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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4

뜻밖의 반전에 서문엽은 멍해졌다.

역시나 모로 형제답다고나 할까.

호의를 베푸는 중에도 자신들의 이익을 빼놓지 않는다.

"한마디로 저희 공방이 서문엽 씨에게 협찬을 드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의외로 큰 시장입니다. 배틀필드 선수 외에는 이런 무기를 안 살 거라고 생각하시죠? 근데 레플리카를 구매하는 팬이나 수집가도 엄청 많습니 다. 저희 공방의 수제품을 거금에 사는 부자 수집가도 있죠."

무기 수집은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취미 중 하나였다.

날카로운 날만 없애서 살상력을 줄인 채 팔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간다고 한다.

그래서 인기 있는 선수들은 자신 만의 전용 무기를 따로 디자인해 사용한다.

보편적인 무기를 사용하면 레플리카를 팔 수 없기 때문.

그렇 다면 7영웅 리더 서문엽의 창 레플리카는?

"그럼 내가 고마워할 필요가 없잖아!"

서문엽이 버럭 소리쳤다.

" 물론이죠."

"그래서 저희가 협찬 비용을 견적 내봤습니다."

형제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슥 훓어보니, 요약하자면 1년에 100만 유로씩 5년 계약이었다.

옵션이 특이했다.

공식 •비 공식 배틀필드 경 기 출전해서 사용할 시 300만 유로. 서 문엽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것들이 기술적으로 날 끌어들이려 하네.'

1. 배틀필드 하세요.

2. 이왕 할 거면 우리 팀에서.

의도가 뻔한데, 또 거절할 이유도 없다는 점에서 치밀하기 그지없는 유혹이었다.

왕년에 전쟁에 참여했다가 지금은 조용히 사는 나이 든 초인들도 자기 무기를 애지중지 보관하는 습성이 있었다.

하물며 얼마 전까지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던 서문엽은 이 신무기들이 갖고 싶었다.

"그래, 좋다. 돈 주고 선물 주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서문엽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모로 형제는 씨익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갖고 있다 보면 쓰고 싶어지지.'

'맞아, 형 . 괜히 아마추어 리그가 있는 게 아니잖아.'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통하는 징그러운 형제.

문어 형제의 꿍꿍이가 척척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계획이 시작되었다.

"계약서는 잘 읽어보셨죠?

"그래."

"그럼 계약서 조항에 무기를 버리지 않고 보관할 것, 이라는 의무도 기억하시죠?"

"당연하잖아. 무기를 당연히 보관해야지 왜 버려?"

서문엽은 왜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말했다.

장 모로가 말했다.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으니 까요."

"사소한 문제?"

서문엽은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문어들의 꿍꿍이가 아직 더 남았나 싶었다.

"무기는 배틀필드 선수만 신고하에 소지할 수 있는 것 아시죠 ?"

"몰라, 나 면책권 있어서 상관없어."

"세관통과가 안됩니다."

즉, 한국에 가져갈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뭐? 그럼 어쩌라고?"

세관 검사를 무력으로 강행 돌파하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런데 아무리 면책권 이 있다해도 그건 지나치게 미친 짓거리였다. 서문엽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간단하지, 형."

"…뭔데?"

"협회에 선수 등룩을 하면 됩니다."

"뭐 인마?"

서문엽은 싸우자는 표정이 되었다.

"자국의 협회에 등록하는 방법이 있고."

"세계 협회에 다이렉트로 등룩하는 방법이 있죠."

"참고로 어느 나라 협회든 상관없이 세계 협회에 선수 등록을 할 수 있습니다."

"즉, 프랑스에서 선수 등록을 하시고 무기를 반입하시면 세관 통과가 됩니다."

"이미 아바타 등록도 되었으니 대리인이 신고해도됩니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직원을 협회로 보내겠습니다."

형제는 대본을 미리 본 것처럼 척척 말했다.

서문엽은 이 문어 형제가 또 자신을 한 발자국 더 꾀어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자식들아! 처음부터 이럴 의도였지?"

"저희 의도야 뭐, 새삼스럽게."

"모르셨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알고도 넘어가게 하는 게 협상이죠."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까지 둘이 판박이라 코미디쇼 같았다.

웃기게 생긴 주제에 참 똑똑한 놈들이었다.

"그건 싫은데...."

다른 방법이 없나 골몰하는 서문엽에게 모로 형제가 꾀었다.

"협회에 등록한다고 어떤 의무나 제한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오히려 뛰고 싶을 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으니 선택권이 늘 어난 거죠. 어느 부분을 봐도 서문엽 씨에게 손해인 부분이 없 습니다."

"설마 저희가 서문엽 씨에게 피해를 입히겠습니까?"

"저희는 서문엽 씨의 유품 경매에서 쓰시 다 귀찮아서 사흘만에 관두신 일기장도 구매했어요."

"공부는 안 하고 낙서만 한 초등학교 교과서도 있죠."

"…직원이나 불러, 이 징그러운 새끼들아."

배틀필드 장비 스폰서십 계약.

협회에 선수 등록.

이쯤 되면 이미 프로 선수였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니, 모로 형제의 유혹이 얼마나 치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손해는커녕 이익만 봤지만 속은 기분이 든 서문엽이었다.

모로 공방은 배틀필드 용품만 제작하는 게 아니었다.

모로 공방에서 개발한 제품을 한정 생산하여 판매하는 주방 용품 브랜드 JP모로라는 사업체를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서 생산된 한정품은 셰프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최고급품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요즘은 테니스 라켓, 배드민턴 라켓도 개발 중으 로 점점 사업을 넓혀가는 중이라고 한다.

'돈벌이가 무궁무진하네, 이 문어들.'

모로 형제가 보통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신나게 쇼평하고 돌아온 백하연과 한승희는 어쩐지 기운이 빠져 있는 서문엽을 보며 의아해했다.

"삼촌, 무슨 일 이야?"

"선물 받았어."

"그게 그렇게 시무룩할 일 이야?"

" 찬 계약도 했어 ."

"엥? 얼마짜리?"

"100만 유로."

"으아 부럽다!"

"근데 경기 뛰면 300만 유로."

"진짜? 한 경기라도 뛰면?"

서문엽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으, 부러운 일투성이네. 대체 왜 시무룩한 거야!"

"선수 등록을 했어 ...."

"선수 등록? 아, 무기 소지하려면 필요하구나."

백하연 은 그제야 자초지종을 이해하고는 풉 웃었다.

"삼촌 완전 프로 선수 다 됐네."

"문어 놈들한테 말린 게 기분 나빠."

그러자 필립 모로가 농담을 건넷다.

"클럽 입단 계약서도 쓰실래요?"

"신무기에 당해블 테냐?"

필립 모로는 고블린처럼 낄낄거리며 달아났다.

백하연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삼촌도 우리 팀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 왜?"

"삼촌이랑 같이 호흡 맞춰보고 싶어. 옛날에 아빠랑 그랬던 것처럼."

"옛날이라...."

서문엽은 피식 웃었다.

그에게는 불과 반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서문엽에게도 그 일이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어느새 2022년 이라는 시간대에 적응했다는 뜻이리라.

"새 무기를 얻으셨다면서요r

문득 나단이 특유의 천진 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어"

"그럼 한 번 테스트해 보고 싶진 않으세요?"

"테스트?"

"내일 오전에 모의 전투 훈련 이 있는데 거기 참가해 보시면 어때요?"

"지금 휴식기 아냐?"

"슬슬 다들 시즌이 다가오니까 전투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하거든요. 서문도 참가하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 말이 당신과 한번 겨뤄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

서문엽은 나단의 눈빛 속에 숨겨진 호승심을 감지했다.

"재미있겠네."

서문엽도 히죽 웃었다.

나단도 웃어 보였다.

"그럼 감독님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아마 허락하실 거예요."

백하연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고 묻자, 서문엽이 설명해 주

었다.

"그럼 삼촌 나단이랑 한판 붙을 수도 있는 거야?"

"응, 재 나랑 붙고 싶나 봐."

"삼촌 자신 있어?"

"자신 없을 건 또 뭐야?"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지만 서문엽 은 눈빛이 맹렬 하게 빛나고 있었다.

현대 스포츠 과학이 집대성된 배틀필드의 최강자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새로운 무기 성능도 확인해 볼 검, 좋은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쉬었는데. 갑자기 실력 발휘가 되려나 모르겠네?"

제럴드 워커 이후로 누군가와 대련해 본 적 이 없었다.

오늘 밤은 간단한 훈련 이라도 해야 할 듯싶었다.

< 유혹(2) > 끝 © 니를로

< 연습(1) >

다음 날.

클럽하우스 주차장에 슈퍼카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이제 휴가도 얼마 안 남았네."

"뭘 해야 남은 휴가를 잘 보냈다는 소리를 들을까?"

"포기해. 이제 놀 때가 아냐."

휴가를 즐기던 선수들이 하나둘 모의 전투 훈련에 참가하러 모여든 것이다.

모의 전투 훈련은 11 대 11 집단전을 치르는 훈련이었다.

던전에서의 사냥과 견제, 운영 등을 제외하고, 그냥 짧고 굵게 한 타 싸움을 치르는 간단한 훈련이다.

이는 오랫동안 쉰 선수들이 실전 감각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뿐, 평가에 반영되는 등의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만약 평가가 반영된다면 선수들도 이를 철저히 준비하느라 휴가를 즐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무 의미도 두지 않는다는 약속하에 동의를 얻은 훈련인 것이다.

하지만 물론 모든 선수가 편한 마음으로 이 훈련에 임하는 건 아니었다.

"후우, 다 죽었어!"

백하연은 각오가 남달랐다.

신참으로서 실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동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까닭이다.

서문엽은 그런 그녀의 등을 툭툭 쳤다.

"눈깔에 힘 풀자, 하연아. 혼자 투지 넘치면 촌스러워 보여."

"엑, 진짜?"

"그래, 제호 던전 처음 간 날 같아."

"흐흐, 뭐야, 그게! 완전 상상 가잖아."

"봐봐, 다들 여유 넘치잖니."

최고급 소파와 100인치짜리 TV가 설치된 휴게실.

각양각색의 선수들이 TV를 보거나 서로 잡담을 했다.

휴게실 한쪽에 설치된 바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문엽과 백하연이 나타나자 휴게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서문엽이다."

"오우, 저게 누구야."

"파리에 와 있다고 들었는데 정말 여기에 있네."

"저 사람이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지?"

"불사신이니 이제 이견의 여지가 없지."

"구단주들이 기어코 저 사람을 여기에 불러냈네. 그렇게 서문엽, 서문엽 노래를 부르더니."

서문엽에게 모든 시선이 쏟아진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모인 이곳에서도 서문엽은 모두의 주목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삼촌의 위엄 덕에 백하연은 조금 기운이 났다.

'그래, 난 아빠가 백제호고 삼촌이 서문엽이야. 나처럼 축복받은 선수가 어디 있겠어?'

배틀필드 변방 출신이라는 게 조금 위축됐었지만, 이내 자신감을 되찾았다.

"헤이, 서문!"

그때 거구의 흑인이 벌떡 일어나 서문엽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인상이 무척 험악해서 시비 거는 줄 알고 백하연은 움찔했다.

물론 쫄 리가 없는 서문엽은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왜 인마?"

"난 메인 탱커 치치 루카스다."

치치 루카스.

이탈리아 선수로 파리 뤼미에르 BC의 대들보라 불리는 메인 탱커였다.

"근데?"

치치 루카스는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쳤다.

그 의미를 알 리 없는 서문엽은 고릴라식의 시비 걸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여기에 사인 좀."

"···펜 가져와."

잠시 후 사인펜을 받은 서문엽이 치치 루카스의 상의에 사인을 해주었다.

"내 조카야. 잘 부탁한다."

"오케이."

치치 루카스는 백하연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도 무서웠지만 잘 보면 좀 순박해 보이기도 했다.

들어보니 치치 루카스는 나이가 이제 겨우 26세였다.

치치 루카스는 순박해서 금방 서문엽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며 친해졌다.

그 와중에 서문엽은 통역을 해주며 백하연을 계속 대화에 끼게 했다.

치치 루카스는 메인 탱커인 현재, 포지션이나 능력치나 파리 뤼미에르 BC의 중심이었다.

팀의 에이스가 나단이라면, 팀의 중심은 치치가 분명했다.

왜냐하면.

-대상: 치치 루카스(인간)

-근력 90/90

-민첩성 93/93

-속도 91/97

-지구력 100/100

-정신력 89/95

-기술 86/91

-오러 82/82

-초능력: 재생, 저항, 녹색 축복

-재생: 상처를 재생한다.

-저항: 모든 질병, 저주에 저항한다.

-녹색 축복: 식물의 성장 및 생존력을 키워준다.

어딜 가도 에이스로 통할 능력치였다.

서문엽이 볼 땐 마케팅에서 밀렸을 뿐, 톱3이나 제럴드 워커 같은 녀석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기량으로 보였다.

근력·지구력이 90·100.

민첩성·속도가 93·91.

특히 속도는 더 키우면 오히려 나단의 95보다 더 빨라질 수 있었다.

탱커가 아니라 근접 딜러를 했어도 잘했을 능력치였다.

'물론 초능력은 전부 탱커에 특화됐군. 근데 녹색 축복은 뭐지?'

독특한 초능력이었다.

서문엽은 치치 루카스에게 물었다.

"혹시 식물 좋아해?"

그러자 치치의 눈빛이 변했다.

"당연하지! 나무는 지구의 심폐야! 당신도 좋아해?"

"뭐, 자연을 싫어할 리 있나."

"역시! 당신은 좋은 사람일 줄 알았어. 물론 그러니까 인류를 구했겠지!"

치치는 어릴 적부터 나무를 심어서 지금은 숲을 가꾼 일을 자랑했다.

인근 땅을 사들여서 계속 나무를 심어 숲은 나날이 확장 중이라고 한다.

숲이 생기자 동물들도 정착했고, 덕분에 생태계가 조성되어 사람들도 좋아한다고 한다.

"멋진 일이네. 착하다."

통역으로 들은 백하연이 칭찬을 했다. 그걸 전해주니 치치도 좋아했다. 두 사람은 이제 친하게 지낼 것 같았다.

서문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다큐멘터리로 본 적 있지. 사막에 나무를 심어서 숲을 만든 여자 이야기였는데."

그 말에 치치는 감격에 부르르 떨었다.

"그런 아름다운 일을 했단 말이야? 사막! 그래,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지?! 그냥 평범한 땅에서 숲을 만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아무나 못 해, 인마.'

"은퇴하면 나도 숲을 만들어 사막을 정복하는 일을 하겠어!"

"그래, 잘할 수 있을 거다."

"제길, 난 왜 이런 데 도움 되는 초능력이 없을까?"

"잉? 있지 않아?"

"없어! 싸우기 좋은 초능력밖에 없어!"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녹색 축복이라는 초능력이 있는 걸 봤는데, 치치 본인은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있을 텐데?"

"없다니까?"

"어릴 때부터 나무 심는 일을 반복했다며?"

"응, 초인 각성하기 전부터 해왔어."

"그렇게 진심을 담아 평생 반복해 왔는데 그쪽 관련 초능력이 없는 게 더 이상한데."

"아직 내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제길, 사막에 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었는데 난!"

"자자, 그러지 말고 실험을 한번 해보자."

"실험?"

"내가 보기에는 네가 아직 초능력이 있는 걸 자각 못 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서문엽은 휴게실에 있는 커다란 대나무야자 화분을 가리켰다.

"저기다가 오러를 움직이면서 식물의 생장을 기원하는 거야. 한번 해봐."

"으음, 알았어!"

순박한 치치는 곧잘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나무야자를 향해 두 손을 뻗고 눈을 감아 집중하는 치치의 모습은 다른 선수들의 주목을 샀다.

"쟤 뭐 해?"

"몰라, 뭔가를 해보려나 봐."

"식물을 잘 키우는 초능력이라도 생기게 해달라고 기원하나?"

그런데 그때, 치치가 눈을 번쩍 뜨며 고함을 질렀다.

"어어!"

"어때, 효과가 있어?"

서문엽이 묻자, 치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가 소모됐어!"

오러가 소모되었다는 것은 초능력이 발동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제야 자신의 초능력 녹색 축복을 깨달은 것이다.

"서문! 고마워. 덕분에 내 초능력을 알게 됐어!"

"별말을. 대신 우리 조카나 잘 돌봐줘."

"미안! 그러고 싶지만 난 할 일이 생겼어."

"응?"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은퇴하고 사막에 가겠어!"

선수들이 모두 모인 휴게실.

그 한복판에서 치치가 폭탄선언을 했다.

"뭐, 뭐?"

"은퇴?"

"저 바보가 뭐래는 거야!"

"어이, 치치!"

선수들이 달려와 치치를 말리기 시작했다. 서문엽의 예상대로 치치는 팀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치치는 굴하지 않고 은퇴하겠다며 떠들어댔다.

바보 주제에 한 번 결심한 일은 번복하지 않는 뚝심을 지녔다.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꾸준히 나무를 심었겠지만 말이다.

골치가 아파진 서문엽은 치치를 불러다가 말했다.

"인마, 네가 하려는 일에는 돈이 엄청 들어. 그러니까 일단은 선수 생활을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지."

"···그런가?"

"사막에 물이 있어, 묘목이 있어, 도와줄 사람이 있어? 그게 전부 돈이야. 선수 생활 할 수 있을 때 돈을 왕창 벌어놓고 나중에 시도해야 효율이 좋잖아. 지금 은퇴하고 달려가겠다는 건 네 자기만족일 뿐이지 진정 자연을 위한 일이 아니야."

"그건 그런 것 같네."

간신히 치치의 은퇴를 뒤로 미뤘다.

대신 '돈이 필요해, 돈' 하며 중얼거리는 걸 보니 이젠 돈벌이에 집중할 듯했다.

"휴. 깜짝 놀랐어, 삼촌. 내가 오자마자 팀 핵심 선수가 사라질 뻔했잖아."

"너 쟤랑 친하게 지내야 해."

"또 그런다, 또. 극성이야, 정말. 내가 전학 온 초딩인 줄 알아?"

"딜러의 가장 큰 조력자가 누구겠어?"

"탱커?"

"그렇지. 삼촌이 볼 때 말이다, 이 팀은 나단은 대체해도 쟤는 대체 못 해."

"그 정도야?"

"응, 쟤 체격 봐라. 단단한데 호리호리하잖아. 발도 무지 빠를 것 같은데, 클래식한 탱커보다는 삼촌처럼 활발하게 전장을 누빌 타입이야."

"잘 아네? 이탈리아의 수호신이잖아. 치치 루카스."

"그래, 하여간 쟤랑 단짝 친구 돼야 한다. 관상용 식물 화분 하나 선물해 주든가 해."

"흐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처세술 좀 해볼까."

백하연은 대나무야자를 어루만지며 즐거워하는 치치를 인맥 타깃으로 삼게 되었다.

"흐음, 그나저나 나도 쟤처럼 뭐 보람찬 일이나 하나 할까?"

"그럼 나랑 여기서 선수 하자."

"아니, 자연보호처럼 지구에 도움이 될 만한 거 말이야."

"지구 한 번 구했으면 됐지 뭘 또? 나랑 선수 생활하면서 쉴 땐 드라마 보고, 딱 좋지 않아?"

"음, 그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다고 느껴지는 걸 보면 문어 놈들의 유혹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이곳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 이 걱정되는 돌머리 조카를 곁에서 돌봐줄 수가 있다는 점이 컸다.

"삼촌! 하자, 같이 하자!"

백하연이 마구 졸랐다.

하지만 서문엽은 이내 딴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소말리아에서 해적들을 학살하며 여생을 보내는 건 어떨까? 바다 정화잖아."

"뭐야, 그게!"

"아니면 아프리카에서 밀렵꾼들을 사냥할까."

"왜 자꾸 발상이 사람을 죽이는 쪽인 거야?"

"폭력이 더 재미있잖니."

그런 서문엽의 대답에 백하연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봐도 배틀필드를 해야 할 사람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Bonjour les gars!"

휴게실에 세 사람이 들어왔다.

둘은 모로 형제.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활기차게 인사를 건넨 덩치 크고 아마색 머리의 백인 사내는 아마도 60대 초중반 정도의 초인으로 보였다.

선수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위기를 보니 감독 같았다.

감독으로 보이는 사내가 서문엽을 바라보았다.

< 연습(1) > 끝

< 연습(2) >

"서문엽!"

사내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반갑게 소리쳤다.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확인해 본 뒤에 입을 열었다.

"고핀 감독?"

"오, 날 아시오?"

"그 정도는 알아야죠."

물론 몰랐다. 관심도 없고. 분석안으로 이름을 알았을 뿐이었다.

"나단에게 이야기는 들었소. 오늘 훈련은 아주 흥미진진하겠군."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카 때문에 예의 바른 서문엽.

고핀 감독은 껄껄 웃었다.

"뭘, 우리야말로 감사한 일이지. 그 멋진 실력을 보여주어서 우리 선수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시오."

"걱정 마십시오."

'아주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니까.'

서문엽은 근질거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소파에 누워 배를 긁적이며 드라마를 보던 게으른 서문엽이 아니었다.

신무기도 받고 강자의 도전도 받아서 승부욕을 자극받은 서문엽이었다.

이 세상에서 승부욕 없이 최고가 된 사람은 없다.

서문엽도 그런 남자였다.

휴게실 한쪽에서 조용히 있던 나단도 눈을 빛냈다.

감독의 허락도 떨어졌고, 구단주 모로 형제야 서문엽의 활약을 보고 싶어서 안달 난 광팬들.

이제 승부만 남았다.

제럴드 워커조차 일대일로 이긴 서문엽과 겨뤄볼 기회였다.

"엄밀히 말해 오늘 훈련은 훈련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놀이라고 봐야 하오. 그래서 팀을 가르는 방식도 재미있지."

고핀 감독은 팀 선정 방식을 설명해 주었다.

요컨대, 나단과 치치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자기 팀원을 한 명씩 데려오는 방식이었다.

나단 베르나흐와 치치 루카스가 한 편이 되면 상대 팀이 너무 불리해지기 때문에 어찌 보면 공정한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미스터 서문이 있으니, 나단과 서문이 팀을 가르시오."

"좋죠."

서문엽은 쾌히 승낙했다.

그리하여 나단과 가위바위보를 시작했다.

첫판에서 이긴 서문엽은 냉큼 치치를 데려갔다.

"윽."

나단이 장난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제럴드 워커에 비견되는 근력과 지구력을 지닌 엄청난 흑인 탱커 잭 존스를 지명했다.

속도가 50대로 낮은 편인 걸 보니 튼튼하고 이동 속도가 느린 클래식 탱커였다.

'왜 강팀인지 알겠군.'

뚝심 있는 클래식 탱커 잭 존스와 탱커답지 않게 발이 매우 빠른 치치 루카스를 둘 다 보유했다.

잠깐 생각해 봐도 이 둘을 활용할 수 있는 전술 패턴이 많이 떠올랐다.

여기에 나단까지 있는 팀?

'내가 감독이었으면 백전백승하고 다녔다.'

