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22. 관악을 보게 하라 (4)
"어!"
"아...!"
점퍼 차림의 청년들은 물론이고 영우마저도 홀린 듯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쐐애애앳!
허공을 갈가리 찢으며 내려오고 있는 저 빛기둥들은 다름 아닌 마물 표식이었기 때문이다.
스앗!
이윽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의 눈앞에 타이머가 나타났다.
[00:06:11]
6분 11초.
이 땅에 마물과 변이자가 출현하기까지 남은 시간.
'타이머가 등장하는 시점도 매일 다르구나.'
영우는 지난날 봤던 마물 타이머를 떠올렸다.
첫날 구미에서 25분, 둘째 날 상주에선 무려 10초, 그리고 삼 일째인 오늘은… 6분.
'무슨 차이인 거지? 순전히 무작위인가?'
영우가 타이머를 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 웅성거리던 점퍼 차림의 청년들이 철마를 탄 괴인에게 하나둘씩 시선을 모았다.
"저...."
이윽고 입을 뗀 누군가.
이에 영우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건장한 청년이 얼굴 근육에 힘을 꽉 준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예. 말씀하세요."
영우가 말을 하다 만 상대에게 문장을 마저 잇길 권하자 일대가 다시 술렁였다.
"헉?"
"진짜 사람이네."
"그럼 저건 뭐야...?"
인파 속에서 누군가 말한 '저거'란 철마 네귀그를 일컫는 것일 터였다.
온갖 장비를 두른 영우의 겉모습 자체도 심상치 않지만, 무엇보다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네귀그 때문에 모두가 영우의 정체를 가늠하지 못했던 거다.
"저는 서울대 소속의 김대원이라고 합니다. 근방에 나타날 마물을 막기 위해 여기 나와 있구요. 실례지만 선생님께선… 여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건장한 청년이 단어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고르며 영우를 올려다본다.
네귀그에 올라탄 탓에 영우는 실제로 높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무위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좌중의 청년들도 그 사실을 직감한 듯했다.
"...."
자신들의 머릿수가 훨씬 많은 데다가 6분 뒤면 사방에 마물이 쏟아져 내릴 텐데도 칼을 뽑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서울대분들이시군요."
영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앞의 청년들이 걸친 점퍼를 다시 살폈다.
예상대로 이 자리의 모두가 입은 건 '서울대 과잠'이었던 것이다.
"그럼 관악구의 마물은 서울대가 독점하고 있나요? 듣자 하니 서울은 마물도 허락받고 잡아야 한다던데요."
영우가 앞서 만난 경관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묻자, 경직되어 있던 김대원의 표정이 아주 살짝 풀렸다.
'서울 출신이 아니지만… 그나마 안내는 듣고 온 사람이구나.'
대원의 눈이 아주 빠르게 외지인의 허리에 채워진 두 자루의 칼끝을 훑는다.
다행히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일부러 칼을 닦고 온 게 아니라면, 오는 길에 경관들을 베진 않았다는 뜻.
"저희는 본교 근처의 마물만 처리하고 있고, 척후병 사업은 관악 경찰서에 일임한 상황입니다."
척후병 사업.
경관들이 말한 마물 사업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제가 관악구의 마물에 손을 댈 경우 곤란해질 수가 있다는 거네요."
상대가 워낙 예의를 갖춰 대화하기에 영우도 최대한 점잖게 말을 풀었으나, 대원과 서울대생들로선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외지에서 막 올라온 괴인이 아닌가.
'우리의 룰을 아는 것과 그걸 달게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다. 하물며 저렇게 장비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걸 보면....'
대원의 시선이 네귀그를 떠나 영우가 걸친 온갖 장비들에 닿는다.
머리에 뒤집어 쓴 투박한 투구부터 시작해 금빛 장갑에게 보호받고 있는 양손, 팔목에 휘감긴 살아있는 뱀까지.
이 세상의 구조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괴인을 보고서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물이고 변이자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이면서 올라왔겠구나. 상인도 한둘을 만나 본 게 아닌 것 같고.'
따라서 이곳의 마물에 손을 대면 곤란해지느냔 영우의 물음이 일종의 협박처럼 들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으음, 일단… 제 자율권으로 이 근처의 마물은 협조를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러나 정작 영우는 청년들의 밥그릇을 뺏을 생각까진 없었다.
"마물을 두고 다투자고 물어본 건 아녜요. 그럼 변이자는 관악제일검이 단독으로 맡나요?"
"...!"
변이자, 그리고 관악제일검.
영우의 입에서 두 단어가 발음되자 장내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선생님께서 여기 오신 이유가 변이자를 처치하기 위함입니까?"
아까와 달리 굉장히 날선 말투.
영우는 그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렇습니다만… 관악제일검도 서울대 소속인가 보네요."
대번에 칼날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영우가 여태 거쳐 온 지역들은 대개 그랬으니까.
그러나 김대원을 포함한 서울대생들은 끝까지 살의를 보이지 않았다.
금빛 섬광의 감각 탈취 알람이 울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예, 맞습니다."
대원은 이렇게 말하고서 영우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가 본교를 대표할 자격까지는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관악구를 떠나 주십시오."
"...."
이변의 연속.
영우는 대원의 정수리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사실상 '우리 지역에서 꺼져.'라는 말이나 다름없겠지만, 이렇게 정중한 '꺼져'는 리셋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라....'
룰을 안내했던 경관의 말에 따르면 서울 로테이션을 고안한 게 서울대고, 이 학교가 정부의 수뇌부 역할을 맡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니 이곳이 외지인과의 전쟁으로 피바다가 되면 여러모로 곤란해지긴 할 터.
하지만.
[00:04:11]
이제 시간이 4분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지역으로 가기엔 다소 늦었고, 영우는 오늘 안에 변이자를 꼭 처리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금빛 홍수]
|5개 이상의 지역에서 황금비를 부르십시오. (4/5)
[도고] "강호초출"
<임무> 능력치 총합 3천 이상의 대상과 1/2회 결투하십시오.
<보상> 500만 카르마
<특수> 본 결투에선 반드시 도고의 지원 사실을 고지해야 합니다.
'금빛 홍수'와 '강호초출' 클리어를 목전에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복수심에 눈이 뒤집힌 강남제일검과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변이자 처치를 뒤로 미룬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이지 않겠는가.
"…미안합니다. 변이자를 포기하면 제가 곤란해져서요. 그렇다고 다른 분들을 해칠 생각은 없으니 제가 관악제일검과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죠."
영우가 결국 제안을 거절하자, 서울대 측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일검끼리 시가지에서 싸우는 건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기면 다른 제일검들의 추격을 받게 되실 겁니다."
"...."
다른 제일검들의 추격.
영우는 대원의 말에서 또 한 번 '서울'을 느꼈다.
"이미 당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게 무슨...?"
영우는 멍한 표정을 짓는 대원을 뒤로 하고 터널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시커먼 터널 저 안쪽이 점차 밝아 오는 게 보였다.
태영과 종수가 이제야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형님!"
엔진음을 뿜어 대며 현장에 도착한 순찰차 안에서 종수가 커다란 상체를 쑥 내밀었다.
그러더니 영우의 앞에 늘어진 십여 명의 서울대 검수를 보고서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놀란 건 서울대 측도 마찬가지였다.
순찰차를 운전하고 있는 태영의 모습은 누가 봐도 진짜 경찰이었으니까.
[00:03:21]
그 와중에 남은 시간은 3분으로 줄어 있었다.
"관악구의 경찰들도 치안 인력인가요? 제 일행이 사람들에게 먼저 공격받을 수도 있는지 묻는 겁니다."
이에 대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어도 관악에선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묘한 답변이다.
하지만 당장은 그거면 충분했기에 영우는 고삐를 다시 그러쥐었다.
***
봉천 터널의 끝자락이 서울대학교 정문과 인접해 있었다는 사실은, 서울대 검수들과의 대치 현장을 떠나고 나서야 알게 됐다.
현장을 벗어나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서울대 정문의 랜드마크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머론 아까 본 과잠 차림의 학생들보다 훨씬 큰 규모의 인파가 바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뭐야, 수백 명은 될 거 같은데.'
어쩌면 저게 서울대의 본대에 해당하는 인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여유까진 없었다.
[00:02:42]
변이자 출현까지 남은 시간, 2분 42초.
영우는 그사이 거리를 제법 좁혀온 태영과 종수를 향해 다시 이별을 고했다.
"아무래도 제가 먼저 변이자 쪽으로 가 있어야겠습니다. 이대론 제시간에 도착 못 하겠어요."
그러자 조수석의 종수가 저 멀리 보이는 붉은 빛기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걱정 말고 먼저 가십시오. 저희는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예. 가능하면 이쪽 사람들과 마찰하는 건 피하시고요."
종수가 다소 도전적인 성격이긴 하지만, 뼛속까지 경찰인 태영이 함께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영우는 태영에게 잘 부탁한다는 뜻을 눈빛으로 전하고서, 즉시 네귀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뀌이이익!
영우의 신호를 받은 네귀그가 순간 고개를 낮추더니, 그대로 가속을 시작했다.
콰콱!
강철 발굽이 아스팔트 도로를 강하게 때리자 시커먼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영우가 보고 있던 풍경도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굉장하네. 얼마나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지?'
영우는 아직 거리감이 상당한 저편의 붉은 빛기둥을 바라봤다.
[00:02:20]
"이제 시간이 2분밖에 안 남았어. 저 붉은 곳까지 최대한 빨리 갈 수 있겠어?"
영우의 말에 네귀그가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뀌익.
마치, 가능은 한데 괜찮겠느냐는 듯한 느낌.
그래서 영우는 대답 대신 네귀그의 고삐를 세게 쥐었다.
그러자.
취이이익!
네귀그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녀석의 전신에서 웬 증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어어? 자, 잠깐...!"
왜인지 불안한 느낌이 든 영우가 고삐를 잡아당기려 했으나.
-퀴이이...!
네귀그가 이미 전력 질주를 시작한 뒤였다.
퍼어엉!
폭탄이 터졌나 싶을 정도의 굉음.
이 소릴 일대의 모두가 들었을 거란 생각은 한참 뒤에나 들었다.
81화 22. 관악을 보게 하라 (5)
콰아아앗!
네귀그의 고속 주행은 실로 엄청났다.
좌우를 스쳐 가는 건물들이 잔상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대신 그만한 부작용도 있었다.
그건 바로.
"꺄아악!"
"괴, 괴물이야!"
"마물이 벌써...?"
사람이 많은 곳을 지나가기엔 굉장히 부적합하다는 점.
지금 관악구 곳곳엔 곧 나타날 마물을 기다리는 '마물 사업자' 경찰과 그들의 고객이 잔뜩 모여 있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철마를 탄 무언가가 증기를 뿜어 대며 다가오니 대번에 난리가 난 것이다.
"사, 살려 줘!"
"뭐 해요? 빨리 막아요!"
고객들은 마물 사업자인 관악 경찰들에게 수수룟값을 하라며 악을 썼고, 개중 일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을 했다.
"제기랄."
상황이 이러니 관악 경찰들 입장에선 칼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가 인간일 거라곤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고 말이다.
-뀌이이익!
물론 네귀그가 사람을 치고 다니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콰악!
사람들과 충돌하기 직전, 녀석이 전방으로 높게 도약을 했기 때문이다.
쉬아아아앗!
"엇?"
"어억!"
전투태세에 들어가 있던 경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흰 증기가 거대한 호를 그리며 저 멀리 뒤편까지 이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침입자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
'온갖 곳에 흔적을 남기고 다니는구나.'
서울에 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목격자를 적어도 천여 명은 만들었다.
'강남제일검이 날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겠네.'
영우는 네귀그의 등에 매달린 채 뒤를 돌아봤으나, 아까 그 현장은 볼 수 없었다.
거리가 워낙 멀어져서였다.
대신 문제의 붉은 빛기둥은 이제 정말 가까이 있었다.
콰아아아...!
빛기둥이 쏘아지며 내는 파공음이 귀에 닿을 정도.
'그 먼 거리를 벌써 다 왔다고...?'
놀라운 일이었지만, 네귀그의 최대 속도를 가늠할 여유까진 없었다.
[00:01:33]
앞으로 1분 33초 뒤면 변이자가 이곳에 도착할 터였으니까.
'관악제일검은 어디 있지?'
빛기둥의 파공음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편의 하천 위로 놓인 굵직한 다리가 불그스름하게 물든 게 보였다.
그 너머의 널찍한 교차로에 관악의 변이자 표식이 내려와 있는 탓이었다.
콰아아앗...!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매섭게 소용돌이치는 붉은 빛기둥.
"...."
영우는 빛기둥을 잠깐 멀거니 보다가, 하천 위의 다리 한가운데에 정장 차림의 중년 사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 사내의 머리 위에 찬란한 빛을 내는 칭호가 붙어 있는 것도.
『관악제일검』
'저 사람이구나.'
관악제일검 조상익01.
사내는 외지인이 찾아온 줄도 모르고 붉은 빛기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영우는 네귀그의 고삐를 슬쩍 잡아당겼다.
탓.
-뀌이익!
네귀그가 고삐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며 괴음을 뿜었고, 이 소릴 들은 다리 위의 제일검이 비로소 뒤를 돌아봤다.
"...."
사내의 눈동자가 검은 철마에 닿았다가 모호한 지점으로 옮겨 간다.
[00:01:21]
변이자 타이머를 확인한 것이리라.
1분 21초.
이윽고 사내가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기에, 영우도 네귀그를 천천히 몰아 다리 앞까지 전진했다.
"손님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때가 좋지 않군요. 전 조상익입니다."
관악제일검 조상익01이 허공에 시선을 걸어 둔 채 인사를 건넨다.
나이가 50대 초반 정도로 추정되는 그는 남색 정장에 군청색 넥타이까지 매고 있어 아주 정갈해 보였다.
"처음 뵙습니다. 정영우라고 합니다."
반면 운동복 위에 온갖 장비를 마구잡이로 두른 영우의 행색은 난해하기 그지없었다.
-쉬잇.
심지어 그의 팔목에 감긴 탐욕의 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조상익을 쳐다보기까지 했다.
정확히는 그가 오른손에 쥔 거대한 곡도를 보고 있는 거였다.
