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14. 롱소드를 쥔 판사 (3)
인간과 자동차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 누가 이길까?
영우야 차량만큼이나 빠르게 달릴 수 있었지만, 지금 들판 위를 가로지르고 있는 충주 시민들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바아앙...!
한참 늦게 출발한 영우 일행의 SUV가 그들을 십여 초 만에 추월했기 때문이다.
"으, 으악!"
SUV가 자신들을 앞질러 가는 걸 본 충주 시민들이 겁에 질린 비명을 질러 댄다.
도로 위를 달리던 사람들도 명호가 경적을 사납게 울리자 좌우로 넘어지듯이 길을 비켰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광경은 꼭....
"우리 진짜 충주를 공격하러 가는 거 같네요."
조수석의 종수가 창밖을 바라보며 신난다는 듯 씩 웃는다.
그는 사람들이 이쪽에게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것이다.
반면 영우는 운전석 머리 받침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명호에게 일렀다.
"속도 조금만 줄여 주세요. 혹시라도 누굴 치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한껏 기분을 내고 있는 종수와 달리 영우는 이 도시에서 문제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충주제일검이 다소 화난 상태로 뛰쳐나오더라도 최대한 대화로 풀어 볼 생각이었다.
'물론 다짜고짜 칼부터 휘두른다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겠지만....'
영우가 허리띠 좌우에 각각 채워 둔 흑검과 얼리버드를 만지작거리는 사이, 운전석의 명호가 침음을 흘렸다.
"엇, 저 앞에 뭐가 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이요?"
영우는 명호의 말을 듣고서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살폈다.
그러자 정말 명호의 이야기대로 사람들이 보였다. 검과 방패로 완전 무장하고 경찰 유니폼까지 갖춰 입은 세 사람이.
이 세 사람은 일렬로 선 채 도로를 가로막은 상태였고, 그 뒤로는 푸른색으로 칠해진 톨게이트가 마치 성채처럼 버티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검문소로 쓰는 중이구나.'
SUV가 서행하며 톨게이트 근처로 다가가자 유니폼 차림의 세 사람이 당황한 기색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톨게이트가 차량 통행료를 받기 위한 시설이긴 했지만 리셋 사태 이후론 차가 실제로 굴러오는 걸 본 일이 없는 탓이었다.
"어… 충주엔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윽고 세 사람 중 하나가 아직은 칼집에 들어 있는 검 손잡이에 팔뚝을 얹은 채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
이에 명호가 창문을 내리며 무어라 답을 하려는 순간.
"…비상! 비상!"
저 멀리 뒤편에서부터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아까부터 전력 질주 중이던 시민 무리의 선두였다.
"뭣...."
뒤늦게 눈앞의 SUV가 '비상'의 원인임을 인지한 경찰들이 험악한 목소리로 명호를 다그쳤다.
"다, 당신들, 뭐야? 당장 시동 끄고 차에서 내려!"
쉬링!
경찰들이 차례대로 검을 뽑았지만 명호는 운전석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덜컥.
뒷좌석의 영우가 자신을 대신해 차에서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싸우러 온 거 아닙니다. 여기 제일검이 신영주 씨죠? 그분만 좀 뵙고 싶어서 왔어요."
영우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양손을 펼쳐 보이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으나, 경찰들의 흥분 상태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영우의 맞은편에서 경찰들이 보고 있는 건 여전히 시동이 걸려 있는 차량과 얼리버드를 가진 외지인 그리고 그 뒤편에서 '비상'을 비명 대신 외치며 달려오고 있는 수십의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이 새끼야! 시동 끄고 내리라고!"
"너… 넌 엎드려. 마지막 경고다!"
영우 일행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과잉 방어를 하게 됐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두려움과 검문 담당자로서의 의무감이 충돌한 결과였다.
그러다 지나치게 흥분한 경찰 하나가 계속해서 엔진음을 흘리는 SUV의 전면부를 칼로 치려는 기색까지 보였고.
홰앳!
이어서 정말 칼날이 허공으로 올라가기까지 하기에 결국 영우가 움직이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번개처럼 쏘아져 나가 문제의 경찰을 어깨로 밀쳐 낸 것이다.
퍼억!
"컥!"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머지 두 사람은 동료가 바닥에 엎어진 다음에야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뭐야?"
"억!"
그러더니 둘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영우에게로 쏘아져 들어갔다.
「감각 수치가 일시적으로 기존 100에서 122로 상승했습니다.」
「감각 수치가 일시적으로 기존 122에서 141로 상승했습니다.」
충주 경찰 측의 반격이다.
그러나 탈취 효과를 통해 확인한 두 사람의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기껏해야 마물 몇 마리를 잡아 본 수준.
그래서인지 곧이어 나타난 경북검법의 홀로그램도 두 사람 모두 한 합 이내에 죽일 수 있다며 살(殺) 표식을 띄워 줬다.
하지만 영우는 가이드를 따르는 대신 온전히 자신만의 판단으로 행동했다.
칼을 쓰지 않고 '제일검의 위세'를 내뿜기로 말이다.
파아앗!
영우가 두 눈에서 이채를 발하며 금빛 파동을 뿜어내자, 그와 엉키려던 두 경찰이 일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헙?"
"억...!"
위세의 영향으로 인해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을 느낀 탓이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귓속에 영우의 나지막한 음성이 파고들었다.
"충주제일검, 어디서 만나 볼 수 있습니까."
영우가 이 말과 함께 위세를 거두자 경찰 하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으며 손에서 무기를 놔 버렸고, 다른 하나는.
