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재벌들은 용으로 변하고 (1)
영우는 잠결에 생각했다.
6년 전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평생 월급쟁이로 살아선 미래가 없다며 인터넷 방송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실 나도 알았지. 현실 도피를 위한 도박이라는 걸.'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도박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고, 영우는 읊조렸다.
물론 허술하게 시작한 도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영우는 그 대가로 대체 가능한 인력에게 경력 단절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경험하게 됐다.
2년 동안 재취업 지망생으로 살았고, 다음 1년은 급한 대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했다.
알바를 두 개나 구할 수 있던 것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그때로부터 1년이 더 지난 지금은.
"영우야, 대체 뭐 해! 빨리 일어나!"
경북 구미의 공장 기숙사에 누워서 꿈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야! 일어나라고!"
"으음...."
영우가 이 음성의 주인이 주간조 룸메이트라는 걸 깨달은 건, 상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기까지 했을 때였다.
"지금 잘 때가 아니야! 진짜 큰일 났다니까?"
큰일, 이라는 단어가 귀에 확 꽂힌다.
영우는 비로소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일순 온몸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벌떡 일어났다.
"헉! 며… 몇 시예요, 형? 저 오늘 야간인데."
"야, 이 시국에 출근이 중요해?"
"…예?"
생각지도 못한 대사에 영우가 멍한 표정을 짓자, 룸메이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 왔다.
"너, 빨리 오른손 펼쳐 봐. 몇 개나 가졌는지 보게."
"무, 무슨 소리예요, 지금?"
영우는 뒤늦게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기숙사 룸메이트. 그러니까 38세 남성 임봉희의 표정이 너무 밝았던 것이다.
아니, 밝은 걸 넘어서 모종의 희열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얀마, 지금 세상이 완전 뒤집히고 있다고! 재벌이고 뭐고 싹 다 뒈지게 생겼다니까? 이거 꿈은 아니겠지?"
"아까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라는 뒷말은 마저 이을 수 없었다.
이내 영우도 자신의 시야에 걸린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김동호]를 소멸 후보에 올리시겠습니까? 동의한다면 업보(業報) 포인트를 소모해 권리를 행사하십시오.
웬 푸른색 문구가 시야 구석에 걸린 채 서서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이어 그 밑으로 또 다른 문구들이 줄을 이었다.
―[배우-현송애]를 소멸 후보에....
―[연쇄 살인마-김응표]를 소멸 후보에....
―[인터넷 방송인-이호연(푸피)]을 소멸 후보에....
"이, 이게 다 뭐야...?"
영우가 허공에 손을 내밀어 문구를 만지려 하자, 봉희가 그의 손바닥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너 왜 이래?"
"네?"
"너 지금 오른손 좀 봐 봐. 포인트가 3개밖에 없어."
이에 영우는 황급히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 봤다.
그러자 '3'이라는 숫자가 손바닥 위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
꿈인가? 아니 그렇게 여기기엔 모든 게 너무 생생하지 않은가.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이게...."
"야, 네 반응을 보니 이게 꿈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다."
영우의 얼빠진 표정을 유심히 보던 봉희는 스스로 결론을 내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밀었다.
홧.
「9」
"보이냐? 이것도 한참 쓰고 남은 거야. 처음엔 20갠가 그랬거든."
"이걸 썼다구요?"
영우는 이렇게 되물으면서 문제의 문구로 시선을 옮겼다.
―[정치인-강홍세]를 소멸 후보에....
―[가수-임광태]를 소멸 후보에....
'설마.'
이제 보니 문구가 뽑아 올린 사람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크든 작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는 점.
이를테면 앞서 본 재벌 총수 김동호는 운전기사에 대한 폭언 이슈가 있었고, 영화배우 현송애는 스타일리스트에게 갑질을 했던 과거가 폭로되어 지탄받았다.
다시 말해 지금 푸른 문구가 소멸 후보로 보여 주고 있는 건 대중에게 미운털이 박힌 자들이었던 거다.
"...."
최소한의 상황 파악이 된 영우는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껌뻑였다.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때 그가 취하는 의식이었다.
"이게 꿈이 아니라고 치면,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영우가 이렇게 묻자 봉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너도 나랑 똑같은 걸 보고 있을 텐데… 머리 위쪽이나 그런 곳에 뭐 없어?"
"머리 위요?"
슥.
영우가 봉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의 시야에 주먹 크기의 청색 구체가 들어왔다.
"…어?"
그리고 마침내 그가 잠을 자는 사이 놓쳤던 안내 문구가 눈앞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회에서 알려드립니다.」
「2025년 6월 10일 화요일 오전 10시 12분 8초경, '불균형' 상태가 도래했습니다.」
「이는 세계에 적의를 가진 인류가 과반수를 초과했다는 의미이며, 이에 따라 리셋 기능이 강제 발동되었습니다.」
적의를 가진 인류가 과반수 초과.
쉽게 말하면 40억 명가량 되는 인간이 세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뭐, 뭐라는 거야...?'
영우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심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불균형이니 리셋이니 하는 것들… 꼭 자신의 망상을 집어서 이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유별난 생각은 아니었다.
인성 파탄 난 재벌들에 대한 기사를 보거나 모 BJ가 슈퍼카를 구매했노라는 소식을 접할 때 하는, 소심한 넋두리 수준이었으니까.
뭔가 좀 불공평하고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아주 가끔은 세상이 크게 뒤집히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라는 망상을 해 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세계에 적의를 가진'으로 해석한단 말인가?
'뭔가 좀 많이… 많이 잘못되어 가는 것 같은데.'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자칭 이사회가 남긴 전언은 계속됐다.
「리셋의 첫 번째 단계는 '여과'입니다. 이 단계에선 세계를 불균형 상태에 이르게 한 주범들을 걸러 내어 제거합니다.」
「따라서 이를 위한 소멸 투표가 곧 진행될 예정입니다.」
「다수의 유권자가 생각하는 불균형의 주범들이 후보 목록에 등재되며, 이 중에서 충분한 표를 받은 후보들은 소멸 또는 변이, 해체됩니다.」
표.
이 대목에 이르러 영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다시 쳐다봤다.
'그러니까, 각자 가진 업보 포인트를 사용해서 유명인들을 저격하라는 건가? 이거 그냥 마녀사냥이잖아.'
후보로 오른 사람 중엔 정말 극악무도한 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아니, 실은 대다수였다.
"이거 이런 식으로 진행하면 대참사...."
영우는 봉희에게 일단 투표를 멈춰야 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9개였던 봉희의 업보 포인트가 어느새 6개까지 줄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오! 찾았다, 이 새끼!"
파앗.
봉희의 포인트가 또 5개로 줄었다.
"혀, 형? 방금 누구한테 투표한 거예요?"
"토보이라고, 나 맨날 보는 BJ 있잖아. 이 자식, 그렇지 않아도 여자들한테 집적대는 게 짜증났는데."
"그 헌팅 방송이요? 그거 형이 항상 챙겨 보던 거잖아요...?"
영우가 이렇게 말하자 허공에 시선을 걸어 두고 있던 봉희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아, 그렇긴 한데. 보면서도 은근 좆같았거든. 방송으로 안 떴으면 어디 호빠에서나 일했을 새끼가 말이야."
"…그렇다고 죽이자는 데에 투표해요?"
"어차피 나 아니어도 찍을 놈 많을 걸?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우리가 언제 이런 놈들 저격해 보겠냐."
"...."
영우의 표정이 어두워졌음에도 봉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표를 행사했다.
파앗.
이제 그가 가진 업보 포인트는 4개에 불과했고, 이때쯤 두 사람 모두의 시야에 알림 문구가 나타났다.
「소멸 후보 확정까지 5분 남았습니다. 빠른 투표를 위해 검색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이와 함께 후보 목록 하단에 자그마한 검색 바가 떠올랐다.
"야, 너도 괜히 표 버리지 말고 없애고 싶은 놈 있으면 얼른 찾아. 나중에 후회한다."
봉희는 이 말을 남기고선 다시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에 영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검색 바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키워드들이 바로 입력되는 게 보였다.
#살인범
#연쇄 살인마
#강간범
영우 자신이 생각하던 '죽어도 마땅한' 죄는 살인, 강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이 키워드들에 반응해 나타난 인물은 얼마 되지 않았다.
후보로 오른 자를 전부 합쳐도 5명밖에 안 됐고, 그것도 하나같이 연쇄 살인마뿐이었다.
'…왜지?'
한참 생각하던 영우는 앞서 봤던 설명문을 다시금 떠올렸다.
―다수의 유권자가 생각하는 불균형의 주범들이 후보 목록에 등재되며....
'맙소사. 나머지는 지목도가 상대적으로 낮았구나. 그래서 유명한 놈들만 후보로 오르게 된 거야.'
그렇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현재 살아 있는 살인마만 수백, 수천일 텐데 그중 유명한 다섯만 처형하고 지나가는 것이 무슨 '여과'냔 말이다.
'이게 정말 꿈이 아니고 현실이라고...?'
영우는 믿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진짜'라면, 리셋의 주체는 인간보다 월등한 존재 아니겠는가.
그게 신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그가 경악하는 동안에도 옆자리의 봉희는 손바닥의 숫자를 빠르게 줄여 나가고 있었다.
4에서 3으로, 다시 3에서 2로… 다음엔 1 그리고 종래엔....
파앗!
남은 업보 포인트가 0에 이르자, 봉희의 손바닥에서 숫자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 진짜 시원하게 다 털었다."
반면 영우는 여전히 후보 목록을 보고 있었다.
「소멸 후보 확정까지 1분 남았습니다.」
현재 보유한 업보 포인트는 처음 그대로 3개.
'어차피 이걸 다 써도 목록에 오른 다섯 놈조차 처리할 수 없어.'
게다가 워낙 유명한 놈들이라 이미 수많은 표가 쏠렸을 터였다.
"...."
영우는 고민 끝에, 표를 행사하지 않은 채 눈앞의 명단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이런 미친 짓거리에 어떤 식으로든 동참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왜인지 찝찝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잠시 뒤 투표 시간 만료를 알리는 안내가 나타났다.
「소멸 후보 확정이 끝났습니다.」
「잠시 뒤, 득표수에 따라 각 후보의 소멸 여부가 결정됩니다.」
「소멸 확정이 된 후보는 소멸, 변이, 해체 중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됩니다.」
"뭐야, 무조건 죽는 게 아니었어?"
마감 문구를 확인한 봉희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러나 그가 정말 걱정해야 할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집표 작업을 하는 동안 리셋의 두 번째 단계인 '개별 여과'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개별 여과.
"응...?"
아니나 다를까 봉희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고, 곧 그를 포함한 모든 이의 시야에 새 안내문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업보 포인트를 소모해 원하는 대상에게 살(煞)을 날릴 수 있습니다.」
「살 하나당 업보 포인트 하나가 소모되며, 자신에게 날아온 살 역시 보유한 업보 포인트를 소모해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살을 막아 내지 못하면 반드시 소멸하므로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자, 잠깐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봉희는 자신에게 날아올 살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안내문을 다 읽자마자 몸을 바르르 떨기 시작했으니까.
"왜 그래요, 형?"
영우는 상대에게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음에도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봉희가 화들짝 놀라며 영우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영우의 손에 남아 있는 '3'이라는 숫자를 발견하고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오, 영우야...! 너 아직 포인트 남았잖아? 이걸로 내 살도 막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마 될 거야, 그렇지?"
"글쎄요. 형한테 왜 살이 날아오는데요? 누가 굳이 포인트까지 써서...."
"그, 그야… 안 날아올 수도 있지만… 혹시 또 모르는 거잖아."
"그래요? 그럼 저도 혹시 모르니 아껴 놓는 게 맞죠."
영우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침대에 도로 앉으려 하자, 봉희가 전에 없이 거친 동작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니야!"
"...?"
"아니라고! 살, 무조건 날아와!"
얼마나 흥분했는지, 봉희는 턱까지 덜덜 떨어 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냐구요.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 주면 저도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나, 난...."
결국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봉희가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쉬이이잇!
천장, 아니 하늘 저편에서 어떤 소리가 난다 싶더니 곧 새하얀 빛이 쏘아져 내려왔다.
정확히 봉희의 정수리 위치로 말이다.
"으앗!"
순간 봉희의 눈에 어마어마한 공포가 스쳐 지나갔고, 영우는 잠시 뒤 상대의 머리 위에 나타난 문구를 보게 됐다.
―[강간범-임봉희]가 살을 막아 내지 못하여 소멸합니다.
그러더니 곧.
스르릇.
봉희의 신체가 허공에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영우의 손엔 여전히 3개의 업보 포인트가 남아 있었다.
2화 1. 재벌들은 용으로 변하고 (2)
"…헉."
봉희의 소멸 순간을 목도한 영우는 제자리에 뻣뻣이 굳었다.
'뭐, 뭐야, 방금?'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이건 결코 봉희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 영우를 사로잡은 건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물리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리셋이라는 이 대대적인 숙청이 실재하는 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방금 확인한 것이다.
1년 가까이 같은 방을 써 오던 사람이 실은 강간범이었다는 데서 오는 충격과 불쾌감은 한참 뒤에야 찾아왔다.
"하."
비로소 현실감이 제대로 든다.
영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봉희가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자 마치 그를 재촉하듯이 새로운 안내 문구가 나타났다.
