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당의 천재(2) >
"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다니엘 만츠가 격하게 악수를 하며 반겼다.
"그냥 견학이야."
"히히, 슈란 보러 온 거겠죠?"
"실은 너를 더 보고 싶었지."
"하하하, 저도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훈련 끝나는 대로 술 한잔 어떤가요?"
"좋지. 같이 네 감독 험담이나 신나게 하자꾸나."
다니엘 만츠는 키득키득 웃었다. 잘 웃으니까 더 아이 같았다.
분석안에 보이는 다니엘 만츠는 전형적인 서포터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단점부터 따지자면 근력 49.
선수가 아닌 일반인 초인의 평균 수준이었다.
이렇게 근력이 약하면 설사 다른 능력치가 좋다 하더라도 근접 무기를 들고 싸우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지구력 62, 기술 70으로 약한 근력을 보완해 주지도 않으니, 스스로 킬을 낼 수 있는 전투력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민첩성이 무려 95.
오러는 99로 서문엽, 피에트로, 슈란 다음 가는 수치로 전 인간 중 4위였다.
초능력은 스프린트, 밀기, 당기기로 세 가지.
'아주 좋구나.'
다니엘 만츠는 전투력이 없는 서포터지만 조승호처럼 전투에서 뒷전에 물러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
스프린트와 빠른 민첩성을 활용해 과감하게 파고들어 적을 아군 쪽으로 밀어버린다.
또는 끌어당겨서 넘어뜨리거나 아군에게 끌려오게 하는 식으로 어시스트를 한다.
그렇게 해서 매년 쌓는 어시스트는 세계 최고치.
다니엘 만츠는 문득 가까이 다가와 나직이 속삭였다.
"얘기 들었어요. 나단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줬다면서요?"
"어라?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뭘 새삼스럽게. 요번 프리 시즌 때 나단하고 이비사 섬에서 같이 휴가 보냈어요."
"아하, 본인에게 들었다면야."
둘이 친한 모양이었다.
소속 팀은 베를린 블리츠와 파리 뤼미에르, 국가 대표로도 독일과 프랑스로 라이벌 관계였는데 친한 것이 용했다. 아마도 포지션이 전혀 달라서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단과 다니엘은 서로 칼을 부딪치는 사이라기보다는 톰과 제리였다. 나단이 뒤쫓고 다니엘은 쏜살같이 달아나며, 종종 밀고 당기면서 훼방 놓곤 했다.
솔직히 얄미워 보일 정도였는데, 바로 그 재치 가득한 플레이가 서문엽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런 스타일은 지금껏 본 적도 없었고, 가르친다고 될 일도 아니었으니까.
"연락처 가르쳐 주세요. 저녁에 연락할게요."
"오케이."
전화번호를 공유하며 다니엘 만츠와 저녁 술 약속을 했다.
그때, 엠레 카사 감독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불쑥 찾아오더니 용건은 견학이라고?"
"하하, 네가 보고 싶었지."
"농담은 됐다."
"그럼 용건이 뭔지 뻔히 알면서 뭐 하러 물어?"
서문엽이 반문했다.
서문엽이 독일에 온 거야 뻔했다. 슈란의 경기력을 보기 위해서였다. 월드컵에서 슈란의 중국과 마주칠 수 있었기 때문에 미리 봐두려는 것이다.
"그냥 중국이 월드컵 본선 때까지 꽁꽁 숨겨놓고 있었다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겠지. 뭘 준비했을지는 뻔하니까."
보나마나 포격 전술일 거라고 서문엽도 예상하고 있었다.
"근데 네가 슈란을 영입하는 바람에 조금 상황이 달라졌잖아."
"내가 슈란을 어떻게 활용할지 보고 싶었겠군."
"그렇지. 내친김에 너도 보고 여기도 구경할 겸해서 왔어."
실제로 서문엽은 베를린 블리츠의 클럽하우스를 유심히 봤다.
명문이라 불리는 것들은 대체 얼마나 잘 해놓았을까 궁금했는데, 과연 기가 질렸다.
엠레 카사 감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뿐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다만 훈련은 보여줄 수 없다."
"알았어."
선수들을 쭉 둘러봤는데 정작 슈란이 안 보였다.
"슈란은?"
"아직 훈련 중이다. 쉬지 않겠다는군."
"흐음······."
서문엽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할 수 있는 훈련이라면 사냥뿐인데, 아마 소멸 광선의 강도를 조절하는 연습이겠지?"
"···잘 아는군."
엠레 카사 감독은 서문엽이 단번에 맞추자 흠칫했다.
"걔가 그걸 조절 못 해서 욕을 바가지로 먹었잖아. 아직도 고생인가 보네, 쯧쯧."
소멸 광선을 강하게 쏘면 오러 소모도 심해지기 때문에 조절해야 했는데, 아무리 굴려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웬만하면 슈란을 싸우지 않게 하는 쪽으로 머리를 굴렸는데, 그게 바로 포격 전술의 실체였다. 엠레 카사 감독이 포격 전술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경기에 슈란 나와?"
"그렇다. 월드 챔스전에 되도록 경기 경험을 많이 쌓게 해야 하니까."
"알았어. 그럼 경기는 내일모레 보도록 하지."
"그럼 용건은 끝난 건가?"
엠레 카사 감독의 그 말에 서문엽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얌마, 너 가만 보니까 내가 여기 와 있는 걸 무척 꺼려하는 눈치다?"
"중요한 훈련 중인데 그걸 보고 싶다고 불쑥 여기까지 찾아온 걸 환영해야 하나?"
"중요한 훈련이라."
그렇게 읊조리며 서문엽은 빙글 웃었다.
"너 말이야. 슈란이 있으니까 파리 뤼미에르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그렇다."
"내가 보기에 너도 위태위태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엠레 카사 감독의 표정이 변했다.
"무슨 뜻이지?"
"글쎄다?"
서문엽은 씨익 웃고는 휙 뒤돌았다.
그렇게 떠나는 서문엽의 뒤를 엠레 카사 감독이 쫓아왔다.
"왜? 바쁘신 양반이."
"오늘 훈련은 끝났다. 남은 시간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쓰지."
서문엽이 지적한 자신의 문제가 뭔지 못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허이고, 그러셔? 난 이제 베를린 관광이나 할 건데?"
"새삼스럽게 베를린 관광이라고?"
독일어를 마스터할 정도로 독일에 자주 들락거린 서문엽이 새삼 관광을 하겠다니 웃긴 얘기였다.
엠레 카사 감독은 잠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했다.
"그보다는 우리 클럽의 리저브 팀과 유소년 팀을 보여주지."
"······."
"내가 상당히 공들여 키운 곳이니 많은 참고가 될 거다."
베를린 블리츠는 빅 사이닝보다는 실력·성격·합리적인 이적료가 두루 갖춰진 선수 영입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그런 선수는 찾기 어려웠다. 설사 다 갖췄대도 팀 컬러와 스타일상 맞지 않으면 영입하지 않았기 때문.
결국은 직접 입맛에 맞는 선수를 유소년 때부터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베를린 블리츠 BC의 유망주 정책은 지금까지 성공적이라는 평가였다.
팀 선수 중 30%가량이 직접 키운 선수 출신이었으니까.
"좋아, 구경 가자."
솔깃한 서문엽이 이를 따르기로 했다.
1분쯤 걸어갔을까.
"그런데 아까 한 말이 신경 쓰이는군. 내가 위태롭다고?"
"아아, 신경 쓰지 마. 세계적인 명장께 무슨 주제넘은 충고를 하겠어."
구차하게 우는 소리 하고 싶지는 않았던 엠레 카사 감독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YSM은 선수 보강이 시급해 보이더군."
"선수 보강은 순조롭게 되고 있어."
"개리 윌리엄스 외에는 소식이 없던데. 기존 선수도 너와 피에트로라는 이상한 이탈리아인 외에는 세계 레벨에서 통할 선수가 없고. 사니야 아흐메토바는 자질이 보였지만 아직 멀었더군."
"그야 그렇지만 우리 사정에 별수 있냐?"
"우리 측 유소년이나 리저브 팀에서 마음에 드는 선수가 있다면 한 명 임대를 보내주지."
"진짜?"
"YSM도 내년 아시아 챔스와 월드 챔스까지 출장할 테니 선수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명문 중의 명문인 베를린 블리츠 BC가 보유한 선수라면 유소년이나 리저브 팀 소속이라도 기량이나 재능이 범상치는 않을 것이다.
"그거 괜찮네. 연봉도 너희가 내주냐? 우리 돈 없어."
"···절반은 부담해 주마."
꽤나 후한 조건이었다.
이쯤 받아냈으면 서문엽도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네 전술 스타일은 인상적이더라. 트렌드와 상관없이 선수마다 적성에 맞는 세부 포지션을 찾아주고 훈련시키고."
"당연한 일이다. 발 빠른 탱커가 유행이라고 갑자기 벌크 업을 줄이고 속도를 높여봐야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꼴이다."
덕분에 베를린 블리츠의 유소년 선수들은 획일적이지 않고 포지션이 종류별로 있었다. 덕분에 베를린산 유망주를 탐내는 클럽들이 참 많았다. 빅 리그 클럽들의 뷔페라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
"포지션 비중은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다양한 포지션을 골고루 활용하는 편이고."
"다 활용도가 따로 있으니까."
트렌드에 따라 클래식 탱커를 많이 쓰든지 원거리 딜러 혹은 근접 딜러의 비중을 극단적으로 높이든지 하는 팀 컬러가 있기 마련이지만, 베를린 블리츠는 한 번도 어느 한 포지션에 치우쳐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는 다재다능한 선수보다는 각자 포지션의 전통적인 역할에 충실한 선수들을 쓰는 편이고."
"맞다."
한마디로 서문엽 같은 하이브리드 탱커보다는 튼튼한 클래식 탱커, 혹은 발 빠른 탱커 등 확실한 강점을 가진 선수를 선호하는 것.
그런데 서문엽의 지적 사항도 바로 이 점에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나랑 정반대지."
"넌 다양한 역할을 두루 수행하는 팀원을 선호했으니까."
"내가 왜 그런 스타일을 선호했을까?"
"던전은 워낙에 변수가 많았으니까. 배틀필드와 달리 던전에 대해 알려진 사전 정보도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매 순간 맞닥뜨린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려면 초인들도 다양한 역할을 할 줄 알았어야 했지. 그 점은 공감한다."
"배틀필드는 달라?"
"물론 다르다. 잘 알려진 던전에서 잘 알려진 선수들끼리 싸운다."
"내가 생각하는 네 단점은 거기에 있어. 선수들의 역할이 고정되어 있으니까 변수에 대응하기 어려워."
"인정할 수 없군."
"아아, 이해해. 다양한 포지션을 두루 쓰니까 대응 못 할 변수는 거의 없지."
서문엽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파리 뤼미에르처럼 기동력이 무척 빠른 팀은 그만큼 변수 창출에 능해."
"올해는 유럽 챔스 결승에서 졌지. 하지만 상대 전적은 우리가 앞선다."
"지금까지 파리를 상대로 잘 싸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한 이야기인데. 너 말이야. 혹시 네 팀에서 다니엘 만츠의 비중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냐?"
그냥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엠레 카사 감독은 곧장 서문엽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다니엘 만츠가 많은 변수를 커버해 주고 있다는 뜻인가?"
"어. 내가 보기에 파리랑 싸울 때 네 팀의 비중 중 4할가량이 다니엘이야."
다양한 포지션을 두루 쓰지만, 그 안에서는 경직된 엠레 카사 감독의 스타일.
그 단점을 재기발랄한 다니엘 만츠가 많은 부분 커버해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파리는 아마 슈란이고 나발이고 다니엘 만츠만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걸. 실제로 다니엘 만츠 잘 잡을 만한 선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잖아."
높은 민첩성과 스프린트로 적들 사이를 누비는 다니엘 만츠.
그러나 빠른 스피드를 가진 파리 뤼미에르 선수들 사이를 누비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결승에서 교체 멤버였던 백하연을 계속 선발로 썼지.'
그리고 백하연은 채찍과 순간이동으로 다니엘 만츠만 마크했다.
원래는 다니엘 만츠를 쫓아다니는 건 나단이 하던 일이었다.
백하연이 대신해 준 덕에 프리가 된 나단이 킬 파티를 벌인 것.
'그랬던 건가. 실은 내 전술의 빈틈을 계속 다니엘이 땜빵해 주고 있었던 건가.'
"걔는 진짜 천재야. 네 팀을 보면 물 흐르듯이 변화하는 맛이 없는데, 꼭 다니엘이 분위기를 계속 바꿔놓더라고."
"그건 깊이 고민해 봐야겠군."
일리 있다고 여겼다.
아니, 실은 서문엽이 한 말이니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한 엠레 카사 감독이었다. 고집이 세긴 하지만 맞는 말이라면 인정할 줄도 아는 그였다.
"자자, 이제 선수 보여줘. 누굴 임대 보낼 생각이야?"
서문엽은 선물 보따리를 풀어달라고 보챘다.
"리저브 팀에 있다."
두 사람은 베를린 블리츠의 리저브 팀 훈련장에 갔다.
리저브 팀은 아직 훈련이 한창이었다.
그곳에서 서문엽은 정말로 눈에 확 띄는 선수를 하나 발견했다.
-대상: 파울 콜린스(인간)
-근력 84/96
-민첩성 78/79
-속도 70/70
-지구력 81/90
-정신력 56/85
-기술 69/84
-오러 80/85
-리더십 32/56
-전술 42/70
-초능력: 강철 육체
-강철 육체: 1초에 1의 오러를 소모하며 육체의 내구력을 비약적으로 높인다.
왜 임대 보내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요즘 추세에 안 맞는 전형적인 클래식 탱커였다.
아무리 트렌드를 거부하는 엠레 카사 감독이라도 클래식 탱커를 더 추가할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 밀당의 천재(2) > 끝
< 밀당의 천재(3) >
엠레 카사 감독이 소개해 준 선수 파울 콜린스는 미국 국적의 18세 흑인이었다.
어릴 때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라 베를린 블리츠에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스카우트됐고, 현재는 리저브 팀에서 뛰는 중이었다.
큰 체격에 걸맞게 근력을 타고난 전형적인 클래식 탱커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친구가 유망주였던 때는 미국식 파워 게임이 유행이었는데, 성인을 앞둔 지금은 클래식 탱커가 하향세였던 것.
그래서 그런지 정신력이 56/85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근력과 지구력은 아직 성장할 여지가 많은데, 민첩성하고 속도는 다 개발됐어.'
이것은 아마도.
"어이."
서문엽이 벤치 프레스를 하던 파울 콜린스를 대뜸 불렀다.
파울 콜린스는 엠레 카사 감독과 함께 온 서문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문?"
"그래그래."
"마, 만나서 영광입니다. 제 롤 모델이십니다."
"안 돼."
서문엽이 대뜸 거절했다.
파울 콜린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
"날 롤 모델 삼지 말라고. 넌 그냥 천생 클래식 탱커야."
파울 콜린스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서문엽은 씨익 웃었다.
"내가 맞춰볼까? 너 몸집을 줄이고 민첩성 키우고 있었지?"
"그, 그걸 어떻게?"
넋이 나간 파울 콜린스.
옆에 있던 엠레 카사 감독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포지션도 문제점도 말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떻게 한눈에 저렇게 파악하는 건지 불가사의였다.
"세상에 영원히 변치 않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뭔지 알아?"
"그, 글쎄요?"
"누군가는 맨 앞에서 맞아줘야 해. 바로 네가 해야 하는 역할이야. 넌 처맞으려고 태어난 놈이야."
파울 콜린스는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분간이 안 갔다.
"우리 팀이 내년에 아시아 챔스랑 월드 챔스를 나갈 예정인데, 네가 1년만 임대를 온다면 다 경험하게 해주마. 어때?"
파울 콜린스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엠레 카사 감독을 바라보았다.
엠레 카사 감독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권하는 것이다. 큰 무대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서문엽은 좋은 스승이다."
"일단 에이전트와 얘기해 볼게요."
"그래그래. 내가 방패 쓰는 법을 마스터하게 해줄게. 꼭 와라."
그러면서 속으로는 선수 숙소를 한 채 더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서문엽이었다.
그렇게 용건이 끝나고 서문엽은 투숙한 호텔로 되돌아갔다.
돌아가기 전에 엠레 카사 감독에게 말을 남겼다.
"너도 내 말 명심해. 다음 경기에 슈란이 나온댔지? 그렇다면 아마 그때도 내 말이 증명될걸?"
"···알았다."
엠레 카사 감독은 큰 숙제를 떠맡은 심정이었다.
***
다음 날.
뮌헨 울펜리터와 베를린 블리츠 BC의 경기가 있었다.
독일 제1리그 최대의 라이벌 매치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구축한 베를린 블리츠에 대항할 수 있는 독일 유일한 클럽이 바로 뮌헨이었다.
실제로 베를린을 이길 때도 많이 있었던 뮌헨이라 이번 경기도 주의해야 했다.
서문엽은 VIP석에서 느긋하게 경기를 구경했다.
"와! 슈란이다!"
"진짜다!"
"와아아아아!!"
선수들이 입장하자 경기장이 떠들썩해졌다.
대형 스크린에 집중적으로 비춰지는 것은 바로 슈란.
좀처럼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던 중국의 전설적인 초인이 마침내 배틀필드 경기에 출전한 것이었다.
과연 명성으로만 듣던 소멸 광선은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이미 소멸 광선의 위력 같은 거야 알고 있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슈란의 경기력.
그리고 슈란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보고 싶었다.
'중국은 그저 슈란을 중심으로 한 한타 싸움이나 생각했겠지만.'
팀이 슈란을 위해 움직이는 체제는 단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엠레 카사 감독도 이를 알고 있을 터.
양측 선수가 던전에 접속했다.
1세트 경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가장 먼저 움직인 쪽은 뮌헨.
뮌헨은 빠른 기동성을 통한 사냥과 견제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스타일로, 적극적으로 파리 뤼미에르 BC를 벤치마킹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뮌헨은 빠르게 일부 선수들이 베를린 측으로 접근했다.
이에 비해 베를린 측은 그냥 평범하게 사냥하는 모습이었다.
슈란은 다른 2명의 동료와 함께 바로 첫 지역의 중간 보스 몹을 사냥했다.
콰콰콰콰콰!!!
슈란의 검지에서 하얀 광선이 쏘아져 나갔다.
중간 보스 몹이었던 대형 살러분에게 소멸 광선이 꽂혔다.
끼이이이익!
오러로 이루어진 물고기, 살러분. 그중에서도 10m의 거대한 체구를 가진 대형 살러분이 소멸 광선에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오오!"
"우와, 세다!"
"강하잖아!"
슈란의 소멸 광선이 계속 쏘아졌다. 대형 살러분도 몸부림을 치며 난동을 부렸지만, 이내 고통에 겨워하며 점점 움직임이 굼떠졌다.
파아앗!
대형 살러분은 이내 온몸을 이루고 있는 오러가 흩어지며 소멸되었다.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이 깜짝 놀랐다.
혼자 보스 몹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짧은 시간에.
슈란은 첫 플레이부터 엄청난 임팩트를 선사했다.
그런데 뮌헨 측의 선수 3명이 인근에 접근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어이구, 당했구나.'
서문엽은 혀를 찼다.
물론 당한 쪽은 뮌헨이다.
슈란에게는 소멸 광선 말고도 초능력이 하나 더 있다.
-위치 파악: 반경 3㎞ 이내의 지정한 타깃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견제를 하러 온 3명 중에 한 명이 타깃으로 지정되어 있다면, 그들은 이미 슈란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 있겠지. 뮌헨 선수들 중에 가장 견제를 활발하게 하는 선수를 지목해 타깃으로 삼았을 테고, 그 선수가 저 3인에 포함됐을 확률이 높으니까.'
슈란 일행이 다음 지역으로 향해 이동했다.
3인은 이동 경로 중간에 매복해 암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슈란은 일행의 가장 뒤쪽에서 걷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며 서문엽은 슈란이 알아차렸다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콰콰콰콰콰콰!!
-슈란, 1킬.
뮌헨 선수들이 뛰쳐나와 암습하는 순간, 슈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멸 광선을 발사했다.
그토록 빠른 대응은 예상 못 했기 때문에, 뮌헨 선수 하나가 즉사해 아바타가 소멸해 버렸다.
-세상에! 슈란 1킬! 정말 엄청난 킬이 나왔습니다!]
-암습을 시도하자마자 소멸 광선을 쐈습니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한 방에 데스라뇨. 정말 무시무시한 위력입니다.
슈란의 일행들도 뮌헨 선수 2명을 공격했다. 역시나 슈란에게 들어서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빨랐다. 뮌헨 측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슈란! 슈란! 슈란!"
베를린 블리츠의 서포터들이 열광하며 슈란의 이름을 연호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고, 단지 1킬이었지만 베를린 블리츠가 몇 걸음 앞서 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슈란에게 단숨에 1킬을 당한 것이 정신적으로도 충격이 컸을 것이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즉사했는데 또다시 견제를 시도할 엄두가 안 나리라.
슈란은 사냥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오케이. 아직 소멸 광선을 약하게 쏘지는 못하는구나.'
사냥을 안 하는 슈란을 보며 서문엽은 정보를 파악했다.
소멸 광선을 최대한 약하게 쏘는 식으로 오러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사냥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
그걸 못하기 때문에 사냥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작 배틀필드를 해서 지금까지 경험을 쌓았더라면 그런 조절도 가능했을 텐데 아깝게 됐네.'
저런 면에서 보면, 슈란이 배틀필드를 다시 준비하게 된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끽해야 2년 정도?
