워하는 괴물.

다른 파간들보다 더욱 끔찍한 형상!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조차 그를 보고 비명을 내질렀을 정도다.

그런 자신을 마주하는 자들은 반드시 겁을 먹고 떨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면사 위로 보이는 것은 입뿐이지만, 도리어 미소를 지어보였다.

"샨. 가족을 되찾고자 인간의 형상을 잃은 자여. 내가 너를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있느냐?"

"······!"

샨의 몸이 움찔거렸다.

노예상인으로부터 가족을 되찾고자 그는 파간이 됐다.

파간이 된 이후 노예상인들을 죽이고 가족을 되찾았지만,

그를 괴물이라 생각한 가족은 먹히기 전에 제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측근들도 모르는 사실이다.

위대한 전사들은 다른 파간들에 비해 수명이 긴 편이었다.

그래서 이후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일곱 번째 군주가 되었다.

대륙에서 흘러들어오는 노예상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다른 군주 중에는 그들과 알게모르게 유착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샨의 두 눈에 분노가 새겨졌다.

어디에도 말하지 않은 슬픔을 감히 입에 담는다.

어디서 신의 행색을 하려 드는 건가.

거짓이면 죽일 것이다. 자신을 농락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나를 치료해라. 네가 정말 신이라면, 이 빌어먹을 몸뚱아리 정도는 고칠 수 있을 테지."

< 파간의 구원자 > 끝

샨.

익숙한 얼굴이다.

북방의 마지막 군주이며 가장 오랜 시간 제국을 괴롭힌 파간이었다.

북벌이 끝나고 노예무역이 활성화되었을 때, 반군들과 힘을 합쳐 노예해방을 실천하던 인물.

'악연이라 해야겠지.'

수 없는 황제 암살 기도, 궁의 화재사건, 심지어 20만 백성들을 결집해 반란을 주도하던 주도자급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사벨라가 성녀로 추앙받으며 반군이 결성되자 가장 먼저 합류한 북방의 야인. 제국 전체에 만연한 '북방의 노예'들이 샨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샨은 반군의 숫자가 순식간에 불어나는데 크게 일조했다.

'워낙에 인상적인 얼굴이니.'

괴물도 울며 도망칠 얼굴.

시체가 되어 매달았을 때, 황실에선 '못생긴 빅풋'이라며 놀림감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한동안 궁에 유행어처럼 번졌던 말이다.

그러니 잊어먹을 리가 있나.

그에 대한 조사결과가 면밀하게 보고된 적도 있었다.

'북방의 군주 중 유일한 파간. 샨을 치료하면 대대적인 홍보가 될 터.'

시체가 되어 매달았을 때, 황실에선 '못생긴 빅풋'이라며 놀림감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북방의 군주 중 유일한 파간. 샨을 치료하면 대대적인 홍보가 될 터.'

한동안 궁에 유행어처럼 번졌던 말이다.

물론 완전한 치유는 아니다.

그러니 잊어먹을 리가 있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사성 물질을 폭식으로 제거하는 것뿐.

그에 대한 조사결과가 면밀하게 보고된 적도 있었다.

방사성 물질에 오랫동안 감염되어 있었다면 제거된다고 해도 체내의 나노머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위대한 전사라 칭송받는 파간이라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크로프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스로를 담금질한 인간의 나노머신은 그만큼 재생능력 또한 뛰어난 탓이다.

그러니 잊어먹을 리가 있나.

'북방의 군주 중 유일한 파간. 샨을 치료하면 대대적인 홍보가 될 터.'

그에 대한 조사결과가 면밀하게 보고된 적도 있었다.

물론 완전한 치유는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사성 물질을 폭식으로 제거하는 것뿐.

방사성 물질에 오랫동안 감염되어 있었다면 제거된다고 해도 체내의 나노머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체내의 나노머신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죽는다.

인간이 강하면, 나노머신도 강하다.

다른 파간보다 생존 확률도 더 높고 대대적인 홍보까지 된다면 치료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믿음이 부족하군."

저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래부터 악연이기도 했거니와.

제대로 된 '연기'를 하려면 무작정 수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믿음? 지금 믿음이라고 했나?"

감히 군주의 앞에서 믿음을 논하느냐 묻는다.

북방의 유일한 군주도 아니고, 정통성도 지니지 않은 '자칭 군주'의 위협 따위야 내겐 그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내 앞에서 군주임을 자처하려면 최소한 가프 정도는 되어야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너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허. 여태껏 북방에서 스스로를 '신'이라 칭한 이가 얼마나 많았는지 아느냐?"

스스로를 신의 사자, 신 따위로 포장한 인간은 숱하게 많았다.

하지만 모두 가짜였다.

그럴싸한 궤변이나, 그럴싸한 마법 따위로 속여왔을 뿐이었다.

"그럼 너는 이곳에 왜 온 거지?"

천하의 군주가.

북방에 존재하는 일곱 군주 중 한 명이라는 작자가.

고작 '소문' 따위에 직접 발걸음을 했다.

그만큼 급하다는 방증이다.

샨이 고개를 돌렸다.

'성녀.'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성녀, 그리고 융이 보증했기 때문이다.

성녀의 얼굴색은 어두웠다. 허나 부정하지 않는다. 강제적으로 진압당해 연극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융······.'

위대한 전사.

자신과 같은 5인의 전사 중 일인.

특히 융은 아무런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고고한 학처럼 혼자 지내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명예를 아는 자다.

약속과 입에 담은 말은 반드시 지키기로도 유명했다.

그런 융이, 지금 눈앞의 사기꾼을 온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

외세의 굴복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믿는 것이다.

전사들도, 다른 파간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눈앞의 남자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성지의 끝에 다다라, 신과 함께 나타난 남자.

파간의 구원자!

'다들 미쳐 돌아가는군.'

집단 최면이라도 걸린 모양이다.

어딜 봐서 이 연약해보이는 인간이 신이라는건가.

한주먹거리도 안 될 것 같은 인간이.

"······ 네가 정말 북방의 신이 되길 원한다면, 입증해야만 한다. 무력으로."

북방의 신은 강해야 한다.

약자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단순히 보여주기 식으로는 절대로 모두의 인정을,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북방의 사람들은 전사의 유전자를 타고났다.

그들에겐 강자를 따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전하."

그때였다.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금발의 남자.

옆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나섰다.

샨은 어이가 없어서 웃어보였다.

'북방민이 아니군. 게다가 약해보인다. 이런 졸속한 인간들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게냐?'

파간이 되며 극도로 예민해진 감각.

그 감각은 흐르는 마나조차 잡아낼 수 있었다.

헌데, 이 금발의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한없이 조촐했다.

약자라는 뜻이다.

대체 이런 것들에게 성녀와 융은 왜 속아넘어갔단 말인가.

필시 대륙에서 북방을 혼란케 하고자 보낸 사기꾼들이다.

"아니다, 크로프트. 제법 재밌겠구나."

크로프트를 만류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지에 들어가고 3일.

그 시간 동안 크로프트는 완치했다.

젊어졌는데 도리어 너무나 평범해졌다.

예전과 같은 예리함과 무거운 분위기가 아예 사라졌다.

하지만, 체내에 갈무리 된 나노머신의 양은,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가뜩이나 말도 안 되는 양을 지녔었는데 그 두 배라니.

'제로도 레벨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지.'

증강현실 속에서 크로프트의 레벨은 110수준으로 책정되었다.

마나샤워를 겪은 지금, 얼마나 높아졌을지 측정조차 어렵다.

당연히 크로프트가 나서면 샨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진정한 존중을 얻으려면 나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다.

성지의 성녀와 전사들은 내가 직접 성지를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크로프트를 치료하고, 이적을 발휘하는 모든 것을 보았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샨은 아니다.

샨을 비롯한 다른 군주들도 내게 '증명'을 원하겠지.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

도리어 대상이 샨인 게 나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싸우기라도 해보자는 건가? 그 증명을 위해?"

"나를 대상으로 이긴다면 다른 군주들도 믿음을 가질 것이다."

샨은 일곱 군주 중 유일한 파간이다.

심지어 위대한 전사라 칭송받는 다섯 파간 중 일인이었다.

'위대한 파간은 소드마스터에 버금간다.'

그 이상일 순 있어도, 이하이진 않다.

융이 크로우를 대상으로 목줄기를 씹어먹는 모습을 직접 봤다.

크로우는 카를로스 대공 휘하의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상위급.

그런 융과 비슷한 무력을 지닌 게 샨이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으나.

"좋다. 증명을 원한다면 증명을 해주지."

나도 마침 궁금했다.

'폭식이 용을 먹고 진화했다.'

지금은 내 피부 위에 늘러붙어있었다.

일종의 용의 피부를 얻은 셈이다.

공생하지만 지배되지는 않은 탓에 제로도 폭식의 성능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사용자를 지킨다는 것 정도만 확인했을 뿐이다.

어디까지가 한계이고,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 마침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 지금, 뭐 하자는 거냐?"

거대한 창을 든 샨이 인상을 구겼다.

나는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뒷짐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신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제대로 미친놈이었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샨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창을 들어, 정확히 나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쿠르릉!

밟은 땅에 균열이 생길 정도의 위력.

이 창을 정면에서 받아낸 자, 살아남지 못한다.

'투창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도 말이다.

대마법사도, 소드마스터라 불리는 제국의 기사들도 죄다 이 창에 맞고 죽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빈다면 멈춰주겠으나.

'떨지도 않는다니.'

하. 저 오만함이 결국 자신을 죽일 것이다.

쫘아악.

샨은 모든 마나를 긁어모아, 단번에 던져냈다.

신조차 죽일 수 있으리라 자신하는 투창.

꽈르르르르르!

땅이 울린다. 하늘이 떨렸다.

바람을 가르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창은 날아들었다.

그리고 지척에 이른 순간.

콰아아아아!

막혔다. 꿰뚫지 못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벽?'

보이지 않는 벽과 창이 충돌했다.

창과 충돌한 부위만이 촘촘한 그물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는데, 깊게 움푹 패이긴 했으나 그물망에 갇힌 물고기처럼 창 또한 빠져나가지 못하는 중이었다.

팅.

마침내, 추진력을 모두 잃은 창이 땅바닥에 볼품없이 떨어졌다.

"······."

전력을 다해 던져낸 창이다.

그것을 아무런 행동도 없이 막아냈다.

마법사라면 영창을 해야할텐데, 그런 기색마저도 없었다.

게다가 마법사가 펼쳐내는 장막이라고 해봐야 절대로 그의 투창을 막을 순 없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

불가해한 현상이다.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자신의 투창을 막아낼 줄이야.

정말로 신이 아니고선······.

'흠. 이 정도는 넉넉하게 막아내는군.'

