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선 경기(2) ##########################
자선 경기 당일.
경기장에 도착한 서문엽은 북적대는 인파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이렇게 인간이 많아?"
"당연하다고 생각 안 하냐?"
백제호의 핀잔에 서문엽은 혀를 찼다.
"지저 전쟁 때 세계 인구가 좀 더 확 줄었어야 했어."
"제발 어디 가서 그런 말 좀 하지 마라."
"더 심한 말도 많이 했는데 뭘."
"심하다는 자각 자체는 있구나?"
"물론이지. 그래야 짜릿하잖아."
사악하게 킬킬 웃는 서문엽에게 백제호는 학을 뗐다.
차에서 세 사람이 내리자 팬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서문엽! 서문엽!"
"사랑해요!"
"서문엽 만세!"
"오늘 올킬하세요!"
백제호는 까닭 없이 울컥했다.
"이런 놈이 뭐 좋다고 난리야!"
"그야 네가 날 반항적인 청춘스타로 미화한 탓이지."
"그러니까 난 투자만 했대도!"
"아으, 그만 좀 해! 혼난다!"
뒤따르던 백하연이 호통치자 그제야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일행에게 기자들이 덤벼들었는데, 백제호는 눈치를 보다가 서문엽을 뒤로 확 밀쳐 버렸다.
"뭐야, 인마!"
"인터뷰나 하고 와!"
파앗! 팟!
백제호와 백하연은 나란히 순간 이동을 써서 도망가 버렸다.
홀로 남은 서문엽만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또 궁금한 게 뭔데? 물어봐요."
"서문재단 신도들을 폭행하셨는데요, 왜 그러셨습니까?"
"말로만 하면 제 말을 멋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냅다 쥐어 팼습니다."
"사건 이후로 서문재단을 탈퇴하는 시도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서문재단은 이 사건에 대해 '믿음이 부족함을 질책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마디만 할게요. 좋은 말 할 때 해체해라."
"지금까지 수많은 폭행 시비를 일으키셨는데요, 반성하는 마음은 안 드십니까?"
"넌 뭔데 훈계야, 씨발아."
서문엽이 눈을 부라리자 기자가 겁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났다.
유년기를 폭력 속에서 보낸 사람이 초인이 되고 형사 면책권까지 손에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서문엽이었다.
그렇게 오늘도 막장 인터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오늘 슈란 씨가 내한했는데요, 17년 만의 재회하는 소감 좀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서문엽은 안색이 변했다.
"걔가 왜 와요?"
"아는 동생을 만나러 왔다고······."
"몰라요. 난 모르는 여자야."
서문엽은 강하게 부정한 뒤에 경기장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버렸다.
***
백제호와 백하연 부녀가 자선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선수 대기실에 서문엽이 나타나자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헉, 진짜 서문엽이다."
"광화문 광장의 동상의 주인공을 보게 되다니."
"실제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선수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초인이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았만 선뜻 다가가기는 힘들었다.
원체 성격이 꼬였다는 게 전 세계에 알려졌기 때문.
서문엽은 모두 무시하고 성큼성큼 백제호에게 다가갔다.
"제호야. 너도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슈란이 한국에 왔대."
"···올 게 왔군."
백제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신 백하연이 눈을 빛냈다.
"슈란? 진짜로?"
백하연은 여성의 몸으로 최강의 초인으로 손꼽히는 슈란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서문엽은 초조한 표정이었다.
"예전에 내가 걔를 좀 막 대하긴 했지?"
"온갖 쌍욕을 다 했지.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뜻은 충분히 통했을 거야. 펑펑 울었으니까."
"끙, 그렇다고 설마 이제 와서 복수하겠다고 소멸 광선을 쏘는 건 아니겠지?"
"글쎄다. 피차 17년이 흘렀다면 둘 다 나이 들어 변했으니 잊었겠지. 근데 넌 그때 쌍욕 했던 그놈 그대로잖아."
"······."
너무 옳은 말이라 서문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보기 드물게 곤란해하는 서문엽.
17년 전, 슈란은 첫 만남부터 서문엽의 심기를 거슬렀다.
부잣집 외동딸에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여왕처럼 자란 17세 소녀. 이에 걸맞게 시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었다.
험하게 산 서문엽과는 출생부터가 상성이 안 맞았다.
심지어.
-대상: 슈란(인간)
-정신력: 29/40
이는 서문엽이 가장 싫어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40이라도 채우겠다고 사전 훈련 때 일부러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랬더니 효과는 없고 원한만 샀지.'
유리는 철과 달리 두드리면 깨진다는 걸 간과한 결과였다.
여왕 대접만 받다가 구박 당한 슈란은 원독에 찬 눈빛으로 두고 보자고 했었다.
"대체 삼촌이 뭐라고 했기에 그래?"
백하연이 궁금해져서 물었다.
서문엽은 머리를 긁적였다.
"용암에 처넣을 년이라고 한 적이 있었지."
"히익!"
"이름 대신 온갖 동물이나 곤충으로 부르기도 했고······."
예를 들면 돼지, 굼벵이, 나무늘보, 닭, 바퀴 등.
"히이익!"
"근데 원래 던전이란 게 그런 거잖아? 평소였으면 그렇게 험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정신력도 강해지는 거고."
"···그냥 삼촌의 명복을 빌게. 장례식 두 번 치르겠네."
"끄응."
나중에 복수해도 상관없으니 지금은 최후의 던전 공략에 집중하자고 약속했던 게 떠올랐다.
정말 복수하겠다고 덤비면 어쩌면 좋을지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백제호가 선수 대기실 한가운데로 나와 입을 열었다.
"다들 주목."
모든 선수가 잡담을 멈추고 백제호를 바라보았다.
"나는 국가 대표 팀 감독 백제호다. 오늘은 희망 팀의 감독 겸 선수로 나왔다."
가볍게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곳에 모인 희망 팀은 백하연 외에는 국가 대표 선수가 없었다.
서문엽과 백하연을 여기에 넣는 대신, 반대 측인 사랑 팀에 나머지 국가대표들을 넣은 것이다.
희망 팀이 전력상 불리한 건지 아니면 유리한 건지는 서문엽의 기량에 달렸다고 봐야 했다.
"너무 오랜만에 무기를 드는 터라 망신이나 안 당하면 다행일 것 같은데, 모쪼록 잘 부탁한다."
선수들은 하하하 웃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때 시큰둥하게 있던 서문엽이 홀로 생각했다.
'너희들보단 나을 거다.'
백제호는 빡센 단기 훈련 덕에 기량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있었다.
-대상: 백제호(인간)
-근력 59/70
-민첩성 86/100
-속도 82/99
-지구력 60/69
-정신력 85/90
-기술 60/70
-오러 69/72
-초능력: 순간 이동
가장 중요한 민첩성·속도가 86·82로, 79·80으로 떨어져 있던 때보다 장족의 발전이었다.
100·99라는 전성기의 미친 스피드는 안 나오겠지만 이 정도면 국가 대표 놈들보다 낫다.
기술 또한 52에서 60으로 껑충 급상승.
몸에 익은 옛 테크닉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이었으므로 단기간에 큰 회복이 가능했다.
근력과 지구력도 상승했으니 이만하면 쓸모가 있었다.
'하연이도 있으니 상대 팀을 처바를 수 있겠는데.'
-대상: 백하연(인간)
-근력 65/82
-민첩성 90/90
-속도 94/95
-지구력 61/80
-정신력 81/81
-기술 68/75
-오러 66/70
-초능력: 순간 이동, 로프
백하연은 그새 근력·지구력·기술이 1씩 올라 있었다.
A매치 미국전을 근접 딜러로 실전을 치러보면서 경험치를 얻은 덕이었다.
"그리고 저기, 보다시피 그 서문엽이다."
백제호는 서문엽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서문엽은 고개만 까닥했다.
"안녕."
백제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다시피 서문엽은 오늘 우리 희망 팀의 탱커로 싸우게 됐다. 그리고 나머지야 서로 잘 알 테니 서로 인사는 이쯤 해두자."
다들 KB-1 리그에서 뛰고 있었으므로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서문엽은 분석안으로 선수들의 면면을 슥 둘러보았다.
'역시나 별것 없네.'
분석안으로 살펴보니 각 능력치의 평균이 60 중반 수준이었다. 재능도 딱 그 정도.
'응?'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띄는 청년이 있었다.
키는 170㎝ 정도로 작지만 다부진 체구를 갖고 있었다.
-대상: 최혁(인간)
-근력 67/90
-민첩성 73/75
-속도 69/71
-지구력 66/70
-정신력 70/80
-기술 60/70
-오러 80/82
-초능력: 오러 집중, 내구력 강화
-오러 집중(초능력): 오러를 들고 있는 무기에 빠르게 집중시킨다.
-내구력 강화: 오러가 항시 몸을 보호하고 있어 외부 충격에 쉽게 다치지 않는다.
근력의 재능이 90이었다.
희망 팀의 8인 중 90짜리 재능이 있는 유일한 선수였다.
'잘 크면 그럭저럭 쓸 만한 탱커가 되겠는데.'
그런데 근력 재능이 90인데 현재 근력이 겨우 67인 게 이상했다.
때마침 최혁도 서문엽을 흘깃 훔쳐보다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흠칫한 최혁에게 서문엽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엉거주춤한 최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근접 딜러 최혁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 근접··· 응?"
대꾸하다가 서문엽이 눈을 크게 떴다.
"내 귀가 이상한가. 방금 근접 딜러라고?"
"예, 쌍성 스피리츠 소속의 근접 딜러입니다."
'뭐래 이 병신이.'
서문엽은 황당해졌다.
근력 재능이 90이고, 내구력 강화라는 좋은 초능력도 있는데 딜러라니?
"탱커 아니고?"
최혁은 쑥스럽게 웃었다.
"어릴 때야 서문엽 선배님 같은 탱커가 되고 싶었지만, 덩치가 작아서 딜러가 됐습니다."
"그냥 덩치 작다고 딜러야?"
"아뇨, 그땐 남들보다 날렵한 편이어서 딜러로 낙점됐습니다. 초능력도 딜러에 적합하고요."
"···초능력이 뭔데?"
"무기에 오러를 빨리 실어서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거 하나야?"
"예."
그제야 대강 이해되었다.
'이 자식, 내구력 강화를 각성해 놓고 자각을 못 하고 있구나.'
초능력을 각성해 놓고도 모르는 초인은 종종 있다.
분석안을 가진 서문엽은 의외로 이런 케이스를 많이 봤다.
'내구력 강화를 모르니 딜러가 됐지.'
보나마나였다.
"어허, 이놈 작고 날렵하네. 너 딜러!"
라고 유소년 때 엉터리 코치가 결정해 줬음이 틀림없었다.
"하연아."
"응, 삼촌."
서문엽이 뭘 하나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하연이 냉큼 대답했다.
"방패 하나 구할 수 있으면 가져와라."
"넹, 잠깐만."
팟!
순간 이동으로 사라진 백하연은 잠시 후에 역삼각형 모양의 카이트 실드를 들고 나타났다. 근처에 무기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 이거 써."
서문엽은 카이트 실드를 최혁에게 건넸다.
"네?!"
최혁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딜러는 빨리 움직이기 위해 무거운 방패를 들지 않는다.
명백히 딜러 때려치우고 탱커를 하라는 뜻이었다.
"딱 기초만 알려준다. 방패는 왼쪽 가슴에. 그리고 방패는 가만히 놔두고 몸만 움직이는 거야. 나가서 공격하고, 다시 방패 뒤에 돌아와 숨고. 나갔다 돌아왔다, 나갔다 돌아왔다, 오케이?"
"아니, 근데······."
서문엽은 방패를 쓰는 기초 동작을 간단하게 보여주었다.
"전 딜러인데······."
"십새꺄, 너 지금 내 가르침 무시해?"
고딩 일진처럼 인상을 쓰며 으름장을 놓는 서문엽.
당황한 최혁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래야지."
그제야 만족스러워진 서문엽.
이를 지켜보던 다른 희망 팀 선수들이 나직이 수군거렸다.
"아니, 똘아이라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처음 본 사람 포지션을 대뜸 바꿔 버렸어."
"최혁이 뭐 잘못했냐? 저건 무슨 괴롭힘이야?"
"눈 마주치지 말자. 또 누가 타깃이 될지 몰라."
서문엽의 똘끼에 두려움을 느낀 선수들이었다.
########################## 자선 경기(3) ##########################
졸지에 방패 들고 탱커가 된 최혁은 울상이 되어 희망 팀 감독인 백제호를 쳐다봤다.
백제호가 최혁을 바라보았다.
최혁은 더더욱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백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탱커는 4명, 딜러는 6명, 서포터 1명이군."
최혁은 절망에 빠졌다.
저 탱커 4명이란 건 최혁을 포함시킨 숫자였다.
'백제호 감독님도 날 포기했어!'
행패를 부리는 서문엽을 묵인하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탱커가 많은 편이군."
'원래 딜러가 많은 편이었어요!'
최혁은 속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옆에 서문엽이 있었기에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일단 던전은 '아즈사의 나선 굴'이다. 얼마 전에 미국전을 치렀던 던전이니 서문엽도 알고 있지?"
"어."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TV로 미국전을 봤고, 그게 아니더라도 실제 아즈사의 나선 굴을 서문엽이 공략했었다.
"자, 그래도 봐봐."
백제호는 스크린에 나오는 지도를 툭툭 쳤다.
아즈사의 나선 굴은 3개의 원이 있는 형태였다.
큰 원.
그 안에 작은 원.
정중앙에 둥그런 중앙 지역.
뿐만 아니라 중앙 지역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숨겨진 통로가 있다.
큰 원에서 작은 원으로 가는 통로는 동서남북에 하나씩 있다.
작은 원에서 중앙 지역으로 향하는 통로는 남서쪽과 북동쪽에 하나씩 있다.
각 지역은 숫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큰 원의 북서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1~8구역으로 표기됐고, 작은 원도 북쪽 통로 부근부터 9~12구역으로 표기됐다.
중앙 구역이 13, 지하는 14였다.
각 구역 역시 1-1, 1-2 등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사랑 팀은 1-1, 우리는 5-1에서 시작한다. 일단 다같이 5-1에서 사냥한 뒤 5-2로 넘어가고, 그때 서문엽은 혼자 5-3으로 간다."
백제호가 제시한 초반 전략에 모두 깜짝 놀랐다.
5-3은 5구역의 보스 몹이 있는 곳이었다.
서문엽 혼자 보스 몹을 사냥하라는 뜻이었다.
"거기 뭐가 있는데?"
서문엽이 물었다.
"세르펜."
"아아, 오케이."
서문엽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가 5-2를 정리할 때, 동시에 서문엽이 5-3에서 세르펜을 사냥할 거다. 우리와 동시에 끝나도록 시간 조절 잘해. 그거 잡으면 5구역이 통째로 붕괴되니까."
"알았어."
오히려 너무 일찍 잡지 말고 조절하라고 당부까지.
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문에 빠졌다.
'세르펜을 혼자 잡을 수 있나?'
'적어도 5명은 붙어야 하지 않아?'
'강팀에서도 3명 이상은 붙는데.'
아무튼 이렇게 한다면 상대 팀보다 더 빨리 사냥을 하게 된다.
"다음은 6구역을 정리한 후, 남쪽 통로를 통해 작은 원으로 진입한다."
작은 원은 바깥의 큰 원으로 통하는 통로가 총 4개인 데다 동선도 짧아서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는 강점이 있었다.
약팀이라면 상대 측와 마주치지 않게 바깥 큰 원을 겉돌 테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 상대 영역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면 나와 백하연, 서문엽 3인이 견제 플레이를 한다. 소규모 전투라면 우리가 월등하니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랑 팀은 전원이 국가 대표 선수이기 때문에 총 전력은 미지수.
하지만 서문엽, 백하연, 백제호 셋이서 3 대 3으로 싸운다면 월등히 유리할 터였다.
그러니 일단 기습을 통한 소규모 싸움에서 적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그게 성공하면 수적에서 유리해지니 정면 대결을 펼쳐도 된다는 계산이었다.
'그냥 11 대 11 붙어도 이길 것 같은데.'
서문엽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백제호가 대표 팀 감독을 하면서 고생하더니 많이 조심스러워진 것 같았다.
'뭐, 첫판은 적당히 놀아줘야지.'
자선 경기는 3판 2선승제였다.
일단 1세트는 협력 플레이를 하며 적당히 놀아주면서 관중들에게 제대로 된 경기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배틀필드에 대해서 파악도 할 겸 말이다.
'그리고 2세트는······.'
서문엽은 히죽히죽 웃었다.
파악이 다 끝나면 이제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경기 시작 10분 전입니다. 장비를 착용해 주세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선수들은 각자 라커룸에서 장비를 꺼내 착용하기 시작했다.
서문엽도 갑옷을 걸쳤다.
선수들은 다 몸에 타이트하게 붙는 배틀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가볍고 움직임도 자유로우면서도 내구성이 강했다.
이 위에 합금으로 제작된 갑옷을 더 걸치는 것이었다.
"오, 가볍네?"
갑옷을 모두 착용한 서문엽은 몸을 움직여보며 신기해했다.
17년 전보다 확연히 발달된 장비였다.
옆자리에서 무장을 하던 백제호가 말했다.
"네 무기는 최후의 던전에서 가져온 것을 손질해서 준비해 놨대. 네 커스텀 무기를 따로 제작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나도 손에 익은 게 좋지."
서문엽은 최후의 던전에서 썼던 창을 그대로 쓰게 되었다.
원형 방패는 비슷한 게 있어서 새 것을 받았지만 말이다.
서문엽의 창은 총 4자루였다.
던지기도 하기 때문에 여분의 창이 꼭 필요했고, 모두 들고 다니기 위해 독특하게도 접이식이다.
철컥! 철컥!
창을 하나씩 접었다 펴보았다.
1.8m 길이의 창은 통짜 합금이었다.
17년 전에 제작된 것이라 해도 당시의 최고 합금 기술로 제작된 거라 여전히 쓸 만했다.
생김새도 특이했다.
앞은 한 갈래의 창날이, 뒤는 포크처럼 두 갈래의 꼬챙이 같은 이중 창날이 달려 있는 구조.
이 이중 창날은 괴물의 꼬리나 촉수 등을 붙잡는 데 쓰는 용도였다. 배틀필드에서는 상대의 무기를 잡거나 뺏는 데 사용 가능했다.
"수리 잘해놨네."
만족한 서문엽은 3자루를 접어서 등에 걸고, 하나는 편 채로 손에 들었다.
"수선에 신경 많이 썼겠지. 유서 깊은 무기니까."
인류를 구한 그 무기니 경매로 팔면 엄청난 돈이 되리라.
"허 참, 만든 지 1년도 안 된 건데."
"아무튼, 방심하지 마라."
백제호가 나직이 경고했다.
"넌 괴물이나 지저인과 싸웠지만, 얘들은 인간과 싸우는 훈련을 했어. 실전 경험도 너보다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넌 한 번밖에 안 죽어봤지만 얘들은 수없이 죽으면서 시행착오를 겪었지."
"명심하지."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서문엽은 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배틀필드를 하라고 꾀더니, 결국 백제호도 서문엽의 본 실력을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17년이나 지났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전투태세를 마쳤을 때, 안내 방송이 다시 들렸다.
"가자!"
백제호가 앞장서며 외쳤다.
선수 입장이었다.
'배틀필드라··· 어디 마음껏 즐겨주겠어.'
일단 참여하게 된 것, 편견 없이 즐겨볼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은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말이다.
***
양 팀 선수들이 복도에서 모였다.
축구처럼 아이들과 손잡고 입장하는 그런 연출은 없었다.
이런 폭력적이고 흉흉한 스포츠에 어린아이들을 낀 연출이 있을 리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영광입니다!"
상대 측인 사랑 팀 선수들이 서문엽에게 인사를 했다.
서문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로만 듣던 서문엽.
살아 있는 신화를 직접 목격한 선수들은 긴장과 경외가 섞인 얼굴들이었다.
한편 서문엽은 사랑 팀의 선수들을 분석안으로 살펴보았다.
'확실히 국가 대표이긴 하네.'
각 능력치의 평균이 70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평균 60 수준인 희망 팀보다는 월등히 높은 수치였다.
하지만······.
'참 희한하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어느 한 부분 특출한 것 없이 고만고만하냐.'
어느 한 분야에서 확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드물었다.
졸지에 탱커로 변신한 최혁처럼 특출한 재능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없이, 그냥 고루 평범했다.
'이건 유망주 육성 방향이 잘못된 건가.'
대충 짐작은 들었다.
어느 한 부분 단점 없이 고루 뛰어난 유망주를 키우다 보니 저런 국가 대표 선수들이 탄생한 것이리라.
서문엽은 백제호에게 질문했다.
"제호야, 혹시 유망주를 선정할 때 채점 같은 거 하냐?"
"당연하지."
"그리고 합산한 총점으로 판단하고?"
"그렇지, 아무래도."
"채점 기준이 팀마다 다 비슷한 거냐?"
"국가에서 유망주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어서 정부가 관여한 채점 기준을 쓰지. 근데 왜?"
"그럴 줄 알았다."
서문엽은 왜들 이렇게 고만고만한지 이해했다.
각 분야별로 뚜렷한 채점 기준이 있고 총점으로 평가한다면, 어느 한 가지에 뛰어나도 다른 못난 부분에서 감점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능력치가 고루 고만고만한 애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고, 거기서 국가 대표까지 올라온 게 바로 이놈들이란 뜻이었다.
'최혁 같은 애는 이렇게 묻혀 버렸고.'
한국이 배틀필드 약체가 된 이유는 실력 있는 초인들이 대거 해외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서문엽이 알기로 그건 벌써 15년 전이었다.
15년.
새로운 초인이 각성하고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약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건 정책의 문제라고 봐야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선수 육성 능력과 노하우가 부족한 탓이겠지.'
서문엽처럼 분석안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문득 앞에 서 있는 백제호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자식, 이거 힘들겠는데.'
국가 대표 감독으로 있는 백제호가 힘든 시간을 보낼 것은 자명했다. 저런 선수들을 데리고 성적을 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터였다.
'최혁 같은 애들 좀 추천해 줘야겠다.'
가장 쉬운 건 자신이 직접 대표 팀에서 뛰는 것이지만, 그렇게까지 하고픈 생각은 없는 서문엽이었다.
일단 이 경기에서는 추천할 만한 사람이 최혁밖에 없어 보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 이상 쓸 만한 재능을 잠재한 녀석은 없었다.
"응?"
선수들을 분석안으로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사랑 팀에 있는 선수들 중 금발로 염색한 헤어스타일에 귀걸이까지 낀 청년이 보였다.