항상 진귀한 것을 바라보는 게 이 뱀의 특징이었으니까.
'변이자 장비인가?'
영우도 저 곡도의 정체가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더 중요한 용무를 위해 시간을 아꼈다.
"변이자를 처치하러 왔습니다."
"그래 보입니다."
두 제일검은 동시에 타이머를 확인했다.
[00:01:07]
1분 7초.
시간을 확인한 뒤 먼저 입을 연 건 조상익이었다.
"서울엔 처음 오신 것 같군요."
"예. 그래도 이야기는 대충 들었습니다."
"그럼 지금 규정을 위반하기 직전이라는 것도 아실 텐데."
서울 내 모든 분쟁은 회합 중인 용산 공원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지역의 변이자 역시 해당 지역의 제일검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그러니 영우가 관악구의 변이자에게 손을 대려면, 회합에 먼저 출두해서 관악제일검 자리를 두고 공식 결투를 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나 영우에겐 회합이 열리는 오후 3시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제일검께서 양보해 주시면 제가 규정을 위반할 일도 없겠죠."
영우가 이 말과 함께 네귀그에서 뛰어내리자, 그의 발을 감싼 유일 등급 신발 '신기루'가 땅바닥과 부딪히며 쇳소리를 냈다.
철컥!
그러자 조상익이 처음으로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제일검 수준의 초인들은 불가피하게 맨발 상태인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관악제일검인 조상익 역시 몸에 걸친 정장과 어울리지 않게 양발만큼은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도 평상시엔 구두를 신고 다니지만, 변이자와 싸우게 되면 어차피 신발이 터져 나갈 것이기에 일부러 맨발로 대기 중이었던 것.
"…지금 신고 계신 것도 장비군요. 혹시 어디서 오는 길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드디어 영우의 출신 성분에 호기심을 보이는 관악제일검.
이에 영우는 자신의 가슴을 툭 치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파아앗!
『경북제일검』
"…으음."
영우의 칭호를 본 조상익이 자신도 모르게 침음한다.
상대가 줄곧 내보이던 자신감의 근거에 본인도 동의해 버린 탓이었다.
경북… 대지역의 통합 제일검이니 서울의 일개 지역구 제일검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렷다.
[00:00:48]
이제 남은 시간은 48초.
조상익은 아까보다 훨씬 초조해진 얼굴로 영우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처음으로 감정 섞인 대사를 내뱉었다.
"왜 하필 관악으로 오셨습니까."
"...?"
"경북제일검이라면 분명 저보다 강하겠지요. 목숨은 하나뿐이니 저로선 물러서는 수밖에 없겠고."
"...."
상당한 확률로 관악제일검이 착각하고 있는 걸 테지만, 영우는 일단 잠자코 들었다.
"하지만 결국 이 일로 인해 회합 내에서 저희 서울대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 겁니다."
"관악제일검이 다른 제일검에 비해 300만 카르마만큼 약해지기 때문인가요?"
영우가 이렇게 묻자, 조상익이 쓰게 웃었다.
"쉽게 말하면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겠죠."
영우도 조상익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제일검 회합이란 게 어찌 살가운 분위기겠는가.
참가자 모두가 손에 피를 적지 않게 묻힌 살인마일 테고, 개중엔 상식을 초월하는 미친놈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아직까진 서로의 무위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규정이라는 명목하에 간을 보고 있을 뿐일 터.
적어도 지방의 수많은 제일검을 겪어 본 영우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00:00:21]
21초.
이젠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의 시간이 됐다.
"다른 도리가 없군요."
스윽.
결국 조상익이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열어줬다.
단 한 합도 겨루지 않은 채, 상대의 칭호만을 보고 변이자를 양보한 것이다.
"너무 쉽게 포기하시는데요."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죽으면 서울은 이틀 안에 다시 무법지대로 변할 겁니다. 질서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자가 없을 테니까."
워낙 큰 짐을 지고 있기에 모험을 할 수 없다는 뜻.
"...."
그렇다고 해서 굉장한 오만이라고 치부하기엔 서울 초입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서울대가 사실상 정부의 수뇌부 역할을 맡은 상태라고 말이다.
아마 제일검들을 한 자리에 모은다는 발상도 이쪽에서 나온 것이리라.
[00:00:09]
이제 남은 시간은 9초.
철컥.
영우는 다리 위로 발을 내딛으며 관악제일검 조상익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전엔 무얼 하던 분이신가요? 서울대 학생이라기엔 나이가 많고. 설마 교수님 중 한 분이신가."
이에 조상익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마치 교수가 제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기획재정부 2차관이었습니다. 서울대 이사 중 하나기도 하구요."
"아."
많은 게 설명되는 이력이다.
제일검들을 등에 업고 마물 사업을 진행시켜 척후병 퀘스트로 돈을 찍어 낸다는 말도 안 되는 기획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전직 기획재정부 차관.
현직 관악제일검.
마인(魔人)에 가까운 제일검들이 온갖 규제를 묵묵히 따라 주고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쿠오오오오...!
이윽고 다리 건너편의 붉은 빛기둥이 주변의 공기를 밀어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00:00:02]
앞으로 2초.
콰르릉!
붉은 빛기둥과 연결된 저 먼 하늘 안쪽에서 시뻘건 번개가 친다.
관악구에 배정된 변이자가 강림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였다.
'운 좋게 변이자를 넘겨받긴 했지만… 나 혼자 잡을 수 있을까?'
영우는 빛기둥 위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허리춤에서 흑검을 뽑아 들었다.
촤아앗!
물론 변이자 친구 영태를 한 번 더 부를 수 있고, '푸른 피'로 근력 도핑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두고 있는 싸움이 이번 하나만은 아니지 않은가.
'다른 옵션이 바로 코앞에 있긴 하지.'
콰지직!
마침내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빛기둥 끄트머리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신음이 들려왔다.
「그아아아...!」
변이자의 음성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영우는 빛기둥을 보고 있지 않았다.
"차관님, 괜찮다면 저와 거래 하나 하시죠."
그의 시선은 지금 조상익에게 닿아 있었다.
"거래라니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지, 지금 저기에...!"
다리 위에서 영우를 바라보던 조상익이 갑자기 기겁을 한다.
"…억!"
이와 동시에 빛기둥 위쪽에서 엄청난 기척이 일었다.
쐐애애애애액!
하늘 너머에서 변이자가 낙하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 이봐요!"
조상익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는 와중에, 영우가 거래 내용을 부연했다.
"변이자 처치를 도와주신다면, 제가 관악구 전역에 3만 카르마를 뿌리겠습니다."
"...?"
"서울대생을 100명만 찾아내도 300만 카르마가 되겠군요."
"…뭐요?"
전직 기획재정부 차관.
현직 관악제일검.
문무를 겸비한 52세 조상익은 순간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이 상대의 거창한 칭호에 속은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82화 23. 꼴통 (1)
"지금 설마 변이자와 혼자 싸울 능력이 없다는 이야길 하는 겁니까? 이 시점에?"
진노한 조상익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그럼 칭호는...? 어떻게 경북제일검이 된 겁니까?"
혼란함이 여실히 묻어나오는 음성.
그러면서도 그는 이미 전투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장 그로선 저 미친 제일검과의 드잡이보다 변이자를 이 교차로 안에서 죽이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서울 로테이션'을 수행 중인 관악구민들이 있다.
마물잡이를 겸하는 경찰이 시민을 인솔 중이긴 하지만, 변이자 앞에선 경찰이나 시민이나 한주먹거리인 건 마찬가지일 터.
따라서 현재 최우선 과제는 변이자 초살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변이자부터 죽이고, 저 자식은 그 다음에 생각하자.'
조상익은 속으로 이렇게 되뇌며 칼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사이 하늘을 찢으며 내려오던 3일 차 변이자가 교차로 중앙에 착지했다.
쿠우우웅!
"윽."
변이자가 착지하자마자 새까만 먼지 폭풍이 일대를 휩쓸었고, 두 제일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뒤로 물러나야 했다.
마치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아스팔트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티팅, 팅, 피잉!
영우가 걸친 금속제 장비들에선 이질적인 소리가 쉬지 않고 났다.
잘게 쪼개진 아스팔트가 장비 표면을 두드리고 있는 것.
물론 장비가 감싸고 있지 않은 신체 부위는 순전히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퍼퍽, 퍽!
내구성을 천 단위로 끌어올린 영우조차 얼얼한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일반인이 이 자리에 서 있었다면 몸이 갈가리 찢겼으리라.
"변이자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저놈이 여길 벗어나게 하면 절대 안 됩니다."
흙먼지 속에서 조상익의 음성이 들려온다.
어쩔 수 없이 협조하겠지만 대민 피해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영우도 칼을 빼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엄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건 싫으니까요."
물론 변이자를 처치한 뒤 주어질 양자택일에 대한 협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변이자가 정리된 뒤 조상익이 급습을 해올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면 내 능력치도 만만치 않아. 이번 전투로 강호초출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강호초출 퀘스트로 얻을 수 있는 카르마 보상은 무려 500만.
이걸 얻고 나면 조상익과의 단독 대결을 한다고 해도 크게 밀리지 않을 터였다.
'어디까지나 변이자에게서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긴 하다만.'
영우는 전방의 흙먼지 안쪽에서 거대한 기척이 일어나는 걸 보며, 아직 뽑지 않은 또 다른 검에 손을 얹었다.
텁.
「언더독」 - 변이 한손검
[사용자보다 체구가 큰 대상에게 위력 25% 증가.]
언더독.
이젠 망자가 된 충주제일검에게서 빼앗은 무기다.
영우가 이 검에 손을 댄 이유는 이번 변이자의 덩치가 누가 봐도 자신보다 크기 때문이었다.
뿌드득.
심상치 않은 마찰음과 함께 커다란 그림자를 가진 무언가가 먼지구름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쿵!
상대의 육중함이 느껴지는 무거운 발소리.
쿠웅!
두 번째 걸음부터는 두 제일검 모두 상대의 이름표를 볼 수 있었다.
[사업가-김태준]
'김태준? 설마 그 김태준인가...?'
영우의 동공이 커진다.
자신이 아는 유명인 중에 정확히 김태준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있는 탓이었다.
대형 게임 개발사 VC소프트의 창업주이자 CEO인 김태준 말이다.
일명 TJ.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도 이름은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VC소프트의 게임들이 연달아 히트하기도 했지만, 그 게임의 과금 유도가 악랄한 탓에 악명 또한 높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멸 후보에 오를 정도였나?'
하기야 상대적으로 많은 표를 받기만 하면 명단에 오르는 방식이었으니 불가능할 건 없었다.
'김태준을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구미에 내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게임 방송을 하던 영우였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고 감회가 새로운 건 장본인인 김태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아… 기분이 이상한데요.」
쿠웅!
세 번째 걸음을 끝으로 김태준이 먼지구름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자, 신장이 3미터에 이르는 그의 장대한 육신이 드러났다.
회백색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피부.
지나칠 정도로 쩍 벌어진 어깨, 그리고 그보다 더 과장된 형태로 빚어진 양팔.
하체 역시 견고해 보이긴 했지만 산이 통째로 얹어진 느낌마저 드는 상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고… 골렘인가?"
영우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말하자, 이를 용케 들은 김태준이 그를 쳐다봤다.
그러곤 돌로 만들어진 자신의 손을 들어 살피더니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진짜 골렘인데요.」
"...!"
영우는 이 대사에서 지금 자신이 마주한 변이자가 정말 그 '김태준'이 맞음을 확신했다.
이 세상 어느 변이자가 자신이 골렘으로 변해 버렸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겠는가.
소싯적엔 직접 게임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던 김태준이니 가능한 일인 것이다.
드드득.
이어선 김태준이 고개를 틀어 말끔히 비워진 교차로 일대를 둘러봤다.
그러곤.
「여긴 절 레이드하는 장소군요.」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현 상황을 압축했다.
「그것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죠? 리셋으로부터 얼마나 지난 겁니까?」
변이자라면 예외 없이 궁금해 하는 시간의 흐름.
그런데 김태준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위치까지도 묻고 있었다.
뉘앙스로 보건대 학살할 사람들을 찾는 건 아닌 듯하고.
"이제 리셋 3일 차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안전하게 잘 있어요. 저희만 태준 씨를 마중 나온 겁니다."
영우가 이렇게 설명하자, 김태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3일...? 정말입니까? 사람들은 어디 있죠?」
그러자 조상익이 대번에 딱딱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사람들은 왜 찾으시는지. 어차피 여길 벗어날 수 없을 텐데요. 저희가 여기에 왜 나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관악제일검 조상익에게 김태준은 대량의 카르마를 안겨 줄 자원임과 동시에 존재만으로도 대민 위협인 재앙이었다.
즉, 이 자리에서 무조건 죽여야 할 대상이라는 거다.
반면 김태준의 입장은 달랐다.
「아직 3일밖에 안 지났으면 내 가족들이 어딘가 살아 있을 겁니다. 누굴 해칠 생각은 없으니 가족만 찾게 해 주십시오.」
"…아."
영우는 김태준의 말을 듣자마자 상황을 이해했다.
비슷한 케이스를 문경에서 겪지 않았던가.
순전히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변이자가 되어 돌아왔다던 장대명 말이다.
'그렇지. 변이자 입장에선 한순간에 가족과 생이별한 셈일 테니까. 복수심보다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클 수도 있겠구나.'
천애고아인 영우조차 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되자 제 발로 그를 찾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본래부터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던 사람은 어떻겠는가.
영우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진 조상익의 답변이 틀리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예. 무슨 말인지는 압니다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제가 김태준 씨를 보내 준다 해도 다른 제일검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애초에 그 몸으로 어디 있는지도 모를 가족을 찾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러자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김태준이 순간 욱하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내와 자식들은 제가 괴물로 돌아올 걸 알지요. 그러니 제가 나타났다는 걸 알리기만 하면 어떻게든 찾아올 겁니다.」
"...!"
굉장한 믿음을 가지지 않고선 할 수 없는 말이다.
영우는 이 말도 안 되는 대화 속에서 홀로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차오르는 격분에 점점 구부러지는 김태준의 육신을 보면서 이 대화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태준 씨."
