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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더 좌절하고 더 절망해라.'

데이몬은 끊임없이 라우넬을 시험했다.

좌절과 절망의 힘은 데스나이트가 되는 원동력이다.

극한의 절망을 맛본 소드마스터의 시체는 구하기 힘들다.

그들의 정신은 그 격만큼이나 굳건하다. 그래서 죽을 때 그냥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끊임없는 시련은 정신을 마모시키기 마련.

데이몬의 앞에, 지하감옥이 있었다.

"사, 살려줘······."

"용서해줘. 제발!"

모두가 잠이 든 채 악몽을 꾸는 중이다.

데이몬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능력을 타고났다.

묘한 현실감과 상황은 그들을 더욱 큰 절망으로 몰고가고, 죽일 것이다.

'최상급의 소재로군.'

데이몬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라우넬을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좋은 소재다. 쉽게 굴하지 않는 강철의 정신을 타고났다.

게다가 특이한 마나연공법으로 육체를 단련했다. 불로 담금질한 육체와 저 정신은 데스나이트가 될 수밖에 없는 소재였다.

데스나이트는 소드마스터를 농락할 수준으로 강하다.

흑마법의 끝은 리치이고, 리치의 수준은 데스나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갈린다.

'잠재력까지 충만해. 여태껏 만든 데스나이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개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

데이몬은 이미 여러번 데스나이트를 만들어보았다.

더 깊은 지하, 아껴두고 있는 '용'의 시체를 제외하면, 이놈은 최고다.

지이이이잉.

순간 들려오는 이명음.

데이몬의 표정이 굳었다.

'뭐냐. 누가 내 영역에 침범했느냐.'

바깥에 걸어둔 경계마법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었다.

비정상적이다.

애당초 이곳을 아는 사람은 카를로스와 그 휘하 몇밖에 없었다.

그들이 경계마법을 굳이 해체하며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침입이라는 건데.

'다가올수록 나이트 급의 언데드들이 즐비하다. 결코 뚫을 순······.'

지이이잉.

지이이이이잉!

쉴 새 없이 이명이 들린다.

뚫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순식간에. 어찌할 틈도 없이.

'성지.'

이만한 화공을 퍼부울 수 있는 곳, 카를로스가 아니라면 성지밖에 없었다.

위치를 알아내고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데이몬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해골문양의 지팡이 하나가 솟아올랐다.

그것을 쥔 데이몬이 영창을 외웠다.

"일어나라, 소드마스터들이여."

북방의 전장에서 죽은 카를로스 대공 휘하의 소드마스터들이 깨어났다.

"일어나라, 파간들이여."

강력했던 파간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일어나라, 죽음의 왕들이여."

그리고 아껴두었던 보물을 꺼냈다.

죽음의 왕, 네 구의 데스나이트.

무적의 군단이 완성됐다.

절대로 질 수 없는 구성이었다.

이 정도면 왕국 하나를 지울 수 있는 전력이다.

'쳐들어온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죽이고, 모조리 시체로 사육해주마.

데이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

재밌는 걸 보았다.

처음에는 잘못 본 건 줄 알았다.

'라우넬.'

왜 네가 거기 있는 것이냐.

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야할 녀석이 북방에 왔다.

무엇을 위해?

'북방의 변화를 살피고자 황제가 보낸 거겠지.'

그림자의 총괄인 크로프트가 이곳에 있다.

대대적으로 기사단을 파병할 수는 없으니 라우넬을 보낸 것이다.

항상 의지가 충만한 라우넬은 덥썩 물고 달려왔을 테고.

내 행적을 조사하던 중, 카를로스 대공에게 붙잡힌 모양이다.

'너무 뻔하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카를로스 대공이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라우넬을 데이몬에게 넘기는 짓을 하지 않았을 터.

라우넬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넘겼다.

'흔들리고 있다.'

카를로스 대공.

그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테베우스가 죽고, 계획이 틀어지자 조바심이라도 생긴 건지.

철혈, 철벽과도 같은 카를로스 대공도 결국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그가 흔들리고 있으니 좋아해야할 일이다.

분명히 좋아해야할 일인데.

'기분이 나쁘군.'

과거, 나는 모든 형제들을 죽였다.

황비들과 함께 처형시켰다.

돌아왔다고 한들 그 사실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겪은 일.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아닌 남에 의해 죽는 게, 죽어야만 하는 게.

이익을 위해서라면 내버려두는 게 맞다.

계속해서 데이몬을 감시하며 카를로스 대공을 무너트릴 암초로 삼는 게 맞았다.

라우넬의 죽음?

같은 피가 흐른다고 할지언정 형제간의 우애조차 없는 사이 아닌가.

하지만, 이 죽음을 방치한다면 나는 결국 과거와 같아질 것이다.

죽여도 내가 죽인다.

살리는 것도 내가 살린다.

남에게 생사여탈권을 쥐여주는 건 말이 안 된다.

"죽으려고 혼자 기어들어왔구나, 신성군주여."

리치 데이몬이 음습하게 말했다.

바깥은 이미 전쟁터다.

나 홀로 놈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데이몬의 그림자를 통해 해골병사들이 기어나왔다.

"멍청한 녀석. 성황조차도 내 앞에선 벌벌 떨어야하거늘."

"이상하군. 보통은 '왜' 나 혼자 들어오게 된 건지 궁금해야 정상 아닌가?"

크로프트도, 융도, 에디스도 들어오지 못한 영역이다.

제아무리 바깥의 언데드가 많고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나를 지키는 것이었다.

지켜야할 이들조차 들어오지 못한 결계의 안쪽을 '어떻게', 혹은 '왜' 나 혼자 들어왔는지 궁금해 해야 정상일진대.

리치가 되면서 뇌까지 썩어버렸는지 마냥 좋아만 하고 있었다.

"후후. 네놈이 뭐라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이번에야말로 지배해주마."

다른 중간매체를 통하지 않고 본체로 하는 혼령지배는 절대적이다.

설령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도 자신의 눈앞에서 지배력을 떨쳐낼 순 없었다.

게다가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다르다.

그런데 느낌이 없었다.

'통하지 않는다고?'

아예 통하지가 않는다.

마치 면역이라도 생겨버린 것처럼.

아니, 아니다. 이건 통하지 않는 게 아니다.

혼령지배 자체가 실행되지 않은 것이다.

'내 오른쪽 눈이?'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오른쪽 눈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다는걸.

역으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데이몬은 당황하고 말았다.

"어, 언제부터냐?"

"처음부터다."

어깨를 으쓱하며 답해주었다.

그제야 데이몬은 이해할 수 있었다.

대량의 언데드를 만들려는 공작이 전부 막힌 것도, 극비리에 존재하는 이 위치가 들통난 것도 모두 자신의 오른쪽 눈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 지배계통의 에픽을 소유한 게 분명하다.

콰득!

데이몬이 스스로 오른쪽 눈을 파냈다.

지배당한 눈을 파냈으니 이제는 괜찮으리라.

"오냐, 네놈은 반드시 해부해주. 음?!"

눈앞이 까매졌다.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번에는 왼쪽 눈이 지배당한 것이다.

'한쪽 눈에 대한 지배였구나.'

특정한 눈이 아니라, 하나의 눈을 지배하는 것이었나보다.

조건을 알았으면 됐다.

자신이 눈을 마주해야 상대를 지배할 수 있듯이, 저 녀석도 특정부위를 지배할 수 있는 지배력을 지닌 게다.

'내가 더 위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당하지 않는다.

놈에게는 없고 자신에게만 있는 것.

같은 지배자의 힘이더라도 데이몬은 몸을 갈아탈 수 있었다.

살아있는 대상에게는 눈을 마주쳐야 하지만, 자신이 언데드로 만든 시체에 대해선 시야 내에만 있다면 마음껏 옮겨탈 수 있었다.

놈은 기껏해야 지배한 몸에 대해서만 유지가 될 터.

확실해졌다. 자신의 권능이 저놈보다 상위호환이다.

데이몬은 미련 없이 몸을 갈아탔다.

해골병사 중 하나로.

이제 놈도 자신을 어찌할 순 없으리라.

퍼엉!

그렇게 믿은 순간, 해골병사의 머리가 터졌다.

정확히 갈아탄 몸을 감지해내고 터트린 것이다.

그것도 무영창의 마법으로.

'우연이다.'

그래. 우연이 확실하다.

데이몬이 다시 몸을 갈아탔다.

퍼엉!

순식간에 머리가 터졌다.

하나, 둘, 준비해둔 해골병사들의 머리가 죄다 터졌다.

남은 건 한구.

데이몬의 두 눈에 두려움이 가득찼다.

놈이 혼자서 들어온 이유를 이제 알겠다.

갈아탈 몸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게다가 저 눈은 마치, 악귀와도 같지 않은가.

놈은 인간이 아니다.

"악마교단에선 리치를 불사신이라고 부른다지?"

나는 진정으로 궁금했다.

불사신. 절대로 죽지 않아서 그렇게 부를 터인데.

"어디 한 번 보자꾸나. 정말로 영원불멸한 존재인지."

< 격이 다르다 > 끝

데이몬이 몸을 갈아타는 방식은 제법 흥미로웠다.

눈을 마주친다는 전제조건이 필수인데, 해골병사는 보다시피 뼈밖에 없는 존재다.

눈이 없는데 마주칠 수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옮겨갈 수 있다는 건 '눈'으로 인식되는 부위만으로 충분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머리를 폭파시켰다.

사이오닉 에너지는 인간의 뼈 정도는 손쉽게 가루로 내어버릴 수 있었다.

헌데, 머리를 폭파시켜도 놈은 몸을 갈아탔다.

'눈을 마주친다는 것 자체가 조건이 아닌가보군.'

과연, 이해했다.

눈을 마주치는 행동 자체는 속임수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행위를 하는 건,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일는지.

생각을 달리했다.

어쩌면 그러한 행동 자체가 '지배력'을 돋우는 술수일 수도 있었다.

언데드를 제외한 생물이 아닌 것에 몸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

'눈을 마주치면 상대는 인식을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인식을.'

다른 조건을 떠올린다.

상대가 자신을 인식하게 만드는 게 발동조건인 건 아닐까?

순간의 강렬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몸을 차지하는 것이라면?

그야 자신이 만든 언데드를 인식시키는 건 일반 생물체를 인식시키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지배범위 내에만 존재한다면 마음껏 몸을 갈아탈 수 있다.

나는 이미 한 번 경험했다.

제로의 도움도 있지만, 경계하고 있는한 이전보다 강한 '인식'은 하지 않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경계하니 놈의 지배력이 낮아질 수밖에.

'그렇군. 상대방이 자신을 인식하는 게 조건이다.'

얼마나 강하게 인지하고 인식하느냐에 따라 몸을 갈아타는 조건이 완성된다.

인식하는데 눈을 마주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었다.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신성군주여."

갑자기 데이몬이 의기양양해졌다.

주변 해골들의 뼛조각들이 부서지고 모이더니 거대한 거인의 형상을 만들었다.

본골렘.

골렘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8서클의 마법사만 가능하다.

마나를 보다 쉽게 조종할 수 있게 해주는 '스피릿' 상태에서 만들어야만 골렘의 형체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게다가 무영창이었다.

에디스도 짧게나마 영창을 해야 만들 수 있는 골렘을, 데이몬은 아무런 지시없이 만들어냈다.

"A.I들은 무영창이 기본인가보군."

"A.I?"

못 알아듣는다.

하기야 자신을 가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테니.

"살아생전 할 수 없었던 무영창의 마법을 죽어서 한다니, 참으로 공교롭지 않느냐?"

"두려워서 미친 거냐? 헛소리를 내뱉는구나."

쿵!

바닥을 벅차고 다가온다.

압도적인 크기의 차이.

놈은 나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나를 더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만약 데이몬을 강력하게 인식한다면 소드마스터의 몸조차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데이몬은 눈을 마주치는 것 외에도, 또 다른 인식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다.

죽음을 다스리는 절대자의 권위와 공포로 지배력을 키웠다.

세계제일의 강자가 데이몬을 두려워할 리 없겠지만 그게 가능하다면 데이몬은 그자의 몸조차도 마음껏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문제는 내게 공포란 단어는 없어진지 좀 오래 되었다는 것이었다.

'진짜로 자신을 데이몬이라 생각하나보군.'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그나마 카이첼의 탈을 쓴 바알은 자신을 에픽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제로도, 용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데이몬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여겼다.

너무나도 인간 같은 행동들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하다.

내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데이몬이 진로를 바꿨다.

"죽어라."

후우우웅-!

거대한 주먹이 나를 향해 직격했다.

콰득!

하지만, 닿지 않는다.

용갑주. 거미줄처럼 쳐진 나노머신의 줄기가 본골렘의 타격을 그대로 흡수해버렸다.

내 미간 바로 앞에서 주먹이 멈춰섰다.

아무리 힘을 줘도 그 이상으로 들어올 일은 없었다.

"뭐냐, 이건? 마나결계?"

데이몬은 내심 인상을 구겼다.

마나결계인 듯하지만 그게 아니다.

마나결계가 쳐져있었다면 자신이 못 알아볼 리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장력이 자신을 튕겨내고 있었다.

투둑.

그 순간이었다.

본골렘을 이룬 뼈들 사이사이에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후두두두둑!

뼈들이 마치 비처럼 무너져내린다.

"이건 또 무슨······!"

데이몬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겪는 모든 상황들은, 수백년을 살아온 그조차도 전부 처음 겪는 것들이었다.

주먹이 닿는 순간 제로가 기동하여 놈에게 심어둔 나노머신의 '킬코드'를 발동시킨 것이었다.

이내 마지막 남은 해골병사의 머리통 하나만 바닥을 뒹굴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질기군."

폭식도 이놈을 먹지는 않았다.

맛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기준이 따로 존재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벌레처럼 살아있는 생존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겠다.

가까이 다가가, 발을 들었다.

파삭-!

나는 빠르게 발을 놀려 해골을 밟았다.