「개별 여과 마감까지 1분 남았습니다.」
|현재 정영우 님의 잔여 업보 포인트는 3개입니다.
3개의 업보 포인트.
원하는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세 번의 기회.
그러나 영우는 이 기회를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불가해한 힘을 빌려서까지 죽이고 싶은 상대가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불길해. 아까 봤던 소멸 투표도 그렇고, 뭐가 됐든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선 반드시 책임을 지게 되는 것 같다.'
이젠 망자가 된 봉희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놈이 만약 1단계 여과에서 유명인들을 마구잡이로 저격하지 않았다면, 2단계에 이르러 살을 맞아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이 시작될 때만 해도 녀석이 가지고 있던 포인트는 20개나 됐다고 하니까.
다시 말해서.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자. 설령 남은 포인트가 싹 날아가게 된다고 해도 일부러 쓸 이유는 없어.'
마음을 정한 영우는 눈앞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걸 보면서도 잠자코 있었다.
「개별 여과 마감이 임박했습니다.」
…3초.
…2초.
…1초.
…여과 마감.
삐익!
천장 너머 어딘가에서 여과 작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고는.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영우는 방 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채로 천장을 바라봤다.
앞서 진행됐던 1단계 여과의 결과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니 '리셋' 자체가 모두 끝난 건 아닐 것이다.
'개표가 끝날 때까지 잠깐 쉴 틈을 주는 건가?'
영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끼익.
기숙사 복도로 고개를 내밀자, 그의 기척을 느낀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문을 여는 게 보였다.
"다, 다들 괜찮아요?"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영우는 고개를 내민 사람들의 눈빛만 봐도 각각이 리셋을 어떤 식으로 맞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단 눈에 살기마저 가득한 사람들은 아마도 살을 맞아 본 경우일 거다.
이 부류는 남의 안부를 묻기는커녕 도로 문을 쾅 닫거나 아예 복도로 빠져나와 건물 밖으로 향했다.
반면 이 상황이 재밌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영우는 이들이 1단계 여과의 저격범들이라고 판단했다.
왜냐면 봉희가 생전에 저들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멍한 모습인 몇몇은 아마도....
'살을 맞지 않았고, 남이 맞는 걸 보지도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아직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려 하고 있는 경우라고, 영우는 생각했다.
'그럼 난 뭐지?'
영우는 다시금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봤다.
2단계 여과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손바닥에 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설마 다음 단계에서도 업보 포인트가 쓰이는 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영우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문제의 문구가 다시 등장했다.
「개표가 완료되었습니다.」
「이에 따른 소멸 작업은 공개 진행되며, 소멸 대상에겐 소멸, 변이, 해체 중 한 가지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또 나왔다. 소멸, 변이, 해체… 대체 저게 무슨 뜻이지?'
영우의 이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재벌 총수-강홍태]가 선택지 앞에 섰습니다.
―몹시 분노합니다.
―<변이> 선택.
―보유한 업보 포인트를 반영 중입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재벌 총수-강홍태]는 이제 화룡이 되어 여러분을 위협합니다.
"뭐...?"
리셋이 현실임을 받아들인 영우조차 방금 본 문구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용이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사이 강홍태의 차례는 지나고 다음 사람이 선택지 앞에 서게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인물의 선택은 강홍태와 다소 달랐다.
―[대통령-박도환]이 선택지 앞에 섰습니다.
―당혹감을 느낍니다.
―<해체> 선택.
―보유한 업보 포인트를 반영 중입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퀘스트』가 추가되었습니다.
화룡이 되었다던 강홍태의 경우와 달리 이번엔 별다른 후속 문구가 없었다.
'부, 분명 해체라고 했으니까… 퀘스트를 추가한 대가로 소멸한 건가?'
영우는 어떻게 해서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려 애썼다.
왜냐면 저건 이제 곧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용과 퀘스트가 있는 세계.
게임이나 소설에서 흔히 보던 것이긴 했지만 저것이 현실화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잠깐, 고작해야 두 명이 선택지를 골랐을 뿐이잖아? 1단계 여과로 못해도 수천 명을 숙청했을 텐데....'
머릿속이 까마득해진다.
그리고 때맞춰 다음 인물이 선택지를 받아 보게 됐다.
―[배우-박소영]이 선택지 앞에 섰습니다.
―큰 슬픔을 느낍니다.
―<소멸> 선택.
―[배우-박소영]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어...?'
한껏 확장되는 영우의 동공.
박소영이 소멸 선택에 앞서 충분한 설명을 들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소멸을 선택하면 이 세계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떠나게 되는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을 저격한 대중을 온전히 놔둔 채 죽기를 택하는 셈인 거다.
어쨌든 앞선 세 인물의 선택을 통해 모두가 알게 됐다.
각각의 선택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말이다.
괴물이 되어서라도 이 세계에 보복을 하고 싶다면 <변이>를, 세계의 형식 자체를 바꾸고 싶다면 <해체>를, 더는 이 세계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면 <소멸>을.
'하지만 누가 순순히 죽고 싶겠어? 그것도 부당한 방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사람들인데.'
영우는 대다수의 인물이 변이와 해체만을 두고 고민할 거라고 생각했다.
꼭 복수를 원하지 않더라도 이 세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허무하고 억울할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네 번째부터는 <소멸>을 선택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오우거』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고블린』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무구』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아울베어』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화폐』가 추가되었습니다.
괴물 아니면 기존 세계를 대체할 새로운 요소가 쉴 새 없이 등장했다.
"...."
이에 영우는 황급히 배낭에 짐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이곳에 계속 있게 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음식』이 추가되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음식』이 추가되었을 때, 영우는 화들짝 놀라며 배낭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쉬잇....
방금 배낭 안으로 집어넣은 초코바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뭐였지?'
조심스럽게 배낭 안을 보자, 초코바가 포장지에 감싸인 그대로 돌이 되어 버린 게 보였다.
'세상에....'
영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초코바를 집어 들었다.
무게는 돌이 되기 전과 똑같았지만, 더는 음식이 아니었다.
이 말인즉슨.
'음식뿐만 아니라 기존 세계의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돌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겠네.'
이를테면 한참 전에 『화폐』가 추가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쓰던 지폐와 동전, 카드까지도 돌로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들이 돌로 변했다는 게 아니었다.
'그럼 새 화폐는 뭐고, 어디서 어떻게 얻는 거지? 음식도 기존 걸 못 먹는다면 이제부턴 뭘 먹게 되는 거야?'
그러자 영우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시야 상단에 새 문구가 나타났다.
「퀘스트 시스템이 활성화됐습니다.」
다음엔 시야 좌측에 노란색 문구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메인 퀘스트'였다.
[메인] "새로운 삶"
<임무> 화살표를 따라 가까운 환전소를 찾으십시오.
<보상> 기초 생활 자금
<특수> 선착순 추가 보상
"...!"
하나같이 기이한 내용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환전'이라는 단어가 영우의 눈을 사로잡았다.
여전히 손바닥에 새겨져 있는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존 세계가 조금씩 지워져 가는 지금, 새로운 화폐와 맞바꿀 수 있을 만한 거라곤 업보 포인트뿐인 것 같았으니까.
휙.
영우는 바닥의 배낭을 잽싸게 들어 올린 뒤, 곧장 방문을 열고 기숙사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에 멍하니 눈앞의 문구들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영우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도 갑자기 발치에 생겨난 커다란 화살표와 메인 퀘스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어엇?"
"이, 이봐! 같이 가!"
이 와중에도 시야 구석에선 숙청 대상자들의 선택 결과가 쉬지 않고 출력됐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골렘』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맨이터』가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월드맵』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때 영우는 기숙사를 빠져나와 주차장 근처를 달리는 중이었는데, 『월드맵』이 추가되자마자 일대의 차량이 전부 석화되는 걸 봤다.
쉬아앗...!
왜인지는 몰라도 승용물 이용이 제한된 거다.
하지만 영우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월드맵? 이동 방식에도 관여하는 요소인가? 누가 해체됐기에 이런 게 추가됐지?'
원한다면 결과 목록을 위로 끌어 올려 확인해 볼 수 있었지만, 그에겐 더 급한 일이 있었다.
타탓!
기숙사에서 가장 먼저 뛰쳐나왔음에도 그새 후발 주자들에게 따라잡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서른넷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영우는 결코 발이 빠른 편이 아니었다.
평소 단련해 두지 않은 몸뚱어리는 정말이지 둔하게 움직였다.
'제길...!'
둘, 셋… 다섯… 수 초 사이에 예닐곱이 그를 앞질러 지나간다.
그러다 마침내.
스윽.
여태 쭉 북동쪽을 가리키고 있던 화살표가 기울기 시작했다.
목표 지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
그러더니 별안간 하늘 위에서부터 어마어마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쐐애애애액!
제트기 기동음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하늘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며 메아리쳤고, 이에 고개를 든 영우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쐐애애애액!
쐐애애애액!
웬 시커먼 기둥 같은 것이 수백 개씩 쏘아져 내려오고 있었으니까.
"...?"
대략 높이 십여 미터의 까만 직사각체.
처음엔 그저 마구잡이로 내려오는 줄 알았으나 실제론 각자 정해진 착지점이 있는 것 같았다.
쒸아아아악!
콰콰콰쾅!
영우의 가시거리에만 8개나 되는 직사각체가 떨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떨어진 녀석만이 낮게 진동을 하며 희미한 빛을 냈다.
…우웅.
…우웅.
'아.'
이를 본 영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저게 바로 환전소.
정확히는 지금 진동하며 이쪽을 부르는 녀석이 자신에게 배정된 환전소였다.
3화 1. 재벌들은 용으로 변하고 (3)
"이, 이게 환전소라고?"
"대체 어디서 떨어진 거야...?"
환전소가 땅에 들이박힘과 동시에 선두 주자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불안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
그리고....
처억.
대범하게도 곧장 환전소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사람.
후자는 극소수였으나, 영우도 이쪽에 속해 있었다.
"...."
두려움에 뻣뻣이 굳은 다리를 억지로 내딛으면서 말이다.
'세계가 리셋된 거지, 모든 사람의 능력치가 리셋된 건 아니야. 신체 능력으로 따지면 나는 완전 하위권… 예정된 취약 계층이다.'
조금 전 달리기에서 뒤쳐지던 순간 깨달은 사실이었다.
용과 퀘스트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치가 무엇이겠는가. 단연 신체 능력일 것이다.
게다가 이를 증명하듯 첫 퀘스트에 무려 선착순 보상 존재.
만약 환전소의 등장이 좌중을 압도하지만 않았어도 일찌감치 발 빠른 자들이 보상을 선점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은 내게도 기회가 있어.'
영우는 자신을 추월했던 자들이 여전히 꼼짝도 못 하고 있는 걸 보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우웅.
…우웅.
환전소와의 거리가 20미터 안쪽으로 줄어들자 그것이 내뿜는 빛과 진동의 세기가 강해졌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 다른 정보가 영우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하나, 환전소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둘, 이곳에 두 시간가량 체류한 뒤 소멸한다.
셋, 환전소의 표면에 손바닥을 대면 환전을 시작할 수 있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되새긴 것만 같았다.
'...?'
영우는 이 기묘한 체험에 불가사의함을 느끼면서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후."
그를 반기듯 더 강렬히 진동하는 환전소 앞에 서게 됐다.
…우웅!
…우웅!
재질을 가늠하기 어려운, 완벽히 흑색을 띠는 표면.
높게 뜬 태양이 햇빛을 쏘아 내고 있음에도 이 기이한 물체는 빛을 반사하거나 투과시키지 않았다.
이 세상 물건이 아니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영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환전소와 접촉했다.
텁.
차갑다.
그리고 대리석을 만진 것처럼 견고한 촉감이 손바닥 전체에 느껴졌다.
영우의 눈앞에 새 인터페이스가 나타난 것은 이 다음이었다.
파앗!
「주민 정보가 등록되었습니다.」
|이름 : 정영우07
|역할 : 미정
|활성 혜택 : [세액 공제-1인 가구]
'세액… 공제?'
이제 영우는 봉희가 자신의 앞에서 죽어 준 것에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만약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런 프로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리 없었을 테니까.
'일종의 상태창이라고 이해하면 되나.'
영우는 자신의 주민 정보를 꼼꼼히 뜯어봤다.
정영우라는 이름 뒤에 07이라는 숫자가 붙은 걸 봐선 아무래도.
'전국의 정영우 중에서 내가 일곱 번째로 주민 정보를 등록했다는 뜻이겠지.'
다시 말하면 남보다 유난히 용맹하거나 무모한 정영우가 여섯이나 더 있다는 뜻이리라.
영우는 묘한 기분에 젖은 채, 자신이 유일하게 가진 혜택인 세액 공제 항목을 살폈다.
|활성 혜택 : [세액 공제-1인 가구]
1인 가구라는 진단엔 이견이 없었다.
갓난아기 때 보육원 앞에 버려져 부모가 누군지 몰랐고, 따라서 형제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1인 가구라서 세액 공제 대상이라는 건 어찌됐든 누군가 세금을 떼어 간다는 뜻이잖아.'
대통령마저 해체되어 사라진 마당에 대체 누가 세금을 걷는단 말인가?
영우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쯤, 주민 정보 화면이 사라지더니 새 문구가 나타났다.
「환전을 시작하겠습니다.」
「잔여 업보 포인트 1개당 1만 카르마가 주화 형태로 지급됩니다.」
카르마.