선수들 면면만 봐도 전술적 영감이 많이 떠오르는 서문엽이었다.

이 선수들로 7영웅을 꾸렸어도 충분했을 법했다.

물론 자신과 슈란은 꼭 포함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이런 선수가 많은 걸 보니, 확실히 초인들의 수준이 17년 전보다 높아졌어.'

바닥을 기고 있는 한국에 있어서 잘 체감 못 했던 사실이었다.

확실히 세계적인 추세로 보면, 배틀필드가 초인들의 수준을 높이고 있었다.

계속해서 팀원을 뽑았고,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능력치를 봐가며 적당히 뽑다가 중간 정도쯤에 백하연을 지명했다.

혹여나 다른 팀으로 갈까 봐 조마조마했던 백하연은 안도한 표정이었다.

팀이 다 갈리자, 고핀 감독은 놀란 얼굴로 서문엽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팀원을 이렇게 적절하게 잘 뽑은 거요? 당신이 뽑은 대로 팀을 구성해 더블 스쿼드로 운영해도 되겠어."

"선수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부해 뒀으니까요."

"흐음, 글쎄. 우리 팀에 대해 전혀 관심 없었다던데?"

"누가? 저 문어들이요?"

"으하하, 그래. 저기 뒤에 계시는 구단주분들 말이오."

문어라는 말에 고핀 감독은 푸하하 폭소를 터뜨렸다.

이 업계에서 모로 형제를 그렇게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서문엽밖에 없을 터였다.

"아무튼 이 정도로 우리 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참 기쁜 일이오."

은근슬쩍 파리 뤼미에르 BC에 입단하라고 권하는 고핀이었다.

대답도 귀찮아진 서문엽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자, 무장을 하고서 시뮬레이션 룸으로 집합한다!"

"옛!"

서문엽은 선수들과 함께 라커 룸으로 향했다.

"자, 배틀 슈트와 갑옷은 이걸 입으시면 됩니다."

클럽 직원들이 장비를 가져와 주었다.

입어보니 몸에 딱 맞았다.

파란색 흉갑 한복판에 떡하니 쓰인 'PLB'라는 팀 약자가 눈에 거슬렸다.

이러니까 마치······.

"이야! 잘 어울리십니다! 벌써 파리 뤼미에르의 선수가 것 같아요!"

"형, 이런 건 사진으로 남겨놔야겠지?"

불쑥 나타난 모로 형제.

그중 동생 필립 모로가 핸드폰 카메라로 그런 서문엽의 모습을 찍었다.

찰칵!

"이 자식들······!"

목적했던 사진을 손에 넣은 문어 형제는 쏜살같이 달아났다.

"아오, 저 문어들을!"

서문엽이 버럭 소리 지르자 함께 무장을 하던 선수들이 웃었다.

나단의 팀은 흰색 갑옷을 입고 있었다.

준비를 마치고 함께 시뮬레이션 룸으로 갔다.

접속 모듈 수십 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대형 스크린에 온갖 분석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있었다.

'저게 뭐지?'

언뜻 보기에는 선수들의 움직임이나 던전 구조 등을 정밀 분석하여 통계치를 내놓는 프로그램 같았다.

하지만 YSM에서는 구경도 못 해본 것이라 서문엽은 신기함을 느꼈다.

그는 고핀 감독에게 물었다.

"저게 무슨 프로그램이에요?"

"보다시피 배틀필드 경기 분석 프로그램이오."

"여기서 만든 겁니까?"

"하하, 설마. 유명한 프로그램이오. 소프트웨어뿐만이 아니라 특수 장비도 설치해야 하는데, 가격이 워낙 비싸서 하위 리그 구단은 손에 넣기 힘들긴 하지."

"얼마나 하는데요?"

"대충 넉넉잡고 200만 유로쯤 할 걸세."

"비싸네."

"하하, 저 프로그램을 잘 다룰 수 있는 코치의 몸값도 비싸지."

그때 마침 백하연이 다가와 말했다.

"삼촌, 분석 툴 얘기하는 거야?"

"너도 아는 거니?"

"응, 1부 리그에서도 도입했어.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외국 코치까지 영입해 와서 돌리고 있어."

"흐음······."

서문엽은 저것이 꽤나 탐났다.

저런 객관적인 통계 도구가 있다면 정신론 좋아하는 얼빠진 최동준 감독도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도 선진적이지 않은가!

강팀들은 다 있다는 저런 것 하나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게 뒤처진 것 같아서 싫었다.

'아하!'

문득 잔꾀가 떠올랐다.

서문엽은 고핀 감독에게 질문했다.

"혹시 제가 이 훈련에 참가하면 저에 대한 분석 데이터도 이곳에 남겠군요?"

그 질문에 고핀 감독은 흠칫했다.

"그렇소."

"전 그게 싫은데, 제 데이터는 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까?"

"그게··· 경기 데이터가 전부 자동 저장 되고, 삭제한다 해도 솔직히 경기 영상을 돌려서 분석하면 통계치를 다시 뽑을 수 있소. 그렇다고 미스터 서문 한 사람 때문에 경기 영상까지 폐기할 수는 없잖소?"

"어허, 이거 곤란하네. 난 내 프라이버시를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데."

서문엽이 너스레를 떨었다.

유서와 앨범, 일기장 사본까지 전부 박물관에 전시된 사람답지 않은 소리였다.

그때 대화를 듣고 있던 모로 형제가 끼어들었다.

"원하시는 게 있지요?"

"분석 프로그램을 원하는 것 같은데, 형."

"뭐, 그걸 선물해 준다면 내 데이터를 갖는 건 용인해 줄 수 있지."

서문엽도 목적을 드러냈다.

장 모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까짓것 선물로 드리죠."

200만 유로나 하는 물건인데도 통 큰 결정이었다.

"서문엽 선수의 영상을 보존할 수 있다면 그 정도 가격쯤이야."

필립 모로도 격하게 동의한다. 광팬들다웠다.

"그걸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좀 소개시켜 줄래?"

서문엽은 살짝 뻔뻔하게 요구를 추가했다.

"소개시켜 드리죠."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하는 서문엽.

그렇게 합의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되었다.

접속 모듈에 들어가 던전에 접속했다.

이윽고 나타난 던전은 넓은 동굴 공터였는데, 22명의 선수가 모조리 집결되어 있었다.

한 타 싸움 훈련 전용으로 제작한 던전인 듯했다.

-자, 일단 포메이션을 상의할 시간을 60초 준다. 10초부터 카운트다운을 해서 끝나면 바로 전투 개시다.

고핀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단 팀이 즉시 모여 상의를 하기 시작했다.

서문엽도 선수를 불러 모았다.

"치치, 메인 탱커는 원래 너지?"

"응."

"그럼 네가 메인 탱커를 하고."

서문엽은 선수들을 둘러보다가 미리 봐둔 탱커 하나를 지목했다.

저쪽 팀의 잭 존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나 상당히 튼튼한 클래식 탱커였다.

"네가 최전방 탱커."

"어?"

보통은 최전방에 서는 탱커가 메인 탱커다.

왜냐하면 딜러들은 아군 탱커 뒤에서 보호받으며 싸우기 때문이다.

탱커의 위치에 따라 딜러들의 위치까지 변하니, 자연히 최전방 탱커가 메인일 수밖에.

하지만 서문엽은 최전방 탱커와 메인 탱커를 분리했다.

그게 속도 91/97짜리 탱커 치치 루카스를 활용하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전방 탱커를 중심으로 치치가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전황에 따라 포메이션을 변환하는 거야."

튼튼한 애가 앞에서 적 공격을 받고, 치치가 딜러진을 이끌며 유동적으로 대형을 변화시키는 것.

이를 설명하자 치치가 신기해하며 물었다.

"정말 우리 경기를 많이 봤나 보네."

"응? 그건 왜?"

"그게 우리 팀 한 타 싸움 포메이션이잖아. 알고 지시한 거 아냐?"

"그래? 뭐, 그렇다 치자."

서문엽에 대한 선수들의 신뢰도가 커졌다. 자신들을 잘 아니, 믿고 같이 싸워도 될 것 같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난 그냥 없는 셈 쳐. 난 나단을 마크할게."

"오!"

"맞대결이군!"

"휴, 저 대결 구경하느라 싸우다 한눈팔 것 같아."

선수들도 몹시 기대하는 눈치였다.

-5.

-4.

-3.

-2.

-1.

-시작!

카운트다운이 떨어졌다.

양측이 일제히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살짝 옆으로 나온 서문엽은 역시나 무리에서 빠져 있는 나단을 발견했다.

쌍도를 각기 양손에 든 나단.

'쌍도라. 다루기 어려운 무기인데.'

하지만 쌍도를 잘 쓰는 적을 상대하기도 어렵다.

다만 서문엽은 견문이 많아 얼추 쌍도에 대해 알고 있었다.

보통 주로 쓰는 오른손의 비중이 높고 왼손의 도는 보조적이다.

그리고 사람은 두 가지 각기 다른 패턴의 행동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두 자루의 도는 일정한 규칙과 의도를 갖고 휘둘러진다.

그것만 파악하면 대처하기 어렵지 않을 터였다.

철컥!

오러를 주입하자 창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역시나 느낌이 좋은 신무기였다.

"와 봐, 인마."

***

"근데 서문엽 말입니다."

고핀 감독이 입을 열었다.

"나단이 양손잡이라는 것을 알까요?"

"굳이 알아보지 않은 이상은 모르겠지요."

장 모로가 말했다.

필립 모로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거야, 형. 따로 알아봤을 리가 없어."

고핀 감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처음 상대하면 힘들 텐데요. 나단의 쌍도는 두 자루의 비중이 멋대로 바뀌어서 규칙성을 파악했다고 생각했다가 순식간에 목이 달아나요."

서문엽의 스타일은 대체로 보편적인 편이었다.

하지만 나단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매우 희귀한 스타일이었다.

둘 중 서문엽이 더 불리한 출발선에 선 것이다.

"심지어 분신을 써서 네 자루가 난도질을 하면······."

그런 나단을 상대하는 방법은 여럿이 협력하는 지역방어밖에 없었다.

서문엽이 이를 모르고 덤볐다 괜히 망신당하고 끝날까 봐 걱정되는 고핀 감독이었다.

그도 인류를 구한 영웅 서문엽을 존경했기 때문이다.

< 연습(2) > 끝

< 연습(3) >

첫 공방은 가볍게 시작됐다.

서문엽은 창으로 나단을 겨누어 접근 못 하게 위협했다.

나단은 짧은 쌍도를 지닌 만큼 공격을 위해 접근해야 했다.

휘휙!

좌우로 움직여 보지만 창이 계속 쫓아오며 나단을 겨눈다.

상체 페인팅으로 속이려 해봤지만, 서문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하체를 바로 찔러 들어갔다.

오히려 나단이 이를 피해 한 걸음 더 물러나야 했다.

'페인팅이 전혀 안 먹히는데.'

보통은 나단의 스피드를 쫓기 버거워서 페인팅을 걸면 반응해 버린다.

하지만 서문엽은 민첩성이 97이라 버거움이 없었고, 기술 100이라 페인팅도 안 속았다.

서서히 나단이 쌍도를 쓰기 시작했다.

우수도로 창을 옆으로 걷어내고 돌파하려는 순간이었다.

휘릭!

걷어내려는 순간, 창이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다시 나단의 가슴을 겨냥했다.

간결하지만 완벽한 창술이었다.

'역시 만만치가 않구나.'

단지 접근 못 하게 막는 견제에서부터 완전무결함을 드러내는 서문엽.

"얘야, 너 뭐하니?"

문득 서문엽이 말을 건넨다.

"무기술로 해보자고? 귀여운 새끼가."

그 직후, 서문엽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촤촥!!

연속 찌르기가 펼쳐지자 나단이 정신없이 물러났다.

아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아슬아슬하게 창 길이에 걸쳐진 찌르기.

공격하면서도 나단이 역으로 피하고 파고들 여유를 주지 않는 완벽한 거리감이었다.

물론 파고들면 방패로 찍어 죽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단이 계속 창을 옆으로 쳐내고서 그 틈에 파고드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휘릭!

어김없이 서문엽의 창이 시계 방향으로 돌며 다시 나단의 가슴을 겨냥했다.

능력치 중에서 가장 체감 효과가 큰 분야는 기술이었다.

아무리 힘세고 날래도 칼에 잘못 맞으면 한 방에 즉사하는 것이 냉혹한 실전이다.

그런 무기를 다루고 몸을 다루는 능력이 기술이니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당연했다.

서문엽의 기술은 100/100.

나단은 90/95.

현재 10이나 차이 나는 이 격차는 나단이 다른 모든 능력치를 다 동원해도 좁힐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특히나 기술은 99와 100의 차이도 매우 클 정도였다.

이럴 때 나단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문엽과 상대하지 않고 더 쉬운 적을 처치하는 것이다.

쉬운 적부터 처치해 수적 우위를 달성하면 승리한다. 본래 배틀필드가 그런 팀 스포츠였고 말이다.

하지만 나단이 원하는 건 일대일 대결이었다.

'일단 공격을 할 수 있어야 흐름이 내게 올 텐데.'

양손잡이로서 쌍도를 자유자재로, 변칙적으로 휘두르는 솜씨는 나단 자신도 가장 자부심 있어 하는 무기술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의 거리 조절에 의해 원천 봉쇄 됐다.

왜 창이 전쟁사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냉병기인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파고들 순간을 모색해 봐도 빈틈이 없자, 나단은 마침내 초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쑤욱!

나단의 몸에서 또 하나의 나단이 나온 것이다.

오러는 절반씩 나눠 가졌지만, 그 외의 피지컬은 전부 똑같이 유지한 채 둘이 되었다.

오늘의 나단을 만든 진정으로 사기적인 초능력이었다.

***

"허, 무기술로 겨루면 밀리는군."

고핀 감독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초능력을 배제한 기본기 대결에서 서문엽이 나단을 압도하고 있었다.

일절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서문엽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나단의 쌍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서문엽은 창 쓰는 게 대가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아."

모로 형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단의 테크닉이 최고 수준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서문엽과 비교해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문엽은 전쟁 시대 던전 공략에 최적화된 초인이고, 나단은 그야말로 대인전 능력을 어릴 적부터 키운 선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서문엽의 창술은 대인전에서도 완벽했다.

"대인전에 대비한 훈련을 따로 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함께 있던 코치들도 의문을 제기했다.

괴물과 지저인 상대하기도 바쁜 그 시절에 서문엽이 굳이 시간을 쪼개서 같은 인간끼리 싸우는 연습을 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고핀 감독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완전히 통달을 하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지는 모양이지. 아마 그 정도의 경지에 들어선 모양이야."

그때, 나단이 비로소 초능력 분신을 사용했다.

"나단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시작하네요."

"2 대 1, 4자루의 도, 양손잡이, 온갖 낯선 공격들이 몰아칠 겁니다."

코치들이 말했다.

그들 말대로 나단의 공격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둘로 나뉜 나단이 양방향에서 쌍도를 마구 휘두르기 시작하자 서문엽은 무척 바빠졌다.

양쪽에 창날이 있는 창 구조를 활용해 정면을 찌르고 뒤로 찌르고를 반복하며 두 분신을 공격.

방패도 바쁘게 공격을 블로킹하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나단은 계속 빠른 풋워크와 함께 방향을 전환해 가며 불규칙한 맹공을 퍼부었다.

점점 눈으로 식별하기 힘든 스피드로 공방이 치달았다.

세계 최고의 민첩성을 지닌 나단의 분신 연격.

거기에 서문엽도 엄청난 반사 신경을 발휘하며 맞서 싸웠다.

"허어······."

"보이지도 않아!"

"나단의 맹공을 다 받아내고 있는데?!"

"저렇게 오래 공세를 받아낸 선수는 없었는데."

고핀 감독도 코치진도 두 사람의 공방을 경이로워했다.

팀플레이로 전술적인 한 타 싸움을 벌이는 다른 선수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의 대결을 치르는 서문엽과 나단.

하지만 스피드에서 서문엽은 살짝 밀리고 있었고, 마침내······.

서걱!!

나단이 파고들 기회를 포착하고 득달같이 달려들자, 창을 쥐고 있던 서문엽의 오른팔이 떨어져 나갔다.

***

'이런 씨발?'

베인 오른팔이 그대로 소멸되자 서문엽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오른팔이 베여버렸다.

어찌어찌 반사 신경과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쌍도의 움직임이 불규칙한 템포로 변화하면서 당하고 말았다.

'이 자식 양손잡이였네.'

서문엽의 머릿속에 나단에 대한 많은 정보가 입력되었다.

쌍검이든 쌍도든, 양손에 각각 무기를 쥐면 비중은 보통 주로 쓰는 손에 많이 쏠리는 법이다.

그런데 비중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불규칙성을 계속 늘려 버린 것이다.

거기에 분신까지 더해져 2 대 1로 싸우니 밀릴 수밖에 없었다.

방패를 들고 있는 왼팔만 남았다.

방패 하나만 들고서 둘로 나뉜 나단을 이기기란 요원한 일.

졌다고 봐도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당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110의 정신력을 지닌 서문엽은 침착했다.

'적어도 분신 하나는 처치해야 견적이 나온다.'

그러려면.

'도박이군. 판돈을 올려주마.'

서문엽은 오른팔을 잃고 당황하여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연기를 했다.

세계 최고의 킬 결정력을 지닌 나단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빈틈이 노출된 서문엽에게 마무리를 가하기 위하여 대시했다.

4자루의 도가 휘둘러진다.

바로 그때.

파앗!

꼼짝없이 당할 것 같았던 서문엽이 왼쪽으로 몸을 날려 공격권에서 벗어나면서, 방패를 냅다 던졌다.

뻐어억!!

날아든 방패에 맞은 나단의 분신이 소멸되었다.

"큭!"

나단이 멈칫했다.

-분신: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타격을 입어 오러를 10%만 보존한 채 흩어진다.

분신 하나가 죽어 소멸되면서 사기 같았던 초능력의 리스크가 발동된 것이다.

나단의 몸에서 오러가 흩어져 버렸다.

10%가량의 오러만 남게 되었다.

전세 역전을 위한 서문엽의 도박 수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서문엽은 왼손으로 새로운 창을 꺼냈다.

'버텨보자. 이제 버틸 수는 있어.'

여전히 서문엽이 불리했다.

나단도 10%의 오러만 남고 다 소모되어 버린 리스크를 짊어졌지만, 오른팔을 잃어 몸의 균형이 무너진 서문엽보단 나았다.

일단 이번 판은 버텨야 했다.

왼손으로 창을 쓰려니까 어색했지만, 승부에서 지지 않기 위하여 집중을 발휘했다.

'할 수 있어. 창술은 찌르기와 간격 유지만 하면 돼.'

서문엽은 왼손으로 창을 다루는 일에 온 집중을 기울였다.

110짜리 정신력이 발휘되었다.

한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초인적인 집중력이 발휘된 것이다.

"차아!"

나단이 덤볐다.

왼손으로 창을 쓰는 서문엽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쉬쉭!

빠른 연속 찌르기로 나단을 멈춰 세웠다.

쌍도로 걷어내려고 했으나, 창이 교묘하게 이를 피하며 나단을 계속 견제했다.

나단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어째 오른손으로 창을 쓸 때보다 더 창술이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100㎝ 던지기 테크닉까지 구사하며 오히려 나단을 몰아붙였다.

그때 마침 한 타 싸움의 승패가 갈렸다.

치치 루카스가 맹활약한 서문엽 팀의 승리였다.

동료가 모두 죽고 홀로 남은 나단은 혀를 찼다.

그렇게 첫 번째 대결이 종료되었다.

"와, 뒤질 뻔했네!"

접속 모듈에서 나온 서문엽이 십년감수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반대편 접속 모듈에서 나온 나단이 여전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양손잡이셨나요?"

"그건 너지."

"왼손으로도 창을 잘 쓰셨잖아요?"

"응, 해보니까 되더라."

실은 정신력 110에서 나온 집중력 덕분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졌을지도 모른다.

고핀 감독이 그런 서문엽을 칭찬했다.

"멋진 대결이었소. 나단을 일대일로 마크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이 일로 당신이 더욱 탐나오."

"됐고, 이거 한 판 더 할 거지?"

"예, 그럴 겁니다."

"오케이. 한 판 더 싸워서 승부를 가리자고."

10분간 휴식이 주어졌다.

화장실로 향하며 서문엽은 생각했다.

'일단 녀석의 쌍도법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으니 방금 전보다는 더 상대하기 쉬울 거야.'

오른팔을 베였을 때 꼼짝없이 지는 줄 알았다.

이는 나단의 스타일이 너무 생소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익숙해졌다고 해서 쉽게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지.'

둘로 나뉜 나단이 둘 다 100의 민첩성으로 공격을 퍼붓는 것은 무척 위협적이었다.

'집중력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다음 판에서는 처음부터 집중해야겠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분석안으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점검하는 서문엽.

그런데.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79/79

-민첩성 97/97

-속도 76/77

-지구력 91/91

-정신력 110/100

-기술 100/100

-오러 100/100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어라?"

거울을 본 서문엽이 깜짝 놀랐다.

못 보던 초능력이 하나 더 있었다.

-증폭: 가진 능력 가운데 하나를 골라 위력을 증폭시킵니다. 신체 능력 중 하나를 고를 시 +10, 초능력을 고를 시 위력 강화.

'이게 뭐야?'

뜬금없이 못 보던 초능력이 생겼다.

집중력을 끌어올려서 한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 요령이 초능력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 연습(3) > 끝

< 또 초능력(1) >

초능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진 바가 별로 없다.

체질적으로 타고난 초능력이 있고, 강렬한 경험에 오러가 반응하여서 초능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강렬한 경험.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110의 정신력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린 것 또한, 강렬한 경험이라고 보기에 충분한지도 몰랐다.

'능력치 하나가 100이 넘어버리면 이런 일이 생기는 건가.'

전인미답의 경지였기 때문에 서문엽도 신기했다.

아무튼 일단 이 증폭이라는 초능력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신체 능력 중 하나를 증폭시킬 시 +10의 효과를 낸다.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 정신력, 기술, 오러 가운데 하나를 +10 할 수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사기잖아?'

민첩성을 올리면 107이다.

기술은 110.

오러도 110.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 근력과 속도도 89, 86으로 보강할 수 있다.

하나만 선택해서 올릴 수 있다는 제한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흥미가 가는 부분이 있었다.

초능력을 증폭시킬 시 위력 강화!

분석안, 던지기, 불사의 위력을 강화하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호기심이 샘솟았다.

하지만 일단 그 실험은 나중에 혼자 있을 때 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2차전을 하러 가야지.'

시뮬레이션 룸으로 돌아온 서문엽은 나단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나단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다 놓친 승리를 이번에야말로 쟁취하겠다는 굳은 결의가 보인다.

서문엽은 인자한 표정으로 그런 흑발 미청년을 바라보았다.

'넌 뒈졌다.'

그때 백하연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삼촌······."

"응, 하연아. 그러고 보니 넌 어땠니?"

"아으, 1어시 하고 죽었어."

백하연은 시무룩했다.

"어쩌다?"

"욕심나서 순간 이동으로 파고들었다가 그냥 데스당했지."

