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화. Prologue
최근에는 신동이라 불리는 애들이 많아졌다.
5살에 미적분을 했다느니 12살 꼬맹이가 바르셀로나 유스에서 코리안 메시로 불린다느니.
하지만 이 중에 진짜 천재는 한두 명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그저 조숙한 어린애들일 뿐.
나도 그중 하나였다.
어릴 때 바둑을 잘 두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른들이 만든 꽃가마에 올라타게 되었었다.
'그거 아니? 바둑을 잘하는 애들이 진짜 천재인 거야!'
'네가 과거에 태어났으면 분명 유명한 장군이 됐을 거다!'
'고 녀석 정말 똘똘하네. 장래 희망은 당연히 대통령이지?'
나는 어른들의 강압과도 같은 기대에 짓눌렸다.
손자병법이나 군주론 같은 쓸데없는 인문 서적을 여섯 살 때부터 읽어야 했고,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말만 해야 했다.
당연하지만 그딴 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나는 곧 가짜 천재의 한계를 드러냈다.
중학생이 되자 메인으로 하고 있던 바둑에서 서서히 다른 애들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고 프로의 꿈은 멀어져 갔다.
도망치듯 선택한 체스에는 정말로 재능이 있었는지 국내 톱 10 안에 들어가긴 했지만 국내에서 체스를 알아주기나 하나.
나는 고3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수험 공부를 해야 했다.
공부 머리는 있었는지 8개월 정도를 공부해서 서울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어른들이 태워 줬던 꽃가마는 가시방석이 되어 있었다.
'쯧쯧, 의대는 갈 줄 알았더니.'
'내 그럴 줄 알았어. 요즘 애들이 다 그렇다니까.'
'개나 소나 천재래. 이거 봐. 결국엔 우리 경민이가 더 좋은 대학 갔잖아요?'
멋대로 기대를 걸고 멋대로 실망하는 어른들.
뭐, 나도 신동이란 후광을 등에 업고 편의를 받았으니 불만은 없었지만 역겨운 건 어쩔 수 없었다.
***
그렇게 결국 신동이라 불렸던 어린애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있었다.
남들 다 아는 대기업에 취직해 동기들 사이에선 부러움을 샀지만 내 인생은 껍데기도, 알맹이도 척박해져 있었다.
내 교육 과정에 대해 다툼을 벌였던 부모님은 이혼했고, 나는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어 혼자 살고 있었다.
보람도, 쌓아 둔 것도 없는 인생.
그런 내 유일한 안식처가 게임이었다.
지금 꽂혀 있는 게임은 '아테나 워 테일즈'라는 모바일 전략 RPG 게임이었는데, 이 게임이 참 독특했다.
스토리 자체는 왕도적인 남성향 게임이었지만 게임 내의 전투 시스템이 심오하고 완성도가 높았다.
플레이어가 얼마나 지능적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로 바뀌는 실력 게임이었던 것.
돈으로 찍어 누르며 자동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대세가 된 요즘 모바일 게임 추세에는 어울리지 않아 인기가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매니아층은 제법 두터웠다.
나는 그 매니아층의 한 명으로 유저들 사이에서 신이라 불리고 있었다.
무과금의 신 웨이드.
내가 커뮤니티에 무과금 공략글을 올리면 댓글이 수십 개가 달렸고, 덱 상담, 전술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나는 유저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두 이 게임 연구에 쏟아부었다.
심지어는 불쏘시개라고 생각했던 병법서, 전술서들까지 스스로 읽어 가며 방법을 찾았다.
결국엔 누군가의 기대를 받아 무언가를 한다는 건 어릴 때와 똑같았지만 그때와 달리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빛의뽕빨 : 웨이드 행님. 카르락스 전투 공략 언제 올려 주십니까? 무과금은 울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ㅠ
─짱구는터진귤 : 근데 카르락스 전투 이거 핵과금 애들도 빡세 하던데 무과금이 클리어할 수 있게 설계되긴 한 거냐? 진짜 웨이드 형만 믿는다.
─웨이드 : 쫌만 기다리셈. 공략하고 있는 중임.
─마카오박 : 오오! 역시 무과금의 신!
─빛의뽕빨 : 웨이드! 웨이드! 웨이드!
어른들의 이기적인 기대와는 다른 순수한 열광.
뭐,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기에 즐거운 거겠지만.
─마카오박 : 근데 웨이드 님. 알스레기는 슬슬 놔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알스레기 빼고 UR 하나만이라도 더 투입하면 훨씬 편할 것 같은데.
─빛의뽕빨 : 인정. 요즘 무과금도 UR 한두 장씩은 갖고 다님. 너무 SSR이나 SR 카드 위주로 깨는 것도 좀 그럼.
─짱구는터진귤 : 그래서 웨이드 형이 SSR 포함된 덱이랑 리얼 똥덱이랑 둘 다 공략글 올리는 거잖아.
─마카오박 : 근데 똥덱부터 공략을 올리시니까ㅋㅋ 솔직히 R카드 덱은 공략 봐도 따라 하기 힘들지. 근데 뭐가 됐든 알스레기만 빼면 좀 더 나을 거 같은데.
─빛의뽕빨 : 그건 인정.
알스레기라고 함은 게임 초반부에 주어지는 알스 일라인이라는 책사 캐릭터를 말함이었다.
무릇 공짜 스타팅 카드가 그렇듯 등급과 성능은 처참. 하여 알스레기라 불린다.
그런 주제에 스토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서 대부분의 전투에 출전한다.
과묵한 주인공을 대신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라고 할까.
스토리 내의 비중은 높지만 실제 유저들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엑스트라나 다름없는 캐릭터. 그게 알스였다.
나는 그런 알스를 매번 기용했다.
나는 성능보단 게임 스토리와 실제 플레이의 합리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B왕국과 전쟁을 하는데 가챠에서 뽑은 B왕국의 국왕이나 장군 캐릭터를 쓰기는 꺼려지는 것이다. 그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런 맥락에서 항상 아군으로 출전하는 알스를 어느 때가 됐건 기용한 것이다.
"좋아, 클리어했다. 후우!"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공략이 성공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 13시간. 분명 이번 스테이지는 유저들이 우는소리를 할 만큼 어려웠다.
그 스토리 내부에 있는 히든 퀘스트를 찾아내지 못하면 무과금 유저가 클리어하기 어려울 정도다.
"설마 여기서 알스의 히든 강화 퀘스트가 나올 줄이야."
이 퀘스트를 통해 알스는 기존 SR 캐릭터에서 SSR로 승급한다. 초기에 R카드였음을 생각하면 스토리에 따라 성장을 한 셈이다.
이걸로 알스의 티어도 상승하겠지.
내가 체감하기에 1티어는 불가능하더라도 최소 2티어까지는 상승할 수 있는 능력 강화였다.
"어우야. 벌써 3시네. 공략은 자고 일어나서 올려야겠는데."
나는 침대에 다이빙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웨이드 : 클리어 완료. 내일 정리해서 공략 올림.
─짱구는터진귤 : 5252! 믿고 있었다구!
─웨이드 : 그리고 히든 강화 퀘스트도 하나 발견했음. 아마 내가 최초로 발견한 거 같은데. 오후에 공략글 올릴게.
─오박사 : 헐 미친. 누구 강화퀘임? 클리어한 과금러들은 그런 말 없었는데.
─웨이드 : 그럴 수밖에 없었음ㅋ
과금러 중에 알스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유저가 있을 리가 없으니 당연하다.
심지어 카르락스 전투는 사흘 전에 막 업데이트된 내용이었고.
"내일부터 알스의 채용률이 엄청 올라가겠는데."
어느새 알스는 내 최애캐가 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강화 퀘스트로 알스의 티어가 올라가게 될 내일이 기대되었으나.
내가 다음 날 공략을 올리는 일은 없었다.
자고 일어난 내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2화
아테나 워 테일즈.
이 게임의 특징을 말하자면, 모바일 게임답지 않은 방대한 스토리에 있다.
이로 인해 게임의 진입장벽이 높아 초기에는 흥행의 흐름을 타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훌륭한 게임성. 몰입감 있는 스토리 라인으로 매니아층의 유저들을 끌어모았다.
게임사도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스토리 분량을 전략적으로 분배했다.
그 악랄한 놈들. 컨텐츠 소비를 늦추려고 스토리를 분할하여 내다니.
나름 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던 나는 총대를 메고 돈 되는 가챠 이벤트만 내밀고 있는 운영진을 비판하는 글을 게시했던 적이 있지만 당연하게도 개무시를 당했다.
'설마 게임사가 그거에 앙심을 품고?'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이질적인…아니, 어느 의미로는 내게 익숙한 세계.
아테나 워 테일즈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으니까.
'스토리 업데이트를 해 달라 그랬지 내 인생까지 이렇게 스펙타클하게 업데이트해 달라곤 안 했는데….'
현대와는 확연히 차별되는 중세풍의 광경에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얼굴은 분명….'
주인공을 보좌하며 삽질을 하는 캐릭터 알스 일라인이 분명했다.
'난리 났군. 그렇다는 건 즉….'
내가 그 사건을 겪게 된다는 뜻이다.
─역시 네가 배신자였어!
─일부러 전쟁을 패배하게끔 유도한 거였군!
─저놈을 붙잡아 감옥에 가둬라!
안색을 바꾸며 알스를 매도하고 고문했던 동료들.
바로 배신자로 몰린 알스의 파멸 이벤트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한 알스는 왼쪽 눈을 잃는 부상을 당한다.
'하지만 알스는 배신자가 아니었어.'
어떤 조력자의 도움으로 탈옥을 한 알스는 말한다.
자신은 배신자에 의해 누명을 쓴 것이며 주인공도 함정에 빠진 게 분명하다고. 그렇게 알스는 조력자들과 함께 외부에서 민병대를 조직해 주인공을 도우려 했으나 돌연 나타난 정체불명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것이 막 업데이트된 스토리이자 내가 공략글을 올리던 카르락스 전투였다.
'내가 알스가 되다니…. 이제 어떻게 한담.'
곧 어느 정도 생각의 정리가 되었다.
어차피 꿈이라면 결국엔 깨어날 테니 지금 당장은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겠지.
문제는 이제부터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그리고 예정된 파멸을 어떻게 회피하느냐였다.
***
이 현실에 적응한 것은 금방이었다.
낙천적인 것이 내 장점이었다. 신동이라는 과중한 압박 속에서도 멘탈이 망가지지 않았던 것도 다 이 덕이었다.
군대 훈련소 첫날조차 쿨쿨 잘만 잤던 것이 나다.
'우선은 상황을 파악하자.'
내가 아는 게임 속의 알스라는 캐릭터는 20살의 성인 캐릭터였다.
하지만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는 건 12살짜리 꼬맹이.
얼굴 생김새로 보아 알스임이 확실했지만 몸은 어린애였다.
키는 157cm 정도일까. 게임 속 알스의 공식 설정이 186cm이었으니 곧 무럭무럭 커 가겠지.
'그건 그렇고….'
굉장한 미형이다.
게임에서도 주인공을 비롯해 주요 남자 캐릭터들은 미청년, 미중년이긴 했지만 뭐가 됐든 그건 2D 일러스트다.
그걸 실제 3D로 보니 미형도 이런 미형이 없었다.
'어릴 때도 이 정도면 커서는 어떻게 된다는 거야?'
이건 주인공도 마찬가지겠지. 주인공 곁으로 여자 캐릭터들이 마구잡이로 꼬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여자 캐릭터? 그러고 보니….'
알스에게는 찰떡처럼 따라다니는 여성 캐릭터가 있었을 테다.
그 캐릭터를 떠올리고 있자니 똑똑!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기침하셨나요?"
"…그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요…. 아니, 들어와."
끼익. 문을 여는 소리마저 최소화하며 들어오는 수인족 여성.
틀림없었다. 알스의 파트너 캐릭터인 시종 유미르다.
나이는 현재 알스보다 12살 많은 24세로. 게임 속에서도 제법 요긴하게 사용된 캐릭터다.
당초엔 일본풍 메이드 캐릭터라고 대차게 까였지만 의외로 스토리 전개상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맡으며 유저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선사한 캐릭터였다.
"제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너무 뚫어지게 바라본 것 같다.
"아무것도 아니야."
일개 사용인 주제에 6단계 중 최고 등급인 UR(울트라 레어)등급을 부여받으며 서포트 계열 1티어 캐릭터로 각광받았던 유미르.
일본풍 캐릭터라며 까이긴 했어도 이런 클리셰 캐릭터는 일단 고정 수요가 있는 만큼 인기가 있었다.
'그건 그렇고, 수인족인가….'
실제로 보니 무척 신기했다. 나도 모르게 발돋움하여 머리에 달린 강아지 형태의 동물 귀를 만지작거렸다.
"도련님? 갑자기 왜…?"
"아, 미안해요…. 아니, 미안해."
언뜻 보니 동물 귀 외에도 인간과 똑같은 귀가 달려 있었다.
게임 설정상 동물 귀와 꼬리는 인간과 종이 섞이면서 남은 흔적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실제 순혈 수인은 온몸에 거친 털이 돋아나 있는 짐승 형태라고 한다.
"그보다 어서 준비하셔야죠. 아카데미에 늦으시겠어요."
능숙한 손길로 의복을 준비하는 유미르.
"서둘러 준비하지 않으면 제때 아침을 드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으, 음. 고마워."
거리낌 없이 옷매무새를 풀어 헤치기에 순간 당황했지만 왜인지 곧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 그러고 보니.'
나는 어떻게 생전 공부해 보지도 못한 언어로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걸까.
마치 저절로 치환되는 것처럼 이쪽 세계의 말이 나오고 있었다.
'혹시….'
그 혹시가 맞았다.
나는 알스의 어린 시절 기억과 경험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알스의 꿈을 꾼 것처럼. 그도 아니면 알스가 나의 꿈을 꾼 것일지도 모른다.
시험 삼아 유미르에게 과거에 있던 일을 얘기해 달라고 하자 자연스럽게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이 덕에 억지로 아는 척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됐으니 내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
식당으로 내려오자 가족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서 와라 동생아. 오늘이 아카데미 첫 등교일이었지?"
그렇게 말해 오는 것은 첫째 형 맥스 일라인. 현재는 왕도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다.
그 옆에서 둘째 형 밀러 일라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알스 너도 참. 사관생 과정을 밟겠다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밀러 형도 마찬가지로 하급 관리로, 지금은 지방 파견을 앞두고 있었다.
"그저 멋있어 보인다고 사관생을 지망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거야. 거긴 그렇게 낭만이 있는 곳이 아니거든."
"혹여 율리아가 바람을 불어넣은 거라면 형들한테 말하렴. 율리아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 해 줄 테니까."
둘은 말은 그렇게 해도 대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일라인 가문의 부드러운 가풍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둘 다 조용히 하거라. 알스도 이제는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는 나이가 된 거겠지."
아버지 베리알 일라인 남작이었다.
변방의 남작으로 명성은 높지 않지만, 그 청렴한 영지 운영 능력으로 말미암아 영지민들의 신망은 높은 편이었다.
'평화로운걸.'
내심 형제들 간의 알력 다툼을 생각했지만 그런 건 전혀 없었다.
후계자는 이미 장남인 맥스 형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다른 형제자매들도 자기 갈 길을 찾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해도 알스가 아카데미에 가게 됐다니. 정말이지 어느새 이렇게 커 가지곤."
맥스 형이 내 머리를 북북 쓰다듬었다.
나는 낯간지러움을 참아 가며 유미르가 건네준 아카데미 소개문을 읽었다.
'그래, 아카데미….'
지금으로부터 약 7년 후. 주인공과 알스가 만나는 장소로,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장소였다.
내 행동 방침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일단은 이야기를 예정대로 진행시켜 주인공을 만난다.
왜 굳이 스토리를 따라가려 하느냐 하면 미래를 아는 것으로 말미암아 커다란 메리트를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면 배신자의 윤곽도 보일 테고 말이지. 주인공과 만나는 시점까지 대비책을 세워야겠어.'
만약 알스가 파멸한 것이 누명이었다면 알스의 말마따나 주인공의 측근 중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다.
나는 스토리가 시작하기 전까지 뒤에서 힘을 키우며 그 배신자를 쳐낼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만 하면 내 파멸을 회피할 수 있고, 주인공에게도 큰 힘을 실어 줄 수 있으니까.
정말로 알스가 죽는 건 아니니 파멸하는 스토리까지 따라가도 상관없는 게 아니냐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얘기가 조금 다르다.
모진 고문으로 한쪽 눈을 잃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알스의 가족들도 배신자로 몰려 고문을 당하거나 죽고 마니까.
내재된 알스의 기억이 나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반드시 배신자를 찾아 가족을 지켜라!'라고.
알스에게 있어 눈앞의 가족은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아카데미라고 다를 건 없다. 영지에서 배우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배우고 오거라. 정 힘들면 언제든 다른 길을 찾으면 되는 것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나는 잠시 눈치를 본 뒤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에 관해서이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말해 보거라."
"그것이…."
아카데미의 사관생 과정을 밟는 학생들은 필히 무예 수업을 받아야만 했는데 이 무예 교육에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
"아카데미에서만이 아니라 개인 교사에게 무예를 배웠으면 합니다."
"…음."
그러자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형인 밀러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신 말한다.
"개인 교사가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는 알고 있니? 우리 같은 변경 가문에게는 버거운 일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액은 얼마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얼마 들지 않는다니?"
"제가 배우고 싶은 건 검술이 아니라 창술이니까요."
"창술?"
이곳 캘리퍼 왕국은 검술이 독보적으로 발달한 국가였다. 하여 검술 사범은 몸값이 비싼 편이었지만 창술 사범은 그렇지 않았다.
밀러 형도 창술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창술 사범이라면 비교적 저렴하게 구할 수 있을 것 같네. 하지만 알스. 왜 갑자기 창술을 배우려 하는 거니?"
"그냥요. 멋있어 보이잖아요."
"나 참. 어린애답네.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다른 국가라면 모를까 우리 왕국에선 무시를 당할 테니까. 평민도 아니고 창술이라니…."
사실을 말하자면 게임 속 지식 때문이었다.
알스는 궁병 유닛을 몰고 다니며 낮은 방어력과 낮은 딜량으로 쓰레기 취급을 받았지만 최근 업데이트된 카르락스 전투의 히든 강화 퀘스트에서 한 가지 사실이 발견된다.
알고 보니 창술과 창병 운용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하여 그 히든 이벤트를 마치면 창병 병과 전직과 함께 개인 무력도 중상위권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물론 그래도 기본적인 스킬들이 가챠 캐릭터에 비해 구려서 1티어로 가기는 어려울 테지만.