영우가 침착한 어조로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자, 김태준이 아까보다 훨씬 거칠어진 말투로 대답했다.
「뭡니까?」
"저분 말씀대로 태준 씨가 지금 상태로 가족들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서울엔 저희 말고도 제일검이 수십이나 더 있어요."
물론 김태준은 정 그렇다면 그 제일검을 다 죽여서라도 가족을 찾겠다고 할 터였다.
그래서 영우는 얼른 뒷말을 붙였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실 테지만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대번에 조상익이 표정을 굳히며 되물었고, 반대로 김태준은 관심을 보였다.
「그게 뭐지요.」
이에 영우가 오른손을 펴 보였다.
"악수입니다."
"…악수?"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의 조상익과 그사이 얼굴이 살짝 밝아진 김태준.
「악수… 변이자로 돌아온 게 후회되면 사용하란 말은 들었지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방법이 되죠?」
김태준이 오른손을 파랗게 빛내더니 손바닥 위에 문 모양의 아이콘을 띄웠다.
"뭣...."
아니나 다를까 조상익이 난생처음 보는 현상에 눈을 휘둥그레 떴고, 일말의 희망을 엿본 영우는 김태준을 향해 호박색 호루라기를 내밀었다.
"저와 악수를 하시면… 어, 그러니까 이 호루라기의 요정 같은 게 될 수 있습니다. 지니처럼요."
이게 영우가 할 수 있는 설명의 최선이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제가 태준 씨를 하루에 두 번 불러낼 수 있어요. 보통은 전투 중 도움을 받기 위해 부르지만… 태준 씨의 가족을 찾았을 때도 부를 수 있겠죠."
영우의 기준에, 김태준은 죄인이 아니었다.
변이자로 돌아와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인간일 적에 큰 죄를 지은 것도 없다.
그래서 그를 꾀어내기 위한 거짓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아까 말한 그대로 김태준의 입장에선 썩 마음에 들 리 없는 방법.
「쉽게 말하면… 생판 모르는 남이 내 가족을 찾아 줄 거라 믿고 그 안에 순순히 갇히라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죠. 하지만 이것 외에 더 좋은 선택지는 없어요. 저희를 죽이고 여길 빠져나가신다 해도 다른 제일검들과 또 싸워야 할 테니까. 온 세상이 태준 씨를 공격할 겁니다."
「그건 이미 겪어서 잘 압니다. 다른 할 말은 없습니까?」
김태준이 마지막을 고했다.
역시나 협상이 결렬된 것이다.
이에 영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허공에 대고 진지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 전투는 범우주적 무기 브랜드 도고의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음?"
「...?」
"저는 지구의 인간, 경북의 최강자, 정영우07입니다."
83화 23. 꼴통 (2)
도고의 지원 사실을 고지한 영우가 '언더독'을 뽑자, 칼날의 궤적을 따라 쐐기 모양의 로고가 그려졌다.
화아앗!
누가 봐도 신기한 효과에 김태준의 눈이 커졌으나, 좌중에서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조상익이었다.
회합을 통해 각양각색의 제일검들을 만나 봤지만 저런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뭐야, 이 사람은...?'
강하다, 라는 느낌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뭔가 있었다. 강함과 다른 유형의 어떤 힘 말이다.
삿.
이윽고 영우가 언더독을 그러쥐며 말했다.
"지금 저와 함께하고 있는 친구도 처음부터 손을 내밀어 온 건 아닙니다. 그러니 일단 승부부터 내시죠."
자신에게 맞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란 말이렷다.
이에 그를 내려다보던 김태준이 화강암 턱을 들어 하늘로 눈을 돌렸다.
「글쎄요. 여러분이 절 상대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엔 하늘이 제게 충분한 힘을 준 거 같은데요.」
그러더니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아까보다 훨씬 싸늘해진 눈빛으로 영우를 봤다.
「어차피 앞으로 모든 제일검이 절 공격할 거라면, 우선 두 분부터 해치워야겠습니다.」
결단이 굉장히 빠른 편인 김태준.
「미안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끝으로 그의 회백색 육신이 꿈틀거렸다.
트득.
동시에 영우의 시야엔 말도 안 되는 문구가 출력됐고 말이다.
「감각 수치가 일시적으로 기존 600에서 2,144로 상승했습니다.」
금빛 섬광이 김태준의 감각 1,544를 탈취해 왔다.
이 말인즉슨, 그의 기본 감각 수치가 3천을 상회한다는 의미.
'말도 안 돼.'
가만히 놀라고 있을 시간까진 없었다.
경북검법이 상대의 공격에 대응하여 즉시 이탈을 주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앗!
영우가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리자, 거의 같은 순간에 바위 주먹이 내려와 땅을 으깼다.
콰작!
"억!"
"이...!"
말도 안 되는 공격 속도에 영우는 물론 조상익도 경악했다.
'뭐가 저렇게 빨라?'
저 공격이 만약 이쪽에 날아들었다면 과연 바로 피할 수 있었을까?
2일 차 변이자와는 현격히 다른 전투력에, 조상익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아앗!」
그사이 땅에 주먹을 박았던 김태준이 그대로 바닥을 퍼 올려 두 제일검에게 아스팔트 파도를 날렸다.
콰과과곽!
삽시간에 두 사람의 눈앞이 시커멓게 변했으나, 제일검의 지역검법은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와중에도 작동했다.
영우와 조상익 둘 모두에게 측면으로 회피 기동 하란 주문이 전달된 것이다.
타탓! 팟!
두 사람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빼내자, 김태준도 연속된 두 번의 회피가 우연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이 재밌게 변했네요. 제일검이란 게 이런 의미였구나.」
그러나 정작 두 제일검은 저 대사를 듣지 못했다.
이미 김태준을 양쪽에서 포위한 채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쐐애애앳!
마침내 시작된 두 제일검의 첫 공격.
조상익은 곡도를, 영우는 흑검을 쥔 채 상대의 상체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 제일검의 시야에 떠오른 전투 표식은 온통 파(破)뿐이었다.
지금의 공격으론 기껏해야 자세를 무너뜨리는 정도로 그칠 거란 의미다.
그리고 실제로도.
콰악!
두 제일검의 칼날은 김태준의 몸에 닿기도 전에 그의 두 손에 각각 붙들렸다.
"아...!"
"하."
영우는 자신보다 능력치가 훨씬 높을 게 자명한 조상익의 검조차 잡힌 것에 놀랐고, 반대로 조상익은 경북제일검의 수준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 탄식했다.
심지어 두 제일검 모두 김태준의 손아귀에서 칼을 빼내지도 못했다.
"다… 다른 장기는 없습니까?"
당황한 조상익이 영우에게 뭔가 더 꺼내 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자, 영우가 흑검의 길이를 5미터까지 늘여 김태준과의 거리를 벌렸다.
촤아앗!
일종의 긴급 탈출.
그러곤 왼손에 쥐고 있던 언더독을 김태준이 아니라 자신의 머리 위 허공으로 높게 던졌다.
휙!
"지금 무슨...."
조상익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사이, 영우는 자신이 쥐고 있던 흑검의 손잡이조차 놓아 버렸다.
그다음엔.
파팟!
아직 조상익과 대치 중인 김태준의 뒤편으로 냅다 뛰었다.
"이 새끼가...!"
누가 봐도 도주하는 것 같은 모습에 조상익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고, 그 순간 김태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
여태 쥐고 있던 흑검이 갑자기 엄청난 출력을 내기 시작해서였다.
마치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김태준이 칼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기 무섭게.
홧!
그의 몸이 뒤편으로 강하게 당겨졌다.
「…아!」
원격 회수 명령을 받은 흑검이 김태준을 매단 채 주인에게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콰드드득!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며 두 다리가 아스팔트 바닥을 갈아엎기 시작하자, 김태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어렸다.
여기에 더해.
쐐애애애액!
까마득한 상공에서 어마어마한 파공음이 나기까지 했다.
조금 전 영우가 높이 던졌던 언더독이 돌아오고 있는 거였다.
'이게 다 뭐야?'
자신의 검과 함께 김태준에게 매달려 있던 조상익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경북제일검에게 뭔가 더 보여 달라고 주문하긴 했지만, 이런 기예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쉬이잇!
이윽고 언더독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지척까지 다가왔다.
「제길.」
이에 결국 김태준이 흑검과 곡도를 모두 놔주며 몸의 중심을 되찾았다.
그러곤 총알같이 날아든 언더독을 가까스로 쳐 냈다.
파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꽃이 튄다.
동시에 돌먼지를 휘감은 화강암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익...?」
언더독을 쳐 낸 김태준의 왼쪽 손등이 부분적이나마 파열된 것이다.
대거수전 병기인 언더독의 위력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사용자보다 체구가 큰 대상에게 위력 25% 증가.]
그리고 김태준의 화강암 육신이 무적은 아니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왜 고통 부여가 발동하질 않지?'
영우는 돌가루를 묻히고 돌아온 언더독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금빛 징벌의 고통 부여는 무기가 상대의 신체에 스치기만 해도 발동하지 않던가.
그러나 이번 상대인 김태준은 자신의 육신이 손상된 것에 놀라워할 뿐, 고통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설마 저 돌덩이가 전부 일종의 방패인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저 외피를 다 긁어내기 전까진 금빛 징벌을 써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
눈앞이 캄캄해진 영우가 침음하려는 찰나, 김태준이 이번엔 조상익을 단독으로 공격했다.
상대의 머릿수부터 하나 줄이기로 결정한 것이리라.
「죽엇!」
두 합 만에 외상을 입은 김태준은 아까보다 훨씬 흥분해 있었다.
이 교차로 바깥에 제일검이 수십은 더 있다는데, 고작 두 명조차 압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실망을 한 것이다.
콰쾅!
성난 김태준의 주먹이 연달아 땅바닥에 박힌다.
관악검법이 검을 내밀어 막지 말고 무조건적인 회피만 하라는 조언을 한 탓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격할 틈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김태준은 근력과 감각 수치 모두 웬만한 제일검을 상회하는 괴물이었으니까.
콰앙!
"이, 이봐요!"
김태준의 세 번째 공격을 아주 간발의 차이로 피해 낸 조상익이 결국 영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분명 아까 서로 협조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물론 영우가 일부러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건 아니었다.
김태준의 주먹 하나하나가 조상익으로 하여금 사선을 넘나들게 만든 바람에 체감 시간이 길었을 뿐이다.
"조금만 버텨요,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영우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미 김태준의 등허리 뒤까지 거의 접근한 상태였다.
'흑검으로 저 외피를 뚫긴 어려울 거 같고, 결국 언더독으로 계속 치는 수밖에 없을 텐데.'
경북검법 또한 영우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전술을 제안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검을 멀리 날린 뒤, 원격 회수를 해서 공격하자는 거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몇 번이나 더 써야 김태준의 외피를 다 깎아 낼 수 있을까?
'그전에 내가 먼저 처맞고 말 텐데. 아까도 엄청 아슬아슬했거든.'
어쩌면 경북검법도 뾰족한 답을 찾지 못해 아까와 똑같은 주문을 하는 건 아닐까.
어차피 이기지 못하는 상대니 자살이나 하라는 조언을 할 순 없을 테니 말이다.
"...."
처음으로 경북검법의 가이드에 불신이 생겼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김태준이 이번엔 어떻게 나오자 보자.'
결국 영우는 경북검법의 조언을 한 번 더 따르기로 결정했다.
홰앳!
언더독을 김태준의 머리 위쪽으로 높게 던진 뒤.
타탓!
흑검을 양손으로 쥔 채 그대로 돌격한 것이다.
"흐압!"
온 힘을 다한 사선 베기.
그러면서 저 멀리 쏘아져 나간 언더독을 다시 불러들이며 양면 공격을 시행했다.
쐐애애애액!
아까처럼 예사롭지 않은 파공음이 나자, 조상익을 쫓던 김태준이 추격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똑같은 방법에 두 번을 당하겠습니까.」
그러더니 도고의 쐐기 문양을 뿌리며 휘둘러지고 있는 영우의 흑검을 손으로 간단히 잡아냈다.
타앗!
아까와 똑같은 전개.
그리고 이어선 김태준이 언더독을 쳐 내고 영우는 검신을 늘여 뒤로 탈출할 차례였는데.
"...!"
막상 경북검법이 보여 준 홀로그램은 제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가이드가 없다는 것처럼.
'뭐야, 내가 알아서 하라는 건가?'
아니면 이게 설마....
「잡았다.」
영우가 혼란에 빠진 그 짧은 순간, 김태준의 거대한 손이 영우의 몸통을 거세게 쥐었다.
본래라면 언더독을 쳐 냈어야 할 오른손으로 영우를 붙잡아 버린 것이다.
그는 애초에 방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걸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고 하던가요.」
콰득.
김태준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영우의 입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와 태준의 팔뚝을 적셨다.
"크학!"
그리고 때를 같이해 언더독이 영우에게로 돌아왔다.
쐐애앳!
영우를 붙든 김태준의 오른 손목을 강타하면서 말이다.
타아앙!
귀가 멍멍할 정도의 타격음과 함께 영우의 턱밑에서 불꽃이 일었고, 곧 언더독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틱.
전력 공격엔 성공했으나, 김태준의 신체를 관통해 버리는 데엔 실패를 한 것이다.
"이… 멍청한!"
조상익이 처참한 얼굴로 김태준의 등짝에 칼을 휘둘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가 말했죠, 하늘이 제게 충분한 힘을 준 거 같다고.」
김태준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채 1초도 되지 않아서.
「…윽?」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두어 번 굴렸다.
마치 상한 음식을 모르고 입에 넣은 사람처럼 말이다.
「뭐지?」
전신을 감싸는 이상한 기운.
그러더니 이내 영우를 쥐고 있던 손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어억!」
김태준이 반사적으로 영우를 내팽개쳤으나, 정체불명의 통증은 이미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으로 퍼지는 중이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눈앞이 흐려질 정도의 격통에 김태준이 의문을 표하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영우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 설득법 중 하납니다."
그러곤 피범벅이 된 팔을 들어 올려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집었다.
"그리고 이건."
호루라기가 영우의 입가로 다가간다.
"제 최후의 수단이고요."
삐리리리릭!