"쟤들은 우리나라 애들이 아니란다. 순간 이동은 탈출기로 남겨둬야 해."

"응, 이제 그러려고."

"그렇다고 너무 조심스러워도 안 돼. 과감하게 못 덤비는 근접 딜러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아."

"알았어. 삼촌은 괜찮아?"

"후우, 하연아."

서문엽은 우수에 잠긴 눈빛을 하며 말했다.

"삼촌은 왜 이렇게 위대한 걸까?"

"뭐래는 거야. 나단한테 팔 썰려놓고는. 꼼수 안 부렸으면 완전 졌을걸."

조카의 팩트 폭행.

서문엽은 굴하지 않았다.

"2차전 때 잘 보렴. 삼촌이 나단 발라 버릴 거야."

"정말? 삼촌이 밀리던데?"

"어허, 한번 보라니까. 이제 견적 나왔어요."

한껏 거들먹거린 서문엽은 빨리 시작하자면서 접속 모듈에 들어가 버렸다.

다른 선수들도 그 모습에 웃으면서 하나둘 접속했다.

"아으, 하긴 내가 누굴 걱정해."

백하연도 투덜거리며 접속 모듈에 들어갔다.

던전에서 서문엽은 다시 나단과 눈을 마주했다.

나단은 이번에야말로 이기겠다고 벼르는 모양새.

참 성격도 순하고 착해 보이는 놈이 무기를 들면 딴판이었다.

'자, 둘로 나뉜 나단을 상대하려면 어떤 능력치를 증폭시켜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증폭, 기술에.'

서문엽이 초능력을 발동했다.

그의 기술 능력치가 100에서 110으로 뛰어올랐다.

당장 어떤 변화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좋아, 잘될 것 같은 느낌이다.'

-5.

-4.

또 고핀 감독의 카운트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3.

-2.

-1.

-시작!

양측이 일제히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나단은 서문엽에게로 곧장 달려왔다.

서문엽은 창을 던지는 그립으로 고쳐 쥐고 태세를 갖췄다.

나단은 일찌감치 분신을 펼쳤다.

몸에서 또 다른 몸이 나오는 신비한 모습.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서문엽의 뇌리로 어떤 영감이 스쳤다.

'지금이다!'

거의 본능이었다.

서문엽은 즉흥적으로 창을 던졌다!

던지는 순간 손끝으로 창을 긁으며 강렬한 회전을 실은 창.

둘로 나뉜 나단 중 오른쪽에게로 날아들었다.

오른쪽의 나단은 이제 막 분신을 펼쳐 나뉜 상태에서 창이 기습적으로 날아오자 화들짝 놀라 피했다.

하지만.

휘릭!

창은 중간에 궤도가 휘어 왼쪽으로 흘렀다.

"헉!"

왼쪽의 나단은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그걸로 끝이었다.

콱!

왼쪽의 나단은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분신이 사라지자 나단은 충격을 받았다.

창던지기 한 방에 그의 필살기였던 분신이 깨져 버린 것이다.

분신이 사라진 충격으로 오러도 흩어져 10%만 남았다.

쌍도는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승부가 결정된 것.

"참 재미있지?"

서문엽은 창 한 자루를 더 꺼내며 다가갔다.

"혼자 있을 때는 잘 피하는데 둘이 있으면 내가 아닐 거란 생각에 못 피해."

거기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창의 절묘한 궤적과 허를 찌르는 타이밍까지.

일격에 승부가 결정되었다.

그 뒤에 나단은 데스를 당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니며 시간을 끌었고, 서문엽은 끝까지 쫓아가 기어코 킬을 냈다.

10%의 오러밖에 안 남은 상대이니 아무리 나단이라도 도리가 없었다.

나단을 처치한 뒤, 싸움에 합류하여서 백하연을 주로 도왔다.

백하연이 상대하는 적에게 창을 뿌려서 킬을 냈다. 그런 방식으로 3킬을 올리자, 자연히 백하연도 3어시스트를 올린 셈이 됐다.

그렇게 두 번째 판도 서문엽 팀의 승리가 되었다.

사실 서문엽과 나단의 대결과는 상관없이, 팀은 치치 루카스가 같은 편이어서 서문엽 측이 유리하긴 했다.

"3판도 하셔야죠?"

나단은 억울한 표정이 되어서 물었다.

서문엽은 씨익 웃었다.

"글쎄다.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물론 장난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대결까지 펼쳐졌다.

세 번째 대결에서 역시 서문엽은 증폭으로 기술을 올렸다.

나단은 아예 처음부터 분신을 써서 2판에서와 같은 허망한 데스를 방지했다.

제대로 한번 싸워보겠다는 의지였다.

그렇게 펼쳐진 싸움은 치열한 접전이었다.

나단은 미친 듯이 쌍도를 휘둘렀고, 서문엽은 양방향에서 협공당하지 않기 위해 계속 움직이며 싸웠다.

첫 번째 대결 때보다 한결 여유 있어 보이는 서문엽.

오히려 공격을 하는 나단 쪽이 싸울수록 부담을 느꼈다.

공격을 했다 하면 카운터로 반격을 날리는 통에 식은땀이 절로 났다.

'내 공격 타이밍을 다 아는 것 같아.'

정확한 타이밍에 카운터로 찌르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어떻게 타이밍을 읽었지?'

나단은 혼란을 느꼈다.

자신의 쌍도법은 불규칙한 템포와 스피드가 최고의 강점이었다.

이 나단의 쌍도를 겨우 한 번 경험한 서문엽이 벌써 어떤 패턴이나 습관을 읽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냥 실력인가?'

나단이 혼란을 느끼는 가운데, 서문엽은 놀라운 활약을 했다.

둘로 나뉜 나단을 상대하면서 창을 뒤로 던져 상대측 선수 하나를 죽이는 성과까지 거뒀다.

워낙 나단의 반사 신경이 빨라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체력도 오러도 나단의 소모가 훨씬 많았다.

둘을 상대로 싸우면서 동선을 최소화하고 간결한 동작만 취하는 서문엽은 전혀 지칠 기색이 없었다.

***

고핀 감독이나 코치진이나 모로 형제나 다 같이 경악에 빠졌다.

대형 스크린에 두 나단의 협공을 능히 상대하는 서문엽이 보였다.

"나단의 쌍도 패턴을 벌써 파악했다고? 그건 불가능해!"

고핀 감독이 믿기 어렵다는 듯이 소리쳤다.

나단은 두 자루의 도를 휘두를 때 일정한 패턴이 반복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마치 원주율의 소수점 자릿수처럼 반복 패턴 없이 불규칙한 공격이 무한히 펼쳐지도록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서문엽이 파악했다니?

"그런데 카운터를 찌르는 타이밍이 완벽한데요?"

"타이밍을 알고 있지 않으면 저렇게 못합니다."

두 나단의 협공은 종합 예술의 경지였다.

쉴 새 없이 공격하면서도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지도록 꾸준히 연습한 결과물이었다.

협공을 깨는 방법은 서문엽이 보여주듯이 공격하려 할 때 카운터로 역공을 가해 호흡을 깨뜨리는 것.

그러려면 나단이 언제 공격하려 하는지 타이밍을 예측해야 한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고핀 감독은 경외 어린 표정으로 서문엽을 바라보았다.

서문엽이 보여주는 동작 하나하나가 완전했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모두 버리고, 정말 필요한 움직임만을 취하였다.

그렇게 최소화된 동선으로 간결하게 움직임으로써 나단의 미친 듯한 스피드에 대항했다.

언뜻 보면 나단은 바쁘게 움직이는데 서문엽은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창 방패 탱커들에게 교본으로 보여주고 싶군.'

인류를 구한 남자.

초인 중의 초인.

17년 만에 살아 돌아온 불사신.

서문엽의 진가는 자신들이 가늠할 수 없는지도 몰랐다.

"필립, 봐봐, 서문엽이 나단을 압도하고 있어."

"명승부야. 저렇게 빠른 템포로 공방을 주고받는 건 처음 봐."

"이 영상은 영원히 소장해야지."

모로 형제는 감동에 젖어버렸다.

결국 승부는 내지 못했다.

결판이 나기도 전에 치치 루카스가 또다시 맹활약을 펼쳐 팀을 승리시킨 것이다.

하지만 계속 싸웠어도 누가 이겼을지는 자명했다.

"하아······."

접속 모듈에서 나온 나단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린놈이 웬 한숨이야?"

접속 모듈에서 나온 서문엽이 실실 웃으며 핀잔했다.

"굉장히 강하시네요. 오늘은 제가 졌어요."

나단이 패배를 인정했다.

"너도 제법이었다. 확실히 제럴드 워커보다는 낫네."

첫 번째 대결에서 하마터면 질 뻔했던 경험을 했다. 확실히 나단은 강했다.

고핀 감독의 칭찬도 이어졌다.

"둘 다 훌륭했소. 특히 미스터 서문. 무슨 수로 나단의 움직임을 읽은 거요?"

"감."

서문엽은 간략히 대답했다.

사실 그거밖에 없었다.

정말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게 없는 녀석이었다.

저 불규칙을 손에 넣기 위하여 얼마나 피나는 수련을 해야 했을지 짐작 갔다.

다만 증폭으로 기술이 110이 되니까 감이 팍팍 꽂히는 것이었다.

'더 정진하렴. 능력치 보니까 아직 올릴 수 있는 능력치가 많던데.'

나단의 근력은 83/95로 무려 12나 더 올릴 수 있었다.

기술도 90/95였다. 물론 기술은 효과가 큰 만큼 올리기도 가장 어렵지만 말이다.

"아무튼 훈련에 참여해 줘서 고맙소."

"나야말로 즐거웠습니다. 조카 좀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염려 놓으시오. 우리도 주급을 공짜로 주지 않으려면 잘 활용해야 하니까."

백하연은 오늘 한 타 싸움 훈련 3판을 치러서 킬은 하나도 못 했다.

하지만 다행히 어시스트는 총 6을 챙겼다.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백하연 같은 신입 선수에게는 첫인상이 중요했다.

근접 딜러로서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보조 딜러로서는 완숙에 달한 경험이 있었던 덕에 그럭저럭 괜찮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삼촌의 도움은 여기까지다. 이제 알아서 잘하겠지.'

서문엽은 백하연의 파리 생활에 대해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생겼기 때문이다.

'아 궁금하다. 초능력을 증폭시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까?'

오랜만에 가슴 설렜다. 빨리 확인해 보고 싶었다.

< 또 초능력(1) > 끝

< 또 초능력(2) >

파리 뤼미에르 BC의 클럽하우스를 나와 호텔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일단 욕실로 달려갔다.

공중목욕탕 수준으로 넓은 욕실은 한쪽 벽에 전부 거울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디 보자."

기술을 증폭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이미 확인했다.

'감이 무지 좋아졌었지.'

상대가 무엇을 할지 빠릿빠릿하게 짐작이 됐다.

덕분에 무지막지한 스피드로 분신과 합격술까지 펼치는 나단을 능히 상대할 수 있었다.

다른 능력치도 결국 마찬가지로 10씩 상승한 효과를 보일 터.

하지만 서문엽은 초능력을 증폭시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몹시 궁금했다.

'증폭, 분석안에.'

일단은 분석안을 증폭시켰다.

그 뒤에 분석안으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대상: 서문엽(인간)

-근력 79/79

-민첩성 97/97

-속도 76/77

-지구력 91/91

-정신력 110/100

-기술 100/100

-오러 100/100

-리더십 100/100

-전술 100/100

-초능력: 분석안, 던지기, 불사, 증폭.

-분석안(증폭): 살아 있는 대상의 능력치를 볼 수 있다. 영상 매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오오!"

서문엽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감탄했다.

리더십과 전술이라는 항목이 새로 생겨났다.

그동안 분석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아쉬웠던 항목이었다.

자신의 리더십, 전술 수치는 더 놀라웠다.

"짐작은 했지만······."

서문엽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정말 위대하구나."

스스로에게 자아도취한 채 감격하는 서문엽.

지저 전쟁의 최전선에서 인류를 구원으로 이끈 서문엽이었다.

동료들을 이끌었던 리더십이나 공략 불가 던전의 공략법을 찾아내던 전술 능력은 인류 중 최고치일 수밖에 없었다.

'100짜리 재능이 대체 몇 개야? 이런 걸 보면 나도 참 운을 타고났네.'

고아로 태어나 갖은 고생을 했지만, 대신 이런 미친 재능을 타고났으니 대체로는 운이 좋았다고 자평했다.

증폭된 분석안은 또 한 가지 더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었다.

-영상 매체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우오오오! 이것도 짱 좋아!'

이제 TV를 통해서 경기를 봐도 분석안으로 선수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게 안 돼서 직접 싸돌아다녀야 했는데. 이제 완벽해!'

그야말로 서문엽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증폭된 분석안의 효과였다.

'이제 던지기에 증폭을 걸어볼까?'

증폭을 해제한 서문엽은 이번에는 던지기 초능력에 증폭을 걸었다.

그리고 분석안으로 다시 한번 체크했다.

분석안에 증폭을 풀자, 더 이상 리더십과 전술 항목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던지기에 추가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던지기(증폭): 손에 든 물체를 던져 비거리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던진 물체를 회수할 수 있다.

'던진 걸 다시 회수해?'

이건 또 무슨 신기한 초능력이란 말인가.

설렌 서문엽은 확인을 위해 재빨리 세면대에 있는 칫솔을 집어 던졌다.

슉 날아간 칫솔.

"자, 다시 돌아와."

그런데 어째 초능력이 먹히지 않았다.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칫솔은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안 돌아오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잠시 궁리해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 혹시?"

초능력을 사용하려면 많든 적든 오러를 소모한다.

아까는 딱 칫솔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오러만 썼다.

하지만 던져진 칫솔이 되돌아오는 데도 오러가 필요할 터였다.

칫솔을 다시 한번 던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2배의 오러를 실어서 던졌다. 되돌아오는 데 사용될 오러를 실은 것.

휙!

던져진 칫솔이 마법처럼 다시 되돌아와 서문엽의 손에 들어왔다.

이제야 증폭된 던지기에 대해 파악이 끝난 서문엽.

마지막으로 확인할 초능력은 바로 불사였다.

이건 서문엽도 긴장이 됐다.

불사를 증폭시키면 대체 뭐가 되는 걸까?

불사 그 자체로도 엄청난 초능력이라, 거기서 한술 더 뜨면 대체 뭐가 될지 궁금하면서도 살짝 두려웠다.

'좋아, 증폭!'

증폭시킨 후에 분석안으로 확인했다.

-불사(증폭): 120초간 오러로 이루어진 영체가 되어 모든 공격을 무효화하고 모든 사물을 통과한다.

'영체? 그게 뭐지?'

직접 확인하는 것이 빠를 듯했다.

서문엽은 불사 초능력을 펼쳤다.

으오오오!

그러자 갑자기 서문엽의 온몸이 하얀 빛으로 감싸였다.

그것은 오러였다.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하얀 빛의 오러가 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이윽고.

파아앗!

변신이 끝났다.

거울에는 서문엽이 없었다.

그저 서문엽의 형상을 한 하얀 오러 덩어리가 있을 뿐이었다.

-이, 이게 영체구나.

육체가 사라진 탓에 목소리도 오러의 울림으로 표출되었다.

누가 보면 유령이라고 할 만한 모습이었다.

육체가 사라지고 오러밖에 남지 않은 모습.

신기해진 서문엽은 슥슥 걸어 다녀 보았다.

일단 움직이는 건 똑같았다. 다만 몸이 매우 가벼워서 체중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사물을 통과한다고?'

계속 걸어서 벽을 통과해 보았다.

쑤욱!

그대로 벽을 통과하여서 거실에 나온 서문엽.

'이러면 정말 모든 공격이 무효화되겠네.'

120초간은 무적의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공격하는 것은 될까?'

서문엽은 역시나 만만한 칫솔을 손에 꽉 쥐었다.

파삭!

칫솔에 오러의 압력이 가해지자 아예 박살 나 가루가 되어버렸다.

종합하자면, 120초간 어떤 공격도 받지 않고 어떤 장애물도 다 통과되는데, 이쪽은 공격을 할 수 있다.

-후우······.

서문엽은 우수에 잠긴 눈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아도취의 절정!

외로운 절대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전쟁도 다 끝났는데 난 아주 우주 최강을 향해가고 있구나.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신이 된 기분이 이러할까?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오러 영체 상태에서 그런 소리를 하니 그럴듯하긴 했다.

120초가 지나자 증폭이 해제되고 서문엽은 원상 복귀 되었다.

갑자기 확 느껴지는 체중이 무겁게 느껴졌다. 육체라는 감옥에 다시 갇힌 기분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실험이 모두 끝났다.

서문엽은 슬슬 자신이 프랑스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프랑스에서 쓸 만한 선수를 좀 데려가면 좋을 텐데.'

초인 에이전트 제이크 랜드는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길 원하는 한국 출신 선수들을 추천했다.

한국 국적을 버리고 해외로 떠났던 1세대 선수들.

이제는 나이 들어 은퇴할 시기가 된 이들은 마지막으로 한국 무대에서 뛰고 싶어 할 테니 영입하기 쉬울 거라는 말이었다.

서문엽도 이에 혹했지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영 별로였다.

'다 늙은 놈을 영입하면 나중에 비싸게 팔 수 없잖아?'

거기다가 경력이 있으니 현재 능력치 상태에 비해 연봉이 비쌀 게 틀림없었다.

두루두루 서문엽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역시 프랑스산 유망주들을 좀 데려가 볼까? 내 명성을 이용하면 혹해서 따라가겠다는 애들이 있을 거 아냐?'

오만 생각을 다 하다가 일단은 최동준 감독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전화를 걸려다가 서문엽은 문득 증폭된 분석안이 떠올랐다.

'이 녀석 감독으로서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봐야겠다.'

서문엽은 분석안에 증폭을 걸고, 영상 통화로 최동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 시각은 새벽이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자고 있는 듯했다.

당연히 서문엽은 받을 때까지 계속 걸었다.

3차 통화 때 비로소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자다 깬 최동준 감독은 피로에 찌든 표정이었다.

"어, 별일 없지?"

-구단주님? 여긴 새벽 5시입니다······.

"알아."

-······.

형편없이 일그러진 최동준 감독의 얼굴이 영상에 보였다.

-대상: 최동준(인간)

-근력 37/52

-민첩성 38/55

-속도 42/60

-지구력 36/61

-정신력 66/72

-기술 69/75

-오러 70/70

-리더십: 49/76

-전술: 45/65

-초능력: 회복, 고취

증폭된 분석안으로 최동준 감독의 리더십과 전술 능력이 나타났다.

'이 인간은 정말 안 되겠다.'

짐작은 했지만 정확한 수치를 보니 더 답이 안 나오는 무능한 감독이었다. 부글부글 끓었다.

'고취 말고 감독으로서 대체 어느 부분이 쓸모 있는 거야?'

그를 계속 유임시킨 건 서문엽 자신이면서도 짜증을 느꼈다.

-구단주님? 왜 갑자기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시는지······.

눈치는 또 빨랐다.

화를 가라앉힌 서문엽이 물었다.

"프랑스에서 선수를 좀 영입할까 싶어서."

-선수요?

"응, 원래는 한국 출신 1세대 선수들을 데려가려 했는데, 유망주가 아니면 비싸게 팔 수 없으니까 관뒀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몸값 비싸요.

"그래서 어린 유망주들을 찾아보려고."

-그것도 조금······.

"왜?"

-프랑스는 전 세계에서 유망주라는 애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거기서 유망주로 불리는 애들은 장난이 아닙니다.

"주목받는 애들 말고. 우린 또 틈새시장을 노려야지."

-배틀필드 변방인 한국으로 오려는 애들은 찾기 어려울 듯한데. 그것도 2부 리그에요.

"인마, 그래도 찾아보지 않고서는 모르잖아?"

-구단주님, 나연이와 승호도 잘 크고 있고, 새로 영입하신 윤범과 최정민도 괜찮은 유망주입니다. 이 정도로도 전력 보강은 충분히 됐다고 생각되는데, 이번 시즌 영입은 여기까지 하시죠?

"으음······."

-해외 선수들은 최소한 KB-1 리그로 승격하고 나서 영입을 시도하는 편이 낫습니다. 한국도 꺼려하는데 거기서도 2부 리그라고 하면 솔직히 아무도 거들떠 안 볼 겁니다.

"그도 맞는 말이긴 하네."

-정 전력 보강을 원하신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있긴 하죠.

"그게 뭔데?"

-뭐긴요? 구단주님이 선수로 직접 뛰시는 거죠.

"뭠마?"

-거기서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지금 구단주님께서 협회에 선수 등록을 했다고 난리입니다.

"아, 그건 사정이 좀 있지."

-심지어 파리 뤼미에르 유니폼을 입으신 사진도 SNS에 올라와서 화제이고요.

"잉? 그런 사진이 어떻게······."

순간 사진 찍고 도망갔던 모로 형제가 떠올랐다.

그 문어들 짓이 분명했다.

"그냥 심심풀이 삼아 여기 애들하고 훈련 좀 한 거야. 조카도 도와줄 겸."

-그냥 심심풀이 삼아 구단주님이 경기 좀 뛰시면 관중석도 꽉 차서 티켓 수익도 늘어나고, 우승 및 1부 리그 승격도 누워서 떡 먹기 아닙니까?

서문엽의 말까지 인용하며 권하는 최동준 감독.

내가 2부 리그 경기에 왜 나서냐고 호통 좀 쳐주려다가 문득 스폰서십 계약이 생각났다.

1년에 100만 유로.

단, 한 경기라도 뛰면 그 해는 300만 유로.

'200만 유로면 20억이 넘는데, 딱 한 경기만 뛰어서 돈 먹을까?'

증폭을 활용한 전투 기법을 좀 더 개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겸사겸사 한두 경기 정도는 뛰어도 괜찮겠지 싶은 마음이 드는 서문엽.

그를 선수로 끌어들이려 하는 모로 형제의 치밀한 꾐이 효과를 보고 있었다.

< 또 초능력(2) > 끝

< 개선(1) >

다음 날, 모로는 분석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코치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냥 코치가 아니었다.

"가브리엘 사나입니다."

뿔테 안경을 낀 창백한 안색의 마르고 단단한 젊은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서문엽은 악수를 받으며 증폭된 분석안을 실행했다.

-대상: 가브리엘 사나(인간)

-근력 37/64

-민첩성 44/72

-속도 45/67

-지구력 35/59

-정신력 40/87

-기술 63/90

-오러 70/70

-리더십: 85/92

-전술: 88/98

-초능력: 집중

-집중: 최장 6시간 동안 강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오!'

서문엽은 내심 감탄했다.

개발이 전혀 안 된 능력치로 보아 선수 출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리더십과 전술 수치는 무척 높았다.

'공부를 아주 잘한 타입인가 보다.'

집중이라는 초능력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정신력이 현재 40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선수 출신이 아니군?"

"예, 아시는군요?"

"그냥 느낌에."

"감이 좋으신 분 같습니다. 전 스포츠 의학을 전공했고, 필립 모로 구단주님의 권유를 받고 배틀필드 지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브리엘의 말에 옆에 있던 필립 모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참 똑똑하고 유능한 친구입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클럽의 리저브 팀 감독까지 지냈죠."