"음."
고민하고 있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 곧 창술 사범을 구해 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아버지."
첫 번째로 활용하는 게임 속 지식.
지금은 부디 게임의 내용대로 알스에게 창술 재능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3화
내가 다니게 될 초등 아카데미는 1시간 거리의 레그람에 위치해 있었다.
나는 출근하는 맥스 형의 마차를 얻어 타고 레그람으로 향했다.
"혹시 힘든 게 있으면 형에게 상담하렴. 속으로 끙끙 앓지 말고."
"괜찮아요. 초등 아카데미일 뿐인걸요."
"초등이라고 해도 여러 사람이 모이니까. 그중에는 가문의 위세가 높은 애들이 많을 거야."
맥스 형은 주절주절 자신의 아카데미 경험을 떠벌리고 있었다.
내재된 알스의 기억으로 말미암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어도 도움은 되었다.
아카데미는 초등, 중등, 고등으로 나뉘는데. 초등, 중등 아카데미 과정까지는 기본적으로 평민과 귀족이 함께 수업을 받는다.
"그래서 평민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알력 다툼이 종종 벌어지거든. 결국엔 무슨 일이건 평민 쪽이 잘못한 것이 되어 고개를 숙이게 되지만."
"그렇군요…."
"그래도 명심하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야. 단지 우리가 귀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을 천대하거나 멸시해서는 안 된단다. 그건 낡은 사고방식이거든."
"알고 있어요."
"그래, 그거면 된 거야. …아, 도착한 모양이네. 그럼 유미르. 알스를 부탁한다."
맥스 형은 중간에서 내려 자신의 근무지로 향했고, 나는 2km를 더 향한 지점에서 내렸다.
눈앞에 보인 것은 레그람 초등 아카데미의 사관학부였다.
그 앞으로 내 또래로 보이는 꼬맹이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숫자는 나를 포함해 70명. 귀족으로 보이는 애들은 나를 포함해 8명이었다.
"음, 전부 모인 것 같군."
내가 마지막이었던 건지 인솔 장교로 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육장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열심히 하세요 도련님."
"괜찮아. 어차피 첫날인데 뭐."
대충 앉아서 설명만 듣다 오겠지 뭐.
라는 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군대의 훈련소도 첫날에는 훈련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쪽은 첫날부터 가차 없이 훈련에 들어갔다.
"하낫!"
척!
"둘!"
처척!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꼬맹이들.
첫날의 교육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제식 훈련이었다.
꼬맹이들은 하나라도 틀려선 안 된다는 절박한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 군대를 다녀와 봤던 내 입장에선 하품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지만.
"대열이 어수선해지고 있다! 정신 바짝 차려라! 다시 하나!"
꼬맹이들의 동작이 어설퍼지기 시작한 것은 훈련이 중반에 들어갔을 때였다. 집중력이 떨어졌는지 대열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러한 실패를 질책받을 거라 생각한 꼬맹이들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 간다.
언제나 있던 일이었는지 장교들은 애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에 제식 훈련을 마무리 짓고는 분위기 전환을 위한 오락거리를 하나 들여왔다.
채찍과 당근 전략이다.
"모두 주목하도록. 이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나?"
장교가 가리킨 것은 흑백 얼룩무늬의 판. 체스판이었다.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꼬맹이들.
장교가 말을 이어 간다.
"대륙에 널리 퍼져 있는 유희 중 하나인 체스는 우리 군대와도 관련이 있다. 그 이유를 아는 녀석이 있나?"
그러자 수많은 꼬맹이가 손을 들었지만 장교는 굳이 선두에 서 있던 귀족 남자애를 가리켰다.
"체스의 기물들이 병사를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정답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군대를 형상화한 거지. 국왕 폐하를 지키는 군대를 말이야."
체스는 이 세계에선 귀족의 소양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체스를 잘하는 귀족은 명성을 얻는다.
현대에서 꼬맹이가 수학 같은 것을 잘하면 신동이라 불리는 것처럼, 이 세계에선 체스를 잘하면 신동이라 불린다고.
"훗, 오늘은 훈련 첫날이니 본 교관도 가혹하게 할 생각은 없다. 그래, 나서서 체스를 해 볼 사관생이 있나?"
그러자 조용해진 와중에 번쩍! 가장 먼저 손을 드는 꼬맹이가 있었다.
조금 전에 우렁차게 대답을 한 꼬맹이였다.
녀석을 보자 교관은 흥미롭다며 눈매를 좁혔다.
"오호라. 케스퍼 밀리아스. 네가 나서는 건가…. 좋다. 나와라."
절도 있는 동작으로 체스판 앞으로 향하는 꼬맹이.
교관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다시 물어왔다.
"상대가 되어 줄 사관생은 없나?"
몇몇 평민 꼬맹이들이 손을 들었지만 장교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귀족 애들에게 향해 있었다.
다만 그 귀족 꼬맹이들이라고 하면 뭐가 무서운지 체스판 앞에 앉은 녀석을 경계하며 손을 들려 하지 않았다.
"잘하지 못해도 좋으니 손을 들도록."
장교가 노골적으로 그리 말하자 손을 들고 있던 평민 꼬마들은 시무룩하며 손을 내렸다.
'뭐, 심심풀이로는 괜찮을 것 같네.'
이대로라면 집에 가는 시간이 늦어질 것 같았기에 내가 손을 들기로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빛.
방금 전 꼬맹이가 어떤 집의 자제인지 대번에 알아챘기에 나도 당연히 아는 줄 알았더니만.
"알스 체이싱 일라인이라고 합니다."
"일라인…? 아, 그래. 일라인 남작가의 자제인가. 좋다. 나와라."
체스판 앞에 앉은 나는 혹시나 이 세계의 말 배치법이 다른가 하여 상대 꼬맹이가 말을 배치하는 것을 일일이 따라 하며 말을 배치했다.
이를 본 상대는 내가 초보라고 생각했는지 재미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내게 상의도 없이 체스판을 회전시켜 백말을 내 앞에 두었다.
선공을 양보한 것이다.
"먼저 해."
"…."
이 매너 밥 말아 먹은 녀석을 봤나.
꼬맹이라 봐주려 했지만 아무래도 엄하게 어루만져 주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럼 먼저 시작하겠는데…. 중간에 울지는 마라?"
"울어? 하! 내가 너 같은 애한테 질 것 같아?"
"그래그래. 네가 천재라면 아무리 나라도 이기지 못하겠지. 정말로 천재라면 말이야."
탁! 나는 폰을 전진시키며 오프닝을 진행했다.
체스는 내게 있어 복잡 미묘한 게임이었다.
바둑에 실패한 내가 조금 더 오래 천재로 불릴 수 있게 해 준 게임이자 어느 의미로는 나를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만약 중학 시절에 체스를 시작하지 않고 평범한 학생으로 살았다면 인생이 뒤바뀔 수도 있었을 테지.
이때 아버지는 평범하게 공부할 것을, 어머니가 체스라도 해 볼 것을 주장하면서 가정이 붕괴되었다.
내게는 씁쓸한 과거였지만 지금에 와서 체스를 한 것에 별로 후회는 없었다.
공부해서 판사나 의사가 되었다고 해도 삶의 만족도는 어차피 똑같았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하여 바둑판만 보면 진저리가 쳐지는 것과 달리 체스는 실력 유지를 위해 간간이 하는 편이었다.
"체크."
"윽!"
탁! 상대의 비숍을 쳐내며 체크를 선언하는 나이트.
나는 공격적인 수를 연발하며 난전으로 유도해 냈다.
이처럼 난전이 일어나며 수읽기가 복잡해질 경우 어린애들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인다.
이 난전을 당돌함과 창의성으로 돌파를 하든가. 혹은 평정을 잃고 빈틈을 보이든가.
전자의 경우는 진짜 천재인 케이스다. 10살에 체스 세계 챔피언이 된다는 둥의 이야기는 이쪽의 이야기다.
반면 가짜 천재들은 후자의 반응을 보인다.
"으으…!"
"안 돼. 그쪽으로 두면 여섯 수 안에 체크 메이트가 될걸?"
"시, 시끄러워!"
우물쭈물하는 꼬맹이. 결국엔 눈앞의 불을 끄기 위해 최악의 수를 두고 만다.
탁! 킹을 완전 포위하는 비숍과 나이트.
"더블 체크. 다음엔 어디로 움직인다고 해도 체크 메이트야. 게임 끝."
"으, 아…."
"수고했어. 너 제법 잘하네. 실력은…그래. 인공지능 하급에서 중급 사이일까."
이 나이에 그 정도 실력이라면 충분히 잘하는 편이다.
우오오! 여기저기서 환성이 울렸다.
"케스퍼 밀리아스가 패배하다니. 이건 대체…!?"
"저 꼬마는 누구지?"
"일라인 남작가라고 하던데."
"처음 들어 보는걸."
뭔가 분위기가 떠들썩하다.
대국을 면밀히 관찰하던 교관이 내게 말해 왔다.
"알스 일라인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상당한 실력이군. 설마 밀리아스의 신동을 농락하면서 제압하다니."
"…신동이요?"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꼬맹이는 현대에서 열 트럭은 있었다. 이 실력으로 신동 소리를 내고 다니면 비웃음을 사기 딱 좋았다.
아무래도 이 세계의 체스는 저변은 넓을지언정 평균 실력은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모양이었다.
***
아카데미 첫날을 끝낸 저녁.
일라인 가문의 저녁 식사 자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맥스 형은 조심스럽게 내게 물어 왔다.
"동생아, 너 혹시 아카데미에서 체스를 했었니?"
"네? 무슨 소리세요 맥스 형?"
나는 시치미를 떼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맥스 형이 끈질기게 캐물어 오자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말한다.
"맥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는 거냐."
"그게…. 요 녀석이 아카데미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에요."
"사고를 쳤다니. 누굴 때리기라도 한 거냐? 뭐, 애들이 치고받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고위 귀족을 때린 거라면 내가 직접 사과를 하러 가야겠지만…."
"그런 사고가 아니니까 그렇죠. 알스 이 녀석이 밀리아스 후작가의 자제를 체스로 이겨 버렸답니다."
"밀리아스 후작가의 자제라고? 알스와 비슷한 또래라면 분명…."
"예, 케스퍼 밀리아스. 그 신동을 말하는 거예요."
이에는 아버지를 비롯해 밀러 형까지도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사실이냐 알스?"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막 손을 움직이다 보니 어쩌다가 이긴 것 같아요."
"흠? 체스가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어린애들의 대국이라 그럴 수가 있었던 건가."
고개를 갸웃하는 아버지.
나는 섣불리 대국을 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주인공을 만난 이후에 이름을 날리는 건 둘째 쳐도. 어릴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지긋지긋한 신동 소리를 또 듣는 것도 싫었을뿐더러. 내가 알던 스토리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생겨 버리니까.
'그 녀석이 그렇게 유명한 녀석이었을 줄이야.'
이 세계는 현대처럼 개나 소나 신동으로 불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귀족이란 특성 때문인지 신동이 가진 영향력이 꽤 컸다.
아버지는 흥미롭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나면 내 방으로 오거라. 한번 직접 확인해 보고 싶구나."
"예에…."
신동으로 불리는 것만큼은 싫었기에 나는 적당히 힘을 빼고 져 드리기로 했다.
다만 이마저도 괜찮은 실력으로 보였는지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서도 내게 체스 선생님을 붙이고자 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체스에 뜻이 없으니까요."
"아쉽구나.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니. 내게도 재능이 보이는구나."
"다시 생각해 보라 하셔도…."
체스 선생이라니. 이보다 더 시간 낭비인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세계에서 나를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4화
알스의 몸에 들어온 지 어언 한 달.
나는 책을 통해 이 세계에 대해 알아 가고 있었다.
'역시, 게임에서 설명되지 않았던 것들이 굉장히 많네.'
대표적으로 전설이나 역사 같은 것들이다.
장황하기에 게임에서는 설명하지 않은 배경지식들. 나는 그것들을 머리로 익히며 흐름을 정리하고 있었다.
요는 간단했다.
과거 이 대륙의 땅을 통치하던 펜실론이라는 통일 제국이 있었다. 그 제국이 멸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지금의 여러 왕국들은 그 제국에서 독립하여 나온 지방 호족들이 세운 것이다.
주인공은 그 펜실론 제국 황가의 마지막 핏줄로, 제국의 부활과 대륙의 통합을 위해 싸운다는 것이 아테나 워 테일즈 스토리의 핵심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전속 메이드 유미르가 펜실론 출신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 묻자 유미르는 포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예, 맞습니다. 전 펜실론 재흥 세력 출신이랍니다."
"재흥 세력?"
"예, 펜실론 제국의 재흥을 위해 황도 플라톤에서 발족했던 세력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저는 어릴 적에 그곳에 신세를 졌답니다."
"그 얘기를 더 들려줄래?"
"도련님께서 듣고 싶으시다면요."
유미르는 여러모로 인생의 굴곡이 있는 인물이었다.
수인 검투사와 인간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펜실론 재흥 세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투기장에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고.
"그렇기에 저에겐 이 일라인 가문에서의 생활이 구원과도 같아요."
게임에서는 일개 메이드가 능력이 이렇게 좋을 수 있냐며 까였지만 마냥 클리셰 캐릭터는 아닌 모양이다.
'혹시 그게 그렇게 연결되는 건가.'
그저 조연인 줄 알았던 그녀가 벌인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스토리의 1막은 절정으로 치달았었다.
알스의 파멸을 야기한 그 사건.
그 사건을 벌인 이유에 대해 많은 유저들이 궁금해하는 상황이었지만 그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나온 바가 없었다.
'그건 배신자의 함정이었던 거겠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유미르가 배신자였던 걸지도 몰라.'
다만 가능성이 있다 뿐, 유미르가 배신자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유미르. 혹시 뭔가 고민이 생기거나 하면 꼭 내게 말해 줘."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냥. 어려운 부탁은 아니잖아. 약속해 줘."
"후훗, 예.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미르가 배신자라면 의미 있는 약속은 아니지만 일단 이 정도로 해 두기로 했다.
뭐가 됐든 내가 배신자를 먼저 밝혀내면 전부 해결되는 일이기도 하고.
"그보다 도련님? 슬슬 준비를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러네."
약속된 오후 2시.
내게 창술을 지도할 창술 사범이 오는 시간이었다.
이 대륙에서 무예로 이름이 높은 창술은 크게 두 부류가 있었다.
서부에서 창시되어 발달한 가란드류 창술. 그리고 용병 구데리안이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체스터류 창검술이다.
각각의 무예는 특징이 있는데. 가란드류 창술은 궁정 무예로 채택될 정도로 예절, 형태와 같이 정석적인 부분이 강한 반면, 체스터류 창검술은 무한한 자유로움이 특징이다.
애초에 체스터류는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순 창술은 아니었다.
왼손에는 검, 오른손에는 창이라는 특수한 무기 파지법을 기조로 한 무예로서, 대단히 실전적인 무예였다.
길이가 다른 두 가지의 무기를 동시에 다뤄야 하는 탓에 습득 난이도는 극악.
그 때문에 체스터류 창검술의 달인은 일종의 희귀 동물 취급을 받는다.
아버지는 당초 가란드류 창술 사범을 초빙하려 했지만 그쪽은 쓸데없이 콧대가 높다고 할까, 어지간한 돈으로는 남작가 사남의 창술 사범을 하고 싶지는 않아 했다.
"안녕하십니까. 일리야 안페이라고 합니다. 체스터류에는 갑 2급에 속해 있습니다."
"…아."
창술 사범이라고 나타난 것은 우락부락한 여성이었다.
키는 180cm 정도 될까. 남성을 기준으로 하면 딱히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 체격은 남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근육으로 뒤덮인 몸은 무척이나 두터워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보였고 온몸의 생채기는 그녀가 얼마나 지독하게 훈련했는가를 나타냈다.
다만 내가 놀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설마 일리야 안페이가 오다니!'
나는 무언가 운명적인 것을 느꼈다.
일리야는 게임 내에서 등장했던 캐릭터로 그 등급은 여섯 개의 등급 중 두 번째 등급인 SSR이었다.
창병과를 지휘하는 그녀는 기병을 말 그대로 믹서기처럼 갈아 버린다 해서 기병믹서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티어는 딱히 높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개인 무력이 82 정도로 SSR 캐릭터 중에서도 높지 않았기 때문.
그렇기에 무과금 공략을 자주 올리던 내가 애용하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설정상의 이유로는 한 팔이 없기 때문에 개인 무력이 낮은 거라고 했는데….'
일리야는 과거 어떤 사건으로 대륙 십걸(十傑)에 속하는 어떤 인물에게 왼팔을 당해 개인 무력이 급감했다는 설정이 있었다.
'지금은 왼팔도 있으니까 개인 무력은 못해도 90 가까이는 될 거야.'
시점이 게임의 7년여 전인 만큼 아직 거기까지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교사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어서 오시오. 일단 응접실로 들어오겠소? 접대 준비를 했소만."
"그보다는 먼저 제가 가르쳐야 하는 아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군요."
"흠, 성격이 급하시군."
"쓸데없는 의례는 싫어하는지라."
"오지랖이 되겠지만 그건 귀족들을 향한 좋은 태도가 아니오.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오."
"불편하셨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아니, 나는 개의치 않소. 알스! 이리로 오거라."
앞으로 나가는 내게 품평을 하는 듯한 시선이 압박을 가해 왔다.
그 시선에는 살기나 투기와 같은 모종의 힘이라도 있는 듯, 나는 목덜미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때.
"뭣…!?"
흠칫하며 펄쩍 물러나는 일리야.
그녀는 경계 태세를 취하며 어느새 내 뒤를 보호하듯 서 있는 유미르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뭣 하는 놈이냐!"
"…."
유미르는 살기를 거두지 않은 채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알스 님의 전속 시종인 유미르라고 합니다. 부디 도련님에게 좋은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런 것치고는 환영하는 기색이 아닌데. 위협하는 건 그만두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당신이 도련님을 위협하기에 저도 모르게."
"…흥."
눈빛을 주고받는 둘.
역시 상급 레어 캐릭터들의 대치는 살벌했다.
아버지는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일리야에게 유미르에 대한 사정을 설명했다.
"이런 실력자가 남작가에서 일개 사용인으로 일하고 있다고요…?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당신은 무언가 속고 있는 겁니다."
"흠, 그 부분은 내가 감수할 일이지 자네가 상관할 부분이 아니네. 그보다 어떤가. 내 아들은."
"글쎄요…."
