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이 떨어진 캘리퍼 군영.
나는 서둘러 혼란을 추스르고 있었다.
"당황하지 말아요! 침착하게 방패를 들고 화살을 막아 내는 겁니다! 방패가 없는 병사들은 지형지물에 엄폐하세요! 적들의 화살은 절대 무한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견뎌 내면 화살은 그칠 거예요!"
상대는 은밀히 강행군을 펼쳐 남하해 온 군대다. 그러니 무거운 보급 물자까지 같이 가져오지는 못했을 거다.
'결국 병사 한 명당 많아 봤자 화살 한 통의 분량밖에 쏘지 못해.'
그것을 적절히 나눠서 쐈다면 꽤 오랜 시간 화살을 쏘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상대는 대장 막사가 있는 곳으로 집중사격을 펼치고 있었다.
나는 화살이 떨어지는 시점을 조율하며 장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요슈아, 당신은 부대의 연락망을 빠르게 복구해 줘요! 펠릭스, 당신은 혼란해하고 있는 선진을 가다듬어 주세요! 곧 유시스 골드레이의 부대가 공격해 들어올 겁니다. 절대로 선진이 간단히 무너져선 안 돼요!"
"아, 알겠다!"
"쳇, 이젠 반말이냐고. 인마들아! 화살을 주의하며 선진으로 간다!"
그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내가 예측한 그대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퍼지 형은 부상병들과 행정병 등의 비전투 병력을 수습해 줘요."
"알았어."
후다닥 떠나는 퍼지 형.
그리고 이때.
'화살의 잔량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살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집중사격으로 인해 대장 막사 부근은 초토화가 되었지만 그만큼 화살의 소모도 격렬했다.
'상대가 틈을 보였어.'
만약 내가 상대의 지휘 장군이었다면 화살을 통한 공격 시간을 더 늘렸을 것이다. 그래야만 산을 올라오고 있는 유시스의 주력 군대가 시간을 더 얻었을 테니까.
지금은 장군을 비롯한 장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화살을 너무 빨리 소모했다.
이건 내가 파고 들어갈 틈을 제공한 것이었다.
"스승, 저를 따라와 주세요. 적의 허를 찌르겠습니다."
"그래. 일리야 용병대, 출진한다!"
나는 스승의 부대와 함께 자리를 박차고 신속하게 목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도중에 스승이 물었다.
"알스, 궁금한 것이 있다."
"뭔가요?"
"어떻게 상대가 동이 트는 시점에 공격을 할 거라 확신한 거지?"
"그거 말인가요. 그야 상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요."
상대는 북서 전선을 기습했던 군대에서 유격군을 편성하여 남하시켰다.
이건 시간이 지날수록 들킬 가능성이 높아지는 군대다.
"그러니 밤을 이용해 어둠을 타고 강행군을 펼쳤을 거예요. 그런 반면 도착하자마자 공격하기에는 아직 날이 어두웠다는 문제가 생기죠."
"문제?"
"야전을 펼치게 될 경우에는 상대에게도 골치 아픈 상황이 펼쳐지거든요."
바로 공격 타이밍을 맞추기 힘들다는 점이다.
공격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선 필히 신호를 보내야 하는데 오밤중에 보낼 수 있는 효과적인 신호 수단은 불을 이용한 것밖에 없다.
그리고 이건 당연하게도 들킬 가능성이 무진장 높고, 설령 한다고 해도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지 않을 수가 있다.
그만큼 야전은 변수가 많다.
"반면 동이 트는 시점이라는 부분은 맞히기가 쉽죠. 유시스 골드레이의 군대가 먼저 움직일 수가 있으니까요."
"그렇군…! 날이 밝으면 후방의 지형에서도 유시스군의 움직임이 보이니까."
"예, 그러니 가만히 숨어 있다가 먼저 움직인 유시스군의 움직임에 맞춰 공격을 진행한 거죠. 그러면 협공의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출 수 있어요. 후방의 군대는 화살을 이용해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날이 밝은 뒤에 공격을 하면 지금처럼 대장 막사를 정밀하게 조준하여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요."
하나의 움직임에 숨겨져 있는 수많은 의도.
그것을 정확하게 읽어 내야만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서 판을 짜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상대는 거기서 사소한 실수를 하고 말았어요."
"사소한 실수?"
"화살을 너무 빨리 써 버린 거죠.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는 이런 식으로 의도치 않은 일격을 얻어맞게 되는 겁니다."
전장의 좌측을 우회하여 돌아간 나와 스승의 용병 부대는 선진을 두들기기 위해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유시스군의 측면을 점하고 있었다.
"이대로 돌파해서 상대의 허리를 끊겠습니다. 이렇게만 하면 상대는 크게 기세를 잃을 거예요."
"좋아, 뒤로 빠져 있어라 알스."
"아뇨, 스승에게 모든 짐을 맡길 수는 없어요."
지금 이 전장에는 전투 능력이 없는 율리아 누나도 있다.
당장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긴 했지만 패전을 한다면 그것도 소용이 없다. 최소한 패전만큼은 면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휘릭! 나는 창을 돌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갑니다!"
"일리야 용병대! 돌격한다!"
우오오오!! 돌격해 들어가는 정예 용병 부대.
"뭐, 뭐야!?"
"적습! 측면에서 온다! 크억!"
캘리퍼 군영 전체가 화살 공격으로 인해 발이 묶여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던 정면의 군대에게 우리의 존재는 악몽과도 같았다.
"하아아앗!"
콱콱콱콱!!
번개 같은 4연격에 목을 꿰뚫려 절명하는 적 병사들.
이전 도적들을 죽일 때와는 달리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그럴 때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계속해서 돌파를 감행했다.
콰직! 그것은 선진을 두들기려던 유시스 군대의 측면이 얻어맞는 소리이자, 길리아스 멜번에게는 자신이 구상하던 로직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대체 뭐냐 저 부대는."
길리아스는 저세상의 것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노려보았다.
언덕을 올라오고 있는 유시스 부대의 측면을 찌르고 들어가는 부대.
숫자는 고작 500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효과는 대단했다.
정면의 군대가 언덕을 타고 올라오던 것이었던 만큼, 상대가 옆을 비집고 들어오자 병력이 경사로로 인해 빠른 속도로 무너지면서 진형에 큰 혼란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습을 당한 캘리퍼군에 이런 기밀함이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길리아스는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설마 선생님의 계략을 눈치채고 역으로 이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가?"
일부러 기습을 허용한 뒤 반대로 허를 찌른다.
그렇다면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진심으로 혼란해하고 있는 상대의 군을 보면 명백하다.
조금 전의 화살 공격으로 고위 장교들이 모조리 죽은 탓에 지휘 체계가 혼란해진 탓이다.
아무리 그래도 고위 장교들을 모조리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런 작전을 사용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건 몇몇 부대의 독자적인 움직임이라는 건가…. 젠장, 화살을 빠르게 소모한 것이 실착이 되었나."
설마 그 사소한 실수를 파고들어 오는 인물이 있을 줄이야.
길리아스는 자신의 실패를 빠르게 인정하고 그다음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위험하군. 무척이나."
결국 알바드의 주력 군대도 언덕을 타고 올라오고 있는 유시스 골드레이의 1만 군대다.
그 주력군이 올라오지 못한다면 이곳을 장악할 수 없다.
"상대가 진형을 고쳐 세우기 전에 처리해야겠어."
이제부터는 속도전이었다.
길리아스는 2천의 병사들을 모두 이끌고 산을 내려와 캘리퍼 진영의 후방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 * *
"하아앗!"
콰콰콰콱!
목을 관통당해 허수아비마냥 쓰러지는 알바드의 병사들.
상대의 피로 인해 피칠갑을 하고 있던 나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아, 허리를 완벽하게 끊었어!'
언덕을 타고 오고 있던 상대는 이런 식으로 허리를 끊기면 재차 진군을 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사이 선진의 방어 태세를 고쳐 세우면 전황은 급격히 우리가 유리해진다.
병력은 상대가 더 많지만 여전히 지형적인 이점은 우리에게 있으니까.
"스승! 상대 선진이 등을 돌리려 하고 있어요! 이제는 물러나야 해요! 이대로 있다간 고립될 수도 있어요!"
마치 무희처럼 검과 창으로 춤을 추듯 상대를 도륙하고 있던 스승은 내 신호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길을 열겠다!"
스승은 등에 메고 있던 자루에 검을 집어넣고 양손으로 창을 꼬나 쥐었다.
나는 합을 맞추며 반대편까지 길을 뚫어 전장을 벗어났다.
"허억! 허억!"
"이젠 지쳤어요 일리야 대장!"
정면의 전장을 이탈하자 뒤를 따르던 용병들은 일제히 탈진하여 주저앉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조금만 더 힘내 줘요. 곧 후방에 있던 군대가 우리 본진을 공격해 들어올 거예요. 그걸 받아쳐야만 전황을 끝낼 수 있습니다."
"…."
용병들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중 하나가 참지 못하겠는지 묻는다.
"그런데 형씨는 누구쇼?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까부터 일리야 대장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아는 사이인 거 같긴 한데."
"저는…."
나는 지금 어머니가 챙겨 주었던 회갈색의 투구를 끼고 있었다.
매의 형상을 본따서 만든 날렵한 형태의 투구는 얼굴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다.
좋다고 정체를 만천하에 밝히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여기서 이름을 날렸다간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가 전부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배신자가 나를 일찌감치 주목하여 경계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무리 못해도 주인공과 만나기 전까지는 이름을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체스터류 창검술마저 봉인하고 창 한 자루만을 쓰고 있던 것이다.
"당신들과 같은 용병입니다. 웨이드라고 불러 주세요. 일리야 씨에게는 과거에 창술을 가르침받은 적이 있습니다."
"웨이드? 우리 용병단에 그런 녀석이 있었나."
"최근에 들어온 신인이거든요. 그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쉬었어요.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얼마 쉬지도 않았다고! 젠장, 험하게 굴리기는."
투덜대면서도 착실히 뒤를 따라오는 용병들.
일반 병사에 비하면 이런 면에서 확실히 터프했다.
전투에 잔뼈가 굵은 그들은 어지간한 강행군에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3화.
전장을 다시 우회하여 본진으로 돌아온 나는 예상대로 후방을 두들기고 있는 상대 부대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지, 진형을 갖춰라! 당황하지 말고…크헉!"
가장 앞에서 병사들을 쓸어버리고 있는 적의 장수. 나는 그가 누구인가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적갈색 갑옷과 황금색 투구… 강격의 호른인가!'
그는 알바드 왕국의 장군 중 하나로 제 2군단장 길리아스 멜번의 오른팔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을 지휘하는 건 길리아스 멜번인가.'
강격의 호른은 SR 캐릭터. 길리아스 멜번은 SSR 캐릭터였다.
둘 다 등급에 비해 애매하게 성능이 별로인 캐릭터들인지라 내가 애용하는 캐릭터들이기도 했다.
그런 캐릭터들과 맞대결을 펼쳐야 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 일리야 용병 부대가 지휘하겠습니다! 장교들을 당장 지휘하에 들어오도록 하십시오!"
내 외침에 부근의 군 장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가 정면의 군대를 파고들며 전장의 국면을 뒤집은 건 그들도 눈으로 봐 알고 있었기에 얌전히 지시에 따라 주었다.
고위급 장교들이 적의 화살 공격에 모조리 죽어 버린 것도 지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괜히 지휘권에 대한 고집을 부리는 일이 없어졌으니까.
"앤디 스마이슨이다. 현재 임시로 제 2보병대를 이끌고 있다. 지금은 일리야 안페이의 지휘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좋습니다. 일리야 대장을 대신하여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웨이드라고 합니다. 이제부턴 제 지시대로 움직여 주세요."
나는 스마이슨의 부대를 각각 300, 400, 300의 세 부대로 떼어 내 좌측, 중앙, 우측에 배치하여 간격을 두고 제자리를 사수해 진군해 들어오는 상대를 강하게 받아치게끔 만들었다.
이건 일종의 포석. 전술적인 쐐기를 만든 것이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상대는 자리를 사수하고 있는 이 세 부대와 부딪히게 된다.
이때 진군해 들어오는 상대는 이런 식으로 쐐기의 간격 사이로 병력을 흘리게 된다.
그렇게 흘러온 병력을 뒤에 위치한 우리 용병 부대가 쓸어 담는 것이 이 전술의 요지였다.
'병사들의 숫자가 의미 없이 줄어들면 곤란해지는 건 그쪽일 텐데.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거지 길리아스 멜번?'
상대가 정말 그 길리아스 멜번이라면 무언가 대책을 내세울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나타난 세 개의 전술적 쐐기.
길리아스의 표정은 더없이 싸늘해졌다.
기세 좋게 돌격해 들어갔다고는 해도 결국엔 2천의 병력으로 9천에 가까운 병력에게 공격을 가한 것이다.
이는 기세를 잃은 유시스의 정면 군대가 재정비를 하고 다시 공격해 들어올 틈을 벌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잘되었다.
혼란해하는 상대를 부장 호른이 거칠게 공격하며 상대를 박살 냈다.
그것이 돌연 나타난 부대에 의해 수습이 되었다.
전술적 쐐기를 설치한 것은 아픈 곳을 찌르는 수였다.
그걸 무시하고 그대로 돌파를 하자니 병력이 간격 사이로 흘러나가며 진형이 무너졌고, 협공하여 부수고 지나가자니 발이 묶이는 결과가 된다.
'누구냐. 대체 누가 저곳에 있는 거냐.'
정확하고 기밀한 전술의 정수.
책사 재목이 없기로 유명한 캘리퍼 왕국군에게 이런 전술적인 반격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어쩔 수 없군. 호른! 우측 날개에 위치한 쐐기를 빠르게 박살 내 버려라! 그 후에 군의 힘을 응집해 뒤에 있는 부대를 치겠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상대를 짓누른다.
"우오오오옷!"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치고 들어간 호른.
그 일격에 병사 서넛이 단번에 양단을 당했다.
"히이이익!"
"사, 살려 줘!"
"이걸 대체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패닉에 빠진 병사들.
호른은 씨익 웃으며 수급을 취하려 했지만 그때.
"핫!"
"크윽…!?"
호른은 자신의 목을 노리는 창 촉을 피해 다급히 뒤로 뛰어야 했다.
"네놈은 뭐냐!"
"…."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성.
왼손에는 검. 오른손에는 창.
그 모습에 호승심이 끌어오른 호른이 씨익 웃었다.
"오호라. 첩보에 있던 그대로로군. 네놈이 일리야 안페이로구나!"
"그러는 너는 강격의 호른이로군."
눈빛을 주고받는 둘. 일리야가 고한다.
"경애하는 제자의 첫 출진이다. 기념으로 그 목을 받아 가도록 하겠다."
"크핫!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캉! 격돌하는 둘의 무력은 호각이었다.
