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기적을 일으키는 자.
일반인들의 눈에 그들은 신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달리 말한다.
"마법사란, 마나에 의지를 입히는 자다."
빛의 마탑주 안드로센이 말했다.
마법은 기적과 같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상상해야만' 일으킬 수 있는 도구 같은 것이라고.
마나라는 촉매에 의지를 입혀 사용하는 게 마법사였다.
농사꾼이 농기구를 사용해 밭을 일구듯 마법사 역시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마나란 대체 무엇인가?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그것에 어떻게 의지를 입힌단 말인가?
"하지만 마나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지. 대륙에 존재하는 217개의 마탑과 그곳에 등록된 274,365명의 마법사가 말이야."
마탑에 등록된 마법사는 20만 명이 훌쩍 넘는다.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의 숫자는 그보다도 더 많다.
개나 소나 마법사를 자칭해, 마탑에 등록할 수 있는 정식 마법사의 수준을 4서클로 규정해놓은 탓이었다.
"그리고 비정식 마법사까지 합치면 백만 명은 족히 되겠지. 그중, 8서클에 오르는 '대마법사'는 고작해야 스물 안팎이다. 나를 포함해."
상상을 초월하는 수련과 깨달음을 통해야만 들어설 수 있는 길.
그것이 8서클의 대마법사였다.
"그런 나조차도 마나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을 깨달아야 9서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니까."
"안드로센 마탑주님. 마나는 자연과 생명의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아니었습니까?"
황궁에 데려온 마법사들은 대부분 유망주였다.
마탑의 차세대 얼굴들.
모두 이른 나이에 5서클의 벽을 넘어선 천재들!
제국 황실의 사람들과 안면도 틀 겸, 바깥바람도 쐬게 해줄 겸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황궁이었다.
본래라면 황자들의 시연을 본 다음 날 바로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벌써 삼일 째 그들은 황궁에 발이 묶여있었다.
빛의 마탑주 안드로센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진실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
"인간이란 자신의 '개념'에 위반되는 지식은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어있다. 마나가 자연이며 생명이라는 건 그 때문에 인위적으로 만든 가짜지식이다."
"모든 마법사가 그렇게 배우지 않습니까······? 그게 가짜라니요?"
"6서클의 도달은 그 의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마나란 무엇인가?' 말이다. 너희들에게 묻겠다. 자연은 인위적인가?"
"아닙니다."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답했다.
자연은 자연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게 자연이었다.
안드로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손을 거치면 우리는 그것을 '인위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본래 자연을 조종할 수 없다. 자연은 결코 인위적으로 될 수 없다."
"그래서 마법사에게만 허락된 특혜 같은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아니다. 마나는, 자연적이지 않다.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위적으로 그것에 의지를 입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다."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
하지만, 기분일 뿐 안드로센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정의하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실마리다.
이 실마리를 이용해 깨달음을 얻으면 6서클에 오를 수 있다.
안드로센이 이어서 말했다.
"마법사의 서클이란 결국 마나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친화력에 알맞으며, 심장의 서클에 새겨넣은' 마나에 국한된다."
마법사를 포함한 모든 '마나 사용자'들에게 공통되는 이야기다.
마나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하지만 적응력과 친화력이 있는 자들은 극소수의 마나를 품는 게 가능하다.
그 품은 마나를 이용해 마법이니 오러이니 하는 기예를 부리는 것이다.
품은 마나는 본능적으로 심장에 기거해, 원을 그린다. 그 원을 그들은 '원천'이라 부르고 있었으며, 마나가 원을 몇 바퀴 도느냐에 따라 서클을 정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마나를 손댈 수 없다. 느낄 수조차 없다. 서클이 오르면 대지에 퍼져있는 마나에 약간의 영향은 줄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다룰 수는 없다."
"'폭주'를 막지 못하는 이유이겠군요."
"그래. 마나폭주는 자신의 마나로 인한 것. 타인은 그것을 어찌할 수 없다. 타인과 대기의 마나를 다룰 수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9서클 마법사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럼 황태자가 9서클이란 말씀입니까?"
안드로센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는 9서클이 아니다. 아무리 마법사가 타인의 마나를 느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경지에 오르면 마나에 대한 '감각'이 활성화된다. 황태자에게선 마법사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하지만, 알아본 자는 있었다.
크로프트.
소드마스터, 검왕, 최강의 검사 따위로 불리는 그는 가장 먼저 황태자가 3황자를 치료한 걸 눈치챘다.
먼저 알고 있었다는 눈치는 아니었다.
'일반적인 소드마스터는 7서클에 비견되곤 하지.'
마법사와 기사 간의 비교 구도는 수백 년이 넘도록 이어져 왔다.
오러를 피워낼 수 있는 소드마스터는 마법사의 몇 서클에 해당하는가.
대략 7서클이라고 하지만 개인차가 심했다.
같은 8서클 마법사라도 편차가 있듯이.
아마도 크로프트는 마법사로 따지면 가장 9서클에 근접한 인간일 것이었다.
그랬기에 폭주를 치료한 게 황태자라고 바로 알아본 건 아닐는지.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황태자는 어떻게 타인의 폭주를 치료한 겁니까?"
"한 세대에 한, 두 명밖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허무 속성의 소유자이거나, 신의 위업을 달성하고 '마나의 신'에게 축복받은 인간이겠지. 아, 사기일 수도 있겠군."
"······ 전부 터무니없군요."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인간일 수도 있다."
네 가지 경우의 수.
전부 말이 안 된다.
허무 속성은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는 특성이다.
신의 위업?
간혹 '별내림'을 통해 계시를 받는 이들이 있기는 있었다.
열두 가지의 위업을 달성하면 신과 같은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전해지긴 하지만 보통 세 개쯤 깨고 포기한다.
그 3개의 위업을 달성하는 것도 천 명 중 한 명이라고.
3개의 위업만으로도 특정 신의 가호를 받고, 인간을 초월한 힘을 내보인다.
인류역사상 12개의 위업 전부를 달성한 인간은 없었다.
최고 달성자는 10개. 제국을 건국한 '절대자'라 불렸던 존재뿐.
마나의 신에게 축복을 받았다고 하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황궁에만 있는 황태자가 어찌 위업 달성을 한단 말인가.
사기이거나, 말 그대로 신비일 것이다.
"그래서 알아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갈증을 풀어줄 수도 있는 존재일 테니. 그게 아니더라도······."
폭주를 완화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대단한 것이다.
마법사의 연구는 언제나 폭주의 위험을 동반한다.
그로 인한 사망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그 사고를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마법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것이다.
수십, 수백 년을 앞당길 수 있고, 어쩌면 궁극적인 '9서클'로 도달하는 길에 이정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9서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그 영역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딜 수 있다면.
모든 마탑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이는 공식적으로 세워진 217개의 마탑 모두가 걸어놓은 맹약.
―모든 마탑과 마법사는 궁극에 이른 자를 주인으로 모신다.
하지만 9서클의 마법사는 천 년 동안 나온 적이 없었다.
고대의 시대에는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실체를 확인한 사람도 없다.
'우리가 먼저 접선해야만 한다.'
다른 마탑주들이 황궁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같았다.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는 상태.
'그나마 우리는 3황비와 접점이 있지.'
그나마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3황자를 치료하고 있었기에, 3황비와 접점이 있는 빛의 마탑이 조금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접촉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보여준 모습으로 말미암아 소문과 다르다는 건 알겠다.
알겠는데······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아.'
하물며 황태자와 자칫 잘못 접선했다간, 황실의 미움을 살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상황.
"아, 안드로센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마법사를 보며 안드로센이 인상을 찌푸렸다.
"노크도 안 하고 무슨 일이냐?"
"그, 그게, 접촉했습니다."
"접촉?"
"얼음마탑과 황태자가 접촉했습니다!"
안드로센의 표정이 더욱 굳어버렸다.
여유를 부리다가 선수를 뺏긴 것이다.
***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얼음 마탑의 마탑주, 에디스가 말했다.
어제와 똑같은 길로 산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직접 접촉해올 줄은 몰랐군.'
나 역시 조금 놀라고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더 있어야 밑의 마법사 한 명쯤을 우연을 가장해 보낼 줄 알았건만.
직접 얼음마탑의 수장이 찾아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래도 황실은 숨소리 하나도 정치와 엮여있는가 보니, 정치판을 잘 모르는 마법사들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디스라.
80은 훌쩍 넘었을 나이.
그럼에도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8서클에 이른 마법사들은 한 차례 '마나 샤워'를 겪으며 육체가 젊어진다고 한다. 수명이 늘어 최대 200살까지도 살 수 있다고.
권위를 위해 노인의 모습대로 사는 사람도 있지만, 에디스는 젊음을 택한 듯싶었다.
'급했겠지.'
에디스의 손녀가 마나폭주로 죽었다.
바로 죽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오늘, 내일 하고 있을 터였다.
저 팔이 그 증거다.
그리고 손녀가 죽은 이후 그는 마탑주의 자리를 내려놓는다.
"무엇을 말이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뻔뻔하게 되묻자 에디스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마법사는 황실의 생각보다 독한 자들입니다.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시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내가 마법사에게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인물인가? 황실을 척지면서까지 움직일 정도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다.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내가 폭주를 완화했다는 것. 어쩌면 그 방식에 '궁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은 없다.
나노머신만이 있을 뿐.
그것을 말한다고 믿을 리도 없겠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일 따름이었다.
"얼음 마탑의 마탑주가 직접 움직일 줄은 몰랐군."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호라. 그렇다면 나와 연관되는 게 어떠한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겠군?"
이곳, 황궁에서 나와 연관된다?
죽겠다는 거다.
고립되겠다는 뜻이다.
황실에서 마탑에 지원하는 금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어림잡아 마탑 1년 재정의 80%를 넘길 것이다.
엉덩이 무겁기로 소문난 마탑주들이 먼 황궁까지 직접 오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나와 연관되면 황비들이 나서서 저 지원비를 끊으려고 작심할 터.
황실의 지원을 받고 싶어 하는 마탑은 많았으니까.
"······ 마탑주의 자리에 욕심은 없습니다. 조만간 은퇴할 생각이었지요."
얼음 마탑과 자신은 별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생긴 문제는 모조리 자신이 떠안고 가겠다는 거다.
"그러면서까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 제 손녀를, 고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좋다. 데려오라."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에디스 역시 모험을 했으니 여러 가지를 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에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불가능합니다."
"어찌하여?"
"제가 전신을 얼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설마 그 팔을 얼렸듯이 몸 전체를 얼렸단 말인가?"
"예."
미친.
이제야 그가 직접 나를 찾아오는 도박을 건 이유를 알겠다.
내가 직접 에디스의 손녀가 있는 곳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실을 벗어나면 나는 죽는다.
솔직한 말로 죽을 가능성이 거의 99.9%에 달했다.
"얼려둔 정도라면 옮기면 그만 아닌가?"
"생명 유지를 위해 완전히 고정해두었습니다. 만약 허투루 움직인다면······ 죽을 겁니다."
이쪽으로 옮겨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황실 밖이 내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제가 목숨을 걸고 호위하겠습니다, 전하."
8서클 대마법사의 호위라.
정말 든든하다.
든든하기는 한데.
'한 손으로 열 손 못 당한다.'
심지어 그 열 손도 비슷한 급의 강자들이다.
가장 우려되는 건 1황비와 4황비다.
얼음 마탑과 접촉했으니 4황비는 반드시 움직일 것이고,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1황비도 내가 황궁 밖으로 나가는 순간 수작을 부릴 터였다.
3황비인 조세핀은 족쇄를 채워뒀으니 당장은 안전하겠지만, 저 둘의 공세와 다른 마탑의 움직임으로부터 그가 혼자 나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버리는 게 좋다.
그런데 만약 2황비까지 움직인다면?
절망적이다.
얼음 마탑의 마탑주를 내 편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인 건 분명하다.
그가 있으면 특급 죄수동을 지배하는 것 또한 한결 편해질 터이니.
"당장은 힘들겠군."
"그렇, 습니까."
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물론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나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의 큰일이 황실에서 벌어진다면 모를까."
바로 황비들이 나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큰일이 벌어지는 경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나를 돕는다면 가능하겠지."
동시에 오른쪽 팔을 걷었다.
"이, 이건······!"
"역시 알아보는군."
"정령어 아닙니까?"
정령.
인간과의 접점이 아예 사라져버린 고대의 존재.
그런 정령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내 오른팔에 새겨져 있었다.
'빛의 탐구자를 부숴버렸지.'
조세핀 황비에게 빛의 탐구자 지팡이를 받아온 직후.
나는 그것을 부숴버렸다.
지팡이 내부에 있는 정령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나노머신 제로에 의해 그 정령어를 그리고 있던 글자들, 일명 '비인가 나노머신'들이 내 오른팔에 기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
"황실에 정령이 출현한다면 어떻겠나."
"난리가 나겠지요. 황실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
"그대가 도와야 할 일이 뭔지 알겠군."
옷매무새를 단장하며 미소지은 채 에디스를 바라봤다.
에디스의 두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에디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필코 성공시키겠습니다, 전하."
< 궁극으로 가는 길 > 끝
정령.
사라진 '7대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것 중 하나.
고대의 인간은 정령과 함께 살아갔다는 기록이 심심찮게 발견되지만, 작금에 이르러 정령을 발견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제보도 있었고, 정령을 소환했다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가 거짓이고 사기였다.
어째서 갑자기 인간과 공존하던 정령이 사라졌는지, 그들이 어디로 간 건지조차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정령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군요. 이처럼 또렷하게 새겨진 정령어는 처음 봅니다."
궁의 서재를 밀고 마련한 너른 공간.
그 안에서 내 오른팔에 새겨진 '정령어'를 보며 에디스가 너스레를 떨었다.
냉철하기 그지없던 그의 눈에 탐구욕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뭐라고 쓰여있는지 알아보겠는가?"
"'··· 나는 빛을 꿰뚫고, 어둠을 물들이는 자.' 가장 첫 줄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어려운 글자도 섞여 있어서 해석하는데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빛을 꿰뚫고, 어둠을 물들이는 자라.
거창하긴 하지만 제대로 된 정령의 소개였다.
동시에 저것은 시동어의 일부분이었다.
과거 황궁비고에 있는 보물을 모조리 부숴버리고서야 알게 된 비밀.
'정령은 의지를 가진 생물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정령을 하나의 유기물로 봤다.
실체는 본래의 세계에 놔둔 채, 소환이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지성체로 본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의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의 관점이 곁들여진 조악한 생각.
개나 고양이를 인간의 감정에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
'정령은 무기다.'
정령은 그런 게 아니다.
정령이란, 고대의 인간이 만든 무기의 한 가지 종류였을 따름이다.
다만 워낙에 오래되어 제 기능을 못 할 뿐.
부서지거나, 시동어가 지워졌거나, 시동어가 멀쩡하더라도 힘을 잃어 발동하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황궁비고의 보물이란 보물은 모조리 깨부순 다음에야 그 안에 시동어가 적혀있는 고대의 무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제대로 작동하는 건 없었지만,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가 이를 연구했고 결국 밝혀낼 수 있었다.
정령은 어딘가로 사라진 게 아니다.
정령을 옆에 두고서도 우리는 그것이 정령인 줄 못 알아본 것이다.
"정령어가 인간의 몸에 이렇게 기생하듯 적혀있는 현상은 저도 처음 봅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빛의 탐구자라 불리는 지팡이를 아나?"
"마법사라면 모를 리가 없는 보물 아닙니까? '인류의 위대한 유산 100선'에도 등장하는 지팡이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3황자님에게 하사하신 물건이기도 하지요."
황제는 노력이 가상하다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던져주었지만, 마법사들의 관점에서 그것은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빛의 탐구자를 쥐면 0.5서클 정도의 마나 조절 능력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이는 '고서클'일수록 어마어마한 효과를 불러왔다.
당장 에디스가 그것을 쥐면 동서클의 마법사 두 명도 장시간 상대할 수 있게 될 터였다.
단순히 문화적인 가치도 엄청나지만 효능은 더 엄청난 것이 빛의 탐구자였다.
그런 보물 중의 보물을.
"부쉈다."
"··· 예?"
"부쉈다고 했다."
"빛의 탐구자를, 말입니까?"
"아아. 지팡이의 양 끝을 잡고, 무릎으로 부쉈지. 생각보다 재질이 약하더군."
에디스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움이 가득 배어 나오는 표정.
본래 3황자에게 있던 것을 내가 어떻게 가졌는 건지도 의문이겠지만, 그것을 부순 건 더욱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었다.
물론 의도는 있었다.
빛의 탐구자에 새겨진 정령어를, 더 빠르게 해석해보려는 의도였다.
과거에도 빛의 탐구자에 새겨진 정령어는 해석하지 못했다.
해석하기 전에 숙청 과정에서 불에 타 유실됐기 때문이다.
마침 마법사들도 모여있겠다,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를 해결해 나름의 입지를 다지려던 것이었으나.
'내 팔에 기생할 줄은 나도 몰랐다.'
마치 문신과도 같았다.
약간의 빛을 내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나노머신.
['비인가 나노머신'을 분석할 수 없습니다. 높은 보안등급의 락이 걸려있습니다. 이를 분석하기 위해선 더욱 높은 등급의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현재 '나노머신 Zero'의 관리자 권한은 9등급입니다. 해당하는 '비인가 나노머신'의 분석을 위해선 최소 '6등급'의 관리자 권한이 필요합니다.]
['관리자 권한'의 등급을 올리기 위해선 더욱 많은 양의 나노머신을 지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등급이 올라가면 더 많은 기능이 해지됩니다.]
등급의 상승이 나노머신 제로의 기능을 올려준다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도 말도 안 되는 성능을 보이는 게 제로였다.
고작 며칠 만에 아무도 고치지 못한 몸을, 정상화했으므로.
나도 궁금증이 생겼다.
권한의 등급을 올려서 오른팔에 새겨진 이 나노머신을 해제했을 때 무슨 현상이 일어날지.
하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 '나노머신'을 모으는 건 세월이 걸린다.
단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폭주'한 나노머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때마침, 공교롭게도 가장 먼저 접선해온 게 바로 에디스였다.
정령어의 해석?
물론 중요하지만, 진짜 의도는 따로 있었다.
"그 보물을······ 허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에디스에게 나는 말했다.
"빛의 탐구자에 새겨진 정령어가 갑자기 내 팔에 붙어버렸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지 않나?"
"전하, 보물을 부숴서 만들어지는 운명이라는 건 없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드디어 본론이다.
이 부분에 있어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폭주를 완화하는 것.
하지만 그 이면은 결국 마나를 강탈해가는 것이다.
자칫하면 마녀이니 사도니 하면서 몰릴 수도 있었다.
금기된 흑마법에 손을 댔다며 특급 죄수동에 갇히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여, 누군가가 이것을 공론화시킨다면 마녀사냥당하기 아주 좋다.'
미친 황태자가 흑마법에 손을 댔다!
폭주를 막는 게 아니라 마나를 빼앗는 것이다!
아무나 폭주의 치료를 할 수 없는 이유다.
마구잡이로 폭주를 치료했다가 그렇게 몰리면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힘을 주어, '연기'를 했다.
"우연이 겹치면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대를 보니 '운명'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군."
"운명이요?"
"우연히 얻은 이 능력이, 우연히 찾아온 그대로 인해 확증되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로 몰렸을 터."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그것은 온전히 전하의 능력이 아닙니까? 필시 사람들도 알아주었을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겠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그가 나타나 능력의 재확신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일이 조금 더 복잡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대의 사정과 나의 사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나한테는 그대가 필요하고, 그대에겐 내가 필요하듯."
"제가, 필요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당장 정령어의 해석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나?"
"그건··· 다른 마탑주들도 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그대처럼 직접 나서지 못할 거다. 황실과의 관계, 마탑주가 보여야 할 체신 따위만 신경 쓰고 있을 테니."
"······."