이제 갓 20세가 된 듯 앳된 얼굴로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었다.
-대상: 심영수(인간)
-근력 60/66
-민첩성 70/73
-속도 79/85
-지구력 65/68
-정신력 26/60
-기술 68/73
-오러 84/85
-초능력: 폭발 구체, 속박
-폭발 구체(초능력): 강한 폭발을 일으키는 화염의 구체를 만들어 던질 수 있다.
-속박(초능력): 오러로 이루어진 로프를 던져 상대를 1~5초간 속박시킬 수 있다.
능력치는 골고루 균등하게 개발되어 있고, 오러량은 많은 편.
초능력도 실전에서 유용한 것으로 두 가지나 있으니, 딱 한국 정부 식 유망주 선정에서 높은 점수를 땄을 듯했다.
그러나 서문엽이 주목하는 건 26밖에 안 되는 정신력이었다.
'응, 저 새낀 빼라 해야겠다.'
정신력 재능은 무난한 60. 그런데 개발된 게 고작 26이면, 무슨 졸부 집안에서 오냐오냐하며 키웠다는 뜻이었다.
슈란보다 더 낮은 끔찍한 정신력이다.
"야."
서문엽은 거침없이 심영수에게 말을 걸었다.
"예? 왜요?"
껌을 씹던 심영수가 깜짝 놀라 물었다.
서문엽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른 선수들처럼 공손하지가 않다.
"너 아버지가 졸부냐?"
질문이 너무 돌 직구라 심영수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희망 팀 선수들은 서문엽의 똘끼가 또 발동됐다며 긴장했다.
"···협회 부회장이신데요."
"역시. 그렇게 생겼다."
서문엽은 자신의 안목이 옳았음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워했다.
요컨대 아버지가 졸부이게 생겼다는 말에 심영수의 표정은 더더욱 썩었다.
########################## 첫 경기(1) ##########################
-선수 입장.
안내 방송과 함께 양 팀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걸어 나갔다.
"와아아아!"
관중들이 환호하며 선수들을 반겼다.
그리고 무장을 한 서문엽을 발견한 순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서문엽 파이팅!"
"서문엽! 서문엽!"
관중들은 광란의 환호성을 질렀다.
서문엽이 손을 흔들어주자 환호성을 더욱 커졌다.
기분이 좋았다.
한때 세계 최고의 VIP이었던 서문엽이지만 대중 앞에 설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런 뜨거운 함성을 받아본 것이 오랜만이었다.
-서문엽 씨가 드디어 선수로서 배틀필드 경기장에 섰습니다! 관중들의 기대가 몹시 클 겁니다.
-예, 영웅 서문엽이 이렇게 돌아오다니 꿈만 같습니다. 누구나 상상을 한 번쯤은 해봤잖습니까. 서문엽이 배틀필드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납니다.
-경기장에 팬분들 외에도 상당히 많은 유명 인사들이 와 있습니다.
대형화면은 VIP석에 앉아 있는 유명 인사들을 비추었다.
슈퍼 에이전트 조 펠만.
유럽의 초인 에이전트 제이크 랜드.
파리 뤼미에르 BC의 구단주 모로 형제 등.
선수가 아님에도, 배틀필드 팬이라면 알고 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뿐만 아니라 각국 빅 클럽의 스카우터들도 매우 많았고, 배틀필드와 상관없는 할리우드 스타들까지 즐비했다.
의외의 얼굴도 보였다.
-오, 제럴드 워커 선수도 와 있네요.
-서문엽 선수의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인터뷰를 통해 서문엽과 도발을 주고받았던 제럴드 워커가 심통 맞은 표정으로 화면에 잡혔다.
워낙 거구라 눈에 잘 띄었다.
-공식전이 아닌 자선 경기입니다만, 이 정도로 세계의 주목을 많이 받는 무대도 드물 겁니다. 우리 선수들 많이 부담도 되겠지만, 기회이기도 합니다.
-아, 물론이죠. 서문엽 씨를 보러 몰려든 스카우터들에게 멋진 플레이를 보여줘서 어필할 수 있잖습니까?
-17년 만에 무기를 든 백제호 감독도 그렇고, 오늘 경기는 볼거리가 참 많습니다.
-17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추는 두 분 영웅의 플레이가 참 기대됩니다.
선수들이 서로 악수를 했다. 그러고는 각자의 더그아웃으로 돌아가 경기 준비를 했다.
장비를 마지막으로 점검한 후에 각자의 접속모듈에 들어간다.
마침내 서문엽의 생애 첫 배틀필드 경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
던전에 접속한 서문엽은 주위를 둘러보며 경탄했다.
"정말 똑같네."
던전 특유의 음습한 공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자, 탱커들! 모두 앞...."
앞장서라고 말하려던 찰나, 백제호는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혁과 눈이 마주쳤다.
"탱커 3명 앞으로. 최혁은 서문엽 옆에."
급조된 탱커 최혁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서문엽이 최혁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인마. 형이 시범을 보여줄게."
딜러들도 탱커 주위에 1, 2명씩 붙었는데, 백제호는 서문엽에게 붙었다.
"엽아, 천장 조심해."
위를 올려다보니 과연 거미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거미들이 보였다.
"끼이익."
"끼익."
지저 거미 아라크네였다.
지저인의 오러 개조로 생명력을 흡수하는 거미줄을 뽑는 흉측한 괴물이었다.
"백제호."
서문엽은 방패를 평평하게 눕히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백제호가 서문엽의 방패 위에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가라!"
서문엽은 백제호를 위로 던졌다.
던지기 판정을 받고 백제호의 신형이 쏜살같이 치솟았다.
10m는 족히 될 법한 동굴 천장까지 치솟은 백제호는 아라크네에게 검을 휘둘렀다.
콰지직! 콰각!
단번에 2연속으로 베어버리고 떨어지자, 서문엽이 달려와 방패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다시 던지기!
탁구를 치듯이 백제호는 계속해서 위로 튕겨져 올라 아라크네들을 죽여 나갔다.
파앗!
아라크네가 거미줄을 쏘자, 동시에 순간 이동을 펼쳤다.
공간을 건너뛴 백제호는 그대로 아라크네의 정수리에 검을 꽂았다.
그때, 천장에서 아라크네 두 마리가 양옆으로 기어왔다.
죽은 거미와 함께 거미줄에 매달려 있던 백제호는 피할 곳이 없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쉬익- 콰직!
서문엽의 창이 날아와 아라크네 한 마리를 꿰뚫어버린 것이다.
아라크네를 꿰뚫고도 모자라 천장에 박혀 버린 창.
'가볍게 던졌는데도 강한 오러가 실렸구나.'
백제호는 나직이 감탄했다.
오랜만의 실전.
서서히 몸이 기억하기 시작했다.
서문엽의 실력을 말이다.
백제호는 그 창을 잡고 매달린 채 회전하며 다른 아라크네의 아가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섬전 같은 쾌검으로 다리 2개를 베어버렸다.
다리 2개를 잃자 휘청거리는 아라크네의 목을 베어 마무리한 백제호는 창을 뽑고서 같이 착지했다.
"자."
창은 서문엽에게 돌려주었다.
"아저씨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서문엽이 웃으며 말했다.
"장난 그만 치고 빨리 정리해."
"뭐, 그러지."
서문엽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아라크네들이 거미줄을 타고 일제히 내려와 달려들었다.
앞장선 서문엽이 아라크네들과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푸욱! 푹!
서문엽은 아라크네가 덤비는 족족 창으로 찔러 죽였다.
푹푹 잘도 박히는 창.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허억!"
최혁은 기겁을 했다.
아무리 맷집이 약한 아라크네라지만, 어떻게 저렇게 푹푹 잘도 죽인단 말인가?
'힘이 그리 세 보이지도 않는데.'
한 번 찌를 때마다 창이 깊숙이 박힌다.
저건 보통 완력으로 되는 공격이 아니었다.
아라크네의 맷집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단단한 껍질을 뚫었을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서문엽이 창을 쓰는 수법이 보통의 찌르기가 아니었다.
창 앞부분을 잡고 살짝 던지더니 뒷부분을 낚아채 회수한다.
'아! 초능력을 활용한 거구나!'
최혁은 잘 몰랐지만, 이는 100㎝ 던지기라는 서문엽만의 테크닉이었다.
던지기 판정을 받으면 그냥 찌르는 동작보다 훨씬 센 위력이 실린다.
서문엽은 이 점을 활용해서 적이 지척까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창을 던지고 회수하는 동작을 극단적으로 짧게 펼쳤다.
즉, 창을 100㎝쯤 던지고 회수하는 일련의 동작인 셈이다.
창을 앞으로 움직이며 살짝 손을 놓기만 해도 던지기 판정을 받으면 최대 속력으로 날아간다.
살짝 창을 놓았다가 잡았다가를 반복.
그래서 멀리서 보면 평범한 찌르기로 보이는 것이었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쉬울 리가 있나!'
창을 놓았다가 잡는 타이밍이 오차 없이 최적화되어야 한다.
그걸 숨 쉬듯이 펼치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감탄을 거듭하면서 최혁은 자신도 자신의 초능력을 저렇게 활용할 수 없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그래! 내 오러 집중을 방패에 써보자.'
최혁도 앞으로 나가 싸우기 시작했다.
아라크네의 공격을 막을 때, 오러를 방패에 집중했다.
쿵!
오러의 힘으로 아라크네가 주춤했다.
막고 나서는 다시 오러를 회수.
막는 순간에만 오러를 집중시켜서 오러 소모를 줄이겠다는 의도였다.
'이 요령이 몸에 익으면 오랫동안 끈질기게 버티는 탱커가 될 수 있어! 응? 근데 왜 좋은 탱커가 되려고 하는 거야? 난 딜러라고!'
겉으로는 고분고분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혼란이 격동치는 최혁이었다.
한참 싸우다가 서문엽은 최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야?"
"예?"
"아, 아냐. 갑자기 실력이 확 늘었기에 놀랐어."
기술이 60/70에서 61/70으로 대뜸 1 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 오러 집중을 방패에 적용하는 걸 생각했습니다."
"그래. 방패에 집중해야 할 때와 무기에 집중해야 할 때를 잘 구분하면 더 늘 거야. 공수 배분에 신경 써봐."
"…아!"
그 말에 최혁은 또 뭔가를 깨달았다.
탱커든 딜러든 공수 밸런스는 중요했다. 탱커는 4 : 6, 딜러는 8 : 2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초능력 오러 집중을 잘 활용하면 6 : 6, 7 : 7도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좋아, 오러의 흐름에 더 집중해 보자. 응? 아니, 근데 난 탱커가 아니란 말이야!'
중2 이후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한 번 더 맞이한 최혁은 의지와 별개로 탱커로서의 실력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5-1구역의 아라크네들이 섬멸되었다.
아라크네를 가장 많이 사냥한 사람은 서문엽인데, 그의 몸이 짙은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문엽은 신기하다는 듯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이게 사냥 포인트로 강해진 거지?"
백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응, 포인트를 얻을수록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 검은색, 흰색 순서로 오러에 휩싸일 거야."
사냥 포인트로 생겨난 오러는 몸에 둘러져 있을 뿐 직접 컨트롤은 불가능했지만, 공격과 수비에 큰 도움을 준다.
"좋아, 그러면 5-2로 이동한다. 엽이 너는 계획대로 혼자 5-3으로 가."
"알았어."
희망 팀이 5-2구역으로 이동했다.
5-2로 접어들자 희망 팀은 탱커 두 명이 앞장서서 쐐기 형태의 대형(隊形)을 취했다.
쐐기 대형의 중앙에는 서문엽이 섰다.
백제호가 소리쳤다.
"돌파해! 엽이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열어야 해."
5-2구역의 괴물들은 살러분.
예의 아바타 테스트 때도 봤던, 오러로 이루어진 가오리처럼 생긴 물고기였다.
처치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오러로밖에 처치할 수 없기 때문에 살러분을 사냥할 땐 오러 소모에 주의해야 했다.
거기에 땅이나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도 주의해야 했고 말이다.
쐐기 대형으로 돌격한 선수들이 금세 길을 뚫었다.
그러자 쐐기 대형 중심부에 있던 서문엽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대로 5-3구역으로 홀로 향했다.
그 모습이 대형화면을 통해 관중들에게도 비춰지고 있었다.
***
-서문엽 선수와 백제호 감독의 호흡이 아주 멋지네요.
-네, 17년을 쉰 게 믿겨지지 않는 솜씨를 발휘합니다, 백제호 감독. 오늘은 선수죠.
-저 정도면 웬만한 현역 선수들보다 좋은데요?
-역시 7영웅 명성 값을 합니다. 아, 슬슬 서문엽 선수도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서는데요.
서문엽이 100㎝ 던지기 테크닉으로 아라크네를 학살하는 게 보였다.
"와아아!"
"진짜 세다!"
관중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최혁 선수도 움직임이 좋습니다. 오늘 갑자기 탱커로 출전했는데요, 지금까지는 디펜스가 좋아요.
시작부터 시선이 집중된 희망 팀.
"역시 서문엽의 움직임이 좋네."
"아라크네를 한 방에 죽이고 있어. 생각보다 힘이 좋은데?"
VIP석에서 경기를 보던 파리 뤼미에르 BC의 구단주 모로 형제가 한마디씩 감상평을 말했다.
그런데 옆자리에 있던 여자가 대화에 끼어든다.
"아니, 저건 100㎝ 던지기예요."
"그게 뭐죠, 슈란 양?"
형 장 모로가 물었다.
슈란이 가벼운 손짓으로 시범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힘으로 찌른 게 아니라 던진 거라고요."
7영웅 멤버 슈란.
최후의 던전에서 함께했던 그녀는 서문엽의 테크닉을 잘 알고 있었다.
"오오! 그런 고급스러운 테크닉을."
"역시 서문엽은 최고야, 형."
"그렇고말고. 반드시 영입해야 해."
아직 제대로 실력 발휘도 안 했는데 영입을 결정한 모로 형제.
그런데 서문엽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순간이 일찍 찾아왔다.
서문엽이 혼자서 5구역의 보스 몹이 있는 5-3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관중석에 있던 수많은 배틀필드 관계자들이 숨죽이고 주시하기 시작했다.
########################## 첫 경기(2) ##########################
5-3구역.
5구역의 보스 몹은 세르펜.
철갑을 두른 거대한 독사로, 독니도 수십 개나 나 있는 흉측한 녀석이었다.
머리 크기만도 사람 덩치와 비슷한데, 입을 벌리면 서 있는 성인 남성을 통째로 삼키기에 충분하다.
잡아먹힌다면 잘근잘근 씹히는 고통과 독에 감염된 고통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안녕?"
물론 서문엽은 세르펜에게 겁먹지 않았다.
시이이익······!
세르펜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똬리를 틀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비늘이 서로 부딪쳐 철컥거리는 소음을 일으킨다.
방패를 왼쪽 가슴 높이에.
창은 찌르기 직전의 자세로.
자세를 취한 서문엽은 조용히 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집중력이 고조되었다.
호흡으로 들어온 공기의 양이 몇 리터인지까지 알 것 같을 정도로, 정신이 바짝 각성했다.
정신력 110이 발휘된 것.
"와, 새꺄."
세르펜에게 한마디 했다. 이에 호응하듯.
시이이이이이익!!
세르펜이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서문엽에게로 똑바로 돌진해 왔다.
서문엽도 앞으로 달렸다.
방패가 세르펜의 위치를 따라 점점 각도를 조정하며, 머리 위까지 올라갔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서문엽과 세르펜.
급속도로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세르펜이 서문엽을 삼키려고 덤볐다.
쉬이익―!!
아가리가 서문엽을 그대로 흔적도 없이 덮치려는 찰나였다.
촤악!
서문엽이 바닥을 미끄러지며 슬라이딩을 했다.
가까스로 아가리를 피해 세르펜의 턱 아래쪽으로 파고든 서문엽.
독니도 머리 위로 든 방패로 튕겨내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오른손에 쥔 창을 힘껏 위로 내질렀다.
오러가 가득 실린 일격이었다.
콰지지지지직!!!
"퀴이이이이익!!"
세르펜이 괴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철갑으로 온몸이 둘러싸여 있는 세르펜의 약점.
바로 턱 밑 부분은 입을 크게 벌리기 위하여 유연하고 연하다는 점이었다.
단 일합(一合).
집중력이 최고조가 된 서문엽은 단숨에 세르펜의 급소를 노리는 최단 동선을 포착하고 실행했다.
거기에 민첩성도 강력한 집중에 의해 한계 이상까지 올라간 상황.
고통에 차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는 세르펜의 몸부림에 깔리지 않도록 이리저리 구르며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오러를 듬뿍 머금은 치명타라 세르펜은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뭐야, 이거. 저 자식 저러다 죽겠는데?"
5구역 보스 몹인 세르펜이 죽으면 5구역 전체가 붕괴된다. 5-2구역에서 사냥 중인 팀원들이 사냥을 중지하고 도망쳐야 한다.
"생각보다 더 깊게 들어간 것 같은데? 야, 정신 좀 차려봐, 새꺄! 힘내!"
서문엽이 발광하는 세르펜을 격려할 때였다.
-뭐라고?! 세르펜이 죽어?
뜬금없이 머릿속에서 백제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헉, 씨발, 깜짝이야! 뭐야? 어디서 들리는 목소리야?"
-진정해. 같은 팀끼리는 떨어져 있어도 서로 목소리가 들려. 그런데 혹시 세르펜 죽어가고 있는 거야?
서문엽은 세르펜을 살피다가 답했다.
"아냐, 죽진 않을 것 같은데 애 상태가 별로 안 좋네?"
-말도 안 돼, 너 방금 싸움을 시작했잖아?
"카운터로 턱 밑에 한 방만 먹였을 뿐인데. 여기 세르펜은 좀 약한 거 아냐?"
-미치겠군, 세르펜을 한 방에 잡을 정도는 아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사냥 포인트 때문에 힘이 더 실린 게 아닐까?"
-겨우 그 정도 포인트 갖고 드라마틱하게 강해지진 않아. 내가 볼 땐 네가 더 강해졌어.
'그건 맞는 말 같군.'
서문엽은 속으로 생각했다.
110짜리 정신력이 다시 위력을 발휘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얘 비실대서 더는 안 되겠다. 나 잠깐 다른 데 다녀올게."
-뭐?
"얘는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
정신을 차린 세르펜은 쉬이 덤비지 못하고 경계하는 눈치였다.
서문엽은 세르펜과 대치를 하면서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그대로 질주, 4구역으로 향했다.
역시나 혼자서 말이다.
***
"크윽, 제기랄!"
제이크 랜드가 주먹을 불끈 쥐며 탄성을 터뜨렸다.
유럽 초인들의 대부로 불리는 에이전트 제이크 랜드.
그 또한 예전에 목숨 걸고 던전을 드나들었던 역전의 용사였다.
최후의 던전에 진입할 7영웅을 선발할 때, 제이크 랜드도 정부의 추천을 받아 자원했을 정도였다. 물론 면접 끝에 떨어졌지만 말이다.
"제법이긴 한데 한계가 뚜렷해. 당신 스스로도 알지?"
그때 면접을 보던 초인 중의 초인, 서문엽이 건넨 말이었다.
모든 걸 꿰뚫어보는 말이었다.
기량이 더는 늘지 않고 오히려 나이 들어 하락하는 걸 느꼈던 제이크 랜드는 순순히 승복했다.
그리고 누군들 안 그렇겠냐마는 그날 후로 서문엽에게 흥미를 느꼈다.
모든 걸 한눈에 꿰뚫어보는 통찰력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 인류의 영웅!
그의 젊음.
위대한 역량.
제이크 랜드는 서문엽에게 매료되었었고,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현재······.
'그런데 당신은 여전히 그토록 젊고 아름답군.'
전율스러운 광경이었다.
세르펜을 일합에 중태에 빠뜨린 그 치명적인 일격!
그 흉악한 괴물을 맞닥뜨리고도 정면에서 달려드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달려드는 속도도 방패의 각도도 모두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급가속으로 슬라이딩해 아가리를 피해서 턱 밑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슬라이딩하는 와중에 역방향으로 찌르기를 펼치는 동작은 또한 얼마나 멋진가.
한두 번의 연습으로 될 일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놀랍다.
다른 배틀필드 선수들과 달리, 서문엽은 목숨을 건 실전 속에서 경험을 쌓았으니 말이다.
'멋지다. 그 한 장면으로 확인했다. 서문엽은 초일류야.'
올해의 선수상을 노릴 수 있는 월드 클래스였다.
-세르펜에게 놀라운 일격을 선사한 서문엽 선수입니다! 한 방에 세르펜이 벌써 상태가 안 좋아요.
-가장 큰 약점인 턱 밑을 제대로 찔렀습니다. 저건 노린다고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약점이 아닌데,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를 서문엽 선수가 아주 잘 보여줬어요!
-네, 삼키려는 순간 미끄러지며 파고들면 바로 위에 세르펜의 턱 밑이 보이는 거죠. 하하, 말은 참 쉽네요.
-이렇게 되면 희망 팀이 사냥에 탄력을 받습니다. 사랑 팀은 정석적인 4-4-3 전술로 세 구역에서 동시에 사냥하고 있거든요.
4-4-3은 4인, 4인, 3인 등 3개 조로 나뉘어 세 구역에서 동시에 사냥하는 것을 뜻했다.
빠르고 효율적인 사냥을 위하여 인원을 그렇게 배분한 것인데, 배틀필드에서는 정석적인 전술이었다.
그에 비하면 희망 팀의 전술이 이상한 것이었다.
10인은 5-2구역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었고, 서문엽은 5-3에서 세르펜에게 중상을 입힌 뒤에 4구역으로 놀러가 버렸다.
-서문엽 선수가 홀로 4구역으로 가버립니다. 아직 세르펜을 죽이면 안 되니 다른 데서 사냥을 더 하겠다는 뜻이죠.
-4구역은 꽤 까다로울 텐데요. 저길 혼자 가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제 생각인데, 백제호 감독은 5구역을 정리하고서 6구역으로 갈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서문엽 선수의 돌발적인 행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짐작이 정확했다.
백제호의 플랜은 5구역-6구역-작은 원 지역이었다.
5구역 다음에 4구역을 거쳐도 지리적으로는 상관없지만, 문제는 4구역의 괴물들이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그걸 모르는 서문엽은 4-3구역에 진입한 뒤에 눈을 반짝였다.
"오, 쟤네들이네."
뼈밖에 남지 않은 스켈레톤 10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냥 스켈레톤이 아니었다.
