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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 영입 결과(1) >

프랑스에서 온 알아주는 창술 코치 막심 블랑코가 사니야를 케어했고, 여기에 서문엽까지 가세했다.

둘이 머리를 맞댄 끝에 디자인한 사니야의 새로운 창술.

그것은 블랑코 코치도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 될 것 같다며 서문엽의 손을 잡고 감격할 정도였다.

그것은 평상시는 원래 서문엽 스타일처럼 한 손으로 창을 잡고 있다가 공격 순간 두 손으로 쥐고 힘을 가해 찌르는 창술이었다.

거기다가 던지는 그립으로 잡고 있다가 왼손으로 같이 잡고 찌르는 동작도 만들었다.

이는 창던지기와 찌르기를 헷갈리게 만들도록 의도한 서문엽의 솜씨였다.

살짝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듯한 역학(力學)이 찌르기에 섞여 있어서 창에 힘도 더욱 많이 실린다는 장점도 있었다.

'양손 내리 찌르기'라고 명명된 이 동작은 근력 강화와 합쳐져서 사니야의 필살기가 되었다.

그 외의 창술 동작은 블랑코 코치가 정석으로 가르쳤다.

회피는 서문엽 스타일처럼 빠르고, 방어와 견제는 블랑코 코치의 정석대로 탄탄했다. 그리고 필살기인 양손 내리 찌르기는 온 무게중심이 창끝에 제대로 실려서 파워풀했다.

스타일 변화에 불안함이 있었던 사니야도 이 필살기에 엄청난 파워가 실리는 걸 체감하고는 만족스러워했다.

"보여줘, 나의 보물."

블랑코 코치는 느끼한 말투로 프랑스어로 중얼거렸다.

"누가 들으면 지가 다 가르친 줄 알겠어."

옆에서 서문엽이 중얼거렸지만 한국말이라 못 알아듣는 블랑코 코치였다.

오늘 상대는 BC서울이었다.

KB-1에서 늘 포스트시즌에 합류하는 정통의 강팀이었다.

-탱커: 최혁, 노정환, 김진수.

-근접 딜러: 남궁지훈, 최정민, 박영민, 사니야 아흐메토바.

-원거리 딜러: 심영수, 이나연, 윤범

-서포터: 조승호

서문엽이 영입하거나 키운 선수들로 완벽한 11인 주전 멤버가 완성되었다.

'완벽해.'

탱커는 최전방에 최혁과 이를 보조하는 노정환, 김진수.

예전엔 4탱커 체제였지만 최근 3탱커 체제로 바뀌고 있는 세계 트렌드에 딱 맞았다.

다만 딜러진은 트렌드와 조금 다르다.

근접 딜러 4명과 원거리 딜러 3명으로, 원거리 딜러를 2명 이하로 줄이는 추세에 반대된다.

하지만 원거리 딜러 중에 윤범은 그림자 속에 숨었다가 단검으로 암습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근접 딜러 역할도 수행한다.

서포터는 조승호 1명.

요즘은 전투가 가능한 서포터를 두거나, 아예 서포터를 없애고 딜러를 보강하는 추세지만, YSM은 조승호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근접 딜러인 남궁지훈은 본래 '보호' 초능력을 동료에게 걸어주던 서포터 출신이었다.

탱커인 최혁도 본래 근접 딜러 출신이라 공격력이 좋다.

상황에 맞춰 수시로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멤버 구성.

이것이야말로 임기응변에 능했던 서문엽의 취향에 딱 맞는 팀 구성이었다.

이 중 서문엽이 가장 기대를 거는 선수는 단연 사니야였다.

'어서 자라렴. 나에게 1,000억을 다오.'

30억에 데려와서 1,000억에 팔면 대체 그 이득이 어느 정도란 말인가?

게다가 안 팔아도 된다.

서문엽이 경기에 나서고, 사니야가 뒷받침해 주면 세계 무대에서도 좋은 성적을 노릴 수 있다.

'사니야 같은 애를 어디서 한 명 더 주워올 수 없을까? 그럼 아시아 챔스 정도는 우승도 노려볼 수 있잖아?'

놀지 말고 근처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이나 몽골도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하지만 백하연, 한승희와 함께 여행을 다닌 것도 좋은 추억이었기 때문에 후회는 곧 사라졌다.

백제호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셋이서만 놀아서 더 꿀맛이었다.

백제호에게 미안하지 않냐고?

'하나도 안 미안하다.'

백제호는 최혁과 윤범을 국가 대표 선수로 합류시켰다.

심영수도 본래 뺄 계획이었지만, 서문엽의 교육에 의해 바뀌길 기대하며 잔류시켰다.

이나연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조승호 없이는 위력이 반감되지만, 그냥 본인이 화살을 잔뜩 챙기고 팀원들도 화살통을 하나씩만 챙겨준다면 얼추 그 지랄 맞은 견제를 펼칠 수 있다.

요번에 영입한 양아치 출신 박영민이나 통영에서 데려온 발 빠른 서브 탱커 김진수도 아마 키워놓으면 백제호가 대표 팀에 데려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리더십도 전술도 그 정도인 녀석이 무슨 수로 대표 팀 감독을 계속하겠어?'

결국 이번에도 서문엽의 덕을 보는 백제호였다.

-드디어 이날이 왔습니다. 2023년 전반기 한국 배틀필드 프로리그 KB-1! 그 개막전은 화제의 팀 YSM이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는 전통의 강호 BC서울! BC서울도 자존심을 걸고 1부 리그에 처음 올라온 팀에게 질 수 없습니다!

-그렇죠. 하물며 서문엽 선수가 주전 멤버로 나선 것도 아니니까요! 대부분이 신인이나 막 합류한 이적생으로 구성된 YSM에게 질 수는 없는 겁니다!

경기장은 만원이었다.

서문엽의 행보에 국민적인 관심이 있던 탓에 YSM의 팬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직까지는 열렬한 서포터라기보다는 그냥 가볍게 응원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어쨌거나 YSM의 티켓 수익이 되고 있었다.

-1세트 던전은 전사의 무덤, 경기 시작합니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전사의 무덤은 공략 불가 던전 중 하나였던 곳의 명칭이다.

서문엽 이전까지 너무나 많은 초인이 쓰러져서 붙여진 그 이름은 접속한 선수들도 눈을 감고 묵념케 했다.

5초간 짧은 묵념을 한 양 팀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첫 번째 구역에서 나타난 적은 '파둡'이라 불리는 식물형 괴물들.

얇고 길쭉한 나무였는데, 뿌리로 땅이나 벽, 천장에 붙어 이동하며 나뭇가지와 잎에 난 날카로운 가시로 상처를 입히고 피를 빨아먹는다.

파둡 자체는 그리 강한 괴물이 아니었다.

몸체가 좀 질겨서 잘 베이지 않지만 오러를 다루는 선수들이 상대하기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종종 무척 까다로운 경우도 생긴다.

'미스텔'이라는 기생 식물형 괴물이 파둡에 달라붙어 있는 경우였다.

"조심해! 미스텔이 함께 있다."

수십 가닥의 넝쿨 줄기로 이루어진 괴물이 파둡을 휘감고 있었다. 뿌리는 파둡의 몸체 안에 박아놓고 영양분을 빨아먹고 있는데, 위급 시가 되자 기생 대상을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수십 가닥의 넝쿨 줄기에서 독을 뿜으며, 그중 몇 가닥은 눈알을 달고 있어서 360도 사방을 본다.

주로 파둡 같은 식물형 괴물에게 기생하지만, 급하면 살아 움직이는 다른 생명체에게도 기생하곤 한다. 초인에게 달라붙어서 1분 안에 양분을 다 빨아먹어 죽이기도 하는 흉측한 놈이었다.

물론 사냥 훈련이 기본으로 되어 있는 선수들은 신속 정확하게 파둡과 미스텔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음, 옛날 생각나네."

사냥하는 선수들을 보며 서문엽은 흐뭇해했다.

"옛날에는 말이야. 정보를 미리 알지 못하니까 어디서 뭐가 나올지 몰랐어."

꼰대 모드가 되어서 옛 추억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서문엽.

"전투 끝났다고 다들 기뻐했는데, 한 녀석이 몸에 미스텔 뿌리를 박고 있는데도 모르고 전투에서 이겼다고 좋아서 웃고 있더라고."

"그, 그게 웃으며 떠올릴 추억인가요?"

최동준 수석 코치가 섬뜩해했다.

"미스텔이 그 자식을 조종하더라. 날 공격하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을 날려 버렸어. 그 녀석 아무 것도 모르고 깔끔하게 죽었으니 나한테 감사해야 할 거야."

전쟁 시대에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괴물에게 침식당한 동료를 죽여야 하는 일이 빈번했다.

서문엽이 대인전에 능한 것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인이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재빠르게 사람 목을 날려 버렸단 거 아냐! 무서워! 무섭다고!'

덕분에 서문엽이 더 무서워진 최동준 수석 코치였다.

그렇게 서문엽이 옛날 얘기를 하며 아재 티를 풀풀 낼 때, YSM 선수들은 첫 번째 구역 사냥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조승호가 다시 조원 5인을 끌고 적진을 향해 움직였는데, 그중에 사니야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브리엘 감독이 준비한 1세트 작전은 평소와 같은 이나연·윤범의 견제가 아니었다.

-YSM, 그대로 적을 덮쳐듭니다! 이건 견제가 아니라 습격이에요!

그랬다.

늘 펼쳤던 견제인 척 적의 방심을 유도하고, 그대로 정면으로 받아버린 것이다.

무려 5인의 습격.

BC서울도 견제를 감안해 인원을 6-5 둘로 나눠 사냥하고 있었는데, 그중 5인 쪽이 습격을 받았다.

먼저 이나연이 점프!

뒤이어 그림자 속에서 윤범이 사격.

그리고 최혁과 사니야가 달려들었다.

조승호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실상 4 대 5였다.

하지만.

파앗!

최혁의 뒤에 숨어 있던 사니야가 기회를 포착하고는 즉각 창을 던졌다.

콰직!

"크억!"

세차게 날아간 창이 이나연을 상대하던 원거리 딜러의 오른쪽 다리에 적중했다.

그 틈에 윤범이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단검으로 찔러 마무리 지었다.

-윤범, 1킬.

-아!! YSM 1킬!

-마무리한 윤범 선수도 좋았지만 사니야 선수의 투창이 멋졌습니다!

-저 선수도 창던지는 초능력이 있는 건가요? 서문엽 선수를 보는 듯한 강력한 투창이었습니다!

"좋아."

지켜보던 서문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던지는 그립으로 페인트를 주기 위해서는, 일단 한 번 정말로 창던지기를 보여줘서 적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창 던지니까 조심하라고 말이다.

창을 또 한 자루 꺼내 든 사니야가 다시 던지려는 자세를 취했다.

적은 다들 긴장했다.

그 순간.

"차하!!"

사니야는 던지려던 창을 양손으로 붙잡고는 눈앞에 있는 탱커를 있는 힘껏 내려찍듯이 찔러 버렸다.

터어엉!!

"큭!"

양손 내리 찌르기가 탱커의 방패 위에 작렬했다.

필살기의 위력은 대단했다.

힘에 밀려난 탱커가 균형이 무너지면서 방패가 아래로 내려간 것이다.

탱커를 힘으로 무너뜨려 버리는 것!

그것이 온 힘을 싣는 이 필살기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냥 정면으로 찌르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듯한 힘의 방향이 주는 이득이었다.

"상대 방패가 힘에 밀려 내려갈 거야. 그때 얼굴을 노리고 빠르게 한 손 찌르기. 무조건 상대보다 반 박자 더 빠르게! 오케이?"

사니야는 말 잘 듣는 제자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창을 찌르는 동작은 어릴 때부터 해왔던 것.

촤악!

비명 지를 틈도 없었다.

적 탱커의 아바타가 소멸됐다.

-사니야 아흐메토바, 1킬.

짧은 전투에서 1킬 1어시를 올린 사니야.

뒤에서 적 전체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던 조승호는 이제 슬슬 빠질까 싶었다.

적 본대에서 지원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니야 아흐메토바, 2킬.

전율이 흐르는 광경이었다.

사니야가 던지려다가 양손 내리 찌르기를 다시 펼치는가 싶더니, 마지막 순간 다시 창을 투척해 버린 것이다.

순간적으로 페인트가 두 번 실린 일격!

멀찍이 있던 근접 딜러 하나가 일격에 아바타가 소멸당했다.

조승호는 화들짝 놀라며 곧 판단을 내렸다.

"그냥 싸워! 우리가 이길 것 같아!"

-우리도 갈까?

본대 쪽에서 노정환이 물었다.

"네, 당장 다 뛰어오세요!"

조승호가 콜을 하자 사냥을 하던 본대도 헐레벌떡 합류했다.

기습 작전이 한타 싸움으로 돌변해 버린 상황.

사니야가 폭발적인 전투력을 펼치며 그야말로 펄펄 날고 있었다.

"어, 어우야."

서문엽도 기겁을 했다.

증폭된 분석안으로 보이는 사니야의 능력치가 경기 중에 상승해 있었다.

민첩성이 80에서 81로, 기술이 76에서 78로.

짧은 순간에 엄청난 상승폭!

사니야가 그동안 훈련으로 익힌 것을 실전에서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완전히 감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저렇듯 실전 중에 갑자기 퍼텐셜이 폭발하는 경우가 어느 순간 찾아오는데, 사니야는 첫날부터 터져 버렸다. 월드 클래스 재능의 위엄이었다.

경기장은 카자흐스탄에서 온 용병의 미친 활약에 충격에 빠졌다.

< 영입 결과(1) > 끝

< 영입 결과(2) >

기술 78/78인 선수와 78/97인 선수의 기량은 같을까?

절대로 같지 않다.

78/97의 유망주는 어쩌다 우연히 90은 족히 되어야 할 수 있는 슈퍼 플레이를 펼쳐 자신의 천재 끼를 드러낸다.

바로 사니야의 이야기였다.

'방금은 언뜻 서문 아저씨랑 비슷하게 한 것 같은데?'

사니야는 서문엽을 아저씨라 부르고 있었다.

첫 만남 때 대련해서 봤던 페인트 동작을 얼추 비슷하게 해냈다고 생각했다.

간단하지만 초고속으로 펼치면 누구라도 걸려드는 동작.

'아냐, 약간 느렸어. 그래도 요령은 알 것 같아.'

2단 페인트 후 창을 던져 2킬을 기록한 사니야는 뒤로 물러섰다.

무기가 없는 틈을 타 적이 반격하려 했지만, 탱커 최혁이 나서서 막아주었다.

사니야는 여유 있게 창을 한 자루 더 꺼냈다.

'딜러는 참 재미있어!'

탱커 뒤에 물러나 있다가 온 전력을 공격에 집중하면 된다.

공수 배분을 해야 하는 탱커보다 더 신났다.

킬에 맛든 사니야는 본격적으로 날뛰었다.

최혁은 앞에서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이나연과 윤범도 눈치 빠르게 견제로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며 사니야에게 보조를 맞춰주었다.

모두가 사니야에게 판을 깔아주고 있는 것.

한국 첫 데뷔전.

사니야는 킬 욕심이 일었다.

"킬은 동료가 만들어준 걸 주워 먹는 거다. 혹은 동료가 주워 먹도록 네가 만들어주는 거고."

서문엽의 당부가 떠올랐다.

"괜히 일대일로 솔로 킬 멋지게 만들겠다고 욕심내면 뒈진다? 넌 내가 아니라 아직 애송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서문엽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잘 들으라는 표정이었다.

'연계 플레이, 연계 플레이.'

사니야는 할 일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

최혁이나 이나연, 윤범이 만들어준 킬 기회가 보이면 냉큼 챙겨 먹기.

없으면 직접 나서서 적을 흔들어 기회를 만들어주기.

해야 할 일이 명쾌해지니 플레이에 거침이 없었다.

최혁이 방패를 앞세워 밀어붙이고, 사니야가 장창으로 찌르며 함께 흔들었다.

탱커를 잃은 BC서울의 포메이션이 무너졌다.

남은 건 킬 주워 담기뿐!

-왼쪽에 원거리 딜러!

조승호가 멀리서 오더를 내리자, 4인이 삽시간에 왼편에 고립된 원거리 딜러를 집중 공격했다.

당연히 혼자서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사니야가 창을 던져 킬을 먹었다.

-사니야 아흐메토바, 3킬.

포메이션이 무너진 팀의 말로였다.

BC서울의 본대가 합류했지만 조승호 조는 물러나지 않고 버티기를 했다.

버티는 사이 노정환 일행도 도착해 한타 싸움에 합류했다.

그 결과는 압도적인 대승!

-YSM 대단합니다! 9-0의 압도적인 스코어로 대승을 거둡니다!

-사니야 아흐메토바 선수의 활약이 지대했습니다. 용병으로 데려온 선수가 첫날부터 터지네요, YSM!

-서문엽 구단주가 카자흐스탄에 직접 가서 데려온 선수라고 하던데, 바로 실력으로 보여주네요.

1세트는 순조롭게 승리.

이어지는 2세트는 아예 11명이 전원 움직여 BC서울을 압박했다.

자신 있게 먼저 한타 싸움을 열려는 의도였다.

BC서울 측은 초반부터 승부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회피하는 듯한 동선을 그리며 사냥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나연과 윤범이 견제를 펼치기 시작하며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뒤따라 합류한 양측 선수들에 의하여 큰 싸움이 열렸다.

콰르릉!

심영수의 폭발 구체가 서전을 열었다.

폭발을 피해 산개한 BC서울 선수들을 YSM이 사냥하기 시작했다.

산개한 틈을 타 전원이 달려들어 일부를 집중 공격하는 전술적 움직임이었다.

-사니야 아흐메토바, 1킬.

첫 킬을 장식한 것은 또 사니야였다.

1세트에서 킬 맛을 본 사니야가 탐욕스럽게 달려들어서 창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런 그녀의 보조를 맞춰준 사람은 의외로 심영수였다.