마침내 영우가 호루라기를 불자, 하늘이 다시 한 번 열리기 시작했다.
84화 23. 꼴통 (3)
이번은 순전히 경북검법의 공이었다.
영우가 자신의 혈액으로도 고통 부여를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 말이다.
「금빛 징벌」 - 전설 팔찌
[적에게 고통 부여.]
금빛 징벌의 이 특수 기능은 소유자인 영우의 무기나 신체가 상대에게 직접 닿아야만 발동한다.
아니, 적어도 지금까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긴, 혈액도 내 신체의 일부라면 일부니까.'
김태준을 향한 두 번째 공격 당시, 경북검법이 다음 가이드를 내놓지 않은 건 그 자체가 파훼법이기 때문이었다.
화강암 외피의 보호를 받는 김태준에게 고통 부여를 적용하려면 그의 외피에 생긴 균열 안으로 영우의 피를 흘려 넣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론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전술이었으나… 영우만큼은 산 채로 해낼 확률이 있는 묘책이었다.
「슬라임의 핵」 - 변이 팔찌
[재생력이 비약적으로 상승.]
그는 동강 난 몸조차도 도로 붙게끔 하는 팔찌의 주인이었으니까.
물론 김태준이 영우의 머리부터 으깼다면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터였다.
'하지만 성공했지. 또 살아남았다.'
경북 같은 대지역 검법의 특징은 칭호 주인이 가진 다른 장비의 특성까지 고려해서 전술을 짠다는 점.
그리고 이 같은 특징은 능력치가 낮은 대신 다수의 장비를 보유한 영우와 궁합이 잘 맞았다.
각 능력치가 수천에 달하는 조상익만 해도 김태준에게 이렇다 할 타격조차 주지 못했지 않은가.
"...."
호루라기의 부름으로 하늘이 열리고 주변의 채도가 낮아진 와중에, 영우는 조상익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침 저 멀리서 그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아, 설마.'
영우는 현시점 자신이 생각한 최악의 경우인 '조상익의 배신'이 끝내 현실화되는 줄 알고 눈을 부릅떴다.
이를 우려해서 영태를 부른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나 실제론.
"이, 이봐요! 괜찮습니까?"
조상익의 용무는 순전히 영우의 안위 확인이었다.
정확히는 갑자기 몸을 비틀기 시작한 김태준을 이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려던 것.
"…예. 괜찮습니다. 조금만 쉬면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영우가 이렇게 답했지만 조상익은 전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조금… 쉬면요?"
그도 그럴 게 외관상으로 봐도 지금 영우의 갈비뼈는 산산이 조각났고 몸 안쪽의 상태도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예. 조금만 쉬면 돼요. 그리고 그 시간은 제 친구가 벌어 줄 겁니다."
영우가 턱을 들어 허공을 가리킨다.
그러자 때맞춰 하늘 끝에서부터 우렁찬 고함이 들려왔다.
「이야아아아아!」
전직 변이자, 홍영태가 이 세상에 돌아온 것이다.
쐐애애애앳, 콰아앙!
요란한 착지음과 함께 또 한차례 아스팔트 폭풍이 일대를 휩쓸었고, 이때 영우는 조상익이 자기 몸으로 파편을 막아 주는 걸 보며 때 아닌 감동을 받았다.
"차, 차관님."
"…그냥 최소한의 매너인 겁니다."
그렇게 시커먼 폭풍이 지나가자, 곧 흙먼지 안에서 또 하나의 이름표가 빛을 발했다.
스아앗!
[정영우07의 친구-홍영태]
"저게 방금 말씀하신 친구분… 인가요?"
"예."
영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름표가 들썩이더니 영태가 먼지구름을 손으로 헤치며 걸어 나왔다.
쿵, 쿠궁!
녀석의 발소리에서 김태준 못지않은 중량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곧이어 나타난 육신 역시 김태준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홍영태. 신장 3미터, 하이에나의 머리를 가진 거대 수인.
「하압...!」
영태는 땅에 발을 딛자마자 들숨을 크게 쉬었다.
귀환자의 방에서 영겁의 세월을 보내다 온 터라, 그에겐 이 호출의 순간이 정말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엉...? 김태준?」
자신과 같은 눈높이를 가진 생물을 발견하고서 놀란 눈을 해 보였다.
상대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거인이라서?
아니다.
영태도 VC소프트의 김태준을 잘 아는 덕분이었다.
영태의 또 다른 이름은 BJ빠글.
한때 악명 높은 인터넷 방송인이었던 만큼 게임계의 고유명사나 다름없는 김태준이 누군지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김태준이 왜 여기에 있어?」
이렇게 묻던 영태는 땅바닥의 영우를 뒤늦게 발견했다.
「넌 왜 매번 상태가 이상하냐.」
조상익으로 하여금 많은 걸 상상하게끔 만드는 영태의 대사.
이에 영우는 상체를 간신히 일으키며 친구에게 주문했다.
"내 걱정은 됐고, 저 사람 좀 막아 줘."
영우가 가리킨 '저 사람'이란 이를 악문 채 이쪽으로 주먹을 날려오고 있는 김태준이었다.
여전히 고통 부여의 영향을 받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투를 아예 속개할 수 없을 정돈 아니었던 거다.
홰애애애액!
회백색 궤적과 함께 묵직한 파공음이 나자, 영태가 기겁하며 김태준의 몸통을 껴안았다.
콰악!
「아니, 시발?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그러면서 기다란 주둥이를 돌려 영우를 쳐다봤다.
단순히 이 변이자를 막으라는 건지 죽일 마음으로 싸우라는 건지 확인을 바라는 거다.
"네가 이길 수 있어? 그렇다고 죽이면 곤란해. 가능하면 영입하고 싶으니까."
영우가 이렇게 주문하자, 영태가 특유의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아, 새 친구 후보인가.」
물론 어디까지나 두 사람의 희망일 뿐.
영태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김태준이 그의 주둥이에 주먹을 꽂았다.
퍼어억!
「으극!」
그러곤 또다시.
빠악!
이번엔 어퍼컷이 영태의 턱에 꽂혔다.
「이 씨발...!」
성난 영태가 으르렁대며 양팔로 격투 자세를 취했으나 이어진 결과는.
퍼어어억!
김태준의 스트레이트가 보란 듯이 적중.
공격 대상이 영우에서 영태로 바뀌면서 김태준의 감각 수치가 정상화된 탓이었다.
「아니 뭔 겜돌이 새끼가 싸움을 이렇게 잘해?」
퍼어억!
힘만 믿고 양팔을 허우적대는 영태와 달리, 김태준은 엄청난 격통에 시달리는 중임에도 매번 정확한 타격을 했다.
퍼퍽!
"저러다가 친구분이 먼저 쓰러지겠습니다."
보다 못한 조상익이 곡검을 들고 참전하려던 순간.
탓!
여태 간신히 앉아 있기만 하던 영우가 손을 뻗어 언더독을 회수했다.
"김태준이 절 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도와주세요."
감각 탈취가 발동한 뒤 끼어들라는 이야기였으나 정작 조상익은 그새 말끔해진 영우의 몸을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라는 뒷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영우의 신형(身形)이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파앗!
"…윽!"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서 전신이 비틀리는 듯한 통증이 있었지만, 영우로선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당장 저기에서 영태를 두드리고 있는 김태준은 이보다 더한 고통을 참고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면에서라도 상대에게 지기 싫었다.
"김태준 씨!"
영우가 상대의 이름을 부르자, 영태의 주둥이를 부수고 있던 김태준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영우의 빠른 회복력이나 그의 관자놀이를 따라 흐르고 있는 금빛 안광에 놀라서 본 건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상대 이름에 '씨'를 붙여 주고 있는 정영우의 어처구니없는 일관성에 놀란 거였다.
그게 지독한 콘셉트든 습관이든 간에 말이다.
「진짜 지독한 놈이네.」
김태준이 상대와 끝을 보겠다는 듯이 영태에게서 손을 떼자, 영우의 시야에 금빛 섬광의 경고가 떠올랐다.
「감각 수치가 일시적으로 기존 600에서 2,144로 상승했습니다.」
김태준이 다시 영우에게 살의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인즉슨.
"영태야! 지금밖에 없다!"
김태준의 감각이 반토막 났다는 의미.
홰애애액!
이윽고 영우에게 화강암 주먹이 날아들면서 경북검법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이번 가이드는 역시나 자살 전략이 아닌 측면 회피 후 반격이었다.
초기와 달리 김태준의 전투력이 많이 떨어져 반격할 여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한 거다.
그리고 실제로.
타앗!
영우가 주먹을 피해 측면으로 몸을 비틂과 동시에 영태의 손톱이 김태준의 허리에 꽂혔다.
콰곽!
「…억.」
영태의 첫 유효타를 맞은 김태준이 신음을 흘린다.
아파서가 아니라, 이 하이에나의 공격이 화강암 외피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탓이었다.
「뭐야, 이거. 의외로 박히는데?」
같은 변이자여서일까.
웬만한 무기론 흠집 하나 낼 수 없던 화강암 외피가 영태의 손톱엔 마치 마분지처럼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이어진 영우의 반격.
촤아앗!
그가 언더독으로 김태준의 두꺼운 팔뚝을 베자, 깊진 않지만 파편이 튀어 나갈 정도의 상처가 생겼다.
"...!"
따라서 이대로 몇 합을 더 진행하면 김태준의 단단한 외피 안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어째서...?」
김태준의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그의 얼굴에 공포가 드리워졌다.
이대로라면 가족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리셋이 시작된 이래 일방적인 공격만 당하다 소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 씹...! 대체 내가 뭘 했는데?」
힘의 우위에 있다는 확신이 사라지자, 그 거대한 빈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이자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경북검법은 상대를 인간으로 인식하고서 홀로그램 가이드를 흩뿌렸다.
부우우욱!
매섭게 허공을 찢는 화강암 손아귀.
이에 영우가 홀로그램을 따라 뒤편으로 몸을 물리자, 영태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김태준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콰득!
손톱과 마찬가지로 김태준의 몸에 깊이 박힌 이빨은 한 무더기나 되는 화강암 덩어리를 끌고 나왔다.
그러자 김태준의 몸에서 처음으로 회백색 돌덩이가 아닌 다른 것이 드러났다.
그건 바로.
쉬이이잇...!
새하얀 증기. 아니, 증기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엇?"
「어!」
영태가 뜯어낸 팔뚝에서 흰 증기가 솟구치기 시작하자, 세상을 다 부술 듯이 폭주하던 김태준의 기력이 빠르게 쇠했다.
쿠궁!
그가 자신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아마도.
'피? 동력원 같은 건가?'
그렇게 단단하던 외피 안쪽이 겨우 이런 기체로 이루어져 있었다니....
정체가 뭔진 몰라도 이게 전부 빠져나가면 김태준도 소멸할 거란 건 확실해 보였다.
「어어, 이거 왜 이래?」
영태가 뒤늦게 김태준의 팔뚝을 자기 손으로 틀어막았으나 증기가 새어 나오는 걸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태준 씨!"
영우가 칼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김태준에게 다가가자, 그가 화강암으로 덮인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그 태준 씨란 말 좀 그만해. 나하고 아는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러면서도 아직 손상되지 않은 다른 팔로 영우를 공격하진 않았다.
처음 영우가 했던 말처럼 승부가 나 버렸다는 걸 아는 탓이었다.
「진짜 난 레이드 몬스터일 뿐이었나...?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 있지? 벌은 당신들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김태준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에 영우는 반쯤 박살 난 상대의 오른팔을 보며 말했다.
"충분한 벌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끔찍한 세상을 살고 있어요. 태준 씨… 아니 대표님의 가족들도요."
「이 새끼가.」
가족 언급에 김태준이 다시 격노하려는 순간, 영우가 주머니에서 서사급 만년필 '수배 전단'을 꺼내 들었다.
"이게 있으면 원하는 누구든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단, 살아 있다면요."
이쪽엔 김태준이 그토록 원하는 가족들을 찾아낼 능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들의 생사 여부도 함께.
그러자 들끓는 듯하던 김태준의 음성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 대신 나더러 그 호루라기 속으로 들어가 달라는 건가? 저 녀석처럼?」
김태준이 이렇게 말하며 영태를 쳐다보자, 녀석이 길쭉한 주둥이를 벌리며 웃었다.
"예. 그게 대표님께 남은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하구요."
영우의 말대로 이제 김태준에게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이대로 소멸하거나 영우의 '친구'가 되어 일단 존재라도 유지하거나.
「....」
쉬이이잇!
이 와중에도 김태준의 생명은 빠르게 사그라지는 중이었고, 결국 그의 화강암 손바닥이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85화 23. 꼴통 (4)
「결국 내 인생의 결말은 배드 엔딩이군.」
귀환 버튼을 띄워 올린 김태준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상 1차 여과의 소멸 투표 후보로 이름이 올랐을 때부터 비극이 확정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두 제일검을 죽이고 가족을 찾으러 갔더라도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최악이 도래한 것까진 아니었다.
"아직 결말은 모르죠. 이제야 리셋 3일 차고, 여전히 살아 계시니까."
영우가 이렇게 말하자, 김태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참 쉽게 말하는군. 어디까지나 당신에겐 남의 일이겠지.」
그러면서 얼른 일을 마무리하자는 듯, 출구 아이콘이 띄워진 손을 까닥였다.
이에 영우는 김태준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소식.
적어도 영우에겐 중의적인 의미였다.
약속한 대로 김태준의 가족을 찾으면 알리겠다는 의미, 그리고.
'어딘가엔 친구들을 사람으로 되돌리는 아이템도 있지 않을까? 이 우주 어딘가엔.'
물론 어디까지나 영우의 바람일 뿐이었다.
그래서 헛된 희망으로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아 입 밖에 낼 수 없던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이윽고 영우가 김태준과 악수했다.
탁!
그러자 순간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김태준의 장대한 육신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스아아앗!
VC소프트의 대표이자 관악구의 3일 차 변이자, 김태준이 영우의 친구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아...!」
이어선 영태의 몸도 김태준을 따라 희미해졌다.
그의 소환 시간 역시 만료가 된 것.
「꼭, 또 보자고.」
영태가 긴 주둥이를 벌려 아쉬운 음성을 흘린다.