힘에서는 호른이 미세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기교에서 일리야가 그를 압도했다.
그렇게 전술적 쐐기를 부숴 줘야 하는 호른의 발이 묶여 버리자 길리아스는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호른의 발이 묶였나…. 그렇담 어쩔 수 없군…."
그는 결국 비장의 수를 꺼내 들고야 만다.
* * *
상대는 역시 호른을 주력으로 하여 전술을 타파하기 위해 나왔다.
'걸려들었군.'
상대의 실수는 이쪽이 가진 패를 알지 못함에도 성급하게 호른을 내보냈다는 것이었다.
'잡았어…!'
나는 곧바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우측과 중앙의 쐐기가 간격을 좁혀 하나의 부대가 되어 힘을 응집했다.
그와 동시였다.
"퍼지 보병대! 돌격한다!"
우측에서 나타난 퍼지 형의 부대가 상대의 본군. 그러니까 길리아스 멜번이 있을 곳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힘을 합친 우측과 중앙의 쐐기 부대가 퍼지 형의 부대와 발을 맞춰 눈앞의 상대를 격파해 내고 진격하기 시작했다.
"체크."
무방비가 된 킹을 향해 힘을 모아 진군하는 폰. 이걸로 상대 본진은 쓸린다.
병력은 우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황을 바꿔 줄 만한 무력을 가진 강격의 호른도 스승에게 묶여 있으니 길리아스가 있는 본군은 이 공격을 감당해 내지 못한다.
버티다가 죽거나 후퇴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일단 후방의 군대를 처리하면 오롯이 선진에만 신경을 쏟을 수 있다.
선진의 방어 라인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으니 좋은 지형을 고수하면서 상대를 물러나게 하면 이 전쟁은 승리하게 된다.
'끝났다.'
이걸로 율리아 누나의 안전도 보장이 된다.
그렇게 안심을 하던 때였다.
"이, 이봐 웨이드 대장. 뭔가 이상해!"
"예?"
"이쪽으로 오고 있는 부대가 있다고!"
"쐐기 부대의 간격 사이로 흘러나온 잔병이에요. 처리해요."
그러나 그 군을 요격하러 간 부대는 쾅!! 오러가 실린 할버드에 의해 거칠게 부서졌다.
할버드를 휘두르는 남자. 나는 그 모습을 알고 있었다.
"길리아스 멜번…!?"
"크하핫! 이 몸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나 보지?"
용병들을 쓸어버리며 내게 일직선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길리아스.
그는 정면에 있는 호위병들을 부수고 내 앞에 섰다.
"호른의 발을 보기 좋게 묶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반대로 말하면 네놈의 주력도 발이 묶였다는 뜻!"
확실히. 그로 인해 일리야 스승의 발 또한 저곳에 묶이고 말았다.
그렇게 서로의 본진이 약해진 상황에서 길리아스는 본진을 박차고 나와 역으로 나를 치러 온 것이다.
"우리 본진은 네가 보낸 부대로 인해 결국 무너지고 말겠지만 지금 여기서 네놈의 목을 치면 전황은 달라지겠지. 아닌가?"
"…그래서?"
"뭐?"
"당신이 저를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 2군단장. 길리아스 멜번."
"훗, 그러는 너는…누구냐. 얼굴을 드러내라."
"거절합니다."
"좋다, 목을 쳐서 직접 확인해 주마! 흐아아앗!"
검은색의 불길한 오러를 휘감은 할버드의 날. 나는 오러를 극한으로 끌어낸 창으로 그 공격을 맞받아쳤다.
기기긱! 오러와 오러의 부딪힘.
내 오러를 본 길리아스는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단순한 책사인 줄 알았더니… 오산이었군. 더 재밌어졌어!"
"하앗!"
캉캉캉! 쾌속의 3연격을 기민하게 막아 내는 길리아스.
그는 여타 병사들과 달리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과거 살레온 유괴 사건에서 상대했던 도적 우두머리와도 차원이 달랐다.
'과연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길리아스는 책사 캐릭터이지만 그 무위도 상당했다.
게임에서 그의 개인 무력은 78.
책사 캐릭터 중에선 중상위권이었다.
'지금의 내 무력이 78을 넘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그로 인해 지금 이 대결은 내가 어느 수준에 있는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증명하는 자리가 되어 있었다.
"흐아아앗!"
떨어져 내리는 반월의 날.
아무리 오러를 두르고 있다 한들 얇은 창대로 두꺼운 할버드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기기긱! 나는 창대를 기울여 상대의 힘을 흘리며 반격을 가하고 있었다.
"에잇! 촐싹거리지 마라!"
"하앗!"
그렇게 40여 합이 지났을까.
나는 점점 힘에 부쳐 오는 것을 느꼈다.
'역시 창 하나만으로는 힘든가…!'
하지만 여기서 체스터류를 선보였다간 훗날 정체가 밝혀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만큼 체스터류를 사용하는 무인이 적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아. 전황은 내가 유리해.'
시간은 내 편이었다.
일단 퍼지 형의 부대가 상대의 본진을 완전히 무너뜨리면 상대도 퇴로가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시점부터는 길리아스가 나를 죽인다고 한들 전황은 뒤집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와아아아──!"
환성이 오르고 있는 좌측 쐐기.
미루어 보건대 일리야 스승이 승기를 잡은 모양이었다.
'버티기만 하면 끝난다!'
그리고 그걸 길리아스도 알고 있었다.
조급해진 길리아스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맹공을 펼쳤지만 내 교묘한 수비를 돌파해 내지는 못했다.
이윽고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한다.
"윌리엄! 지금이다!"
누군가를 호출하는 길리아스. 그와 동시에 나는 스산한 살기를 감지했다.
핑! 대기를 찢으며 쏘아진 화살이 심장을 노려 날아온 것이다.
'오러가 담긴 화살!'
실력자가 하나 더 숨어 있던 것인가.
그 오러의 수준이 높은 편은 아니어서 휘릭! 창을 휘둘러 쳐 낼 수 있었지만 이 틈을 이용해 길리아스가 공격을 가해 왔다.
"죽어라──!"
풀스윙으로 휘둘러진 할버드.
마땅히 피할 공간은 없었다.
"쳇!"
나는 혀를 차며 철컥! 등에 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뽑았다.
캉!! 할버드의 거력을 막아 내는 푸른 오러.
길리아스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왼손의 검…! 네놈 체스터의…!"
녀석이 그렇게 아연해하는 순간.
휙! 나는 이미 반격에 들어가고 있었다.
검을 사선으로 세워 할버드를 머리 위로 흘리며 그 아래로 몸 전체를 통과시켰다. 그러고는 놈의 측면을 파고들어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빌어먹을!"
녀석은 완전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른쪽 어깨를 이용해 목을 막았다.
푹!! 어깨에 꽂히는 검.
단번에 끝을 내지는 못했지만 이걸로 승부는 났다. 나는 오른손의 창을 이용해 녀석의 심장을 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이 길리아스 멜번을 얕보지 마라──!!"
꽉! 녀석은 할버드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는 그 무거운 할버드를 왼손 하나만을 이용해 휘둘러 쳤다.
"크윽!?"
나는 오른손의 창을 세로로 땅에 박고 막아 내려 했지만 콱! 할버드에 실린 힘은 내 철창을 휘게 만들고는 기기긱! 휘어진 창대를 타고 내 머리로 올라왔다.
"…!?"
캉!! 투구의 옆 관자놀이를 스치는 할버드의 날.
지이이잉! 아찔해지는 시야.
나는 의식이 날아가려는 것을 꾹 참으며 꽉! 어떻게든 검을 쥐고 있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녀석이 추가타를 먹이지 못하도록. 콰직! 상대 어깨에 꽂혀 있는 검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크아아악──!"
이 고통에 길리아스는 할버드를 손에서 놓치게 된다.
서로가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나는 윌리엄이라는 자의 화살 공격이 또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난입한 것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어, 어깨가…!?"
"난 괜찮다! 그보다 어서 저놈을 처치해라!"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강격의 호른은 거대 도끼를 들어 나를 덮치려 했다.
나는 어떻게든 그 도끼를 피하려고 했지만 조금 전의 일격으로 가벼운 뇌진탕이 일었는지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큰일이다…!'
떨어져 내리는 도끼.
캉! 이걸 일리야 스승이 난입하여 막아 주었다. 스승이 등장하자 호른의 표정이 구겨졌다.
창과 검을 교차하여 도끼를 받아 낸 스승은 투기를 폭발적으로 상승시켰다. 그와 함께 무기에 담긴 진득한 오러가 폭주하듯 파도쳤다.
"미안하다. 저격수를 정리하느라 한발 늦고 말았어. 괜찮나?"
"큭…. 전 괜찮습니다."
"넌 쉬고 있어라. 이놈들은 내가 정리해 놓겠다."
본격적으로 호른을 밀어붙이는 스승.
초반 대결은 비교적 호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호른은 스승의 기교를 감당해 내지 못했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호른이 상대하기에 일리야 스승은 너무나도 변칙적이었다. 상성에 있다고 할까.
호른의 갑주는 거의 파괴되어 너덜너덜해져 있던 반면 스승은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이를 보고 길리아스는 이 이상의 희망이 없다고 봤는지 어깨를 부여잡고 일어나 외쳤다.
"젠장… 퇴각한다! 호른, 너는 후방을 맡아라. 내가 퇴로를 열겠다."
"옛!"
후퇴하는 길리아스의 유격군. 그는 이를 악물며 내게 으르렁거렸다.
"그 얼굴은 두고두고 기억해 두마 애송이…!"
"…!"
나는 무심코 얼굴을 만졌다. 할버드에 빗맞은 것으로 인해 투구가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서둘러 투구를 주워 착용했기에 다행히 호른과 길리아스 외에 제대로 본 인물은 없었다.
"알스… 아니, 웨이드. 놈들을 쫓아갈까."
"저걸 쫓아서 섬멸하려면 시간이 너무 끌려요. 추격은 퍼지 형에게 맡겨 두고 우리는 선진을 구하러 가는 게 나아요."
"내가 가지. 넌 이곳에서 쉬고 있어라."
"…그래야 할 것 같네요. 휘유!"
풀썩!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뇌진탕의 영향도 있었지만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탓이었다.
나는 주변 상황을 정리하며 전황이 종료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4화.
기습적으로 서부 전선을 급습한 알바드 왕국.
알바드의 제 2군단장 길리아스 멜번과 제 3군단장 유시스 골드레이의 협공을 받은 캘리퍼군은 장군 모르간 롯시를 비롯해 핵심 장교들이 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용병 부대의 활약과 몇몇 장교들의 분전으로 인해 승전을 거두었다.
"──라는 것이 궁정에 올라갈 전후 보고서인 모양이다."
퍼지 형이 담담히 말하였다.
"말도 안 돼! 요 녀석에 대한 게 전혀 없었다고!?"
나를 가리키며 분노를 터뜨리는 펠릭스 보병대장. 그는 이번 전공을 인정받아 진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전 괜찮아요 펠릭스 씨."
오히려 나에 대한 것이 없어서 좋았다.
"아니, 내 동생에 관한 건 있었어. 엄밀히 말하면 알스는 아니지만."
"제가 아니라뇨?"
"용병 웨이드. 일리야 용병대장과 같은 수준의 전공으로 평가받는 모양이야. 군부에선 두둑한 사례금을 준다고 하더군."
"어… 그건 일리야 스승이 대신 받아야겠네요."
설마 웨이드의 신분이 명성을 얻을 줄이야.
'이 부분은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겠어.'
주인공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까지는 파멸에 대비하며 뒤에서 암약을 할 생각이었다. 웨이드라는 신분은 그러기에 알맞았다.
나는 요슈아와 펠릭스에게 입단속을 부탁하기로 했다.
둘은 왜 출세의 길을 마다하려 하는지 의문을 표했지만 일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동안 전후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 있을 때.
기척을 주며 막사에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잠깐 괜찮겠나?"
아이언하트 부사령관이었다.
핵심 장교인 그는 길리아스가 펼친 화살 공격에서 중상을 입었지만 빠르게 엄폐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부사령관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가 등장하자 퍼지 형을 비롯해 장교들이 각을 잡았다.
아이언하트는 그들에게 편히 있으라 얘기하며 내게 눈길을 주었다.
"자네…. 알스 일라인이라고 했었지."
그는 내가 직언을 했던 것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정말 자네 말대로 전황이 벌어지고 말았군."
"제 말대로라니 무슨 이야기이신지요."
"어젯밤에 자네가 직언했던 것 말이야."
"직언이요? 제 주제에 그런 행동을 했던 기억은 없습니다만."
시치미를 떼는 내게 아이언하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는 건가. 정말 고맙군."
만약 그 일이 알려지면 아이언하트는 입지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정확했던 직언을 무시하여 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능력 없는 장교로 낙인찍힐 테니까.
이건 서로 윈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알스라는 신분이 유명해지지 않아서 좋고, 아이언하트도 위신을 지킨다.
"그것에 관해서이지만 현재 병사들 사이에서 한 가지 묘한 소문이 돌고 있더군."
"묘한 소문…입니까?"
"그래. 우리 군에 기린아(麒麟兒)가 나타나 위기를 구원했다고 말이야."
"…."
충분히 입단속을 했지만 그럼에도 흘러간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펠릭스와 요슈아는 찔리는 게 있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정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모양이야. 정보만 종합해 보면 마치 몸이 여러 개가 있는 것 같은 활약을 했더군."
"여러 개요?"
"간단히 말해 여러 명이 올린 전공이 한 명에게 집중됐다는 거다. 바로 밀리아스의 신동. 케스퍼 밀리아스에게 말이야."
이번에 실습을 온 줄리아 아카데미의 사관생들.
그들은 오늘 새벽에 있었던 전투에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냈다.
대부분이 지원 임무이긴 했지만 케스퍼 밀리아스는 달랐다.
"녀석은 선진에서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하더군."
물론 전황을 뒤집을 만한 큰 활약을 펼친 건 아니었다.
그저 눈에 띄었다는 것 때문에 일종의 승전의 상징이 되어 전공과 명성을 몰아서 가져가 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론 내 공을 어느 정도 가로채 간 느낌이다.
"녀석은 이제부터 기린아로서 칭송을 받게 될 거야. 너는 그래도 괜찮겠나?"
"조금 전부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던 겁쟁이에 불과했던 걸요."
"훗, 노련한 매는 발톱을 숨긴다는 건가…. 뭐, 좋아. 네가 그리 원한다면 지금은 그런 걸로 알고 있도록 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떠나는 아이언하트.
나는 그를 배웅한 뒤 본격적인 귀환의 준비에 들어갔다.
* * *
그런 일이 벌어진 이상 계속해서 실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실습이 끝나던 시점이었기에 우리 사관생들에게 일찌감치 군장을 정리하고 돌아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사태 수습을 위해 남은 율리아 누나와 퍼지 형. 용병 본부로 돌아가기로 한 일리야 스승과 인사를 나눈 뒤 영지인 리벨로 돌아가기로 했다.