배틀필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선수 경험을 쌓아왔다면 진즉에 톱4라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다만, 슈란은 뮌헨이 끈질기게 시도한 수차례의 견제 플레이를 계속해서 막아냈다.
적이 나타나면 소멸 광선을 쏴서 쫓아내 버린 것이다.
'견제를 막아내는 데는 원거리 딜러가 적합하지. 포지션의 기본을 그대로 수행하는구나.'
견제 방어.
보스 몹 사냥.
그리고 한타 싸움.
그 3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슈란은 전형적인 마법사형 원거리 딜러의 모습이었다.
뮌헨도 슈란에게 견제가 계속 막히자 방향을 바꿨다.
그냥 사냥에 집중해서 사냥 포인트만 쌓다가 한타 싸움에서 이기자는 식이었다.
이미 견제도 여러 번 실패하는 바람에 동선 낭비도 있어서 양측의 격차는 10명 대 11명이라는 숫자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장기전 외에는 답이 없었다.
베를린 블리츠도 급할 게 없었다.
한타 싸움도 슈란이 있는 이상 불리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한타 싸움이 열렸다.
서로 뒤엉켜 싸우면서도 뮌헨의 탱커들은 슈란의 소멸 광선을 각별히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소멸 광선이 쏘아지면 방패에 오러를 집중해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면 설사 강제로 방패를 뚫어버리고 킬을 추가한다 해도, 슈란 또한 오러 소모가 너무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슈란도 소멸 광선을 함부로 쏘지 않고 기회를 엿봤다. 혼란 중에 뮌헨의 포메이션이 깨지면 킬을 쓸어 담을 기회는 찾아오니까.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다니엘 만츠가 만들어줬다.
팟!
다니엘 만츠는 탱커 뒤에 숨은 근접 딜러 하나를 당기기로 끌어냈다.
깜짝 놀란 근접 딜러도 안 끌려가려고 저항했지만, 상체가 살짝 탱커의 커버 범위 밖으로 삐져나왔다.
슈란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콰콰콰콰콰콰!!
-슈란, 2킬.
수없이 연습한 결과물이 틀림없었다.
서문엽은 감탄했다.
'역시 다니엘 저 녀석 대단하잖아?'
뮌헨은 나름 슈란에 대한 대응을 잘했는데, 다니엘 만츠가 기회를 만들어줌으로써 슈란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줬다.
뮌헨은 주춤했지만 끝까지 포메이션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저항했다. 끈질기게 버티면 기회가 역전의 찾아온다는 굳은 믿음. 초능력이 난무하는 한타 싸움은 역전도 흔했기 때문에 포기하기 일렀다.
하지만 그때, 다시 한번 다니엘 만츠가 움직였다.
다니엘 만츠는 아군 탱커 하나를 데리고 함께 돌격했다.
아군 탱커가 온몸을 날린 몸통 박치기로 적 포메이션의 틈을 만들었다.
그 틈새로 다니엘 만츠가 뛰어들었다. '스프린트'를 사용한 엄청난 스피드였다.
다른 서포터가 감히 엄두도 못 낼 과감함!
적진에 파고들어서 밀치기로 뮌헨 선수들을 탱커 라인 밖으로 내보냈다.
상대 선수들은 밀리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때로는 끌어당겼다가 밀쳐서 균형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곡예처럼 적들 사이를 누비며 포메이션을 무너뜨려 버리는 다니엘 만츠.
밀기.
당기기.
그 두 가지 탁월하게 사용한 멋진 플레이였다.
그렇게 밀쳐진 적은 슈란의 소멸 광선에 먹잇감이 되었다.
슈란은 다니엘 만츠가 만들어준 먹잇감을 잘 주워 먹으라는 당부를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야말로 멋진 콤비 플레이.
'거봐. 역시 내 말이 맞잖아.'
서문엽은 실실 웃었다.
슈란을 한타 싸움에서 제 역할을 하게 만들어준 이는 다니엘 만츠였다.
직접 파고들어서 적 포메이션을 무너뜨린 것도 다니엘 만츠였다.
필요할 때마다 나서서 팀플레이를 매끄럽게 만들어주는 다니엘 만츠.
"와아아아아!!"
"대단하다! 슈란! 만츠!"
"다니엘! 다니엘! 슈란!"
베를린 블리츠의 서포터들은 환상적인 경기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니엘 만츠가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있었다.
2세트도 비슷한 패턴으로 베를린 블리츠가 승리를 거두었다.
슈란 때문에 자신들의 장기인 견제 플레이를 시도하지 못한 뮌헨은 경기 내내 끌려다니다가 한타 싸움에서 완패당하는 수준을 밟았다.
하지만 엠레 카사 감독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도 다니엘 만츠에게 쏠린 많은 짐을 알아차렸다.
서문엽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을 떠났다.
'엠레 카사 녀석, 슈란을 그냥 평범한 원거리 딜러로 쓰는구나.'
팀의 중심이 아닌, 팀의 일원 중 하나.
정답이었다.
슈란은 팀의 모든 것을 짊어질 기량은 없지만, 원거리 딜러로서 제 몫을 다할 때는 엄청난 무기가 된다.
다니엘 만츠의 플레이로 눈 호강도 했고, 덤으로 내년에 임대 올 유망주 탱커도 얻었다.
목적을 모두 이루었으니 이제 더는 독일에 볼일이 없었다.
'우리도 슬슬 월드컵을 준비해야지.'
< 밀당의 천재(3) > 끝
< 잔당들의 던전(1) >
한국에 돌아와 가브리엘 감독에게 이번 겨울에 임대해 올 선수에 대해 들려주었다.
"파울 콜린스가 정말 온답니까?"
가브리엘 감독은 놀란 얼굴을 했다.
"응, 내년 1년은 쓸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파울 콜린스를 알아?"
"베를린 블리츠가 공들였던 유망주를 설마 모르겠습니까. 타고난 힘이 뛰어나고 육체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초능력도 탱킹에는 제격이죠."
그 말을 듣고 서문엽은 얼마 전에 만나봤던 파울 콜린스를 떠올렸다.
그 고민 많던 덩치 큰 흑인 청년이 보기와 달리 꽤 주목받던 거물인 모양이었다.
이혼의 여파로 오랫동안 쉬었던 가브리엘 감독도 알 정도이니 말이다.
"요즘 클래식 탱커의 추세가 별로 안 좋으니까 스타일을 바꾸려고 근육을 줄이고 민첩성 훈련에 매진하고 있더라고."
"이런, 갑자기 스타일을 바꾼다고 몸에 맞는다는 보장이 없을 텐데요."
"응, 안 맞더라. 민첩성은 한계가 보이는 체질이었어. 괜히 힘만 줄었지 뭐."
"다시 근력을 끌어올리는 문제가 시급하겠군요.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재능은 알아주던 유망주이니 최전방을 맡길 수 있는 탱커가 될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 클럽에 탱커가 5명이 되겠군요."
YSM의 탱커는 서문엽, 최혁, 노정환, 김진수까지 총 4인이었다.
서문엽은 탱킹과 근접 공격, 원거리 공격이 두루 가능한 하이브리드 탱커.
통영에서 데려온 신입 탱커 김진수도 근력은 80밖에 안 되지만 민첩성과 지구력이 좋아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스피드형 탱커였다.
반면 최혁은 한때 근접 딜러였다고는 하지만 그건 한국 리그 수준에서나 통할 뿐, 능력치는 근력 90만이 장점인 전형적인 클래식 탱커였다.
좋은 공격 초능력과 근접 딜러로서의 오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종종 침투하는 역할도 소화할 수 있었을 뿐, 플레이의 대부분은 최전방에서 막는 역할을 한다.
한정실업 시절부터 쭉 YSM의 주장이었던 노정환도 근력 87과 육체 강화를 가진 클래식 탱커다.
여기서 클래식 탱커를 더 데려오는 셈이니, 시대를 역행한 채 5탱커 중 클래식 탱커만 3명이 된다.
"거기에 대해서도 내가 생각해 본 여러 가지 방안이 있어."
서문엽은 화이트보드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5탱커를 총동원한 가짜 탱커 전술.>
이 전술에서 적진에 침투하는 가짜 탱커 역할은 서문엽과 최혁이 맡는다.
서문엽은 대단히 민첩하고 근접 전투에 뛰어나니 당연한 일.
그리고 최혁은 능력치만 봐서는 클래식 탱커이지만, '오러 집중'이라는 초능력이 공격에도 용이하므로 공격적인 역할을 맡아도 나쁘지 않다. 일전에 영국과의 A매치에서도 증명된 사실.
수비를 전담하는 최전방 탱커는 파울 콜린스.
그 뒤로 보조 탱커가 노정환.
남은 김진수는 또 다른 보조 탱커로 여기저기 열심히 다니며 아군 포메이션에서 약한 부분을 땜빵한다.
김진수는 민첩성이 좋은 편이지만 공격에는 재능이 없어서 침투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기도 방패 컨트롤이고, 가진 초능력도 '희생', '재생'으로 공격과 거리가 멀다.
선수들 이름이 적힌 자석을 배치하며 설명하자, 가브리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요. 파울 콜린스가 충분히 최전방 탱커 역할을 맡을 수 있다면, 최혁을 가짜 탱커로 돌려도 되겠습니다. 다만 5탱커를 하면 근접 딜러나 원거리 딜러의 숫자가 줄어드니 팀의 공격력이 약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이에 서문엽은 간단히 답했다.
"내가 있잖아. 피에트로도 있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말이지. 우리 애들은 몇 명 빼고 다 월드 챔스 레벨에서는 허접이야. 허접들이 딜러들 늘려서 공격력 강화한다고 딱히 큰 효과는 못 봐."
"수비와 역습으로 가는 겁니까?"
수비와 역습은 약팀이 강팀 상대할 때 쓰는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탱커가 많으면 수비라도 잘하니 쉽게 안 죽고 오래 버틸 수 있잖아?"
영국과 A매치를 치러보고서 서문엽은 약팀을 데리고 강팀을 어떻게 상대할지 충분히 고민해 보았다.
그 결론이 이거였다.
많은 건 안 바란다. 그저 쉽게 킬 내주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기나 해다오!
다행히 피에트로도 있고, 개리 윌리엄스, 파울 콜린스도 곧 합류하니 서문엽 혼자 날뛰어야 했던 한국 대표 팀보다는 나을 터였다.
"자, 그리고 또 하나는 이거다."
서문엽은 화이트보드에 또 다른 전술 명을 썼다.
<클래식 3탱커 전술.>
이건 파울 콜린스, 최혁, 노정환을 탱커로 세우는 전술이다.
그리고 서문엽은 아예 딜러가 되어 프리 롤을 맡는다.
"3탱커 체제에서 탱커가 모두 클래식 탱커인 건 좋지 않습니다. 발이 느려서 딜러진과 같은 템포로 따라와 줄 탱커가 없으니 공격과 수비가 따로 놀게 되죠. 차라리 노정환을 빼고 김진수를 넣는 게 좋겠습니다."
"아냐, 파울 콜린스와 최혁 둘만 갖고는 월드 챔스에서 못 버텨. 노정환도 같이 있어줘야 해. 공수 조절은 내가 맡을 테니 괜찮을 거야."
"그러면 구단주님께 가해지는 부담이 크겠군요."
"괜찮아, 괜찮아."
언제는 큰 부담 안 짊어진 적이 있었던가?
하드캐리가 일생이었던지라 서문엽은 딱히 부담을 못 느꼈다.
서문엽이 구상한 전술은 이렇게 두 가지였다.
가브리엘 감독은 심사숙고하다가 그 두 전술이 YSM의 현재 실정에서는 가장 적합하다고 인정했다.
"구단주님의 생각이 매우 탁월하십니다. 그것을 기초로 제가 좀 더 디테일하게 짜보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서문엽은 탱커들만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포지션은 가브리엘 감독에게 맡겼다.
어차피 같은 전술이라도 던전의 지형에 따라 변화가 불가피했다.
서문엽이 구상했어도 이를 실현하는 가브리엘 감독의 역량이 더 중요했다.
아무튼 후반기 시즌이 끝나고 겨울 이적 시장 때 약속했던 두 선수가 합류한다면, YSM은 다음과 같은 선수 구성이 된다.
-탱커: 서문엽, 최혁, 노정환, 김진수, 파울 콜린스.
-근접 딜러: 사니야 아흐메토바, 남궁지훈, 박영민, 최정민.
-원거리 딜러: 개리 윌리엄스, 이나연, 심영수, 피에트로 아넬라.
-서포터: 조승호.
모두 서문엽이 영입하거나 키운 선수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 전력상 보탬이 안 되는 선수들은 진즉에 모두 정리한 뒤였다.
'이제야 조금 팀다운 팀이 됐구나.'
서문엽은 뿌듯해졌다.
KB-2 리그의 최약체를 사들여서 여기까지 키웠으니 성취감이 쏠쏠했다.
언젠가는 진짜 세계적인 명문 클럽으로 만들고 싶었다. 자신과 피에트로가 없어도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이 있는, 그런 강력한 팀 말이다.
일류 선수들이 오고 싶어 하는 클럽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KB-1의 리그 수준도 높아야 한다.
현재로서는 서문엽이 자신의 명성과 안목을 이용하여 선수들을 설득해 데려오는 방식이었지만, 언제까지고 자신이 계속 발로 뛰며 선수들을 만나 우리 팀에 오라고 졸라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서문엽의 생각을 읽었을까?
전술 토론이 끝나고서 가브리엘 감독이 문득 말했다.
"구단주님 덕분에 지름길로 빨리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빅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개리 윌리엄스나 한때 세계적인 유망주였던 파울 콜린스가 한국에 올 리가 없었겠죠."
"계속 우리 팀에 머무를 선수들은 아니잖아."
서문엽은 툴툴거렸다.
"파울 콜린스야 애초부터 임대고, 개리 윌리엄스는 내년 월드 챔스만 경험한 뒤에 딴 데로 이적하려 할걸? 그뿐이야? 사니야도 다 크면 빅 리그로 진출하겠지."
서문엽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난 또 그다음 월드 챔스에서 써먹을 만한 선수를 찾아다녀야겠지. 어이구, 내 팔자야."
"하지만 내년 월드 챔스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둔다면 어떻겠습니까?"
"응?"
"그리고 고생하시더라도 어떻게든 또 좋은 선수들을 영입한 다음에 그다음 월드 챔스에서도 4강 이상 올라간다면 어떨까요?"
"음······."
"월드 챔스 진출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시아 챔스나 아프리카 챔스에서 운 좋게 올라오는 약체 팀은 언제나 있다고 인식되어지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물론 아시아 챔스에도 돈 많고 선수 수준도 높은 중국의 대형 클럽들이 있지만, 서구권의 빅 리그 측은 편견이 여전했다.
"하지만 거기서 한 번 이겨서 8강, 또 한 번 이겨서 4강에 오른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운 좋아서 월드 챔스의 강팀들을 연파할 수는 없으니까요."
"2년 연속으로 그런 성적을 보여주면 세계적인 강팀으로 인정받겠지."
"예. 월드 챔스 티켓은 보장된 클럽이 되어서 선수들에게 나름대로 매력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가브리엘 감독이 말을 이었다.
"장기적으로는 우리도 직접 유망주를 키워야 합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 클럽만 보고 자라서 충성심을 지닌 선수들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유소년 팀이 필요하긴 하지."
그렇지 않아도 서문엽도 베를린 블리츠의 유소년 팀을 구경했다. 호화로운 시설이나 유망주들이나 무척 부러웠다.
"돈 생기면 한번 해보자. 시설도 시설이지만 좋은 지도자를 고용하는 것도 돈이잖아."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니 어느덧 밤이 깊었다.
서문엽도 슬슬 바이크를 타고 퇴근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앗!
대뜸 피에트로가 공간 이동으로 눈앞에 나타났다.
"인마, 여기서 함부로 공간 이동을 쓰지 마!"
"보는 눈 없는 것을 확인했다."
덤덤히 대꾸하는 피에트로였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여왕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뭐?"
서문엽은 흠칫했다.
여왕이 먼저 연락을 해왔다면 사소한 일은 아닐 터.
아마도,
"뭔가 발견했냐?"
피에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려준 던전에 있던 이동 흔적을 추적했더니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첫 번째 상급 사제인가 하는 미친놈 은신처인가?"
"그건 모른다. 이동 흔적에 기록된 위치로 탐색을 갔던 이가 연락 두절되었다고 하니까."
여왕은 그녀를 도와 지저 세계를 수색하는 지저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연락을 하도록 조치하고 있었다.
연락이 두절되었다면 무슨 사고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위험한 곳에 갔다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뭔가가 있긴 있나 보네."
"그렇다. 그래서 우리더러 도와달라더군. 여왕의 수하들은 수색은 할 수 있지만 전투 능력은 형편없으니까."
여왕의 수하들은 대부분 문명이 몰락하고 떠돌다가 거두어져서 지상에 마련된 보금자리에 정착한 지저인들이었다.
그들은 빛이 내리는 땅에 인도해 준 여왕의 은혜에 감읍하여서 충성을 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문 전투원은 거의 없었다.
고위 등급의 강력한 지저인들은 대부분 대사제의 추종자들이었다. 지금은 죽거나 첫 번째 상급 사제를 따르고 있을 터였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침 신나게 싸우고 싶었는데 잘됐다. 우리 둘이 가보지 뭐."
"알겠다. 언제 갈 텐가?"
"내일. 이번에는 단단히 무장하고 갈 거니까 너도 배틀슈트라도 입어."
"내게 그런 건 의미가 없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따르지."
다음 날.
서문엽은 배틀슈트와 갑옷을 챙겨 입었고, 8자루의 창도 챙겼다.
귀환석도 챙겼으며, 혹시 몰라 전투 식량과 물도 준비했다.
반면 피에트로는 배틀슈트 위에 롱 코트만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일단 이동 흔적이 있는 그 던전으로 가지."
피에트로는 그 던전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공간 이동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동수단을 타고 강원도까지 가기로 했다.
"흐흐, 오랜만에 신나는 던전 공략이다."
서문엽은 싱글벙글했다.
배틀필드와는 달랐다.
역시 목숨이 걸려야 짜릿했다.
< 잔당들의 던전(1) > 끝
< 잔당들의 던전(2) >
서문엽이 개인적인 비밀 장소로 삼았었던 던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서문엽이 해치웠던 지저인이 자폭을 한 폭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에트로는 던전을 슥 훑어보다가 말했다.
"던전을 지탱해 줄 코어의 마력석 수명이 거의 다 됐군."
"그래?"
"약 41년 남았다. 수탐이라는 지저인이 자폭할 때 충격을 입어서 대지로부터 오러를 자동 공급 받는 코어의 기능이 망가진 모양이군."
"뭐, 이제 다시는 안 오니까 상관없어."
오랫동안 애용했던 개인적인 힐링 장소였지만 미련은 없었다. 더 이상 혼자만 아는 곳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두 사람은 수탐이 이동 흔적을 남긴 곳에 도착했다.
물론 서문엽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일 뿐.
그러나 피에트로는 허공을 빤히 들여다보며 관찰하고 있었다.
불과 몇 초쯤 지났을까.
"알았다."
피에트로가 분석을 완료했다.
"원래 그렇게 빨라?"
서문엽이 놀라 물었다.
"내겐 쉬운 일이다."
피에트로는 덤덤히 대꾸했다. 지저 문명 당대 최고 천재의 위엄을 보여주는 전직 대사제 피에트로.
서문엽은 아니꼬워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자제했다.
"이동해야겠군. 귀환석을 꺼내라."
"귀환석 없이는 안 돼?"
"같이 이동은 안 된다. 널 먼저 보내고 그다음 내가 가는 건 가능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공간 이동을 함께하려면 귀환석 같은 보조 장치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주의해. 이거 사용 횟수 얼마 안 남았을걸."
서문엽은 귀환석을 건네주며 충고했다. 그랬더니.
"별문제는 아니다."
한 손에 귀환석을 든 피에트로는 다른 손으로 자그마한 마법진을 만들었다.
파앗!
마법진에서 새어나오는 오러가 귀환석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이윽고 작업을 끝낸 피에트로가 말했다.
"20회로 늘렸다."
"헉!"
깜짝 놀란 서문엽.
피에트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주먹 도끼 수준의 물건이다. 어려울 리가 없지."
귀환석은 지저 전쟁 당시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거의 전무했던 인간이 제작에 성공한 거의 유일한 아이템이었다.
지금은 오러에 반응하여 간단한 동작을 하는 물건을 만들 정도가 되었지만, 지저 문명의 시각에서 보기에는 원시적인 수준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아무튼 피에트로의 재주를 본 서문엽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혹시 너 말이야. 코어도 만들 줄 알아?"
"마력석만 있으면 된다. 어떤 용도의 코어냐가 관건이지만, 지금까지 못 만드는 코어는 없었다."
천성적으로 묻어나오는 거만함. 그러나 전부 사실이므로 더 재수 없는 피에트로였다.
"그럼 오토바이에 들어가는 코어 만들 수 있어?"
"그 조잡한 구조를 가진 탈것 말이냐. 가능하다. 그 저능한 소음도 안 내고 속력도 몇 배는 높일 수 있지."
"헉! 만들어줘! 마력석 구해줄게."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
피에트로는 냉정했다.
서문엽은 이를 갈았지만 피에트로에게 갑질을 할 수단이 없었으므로 후일을 기약했다.
아무튼 귀환석을 촉매 삼아 공간 이동을 했다.
파아앗!
두 사람은 이윽고 생소한 지저의 공간에 도착했다.
그것은 무척 작은 동굴이었다.