"내게 필요한 건 그딴 관계를 아랑곳하지 않는,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자다."
"저는 그저 손녀의 치료가 급했을 뿐입니다, 전하."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손녀를 위해 모든 것을 집어던지는 사람은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저만한 위치에 있으면서 모든 걸 내던지며 오직 손녀만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
몇이나 되겠는가.
손녀가 죽은 이후 그는 마탑주의 지위마저 내려놓았다.
초야에 묻혀, 손녀를 묻은 곳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들었다.
이자는 신념이 있는 자다.
자신만의 길을 걷는 자였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운명이라 하지 않던가? 운명이, 그대의 간절함이 그대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지."
순간 에디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나 찾지 못했던 해결법.
그것을 이곳에서 마주했다. 마치 운명처럼.
지금까진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겠지만, 내 말을 들음으로 인해 '운명'이라 여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하."
의도를 파악하고자 에디스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에디스가 애써 진정하며 나를 쳐다봤다.
황태자가 원하는 게 없는 것이 이상했다.
어쩌면,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으나.
"그대의 완치다."
완전한 치료.
폭주의 부작용을 없애는 것.
능력에 대한 확신을 주고, 더불어 의심 없이 폭주한 나노머신을 가져오기 위한 수이다.
계산적으로 사고하던 에디스의 눈빛이 더욱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에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의 순수한 선의를 몰라보고서 이기심에 젖어있던 저를 용서하십시오."
순수한 선의?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만 에디스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을 테니.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니 고개를 들라."
"아닙니다. 제가 저를 용서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법사는 계산적이며 냉철해 보이지만 그와 반대로 순진한 면도 있었다.
'믿음이 흔들릴 때 그들은 더욱 큰 믿음을 보인다.'
믿음에 대한 상식이 깨지면 보통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고서클의 마법사는 그러한 '상식의 저편'을 더욱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벽을 깨고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탓이다.
에디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소문에 대한 편견과 상식들.
그것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며 내가 새롭게 보였겠지.
이것을 잘 끌고만 갈 수 있다면, 에디스를 완전한 '나의 편'으로 만들 수도 있을 터.
"그렇게 있으면 치료를 하기가 어렵다. 앉아라."
"······."
저러다 울겠다.
***
8서클 마법사의 폭주.
그 나노머신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흡착하는 나노머신의 양이 매일 한계치를 초과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나는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폭주한 나노머신을 전부 빨아들일 때 즈음.
[6등급 관리자 권한이 해제되었습니다.]
6등급 관리자 권한이 해제되었다는 제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해지 된 제로의 수많은 '능력'들.
더불어 팔에 기생한 정령어의 분석을 시작한다는 그 말을 듣고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을 뒤집어놓을 준비가, 끝났다.
< 관리자 권한 > 끝
데우스는 권좌에 앉아 권태로운 표정으로 쌓여있는 보물들을 쳐다보았다.
"카툴루 왕국에서 보내온 공물입니다, 폐하."
"리겔 왕국의 공물도 도착했사옵니다, 폐하."
"수르트만 왕국에서도······."
주변 왕국들로부터 끊임없이 보내져 오는 공물들.
평화의 시대.
제국의 안녕과 평화의 수호가 계속되길 바라면서 보내오는 뇌물이었다.
반백 년간 사이가 좋지 않던 수르트만 왕국에서조차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제국의 위상은, 데우스의 위상은 하늘을 찔렀다.
그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80%가 줄었으니까.
오죽하면 그를 일컬어 평화의 수호자라 부르겠는가.
허나.
"치워라."
데우스는 저들의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들은 들리지 않는가, 평화가 종식되어가는 소리가.'
자신이 만든 평화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 공물이 이제 곧 칼과 창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대륙은 불바다가 될 것이고, 성왕의 이름도 휴짓조각이 되리라.
지금 제국에선 비대하게 몸을 부풀린 괴물들이 기지개를 켜려고 하고 있었다.
황실이 축적한 힘을 웃도는 그들은 내정에도 간섭하고 있었다.
이것이 공화정과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북방의 정벌마저 성공한다면 그들을 막을 구실이 없다.'
대륙의 북방. 사시사철 눈보라가 치는 얼음의 땅.
역사상 단 한 번도 정복된 적이 없는 그곳의 정복을 위해 귀족들은 원정에 나섰다.
전쟁에 굶주린 그들을 달랠 유일한 수였기에.
실패하길 바라지만 만약 성공하여 돌아온다면 걷잡을 수 없을 터.
물론, 그 사이의 공백을 노리는 방법도 있었다.
북벌을 위해 비워졌을 귀족들의 영지를 제압하고 재산을 몰수하면 된다.
북벌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돌아온 즉시 포박해서 목을 잘라내면 그만이다.
성왕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꼴이지만 제국이 그들에게 넘어가는 것보단 나았다.
하지만, 데우스는 아무런 선택도 할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 대공. 그가 존재하는 한.
기사왕이자 정복왕이라 불리는 그는 모든 불가해의 영역에 손을 대 정복했다.
황실의 소드마스터는 고작 다섯이지만 그의 산하 기사단에는 스물에 가까운 소드마스터가 있었다.
공개된 숫자가 그 정도이니 어쩌면 이를 아득히 넘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나마 실력 면에선 크로프트를 당해낼 기사가 없다지만 그것도 20년 전의 이야기.
'크로프트도 늙었지.'
소드마스터도 세월의 역경을 이겨낼 순 없다.
전성기의 실력이라면 크로프트 혼자서 어지간한 소드마스터 서넛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또한 크로프트가 기사들의 육성에 힘을 쓰고 있으나, 황실의 기사가 카를로스 대공의 기사들보다 질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들은 제국 내에서 유일하게 숱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대공의 자식들 또한 황자들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평화를 먹으며 힘을 키운 괴물.'
그가 필두로 있는 한 결국 주변 국가끼리의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카를로스는 미쳐있던 라인하르트를 황태자로 책봉시켰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태자 책봉과 바꾼 북벌이었다.
제국의 천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북벌.
대륙의 그 어떤 왕국도 성사해내지 못한 과업.
북벌이 실패하거나, 북벌 도중 그가 죽는다면 제국은 계속해서 평화로울 수 있으니까.
"··· 황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더냐."
스윽.
그의 앞에 다섯 개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황가를 수호하는 또 다른 그림자들.
직속근위대와 달리 어둠 속에서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해결사들이었다.
"1황자께선 황궁비고에서 '여명의 검'을 취하셨습니다."
"기특하군. 항상 보는 안목이 부족해 걱정이었는데."
데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비고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
아무런 조언 없이 혼자서 그 많은 보물 중 쓸만한 걸 골라야 한다.
여명의 검이라면 그중에서도 특등급의 보물.
괜한 걱정이었나 싶었다.
"2황자께선 '바람의 보옥'을 통한 마나연공에 들어가셨습니다. 벌써 칠 일째 연공실에 칩거하고 계십니다."
"하하! 그 만사가 귀찮은 놈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2황자는 모든 걸 귀찮아했다.
열정이 부족해서 재능을 썩히는 부류였다.
그런데도 어린 나이에 6서클을 달성할 수준의 천재성.
단순히 재능만을 따지자면, 황자들 중 제일이었다.
데우스가 세 번째 그림자에게 물었다.
"3황자는?"
"깨어나셨습니다. 다만, '빛의 탐구자'를 다루진 않으시는 듯합니다."
"하기야. 빛의 탐구자에 얽힌 비밀은 천 년간 풀리지 않았으니."
"하오나 깨어나신 이후부터 비약적인 성장을 하셨습니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대폭 향상되셨는지 3서클에 도달한 듯 보였습니다."
"폭주의 여파인가?"
"정확한 원인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괘념치 않는다."
데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폭주는 마법사들도 고개를 젓는 내용이다.
그에 관한 지식은 모두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속성을 가진 3황자 카르몬. 그는 정말 빛과도 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와 조세핀 황비는 이 무료한 황궁에서의 생활에 감칠맛이 되어주었다.
"4황자께선 '얼음새의 알'과 교감을 마치셨습니다."
"그녀의 피를 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4황비.
3황비와 비슷한 시기에 궁에 들어왔으나 그것은 그녀가 이은 '피'를 위함이었다.
과거 북방에서 마왕이라 불렸던 존재.
북방을 통일한 마왕의 후손이 그녀였다.
최강의 피, 오직 그것만을 위해 그녀를 황궁에 들였다.
마왕의 피를 진하게 이은 4황비의 아들이니 얼음새와의 교감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을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네 명의 황자들은 모두 천재적이다.
저 아이들은 제국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다.
"······ 황태자는, 무엇을 하고 있더냐."
데우스가 물었다.
그러자 다섯 번째 그림자가 말했다.
"여전히 궁에 칩거해 계십니다. 얼음 마탑의 마탑주 에디스와 함께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에디스의 영역 안에 들어갈 수가 없어, 그 이상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절대영역을 다루는 8서클의 대마법사다. 같이 있다면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 이 또한 괘념치 않으마."
"감사합니다, 폐하."
"헌데······ 이상하군."
이상함을 넘어 수상하기까지 하다.
일전 행사에서부터 황태자의 상태가 예전과 달라졌음을 느끼고는 있었다.
'광증이 나은 건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광증.
머릿속에 벌레가 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몸부림치던 라인하르트다.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음에도 광증은 낫질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고, 그 틈을 카를로스 대공이 노리고 들어온 것일진대.
"특급 죄수동의 관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들르지조차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들르지조차 않았다.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면 그렇지.'
괜한 기대였나보다.
특급 죄수동의 관리를 맡긴 건 황태자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말 많고 탈 많은 그들의 관리를 해낼 수만 있다면 광증이 완화되었음을 어느 정도 믿었을 것이다.
반대로 광증이 도져 학살을 일으켜도 상관은 없었다.
그냥 미친 황태자인 채로 평소와 같이 대하면 되니까.
'제정신이 된다 한들,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무능력한 황태자는 결국 귀족들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황태자를 폐위하면 다른 황자들을 조정하려고 손을 뻗을 것이었다.
차라리······ 귀족들의 시선이 황태자에게 가 있는 게 나았다.
그저 미쳐있는 채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채로.
어중간하게 능력을 발휘해봤자, 광증이 나아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
보나마나 얼음 마탑의 마탑주도 뭐 떨어질 거 없나 기웃거리는 것일 테다.
그게 얼마나 멍청하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짓인지도 모른 채.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천축이 뒤흔들리는 소리.
무언가가 침입하여 궁 내에서 터졌다.
"황궁의 결계가 깨졌습니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그림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허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황궁에 쳐놓은 결계형 마법들은 모든 마탑주들이 합심하여 만든 것.
그것을 깨트리며 감히 제국의 심장부를 습격한다니?
데우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감히, 평화의 상징인 이곳에서.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 장소에서!
어느 누가 공격을 해온 것인지,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그가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궁의 중심에 놓인 그것을 보았다.
"검?"
바위에 꽂힌 검.
바위 째로 떨어졌으며, 그 가운데에 검이 꽂혀 있었다.
더욱이 드는 의문은.
"······ 정령?"
검 위를 감도는 흐릿한 연기와도 같은 존재.
'7대 신비'라 불리는 정령이 그곳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
정령, 칼리번.
6등급의 관리자 권한으로 오른팔의 주박을 풀어내자, 나타난 정령이 말한 이름이었다.
―나 칼리번을 깨운 게 그대인가, 인간?
놀랍게도 자의식이 있었다.
단순한 무기도 아니었던 건지.
칼리번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믿기지가 않는군. 빛의 왕과 함께 위대한 정령이라 일컬어지던 나를 고작 너 같은 인간이 깨웠단 말이냐?
"문제있나?"
―인간, 너는 너무 약해 보인다. 차라리 옆에 있는 나이 많은 인간이 훨씬 더 강해 보이는군.
자신을 깨운 게 나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다.
하긴 바로 옆에 8서클의 대마법사가 있으니 굳이 비교하면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 정말로, 정령의 소환해 성공하셨군요."
"다 그대 덕이지."
7대 신비 중 하나가 깨졌다.
에디스가 놀라움에 몸을 떨어댔다.
하지만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8서클 대마법사의 폭주한 나노머신은 구하기 쉽지 않을 터이니.
바위에 꽂힌 검의 형태로 나타난 정령.
아마도 저 검이 칼리번의 본체이리라.
그리고 자신이 인정한 사람만이 저 검을 뽑을 수 있는 듯싶었다.
"음. 안 뽑히는군."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에디스가 나섰다.
그러나 단순히 힘만으로는 검은 뽑히지 않았다.
마나를 주입하고, 마법을 사용해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안 되는군요."
에디스가 살짝 아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8서클의 대마법사도 뽑을 수 없는 검이라.
―인간들이여. 나 칼리번은 내가 인정한 자가 아니면 따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세계에 내 인정을 받을 만한 인간은 이제 없다.
"방법이 없는 건가?"
―없다. 포기해라.
칼리번에게 말한 게 아니다.
내 말을 인식한 제로가 답했다.
[비정상적인 프로그램으로 작동되고 있는 A.I입니다. 현재 관리자 등급에서 제거하는 게 가능합니다. 제거하시겠습니까?]
비정상적인 A.I라.
인공지능. 만들어진 지능이라는 뜻이다. 제로 또한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지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번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제거하는 게 낫겠군."
―어이가 없구나. 누가 누구를 제거한다는 거지?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제거하는 게 낫다.
내 뜻을 알아들은 제로가 그 즉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거 프로그램을 가동합니다.]
[0.1%]
―······?
순간 뺀질대던 칼리번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0.2%]
―자, 잠깐.
칼리번의 목소리에 경각심이 묻어났다.
[0.3%]
―끄으윽?!
참기 힘든 고통이 추가됐다.
[0.4%]
―이게 대체? 어찌 부동 영역에 있는 내 영혼을 지워낼 수 있단 말이냐?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인간이 부동 영역에 있는 정령의 본체, 영혼에 타격을 주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초월자들도 할 수 없는 기예다.
하물며 상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정령무기의 시동어는 오직 자격이 있는 자만 입에 담을 수 있는 것.
그런데 느껴지는 마력조차도 터무니없이 작았다. 차라리 옆에 있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는 게 더 타당할 수준이었다.
[0.5%]
―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를 다룰 자격이 있는 것 같구나.
문제는 이대로 있으면 자신이 완전히 지워진다는 것이었다.
부동 영역을 타파해 자신을 지우려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결국 칼리번이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가 없었다.
"있는 것 같구나?"
―······ 저를 깨웠으니 확실하게 자격이 있습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제거 프로그램 가동을 정지합니다.]
삭제처리가 정지되자 정령 칼리번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요동쳤다.
다소 겁에 질리기까지 한듯한 태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다시 검을 쥐어보았다.
스릉,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검이 뽑혔다.
정령무기. 천 년만에 되찾은 7대 신비!
크게 감흥은 없었으나 마침 기발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거면 되겠어.'
황궁 내에서 파급을 일으키기에 이만하면 안성맞춤이다.
순간 말피엘이 떠올랐다.
재수 없는 놈이지만, 녀석의 '쇼맨십'은 확실히 극강이었다.
보여주는 것 하나만큼은 놈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영웅으로 추앙했다.
'나라고 못 할 건 없지.'
7대 신비의 정령.
바위에 꽂힌 검과 함께 나타나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살은 알아서 붙일 것이다.
인간은 상상의 동물이고 이야기 만들기를 아주 좋아하니까.
―호, 혹시 정령왕 님이십니까?
< 7대 신비 > 끝
"젠장! 이게 왜 안 뽑히는 거야?"
"네 힘이 약하니까 안 빠지는 거지!"
긴 행렬. 기사들이 앞다투어 검을 뽑고 있었다.
몰려든 인파로 인해 황궁은 오랜만에 활기가 띠었다.
"북적북적하군."
나는 궁의 정원에서 그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이백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도전하고 실패했다.
일명 검 뽑기를.
이틀 전, 하늘에서 떨어져 황궁의 중심부에 처박힌 칼리번은 모두의 이목을 끈 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칼리번. 위대한 왕의 정령. 나를 뽑는 자만이 진정한 군주의 자격을 갖추리라.
난데없는 정령의 출현에 황궁은 뒤집혔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확인 결과, '진짜 정령'임이 밝혀지며 너나 할 것 없이 검 앞으로 모여들었다.
천 년 전 사라진 신비를 직접 보며 자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마법사들은 모조리 실패했고, 기사들이 도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황실의 사람들은 도전하고 있지 않군요."
에디스가 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나는 빵을 입에 욱여넣고는 미소지었다.
"조심스러운 거겠지.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나를 뽑는 자, 왕의 자격을 갖추리라.
감히 이곳 제국의 심장에서 그런 소리를 지껄인다?
천 번 죽어 마땅하지만 상대는 정령이다.
게다가 이 상황은 황실에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황자 중 한 명이 저 검을 뽑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자격 없는 황태자를 폐위하고 새롭게 차기 황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황비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끝마치고 도전하려는 셈이다.
기사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뭐.
'기사의 것은 주인의 것이기도 하니.'
기사가 뽑아도 손해 볼 건 없었다.
에디스가 물었다.
"이런 상황이 되리라고 예상하셨습니까?"
"마법사나 기사에게 도전권을 주는 그런 상황을 말하는 건가?"
"예."
"아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폐하께서 덮으실 줄 아셨습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외부인사가 없다면 모를까, 마탑주가 넷이나 있는 상황에서 숨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일부러 결계까지 뚫어가면서 만든 무대다.
내부인사만 있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신비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마법사들이 대거 결집한 상황.
다 죽이지 않는 이상 덮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냅킨으로 입을 닦아내곤 말했다.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궁 밖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 터."
"설마 황제 폐하께서 궁을 열고 일반 시민에게 도전권을 주겠습니까?"
"검이 뽑히지 않으면, 줄 수밖에 없다."
천 년 만에 등장한 정령이다.
소문이 퍼져나가는 순간 삽시간에 제국의 시민들 전부가 알게 될 것이다.
이 평화의 시기에 등장한 정령이 궁 안에서 '왕의 자격'을 논한다고.
가만히 있다간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와 추문으로 부풀려지리라.
왕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궁을 열고 일반시민들에게도 기회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검을 뽑지 못한다.
칼리번을 뽑는 건 나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이다.
소문이 새어나가 모두가 알게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세간의 이목이 집중 될 시간.
나는 적당한 사이에 궁을 나가, 에디스의 손녀를 치유하고 돌아와 검을 뽑을 작정이었다.
'설마 그사이에 누가 검을 뽑지는 않겠지.'
8서클 대마법사들도 뽑지 못한 검이다.
설마 그 사이에 누가 뽑는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전하께선 엄청나게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는구나.'
그런 황태자를 보며 에디스는 짧게 감탄했다.
황태자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저 확신에 찬 눈동자를 보라.
누가 감히 그를 미쳤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오오! 라우넬님!"
"라우넬님께서 도전하신다!!!"
"음?"
잠깐 눈빛이 흔들렸다.
1황자의 이름이 귓가에 들려왔다.
1황자가 도전하는 건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라우넬. 붉은 머리칼의 귀공자가 팔을 걷어붙이며 걸어 나왔다.
기사와 병사들의 시선이 오롯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정령 칼리번이여! 너의 주인이 될 자는 바로 나다."
―오호라. 확실히, 네놈은 여태껏 도전한 자들 중 가장 군주에 가깝구나.
칼리번이 감탄을 내뱉었다.
아무리 봐도 진심이었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와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와 말.
'벌써 도전할 줄은 몰랐는데.'
1황자, 라우넬.
녀석은 누가 봐도 군주의 재목이었다.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를 갖고 태어났다.
노력하는 천재, 모두의 사랑을 받는 1황자.
자격 있는 자만이 검을 뽑을 수 있다면 아마도 그가 이 궁에서 제일가는 적임자이리라.
라우넬이 천천히 칼리번의 손잡이를 쥐었다.