속박을 펼쳐 킬을 할 수 있는 타깃을 만들어준 것이다.

킬 기회를 찾아 눈빛을 희번덕거리고 있던 사니야는 심영수의 의도를 놓치지 않았다.

나름 국가 대표 원거리 딜러라 속박으로 빈틈을 만들 줄을 아는 심영수.

놀랍게도 그는 폭발 구체를 더 사용하지 않고 속박만으로 싸웠다. 손에 창을 들긴 했지만 장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심영수가 잘하는군요."

가브리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 이 나라에서는 국가 대표 선수라더니, 자기 초능력을 활용할 줄 알았다.

가장 문제시되던 폭발 구체 남발도 없었다.

오더에 의해 전술적 목적으로 한 번 사용했을 뿐, 그 뒤로는 순순히 속박만 썼다.

예전 같았으면 폭발 구체로 킬을 내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고분고분한 모습.

두말할 것도 없이 서문엽 때문이었다.

"맞기 싫으면 말 잘 들어야지."

"사니야와 호흡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팀플레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왜 그러는지 알아? 내가 사니야를 아끼는 걸 봐서 그래."

서문엽이 직접 카자흐스탄에 날아가서 데려온 어린 선수.

더구나 서문엽이 몸소 창술 코치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창술까지 새로 디자인했다.

그야말로 애지중지였다.

그만큼 넘치는 재능을 서문엽이 보았다는 뜻도 된다.

"사니야와 호흡 맞추면 어시스트를 잘 주워 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 생긴 거지."

"포인트 욕심이야 누구나 있죠. 목적이 무엇이든 제 역할을 잘한다면 팀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근데 쟤도 좀 창술을 본격적으로 가르치든가 해야지 안 되겠어."

본래 무기라고는 검을 한 자루 달랑 들고 있던 심영수였다.

하지만 검술 실력이 거의 쓰레기임을 알아본 서문엽은 창으로 바꾸게 했다.

그러고는 속박과 창을 연계한 공격을 펼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작했는데, 아직은 잘되지 않았다.

"유럽에 진출하려면 무기도 잘 다뤄야 할 겁니다. 최근 트렌드는 11인 모두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하는 거니까요."

초능력 위주의 원거리 딜러는 물론 서포터까지도 무기를 잘 다뤄야 한다.

귀하신 몸처럼 원거리 딜러와 서포터를 보호해 주던 시절은 이미 지난 것이다.

"아주 죽도록 훈련시켜야겠군."

-대상: 심영수(인간)

-근력 60/66

-민첩성 70/73

-속도 79/85

-지구력 65/68

-정신력 28/60

-기술 68/73

-오러 84/85

-리더십 11/23

-전술 19/46

-초능력: 폭발 구체, 속박

정신력을 제외하면 아직 잠재력이 많이 남아 있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 재미없는 능력치.

그러나 모든 부문에서 조금씩 더 올릴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피지컬 전 분야부터 기술까지, 빡세게 굴려야겠다.'

그래야 좋은 활약을 펼치고서 비싸게 팔릴 테니까.

크게 성장할 부분이 별로 없는 심영수는 최대한 가치를 부풀려서 뻥튀기로 팔아 치울 생각인 서문엽이었다.

본인도 해외 진출을 원하니 서로 윈윈이었다.

'그러고 또 외국에서 사니야 같은 애를 주워와야지.'

지금도 맹활약을 하는 사니야를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2세트는 4-0 승리로 끝났다.

YSM도 7명이나 죽었을 정도로 장렬한 한타 싸움이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쟁취했다.

1세트에 이어 2세트도 MVP는 사니야였다.

사니야는 통역사와 함께 인터뷰에 불려갔다.

하지만 서문엽이 보기에는 1킬 3어시를 기록한 최정민과 서브 탱커 김진수도 잘했다.

'최정민 저 자식 관찰 초능력을 가진 값을 한단 말이야.'

소설가 지망생 최정민.

관찰로 상대의 허점을 파악하는 능력을 십분 활용해 곧잘 활약하고 있었다.

모든 능력치가 조금씩 늘었는데, 그중 기술이 도드라졌다.

70/87이었던 기술이 벌써 75/87까지 쭉쭉 성장한 것이다.

어떻게 올리기 힘든 기술이 가장 많이 성장했을까?

그것은 실전을 치르면서 관찰로 파악한 적의 허점을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하는지 서서히 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관찰은 기술 능력치에 10~15쯤을 추가해 주는 효과였던 것이다.

새로 영입된 김진수도 열심히 뛰어다니며 서브 탱커로서 부지런히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첫 프로 무대에서 겁먹은 기색도 아니었고, 유소년 리그보다 훨씬 강한 선수들을 상대로도 제 실력을 다 발휘해 일인분을 했다.

"다들 쭉쭉 성장하는구나."

그저 흐뭇한 서문엽.

가브리엘 감독도 동의했다.

"구단주님께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유망주들만 데려오셨습니다."

"그럼, 내 안목은 신의 경지지. 그런데 다음 경기 상대는 누구지?"

"쌍성 스피리츠입니다."

"쌍성?"

최혁의 원래 소속 팀이었다.

쌍성 스피리츠의 감독은 옛날에 서문엽에게 무참히 구타당했던 인연이 있는 최문앙 감독.

옛날, 자신이 내린 오더에 꼬박꼬박 이견을 제시하던 짜증 나는 모습이 떠올랐다.

'두들겨 패서 응징해 줬던 기억은 잘 안 떠오르니까 더 짜증 나네. 정말 내가 때렸던 거 맞아?'

자신이 가해(加害)한 일은 잘 기억 못 하는 중증 증상을 앓고 있는 서문엽으로서는 속이 풀리지 않고 찜찜했다.

"안 되겠다."

"예?"

"쌍성 걔네들 잘하지?"

"우승 후보 클럽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휴, 그럼 내가 나서야겠군."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요?"

"아냐, 내가 나서고 싶어."

"1년 3회 이용권에서 빼주시는 겁니까?"

"그래그래. 상대가 쌍성 스피리츠면 항상 예외로 쳐줄게."

"포스트시즌에서 쌍성과 만나도 예외입니까?"

"그래."

가브리엘 감독은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올해에 바로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겠군요."

"포스트시즌에만 진출해라. 내가 우승 시켜 줄 테니까. 올해 우승컵 들고 내년부터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참가하자고."

"그러죠. 올해 안에 선수들이 최대한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서 다음 경기는 물론, 앞으로도 쌍성 스피리츠만 만나면 서문엽은 무조건 출전하기로 했다.

뒤끝이 상당히 강한 서문엽.

그 이유는 본인이 보복했던 일은 잘 기억 못 하기 때문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보니, 백제호가 서문엽에게 물었다.

"너 자드룬 씨앗 어쨌어?"

"늘 가지고 다니지."

서문엽은 품속에서 작은 철제 상자를 꺼냈다.

열어보니 벌레만 한 크기의 검은 씨앗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들고 다니는 사람이 서문엽이다 보니 싹을 틔울 생각도 못 하고 씨앗 상태로 잠들어 있는 것.

"혹시 카자흐스탄 놀러 갔을 때도 가지고 다녔냐?"

"당근이지."

"그러다 흘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건 너고. 내가 흘리겠냐?"

"끄응, 아무튼 그거 세계 협회에서 사겠단다."

"진짜?"

"응, 대신 그거 어디서 구했는지 알려달라는데."

"···그냥 오다 주웠어."

백제호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서문엽은 뻔뻔하게 낯짝에 철판을 깔았다.

자신의 비밀 장소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에 사겠대?"

"몰라. 근데 태도로 보니 자드룬 씨앗을 원하기보다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를 대신 처리해 주겠다는 호의처럼 보였다더라."

"······."

돈도 주고 쓰레기도 치워주겠다는 세계 협회의 착한 마음씨.

서문엽은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콱 뒤뜰에 심어버릴까."

"죽을래? 자드룬이랑 너랑 같이 이 집에서 치워 버린다!"

< 영입 결과(2) > 끝

< A매치(1) >

쌍성 스피리츠는 초상집이 되었다.

얼마 전에 벌어진 YSM과의 경기에서 참패를 당한 것이다.

1세트, 11-0.

2세트, 11-0.

MVP: 서문엽, 도합 22킬.

그랬다.

서문엽이 대뜸 출전하더니 쌍성 스피리츠를 때려눕혀 버렸다.

그냥 천천히 가지고 논 것도 아니고, 대뜸 돌격하더니 그대로 11명을 다 올킬해 버린 것이다.

경기를 지켜보던 최문앙 감독은 고통 끝에 해탈한 표정이 되었다.

실력 차이가 나도 정도껏이지, 자연재해처럼 휩쓸려 버리니 차라리 그냥 운명이었다고 셈치고 일찍 체념해 버린 것이다.

더 가관은 서문엽의 단독 MVP 인터뷰였다.

"너무 놀면 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앞으로 쌍성 스피리츠와 하는 경기는 출전할 생각입니다. 쌍성이 좋은 팀이기 때문에 제 몸 풀기 상대로 제격입니다."

-ㅋㅋㅋ쌍성 애들 픽픽 죽어나가더라.

-쌍성 스피리츠 여러분 감사합니다. 11명이서 일시에 덮치면 서문엽을 이길 수 있는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택도 없군요.

-이제는 적당히 쇼를 할 생각도 없이 바로 달려가 학살하더라.

-쌍성 애들 개불쌍ㅋㅋㅋ

-앞으로 쌍성 경기는 계속 나가겠대ㅋㅋㅋㅋ 쌍성 어떡하니ㅋㅋ

-지금껏 본 쌍성 스피리츠 경기 중 가장 재미있었다.

-오늘 경기 역대급ㅋㅋ

인터넷에서는 역대급으로 무참히 박살 나버린 쌍성 스피리츠를 씹고 맛보는 축제가 열렸다. 자주 볼 수 없는 서문엽의 실력 발휘에 신이 난 네티즌들이었다.

쌍성 스피리츠의 서포터들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상대가 서문엽이니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서문엽도 참 너무하는 거 아니냐? 장거리 투창이라든지 견제 플레이라든지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한 볼거리도 많았을 텐데, 왜 그냥 달려들어서 죽이냐?

-우리 선수들이 너무 불쌍했다. 서문엽 무자비하네.

-최문앙 감독이 백제호 대표 팀 감독과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있음.

-저러면 누가 이겨ㅠㅠ

-우리 팀에 국가 대표 선수도 많았는데 상대가 안 되네······.

-왜 해외로 안 나가고 한국에서 양민학살을 하는 거지?

-아니, 진짜 서문엽한테 밉보인 거 있냐? 왜 우리랑 할 때만 계속 출전하겠다는 거야?

-근데 세긴 세다. 우리나라에 저런 선수가 있는 게 신기하네.

-아니, 진짜 저런 초인을 배출한 우리나라인데 왜 이렇게 약해졌지.

-서문엽 형님, 제발 자중 좀 해주세요. 우리한테 왜 그래요ㅠㅠ

경기를 주의 깊게 본 것은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치열하게 올해의 선수상을 다퉜던 톱3 체제.

우후죽순 유망주들이 나타나지만 아직까지 톱3의 어린 시절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는 이는 없는 실정.

앞으로도 톱3 체제가 계속될 듯했는데, 서문엽의 출현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서문엽은 기존의 톱3 체제를 위협할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 예측되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한국에서만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톱3에 해당될지는 찬반이 갈리는 상황.

전 세계가 서문엽을 존경하고 인정하지만, 배틀필드는 전쟁 시절과 다르다는 논리였다.

의외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서문엽이 백인이 아니었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북미·유럽권 팬들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지저 전쟁 시절 서문엽의 활약도 다른 초인의 활약을 억누른 독재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는 이가 있는 판에,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배틀필드에서는 어떻겠는가?

장거리 투창이라는 어마어마한 플레이를 보여줬을 때도 순수하게 감탄하지 않고 폄하하는 무리는 꼭 있었다.

빅 리그에서는 통하지 않을 플레이다.

저런 창에 맞고 킬당할 선수가 빅 리그에는 없을뿐더러, 사냥감 스틸에 쓰기에도 오러 낭비가 더 심하다.

조라는 서포터 없이는 펼치지 못하는 플레이인데, 저 서포터는 빅 리그에서 뛸 수 없다.

전투에서 1인분을 못하는 클래식 서포터는 구시대적.

온갖 트집을 잡으며 배틀필드 약체 리그에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그렇듯 찬반 논쟁이 일어나는 주된 이유는 바로 자료 부족.

서문엽을 분석하기에는 자료가 너무 없었던 것이다.

쌍성 스피리츠와의 경기는 1, 2세트 모두 서문엽이 단독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무척 귀한 분석 자료가 되었다.

서문엽의 영입을 노리고 있는 내로라하는 명문 클럽들은 모두 그 경기 영상을 분석했다.

배틀필드를 사랑하는 유튜버들도 분석 영상을 우후죽순 개시하고 있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방패 컨트롤이 대단하다. 모든 공격에 다 여유 있게 반응하고 있어.

-막을 건 막고 피할 건 피하고, 다수와 싸우는데도 굉장히 여유가 있는걸.

-계속 움직이면서 포위당하지 않도록 포지셔닝을 하고 있어. 그리고 창술 솜씨는 예술 그 자체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지 않아? 나단 베르나흐보다 별로인 것 같은데. 그냥 상대팀이 너무 못할 뿐이야.

└네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

└공격에 100% 쏟는 나단이 화려하지만, 서문엽이 공수 밸런스가 너무 좋아서 쉽게 싸우는 거야. 강팀이 약팀과 싸워도 올킬이 벌어진 사례는 많지 않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상대의 초능력에 대한 대처가 완벽하다는 걸 가장 높이 사고 싶어.

세계 네티즌들도 서문엽의 영상을 보며 전문가 흉내를 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A매치 휴식 기간이 다가오고 있을 때였다.

대한민국 대표 팀은 의외의 나라로부터 A매치 제안을 받았다.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은 프랑스만큼은 아니지만 유럽의 강팀으로 평가받는 배틀필드 강국이었다.

영국 협회는 A매치를 제안하면서 서문엽의 출전을 조건으로 삼았다.

그 탓에······.

"그래서 나더러 국가 대표를 하라고요?"

서문엽은 집까지 찾아온 박진태 협회장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게 조건이라는데 어떡하나?"

"뭘 어떡해. 안 하는 거지."

서문엽은 콧방귀를 뀌었다.

"영국 같은 강팀과 A매치를 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전에는 미국하고도 하더만."

"그건 운이 좋았지. 정말 생각 없어?"

"내가 얻는 게 뭐가 있다고 국가 대표 팀 경기를 뛰어요."

"자네도 나름 얻는 게 있기 때문에 제안을 하는 거지. 그게 아니면 굳이 이렇게 찾아왔을까?"

박진태 협회장이 그렇게 서문엽을 구슬리려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서문엽은 귀찮다는 듯이 휘휘 손짓했다.

"가요, 아저씨, 안 사요."

잡상인 취급이었다.

"끄응, 그럼 하나만 묻지. 유럽에서 널 가장 존경하는 나라가 어딜까?"

"러시아죠. 땅덩이 넓어서 골 아픈 던전도 참 많았거든요."

매우 어려운 편인 러시아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정도로 서문엽은 그곳에서 오래 활약했다. 그만큼 러시아인의 인지도도 높아졌다.

"그럼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절 싫어하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서문엽은 뻔뻔스럽게 반문했다.

박진태 협회장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자네, 7영웅 뽑을 때 영국 초인은 안 뽑았었지."

"그럼 여섯 나라 빼고 다 날 싫어해야 되네요."

"프랑스 초인인 에릭 튀랑은 뽑았잖아."

"뭘 그렇게 따져요. 그냥 쓸 만한 애로 뽑은 거지. 그때도 그것 때문에 시끄러워서 짜증 났었는데."

그때 일이 생각났는지 서문엽의 표정에 짜증이 어렸다.

최후의 던전 공략 멤버를 뽑는 일은 세기의 이벤트였다.

2명이나 들어 있어서 자랑스러워 국뽕을 몇 사발씩 들이켠 대한민국 같은 나라가 있는가 하면, 왜 우리나라 초인은 뽑지 않느냐며 불만을 표출하는 나라도 많았다.

현재 베를린 블리츠 BC의 감독을 하고 있는 7영웅 멤버 엠레 카사는 터키의 국민 영웅이지만, 독일 국적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터키와 독일 두 나라가 서로 자랑스럽다며 찬양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기자들이 워낙 집요하게 달려들어서 서문엽도 폭언을 참 많이 쏟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때 영국에도 잭 브란트라는 입지전적인 초인이 있었는데 기억나?"

"덩치 큰 탱커요. 발이 느려서 안 썼어요."

서문엽도 기억했다.

근력이나 지구력이나 오러량이나 끝내줬는데 민첩성과 속도가 별로라서 고민 끝에 안 썼다.

최후의 던전 같은 위험한 곳에서는 전면으로 충돌하기보다는 재빠르게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스피드와 유연성을 중시 여기는 서문엽의 스타일이 전술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잭 브란트는 7영웅에 뽑히지 않았다.

"잭 브란트는 영국에서는 국민 영웅이었는데 자네가 폄하하는 발언을 했어."

박진태 협회장의 말에 서문엽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언제요."

"영국의 타블로이드지 기자들이 워낙에 극성이라 자네가 쏘아붙였잖아. 그 덩치 큰 굼벵이는 안 뽑으니까 그만 물어보라고."

"···내가?"

서문엽은 전혀 기억 안 났다.

자신이 가해한 일은 잘 기억 못 하는 중증 질환!

"했어. 아무튼 그때 일로 영국인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 심지어 라이벌로 생각하는 프랑스 초인은 7영웅에 뽑혔고."

"그거 때문에 아직도 삐져 있대요?"

"지금도 배틀필드는 영국보다 프랑스가 더 강하고, 리그도 영국 프리미어 리그보다 프랑스의 프르미에 리그를 더 높게 쳐주지.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한 게 자네에게 원망이 쏠린 것도 있지."