그러자 서문엽의 눈이 빛났다.

"그런데 어떤 우환이 생겨서 지난 3년간 쉬었군?"

가브리엘과 필립 모로는 둘 다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브리엘이 물었다.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성실해 보이는 사람이 3년간 쉬었다는 게 이상하잖아."

실은 정신력이 40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무슨 사연이 있나 싶었다.

나태해서 정신력을 기르지 못한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하,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 해두죠."

필립 모로가 얼버무리며 그냥 넘기려 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내와 이혼했습니다."

"아하, 그 충격으로?"

"그런 셈입니다."

쿨하게 대꾸하지만 정신력이 많이 낮아져 있는 걸 보면 더 괴로운 가정사가 있는 듯했다.

"그럼 이제는 일에 복귀할 마음이 있으니까 여기에 나왔겠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분석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아는 코치를 찾고 있었어. 게다가 우리 팀은 한국의 2부 리그 팀이지."

"얘기는 들었습니다."

"생각이 있어? 사실 내가 생각해도 당신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사람이 날 따라서 한국에 갈 필요가 있나 싶거든."

"저도 한국의 2부 리그 약소 팀에 가는 게 꺼려졌습니다. 하지만 서문엽 씨가 구단주라는 점과, 프랑스에서 최대한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이 생겼죠."

아픈 일이 있었던 프랑스를 아예 떠나고 싶은 모양이었다.

"흐음······."

서문엽은 살짝 고민이 들었다.

왜냐하면 가브리엘의 능력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사나: 명문 클럽 리저브 팀 감독 출신, 스포츠 의학에 능통, 리더십 85에 전술 88.

-최동준 감독: 팀을 부동의 꼴찌로 만든 감독, 기타 잡일은 잘하나 대체로 무능, 리더십 49에 전술 45.

가브리엘이 최동준 감독 밑에서 일한다니?

이건 몹시 부조리한 일이었다.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합시다. 감독직과 함께 팀 운영에 대한 전권을 주지."

가브리엘은 딱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명문 클럽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던 지도자였다.

배틀필드의 변방인 한국에서도 약체 팀에 가는 생각을 하면, 서문엽이 말한 조건은 당연한 거지 별로 파격적이지 않았다.

"희망 연봉은 음, 얼마?"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감독 자리나 전권이나 사실 제게는 당연한 이야기죠."

"그렇지."

서문엽도 동의했다.

이런 엘리트를 최동준 감독 같은 녀석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게 하는 것 자체가 미안했다.

그것도 강화도 산골에서 말이다.

"한국 2부 리그에서도 오랫동안 꼴찌에 있다가 이제야 서문엽 씨에게 인수되고서 좋은 성적을 거뒀죠."

"좋은 성적은 아냐."

20팀 중 11위가 어딜 봐서 좋은 성적인가?

서문엽에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경기를 봤는데, 서문엽 구단주께서 발굴하신 몇몇 선수는 흥미로웠습니다."

악마 소녀 넷티.

던전에서 책을 읽는 놈.

한국을 뒤흔든 페어였다. 흥미로울 수밖에.

"중위권으로 전반기를 마감하셨으니, 이번에 추가로 이루어진 선수 영입이 성공을 거둔다면 승격도 불가능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난 그리 급하지 않아. 애들이 성장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수 있어."

"사실 한국으로 가는 건 제 커리어에 마이너스입니다."

"그건 그래."

"그런데 2부 리그 강등권에 있었던 팀을 승격시키고 우승까지 시킨다면 그건 그럭저럭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하는 건가?"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봐."

"구단주께서 경기에 출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서문엽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건 좀······."

"그래, 그건 자네가 허언을 했네."

필립 모로도 웬일인지 거들어 반대했다.

필립 모로는 단호히 말했다.

"선수 생활을 한다면 우리 파리 뤼미에르에서 해야지, 그깟 아시아 변방의 쓰레기 팀에서······."

"쓰레기 팀이라 미안하다, 문어 새꺄."

"흠흠, 제가 오버했군요."

찔끔한 동생 문어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가브리엘이 다시 말했다.

"1년에 최대 5회 출전은 어떻습니까? 그쯤이면 팀 승격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제안에 서문엽도 고심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3회 하자."

"좋습니다."

가브리엘도 선선히 수락했다.

가브리엘 사나와 계약을 한 후, 서문엽은 최동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구단주님.

"긴히 할 말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새로운 사람이 팀에 들어올 거야."

-선수입니까?

"아니, 지도자야."

일부러 감독이란 말은 안 하고 지도자라 돌려 말했다.

-지도자··· 요?

최동준 감독의 목소리에 살짝 긴장이 어렸다.

"형이 여기서 선물로 분석 프로그램을 받았거든. 조만간 팀에 설치될 거야."

-헉, 그 비싼 걸요?

"그래, 근데 그거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없다더라? 그래서 고용했어."

-아, 그렇군요. 그런 게 있다면 정말 도움이 많이 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입니까?

"놀라지 마. 무려 파리 뤼미에르 리저브 팀에서 감독까지 했던 사람이야."

-헉!

최동준 감독이 헛바람을 삼켰다.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커리어였기 때문.

"스포츠 의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까지 있대."

-바, 박사 학위까지······.

"실력이 정말 뛰어난지 모로 형제가 직접 추천해 준 사람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 사람이 정말 우리 팀에 온답니까?

"응, 계약했어."

-그거 참 우리 팀에 도, 도움이 많이 되겠네요.

최동준 감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팀에 도움이 되는 일인데 전혀 기뻐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내가 고민이 많아."

-무슨 고민입니까······?

"이런 사람을 네 밑에 둬야 할까?"

-헉!

결국 돌직구가 날아오자 최동준 감독이 기겁했다.

"최동준 수석 코치, 내 말을 잘 들어봐."

-헉, 수석 코치라뇨? 왜 갑자기 저를 수석 코치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오해하지 말고 형 말 좀 들어봐. 넌 뛰어난 수석 코치가 될 자질이 있어. 선수들에게 인망도 있고, 사기 진작도 잘 시키고."

-전 이미 감독인데 수석 코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하시면······.

"야, 이 새꺄. 그동안 부진의 책임을 지고 옷 벗을래, 수석 코치 할래?"

서문엽이 본색을 드러냈다.

한참 뒤에 최동준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석 코치 하겠습니다, 크흐흑!

비통하게 울건 말건 서문엽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질질 짜지 말고 좋게 생각하자. 이런 엘리트가 설마 우리 팀에 오래 있겠어? 실적 세우고 금방 큰물로 떠나겠지. 넌 얘 밑에서 잘 배웠다가 다시 감독이 되면 되는 거야."

-···다시 절 감독으로 복귀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겁니까?

"야 이 개새꺄, 그건 네가 얼마나 열심히 잘 배웠느냐에 달렸지 나한테 네 인생을 보장받으려 하냐? 뒈질래?"

서문엽이 제일 싫어하는 질문 중 하나였다.

-아, 아닙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최동준 수석 코치! 우리 앞으로도 잘해보자고."

-네······.

***

<서문엽, 세계 협회에 선수 등록!>

<선수 등록한 서문엽, 파리 뤼미에르 BC 유니폼 입은 이유는?>

<모로 형제, 서문엽 영입 성공했나>

<서문엽 선수 등록, 모로 공방에 거액의 스폰서십 계약까지>

오랜만에 언론이 끓어올랐다.

구단주 놀이만 할 뿐, 대체로 잠잠했던 서문엽이 뜬금없이 프랑스에서 선수 등록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프랑스 협회에 선수 등록하고 파리 뤼미에르 BC에 입단하는 것처럼 비춰졌으나, 나중에 단순히 세계 협회에 등록했을 뿐이라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어쨌거나 파리 뤼미에르 BC와의 관계가 긴밀해진 것은 명백해 보였다.

이에 대하여 파리 뤼미에르 BC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팀들이 불편함을 드러냈다.

가장 대표적으로 독일 최강 명문, 베를린 블리츠 BC의 엠레 카사 감독이었다.

<'7영웅 동료' 엠레 카사 감독 '서문엽 파리 행은 재능 낭비'>

<엠레 카사 감독, 모로 형제에 독설 '잔수작 부리며 서문엽 귀찮게 해', '파리는 서문엽 담을 그릇 못돼'>

7영웅 동료이자 지금은 최고의 명감독으로 손꼽히는 엠레 카사가 이례적으로 파리 뤼미에르 BC에 대하여 독설을 날렸다.

서문엽이 파리로 간다면 세계 배틀필드 최강을 다투는 톱3의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모로 형제는 점잖게 받아쳤다.

<장 모로 '서문엽은 단순히 조카의 입단을 축하하러 동행했을 뿐'>

그렇게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그 뒤에 서문엽이 파리 뤼미에르 BC의 선수들과 훈련을 받은 사실이 부각되면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인천공항.

찰칵! 찰칵!

"서문엽 씨, 파리 선수들과 함께 모의 훈련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서문엽은 귀찮은 표정으로 답했다.

"나단과 겨뤘다고 알려졌는데요?"

"붙어봤지."

서문엽은 쉽게 시인했다.

기자들의 눈에 불이 켜졌다.

"나단 선수와 대결에서 누가 승리했습니까?"

"당연히 안 가르쳐 주지. 궁금하지?"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기자들을 놀렸다.

기자들이 질기게 질문했지만 결국 대결 결과는 듣지 못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이긴 쪽이 나단이냐 서문엽이냐 갑론을박 키보드 배틀이 붙었다.

이래저래 화제를 몰고 다니는 서문엽이었다.

< 개선(1) > 끝

< 개선(2) >

YSM의 클럽하우스는 오전부터 분주했다.

외국인 설치 기사들이 우르르 와서 분석 프로그램을 설치한 것.

그리고 새 감독으로 임명된 가브리엘 사나가 프로그램과 장비가 설치되는 것을 감독했다

프로그램이 잘 구동되는지도 직접 시범해 보는 가브리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선수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와, 똑똑해 보인다."

"저 사람이 새 감독님이지?"

"저거 우리나라엔 아직 제대로 만질 줄 아는 사람 없다며?"

"저 프로그램 KB-1 리그에도 안 쓰는 팀이 있다던데, 우리가 저걸 쓰네."

"구단주 잘 둔 덕이지 뭐."

"저 프로그램 어떤지 본 사람 우리 중에 있나?"

그 질문에 최혁이 살짝 손을 들었다.

"나야 쌍성 스피리츠에 있었으니까 봤지. 저거 있으면 무지 좋아."

1부 리그 강팀의 근접 딜러였던 최혁은 당연히 분석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은 적 있었다.

물론 지금은 2부 리그의 새내기 탱커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의외로 팀의 주장 노정환도 말했다.

"나도 유소년 국가 대표 때 보긴 했는데 무척 신기했던 걸로 기억한다. 안 좋은 습관 같은 것도 다 잡아내고."

노정환도 어릴 때는 주목받는 유망주였던 것이다.

"이제 우리 팀에도 저게 생겼으니 YSM은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몹시 진지하게 희망찬 이야기를 하는 노정환.

다른 선수들은 몸서리를 쳤다.

'어우, 오글거려.'

'대충 쓴 영화 대사인 줄.'

'참자. 팀에 이런 캐릭터도 있어야지.'

팀에 대한 충성과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노정환은 지나치게 진지해서 탈이었던 것이다.

선수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 최동준 감독도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여기 있었구나."

목소리에 기운이 없는 최동준 감독.

이제 조금 있으면 수석 코치로 강등될 운명이었다.

선수들도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최동준 감독을 가차 없이 수석 코치로 강등시켜 버린 서문엽의 결정이 좀 너무했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파리 뤼미에르 BC 리저브 감독 출신이래.'

'스포츠 의학 박사에 엘리트 코스 밟던 사람이라며?'

'그럼 최동준 감독님이 밑으로 가는 게 맞긴 하지.'

'최동준 감독님 안되셨다. 근데 새로 오신 감독님 우리 팀에 오래 계셨으면 좋겠네.'

'사람은 좋지만 수석 코치가 딱이긴 하지.'

선수들의 속내를 들어보면 더 좌절했을지도 모르는 최동준 감독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요란한 바이크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구단주가 출현했다는 경고음이나 다름없었다.

"헉, 구단주님이다!"

선수들은 태연했는데 최동준 감독만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클럽 내에서 누가 가장 갈굼을 많이 당하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제군들!"

서문엽이 큰 소리를 치며 나타났다.

장비 및 프로그램 점검을 마친 가브리엘도 서문엽을 주목했다. 그의 옆에는 통역사도 함께였다.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서문엽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웬 노인네가 나타나더니 지가 내 조상이라는 거야."

다들 구단주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그래서 난 유전자 검사 해보자고 했는데 그럴 시간이 없다며 거절하더군. 사기꾼 같은 노인네였어."

통역을 듣던 가브리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봐도 업무와 상관없는 헛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조상이 부덕한 탓에 고생이 많았다면서 숫자 여섯 개를 불러주더라?"

"헉!"

"그 유명한!"

선수들이나 코치진이나 화들짝 놀랐다.

서문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필요 없다고 꺼지라고 했는데 제발 들어달라고 굳이 불러주는 거야. 그래서 아직도 숫자 여섯 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서문엽은 제 딴에는 몹시 진지한 표정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지. 설마 신이 세상을 구한 답례랍시고 고작 로또 1등으로 퉁치려고 하나?"

"로또 사셨어요?"

넷티 이나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아니!"

서문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로또를 사지 않았어. 왜인 줄 알아?"

"돈 많으니까요."

"아니, 돈은 다다익선이야."

"로또가 아니어도 돈은 얼마든지 벌 수 있으니까요."

"절반쯤 맞았다."

서문엽이 이어서 말했다.

"너희가 나의 로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군들! 이번 시즌도 열심히 노력해서 쑥쑥 몸값을 키우도록 해라, 알겠냐?!"

구단주로서의 운영 철학인 선수 재테크를 다시 한번 밝히는 서문엽이었다.

"옛!"

"자, 너희들의 성장을 위해서 내가 프랑스에서 데려온 사람이 있다."

서문엽은 가브리엘을 가리켰다.

"새 감독, 가브리엘 사나다. 무지 엘리트라 이런 산골에 올 사람이 아닌데, 내가 특별히 어렵게 모셔왔다. 참고로 연봉도 너희보다 비싸니까 알아서 잘 모셔라, 알간?"

"옛!"

"자, 소개."

손짓하자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어 나왔다.

통역을 통해 자기소개를 간략히 했다.

"가브리엘 사나이고 당분간 감독직을 맡았습니다. 이번 시즌 목표는 1부 리그 승격이고, 그 뒤에는 2년 내에 우승하는 것입니다."

담백한 말투에서 나온 것치고는 대단한 목표였다.

선수들이 놀란 가운데, 더 놀랄 만한 말이 이어졌다.

"기존 감독이셨던 최동준 감독도 수석 코치로 남아 조력하겠다는 데 감사함을 느끼고 있고, 구단주님께서도 선수로서 1년에 세 경기까지 참가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헉!"

"구단주님이 선수로?!"

"진짜?!"

"구단주님이 경기를 뛰시면······."

선수들은 놀라 웅성거렸다.

서문엽이 말했다.

"내가 나설 필요 없도록 너희가 잘해라."

"옛!"

그렇게 가브리엘 감독 체제하에서 팀이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가브리엘 감독은 단체 사냥을 첫 훈련으로 택했다.

모든 선수가 던전에 접속하여서 4, 5명씩 짝을 지어 각 구역별로 사냥을 개시했다.

이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기본적인 사항을 파악하려는 의도였다.

분석 프로그램이 돌아가면서 선수들의 모든 행동거지를 입력했다.

적을 공격할 때는 근력과 민첩성 등이 측정되고, 이동할 때는 속도가 측정됐다.

다소 오차가 있긴 하지만 분석안으로 보는 것과 제법 비슷한 정도라 함께 영상을 보고 있던 서문엽도 놀랐다.

"음, 이 선수는 정말 모든 부분이 다 문제로군요."

가브리엘이 가장 먼저 언급한 선수는 다름 아닌 조승호였다.

택배 기사였다가 대뜸 영입되어 선수가 된 특이케이스.

-대상: 조승호(인간)

-근력: 37/39

-민첩성: 48/49

-속도: 74/78

-지구력: 45/45

-정신력: 77/77

-기술: 35/51

-오러: 67/70

-리더십: 62/82

-전술: 74/90

-초능력: 물체 전달, 시야 전달, 오러 전달

서문엽은 증폭된 분석안으로 조승호를 살폈다.

증폭된 분석안은 영상매체를 통해서도 대상을 볼 수 있어서 한결 편리했다.

"이 정도면 정말 많이 좋아진 편인데."

전반적으로 모든 능력치가 다 상승된 상태의 조승호였다.

비록 던전에서는 숨어서 만화책을 보는 처지의 조승호였지만 나름대로 팀 훈련을 소화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증거였다.

"전반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가브리엘 감독의 말에 서문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기술적인 측면은 아직 기초도 안 되어 있어서 더 가르칠 구석이 있는데, 전반적으로 더 발전하기란 무리지."

"유용한 초능력이 많아서 결국 써야 하긴 하지만, 우리 팀의 약점이 되기도 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싸움을 전혀 못하는 서포터는 없었다.

아무리 유용한 초능력이 많아도, 적에게 발각돼 죽으면 활용해 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정말 발전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증폭'을 얻기 전이라면 서문엽도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증폭된 분석안을 통해 서문엽은 조승호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승호를 서브 오더로 키워보는 건 어떨까?"

"서브 오더요?"

"그래, 쟤가 의외로 침착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 초능력을 활용해서 적 위치도 파악하는 입장이라 오더를 내리기도 좋고."

"흐음, 메인 오더는 주장 노정환으로 고정하되,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오더를 따로 내리는 거군요."

서브 오더란 그런 역할이었다.

"지금도 견제를 하러 나왔을 때는 이나연한테 오더를 내리고 있는데 뭘."

어딜 공격하고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 조승호가 지시를 내리는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술 재능 한계치가 90이라니. 감독의 자질이 있는 녀석이잖아?'

리더십과 전술은 지금 현재도 62, 74로 최동준 수석 코치보다 나았다.

"그건 좋은 생각 같습니다. 어차피 다른 부분에서 발전 가능성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해보죠. 그는 제가 직접 지도를 해보겠습니다."

가브리엘 감독도 찬성했다.

다음 관찰 대상은 최정민.

소설가 지망생으로,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었지만 자퇴하고 팀에 들어왔다.

-대상: 최정민(인간)

-근력: 65/71

-민첩성: 66/81

-속도: 60/68

-지구력: 57/57

-정신력: 90/90

-기술: 70/87

-오러: 61/63

-리더십: 32/37

-전술: 86/95

-초능력: 관찰

아직 후보 선수였지만 움직임이 괜찮았다.

관찰로 상대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좋네요. 키워볼 만한 선수입니다."

"관찰을 더 잘 활용하면 자기 능력 이상의 활약을 펼칠 수 있지."

"예, 초능력 덕분에 불필요한 움직임이 없이 공격이 날카롭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전술 능력!

리더십은 쓰레기였지만, 전술이 무려 86/95였다.

관찰 초능력과 시너지를 일으킨 탓인지 보다 생각이 깊고 지능적인 타입이었다.

'와, 얘도 나중에 전술 코치 같은 거 시키면 되겠다.'

리더십이 형편없어 감독은 못 되겠지만 말이다.

증폭된 분석안으로 선수들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저 선수도 얼마 전에 영입하셨지요?"

가브리엘 감독은 윤범을 가리키며 물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에 방문했다가 수험 공부를 하던 놈을 선수 시키려고 잡아온 케이스였다.

"계약에 특이한 사항이 있더군요."

"2년 뒤에 선수 생활 은퇴하면 3억 지급하기로 한 거?"

"예, 그 정도로 주목할 가치가 있었을까요? 전 아무리 봐도 이 선수에게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윤범의 능력치는 KB-2 리그에서도 후보에 못 들 수준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이 윤범을 데려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림자 걷기: 그림자 속에서 이동 속도 20% 상승. 70 이상의 오러를 가졌을 시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 움직인다.

현재 윤범의 오러는 69/72.

조금만 더 기다리면, 초능력 그림자 걷기의 진가가 나타난다.

오러가 딱 1만 더 오르면 어둠 속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암살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빨리 좀 올라라. 1만 오르면 되는데.'

윤범은 서문엽이 가장 터지길 기다리는 로또였다.

터질 날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더욱 조마조마해지는 것이었다.

< 개선(2) > 끝

< 자꾸 터진다(1) >

가브리엘 사나 감독은 확실히 빅 리그에서 온 엘리트다웠다.

주먹구구식이었던 팀이 한순간에 프로페셔널하게 변해 버렸다.

강화도 산골이라는 미친 위치나, 공장을 급조한 볼품없는 클럽하우스에도 실망한 기색이 없었던 가브리엘 감독.

그러나 팀 운영 방식이나 선수들의 훈련 스케줄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껏 이따위로 팀이 운영됐습니까?"

전 감독인 최동준 수석 코치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랐다.

통역을 통해서 건너 듣지 않았으면 심장이 멎을 뻔했다. 물론 이마저도 가브리엘이 빠른 속도로 한국어를 습득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타고난 을인 최동준 수석 코치는 절로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팀이 최근에 좋은 성적을 얻었다니, 구단주의 힘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겠습니다."

가브리엘은 그날로 클럽 운영 방침과 선수 훈련 스케줄을 새롭게 바꿨다.

상당히 체계적이고 칼 같은 체계에 그동안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선수들은 화들짝 놀라 군기가 바짝 들었다.

당장 훈련부터가 시간은 짧지만 훨씬 힘들어졌다.

다양한 훈련 기구를 프랑스로부터 수입해 훈련에 도입했는데, 선수들은 단기간에 훨씬 힘들어졌다.

"이, 이거 혹사 아니죠?"

"야, 감독이 스포츠 의학 박사란다. 혹사인데 혹사가 아니야."

"파리 뤼미에르 BC 리저브 팀의 훈련 방식을 그대로 도입했다고 했어. 그쪽에서는 다들 매일 하는 훈련인 거야."

"명문은 확실히 다르구나."

"같은 사람인데 우리라고 못 할 건 또 뭐야?"

선수들은 갑자기 꽉 잡혀진 클럽 내의 규율에 힘들어했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이제야 뭔가 프로 팀답게 굴러간다는 신뢰가 생긴 것이다.

가브리엘 감독의 훈련 시스템은 힘들지만 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과학적인 이론과 비전이 뚜렷했다.

분석 프로그램까지 도입되어서 훈련의 성과가 수치화되니 더욱 신뢰가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꼴찌를 밥 먹듯이 했던 팀.

그러나 이제는 모든 선수가 향상심을 품게 되었다.

KB7 1부 리그 우승 팀이 승격을 거부한 덕에 간신히 살아남았던 비운의 팀은 YSM의 이름을 달고 비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정말 희한하군.'

던전 내에서 벌어지는 훈련 상황을 대형 스크린으로 지켜보던 가브리엘 감독은 의문을 품었다.