금으로 무늬가 새겨진 검은 갑옷으로 중무장했으며, 망토까지 걸치고 있었다.
-너무 들뜨지 말고 조심해!
백제호의 경고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그럴 만했다.
한눈에도 복장부터가 위압감이 넘치는 저 스켈레톤들은 지저인의 조상들이었다.
정확히는 지저인이 자신의 조상들의 유골을 조작하여서 만든 괴물이다.
생명체가 아닌, 오러로 인해 동작하는 무기물에 불과했지만, 지저인이 각종 격투 기술을 입력해 넣어서 상당한 실력을 자랑했다.
빅 리그에서 뛰는 일류 배틀필드 선수들과 비교해도 테크닉에서 밀리지 않을 정도.
결국 팀플레이와 초능력으로 상대해야 사냥이 쉬운데, 스켈레톤도 10명이나 되니 약팀들은 이 4구역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맷집은 약한데 격투 기술은 뛰어난 적이란 말이지.'
서문엽은 방패와 창을 들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제일 좋아하는 상대였다.
힘과 맷집으로 밀어붙이는 상대는 까다롭다.
하지만 테크니션이라면 더 우월한 테크닉으로 쉽게 이길 수 있다.
기술 100/100.
서문엽은 테크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실력자인 것이다.
서문엽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삼지창을 든 스켈레톤에게 다가갔다.
서문엽의 것보다 훨씬 더 긴 삼지창이 앞으로 겨누어졌다.
"솜씨 좀 볼까."
서문엽은 자신의 창으로 삼지창을 툭 쳐서 옆으로 젖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앗!
벼락같이 달려든 서문엽.
있는 힘껏 앞으로 내지르면서, 원형 방패로 오른쪽 옆구리를 가린 자세였다.
콰지직!
터엉!
오러를 머금은 창이 스켈레톤의 두개골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삼지창은 원형 방패에 의해 막힌 뒤였다.
약점인 두개골이 당하자 스켈레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고수의 대결은 순간에 끝나기도 하는 법.
서문엽은 삼지창을 살짝 쳐내 0.1초의 틈을 만들고는 그대로 달려들어 민첩성 승부를 펼친 것이었다.
집중력까지 발휘된 그의 민첩성은 최고 수준이었고, 단숨에 쓰러뜨릴 수 있었다.
"자, 다음."
서문엽이 대검을 든 스켈레톤을 응시했다.
상대의 무기가 대검인 걸 본 순간 서문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창을 던졌다.
쉬이익!
스켈레톤이 대검을 휘둘러 창을 쳐내려 했지만.
콰지직!
헛스윙.
변화구처럼 특유의 회전이 실린 창은 궤도가 틀어지며 대검을 피해 스켈레톤의 심장부에 꽂혀 버렸다.
창이 꽂힌 심장부에서 검은 오라가 줄줄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인간으로 치면 대량 출혈 상태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문엽은 그대로 달려들어서 덩크슛을 하듯이 방패로 두개골을 찍어버렸다.
와르르르!
두개골과 함께 무너져 버리는 스켈레톤.
두 마리째 사냥하니 서문엽의 몸에 둘러져 있던 오러가 더욱 짙은 푸른빛으로 변했다.
하나하나가 강한 몹이라서 획득한 포인트도 많았다.
'왜 이런 좋은 곳을 피해서 6구역으로 가려 했던 거야?'
서문엽으로서는 이런 노다지가 없었다.
"다음."
서문엽의 미소가 짙어졌다.
4-3구역의 스켈레톤들이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백제호 일행은 이제야 겨우 5-2를 정리하고 5-3에서 세르펜과 싸우는 상황이었다.
서문엽의 활약이 계속될수록 경기장의 함성은 뜨거워졌다.
하지만 배틀필드 관계자들은 도리어 침묵했다.
일반인과 안목이 다른 전문가들은 서문엽의 진정한 실력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 퍼스트 블러드(1) ##########################
"엽아, 거긴 어때?"
세르펜 사냥을 지휘하던 백제호가 물었다.
-야, 여기 완전 꿀인데?
"혼자 거기서 사냥이 잘돼?"
-나 보라색이야.
"벌써?!"
포인트가 누적될수록 오러 색은 푸른색-보라색-붉은색-검은색-흰색으로 변한다.
이 시간에 벌써 보라색으로 오러가 변했다면, 정말 혼자 포인트를 엄청 쓸어 담았다는 뜻이었다.
백제호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냥 저기서 혼자 사냥하게 놔둘까?'
서문엽을 외딴곳에 홀로 내버려 둬서 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잘 크게 하는 것도 좋은 생각 같았다.
'아냐, 그래도 혼자서는 좀 불안하지.'
결정을 내린 백제호가 지시했다.
"백하연, 세르펜을 마무리하고 서문엽에게 합류해. 나머지는 6구역으로 간다."
"옛!"
일행은 함께 세르펜을 공격했다.
이미 서문엽에게 치명타를 한 번 먹었던 터라 쉽게 잡혔다.
마무리는 백하연의 몫이었다.
촤촥!
날카로운 채찍 끝이 세르펜의 턱 밑을 다시 한번 꿰뚫은 것.
세르펜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쓰러졌다.
쿠르르릉!
5구역 전체가 지진으로 흔들거렸다. 보스 몹이 죽자 붕괴가 시작된 것.
세르펜을 마무리해서 포인트를 획득한 백하연은 서문엽이 있는 4구역으로 달려갔다.
'하연이에게도 포인트를 많이 먹여놨으니 둘이서도 안전할 거다.'
혹시나 모를 적의 습격을 위한 안전 장치였다.
둘뿐이지만 서문엽은 강하고 백하연은 발이 빠른 데다 순간 이동까지 있으니 위기가 닥쳐도 잘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나머지는 6구역을 향해 달렸다.
6구역은 6-1, 6-2 두 구역으로 분류되는데, 백제호는 각각 4명, 5명씩 나눠서 사냥을 했다.
조마다 탱커가 한 명씩.
4인 조는 임시 탱커지만 본래 딜러인 최혁도 있으니 사냥 효율에 균형이 맞아떨어졌다.
"엽아, 넌 거기서 하연이와 사냥에 열중해. 적과 만나면 너희가 핵심이 될 거니까."
-알았어.
***
-서문엽 선수와 백하연 선수가 빠른 속도로 사냥을 하고 있네요.
-두 사람 다 멀티 포지션을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백하연 선수는 보조 딜러에 근접 딜러까지 소화 가능하고, 서문엽 선수는 탱커이지만 근접 딜러와 원거리 딜러를 두루 소화할 수 있는 데다가 오더도 가능하죠.
-하하, 최후의 던전 공략도 지휘했으니 세계 최고의 오더였죠. 다른 건 몰라도 괴물을 사냥하는 분야는 여전히 최고일 겁니다.
비록 탱커이지만 톱클래스의 민첩성을 가진 서문엽은 사냥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거기에 백하연이 가세하자 시너지가 일어나 가속도가 붙었다.
1+1이 2가 아니라 3, 4 이상이 되려면 평상시에 서로 호흡을 맞추는 훈련을 충분히 해야 한다.
두 사람이 그런 훈련을 했을 리 없을 텐데도, 지금 경기에서 보이는 호흡은 완벽했다.
"백제호의 딸이니까."
다이어트 콜라를 다 비워 버린 거구의 흑인, 조 펠만이 말했다.
"백제호가 키웠어. 당연히 채찍만 빼면 백제호지."
"17년 전의 팀워크를 다시 재현하는 건가 봐요?"
비서가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묻자 조 펠만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안 돼. 서문엽의 입장에서는 겨우 몇 주 전의 일이야. 그리고 백제호와 같을 수는 없지. 채찍을 다루는 유용한 초능력을 가졌지만, 스피드는 더 느리니까."
"미스 백도 스피드 하나는 빅 리그에 내놔도 되는 수준 아닌가요?"
"그렇지. 하지만 백제호는 서문엽이 7영웅을 선발할 때 그 이상의 스피드를 가진 초인을 찾을 수 없었을 정도야. 있었다면 친구라도 최후의 던전에 데려가지 않았겠지."
"당대 최고 스피드라면, 지금으로 치면······."
"나단 베르나흐쯤 되겠지. 어쩌면 그래서 서문엽이 나단 베르나흐를 무의식중에 마음에 들어 했던 걸 수도 있고."
"저기 앉아 있는 문어 형제에게는 좋은 소식이네요? 만약 선수를 한다면 파리 뤼미에르에서 나단과 호흡을 맞춰보고 싶어 할지도 모르니까요."
문어 형제라는 비서의 말에 조 펠만은 키득거렸다.
"그곳에 가더라도 나와 함께 가야지. 서문엽 같은 위대한 스타는 나 같은 유능한 에이전트가 필요하니까. 아무튼 저 호흡은 서문엽이 백하연에게 맞춰주고 있는 거야. 그래서 더 대단한 선수지."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지만 던전에서는 많은 요소를 고려하는 사려 깊은 성격.
두말할 나위 없이 최고의 리더였다.
"자, 영웅이여. 이제 대인전을 보여줘. 대인전만 입증되면 돼."
같은 사람을 상대로도 잘 싸운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서문엽은 완벽해진다.
"저 사람도 참 피곤하겠네요."
그의 미모의 여비서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대형화면에 줄곧 비춰지고 있는 서문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가?"
"죽다 되살아날 정도로 힘들게 싸우고 돌아온 지 이제 겨우 2주 남짓인데, 그의 활약을 바라는 사람들이 아주 많잖아요."
"흐음······."
그 말에 조 펠만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좋은 지적이야. 한 번 서문엽이 되어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조 펠만은 두 검지를 양쪽 관자놀이에 대고 정말로 깊이 몰입한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서문엽이다."
"꼭 그런 포즈를 취해야 하나요?"
"응. 난 지상 최강의 초인이다. 미국 대통령도 한 수 접어준다. UN 사무총장이 도와달라고 구걸했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죠."
"나는 가족이 없다. 사랑 대신 학대를 받았다. 초인이 되자 복수를 했다. 그래, 내 초인의 힘은 나를,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다."
조 펠만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돌아와 보니 모든 게 변했다. 친하게 지낸 몇 안 되는 사람들마저 변했고, 심지어 친구의 집도 기억 속에 없는 생소한 저택이다. 대중은 그를 알고 존경하지만, 그건 진짜 내가 아닌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일 뿐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도 사라져 버렸다."
"······."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애착을 가질 만한 것이 조금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꾸만 날 부르는데, 관심 없다. 사람들이 나를 원하지만, 낯선 세상의 낯선 주민들에게 관심 없다. 나는 혼자다."
"참 우울한 이야기네요."
"그렇지. 하지만 뭐, 그래도 만인이 존경하는 영웅인 게 어디야? 이 세상엔 아직도 전쟁과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도 많다고."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그 요상한 포즈로 분석하신 바에 따르면 배틀필드 선수가 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내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시간을 두고 기다려 줘야 해."
"뭘요?"
"방문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이 낯선 세계에 정을 붙일 시간 말이야. 사람들과 친해질 시간도 줘야지. 유일한 친구인 백제호도 그에게는 기억보다 17살 더 먹은 옛 친구에 불과해."
자선 경기 1세트는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양 팀 사이에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냥을 하며 구역이 하나둘씩 정리되면서, 양측의 거리가 서서히 가까워진 것이다.
한두 구역을 사이에 둔 정도의 거리라면 몰래 잠입해 기습도 시도할 수 있었다.
둘이서 사냥하던 서문엽과 백하연도 일행과 다시 합류했고, 본격적으로 인간 간의 유혈이 발발할 것으로 보였다.
그럴수록 경기장에 모인 수만 관중의 기대감도 고조되고 있었다.
"오오오!!"
"싸워라!"
"기다렸다고! 서문엽!"
계획대로 서문엽과 백하연, 그리고 백제호 3인이 조를 이루어 사랑 팀이 사냥 중인 구역으로 잠입하기 시작했다.
-희망 팀의 세 사람이 던전을 빠르게 우회합니다.
-도중에 괴물들과 맞닥뜨리면 들킬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사냥이 완료되어 괴물이 없는 쪽으로 우회하는 겁니다.
던전의 각 구역은 보스 몹이 죽으면 붕괴되는 곳이 있고 붕괴되지 않는 곳이 있다.
던전이 너무 넓고 길이 많으면 영원히 도망만 다녀서 승부가 안 끝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제한을 둔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길이 너무 제한적이면 경기 양상이 단조로워질 수 있어서 계속 유지되는 구역도 있었다.
물론 선수들의 판단에 따라 일부러 보스 몹을 처치하지 않고 구역을 유지시키는 작전도 있기에 배틀필드는 다양한 양상이 나타난다.
-이 경기의 분기점이 될 수 있는 중요한 기습 작전입니다. 여기서 이득을 챙기면 바로 승부를 볼 수도 있어요.
-희망 팀의 핵심 전력이자 이번 자선 경기에서 가장 핫한 세 선수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상대측인 사랑 팀은 5인, 6인으로 나눠져 두 구역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4-4-3 전술로 3개 조를 운영해 왔지만, 이제는 적습이 언제 있을지 모르니 5-6으로 안전하게 사냥하는 것.
세 사람이 향하는 곳에는 5인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중 탱커만 2명이라 나름대로 기습에 대비해 디펜스를 높인 것이었다.
"수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기습을 펼친 직후에 바로 물러나야 해."
백제호가 간략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1명만 처치하면 그냥 빠지고, 2명 이상을 처치하면 전원이 공세를 펼쳐서 승부를 보는 거야."
11 대 10은 그리 큰 수적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워낙 초능력이 다양해서 막상 한 타 싸움이 벌어지면 어느 쪽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11 대 9라면 수적 차이가 확실하게 난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서 작전을 짠 백제호였다.
그때 잠자코 있던 서문엽이 말했다.
"그 졸부 아들래미."
"심영수?"
"몰라, 아무튼 비리비리한 원거리 딜러 놈 있잖아."
"그래, 대표 팀의 화력을 담당하는 핵심 원거리 딜러야."
"그 자식을 처치하면 1명만 죽였어도 유리하잖아."
"그야 그렇지. 저쪽 사랑 팀에서 영수가 차지하고 있는 화력 비중은 크니까."
폭발을 일으키는 '폭발 구체'는 물론, 상대를 묶는 '속박'도 까다롭다.
오러도 84/85로 높은 편이었으니 위력도 상당할 터.
하지만 서문엽은 정신력 26짜리의 그 허접한 녀석이 두렵지 않았다.
'제멋대로 자라서 자기가 원하는 상황에서는 활약하지만,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하면 힘을 못 쓰는 타입이지.'
워낙 분석안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봐온 탓에 딱 한 번 얼굴을 봤으면서도 거의 확신하고 있는 서문엽이었다.
이윽고 적과 맞닥뜨렸다.
서문엽은 사냥 중인 적 5인 중에서 심영수가 있음을 확인했다.
"좋은 생각이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백제호와 백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습이다!"
사랑 팀이 일행을 발견하여 소리쳤을 때, 서문엽은 곧바로 창을 던졌다.
쉬이이익!!
목표는 심영수였다.
"어딜!"
근처에 있던 사랑 팀의 근접 딜러 한 명이 몸을 날려서 창을 쳐냈다.
까아앙!
환도에 의해 쳐내진 창이 나가떨어졌을 때였다.
서문엽은 또 하나 던졌다.
이번에는 창이 아니라 백제호를 말이다.
쏜살같이 공중을 나는 백제호.
이어 순간 이동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근접 딜러에게 검을 휘둘렀다.
촤촥!
"크윽!"
심영수를 보호하느라 몸을 날렸던 근접 딜러는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아바타가 소멸되고 말았다.
뒤를 이어 서문엽은 백하연도 던졌다.
날아간 백하연은 적들 한복판에 떨어진 백제호의 허리를 채찍으로 휘감아 힘껏 당겼다.
백제호의 몸이 다시 공중을 날아서 서문엽에게 되돌아왔고, 백하연 또한 순간 이동을 써서 되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완벽한 팀플레이!
적 한복판에 몸을 날려 1명을 죽이고 안전하게 되돌아온 것이다.
서문엽은 다시 심영수를 향해 새로 꺼낸 창을 던졌다.
당황한 심영수는 몸을 날려 피했지만.
푸우욱!
"컥!"
창은 도중에 방향을 꺾어 뚝 떨어지면서 가까이 있던 탱커의 머리에 꽂혔다.
물론 꽂히기 전에 아바타가 소멸되었다.
2킬!
'그럴 줄 알았다. 초능력은 좋지만 멘탈이 약한 팀 동료라면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돌볼 수밖에 없지.'
심영수를 보호하느라 정신이 팔린 빈틈을 제대로 찌른 서문엽이었다.
########################## 퍼스트 블러드(2) ##########################
-정말 멋집니다! 재치 있는 연계 플레이가 나왔어요!
-심영수 선수를 노리는 척하면서 보호하려고 움직인 다른 선수들을 차례로 쓰러뜨렸죠. 심영수 선수가 화력의 핵심이라 중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점을 간파한 플레이였습니다!
-백제호 백하연 부녀가 같이 순간 이동을 쓰니 저런 센스 있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서문엽 선수의 역사적인 퍼스트 블러드도 멋졌습니다. 의미 있는 명장면으로 계속 회자되겠군요.
-서문엽 선수가 가진 초능력 던지기는 가치에서 C등급을 받고 있죠. 방금 보셨다시피 사람도 던질 수 있고 비거리와 속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활용성 때문에 받은 등급인데, 사실 위력만 따졌을 땐 E등급 정도죠. 그런데 서문엽 선수가 창에 회전을 먹여 던지는 변화구 같은 테크닉으로 멋지게 발전시켰어요.
-네, 그 점이 놀랍습니다. 투수로 치면 제구가 되는 스크루볼이에요. 방금도 심영수 선수에게 향하던 창이 뚝 떨어졌잖습니까? 어디를 맞출지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막기 어려운 투창이면 C등급은 받고도 남죠.
중계진이 흥분해서 해설에 열을 올렸다.
2명이 처치되자 희망 팀은 총공격을 개시했다.
서문엽이 있는 쪽에서는 인원수가 같아졌으므로 3 대 3이 벌어졌고, 그 남쪽 구역에서는 6 대 8로 전투가 펼쳐졌다.
남쪽 구역의 사랑 팀 6인은 전원이 국가 대표 선수였던 탓에 희망 팀 8명을 상대로도 잘 버텼다.
하지만 승부의 균형은 3 대 3 싸움에서 무너졌다.
파앗!
백제호가 서문엽에게 던져져서 공중을 날았다.
날개처럼 두 팔을 펼치며 공중제비를 돈 백제호는 매처럼 사냥감을 포착했다.
바로 심영수가 보였다.
이윽고 천장을 박차며 낙하!
"속박!"
심영수가 급히 오러로 이루어진 로프를 던졌다.
물론 부질없었다.
파앗!
순간 이동으로 로프를 피하며 순식간에 심영수의 지척에 도달한 백제호는 그동안 꾸준히 수련한 연속 베기를 시전했다.
쉬쉬쉭!!
촤악!
섬전 같은 3단 베기가 작렬했다.
전성기 시절의 공중 3단 베기를 그대로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크억!"
심영수의 아바타가 소멸되었다.
지켜보던 관중들의 어안이 벙벙해지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현역 한국 국가 대표 선수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엄청난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고난이도의 동작이었던 탓일까.
균형을 잃은 채로 땅에 착지한 백제호를 노리고 근접 딜러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휘익!
"큭!"
타이밍 좋게도 서문엽이 창을 던져서 근접 딜러를 견제해 주었다.
그 덕에 백제호는 무사히 몸을 뺄 수 있었다.
호흡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이었다.
"젠장! 후퇴해!"
둘밖에 안 남은 사랑 팀이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도망쳤다.
여기서 계속 싸울 바에는 차라리 한곳에 집결해서 8 대 11로 싸우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도망치는 그들을 보며, 서문엽은 이번에는 백하연에게 손짓했다.
"너도 해볼래?"
"응!"
서문엽은 방패를 내밀었다.
훌쩍 백하연이 위에 올라앉자, 힘껏 던졌다.
슈웅!
몸을 둥글게 만 채 투포환처럼 날아간 백하연.
속력이 떨어졌을 즈음,
파앗!
순간 이동으로 다시 한번 10m를 건너뛰었다.
그리고 채찍을 날렸다.
촤악!
"컥!"
채찍이 도망치던 근접 딜러의 발목을 낚아챘다.
던지기+순간 이동+채찍으로 엄청난 거리를 좁혀 적을 추격하는 데 성공한 것!
그대로 채찍을 끌어당기며 달려드는 백하연. 근접 딜러가 된 뒤에 이런 상황에서 무척 공격적이게 된 그녀였다.
발목이 낚아 채인 탓에 균형을 못 잡은 딜러는 저항을 했지만, 이내 백하연에게 베여 소멸됐다.
같이 도망치던 탱커가 동료를 구하려 했지만, 또 서문엽이 창을 던져서 견제해 주었다.
적절하게 보조를 맞춰주어서 두 사람의 활약을 도운 서문엽.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정확히 판단하고 지능적으로 움직인 서문엽의 플레이였다.
그대로 한곳에 모여서 7 대 11의 일방적인 한 타 싸움이 펼쳐졌다.
서문엽이 특별히 나설 필요도 없는 싸움이었다.
1세트는 그렇게 희망 팀의 8 대 0 승리로 돌아갔다.
서문엽의 기록은 1킬 2어시스트.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무결점의 활약이었다.
-첫 출전한 배틀필드 무대에서 서문엽 선수가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예, 사실 기대했던 것처럼 막 화려한 면은 없었습니다만, 한 번도 위태롭지 않고 팀플레이에 기여했던 면에서는 완벽한 탱커였습니다.
-사실 서문엽 선수 본인도 한 타 싸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동료를 도와주는 모습이 강했습니다. 네, 결정적이었던 한 타 싸움이 다시 나오네요.
11 대 7로 1세트를 마무리 지었던 격전 영상이 대형화면에 나왔다.
거기서 서문엽은 그다지 공격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선두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탱커로서의 역할은 다했다.
그때도 위태로운 모습은 전혀 없었으니, 사실상 쉬엄쉬엄 하고 있다고 봐도 옳았다.
-창을 던지는 솜씨가 예술 그 자체였고, 백제호 선수와 백하연 선수를 보조해 주는 모습도 팀플레이어로서 완숙된 모습이었습니다. 정말, 저런 선수가 국가 대표 선수로 뽑힌다면 대표팀의 조직력이 한층 강화될 텐데요.
-하하, 그건 서문엽 선수의 의사에 달린 문제죠.