모두가 넋을 놓았을 때, 나는 턱을 쓸었다.

새로 얻은 용의 피부, 절대 방어력을 자랑하는 갑옷.

샨의 투창까지 제스스로 막아낼 정도면 자다가 암살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다만, 이 용의 피부, 편의상 '용갑주'라 부르는 자율방어 기능은 에너지 소모가 막심한 게 문제였다.

[에너지 20%가 소모되었습니다.]

[자율방어기능, '용갑주'의 에너지 소모가 큽니다.]

또한, 용갑주가 실행될 땐 사이오닉 에너지도 방출할 수 없다.

투명한 거미줄 같은 입자를 통해 충격을 최소화하고 에너지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탓이다.

공방일체는 안 된다는 뜻인데, 그 대신 방어에 치중할 경우 무적의 방어력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폭식도 아무거나 먹지는 않아.'

창을 먹지 않은 건 의외였다.

방사능이나 용은 전부 먹어치운 주제에, 편식이라도 하는 건지.

"또 보여줄 게 남았나?"

"······ 내가 졌다."

최선을 다한 공격이 막혔다.

적당히 한 것이 아니었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날 죽여라. 내 목을 다른 군주에게 보여준다면, 그들도 믿겠지."

싸움에서 졌다.

전사의 싸움은 대상의 목숨을 취해야만 끝난다.

'재밌군.'

군주가 투창 한 번 막혔다고 목을 내놓는다.

참 단순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좋지만.

계속 싸웠다면 도리어 내가 졌을 것이다.

"나는 전사가 아니다. 네놈의 목을 잘라봐야 쓸데도 없고."

샨을 죽이면 다른 군주들의 반발만 심해진다.

그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방법은 많았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폭식의 나노머신이 흘러들어가 동시에 샨의 방사성 물질을 먹어치웠다.

다행이 체내 나노머신들이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약간의 변화를 창출해냈다.

"지금 뭘 하는······."

죽이려고 손을 댄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샨이, 의문을 표하다가 입을 닫았다.

"아······!"

재생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목의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고 있었다.

그것을 본 샨은 말문이 막혔다.

비록 미미한 수준이지만, 파간이 되며 '재생의 권리'를 잃었던 그에게 기적이 도래한 것이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샨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믿음을 키워라. 나에 대한 믿음이 너를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할 테니."

더욱 큰 믿음이 너를 온전하게 치료하리라.

샨의 두 눈동자가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

그는 파간이 된 것을, 성지에 들어간 것을 후회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면 성지에 들어가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날, 괴물이 된 날.

노예상인으로부터 가족들을 구했지만, 파간이 된 직후 그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다, 다가오지 마, 괴물아!"

"네놈에게 먹히느니 인간답게 죽겠어."

다른 파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얼굴과 몸.

그것을 본 가족들은, 어찌할 새도 없이 제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체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성지를 증오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곳을, 부수고 싶었다.

제국의 침략에도 성지를 외면한 건 그래서다.

"정말 끔찍하게 생겼군."

"떼쓰면 '빅풋'이 잡아간다!"

빅풋은 그를 칭하는 말이었다.

전설 속 설인. 보는 이로 하여금 비명을 지르게 만든다는 괴물.

그는 북방에서 우스운 농담처럼 화자되고 있었다. 실제로 보는 이들은 오줌을 지렸으며, 그래서 그는 평소에 검은 곰의 탈을 쓰고 다녔다.

'고통스럽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오죽하면 고통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파간이 있을 정도였다.

신은 힘을 줬지만, 나머지 모든 것들을 빼앗아갔다.

하지만 그는 군주가 되어 노예상인들을 쓸어버리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살고싶다.'

치료할 방법은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파간이 된 이상,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모든 파간들이 그렇게 말했다.

다들 죽음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있었다.

샨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는 사기꾼이 손을 얹는 그 순간.

'고통스럽지 않다.'

파간이 된 이후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혀온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재생이 된다.'

새살이 돋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오랜시간 파간들이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써도 불가능했던 기적.

그것이, 고작 손을 얹는 것만으로 된다고?

전신이 아니라 미비한 수준이지만.

"아."

눈앞이 흐려졌다.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돌연 듯이 찾아온 일말의 희망.

'다시 한 번 믿어보란 말이냐?'

성지의 신은 그의 모든 걸 빼앗아갔다.

그런데 그 신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잃은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아내와 자식들은 되찾을 수 없었다.

"자책하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다."

뭘 안다고.

네놈이.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지껄이는 거냐.

그런데, 힘이 빠진다.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도 몰라야 정상일 그 일을, 눈앞의 남자는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알면서도 말했다.

자책하지 말라니. 내 잘못이 아니라니.

이기적이다.

고작 말 몇 마디로 사람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았다.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살았다.

결국 그 마지막 말 한 마디에 샨은 왈칵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아."

그는 지금, 구원받았다.

< 용갑주 > 끝

황제, 데우스가 황좌에 앉아 이맛살을 구겼다.

눈앞에 놓인 서신들.

이십여 장의 이 서신은 모두 카를로스 대공 측으로부터 전달된 것이다.

쓰여진 글자는 전부 다르지만 내용은 하나로 귀결됐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북부로 보낸 저의가 무엇이냐?』

정령이 나타난 날 라인하르트는 황궁에서 모습을 감췄다.

제르민, 에디스, 그리고 크로프트와 함께 마차를 끌고 북방으로 향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 크로프트였다.

그림자의 총괄이며 자신의 충실한 기사인 그가, 말도 없이 라인하르트를 따라갔다.

대체 왜, 그것도 하필 한창 전쟁중인 북방으로 향했단 말인가.

'라인하르트. 거기서 뭘 하려는 것이냐?'

다시 광증이 돋지 않는 한 죽음만이 만연한 그곳에 발길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라는 특급 죄수동의 관리는 안 하고 북방에 간 저의를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알 수가 없음이었다.

분명한 건 모두의 예상 밖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건데.

카를로스와 라인하르트가 북방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겠다.

분명한 건 모두의 예상 밖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건데.

'북벌에 변수가 생겼다. 확인을 해야한다.'

카를로스와 라인하르트가 북방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알아내야겠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건 불가하다.

'북벌에 변수가 생겼다. 확인을 해야한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건 불가하다.

허나 믿을만한 사람을 보내서 북방의 정황을 직접 확인케 할 수는 있었다.

"1황자 라우넬을 조용히 불러오너라."

*

샨은 시발점이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순간, 지켜보던 파간들의 믿음은 더없이 굳건해졌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신위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자는 없었다.

기적을 몰고오는자.

그것을 신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이젠 나도 헷갈리는구나.'

며칠간 이어진 장대한 행렬을 보며 에디스는 혼란해하고 있었다.

군주들이 찾아오고, 파간들이 치료받으며 성지는 순식간에 활기가 돌았다.

다른 군주나 전사들은 몰라도 모든 파간은 라인하르트를 정말 신으로 여겼다.

겸허히 죽음을 기다릴뿐인 그들에게 라인하르트는 구원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전하께선 정말 신인건가?'

그런데 이젠 에디스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라인하르트가 연달아 보여주는 이적들은 단순히 '천재'라는 단어로 정의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탓이다.

정령 칼리번의 말마따나, 처음에는 정령왕과 계약했다고 여겼다.

정령왕과 계약하면 영창 없이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거라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지는 완전히 별개다.

저 저주받은 마나는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자신조차도 들어가면 백중백 죽을 것이다.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거침없이 성지에 들어갔다.

성지의 끝까지 도달해 용을 품고 나오는가하면 저주를 풀어내는 힘까지 생겼다.

'천재도, 정령왕의 계약자도 아니라면.'

그것은 그럼 신밖에 남지 않지 않나.

8서클의 대마법사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직접 라인하르트 황태자를 보게된다면 이 생각이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었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해요?"

"8대 신비······."

에디스는 정의내렸다.

마법사는 정의를 내리는 존재니까.

라인하르트는 새롭게 탄생한 8대 신비다.

카이첼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깨닫곤 폭소를 흘렸다.

"8대 신비요? 아, 설마 전하가?"

"크흠. 아니다. 그보다 너는 뭘 하고 있는 게냐?"

카이첼은 둥그런 구처럼 생긴 철제 장치 안으로 북방에서 구한 약재와 하얀색 가루 등을 집어넣어 배합하고 있었다.

저 동구런 철제 구는 연금술사들이 사용한다는 마도공학장치다.

주로 무언가를 합성할 때 사용하는데, 마법이 담긴 일종의 마도구였다.

"전하께서 지시한 일이 있어서 뭘 좀 만들고 있었어요. 마침 구상이 끝나서."

"'악마의 죽음'을 이용해서 만들 게 있다고?"

허나 에디스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악마의 죽음을 태우긴 했지만 전부 태우진 않았다.

상당한 양을 마차에 숨겨, 그대로 싣고 들어왔다.

라인하르트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전부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혹시나 누가 흡입이라도 할까 에디스는 마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 듯 카이첼이 그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카이첼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이 약은 순도가 너무 낮아요. 싸구려 연금술사가 이런 싸구려를 만드니까 별별 부작용이 나타나는 거라고요."

"아니······ 약의 순도를 높여서 뭘 어쩌려는 거냐?"

그러니까 지금 카이첼은 '악마의 죽음'이라 불리는 마약의 순도를 높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악마의 죽음을 악마의 초죽음으로 만들려는 건지.

게다가 카이첼은 진짜 연금술사다.

연금술사의 세계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였다.

최초로 현자의 돌까지 연성해낸, 진짜배기 말이다.

그녀가 마음먹고 손을 댄다면 연성해내지 못할 게 없었다.

"그거야 전 모르죠. 전하가 시키셔서 하는건데. 그보다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불순물을 제거하려면 북방에서 자생하는 약초 몇 개가 더 필요하거든요."

카이첼은 한 번 빠져들면 아무도 못 말린다.

그런 성격은 여전했지만, 에디스는 여전히 걱정이 밀려들었다.

'설마 마약을 사용해서 신성을 얻으시려는 겁니까?'

그런 곳도 있었다.

정신을 어지럽히고 환각을 보게만드는 약을 이용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교세를 넓힌 악의 교단.

악마의 죽음을 만들어낸 근원지!

제국이 악마의 죽음을 취급하는 자 모두를 사형에 처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그래서 에디스는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빌었다.

*

길고 둥그런 원목탁자의 주변으로 일곱 군주가 모두 모여있었다.

검은 곰의 탈을 쓴 샨, 그리고 나머지 여섯 군주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 뒤로 한 명씩 자신이 가장 믿는 전사들을 배치해 두었는데, 그 위용은 나조차도 제법 놀랄 정도였다.

'이만한 전력이 있으면서 가만히 있었다?'