유미르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는 일리야.
"일단 가르쳐 봐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럼 부탁하네. 자세한 이야기는 가르치면서 해 보도록 하지."
일리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택 내 연무장으로 향했다.
나는 연습용으로 준비한 나무창을 꼬나 쥐고 그 뒤를 따랐다.
***
체스터류 창검술은 검술, 창술을 따로 익힌 뒤 그것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창검술로 승화시키는 구조였다.
하여 검술과 창술도 단독으로 있었다.
그런 만큼 일리야는 최선의 선생이 될 수 있었다.
창술은 물론이거니와 검술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창술을 배우고 싶다는 내 의사를 존중했지만 아이의 생각이니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검술까지 가르칠 수 있는 일리야를 섭외해 준 것이다.
"본격적으로 무예를 익히기 전에, 무예에 대한 조예를 확인할 거다."
"어떻게 확인을 하신다는 거죠?"
"간단하다."
스윽! 자루에서 창 한 자루를 꺼낸 일리야는 그것을 내게 던져 주었다.
날이 바짝 서 있는 창 촉과 둔탁한 쇠 창대. 그것을 받아들기 위해 나무로 된 창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걸로 나를 공격해 봐라. 정말로 죽일 생각으로 말이야."
"…."
이런 뻔한 테스트에 위축될 생각은 없었다.
꽉! 나는 창을 움켜잡고 일리야를 향해 겨누었다.
"오호…."
그녀는 흥미롭다며 눈을 빛냈다.
보통 어린애들은 이런 실전 병장기를 쥐면 위축되기 마련이다.
비단 어린이뿐만이 아니다. 성인들조차 다른 이를 손쉽게 죽일 수 있는 병장기를 쥐게 되면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다.
다만 그런 압박을 이미 겪어 본 나는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 총을 받았을 때 이런 느낌이었지.'
훈련소에서 했던 첫 사격 훈련 때는 나도 쫄았었다. 첫 사격을 하기 전까지는 잔뜩 긴장을 했다.
하지만 결국엔 별거 아니었다.
정말로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처럼 느껴졌다.
"하앗!"
휘익! 휘익! 그녀의 목을 찌르고 들어가는 창 촉.
"흐음."
일리야는 가볍게 공격을 피하고는 중얼거렸다.
"기질은 제법인 것 같다만…. 한 가지 간과를 하고 있군."
그러고는 퍽! 창을 찌름으로 인해 비어 있던 내 명치를 무릎으로 강타했다.
"커헉!?"
순간 아찔해지는 시야. 나는 무릎을 꿇고 헛구역질을 토해 내야 했다.
그런 내 위로 일리야가 말한다.
"왜 자신은 공격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공격하는 자는 응당 자신도 공격당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표적을 맞히는 사격 훈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일어나라. 일어나서 다시 시도해 봐."
"크윽…!"
그 한 방으로 다리가 풀려 버리고 말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명치를 보호하면서…!'
내 몸을 보호하며 창을 휘둘러야 했기에 아까처럼 곧장 급소를 노릴 수는 없었다.
마치 잽을 날리듯 거리를 조절하며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했다.
일리야는 만족스럽다며 말한다.
"명심해라. 상대와 맞춰 가는 것. 그것이 무예의 기본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보지 않고 그저 휘두르는 것은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지."
그 뒤로는 먼지가 흩날리는 훈련이 이어졌다. 나는 몸 여기저기를 얻어맞으며 뒹굴어야 했다.
마침내는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서야 훈련이 끝났다.
그렇게 내가 대자로 뻗어 있는 사이에 일리야는 지켜보고 있던 아버지를 향해 합격 사인을 주었다.
"자질은 상당한 것 같군요. 정신적인 기질도 그렇거니와, 창을 다루는 센스도 제법입니다. 가르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앞으로 아들을 부탁하겠네."
"그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뭔가?"
"교육을 진행하는 동안은 저 여자를 떨어뜨려 줬으면 합니다. 교육을 할 때마다 제게 살기를 뿜어 대니 솔직히 힘들군요."
나를 구타할 때마다 유미르가 살기를 흘렸던 모양이다.
유미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던 일리야는 저택에 방을 내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까지 거절하며 영지 내에 숙소를 잡았다.
그렇게 내 창술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5화
이 세계에서 생활한 지 어느덧 2년.
14살이 된 내게는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체적인 것이었다.
160 정도이던 키는 급격하게 성장하여 180 가까이 도달했고, 골격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외모도 내가 알던 게임 속의 알스와 거의 흡사해졌다.
온화한 인상의 금발 미청년.
이 세계에서도 이러한 외모가 흔한 것은 아닌지 영지로 시찰을 나가거나 아카데미가 위치한 레그람으로 외출을 하기라도 하면 여기저기서 시선이 꽂혀 와서 꽤나 난감했다.
이러한 시선들을 즐길 정도로 낯짝이 두꺼운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던 중 기어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어느 날의 아침. 아버지가 내게 말해 왔다.
"알스, 네게 혼담이 들어왔다."
순간 식사 자리는 정적에 빠졌다.
"혼담이라굽쇼!?"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장남인 맥스 형이다.
귀족의 경우 13~15살쯤 약혼자가 정해지는 케이스가 있는데 이러한 것도 유력 귀족가에 한정한 이야기다.
변경의 남작 가문에게 그런 이야기가 오고 가는 일이 없었다.
맥스 형은 올해 28살이 됐음에도 마땅한 혼담이 없는 실정.
그런 상황에서 내게 혼담이 왔으니 맥스 형이 펄쩍 뛰는 게 당연했다.
"상대는요? 알스에게 청혼을 한 가문은 어디입니까?"
"아이즈베인 백작가다."
"아이즈베인이라면 제가 혼담을 넣었던 곳이 아닙니까! 아버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제게 온 혼담을 잘못 보신 거겠죠!"
"아니, 정확히 알스를 지목하더군. 레그람에서 알스를 직접 보았던 모양이야."
그저 본 것만으로 혼담을 넣다니.
내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어머니가 대신하여 아버지에게 물었다.
"하지만 당신, 맥스의 말대로 그건 이상해요. 배우자가 없는 아이즈베인 백작가의 따님이라면 제니슨 양밖에 없지 않나요?"
"그렇지."
"그 제니슨 양의 나이가 올해로 26세예요. 그래서 비슷한 또래인 맥스가 혼담을 넣었던 거고요."
듣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착각한 게 아니야. 그쪽에서 먼저 나이 차이를 문제 삼지 말아 달라고 말해 왔으니 알스를 지목한 게 맞아."
다시금 침묵이 흐르는 식탁. 아버지도 난감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상대의 의도는 뻔했다.
혼기가 지난 딸을 어떻게든 시집보내고 싶다. 그 와중에 딸도 반했고, 내 외모도 반반하니 결혼을 시켜 사교계에서 활용을 해 보겠다는 뜻이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남편이나 부인을 가지는 건 사교계에서 일종의 능력 취급을 받으니까.
"마음 같아선 단박에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그쪽의 체면도 있으니 말이야."
상대는 우리보다 가세가 강한 백작 가문. 그냥 퇴짜를 놓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말이다만 알스. 수업을 하나 받지 않겠니?"
"신랑 수업을 말인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집사 수업을 한번 받아 보는 게 어떨까 해서 말이야."
"집사 수업인가요…."
"정말로 집사가 되라는 건 아니야. 그저 그런 수업을 받아 보기만 하면 돼."
그럴 경우 혼담을 자동으로 없던 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기가 지난 여성이라 하더라도 백작가의 여식이 집사 수업을 받는 어린애와 혼담을 진행시키기에는 체면이 서질 않으니까.
"장소는 어디죠?"
"살레온 공작가란다. 올해부터 네가 다닐 중등 아카데미도 그곳에 있으니 숙박을 해도 문제없겠지. 정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괜찮다만…."
"아니에요. 가 보도록 할게요."
"잘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살레온 공작가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거니까. 네가 좋아하는 책들도 여기보다 더 많을 거다."
의도치 않게 결정된 집사 수업.
'게임에서의 알스도 집사 수업을 받았을까.'
알스의 소년기에 대해 게임에서 나온 게 없었기에 이게 스토리의 흐름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
캘리퍼의 제 3도시이자 은의 도시라 불리는 그란셀.
함께 온 아버지는 그렇게 도시를 설명하며 내게 주의를 주었다.
"노파심에 말하는 거다만. 웃어른들의 심기를 건드릴 것 같은 행동은 하지 말거라. 우리는 그저 신세를 지러 온 하급 귀족일 뿐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가자."
아버지도 꽤 긴장을 했는지 걸음걸이가 딱딱했다.
살레온의 저택은 우리 저택과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의 대저택이었다.
따로 딸린 연무장의 크기는 헉 소리가 나올 정도였고, 내가 지내게 될 별택마저도 우리 저택보다 훨씬 컸다.
한참을 걸어 으리으리한 응접실에 도착하자 알티오르 살레온 공작을 마주할 수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날이 선 눈빛을 한 노인이었다. 아버지가 말하기로 현역 때는 대륙에 이름을 날리는 장군이었다고 한다.
"처음 문안드립니다. 알스 체이싱 일라인이라고 합니다. 살레온 어르신을 만나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난 알티오르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할아버지. 굉장한데.'
노쇠했음에도 숨길 수 없는 투기가 느껴졌다. 최근 무예를 익히며 이런 것들을 느끼기 시작한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강하다고.
"오호."
알티오르는 흥미롭다며 눈매를 좁혔다.
"처음 보는군. 내 손녀가 아니라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소년은 말이야."
"예? 아…."
그제야 알티오르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애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 입장에선 그것 이외의 감상은 없었다.
"인사하도록 해라. 네가 정말로 집사가 된다면 이 아이의 수발을 들게 될 테니까. 미리 점수를 따 놓는 게 좋을 게야. 하하하!"
집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뭐, 인사는 해 둬야지.
"알스 체이싱 일라인이라고 합니다."
"에리나 에걸 살레온이에요. 그냥 에리나라고 불러 줘요."
"반갑습니다 에리나 양.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
품평하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은 진득한 모멸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그랬지.'
이 집사 수업에는 나도 그렇지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는 녀석들이 많다고 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공작가의 영애를 꼬셔 보기 위해 집사 수업을 자청한 귀족 자제들이 더러 있었다.
잘만 해서 정말 인연을 맺는다면 더할 나위 없고, 설령 안 된다고 해도 미리 공작가의 영애와 안면을 쌓으며 사교계의 인맥을 만들어 놓을 수 있다.
뭐가 됐든 손해 보는 구조는 아니었던 것.
그렇기에 나처럼 계승 순위가 낮은 귀족 자제들뿐만 아니라 제법 계승 순위가 높은 녀석들도 집사 수업을 받으러 왔다.
그러한 의도를 이 여자애가 알고 있다면야 모멸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이번 살레온 공작가에서의 생활은 내게 있어서 사정이 괜찮았다.
집사 수업은 둘째 치고 살레온 공작가 저택에서 신세를 지며 5분 거리에 있는 중등 아카데미에 등하교를 할 수 있었으니까.
우리 영지에서 마차로 왔다면 족히 2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도보로 통학할 수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집사 수업은 재미없지만…. 통학으로 인한 메리트가 훨씬 크지.'
게다가 이곳 그란셀은 대도시인 만큼 유흥거리도 많았다.
지금은 집사 수업으로 인해 외출 금지가 걸려 있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지만 외출 금지가 풀린 후에는 그란셀을 한번 돌아볼 생각이었다.
"──라인. 알스 일라인! 듣고 있습니까?"
"…아. 네. 듣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교사는 코로 한숨을 쉬며 말한다.
"중등 아카데미에 막 올라와 낯선 것은 알겠지만 집중하세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래도 수업은 제대로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사관생인 당신이 튈랑의 통상협정을 야기한 전쟁에 대해 설명을 해 보겠습니까?"
"조악 전투 말인가요? 721년 펜실론 왕국과 에레보니아 왕국이 조악에서 펼친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에레보니아 왕국은 크게 패배. 이 여파로 에레보니아에 종속되어 있던 튈랑이 독립운동을 벌이며 다른 국가와 광범위한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그게 튈랑의 통상협정입니다."
"틀렸습니다."
아카데미 교사는 단호하게 못을 박고는 다른 이에게 손짓을 했다.
"살레온 양. 대신 설명해 주겠습니까?"
"예."
지목을 받은 여자애는 가볍게 정정을 했다.
"조악 전투는 724년에 개전을 했습니다. 게다가 튈랑은 독립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펜실론 제국과 완만한 국가 병합을 위해 통상협정을 맺은 겁니다."
"정확합니다. 모두 살레온 양에게 박수를 보내 주세요."
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께 소곤거림이 일었다. 역시 그란셀의 재녀라느니. 살레온의 보물이라느니.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잘못된 사실만큼은 정정해 놓기로 했다.
"잠시 괜찮을까요?"
"뭔가요 일라인. 잘못 대답한 건 개의치 않아도 괜찮습니다. 틀렸다고는 해도 충분히 좋은 대답이었어요. 앉아도 좋습니다."
"아뇨, 틀린 건 제가 아니라 저쪽이라서요.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는데…. 틀린 건 틀린 겁니다. 조악 전투는 721년에 개전한 게 맞아요."
아카데미 교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입니까. 살레온 양의 말대로 조악 전투는 724년에 벌어졌습니다. 721년에 벌어진 전쟁은 데칸 평야 전투입니다."
"예, 그리고 그 데칸 평야는 그 당시 조악의 일부분이었습니다. 행정구역이 나뉜 것은 729년에 펜실론이 제국이 되면서 실시했던 영토 재편 때의 일이에요. 그러니 조악 전투는 엄밀히 말해 721년부터 시작된 게 맞겠죠?"
"어…."
이제 당황하는 건 교사 쪽이었다.
그는 경제학 교사였던 탓인지 디테일은 잘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튈랑이 독립을 원했다는 건 이후 정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통상협정 후에 독립군을 조직해 펜실론의 군대와 교전을 치렀고, 그 과정에서 마치 공동전선을 펼치듯 델턴과 에레보니아 측에서도 군사를 일으켜 펜실론을 공격했죠. 합병을 원하는 측의 움직임은 명백히 아니었어요. 최종 승리자인 펜실론은 튈랑의 독립군을 에레보니아의 괴뢰군이라 역사서에 썼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이후 정황을 봐도 그렇고. 무엇보다 다른 국가들의 역사서는 일관적으로 튈랑이 독립을 원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건…!"
"그러실 수도 있죠. 주류가 되는 펜실론 역사서 정도만 참고를 하셨을 테니까요."
"추, 추후 역사학 담당 교사에게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단 앉으세요."
"옙."
다시금 웅성임이 일었다.
쟤는 누구냐. 사관학생이니 당연한 거 아니냐. 운 좋게 저 부분만 자세하게 알았던 거다 등등. 왜인지 칭찬 일색이던 여자애에 비해선 박한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발표를 했던 여자애라고 하면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어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대신하듯 아카데미 교사가 상황을 정리했다.
"미안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자료 조사를 소홀히 했던 것 같군요. 살레온 양도 앉아 주세요."
"…네."
그 여자애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지그시.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다른 애들의 시선도 꽂혀 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루한 수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외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6화
살레온 가문에서 이뤄진 집사 수업은 일종의 테스트였다.
집사 희망자들을 저택에 머물게 하여 결격점이 없는가를 골라내는 자리였다.
그 기준이 제법 엄격하고 불합리해서 누가 이걸 할까 싶었으나, 역시 공작가의 집사 자리라고, 내가 머물고 있는 제 1별택은 물론이고 제 2별택에도 집사 희망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다만 나처럼 다른 목적으로 온 애들이 태반이기에 분위기는 물렁했다.
8주간의 외출 금지로 인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집사 후보생들이 별택의 시녀들을 꼬셔 연애질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풍기가 문란한 상황이었다.
집사 후보생들은 마치 무용담을 늘어놓듯 시녀를 꼬신 일을 떠벌리고 다녔고, 시녀들은 자기가 어느 집 자제와 만나고 있다며 뽐내고 있었다.
나는 이 문란한 풍기의 피해자였다.
"일라인. 잠시 괜찮을까요."
"윽."
이것으로 몇 번째일까.
시종장 조안이 한숨을 쉬며 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이시죠?"
집사들의 교육계를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엄격한 눈으로 말해 왔다.
"조금 전 세레나와 이야기를 하던데 무슨 용무가 있던 겁니까. 그 전에는 알리사와도 이야기를 하였죠."
"이야기를 했다기보다 불려 세워진 겁니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고 있지만 분명 제 탓이 아닐 겁니다."
난 억울했다.
나를 꼬시는 게 시녀들 사이에선 일종의 업적이 되어 있는지 권유가 끊이질 않았다.
서재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어도, 정원에서 혼자 쉬고 있어도 이야기를 하자는 권유가 쉴 새 없이 오니 나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조안도 이 부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 골치가 아프다며 살포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런 거라면 당신에게 행동거지를 주의해 달라 말할 수도 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세레나와 알리사에게는 제가 따끔하게 이야기를 해 놓도록 하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조안이 말했다.
"내일부터는 외출 금지가 풀릴 겁니다.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이니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저택 밖으로 나가서 놀아라. 조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나로서도 원하는 바였다.
이 집사 수업이 짜증 났던 건 외출 금지에 있었다.
최초 8주에 한해선 아카데미에 등교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저택에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
일차적인 집사 수업이 끝나 인원 선별이 끝나며 드디어 외출 금지령이 풀리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를 얻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집사 후보에서 사실상 탈락했다는 거다.
"이것이 자유의 맛인가…. 백일휴가가 떠오르는걸."
저택을 나온 나는 약속 지점인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일리야 스승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승!"
"흠, 빨리 왔구나."
"바쁜데도 와 주셔서 고마워요."
"뭘, 나도 마침 그란셀에서 의뢰를 받았거든. 개의치 않아도 된다."
스승은 오늘 내 호위 겸 안내역으로서 동행을 해 주기로 했다. 밤의 거리나 뒷세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니 적임이었다.
"집사 수업은 조금 어떠냐."
"재미없죠. 뭐, 유익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상류 귀족들의 예절에 관련해선 배울 부분이 꽤 많았다. 그뿐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귀족들의 예절인가. 기회가 된다면 나도 배워 보고 싶은걸. 요즘에는 귀족들을 마주치는 일이 많아져서 말이야."
"그러고 보니 백작가의 의뢰를 받았었다고 하셨죠?"
스승은 용병으로서 주가를 올려 가고 있었다. 어느새 용병으로서는 최고 등급인 S급에 올라섰다고.