"흡!"
덜컹!
"······ 지금 조금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에디스의 말마따나 검이 약간 빠져나온 것 같았다.
삭제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헉!
내 살기를 느꼈는지 칼리번도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다.
왕의 정령이라 자신을 소개했듯, 아마도 진짜 왕의 자격을 지닌 이라면 칼리번을 뽑을 수 있도록 설계된 모양이었다.
"끄으으으윽!"
―끄으으읍!
둘 다 온 힘을 주고 있었다.
빼내기 위해, 빼내 지지 않기 위해.
라우넬의 위로 피닉스가 날갯짓했다.
각성상태까지 갔지만 결국 칼리번을 뽑지는 못하였다.
"······ 젠장."
라우넬이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쉽, 구나. 너에겐, 후욱! 자격이 없노라.
아무래도 칼리번의 진짜 주인은 라우넬인 것 같았다.
칼리번 역시 삭제되지 않겠다는 필사의 의지로 겨우 버텨낸 것이다.
나도 살짝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가장 고비였던 라우넬이 지나가서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전하.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해보라."
"결계의 취약점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 취약 부분은 마탑주들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만······."
덕분에 에디스가 별 무리 없이 결계를 뚫어낼 수 있었다.
허나 황궁에 마나결계를 친 건 네 명의 마탑주들이다.
그들은 완벽을 자부했다. 결계에 결점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말피엘이 알려줬지.'
개새끼.
정말 빌어먹게도 고마운 놈이다.
황궁에 쳐들어오기 전, 놈은 결계의 취약 부분까지 알려주며 한번 막아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다중결계를 치고, 취약 부분까지 고쳤지만 결국 그 미친 괴물을 막아내지 못했다.
전격 한 방에 뚫려버렸으니까.
그때 마법사들의 넋 나간 표정을 봐야 했는데.
'놈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말피엘과 나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
회귀 후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결론을 하나였다.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물론 내가 죽을 가능성이 훨씬 컸다.
12위업을 달성한 말피엘은 진짜 신과도 같았다.
그나마의 가능성이라면 위업을 모두 달성하기 전에 죽이는 건데, 아직 놈이 최초 등장한 시기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그러니까 그 전에 최대한 힘을 키워서 말피엘을 죽이자.
황실의 힘이 부족하면 마법사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조차도 부족하면 대륙의 모든 용병과 암살자를 고용해서라도.
그조차도 부족하면······.
고개를 털며 답해주었다.
"그냥 그 부위가 약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더군."
"역시 그렇습니까."
역시?
에디스의 눈빛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정말 정령왕과 관계된 줄 아는 건가?'
칼리번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을까.
정령왕과 계약이라도 한 거라고 내심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정령왕과 관련되어 있다면 폭주를 완화하는 것도, 칼리번을 다루는 것도, 심지어 결계의 취약점을 알아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알아서 착각해주니 고맙긴 하군.'
애써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편했다.
거짓은 결국 거짓을 낳게 되고, 들통나기 마련이었으므로.
저처럼 알아서 착각하고 확신해주는 게 최고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검이 그사이에 뽑히진 않을 테지."
"그게 아니라······ 제 손녀가 있는 곳 말입니다."
"북방 말인가?"
북방.
사시사철 눈보라가 내리는 빙하의 대지.
에디스의 손녀는 그곳에 있었다.
폭주를 멈추고자 얼려버린 손녀를, 절대로 녹지 않을 대지에 놔둔 것이다.
위치를 듣곤 나도 잠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북방은 지금쯤 한창 전쟁 통일 터였다.
카를로스 대공과 그가 이끄는 귀족들, 그의 자식들이 북방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정복전을 펼치고 있을 것이었다.
'북벌은 성공한다.'
나의 책봉과 맞바꾼 북벌.
황제 데우스는 북벌 도중 카를로스 대공이 죽기를 원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성공하여 황궁에 입성한다.
이후 대흉년까지 겹쳐, 황제는 완전히 힘을 잃고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황실과 황자들이 힘을 합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내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로는······ 최악이었다.
죽고, 죽이고, 궁은 하루도 빠짐없이 피와 비명이 난무했다.
"예. 지금 그곳은 전쟁 중입니다."
"어쩔 수 없지. 약속은 약속이니."
그가 나를 도우면 나도 그를 돕기로 했다.
북방인 게 못내 걸리지만,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면 된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시기에 북방을 가는 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이맘때에 들려온 소문.
『북방에서 신비가 발견됐다.』
7대 신비.
그중 하나가 북방에서 발견되었노라고.
후에 이 소문은 이렇게 변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그 신비를 취하고, 북방을 굴복시켰다.』
신비의 힘으로 인해 북벌에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없어도 성공시키긴 했겠지만 솔깃한 건 사실이다.
7대 신비 중 하나인 정령은 이곳 황궁에.
그리고 다른 하나인 '용'의 신비가 저 북방에 있었다.
북방은 위험한 곳이지만 8서클 마법사인 에디스가 옆에 있다면 해볼 만한 일이다.
'용이라곤 했지만 나도 정확하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다. 카를로스 대공이 말피엘을 위해 남겨둔 비장의 수라고 밖엔.'
카를로스 대공은 용의 신비를 접하고 취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극구로 숨겼다.
황제에 즉위한 뒤에도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말피엘이 귀족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다닐 때 카를로스 대공만은 쉽게 건드리지 못한 이유가 그 '용' 때문이라는 소문은 들었다.
'위치는 알고 있다. 아직 카를로스 대공도 발견 못 했을 테고.'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그 신비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에디스가 함께라면 해볼 만하다.
"······ 준비됐습니다, 전하."
멀리서 들려오는 제르민의 목소리.
'마차가 준비됐나 보군.'
최대한 조용히 궁을 떠날 생각이었다.
간다고 말해봤자 '나 좀 죽여주시오'하는 꼴이니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최상이다.
모두의 시선이 정령 칼리번에게 쏠려있을 때 단출한 마차로 조용히 이동할 계획이었건만.
고개를 돌린 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왜 그대가?"
"어딜 가십니까, 전하."
··· 크로프트 경.
왜 그대가 제르민과 함께 있는 거지?
혹시 제르민이 말한 건가?
'그건 아닌 거 같군.'
제르민은 필사적으로 눈을 양쪽으로 젓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차를 구하다가 걸린 듯싶었다.
"궁이 답답해, 산책을 좀 하려고 했다."
"함께 가시지요."
처음에는 반말로 꾸짖던 그가 웬일로 말을 높이고 있었다.
이전 황실의 행사에서 보인 활약으로 인해 심경의 변화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같이 가자고?
왜?
―황태자일 때 너를 죽였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한이다.
황제가 죽고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 이러할까.
가다가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그도 그럴 게 아직 크로프트에게 있어서 나는 '죽여야 할 미친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터.
"꼭 같이 가야 하나?"
"저는 황룡기사단의 기사단장입니다. 전하가 가시는 곳 어디든 따라가야 하는 처지지요."
"조금 멀리 산책 할 예정이다만."
"괜찮습니다. 어디로 가실지 예상은 됩니다."
크로프트가 에디스를 노려봤다.
순간 에디스의 몸이 움찔했다.
최강의 마법사라 일컬어지는 8서클의 대마법사.
그리고 전성기 시절 적수가 없었다는 최강의 소드마스터가 서로 만났다.
크로프트는 에디스의 사정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내가 멀리 떠날 것을 눈치챈 것이리라.
'황제에게 말했다면 근위대가 와서 잡아갔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크로프트 혼자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크로프트는 황제 쪽 사람이다.
왜 그가 나의 외출을 황제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찾아온 걸까?
"······ 좋다. 함께 가지."
< 떠나는 길 > 끝
궁을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제르민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차 안은 확인도 하지 않고 통과였다.
대대로 황가를 모셔온 집사 가문.
그 위치는 어지간한 귀족보다 높았다.
무엇보다 궁 천제가 시끌벅적했다. 정령의 출현으로 인해 일개 병사들마저 '혹시 내가?'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시기.
별 의심 없이 관문대를 통과한 이후 마차는 길가를 달렸다.
"······."
마차 안은 적막이 가득했다.
공기가 무겁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전신이 짓눌릴 것만 같았다.
에디스와 크로프트.
그리고 그사이의 나까지.
"마차의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에디스가 원을 그렸다.
원은 진리다. 완전무결함의 상징이다.
모든 마법사가 마법을 쓰기 전에 원을 그린다.
그러면 마나가 흘러나와 원형을 이루고 의지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마나여, 나의 의지에 순응할지어다."
순간 어마어마한 양의 나노머신들이 그의 심장에서 흘러나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변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람의 방향이 마차가 달리는 길로 바뀌었고, 땅은 더욱 평평해졌다.
마차를 끄는 말들에게도 마나가 주입되자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이것이 8서클 대마법사가 이룩한 경지.
다른 명령을 입히지 않아도 의지만으로 주변에 영향을 끼친다.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마나를 필요로 하지만, 그의 심장에 있는 마나량은 바다와도 같았다.
"저 또한 거들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질세라 크로프트가 마차에 손을 댔다.
동시에 그의 전신을 두른 흰색의 오러가 마차와 말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지에 이른 기사만이 사용한다는 오러.
나뭇가지에 오러를 입히면 강철보다 단단해지며 절삭력이 높아진다.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크로프트의 오러를 다루는 솜씨는 진즉에 그것을 뛰어넘었다.
마차가 흔들리지 않는다.
"워, 워!"
히이이이잉!
동시에 말들이 폭주했다.
마차는 평범하지만 마차를 끄는 말들은 명마다.
갑작스러운 변화조차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며 질주해나갔다.
어찌나 빠른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제르민의 말을 모는 실력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사달이 났을 것이다.
덕분에 일반적으로 이틀은 걸려야 벗어날 황도를 고작 반나절도 안 되어 빠져나갔다.
황도를 벗어나 북방으로 가려거든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한다.
돌아가면 최소 두 달은 더 걸린다.
하지만 아무리 지름길이라 하더라도 산세가 험하고 도적이 많아 대상인들도 꺼리는 길.
그런데도 마차의 속도는 줄질 않았다.
"멈춰라! 우린 악명높은 '레드 후드 도적단'······!"
"피, 피해!"
"미친, 뭐야 저거!"
"허어어억!"
지금 뭔가를 밟고 지나간 것 같은데.
저기 날아가는 건 사람 아닌가?
마차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그 자체였다.
북방과 제국 국경을 잇는 로카리 산맥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한 곳으로 꼽힐 만큼 험난한 곳이었다.
도적들이라고 해봐야 산맥 초입에서 겨우 자리나 잡고 있을 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미지의 야생이 기다리고 있어 인간에겐 치명적이다.
단순한 야생동물만이 아니라 '마물'도 많았다.
카를로스 대공조차도 병력의 손실을 줄이고자 산맥을 두 달여간 돌아서 북방으로 진출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산주인의 피를 뿌려놓았으니 안심하고 주무셔도 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로카리산맥의 어느 이름 모를 산 중턱에 있었다.
크로프트는 마물의 머리를 잘라 주변에 피를 흩뿌려놓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산의 주인인 거대하기 짝이 없는 오우거였다.
수백 개의 산으로 이루어진 산맥.
모든 산의 주인이 다르다지만 오우거라면 상급의 마물이다.
그것을 크로프트는 한 끼 간식처럼 해치우곤 돌아온 것이다.
'도저히 모르겠군.'
크로프트 경.
그대의 생각이 잘 읽히지 않는다.
과거에 그와 대화를 나눈 적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물며 그 대화라는 것도 전부 나를 질책하는 것이었고.
진심에서 우러나와 나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건 확실했다.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처음부터 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라면 제르민이 마차를 구해왔을 때 하필 그 시기를 노려서 찾아오진 않았으리라.
내가 에디스의 부탁을 받아 떠나리라고 진즉에 예상한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행보다.
황제의 측근일 터인 그가 아무런 말 없이 혼자 나선 이유.
"크로프트 경. 그대의 의도를 알고 싶군."
하여 물었다.
어차피 나 혼자 끙끙 앓아봤자 답이 안 나온다.
그리고 크로프트는 '할 말 다 하는' 성격의 검사였다. 귀족들이 그를 질색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였다.
스릉.
순간, 그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황궁의 바깥. 나의 목을 노리는 건 더욱 쉬운 일.
이곳 로카리 산맥이라면 시체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거다.
궁에선 그가 나온 사실조차도 모를 테니 살인의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에디스가 경계했지만, 근접전에서 소드마스터를 이길 순 없다.
죽음의 문턱. 그저 검을 뽑는 것만으로도 스산하기 짝이 없는 기운.
허나 나는 과거의 경험에서 이미 숱하게 겪어봤다.
강자가 약자를 죽일 때 구태여 검을 보이진 않는다는 걸.
검날이 보이기도 전에 목을 잘라 숨통을 끊어버린다는 것을.
"···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의외라는 크로프트의 눈빛.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죽이려면 진즉에 죽였겠지."
"과연, 그랬겠지요."
크로프트도 수긍했다.
무엄하기 그지없으나 사실이었다.
죽일 기회라면 넘쳐났다.
심지어 고민조차도 하였다.
황태자를 죽여, 황실의 안정을 꾀하는 것에 대하여 말이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크로프트가 자신의 검을 내게 건넸다.
투박한 철검.
이름난 명검은 아니지만 그에겐 이거면 충분했다.
받아 쥐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음."
"무거우실 겁니다. 무게가 일반적인 철검의 세 배는 될 테니."
"확실히 그래 보이는군."
일반 철검의 무게가 대략 5kg.
그 세 배라면 15kg가 넘는 무게였다.
크로프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또한, 한 달 전의 전하셨다면 들지 못했을 겁니다."
약에 찌들어 피골이 상접한 몸.
제대로 된 철검 하나 들기 어려웠던 내가 지금은 그 세 배의 무게에 달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물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나를 유심히 보고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크로프트의 눈썰미를 피해갈 순 없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조금 늦게 성장기가 온 거겠지."
"그런 것치곤 하루가 다르게 몸 상태가 좋아지시더군요."
"튼튼한 게 죄는 아니지 않나."
"털과 신장의 성장이 평범한 사람보다 30배쯤 빠르기도 했습니다."
크로프트는 나노머신 제로가 신체대사를 30배 올려놓은 것까지 꿰뚫고 있었다.
예리하다. 저 혀에 몸과 머리가 잘려버릴 것만 같았다.
허나 크로프트가 어느 쪽에 선을 대고 있는지 애매한 지금, 내 모든 것을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근육과 뼈의 형태, 피부에서 탈피하는 각질 따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전하의 체질이 근본까지 뒤바뀌어 버렸다는 것을.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크로프트는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건 나의 무능력함을 토로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그가 나를 '라인하르트'가 아니라고 규정한다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었다.
금기 마법에 손을 대 악마와 빙의했다고 믿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제로를 악마로 규정짓고, 나는 악마 추종자가 되어 목이 매달릴 가능성마저 존재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크로프트 경."
굳이 저런 내용을 지금 입에 담은 이유.
무겁게 내리깔자 크로프트가 의외의 말을 했다.
"검을, 배워보시겠습니까."
"······ 검을?"
검이라니. 예상조차 못했다.
크로프트에게 검을 배우는 기사는 많다.
어지간한 궁의 기사는 모두 크로프트를 한 번씩 거쳐 간다.
하지만 그가 정식으로 가르치는 제자는 없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는 것도 들어본 바 없었다.
"재생이 30배 빠르다는 것은 근육의 회복 또한 그만큼 빠르다는 뜻. 마음만 먹는다면 그 자체가 엄청난 재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다.
하지만 상대가 크로프트인 게 여전히 걸렸다.
'내가 제대로 검을 배운다?'
진짜 검의 천재는 1황자 라우넬이었다.
2황자인 카잔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마법적인 재능을 지녔다.
3황자 카르몬의 재능은 그 누구보다 희귀했으며,
4황자의 경우 알 수 없는 신력을 타고났다.
반면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고, 광증으로 인해 무엇 하나 깊게 파고들지도 못하는 탓에 가시적인 능력을 보여준 적도 없었다.
내가 배운다고 저 천재들을 이길 수 있을까?
'못할 것도 없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의지도, 몸의 상태도.
"마음은 고마우나, 갑작스럽군."
그러나 준다고 넙죽 받아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크로프트의 진짜 의도를 알아야만 했다.
"제가 이러는 것이 당황스러우십니까?"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이해합니다. 저 역시도 모르겠으니."
크로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오랜 시간 황태자를 지켜봤다.
수없이 실망하며 희망을 놓았다.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영원히 저 상태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건만.
근래에 보여준 황태자의 행보는 상상을 초월했다.
달라졌다. 아예 다른 사람 같다.
여태껏 삶에 의지를 보인 적 없던 황태자가 누구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국의 미래를, 안녕을 생각한다면 궁 밖에서 죽여야 한다.
황태자의 광증은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기에.
―형이 동생을 구하는 게, 정녕 이상한 일이냐고 물었다.
그때의 그 한 마디가, 그 눈빛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 그저, 늙은이의 변덕이라고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다가 내가 검의 천재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허허, 그럴 일은 없습니다."
즉답이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확신에 찬 어조.
애당초 검을 가르친다는 건 거창한 뜻이 아니었다.
의지를 보려는 것뿐이다.
정말 과거의 황태자와는 달라진 건지. 그 근성 없던 황태자가 변화를 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
재능이 넘쳐흘러서 제자로 들이겠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진짜 기본기만 닦아놓을 생각이었으니까.
황태자 라인하르트가 검에 재능이 있을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없었다.
'검을 보는 눈은 있지만 그것을 몸에 익혀낼 순 없는 둔재. 몸이 건강해졌다고 그 사실이 변하진 않는다.'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게 검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물론 황실의 피를 이었으니 기본은 하겠지만 그 이상을 바라진 않았다.
재생능력을 칭찬한 건 어디까지나 '미친 듯이 굴리겠다'는 의미.
굴리고 또 굴리다 보면 본성이 튀어나오게 되어있었다.
"흠, 냉정하군."
"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전성기 시절 최강이라 불렸던 그다.
그의 검술을 직접 배울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다. 한 번 배워보마."
"말 나온 김에 기본적인 동작부터 먼저 보여드리지요."
검을 넘기자, 크로프트가 자세를 잡았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전신으로 나노머신이 퍼지는 게 보였다.
오러를 피우지 않았음에도, 모든 신체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읍.
숨을 들이마신 그가 검을 내리그은다.
천천히, 너무나도 느릿하게, 그가 달을 베었다.
나무를, 산을, 세상을 베었다.
단 한 번의 동작에 얽혀있는 흐름에 압도될 지경이었다.
저게 그에게 있어선 '기본'이다.
누군가는 십 년, 이십 년을 투자해야 겨우 도달할 경지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한 번 따라 해보시겠습니까?"
나는 검을 쥐어 보였다.
초보자가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높은 경지에 베어내기였다.
크로프트 역시 내가 한 번 보고 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일절 없어 보였다.
갓난아기가 검을 쥔다고 풍월을 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제로. 스캔은 제대로 됐겠지?'
[예, 마스터. 모든 생체의 움직임, 나노머신의 동향을 전부 기록했습니다. 녹화한 것을 바탕으로 재현을 시작합니다.]
관리자 권한의 등급이 오르며 생겨난 제로의 새로운 기능들.
그중 하나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 천재 > 끝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짙은 고양감. 전신의 모든 세포가 깨어나는 감각.
나노머신이 활성화되며 신체의 모든 부위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크로프트가 했던 대로. 그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자세 그대로.
검왕, 최강이라 불렸던 검사의 '기본'을 따라 했다.
'느려진다.'
세상이.
두 번째로 겪는 시간의 이변.
이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마치 멈춰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더, 더, 한없이 0에 가깝도록.
이것이 크로프트가 보는 세계다.
'그대의 세계는 이토록 느렸군.'