"우워억!"
바닥에 엎드리듯 넘어지더니 그대로 토사물을 쏟아 냈다. 심력이 굉장히 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
영우는 땅바닥에 퍼지기 시작한 토사물을 피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아까 어깨로 밀쳐 냈던 경찰에게 물었다.
"좀 전에 말했지만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제일검은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으음."
이에 황망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서 있던 상대가 손을 들어 북동쪽을 가리켰다.
"아마 건대 캠퍼스에...."
"건대요? 건국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우가 알기로 건국대는 서울에 있는 학교였다.
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북동쪽을 바라보자 경찰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여기에 분교가 하나 있거든요. 그사이 별일이 없었다면 아직 캠퍼스 안에 계실 겁니다."
"그렇군요."
영우는 '계실 겁니다.'라는 대목에서 충주제일검이 시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걸 엿봤다.
"그럼 저희랑 같이 좀 가 주시겠어요?"
"예?"
"네비도 작동이 안 되니… 학교까지 길 안내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요."
"그, 그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경찰.
이를 본 영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무심한 투로 덧붙였다.
"저희가 단번에 길을 찾지 못하면 학교로 가는 동안 이런 일이 몇 번은 더 생길 텐데요. 괜한 변수를 만들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우가 말한 '이런 일'이란 또 다른 경찰이나 충주 시민을 만나 힘으로 제압하고 길을 묻는 일련의 과정을 뜻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면 비극이 아니겠냐는 물음… 아니 협박이기도 했고 말이다.
"...."
상대도 영우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이내 끄덕였다.
***
철컥.
영우가 톨게이트에서 차를 가로막았던 경찰 중 하나를 태우고 뒷좌석에 올라타자 좌중의 모두가 눈을 크게 뜨며 물어왔다.
"무… 무슨 일입니까?"
"누구예요, 이분은?"
"아니, 형님...."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놀란 건 영우의 협박에 못 이겨 길잡이를 자처하게 된 경찰 본인이었다.
"저기… 이게 뭡니까?"
경찰이 차마 뒷좌석에 올라타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시트 밑을 가리킨다.
-키잇?
그곳엔 금빛 피부를 가진 유물급 노예, 황금 고블린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제 노예요. 시간 없으니 일단 빨리 타시죠."
먼저 차에 올라탄 영우가 다소 강압적인 기운을 풍기며 손짓하자, 무력한 경찰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스윽.
그가 뒷좌석 끄트머리에 발을 들이자 고블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고, 명애도 고블린을 피해 차창에 바짝 붙으며 헛기침했다.
"...."
여러모로 불편하고 기괴한 자리.
어쨌든 모든 사람과 괴물이 착석을 마치자 영우가 운전석 머리 받침을 툭 건드리며 출발하란 신호를 줬다.
"어… 일단 도로 따라서 쭉 들어가면 될까요?"
명호가 이렇게 물으며 룸 미러로 뒤편을 살핀다.
그러자 경찰이 목을 가다듬으며 영우를 쳐다봤다.
"뒤로 조금 돌아가서 문강리를 통해 진입하면 검문도 없고 편할 겁니다."
"이대로 직진하면요?"
"음...."
영우의 반문에 경찰이 또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는 거니까 길이야 편하겠지만 문강리를 통하는 것과 시간 차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검문 때문에 더 지체될 순 있어도요."
"톨게이트가 하나 더 있습니까? 위로 올라가면 왜 또 검문이 있죠?"
영우가 이 질문을 던지자 비로소 경찰의 본심이 드러났다.
"인구 밀집 지역이 있습니다. 근처에 국립대도 하나 있어서 여러모로 사람이 많죠. 그만큼 치안 인력도 많구요. 그러니 최대한 사람을 피해 가는 게...."
"치안 인력이요...?"
온갖 것이 돌로 변한 마당에 어째서 국립대 근처에 사람이 많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인구 밀집 지역이라 치안 인력이 많다는 것부터가 영우에겐 문화 충격이었다.
그간 보아 온 도시들의 경우 치안은커녕 기본적인 생활 체계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치안이 어떻게 지켜지죠? 대부분의 경찰이 일반 시민보다 훨씬 강해야 가능한 일 아닙니까?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할 텐데."
또한 그게 가능하다 해도, 치안 유지를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경찰들은 누가 통제하는가?
경찰 중 하나라도 일탈을 하게 된다면 질서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일 텐데 말이다.
"아, 그건...."
영우의 질문 세례에 경찰이 진땀을 흘리며 운전석의 유리창 쪽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다가.
"어!"
갑자기 경찰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지며 탄성이 쏘아져 나왔다.
다만 놀랐다기보다는 반가워하는 것에 가까운 반응이었고, 영우는 그런 경찰의 모습을 보자마자 저편에 누가 나타났는지 은연중에 알아차렸다.
'설마.'
영우가 상체를 틀어 운전석 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기자,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부터 아주 빠른 속도로 접근 중인 실루엣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파바바바밧!
거리감이 상당한 이 마찰음의 정체는 사람이 맨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연달아 밀어내는 소리.
저편의 상대와 마찬가지로 맨발로 도로 위를 달려 본 영우였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충주제일검이 날 직접 찾아왔구나. 그런데 어떻게...?'
아직 파발 중 그 누구도 일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누가 알려 준 걸까?
파팟!
그사이 문제의 실루엣은 벌써 얼굴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고, 영우는 이때가 돼서 한 번 더 놀라게 됐다.
"...!"