초인은 곧 국력.

때문에 초인들의 싸움인 배틀필드는 다른 스포츠보다 훨씬 더 각국 국민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축구만큼이나 배틀필드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 놈들보다 약하다는 게 용납이 안 됐다.

아무튼 그 원망도 다소 서문엽에게 쏠렸다.

서문엽은 평소에도 언행이 불량한 인간이었기에 더 얄밉게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아하, 그래서 걔들이 나를 꺾겠다고 A매치를 제안한 거예요?"

"정확히는 자네가 거품이고 빅 리그에서는 안 통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

"으음, 그렇게 말하니까 또 뚜드려 패주고 싶긴 하네."

어디 가서 누가 시비 걸면 안 빼는 서문엽이었다.

"그렇지? 한 번 보여줘야지?"

박진태 협회장의 초조해하던 안색이 펴졌다.

"으음, 근데 또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기도 싫고."

다시 안면이 구겨진 박진태 협회장.

그는 지쳤다는 듯이 부탁했다.

"이번 한 번뿐이야. 또 국가 대표 해달라고 조르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양민학살만 하고 강팀은 기피한다는 오명은 벗어야지?"

"그딴 소릴 하는 놈들도 있다고요?"

서문엽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주로 영국 애들이."

"그 요리도 못하는 새끼들이······."

서문엽이 이를 부득부득 갈기 시작했다.

슬슬 투쟁심이 들었는지, 서문엽은 쌍심지를 켜며 옆에 가만히 있던 백제호를 바라보았다.

"대신 이번 A매치 전술은 내 마음대로 짠다. 알겠냐?"

리더십 51, 전술 62짜리인 백제호에게 전술을 맡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였다.

"아, 알았다."

백제호는 무기력하게 승낙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근 서문엽의 의견대로 해서 한국 대표 팀의 전력이 강화되었다. 때문에 서문엽의 말이 곧 법이었다.

< A매치(1) > 끝

< A매치(2) >

한국 배틀필드 국가 대표 팀의 클럽하우스에 서문엽이 백제호와 함께 입성했다.

트레이닝 룸에서 개별 훈련을 하고 있던 선수들이 다들 서문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진짜 왔다."

"이제부터 국가 대표 계속하는 건가?"

"이번 경기만 하는 거 아냐?"

선수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구단주님!"

YSM 소속인 최혁과 윤범이 다가왔다.

두 선수 모두 대표 팀에 합류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최혁은 KB-1에서 쭉 활약해 왔던 탓에 다른 국가 대표 선수들과 친분이 있었지만, 윤범은 생판 신인이라 아직 적응을 못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만하지. 얘는 정말 초능력 말고는 아직 역부족이니까.'

서문엽은 증폭된 분석안으로 윤범을 살폈다.

-대상: 윤범(인간)

-근력: 60/60

-민첩성: 62/64

-속도: 57/57

-지구력: 62/62

-정신력: 74/85

-기술: 50/55

-오러: 72/72

-리더십: 20/20

-전술: 45/45

-초능력: 그림자 걷기

가브리엘 감독 밑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덕에 능력치가 거의 다 계발된 모습.

민첩성 2, 기술 5만 더 올리면 완전히 완성된다.

초능력 덕에 출전을 많이 했으므로 실전 경험도 쌓여 전술 능력까지 꽉 찬 상태.

하지만 초능력을 쓰지 않고 그냥 보면 KB-1에서도 하위에 속한 수준이다. 끽해야 KB-2의 주전 정도?

아마도 대표 팀에서는 수많은 국가 대표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받으니, 그들과의 기량 차이 때문에 자신감도 많이 죽었을 터.

'그래도 여기까지 오고 참 잘 컸네.'

선수로서 성공할 자신이 없다고 공부나 하던 놈을 억지로 데려왔었다.

2년만 해보고 은퇴한다면 위로금 3억 원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물론 얼마 전의 재계약을 통해 그 조건은 사라졌다.

그림자 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모습을 감출 수 있는 그림자 걷기 초능력이 완전히 각성하면서 선수로서 계속 뛸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제 다 키웠으니 얘는 팔아야겠다.'

한계가 뚜렷했다.

그림자 걷기만 갖고도 한국에서는 선수로 먹고살 수 있지만, 서문엽은 YSM을 세계적인 명문으로 키우고 싶었기 때문에 윤범을 계속 데려갈 수가 없었다.

성장이 정체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기 전에 팔아 치워서 이적료를 챙기는 게 이득이었다.

"왜, 왜 그렇게 흐뭇하게 보세요?"

윤범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저었다.

"대학가겠다고 징징대던 놈이 국가 대표도 되고 참 많이 컸다 싶어서."

잘 팔릴 것 같아서 흐뭇하다고 대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 참, 언제 적 일을."

"이제 1년 됐어, 새꺄. 근데 너 여기서 다른 선수들하고 잘 어울리고 있냐?"

"네, 다들 안면은 텄는데······."

그런 것치고는 말투는 영 자신감이 없었다.

서문엽은 혀를 차고는 옆에 있는 최혁에게 핀잔했다.

"네가 잘 돌봐야지 뭐하냐?"

"저도 국가 대표는 처음인걸요. 탱커로 뛴 것도 얼마 안 돼서 저 적응하기도 바빠요."

"팀에서 했던 대로 똑같이 하면 되지 뭐. 너 같은 초보 탱커한테 그 이상의 다른 뭔가를 시킬 것 같아? 다른 애들이 다 너한테 맞춰줄 거야."

"구단주님이 감독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야 서문엽이 비선 실세였기 때문이었다.

"시끄러. 아무튼 넌 그냥 최전방에서 적한테 처맞으면 돼."

"···네."

덕담을 해준 뒤에 다른 선수들도 쭉 훑어보았다.

"심영수 이 새낀 어디 갔어?"

서문엽이 묻자 대표 팀의 주장 채우현이 일어나 답했다.

"휴게실에 있는 것 같은데 부를까요?"

그 말에 백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들 다 회의실로 오라고 해."

그렇게 회의실에 코치진과 선수들까지 전부 모였다.

휴게실에서 노닥거리던 심영수도 나타났고,

"삼촌."

대표 팀에 소집되어 귀국한 백하연도 서문엽의 옆자리에 앉았다.

"삼촌도 드디어 태극마크를 다네."

"존만 한 놈들이 나한테 시비를 걸어서 말이다."

서문엽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그 대상은 영국 대표 팀이었다.

"히히, 영국이 삼촌을 싫어하긴 하지."

"그 누구더라, 덩치 큰 굼벵이."

"설마 잭 브란트 말하는 거야?"

"그래, 그 양반 7영웅에 안 뽑았다고 징징거리는 거 아냐."

"정확히는 삼촌이 잭 브란트 욕해서 그렇잖아."

"그 덕에 최후의 던전도 깼고, 인류도 구했으니 해피엔딩이지 무슨 살려줘도 불만들이 많아가지고는."

"걔네들이 국제 대회에서 프랑스를 이겨본 적이 없어서 더 그러는 거야. 프랑스에서 영국을 놀릴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게 삼촌이 했던 발언이거든."

프랑스 국가 대표 팀은 세계 최강이었기 때문에 영국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한 번도 못 이긴 것은 좀 심각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양국 간에 경기가 있은 뒤에 프랑스의 팬들이 영국을 조롱하면서 하는 말이 '영국산 굼벵이'들이었다.

서문엽이 극성맞은 영국 언론에 짜증 나서 했던 말이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계속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었다.

"영국 대표 팀을 흔히 기사와 마법사라고 표현한다."

백제호가 자료 화면을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미국의 파워 게임처럼 빅맨 탱커들 위주의 육박전으로 경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한타 싸움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면서 영국 대표 팀의 탱커들 프로필을 하나씩 보여준다.

"다 잭 브란트 같은 애들이네."

서문엽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나같이 옛날에 발이 느려서 안 뽑았던 잭 브란트 같은 탱커들이었다.

영국산 굼벵이들이라고 조롱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클래식 탱커 위주에 미국의 경우는 느린 기동력을 보완하기 위해 빠른 근접 딜러들을 함께 쓴다. 그에 비해 영국은 원거리 딜러를 많이 투입하여서 보완한다. 이들이 바로 마법사다."

영국의 주요 전술이 나타났다.

4탱커, 2근접 딜러, 5원거리 딜러.

원거리 딜러가 무려 5명이나 되는 특이한 체제였다.

저 중 장궁을 사용하는 원거리 딜러 외에 4인은 하나같이 심영수처럼 범위 공격을 가진 초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 4인이 바로 마법사였다.

화력 하나는 막강할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그중에서도 바로 이 선수."

한 선수의 프로필이 나타났다.

붉은 머리칼의 젊은 사내, 이름은 로이 마이어라 표기되어 있었다.

서문엽은 눈을 빛냈다.

아이리시 위저드, 로이 마이어.

아일랜드가 자랑하는 선수로, 3가지 초능력으로 혼자서 경기의 양상을 뒤집을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선수였다.

잉글랜드가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더불어 아일랜드와 통합 대표 팀을 구성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바로 아일랜드의 로이 마이어를 대표 팀에 넣으면 월드컵 우승도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무엇보다도 2017년, 2018년에 2연속으로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

그랬다.

로이 마이어는 톱3라 불리는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것이다.

"영국 대표 팀은 로이 마이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이다. 탱커진도 딜러진도 모두 로이 마이어를 위해 움직인다."

로이 마이어의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이 재생되었다.

첫 번째 초능력, 얼음벽.

로이 마이어의 두 손에서 얼음벽이 펼쳐져 던전의 한 지역을 두 개로 갈라놓았다.

적 팀의 선수 2인이 동료들과 고립되어서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또 다른 영상에서는 영국 대표 팀이 한타 싸움에서 지는 듯하자, 얼음벽을 쳐서 적의 추격을 차단하고는 아군을 도주시킴으로써 팀을 구했다.

그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것 같았는데, 무서운 초능력이 또 있었다.

두 번째 초능력, 눈보라.

손에서 눈보라를 뿜어서 전방에 있는 일정 범위의 적을 모두 공격한다.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서 써야 했지만, 범위를 조절해서 잘 컨트롤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초능력, 얼음 봉인.

"대상 하나를 20초간 얼음 속에 가둬놓는다. 얼음 속에 갇힌 사람은 20초가 지날 때까지는 탈출할 수 없지만, 외부의 물리적 타격도 받지 않는다. 20초가 지나기 전에는 로이 마이어 본인도 해제시킬 수 없다. 이 초능력도 유명하니 다들 많이 봤겠지?"

"예!"

서문엽도 간밤에 백제호와 전술 상의를 하면서 로이 마이어의 영상을 많이 봤다.

'초능력이 거의 사기 같은 새끼일세.'

얼음벽과 눈보라만 갖고 있어도 위협적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얼음 봉인이라는 희대의 사기성 초능력까지 있었다.

"얼음 봉인은 한타 싸움에서 상대 팀의 에이스를 봉인시키는 데 주로 쓰이며, 위기에 처한 아군을 구할 때도 종종 쓴다. 한마디로······."

백제호는 서문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얘를 20초간 봉인시켜 놓고 한타 싸움을 연다 이 말이지."

선수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서문엽이 20초간 얼음 속에 갇히면 그 순간 게임 끝이었다.

20초밖에 안 되지만, 전원이 동원된 한타 싸움에서는 승부의 행방이 결정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봉인에 실패하면 그냥 물러나지만, 성공하면 바로 한타 싸움이 펼쳐지는 거다. 한타 싸움을 여는 키 플레이어인 셈이다. 그러니 경기 내내 로이 마이어를 특별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옛!"

서문엽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로이 마이어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아마 영국은 저 자식을 믿고서 날 A매치에 참여시켜 달라고 요구했겠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이 4국을 통합한 대표 팀이 출범한 것은 불과 3년도 안 된 일이라고 한다.

통합된 후에야 비로소 영국 대표 팀은 유럽의 강호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 입장상, 한국 같은 약체에게 기껏 통합된 대표 팀이 패배하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설사 서문엽이 있다 해도 한국한테 지냐고 말이다.

게다가 서문엽에게 지면 가뜩이나 그를 싫어하는 영국은 더 여론이 안 좋아진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도 이번 이벤트를 벌였다는 것은 순전히 로이 마이어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로이 마이어는 나단 베르나흐처럼 육박전을 펼치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대일로 실력을 겨루는 일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래서 서문엽에게는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눈보라쯤이야 오러를 일으켜서 견딜 수 있어. 그런데 얼음벽으로 날 고립시켜 놓고 다구리 칠 수도 있고, 얼음 봉인으로 가둬놓을 수도 있는 건 좀 까다로운데.'

로이 마이어 입장에선 서문엽을 상대할 방법이 두 가지나 있는 셈이었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한국 대표 팀 선수들의 면면을 훑어보니 한숨이 나온다.

로이 마이어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선수는 한 명도 안 보였다.

객관적인 전력상으로는 영국 대표 팀을 이길 가망이 안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적으로 꺾는다면 기분이 몹시 좋을 것 같았다.

'어떻게 이겨볼까?'

서문엽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A매치(2) > 끝

< A매치(3) >

금발의 백인 미청년이 영상을 계속 보고 있었다.

이 25세의 아일랜드 청년의 이름은 바로 로이 마이어.

아이리시 위저드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입지전적인 선수였다.

불과 20세의 나이에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했고, 이듬해인 21세에 또다시 차지해 명실상부한 톱3에 이름을 올린 청년.

그의 약점은 선수층이 빈약한 아일랜드 국가 대표 팀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 자.

그러나 영국 통합 대표 팀이 출범하면서 그 약점도 사라졌다.

로이 마이어는 3년 전의 자신과 같은 약점을 가진 사내의 경기 영상을 보고 있었다.

바로 지난번 쌍성 스피리츠와 싸운 서문엽의 경기였다.

서문엽의 플레이만 따로 편집된 하이라이트 영상이 아니었다. 그냥 경기 전체가 통으로 서문엽의 플레이였다.

경기 전체가 주요 장면인 경우는 참 오랜만이었다.

처음에는 외곽을 돌면서 상대하더니, 어느 순간 거침없이 11명의 적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홀로 11명의 적 한복판에 들어왔으니 제 발로 무덤을 판 것일까?

'아니다.'

로이 마이어는 감탄했다.

한 명의 적이 아군 속에 파고들면, 아군이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공격이 같은 동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움츠러든다. 초능력도 종류에 따라 쓰기 어려워진다. 주변의 아군까지 휘말릴 수 있는 범위 공격형 초능력 말이다.

'같은 상황에 처하면 내 눈보라는 쓸 수가 없지.'

그러한 심리적인 상태를 아주 정확히 파고드는 서문엽.

물론 서문엽 자신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방패 컨트롤에 자신 있어 했다.

실제로도 방패로 거의 한 방향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면서, 다른 방향은 창으로 찔러 공격한다.

포메이션을 무너뜨리며, 하나둘씩 사냥!

실력 차이라는 것이 피지컬, 테크닉, 오러만 뜻하는 게 아님을 똑똑히 보여준다.

'동작 하나하나가 전술적이야. 정말 멋지다.'

같은 상황에서 나단 베르나흐라면 어땠을까?

아마 분신으로 200%가 된 공격력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건 로이 마이어도 유럽 챔스에서 익히 겪어보았던 끔찍한 폭력이었다.

그에 비해 서문엽은 조화를 이루는 공격과 디펜스를 무기로 삼아, 기술적이고 정밀하게 적을 와해시키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대단한지 우열을 나눌 수는 없지만, 로이 마이어는 서문엽의 플레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번 A매치는 서문엽을 보고 싶었던 로이 마이어의 입김이 강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탱커였던 잭 브란트가 서문엽에게 어떻게 모욕을 당했건 별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반감도 없었다.

'우리 팀에 데려올 수는 없나? 마음에 쏙 드는데.'

원거리 딜러인 로이 마이어로서는 탱커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얼음벽, 눈보라, 얼음 봉인.

하나같이 전술 병기 수준의 위력을 자랑하는 초능력을 가진 로이 마이어는 큰 틀에서 팀 전술을 결정짓는 플레이 메이커였다.

반면 서문엽은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전술성을 띠는, 작은 틀에서의 전술에 능하다.

자신이 판을 깔아주고, 서문엽이 그 판 위에서 활약해 준다면?

'환상적이야.'

로이 마이어는 현재 뉴욕 베어스 소속이었다.

뉴욕 베어스는 LA 워리어스와 함께 미국 최강을 다투며, 월드 챔스에서도 파리 뤼미에르 BC, 베를린 블리츠와 함께 세계 최강을 다투는 톱3 명문 중 하나였다.

'우리 클럽이 서문엽 영입을 위해 얼마를 준비했지?'

로이 마이어는 불만이 하나 있었다.

영국 통합 대표 팀도, 미국도 클래식 탱커 위주로 선 굵은 플레이를 추구한다는 것.

지능적인 플레이의 미학을 추구하는 로이 마이어는 어마어마한 거력을 가진 덩치들에게 열광하는 마초 판에 진저리가 났다.

서문엽처럼 똑똑하고 날렵한 탱커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했다.

'LA 워리어스로부터 제럴드 워커를 빼오려고 우리 클럽이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했을 때는 속이 터졌지.'

가뜩이나 섬세하지 못한 거구 마초들에게 질렸는데, 제럴드 워커까지 가세할 뻔했으니 열받아서 돌아가실 뻔했다.

'책을 읽으면 샌님이라고 비웃는 무식한 놈들!'

실은 럭비 선수였던 친형의 얘기였다.

로이 마이어는 어릴 적부터 형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았다. 압권은 눈 오는 날 눈싸움을 하자며 데미안을 읽던 로이를 끌고 나온 것.

눈싸움이란 건 보통 멀리서 눈덩이를 던지며 노는 거다.