군부에서 챙겨 준 여비가 두둑했기에 근처 도시에서 좋은 마차를 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유미르가 어떻게 알았는지 마차를 끌고 먼저 나타났다.
"도련님. 율리아 아가씨에게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고마워. 귀찮음을 덜었네."
유미르는 포근하게 미소 지으며 마차로 안내를 했으나 곧 내 관자놀이에 생긴 커다란 멍을 보고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도련님, 이건…?"
"일종의 훈장이지."
"머리에 상처라니. 설마 목숨을 건 전투를 하셨던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가 챙겨 준 투구가 없었다면 위험할 뻔했어. 설마 정말로 그게 부적이 되어 줄 줄이야."
유미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여자가 함께한다기에 제가 따라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이 되다니…!"
"일리야 스승을 너무 나무라지 마. 결국엔 내가 실수한 거니까."
"하지만…!"
유미르는 결심했다며 말한다.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해.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몰래 따라올 거잖아?"
"…."
하여간 과보호가 심하다.
실제 게임상에서도 유미르는 알스만을 위해 행동했다.
주인공과의 인연 이벤트에서도 주인공과의 썸씽이 전혀 없었고. 주인공을 따른다기보다는 알스가 주인공과 함께 일하기에 힘을 빌려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도 그녀가 일곱 가신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스토리 막바지에 그런 일을 저지른 걸 보면 무언가 내막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은근히 떠보려 해도 유미르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뭐, 차차 밝혀지겠지.'
어차피 유미르의 건은 배신자를 미리 색출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일이었으니 지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 *
리벨에 돌아온 나는 다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왕국은 당연히 시끄러워지고 있었는데, 국왕은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한 알바드 왕국을 규탄하며 이웃 국가인 크로싱 공화국과 방위 협약을 포함한 동맹을 맺어 대응을 하였다.
그렇게 연합으로 대응을 하자 알바드도 일단은 꼬리를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각국이 외교전에 들어가며 일시적으로 조용해진 국면.
이 외교전이 어느 정도 끝난 시점에서 궁정에선 크로싱과의 전략적 동맹에 대한 축하와 함께 서부 전선 승전 파티의 개최를 선언했다.
"아, 알스. 네게 이런 것이 왔다."
아버지는 제법 놀랐는지 말을 더듬으며 내게 초대장을 건네었다.
왕의 직인이 찍힌 궁정 파티 초대장이었다. 이걸 본 맥스 형과 밀러 형은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변경의 남작가에게 있어서 궁정 파티는 꿈에서나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전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요…."
"무슨 소리냐 알스! 이게 어느 정도의 영광인지는 알고 그러는 거니!?"
맥스 형이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혼담을 건네기 위해 여러 파티를 전전하고 있던 맥스 형은 궁정 파티라는 말에 아까부터 흥분을 하고 있었다.
"이건 무조건 가야 하는 거야!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가문의 위신이 높아지는 거란다!"
"퍼지 형이랑 율리아 누나도 같이 가나요?"
아버지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퍼지는 받은 모양이다만."
전공의 정도에 따라 초대를 받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초대를 받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대외적으로 내 전공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이에 대해선 다른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전장에 참가한 귀족 사관생들은 모두 초대를 한다더구나. 미래를 짊어질 인재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저는 별로 주목받지 않겠네요."
케스퍼 녀석과 헤럴드 백작가의 녀석을 제외한 나머지는 자리 채우기를 하는 정도일 테다.
"그렇다면 뭐. 가겠습니다."
파티에 참가한 게임 캐릭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았다.
어머니는 대견하다 웃으며 말한다.
"준비했던 연미복은 네 성인식에 선물하려고 했다만… 어쩔 수 없구나. 유미르, 그 옷을 가져와 주겠니?"
"예, 사모님."
그렇게 결정된 궁정 파티로 인해 나는 한동안 예절 교육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 * *
파티 참가를 위해 수도에 도착한 나는 퍼지 형과 도시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역 인구 110만을 자랑하는 수도 알펜서드.
왕궁이 위치한 도시의 인구만 20만이었을 정도로 이곳은 대륙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도시였다.
'확실히 인구가 너무 많아….'
이 세계는 시대 배경에 비해 인구가 특출나게 많았다.
현대로 치면 이곳은 중세와 근현대의 사이에 있었는데, 중간 규모의 국가가 20만까지 병력을 편성할 수 있는 이 환경은 분명 이상했다.
게임으로 즐길 때야 재미를 위해 숫자를 부풀린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도 병력의 규모는 그만큼 컸다.
이에 대한 이유는 간단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발달한 의료 체계 때문이다.
이 세계는 마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해지기로는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신들 간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마법이 실전됐다고 한다.
다만 여러 마법은 사라졌어도 밤을 밝혀 주는 조명 마법과 외상을 치료하는 신성 마법만큼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었는데, 이 중 신성 마법의 효과가 대단했다.
완전히 뭉개져 버리거나 신체 일부가 절단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닌 이상 시간만 충분하다면 대부분의 외상이 치유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약초학까지 함께 발달하여 질병에 대해서도 의료 체계가 잘 갖춰져 있었다.
이것이 인구의 폭등을 불러오며 이 대륙의 추정 인구는 현재 5천만 정도.
실제 중세 유럽의 인구가 최대 7천만 정도였다고 하니 오히려 적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이쪽의 세계는 유럽 크기의 1/3 정도다. 인구 밀도로 보면 2배가량 더 높은 셈이었다.
"알스, 뭐 하고 있니. 수도에 와서 들뜬 건 알겠지만 멍하니 있다간 길을 잃어버릴 거다."
퍼지 형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가자.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준비를 하려면 못해도 1시간은 걸릴 테니까."
"예, 형님."
퍼지 형을 따라 도착한 곳은 일종의 미용실 같은 곳이었다.
귀족 전용으로 운영되는 이곳에서 스타일링을 받기로 약속을 잡아 놓고 있었다.
이곳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나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어머나, 오랜만에 보는 멋진 재목인걸?"
자신을 티오테라고 소개한 여성은 내게 진득한 관심을 표했다.
"내게 맡겨요. 단숨에 파티의 주역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퍼지 형은 의욕이 과다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군인입니다. 너무 화려한 것은 곤란합니다."
"아까워라. 그러면 일단 준비해 온 복장을 보여 줄 수 있을까요? 그에 맞춰서 가꾸어 드릴게요."
나는 부모님이 준비해 준 연미복을 건넸다.
티오테는 필이 오는지 나를 자리에 앉혀 두고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딱히 스타일링에 관심이 없던 나는 창밖을 구경하기로 했다.
'무척 떠들썩한걸.'
보통 왕궁에서 파티를 벌인다고 하면 서민을 착취하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의외로 여기는 선순환의 구조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도시도 덩달아 축제 분위기를 띠며 소비가 촉진되고 있었다.
"다 됐어요!"
OK 사인에 거울을 보니 제법 귀티가 나게 스타일링이 되어 있었다.
반면 퍼지 형은 정갈하게 머리를 뒤로 넘겨 딱 봐도 군인인 것처럼 치장을 하였다.
옷까지 연미복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왕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한 마차를 타기 위해 움직였다.
그 잠시 움직이는 사이에도 여기저기서 시선이 꽂혀왔다.
이윽고는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후다닥 달려와 내게 꽃송이를 건네주기에 이른다.
"이거 받아 주세요!"
"고마워. 예쁜 꽃이네."
"에헤헤."
배시시 웃으며 언니에게로 돌아가는 아이. 언니 쪽은 용기를 낸 여동생을 부러워하고 있다.
"나 참."
퍼지 형은 기가 찬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 인기가 반만이라도 맥스 형에게 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갑자기 맥스 형님은 왜요?"
"맥스 형이 결혼을 못 하고 있어서 밀러 형도 나도 혼담을 못 꺼내고 있거든. 이쪽은 할 수만 있으면 바로 할 수 있는 상황인데 말이야…."
"퍼지 형님은 교제하고 있는 분이 계신가요?"
"사관 동기야. 같은 남작가의 영애이지. 나중에 네가 군에 임관을 하면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상견례로 만나는 게 최고겠네요."
"훗,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퍼지 형과 잡담을 하고 있자니 곧 마차가 준비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5화.
왕궁 연회장에 도착한 나는 딱히 주목받을 것도 없이 조용하게 입장하여 구석에 테이블을 잡았다.
보통 입장을 할 때는 소속 가문과 작위를 소리 높여 호명해 주고는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가문이나 하는 것이다.
변경의 남작가인 우리는 방명록을 작성하고 정문이 아닌 쪽문으로 들어와 빠르게 자리를 채워야 했다.
일행인 퍼지 형은 상석의 인물들을 보고는 작게 한숨 쉬더니 옷깃을 고쳐 세웠다.
"알스, 잠깐 자리를 지켜 주겠니? 상관들에게 인사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아."
"저도 함께 갈까요?"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옙, 그럼 다녀오세요."
나는 얌전히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유력 귀족가들이 거의 다 입장을 하였다.
뒤로 갈수록 가세가 높은 귀족가들이 입장하게 되는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파티의 주인공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걸 녀석이 차지하였다.
"밀리아스 후작가! 케스퍼 밀리아스, 플로라 밀리아스 님이 입장하십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기린아가 나타났다며 관심을 드러냈다.
어머니와 함께 입장한 케스퍼 녀석은 제법 긴장했는지 로봇 같은 걸음걸이로 국왕의 앞으로 향했다.
나는 국왕과 그 주변에 있는 인물들을 훑어보았다.
눈에 띄는 사람은 둘.
국가의 두 공작 가문인 살레온 공작가와 헬리안 공작가의 인물들이다.
살레온 공작가의 경우 알티오르가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났기에 그 후계자이자 당주인 길버트가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길버트 살레온과 레그나트 헬리안…. 둘 다 R등급 캐릭터였었지.'
길버트 살레온은 그저 스토리 비중이 있었기에 등장한 캐릭터로 실제 성능은 좋지 않았다. 핸디 플레이를 위해 R캐릭터를 주로 육성했던 나조차 외면했던 캐릭터다.
반면 그 옆에 앉아 있는 레그나트 헬리안은 다르다.
레그나트 헬리안 공작. 마찬가지로 게임에서는 R등급의 인물이었지만 내정 방면에선 극히 낮은 코스트라는 이점을 통해 UR급의 활용도를 보이며 내정에 한하면 1티어를 넘어 0티어로 사용된 캐릭터였다.
그 레그나트는 케스퍼가 올린 전공에 대해서 칭송조로 국왕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핵심에는 길리아스 멜번과 강격의 호른을 패퇴시켰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나와 스승의 용병 부대가 한 전공이었지만 어떻게든 은근슬쩍 끼워 넣은 모양이다.
'뭐, 저 녀석도 활약을 하긴 했으니까.'
나는 신경을 끄고 식사를 재개했다.
그때였다.
"오랜만이에요, 알스 님. 잘 지내셨나요?"
"…?"
구석에 있는 내 테이블까지 찾아온 아리따운 금발의 여성.
그녀는 촤륵! 부채를 펼치며 미소 지어 보였다.
그녀가 나타나자 주위에 있던 또래들 모두 홀린 듯이 바라보며 놀람을 표하고 있었다.
'낯이 익은데. …누구였지?'
나는 눈매를 좁히며 생각해 보다가 그녀가 살레온 공작가의 여식이었음을 떠올렸다.
그러나 막상 이름이 애매하게 생각나지를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때 이후로 1년 가까이 지났다.
그 유괴 사건에서 내가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엘드릭 왕자 정도. 나머지는 스치는 인연에 불과했다.
'에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이름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확실하지 않으니 도박을 걸지는 않기로 했다.
나는 작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살레온 양."
"…."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곧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알스 님? 이곳엔 저 말고도 살레온 가문의 사람들이 많답니다. 가능하면 이름으로 불러 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역시 그래야겠죠?"
"그럼 재차 인사를 나눠 볼까요? 알스 체이싱 일라인 님."
내 미들네임까지 넣으며 압박을 주는 그녀. 나는 어떻게든 떠올리려 했지만 중간 글자가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이름을 묻는 실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사용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교계에선 이런 식으로 이름을 잊어버리는 게 다반사인지라 수행원이 대신 이름을 외우고 다니고는 한다.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사용인은 입모양만으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에리나]
그렇군.
"예, 오랜만에 만나네요. 에이나 양."
쩌적! 순간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입모양을 잘못 읽은 듯하다.
"어감은 비슷하지만 한 글자가 틀렸답니다. 에리나예요. 에리나 살레온. 이번 건 조크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아 줬으면 하네요."
"아, 에리나 양이었죠. 미안해요. 조금 착각을 했나 보네요.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렇담 사과의 의미로 춤이라도 신청해 주시겠어요?"
"그건 조금 곤란하네요."
"…제가 잘못 들은 걸까요?"
"더 크게 말해야 하나요? 춤은 곤란하다고 했어요."
"…후훗.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군요?"
부글부글 끓는지 웃는 표정으로도 모종의 압박을 보내는 에리나.
춤을 못 추는 건 아니지만 살레온 공작가의 영애와 궁정 파티에서 춤을 추면서 주목받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나는 헬리안 계파에 속해 있기도 했고.
"그럼 다과라도 함께하죠. 그것도 안 된다고 말하진 않겠죠?"
에리나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내 테이블에 앉았다. 이미 또래 사이에서의 주목도는 최고치를 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어른들끼리 활발히 인사를 나누고 있는 도중이라 어른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지 않은 게 다행인 정도.
"이번 전쟁에서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후방 지원일 뿐인데요 뭘."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죠. 그래도 그렇다면 제가 선물한 창을 사용할 일은 없었겠군요. 사용할 일이 없었음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요, 그도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하는 걸까요."
"아, 그건 부러졌어요."
"예!? 후방 지원을 하는데 철창이 부러질 일이 생길 수 있나요?"
"뒷걸음질을 치다 넘어졌을 때 엉덩이로 깔고 앉았더니 그냥 구부러지던데요?"
"그럴 리가…. 그란셀의 최고 장인이 만든 창인데…."
확실히 그 창은 훌륭했다. 그 창이 구부러지면서까지 버텨 주지 못했다면 할버드가 투구에 스치는 게 아니라 목을 베었을 테니까.
"다음에는 더 좋은 창으로 준비할게요."
"아뇨, 제 스승께서 성인식 선물로 창을 하나 장만해 주겠다고 하셨거든요. 구태여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
"으읏…."
그렇게 에리나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매서운 눈빛으로 다가오는 소년이 하나.
"네놈. 어디 감히 에리나 양을 귀찮게 하고 있는 거냐."
미루어 보건대 살레온 계파에 속한 사관생인 것 같았다.