충주제일검, 신영주22가 예상과 달리 중년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51화 14. 롱소드를 쥔 판사 (4)
'뭣....'
영우는 허공에 머리칼을 흩날리며 고속으로 접근 중인 충주제일검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시무시한 기세와 달리, 정작 제일검의 실제 모습은 가냘프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팔은 과연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늘었고, 얇은 입술과 메말라 보이는 뺨은 병약한 인상마저 줬다.
물론 능력치 포인트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 외형으로 전투력을 판단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분명 리셋 첫날엔 저 유약한 몸을 가지고 환전소의 아비규환을 돌파했을 거 아닌가.
영우가 쉽게 그려지지 않는 충주제일검의 리셋 첫날을 더듬는 사이, 저편에서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홰앳!
상대가 영우 일행이 탄 SUV를 바라본 채로 팔을 휘둘러 검을 던진 것이다.
"이익!"
"헉!"
영우와 처음 조우하던 순간을 떠올린 명호와 명애가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고, 여태 태평한 모습을 보여 주던 종수도 이때만큼은 영우 쪽을 돌아보며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반면 영우는.
"...."
상대가 던진 칼이 쏜살처럼 날아와 차량 왼편의 도로 위에 꽂히는 걸 묵묵히 바라봤다.
패애앵!
애초에 사람을 노리고 던진 칼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덕분이었다.
'뭐지? 이쪽이 어떻게 나오나 보려는 건가?'
심지어 상대가 던진 건 얼리버드.
놀의 허리띠 같은 게 있어서 원격 회수가 가능한 게 아닌 이상 굉장히 비싼 도발을 한 셈이었다.
"제일검이 직접 오셨으니 힘들게 길 안내를 해 주실 필요는 없겠네요."
바닥에 꽂힌 얼리버드에서 시선을 떼어 낸 영우가 태연한 목소리를 내자, 자리에 빳빳이 굳어 있던 경찰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헛."
그러더니 도망치듯 뒷좌석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타탓!
경찰이 도망친 방향은 다름 아닌 충주제일검의 뒤편이었고, 영우는 이를 보고 나서야 차에서 천천히 내렸다.
척.
시커먼 아스팔트 위에 닿는 영우의 하얀 맨발.
그러자 약 30미터 거리에서 차를 유심히 살피고 있던 충주제일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누가 봐도 제일검의 행색을 한 영우의 머리 위에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아서였다.
반면 충주제일검 신영주22는 여느 제일검과 마찬가지로 머리 위에 휘황찬란한 칭호를 붙이고 있었고, 이 점이 영우의 이목을 끌었다.
'도시의 치안대 역할을 자처할 정도면 황금비 루트를 탔을 법도 한데… 그 정도로 무모한 캐릭터는 아니었나?'
칭호를 감출 수 있게 해 주는 유물 문신 '암행 표식'은 영우가 황금비를 통해 업적 시스템을 처음 개방했을 때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당시엔 업적 시스템을 개방만 하면 누구나 받는 보상인 줄 알았으나, 여태 만난 제일검들이 전부 칭호를 감출 줄 몰랐던 걸 보면 황금비 전용 특전일 확률이 높았다.
즉, 눈앞의 충주제일검 역시 높은 확률로 300만 카르마 독식을 선택한 인물일 거라는 뜻이다.
'하긴. 황금비 루트를 탔으면 어딘가엔 금빛 장비를 걸치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딱히 안 보이고.'
영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무적'인 복장을 한 충주제일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검은 슬랙스에 남색 셔츠 차림, 왼팔엔 석화가 해제된 시계까지 두른 상태였다.
물론 그녀 역시 맨발이고 오른손에 기다란 장검을 쥐고 있었기에 충분히 위화감 있는 모습이긴 했다.
"듣자 하니 절 찾으셨다구요."
이윽고 먼저 입을 뗀 충주제일검.
대뜸 칼을 던져 오던 것과는 상반되게 온화한 어조였다.
이에 영우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예. 구미에서 올라온 정영우라고 합니다. 아까도 저분께 말씀드렸지만 싸우러 온 게 아니고...."
영우가 제일검 뒤편에 몸을 숨긴 경찰을 곁눈질하며 말을 이으려 하자, 충주제일검 신영주22가 왼손을 살짝 들면서 끼어들었다.
"말씀 도중에 죄송한데, 번호는요?"
"…네?"
"이름 뒤에 번호요."
번호.
동명인 중 환전소와 빨리 접촉한 순으로 매겨지는 식별번호를 묻는 거였다.
이를테면 충주제일검의 이름은 신영주22니까 전국의 신영주 가운데 22번째로 환전소와 접촉했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 이 식별번호의 숫자가 작은 인물일수록 리셋 첫날의 행보가 과감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위험인물인지 보려는 거구나.'
영우는 상대가 굉장히 경계심 많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7입니다. 정영우07요."
"정영우면 흔한 이름인데 아주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7이라니...."
영우의 번호를 전해 들은 충주제일검은 7이란 숫자를 곱씹으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위치를 옆으로 몇 발자국 옮겨 SUV 안을 살폈다.
"저쪽은 일행분들이구요?"
"예. 전부터 알던 사람들은 아니고 오는 길에 차를 좀 빌려 탔습니다."
"아, 그래요."
차를 빌려 탔다는 영우의 말에 충주제일검이 그의 맨발을 슬쩍 본다.
그러곤 영우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충주지원 판사 신영주22라고 해요."
기다란 머리칼이 바닥을 향해 길게 늘어지며 잠깐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영우로선 황송할 따름이었다.