지금에 와서는 그 몸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져 우리 가문으로서는 교사 비용을 낼 수 없을 정도가 됐지만 스승은 고맙게도 추가 금액을 요구하지 않은 채 시간이 날 때마다 내 교사 역을 계속해 주고 있었다.
"그래, 알바드 왕국에서 말이지. 단순한 경호 임무이긴 했지만 경호 임무인 만큼 겉치레가 중요하더라고.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던지 나 참."
"하기야. 고위 귀족이라면 쓸데없는 부분에 구애를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훗, 괜찮다면 나중에 가르쳐 다오. 네가 가르쳐 준다면 나도 의욕이 생길 것 같거든."
"기꺼이 해 드려야죠."
나는 스승을 이끌고 그란셀의 뒷거리로 향했다.
우리 영지는 규모가 작아 이런 할렘가가 없었지만 대도시인 이곳은 달랐다.
저녁을 맞아 더욱 분주해진 밤의 거리.
거리에 들어서기 무섭게 스멀스멀 술 냄새가 풍겨 왔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확연히 달라졌다.
"그런데 용케도 응해 주셨네요. 스승의 성격상 이런 건 아직 이르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요."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니까."
"귀여운 수준이라뇨?"
"카르텐이나 에테라 같은 도시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거지. 적어도 이곳은 노예시장이나 지하투기장 같은 건 없으니까."
"그렇긴 하죠. 집중적으로 치안을 관리하는 모양이니까요."
보통 할렘가의 규모가 커지면 치안을 반쯤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 주변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할렘가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이곳은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골목 곳곳에 영지 경비병이 서 있었고, 싸움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곧장 달려가서 막았다.
그런 탓에 이곳에는 상류층의 유흥 장소가 많았다.
귀족을 타깃으로 한 고급 술집이라든지, 경마장이라든지.
"경마장은 지금 하지 않는 모양이군. 낮에 찾아와야 할 것 같다."
"괜찮아요. 제가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으니까요. 그 전에…."
얼굴을 가릴 것이 필요했다.
나는 근처 노점에서 가면을 사려고 했으나 마땅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 의도를 읽었는지 스승이 다른 물건을 가리켰다.
"얼굴을 가릴 거라면 투구로 하는 건 어떠냐. 마침 나도 함께 있으니 용병을 자칭하면 될 거다."
"시야를 많이 가릴 것 같긴 하지만…. 상관없겠죠."
나는 적당히 회색의 투구를 구매해 착용한 뒤 본격적으로 그란셀의 거리를 돌아보기로 했다.
* * *
내가 밤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인재를 찾는 것. 그리고 재산을 부풀리기 위한 실험이었다.
이 두 가지 모두 훗날 예정된 파멸을 피하기 위한 무기였다.
'결국엔 힘을 길러야 해.'
알스가 파멸했던 결정적인 원인은 배신자의 함정에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뒷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핏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문의 휘광도 없으며 가지고 있는 재산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실적까지 마땅찮으니 다른 동료들로부터 무능력한 놈이라 비난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만약 알스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거야.'
그리고 그 조력자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게임 속 지식으로 알 수 있었던 알스의 주요 조력자는 일곱.'
알스가 배신자로 낙인찍힌 후에도, 감옥을 무단으로 탈옥한 후에도 믿고 따라와 줬던 인물들이다.
어느 의미로는 주인공보다도 알스를 더 믿어 주는 인물들이었다.
나는 일단 이 인물들에 대해선 빠르게 내 편으로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걸 바탕으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해 주인공과 합류했을 때에는 배신자도 감히 나를 쳐내지 못할 상황을 만든다.
그 후 세력 내에서 배신자를 찾아내 축출하면 내 파멸만큼은 확실하게 피할 수 있다.
'조력자 일곱 명 사이에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판단할 근거가 없으니 그 부분은 그들을 전부 모은 다음 생각하기로 했다.
'카르락스 전투에선 엄밀히 말해 주인공을 등지고 알스를 따르기로 한 거니까…. 대충 알스를 따르는 일곱 명의 가신이라 명명해 두는 게 좋겠네.'
그 일곱 가신의 게임 내 키워드는 이러했다.
─철옹성
─성녀
─구호반
─와룡
─광견
─명공
─'의용병' 일리야 안페이
─???
일곱 명 외에 알스의 탈옥을 도운 정체불명의 괴무장이 또 하나의 조력자로 등장을 하지만 그 녀석의 정체는 나도 모르는 만큼 당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하면 여덟 명에서 이제 남은 건 여섯 명….'
그랬다. 그들 중 하나.
알스의 실각에 의문을 품고 휘하 용병 부대와 함께 알스를 도우러 온 외팔의 용병.
일리야 안페이는 이미 내 곁에 있었다. 스승이란 직함으로 말이다.
내가 일리야를 만난 순간 강한 운명을 느꼈다는 게 이것 때문이었다.
"잠시 괜찮을까요."
암시장을 방문한 나는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성녀, 와룡, 구호반, 명공은 스토리의 큰 맥락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으니 급하지 않지만….'
광견과 철옹성은 다르다.
스토리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조우 이벤트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 한해선 주인공을 대신하여 내가 미리 모아 두는 편이 사정이 괜찮았다.
"흠, 한 명 말곤 처음 듣는 이름이군."
"한 명이라고 하면요?"
정보 상인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로젠버그에 대한 행방이라면 알고 있소. 며칠 지난 소식이긴 하지만 말이야."
"역시."
철옹성의 로젠버그. 그가 발견되었다.
이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로젠버그의 경우엔 특수한 사정을 지닌 인물인 만큼 조건을 갖춘 뒤 만날 수만 있으면 높은 확률로 스카우트할 수 있었으니까.
"그 정보를 듣고 싶소?"
"들려주시죠."
"5천 실란을 주시오."
금액을 지불하자 정보상은 편지 형태로 된 서류를 넘겨주었다.
"그 외에 더 알고 싶은 건 없소?"
"그러면 그란셀에 있다는 비밀 살롱의 위치를 알려 주겠습니까?"
"1만 실란. 이건 정보료라기보다는 입장료라고 생각하시오."
입장료가 제법 비쌌지만 투자금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1만 실란짜리 금화를 지불하고 비밀 살롱의 위치를 전해 들은 나는 기다리고 있는 스승에게 향해 그에 대해 말했다.
스승은 사고뭉치가 따로 없다며 어이없어하면서도 내 뒤를 따라 주었다.
그란셀의 비밀 살롱은 일종의 카지노였다.
귀족들이 많이 이용하는지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가장 돈이 많이 걸리는 도박이 체스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여길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어디 용돈 좀 벌어 볼까.'
용돈벌이 이외의 목적도 있었다.
이 세계 체스 기사들의 전반적인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서다.
"알스, 대체 무슨 짓이냐."
"무슨 짓이냐뇨? 내기 체스에 참가하려고 하는데요?"
"아니…."
스승은 골치가 아프다며 머리를 감싸 쥐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스승은 내가 호되게 패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선 한 판이라도 패배하는 게 더 놀라운 일이 될 테지만.
그렇게 무작정 대국장으로 진입을 했지만 당연히 문전박대를 당했다.
"신분이 증명된 사람이 아니면 참가할 수 없소. 물러가 주시오."
"쳇."
하기야, 개나 소나 대국을 하게 놔둘 리는 없지.
"내 신분으로는 안 되는 건가?"
"당신은…?"
"일리야 안페이. 용병 협회에 소속된 S급 용병이다."
"이, 일리야 안페이!"
흠칫 놀라는 문지기.
S급 용병이라고 하면 전 대륙에서도 2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특히 스승은 이곳 캘리퍼 왕국이 속한 대륙 동부에서 주로 활동을 한지라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귀하가 대국을 하는 거요?"
"아니, 대국은 이쪽에 있는…."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 망설이는 스승.
나는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최대한 목소리를 긁어 변조를 하고 말했다.
"용병인 웨이드라고 합니다."
아테나 워 테일즈의 무과금의 신 웨이드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좋소. 내기에 걸 금액을 말해 주시오. 그러면 대국장을 안내해 주지."
"10만 실란입니다."
2년간 없는 용돈을 모으고 모아 만든 금액이었다.
한화로 치면 대략 100만 원 정도다.
"10만 실란이면…. 21번 대국장으로 가시오."
"고맙습니다."
10만 실란이 큰 내기 금액은 아닌지 후미진 곳을 안내해 주었다.
그곳엔 퀭한 눈빛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스승을 경계했지만 스승이 아닌 내가 자리에 앉자 조금은 안도한 모습이다.
"내기 금액은 얼마로 할 거지?"
"얼마로 할 거냐니요. 당연히 10만 실란 전부죠."
"그건 내키지 않는군. 5만 실란부터 시작하지 않겠나."
5만 실란을 두 번 털리는 거나 10만 실란을 한 방에 털리는 거나 똑같을 텐데 말이지.
뭐, 기회를 여러 번 가지고 싶어 하는 심정은 이해를 한다.
"그럼 5만 실란으로 하죠."
"백은 내가 먼저 잡겠어. 먼저 앉아 있었으니까."
"좋을 대로 하십쇼."
선공으로 시작하는 남자.
5만 실란을 끝으로 도망가면 곤란했기에 대충 맞춰서 둬 주며 승리를 거두었다.
"체크."
"졌다…. 바로 다음 대국을 시작하지."
"그 전에 5만 실란은 주셔야죠."
"젠장."
툭! 그가 내던진 돈주머니를 받은 나는 스승에게 그 돈주머니를 맡겼다.
스승은 내 승리가 믿기지 않는지 말문을 잃은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눈앞에 있는 남자의 10만 실란을 털어 버린 후에는 내 투자금 10만 실란은 보관해 두고 따낸 10만 실란으로 대국 상대를 찾았다.
그것이 20만 실란. 40만 실란. 80만 실란, 160만 실란까지 가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금액이 여기까지 가자 내 대국 상대도 없어지고 말았다.
'슬슬 미끼를 물 타이밍인데.'
그러길 잠시.
"잠시 괜찮겠나."
살롱의 책임자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자네 제법 실력이 좋아 보이는데. 우리 살롱의 챔피언과 대국해 볼 생각은 없나?"
"물론 가능합니다. 시시한 대국뿐이라 지루한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군요."
"패기 넘치는 친구로군! 아주 마음에 들어. 금방 대국장을 준비하지!"
그와 함께 살롱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벤트가 일어났다는 공기.
'좋아, 드디어 물었어.'
단순 내기 체스가 아닌 베팅 체스.
진짜 도박판이 벌어지려 한 것이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7화
이 도박 체스의 룰은 간단하다.
3판 2선승으로 치러지며 베팅자들은 세 경기의 승무패를 맞히면 된다.
세 개를 다 맞히면 막대한 금액을 획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배팅에는 나도 참여할 수 있었다. 챔피언의 승리를 예측하는 것만 아니라면 가능했다.
나는 1, 2경기 내 승리. 3경기 경기 없음에 160만 실란을 모조리 때려 박고 테이블에 앉았다.
주변으로는 마치 골프 갤러리처럼 관중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숫자는 100명이 훌쩍 넘었다.
"모두 주목해 주시오! 우리 그란셀의 챔피언이 입장하오!"
챔피언은 40대를 넘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차림을 보아하니 귀족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 행색을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정말이지 간만에 대국자가 나타났군. 반갑네. 패트릭 하임즈라고 하네."
"용병을 하고 있는 웨이드라고 합니다."
"그 투구를 벗을 생각은 없는 건가? 보는 내가 다 답답하군."
"대국에서 패배한다면 벗도록 하죠."
"훗, 그거 재밌군. 그럼 시작하지. 백을 쥐겠나?"
"아뇨, 먼저 백을 쥐시지요."
내 말에 소란이 일었다.
─챔피언에게 백을 넘긴다고? 치기가 지나치군!
─어리석은 자야.
체스는 바둑 정도는 아니라도 선공에 메리트가 있는 게임이었다.
그걸 챔피언에게 양보를 한다는 건 만용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흑을 쥐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나는 가슴 한편으로는 패배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나를 패배시킬 정도의 실력자가 있었으면 했다.
투자금인 10만 실란은 따로 챙겨 놨으니 설령 160만 실란이 날아간다 해도 그다지 속이 쓰릴 것 같지 않았고.
"양보해 오는 건 거절하지 않는 주의라서 말이야.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하겠네."
폰을 움직이며 오프닝을 개시하는 패트릭. 나는 맞춰서 해 주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력을 내보이기로 했다.
과연 이 챔피언이라는 자가 얼마나 대항할 수 있는가.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체크입니다."
"…!"
눈을 부릅뜨는 패트릭.
이미 전황은 크게 기울어 있었다.
"계속해 보시겠습니까?"
"…아니, 상황을 반전시킬 묘수는 없는 것 같군. 어디로 움직이던 악수가 되겠지. 내가 졌네."
"원한다면 복기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만."
갤러리가 더없이 소란스러워졌다.
승자가 복기를 해 준다는 건 한 수 아래의 하수에게 지도를 해 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저 건방진 놈! 감히 패트릭에게 도발을!
─우연히 이긴 거야!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그런 갤러리들은 이어지는 상황에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그렇다면 부디 복기를 부탁하지."
서로 간의 넘을 수 없는 벽을 여실히 느꼈는지 숙이고 들어오는 패트릭.
'그래도 쓸데없는 자존심은 없네.'
이런 사람은 싫지 않았다.
나는 세세하게 복기를 해 주었다.
"이 상황에선 퀸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룩을 전진시키는 게 맞았습니다. 그 경우 제 비숍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을 테고, 결과적으로 침투해 들어간 나이트가 힘을 받았겠죠."
"그렇군…."
"그럼 2국을 시작할까요?"
시간도 새벽 4시를 넘어가고 있었기에 슬슬 끝을 내기로 했다.
"한 수 배우도록 하지. 백은 내가 쥐겠네."
태도가 바뀐 패트릭.
그는 모든 집중을 발휘하여 차분하게 수를 뒀지만 결국엔 한계가 있었다.
나는 차근차근 전황을 잡아 가며 그의 킹을 옭아맸다.
'이대로라면 20수 안에 끝나겠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
내 뒤에 서 있던 스승이 바쁘게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속삭였다.
"알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주변으로 불온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어."
"설마 쓸데없는 짓을…."
배당금을 주지 않기 위해 무력 행사를 할 생각인 건가.
내가 얻게 되는 배당금의 수준이 족히 천만 실란은 될 테니 배가 아픈 건 이해가 됐지만 이런 유치한 짓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뭐, 가능성 정도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스승과 함께 온 거지만.
'굳이 피를 보고 싶진 않은데.'
건달들을 얼마나 모아 온다고 한들 나와 스승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나는 멍청한 짓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살롱의 책임자를 노려보았으나 그의 표정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했다. 오히려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뭐야. 그럼 스승이 느낀 기척은 뭐지?'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불이야──!"
돌연 사방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맹렬한 불길과 탁한 연기.
순간 체스고 뭐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건물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무질서하게 출구로 뛰어갔고, 몇몇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은 쌓여 있는 돈 자루를 훔치려 달려들었다.
"알스, 어서 빠져나가자!"
"예? 하지만 배당금을…."
"그럴 시간이 없다!"
스승은 억지로 내 팔을 잡아끌더니 최단 경로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판단은 옳았다. 조직적인 방화였는지 불길이 번지는 속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그 탓에 돈 자루를 훔치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들은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이는 건물.
이변을 감지하고 출동한 경비대는 그 불이 다른 건물로 번지지 않게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허…."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필 이 타이밍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마냥 우연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스승. 어떤 의뢰를 받고 그란셀에 온 거라고 하셨죠."
"…음."
"이 상황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요?"
"아마 그렇겠지. 듣기로는 살레온 공작가를 노리는 불온분자들이 있다는 것 같아. 그 색출과 토벌을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거든. 설마 이런 식으로 과감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지만."
"뭐, 피해를 입히는 방식으로는 꽤 괜찮았다고 봐요."
모르긴 몰라도 이 살롱은 영지 내에서 최고 수준의 매출을 내는 시설일 것이다.
그것을 전소시켜 버렸으니 살레온 공작가의 입장에서도 뼈아픈 타격일 테다.
"알스, 너는 얌전히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라. 오늘은 좋은 공부를 했다고 생각하고."
"스승은 어쩌게요?"
"일을 시작해야지."
"…?"
그러기 무섭게 탓! 스승은 번개처럼 발돋움하여 누군가를 덮쳐 땅에 처박았다.
"크윽! 넌 뭐야!"
"내 이목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나? 경비대! 이놈을 구속해라! 방화를 저지른 일당 중 하나다!"
이에 경비대는 스승의 신분을 확인한 뒤 남자를 구속. 그 외에 살롱에 있던 사람들의 취조를 시작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나도 취조의 대상이었지만 스승의 안배 덕분에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소동 끝에 새벽 6시쯤 공작가 별택에 돌아온 나는 시종장 조안의 한숨을 들어야 했다.
"일라인, 대체 어디를 갔다 이제 오는 겁니까."
"무슨 문제가 있나요? 외박 허가는 받아 놨을 텐데요."
"얌전히 잠을 자고 온 게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견문을 넓히고 오라고 했지 사고를 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툭! 툭! 옷에 묻은 재를 털어 내 주었다.
"설마하니 화재가 일어났다는 그곳에 출입했던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 설마요. 바람을 타고 날아온 재가 우연히 묻은 것 같습니다."
"뭐, 좋습니다만. 하나 명심하세요. 아직 집사 교육은 끝난 게 아닙니다. 그 교육이 끝나기 전까지는 당신도 살레온 가문의 일원입니다. 모쪼록 가문에 누가 되는 행동은 삼가 주세요."
"주의하겠습니다만…. 저 같은 것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당신은 여러모로 이목을 끌어당기니까요."
조안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주위를 곁눈질했다.
그곳에는 시녀들이 숨을 죽이고 이곳을 훔쳐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아….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본택에 대한 출입도 허가되었으니 흥미가 있다면 방문해 보도록 하세요. 서재에 대한 출입도 허가됐으니 당신이 좋아하는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책을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당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시녀들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알기 싫어도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조안이 뼈를 담아 말하자 이쪽을 훔쳐보고 있던 메이드들이 부리나케 도망갔다.
"어휴, 저 애들도 참."
"뭔가 죄송하네요."
"당신이 미안해할 건 없습니다. 그럼 이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뿐한 발걸음으로 떠나는 조안. 나는 우선 방으로 돌아가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 * *
일차적인 집사 수업이 끝난 시점에 100여 명에 달하던 집사 후보생들은 30명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다.