살레온 계파 쪽의 귀족 사관생들도 우리랑 비슷하게 전투가 벌어진 북서부 전선에서 실습을 하고 있던 만큼 마찬가지로 파티장에 초대되어 있었다.
녀석은 내가 헬리안 계파인 걸 대번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런 내가 살레온 공작가 영애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으니 이 녀석의 입장에선 눈이 뒤집히는 일이었겠지.
"데니안, 나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에리나 님. 이런 놈은 제가 쫓아내겠습니다."
"아뇨, 저는…!"
그는 에리나의 얘기도 듣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이때다 싶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정도로 높은 신분의 영애분인지는 몰랐네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를 하겠습니다."
"흥, 주제는 알고 있는 모양이군. 알았다면 어서 사라져라."
"예, 그럼 이만."
홀라당 빠져나온 내 뒤로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리나 님. 이제 편히 파티를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뭣하면 저와…."
"그 입 다물어요. 불쾌하니까."
"예…?"
에리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떠나갔다.
데니안이라 불린 녀석은 뭐가 잘못된 거였냐며 절규.
일단 다른 테이블에 옮겨 앉은 나는 신경을 끄고 다시 식사를 하기로 했다.
"그냥 보내도 괜찮은 거냐 알스."
"…? 앗, 스승!"
일리야 스승은 파티에 어울리지 않는 간소한 복장으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이에 몇몇 귀족들이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용병이 왕정 파티에 참여한 것이 처음은 아닌지 기본적으로는 이해를 받는 모양이었다.
"꽤나 귀여운 아이던데. 사견이지만 너와 어울려 보였다."
"에이, 무슨 소리예요. 사는 세계가 다른데요. 그보다 스승. 파티에는 못 올 거 같다고 하지 않았어요?"
"용병 협회 쪽에서 하도 간곡하게 부탁을 했거든. 협회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용병 웨이드도 초대를 받았어. 알고 있니?"
"헉."
사실상 나는 두 개의 초대장을 받은 셈이다.
스승은 얘기 상대가 고팠는지 내 테이블에 합석을 하였다. 나는 도시에서 본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파티장을 뒤흔드는 초대형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데니안이 에리나에게 춤을 신청했다가 신경질적인 거절을 당한 건 사소한 축에 속했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동맹국 크로싱의 사절단이 20여 명의 노예를 대동하여 파티장에 등장한 것이다.
* * *
크로싱 공화국은 공공연하게 괴짜라 불리는 국가였다.
아무런 맥락 없이 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구호물자를 마구 보내오기도 한다.
귀족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을 주장하지만 왕이 존재하고 노예 제도가 성행하는 국가. 행동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국가가 크로싱이었다.
캘리퍼 입장에선 알바드를 견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맹을 맺긴 했지만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크로싱의 사절단이 궁정 파티장에 노예를 대동하여 나타난 것은 왕국을 넘어서 대륙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고귀한 자리에 이 무슨 추태를 보이는 것이냐!"
"당장 떠나가라!"
원로 귀족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크로싱 사절단의 대표는 이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불청객을 맞이하는 듯한 태도는 삼가 줬으면 합니다만. 이것도 전부 계약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요?"
나이는 이제 30대를 넘은 정도일까.
나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쥬라스 파밀리온…!'
게임 속에서는 적군으로만 나오는 악역 캐릭터 중 하나로 현 십걸 중 수위를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동시대의 인물인 엘드릭 왕자를 만년 2인자로 전락시켜 버린 게 바로 그였고, 왕가의 핏줄이 아니면서도 수년 전까지 크로싱의 왕위 계승 1순위였던 것이 쥬라스였다.
그 정도로 불세출의 인물이었다.
만약 게임에서 가챠 캐릭터로 나왔다면 UR등급은 당연하고, 성능으로도 부동의 0티어가 될 거라는 평이 자자한 캐릭터였다.
그의 별명은 천의무봉(天衣無縫).
알바드 왕국의 대장군 사략(師略)의 카이엔, 서방 제일의 장군인 악뇌(惡腦) 제무토와 함께 거론되는 3대 장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국왕 폐하. 이번 노예 옥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놓지 않으셨던 겁니까?"
"으, 으음…!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겠다고는 하였지만 그게 이번 파티라고는 말하지 않았네!"
"조약에서는 유력 귀족 가문들이 모이는 첫 번째 행사에서 노예 옥션을 개최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만? 우리가 해석을 잘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상급 관리로 보이는 남자가 국왕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국왕은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뜻대로 하시게."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노예 옥션이라는 말에 연회장이 크게 술렁였다.
이곳 캘리퍼 왕국은 법적으로 노예 제도가 금지되어 있었다. 노예 옥션은 어불성설이었다.
반면 크로싱 공화국은 노예 제도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국가다.
그래도 복지 시스템은 잘 갖춰져 있어서, 노예가 일정 수준의 빚을 변제하면 시민으로 승격할 기회를 준다.
노예 제도는 허용되어 있지만 노예를 혹사시키거나 학대하는 것에 대해선 철저히 제재를 가한다.
'주인공은 이러한 노예 제도에 반발하여 크로싱을 적대했었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크로싱이 노예를 운용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땅이 워낙 척박하여 정착하는 국민보다 떠나는 국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걸 어떻게든 노동력을 확보하고 강제로 인구를 늘리기 위해 노예 제도를 장려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캘리퍼의 고귀한 여러분. 오늘은 여러분에게 크로싱의 노예 옥션에 대해 소개를 해 드리려고 합니다."
이번 동맹 조항에는 노예 옥션 입점에 관한 것이 삽입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쥬라스는 한두 번 해 본 실력이 아닌지 능수능란하게 노예 옥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예라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몇몇 귀족들은 불편함을 표출했지만 관심이 있는 자들은 빠져든 것처럼 경청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캘리퍼 왕국의 귀족 여러분에게 옥션을 처음 선보이는 이 자리는 우리에게도 특별합니다. 하여 이번에는 우리 크로싱 공화국의 건국일에나 갖춰질 법한 상등품의 노예를 데리고 왔습니다."
하나하나 노예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는 쥬라스.
그 면면을 확인한 나는 벼락을 맞은 것 같이 놀라 몸을 떨어야 했다.
"말도 안…돼."
나는 왜 노예들 사이에 그가 있는가를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
각양각색의 노예들 사이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
그의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색의 머리칼과 또렷한 눈동자가 내 기억을 강렬하게 두들기고 있었다.
'틀림없어. 저건 카시우스 로이드야.'
카시우스 로이드.
아테나 워 테일즈의 주인공이 노예 수갑을 찬 채로 서 있었던 것이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6화.
저 얼굴은 내가 기억하던 주인공 카시우스 로이드였다. 일러스트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지만 틀림없다.
그가 추레한 차림새와 함께 묵직한 수갑을 차고 있었다.
'이상해. 카시우스가 어째서 노예가 돼 있는 거지?'
물론 나도 주인공의 과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보통의 게임이 그러하듯이 주인공은 플레이어의 감정이입이 잘되도록 무미무취로 설정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테나 워 테일즈에서도 잘빠진 일러스트 외에 주인공에 대해 공개된 정보는 많지 않았다.
'주인공은 본래 노예였던 건가?'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있다.
게임에서 주인공은 귀족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로이드 후작가의 삼남으로서 말이다.
이 로이드 후작가라고 하면 남방의 대국인 뷜랑 연합의 유력 귀족가다.
'아귀 자체는 맞아떨어져.'
노예인 주인공이 머지않아 로이드 후작가에 입양 형식으로 팔려 간다면 이상할 것도 없다.
크로싱 공화국을 적대하던 성향도 본인이 크로싱에서 노예로 굴렀으니 이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게임 속의 주인공은 쥬라스 파밀리온을 알지 못했으니까.
조우 이벤트 때도 처음 보는 듯 이야기를 했었다.
'혹시 어딘가에서 이미 스토리가 바뀌어 버린 걸지도 몰라.'
그런 혼란을 느낀 나는 자그마한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사이 쥬라스는 캘리퍼 귀족들의 반응을 즐기며 노예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었다.
노예들은 그의 말대로 상등품의 것이었다.
이름 높은 무인, 뛰어난 외모의 여인과 남성. 그리고 요리나 건축 등의 특기를 가진 사람들까지.
"노예 제도가 없는 캘리퍼 왕국의 귀족 여러분에게 이것은 구제 사업이 되겠군요. 저에게 대가를 치르고 이자들을 구원해 주는 겁니다. 관점을 달리하여 보면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까?"
달변을 뽐내는 쥬라스. 이미 넘어간 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돈을 내고 구매를 하는 것도 구제 사업이라고 치장하면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 되니까.
흔들리는 귀족들. 이를 감안했는지 레그나트 헬리안 공작이 먼저 나섰다.
"확실히, 구제 사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말이 통하는 분이시군요."
씨익 웃는 쥬라스.
그런 그에게 헬리안이 냉혹하게 고했다.
"그렇다면 그 전원을 내가 구제하겠다. 돈은 원하는 만큼 내주지. 그러니… 용건을 끝낸 네놈들은 이 자리에서 썩 사라져라."
"…오호."
역시 내정의 0티어. 강하게 저질러 버렸다.
그는 쥬라스를 상대로도 기 싸움에서 추호도 밀리지 않았다.
"왜 그러지, 내가 그만한 돈을 내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가?"
"설마요. 캘리퍼의 헬리안 공작가라면 굴지의 상인 가문으로도 유명한 곳 아닙니까. 이 정도의 대가는 치러 낼 수 있겠죠. 하지만 이곳엔 돈으로 살 수 없는 노예도 있습니다."
"뭐라?"
그러면서 쥬라스는 주인공 카시우스와 온몸이 화상으로 짓뭉개져 얼굴을 구분하기 힘든 여성을 가리켰다.
"둘만큼은 이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돈 이외의 것이 필요하죠. 먼저 이 남자로 말하자면 과거 멸망한 펜실론 황가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자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지금 밝히지 못하나 요주의 인물임은 보장하겠습니다."
그건 사실이다. 주인공은 설정상 펜실론 황가의 마지막 남은 핏줄이었다.
"그리고 이것. 이 흉측한 물건은 놀라지 마십시오. 쿠라벨 성국의 마지막 발키리. 에오니아 미라벨입니다."
그러자 연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카시우스의 경우 펜실론 제국이라고 해 봤자 어차피 30년 전에 멸망한 국가이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쿠라벨 성국은 다르다.
쿠라벨 성국은 불과 1년 전에 크로싱에 의해 멸망한 독특한 신앙을 가진 국가였다.
발키리라 함은 그 쿠라벨 성국의 당대 왕실 근위단장을 칭하는 것으로, 1인 전승으로만 이어지는 발키리의 무예는 우아하고 매섭다 전해진다.
"그자가 에오니아 미라벨이라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분명 이 몰골을 보면 누구도 믿지 않겠죠. 우리도 곤란할 따름입니다. 순결을 유린당하지 않겠다며 스스로 불길에 몸을 던져 자해를 해 버릴 줄이야. 그래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본래의 뛰어난 풍모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랬는데 에오니아 미라벨이 아니라면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겠군."
"맹세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쥬라스 파밀리온의 이름을 걸고, 크로싱 공화국의 명예를 걸고 이 물건이 마지막 발키리 에오니아임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자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지?"
에오니아 미라벨이라고 하면 캘리퍼에게 있어서도 상당한 전력이 되는 인재였다.
왕실 경비대였으니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없어도 개인 경호 능력만큼은 확실했다. 불길에 몸을 던질 정도로 크로싱에 적대적이니 첩자일 가능성도 적다.
그런 만큼 여러 귀족들이 에오니아를 탐내고 있었다.
쥬라스는 그런 분위기를 즐기듯 씨익 웃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인공과 에오니아.
이 둘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말과는 달리 절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저. 쥬라스 파밀리온에게 어떠한 것이라도 한 가지를 이길 수 있다면 이자들을 대가 없이 드리겠습니다."
* * *
쥬라스가 호기롭게 내건 조건.
"무예도 좋고, 주제를 건 토론도 좋고 뭐든 좋습니다. 저를 승복하게끔 만들어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들을 데리고 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자는 없었다. 현 십걸의 위상은 그만큼 거대했다.
덤비는 자가 있다고 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얼빠진 녀석들 뿐.
"제가 해 보겠습니다."
호기롭게 나선 것은 케스퍼 녀석이었다.
쥬라스는 씨익! 입꼬리를 광대까지 올린 섬뜩한 미소로 케스퍼를 바라보았다.
"밀리아스의 신동…. 캘리퍼의 기린아입니까. 당신은 무엇으로 저를 승복시킬 생각입니까?"
"체스입니다."
"체스입니까. 좋습니다. 바로 대국을 준비하도록 하죠."
결과가 뻔히 보였기에 나는 케스퍼 녀석에게 신경을 끄고 근처에 있던 일리야 스승을 막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진정해요 스승!"
"막지 마라. 이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녀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알스, 언젠가 네게도 말했었지. 1년 전의 일을."
"쿠라벨 성국에게서 의뢰를 받고 용병으로 전장에 나갔었다는 그 일 말이군요."
"그래. 나는 그 당시 에오니아와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적이 있다. 깊은 인연은 아니었다만 저런 치욕을 당하고 있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에오니아 미라벨이라고 하면 게임에선 SSR등급의 캐릭터였다.
개인 무력은 93으로 나름대로 상위권에 있었지만 왕실 경비대 출신이기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전쟁에서의 스킬은 구제불능급으로 좋지 않았다.
심지어 메인 스토리에도 관여되는 바가 없는 번외 캐릭터였다.
스토리를 진행하는 도중 크로싱 측의 군대에서 흉측한 몰골을 한 괴인 무장으로 등장을 하는데, 포획을 하는 히든 이벤트를 보지 않는다면 그냥 소리 소문 없이 사망하고 다시는 나오지 않는다.
포획을 하여 아군으로 만들어도 개인 인연 이벤트가 자신이 쿠라벨 성국의 근위단장으로 일하던 때를 회상하는 것뿐이어서 인연 이벤트조차 메인 스토리에 관여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추후 업데이트되는 스토리에 지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스토리는 나도 모르는 것이니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일리야 스승과의 인연 이벤트가 있었어.'
서로 아는 사이라며 창술을 겨뤘던 간단한 이벤트다. 그 이벤트 이후 발키리의 창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며 일리야의 무력이 2 상승을 했었지 아마.
발키리에게만 1인 전승으로 이어져 오는 창술. 나로서도 흥미가 있었지만….
"저 녀석을 어떻게 이길 생각인데요?"
"하나밖에 없지. 창과 검이라면 금방이라도 준비할 수 있다. 설령 패배한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건 내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진정하라니까요…!"
내가 이렇게 조마조마한 이유는 게임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십걸 중 누군가에게 당해 왼팔을 잃어버렸다던 그녀.
'그게 혹시 지금이 아닐까?'