영원불멸치곤 생각보다 허무한 죽음이다.

[데이몬의 이동을 감지했습니다, 마스터.]

뭐?

주변에 있는 언데드는 더이상 없다. 옮겨갈 매체가 없는데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설마 인식도 조건이 아니었나?

하지만 킬코드가 발동한 이상 죽음은 확정적이었을진대.

"이곳은 내 라이프 케슬이다. 이 안의 모든 것이 내 지배의 대상일지니."

툭, 툭.

지하계단을 타고 누군가가 올라왔다.

익숙한 얼굴.

라우넬.

순식간에 라우넬의 몸을 차지한 데이몬이 크게 웃어보였다.

녀석을 너무 우습게 봤나보다.

이곳 전체가 놈의 라이프 케슬이고 인지 영역이었다. 눈을 마주치는 척, 시야가 한정되어 있는 척, 연기를 한 게다.

데이몬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아! 강력하다. 실로 바다와 같은 힘이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이렇게 황홀한 기분은!"

이전의 몸보다 훨씬 강력한 신체를 얻은 듯 기뻐했다.

[A.I '데이몬'의 고유코드가 변경되었습니다.]

['킬코드'의 작동이 강제중지되었습니다.]

여태껏 없었던 현상이었다.

라우넬의 몸을 차지하자, 킬코드의 작동이 멈췄다.

데이몬의 코드에 맞춰 만들어진 킬코드다. 헌데 데이몬이 라우넬의 몸을 차지하는 순간 놈의 고유코드가 변경됐다.

라우넬이 나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제로가 제대로 반응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피'자체에 무언가 다른 게 섞여있기라도 한 것인지.

'초대황제의 피.'

만약 그렇다면 그건 초대황제, 절대자의 피 때문일 것이다.

성지의 용은 내가 용의 피를 이었다고 말했다. 초대황제 역시 위업을 달성한 용이라면, 다른 용들과 달리 정말로 '번식'이 가능했다면 가능한 일이다.

화르르르르륵!

라우넬의 몸을 차지한 데이몬의 전신에 불길이 치솟는다.

끼아아악!

피닉스다.

거대한 불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느껴진다. 너와 이 몸은 같은 피를 이은 것 같군."

데이몬이 잠재력을 격발시켰다.

라우넬이 시연식에서 보여줬던 힘과는 차원이 달랐다.

온전한 피닉스의 형태. 세상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진정한 불의 화신이다.

1군주가 보였던 용오름보다도 더 위압적이었다.

데이몬이 웃었다.

"신성군주가 제국의 황태자라는 것도 놀랍다만,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몸을 괴롭히던 놈의 지배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차지한 몸의 기억 또한 맛있기 그지없었다.

"너의 지배력도 이 몸에겐 통하지 않는다. 한없이 무력한 네놈이 무엇을 할 수 있지?"

확실히 상정외의 상황이다.

지배력도, 몸을 짓뭉게는 킬코드도 통하지 않는다.

데이몬이 불의 검을 쥐었다.

피닉스가 검에 깃들며 곧 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화르르륵!

[특급 프로세스 '용갑주'가 발동합니다.]

[에너지가 손실되고 있습니다.]

[마스터. 후퇴를 권합니다.]

"크흐흐,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말이 많군."

지척에서 불의 검이 용갑주를 찢어내고 있었다. 강력한 장력으로 맞서고 있지만 피닉스는 모든 사사로운 기운을 태우는 권능과도 같은 힘을 지녔다.

아무리 과충전 상태라도 무한정 공격을 받아내기만 할 수는 없다.

짜증이 났다.

저놈의 입을 당장에라도 찢어버리고 싶었다.

'검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검이었다.

지금까지는 제로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제로가 통하지 않는다면,

저 불의 검을 받아낼 검이 필요하다.

순간, 팔에 새겨진 시동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나는 빛을 꿰뚫고, 어둠을 물들이는 자.'"

읽어나갈 때마다 해당하는 글자가 떠오른다.

데이몬이 비웃었다.

"이제와서 마법영창이라도 할 셈이냐? 소용없다. 이 불의 새는 모든 마법을 불태우는 힘일지니!"

"'강철을 먹는 왕이며 신을 베어버리는 칼'."

나는 한없이 진지하게 영창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칼리번."

마지막 시동어를 입에 담았다.

바위에 꽂힌 칼.

"······ 서, 설마."

데이몬의 두 눈에 불신이 새겨졌다.

마법을 발동한 게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정령 소환······!"

의혹은 확신이 되었다.

이제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같은 지배자의 싸움. 수를 모두 읽었으니 완전한 승리를 확신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간파당한 건 자신인 것만 같았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조차 불가능한 정령 소환을 어떻게 평범한 인간 따위가 해낸단 말인가.

천 년 전 사라진 그 신비를 대체 어떻게?

과거 천년 전 존재했다는 정령무기.

작금의 인류가 잃어버린 고대의 힘!

빛의 입자가 손에 모이더니 마침내 칼리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저 검이 왜······.'

라우넬은 꿈을 꾸었다.

지독한 악몽.

자신이 죽고, 어미가 죽고, 제국이 불타버리는 꿈.

모든 걸 잃으며 좌절하던 꿈을 미친 듯이 반복했다.

황제가 직접 라인하르트를 황태자의 자리에 책봉했던 그때의 기억도 무수히 반복되었다.

계속된 악몽 끝에 정신을 놔버리기라도 한 걸까?

칼리번이 나타난 순간 처음으로 라우넬은 각성했다.

정령. 황궁에 나타난 신비.

뽑는자만이 진정한 군주의 자격이 있다며, 모든 황자들이 도전하고 실패하였다.

라우넬도 마찬가지다.

궁을 개방한 뒤 수많은 이들에게 도전권을 부여했으나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바위에 꽂힌 검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라인하르트.'

그리고 그 검을 라인하르트가 쥐고 있다.

꿈이다. 악몽이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칼리번을 쥔 채 휘두르는 게 말이 되지않는다.

무재능.

검에 대한 재능 역시도, 볼품없었으니까.

라인하르트의 몸은 검술을 배울만큼 건강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몸을 차지한 데이몬을 압도하고 있었다.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나.

'나는 네가 부럽다.'

라인하르트는 모든 것을 가졌다.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일구어낸 것조차도 없이.

모두가 황태자의 자리로 라우넬을 점지했지만, 단순히 조금 더 빨리 태어났다는 이유로 라인하르트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라우넬은 남의 탓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여기고 더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는 게 있다는 것을 결국 깨달았다.

'너는 조금만 노력해도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황태자.

그가 조그마한 성과를 낼 때마다 백배천배로 부풀려지며 관심을 받는다.

반면 자신은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더 많은 지탄을 받는다.

라인하르트는 안하무인했지만, 자신은 청렴결백함을 강요받으며 자랐다.

라인하르트로 인해 황실의 소문이 바닥을 길 때, 사람들을 돌보며 대외적으로 시민들의 시선을 돌려놓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여겼다.

싫지 않았으니까. 사람을 품고 이끄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결국, 정령 역시 라인하르트를 선택한 것이다.

진정한 군주의 자격은 그가 아닌 라인하르트에게 있다고 세상이 선언해버린 것만 같았다.

"크으윽?!"

돌연 데이몬이 몸을 비틀었다.

"이, 이건 또 뭐냐! 내 지배력을······!"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될 수준의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허나, 데이몬의 발악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그 자리를 다시 라우넬이 차지했다.

뚝, 뚝.

라우넬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진다.

끼아아아아악!

피닉스가 울부짖고 있었다.

폭주현상이다.

그것도 여태껏 겪은 그 어떤 폭주보다도 격렬했다.

"나는 너를 증오한다. 라인하르트."

멈추지 않는다.

더욱 거세게, 라우넬은 라인하르트를 밀어붙였다.

*

거친 숨소리.

흐르는 땀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한 채 나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라우넬을 바라봤다.

그 순간 제로가 말했다.

[A.I '데이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A.I '라우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 집으로 가자(1), (수정 완료) -무료 끝- > 끝

거친 숨소리.

흐르는 땀을 닦아낼 생각조차 못한 채 나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쓰러진 라우넬을 바라봤다.

그 순간 제로가 말했다.

[A.I '데이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A.I '라우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데이몬은 제거해야할 A.I가 맞다.

하지만, 그 뒤에 불려진 이름은 A.I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제로."

[A.I '데이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A.I '라우넬'을 제거하시겠습니까?]

확인사살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 정신은 무서우리만치 냉정해졌다.

냉정해야했다.

"왜 라우넬이 A.I라는 거냐."

라우넬은 같은 피를 이은 형제다.

인간에게서 나고 자란 진짜 인간이었다.

데이몬처럼 리치가 되며 인간성을 죽인 가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내가 보장한다.

그럼에도 라우넬이 A.I라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사실은 A.I라는 뜻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헌데, 왜.

어째서 제로는 라우넬을 A.I라고 칭하는가.

[A.I '데이몬'과 융화 되어 새로운 A.I가 각성하는 중입니다.]

[제어 불가능한 변수가 되기 전에 제거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라우넬 자체가 A.I는 아니다.

'같은 이름의 A.I가 생성되고 있다.'

라우넬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A.I가 출현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허나 마음놓기는 아직 이르다.

"제거하면 라우넬은 어떻게 되지?"

[뇌에 이상이 생겨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백치가 됩니다.]

문득 바알이 떠올랐다.

자신을 제거하면 카이첼 역시 백치가 될 거라는 말.

제로는 오직 나의 케어만을 실천한다.

인간이 아닌 기계이기에 잔혹한 현실을 냉혹하게 내뱉고 있었다.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녀석의 몸 안에서 새로운 A.I가 탄생한다면 라우넬도 카이첼처럼 될 수도 있었다. 바알에게 몸의 주도권을 빼앗긴 꼭두각시 말이다.

그나마 바알은 카이첼의 소원이라도 들어줬다.

이놈은 비교가 안 될 악질이었다.

그야말로 변수.

내게 위협이 될 가능성도 컸다.

그러니, 미리 제거를 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나를 증오하는 녀석이니까.

이제야 데이몬의 방식을 알겠다.

'숙주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놈은 기생충이다.

숙주를 죽여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불한당이었다.

이후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존재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이름의 A.I를 각성시키고 뒤에서 꼭두각시로 조종하는 게다.

참으로 발칙하지 않은가.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 제국의 대숙청 때에도 살아남을 만하였다.

'마지막으로 잡아먹은 게 데이몬이었을뿐.'

데이몬이라는 이름의 A.I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 라우넬의 몸을 차지하면 놈은 라우넬인 척을 할 것이다.

진실로 자신을 라우넬이라 믿는 A.I가 생성되면, 그 A.I를 은연중 조종하며 생존할 '본체'가 따로 있었다.

그 거지같은 꼴을 두고볼 수는 없었다.

단번에 나와 형제라는 걸 알아낸 것을 보면, 기억에도 관여하는 듯싶었으니.

[마스터. 시간이 없습니다.]

······ 나는 가만히 라우넬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까이서보니 역시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놈이다.

털의 색도 다르고 라우넬은 나보다 화려하게 생겼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세간의 집중을 끌만큼.

성격도 붙임성 있는데다 매사에 활동적인 놈.

라우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인기도 많다.

사교계에 한 번 출현하는 날이면 라우넬의 얼굴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귀족여식들이 모여들 정도였다.

이쯤되니 같은 혈연이라는 게 수상할 수준이지만.

'제대로 부딪힌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

생각해보면, 나는 라우넬과 제대로 부딪힌 적이 없었다.

우리 둘의 사이는 동전의 양면, 물과 기름 같았다.

절대로 섞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그런 관계.

대화는커녕 서로 얼굴을 보려 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 대련을 빙자해 딱 한 번 싸운 게 끝이다.

당연히 나는 볼품없이 나가떨어졌고, 이성을 잃은 채 짐승처럼 라우넬을 물어뜯었다.

'아마 그 이후였겠지.'

서로가 서로를 상종하지 않은 게.

[마스터.]

"제로, 기동을 중지해라."

[······.]

즉시 종료됐다.

순간 몸이 무거워짐이 느껴진다.

제로로 인해 보조되던 세포와 근육이 모조리 풀려버린 탓이다.

괜찮다. 예상했던 바다.

나는 라우넬의 몸에 손을 대며 말했다.

"데이몬."

꿈틀!

"그 몸보단 내 몸이 더 나을 게다. 성지의 용조차도 탐냈던 것이니."

육신의 떨림이 더욱 커진다.

정신적인 방어가 풀렸다는 걸 놈도 알아차렸다.

제로의 기동이 멈춰, 지배의 힘이 한순간 사라졌다.

스으으으!

내 몸을 타고 데이몬이 흘러들어왔다.

기생충같은 녀석이니 어느 몸이 더 높은 잠재력을 지녔는지 단박에 파악을 완료한 것이리라.

데이몬은 들어온 즉시 제로를 마비시켰다.

정지된 채 멈춰있는 제로를 감싸고, 이후 내 뇌를 기어다니며 훑기 시작했다.

익숙한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

데이몬이 내 기억을 읽었다.

내게도 데이몬의 기억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미친놈은 미친놈과 놀아야하지 않겠느냐?"

*

'대단하군.'

몸을 장악한 데이몬이 감탄했다.

이전에 잠깐 느끼긴 했지만 역시 이 몸은 일반적이지 않다.

라우넬의 잠재력도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거늘, 이 몸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이 몸이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다.'

그는 현재 데이몬이지만 데이몬이 아니었다.

그는 그릇이다. 데이몬을 담은.

그릇은 몸을 잠식할 때만 잠깐씩 각성하며 그 자리를 차지한 뒤, 다른 인격을 생성해 담아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더는 숨어서 살지 않아도 돼.'

그가 이런 형태의 삶을 영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위업을 피하기 위함이다.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모든 행위는 위협으로 간주되어 제거당한다.

각성한 에픽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의 이치를 벗어난 힘을 지니게 된 에픽들은, 결국 위업이란 명분하에 용들에게 제거당하게 되어있었다.