나 역시 그냥 집에 돌아가도 상관이 없긴 했지만 아카데미 통학에 메리트가 있어 머무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슬슬 불편해지고 있었다.
"저기…. 일라인 님? 괜찮다면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별택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내게 시녀로 보이는 여성이 다가와 말했다.
그 멀리에는 다른 시녀들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괜찮지 않습니다. 모처럼의 독서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네요."
"아, 그… 네, 죄송합니다!"
얼굴을 붉히며 후다닥 사라지는 시녀. 멀리서는 쌤통이라는 듯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여간. 무슨 동물원도 아니고.'
별택에 머무르는 집사 후보생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시녀들의 일이 줄어들자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잖아.'
나는 그녀들에게 있어 일종의 우량 매물이라고 한다.
귀족이긴 하지만 실상 귀족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남작가의 사남. 확실한 신분의 격차가 있는 다른 귀족가 자제들과는 달리 단순 불장난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장래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거기에 알스의 화려한 외모까지 더해져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도무지 마음 편히 책을 읽을 상황이 아니었다.
"다들 뭣 하고 있는 겁니까! 어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세요!"
시종장 조안이 그들을 나무라고 나서야 겨우 인파가 사라졌다.
서재에 나타난 조안은 나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번에도 억울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제 탓이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녀는 골치 아프다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설마 본택의 시녀들까지 구경하러 올 줄이야…."
그녀는 작심했는지 내게 말했다.
"일라인, 독서를 할 거라면 미안하지만 본택 2층의 서재로 가 주세요. 그곳은 시녀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후우…. 그렇게 해야겠네요."
내 책임은 아니라고 해도 이 이상 소란을 일으키는 건 조안에게 미안했다.
시녀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스승의 일이 끝날 때까지는 본택의 서재에서 얌전히 지내기로 했다.
그 후부터는 아카데미 수업 시간 외에는 본택의 서재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과연 공작가인지 여러 희귀한 책들이 아무렇지 않게 꽂혀 있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일반적으로는 잘 다뤄지지 않는 변방 국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쿠라벨 성국은 엘프와 연관이 있는 국가였던 건가. 이건 나중에 업데이트될 내용에서 다뤄졌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식으로 책에서 스토리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역사서 위주로 탐독하며 지식을 쌓았다.
그러던 날이었다.
"이봐요."
책을 읽고 있는 내게 말을 거는 여자애.
언제나의 일이라고 생각한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
"이봐요. 제 말이 들리지 않아요?"
"듣지 않은 걸로 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남의 독서를 방해하는 교양 없는 분과는 말을 섞고 싶지 않거든요."
"아…!?"
"그러니 조용히 좀 해 주시겠어요?"
그녀는 어이없어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그 부분에 대해선 사과를 하죠. 하지만 당신도 문제가 있지 않나요? 그 책은 제가 읽으려고 꺼내 두었던 거예요. 제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걸 읽고 있는 것도 무례하다고 생각하는데요?"
"…?"
나는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뭔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미안한데 누구셨죠?"
"무슨…!?"
토끼눈을 뜨는 여자애. 그녀는 곧 경계하듯 말한다.
"저를 구슬리려는 새로운 전략이군요? 저는 속지 않아요!"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해 주지 않겠어요? 최근에 독서를 방해받은 일이 많아서 조금 언짢거든요."
"당신. 정말로 저를 모르는 건가요? 첫날에 정식으로 인사를 했잖아요!"
"…."
잠깐. 첫날에 정식으로 인사를 했던 여자애라고 하면 한 명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주르륵!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정작 그 이름이 떠오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그야 그때 한 10분 정도 만나고 두 달여간 마주치지도 않았으니 기억이 안 날 수밖에.
어차피 집사가 될 생각도, 커리어를 쌓을 생각도 없었기에 완전히 신경을 끄고 있던 게 문제였다.
'다른 애들이 입버릇처럼 누구누구 님이라고 했던 것 같긴 한데.'
나는 연어마냥 기억을 더듬어 해답을 찾아냈다.
"물론 잊지 않았습니다. 제이나 양이잖아요?"
"한 글자밖에 맞지 않았어요! 정말로 잊어버렸다니 믿을 수 없네요!"
"쯧. 귀찮네…."
"지, 지금 귀찮다고 한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래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읏… 말해 주지 않겠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솔직히 어쩔 거냐는 마인드였다. 다른 애들과 달리 나는 그녀에게 목적이 없었으니까. 잘 보이건 말건 상관이 없었다.
이 서재를 안내해 준 것도 조안이었고. 뭐라 할 거면 조안에게 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그녀 쪽으로 밀어 두고 다른 책을 읽기로 했다.
그녀는 입술을 앙 깨물고는 앞에 마주 앉더니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30분.
내가 정말로 책만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그녀는 질렸다는 기색이다.
"정말로 책만 읽다니…. 당신은 왜 우리 저택에 집사 수업을 받으러 온 거죠?"
"시답잖은 이유예요. 버거운 혼담이 들어왔었거든요. 이번 집사 수업은 그걸 거절하기 딱 좋은 명분이었고요."
"그런 가당치도 않은 일이…."
"하급 귀족에게는 하급 귀족만의 고충이 있는 법이랍니다. 당신이 지금 제 독서를 방해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충분히 함부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알려 주지 않을 거예요."
"흠, 그 모습을 보아하니 당신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죠?"
"…!"
정곡을 찌른 것 같다.
"한 번 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다니. 기억력도 좋으시네요."
내 말에 그녀는 더욱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 한 번이라고요? 아카데미에서 종종 같이 수업을 받았잖아요. 기억 안 나요? 조악 전투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요!"
"그런 일도 있었나요. 미안해요. 그런 사사로운 것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아서요."
수업 내용의 일부를 그렇게까지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다니. 조금 소름이 돋는다.
"사사로운 일이라고요…! 읏!"
왜인지 그녀는 자존심이 잔뜩 상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러던 때였다.
서재를 찾은 새로운 인기척.
"에리나, 여기에 있었구나. 찾고 있었단다."
알티오르 살레온이 갑자기 서재에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디! 찾고 있는 서적의 제목이 뭐라고 하셨죠?"
과연 윗사람의 앞에서까지 이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만들어진 웃음으로 말했으나 그녀는 가증스럽다며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살레온 공작에게 말한다.
"할아버님! 이 남자도 이번 곰 사냥에 데려가고 싶습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8화
살레온 공작가의 영지 그란셀의 뒤편에는 산악 지형이 있었는데 이곳에 곰이 많이 서식했다. 세 달에 한 번 정도 사냥을 해 놓지 않으면 영지로 내려와 밭을 망쳐 놓는다고.
마침 스승의 활약으로 살롱에 방화를 저질렀던 불온분자들이 소탕되어 한시름 놓은 상황이었기에 사냥하여 얻은 곰 고기를 통해 자그마한 축제를 벌이려는 모양이었다.
살레온 공작가는 그 곰 사냥을 집사 수업을 받고 있는 남자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집사가 되는 자. 필히 주인을 지켜야 하는 경우도 생기는 법. 그 일신의 무력도 필요했으니 곰 사냥을 통해 검증을 하겠다는 것이다.
하여 집사 수업에서 두각을 드러낸 12명의 남자들이 이 곰 사냥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다들 나이가 스물을 넘은 장정들로, 그들은 튼튼한 무구와 올가미로 완전무장한 채 대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잘못 걸렸네.'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끌려오다니. 귀찮기 그지없다.
다른 남자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마키아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봐 꼬맹아. 장소를 잘못 찾아온 거 아니니? 이번 일은 성인들만 참가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집사가 되고 싶어서 억지를 부렸다거나?"
"그럴 리가요. 그냥 조금 사정이 있었어요."
"흠, 부모님이 억지로라도 하라고 했나 보군."
그는 지레짐작하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사냥 도중에는 얌전히 뒤로 빠져 있는 게 좋을 거다. 오늘은 다들 살벌하거든."
"살벌하다뇨?"
"이번 곰 사냥을 통해 누가 정식으로 예비 집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 같아서 말이야. 사고를 가장해서 다른 녀석을 떨어뜨리려는 놈이 나올지도 몰라. 뭐, 모두가 그렇지. 점수를 따기 위해선 뭐든 할 테니까. 그러니 너는 휘말리지 않게 빠져 있어."
고작 집사가 되기 위해 왜 이렇게 혈안이 되었는가 싶을 수 있지만 살레온 공작가는 캘리퍼 왕국에서 두 손가락에 드는 가문이다.
적어도 집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 귀족가 자제들에겐 놓치고 싶지 않은 자리였다.
"충고 고맙습니다."
"그래. 뭣하면 내 보조를 좀 해 줄 수 있겠어? 내가 신호를 하면 올가미를 곰에게 던져 줘. 일이 잘 풀리면 용돈을 조금 줄게."
"그러면 그럴까요?"
그러나 내 역할은 이미 정해져 있던 모양이다.
"알스 일라인. 당신은 이쪽으로 오세요."
출발 직전에 에리나가 나를 호출해 수행원으로 임명한 것이다.
나 같은 꼬맹이가 곰 사냥에 참가하기는 버거울 테니 괜한 것에 휘말리지 않게끔 배려한 모양이었지만 한편으론 어제의 복수를 하려는 듯했다.
"자, 이걸 읽어 볼래요? 뭐라고 쓰여 있죠?"
"에리나 살레온…이라 쓰여 있습니다."
"맞아요. 세 번 더 소리 내서 읽어요."
이름을 잊힌 게 꽤나 충격이었는지 내게 귀여운 보복을 하고 있었다.
* * *
에리나는 곰 사냥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지 능숙하게 지휘를 해냈다.
아기 곰을 달콤한 먹이로 유도해 낸 뒤. 그걸 보고 눈이 뒤집혀 쫓아온 어미 곰을 덫에 걸어 사냥하는 방식이었다.
영리한 곰들도 아이가 위험에 처하자 덫이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사지로 뛰어 들어왔다.
그렇게 덫에 걸려 이도 저도 못 하는 곰을 올가미로 잡아 둔 다음 일제히 창으로 찔러 사살.
어미 곰의 숨이 끊어지는 모습에 아기 곰이 서럽게 울었지만 녀석도 곧 가죽이 벗겨져 도축을 당했다.
어미 곰 같은 경우에는 고기가 질겨 요리하기가 까다로웠지만 아기 곰은 그렇지 않았다.
어미 곰은 알아서 처리를 하게끔 시체 통째로 영지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기 곰은 당장 고기로 저택에서 먹는 용도였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수법이네요."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여섯 마리의 곰을 사냥하며 오후쯤에는 산 중심부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느덧 저물어 가는 해.
이 순간 나는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다.
"…저기요?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저기라고 하면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그거 그만 좀 하죠 에리나 양?"
"후훗, 네, 무슨 일이죠?"
"여기가 종착점이 아니었나요? 슬슬 해가 지고 있어요."
"맞아요.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산을 내려갈 거예요."
"그런데 왜 이런 곳에 덫이 설치되어 있는 겁니까?"
"덫이요?"
나는 조심스럽게 수풀과 흙을 헤집어 덫을 드러냈다.
밟을 경우 발목을 아작 내며 기동력을 상실케 하는 악랄한 덫이었다.
굵은 나뭇가지로 덫 중앙을 살포시 누르자 콱! 덫이 발동하면서 나뭇가지를 동강 내 버렸다.
"이 정도 크기면 멧돼지나 사슴을 잡는 용도인데요. 보아하니 몇 시간 전에 설치를 해 놓은 것 같네요. 영지에 사냥꾼들이 있나 보죠?"
"있긴 있지만…."
"그러면 주의 좀 하라고 전해 줘요. 사람들이 밟을 수도 있는 위치에 설치를 해 놨잖아요."
"아뇨. 오늘은 곰 사냥을 할 거라고 전해 놔서 사냥꾼들이 들어오지는 않았을 텐데요…."
영문을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리는 에리나.
나는 그제야 위화감으로 위장하던 위기감을 감지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핑! 화살이 날아와 대열의 옆을 지키고 있던 남자의 팔뚝에 박힌다.
"큭! 뭐야 이건!"
"습격인가!? 주변을 경계해!"
스르르륵!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수풀에서 인기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내가 지금까지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제법 실력이 있는 놈들이란 뜻이었다.
'스승이 쫓던 녀석들인가! 그렇담 그 살롱의 방화는 함정이었군!'
스승이 소탕했다는 그 불온분자들은 미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놈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다. 안일하게 곰 사냥을 나선 공작가의 딸을 납치하는 것.
'위험해. 이쪽을 잡아낼 자신감이 있으니까 기척을 드러낸 거야. 여기선 승산이 없다.'
내 머리는 백열하며 순식간에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가짜 천재라 불린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재능.
나는 남들보다 계산 속도가 월등하게 빨랐다.
바둑에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큰 효과를 보진 못했지만 수가 단순한 체스에서는 이 재능이 빛을 발했다.
속기 대국에 한정해서는 세계 톱 레벨에 육박했을 정도다.
'도망칠 수 있는 경로는….'
놈들의 목적, 화살이 날아온 방향. 기척이 느껴진 곳과 지형, 지물, 덫의 위치.
계산을 끝마친 나는 덥썩! 에리나를 들쳐 업었다.
"꺄아!?"
"꽉 잡아요!"
탓! 나는 박차고 나와 한 지점으로 뛰기 시작했다.
상대가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하기로 작정했을 경우 생기는 허술함이었다.
완전 포위라는 건 상대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작전이다. 그 정도로 많은 인원을 준비했다면 사전에 어떻게든 눈치를 챘을 테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
'놈들의 작전은 우리가 혼란 상태에 빠지는 걸 이용하는 거야.'
그러니 혼란하지 않고 신속하게 빠져나오기만 하면 간단하게 파훼할 수 있다.
"무슨…! 놈들이 빠져나간다!"
"뭐야 저놈은!? 잡아! 여자를 놓쳐선 안 돼!"
놈들은 당황하며 이쪽을 쫓았다.
저들의 목적은 역시 에리나였다.
내가 목표인 에리나를 들쳐 업고 빈틈으로 뛰어 버리자 포위 진형은 간단하게 무너졌다.
그렇게 진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나를 억지로 쫓으려 할 경우 다른 예비 집사들과 경로가 겹치며 발이 묶이게 된다.
곧바로 챙! 챙! 전투가 벌어지며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안 돼…! 저 사람들이…!"
에리나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힘을 합해 무력으로 돌파한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지만 그 정도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사람을 죽인 적이 없던 내가 어떤 혼란 상태에 빠질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탓! 탓! 나는 왔던 길을 빠르게 주파하며 산을 내려왔다.
지형은 산을 올라오면서 외운 상태였다.
일리야 스승에게 산지에서의 요령을 배웠던 것이 도움이 되고 있었다.
다만 상대의 실력도 녹록지 않은 모양이었다.
"찾았다! 이쪽이야!"
"남자는 죽여! 여자만 사로잡으면 돼!"
매복하고 있던 남자 두 명이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나는 에리나를 등 뒤의 수풀에 내던진 다음 혹시 몰라 등에 메고 왔던 단창을 꺼냈다.
"애새끼 주제에!"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쿨럭!?"
콱콱! 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목과 머리를 꿰뚫리며 절명하는 둘.
첫 살인이었음에도 내게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감흥이 없네…."
스승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사냥한 동물들의 숨통을 끊는 연습을 시켰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이들이 악인이기 때문일까.
휙! 나는 창 촉에 묻은 피를 털어 낸 다음 재차 에리나를 안아 들었다.
"다, 당신…. 어떻게 그런…."
"요즘 집사들은 다들 이 정도는 할걸요."
내가 접한 서브 컬처에서는 집사가 세계관 최강자급인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런 가벼운 농담을 던져 두려워하지 않도록 긴장을 풀어 줄 생각이었으나 곧 한계가 찾아왔다.
"…!"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살기.
나는 황급히 에리나를 던져 버리고는 몸을 뒤집어 창을 가로로 세웠다.
쿵! 몸을 짓누르는 듯한 묵직한 일격.
"오호라. 이 몸의 일격을 막아 냈다고? 제법인걸."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였다.
"하아앗!"
휙휙휙휙! 나는 쾌속의 4연격으로 놈의 급소를 노려 밀어내려 했지만 캉! 놈은 힘으로 맞받아 내며 거리를 유지했다.
'쳇! 스승이었다면 멋지게 13연격 정도는 먹였을 텐데.'
나는 아직 그 수준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해 내 회심의 4연격을 막아 낸 이놈과 나 사이에 실력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스승보다는 분명하게 약하다. 하지만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
혼자라면 도망갈 수 있어 보이긴 했지만 짐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상대가 말한다.
"지금이라도 내뺀다면 네놈은 놓쳐 주도록 하지. 이쪽의 목적은 그쪽의 아가씨거든. 걱정하지는 마. 그 아가씨의 목숨을 뺏을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은 말이지."
"잘하지도 못하는 머리 굴리기는 그만하고 어서 덤비는 게 어떻습니까?"
"흥."
내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에리나를 버리고 갔다간 훗날 살레온 공작가에서 내게 손을 써 올 테니까.
"후회하지 마라 꼬맹아!"
"당신이야말로."
휙휙휙! 목, 심장, 복부를 노리는 3연격.
놈은 왼손에 차고 있던 소형 방패로 공격을 흘리며 접근. 거력을 담아 검을 휘둘러 쳤다.
그 검에는 붉은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이걸 본 에리나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오러…!"
더없이 불길한 새빨간 기운.
"무기째로 양단해 주마!"
그러나. 내 창에서도 푸른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하앗!"
"우옷…?"
캉캉캉! 상대의 검을 밀어내는 푸른 오러의 창.
이걸 본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네 이놈 오러를…! 젠장, 살레온가에서 이미 호위를 붙여 놨던 건가. 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하아! 하아!"
무의 재능을 타고나야 이룰 수 있다는 오러의 경지.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상 게임에선 개나 소나 쓰던 것이었다.
게임상에서 무력 70 이상의 무장은 기본적으로 오러를 사용했었는데. 게임에서 알스의 개인 무력이 87 정도였다. 이것도 히든 강화 퀘스트까지 클리어를 하면 91까지 상승한다.
실제 성능은 둘째 치고 무예의 재능은 충분히 있는 셈.
"더 해볼 겁니까? 다음에는 그 목이 꿰뚫릴지도 모르는데요."
"기고만장해하지 마라 꼬맹아. 내가 오러 사용자와의 전투를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렇다면 어서 덤벼 보든가요."
"그럴 필요가 있나. 급한 건 내 쪽이 아닌데?"