그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게임에서 쥬라스 파밀리온의 개인 무력은 자그마치 98이었으니까.
이는 전체에서도 열 번째로 높은 수치로, 저놈은 책사로서도, 무인으로서도 괴물인 것이다.
스승이라면 어느 정도 비빌 수는 있겠지만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말렸지만 들어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로 했다.
"에잇…! 알겠어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대신 할게요."
"대신 한다니?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알스. 네게 승산은 없다."
"괜찮아요. 어차피 무예로 겨루려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 스승. 혹시 가지고 있는 용병 옷 있어요? 그리고 투구도요."
"너 설마…."
스승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용병 웨이드가 등장하는 수밖에.
케스퍼 녀석이 시선을 끌어 주는 동안 연회장을 나온 나는 스승이 구해 준 용병 옷과 얼굴을 가리는 회색의 투구를 착용하였다.
왕궁 파티에 얼굴을 가리고 가는 것은 실례되는 일을 넘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밀어붙인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오니 체스의 결과가 대충 나와 있었다.
"잘하는군요. 과연 밀리아스의 신동이라 불릴 만해요. 기린아라는 호칭은… 과한 듯하지만. 훗."
"크윽!"
체스판의 상황은 일목요연했다. 쥬라스가 농락을 하면서 케스퍼 녀석을 박살 내 버렸다.
케스퍼는 벽을 느꼈는지 사색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자,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완전히 형세가 기울기 전에 박차고 나가는 케스퍼 녀석. 그래야만 그나마 체면이 살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에오니아 미라벨을 데려가지는 못하겠군요. 다음, 저와 겨루어 볼 분이 계십니까?"
조용해진 파티장.
나는 녀석이 이제 끝이냐며 물러나려 하기 직전에 한껏 목소리를 긁어 최대한 변조를 하고 고했다.
"제가 하도록 하죠."
일제히 나에게 모이는 시선.
얼굴을 가리는 투구에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으나 쥬라스는 아니었다.
"오호라…. 그 잿빛의 투구. 당신이 길리아스 멜번을 패퇴시켰다는 용병. 웨이드로군요."
내 뒤에는 보증을 서는 것처럼 스승이 서 있었다.
스승은 죽일 듯이 쥬라스를 노려보았다.
"하핫, 일리야 안페이입니까…. 1년 전의 전장에서 본 이후로 처음이군요. 격조했습니까?"
빠득! 스승은 살기로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쥬라스의 측근 일부가 맞서서 살기를 내뿜으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쥬라스는 측근에게 곧장 주의를 주었다.
"그만해라, 이곳은 그러한 자리가 아니다."
"일리야, 물러나 있으세요."
내가 단호하게 이름으로 부르자 스승은 새삼스러웠는지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용병 웨이드. 당신이 저와 겨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죠?"
"체스입니다."
"으음, 체스입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것은 안 될까요? 또 한 번 시시한 승리를 거두는 건 저에게도, 관객분들에게도 지루한 일이 될 테니까요."
"시시한 승리입니까…. 당신은 하늘 위의 하늘을 보지 못한 거로군요."
높은 경지의 체스에선 시시한 승리 따위는 없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다고 한들 쉽게 승리할 수가 없다.
하늘 위의 하늘. 인공지능이 있었으니까.
인공지능이 선보이는 수 싸움의 세계는 말 그대로 저세상의 것이었다. 최소한 쥬라스 녀석이 그 벽을 경험해 보진 못했겠지.
"간접적이 되겠지만 당신에게 그 하늘 위의 하늘을 경험하게 해 드리죠."
"하늘 위의 하늘이라니 용병 주제에 거창한 말을 하는군요. 좋습니다. 도발에 넘어가 주도록 하겠습니다."
"말이 배치되는 즉시 바로 시작하죠."
"그 전에…. 조건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건? 이야기가 다르군요. 그런 조건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조금 전의 대국도 그랬고요."
분명 케스퍼 녀석과의 대국에는 그런 조건이 없었다.
"조금 전의 대국에선 충분히 제가 얻어 가는 것이 있었죠. 밀리아스의 신동이자 캘리퍼의 기린아를 꺾었다는 명성을 획득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을 이겨서 제가 얻는 이득은 대관절 무엇입니까? 저는 조건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없다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쯧."
상황이 묘해졌지만 상관없었다.
"뭘 원합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용병 따위에게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저도 의문이군요. 뭣하면 왼쪽 팔이라도 걸겠습니까? 당신이 패배하면 왼쪽 팔을 내놓고 가십시오."
"뭐…! 너 이 자식…!"
나는 결투에 패배하여 스스로 왼쪽 팔을 내놓는 스승의 모습을 상상하고 말았다.
설마 실제 스토리에선 이런 식으로 스승의 왼팔을 가져갔었던 것일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이기는 건 나일 테니까."
"좋은 자신감입니다. 뭐, 이런 자리에서 피를 보는 건 저도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제 조건은 간단합니다. 제가 이길 경우 그 투구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도록 하세요. 용병 웨이드의 정체를 온 세상에 밝히는 겁니다."
내 입장에선 그것도 리스크가 큰 제안이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서론이 끝났으면 빨리 시작합시다."
"급하기도 해라. 백말을 잡겠습니까?"
"당신이 가져가십시오. 혹여나 흑을 잡아서 졌다고 핑계를 대면 곤란하니까."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확인해 보도록 할까요. 그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머리에 올라온 피를 가라앉히고 체스판을 바라보았다.
최고조로 올라와 있는 집중력.
나는 녀석을 철저하게 때려 부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7화.
탁! 탁!
살 떨리는 정적 속에서 움직이는 체스 말.
쥬라스는 이 긴장감을 즐기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애초에 긴장을 느끼지 않는 건지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전 개인적으로 체스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좋지 않은 추억이 있거든요."
"…."
"훗, 이유를 물어보지 않는 겁니까?"
쥬라스는 개의치 않고 기물을 움직이며 말을 이어갔다.
"여덟 살 때의 일이었을까요. 저에게 군략을 가르쳐 주던 스승께서 체스라는 걸 알려 주더군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전 패배했습니다.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었죠."
그런 스승을 이기게 된 것은 고작 한 달만의 일이었다고.
"그 이후 스승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저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체스가 계기가 된 거겠죠. 모든 부문에서 제자보다 열등해지고 있음을 깨달았던 겁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스승을 잃고 만 거죠. 참으로 슬픈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촌극이 따로 없군요. 어린애에게 벽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다니."
"하하하! 이해합니다. 분명 우습죠. 저도 그저 제 스승이 모자란 인물이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
"그야 저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체스 대결에선 진 적이 없으니까요. 제 스승은 지금껏 제가 만난 인물들 중에는 가장 강했던 셈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몇몇 귀족들은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조소하며 말을 받았다.
"그 부분이 촌극이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고작 이따위 실력에 벽을 느꼈다는 게 우습다는 거죠. 쥬라스 파밀리온. 당신은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까?"
"흐음, 맥락으로 보아하니 제가 그렇다는 말이로군요?"
"잘 알고 있네요."
나는 고했다.
"지금으로부터 44수 후. 당신은 첫 번째 체크를 당하게 될 겁니다."
"…."
"그리고 8수 후에 또 한 번 체크. 그 뒤 16수 후에는 체크 메이트예요."
"말로는 뭐라고 못하겠습니까."
허세라고 생각했는지 여유로운 웃음을 무너뜨리지 않는 쥬라스.
그러나 20수 후.
"...."
입이 다물어졌다.
그는 뚫어지게 체스판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 여유가 생긴 건 내 쪽이었다.
"뭐, 저의 예고 체크는 빗나갈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멍청하다면 말이죠."
웅성이는 연회장. 체스에 대해 잘 아는 귀족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대국을 관전하고 있었다.
마침내 예고한 44수.
탁! 나는 나이트를 이용해 왕의 목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체크."
우오오오!! 탄성이 터져 나오는 파티장.
크로싱 사절단 측에서는 당황하는 기색이 보였다.
"말도 안 돼. 재상님이 밀리고 있다고?"
"쥬라스 님과 동등하게 겨룰 수 있는 자는 사략의 카이엔 정도밖에 없을 텐데…?"
나는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려 했으나… 어차피 투구를 쓰고 있어서 남들에겐 보이지 않았기에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핫! 예고 체크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악수를 두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군요. 예, 칭찬해 드리겠습니다. 참 잘했어요."
"…."
이미 이 대국은 끝나 있었다. 쥬라스에게 상황을 타파할 만한 수는 없다.
이것이 체스가 인공지능에게 빠르게 정복당한 이유였다.
체스는 바둑에 비해 경우의수가 많지가 않다.
그 바둑조차 이제는 인공지능에 의해 정복된 상황에서 체스는 대국 시작과 동시에 끝이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길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초반의 오프닝과 그 이후의 미들게임의 수 싸움이 무척 중요하다.
인공지능과 수백 국의 대국을 하며 무엇이 상수인가를 수도 없이 익힌 내게 쥬라스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해도 상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인류의 재능 따위는 초월해 버린 존재인 인공지능과 대결을 하며 실력을 키웠으니까.
쥬라스는 많은 부분에서 실수를 하였다. 나에 비해 정상급의 대국을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뭐, 그걸 제외해도 내 실력이 우위에 있었으니 결국엔 여유롭게 승기를 잡았겠지만.
"그럼 어디 당신의 그릇을 보도록 할까요. 예고 체크 메이트를 피하기 위해 더 악수를 두는가. 그도 아니면 그대로 결과를 받아들이는가. 십걸 쥬라스 파밀리온의 선택. 흥미롭군요."
"네놈…."
처음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쥬라스.
왜냐하면 이건 가불기이기 때문이다.
내 예고 체크메이트를 피하려 다른 악수를 둔다면 차악보다 최악을 선택하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고 그대로 결과를 받아들이면 상황을 타파할 생각을 하지 않는 멍청이가 된다.
결국엔 뭘 선택하든 멍청한 그릇이다.
쥬라스가 선택한 것은 전자였다.
"체크 메이트."
"…졌습니다."
그대로 나의 수 계산을 인정하고 체크 메이트를 받아들인 것이다.
* * *
내 승리로 끝난 체스 대결.
용병 웨이드의 승리에 파티장의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십걸의 필두 중 하나인 쥬라스 파밀리온이 패배했다고…?"
"놀랍군. 정말 놀라워!"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체스 실력이군. 경이로울 정도야!"
어떤 도전이든 받아 준다는 쥬라스의 기행은 유명한 것이었다.
도전을 받는 것 자체도 그러했고,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것도 그러했다.
그 명성이 깨졌다.
한낱 용병에게 말이다.
"재대국을 하지 않겠습니까?"
쥬라스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재전을 신청했다.
나는 능글맞게 답했다.
"조건은 무엇입니까?"
"조건…이라고요?"
"이미 당신이 내놓은 노예는 제가 받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걸 내놓으셔야죠? 가령. 아까 당신이 지껄였던 왼팔이라든가요…!"
"…!"
내 위협에 쥬라스가 움찔했다.
그도 알고 있던 것이다. 다시 대결을 한다고 해도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걸.
왼팔을 걸고 대결을 하기에는 너무 리스크가 크다는 걸.
"무엄하다! 한낱 용병 주제에 쥬라스 님에게 그 무슨 망발이냐!"
"조용히 하십시오. 키암."
"하지만 쥬라스 님…!"
"닥치라고 했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주, 주제넘었습니다."
쥬라스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는 에오니아를 가리키며 말한다.
"어차피 당신과 일리야 안페이가 원하는 건 에오니아 미라벨 쪽이겠죠. 만약 이번에도 이긴다면 이 펜실론의 끄나풀까지 주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주인공을 준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 그건 어떨까 싶었다.
에오니아야 메인 스토리에 관련이 없는 인물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아니었다.
주인공의 심복 포지션이어야 하는 알스가 역으로 주인공을 노예로 부리다니.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수준을 넘어서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시점에서 내가 아는 스토리는 전부 사라지게 될 테다.
'이 대국은 거절하는 게 맞겠어.'
때마침 헬리안 공작이 도움의 손길을 내주었다.
"거기까지. 둘 다 이 이상 파티의 흥을 깨뜨리지 마라."
그는 노예 옥션의 종료를 선언했다.
"쥬라스 파밀리온. 이 이상의 무례는 용납하지 않겠다. 노예는 도로 가져가도 상관없으니 물러나라."
"…좋습니다. 저도 일부러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취미는 없으니까요."
"이미 파티 분위기를 충분히 망쳐 놨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만?"
"훗, 그건 송구하군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노예들은 얘기한 대로 데리고 가도 좋습니다. 값은 받지 않도록 하죠. 사과와 우호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흥, 첩자일지도 모르는 자들을 좋다고 받을 줄 아는가."
"그 부분은 알아서 결정하시길…."
쥬라스는 주인공 하나만을 데리고 파티장을 떠나갔다.
에오니아 미라벨도 약속대로 풀어 준 모양이었다.
"에오니아!"
일리야 스승은 곧장 에오니아의 손을 붙잡으며 무사함을 기뻐했다.
에오니아는 설마 쥬라스가 패배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어쩐담.
스승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일이 제법 커지고 말았다.
* * *
쥬라스와의 대결을 끝낸 나는 부랴부랴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그대로 있다간 붙잡혀서 얼굴을 공개당할 것 같았으니까.
용병 협회 인물들과 스승의 도움으로 파티장을 나온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 하나만 약속해 줘요.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저와 상의해서 결정을 하겠다고요. 무인의 자존심이 중요한 건 저도 알지만 실리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가능한 한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볼 테니까 부디 저를 믿고 상담해 줘요."
"훗, 그래. 그게 좋은 것 같구나.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하마."
"스승?"
"체스를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쥬라스에게 승리를 거둘 줄이야. 너를 영특한 아이라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다 자부했지만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너는 더 특별한 녀석이야."
스승은 대견한지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째서 머리가 아니라 어깨를 쓰다듬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투구의 존재를 뒤늦게 떠올렸다.
나는 주변의 시선이 없음을 확인하고 투구를 벗고 변조하던 목소리를 되돌렸다.
"휴우!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요. 전장에선 피가 튀는 걸 막아 주니까 답답해도 참을 수 있었는데 실내에서 쓰고 있자니 고문이 따로 없네요."
"무슨…!"
내가 얼굴을 드러내자 에오니아가 눈을 부릅떴다.
"어째서 아이가…?"
"일단 올해로 성인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됐는데요. 아직 성인식은 하지 않았지만요. 그보다 통성명을 해 볼까요? 저는 알스 체이싱 일라인이라고 합니다."
"에, 에오니아 미라벨이다. 아니… 미라벨입니다."
갑자기 왜 존대를 하는 걸까.
어쨌든. 에오니아의 처신을 결정해야 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함부로 어디에 둘 수가 없었다. 쥬라스 녀석이 추적을 붙여 놓을 수도 있는 일이고.