어쩌면 적일지도 모르는 데다가 나이까지 한참 어린 상대에게 스스럼없이 허리를 숙이다니....
"아시겠지만 충주제일검이기도 하구요. 이곳 질서를 지키려고 최대한 애 쓰고 있죠. 아까 칼을 던진 것도 사과드릴게요. 제 입장에선 영우 씨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거든요."
"아...! 괘, 괜찮습니다."
신영주의 내력에 영우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작은 체구로 환전소 구간을 뚫은 것도 신기한데 판사이기까지 했다니.
'그래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건가? 단순히 힘만으로 도시를 지탱하는 게 아니었구나. 인품도 보통이 아닌 것 같고....'
그간 수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그래 봐야 리셋이라는 대격변이 일어난 지 이틀째일 뿐이다.
그래서 다들 칼을 쥐고 살게 됐을지언정, 이전 세계의 가치와 체계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영우 씨는요? 제가 도중에 끊는 바람에 아까 소개를 듣다 만 거 같은데."
"아, 그렇죠."
판사 출신의 충주제일검, 충주시 질서의 수호자.
신영주의 화려한 이력을 알고 나니 영우로선 선뜻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상대의 소개 양식을 그대로 따르자면 이쪽은 내세울 것이 딱히 없지 않은가.
구미에서 공장을 다니던 정영우. 어쩌다 보니 경북제일검이 되어 버렸고, 업적 달성을 위해 변이자들을 처치하며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
대단한 직업도, 그렇다고 숭고한 목적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다.
"저는...."
영우가 운을 떼고도 뒷말을 쉽게 잇지 못하자, 신영주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판사라고 해서 조금 부담되시죠? 역시 괜한 소리를 했나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더니 기묘한 행색의 영우를 슬쩍 훑어보며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구미에선 무슨 일을 하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예, 서른넷입니다. 구미에선 디스플레이 공장을 다녔구요."
"그렇겠네요. 구미에도 공장이 제법 많으니까요. 그나저나 구미면 여기서 꽤 먼데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신영주는 이 말을 끝으로 사람 좋게 웃더니 조용히 영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거다.
이에 영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여기까지 올라온 건지 궁금하시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며 눈매를 더욱 길게 빼는 신영주.
영우는 그런 상대를 보면서 뒤편의 SUV를 가리켰다.
"일단… 저분들 가족이 이곳에 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신세를 진 분들이라 겸사겸사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족이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신영주에게, 영우는 자신이 충주로 오게 된 경위를 간략히 설명했다.
구미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면서 변이자를 찾아 죽이고 있다는 것과 고속도로에서 정씨 일가를 조우하게 된 일까지 말이다.
그러자 신영주가 SUV를 쳐다보며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마침 저희가 매일 오후 7시에 시청 앞에서 인원 점검을 하거든요. 모든 분이 출석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곳에서 남편분을 찾아보시면 되겠네요."
"오후 7시면 대실 시작 2시간 전이군요."
"그렇죠. 저때 모이면 어쩔 수 없이 시청 근처에 있는 집을 빌리게 되니까요. 인구 밀집지를 조성하기 위한 방편이에요. 저도 항상 시청 근처에서 잠을 자니까 치안 유지에도 도움이 되구요."
"아아...."
영우는 다른 도시들과 차원이 다른 충주시의 관리 체계에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만큼 도시 외곽은 치안 사각지대가 되겠지만, 도시 전체가 무법화 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겠는가.
충주시는 현실적인 선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럼 이제 영우 씨가 왜 절 찾으셨는지도 들어 볼까요? 여긴 지금 변이자도 없는데 제게 무슨 볼일이."
이윽고 신영주가 은근히 몸에 힘을 주며 물어오기에, 영우도 상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장검을 바라봤다.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왜 이런 걸 기꺼이 떠맡고 계신지 알고 싶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이런 거… 라뇨?"
영우의 질문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의 신영주.
이에 영우는 팔을 슬쩍 펼쳐 주변을 휘저었다.
"충주시요. 사실상 생판 남에 불과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계신 거잖아요. 분명 좋은 일을 하고 계신 건 맞지만 이런 유형의 제일검은 처음 봐서 신기했거든요."
"그동안 제일검을 많이 만나 보셨나 보네요."
의미심장한 어조의 반문.
영우가 상대에게서 일순 살기를 느낀 건 결코 착각이 아닐 터였다.
그러나 아직까진 금빛 섬광의 감각 탈취 알람이 울리지 않고 있었다.
상대가 여전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리다.
"시민들이 저와는 생판 남인 거? 사실이죠. 제가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관점에 따라선 맞는 말일 수 있구요. 하지만."
신영주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하늘을 바라본다.
"제가 해야만 했어요."
"예...?"
"초대 제일검은 그냥 범죄자였고, 2대는 시야가 너무 좁았거든요. 그대로 놔뒀으면 제일검 본인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았겠지만 도시는 붕괴됐겠죠."
"도시가 유지되는 걸 아주 중요하게 여기시는군요."
영우가 이렇게 호응하자, 순간 신영주의 표정이 아주 싸늘하게 굳었다.
"당연하죠. 매일 괴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도시에 질서조차 잡혀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야...."
그 결과는 영우도 직접 봐 온 터였기에 잘 알았다.
그나마 강자가 출현하기라도 한다면 상주시처럼 독재가 시작되는 것이고, 그마저도 못 된 경우엔 김천처럼 변이자 하나에게 도시가 절멸하는 사태가 오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마녀사냥으로 시작된 일이니까 사람들에게 현명함을 바라진 않아요. 어떻게 보면 자기 수준에 맞는 세상에서 살게 된 셈이죠."