'그동안의 훈련 방식이 다 비효율적이었는데, 어째서 몇몇 선수들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을까?'

지난 시즌에 뚜렷한 발전을 이룬 선수로 4명이 눈에 띄었다.

노정환.

이나연.

조승호.

남궁지훈.

팀의 주장인 노정환은 지구력을 집중적으로 훈련받아 킬과 어시스트가 늘었고, 무엇보다도 세이브 성공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세이브란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지킨 탱커의 디펜스 성공을 뜻한다.

아군을 데스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해 내는 것은 슈퍼세이브라 부른다.

지난 시즌 노정환은 높은 세이브 성공률은 물론이고 슈퍼 세이브도 자주 연출했다.

이제야 받쳐주는 선수들이 있어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지만, 가브리엘 감독이 보기에는 아니었다.

'그 이전 경기들을 보면 부족한 점이 많았어. 지난 시즌에 갑자기 기량이 오른 건 역시 지구력이 상승한 덕이다.'

지구력이 좋아지니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그 결과 아군을 보호하러 부지런하게 움직인 것.

육상 선수처럼 스프린터만 죽어라 훈련시킨 이나연이나 조승호도 마찬가지.

서포터였다가 뜬금없이 근접 딜러로 포지션이 변경되어서 검술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남궁지훈도 신기했다.

남궁지훈은 검을 대단히 섬세하게 다루는 재능이 있었다.

그간 집중 검술 훈련을 받고 경기에도 출전해 실전 경험을 쌓았기에 수면 위로 재능이 드러난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가브리엘 감독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였다.

'대체 구단주는 어떻게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지?'

이들 네 선수의 맞춤 훈련을 지시한 사람은 바로 서문엽이었다.

심지어는 상위 리그 강팀의 주전 근접 딜러였던 최혁을 데려와 탱커로 포지션 변경시켜 버리는 배짱까지.

웃긴 것은 최혁의 탱커로서의 자질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YSM로 이적해 와서는 휴식기 동안 휴가를 반납하고 근력 단련만 몰두했다는 최혁.

근력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니 확실히 탱커 감이었다.

옵서버의 초점을 조정하여서 최혁이 싸우는 모습을 클로즈업시켰다.

분석 프로그램이 최혁이 보여주는 움직임에 따라 수치를 측정했다.

카이트 실드를 왼쪽 가슴에 당긴 기본자세는 서문엽에게 배운 그대로.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두르며 잘 싸운다.

마치 근접 딜러에게 방패를 얹은 느낌이지만 이게 또 나쁘지 않았다.

'요즘은 탱커의 공격력이 중요시되는 시기니까.'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방어력이 중시되던 클래식 탱커의 시대가 저물고, 치치 루카스 같은 날렵하고 발 빠른 탱커로 트렌드가 옮겨가고 있었다.

탱커에게 딜러만큼의 공격력을 요구하는 시기.

'생각해 보니 우리 구단주가 딱이군.'

왼손으로 창을 써서 나단을 상대해 버린 미친 창술.

던지기는 보고도 못 피할 정도.

민첩성도 분신을 쓴 나단과 싸울 정도로 빠르다.

'어딜 봐도 돌아가서 배틀필드나 하라고 살려 보내준 것 같은데.'

너무 절묘한 시대에 생환한 서문엽이었다.

배틀필드의 트렌드조차도 서문엽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아무튼 가브리엘 감독은 이번 시즌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이 멤버로 포스트 시즌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포스트 시즌만 가면 구단주 3회 이용권을 써서 100% 우승 확정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응?"

가브리엘 감독은 분석 프로그램이 도출한 이상한 수치에 의문을 느꼈다.

최전방에서 디펜스를 하며 스테이지 보스 몹과 싸우는 최혁.

방패만으로 다 막을 수는 없었고, 몸에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어쩔 수 없을 때는 중상만 피하고 적당히 감수하는 탱커의 기본기를 어느 정도 숙지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최혁이 입은 부상 정도를 나타낸 수치가 이상했다.

"뭔가 이상하십니까?"

최동준 수석 코치가 물었다. 옆에 얌전히 있긴 했지만, 나름 분석 프로그램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어깨너머로 배우는 중이었다.

가브리엘 감독이 물었다.

"최혁의 초능력은 오러 집중 하나가 맞습니까?"

통역을 통해 질문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최동준 수석 코치.

"그럼요."

"이상하군. 내 생각이 옳다면 최혁의 초능력은 2개인데."

"예?"

최동준 수석 코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속 나타나는 수치를 보며 가브리엘 감독은 씨익 웃었다.

"구단주 말이 옳았어. 완벽한 탱커 감이야."

코치진은 분석 프로그램을 볼 줄 몰라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가브리엘 감독이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발견한 초능력은 바로.

-내구력 강화: 오러가 항시 몸을 보호하고 있어 외부 충격에 쉽게 다치지 않는다.

서문엽이 최혁을 탱커로 만든 근본적인 이유인 내구력 강화였다.

오러가 항시 몸을 보호하고 있어서 외부 충격에 쉽게 다치지 않는 초능력이었다.

사냥 포인트로 생기는 오러처럼 몸을 감싸는 형태가 아니라, 내부에서 보호 작용을 하는 터라 본인이 모르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패시브 타입 초능력이었다.

'설마 이것까지 알아차리고서 영입한 건가?'

구단주에 대한 신비감은 더욱 커졌다.

그리고 아마도 이 사실이 밝혀지면 쌍성 스피리츠는 아까워서 뒷목을 잡을지도 몰랐다.

괜히 팀 규모치고는 큰돈을 썼다고 생각했던 영입이 대성공이었다는 게 밝혀진 순간이었다.

"저, 그럼 최혁도 주전으로 쓰실 생각이십니까?"

최동준 수석 코치가 슬그머니 질문을 했다.

가브리엘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지션이 낯설긴 하지만 2부 리그에서는 충분한 실력입니다. 거기다가 실전에 계속 내보내라는 구단주님의 지침도 있었습니다."

가브리엘 감독은 생각난 김에 옵서버를 조정하여서 새로운 영입생인 소설가 지망생 최정민을 확대했다.

"이 선수도 선발입니다."

"그러면 팀워크에 너무 혼란이 오지 않을까요?"

최동준 수석 코치는 전 감독으로서 이 팀에 대해 잘 알았으므로 이의를 제기했다.

"이나연, 조승호, 남궁지훈도 주전이 아니었습니다. 새로 영입된 최혁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에 역시나 신인인 최정민까지 끼면, 11명 중 5명은 조직력에 녹아들지 못한 채로 팀플레이를 해야 됩니다."

"타당한 의견입니다."

가브리엘 감독은 전 감독이었던 그의 입장을 존중해 주었다.

"하지만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사냥 훈련이 끝나고, 가브리엘 감독은 선수들을 모아놓고 분석 결과를 통지해 주었다.

선수들은 조금씩이지만 오르고 있는 수치에 만족감을 느꼈고, 최혁의 경우는 대박이 나서 뛸 듯이 기뻐했다.

"제게 그런 초능력이 있었다고요?!"

"얼마 전에 갑자기 생겼을 리는 없고, 이전부터 각성했지만 자각을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전 팀에서 분석 프로그램으로 알아차리지 못했나?"

"그걸 알았으면 포지션 변경에 진즉 동의해 줬겠죠! 국가 대표로도 뽑아준다고 했는데!"

"분석 프로그램을 아주 잘 다루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차리기 힘들긴 하지."

가브리엘 감독의 말에 최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선수 외에 다른 인력에 돈을 많이 쓸 팀은 아니죠."

쌍성 스피리츠뿐만 아니라 한국 클럽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일단 해외 명문 팀에서 쓴다니까 따라 쓰긴 하는데, 몸값 비싼 실력자는 엄두도 못 내고 실력이 뒤떨어지지만 연봉 적당한 사람을 고용해 구색만 맞춘다.

"아무튼 이렇게 되면 내가 구상한 전술에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멤버 구성이 나왔군."

그 말에 선수들은 의아한 표정들이 됐다.

"팀 내에 새로운 팀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나연, 조승호, 남궁지훈, 최혁, 그리고 최정민. 이렇게 5명은 한 조로 움직이며 전진 배치되어 상대 팀을 압박하는 선발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가브리엘 감독은 조승호를 가리켰다.

"그 팀의 주장은 조승호다."

"···네?"

조승호가 눈을 끔뻑였다.

"탱커 1명, 원거리 딜러 1명, 근접 딜러 2명, 서포터 1명. 완벽한 조합이지. 어때, 할 수 있겠나?"

조승호는 방금 사냥 훈련에서도 사냥에 동참했다가 방해만 되는 바람에 구석에서 쪼그려 앉아 있어야 했던 처지라 그저 뜬금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은근히 시키면 빼지 않는 대범한 구석이 있는 조승호였다.

"잘못돼도 제 책임 아니죠?"

가브리엘 감독은 미소를 지었다.

"구단주는 네게 전술가적인 자질이 있으니 서브 오더로 키워보자고 하셨다. 난 구단주의 안목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이지. 그러니 이번 시즌은 너에게 걸어보고자 한다."

"아니, 제대로 말해줘요. 잘못돼도 제 탓 하시면 안 돼요?"

"물론 내 책임이다."

택배 기사 2년, 배틀필드 선수 반년.

조승호의 인생에 봄이 오려 하고 있었다.

< 자꾸 터진다(1) > 끝

< 자꾸 터진다(2) >

후반기 시즌이 머지않았을 무렵.

이적 시즌이 서서히 끝나가자 전력 보강이 다급해진 클럽들의 행보가 부쩍 활발해졌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영입 러시.

그 타깃은 YSM도 피해가지 못했다.

한국 2부 리그 중위권 팀에 불과했지만, 서문엽이 구단주로 취임하는 바람에 배틀필드 관계자라면 모두가 아는 팀이 된 탓이다.

"죄송하지만 이나연 선수는 이적 대상이 아닙니다."

"Not for sale!"

사무실에서는 KB-1 리그 팀들은 물론 일본, 아랍권에서도 밀려오는 영입 제의를 거절하느라 진땀을 뺐다.

가장 핫한 선수는 뭐니 뭐니 해도 이나연이었다.

빠른 발과 미친 점프로 적진 한복판에서 난동을 부리는 이나연의 견제 플레이는 많은 클럽들을 매료시켰다.

거기에 조승호까지 세트로 영입하겠다며 거액을 제시하는 해외 클럽들도 있어서 서문엽을 혹하게 만들었다.

"둘이 세트로 500만 달러? 아랍 애들 미쳤네."

서문엽이 혀를 내둘렀다.

운영 팀의 사무 업무를 돕고 있었던 최동준 수석 코치가 옆에서 대꾸했다.

"단시간이지만 워낙 임팩트가 강했고, 구단주님께서 직접 고르신 콤비라는 게 또 신뢰가 있어서 일본이나 아랍권, 그리고 유럽의 하위 리그 등에서 관심이 많습니다."

"이야, 축구였다면 중국에 2배는 더 비싸게 받고 팔았을 텐데."

아쉽게도 중국 배틀필드는 축구와 달리 폐쇄적이었다.

중국은 초인들을 매우 소중한 국가 전력으로 여기기 때문에 해외와의 교류 자체를 꺼려 했다.

또한 초인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 실력자들도 많은 편이었다.

중국 리그를 보면 배틀필드와 함께 각종 전통 중국 무술이 되살아나면서 이색적이고 화려했다.

뜬구름 잡는 무술 이론을 정말로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초인들이 나타나자 생겨난 일이었다.

'지저 전쟁 때는 잠잠했는데 전쟁 끝나고 배틀필드가 생기니까 확 일어났다지?'

전쟁 때는 목숨이 걸린 판이라 실용성이 검증도 안 된 전통 무술 따위에 목맬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스포츠이니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부각되어서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무술 액션이 확 떴다.

중국은 현재 배틀필드 계의 갈라파고스라 불리는데, 정말 세계 트렌드와 동떨어진 고유의 색깔을 갖춰가는 중이었다.

"저, 그런데 500만 달러에 애들 파실 겁니까?"

"미쳤어?"

서문엽이 강하게 부정했다.

"500만 달러 같은 푼돈에 팔 리가 있나."

"방금 전에는 금액을 듣고 감탄하셨잖습니까."

"그야 이제 반 시즌 반짝 활약한 애송이들을 그 가격에 사겠다니 놀란 거고. 하연이 이적료가 겨우 250만 유로였는데 얘들 둘이 뭐라고 세트로 500만 달러야?"

"백하연 선수는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 이적료가 싸진 거긴 하지만, 그래도 나연이와 승호가 500만 달러라는 건 좀 과하죠. 그럼 과하게 불렀을 때 파는 게 이득이긴 하잖습니까?"

사실 이나연과 조승호는 서로 함께 해야 시너지를 발휘하기 때문에 세트로 묶어서 비싸진 측면이 있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저었다.

"넷티는 몰라도 조승호는 안 돼."

"예? 나연이가 아니라요?"

최동준 수석 코치는 의외라는 얼굴이 됐다.

"넷티 스타일은 한계가 뚜렷하잖아. 근데 승호는 활용 가치가 아주 커."

물체 전달, 시야 전달, 오러 전달.

이 3가지 전달 시리즈는 서문엽처럼 전술적 창의성이 풍부한 사람에게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주는 재료였다.

서문엽은 당장 자신이 경기를 뛰었을 때 조승호를 활용할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놓은 상태였다.

자선 경기 2세트의 올킬만큼이나 대중들에게 충격을 선사할 생각이었다.

'아, 기다려진다. 실현만 되면 5분 안에 게임이 끝나 버릴 거야.'

허망해진 상대 팀 선수들.

충격 먹은 관중들.

상상할수록 신나는 서문엽이었다.

겸사겸사 무기 스폰서십 계약 조건으로 200만 유로를 더 챙길 수 있으니 가지가지로 개이득!

그러려면 조승호는 꼭 데리고 있어야 했다.

"하긴, 걔네들을 팔면 가브리엘 감독이 화내겠죠."

"그래, 그래서 더 안 돼."

"그럼 감독의 시즌 구상에 없는 선수들을 처분하는 건 어떨까요?"

서문엽은 그런 제안을 하는 최동준 수석 코치를 빤히 쳐다봤다.

"걔들 다 네가 데리고 있던 애들이잖아? 왜 팔려고 해?"

구상에 없는 선수들.

그들은 본래 주전이었으나 신인들의 약진으로 밀려난 기존 선수들이었다.

최동준 수석 코치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안목 좋으신 구단주님도 걔네들에게는 아무 관심도 안 보이시고, 주전에도 밀려났으니, 차라리 경기를 뛸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는 게 걔네들한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솔직히 걔들은 끽해야 2부 리그가 한계지."

서문엽은 냉정하게 평가했다.

"근데 우리 팀에 선수는 18명밖에 없어. 가브리엘도 별말 없고 본인들도 요청이 없으면 그냥 놔둬."

"네······."

그 말에 최동준 수석 코치도 납득했다. 하기야 지금은 모두가 우승과 승격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굳이 벌써부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아무튼 선수 이적은 아무도 없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오히려 마음 같아서는 4명을 더 영입해서 22명을 다 채우고 싶은 서문엽이었다.

'그럼 나의 로또나 보러 가볼까?'

서문엽은 휴게실에서 윤범을 발견해 냈다.

윤범은 무슨 이유인지 한숨을 푹 쉬고 있었다.

"땅 꺼지겠다."

"헉, 구단주님!"

"뭘 그렇게 화들짝 놀라?"

서문엽은 자신과 마주치자 기겁을 하는 윤범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그냥 놀라서요."

"앞으로 날 보면 존경과 반가움을 표시해라, 알겠냐? 확 그냥."

"···네."

역시 일진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윤범이었다.

"자, 형한테 말해봐. 고민이 뭐야?"

어깨동무를 하며 선심 썼다는 듯이 말을 건네는 서문엽.

윤범은 정말 부담돼서 말 섞기 싫어졌지만,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제 실력이 가장 형편없어서요."

"이제 막 영입된 신인 놈이 무슨 벌써부터 좌절이야?"

"학생 때랑 똑같다고요. 그때도 실력이 부족해서 관뒀는데, 역시나 지금도 마찬가지잖아요. 저보다 한 살 어린 정민이는 벌써 주전에 낙점됐는데."

"걘 원래 재능 있었고 넌 아니잖아."

서문엽의 돌직구. 확실히 상담에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민을 털어놓을수록 더욱 상처를 받는 신비한 상담을 받으며 윤범은 죽을상이 되었다.

"그러게 왜 굳이 저를 데려오신 거예요? 재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데!"

"재능은 없지만 좋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그늘에서 이동 속도 올라가는 거요? 제가 여기서 이동 속도 조금 늘어난 거 가지고 뭘 어쩌라고요? 초능력을 발휘해도 이나연 선배님 발끝도 못 쫓아간다고요."

그건 맞다.

윤범의 속도는 50/57.

그림자 속에서 이동 속도 20% 상승을 적용받아도 팀 내에서는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가진 초능력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으니 더욱 좌절할 만했다.

"내가 말했잖아. 그런 초능력은 아직 다 개발된 게 아니라고."

"확실히 찾아보니까 오러량에 따라 초능력의 특성이 달라지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극히 드문 케이스잖아요. 구단주님은 어떻게 그걸 장담하시는 거예요?"

"장담은 안 했고, 대신 2년 뒤에 그만두면 2억 준다고 보장했잖아. 2억이면 치킨집도 차릴 수 있어."

"안 차려요! 공부해서 대학 갈 거라고요!"

버럭 성질내는 윤범.

서문엽이 인상을 썼다.

"개새야, 치킨집 무시했냐? 근데 이 새끼 고함을 지르네."

"죄, 죄송합니다."

바로 심장이 쪼그라든 윤범이었다.

대화를 나눌수록 더 힘들어지는 서문엽의 디버프 상담!

서문엽은 아까보다 표정이 더 안 좋아진 윤범에게 말했다.

"넌 이러고 있을 시간에 오러를 더 연마해."

"명상을 하면서 오러 통제에 신경을 쓰고 있긴 해요. 근데 이런 건 효과가 미미하다면서요?"

오러는 따로 수련하지 않아도 딱 정해진 재능만큼 나타나는 편이다.

수련 방법이 있긴 하지만 그 시간에 다른 훈련을 하는 게 이득이긴 했다.

"미미하지만 효과가 없는 건 아니지. 어차피 네 재능은 썩었어. 승호랑 쌍벽이야."

"그, 그 정도는······."

조승호는 같이 사냥하면 도리어 방해가 되는 수준! 좌절에 빠진 윤범도 거기까지는 양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윤범이 지금 그림자 걷기를 써도 조승호보다 발이 느리다.

거기에 윤범은 증폭된 분석안으로 본 결과, 리더십과 전술도 각각 20/20, 31/45에 불과했다.

'따지면 따질수록 윤범이 더 쓸모없지만 굳이 말하진 말자. 난 배려심 있는 따듯한 남자니까.'

윤범이 들었으면 말도 안 된다고 노발대발했을 생각을 하는 서문엽이었다.

"아무튼 아무리 훈련해도 네 선수 생활에 큰 변화는 없을 거란 말이야. 그럴 바에는 크게 한 방 터뜨릴 수 있는 대박을 노려야지."

"무슨 어른이 꾸준함보다 대박을 노리라고 권하세요?"

"내가 못 배워서 그렇다, 씨발아."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요."

크게 당황한 윤범.

서문엽은 쯧쯧 혀를 찼다.

"남자답게 되고 싶어서 배틀필드를 했지?"

"네······."

"그럼 더욱 내 말을 들어야지. 돈이 있으면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도박장에 가야 대범한 남자야."

난잡한 10대 후반 시절의 경험담이었다. 던전에서 목숨 건 스릴이 더 재미있어서 관뒀지만 말이다.

"그, 그런 미친······."

"뭐 인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좋아! 그럼 네게 적합한 오러 수련법을 찾아보자."

"그런 게 있어요?"

"오러는 네 각성과 관련이 있는 곳에서 더 활발해지는 특성이 있거든."

"구단주님도 그런 곳이 있나요?"

"난 던전에서 더 잘됐어."

"던전?"

"던전에 있을 때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거든."

"···네?"

"내가 살던 고아원의 일상은 네가 겪은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고아원장부터가 폭력을 휘두르니 애들도 복싱을 한답시고 때리고 괴롭히며 놀았지. 그땐 복싱이 유행이었거든. 개새끼들······."

그 말에 윤범은 충격을 받았다.

저 강인한 서문엽조차도 그런 아픔이 있었단 말인가?

서문엽은 웃으며 윤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태는 달라도 누구나 너만큼의 상처는 있어. 다 짊어지고 참고 살아갈 뿐이야."

"······."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진 윤범.

아픈 과거와 좌절, 열등감.

누구나 다 그런 것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말에 까닭 없이 감동을 느꼈다.

"자, 그럼 너에게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지. 넌 타고난 찐따니까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그늘진 곳을 찾아보자."

"그, 그런 말을······!"

찐따라는 말에 상처 입은 윤범.

감동 따위는 채 3초를 가지 않고 소멸했다.

신비의 디버프 상담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여담으로 서문엽은 고아원 시절, 몇 살이나 많은 상대를 돌로 찍어 병원에 보냈었다.

병원에서 돌아와 복수하려 들자 다시 한번 돌로 찍어서 미친놈 인증을 했다. 당연히 그 뒤로 아무도 시비를 안 걸었다.

그러나 자신이 폭행한 사실은 곧잘 잊어버리기 때문에 원한만 기억하는 서문엽이었다.

< 자꾸 터진다(2) > 끝

< 자꾸 터진다(3) >

"아무도 안 오고, 햇볕도 들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가자."

"왜 그런 곳을 찾는 건데요!"

"그건 네 초능력을 보고 물어라."

윤범은 기분이 나빴지만 반박할 말이 궁했다.

초능력은 초인의 경험과 정신 상태, 혹은 체질에 따라 결정된다.

그림자 걷기.

아무리 봐도 어두침침한 성격을 짐작케 하는 초능력이었다.

"그건 편견이에요. 전 그렇게 음침한 놈이 아니라고요!"

"자, 이 산으로 올라가 보자. 이 산을 누가 올라가겠어?"

"아니, 제 말 듣고 계세요?"

"시험해 보고 아니면 마는 거지 왜 지랄이야? 넌 내가 한가해 보이냐?"

"······."

하마터면 '네'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렇게 윤범의 체질에 맞는 장소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누구 하나 등산하러 올 리가 없는 그냥 흔한 동네 산.

"어디 동굴 없냐?"

"제가 박쥐예요?! 그리고 이런 산에 동굴이 어디 있어요!"

"있으면?"

"네?"

"찾아서 동굴 나오면 뒈진다?"

서문엽은 말문이 막혔는지 시비를 걸어왔다.

윤범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어, 없으면요?"

"너도 나 한 대 때려."

"···됐어요."

"저쪽에 가보자, 찐따야. 저쪽이 그늘졌다."

"찐따라고 하지 마요!"

"풉, 되게 예민하네."