다만 이 부분은 스승이 시원스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에오니아의 얼굴은 화상으로 인해 알아볼 수가 없다."
"그건… 그렇죠."
"그러니 서서히 치료를 하면서 외모를 이전과 다르게 바꿔 가면 되는 일이야."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아마 될 거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건 힘들지만 인상을 바꾸는 건 충분히 가능할 거다."
물론 당분간은 에오니아라는 이름을 숨기고 생활을 해야 한다.
이를 그녀는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
"전 1년 전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입니다. 이름을 숨기는 것 정도는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에게 입은 은혜를 갚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상관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은혜라니. 미리 말해 두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난 그저 스승을 구하기 위해 쥬라스와 승부한 겁니다. 당신의 신세가 어떻게 되건 하등 상관없었어요. 그러니 당신은 이제부터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을 살면 되는 거예요."
"예, 그럴 생각입니다. …한 번 꺾였었던 저의 창은 당신의 의지를 따라 다시금 적의 목을 겨눌 것입니다. 부디 곁에서 모시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나 참."
올곧고 강렬한 시선을 부딪쳐 오는 에오니아.
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이건 주인공에게 했던 맹세와 비슷하잖아.'
오히려 더 강도가 높은 느낌이 들었다. 게임에서 주인공과는 동료로서 인정했다는 느낌이라면 이건 마치 주종의 맹세 같았으니까.
주인공도 아닌 내가 SSR등급 캐릭터의 충성 맹세를 받다니.
농담 삼아 내 조력자들을 일곱 가신이라 칭하긴 했지만. 지금 이건 정말로 가신을 받아 버리게 된 셈이었다.
그래도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니 상관없을 거라 자기 합리화를 하기로 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8화.
재차 환복을 하고 파티장으로 돌아온 내게 퍼지 형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왔다.
"알스, 너…. 대체 무슨 일을 한 거니?"
"쉿, 지금은 그냥 넘어가 줘요 퍼지 형. 나중에 다 설명할게요."
퍼지 형은 한숨을 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해 두지만 지금 이곳엔 네가 웨이드라는 걸 알고 있거나, 추측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윽. 역시 그런가요?"
그 당시 함께 일을 도모했던 펠릭스와 요슈아도 그렇고 아이언하트 부사령관도 그렇다.
아이언하트 부사령관의 소속을 생각하면 헬리안 계파의 핵심 인물들은 내 정체를 알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는 에리나까지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사라진 뒤에 웨이드가 등장하고, 웨이드가 사라지고서야 내가 나타난 걸 보고 의심을 한 것 같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야.'
급기야는 에리나가 내게 다가오려 했으나 그 전에 파란이 일었다.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한 중견 귀족 하나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케스퍼 군이 투구를 쓰고 다시 나타났던 건가!"
치졸한 수작이었다.
캘리퍼 왕국의 기린아가 쥬라스에게 패했다는 걸 대외적으로 알릴 수가 없었기에 용병 웨이드를 케스퍼라 혼동시켜 그 부분을 흐지부지해 보려 한 것이다.
이걸로 헬리안 계파 쪽의 위신도 동시에 세울 수 있었다. 케스퍼가 속한 밀리아스 후작가는 헬리안 계파의 핵심 세력 중 하나였으니까.
애초에 케스퍼 밀리아스가 용병 웨이드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있었기에 이 치졸한 정치질이 먹혀들고 있었다.
헬리안 계파의 귀족들은 케스퍼가 웨이드가 아님을 알면서도 뻔한 연극에 어울려 주었다.
문제는 여기서 한술 더 떠 버렸다는 거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아야 할 밀리아스 후작가 쪽에서 이 정치질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내가…?"
막 파티장에 돌아온 케스퍼 녀석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떨떨해했지만 아버지인 조제트 밀리아스 후작의 귀띔을 받고는 눈을 부릅떴다.
밀리아스 후작은 그러더니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응시했다.
"훗."
내 쪽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조제트 밀리아스.
그 생각은 뻔히 읽을 수 있었다.
'날 이용해 보겠다는 건가.'
밀리아스 후작의 귀띔을 받은 케스퍼 녀석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외쳤다.
"마, 맞습니다. 제가 투구를 쓰고 심기일전하여 그를 상대했습니다."
우오오! 탄성이 오르는 연회장.
연극인 걸 다 알면서도 어울리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살레온 계파 쪽은 연극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사칭을 했으니 가만 놔둬도 파멸할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쥬라스를 상대로 승리하다니 과연 캘리퍼의 기린아라 불릴 만하군!"
"역시 용병 웨이드는 케스퍼였어!"
나는 케스퍼 녀석이 더없이 안쓰러워 보였다.
어른들의 이기심에 놀아나는 모습을 보니 과거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군요."
내 앞에 다가와 앉은 에리나도 이 연극이 역겨웠던 모양이다.
"당신의 공을 이런 식으로 가로채 버리다니 말이에요."
"메리나 양?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에리나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걸까요? 웨이드 님?"
"…."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그럴 만도 한 게 에리나는 내 무예 능력을 익히 알고 있다.
내가 오러를 다룰 정도의 강자임에도 실력을 감추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추론이 쉬웠을 테다.
"제가 선물한 철창이 망가진 것도 엉덩방아를 찧어서 그런 게 아니고 길리아스 멜번과의 결투 때문에 그랬던 거죠?"
"설마요. 그랬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겠죠."
"특이하게도 당신은 그런 성향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저 멍청한 자들이 공을 가로채 가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틀린가요?"
정곡을 찔렸다.
다른 변명할 말이 별로 떠오르질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아가씨, 문제가 되는 행동은 삼가 주십시오."
살레온 가문의 시종장 조안이 살며시 다가와 말한 것이다.
"아가씨는 다른 이들의 이목을 받고 계시니까요. 우리 측의 귀족 자제와 담소를 나누는 거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곤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가씨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말입니다."
"알고 있어요. 잠깐이면 돼요."
"예, 부디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게 주의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한 조안은 나를 보며 고개를 슬쩍 눈인사를 보냈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조안 씨. 잘 지내셨나요?"
"일라인 님이야말로. 격조하셨습니까."
"보다시피 잘 지냈습니다."
"그러네요, 변하신 게 없는 것 같아 안심입니다."
조안은 나를 훔쳐보는 주변 귀족 영애들을 곁눈질하며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열렬한 시선을 받으시는군요."
"하하…."
"그렇다고는 해도 에리나 아가씨와 합석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만. 그걸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예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전 잘못 없어요. 찾아오는 건 제가 아니라 상대 쪽이거든요."
"예에… 그랬었죠."
내게는 다행스럽게도 조안이 이 자리를 수습해 주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에리나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넌지시 전했으나 에리나는 왜인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문제 삼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잠깐만요, 어째서 조안의 이름은 기억하고 있는 거죠?"
"예? 그야 기억을 하고 있으니까요."
"내,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죠. 당신을 얼마나 봤다고요."
"조안은 다르다는 건가요?"
"다르죠."
조안과는 집사 수업이 진행되는 2달 동안 매일 얼굴을 마주했다. 아무리 나라도 얼굴과 이름 정도는 기억한다.
"읏…!"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무는 에리나.
조안은 골치 아프다며 고개를 흔들고는 내게 말했다.
"일라인 님. 슬슬 다른 분과도 이야기를 해 보시는 게 어떠실지요."
"그래야겠네요."
마침 데니안이란 녀석이 이곳을 보고 눈에 불을 켠 채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 * *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진 왕실 파티.
파티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혹여나 쥬라스 녀석이 무슨 짓을 해 오지 않을까 싶어 조마조마했으나 며칠이 지나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루어 보건대 내 뒷조사에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아니, 단순히 뒷조사를 하지 않은 걸지도 몰라.'
에오니아에 대해서도 깔끔하게 넘겨줬다고 생각하는지 미행을 붙인다거나 하는 미련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 덕에 에오니아는 실력 있는 신관이 있는 도시로 향해 무사히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나마 일이 있다고 하면 내 명성을 역이용한 케스퍼 녀석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는 것 정도.
─용병 웨이드가 쥬라스 파밀리온을 꺾었다!
─용병 웨이드는 밀리아스의 신동이었다!
이런 소문이 국내에 퍼지게 되면서 케스퍼 녀석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져 있었다.
다른 국가들은 이런 뜬소문을 쉽게 믿지 않았던 반면 왕국 내 국민들은 이런 우상화 선동이 쉬웠다.
줄리아의 시민들은 케스퍼 녀석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일손을 놓고 동물원의 동물을 보는 것처럼 녀석을 바라보았고, 듣자 하니 이런저런 혼담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있다고 한다.
'노골적인걸.'
밀리아스 후작가의 의도는 뻔했다.
내게 도착한 편지를 보면 명확하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웨이드.
조제트의 직인이 찍혀 있는 편지.
내게 어떤 제안을 해 올지 너무도 일목요연했기에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단은 시기를 최대한 늦춰야겠군.'
다행히 저쪽도 일을 급하게 진행시키고 싶지는 않은지 사람을 보낸다거나 하는 둥의 강압적인 방식은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답신을 무시하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을 내기로 했다. 그로 인해 다니던 아카데미에 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 그 일에 착수하기로 했다.
철옹성의 로젠버그. 그에 대한 영입 작업을 말이다.
내가 다른 이의 간계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뒷배였다.
뒤를 지켜 주는 세력만 있으면 그 치졸한 간계에 놀아나지 않아도 된다.
'그 후보군은 셋.'
로젠버그는 그중 하나였다.
루트거 로젠버그 백작.
지금은 가세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로젠버그 백작가는 전성기 적 알바드 내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는 명문가였다.
그를 내 편으로 만든다면 밀리아스 후작을 견제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긴 하겠지만.'
당장은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나는 유미르를 대동하고 루트거가 목격됐다고 하는 칼론 산지로 향했다.
베카비아 왕국과 알바드 왕국의 접경 지역인 이곳에서 루트거의 목격담이 나오고 있었다.
산지 부근에 형성되어 있는 마을에 도착한 나는 허름한 주점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저자들이군.'
명백히 품고 있는 기운이 다른 두 명의 남자. 용병이라기에는 그 풍모가 정갈했고, 정규군이나 기사라기에는 야인의 기색이 느껴졌다.
나는 그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주점의 점주에게 말했다.
"주인장, 이곳에는 중환자라도 있는 겁니까?"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약재가 보여서 말입니다. 거기에 놓여 있는 그건 루어의 풀인 것 같고. 그 옆에 있는 건 시스오의 줄기입니까? 둘 다 제법 독한 약재여서 중환자라도 있는 줄 알았죠."
"하하, 저는 맡아 두고 있는 것뿐입니다요. 환자는… 있습니다만. 저는 자세히는 모릅니다."
점주는 환자 이야기가 나오자 남자 둘을 흘겨보았다. 남자들은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긴급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흠, 이건 쓸데없는 참견이지만 루어의 풀을 사용할 때는 주의하는 게 좋다고 전해요. 그건 약초이기도 하지만 고열이 있는 환자에게 처방했다간 맹독으로 작용하니까."
"그, 그렇다면 직접 주의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점주는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경계와 정중함이 오묘하게 섞인 태도로 내게 말해 왔다.
"잠시 괜찮겠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음…!?"
그들은 후드 속에 숨어 있는 내 얼굴을 보고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얼굴이 가면으로 가려져 있는 것을 보고 경계심을 높인 것이다.
"훗, 그 태도로 보아하니 용건은 사라진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불쾌했다면 사과를 드리지요. 실례가 안 된다면 귀하의 고명을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쉽게 이름을 내놓을 처지가 아니라서요. 거절하죠."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대충 이해하고 넘긴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게 상관없을 정도로 절박한 것인지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그렇담 이름에 대해선 아무래도 좋습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귀하께선 약학에 밝으신 것 같은데, 혹여 환자 한 명을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좋아, 걸려들었다.
그렇다고 넙죽 알았다고 하면 굳이 이런 상황극을 한 이유도 없었기에 조금 뜸을 들이기로 했다.
"갈 길이 바빠서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든 좀…."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도록 하죠."
그러자 잠자코 있던 다른 남자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다혈질인 모양인지 쏘아 내듯 내게 말해 왔다.
"환자가 있다고 말하잖아! 잠자코 따라오라고!"
"…귀찮은 녀석들이었군. 르미유. 쫓아내."
내 말에 유미르가 은은한 투기를 발산했다. 등골을 찌르는 살기에 남자들은 우당탕!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려 했다.
점주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부탁이니 밖에서 해 주십시오! 제발!"
"…흠. 미안합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낫겠군요."
딸그락! 나는 테이블 위에 동화 하나를 올려놓고 일어났다.
그렇게 미련 없이 주점을 떠나려는 내게 남자가 쿵! 머리를 박으며 오체투지를 했다.
"부탁드립니다! 조금 전의 무례는 사과드리겠으니 부디 환자를… 우리 아가씨의 상태를 봐주십시오!"
유미르의 무력시위가 효과가 있었다.
그걸로 말미암아 내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걸 어필했으니까.
이쯤 하면 충분하다. 이제 승낙할 일만 남았는데.
"흠, 그런데 그쪽은 머리 안 박습니까?"
"…엉?"
멍하니 있던 다혈질의 남자는 어리둥절하며 신음했다.
그의 옆에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야, 조지. 뒈지고 싶지 않으면 머리 박아."
"…옙!"
정중한 남자가 상관이었는지 다혈질의 남자도 곧 머리를 박았다.
나는 그 모습에 못이기는 척. 그들을 따라가기로 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19화.
게임의 스토리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나 여러 캐릭터가 마구 등장하는 가챠 게임은 더더욱 그렇다.
그 캐릭터 하나하나에 심도 있는 스토리를 넣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여 게임사들은 어쩔 수 없이 클리셰를 사용한 개인 스토리를 내고는 하는데 루트거 로젠버그는 그런 류의 캐릭터였다.
병약한 외동딸을 둔 아빠. 대표적인 클리셰다.
그의 딸 에스텔 로젠버그는 10살 때까지는 그 미모로 영지 내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성장한다면 장차 알바드 왕국을 대표하는 미녀가 될 거라며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미모는 돌연 온몸에 생긴 흉측한 종기들로 인해 망가지고 말았다.
루트거는 저명한 의사들을 불러 병의 이유를 알아보려 했지만 그 누구도 병에 대해서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 와중 그의 영지에 지독한 전염병이 돌게 된다.
─저것이 원인이다! 저것이 병을 퍼트리고 있는 거야!
─이 괴물!
영지민들은 그 전염병의 원인으로 에스텔을 지목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입이 마를 정도로 칭송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괴물 취급하며 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영지민들에게 크게 실망한 루트거는 영지와 작위를 반납하고 측근 부하들만을 대동한 채 대륙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병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거병을 한 주인공과 알스는 훗날 산적단으로 전락해 버린 루트거 무리를 토벌하러 갔다 이 사정을 알고 도움을 주기로 한다.