1세트가 끝나고 휴식 시간 동안 다양한 경기 장면 리플레이와 함께 서문엽의 이야기가 꽃피웠다.
서문엽도 서문엽이었지만, 1세트에서 총 3킬 3어시를 해낸 백제호의 미친 활약도 큰 화제였다.
서문엽이야 시간 왜곡 탓에 아직 서른이라지만, 17년이나 무기를 놓았던 48세의 백제호가 그런 활약을 펼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질풍처럼 전장을 누비며 자신이 지도하는 국가 대표 선수들을 베어 넘기는 백제호의 활극은 충격적이었다.
희망 팀 선수대기실.
"와, 감독님. 완전 쩔었던 거 알아요? 그냥 선수 뛰세요!"
"차라리 내가 뛰고 말지, 라는 생각을 실제로 하셨겠네요?"
"너무 아깝다. 은퇴 안 하셨으면 올해의 선수상 여러 번 타셨을 텐데."
승리에 도취된 희망 팀 선수들이 백제호에게 한마디씩 했다.
백제호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은퇴하지 말걸, 하는 후회를 대표 팀 감독을 맡으면서 종종 했었다.
오늘 17년 만에 다시 무기를 잡으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역시 즐겁다.'
초인이 되고서 위험이 도사리는 던전을 누볐던 시절에도 이런 즐거움이 있었다.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무서운 곳이었지만, 서문엽과 함께라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우면서도 이를 이겨내는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도 엽이와 함께했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겠지.'
그때, 선수대기실에 설치된 TV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1세트 MVP.
그 뒤에 백제호의 모습이 TV에 나타났다.
"와아!"
"MVP까지 드셨다!"
"오오!"
희망 팀 선수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백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MVP까지는 아니었는데."
"무슨 소리세요. 그냥 직접 국가 대표로 뛰셔도 되겠던데."
왁자지껄한 희망 팀 선수대기실.
서문엽이 다가와서 히죽 웃었다.
"내가 말했지? 차라리 네가 뛰라고."
"······."
정말로 일주일 정도 훈련을 했더니 현직 국가 대표 선수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 나라 배틀필드 수준이 이 정도로 추락할 줄 알았더라면 은퇴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백제호는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자자, 됐고. 이제 2세트 준비하자. 2세트 던전은 '망자의 미궁'이다. 엽아, 여기 기억나?"
서문엽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1년 전에 공략한 데잖아."
1년 전이라는 말에 선수들은 숙연해졌다.
18년 전까지 실존했던 던전이라고 들었지만, 서문엽에게는 불과 1년 전의 이야기였다.
망자의 미궁.
이는 방과 계단들이 얼키설키 복잡하게 이어진 미궁이었다.
미궁은 전체적으로 아래를 향해 내려가는 형태을 띠고 있는데, 중력의 방향성을 조작해 놔서 계단이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도 알기 어려운 악취미 같은 던전이었다.
하지만 난간도 없는 위험한 계단에서 떨어지면 아주 확실하게 최하층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방바닥이나 계단에서 벗어나는 순간 10배의 중력을 받아 추락사시키는 것이다.
공략 불가로 판정받은 던전으로, 서문엽이 공략할 때까지 수많은 초인의 시체를 양산한 던전이었다.
"주로 출현하는 괴물은 스켈레톤으로, 최하층에 모셔진 왕과 함께 매장된 신하들이 침입자를 공격하는 곳이다. 활과 마법에 의한 원거리 공격이 잦은 만큼 탱커들의 역할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길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백제호는 다시 한번 서문엽을 바라보았다.
다른 선수들이야 프로리그를 통해 '망자의 미궁'을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한 번밖에 못 겪어본 서문엽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다 기억하고 있어, 걱정 마."
서문엽은 손사래를 쳤다.
지도까지 그려가면서 공략했던 던전이었다.
진저리나도록 고생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났다.
거기다가 그냥 애들 보는 책에 그려진 미로처럼 평면이 아니라, 전후좌우위아래로 입체적으로 얽혀 있어서 지도를 그리기도 힘들었다.
그런데도 기어코 다 그려서 지금은 서문엽 박물관에 전시됐으니, 머릿속에 내부 구조가 다 들어 있었다.
"특별히 변형된 건 없지?"
"응."
"오케이. 그럼 다 알아."
"알았다. 그럼 작전을······."
백제호가 뭐라고 실컷 설명하는 작전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망자의 미궁이라고? 잘됐군.'
1세트 아즈사의 나선 굴보다 훨씬 상대 팀에게 접근하기가 용이했다.
루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어디서 어떻게 적과 마주칠지 모르는 것이 이 던전의 재미였다.
던전 구조를 다 기억하고 있는 서문엽은 이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들 수준은 1세트 때 파악 끝났다.'
TV로 대충 수준은 알았지만 실제 보유한 능력치와 초능력, 그리고 그것들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여부까지.
사랑 팀의 국가 대표 선수들 수준은 한마디로······.
'죽었다고 복창해라, 허접들아.'
***
2세트가 시작되었다.
던전에 접속한 서문엽은 망자의 미궁의 전경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에 다닥다닥 설치된 직육면체의 방들.
그리고 방들을 이어주는 오르막인지 내리막인지 모를 계단들.
추상화 같은 풍경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오싹한 공포를 자아내는 일이었다.
"제호야."
"응?"
"난 혼자 움직일 테니까 너희는 알아서 해라."
"뭐? 무슨 소리를······!"
"안녕."
서문엽은 방에서 나온 뒤, 계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10배의 중력을 받아 급강하한 서문엽은 간신히 아래쪽에 있던 계단 위에 착지했다.
미궁의 구조는 이미 꿰고 있었다.
10배의 중력을 활용할 줄도 알았고, 어디서 뛰어내리면 어디로 도착하는지 지름길도 잘 알았다.
'다들 그렇게 내 실력을 보고 싶다고?'
서문엽의 웃음이 다소 싸늘했다.
'보여주지. 대신 너희 상상과 달리 좀 처참할 수 있으니 조심해.'
대중의 환호가 충격, 경악으로 바뀌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살육(1) ##########################
시작한 지 8분쯤 됐을 때였다.
엄청난 속도로 미궁을 쏘다니며 나타나는 스켈레톤을 부수고 밟고 다니던 서문엽은 마침내 사랑 팀을 발견했다.
거리는 약 30m.
뒤에서는 여전히 스켈레톤들이 쫓아오고 있는 형국.
하지만 사랑 팀을 발견하자 서문엽은 눈을 빛내며 분석안을 펼쳤다.
'쟤는 아니고, 쟤도 아니고, 그래, 얘다!'
서문엽은 계속 달리면서 그대로 창을 있는 힘껏 던졌다.
쉬이익!!
초능력의 힘으로 난폭하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
"헉! 피······!"
민첩한 딜러가 먼저 발견하고는 소리치려던 찰나.
퍼억!
앞서가던 탱커는 뒤늦게 창을 보았지만 반응을 못 해보고 머리에 맞아 아바타가 소멸되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서문엽은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래, 반응 못 할 줄 알았다. 민첩성 51/54짜리.'
경기 시작 전에 민첩성이 가장 낮은 선수를 미리 봐뒀다.
민첩성이 낮으면 반응 속도도 느리므로 기습할 때 가장 좋은 타깃이었다.
플레이어 킬도 포인트를 주기 때문에 서문엽의 몸은 벌써부터 짙푸른 빛깔이 되었다.
서문엽은 질기게 쫓아오는 스켈레톤들을 재빨리 정리하고는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벌써부터 여기까지 접근하다니! 제기랄, 허를 찔렸어."
먼저 반응했으나 손을 쓰지는 못했던 딜러가 신경질을 내며 계단에 떨어진 서문엽의 창을 걷어찼다.
창은 아래로 추락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서문엽이 창을 회수 못하게 조치한 것이었다.
"혼자 온 것 같은데?"
"그건 몰라. 지금부터 사주 경계 잘 해. 또 습격할지도 모르니까."
사랑 팀은 그때부터 습격에 대비해 경계를 강화했지만, 그 탓에 사냥 속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편, 서문엽은 계속 망자의 미궁을 홀로 떠돌았다.
정처 없이 떠도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길을 다 알고 있었다.
'이제 경계를 할 테니 기습은 효과가 없고.'
머릿속으로 김정호라도 된 양 피땀 흘려 그렸던 망자의 미궁 지도를 떠올렸다.
직접 보고 겪으며 그렸기 때문에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생생하게 기억났다.
'아냐. 거기서 다시 한번 창을 날려보자.'
서문엽은 창을 던져 기습하기 좋은 지형을 떠올렸다.
아까 던졌던 창은 회수를 못 했으니, 이제 남은 창은 3자루.
아직 기회가 더 있었다.
'그곳에 먼저 가서 기다리려면 서둘러야겠군.'
이 미궁은 해매다 보면 어느새 점점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하지만 길을 잘 아는 서문엽은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이쯤인가."
스켈레톤들을 해치며 올라온 서문엽은 계단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야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까 봤던 사랑 팀 선수들이 지금쯤 어디를 지나고 있을지 예측이 가능했다.
이동 속도와 경로를 염두에 두고서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 있어서 서문엽의 두뇌는 매우 우수한 편이었다.
그 옛날, 위험이 도사리는 던전에서는 누구나 신중하고 철저히 분석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유독 서문엽만이 분석안을 얻었다.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고력의 수준이 다른 초인들을 한참 상회했다는 뜻이었다.
'지금쯤 저곳을 가고 있겠지.'
다른 방과 계단 등에 가려져서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이곳을 골랐다.
다른 말로, 상대도 이쪽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확률은 반반이니까 실패하면 어쩔 수 없고.'
서문엽은 신중하게 창을 던지는 그립으로 잡았다.
이윽고.
"사랑은."
휘이익!
오러를 싣고 힘껏 던졌다.
"돌아오는 거야!"
드라마의 영향이 다분한 기합이었다.
쐐애액―!!
오러와 근력, 그리고 던지기 초능력이 실린 투창!
거기에 던지는 순간 손끝으로 창대를 긁으며 강력한 회전을 실었다.
긁히는 느낌이 좋았다.
창은 회오리와 같은 궤도를 그리며 날았다.
스크루볼처럼 옆으로 꺾이며 시야를 가리고 있던 방과 계단 등을 피해갔다.
그리고 다시 꺾이면서 적이 있을 거라고 예측했던 지점을 향해 쏘아졌다.
'좋아!'
서문엽은 쾌재를 불렀다.
각도가 없는 곳에서 창을 던져 목표물을 적중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10배 중력이라는 변수까지 있을 때는 말이다.
그야말로 기술 100/100의 진수가 집약된 일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퍽!
둔탁한 소음과.
"컥!"
단말마의 신음이 먼 곳에서 아스라이 들렸다.
-서문엽, 2킬.
미궁에 안내 방송이 나타났다.
플레이어가 죽었거나 한 구역이 붕괴될 때만 나타나는 방송이었다.
"아자!"
주먹을 불끈 쥐는 서문엽.
2022년 초, 가장 위대한 킬 장면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때 백제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엽아, 어떻게 된 거야?
"기뻐해라, 나 이제 보라돌이 됐다."
스켈레톤 사냥과 2킬로 쌓인 포인트로 인해 온몸에 보랏빛 오러가 둘러싸인 서문엽이었다.
-대체 어떻게 2킬을 한 거야? 우리도 그리로 합류할까?
11 대 9로 수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됐으니, 적극적으로 거리를 좁혀 압박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
서문엽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하던 대로 해."
-너 지금 어딘데?
"여기가 아마 2-2구역이었지 아마?"
-적은?
"저 밑에 4구역."
-뭐? 2-2에서 어떻게 4구역에 있던 적을 죽··· 아, 창 던졌구나. 그게 가능하디?
"사랑의 힘으로."
팀원 간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이 들리므로, 사랑은 돌아온다는 투창 기합도 들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백하연을 포함한 팀원들의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저 녀석들에게 공포의 회전목마 맛을 보여줄 테니 너희는 구경이나 하고 있어."
-무리하지 말고, 드라마 좀 그만 봐라······.
다 포기했다는 백제호의 목소리에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하지만 서문엽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17년 전에도 늘 이런 포지션이었다.
서문엽은 사고 치고, 백제호는 수습하고.
***
-서문엽 2킬!!
-와! 말도 안 됩니다! 불가사의한 킬이 나왔어요!
장거리 투창 저격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 중계진도 수만 관중도 난리가 났다.
"저걸 어떻게 맞춘 거야?"
"와, 지린다."
"인간의 경지가 아냐, 저건!"
"상대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던져서 맞췄어! 와, 미치겠다!"
"창 회오리를 그리며 날아가는 거 봤냐?"
흥분한 관중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배틀필드의 역사에 남을 위대한 킬입니다! 선사 시대에도 창을 던져 사냥을 했습니다만, 방금 전의 킬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투창일 겁니다!
-보지 않고도 적의 위치를 계산했고, 각도가 나오지 않는 위치에서 창을 던져 목표물을 맞혔습니다. 본인도 성공을 확신 못 하는 시도였을 테지만,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실력과 행운의 조화였죠!
-실패했더라도 적을 긴장시켜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효과가 있었을 테죠. 그런데 성공했으니 최상입니다! 이제 희망 팀이 반쯤 승기를 잡았어요!
방송을 통해 전 세계에 그 명장면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덥수룩한 수염을 한 젊은 외모의 남자가 TV를 보고 있었다.
그는 독일 최강 명문, 베를린 블리츠 BC의 감독 엠레 카사였다.
배틀필드가 출범한 해부터 베를린 블리츠 BC의 감독직을 맡아 15년간 이끌며 팀을 세계 최강 팀 중 하나로 만든 명장.
구단의 대주주 중 한 사람이기도 하여서 절대적인 권한과 카리스마를 자랑하는 엠레 카사도 서문엽이 보여준 신기의 투창에 넋을 잃었다.
"그래, 저런 사나이였다."
엠레 카사 감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서전을 출간한 바 있었다.
그 자서전의 절반가량은 서문엽을 논하고 있었다.
엠레 카사 감독의 자서전인지 서문엽 위인전기인지 헷갈린다는 평.
어쩔 수 없었다.
왜냐면 그게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7영웅의 원거리 딜러 엠레 카사.
철궁으로 적을 백발백중 맞힌 저격수이자 터키의 국민 영웅이 바로 그였다.
최후의 던전에서 그는 먼 곳에서 서문엽의 상황 판단과 싸움 양상을 객관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던 포지션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장이 된 원동력이기도 했다.
처음 7영웅에 참여하게 되었을 때, 그는 서문엽에 대해 알아보고는 고민을 많이 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클럽에서 술에 취한 채 재벌 3세를 폭행하고 '이 새끼 애비' 데려오라고 난동을 부린 기사가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이다.
'미친놈인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특히 초인의 범죄에 몹시 예민했는데, 저 짓을 하는데도 아무도 처벌하지 못했다.
도리어 무슨 영문인지 다음 날 해당 한국 대기업에서 세이브 더 칠드런에 500억 원을 기부했다는 연관 기사가 링크되어 있었다.
초인은 어지간해선 술에 취하기도 힘든데, 알코올 함량이 98%나 되는 독주를 퍼마시고 그 소란을 떨었다니?
이런 인간과 최후의 던전을 가야 하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런데도 던전에서는 사람이 180도 달라졌다.
그는 기적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매사에 옳은 판단만 하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 무게감이 실렸다.
냉정하고 오만한 독설가이기도 한 엠레 카사 감독조차도 당시 서문엽의 지시에 복종해야 했다.
'심지어 불사신이 되어 돌아오는 기적까지 보여주었으니, 그답다고 해야 하나. 놀라운데도 놀랍지가 않았다.'
엠레 카사 감독은 심경이 복잡해졌다.
만약 서문엽이 배틀필드 선수로서 뛰어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드시 영입해야 한다고 머리가 말한다.
하지만 '그건 좀······.' 하고 가슴이 말했다.
자신의 지시에 반(反)하면 설령 슈퍼스타라도 내쳐 버리는 권위주의자가 엠레 카사 감독이었다.
폭군, 독재자, 권위성애자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그로서는 서문엽이 자신 휘하의 선수로 들어오는 게 꺼림칙했다.
그 미친 망나니가 자신의 권위를 지켜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런 상상 초월의 솜씨를 가진 초인을 포기한단 말인가?
소위 톱3로 통하는 세계 정상급의 세 선수를 보유한 3팀은 하나같이 세계 최강 팀으로 손꼽혔다. 베를린 블리츠 BC도 그중 하나였다.
이 3팀은 최고 수준의 자금력을 자랑했고, 만약 서문엽이 매물로 나온다면 이들 중 한 팀이 영입할 공산이 컸다.
서문엽을 가진 팀이 기존 3강의 균형을 깨고 정상에 설지도 몰랐다.
'제발 배틀필드를 하지 않기를 빌어야겠군.'
그는 '올, 너 많이 출세했다?'라며 옆에서 건들거리면서 권위를 해치는 선수를 영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3강 중 한 팀인 파리 뤼미에르 BC의 대머리 형제는 서문엽 광팬답게 한국에 달려갔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오지 마라. 이 바닥에 얼씬거리지 마라.'
엠레 카사 감독은 오랜만에 신께 기도했다.
########################## 살육(2) ##########################
남은 창은 두 자루.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하니 이제 투창은 한 번밖에 못한다.
상대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투창을 한 번 더 하면, 상대측은 마음을 놓게 된다.
이제 창이 날아오지 않을 거라고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문엽은 이제 투창으로 기습하는 것을 관뒀다.
'계속 긴장하게 놔두는 게 좋겠군.'
언제 또 창이 날아올지 모른다면 심리적 압박이 된다.
이런 압박에 취약한 녀석이 사랑 팀에 있다.
'그 졸부 아들 녀석이 무너질 때까지 천천히 요리해 보실까.'
정신력 26/60짜리 심영수.
보유한 초능력은 폭발 구체와 속박.
폭발 구체는 보아하니 오러 소모가 많아 신중하게 써야 하고, 속박은 오러로 이루어진 로프를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한다.
한마디로 멘탈이 나가면 둘 다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힘을 빼놓은 후에······.
'지옥을 보여줘야지.'
서문엽은 독자적으로 계속 사냥을 해나가면서 사랑 팀의 뒤를 쫓았다.
서문엽의 존재감을 사랑 팀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계속 근처를 맴돌면서 사냥을 하니 사랑 팀의 입장에서는 못내 신경이 쓰였다.
"안 되겠어. 나타나면 한 방에 구워 버려야지."
심영수가 이를 갈며 말하자, 대표 팀 주장이자 사랑 팀의 리더인 탱커 채우현이 반대했다.
"안 돼, 오러를 아껴!"
"계속 신경 쓰여서 사냥을 못 하잖아! 이러고 있는 동안 저쪽은 자유롭게 사냥하고 있다고. 아니면 우리도 견제 보내서 똑같이 괴롭히든지."
"인원이 부족해서 견제 보내면 전력이 더 분산돼. 그리고 지금 계속 감시받고 있어서 견제 보내봐야 사전에 다 들통나."
"그럼 이대로 지자는 거야, 뭐야!"
심영수의 짜증이 폭발했다.
채우현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시간 끌어야지. 다행히 여긴 도망칠 루트가 많아서 장기전으로 갈 수 있어."
채우현은 꾸준히 사냥으로 포인트를 모으면서 후반을 바라보자는 마인드였다.
계속 방해를 받는 바람에 사냥 효율이 떨어졌지만, 어차피 중반을 무사히 넘기고 후반까지 가면 포인트 격차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딜러들에게 포인트를 잘 몰아주면 수적으로 불리해도 한 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저쪽은 몇 사람 빼고는 국가 대표도 없어.'
하지만 그 몇 사람이 문제이긴 하다는 생각이 채우현의 뇌리에 스쳤다.
백하연은 물론이고 백제호도 1세트 한 타 싸움에서 날아다녔던 게 마음에 걸렸다.
'서문엽까지 제 실력을 발휘했다간······.'
1세트에서는 쉬엄쉬엄하는 기색이 보였던 서문엽이었다.
그가 있는 한 승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자식! 딱 걸렸어!"
심영수가 버럭 소리쳤다.
위층의 계단에서 서문엽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영수는 재빨리 폭발 구체를 만들었다.
화르르르!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를 즉시 서문엽에게 집어 던졌다.
"뒈져!"
서문엽은 피하지 않고 방패를 들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한껏 낮춘 채 방패를 내밀었다. 방패에 오러가 맺혔다.
콰르릉!!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화염이 방패에 부딪쳐 사방으로 분사되었다.
서문엽이 있던 자리는 화염으로 가득 차버렸다.
"심영수!"
채우현이 화를 냈다. 폭발 구체처럼 오러 소모가 큰 초능력은 리더의 오더가 있을 때 펼쳐야 옳다.
"하하! 봤지?"
그러거나 말거나, 심영수는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경기 시작 전에 졸부 어쩌고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던 작자였다.
드디어 본때를 보여줘서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런데······.
화염과 연기가 걷히자 그 자리에 서문엽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심영수는 당황했다.
채우현도, 다른 사랑 팀 선수들도 깜짝 놀랐다.
방패로 막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서문엽은 조금의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씨익.
서문엽은 불꽃을 선물해 준 심영수에게 웃어 보이고는 일어나서 유유히 돌아가 버렸다.
"그, 그걸 정통으로 맞았는데 막았다고?"
심영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엄청난 범위 데미지를 일으키는 자신 있는 초능력이었다.
초능력의 위력과 오러량만큼은 빅 리그에서도 통한다고 자부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 팀에서도 핵심 딜러이고 말이다.
저렇게 멀쩡히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안 되겠다.'
채우현은 두려움을 느꼈다.
저런 인간이 포인트를 모아서 더 강해지면 감당 못 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채우현이 나직이 말했다.
"잘 들어. 서문엽을 그냥 놔두면 안 될 것 같아. 한 번에 잡아버리자."
작게 말해도 던전이므로 동료들에게 전달되었다.
"지금부터 3명은 서쪽 길로 빠질 거야. 상대측에 견제를 가는 것처럼 보이게 가지만, 빙 돌아서 서문엽의 뒤를 차단해."
-동선이 너무 길어지는 것 아닌가?
사냥 중이던 동료 하나가 물었다.
하나 잡겠다고 전원이 사냥 못 하고 길게 움직이는 것도 손해 아니냐는 이의 제기였다.
채우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잡아야 할 것 같아. 탱커라서 더더욱."
그 말에 다른 동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실전을 치러보면 느끼게 된다.