바깥에 있는 전사들을 모두 합치면 능히 카를로스 대공을 대적할 수준이다.

이만한 저력이 있으면서 뭉치지 않았다.

성지가 공격당하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왜?

'다들 사이가 좋지는 않은 모양이군.'

적대적이다.

그들은 나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마땅히 지켜야할 장소에 모이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로.

내가 아니었다면 저들이 이곳에 모일 일 역시 없었을 것이다.

"파간의 치료가 가능하다지?"

1군주, 거대한 거구의 전사가 말했다.

북방에서 가장 큰 파벌을 지닌 자.

거친 북방의 남자다운 기백이었다.

파간이 아니지만, 순수 실력만으로도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존재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군주들은 모두 강했다.

파벌 내에서 가장 강한 자가 군주가 될 테니.

특출난 전사라고 모두 파간이 되는 건 아닌 듯싶었다.

하기야, 군주는 통치를 해야하는데 수명이 짧아지면 문제가 있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믿음만이 그들을 구원하노라."

"··· 헛소리는 됐다. 무엇을 원하냐? 금은보화? 여자? 부군주의 자리를 내어주마. 내게 협력해라."

파간을 치료한다는 것.

그것은 장기적으로 군주의 힘을 키우는 일이다.

파벌에 속한 파간들의 수명을 늘릴 수만 있다면, 파간을 만들어도 부작용을 없앨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강력한 군단이 완성되겠는가.

"내게 그것을 줄 권한이 네게 있는 건가?"

나는 나직이 물었다.

그러자 1군주가 호쾌하게 답했다.

"당연하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만 해라."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너는 군주가 아니지 않나."

"······."

1군주가 말을 잃었다.

나는 놈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그 뒤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네놈은 군주의 그릇이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약하군. 차라리 너의 뒤에 있는 자라면 모를까."

북방의 군주를 모두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품은 나노머신의 적고 많음은 확실하게 구분해낼 수 있었다.

지금 1군주라고 떠들고 있는 거구의 남자는, 다른 군주들에 비해 너무 약했다.

나노머신의 양도 형편없었고.

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전사는 이들 모두를 아우를 정도였다.

감히 비교가 안 된다.

강자의 법칙에 의해 군주가 정해진다면 저 뒤의 전사야말로 군주의 그릇이었다.

"······ 제법이군. 한 눈에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역시나.

이것도 일종의 시험이었다.

진짜 1군주가 자리에 앉은 거구의 전사에게 말했다.

"비켜라."

"죄, 죄송합니다. 군주님."

거구의 전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리에, 진짜 1군주가 새로이 앉았다.

얇상한 몸. 두터운 눈썹. 검은색 머리칼.

젊어보이지만, 젊지 않다.

'마나샤워.'

1군주는 마나샤워를 통해 젊어졌다.

저만한 양과 질의 나노머신이라면 달리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가 앉자 군주들도 혼란의 도가니였다.

"뭐?"

"······ 잠깐. 네가 1군주라고?"

"죽어서 자리를 계승한 게 아니었나?"

다들 몰랐나보다.

마나샤워를 겪고 젊어진 이후 죽은 걸로 해둔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저력은 에디스나 융 이상이다.

크로프트와 싸우면 좋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았다.

1군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보다시피, 내가 진짜 군주임은 내 직속의 둘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다. 적어도 네가 '신'을 자처할만한 눈을 지닌 건 인정하마."

여유가 있었다.

진정한 강자의 여유였다.

또한, 그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정말로 강했으니까.

"다시 시작하지."

다른 군주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눈빛.

오로지 나를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북방의 절반을 너에게 주마. 원한다면, 그 이상의 것도 쥐어주겠다."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는 듯.

다른 군주들이야 밀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그럴 힘이 있는 건 이해하지만.

'하.'

이제야 알겠다.

북방의 저력이 상당함에도 카를로스 대공에게 순식간에 밀려버렸던 이유.

7군주인 샨의 문제는 성지에 대한 증오심이었다면.

1군주의 문제는 바로 저 자신감이었다.

혼자 다 해쳐먹을 수 있다는 자신감.

카를로스는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는 저 미친 자신감!

'이 머저리같은 놈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바로 저 자신감을 부숴버리는 것이리라.

"크로프트."

나는 나직이 크로프트를 불렀다.

뒤에 서있던 그가 조용히 답했다.

"예."

"누가 이길 것 같은가?"

"제가 이기겠지요."

즉답이었다.

그래. 크로프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것이다.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이해한 1군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나보다 그가 강하다는 뜻인가?"

"제대로 들었군."

"······."

"크로프트는 나의 분신이며, 나의 사자다. 그의 승리는 나의 승리이고, 그의 패배는 나의 패배다. 그러니 크로프트를 이긴다면 너의 말을 들어주마."

"어이가 없군."

1군주가 크로프트를 바라봤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으나, 범상치 않은 기운이 갈무리되어있다는 건 느껴졌다.

자신과 같이 축복을 받은 자.

허나 1군주의 저력은 그 이상이었다.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고 자신했다.

"반대로 크로프트가 이기면 내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받아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 없나?"

조악한 도발이다.

하지만 1군주는 생각했다.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그저 싸워서 이기면 저 신성자를 얻을 수 있다.

이기기만 한다면 한참 남는 장사인 셈이다.

"······ 좋다. 그 도발, 받아주지."

< 대군주회의 > 끝

일촉즉발의 분위기.

전투가 벌어지는 그 어떤 전장보다도 회장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1군주가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그것을 지금까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그의 기량은 대단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북방의 전사 중 가장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1군주다.

그런 그가 '신의 축복'을 통해 젊어졌다면, 그 무력이 어느정도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천년 전 북방을 일통했다 전해진 마왕 가프에 비견될 수도 있지 않을까.

'최소 셋은 달려들어야 맞수. 세력전으로 가면 훨씬 유리하다.'

'저 야욕은 위험해. 여기서 제거하는 편이······.'

군주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경쟁자다.

다른 한 명이 앞서나가는 걸 가만히 두고보지 못한다.

자신의 모습을 군주회의에서 드러낸 이상, 1군주는 이곳에서 돌아간 즉시 정복전을 펼칠 것이다.

그들의 앞에서 '북방의 절반을 준다'느니 하는 오만방자한 말을 지껄이는 것만 보더라도 절대 가만히 있을 인간이 아니었다.

어찌해야할까.

만약, 저 1군주가 '신성자의 사자'를 이기고 신성자까지 취한다면?

"잠깐."

사슴탈을 쓴 2군주가 말했다.

"이곳은 군주회의다. 군주의 자격이 없는 이상 발언권은 없지."

2군주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로 인해 모이긴 했으나 엄밀히 말하면 나는 군주가 아닌 탓이다.

어찌해야할까.

"잠깐."

만약, 저 1군주가 '신성자의 사자'를 이기고 신성자까지 취한다면?

사슴탈을 쓴 2군주가 말했다.

그런 내가 이 군주회의에서 의견을 내어 다른 군주에게 반영시키는 건 그간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짓이었다.

'크로프트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군.'

억지이긴 했다.

애당초 군주회의로 소집을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은 저들이 원하는 게 있어서 모였을뿐, 어디까지나 서로의 필요에 의해 자리한 것이지 무언가의 논의를 위해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굳이 '군주회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크로프트의 패배.

크로프트가 지고, 내가 1군주에게 귀속되는 순간 일어날 여파를 상상한 것이리라.

2군주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성지에 나타나 '신'을 자처하는 자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모였다. 오직 군주만이 발언할 수 있으며 의결을 거치지 않은 결정에 대해선 무효로 처리한다."

3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2군주의 말이 옳다. 오래전부터 합의한 사항이지 않은가? 전쟁에서 '성지'에 간섭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군주회의'에서 의결되었던 것처럼."

오호라.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성지가 휑하니 비어버린 게 '군주회의'에서 결정난 사항이었다?

과반수가 동의하여 성지의 파병을 금지했다는 건데.

'의도가 느껴지는군.'

카를로스 대공이 손을 썼나?

확실한 건, 카를로스 대공이 이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높은 확률로 이 군주들 중에 그와 손이 닿은 이가 있다.

카를로스 대공을 뒷배로 둔 채 전쟁을 북방에 불리하게 끌고가려는 자가 있었다.

일단 샨은 아니다. 성지를 지키던 이들도 아니다.

'조용히 성지에 파병을 보낸 군주도 있었을 터.'

카를로스 대공에게 성지는 반드시 취해야할 보물이다.

그러니, 대공과 손을 잡은 이라면 성지를 수수방관했겠지.

누굴까. 누가 범인일까.

2군주가 계속해서 말했다.

"하물며 저 '신'을 자처하는 자, 얼굴조차 가린 채 우리의 회의에 참석했다. 고작 성녀나 융의 보장 따위로 우리 군주의 자격을 대신한다는 건 아닐 테지?"

"······ 내가 보장한다."

그때였다.

7군주, 샨이 검은 곰의 탈을 쓴 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위대한 전사이며 동시에 군주인 샨의 보장이다.

성녀도, 파간도 아닌, 군주가 보장했으니 무시할 수 없다.

다른 군주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7군주······."

"군주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진대. 너무 나서는군."

가장 마지막에 군주가 된 자.

하지만 샨은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다.

"그가 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주'로서의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7군주, 미친 건가?"

2군주의 물음에, 샨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나를 이겼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뒷짐만 쥔 채로."

"······!"

7군주를 이겼다.

그것도 뒷짐을 쥔 채로?

7군주 샨의 주특기는 투창이다.

그의 투창은 수km 밖에 있는 물체도 정확히 가격한다.

그 파괴력은 산을 가를 정도이며 정면에서 맞은 이들은 형체도 없이 박살난다.

감히 투창의 신이라 할 수 있는 샨이 패배를 선언했다.

공식선상에서의 선언이니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얼마나 강하기에?'

'정말로 성지의 끝에 도달할 수준의 무력도 지녔단 건가?'

성지는 힘을 준다.

힘이 있던 자는, 더 깊숙하게 들어가 더 큰 힘을 얻는다.

하지만 대개의 군주들은 성지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성지에서 힘을 얻으면 성장이 멈추기 때문이다.

수명도 줄어드는데다, 파간의 고통은 너무나도 유명했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존재가 파간이다. 그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것도 그들이 항상 '고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신을 자처하는 자가,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그만한 힘을 지녀서 성지의 끝에 다다랐다면?

'1군주보다 더 강하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내심 긴장했다.

파간을 치료하는 권능과 압도적인 힘까지 지녔다.

게다가 성지의 전사들과 파간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모든 자격에 합당하다.

군주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7군주가 오른손을 들어 선언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8군주의 자리를 추천하는 바다."

군주가 되는 방법은 다른 군주의 추천이 있어야만 한다.