첫 번째로 겪었던 시간의 이변과는 차원이 다르다.
검은 앞으로 출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뻗어낼 수만 있다면 저 나무를, 산을, 심지어 세상을 베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극한의 영역.
모든 검사가 도달하길 바라는 꿈의 경지!
그 위치에 나는 올라섰다.
'이게 끝이 아닐진대.'
하지만 만족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내 갈증을 채울 수 없다.
만족을 모르는 제왕.
모든 걸 먹어치우는 나는 포식자였다.
더, 더, 더.
깊게, 심연의 끝까지 손을 뻗는다.
세상은 이제 아예 멈춰버렸다.
세상의 중심에는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러자 보였다.
그 너머가.
나는 짧게 전율했다.
거대한 달.
푸른 달이 눈앞에 있었다.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나며 그 빛무리가 모든 걸 압도하고 있다.
황제에 즉위했을 때도, 타국을 점령했을 때조차도 느껴보지 못한 이 감각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이것이.'
알겠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부른다.
'정점인가.'
정점(頂點).
누구도 도달하지 못할 지고의 영역이라고.
[뇌의 동시 활성 영역이 20%까지 확장됩니다.]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재현의 영역을 초과해 세포의 이상 변이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강제종료합니다.]
허나 짙은 고양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대로 검을 배워본 적조차 없는 내가, 최강의 검사를 한순간이나마 모방한 것이다.
현실의 시간으로 기껏해야 1초 안팎.
'아쉽다.'
결국, 검은 휘두르지도 못했다.
재현하는 것도 몸이 받쳐줘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욕심을 부린 걸까.
하지만 그 감각만은, 정점에 이르렀던 그 시간만은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내 뇌리에, 전신에, 세포 하나하나에.
그것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극명하기 마련.
"······."
크로프트와 에디스, 그리고 제르민이 가만히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실망했으리라.
제대로 휘두르지조차 못했으니 이해는 갔다.
"생각보다 쉽지 않군."
"지, 지금 제가 본 게 맞습니까?"
동시에 제르민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비비며 고개를 털어댔다.
혹시나 자신이 본 것이 '헛것'이 아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에디스도, 크로프트도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한 채 미묘하기 짝이 없는 눈빛만을 내게 보내올 따름이다.
하여,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을 봤단 말인가?"
"오··· 러입니다, 전하.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전하의 전신에서 달빛과도 같은 푸른색의 오러가 피어올랐습니다."
오러.
경지에 이른 검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기예다.
마스터의 상징으로도 불리며, 그것을 피워 낸 자만이 진정한 강자의 취급을 받는다.
오러를 피워낼 수 있는 이를 오러마스터, 혹은 소드마스터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한 왕국에 많아야 두, 세 명 정도.
오러를 피워내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왕국들이 귀족의 작위와 영지를 하사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제 막 검을 잡은 내가 피워냈다는 소리다.
'오러 역시 마나. 재현이라는 게 오러까지 만들어낸다는 뜻이었나?'
물론 재현의 영역을 초과해 얻은 성과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마나는 모두 '비인가 나노머신'이었다.
마법사는 그것을 내부에 갈무리해, 의지를 입혀 여러 방식으로 사용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검을 쓰는 자들은 마나를 갈무리해 온전히 자신의 강화만을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가 오러다.
하지만 오러 역시 마나이고, 마나는 나노머신이기에, 그 방식만 알면 나도 잠깐이나마 흉내는 낼 수있다는 의미일지.
찰나의 순간임은 아쉽지만 이는 당연한 것이다.
오러를 만들어내기 위한 나노머신의 양이 압도적으로 부족했으니까.
'나노머신의 양을 늘리면 오러를 더 오랫동안 피워낼 수 있다.'
내가 가진 나노머신의 양은 크로프트의 0.1%.
고작 천 분의 일이었다.
하지만 폭주한 나노머신을 대량으로 지배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 역시 어느 정도는 해결될 터.
'가짜 소드마스터라.'
오러를 사용하는 가짜 소드마스터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검술을······ 배우신 적이 있으십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크로프트가 물었다.
이런 경우는 그 역시도 처음이었다.
이제 막 검을 쥔 사람이 오러를 피워내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검술을 배운 적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크로프트였다.
틈만 보이면 나타나는 광증.
그로 인해 황태자의 궁에는 그 흔한 날붙이 하나 없었다.
당연히 검을 쥐어본 건 어릴 때 이후로는 없을 것이었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일전 알베르토 기사단장이 황태자와의 대련에서 패배했다는 소문.
알게모르게 퍼져나간 소문이지만 믿지는 않았다.
아무리 3황자의 '황금 사자 기사단'이 조세핀 황비의 얼굴마담 용으로 뽑힌 기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기사는 기사다.
그런 이가 황태자에게 패배한다면 그만한 굴욕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황태자가 남몰래 검술을 배워온 게 아닌가.
자신의 눈조차 피하고서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만약 가능하다면 누구의 원조를 받았을지 알아내야 했다.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만. 그건 그대가 더 잘 알지 않나?"
"······ 손을 좀 잡아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그리하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건네자 크로프트가 맥을 짚었다.
'사사로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금기 된 흑마법들.
그런 것중에는 생명을 먹고 마나를 증폭시키는 종류의 마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크로프트는 자신의 마나를 라인하르트에게 흘려넣었다.
[허가되지 않은 나노머신의 침입을 확인했습니다.]
[지배가 불가능한 나노머신입니다.]
[멸합니다.]
"흐읍······!"
크로프트가 급히 손을 뗐다.
튕겨져나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흘려넣은 마나가 모두 소멸됐다?'
어안이 벙벙했다.
반백년이 넘게 수많은 기사들을 가르쳤고, 그중에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체내로 흘려넣은 마나를 강제로 소멸시키다니!
그것도 일반적인 마나가 아니다.
검왕이라 불리는 자신의 마나다.
그것을 고작, 마나의 양조차 적을 터인 황태자가 없애버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찰나였지만, 분명히 나를 그대로 흉내내었다.'
뿐만인가.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으나 그 기세는 분명히 자신과 똑같았다.
그저 보았다고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니건만.
수십 년을 갈무리한 그 기세를 따라하는 건 단순히 자세를 같이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모든 현상을 결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뿐이었다.
'뒤늦은 피의 각성인가?'
라인하르트의 체질이 하루아침에 변했다.
일반인의 30배에 달하는 대사를 갖게 됐다.
크로프트는 그것이 황가의 특수한 피에 기인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나마 황태자도 재능을 각성한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재능들이 한꺼번에 개화하고 있는 것이라면?
광증에 가려졌던 재능들이 뒤늦게 꽃피는 것이라면 어떨까.
'······ 제국을 건국한 절대자. 열 개의 위업을 달성했던 그가 이와 비슷했다고 들었다.'
천 년전 제국을 세운 초대 건국왕.
절대자라 불리던 그는 검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오러를 피워낼 수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신화 속 이야기이니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야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12위업이니 뭐니 하는 것들 또한 크로프트는 맹신하지 않았다. 젊을적에 위업 달성자를 만난 적이 있으나 그들은 힘 쎈 갓난아기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헌데, 지금 눈앞에 불신했던 이야기들의 집합체가 존재했다.
무능력함의 대명사.
광인.
모두의 괄시를 받던, 맞지 않는 왕관을 짊어졌던 바로 그 황태자가.
만에 하나.
정말 뒤늦게 절대자의 재능을 피워낸 것이라면······.
'위험하다.'
너무나도, 위험했다.
황태자의 존재는.
미쳐있을 때보다도 더더욱.
***
그로부터 일주일.
산맥을 겨우 넘고나서야 거친 북방의 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죽겠군.'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마차 안에서조차도 훈련을 받느라 나로서는 미쳐버릴 일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미치진 않았다.
나노머신 제로의 회복능력 덕분이었다.
완벽한 서포팅이 빛을 발하다 못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산맥을 넘어 주변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북방은 넓다. 사시사철 부는 눈보라와 끊임없이 변하는 지형 덕분에 길잡이 없이는 길을 찾는 게 불가능하다.
길잡이는 현지에서 구해야만 했기에, 마을을 도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시체밖에 없군요."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제르민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렵게 찾은 첫 번째 마을.
모든 게 불타고, 수많은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서.
그런 마을의 중심부에는 몇 개의 깃발들이 꽂혀있었다.
'카를로스 대공.'
바로 카를로스 대공을 상징하는 독수리의 표식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두 번째 마을도, 세 번째 마을도.
모두 시체뿐이었다.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북방 정벌을 위해 대군과 함께 떠난 카를로스 대공은 모든 북방의 민족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아예 씨를 말려버릴 생각인 건가?
'예상은 했지만, 더 참혹하다.'
내가 즉위한 이후부턴 이 상황이 제국에서, 대륙 전체에서 재현된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전쟁을 승인한다.
입안이 써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몇 개의 마을을 더 전전했을 때였다.
"아모라 아피르!"
저 멀리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곧 그녀의 등 뒤로 창이 날아와 꽂혔다.
즉사.
뒤이어 달려가던 두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주저앉았다.
"크하하! 역시 도련님! 투창 실력이 그사이에 또 느셨군요!"
"이곳에 올 때만 하더라도 바로 앞에 있는 것도 못 맞추셨던 분이!"
"뭐야, 왜 안 도망쳐? 애새끼들아! 살고 싶으면 어서 뛰라고!"
시끌벅쩍한 소리와 함께 수백의 병사들이 결집해 있었다.
그 가운데에, 독수리 깃발이 있다.
하지만 여흥은 이어지지 않았다.
저들이 마차의 존재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응? 웬 마차?"
"뭐야, 누가 내리는데?"
"으응?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거리가 꽤 있음에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실력자라는 방증이었다.
이윽고 크로프트를 본 그들은 눈을 비볐다.
"크, 크로프트 경?"
"그분이 북방에는 왜 와?"
"잘 보라고!"
"좀 닮은 거 같기는 한······ 미친!"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다섯을 꼽으라면 그중 반드시 들어가는 게 크로프트였다.
하물며 기사들이라면 더욱이 모를 수가 없었다.
크로프트를 확인한 기사들의 표정이 백짓장처럼 굳어버렸다.
하지만 단 한 명.
도련님이라 불리었던, 창을 던진 남자만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르민이 떪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테베우스님."
테베우스.
카를로스 대공의 셋째 아들.
그가 기사들과 함께 마차로 다가왔다.
"크로프트 경, 이 먼 북방에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테베우스가 피가 잔뜩 묻은 손을 건넸다.
몇 명을 죽인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혈향이 짙었다.
"잠시 볼 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손을 맞잡은 크로프트가 간결하게 답했다.
"크로프트 경의 볼일이라. 굉장히 궁금해지는군."
제르민을 보고, 에디스를 보던 테베우스의 눈이 내게 다다르자 멈춰섰다.
"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인상을 찌푸리던 테베우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라인하르트 전하 아니십니까? "
"오랜만이군."
실로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 이후 만날 일이 없었으므로.
과거에도 북벌에 성공한 이후 입성할 때나 봤다.
황제와 황자들의 어두운 표정을 뒤로하고 환하게 웃던 카를로스 대공과 그의 자식들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때와 같이, 테베우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침 잘됐습니다. 오랜 재회의 기념으로."
그가 죽은 어미 근처에서 떨고 있는 두 아이를 바라보곤, 내게 창을 건네며 말했다.
"사냥할 게 두 마리가 남았으니 같이 즐기시죠, 전하."
< 전율 > 끝
나는 자제하고 있었다.
북방에 도착한 이후부터 느껴지는 이 익숙한 기분을.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기 짝이 없는 이 학살의 현장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나노머신의 짓눌림에 의해 광증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미친 황제로 지낸 20년의 모든 시간이 다 기억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미친 황제로 20년쯤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게 있다.
생명의 덧없음, 인간의 초라함을.
'카를로스 대공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무리한 전쟁을 계속 이어나갔다.'
카를로스 대공은 나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다.
그의 의도대로 나는 제스스로 황실의 모든 힘을 축출했다.
이후 불명예스럽기 짝이 없는 전쟁을 선포했다.
카를로스 대공은 어느 정도 전쟁을 완료한 뒤 반역을 일으킬 계획이었을 것이다.
'미친황제를 죽인다'는 누구나 바라는 명분으로.
전쟁영웅이 되어 온전하게 제국을 갖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하지만, 카를로스 대공도 몰랐던 게 있었다.
바로 나라는 존재를 말이다.
나는 전쟁을 부풀리고, 또 부풀려, 내전 따위는 일어날 수가 없게끔 만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5년은 진짜 광인처럼 살았다.
내 편 따윈 없는 궁에서 수십년을 살며, 하루도 암살의 위험으로부터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으니.
오히려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과거 나의 열화판이 존재하고 있었다.
'테베우스.'
광인.
아니······ 망나니라고 해야겠지.
진정한 미친놈들의 세계에 끼기에는, 이놈은 너무 재미가 없다.
"테베우스님. 예의를 지키십시오."
보다못한 제르민이 나섰다.
테베우스가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 예의? 우리 가문과 라인하르트 전하의 사이에 격식이 없음은 제국 신민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오. 난 정말 반가서워 그러는 것이고."
서로 예의를 따지지 않을 만큼 가깝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예의를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황태자의 자리에 나를 앉힌 게 온전한 황제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때의 멍청했던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대공, 특히 카를로스 대공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이리라.
하여 나는 그들 앞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황제 데우스였건만.
그 데우스조차 꼼짝 못하는 가문이라니!
"실망이다, 테베우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 지금, 저한테 실망이라 하셨습니까?"
테베우스의 웃음기가 단번에 사라졌다.
만만하게 보던 상대가 실망이란 단어를 운운하니 김이 새는 건 당연했다.
허나 정말로 실망이었다.
"고작 도망도 못치는 것들을 죽이는 게 '사냥'이라니. 왜 아직도 이런 후방에 남아있는 지 알 것 같구나."
북벌이 시작되고 벌써 반 년이 넘게 흘렀다.
그리고 이곳은 로카리 산맥의 주변.
카를로스 대공이 가장 먼저 쓸어버렸을 지점이었다.
그야말로 후방 중의 후방.
테베우스는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남은 잔당이나 죽이며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테베우스. 아직 제대로 된 전투는 너도 겪어보지 못했을 테지?"
"······."
"흠. 보아하니, 첫 전투에서 크게 실수를 했나보군. 카를로스 대공이 자신의 친아들을 후방 잔당을 처리하는 일에 쓴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안 가서 말이다."
테베우스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창백해졌다.
사실이었다.
첫 전투에서 실수를 해 테베우스는 후방에 배치됐다.
'대충 떠본건데 맞았나보군.'
얼추 그럴 것 같기는 하였다.
카를로스 대공의 친아들들은 모두 한가락하는 천재들이다.
더불어 황자들과는 달리 서로간의 경쟁심이 치열했다.
전방에서 공을 세우는데 혈안이 되어야 정상이건만, 후방에 안전하게 있다는 건 좀처럼 용서하기 힘든 실수를 저질렀다는 뜻이다.
그 분풀이로 테베우스가 모든 마을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카를로스 대공이 용서하기 힘든 실수라. 뭔지 알겠다. 네놈, 지렸나?"
"··· 닥쳐라."
살인을 해봤더라도 전쟁의 긴장감과 잔악함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다.
하지만 대공의 자식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의연해야 한다.
카를로스 대공은 자식들의 나약함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강하게, 더욱 강하게.
오줌을 지리며 꼴사납게 검조차 제대로 휘두르지 못했다면, 후방으로 좌천시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스릉!
테베우스가 검을 뽑았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사악!
순식간에 테베우스의 검이 잘려나갔다.
크로프트. 지금 이곳은 그의 절대영역 안이었다.
"전하를 향한 공격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테베우스님."
두 번은 없다.
그렇게 못을 박았다.
그러자, 주변 수백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들었다.
"크로프트님. 이곳은 궁이 아닌 북방입니다."
"테베우스님을 향한 공격 또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래도 기사는 기사라 이건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크로프트와 에디스. 그리고 실력있는 삼백여에 달하는 기사들.
두쪽 다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건 확실했다.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테베우스. 심기를 건드렸다면 미안하군. 우리는 그저, 길잡이 한 명만을 원할 뿐이다."
"그따위 말을 해놓고 길잡이를 원한다고?"
"네놈이 주변 마을을 죄다 전멸시켜놓은 덕에,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더구나. 며칠을 차가운 눈밭에 있다보니 내 신경이 곤두서있었음을 인정하마."
"너는 내 명예를 모욕했다. 대결을 청한다, 라인하르트."
막무가내가 따로없었다.
일장연설을 했음에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집.
저기서 고집을 피우면 정말로 지렸다는 걸 시인하는 꼴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지.
더불어 저게 진짜 본심이다.
황실보다 대공가가 더 위에 있다 생각한다는 방증이었다.
아니라면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고 바로 말을 깔며 명예를 운운하진 않았을 터.
테베우스만이 아니라 대공가 전체의 분위기라고 봐도 좋으리라.
한숨을 내쉬자 크로프트가 중재에 나섰다.
"테베우스님. 진정 내분을 원하십니까?"
어쨌든 같은 제국의 사람들이다.
서로 싸워봤자 이 전쟁통에서 좋을 게 없었다.
차가운 크로프트의 눈빛이 테베우스를, 기사들을 훑었다.
꿀꺽!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고는 하나, 그를 1:1로 당할 자는 이곳에 없었다.
아니, 그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크로프트를 확실하게 죽인다고 장담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존재인 것이다.
제국에게, 기사들에게 크로프트란 존재는.
"됐다. 크로프트 경, 대결에 응하도록 하지."
"··· 전하!"
"대신 조건이 있다."
그냥 싸우는 건 자살행위다.
테베우스가 후방으로 좌천됐다고는 하나, 그 역시 대공의 자식.
황자들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닌 괴물이었다.
특히 테베우스는 소드마스터의 위치까지 오를 정도로 검술에 일가견이 있었다.
하여, 나는 조건을 걸었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끝나는 거다."
내 조건을 들은 모두가 술렁거렸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대결.
그딴 게 성립할 리 없었다.
누가 죽더라도 결국은 파국이다.
이에 기사들은 생각했다.
'허세겠지.'
'황태자가 진짜 미치긴 했나보네.'
'푸하! 아무런 능력도 없는 황태자가 테베우스님과 생사대결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쯧쯧, 테베우스님의 성격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저딴 허세.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테베우스에겐 통하지 않는다.
'제발 그만하라고 울며불며 매달리게 만들어주마.'
이에 테베우스가 씨익 웃으며 대결을 승낙하려고 할 때였다.
번쩍!
찰나의 순간, 황태자의 몸에서 푸른 빛이 흘러나왔다.
유형화 된 마나.
익숙하기 짝이 없는 기운.
카를로스 대공의 산하 소드마스터들에게서도 익히 보아왔던 그것!
"오, 오러······?"
기사들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모두가 들었다.
오러. 소드마스터의 상징이 왜 거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길게 유지되진 않았으나 분명 오러가 맞았다.
여전히 이해가 불가능하지만, 황태자가 소드마스터라면.
이 싸움, 테베우스의 필패다.
'테베우스가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도 나중 일이지.'
지금의 테베우스는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기껏해야 1황자의 순수 검술 실력에도 못미친다.
하여, 나는 어깨를 펴고 모두의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생사대결이다. 내가 죽더라도 크로프트 경은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내 모든 명예를 걸고 약조하지. 그렇지 않나, 크로프트 경?"
"······ 예. 전하께서 그리하시겠다면, 따르겠습니다."
크로프트가 동조했다.
모든 '보여주기'는 끝났다.
남은 건 테베우스에 대한 압박뿐.
"테베우스, 검을 들어라."
"······."
테베우스가 입을 닫았다.
그럴 수밖에.
황태자의 무능함은 대공가에서 진즉에 확인한 사항이다.
그럴진대 황태자가 소드마스터라고?
'속인건가?'