그러더니 신영주가 분하다는 듯 뒷말을 붙였다.
"하지만 난 아녜요. 나는 마녀사냥에 표를 던질 만큼 비열한 사람도 아니었고, 충분히 성실하게 살았어요. 형벌을 같이 받을 이유가 없다구요."
"...."
영우로선 무어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신영주의 입장도 이해가 됐으니까.
그녀는 본인이 적어도 이런 '형벌'을 받을 정도로 잘못 살지는 않았다고 자신했기에 억울했던 거다.
리셋만 아니었다면, 아니 설령 리셋이 벌어졌대도 무분별한 마녀사냥만 없었다면 이 세상은 조금이나마 더 정상적인 형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말았고, 그래서 결국 신영주는.
'남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떠맡기느니 직접 실권을 잡기로 한 거구나.'
3대 충주제일검.
마녀사냥에 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의 성장 자산은 환전을 통해 얻은 대량의 카르마였을 것이다.
'그 돈을 들고 환전소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어쨌든 신영주가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충주 시민 중 다수도 마녀사냥에 기꺼이 동참했으리란 걸 그녀가 모를 리 없잖은가.
그럼에도 충주시 수호자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우는 존경심이 생겼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판사님에 비하면 전...."
영우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려는 순간, 정씨일가의 SUV 안에서 금빛 신형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키잇.
그건 다름 아닌 유물급 노예 황금 고블린이었다.
주인인 영우가 한참이나 시야에 들어오지 않자 그의 곁에 붙기 위해 차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그리고 이내 녀석이 영우의 다리 근처에 찰싹 달라붙는 순간.
"어?"
삭막하던 신영주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저게 뭐예요? 설마 영우 씨 건가요."
"아, 예. 애완동물 같은 거죠."
"애완동물...?"
영우가 그저 애완동물이라고만 소개를 했지만, 신영주로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그녀도 외계 상단과 마주쳐 본 경험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상인이 생물을 팔기도 하나 보군요. 이런 건 처음 봐요."
고블린을 신기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던 신영주는 곧이어 시선을 옮겨 영우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비로소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외지인이 가지고 있던 것들 말이다.
팔뚝을 감싼 뱀과 금빛 팔찌, 어깨에 두른 검은 망토, 보급형과는 분명 다르게 생긴 철제 허리띠.
그리고 그 허리띠엔 얼리버드와 함께 웬 흑검이 하나 더 꽂혀 있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목에 걸린 호루라기와 손가락의 반지도 십중팔구 '아이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신영주가 아이템으로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세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리고 만 순간, 영우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서 이를 꽉 다물었다.
잠깐이지만 상대의 눈에서 익숙한 걸 엿본 탓이었다.
그건 다름 아닌 눈빛.
이틀 전, 환전소의 아귀다툼 중에 봤던 강도들의 눈빛이었다.
52화 14. 롱소드를 쥔 판사 (5)
'윽.'
신영주의 눈에서 불길한 빛을 감지한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칼집에 손을 갖다 대려다 얼른 멈췄다.
그러나 신영주도 뻔히 그 동작을 보고 있었기에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
"아, 제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요?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처음 보는 장비들이 많아서."
얼른 능청스러운 대사를 내밀며 분위기를 전환하는 신영주.
그러더니 정씨 일가의 SUV를 쳐다보며 화제를 바꿨다.
"충주엔 저분들 가족을 찾으러 왔다고 하셨죠? 그럼 영우 씨도 그때까진 이곳에 머물 예정이신가요?"
"아, 그건."
영우의 시선이 자신의 손목시계에 닿았다가 시야 상단의 타이머로 옮겨간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10분.
|광고주 도착까지 : 03:56:31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9시부턴 또 대실이 시작될 텐데.'
충주시의 인원 점검이 오후 7시에 있다고 했으니, 정씨 일가의 가족 상봉까지 지켜보려면 꼼짝없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물론 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는 충주인 만큼 평온한 밤이 보장되겠지만....
'문제는 광고주란 놈들이야. 보나마나 외계에서 온 괴물이지 않을까.'
영우는 광고주 방문이라는 불길한 이벤트에 충주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광고주들이 어떤 성향과 외향을 지니고 있든, 놈들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충주시에 큰 혼란이 야기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영주가 이쪽이 걸친 장비를 은근히 탐내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하기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만큼 힘에 대한 열망도 크지 않겠는가.
그래서 결국 영우는 본래 계획대로 계속 북상하는 걸 택했다.
"아뇨. 저는 바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대실이 시작되기 전까진 다음 도시에 닿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아무래도 영우 씨가 저보다 세상 경험이 많은 거 같아서 묻고 싶은 게 꽤 있었거든요."
신영주가 말한 '세상 경험'이란 아마도 리셋 이후의 세상을 일컫는 것일 터였다.
실제로도 충주시 붙박이일 수밖에 없었던 그녀보단 여러 지역을 돌파해온 영우의 경험치가 훨씬 높았고 말이다.
"저도 여유만 있었다면 판사님께 많은 걸 배웠을 텐데요. 그래도 언젠가 또 뵐 일이 있겠죠."
영우가 이 말과 함께 슬슬 자리를 뜨려 하자, 신영주가 앞서 바닥에 꽂아 놨던 얼리버드를 뽑으며 물었다.
"다른 볼일은 없으시구요? 전 사실 영우 씨가 장비를 워낙 많이 갖고 있길래 여기에도 상인을 만나러 온 줄 알았거든요."