이후 군주회의에서 과반수의 투표를 받아야, 군주가 된다.

난잡한 북방을 정리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런 제도가 없었다면 수많은 세력들이 일어나 왕을 자처했을 것이다.

일종의 공화정같은 상태.

지금 군주가 되기 위해선 이곳에 모인 일곱 명 중 네 명이 동의해야만 한다.

무력의 강함이나 세력의 크기와는 관계 없이.

2군주가 반대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여덟 번째 군주로 앉히자는 말이냐?"

"출신성분이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너도 사슴탈을 썼고, 나 또한 검은 곰의 탈을 썼듯이, 우리의 자리와 자격은 '얼굴'로 대변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잠시 말을 쉰 샨이 이어서 이야기했다.

"파간을 치료하고, 성지의 끝에 도달한 존재다. 우리에게 득이 되면 되었지, 해를 끼칠만한 존재로 생각되진 않는다."

자격은 충분하다.

그리고 군주의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 증명이다.

북방에 있는 수많은 민족들.

그들의 경계를 지우고자, 군주는 탈을 쓰고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짐승군주'다.

군주마다 특정한 짐승의 가호를 받는다.

2군주는 사슴군주라고도 불렸으며, 7군주 샨은 검은 곰군주라는 별명이 붙었다.

만약 8군주가 나타난다면 그는 이렇게 불릴 것이다.

'용군주.'

성지의 끝에서 수호신 용과 함께 세상에 나타난 자.

용군주 외에 따로 붙을 이름은 없어보였다.

'좋은 생각이군.'

탈로 자격을 대변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제로.'

[예, 마스터.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용'의 얼굴을 축소해 홀로그램으로 입히는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폭식이 먹어치운 '용'은 제로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된 상태였다.

그리고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제로는 홀로그램을 띄울 수 있었다.

이 또한 폭식과의 공생관계 중에 생겨난 능력인 듯싶었다.

"······ 음?"

"용의 얼굴이······!"

군주들이 나를 보며 웅성거렸다.

용의 얼굴이 축소되어 투구처럼 씌여있었다.

검은 용, 천년 전 가프와 싸웠던 형태 그대로.

마법이 아니다. 그 정도는 모두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러니 정말 신의 기척처럼 보일 것이다.

샨이 거수했다.

"여덟 번째, '용군주'의 자리에 그가 앉는 것을 찬성하는 군주는 손을 들어 가결하도록 하지."

우선 한 표.

"어쩔 수 없군."

1군주가 손을 들었다.

나를 군주의 자리에 앉혀야만 대등한 상태에서 결투가 가능했다.

모두의 입회 하에 진행되어야만 그 효력이 발효되는 것이다.

이로써 두표.

아직 두표가 부족하다.

2군주는 아예 팔짱을 꼈다.

3군주도 고개를 저었다.

자칭 '신'에 대한 처분을 어찌할지 의논하고자 모인 자리인데, 그를 군주로 세우는 건 어불성설 말도 안 될 일이었다.

"재밌네. 나는 찬성이다."

4군주가 찬성했다.

"··· 불가."

5군주는 반대표를 던졌다.

마지막, 6군주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전신에 호랑이 같은 문신을 한 6군주가 나를 쳐다봤다.

짐승같은 눈.

호의인지, 불신인지 알 수 없는 눈빛.

잠시 후 그는 성호를 그리곤 합장했다.

"성지의 수호신이시여. 환영하는 바이오."

이로써 4표.

여덟 번째 군주, 용군주의 탄생이었다.

*

다짜고짜 저들이 나를 신으로 떠받드리란 생각은 애당초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대등한 관계, 혹은 그 이상으로 나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 번 자격을 쥐어줬으니 그 이상으로 가는 길은 훨씬 편하리라.

8군주? 내가 고작 그런 자리에 만족할 리 없지 않나.

'반대하는 자 중에 첩자가 있다.'

2, 3, 5군주.

저 셋 중 한 명, 혹은 그 이상이 카를로스 대공과 손을 잡았다.

새로운 군주가 성지에서 나타났다.

그야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이전 성지의 파병 금지 조항을 주장할 때 누가 주장하고 찬성했는지만 알아내 대조하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터.

남은 건 하나.

1군주와의 한판승부뿐.

모든 군주와 병사들의 입회 하에, 승부는 치러졌다.

"안색이 어둡군, 크로프트. 자신이 없느냐?"

결투가 치러지기 전 나는 크로프트를 향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안색은 회복되고 나서도 계속해서 어두웠다.

회의장 안에선 자신있게 답했지만 1군주는 어쨌든 북방 최강의 전사다.

마나샤워를 겪으며 얼마나 강해졌을지 가늠이 안 되는.

크로프트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저······."

크로프트는 고개를 저었다.

결투에 대한 걱정 때문에 표정이 어두운 건 아니었다.

"말 못할 고민이라도 있나보군. 말해봐라."

"전하.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말 해보라 하였다."

크로프트가 정색하며 내게 시선을 던졌다.

예전이라면 이런 고민 따위, 내게 아예 내색조차도 안했을 테지만.

지금의 나와 크로프트는 전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가까운 관계가 됐다.

그래서 나도 정색하며 고민이 있다면 털어놓을 것을 명했다.

곧이어 크로프트가 생각을 정리한 듯 속내를 털어놓았다.

"··· '위업'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위업이라니.

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신들의 심부름 같은 거라고 들었다. 그건 왜 묻는 것이냐?"

"성지 안에서 정말 용을 만나셨습니까?"

"그래. 만났다."

"혹, 그 용이 '위업'을 처리하는 대상입니까?"

"······ 맞다."

이건 나도 성지 끝에 도달하고서야 알게 된 진실이었다.

그것을 크로프트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 세상에 9서클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군요."

마지막 9서클 대마법사는 천 년 전에나 존재했다.

이후 천 년 동안 9서클에 도달한 인간은 없었다.

크로프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신의 비밀을 엿본자는 모두 처분이 된다······."

그의 눈빛.

왠지 익숙하다.

너무나도 익숙했다.

과거, 궁을 떠나기 전, 결심을 했을 때의 그 눈빛이었다.

'설마?'

신의 비밀이란 말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간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문득 바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행위는 '위업'으로 선정될 빌미가 될 수 있다고.

"크로프트. 위업으로 선택되었느냐?"

"그렇습니다, 전하."

이.

빌어먹을.

혹시나 했다.

이번에 마나샤워를 겪으며, 극의를 본 크로프트가 위업으로 선정됐다는 말이다.

'과거에 궁을 떠난 것도 그럼?'

크로프트는 경계에 있었다.

시간만 주어지면 충분히 벽을 넘을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과거 궁을 떠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혹시 '위업'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라면?

······ 그래서 밖에서 조용히 용과 싸우고 죽은 것이라면?

비약일 수도 있다.

허나 크로프트의 성격상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크로프트가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그 위업 때문에 제가 떠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는다. 그딴 것에 그대가 패배하리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으니까."

"······ 빠르게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전하."

크로프트가 고개를 숙이며 결투를 위해 발을 옮겼다.

1군주의 자신만만한 얼굴.

벌써부터 황금빛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했다.

빠드득.

'절대로 그렇게 두지 않는다.'

이를 갈았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기분은.

이런 거지 같은 분노는.

나의 것을 건드린 대가는 크다.

그게 누구든, 설령 신이라 할지라도.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할 것이다.

< 대군주회의(2) > 끝

성지의 전사들이 수근거렸다.

"여덟 번째 군주라고?"

"용군주라는데?"

여덟 번째 용군주의 출현!

군주회의의 결과를 발표하자, 파간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이 어떻게 인간과 같은 위치에 선다는 것이냐?"

"어리석구나. 어리석어."

"전사를, 파간을 우롱하는 짓이다."

지난 세월 파간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북방을, 성지를, 사람들을 수호하고자 그들은 죽음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들이라고 죽고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희망이 제발로 찾아왔음에도 저 군주를 자처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시선에서 신을 해석하려고 들었다.

입장의 차이다.

그들은 파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7군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죽음을 강요받은 적이 없는 탓이다.

"너희들은 모른다. 어둠밖에 없는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을."

군주의 입장에선 파간 역시 쓰고 버리는 말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런 선택을 내린 것이겠지.

"······ 살고싶다. 나 역시도, 그저 살고싶다."

"파간들이여! 신을 따르라!"

결국 억눌러진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졌다.

성지의 모든 파간이 8군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7군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죽음을 강요받은 적이 없는 탓이다.

군주의 입장에선 파간 역시 쓰고 버리는 말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런 선택을 내린 것이겠지.

"너희들은 모른다. 어둠밖에 없는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기분을."

"······ 살고싶다. 나 역시도, 그저 살고싶다."

그 숫자가 무려 200.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지만 다른 군주 휘하의 파간도 많았다.

그들은 혼란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지의 파간들은 직접 기적을 목도했다.

그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파간은 신성한 존재다.

신성한 존재의 희망이 그저 같은 '군주'로 치환될 수는 없는 것이다.

파간이 따른다면, 그것은 신이다.

신이어야만 했다.

그때, 7군주가 검은 곰의 탈을 벗었다.

"··· 샨?"

"빅풋의 얼굴이?"

샨의 얼굴은 유명하다. 그의 끔찍한 몰골은 북방에서도 '빅풋'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시에 그가 파간이 되며 재생의 권리를 잃은 사실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샨의 얼굴이, 딱지로 가득하던 그의 얼굴에, 새살이 돋고 있었다.

"재생되고 있다."

"허, 재생의 권리를 잃은 것 아니었나?"

"정말 파간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산증인이 눈앞에 있었다.

신성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파간이 치유되고 있다.

그것을 본 모든 군주 휘하의 파간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짧으면 며칠, 길어야 1, 2년을 살다 죽는 게 파간이다.

그런데 살 수 있단다.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신성한 존재라는 의식 하에 전쟁병기처럼 쓰다 버려지는 게 파간의 인생이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은 당연한 게 아님에도 희생을 강요받았다.

그런 파간의 동요는, 다른 전사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만-."

쿠우우웅!

1군주가 발을 굴렀다.

지면이 갈리며 지진이 난 듯 진동했다.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파간의 눈에 깃든 불신은 지우지 못했다.

'······ 반드시 이겨야겠군.'

1군주는 이게 단순히 신성자와 자신의 싸움이 아님을 직감했다.

이 대결의 결과에 따라 모든 게 변할 것이다.

군주의 입장에서 파간은 그저 인간병기다.

병기는 생각이라는 걸 하면 안 된다.

추앙받으면 받는대로, 스스로를 내던지며 적들을 소탕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신성자가 나타나며 파간에게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저들에게 생각이라는 걸 하게 만들었다.