모르겠다.
미친놈은 분명한데 실력까지 겸비한 미친놈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무능력함'을 여태까지 연기한 거라면?
황태자로 책봉되기 위한 연기였을 뿐이었다면?
사실은 다른 황자들과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닐까.
거짓으로 오러를 피워낼 순 없으니까.
저 자신감, 저 태도. 진정한 강자의 여유였다.
'하필 왜 지금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여태껏 숨겨왔다면 왜 지금 그 능력을 보이는 걸까.
'젠장.'
내심 고개를 저은 테베우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 길잡이는 우리도 없다. 필요가 없어져서 다 죽였거든."
"그럼 저 아이들이라도 데려가도록 하지."
북방의 사람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길을 찾는다.
아이들이라도 방향을 잡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테베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한 명만 데려가라."
"허락한 걸로 알고 둘 다 데려가마."
"라인하르트······!"
자신을 어디까지 무시하는 건가.
테베우스가 라인하르트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몸을 돌리자, 두 눈이 부딪쳤다.
'뭐야······?'
순간 테베우스는 흔들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인하르트의 눈.
'이 새끼 눈빛이······.'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진정한 광인의 그것이 이러할까.
아버지에게서도 이런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치 무저갱에 빠진 기분이었다.
"한 번 더 나의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대면, 그 즉시 네놈의 손목을 잘라버리겠다."
그리고 그 눈빛과 말투에,
테베우스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이건 단순한 광인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지배하는 자의 격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는 지배당하고 말았다.
압도되었다.
'빌어처먹을······!'
그 사실에, 테베우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 북방에서 > 끝
크로프트는 마차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라인하르트를 바라봤다.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방자하고 교만하며 사람을 업신여기던 라인하르트다.
자신밖에 모르던 그가 궁을 떠나 북방에 왔다.
에디스의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조차도 믿기지 않건만, 두 아이를 구하고자 마차를 멈춰세운 것도 그였다.
명목상이야 테베우스를 통해 길잡이를 구하겠다는 것이었지만, 크로프트는 그 속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렸다.
'변했다.'
결국 크로프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 황태자 라인하르트가 변했음을.
단순히 광증을 벗어난 게 아니라 사람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을 수준으로 말이다.
게다가 테베우스를 대할 때의 태도는······.
'테베우스의 성격을 이용해 모든 답을 유도해냈지.'
돌발적인 상황에서 판을 짜고 원하는 답을 유도해내는 건 노련한 정치판의 귀족들도 쉽지않아 하는 일이었다.
결국 라인하르트는 두 아이를 구했으며 테베우스를 굴복시켰다.
전략적으로 오러를 엿보이고, 자신을 이용해 신뢰도를 끌어높이는 수까지 사용해가면서.
제대로 된 대결이었다면 백중 백 라인하르트의 패배였을 터이나.
'······ 광증은커녕 그 눈빛과 기세는 제왕의 면모였다.'
허나 그러한 기세는 성왕 데우스에겐 없는 것이었다.
다른 황자들도 갖지 못한 또 다른 제왕의 재능.
왜 여태껏 몰랐던 걸까.
어쩌면, 황태자의 이러한 변화는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관심이 없었기에, 누구하나 제대로 황태자를 보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래서 몰랐을 뿐.
크로프트가 주먹을 쥐며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렇다면 광증에 가려진 게 아니다.
광증이라는 편견으로 모두가 라인하르트를 덮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두꺼운 편견의 막을 라인하르트는 혼자 깨버리고 나왔다.
누구의 도움없이 홀로 세상에 나와 포효하고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그 포효가, 크로프트는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라인하르트의 재능은 제국을 내전으로 이끌 것이다.
오직 무능하고 미쳐있었기에 그는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유능하다는 게 밝혀지면 대공가에서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 막을 깨고 나왔으나 계속해서 막 안에 있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테베우스를 대하는 라인하르트의 태도를 보고선 생각이 달라졌다.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있다.'
수백의 기사와 테베우스를 향해, 카를로스 대공을 향해, 귀족들과 황실의 사람들을 향해 라인하르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태자의 자리가 이제 오롯이 자신의 위치임을.
막을 뚫고 더 높이 올라가 꼭두각시로 살지 않을 것임을.
그 의지는 모두를 파멸시킬 수도 있으나.
···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른다.
황실의 영광은 모두 귀족의 것들이 되었다.
긴 평화가 오히려 황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귀족들의 검은 야욕은 지고한 황권조차도 엿보고 있었다.
"크로프트 경."
"예, 전하."
"북벌이 성공할 것 같나, 실패할 것 같나."
눈을 뜬 라인하르트가 물어왔다.
북방의 정벌이 시작되고 벌써 반년.
아직도 성지탈환을 하지 못한 채 접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막상막하라고 들었으나, 이상하긴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성공할 것이다."
북벌이 성공한다. 완전히 단정짓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후방에 배치된 기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진즉 절멸시킨 후방.
아무리 테베우스의 호위라 하더라도 기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
족히 삼백. 보이는 것만 그 정도이고 분명히 더 많을 것이다.
하물며 그들 모두 실력자였다.
전방에서 적을 도륙할 일당 백의 기사들이 후방에서 잔당처리나 하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효율을 극도로 따지는 카를로스 대공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선택을 내릴 리 없었다.
"의도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카를로스 대공은 철두철미한 자다. 심어놓은 병사들로부터 연락이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굳이 숨길 필요 없다. 그림자들의 총괄 책임자가 그대인 건 알고 있었으니."
그림자.
황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해결사들.
그 해결사들을 부리는 총책임자가 바로 크로프트였다.
크로프트는 자신의 존재감을 낮춰, 귀족들의 칼날로부터 스스로를 숨겨왔다.
대신 그림자들을 움직여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건 황제를 포함한 극소수의 인물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감히 대공들도 모르는 것을 라인하르트가 어떻게 알았을까.
"황룡기사단을 이곳저곳에 전출시키는 척, 그림자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황태자에게 실망해 황룡기사단을 나가거나,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갔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귀족들의 감시를 위해 크로프트가 직접 그림자로 운영하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것까지 안다는 건 전부 알고 있다는 뜻이다.
크로프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실을 어떻게 알고있느냐고 중요한 게 아니다.
더욱 중요한 건, 황태자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냈냐는 것이었다.
"······ 맞습니다. 북방으로 보낸 그림자들의 연락이 대부분 끊겼습니다."
카를로스 대공을 언급하고 그림자를 말했다.
전쟁 중 죽은 게 아니라 대공이 의도적으로 그림자를 제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카를로스 대공은 힘을 숨기고 있다. 황실에 자신의 힘이 전부 드러나는 걸 극도로 꺼리고 있는 게다."
"그래서 물밑작업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당장 성지를 정복할 수 있음에도 그는 후방으로 병력을 몰래 빼내고 있다. 비밀이 새어나갈까봐 첩자들도 색출해내는 중이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런 귀찮은 짓을?"
전쟁 중이다.
아무리 우위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여유가, 그러한 귀찮은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철저한 통제.
북방 전체를 아예 가둬버리는 형국이다.
대공은 조용한 승리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차단해야할 정도로 중요한 게 눈앞에 있다는 뜻이겠지."
바로, 용을 노리고 있다.
북방의 모든 민족들이 우상하는 성지에는 용이 있었다.
용을 취하는 걸 숨기고, 병력을 숨겨 카를로스 대공은 황실을 단번에 압박한다.
그가 궁으로 입성하고나서야 모두가 알았다.
황실이 패배했음을.
크로프트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혹시, 테베우스에게 얼굴을 보인 것도······."
단순히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단 말인가.
후방에 배치된 기사들을 면밀히 확인하고 의심을 심어주기 위해.
더불어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라인하르트는 마차에서 내린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몇 수 앞을 내다본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생각에 답하듯.
"모든 걸 차단했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나타났다. 카를로스 대공도 나를 죽일 순 없으니 고민에 빠질 터."
나를 황태자에 책봉하고자 대공은 온갖 작업을 해왔다.
북벌도 그중 하나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가 북방에 나타났다.
그것도 테베우스를 굴복시켜가면서.
과연 대공은 내 광증이 나았다고 생각 할까?
'사람의 편견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확인은 하고자 할 것이다.
내가 크로프트와 함께 왜 북방에 왔는지 궁금해 미쳐버릴 것이었다.
대공이 다루는 체스판의 말 중 당장 나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우리는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길이 열릴 테니."
나만큼이나 대공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카를로스 대공은 패악적이라 알려졌지만 그만큼 신중한 사람은 없었다.
나를 잡아, 진의를 확인하기 전까진 쉽게 움직이지 못하리라.
잡는자와 도망치는자.
자고로, 도망치는 쪽이 잡는 쪽보다 재미는 있는 법이다.
"길, 말입니까?"
"크로프트 경. 카를로스 대공이 무엇을 그리도 숨기고 싶어하는지, 알고 싶지 않나?"
알고싶다.
미친 듯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더욱 미치게 하는 건 라인하르트였다.
'단순한 검의 재능만이 아니었던 건가.'
검의 재능.
단순히 재능만을 따지자면 그는 천재였다.
고작 일주일만에 어지간한 기사급의 실력을 갖췄으니까.
특히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은 가히 압도적이라 할 수 있었다.
기본기만 닦였음에도 벌써부터 광이 나고 있었다.
제대로 가르친다면, 어쩌면 1황자가 가진 검의 천부적인 재능조차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카를로스 대공을 상대할 수 없다.
그런데.
'힘을, 보태드려야 하는가.'
크로프트는 가능성을 보았다.
물론 지금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모든 걸 빨아들이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진정한 제왕의 재능이다.
다른 황자들도, 황제 데우스조차도 갖지 못한.
오직 라인하르트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재능 말이다.
'내가 멍청했구나.'
크로프트는 자책했다.
부족한 게 아니라 그저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면······.
가장 먼저 저 재능을 알아차려야하는 게 자신이었건만 그대로 방치해버린 게 되는 것이다.
귀를 막고, 고개를 돌린 채, 황태자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있었다.
아무리 부족해도 잘하는 게 있었을 텐데.
하고 싶어하는 게 있었을진대.
누구 하나 그런 것을 황태자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그치고, 외면하기만 하니 광증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궁은 라인하르트에게 지옥과도 같았으리라.
'그런데도 혼자 알을 깨고 나오셨다.'
궁을 벗어나자마자 마치 폭발하듯 가려진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슬퍼하는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정도의 자비 또한 그는 갖추고 있었다.
겉으로는 방자하고 교만하나, 그 이면에는 다른 면모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니 알을 깨고 나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출 게 아니라 축하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황태자가 알을 깨고 나온 것을 축하해줄 사람이 없었다.
자신조차도 그랬으니까.
그냥 계속 알 속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황태자의 무능력함에 진저리를 치며 포기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냥 자기 위안, 합리화였을 뿐이다.
어차피 무능한 황태자이니 포기하는 게 맞다고. 차라리 계속 무능한 게 낫다고.
죽여야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프트의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선, 이런 날이 오기를 은연중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황태자가 태어났을 때의 그 기쁨이, 황제의 첫 아들이며 제국의 굳건한 기둥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환희가.
―크로프트경. 그대가 라인하르트를 지켜주시오. 그대라면, 믿고 맡길 수 있으니.
―부탁드려요, 크로프트. 내 오랜 친구여. 이곳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대뿐입니다.
황제와 황후가 아이를 건넸을 때, 라인하르트를 처음으로 품에 안아보았을 때의 그 감동이.
자신을 보며 웃던 그 작은 아이가.
불현 듯,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라인하르트가 정말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이어서 말했다.
"왜 웃으면서 우는 게냐?"
······ 그러게나 말입니다, 전하.
애써 크로프트가 고개를 돌렸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봅니다."
"소드마스터도 눈에 먼지가 들어가면 눈물이 나오나보군."
"사람이니까요."
사람이었다.
그도, 라인하르트도.
크로프트는 생각했다.
알을 깬 건 라인하르트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자신을 가두고 있던 두꺼운 벽을 라인하르트가 부숴버린 것이다.
< 알을 깨고 나오다 > 끝
이십만이 넘는 병사가 성지(聖地)를 둘러싸고 있었다.
거대한 동굴과 그 주변으로 지어진 조악하기 그지없는 돌탑들.
맞서는 북방의 전사들이라고 해봐야 고작 삼만안팎.
하지만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대치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북방의 전사들 중에서도 특수한 힘을 지닌 괴물들 때문이다.
인간이면서 괴물의 모습을 한 자들.
그들은 그것을 '신을 받은 자'라고 칭한다지.
'이것이 신인가.'
카를로스 대공.
거구의 신체. 신력을 이어받은 그 묵직한 손으로 막사 안에 놓인 시체를 들추어보았다.
그것을 본 마법사들이 기겁했다.
"가,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강력한 흑마법의 기운입니다. 언제 마나벽을 뚫고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카를로스 대공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신체는 성역과도 같았다.
흑마법의 기운은 절대로 그를 침범하지 못한다.
"강력한 흑마법의 기운입니다. 언제 마나벽을 뚫고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흑마법의 기운은 절대로 그를 침범하지 못한다.
카를로스 대공은 개의치 않았다.
"흠."
그의 신체는 성역과도 같았다.
시체는 변형되어 있었다.
살이 부풀고, 내장이 튀어나오며 알 수 없는 형체가 되어버렸다.
살갗에서 기포가 터진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가스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가장 놀라운 점은 피다.
피가, 하얗다.
마법사들이 마나벽으로 막아서고 있지만, 시체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그 기운은 마나벽마저 갉아먹었다.
"흠."
시체는 변형되어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둘러싼 '성역'마저도 침범하려 하다니.
가공할 위력이었다.
'소드마스터조차 죽이는 킬링필드라.'
시체는 대공 휘하의 소드마스터였다.
성지에 몰래 잠입한 이후 이렇게 변한 것이다.
육체의 극한에 올랐다고 칭해지는 소드마스터가 고작 10분을 버티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은 들어가자마자 죽으리라.
심지어 '걸어다니는 성역'이라 불리는 능력으로도 오래는 버티지 못할 듯싶다.
킬링필드.
그야말로 용의 절대마법과도 같은 것.
고대의 문헌에 적혀있는 그대로다.
'저 성지 안에, 용이 있다.'
의심은 확신이 됐다.
북방의 특수한 체질을 가진 자들은 저 킬링필드 안으로 들어가 힘을 얻는다.
허나 그들도 성지의 끝까지 가서 용의 존재를 확인한 이는 없다고 전해진다.
깊게 들어갈수록 더 많은 신체의 변형과 힘을 얻지만, 그만큼 극도로 수명이 짧아진다는 단점 또한 있다고.
카를로스 대공은 신을 받은 자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신이라 불리는 용뿐.
신비이며 사라졌다 전해지는 그 전설이 저 안에 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쟁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감각에 취할 지경이었다.
저 용을 취하면 세계를 발 아래 둘 것이다.
제국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러기 위한 모든 물밑작업은 끝이났다.
드디어 성지의 확인도 끝이 났다.
남은 건 정복뿐.
"대공각하. 테베우스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테베우스가?"
테베우스. 그의 멍청한 셋 째 아들.
후방에 배치해뒀건만 그새를 참지 못하고 찾아왔다.
카를로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들라하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사를 펼치며 테베우스가 걸어들어왔다.
빠른걸음으로 다가온 테베우스가 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곳은 전장이라고 내 누누이······."
"라인하르트가 북방에 있습니다."
라인하르트.
그 이름이 왜 테베우스의 입에서 나온단 말인가.
언제나와 같이 궁에 칩거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황태자가 해야할 일이었다.
이후 북벌이 끝나면 황태자는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헌데, 북방이라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듯 테베우스가 이어서 말했다.
"크로프트 경과 함께 있습니다. 다른 속내를 갖고 찾아온 게 분명합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느냐?"
"그, 그건······."
테베우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라인하르트에게 압도되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걸 말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엄청난 속도로 마차가 사라진 뒤였다.
찾으려고 했지만, 길잡이도 없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테베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필코 찾아내겠습니다."
카를로스는 턱을 쓸었다.
이 시기에, 궁을 벗어나 라인하르트가 북방에 왔다.
잠자는 사자 크로프트와 함께.
'무엇을 위해?'
무언가 눈치를 챈 걸까?
미친 황태자의 산책치고는 너무 멀리 왔다.
크로프트가 왜 라인하르트와 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의구심을 갖고 찾아온 건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크로프트가 함께 있었다면, 테베우스가 라인하르트를 잡지 못한 것도 이해는 되었다.
허나 시기가 너무나도 공교롭다.
하필이면 성지를 공략하기 바로 직전.
'그림자의 색출에 반응하는 것인가?'
성지를 정복해 용을 취하고자 그는 내부의 첩자부터 소탕했다.
자신이 용을 취하는 과정을, '용'이 무엇인지를 황실 측에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황제가 크로프트를 보낸 경우의 수도 생각해보았다.
'평화에 찌든, 무능한 황제가 움직였다?'
무능한 황제.
카를로스는 평화의 수호자라 불리는 데우스를 무능하다고 여겼다.
평화의 이면에 존재하는 괴물을 그는 모른다.
데우스로 인해 제국은 도태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결국 제국은 과거의 명성과 힘을 잃고 다른 국가에게 정복당할 것이다.
위대한 천 년 제국의 역사가 데우스로 인해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제국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계획은 종지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헌데.
자신이 짜놓은 판의 말이 멋대로 움직였다?
"테베우스."
"예, 대공각하."
"잡아오너라. 허나, 죽여선 안 된다."
테베우스의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 전선에 서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
라인하르트. 놈은 복덩이였다.
비록 굴욕당했지만, 갚아주면 그만.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까?"
"도망치지 못하도록 발목 하나쯤은 잘라도 되겠지."
"명을 받듭니다, 대공각하."
"패트릭, 크로우와 함께 가라. 둘이라면 크로프트도 능히 제압할 수 있을 터."
"아······! 감사합니다. 반드시 잡아서 돌아오겠습니다!"
패트릭과 크로우는 대공 휘하의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들이다.
감히 전성기 크로프트가 와도 쉬이 상대하기 힘들 수준의 강자들.
설령 변수가 존재해도 그 둘을 대동한다면 잡지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다.
둘의 공백으로 성지의 진입이 늦어지겠지만, 그만큼 라인하르트를 잡아오는 게 시급하다는 방증이었다.
테베우스가 주먹을 바스라지게 쥐었다.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
'기다려라, 라인하르트.'
***
북방의 사람들은 바람과 냄새를 읽고 방향을 잡는다.
굳이 교육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두 아이의 인도에 따라 마차의 방향을 정하고 움직였다.
어미를 잃은 슬픔이 강렬했지만 자신들을 구한 게 우리라는 것을 두 아이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도착했습니다, 전하."
에디스가 말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반파된 성당이었다.
성당의 지하로 향하는 입구. 그 위에 한 남자가 있었다.
거대한 할버드를 쥔 전사.
하지만 신체가 이상하게 변형한 이였다.
팔과 다리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배했으며 자라난 털도 짐승의 그것처럼 뒤덮여있었다.
"파간!"
"파간!"
마차에서 내린 두 아이들이, 그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신성한 의식과도 같이.
그 모습을 보며 에디스가 설명했다.
"'신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북방의 전사들 중 가장 특출난 자들.
그들을 파간이라 불렀다.
신을 받은 자. 하나같이 기괴한 신체변형을 일으킨 괴물들.
북방의 사람들은 그들을 숭상한다. 진짜 신처럼 여겼다.
하지만 파간의 수명은 극히 짧다.
신을 받으면 길어야 1년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
북방을 오랜시간 정복하지 못한 건 저 파간들의 강력함이 존재해서다.
수명과 바꿔, 상상을 초월하는 신력을 얻은 저들의 희생으로 북방은 지켜졌다.
"놀라우십니까?"
"그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저곳에 꽤 오래있던 것 아닌가?"