그러곤.
쉬릭.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아… 이건 참...."
조상익이 여운 가득한 눈으로 김태준과 영태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말로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같은 사람으로서 감명을 받아서였다.
그도 어느새 변이자를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거다.
그러나 감상에 젖는 시간도 잠시, 이내 변이자가 처치됐음을 의미하는 금빛 구체가 땅 위에 나타났다.
파앗!
「변이자를 처치했습니다.」
「절차 완료를 위해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이어서 나타난 안내 문구.
영우로선 이번이 무려 다섯 번째 구체를 마주하는 거였다.
즉, 이번에도 카르마 뿌리기를 선택한다면 '금빛 홍수' 업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슥.
영우가 말없이 조상익을 쳐다보자, 그가 공무원 특유의 업무용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물러났다.
"협의한 대로, 선택권은 영우 씨 겁니다."
물론 실제로 두 사람이 양자택일에 대해 명확히 협의한 바는 없다.
따라서 그저 김태준과의 전투를 통해 자연스레 협의가 된 것뿐이었다.
조상익이 자발적인 양보를 하기로 말이다.
"고맙습니다."
영우는 조상익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허공에서 자전 중인 금빛 구체에 손을 올렸다.
텁.
그러자 구체의 자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처치 보상을 보여 줬다.
≪확정 보상≫
「바위 수호자」 - 변이 보석
[슬롯 : 모든 물리 피해 경감]
≪선택 보상≫
[300만 카르마]
또는
[지역 내 모든 주민에게 3만 카르마 지급]
'하,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서도 양자택일을 하게 된 영우.
[금빛 홍수]
|5개 이상의 지역에서 황금비를 부르십시오. (4/5)
영우는 제법 오래 묵혀왔던 업적 내역을 흘깃 본 뒤, 자전하는 금빛 구체에 시선을 얹은 채 입을 열었다.
"차관님."
"예."
"서울에서도 황금비가 내린 적이 있나요?"
"황...? 제대로 못 들었는데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조상익의 반응으로 보건대, 황금비를 보긴커녕 그런 단어 자체를 처음 접하는 듯했다.
카르마를 뿌린다는 선택지가 있는 건 알지만, 그게 어떤 형태로 뿌려지는진 모르는 것이다.
"그럼 이참에 보시죠. 이게 아까 궁금해 하시던 제가 경북제일검이 된 방법이니까."
영우는 이 말을 끝으로 양자택일을 마쳤다.
[지역 내 모든 주민에게 3만 카르마 지급]
그러자 구체가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하늘로 솟아올랐다.
슈아아앗!
구체가 빠르게 움직이며 금빛 궤적을 남긴 탓에, 밑에서 보기엔 관악구 상공에 기다란 금빛 사선이 그어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퍼포먼스에 조상익이 입을 쩍 벌린다.
여태 골라온 '300만 카르마 독점'에선 구체가 허공에 녹아 사라지는 게 끝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정답이었구나.'
조상익은 그새 시야 끄트머리까지 날아오른 구체를 보면서 무거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곤.
퍼펑!
"헉."
이내 동공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하늘 끝까지 날아간 구체가 폭발하며 온 하늘을 금빛으로 채운 탓이었다.
"와...!"
52세 조상익이 마치 아이 같은 탄성을 지른다.
리셋 이래 처음으로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광경을 보게 됐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클라이맥스는 이제부터였다.
구체가 폭발한 지점에서부터 넓게 펼쳐진 금빛들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스아아아아...!
꼭 빗소리처럼 들리는 금빛들의 낙하 소리.
그리고 실제 그 모습도 정말 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화… 황금비. 황금비였구나."
조상익은 조금 전 영우가 발음했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서울에선 단 한 번도 황금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도.
만약 어느 한 지역이라도 황금비가 내린 적이 있다면, 제일검 회합에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리고 이 말인즉슨.
'…아.'
지금 관악구 전역에 내리고 있는 황금비를 인접한 지역의 모두가 보고 있을 거란 거.
따라서 오늘 오후 3시에 열릴 제일검 회합에서도 분명 이야기가 나올 터였다.
"...."
순간적으로 조상익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려 했지만, 이어진 사건이 주의를 앗아 갔다.
"경북제일검 '정영우07'이 300만 카르마 독점을 포기하고 모든 관악 주민에게 3만 카르마를 선물했습니다."
"곧 3만 카르마가 기념주화 형태로 지급됩니다. 준비하십시오."
"기념주화?"
조상익이 놀라서 중얼거리자, 영우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순식간에 나타나니까 잘 잡으세요."
"그게 무슨...."
조상익이 반문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찰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파앗!
정말로 금빛을 띤 주화 3개가 허공에 나타났다.
"엇."
여전히 경황이 없는 조상익이었지만, 그는 능력치 총합이 수천에 달하는 관악제일검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무리 당황했어도 불시에 떨어진 주화 3개를 잡아내는 것 정돈 손쉬운 일.
타탓!
조상익이 번개 같은 출수로 주화를 잡아낸 뒤 손을 펼쳐 보자, 주화에 새겨진 경북제일검 정영우07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합니까?"
"그럼 변이자나 제일검은 뭐 가능한 일이었나요."
영우는 자신의 손에 잡힌 기념주화들을 슬쩍 본 뒤, 뒤편의 허공으로 던졌다.
휙!
그러자 다리 건너, 네귀그를 주차해 둔 곳에서부터 또 다른 금빛 물체가 총알처럼 쏘아져 나왔다.
-키잇!
다름 아닌 유물급 노예 황금 고블린이었다.
"...."
고블린이 주화를 받아 가는 걸 본 조상익은 저건 또 뭐냐고 질문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이제 그의 눈에 정영우는 거의 이계인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크게 틀리지 않은 진단이기도 했다.
영우는 단순한 지구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파아앗!
<퀘스트 완료 - "강호초출">
<보상 지급>
|500만 카르마
영우의 예상대로 변이자를 '능력치 총합 3천 이상의 대상'으로 판단한 퀘스트 시스템이 도고가 내려 준 임무를 완료 처리했다.
그리고 그들의 약속대로.
피이잉!
"어?"
하늘에서 웬 소리가 나더니.
쒸이이이잇!
아주 자그마한 쇠붙이가 무서운 기세로 곤두박질했다.
"헉."
"억! 뭐야."
또 다른 공격인 줄 알고 두 제일검 모두 기겁했으나, 정체불명의 쇠붙이가 두 사람의 근처에서 멈춰 선 덕에 볼썽사나운 모습까진 보이지 않아도 됐다.
"이, 이게 뭡니까?"
결국 또 참지 못하고 영우에게 질문을 던지는 관악제일검 조상익.
이에 영우는 문제의 쇠붙이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위이잉.
이젠 작은 진동음을 내며 약 1.5미터 높이에서 자전 중인 이 물건은.
'…카드잖아?'
손바닥 크기의 직사각형 카드였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의 신용카드 말이다.
"...."
영우는 이 물건이 쏘아져 내려온 하늘 저편을 잠시 보다가, 문제의 카드를 집었다.
탓.
그러자 까만 금속으로 이루어진 카드 위로 5,000,000이라는 숫자가 자그맣게 떠올랐다.
"…500만."
"오백만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카르마요."
이 카드는 외계 군수업체 도고가 지급한 퀘스트 완료 보상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기가 막힌 비행을 하던 이 카드조차 일종의 PPL일지 모른다.
영우는 이제 변이자도 없이 휑한 주변을 슥 둘러본 뒤, 주머니에 카드를 찔러 넣었다.
이 지역에서 변이자를 해치웠으니 조만간 상인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매물부터 확인한 뒤 이 500만을 어디에 쓸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영우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조상익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뭐가 또 있습니까...?"
변이자 처치, '친구' 소환 그리고 하늘을 빌려 쓰는 수준의 퍼포먼스인 황금비까지. 심지어 하늘 너머에서 내려온 카드도 봤는데 무엇이 또 있단 말인가.
"제일 중요한 게 하나 남았어요. 하지만 놀랄 일은 더 이상 안 생길 겁니다."
영우는 이렇게 말하며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는 알람 문구로 시선을 옮겼다.
[업적 달성 : 금빛 홍수]
|업적 등급 : 전설
|달성 랭크 : 최초
「추천 업적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수령하지 않은 업적 보상이 1개 있습니다.」
영우로 하여금 온갖 지역을 누비게 만들었던 메인 업적을 드디어 쳐 낸 것이다.
일명 황금비 루트.
첫 번째 보상은 감각 탈취 능력이 있는 '금빛 섬광'이었고, 두 번째 보상은 비대칭 전력이나 다름없는 고통 부여가 가능한 '금빛 징벌'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뭘까?
영우는 자신의 팔에 감긴 금빛 장비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보상 수령."
86화 23. 꼴통 (5)
영우가 보상 수령을 승인하자, 곧바로 그의 상체가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파아앗!
"어엇?"
도리어 이를 지켜보던 조상익이 놀랄 정도의 강한 이채였고, 곧이어 영우의 상체에 무언가가 씌워지는 게 보였다.
철컥!
다름 아닌 황금빛을 내는 갑주였다.
황금비 루트의 세 번째 보상 아이템은 흉갑이었던 것이다.
「금빛 서약」 - 전설 흉갑
[적의 공격 능력 50% 감소.]
[누적 황금비 : 5]
*'금빛 홍수' 특전.
'공격 능력...? 위력이나 근력도 아니고 공격 능력은 뭐야?'
이 세계의 아이템 툴팁은 결코 허투루 적히지 않는다.
일례로 언더독의 툴팁은 '사용자보다 체구가 큰 대상에게 위력 25% 증가'다.
따라서 금빛 서약이 단순히 상대가 가하는 공격의 파괴력만 줄이는 것이었다면 '위력'이라는 표현을 썼을 터였다.
'그럼 공격 능력이란 건 좀 더 복합적인 의미인가?'
물론 순전히 위력 감소였더라도 말도 안 되는 옵션의 장비임은 분명했다.
'완전히 수비형 장비네. 내가 선공을 할 땐 효과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어쩌면 황금비 루트를 걷는 자에겐 딱 맞는 효과일는지도 몰랐다.
모든 강자가 300만 독점을 택하는 이 시국에 홀로 카르마를 뿌리고 다닌다는 건 미움을 사기 딱 좋은 행동이지 않겠는가.
"차관님, 회합에 출두하는 제일검 간에도 일종의 서열 같은 게 있나요?"
"예?"
갑작스런 물음에 조상익이 의아하단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일단 답을 줬다.
"서열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고… 다만 서로 힘을 직접 겨뤄 본 적이 없으니 암묵적인 서열이 있을 뿐이라고만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그럼 그 안에서 차관님의 서열은요? 실례되는 말인 건 알지만 필요해서 여쭙는 겁니다."
"...."
영우의 말에 조상익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아마도 용산 공원의 방향일 북쪽을 흘깃 봤다.
"글쎄요. 중간 정도 되지 않을까요?"
굉장히 방어적인 대답이다.
'그래도 하위권은 아니라는 뜻이겠네.'
영우는 생각했다.
조상익이 이전엔 황금비를 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지난 이틀 동안 300만 카르마 독점만을 선택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보유했던 카르마 총액은 최소 600만. 능력치로 환산하면 6,000 포인트.
'곡도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장비가 없는 걸로 봐선 카르마 대부분을 능력치에 투자한 것 같고....'
단순 계산하면 조상익의 예상 평균 능력치는 대략 1,500이었다.
영우의 4대 능력치 중 수치가 가장 높은 근력보다도 무려 300이 높은 수준이다.
『캐릭터 : 정영우07』
[근력] 1,200 (19+1,181)
[지구력] 850 (21+829)
[내구성] 1,050 (13+1,037)
[감각] 600 (24+576)
즉, 다른 능력치로 비교하면 차이가 훨씬 벌어질 거라는 뜻.
여기까지 생각한 영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상익을 정면으로 보도록 섰다.
"그럼 저 좀 한 번 공격해 보시겠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절 죽일 생각으로 공격해 보세요. 한 번만요."
"그 갑옷 능력 때문인가요?"
역시나 예리한 조상익.
이에 영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도 제가 일격에 죽진 않을 거예요."
최악을 상정해 봐야 몸이 갈라지는 수준일 거다.
물론 엄청나게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그 정돈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붙을 터였다.
'이번에 얻은 장비가 정확히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 제대로 알아 놔야 해.'
이윽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영우가 눈으로 신호를 주자, 조상익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곡도를 들어 올렸다.
"정말 괜찮겠지요...? 변이자 전투에선 큰 도움을 못 드렸지만, 대인전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제가 누군지 잊지 마십시오."
곧 그쪽으로 칼을 내지르게 될 인물이 제일검이란 걸 간과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 충분히 고려했습니다. 시작하시죠."
영우의 거듭된 승인에 조상익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홰애애앳!
정말로 그가 곡도를 휘둘렀다.
홰애앳!
「감각 수치가 일시적으로 기존 600에서 1,360으로 상승했습니다.」
"...!"
영우가 감각 탈취를 통해 확인한 조상익의 감각 수치는 약 1,400.
과연 서울의 제일검다웠다.
그러나.
'뭐지...?'
막상 눈으로 보게 된 그의 공격은 무척이나 느렸다.
경북검법의 도움 없이도 막아 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제아무리 감각 탈취를 당했다고 해도 이렇게 느릴 수가 있을까?
그리고 애초에 공격 속도는 근력의 영역이지 않던가.
그러나 이건 못해도 1,500 이상은 될 근력에서 나오는 속도가 아니었다.
탓.
결국 영우가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공격을 피해 내자, 조상익의 기다란 곡도 끝이 허공을 갈랐다.
홰앳!
"…어?"
영우와 마찬가지로 뭔가 이상함을 느낀 조상익.
이에 영우가 다시 주문했다.
"한 번 더요. 이번엔 진짜 죽일 기세로 해 주십시오."
"예."
은근히 자존심 상한 조상익의 눈에 날카로운 살기가 돋았고, 이번엔 예고도 없이 그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쉬이이익!
이번엔 직선 베기보다 피하기 까다로운 사선 베기.
정말 작정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느려.'