아마도 리셋된 세계에서 통용되는 새로운 화폐일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잔여 포인트가 환전 대상임을 확인한 영우는 미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근로자 정영우07 님이 보유한 업보 포인트는 3개입니다.
|환전을 통해 3만 카르마가 지급될 예정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준비? 뭘...?'
안내 문구를 본 영우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짤그락.
환전소 안쪽에서 동전이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촤르륵!
난데없이 진홍색 주화 수십 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어...!"
반사적으로 양손을 뻗었으나 모든 주화를 잡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티잉, 팅! 팅!
결국 십여 개의 주화가 영우의 손을 피해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곧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런.'
그러나 '사고'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영우가 당황한 얼굴로 바닥을 헤집는 사이, 환전소 맞은편에서 익숙한 소리가 또 한 번 난 것이다.
짤그락.
영우와 같은 환전소를 배정받은 누군가도 반대편에서 환전을 시작한 거였다.
"어, 조심해요!"
영우가 경고를 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촤르르륵!
영우 때보다 훨씬 많은 양의 주화가 환전소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고, 곧 누군가의 당황한 목소리가 환전소 저편에서 흘러나왔다.
"어엇?"
그러더니 여태 커다란 환전소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맞은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죄, 죄송합니다! 이게 그러니까...!"
상대는 거구의 청년이었고, 자신의 주화 일부가 영우 것과 섞이는 걸 보자마자 잽싸게 사과를 했다.
한편 영우는 그가 경찰 제복 차림인 것을 보고서 발치까지 굴러 들어왔던 주화 몇 개를 주워서 건넸다.
"이거… 여기까지 넘어왔더라구요."
"아아, 감사합니다!"
거듭 고개를 꾸벅이는 청년의 모습에 영우는 잠시나마 경계심을 풀었다.
왜인지 좋은 사람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거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곧 사납고 거대한 기척이 두 사람은 물론 환전 중이던 일대의 모두를 덮쳤다.
두두두두...!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후발 주자'들이 주화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서 뒤늦게 달려오기 시작한 거였다.
"환전소라더니 진짜 돈을 주잖아?"
"아니 세상에."
"그냥 막 바닥에 흩어져 있는데?"
리셋으로 인해 기존 화폐가 무용지물이 됐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이 때문에 지금 환전소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자들은 눈이 완전 뒤집힌 상태였다.
'미친. 서둘러야겠네.'
조만간 일대가 난장판이 될 것임을 직감한 영우는 바닥의 주화를 마저 집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깨달은 사실인데, 대략 오백 원 동전 크기의 이 진홍색 주화는 개당 1천 카르마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주변에 흩어진 주화를 다 수거하자 정확히 30개가 됐기 때문이다.
철그럭.
'가방이 없었으면 진짜 곤란했겠는데.'
양손에 가득 찬 주화를 배낭 속으로 쏟아 넣던 영우는 문득 아까 그 경찰이 생각나서 고개를 들었다.
슥.
아니나 다를까, 필사적인 표정으로 바지와 상의 주머니에 주화를 쑤셔 넣고 있는 경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환전 받은 카르마의 양이 너무 많아서, 양손을 다 쓰고도 전부 줍지 못한 것이다.
두두두두...!
그사이 후발 주자들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경찰 주변에 널브러진 수십 개의 주화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다.
'저대론 답이 없어. 눈앞에서 싹 다 빼앗길 거다.'
영우는 경찰의 주머니에 더는 공간이 없는 걸 보고서 크게 소리쳤다.
"늦었어요! 나머진 포기해요!"
"그, 그래도...!"
영우의 말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경찰이었지만, 선뜻 자리를 뜨진 못했다.
미련이 남아서였다. 바닥에 흩어진 주화가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그래서 결국.
"와아아아!"
끝내 환전소 앞까지 들이닥친 후발 주자들에게 덮쳐지고 말았다.
퍼버벅, 퍼벅!
말이 좋아 '후발 주자'지, 사실상 노상강도나 다름없었다.
의도적으로 몸싸움을 걸며 돈을 빼앗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요!"
누가 봐도 주화로 주머니가 가득 찬 경찰이 최우선 타겟으로 잡혔다.
수십의 사람이 경찰에게 몰려들어 주머니 안으로 손을 쑤셔 넣었고, 그의 덩치와 제복이 부담된 자들은 땅바닥의 돈부터 줍기 시작했다.
'…맙소사.'
일찍이 현장에서 빠져나와 있던 영우도 안전하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안전지대라는 건 없었다.
사방에 등장한 다른 환전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로가 없어.'
어딜 보든 강도 현장이었다.
그리고 곧 영우에게도 그 강도들이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수십 명을 상대해야 했던 경찰과 달리, 영우에겐 너덧 명의 사내만이 달라붙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체격이 크지 않고 힘도 세지 않은 영우에게 수적 열세가 주는 압박감은 어마어마했다.
"이 씨빨 새끼들이!"
여기에 더해서.
부우욱!
뒤편에 붙은 사람이 배낭을 뜯어낼 듯 당기던 순간엔 죽음의 공포에 가까운 감정마저 느꼈다.
"이익...!"
무려 전 재산이 든 배낭이지 않던가.
홰액!
또 한 번 몸이 거세게 당겨진다.
이에 격분한 영우는 상체를 최대한 틀어 문제의 상대를 돌아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안면에 주먹이 꽂혀 들어왔다.
퍼억!
강도들도 애가 타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다른 놈들이 더 달라붙기 전에 얼른 배낭을 빼앗아야 했으니까.
"어억!"
영우가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움츠리자,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만 더 패면 배낭을 포기할 거 같다고.
퍼어억!
여지없이 이어진 두 번째 공격은 영우의 오른쪽 귀와 뺨 사이를 타격했다.
"커헉!"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귀에서 이명 같은 게 들렸고, 동시에 두 다리의 힘이 쫙 빠져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남에게 이렇게 맞아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배낭을 벗기려는 사람들이 계속 들러붙었다.
"안 돼! 그것마저 없으면...!"
영우가 몸을 꿈틀거리며 반항하자 시야 밖의 누군가가 그의 팔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드득.
팔이 부러지든 말든 상관 안 하겠다는 의도가 여실히 느껴질 정도의 압력이었다.
'이, 이러다간 진짜 부러져.'
그저 빈털터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빈털터리에 불구이기까지 할 것인가.
'아.'
결국 낙담한 영우가 배낭을 포기하려는 찰나.
파앗!
여태 그의 시야 한쪽에 박혀 있던 퀘스트 문구가 사라지고 새 텍스트가 나타났다.
<퀘스트 완료 - "새로운 삶">
<보상 지급>
|기초 생활 자금
|선착순 보상
그러더니 새빨간 경고 문구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선착순 보상 대상자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준비...?'
영우는 이제 준비라는 단어만 봐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전에 준비하란 안내를 봤을 때는 환전소가 다짜고짜 주화를 뿜어냈으니까.
그리고 이번엔.
쐐애애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상공 까마득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쏘아져 내려왔다.
'뭐야?'
어느새 바닥에 엎어져 구타당하고 있던 영우는 간신히 한쪽 눈을 벌려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곤 보게 됐다.
웬 검 한 자루가 자신을 향해 수직 하강 중인 광경을.
"...!"
워낙 쏜살같은 속도라, 그가 사태를 인지했을 땐 이미 검이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영우의 오른손 바로 옆에 말이다.
티잉!
총장 80센티미터짜리 쇠붙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자 모든 사람이 움직임을 멈췄다.
"어...?"
"뭐, 뭐야."
"엇."
그도 그럴 게 검이 한 자루만 떨어진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쐐애애애액!
쐐애애앳!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을 뿐, 선착순 조건을 달성한 자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검을 전달받게 됐다.
티잉, 팅, 티잉!
사람들이 몰려든 지점마다 은빛 궤적이 적게는 하나, 많게는 셋까지도 쏘아져 내려왔다.
'둘, 셋, 일곱… 열… 대충 열 명 정도인가.'
영우는 방금 들은 검의 착지음으로 '선두 주자'의 수를 가늠했다.
그러곤.
텁!
누구보다도 빠르게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4화 1. 재벌들은 용으로 변하고 (4)
검.
보기보단 굉장히 가벼웠다.
기껏해야 몇 백 그램 정도일 거 같은 느낌.
그리고 검 손잡이를 쥐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툴팁으로 보건대, 실제로도 가볍게 설계된 무기가 맞는 것 같았다.
「얼리버드」 - 영웅 한손검
[매우 가볍습니다.]
다만 이외의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기 아이템의 툴팁이라면 으레 표기되는 공격력조차 말이다.
영우가 알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가볍다는 사실 하나뿐.
하지만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비켜! 지금부터 내 몸에 손대는 새끼는 무조건 죽인다!"
영우가 검을 양손으로 쥔 채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르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번에 도망을 치진 않았다.
영우의 칼끝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걸 봐 버린 탓이었다.
"...."
묘한 정적이 흐른다.
만만한 체격, 피떡이 된 얼굴, 간신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위태로운 자세.
정말 이자에게 사람을 죽일 능력이 있을까?
게다가 검이란 건 주화보다도 훨씬 값진 물건일 터였다. 검이 있다면 남이 가진 주화야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을 테니까.
근방에 몇 개 없는 희귀품이란 사실은 덤이고 말이다.
'…내가 개좆밥으로 보이는구나.'
영우는 사람들의 눈에 모종의 의지가 감돌기 시작하는 걸 보고서 양손과 팔뚝에 힘을 꽉 줬다.
화앗!
아니나 다를까, 곧 등 뒤에서 커다란 기척이 일어났다. 누군가 그의 팔을 휘감기 위해 달려든 거였다.
"...!"
이에 영우는 잽싸게 몸을 틀면서 뒤편으로 검을 휘둘렀다.
휘잇!
검의 궤적이 번쩍이기 무섭게 질퍽한 소리가 난다.
쩌업!
영우에게 접근하려던 사내의 승모근에 칼날이 박힌 거다.
"어...!"
영화나 만화처럼 칼날이 상대방의 몸을 가르고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벌어진 일은 상대의 승모근이 반사적으로 수축하며 칼날을 꽉 문 것뿐이었다.
…드릅.
수축한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 검 손잡이를 통해 전해진다.
아마도 이게 사람의 육질일 것이다.
'....'
대체 어떤 삶이 시작된 걸까. 공장과 기숙사만을 오가던 어제까지의 삶이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쩍!
상대의 몸에서 칼을 빼내자 소량의 핏물이 튀었고, 비로소 잠시 잊고 있던 현장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잡아앗!"
"으아아아!"
영우의 첫 베기가 실패했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영우의 베기는 실패한 게 아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방금 베기는 일종의 '영점 사격'이었기 때문이다.
첫 베기를 통해 검의 타격점을 어느 정도 알게 됐고, 아까처럼 칼날이 상대의 몸에 박혀 버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딜 손실'이라는 것 역시 깨닫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 사람을 베어 죽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
이 깨달음이 아주 중요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찌르기를 채용하게 됐으니까.
휘익.
물론 자세가 제대로 잡힌 공격은 아니었다.
칼날을 몸과 직각이 되도록 가로로 눕힌 상태에서, 다가오는 상대의 목젖을 노리고 찔렀을 뿐.
그러나 그 효과와 파급력은 대단했다.
푸욱!
칼날이 대번에 목을 꿰뚫은 것이다.
"꺽...!"
피격당한 사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자, 그 뒤를 따르던 자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목젖을 관통한 칼날이 사내의 뒷목을 찢고 솟아오른 걸 본 탓이었다.
"미, 미친 새끼."
"…잠깐만."
한순간에 전황이 뒤집혔다.
"분명히 경고했잖아! 날 또 건드리면 정말 죽여 버린다고!"
격분한 영우가 두 번째 찌르기를 위해 검을 다잡자, 그제야 강도들이 탈주를 시작했다.
타탓!
하지만 아직까진 양측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웠고.
휘잇!
두 번째 찌르기도 여지없이 어느 탈주자의 뒷덜미에 들이박혔다.
피윳!
"...!"
아까와는 또 다른 육질이다.
도독, 하면서 칼끝이 상대의 경추를 건드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 아아...!"
상대가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지만, 영우는 그새 저만치 도망가고 있는 나머지 탈주자를 눈으로 좇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명.'
칼을 피해 무사히 도망친 강도의 숫자다.
'시발, 다 죽여야 맞는데.'
오기와 복수심 그리고 모종의 강박이었다.
똑같이 이쪽을 공격했음에도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다면 형평성에 맞지 않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쫓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따라서 당장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훗날을 기약하는 것뿐이었다.
'제길.'
미간을 좀 찌푸리자 두 탈주자의 안면 윤곽이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길에서 마주쳤을 때 알아볼 수 있으리라. 가능하다면 기회가 왔을 때 바로 죽여야 할 테고.
어쩌면 이런 것도 업(業)의 일종일까.
"으윽… 으...."
찌르기의 두 번째 피해자가 아직까지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에, 영우는 늦게나마 그의 숨을 끊어 줬다.
푸욱.
그러자 이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듯, 눈앞에 시스템 문구가 다시 나타났다.
|기초 생활 자금이 지급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선착순 보상인 '얼리버드'만 수령했지, 메인 퀘스트의 기본 보상은 받지 못한 상태였다.
짤그락.
이윽고 익숙한 소리가 나더니 영우가 쳐다보고 있던 허공에 붉은 주화 3개가 나타났다.