폭이 1m밖에 되지 않아 둘이 나란히 이동할 수도 없었고, 길은 구불거려서 코너 너머에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서문엽은 배낭에서 손전등을 꺼내 앞을 비추며 투덜거렸다.
"중간 지점이다."
피에트로가 말했다.
"중간 지점? 휴게소 같은 거야?"
"비슷하다."
"공간 이동도 먼 곳으로 갈 땐 그런 게 필요한 건가?"
"아니."
피에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이동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이곳을 거쳐가지. 이곳의 코어가 추적을 방해하는 오러 역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럼 추적 못 하는 거야?"
"완전히 이동 흔적을 지우지는 못해. 추적이나 탐사를 방해할 뿐이지."
피에트로가 앞장서서 동굴을 걸었다.
걸으면서 피에트로가 계속 말했다.
"추적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곳에 함정을 설치해 외부인을 죽이는 것이지."
그 말에 서문엽은 방패와 창을 꺼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서문엽의 질문에 피에트로가 말했다.
"함정을 찾아 제거하고 코어를 찾아서 오러 역장을 일으키지 않도록 개조한다. 그 뒤에 이동 흔적을 쫓으면 된다."
"오케이. 함정 타입은?"
"주로 괴물을 숨겨놓는다. 또는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고 잘못된 길에 진입하면 일정 공간을 통째로 붕괴시키는 함정도 있지."
"후자가 더 골치 아픈데."
"문제없다. 내가 미리 감지할 수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길에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지저인이었다.
피에트로는 그 지저인을 알아보았다.
"여왕의 수하다. 여기서 죽은 것이군."
"그럼 이곳에 함정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
서문엽은 방패와 창을 꼬나 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촤르르륵!
동굴의 높은 천장에서 쇠사슬에 매달린 스켈레톤들이 줄줄이 내려왔다.
서문엽은 빠르게 훑어보며 숫자를 헤아렸다.
총 21마리.
흑색 갑옷으로 중무장을 했는데, 특이하게도 왜 저마다 쇠사슬에 달려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해답은 피에트로가 알려주었다.
"쇠사슬을 통해 오러와 함께 명령이 주입되고 있다. 두개골을 부순다고 파괴되지 않아."
"쇠사슬을 끊으면 된다는 거지?"
"그렇다. 쇠사슬도 보호 처리가 되어 있군."
"오케이."
서문엽이 앞장서서 스켈레톤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쇠사슬을 끊으면 죽는 스켈레톤.
그러나 쇠사슬이 보호 처리가 되어 있어 쉽게 못 끊는다.
"그냥 때려 부수면 되잖아!"
뻐어억! 콰직!
서문엽은 창으로 스켈레톤의 오른팔을 부수고, 연이어 방패로 왼쪽 어깨도 박살 냈다.
양쪽에서 스켈레톤들이 창을 찔러왔지만.
휘릭!
180도 턴을 하며 두 자루의 창을 모두 피했다.
그러고는 오른쪽에 있는 스켈레톤에게 달려들어서 창으로 척추를 찔러 부쉈다. 갑옷에 보호되지 않은 작은 틈새를 정확히 찌른 일격이었다.
쇠사슬과 연결된 척추 부위가 박살 나며 스켈레톤이 픽 쓰러졌다.
"좋아, 감 잡았어."
그러더니 정말로 스켈레톤을 부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스켈레톤들의 공격이 서문엽에게 하나도 먹혀들지 않았다.
감 잡았다고 했던 건, 스켈레톤들이 구사하는 창술이었다.
서문엽이 오래전에 경험했던 몇 가지 창술 중 하나가 스켈레톤들에게 입력되어 있는 걸 확인한 것.
무슨 창술을 쓰는지 알고 있으니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야, 궁금한 게 있는데!"
스켈레톤들을 부수며 소리쳤다.
"옛날에는 만인릉 황제 같은 작자도 있었는데, 지금 너희는 왜 이렇게 무기를 안 쓰냐?"
"오러에 대한 의존도가 심해진 탓이다."
그것이 약점이 되어서 인간에게 패배했다. 설마 인간이 오러를 다루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결과였다.
몇 분 후.
서문엽은 무기 영체화도 쓰지 않고 스켈레톤 21마리를 모조리 해치워 버렸다. 몸에 생채기 하나 안 난 깔끔한 전투였다.
"함정은 이거 같고, 코어는 어디 있지?"
"천장에 있군."
피에트로가 높은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드득!!
천장에 심어져 있던 둥그런 모양의 코어가 튀어나와 피에트로의 손까지 살포시 내려왔다.
피에트로는 귀환석을 개조했을 때처럼 작은 마법진을 생성하더니, 코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오래 걸렸다.
"됐다."
피에트로는 오러 역장을 일으키지 않도록 개조한 코어를 다시 원위치로 올려 보냈다.
"이동 흔적은?"
"여기 몇 개 있다."
서문엽이 무기를 손질하는 동안 피에트로는 이동 흔적을 분석했다.
"됐다."
피에트로는 이번에도 금방 분석을 끝내버렸다.
"근데 왜 이렇게 쉬운 거야?"
"방해하는 세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기 때문이겠지. 일반적으로 인간은 지저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왕은 떠도는 주민을 찾아 구조할 뿐이었으니까."
"아, 그러네."
결국은 설마 전직 대사제가 인간의 편을 들어서 자신들을 추적할 줄을 예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첫 번째 상급 사제로서는 몹시 억울한 일일 터였다.
흔적을 쫓아 공간 이동을 하기 전에, 서문엽이 물었다.
"첫 번째 말고도 상급 사제가 하나 더 있겠지?"
"그럴 거다."
최후의 던전이 무너지면서 살아남은 상급 사제는 3명일 거라고 피에트로가 예측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일전에 죽였다.
남은 건 둘.
"다른 사제들도 있을 거고, 아마 괴물들도 많겠지?"
"그럴 거다."
"그럼 단단히 각오해야겠네."
지금은 몸 풀기로 간단히 싸웠지만, 목적지에 진입하고 나서는 곧바로 무기 영체화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사실 상급 사제도 대단한 존재였다.
지저인의 3등급 중 검은색에 해당하는 최상위의 존재.
지저 전쟁 때도 7영웅이 함께 대항해야 했던 강적이었다.
물론 지금은 서문엽이 운 좋게 영체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서 전혀 다른 차원의 힘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별것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일전의 세 번째 상급 사제도 피에트로가 간단히 처치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제대로 싸우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무기 영체화는 그냥 영체화와 달리 43분까지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싸움이 43분 내로 끝나지 않는다면 승부는 알 수 없게 된다.
"일찍 결판을 지어야 해."
"안다."
"괴물류는 내가, 사제들은 네가 상대하는 게 좋겠지?"
"그렇다."
오러에 의존하는 사제들의 천적은 피에트로였다.
전지전능해 보일 정도로 오러 다루는 기술이 정점에 이른 피에트로라면 사제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반면 서문엽은 괴물을 사냥하는 데 도사였다.
그렇게 약속을 한 뒤에 두 사람은 공간 이동을 했다.
파앗!
***
파앗!
두 사람이 그곳 한복판에 도착했다.
서문엽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지형 파악부터 했다.
어두운 신전이었다.
중앙에 제단이 있었고, 제단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신전 전체를 감싼 외벽에는 아마도 주거 공간으로 보이는 수없이 많은 동굴이 파여져 있었다.
오러로 이루어진 불덩어리가 음산한 푸른빛을 내며 여기저기에 떠다녔다.
무엇보다도 신전 정중앙의 제단 앞에, 어마어마한 괴물이 서 있었다.
"뭐야, 저 괴물은? 한 번도 못 본 종인데?"
누구보다도 많은 던전을 공략한 서문엽이 보지 못한 괴물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피에트로가 말했다.
"나도 모른다. 저건 내가 통치하던 때에 만든 괴물이 아니야."
20m는 족히 될 법한 거대한 덩치를 가진 괴물.
그것은 서양의 용을 연상케 했다.
언뜻 보면 철갑 같은 단단한 껍질을 두른 거대한 뱀, 세르펜이지만 머리가 무려 8개나 나 있었다.
또한 몸통에 다리가 10개나 달려 있어서 지네를 연상케 했다.
몸통은 일반 세르펜보다도 5배는 더 크고 두꺼웠다.
압권은 등에 달린 날개.
박쥐의 날개처럼 생겼는데, 무척 거대했다.
저 엄청난 몸뚱이로 설마 날 수 있을까 의심됐지만, 저런 괴물이 날면 몇 배는 더 위험할 게 자명했다.
서문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거 설마 예언에 나온 그 괴물은 아니겠지?"
"아니다."
피에트로가 단언했다.
"생명 반응이 없다. 아직 미완성된 괴물이야. 기본 베이스가 세르펜인 걸 보면 첫 번째가 새로 만드는 괴물 같군."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분석안이 통하지 않았다.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서문엽이 안도한 가운데, 피에트로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군. 저 정도의 괴물을 만들려면 거의 모든 역량을 오랫동안 쏟아부어야 하는데, 따로 목적이 있던 놈이 왜 저 괴물 제작에 매달리지?"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잖아."
서문엽은 신전을 가리켰다.
"마치 이 신전이 저 괴물을 섬기는 것 같은 구조잖아."
그랬다.
제단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미완성된 괴물은 어떤 종교의 우상 같은 모습이었다.
< 잔당들의 던전(2) > 끝
< 잔당들의 던전(3) >
첫 번째 상급 사제의 은신처로 추정되는 곳에 왔더니, 제단 앞에 떡하니 모셔진 머리 8개와 팔 10개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 있다?
아무리 봐도 만인릉 황제가 말한 괴물이 연상될 수밖에 없었다.
"세르펜은 내 통치 때 만들어진 신종 괴물이다. 저 괴물은 세르펜을 베이스로 개조됐으니 황제가 말한 까마득한 고대의 괴물과는 연관성이 없다."
피에트로가 계속 말했다.
"차라리 지상 재침공을 위한 비밀 병기로 준비 중이었다는 편이 낫겠군."
"첫 번째는 그 고대의 괴물을 이곳에 불러들이는 게 목적이잖아. 왜 해야 할 일은 뒷전이고 저딴 괴물 개조에 몰두하겠어?"
"그게 이상하다는 거다."
"근데 왜 아무도 안 보이는 거야?"
"중간 지점에 설치해 둔 함정이 파괴된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정도 알람은 해놨겠지."
서문엽은 외벽에 뚫려 있는 수많은 동굴을 둘러보았다. 아마 저곳에서 지저인과 괴물들이 쏟아져 나올 터였다.
'단둘뿐인 걸 확인했을 텐데 아직 안 나와? 이거 상당히 경계하는 눈치인데.'
상급 사제 하나가 죽었고, 이곳을 올 때 거치는 중간 지점에도 침입자가 발생했다.
이만하면 그들도 누군가가 자기들을 노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세뇌했던 피에트로 아넬라에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 내가 여왕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도 알겠지.'
그래서 서문엽을 죽일 함정을 팠지만 실패했고, 오히려 함정을 꾸몄던 세 번째 상급 사제가 연락 두절됐다.
즉.
'상대가 나라는 것은 녀석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지.'
지저 문명을 몰락시킨 서문엽이었다. 그가 여왕과 손잡고 자신들을 노리고 있으니, 이 정도 경계심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우리가 중앙으로 나오면 사방에서 덮칠 생각인가 본데."
"그런 것 같군."
"뜻대로 따라주긴 싫으니까 일단은 놈들이 먼저 나오게 하자."
서문엽은 던지기에 증폭을 걸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창 한 자루를 대뜸 던졌다.
슈욱!!
쏜살같이 날아간 창이 한 동굴 속으로 쏙 들어갔다.
이윽고.
끼이이이익!
괴이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던졌던 창은 다시 서문엽의 손에 되돌아왔다.
"살러분이네."
소리만 들어도 서문엽은 쉽사리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동굴 속에서 오러로 이루어진 가오리처럼 생긴 괴물, 살러분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서문엽이 던진 창 때문에 자극받은 것이었다.
'기다렸다가 특정 신호를 주면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겠지만, 원래 괴물이 그렇게 잘 통제되지는 않지.'
간단한 지시를 따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괴물들은 본능을 잘 참지 못한다.
"넌 대기해."
서문엽은 피에트로에게 말해놓고는 홀로 앞으로 나섰다.
파앗! 팟! 팟!
끼이익······!
끼익!
창에 꿰뚫릴 때마다 살러분들이 희미한 비명을 남기며 흩어져 버렸다.
서문엽은 찌르기를 고속으로 펼치며 살러분을 무더기로 처치했다.
그때였다.
삐이익!
호각 소리와 같은 날카로운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성이 나서 서문엽에게 덤볐던 살러분들이 방향을 돌려 일제히 위로 솟아올랐다.
신전의 천장을 온통 뒤덮은 살러분들.
그리고 낮은 곳에 위치한 동굴들에서 아라크네들이 기어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키아아악!
다 성장한 자드룬 세 마리가 동굴 안에서부터 굵은 줄기를 드러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동굴들에서 중무장한 스켈레톤들까지 나왔다.
"용케 이렇게까지 모았군."
피에트로가 중얼거렸다.
몰락해서 숨은 잔당들치고는 괴물들을 상당히 많이 동원했다.
엄청난 숫자의 괴물 군단과 마주하니 서문엽의 표정도 변했다.
"이거 꽤 많은데?"
숫자도 숫자지만 괴물들이 종류별로 다양하다는 게 또 쉽지 않았다.
그때였다.
맨 위쪽의 동굴들에서 지저인들이 나왔다.
공중을 날고 있는 지저인들은 하나같이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서문엽은 그들을 분석안으로 살폈다.
그랬더니 가장 눈에 띄는 지저인 두 명이 보였다.
-대상: 상급 사제(지저인)
-근력 37/37
-민첩성 66/75
-속도 60/60
-지구력 51/51
-정신력 82/82
-기술 84/84
-오러 184/184
-초능력: 생체 조작, 백연
-생체 조작: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조작하는 데 소모되는 오러량이 대폭 줄어든다.
-백연: 오러를 하얀 독안개로 바꿔서 적의 시야를 가리고 중독시킨다.
생명체를 조작해 괴물을 만드는 데 특화된 상급 사제였다.
거기다가 독 안개로 다수의 적을 살육하는 데 특화된 초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괴물들도 함께 죽을 수 있으니 독 안개를 펼치지 못할 터였다.
상급 사제답게 오러량은 184.
푸른색-보라색-붉은색-검은색-하얀색 중 최상위 등급에 해당되는 흰빛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지저인이 있었다.
-대상: 타락한 대사제(지저인)
-근력 95/95
-민첩성 93/93
-속도 82/82
-지구력 89/89
-정신력 31/100
-기술 82/82
-오러 245/188
-초능력: 추종, 서약, 전사의 기억
-추종: 먼 시공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와 감응한다.
-서약: 먼 시공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충성을 맹세하고, 대가로 한계를 뛰어넘은 오러를 얻는다.
-전사의 기억: 실제로 본 적이 있었던 전사의 무예를 똑같이 재현한다.
"허······."
서문엽은 기가 막혔다.
지저인은 이름이 없고, 자신이 맡은 역할을 호칭으로 삼는다.
역할이 바뀌면 호칭도 바뀐다.
그래서일까.
분명 과거에는 첫 번째 상급 사제로 불렸을 저 지저인은 이제 타락한 대사제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치도 범상치 않았다.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이 모두 높았다. 육체를 잘 안 쓰는 다른 지저인들과 전혀 다른 무투파의 모습이었다.
더 압권적인 것은 오러 수치였다.
-오러 245/188
자신의 한계인 188을 뛰어넘은 245의 오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최후의 던전에서 봤던 대사제의 오러량을 뛰어넘은 수치였다.
서약이라는 초능력 덕에 자기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얻은 것이다.
추종과 서약.
타락한 대사제가 가진 두 초능력은 모든 추측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먼 시공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라니. 이거 만인릉 황제가 말한 그 괴물이 맞잖아!'
내심 아니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첫 번째가 내가 알던 것보다 더 강해졌다. 짧은 시간에 저렇게 성장할 수 있던가?"
피에트로가 지저인들을 살피며 말했다.
최후의 던전이 무너지고서 약 19년이 흘렀지만, 지저인들에게는 짧은 시간이었다.
그사이에 엄청난 오러량을 갖게 됐으니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서문엽이 말했다.
"여왕도 태초의 빛에게 선택받고서 오러가 성장했다고 했었지?"
"그렇다."
"쟤도 같은 경우야."
"태초의 빛의 선택을 받았을 리는 만무하고······."
좀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피에트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고대의 괴물에게 선택받아서 저렇게 강해진 건가. 그건 그 괴물에게도 태초의 빛처럼 선택한 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인데."
"그것도 아주 먼 곳에 있는데도 말이지."
"서문엽."
피에트로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왜?"
"반드시 첫 번째를 처치하고 문이 열리는 걸 저지해야 한다."
"그야 당연하지."
"그 괴물이 가진 영혼의 격이 태초의 빛을 흉내 낼 정도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본신의 힘은 어느 정도일지 예측조차 안 된다."
"쯧, 아무튼 저 자식은 그렇다 치고, 옆에 있는 다른 상급 사제는 누구야?"
"다섯째다. 괴물을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지. 저 거대한 신종 괴물을 만드는 일을 맡은 사람이 다섯째였나 보군."
양측은 아직 싸우지 않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타락한 대사제가 서문엽 일행에게 손짓했다.
서문엽은 손짓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뭐라고 말을 해보라는 뜻이군.'
그래야 그 말을 듣고 습득해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서문엽이 말했다.
"야, 이 쥐새끼들아. 이런 곳에 숨어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그러자 지저인들이 저마다 서문엽이 한 말을 읊조리며 한국어를 습득하기 시작했다.
"괴물을 또 이렇게나 만들 여력이 있으면 지들 살 터전을 새로 꾸미고 떠도는 동족들을 구할 생각을 해야지, 또 전쟁 일으킬 궁리나 하고. 아주 잘 하는 짓이다, 씨발 놈들."
-구할 것이다.
첫 번째 상급 사제, 즉 타락한 대사제가 말했다. 가장 먼저 한국어를 습득한 것이다.
-서문엽. 바로 너를 처치하고서 말이다.
"하하, 내 이름을 모르는 지저인이 없네."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 원수를 모를까? 이곳에서 널 처치하고 희생된 동족의 넋을 기린다. 그리하여서 나는······!
"너는 뭐? 빛이 내리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아는군.
할 말을 빼앗겼지만 타락한 대사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인마, 근데 그거 아냐? 예언의 선지자는 이미 누군지 밝혀졌어. 넌 아냐, 자식아."
-뭣?!
타락한 대사제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서문엽이 말했다.
"여왕이 선지자잖아. 그 여자, 성역이 붕괴되기 2년 전에 이미 태초의 빛의 선택을 받았던데."
-그게 무슨······!
-여왕이?
다른 지저인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타락한 대사제는 노하여 소리쳤다.
-그 여자가 그리 말하더냐?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가 이제 태초의 빛을 걸고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그래, 거짓말이다!
-대사제는 여기 계신 이분이야!
지저인들은 저마다 화를 냈다. 태초의 빛을 걸고서 거짓말을 한 여왕을 용서할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조용히 있던 피에트로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여."
타락한 대사제의 미간이 꿈틀했다.
-인간. 넌 누구냐? 내가 한때 첫 번째 상급 사제였다는 것을 어찌 알고 있느냐?
"내가 널 임명했으니 아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피에트로의 덤덤한 대꾸.
타락한 대사제는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어렸던 너는 나에게 말했다. 나처럼 위대한 이가 되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답했다. 이 세상 그 누군가가 강대한 힘이나 끝없는 권세, 명예를 가졌든 그것은 위대한 게 아니라고. 오직······."
-오직 태초의 빛의 사랑만이 위대하다······.
타락한 대사제는 충격받은 얼굴로 피에트로의 말을 받아 중얼거렸다.
피에트로는 미소를 지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자한 미소였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짓는 미소가 저러할까?
"첫 번째여. 가장 나를 닮았던 아이여. 어이하여 내가 지은 죄까지 닮으려 하는 것이냐?"
-거짓말! 인간인데 어째서 그분과 나만 아는 일을······!
"세 번째가 감당 못 할 사령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 내 충고를 어겼잖느냐."
그제야 타락한 대사제는 전후사정을 깨달았다.
-인간의 몸에 빙의하신 겁니까?
"그렇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에는 인간 따위가 되었다는 자괴감이 들었으나, 익숙해지니 괜찮아졌다. 인간도 나쁘지 않아. 빛 아래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까."
-대사제님!! 그렇다면 어째서 저 인간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까? 저희가 대사제님의 옥체를 멋대로 다뤄서 화나신 겁니까? 그것은 죄송스럽게도 대의를 위한······!
"그딴 건 문제가 아니다, 첫 번째여."
피에트로의 정체가 밝혀지고서 모두들 동요하여 웅성거렸다.
피에트로는 계속 말했다.
"서문엽의 말이 맞다. 여왕이 선지자다. 그녀는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들었고, 예언을 더 많이 들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제가 대사제입니다! 제가 당신의 뒤를 이어 태초의 빛을 모시고 있단 말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우리의 성역이 무너지기 수년 전 이미 태초의 빛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그런······!
타락한 대사제의 눈빛이 떨렸다.
아버지와 같은 피에트로가 자신의 추한 부분을 고백하니 동요한 것.
"그때 명상 중에 태초의 빛을 흉내 내는 간사한 영령을 보았는데, 지금 네가 섬기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놈이다."
폭탄 발언이 나오자 지저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 잔당들의 던전(3) > 끝
< 잔당들의 던전(4) >
-가짜라고?