이번에도 조상익의 공격은 더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위력만 줄이는 게 아니었구나, 공격 능력 감소란 게.'
여기까지 추론한 영우는 곧바로 흑검을 휘둘러 조상익의 칼날을 쳐 냈다.
패애앵!
그러자 영우조차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으윽...!"
곡도를 쥐고 있던 조상익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이다.
"괘,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영우가 다가가자, 조상익이 자기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이렇게 힘이 셀 줄 몰라서 제가 방심을 좀 했나 봅니다. 손목이 얼얼하네요."
"힘이 세다구요?"
영우는 이렇게 되물었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조상익에게 밝히지 않았을 뿐, 근력 수치는 오히려 이쪽이 현저히 낮을 터였다.
그리고 정말 방심했다고 하더라도 무기를 놓치면 놓쳤지, 손목에 부하가 올 리는 없었다.
따라서 이 결과가 뜻하는 바는.
'내 근력이 올라간 게 아니야. 순간적으로 차관님의 근력과 내구성이 내려간 거다.'
[적의 공격 능력 50% 감소.]
영우는 비로소 이 툴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공격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능력.'
무기를 휘두르기 위한 근력, 이 힘을 신체로 지탱하기 위한 내구성 그리고 소량이나마 사용될 지구력과 정확도를 위한 감각까지.
공격을 구성하는 능력 전부를 토막 내 버리는 효과였던 것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 아이템이네. 이러면 적어도 방어 면에선....'
조상익뿐만 아니라 서울의 다른 제일검 누구와도 견줄 만할 터였다.
'몇몇은 벌써 변이자를 처치했을 테니 차관님보다야 훨씬 세겠지만, 이젠 내게도 500만이 있다. 얼마든지 비슷한 수준으로 맞출 수 있어.'
영우가 주머니 위로 거액이 담긴 카드를 만지려는 찰나, 영우의 모든 능력치가 100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근력 수치가 기존 1,200에서 1,300으로 상승했습니다.」
「지구력 수치가 기존 850에서 950으로 상승했습니다.」
「내구성 수치가 기존 1,050에서 1,150으로 상승했습니다.」
「감각 수치가 기존 600에서 700으로 상승했습니다.」
영우가 완수한 금빛 홍수 업적이 업적창에 동기화되면서 서사 반지 '이상주의자'가 모든 능력치를 100씩 상승시킨 거였다.
'맙소사,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영우가 뒤늦게 업적창을 열자, 완료 업적 개수가 5에서 6으로 늘어나 있는 게 보였다.
〔당신의 업적 성향은 "꼴통"입니다.〕
||완료한 업적 : 6
'아직도 꼴통이군.'
영우는 자신의 업적 성향을 보면서 실소했다.
시스템이 그의 성향을 '꼴통'으로 규정하게끔 한 첫 황금비 사건이 생각나서였다.
'예찬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첫 황금비를 떠올리자, 당시 옆자리에 함께 있던 예찬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그래서 만년필로 그 녀석의 위치라도 살짝 볼까 했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당장은 훨씬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금빛 홍수를 완수했으니 새 업적이 하나 들어왔겠지.'
추천 업적 목록은 4개가 최대치고, 그중 하나를 완수해야 새 업적을 확인할 수 있는 구조다.
따라서 금빛 홍수가 완수된 지금, 새로운 추천 업적이 하나 생겨 있을 터였다.
'높은 확률로 황금비 루트 계열일 거 같은데… 다음은 설마 10개 지역에 비 뿌리기인가?'
이미 황금비 루트를 걷기 시작한 탓에, 전혀 다른 유형의 업적이 나타나도 곤란했다.
'그럼 일단 한번 볼까.'
이번 변이자 전투의 마지막 과업.
영우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추천 업적을 펼쳤다.
파앗!
[야행성]
|거주지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십시오.
[보석상인의 손길]
|검지와 약지에 영웅 등급 이상의 반지를 두 개씩 착용하십시오. (3/4)
[완전한 고아]
|부모를 찾아 없애십시오. (1/2)
[황금 여정]
|다음 지역에서 황금비를 부르십시오.
|내국 (0/3) |외국 (0/2)
***
쿵.
…
…
쿵!
…
쿠궁, 쿵!
'대체 누구야, 시끄럽게.'
태준은 잠결에 얼굴을 찡그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어!"
그러자 소름 돋을 정도로 새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으, 으엇?"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는데, 이번엔 바닥의 질감이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익!"
아니나 다를까, 바닥도 천장과 마찬가지로 재질을 알 수 없는 하얀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뿐인가. 사방을 에워싼 벽도 그리고 그 벽 한쪽에 아담하게 붙은 문고리도....
'무, 문이 있다!'
태준은 이 괴상한 공간에 문고리가 달려 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본능적으로 달려갔다.
타탓!
3평 남짓한 방이었기에 문고리를 붙잡는 데엔 채 몇 걸음이 필요하지 않았다.
텁!
이윽고 손아귀에 넣게 된 문고리.
태준은 지체 없이 문고리를 당겨 흰 벽 속에 매립되어 있던 출입문을 열었다.
홰액!
그러곤 방 밖으로 발을 내딛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억...?"
왜냐하면, 문밖 역시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벽과 천장이 있는 이 방과 달리, 바깥은 마치 무한한 공간인 것처럼 벽과 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희고 흰 배경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
그렇다 보니 고저 차를 가늠할 기준이 없어 지금 보고 있는 게 바닥인지 허공인건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대, 대체 뭐야...? 여기는."
태준이 자신의 방 밖에 쭈그리고 앉은 또 다른 사내를 발견한 건 이다음이었다.
"악!"
태준이 사내를 보고서 또 한 차례 비명을 지르자, 문제의 사내가 너무 반갑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님! 한참 기다렸습니다, 진짜!"
"…예?"
"접니다, 저요! 못 알아보시겠어요?"
기껏해야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익살스러운 표정의 사내.
옷은 웬 하얀 파자마 같은 걸 걸치고 있어서 무척 괴상해 보였다.
"...."
이에 태준은 잠시 눈을 껌뻑거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제대로 맞히신 거 같은데요."
"당신, 그때 그 짐승인가?"
경황이 없는 탓에 태준이 '놀'이라는 명칭 대신 짐승이라고 불렀지만, 상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예, 맞습니다! 저 홍영태입니다!"
홍영태.
경북제일검 정영우07의 친구… 아니 포로.
그렇다면 여기는.
"제기랄."
태준이 침음한다.
그저 긴 꿈을 꾼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가 그 감옥이군."
태준이 이렇게 말하자, 영태가 코를 슥 훑더니 애써 웃어 보였다.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이제 형님이 오셨으니까. 그전까진 이런 것도 없었거든요."
영태는 '이런 것'을 발음하며 방 밖의 무한한 공간을 손으로 훑었다.
"저게… 이전엔 없었다고?"
"예. 형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곳에 존재하는 거라곤 제 방 하나뿐이었어요."
"...."
제 방, 이라니. 그럼 이런 방이 또 하나 있단 말인가.
태준은 이제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얼른 나와 보세요, 형님! 어차피 거긴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어서 영태가 손을 휘저으며 태준을 신나게 불렀다.
이에 태준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방 밖으로 발을 뻗었다.
탓.
그러자, 왼편 저 멀리에 사각형의 흰 건물이 또 하나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영태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팔짝 뛰기까지 하며 벌써 저만치 달려가 있었다.
"저, 저 방엔 뭐가 있는데...?"
태준이 여전히 까마득하게만 보이는 일대의 흰 공간을 둘러보며 묻자, 영태가 아까보다 훨씬 멀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래시계도 있고!"
"모래시계...?"
"메뉴판도 있어요!"
"...?"
"다음엔 돈 좀 모아서 TV를 사려구요!"
한층 더 멀어진 영태의 음성.
그러나 'TV'라는 단어는 똑똑히 들렸다.
"TV? 여기에 텔레비전이 있다고?"
태준이 이렇게 되묻는 사이 영태는 자신의 방으로 막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
그래서 결국 태준도.
팟!
영태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87화 24. 파동 (1)
변이자란 무엇일까.
피상적으론 당연히 괴물일 터였다.
웬만한 인간 정돈 손가락 하나로 짓뭉갤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까.
게다가 대체로 세계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있다.
왜?
이 세계를 구성한 대중이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소멸 투표라는 미명 아래 가해진 익명의 일방적인 공격.
그래서 현식은 변이자들의 귀환이 이 세계에 대한 공격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무어라 정의해야 한다면.
'…반격에 가깝지.'
대중에게 죽임 당한 자가 돌아와 대중을 죽인다.
정말이지 끔찍한 세상이었지만 현식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가 자초한 업보잖아. 사람을 그렇게 죽여 놓고도 무사할 줄 알았냐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쿠우웅!
현식은 강했다.
이 세계의 그 무엇도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실은 바로 이것이 현식으로 하여금 '리셋'을 납득하게 만든 결정적 이유였다.
적어도 그는 여전히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으니까.
리셋이 일어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쯧."
현식이 혀를 차며 자신의 발밑에 고꾸라진 거대 생명체를 바라본다.
신장 약 3.5미터.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두꺼운 팔다리 그리고 그 위를 뒤덮은 날카로운 비늘.
지금 현식이 내려다보고 있는 건 강남구에 리자드맨으로 현신해 나타난 목사 김원길이었다.
"목사님, 이렇게 된 김에 한번 물어나 봅시다. 진짜 신이 있어요?"
현식이 김원길의 목덜미를 발로 쿡 밟자, 저 멀리까지 뻗어 있던 원길의 긴 주둥이가 힘없이 쩍 벌어졌다.
「…이제 보니 여기가 지옥이었구만. 그만 끝내라.」
김원길이 초탈한 듯한 대사를 뱉었지만, 현식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의 눈두덩이를 밟았다.
푸욱.
「으, 으아악!」
"물었잖아, 진짜 신이 있는 거 같냐고. 아직도 그렇게 믿냐고."
현식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댄다.
정현식, 52세. 현직 강남제일검.
동시에 그는 전직 재벌 2세이기도 했다.
국내 대기업 3위, 태원 그룹 창업자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식이 리셋의 소멸 투표 후보에 오르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대외 노출이 없던 탓이었다.
형과 누나가 각각 그룹 회장, 주력 계열사 사장을 꿰찼던 것과 달리, 현식은 태원에서 가장 작은 계열사의 전무에 불과했으니까.
덕분에 '개별 여과'에서 살(煞) 십여 개를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거다.
"장사치였던 내 형과 누나는 용이라도 됐어. 그런데 넌 뭐야, 응? 한낱 도마뱀이잖아. 어떻게 된 거냐고."
퍼억!
현식이 원길의 허리춤을 세게 걷어찼지만, 이번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 벌써 죽었나."
상대를 완전히 제압한 뒤로 한참을 더 두들겨 팼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쉬아앗!
이윽고 김원길의 사체가 말끔히 소멸하면서, 그의 죽음이 공식화됐다.
강남 대형 교회 '푸름'의 담임 목사 김원길 사망.
"...."
물론 현식이라고 해서 김원길에게 대단한 감정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푸름 교회가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태원 그룹이 헌금 및 기부 명목으로 거액의 광고비를 집행해 왔기 때문이다.
즉, 두 '업체'는 비즈니스 관계였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본질적으로 종교인이니까 최소한의 무언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다 허상이지."
현식은 김원길 목사가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찢어 죽일 사람부터 찾던 걸 떠올리며, 그가 있던 자리에 침을 뱉었다.
퉷!
그러자 그곳에 금빛 구체가 홀연히 떠올랐다.
「변이자를 처치했습니다.」
「절차 완료를 위해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흠."
고민할 것도 없이 300만 독점이다.
현식이 거금 수령을 선택하자, 금빛 구체가 허공에 녹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이때쯤.
바아아앙...!
저 멀리서부터 웬 차량 엔진음이 들려왔다.
"뭐지."
현재 시각, 오후 1시 14분.
방금 전까지 변이자 표식이 이곳을 비추고 있던 터라, 제정신인 강남 주민이라면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을 수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변이자가 무서울 테고, 칼잡이들이라면 제일검이 겁날 테니까.
그렇다는 건.
'외지인인가?'
간혹 검문소를 통하지 않고 이상한 길을 거쳐 진입해 오는 지방 출신의 검수들이 있긴 했다.
바아아앙....
이윽고 현식의 시야에 들어온 문제의 차량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저쪽도 강남제일검을 발견한 것이다.
쥐색 아반떼.
타 지역의 실력자가 몰고 다니는 차라고 보기엔 소박한 차종이어서, 현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덜컥.
이윽고 속도를 완전히 줄인 아반떼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건.
'어? 어디서 본 얼굴인데.'
현식도 아는 얼굴이었다.
물론 현식의 기준엔 조연급도 안 되는 인물이라 이름이나 신분까진 몰랐지만 말이다.
"저… 전무님."
이윽고 차에서 나온 사내가 약 10미터 거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걸어왔다.
"...."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본 현식은 불현듯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쪽을 제일검이 아니라 전무님이라고 칭한다는 건 태원 그룹의 직원이거나 강남구 마물 사업권에 입찰했던 사람 중 하나라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강남구 마물 사업권을 따낸 자라면 이것보단 좀 더 낯이 익어야 했다.
'강남에서 마물을 잡는 사람도 아니고 우리 직원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남은 경우의 수는 강남구 소속이지만 마물 사업권까진 따내지 못한 검수뿐.
다시 말해 서울이 아닌 경기권으로 내려가 돈을 버는 칼잡이로 추정된다는 거다.
그리고 거기엔 자수성가를 천명하며 독립한 외아들 정규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현식이 마중을 나가려고 걸음을 떼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그… 음, 저는 그러니까."
사내는 현식에게서 약 5미터 떨어진 지점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홰액!
갑자기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이마를 땅에 박았다.
'아, 설마.'
사내의 모습을 본 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곧 이어질 상대의 대사가 왜인지 예상돼서였다.
설마 아들이 변이자에게 도전하는 악수를 두었는가.
그게 아니라면 마물이 유독 강한 날이었을 수도 있다.
대체 누굴 닮았는지 지독한 성격 탓에 외지인과 시비가 붙었을 수도 있고.