똑같이 잘하는 선수가 있다면, 가장 무서운 건 탱커라고.
일대일이면 모를까, 팀플레이에서는 앞에서 버텨주는 탱커의 존재가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디펜스란 한 번 뚫리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지만, 반대로 한 번 막히면 계속 막히는 막막함 또한 그들은 수많은 한 타 싸움에서 느껴보았다.
1세트에서도 서문엽은 한 번도 위태로운 모습 없이 최전방에서 버텼던 걸 기억했다.
일반 관중이라면 모를까, 싸우는 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부담됐다.
"서문엽만 없으면 디펜스 라인을 무너뜨릴 기회가 많이 찾아올 거야. 자, 출발해."
채우현의 지시에 근접 딜러 2인과 원거리 딜러 1인이 함께 움직였다.
방향은 희망 팀이 위치한 서쪽 방면.
희망 팀의 사냥을 견제하러 떠난다고 서문엽이 착각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
-서문엽 선수, 가드가 굉장히 좋습니다.
-위력 면에서 정평이 난 심영수 선수의 폭발 구체를 막고도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피할지언정, 저렇게 깔끔하게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전 세계를 통틀어도 몇 없거든요?
-예, 따지자면 제럴드 워커 정도나 될까요?
-서문엽 선수에게 그 정도의 근력은 없지만, 대신 오러량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죠. 7영웅 슈란 씨의 소멸 광선도 막은 적 있다고 하니 폭발 구체 정도는 너끈하다는 걸 보여준 것 같습니다.
-이번엔 적극적인 공격 의도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계속 사랑 팀을 정신적으로 흔들려는 것 같았습니다. 아! 사랑 팀도 움직입니다!
사랑 팀에서 3인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대형화면에 포착되었다.
사실 던전 내부 상황을 포착해서 대형화면에 송출시키는 일은 '옵서버'라 불리는 이들이 한다.
그들은 미니 맵으로, 점으로 표시된 선수들의 움직임을 일일이 체크하면서 중요한 곳에 초점을 맞추는 일을 한다.
던전 내부의 모든 상황은 통째로 녹화되어 저장되긴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중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지 못해 욕을 먹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번 옵서버들은 국가 대표 경기도 관리하는 실력자들이었고, 사랑 팀의 움직임을 포착해 냈다.
-이동 방향을 보면 희망 팀에게 견제를 떠나는 걸로 보이는데요.
-우리만 방해받고 있을 수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은 오히려 서문엽 선수를 노리는 걸 수도 있어요.
-아! 퇴로를 차단하고서 몰이사냥으로 서문엽 선수를 제거할 수도 있겠군요.
-예, 변수가 있다면 서문엽 선수가 그리 쉽게 잡히느냐입니다. 지금까지의 움직임으로 봤을 땐, 서문엽 선수가 의외로 망자의 미궁 지리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망자의 미궁의 실제 모델을 공략한 장본인이 서문엽 선수이니까요.
-사랑 팀 선수들이 잘 알지 못하는 루트로 달아나 버리면 그야말로 시간 낭비, 동선 낭비만 실컷 한 꼴이 됩니다.
-그래도 사랑 팀의 오더 채우현 선수가 상당히 신중하고 치밀한 성품입니다. 얼마 전 미국전 때도 끊임없이 치고 빠지는 전략적인 플레이를 잘 이끌었거든요. 이거 기대됩니다. 서문엽 선수가 잘 빠져나가느냐, 당하느냐!
-서문엽 선수도 눈치챘습니다.
대형화면에 서문엽이 비춰졌다.
서쪽 루트로 이동하는 사랑 팀 3인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상대의 움직임을 손바닥 안에 놓고 보듯이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던 것이다.
씨익 웃은 서문엽이 그들을 쫓아 은밀히 미행하기 시작한다.
-서문엽 선수, 표정이 좋습니다.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죠. 잘하면 이번 2세트의 결정적인 장면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계속 미행하던 서문엽이 어느 순간, 위에서 3인조를 덮쳤다.
-과감합니다! 바로 덤벼드는데요!
-3 대 1의 싸움! 자신 있다는 건가요?!
중계진의 목소리도 절로 흥분했다.
일반적으로 3 대 1 같은 수적 불리함을 감수하고 덤비는 장면은 많이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나단 베르나흐 같은 톱3 월드 클래스들만 하는 플레이였다.
깜짝 놀란 3인조.
하지만 전원 딜러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응이 빨랐다.
타깃이 된 근접 딜러는 서문엽이 창으로 찔러오자, 즉각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불의의 기습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은 멋진 회피.
그러나 서문엽의 창은 완전히 찌르는 도중에 뚝 멈췄다.
그리고 좌측으로 방향을 돌려서 찔렀다.
콰직!
"크악!"
왼쪽 어깨에 깊숙이 박힌 근접 딜러가 신음을 토했다.
서문엽의 첫 찌르기가 페이크였던 것이다.
어디로 피하는지 방향을 보고 바로 찌르는 순발력!
민첩성 97의 서문엽 앞에서는 날쌘 딜러들도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전원이 딜러군.'
스켈레톤과 비슷한 원리로 좋은 먹잇감이었다.
차라리 힘밖에 없는 탱커들은 단단하고 끈질긴 면이라도 있지, 테크니션인 딜러들은 더 고차원의 테크닉으로 손쉽게 요리할 수 있으니까.
어깨가 찔려 주춤한 틈을 놓치지 않고 재차 창을 찔렀다.
국가 대표 선수답게 창을 검으로 쳐내며 대응.
그러나······.
뻐어억!
-서문엽, 3킬.
원형 방패로 머리를 후려쳐 아바타를 소멸시킨 서문엽이었다. 공격의 연계 속도가 폭풍 같았다.
뒤이어 서문엽은 들고 있던 창을 보지도 않고 뒤로 던졌다.
콰직!
보지도 않고, 준비 동작도 없이 대뜸 날아든 창.
뒤에서 덤비던 근접 딜러가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서문엽, 4킬.
안내 방송이 섬뜩한 사실을 알려준다.
홀로 남은 원거리 딜러는 이를 악물고 활을 쐈지만.
텅!
허망하게 방패에 가로막힌다.
떨어져 있는 창을 발로 차 띄워서 낚아챈 서문엽은 히죽 웃었다.
네가 뭘 어쩔 거냐는 표정이었다.
잠깐의 대치 상태.
"······."
"······."
서로 눈빛을 마주한 채 눈치를 보다가, 원거리 딜러가 휙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일단 피하고 보자는 판단.
콰직!
동시에 원거리 딜러의 아바타가 소멸되었다.
뛰어내리려는 순간 이미 서문엽은 창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엽, 5킬.
"어디서 눈치 게임이야, 민첩성도 낮은 게."
민첩성 79/81의 준수한 원거리 딜러였지만, 97/97의 서문엽을 상대로 순발력 테스트를 한 꼴이었다.
삽시간에 3킬로 포인트를 누적한 그의 몸은 흉흉한 붉은색 광채로 휩싸여 있었다.
경기장은 너무 허망하게 일어난 3킬 학살에 정적에 휩싸였다.
########################## 살육(3) ##########################
-수, 순식간에 끝나 버렸습니다. 이게 지금······.
중계진도 말을 잇지 못했다.
-국가 대표 딜러 세 사람이 죽는 게 1분도 안 걸렸습니다. 와,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강합니다, 서문엽 선수.
탱커는 강하다.
하지만 팀이 함께 있을 때의 얘기다.
단독으로 있을 때는 딜러의 먹잇감이 되기 쉬웠다.
방패를 들고 있으니 디펜스가 안정적이여서 유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건 일반인이 아닌 초인들의 싸움이었다.
본질적으로 스피드에서 차이가 크게 난다.
특히나 선수 풀이 부족한 한국 같은 약체에선 격차가 더 심하다.
하지만 방금은 어떠한가?
서문엽은 국가 대표 딜러들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며 단숨에 학살해 버렸다.
그것은 탱커라도 스피드가 뒤지지 않고, 딜러라도 근력이 낮지 않은 월드 클래스의 레벨이었다.
"와······."
"지금 꿈을 꾸나?"
"우리나라 초인 맞아?"
"한순간에 싸움이 끝나 버렸어."
관중들도 웅성거리며 당혹감을 표했다.
너무 삽시간에 끝나는 바람에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서문엽이 봤으면 바로 이거라며 좋아했을 정적이었다.
-공간이 협소하기 때문에 사랑 팀 딜러진이 넓게 산개할 여유가 없었고, 그 점을 노려서 서문엽 선수가 과감하게 플레이를 했죠.
-예! 군더더기가 조금도 없는 완벽한 동작으로 싸움을 끝내 버렸습니다. 예, 리플레이가 나오네요.
서문엽이 위에서 뛰어내리며 덮치는 장면부터 싸움이 펼쳐졌다.
-보시면 공격에서 다음 공격으로 이어지는 연계가 막힘없이 흐릅니다.
마지막 압권은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서 도망치려는 원거리 딜러를 창을 던져 잡아버린 것.
원거리 딜러가 뛰어들려는 순간 이미 창을 던지고 있는 서문엽의 놀라운 반응 속도가 느린 화면으로 모두에게 공개되었다.
-민첩성 테스트에서 나단 베르나흐 선수와 타이기록을 세웠다고 하죠? 그 진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명장면입니다.
-서문엽, 서문엽 하지만 요즘 배틀필드 선수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일까 많이들 궁금했잖습니까? 오늘 똑똑히 확인하네요. 17년간 은퇴했던 백제호 대표 팀 감독도 MVP에 선정될 정도로 대단했고, 서문엽 선수는 그냥 압도적입니다. 명성 그대로 초인 중의 초인입니다.
-서문엽 선수, 계속 움직입니다. 사랑 팀 선수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갑니다. 이제 은밀히 접근하지도 않네요.
***
'이제 6명밖에 안 남았네?'
원거리 딜러를 잡느라 던졌던 창을 아래층에서 회수한 서문엽은 사랑 팀이 있는 구역으로 달렸다.
'그럼 내가 너희랑 안 싸울 이유가 없잖아?'
전력질주.
거침없이 사랑 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치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야,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백제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이긴, 나 이제 빨개졌어."
온몸에 휩싸인 붉은 광채.
푸른빛-보랏빛-붉은빛-검은빛-흰빛의 5단계에서 벌써 3단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우리도 크게 퇴로를 차단하면서 합류할게.
"맘대로 해. 어차피 그전에 끝나."
-뭐?
"이제 말 걸지 마. 싸운다."
사랑 팀 6인이 보이자 서문엽이 대화를 마쳤다.
3데스의 충격에 혼란에 빠져 있었던 사랑 팀은 서문엽이 대놓고 나타나자 화들짝 놀랐다.
그나마 채우현이 리더답게 대응했다.
"산개!"
5인이 좌우로 산개했다.
심영수만이 탱커인 채우현의 뒤에 서서 보호받는 포지션이었다.
일반인과 달리 초인의 세계에서는 전투 시 산개가 기본 원칙이다. 초능력 중 범위 타격이 워낙 많아서 뭉치고 있으면 모두 당하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는 서문엽 한 사람을 다방면에서 에워싸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런데 그때, 레이피어와 패링 대거를 들고 있던 딜러가 갑자기 빠르게 서문엽의 후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빨라진 달리기 속도.
그러나 서문엽은 당황하지 않았다.
분석안으로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대상: 유벽호(인간)
-근력 68/72
-민첩성 79/79
-속도 80/80
-지구력 65/75
-정신력 67/80
-기술 70/85
-오러 70/71
-초능력: 순간 가속
-순간 가속(초능력): 오러를 지속적으로 소모하여 30초간 몸을 30% 빨리 움직인다.
좋은 초능력이었다.
30% 상승이라면 일시적이지만 민첩성 102.7 속도 104의 움직임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30초라면 한 타 싸움을 치를 때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초능력인데 왜 강국과의 A매치에서 그렇게 죽을 쑤는지 생각 안 해봤니?'
일시적으로 103·104라는 미친 스피드를 낼 수 있는데 왜?
서문엽이 단숨에 창을 뻗었다.
움직임을 미리 예측하여 찌른 일격이었다.
유벽호가 급격히 정지했다.
순간,
뻐억!
뒤이어 방패에 얻어맞고서 아바타가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서문엽 특유의 빠른 연계 공격!
'몸이 빨라진 거지 머리가 빨라진 건 아니잖아.'
보고 판단하고 몸에 명령을 내리는 두뇌의 기능은 그대로였다.
당연히 생각 없이 본능에 몸을 맡길 뿐이라는 순간 가속의 약점을 서문엽은 단번에 파악했다.
진짜 민첩성 100을 가진 백제호 같은 초인은 아주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보고 판단한다.
서문엽에게 던져져 공중에 떠오른 순간, 지상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빈틈을 찾아내는 순간 판단은 백제호의 전성기 주특기였다.
그 차이가 하드웨어의 가속에도 불구하고 이류는 이류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근데 쓰기에 따라 쓸모는 있어. 맞춤 전술 패턴 몇 가지를 만들어주면 괜찮겠군. 넌 합격.'
속으로 대표 선출까지 하고 있는 서문엽이었다.
-서문엽, 6킬.
던전에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이 사랑 팀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팀의 과반수가 한 사람에게 킬 당한 것이었다.
숨 막히는 싸움이 펼쳐졌다.
서문엽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단번에 유벽호를 처치한 서문엽은 둘러싸이지 않게 바깥을 돌며 계속 싸웠다.
채우현은 방패를 들어 입을 가린 채 나직이 지시했다.
"영수 폭발 쏘고, 시야 가려졌을 때 진현이가 들어간다."
아주 작아 육성으로는 안 들리지만 던전 내부 시스템으로 팀원들 간에는 들을 수 있었다.
심영수가 폭발 구체를 만들어 서문엽에게 쏘았다.
서문엽은 납작 웅크리고 가드를 했다.
콰르릉!!
폭발과 함께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매캐한 연기가 시야를 가득 채웠을 때, 탱커 박진현이 카이트 실드와 토마호크를 들고 연기 속으로 달려들었다.
연기 속에서······.
쉬익― 콱!
-서문엽, 7킬.
허무한 7킬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연기가 걷히자 던졌던 창을 주워 들고 있는 서문엽이 보였다.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는 애를 어떻게 눈치 못 채겠니?"
"진현이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없는데······."
채우현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옹호했다.
"눈빛으로 했잖아."
"······!"
서문엽은 대참패에 좌절하고 있는 채우현을 바라보았다.
-대상: 채우현(인간)
-근력 88/88
-민첩성 75/80
-속도 70/70
-지구력 69/80
-정신력 79/90
-기술 70/85
-오러 80/83
-초능력: 둔화
-둔화(초능력): 반경 10m 내의 타깃 10명의 움직임을 30% 둔화시킨다. 본인도 움직일 수 없으며, 본인보다 오러량이 적은 타깃에게만 적용된다.
'오.'
그럭저럭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재였다.
역시 국가 대표 팀의 주장인가.
아직 다 개발되지 않았지만 80이 넘는 재능이 상당했다.
그런데 초능력은 조금 안타까웠다.
'초능력은 완전히 양학용이네.'
오러량이 80을 넘는 선수는 빅 리그에 갈수록 많을 터였다.
재능의 한계인 83까지 모두 끌어낸다면 좀 더 낫겠지만 말이다.
거기에 본인은 움직일 수가 없다니. 후방에서 뛰는 서포터라면 모를까, 최전방에서 탱커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거리 조절을 잘하며 지능적인 플레이를 한다면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초능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썼다 안 썼다 반복하며 플레이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런 넓은 시야가 있느냐가 관건인데, 현재 수준으로는 무리였다.
어찌 되었건 서문엽에게는 전혀 안 통하는 초능력이었다.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안타깝지만, 잘 가라.'
4 대 1.
서문엽은 거침없이 짓쳐들었다.
***
-서문엽, 8킬.
-서문엽, 9킬.
급기야,
-서문엽, 10킬, 11킬.
마무리로 채우현의 다리를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린 뒤, 뒤에 있는 심영수를 방패로 때려 죽였다. 동시에 창은 채우현에게 던져 마무리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탱커인 채우현도 몇 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자 관중들은 질려 버렸다.
-2세트가 이렇게 끝나 버렸습니다.
-서문엽 선수, 무려 올킬을 달성합니다! 공식 비공식 포함 한국 최초의 올킬입니다! 자선 경기가 아니라 공식전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상대가 전원 국가 대표 선수였다는 점이 충격적입니다. 물론 에이스인 백하연 선수가 빠졌다지만 어떻게 저런 실력 차이가 난 걸까요?
서문엽이 역대 최고의 초인이었다는 데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7영웅과 현대 배틀필드 선수를 비교한다면 의구심을 가지는 경우는 상당히 있었다.
왜냐하면 배틀필드는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같은 사람을 상대하도록 기술을 닦는 스포츠였기 때문이다.
지저인과 괴물을 상대로 특화된 예전의 초인들이 배틀필드 선수들과 대인전을 치른다는 건 애초부터 불공평한 전제라고 생각한 것.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싸웠던 초인들의 가치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옹호론이었다.
그런데 오늘, 모든 게 뒤집혔다.
서문엽은 혼자서 한국 국가 대표 팀 11명을 올킬했다.
견제 플레이로도 2킬을 거두는 탁월함을 보여줬고, 다수와 싸워도 3 대 1이든 6 대 1이든 거침없었다.
치열한 혈전도 없었다.
테크닉에서부터 레벨이 너무 달라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래도 국가 대표인데······."
"서문엽이 저 정도였어?"
"괴물도 잘 잡더니 사람도 잘 잡네."
문화 충격을 받은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서문엽의 맹활약을 누구보다도 기대했지만, 그들의 기대는 이런 살육이 아니었다.
4, 5킬 정도로 MVP를 받는 정상적인 활약을 원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다 죽여 버리다니?
-A매치에서 연패의 수렁에 빠졌던 대표 팀이 오늘 자선 경기에서 또 참패를 당하네요.
-프랑스 대표 팀과 A매치를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서문엽 선수의 압도적인 실력이었습니다. 첫 실전이라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부숴 버렸습니다.
접속 모듈에서 선수들이 나왔다.
사랑 팀은 거의 초상집 풍경이었고, 희망 팀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
서문엽만이 태연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존나 약하네. 안 됐다, 제호야. 쟤들 데리고 뭘 한다고."
"···몰라, 인마."
백제호도 침울했다.
또 참패를 당해 사기가 바닥 난 대표 팀 선수들을 어떻게 다독여야 할지 암담했기 때문이다.
########################## MVP ##########################
당연하지만 자선 경기는 성황리에 끝났다.
당연했다.
서문엽이 출전했을 때, 이미 성공은 보장된 경기였다.
전 세계에 방영이 되었고, 어마어마한 수익금이 기부금으로 전달되었다.
세계인이 모두 궁금했던 것이다.
대체 서문엽의 실제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배틀필드에서 통할까?
서문엽은 7영웅을 대표하는 존재였고, 현역 배틀필드 플레이어와 7영웅의 실력 비교를 할 수 있는 척도였다.
그 결과는 1, 2세트를 통해 잘 나왔다.
-2세트 MVP, 정해져 있죠. 서문엽 선수입니다!
-백제호 감독에 이어 서문엽 선수까지 나란히 MVP를 받았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7영웅의 명성이 거품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줬습니다.
-백제호 감독도 무려 17년 만에 무기를 잡았는데 그 나이에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냥 감독하다가 자기가 대표 팀 경기 출전해도 되겠어요.
-하하, 그렇습니다. 서문엽 선수와의 연계 플레이로 척척 맞는 호흡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옛날을 떠올리며 감동을 받으셨을 것 같습니다.
대형화면에는 희망 팀의 선수 대기실이 비쳐지고 있었다.
서문엽이 낄낄거리며 백제호의 옆구리를 툭툭 치고 있고, 백제호는 뭔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백하연이 다가와 서문엽에게 어깨에 팔을 걸치며 뭐라고 얘기한다. 입 모양을 보니 왜 이렇게 잘하냐고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가장 핫한 3인이 나오자 관중들의 환성이 커졌다.
"봤어, 형?"
"눈이 있는데 안 봤을 리가 있어?"
코미디언으로 오해 사기 쉬운 대머리 쌍둥이, 모로 형제가 대화를 나눴다.
"너무나 뛰어난 테크닉이야. 저 진가를 알아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동생 필립 모로는 감격하여 부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형 장 모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선을 최소화한 간결한 움직임에 척척 죽어나가서 일반인이 보기에는 한국 국가 대표 선수들이 너무 나약했다고 보이기 십상이지."
"다행이야. 우리가 저 진가를 알아볼 정도의 안목이 있어서. 모든 공격에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허를 찌르는 원리가 담겨 있었어. 눈앞의 상대와 싸우면서도 주위의 다른 적까지 모두 시야에 두고 있었던 거야."
"정말 끝내주는군. 1세트에서는 동료들을 활용하는 팀워크를 보여줬고, 2세트는 대인전 능력을 보여줬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건 지상 최대의 쇼케이스였어."
"던전의 구조와 활용에 대한 이해도도 보여줬지. 맙소사, 그는 지금도 현역 톱3와 올해의 선수상 경쟁을 펼칠 수 있어."
선수 관리와 인사 담당인 필립 모로는 흥분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창을 4자루밖에 소지하지 않은 게 아쉬웠어. 좀 더 최신 테크놀로지로 평소에는 축소된 형태로 소지할 수 있게 한다면 10자루까지도 들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파리 뤼미에르 BC를 창단하기 전에는 던전 산업체의 오너였다.
초인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일이 주된 사업이었고, 지금도 배틀필드 장비 제작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무기 제작에 대한 전문 지식을 많이 알았다.
"함부로 무기를 바꾸면 무게 균형이 변해서 그 예술적인 던지기의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어. 하지만 적응만 한다면 견제 플레이 능력이 2배 이상 상승하지 않을까?"
"내 말이! 배틀 슈트도 커스텀으로 맞추면 본인의 동작에 최적화될 수 있어.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가 끝나면 그는 지상 최고의 선수가 될 거야!"
"우리 파리 뤼미에르를 빛내줄 최고의 선수 말이지."
꿈꾸는 모로 형제에게 옆에서 듣고 있던 슈란이 끼어들었다.
"본인은 별로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망상에 빠져 있네요."
유창한 프랑스어로 일침 하는 슈란에게 모로 형제는 껄껄 웃으며 대꾸했다.
"모르시는 말씀. 저런 실력을 선보였는데 배틀필드를 안 한다니, 그럴 리가 없죠."
"그는 스타의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입니다. 결국 자기가 가장 빛날 수 있는 곳으로 올 겁니다."