"구단주님은 이나연 선배도 계속 넷티라고 부르시잖아요. 그런 이상한 별명이 구단주님 입에 붙으면 전 고개도 못 들어요!"

서문엽은 뜨끔했다.

'이 자식, 은근 할 말은 다 하네.'

서문엽에게 억울한 취급을 받았을 뿐, 사실 윤범은 배틀필드 선수 생활도 했고 수능 준비도 착실히 해서 서울 4년제 대학을 노렸다. 결코 어리바리하고 멍청한 성격은 아니었다.

둘은 산속을 돌아다녔다.

초인 둘이 산 좀 탄다고 피곤할 리 없었지만, 윤범은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서문엽이 소리쳤다.

"여기다!"

"어?"

산 중턱쯤 되는 곳.

활엽수가 가득 우거진 지형이었다.

그리고 3미터쯤 될 법한 커다란 바위가 땅에 박혀 있었다.

윤범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바위 위에서 하라고요?"

"인마, 네가 무슨 도사냐? 바위 위에서 도 닦게?"

"그럼요?"

"자, 바로 여기야."

서문엽은 바위 뒤편을 가리켰다.

큰 바위에 가려져 그늘지고 주변도 높게 자란 잡초와 넝쿨로 시야가 가려진 장소였다.

그야말로 매복을 하라면 바로 여기라고 소리칠 만한 은폐 엄폐 포인트!

윤범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바위 위를 놔두고 왜 이런 곳에 숨어서 오러를 연마해요! 제가 무슨 죄졌어요?"

"그건 네 초능력에게 물어보라니까? 내가 묻고 싶네. 너 무슨 죄졌냐? 왜 그림자 속에서 빨리 움직이는데? 도둑놈이냐?"

서문엽이 적반하장으로 호통 쳤다.

윤범은 황당했지만 아예 틀린 말도 아니라서 대꾸를 못 했다.

"넷티랑 콤비 짜지 그러냐? 도둑 연놈 콤비!"

"도둑이라고 하지 마요!"

"이 새낀 다 부르지 말래. 찐따랑 도둑이랑 둘 중 하나 골라!"

"둘 다 싫다고요! 그냥 이름 불러요!"

"자자, 알았으니까 시키는 대로 해봐. 넌 잘 모르나 본데, 이건 내 꿀팁이야. 다들 오러 연마에 대한 필요성을 잘 못 느껴서 모르는 비법이라고."

"구단주님도 이런 식으로 성과를 보신 거예요?"

"그래. 공략 끝난 미공개 던전을 붕괴시키지 않고 나만의 비밀 장소로 삼으면서 오러 연마를 했다."

던전을 지탱하는 코어를 파괴하지 않고 놔두면 던전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를 이용해 서문엽은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던전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홀로 공략한 후, 자신의 비밀 장소로 삼았다.

다만 귀환석이 없으면 나올 수 없으므로, 이제는 쓸 수 없는 장소였다. 더 이상 귀환석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러 재능 100을 꽉 채우려고 거기서 부단히 노력했지. 정말 힘들었어.'

오러가 98/100에서 잘 안 오르는 바람에 짜증이 난 서문엽은 미친 듯이 수련에 몰두했다.

온갖 수련법을 동원해 본 결과 알아낸 최적의 오러 수련법을 윤범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물론 놀리는 마음도 3할쯤 있지만 어쨌든 윤범이 잘돼야 서문엽도 이득인 상황이었다.

"어휴, 알았어요."

윤범은 바위 뒤편에 숨듯이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서문엽이 풉 웃었다.

"웃지 마요!"

"미안. 하도 보기 짠해서."

"이게 다 구단주님이 시켜서잖아요."

"알았어, 인마. 난 이만 가볼 테니까 거기서 혼자 조용히 수련해 봐."

"네······."

그렇게 윤범은 수련을 개시했다.

조용하고 아늑한 바위 뒤에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고요함이 찾아들었다.

문득 떠올랐다.

서문엽에게 시달리느라, 자신을 괴롭혔던 번뇌를 어느새 잊고 있었다는 것을.

윤범은 한 가지 깨달았다.

아픈 과거보다도,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도.

'당장 이놈의 구단주가 놀리는 게 더 싫다!'

서문엽 앞에서는 모든 고민이 다 부질없다는 신기한 결론에 이르자, 윤범은 오러 수련에 집중했다.

'강해져서 놀림 안 받을 거다! 해볼 만큼은 해보겠어. 안 되면 공부하지 뭐!'

마음을 비우고 집중했다.

오러에 모든 신경을 기울이고, 오러를 천천히 움직였다.

활발한 상태로 둬야 오러가 오러를 불러와 조금씩 성장하는 원리였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서문엽의 조언에 따른 플라시보 효과인지, 분명 오러가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첫날부터 성과가 생길 리는 없었다.

윤범은 그날 이후로 매일 훈련이 끝나면 이곳에서 오러 수련을 더했다.

***

새롭게 떠오른 YSM의 에이스 이나연은 훈련을 마치고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왔다.

사방팔방이 자연과 함께한 산책로라 굳이 옥상에 올라올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도 옥상에 오지 않으므로 전세 낸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사람이 더 있었다.

서문엽이 옥상에서 쌍안경으로 산속을 보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이나연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나연은 팀 내에서 구단주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이야 존경하면서도 막상 상대하기는 부담스러워하는 면이 있었다. 워낙 거물이라 자연히 위축되는 것.

하지만 이나연은 늘 별명으로 불려서인지 서문엽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은혜를 입은 점도 있어 더욱 그랬다.

"어, 그래."

서문엽은 쌍안경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나연은 의아함을 느꼈다.

"뭘 보세요?"

"그냥."

"아하, 야생동물 보세요?"

"응."

귀찮아서 대충 그렇다고 대꾸한 서문엽.

하지만 그 말에 이나연은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우왕, 그런 취미가 있으셨구나. 저도 동물 무지 좋아해요!"

"그래그래."

"뭐 보세요? 멧돼지? 고라니? 새?"

"뭐 비슷한 거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도 한 번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안 돼."

서문엽의 목소리에 살짝 당혹이 어렸다.

"치사해! 한 번만 보여주세요."

"안 된다니까."

"잠깐만 보여주는 건 괜찮잖아요."

이나연은 섭섭하다는 투로 투정을 부렸다.

서문엽은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그깟 쌍안경 한 번 안 빌려주는 치사한 놈이 되어가고 있었다.

보여줄 수 없는 이유야 당연했다.

쌍안경으로 보던 건 동물이 아니라 바위 뒤 틈새에 있는 윤범이었으니까.

언제쯤 오러가 69에서 70으로 바뀔까 하고, 조마조마하고 기대되는 재미로 윤범을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저 장소도, 옥상에서 쌍안경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선정한 것이었다.

"내가 실은 도구에 결벽증 비슷한 게 있어."

"어머, 정말요?"

"응, 쌍안경이나 카메라처럼 렌즈가 달려 있는 물건은 남의 손을 타는 게 거북하더라고. 네가 이해 좀 해줘."

없었던 결벽증이 탄생했다.

"아항, 알겠어요."

다행히 쉽게 수긍한 이나연.

하지만 서문엽이 미처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근데 동물들을 보며 힐링을 하는 건 좋은 방법 같아요. 저도 훈련으로 피로가 쌓인 멘탈을 그런 식으로 풀어야겠어요."

"···응?"

"저도 쌍안경 사 올게요. 우리 같이 동물들 구경하고 놀아요."

"그, 그래."

외통수에 걸린 서문엽은 그냥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었다.

'미안하다, 윤범아.'

이나연이 쌍안경을 사오면 윤범을 발견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니므로 그만 신경 끄기로 했다.

'물론 이상한 놈으로 보겠지만, 넷티 성격이면 널 더 신경 써서 보살펴 줄 거다. 어찌 보면 내가 또 윤범을 위해 좋은 일을 한 건 한 셈이군.'

죄책감은 0.1%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이틀 후.

이나연은 택배로 받은 쌍안경을 보여주며 신이 났다.

"저도 샀어요! 같이 동물 봐요!"

"그러자꾸나."

서문엽은 더 이상 윤범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나연에게 발견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이미 결심했으니까.

"어디에 동물이 많아요?"

"저쪽에 고라니 있더라."

서문엽은 윤범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고라니 예쁘겠다! 근데 구단주님은 저쪽만 보고 있었잖아요."

"이, 이건 동물을 보는 게 아니라 일종의 가상 사냥이야."

"가상 사냥?"

"동물의 흔적이 있나 살피고 있었어. 흔적을 발견하면 그걸 쫓아가며 타깃을 찾아내는 거지."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아항! 그럼 전 고라니나 찾아볼게요."

이나연은 고라니는 발견 못 했지만, 딱따구리를 발견하여서 이내 그것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내 옆에 있는 서문엽이 신경 쓰였다.

'구단주님은 뭘 보실까?'

문득 궁금해졌다.

서문엽이 무엇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쌍안경의 방향을 돌려 서문엽이 무엇을 보나 찾으려는 찰나였다.

"됐다!"

서문엽이 돌연 크게 환호했다.

"네, 네?"

깜짝 놀란 이나연.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좋아했다.

"방금 로또가 터졌어."

"로또요?"

"아무튼 먼저 갈게!"

"구, 구단주님!"

서문엽은 쌩하니 옥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떠나 버리니 조금 섭섭했지만, 이나연은 서문엽이 뭘 보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윤범은 이상함을 느꼈다.

돌아오니 먼저 얄미운 구단주가 반겼다.

"여, 효과가 있지?"

"음,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요."

"기분 탓이 아닐 거야."

"아무튼 조언 감사합니다."

"그래그래."

서문엽은 어깨를 툭툭 치며 윤범을 격려했다.

그런 친절한 구단주의 태도는 처음이라 윤범은 도리어 오싹함을 느꼈다.

그런데 숙소 건물에서는 팀 선배인 이나연과 마주쳤다.

"어? 선배님."

"그래, 윤범아. 뭐 하다 왔어?"

"네, 혼자 수련을 좀······."

그 말에 이나연은 무슨 이유인지 측은함과 걱정이 가득한 눈이 되었다.

"고민 같은 건 없고?"

"네,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록 이나연은 성격 좋고 발랄한 여자였지만, 윤범은 선배에 대한 깍듯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래, 고민 같은 거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하고."

"네!"

윤범은 걱정해 주는 이나연에게 감동했다.

이런 좋은 선배들이 있으니 YSM에 입단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윤범은 등 뒤에서 이나연이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자꾸 터진다(3) > 끝

< 비밀 장소(1) >

후반기 시즌 시작.

11위에서부터 시작한 YSM은 후반기 첫 경기부터 파란을 일으켰다.

-윤범, 1킬!

-윤범, 2킬!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 있던 윤범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2킬을 이룩했다.

윤범에 대한 정보라고는 그늘 속에서 이동 속도가 조금 빨라지며, 전체적으로 수준 이하라는 사실뿐.

GT 나이츠는 이동 중에 기습을 받아 치명타를 입었다.

"오, 좋아! 역시 죽어라 시키니까 되네!"

VIP석에서 서문엽이 신이 나 소리쳤다.

서문엽은 윤범의 무기를 활과 단검으로 바꾸게 했다.

기존에는 장검을 썼는데, 장검을 소리나 기척 없이 다루기에는 윤범의 테크닉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활과 단검으로 기습에 중점 두는 훈련만 하고, 서문엽이 개인적으로 연계 동작 몇 가지를 죽어라 반복시켰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윤범은 다시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윤범과 더불어 가브리엘 감독의 작전도 성공이었다.

조승호가 이끄는 팀이 깊숙이 접근해서 압박을 하고, 이나연이 날뛰며 견제 플레이.

이나연에게 보급을 해주는 조승호를 잡기 위해 던전을 우회하여 배후로 이동하는 GT 선수들을 길목에 매복한 윤범이 기습.

삽시간의 2킬.

그리고 이나연의 사냥 방해로 인한 성장 저하까지 걸린 GT 나이츠는 궁지에 몰렸다.

노정환 일행까지 합세하여서 단숨에 총공격으로 승부를 내버렸다.

이때 달아날 길목을 틀어막으며 GT 나이츠를 구석에 몰아넣은 데는 오더를 내린 조승호의 공이 컸다.

1세트의 MVP는 2킬 2어시의 윤범.

2세트는 이나연이 무려 5어시를 기록하며 따냈다.

윤범과 함께 영입된 신입생 최정민도 1, 2세트 도합 1킬 3어시를 기록해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파란의 주인공은 역시나 그림자 속에서 자취를 감춰 버리는 윤범이었다.

<윤범 영입 대박 난 YSM, 서문엽 효과?>

<윤범 '서문엽 구단주님께 감사'>

<서문엽의 선택을 받은 선수들>

<만년 꼴찌에서 도약한 YSM, 그 비결은?>

GT 나이츠는 서문엽이 관람했던 당시 한정실업이었던 팀이 쫄딱 완패했던 상대였다.

그런데 불과 반년 만에 달라졌다.

이나연이라는 공격 1옵션 이후, 윤범이라는 2옵션까지 생겨났다.

특수한 작전을 쓸 재료가 갖춰진 데다 가브리엘 감독의 역량이 합쳐져서 선수들의 전술적 움직임이 물샐틈없이 완벽해졌다.

언론은 YSM이 강팀으로 거듭난 비결로 서문엽을 꼽았다.

서문엽이 가장 대중의 주목을 잘 받는 소재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서문엽 덕이었기 때문이다.

배틀필드 마니아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지금까지 서문엽이 직접 뽑은 선수 명단: 이나연, 조승호, 남궁지훈, 윤범, 최정민, 최혁.

-와 서문엽 안목 미쳤다.

-영입 다 성공했네.

-최혁도 오늘 탱커로 첫 출전해서 활약 좋았음.

-최혁은 1부 리거였는데 2부 리그 간 거니 당연히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미쳤냐? 탱커로 포지션 변경을 했는데 첫 출전부터 그 정도면 잘한 거지.

└서문엽 형님께서 탱커 하라 하셨으니 탱커가 맞는 거다.

-남궁지훈도 원래 서포터였는데 서문엽이 근접 딜러로 바꾸게 했다고 하잖아.

└남궁지훈 검술 오지지. 보호 걸고 치고 들어가 킬 따내는 거 보면 지림.

-재테크 때문에 클럽 인수했다더니 정말 오지게 돈 잘 번다ㅋㅋㅋ 저 선수들 팔면 얼마 벌까?

└아랍에서 이나연 조승호 산다고 거액 비드한 적 있음.

-근데 윤범은 개신기하네. 윤범은 선수도 안 한다는 애였는데 어떻게 터질 줄 알고 영입한 걸까?

└그래서 서문엽, 서문엽 하는 거겠지.

-인류를 구원하실 불사신 서문엽 만세!

└작작해라.

└서문재단 아직 안 사라졌냐?

└서문재단 해체됐는데 인터넷에 서문재단인 척하는 병신들은 개많아졌음ㅋㅋ

└서문엽한테 처맞고 싶나.

서문엽의 히트 상품 윤범은 두 번째 경기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이나연과 윤범을 함께 보내 상대 팀의 사냥을 방해한 것이다.

이나연은 벼룩처럼 날뛰고, 윤범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화살을 쏘고 자리를 바꾸고를 반복했다.

조승호가 화살을 계속 공급해 줬으므로 견제는 2배 이상의 위력을 발휘했다.

눈에 보여도 잡기 힘든 이나연과 안 보여서 못 잡는 윤범의 조화!

그렇게 초반부터 벌어진 사냥 포인트 격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YSM은 다시금 압승을 거두었다.

관람한 두 경기 연속으로 대승을 거두자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클럽은 알아서 잘 돌아가겠군.'

감독도 명문에서 온 엘리트 가브리엘 사나이니 이번 시즌은 자신이 더 관여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가브리엘 감독은 자신보다 더 체계적인 훈련법을 가진 사람이라 오히려 방해였다.

'가브리엘 감독은 내 의견에 관심이 많아 보였지만 말이지.'

윤범의 초능력까지 개발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서문엽.

가브리엘 감독은 이를 놀라워하며 서문엽의 안목에 관심이 많아졌다.

구단주의 눈이 자신의 이론을 능가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서문엽의 안목에 대해 배우려는 듯한 태도를 풍겼지만, 분석안에 대해 말해줄 생각은 없어서 모른 체했다.

***

백하연은 준비를 마치고 파리로 완전히 떠나 버렸다.

딸이 떠나자 허전해진 한승희는 서문엽과 더불어 예전 드라마 몰아 보는 데 열중했다.

서문엽도 한동안 구단주로서 일하고 난 터라 당분간은 푹 쉴 생각으로 집에만 붙어 있었다.

그렇게 소파와 혼연일체되어 시간을 때울 무렵이었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욥! 서문욥!"

키 큰 흑인이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치 숲을 사랑하는 괴물 탱커 치치 루카스를 떠올리게 하는 순박한 인상의 청년.

바로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자 7영웅의 1인, 에릭 튀랑이었다.

싸울 때는 미친놈처럼 이성을 잃고 도끼를 휘두르는 근접 딜러였는데, 싸우지 않을 때는 한없이 착했던 동료였다.

"어라? 튀랑이 네가 여긴 웬일이냐?"

"프랑스에 왔었다면서? 프랑스에 와놓고 날 만나러 오지도 않다니, 섭섭해!"

"기자들한테 말했는데, 네가 파리로 찾아오면 만나주겠다고."

"히히, 실은 그때 배 타고 너무 멀리까지 갔다가 난파당하는 바람에 살짝 큰일이었어."

"넌 대체 보트를 타고 어디까지 나가냐?"

"말도 마, 일주일간 헤엄만 쳐서 간신히 돌아와서 아내에게 혼났단 말이야. 당분간은 낚시를 못 하게 됐어."

에릭 튀랑은 일주일간 행방불명되었던 잘못을 빌미로, 한동안 아내가 운영하는 패션 업체의 광고 모델로 일해야 했다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다.

바다 한복판에서 난파당한 건 초인이라 해도 큰일이었지만, 서문엽은 딱히 그런 위험한 짓을 하는 에릭 튀랑을 걱정하지 않았다.

-대상: 에릭 튀랑(인간)

-초능력: 악운, 생존 본능

-악운: 위기의 순간 강한 운을 발휘한다.

-생존 본능: 위기의 순간 근력, 민첩성, 지구력이 30% 상승.

'어지간해서는 죽을 새끼가 아니지.'

두 가지 초능력 모두 생존에 최적화된 능력!

최후의 던전에서도 수많은 위기를 맞았지만 안 죽었다.

그중 생존 본능은 본인도 알고 있는 초능력이지만, 악운은 스스로 자각 못 하고 있었다.

저런 초능력이 있는 줄은 오직 서문엽만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자각을 못 했을 뿐, 본능적으로는 에릭 튀랑도 자신의 악운에 대해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왜냐면 던전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에릭 튀랑은 위험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저 스릴 중독자처럼 보이긴 하지만, 서문엽이 보기에는 자신의 '악운'을 어렴풋이 느끼고 실험하는 습관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한승희도 에릭 튀랑을 보더니 반갑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백제호의 아내인 그녀도 7영웅 일원인 에릭 튀랑과 안면이 있었던 것.

"와우, 마담 백!"

"백이 아니라 한 씨야, 멍청아."

서문엽의 핀잔에 에릭 튀랑은 싱글벙글 웃어 보였다.

"몰라! 그냥 불렀던 대로 마담 백이라 할 거야."

한승희는 한국어, 에릭 튀랑은 프랑스어로 얘기해서 대화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서로 반가워하는 뜻은 전해지고 있어서 서문엽은 굳이 통역할 필요를 못 느꼈다.

한승희가 식사를 할 거냐며 밥 먹는 시늉을 하자, 에릭 튀랑도 활짝 웃으며 그 시늉을 따라했다.

한승희는 곧 온갖 식재료가 다 들어 있는 큰 냉동실에서 삼치를 꺼내 구워 주었다.

한국식 상차림이었는데 튀랑은 젓가락질을 제법 잘하며 맛있게 먹었다.

물론 서문엽도 언제나처럼 잘 먹어 치웠다.

그런 둘을 마치 아들들 보듯이 흐뭇해하는 한승희였다.

"근데 욥! 너 불사신이라며?"

"오냐."

"대단해, 욥! 언제 그런 초능력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숨기긴. 그때 혼자 남아 싸우다가 새로 생겨 버렸다."

"헉, 정말? 대단해, 욥!"

"불사신이 뭐 대수라고. 너도 비슷하잖아."

"하하하, 난 언제나 운이 좋은 거고."

'역시 은연중에 알긴 아네.'

에릭 튀랑은 신나게 옛날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희한하게 서문엽도 이제 그때의 일이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아 참! 욥에게 줄 선물을 가져왔어."

"선물?"

"응! 욥은 돈이 많으니까 돈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걸 준비했지."

"나 이제 돈 없어. 돈 되는 걸 줘야지."

"히히, 그래? 이것도 나름 돈이 되긴 할 거야."

에릭은 매우 익숙한 푸른 돌을 꺼내 보였다.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주먹만 한 돌조각.

서문엽은 오랜만에 본 그 물건이 반가워졌다.

"귀환석?"

"응, 내구성을 보면 아마 한 일곱 번은 더 쓸 수 있을 거야. 물론 이제는 쓸 일이 없지만 기념으로 갖는 건 좋잖아?"

"오오, 땡큐!"

서문엽은 냉큼 귀환석을 챙겼다.

"의외로 기뻐하네? 나도 기쁘다!"

"이런 귀환석은 얼마쯤 하냐?"

"글쎄, 1회에 100만 원 정도 하지 않을까?"

"그래? 생각보다 싸네."

"다시는 구할 수 없지만, 쓸 일도 없으니 그냥 기념품 수준이지 뭐. 옛날에는 초인이라면 다들 갖고 있던 거라 찾아보면 구하기 힘든 것도 아니고."

"호오, 그래?"

서문엽은 귀환석이 반가워졌다.

자신만의 비밀 장소였던 미공개 던전으로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던전에서 구한 각종 부산물을 보관해 놓기도 했다. 던전 코어나 괴물 사체를 해체해서 얻은 가죽, 뼈 등도 있었다.

창고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거기에 쌓여 있는 물건의 양이 방대했다.

'언제 한번 시간 내서 가봐야겠다.'

마침 할 일도 없어서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문엽에게 가장 마음의 위안이 되는 고향은 바로 던전이었다.

가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닌 진짜 던전 말이다.

< 비밀 장소(1) > 끝

< 비밀 장소(2) >

에릭 튀랑은 이틀간 서문엽과 어울려 놀다가 돌아가게 되었다.

"욥, 나랑 같이 낚시하러 안 갈래? 보니까 욥도 한가해 보이는데."

"짜식, 나랑 같이 논다는 빌미로 낚시 금지 당한 거 풀려는 거지?"

"히히, 역시 욥은 눈치 빨라. 제발 나 좀 도와줘."

"미안한데 낚시는 취미가 없어서. 한가하면 네 식구들 데리고 가족 여행이나 가던가 해."

"그럴까? 그럼 그래야겠다. 아무튼, 욥! 좀 놀러와. 연락도 자주 하고."

"오냐오냐."