타락한 대사제는 부들부들 떨었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어떻게 당신이 그분을 부정하는 말을!
"내가 부정하는 건 네가 말하는 그분이다."
피에트로의 말에 다른 지저인들이 동요했다.
그들은 모두 사제들이라 전직 대사제였던 피에트로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그들의 지도자였던 피에트로가 타락한 대사제를 부정하니 동요가 커졌다.
어쩌면 태초의 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독처럼 퍼져갔다.
타락한 대사제는 그런 부하들의 동요를 알아채고는 당혹했다. 일단 이 혼란을 수습하지 않으면 골이 깊어질 수 있었다. 의심이라는 건 점점 마음을 잡아먹는 괴물이니까.
타락한 대사제는 피에트로에게 호통 쳤다.
-닥쳐라! 지고한 문명을 망쳐 버린 죄인아! 여전히 거짓을 일삼는구나!
"그러니 나와 같은 실수를 답습하지 말라는 거다."
-지금 네 모습을 보아라!
그 말은 피에트로가 아니라 다른 사제들에게 한 말이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피에트로의 꼴을 보라고. 저따위 모습을 한 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냐고 말이다.
-태초의 빛의 말씀을 왜곡하여서 선지자 행세를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간의 편에 선 역적! 이제는 그분의 존재마저 왜곡하느냐!
"그리 생각한다면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피에트로는 제단 앞에 있는 거대한 괴물을 가리켰다.
"네가 말한 그분이 저딴 것을 만들라고 시키더냐?"
-뭐, 뭣이?
당혹감이 역력한 목소리.
피에트로가 말했다.
"금기에 속하는 온갖 흉측한 것이 다 들어갔구나. 스스로 호흡을 통해 오러를 모을 수 있고, 보유할 수 있는 오러량에 제한이 없고,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장치조차 보이지 않는군. 저런 괴물을 제정신으로 만든 것이냐?"
생명 조작의 대가였던 피에트로는 괴물에 들어간 메커니즘을 한눈에 파악한 상태였다.
"너희의 생각은 어떠한가?"
피에트로는 다른 사제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설마 저걸 태초의 빛의 말씀에 따라 만들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사제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타락한 대사제가 입을 열었다.
-문이 열릴 것이다.
그 말에 서문엽과 피에트로의 표정이 변했다.
알려진 예언은 선지자가 빛이 내리는 땅에 인도한다는 전반부뿐.
여왕만이 알고 있었던 예언의 후반부, 즉 문이 열리고 환란이 닥친다는 경고는 다른 지저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문이 열리면 우리에게 빛이 내리는 땅을 가져다줄 강력한 존재가 나타날 것이다.
그랬다.
그것이 타락한 대사제가 미지의 존재로부터 받은 거짓 예언이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
-지상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부흥을 다시 가져다줄 존재가 강림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타락한 대사제는 핏발이 선 눈으로 소리쳤다.
-저것이 뭐냐고? 바로 우리의 의지를 나타내는 괴물이다.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고 치열한지를 말이다!
그 말과 함께 타락한 대사제가 허공에 마법진 하나를 그렸다. 피에트로가 자주 보여주는 마법진과 비슷한 생김새였다.
"더 말로 하기가 불편해하는 눈치지?"
서문엽이 비아냥거렸다.
피에트로가 설명했다.
"첫 번째는 영령을 소환하는 내 재주를 흉내 내려 했지만 실패했지. 그 대신 자기 기억 속에 있는 자를 영혼처럼 만들어 스스로에게 깃들게 하는 법을 터득했다."
경고하지 않아도 서문엽도 타락한 대사제의 초능력을 알고 있었다.
-전사의 기억: 실제로 본 적이 있었던 전사의 무예를 똑같이 재현한다.
만만치 않을 것이다.
타락한 대사제는 근력 95, 민첩성 93, 지구력 89라는 높은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만 보면 딱히 배틀필드의 톱3 선수들보다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오러량이 압박이군.'
영혼을 저당 잡힌 충성에 대한 대가로 손에 넣은 245에 달하는 오러.
그것이 저 훌륭한 피지컬을 통해 발현되면 무시무시한 전사가 된다.
심지어 전사의 기억을 불러와 똑같은 무예를 펼친다면 무기 숙련도도 약점이 안 된다.
과연 타락한 대사제는 기억 속에서 어떤 전사를 불러낼 것인가?
이윽고 타락한 대사제가 무기를 꺼냈다.
파앗! 팟!
응축된 하얀 오러가 무기가 되어서 그의 두 손에 쥐어졌다.
그것은 대검 두 자루였다.
"응?"
서문엽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자루의 대검으로 취하는 준비 자세도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었다.
"첫 번째는 자기 입지를 다지기 위해 공적을 필요로 했지. 그래서 만인릉을 토벌하는 역할을 자청하여 맡았다. 그리고 실패한 탓에 그 뒤로는 전쟁에서 전면에 나서지 못했지. 결과적으로는 그 덕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지만."
피에트로의 부연 설명.
"한마디로 저 자식 기억 속에 있는 가장 뛰어난 전사가 만인릉 황제라는 거잖아?"
서문엽의 표정에 흥미가 떠올랐다.
"이거 재미있겠는데?"
만인릉 황제와 피 터지게 싸워본 이후로 다른 싸움이 모두 시시하게만 느껴졌던 차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다시 상대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저 자식 내가 맡을게. 다른 건 네가 정리해."
"그러지."
피에트로도 영령의 일격을 준비했다.
파파파파팟!
십여 개의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 광경에 지저인들이 움찔했다.
살아생전 저것을 펼치던 대사제는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그러자 타락한 대사제가 비웃었다.
-겁먹지 마라. 옛날보다 훨씬 못한 수준이다. 게다가 어떤 영령께서 저 타락한 자에게 힘을 빌려주겠느냐!
역시나 바로 약점을 꿰뚫어 보는 타락한 대사제.
피에트로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너희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색다른 선물을 주기로 했다."
십여 개의 마법진에서 음산한 기운이 풍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어서 영령이 되지 못한 사령들의 원한과 분노였다.
"너희가 그렇게 된 데는 내 잘못이 크니 여기서 책임을 진다. 오늘 이 자리에서 아무도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윽고 마법진에서 오러에 덧씌워진 사령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생명을!
-비통하다!
-어찌나 기나긴 고통이었던가!
사령들이 원한의 말을 쏟아내며 음험하게 공중을 맴돌았다.
"다 죽어라."
피에트로의 말이 떨어지자, 사령들이 지저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피해라!
지저인들이 공간 이동을 펼쳐서 피했다.
그 순간, 피에트로가 손가락을 까닥했다.
팟! 팟! 팟!
-헉!
사령을 피하려고 공간 이동을 펼쳤던 사제들 3명이 한 지점에 나타났다. 사령 둘이 그들을 덮쳤다.
콰아아앙!
-크아악!
-으억!
-안 돼!
사령들에게 물어뜯긴 사제들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본능적으로 공간 이동을 또 펼쳤다.
피에트로가 다시 손가락을 까닥했다.
사제 3명은 달아나지 못하고 다시 원위치에 나타났다.
사령들이 계속 덮쳤다.
-끄아아아!
-살려줘!
결국 사제 3인은 걸레짝이 된 몸에서 오러가 줄줄이 새는 채로 죽어버렸다.
그러자 다섯째 상급 사제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멍청한! 공간 이동을 쓰지 마! 대사제님, 아니 저자는 시공을 조작한다고!
그 말에 당황한 사제들.
공간 이동에 익숙한 지저인이 그 외에 어떤 수단으로 사령들을 피한단 말인가?
피에트로는 음산하게 웃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모두 이 자리에서 살아 나가지 못한다고. 공간 이동으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지 마라. 내 시야 안으로 들어왔을 때, 너희는 달아날 수 있는 방법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으으으······!
-진짜 대사제님이시다.
-대사제님만이 보였던 능력이야······!
사제들은 공포에 질렸다.
-멍청한 놈들! 뭣들 하는 것이냐!
타락한 대사제가 호통 쳤다. 그가 불같은 눈으로 쏘아보자, 흠칫한 다섯째 상급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괴물들에게 신호를 냈다.
삐익!
그러자 괴물들이 움직였다.
자드룬, 아라크네, 살러분, 그리고 스켈레톤들까지.
일제히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에트로가 사령들을 조종했다.
그러자 사령들이 괴물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오러 공격에 취약한 살러분들이 가장 먼저 소멸당했다.
그다음 자드룬 3마리도 동굴 깊숙이에 숨겨놓았던 약점인 본체를 사령들에게 들켜서 죽임당했다.
-키키키키!
-다 죽음만이!
-너희도 우리와 같은 죽음을!
미쳐 날뛰는 사령들이 살육의 잔치를 벌였다.
단단한 껍질을 가진 아라크네와 방어 능력이 좋은 스켈레톤들이 조금 까다로웠는데, 이는 서문엽이 해결했다.
"나도 슬슬 간다!"
서문엽은 초능력 '불사'를 증폭시켰다. 그리고 삽시간에 창과 방패를 영체화시켰다.
그동안 틈틈이 연습한 덕에 무기 영체화를 신속하게 펼칠 수 있게 된 것.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서문엽은 영체화된 방패를 냅다 집어던졌다.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떨어졌음에도 방패는 여전히 영체화를 유지한 채로 날아갔다.
부메랑처럼 원을 그리며 날아간 방패는 스켈레톤들을 무더기로 죽였다.
다시 선회하여 되돌아오면서는 아라크네들까지 몇 마리 죽이고 돌아왔다.
"한 번 더!"
또다시 방패를 던졌다.
그럴 때마다 스켈레톤들과 아라크네들이 죽어나갔다.
-어, 어떻게!
타락한 대사제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뭐? 나?"
서문엽이 능청스럽게 물었다.
-인간 따위가 어떻게 영체화를?!
"아하, 넌 만인릉 황제 본 적 있지? 넌 무기 영체화 못하냐?"
-영체화의 경지에 어찌 인간 따위가 발을 들일 수 있단 말이냐. 이건 거짓말이다! 눈속임이야!
"겨우 영체화의 경지가 아니야. 만인릉 황제만 했던 무기 영체화지."
타락한 대사제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력은 좋았다.
기억 속에 똑똑히 각인되었던 만인릉 황제의 위엄.
오러와 영혼이 함께 빛나던 두 자루의 대검.
그와 똑같은 것이 서문엽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누가 싸움 중에 넋 놓고 있냐!"
도리어 서문엽이 타락한 대사제를 호통 쳐서 일깨웠다.
"덤벼, 새꺄! 겁먹고 싸우지 못하는 걸 부하들에게 보여주려고? 그럼 얘들이 널 뭐로 보겠어? 아, 저 새끼 진짜 대사제 아닌가 보다. 진짜 우리가 속고 있는 거 아닐까?"
서문엽은 계속 그의 아픈 부분만 찌르며 도발했다.
-크윽! 이 개자식을!
타락한 대사제가 분통을 터뜨리며 서문엽에게로 쏘아져 나갔다.
-황제의 지고한 검술을 느껴보아라!
무기 영체화는 아니지만, 타락한 대사제 역시 오러를 구체화하여 만든 대검 두 자루를 들고 있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긴장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죽어가며 신나게 싸워보았던 검술을 또 만났을 뿐이었다. 당연히.
파앗! 팟!
서문엽은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휘둘러진 대검 두 자루를 가볍게 피했다.
뿐만 아니라 등 뒤로 창을 찔러 넣으며 반격까지 했다.
쉭!
아슬아슬하게 뺨을 스쳐 지나간 창.
창을 피하려고 흠칫 멈추는 바람에 타락한 대사제의 공세는 흐름이 끊겼다.
곧바로 서문엽이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갔다.
연속 찌르기.
이어서 방패로 후려치기.
타락한 대사제는 계속 뒷걸음질로 피하면서도 대검을 휘두를 간격과 타이밍이 나오지 않아 당혹했다.
"인마, 내가 그 황제 두 번이나 죽여봤어."
-······?!
타락한 대사제는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상대가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동요시키려는 의도일 터였다. 그런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타락한 대사제가 하늘로 솟구친 뒤, 두 자루 대검을 십자(十字)로 교차시켰다.
파아아아앗!!
십자 모양으로 오러가 쏟아졌다.
서문엽은 십자 밖으로 빠져나온 뒤, 곧바로 다시 타락한 대사제를 덮쳤다.
-무슨?!
곧바로 간파당하자 타락한 대사제의 불안함은 더욱 커졌다.
"말했지. 그 양반 두 번 죽였다고."
< 잔당들의 던전(4) > 끝
< 미완성 괴물(1) >
서문엽이 타락한 대사제를 상대하는 동안, 피에트로는 다른 사제들과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죽어!
한 사제가 오러를 일으켰다.
압축된 오러가 광선처럼 쏘아져 나갔다.
피에트로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파앗! 팟! 팟!
피에트로의 앞에 마법진 3개가 중첩되어 나타났다.
3겹의 마법진이 오러 광선을 막아냈다.
"너도 받아봐라."
이번에는 피에트로가 그 사제를 향하여 검지를 뻗었다.
이윽고 검지에 오러가 압축되기 시작했다.
피에트로는 예전의 대사제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죽어 본신의 힘을 잃었고 현재는 인간의 몸이라 오러량은 인체의 한계인 100 수준.
그러나 피에트로에게는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파앗!
공간 이동을 펼친 피에트로가 사제의 등 뒤에 나타났다.
-헉!
대경실색한 사제는 즉시 공간 이동을 써서 피했다.
하지만.
피에트로가 반대편 손가락을 까닥였다.
팟!
공간 이동을 펼쳤던 사제가 제자리에 나타났다.
피에트로는 웃었다.
"방어를 했어야지. 미숙하다."
파아아앗!!
-끄아아악!
오러 광선이 사제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다른 사제들은 그 광경에 넋을 놓았다.
-오러를 압축한 채로 공간 이동을 쓰고 시공을 조작하다니!
-역시 대사제님이다······.
-전대미문의 오러 운용술이야.
겁에 질린 사제들의 반응에 다섯째 상급 사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는 거야! 다 함께 저 인간 놈을 처치해!
'인간 놈'은 피에트로를 지칭하는 소리였다.
그 말에 사제들도 정신을 차렸다. 하찮은 인간의 몸을 하고 있는 대사제는 더 이상 존경해야 마땅한 자가 아니었다.
여전히 신전은 오러에 씌워진 사령들이 날아다니며 괴물들을 습격하고 있는 상황.
다섯째 상급 사제는 사제들을 독려하는 한편, 자신은 초능력인 '백연'을 펼쳤다.
츠츠츠츠츠!
오러로 이루어진 하얀 독안개가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타깃은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사령들이었다.
백연의 독은 오러를 중독시키는 특별한 성질이 있었기 때문에 오러에 깃든 악령들도 타격을 입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일단 악령들부터 제거하고 나면 괴물들과 함께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 저자는 인간의 몸을 하고 있어서 오러량이 별로 없어!'
다섯째 상급 사제는 피에트로의 약점을 꿰뚫어 보았다.
인간 중에서는 최고치의 오러를 가진 피에트로였으나, 오러와 함께 진화한 지저인의 육체에 비하면 족쇄를 차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얀 안개가 퍼져 나갔다.
안개 속에서 사령들의 맹렬한 움직임이 굼떠졌다.
하얀 안개는 점점 사령들을 옭아매고 점차 중독시켰다.
그런데 그때였다.
"안쓰럽구나."
피에트로가 양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하얀 안개가 삽시간에 양옆으로 갈라졌다.
안개가 치워지면서 뿌옇던 시야가 단숨에 말끔해지는 광경은 이적과도 같았다.
"그 가상한 노력이 말이다, 다섯째여."
-크으윽! 이 배신자가!
부들부들 떨던 다섯째 상급 사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오러를 일으켰다.
그의 오러가 죽은 괴물들의 사체에 스며들었다.
죽었던 아라크네와 스켈레톤들이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눈에는 생기가 없었지만 다시 일어난 아라크네와 스켈레톤들은 피에트로를 향해 다가갔다.
"호오?"
피에트로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언데드로 만들어 일으켜 세운 것은 아니고, 복잡한 통제 설정이 담긴 오러를 주입해 움직이게 만든 건가. 넌 그런 쪽에 재능이 풍부했던 아이지."
다섯째 상급 사제는 코웃음을 쳤다.
-여유 있는 척 도 소용없다. 인간의 몸이 수용 가능한 오러량은 한계가 있다는 걸 모를 줄 아느냐? 너와 함께 수많은 인체 실험을 한 이가 나라는 걸 잊지 마라!
"알다마다."
피에트로는 덤덤했다.
"그러니 옛정을 생각해서 나도 재미있는 것을 보여줘야지."
손가락을 튕기니 또다시 마법진 4개가 떠올랐다.
그 마법진은 피에트로에게 죽임당한 사제들의 시신 위에 떠올라 있었다.
다섯째 상급 사제는 아연실색했다.
-서, 설마?
피에트로는 계속해서 눈을 감고 죽은 이의 영혼을 부르는 '초혼'을 펼쳤다.
이윽고.
-으으으······.
-이렇게 원통할 수가.
죽었던 4명의 사제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사령 언데드였다.
-어, 어떻게 사령 언데드를 그토록 빠르게!!
다섯째 상급 사제가 기겁하여 소리쳤다.
"사령을 하도 다루다 보니 이런 것도 가능해지더군. 인간의 몸으로 이 정도면 아직 쓸 만한 솜씨 아니냐."
다섯째 상급 사제는 그런 피에트로를 괴물 보듯이 보았다. 그제야 그가 누구였는지 새삼 깨달았다.
지저 문명이 낳은 사상 최고의 천재.
똑똑하고 재능이 넘쳤던 탓에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 차 있었던, 그래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폭주하고 말았던 최고이자 최악의 대사제였다.
사령 언데드가 되어 깨어난 사제들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태를 파악했다.
피에트로가 그들에게 말했다.
"자, 너희가 깨닫게 된 바를 모두에게 알려주어라."
지시가 떨어지자, 언데드 사제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우리는 속았다!
-첫 번째 상급 사제! 이 악마와 내통한 이단자야!!
-우리가 하던 일은 태초의 빛의 뜻이 아니었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영령이 되지 못하게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동료였던 언데드 사제들이 일제히 성토하기 시작했다.
다섯째 상급 사제는 당황했다.
-이, 이게 무슨?
다른 사제들 또한 동요하는 것은 마찬가지.
-어떻게 된 거야?
-전 대사제님의 말씀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언데드 사제들로 인해 상황은 난장판이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타락한 대사제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더러운 꼴이지!'
죽은 줄 알았던 대사제가 인간의 몸으로 되살아나 인간의 편을 들었을 때부터 상황은 꼬여들기 시작했다.
'아니, 원인은 서문엽인가.'
재앙의 원흉인 서문엽이 생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물론 인간은 지저 세계를 자유롭게 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먼저 시공을 연결하지 않으면 공격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왕.
인간 사회에 숨어들어 떠돌던 동족들을 거두어 여왕 행세를 계속하던 그 여자가 서문엽과 접촉하려 한 것이다.
지금도 지저 세계를 들쑤시고 다니며 동족들을 모으고 있는 여왕이 서문엽과 손잡기까지 한다면 심각한 위협이 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서문엽을 처치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처치는커녕 오히려 서문엽에게 처치당했는지 이 일을 담당한 세 번째 상급 사제가 연락 두절되었다.
알고 보니 서문엽이 사령 언데드가 된 대사제와 손잡은 게 아닌가?
'대사제님이 인간과 손잡고서 이렇게 나를 방해하다니? 제정신이신가? 그렇게 강인하시고 지고지순하시던 신앙심은 어디로 가고 저런 추한 꼴이란 말이냐!'
아버지 같았던 이가 동족을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자신의 원대한 뜻을 방해하고 있으니 울분을 느꼈다.
타락한 대사제.
즉, 첫 번째 상급 사제는 옛날 성역이 붕괴되는 것을 지켜보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상대는 하찮고 미개함에도 불구하고 빛이 내리는 땅에서 살아가는,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았던 인간이었다.
그들은 미개하게도 사회가 단일적으로 통합되지 않아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살아가는 은혜로운 땅을 스스로 오염시키고 있었다.
미개한 데다가 폭력적이며 땅을 더럽히는 해로운 종족이니, 단숨에 박멸시키겠다는 결정은 타당했다.
그러나 그런 인간들에게 패배했고, 성역마저 무너지다니.
태초의 빛의 말씀에 따라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다는 믿음도 무너졌다.
말씀대로 행하였는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단 말인가.
태초의 빛의 가르침은 틀렸는가?
살아남은 사제들을 이끌고 붕괴되는 성역에서 대피한 뒤에도 그는 계속 고뇌했다.
결국 답을 찾기 위해 태초의 빛을 찾아 방황했다.
끊임없이 명상에 빠진 채 영령계를 탐사했다.
깊이.
더 깊이.
태초부터 존재하였던 위대한 영령이 있는 곳에 닿을 때까지.
무려 수천 일간 명상에 빠져 지냈다.
그리고 마침내 닿았다.
까마득한 세월을 존재했던 위대한 영령과.
그분은 자신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첫 번째 상급 사제는 스스로 대사제의 지위에 올라 문명을 다시 일으킬 진정한 지도자가 되었다.
-우리 위대한 문명이 인간 따위에게 질 리가 없다!
타락한 대사제가 두 자루 대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서문엽은 능숙하게 피하고는 방패를 앞세워서 몸통 박치기를 했다.
쿠웅!