파앗!
"엇."
영우는 놀란 소리를 내면서도 주화들을 잽싸게 잡아냈다.
'붉은 주화 하나에 1천 카르마니까… 기초 생활 자금이란 명목으로 3천 카르마씩 주는 셈이네.'
이 돈이면 얼마간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업보 포인트 환전으로 얻은 3만 카르마는 대체....
"...."
불현듯 같은 환전소에 있던 경찰과 그곳에 뿌려진 수많은 주화가 떠올랐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지금쯤 죽었거나 그보다 더한 상태가 됐겠지. 환전소 근처엔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까.'
주화들 역시 제각기 다른 주인에게로 흩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최우선 과제는 이 생지옥을 벗어나는 것뿐.
'그럼 이제 어디로.'
영우가 칼을 그러쥐며 퇴로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때맞춰 새로운 퀘스트가 부여됐다.
[메인] "초년병"
<임무> 화살표를 따라 검의 산으로 이동한 뒤, 운명을 교체하십시오.
<보상> 생존 장비
'검의 산...?'
영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얼리버드로 향한다.
다음 퀘스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한 탓이었다.
'무기 보급 구간이구나. 운명을 교체하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번엔 선착순 조건이 없으니 검의 산까지 살아서 도착한 자라면 누구나 무기를 갖게 되는 셈이다.
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무기를 나눠 준단 말인가.
"...."
어차피 더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을 터였다.
영우는 생각하길 멈추고 발치의 화살표를 살폈다.
'서쪽… 광평동 방향이네.'
광평동. 현재 체류 중인 공단동과 인접한 주택단지다.
공장 기숙사에서 음식을 주문하면 대개 광평동에서 배달이 왔기에 친숙한 지역이기도 했다.
문제는 검의 산이란 게 그곳에 있다는 사실.
또 한 차례 아비규환이 펼쳐질 거란 예감이 들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영우는 지체 없이 화살표를 따라 발을 내디뎠다.
***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트롤』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이상기후』가 추가되었습니다.
영우가 화살표를 따라 달리는 와중에도 세계는 계속 변형됐다.
물론 여전히 공단동 외곽을 가로지르는 중이라 체감은 전혀 되지 않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거라곤 탁한 빛깔의 공장 건물과 군데군데 들이박힌 환전소뿐이었으니까.
다만 이전과 큰 차이점이 있긴 했다.
'왜지?'
그건 바로, 언젠가부터 앞을 가로막는 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점.
아니, 앞을 막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부리나케 길을 터 주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왜일까?
살인 경험이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엄청난 위압감을 뿜게 되진 않았을 거 아닌가.
'설마.'
이에 영우로선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날 겁내는 게 아니야. 얼리버드를 겁내는 거다.'
환전소가 땅에 착륙하고 선착순자가 가려진 지 벌써 수십 분은 족히 지났다.
환전소마다 형편이 비슷했기에 얼리버드의 최초 수령자는 수십 명과의 아귀다툼에 휘말려야만 했고, 그렇다 보니....
'얼리버드의 최종 주인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강하다는 걸 증명한 셈이 된 거지.'
즉, 이제 얼리버드란 건 강인하고 악랄한 자임을 뜻하는 마패인 것이다.
"어엇."
"뒤, 뒤 조심해!"
영우는 자신보다 체격이 한참 큰 자들마저 허겁지겁 물러나는 걸 보며 시커먼 쾌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타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영우는 이내 자신의 분수를 되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리버드의 '진정한 주인'을 조우한 탓이었다.
타탓!
상대는 영우의 우측 사선 10미터 거리에서 섬광처럼 나타났다.
구릿빛 피부를 가진 장신의 사내.
키가 얼마나 큰지 총장이 80센티에 달하는 얼리버드가 짤막해 보일 정도였고, 검게 그을린 피부에선 탄력과 근력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세상에.'
누가 봐도 강력한 생물이란 인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피지컬이었다.
"...."
찰나에 영우와 시선을 비스듬하게 맞댄 사내는 영우가 손에 쥔 얼리버드를 슬쩍 보더니 그대로 쭉 튀어나갔다.
파앗...!
두 얼리버드 간의 거리가 빠르게 벌어진다.
이에 영우는 방향을 살짝 틀어 방금 그자가 지나간 길을 그대로 밟았다.
상대의 압도적인 포스 덕분에 길이 아주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검의 산이란 곳에 도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지? 설마 저런 놈들과 싸우게 되나.'
영우는 그새 자그마한 점으로 변해 가고 있는 '강력한 생물'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이때쯤 그의 왼편에서 왁자지껄한 기척이 나기 시작했다.
"...?"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하나같이 흰 셔츠에 적갈색 넥타이 차림을 한 십여 명이 시야에 들어왔다.
회사원들이 단체로 몰려나온 걸까?
'아니 저만한 사무실이 여기 어디....'
고개를 갸웃하던 영우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아.'
저만한 수의 사람이 셔츠 차림으로 있을 법한 장소가 하나 있긴 했다.
그곳은 바로 구미시 광평동에 소재한....
'금오고등학교.'
학교에 있던 학생들도 리셋에서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검의 산으로 향하고 있는 걸로 봐선 환전소의 그 난리통을 다 거친 게 분명했다.
선두의 한 학생이 얼리버드를 들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저 녀석을 중심으로 연합을 한 건가?'
얼리버드를 확보한 고등학생 무리.
영우로선 선입견에 근거해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스슷.
발치의 화살표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거의 도착했나.'
영우는 자신의 진행 방향으로 비스듬하게 달려오고 있는 학생들을 주시하며 '검의 산'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이때.
콰직, 하며 무언가 분질러지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전방의 하늘에 변화가 생겼다.
'맙소사.'
순간 영우의 동공이 최대로 확장됐다.
그가 보게 된 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 수만 개의 무기였다.
5화 2. 구미제일검 (1)
'검의 산이라는 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구나.'
영우는 하늘에서 떨어진 무기들이 엄청난 속도로 쌓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저게 곧 '산'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도 깨달았다.
'이번엔 환전소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일 거다.'
이 추론의 근거는 검의 산이 점거한 어마어마한 면적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이동 중인 금오고 학생들이었다.
'공단동에서 출발한 내가 지금 금오고 애들을 마주쳤다는 건....'
금오고등학교는 광평동 한복판에 있다.
즉, 기껏해야 수십에서 백여 명을 엮던 환전소와 달리 검의 산은 사람들을 동 단위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우는 인접한 송정동, 신평동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을 거라고 봤다.
'그것도 몇몇은 얼리버드를 든 채 말이지.'
검을 쥔 손에 땀이 난다.
만약 이쪽과 똑같이 얼리버드를 가진 사람이 주화나 검을 빼앗기 위해 덤벼든다면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될까?
'산 넘어 산이네.'
영우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검의 산은 계속해서 몸집을 불렸다.
벌써 웬만한 동네 야산 크기가 돼서 이젠 랜드마크나 다름없었고, 이를 본 금오고 학생들도 속도를 한층 더 내기 시작했다.
비무장 인원이 많다 보니 무기부터 빨리 집어야겠다고 판단한 거다.
이 와중에도 검의 산 위로 무기가 계속 쏟아졌기에 쇠붙이들의 마찰음이 천둥처럼 귓가를 때렸다.
콰과과광...!
영우는 일대의 공기가 통째로 진동하는 것에 몸서리치면서도 산꼭대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무기들이 검의 산과 부딪혀 튕길 때마다 일부 무기의 실루엣이 잠깐씩 보였기 때문이다.
'검… 도끼… 저건 방패인가? 방패도 있네.'
영우가 무기 유형을 파악하는 사이, 일찌감치 속도를 끌어올렸던 금오고 학생들이 산의 외곽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핏, 피윳!
"...!"
학생들의 머리 위에 5라는 숫자가 떠오른 것도 이때였다.
그러더니 곧.
「4」
숫자가 4로 바뀌고, 다음엔 3으로 다시 바뀌었다.
'…무기를 고르는 데에 제한 시간이 있구나.'
이 정도는 예측 범위 안의 변수다.
영우는 학생들이 가까운 무기 더미를 찾아 허겁지겁 움직이는 걸 보면서,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옆으로 비스듬히 달렸다.
'무기 더미에 다가가지만 않으면 타이머가 나타나지 않아. 그러니까 이걸 뒤집어 생각하면… 원하는 무기를 발견한 뒤 진입해도 된다는 거다.'
아까 확인한 대로 검의 산엔 검뿐만 아니라 도끼, 망치, 창 따위의 온갖 병장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수많은 무기가 무작위로 쌓여 있다는 점.
따라서 5초 안에 원하는 무기를 골라내려면 애초에 그 무기가 바깥으로 빠져 나와 있는 지점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방금 막.
'…찾았다.'
영우의 앞에 그가 원하던 장소가 나타났다.
아직 먼저 진입한 사람이 없으며, '방패'가 무기 더미 가장자리에 노출되어 있는 지점.
타앗!
영우는 그곳을 시야에 넣자마자 곧장 전력 질주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제한 시간 내에서라면 무기를 두 개 이상도 집을 수 있나?'
이런 생각까지 하며 방패 주변에 어떤 무기들이 있는지 잽싸게 훑었다.
도끼, 창… 대부분 중대형 무기였지만 드문드문 얄팍한 실루엣이 눈에 띄기도 했다.
다름 아닌 단검이었다.
'하나를 더 집을 여유가 있다면 방패 다음은 단검이다.'
그러나 영우의 플랜 B는 실현되지 않았다.
파앗!
그가 무기 더미에 접근하기 무섭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떴기 때문이다.
「검의 산에 진입했습니다.」
「5초 이내에 생존 장비 하나를 고르십시오.」
'…하나?'
이러면 선택지 역시 하나로 고정된다.
영우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무기 더미에 박힌 방패를 뽑아냈다.
촤르륵!
그러자 대번에 타이머가 사라지더니 눈앞에 장비 툴팁이 나타났다.
「강철 원형 방패」 - 일반 중형 방패
|무기로도 쓰입니다.
'무기로도 쓰여… 방패로 상대를 후려치라는 소린가.'
방패의 직경은 50센티미터 정도였으나 두께가 제법 있어서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텁.
방패 안쪽의 손잡이에 왼손을 끼워 넣자 부담스러울 정도의 무게감이 왼팔 전체를 조여 왔다.
'왜 무기 겸용이라는 건지 알 만하네.'
영우의 방패 감상은 여기서 끝났다.
곧 측후방에서 거친 기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타탓!
'기습인가?'
온몸의 세포가 불에 덴 듯 뜨거워진다.
영우는 방패로 상체와 얼굴 사이를 가린 뒤, 칼로 찌르기 자세를 취하며 뒤돌았다.
홧!
그러자 방패의 외곽선 너머로 웬 소년 하나가 보였다.
"아… 아저씨."
겁에 질린 음성과 싱크가 딱 맞는 표정. 금오고 학생이었다.
기껏해야 1학년일까. 얼굴이 앳되고 덩치도 상당히 작았다.
"뭐야, 넌."
시뻘건 살기를 뿜던 영우는 상대가 비무장 상태인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물러섰다.
학생의 머리 위에 붙은 숫자를 발견한 건 그다음이었다.
「2」
그러곤 곧.
「1」
"어."
"…아."
영우가 외마디를 내뱉는 순간 학생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기를 미처 고르기도 전에 제한 시간이 다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학생의 머리 위엔 아무 표시도 없었고, 양손도 텅 빈 그대로였다.
'이런.'
영우는 학생이 허망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서 아까보단 좀 누그러진 말투로 이야기했다.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친구들하고 같이 있지 않고."
이에 학생이 뒤편을 슬쩍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게 답했다.
"…친구 아니에요."
"뭐?"
"같은 학교라고 다 친구인 건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다.
또한 정황상으로도 납득되는 이야기였다.
'그러네. 마주친 타이밍부터 안 맞아. 아까 그놈들은 나보다도 먼저 산에 진입했으니까.'
게다가 여긴 금오고 학생들이 있던 곳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즉, 이 학생은 애초에 금오고 무리와 따로 움직이고 있던 거다.
'하긴 혼자 다니는 건 나도 마찬가지네.'
이렇게 생각하며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던 영우는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미간을 움찔했다.
학생의 교복 명찰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누가 라이터로 태운 거 같은데.'
영우가 반쯤 타다 만 명찰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를 알아챈 학생이 얼른 다른 화제를 내밀었다.
"저… 아저씨."
"...?"
"혹시 지금이라도 무기 뽑아 보면 안 될까요?"
"무기?"
영우는 이렇게 되물으면서 주변을 경계했다.
저 멀리 사람들의 실루엣이 어른거리긴 했으나 당장 이쪽으로 접근 중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좋아. 해 봐."
실은 영우도 궁금하던 차였다.
제한 시간이 다 지난 뒤에 무기를 건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다.
척.
영우가 옆으로 한 걸음 더 물러나자 학생이 긴장한 표정으로 양손을 포갰다.
그러곤 조금 전 영우가 방패를 뽑아냈던 무기 더미에 손을 들이밀었다.
스윽.
학생이 갖고 싶어 한 무기는 다름 아닌 창이었다.
아무래도 체구가 작다 보니 상대와 근접하지 않아도 되는 무기를 선호한 것이리라.
텁!
이윽고 학생이 창 자루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으읍...!"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창이 뽑혀 나오지 않았으니까.