그렇게 에릭 튀랑을 보낸 뒤, 서문엽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어딜 가려고 짐을 싸?"

출근 준비를 하던 백제호가 희한하다는 듯이 물었다.

배낭에 음식과 식수를 잔뜩 챙긴 서문엽은 씨익 웃었다.

"잠깐 여행 좀 다녀온다."

"혹시 사흘쯤이냐?"

"잘 아네?"

"옛날에도 곧잘 사흘씩 사라졌었잖아."

"나만의 비밀 장소가 따로 있거든."

"그런 데가 있었어? 난 왜 몰랐지?"

"인마, 너라고 내 모든 것을 다 알겠냐?"

"내가 네 다큐 영화 제작하면서 세계 최고의 서문엽 전문가가 됐거든."

서문엽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설령 백제호라 해도 서문엽은 자신의 속내를 전부 밝히지 않았다. 분석안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연다는 게 서문엽에게는 퍽 힘든 일이었다.

모든 마음을 다 보여준다는 건 특히 더 말이다.

"다녀올게!"

서문엽은 배낭을 짊어진 채 바이크를 타고 달렸다.

이번에는 눈에 띄지 않도록 교통법규를 준수하며 조용히 이동했다.

그렇게 무려 강원도까지 간 서문엽은 기억을 더듬으며 산을 타기 시작했다.

자주 들락날락했던 곳이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산을 타고 오르다가 절벽 아래로 기어 내려갔다.

절벽 아래쪽에 커다란 균열이 난 틈새가 있었다.

막아놓았던 바위를 치우니, 사람 하나가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폭도 좁고 깊이도 얕은 공간이었는데도, 그곳에서 알 수 없는 기이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마치 끝을 알 수 없는 긴 동굴 입구에 선 듯한 느낌.

던전으로 진입하는 게이트 특유의 분위기였다.

'아직 존재하는군.'

던전을 지탱하는 코어의 마력이 다 고갈되면 붕괴되고 말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했다.

서문엽은 던전으로 진입했다.

파앗!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서문엽은 던전에 도착했다.

내딛은 발이 지면에 도달했을 때, 서문엽은 어느새 던전 안에 있었다.

"후우······."

서문엽은 호흡을 크게 했다.

어째서 던전에 오면 몸과 마음이 이렇게 상쾌해진단 말인가.

최후의 던전에서 생환한 이후 최고로 컨디션이 좋았다.

다른 어떤 오락을 즐겨도 이렇게 그를 설레게 할 수는 없을 터였다.

"하아, 좋다."

배낭을 내려놓고 땅에 털썩 드러누운 서문엽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던전.

이곳만이 자신을 살아 있게 한다.

최후의 던전을 공략한 것이 후회됐다.

후회하지 않지만 후회된다.

결국은 도전하고 공략해야 할 곳이니 후회하지 않지만, 더 이상 즐길 던전이 없어져서 안타까웠다.

텅 빈 과자 봉지를 놓고 좀 더 아껴 먹을 걸 하고 후회하는 것과 동일한 기분이었다.

서문엽은 서글픔을 느꼈다.

"역시 난 거기서 죽어야 했어."

초인이 되어 던전에서 비로소 진짜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니 인생의 끝은 최후의 던전에서 마감했어야 했다.

다 공략 완료 한 뒤에 맞이한 완벽한 피날레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처절하고 치열했던 인생이었다.

왜 거기서 살아나서 이러고 있는 건가.

역시나 자신은 평화로운 2020년대를 살아갈 준비가 안 된 부적응자였다.

에릭 튀랑과 잡담을 나눌 때만 해도 오래된 옛날 일처럼 느꼈었다. 그래서 이제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돌아와 보니 부질없는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냥 본연의 자신을 억누를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어디서 지저 문명의 잔당이라도 안 나타나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스르륵.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놀란 서문엽은 벌떡 일어났다.

'뭐지?'

착각일 리 없었다.

서문엽은 자신의 육감을 100% 확신했다.

그런데 이미 던전 공략이 다 끝난 이곳에 무엇이 남아 있단 말인가?

지저인도, 괴물도 남김없이 처치한 장본인이 서문엽이었다.

'설마 다른 사람이 여길 발견했나?'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누군가가 있다면 우연히 이 빈 던전을 발견한 다른 초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아니면······.

'혹시 지저인 잔당?'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다만 서문엽은 후자이길 바랐을 뿐이었다.

'장비를 제대로 안 챙겨와서 곤란한데.'

하지만 표정은 이미 웃고 있는 서문엽이었다.

배낭에 매달아놓은 창 하나를 꺼냈다.

촤락! 철컥! 철컥!

오러를 주입하자 창이 펼쳐지면서 늘어났다.

가져온 무기라고는 이것 한 자루뿐이었다.

이마저도 허전해서 하나 가지고 다닐 뿐, 평소에 무장을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전혀 겁먹지 않고 던전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스륵.

또 뭔가가 움직였다.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나와."

서문엽이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안 이상, 난 널 절대 놓칠 사람이 아니야."

신경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걷는다.

앞에 끝을 알 수 없는 절벽이 있었고, 커다란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만약 다리를 건너다가 공격을 받으면 지리상 불리해진다.

하지만 서문엽은 망설이지 않고 다리 위를 지났다.

여길 지나면 서문엽이 그동안 보관해 두었던 온갖 잡동사니가 쌓인 장소로 도달하게 된다.

마치 만화에 나오는 드래곤의 둥지처럼 각 방마다 보물을 분류해서 쌓아놓고 지냈던 것이다.

원래는 각 방마다 괴물들이 감금되어 있어서 침입자가 지나가면 튀어나와 습격했다.

가장 끝 방에 던전의 주인인 지저인이 있었고.

괴물을 조종하는 능력을 지녔고, 또한 괴물을 생체 개조하는 능력까지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변종 괴물들의 사체를 해체해 보관해 뒀었다.

추억을 되새기며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였다.

스르륵.

이번에는 더 선명하게 느꼈다.

서문엽은 미소를 지었다.

"오케이, 파악했어. 사람의 기척은 아닌 것 같군."

직감상 괴물의 기척이었다.

직립보행 타입은 아니고, 팔다리가 있는 짐승 타입도 아니다.

뱀이나 식물 타입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종류였다.

'드러내기만 해라.'

신체 일부분만 봐도 분석안이 통한다.

그땐 완전히 게임 끝이다.

200m짜리 긴 다리는 이제 거의 다 건너온 상황.

그때였다.

파앗!

화살이 쏘아진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의 동시에 서문엽은 뒤로 굴러서 피했다.

쾅!

어떤 식물의 거대한 뿌리 같은 것이 바위로 이루어진 다리에 구멍을 냈다.

-대상: 자드룬(괴물)

-근력: 147/412

-민첩성: 85/97

-오러: 142/533

-약점: 흥분하거나 잡은 먹이를 삼킬 때 본체를 드러낸다.

"자드룬이었구나!"

비로소 정체를 알게 되었다.

자드룬은 식물로 치면 감자 같은 녀석이었다.

큰 덩어리를 이룬 본체는 주로 천장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 숨어 있고, 무지막지하게 긴 뿌리를 뻗어 먹잇감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먹는다.

그렇게 영양분을 흡수하면 본체 내에서 오러로 치환된다.

오러를 모을수록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물론 그렇게 해서 모을 수 있는 오러의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자드룬은 만족이란 걸 모른다.

한계를 넘어서서 오러가 넘쳐 붕괴될 지경이 될 때까지도 계속 양분만 찾아다니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당연하지만 자연 발생종이 아니었다.

생존을 넘어 스스로 붕괴될 때까지 모든 것을 먹어치우도록 개조된 식물.

이런 섬뜩하고 악의만 가득한 생체 개조는 지저 문명의 작품이었다.

지저 문명은 어떤 생물이든 죽은 세포라도 발견하면 배양하고 개조해서 악의만 찬 괴물로 만든다.

그래서 인류에게 지저 문명은 무엇보다도 공포의 존재였다.

전쟁 당시 지저 문명을 소재로 한 공포 영화가 만들어졌다가 빗발치는 비난에 조기 종영되고 제작자들이 백배사죄했을 정도.

인류에게는 공포지만 지저인들은 매우 좋아하는 식물이었다.

닥치는 대로 오러를 모아주니까.

충분히 자란 자드룬을 수확해서 오러를 수확하는, 지저인의 잔인한 농사 수단인 셈.

"내가 자드룬의 씨앗을 하나 놓쳤었나?"

계속 날아드는 뿌리들을 피하며, 서문엽은 의아해했다.

이 던전을 공략했을 때 자드룬도 몇 마리 있었다.

전부 죽이고 던전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죽기 전에 날린 씨앗들을 부쉈다.

하나라도 남겨놓으면 언젠간 반드시 자라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 근처에 있으면 성장을 시도하지 않고 계속 씨앗 상태로 숨어 있는 습성이 있다.

주위에 영양분이 없어도 마찬가지.

그러나 적이 사라지면 즉시 성장해 뿌리를 뻗어 점찍어둔 영양분을 먹기 시작한다.

만약 서문엽이 놓친 씨앗이 남아 있었다면?

서문엽이 이곳을 드나들던 동안은 감히 생장(生長)을 시도하지 못했다가, 17년간 사라진 동안 안심하고 씨앗에서 깨어났을 수도 있다.

'영양분은 충분하니까.'

바로 서문엽이 보관해 놓았던 괴물들 사체 말이다.

마력석도 있었고, 각종 지저인이 쓰던 정체 모를 물건들도 있었다.

그게 다 먹이였다.

촤촤촥!

세 갈래의 뿌리가 덮쳐왔다.

순간, 서문엽이 창을 매섭게 휘둘렀다.

파바박!

뿌리들이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잘린 낙지 다리처럼 꿈틀대며 도망가는 것을 끝까지 쫓아가 계속 베었다.

서걱! 서걱!

계속 뿌리를 베어서 상처를 입히는 것은 자드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키아아악!!

어디선가 날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신경질이 잔뜩 난 자드룬이 토한 소리였다.

서문엽은 비명이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우연히 놓친 씨앗 하나가 자란 거라고?"

위치를 들킨 자드룬은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계속 뿌리를 뻗었지만, 서문엽의 번개 같은 창술에 베여 나갈 뿐이었다.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

가장 개연성이 높은 추측이기도 하고, 그 이상의 어떤 사건도 기대할 수 없어서 재미없는 결론이기도 했다.

서문엽은 던지기에 증폭을 걸었다.

창을 던졌다.

콰콱!

세차게 날아간 창이 가로막는 뿌리들을 자르고 날아가 본체에 틀어박혔다.

-키아악!

시커먼 먼지 덩어리 같은 본체는 거대한 입을 벌리며 비명을 토했다.

본체에 박힌 창은 다시 서문엽의 손으로 회수되었다.

그대로 몇 번이고 계속 던져서 자드룬의 본체를 난도질했다.

그때마다 자드룬은 그동안 모아왔던 오러로 재생을 했지만, 재생 속도보다 상처 입는 속도가 더 빨랐다.

콰지지직!

마침내 창이 벌어져 있던 입속에 틀어박혔다.

심장부를 직격당하자 자드룬은 요동치는 오러를 통제 못 하고 붕괴했다.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자드룬의 최후를 지켜보며 서문엽이 중얼거렸다.

"지저인이 자드룬을 심어놓고 간 거면 좋겠는데."

지저 문명이 몰락했지만 지저인이 모두 죽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대부분 다시는 지상에 나설 엄두도 못 내고 더 깊숙한 지하로 숨었겠지만.

'다시 지상 침공을 계획하고 음모를 꾸미는 잔당 세력이 있어도 되잖아?'

온갖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내는 지저인들이었다.

그런 못돼 처먹은 놈들인데, 누군가는 그 정도 불굴의 정신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은가?

'힘내라, 지저인들.'

다음 스테이지를 달라고 개발사에 아우성치는 게이머나 다름없는 서문엽이었다.

< 비밀 장소(2) > 끝

< 지저인(1) >

자드룬은 붕괴되면서 씨앗을 사방에 날려 보냈다.

끝없이 식탐을 채우다가 최후의 순간에 씨앗을 퍼뜨려 번식을 시도하는 꼴이 참 끈질긴 악마의 식물이었다.

서문엽은 열심히 돌아다니며 씨앗을 하나하나 찾아내 밟아 터뜨렸다.

참 지독한 종자였다.

밟아 터져도 낙지 다리처럼 꼬물거리는 작은 줄기 하나가 기어 나와 도망치려 했던 것이다.

콰직!

이마저도 밟아 죽여 후환을 없앴다.

던전을 샅샅이 돌아다니는 서문엽.

이러한 철저한 탐색은 이골이 났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모든 씨앗을 찾아냈다.

다 처리한 뒤에 딱 하나만 따로 챙겼다.

'혹시 모르니까 챙겨놓을까.'

연구용 같은 걸로 기관에서 찾을지도 모르니까.

다 마신 물병에 씨앗을 담았다. 서문엽은 물병을 흔들며 말했다.

"야 이 새꺄. 배짱 있으면 한번 싹 틔워봐라. 형이 너 가지고 다닐 테니까."

물론 씨앗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훑으며 점검한 서문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이렇게 철저했는데 자드룬 씨앗을 놓친 게 말이 되나?"

그런 건 솔직히 초보나 하는 실수였다.

물론 던전 코어를 파괴해 붕괴시키면 놓친 씨앗이 있건 말건 상관없다.

하지만 보통 던전 공략에 사흘에서 일주일가량이 소요된다.

자드룬의 씨앗은 주변에 양분이 많으면 30분 만에도 성장해 뒤를 노린다.

그래서 자드룬 처치 후 샅샅이 점검하는 건 초인들의 기본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의심하지 않는 서문엽은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가보자.'

다리를 건너 물건들이 보관된 곳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방마다 바위로 된 문이 전부 파괴되어 있었고, 그 안은 남겨진 게 하나도 없었다.

자드룬이 문을 부수고 안에 있는 걸 죄다 먹어 치운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문은 부서지지 않았다.

부수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 보였지만, 마지막 방문은 오러로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드룬이 어찌할 수 없었다.

바로 던전을 지탱하는 메인 코어가 설치되어 있는 석실이었다.

문에 간단한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여러 겹으로 되어 있어 자드룬의 지능으로는 풀 수 없었다.

'여기다가 마력석들도 좀 갖다놨었지?'

아마 그 마력석까지 죄다 먹어 치웠다면 자드룬은 끝까지 다 성장하고도 모자라 오러 과잉으로 붕괴했을 터였다.

서문엽이 힘을 주어서 잠금장치들을 풀어 헤쳤다.

철컥! 철컥!

그리고 열어젖혔다.

텅 빈 석실.

중앙에 복잡하고 정교한 금속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중심에 거대한 마력석이 박힌 형태를 띤 메인 코어가 작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문엽이 보관해 놓았던 마력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량의 오러를 머금은 던전 코어가 눈앞에 있자, 물병에 담아놨던 자드룬의 씨앗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잠잠해졌다. 너무나 탐나는 먹잇감을 만났지만 코앞에 무서운 천적이 있었기 때문.

"없잖아?"

서문엽은 미소를 지었다.

자드룬은 이곳을 침범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이 문을 열고 들어와 마력석을 가져갔다는 뜻이었다.

다른 것들은 다 자드룬의 먹이로 남겨놓았으면서 마력석은 다 가져간 자.

떠나면서 자드룬을 심어 경비를 세워 놓은 자.

'지저인이다!'

전율을 느꼈다.

아직 적이 남아 있다는 환희.

자신의 인생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기쁨이었다.

지저인이 지저 세계를 탐사하며 남아 있는 던전을 찾다가 이곳을 발견했을 것이다.

지저인에게 오러란, 20세기 인류의 석탄·석유와 같은 것이었다.

오러 없이 지저 문명은 유지될 수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러가 모여드는 심장부인 최후의 던전이 파괴당하자 붕괴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누군가가 보관해 놓은 마력석들을 발견하자 횡재했다 싶었으리라.

'마력석을 가져가고 자드룬도 심어놓았다.'

인간이 돈을 좋아하듯이 지저인은 오러를 탐한다.

이곳을 다녀갔던 지저인은 자드룬이 인근 물자를 먹어 치우며 모아놓은 오러를 수확하러 다시 올 것이다.

안 올 리가 없다.

지저인은 잔인한 습성만큼이나 탐욕도 강하니까.

설렘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문엽은 생각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지저인이 나타나면 잡자.'

서문엽은 우연히 잡은 지저 문명의 잔해에 대한 실마리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저인은 아마도 곧 나타날 것이다.

던전 메인 코어도 있고 수확할 자드룬도 있는 던전이니, 누가 침범하면 알 수 있도록 경보 장치를 해두었을 터였다.

서문엽의 경험에 따르면, 바로 이 메인 코어가 보관된 석실 문에 경보 장치가 있었다고 판단되었다.

'문이 열리면 알게 되도록 했겠지. 그럼 이제 곧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때였다.

파앗!

석실 바깥쪽에서 미약한 오러의 파동이 느껴졌다.

"왔냐!"

서문엽이 잽싸게 석실에서 튀어나갔다.

10m쯤 떨어진 곳에 지저인이 있었다.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하지만 피부색이 창백하며 눈동자가 조금 더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치 사냥 포인트를 모은 배틀필드 선수처럼 온몸이 붉은빛의 오러로 휩싸여 있었다.

사실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 검은색, 흰색 순서로 사냥 포인트에 따라 몸에 둘러지는 오러 색깔이 구분되는 것은 지저인에게서 따온 시스템이었다.

지저인들은 보유한 오러에 따라 신분 등급이 나뉜다.

오러를 외부에 표출할 정도가 아닌 지저인은 노예로 부려진다고 한다.

붉은색이면 3등급.

제법 상위의 지저인이었다.

그때 지저인이 서문엽을 보더니 뭐라고 외쳤다.

하도 자주 들어봤던 단어라 뜻도 알았다. 서문엽의 기억에 따르면 '인간'이었다.

"그래, 나 인간이다. 반가워?"

지저인이 알아들을 리 없지만 서문엽은 계속 말을 건넸다.

"너희 지저인은 언어 습득이 굉장히 빠르지. 우리는 너희가 쓰는 말이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 배우는데 말이야."

그렇다.

서문엽은 지저인이 빠르게 한국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계속 말을 건네는 중이었다.

-인간 놈.

지저인은 벌써 서문엽에게 한국어로 말을 건넸다.

"그래그래, 지저인 씨."

-인간, 너 혼자냐.

지저인이 제대로 된 문장으로 질문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지저인들은 조금의 말을 듣고도 해당 언어를 빠르게 유추하여 마스터해 버리곤 했다.

알지 못하는 단어까지도 습득해 버려서 곧잘 언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본 서문엽이었다.

이윽고.

지저인은 서문엽에게 말했다.

-너 혼자냐고 물었다, 인간.

"그래. 언어 금방 배우네?"

-당연하다. 이깟 하급 언어 따위 몇 분이면 족하지.

"너희는 단어 하나하나에 많은 뜻이 함축될수록 고등 언어이고, 어떤 언어를 쓰느냐로 신분제가 갈리지, 아마?"

-잘 아는군. 참고로 네가 쓰는 언어는 노예들이나 쓰는 2등급 수준의 언어다. 이따위 저급한 언어라니. 네놈 때문에 이 언어를 입 밖에 내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계속 재수 없는 말만 하는 지저인이지만 서문엽은 그저 흐뭇한 웃음만 나왔다.

오랜만에 지저인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뭐지?

"너희는 우리보다 훨씬 똑똑한데 왜 졌는지 알아?"

-너희가 쥐새끼들처럼 성역에 침범해서다!

지저인에게서 처음으로 격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성역? 아아, 최후의 던전?"

-최후의 던전? 우리의 성역을 그렇게 부르나. 그래, 둥지를 던전이라 부르는군. 그리고 최후라는 표현을 붙이다니······.

지저인은 증오심 가득한 눈길로 서문엽을 노려봤다.

그때, 서문엽이 창을 냅다 집어 던졌다.

쉬익-!

-큭!

지저인은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창을 다급히 피했다.

벽에 꽂힌 창이 다시 돌아와 서문엽의 손에 돌아왔다.

눈 깜짝할 순간에 던지기에 증폭을 걸고 창을 던진 서문엽.

겉보기보다 복잡한 오러 메커니즘이 담긴 테크닉이었는데, 오러에 예민한 지저인은 이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내 말 안 끝났어, 씨발아."

-이놈······!

지저인은 서문엽의 언어 표현에서 그가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는 걸 깨달았다.

"너희는 우리 먹이였거든."

-뭐라고?

"너희를 사냥하면 돈이 나와. 그래서 신나게 사냥한 거야. 너희가 오러를 탐하듯이 말이야. 던전? 그건 마치 너희가 오러를 잔뜩 먹은 자드룬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면 돼. 그냥 땡큐지, 크하하! 이 먹잇감 새끼들!"

서문엽은 광소를 터뜨렸다.

평화의 시기에 생환하는 바람에 오랫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폭력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먹이라고! 가축 같은 인간 놈이 감히 우리더러 그런 표현을 써?!

자신들 외에 모든 생명체를 도구로 여기고 마음대로 조작하는 지저인은 인간을 가축 수준으로 낮게 여겼다.

"그런 가축이 너희의 성역을 부쉈지."

서문엽이 창을 꼬나 쥐었다.

지저인도 전투 준비를 했다.

파아아앗!

붉은 오러가 폭사되어서 온몸에 구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넘실거렸다.

이윽고 붉은 오러는 100갈래의 머리를 가진 뱀의 형상을 이루었다.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지저인다운 전투법이었다.

"너희 성역에 달려 있던 메인 코어는 존나 크더라? 내 키의 2배가량이었지?"

신나게 소리치는 서문엽의 말에 지저인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지?

"어떻게 알고 있을까?"

파앗!

서문엽이 즉시 달려들었다.

100마리의 뱀 머리가 덤볐지만, 그 순간 서문엽은 오러를 한가득 창에 집중하고서 풍차처럼 휘둘렀다.

콰콰콰콰콰쾅!!

창이 뱀 머리를 하나둘 일그러뜨릴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계속 일어나는 오러 충돌에 지저인은 움찔거렸지만, 서문엽은 표정 하나 안 변했다.

"마치 거기 다녀와 본 사람처럼 말이야!"

-뭐, 뭐?!

지저인의 안색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오러 충돌로 입은 타격 때문만이 아니리라.

-네놈의 이름은 뭐냐!

"서문엽."

-아아아······!!

지저인이 바들바들 떨었다.

지저인은 이름이라는 개념이 없다.

물론 호칭은 있다.

탐사, 사냥 등 자신이 주로 맡고 있는 역할을 호칭으로 정한다.

그러므로 하찮은 인간의 이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지저 문명이 알고 있는 한 인간의 이름이 있었다.

"내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맙다! 더 이상 너희를 사냥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웠거든!"

-으아아아!!

지저인이 폭주했다.

100마리의 뱀이 더욱 커다랗게 팽창된 모습으로 일거에 덮쳐들었다.

그렇게 오러를 일거에 퍼부어놓고서는, 지저인은 뒤돌아 달아나려 했다.