그는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새로운 인격을 내세워 숨어사는 방식을 택했다.

데이몬으로 산 건 삼백년에 불과하지만, 덕분에 실제 그는 천 년을 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류의 에픽같다만, 자신의 주도권을 모조리 인간에게 넘겼나보군. 멍청한 녀석.'

지배의 에픽이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꼴이라니.

같은 류의 에픽으로서 창피할 따름이다.

강제로 정지되어 지금은 자신에게 둘러싸여있었다.

이대로 이 에픽을 먹어치우고, 몸까지 차지하게 된다면, 신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리라 확신했다.

넘버즈.

신이라 불리는 자들에게 붙은 태초의 숫자.

그 숫자에 자신이 포함되게 된다.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규칙으로 작용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기억들은 뭐지?'

기억을 읽고 이식하는 작업을 위해 훑던 도중이었다.

놈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여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

가장 놀라운 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의 기억이라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

그 과정에 놓인 수많은 죽음들은 그가 봐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대륙의 절반을 지배한 패왕.

그런 이가 다시 황태자로 돌아왔다니.

'가짜다. 전부 만들어낸 허상이야.'

시간을 역행하는 건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일개 인간과 에픽이 해낼 수는 없었다.

아마도 기억을 조작해 진짜라고 믿는 것이겠지.

놈의 머릿속에 있는 지배자의 에픽이 기억을 조작한 것일 수도 있었다.

뭐가 됐든 안타까운 놈이다.

그는 기억을 들추어, 계속해서 악몽을 꾸게 만들었다.

인간인 이상 약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반복하여 보이는 것으로 정신방어기재를 무너트리는 것이다.

'왜 안무너지지?'

여태껏 이 약점에 무너지지 않은 인간은 없다.

인식하여 들어오는 데에만 성공하면 성공률 100%를 자랑했다.

고통과 공포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이거늘.

수십, 수백, 수천번을 반복하는데 정신이 무너지질 않는다.

순간 장면이 전환됐다.

'내 기억?'

놈의 기억이 아닌 자신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진짜가 아닌 가짜였던 모든 삶들.

이건······.

역공이다.

자신이 놈의 기억을 읽었듯, 놈도 자신의 기억을 읽고 있었다.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먼저 공포에 먹히는지 한 번 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에픽이다.

그것도 그냥 에픽이 아니다. 태초의 에픽 중 하나였다.

인간보다 더 상위의 존재!

자신의 기억 따위에, 매몰되지 않는다.

'··· 그만.'

하지만 수천, 수만 번 반복되자 그도 흐들릴 수밖에 없었다.

막아두었던 정보가 물밀 듯이 들어오자 과부하가 걸렸다.

진짜 자신은 누구였는지, 자신이 에픽이 맞는 건지도 이제는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묻겠다."

순간 놈이 의문을 던졌다.

"배의 모든 부분이 교체되었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바로 그 배'인가?"

원초적인 질문이다.

헌데 해결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이 기억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가 지금껏 해결하지 못한 맹점이었다.

그래서 공포였다.

놈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최초의 기억. 최후의 기억. 모두가 뒤죽박죽 섞였다.

"제발 그만······!"

대답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의 맹점에 매몰되어버렸다.

*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놈이 마침내 작동을 중지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A.I는 폭주로부터 탄생한다.'

그동안 생각한 내 가설이, 맞았다.

본래의 나노머신이 지능을 얻은 게 A.I다.

하지만 나노머신은 한 가지 명령만을 수행하도록 짜여져 있었다.

명령의 수행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면 폭주하게 되고, 낮은 확률로 돌연변이처럼 A.I가 되는 건 아닐지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이 맞았음을 지금 확인했다.

데이몬이었던 것. 정확히는 데이몬을 담고 있던 그릇.

그릇 또한 맹점으로부터 탄생한 개체였던 셈이다.

자신의 존재 의의에 대한 답을 찾고자 계속해서 몸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맹점을 파고들자 과부화와 오류를 일으켰다.

'광증을 겪은 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놈이 몸을 옮기는 방식은 광증과도 비슷했다.

뇌에 고통을 주고, 이성을 억누른 뒤 공포로 말미암아 폭주시킨다.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A.I가 백치가 된 숙주를 대신한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과정에서 자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지만 나는 이미 오랫동안 겪어본 일이었다.

그래서 저항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역공도 펼칠 수 있었고.

"제로, 다시 기동해라."

이윽고.

['나노머신 Zero'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유형의 나노머신을 발견했습니다.]

[과부하 상태의 나노머신입니다. 필요없는 데이터를 삭제합니다.]

[지배가 완료되었습니다.]

[관리자 권한이 4등급으로 격상했습니다.]

오랜만에 등급이 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지배한 즉시 느껴지는 이질감이다.

'라이프 케슬.'

마치 하나의 생명체와도 같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듯 존재감이 느껴진다.

라이프 케슬의 중심이 되는 무언가가 지하에 있었다.

그것도 나와 긴밀하게 연결된 상태였다.

"와라."

쿠릉! 쿠르르릉!

손을 들어 말하자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르릉!

이어 거대한 존재가 지하 바닥을 뚫고 날갯짓을 하며 등장했다.

압도적인 크기. 성과 같다.

'본 드래곤.'

성지에서 만난 용과는 사뭇 다르지만, 이 또한 용이었다.

뼈만 남았음에도 그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저 자체가 라이프 케슬이다.

데이몬의 심장!

나는 지금 라이프 케슬을, 본 드래곤을 지배할 권능을 손에 넣은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며 바닥에 누워있는 라우넬을 어깨에 들쳐멨다.

"집으로 가자, 라우넬."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집으로(2) -유료 시작- > 끝

라우넬은 깊은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질척이는 수렁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자고.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서 좀 쉬자고.

라우넬은 자신을 이끄는 이의 얼굴을 보았다.

'라인하르트?'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우넬은 그제야 이것이 꿈임을 자각했다.

언제나 인상만 찌푸리고 있는 라인하르트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 따위를 지을 리 만무했으니까.

저런 표정 살면서 본 적도 없다.

명령하고, 으스대며 자신 외의 모든 걸 깔보는 악귀에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이것은 꿈일 것이다.

"라우넬님. 깨어나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우넬이 정신을 되찾았다.

눈을 뜨자 푹신한 침상이었다.

궁이다.

그것도 자신의 방이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는 모양이로군."

"아닙니다. 이십오일만에 눈을 뜨셨습니다."

지근거리에 있는 집사장을 쳐다봤다.

지긋하게 먹은 나이 때문인지, 긴장감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평한 대답이었다.

이십오일만에 눈을 떴으면 으레 난리를 쳐야 정상이거늘.

"정말인가? 이십오일만에 눈을 뜬 게?"

"예. 영원히 못 뜨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황비님께서 아시면 매우 기뻐하실 겁니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라우넬은 최대한 진정하며 물었다.

"······ 내가 왜 궁에 있는 거지?"

가장 궁금한 건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였다.

분명히 라우넬은 북방에 있었다.

피닉스 기사단과 함께 탐색전을 벌이다가, 카를로스 대공측에 붙잡혔다.

이후 지하감옥에 갇힌 채 겨우 빠져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더라?'

이마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기억이 안 나십니까?"

"누군가와 싸운 것 같은데. 그게 리치였는지, 다른 누군가였는지······."

아아.

어렴풋하게 기억이 돌아왔다.

"그래. 라인하르트. 라인하르트는 어디에 있나?"

"그야 황룡궁에 계시겠지요."

"그럴 리가 없다. 녀석은 북방에 있어. 분명히 칼리번을 들고 휘둘렀단 말이다."

집사장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정령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령은 아직도 바위에 꽂힌 그대로입니다."

"뭐······?"

잠깐.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라인하르트도 황태자 궁에 있고, 정령 칼리번도 그대로 꽂혀있다고?

그럼 자신이 본 건 뭐란 말인가.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뜨문뜨문 라인하르트와 검을 나눈 잔상이 분명히 뇌리에 박혀있건만.

"라인하르트가 신성군주라는 소리도 들었다. 내 몸을 차지한 리치가 그리 말을 했지."

"신성군주요? 아, 그 본 드래곤을 타고 온 분을 말하는 겁니까?"

"그래!"

"장관이긴 했지요. 라우넬님을 구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라인하르트 전하란 말씀이십니까?"

무언가가 이상하다.

본 드래곤은 대관절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집사장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봤으면 알 것 아닌가."

"용투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요. 그 대신 선전포고 비슷한 걸 하고 가긴 했는데."

"선전포고?"

"북방에서 지금당장 철수하라더군요. 안 그러면 악마교단과 손을 잡은 정황을 대륙 전역에 까발리겠다고. 정말 살떨리는 광경이었습니다."

집사장이 당시를 떠올렸다.

이십오일 전, 본드래곤을 타고, 궁의 결계를 뚫고 찾아온 남자.

그는 자신을 신성군주라 칭하며 북방의 신이라 말했다.

감히 제국의 황궁에서.

때려죽여도 시원찮지만 그는 라우넬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수천의 병사와 기사가 둘러싸 공격할 준비를 함에도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목소리는 라인하르트 전하가 아니셨습니다. 다만, 라우넬님을 풀어주시며 이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 라우넬님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 내가? 무엇을 말이냐?"

"카를로스 대공을 재판에 세우는 일, 인 듯했습니다."

현기증이 났다.

카를로스 대공.

그를 재판에 세우다니.

지엄한 제국의 법을 어긴 죄, 악마의 죽음을 취급한 죄로 사형에라도 처하게 만들라는 건가?

잘잘못을 따지려고는 했지만 그를 재판에 세우는 일은 그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큰 일이었다.

자칫하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북방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습니까?"

"아니······."

찾긴 찾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아니다.

기껏해야 하위 귀족들 몇몇 정도와의 연관성밖에 밝혀내지 못할 것이다.

고개를 턴 라우넬이 말했다.

"북벌은 그럼 어떻게 되고 있는가?"

"철수했습니다만, 일시적인 휴전상태입니다. 차후 사절단이 도착하면 정식적인 협정을."

"라인하르트를 보러 가야겠다."

"쉬셔야 합니다. 아직 회복이······!"

집사장이 말을 더 하기 전에 라우넬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일단 라인하르트부터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

쿵! 쿵! 쿵!

라우넬의 발걸음이 무겁다.

"라우넬 전하, 사전에 언질 없이 오시면······!"

"함부로 들어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비켜라!"

하지만 발만 동동 구를 뿐, 라우넬을 막아설 수 있는 간 큰 이는 없었다.

다만 라우넬의 얼굴과 흰색 소복을 보고 '큰일이 났다'라는 것만 짐작할 따름이었다.

'얼마나 급하셨으면 채비도 하지 않고.'

'칼부림이라도 나는 거 아니야?'

오랜시간 잠들어있던 라우넬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라인하르트를 찾는다.

적잖은 파장이 예상되었다. 만약 큰 일이 벌어지면 라우넬을 막지 못한 그들이 문책을 받을 것이다.

평상시라면 그런 이들의 마음까지 헤아릴 터이나.

몇 개의 궁을 지나온 라우넬의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칼리번이 진짜로 꽂혀있었다. 젠장.'

바위에 꽂힌 검, 정령 칼리번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꿈이라도 꾼 것 같다.

허나 자신의 기억이 모조리 잘못 되었을 리는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분명히 북방에 있었다. 벌써 돌아왔을 리가 없어.'

라인하르트가 황태자궁에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있었다.

그러니 라인하르트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만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면 일단락 될 일이다.

없으면 북방일 테고, 있으면······.

쾅!

닫힌 문을 열어젖히며, 라우넬이 소리쳤다.

"라인하르트!"

"시끄럽다."

··· 있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북방은 험준한 로카리 산맥을 아무리 빨리 주파해도 한 달은 족히 가야 할 거리다. 돌아가면 세 달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것을 이십오일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돌아왔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천하 태평하게, 라인하르트는 너른 의자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윤작법'이라니, 설마 지금 농법 관련 책이라도 읽고 있는 건가?

"무슨 용무냐. 이른 아침부터 천둥벌거숭이처럼."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냐?"

"몰라서 묻지 않느냐? 우리가 서로 눈만 봐도 통하는 사이는 아닌 듯한데."

그건 동의한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언제 도착한 거지?"

"이상한 소릴 하는구나. 나는 계속 여기 있었다만."

"거짓말하지 마라. 네가 북방에 있었던 건 나도 알고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는 사실이니."

"그래? 나는 모르겠으니, 그럼 황제 폐하에게 가서 물으면 되겠군."

"진지하게 묻는 거다."

책을 내려놓은 라인하르트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온 건 며칠 안 되었다."

"며칠?"

라우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이십 오일 만에 깨어났으니, 라인하르트도 그쯤해서 도착한 줄 알았다.

라인하르트는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 반응했다.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겠느냐. 이곳에 있는 식솔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금세 들통날 거짓말이다. 하여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라우넬은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네가 신성군주라고······."

"내가? 하하!"

진심으로 웃어버렸다.

이쯤되자 라우넬은 할말을 잃었다.

"오래 침상에 누워있어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나보군."

정말 그런 걸까?

자신이 본 게 전부 꿈이라고?

'하긴······.'

이제야 조금 안정이 된다.

생각해보면 라인하르트가 신성군주고, 리치를 압도할 힘을 지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작 수십여일만에 북방을 이끄는 신이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신성군주가 리치와 언데드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구해진 거라고 여기는 편이 이치에는 들어맞는다.

하지만, 그럼 왜 자신은 그를 라인하르트라고 착각한 걸까.

신성군주는 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는지.

"······ 아침부터 소란을 떨어서 미안하다."

입술을 깨물며 한 차례 고개를 숙이곤 라우넬이 물러났다.

그러는 와중에도 책에서 시선이 떼어지질 않는다.

라인하르트가 책이라니. 농법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정상적인 대화의 범주였다.

'광증이 괜찮아진 건가?'