이때 대륙 북동부로 파견을 갔던 알스가 우연히 병의 원인을 알아낸다.
그렇게 알스가 치료약을 가지고 루트거가 있는 곳으로 갔지만 아버지의 짐이 되기 싫었던 에스텔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였다.
루트거는 딸을 잃은 슬픔에 오열하면서도 백방으로 노력해 준 주인공 일행, 특히 알스에게 감복하며 휘하에 들어간다는 것이 루트거의 스토리였다.
"그런데…. 책임자가 없는 모양이군요."
루트거가 보이질 않았다. 내 물음에 안내를 맡은 정중한 남자, 잉스는 볼을 긁적였다.
"눈치채셨습니까. 예, 추측하신 대로 우리 주군께서는 희귀한 약초를 구하기 위해 남방에 가 계십니다."
"그 주군이라면?"
잉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루트거 로젠버그. 비취의 로젠버그라고도 불립니다만. 알고 계십니까?"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과거 알바드의 제 2장군이자 사략의 카이엔의 오른팔로 불리던 명장. 그것이 로젠버그였다.
'쳇, 엇갈려 버리고 만 건가.'
들어 보니 루트거가 돌아오기까지 못해도 보름은 걸린다고 한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으니 루트거와의 대면은 후일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잉스가 안내한 곳은 산지 구석에 위치한 산장이었다. 산장 부근에 도착하자 악취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미리 부탁드립니다만 부디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아가씨께서 상심하실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문을 열어젖히는 잉스.
그곳에는 흉물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형이 있었다.
언제나 침착한 유미르가 헛숨을 들이켰을 정도다. 잉스가 미리 주의를 해 주지 않았다면 소리를 질렀을지도 몰랐다.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데.'
게임에선 그저 흉측한 몰골이었다 정도로 표현이 되기에 알 수가 없었지만 이건 정말 심각했다.
언젠가 우연찮게 익사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지금 에스텔의 모습은 그것보다도 심각했다.
영지민들이 에스텔을 역병의 원인이라 여긴 것도 이해가 갔다.
온몸에 난 종기는 잔뜩 부풀어 고름이 꽉 차 곧 흐를 것 같았고, 이미 터져 버린 고름에선 악취가 진동했다.
"잉스…? 당신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말씀드렸다시피 루트거 님께서 돌아오시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부풀어 오른 종기가 눈을 덮어 앞이 보이질 않는지 그녀는 어디를 바라보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곧 나의 존재를 본능으로 눈치챘는지 움찔, 몸을 움츠렸다.
"혹시, 다른 분이 계신가요?"
"예, 아가씨의 상태를 봐주실 분입니다."
"…."
이제는 의사들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지 침울한 기색을 보이는 에스텔.
어떠냐며 바라보는 잉스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도록 하죠."
"엇…! 병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으신 겁니까?"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게임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니까.
게다가 실제 알스가 구해 왔다는 약초는 사용해 보지 못했었다. 그 전에 에스텔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계산 착오가 있었네.'
설마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다. 그렇기에 준비해 온 약재가 부족할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저희는 아무런 갈피도 잡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그럼 준비를 하도록 하죠."
그러나 그때였다.
"…전, 치료받고 싶지 않아요."
에스텔의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
"…."
낫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지금껏 자신을 찾은 수십, 수백 명의 의사가 어떤 호언장담을 하고서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를 속였는가를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잉스는 빠득! 이를 악물고는 내게 말했다.
"준비해 주십시오. 아가씨는 제가 설득해 놓겠습니다."
"뭐, 그러도록 하죠."
산장에서 나온 나는 유미르의 도움을 받으며 도구를 준비했다. 일단 고름을 째야 하기에 의료용 칼을 소독하고 미리 가져온 약재를 빻아 특수한 기름을 넣어 연고로 만들었다.
나에겐 이러한 약학 지식이 있었다.
현대의 지식은 아니었다. 그저 이 세계에서 공부할 거라곤 그런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루트거의 일도 있고, 훗날 도움이 될까 하여 나는 틈틈이 약학 서적을 읽었었다. 스승의 도움을 받아 응급처치 기술도 배워 의료 기술을 일정 수준 갖추고 있었다.
"유미르, 넌 저 병에 대해 짐작 가는 게 있어?"
혹시나 하여 물었더니 유미르는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보는 증상입니다. 그보다도 도련님. 저 환자를 너무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필요한 처치는 제가 하겠습니다."
"왜, 전염이라도 될까 봐? 괜찮아. 그랬다면 다른 사람들도 다 죽었겠지."
"그보다… 베카비아에는 가 보지 않으셔도 괜찮은 건가요? 날이 넘어가면 베카비아에서 머무를 시간이 줄어들 겁니다."
"아, 그거 말이지."
유미르에게는 그렇게 둘러댔었다. 갑자기 내가 루트거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이상하니까.
"다음에 가지 뭐."
난 유미르의 도움을 받으며 치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잠시 괜찮겠소."
다혈질의 남자. 조지라는 자였다.
"무슨 일입니까? 재촉하는 거라면 거의 다 됐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좋소. 다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을 뿐이요."
"부탁?"
조지는 침을 삼키더니 말한다.
"부디 아가씨의 비극을 당신이 끝내 주시오."
"…오호라."
에스텔을 죽여 달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조지의 얼굴에 쓰여 있는 건 다른 게 아니었다.
"이 이상 이런 외딴곳에서 썩기 싫다는 겁니까?"
"…!"
"저 환자만 없다면 루트거 로젠버그는 자유의 몸. 그렇게 될 경우 당신도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되는 거니까요."
정곡이었는지 조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이유가 됐든 상관없소. 아가씨의 병은 고칠 수 없는 것이요! 그 어떤 고명한 의사도 해내지 못했지. 그러니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자는 것뿐이야! 당신이라면 좋소. 정체를 알고 있지 못하니 루트거 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체념을 하시겠지. 당신에게 복수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시오."
"훗, 그걸 과연 충성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까?"
"크윽!"
"뭐, 쓸데없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르미유, 그것들을 챙기고 따라와."
그리고 다시 도착한 산장에서도 잉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오 아가씨! 당신이 그런 태도를 보이니까 루트거 님도 마음을 강하게 먹지 못하는 겁니다! 당신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저와 조지의 입장도 생각해 주십시오! 제발 좀!"
"흑! 흐흑!"
고름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
잉스의 눈빛엔 에스텔에 대한 존중이나 존경보다는 분노와 혐오가 더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이거 완전 콩가루 집안이구만.'
후에 루트거를 휘하에 들일 때 이놈들은 쳐내기로 했다.
"아….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아가씨는 설득했습니다. 치료 준비는 된 겁니까?"
"됐습니다만. 정말 설득한 것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러니 어서 치료를 해 주시지요."
"흠."
치료 과정 자체는 단순했다.
먼저 종기를 칼로 째 그 안에 있는 고름을 전부 짜내야 한다.
준비해 온 약재가 부족해 모든 종기를 짜내는 것은 무리였기에 생활에 문제가 되는 종기들만 처치를 해 놓기로 했다.
찌익! 기괴한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종기. 그 안에서 고동색의 고름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건….'
일반적인 고름이 아니었다. 고름이란 백혈구가 세균과 싸워 생기는 치유 작용의 일종이다.
이 고름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과학적으로 분석을 할 수가 없으니 뭐라 할 수가 없었지만 적어도 몸의 치유 작용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이만큼 종기가 생길 정도로 백혈구가 일을 했다면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이마의 종기를 짜내자 눈이 보여 왔다.
"…."
그녀는 가면 속의 내 눈을 응시해 왔다.
푸른색의 깊은 눈. 그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르미유, 연고를 줘."
"예."
고름을 짜낸 뒤에는 칼로 짼 흉터에 연고를 발랐다.
잉스가 묻는다.
"그걸로 치료가 끝난 겁니까?"
"우선은 긴급하게 처치를 해 놓은 것뿐입니다.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치료하는 건 아니에요."
우선 눈 쪽의 종기를 처리한 뒤에는 등 쪽의 종기들을 처리했다. 그것으로 준비해 온 약재는 전부 사용하게 되었다.
"이걸로 적어도 편안하게 누울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잉스는 상황을 낙관하지 않았다.
"몇몇 의사들도 당신과 똑같은 처치를 했었습니다만 몇 시간 후 곧바로 재발하더군요. 더 심각하게 말이죠."
"그 몇 시간이라고 하면?"
"대략 4시간에서 5시간입니다."
"그럼 그때까지는 기다리고 있도록 하죠."
나로서도 치료에 대한 확신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준비한 약재는 게임에서 알스가 준비했던 물건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읽은 약학 서적에 이런 약초 조합은 없었어.'
실제 사용해 보질 못했으니 게임의 알스가 잘못 짚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 경우 루트거의 영입에 차질이 생기겠지만 그때를 위한 다른 방법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나는 잉스가 준비해 준 산장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처치를 하고 12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쿵쿵쿵! 산장 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입니다! 잉스입니다!"
나는 가면을 착용하고 문을 열었다.
"차도가 있습니까? 뭐, 그 표정을 보니 있는 것 같군요."
"예, 있습니다! 종기가 재발하지 않았어요!"
좋아, 게임의 알스는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병의 완치 방법도 짐작이 갔다.
"그럼 제 역할도 여기서 끝이군요. 연고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다음부터는 직접 처치하도록 하세요."
"예? 하, 하지만 병의 근본적인 치료가 되는 건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요?"
"치료를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들이 환자를 봐달라고 하기에 봐준 것뿐입니다. 맡아서 치료를 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애초에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선 긴 시간이 필요한데, 저 환자 하나를 위해 내게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라는 겁니까?"
"대, 대가는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고용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이만 가 보도록 하죠. 르미유, 가자."
"기다리십시오!"
잉스는 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려 한 모양이지만 탁! 유미르가 먼저 쳐내 버렸다.
잉스는 읍소했다.
"루트거 님이라면. 루트거 님이 돌아오시면 대가를 지불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름만이라도 알려 주고 가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렇담 좋습니다. 그 루트거가 돌아오면 전하도록 하세요. 딸을 고치고 싶다면…."
이걸로 루트거 영입 작전의 첫발을 뗄 수 있게 된다.
"용병 웨이드를 찾아오라고."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20화.
칼론 산지에서 돌아오고 며칠.
나는 밀리아스 후작의 간계에 대처할 본격적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남은 선택지는 두 개인가.'
루트거를 통해 견제한다는 방법이 실패한 지금 남은 선택지는 두 개.
살레온 계파와 손을 잡는 것과, 크로싱 공화국과 손을 잡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둘 다 꺼림칙한 선택이었다.
살레온 계파와 손을 잡는다고 해도 결국 이용당하는 건 똑같았고, 크로싱의 경우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크로싱은 너무 위험하긴 하지. 그렇담 살레온 쪽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건가.'
다행이 내게는 살레온 커넥션이 있었다.
바로 에리나였다.
얼마 전에도 살레온 공작가에서 편지가 왔었다.
다시 한번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다고.
아마도 파티에서 애매하게 대화가 끊긴 일 때문에 에리나가 나를 호출해 낸 것이리라.
그때는 루트거를 영입하기 위해 칼론 산지로 향하려던 때였기에 정중한 거절 답장에 세로 드립으로 '질척대지 좀 마요.'라고 적어 보내 주었지만 이젠 오히려 내 쪽에서 다가가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살레온 쪽과 접촉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며칠이 더 지나.
내 생일이자 성인식의 날이 찾아왔다.
이날에는 퍼지 형과 율리아 누나까지 휴가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성인이 된 걸 축하한다 알스. 이건 자그마한 선물이다."
퍼지 형은 군 장교들이 사용하는 지휘 막대를 선물해 주었다. 좋은 나무로 만든 것인지 광택이 흐르고 있다.
맥스 형은 구애의 시가 적힌 시집. 밀러 형은 역사서. 그리고 율리아 누나는 멋들어진 사복을 선물해 주었다.
"축하해 막둥아. 하여튼 어느새 다 커 가지고. 예전에는 누나 누나 거리면서 졸졸 따라다녔었는데 말이야."
"그런 기억은 없습니다만. 그리고 누님. 이제는 막둥이라 부르지 말아 주세요."
"후후, 전에도 말했지만 막둥이는 언제까지나 막둥이란다! 그게 싫으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힘을 내 달라고 말하렴!"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됐다고요."
"…엉?"
영문을 몰라 하는 누나에게 부모님이 멋쩍은 얼굴로 말한다.
진짜 막둥이가 될 막내의 잉태 소식이었다.
이를 몰랐던 퍼지 형과 율리아 누나는 펄쩍 뛰며 놀라 했다.
아버지가 말하길. 내가 성인이 되어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고.
그렇게 내 성인식은 막내의 잉태 소식과 함께 더욱 떠들썩해졌다.
형들은 귀한 술을 마음껏 풀어 마시고 있었고, 율리아 누나는 어머니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며 경이로워했다.
노산이 걱정되는지 실력이 좋은 산파를 구하겠다며 벌써부터 난리를 피운다.
내 성인식이었는데, 어느새 주인공은 부모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리야 스승이 며칠 사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승의 선물을 기대하고 있던 내게는 맥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도련님."
"아, 유미르. 마침 잘됐네. 물어볼 게 있었어."
"뭐든 물어보세요. 하지만 그 전에… 이걸 받아 주십시오."
유미르가 건네준 것은 특이한 모양을 한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이건…!'
게임 속의 알스가 항상 차고 다니던 목걸이였다. 그 당시에는 그냥 일러스트를 화려하게 보이기 위한 장신구이겠거니 했었다.
'그게 유미르의 성인식 선물이었다니. 이런 사정이 있는 물건이었군.'
무척 기뻤다. 선물 자체도 기뻤지만 스토리대로 이야기가 흐르는 것 같아서 더욱 좋았다.
"성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그런데 괜찮은 거야? 척 봐도 굉장히 비싸 보이는 물건인데."
"예, 괜찮습니다. 구매한 것이 아니라 제가 맡아 놓고 있던 물건이니까요."
"맡아 놓고 있던 거라면 더더욱 안 되잖아. 주인이 따로 있다는 거 아니야?"
"아뇨, 그 목걸이의 주인은 알스 님이십니다. 그것만큼은 분명합니다."
"…?"
무슨 사정이 있는 것처럼 보여 물으려 했으나.
스륵! 때마침 내 방에서 느껴지는 기척.
"응…? 누구지?"
가족들은 전부 1층에 있고, 내 방을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사용인인 유미르도 여기에 있다.
나는 괜한 의심이 들었으나 유미르가 속삭였다.
"일리야 님입니다. 조금 전에 조용히 저택에 들어오셨어요."
"조용히라니 어째서…."
그건 들어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끼익!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스승은 군것질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움찔하더니 이내 나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습을 보아하니 선물과 편지를 내 책상에 올려놓고 떠나려던 모양이다.