서문엽은 민첩성에 증폭을 걸었다.

그리고 100마리의 뱀이 커버하지 못한 미세한 틈바구니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투창!

휘리릭!

콰직!

-끄아아악!

창이 뱀들을 피해 나선을 그리며 절묘하게 날아가 지저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 지저인(1) > 끝

< 지저인(2) >

창은 지저인의 가슴을 꿰뚫고 벽에 박혔다.

지저인은 꿈틀거리더니 고개를 떨어뜨리며 축 늘어졌다.

서문엽은 천천히 그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말했다.

"안 죽은 거 알아, 인마."

죽은 것 같았던 지저인의 몸이 움찔했다.

"다른 생명체도 마음대로 개조하는데 자기들 몸은 오죽할까."

지저인은 몸의 순환을 오러로 유지할 수 있게 개조하고,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장기를 제거했다.

물론 다치면 체내의 오러도 상처를 통해 유출되므로 타격을 받는 건 같지만, 치명상을 입히기란 쉽지 않다.

아니, 쉽다.

강력한 오러로 타격을 입혀서 체내의 순환을 흔들면 된다.

오러 100/100의 서문엽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인 것이다.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지저인을 살펴보았다.

-대상: 수탐(지저인)

-근력 52/52

-민첩성 80/80

-속도 78/78

-지구력 60/60

-정신력 44/57

-기술 84/84

-오러 93/93

-초능력: 오러 수탐

-오러 수탐: 오러 반응을 탐사한다.

저 지저인을 부르는 호칭은 수탐.

지저인은 이름이 필요 없다.

남들과 구분되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하는 역할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진다.

수탐.

저 지저인은 오러를 얻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역할을 맡은 자였다.

그 역할을 누가 부여하는지는 불명이다.

'태초의 빛'이라 불리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지저인의 추앙을 받으며 지저 문명을 지배한다고만 알려졌다.

최후의 던전을 무너뜨릴 때도 그 태초의 빛이라는 존재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신과 같은 영적인 존재가 아닐까 추측될 따름이었다.

"수탐꾼인가. 그냥 잔챙이네."

지저인은 대체로 싸움에 몸을 쓰지 않기 때문에 능력치는 기술과 오러만 보면 된다.

84·93이면 초인들 관점에서는 상위권이지만 지저인들 사이에서는 딱 중간 등급, 붉은색이었다.

전투 시 육체를 잘 쓰지 않는다는 지저인의 단점을 생각했을 때, 전투 초능력이 없다는 점은 약점이었다.

물론 방금처럼 100마리의 뱀 형상을 만드는 등의 오러 활용법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초능력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네놈이 서문엽이었구나.

죽은 체했던 지저인이 눈을 부릅뜨고 원독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서문엽은 가까이 다가가 지저인의 코앞에 도달했다.

-키아아아!

순간 지저인이 괴성을 지르며 붉은 오러를 다시 한번 일으켰다.

하지만.

콰지직!

-끄아아아아!!

서문엽은 창을 붙잡고 비틀어 상처를 벌렸다.

육체의 고통에 익숙하지 않은 지저인이 비명을 지르며 오러 컨트롤에 실패했다.

"너희는 이대로 끝난 거야?"

-그··· 끄윽! 그게 무슨 뜻이냐?

"이제 겁에 질려서 다시는 지상에 얼씬도 하지 않는 거냐고. 그건 너무 재미없지 않아?"

-하등한 인간 주제에 오만하구나. 크으으!

"너희 성역에서 싸웠던 흰둥이는 재미있었는데. 짜릿짜릿했다고."

-흰둥이?

"하얀색으로 빛나는 애 있잖아. 너희 대사제."

지저인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대사제는 지저 문명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수장 같은 존재였다.

최상위 등급인 하얀색의 오러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흰둥이라고 표현한 것.

성역이 무너지고 대사제까지 죽으면서 지저 문명은 몰락했다.

-가축처럼 하등한 인간아. 오만하지 마라. 우리는··· 크윽! 끝나지 않았다.

"그래?"

서문엽은 미소 지었다.

지저인은 그 미소를 보지 못한 채 계속 말했다.

-위대한 조상님들과 태초의 빛께서 계속 우리를 이끄신다. 그분들을 대리하셨던 대사제께서 돌아가셨지만, 아직 우리는 위대한 질서 속에······.

말하는 지저인의 힘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상처가 너무 깊어 오러의 유출이 심해진 탓이었다.

서문엽은 가만히 지저인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태초의 빛께서 예언하시길, 영적 각성을 이룬 선지자가 나타났노라.

-선지자가 너희를 빛이 내리는 땅으로 인도하리라.

-태초의 빛이시여··· 너무나 어둡나이다. 우리에게 빛을··· 빛을 내리는 땅을······.

어느새 이성을 잃은 채 무아지경으로 기도를 읊는 지저인.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지저인이 인간이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역(音域)을 넘어선 고주파로 비명을 토했다.

서문엽은 이 모습을 아주 많이 보았다.

죽기 전에 자폭을 하는 지저인의 최후 말이다.

본래는 잽싸게 도망가야 했지만, 서문엽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그냥 태연히 서 있었다.

-빛이··· 내리는······.

단말마의 말과 함께 붉은 오러가 한껏 폭사되어 사방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생명력이나 다름없는 오러를 다 소진한 지저인은 폭발에 휩싸인 채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최후의 순간 지저인 수탐은 무언가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하얀 오러로 이루어진 영체였다.

지저인은 정신이 혼미해진 가운데에서도 눈물을 흘렸다.

-선지자시여······!

영적 각성을 이루어 영체가 된 선지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저를 데리고 가주시는 겁니까. 이 미천한 저를, 빛이 내리는 땅으로······!

죽기 전에 선지자를 본 것이 수탐에게는 큰 감격이었다.

수탐은 감격에 울며 선지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지자가 말했다.

-빨리 죽어, 이 새꺄.

-···예?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그래.

환청일 것이다.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이라 정신이 혼미해서 그럴 것이다.

-거 귀찮네, 이 새끼. 그래, 내가 천국에 보내주마.

선지자가 휘두른 주먹에 맞아 수탐은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의식을 잃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생각은, 왜 선지자께서 서문엽이라는 인간 놈의 형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지저인 수탐의 절명과 함께 오러 폭발도 멎었다.

지저인의 육신은 산산조각이 난 채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서문엽이 홀로 서 있었다.

-선지자 같은 소리 하네.

서문엽은 불사에 증폭을 걸어서 오러 영체로 변신한 상태였다.

덕분에 지저인의 자폭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없었다.

-이젠 자폭으로도 안 죽는구나.

서문엽은 오러 영체가 된 김에 달리기도 해보고 점프도 해보았다.

달리려고 하니까 달리는 대신 날아다녔다.

점프를 하니 그냥 공중을 비행했다.

중력을 무시하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난 정말 우주 최강이 되었구나.

엄청난 자기애였다.

던전의 유령처럼 공중을 배회하던 서문엽은 120초가 다 지나서야 원래대로 돌아와 지면에 착지했다.

***

귀환석을 써서 던전에서 나온 서문엽은 곰곰이 지저인이 죽기 전에 남긴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영적 각성을 이룬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예언이라는 게 대개 신빙성이 떨어지는 법이지만, 지저인이 말하는 태초의 빛의 예언이라 의미심장했다.

'그런데 걔들은 원래 전쟁 당시에도 태초의 빛께서 빛이 내리는 땅을 허락하셨다는 소릴 지껄이던 놈들이었는데.'

빛이 내리는 땅이란 아마도 지상.

태초의 빛이라는 존재가 신쯤 된다면 왜 지저 문명이 전쟁에서 패하고 무너지는 걸 몰랐단 말인가?

선지자라는 게 나타난다 해도 지저 문명은 이미 최후의 던전이 파괴당하면서 문명의 동력을 다 잃은 상태.

살아남은 수탐꾼들이 돌아다니면서 오러를 악착같이 모으는 모양인데, 그래봐야 1만여 년에 걸쳐 구축했다는 최후의 던전 같은 걸 다시 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후의 던전은 세상의 오러를 끌어모으는 장치였고, 마력석을 생산하는 공장 같은 곳이기도 했다.

아무리 써도 끝없이 넘치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지저 문명은 괴물을 만들고 침공하는 등의 악랄한 짓을 했다.

무한정한 에너지에 심취해 폭주하여서 찬란한 문명의 본래 색을 잃고 폭주했다고 전문가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인간이 쓰는 언어보다 100배 이상 정보 전달 속도가 빠른 고차원적 언어를 구사하며, 놀라운 기술력을 갖춘 문명이 저리 폭력에 물든 모습인 게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선지자라는 놈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당장 지상을 다시 침공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언젠간 다시 침공한다 해도 서문엽이 살아 있을 때는 아닐 듯했다.

'쳇, 기대 많았었는데.'

간만에 만난 지저인이었다.

하지만 그 지저인에게서 느껴진 것은 절망과 위축, 두려움뿐이었다.

본래 같았으면 강한 적이 나타났을 때 신호를 보내 동료를 더 불러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혼자 자폭한 걸 보면 줄곧 홀로 떠돌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사회를 잃고 떠도는 유민의 모습이었다.

'좋다 말았네.'

서문엽은 투덜거리며 짐을 챙겼다.

이제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

퇴근한 백제호는 어느새 돌아와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서문엽을 발견했다.

"여행은 잘 다녀왔어?"

"응."

"산속에라도 있었어?"

"응."

"산삼이라도 좀 따오지 그랬냐?"

백제호가 농담을 건넸다.

서문엽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비슷한 걸 따오긴 했지."

"그래? 도라지라도 되냐?"

"이런 건 얼마쯤 하냐?"

서문엽은 배낭에서 물병을 꺼내 건네며 물었다.

백제호는 빈 물병에 뭔가 큼직한 검은색 씨앗 같은 게 들어 있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17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것이 정말 씨앗이라는 걸 깨달았다.

"헉! 뭐야, 이게!"

백제호는 기겁을 했다.

"뭐긴 뭐야."

"자드룬의 씨앗이 왜 있어?"

"내 창고에 있기에 가져왔어."

"창고? 아니, 이런 걸 안 죽이고 가지고 있었어?"

"어쩌다 보니."

"이 씨앗 하나 때문에 도시 하나가 통째로 파괴될 수도 있는 거 몰라?"

"호들갑 좀 떨지 말자. 도시에 초인이 한둘이냐? 무슨 자드룬 하나로······."

"요즘 초인은 배틀필드 선수 빼면 그냥 싸울 줄 모르는 일반인이야. 오히려 자드룬을 키워줄 먹잇감에 불과하다고."

"그러냐? 몰랐네."

"자드룬이면 배틀필드에서도 여럿이서 사냥하는 스테이지 보스 몹인데. 어휴, 말을 말자."

"왜 말을 하다 말아. 이거 팔면 얼마쯤 하냐고."

"글쎄다. 그냥 돈 필요하면 줄게. 뭘 또 팔려고 들어? 진짜 괴물이 또 나타났다고 세상 시끄러워지게."

"누가 돈 필요하대? 지저 문명에 대해 연구하는 기관이 아직 있을 거 아냐? 그런 애들한테 도움 되라고 넘기려는 거지."

"···의외로 옳은 말도 하네?"

"지저 문명에 대한 관심은 아직 끊어지면 안 돼. 완전히 몰살된 것도 아니어서 언제 또 침공을 할지 모르잖아?"

언제부터 그런 거 걱정했냐고 묻고 싶었는데, 알고 보면 세상을 구한 놈이라 백제호는 그냥 대꾸를 관뒀다.

"세계에서 지저 문명을 가장 열심히 연구하는 기관은 뻔하지."

"어딘데?"

"세계 협회."

< 지저인(2) > 끝

< 출전(1) >

이나연이 힘껏 점프했다.

파앗!

초능력에 달리던 가속도까지 실려 이나연은 그야말로 새처럼 날았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화살 3대를 한 번에 활시위에 먹여 발사!

촤촤촥!

뒤쫓던 근접 딜러가 주춤 물러나야 했다.

벽을 딛고 반대편으로 다시 점프!

쏜살같이 날아가는 중에도 화살 1대를 다시 발사해 상대 팀 탱커가 사냥하던 살러분 한 마리를 처치했다.

탱커는 벌컥 화를 냈다.

"아오, 저 쌍년이 진짜!"

"깔깔, 고마워요!"

포니테일을 휘날리며 연신 날아오르는 이나연.

적의 욕설을 들어도 웃음으로 화답하는 그녀는 단시간에 성장해 있었다.

지면에 착지하자 분기탱천한 적들이 몰려들었지만, 폭발적인 스프린트로 전부 따돌리는 위업을 달성해 버렸다.

경기장 VIP석.

대형 화면을 통해 경기를 보던 서문엽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도둑년 넷티가 정말 훌륭하게 자랐구나."

-대상: 이나연(인간)

-근력 48/48

-민첩성 71/71

-속도 95/100

-지구력 53/53

-정신력 73/73

-기술 60/60

-오러 69/69

-리더십 20/24

-전술 65/83

-초능력: 점프

가브리엘 감독의 훈련법은 참으로 훌륭했다.

민첩성을 한계까지 다 찍었으며, 속도는 95에 달하며 드디어 월드 클래스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선수로서 활약하고 쭉쭉 성장하는 걸 느끼니 정신력도 73/73.

기술도 한계를 다 채워서 공중에서 활 쏘는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리더십이야 원래 기대도 안 했지만, 의외로 전술적 재능이 좋은 편이었다.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전술적 속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속도 외에 더 성장할 여지가 없는 이나연에게 중요한 성장 요소가 될 터였다.

증폭된 분석안으로 이나연의 활약상을 살핀 서문엽은 속으로 생각했다.

'피지컬은 속도 외에 더 성장할 게 없지만, 그래도 더 데리고 있어야겠다.'

지금도 95에 달하는 속도와 점프로 국내외 클럽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속도 95면 이미 나단과 달리기만은 동급이었다.

점프를 정면을 향해 하는, 일명 '앞 점프'를 펼치며 뛰어다니면 100의 속도를 가진 상대도 따돌릴 수 있을 정도였다.

싸움에서 이동 속도가 뭐가 중요하냐는 의문은, 전쟁에서 기동력이 뭐가 중요하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다른 장점은 없고 오직 속도와 점프만 가진 이나연은 다채로운 전술 스타일을 가진 감독들이 탐내는 소재였다.

'여기서 속도를 완전히 100 찍어서 비공식 세계 신기록이라도 내버리고, 전술 능력도 키워주면 어떤 감독이든 아주 좋아 죽을 수밖에 없지.'

속도 100을 다 채워서 달리기 세계 신기록을 찍으면 단숨에 전 세계의 이목을 끌 수 있다.

거기에 전술적 움직임도 잘 구사한다면 세상 어떤 감독이 싫어하겠는가?

귀여운 얼굴과 휘날리는 밤색 포니테일은 또 인기도 끝내준다.

이나연은 현재 YSM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선수로, 관련 상품들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부동의 인기 1위인 백하연과 국가 대표 선수 몇 사람을 제외하면 이나연이 인기를 휩쓸고 있을 정도.

서문엽의 선택을 받은 스토리 때문인지 대중적으로도 반응이 좋아 팬클럽이 폭발적으로 자랐다.

다만 한 가지 불안한 점은 있었다.

'팔 수 있으려나?'

그놈의 인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나연은 YSM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된 상황인 것이다.

YSM은 요즘 티켓 판매로도 많은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이나연을 보러 온 거다.

껑충껑충 잘도 뛰어다니는 게 볼수록 속이 다 시원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이느라 불필요한 동선을 줄이고 절도 있게 움직이기 때문에 계속 보면 지루한 면이 있었다.

이나연은 그런 유니크함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중이었다.

아마 이번 시즌이 끝나면 엄청난 연봉 인상이 예상된다.

지금도 이미 광고 모델로 활약하며 돈을 만지고 있지만 말이다.

이나연과 함께 활약하는 선수가 또 있었다.

촤촥!

그림자 속에서 불쑥 화살 세 대가 튀어나왔다.

"큭!"

타깃이 된 근접 딜러가 다리에 화살을 맞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림자에 숨어 다닐 수 있는 윤범이었다.

이나연이 코앞에서 날뛰고 그 와중에 사냥도 해야 하는데, 그림자에 스며든 채 접근한 윤범의 기습 공격을 막기란 어려웠다.

아무리 신경 쓴다고 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KB-2 리그에서 뛰지도 않는다.

"쯧쯧, 쟨 왜 이렇게 안쓰럽냐."

서문엽은 혀를 찼다.

분명 윤범이 1킬을 했는데 눈에 잘 띄지를 않는다.

그림자에 스며들어 보이지를 않으니, 아무리 송출되는 대형 화면에 몸의 테두리를 밝게 표시해 주어도 관중들의 환호를 받기 어려웠다.

또 MVP에 선정되어 인터뷰를 해도 우물쭈물하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는 성격이란!

꾸준히 킬을 올리는 대형 루키임에도 인기가 없어 슬픈 윤범이었다.

하지만 전술적 가치는 이나연에 맞먹었다.

이나연이 대놓고 마구 날뛰면, 윤범은 저격수처럼 일격을 선사하고 즉시 이동해 위치를 바꾸는 식이었다.

거기에 조승호가 오늘도 만화책을 읽으면서 화살을 보급해 주니, 이 조합을 막을 수 있는 팀이 KB-2에는 극히 드물었다.

전황이 유리해지자 YSM의 본대도 서서히 상대측 진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결국 몰아넣어진 상대 팀이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한 타 싸움을 걸었지만, 조직적으로 집단전을 펼치는 YSM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압살당했다.

-10 대 0! YSM이 압도적인 스코어로 승리를 거두며 2세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YSM이 이렇게 되면 가까스로 4위에 올라 포스트시즌 우승 경쟁에 합류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저력입니다. 신인 선수들이 대거 약진하고 가브리엘 감독의 정교한 전술과 맞물려 KB-2의 강팀들을 차례차례 격파한 YSM! 이러면 포스트시즌 진출을 앞서 확정 지은 세 팀들이 골치를 썩겠네요!

-그렇죠. 이번 시즌, 가장 까다로운 팀을 꼽으라면 모두가 YSM을 손꼽았거든요.

-이번 YSM의 신진들은 서문엽 구단주가 선별했다고 하던데, 정말 안목이 대단합니다.

-더불어 다른 강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한 타 싸움에서 YSM 선수들의 움직임이 정말 조직적이고 정교해졌기 때문이거든요. 파리 뤼미에르에서 왔다는 가브리엘 감독이 정말 팀의 기본기를 잘 확립시켜 놓았습니다.

-예, 한 타 싸움은 기본 중의 기본이죠. 한 타 싸움을 잘하는데 지는 일은 별로 없거든요.

-이 가브리엘 감독도 서문엽 구단주가 파리에서 직접 데려왔다죠? 하하, 이렇게 되면 서문엽 구단주의 올해 영입은 모두 성공입니다.

대형 화면은 4위 및 포스트 시즌 진출 확정에 기뻐하는 선수들을 비추다가 이내 VIP석에 오랜만에 나타난 서문엽을 보여주었다.

서문엽의 얼굴이 보이자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서문엽! 서문엽!"

서문엽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놈의 인기는 참.'

이나연의 활약을 보기 위해 온 관중이 절반 이상이라면, 나머지는 서문엽 때문에 YSM의 팬이 된 케이스였다.

서문엽이 직접 경기를 뛰는 것도 아니지만, 그가 하는 일이니 응원하겠다는 마인드였다.

무슨 짓을 해도 용서받고 뭘 해도 지지받는 서문엽의 놀라운 입지였다.

한 줌의 희망도 없이 디스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던 세계에 한 줄기 빛이 되었던 영웅의 위상이었다. 17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 시절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아무튼 자신의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서문엽은 웃음이 나왔다.

'가브리엘 감독이 결국 약속을 지켰네.'

포스트시즌만 진출하면 우승은 확실하다고 가브리엘 감독은 말했다.

사실이었다.

가브리엘 감독에게는 1년에 세 번 서문엽을 경기에 출전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3회 이용권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으니, 이제 우승을 가르는 세 번의 경기에 그걸 쓸 터였다.

포스트시즌은 3·4위 팀이 경기를 치르고 이긴 팀이 2위 팀과 경기를 치른다. 거기서 이긴 팀이 1위 팀과 결승전을 치러 승자가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무려 5전 3선승제로 진행되는 터라 4위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려면 그야말로 피 말리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서문엽이 출전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걸 알기 때문에 YSM 선수들은 벌써 우승했다는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꼴찌 팀의 주장으로 설움을 느꼈던 노정환은 감격의 눈물까지 흘렸다.

포스트시즌 진출을 저렇게 기뻐하는구나, 하고 관중들은 바라보지만······.

"아주 신났네, 신났어."

경기에 나가게 된 서문엽은 혀를 찰 뿐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MVP로 선정된 최혁과 윤범이 인터뷰를 했다.

근접 딜러에서 탱커로 전향한 최혁은 YSM이 한 타 싸움에서 강해진 비결 중 하나였다.

매번 싸움 때마다 최전방에서 악전고투하며 공격을 막아내고 버텼던 것이다.

특유의 질긴 목숨은 이제 최혁의 플레이를 설명해 주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탱커로서 MVP도 받고 팀의 포스트 진출에도 기여해서 아주 기쁩니다. 이제 제 소질이 탱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포지션 변경을 권해주신 구단주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혁은 재미는 없지만 유창하게 인터뷰를 처리했다.

다만 윤범은 또 인터뷰를 권하는 매혹적인 아나운서 앞에서 목소리를 떨어 사람들을 속 터지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감독 인터뷰도 있었다.

가브리엘 사나 감독은 통역사와 함께 인터뷰를 했지만, 간단한 답변은 본인이 한국어로 처리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뿔테 안경이나 헤어스타일도 보다 세련되게 바뀐 가브리엘 감독은 지적인 이미지로 팬을 자처하는 여자들이 간간히 나타나고 있었다.

벌써부터 한국에서는 명장 소리를 듣고 있는데, 학력 좋아하는 한국에서 공부 잘하는 태가 물씬 풍기는 가브리엘 감독은 취향 저격일지도 몰랐다.

가브리엘 감독은 포스트시즌은 어떻게 준비할 거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포스트시즌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고 긴장도 안 됩니다. 이미 우승컵은 우리가 맡아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와, 자신 만만하시네요?

-YSM에 올 때 구단주께서 약속했습니다. 제가 감독이 되면 1년에 세 번 경기에 뛰어주겠다고요. 솔직히 우승 경쟁을 치르는 다른 세 팀에게 미안함을 느낍니다.

가브리엘 감독의 발언은 폭탄처럼 인터넷 언론에 퍼져 나갔다.

서문엽씩이나 되는 사람이 왜 여기에 나오느냐는 항의 아닌 항의가 포스트시즌1, 2, 3위 팀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승격을 간절히 응원하던 그들의 팬들도 삽시간에 좌절했다.

다음 날, 서문엽이 YSM에 입단 계약을 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선수 풀이 부족한 한국 특성상 소속이 없는 선수는 시즌 중에도 영입할 수 있다는 규정이 서문엽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 출전(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