"…."
역시 이렇게 나오는가.
상대는 곧장 이곳으로 달려올 수 있는 증원 병력이 있다는 부분을 활용해 왔다. 시간은 저쪽의 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쳇, 빠르게 승부를 봐야겠어!'
수 계산을 끝마친 나는 창을 꼬나 쥐고 놈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앗!"
"멍청한 놈, 명을 재촉하는구나!"
캉! 불꽃이 튀는 날붙이.
콱콱콱! 나는 중거리에서 섬전 같은 연격을 찌르며 빈틈을 만들려 했다.
찌르는 곳은 모두가 급소. 하나라도 적중하면 그대로 목숨을 거둘 수 있다.
이에 놈은 선뜻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공격을 흘리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는 캉! 더 이상 흘리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지 창을 강하게 쳐내고는 거리를 두었다.
사십여 합에 이른 결투에서 무승부가 난 것이다.
"하핫!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수에게 배운 것 같지는 않군. 네놈을 가르친 작자의 이름은 뭐라고 하지?"
"그 전에 당신의 이름부터 말하는 게 어떻습니까?"
"흥, 반쯤 죽여 놓은 다음에 물어보면 싫어도 대답을 하겠지. 그래서? 더 달려들 생각은 없는 거냐? 시간은 네놈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여유작작하게 말하는 놈.
놈에게 증원이 온다면 나는 외통수에 몰리게 된다.
지금은 일대일 대결이기에 에리나를 신경 쓰지 않고 싸울 수 있지만 다른 한 놈이 나타난다면 그게 불가능해지니까.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는 게 발목을 잡는걸.'
스승의 활약으로 그 불온분자를 소탕했다기에 정말로 깔끔하게 소탕했다고 생각한 게 실착으로 다가왔다.
그게 아니었다면 제대로 대비를 했을 것이다.
만에 하나의 상황을 대비해 보험을 들어 놓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큰 사건이 벌어질 줄은 나도 몰랐었기에 그 보험이 제때 효과를 볼지는 의문이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지금은 플랜 B로 가는 수밖에.'
팅! 나는 발치에 놓아두었던 검을 발로 차 공중에 띄웠다.
아까 죽인 놈들의 검을 챙겨 둔 것이었다.
휘릭휘릭휘릭! 공중에서 매섭게 회전하는 검.
그것을 탕! 창대로 때려 놈에게 쏘아 냄과 동시에 재차 돌진해 들어갔다.
"애새끼 주제에 너절한 수법을 쓰는구나!"
놈은 뒷걸음질하여 가볍게 피하고는 내 공격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콱! 검은 그의 앞에 박혀 들었다.
"하아아앗!"
나는 오른손의 창을 꽉 쥐어 묵직한 한 방을 찔러 넣었다. 간단히 쳐낼 수 없는 힘이 담긴 공격.
하지만 너무 동작이 컸던 탓일까. 놈이 비릿하게 웃었다.
"멍청한 놈! 죽어라!"
오히려 거리를 좁히면서 창을 피한 녀석은 검을 휘둘러 쇄골부터 오른쪽 골반까지 쪼개려 들었다.
"안 돼──!!"
에리나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육안상으로 보기에 피할 수 없는 일격.
나는 이때를 노려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9화
내 몸을 양단하려는 놈의 검격. 나는 이 타이밍을 노렸다.
텁! 조금 전에 투척하여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왼손으로 뽑아 들어 챙! 공격을 막아 낸 뒤, 미끄러지듯 놈의 우측을 돌아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오른손의 창을 짧게 잡은 다음 내 왼쪽 옆구리 쪽으로 찔러 넣는다.
'일리야류 비기! 회축!'
상대방을 끌어들여 목숨을 취하는 일리야 스승의 시그니처 기술.
"헛…!"
허를 찔린 놈은 등 뒤에서 창이 온다는 것을 본능으로 느꼈는지 재빨리 박차 피하려 했으나 푹! 창은 그대로 놈의 등을 관통했다.
"크헉!?"
"실패인가…!"
중상을 입히긴 했으나 기술이 완벽하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본래는 창을 더 높게 찔러 심장을 취했어야 하지만 녀석이 동물적인 감각으로 뛰는 바람에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창을 뽑으려 했으나 텁! 녀석은 배를 뚫고 나온 창 촉을 황급히 움켜쥐고는 놓지 않았다.
여기서 창이 뽑힐 경우 과다출혈로 인해 전투 능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붙잡혔다!?'
놈은 내 창을 붙잡은 채 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쳤다.
"크아앗!"
"쳇!"
부웅! 나는 창을 놓으며 탈출.
곧장 에리나가 있는 앞까지 후퇴했다.
"허억! 허억!"
놈은 피가 섞인 숨을 몰아쉬며 왼손으로는 창 촉 부분을, 오른손으로는 등 쪽의 창대를 잡고는 창을 뽑지 않은 채 콰직! 창대를 부러뜨려 여전히 창을 몸에 박은 채 몸을 움직이기 쉽게 만들었다.
놈이 가증스럽다며 말한다.
"네 이놈 체스터류였구나! 그 광대 놈들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광대란 체스터류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었다.
왼손에는 검. 오른손에는 창. 두 가지 무기를 동시에 다루는 무예이기 때문에 그 모습이 마치 서커스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화려함과 의외성은 독보적이었다.
"스승의 움직임의 반도 따라 하지 못하긴 했지만 이걸 피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피했다니, 이 빌어먹을 꼬맹이. 내 배에 박혀 있는 창이 보이지 않는 거냐?"
"죽일 생각이었으니까요. 죽이지 못했으면 피한 거죠."
"흥. 말은 잘하는군."
복부를 꿰뚫렸음에도 녀석의 눈빛은 흐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더 해볼 생각입니까?"
"배 좀 뚫은 것 정도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애송아. 너 같은 온실의 화초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거든."
저벅. 저벅. 접근해 오는 녀석. 그 귀신같은 기백에 에리나는 사색이 되었다.
창은 뺏겼고 검도 아까 녀석의 공격을 막아 낼 때 부러졌다.
주먹으로 놈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놈은 혹시라도 내가 도망을 갈 것을 우려해 퇴로를 점한 뒤 서서히 숨통을 조여 왔다.
"아, 알스 님. 이제는 어떻게 해야…!"
"걱정 말아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죽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
괜히 울고불고 떠들어 봐야 도움이 안 됐기에 그렇게 안심을 시켜 주자 에리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굳어 버렸다.
방법은 있었다.
혹시라도 이렇게 될 경우를 생각해 봐 둔 경로가 하나 있었다.
측방에 설치되어 있는 곰덫이었다.
이곳에는 에리나가 설치한 곰덫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놈의 경계심이 강해 이용하지 않았지만 놈도 배를 찔려 경황이 없어진 지금은 충분히 걸려들 수 있었다.
"그거 압니까? 체스터류에는 권법도 있다는 걸."
"개소리. 허세는 집어치워라."
그렇게 마지막 남은 카드를 사용하려던 때였다.
부스럭! 부스럭! 소란스러워지는 산. 그것은 아래에서도, 위에서도 들려왔다.
양측의 원군이 접근해 온 것이다.
아래에서는 소란을 눈치채고 헐레벌떡 뛰어온 살레온 공작가의 사병들이. 위에서는 아마도 도적단의 무리가.
"하, 하핫! 네놈이 졌다 꼬맹아."
놈은 지친 듯이 웃으며 말한다.
"멍청한 경비병 놈들은 이곳을 곧바로 찾아내지 못해. 하지만 내 부하들은 다르지. 내가 뿌려 놓은 표식을 충실히 따라올 거거든."
"표식…?"
그건 이상하다. 그랬다고 하기에는 증원이 너무 느렸으니까.
마치 어딘가에서 발목을 붙잡힌 것처럼.
'설마…. 그랬던 거였나.'
순간 허탈함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부러진 검을 내던졌다.
"…뭐 하는 짓이지?"
"혼자 생쇼를 했다는 걸 알게 되니 조금 허무해져서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얌전히 죽어 준다면 나야 고맙지."
"아뇨, 지금 건 저쪽 얘기입니다. 이쪽은 이쪽대로 마무리가 됐습니다. 예, 당신 말이 맞아요. 살레온 공작가의 경비병들은 한 발자국 늦고 말았죠. 하지만…."
서걱! 돌연 떨어져 나가는 놈의 오른팔.
"크아아악──!!"
"제 메이드는 남들보다 몇 발자국은 빠르거든요."
딱 달라붙는 회갈색의 옷을 입고 그림자처럼 나타난 유미르는 귀기 어린 형상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그 살기와 투기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나와 놈의 사투가 어린애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상처는 없어."
유미르는 며칠 전부터 그란셀에 머무르고 있었다. 내 집사 수업이 끝난 후에도 아카데미에 통학하기 쉽게 저렴한 숙소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오늘은 혹시 몰라 산지 아래에 대기해 달라 부탁을 해 두었었다. 이것이 내가 걸어 둔 최소한의 보험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할 줄 알았다면 저도 함께 산을 올라오는 것이었는데…."
"아니야. 오늘 일은 내가 잘못한 거니까."
"도련님의 잘못이라니요?"
"됐어. 일단 정리하자."
내 히든카드인 유미르가 나타난 이상 놈에게 더 이상의 승산은 없다.
게임상 유미르의 공식 무력 수치는 93으로 서포트 계열 캐릭터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었다.
지금 눈앞의 녀석의 무력은 잘 쳐줘 봐야 72 정도. 둘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뭐, 뭐냐 네놈은…!"
놈은 대번에 전의를 상실했다. 이미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유미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추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줘! 나는 그저…! 누가, 누가 빨리 이쪽으로 와 봐! 어서!"
그 바람이 닿았는지 부스럭하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곰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내게 말을 걸었던 마키아스라는 남자였다.
험악한 표정으로 나타난 그는 이쪽을 바라보더니 오만상을 찌푸렸다.
"쳇, 두 명이 더 있었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대뜸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유미르는 팔을 잃고 발버둥 치는 남자의 머리에 단도를 투척해 후환을 없앤 뒤 응전했다.
둘은 오러가 실린 공격을 치열하게 주고받으며 대결을 벌였으나 곧 마키아스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마키아스의 실력은 내가 상대한 놈보다는 좋았으나 그래도 유미르의 상대는 아니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일개 도적단에 이 정도의 실력자가…!"
경악하는 마키아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그만해 유미르. 저쪽은 아군이야."
척! 유미르는 이유도 묻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 내 옆을 지키고 섰다.
마키아스는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곧 진상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너. 도적이 아니었구나."
"오해할 만했죠. 이해합니다."
마키아스의 입장에선 도적의 등장과 동시에 내가 갑자기 에리나를 들쳐 업고 도망치듯 뛰어 버리니 한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그런 당신은 공작가에서 보험으로 붙여 둔 위장 호위라는 거겠네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뭐, 비슷한 거지. 조금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결국엔 나 혼자 쇼를 한 셈이었다. 거기선 가만히 버티는 게 정답이었으니까.
"미안합니다. 경거망동을 해 혼선을 주고 말았네요."
"아니, 숨기고 있던 이쪽의 잘못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가의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그중에는 살레온의 당주 부인인 아리아나 살레온이 있었다.
"에리나!"
후다닥 달려와 에리나를 끌어안은 살레온 부인은 곧 마키아스를 향해 말했다.
"딸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엘드릭 왕자님.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아닙니다 살레온 부인. 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다 이 어린 친구가 해냈죠."
마키아스라는 이름이 위장 신분이라 해도 일개 호위에게 하는 것치고는 살레온 부인의 태도가 너무 깍듯했다.
'잠깐, 엘드릭 왕자라고?'
엘드릭 슈바르쳐. 남부의 대국 뷜랑 연합 왕국의 3왕자로. 방랑 왕자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게임상의 스토리에선 주인공의 가장 큰 조력자로 나오며, 스토리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나타난다.
가챠 캐릭터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나올 경우 최고 등급인 UR은 확정적인 인물이다.
'그런 녀석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거물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 * *
상황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주모자를 찾기 위한 심문이 진행되었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엘드릭 왕자와 함께 알티오르 공작에게 불려 갔다.
마키아스라는 신분을 벗어던진 엘드릭 왕자는 특유의 푸른색 머리칼을 빛내며 씨익 웃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공작. 그러니 에리나 양을 구해 준 사례는 내가 아니라 이 어린 영웅에게 해 주면 됩니다."
"그렇습니까. 일라인 남작가의 자제가…. 흠!"
옆에는 에리나가 앉아 있었는데 뭐가 불편한지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그보다도 공작. 이번 에리나 양과의 혼담 말입니다만."
움찔하는 에리나. 곧 나를 보더니 자기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해명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역시 그 혼담은 없었던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십니까. 안타깝군요. 뷜랑과 캘리퍼의 우호를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만."
"저도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어린아이들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건 눈치 없는 행동 같아서 말입니다."
"허허! 잘도 빠져나갈 말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
"아주 빈말은 아닙니다. 전 이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합니다. 공작가의 딸과 남작가 아들의 순애보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에리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엘드릭은 나를 보더니 말했다.
"지금이란다. 지금이라면 살레온 공작도 거절하지 못할 거다. 내 얼굴을 봐서라도 무슨 부탁이라도 들어줄 거야. 설령 청혼이라 하더라도 말이지."
"그렇습니까?"
알티오르 공작은 난감하다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고, 살레온 부인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에리나도 꼼지락거림이 심해졌다.
만약 이 자리에 실질적인 당주이자 에리나의 아버지인 길버트 살레온이 있었다면 펄쩍 뛰었겠지.
"그렇다면 부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저질러 버리렴."
나는 부추기는 엘드릭을 살짝 흘겨본 뒤 말했다.
"사례로 500만 실란을 주십시오."
순간 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
"…너무 많으면 300만 실란도 괜찮습니다만?"
체스 내기에서 날아가 버린 돈을 만회할 좋은 기회였다.
음, 역시 보상은 현금으로 받는 게 최고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살레온 공작가에선 선뜻 300만 실란을 내주기로 했다.
그쪽의 입장에서도 이게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쥐뿔도 없는 남작가의 사남에게 장녀를 시집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휴우!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있었네."
300만 실란이 공작가에게 있어 별거 아닌 금액이긴 했어도 우리처럼 가난한 남작가에겐 큰돈이었다.
"훗, 아직 어린데도 수완이 좋구나."
"…?"
엘드릭 왕자였다.
"잠깐 이야기를 좀 할 수 있을까 꼬마야? 그러니까…. 남작가의 사남이라고 했었지?"
"일라인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래. 일라인."
엘드릭은 인적이 드문 장소로 자리를 옮겨 용건을 말해 왔다.
나도 그에 대해선 흥미가 있었다.
그는 알스가 배신자로 낙인찍혔을 때에 누군가의 함정일 수도 있다며 섣부른 내분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이었다.
알스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는 호의적이었고, 더구나 주인공에게 있어 후원자이자 멘토나 다름없는 인물인 만큼 그가 배신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내게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흥미가 있었으나 그 내용은 정말이지 시답잖은 것이었다.
"너는 재능이 있어 보이는군. 저 그란셀의 재녀라 불리는 에리나 살레온보다도 말이지."
"재능…입니까?"
"그래, 높은 위치에서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능력 말이야. 어때, 내 아래에서 일해 볼 생각 없니? 널 소홀히 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느닷없는 스카우트 제의.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것도 모르고 엘드릭은 말을 이어 갔다.
그는 거절을 당한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작위를 잇지 못하는 남작가 사남의 출셋길은 바늘구멍이나 다름없다.
왕자의 측근으로 발탁된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지금 집사 수업을 받고 있는 귀족가 자제들에게 같은 제안을 했다면 열이면 열 수락을 했겠지.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이긴 했지만 조건이라고 하니 들어 보고 싶었다.
"무엇이죠?"
"너의 그 냉혹한 행동 방침은 고쳐 줘야겠어."
그가 지적한 것은 내가 에리나를 구출할 때 나머지 사람들을 가차 없이 버린 일이었다.
"난 대를 위해 소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미친 짓을 혐오해. 나와 함께 일하려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해선 안 된다."
"…."
"너의 그 행동은 마치 체스를 보는 것 같았어.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말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 가든 상관하지 않는 거지."
그제야 나는 모든 일이 이해가 갔다.
왜 내가 에리나를 들쳐 업고 도망갔음에도 엘드릭이 바로 쫓아오지 않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군요. 그때 당신은 다른 예비 집사들을 돕고 있었던 거군요."
"그래.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공작가의 여식 하나를 살리자고 나머지가 모두 죽을 수는 없는 거야."
"풉! 푸하하!"
"…그건 비웃음인가?"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당연히 비웃음이죠. 당신 정말 엄청나군요. 상상도 못 했어요. 그 방랑 왕자가 이런 얼빠진 사람이었다니."
"…!"
그러자 엘드릭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거한이 앞으로 나섰다.
"하찮은 자가 감히 왕자님에게! 그 입을 찢어발기겠다!"
일렁이는 살기.
엘드릭이 말한다.
"물러나라 크란스."
"하지만 왕자님…!"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게다가 이곳은 뷜랑이 아니야. 이곳에서 나는 그저 평범한 청년일 뿐이지. 조금 모욕당한 걸로 살기를 흘리지 마라."
"윽…. 죄송합니다."
크란스라 불린 남자는 나를 흘겨보고는 살기를 거두었다.
'크란스라고 하는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는데. 다음 스토리 업데이트에서 등장하는 인물인 건가?'
자세히 알 수는 없어도 기세로 보아 상당한 강자임에는 분명했다.
"내 부하가 무례를 저질렀군. 사과하지."
"아뇨, 무례를 범한 건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보다 내가 머저리라는 건가…. 이유를 들어 봐도 될까?"
"말 그대로입니다. 당신은 멍청해요. 스스로의 모순도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모순? 어떤 부분이 말이지?"
"당신이 말했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건 용납지 못한다고."
"그래. 내 흔들림 없는 철학이지."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는데요? 아마 이전에 당신이 한 선택들도 그런 게 아니었을 테죠."
"뭐라고?"
"그도 그럴 게 왕자님은 에리나를 희생시킨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까?"
"…!"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게 정의. 다시 말해 대의라고 생각했어요. 그 대의를 위해 작은 하나. 공작가의 딸을 버렸죠. 당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행한 거예요. 틀립니까?"
엘드릭은 말문이 막혔는지 침묵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취하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하죠. 당신은 대를 취하지 않고 소를 지켰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겁니다."
"그…건."