손녀가 폭주하고 몇 년은 지났다.
계속해서 저곳을 지키고 있었다면 신을 받고 몇 년이 더 지났다는 의미였다.
이는 파간의 평균수명을 웃도는 것이었다.
에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간 중에서도 유독 특수한 체질이라 하더군요. 또한 그는 제 오랜 벗입니다."
이어 에디스가 파간에게 다가가 양 팔을 벌렸다.
진정으로 반가운 친구를 만났을 때의 표정으로.
파간 역시 양 팔을 벌려 그를 환대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저 파간의 기괴한 생김새 때문이 아니었다.
['방사능 피폭' 수치가 한계치를 뛰어넘은 상태입니다.]
['비인가 나노머신'에 의해 억제되고 있으나 현재 단계에서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방어체제에 돌입합니다.]
만에 하나 유입될 방사능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고자, 제로가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나노머신들이 벽처럼 나를 둘러싸기 시작한 것이다.
'방사능?'
이윽고 그 단어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그것은 이세계의 단어다.
찬란한 문명을 고작 10여분만에 몰락시킨 최종병기.
그 병기가 쏟아내는 물질이 바로 방사능이었다.
인류를 절멸시킨 진짜 악마의 이름 말이다.
그런데 왜 저 파간이 방사능에 피폭되었다는 것인가.
'제로. 내가 방사능에 피폭되면 어떻게 되지?'
[방사능 피폭의 증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방사능은 인간의 DNA구조를 파괴시키고, 그로 인해 돌연변이 현상을 야기합니다. 적은 수치로도 암, 탈모, 백혈병을 일으키며 조직을 괴사시키고 피를 하얗게 만드는 등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무기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나노머신 'Zero'는 방사능에 피폭된 인류를 구원하고자 제작되었습니다. 제가 기동하는 한 방사능이 마스터의 신체에 해를 끼칠 가능성은 없습니다.]
돌연변이 현상이라.
파간의 저 기괴한 신체는 방사능에 의한 모습이란 뜻이다.
그리고 제로는 그런 방사능으로부터 나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내비췄다.
'선택받아 성지에 들어간 전사들만이 파간이 된다. 성지에는 용이 있다. 용은 방사능을 내뿜는다······.'
그렇다면 용이란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에디스와 파간을 따라, 문을 열고 지하로 향했다.
지하의 너른 공동.
그 가운데에 있는 한 얼음기둥을 보고나선 모든 고민이 날아가버렸다.
"제 손녀입니다, 전하."
에디스가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얼음기둥의 중심에 갇힌 여인.
하얀 얼굴과 하얀 피부.
대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백색종이다.
마나폭주로 인해 에디스가 억지로 빙결시켜두었다던 그녀였다.
내가 아는 거라곤 손녀가 죽고 에디스가 마탑주의 자리를 내려놓는다는 것뿐이었다.
그 손녀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자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저 여인의 모습이, 왜인지 낯이 익었다.
용에 대한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한 존재.
'······ 백은의 마왕.'
그것은, 말피엘이 달성한 일곱 번째 위업의 이름이었다.
< 백은의 마왕 > 끝
백은의 마왕.
내가 황제에 즉위한 이후 나타난 최초의 시련.
제국의 젖줄이라 불리던 '리겔룽 강'을 얼려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마왕의 무차별 학살이 시작되었다.
백은의 마왕과 눈만 마주쳐도 전신이 얼어붙었으며, 무영창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이상자의 발생에 마탑들도 난리가 났다.
뿐만인가.
날카로운 얼음의 비를 내려 어마어마한 영역의 영토에 피해를 속출시켰다.
단 하루만에 길리쟈 백작령이 초토화 된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은 그녀를 '백은의 마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계된 사상자만 20만 명이 넘어갈 즈음, 말피엘이 등장해 백은의 마왕을 처단하였다.
삼일밤낮을 싸워서 겨우 목을 베어내었다고.
'말피엘이 최초로 등장한 건 여섯 번째 위업을 달성하면서다.'
위업이란 신의 부탁과도 같은 것이다.
열 두가지 부탁을 수행하면 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지만, 하나하나의 위업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과 고난으로 이루어졌다.
위업의 내용은 모두 다르나 한결같이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 것을 무려 여섯 개나 달성했으니 적수가 없었다.
출현 당시만 하더라도 '정말 여섯 개의 위업을 달성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데다가 정말 미친 듯이 강했기 때문에 1:1로는 이미 적수가 없을 거라 정평이 나있는 상태였다.
'말피엘이 최초로 등장한 건 여섯 번째 위업을 달성하면서다.'
출현 당시만 하더라도 '정말 여섯 개의 위업을 달성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했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데다가 정말 미친 듯이 강했기 때문에 1:1로는 이미 적수가 없을 거라 정평이 나있는 상태였다.
위업이란 신의 부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무려 여섯 개나 달성했으니 적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 백은의 마왕을 처단했으니 말피엘의 본격적인 '영웅'의 행보가 두드러지는 건 당연지사.
사람들은 마왕의 죽음과 말피엘의 영웅적 행보에 열광하며 그를 우상시했다.
모든 왕국들이 그를 포섭하길 바랐고 신성교까지 나서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도와주었다.
열 두가지 부탁을 수행하면 신과 같은 힘을 갖게 되지만, 하나하나의 위업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역경과 고난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 백은의 마왕을 처단했으니 말피엘의 본격적인 '영웅'의 행보가 두드러지는 건 당연지사.
위업의 내용은 모두 다르나 한결같이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런 것을 무려 여섯 개나 달성했으니 적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마왕의 죽음과 말피엘의 영웅적 행보에 열광하며 그를 우상시했다.
'관심종자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상황이었지.'
물론 나도 불렀다.
얼마나 잘난 놈이기에 이처럼 귀가 아프도록 이름이 들려오는지 궁금했던 탓이다.
단칼에 거절당했지만.
'그 백은의 마왕이 에디스의 손녀였다······.'
출현 당시부터 적수가 없을만큼 강했던 말피엘과 삼일밤낮을 싸운 마왕. 그 마왕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허나 분명히 손녀가 죽은 뒤 에디스는 마탑주의 지위를 내려놓았다.
'사실은 죽은 게 아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려내려고 한 것이다.'
생각을 달리해보았다.
손녀를 살리고자, 더욱 집중하기 위해 명예를 버렸다.
에디스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다만, 어째서 그녀가 마왕이 되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에디스가 살려냈다면 둘이 오순도순 잘 살면 됐을 텐데.
[대량의 폭주한 비인가 나노머신이 포착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순수하게 놀라고 있었다.
다른 '폭주'의 현상에서 보았던 비인가 나노머신의 양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열 배. 아니, 그 이상.'
8서클에 다다른 에디스의 폭주한 나노머신보다 족히 열 배 이상 많은 것 같았다.
압도적인 광경에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진즉에 터지거나 죽었어야 정상일 몸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걸까.
[강력한 바이러스 인자를 확인했습니다.]
[주의. 강력한 '사이오닉' 에너지가 포착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은 되었다.
심장으로부터 퍼져나가고 있는 붉은 색 핏줄과도 같은 선.
마치 실로 이어놓은 마리오네트마냥 저 붉은 선이 그녀의 육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이어놓고 있었다.
"제 손녀는 현자의 돌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연금술사들의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말이냐?"
에디스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연금술사들은 허황된 사기꾼들이다.
돌로 황금을 만든다느니, 전설의 엘릭서를 만들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느니 하는 말들로 연구비를 뜯어갔다.
그중 가장 말이 안 되는 게 현자의 돌이다.
연금술사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돌이란다.
제국의 재정이 넉넉하여 지원은 하고 있지만, 내가 황제에 즉위하면 그 즉시 없애버릴 비용이 바로 저 사기꾼들에게 들어가는 지원비였다.
그런데 그 이름을 에디스가 입에 담았다.
에디스는 내 의견에 일정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금술은 사기에 가깝습니다. 마법적인 처리를 해서 그럴싸하게 포장해놓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제 손녀의 연금술은 달랐습니다."
그가 처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르다.
확실히,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은 다른 사기꾼들에 비할 바가 못된다.
제로마저 경고를 줄 정도의 물건이다.
'저게 진짜 현자의 돌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아마도 이 세계에는 없는 물질.
신들이 부여하는 위업의 대상으로 선정될만큼 위협적인 것일 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힘이 들다면, 하지 않으셔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제 손녀의 상태는 살아있는 게 기적이니까요."
여기까지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에디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좋지 않은 예감이 듭니다."
크로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감각은 보이지 않는 마나마저 감지해낼 수준이었다.
제로도 주의를 준만큼 조심하는 게 좋겠으나.
"전하!"
"아!"
주변의 탄성에 아랑곳않고 나는 과감하게 손을 가져갔다.
얼음기둥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
그와 동시에 폭주한 나노머신들이 나를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경고! 비인가 나노머신의 침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력한 바이러스 인자를 품은 나노머신입니다!]
[사이오닉 에너지의 발생이 확대됩니다!]
시야가 흐려진다.
정신이 멀어지는 감각.
나는 이 감각이 무척이나 익숙했다.
'광증.'
광증이 도질 때.
'또 다른 나'가 튀어나올 때 항상 느꼈던 거지같은 감각.
광증이 도지면 항상 나 스스로를 절제할 수가 없었다.
까무러치는 고통과 함께 모든 것을 놓게 만들었다.
'꺼져라.'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내 선택도, 내 의지도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만 했다.
그러니 꺼져라.
[뇌의 순간 동시 활성 영역이 25%로 폭증했습니다.]
[사이오닉 에너지가 중화되어갑니다.]
[바이러스 인자와 결합······.]
[······.]
시간이 멈췄다.
얼음이 깨지고, 그 안에서 그녀가 걸어나왔다.
멈춰있는 내 턱을 쓰다듬으며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대단하군요. 인간은 저의 에너지를 버티지 못해야 정상일텐데."
사이오닉 에너지.
그로 인한 광증.
나 자신을 놓아버릴 뻔한 그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대의 머릿속에 있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워요. 제가 가진 '진리의 도서관'에는 없는 내용이거든요."
나는 비로소 그녀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바로 현자의 돌이다.
여자의 심장과 융화한 현자의 돌이, 의지를 갖고 나타난 것이었다.
"세상에 없는 것. 존재하지 말아야할 것들의 청소를 위해, 그대 또한 신들의 '위업'으로 선정되겠죠. 우리는 비슷한 처지인 것 같군요."
그 끝은 파멸이라.
전신에 힘을 줬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발버둥치지 말아요. 어차피 못 움직일 테니까. 그대를 해칠 생각은 없······."
"너와 내가 같다고 생각하느냐?"
"······ 진심으로 놀랐어요. 어떻게 입만 움직일 수 있는 거죠?"
달이 보였기 때문이다.
크로프트의 움직임을 '재현'했을 때 보았던 달.
그것이 마치 현자의 돌과 비슷한 형상으로 보였던 탓이었다.
그래서 고민없이 손을 뻗었다.
한 번 겪어본 현상.
놀라긴 일렀다.
이윽고 입, 손, 발, 모든 신체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부동영역을 타파하는 인간이라니···! 괴물인가요, 그대는?"
부동영역.
정령 칼리번이 언급했던 영혼의 안식처.
그렇다면, 그녀 역시 A.I라는 것일는지.
나는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항한다.
더 이상 내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는 인생을 살기는 싫었기에.
그 의지만은 신조차도 어찌하지 못할 에고였다.
A.I 따위에 굴복할 순 없었다.
"만들어진 주제에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재밌는 말이네요. 만들어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옳은 말도 아니에요."
그녀가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
"나는 바알. 현자의 돌에 깃든 정신생명체. 동시에 지금 이 몸의 주인이기도 하죠."
"기생하는 건가?"
"합의를 했어요. 살기 위해. 살리기 위해. 둘이 하나가 되기로 했죠."
생명의 유지를 위해 서로 합의를 했다.
바알이 아니었다면 에디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었으리라.
지금 저 모습이 바로 '백은의 마왕'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생명을 저주하며 학살을 저지른 잔악무도의 마왕!
"······ 저를 제거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군요."
그의 눈을 본 바알이 기함했다.
그럴 수밖에.
미지의 세계. 신비를 접했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 신비를 '제거'한다는 생각은 못해야 정상이다.
제거 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여유조차 없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놀라지 않는다. 일말의 공포도 없다.
저 자는 진심으로 자신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의지를 가진 에픽들 끼리도 서열이 있다, 이건가?'
에픽.
의지를 가진 물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신비.
그녀 역시 그런 신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저 남자가 가진 머릿속의 신비는, 확실히 자신의 이해 범주를 뛰어넘고 있었다.
아직 전체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부동영역을 타파해왔다.
뿐만 아니라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융화, 제거할 움직임까지 보인다.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신비들 끼리의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는 놈이 분명했다.
진리의 도서관에 기재되지 않은 신비. '태고의 에픽' 중 하나임은 확실하나, 왜 저런 게 아직까지 인세에 나돌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사나 하려고 했더니.'
그래서 에픽끼리 통성명이나 할 겸, 자신의 세계로 불러온 것이었다.
그런데 에픽은 나오지 않고 그 사용자가 의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하물며 저 남자는 신비에 먹힌 게 아니라······.'
보통의 에픽은, 자신과 같이 사용자의 정신과 융화된다.
융화 되면 다행이고 대부분 잡아먹어 지배한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신비와 융화되거나, 먹힌 것 같지 않았다.
도리어 에픽을 완전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태고의 에픽이라면 오히려 더 자기의지가 강할진대.
강력한 에픽일수록 의지는 비대해지기 마련이다. 자신 역시도 그랬으니까.
"너를 제거하지 말아야할 이유가 있느냐?"
"제가 죽으면 이 아이도 죽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있긴 하겠지만 이지를 잃은 시체와 다를 바 없게 변하겠죠."
"그것밖에 없다면 제거해야겠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었다.
이 몸을 구하러 온 게 아니었나?
바알은 생각을 달리했다.
"선물을 드릴게요."
이 신비한 인간을 아군으로 만들자고.
태고의 에픽과 인연을 쌓아놓으면 후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자기의지'의 향상에도 많은 진전이 생길지도 모르고.
마음 같아선 이 몸의 주인과 같이 계약을 하고 싶지만, 저 에픽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계약이 발동되기도 전에 자신을 제거하고자 움직이겠지.
아니면 계약 자체를 무효로 되돌리거나.
"이름이 뭐죠?"
"라인하르트다."
"좋아요, 라인하르트. 폭주하는 이 아이의 마력을 받아주세요. 이 마력은 제 권능이 섞인 것. 이로 말미암아 그대는 큰 힘을 얻게 될 거에요."
두웅.
그 순간 커다란 물결과 함께 세상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가라앉는 느낌.
곧이어 정신을 찾았을 땐,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였다.
아니, 얼음기둥에 갇힌 그대로였다.
환각이나 착각은 아니다.
'부동영역.'
나는 바알의 부동영역 안에 있었을 따름이다.
그 영역이 깨지며 현실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콰직!
콰지지직!
찰나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나노머신이 흘러들어왔고, 그와 함께 얼음기둥이 쩌적 갈라지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아······!"
"전하, 괜찮으십니까?"
크로프트와 제르민이 나를 챙겼다.
반면 에디스는 떨어지는 여자를 받아들고자 전력으로 달려갔다.
이어 손녀를 받아낸 에디스는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카이첼. 오, 카이첼!"
눈물을 지으며 그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얼음장같던 카이첼의 신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카이첼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할아버지······?"
"그래. 에디스 할아버지다. 알아보겠느냐?"
"여, 여기가 어디에요?"
"아직 움직이지 말거라. 몸이 회복되려거든 시간이 필요할테니······!"
그 감동을 에디스는 온몸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저 카이첼의 행동이 사실 바알에 의한 것임을.
바알은 지금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연약한 카이첼의 연기를 말이다.
[모든 '비허가 나노머신'을 지배했습니다.]
[관리자 권한이 5등급으로 격상합니다.]
[지배한 비허가 나노머신들이 '사이오닉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사이오닉 에너지.
바알의 선물이었다.
얻은 즉시,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허!'
동시에 나는 전율했다.
대륙의 절반을 정복했을 때에도 느껴보지 못한 감각.
그 이상의 환희가 나를 감쌌다.
< 사이오닉 에너지 > 끝
세상에 퍼진 마나.
일반적인 비인가 나노머신은 '만능유도 줄기세포'라는 인자와 결합한 상태다.
특정한 명령어를 입히면 발동되도록 만들어진 인자이자 마법의 매개체가 바로 그것이었다.
보통 자신의 체질이나 특성따위에 걸맞은 나노머신을 심장에 품어, 서클을 그리며 부리면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비인가 나노머신이 저 줄기세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드물게, '특수한 마나'를 품은 인간이 존재했다.
사이오닉 에너지는 그러한 마나 중에 하나였다.
'명령어를 입히지 않아도 되는 나노머신.'
한 마디로 무영창.
초능력이다.
제로로 지배한 나노머신도 특수한 현상을 일으키려면 원을 그리고, 명령어를 입에 담아야만 했다.
원을 그리지 않아도, 명령어를 입에 담지 않아도 마법이 구현된다는 건 그야말로 '권능'이란 말 외엔 설명할 길이 없는 사기인 셈이다.
특히 고서클의 강력한 마법일 경우 발동의 시간이 길어진다.
그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건, 모든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다준다는 것과도 같았다.
여태껏 쌓아올린 마법사회의 통념이 단번에 무너지는 일이었다.
'백은의 마왕도 얼음마법을 무영창으로 구사했지.'
제로로 지배한 나노머신도 특수한 현상을 일으키려면 원을 그리고, 명령어를 입에 담아야만 했다.
여태껏 쌓아올린 마법사회의 통념이 단번에 무너지는 일이었다.
원을 그리지 않아도, 명령어를 입에 담지 않아도 마법이 구현된다는 건 그야말로 '권능'이란 말 외엔 설명할 길이 없는 사기인 셈이다.
'백은의 마왕도 얼음마법을 무영창으로 구사했지.'
특히 고서클의 강력한 마법일 경우 발동의 시간이 길어진다.
강을 얼리고, 영지 하나를 뒤덮는 얼음송곳의 비를 뿌렸다.
그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건, 모든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다준다는 것과도 같았다.
수백의 기사가 그녀에게 닿지도 못한 채 즉사했으며 수많은 마법사들이 그녀의 앞에서 영창만 외우다가 목이 잘려나갔다.
아마도 이것이 바알의 권능이리라.
하지만 그런 백은의 마왕도 결국 죽었다.
하늘 아래 적수가 없을 것 같은 마왕도 말피엘의 한끼 식사였을 따름이다.
삼일밤낮을 싸웠다는 건 미화된 이야기일 터.
특히 고서클의 강력한 마법일 경우 발동의 시간이 길어진다.
여태껏 쌓아올린 마법사회의 통념이 단번에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것을 무시할 수 있다는 건, 모든 마법사와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다준다는 것과도 같았다.
'백은의 마왕도 얼음마법을 무영창으로 구사했지.'
강을 얼리고, 영지 하나를 뒤덮는 얼음송곳의 비를 뿌렸다.
수백의 기사가 그녀에게 닿지도 못한 채 즉사했으며 수많은 마법사들이 그녀의 앞에서 영창만 외우다가 목이 잘려나갔다.
말피엘은 관심종자고, 자신의 '신화'를 만드는데 열심히였다.
그리고 백은의 마왕을 죽인 말피엘을 향해, 연구를 위한 시체의 포기와 양도를 바란다며 마탑들의 어마어마한 접촉이 있었다.
무영창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하늘과도 같은 은혜를 제가 어찌 갚아야 될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에디스가 말했다.
그의 눈시울은 아직도 붉었다.
핏줄이 터질만큼 울었기 때문이다.
미칠 듯이 기쁘고 가슴이 터질 듯이 뻐근해서.
카이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손녀.