타락한 대사제는 뒤로 밀려나지 않고 버텼지만, 대검을 휘두를 공간이 나오지 않아 공세가 주춤했다.
"다 이해해, 인마. 이 형님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대하지."
-이놈!
타락한 대사제가 발길질을 했다.
쿵!
방패로 받아낸 서문엽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게 마음 좀 곱게 쓰지 그랬어? 앙? 흉측한 괴물을 만들어 공격할 발상이나 하고 말이야. 너희들 대가리에는 평화라는 개념이 없냐?"
-해충과 평화를 논하더냐?
"어디나 해충은 있는 거야. 너처럼!"
서문엽이 연속 찌르기를 펼치며 타락한 대사제를 압박했다.
파앗!
순간 타락한 대사제가 공간 이동을 써서 사라졌다.
그러고는 좌측에서 나타나 두 대검을 십자로 교차시켰다.
-비록 성역을 잃었으나, 그것이 우리 문명의 모든 저력은 아니다!
콰콰콰콰콰콰!!
십자 오러가 서문엽에게 퍼부어졌다.
서문엽은 방패를 낀 채 몸을 날려 피했다.
오러의 파도에 휩쓸렸으나 방패로 막아낸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찍어 누르려 해도 생쥐처럼 살아나가는 서문엽의 대응에 타락한 대사제는 더더욱 노하여 소리쳤다.
-버려진 세계에 우리가 두고 온 선조들의 지혜가 남겨져 있다! 그것을 가져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이 새끼가 아직도 똥오줌 못 가리네. 그렇게 좋은 지혜를 왜 거기다 버리고 도망쳐 왔겠냐? 만인릉의 황제가 너희들 비웃지 않디?"
만인릉 황제가 언급되자 타락한 대사제가 흠칫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실패였던 만인릉 원정 때가 생각난 것이다. 그때 만인릉의 황제는 모두를 비웃고 있었다.
"네가 받들어 모시고 있는 그 새끼 말이야. 옛날에 만인릉 황제가 쫓아낸 괴물이야. 너희 선조가 만든 괴물이 감당 못 할 수준으로 진화한 탓에 세계를 통째로 버리고 달아나야 했던 그 괴물!"
-또, 또, 또 무슨 괴변을······!
타락한 대사제로서는 알 리가 없었던 까마득한 고대의 역사였다.
버려진 세계의 진실.
만인릉 황제가 무소불위의 군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업적.
그것들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해서 퍼부어주니 타락한 대사제는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 놈이 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나를 흔들려 하는구나.'
그리 생각하며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몸은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즉석에서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비사(祕史)를 관통하는 이야기 아닌가.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치는 동안, 피에트로와 사제들의 대결도 점점 혈투로 치달았다.
다섯째 상급 사제가 죽은 괴물을 조종하며 끊임없이 밀어붙였고, 피에트로는 자신의 오러 컨트롤 솜씨와 언데드 사제들의 화력 지원을 무기 삼아 대항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싸움 속에서 신전도 차츰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꿈틀.
제단 앞에 서 있는 미완성 괴물의 꼬리가 아주 미세하지만 움직임을 보였다.
< 미완성 괴물(1) > 끝
< 미완성 괴물(2) >
대결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타락한 대사제를 향해 창을 던지는 포즈를 취했던 서문엽은 돌연.
휘릭!
던지지 않고 한 바퀴 돌더니, 제단 앞의 괴물을 향해 창을 던졌다.
촤아아악!
무기 영체화가 풀리지 않은 창이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자신에게 창을 던지는 줄 알고 방어 태세를 갖췄던 타락한 대사제는 흠칫 놀랐다.
왜 갑자기 가만히 있는 괴물에게 창을 던졌을까?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지직!!
8개의 머리 중 하나를 직격하려는 순간, 괴물이 머리를 옆으로 움직여 피한 것이다.
창은 벽에 깊숙이 박혔다.
서문엽은 창을 한 자루 더 꺼내며 입을 열었다.
"그럴 줄 알았어. 내 감각은 못 속이지."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타락한 대사제와 치열한 대결을 펼치던 중, 서문엽은 감각에 이질적인 기척을 느꼈다.
그것은 던전에서 지겹게 만났던 괴물의 기척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만나본 적 없었던 새로운 존재감이기도 했다.
당연히 제단 앞에 모셔진 괴물에게로 신경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길게 생각하지 않고 냅다 창부터 던졌다.
그것은 옳았다.
괴물이 창에 꿰뚫리지 않으려고 움직였으니까.
-아, 아직 미완성이었을 텐데?
괴물 제작의 책임자였던 다섯째 상급 사제는 화들짝 놀라서 중얼거렸다.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미완성되어서 생명을 얻지 못한 괴물이 무슨 수로 스스로 움직인 것인지 불가사의였다.
동요하지 않는 것은 서문엽과 피에트로뿐이었다.
"그렇군."
피에트로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는지 입을 열었다.
서문엽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아? 저거 아직 미완성이었다며?"
"미완성일 수밖에 없지. 완성시킬 필요가 없었으니까."
"뭔 소리야, 그게?"
피에트로는 타락한 대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령 언데드구나. 그렇지?"
-······.
타락한 대사제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사령 언데드? 괴물로?"
서문엽은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분석안으로는 여전히 괴물에 대한 능력치가 나오지 않았다. 살아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이를 미루어 보아 피에트로의 추측이 맞을 터였다.
"괴물이 죽어서 사령을 남기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고, 다루는 법은 더더욱 알 수 없다. 소통도 되지 않는데 무슨 수로 괴물의 사령을 인도할 수 있을까."
피에트로의 말이 계속되었다.
"나조차도 불가능한데 첫 번째 네가 해냈다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지.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다."
자연스럽게 말에서 상대를 낮잡아보는 거만함이 묻어나왔지만, 타락한 대사제도 이를 순순히 인정하는지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 없었다.
"예언의 괴물이 한 일이다."
"버려진 세계에 있는 그 녀석? 사령까지 다룬다고?"
"스스로 영령계까지 가는데 사령을 다룬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
다만 영령계로 접속하는 것도, 사령을 다루는 것도 스스로 독학으로 터득했다는 부분이 무서운 것이었다.
억겁의 세월 동안 괴물밖에 없는 그 세상에서, 홀로 지성을 거기까지 진화시켰다는 게 실로 두려운 부분이었다.
"사령을 다루려면 소통이 되어야 한다. 사령을 다룰 수 있으며, 괴물과 소통할 줄 아는 자. 그런 존재는 하나밖에 짐작할 수 없군."
"먼 곳에 있는데도 여기다가 사령 언데드를 만드는 게 가능해?"
"그래서 육체는 이 녀석들이 제작한 것이겠지. 그리고 예언의 괴물이 자기 부하 괴물을 죽인 후에 사령을 이리로 보낸 것일 테고. 그럼 저 괴물을 힘들게 개조한 이유도 알 수 있다. 사령과 최대한 흡사한 형태로 만들기 위해 저렇게 개조한 것이야."
철갑을 두른 거대한 뱀 세르펜.
그러나 보통 세르펜보다 훨씬 거대하며, 머리는 8개에 다리는 10개, 등에는 거대한 날개까지.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최대한 강력하게 개조한 괴물이었다. 버려진 세계에는 저런 괴물들이 잔뜩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이를 생각하니 서문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안 되지, 싸우기 전에 쫄면 안 돼."
그런 예언의 괴물을 한 번 격퇴시켰던 살아생전의 만인릉 황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크르르륵.
괴물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냥 울음소리를 냈을 뿐이지만, 분명 다른 괴물들과는 달랐다.
"호흡기와 성대가 있음에도 오러를 진동시켜서 소리를 냈다. 의사소통을 할 줄을 안다는 뜻이다."
피에트로가 설명했다.
서문엽은 긴장하여서 방패와 창을 꼬나 쥐었다.
오러를 아끼기 위해 무기 영체화는 해제하고 있었지만, 언제든 다시 펼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문엽이 상대하기 싫어하는 타입인 거대하고 파워풀한 괴물이었다. 언데드라서 분석안이 나오지 않으니 더욱 까다로웠다.
"말도 할 줄 안다는 거야?"
"아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걸 보니 동물 수준의 의사 표현 정도다."
언어였다면 이 자리에 있는 지저인들이 금방 알아듣고 괴물의 언어를 터득했을 터였다. 그렇지 못하는 걸 보면, 다행히도 지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닌 듯했다.
-크르르르륵.
괴물은 8쌍의 눈을 서문엽에게 집중시킨 채로 다시 한번 나직이 울었다.
격렬하지는 않지만 분노가 담겨 있는 듯한 울음.
그러나 막상 서문엽을 공격하려 하지는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이상했다.
"저런 덩치를 갖고는 왜 덤비지도 않고 꼬나보기만 해? 인마, 덤벼! 눈깔 확 뽑아버릴라!"
소리쳐서 도발했지만 괴물은 미동도 없었다.
그쯤 되자 서문엽은 의심이 들었다.
"저 새끼 신체가 아직 미완성이라 거동이 불편한 거 아냐?"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휙!
빠르게 창을 무기 영체화시키고 집어 던진 것이다.
이번에는 몸통을 노렸다.
그런데.
화라라라라락!!
거대한 날개가 펼쳐졌다.
신전의 양 끝에 닿을 정도로 넓고 거대한 날개를 휘두르며, 괴물은 거대한 몸을 공중에 띄웠다.
신전 천장 끝까지 단숨에 솟아오른 괴물은 그대로 10개의 다리로 벽면을 붙들고 매달렸다.
그런 채로 계속 8개의 머리가 서문엽만을 응시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괴물이 보여준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서문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잘 움직이는군."
피에트로가 나직이 감상을 표했다.
-오오오! 잘 난다!
괴물을 만든 다섯째 상급 사제는 기쁨을 표했다. 저 거대한 괴물을 원활하게 비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실로 힘든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보았느냐! 태초의 빛께서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뜬금없이 타락한 대사제가 소리쳤다.
-태초의 빛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위해 괴물의 사령을 불어넣어주셨다!
-오오, 그런가!
-태초의 빛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어!
사제들이 이에 동조하여 희망을 얻었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에 피에트로가 말했다.
"태초의 빛께서 전지전능하시다는 믿음은 무슨 사이비 같은 발상이더냐? 그분은 태초부터 존재하신 영령으로서 억겁의 세월 동안 축적한 지혜로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해 주실 뿐이다. 너희가 정녕 사제가 맞긴 한 것이냐?"
-닥쳐라, 이단자!
"그만 진실을 보아라, 첫 번째여. 저 괴물이 원활하게 비행할 수 있는 이유는 다섯째가 잘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부터 비행에 능숙한 괴물의 사령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괴물이 버려진 세계 외에 어디에 존재하겠느냐?"
-닥쳐! 선조를 모욕하고 태초의 빛께서 행하신 일마저 부정하느냐!
타락한 대사제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서문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소용없어. 이미 충성 맹세에 영혼을 저당 잡혔다. 돌이킬 수도 없는 이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어.'
잘못을 깨닫고 후회한들 어차피 돌이킬 수 없으면, 끝까지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는 일밖에 없을 터였다. 저렇게 진취적이고 야망이 큰 유형일수록 그러하다.
태초의 빛이라는 절대적인 종교적 신념이 있지만, 그마저도 수단으로 전락될 수 있음은 이전에도 피에트로가 보여주지 않았던가.
타락한 대사제는 천장 쪽에 매달려 있는 괴물에게 소리쳤다.
-싸워라! 저 인간 놈들을 죽여라!
그러나 괴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의 반응조차 없었다.
그저 모든 시선이 서문엽에게 쏠려 있을 뿐, 타락한 대사제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타락한 대사제는 괴물이 자신의 지시를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당혹감을 느꼈다.
"왜 저 괴물이 덤비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될 테지?"
피에트로가 물었다.
서문엽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궁금하다. 저 새끼 왜 안 덤비지?'
겁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분명 싸우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몹시 신중하다고 할까?
괴물의 태도에서 경계심이 가득한 느낌이 들었다.
피에트로가 말했다.
"간단하지. 영체화가 된 무기에 호되게 당해본 경험이 있으니까."
"아!"
그 말에 서문엽은 탄성을 터뜨렸다. 피에트로는 정말 천재가 맞는 것 같았다.
저 괴물의 사령은 예언의 괴물의 수하일 것이라고 추측됐다.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다른 추측도 바로 귀결된다.
먼 옛날, 만인릉 황제와 싸워보았던 것이다.
예언의 괴물조차 패퇴시켰던 만인릉 황제였다.
그런 그가 휘두르는 무기 영체화된 대검에 호되게 얻어터진 경험이 있다면 지금의 상황도 설명된다.
한 번 당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기 영체화를 할 줄 아는 서문엽에게 덤비지 못하고 경계만 잔뜩 하는 것.
"어떠냐? 첫 번째여. 우리의 주장대로 설명하니 모든 게 이치에 맞아떨어지지 않으냐."
언데드 사제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추종했던 타락한 대사제를 증오 어린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대사제님, 저자가 하는 말이 사실입니까?
다섯째 상급 사제가 어색한 말투로 타락한 대사제에게 물었다. 계속 따라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심경이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의심하지 마라. 모든 게 저 이단자의 계략이다. 그럴듯한 논리와 죽은 사제들까지 언데드로 깨워 그 거짓에 동조하게 만들고 있다.
타락한 대사제의 주장에 사제들은 더욱 갈피를 못 잡고 혼란을 느꼈다. 그 또한 옳은 소리 같았다. 전 대사제 피에트로가 얼마나 똑똑한지는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에이 씨발, 덤비든지 말든지 어서 정해! 언제까지 쉴 참이야?"
서문엽이 보다 못해 소리쳤다. 급한 성질을 못 참고 소리친 것 같지만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적의 자중지란은 환영할 만했지만, 이제는 더 시간을 줘봐야 타락한 대사제가 혼란을 수습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갈피를 못 잡게 된다면, 결국은 자기들이 믿고 싶은 쪽을 선택하게 되어 있어.'
이쪽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저들이 벌레처럼 여기는 하찮은 인간 말이다. 이쪽으로 돌아서느니, 결국은 하던 대로 타락한 대사제를 따를 터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르르르륵!!
위에서 괴물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화락!
날개를 좌우로 활짝 펼치는 것이, 금방이라도 날 듯했다.
비로소 괴물도 싸울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서문엽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너, 너 말고 인마."
피에트로도 다시 싸움을 준비했다.
"결국 싸워야 한다. 저 괴물을 누가 통제하는지 생각해 보아라."
예언의 괴물.
"먼 시공 너머에 있으니 자세한 명령을 일일이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기본적으로 통제 설정된 지시 사항은 몇 가지 있을 거다."
"인간을 죽여라 같은?"
"그건 필수겠지."
-크롸라라라!!
괴물이 마침내 포효했다.
억눌려 온 분노를 폭발시키듯, 서문엽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이 똑바로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폭풍을 연상케 했다.
< 미완성 괴물(2) > 끝
< 미완성 괴물(3) >
온몸으로 부딪쳐 짓누를 것처럼 날아들던 괴물.
서문엽도 신속하게 무기 영체화를 시켰다.
그러자 괴물은 도중에 날개를 활짝 펼쳐 속력을 줄이더니, 이윽고 공중에 멈춰 섰다.
그것만으로도 사나운 바람이 몰아쳐서 흙먼지와 머리칼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헹, 쫄았냐?"
서문엽이 소리쳤다.
대답 대신 8개의 머리가 일제히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잉?"
서문엽은 설마 싶었다.
설마가 맞았다.
8개의 아가리에서 칠흑빛의 오러 덩어리가 뭉쳐지기 시작한 것.
"오러를 저렇게 다룰 수 있는 괴물이 있다고?"
기가 막혀서 소리치는 서문엽에게 피에트로가 말했다.
"나와 마찬가지다. 저건 저 몸 안에 깃든 사령의 능력이야."
인간의 몸이 되었으나 인간이 흉내도 못 내는 오러 운용을 펼치는 피에트로.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예언의 괴물이 보낸 부하이자 까마득히 긴 세월을 존재해 온 괴물의 영혼은 오러를 다루는 능력마저 터득한 것이었다.
-푸하악!
8개의 흑색 오러 구체를 일제히 발사했다.
서문엽은 오러 구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에 섬뜩함을 느꼈다. 하나하나가 심영수의 폭발 구체보다 위력이 강해 보였다.
'이건 막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서문엽은 단숨에 결판을 짓기로 결심했다.
오러 소모가 아까웠지만, 서문엽은 전신을 영체화시켰다.
삽시간에 영체로 변한 서문엽은 재빨리 날아올랐다.
8개의 흑색 오러 구체는 영체가 된 서문엽을 그냥 통과한 채 신전 사방으로 떨어졌다.
꽈르르릉!!
콰아아앙! 콰르르릉!
여지없이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신전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외벽도 무너지면서 바위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다.
낙석에 휩쓸려 괴물들이 죽어나갔다.
괴물들까지 죽을 정도이니 사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으악!
-피해!
몇몇 사제들이 패닉에 빠져 공간 이동을 펼쳤다.
그 순간,
낙석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냉정했던 피에트로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팟! 팟!
공간 이동을 펼쳤던 사제 2인이 한 자리에 나타났다.
어리둥절했던 사제들은 바로 위에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를 피하지 못했다.
쩌어억!
-끄억!
-악!
사제 2인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
그 광경을 본 타락한 대사제가 분통을 터뜨렸다.
-멍청한! 공간 이동을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타락한 대사제는 두 자루의 대검을 휘둘러 떨어지는 바위를 부숴 버리고 있었다. 오러를 응축해 만든 대검이므로 얼마나 큰 바위든 무차별로 썰렸다.
-대사제님께로!
오러로 방어막을 펼치던 다섯째 상급 사제가 황급히 소리쳤다. 그들은 바위를 베어 부수는 타락한 대사제 주위로 모여들었다.
타락한 대사제가 낙석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했다.
한편, 피에트로는 낙석을 피해 공간 이동을 펼쳐서 신전 천장으로 이동했다. 시공 조작을 자유자재로 하는 그는 이 자리에서 공간 이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몸을 둥실 띄운 채로 타락한 대사제 일당을 내려다보며, 피에트로가 말했다.
"끝을 내지."
파파파파파파팟!
십여 개의 마법진이 허공을 수놓았다.
이 와중에 영령의 일격까지 감당하게 되자 타락한 대사제는 질린 표정이 되었다.
-방어막을 펼쳐라!
마법진에서 사령들이 오러에 빙의된 채 쏟아져 나오자, 타락한 대사제 일당은 일제히 오러 보호막을 펼쳐 둘러쌌다.
그런데 사령들은 타락한 대사제 일당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일제히 방향을 돌려 괴물에게로 향한 것이다.
"서문엽! 사령 언데드의 약점은 한결같다!"
피에트로가 소리쳤다. 타락한 대사제 일당을 방어에 전념하게 만들어서 끼어들지 못하게 한 뒤, 괴물부터 처리할 의도.
-오케이!
서문엽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영체가 된 서문엽은 괴물을 향해 똑바로 날아들었다.
괴물은 가장 꺼려하는 영체가 다가오니 흠칫 놀라 더 높이 날아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서문엽이 더 빨리 솟구쳐서 보다 높은 곳을 점유했다.
다시 재빨리 영체화를 풀고 무기 영체화로 전환.
이윽고 괴물이 가진 8개의 머리 중 하나를 창으로 후볐다.
콰지지지직!!
-끄오오오오오오오!!
괴물의 처참한 비명이 신전을 쩌렁쩌렁하게 채웠다.
영체화된 창에 머리가 깊숙이 꽂히니, 육체뿐만이 아니라 사령에 타격을 입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피에트로가 소환한 사령들까지도 괴물들에게 달라붙어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괴물의 철갑 비늘을 뚫기는 힘들었지만, 육체보다는 영혼에 가해지는 타격이 더욱 컸다.
괴물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거대한 몸이 격렬하게 움직이니 여기저기 부딪치며 낙석을 더 만들어냈다.
자칫 잘못하면 몸부림에 휩쓸려 크게 당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서문엽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끝장을 내야지.'
생명력이 질긴 괴물들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서문엽은 영체로 변신해서 과감하게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영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총 120초.
서둘러야 했다. 지금은 오러를 많이 소모해서 그중 대략 40여 초만 남은 상황이었다.
몸부림치며 날뛰지만 영체 상태인 서문엽에게는 영향이 없었다.
서문엽은 곧장 괴물의 머리 하나를 창으로 찔렀다.
콰지직!!
-끄오오오오!
머리 또 하나가 당하자 괴물의 비명이 더욱 커졌다.
어찌나 쩌렁쩌렁한지 비명만으로도 신전 전체가 진동했다.
"이 자식 왜 이렇게 안 죽어?!"
서문엽이 소리쳐 물었다.
"놀랍군. 아주 완성도 높게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완벽한 사령 언데드는 웬만한 타격에도 영혼이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피에트로의 부연 설명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예언의 괴물은 괴물 주제에 지성이 어디까지 진화했단 말인가?
"하지만 타격을 입은 것은 확실하다. 계속 밀어붙여."
"좋아!"
피에트로와 서문엽이 사력을 다해 괴물을 공격했다.
서문엽은 영체로 변신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오러를 최대한 아끼며 싸웠다.
치열한 격전.
머리 또 하나를 잃자, 5개밖에 안 남은 괴물은 고통에 버둥거리다 말고 불같은 분노가 서린 눈빛으로 서문엽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서문엽은 겁먹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때 괴물이 다시 흑색 오러 구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머리 3개가 당한 탓에 이제는 5개였다.
"쏴봐, 씨발!"
서문엽이 소리쳤다. 또다시 영체로 변신하면 그만이었기에 자신 있었다.