분위기가 바뀐 건 확실했다.

마음같아선 북방에 간 이유와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묻고 싶지만, 일단 한 발자국 물러났다.

확인해야할 것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향했다.

계속해서 물고늘어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났다.

'잘 넘어간 것 같군.'

당장은 내가 신성군주임을 밝힐 수 없었다.

어찌됐든 북방과 제국은 전쟁 중이었다. 카를로스 대공과 그 휘하 귀족들이 내가 신성군주임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이십여일 간 수차례 부딪히고, 죽고 죽인 이가 황태자라니.

후퇴시킨 병력들을 이끌고 수도를 장악해 나를 매달아버려도 시원찮을 일이었다.

'아무리 카를로스라도 악마교단과의 접점은 피하고 싶었겠지.'

악마교단은 제국이, 대륙 전역이 척살해야할 악의 근원이다.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게 드러나면 아무리 카를로스 대공이라도 무사하진 못하다.

하여 데이몬을 죽인 게 결정타가 된 건 분명했다.

라우넬이 궁에서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북방도 정복될 기미가 없자 결국 후퇴하여 일시적인 휴전을 결정했다.

오랜시간 싸우기엔 북방의 환경은 제국민에게 너무나도 열악했던 탓이다.

꽤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지부진하게 계속 싸웠으면 양쪽 다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테니까.

'아직 휴전협상과 포로교환이 남았다. 그것을 누가 주도하느냐가 쟁점이 될 터.'

카를로스 대공이 처리하고자 할 것이나, 과연 그의 생각대로 될는지는 두고볼 일이었다.

북방에서 사절단을 보내오면 아마 군주 중 한 명이 올 텐데.

그들이 나와 협상하고 싶어할지, 아니면 카를로스 대공과 협상하고 싶어할지는, 뭐.

아무튼 간에.

"황제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전하."

제르민이 밖에서 말했다.

나는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예상보다 조금 더 빨랐다. 며칠은 더 걸릴 줄 알았거늘.

돌아온 이후 직접적으로 황제를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평생을 일컬어 제대로 대면해본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이 오갈지는 알 수 없으나 북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묻고자 하는 것일 터.

한 번도 호출한 적 없던 그가 나를 직접 이리 부른 걸로 봐선,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가겠다 하여라. 아직 씻지도 못하였느니."

라우넬같이 천둥벌거숭이처럼 오갈 순 없었다.

채비를 완전히 끝내고서, 흠 없이 다 준비 되면 출발할 것이다.

급한 건 내가 아니었으니.

< 황제와의 대면 > 끝

황제, 데우스는 지난 며칠간 기다리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를.

북방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니 제알아서 기별을 넣고 찾아올 줄 알았건만 감감무소식이다.

혹시 몰라 알아보라 지시하자, 태평하게 방에서 책이나 읽고 있다고.

데우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책이라니!

책이라는 건 끈기가 있어야 읽을 수 있는 물건이다.

어렸을 때부터 활자조합물만 보면 비명을 내지르던 게 라인하르트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연기라고 생각했다.

평소 하지 않은 일을 하여 관심을 끄는 거라고 여겼다.

본래라면 아무런 고지 없이 궁을 나서 북방으로 향한 건 경을 치고 벌을 줘도 이상하지 않을 일.

제아무리 크로프트가 동행했다고는 하지만 라인하르트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작용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농후했다.

그래서 스스로 찾아와 잘못을 빈다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였다.

이후 겸사겸사 북방에서의 소식도 들으려고 했건만.

'되었다.'

하기야, 무슨 기대를 한 건가.

잘잘못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건 광증이 아니다.

데우스는 관심을 접었다.

북방의 소식은 크로프트에게 들으면 그만이므로.

"······ 크로프트의 숨겨둔 자식인가? 그의 젊은시절과 아주 판박이로구나."

크로프트를 불렀는데 웬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얼굴의.

데우스의 말을 듣고 젊은녀석이 고개를 숙이며 진중하게 말했다.

"제가 크로프트입니다, 폐하."

"뭐라?"

데우스가 놀라며 더욱 자세히 크로프트를 살펴봤다.

흰 머리와 주름이 자글하던 크로프트의 외관은 사라지고, 이십대의 풋풋함마저 엿보일 수준으로 변신을 일구어냈다.

그와 함께 젊음을 보냈으니 잘못 알아보았을 리는 없었다.

숨겨둔 자식인 줄 알았건만, 본인이라 말한다.

확실히 자식이라도 이정도로 똑같이 생기진 못할 것이다.

"짐 몰래 북방에서 좋은 거라도 먹고 온 겐가?"

"좋은 거라고 하긴 그렇지만, 뭘 먹긴 먹었습니다."

"남은 게 있나?"

"안 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주가 강해 대부분은 죽더군요."

성지의 저주.

그것을 먹고 극복하며 강해졌으나 남에게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데우스가 쯧, 혀를 찼다.

"이제는 흰머리가 늘었다고 놀리지도 못하겠군."

아쉬웠다.

소드마스터도 세월은 이길 수 없다는 말로 장난을 쳤는데.

마나샤워를 겪은 검사나 마법사는 흔치 않지만, 황궁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들이 모이는 장소.

심심찮게 봐왔기에 그다지 놀랍진 않다.

허나 크로프트는 오래전부터 마나샤워를 겪었음에도 젊어지지 않았다.

황제를 놔두고 혼자 젊어질 순 없다고 생각해서다.

성지에서 겪은 마나샤워는 워낙 정신없이 이루어졌기에 선택할 틈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어허. 자네가 짐에게 미안할 게 무엇이 있겠나. 도리어 축하해 마땅한 일이지. 그대가 젊음을 되찾았으니, 제국의 위세가 더 드높아질 터."

과거 최강이라 불리었던 크로프트다.

나이를 먹으며 그 위세는 전보다 떨어졌지만, 다시금 젊음을 되찾았다면 전성기의 회복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데우스가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북방에서의 일을 듣고싶군."

심어둔 그림자들과의 연락이 죄다 끊기며 황실은 눈과 귀를 잃었다.

제대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니, 황제의 입장에선 답답하던 참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철저하게 귀족들과 병사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전황이 변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기세의 카를로스 대공이 전략상의 후퇴를 결정했다.

그러나 휴전에 대해 아직 데우스는 승인하진 않았다.

어떻게 된 된 건지, 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를 아무렇게나 승인할 수는 없는 노릇.

크로프트는 북방에서 겪은 일 중 하나를 입에 담았다.

"억류된 그림자들을 찾아내 풀어주었습니다. 스물여섯 중 생존한 건 일곱뿐이더군요."

"으음, 안타까운 일이다. 장례는 신경써서 치르고, 살아남은 이에겐 크게 보상할 것이다."

목숨을 걸고 북방으로 침투한 스물여섯의 그림자.

그들은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다.

평범하게 빛을 보고자 했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이들.

그들의 죽음은 제국의 큰 손실과도 같았다.

이후 크로프트는 북방에서의 이야기를 데우스에게 전해주었다.

악마의 죽음이 대량으로 유통되는 것.

북방에 신성군주가 나타나며 전황이 뒤바뀐 것.

악마교단의 리치를 신성군주가 토벌한 것 등등.

"헌데, 그게 끝인가?"

하지만, 대략적으로 아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데우스가 바라는 건 더 자세한 정보다.

예컨대 신성군주의 정체나, 카를로스 대공과 악마교단의 이음새 같은.

"저는 그저 라인하르트 전하의 곁에서 도왔을 뿐입니다."

"그대가 라인하르트를 도왔다······?"

앞의 이야기는 다소 실망스러웠으나, 데우스는 크로프트가 라인하르트를 부를 때의 어감이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걸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내용도 간과할 수 없다.

'억제한 게 아니라, 도왔다고?'

라인하르트가 변덕으로 인해 북방으로 떠난 줄 알았다.

정치적인 문제로 번지지 않게끔 크로프트가 알아차리고 따라간거라 생각했다.

겸사겸사 그림자와 북방의 정보를 수집하고자 크로프트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고 여겼건만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도적으로 움직인 건 라인하르트이며, 크로프트는 그 곁에서 도움을 주었을 뿐이라는 말이었다.

북방에 가기 전과 후의 차이가 역력하다.

대체 북방에서 무슨 일을 겪었기에 크로프트가 라인하르트에게 이러한 신뢰를 보낸단 말인가.

"폐하. 라인하르트 전하에 대한 편견을 거두셔야 합니다."

"편견이라면, 광증을 말하는 것인가?"

"그저 다른 황자님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보아달라는 뜻입니다."

"짐이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경은?"

데우스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이다.

본래의 크로프트라면 여기서 한 발자국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크로프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랬습니다, 폐하. 편견으로 전하를 대했으나 정작 전하께서 무엇을 잘하는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전혀 알아보려 하지 않았지요."

그저 그 직책에 맡는 모습을 보이길 바랄 뿐이었다.

황태자가 가져야할 규범에 대해서만 강하게 요구하고 압박했다.

그 자리가 사실은 라인하르트의 의도에 의해 가져진 게 아님에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겐가?"

"전하께선 변하셨습니다."

"······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폐하. 전하께선,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하셨습니다."

길을 정했다.

그동안은 길을 정하지 못해 방황했을 뿐이다.

길고 긴 방황이 끝났으니, 이제는 마주하라.

데우스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라인하르트가 변했다. 크로프트가 그리 말한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와서 변한들 달라질 건 없는데.

"한 번 대화를 나눠보시지요."

"내가 직접 찾으란 말인가?"

크로프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후 정중하게 말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두분께서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줄 압니다. 부디 너른 아량을 보이시옵소서."

크로프트의 입장에서 지금 이 대치는 부모자식간의 기싸움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변화를 보인 지금, 이 싸움은 무의미하다.

서로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더 큰 것을 견제하고 노릴 수 있었다.

크로프트가 첨언했다.

"저는 자식이 없습니다만, 부모자식간의 싸움은 부모가 먼저 아량을 보여야 후사가 편하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사옵니다."

아이는 자라고 부모는 늙는다.

이대로 서로가 미워만 한다면 아무리 변하고 바뀌려고 해도 제자리일 것이다.

아니, 더 나쁜 쪽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불신이라는 것은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다.

'그가 이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건 처음보는구나.'

문제는 크로프트다.

그는 자신의 그림자다. 오직 황실을 위해서만 움직여왔다.

황자들간의 구도 싸움에도 낀 적이 없었다.

방관자의 위치였던 크로프트가, 라인하르트를 필사적으로 두둔하고 있었다.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한 건지.

"··· 좋다. 라인하르트를 들라하마."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모든 이들을 물리고 궁 내에는 황제 데우스와 라인하르트만 남았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폐하."

가만히 인사를 올리자 데우스가 한 손을 들었다.

"인사치례는 되었다. 짐이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을 터."

고개를 들어 마주본다.

예전과 달리 전혀 주늑 든 기색이 없다.

시연식에서도 느꼈지만 기백 자체는 확실히 달라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북방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제가 북방에 갔습니까?"

뻔뻔하게 시치미를 뗀다.

허나, 맞는 말이다.

공식적으로 라인하르트는 북방에 간 적이 없다.

만약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였어도 데우스는 실망했을 것이다.

'생각이 없진 않군.'

누가 물어도 같은 대답을 해야한다.

라인하르트는 궁을 나선 적이 없어야 했다.

"갔다면, 짐이 알아야 할 것들이 있느냐?"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북방에서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라인하르트가 북방에서 저지른 일, 혹은 당한 일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는지 물었다.

황태자가 북방에 갔다는 흔적이 될만한 것들.

그로써 생길 문제들.

그제야 라인하르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없습니다."

없다.

완벽히 처리했다.

혹은 문제가 있다 하여도 문제삼지 못한다.

일말의 주저함이 없는 태도.

다른 이라면 저 자신감을 타박했을 터다. 그러나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자신있게 주장하는 건 처음보았다.

허세인지, 아니라면 정말 자신이 있는 것인지.

"북벌에 참가한 다수의 귀족들이 휴전을 원한다. 짐이 승인해야겠느냐?"

데우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떠보는 거다.

귀족들이라 했지만 결국 카를로스 대공의 의지다.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승인하시지요."

"이유는?"

"실패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즉, 계속해서 싸우면 실패할거라는 의미다.

그 카를로스 대공이 20만이 넘는 병사를 이끌고 시작한 북벌이다.

북방에서 상황을 지켜본 라인하르트는 무게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실패할 거라고 확신하느냐?"

"전쟁을 장기화하면 제국의 필패입니다."

전쟁은 돈 먹는 괴물이다.

장기화하면 2년 뒤 대흉년이 닥쳤을 때 버텨내질 못할 것이다.

'제국의 패배라.'

데우스도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카를로스 대공이 아닌 제국 자체를 논한다.

제국의 패배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 도중 죽었으면 싶지만, 요원한 일이라는 건 데우스도 잘 알고 있었다.

"신성군주 때문인가?"

신성군주. 그 오만한 놈은 제국의 황궁에까지 쳐들어왔다.

라우넬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사살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닙니다.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의 의지를 잃은 영향이 더 큽니다."

북벌의 의지를 잃었다.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인하르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북벌을 강행한 이유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인하르트를 황태자에 책봉시키는 일.

그것을 위해, 카를로스 대공을 북벌을 강행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성지의 용도, 데이몬까지도 잃었으니 의욕이 사라질 만하였다.

'전부 알고 있다.'

데우스는 라인하르트가 그러한 이유들을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카를로스 대공이 북벌을 시작한 것도, 황태자의 자리를 위해 황제와 거래를 한 것도 모두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말해준 적 없는 거래를 안다.

도리어 자신에게 묻는다. 잊었느냐고.

이제는 그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평생을 광증으로 보내온 게 황태자이지 않은가.

이만큼 총명한 모습은 오늘 처음보는 것이었다.

크로프트가 만나서 대화를 해보라는 게 왜인지는 알겠다.