근데 형은 성미에 안 차는지 껄껄 웃으며 큼직한 눈덩어리를 뭉쳐서 돌격해 왔다.

그걸로 크게 한 대 맞았을 때, 로이는 눈 속에 파묻혀 얼어 죽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데미안의 구절이 떠올랐다.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는 명언 말이다.

아이리시 위저드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가족들은 아직도 그가 동사(凍死)하지 않으려고 초인이 됐다는 사실에 깔깔거린다.

문제의 친형도 자신이 은인이라며 속편한 소리를 해서 울화통 터지게 했다.

참고로 그의 형은 힘에서 동생에게 추월당하자 초인이 되겠다며 온갖 기행을 벌였지만 실패.

그러다가 체념한 지 오래였던 23세의 늦은 나이에 각성했다.

근력을 늘려주는 초능력까지 얻은 형은 군인이 되었고, 아직도 가족이 모이면 로이를 괴롭힌다.

차마 형에게 초능력을 쓰지는 못해서 현재도 여전히 고통받는 로이 마이어였다.

'안 되지.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중요한 때에 형 생각은 하지 말자.'

형 얼굴만 떠올려도 컨디션이 뚝뚝 떨어지니 주의해야 했다.

하지만.

위잉 윙!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자의 이름을 보고 로이 마이어는 평정이 깨졌다.

바로 형 로버트 마이어였다.

"로버트?"

-하하, 내 동생! 경기 준비는 잘 되어가냐?

"형이 전화하기 전까지는."

-여전히 나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언제 한번 내가 강인한 군인 정신을 가르쳐 줘야겠다.

"···그때는 얼음 속에 갇힌 게 어떤 기분인지 알게 해주지."

-하하, 그거 기대되네.

"왜 전화했어?"

-기분이 좋아서. 이 형이 오늘 여자 셋을 천국에 보내 버렸거든! 크하하하!

부들부들.

로이 마이어는 손에 쥔 핸드폰을 부술 뻔했다. 또 콜걸을 불러 논 모양이었다.

"난 바쁘니까 시답잖은 일로 전화하지 마."

-오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 상대가 서문이다 보니 나름 긴장했나 보네?

"A매치에 불과하지만 중요한 경기야."

-크, 서문이 강팀을 상대로 어떤 플레이를 보일지도 기대되네. 그러고 보면 서문도 나처럼 화끈한 사나이잖아?

"그가 형과 같다니 실례될 착각은 하지 마. 그는 5개 국어에 능통하고 난관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지적인 사람이야."

-술 좋아하고, 폭력 좋아하고, 완전 내 과던데? 얼마 전에도 양아치들을 두들겨 패줬잖아. 크, 기어서 나가라니 쿨했다고.

PC방 양아치 참교육 영상은 이미 자막까지 달려서 전 세계에 퍼져 나갔다.

"불의를 참지 못할 뿐이지. 외부에 보여지는 그의 폭력성은 대개 언론이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야. 지적인 사람을 망나니처럼 언론이 꾸미고 있다고."

-그래? 아무리 봐도 내 과던데. 아무튼 넌 서문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구나. 그럼 힘내라. 부모님과 TV로 볼게.

"알았어. 끊어."

통화를 종료한 후, 로이 마이어는 투덜거렸다.

"스타는 미디어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지. 특히나 그처럼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말이야. 학력도 낮으니 무식한 악동 프레임을 씌우기 좋았겠지. 실제로는 지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일 거야. 꼭 만나고 싶다."

서문엽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로이 마이어였다.

***

<서문엽 VS 로이 마이어 격돌>

<인류의 구원자 對 아이리시 위저드, 승자는?>

<내일 저녁 7시, 한국 대 영국 A매치>

세기의 빅 매치가 이러할까?

대한민국에서만 이따금 감질나게 실력을 살짝 보여주던 서문엽이 마침내 세계 레벨의 강호 앞에 나타났다.

심지어 상대는 월드 클래스 톱3로 꼽히는 로이 마이어.

비록 로이 마이어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우열을 제대로 가르는 대결은 성립되지 않지만, 어찌 됐건 톱3와 서문엽의 싸움이라 기대가 컸다.

이 빅 이벤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한국 협회는 영국 통합 대표 팀의 감독과 로이 마이어, 그리고 한국 대표 팀 감독인 백제호와 서문엽 등 4인이 모여 기자회견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영국 협회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4인이 모인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양 팀 감독도 주목할 만했지만 역시나 가장 많이 사진이 찍히는 쪽은 나란히 앉은 서문엽과 로이 마이어였다.

로이 마이어는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서문엽은 통역이 필요 없었기에 외신 기자들을 혼자 잘 상대해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 영국 기자 한 사람이 질문했다.

"잭 브란트 씨를 7영웅에 뽑지 않으면서 비하하는 발언을 하셨는데, 기억하십니까?"

올 게 왔다는 듯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발언은 댁네 나라 타블로이드 언론 때문에 짜증 나서 홧김에 한 말입니다. 잭 브란트에게는 실력이 출중하지만 원하는 유형이 아니라 아쉽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알 만큼 아는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잭 브란트 본인은 꽤 오래 전부터 서문엽에게 유감이 없다고 누누이 말해왔었다.

"어디 신문이었는지 기억 안 나는데, 아무튼 이간질로 영국 시민을 선동한 악질 언론입니다. 잭 브란트는 훌륭한 탱커였습니다."

서문엽은 그렇게 그때 자신을 귀찮게 한 언론에 소소한 복수를 했다.

질문을 주고받은 뒤, 이번에는 서문엽과 로이 마이어가 서로에게 궁금한 질문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로이 마이어는 고민하다가 질문했다.

"생환했을 때 세상이 17년이 지나 있었는데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하군요."

질문을 들은 서문엽은 바로 답했다.

"모든 게 낯설고 홀로 세상에 뒤처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말한 서문엽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또 이어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새벽 빨리 길을 나서도 거리에는 어김없이 먼저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나 세상은 저보다 빠르죠. 그렇기에 따라잡기보다는 제 인생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 잘했다고 생각됐는지 몹시 만족해하는 서문엽.

그러나 옆에 있는 백제호는 대신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왜냐하면.

"저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니냐?"

"완생 명대사잖아."

"아, 진짜 드라마 좋아하네."

기자들이 낮게 수군거렸다.

하지만 통역으로 말을 들은 로이 마이어는 눈을 감으며 의미를 곱씹었다.

'정말 지혜로운 말이다. 역시 품격 있고 지적인 사람이야.'

로이 마이어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이번에는 서문엽이 로이 마이어에게 질문할 차례.

서문엽은 빤히 로이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형제가 있나요?"

흠칫한 로이 마이어.

그러나 곧 태연히 말했다.

"형이 하나 있습니다."

서문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비 거는 건 아니고, 보니까 제호처럼 은근 괴롭히기 좋은 타입 같은데. 혹시 형한테 괴롭힘당하다가 각성했나?"

그 농담에 기자들이 웃었다.

하지만 로이 마이어는 동공이 흔들렸다.

'어떻게?'

형 얘기를 남에게 언급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입에도 담기 싫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내 과던데."

형의 말이 떠오르면서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 A매치(3) > 끝

< 격돌(1) >

"쓸데없는 소릴 왜 해?"

기자회견이 끝나고 백제호가 투덜거렸다.

"그냥. 밖에서 맞고 다녔을 것 같진 않은데 묘하게 괴롭히면 찰질 것 같은 인상이잖아. 그럼 답은 친구나 형제지."

그래서 괴롭히는 형제가 있었냐고 찍었다. 이런 방면에서는 귀신같은 서문엽의 감이었다.

"그런 인상도 있냐?"

"두고두고 놀려먹기 좋지."

"···나처럼 말이냐."

"그럼."

"언젠간 널 잡고 절벽에서 뛰어내린 뒤 나만 순간 이동으로 빠져나갈 거다."

"그것도 재미있겠네. 난 불사신이거든."

그렇게 시시덕거리며 걸었지만, 사실 서문엽은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증폭된 분석안으로 로이 마이어의 능력치를 봤기 때문이다.

-대상: 로이 마이어(인간)

-근력 64/64

-민첩성 88/88

-속도 71/71

-지구력 69/69

-정신력 90/90

-기술 62/62

-오러 96/96

-리더십 86/86

-전술 92/98

-초능력: 얼음벽, 눈보라, 얼음 봉인

-얼음벽: 높이 7m, 길이 30m의 얼음벽을 만들어 30초간 유지시킨다.

-눈보라: 냉기를 담은 눈보라를 전방에 뿌린다.

-얼음 봉인: 지정 타깃을 20초간 얼음 속에 봉인시킨다.

숫자만 보면 그리 대단찮다 싶을지도 모른다.

근력, 속도, 지구력, 기술은 평범한 KB-1 선수 수준이니까.

하지만 그는 원거리 딜러였다.

하나만 있어도 대접받을 만한 초능력을 3가지나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첩성이 무려 88.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초능력을 펼치는 순발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또한 육박전에서도 웬만한 공격은 쉽게 피하는 반응 속도를 가진 것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오러는 96. 초능력의 위력은 보장된 셈이었다.

그리고······.

'이런 앞날 창창한 시부랄 놈을 봤나.'

리더십 86, 전술 92/98.

나중에 감독을 해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재능이었다.

아니.

지금도 이미 일류 감독 수준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냐고?

'저런 전술성 초능력을 가진 녀석이 전술적 역량까지 92/98이라니. 괴물이잖아.'

얼음벽만 따져보자.

전장을 반으로 뚝 잘라 나눠 버리는 효능을 지닌 초능력.

얼음벽이 펼쳐지면 적과 아군이 양분된다.

이는 잘못 사용하면 도리어 아군이 불리한 구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얼음벽을 시전하는 로이 마이어의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전술 92/98이면 얼음벽을 120% 활용한다는 뜻이었다.

90에 달하는 정신력까지 지녔으니 위급한 상황에도 냉정을 유지하므로, 오판을 거의 안 한다.

이는 얼음 봉인도 마찬가지고, 눈보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세계 최고를 다투는 톱3에 들었는지 알게 해주는 능력치였다.

"마이어 얘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서문엽이 투덜거리자 백제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상의된 얘기잖아? 네가 길을 열면 하연이를 비롯한 근접 딜러진을 침투시켜서 킬 따는 걸로."

로이 마이어를 비롯한 영국 통합 대표 팀의 원거리 딜러들은 탱커들이 성채처럼 둘러싸 지키고 있었다.

엄청난 힘을 가진 클래식 탱커는 전술적인 유동성이 부족해도 누군가를 지킨다는 기본 명제는 매우 충실하다.

전술적 유동성은 로이 마이어가 만들어주면 된다.

미국의 파워 게임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고 평가됐던 잉글랜드의 빅맨 전술은 영국 통합 대표 팀을 꾸려서 로이 마이어를 합류시키자마자 단점이 보완되었다.

아일랜드 대표 팀에서 혼자 눈물겨운 원맨쇼를 펼쳐야 했던 로이 마이어는 믿을 만한 동료를 얻었고 말이다.

덕분에 유럽에서 약체로 평가돼 체면을 구겼던 영국은 단숨에 강호로 우뚝 섰다.

아무튼 로이 마이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임무를 영국의 탱커진은 매우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그러한 탱커진을 뚫고서 침투로를 여는 역할을 서문엽이 맡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서문엽은 생각이 바뀌었다.

"안 통할 것 같아."

"왜?"

"영상을 다시 보니 로이 마이어는 적이 접근해 공격을 퍼붓는데도 당황하지 않을 거야."

"음······."

"이미 그 같은 상황을 수없이 맞닥뜨렸던 놈일 테고."

민첩성 88과 정신력 90은 육박전도 수없이 겪으면서 달성한 능력치일 것이다.

"음, 그야 그렇지. 안 그랬으면 진작 나단 베르나흐에게 무참히 썰려 톱3에서 배제됐을 테니까.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 말에 서문엽은 눈을 빛냈다.

"없진 않아."

"생각해 놓은 게 있어?"

"어."

전술 100의 서문엽은 나름대로의 해법을 찾아냈다.

로이 마이어를 직접 만나봐서 능력치를 확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언제나 미지의 던전에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헤쳐 나갔던 서문엽의 빠른 두뇌 회전이었다.

시뮬레이션 훈련실에 대표 팀 선수들이 모두 집결했다.

접속 모듈만 22대가 배치된 어마어마한 훈련 시설로, 대형 스크린도 3대가 세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어 나름대로 협회가 공들였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분석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외국인 코치들도 있었다.

다 모인 자리에서 백제호가 선수들에게 통보했다.

"출전 명단에 변동이 생겼다. 갑작스럽지만 어차피 이번 경기는 다양한 전술을 실험해 볼 좋은 기회니 양해 바란다."

선수들은 대체로 불만 없이 잠자코 동의하는 편이었다.

'생각보다 대표 팀을 잘 장악하고 있네.'

서문엽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껏 죽을 쑨 대표 팀 선수들이 국민 영웅인 백제호에게 대립각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에 절친한 친구이자 엄청난 인성의 소유자인 서문엽이 같이 있었고 말이다.

백제호가 말했다.

"심영수를 제외하고 최만식이 들어간다."

"네? 네!"

호명된 최만식이 당황하다가 냉큼 대답했다.

영국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 유럽 쪽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 했던 심영수는 날벼락 맞은 표정.

다른 선수들도 깜짝 놀랐다.

심영수는 당연히 대표 팀의 화력을 담당하는 원거리 딜러.

그리고 최만식은 탱커였던 것이다.

"저기 감독님, 지금 5탱커인데요?"

주장 채우현이 선수 대표로 의문을 표했다.

애당초 본래 포메이션은 4탱커 체제였다.

세계 트렌드는 3탱커이고, 대표적인 팀이 바로 영국을 매번 떡실신시켜 버리는 프랑스 대표 팀이다.

하지만 그것은 3탱커로도 충분한 수준의 방어력을 유지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실력 차이가 나는 대한민국이 영국 통합 대표 팀을 상대로 3탱커 체제를 했다가는 처참한 꼴을 당한다. 그리고 3탱커 체제의 핵심인 빠른 템포와 전술적 유연함도 한국의 선수들이 소화 못 한다.

그러므로 범위 공격형 원거리 딜러들이 많은 영국의 화력을 견디기 위해 서문엽을 위시하여서 탱커를 4명 두기로 한 것이다.

서문엽과 함께 강인한 근력과 맷집을 가진 최혁이 어떻게든 버틴다는 게 개요였다.

그런데 거기다가 탱커를 하나 더 추가시켰다.

하나 더 추가해 5탱!

이런 갑작스러운 선택은 백제호답지 않았다. 늘 안정적인 선택만 하던 백제호였으니 말이다.

"자세한 설명은 이 친구가 할 거다."

백제호는 서문엽을 가리켰다.

그제야 선수들은 납득했다.

'그럼 그렇지.'

'서문엽이구나.'

'역시 비선실세.'

배턴을 이어받은 서문엽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이 전략의 주요 목적은 한타 싸움에서의 승리다. 탱커가 많으니 사냥은 그만큼 느려질 테고, 따라서 일찍 한타 싸움을 열어서 승부를 봐야 한다. 다행히 영국 애들도 우리가 우스워 보일 테니 질질 끌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올 테지."

선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전제였다.

"저쪽은 어마어마한 화력을 지니고 있어서 이쪽도 심영수가 폭발 구체를 써봐야 티도 안 나는 수준이다. 그래서 심영수는 배제. 대신 탱커를 더 늘렸다."

"공격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채우현이 질문했다.

서문엽이 말했다.

"안 부족해. 엄밀히 말해서 이건 5탱이 아냐."

"예?"

"아, 말 나온 김에 채우현, 네가 최전방에 선다. 늘 하던 역할이니 할 수 있지?"

"혁이와 역할을 바꿉니까?"

채우현은 최혁을 가리키며 물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한타 싸움이 열리고 내가 신호하면, 적 탱커들한테 네 초능력 걸어버려."

채우현은 둔화라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꽤 까다로웠다.

-둔화(초능력): 반경 10m 내의 타깃 10명의 움직임을 30% 둔화시킨다. 본인도 움직일 수 없으며, 본인보다 오러량이 적은 타깃에게만 적용된다.

상대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데, 대신 자신도 못 움직인다.

심지어 상대가 자신보다 오러량이 적어야 한다.

채우현의 오러는 82/83.

많이 노력했는지 처음 봤을 때의 80보다는 상승한 수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서브 탱커인가요?"

최혁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근접 딜러였다가 최근에서야 탱커로 변경했다.

짧은 시간 동안 했던 역할은 오직 최전방 탱커.

그런데 갑자기 역할이 바뀌니 불안한 것이었다.

"바로 이게 핵심인데 말이야."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넌 나랑 같이 딜러야. 방패를 든 딜러."

5탱커가 아니라는 말의 의미가 비로소 밝혀졌다.

"영국의 클래식 탱커 4인은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다. 비집고 들어가려 하면 바로 응징하겠지. 그러니 내가 길을 열고 백하연이 들어간다는 전제는 승산이 낮아."

서문엽은 화이트보드에 선수 이름이 쓰인 자석을 붙이며 설명을 이었다.

"그러니 최혁이 가장 먼저 치고 들어가 길을 연다. 반격이 들어올 테지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텨."

"아, 예!"

그 일은 내구력 강화가 있는 탱커인 최혁이 적임이었다.

"그다음이 백하연."

"넹!"

"치고 들어가서 채찍이랑 순간 이동으로 교란시키면서 길을 더 연다. 네 목적은 킬이 아니라 혼란이야."

"알았어."

"상황이 거기까지 갔을 때!"

서문엽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석을 적진 한복판에 집어넣어 로이 마이어의 자석 앞에 놓았다.

"우리 팀 최강의 딜러인 내가 끝을 본다."

혼란을 유도했지만 여전히 위험한 적 한복판.

바로 탱커의 방어력과 근접 딜러의 스피드와 원거리 딜러의 공격 범위를 가진 서문엽이 들어간다.