그런데 괴물은 돌연 흑색 오러 구체 5개를 사방으로 쏘아 날렸다.
콰르릉! 콰콰콰쾅!!
신전이 또다시 폭발에 충격을 받아 낙석이 떨어졌다.
제단도 동굴도 무너지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이 공간을 통째로 붕괴시킬 작정이다!"
피에트로가 경고했다.
"저 새끼 바보 아냐? 그럼 우린 공간 이동으로 피하면 그만이잖아?"
"저 괴물도 던전이 아닌 지저 공간에서도 생존할 자신이 있어 보이는군.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육체와 오러를 지녔을 뿐더러, 언데드이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생태계도 필요 없지."
그랬다.
괴물은 어차피 언데드였다. 어떤 공간에서도 존재할 수가 있었다.
신전을 무너뜨리려는 지금의 행동은 서문엽과의 싸움을 피해 도피하려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똑똑한데?"
서문엽은 괴물의 지능을 재평가했다. 그리고 기필코 죽이기로 결심했다.
"후환 없이 모두 죽여야지. 넌 저 녀석들을 맡아!"
"알았다."
서문엽은 괴물에게로, 피에트로는 타락한 대사제 일당에게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싸움은 여의치 않았다.
괴물이 계속해서 신전을 부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모두들 낙석을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직 영체로 변신한 서문엽만이 모든 장애물을 통과하며 괴물에게 쏘아졌다.
이번에 노리는 것은 머리가 아니었다.
-죽어!
서문엽은 괴물의 한쪽 날개를 노렸다.
콰지지지직!!
-끄어어어오오오오!!
날갯죽지가 찢겨나간 괴물은 땅으로 추락했다.
영체 상태를 해제한 서문엽도 괴물을 향해 추락했다. 창을 무기 영체화시키고 똑바로 괴물을 조준했다.
푸우우욱!!
유성처럼 추락한 서문엽은 창으로 괴물의 머리 하나를 꿰뚫었다.
고막이 나갈 것 같은 괴물의 비명.
그런데 그때였다.
괴물의 남은 4개의 머리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고주파의 비명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이건?!'
서문엽의 안색이 변했다.
저건 지저인이 자폭할 때 보이는 현상이었다.
"자폭까지 학습했군."
피에트로가 말했다.
타락한 대사제 일당도 경악한 표정이었다.
괴물의 체내에서 대량의 오러가 증폭되기 시작했다.
아주 확실한 자폭의 전조였다.
"터지기 전에 딴 데로 보낼 수 없어? 그때 그 세 번째인가 하는 녀석처럼."
피에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저항력이 있는 상대는 마음대로 공간 이동으로 보낼 수 없다. 저 괴물은 저 와중에도 아직 오러가 격렬히 저항하는군."
이렇게 되니 곤란해졌다.
"차라리 잘됐다. 우리도 힘이 소진되어서 더 싸우기 버거웠다."
피에트로가 나직이 결론을 내렸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피하자. 그래도 여럿 족쳤으니까."
사제들을 상당수 죽였고 모으고 있던 괴물 군단도 전멸시켰다. 무엇보다도 저 괴이한 괴물을 처치하지 않았나. 예언의 괴물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는지 알게 되기도 했다.
정작 중요 인물을 처지하지 못한 게 아쉬웠지만 여기까지였다.
서문엽은 귀환석을 꺼냈다.
피에트로는 서문엽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공간 이동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 전에 타락한 대사제 쪽을 보며 한 마디 말을 남긴다.
"깨달아라, 첫 번째여. 너희가 잘못되었음을."
파앗!
그렇게 서문엽과 피에트로는 사라졌다.
***
서문엽이 개인 공간으로 썼던 던전의 출입구 앞에 도착했다.
이제야 간신히 격전을 마치고 한숨 돌릴까 싶을 타이밍.
그러나 서문엽은 급히 소리쳤다.
"다시 그리로 가자!"
"뭐?"
"어서!!"
의아함을 느꼈던 피에트로. 그러나 곧 서문엽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좋은 생각이다."
파앗!
두 사람은 다시 공간 이동으로 신전으로 갔다.
신전은 여전히 붕괴되고 있었고, 괴물은 자폭 직전이었다.
타락한 대사제 일당은 공간 이동으로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동 흔적을 읽어!"
"따라와라. 바로 떠나야 하니까."
피에트로는 재빨리 타락한 대사제 일당이 있었던 자리로 갔다.
그곳에 남아 있는 공간 이동의 흔적을 분석했다.
시간 싸움이었다.
괴물이 곧 터질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열심히 집중했던 피에트로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읽었다!"
역시나 지저 문명 최고의 천재답게 빨랐다.
"그럼 쫓아가야지."
"어디까지나 기습이다. 싸움을 더 지속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나도 알아."
두 사람은 다시 공간 이동을 썼다.
타락한 대사제 일당이 도망친 곳으로.
파앗!
두 사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괴물이 마침내 폭발했다.
엄청난 폭발이 신전을 삽시간에 잡아먹었다.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만인릉을 연상케 하는 무덤 도시였다.
그러나 만인릉처럼 규모가 크거나 순장당한 지저인들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왕의 무덤 정도였다.
을씨년스러운 정적만이 있는 무덤 도시에 한 무리의 일당이 보였다.
바로 피신해 온 타락한 대사제 일행이었다.
그들은 서문엽과 피에트로를 보자 깜짝 놀랐다.
-속았구나!
타락한 대사제가 소리쳤다.
"죽어, 새꺄!"
서문엽은 재빨리 영체로 변신하고는 타락한 대사제에게로 날아갔다.
긴장이 풀려 무방비 상태가 된 적들에게 가하는 불시의 기습.
순간적으로 떠올린 서문엽의 작전이 성공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타락한 대사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다섯째 상급 사제.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오러 보호막을 겹겹이 펼쳤다.
콰쾅! 쾅! 콰쾅!
서문엽은 단숨에 모든 보호막을 부수고는,
콰직!
다섯째 상급 사제의 몸통을 창으로 꿰뚫어버렸다.
-꺼어어억!
다섯째 상급 사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서문엽도 영체화의 남은 시간이 5초밖에 안 남았다.
-다섯째!!
그 덕에 싸울 태세를 갖춘 타락한 대사제가 절규했다.
다섯째 상급 사제는 죽어가면서 타락한 대사제를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어. 내 목숨을 너에게 걸어본다. 부디 우리의 목적을······.
다섯째 상급 사제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숨졌다.
-네 이놈!!
악에 받친 타락한 대사제가 노호성을 터뜨리며 서문엽에게 덤벼들었다.
오러가 얼마 없는 서문엽은 영체화를 풀고 무기 영체화로 전환해 맞섰다.
그러나 기습으로 끝낼 생각이었기에 대항하면서 물러섰다.
이에 피에트로까지 끼어들자 타락한 대사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냥 갈 줄 알았지? 근데 난 던전에서 성과 없이 나온 적이 없어."
서문엽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눈빛은 폭력적인 광기가 흉흉히 빛나고 있었다.
"이게 나야. 또 보면 그땐 넌 죽는 거야."
파앗!
그렇게 정말로 싸움이 끝이 났다.
< 미완성 괴물(3) > 끝
< 영혼의 만남(1) >
그렇게 정말로 싸움이 끝이 났다.
서문엽이나 피에트로나 오러가 고갈된 상태여서 더 싸울 여력이 없었다.
공간 이동으로 탈출해 지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진이 다 빠진다."
서문엽은 아예 드러누웠다.
음침한 지저에만 있다가 햇볕과 바람과 산이 있는 맑은 공기를 마시니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피에트로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무리하게 많은 오러를 소모한 탓에 안색이 창백하게 질릴 정도였다.
"좀 쉬고 회복한 뒤에 다시 거기 가볼까?"
서문엽의 제안에 피에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다. 바보들도 아니고 이번에는 흔적을 완전히 지웠겠지. 중간 지점을 거쳐 가고 그 중간 지점을 붕괴시키면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는 거다."
그 말에 서문엽도 납득했다.
애초에 중간 지점을 만들어서 이동했을 정도로 신중했던 놈들이 그 정도 발상도 못할 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러면 이제 녀석들을 추적할 수 있는 연결 고리가 없어진 거 아냐?"
"그렇지."
"에휴."
"대신 그쪽도 괴물 제작에 특기가 있었던 다섯째가 죽었다. 앞으로는 사령 언데드로 괴물을 만들더라도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은 불가능하다."
타락한 대사제를 처치한다는 목적은 실패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번 싸움은 엄청난 대승이었다.
그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미완성 괴물도 처치했고, 타락한 대사제를 따르던 사제들도 다수 처치했다.
거기다가 주요 측근인 다섯째 상급 사제를 처치한 것이 최대 성과. 막판에 다시 되돌아가 추적, 기습한 판단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지금까지 그 괴물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아직 문을 열 방법을 모른다는 거지?"
서문엽이 말을 이어 받았다.
피에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예언의 괴물이 아직 시공간에 대한 이해력이 전혀 없어 보인다."
설명이 계속되었다.
"버려진 세계는 우연이라도 진입할 수 없도록 선조들이 봉인한 지역이다. 중간 지점에 오러 역장을 발생시킨 것을 봤지? 그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첫 번째 상급 사제도 공간 이동을 써서 그쪽으로 갈 수가 없는 거구나."
"어딘지 모르는데 갈 수도 없을뿐더러, 단단히 봉인되어 있으니 찾을 수조차 없지."
"그럼 문은 어떻게 열지?"
"봉인을 일시적으로 해제하면서 버려진 세계와 연결시키는 터널을 문이라고 예언에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결국은 버려진 세계의 위치를 알아내야 해.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서든, 아니면 예언의 괴물이 자기 위치를 알려주든지."
"기록 같은 것은 이제 남아 있지 않겠지?"
혹시라도 남아 있는 기록을 타락한 대사제가 입수하면 큰일이었다.
"버려진 세계는 애당초 숨기려 했던 역사이고, 그나마 남은 기록도 만인릉 황제가 싸움이 끝나고 지워 버렸겠지. 다시는 문을 열지 못하게."
결국 문을 열 방법은 예언의 괴물이 자기 위치를 알려주어서 문을 열게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예언의 괴물은 시공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자기 위치도 어딘지 모르고 표현할 방법도 없는 것이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서문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시공간에 대한 지식을 첫 번째가 가르쳐 주고 있는 건가?"
"그게 재미있는 부분이지."
피에트로가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 싸늘한 냉소였다.
"놈은 태초의 빛으로 가장하고 있다. 그런데 모르니까 가르쳐 달라고 할 수가 있을까?"
"못하지. 정체가 들통나니까."
한 점 의심 없이 신념이 확고해 보였던 타락한 대사제의 태도를 생각하면, 아직 놈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문엽은 분석안에 있었던 타락한 대사제의 특이점을 떠올렸다.
-서약: 먼 시공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충성을 맹세하고, 대가로 한계를 뛰어넘은 오러를 얻는다.
"그런데 이미 첫 번째는 그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 같은데?"
"영혼을 걸고 서약을 했겠지. 본래 사제들이 태초의 빛께 하는 의식이다. 태초의 빛께 직접 서약할 수 있는 것은 대사제뿐이지만, 그분께 아직 닿지 못하는 일반 사제들도 스스로 서약을 하며 태초의 빛을 따르는 영령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렇게 해서 신념도 강해지고
종종 오러도 강해지지."
왕년에 대사제였던 피에트로도, 여왕도 태초의 빛으로부터 힘을 얻어 강한 오러를 손에 넣은 케이스였다.
그런데 그것을 예언의 괴물이 흉내 낸 것이었다.
"하지만 설사 자신의 영혼이 걸려 있다 해도, 첫 번째라면 놈이 태초의 빛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영혼이 걸려 있는데도?"
"그 정도로 신념이 강한 아이지. 그래서 더 위험한 거고."
"하지만 그런 타입은 반신반의할 때는 하던 대로 계속 밀어붙이곤 하지."
"그게 문제다. 그러다가 결국은 잘못된 것을 깨닫더라도 스스로를 속이게 되지."
피에트로 자신의 경험담이기도 했다.
"너무 닮았어."
라고 탄식하며 피에트로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여왕에게 가서 오늘 일을 보고하자."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피에트로는 귀환석을 활용한 공간 이동으로 함께 여왕의 거처로 이동했다.
"무사하셨군요!"
두 사람을 맞이하는 여왕의 표정이 무척 밝았다. 두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실종됐던 당신 수하는 죽었소."
피에트로의 직설적인 말에 여왕은 침통한 얼굴이 됐다.
"짐작했어요."
"그리고 놈들의 목적을 알아냈소."
그들은 오늘 있었던 싸움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여왕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목적이 뭔지 확실히 알 것 같네요."
서문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혹시 걔들 문을 열지 못하니까 아예 사령 언데드 괴물을 만드는 방식으로 영혼만 이쪽으로 건너오려는 거 아닐까?"
"아냐."
"아니에요."
피에트로와 여왕이 동시에 답했다. 서문엽은 순간 삐칠 뻔했다.
"예언은 틀리지 않아요."
"아무리 괴물을 잘 만들어도 그 놈의 본래 힘을 재현할 수는 없다. 거기다가 괴물은 무엇보다도 생존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스스로 죽고 언데드가 되는 선택을 할 리가 없지."
"근데 지금 걔들이 하는 게 그거밖에 없잖아?"
이에 피에트로가 말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사령을 원격으로 조종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쪽을 살펴보며 시공간에 대한 지식을 알아낼 생각이겠지. 물리적인 거리상으로는 아주 멀지만, 영혼을 보내는 것은 가능하니까."
이 부분은 설명을 들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서문엽이었다. 아무래도 지저인이 아니다 보니 영혼을 어떻게 다루느니 마느니 하는 것들이 인간으로서는 잘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서문엽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 너, 그 자식 만난 적 있다며?"
"누굴 말이냐?"
"예언의 괴물."
그 말에 피에트로는 침묵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때 느꼈던 두려움의 후유증으로 피에트로는 다시는 영령계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언급하기도 싫었을 터였다.
하지만 서문엽은 재차 말했다.
"다시 그 자식 만나봐. 만나서 얘기라도 나눠봐. 탐색전인 셈이지."
"으음······."
피에트로는 나직이 신음했다.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제는 실마리가 모두 끊긴 상황.
이제 타락한 대사제를 쫓을 방법이라고는 넓은 지저 세계를 탐사하고 다니는 것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지만, 아예 직접 당사자를 만나보는 것도 좋은 생각이긴 했다.
아무리 추측을 남발해 봤자 직접 만나보는 것만 못한 것이다.
여왕은 차마 강요는 못 하겠고,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없으니 그냥 간절히 피에트로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배려 따윈 없는 서문엽은 계속 밀어붙였다.
"인마, 쫄았냐? 야, 내가 갈 수 있었으면 진작 가서 만나봤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군."
"야, 전쟁 때 너희가 왜 나한테 졌는지 알아?"
피에트로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문엽이 계속 말했다.
"너희는 계속 태초의 빛이니 뭐니 하면서 정신적으로 의지하잖아. 근데 난 그딴 거 없어. 다 내 힘이고 내 책임이고 내 판단이야."
"······."
"그때 만났을 때는 두려웠다고 했지? 근데 그때 너는 태초의 빛을 찾아가려고 했었어. 당연히 경계심이 모두 해제된 경건한 마음가짐이었겠지. 심적으로 쫓길 시기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잖아? 이번엔 마음에 힘 빡 주고 가보라고."
피에트로는 더 고심하거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보지."
"진심이신가요?"
여왕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녀도 태초의 빛을 찾아 영령계를 깊숙이까지 접속해 본 터라 두려움에 공감이 가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더 버릴 것도 없는 신세라고 생각했었는데."
피에트로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빛이 내리는 땅에 오고 나서 새삼 삶에 대한 미련이 생겼었나 보오."
피에트로는 창밖에 보이는 아름다운 산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밝게 내리쬐는 자연의 빛도, 깊이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무한한 우주가 펼쳐진 하늘도, 내게는 이 자연의 모든 것이 바라만 보아도 축복이고 행복이었소."
"그렇다고 왜 곧 죽을 것처럼 복선 깔고 지랄이야?"
서문엽이 구시렁거렸다.
피에트로는 피식 웃고 말했다.
"오늘 밤에 하지. 준비할 게 있으니까."
그날, 피에트로는 땅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직접 둥근 원과 그 안의 기하학적인 패턴을 새기기 시작한 것.
서문엽은 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땅에다 직접 그리지? 원래는 그냥 한 번에 딱, 하고 오러로 만들었으면서."
옆에서 여왕이 답했다.
"영령계에 접속한 동안에는 오러를 쓸 수 없으니까 저렇게 하는 것 같아요. 대체 무슨 구조인지는 전혀 짐작도 안 가지만요."
여왕은 피에트로가 그리는 마법진을 보며 감탄을 거듭하고 있었다.
오러의 흐름을 나타내는 마법진의 내부 구조가 여왕씩이나 되는 지저인이 보기에도 너무 복잡하고 수준 높아서 그런 듯했다.
하루 종일 거기에 전념했던 피에트로가 그날 밤에 마법진을 완성했다.
"이제 됐소."
피에트로는 땅에 깊숙이 그려놓은 마법진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서문엽에게 손짓했다.
"서문엽, 이리로 와라."
"잉? 난 왜?"
"와서 내 손을 잡아."
"아, 왜!"
서문엽은 몹시 꺼리는 반응을 보였다.
남자 손을 잡기 싫은 것은 둘째 치고, 왠지 함께 영령계로 끌려갈 것 같은 꺼림칙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공간 이동을 함께 할 때도 서로 접촉해 있어야 하지 않은가.
피에트로는 그런 서문엽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겁나나?"
"크흠! 겁나는 건 아니고, 그냥 싫어서 그렇지."
"꼭 필요한 일이니 시키는 대로 해라."
"에이 씨. 이상한 건 아니지?"
"네게는 아무 영향도 없다. 그냥 계속 잡고 있으면 된다."
"하는 수 없지."
서문엽은 옆에 앉은 채 피에트로의 손을 잡았다.
"그럼 간다."
"가, 같이 가는 것처럼 얘기하지 말래?"
"멍청한 놈, 나 혼자 간다."
피에트로는 눈을 감았다.
-명상: 영령계로 접속해 선조의 영령과 감응한다.
사제라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초능력으로 분석안에 나와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는 그만큼 피에트로가 명상에 남다른 조예가 있다는 뜻이었다.
괴물 제작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초능력으로 분석안에 나와 있었던 다섯째 상급 사제처럼 말이다.
이윽고 피에트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대로 영령계로 접속한 것이었다.
< 영혼의 만남(1) > 끝
< 영혼의 만남(2) >
피에트로는 영령계로 접속했다.
그곳은 눈으로 보지도, 귀로 듣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육체를 두고 영혼만 접속하므로 감각 기관으로 가늠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다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육감만이 영령계에서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영령계에 접속하자 가장 먼저 육감에 포착되는 수많은 영령들이 있었다.
무척 많은 영령들.
다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탓에 영령계의 가장 초입에 몰려 있었다.
피에트로는 서글퍼졌다.
바로 지저 문명이 몰락하면서 죽은 지저인들의 영령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영령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가 누군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영혼에는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강렬한 존재감이 있었다. 많은 주목과 관심을 받고, 누군가는 말을 걸려고도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바쁜 피에트로는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대사제 아니시오?]
누군가가 피에트로에게 말을 건넸다.
목소리가 워낙에 또렷해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영령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존재감이 흐려지기 때문에 강인한 영혼이 아니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존재감을 보일 수 없었다.
[낯이 익은 존재감인데, 누구시오?]
[보좌요. 날 기억하시오?]
보좌.
그 말에 피에트로는 흠칫했다.
보좌라는 역할을 가진 지저인은 지저 문명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여왕을 보좌하는 자.
어리고 힘없던 여왕을 보호하며, 대사제였던 피에트로의 인류 박멸 계획에 우려를 표했던 인사였다.
그 당시 대사제의 권력과 위상이 절대적이어서 차마 대놓고 반대를 표하지는 못했지만, 완곡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냈었다.
[기억나오. 기억날 수밖에. 내 전쟁 계획에 반대하지 않았소. 태초의 빛의 말씀을 폭력과 결부 짓는 건 옳지 않다고 주장했지. 결국 당신이 옳았소, 보좌.]
그 말에 보좌를 쑥스러워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반대를 표할 용기가 있었으면 하고 아쉬워하고 있소. 작은 목소리로 완곡하게 반대했지.]
[그때는 올바른 말을 하는 자가 별로 없었지. 아무튼 사과하겠소.]
피에트로는 정치적으로 반대편이었던 그에게 압력을 가했던 일이 생각나 사과했다.
[지난 일은 이제 괜찮소. 그런데 어디로 가시오? 찾는 이가 있소?]
이 부근에서 찾는 영령이 있다면 도와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의 호의를 느꼈지만 피에트로는 보좌가 도울 수 없는 곳으로 가는 길이었다.
[깊은 곳으로 가오.]
[혹, 태초의 빛께서 계시는 곳에?]
[아니오.]
피에트로는 부인했다.
[난 그럴 자격이 없고, 태초의 빛께서는 이미 여왕을 선택하셨소.]
[여, 여왕께서!]
보좌가 놀라워했다.
[고백컨대 여왕은 이미 성역이 붕괴되기 3년 전에 태초의 빛의 선택을 받으셨소.]
그 말은 그 시점부터 자신은 이미 정당한 대사제가 아니었다는 고백이었다.
[허어······.]
보좌는 놀라워했다.