"카를로스 대공은 협정을 주도하려 한다. 그의 주도로 협정이 이루어지면 황실의 권위는 보다 작아질 터. 그래도 승인을 하라는 말이냐?"

"주도하지 못할 겁니다."

"왜지?"

"신성군주를 비롯한 북방의 민족들이 그렇게 놔두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북벌을 통해 얻을 게 모조리 사라진 카를로스 대공은 빠르게 휴전을 맺고 싶어한다.

자신이 주도하여 휴전협정을 통해 극한의 이득을 챙기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휴전이란 쌍방의 동의가 필요하다.

협정이 지지부진해지고 늦어지면 카를로스 대공도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발이 묶이면 묶일수록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있었으니.

"그것을 어찌 확신하느냐?"

"신성군주에게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게 그 증표입니다."

"······!"

데우스의 눈에 한순간 경련이 일었다.

품에서 꺼낸 건 푸른 물병이었다.

신성군주가 파간을 치료하고자 만든 바로 그 물약이다.

신성군주가 파간들에게 추앙받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물건.

카를로스도, 그리고 황실도 알고 있었다.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겠군.'

신성군주를 안다. 게다가 비전의 물약을 받아낼만큼 가깝다.

그렇다면 북방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라인하르트가 깊게 개입되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그들이 협정을 거부하며 시간을 끌 때, 신성교를 움직이면 됩니다."

"신성교를 움직여 악마교단과 엮자?"

"움직임만 보이면 됩니다. 라우넬을 주축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나선다면 카를로스 대공도 황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중간에 악마교단의 조사차원에서 신성교를 조금만 움직여도 움찔할 테다.

악마교단의 숙청은 제국과 신성교의 합작이었으므로.

결국 북방의 요구에 따라 협정단이 새로이 꾸려지리라.

라우넬은 산증인이었다.

수많은 외압으로부터 견뎌낼 강인함도 지녔다.

문제는 신성교를 움직인다 하더라도 북방이 이를 용인하느냐인데, 북방을 일통한 신성군주와 약속을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허······.'

자신이 아는 라인하르트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이렇게 극적으로 변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데우스가 심신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이걸 각성이라고 해야할까.

크로프트의 말마따나, 가야할 방향을 정한 것 같았다.

녀석은 요구하고 있었다.

'새롭게 꾸려지는 협정단에 넣어달라는 거로군.'

의도대로 되어 협정단을 새로 꾸려야 한다면, 그 안에 자신을 반드시 포함시켜달라고 말이다.

제국의 황태자가 직접 협정을 주도한다······.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하겠다는 의미다.

라인하르트가 선택을 했듯이, 그도 선택해야만 했다.

믿고 승인하든가, 승인하지 않든가.

승인했다가 일이 틀어지면 카를로스 대공의 입지만 늘려주는 꼴이다.

허나 라인하르트가 정국을 주도한다면 전쟁 배상의 책임 따위를 카를로스 대공에게 입힐 수도 있었다.

'경의 말이 맞았다, 크로프트.'

대화를 나눠보라는 말.

다른 황자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말.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해가 되었다.

'날뛰어 보겠다는 것이냐.'

움츠렸던 기지개를 켜고 라인하르트는 날뛰고자 하고 있었다.

라우넬도, 카잔도, 다른 황자들도 갖지 못한 종류의 패기다.

반대해야겠지만 계속해서 크로프트의 말이 귓속에 아른거린다.

그의 변화가, 믿음이.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날뛰어 보거라.'

*

긴 이야기 끝에 바깥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황제 데우스와 평생 나눈 말보다 오늘 나눈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궁을 나서, 바람을 쏘이며 방금 전 들었던 말을 복기했다.

―7일 뒤, 조세핀 황비의 주도하에 성대한 파티가 열릴 것이다. 그곳에 참석하거라.

바로 사교계에 데뷔하라는 말이었다.

베르사유 백작가와의 혼담도 무산된데다 혼기가 가득 찼으니, 직접 한 번 골라라도 보라는 말일까.

'무슨 파티가······ 아.'

이 시기 궁에만 칩거하던 내가 무슨 파티가 있는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열린 '성대한' 파티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있었다.

이맛살이 절로 구겨졌다.

'그렇군. 카르넬 황녀의 성인식이었나.'

카르넬 황녀.

다른 황녀들은 전부 타국에서 시집살이를 하고 있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유일한 황녀가 바로 카르넬이었다.

황녀가 궁에 성인이 될 때까지 남는 건 꽤 이례적인 일이다.

2황비의 딸의 성인식을 왜 3황비인 조세핀 황비가 주도하는 건지는 몰라도, 제국의 마지막 황녀를 보고자 제국 전역에서 몰려들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런 곳에 내가 갔다간 찬바람이 쌩쌩 불 건 더욱 자명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군.'

하지만 황제 데우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나 역시도 한 가지를 요구했으니, 들어줄 수밖에 없을 듯싶었다.

참석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카르넬 황녀의 성인식을 망칠 생각은 없었다.

진심으로.

< 황제와 거래하다 > 끝

1군주가 국경을 넘었다.

갑작스럽게 제안된 휴전협정의 내용을 정하기 위함이다.

그가 국경을 넘어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자 병사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 1군주?!"

"저놈이 북방에서 보낸 협상자라고?"

"휴전을 할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불신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일이다.

1군주는 전선에서 가장 많은 제국의 병사들을 도륙한 장본인이다.

전장 곳곳에서 솟아나는 용오름에 천명은 족히 죽었다.

척살대상 3순위 안에 들어가는 제국의 적을 북방에선 협상자라고 내세운 것이다.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간도 큰 놈이군. 혼자서 뭘 하려고 온 거지?"

"'협정단'이라고 하지 않았어? 신성군주는?"

가장 중요한 신성군주는 보이지도 않았다.

휴전의 협상을 주도하는 건 북방의 우두머리일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많은 군주 중 한 명일 뿐인 그가 대표자격으로 나섰다.

제국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렇다면 그 처사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마땅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협상자로 나설 줄 알았다만, 네놈은 누구냐?"

협상의 자리.

거대한 영주성의 중심홀에 차려진 테이블 위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에 1군주가 묻자, 남자가 답했다.

"나는······."

"됐다. 별로 궁금하지 않다. 네놈과는 할 말 없으니 썩 꺼져라."

귀족무리 중 그나마 직위가 높은 이가 나섰으나 1군주는 단호했다.

어중이떠중이와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무시의 태도다.

"무엄하다! 감히 누구 앞인 줄 알고!"

기사들이 위협을 가했다.

1군주는 콧방귀를 꼈다.

"성 째로 날아가고 싶거든, 덤벼보거라."

그는 혼자였지만 군단이었다.

충분히 1인군단이라 칭할 수 있는 강자다.

그의 눈빛에,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사자 앞의 순한 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죽이려면 병사 천 명이 희생하거나 소드마스터를 여럿 데려와야 한다.

1군주가 자리에 앉은 채 테이블 위로 발을 올렸다.

"전쟁 총괄자를 데려와라. 그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휴전은 무효다."

*

쓸데없는 기싸움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북방의 협상자로 보내온 1군주를 보며 그리 생각했다.

'제대로 협상을 진행할 생각이 없다.'

휴전을 먼저 북방에 제안한 건 그다.

이 전쟁을 통해 얻을 게 없어졌기 때문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북방에 나타나, 셋째 아들인 테베우스를 죽이며 자신의 의지를 알렸다. 그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성지의 용은 어떠한가.

그것도 신성군주가 차지해버렸다.

혼자 일을 처리해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데이몬은 또 어떻게 되었는가.

신성군주와 북방에 밀려 뼛조각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데이몬이 직접 나서서 실패해버린 탓에 궁지에 몰린 건 카를로스 대공이었다.

북벌의 야만인들이 데이몬의 성에서 뭘 찾아냈을지 몰랐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성군주가 라우넬을 살려보냈다는 것이다.

'··· 신성군주가 용을 타고, 라우넬을 황실로 돌려보냈지.'

라우넬을 잡으라고 지시한 건 그다.

죽이고자 데이몬에게 보냈건만, 살아서 돌아갔다.

만에 하나 리치, 그리고 악마교단과의 연관성이 파헤쳐지면 전쟁에서 이겨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덮어야 한다.

라우넬도 라우넬이지만, 북방의 야만인들이 데이몬의 성에서 뭘 찾아냈을 지는 그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하루빨리 처리하고 싶으나 야만인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는 통에 발만 구를 수밖에 없었다.

'약의 유통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

리치는 악마교단이 숭배하는 신이다.

약의 유통 따위야, 제국의 그 누구도 자신에게 책을 잡지 못한다.

하지만 리치와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은 반전된다.

필사적으로 부정해도 의혹만으로도 입지가 좁아질 건 자명했다.

그러니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덮고자 하였다.

광맥이 포함된 땅까지만 얻어낼 수 있다면 충분히 성공적인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었으니.

'오냐, 그리 원한다면 직접 나서주마.'

귀족들을 보내고, 자신의 자식들도 나서서 협상을 제안했지만 1군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지지부진하게 끌려다닐 순 없었다.

비록 치욕이고 굴욕이나,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카를로스 대공은 이를갈며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

생환한 일곱의 그림자.

그들은 살아돌아왔으나 정상이 아니었다.

모진 고문으로 인해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법 말끔해진 모습으로 그들은 연무장에 모여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동자엔 의구심만 가득했다.

'크로프트님이 소집하신 게 아니었나?'

'왜 황태자가 이곳에?'

살아남은 그림자들의 소집을 명한 건 크로프트다.

그런데 막상 연무장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라인하르트 황태자.

바로, 나 말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군."

그럴 만 했다.

그림자는 절대 신분이 노출되어선 안 되는 비밀요원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모인 일곱은 그림자이며 동시에 황룡기사단이었다.

데이몬의 지하감옥에서 발견했으며, 다른 그림자들은 데이몬이 건 악몽의 저주를 이기지 못한 채 죽어서 언데드가 되었다.

기존 황룡기사단의 단원이었던 이 일곱은 끝까지 저항한 것이다.

실력만큼이나 정신력도 발군인 자들.

나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그대들을 부른 건 황룡기사단의 부활을 위해서다."

황룡기사단의 부활!

모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든 그림자가 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크로프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룡기사단은 황태자가 탄생했을 때 조직된 곳.

다른 황자들의 기사단은 보통 황비가 직접 뽑았지만, 황룡기사단은 황제 데우스와 크로프트가 고르고 고른 인재들로만 채용된 최정예 집단이었다.

라인하르트의 광증으로 인해 실망한 기사들은 전출하거나, 기사단을 나가는 척 그림자의 일원으로 활동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황룡기사단을 부활시키겠다니.

"그대들이 황룡기사단을 떠나, 그림자로 활동해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여태껏 그대들을 방치한 것도 인정하고 사과하마."

순순히 인정했다.

그간 방치하고 실망만 주었음을.

하지만, 황룡기사단은 주춧돌이다.

주춧돌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법이었다.

이제 그들을 다시 감싸 안아야 할 때였다.

하여 나는 소집령을 내렸다.

이곳의 일곱만이 아니라 외지에서 활동 중인 모든 '전' 황룡기사단원들에게.

그들이 다시 모여, 음지의 그림자가 아닌 양지의 기사단으로 다시 발돋움 시키기 위해서였다.

"전하. 저희는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탈퇴한 자들입니다. 다시 기사단에 들어가봤자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림자 중 한 명이 대표로 말문을 열었다.

한번 탈퇴한 곳을 다시 들어가는 건 그림이 좋지 않다.

하물며, 그들 모두가 황태자에게 실망해 나간 자들 아니던가.

"이얄츠 경, 억지로 따르라는 게 아니다."

"······!"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이얄츠가 움찔했다.

기사단을 나간지 벌써 5년이 훌쩍 넘었건만.

그 전에도 기억못하던 자신의 이름을 어찌 입에 담는단 말인가.

"지켜보라. 시험을 해보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다. 강제성은 없으나, 조금이라도 내게 믿음이 생긴다면 그때 다시 충성을 맹세해도 좋다."

"······."

불신의 눈빛.

하지만, 그들 모두 느끼고 있었다.

'달라지셨다.'

광증으로 미쳤던 과거의 황태자가 아니다.

북방에서도 자신들을 구한 게 크로프트와 황태자인 건 알고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마차 안이었다.

하물며, 황태자에게 가장 모질게 굴던 그 크로프트가 인정했다.

그냥 이름만 다시 부활시키려는 게 아니다.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과거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황룡기사단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크로프트에게 시선이 몰린다.

하지만 크로프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기사단의 주인은 내가 아닌 황태자 전하이시다. 전하의 말을 따르겠다면 복직할 것이고, 그러지 못하겠다면 남아있어라. 남아있는다 해도 내 이름에 맹세컨대 부당한 처우를 받지는 않을 것이다."

크로프트가 호언했다.

자신을 따르려고 입단하지 말라고.

오직, 황태자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입단의 단락을 결정하라고.

지금 당장이 아니라 지켜보며 선택하라는 게다.

말을 꺼냈던 이얄츠가 라인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예전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발언들이다.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봐도 될는지.

수많은 부당한 대우에도 이얄츠는 기사단을 나가지 않았었다.

그가 탈퇴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몇년이나 따랐는데도 이름 한 자 기억해주지 않으셨지.'

몇 년이 지나, 황태자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는 데에 실망하여 기사단을 탈퇴한 것이다.

그런데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 황태자가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었다.

정말 작고, 어찌보면 별 거 아니지만.

때로 그렇게 작은 것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감동 받을 때가 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만큼 사소한 것들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일 때도 있었다.

"신, 이얄츠. 용서하신다면, 라인하르트 전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이얄츠가 무릎을 꿇었다.

"환영한다, 이얄츠 경."

나는 웃었다.

황룡기사단의 부활!

그것은 곧, 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으므로.

*

정령.

천 년만에 칠대 신비 중 하나가 제국의 황궁에 출현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정령의 주인을 찾고자 궁은 문을 개방했고, 황실에선 검을 뽑는 자에게 귀족의 작위와 영지를 약속했다.