"아… 그렇지 않아도 한번 여쭈려고는 했습니다."
상대가 먼저 상인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영우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도시 안쪽의 검은 빛기둥을 바라봤다.
"괜찮으시겠어요? 허락하신다면 상인과 만나 보고 싶습니다."
"물론이죠. 저야 살 수 있는 건 다 샀고, 이대로 두면 어차피 오늘 밤에 사라질 테니까요."
상인도 체류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영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신영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이요...?"
***
오후 4시 31분.
마침내 톨게이트를 지나 충주시 안으로 진입한 정씨 일가의 SUV는 여전히 꽉 차 있었다.
이번엔 경찰 대신 충주제일검 신영주가 뒷좌석에 합승했기 때문이다.
상인과의 거래를 마칠 때까진 자신이 동행하게 해 달라는 것이 바로 신영주가 내민 조건이었다.
영우는 어차피 충주에 머무는 동안 제일검의 감시를 받게 되리라 예상하던 차였기에 거부할 이유가 없었고, 정씨 일가로선 오히려 황송한 일이기까지 했다.
이들은 영우와 달리 앞으로 충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수는.
"어… 이렇게 되면 제가 명호 형님 쪽에 남을 필요가 없어지지 않습니까? 여긴 이미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요?"
이번 일을 이용해 영우와의 약속에서 벗어날 궁리를 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큰형님? 앞으로 여기서 쭉 지내실 거면 보디가드가 굳이 필요 없잖아요?"
종수가 다그치듯이 묻자, 명호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건 반쯤 진심이기도 했다.
충주가 안전한 것 이전에 종수란 인물 자체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큰 덩치, 지나친 넉살, 말만 동생이지 사실상 깡패처럼 느껴지는 기세까지… 뭐 하나 만만한 구석이 없었다.
"역시 그렇죠? 영우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명호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확인한 종수가 이번엔 영우를 쳐다본다.
그러나 명호를 볼 때와 같은 드센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니, 드세긴커녕 경외심에 가까운 무언가마저 눈에 서려 있기까지 했다.
"…으음."
물론 영우가 보기에도 명호에게 종수를 감당할 만한 강단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수가 이쪽과의 약속을 이렇듯 쉽게 저버리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짐이 될 만한 사람은 동료로 삼지 않겠다고 한 말 역시 진심이었다.
"두 분이 합의를 한 사안이라면 어떻게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지만, 그렇다고 제가 종수 씨를 거두는 일도 없을 겁니다. 일행이 있으면 움직일 때 제약이 많거든요."
영우가 이렇게 딱 잘라 말하자, 종수가 굉장히 낙담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차창 저편에 직사각형의 육중한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충주시청이었다.
"저기가 시청 광장이에요. 남편분이 아직 충주에 있다면 이 근처에 자리를 잡았을 겁니다."
신영주가 시청 건물 앞의 널찍한 공터를 가리키며 말하자, 명애가 아주 복잡한 눈빛으로 시청 광장을 훑었다.
아직 집합 시간이 아닌 데도 광장에 제법 많은 사람이 있어서였다.
다만 충주시 진입부의 벌판에 있던 자들과 달리 이곳의 대부분은 바닥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었다.
"어, 여기도 마물을 기다리는 건가?"
조수석의 종수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그러자 신영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거예요. 제 입장에선 시한폭탄이죠."
"시한폭탄요?"
명애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묻는다.
혹시나 저 안에 남편이 있을까 싶어 인파를 눈으로 헤치던 차였기 때문이다.
"네. 충주시민의 태반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떻게든 카르마를 더 벌려고 애쓰고 있어요. 목숨을 걸고 마물을 찾아다니거나 일일 퀘스트에 도전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쓸 만한 물건이라도 주우러 다니죠."
매일 오후 7시의 집합 시간에 임시 장터가 함께 열리는데, 쓸 만한 물건은 석화된 상태여도 거래가 된다는 게 신영주의 설명.
"그럼 지금 저기 있는 사람들은...."
명애가 광장의 인파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신영주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최소한의 자구책도 실행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죠. 가진 돈이 다 떨어지면 죽는 수밖에 없는데, 과연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저 사람들은 언제 강도로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물론 일일 퀘스트 정돈 수행하는 사람도 일부 있으나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신영주는 덧붙였다.
당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있지만, 일일 퀘스트만 해서는 대실료와 세금 이외의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이를테면 식량 같은 문제 말이다.
"리셋이 시작된 지 이제 이틀이 다 되어 가고 있어요. 다시 말해 대다수의 사람이 벌써 이틀째 굶고 있다는 거죠."
"그럼 충주에선 식량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죠? 마트나 백화점 같은 곳에 식량이 쌓여 있긴 할 거 아녜요?"
이 질문은 영우가 던진 거였다.
일찍이 구미의 마트 앞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걸 봤던 탓이다.
이에 신영주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관리할 것도 없어요. 1대 제일검 시절에 난장판이 돼서 마트고 뭐고 다 털렸으니까."
"…아."
영우가 탄식하자 신영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만 음식을 가지고 있어도 카르마가 없으면 먹지 못하니 결국엔 장터로 가지고 나오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돌이 된 음식도 카르마로 거래가 될 테니 1대 제일검 시절에 강도질을 한 사람들이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된 셈이네요."
영우의 지적에 신영주가 눈을 꽉 감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에요. 현실적인 한계죠. 그렇다고 개인이 가진 모든 음식을 강제로 회수한다면 그건 더 큰 혼란을 야기할 겁니다. 애초에 완벽한 회수가 가능할 리도 없구요."