물론,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찍어누른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저 신의 사자를 짖밟는다면 이 소란은 가라앉을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밝혀낸다면 파간들도 계속해서 난리를 피우진 못하리라.

어차피 이기면 신성자를 취할 수 있다.

신성자를 취해 다른 파간들도 함께 끌어들이는 것이다.

유일무이한 군주, 진정한 제왕으로 거듭나는 길!

'축복을 받았다고 하여, 같은 수준이라 생각하진 마라.'

마나의 축복.

경계를 넘고 벽을 부순 자만이 도달한다는 영역이다.

신체가 재구성되며 더욱 양질의 마나를 갈무리하게 되는 경지.

그는 두 번이나 겪었다.

눈앞의 남자, 크로프트는 기껏해야 한 번 겪었을 것이다.

'제법 강해보인다만.'

다른 이들은 몰라도 1군주는 확실히 크로프트의 범상치 않은 기운을 읽었다.

허나 그뿐이었다.

1군주는 그저 기다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제국의 개들과 군주들이 치고 받고 싸우며 서로 자멸하기를.

결국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스으읍.

샨이 창을 들었다.

샨이 자세를 잡고, 투창을 하였다.

콰르릉!

정확히 1군주와 크로프트의 중심부에 창이 꽂힌 순간.

스팟!

폭발하듯 지면을 박차며 1군주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외부와 내부의 마나를 진동하고 폭발시켜 번개와 같은 움직임을 보이는 것.

제아무리 고수라도 모든 걸 담아낸 그의 일격은 막을 수 없다.

길게 끄는 것도 사치다.

찍어누르기 위해 이 한 합에 끝낸다.

지면을 박찬 소리가 채 들려오기도 전에 목전에 도달한 1군주가, 검을 들어 사선으로 크로프트를 베어내려고 했다.

"흡······!"

하지만, 검은 닿지 않았다.

아니, 1군주는 본능적으로 검과 몸을 틀어 자리를 회피했다.

크로프트의 뒤에서 겨우 멈춰선 1군주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피했다고?'

순간적으로 죽음을 감지하고 몸이 움직였다.

정작 크로프트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다.

착오인가?

'그럴 리가.'

극한까지 담금질한 감각이다. 야생조차 뛰어넘는 초(超)감각이 틀릴 리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찰나의 순간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뜻이다.

1군주의 전신에 푸른색의 오러가 덧씌워졌다.

전신의 근육을 팽창시켜 그대로 검을 바닥에 박아넣었다.

쿠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

유형화한 오러가 지면을 타고 크로프트가 있는 영역에 광범위하게 솟아올랐다.

'용오름'이다.

반경 수백미터를 집어삼키며 도망칠 장소 자체를 없애버린다. 설령 피하더라도 1군주의 광속의 검을 빗겨갈순 없다.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로 용오름에 먹혀 죽을 셈이냐?'

용오름은 절대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는 그만의 비기.

오러를 길게 늘어트려 지면과 함께 폭사시키는 수는 다른 소드마스터는 엄두도 내지 못할 기예였다.

예외는 없다.

저 안에 들어가 살아나올 순 없었다.

"괴물이냐······?"

1군주가 중얼거렸다.

지금, 예외가 생겼다.

태양과 같이 빛나는 오러.

전신에 넘실거리는 저 오러의 양은 태양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용오름을 막아낼 수준의 양이라니.

'대체 얼마나 오러가 많으면.'

마나를 정제한 게 오러다.

효율 면에서 일반 마나를 사용하는 것보다 나쁜 건 당연하다.

게다가 공격보다 방어를 하는데 더 많은 오러가 들어간다.

저런식으로 뽑아 쓸 수 있다는 건 상상을 초월할만큼 많다는 뜻.

1군주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금어졌다.

'재밌군.'

재밌다. 저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스르르.

크로프트가 검을 뽑았다.

1군주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잔재주로 끝낼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듯싶었다.

오러의 양에서 절대적으로 차이가 난다면, 실력으로 찍어누르면 된다.

이윽고, 빛과 같이 쇄도하며 1군주와 크로프트가 동시에 움직였다.

*

[녹화를 종료합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극의에 다다른 두 괴물의 싸움을 온전하게 담는데 성공한 것이다.

물론 지금당장 내가 따라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보고,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가파르게 상승하게 되어있었다.

'훌륭하군.'

내 눈에 보인 건 십합(十合) 정도였다.

그나마 뇌의 동시활성 영역을 넓혀서 이 정도였지, 다른 전사들은 검을 휘두르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한 듯했다.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느덧 쓰러진 1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1군주가 진 거 같은데?"

"허."

그나마 본질을 파악한 파간들만이 놀라워할 따름이었다.

하늘 위의 하늘. 두 하늘이 부딪혔다.

[정확히 76번 검이 부딪혔습니다. 검을 휘두른 횟수는 266회입니다.]

이건 제대로 복기를 해봐야겠다.

그간 현실과 증강현실을 오가며 강해졌다 생각했는데, 둘의 싸움을 보니 아직 멀었다.

"······."

1군주는 믿기지 않는단 눈초리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졌다고?'

무적이다.

최강이었다.

북방의 어느 전사도 자신을 이길 순 없으리라.

아니, 대륙 전체를 따져봐도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데 졌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변명할 틈도 없이 깨져버렸다.

'저놈은 뭐냐. 정말 인간이냐?'

반백년이 넘게 검을 휘둘렀다.

천재적인 재능, 압도적인 노력으로 보낸 시간이었건만.

'내가 넘지 못한 벽을 넘었다. 궁극의 벽을.'

무(武)는 끝이 없다.

궁극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지만, 그 위에 또 다른 세계가 있었다.

저자는 분명히 자신이 보지 못하고 넘지 못한 벽을 넘었을 것이다.

크게 차이나지는 않으나, 그 미세한 차이마저도 자신이 있는 곳에서는 무한대와 같기에.

"하!"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하하하!"

오를 곳이 또 있음에 그는 광소를 터트렸다.

아무래도 다시 수련을 해야겠다.

저 영역에 닿을 때까지 다시.

'어리석었군. 내가.'

동시에 파간들의 동요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저만한 강자를 수하로 부리는 존재를, 같은 군주로 취급해버렸다.

내기에서 졌으니 자신을 부릴 권한까지 갖게 됐다.

이제 그가 같은 군주의 선상에서 존재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 신이라 부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먼지를 털고 일어나, 1군주가 선언했다.

"내가 졌다. 결과에 승복하며, 나는 8군주에게 복종할 것을 선언한다."

"······!"

모든 군주와 전사, 파간들이 보는 장소다.

성녀 또한 있으니 이 선언은 절대로 무를 수 없다.

무르게 되면 모든 이들이 1군주를 떠날 것이기에, 그는 더 이상 군주라 불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안을 1군주는 담담하게 쏟아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새롭게 바라건대, 나는 8군주를 '신성'이며 동시에 '대군주'의 자리에 올리는 안건을 건의하는 바다. 지금 이곳에서. 반대하는 자는 손을 들어라."

대군주!

그 이름에 모두가 전율했다.

천 년 전 마왕 가프만이, 북방을 정벌해 대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단 한 명도 대군주의 자리에 오른 이는 없다.

대군주가 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였다.

가프처럼 정복하던가, 모든 세력들의 동의를 얻던가.

지금 1군주는 후자의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손을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우선 파간이 문제였다.

모든 파간들이 직간접적으로 저 신성자를 따르고 있다.

억지로 같은 군주의 자리에 얽메어뒀건만, 대군주가 되면 정말 신처럼 떠받들어 질 것이다.

허나 1군주가 합류했다.

7군주도, 심지어 1군주를 이긴 저 강력한 사자도 마음에 걸린다.

쉽사리 손을 들 수 있을 리가 없다.

1군주는 일부러 찬성자를 골라내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하는 자를 먼저 골라내는 방식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각인효과'를 위해서다.

지금 손을 든 자, 신에 반하는 의사를 지닌 군주라고.

성지를 벗어나기도 전에 공격받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바람을 탔다.

이 바람은, 결코 거스를 수 없다.

"모두가 찬성한 걸로 알겠다. 8군주. 아니, 이제 대신성군주라고 불러야되나?"

신성이며 동시에 대군주인 자.

그런 칭호에 관해선 전해내려온 게 없었다.

1군주가 무릎을 꿇었다.

"신이시여. 저희를 이끌어주시옵소서."

"신이시여!"

하나, 둘 무릎을 꿇는다.

순식간에 모든 이가 내게 경배했다.

이어 시선을 던지며 묘한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수상소감이라도 말해보라는 건가?

멋쩍은 일이지만 당황스럽진 않다.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저 시선들은, 나로서도 익숙하지 않은 종류였다.

기대감.

내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 저런 눈빛을 보내오는 자는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수많은 이들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기는 나도 처음이다.

묘한 기분이다.

하지만 알겠다.

이런 기분이다.

내가 바랐던, 바라왔던, 정점에 오르는 기분.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가장 강한 순간이다.

하여 첫 마디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신이 된 자.

이제는 모두를 이끌 자격마저 쥐었다.

전무후무.

그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신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런 이의 첫마디는 북방 전역을 움직이게 될 터.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믿는 자는 살 것이다."

단 한 마디.

동시에 파간들이 몸을 떨었다.

살 수 있다는 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희망이 보였으니까.

정말로 살아났으니까.

잃었던 것을, 포기했던 것을, 이제는 놓지 않아도 된다.

파간의 떨림은 모든 전사에게 전염됐다. 이는 곧 북방 전역으로 퍼지리라.

천 년만에 대군주가 탄생했다.

그들의 신이, 이곳에 있었다.

모두가 하나 될 구실로는 차고 넘쳤다.

*

성지에서 목격된 용오름을 시작으로 모든 게 변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주목할 점은 경계해야할 존재가 탄생했다는 것이었다.

'대신성군주가 나타났다?'

대군주면 대군주지, 대신성군주는 뭐란 말인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대체 누가?

변수는 없었다. 계산은 완벽했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제3의 인물이 나타났다.

북방을 통합할 대군주이며 신이라니!

'누구냐, 네놈은.'

카를로스 대공의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 전무후무한 존재 (수정) > 끝

1황자 라우넬이 산맥을 넘어 북방에 도착했다.

은밀하게 움직이라는 황제 데우스의 명령에 따라, 최소한의 인원만 대동한 채 먼 길을 떠나온 것이다.

'황제폐하께서 거는 기대가 크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데우스가 이만한 중임을 맡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장의 한복판. 태풍과도 같은 곳에 황자들을 보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은밀하게 알아보거라.

아무도 모르게 정보를 수집하라는 뜻이다.

본래라면 그림자들이 처리해야할 문제이나, 그조차 여의치 않다는 의미였다.