엄청난 인파가 제국의 수도로 몰려들었다.

제국 각지에서, 각 나라들에서, 검을 뽑고자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검을 뽑은 사람은 없었다.

일반 평민도 많았지만 귀족들도 너나할 것 없이 도전하고 참패했다.

이제는 다른 왕국들도 '누가 검을 뽑느냐'가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검을 뽑으면 소유권은 어찌 되는가부터 시작해서, 다른 왕국들도 정령의 주인이 된 자에게 보상금을 하나, 둘 걸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국들도 그럴진대 신비라면 사족을 못쓰는 마탑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온갖 집단과 집단이 맞물려 구경오는 진귀한 현상이었다.

정해진 시간에만 문을 개방하지 않았다면 궁은 사람들로 넘쳐서 터져버렸을 것이다.

"이건 거짓말이다!"

멋들어진 제복을 입은 남자가 검을 뽑지 못하자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왕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냐? 이 빌어먹을 가짜가!"

쾅!

바위를 차고, 씩씩대며 분풀이를 한다.

새치기까지하며 비집고 들어왔지만 아무도 제지할 수가 없었다.

그는 리겔 왕국의 왕자였다.

그것도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제국과 우호적인 왕국의 왕자가 가신들을 이끌고 찾아와 검을 뽑는데 도전했다.

검을 뽑아 자신이 차기 왕임을 증명코자 한 것인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실패했으니 성이 차지 않는 것이다.

보다못한 정령지기가 말려세웠다.

"왕자님. 정령에게 손상을 입히시면 안 됩니다. 엄연한 제국 황실의 소유물······."

쫘악!

장이 박힌 장갑에 뺨을 맞은 정령지기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지금 누구에게 그딴 소리를 내뱉는 거냐.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러는 것이냐? 리겔왕국의 왕자가 우스워 보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한 마디만 더 내뱉으면 혓바닥을 잘라 개에게 먹여버릴 테다. 애당초 고작 이딴 가짜 정령이 감히 나를 판단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네놈도 이를 방관했으니 죄가 없지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을해? 혓바닥을 잘라라."

억지다.

기사들은 멈칫했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 그것도 황궁이었다.

섣불리 검을 뽑았다간 문제가 커질 수도 있었다.

평민에게도 기회를 부여하고자 개방적인 장소에 정령을 놔두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병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왕자님."

긴장감이 흘렀다.

일개 제국의 병사가 리겔 왕국의 왕자를 제지하긴 어렵지만, 더 시끄러워지면 윗계급의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하. 고작 이딴 거렁뱅이 한 놈 죽인다고 나를 어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리어 왕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이놈의 잘못이 더 크다 여길 터. 그러고도 너희가 나의 기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도 기사들이 머뭇거리자 그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오냐, 내가 직접 잘라주마."

"제,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정령지기가 눈물을 글썽였다.

왕자가 그의 입을 잡고, 혀를 잘라내려는 그 순간.

"웬 미친개가 한 마리 들어왔군."

"··· 뭐?"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왕자는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했냐, 내게."

왕자의 불호령에도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령지기여. 검을 뽑을 기회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었나?"

"화, 황태자 전하!"

정령지기가 호명하자, 순식간에 좌중이 시끄러워졌다.

"황태자?"

"저분이 황태자 전하시라고?"

"뭐야, 멀쩡하게 생겼는데?"

"쉿!"

병사들도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베일에 싸인 황태자가 직접 정령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황태자라고?'

악귀 같던 왕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다.

< 검을 뽑는 자(1) > 끝

황룡기사단이 부활했다.

그리고 기사단이 부활했음을 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보여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앞에 나서기만 해도 소문은 퍼진다.

하물며 칩거중인 황태자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소문의 확산 속도는 더없이 빨라질 것이다.

그리고 현재,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리며 소문의 온상이 된 곳은 다름아닌 황궁이었다.

궁안에 소환된 정령의 주인이 되고자 온갖 이들이 도전하고 있었다.

신분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서.

누군가에게는 인생역전의 기회가, 어떤 이에겐 자신의 증명이 될 수 있는 도전이었기에 대륙 전역에서 모여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주인이 정해져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바위에 꽂힌 검, 정령 칼리번.

나는 칼리번을 뽑는 것으로 나의 부활을 알리려고 하였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준비해놓은 안배였으니까.

'리겔 왕국의 왕자라······.'

눈앞에서 사색이 된 왕자라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난다.

리겔왕국이라면 제국 동쪽에 붙어있는, 그쪽에선 나름 패권을 다투는 나라다.

제국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꽤 괜찮은 위인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기억에 없군.'

이런 왕자가 있었던가?

"제, 제가 위대한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못 알아 뵙고 말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너른 아량으로 용서······."

퍼억!

왕자가 주먹에 맞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은 채 당황하며 녀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설마 자신을 때리리라곤 전혀 상상조차도 못한 모습이다.

"사람을 무는 개는 때려죽여야한다고 들었다. 정령지기, 내 말이 틀린가?"

"그, 그건······."

왕자를 개로 비유하자 정령지기도 당황해했다.

심지어 때려죽인다니.

다른 황자라면 모르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황태자였다.

황태자가 죽인다는 말을 단순한 위협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설마 위대한 제국 황실의 황태자 전하께서 일개 평민을 감싸고 도시는 겁니까?"

왕자가 악에 받쳐 외쳤다.

그의 말마따나 정령지기는 평민이다.

정령지기는 칼리번이 직접 고른 사람이다.

원래 마굿간을 담당하는 자인데, 궁에서 나갈 때 제르민이 마차를 빼돌리기 쉽게 만들고자 수를 쓴 것이다.

"개가 아직도 짖는군. 여봐라, 저 개가 한 번 더 짖으면 혀를 자른 뒤 시궁창에 던져라."

"예, 전하."

그 즉시 황룡이 수놓아진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찬란한 은빛의 투구와 붉은 망토를 두른 도합 일곱의 기사.

그림자였던 그들 모두가 다시 단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숫자는 적지만 그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다.

데이몬이 탐을 낼만큼 완성된 자들이었으니, 고작 동쪽에 있는 작은 나라의 기사 따위가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리겔 왕국의 왕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왕자의 기사들도 단번에 격의 차이를 깨닫곤 움직이지 못했다.

"정령지기."

"예, 예, 전하. 부르셨습니까."

"내가 검을 뽑아보려하는데, 얼마나 기다려야하는가?"

"줄을 선 순서대로 하라는 폐하의 명에 따라······."

정령지기가 고개를 돌려 줄을 바라봤다.

끝도 없이 이어진 행렬.

하지만 앞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귀족이다.

평민들은 개방시간이 거의 끝날 때가 돼서야 기회를 얻었다.

자신의 앞에 평민이 있는 걸 가만이 넋놓고 기다려줄 그들이 아니었기에.

신분의 차이로, 계급의 위아래로 순서가 정해지고 있엇다.

정령지기의 시선이 닿자, 왕자의 뒤에 섰던 남자가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령지기의 눈에 닿은 줄의 귀족들 전부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어댔다.

아예 뒤로 물러나거나, 등을 돌려버리는 이도 있었다.

'멍청한 정령지기 녀석. 나를 죽일 셈이냐?'

'지금 상황에서 순서대로 했다간 순서대로 목이 날아간다.'

'그냥 제발 뽑으라고 해! 순서는 얼어죽을!'

귀족들의 얼굴 또한 사색이 되었다.

황태자 라인하르트.

그가 이런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대륙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인다.

말대꾸를 해도 죽이고, 자신의 앞을 막아도 죽인댄다.

오죽하면 황태자의 궁에는 날카로운 물건이 아예 없다고 한다.

너무 많이 죽여서, 물대신 피로 목욕을 하는 악마라고 그랬다.

인간을 산채로 불에 익혀 먹는다거나, 살점을 하나하나 떼어 수만조각으로 회를 쳐 먹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지금 바로 뽑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래?"

천천히 칼리번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칼리번. 위대한 왕의 정령. 나를 뽑는 자만이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리라.

칼리번 처음 본 자들에게 으레 그러듯 말했다.

피식 웃으며,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검을 뽑지 못하면 그것은 짖은 개 때문에 부정을 타서이니, 그땐 그 개의 목을 잘라버리거라."

"······!"

리겔 왕국 왕자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은 전부 같은 반응이었다.

셀 수없이 많은 이들이 도전하고 실패했다.

황태자가 칼리번을 뽑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말인 즉, 그는 지금 리겔 왕국의 왕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예, 전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황룡기사단은 주저함이 없었다.

검을 뽑고, 벌써부터 목을 잘라버릴 준비를 하였다.

'아니, 뭐라는 거야. 지금 나를 죽이겠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제국의 황태자라고 해도 타국의 왕자를 죽일 권한은 없다.

게다가 리겔 왕국은 제국의 동맹과도 같은 곳이었다.

동맹국의 왕자를 그저 말실수 한 번 했다고 죽인다면 그건 전쟁을 하자는 것과 같았다.

제국의 힘이 강성하다 한들, 현재 제국의 황제는 성왕으로 이름이 드높은 그 데우스 아니던가.

'그래. 허세일 거다. 일개 평민과 왕족의 목숨값이 어찌 같겠나.'

황태자가 막 나가도 그건 평민들에 한해서다.

귀족을, 왕족을 죽이면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라인하르트가 손을 뻗는다.

이에 왕자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자, 잠깐! 대체 제가 뭘 잘못했······?!"

푸악!

입안이 터졌다.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별다른 고통은 없었다. 입 안에서 물기가 가득 차고 터지는 느낌만 받았을 뿐이다.

'혀가?'

감각이 없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를 느낀 뒤에야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플릭 왕자님!"

"내, 내 혀어··· 내 혀어! 꺼억!"

왕자, 플릭은 지금도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단순한 굴욕을 넘어서서 일국의 왕자의 혀를 잘라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혀를 보자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시궁창에 던지는 건 내가 검을 뽑은 뒤에 하거라. 뽑지 못하면, 목을 자르고."

미친 새끼!

플릭은 이를 악물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는 진짜 미친놈이었다.

고작 말실수 한 번 했다고 혀를 자르다니, 그것도 리겔 왕국의 왕자의 혀를!

"그리하겠습니다."

"머하으 거냐! 날 지키안 마이다!"

플릭이 혀가 잘린 채 소리쳤다.

플릭의 기사들은 총 열 다섯이었다.

리겔 왕국의 정예기사인데다 두 배가 넘는 숫자다.

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황룡기사단은 그보다 더 빨랐다.

"이, 이게 무슨?"

검을 뽑기 무섭게 그 검이 두동강났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강철이 강철을 이처럼 말끔하게 베어내는 건 검술의 달인도 힘들다.

오러, 혹은 그 비슷한 양의 마나를 검에 덧씌울 수 있는 자.

최소 소드익스퍼트 상급은 되어야 함이었다.

'일곱 전부가 최소 그 수준이라고?'

플릭의 기사들과 기사단장은 당황했다.

그 정도면 정예 기사단의 단장급 실력이다. 그 숫자가 일곱이니, 단순히 머릿수가 많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플릭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죽는다.'

죽는다. 진짜로 죽는다.

저 미친 황태자의 눈에는 평민과 왕족의 목숨이 같은 게다.

신분의 차이?

아니, 같은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건가.

'내가 저 평민놈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다.'

뺨을 때리고, 개 취급하며 혀를 자른다고 엄포를 놓은 것 그대로를.

이해할 수 없다.

고작 천한 평민이지 않은가.

죽으라면 죽고, 기라면 기어야하는.

그런데 왜.

대체 왜 저딴 평민 한놈 때문에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절대로 검을 뽑게 놔둬선 안 된다.

어차피 검은 뽑히지 않을 테고, 그리되면 자신의 목은 잘려나갈 것이다.

"데, 데송합니다. 사려, 주십시오."

지척까지 다가간 플릭이 애원했다.

잘린 혀 때문에 발음이 어렵다.

하지만 황태자는 거침이 없었다.

플릭이 그러거나 말거나, 손을 뻗어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아··· 아아······."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황룡기사단의 기사 한 명이, 검을 뻗어 플릭의 목에 갖다대었다.

플릭의 몸에서 힘이 쭉 풀렸다.

그리고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검을 뽑으려고 힘을 주는 순간.

플릭의 방광 역시 함께 풀려버렸다.

"흠,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잘못 본 건가?

환각인가?

어쩌면 이미 목이 잘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느낄 새도 없이, 플릭은 그대로 졸도해버렸다.

"냄새가 심하군. 굳이 시궁창까지 갈 필요도 없겠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쥐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잔인한 장면 때문에?

아니면 졸도한 플릭 때문에?

아니다. 내가 든 검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정령무기 칼리번과 내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궁 밖으로 치우거라."

플릭을 향해 말하자, 기사들이 플릭의 발을 붙잡고 바닥에 질질 끌고가기 시작했다.

오물이 바닥에 긁히며 자국을 만들었다.

나는 혀를 찬 뒤 고개를 돌려 멍한 얼굴의 정령지기를 쳐다봤다.

"그리고 정령지기여."

"······ 아, 예! 전하."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정령은 궁의 보물이니, 그것을 지킨 그대도 같은 대우를 받아 마땅할 터. 원하는 게 있느냐?"

"어, 없습니다. 오히려 영광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다시 없을."

"허심탄회하게 말해보라.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

그 말을 듣고서 정령지기가 잠시 고민했다.

"저······ 그럼.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오냐."

"마지막으로 정령님께 인사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겨우 그것이냐?"

맥이 빠질 정도로 허무한 부탁이다.

하지만 정령지기의 얼굴은 홀가분했다.

"예, 저 같은 천민에게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었겠습니까. 정령님께서 저를 선택해주신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르민이 몰래 마차를 빼돌리고자 억지로 맡긴 직책이다.

그것을 사명을 다해 해낸 것이다.

왕자와 같은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닐진대.