"이...! 으윽!"
학생의 표정이 점점 처참해진다.
그러다 종래엔 울음을 터뜨렸다.
본인도 아는 것이다. 괴물들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무기 하나 없이 살아가게 되었다는 걸.
'역시 시간이 끝나면 안 되는구나.'
이를 보는 영우의 마음도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돼서 유감이다. 어쨌든 여기 너무 오래 있진 마. 곧 사람들이 몰려들 테니까."
영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찝찝한 마음으로 조언 아닌 조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발치의 화살표를 살피려는 순간.
터업!
엎드린 채 울던 학생이 갑자기 영우의 방패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아… 아저씨!"
"...?"
"저 좀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이대로 혼자 다니면 사람들한테 맞아 죽을 거예요."
영우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이 소년이 두려워하던 게 괴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이 녀석도 세상이 약자에게 얼마나 가혹한가를 잘 알고 있던 것이다.
환전소에서의 아비규환으로 미뤄 보건대, 그건 세상이 뒤집힌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무기도 없고 체구마저 작은 소년을 어디에 쓰겠는가.
'어느 순간 뒤통수라도 안 맞으면 다행일 거 같은데.'
생각이 여기까지 이른 영우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학생을 내치려 했다.
녀석의 오른손에 적힌 숫자가 살짝 보이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뭐지, 잘못 봤나?'
영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를 알아챈 학생이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아, 이거...!"
"어?"
순식간에 휘둥그레지는 영우의 눈.
정말로 숫자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17」
17 업보 포인트.
이걸 주화로 환산하면 무려 17만 카르마다.
"아니 어떻게 이걸 여태 가지고 있어? 환전소를 들렀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냐?"
영우가 격앙된 목소리로 묻자, 학생이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환전을 못 했어요. 애들이 너무 많아서...."
"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던 영우는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뒤 다시 물었다.
"지금 보고 있는 퀘스트 이름이 뭐야?"
"새, 새로운 삶이요."
"맙소사."
[메인] "새로운 삶"
<임무> 화살표를 따라 가까운 환전소를 찾으십시오.
<보상> 기초 생활 자금
<특수> 선착순 추가 보상
다시 말해서 지금 이 학생은 환전소 구간을 건너뛴 채로 이곳에 와 있던 것이다.
"여긴 어떻게 찾았고?"
"칼을 받은 애들이 길을 뚫었어요. 저는 몰래 그 뒤를 따라온 거구요."
검의 산으로 오면서 봤던 학생 무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얼리버드를 가지고 있었으니 아마 금오고의 최선두였을 터.
'그럼 무기 선택은 퀘스트가 없어도 검의 산에 도착만 하면 발동하는 거였나?'
일종의 버그라고 해야 할까. 이 세계의 허점을 엿본 느낌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사실은 17만 카르마를 가진 사람이 구명을 요청해 오고 있다는 거.
물론 문제가 없진 않았다.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순 없으니 새 환전소를 찾아야 해. 하지만 거기서 환전이 정상적으로 될 거란 보장도 없지.'
그러나 시도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너무 큰 돈일 거란 직감이 들었다.
첫 메인 퀘스트를 통해 지급된 기초 생활 자금이 3천 카르마이지 않았던가.
'17만 카르마면 기초 자금의 50배가 넘어. 3천 카르마가 일급에 해당하는 돈이라고 쳐도 남보다 두 달 가까이 앞설 수 있는 돈이다.'
영우는 학생의 손바닥을 다시 확인한 뒤, 진지하게 제안했다.
"지금 네 전 재산은 17만 카르마야. 목숨값으로 나한테 얼마까지 줄 수 있지?"
6화 2. 구미제일검 (2)
"…목숨값이요?"
영우의 제안에 학생이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감정을 다잡고서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사, 살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드려야죠!"
이 시점에 이만한 '보디가드'를 또 구할 수 있을 리 없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현재 얼리버드와 방패를 모두 가진 사람은 누가 봐도 고급 인력이었으니까.
게다가 당장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 돈은 환전소에 도착해서 드리면 되는 거죠?"
"그래. 다만...."
영우는 잠시 갈등했다.
아무리 이쪽이 상대를 구명해 주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막상 전 재산을 뜯자니 마음이 찝찝해진 것이다.
"전 재산까진 됐고, 10만 정도면 어떠냐. 너도 네가 쓸 돈은 남겨 놔야 할 거 아니야."
"아…! 그, 그건 그렇죠."
"그럼 10만으로 거래 확정이다."
계약은 이렇게 성사됐다.
따라서 이제 영우에게 주어진 과제는 본인과 고용주의 생존 그리고 환전.
'환전소의 체류 시간이 2시간이라고 했던가. 그럼 앞으로 대략 한 시간 남은 거네.'
새 환전소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검의 산으로 오면서 봤듯, 도처에 널린 게 환전소였으니까.
다만.
'17만 카르마면… 주화가 170개.'
그나마 가방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든 주워 담을 순 있겠지만 과연 사람들이 그걸 가만 놔둘까?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사람이 다 빠져나간 환전소를 찾거나, 아니면....'
접근하는 사람을 전부 죽이거나.
스릇.
그사이 발치의 화살표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다음 목적지인가.'
영우를 검의 산으로 이끌었던 메인 퀘스트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메인] "초년병"
<임무> 화살표를 따라 검의 산으로 이동한 뒤, 운명을 교체하십시오.
<보상> 생존 장비
즉, 운명을 교체하란 지시까지 이행해야 완료 판정이 나는 것이다.
'뭔진 몰라도 서쪽에서 운명을 바꿀 수 있나 본데.'
스륵.
영우가 생각을 하는 사이 화살표가 또 한 번 움직였다.
'응?'
착각했나 싶어 눈을 껌뻑이자, 화살표가 재차 머리를 트는 게 보였다.
목표 지역이 움직이고 있는 거다.
'아니지… 지금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게 꼭 지역이 아닐 수도 있잖아.'
뭐가 됐든 화살표를 따라 가야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혹시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움직이기 불편하다거나."
"네네. 뛸 수도 있어요."
"그럼 잘 됐다. 이제 좀 달릴 참이거든."
영우가 칼과 방패를 바짝 당기며 앞장서자, 학생도 빈 두 손을 꽉 쥐며 걸음을 뗐다.
***
"헉… 헉!"
"후욱, 훅!"
난생 처음 해 보는 보디가드 역할.
칼에 방패까지 들고 뛰는 게 조금 불편했을 뿐, 이외엔 생각보다 어려운 게 없었다.
여태 마주친 모두가 이쪽의 무장 상태를 보고 알아서 피해 갔기 때문이다.
'환전소에서도 이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검의 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쉬지 않고 달려온 지 벌써 5분가량이 지났다.
영우의 경험상 슬슬 환전소들이 나타날 때였고, 그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학생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저… 아저씨."
"뭔데. 말해."
"혹시나 싸움이 벌어지면 저는 뭘 하죠?"
"뭘 하긴."
영우는 운을 띄워 놓고도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어서 잠시 머뭇거렸다.
전투 경험이 일천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살아 있어.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볼 테니까."
결국 영우가 자신의 고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어떻게든 살아 있으란 이야기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정말로 환전소 구간이 다시 나타났다.
전방 우측, 눈대중으론 약 150미터 거리.
'세상에. 이건 하늘이 준 기회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환전소 근처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꾸물거리는 실루엣으로 미뤄 보건대 기껏해야 너덧 명 정도.
"너, 이름이 뭐랬지?"
"예찬이에요. 강예찬. 아저씨는요?"
"난 정영우야. 이제 환전소로 진입할 거니까 내 곁에 딱 붙어 있어."
이 말과 함께 영우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환전소를 가리키자, 예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들 무기가 없어서 함부로 덤비진 못하겠지. 주화 회수만 빠르게 하면 된다.'
인생이 이렇게 술술 풀린 적이 또 있던가.
영우는 그새 50미터 거리까지 다가온 환전소를 주시하면서 방패를 꽉 붙들었다.
그러자 환전소 쪽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하나둘씩 영우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양측이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다.
"어...!"
"헉."
"뭐, 뭐야?"
겁에 질린 건 단연 환전소 측.
이들은 영우의 예상대로 비무장 상태였고, 대부분 노약자이기까지 했다.
전투 인력이라고 할 만한 자들은 진즉에 아귀다툼을 거쳐 검의 산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영우는 혹시 있을지 모를 도전자를 의식하며 일부러 악랄한 음성을 쏘아 냈다.
"비켜! 환전소 근처에 있는 새끼는 다 죽인다!"
그의 뒤를 따르던 예찬조차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살기.
이에 환전소 주변의 사람들이 전력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사자를 맞닥뜨린 가젤 무리처럼 말이다.
"지금 바로 가."
영우는 환전소 일대가 휑해지자마자 예찬을 그리로 떠밀었다.
"저, 저기에 손만 대면 되는 거죠?"
"맞아. 서둘러."
환전소를 확보했다고 끝이 아니다.
환전된 주화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부터가 진짜일 터였다.
일대의 모두가 이쪽을 주목하게 될 테니까.
게다가.
'환전소에 사람이 얼마 없다는 건, 검의 산에 체류 중인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해.'
그리고 이 말인즉슨.
'곧 무길 가진 사람들이 여길 지나간다.'
영우가 여기까지 생각하는 사이, 예찬이 드디어 환전을 시작했다.
짤그락.
영우에겐 트라우마나 다름없는 소리가 환전소 안에서 흘러나왔고, 곧이어 일이 벌어졌다.
촤르르르륵!
진홍색 주화 170개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온 것이다.
"아, 아저씨?"
당황한 예찬이 자신의 보디가드를 쳐다본다.
이에 영우는 배낭을 그쪽으로 던지며 황급히 외쳤다.
"전부 쓸어 담아!"
그러면서 자신도 바닥을 거의 기다시피하며 주화를 줍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돈이 저렇게 많아?"
워낙 큰 소란이었기에, 다른 환전소의 사람들이 금세 몰려왔다.
처음엔 십여 명이었다가 곧 스물, 서른… 나중엔 제아무리 완전 무장한 영우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인파가 돼 버렸다.
그럼에도.
"...."
그 누구 하나 바닥의 주화를 집어 가려 하지 않았다.
단순히 영우의 칼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애초에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이번 소동의 말미에 이르러 문제가 하나 벌어졌다.
"뭔데 사람이 이렇게 많아?"
"비켜 봐요, 좀."
누군가 강압적인 말투를 쓰고 있다.
인파의 맞은편.
영우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무기를 얻은 녀석들이 도착했구나.'
그래도 최악의 상황까진 아니었다.
주화 회수가 막바지에 이른 차였으니까.
"나머진 네 주머니에 넣어. 바로 이동할 거야."
영우가 배낭을 도로 짊어지며 예찬에게 지시하자, 녀석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영우의 뒤편을 바라봤다.
"…아저씨."
아마도 아까 그 목소리의 주인들이 뒤쪽에 도착한 것이리라.
"알아.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으라고."
"어? 아저씨!"
"...!"
영우는 예찬의 얼굴을 보고서 깨달았다.
놈들이 이미 선공을 시작했다는 걸.
홰액!
몸을 뒤로 비틀며 방패를 치켜들기 무섭게 둔탁한 타격음이 울렸다.
터엉!
뭔가 묵직한 것이 방패 바깥면을 두드린 거다.
'망치?'
이제 위협을 받을 때면 기숙사 근처의 환전소에서 두들겨 맞던 순간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그때 느꼈던 치욕감도 함께 말이다.
'이 씨빨 새끼들이.'
또다시 온몸의 세포가 시뻘겋게 끓는다.
영우는 방패 아래쪽으로 누군가의 하반신이 드러나 있는 걸 봤다.
그렇다면 그 위쪽엔 당연히.
"...."
이다음 그가 방패를 살짝 비껴 내며 칼날을 쑤셔 넣은 건 그야말로 찰나였다.
피슛!
"어?"
방패 저편의 상대가 놀란 소리를 낸다.
그러더니.
"어억? 아아악!"
악에 찬 비명을 질러 대며 불규칙한 뒷걸음을 쳤다.
영우가 방패를 걷어 내며 상황을 제대로 확인한 것도 이때였다.
상대는 총 세 명.
가장 가까이 있던 하나는 칼날에 오른쪽 눈이 꿰뚫린 채, 막 뒤로 넘어지는 중이었다.
한편 다른 둘은 끔찍한 모습이 된 동료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영우는 놈들이 쥔 무기부터 확인했다.
'창, 도끼.'
그다음은 위치.
'일렬로 서 있....'
영우는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고 무작정 달려 나갔다.
타탓!
두 번째로 가까이 있던 창잡이가 방금 자신과 눈을 마주쳤기 때문이다.
"…어."
한발 늦게 연산을 시작한 창잡이의 뇌가 버퍼링에 걸린 사이, 얼리버드가 놈의 얼굴을 사선으로 벴다.
프홧!
그러자 바로 그 뒤편에 서 있던 사내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가!"
자신의 위치를 음성으로 알려 주면서 말이다.
덕분에 영우는 소리가 난 쪽으로 방패를 내미는 것만으로도 한 합을 벌 수 있었다.
티잉!
역시 망치와는 다르게 다소 얄팍한 타격음.
그러나 이번엔 방패 아래쪽에 상대의 하반신이 보이지 않았다.