데우스가 전장으로 황자를 보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방증일 터.

'라인하르트와 크로프트가 북방으로 향했다.'

황제 데우스가 북방으로 자신을 보낸 이유.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라우넬은 이미 알고 있었다.

둘의 행방을 찾고, 카를로스 대공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서이리라.

라우넬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북방을 돌았다.

중립의 도시들을 지나며 정보를 수집했다.

이후 프렐류드의 숲에 도착했을 때 라우넬은 확신했다.

'둘 다 이곳에 왔다. 브리저튼 후작을 처형하고, 악마의 죽음을 태웠어.'

악마의 죽음!

다루는 모든 이는 사형에 처하는 죽음의 마약.

그 이름을 듣고 라우넬은 주먹을 쥐어보였다.

브리저튼 후작이 혼자 저지른 짓일 리 만무하다.

분명히 카를로스 대공이 배후에 있다.

그러나 이는 황실에 보고된 바 없는 내용이다.

'오만방자한놈. 반드시 죗값을 치루게 만들어주마.'

다른 이라면 문제삼지 못하겠지만 라우넬은 달랐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기필코 카를로스 대공에게 죗값을 물을 것이다.

제아무리 그의 힘이 강력하다 할지언정, 지엄한 제국의 법은 모든 제국민 위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넘어갈 수 없었다.

"브리저튼 후작을 처형만 하고 끝냈느냐? 허튼 짓을 하진 않았고?"

"다정한 분이셨어요. 위대한 영혼의 인도자셨지요."

"그럴 리가 없다. 잘못본 거 아닌가?"

라인하르트에 대해 묻자 프렐류드의 숲 사람들은 한결같은 대답만 내뱉었다.

모두 칭찬일색이었다.

하지만 라우넬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라인하르트가 다정하다?'

형제지만 단 한 번도 라우넬은 라인하르트를 형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광증을 핑계로 그는 모든 걸 가졌다.

황태자의 자리도, 아버지의 관심조차도.

당연히 라인하르트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의 소유자였다.

미쳐 날뛸 때의 눈은 악귀와도 같다.

평상시에도 활화산 같은 존재가 바로 라인하르트였다.

그런 그를 어떻게 형제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인간이다.

아니, 같은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운 괴물이었다.

그런데 다정스러웠다니?

또 다른 이야기도 들었다.

"아모라와 아피르를 구해주셨어요. 아이들이 많이 보고싶어하는데······ 어딜 가신 건지. 다시 볼 수는 있는 건지."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라인하르트는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저었다.

무언가의 착오이리라. 그냥 다른 사람이겠지.

라우넬의 목표는 라인하르트가 북방에서 허튼 짓을 하기 전에 제국으로 압송하는 것이었다.

예상 경로를 따라 추적을 시작했다.

"성지에서 신이 탄생하셨다!"

"모두 성지로 향하자!"

머지않아 라우넬은 거대한 행렬을 목격했다.

순례길.

모든 북방민들이 성지로 향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은 그야말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천 년만에 나타난 대군주가 신이라니. 확인해봐야겠군.'

라우넬은 그 행렬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

대군주회의를 통해 치료할 파간을 선별했다.

이후 생명이 경각에 달한 파간을 순서로 방사성 물질을 제거해나갔다.

물론 100% 모두 살아날 순 없었다.

평균적인 생존률은 50% 안팎. 돌연변이의 원인을 제거할 뿐 나노머신의 재생능력까지 더해주지는 못하는 탓이다.

죽으면 죽는 대로 '믿음이 부족해서다'라는 핑계를 둘러대면 그만이었으니.

허나 그 절반의 생존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 할만했다.

"늦었지만 축하해요. 성지의 신비를 먹어치우고 북방의 신이 되신걸."

늦은 저녁.

방 안으로 카이첼이 들어왔다.

그간 착실하게 에디스의 손녀로 지냈지만, 그 속내는 현자의 돌에 깃든 바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카이첼이 아니라 바알로서 나를 대하고 있었다.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카이첼이 말했다.

"자, 선물이에요."

그녀의 손이 턱을 쓸며 이내 가슴팍으로 내려왔다.

부드러운 손길로 희롱하듯 손가락을 돌려댄다.

유혹이라도 하는 것 같지만 단순한 장난이다.

인간인 라인하르트가 그녀에게 반응하는지 보고자하는 것이다.

내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재미없다는 듯 손을 뗀 그녀가 이번엔 작은 물병 하나를 건넸다.

이게 진짜 선물이다.

"성공했나보군."

"순도 99%의 악마의 죽음을 섞었어요. 기존의 것들은 기껏해야 70%정도더군요."

물병 안에는 푸른색의 걸쭉한 용액이 가득차있었다.

악마의 죽음을 고농도로 섞은 물건. 자칫 잘못 마시면 죽을 수도 있다.

"수고했다."

"설마 그 한 마디가 끝이에요? 밤잠 설쳐가며 만든 저와 할아버지의 노력이?"

나는 이래보여도 꽤 놀라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순도를 거의 끝까지 끌어올렸다.

궁의 연금술사도 해내지 못할 고난도의 기술일진대.

"돌아가면 원하는만큼 황금을 주도록 하지."

내가 운용할 수 있는 금이 얼마나 있는지 잠시 계산해보았다.

별다른 재산은 없지만, 품위유지를 위해 황실에서 운용하는 금고가 따로 존재했다.

반강제로 궁에 칩거하여 돈 쓸일이 없었으니 꽤 쌓여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어지간한 공국의 1년 치 예산쯤은 되지 않을까?

눈길을 돌리자, 카이첼은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이었다.

"친구 없죠?"

"있다."

"개? 고양이? 하여튼 사람은 아닐 거고."

"이사벨라. 사람이다."

"세상에. 이제는 상상 속의 친구까지······."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황금은 필요 없어요. 대신 저라도 친구가 되어드려야겠네요."

카이첼이 씽긋 미소지었다.

이것도 역시, 계산된 미소다.

'진짜로 이기고 돌아올 줄이야.'

성지 안에 있던 건 평범한 에픽이 아니었다.

굉장히 강력한, 태고의 에픽이라 불릴 수준의 폭군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정면으로 돌파하고 돌아왔다.

심지어 먹어치운 것 같다.

'정체가 뭘까?'

현자의 돌.

말마따나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긴 '진리의 도서관'을 그녀는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런 에픽은 도서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뭐라고 한 마디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기능을 담고 있는 에픽. 전지전능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만능이었다.

어디가 한계인지, 아니면 한계가 없는 건지.

궁금했다.

'재밌기도 하고.'

에픽도 에픽이지만, 저 인간 자체도 굉장히 흥미가 깊었다.

라인하르트.

마찬가지로 종잡을 수 없는 인간.

에픽에게 황금을 쥐어준다는 발언은 상식 밖이었다.

어딘가 어그러지고 비틀려있지만, 그가 발을 옮기면 그곳은 길이 된다.

"그런데 그 물건은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거죠? 제가 만들긴 했지만, 제 생각에 그건 독약과 다를 바가 없어요."

순도 높은 악마의 죽음과 몇몇 재료들을 섞어 만든 용액이다.

그것들이 섞여 무슨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카이첼도 알 수 없었다.

황태자의 명령에 따라서 조합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건 잘못 음용했다간 그대로 골로 갈 거라는 사실이었다.

효과가 가루로 먹을 때보다 배로 강한 건 확실했으니.

"내가 쓸 거다."

"······ 예?"

이건 또 전혀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에디스의 걱정처럼 저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자 쓸 줄 알았다.

순도 높은 악마의 죽음으로 북방을 지배하리라 생각했건만.

"육체적인 중독성은 줄여놨지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될 수도 있어요. 한 번 의존하게 되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인간도 결국 무너지게 만드는 게······."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머릿속의 벌레로 인해 고통에 몸부림칠 때.

그 고통을 줄이고자 안 써본 약이 없었다. 마약을 포함해서.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건 악마의 죽음이라 불리는 것의 원료에 가깝다. 이제는 구하는 게 불가능한 악마 교단의 잔재.

이 약에 중독되면 모든 신체기능이 비약적으로 올라가고,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오직 즐거운 감정만 느낄 수 있게 된다.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전사로 변하는 이유다.

제국이 대대적으로 교단의 씨를 말려놓은 탓에 순도높은 물건은 구할 수 없다.

카를로스 대공도 순도 낮은 악마의 죽음에 이것저것을 섞어 비슷한 효용을 발휘하게끔 만든 것에 불과했다.

'악마의 죽음은 포션의 주원료가 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후에 악마의 죽음은 '포션'이라 불리는 물건의 주원료가 된다.

상처에 뿌리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아물게 하며, 순도 높은 물약은 반 죽은 환자도 살려낼 비약이었다.

신성교의 위세가 포션의 출현으로 땅에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이 인류사의 관점에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전쟁은 인류의 기술을 대폭 발전시켰다.

포션과 같은 물건들이 다수 개발됐으니까.

'순도 높은 악마의 죽음은 체내마나를 활성화하는 기능이 있지.'

체내마나.

말인 즉, 체내 나노머신을 활성화시킨다.

활성화한 나노머신이 신체의 재생을 촉진하는 것이다.

제로가 내 세포재생을 30배 촉진한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리고 포션이 망가진 나노머신조차도 복구해낼 수 있다면 파간들의 생존가능성이 대폭 상승할 터.

파간만이 아니라 내게도 필요한 기능이었다.

'닳은 나노머신의 에너지를 수급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노머신 제로의 기능은 뛰어나지만 문제는 에너지다.

성지에서도 느꼈듯이 닳은 에너지를 수급할 방법이 필요했다.

가프 덕분에 요행으로 살아났지만 그런 상황을 반복할 수도 없지 않나.

용갑주의 에너지 소모도 극심한데, 체내의 나노머신을 늘리는 건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포션을 만들었다.

최고의 연금술사가 배합한 포션이니 그 효용은 확실하리라.

물론 상용화할 단계도, 그 흔한 실험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셨다가 죽어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위험한 물건이다.

"자, 잠깐!"

벌컥!

카이첼의 기함을 뒤로한 채 포션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쓰다.

과거에 마셨던 포션은 꿀 같은 달콤한 맛이었는데.

"음."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로 울리며, 세상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체내로 독성물질이 유입됐습니다.]

[유해성분을 분해합니다.]

[급속도로 뇌신경에 작용하는 향정신성 물질을 차단했습니다.]

[나노머신의 먹이가 되는 미생물 '나노바이오'를 발견했습니다.]

나노바이오?

그간 나노머신의 먹이는 빛과 전기인 줄 알았다.

체내에서 합성되는 생체전기를 먹고 산다고 제로가 직접 말했던 것이다.