슈란은 광적인 팬심으로 논리를 초월해 버린 모로 형제를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대형화면에 비쳐지는 서문엽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그는 옛날과 똑같은 외모와 표정으로 백제호와 잡담을 나누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보나마나 짓궂은 얘기로 백제호를 놀리고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어렸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붙이던, 미운 모습 그대로였다.
이쪽은 17년의 세월을 보내며 변했는데, 저 남자는 그때 그 시점에서 막 돌아온 상태였다.
최후의 던전은 슈란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장소였다.
그곳에서 서문엽은 막힘없이 공략을 이끌었다.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 버거운 곳이었는데, 그는 언제나 해답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희생하면서 역할을 완수했다.
두려움이 하나도 없었고, 홀로 괴물 떼를 향해 뛰어들 때조차 망설임이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었는지, 슈란에게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살아 있었단 말이지.'
슈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삼촌 왜 이렇게 세?"
"삼촌 무지 세다고 누누이 얘기했잖니. 근데 그렇다 쳐도 너희는 좀 심하게 약하다?"
"이씨,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란 말이야."
대표 팀을 비하하는 얘기를 일삼으니 백하연이 짜증을 부렸다.
한 타 싸움에서 올킬을 당한 것도 아니고, 아예 시종일관 서문엽 한 사람에게 죽어나간 대표 팀 동료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백하연은 씩씩댔다.
"삼촌은 그렇게 세면서 굳이 그렇게 비참하게 짓밟았어야 했어?"
"삼촌이 굳이 악취미로 그랬겠니?"
실은 그럴 의도가 맞았다.
"그럼?"
"가장 쉽고 빨리 이기는 길을 택한 거지. 그리고 너희는 애당초 선발 기준부터 잘못됐어. 다 어중간한 것들만 뽑아가지고는."
말을 마친 서문엽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요즘 그는 '거침없이 로우 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백제호가 서문엽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딜?"
"MVP 인터뷰해야지."
"그것만 하고 집에 가는 거지?"
"축하 파티도 있다."
"뭔 또 파티야?"
서문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선 행사잖아. 배틀필드 관계자들이랑 VIP들 모아놓은 파티가 있어."
"경기를 막 마치고 피곤한 선수에게 배려도 없냐?"
"아바타로 뛰어서 피로 같은 건 있지도 않은데 무슨 헛소리야?"
"쳇, VIP 같은 소리 하네. 얼마나 중요한 새끼들이 온다고. 확 엎어버릴 까 보다."
"기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이는 거니까 심보 못되게 쓰지 마라. 그리고 너 독한 술 퍼마시면 가만 안 둔다? 예전에도 네가 클럽에서 난동 부리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진땀 뺐는지 알아?"
"흐흐, 그땐 나도 많이 어렸지."
"옛날 일인 척하지 마라. 너한텐 불과 수개월 전이잖아."
뭐하는 놈들인지는 기억 안 났다.
클럽에서 술에 취해 같이 놀던 여자를 폭행하던 재벌 3세가 눈에 띄어 똑같이 취한 자신이 응징해 주었다.
주폭(酒暴)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몸소 보여주었던 것.
물론 서문엽은 그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중에 제호에게 들어보니, 서문엽이 인질극을 벌이는 바람에 그 집안에서 회장까지 급히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나?
돈이 많으면 기부를 하라고 인질극을 벌였고, 결국 세이브 더 칠드런에 500억 원을 전달하는 약속으로 아들을 풀어줬단다.
취한 와중에도 세이브 더 칠드런을 언급하다니, 역시 자신은 일관된 성격의 소유자라고 서문엽은 만족스러워했다.
불과 수개월 전의 일이었지만, 옛 추억에 기분이 좋아진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오랜만에 신나게 마셔보자."
"내 말 뭐로 들었냐? 적당히 마시랬다."
"내가 뭐 옛날처럼 98도짜리 독주를 퍼마시겠어? 적당히 보드카나 마실게."
"옛날 일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때 마신 것도 보드카였어."
"우리 조카 하연이! 너도 이제 술 마실 나이가 됐네?"
"응! 나 엄청 잘 마셔."
백하연이 신나서 소리쳤다.
활짝 핀 안색을 보니 얘도 주당(酒黨)이구나 하고 생각한 서문엽이었다.
백제호만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정이었다.
MVP 인터뷰에 파티까지.
서문엽이 사고 치기 좋은 일정뿐이니 함께 움직이는 백제호가 벌써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서문엽은 백제호와 함께 경기장 중앙에 설치된 인터뷰 부스로 걸어 나갔다.
서문엽이 나타나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맞이했다.
"와아아아아아!!!"
"서문엽! 서문엽! 서문엽!"
쩌렁쩌렁한 환호성.
기분이 좋아진 서문엽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함성이 더 커졌다.
그때 문득 윙윙거리며 날아오는 작은 로봇이 눈에 띄었다.
카메라 앵글이 달려 있어서 대충 뭔지는 짐작했지만 서문엽은 신기해서 백제호에게 물었다.
"저게 뭐야?"
"드론 카메라."
"오, 그런 것도 있어?"
대형화면 쪽을 올려다보니 정말 자신의 얼굴이 드론 카메라가 있는 각도에서 클로즈업되어 비춰졌다.
심심해진 서문엽은 무심코 드론 카메라를 향해 중지를 세워 보였다. 백제호가 재빨리 그 몹쓸 손가락을 제지시켰다.
"넌 대체 뭐가 문제냐!"
"그냥 심심해서······."
"그렇게 심심하면 배틀필드를 하란 말이야!"
"또 말이 그렇게 되네."
투덕거리는 두 사람.
"와하하하하!"
서문엽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에 경기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인터뷰 부스에는 날씬한 몸매의 미녀 캐스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캐스터 이영희라고 합니다."
"예, 반갑습니다. 대표 팀 감독 백제호입니다."
"안녕하쇼."
백제호와 서문엽도 인사했다.
"두 분 다 멋진 경기력을 보여주셨는데요, 먼저 1세트 MVP이신 백제호 선수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활약하실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셨나요?"
"예상 못 했습니다. 서문엽 씨의 억지 때문에 강제로 출전하게 돼서 부랴부랴 훈련을 했는데 다행히 운이 좋았습니다."
"서문엽 선수와의 호흡이 척척 맞았는데요, 예전의 경험이 다시 떠오르셨나요?"
"예, 기억은 희미했는데 다행히 몸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질문과 모범 답변이 이어졌다.
그리고 서문엽의 차례가 되었다.
"서문엽 선수! 오늘은 선수죠? 2세트에서 굉장한 활약을 펼치셨는데요. 올킬을 할 수 있다고 예상하셨나요?"
"네."
서문엽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세트는 배틀필드에 대해 감을 잡으려고 쉬엄쉬엄했는데, 해보니까 별거 아니어서 2세트는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 참패를 한 사랑 팀 선수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서문엽은 곰곰이 생각했다.
대상: 백하연(인간)
-기술 68/75
-대상: 최혁(인간)
-기술 61/70
-대상: 유벽호(인간)
-기술 70/85
-대상: 채우현(인간)
-기술 70/85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선수들의 적성에 맞는 포지션과 역할을 잘 못 찾아주는 것 같고, 기술도 못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혹시 서문엽 선수가 그런 측면에서 선수들을 이끌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서문엽은 흠칫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저 섹시한 몸매의 처자는 아무래도 박진태 협회장의 사주를 받은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서문엽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많은 것이 내포된 대답이었다.
########################## 파티(1) ##########################
"웬일로 안 한다는 말은 안 하네."
인터뷰가 끝나고 백제호가 툭 말했다.
서문엽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때문이지."
"나?"
"넌 왜 적성에도 안 맞는 지도자 노릇을 하려고 들었어?"
"내가 하려 들었던 게 아니야."
백제호는 겸연쩍어하며 변명을 했다.
실은 그도 감독직을 맡고서 계속 후회 중이었다.
현역 시절 자신은 서문엽의 충실한 수족 같은 포지션이었다.
감독에 어울리는 사람은 서문엽이지 자신은 아니었다.
'그래도 옆에서 보고 들은 게 있으니 어찌어찌 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지.'
7영웅 동료 엠레 카사도 서문엽에게서 영감을 받아 명감독이 되지 않았던가.
3년 차 서당 개도 풍월을 읊는데, 서문엽 측근 11년 차면 감독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백제호로서도 억울한 부분은 있었다.
그는 감독으로서 무능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한국 대표 팀의 현실이 웬만한 베테랑 감독도 극복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을 뿐이었다.
서문엽이 말했다.
"오늘 직접 싸워보니 알겠더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쟤들도 이따위이니, 이 나라에 기술을 잘 가르칠 지도자가 없는 거야."
기술 능력치를 재능의 한계까지 다 채운 놈이 하나도 없는 게 이를 증명했다.
"그래서 네가 기술 코치 해주겠다고?"
"돈만 확실히 준다면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이것도 네가 감독이니까 도와주는 거야."
'더럽게 비싸게 구네.'
백제호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근데 생각해 보면 실제로도 비싼 녀석이긴 했다.
선수대기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다 떠난 가운데, 두 사람은 무장을 해제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대화를 나눴다.
"일단 내가 몇 마디 조언을 좀 해줄 테니, 시키는 대로 해보고 성과를 보자고."
"좋아, 듣고 있어."
"일단 최혁을 대표 팀에 뽑아."
최혁.
오늘 뜬금없이 탱커 노릇을 해야 했던 쌍성 스피리츠의 주전 딜러였다.
"그거 진심이었어?"
"그럼 내가 누구 하나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랬겠냐?"
백제호는 '응'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탱커로 기용하고 본격적으로 근력 훈련 시켜."
"최혁이 따를까? 지금까지 근접 딜러로 선수 생활 잘해왔는데."
"그따위 실력 갖고 잘해왔다는 소리가 나와? 싫으면 안 뽑겠다고 해."
서문엽의 눈높이에서는 대부분의 선수가 쓰레기였다.
"좋아, 한 번 제의해 보지. 또 다른 건?"
"그 협회 부회장 아들이라는 놈 빼."
"심영수? 곤란한데."
"왜? 협회 부회장 눈치 보냐?"
"내가 눈치를 왜 봐? 그럴 바엔 감독 안 하지."
백제호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확실히 감독직을 때려치우려 했을 때도 협회에서 매달렸던 그였다.
"스펙상으로 영수를 뺄 근거가 부족해."
"정신력이 애새끼 수준인데 데리고 뭐 하게? 1, 2세트 말아먹는 데 크게 일조한 거 못 봤냐?"
"끄응, 초능력이 너무 아까운데."
폭발 구체와 속박, 그리고 대표 팀 내 최고의 오러량.
기록상으로만 보면 원거리 딜러의 핵심으로 삼을 만한 심영수였다.
"하여간 멘탈 키우기 전에는 안 돼."
정신력 26이면 일반인만 못한 수치였다.
일반인의 정신력 평균이 40 정도이고, 초인은 60 정도.
26이면 일반인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죽음을 가상 체험해야 하는 폭력적인 팀플레이 스포츠에서 그런 멘탈은 독이었다.
"그럼 심영수를 빼고 그 자리에 최혁이 들어가는 건가."
"그렇지. 최혁은 근력 트레이닝만 집중적으로 시키면 수개월 안에 성과 나온다. 형아 말 틀린 적 없는 거 알지?"
"···그건 아는데."
"아, 채우현도 있었구나."
백제호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채우현은 진짜 빼면 안 돼!"
"왜 호들갑이야. 사랑 팀에서 유일하게 사람다운 놈이었는데 왜 빼?"
"휴."
백제호는 안도했다.
채우현은 실력부터 멘탈까지 두루 준수한 대표 팀의 기둥이었다. 채우현이 없으면 팀워크가 성립되지 않았다.
"우현이는 왜?"
"걔는 최전방 말고 후방 보조 탱커로 바꿔."
"우현이 초능력이 뭔지 아는 거야?"
백제호가 놀라서 물었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TV로 A매치 봤잖아."
"초능력만 따지면 뒤로 빼는 게 맞긴 하지. 근데 최전방엔 튼튼한 탱커가 필요해."
"있잖아, 최혁."
"···정말 최혁이 그 정도로 재능 있는 거 맞지? 멀쩡한 젊은 애 인생이 걸린 일이야."
"이 새퀴가 이제 내 말을 의심하네."
서문엽이 화를 내려 하자 급히 알겠다고 답한 백제호였다.
"또 없어?"
"왜 없어. 유벽호라는 놈 있지?"
"그래."
순간 가속이라는 초능력을 가졌지만 서문엽에게 한 방에 킬 당한 근접 딜러였다.
"초능력으로 스피드를 내긴 하는데 대가리가 몸처럼 빠르진 않잖아."
"···그건 그렇지."
안타깝지만 유벽호의 약점은 한때 세계 최고의 스피드를 가졌던 백제호도 잘 알고 있었다.
"아까 보니까 걔가 가속을 이용해서 내 뒤로 빠르게 달려가더라. 근데 걘 그렇게 쓰면 안 돼. 스피드만 빠르지 밥이야."
"그럼?"
"탱커 곁에 뒀다가 기회를 포착하면 뛰어드는 식으로 가야지. 일본도가 칼집에 꽂혀 있다가 뽑히듯이."
"흐음, 그러면 효과가 더 있을까?"
"걘 가속으로 낸 자기 스피드를 감당 못해. 그러니까 공격은 일격필살로 가야 효과를 봐."
유벽호의 기술 능력치는 70/85였다.
85까지 다 개발되면 순간 가속을 이용하여 더 많은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본래 자신의 스피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오늘 감상은 여기까지야. 나중에 배틀필드 경기를 보게 되면 또 알려줄게."
"그래, 고맙다."
"고맙긴."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협회장 늙은이한테 전해. 날 고용하고 싶다면 연봉 두둑이 준비하라고."
오늘의 조언이 성과를 거둔다면, 협회는 서문엽을 고용하기 위해 막대한 연봉을 써야 할 터였다.
***
경기가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그날 저녁 서문엽 일행은 자선 파티에 참가했다.
미리 준비된 의상을 입은 서문엽은 어린애처럼 귀찮음 가득 담긴 표정으로 일행과 함께 연회장에 입장했다.
수익금을 세이브 더 칠드런에 전달하는 행사도 포함된 파티였기 때문에 서문엽이 참가 안 할 수는 없었다.
"삼촌, 저기 보드카 짱 많아."
백하연이 옆에서 소곤거렸다.
"오, 너도 술맛을 좀 아는구나?"
"삼촌이 좋아하는 술이라고 해서 나도 보드카로 술을 배웠지. 이제 다른 술은 음료수 같아서 못 마시겠어."
"정말 훌륭하게 자랐다."
"흐흐."
서문엽은 아저씨처럼 웃는 백하연을 몹시 기특해했다.
백제호는 망나니 친구에게 물들어가는 딸의 모습이 몹시 불만이었지만 꾸욱 참았다.
연회장의 모든 시선이 서문엽에게 집중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배틀필드 관계자였기 때문이다.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내서 화제를 모은 배틀필드 계의 거물들도 서문엽을 보기 위해 기부금을 내고 이 파티에 참석한 상태였다.
"다이아몬드가 나타났다."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거구의 흑인, 조 펠만이 눈을 빛냈다.
옆에서 늘 따라다니는 미녀 비서가 소곤거렸다.
"바로 계약 의도를 갖고 접근하면 불쾌해하지 않을까요?"
"흠, 역시 그렇겠지?"
"네,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 욕설을 날린 걸로 봐서는 불쾌지수가 상당히 높아진 것 같았어요."
수만 관중이 보는 경기장 대형화면을 당당히 중지로 가득 채운 위업은 누구도 생각 못 한 광경이었다.
저래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게 신기한 서문엽의 위엄이었다.
"좋아, 천천히 여유를 두고 접근······."
그런데 그때, 당당한 체격의 백인 남성이 선뜻 서문엽에게 다가갔다.
또 다른 거물 에이전트인 제이크 랜드였다.
"미스터 서!"
웃음 지으며 당당하게 접근하는 제이크 랜드.
조 펠만은 또 선수를 빼앗겼다고 원통해했다.
"오랜만이군, 서."
"음? 제이크 랜드 아냐? 되게 오랜만이네. 근데 내 성은 서문이야."
서문엽은 제이크 랜드를 알아봤다.
제이크 랜드는 기뻐했다.
"날 기억하나?"
"몇 달 전에 봤었잖아. 최후의 던전 멤버 선발할 때."
"수많은 불합격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용케 기억해 주는군."
"댁은 좀 아슬아슬하게 떨어졌어. 아까웠지."
"하하, 고맙군. 하지만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이 맞아. 나도 내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
유럽 던전 공략의 베테랑이자 젊은 초인들의 멘토였던 제이크 랜드.
그는 7영웅에 낄 수 있는 위상을 가진 거물 초인이었지만 아깝게 탈락했다.
그는 나이가 많았고, 서문엽의 평가 기준에 위상 같은 건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때 5년만 더 젊었더라도 제이크 랜드는 7영웅의 일원으로 명성을 떨쳤을지도 모른다.
"비록 아쉽긴 하지만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있어."
"그래? 지금은 뭐 하는데?"
"에이전트. 빅 리그에서 뛰는 수많은 배틀필드 플레이어들이 내 매니지먼트를 받고 있지."
"아하, 잘 어울리네. 그때도 당신 따르는 초인들이 많았었지."
"땡큐,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서문은 어때? 배틀필드에 마음이 있어?"
"당장은 별로. 지금은 쉬고 싶어."
"좋은 대답이군. 아예 하기 싫다는 말은 아니잖아."
"뭐, 오늘 경기를 해보니 생각처럼 꼭 불쾌하진 않았어."
"오케이. 지금은 세상을 구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 휴식을 취할 때지. 하지만 당신은 계속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낼 성격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원래 노는 것도 놀아본 놈이 잘하거든."
제이크 랜드는 명함을 꺼내 서문엽의 포켓에 넣은 뒤 어깨를 툭 쳤다.
"슬슬 몸이 근질거리면 연락해."
"생각해 보지."
"좋아, 희망을 품고 기다리지."
목적을 달성한 제이크 랜드는 빙글빙글 웃으며 물러났다.
대화가 끝난 후, 옆에서 멍하니 있던 백하연이 서문엽에게 말했다.
"사, 삼촌!"
"응?"
"제이크 랜드랑 무슨 얘기 했어? 아니, 삼촌 영어 할 줄 알았어?"
그랬다.
서문엽은 지금껏 영어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외국 싸돌아다닐 일 많아서 저절로 익혔어."
"헉!"
백하연은 경악했다.
초등학교 중퇴.
13살 때부터 줄곧 던전 생활.
폭행시비 구설수 다수.
던전 공략에 대한 것만 제외하면 무식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서문엽의 의외의 면이었다.
"삼촌, 영어 공부 어떻게 했어? 나도 해외 진출 준비하느라 공부 중인데 너무 어려워."
"공부를 왜 해?"
"응?!"
"실생활에서 듣고 따라 말하고 하다 보니 절로 익혀지던데. 아기가 공부한 뒤에 말문 트이는 게 아니잖아."
어울리지 않게 머리가 매우 좋은 서문엽.
백하연은 배신감을 느꼈다.
"치사해! 삼촌도 나처럼 공부를 못할 줄 알았는데."
"영어가 힘드니? 우리 하연이, 머리가 돌이구나?"
"크윽!"
백하연이 몹시 분개했지만 반박을 못 했다.
가만히 있던 백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하연이가 좀 돌머리이긴 했지.'
일찌감치 배틀필드 선수가 되라고 조기 교육을 시켰던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 파티(2) ##########################
"안녕하십니까, 서문엽 씨."
"영어 가능하시죠?"
작은 키에 빛나는 대머리, 심지어 쌍둥이라 더욱 특이한 형제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들은 왠지 잔뜩 기대 어린 표정들이었다.
"프랑스어도 할 줄 알지."
서문엽은 프랑스어로 대꾸해 주었다.
대머리 쌍둥이, 모로 형제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상관없지만 백하연도 기겁했다.
"저희를 아십니까?"
"프랑스의 무기상 모로 형제."
"오오!"
"예전에 신문에서 봤는데 코미디언 콤비처럼 생겨서 기억하지."
코미디언처럼 생겼다는 말에도 모로 형제는 유쾌했다.
"하하,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어렸을 땐 그 콘셉트로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죠."
"무기상은 폐업했을 테고, 요즘은 뭐 해?"
서문엽이 물었다.
불감청고소원이라, 모로 형제는 그 질문을 몹시 반겼다.
"저희는 파리 뤼미에르 BC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무기상은 서문엽 씨가 나타났을 때 냉큼 접었죠."
"서문엽 씨가 나타났을 때 저희는 느꼈죠. 지저 문명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말입니다."
"BC가 뭐야?"
서문엽은 자신을 찬양하는 듯한 모로 형제의 태도에 떨떠름하면서도 물었다.
"오, 죄송합니다."
"배틀필드 클럽의 약자입니다."
"아하."
서문엽은 옆에 있던 백하연에게 물었다.
"얘들 파리 어쩌고 배틀필드 팀 구단주인가 본데?"
"나도 알아! 삼촌, 이 문어 형제 엄청 유명해."
백하연은 흥분한 표정이 되었다. 파리 뤼미에르 BC는 그녀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파리 어쩌고 클럽이 그렇게 큰 팀이냐?"
"파리 뤼미에르, 세계 최고의 팀이야! 나단 베르나흐도 거기 소속이고."
그때, 모로 형제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한국어는 모르지만 나단 베르나흐가 언급된 것 같은데요?"
"나단 베르나흐를 칭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나단도 아주 기뻐했죠."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걔 잘하더라. 제호 전성기 수준으로 빠르던데."
"크으, 칭찬 감사합니다. 제가 유소년 때부터 챙긴 아이라 제 아들 일처럼 기쁘군요."
필립 모로가 감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단 베르나흐를 키운 자신의 능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서문엽은 얘들 왜 이렇게 텐션이 높나 의아해졌다.
그때 백하연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문어 형제, 삼촌의 광팬이야. 홈구장에 삼촌 동상을 엄청 거대하게 세우려고까지 했었어."
알고 보니 그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라고 했다.
형제 중 동생 필립 모로는 유망주 발굴의 귀재로 이름 높았다.
다만 그렇게 발견한 유망주에게 일단 서문엽 스타일을 시키려 든다는 단점이 있었다.
물론 유소년 코치진이 출중한 덕에 그 사심이 충족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유망주를 발굴해 왔습니다만, 서문엽 씨의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화도 났습니다."
필립 모로의 말에 장 모로도 맞장구친다.