놈도 아까 본 게 있어서 공격이 막히자마자 부리나케 뒤로 물러선 거다.
하지만 영우의 집요함이 한층 앞섰다.
'날 건든 놈은 무조건 죽인다.'
타앗!
영우가 방패를 앞세우며 무서운 기세로 전진하자, 정신없이 뒷걸음치던 상대의 발이 꼬이고 말았다.
"억!"
외마디와 함께 중심을 잃고 옆으로 기우는 상대.
영우는 그걸 놓치지 않고 놈의 가슴팍에 얼리버드를 쑤셔 넣었다.
"…죽어!"
푸욱!
칼날이 상대의 몸속으로 한 뼘이나 들어가자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인파가 술렁였다.
"마, 맙소사."
"뭐야...?"
몇몇은 이미 현장을 빠져나가는 중이었고, 나머지도 영우를 괴물 쳐다보듯 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우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그의 고객인 예찬뿐이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걱정을 하는 듯한 대사였으나 정작 예찬의 눈엔 경외감이 가득했다.
자신의 보디가드가 무장한 세 사람 정돈 간단히 해치울 수 있다는 걸 방금 확인한 탓이었다.
물론 실상은 좀 달랐지만 말이다.
'끄… 끝인가?'
영우는 손이 벌벌 떨리는 걸 애써 억누르며 도끼 든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걸로 봐선 사망한 게 맞으리라.
그렇다면 남은 건 창잡이와 망치.
"으, 으으...!"
가장 산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창잡이였다.
사선으로 갈라진 얼굴 가죽에서 피를 쏟아 내면서도 필사적으로 기는 중이었으니까.
반면 눈을 찔렸던 망치는 가늘게 몸을 떨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이에 영우는 망치에게 먼저 다가가 목을 찌른 뒤, 그새 서너 발자국 더 멀어진 창잡이를 쫓아갔다.
사실 녀석은 더 이상 창을 쥐고 있지도 않았다.
저벅, 저벅.
"힉!"
영우의 발소리를 들은 사내가 일순 몸을 움찔한다.
그러곤 곧 뒷덜미를 쑤시고 들어온 칼날에 죽음을 맞이했다.
푹.
무려 1대3의 전투.
최후의 승자가 된 영우는 상대방이 모두 움직임을 멈춘 뒤에야 거친 호흡을 뱉어 냈다.
"헉, 허억."
그러자 숨을 꽉 죄고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리며 주변 상황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주머니가 불룩해진 채 멀거니 서 있는 예찬, 저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수십의 관중 그리고....
'어?'
언젠가부터 시야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한 줄의 문구.
[새로운 칭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영우가 문구에 시선을 주자, 곧 그 밑으로 새로운 문자열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이 당신의 무위를 목격했습니다. 그 누구도 당신이 '구미제일검'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뭐?'
영우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됐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제일검이 된다면 대단한 위세를 떨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당신을 알아볼 것이고, 그중 일부는 제일검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도전해 올 것입니다.
'설마 머리 위에 제일검이란 칭호를 붙이고 다니게 되는 건 아니겠지.'
마치 게임처럼 말이다.
영우는 아직 아무런 것도 붙어 있지 않은 자신의 머리 위를 힐끔 쳐다봤다.
자리를 빼앗기 위해 도전해 오는 자들이 있을 거란 내용으로 미뤄 보건대, 이 칭호를 얻는 방법은 구미제일검을 찾아가 죽이는 것 같았다.
다만 지금은 구미제일검이 공석인 상태다 보니 '많은 사람이 무위를 목격한' 자를 임의로 앉혀 놓는 것이다.
'어차피 제일검의 재목이 아니라면 얼마 안 가 칭호를 빼앗길 테니까.'
스릇.
이윽고 제 역할을 다한 문구들이 허공에 녹듯이 사라졌다.
그러더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게 될 제안이 눈앞에 떠올랐다.
파앗!
「구미제일검」 - 유일 칭호
[제일검의 위세]
[구미검법]
-구미제일검에 등극하시겠습니까?
7화 2. 구미제일검 (3)
꿀꺽.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침을 삼켰다.
일생일대의 기회 또는 위기가 찾아왔음을 직감한 탓이었다.
'구미제일검… 이 칭호를 얻는 순간 나는 모든 강자의 표적이 된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이 기회를 거부하는 게 옳았다.
언젠간 이쪽과 장비 수준이 비슷하면서도 신체 능력이 훨씬 뛰어난 적을 조우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단순한 칭호가 아니야.'
영우는 눈앞의 툴팁이 그저 '칭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구미제일검」 - 유일 칭호
[제일검의 위세]
[구미검법]
형식이 저것과 똑같은 아이템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리버드」 - 영웅 한손검
[매우 가볍습니다.]
이 말인즉슨.
'칭호도 아이템의 일종이야. 밑의 두 줄은 특수 옵션이라고.'
제일검의 위세, 구미검법.
정확히 무슨 효과인지는 당장 알 수 없으나 전투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은 분명해 보였다.
특히나 '구미검법'.
얼리버드의 '매우 가벼움'만 해도 체감이 엄청났는데, 과연 '검법'이란 이름까지 붙은 저 옵션은 어떻겠는가.
"...."
영우가 고민을 하고 있자, 이윽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구미제일검에 등극하시겠습니까?
…5초 뒤 획득 권한이 사라집니다.
…4.
…3.
'젠장, 생각할 틈을 안 주네.'
영우는 남은 시간이 줄어드는 동안 자신이 확보한 자산을 빠르게 되새겼다.
이제 곧 예찬에게 받아 내야 할 품삯을 포함해서 13만 3천 카르마.
여기에 더해 바닥에 널브러진 습격자들의 주머니를 뒤지면 얼마큼의 주화가 더 나올 터였다.
또한 습격자들이 떨어뜨린 장비인 창, 도끼, 망치도 자산의 일종.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한층 더 강해지는 대신 적을 여럿 만드는 것과 남의 이목을 피하는 것 중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일까?
'아니지. 난 애초에 후자가 불가능하잖아.'
영우의 시선이 얼리버드의 은백색 칼날에 닿는다.
그리고 때맞춰 카운트다운이 1초에 이르렀다.
영우가 다급히 구미제일검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이때였다.
'하겠다, 구미제일검...!'
행여나 늦었을까 봐 눈을 부릅떴고, 곧이어 영우뿐만 아니라 구미시 모든 이의 눈앞에 공고가 나타났다.
「구미 지역의 제일검이 선출되었습니다!」
「현재 구미제일검은 '정영우07'입니다. 1대, 방어 0회.」
「제일검이 되면 압도적으로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결투를 통해 제일검에 등극할 수 있으며, 승계 방식은 살해입니다.」
'승계 방식은 살해....'
영우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낌과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울긋불긋한 빛이 모여 들었다.
그러더니.
피잉!
날카로운 효과음과 함께 문자열 하나를 만들어 냈다.
『구미제일검』
다름 아닌 칭호였다. 영우가 예상한 대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머리 위에 붙여 버린 것이다.
"엇… 아저씨."
이 모든 장면을 멍하니 보던 예찬이 영우를 부른다.
이에 영우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이유를 깨닫고 침음했다.
'이런.'
자신의 눈에도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 체류 중인 지역은 '구미'입니다.
|이 지역의 제일검은 '정영우07'입니다. 1대, 방어 0회.
시야의 우측 상단에 자그맣게 붙은 이 문구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즉, 이젠 누구나 현지 제일검의 이름과 전적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방어가 0회라는 건 아직 도전자를 물리친 적이 없다는 뜻이겠지. 한동안 너 나 할 것 없이 다 덤벼들겠구나.'
다시 말해 지금은 일종의 취약 구간.
그렇다면 방어 전적이 얼마나 쌓여야 감히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게 될까?
"...."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높은 산이다.
영우는 조금 암담해진 심정으로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칭호를 바라봤다.
그러자 예찬이 달그락거리며 영우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이건 어떻게 하죠?"
뭔가 싶어 시선을 주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무기 3종을 품에 안은 예찬이 보였다.
습격자들이 남긴 유산을 챙긴 거였다.
"주화는?"
"…네?"
예찬이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이기에 영우는 말없이 시체들을 뒤져 주화를 찾아냈다.
7천 그리고 4천, 마지막 녀석은 5천.
'제법 악랄한 놈들이었나 보네.'
기초 생활 자금으로 주어진 게 3천뿐인데 그 이상을 들고 있었다는 건, 환전소에서 남의 주화를 뺏어왔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물론 본인이 환전자였고 간신히 일부만 챙겨 나왔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글쎄. 다짜고짜 남의 뒤를 치는 녀석들이 포인트를 안 쓰고 남겨 뒀을까?'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이었다.
악한 자들은 날릴 살도 많고 막아야 할 살도 많아서 카르마 포인트를 남길 수 없었다는 걸.
룸메이트였던 임봉희처럼 말이다.
반면에 모든 저격이 끝나고도 포인트가 남아 있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선했다.
첫 환전소에서 만났던 경찰이 그랬고, 검의 산에서 조우한 예찬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촤르륵.
영우는 망자들에게 빼앗은 주화를 배낭에 쏟아 넣으며 예찬에게 말했다.
"제대로 된 정산은 좀 안전한 곳을 찾고 나면 하자."
그러자 예찬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환한 얼굴을 했다.
"오… 좋아요."
예찬의 입장에선 영우 곁에 계속 붙어 있는 게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영우란 사내는 이제 '구미제일검'.
하지만 정작 제일검 본인은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너, 창을 쓰고 싶다고 했나?"
영우는 이렇게 말하며 예찬이 품고 있던 도끼를 빼내서 배낭의 간이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칼까진 넣을 자리가 없어. 나머진 네가 들고 다녀라. 유사시엔 사용하고."
"정말요?"
영우는 예찬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저 멀리 모여 있는 사람들을 흘깃 봤다.
그러곤 예찬의 어깨를 툭 치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물론이야. 이젠 너도 1인분 해야지."
***
서쪽, 또 서쪽으로.
영우와 예찬은 화살표를 따라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리고 수많은 예비 도전자를 마주쳤다.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구미제일검'이라는 칭호 때문이었다.
다만 십중팔구는 거리가 가까워진 뒤에야 드러난 영우의 무장 상태를 확인하고서 뒷걸음을 쳤다.
상대가 제일검이 아니더라도 검과 방패로 완전 무장한 상대와 싸울 자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깔끔하게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당신이 진짜 제일검이야? 안 믿기는데."
영우를 향한 날선 목소리.
아까부터 웬 거구 하나가 십여 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놈이 손에 든 건 도끼 한 자루가 전부.
"그럼 덤벼 보든가. 꼴사납게 뭐 하는 짓이지?"
영우가 뒤를 흘겨보며 쏘아붙인다.
물론 태생 싸움꾼이 아닌 그로선 순전히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또 다른 도전자가 와서 2대1 구도가 벌어질지 모르고, 잠깐 경계를 늦춘 사이에 후방 기습을 당하게 될는지도 몰랐다.
아마 저 덩치가 노리는 것도 그런 상황일 테고 말이다.
비겁하긴 하나 놈으로선 최선의 전략을 펼치고 있는 거였다.
'먼저 공격하려고 다가가면 잽싸게 도망치고… 이거 뾰족한 방법이 없는데.'
이게 바로 초임 제일검의 삶이란 말인가.
"나 같은 사람은 딱 보면 알아. 상대가 좆밥인지 아닌지 말이야."
사내는 잊을 만하면 이렇게 도발 멘트를 날리면서 영우의 반응을 살폈다.
영우가 또 덤벼들면 뒤편으로 달음질하려는 거다.
그러다 결국.
"어우, 이건 또 뭐야. 한두 명이 아니네."
딱 봐도 만만치 않은 새 도전자가 영우 일행의 측면에서 나타났다.
심지어 2인조.
후방의 골칫거리처럼 거구까진 아니었지만, 강단이 엿보이는 눈빛과 무기 조합이 문제였다.
방패와 칼을 나눠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방패를 쥔 사람은 전신이 근육질이었고, 방패의 외곽부가 붉게 물들어 있기까지 했다.
저걸 여태 무기로 잘 써 왔다는 방증이리라.
'이전에도 사람을 가격해 본 적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영우는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너희가 전부 범죄자 출신일 거 같지는 않은데."
영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자, 근육질의 사내가 하늘을 슬쩍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높으신 분들도 다 죽었고 온갖 게 다 돌로 변했잖아. 세상이 망했다고 봐도 되지 않나?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뭐라도 하나 더 챙겨 두려는 거야."
"우리도 아무나 다짜고짜 죽이진 않아. 하필 네가 제일검이고, 가진 것도 많아 보여서 이럴 뿐이지."
뒤의 대사는 근육남의 파트너인 칼잡이가 영우의 배낭을 가리키며 말한 거였다.
그러자 거구가 잽싸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봐요, 저랑 합공하는 게 어떻습니까? 여기서 더 시간 끌면 경쟁자만 늘어나요. 전리품은 공평하게 3등분하고 칭호는 각자 운에 맡깁시다."
강약약강… 아까 영우를 도발할 때와는 표정도 말투도 사뭇 달랐다.
"나쁠 거 없죠."
"그럽시다."
합의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이에 영우는 자신의 고객에게 조용히 일렀다.
"최선을 다해 싸워 보겠다만 내게 가망이 없어 보이면 틈을 봐서 도망쳐. 괜히 개죽음당하지 말고."