"로이 마이어 모가지 따고 적의 포메이션이 무너지면, 설령 이 시점에서 우리가 수적으로 불리해도 이길 수 있어. 내가 킬을 싹 쓸어 담을 테니까. 그러니 호명되지 않은 나머지는 전부 공격보다는 생존에 더 신경 쓰도록."

탱커를 딜러처럼 사용해 극단적인 돌파력으로 적 포메이션을 무너뜨리는 전술.

후일 주류 전술 중 하나가 되는, 이른바 '가짜 탱커' 전략이 서문엽에 의해 탄생한 순간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바로 연습 게임이 이루어졌다.

대표 팀의 후보 탱커들은 물론이고, 가까운 클럽에서 탱커를 더 섭외해 가상의 영국 팀을 만들어놓고 가짜 탱커 전술을 연습했다.

실력 차이를 감안하여 상대 팀에 무려 7탱커를 꽂아놨지만, 서문엽의 차례가 오기 전에 최혁과 백하연에 의해 포메이션이 붕괴되었다.

탱커인데 딜러처럼 움직일 줄 아는 최혁의 순간 돌파가 생각보다 매서웠다.

"이,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좋은데?"

백제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가짜 탱커 전술의 진가가 바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연습 경기 영상을 돌려보고 있던 서문엽은 우쭐해졌다.

"좋긴 하지. 이 몸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만든 전술인데."

"이러면 승산이 있잖아."

"이렇게까지 해도, 한 세트라도 따내면 다행인 것 같다."

서문엽은 푸념했다.

이기고 싶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두 사람이 정한 목표는 애당초 2-1 패배.

유럽 강호인 영국에게 한 세트라도 따내서 좋은 경기를 펼쳤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야, 전에 미국한테 2-0으로 졌는데도 잘 싸웠다고 격려 들은 거 기억 안 나냐? 로이 마이어가 있는 영국한테 한 세트 따내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냐?"

서문엽은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이 싫었기 때문에 연신 투덜거렸다.

"이걸로 한 세트는 따고, 다음은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겠다."

< 격돌(1) > 끝

< 격돌(2) >

A매치 당일.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경기장은 시작 전부터 응원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이 이렇게까지 기대를 받은 일은 드물었다.

상대는 무려 영국.

전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강팀이었다.

그럼에도 전 국민이 이번만큼은 다르다며 기대 중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와아아아아!!"

"와아아!!"

"서문엽! 서문엽!"

선수들이 등장하자 쩌렁쩌렁한 환호성이 들렸다.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서문엽의 등장이었다.

일렬로 함께 걸어 나오고 있는 양 팀 선수들.

"진짜 로이 마이어다."

"존나 잘생겼네."

"사인 받고 싶다."

"배틀필드는 왜 유니폼 바꿔 입는 문화가 없냐?"

"배틀슈트는 존나 비싸잖아."

"있어도 너랑 바꿔주겠냐?"

한국 선수들은 로이 마이어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월드 스타를 본 촌놈들 같아서 서문엽은 심기가 언짢았다.

하지만.

"진짜 서문엽이다. 사인해 달래야지."

"인마, 서문에게 사인 받는 모습 들키면 국민들 난리 난다."

"헹, 우리 스코틀랜드는 서문을 좋아하거든?"

"내 방패와 교환하자고 해야지."

"저 방패, 최후의 던전에 들고 갔던 거잖아?"

"헉, 그런가?"

"차라리 국보를 달래라."

영국 선수들도 서문엽을 쳐다보며 신기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쪽도 촌놈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같은 촌놈이라도 급이 달랐다.

'쟤들은 능력치가 살벌하네.'

모든 능력치의 평균이 80대 초중반 가량이었다.

빅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다 모아놓았으니 당연했다.

선수들을 쭉 훑어보다가 로이 마이어와 눈이 마주쳤다.

로이 마이어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서문엽은 로이 마이어가 들고 있는 기다란 지팡이에 주목했다.

마치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생긴 그것이 로이 마이어의 무기였다.

아이리시 위저드라는 별명에 걸맞게 무기를 디자인한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그냥 폼으로 들고 다니는 장식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상을 봤던 서문엽은 저게 진짜 무기임을 알고 있었다.

금색으로 도금되었으며 포효하는 사자의 형상이 앞대가리에 장식된 지팡이.

평상시에는 그냥 폼으로 들고 다니며 초능력만으로 싸우지만, 육박전 상황이 오면 저 지팡이를 쓴다.

5개의 기다란 칼날이 튀어나오며 창이 되는 것이다.

근력이 64밖에 안 되니 방패는 써봤자 역효과만 난다.

대신 창으로 변신한 지팡이로 견제와 방어를 펼친다.

기술이 62에 불과하니 창술이 특별한 것은 없지만, 적을 견제하고 시간을 끌며 아군의 도움을 기다리는 데는 충분할 정도로 숙련됐다.

기초 수준이지만 88의 민첩성으로 펼치면 마냥 무시할 수는 없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다른 한국 선수였을 때의 이야기.

서문엽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저깟 창술, 나한텐 문제가 안 돼. 가까이 접근만 하면 바로 모가지 딴다.'

그때 로이 마이어가 영어로 말을 건네왔다.

"내 무기에 관심 있어요?"

"어."

"그럼 경기 끝나고 당신의 창과 교환할까요?"

"그래, 좋아."

서문엽도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엽의 창은 모로 공방에서 제작한 값비싼 무기였다.

하지만 그건 로이 마이어도 마찬가지이므로 부담 없이 교환을 제안한 것이었다.

단순 표준 장비를 쓰는 선수들은 제안하지 못하는, 스타급 선수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자, 드디어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 영국의 A매치가 시작됩니다.

-서문엽 선수가 드디어 국가 대표 팀에 합류했죠.

-앞으로도 계속 대표 팀에 남아 있을지, 아니면 이번 경기만 특별히 영국 측의 요청에 의해 출전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요.

-어쨌든 전례가 생겼다는 것이 기쁜 일 아닙니까? 한 번 출전했는데, 두 번, 세 번도 출전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서문엽 선수와 경기를 하고 싶어 하는 국가들이 한둘도 아니고요. 전례가 생겼으니 앞으로도 A매치를 제안하면서 서문엽 선수를 줄기차게 요청하겠죠!

-서문엽 선수 하나로 대한민국 팀의 대접이 달라지네요. 전에 프랑스와 A매치 잡을 때도 참 힘들었다고 하던데 말이죠.

-하지만 아무리 서문엽 선수라도 혼자서 대한민국 대표 팀을 강팀으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선수들이 분발해야 해요!

-지금까지 연패의 수렁에 빠져 있는 우리나라 대표 팀인데요, 또다시 강팀인 영국과 A매치를 치르는 결정은 좋다고 봅니다. 철은 두들길수록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그건 재질이 철일 때의 얘기지."

"우리나라는 유리나 플라스틱이야. 맞으면 깨져."

"기껏 서문엽도 출전하는데 좀 경기다운 경기나 됐으면 좋겠다."

관중들 중 일부가 중계진의 말을 듣고 투덜거렸다.

전 국민이 서문엽이 출전한다니까 이길 수 있다며 기대 만발이다.

언론도 아주 신이 나셨는지 승산이 있다며 호들갑에 부추기는 상황.

하지만 평소에도 프로 리그 경기를 즐겨 보며 배틀필드에 대한 상식이 풍부한 진짜 팬들은 실상을 잘 알았다.

북미나 유럽 등의 선진 리그에 진출한 선수라고는 백하연밖에 없는 상황.

그게 한국 배틀필드의 수준을 말해주는 실상이었다.

"그나마 백하연이 있으니까 받쳐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는 건데."

"괜히 서문엽이 체면 구기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배틀필드 팬들은 서문엽이 고생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우리나라 선수 구성이 특이하죠?

-예? 어떤 부분 말씀이십니까?

-탱커가 다섯 명인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최혁 선수가 아직 근접 딜러인 줄 알고 착각했습니다. 탱커가 총 5인 맞습니다! 5탱커를 시도하나요?

-영국 팀의 강력한 화력에 맞서 탱커를 더 늘리겠다는 발상일까요?

-너무 단순한 발상이 아닐까요? 약팀이 강팀 앞에서 방어적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건 축구가 아니라 배틀필드거든요.

백제호 감독이 갑자기 꺼내 든 실험적인 전술에 중계진은 우려를 표했다.

지금껏 시도해 본 적 없는 전술이었으니까.

물론 5탱커를 시도한 전례가 몇 번 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선수들은 서로 악수를 한 뒤, 각자의 더그아웃 쪽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더그아웃 쪽의 접속 모듈에 들어가면서 경기가 시작됐다.

대한민국 대 영국 A매치.

1세트, 망자의 미궁.

네모난 방과 계단들이 얼키설키 복잡하게 이어진 미궁.

미궁을 헤매다 보면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구조였지만, 중력을 조작해 올라가는 계단인지 내려가는 계단인지도 헷갈리게 해놓았다.

예전에 서문엽이 자선 경기를 치르면서 처음으로 올킬을 펼쳤던 바로 그 던전이었다.

-1세트 던전은 좋습니다!

-서문엽 선수가 여기서 대한민국 최초로 올킬에 성공했죠.

-그 이후로도 공식전에서 여러 번 올킬을 했지만, 가장 큰 충격을 준 첫 올킬은 바로 여기였습니다.

-서문엽 선수는 이 던전 지리를 아주 잘 알고 있고, 주로 출현하는 언데드 계열 괴물들도 서문엽 선수가 아주 잘 사냥합니다.

한국 팀은 바로 사냥을 개시했다.

특히나 서문엽은 아래쪽 계단을 향해 훌쩍 뛰어내려서 단독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스켈레톤들을 쓸어 담듯이 사냥했기 때문에 단독 사냥이 더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아, 홀로 견제를 하러 떠나나 했는데요,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네요.

-상대가 상대니까요. 서문엽 선수도 이번엔 신중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 팀은 사냥을 하면서 꾸준히 전진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아래쪽이 아니라, 영국 팀이 있는 쪽이었다.

한국 팀이 계속 사냥하며 나아가는 방향을 보며 중계진은 깜짝 놀랐다.

-지금 우리나라 선수들이 영국 팀을 향해 접근하고 있죠?

-예, 차분히 사냥을 하고 있지만, 명백히 영국 팀 쪽으로 다가갑니다. 이거 초반에 한타 싸움을 열겠다는 뜻인가 본데요!

-아, 탱커가 5명이나 되니 사냥 속도는 더 느리죠. 그러니 시간 끌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당연히 초반에 승부를 보는 의도일 수밖에 없는 선수 구성이었어요.

***

-로이, 저쪽에서 서서히 이리로 접근하고 있는데? 일찌감치 붙어보자는 것 같아.

정찰을 나갔던 선수가 보고해 왔다.

로이 마이어는 바로 판단을 내렸다.

"저쪽은 탱커가 5인이야. 승부를 오래 끌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어. 압박이 아니라 정말 전투를 벌이겠다는 거야."

-그럼 우리도 일찍 끝내고 쉴 수 있어서 좋은데.

-끝나고 클럽 가자. SNS에서 한국 팬에게 끝내주는 곳을 추천받았어.

영국 선수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로이 마이어가 말했다.

"복잡한 지형에서 산발적으로 교전이 벌어지면 변수가 생기게 돼. 지하 25층 플로어로 끌어들여."

지하 25층은 중간 보스 몹이 있는 넓은 공터였다.

약팀을 상대로 굳이 게릴라전술이 가능한 지형에서 싸워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약팀이라면 그래도 능히 이길 수 있지만, 서문엽이 있는 약팀이었다.

수많은 변수가 발생하는 복잡한 전투 속에서 서문엽이 어떤 위협을 가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오케이.

영국 팀은 빠른 속도로 지하 25층으로 향했다.

넓은 공터에서 변수 없이 제대로 붙어보겠다는 마인드였다.

혹여 한국 팀이 덤비지 않고 물러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럼 25층의 중간 보스 몹을 사냥하고서 계속 내려가면 되니까.

앞서가며 사냥 포인트를 많이 주는 보스 몹을 독점하면 한국 팀은 더더욱 불리해진다.

"월터, 케인, 잭. 한국이 25층에 가기 전에 전투를 벌이려고 서둘러 달려올 수도 있어."

-매복했다가 기습하라는 거지? 오케이.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지.

로이 마이어의 오더에 따라 세 선수가 움직였다.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가 전부라면, 한국은 지하 25층 공터에서 싸우기 싫을 터.

'그럼 서두를 수밖에 없고, 조급해질수록 독이 된다.'

로이 마이어는 치밀하게 생각하며 팀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은 서두르지 않았다. 좋다고 말하듯 25층으로 향했다.

-정말 제대로 한판 붙겠다는 건가?

-손님맞이가 너무 친절한 거 아냐?

영국 선수들은 의아함을 느꼈다.

한국이 제대로 된 한타 싸움을 치르고 싶다고 의지를 표명하니 말이다.

"5탱커 전술의 효과를 전투를 통해 확인하고 싶나 본데. 그럼 어디 응해주지. 5탱커를 시도하다가 망한 이유를 가르쳐 줘야지."

-좋아!

양측은 지하 25층의 공터로 집결했다.

잠겨 있는 비밀 방에 중간 보스 몹이 봉인되어 있는데, 그곳을 통과하면 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양 팀은 그럴 필요 없이, 이 공터에서 자웅을 겨룰 생각이었다.

"펼쳐!"

영국 팀이 좌우로 포메이션을 펼쳤다.

한국도 서문엽이 뭐라고 한국말로 외치니 선수들이 좌우로 펼쳐졌다.

'탱커 셋이 선두에 있고, 서문엽을 포함한 탱커 둘은 뒤에서 예비로 대기하는군.'

5탱커가 전부 선두에 서서 밀어붙일 줄 알았는데 의외의 포메이션이었다.

하지만 별로 겁이 안 났다.

'이제 게임은 끝이다.'

"공격!"

영국의 원거리 딜러들이 각자 초능력을 준비했다.

로이는 언제든 얼음벽과 얼음 봉인을 펼칠 절호의 타이밍만 엿봤다.

한국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 격돌(2) > 끝

< 격돌(3) >

한국 측이 영국 팀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이 마이어는 생각했다.

'한국의 기량으로 우리 탱커진의 철벽을 뚫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서문엽이 직접 뚫거나, 뚫지 않고 건너뛰거나.'

몸집이 크고 힘도 센 영국 대표 팀의 탱커들을 뚫을 재주가 있는 사람은 한국에서는 서문엽뿐이었다.

순간이동을 쓰며 긴 채찍을 자유자재로 쓰는 백하연도 주의해야 했다.

'답은 하나다. 서문엽이 뚫고 백하연이 침투할 테지.'

로이 마이어는 서문엽이 본래 준비했던 전술을 완전히 파악했다.

'하지만 내가 백하연의 공격 정도에 당황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로이 마이어는 자신이 근접전에 약할 거라고 생각하는 적을 수없이 만나봤다.

하지만 그는 웬만한 공격은 손쉽게 피해낼 민첩성을 지녔다.

'어디 해보시지. 실력 차이를 보여줄 테니까.'

마침내 양측이 격돌했다.

콰콰쾅!

원거리 딜러들이 쏟아내는 초능력을 한국의 탱커 5인이 합심하여 막아냈다.

하지만 이윽고 영국 측도 탱커 4인이 돌격해 왔다.

쿠우웅!

온몸으로 부딪쳐 오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한국의 최전방에 선 탱커 3인이 쩔쩔맸다. 몸통 박치기 한 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간문제군.'

영국의 파워풀한 탱커들에게 육탄전에서 계속 밀리는 한국 탱커들.

그나마 방어에만 몰두하고 있어 버틸 뿐, 금방 무너질 것으로 보였다.

'그 전에 준비해 온 작전을 시도하겠지.'

로이 마이어는 한국 대표 팀의 의도를 뻔히 꿰뚫어 보았다.

아니,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아군에게만 전달되도록 속삭였다.

"조심해, 서문엽이 곧 돌진할 거야."

그리고 그때가 한국 팀이 전멸하는 순간일 터였다.

로이 마이어는 백하연이 순간 이동으로 침투한 순간 처치해 버리고 게임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아!"

돌연 돌격을 펼친 것은 서문엽이 아니라, 최혁이라는 탱커였다.

'아니?'

최혁이 무모하리만치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영국 탱커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방패를 왼쪽 가슴에 밀착한 채 검을 마구 휘두르며 돌파를 펼치는 최혁.

영국 탱커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틈새를 허용하고 말았다.

한 번 비집고 들어온 최혁은 완벽한 진형에 낀 이물질이 되었다.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졌지만 꽤나 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아군을 지켜야 할 탱커가 저렇게 침투를 하다니!'

탱커는 보통 상대 탱커를 힘으로 누르며 포메이션을 붕괴시킨다.

저렇듯 틈새를 파고들어 공격하는 것은 근접 딜러의 역할이었다.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해 상대의 포메이션 붕괴를 내부로부터 촉진하는 특명을 받는 역할 말이다.

최혁으로 인해 영국의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 측의 근접 딜러들도 줄줄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서문엽이 온······!'

서문엽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까지 사리고 있을 줄 알았던 백하연이 뛰어들었다.

파앗!

서걱!

-백하연, 1킬.

과연 파리 뤼미에르 BC의 선수다웠다.

백하연은 순간 이동으로 들어와 원거리 딜러 하나의 목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채찍으로도 탱커의 다리를 휘감고 끌어당겼다.

백하연의 난입으로 영국의 진형이 더욱 붕괴되었을 때였다.

마지막까지 기다리고 있던 서문엽이 돌격을 감행했다.

아니. 그것은 탱커의 돌격이 아닌, 근접 딜러의 자객 같은 침투였다.

사방에서 저지하려는 영국 선수들의 공격을 방패로 흘리거나 피해 버린 서문엽은 그대로 창을 휘둘렀다.

"비켜, 새꺄!"

퍼억!

"큭!"