어쨌든 신영주에겐 치부나 다름없는 일일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자, 이 대화는 여기까지 할까요? 이제 광장에 도착했으니 괜찮으시다면 바로 상인을 보러 가죠."
이 말과 함께 신영주가 뒷좌석 문을 열자, 광장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차량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정말 이렇게 헤어진다고요? 나는 좀 억울한데...?"
종수가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고, 그사이 영우는 신영주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명호도 얼른 차에서 내려와 영우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게 있나요. 좋은 일만 있던 것도 아니고 저도 명호 씨와 어머님께 신세를 진 걸요."
"...."
"그나저나 정말 종수 씨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진짜 자기 갈 길 가 버릴 사람 같은데."
영우가 이제 막 차에서 내리기 시작한 종수를 슬쩍 쳐다보며 말하자 명호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종수 씨는 결국 남이잖아요. 어차피 오래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죠."
그러더니 명호의 시선이 차량 안쪽으로 향했다.
이에 영우도 그리로 눈을 돌리자 뒷좌석의 명애가 말없는 목례로 작별인사를 해 오는 게 보였다.
"...."
"어머님, 건강하세요.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마도 이게 정씨 일가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일 것이다.
영우는 명애에게 깍듯이 인사를 한 뒤, 검은 빛기둥 방향으로 벌써 서너 걸음 나가 있는 신영주의 뒤를 쫓았다.
***
오후 4시 52분.
시청 광장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우는 이상함을 느꼈다.
파파팟!
앞서 달리는 중인 신영주가 이쪽의 템포에 맞추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뛰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다른 일행도 없고 제일검 신분인 사람 둘뿐이라 고속 이동을 하는 거야 십분 이해됐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쪽은 외부인이고 형식적으로나마 손님이기도 한데 저렇게 마구잡이로 먼저 달린다고?'
따라서 영우의 생각에 이건 아무리 봐도.
'설마 내 능력치를 가늠하려는 건가.'
정황상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됐다.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영우는 자신이 제일검치곤 능력치가 현저히 낮다는 걸 고스란히 보이고 있는 셈이었다.
신영주가 조금만 속도를 내면 금방 뒤쳐지기 일쑤였으니까.
"혹시 너무 빨라요? 거의 도착하긴 했는데… 이쯤부턴 조금 천천히 갈까요?"
아니나 다를까 신영주가 뒤를 흘깃 돌아보며 걱정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이에 영우는 애써 웃으며 상대의 말대로 상당히 가까워진 검은 빛기둥을 쳐다봤다.
"아뇨, 괜찮습니다. 이제 정말 다 왔네요."
주변을 둘러보자 여긴 시청 근처와 달리 인적이 전혀 없다는 것도 느껴졌다.
어쩌면 상인 근처는 마물을 잡으려는 사람들조차 접근하지 못하는, 일종의 제한 구역인 게 아닐까?
'하긴 상인은 선착순으로만 상품을 판매하니까… 제일검 권한으로 접근금지령을 내렸대도 이상할 게 없지.'
그렇다면 신영주는 어째서 외지인에게 선뜻 상인과의 거래를 허락한 걸까?
스으....
이윽고 상인 특유의 위화감이 공기를 통해 느껴지면서 크고 작은 건물들로 가려져 있던 시야가 일시에 트였다.
마침내 상인이 자리를 잡은 교차로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때맞춰 여태 앞서 가기만 했던 신영주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탓!
그러더니 손을 들어 전방의 빛기둥을 가리켰다.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길 바랄게요."
53화 14. 롱소드를 쥔 판사 (6)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길 바란다라… 영우는 신영주의 말을 곱씹으면서 전방의 빛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현재 그가 보유한 카르마 총액은 87만 1천.
'이 돈이면 유일급 장비 정돈 살 수 있겠네.'
물론 십중팔구 신영주가 좋은 매물을 선점했겠지만 영우에겐 아직 여지가 있었다. 주 중개자 쿠부 말이다.
'변수가 있긴 해. 이곳의 상인은 한 차례 거래를 진행한 상태니까.'
영우의 중개자인 쿠부가 제공하는 혜택은 거래에 입찰한 상인들을 보여 주고 그중에서 원하는 대상을 직접 고를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그런데 만약 영우가 이미 입찰이 끝나 최종적으로 거래까지 진행한 상인과 접촉한다면?
이 경우에도 쿠부가 새 상인 리스트를 보여 주고 원하는 거래자를 고를 수 있도록 해 줄까?
'이참에 알아보면 되겠지. 별다른 사건이 터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조용히 뒤를 돌아보니 신영주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천천히 따라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표정도 더없이 온화하고 금빛 섬광 역시 상대에게서 아무런 살의를 감지하지 못했지만, 영우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자신이 신영주였다면 이 외지인을 살려서 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주변에 보는 사람도 없고… 시민들 몰래 살인을 하기엔 최적의 장소야. 거래 도중에 뒤를 치면 반응도 느릴 수밖에 없겠지.'
이곳까지 함께 달려오면서 이쪽의 능력치가 낮다는 것도 눈치 챘을 테니, 도덕심만 좀 내려놓으면 지금 이 상황은 신영주에게 둘도 없을 성장 기회가 될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힘을 이용해 충주시를 더 굳건히 지킬 수 있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끝까지 뒤를 노려오지 않는다면....
'그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지. 내가 세상을 너무 악하게만 보고 있다는 걸.'