"하지만 오늘 경기를 보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죠. 탱커, 근접·원거리 딜러 역할을 모두 소화하면서도 동료 활용, 적 간파, 던전 지리 이해도까지!"
"그런 전천후의 천재가 두 번 다시 나올 수 있을 리 없죠. 아무도 서문엽 씨를 흉내 못 내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건 당신만이 소화할 수 있어요."
"고마운데 정신이 하나도 없네. 두 사람인데 마치 한 사람과 얘기하는 것 같아. 혹시 미리 대본이라도 짜온 거 아니지?"
모로 형제는 뭐가 그리 웃긴지 껄껄 웃었다.
"하도 같이 다니다 보니 호흡이 척척 맞죠."
"이제 같이 안 있으면 말을 혼자 해야 해서 피곤해질 정도죠."
합격술처럼 척척 맞는 호흡으로 시너지가 일어나 남들의 2, 3배 말을 많이 하는 특이한 모로 형제였다.
"뭐, 됐어. 어쨌든 너희도 날 영입하고 싶은 거지?"
바로 본론을 꺼내는 서문엽의 돌 직구.
모로 형제는 서로를 보더니, 이윽고 필립 모로가 말했다.
"아니요."
"응?"
의외라는 듯 놀란 서문엽.
필립 모로는 그의 옆에 있는 백하연을 가리켰다.
"이 아름다운 마드무아젤에게도 관심이 있습니다."
"잉? 나? 나 왜 가리켜?"
프랑스어를 모르는 백하연은 그저 어안이 벙벙해져서 당황했다.
"널 영입하고 싶다네."
"헉, 영광입니다! 땡큐! 메르시!"
"쉿, 바보 같으니까 그만."
흥분한 조카를 달랜 서문엽은 필립 모로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정말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하연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선수 본인을 앞에 두고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전부터 백제호의 딸에 한국 대표 팀의 에이스이니 관찰했습니다만, 킬 결정력이 아쉬워서 흥미를 끊었었죠. 애매한 보조 딜러는 필요 없었거든요."
필립 모로가 계속 설명했다.
"하지만 최근에 근접 딜러로 포지션을 바꿨더군요. 부족한 퍼즐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었습니다. 근력과 실전 검술을 좀 더 가다듬으면 우리 파리 뤼미에르에서도 출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초능력 두 가지가 모두 활용성이 높으니까요."
서문엽은 놀라움에 눈이 커졌다.
'꽤 잘 파악했잖아?'
필립 모로의 안목이 정확함을 알게 되니 보다 신뢰가 생겼다.
"물론 거기에 서문엽 씨까지 합류한다면 더더욱 시너지가 나겠죠. 놀라운 스피드를 가진 탱커인 서문엽 씨와 최고의 스피드스타인 나단, 그리고 순간 이동을 가진 백하연 양까지. 이 삼각편대가 이루어지면 얼마나 대단할까요?"
"삼촌, 삼촌! 뭐라고 하는 거야? 나도 좀 알려줘."
모로 형제의 관심에 조바심이 난 백하연이 옆에서 보챘다.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선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도 괜찮지. 생각은 해볼게."
"후후, 좋습니다. 참고로 저희는 무기상을 관뒀지만 여전히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무기 공방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3단 우산처럼 버튼 하나에 펼쳐지는 창도 만들어 드리죠."
"오, 그거 괜찮겠군. 뭐, 공짜로 준다면 사양 안 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건 저희 형제의 팬심이니까요."
모로 형제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슬슬 귀찮아진 서문엽은 그들을 보내 버렸다.
"삼촌, 문어 형제가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알려줘, 좀!"
"자자, 저기서 보드카나 마시며 얘기하자."
"응? 보드카 좋지."
백제호가 협회 관계자 등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 두 사람은 보드카가 따라진 잔이 산더미처럼 쌓인 곳으로 향했다.
손님 중에 초인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독한 보드카였다.
"삼촌, 잘 봐라."
백하연은 자랑하듯이 손목을 보여주었다.
손목에는 가느다란 가죽 끈을 칭칭 감아놓고 있었다. 빨간색으로 곱게 염색되어서 장식을 겸한 듯했다.
가죽 끈이 스르륵 풀리더니 보드카 잔 6개를 동시에 휘감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주로 채찍에 쓰는 로프 초능력을 활용한 것이었다.
"오, 실생활에 쓰기 좋구나."
"흐흐, 그렇지? 나 머리 좋지 않아?"
"그러네. 공부 머리는 돌인데."
"아으, 화낸다?"
서문엽은 술을 마시며 모로 형제에게 들은 제안을 들려주었다.
백하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삼촌을 원하니까 날 미끼로 쓴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일단 너에 대해 분석한 평가는 아주 정확했어."
"삼촌이 덤으로 오지 않으면 난 프르미에 리그(Premier ligue)에 진출해도 2군 벤치 워머 신세일 거야."
프랑스의 프르미에 리그는 각국 배틀필드 리그 중 실력으로 따졌을 때 첫 번째로 손꼽힌다.
돈은 미국의 메이저리그가 더 벌지만, 프르미에 리그는 배틀필드 선수들의 꿈의 무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기에 출전을 못 하고 벤치에만 앉아 있으면 의미가 없었다.
"글쎄, 난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일단 이 나라는 좋은 코치가 없어. 내가 직접 국가 대표라는 애들을 쥐어 패고서 내린 판단이야."
"그건 별수 없어. 지저 전쟁 시절 경험을 쌓은 베테랑 초인들은 다 해외로 떠나 버렸는걸. 그러니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지."
당시 초인들의 배틀필드 참여를 금지시킨 정부의 판단이 치명타였다.
해외에서 배틀필드에 출전하면 범죄자가 되므로, 아예 해외 진출과 함께 한국 국적을 버려 버리는 사태가 대거 발생한 것이다.
배틀필드가 초인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보수적 판단이 부른 참사로, 당시 대통령의 권위가 지지율과 함께 땅에 떨어져 버린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 파리 뤼미에르 BC는 최고의 코치진이 널 케어해 줄 거야. 날 봐서라도 모로 형제가 네게 신경 써주기도 할 테고."
"흐응, 그건 좋은데."
"그리고 벤치 워머는 되지만, 빡세게 배우면 늦어도 반년 뒤에는 출전 기회가 생길 거야."
"내가 거기서 그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
"삼촌 믿어. 삼촌 안목은 틀린 적이 없잖니. 공부만 한 샌님이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네 아빠를 알아본 게 나야."
그 말에 백하연은 용기를 얻었다.
이미 서문엽의 조언으로 근접 딜러가 되면서 성과도 얻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었다.
"알았어, 삼촌 말대로 할게."
"그래도 불안하다면 내가 좋은 에이전트를 소개해 줄까? 유럽에서 초인들의 멘토였던 좋은 인격자야."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포켓에서 제이크 랜드의 명함을 꺼내 보였다. 백하연도 활짝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기, 말씀은 다 나누셨습니까?"
웬 한국인 중년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슈트부터 손목시계까지 모두 고급이라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로 보였는데, 그런 것치고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누굽니까?"
서문엽이 물었다.
중년 남성은 명함을 내밀었다.
"청와대 비서관 양민양입니다."
청와대라는 말에 서문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치인에 대한 편견이 많아 표정이 좋을 수 없었다.
"청와대에서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예, 서문엽 씨께 좋은 소식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상대가 대통령도 하찮게 보는 서문엽이기에 양민양 비서관은 몹시 공손했다.
"뭔데요?"
서문엽은 시큰둥했다. 상대가 청와대면 유독 더 거만해지는 습관이 생겼다.
"초인 공훈자 제도를 아십니까?"
"음? 그거 지저 전쟁 끝나면 공을 세운 초인에게 연금을 지급하겠다고 공수표 남발한 거 아닌가?"
초인들의 던전 공략을 독려하기 위해 정치권에서 언급된 제도였다.
지저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초인들은 다들 공수표라고 생각했었다.
양민양 비서관이 말했다.
"공수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17년간 시행되어 왔죠."
"그래요?"
"그중 1급에 서문엽 씨와 백제호 씨가 선정됐고, 백제호 씨는 지금껏 매달 1,200만 원씩 연금을 받아오셨죠."
물론 이미 UN이 7영웅에게 엄청난 보상금을 지급했고, 사업가로 성공한 백제호에게는 큰 의미 없는 돈이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서문엽의 눈이 커졌다.
양민양 비서관이 말을 이었다.
"서문엽 씨께서 수령하지 않으신 17년 치 연금이 쌓여 있습니다."
사망했다면 지급되지 않는 연금.
하지만 살아 돌아왔으니 다시 지급 대상자가 된 것이다.
"···그래요?"
굳었던 표정이 다소 부드럽게 풀린 서문엽.
"정확히 25억 6천8백만 원입니다. 비과세죠."
세계 배틀필드 협회에서 지급한 보상금 200만 달러에 이어 또다시 터진 돈 복이었다.
########################## 파티(3) ##########################
세계 협회 관계자, 한국 협회 관계자, 기타 배틀필드 스포츠 관계자 등등.
서문엽은 다양한 사람과 만나 짤막하게나마 인사를 나눠야 했다.
그중에는 미국을 주름잡는 에이전트이자 한국 초인 유출 사태의 주범이었던 조 펠만도 있었다.
조 펠만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을 붙여봤지만, 애석하게도 사람을 많이 상대해서 피곤해진 서문엽에게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해 낙담했다.
그래도 조 펠만은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신에게 이 세상은 아직 낯설겠죠. 세계를 구하고 돌아온 대가가 이거라니 맥이 빠질 테고, 인생의 활력소였던 지저 문명도 이제 없죠. 하지만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들입니다."
"문제?"
"예, 시간이 지나면 정든 장소도, 사람도 다시 생기고, 새로운 삶의 목표도 생길 겁니다. 평화로운 세상에도 적응이 되실 테고요. 그러니 마음을 무기력하게 내팽개치지 마십시오. 제 말대로 된다면, 그땐 이것도 기억해 주세요."
그러면서 명함을 주고는 작별과 함께 뒤돌았다.
그러나 뒤도는 순간 조 펠만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방금 나 영문 모를 헛소리를 늘어놓지 않았어?"
"그렇게 보이긴 했죠."
옆에서 비서가 평했다.
"끄응, 천하의 내가 긴장했나 봐. 역대 최고의 다이아몬드를 눈앞에 둬서 그랬나."
"그래도 오늘 본 수많은 사람 중에서 궤변을 늘어놓은 덩치 큰 흑인 놈은 깊은 인상을 남겼겠죠."
"그,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게 후회되시면 제이크 랜드처럼 쿨하게 접근하지 그랬어요. 늘 그를 의식하면서 왜 따라하진 못해요?"
"제길, 그 작자는 베테랑 초인이고 난 일반인이야. 쉽게 동질감을 얻을 수 있는 그 양반에 비해서 난 아무것도 없다고."
"하긴, 제이크 랜드는 서문엽과 인연이 있었으니 접근하기 쉬웠겠죠. 하지만 언제나 한발 늦은 것에 대한 변명은 못 되죠."
"시끄러. 그 양반이랑 그만 비교해."
조 펠만은 구시렁거리며 비서와 함께 떠났다.
서문엽은 받은 명함을 보다가 조 펠만의 뒷모습을 흘깃 보았다.
"삼촌, 조 펠만한테도 러브콜을 받았네?"
"참 이상한 새끼였어."
"메이저리그의 거물 에이전트야. 별명은 돈 귀신."
"그런 것치고는 돈 얘기 하나 없이 추상적인 말만 하고 가던데."
"그래? 옛날에 울 아빠를 영입하려 했었을 땐 그렇지 않았다던데."
"그래도 의외로 공감 가는 말도 많았어."
서문엽의 기억 속에 조 펠만이 새겨졌다.
확실히 일류 에이전트 같았다.
17년 만에 돌아온 후로 자신의 기분을 이렇게 잘 이해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시간이 늦었을 때, 파티의 메인이벤트가 열렸다.
자선 경기 및 오늘 파티로 모인 기부금을 전달하는 행사였다.
상당한 거액이 전달되었고, 세이브 더 칠드런의 관계자가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행사를 진행하던 MC가 서문엽을 가리켰다.
"자, 그럼 이 자리에서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나이가 오늘의 축사를 하겠습니다. 바로 서문엽 씨!"
눈이 휘둥그레진 서문엽은 지목을 당하자 일단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서문엽이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제가 여기서 기부를 가장 많이 했다고요? 제 전 재산이 어느 정도였던가요?"
"1조 7천4백억 원."
박진태 협회장이 대답해 주었다.
재산에 대해 신경 써본 적이 없었던 서문엽은 생각보다 큰 금액에 깜짝 놀랐다.
물론 인류의 존망이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적은 재산이었다.
"와, 그렇게나? 그렇게 많은 줄 알았으면 재산 환수를 좀 할 걸 그랬나."
사람들이 하하 웃었다.
서문엽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그 재산이 모두 기부된 지 17년이 지났단 뜻이네요. 전 최후의 던전에서 얼마 전에 돌아왔을 뿐인데, 너무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다."
잃어버린 17년.
자신만 제외하고 모든 것이 달라진 세상.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서문엽 외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제가 세상을 구했다고들 말하죠. 근데 별로 숭고한 마음 같은 건 없었습니다. 난 그냥 던전이 좋았을 뿐이니까요. 지저 문명이 무너지지 않고 계속 내 상대로 남아주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습니다."
서문엽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구했다고 칭찬해 줘도 별로 와닿지 않는 소리예요. 별로 뿌듯하지도 않고, 그냥 즐거운 놀이가 끝난 기분입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는 뿌듯하네요. 그 돈으로 도움받은 어려운 아이들이 이제는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제 재산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세상을 구한 것보다 그게 더 보람찹니다. 다시는 저처럼 불행한 아이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박수가 쏟아졌다.
단상에서 내려오자 박진태 협회장이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겨우 1조 7천억으로 자신의 망나니 행각을 무마시키겠다고?"
"오해하지 마요. 사실 전 천성은 착한데 불운한 유년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요."
"그런 핑계 좋지 않아. 내가 볼 때 넌 타고난 문제아였어."
"아, 그러고 보니 아저씨도 제 인격 형성에 일조하셨던 분이군요? 그땐 아저씨도 엄청난 미친놈이었는데 감투 썼다고 점잖은 척하는 게 패고 싶네요."
"어른이자 은인에게 패고 싶다니, 양식 있는 언행을 하지?"
"됐어요, 용건 없으면 저리 사라져요."
"때마침 용건이 두 가지 있다."
"두 가지? 하나는 즉석에서 지어낸 것 같은데?"
"눈치 참 빠르군. 하나는 질책이야. 선배가 되어서 명색이 국가 대표인 애들을 꼭 그렇게 무참히 박살 내야 했나?"
"어이가 없군. 협회장이 되어서 명색이 국가 대표인 애들을 꼭 그따위로 키워야 했나요?"
박진태 협회장이 노려보자 서문엽은 꼬나보면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마주 봤다.
"덕분에 한국 배틀필드의 흥행에 도움이 될 줄 알았던 자선 경기가 독이 됐어. 이제 KB리그는 어차피 서문엽에게 올킬 당하는 애들 놀이터가 되었다고."
"그전에도 A매치만 하면 죽 쑤는 애들 리그였잖아요. 생각해 보니 이 양반 협회장 되고서 쫄딱 말아먹었네?"
"마, 말아먹다니!"
뜨끔한 박진태 협회장이 당황했다.
결정적으로는 당시 정부의 실책이지만, 그 뒤에 배틀필드가 출범하고서 협회장이 된 그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없는 예산에 여기까지 끌고 온 게 누군데!"
박진태 협회장은 지원을 안 하는 정부를 탓했다.
사실 더 이상의 초인 유출을 막기 위해 마지못해 배틀필드 리그를 발족했을 뿐, 정부는 여전히 못 미더워했다.
정치인 대부분이 일반인이기 때문에 초인을 무슨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 취급을 한 것이다.
"그런 정부 태도에는 자네도 크게 한몫했어."
"뭐래, 이 아저씨?"
"청와대를 무슨 동네북처럼 여겼잖아! 덕분에 초인에 대한 정치권의 인식도 딱 자네가 됐어."
"편견 쩌네. 초인들이 다 망나니인 줄 아나!"
서문엽도 화를 냈다.
박진태 협회장은 그런 그를 빤히 봤다.
"그러고 보면 자기 스스로 망나니임을 부인한 적은 없군?"
"원래 스포츠 스타들도 사고 치고 그러잖아요. 근데도 다들 귀여워하던데."
"사고 치는 초인이 잘도 귀엽겠군. 우리들 초인 때문에 불안해하는 민간인이 많으니 제발 자중 좀 해. 원래 스스로 자기 성격 더럽다고 말하는 놈이 제일 재수 없는 법이야."
"흥, 내가 사고를 치면 또 얼마나 쳤다고."
서문엽은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두 번째 용건을 말하지. 기술 코치로 대표 팀에 들어와 주겠나? 선수가 되어달라고까지는 말 안 하지."
"그건 좀 봐서요."
"또 왜? 그 정도는 돈만 주면 할 수 있다며?"
"돈을 최대한 뜯어야죠. 일단 제호한테 지시한 게 있으니 결과를 봐서 결정하세요."
"끄응, 우린 돈이 없어."
"보아하니 이번 정부는 나한테 잘하려는 것 같던데요? 초인 공훈자 연금도 받았다고요. 흐름 타서 배틀필드 쪽에도 좋은 방향으로 선회하겠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정부 지원을 더 받는다면 해외에서 일류 코치들을 영입해 한국 배틀필드를 발전시킬 초석을 마련하고 싶은 박진태 협회장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세 사람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백제호가 물었다.
"오늘 어땠어?"
"괜찮았지."
"마냥 부정적이진 않네."
"나 돈 벌었잖아. 세계 협회에서 나온 보상금까지 한 47억쯤 되려나. 이 돈 굴려서 재테크나 해야겠다."
"재테크는 무슨. 돈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무슨 해본 적도 없는 재테크야?"
"얘가 날 무시하네. 그동안 신경 안 썼을 뿐이지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또 잘해. 이 돈 투자해서 큰돈을 벌어주겠어."
"어디다 투자하게?"
"오늘 파티에서 보니까 배틀필드로 돈 번 애들이 꽤 많더라."
"구단에 투자하려고?"
"심심풀이 삼아 해볼까 싶어. 한국에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배틀필드 클럽이 있냐?"
그랬다.
서문엽은 배틀필드 클럽을 하나 인수해서 돈을 벌 궁리를 했다.
운영은 경영자에게 맡기고, 분석안으로 유망주만 잘 찾아 넣으면 큰돈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이에 백제호가 말했다.
"KB-1 리그는 꼴지 구단도 200억은 넘는다."
"뭐 그렇게 비싸?"
"아무리 우리나라 배틀필드 수준이 낮아도, 그래도 인기 스포츠야."
"선수들은 허접한 주제에 더럽게 비싸네. 그보다 하위 리그의 구단은 어때?"
"어디 보자. KB-2 리그도 아슬아슬하겠는데. 워낙 운영비가 많이 나가서 네가 감당하기 어려울걸?"
"삼촌, 차라리 KB7 1부 리그 팀을 사는 게 나을 거야."
백하연이 끼어들었다.
서문엽은 의아해했다.
"KB7은 뭐야?"
"7명이서 뛰는 리그야. 7영웅도 그렇고 원래 옛날에는 던전 공략 멤버가 보통 7인이었잖아. 그래서 하위 리그이긴 하지만 KB-2보다 마니아층이 많아."
듣자 하니 한국 배틀필드는 총 6개의 리그가 있었다.
KB-1.
KB-2.
KB7 1부 리그.
KB7 2부 리그.
KB7 아마추어 리그.
KB7 유소년 리그.
그중 KB7 1부 리그는 KB-2보다 실력은 처지지만, 인기는 더 높았다.
11명은 너무 많고 7인이 딱 보기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팬 층도 두터웠기 때문이다.
11인은 인원이 많아서 2, 3개로 조를 나눠서 사냥하기 때문에 정신 사나웠다.
반면 7인은 나누기가 애매한 인원이라 늘 함께 다닌다. 그래서 경기를 보기도 더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지저 전쟁 시대 전통의 7인 구성이라는 오리지널리티도 있었고 말이다.
"흐음, 하나 사볼까?"
서문엽은 눈을 빛냈다.
그 정도는 심심풀이 삼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손님(1) ##########################
집에 돌아오니 한승희가 반겼다.
"어서 오세요. 엽이 씨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 손님이요?"
서문엽이 의아해했다.
"네, 지금 식사 중이에요."
"희한하네. 나한테 용건이 있으면 파티에서 보면 되지 왜 여길 찾아오지?"
"파티가 싫은가 봐요. 자, 아무튼 만나봐요. 오랜만에 영어 쓰느라 혼났네."
손님이란 사람이 외국인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거실에 들어와 보니 손님은 두 사람이었다.
하나는 관능미 넘치는 젊은 동양인 여자.
또 하나는 거대한 근육질 백인이었다.
여자는 나른하게 소파에 파묻힌 채 TV를 보고 있었는데, 짧은 스커트 아래로 하얀 맨다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1인용 소파에 혼자 앉은 거구의 백인은 한승희가 내준 듯한 과자와 맥주를 신나게 먹고 있었다.
"어우 야, 얘들은 또 뭐야?"
서문엽이 가장 보기 꺼렸던 두 사람이었다.
바로 슈란과 제럴드 워커 말이다.
서문엽은 당황해서 한승희에게 물었다.
"얘들 왜 여기 있어요?"
"몰라요. 파티에 가보라고 하니까 슈란은 번잡한 게 싫다고 하고, 제럴드는 그럴 기분이 아니라네요."
"삼촌, 둘 다 삼촌 죽이러 온 것 같은데?"
백하연이 소곤소곤 말했다.
"다 네 업보다."
백제호의 짧은 평이었다.
"어휴, 오늘은 이제 그만 싸우고 싶은데."
배틀필드로 신나게 날뛰다 온 서문엽은 폭력성이 다소 해소된 상태였다.
파티에서도 좋은 소식을 들어 기분이 좋아진 상태.
그런데 인류 중 가장 강력한 폭력을 가진 두 사람이 찾아왔으니 달갑지가 않았다.
슈란과 제럴드도 곧 서문엽을 보았다.
슈란은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불길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슈란은 당연하지만 몇 달 전과는 인상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외모는 17세에 불과했던 전보다 훨씬 성숙해졌고 여성미가 넘쳤다.
최후의 던전에서 함께하던 때보다는 얼굴에 여유가 보였다.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위험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전에는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는데.'