"물론 옳고 그름은 본인이 정하는 거죠. 당신이 그 철학을 바탕으로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자유예요. 다만 그 선택을 남에게 강요하는 건 정말이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이제 이해했습니까? 왜 당신을 멍청하다 했는가를."
"…."
인정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논파를 당했다는 건 자각하고 있는지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이걸로 왕자님의 제의에 대한 대답도 함께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군."
"예, 그럼 이만."
떠나가는 내 등 뒤로는 엘드릭의 뚫어지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지금에야말로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각인했다는 듯이.
* * *
이번 유괴 미수 사건은 왕국을 크게 뒤흔들었다.
이번 일을 사주한 것이 왕국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헬리안 공작가 측이었다는 게 심문에서 밝혀진 것이다.
헬리안 공작이 직접 사주한 것이 아니라 그 계파에 속한 귀족이 단독으로 벌인 소행이긴 했지만 그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이건 대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귀족계는 살레온 공작 계파와 헬리안 공작 계파로 완전히 이분되어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우리처럼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귀족들에게도 눈치껏 줄을 서라는 강압이 왔다.
─살레온인가 헬리안인가. 선택하라!
아버지는 고심 끝에 헬리안 공작가를 선택하게 되었다.
헬리안 공작가가 군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생인 나는 물론이고 삼남인 퍼지, 장녀 율리아까지 군부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우리의 출셋길이 막히지 않게끔 헬리안 공작가에 줄을 선 것이다.
그 탓에 나는 더 이상 집사 수업을 받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그란셀의 중등 아카데미에도 다닐 수가 없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애들은 쫓겨나듯 떠나야 했을 정도.
다만 내 경우에는 에리나를 지켰다는 공로가 있었기에 비교적 정중하게 배웅을 받았다.
나는 보수와도 같은 300만 실란을 받은 즉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올 때는 비루한 일두마차를 타고 왔지만 갈 때는 이두마차 정도는 끌고 갈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유미르에게 마차 수배를 부탁하고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잠깐 기다려요."
시종장 조안과 함께 나타난 에리나는 사용인을 시켜 대뜸 자루 하나를 내게 넘겨주었다.
"이건 뭡니까?"
"창이에요. 당신의 것은 그때 저를 지키려다 부러졌잖아요? 이건 우리 영지의 장인에게 부탁해서 만든 거니까 그때 당신이 가지고 있던 것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자루를 풀어 창을 꺼내 보았다.
검은색으로 잘 빠진 철창이었다. 무게는 조금 무거운 듯했지만 골격이 자리 잡으며 근력도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 딱 알맞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에리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당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어요?"
"이제 와서 집사가 되라고요? 우리 가문은 이미 헬리안 쪽에 붙었는걸요. 다음에 만날 땐 으르렁거려야 할지도 몰라요."
"당신 같은 말단 귀족과는 관련 없는 권력 싸움이에요."
"뭐, 그렇긴 하죠. 그래도 거절할게요. 제 목표는 집사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크거든요."
"크다면 어느 정도로 큰 거죠?"
돌연 눈을 빛내며 캐물어 오는 에리나.
"왜요?"
"됐으니까 말해 줘요."
"글쎄요."
음, 주인공의 옆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한다고 하면.
"군부의 장군 정도일까요."
"장군…. 그 정도라면 아버님도…."
에리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들어 웃어 보였다.
"꼭 이루도록 해요. 그 목표."
"예, 고맙습니다."
창을 갈무리하여 마차에 실은 나는 문득 시가지에서 사 두었던 물건을 떠올렸다.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사 놓은 부채였다.
그때는 돈이 얼마 없었기에 부채를 사 놓았지만 이제는 돈이 생겼으니 돌아가다가 더 좋은 선물을 준비하기로 하고, 이 부채는 창에 대한 보답으로 에리나에게 주기로 했다.
"이걸… 저에게?"
"필요 없으면 버려도 돼요. 그럼 잘 지내요. 엇챠! 가자 유미르."
마차에 올라탄 나는 유미르에게 출발 신호를 보냈다.
에리나는 부채를 품에 꼭 안은 채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0화
그 집사 수업이 끝난 후 영지로 돌아온 나는 헬리안 공작령에 위치한 줄리아 아카데미로 소속을 옮겨야 했다.
뜬금없이 전학을 해야 했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애들이 많아 별다른 탈은 없었다.
나는 차근차근 일곱 가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가며 중등 아카데미 1학년을 끝마쳤다.
그렇게 15세가 되어 성인이 된 내게도 의무가 생겼다.
영지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이었다.
마음 같아선 내내 일리야 스승과 무예 훈련을 하고 싶었지만 스승이 얼마 전 용병 의뢰를 맡고 자리를 비운 탓에 시무룩한 채로 영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도련님, 벌목소에서 인력 충원을 원한다고 합니다. 이건 현재 인력과 급여 현황입니다."
"먼저 정리를 해 놨구나. 음, 얼마 있으면 겨울이니까 벌목꾼이 더 필요하긴 하지. 우선 무작정 더 뽑는 것보단 제재소나 목공소에서 벌목꾼을 차출해 보자. 그쪽엔 벌목꾼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걸로 오늘 업무는 끝입니다. 수고하셨어요 도련님."
"휴우! 고마워 유미르. 네가 없었으면 난 쓰러졌을지도 몰라."
일도 도와주지, 대련 상대도 해 주지, 제때 간식도 가져와 주지.
게임에서나 보던 만능 메이드 캐릭터가 실제로 곁에 있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 있자니 아버지가 내 집무실에 노크를 했다.
"잘하고 있는 것 같구나."
"아버지. 어서 오세요. 무슨 용무라도 있으세요?"
"아니, 일은 없다. 그저 격려를 하고 싶어서 말이다."
"예?"
"영지민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더군. 일 처리가 공정하고 매끄럽다고 말이다."
"그냥 원칙대로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뭘."
"그게 어려우니까 그런 거지. 그보다 곧 네 성인식이 다가오는구나. 원하는 선물이라도 있니?"
"새삼스럽게 그런 걸요. 그냥 책이라도 하나 선물해 주세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미리 말하면 김이 샐 지도 모르겠지만 파티에 입고 갈 수 있는 연미복을 준비하기로 했단다. 너도 이제는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가 됐으니까."
"입고 갈 파티장이 있긴 할까요?"
귀족들의 생활이라고 하면 화려한 파티를 상상하고는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내세울 게 없는 가문은 도무지 파티에 초대되지를 않기 때문이다.
장남인 맥스 형도 파티에 초대되는 건 1년에 한 번 정도.
그것도 규모가 있는 파티는 아니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쨌든 사관실습이 끝나면 멋들어지게 성인식을 하자꾸나."
"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곧 있을 성인식. 형식적일 뿐이지만 귀족에게 있어선 대단히 의미가 있는 행사라고 한다.
가족 외에도 스승이나 유미르와 같은 지인들에게도 축하 선물을 받을 예정이었으니 나로서도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아카데미의 사관실습이 먼저였다.
아카데미의 사관생은 성인이 되면 갖가지 체험을 하게 된다.
전쟁은 이론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여 성인이 된 후에는 정기적으로 현장에 파견을 가게 되는데, 그 현장은 대부분 최전선이었다.
우리 줄리아의 아카데미 사관생들은 이웃 국가 알바드 왕국과 대치전을 벌이고 있는 서부 전선으로의 파견이 결정된 상태였다.
실제 전장이기에 위험부담이 있긴 했지만 20세 이하 사관생들의 경우 포로가 되어도 조건 없이 석방을 해야만 하는 대륙 조약이 있다.
하여 보통은 이 조약에 의거하여 사관생들의 목숨에 최소한의 보험이 걸린다.
물론 전투 중에 죽을 수도 있고,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숨긴 채 죽일 수도 있으니 완전한 보호막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사관생들은 실제 전투가 벌어지면 뒤로 빠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렇다 해도 정신 바짝 차리렴."
어머니는 떠나려는 내게 몇 번이나 주의를 주더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꼭 끌어안고 놔주지를 않았다.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만 됐소. 알스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 마음 편히 보내 주시오."
"하지만 당신…."
"괜찮다니까."
아버지의 위로에 겨우 나를 놓은 어머니는 부적이라도 건네주는 것처럼 투구를 하나 건네주었다.
"내 오라비가 사용하던 물건이란다. 아주 능력 있는 장교였지. 분명 너를 지켜 줄 거란다."
"하하, 어머니. 전 장교로 가는 게 아니에요. 개인 투구를 사용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래도 챙겨 갈게요. 혹시 모르니."
회갈색의 투구는 매일매일 손질을 했는지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투구를 짐 속에 넣고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관실습이 이루어지는 폴딕으로 향했다.
* * *
알바드 왕국과의 대치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부 전선 폴딕.
"제군들. 폴딕 전선에 온 걸 환영한다."
그렇게 말한 것은 군의 부사령관인 아이언하트 군장이었다.
"부디 이곳에서 배워 가는 것이 많기를 바란다. 일단 각자 부대 배정은 해 놓았으니 확인하고 부대원들과 인사를 나누도록. 그리고 내일은 군영 회의가 있을 거다. 너희 중 일부도 그 군영 회의에 참가할 거야. 원칙대로라면 너희에게도 발언권은 있다만… 조용히 하고 있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상."
우리 줄리아 아카데미의 사관생 74명은 각각 부대 배치표를 전달받았다.
나는 다목적 보병부대인 제 5보병대에 배치가 되었다. 자대 배치를 받았던 옛일이 떠올라 기분이 묘하다.
어쨌든, 배치를 받은 나는 다른 사관생들과 함께 움직이려고 했으나 몇몇 특혜를 받는 녀석들이 있었나 보다.
아이언하트는 가지고 온 쪽지를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케스퍼 밀리아스, 조슈아 헤럴드. 너희 둘은 남아라. 장군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신다."
밀리아스 후작가의 신동과 헤럴드 백작가의 차남. 유력 귀족 가문의 두 명은 특별대우를 받는 모양이었다.
나야 당연히 떨거지였다.
과거 체스 대결 이후에 눈에 띄는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기도 하고, 살레온 공작가의 유괴 미수 사건에서도 내 실력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당시 오러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걸 직접 본 건 에리나 한 명밖에 없었다.
살레온 공작가도 그 유괴 미수 사건에 대한 세부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기에 나에 대한 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젠장, 유력 귀족가 녀석들은 다르다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관생 동기. 자작가의 배닝스가 내게 말해 왔다.
"알스, 넌 몇 번 부대야?"
"제 5보병대. 다목적 부대라는데?"
"으악, 꽝을 뽑았네. 말이 다목적 부대지 용병들이 주축이 된 부대잖아. 용병들은 귀족 사관생을 아니꼽게 봐서 명령에 잘 따르지 않는다고 그러더라고."
"그래? 그러는 넌 어디 배치됐는데?"
"난 제 2궁병대야. 비교적 쉬운 부대지. 나 같은 사관생은 물품 정비만 신경 쓰면 되니까."
나는 배닝스와 함께 군영을 돌아다니며 체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진짜 전쟁터인가.'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봤지 실제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렇게 부대의 표식들을 확인하며 걷자 제 5보병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각을 잡고 5보병대의 부대장에게 인사를 하려 했지만.
"…어?"
그런 반응밖에 할 수가 없었다.
"어서 와라 알스. 기다리고 있었다."
5보병대의 대장인 일리야 스승이 나를 맞이해 주었기 때문이다.
"스승!? 어째서 이곳에…!"
놀랄 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는 용병으로 전쟁터에 나갔었으니까.
현재 캘리퍼 왕국에서 대치전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이 서부와 북서부 전선뿐. 스승이 이곳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훗, 설마 네가 이곳으로 실습을 오게 될 줄이야."
"무서운 우연이네요. 하물며 스승의 부대의 배치되다니요."
"아니, 네가 이 부대에 배치된 것만큼은 우연이 아니다."
"예?"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우리 막둥이 왔구나!"
나를 등 뒤에서 덥석 껴안는 여성.
가문의 넷째이자 장녀인 율리아 일라인. 행정 장교인 그녀가 나를 이 부대로 추천한 것이다.
"누님…. 퍼지 형이 이곳에 있는 건 알았지만 누님까지 있는 줄은 몰랐네요."
"후훗, 아버지한테 말하지 말라고 내가 그랬거든.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말이야."
"나 참."
누나 율리아는 언제나 쾌활한 점이 장점이었지만 단점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위 시선은 아랑곳 않고 나를 잡고는 놓지를 않았다. 이런 부분은 어머니를 무척 닮았다.
"우리 막둥이. 6개월 만에 만나는 건가? 더 멋있어졌네!"
"누님.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막둥이는 하지 말아 줘요."
"왜 그래. 이제 성인이 됐다고 그러는 거야? 안타깝지만 막둥이는 영원히 막둥이란다! 억울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힘을 내 달라고 해!"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볼을 비벼 오는 그녀를 겨우겨우 떼어 낸 후에는 자초지종을 설명받았다.
"뭐 별거 있니? 사관후보생들이 현장실습을 온다기에 준비를 해 놓은 거지. 내가 하는 일이 뭐겠어?"
"부대의 행정 장교… 그렇게 된 거군요."
스승과 나의 관계를 알고 있던 누나는 나를 이 다목적 부대에 배치시켰다.
더구나 이곳에는 누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제해라 율리아. 알스가 곤란해하잖냐."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것은 가문의 삼남 퍼지 일라인이었다.
율리아와 쌍둥이인 그는 500명의 부대를 이끄는 부대 장교의 위치에 있었다.
"퍼지 형도 있었군요."
"그래, 어서 와라 알스. 제 5보병대에 온 걸 환영한다. 꽤 독특하고 거친 부대이지만 그만큼 배워 가는 것도 많을 거야."
"예, 많이 배우고 가겠습니다."
지인들과 가볍게 회포를 푼 뒤에는 퍼지 형에게 부대의 현황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다.
다목적 부대인 제 5보병대는 500여 명의 용병과 500여 명의 정규군으로 구성된 1천가량의 부대였다.
명목상의 부대장은 스승으로서 군으로 치자면 보병대장의 지위에 있었다.
쿡쿡!
율리아 누나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일리야 씨는 정말 대단하셔. 여성의 몸으로 2년 만에 S급 용병의 위치까지 올라선 건 최초였거든. 국가에서는 핵심 장교로 정식 임관을 제안하고 있다나 봐. 그런데도 네 개인 교사를 계속해서 해 주고 있으니… 으이구, 우리 막둥이는 정말 복 받았구나!"
"하하…."
나로서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듣기로 어떤 후작가에서 지금 우리 가문에서 받고 있는 임금의 20배를 제안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나중에 보답을 해야겠지.'
스승과는 오래도록 같이할 생각이었기에 지금 받은 은의는 전부 갚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부대의 현황을 보고받은 뒤에는 전황에 대한 보고를 이어받았다.
대치하고 있는 알바드 왕국군의 숫자는 자그마치 1만.
그것도 상당한 정예로 알려진 제 3군단이었다.
"그걸 상대하는 우리 군의 숫자도 1만. 하지만 수비하는 입장인 우리의 지형이 훨씬 좋아. 그래서 알바드 녀석들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어. 이러나저러나 두 달째 대치를 하는 중이다."
퍼지 형은 지겨운 상황이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지형도를 살펴보던 나는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알바드의 제 3군단이라면 4장군 유시스 골드레이가 지휘하는 군대 아닌가요? 그의 장기는 수비라고 알고 있는데요."
"잘 알고 있구나. 공부를 하고 왔니?"
"아, 예. 그런 셈이죠."
"네 말이 맞다. 적 진영에는 그 유시스가 있어. 그래서 우리 군도 용병을 대거 고용하거나 하여 신속하게 대처를 했던 거지. 뭐, 그런 것치고는 별달리 움직임이 없어서 상부에서는 알바드 왕국의 의도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 중이야."
"그 의도가 뭐죠?"
"아직은 몰라. 우리도 파악하려고 노력 중인 상황이야."
유시스 골드레이.
아테나 워 테일즈에선 R등급의 책사 캐릭터로서, 강화 비용이 적어 가성비가 좋은 캐릭터였다.
물론 초반에나 가성비가 좋지, 후반에는 여러모로 애매해서 아무도 쓰지 않았었다.
핸디 플레이를 즐기던 나 같은 사람이나 사용하던 캐릭터다.
'그 유시스의 주요 전략은 철벽같은 방어….'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수비력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히 이상하긴 해.'
알바드 왕국은 침공을 하기 위해 군사를 끌어모았다. 그런데도 수비에 특화된 군대를 파병하다니.
노골적으로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1화.
군에 합류한 우리 사관생들은 날마다 부대를 전전하며 현장을 실습했다.
행정 부대가 하는 역할과 중요성. 척후 부대의 운용 방법, 병기의 관리 방법 등등.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교육받았다.
그 일정마다 몇 가지 테스트가 있었는데, 여기서 노골적인 띄워 주기가 자행되고 있었다.
"─하여 많은 숫자의 말을 이동시킬 때에는 가장 먼저 목초지를 수배해 둬야 하지. 자칫 실수를 저지르면 병사들이 먹어야 하는 식량을 말에게 줘야 하는 경우가 생겨 버리니까."
보급 부대 장교인 요슈아는 우리 사관생을 둘러보더니 내 옆의 배닝스를 지목했다.
"그럼 그쪽의 너. 말을 이동시키기 가장 까다로운 지형이 어디라고 생각하지?"
"음…. 목초지를 말씀하셨으니 목초지가 자라지 않는 황야일까요?"
"단편적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런 지형을 이동할 때에는 당연히 말에게 먹일 식량을 준비해서 가겠지. 게다가 황야는 말들이 달리기 좋은 지형이기 때문에 여차할 때에는 빠져나오기도 쉽거든. 다음 너. 대답해 봐라."
요슈아는 평민 사관생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귀족 사관생들에게만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분위기가 고조된다 싶으니 케스퍼 밀리아스를 가리켰다.
케스퍼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한다.
"늪지대입니다!"
"정답이다. 늪지대는 사막이나 산지 이상으로 말이 이동하기가 어려운 곳이지. 말들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가 일쑤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은 많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먹게 뒀다간 탈이 나거든. 위생이 쉽게 나빠져 말 사이에 전염병이 도는 경우도 있고. 곳곳에 말을 공격하는 맹수들이나 벌레들도 많아. 그렇기에 늪지대에서 말을 이동시킬 때에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아주 잘 대답했어. 역시 밀리아스의 신동이라 불릴 만하군."
그러더니 채점표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케스퍼 녀석을 띄워 주기 위한 뻔한 쇼였다.