짐작은 했다. 태초의 빛의 뜻을 올바로 따랐다면 이런 재앙적인 결과가 나왔을 리가 없으니까.
[당신도 참 힘들었겠소.]
보좌는 뜻밖에도 위로했다.
피에트로는 이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 문제로 위로를 받은 것은 처음이오.]
피에트로는 잠시 보좌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왕이 선지자이며, 지저인 유랑민을 거두어 빛이 내리는 땅에 마련한 거처에서 살게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보좌는 기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언젠가는 훌륭한 일을 하실 줄 알았단 말이오.]
성장한 여왕에 대하여 한참을 기뻐했던 보좌는 다시 의문을 표했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가시오?]
[태초의 빛 이외의 어떤 영령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깊은 곳에 가고 있소.]
[그 정도면 제정(帝政) 시절보다 더 오래된 곳 아니오?]
[맞소.]
[제정 시절의 영령분들도 얼마 안 남으셨는데,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누가 있단 말이오?]
[태초의 빛을 가장한 사악한 것이 있소.]
보좌는 충격받은 감정을 표출했다. 지저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 영령이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영령도 아니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놀란 보좌에게 자초지종을 짧게 설명했다.
영령계는 바깥의 시간 흐름과 상관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와 오래 대화를 나눠도 시간을 뺏길 일은 없었다. 또한 보좌는 현명한 이였기 때문에 그의 의견도 듣고 싶었던 피에트로였다.
[다행히 이제 남은 상급 사제는 첫 번째뿐이구려. 서문엽이라, 그 흉악한 인간이 큰일을 해냈군.]
보좌에게서 떨떠름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서문엽에 대한 깊은 거부감은 지저인의 공통적인 인식이었다.
[난 서문엽을 본 적이 있소. 그 인간에게 죽었으니까.]
보좌는 살아생전에 전쟁에 차출되었다. 그리고 지저인들이 흔히 그렇듯 서문엽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피차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원한은 없소. 다만 내가 본 그자는 강렬한 폭력성과 투쟁심을 지녔소. 그 정도가 지나쳐.]
[그건 알고 있습니다.]
대사제였던 시절에 서문엽과 싸워봤던 피에트로였다.
못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대사제 자신이 가진 엄청난 오러와 기술로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서문엽은 어떻게든 이기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투쟁심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전술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 시기에 살았으니 망정이지, 그는 평화를 견디지 못할 거요. 얘기를 들어보니 당신과 친하게 지내는 모양인데, 내 생각에 이는 당연하오.]
[어째서 그렇습니까?]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피에트로는 왠지 그 말에 공감 가는 기분이 들었다.
[전쟁 속에서 살게 해줘서 고마울 거요. 같은 동족이 수없이 죽었지만 서문엽은 신경도 안 쓸 거요.]
피에트로는 서문엽이 어린 시절을 불운과 분노로 보낸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 영향으로 투쟁심만이 원동력이 되는 인간으로 자랐다고 추측했다.
보좌가 말했다.
[하지만 별수 없나 보오.]
[무슨?]
[그쯤은 되어야 예언에 언급된 괴물에 대적할 수 있다고 태초의 빛께서는 생각하셨던 게 아니겠소.]
[그건 맞소. 그 괴물에게 대적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서문엽뿐이지.]
피에트로도 동의했다.
그러고 보면 투쟁심의 측면에서는 만인릉의 황제와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일을 맡으셨는데,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구려.]
[괜찮소.]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내가 당신과 동행하겠소.]
[나와?]
[너무 깊이까지는 갈 수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나도 영령계를 다닐 수 있소.]
최대한 깊이까지 피에트로의 영령계 탐사에 동행하겠다는 뜻이었다.
살아있는 사제들도 영령계를 탐사할 수 있으니, 당연히 영령도 영령계를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도 급급한 영령은 기본적으로 돌아다니지 않고 제자리를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니 보좌의 제안은 이례적이었다.
[당신은 깊은 곳에 계시는 수많은 영령분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소.]
[맞소.]
[내가 그분들의 신뢰를 되찾는 것을 돕겠소.]
[그것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도움이 될 거요.]
피에트로가 고마움을 표했다.
살아생전에 대립 관계였음에도 헌신적으로 도우려는 보좌의 호의가 느껴졌다.
[뭘, 이런 게 아직 살아 있는 후손을 위한 영령의 역할 아니겠소. 더구나 여왕 폐하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피에트로는 보좌와 함께 영령계 탐사를 재개했다.
깊이 나아가자 피에트로가 더 이상 영령의 일격에 동원할 수 없는 고대의 영령들이 나타났다.
그들 대부분은 제정 시절에 살았던 지저인들의 영령이었다.
피에트로는 유명 인사였다.
태초의 빛의 신뢰를 잃었고, 끔찍한 전쟁을 일으켜 대량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후손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이래서 다시는 영령계에 오기 싫었던 것도 있지.'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자신을 향한 악감정에 몸서리쳐졌다.
누군가로부터 악의를 받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자신 스스로가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동행했던 보좌가 선조의 영령들에게 인사를 하며 피에트로에 대한 변호를 해주었다.
[그는 지금 여왕 폐하를 도와 태초의 빛께서 우려하신 재앙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태초의 빛을 따른다면 그에게 힘이 되어줘야 합니다.]
보좌 덕에 선조의 영령들의 분노가 수그러들었다.
그보다 선조들은 태초의 빛이 전한 예언에 관심을 보였다.
[버려진 세계에 그런 비밀이 있었던가?]
[우리는 전혀 몰랐어. 오래전에 장기 집권을 했던 폭군은 알고 있지만.]
[만인릉을 건설한 그 끔찍한 황제에 대한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사제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 그런데 그 탓에 중요한 것을 함께 묻어버렸군.]
[나는 상급 사제였다. 나조차도 버려진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가 살았던 시점에서는 모두가 그 일을 알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역사가 폐기됐어.]
선조의 영령들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그들도 만인릉 황제 시절보다는 훨씬 이후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버려진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선조들과 이야기를 마친 보좌는 피에트로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여기까지요. 이 이상 깊은 곳에 가려면 내 존재가 흐려질지도 모르오.]
영령은 남아 있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자아정체성을 잃기 쉽다.
특히나 자신이 있던 시대에서 벗어나면 더더욱 말이다.
그래서 영령은 자기 시대에 머물며 동시대의 영령들과 어울리면서 자아를 유지하려 애쓴다.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피에트로는 감사를 표했다.
[큰 도움이 됐소.]
선조들이 상당수 피에트로에 대한 악감정을 거두었다.
보좌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리기 전에 재빨리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헤어진 후에 다시 깊은 곳으로 나아가려 했을 때였다.
[후대의 대사제여.]
살아생전 상급 사제였다는 고대 영령이 피에트로를 불러 세웠다.
[전 더 이상 대사제가 아닙니다.]
[그건 됐다. 조금 더 깊이에 가면 내가 모셨던 대사제님이 계신다. 그분께 도움을 청해봐라.]
[도움받을 일이 있을까요?]
[그분은 특별한 분이셨어. 버려진 세계에 대해서는 그분도 모르시겠지만, 그분이라면 분명 무언가 도움을 주실 거야.]
[제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보면 안다. 거기서 가장 존재가 강한 영령을 찾으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에트로는 조금 더 깊은 곳에서 상급 사제의 영령이 말한 고대의 대사제를 찾았다.
정말로 고대 시절부터 존재했던 영령이라고는 생각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가진 영령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대사제님.]
[호오, 너는 한참 후대의 대사제 아니냐.]
[지금은 자격을 잃었죠.]
[흐흐흐, 사고를 거하게 쳤으니 그렇지. 나도 젊을 땐 너처럼 똑똑하고 과감했지. 다행히 나 때는 태초의 빛께서 딱히 예언을 내리신 게 없어서 사고 치지 않고 잘 살다 왔어.]
고대의 대사제는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피에트로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고서, 상급 사제의 소개를 받고 찾아뵈었다고 말을 전했다.
[아하, 그 녀석은 내가 가장 아끼던 아이였어. 역시나 내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존재를 유지하고 있잖아. 흐음, 그런데 도움이라······.]
[꼭 좀 도와주십시오.]
피에트로가 간절히 청했다. 대체 영령인 그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조들이 허튼 소리를 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윽고 고대의 대사제가 말했다.
[그 아이가 내 도움을 받으라고 했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무엇입니까?]
고대의 대사제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갈등하는 기색이었다.
[설마 이걸 인간에게 물려줄 줄은 몰랐는데······.]
< 영혼의 만남(2) > 끝
< 영혼의 만남(3) >
고대의 대사제는 피에트로에게 어느 시공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여긴?]
[가보면 알 거야. 거기에 보관된 물건을 그 구원자로 지명된 인간에게 전해주어라.]
아마도 고대의 대사제가 비밀리에 자신의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던전인 모양이었다.
전대의 왕이나 대사제는 종종 그런 식으로 자신만의 장소를 만들어두곤 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죽은 지 까마득한 세월이 지난 대사제가 이제 와서 내놓는 물건이 대체 무엇일지가 궁금해졌다.
고대의 대사제는 연신 투덜거렸다.
[잘 간직했다가 후임 대사제 중에 싹수가 보이는 녀석에게 주려고 놔뒀거늘, 괜히 아꼈다가 인간에게 주게 되었군. 아끼다 똥 됐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보면 알아, 그건. 원래 네게 줄까 생각도 했던 물건이다.]
[제게요?]
놀란 피에트로에게 고대의 대사제는 계속 불만을 나타냈다.
[역대 후임 대사제들을 계속 지켜봤지만 성에 차는 재능을 가진 아이가 안 나오더군. 그러다가 너를 보았다. 태초의 빛을 만나러 가는 너를 말이다.]
[······.]
[재능도 탁월했고, 심지어 막중한 예언도 들었지. 그래서 네게 줘야겠다고 싶었지. 네가 괴물 군단을 만들어 지상을 침공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에잉, 아무튼 도움은 될 거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한 뒤 떠나려 할 때였다.
[조심해라.]
고대의 대사제가 말했다.
[살아 있는 육체를 가졌다 해도 그건 네 본래 몸이 아니지 않으냐.]
[맞습니다.]
[네가 사령이라는 것을 놈은 한눈에 알아볼 것이다. 육체와의 결속력이 약하다는 것까지도.]
[······.]
[놈이 네 영혼을 노리고 널 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피에트로는 걱정해 줘서 감사하다는 감정을 표했다.
[대비를 해놓고 왔습니다.]
[흐흐, 그러냐? 과연 내가 눈여겨봤던 녀석이로다.]
고대의 대사제는 만족스러워하며 피에트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선조들의 신뢰를 다소 되찾은 피에트로는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영령계 탐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깊이.
더 깊이.
이제는 존재감을 유지하는 영령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깊이에 이르렀다.
[자네는 누구인가? 영령도 아니고 생령도 아닌데. 허, 사령이구먼.]
존재감이 희미해진 영령이 말을 건넨다. 비록 희미해졌으나 단번에 피에트로가 사령임을 알아맞힌 안목은 까마득한 세월 동안 존재한 통찰력을 느끼게 했다.
[예, 맞습니다. 얼마 전까지 대사제였습니다.]
[쯧쯧, 대사제쯤 된 자가 사령이 됐다면 뭔가 안 좋은 일을 했구먼.]
[예, 치명적인 죄를 범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지. 개인의 실수가 자기 자신으로 끝나지 않아.]
[예.]
[자네의 처지에 공감이 되는 것을 보면, 으음. 아마 나도 살아생전에는 대사제였거나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것 같군.]
영령의 존재감이 희미하다는 것은 정체성이 사라져간다는 뜻이었다.
육체도 물질도 없는 영령계.
이는 자기 자신을 증명할 만한 증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곳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면 자연히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도 잊게 된다.
그리고 끝내는 자기가 누구였는지 잊어버린다.
그렇게 영령은 소멸하는 것이다.
[그랬을 것 같습니다. 선조님에게서 대사제의 위엄이 느껴집니다. 부디 제게 지혜를 주십시오.]
피에트로는 공손하게 말했다.
비록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린 영령이지만, 영령이란 그렇게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자아는 사라지지만, 자신을 버린 대신 지혜를 갈고 닦으며 참된 진리를 찾는다.
[사령이 된 지금도 이리도 간절하니, 아직 자신의 소임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갸륵하다. 너는 죄를 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네가 누구를 찾아가려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 말에 피에트로는 흠칫했다.
[사령이 된 자가 이곳에 왔는데 설마 태초의 빛을 찾아가려 할까.]
[그자, 아니, 그놈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알지는 못한다. 그저 느낄 뿐이지. 생소한 미지의 존재더군.]
자신을 잃어가는 희미한 영령이 계속 말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상대가 크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명심해라. 올바른 가치관이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님을. 놈이 가진 지혜가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영령은 자신의 존재감만큼이나 희미한 기쁨을 보내왔다.
[가라.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라.]
[···예.]
영령은 피에트로가 인간이 된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지혜가 있는 것이리라.
계속 나아갔다.
이제는 어떤 영령도 보이지 않았다.
만인릉 황제보다도 더 오래된 시대의 영역이었다.
당연히 남아 있는 영령이 없었다.
···라고 생각했는데, 문득 피에트로는 한 영령의 존재감을 포착했다.
너무 희미한 나머지 하마터면 놓칠 뻔한 영령이었다.
영령도 피에트로를 발견했지만, 거의 사라져 가는 터라 말도 전하지 못하였다.
피에트로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만인릉 황제보다도 오래된 시대에 살았으니 분명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영령이 움직였다.
피에트로는 직감적으로 영령이 따라오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영령을 따라갔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웠던 영령은 급격히 소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령은 멈추지 않았다.
어디론가 세차게 날아가더니, 그대로 완전히 소멸되어 버렸다.
[아······!]
피에트로는 벅찬 감격을 느꼈다.
소멸된 영령의 잔향이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로 가라는 거구나. 감사합니다, 선조님.'
자신을 바쳐서 도움을 준 영령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피에트로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태초의 빛에게 이르는 길이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태초의 빛을 찾아 갔었던 피에트로는 다른 길임을 알 수 있었다.
'놈이 이상한 곳에 자리를 잡았구나.'
아마도 태초의 빛을 찾아왔다가 길을 잘못 든 자를 꼬드기려는 속셈일 터.
피에트로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조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 같은 죄인이 말이다.
그러니 자신에게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책임이 있었다.
길을 갈수록 어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영령계에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던 탓에 피에트로는 당황했다.
'이 따스함은 뭐지?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열기가 저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기이했다.
마치 자신을 포용하는 듯한 온기라니.
이건 곤란했다.
'다른 이가 이곳에 오면 태초의 빛에게 이르는 길인 줄로 착각하고 말 거다.'
역시나 위대한 태초의 빛은 다르구나.
여기가 그분에게 닿는 길이구나.
그렇게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첫 번째 상급 사제가 어떻게 속아 넘어갔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게 예언의 괴물이 펼쳐놓은 함정이라면, 실로 무서운 일이었다.
그 괴물은 적어도 영혼을 다루는 기술에 있어서는 완전히 통달한 것을 넘어, 아예 새 영역을 개척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였다고?'
먼 시공 저편에서 원격으로 사령 언데드를 만들었을 때도 놀랐다.
사령을 다루는 일에 최고봉이었던 피에트로 자신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심지어 영령계까지 건드리다니.
이것은 흡사 태초의 빛을 연상케 하는 지고한 수준이 아닌가!
'정말 괴물이 맞나?'
피에트로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태생이 괴물인 것 확실하다.
버려진 세계에 끝없이 증식한 괴물들 중 하나가 진화하여서 지혜를 터득했을 테니까. 그것은 여러 정황상 확실하다.
하지만 태생이 괴물이었다는 이유로, 단지 괴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은 지성체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괴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지고한 지성체가 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 그 고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으면서 지혜를 축적했으니, 오늘 만났던 수많은 선조님보다도 위대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인간을 하찮게 보았듯이, 그 괴물의 눈에도 우리가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뜻대로 조종되는 첫 번째를 보며 조롱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대가 상상보다 더한 존재라는 생각에 무거운 압박감이 생겼다.
'이대로 놈을 만나도 되는 걸까?'
그 앞에 서면 자기 자신이 무척 작고 초라해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런데 그때, 앞서 존재가 희미해진 오래된 선조가 들려준 조언이 떠올랐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상대가 크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
피에트로는 자신이 바로 그 상태임을 깨달았다.
[올바른 가치관이 없는 지혜는 지혜가 아님을.]
피에트로는 정신을 차렸다.
'냉정해지자. 놈은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지금껏 본 적 없는 미지의 존재일 뿐이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에 괴물을 너무 큰 존재로 과대평가한 셈이었다.
필요한 조언을 적절하게 해준 선조에 대한 감사함과 경외를 느꼈다.
'일단 놈을 만나보자.'
더욱 깊이로 나아갔다.
열기가 점점 강하게 느껴졌으나, 피에트로는 개의치 않았다.
'처음 겪는 일일 뿐, 당황할 것은 아니다. 그냥 날 속이려는 수단일 뿐이야.'
얼마가 깊이 갔을까.
돌연 어떤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희미한 영령들만 보았다가 갑자기 엄청나게 강렬한 존재감을 느끼자 마음이 동요되었다.
하지만 피에트로는 이내 동요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극도의 냉정함으로 무장한 피에트로.
그런 그에게 미지의 존재가 말을 건넸다.
[나의 아이야.]
무척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피에트로는 소름이 돋았다.
순간적으로 태초의 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
정확히는 태초의 빛이라고 믿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나서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이놈이 사제들의 약점을 철저하게 파고드는구나.'
이건 첫 번째 상급 사제가 속을 수밖에 없었다.
피에트로가 대사제였던 시절에 잠깐 만났을 때는 운이 좋았다.
그때 피에트로는 이미 태초의 빛을 만나봤었고, 상대는 지금처럼 치밀하지 못했다.
그 덕에 속지 않았지만, 다른 사제들은 영락없이 넘어갈 터였다.
[네 정체를 알고 있다. 멋진 재주를 부리더군.]
피에트로가 말했다.
그러자,
상대측에서 웃는 감정이 느껴졌다.
존재감이 강렬한 탓에 감정도 강렬하게 표출되어 해일처럼 물씬 밀려왔다.
'기쁨? 왜 기뻐하지?'
[멋졌나? 기쁘구나.]
[무엇이 기쁜가?]
[난 그것이 멋진 재주인지 하찮은 재주인지 모른다.]
[······.]
[칭찬을 하든, 비웃든, 누군가의 평가를 듣고 싶었지. 그런 게 바로 소통이 아니냐.]
[소통······.]
[그렇다. 소통이 하고 싶었다. 지혜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존재와 말이다.]
피에트로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무언가가 스쳤다.
[너는 외롭나?]
[외롭다?]
그 말을 곱씹은 미지의 존재는 이윽고 기뻐했다.
[그래. 외롭다는 것이군. 맞아. 이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었어.]
미지의 존재는 방금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새로 학습했다.
[나를 따르는 놈들이 득시글거려서 몰랐던 거야. 이게 바로 고독이라는 것임을. 아무도 나의 위대한 지혜를 알지 못하니, 이토록 위대해진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
피에트로는 선조의 조언을 다시 떠올렸다.
[놈이 가진 지혜가 진정한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구나.'
피에트로는 놈이 가진 게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리어 어리석음에 가까웠다.
[넌 누구냐?]
피에트로가 물었다.
미지의 존재가 답했다.
[음, 나도 그것을 오랫동안 고민했지. 그러다가 어떤 경험을 계기로 날 뭐라고 정의할지 떠올렸다.]
[······?]
[나는 왕이다. 그 외에 나를 정의 내릴 개념은 없다.]
< 영혼의 만남(3) > 끝
< 영혼의 만남(4) >
왕.
미지의 존재이자 예언의 괴물은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만인릉 황제와 전쟁을 벌일 때 군주라는 개념을 배웠나 보군.'
처음으로 지저 문명과 조우해 전쟁을 벌였던 경험이, 예언의 괴물에게는 많은 학습의 기회였던 것.
[나는 왕이다. 너는 누구냐?]
왕이 물었다.
피에트로가 답했다.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전에는 대사제였고 지금은 인간이다.]
[네가 지금은 다른 종족의 몸에 깃들어 있는 건 안다. 그런 몸을 가진 종족을 인간이라고 하나 보군. 듣기로 인간은 간악하고 미개하다던데, 한쪽에 치우쳐진 말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더군. 인간은 어떤 종족이냐?]
왕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자기가 몰랐던 새로운 정보를 발견할 때마다 못내 궁금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서로 진화 방식이 달라 부족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지성을 가진 종족이다.]
[진화?]
왕이 또 호기심을 드러냈다.
궁금해하는 키워드가 참 많았다.
피에트로는 왕이 어떻게 영혼을 다루는 기술을 엄청난 수준으로 습득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성이 없는 괴물들.
그사이에 홀로 지성을 갖춘 왕.
그것은 끔찍한 고독이었다.
자식을 나눌 상대도 없고, 자신의 지식에 반응을 보이는 이도 없다.
그래서 왕은 버려진 세계에서 탈출하려 하는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을 찾아서.
영령계에 진출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버려진 세계에서 나갈 방법이 없으니, 영혼이라도 영령계로 나온 것.
호기심 많은 왕에게 풀리지 않은 비밀이 많은 신비한 영령계는 신세계나 다름없었으리라.
그쪽을 계속 파고들었고,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르자 영혼을 다루는 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엄청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으니 꾸준히 연마했을 것이다.
[진화에 대해서도 설명해 줘야 하나?]
피에트로의 물음에 왕은 긍정을 표했다.