그녀가 폭주를 일으키고 거진 10년 가까이 그가 안해본 건 없었다.
모든 종류의 마법을 탐독했다.
폭주한 채 죽은 시체를 불법적으로 구해오기도 했으며, 짐승을 상대로 실험을 해나간 적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스스로의 몸에 폭주를 가속화했다.
하지만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카이첼은 여전히 얼어붙은 채였다.
결국 그는 폐인이 됐다.
마탑 의회의 요구에 못이겨 황실로 가지 않았다면, 계속 폐인이었을 것이다.
처음 황자들의 시연이 있던 그날.
3황자 카르몬의 폭주가 멈춘 것을 보며 그는 몸을 잘게 떨었다.
그냥 폭주가 아니라 이중중첩과 마나번 현상에 의한 폭주였다.
죽거나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되는, 해독 불가능한 독이 몸에 퍼진 것과 같은 현상.
그런데 폭주가 멈췄다.
순식간에.
그 대상이 황태자로 지목됐을 땐, 솔직히 믿지 않았다.
―연극을 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황태자를 띄우기 위해 최강의 검사라는 작자가 연극을 하는 것이라고.
우연의 일치일뿐 황태자가 정말로 폭주를 멈췄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릎쓰고 확인을 위해 팔을 걷었다.
이는 얼음마탑 전체가 황실에 매도당할 수도 있는 큰 도박수.
허나 개의치 않았다. 그에겐 폭주의 해결 실마리가 먼저였으니까.
―정말······ 폭주가 완화됐다.
심지어 팔의 폭주 현상이 어느정도 완화되었음에도 쉽게 믿기지가 않았다.
10년을 넘도록 붙잡아온 일이다.
그걸 느닷없이 제3자가 해결해버렸다.
허나 그는 마법사다. 겸허하게 인정하며 황태자 라인하르트의 주변을 돌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게 먼저였으므로.
―인간말종, 쓰레기, 미치광이.
그를 수식하는 단어는 많았지만 그 성향은 대충 비슷했다.
안 좋은 쪽으로 극에 닿은 인물.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잔악한 놈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그를 북방에 있는 손녀의 옆에까지 데려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 소문이 잘못됐다는 걸 깨다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그대의 완치다.
설령 그것이 입에 발린 말일지라도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입과 행동이 다르다.
하여 약간의 흔들림은 있을지언정 믿지 않았다.
너무 오랜시간 그는 '믿음'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어져 있었으니까.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먼 북방까지 와서, 카이첼의 폭주를 단번에 말살해버렸다.
황태자라는 자리에 앉은 자가.
고작 일개 마법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전장의 중심부로 온다는 건, 다른 왕국이라 할지라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리고 꿈이라면, 절대로 깨지 않기를 바란다······.
"잘됐군. 그리고 바라는 것은 없다. 약속을 지켰을 뿐이니."
정령의 소환을 도와주면, 손녀의 폭주를 완화해주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정말로 지킬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권력을 쥔 자들은 하나같이 말뿐이다.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난 뒤에는 한결같이 입을 닦는다.
마법사들이 귀족들을 혐오하는 이유였다.
황실 역시 연구비를 주는 대신 그 이상의 것들을 요구해오곤 했으므로.
에디스의 눈시울이 다시금 붉어졌다.
손녀의 생환을 염치없이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마나여, 내 의지에 순응할지어다."
찬란한 빛의 무리가 그의 전신에서 뻗어나온다.
에디스의 모든 마나가 그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직 8서클에 다다른 자만이 사용 가능한 '스피릿'이다.
짧은 영창만으로도 고서클의 마법을 사용하게 만들어주는.
에디스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지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 에디스는 라인하르트님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제 '서클'에 걸고."
서클에 건 맹약.
마나에 걸어놓은 의지.
어기면, 폭주를 일으킨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마나의 맹약'을 절대로 맺지 않는다.
설령 맺더라도 '기피조항'을 만들어놓았다.
예컨대 '얼음마탑의 마탑주 에디스'라고 했다면, 그저 마탑주의 자리를 내려놓기만 하면 그만인 일이다.
충성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폭주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에디스는 아무런 수식어도 미사여구도 붙이지 않았다.
충성.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정으로 따르겠다는 말.
단순히 손녀의 생명을 구해줘서만은 아니었다.
이 사람이라면, 라인하르트라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마법사의 충성이라. 낯간지러운 기분이군."
마법사는 충성하지 않는다.
마법사는 계산적이며 이해타산적이다.
허나 이는 잘못 알려진 편견이다.
마법사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마음을 연 대상에겐,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낸다.
에디스가 그랬다.
"라인하르트님은 존귀하며 존엄한 분이십니다. 제가 충성하는 게 누가 될 정도로요."
"대마법사라 그런지 말도 환상적이로구나."
"아닙니다. 저는 그저······."
뚝.
순간, 에디스의 표정이 굳었다.
에디스만이 아니라 크로프트와 파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위를 쳐다봤다.
"'덫'에 누군가가 걸렸습니다."
"추적대군."
에디스가 걸어놓은 덫.
그 덫에 누군가가 걸렸다.
크로프트는 단번에 그들이 자신들을 잡기 위해 카를로스가 보낸 추적대라고 확신했다.
"덫이 제거됐습니다. 상당한 실력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에디스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8서클 대마법사가 쳐놓은 덫을 간파하고 제거했다.
만만찮은 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전하, 피하시겠습니까?"
크로프트가 물었다.
빠르다. 예상보다 빠른 추격이었다.
허나 지금이라면 충분히 피할 여유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온 걸 보면 내가 미친 듯이 보고싶었나보군."
"······ 예. 아마도, 테베우스이겠지요."
테베우스.
그 망나니 녀석이 화가 잔뜩 난 모양이었다.
즉시 달려가 카를로스에게 일러 추격할 병력을 받아낸 것이다.
크로프트와 함께 있는 것을 알 테니, 맞춤형으로 데려왔겠지.
상위의 소드마스터 한, 두 명과 함께 오고 있으리라.
하지만 테베우스는 에디스가 8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었다.
'예상대로다.'
예측했던 범위 안이었다.
테베우스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착실하게 카를로스에게 메신저 역할을 해주고, 적당한 병사와 함께 나를 급히 추격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며 지치게 만드는 방법도 있으나.
"맞이해주지."
크로프트, 에디스, 파간.
그리고 이들 모두를 속이고 있는 저 가증스런 바알이 있다.
마침, 나 역시도 테베우스를 이전에 그냥 보내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전이라면 쉽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어떨까?
'질 것 같지 않다.'
그 멍청한 놈을 상대로 패배한다는 것 자체가 그려지지 않았다.
***
'아무리 생각해도 복덩이가 따로없단 말이야.'
테베우스는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패트릭과 크로우.
최강의 소드마스터가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사들과 함께 무려 '크로프트'를 잡으러 가는 중이었다.
'내가 라인하르트와 크로프트를 잡는다. 이만한 공은 없다.'
검왕, 제국 최고의 실력자.
그를 잡을 절호의 기회다.
뿐만 아니라 라인하르트까지 설욕한다면 다른 형제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큰 공을 세우게 되는 셈이었다.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라인하르트는 복덩이였다.
그러니 살살 갖고 놀아주자. 울며불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이쪽으로 갔다."
"강력한 마나의 파장이 느껴진다. 근처다."
"꽤 강력한 마법사가 같이 있다."
"숫자는 일곱."
심지어 패트릭과 크로우는 추적의 대가들이었다.
순식간에 저들의 위치를 특정한채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테베우스는 발견할 수 있었다.
"라인하르트! 도망칠 시간도 없었나?"
너무 빨리 온 모양이다.
도망칠 틈도 없이 자신들을 맞이해주는 걸 보면 말이다.
라인하르트에게선 답이 없었다.
하기야, 패트릭과 크로우를 보면 겁을 먹은 만하다.
저 둘은 카를로스 대공도 아끼는 최강자들이니까.
"라인하르트는 내 것이다. 저놈은 내가 갖고 놀 거다. 알겠나?"
패트릭과 크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프트를 눈앞에 둔 그들도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파간과, 강력한 마법사의 존재까지 둘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테베우스는 기고만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인하르트! 겁 먹었냐? 아니면 말을 못 하는 벙어리가 됐나? 이전처럼 한 번 나불거려보란 말······!"
하지만, 테베우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언가가 이상하다.
시야가 낮아지고 있었다.
옆을 보자, 패트릭과 크로우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어느새 검을 뽑아 오러를 피워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마법을 둘은 본능적으로 막았지만, 테베우스를 구하진 못한 것이다.
'뭐야?'
이상한 일이었다.
마법을 영창하면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위의 마법사라도 '영창'없이 마법을 사용하진 못하는 까닭이다.
아니, 설령 숨어서 저격하는 것일지라도 소드마스터의 기감 안에 잡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만약 그랬다면 진즉에 패트릭과 크로우가 제거했을 터.
하지만,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왜?'
그런데 왜, 자신의 시야가 말의 아래까지 닿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점점 더 낮아진다.
툭!
그렇게 바닥에 머리가 닿고 나서야, 테베우스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인지했다.
ㅋ
< 능력 발현 > 끝
정적이 찾아들었다.
테베우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도 잠시간 모두가 시간이 정지된 듯 멈춰섰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
양측 전부 갑작스럽게 잘려나간 테베우스를 보며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본능적으로 공격을 막아낸 패트릭과 크로우의 얼굴에도 당황함이 서려 있었다.
'아쉽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기습적으로 테베우스, 패트릭, 크로우의 목을 동시에 따버리려고 했다.
가진 사이오닉 에너지 전부를 털어내 바람처럼 날카롭게 날려낸 것이다.
하지만 테베우스만 죽고 나머지 둘은 멀쩡했다.
'소드마스터쯤 되면 마나에 대한 감각이 미친 듯이 상승한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나.'
크로프트야 워낙 괴물 같은 강자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저 둘이 무영창의 칼날을 막아낸 건 의외였다.
극도로 발달한 기감.
감각이 좋은 이들은 느껴지지 않는 것도 피할 수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역시 소드마스터 둘을 동시에 보내버리려고 한 게 욕심인 듯싶었다.
'나노머신의 양을 늘리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감각적으로 막아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하물며 기습에 대비할 땐 100%의 힘을 활용할 수 없다.
순간적인 기지에 기대면 능률 또한 떨어지는 법.
나노머신의 양을 더욱 늘리면 기습시 충분히 소드마스터의 목숨도 앗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또한, 지금 내가 지배한 나노머신의 양은 마법사로 치면 4서클을 조금 웃도는 수준. 심장을 네 바퀴 순환하는 양이었다.
마탑에 등록할 수 있는 최저의 등급 말이다.
질이 아닌 양만을 늘리는 것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폭주한 나노머신을 지배하면 되니까.
툭툭.
나는 옷을 털고, 느긋하게 걸어, 마차로 들어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최선을 다했다. 나머진 알아서 해라.'
몸을 굴려 싸우는 건 내 체질이 아니다.
하물며 있는 나노머신을 전부 털어 쏟아낸 공격이었다.
비인가 나노머신의 에너지가 충전되려면 시간이 걸린다.
체력은 있지만 저 괴물들의 틈바구니에서 검 한자루 들고 설치는 건 정신나간 짓.
"······ 무영창?"
패트릭. 그가 크로우에게 물었다.
자신이 느낀 게 맞는지 확인코자 하는 것이다.
크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제 3자의 인기척은 없었다.
미리 파둔 함정이라면 그 또한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영창의 마법이라니.
대체 누가?
'스피릿 상태의 마법사가 한 명.'
8서클의 마법사만 사용할 수 있다는 마법, 스피릿. 일종의 각성상태다.
영창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주고 마나의 흐름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상태. 하여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8서클의 마법사는 근접전도 치러낼 수 있었다.
몇 개의 마법을 중첩시킬 수도 있고, 꼬아서 시간차로 나가게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그 정도의 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싸우면 거의 수싸움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런 8서클 마법사들도 기본적으로 '영창'은 했다.
그래서 검사들도 대비할 수 있는 것인데.
'내 감지영역 바깥에서 쏘아냈다?'
또 다른 수는 장거리 저격이다.
허나 이 역시 말이 안 된다.
심장에 지배한 마나는 지속시간이 짧다. 기껏해야 수백미터 바깥에서 쏘아내는 게 한계다. 그리고 그 거리라면, 자신이 잡아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영창.
그나마의 가능성이라면 스피릿을 사용할 줄 아는 대마법사.
허나, 왜 마차로 들어가 앉은 저 황태자가 눈에 밟히는가.
이 적막과 무거움 속에서 라인하르트 황태자만은 홀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저 여유가, 저 자신만만함이 이상하게 걸린다.
"일단 후퇴······."
"제국의 악마들이여!"
패트릭이 혀를 찼다.
오러를 피워내, 날아오는 할버드를 쳐냈다.
쿵!
바닥에 처박힌 거대한 할버드.
오러로도 잘리지 않는 특수한 재질이다.
'젠장, 파간이······.'
그러고 보니 파간도 있었다.
빌어먹을 테베우스.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되는 놈이었다.
카를로스 대공의 아들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였을 멍청한 녀석.
크로프트만이 아니라 파간에 8서클 대마법사가 함께하고 있는 미친 파티다.
저런 파티를 고작 이 인원으로 잡으러 온 게 말이 안 된다.
마음 같아선 후퇴하고 싶지만 파간은 자신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보였다.
"크로우, 너는 파간을 맡아라."
"그러지."
뛰어들어, 순식간에 기사들을 양 손으로 찢어버리고 있는 괴물.
파간이란 놈들은 상식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강력하며, 그 힘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지만, 패트릭과 크로우는 벌써 수십의 파간을 죽인 경험이 있었다.
크로우가 파간을 향해 도약했다.
눈깜빡할 사이에 파간의 등에 칼을 꼽아넣은 것이다.
"다 도륙내버리겠다! 제국의 악마들!"
하지만, 파간 답게 고통 따윈 없는 듯 보였다.
강철같이 두꺼운 저 피부는 오러로도 제대로 잘라낼 수가 없었다.
허나 크로우는 능숙하게 파간의 공격을 피해내며 타격을 축적해나갔다.
미친 듯이 날뛰는 둘을 내버려둔 채, 패트릭이 숨을 골라내며 크로프트를 바라봤다.
'물러날 수는 없겠구나.'
테베우스가 죽었다.
눈앞에서 크로프트와 라인하르트마저 놓친다면 카를로스 대공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크로프트 역시 자신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크로프트 경. 예의를 표하겠소, 지상 최강의 검사였던 자여."
1:1의 상황으로 몰고자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대마법사가 끼어든다면 이 싸움, 쉽지 않을 터.
무영창의 마법도 신경쓰인다.
허나 1:1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최강이었다고는 하나 그것도 옛말이다.
전성기를 훌쩍 넘긴 검사의 말로는 뻔했다.
'크로프트가 실전을 겪은 건 족히 20년 전의 일이다. 이후 궁에만 있었던 크로프트의 실력이야 불 보듯 뻔하지.'
제대로 된 강자와 실전을 벌인 게 지금으로부터 족히 20년 전이었다.
이후 궁에 눌러앉은 그는 기사들이나 가르치며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긴장감과 육체의 건강함마저 잃은 검사.
한때 최강이었으나 그 자리는 이제 후대에 반납할 때가 되었다.
하물며 패트릭은 매일같이 생사를 오가는 전장을 몇 번이나 겪었다.
카를로스 대공가에 전해지는 서클 단련법과 검술로 말미암아, 최강의 검사 중 한 명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 최강이었던, 검사라."
크로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은 평화로웠지만, 그와 반대로 쟁쟁한 검사들은 꾸준히 배출되고 있었다.
패트릭도 그중 하나다.
과거 자신과 비견된다 회자되는 검사들 중 한 명.
충분히 저 말을 할 자격이 있다.
크로프트는 죽어있던 세포가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투쟁심이었다.
'라인하르트 전하께서 선택을 하셨다.'
또한, 무영창의 마법이 누구로부터 흘러나온 것인지 크로프트는 알고 있었다.
라인하르트 황태자가 테베우스를 죽인 것이다.
그것도 일말의 여지 없이 단번에 죽여버림으로써 선택을 내렸다.
카를로스 대공과의 전면전을 피하지 않을 것임을.
이후 마차에 올라, 여유로이 전장을 관망하며 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를 것이냐, 따르지 않을 것이냐······ 그 선택을 지금 하란 말씀이십니까.'
카를로스 대공과의 전쟁은 황제는 바라지 않는 것이다.
황제 데우스는 카를로스 대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데우스를 지탱하고자 크로프트는 궁에 남아, 자신을 지우며 그림자로 남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제국은 카를로스 대공의 손에 넘어간다.
지금 라인하르트는 크로프트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침몰할 것인가, 장렬하게 싸울 것인가.
황제인가, 자신인가.
아무리 라인하르트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
"··· 살려 보낼 수는 없을 것 같구나."
"한 수 배우겠소, 크로프트 경."
패트릭이 미소지었다.
최강이었던 자를 죽이고 진정한 최강이 된다.
이 사실은 대륙 전체에 널리 퍼지리라.
신흥강자의 출현에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다. 새로운 영웅이 나타났음에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몸이 달아올랐다.
패트릭의 검에서 오러가 솟아올랐다.
동시에.
쫘르륵!
크로프트의 전신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근육이 재생되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오러.
아지렁이처럼 피어오른 흰색의 오러는 마치 태양처럼 빛나며 크로프트를 감쌌다.
'······ 뭐야, 저게.'
패트릭의 양 손이 잘게 떨렸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거대한 맹수를 마주한 연약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일 생존의 본능.
이건 말도 안 된다.
크로프트는 20년 전 최강이라 불렸으나 이제 나이를 먹을 대로 먹은 노인이었다.
마나란 것도 신체에 장시간 쌓여있으면 부식되어 사라지기 마련.
그런데 저 양은, 저 말도 안 되는 오러의 양은 대체 뭐란 말인가.
'마치 태양 같다······.'
저토록 눈부신 오러는 패트릭 역시 본 적이 없었다.
떠오르는 단어난 하나뿐이었다.
'괴물.'
누가 그를 한물 간 검사라고 칭했는가.
크로프트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전성기였다.
아니, 오히려 전성기라고 불릴 때보다 더 강해보였다.
저 근육은 도저히 노인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러의 양도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괴물이란 말 외엔 달리 설명할 게 없는 괴물.
꿀꺽!
패트릭이 침을 삼켰다.
***
폭력이었다.
강자의 일방적인 괴롭힘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크로프트의 진짜 실력은, 나 역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가 궁에 남아있었다면 말피엘이 그토록 쉽게 궁을 침범해오진 못했겠지.'
그가 있었다면 말피엘의 손목 하나쯤은 잘라내지 않았을까.
허나 크로프트는 자신의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황제 데우스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황제에 즉위한 직후 조용히 궁을 떠났을 뿐이다.
이후 어디로 갔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 전혀 들려오는 게 없었다.
하지만 황제 데우스가 죽기 전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크로프트를 그림자로 놔둔 것이 짐의 제일 큰 실책 중 하나다.
데우스는 크로프트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그림자로 존재하게 놔뒀다.
아무런 선택도 못하도록.
이후 데우스가 죽자, 크로프트 역시 자신이 할 일을 하지 못했음에 후회하며 궁을 떠났다.
무엇 하나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그런데 크로프트는 지금 선택을 했다.
그림자라면 할 수 없는 선택을.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은,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들었던 것보다 훨씬 충격이었다.
대륙을 정벌하며 치른 오랜 전쟁.
수많은 강자들을 직접 보았지만 이처럼 강렬한 느낌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한 수, 한 수가 마치 대해와도 같았다.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자연재해.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초월자의 경지!
정말 저게 같은 소드마스터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으니.
'제로. 다 녹화해 놔라.'