그런데 이어진 예찬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어차피 도망쳐 봤자 또 저런 사람들 마주치면 개죽음당할 거 아녜요? 저도 이제 무기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도와드릴게요."
창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예찬의 손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 뒤편의 거구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며 거리를 좁혀 왔다.
타탓!
때맞춰 옆쪽에서도 두 사내의 신발이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합공.
'이판사판이다.'
툭.
영우는 자신과 거리를 벌리라는 의미로 예찬을 밀친 뒤, 방패를 바짝 당기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어떻게든 첫 합을 버티고 한 명씩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대도 방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삼면으로 흩어지며 영우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촤아앗!
"...!"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 버렸다. 지난 상대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력.
'이 씹...!'
전술적인 고민을 할 틈조차 없었기에 영우는 순전히 본능에 따른 결정을 내렸다.
"흐아아!"
방패로 왼편을 가드하면서 우측으로 얼리버드를 크게 내지른 거다.
홰애애앳!
은빛 궤적이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파아아앗!
영우를 중심으로 웬 금빛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
"억?"
당장이라도 영우를 난자할 기세였던 세 도전자가 동작을 멈춘 것도 이때였다.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 아파 왔기 때문이다.
"어...!"
무슨 일인가 싶어 영우를 쳐다본 예찬도 곧 딱딱하게 굳어 버린 건 마찬가지.
구미제일검의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해 있었다.
"뭣...."
이게 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영우가 고개를 휘적거리자, 금빛 안광이 어지러운 궤적을 남겼다.
"설마."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영우.
머리 위로 시선을 옮기니 여느 때처럼 칭호와 툴팁이 나타났다.
「구미제일검」 - 유일 칭호
[제일검의 위세]
[구미검법]
'설마 제일검의 위세라는 게.'
영우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거구가 다시금 도끼를 휘둘러 왔다.
가까스로 위세의 영향을 벗어나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거다.
"뒈져!"
홰애애액!
육중한 기척을 뿜어내며 날아드는 도끼날.
하지만 정작 영우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바로 코앞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홀로그램이 칼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서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방어 자세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홰앳!
잽싸게 홀로그램을 따라 자세를 취하는 영우.
그러자 곧 도끼날이 영우가 내민 칼날을 타격하더니, 날의 경사면을 따라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
휘익.
순간적으로 거구의 몸이 옆으로 기운다.
그리고 이에 맞춰 홀로그램이 거구의 목 언저리를 찌르는 게 보였다.
―살(殺)
타격 지점에 '살'이란 표식을 띄우면서 말이다.
'아...!'
영우는 박자를 놓치기 전에 서둘러 홀로그램이 한 그대로 칼을 움직였다.
휘잇.
도끼날의 무게에 눌려 밑으로 기울어 있던 칼날이 탄성 있게 튀어 올랐고, 그 힘을 바탕으로 상대의 목을 쏜살같이 꿰뚫었다.
피슛!
"어."
"헉."
찌른 사람과 찔린 사람 모두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그러곤 곧.
쿠웅.
거구의 육중한 몸뚱어리가 무너져 내렸다.
8화 3. 4급 엑스트라였던 것 (1)
'미, 미친....'
순식간에 거구를 구멍 낸 영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이게 구미검법이구나.'
정확히는 실시간 검법 교습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홀로그램은 어디를 공격하고 어떻게 막아야 할지 시범을 보여 줄 뿐, 그걸 해내는 건 온전히 영우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홀로그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전투가 진행 중일 때만 나타나는 건가?'
영우는 대여섯 발자국 거리에 뻣뻣이 굳어 있는 두 도전자를 바라봤다.
이들의 시선은 바닥에 엎어진 시체와 영우 사이를 오가는 중이었고, 이를 통해 많은 걸 예감한 듯했다.
"이봐… 미안해. 우리가 실수를 한 것 같다."
"얌전히 물러날 테니 이것 좀 풀어 줘."
이것 좀 풀어 달라는 말에 영우는 비로소 깨달았다.
저들이 아직도 '위세'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뭐지?'
이에 영우는 언젠가부터 정상적인 기척을 내고 있던 예찬을 쳐다봤다.
"넌 괜찮아?"
"어? 네. 아까는 엄청 무서워서 다리가 굳을 정도였는데 금방 나아졌어요."
"그래?"
그렇다는 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첫째, 예찬의 기가 굉장히 세서 제일검의 위세를 빠르게 떨쳐 냈다.
또는 둘째.
'내가 이 녀석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는 상대에게 살의를 가져 보면 간단히 검증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그게 쉽게 되진 않았다.
'단순히 노려보는 정도론 안 되는구나. 진짜 죽일 마음이 들어야 하는 건가.'
하기야 아무에게나 살의를 가질 수 있다면 그건 보통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럼 저쪽은.'
스윽.
영우가 두 도전자에게 성큼 다가가자 대번에 변화가 생겼다.
"...!"
놈들의 몸 곳곳에 살(殺) 표식이 나타난 거다.
다만 홀로그램까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거네.'
왜인지 씁쓸해진다.
하지만 더는 머뭇거릴 시간도 이유도 없었다.
'이런 놈들을 살려서 보내는 게 더 말이 안 되지.'
영우가 얼리버드의 각도를 위협적으로 비틀자, 때가 왔음을 직감한 두 사내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아, 안 돼! 제발!"
"그만둬! 진짜 미안하다고!"
그러나 영우는 가차 없이 둘의 목을 차례대로 찔렀다.
푸슉, 피잇!
그러곤 바닥에 피가 고이기도 전에 놈들의 주머니를 뒤져 주화를 찾아냈다.
1천, 3천.
심지어 도끼를 들고 있던 거구는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체격이 좋았는데도 환전소에서 자신의 기초 자금조차 챙겨 나오지 못한 것이다.
'내 배낭에 집착한 이유가 다 있었군.'
어쩌면 놈도 환전소에서 강도를 당했던 걸까.
영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시야 구석의 지역 현황으로 눈을 돌렸다.
뭔가 위화감이 들어서였다.
|현재 체류 중인 지역은 '구미'입니다.
|이 지역의 제일검은 '정영우07'입니다. 1대, 방어 3회.
'방어 3회...?'
방금 전투를 3연속 타이틀 방어로 계산한 것이다.
이 와중에도 일대엔 사람이 계속 지나가고 있었다.
대부분 영우의 발치에 시체들이 널브러진 걸 보고서 멀리 돌아가긴 했지만 말이다.
"저… 이거 다 챙길까요?"
"...?"
예찬이 말을 걸어오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각종 무기를 한가득 안고 있는 게 보였다.
망치, 창, 방패, 검.
그동안 얻은 전리품들이었다.
"그래선 얼마 걷지도 못하겠는데."
"그, 그러게요."
영우는 예찬의 얄팍한 팔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창이랑 방패만 챙겨. 나머진 버리고. 어차피 다 쓸 수도 없을 테니까."
"이걸 전부 버리라구요?"
예찬이 너무 아깝다는 표정으로 무기들을 바라봤으나 영우는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새 무기야 다음 도전자들이 계속 들고 올 거다. 그러니 미련 갖지 마. 바로 이동한다."
***
다시 서쪽으로.
시계는 물론 휴대폰까지 전부 돌이 되었기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던전』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세계에 새로운 구성 요소, 『의뢰』가 추가되었습니다.
지금도 초 단위로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세계에 새로운 몬스터 유형, 『기사』가 추가되었습니다.
―[재벌3세-신연화]는 이제 검은 기사가 되어 여러분을 위협합니다.
이번엔 또 새로운 유형의 몬스터와 '네임드' 추가.
아직 몬스터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저런 게 어딘가 존재하게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리셋이라더니… 이건 형벌에 가깝지 않나.'
누가 봐도 리셋된 세계는 새로운 세상보단 지옥에 가까웠다.
리셋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살인과 약탈뿐이었으니까.
'좋은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건가. 이제 쭉 이렇게 사는 거야?'
영우가 암담한 표정을 하고 있자, 예찬도 앞날이 걱정됐는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세요?"
"뭘?"
"저하고 거래가 끝난 다음에요. 안전한 곳을 찾아서 정산을 마치고 나면 거래도 끝나는 거 아녜요?"
"그렇긴 한데… 그 뒷일까진 아직 생각을 안 해 봤네."
이에 예찬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영우를 바라봤다.
"가족은요? 보통은 가족을 찾으러 가잖아요."
"난 혼자야. 찾을 가족이 있었다면 너하고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아."
영우의 대답을 들은 예찬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는 넌? 너야말로 얼른 부모님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냐."
"저도 지금 보육원에 있어요."
"개판이네."
"그렇죠."
영우는 예찬이 씁쓸하게 웃는 걸 보면서 다시 질문했다.
"몇 학년이야?"
"3학년이에요."
"생각보다 나이가 좀 있네. 그럼 곧 퇴소잖아."
보육원 퇴소를 말하는 거다.
원칙적으로 만18세가 되면 보육원을 떠나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예찬은 이 말을 듣고서 영우 또한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예. 이젠 상관없을 거 같지만요."
"그렇겠지."
영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발치의 화살표를 바라봤다.
아까부터 화살표가 굉장히 빠르게 기울고 있어서였다.
"거의 다 도착한 거 같은데."
영우가 이렇게 말하기 무섭게, 저편에 이제껏 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나타났다.
"어...?"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규모에 예찬이 먼저 걸음을 멈췄고, 반대로 영우는 사람들의 무장 상태를 살피기 위해 앞으로 더 나아갔다.
'검의 산을 통과한 사람들이 전부 여기 모였구나.'
영우는 인파의 대부분이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심지어 얼리버드를 가진 자마저 심심찮게 보였다.
현시점 구미 각지의 선두 주자들이 이곳에 모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체 어디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거야...?'
다들 앞쪽을 바라보느라 뒤편을 살필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영우와 예찬은 아무런 제지 없이 인파의 후열에 합류했다.
일부가 뒤늦게 영우의 칭호를 보고서 흠칫했으나, 이내 다시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지만 영우와 예찬 두 사람도 곧 납득하게 됐다.
스윽.
사람들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가 보게 됐기 때문이다.
'박도환...?'
'해체'되어 죽은 줄 알았던 대통령 박도환이 길거리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 있지? 퀘스트를 추가하고 죽은 거 아니었어?'
영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통령을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텔레비전에서 종종 보던 바로 그 얼굴에 말끔한 정장 차림.
키나 체격도 평소 알던 대통령의 것과 똑같았지만 한 가지가 영 달랐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대통령의 신체가 이따금씩 깜빡거리고 있다는 점.
'뭐야, 저것도 홀로그램인가.'
피핏.
방금 또 박도환의 모습이 일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거북스러울 정도의 이질감이 든다.
여기에 더해 그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정도 되는 원이 빨갛게 그어져 있어 아무도 섣불리 접근하질 못하고 있었다.
'진짜 박도환일 리가 없어. 그 많은 도시 중에 하필 여기에 와 있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잖아.'
그렇다면 뭘까.
미지의 존재가 박도환의 모습을 빌려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어쩌면 전국의 모든 도시에 저런 게 하나씩 출현했을지도 모른다.
"...."
영우는 발치의 화살표가 박도환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서.
슥.
박도환이 손목의 시계를 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 다음엔 좌중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 다 됐군요. 지금부터 여러분의 기존 운명을 공개하겠습니다.
"…운명?"
"운명이면 운명이지 기존 운명은 또 뭐야?"
"퀘스트에 운명을 교체하란 말이 있었잖아요. 그거 때문인 거 같은데."
사람들이 술렁이는 사이, 모든 이의 머리 앞에 노란빛을 띠는 직사각체가 나타났다.
파앗, 팟, 팟!
그러곤 이어지는 박도환의 부연.
―지금 보고 계신 것은 세계가 리셋되기 이전의 운명록입니다. 만약 리셋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그곳에 적힌 그대로 살고 죽었을 겁니다.
"뭐라고?"
"그게 말이 돼?"
박도환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 각자의 운명록에 시선을 꽂았다.
영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운명록의 첫줄부터가 눈길을 확 끌었기 때문이다.
『정영우-49523-IIIII_II-4급-엑스트라』
'4급… 엑스트라.'
알 수 없는 숫자와 바코드 사이에서도 자신의 이름 석 자와 4급 엑스트라란 명칭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저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밑의 내용들이 확인시켜 줬다.
「이 인물은 4급 설정의 무작위 조합물입니다.」
「부모의 설정에 영향을 받아, 탄생과 동시에 다음의 불변요소를 가집니다. #4급 #고아」
「태생 4급 조합물이므로 생애주기 동안 2급 이상의 설정치 획득에 역보정을 받습니다.」
이건 쉽게 말해서 4급으로 태어난 사람은 평생 애를 써도 2급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태생 급수에는 부모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말이다.
'…이게 진짜야? 애초에 내부적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운명록은 밑으로 계속 이어졌다.
[부] : 6급 엑스트라
[모] : 1급 조연
'아버지가 6급 엑스트라였구나. 그런데 어머니는....'
엑스트라가 아닌 조연. 심지어 등급이 아버지보다 다섯 단계나 높은 1급이다.
아마 최상 등급일 것이다.
그렇다면 1급 조연이란 어떤 인물일까?
'아니, 그 이전에 6급 엑스트라인 남자가 어떻게 1급 조연을 만나게 된 거지?'