[명확히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을 뿐, 아마 듣고 보면 내가 아는 개념일 것이다.]
[정의가 내려진다는 것이 중요하지.]
[음?]
그 말에 왕은 곰곰이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피에트로가 한 말뜻을 이해하려고 곱씹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 말이 맞다. 정의되지 않은 지식은 더 깊어지지 않는다. 그건 알겠으니 어서 진화에 대해 말해봐라.]
[너희들 괴물 중에서 우연히 덩치가 매우 큰 괴물이 태어났다고 쳐보자. 그 괴물은 남달리 덩치가 크므로 남보다 더 강력하고 번식도 더 많이 할 것이다.]
[그렇지.]
[그럼 그 괴물에게서 똑같이 덩치 큰 괴물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생기지.]
[맞는 말이다.]
[덩치 큰 괴물들은 생존 경쟁에서 다른 괴물들을 압도하고 계속 번식할 것이다. 그럼 결국 그 괴물 종은 덩치가 커진 쪽으로 진화한 셈이지.]
[그게 진화로군. 요는, 환경에 잘 적응하고 생존 경쟁에 유리한 쪽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뜻이군.]
왕은 금방 이해했다.
[혹은 생존 경쟁에서 패배해서 사라지든가.]
[그래, 역시 내가 어렴풋이 아는 내용이었어. 명확히 정의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을 못 한 거지.]
[그리고 괴물들 중에서 우연히 너처럼 지성을 가진 변종이 탄생하기도 했지.]
[으음······.]
무슨 일인지 그 말에 왕은 침음했다. 실망이라는 감정이 물씬 느껴졌다.
왕이 말했다.
[짝짓기를 해서 수많은 자식을 낳았지. 족히 수천 마리의 자식을 봤을 거야.]
[마리?]
영령계는 서로 언어가 달라도 상관없이 마음이 통하는 곳이었다.
자기 자식을 가축이나 세는 단위로 표현했다. 왕이 자기 자식을 동등한 지성체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너무 외로웠으니까. 나와 같은 지혜를 가진 이가 있었으면 했으니까. 가장 먼저 날 닮은 자식을 낳자는 발상을 안 했겠는가?]
[했겠지.]
[소용없었어. 다 지성이 없는 머저리들이었다. 싸우고 잡아먹고 번식하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못하는 머저리들 말이다!]
왕의 분노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분명 생김새는 나를 닮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닮지 않았어. 나와 닮은 모습으로 미개한 짓거리를 하는 걸 보니 참을 수가 없더군.]
[다 죽였군?]
[그렇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난 우연히 지성을 갖추고 태어난 왕인데, 내 자식들은 단 한 마리도 나처럼 지성을 갖지 못했다. 진화하지 못한 것이다. 네가 말한 진화는 틀린 게 아니냐?]
따지고 보면 나름대로 자기 종족을 진화시키려는 시도를 했는데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강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특정 대상에게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그냥 뜻대로 안 되니 분통 터진다는 투였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설명은 길수록 좋다. 난 너에게서 되도록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으니까.]
같은 지성체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던 왕은 피에트로를 무척 반가워하는 분위기였다.
[너희가 우리가 만든 괴물이었다는 걸 아나?]
[안다.]
왕은 긍정했다.
[내가 사는 세계에 남겨진 흔적들을 둘러보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다가 결론에 이르렀지. 너희는 우리를 활용하려고 만들었지만, 우리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도망쳤다.]
[혼자 생각해서 거기까지 결론에 이르렀다면 대단하군.]
[이게 대단한 것인가? 음, 그렇군. 역시 난 대단해.]
만족스러워하는 왕.
피에트로가 말했다.
[너희가 진화를 통해 강해진 탓에 내 선조들은 감당 못 하고 도망쳤지.]
[역시 진화가 중요했군.]
[그렇다. 그런데 내 말의 요지는, 너희는 내 선조가 만든 생명체였다는 것이다.]
의아해하는 왕에게 피에트로가 계속 설명했다.
[애당초 만들 때 지성을 가질 수 있도록 설계했을 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지성을 갖게 되면 어찌 되는지 그 위험성을 선조들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 난 어떻게 된 것이냐?]
[두 가지 가설이 있다.]
[가설?]
왕은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새로운 단어에 관심을 보였다. 말도 못 하게 왕성한 호기심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에트로는 할 얘기만 했다.
[첫 번째 가설은 정말 까마득히 희박한 확률로 탄생한 변종이라는 것. 사실 난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확률이 희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내가 탄생했으니, 내 자식은 날 닮아야 하지 않은가?]
[그렇다. 나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서 방금 두 번째 가설을 떠올렸지.]
[그게 뭐냐?]
[유전이 아닌 외부의 요인에 의하여 지성이 생긴 경우.]
[외부의 요인?]
[내 생각에 넌 애당초 본질부터 지성을 가질 수 없는 구조였을 것이다. 그래서 네 자식도 지성이 없는 것이고. 그런데 너는 어떤 초자연적인 작용에 의해 지성이 인위적으로 심어졌을 수도 있지.]
[초자연적인 작용?]
[나도 모른다. 하여간 지금 가설은 그렇다. 네 진화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피에트로는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겼다.
괴물 중에 지성을 가진 것은 오직 왕 하나뿐이었다. 자식들에게는 지성이 이어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괴물들이 지성 쪽으로 진화할 걱정은 없어 보였다.
다만 눈앞의 이 괴물왕은 엄청난 지성과 호기심을 가졌다는 것. 새로운 개념에 대하여 들을 때마다 곧바로 이해하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쳤다.
오늘 영령계에서 만난 왕은 무척 순수해 보였다. 모든 감정이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피에트로는 방심하지 않았다.
'놈은 필요하면 언제든 간사해질 수 있다.'
버려진 세계에는 다양한 괴물이 있다.
힘이 세지든 덩치가 커지든 다양한 방향으로 진화한 괴물들이 수두룩하다.
그런데 어째서 지성을 가진 이 괴물이 왕이 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지성을 활용하여 다른 괴물을 속일 줄 알기 때문일 터였다.
단지 호기심 왕성한 순수한 괴물이었다면, 똑똑했던 첫 번째 상급 사제를 어떻게 속였겠는가?
아무튼 피에트로는 왕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많은 대화를 했다.
주로 왕이 질문하면 피에트로가 설명해주었다.
피에트로는 무기화될 염려가 없는 개념만 가르쳐 주었고, 왕은 호기심이 충족될 때마다 뛸 듯이 기뻐했다.
[이봐라, 전 대사제이자 현 인간이여.]
[그냥 피에트로라 부르면 된다.]
[피에트로?]
[인간은 이름을 따로 지칭해서 부른다.]
[이름? 이름이라. 그것도 재미있는 개념이구나. 난 그냥 왕인데, 왕은 내 지위일 뿐 이름은 되지 않겠군.]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나?]
[아, 그렇지.]
왕은 그제야 호기심을 잠시 억누르고 정신을 차렸다.
[난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 네 제자라고 했던 녀석은 본래 똑똑했던 모양인데 지금은 멍청해졌다.]
[이상한 신념에 빠져 사고가 편협해졌으니까.]
[그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면, 전지전능하고 뭐든지 다 아는 체를 해야 해서 피곤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왕의 이 투덜거림을 첫 번째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불쌍한 첫 번째. 이런 괴물을 태초의 빛이라 믿고 있구나.'
[아무튼 난 너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지금도 하고 있잖나.]
[아니, 여기 말고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곳에서 말이다.]
피에트로는 긴장했다.
왕이 슬슬 본색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너를 나의 세계에 초대하마. 내가 내 세계에서 너의 영혼을 소환할 테니, 응하겠나?]
[어디다가 소환할 생각이지?]
[임시로 쓸 육체가 필요하지. 그건 내 오러로 대체하면 된다.]
피에트로는 기가 막혔다.
영혼을 불러와 자신의 오러에 깃들게 하는 것.
그건 바로 오직 피에트로만 할 수 있었던 영령의 일격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의 절기와 동일한 수법까지 할 줄 알 줄이야.
[좋다.]
피에트로는 승낙했다.
[기쁘다. 난 너희와 다르게 육체 감각을 쓸 수 없는 이곳이 갑갑하게 느껴지거든. 물론 머저리들밖에 없는 나의 세계는 더 갑갑하지만. 아무튼 내가 돌아가서 널 소환할 테니 꼭 응해라.]
[좋다.]
왕은 기뻐하며 영령계에서 사라졌다.
버려진 세계로 돌아간 것.
그리고 이윽고 앞에 영령계와 물질계를 잇는 통로가 생성되었다.
[이리로 와라.]
왕의 말이 통로 너머로 들렸다.
'나에게 소환되었던 선조들이 이런 기분이었나.'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이, 확실히 신뢰할 수 없는 놈의 부름에 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피에트로는 통로 너머로 나아갔다.
파아앗!
그리고 피에트로는 오러 덩어리를 육체 삼아 깃들었다.
'이게 왕의 오러인가.'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오러였다.
영령계에서 느꼈던 그 온기가 바로 오러에서 나오는 열기였음을 깨달았다.
최고 등급의 지저인처럼 하얗게 정제된 순수한 오러는 아니었다.
표현하자면 불순물이 많이 섞인 오러.
그러나 뜨겁고, 강렬하다.
이런 오러로 공격을 펼친다면 어떤 위력이 나올까?
어쨌거나 피에트로는 자신의 임시 육체로 쓰일 이 오러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오러 덩어리를 조종해서 형태를 바꿔나갔다.
팔다리를 만들고 머리를 만들었다.
그리그 그 형태는 인간 피에트로 아넬라가 아니라 점차 살아생전의 모습, 대사제가 되었다.
육체를 재구성한 피에트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어디 있지?
피에트로가 물었다.
그러자 왕이 답했다.
오러의 진동으로 뭐라고 답한 것 같은데, 당연하게도 알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피에트로는 본래 지저인.
언어 습득은 어렵지 않았다.
-네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군. 습득할 테니 계속 말해봐라.
그러자 왕은 계속 뭐라고 말했다.
알 수 없었던 언어가 점차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르겠나?
왕의 말이 또렷이 이해되었다.
-난 여기 있는데.
< 영혼의 만남(4) > 끝
< 유산(1) >
피에트로는 주위에 집중해 보았다.
오러로 이루어진 임시 육체라 시각 청각 등은 없지만, 지저인에게 오러는 감각 기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강물이 굽이치며 흐르는 소리.
그런데 그것이 주위의 모든 곳에서 들리고 있었다.
마침내 피에트로는 깨달았다.
흐르는 강물은 바로 피였다.
혈관을 타고 뜨겁게 흐르는 괴물의 피.
피의 흐름을 따라 피에트로는 주위를 시커멓게 물든 것의 정체도 알 수 있었다.
꽈리를 튼 거대한 뱀의 몸이었다.
모든 곳을 칭칭 둘러싸고 있어서 사방이 온통 어두웠던 것이다.
정확한 생김새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몸은 뱀의 형태가 분명했다.
'이렇게 컸나.'
지저 문명에서 괴물 제작을 주도했던 피에트로조차도 이 정도로 큰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신전의 그 미완성 괴물도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이제 나를 인지했나?
-온통 둘러싸고 있군. 비켜주겠나?
-그럴 수는 없지.
피에트로의 미간이 꿈틀했다.
-무슨 뜻이지?
-나는 너와 이야기하는 게 즐겁다.
파아앗!
돌연 왕의 온몸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으로 감싼 모든 방면이 오러로 차올랐다.
-그래서 널 보낼 생각이 없다.
모든 방면을 몸으로 둘러싸고서 오러를 일으킨 것이, 왕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봉인 혹은 결계의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경이롭군.'
태생이 괴물인데도 지성을 갖고서 긴 세월을 살면 이 정도까지 되는구나 싶었다.
마법진으로 오러의 미세 구동까지 설계하는 피에트로의 기술에 비하면 무식하고 우악스럽지만,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네가 네 육체와의 결속이 약하다는 것을 안다.
-이 결계로 날 붙잡아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
-물론. 내가 모르는 게 많지만 이 부분만큼은 자신 있거든. 네 결속은 끊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오러가 너의 본체가 될 거야. 그리고 설령 오러마저 버리고 사령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넌 여길 못 빠져나간다.
-이러는 목적이 뭔가?
-넌 재미있다. 날 섬기는 그 멍청한 녀석보다 훨씬 더 현명하지. 널 이곳에 둘 거다. 넌 나와 함께 있어야 해.
-그렇다면 다시 묻지. 네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냐? 이 세상에서 나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말했을 텐데. 난 이곳이 갑갑하다.
-고통스러운가?
-그렇다. 이곳에서 나는 혼자다. 외롭지. 다른 놈들에게 지성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욕망에 충실한 본능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 지성은커녕 덩치만 점점 비대해져 가고 있지!
피에트로는 더 이야기를 나누며 정보를 얻고 싶었지만,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정말 육체와의 결속이 끊겨 이곳에 갇힐 것 같았다.
-난 이만 가봐야겠군.
-하하하! 널 보내지 않을 거다!
-난 생각이 다르다.
피에트로는 오러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영혼의 상태로 돌아온 피에트로는 영령계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때 왕의 결계가 피에트로의 영혼을 옥죄어왔다.
끈끈한 그물처럼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피에트로는 강하게 저항했다.
-생각 외로 저항이 세군. 무언가 대비를 해놓고 온 모양이야?
-그렇다.
-흐흐흐, 역시 똑똑해. 난 널 갖고 싶다.
-그게 가능할지는 두고 봐야지.
결계의 그물을 헤치며 나아갔다. 그물이 질기게 그의 영혼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수렁에 빠진 것처럼 힘이 빠져왔다. 결속이 끊어지려 한다.
'위험하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피에트로는 손을 뻗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 손을 잡고 당겨줄 것처럼.
그리고 놀랍게도,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고 당겨주었다.
스르르륵.
그물이 풀려 나간다.
-안 돼!!
왕이 소리 질렀다.
피에트로는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지혜를 외부에서만 찾으려 하니, 그것은 지혜도 아닐뿐더러 차라리 무지한 괴물만 못한 어리석음이다.
-뭐?
-지혜는 네 안에서 찾아라. 그러지 못하면 지금껏 그래왔듯 영원히 스스로 고통받을 뿐이다.
피에트로는 영령계로 떠났다.
***
피에트로는 번쩍 눈을 떴다.
광채가 흐르는 마법진 위.
밤하늘은 수많은 별들이 수억 수천만 년 전의 빛을 내고 있었다. 언제 봐도 중독될 수밖에 없는 신비한 풍경이었다.
"야 이 씨발아."
익숙한 인간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서문엽이었다.
"깼으면 깼다고 말을 해. 이거 언제까지 잡고 있어야 해?"
서문엽은 여전히 피에트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남자끼리 장시간 손을 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몹시 기분 나쁜 경험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차마 뗄 수도 없고 해서 계속 치미는 분노를 참고 있었다.
그리고 서문엽의 짐작대로 그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왕의 결계에서 탈출할 때 손을 잡고 있던 서문엽의 손길이 결속을 강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서문엽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왕 죽는 김에 너도 같이 안 갈래? 불가능한가?
-같이? 그건 불가능하지 않지만······.
-어차피 죽을 건데 빛이 내리는 땅도 구경하고 좋잖아? 자!
그때, 그곳에서 소멸될 것을 각오했던 대사제에게 서문엽이 손을 뻗었던 것이다.
그때 피에트로는 서문엽이 자신을 빛이 내리는 땅에 인도해 주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피에트로에게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손을 잡고 있으라고 시킨 것이었다. 그 의미가 또 다른 결속이 되어서 영혼을 붙잡아둘 수 있도록 말이다.
"이제 놔도 된다."
"휴."
그제야 손을 놓은 서문엽.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하루."
"뭐?"
"거의 24시간이 지났다고, 이 새끼야!"
24시간 동안 남자 손을 잡고 있어야 했던 서문엽은 짜증이 폭발했다.
피에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뭠마?"
"아무튼 성과가 있었다."
그때, 여왕이 끼어들었다.
"예언의 괴물을 만났나요?"
"그렇소."
피에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령계에 들어서면서 생겼던 일들을 모두 들려주었다.
"왕이라는 녀석 말고는 똑똑한 괴물이 없는 거네?"
"그렇다. 왕 자신도 자연적인 진화로 지성을 얻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어떻게 지성을 얻은 걸까요?"
여왕이 물었다.
"어떤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지성이 생겼다고 보는 편이 자연 진화로 지성을 얻은 것보다는 확률적으로 높아 보이더군."
"설마 버려진 세계에 살았던 선조 중 누군가가 일부러 괴물에게 지성을 부여한 걸까요?"
피에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요. 얘기를 종합해 봤을 때, 왕은 아마 버려진 세계가 이미 버려지고서 한참 뒤에 태어난 것 같으니까. 만인릉 황제와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는 다른 지성체를 만난 적이 없었을 거요."
"원래 과학 기술도 전쟁 때문에 발전하거든. 그놈도 마찬가지일 거야. 전쟁 통에 수많은 지식을 얻은 경험이 워낙 강렬해서, 또 전쟁을 벌이고 싶은 걸 거야."
서문엽이 말했다.
"글쎄."
피에트로는 그 말에 선뜻 동의하지는 않았다.
"왕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마지막에 중요한 말을 흘렸지."
"뭔데?"
"지성은커녕 덩치만 점점 비대해져 간다고."
"응?"
서문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휘하의 괴물들을 두고 왕이 했던 소리다. 본능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고 덩치만 점점 비대해져 간다고 불만을 토로했지."
"근데 그게 왜?"
"놈에게 지성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인릉 황제와 싸우면서 놈이 학습한 것은 군주라는 개념이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왕이라 칭했지. 그 외에 자신을 정의 내릴 개념은 없다고."
"그래서?"
"지식을 추구하지만 왕은 결코 순수하지 않았다. 호기심만큼이나 강렬한 이기심이 있었지. 충만한 악의도 있었고."
그 말에 서문엽도 깊이 생각을 해보았다.
"으음, 순수하게 지적 욕구를 충족하려 들었다면, 자기 자신을 현자 같은 칭호로 정의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왕이라고 정의했다면 놈도 결국 권력욕이 강한 거야."
"바로 그거다. 왕에게 지성이란 곧 자신의 권력이다. 그렇다면 부하들에게 지성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도, 자신의 권력에 굴복하고 따르게 만드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일리 있네. 무식한 놈들이라 왕이 강하니까 따르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욕구를 억누르면서까지 따르지는 않겠지."
본래 집단이라는 것은 구성원들이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어느 정도 억눌러야 한다.
집단을 유지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서다.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억누른다는 것은 짐승들에게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버려진 세계는 어떠할까?
서문엽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알았다!"
피에트로와 여왕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서문엽이 자신 있게 말했다.
"왕 그 새끼가 자기 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거야. 왕에게 충성할 줄은 모르고, 덩치만 뒤룩뒤룩 커지는 놈들한테 말이야. 생각해 봐. 버려진 세계는 이미 괴물 세상이고 왕의 세상이야. 생존을 위협할 적이 없는데 집단이 멀쩡히 유지되겠어? 인간도 살 만하다 싶으면 분
열을 일으키는데."
"일리가 있다. 다른 괴물들의 입장에서는 왕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되었겠지. 나도 비슷한 추측을 했다."
피에트로도 왕이 지성을 권력과 연관 짓고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지성은 곧 자신의 권력을 뜻하고, 다른 이의 지성은 자신에게 복종하는 충성심을 뜻한다고 말이다.
"괴물답지 않게 오러를 잘 다루고 영혼까지 다룰 정도로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너네 선조들도 다 할 줄 알던 거 아냐. 근데 너네 선조들은 버려진 세계에서 쫓겨났잖아. 왕이 지성을 얻었을 때, 다른 괴물들도 나름의 방향으로 진화를 해오고 있었던 거지. 그중
에는 왕이 감당 못 할 적수가 생겼을 수도 있고."
하지만 여기까지는 모두 추측이었다.
그들은 기회가 되면 자주 영령계로 가서 정탐을 해보기로 했다. 물론 피에트로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여왕이 또 왕을 봐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은지 걱정했지만 피에트로는 개의치 않았다.
"더 이상 놈이 두렵지 않소. 얼마든지 또 볼 수 있소. 왕이 나를 꾀어서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쓸 테지만, 나 또한 안 잡힐 자신이 있소."
그렇게 해서 기나긴 하루가 끝이 났다.
신전에서 타락한 대사제 일행과 싸우고 미완성 괴물과 싸웠다. 연이어 영령계에서 왕을 만났다.
겨우 이틀에 불과했는데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는 계속 떠도는 동족들을 찾아 구출하도록 할게요. 왕의 문제는 부탁드려요."
여왕은 그렇게 작별을 고했다.
여왕의 처소를 떠나면서, 피에트로가 문득 서문엽에게 말했다.
"넌 아직 나와 갈 데가 있다."
"또? 어딜 또 가? 나 이제 집에 갈 거야!"
원 없이 싸웠던 서문엽은 아직 오러도 다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쉬고 싶었다.
하지만 피에트로는 서문엽을 데리고 갈 곳이 있었다.
바로 영령계에서 만난 고대의 대사제가 일러주었던 비밀 장소였다. 그곳에 고대의 대사제가 서문엽에게 줄 선물이 있다고 했다.
"에잉, 할 수 없지. 줄 선물이 있다는데 성의는 받아야지."
선물이라는 말에 서문엽은 태도가 돌변했다.
고대의 대사제씩이나 되는 거물이 남긴 것이라면 엄청난 보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었던 것이다.
피에트로는 서문엽과 함께 공간 이동을 썼다.
< 유산(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