물론 이 모든 게 그저 기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이 아니라면 대체 왜 통성명조차 한 적 없는 무명의 엑스트라가 갑자기 나타나 땅에 머리를 박는단 말인가.
"어떻게 왔냐고 물었습니다."
이번엔 현식의 음성이 살짝 흔들렸다.
이에 여전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는 사내, 이장호73이 강남제일검에게 아뢨다.
"아드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정 전무, 아니 강남제일검의 진노를 두려워한 장호는 자신이 '유일한' 목격자임을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분노한 제일검은 숨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장호의 예상과 달리 제일검은 미쳐 날뛰지 않았다.
대신 잇새로 아들의 소재부터 물었다.
"지금 내 아들은 어디 있습니까."
***
오후 1시 31분, 관악구.
영우는 교차로 너머의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마침내 상인의 위치를 의미하는 검은 빛기둥이 쏘아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해가 진 뒤인 오후 8시나 돼야 대실 서비스와 이상기후 공지가 나타나므로 사실상 주요 일과는 다 끝난 셈이었다.
"이제 상인을 만나 보실 겁니까?"
조상익이 영우를 따라 상인 표식을 바라보며 묻는다.
이에 영우는 도리어 조상익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지역의 제일검이시니… 상인 우선권은 차관님께 있죠. 물론 허락해 주신다면 만나 보고 싶습니다."
사실 이건 새 장비가 급하지 않아서 한 말이기도 했다.
상대의 공격 능력을 토막 내는 갑옷을 얻은 이상, 한동안은 순수 능력치의 효율이 훨씬 높을 터였으니까.
"글쎄요. 당장은 현찰이 많지 않아서 상인을 만나는 게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조상익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다.
영우가 이 지역에서 황금비를 뿌린 바람에 자기가 가져갈 300만이 증발했음을 상기시키는 거였다.
"학교로 돌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면 카르마를 십시일반 모아 주긴 할 겁니다. 어쨌든 회합에서 우리 관악구가 목소리를 내고, 변이자를 계속 상대하려면 강력한 제일검이 필요하니까요."
그러더니 조상익의 눈이 영우가 걸친 휘황찬란한 갑주에 닿았다.
"그나저나 영우 씨는 앞으로 어쩌실 생각입니까?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황금비를 뿌리나요?"
정영우는 굉장히 눈에 띄는 인물이다.
그리고 오늘 오후 3시에 열릴 회합에서 '황금비 목격담'에 대한 소명 요청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조상익은 가급적 영우를 데리고 회합에 출두하고 싶었다.
그래야 행여나 있을 추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테니까.
"...."
반면 영우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조상익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터놓고 믿을 상대까진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금 여정]
|다음 지역에서 황금비를 부르십시오.
|내국 (0/3) |외국 (0/2)
네 번째 황금비 업적 덕분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외국 지역이라니… 중국이나 일본 같은 데를 말하는 건가? 북한도 외국으로 쳐준다면 한번 시도해 볼 순 있겠네.'
외국 판정이 어떻든 간에, 중요한 건 업적 시스템이 외국에서의 변이자 처치도 고려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이런 업적이 존재한다는 건, 자국의 제일검이 해외에서 싸우게 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방증이었으니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
영우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무의미한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서울에서 할일이 더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일단은 허락해 주신다면 이곳의 상인부터 만나 봐야죠. 약속한 대로 김태준 대표님의 가족들도 수소문해야 할 거구요."
그리고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영우 자신의 아버지도 찾아야 했다.
"아, 그렇죠. 좋은 생각입니다."
영우의 말에 조상익이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김태준 대표의 가족들을 찾으려면 아무래도 정부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겁니다."
이참에 회합 출두를 하라는 이야기.
"그건...."
이에 영우가 강남제일검과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내려는 찰나.
"…음?"
편하게 웃고 있던 조상익이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영우를 바라보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서, 설마 당신입니까?"
"그게 무슨...."
영우는 이렇게 되물으면서도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몰라도 조상익이 모종의 전보를 받은 게 확실했다.
이를테면.
"강남제일검의 아들이 참수된 채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분당 근처의 고속도로에서요."
"그렇군요."
참수 소식에 영우가 놀라는 기색조차 없자, 조상익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아니...."
"말씀하신 것처럼 분당 근처에서 웬 양아치들이 시비를 걸기에 죽이긴 했죠."
"14명을 전부 말입니까?"
"그쯤 됐던 것 같습니다."
"그럼 시, 시체는요? 목이 잘린 채로 누워 있었을 텐데, 설마 그대로 두고 온 겁니까?"
"차관님께서는 마물을 죽인 뒤에 장례도 치러 주시나요?"
이 말인즉슨, 영우가 목이 잘린 강남제일검의 아들을 포함한 서울 검수 14인의 시체를 도로변에 그대로 두고 왔다는 말이었다.
"미… 미친."
새끼, 라는 뒷말까진 차마 발음하지 못한 채, 조상익은 말을 잠시 쉬었다.
왜냐하면 이제 진짜 중요한 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좆 됐습니다. 강남제일검이 지금 미쳐 날뛰고 있어요. 아들의 시체를 직접 봤다고 하니…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을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죠? 그건 순전히 제 일인데요."
영우가 이렇게 되묻자, 조상익이 순간 욱하려다가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에 당신이 관악구에서 황금비를 뿌렸으니까요. 씨발, 그걸 모두가 다 봤을 겁니다."
88화 24. 파동 (2)
황금비.
변이자를 처치한 자가 300만 독점을 포기하고, 모두에게 3만 카르마를 지급하기로 결정해야만 볼 수 있는 일종의 퍼레이드.
당연히 그동안 서울에선 그 누구도 황금비를 부른 적이 없었고, 모르긴 몰라도 전국 단위에서조차 흔하지 않은 일일 터였다.
그래서 조상익은 관악구에 내린 황금비를 보고서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황금비가 등장하는 조건과 실제 비가 내리는 모습까지,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내린 단비 같았으니까.
바로 이런 걸 기적이라고 부르는 걸까?
그러나 당시 느꼈던 감동도 찰나였을 뿐.
이제 조상익에게 황금비란 재앙의 이음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하필 강남제일검의 아들이 죽은 날에 관악구에서만 황금비라는 게 나타났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조상익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렇게 말하자, 영우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거죠?"
"서울 연맹이 제게 이번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할 겁니다. 황금비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가 그걸 내렸는지, 그 인물이 정현식의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건 아닌지."
"그럼 사실대로 말씀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외지인인 제가 무단으로 변이자를 처치했고, 황금비를 불렀다고."
"...."
영우의 말에 조상익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살아 있는 겁니까?"
"…예?"
"길에서 마주친 청년 14명을 살해한 외지인이 관악구까지 올라와서 변이자를 빼앗았는데, 관악제일검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느냔 말입니다."
"그야 그때 대화로...."
곧이곧대로 말을 이어 나가려던 영우는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앞뒤가 안 맞는군요."
그렇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전혀 설득력 없는 이야기였다.
서울 유지의 아들조차 과감히 베어 버린 외지인이 관악제일검은 건들지 않았다?
심지어 관악제일검은 갑자기 나타난 외지인이 자기 눈앞에서 변이자를 처치하는 걸 가만히 두고 봤고...?
'나였어도 안 믿긴 했겠네.'
영우가 상황을 납득하는 듯하자, 조상익이 말을 마저 이었다.
"정현식의 눈엔 제가 영우 씨의 조력자처럼 보일 겁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도 함께 죽이려 들 확률이 아주 높다는 뜻입니다."
저도 함께, 라는 건 살인 용의자인 영우는 당연히 죽일 거라는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현식은 현재 서울 연맹의 잠정적인 맹주입니다. 그러니 대다수의 제일검이 정현식의 편에 서겠죠."
"아무도 정현식을 막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같이 덤벼들지만 않아도 다행이지요."
"차관님도 평소 엄청난 미움을 받으시나 본데요."
"회합에 참여하는 모든 제일검이 질서를 원하는 건 아닙니다. 힘을 만끽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들도 있어요."
조상익은 이번 사태가 기폭제로 작용해 서울의 질서가 무너질 것을 염려했다.
"그렇다고 회합 출두를 피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 될 겁니다. 그랬다간 정현식이 관악구로 직접 찾아올 테니까."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서울대에 시산혈해(屍山血海)가 펼쳐질 터였다.
끔찍한 전개를 상상한 조상익이 미간을 찌푸린다.
"그럼 오늘 회합에 순순히 출두할 생각이란 말씀이세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가서 최대한 해명을 해 보는 수밖에 없지요."
"...."
이에 영우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 오후 1시 36분.
용산 공원에서 열린다는 제일검 회합까진 약 1시간 20분이 남았다.
"그런데요, 차관님."
"예."
"강남제일검이 그렇게나 강합니까? 왜 우리가 질 거라고 생각하세요?"
"...?"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우리' 좆 됐다고."
"그야...."
조상익이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자, 영우가 대신 뒷말을 이어줬다.
"우리 아직 그렇게까진 되지 않았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알죠. 그리고 전 아직 대인전에서 져 본 적이 없어요."
물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가 될 순 있을 것이다.
"저쪽은 오늘 300만을 벌었겠지만… 우린 얼마를 벌었죠? 인당 3만이니까, 최소 3천만. 아니, 몇 억은 벌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는 게 말이 되나요? 돈이 곧 힘인데. 관악구는 지금 서울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예요."
"...."
사실인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떻게 들으면 궤변이다.
관악구에 수많은 돈을 끌어온 건 사실이지만, 그 돈은 지금 이 지역 사방에 퍼진 지역구민들에게 나뉘어 있지 않은가. 이 자리에 돈이 쌓여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조상익이 혼란하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그러자 영우가 서울대 방향인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금하셔야죠. 다음에도 또 3만 카르마를 받고 싶다면 지금 1만씩만 돌려 달라고. 이미 서울에서도 비슷한 걸 하고 있었잖아요? 서울 로테이션이라고 하던가."
"...."
허무맹랑한 계획이었지만, 조상익은 반박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말 자체는 지극히 옳았기 때문이다.
황금비를 뿌린 뒤 일정 금액을 돌려받는 건, 각 지역구가 주민들이 척후병 퀘스트를 깰 수 있도록 도운 뒤 수수료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주민 입장에선 황금비 쪽이 압도적으로 안전하고 수익도 많게는 10배에 달한다는 점.
"어차피 관악구가 회합에서 목소리를 내려면 강한 제일검이 필요하다면서요? 그러니 이건 공익을 위한 일이기도 하죠. 명분 있고, 당장 닥친 위기기도 하고. 모금 충분히 가능할 거 같은데요."
또한 조상익은 서울 로테이션으로 구민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살길을 모색한 인물이기도 하지 않은가.
영우는 여기까지 말한 뒤 손목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차관님, 이제 1시간 17분 남았습니다. 관악구도 지금 서울 로테이션 중일 테니 구민들이 뭉쳐 있겠죠. 빨리 움직이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심지어 서울대엔 고수도 꽤 있잖아요. 사방으로 보내서 돈을 걷어 오게 하면 됩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조상익은 떨떠름하게 답하면서도 내심 놀라고 있었다.
정영우의 적응력과 대담함에 말이다.
과연 대지역의 제일검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걸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악구의 돈이라는 거, 정확히 알고 제안 중인 게 맞습니까?"
모금에 성공하더라도 그 돈을 영우에게 주진 않을 거란 이야기다.
이에 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처음에 약속했듯이."
"그, 그럼 제가 돈을 모으는 동안 영우 씨는 뭘 하고 계실 겁니까?"
조상익이 이렇게 묻는다는 건, 영우의 제안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
이에 영우가 마음이 좀 놓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 상인을 만나 봐야죠. 그전에 제 동료들과 이야기도 좀 해 봐야 하고."
"동료요...?"
이런 괴인에게 정말 동료가 있을까?
조상익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뒤편에서 차량 경적 소리가 들렸다.
빵, 빠앙!
"엇."
갑작스러운 소리에 조상익이 뒤를 돌아보자, 저편에서부터 다가오는 웬 순찰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태영과 종수가 영우를 찾아온 것이다.
***
"아, 반갑습니다. 조상익이라고 합니다."
조상익이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자, 태영이 겸연쩍은 얼굴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천 지구대의 권태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태영의 눈은 상대의 머리 위에 붙은 칭호에 닿아 있었다.
『관악제일검』
따라서 이 사내가 관악구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건 태영도 잘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외지 침입자인 영우와 이 사내 모두 산 채로 있는 걸까?
'분명 아까 황금비가 내리는 걸 봤는데 말이야.'
반면 조상익은 지금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상대의 악력을 가늠하고 있었다.
'완전 일반인인데...? 어쩌다 경북제일검이 지구대 순경하고 같이 다니게 됐지?'
조상익은 행여나 자신이 태영의 손을 으스러뜨릴까 봐 조심스레 악수를 마쳤다.
그리고 다음은.
"안동의 김종수입니다."
"예. 처음 뵙겠습니다."
안동의 김종수… 이번엔 직전의 경관보다 힘이 훨씬 셌다.
그렇다고 서울대의 정예 검수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물잡이론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정도.
"안동과 이천이라니 일행분들 내력이 잘 가늠되질 않네요. 마음 같아선 좀 더 진득하게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습니다. 워낙 중요한 일과가 있어서."
"조만간 또 뵙게 되겠죠."
종수가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자 조상익도 씩 웃어 주곤 다시 영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영우 씨는 이쪽에서 일을 보고 회합장으로 바로 오실 건가요?"
이제 각자 찢어질 텐데 회합 참여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이냔 물음이었다.
"아무래도 같이 가는 게 더 안전하겠지만… 여유 시간이 많지 않으시겠죠."
영우는 잠시 생각한 뒤 답을 이었다.
"제가 먼저 회합장에 가 있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정현식이 먼저 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결투를 신청하는 수밖에 없죠. 누구나 제일검 자리를 노리고 도전할 수 있다면서요?"
이는 양재 인터체인지의 경관들에게 들은 내용이라 확실했다.
―제일검 자리를 원하신다면 회합에 출석한 누구에게나 도전하실 수 있고, 마물 사업을 원하신다면 선점한 자와의 결투를 통해 사업권을 양도받을 수도 있습니다.