영우가 부모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갓난아기였던 자신을 보육원 앞에 버리고 떠났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간 부모의 정체는커녕 생사유무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 세계가 리셋되고 나서야 부모의 신분을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기존 세계의 내부 설정을 엿보는 방식으로.
"...."
영우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자 또다시 운명록이 위로 밀려 올라가며 다음 내용을 나타냈다.
|이름 : 정영우
|역할 : 4급 엑스트라
|기능 : 배경, 보수재
|생성 : 1992년 4월 8일 오후 11시 41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수정.
|소멸 : 2028년 11월 7일 오후 8시 36분, 귀가 중 취객에게 구타당해 사망.
'시발, 이건 또 뭐야.'
속이 메스꺼워진다.
영우는 더 버티지 못하고 운명록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예찬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녀석의 눈앞에 떠 있는 운명록도 함께.
|이름 : 강예찬
|역할 : 6급 엑스트라
|기능 : 배경, 지우개
|생성 : 2006년 7월 16일 오전 2시 30분, 강제 간음에 의한 수정.
|소멸 : 2039년 2월 1일 오후 8시 36분, 주점에서 근무 중 고객을 살해 후 자살.
9화 3. 4급 엑스트라였던 것 (2)
"어...."
불가항력이었다.
영우가 예찬의 운명록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 말이다.
생성… 06년, 강제 간음에 의한 수정.
소멸… 39년, 주점에서 근무 중 고객을 살해 후 자살.
요약하자면 예찬은 강간의 결과물이며, 이 때문인지 세상에 고아로 버려져 자라다가 서른 중반쯤 술집에서 손님을 죽이고 자살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3년 뒤 취객에게 살해당한다는 영우의 운명도 충격적이긴 했지만 예찬에 비할 바는 못 됐다.
게다가.
'…역시 모르고 있었구나.'
영우는 예찬의 시선이 '강제 간음'이란 단어에 딱 붙어 있는 걸 보고서 마른침을 삼켰다.
녀석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미친."
"내가 다음 달에 죽을 예정이었다고?"
"이, 이걸 누가 정한 건데? 미래가 정해져 있었다는 게 말이 돼?"
한동안 정적만 흐르던 일대가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들 자신의 태생과 결말이 전부 정해져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은 거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인가.
리셋 이후의 세계다.
용과 퀘스트가 존재하며, 하늘에선 칼이 쏟아져 내리는 세계.
여기선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이미 발생했다. 아니, 확인됐다.
일찍이 정해져 있던 나의 운명, 계급.
"...."
고성이 오가던 장내가 다시 고요해지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자 말없이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던 박도환이 입을 열었다.
―모든 분께 유감을 표합니다. 암울한 운명을 엿본 분들은 실망이 크셨을 줄로 압니다.
―반대로 윤택한 삶이 예정되어 있던 분들은 리셋으로 인해 그것을 잃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리셋된 세계에선 기존 운명이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리라.
이에 몇몇이 바로 반응을 했다.
"그럼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더는 운명도 없으니 그냥 알아서 살라는 건가?"
"아니지. 설령 운명이 사라졌다고 해도 사람은 그대로잖아. 1급으로 태어났던 놈들은 여전히 1급 설정치를 가지고 있을 거 아니야."
"맞네. 급수까지 리셋된 건 아니네. 그러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영우만 해도 기존의 신체 조건이 그대로 이어진 탓에 달리기나 몸싸움 등에서 열세였으니까.
심지어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운명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뭘 어떻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돈이고 음식이고 전부 돌이 됐잖아."
"맞네. 이제 돈은 어디서 벌지?"
흉기를 하나씩 든 사람들이 진지하게 먹고 살 걱정부터 하는 광경은 기괴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이에 박도환이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
그러자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운명록의 내용이 전부 사라지고 각기 다른 일련의 숫자가 나타났다.
적게는 0에서부터 많게는 10만 단위의 숫자.
영우의 경우는 15만 3천이었다.
「153,000」
그리고 이를 본 영우는 이 숫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보유한 카르마.'
그것도 단순한 보유량이 아니었다.
이건 예찬과의 계약까지도 고려한 수치였으니까.
그저 구두계약일 뿐이었던 두 사람 간의 거래가 운명록에 자동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운명록에 새겨진 것은 현시점 여러분이 확보한 카르마의 양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이 카르마를 이용해 자신의 외모를 바꾸거나 신체 능력을 향상하고, 더 나아가서는 돌이 되어 버린 이전 세계의 물건을 본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습니다.
'외모를 바꾸고 신체 능력을 향상한다고?'
영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사람들이 앞다퉈 질문을 던졌다.
"당장 카르마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요?"
"카르마는 어디에서 더 얻을 수 있죠?"
이에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대통령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
[00:25:19]
박수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타이머.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옮겨 가자 박도환이 부연했다.
―카르마를 획득하는 방법은 약 25분 뒤 출현할 변이자와 마물들을 처치하는 것뿐입니다.
"…변이자?"
"이건 또 뭔 소리야?"
다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불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연중 저 대사의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영우도 마찬가지였다.
'…돌아오는 거구나, 변이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소멸, 변이, 해체.
대중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져 세 가지 선택지 앞에 서야만 했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괴물이 되는 선택지인 '변이'를 고른 자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런 자들이 이 세계로 돌아와서 무엇을 하겠는가.
'…복수.'
영우는 주변을 훑어봤다.
검의 산을 통해 무기가 보급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아서였다.
―대부분의 변이자는 자신과 같은 유형의 마물 무리와 함께 출현하며, 이 마물들 역시 소멸할 때 카르마를 남깁니다.
"무,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괴물하고 싸워서 돈을 벌라고?"
"싸우기 싫은 사람은? 아니, 싸울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을 거 아니야?"
당연한 반응이 이어진다.
그 누구도 직장으로 출근하는 대신 마물과 싸우는 것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에게 닥친 재앙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짝!
박도환이 또 한 번 박수를 친다.
그러자 허공의 타이머 밑에 일련의 숫자가 나타났다.
「1,000」
―내일부터 매일 밤 10시에 세금이 자동 징수됩니다.
―기본 세액은 1천 카르마이며, 세금 미납자는 징수 시점에 즉시 소멸하므로 반드시 카르마를 확보하셔야 합니다.
"...!"
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기초 생활 자금이라고 해 봐야 3천 카르마가 지급됐을 뿐이고, 이마저도 환전소의 난리통 탓에 온전히 챙긴 자가 많지 않았으니까.
즉, 마물과 싸우지 않으면 수일 이내에 세금 미납으로 죽게 되는 것이다.
―이제 변이자 귀환까지 22분 남았습니다.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이 말을 끝으로 박도환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초년병' 퀘스트가 완료됐다.
피잉!
<퀘스트 완료 - "초년병">
<보상 지급>
|생존 장비
스르릇.
퀘스트 문구의 변화와 함께 장내 모두에게 허리띠가 채워졌다.
무기를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철제 고리가 하나 달린 일종의 간이 칼집이었다.
"엇."
"어, 뭐야."
"이게 생존 장비라고?"
기대 이하의 퀘스트 보상에 다들 불만을 내뱉는 찰나.
투우웅!
곧바로 하늘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수십 개의 거대한 빛기둥이 구미시 곳곳에 내리박히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이번엔 또 뭘까.
사람들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저건 누가 봐도 마물들의 출현 위치.
심지어 빛기둥 중 하나는 이곳과의 거리가 채 10미터도 안 되는 지점을 비추고 있었다.
"꺄아악!"
"도… 도망쳐!"
절대다수가 본능에 따라 도주를 선택했다.
그러나 영우는 예외였다.
'…도망친다고?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마물과의 전투라잖아. 내일부터 매일 세금을 내야 한다는데 도망치면 어쩌자는 거야.'
사실 이건 다른 사람이 아닌 영우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는 리셋된 세계에서 '성공 경험'을 착실히 쌓아 온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환전소에서 얼리버드 획득, 검의 산에서 방패 확보 그리고 종래엔 1대3의 전투를 해내며 구미제일검에 등극....
이렇다 보니 그가 이 세계의 위협들을 단순히 두렵고 피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4급 설정치를 기반으로 한 본능은 더 나아가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
지금도 얼리버드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으니까.
'마물들의 전투력이 말도 안 되게 높진 않을 거야. 적어도 인간 평균의 전투력이라면 싸워 볼 만한 수준 아닐까? 마물 사냥이 유일한 카르마 수급처라고 했으니까.'
영우는 박도환이 일러 줬던 내용들을 되새기며 빛기둥 천지인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 예찬이 자신의 옆에 멀거니 서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녀석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운명록이 있던 자리를 빤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직도 '출생의 비밀'에 충격받은 상태인 걸까.
"…괜찮아?"
영우가 조심스레 예찬의 어깨를 건드리며 묻자, 그제야 죽은 사람처럼 보이던 녀석의 눈빛이 조금 살아났다.
"아… 예."
그러더니 이번엔 예찬이 되물었다.
"아저씨는 괜찮으시구요?"
"어? 나야 뭐...."
1급 조연이었던 어머니와 6급 엑스트라였던 아버지. 영우 또한 자신의 내력에 호기심이 생긴 터였지만 당장은 후순위의 문제였다.
[00:19:26]
19분 뒤면 변이자와 마물 떼가 출현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약속한대로 정산부터 해 줄게.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나도 고마웠고."
영우가 배낭을 열어 고객의 몫에 해당하는 주화를 집어 내밀자, 예찬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안전한 곳에서 정산하겠다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지금 여기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나?"
"아니...."
영우의 말에 반문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예찬은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대를 까맣게 채웠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도망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거부터 빨리 받아. 양손이 다 묶였잖아."
"네?"
무슨 소린가 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영우가 양손으로 주화들을 움켜쥐고 있는 게 보였다.
자신을 비무장 상태로 있게 하지 말라는 의미였던 거다.
"아...!"
예찬이 허둥대며 주화를 받아 내자, 비로소 손이 비게 된 영우가 칼집에서 얼리버드를 뽑아 들었다.
"난 여기서 좀 쉬었다가 마물들하고 싸워 볼 거야. 너도 이제 네 앞가림 정돈 할 수 있을 테니까 가고 싶은 곳으로 가. 경호 계약은 여기까지다."
영우는 이 말과 함께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론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해 예찬을 정면으로 바라본 채였다. 오른손엔 얼리버드, 왼손엔 방패가 단단히 쥐여 있었고 말이다.
이에 예찬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영우를 따라 땅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아무리 아저씨여도 여기 혼자 계시면 위험하지 않을까요? 차라리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는 게 그나마...."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최소한 마물들의 시선이 분산되기라도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영우의 생각은 달랐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뒤에서 기습을 당할 확률도 높아지겠지. 상대해야 할 마물의 수까지 더 많아질지도 모르고."
그러니 차라리 여기서 대기하다가 빛기둥 하나 분량의 마물만 상대해 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예찬은 영우가 지나치게 무모하다고 여겼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구미제일검이지 않은가. 살해를 통해서만 승계가 가능한 칭호의 주인 말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등을 보인 채 마물과 싸웠다간 뒤통수를 맞을 게 자명했다.
"…그럼."
예찬이 조심스레 운을 떼자 영우가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길을 줬다.
"등 뒤 말고 옆에서 싸우는 사람은요?"
"옆? 네가 여기 남아서 싸워 보겠다고?"
영우가 턱을 긁적이며 예찬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곤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명 정돈 괜찮겠지. 하지만 내가 판단을 잘못 내린 거라면 넌 여기서 개죽음당할 수도 있어. 잘 생각해."
그러자 예찬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저씨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죽었을 텐데요 뭐."
"...."
운명록에 적혀 있던 내용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검의 산에서 있었던 일을 뜻하는 걸까.
영우의 표정이 묘하게 굳자 이를 알아챈 예찬이 애써 목소리를 끌어 올렸다.
"아이, 농담이에요. 그나저나 아까 설명을 들어 보니까 카르마로 신체 능력도 향상할 수 있다던데 정말일까요?"
어색한 화제 전환이다.
하지만 영우도 내심 궁금하던 차였기에 배낭에서 주화를 하나 꺼내 살폈다.
"놈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닐 텐데… 방법을 안 알려 주고 갔네."
오백 원 동전 크기의 진홍색 주화.
뒷면엔 아무것도 없고, 앞면의 정중앙에만 가로 실선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1천 카르마라는 표시인가.'
주화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봤으나 별다른 일이 벌어지진 않았다.
저편에 앉은 예찬도 주화를 팔에 대 보고 바닥에도 던져 보는 등, 이런저런 시도를 해 봤지만 뭔가 발견하진 못했다.
하기야 신체 접촉만으로도 카르마의 특수 기능이 활성화되는 것이었다면 주화를 집는 순간에 알았을 거다.
'이걸 대체 어떻게 쓰라는 거지? 이래 가지곤 날이 갈수록 짐만 늘어나는 거잖아. 가방이 없는 사람들은 진짜 곤란하겠는데. 이거 뭐 먹어 없앨 수도 없....'
여기까지 생각한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혹시 이걸 먹을 수도 있나?
외모를 바꾸고 신체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쓰인댔으니 아예 말이 안 되진 않았다.
'....'
그리고 애초에 이따위 세상에서 말이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하겠는가.
영우는 망설이지 않고 주화를 입 안에 넣었다.
그러자.
피잉!
그가 주화를 채 씹기도 전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
10화 3. 4급 엑스트라였던 것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