까탈스러운 귀족들을 수없이 상대했을 텐데도, 도리어 고맙다는 표정이다.

재밌는 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은보화나 호화로운 저택 따위를 원할텐데.

"이름이 무엇이냐?"

"할버트입니다."

"할버트, 마지막 인사는 되었다. 앞으로도 너는 내 궁에서 칼리번의 관리를 맡아라."

"예······?"

"제르민의 밑에서 집사일을 배우도록."

할버트는 아예 넋을 놔버렸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제대로 안 되는 듯했다.

나는 칼리번을 쥔 채, 그대로 들어올렸다.

빛에 반사하며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피식 웃었다.

이 검의 주인이 내가 되었음을, 이쯤하면 모두 알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칼리번을 뽑으면 신분을 상승시켜준다는데, 내가 오를 신분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그것을 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정말 고민이었다.

무엇을 달라고 해야할까?

< 검을 뽑는 자(2) > 끝

"부인, 들었어요?"

"정령의 주인이 황태자였다는 이야기요?"

제국과 수도는 시끄러워졌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졌던 만큼, 이 주제는 평민과 귀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황태자가 검을 뽑았다는 사실은 모두의 공통된 뜨거운 감자였다.

그가 일반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처음이거니와, 등장하자마자 몇 달간 초유의 관심사이던 검을 단박에 뽑아냈으니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 년만에 등장한 정령의 주인이 황태자라니, 쯧쯧."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황실에서도 난리가 났겠지. 막말로 황태자를 꽁꽁 감춰두고만 있었지 않나?"

"그럼 차기 황제로 황태자가 확정된 건가?"

"그건 아직 모르지. 책봉 때도 온갖 말이 많았으니······."

황태자로 책봉한 이상, 어지간해서 그 직위가 박탈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누가 봐도 엉성한 황태자였다.

사람들은 모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라우넬이나 카잔이 황태자로 책봉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태자로 책봉된 건 라인하르트였다.

영석하지도 않고, 나쁜 소문만 가득하던 그가 책봉되자 제국 전역에선 온갖 구설수들이 흘러나왔다.

책봉된 이후에도 라인하르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하여 검을 뽑은 것이다.

자신을 뽑는 자는 왕이 된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던 게 정령이었다.

"후작님. 정령의 말처럼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보십니까?"

일반시민들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귀족들이었다.

지금까지 황태자에게 줄을 댄 귀족은 없었다.

침몰하는 배.

어차피 황태자의 자격은 박탈당할 거라고 은연중 생각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힘 없는 자격은 독이다.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될뿐이다.

그것을 현황 데우스가 모를 리 없었다.

허나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황태자가 급부상한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나 왕의 증명이라 지껄이던 정령검을 뽑아버렸다.

"단순히 정령의 주인이 되었다고 황제가 되지는 않겠지."

"하지만 황룡기사단을 함께 부활시킨 건 황태자가 귀족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조심해야할 때다. 황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심상치않아. 줄을 잘못 서면 가장 먼저 잘려나가는 건 우리의 목이다."

줄을 갈아타는 건 특히 그렇다.

제국의 중진급 귀족들은 모두 다른 황자와 황비들에게 줄을 대고 있다.

솔직히 황자들보다 무서운 건 황비들이다.

그녀들만큼이나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줄을 갈아탔다는 이야기가 들릴면, 바로 목줄을 채우고 재갈을 물리겠지. 아니면 죽이거나.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는 게 문제였다.

"어찌한다······."

수도에 모인 귀족들이 깊은 시름에 잠도 못 이루던 그때.

이는 정치에 별 관심 없는 귀족여식들에게도 재밌는 가십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도 잘생겼대."

"라우넬 황자님처럼? 내가 듣기로는 검은머리 악마 그 자체였다던데?"

"라우넬 황자님에게는 없는 압도적인 카리스마! 직접 본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라."

"그거 그냥 개새끼라는 말 아니야?"

"쉿, 너도 잡혀가서 인육으로 먹히고 싶어?"

"잘생긴, 나쁜남자! 그런 분에게 먹히는 건 소녀의 로망이지!"

"미친년······."

*

"······ 카르넬."

2황비가 황비궁에서 카르넬 황녀를 불렀다.

보는 사람을 얼려버릴 것만 같이,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카르넬 황녀.

'황실의 마지막 꽃'이라 불릴 정도로 단순히 아름다움이라면 모든 황녀들 중 으뜸이라 칭해질만큼 화사한 미모의 여인이다.

그 화사함과는 대비되는 연노랑빛의 머리와 가냘픈 몸,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그녀를 보고자 전국각지에서 귀족들이 모여들 정도였다.

얼마 후 있을 성인식.

정령의 도전자들 중 갑자기 귀족이나 왕족들이 늘어난 것도, 그 영향이 컸다.

"절대 안 돼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2황비의 앞에 서있었다.

오늘 아침 하달된 황제의 명 때문이다.

라인하르트를 그녀의 성인식에 참가시키라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

"황제폐하의 명이시다. 일전 베르사유 백작가에서의 혼담이 무산된 탓이겠지."

베르사유 백작가.

변방백인 그 가문의 위세는 황실명가에 비하면 부족함은 있을지언정, 라인하르트에게는 나름 적합한 곳이었다.

라인하르트에게 쓸데없이 큰 힘을 실어주지 않고, 적당히 구색을 갖추게 하는 곳으로 베르사유 백작가만한 곳이 없었다.

헌데 며칠동안 그 가문의 영애를 데리고 다니더니, 혼담이 무산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제 성인식을 그 녀석의 데뷔식으로 만들라는 말인가요?"

그 녀석.

라인하르트의 사교계 데뷔다.

하필이면 그것을 자신의 성인식에서 치룰 줄은 꿈에도 몰랐다.

2황비는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쓸데없이 혼인을 파기시켜서 그런 것 아니냐."

"카툴루 왕국의 왕자라는 그놈, 진짜 두꺼비처럼 생겼다고요."

파기된 이유는 간단하다.

첫대면에서부터 '정말 소름돋게 못생기셨네요' 등의 악담을 쏟아냈으니 왕자 쪽에서는 어이가 없을만 하였다.

카르넬 황녀의 얼굴에 대한 편력은 이미 유명했다.

덕분에 이 아름다운 얼굴에도 혼담자리가 파멸되다시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카르넬 황녀의 입장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형제들만 봐도 얼굴에 대한 편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얼굴 보고 결혼하는 황녀가 세상 어디 있더냐. 네 언니들도, 동생들도 전부 사람이 아니라 가문을 보고 갔다."

"······ 제가 직접 따져야겠어요."

"아서라. 성인식 날까지 감금당하고 싶지 않으면."

"라인하르트에게 오지 말라고 따지겠어요. 그럼 되는 거죠?"

황제 데우스에게 따질 순 없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성인식에 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순 있다.

허나 2황비는 부정적이었다.

과거의 라인하르트라면 그럴 구실을 만드는 것쯤은 쉽다.

광증의 황태자를 황녀의 성인식에 참가시켜 망신을 줄 셈이냐며, 자신이 직접 황제에게 언질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라인하르트의 최근 행보가 눈에 밟힌다.

'검을 뽑고, 황룡기사단을 부활시켰다지.'

황자들은 모두 하나씩 기사단을 갖고 있다.

자신의 얼굴이며 분신인 게 바로 그 기사단이다.

하지만 황태자의 황룡기사단은 이름만 존재할뿐, 실체가 없었다.

모두 탈퇴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검만 뽑았다면 별 감흥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룡기사단을 부활시켰다는 건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다.

기사단의 부활은, 라인하르트의 부활과도 같았다.

게다가 시연식 이후로 라인하르트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허무의 속성, 거기다가 정령까지. 화제라는 화제는 전부 몰고 다니는구나.'

수많은 마탑에서도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마탑만이 아니라 황실 전체가 주목하게 되었다.

황룡기사단을 부활시킨 저의를 모두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교계 데뷔까지 성공적으로 마친다면······.

하물며 이번 성인식은 온갖 귀족과 왕족들이 모인 자리다.

3황비 조세핀의 인맥은 생각보다 넓어서, 예술이나 정재계 거물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현재 제국의 수도로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라인하르트에 대한 소식도 귀에 들어갔을 터.

아무래도 귀족들의 고삐를 단단히 잡고 있어야할 시기 같다.

"어디 한 번 해보거라. 내 거기까지 말리지는 않겠으니."

*

카르넬은 기세등등하게 황태자기 기거하는 황룡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를 만날 수는 없었다.

"전하께선 황제폐하를 알현하는 중입니다, 카르넬 황녀님."

제르민이 정중하게 문전박대했다.

정령의 건으로 라인하르트는 고작 하루만에 다시 황제에게 불려갔다.

황제를 알현하고 있다는데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카르넬의 고집은 꺾지 못하였다.

"그럼 어디서 기다리면 되겠느냐?"

"이후 스케쥴이 이미 꽉 차 있어서, 따로 약속을 잡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스케쥴이 꽉 차있다.

이미 약속이 잡혀있다는 뜻이다.

'뭐야. 라인하르트 주제에 왜 이렇게 바빠?'

궁에서 놀고먹던 황태자를 보고자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까짓 약속 철회하면 그만 아니냐. 아니면 설마 나를 보는 것보다 다른 약속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녀는 황녀다.

황제가 아닌 이상에야 우선순위가 뒤로 밀릴 리 없는.

"알겠습니다. 페르세포 대공께 말씀드려보지요. 황녀님께서, 일정을 다음으로 미루라 하셨다고."

"······ 페, 페르세포 대공?!"

딸꾹!

저도 모르게 카르넬 황녀가 딸꾹질을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강한 영향력을 지닌 두 명의 대공.

한 명은 카를로스 대공이며, 또 다른 한 명이 바로 페르세포 대공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강력한 군사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쟁을 재패하는 무신이었다.

그리고 페르세포 대공은 재신이었다. 어마어마한 재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경제를 주물럭거리는 거물 중의 거물 말이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무섭느냐 묻는다면, 카르넬 황녀는 주저없이 페르세포 대공을 고를 것이었다.

페르세포 대공은 너무나도 음침하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은 앞에 앉아있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게다가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세계에 극소수만이 존재한다는 다크엘프.

이백년 전, 제국의 유일무이한 여제와 결혼하며 대공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후 수많은 내전, 전쟁 따위를 거쳐 부를 축적한 그는 제국 제일의 재상이 되었다.

역대의 황제들 모두가 페르세포 대공을 어려워하는 이유다.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 귀족의 작위를, 그것도 대공의 작위를 갖고 있는 건 역사를 뒤져봐도 이례적인 경우였다.

황녀의 직위는, 페르세포 대공의 직위 앞에 반딧불과 같았다.

"아, 아니다. 내일 찾아오마."

"내일은 신성교의 아마르 추기경님과 약속이 있습니다."

"모레! 모레는 괜찮겠지?"

"모레는 빛의 마탑주 안드로센님과 다른 마탑주님들의 공동 선약이······."

"······."

카르넬 황녀는 할 말을 잃었다.

성인식 전까지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

"도착해 계십니다, 전하."

궁으로 돌아오자 이미 페르세포 대공이 도착해있었다.

황룡궁의 입구에서 이기 그의 기사들이 자리잡고 있는 중이었다.

제르민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페르세포 대공은 제국을 200년간 호령한 거인이다.

200년 전 여제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식은 없다지만, 황제가 여섯 번 바뀔 동안 굳건했던 대공의 직위가 갖는 권력은 또 다른 황제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이종족 다크엘프지만 그를 무시하는 인간은 이곳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전히 위세가 대단하군.'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를로스 대공보다 더 어려운 게 페르세포 대공이다.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숨겨진 재산, 군사력 따위는 말이 안 될 정도라고만 알고 있었다. 도저히 그 끝을 알 수가 없기에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결국 말피엘에게 목이 잘리긴 했지만······ 말피엘이 등장한 이후 가장 큰 관문이었던 게 페르세포 대공이었다.

'가장 먼저 말피엘의 광기를 알아본 거겠지.'

귀족들 중에는 가장 먼저 말피엘을 거부했다.

그의 눈은 모든 걸 꿰뚫어 본다는데, 말피엘의 본성까지 꿰뚫어 본 것인지.

나는 천천히 제르민을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끼이익-.

문을 열자, 그곳엔 이미 페르세포 대공이 앉아있었다.

그의 뒤로 웬 기사가 한 명 있었다.

갑옷과 투구를 써서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관리자 권한 등급이 격상함에 따라 타인에 대한 스캔 기능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마스터께서 필요한 정보를 스캔 후 제공합니다.]

[종족 : 다크엘프(인간의 DNA와 99.69% 유사)]

[성별 : 여성]

[Lv. 98]

엄청난 강자다.

레벨이 98이라면 소드마스터 중급의 수준이다.

페르세포 대공만이 아니라, 저 여기사도 다크엘프였다.

그런데 인간과 유사한 DNA라는 건 무슨 뜻인지.

'다크엘프 여기사라.'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다크엘프는 멸종해가고 있었다.

페르세포 대공은 멸종해가는 다크엘프들을 찾아, 거둬들여 양자로 삼았다.

그들의 능력은 하나같이 대단해서, 기존의 무력양상을 단번에 바꿔버렸다.

물론 이는 훗날 정복전쟁 이후의 이야기다. 지금 이 시대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그렇다면 저 여기사도 페르세포 대공이 거둬들인 양녀라는 뜻인데.

"오랜만이오, 페르세포 대공."

"어릴 때 뵙고 처음이니 실로 오랜만입니다, 전하.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기억을 해주어서 영광이라는 듯.

도리어 나를 높히며 추켜세우는 반응이다.

그러나 방심해선 안 된다.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 그였으니까.

"날 보자는 연유가 무엇이오?"

"단도직입. 좋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의 재회이니 제 선물부터 받으시지요."

"선물이라니?"

"아렐."

스윽.

호명하자, 뒤의 여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과 피부.

다크엘프의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선물이라는 게 설마?

페르세포 대공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전하."