창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든 탱커는 오히려 로우 킥에 정강이를 정통으로 맞아 주저앉았다. 창은 페인트였던 것이다.

킬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서문엽은 무시하고 곧장 로이 마이어에게 달려갔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

'탱커 2인이 침투를 펼친다고? 이래서 5탱커였구나.'

이를 테면 나무 쐐기와 같은 역할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무 쐐기를 박고 물로 불려서 석재를 떼어낸 원리였다.

날렵하게 작은 공간을 비집고 침투할 수 있는 탱커가 끼어들고서, 탱커다운 방어력으로 버틴다.

'머리를 잘 썼구나.'

심지어 백하연도 흔들기 용도로 써먹어 버리고, 서문엽 자신이 결정타를 날리러 왔다.

'당할까 보냐?'

왼손으로는 눈보라를 쏠 준비를 하고, 오른손에 든 지팡이는 칼날 5개를 모두 꺼냈다.

철컥! 철컥!

50㎝ 길이의 칼날들이 튀어나와 흉악한 무기로 둔갑한 그의 상징 같은 지팡이.

서문엽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 빠르게 달려왔다.

파앗!

로이 마이어가 눈보라를 발사했다.

그 순간 서문엽도 창을 냅다 집어 던졌다.

짧은 순간, 로이 마이어는 투창을 눈보라를 쏴서 격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피하기보다는 눈보라에 오러를 더 쏟았다.

파아아아앗!!

눈보라가 쏟아졌다.

서문엽의 투창 폼은 다이내믹했다.

팔을 땅과 수평이 되게 90도 각도로 쭉 뻗은 사이드암 자세였다.

거기서 출발한 창은 강렬한 테일링이 걸린 채 눈보라에 직면했다.

휘익!

창은 무척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스크루처럼 회전하듯이 아래로 뚝 떨어져 눈보라를 피해간 것이다.

'뭣?!'

그대로.

푸욱!

"컥!"

오른쪽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로이 마이어의 얼굴이 고통과 당혹에 일그러졌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어떻게 저런 궤적을!'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투창이었다. 엄청난 테크닉으로 자신의 던지기 초능력을 200% 활용하는 서문엽이었다.

반면 서문엽은 오러를 온몸에 두른 채 방패를 앞세워 눈보라에 저항하며 달려왔다.

새로 창 한 자루를 꺼내 그대로 찌르기!

"큭!"

풀썩!

로이 마이어는 자리에 주저앉아 가까스로 창을 피했다.

그리고 옆으로 구르며 서문엽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한쪽 다리를 다친 것치고는 굉장히 민첩한 회피였다.

그러나 어느새 창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죽음에 직면한 순간.

'그럼 이건 어떠냐?'

전황을 빠르게 훑어본 로이 마이어가 최후의 초능력을 펼쳤다.

콰콰콰콰콰콰!!

거대한 얼음벽이 펼쳐져 전장을 삽시간에 둘로 갈라 버렸다.

-서문엽, 1킬.

물론 그 직후 로이 마이어는 서문엽의 창에 죽었다.

***

"우와아아아아!!"

관중들이 뜨겁게 환호했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한국이 영국 팀을 밀어붙입니다. 영국 진형이 흔들렸어요!

-최혁 선수가 침투한 작전이 주효했습니다. 뒤를 이어서 백하연 선수가 멋지게 킬을 따냈습니다!

-계속해서 파고듭니다! 영국 진형이 붕괴됐어요! 뒤에 있는 원거리 딜러들이 고스란히 노출됐습니다.

-서문엽! 서문엽 선수 파고들어요!

서문엽은 과연 달랐다.

가로막는 영국의 튼튼한 탱커를 간단히 때려눕힌 후에 적진 깊숙이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창으로 페인트를 주면서 발차기! 이야, 멋집니다!

-간단한 페인트인데 저런 스피드로 펼치니 속습니다. 계속 갑니다! 목표는 로이 마이어!

그리고 마침내 로이 마이어를 처치하자 경기장의 분위기가 더없이 뜨거워졌다.

-로이 마이어 처치 성공! 서문엽 선수가 아이리시 위저드를 처치했습니다!

-하, 하지만 죽기 전에 얼음벽을 펼쳤죠? 이거······.

-네, 전장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양 팀 선수들도 둘로 나뉘었는데, 아! 이거 참······!

중계진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얼음벽에 의해 둘로 나뉜 전장.

한쪽에 서문엽과 영국 선수 3인이 있었고, 나머지는 다른 쪽에 있었다.

-서문엽 선수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영국 선수 3명을 혼자서 상대해야 해요!

-그만큼 다른 쪽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수적으로 유리합니다만, 지금 우리 선수들도 많이 죽어나가고 있어요! 처음에 기세가 좋았지만 곧 개개인의 역량 차이가 나기 시작했어요!

-서문엽만 처치하면 나머지는 간단하다고 로이 마이어 선수가 판단하고 얼음벽을 펼쳤습니다.

-마법사의 지혜인가요. 역시 로이 마이어입니다. 어떻게 죽기 전에 그런 판단을 내리나요?!

-얼음벽 유지 시간은 30초! 30초만 버티면 됩니다!

***

혼자 영국 선수 3명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로이 마이어가 유산처럼 남긴 함정에 빠진 서문엽.

하지만 서문엽의 얼굴에는 별로 낭패감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씨익 웃었다.

"이렇게 판을 깔아주면 나야 고맙지."

-삼촌, 조금만 버텨! 곧 순간 이동 딜레이 끝나면 넘어가서 도와줄게!

백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백하연의 순간 이동도 딜레이가 30초였다.

"필요 없어."

-응? 정말? 3 대 1인데?

"네가 이 삼촌의 위대함을 아직 모르는구나? 그쪽이나 잘해."

-알았어.

영국 선수들은 얼음벽이 사라지기 전에 서문엽을 처치할 생각으로 재빨리 덤벼왔다.

'증폭, 기술에.'

서문엽의 숨겨진 초능력, 증폭이 시전됐다.

기술이 110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게 되었다.

매서운 스피드로 3단 찌르기!

채채챙!

앞장선 탱커의 큰 사각방패에 막혔다.

하지만 서문엽은 또 다른 테크닉을 펼쳤다.

몸을 낮게 웅크리고서 상대가 사각방패를 회수한 순간.

팟!

사각방패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시야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짧은 순간 서문엽을 놓친 탱커는 당황했다.

푹!

"컥!"

뒤늦게 방패를 내밀었지만, 그 전에 파고든 창이 왼쪽 어깨를 찔렀다.

"다쳤구나? 팔을 못 들겠지?"

한눈에 진단까지 해버리는 서문엽.

영국 선수 3인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 자식!"

근접 딜러가 측면에서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챙!

서문엽은 창 뒤쪽의 이중날로 검을 잡아채 버렸다.

그대로 창과 함께 온몸을 180도 회전했다.

창과 함께 이중날에 잡혀 있던 검도 비틀렸다.

"큭!"

그 바람에 근접 딜러는 검을 놓쳤다.

삽시간에 터져 나온 놀라운 테크닉!

서문엽은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창을 던져 버렸다.

"크아!"

근접 딜러는 재빨리 등 뒤에서 예비용 검을 꺼냈다. 재빠른 반응은 역시나 영국 국가 대표다웠다. 하지만.

날아오는 창을 쳐내려 했지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아니?!"

생각보다 느리게 날아온 창은 그대로 근접 딜러를 꿰뚫었다.

-서문엽, 2킬.

"체인지업이다, 짜식."

던지는 비거리와 속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서문엽의 초능력!

최대한 느린 속도로 던져서 타이밍을 뺏은 것이었다.

이제 부상 입은 탱커와 원거리 딜러뿐이었다.

원거리 딜러가 오러를 크게 일으켜 거대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불꽃은 이윽고 거대한 사람의 형상을 띠었다.

원거리 딜러 잭 말론의 초능력 불의 거인이었다.

"웃기고 있네."

서문엽은 오러를 증폭시켰다.

그리고 오러를 창에 잔뜩 집중한 채, 불의 거인에게 뛰어들었다.

"뒈져, 새꺄!"

불의 거인에게 창을 내질렀다.

콰르르르르릉!!

믿을 수 없는 오러량이 담긴 일격에 불의 거인은 한 방에 폭사되어 사라졌다.

"마, 말도 안 되는! 이런 괴물!"

잭 말론은 패닉에 빠졌다.

자신의 초능력 불의 거인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소멸된 적은 처음이었다.

어지간한 오러가 실린 공격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서문엽은 그대로 달려들어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부상 입은 탱커가 가로막았다.

"덤벼!!"

투혼을 발휘하는 탱커.

서문엽은 피식 웃더니.

팟!

잽싸게 자세를 낮추며 하단 찌르기 자세를 취했다.

탱커도 이에 반응하여 방패를 내렸다.

하지만 역시나 페인트.

자세만 하단 찌르기 폼일 뿐, 창은 여전히 위를 겨누고 있었다.

탱커는 급히 방패를 다시 위로 올리려 했지만, 아까 찔린 어깨에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팔을 못 들겠지?"

아까 서문엽이 했던 악마 같은 말이 뇌리를 스쳤다.

푹.

-서문엽, 3킬.

이어서 원거리 딜러 잭 말론도 마무리 지었다.

-서문엽, 4킬.

***

-4킬! 서문엽 4킬!!

-정말 대단한 장면입니다! 세계 레벨에서 서문엽 선수의 실력이 얼마나 통할지 모두가 궁금해했습니다만, 이제 밝혀졌습니다. 강합니다! 너무 강합니다!!

중계진이 흥분에 차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 서문엽 만세!"

"말했잖아! 서문엽 형님이 짱이라고 이 새끼들아!"

"우와아아!"

"말도 안 돼!"

관중들도 경악과 감탄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새 접속 모듈에서 나와 대형 스크린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로이 마이어도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뭐야, 저게?'

3 대 1이었다.

저 세 사람은 빅 리그에서 엄청난 몸값을 받는 스타급 선수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약팀 학살하듯이 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얼음벽이 오히려 독이 됐어!'

얼음벽이 사라지자 서문엽은 악마처럼 날뛰며 킬을 쓸어 담았다.

수적으로 유리함에도 한국 선수들은 영국 선수들에게 맥을 못 추고 하나둘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서문엽은 얘기가 달랐다.

찔러 죽이고 던져서 죽이고 방패로 찍어 죽이고.

그럴 때마다 경기장은 그동안 약체로 평가되었던 한국 팬들의 설움이 환호성으로 폭발했다.

포메이션이 붕괴되어서 각자도생하고 있던 영국 선수들은 조직적으로 서문엽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무자비하게 날뛴 서문엽은 기어코 영국 팀을 몰살시켰다.

7킬 2어시.

전장의 사신이 된 서문엽의 1세트 성적이었다.

< 격돌(3) > 끝

< 분전(1) >

접속 모듈에서 서문엽이 나왔다.

선수들은 서문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 정도일 줄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투는 서문엽이 공식전에서 처음으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국 리그에서야 쇼맨십이 절반이었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강호인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악물고 싸운 덕에 7킬 2어시.

11명 중 9명을 처치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거의 혼자 싸웠다. 강호 영국을 상대로 드문 기록이었다.

서문엽은 성큼성큼 걸어가 더그아웃의 좌석에 철퍼덕 앉았다. 백제호의 옆자리였다.

"아오, 존나 힘들다."

"엽아, 너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아니냐?"

백제호가 물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실제로도 증폭 덕에 훨씬 강해졌다.

"나야 끊임없이 정진한 덕에 하루하루 발전하고 있지."

"TV 앞에 살던 놈이······."

서문엽이 수련하는 꼴을 못 본 백제호는 기가 막혔지만, 이게 타고난 재능의 차이인가 보다 하고 트집 잡길 관두었다.

잠시 후, 서문엽이 1세트 MVP에 선정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경기장은 관중들의 환호로 들썩였다.

하이라이트로 서문엽의 7킬 영상이 나왔다.

그것을 곰곰이 지켜보면서 서문엽은 자신의 활약보다는 그때 주변에 있는 다른 한국 선수들을 살폈다.

"제호, 네가 볼 땐 어땠어?"

"잘했지."

"그래?"

너무 단순한 감상이라 실망하려던 찰나.

"정말 대단했어, 너는."

다른 선수들은 문제가 있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대단한 건 이 몸뿐이지."

이윽고 서문엽은 쉬고 있는 선수들을 손짓으로 집합시켰다.

"야 이것들아."

"예!"

선수들의 대답이 우렁차다.

서문엽의 어마어마한 활약에 경외를 느낀 탓이었다.

"일단 처음은 잘했어. 앞에 탱커 3명도 잘 버텼고, 최혁도 잘 파고들었어. 백하연도 완벽했고. 다 잘했는데······."

서문엽은 한숨을 쉬며 전광판에 쓰여 있는 3-0 스코어를 가리켰다.

"5탱커 작전이 성공했고, 로이 마이어도 죽였고, 서비스로 내가 3명을 사살했다. 그런데도 쟤네가 전멸했을 때 우리는 겨우 3명만 살았다."

그 말에 선수들은 겸연쩍어졌다.

서문엽이 혼자 7킬을 할 때, 나머지 4킬을 10명이서 나눠 가졌다. 그마저도 백하연의 2킬 1어시를 빼면 더 초라해진다.

나머지 2킬도 서문엽이나 백하연이 어시스트한 것을 주워 먹은 격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팀이라지만 너무 초라한 실력 차이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문엽이 말했다.

"개인 기량을 문제 삼자는 게 아냐. 생각해 봐. 우리 전술은 성공했어. 영국 전술의 완벽한 카운터였단 말이야. 그런데 너희가 고전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개인 기량 차이 외엔 생각이 안 나는 터라 다들 말을 못 하고 있을 때, 한국 대표 팀 주장인 채우현이 나섰다.

"난전 중에 조직적인 플레이가 부족했습니다."

"그렇지!"

서문엽이 무릎을 쳤다.

"영국 애새끼들이 진형이 무너져서 뿔뿔이 흩어진 채 제각기 싸우고 있는데, 그럴 때 너희들은 조직적으로, 연계 플레이로 하나씩 잡았어야지! 너희는 서로 연계하지 않으면 일대일로 쟤네 못 잡아."

"네, 더 주의하겠습니다."

채우현이 대답했다. 그래도 신임받는 주장답게 믿음직했다.

"이제 저쪽도 비상이 걸렸을 거야. 그동안 고집했던 '기사와 마법사' 전술에 대한 완벽한 카운터가 나왔으니까."

백제호가 말했다.

서문엽이 키득거렸다.

"엄청 당혹스러울걸? 같은 전술을 프랑스가 쓰면 완전히 박살이 난다는 걸 알 테니까."

한국 팀이니까 3-0이었다.

프랑스 대표 팀이 가짜 탱커 전술을 펼친다면?

영국 대표 팀은 그냥 순삭당한다.

"그래도 1세트에서 확인했으니 조치가 있지 않을까?"

"기껏해야 원거리 딜러를 몇 명 빼고 근접 딜러를 투입하겠지."

서문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름 감독으로서 대표 팀을 지도했던 백제호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방금 서문엽이 언급한 대책은 임시방편에 불과하지만, 한국 대표 팀은 그 정도만으로도 이기기 어려워진다. 워낙 실력 차이가 나는 탓이었다.

"괜찮을까?"

백제호가 조용히 물었다.

서문엽도 나직이 답했다.

"뭘 괜찮아? 나라면 로이 마이어 빼고 다른 원거리 딜러를 모조리 근접 딜러로 교체할 거야. 저쪽 감독이 똑똑한 놈이라면 그런 식으로 나오겠지."

백제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극단적인 포지션 비중 변화.

한타 싸움에서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면, 난전에서 승리를 거두겠다는 의도다.

그 정도면 한국쯤은 찍어 누를 수 있다.

"그럼 우리 전술이 벌써 파헤쳐진 거잖아?"

"아냐. 원거리 딜러의 화력으로 클래식 탱커의 느린 발을 보완한다는 쟤네의 명제가 깨진 거지."

서문엽은 영국 측의 생각을 손안에 넣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꿰뚫고 있었다.

"그럼 그 부분을 노려볼 수 있지 않나?"

"잘 들어. 쟤네도 처음부터 로이 마이어 빼고 다 바꾸는 강수는 안 둬. 2세트에서 2명 정도만 교체해 시험해 보겠지."

백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세트는 그냥 내줘버려. 내가 나름 분전해 볼 테지만 아마 못 이길 거야."

그제야 백제호도 서문엽의 의도를 깨달았다.

"2세트에서 성공을 거두면, 3세트는 아예 원거리 딜러를 전원 근접 딜러로 교체하겠구나? 그게 우리 전술에 대한 완벽한 해법이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그렇게 오판하게 만들기 위해 2세트를 내줘 버리는 작전이었다.

***

2세트 시작 전, 양 팀의 출전 명단이 갱신되었다.

한국은 변화가 없었지만, 영국 측은 서문엽의 예측대로였다.

4탱커, 4근접 딜러, 3원거리 딜러.

원거리 딜러 2명을 빼고, 대신 근접 딜러 2인을 투입한 것.

화력 집중적인 구성에서 육박전이 보강됐다.

영국 대표 팀은 한국이 선보인 새로운 전술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완전히 허를 찔렸군. 백제호가 이 정도로 능력 있는 감독이었던가?"

2세트 시작 전, 영국 대표 팀을 이끄는 론 델리 감독은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로이 마이어가 말했다.

"서문엽일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딜러처럼 할 수 있는 탱커는 서문엽 그 자체죠. 최후의 던전을 공략한 7영웅도 기동성과 멀티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구성이었고요."

"그렇군. 어쨌거나 우리에게 중대한 위기가 닥쳤음을 분명하다. 이건 한국 같은 약체에게 1세트에서 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야."

"프랑스나 치치 루카스가 있는 이탈리아가 같은 전술을 쓰면 우리는 더 확실하게 무너졌겠죠."