또한 외부에서의 충격으로 에너지를 회복하려면 최소 10만 볼트 이상의 전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번개를 맞거나, 말피엘의 전격에 제로가 깨어났듯 그만한 충격 없이는 충전이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런데 생소한 이름의 '먹이'를 발견했다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노머신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향상됩니다.]

[과충전된 잉여 에너지를 세포에 축적합니다.]

[뇌의 동시 활성화 영역이 확대됩니다.]

[26%]

[27%]

······.

[30%]

30%.

25%에서 멈춰있던 동시활성 영역이 30%로 확대되자 내 눈앞에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다.

*

'파간들을 저주로부터 해방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독수리가 하늘을 배회하며 성지를 관찰했다.

그 독수리를 조종하는 건 바로 데이몬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숨겨진 조력자이며, 수백년을 살아온 리치인 그는 자신의 정신을 다른 그릇에 심어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대공의 부름에 따라 조건을 내걸고 이 전장에 참여했다.

본래라면 성지를 정복하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을 계획이었는데, 성지에 나타난 '대신성군주'에 의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과연, 카를로스가 시간을 지연시킬만하군.'

파간을 비롯한 모든 군주들이 성지에 모여있었다.

그 숫자는 대략 8만.

제국군이 훨씬 많지만 성지의 특성상 수비가 유리하다.

8만이면 능히 20만을 상대할 수 있다.

자신이 조금 도움을 줘야할 것 같았다.

'저게 뭐지?'

한참을 배회하자 파간들이 푸른색의 물약을 먹고 있다.

물약을 먹자 상처가 치유되고 가파르게 새살이 돋았다.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아······."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무릎을 꿇고 겸허한 자세로 푸른색 물약을 마시고있었다.

'저 물약이 파간들을 치료한 건가?'

파간은 골치가 아프다. 생명도 짧은 주제에 힘은 무식하게 강했다.

하지만 한 번 파간이 되면 절대로 치료할 수 없다.

수백년을 산 데이몬은 수많은 생체실험을 해봤지만, 파간의 돌연변이 현상만큼은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었다.

자신이 실패한 걸 누군가가 해냈다.

저 물약은 파간들이 잃어버린 재생능력을 되살려주었다.

단순히 수명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신체능력이 더욱 향상되고 감각도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재생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투능력이 두 배는 올라가는 셈이다.

카를로스 대공이 지체할 만 하다.

허나, 자신이 전장에 참여한 이상 패배는 없다.

'저놈이 대신성군주로군.'

마침내 찾았다.

저 물약을 배포하며 신이 된 존재.

용의 투구를 쓰고 있는 저놈이 필시 대신성군주렸다.

'지배해주마.'

오히려 일이 쉬워졌다.

저놈의 정신을 지배해 몸을 강탈하면 북방전역을 얻게 된다.

데이몬이 영원불멸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는 리치가 되며 에픽을 각성했다.

그 자체가 에픽이 된 것이다.

에픽에 새겨진 권능은 혼령지배.

권능을 발현하면 저 대신성군주를 지배할 수 있다.

권능을 발현하는 조건은 간단하다.

눈만 마주치면 된다.

눈만 마주치면 저 몸은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런데.

'음?'

하늘에서 내려온 순간, 독수리에게서 신호가 끊겼다.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무언가가 눈깜빡할 사이에 독수리를 죽인 것이다.

'방비가 제법이로구나. 그러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다음은 바퀴벌레였다.

작은 굴을 따라 이동하며 놈의 방까지 침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방에 침입한 순간 신호가 끊겼다.

'대마법사의 마나벽?'

이 정도면 8서클 대마법사가 직접 쳐둔 마나벽이다.

24시간 보호하려거든 어마어마한 마나가 소모될텐데 그짓을 하고 있다.

수십번을 다른 대상으로 도전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대신성군주의 옆에 있는 검사와 대마법사.

특히 검사의 감각이 너무나도 뛰어났다.

'드디어 혼자 있구나!'

성지 내의 인간을 지배하고, 침투한 날의 일이었다.

대신성군주가 웬일로 혼자 나왔다.

마나벽도 없었다.

그는 뒷짐을 쥔채 뒤뜰에서 밤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다.

"근래에 들어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더니, 그게 네놈인가보군."

데이몬을 발견한 대신성군주, 라인하르트가 말했다.

멍청한놈.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혼자 나왔단 건가?

'마주쳤다.'

순간 두 눈이 마주쳤다.

데이몬은 미소지었다.

동시에 그의 권능 혼령지배가 발동했다.

데이몬의 몸이 축 늘어지고, 이어 라인하르트의 몸 안으로 정신을 욱여넣었다.

"후후. 생각보다 멍청한 놈이라서 다행이야."

라인하르트의 몸을 차지한 데이몬이 웃어보였다.

이제 북방을 궤멸시킬 차례다.

저 물약의 비밀을 알아내고, 군주들을 와해해 카를로스가 성지에 입성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면 자신의 할 일은 끝이 난다.

"음······?"

하지만 이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지워지고 있었다.

아니, 지워지는 게 아니다.

'파고들고 있어?'

자신의 정신을 역으로 차지하려고 들었다.

급히 육체의 지배권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놈은 집요하게 자신을 놓지 않았다.

'감히 나를 빼앗겠다?'

역으로 자신을 뺏으려 한다. 어이가 없는 놈이었다.

데이몬은 모든 걸 차단한 채 본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정신을 뺏기거나, 지워질 뻔했다.

빠드득!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에픽을 소유한 놈인 건 분명하다.'

놈이 에픽을 소유했다면 자신과 같은 권능을 지녔을 터.

그것도 자신과 비슷한 류의 지배적인 권능인 듯싶었다.

에픽 소유자는 오랜만이었다.

그리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오히려 사냥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는 기필코 빼앗아주마.'

저 몸도, 그리고 에픽도.

데이몬이 고개를 저으며 퀘퀘한 방을 떠나 지하감옥으로 내려갔다.

상대가 에픽 소유자라면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한다.

순간, 데이몬의 오른쪽 눈이 빙그르르 돌았다.

그러나 데이몬은 그를 인지하지 못했다.

제로에게 시야가 공유되고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 데이몬 > 끝

동시 뇌 활성 영역이 30%를 돌파한 이후.

단순히 세상이 느려지는 것을 넘어, 나는 또 다른 세계에 도달했다.

'보인다.'

1초 이후의 세계가.

포션은 뇌의 영역을 일시적으로 넓혀줬다.

본래라면 한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번 넓혀진 영역은 의외로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나노바이오.'

나노바이오로 인해 능률이 올라간 나노머신들 덕이다.

제로는 정확히 포션에서 나노바이오만을 추출해, 그 대부분을 뇌를 담당하는 나노머신들에게 먹였다.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다른 이들은 포션을 붓거나, 섭취한 그 부분의 재생만 빨라진다.

나처럼 뇌가 향상되는 경우는 없었다.

다른 사람에겐 제로가 없기 때문이다.

아쉬운 건 포션을 더 마셔도 30% 이상에서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한 번 느끼고 경험했으니 충분하다.

잔상처럼 모든 1초 이후의 움직임이 보였다.

이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초감각.'

나는 이 감각을 초감각이라 칭했다.

모든 뇌 영역을 활성화하는 건 기껏해야 수초. 하지만 목숨이 오가는 전장이나, '증강현실' 속이라면 보다 길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Lv 110.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각성하기 전의 크로프트가 눈앞에 있다.

마나샤워를 겪고 젊어진 모습이 아닌, 주름 자글한 노인의 모습으로.

하지만 저런 상태임에도 그는 최강이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전투보조 프로그램'을 활성화합니다.]

전투보조 프로그램. 제로가 새롭게 짠 프로그램의 이름이었다.

권한의 레벨이 높아지며 자신이 짤 수 있는 프로그램의 영역도 넓어졌다는데, 내 움직임에 따라 체내의 나노머신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필요한 곳의 세포를 크게 활성화시켜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여태껏 전투보조 프로그램을 활용해도 크로프트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보이지도 않는 걸 막아낼 순 없는 탓이다.

'지금이라면.'

30%,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섰다.

이윽고 크로프트가 움직였다.

'보인다.'

보였다.

크로프트의 잔상이.

그가 움직일 경로가!

검을 뽑았다.

스팟!

[사망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종료합니다.]

보인 경로 그대로 검이 날아왔는데, 피할 수가 없었다.

반응이 느렸다.

'움직이면서 피해야한다.'

1초 안에 반응하는 게 아니라, 반응하면서 피해야 한다.

나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몸이 먼저 위험을 감지하며 움직일 때 나는 초감각으로 그 움직임의 방향성을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보인다면 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보이기만 하면 연습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최강인 크로프트의 검을 최약체인 내가 받아낸다.

과거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저 떠받들어 지는 채로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나 스스로 증명하고, 올라설 것이다.

그 과정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Lv 110.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사망했습니다.]

"다시."

[Lv 110.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사망······.]

"다시!"

*

"······."

크로프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처음의 카이첼처럼 얼음기둥에 얼어버린 것 같다.

'검을, 막았다고?'

오랜만의 검술지도.

라인하르트의 부탁으로, 대련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의 일격이 막혔다.

아무리 천재를 뛰어넘는 재능이라도 너무 빠르다.

검을 배운지 기껏해야 한 달.

하물며 최근에는 검을 가르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검을 막아냈다.

'내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고 움직였다.'

게다가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 경로를 먼저 확인하고 움직인 것도 아니다.

미리 예측하고, 정확히 그곳으로 검을 뻗었다.

전력을 다한 검이 아닐지언정 크로프트는 예전의 수준에서 봐주지 않고 있었다.

그의 사전에 봐준다는 단어는 없었다.

애당초 라인하르트가 검을 막는다는 조건은 없었다.

그저 강자의 움직임에 익숙해지라고 지도를 했을 뿐이다.

'육감을 개통하신 건가?'

오감을 뛰어넘은 육감.

소드마스터에 오른 자들은 그 감각이 고도로 발달되어있다.

하여 미리 예측하고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육감을 얼마나 개발하느냐에 따라 정밀도에 차이가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움직임이었다.

'한 치의 미세한 차이도 없이, 정확히 예측하며 움직인 것이었다. 육감을 그 정도로 발달시키려면 그만한 고행이 필요한 법이건만.'

이건 정말로 '보였다'고 밖에 설명이안 되는 구조다.

미래를 읽지 않고서야.

'보였다고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았을 터인데.'

신체능력 또한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정예기사의 수준은 진즉에 뛰어넘었다.

검의 천재라 불린 이들이 10년간 쌓은 실력에 비견된다.

온갖 변수까지 더하면, 1황자와도 대결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알게 된 이상 두 번 당하진 않는다.