외지인인 영우에게 회합 참여를 권하며 했던 말이었으니까.
"제일검 자리에 도전할 수 있다는 거, 단독 대결을 의미하는 걸로 이해했는데요."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조상익이 침음한다.
정현식이야 당연히 자기 손으로 직접 아들의 원수를 죽이고 싶어 할 테고, 공식 결투라면 다른 제일검들도 섣불리 끼어들진 못할 터였다.
정현식이 룰을 어기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제가 회합에서 해야 하는 역할은 뭡니까? 정현식과 단독 대결을 하실 거라면."
조상익이 이렇게 묻자, 영우가 역시나 같은 우려를 표했다.
"만에 하나 제가 정현식을 압도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다른 제일검들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어요. 그러면 그때 지원이 붙는 걸 막아 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어차피 영우가 정현식에게 완패하면 조상익 역시 생존하기 어려울 터였다.
정현식뿐만 아니라 이참에 주인이 없는 지역구를 하나 만들려는 몇몇 제일검이 득달같이 달려들 테니까.
"…알겠습니다. 곧 용산에서 뵙죠."
일련의 협의를 마친 조상익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곤 남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뛰쳐나갔다.
파아앙!
"...."
이제 교차로에 남은 건 영우와 종수, 태영까지 셋.
이윽고 종수가 아까부터 궁금했다는 듯이 물었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이에 영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은 복잡한 곳이네요."
그러더니 이천 지구대 순경 권태영을 보며 물었다.
"태영 씨, 아직 경찰이시죠?"
"…물론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서울이 복잡해 보이긴 하지만요."
"그럼 부탁 좀 하나 드려야겠어요."
"그게 어떤...?"
태영이 일단 들어 보자는 제스처를 취하자, 영우가 턱을 긁적였다.
"사람들 좀 찾아 주세요."
"사람들이요?"
"예. 제가 회합에 출두해서 결판을 짓는 동안, 김태준 대표님의 가족들을 찾아 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김태준이라면...."
"VC소프트의 대표예요."
그러자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태영 대신 종수가 아는 체를 했다.
"형님, 설마 그 TJ 말입니까?"
"예, 그분이에요."
관악구의 3일 차 변이자 김태준, 그리고 일련의 전투와 '친구'를 맺기까지.
영우가 이 교차로에서 벌어진 일을 간략하게 요약하자 태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게 중요한 약속인데… 그 가족분들의 소재지는 파악이 되어 있는 겁니까?"
제아무리 경찰이라지만 김태준이란 단서 하나로 사람들을 찾아낼 순 없는 노릇.
이에 영우가 만년필 '수배 전단'을 꺼내며 말했다.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알 수 있을 겁니다."
89화 24. 파동 (3)
「수배 전단」 - 서사 문구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아버지
원하는 것을 찾게 해 준다는 마법의 만년필.
영우는 현재 탐색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는 '아버지'라는 문구를 잠시 보다가, 이내 대상을 재입력했다.
'두 가지 조건이 붙어도 제대로 검색이 되나?'
김태준의, 가족.
애초에 우주에서 온 물건이 '가족'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일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인간 세계에선 가족이라는 범주 안에 단순 혈육뿐만 아니라 배우자나 양자 같은 관계도 포함되니까 말이다.
'뭐가 됐든 가족 중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
영우는 조금 초조해진 마음으로 수배 전단의 탐색 대상을 재입력했다.
그러자 만년필 형태의 수배 전단이 일순 진동하더니 시스템 문구를 출력했다.
「새 탐색 대상이 입력되었습니다. 결과를 갱신하겠습니까?」
결과를 갱신하겠냐는 건, 지금 눈앞에 표시되고 있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지워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스… 승인.'
이에 영우가 갱신 승인을 하자, 수배 전단이 밝게 빛났다.
파아앗!
그러더니 북쪽을 가리키고 있던 탐색 화살표가 동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스스슷.
"엇...."
"형님, 무슨 일입니까?"
화살표는 이제 북동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이곳, 관악구를 기준으로 북동쪽이라면.
'서초, 강남, 광진 정도. 그다음은 구리시 아닌가?'
반면 VC소프트의 본사는 분당에 있다.
그래서 영우는 화살표가 남쪽으로 기울 거라고 예상하던 터였다.
슥.
이어서 영우가 화살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쪽 방향에 VC소프트나 김태준 대표와 관련한 게 있나요? 서초, 강남, 광진구 정도가 걸쳐져 있을 거 같은데."
그러자 종수가 의외라는 듯이 영우를 쳐다봤다.
"형님, VC의 첫 사무실이 논현동이었어요. 그래서 김태준이 거기 기념관 같은 걸 지었잖아요."
"아, 논현동이면."
"강남구죠."
강남구.
아들을 잃어 눈이 뒤집힌 정현식의 본거지다.
아니나 다를까, 종수도 이 사실을 지적했다.
"강남제일검 턱밑에 있었군요.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죠. 가족들만 얼른 찾아서 데려오는 데엔 별문제 없을 겁니다."
물론 영우도 저 주장엔 동의하는 바였다.
적어도 오늘 오후 중엔 강남제일검의 발이 용산에 묶여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경관님도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수사 경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건 민원 업무에 가까우니까요. 소싯적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태영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의 권총을 손으로 더듬었다.
실탄이 한 발 들어 있는, 이천 지구대장 김병철의 유품이었다.
"강남도 이곳처럼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지역이긴 할 거예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 종수 씨와 함께 움직이는 게 좋겠습니다."
"예, 형님. 이참에 밥값을 좀 해야죠."
"알겠습니다."
두 사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에, 영우는 둘에게 경비를 지급하려고 했다.
그러나 대번에 종수가 만류하며 자기 주머니에서 금빛 주화를 꺼내 보였다.
"경비는 이미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주신 돈도 그대로 있구요."
현재 종수의 재산은 무려 14만 7천 카르마.
사실 일반인 중에선 상당히 부유한 축에 속했다.
"당장은 현금보단 능력치가 더 유용할 거예요. 최소한만 남기고 능력치를 올려 두세요."
영우가 이렇게 주문하자, 종수의 신체 윤곽을 따라 점선이 그어졌다.
그가 영우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능력치 투자를 시작한 것이다.
반면 태영은 여전히 걱정이 조금 되는지, 경직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준 씨의 가족분들을 찾게 되면, 그다음엔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이건 꽤 어려운 문제였다.
만약 영우가 정현식에게 살해당한다면 태준의 가족 상봉은 요원해질 터였으니까.
'영태만 해도 이름표에 내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어. 그러니 주인이 바뀌면 친구들도 소멸할 가능성이 높지.'
어쩌면 호루라기에서 풀려나 다시 변이자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 번째, 영우가 정현식을 살해할 경우.
'그렇게 되면 내가 강남제일검이 된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대표님과 가족분들에겐 아주 좋은 일이겠지.'
이 경우엔 오히려 김태준의 가족들이 논현동에 그대로 있는 게 나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모종의 이유로 영우와 정현식 모두 산 채로 회합을 마무리하게 될 경우.
이러면 영우가 강남에 가서 '친구'를 소환할 수 없을 것이기에 김태준 대표의 가족들을 꼭 빼와야만 했다.
따라서 결론은.
"서울대로 모셔오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나마 중립 지역에 가까운 서울대에 의탁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
오후 1시 52분.
강남으로 두 사람을 파견한 영우는 이제 관악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상인 접견을 위해 길을 나섰다.
-뀌익.
철마 네귀그에 황금 고블린까지.
누가 봐도 영락없는 변이자 꼴이었지만, 다행히 상인을 만나러 가는 길목은 한적한 편이었다.
상인 표식 자체가 마물이나 변이자 표식과 같은 위치에 나타나진 않는 듯.
"뭐, 뭐야...?"
"으아악!"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철마를 보고 기겁해 달아나는 관악구민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어? 뭐야."
그리고 아주 가끔은 도주하는 대신 영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조금 전 얻었던 기념주화에 새겨진 얼굴과 저 괴인이 닮았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
이에 영우가 어색하게 묵례하면 상대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 제 갈 길을 가는, 그런 기묘한 일이 두어 번 더 있고 나서야.
스아아앗...!
마침내 검은 빛기둥이 자리 잡은 공원에 도착하게 됐다.
'상인들은 대체로 한적한 곳에 나타나는구나.'
영우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주변을 휙 둘러보며 안도했다.
마물과 변이자는 출현 예정지가 길바닥이든 건물 위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들이 다 때려 부술 세계이지 않은가.
이에 반해 상인들은 가급적 자신이 방문할 세계에 폐를 덜 끼치는 장소를 선택하는 느낌이었다.
어디까지나 거래를 하러 오는 입장이기 때문인 걸까?
철컥, 철컥.
네귀그를 천천히 몰아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자, 널찍하게 마련된 운동장 중앙에 검은 빛기둥이 내려와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내가 첫 손님이구나.'
영우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재차 확인한 뒤, 네귀그에서 뛰어내렸다.
탓!
그러자 빛기둥 안의 실루엣이 움찔하며 영우 쪽으로 몸을 돌렸다.
먼저 와 있던 상인도 거래 상대가 도착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번엔 덩치가 그렇게 크진 않네.'
물론 저자와 거래하게 될지 여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으리라.
이윽고 영우와 상인 간의 거리가 10미터 안쪽으로 줄어들자, 빛기둥 앞의 공간이 갈라지며 중개자 쿠부가 나타났다.
스르릇.
―지구의 인간, 경북의 최강자인 정영우07 님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번 거래를 중개하게 된 텐타족의 주인이자 다로의 수호자, 쿠부입니다.
이젠 거의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일관된 인사 문구.
그러나 허공을 눈꺼풀로 쓰는 쿠부의 모습 자체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본 거래의 중개 수수료는 10%이며, 상품 가격에 포함됩니다. 본 거래엔 총 3개 상단이 입찰했습니다.
―입찰한 상단 목록과 제안 내역을 보시겠습니까?
주중개자 특혜 역시 여전했다.
"예. 보여 주세요."
영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부의 눈이 크게 깜빡였다.
그러곤.
퀴기깃!
영우와 쿠부 사이의 허공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곧 그곳에 주먹 크기의 물체 세 개가 나타났다.
'저게 상단 목록...?'
영우가 정체불명의 물체들을 향해 다가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형체를 전혀 알아볼 수 없던 그것들이 각기 다른 모양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쉬리릿.
그건 다름 아닌.
'…아아.'
지구의 물건이었다.
각 상단이 나름의 방식으로 지구인이 알아볼 만한 물건을 빚어낸 것이다.
'세상에.'
영우는 마치 심사 위원이 된 듯한 기분으로 외계인이 흉내 낸 물건들을 하나씩 훑었다.
첫 번째는.
'동상인가?'
묵직하게 생긴 의자에 앉은 사람의 형상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왕. 왕이잖아.'
옥좌에 앉은 왕의 형상을 빚어낸 거였다. 심지어 고증까지 제법 잘된 임금의 복식을 하고 있었다.
재료는 무엇을 썼는지 모르겠는데, 점토도 돌도 아닌 희한한 재질의 물체였다.
어쨌든 이들이 어필하려는 건, 자신들의 거래 대상인 영우. 즉, 인간에 대한 이해가 높다는 점인 것 같았다.
영우가 한국인인 걸 고려해서, 실제론 과거에만 존재했지만 지금도 관념적으론 사용되고 있는 '임금'을 빚어서 보낸 거다.
따라서 이들이 제공하는 물품 또한 인간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터.
'굉장히 섬세한 양반들이겠군.'
그러나 영우의 이런 생각은 두 번째 물건을 보자마자 바뀌었다.
쉬리릿.
두 번째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로 만들어졌는데, 정말 살아 있는 것처럼 홀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쉬잇!
두 번째 상단이 만들어서 보낸 건 활공 중인 새였다.
깃털들의 세밀한 움직임부터 부리의 미세한 떨림까지 거의 완벽하게 구현한 새.
'엄청난 기술이네.'
다만 영우는 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어필하고자 새를 빚은 건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지구의 여러 내용물 중에 새라는 존재가 이들의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럼 다음은.'
마지막 세 번째 물건으로 눈을 돌리기 무섭게, 영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이, 이게 뭐야.'
세 번째는 물건이 아니라 일종의 풍경인 탓이었다.
콰르릉, 하면서 당장이라도 천둥이 칠 것 같은 한밤의 바다.
그 가운데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광경이 형상화되어 있었다.
"...."
분명 영우의 본거지인 지구의 일부 형상이건만, 그는 모종의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이자들이 내놓는 물건을 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이 사람들… 아니, 이 상단과 거래를 하겠습니다."
영우가 문제의 바다 풍경을 가리키자, 쿠부가 눈을 껌뻑였다.
―확실하십니까?
"예."
영우가 재차 고개를 끄덕이자 쿠부의 눈이 아주 잠깐이지만 허공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정영우07 님의 요청에 따라 샤밀 상단을 귀환시키고 로옴의 죄수들을 호출합니다.
쿠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빛기둥이 명멸하며 그 안에 보이던 실루엣이 하늘 위로 끌려 올라갔다.
그러곤 거의 곧바로.
콰아아아...!
시커먼 기름 같은 것이 빛기둥 안쪽을 가득 채우며 쏟아져 내렸다.
'저게 상인이야?'
영우는 빛기둥의 가장 밑부터 까마득한 윗부분까지를 그저 까맣게만 채운 '로옴의 죄수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자 쿠부가 눈알을 데룩 굴리며 말했다.
―상품 목록이 완성됐습니다.
상인, 로옴의 죄수들.
이들이 정말 어딘가의 죄수인지, 그저 상단의 이름이 '죄수들'일 뿐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이들이 파는 물건으로 미뤄 보건대.
'굉장히 극단적인 자들인 건 확실하군.'
1 ― 「부서진 저울」 - 유일 반지
[근력 30% 감소.]
[지구력, 감각 40% 증가.]
◇ 680,000 카르마
2 ― 「피학증」 - 서사 보석
[슬롯 : 출혈 시 근력 25% 증가.]
◇ 1,700,000 카르마
3 ― 「로옴의 바닥」 - 전설 검법
[죄수처럼 싸웁니다.]
◇ 현지 무공
90화 24. 파동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