지금 그녀의 나이는 34세.
그때의 2배를 살며 많은 일을 겪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았고, 눈빛은 장난스러웠다.
저러다가 대뜸 소멸 광선을 쏠지도 모르는 노릇이라 더 무섭다.
-대상: 슈란(인간)
-근력 50/53
-민첩성 71/71
-속도 67/67
-지구력 60/60
-정신력 40/40
-기술 59/59
-오러 100/100
-초능력: 소멸 광선, 위치 파악
-소멸 광선(초능력): 오러를 모든 것을 파괴하는 광선으로 치환하여 발사한다.
-위치 파악(초능력): 반경 3㎞ 이내의 지정한 타깃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뭐, 뭐야?'
분석안으로 슈란을 본 서문엽은 깜짝 놀랐다.
근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한계까지 개발되어 있었다.
최후의 던전 때도 저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거기다가 '위치 파악'이라는 새로운 초능력은 서문엽이 본 적이 없었다.
정신력이 40/40까지 전부 채워진 것도 주목할 만했다.
'저년이 전보다 더 강해졌잖아?'
소멸 광선은 당연하지만 웬만한 벽도 뚫어버린다.
위치 파악과 함께 사용된다면, 타깃이 어디에 숨어 있어도 소멸 광선으로 쏴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평화로운 시기에 배틀필드도 안 하는 년이 왜 저렇게 강해졌지? 하여간 덤벼만 봐라. 옛정이고 뭐고 확 그냥.'
어쨌든 서문엽도 불사 능력을 가진 괴물이었다.
만일의 경우에도 죽을 일은 없다는 사실에 배짱이 생겼다. 사실 누구에게 겁먹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제럴드 워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2.2미터짜리 거구가 몸을 일으키자 철탑이 하나 세워진 듯한 위압감이 들었다.
"기다렸다."
제럴드 워커가 툭 내뱉었다.
서문엽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길 왜 와?"
"초대를 받았으니까."
누가?
라고 물으려다가 서문엽은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붙어보고 싶으면 배틀필드는 됐고, 그냥 찾아오라 해요."
"뒤뜰에 묻어버리게."
"아하, 내가 초대한 게 맞네."
"아니 다행이군. 그렇게 초대하면 내가 겁먹고 못 찾아올 사람으로 보였나?"
"그런다고 누가 진짜 찾아 오냐? 할 일 없어?"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형이 오늘 기분이 좋아요. 그러니까 그냥 가라."
"······."
"송장 치우기 전에, 새꺄."
마지막 말은 안 붙이는 게 나았으리라.
그런데 제럴드 워커는 벌컥 성질내지는 않고, 대신 서문엽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가 듣던 것과 조금 인상이 다르다 싶었다.
-대상: 제럴드 워커(인간)
-근력 100/100
-민첩성 81/96
-속도 58/62
-지구력 100/100
-정신력 87/97
-기술 80/93
-오러 88/88
-초능력: 육체 강화, 불굴
-육체 강화(초능력): 근력, 민첩성, 속도, 지구력을 30초간 20% 강화한다.
-불굴(초능력): 지쳤을 때 지구력을 50% 회복한다.
'어 씨발, 뭐야, 이 괴물은.'
괴물이다.
힘세고 오래가는 괴물이 나타났다.
서문엽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백하연이 백제호에게 소곤거렸다.
"방금 삼촌 쫄았지?"
"살짝?"
등 뒤에서 부녀가 나누는 대화가 살짝 거슬렸지만,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의 능력치에 정신이 팔렸다.
근력과 지구력이 100·100이라니.
그야말로 태어나자마자 '엄마 나 탱커 하게 방패 사 줘요!'라고 소리쳤을 법한 능력치였다.
거기에 육체 강화로 순간적으로 괴력을 더 낼 수 있고, 궁지에 몰려도 불굴로 더 버틸 수 있다.
17년 전에 이런 놈이 있었으면 당장 최후의 던전에 데려갔을 터였다.
아직 성장할 여지가 더 남아 있다는 점도 놀랍고, 정신력이 87/97인 게 또 의외였다.
쉽게 발끈하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대외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뚝심 있는 녀석인 것이다.
험악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백제호와 백하연은 긴장했고, 슈란은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한승희는 관심이 없는지 부엌으로 향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지."
제럴드 워커가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건 네 얼굴이고."
깐족거리는 서문엽을 무시하며 제럴드 워커가 계속 말했다.
"듣자하니 죽지를 않는다지? 또한 면책권이 있어서 죄를 짓고 다녀도 처벌을 안 받는다고 하고."
"맞아."
"그렇다면 내가 당신을 죽여도 죽지 않으니 괜찮고, 당신이 날 죽여도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럴드 워커의 눈빛이 비로소 흉흉하게 변했다.
"줄곧 한판 붙어보고 싶었지. 최강의 초인이라 불렸던 남자는 어느 정도인지 말이야."
"그래? 근데 미안한데 말이야, 일단 톱3인가 하는 애들부터 이기고 오지 그래? 사천왕 건너뛰고 마왕부터 찾으면 스토리가 성립 안 되잖아."
"톱3고 나발이고, 그놈들은 전부 겁쟁이다!"
제럴드 워커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식들은 쥐새끼처럼 피해 다니지 나와 정면 대결을 할 생각을 못해."
'당연하지. 누가 한가하게 너랑 드잡이를 하고 앉아 있겠니?'
근력과 지구력 100·100에 육체 강화, 불굴까지 갖춘 미친 탱커였다.
덩치도 산만해서 공격 시 상대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유리한 구도를 가지며, 자기 덩치만 한 사각방패까지 들었다.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이런 놈과 정면 대결할 시간에 다른 놈부터 처리할 터였다.
아마 제럴드 워커는 그런 팀플레이 측면에서 톱3에 들 만한 가치가 부족하다고 평가를 받은 듯했다.
일대일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직 개발이 덜된 능력치를 한계까지 키우면 평가가 달라질 것 같은데.'
민첩성과 기술만 한계인 96, 93으로 성장해도 느린 발을 커버하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파악하고 장악하는 포지셔닝도 보강하면 완벽해진다.
서문엽이 감독이라면 이런 녀석을 기꺼이 탱커로 쓰고 싶을 터였다.
"그 자식들은 겁쟁이라 날 피해 다니지만, 당신이라면 나와 한판 붙어줄 것 같았다. 배틀필드에서 붙고 싶었지만, 뭐 현실도 상관없지. 긴장감도 있고."
"7영웅은 거품이라고 누군가가 그러던데 싸울 가치나 있나 몰라."
"그건 사과하지."
"잉?"
놀란 서문엽에게 제럴드 워커가 말했다.
"오늘 경기는 봤다. 한국 대표 팀이 약하지만 그렇다 해도 훌륭했어. 별것 아니었다면 그냥 미국으로 돌아갔을 거다."
"뭐 그렇게 순순히 사과를 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난 당신과 한판 붙고 싶을 뿐이야."
"와, 배틀 만화 같다."
조카 녀석이 또 나직이 속삭인다.
살짝 혈압이 오른 서문엽은 문득 슈란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넌? 너도 나 죽이러 왔냐?"
"오랜만이야."
"응? 어, 그래. 오랜만에 나 죽이러 왔니?"
"아니. 불사신이란 얘기를 듣고 한 번쯤 죽여도 티 안 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음, 그건 그렇지."
곰곰이 생각해 본 서문엽이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근데 내 덕에 네가 살아 돌아갔으니 옛 원한은 그냥 퉁치자."
슈란은 미소를 지었다.
"원한 같은 건 없지만, 내게 심하게 대했던 건 그걸로 용서할게."
뜻밖에도 슈란은 원한이 별로 없어 보였다.
오히려 눈빛은 서문엽에게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뭐야, 못 본 사이에 철들었네. 그럼 여긴 왜 왔어?"
"파티에서 인사하려고 했는데, 저 덩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어디로 가더라. 혼자 다니는 것도 수상하고, 아마 여기로 올 것 같기에 흥미진진해서 따라와 봤지."
아마 위치 파악을 이용해 미행했으리라.
"오케이, 그럼 용건은 싸움 구경이군. 자, 덩치야!"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를 불렀다.
"뒤뜰로 따라와."
제럴드 워커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섰다.
"제호야, 무기 좀 갖고 와라."
"조심해."
"나 안 죽어."
"안 죽이게 조심하라고! 무슨 문제를 일으키려고 그래?"
일행은 우르르 뒤뜰로 향했다.
제호는 무기와 방어구를 종류별로 가져와 나눠주었다.
배틀필드 국가 대표 부녀의 집답게 온갖 무기와 방어구가 종류별로 있었다.
두 사람이 묵묵히 무장을 하는 동안, 백제호는 슈란과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군."
"그러게. 경기는 잘 봤어."
"많이 녹슬었지."
"그런 것치곤 제법이었어."
"그보다 적당한 순간에 말리려면 나도 무장을 해야겠는걸."
백제호는 피차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 전에 순간 이동으로 끼어들어 말릴 생각이었다.
슈란이 말했다.
"그 나이에 그러다 뼈도 못 추려. 내가 말려줄게."
"그럼 부탁하지."
슈란이 소멸 광선을 쓰기 위해 막대한 오러를 집중시키면,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위험을 감지하고 싸움을 중단할 터였다.
########################## 손님(2) ##########################
준비를 마친 서문엽은 물끄러미 제럴드 워커를 쳐다봤다.
능력치는 다시 봐도 괴물.
근력과 지구력이 100·100인데 민첩성까지 80 이하가 아니다.
민첩성을 한계치인 96까지 찍고, 현재 80인 기술도 93까지 다 찍으면 그야말로 괴물이 될 터.
속도가 50대 후반에 불과해서 기동성이 없지만, 저 덩치로 재빠르면 그거야말로 코미디였다.
그야말로 죽어라 때려도 안 쓰러지고 버티는 정통파 탱커.
'솔직히 저런 놈은 상대 안 하는 게 맞지.'
얼마 전에 있었던 A매치 미국전에서도, 한국 팀이 전원 제럴드 워커를 집중 공격했는데도 순삭당하지 않고 질기게 버티지 않았던가.
사실 서문엽이 가장 꺼리는 타입이었다.
날렵하고 테크니컬한 상대는 서문엽의 먹잇감.
반대로 저렇게 디펜스와 파워로 똘똘 뭉친 상대는 껄끄러웠다.
아무리 후려 패도 쉽게 쓰러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민첩성이나 오러량이 부족하면 공략해 볼 만한데, 제럴드 워커는 월드 클래스답게 그런 약점도 없었다.
차라리 백하연의 순간 이동과 로프 등의 변칙적인 수법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빈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아, 하루 종일 싸우겠네.'
서문엽은 입이 방정이라고 반성했다.
차라리 배틀필드였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일대일은 위협적인 상대였다.
제럴드 워커는 자기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는 거대한 사각 방패와 핼버드를 들었다.
그런데 성벽 같은 사각 방패를 보고, 질려 있던 서문엽의 눈빛이 변했다.
'약점이 없는 건 아니군?'
방패와 창을 든 서문엽은 제럴드 워커와 대치했다.
잠시 눈을 마주 보다가, 서문엽이 먼저 움직였다.
촥!
섬전 같은 찌르기.
제럴드 워커는 깜짝 놀라 머리를 뒤로 젖혀 피해야 했다.
순발력에서 밀려 방패로 막을 타이밍을 놓친 것.
첫 수로 기선 제압한 서문엽은 씨익 웃어 보였다.
"정신 차려, 인마. 네 생각보다 반 박자 더 빨라."
조롱 같지만 실제적인 충고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제럴드 워커는 서문엽의 동일한 지적에 가슴이 철렁했다.
겉보기와 달리 서문엽에게서 일가(一家)를 이룬 마스터 같은 깊이가 느껴졌다.
'좋아, 이런 걸 원했다.'
제럴드 워커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대결에 임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서문엽이 다시 움직였다.
방금 전처럼 갑작스러운 찌르기였다.
텅!
하지만 이번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막아낸 제럴드 워커.
서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준비됐군."
"얼마든지 덤벼."
"그러지."
서문엽이 다시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눈빛 페인팅.
다시 왼쪽으로 상체 페인팅.
이윽고.
팟!
오른쪽으로 뛰어올라 창을 찔렀다.
터엉!
제럴드 워커는 한 걸음 물러서며 방패로 안정적으로 막아냈다.
'역시 조금도 안 흔들리네.'
정신력이 85 이상인 경우 페인팅에 웬만하면 잘 안 걸려든다.
멘탈이 단단해 상대의 심리전에 잘 안 말려들기 때문.
이럴 땐, 상대를 당황시키고 페인팅을 걸어야 걸려든다.
본래 평정심을 유지할 때는 빈틈이 없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리면 상대의 속임수에 넘어갈 빈틈이 생긴다.
그 심리적 간극(間隙)을 파고들 수 있으면 일류, 심리적 간극을 만들어낼 줄 알면 초일류다.
초일류인 서문엽은 심리적인 틈을 만들어낼 노림수가 있었다.
서문엽은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방향을 교란시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휙.
서문엽은 몸을 웅크리며 제럴드 워커의 사각 방패 뒤로 숨어들었다.
제럴드 워커는 자신의 사각 방패 때문에 시야가 막혀 순간적으로 서문엽을 놓쳤다.
급히 사각 방패를 옆으로 치웠을 때, 서문엽의 오른손에는 창이 없었다.
창은 회오리 같은 난폭한 테일링을 일으키며 날아오고 있었다.
'······!'
머리로 날아오는 줄 알고 다급히 방패를 들었다.
하지만 서문엽 특유의 회전력 실어 던지기였다.
머리로 가던 창의 궤도가 휘어져 옆구리로 향했다.
제럴드 워커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탓에 그 창의 변화에 속았다.
좌측 상단에서 우측 하단으로 움직이는 엄청난 변화폭은 사각 방패로도 커버하지 못했다.
파앗!
창은 아슬아슬하게 옆구리를 스쳐지나갔다.
"나의 승리."
서문엽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빗나간 걸로 보이는데?"
"당연히 마음먹었으면 네 옆구리를 맞췄지. 봐주니까 지랄이야."
"난 죽기 전에는 그런 거 인정 안 한다."
"얼씨구?"
낯빛 하나 안 바뀌고 뻔뻔하게 구는 제럴드 워커.
지기 싫은 것보다는 이렇게 허망하게 대결을 끝내기가 싫은 거였다.
서문엽은 피식 웃었다.
"징그럽게 생긴 새끼가 은근 귀엽네."
"······."
"인마, 덩칫값 하지 말고 방패를 작은 걸로 바꿔."
"뭐라고?"
"형이 너 마음에 들어서 충고해 주는 거야. 방패 때문에 시야가 방해되잖아."
"···그랬나?"
"너 어릴 때 시야가 좁다는 소리 들었지?"
"······!"
"그래서 싸우는 중간중간에 주위를 살피려고 방어에 용이한 졸라 큰 방패를 골랐을 거야."
완전히 정곡이었다.
좁은 시야.
팀플레이.
지금도 진저리 날 정도로 받는 지적이었다.
"근데 그건 임시방편이지. 형처럼 시야의 사각을 이용할 줄 아는 초고수를 만나면 역효과거든. 그러니까 방패 작은 걸로 바꿔봐."
"진심이냐?"
"내가 널 왜 속여? 안 그래도 넌 나한테 안 돼, 새꺄!"
제럴드 워커는 잠시 고민했다.
그도 월드 클래스로 남의 충고에 스타일을 바꿀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문엽을 빤히 쳐다보던 제럴드 워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시험해 보지."
"싫으면 말든가."
굳이 이렇게 오지랖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싸워보니 자기 능력을 제대로 활용 못 하고 죽 쑤는 게 어이가 없어서 훈수를 좀 뒀다.
"저걸 가르쳐 주네."
지켜보던 백제호는 아까워했다.
백제호도 같은 방식의 공략법을 떠올렸던 참이었다.
하지만 서문엽은 그 부분을 지적해서 제럴드 워커의 단점을 개선시키려 했다.
저게 결투를 벌이다 말고 뭐 하는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제럴드 워커는 사각 방패를 버리고 상대적으로 작은 카이트 실드를 들었다.
그것도 표준형보다는 더 큰 사이즈였지만 아까의 사각 방패보다는 작았다.
"좋아, 다시 간다."
공방이 또 펼쳐졌다.
확실히 아까 전보다는 반응이 민첩해진 제럴드 워커.
보다 작아진 만큼 방패의 움직임이 더 역동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제럴드 워커의 공격도 더 활발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문엽의 눈이 매섭게 빛나더니.
휘릭!
창을 거꾸로 고쳐 쥐고 힘껏 뻗었다.
창 뒤쪽 이중 날로 핼버드를 집어 옆으로 젖히고, 그대로 뛰어올라 방패로 후려갈겼다.
콰앙!
급히 카이트 실드를 들어 막아냈지만, 자세가 안정적이지 않았던 탓에 뒤로 밀려났다.
따라붙으며 계속 맹공을 펼치는 서문엽.
카이트 실드를 피해 좌우로 움직이며 찌르기, 찌르기!
따라가기 급급해진 나머지, 제럴드 워커의 템포가 꼬였다.
그 순간, 서문엽은 좌측으로 뛰어오르며 찌르기를 펼쳤다.
촤악!
아슬아슬하게 머리 옆을 빗나가는 창.
제럴드 워커는 진땀을 뺐다.
"인마, 뒤로 피할 때도 방패는 앞으로 내밀어서 각도를 좁혀야지!"
"······!"
"그 큰 방패였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근데 그래서 네 방패 테크닉이 답보 상태였던 거야, 알간?"
제럴드 워커는 표정이 멍해졌다.
서문엽의 말은 엄연히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자. 방패 컨트롤에 유의하면서, 다시!"
어느새 과외로 변한 대결.
서문엽도 서문엽이었지만, 순순히 따르는 제럴드 워커도 희한했다.
계속된 지적에 제럴드 워커는 확연히 나아진 전투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서문엽은 여전히 그런 제럴드 워커를 몰아붙였다.
엄청난 덩치와 힘을 가진 제럴드 워커를 상대로는 치고 빠지며 상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서문엽은 지근거리에 붙어서 맞붙고 있었다.
그것도 비교적 수월하게 말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백제호는 제럴드 워커를 상대로 저렇게 몸싸움에서 안 밀리고 잘 싸우는 선수를 처음 봤다.
이는 기술 100/100에서 우러나오는 노하우였다.
자세를 낮춰서 버텨내는 테크닉을 펼치며 몸싸움을 커버하는 것!
거기다가 창을 짧게 쥐었다, 길게 쥐었다가 자유자재로 리치를 조절하는 수법까지.
그 탓에 제럴드 워커는 어려움을 느꼈다.
'지금껏 이런 상대는 없었는데!'
자신을 상대로 도망 다니는 녀석들만 봤다.
이렇게 붙어서 안 밀리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팟!
순간적으로 서문엽이 돌연 몸을 회전시켰다.
'뭐지?'
제럴드 워커는 적을 앞에 두고 빙글 도는 서문엽이 미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촤악!
"큭!"
창을 어깨에 걸쳐 뒤로 찌르는 테크닉!
불의의 일격에 제럴드 워커는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쳤다.
"으라!"
서문엽은 연이어 기합과 함께 찌르기를 펼쳤다.
제럴드 워커가 카이트 실드를 들어 막으려는 순간,
찌르기를 멈추고 대신 발로 힘껏 걷어찼다.
퍼엉!
"컥!"
체중 실린 발차기에 폼이 무너진 제럴드 워커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서문엽이 마무리를 하러 다가오자 제럴드 워커는 체면 불구하고 땅을 뒹굴어서 간신히 빠져나갔다.
그 같은 공방이 계속됐다.
테크닉으로 자신의 체력은 아끼면서 상대의 체력을 소모시키는 서문엽.
그 의도대로 체력이 소모됐지만, 그때마다 불굴로 지구력을 회복하며 버티는 제럴드 워커.
질 듯 말 듯하면서도 은근히 버티는 바람에 사투는 어느새 1시간째 흘렀다.
돌연 서문엽이 고개를 저었다.
"야, 이제 안 할래. 힘들어."
그러면서 멋대로 무기를 내던져 버렸다.
이번에는 제럴드 워커도 반박하지 못했다.
'내가 졌다.'
불굴로 회복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용 면에서는 더욱 완패였다.
'그래도 더 싸우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제럴드 워커는 승복하고 역시나 무기를 버렸다.
"오늘은··· 내 판정패로 치지."
판정패도 부질없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오늘 완패했음을 제럴드 워커도 알았다.
"그딴 건 됐고."
서문엽은 승패 따위에는 정말 아무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형한테 잘 배웠으니까 돌아가면 자문료 입금해라."
제럴드 워커는 벙쪘다.
당당히 돈을 요구한 서문엽은 휘적휘적 떠나 버렸다.
지켜보던 백제호, 백하연, 슈란이 왠지 대신 부끄러움을 느꼈다.
***
며칠 후.
팀에 복귀한 제럴드 워커는 연습 시합에서 감독 및 코치진의 호평을 받았다.
사각 방패의 사이즈를 기존보다 작은 것으로 교체했는데, 그 뒤로 플레이가 더 날카롭고 까다로워진 것이었다.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매니저인 존 킴이 칭찬했다.
"정말 잘했어. 부쩍 좋아졌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존 킴은 미국에 이민 온 한국 출신 초인이었다.
7년간 메이저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뒤 에이전트 회사에 입사해 경력을 쌓았고, 현재는 제럴드 워커에게 고용되었다.
에이전트 겸 매니저로서 선수 경험을 살려 때때로 조언도 해주는 좋은 관계에 있었다.
"내 실력이 많이 좋아졌어?"
제럴드 워커가 물었다.
존 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동안의 단점에 돌파구가 생긴 느낌이었어."
"그 개선된 정도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 될까?"
뜬금없는 질문에 존 킴은 고민 끝에 말했다.
"족히 1천만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지. 이대로 가면 다음 재계약 때 그 정도는 충분히 연봉을 올려 받을 수 있을 거야."
"1천만 달러라."
제럴드 워커는 며칠 전 서문엽과의 대결을 떠올렸다.
수준이 달랐다.
힘과 체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접전에서 무참히 밀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같은 탱커로서 존경스러웠다.
"그래, 그 정도 가치는 충분하지."
"하하, 물론이지."
"서문엽에게 1천만 달러를 보내."
"응? 뭐라고?!"
존 킴은 화들짝 놀랐다.
"자문료야."
제럴드 워커는 단호히 대답했다.
또다시 돈 복이 터진 서문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