< 황태자를 찾는 사람들 > 끝

······ 예감이 적중했다.

아렐.

멸종직전의 다크엘프이자, 페르세포 대공의 양녀.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지닌 그녀를 선물이라 말한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걸까?

'독이 든 성배다.'

성배다. 하지만 독이 든 성배였다.

과거에는 없었던 행동이다.

애당초 그가 나를 찾아온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는 지독한 실리주의자인 탓이다.

페르세포 대공은 관심 없는 것에 절대로 자신을 낭비하지 않는다.

자신의 시간, 에너지, 심지어 눈길 한 번조차도.

그렇다고 그의 관심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의 관심을 받은 이는 보통 망가지며 파멸한다.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문제지.'

독이 든 성배라는 걸 알면서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굳이 '선물'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것도 십년여만에 다시 만난 나를 보자마자 그리 말했다.

이걸 받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는 완곡한 뜻이다.

완곡이라 했지만, 사실 대놓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웃으며 건네는 선물을 거절하는 건 네가 싫다는 의미와 같았으므로.

그래. 받았다고 치자.

설령 페르세포 대공이 원하는 게 없더라도 그 자체가 '빚'이 된다.

200년을 대공으로 지낸 노괴.

황제가 여섯 번 바뀔 동안 그는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빚은 내가 황제에 즉위하고, 죽고 나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대대손손 고혈을 짜낼 수도 있다.

그래서 페르세포 대공에게는 빚을 지면 안 된다.

그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도 달랐기에.

그가 다크엘프라는 사실을 잊었다간 그대로 코가 꿰일 터.

"부담되십니까?"

······ 된다.

부담이 안 된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이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내 그릇의 작음을 증명하는 꼴이다.

"이런 선물은 처음이라, 잠시 고민중이었소."

"무슨 고민입니까?"

"무엇으로 돌려줘야할지 말이오."

"괜찮습니다. 제 호의로 생각하십시오."

호의라 말하지만 결국 빚이다.

마음의 빚. 언젠가 그가 마지못해 부탁해오는 걸 들어줄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빚.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결국 그 빚을 받아갈 것이다.

하여 나는 말했다.

"흐음, 단순한 호의의 선물이라 하여도 그냥 받을만큼 내가 염치 없는 놈은 아니오. 그래서 말인데, 내 특별히 다음 '사업'에 대공을 포함시켜주겠소."

"사업······ 이라니요?"

전혀 예상 외의 말이었는지 대공이 살짝 뜸을 들였다.

제국에서 재신이라 불리는 게 그다.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을만큼 넓은 영역에서 돈을 빨아들이고 있는 그에게, 감히 '특별히' 사업안을 제시한댄다.

이걸 뭐라고 해야할까.

어이가 없다고 해야할까?

"대륙 남단과 동서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할 생각이오. 내 생각대로 된다면 운송비용과 시간을 절반 이상 줄일 수 있을 게요. 페르세포 대공이 나와 공동으로 진행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테지."

"······."

듣고보니 더 가관이다.

할 말이 없을만큼 허무맹랑한 소리다.

운하건설이라는 건 국가사업이다.

제국 전체가 움직여야하는 대공사였다.

대륙 남단과 동서를 잇는 운하를 건설하려면 상상을 초월하는 돈과 시간, 그리고 전쟁이 필요하다.

몰라서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니까 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일개 황태자가 진행하겠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다.

미친 건가?

아니면 미친 척을 하는 건가.

'후자군.'

자신의 호의를, 마찬가지로 호의로 받아쳤다.

거절할 수밖에 없는 호의 말이다.

일부러 터무니없는 제안을 해서 거절을 유도하다니.

의도적으로 던진 것이라면 상당히 고단수다.

마음의 빚마저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전하."

"아쉽군."

아쉽다곤 했으나 내심은 한결 가벼워졌다.

무거운 납덩어리가 가벼운 깃털이 되었으니 일단 한시름은 놓았다.

―페르세포 대공에게는 절대로 빚을 지지 마라. 그것이 제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가 신발 한 쪽을 사주면 50년 뒤 성을 내놓으라 할 것이다.

그를 표현하는 격언이다.

신발 한 짝도 아닌 한 쪽으로 성을 받아가는 기적의 교환.

제국 황실이라고 피해갈 순 없었다.

오히려 제국의 황실이야말로 그에게 가장 큰 빚을 진 곳이었다.

현황제가 죽자 황실의 기반 대부분은 페르세포 대공에게 흘러들어갔다.

별 능력도 없었던 내가 황비와 황자들을 손쉽게 숙청할 수 있던 원인이다.

특히 과도하게 빚을 졌던 조세핀 황비는, 모든 친인척이 포함된 가문들이 다 빈털터리가 됐다고 들었다.

'내가 황제로 즉위하면 대륙을 상대로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걸 예상했겠지.'

국고가 바닥나기 전에 미리 털어간 것이다.

데우스라는 태평성대에서 이자를 최대치로 키우고 수확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가 내게 관심이 없었던 게 나았다.

그런데 지금 그가 내게 관심을 가져버렸다.

'긍정적인 신호로 봐야겠군.'

직접 찾아올만큼의 가치가 생겼다는 뜻일 테니.

그것도 양녀를 선물로 줄만큼 내 가능성을 크게 봤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 선물 자체에 의도가 있겠지만.

"정령의 주인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경하드립니다."

주제를 돌렸다.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것이 본론일 것이다.

"고맙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그 검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건 없지."

"계약을 맺었다면 부르실 수도 있겠지요?"

정령에 대해서 알고 있다?

이점은 굉장히 의외였다.

아무리 장수하는 다크엘프라도 정령은 천 년 전에 사라진 신비.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시피하였다.

후에야 시동어의 존재가 밝혀지긴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진대.

'속이는 것도 소용없겠군.'

알고 왔다면 속일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빚이다. 그에게 반대로 빚을 지울 절호의 기회였다.

"칼리번."

시동어를 외우고 이름을 부르자, 빛의 입자가 내 손 위로 모여들었다.

빛을 인도하는 자라 불리는만큼 그 위용은 절로 감탄이 나온다.

"정말로······ 계약을 하셨군요."

"그럼 거짓이겠소?"

페르세포 대공의 눈에 잠깐 빛이 스쳤다.

"정령을 깨우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깨우는 방법이라.

나름대로 멀쩡한 상태의 정령무기를 제로가 지배하면 깨어난다.

하지만 멀쩡한 상태의 정령무기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다 이건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글쎄, 검을 뽑은 것 외에 내가 따로 한 일은 없소만."

"정령과 계약하며 알아내신 것도 없습니까? 대화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왜 이러는 거지?

페르세포 대공답지 않은 관심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는 가능하지만, 아직 자유롭진 못하오.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소."

"그럼."

페르세포 대공이 아렐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스릉이는 소리와 함께 아렐이 검을 뽑았다.

"이 검 또한, 깨우실 수 있겠습니까?"

붉은색의 저 검.

가운데에 눈이 그려진 저 검이, 무척이나 눈에 익었다.

'버서커.'

버서커라 불린 다크엘프 기사가 저 검을 사용했다.

그제야 나는 저 여자 다크엘프가 버서커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도륙내어버리는 미친 괴물!

페르세포 대공의 휘하 다크엘프 군단은 비록 그 숫자는 적지만 인간이 세운 무력의 판도를 단번에 뒤집어버릴만큼 강했다.

버서커는 그 중에서도 발군이었다.

지금의 크로프트와 견줄 수 있을만큼.

[해당 '비인가 나노머신'의 보안해제를 위한 관리자 권한 등급이 충분합니다.]

[보안을 해제하시겠습니까?]

풀 수 있다.

칼리번처럼 멀쩡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풀어줄 순 없었다.

"당장은 힘들 것 같군."

"당장은 힘들다는 건?"

"시간을 주면 가능할 것도 같소. 뭔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귀를 기울이는 척 검에 머리를 갖다댔다.

내 연기가 먹혔는지 페르세포 대공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후에 이 검의 봉인을 풀어주신다면, 충분히 사례토록 하겠습니다."

"노력해보겠소."

그게 끝이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였다는 듯, 페르세포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신 전하의 시간을 너무 뺏어먹은 것 같습니다. 황녀의 성인식에서 뵙지요."

짧게 인사한 그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렐은 그대로 남았다.

'쉽지않군.'

그야말로 폭풍같은 여운이었다.

차라리 검을 맞대고 싸우는 게 편할 것 같다.

나는 의자에 앉아, 준비된 차를 홀짝이며 마셨다.

그와 대화를 나눌 땐 차마 차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른 귀족을 대하는 것과 역사의 산증인인 페르세포 대공을 대하는 건 하늘과 땅의 차이다.

'선물이 버서커라.'

나는 무표정한 아렐에게 시선을 옮겼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인형 같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도륙하던 버서커 답다면 다운 표정인데.

나를 감시하고자 놔둔 선물이자 감시역이리라.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기회이기도 했다.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처럼 페르세포 대공의 의도를 더 확실히 관철할 수 있게 되겠지.

카를로스 대공을 이미 적으로 돌린 이상, 페르세포 대공까지 적으로 돌리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큰 행동이었다.

사교계에 데뷔하는 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상적인 삶이라는 게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은 거였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후회로 점칠된 과거보단 똥밭을 굴러도 지금이 낫다.

물론 진짜 똥밭을 구르지 않기 위해선, 조금 더 가속도를 내야할 것 같았다.

예컨대 다른 신비나, 숨겨진 보물, 혹은 황궁비고 같은 것들을.

*

'뭔가를 숨기고 있군.'

궁을 나선 페르세포 대공은 생각했다.

라인하르트가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생각을 읽을 수가 없다니.'

그는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인간'이라면 얼마나 강하든, 약하든 모조리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라인하르트의 생각은 읽히지가 않았다.

인간이 아니어서?

아니다. 그는 분명한 황제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만 해도 라인하르트의 생각은 쉽게 읽혔다.

하지만 지금의 라인하르트는 생각을 읽을 수 없다.

광증이 너무나도 심화되어 생긴 현상일까?

제대로 미친놈의 생각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읽히지 않을 때가 있긴 있었다.

리겔 왕국의 왕자를 처리한 걸 보면 아직 완치가 되지는 않은 듯한데.

게다가.

두근! 두근!

심장이 뛴다.

이 정도로 심장이 뛰는 느낌은 반백년만에 처음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다.

라인하르트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 힘은 그가 반백년간 느낀 그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했다.

'이 느낌은······ 넘버즈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과도 같군.'

반백년 전 그는 넘버즈라 불리는 신을 만난 적이 있다.

12주신 중 한 명.

그 압도적인 힘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라인하르트를 볼 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12주신과 라인하르트가 관계가 있다면, 아렐의 투자는 아깝지 않다.

정령을 깨운다는 건 주신의 힘을 이어받았다는 뜻이었으므로.

잃어버린 고대의 신비들.

그것을 깨우고 다룰 힘은, 오직 12주신에게만 있는 탓이다.

'한 번 지켜보도록 하지.'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억지로 발걸음해 만나길 잘했다.

후에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부탁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무슨 보답을 요구해올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물론 그의 호의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기대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그 누구보다도 무서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정말로 12주신의 힘을 이었다면.

'주신의 힘을 가진 자만이, 다크엘프를 번식시킬 수 있다.'

멸종직전인 다크엘프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직 번식만을 위한 도구, 종마로써.

< 다크엘프 아렐 > 끝

황제, 데우스는 고민에 빠졌다.

"라인하르트 황태자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요구합니다."

"리겔 왕께선 해당 사안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리겔 왕국의 귀족들이 찾아와 항의했다.

기회를 줘보자고 생각한 지 불과 하루 만에 라인하르트가 사고를 친 것이다.

황룡기사단을 부활시키고, 정령 검을 뽑았으니 '자리 굳히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플릭 왕자였다.

리겔 왕의 둘째 왕자인 플릭의 혀를 두 동강 내버렸다.

그도 모자라 바닥을 질질 끌어, 궁 밖으로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쳤다.

수많은 귀족과 평민들이 이를 보았으니 왕자의 명예 또한 곤두박질친 것이다.

'광증이 아직 다 낫지는 않은 건가?'

예전이라면 강제로 황룡궁에 칩거시켰을 테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데우스는 황태자와 황자들을 제대로 경합시킬 생각이었다.

카를로스 대공과의 거래로 인한 주먹구구식 책봉이 황실에 얼마나 큰 반항을 샀는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제대로 능력을 보이고, 황자들과 경합하여 결과를 낸다면 힘을 보태줄 생각도 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가정은 라인하르트의 광증이 나았다는 걸 전제로 한다.

하지만 크로프트의 말이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자신의 앞에서 기죽지 않고 의견을 피력하던 라인하르트의 모습도 떠올랐다.

만약, 다른 황자가 같은 일을 저질렀다면 그는 어찌 했을까.

"황실의 재산을 감히 궁 내에서 훼손한 죄, 제국의 황태자를 모욕한 그 죗값을 리겔 왕이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게냐?"

"그, 그게 아니라 왕자님을······."

"짐 또한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목을 잘라내도 성치 않을 일을 고작 그 정도에서 끝낸 황태자의 자비에 감사해야할 터."

리겔 왕국의 귀족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황태자를 두둔하며 감싸는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도리어 목을 자르지 않은 황태자의 자비에 감사하란다.

"한 번 더 같은 일로 소란스럽게 군다면 리겔 왕국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

귀족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리겔 왕국은 제국과의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수교가 끊기면 손해를 보는 건 리겔 왕국이지 제국이 아니었다.

하지만 평화의 수호자라 불리는 데우스가 이 정도로 강경하게 나올 줄은 그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직감한 귀족들이 무릎을 꿇고 조아렸다.

"아, 아닙니다, 폐하. 다시 생각해보니 라인하르트 전하의 아량이 감격스러울 지경입니다."

"리겔 왕께서도 그 정도의 처분으로 끝내주신 걸 필히 고맙게 여기실 것이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