로이 마이어도 서문엽의 머리에서 나왔을 가짜 탱커 전술의 위력을 깨닫고 있었다.

"일단은 난전 상황에 처했을 때 근접전을 수월하게 치를 수 있는 선수 구성을 짤 것이다."

그러면서 근접 딜러 2명이 교체 투입됐다.

가짜 탱커 전술에 대한 해법을 이번 A매치 경기에서 찾아보겠다는 의지였다.

론 델리 감독은 로이 마이어에게 당부했다.

"얼음벽을 쓸 때 주의해라."

"네, 알고 있습니다."

로이 마이어는 이미 서문엽의 본 실력에 충격을 받았다.

3 대 1 구도를 만들어놨는데 서문엽에게 무참히 박살 났다.

아까와 같은 구도를 얼음벽으로 만들었다간 도리어 서문엽에게 유리했다.

'아예 전투 시에 배제시키는 쪽으로 써야겠다.'

얼음벽으로 서문엽을 따로 고립시켜 놓고, 30초 안에 한국 팀을 박살 낸다.

그러면 무난하게 이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괜찮을까?'

로이 마이어는 가짜 탱커 전술에 대해 걱정이 컸다. 당장 한국 팀이 문제가 아니었다.

클래식 탱커 체제에 대한 맞춤 전술!

이는 영국 대표 팀이나 그가 소속된 뉴욕 베어스 모두 위태로워졌다는 뜻이었다.

'확인하겠다. 근접 딜러의 투입으로 쉽게 대처할 수 있는 전술인지, 새로운 트렌드인지를.'

2세트가 시작되었다.

2세트 던전은 아즈사의 나선 굴.

이번에도 양 팀은 서로에게 접근하여서 한타 싸움을 벌였다.

"이번엔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확실하게 마크해!"

로이 마이어의 외침에 영국 탱커들은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해 경계했다.

최혁이 몇 번이나 기회를 엿봤으나 영국 측은 똑같이 당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서문엽의 해법은 간단했다.

"뭐 해? 더 넓게 펼쳐."

한국 측이 좌우로 더 넓게 펼쳤다.

거기에 맞춰 영국도 펼치다 보니 탱커들 간에 간격이 넓어졌다.

그 순간 최혁이 뛰어들었고, 동시에 서문엽은 방패에 백하연을 태워 던졌다. 그러고는 서문엽도 달려들었다.

왼쪽에서 최혁, 오른쪽에서 서문엽, 공중에서 백하연!

3면에서 동시에 침투하자 발이 느린 영국의 탱커들이 대처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2선에서 대기하던 근접 딜러들이 즉각 반응했다.

그와 함께 로이 마이어가 뒤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앞으로 나섰다.

침투를 시도한 최혁의 눈앞에 당도했을 정도였다.

의외의 상황에 놀란 최혁에게, 로이 마이어가 손을 뻗었다.

파아아아앗!!!

"크헉!"

엄청난 눈보라가 쏟아졌다.

방패로 급히 막았지만 최혁은 속절없이 몸이 얼었다.

콰직!

로이 마이어는 5개의 칼날이 솟아난 지팡이로 마무리 지었다.

-로이 마이어, 1킬.

왼손으로 눈보라, 지팡이로 마무리. 로이 마이어의 필승 패턴이었다.

로이 마이어는 계속 앞으로 나서며 눈보라를 몰아쳤다.

단숨에 한국 측의 공세가 위축될 정도의 위력이었다.

그때.

촤라락!

채찍이 날아들어 로이 마이어의 목을 휘감았다.

백하연이었다.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끼어 넣어 목이 완전히 졸리는 참사는 면했지만, 로이 마이어는 백하연에게 붙잡혔다.

백하연은 그대로 오른손에 든 검으로 마무리 지으러 달려들었다.

그때, 로이 마이어의 발아래에 둥그런 원이 나타났다.

백하연이 지척에 도달한 순간, 로이 마이어는 뒤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 직후.

쩌저저적!

그 원 안에 들어선 백하연은 삽시간에 거대한 얼음 속에 갇혀 버렸다.

얼음 봉인이었다.

가장 날렵한 백하연을 처음부터 노리고 앞에 나섰던 로이 마이어였다. 빠른 스피드와 순간 이동이 아군의 교란시키는 탓이었다.

최혁에 이어 백하연까지 당하자 한국 측은 1세트 때와 달리 주춤거렸다.

물론 변함없이 미쳐 날뛰는 사람도 있었다.

-서문엽, 1킬.

서문엽은 덤벼들던 근접 딜러 하나를 골로 보내고서 영국 대표 팀의 포메이션 한복판에 들어왔다.

"최전방 탱커들은 적을 막고, 나머지는 서문엽을 에워싸!"

로이 마이어의 오더가 떨어졌다.

그러자 사방에서 서문엽을 압박했다.

"덤벼!"

서문엽은 굴하지 않고 좌충우돌했다.

공격이 쏟아지는데도 신들린 무빙과 방패 컨트롤로 막아내며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한복판에서 적이 날뛰니 영국의 대형이 깨져갔다.

하지만 팀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영국의 탱커진을 뚫지 못했고, 20초가 지나 얼음 봉인에서 풀려난 백하연도 기다리고 있던 로이 마이어의 눈보라를 뒤집어쓰고 아바타가 소멸됐다.

연이어 로이 마이어는 한국 선수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서문엽은 영국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고군분투했다.

카각!

"큭!"

서문엽이 창을 등 뒤로 젖혀 찌르는 테크닉으로 근접 딜러의 허벅다리를 찔렀다.

찔렀다가 뽑는 동작으로, 반대편에 창을 던졌다.

애매한 자세로 던졌어도 초능력에 의해 세차게 날아간 창은 그대로 원거리 딜러를 죽였다. 눈으로 보지도 않고 옆으로 던져 맞춰 버린 것이다.

-서문엽, 2킬.

창이 손에 없는 틈을 타 적들이 덤벼들었지만, 서문엽은 한 바퀴 구르는 동작과 함께 새로운 창을 꺼내는 데 성공했다.

초능력이 난무했다.

서문엽은 오러로 몸을 둘러서 보호했지만, 많은 오러가 소모되었다.

정신없이 싸우는 중에도 전장을 쭉 둘러봤는데, 이미 승기가 영국에 기울었다.

'초장에 로이 마이어를 잡았어야 했는데.'

아이리시 위저드를 빨리 제거하지 못한 대가는 뼈아팠다.

로이 마이어가 적극적으로 나서며 한국 선수들을 학살한 것이다.

일찍 승부가 판가름 났지만, 서문엽은 정말 미친 듯이 싸웠다.

민첩성을 증폭시켰다가, 오러를 증폭시켰다가, 기술을 증폭시키며 자신의 기량을 한계 이상 펼쳤다.

때문에 위태롭고 점점 대미지가 쌓여가는 와중에도 반격으로 킬을 꾸역꾸역 쌓았다.

결국 한국 팀이 전멸하자, 서문엽도 적에게 둘러싸여 생애 첫 데스를 당했다.

그때 서문엽의 기록은 5킬.

적진 한복판에서 혼자 싸우면서 거둔 공격 포인트였다.

5-0으로 2세트 승리를 거뒀지만, 영국 선수들은 서문엽이 두려워졌다.

< 분전(1) > 끝

< 분전(2) >

-2세트, MVP.

안내 방송과 함께 영상이 나온다.

로이 마이어였다.

4킬 4어시.

1세트 때와 달리 아이리시 위저드의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과감히 뛰쳐나가 최혁을 단 번에 처치하고, 백하연을 끌어들여 얼음 봉인에 가뒀다.

압권은 그 후 혼자서 눈보라를 몰아치며 한국 진형을 쓸어버린 광경이었다.

2킬과 4어시가 거기서 나왔다.

무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다들 꼼짝을 못하고 움츠러들어 영국 선수들의 공격에 무너졌다.

"와아!"

"진짜 세다!"

"미쳤어."

한국 대표 팀을 응원하러 모여든 관중들도 비록 적이지만 박수를 보냈다. 경기장에서 직접 본 톱3의 위력은 놀라웠다.

-영국 대표 팀이 바로 한국의 전술에 대처한 모습이었죠?

-네, 근접 딜러를 추가 투입해 근접전을 강화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최혁 선수와 백하연 선수가 쉽게 잡혀 버린 겁니다. 그 탓에 적진에 홀로 고립된 서문엽 선수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어요.

-그나저나 서문엽 선수도 정말 대단하네요.

-예,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서문엽이 치른 격전도 영상이 안 나올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맹수였다.

사방에 적밖에 없는데, 그 속에서 혼자 분투를 벌였다.

-저 상황에서 혼자 5킬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뒤를 받쳐주는 선수가 있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너무 혼자 싸웠어요.

-아무튼 서문엽 선수의 실력이 이걸로 입증이 되네요. 세계 최고를 논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게 명백히 입증됐습니다.

-그야 물론입니다. 어느 누가 저 상황에서 5킬을 만듭니까?

중계진의 대화는 차츰 서문엽에 대한 예찬으로 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문엽은 백제호와 다시 상의했다.

"잘했어, 네가 분투하지 않았으면 더 큰 스코어로 졌을 거야."

백제호가 칭찬했다.

2세트 스코어는 5-0.

데스당한 영국 선수 6인 중 5명이 서문엽의 작품이었다.

서문엽이 아니었더라면 훨씬 큰 스코어로 졌을 터였다.

"크게 졌으면 3세트도 안심하고 똑같이 나왔겠지."

5-0이 딱 좋았다.

백하연과 최혁을 일찍 처리하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했다, 라고 영국 측이 생각할 수 있는 스코어였다.

"안전하게 가기 위해 근접 딜러를 추가 투입할 거야."

"그럼 우린······."

서문엽이 웃으며 말했다.

"클래식 탱커 체제를 깨기 위해 탄생한 전술 있잖아. 요즘 대세가 된 거."

잠시 후.

대한민국과 영국의 출전 명단이 공개되었다.

-아! 영국이 초강수를 뒀습니다! 로이 마이어를 제외한 모든 원거리 딜러를 근접 딜러로 교체했어요. 한타 싸움에서 절대 안 지겠다는 강한 의지입니다.

-2세트에서 승리하긴 했어도 서문엽 선수의 활약이 워낙 위협적이었거든요. 육박전을 더 강화해서 맞서야 할 필요성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표 팀의 출전 명단이 의외입니다.

한국 측에서 출전하는 탱커는 서문엽, 최혁, 채우현 3명뿐이었다.

영국 측의 더그아웃이 동요했다.

"제기랄, 당했군."

영국의 론 델리 감독이 침음했다.

3탱커.

기동성을 강화한 조합으로, 클래식 탱커 위주의 4탱커에 대한 카운터로 나온 전술이었다.

바로 최근 대세가 된 트렌드다.

클래식 탱커의 단점인 기동성을 노리고, 발 빠른 사냥과 견제로 이득을 보는 조합인 것이다.

영국은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원거리 딜러를 다수 포함한 화력 집중형 조합을 만들었다.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는 원거리 딜러는 적의 견제 플레이에 대항하기 쉬운 것.

그런데 지금 영국은 육박전을 강화하겠다고 원거리 딜러들을 죄다 빼버렸다.

가위 바위 보에서 진 셈이었다.

"어쩔 수 없다. 로이!"

"네."

"부탁한다."

"예, 맡겨주십시오. 어떻게든 한타 싸움까지 끌고 가서 이기겠습니다."

로이 마이어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

3세트가 시작되었다.

3세트의 던전은 만인릉.

그것은 거대한 무덤 도시였다.

옛날 지저 문명을 다스린 황제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던전이었다.

너무나 오래되어서 그 황제가 누구인지는 지저인들도 몰랐다.

다만 엄청난 절대 권력을 누렸던 것은 자명했다.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도시. 황제가 새롭게 다스릴 사후세계의 수도를 건설해 놓은 것이었다.

심지어 족히 1만여 명의 신하와 백성들까지도 사후세계의 구성원으로 선택되어서 함께 순장되었다.

인구가 많지 않은 지저 문명에서 그러한 짓은 상상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언데드들의 도시.

육체가 잘 보존된 황제는 아직도 이 도시를 통치하고 있으며, 지저인의 출입조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저인들조차 이 만인릉을 조사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서문엽은 오랜만에 와본 만인릉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풍경에 과거를 떠올렸다.

역시나 서문엽이 공략한 적 있는 던전이었다.

다만 서문엽이 공략을 주도했던 것은 아니고, 여러 팀이 연합하여 함께 진입했으며 책임자도 따로 있었다.

거리가 미로처럼 꼬여 있는데 스켈레톤 주민들과 경비병들이 수시로 출몰해 고생했던 곳이다.

'벌써 한참 옛날 일이군.'

이곳의 궁전 중심부에 황제가 있다.

살아생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었던 황제는 심상치 않은 위압감을 풍겨 서문엽도 압도되었었다.

결국 처치하긴 했지만 힘들었다.

'그땐 나도 아직 덜 여물었을 때라 고전했지.'

배틀필드는 최종 보스로 황제까지 구현했다.

다만 말이 없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저인을 구현하지 않은 이유와 마찬가지로, 지성체를 만들기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만인릉은 워낙 드넓어 대개는 최종 보스인 황제까지 도달하기 전에 경기가 끝난다.

던전에 접속하자마자 서문엽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여기 황제 면상 보기 전에 경기 끝내지 않으면 힘들어진다. 알지?"

"예!"

"그럼 사냥은 얘기했던 대로 3-3-3-2로 간다."

팀원들은 탱커를 조장으로 삼아서 3인 1조로 흩어졌다.

탱커 없이 근접 딜러 2명과 원거리 딜러 1명으로 이루어진 조도 있었는데, 이 조는 사냥 겸 정찰을 맡았다. 조장은 원거리 딜러, 심영수였다.

"심영수, 가능성은 낮지만 적도 견제를 해올지 몰라. 잘 감시해,"

"넷!"

그리고 서문엽은 백하연과 함께 움직였다.

"가자."

백하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맡은 역할은 바로 견제 플레이였다.

쟁쟁한 선수들로 구성된 영국 팀을 공격해야 하는 역할을 소화할 선수가 한국 팀에 별로 없었다.

"적이 5인조면 투창으로 견제, 4인조면 치고 빠지기, 3인조면 다 조질 거야."

"응."

1세트 때 3 대 1로 이겼던 서문엽이었다. 백하연도 함께 있는데 3인조는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영국 측 진영으로 가는 길에 만난 스켈레톤 주민들을 사냥했다.

긴 싸움이 예상되므로 던지기는 자제하고 그냥 평범한 창술로 사냥에 임했다.

증폭 역시 초능력이므로 오러가 소모되니 되도록 아꼈다.

그럼에도 서문엽의 테크닉은 스켈레톤들을 사냥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파각! 파각!

두개골을 하나둘 창으로 찌르고 방패로 찍어 부수며 전진.

백하연도 채찍으로 거들며 사냥 포인트를 쌓았다. 그녀의 채찍을 뚫고 가까이 다가오는 스켈레톤 주민은 1명도 없었다.

그렇게 사냥하며 전진하던 중에 중간 보스 몹도 만났다.

바로 경비대를 끌고 온 경비대장이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무장하여서 무쇠 갑옷으로 골격이 보이지도 않는 경비대장은 경비대와 함께 돌격했다.

서문엽은 방패를 뉘여 백하연을 태웠다.

파앗!

백하연이 하늘 높이 도약했다.

그러고는 경비대장을 향해 똑바로 떨어졌다.

서문엽은 백하연이 경비대장을 공격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창을 던졌다.

쉬이이익!!

경비대장은 방패로 막으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창이 뚝 떨어지며 하단을 노렸다.

까아앙!

급히 방패를 아래로 낮춰 막는 경비대장.

하지만 그로 인해 상단에 대한 방비가 되지 않았다.

촤아악!

백하연의 채찍이 대도를 들고 있는 경비대장의 오른손을 휘감았다.

이어서 검으로 목을 그었다.

서걱!

-크어어!

투구를 쓴 경비대장의 두개골이 떨어졌다.

경비대장의 몸뚱이는 잃어버린 두개골을 찾기 위해 땅을 더듬었지만,

파각!

연이어 날아든 창이 두개골을 꿰뚫어 버렸다.

사냥 포인트를 획득한 서문엽의 몸이 보라색 광채로 빛났다.

파란색-보라색-붉은색-검은색-흰색 중 2단계였다.

백하연 또한 어스름한 보랏빛을 띠었다.

파앗!

순간 이동으로 스켈레톤 경비대의 한복판에서 탈출한 백하연은 건물 지붕 위로 올라섰다.

서문엽이 힘껏 점프하자, 백하연이 채찍으로 낚아채 올려주었다.

"가자!"

경비대의 추격을 뿌리쳐 달아나기 시작한 두 사람.

한국 최고의 2인조는 서서히 영국 팀이 사냥하고 있는 지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구단주님?

심영수의 목소리였다.

"왜?"

-지금 어디쯤이시죠?

"이제 거의 다 왔어. 왜?"

-여기 문제가 좀 생겼는데······.

***

심영수는 건물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인영을 보며 떨떠름해졌다.

포효하는 사자의 형상이 장식된 금도금 지팡이를 든, 마법사와도 같은 모습의 금발 청년.

몸은 짙은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의 3단계에 근접한 2단계.

여기 오기까지 만난 괴물들을 죄다 쓸어버렸다는 뜻이었다.

"여, 여기 로이 마이어가 나타났어요."

-뭐? 피해!

서문엽의 외침이 들리는 찰나, 로이 마이어가 왼손을 뻗었다.

쩌저저적!!

얼음벽이 도로의 한쪽을 틀어막았다.

한쪽 퇴로를 막은 로이 마이어는 건물에서 뛰어내렸다.

"젠장! 30초만 싸워!"

심영수는 폭발 구체를 생성시키며 소리쳤다. 30초가 지나 얼음벽이 사라지면 도망치자는 뜻.

눈보라가 몰아쳤다.