"곤란하게 됐군. 모르게 두고 갈 생각이었는데…."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뭐 하고 있어요 스승?"
나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선물을 확인했다.
잘 제련된 검과 창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것도 읽어 봐도 되죠?"
나는 곧장 편지까지 뜯었다.
"아니 잠깐…."
스승은 멈추려는 모션을 취했으나 곧 체념하고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는가는 편지 내용에 쓰여 있었다.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뇨? 무슨 소리예요 이게?"
"쓰여 있는 그대로야. 알스, 나는 이제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그러니 앞으로 나에 대한 건 잊고 살아가 다오."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요. 말해 주세요."
"미안하다. 이건 말할 수가…."
"말해 주세요."
꽉! 그녀의 어깨를 잡고 말을 이어 갔다.
"전에 파티장에서도 말했었죠. 무슨 일이 있으면 부탁이니 제게 상담을 해 달라고요. 제가 가능한 한 더 좋은 방향으로 일을 이끌어 가겠다고요. 그때 스승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죠?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건 긍지 있는 무인으로서 어떨까 싶은데요?"
"크윽…!"
그녀는 이내 고개를 떨어뜨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 *
내가 칼론 산지에 가기 며칠 전. 스승에게는 한 가지 용병 의뢰가 들어왔다고 한다.
보수금은 자그마치 1천만 실란. 우리 영지의 반년 치 예산과 맞먹는 거금이다. 한화의 가치로 따지면 1억 정도일까.
하지만 스승은 이 거액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가 조항에 나를 대동할 것이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기보다 이 의뢰는 용병 웨이드에게 온 것과 다름없었다. 신원미상의 인물인 웨이드에게 직접 보낼 수가 없으니 관계자로 알려진 일리야 스승에게 보낸 것이다.
"제게 의뢰가… 어디에서 보낸 거죠?"
"크로싱 공화국이다."
"크로싱…!"
쥬라스 녀석의 짓이 분명했다.
"크로싱은 최근 대대적으로 병사들을 소집하고 있어. 그 탓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들은 비상이 떨어져 있는 상태야. 주요 상대는 알바드 왕국과 베카비아 왕국. 그 둘이지."
"알바드와 베카비아…. 크로싱과는 역사적인 앙숙들이네요."
그런 와중에 나에게 의뢰를 보냈다는 건 다른 뜻이 아니다.
"그들은 너를 군의 지휘관으로서 사용하고 싶은 모양이야. 이 거액의 의뢰금을 보면 분명해."
"제가 지휘관으로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아이에게 본격적인 군의 지휘라니."
"아뇨…. 애초에 용병을 정규군의 지휘관으로 쓴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에요. 폴딕 전투에서의 전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래, 그러니 짚이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제가 쥬라스와 체스 대결을 벌인 것 때문인가요…."
"그래. 내 탓으로 인해 알스 네가 이상한 주목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지."
나를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때의 체스 승부는 스승을 대신하여 나섰던 것이니까.
"그렇기에 거절을 했지만 곧 치졸한 방법을 써 오더군."
쥬라스. 그 녀석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뭐든 한다.
곧바로 스승의 용병 부하들을 붙잡아 협박을 가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 했던 거군요."
"그래. 제자의 발목을 잡는 못난 스승은 될 수 없으니까."
"어휴, 그래서요? 혼자 어떻게 하려는 건데요?"
"어떻게든 부하들을 구출해 내고 조용히 은거하여 살아갈 생각이다."
"소용없어요."
"뭐?"
어차피 쥬라스는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이건 그 녀석이 나름대로 배려를 해 준 거예요."
"배려라고?"
"그야 그럴 생각만 있었으면 더 과격한 수를 썼을 테니까요. 스승의 부하들을 인질로 잡는 건 보여 주기식의 유치한 짓이죠."
좋은 말 할 때 나타나라.
쥬라스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부하들을 붙잡아 약점을 잡은 것도 딱히 어떻게 해 보려 한 게 아니라 참지 못한 스승이 제게 이야기를 하게끔 만들려던 거예요. 그러니까 아마 그들은 별 탈 없이 무사할 겁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한담.
부하들을 약점으로 잡은 건 형식상의 협박이었겠지만 내가 거절을 할 경우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예상이 맞다면 이번 전쟁은 그 전쟁이다.
과거의 이야기는 잘 나오지 않는 게임에서도 몇 번 언급이 되었던 대전쟁.
삼사자 전쟁이다.
'마침 좋은 기회야.'
크로싱과의 커넥션을 만들 기회.
살레온 계파와 손을 잡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던 만큼 이번 일로 돌파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스승, 크로싱에 답변을 보내 줄래요? 2천만 실란과 함께 전리품 일부를 약속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요."
두 배로 올린 보수금.
이 제안을 쥬라스는 단박에 수락.
나는 크로싱으로 향하는 여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크로싱이 제시한 합류 시한은 보름 정도.
그 전까지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먼저 부모님에게 사정을 설명하기로 했다.
다만 어머니의 경우에는 걱정을 시키면 태교에 좋지 않을 것 같았기에 스승과 수행을 떠난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아버지에게만 사정을 말하였다.
"흠, 크로싱으로 가게 됐다니…. 기구한 일이 되었구나."
퍼지 형에게 미리 귀띔을 받은 게 있는지 아버지는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다.
"네 결정은 존중한다만 너무 상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아니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피하기만 한다면 상대가 더 악랄한 수를 써 올지도 몰랐다.
"지금은 녀석의 의도에 놀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정면에서 담판을 짓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위험한 일이긴 했다.
밀리아스 후작과 쥬라스 파밀리온. 진정으로 무서운 게 누구냐고 한다면 후자였으니까.
"일라인 남작,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저의 탓으로 당신의 귀한 아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어요. 어떤 비난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일리야 스승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너무 자책하지 말게. 결국엔 아들 녀석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까. 선생 된 자라면 제자의 선택을 믿고 지켜봐 주게나."
"…감사합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알스를 당신의 품으로 돌려보내겠다 맹세하겠습니다."
"그보다는 둘 다 생환하는 게 좋겠지. 무사를 기원하겠네."
그렇게 아버지를 납득시킨 후에는 곧바로 채비에 들어갔다.
영지 내에서 마차를 수배한 뒤, 얼굴을 가려 줄 회갈색의 투구를 새로이 제작하기로 했다.
어머니가 내게 준 투구는 그때 길리아스의 일격을 맞고 패여 버렸으니까.
'아마 그곳에선 투구를 쓰고 지내는 시간이 더 많을 거야.'
그러니 되도록 쓰고 있기 편안한 투구를 제작하기로 했는데, 영지의 대장장이가 너무 힘을 준 것이 문제였다.
"하하핫! 어떻습니까 도련님. 도련님에게 딱 어울리는 투구 아닙니까? 과거 신화시대의 용기사들이 사용했다던 칠용 투구를 빗대어 만들어 봤습니다."
"음…. 분명 멋지긴 합니다만."
전쟁에서 사용하기에는 어떨까 싶었다.
너무 눈에 띄면 상대에게 표적이 되기 딱 좋으니까.
'뭐, 괜찮으려나. 일부러 대장의 표식을 휘황찬란하게 만들어서 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똑같은 모양의 투구 하나와 평범한 투구를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그 투구의 제작이 끝나 출발을 하기 직전.
때마침 치료를 끝마친 에오니아가 이쪽으로 합류를 하였다.
그녀는 나를 보자 곧장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소리 높여 말했다.
"에오니아 미라벨! 지금 이 시간부로 착임하겠습니다!"
"착임이라니. 그런 거창한 말투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용병 웨이드가 에오니아 미라벨을 쥬라스로부터 구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었기에 웨이드로 활동하는 때만큼은 그녀가 정체를 밝힌 채 온전히 활동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여정에도 데려가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우리들은 그냥 동료예요. 용병 동료."
"그, 그렇습니까…."
아쉽다는 눈치다. 형식 같은 것에 굉장한 구애를 받는 모양이다.
일리야 스승은 에오니아의 그러한 성향을 알고 있는지 피식 웃으며 말한다.
"그러면 알스의 근위기사라는 건 어때 에오니아. 네 적성에도 맞고 괜찮을 것 같은데."
"어…? 근위기사는 일리야 너 아니었어?"
"아니야. 나는 이 아이의 가정교사 같은 거거든."
"그렇다면 알스 님의 근위기사는…."
"아직 없을 거다. 네가 맡는다면 첫 번째가 될 거야."
"첫 번째…!"
첫 번째라는 말에 에오니아는 부들부들 떨며 강력하게 자기주장을 시작했다.
자신이 쿠라벨 성국의 근위단장이었다는 커리어를 역설하며 근위기사직을 열렬히 희망한 것이다.
'이미지가 많이 다르네.'
게임에서 에오니아의 이미지는 세상에 달관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려 6년여간을 화상을 입은 흉측한 몰골로 죽은 사람처럼 생활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겠지.
지금은 대략 7개월여 만에 구출되었다. 그게 사람이 바뀔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대단한데. 정말로 그 심각했던 화상이 전부 치료되다니.'
에오니아는 과거의 화려했던 풍모를 되찾은 상태였다.
미라나 다름없었던 피부는 매끄러워져 있었고 전부 다 타 버렸던 머리카락도 단발의 형태로 자라고 있었다.
치료 과정에서 인상을 바꾼 탓인지 내가 알고 있던 일러스트와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대단한 미모였다.
"알스 님, 부디 저를 근위기사로 사용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근위기사는 이미 있어요."
"…예?"
나는 주위를 슬쩍 둘러본 뒤 외쳤다.
"유미르, 여기 있지?"
그러자 스르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암갈색의 딱 붙는 옷을 입고 있는 유미르가 나타났다.
"대단하세요 도련님. 기척은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요."
"기척은 느끼지 못했어. 그냥 있을 것 같아서 불러 본 거야. 아버지가 따라가라고 한 거지?"
"예에. 그런 셈이죠…."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는 유미르.
"그보다 도련님. 설마 저를 근위기사라고 말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맞아. 실제로 하는 일은 비슷하잖아?"
"안 됩니다. 저 같은 천한 것에게 도련님의 첫 번째 근위기사는 과분해요. 훗날 누군가에게 책을 잡힐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수인은 차별을 받는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걱정도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네가 진심으로 싫다면 재고해 보겠지만."
"싫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내심 기쁜지 자기도 모르게 꼬리를 살랑이고 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에오니아. 당신에겐 경호대를 맡길게요."
"경호대입니까?"
경호기사도 근위기사와 본질적으로는 같지만 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근위기사의 주목적이 요인 보호라면 경호대는 경비대를 통솔하는 일을 한다.
지금이야 경비대고 뭐고 없으니 형식상의 직책이긴 했지만 에오니아는 그것조차도 무척 기뻐했다.
"경호대장 에오니아 미라벨! 분골쇄신하여 알스 님을 보좌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오니아는 순식간에 일행에 녹아들었다.
친화력 하나만큼은 타고났는지 사이가 껄끄러웠던 유미르와 스승의 사이를 중재시키는 위업을 달성해 낸다.
그렇게 유미르(27세), 에오니아(28세), 일리야(29세). 훗날 아줌마 트리오라 불리는 콤비가 결성된 것이었다.
엑스트라 책사의 로열로드 21화
소집 장소는 크로싱의 서부에 위치한 대도시 카르텐이었다. 현재 카르텐에는 10만의 정규군과 함께 크로싱의 핵심 군 장교들이 모조리 집합해 있었다.
나는 이두마차를 빌려 카르텐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도착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대략 2일에서 3일.
그 마차 생활이 지겨울 거라 생각했기에 이번 전쟁에 관해 읽어 둘 만한 책을 챙겨 왔지만 그걸 읽을 틈은 없었다.
기마술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기마를 운용하기 힘든 캘리퍼 왕국의 전장과는 달리 이번 전쟁에는 기마병이 활발하게 운용될 거다. 알스, 네가 직접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하는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크로싱에선 장교들에게 필히 군마를 지급하게끔 하고 있어."
말을 타 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달려 본 기억은 없었다.
캘리퍼 왕국은 기마병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와 관련된 훈련을 받지 못했다.
스승은 마차 외에 따로 준비해 두었던 기마를 끌고 왔다.
"스승이 알려 주시는 건가요?"
"아니, 나보다 뛰어난 적임자가 있거든."
스승이 지목한 것은 에오니아였다.
'그러고 보니….'
게임에서 에오니아의 병과는 기마병이었다. 그것도 특수 병과였던 백마 부대다.
뭐, 백마 부대라고 해서 다른 기마대에 비해 성능이 더 뛰어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캐릭터 스킨적인 느낌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그럼 알스 님. 주제넘지만 교육을 진행하겠습니다."
"예, 부탁할게요."
"…."
"에오니아?"
"그… 가능하면 말씀을 낮춰 주실 수 있겠습니까? 주군에게 존대를 받는 건 이상한 느낌인지라…. 편하게 에오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애초에 주종관계가 아니라 말해도 듣지 않았기에 그녀의 뜻대로 해 주기로 했다.
"알겠어. 그럼 시작해 줘 에오."
"예!"
그녀는 최종 목표를 말을 타고 책을 읽는 것으로 정해 주었다.
"도착 전까지 가져오신 책을 모두 읽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건 너무 가혹한 거 아니야?"
내가 가져온 책은 총 다섯 권. 하루에 6시간씩은 읽어야 도착 전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말을 다루는 요령을 익히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요령 말이지…."
"간단합니다. 말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영특한 생물. 이 의미만 깨우칠 수 있으면 금방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말 또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녀의 말대로 그것이 핵심이었다.
딱히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말은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인다.
기수는 그저 방향을 정해 주는 것뿐.
그걸 깨우치고 나서야 편안하게 몸을 맡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틀째가 되는 날에는 말에 올라탄 채 꾸벅꾸벅 졸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는 말 위에서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 3일째가 되는 새벽.
"…대단하신 분이야."
비몽사몽하고 있는 내 귀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안에서 에오와 스승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빠르게 말을 다룰 수 있게 되실 줄은 몰랐어. 책도 기껏해야 세 권 정도 읽으면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다섯 권째를 끝내셨다니까!?"
에오는 흥분하여 재잘거리고 있었다.
"하핫, 기쁜 건 알겠지만 목소리를 줄여라. 그러다 알스가 깰지도 몰라."
"헉."
에오니아는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통해 이쪽을 엿본다.
나는 조용히 자는 척을 하기로 했다.
안심을 했는지 그녀는 무려 1시간이나 극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에오는 은근히 간신의 기질이 있네.'
나에 대해선 표리가 없이 그저 좋은 방향으로만 해석을 한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부하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법.
'뭐, 그래도 지금은 괜찮겠지.'
그렇게 극찬의 세례를 애써 무시하고 있자니 서서히 목적지인 카르텐이 보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