<네, 마스터. 녹화를 시작합니다.>
< 최강이었던 자 > 끝
강자의 대련을 볼 수만 있다면 그게 누구든 돈을 지불할 것이다.
강자의 생사결을 볼 수만 있다면 백만금을 들여서라도 두 눈에 담고 싶어 하는 이들로 넘쳐날 것이었다.
그리고 만약 보고 싶을 때 그러한 강자들의 싸움을 '반복재생' 하는 물건이 있다면 성을 통째로 갖다 바칠 귀족조차 넘쳐날 터였다.
그런데 단순 재생을 넘어, 그 동작을 재현하고 감각마저 체험할 수 있다?
'보물 중의 보물이지.'
단언하건대 황궁비고에 있는 보물 전부를 가져와도 이 기능 하나에 미치지 못하리라.
아니, 세상 그 어떤 보물도 범접 불가다.
구오오오-.
크로프트의 오러는 이글거리는 태양과도 같이 전신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뇌의 동시 활성 영역이 18% 활성화 된 상태입니다.]
뇌를 활성화하여 시간이 느려지지 않았다면 두 눈에 담지조차 못할 정도로 빨랐다.
최대 25%까지 활성화 할 수 있으나, 최대치로 영역을 넓힐 경우 뇌가 타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과 함께 고작 몇 초 버티는 게 전부였다.
오랫동안 눈에 담으려면 18% 정도가 적당했다.
[뇌의 동시 활성 영역이 18% 활성화 된 상태입니다.]
오러와 오러가 부딪힐 때마다 공간 자체가 휘어버렸다.
뇌를 활성화하여 시간이 느려지지 않았다면 두 눈에 담지조차 못할 정도로 빨랐다.
최강이라 불리었던 검사와 현역 소드마스터의 대결.
최대 25%까지 활성화 할 수 있으나, 최대치로 영역을 넓힐 경우 뇌가 타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과 함께 고작 몇 초 버티는 게 전부였다.
전쟁통에서도 쉬이 보기 힘든 광경이다.
오랫동안 눈에 담으려면 18% 정도가 적당했다.
보는 것만이 아니다.
꽈득!
제로로 말미암아 나는 저 모든 영상을 녹화화고 있었다.
촤아아아!
크로프트만이 아닌 상대 소드마스터의 움직임까지도 세밀하게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대단하군.'
20합.
크로프트의 검에 패트릭의 목이 날아가기까지 걸린 합의 횟수다.
패트릭은 카를로스 대공 휘하의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나름 실력좋은 검사였다. 그런 그가 크로프트에게 고작 20합에 나가떨어졌다.
'다 같은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인류가 측정하는 '강함'의 기준.
마법사와 달리, 검사의 경우 단순히 오러를 피워내는 것 이상의 측량 방법이 인류에겐 부족했다.
특히 크로프트 같은 '규격외'의 인간을 측량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 리 만무했으니.
"사, 살려줘!"
"끄아악!"
꽈앙!
쿠아아앙!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크기가 산만한 얼음골렘이 병사와 기사들을 뭉개버리고 있었다.
에디스. 그는 얼음을 이용해 골렘을 연성할 수 있는 전투마법사였다.
얼음골렘의 중심부에서 마나를 조종하며 압도했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되고 있었다.
가장 우려됐던 파간 역시도 크로우의 목을 물어뜯어 승리를 쟁취했다.
'훌륭하다.'
그 모두를 감상한 나는 총평을 내렸다.
감히 100점짜리 전투라 평할 수 있으리라.
"태평하시군요."
"누가 그러더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구경이라고."
카이첼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테베우스의 목을 잘라내고, 두 소드마스터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것만으로도 나는 내 할 일을 다했다.
실제로 크로우의 경우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무영창 마법을 경계하느라, 파간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게 다소 소홀해진 것이다.
"언제까지 카이첼의 연기를 할 셈이냐?"
나는 되물었다.
그러자 카이첼, 아니, 바알이 전장의 에디스를 바라보며 답했다.
"계약을 했어요. 이 아이의 할아버지가 죽을 때까지는 카이첼로 살기로."
"그럼 그 뒤는 어쩔 셈이지?"
"글쎄요. 인간세상을 탐방해볼까요? 아니면 그쪽이랑 결혼? 아, 이건 카이첼도 좋아할 것 같네요. 왜인지 호감이 가는 걸 보니, 카이첼의 취향일 수도?"
인간세상의 탐방이 아니라 인류를 멸절시키고자 그녀는 백은의 마왕이 된다.
허나 이는 훗날의 이야기.
지금으로선 딱히 인류를 증오한다거나 하는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위업에 대해 이야기해봐라."
칫. 소리와 함께 그녀가 설명했다.
"······ 신들은 '비정상적인 존재'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어요. 예컨대 그대와 저 같은? 그래서 '위업'이란 이름으로 제거하려 하죠."
말피엘이 달성한 일곱 번째 위업.
그것은 바로 백은의 마왕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위업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말인 즉, 언제 어디서 말피엘이 찾아와 내 목을 따갈지 모른다.
놈과의 재회가 예상보다 빠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생각도 못한 제 3의 위업달성자가 나타나거나.
"너무 걱정은 말아요. 눈에 띄는 짓만 안 하면 모를 테니까."
"눈에 띄는 짓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지?"
"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행위."
신에게 도전한다.
그렇다면 백은의 마왕은 인류를 학살한 게 원인이 아니라, 신에게 도전하려 했다가 '위업'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신과 싸운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신의 영역에 침범하려는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 터.
'죽은 사람이라도 되살리려고 한 건가?'
바알은 생각보다 침착하다.
위험한 일에 굳이 뛰어들지 않는 스타일이다.
도리어 나를 포섭하려하는 유연함까지 보였다.
자신의 권능을 나눠주기까지 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위업의 대상이 되는 건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웠다.
이윽고 귀가 먹던 현상이 사라졌다.
바알이 대화소리를 숨기고자 풀어놓은 마나를 제거한 것이다.
"전하, 정리가 끝났습니다."
마지막 잔당의 처리까지 끝낸 에디스와 크로프트가 다가왔다.
그러자 바알은 곧장 연기모드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너야말로 괜찮더냐? 어디 안 다쳤고?"
"네. 할아버지가 지켜주셔서 저는 멀쩡해요."
눈물을 글썽이며 극진히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손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딱히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놔둬도 될 듯싶었다.
억지로 A.I를 제거하려 들었다가 식물인간이 되면 겨우 얻은 8서클의 대마법사도 잃게 되는 것이었으므로.
'내게 위협을 가하려고 하면, 그 즉시 제거해라.'
[네, 마스터. 'A.I 제거툴'을 포함한 극소량의 '더미 데이터'를 덮어쓴 나노머신을 투여해놓았습니다.]
바알은 알고 있을까?
내게 나눠준 사이오닉 에너지 덕분에 더미 데이터를 만드는 게 수월했음을.
덕분에 의심없이 나노머신도 심어놓을 수 있었음을.
혹시 모를 보험이었다.
나중에 어찌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에디스의 마법을 이용해 시체들은 전부 땅 밑에 매장시켜버린 뒤, 우리는 마차를 타고 '프렐류드의 숲'으로 향했다.
북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얼음숲.
이곳은 진즉에 '항복'하여 카를로스의 검을 피한 곳이었다.
빠른 북방의 정벌과 성지의 탈환을 위해, 카를로스는 공식적으로 '항복'한 곳에 한하여 침략을 하지 않았다.
또한, 전쟁 중이 아닐 때도 프렐류드의 숲은 이방인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락하고 있었다.
폐쇄적인 북방의 대부분 민족들과는 확연히 다른 진로를 택해, 그 대신 부유함을 얻은 숲.
대륙의 상인들을 상대로도 장사를 해왔으니 마차 한 대가 출입한다 하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성지로 향할 길이 이곳에 있다.'
마차를 이곳으로 이끈 건 성지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 제국의 병사들이 꽤 있군요."
에디스가 말했다.
숲과 공존하는 마을에 이질적인 존재들이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
카를로스 대공의 명에 의해, 이곳을 감시하는 인원인 듯싶었다.
아무리 항복을 선언했다고 하더라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게 좋았으므로.
그러나 그들도 마차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약에 취했군."
병사들 전부가 마약에 취해있었다.
강력한 환각제와 각성제로 말미암아 온갖 기행을 선보이는 중이었다.
바닥에 쓰러져있는 건 기본이고, 허공에 소리치며 히죽거리는 병사도 있었다.
물론 전쟁의 승리를 위해 병사들에게 마약을 투여하는 건 전쟁사에서 드물지않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 데우스는 이러한 행위를 강력하게 금지해놓았다.
마약의 중독성과 의존성은 신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면 대부분이 폐인이 되는 탓이다.
하물며 카를로스 대공이 병사들에게 투여한 마약은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악마의 죽음'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조세핀 황비가 몰래 섞은 '악마의 속삭임'은 애들 장난과도 같을 수준의 물건.
"사, 살려주세요!"
"푸하하! 들었어? 살려달라는데?"
"어이, 미개한 야만인놈들! 나와서 한 번 구해보라고!"
마을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문을 걸어잠근 채 창의 틈사이로 불쌍히 여인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브리저튼 후작님! 이년은 처음보는 년 아닙니까?"
"하여간 속이 시꺼먼 야만인놈들, 숨겨놓는 건 지랄맞게 잘해요."
"대대적으로 한 번 더 엎어야겠는데요?"
히죽대며 광장에 모여있는 병사들.
"처녀는 다 바치라고 했을 텐데, 아직도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모양이군."
그 가운데에서 한 남자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반쯤 발가벗겨진 여자의 머리칼을 움켜쥐자 그 옆의 여자가 눈물을 흘렸다.
"브, 브리저튼님, 제발 제 딸아이만은 살려주세요!"
"이 더럽고 천박한 년이 어딜 붙잡아?"
발로 차내며, 마구 짓밟았다.
그럼에도 분이 안 풀리는지 검을 빼든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잘 봐두어라, 북방의 오랑캐들이여! 내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말이다!"
한, 두 번이 아닌 듯 익숙하게 목을 그어버릴 준비를 하려던 그때.
제르민이 마차를 세웠다.
"······ 뭐야, 네놈들은?"
남자, 브리저튼이 인상을 구겼다.
상인들의 마차는 몇 번 보았지만 분명히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 양식도 제국식이다.
"이 새끼들이. 처음보는 마차가 활보하고 있는데도 내가 있는 곳까지 그냥 보냈단 말이야?"
아무리 약에 취했대도 처음 보는 마차가 마을의 중심부까지 왔다.
그동안 아무도 제지를 하지 않았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더욱이 어이가 없는 건, 이 상황에서 당당하게 멈춰선 저놈들이다.
보아하니 북방의 현황에 어두운 제국 상인무리인 것 같은데.
"당장 끄집어내서 내 앞에 꿇리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병사들이 마차로 다가왔다.
그들은 마차 안의 카이첼을 발견하곤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휘유!"
"브리저튼 후작님, 특상품입니다."
"노인들은 죽일까요?"
제국 양식의 마차마저 약탈하려드는 미친놈들.
브리저튼이 다가와 마차의 내부를 살피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흐흐, 복이 제 스스로 걸어왔구나. 오늘밤 나를 만족시킨다면 내 특별히 살려는······."
"크로프트, 베어라."
서걱!
단말마조차 없었다.
크로프트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브리저튼의 목을 베었다.
얇은 선혈과 함께 브리저튼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자, 병사들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이윽고 크로프트가 마차 밖으로 나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꿇어라. 라인하르트 황태자 전하께서 행차하셨으니."
파르셸 행정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곳 영지를 맡은 브리저튼 후작이 단칼에 죽은 것도 큰일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눈앞에 있는 라인하르트 황태자였다.
'라인하르트 황태자랑 크로프트 경이 왜 북방에 있는 거야?'
북방. 하물며 이곳 프렐류드의 숲은 전장과도 한참 떨어진 곳이다.
다른 귀족이나, 카를로스 대공가로부터도 황실의 인물들이 행차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도 까딱 잘못하면 목이 잘릴 판국.
"라인하르트 전하. 이 먼 북방까지는 무슨 일로 걸음하셨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한가?"
"그, 그그, 그건 아닙니다. 제국의 안녕을 위해 시찰차 오셨겠지요!"
젠장. 말실수를 했다. 죽을 것 같다. 어쩌면 이미 목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파르셸 행정관이 목을 더듬었다.
다행이 아직 목이 붙어있었다.
"성지로 향하는 중간 보급로가 이곳이라고 들었다. 맞나?"
"예, 맞습니다."
"물자 보급을 핑계로, '악마의 죽음'을 유통하는 곳도 이곳이고."
"그, 그, 그건······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파르셸 행정관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악마의 죽음은 제국에서도 엄격하게 금지하는 마약류다.
유통시키거나, 흡입하는 자는 지위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한다.
카를로스 대공이 그딴걸 신경쓰진 않겠지만 하위 귀족들은 아니었다.
"오해. 오해라."
피식 웃으며 손짓하자, 문을 열고 에디스가 들어왔다.
오크통 하나를 파간이 어깨에 들쳐메고 있었는데 그 안은 전부 '악마의 죽음'이라 불리는 흰색 가루가 가득했다.
"헉······!"
"파르셸 행정관. 제국의 법은 지엄하다. 악마의 죽음을 유통하는 자의 처분에 대해선, 제국민인 그대가 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사사, 살려주십시오!"
파르셸 행정관이 무릎을 꿇었다.
현장에서 걸렸으니 설령 아니라고 잡아떼도 사형이다.
카를로스 대공은 방관할 것이다. 전부 브리저튼 후작이 몰래 한 짓이라며 이 영지의 병사들 쯤은 가볍게 수장시켜버릴 인간이었다.
그것을 파르셸 행정관 역시 알고 있었다.
'전부 알고 왔구나!'
그래서 브리저튼 후작을 즉결처형한 것이다.
파르셸 행정관은 입이 말랐다.
"살고 싶나?"
"살려······ 주시는 겁니까?"
"아니."
"아아······."
파르셸 행정관이 눈물을 흘렸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 말을 듣고, 그의 태도가 급변했다.
"앞으로 이틀간 이곳에서 머물 것이다. 그때까지 내 명령을 잘 수행한다면, 살려주도록 하마."
"무슨 명령이든 따르겠습니다, 전하!"
쿵! 쿵!
파르셸 행정관이 바닥에 이마를 계속해서 찧었다.
늦은 저녁.
행정관에게 안내되어 본래 브리저튼 후작이 머물던 주택에 머무르게 되었다.
'푹신한 침대.'
방에 들어와 침대를 바라봤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마치 몇 년 만에 보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 이러할까 싶었다.
의복을 정리한 뒤 푹신한 침대에 눕자 수마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잠들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제로. 딥 드림을 실행하도록.'
[관리자 권한이 5등급으로 격상하며 '증강현실, 딥 드림(Deep Dream)'이 개방되었습니다.]
[마스터의 꿈속에서 증강현실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딥 드림을 실행합니다.]
[녹화한 영상을 바탕으로 '재현'을 시작합니다.]
이윽고 눈앞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텅 빈 공간.
"······."
내 앞에, 크로프트가 검을 쥔 채 서있었다.
< 증강현실 > 끝
[녹화한 동영상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구성합니다.]
[수집한 데이터를 기초하여 재구성합니다.]
[대상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정신 보호 프로그램이 가동 중입니다.]
그간 크로프트에 대해 쌓아온 전투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아바타.
무표정하기 이를데 없는 크로프트의 아바타가 바로 내 수련상대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련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기능이 바로 '딥 드림'이었다.
관리자 권한의 격상으로 새로 개방된 능력!
'똑같군.'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핏줄 하나, 주름 하나까지 전부 완벽하게 구현해낸 것이다.
이곳이 꿈속이라는 생각조차도 전혀 들지 않았다.
'허.'
제로의 기능에 새삼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하지만 마냥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크로프트의 전신에서 오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패트릭을 압살할 때 보여줬던 바로 그것이다.
제로의 기능에 새삼 감탄이 나올 따름이었다.
패트릭을 압살할 때 보여줬던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마냥 넋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내 손에도 어느덧 검 한자루가 쥐어져있었다.
크로프트의 전신에서 오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위압감이로군.'
패트릭이 느꼈을 감정이 이러했을까 싶었다.
정신 보호 프로그램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오금이 저리는 것 외에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나는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몸의 움직임 역시 자연스러웠다.
현실의 몸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의 수련성과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내가 준비를 끝마치자 제로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
어느덧 눈앞에 크로프트가 있었다.
크로프트의 존재감을 느끼자마자, 검에 두동강이 났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잘린 목을 두 손으로 매만졌다.
다행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크로프트의 아바타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 상태로 초기화된 것이리라.
목이 잘린 느낌이 생생하지만 금새 가라앉았다.
이 역시 정신 보호 프로그램에 의한 현상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현실에서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았다.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이맛살을 구겼다.
처음부터 이길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한 건 자존심이 상했다.
"이번엔 패트릭으로 하지."
그래. 크로프트는 너무 욕심이었다.
눈높이를 조금 낮춰서 현실적으로 수련을 할 필요가 있었다.
[대상 '패트릭'의 아바타가 생성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자. 이번에야말로 일격을 막아······.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 역시, 소드마스터는 소드마스터다.
오히려 올라야 할 산이 높음에 감사한다.
그만큼 오르는 순간 성취감도 커질 테니까.
"테베우스로 하겠다."
[대상 '테베우스'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생각해보니 테베우스가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결국 회심의 일격으로 목이 잘렸으니.
쌓을 데이터조차 없는 게 당연했다.
제로가 말했다.
[세부설정을 이용해 가상의 아바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간의 전투측정 데이터를 활용하여 세분화한 지표에 따라, 설정을 해주십시오.]
곧이어 눈앞에 몇 개의 창이 떠올랐다.
―평범한 성인남성의 수준입니다.
―정예병사의 수준입니다.
―일반기사의 수준입니다.
―정예기사의 수준입니다.
[현재까지 측정된 전투기반 지표로는 전투력 레벨 40의 아바타까지 생성 가능합니다.]
[레벨을 정하고 인원수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상황과 배경 등의 세부설정 또한 가능합니다.]
녹화된 내용이 없어도, 전투 데이터가 쌓이면 더높은 레벨의 아바타를 생성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레벨, 인원수, 상황과 배경 따위를 설정해 모든 경우에서 싸움이 가능토록 만들어주는 만능의 머신.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문득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크로프트는 몇 레벨인 거지?"
[현재까지 쌓인 전투데이터를 기반으로 결과를 도출하면 전투력 레벨 110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오차범위 10% 내외이며, 그날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110이라.
여전히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감이 잡히지 않았다.
"패트릭은?"
[녹화된 내용으로만 결과를 도출했을 때 90이라는 수치에 도달했습니다.]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꽤 강한 축에 끼는 게 패트릭이다.
크로프트와 20합을 나눌 정도의 실력자였다.
그가 레벨 90. 그렇다면 일반적인 소드마스터는 70이나 80정도라는 건데.
"그럼 나는 몇이냐?"
[마스터의 전투력 레벨은 측정불가입니다.]
측정불가?
측정이 안 된다는 의미다.
"왜 측정이 불가한 거지?"
[변수 작용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더 많은 전투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아쉬움에 혀를 찼다.
하긴, 제로의 말도 이해는 되었다. 제로 자체가 워낙 변수인데다 최근 얻은 사이오닉 에너지도 정확한 무력수치로 표현하기는 애매한 것이다.
물론 이 레벨에 대해 맹신할 필요는 없다.
여러 요소가 들어가면 변수는 생기기 마련이다.
제로도 그날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 만큼 '절대적'인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참고사항.
그리고 그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하여, 대비하고 수련이 가능토록 만들어주는 게 바로 이 공간이었다.
"레벨 1, 한 명으로 시작하겠다."
그러니 처음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자.
한계를 확인하고, 뚫어내며, 정상에 오르는 게 나의 목표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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