***

"몇 명이야?"

-로이 하나요. 악! 젠장!

고전하고 있는 심영수의 목소리였다.

서문엽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로이 마이어.

혼자서 한국 진영에 나타났다는 뜻은 하나였다.

'맞바꾸기 하자는 거냐?'

로이 마이어가 던지는 메시지를 하나였다.

너는 내 아군을 쳐라.

난 네 동료를 치겠다.

서문엽이 견제로 영국 팀을 박살 내는 속도보다, 로이 마이어 자신이 한국 팀을 풍비박산 내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계산이었다.

-전원 로이 마이어를 잡아.

서문엽이 이를 악물며 오더를 내렸다.

발도 그리 빠르지 않으면서 원거리 딜러가 홀로 적진에 간다는 건 무리한 발상이었다.

이나연처럼 빠르고 점프 뛰는 재주가 없는 한은 말이다.

로이 마이어는 허를 찔렀다.

상대가 한국 팀이라는 데서 든 착안이었다.

서문엽과 백하연을 빼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그나마 백하연도 서문엽과 페어를 이루어 견제에 나설 거라는 예측까지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 유명한 마법사의 지혜, 로이 마이어의 판단력이 발휘된 한 수였다.

"삼촌, 어떡해?"

"돌아가긴 늦었잖아."

먼 길을 왔다.

이제 와서 소득 없이 그냥 돌아가면 동선 낭비, 시간 낭비였다.

"가자. 영국 놈들 조지러."

서문엽이 독기를 품었다. 이쪽도 영국 진영을 조져 버려야 균형이 맞다.

도착하니 영국 측은 이미 5인씩 2개 조로 짝지어서 사냥 중이었다.

서문엽이 견제 올 거란 알고 조당 2명씩 붙은 탱커들이 삼엄하게 경계 중이었다.

"틈이 없는데? 스틸이라도 할까?"

백하연이 나직이 물었다.

원래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판이 바뀌었다.

"넌 기다렸다가 혹시 내가 위험해지면 도와줘."

"응?"

서문엽은 단독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이건 기습도 암습도 아니었다.

정면으로 달려든 것이다.

"나타났다!"

영국 측의 탱커 2인이 소리쳤다.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약간은 당황했을까?

혼자 당당히 정면에서 달려드는 서문엽의 모습에 영국 측은 어수선해졌다.

가까이 접근한 서문엽이 들고 있던 창을 냅다 던졌다.

창이 위로 날아갔지만 정면에 대치한 탱커는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방패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창이 뚝 떨어져 자신을 노릴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뒤로 날아갔다.

물론 변화를 일으키며 전혀 생각 못 하고 있던 근접 딜러에게 꽂혔다.

"헉!"

몸을 날려 겨우 피한 근접 딜러.

서문엽은 창을 또 꺼내기 위해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탱커가 달려들었지만, 노렸던 바였다.

쿠웅!!

물러나는 척했던 서문엽이 냅다 들이받았다.

예상 못 했던 타이밍에 들이치니 탱커는 단번에 균형이 무너졌다.

근력이 무려 96이나 되는 탱커였지만, 서문엽도 근력을 증폭해 89였다.

쾅!

"큭!"

방패로 내려찍자 똑같이 방패로 가까스로 가로막는 탱커, 그러나 균형을 잃은 채여서 더욱 위태로웠다.

서문엽은 손을 위로 뻗었다.

휙, 척!

던졌던 창이 되돌아왔다.

콰직!

-서문엽, 1킬.

정면에서 덤벼 탱커를 1킬.

그동안 다른 4인이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포위 대형을 갖춰서 서문엽을 둘러싼 것.

그때였다.

-로이 마이어, 1킬.

-로이 마이어, 2킬.

"씨발."

서문엽은 욕이 나왔다.

< 분전(2) > 끝

< 분전(3) >

백하연이 뛰어들어서 포위된 서문엽을 간신히 빼냈다.

넓은 공간이라 혼자 싸우기 여의치 않았으므로 서문엽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이 자식들이 이제 수비적으로 싸우는군."

당연하지만 영국 선수들도 학습 효과가 있었다.

1, 2세트에서 다수로 덤볐어도 서문엽에게 킬당한 주된 이유는 반격에 의해서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래서 반격을 당할 틈을 주지 않도록 신중하게 싸우는 것이다. 다소 소극적이어도 당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

백하연과 함께 후퇴하자 영국 선수들도 뒤쫓지 않았다.

추격하다가 좁은 길목에 접어들면 반격당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그때, 안 좋은 소식이 또 들렸다.

-로이 마이어, 3킬.

"죽은 거 누구야!"

짜증 섞인 서문엽의 질문.

-영수가 당했습니다.

채우현이 보고했다.

"원거리 딜러 하나를 왜 못 잡아?"

-워낙 도주 루트를 잘 잡고 있고, 근접전에도 강합니다.

'끙, 그건 그럴 테지.'

로이 마이어의 민첩성이 88이었다.

근력, 지구력, 기술은 낮지만 96이나 되는 오러로 커버 가능하다.

민첩성 88, 오러 96이면 일류 선수는 몰라도 평범한 선수급은 육박전으로도 처리 가능한 실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한국 선수들은 바로 그 평범한 선수 수준도 아슬아슬한 것들이 아닌가?

"어느 쪽으로 도주하는데?"

-북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서문엽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쫓지 말고 사냥해. 또 올지도 모르니까 정찰로 2명 보내고."

-예.

이어서 서문엽은 백하연에게 말했다.

"하연아, 방금 부딪친 애들 말고 다른 영국 놈들 뭐 하나 정찰해. 아마 로이 마이어와 합류하기 위해 북쪽 루트로 우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응!"

백하연은 즉시 출발했다.

영국 팀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단독으로 한국 진영을 활보하는 로이 마이어.

그리고 5인 1조로 움직이는 무리가 2개 있다. 그중 하나는 방금 서문엽과 싸워 1명이 데스.

'나와 하연이가 이쪽에 있고, 3명이 죽는 바람에 저쪽에 있는 우리 측 본대는 6명뿐이다.'

만약 4인이 서문엽과 싸우는 동안, 다른 5인이 북쪽 루트로 우회해 로이 마이어와 합류한다면?

그럼 더 이상 한국의 본대와 정면충돌해도 무섭지가 않게 된다.

합류하기 전에 아직 혼자인 로이 마이어를 제거하는 게 최선이지만,

'이놈의 약체 팀은 믿을 수가 없구나.'

전원 달려들어 로이 마이어를 사냥하라고 오더를 내렸던 건 서문엽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로이 마이어에 대해 잘 몰랐다.

영상을 많이 보고 분석했지만, 아일랜드 대표 팀 시절 받쳐주는 동료 없이 홀로 분투를 벌이던 로이 마이어의 활약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단독 행동하는 일에 익숙하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사실 진짜 실책은 전원이 몰이사냥에 나섰는데 거꾸로 3킬 당한 한국 대표 팀이지만 말이다.

잠시 후, 정찰 떠난 백하연이 보고했다.

-북쪽 루트로 이동하고 있어. 로이 마이어와 합류하러 가는 것 같아.

예상대로였다.

서문엽은 결단을 내렸다.

"채우현, 잘 들어."

-예.

"로이 마이어가 동료들과 합류해서 너희를 죽이러 쫓아다닐 거야."

채우현의 긴장한 숨소리가 전달되었다.

"너희는 반시계 방향으로 도망 다니면서 사냥 포인트를 축적해. 너희의 목표는 최대한 오래 살아남는 거야. 알았어?"

-예.

"하연이는 놈들을 계속 쫓아다니면서 위치 파악해. 너도 최대한 오래 살면서 적의 위치를 알려줘야 해."

95의 속도와 순간 이동을 지닌 백하연에게 딱 적합한 임무였다.

-알았어.

"난 최대한 놈들을 조지면서 숫자를 줄일 거야. 그동안 너희가 최대한 생존해야 해."

서문엽이 그린 그림은 양측이 서로의 꼬리를 물며 잡아먹으려 하는 2마리의 뱀 같은 구도였다.

'최종적으로 3 대 1 구도만 되어도 성공이다.'

결국 다 죽고 서문엽 자신이 홀로 남았을 때, 영국 팀의 숫자가 3명 이내라면 이 작전은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은 불리했다.

그렇게 기상천외한 경기가 펼쳐졌다.

서문엽이 계속해서 영국의 선수 4인을 습격했고, 로이 마이어는 아군과 합류해 채우현이 이끄는 한국 팀 본대를 쫓았다.

-서로가 서로의 꽁무니를 뒤쫓는 형국입니다.

-도주 및 장기전 전략을 택한 한국! 로이 마이어가 뒤쫓지만 영국 또한 서문엽에게 공격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로이 마이어도 서두르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 선수들이 아주 잘 도망 다닙니다. 백하연 선수가 계속 적의 위치를 파악하고 알려주기 때문이죠!

-백하연 선수가 정말 위험한 역할을 수행 중입니다. 역시 파리 뤼미에르 BC의 선수다운 모습입니다.

백하연은 발이 느린 영국 팀이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었다.

홀로 다니느라 괴물들과도 자주 마주쳤지만, 채찍을 활용해 매달려서 날아다니거나 순간 이동을 적절하게 활용해 피해 다녔다.

덕분에 채우현은 동료들을 이끌고 적이 쫓아오기 힘든 루트로 도망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서문엽은.

파앗!

수시로 창을 날려서 영국 선수들을 위협하고 사냥을 스틸했다.

영국 선수들은 4명이나 있지만 제대로 싸우기보다는 방어에 최선을 다하는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로이 마이어의 오더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섣불리 맞서 싸우다가 서문엽을 죽일 수 있다는 욕심이 들어 과감하게 공격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반격에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서문엽은 계속 영국 팀을 괴롭혀 봤지만 쉽게 킬을 딸 기회를 보지 못했다.

'괴물들이 쏟아진 틈을 타 혼란을 노려보면 좋지만······.'

아쉽게도 영국 측은 괴물의 출현 빈도가 낮은 구간만 골라 다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없는 혼란을 내가 만들어내야지.'

서문엽은 즉각 움직였다.

일단 만인릉의 중심부로 향했다.

중심부는 황제가 기거하는 궁전이 있었다.

이 던전에서 출현하는 가장 무서운 괴물들도 이곳에 대기하고 있다.

본래는 더 시간이 흘러야 궁전에서 괴물 근위대가 파견되지만, 그걸 억지로 끌어낼 생각이었다.

서문엽은 던지기에 증폭을 걸고서, 창을 무제한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파앗! 파앗! 팟!

창이 잇달아 날아들며 궁전을 지키는 스켈레톤 근위병을 맞췄다.

퍼걱! 빠각!

돌아온 창을 다시 던지며 8자루의 창을 로테이션으로 던지는 서문엽의 필살기!

'오러 소모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장기전을 노린 이상 최후의 순간을 위하여 오러를 최대한 비축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서문엽의 요란한 필살기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궁전에서 이를 좌시하지 않고 스켈레톤 근위대를 출동시킨 것.

자주 나타나는 경비대보다 훨씬 강한 정예 부대였다.

은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이 이를 증명했다.

척! 척! 척! 척!

백여 켤레의 군화가 일으키는 발소리가 소름 끼치게 균일했다.

칼 같은 제식 군기.

5m나 되는 길이에, 붉은 빛깔의 창날이 달린 독특한 장창.

붉은 망토까지.

근위대가 서문엽을 향해 똑바로 진군하고 있었다.

"자, 쫓아와라."

서문엽은 근위대를 4명의 영국 선수가 있는 쪽으로 유인했다.

***

영국 통합 대표 팀에 웨일즈 출신의 개리 윌리엄스라는 선수가 있다.

34세의 베테랑 근접 딜러.

주무기는 도끼지만 특이하게도 장궁도 들고 다녀서 유사시 원거리 딜러 역할도 수행한다.

적성에 따라 근접 딜러가 됐지만, 어렸을 적부터 7영웅의 활잡이였던 엠레 카사의 팬이었기 때문이었다.

활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아서였을까.

그는 특이한 초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바로 '강화된 시력'이었다.

초인은 대체로 시력이 좋지만, 그는 강화된 시력에 의해 몇 배나 좋은 눈을 가졌다.

심지어 일부러 사용하지 않아도 평상시에 유지되는 패시브 초능력이었다.

그 시력이 아니었으면 국가 대표로 뽑히지 못했을 테니, 장궁을 놓지 않았던 그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옳았다.

팀의 정찰을 전담하는 개리는 계속 아군의 주위를 배회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멀리까지 내다보는 그의 시야는 중심부 궁전에서 출동한 근위대를 포착했다.

"근위대 출동.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

아직 근위대가 나타날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이상하게 여겨졌다.

-서문엽이군. 그쪽으로 근위대를 끌고 가니 주의하도록.

로이 마이어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경고했다.

-알았다.

동쪽 지역에서 서문엽과 드잡이하던 4인조가 대답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개리가 제안했다.

"내가 서문엽을 감시하는 건 어때?"

-안 돼, 한국 본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필요해.

"어차피 그쪽은 반격할 의욕이 전혀 없어. 지금 한국 팀에서 공격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서문엽밖에 없잖아?"

개리가 말했다.

-음······.

로이 마이어도 그 의견에 고민했다.

베테랑답게 타당한 의견이었다.

한국 측이 백하연을 정찰에 활용하듯, 이쪽은 개리가 서문엽의 위치를 수시로 파악해 위험을 경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

-오케이. 맡아줘.

"알았어."

-단, 섣불리 저격하려 하지 마. 무조건 조용히 감시만 해야 해.

장궁을 쓰고 싶어 하는 개리의 저격 본능을 자제하라는 주문이었다.

"알아. 나도 벌써 프로 18년 차야."

개리보다 배틀필드 경력이 오래된 선수는 세상에 없었다.

배틀필드가 탄생한 2006년, 17세에 선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던전 공략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을 받았지만, 서문엽이 인류를 구하는 바람에 15세에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다행히 배틀필드가 탄생한 덕에 조기교육은 헛되지 않았다.

잃었던 꿈을 되찾은 덕에 개리는 지금까지 정력적으로 선수 생활을 해올 수 있었다.

개리 윌리엄스가 서문엽이 있는 동쪽 지역으로 향했다.

워낙 시력이 좋았던 탓에 조금만 이동하자 높은 위치에서 서문엽을 볼 수 있었다.

'이동 중간에 백하연과 마주쳤다. 내가 이쪽에 왔다는 게 서문엽에게도 알려졌을 거야.'

서문엽은 어마무시한 장거리 투창이 가능하므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제3자 입장인 것처럼 긴장 풀어서는 안 된다.

'이 긴장감 너무 좋군.'

마치 저격수들의 대결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내 개리는 웃었다.

'불공평한 대결이지만,'

그는 서문엽의 몇 배나 되는 시력을 가졌다.

저쪽은 자신을 못 보는데 공평할 리 없다.

개리는 장궁을 꺼내 들었다.

철컥!

오러를 주입하자 좌우로 살이 튀어나오는 최신형 장궁.

합금 화살을 한 대 꺼내 시위에 먹이며 개리는 기회를 엿봤다.

당부대로 자제할 생각이지만, 아군이 위험하면 언제든 지원사격 할 것이다.

서문엽이 건물 뒤편으로 움직이는 바람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역시 내가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아는군.'

어느 방향에서 감시하는지도 알고 시야의 사각으로 정확하게 이동하는 서문엽.

그의 똑똑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를 것이다.'

개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 시야의 우위를 이용할 줄 알았다.

이쪽에서 볼 수 없으니, 저쪽도 이쪽을 보지 못한다.

그 틈에 개리는 빠르게 이동했다.

다른 방향에서 서문엽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서문엽은 근위대를 유인하고 있어서 자신과 두뇌 싸움 하고 있을 여유가 없을 터였다.

"서문엽은 동쪽 3구역으로 갔다. 근위대도 그쪽으로 간다. 나도 이동한다. 유사시 지원사격을 해주지."

개리는 이동 중에 동료들에게 말했다.

-서문엽에게 위치를 들키지 마.

로이 마이어의 연이은 경고.

"절대 안 들켜. 저쪽은 날 못 보고 있다고."

들킨다면 어쩔 텐가?

서문엽이 아무리 창을 잘 던져도 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개리, 조심해!

"응?"

4인조 쪽에서 소리쳤다.

무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개리는 곧 그 경고의 의미를 깨달았다.

쉬이이익!!

쉬이익!

무려 4자루나 되는 창이 날아오고 있었다.

어떤 건 직선, 어떤 건 포물선, 어떤 건 불규칙한 궤적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5자루, 6자루······.

서문엽이 계속 창을 던지는 듯했다.

"허억!"

기겁을 한 개리는 감시 포인트로 삼았던 첨탑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뒤늦게 던진 7, 8번째 창은 뛰어내릴 것을 계산하고서 던져졌다.

'말도 안 되는!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콰직!

-서문엽, 2킬.

개리 윌리엄스는 허무하게 서문엽의 킬 제물이 되었다.

그는 확실히 서문엽의 시야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

다만 실수가 있다면, 서문엽이 '적에게 들키지 않고 감시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에 정확히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저기 있겠거니 싶어서 마구 던진 창에 맞은 것이었다.

< 분전(3) > 끝

< 분전(4) >

'진짜 맞았네.'

서문엽은 3세트 시작 후 처음으로 웃었다.

보지 않고 마구 던졌지만, 그렇다고 아예 운에 기댄 건 아니었다.

처음 것은 천천히, 갈수록 빠른 속도로 던져서 창들이 동시에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안배했다.

결국 피할 곳이 없어 뛰어내리게끔 설계된 연속 투창이었다.

증폭은 던지기에 썼으므로, 순전히 기술 100인 자신의 테크닉만으로 펼친 슈퍼 플레이였다.

'이 진가를 관중들이 알아주기는 할까?'

조승호의 시력 전달과 함께 장거리 투창을 하면서 구상한 플레이인데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도 종종 써먹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