미리 움직인다면, 그에 따라 다시 반응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처음 당하는 경우라면 소드마스터라도 상당히 당황할 수 있겠다.

요행은 아니다.

적어도 크로프트의 앞에서 요행은 존재할 수 없었다.

"성장하셨군요."

"아직 두 번은 못 막겠군."

"한 번으로도 충분합니다, 전하."

머리가 어지러운지 라인하르트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만하면 됐다며 바닥에 검을 던져버리는 저 행위는 도저히 기사도를 느낄 수 없는 행위지만, 생각해보면 라인하르트는 기사가 아니지 않은가.

'가르치지 않아도 알아서 성장하신다. 마치 신화 속 대영웅들처럼.'

신화 속의 존재들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제스스로 강해지고 증명한다.

그런 존재를 보는 기분이었다.

'초대황제의 피를 가장 진하게 받으신 거다.'

라인하르트의 초고속성장은, 그 외의 말로는 설명이 안 됐다.

초대황제, 절대자라 불린 존재.

그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았음이 분명하다. 다른 황자들과 다르게.

'스스로 북방의 신이 되셨다. 신분상 공식적으로 공론화할 수는 없겠으나, 결국은 알려지게 될 터.'

크로프트는 이후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증명하는 중이다.

제국의 황태자가 북방의 신이 됐다.

이게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공식적으로 인정하면 '제국의 황태자가 북방 오랑캐의 신인 게 말이 되느냐'며 역으로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은은하게 여지를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모든 걸 착각시키고 망상을 부풀리게 만드는 게다.

'카를로스와 그의 귀족들을 제외하면, 친황태자파는 전무하다. 허나······.'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을 실패한다면?

그리고 카를로스 대공이 황태자와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원래라면 폐위하고 새 황자를 황태자로 즉위시키겠으나, 라인하르트 스스로 격을 쌓아 힘을 갖추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카를로스대공의 곁에 선 귀족들 중에 분명히 이탈자가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선을 대고자 분명히 움직일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황실, 황가의 힘이지만, 황자와 황비들이 라인하르트에게 힘을 실어줄지는 솔직히 미지수였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옆에는 크로프트가 있었다.

그가 황제를 설득시킨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황제가 진심으로 황태자의 자격을 인정하고 인증하면 그 지위가 흔들릴 일은 없으리라.

'무엇이 되었든, 결국 주머니를 뚫고 나오시겠지.'

라인하르트의 행보는 크로프트도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때 라인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준비해라. 온다."

"무엇이 온다는 말입니까?"

"시체들."

라인하르트의 말을 듣고 크로프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체가 온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 크로프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데드 군단이 몰려온다. 모든 군주를 소집하도록."

*

데이몬의 오른쪽 눈을 해킹한 이후, 나는 제로를 통해 그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데이몬은 리치였다.

단순히 살아있는 것들의 정신을 빼앗는 게 아니라, 죽은 시체 역시 언데드로 만들어 부릴 수있었다.

카를로스 대공이 리치와 손을 잡은 게 확실시된 상황.

'악마교단의 잔재.'

리치는 악마교단의 잔재다.

악마의 죽음을 만들고, 교세를 넓혔다가 제국에게 먼지 한 톨까지 털려버린 그곳.

흑마법사들이 주류를 이뤘으나 그들은 리치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다 제거한 줄 알았는데, 데이몬은 다른 리치와 달리 살아있는 것의 몸도 빼앗을 수 있어서 생존한 것 같았다.

아니면 카를로스 대공이 몰래 빼돌렸거나.

소문이 사실이었다. 대공의 뒤에 리치가 있었다.

'리치는 인간이 아니다.'

제로가 해킹한 게 그 증명이다.

인간은 해킹할 수 없다.

데이몬이 A.I라는 뜻이다.

만약 데이몬이 인간 흑마법사인 상태에서 리치가 된 거라면, 해킹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킹이 가능했다는 건 처음부터 그가 A.I였다는 의미였다.

마왕 가프의 '폭식'이 아예 처음부터 지배불가였던 건 그가 A.I가 아닌 인간인 상태로 권능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로는 인간의 것은 해킹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

반대로 A.I의 것은 모조리 해킹하고 지배할 수 있다.

'인간의 기억을 계승한 A.I가 바로 리치다.'

흑마법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리치화.

정작 모든 것을 쏟아부은 인간은 진짜로 죽고, 그 자리를 A.I가 본인을 인간이라 착각하여서 되는 게 리치였다.

리치 자체가 하나의 에픽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흑마법사는 금기를 어겨가며 리치가 돼서 영원불멸을 꿈꾸지만, 정작 그 리치 자체가 영원불멸은 없다는 증거와도 같지 않나.

자신의 기억과 능력을 A.I에게 계승해줄 뿐이라니.

'흑마법과 A.I간에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겠군.'

흑마법은 나노머신의 A.I를 각성시키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후에 필히 알아봐야겠다. 지금 당장은 데이몬의 움직임을 저지하는 게 먼저였다.

"죽음의 군단이 성지를 노리고 있다. 위대한 전사들이여, 놈들을 모조리 짓밟고 죽여라."

시체들이 뭉치기 전에 각개격파 한다.

데이몬이 언데드를 만드는 모든 위치는,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는 말밖에 나오지가 않았다.

'언데드를 만드는 위치가 모두 공격받았다.'

특히 파간들이 광전사처럼 밀려와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처음부터 위치를 알고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다.

언데드를 만들기 위한 영역을 전개해두면 귀신같이 찾아와 눈 깜빡할 사이에 모조리 분쇄시켜버린다.

북방에 넘쳐나는 시체들.

그 시체들을 되살리면 성지를 흔들 수 있다.

그런데, 미처 다 살아나기도 전에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다.

'위치를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모르겠다.

진짜 신성교의 성황이라도 저기에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성황 같은 존재는 없었다.

그 특유의 걸쭉한 신성력을 지닌 존재가 성지에 있었다면, 자신이 못 알아볼 리 만무했다.

"낭패군."

카를로스에게 거래를 제시하며 큰 소리를 뻥뻥 쳐놨다.

그러나 시작도 못하고 죄다 실패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쓸 수밖에.'

그가 수백년간 모아온 강자의 시체들.

언데드로 만들면 최소 나이트 급인, 아껴둔 시체들이 있다.

언데드의 유통기한이 길지 않아 모아두고만 있었지만.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최후의 최후에나 사용해야할 보물들이다.

고작 카를로스와의 거래를 위해 쓸 수는 없었다.

'아니, 아니지. 내 보물을 이런 일에 쓸 수는 없다.'

잠시 생각한 데이몬이 좋은 수를 떠올려냈다.

'마침 오늘 카를로스가 가둬둔 놈들이 있었지. 일단 그놈들을 써볼까?'

그의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자들.

아직 확인은 안 했는데 제법 강한 놈들이라고 들었다.

지하감옥으로 내려가 확인하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오호.'

피닉스의 표식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마나의 질이 확실히 뛰어난 놈들이다.

카를로스가 마음대로 쓰라고 했으니, 저 녀석들을 언데드로 만들어 부린다면 제법 괜찮은 성과가 나올 것 같았다.

'최소 한놈은 데스나이트로 만들 수 있겠군.'

상당히 강한 놈들도 있었다.

소드마스터는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 수준인 강자들.

그중 한 명은 거의 소드마스터에 필적한다.

소드마스터의 시체로 언데드를 만들면 데스나이트가 되어 전성기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소드마스터가 아니어도 잠재력이 충분하다면 데스나이트로 만들 수 있었다.

"······."

감옥 안에 있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빛이 죽지 않았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든다.

"이분이 누구신줄 줄 아느냐. 어서 풀지 못할까!"

"황제폐하께서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기사들이 시끄러워졌다.

데이몬이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제가 정말 너희를 구할 것 같으냐? 이곳에 있는 줄도 모를 텐데?"

꽈득!

데이몬과 눈이 마주친 기사 한 명이, 제스스로 목을 꺾어버렸다.

순식간에 감옥이 조용해졌다.

데이몬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포기해라. 너희를 구해줄 구원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끝장을 보자 > 끝

프렐류드의 숲에서 꼬리가 붙었다.

라인하르트에 관해 물어보고 다니는 이방인. 카를로스 대공 역시 노리고 있었는지 이곳저곳에 끄나풀을 심어둔 게다.

순례길에 오르던 도중 습격당했다.

라우넬 1황자가 지금 지하감옥에 갇혀있는 이유였다.

"걱정마십시오! 제 목숨을 다 바쳐서라도 빠져나가게하겠습니다."

"분명히 기회가 올 겁니다!"

기사들이 희망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일부러다.

고의로 크게 말해 리치의 동태를 살피려는 것이다.

반응은 없었다.

허나 혹시 모른다.

라우넬이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씨를 적었다.

『놈은 눈을 마주치는 자를 조종할 수 있다.』

넋놓고 있을 순 없었다.

기사들은 그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눈을 마주치고 기사 중 한 명이 스스로 목을 꺾었다.

리치의 눈에 정신을 헤집는 흑마법이 걸려있는 게 분명하다.

이어 기사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내용을 바닥에 적어나갔다.

『출구까지 127보.』

『마나 회복 완료.』

『리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금 탈출하시겠습니까?』

모두 눈을 마주쳤다.

순간.

화르륵!

그들의 전신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피닉스 기사단 상위단원만 사용 가능한, 강림의 상태다.

강렬한 불길은 구속구를 태우고 저주를 없앴다.

지글거리는 상태로 철창을 잡자 그대로 녹아내렸다.

네명의 기사단원과 라우넬이 빠르게 감옥을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지나온 길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하지만 이내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긴······."

"하늘?"

분명히 출구로 향했으나 있는 건 문이 아니었다.

바깥, 하늘이 보인다.

구름이 수놓인 이곳은 자신들이 잡혀온 북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탑.'

거대한 탑.

하늘까지 치솟은 탑의 정상.

하지만, 이런 건축물은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높은 건축물은 생전 처음보는 것이었다.

이세상이 아닌 것 같다.

정신이 붕 떠 있는 기분.

"이곳은 내 '라이프 케슬'이다."

목이 꺾인 시체가 다가왔다.

처음 리치에게 눈이 마주치고 목이 꺾인 기사단원이었다.

기괴하다.

죽은 자에 대한 모욕이었다.

리치에게 몸을 지배당한 그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너희는 절대로 이곳을 벗어날······."

화르르륵!

화염의 검을 만들어낸 라우넬이 리치의 목을 베었다.

"··· 수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고지했음에도 단원 중 한 명이 놈과 눈을 마주친 게 분명하다.

죽은 단원의 몸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다.

"전부 눈 감아!"

"어둠 속에서 나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어둠을 밝히는 불꽃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

닿지 않는다.

절망의 늪에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라우넬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