뭐, 이 쉬운 걸 틀려먹은 다른 애들도 어지간하지만.
모든 실습이 이런 형식이었다. 케스퍼 녀석 이외에는 전부 들러리.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오늘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네가 율리아의 동생이구나. 이거, 율리아가 자랑할 만한걸. 자그마한 충고지만 제 3행정부대로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쪽엔 남자에 고픈 녀석들이 몰려 있거든.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아하하…."
"그래. 그럼 네가 원정 보급 시의 주의 사항을 말해 보겠어?"
그래도 퍼지 형과 율리아 누나의 인맥 덕분에 나도 괜찮은 채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뻔하디 뻔한 실습의 끝이 다가왔을 때였다.
돌연 어수선해지기 시작하는 군영.
몇몇 장교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병사들도 그 낌새를 챘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설마."
이곳을 떠나기 위해 군장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부랴부랴 일리야 스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스승도 이변을 감지했는지 본부 막사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 그 방향에서 병사가 달려와 스승의 앞에 부복했다.
"보고드립니다! 알바드의 제 1군단, 제 2군단이 북서 전선을 기습적으로 침공 중! 빠르게 동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1군단과 2군단이 움직였는가…."
스승조차 마른침을 삼킬 정도로 알바드의 1, 2군단은 최정예 군단이었다.
그들이 북서 전선을 기습 침공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장군께선 내일로 예정되어 있던 군영 회의를 지금으로부터 1시간 뒤에 개최한다고 합니다! 5보병대의 장교들은 모두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겠다."
스승은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다른 장교들은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1, 2군단이 침공을 했다니…! 전면전을 펼친다는 뜻이잖아!"
"진짜로 전쟁이 일어나는 거야!?"
알바드와는 계속해서 적대관계를 유지했지만 근 20년간 전면 전쟁의 양상은 벌어지지 않았었다.
소규모 국지전은 있었어도 대대적인 침공은 없었다.
하여 이번 서부 전선에서의 충돌 또한 대치만 하다 끝이 날 거라 생각했지 정말 전면 전쟁이 벌어질 거라 생각한 장교들은 많지 않았다.
내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설마 이것이 대륙 전체를 전쟁의 업화로 몰고 가는 도화선은 아니겠지.'
게임 속에서도 어떠한 이유로 전쟁의 불길이 퍼졌는가는 나와 있지 않아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전면 전쟁.
나로서는 운명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본부 막사에 모인 100여 명의 장교들.
그 중심에는 부사령관 아이언하트 군장과 총대장이자 캘리퍼의 제 3장군. 모르간 롯시가 있었다.
"정말로 쳐들어오다니 건방진 알바드 놈들…!"
모르간은 시종일관 투덜거리며 전황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퇴역까지 2년이 남아 있던 그에게 이 전쟁은 불쾌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뒤룩뒤룩 붙어 있는 볼살을 흔들거리며 전황을 종합하고 있었다.
"장군님, 어찌해야 할까요."
"어쩌긴 뭘 어째!"
아이언하트 부사령관이 묻자 모르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키고 있어야지 않나!"
북서 전선은 이곳에서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보내기로 마음먹는다면 곧장 지원군을 파견할 수도 있었다. 강행군을 펼친다면 하루 안에는 도착할 수 있다.
"지원군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바드의 1, 2군단이 동시에 기습을 가해 왔다면 제아무리 듀난 장군이라도 버텨 내지 못할 겁니다."
"군부에서도 녀석들의 양동작전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고 있었을 거야. 게다가 지원 요청은 아직 없었지 않나!"
"그야 기습을 당했으니까요! 그럴 겨를이 없었겠지요!"
"뭐가 됐든 지원 요청은 없었다! 총군영에서 지원 지시가 오지 않는 한 나는 움직이지 않을 거다!"
언쟁을 벌이는 둘.
장교들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문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군영의 지시를 기다릴 여유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지원을 보내야 합니다!"
"안 돼! 애초에 우리 지원이 의미가 있겠나! 북서부 전선은 평야를 두고 대치를 하고 있어 부대의 규모가 훨씬 크다! 우리가 3천가량의 병력을 지원한다고 해도 전황에 큰 변화를 줄 수는 없어!"
"그건 해 봐야 아는 일이지요! 적의 후방이나 측면을 파고 들어갈 수 있다면 충분히 전황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3천의 병력으로 몇만에 달하는 병력에 무작정 들이받으라고? 그렇게 위험한 작전을 총군영의 지시 없이 할 수는 없다!"
지원을 보내길 극구 거부하는 모르간.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1만과 대치 중인 우리 군에서 지원군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야! 우리가 지원을 보내는 즉시 눈앞의 상대가 공격해 들어올 게 뻔하지 않나!"
"지형은 우리가 우세합니다! 능히 7천의 군사로 상대 1만 병력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지요! 그러니 3천의 병력을 당장 북서 전선으로 급파해야 합니다!"
"끄응…!"
보아하니 모르간은 상대 장군인 유시스와의 전술 대결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싸우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모르간의 선택은 전술적으로 옳아.'
모든 전술의 기본이 되는 것.
상대보다 많은 병사를 준비하고. 더 높은 지형. 더 견고한 위치를 사수하는 것이다.
모르간은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첫 번째 요소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어 했다.
병법적인 개념이 없는 장군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란 하나의 전투만 봐서는 안 된다. 전투에선 승리할지 몰라도 전쟁에선 패배해 버리니까.
"안 돼! 이 부분은 결론이 났다. 본부의 요청이 없는 한 북서 전선에 대한 지원은 없다. 이제부터는 차후 전략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허…!"
탄식하는 아이언하트.
모르간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지원군 파견을 거부하고 다음 논의 사항으로 넘어갔다.
지원군은 그렇다 치고,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가.
그때 일리야 스승이 손을 들며 말했다.
"공격을 가는 것은 어떻지?"
공격이라는 말에 웅성이는 막사.
"북서 전선을 일시에 침공한 상대 또한 이쪽으로 지원군을 보낼 여력은 없다. 우리가 같은 1만으로 눈앞의 상대를 쳐부순다면 역으로 상대가 궁지에 몰리게 될 터."
아이언하트가 스승의 말을 받았다.
"유시스 골드레이와 전면전을 펼치자는 뜻인가?"
"그래."
"분명 일리는 있지만…."
아이언하트조차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호전적인 선택이었다.
"같은 숫자의 대결이야…. 부하들이 대체 얼마나 죽어 갈지 예측조차 안 되는군."
"흥, 죽음을 두려워해서 대체 무슨 전쟁을 하겠다는 거지?"
"무, 물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상대도 그걸 알고 그 유시스 골드레이를 이곳에 세운 것 아니겠나?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 상대에게 부딪치는 것도 무척 어리석은 일이지. 안 그런가? 일리야 용병대장."
이번에는 모르간 장군도 아이언하트와 같은 생각인지 끄덕끄덕! 바쁘게 동조를 했다.
부하의 목숨을 걱정하는 아이언하트와는 달리 이쪽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모르간은 곧 꽥꽥 소리를 질렀다.
"각하다! 각하! 애초에 용병 주제에 함부로 떠들지 말아라!"
"흠. 알겠다."
스승은 그럴 줄 알았다며 팔짱을 끼고는 알아서 하라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율리아 누나가 "저 돼지 자식, 또 일리야 씨를 무시하네."라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던 그녀가 내게 시선을 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막둥아? 왜 그러니?"
"…."
나는 전황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스승의 부대에 있었던 간이 전황도와는 달리 부대의 움직임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는 본부 막사의 전황도.
3일 전에 있었던 유시스 부대의 게릴라 움직임과 그에 맞선 우리 부대의 대응. 북서 전선을 기습한 상대의 의도까지.
전황도를 해석하고 있던 나는 상대의 진짜 작전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이건….'
이 움직임대로라면 상대의 목적은 따로 있다.
나는 손을 들어 발언하려 했으나 텁! 퍼지 형이 내 손을 잡아챘다.
"가만있어라 알스. 지금 무언가를 말해 봤자 체면만 구길 뿐이야. 말할 기회를 주지도 않을 테고. 정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회의가 끝난 후 아이언하트 부사령관님에게 말하도록 해. 그분은 그래도 말이 통하는 분이니까."
"…알겠습니다."
퍼지 형의 말이 옳았다.
나는 이 상황에서도 밀리아스 후작가 신동의 의견은 어떠냐느니 헤럴드 백작가의 자제는 어떻게 생각하냐느니,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군영 회의가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 *
내 생각을 들은 아이언하트 부사령관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걱정을 하게 만들었나 보구나. 아카데미 사관생이 그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했다니. 하지만 걱정 말아라. 적 부대가 그렇게 움직였다면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아뇨, 그 척후 라인은 사흘 전에 상대가 취했던 유격 작전에서 망가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미안하다. 네 말을 일일이 듣고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구나. 곧 핵심 장교들을 모은 2차 군영 회의가 있거든. 이쪽이 진짜 군영 회의인 거지. 아무튼, 네 걱정은 잘 알겠다. 밤도 늦었으니 이만 가서 쉬어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그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도 분명 있었고.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부대로 돌아온 나는 얌전히 개인 정비를 시작했다. 아카데미 사관생들은 혹시나 전투가 있을 수도 있으니 내일 오후에 군을 이탈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스승이 내 막사에 들어와 말했다.
"그쪽은 뭐라 그랬지?"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전혀 듣지를 않네요. 저도 그러려니 하기로 했어요."
"…음. 그렇다면 나에게라도 자세히 들려다오."
"예?"
"알스, 나는 너를 신뢰한다. 지난 3년간 너만큼 영특한 사람은 보지 못했어. 네 또래의 어린애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야. 너는 내게 있어 특별하다."
"스승…."
"나는 네 의견을 무시하지 않아. 오히려 적극적으로 따를 생각도 있다."
"따른다고요…?"
"우리 용병 부대는 어느 정도의 자율성이 보장되어 있거든. 네가 미리 말을 해 준다면 최소한의 준비는 해 놓을 수가 있어."
스승은 그럼에도 내가 망설이자 미소 지으며 말한다.
"나도 나를 따르는 용병들의 목숨을 떠안고 있다. 그들의 목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입장이지. 나는 그 최선이 네 생각을 듣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부디 네 생각을 말해 다오."
"그렇다면야…."
나는 최근 보여 준 적 부대의 움직임의 의미와 최종적인 목적을 스승에게 전달했다.
스승은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장 부대의 재편을 시작했다.
사실상 내 휘하에 스승의 부대가 들어오게 된 셈이었다.
스승의 도움을 받으며 용병 부대의 지휘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잡게 된 나는 가슴을 옥죄는 긴장감을 느꼈다.
이건 평소에 하던 무예 대련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도합 2만이 넘는 목숨이.
그렇기에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칠 수가 없었다. 스승의 막사에서 전도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호출을 받은 퍼지 형이 기척을 내고는 막사로 들어왔다.
"일리야 씨. 저를 부르셨다고요."
"음, 어서 와라 퍼지 부대장. 알스, 네가 설명을 해 다오."
"알스…? 네가 왜 이 시간에 일리야 씨의 막사에 있는 거니?"
나는 미간을 찌푸리는 퍼지 형에게 이번 작전에 대한 것을 설명하였다.
처음에는 표정을 찌푸렸던 퍼지 형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나도 협력하겠다. 하지만 알스, 이것만큼은 명심해라. 나는 네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협력한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럴 가능성이 있기에 동참한 것뿐이야. 네 말대로 대비를 한다고 해서 부대에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니까."
퍼지 형은 내가 우쭐해할 것을 걱정한 모양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좋습니다."
"그래, 지금부터 내 보병 부대는 다음 장군님의 명령이 있기까지 일리야 안페이 용병 대장의 지휘하에 들어가겠다. 그리고… 나와 친분이 있는 부대 장교들이 두 명 정도 더 있다. 그들도 설득을 하는 게 좋겠어. 정말 그런 식으로 일이 벌어진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으니까."
그러면서 퍼지 형은 신속하게 두 명의 부대장을 스승의 막사로 불러들였다.
한 명은 나도 안면이 있는 요슈아 보급 장교였고, 또 하나는 펠릭스라는 이름의 보병 대장이었다.
요슈아는 보급&궁병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펠릭스는 중갑 보병대를 지휘하는 부대장이었다.
둘은 퍼지 형의 사관 동기라고 한다.
"이런 시간에 갑자기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거야 퍼지. 나는 2차 군영 회의 때문에 피곤하다고."
"미안해. 간과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간과할 수 없는 일?"
"설명은 이쪽…. 내 동생이 할 거다."
퍼지 형은 일을 벌인 이상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게 일임했다.
나는 전황도를 가리키며 설명을 하였다.
두 사람이 보인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가능성이야 있지 않겠어?"
요슈아는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가능성만큼은 인정했고.
"젠장, 또 애새끼의 헛소리였냐."
펠릭스는 짜증 난다며 혀를 찼다.
"왜 헛소리라는 겁니까? 펠릭스 부대장님?"
"흥, 뭐. 요슈아의 말마따나 가능성이야 있겠지. 그래서? 모든 군사들을 이 오밤중에 깨워 놓자고? 꼬맹이의 비관적인 망상 때문에?"
비웃음을 보내는 펠릭스.
나는 결심을 하기로 했다.
"아뇨, 망상이 아닙니다. 상대는 분명 그렇게 할 거예요. 그렇지 않고선 이 전술적 움직임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책임을 지기로 한 만큼 이제는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며 물러나지는 않기로 했다.
"오호, 자신감은 좋다만…. 이쪽은 말이야. 아까부터 밀리아스의 신동이니 헤럴드 백작가의 장남이니 뭐니 하는 코흘리개들한테 신나게 휘둘렸거든."
평민 출신 펠릭스에게 귀족 꼬맹이의 현장을 모르는 훈수는 듣기 불편했던 모양이다.
"네 말이 틀렸다면 어떻게 대가를 치를 생각이냐 꼬맹아."
겁박을 하는 거라면 상대를 잘못 골랐다. 나는 그 눈을 정면으로 받으며 대답했다.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얌전히 이쪽의 지휘 아래로 들어오세요."
"…."
펠릭스는 잠시 숨을 죽이더니.
"하하하! 재밌는 꼬맹이로군. 퍼지, 네가 말한 일라인 가문에서 나온 천재라는 게 이 녀석이냐?"
무슨 소리일까. 평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퍼지 형이 내게 그런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고?
퍼지 형은 멋쩍은지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거기까지만 해라 펠릭스. 나중에 거하게 한잔 살 테니 얌전하게 일리야 씨의 지휘 아래로 들어와."
"흥, 좋아. 이 꼬맹이는 둘째 쳐도 일리야 안페이는 믿을 만하니까. 부대를 준비시켜 놓지."
"그러는 김에 아이언하트 부사령관님을 설득해 줄 수는 없을까."
"아서라. 꼬맹이의 불확실한 작전을 따르는 것도 못마땅한데 심지어 그걸 아이언하트 부사령에게 말해 설득하라고? 차라리 혀 깨물고 죽으라고 말해."
"어쩔 수 없군."
이걸로 준비된 총 병력은 2천. 부대의 1/5가량이 되었다.
이걸 사관생인 내가 지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란셀에서 사용했던 용병 웨이드의 신분을 다시 한번 사용하기로 했다.
명목상의 위치는 일리야 안페이 용병 대대의 책사였다.
부대의 하급 장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투구를 쓰고 나선 나는 작전의 개요를 설명하며 하나를 분명히 했다.
"상대가 그리 움직이기로 결정했다면 결전의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내일의 새벽… 아니, 이제 자정이 지났으니 오늘 새벽이 되겠군요."
아침. 동이 트는 것과 동시에 공격을 해 올 것이 분명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2화.
동이 트는 새벽.
땅! 땅! 땅! 땅!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부대에 비상이 떨어졌다.
"적습! 적습! 빨리 진형을 잡아라!"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막사에서 밤을 지새워 회의를 하고 있던 모르간은 허겁지겁 막사를 뛰쳐나와 주위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뛰쳐나온 아이언하트도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보다 군영의 후방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럴…수가."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캘리퍼군은 분명 요지를 점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산지를 끼고 진영을 구축하여 고지를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더 많은 병력은 준비하지 못했어도, 더 높은 지형, 더 견고한 지형을 장악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기에 마주 보고 있는 알바드군도 공격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덕을 올라가면서 공격을 해야 했기에 전술적인 조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진형은 고지이긴 해도 최대 고지인 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진영의 후방에 위치한 산악 지형이 더 지대가 높았다.
그래도 크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던 것이 적군이 우회할 만한 경로에는 척후 라인이 쫙 깔려 있어 먼저 잡아낼 수 있었다. 그 경우 상대의 옆구리를 찌르면 일망타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지형이.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버버 입술을 떠는 모르간.
그 산악 지대에 2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자신을 내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님! 정면에 있던 유시스 골드레이의 부대도 곧 사정거리에 들어옵니다! 준비된 협공입니다!"
앞뒤로 협공을 당하게 된 캘리퍼의 군대는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아이언하트 부사령관이 서둘러 군을 정비하려 했지만 적의 공격이 더 빨랐다.
피피핑! 후방의 고지대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유격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남자는 허둥지둥하는 캘리퍼의 군대를 보며 조소했다.
"쉽군. 너무 쉬워서 하품이 나올 정도야."
그는 알바드 왕국의 제 2군단장이자 핵심 장군 중 하나인 길리아스 멜번이라는 자였다.
"알티오르 살레온이 퇴역한 뒤 캘리퍼는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됐다는 선생님의 말이 맞았어."
북서 전선을 기습적으로 총공격한 그 행동.
그건 기만일 뿐이었다.
그 행동을 취해 상대의 주의를 돌리고 유격군을 편성하여 남하시킨다.
지금 이 부대는 북서 전선을 기습한 제 2군단에서 극비리에 떨어져 나온 유격군이었다.
유시스의 군대가 캘리퍼의 척후 라인을 교란한 것을 이용해 은밀히 남하하여 뒤를 잡은 것이다.
"선생님의 계책이 읽기 어려웠다고는 해도 장군된 자. 언제든 성동격서의 계책을 경계하고 있어야 하거늘. 흥, 어쩌겠나 졸장은 얌전히 죽어야지. …윌리엄!"
"옛!"
"저쪽에 보이는 저것이 대장기다. 집중사격하여 무너뜨려라."
"그리하겠습니다!"
처처처처척!
일제히 모르간이 있는 곳을 조준하는 궁병들.
모르간은 화살로 까맣게 물든 하늘을 마주해야 했다.
그것이 그가 본 생애 마지막 광경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