영우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허리띠에 끼워진 흑검과 얼리버드를 뽑아 땅바닥에 꽂아 넣었다.
콰악!
만에 하나 신영주가 후방 기습을 감당할 경우 이 검들을 불러들여 반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이를 보고 있던 신영주가 의아하다는 듯 물어왔다.
"뭐예요, 갑자기?"
"제 나름의 예의죠. 거래를 하러 왔다는 사람이 무기를 들고 있으면 조금 그렇잖아요."
"...?"
영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의 상대를 뒤로 하고서 다시 빛기둥을 향해 걸었다.
'대충 이십 미터쯤 되려나.'
칼을 박아 둔 지점부터 빛기둥까지의 거리는 약 20미터.
슥.
가슴 언저리를 만지자 품속에 넣어 뒀던 단검이 느껴졌다.
신영주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빠르다면 땅에 박아 둔 칼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녀와 맞붙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정말 그렇게까지 된다면 단검이라도 뽑아서 시간을 벌 생각이었다.
'아주 살짝이라도 칼이 스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금빛 징벌」 - 전설 팔찌
[적에게 고통 부여.]
[누적 황금비 : 4]
능력치 열세일 게 분명한 영우가 믿고 있는 건 금빛 징벌이 안겨 줄 어마어마한 고통이었다.
극도로 분노한 변이자들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했던 효과 아니던가.
"후우."
영우가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냈을 때쯤, 그와 검은 빛기둥의 거리가 십여 미터 수준까지 줄어들면서 마침내 상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끼르륵.
저편에서도 영우의 존재가 느껴졌는지 이질적인 소리를 냈고, 곧이어.
"읍...."
나름 산전수전을 겪어 온 영우조차 순간 멈칫하게 될 정도의 흉물스러운 존재가 빛기둥 바깥으로 몸 일부를 내밀었다.
스윽.
그건 바로.
'저… 저런 것도 상인이라고?'
아주 거대한 바퀴벌레였다.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 바퀴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몸 길이가 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인다는 점.
빛기둥 바깥으로 완전히 나올 수는 없는지, 본래라면 곧게 뻗어 있었을 기다란 더듬이가 기둥 벽면을 따라 위로 휘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맙소사."
영우가 끔찍하다는 투로 중얼거리자, 뒤편의 신영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왔다.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되네요. 저걸 볼 때마다 겁이 나기도 해요. 앞으로 대체 무슨 일이 더 벌어질지… 이런 건 예측할 수가 없잖아요."
신영주의 음성에서, 영우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엿들었다.
"그래도 용케 거래를 하셨네요. 판사님은 저자에게서 뭘 사셨나요?"
영우의 이 물음에 신영주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저자, 라고요? 아까부터 느끼던 거지만 영우 씨, 정말 특이한 사람이네요. 아무래도 젊어서 그런가."
그러더니 바퀴 모습을 한 상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직접 확인해 봐요. 많이 사진 않았어요."
-끼륵.
때맞춰 울음을 뱉는 상인 바퀴.
이에 영우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빛기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빛기둥 사이의 공간이 갈라지며 중개자 쿠부가 나타났다.
스르릇.
―지구의 인간, 경북의 최강자인 정영우07 님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번 거래를 중개하게 된 텐타족의 주인이자 다로의 수호자, 쿠부입니다.
여느 때와 같은 쿠부의 인사말.
다음엔 녀석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쿠부가 눈알까지 굴려 가며 거래 현장을 살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즉, 뭔가 이상함을 느낀 거다.
그도 그럴 게 지난 두 번의 거래 모두 영우가 첫 거래자이지 않았는가.
반면 이번엔.
―누가 먼저 다녀갔군요. 거래 내역이 존재합니다.
쿠부의 음성에서 곤란한 기색이 묻어 나오기에 영우가 물었다.
"그래도 거래는 가능하죠? 아니면 설마 수수료가 달라진다거나."
―거래는 가능합니다. 수수료 역시 변동이 없습니다만, 거래 대상을 교체할 순....
영우에게 시선을 붙인 채 답변을 이어 가던 쿠부가 갑자기 눈알을 굴려 어딘가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조심하십시오.
영우가 예상치 못한 대사를 뱉어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
여태 침묵하던 금빛 섬광이 경고 메시지를 출력한 것도 이때였다.
「감각 수치가 일시적으로 기존 100에서 866으로 상승했습니다.」
'미친.'
감각 수치가 무려 766 증가.
이건 기습해 온 상대의 감각 수치가 1532나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저만한 능력치를 지니고 있을 법한 존재는....
홱!
고개를 뒤쪽으로 틀자, 충주제일검 신영주22가 눈에서 금빛 안광을 뿌리며 달려드는 게 보였다.
경북검법의 홀로그램 가이드에 따르면 상대의 칼끝이 이미 이쪽의 목에 닿아 있었고 말이다.
"...!"
홀로그램이 반격 시도조차 않고 회피 기동만을 권하고 있었기에, 영우도 이를 따라 몸을 비틀었다.
횃.
그러자 신영주의 찌르기가 아주 간발의 차이로 영우의 목이 있던 자리를 쑤시고 들어왔다.
"판사님...!"
영우가 뒤로 구르다시피 하며 거리를 벌렸으나 소용없었다. 신영주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혀온 신영주의 신형(身形)은 해를 등진 탓에 시커멓게 보였다.
그리고 곧이어.
쐐앳!
영우가 단검을 채 뽑기도 전에 신영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커억!"
복부에 느껴지는 격통.
영우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즉시 깨달았다.
비단 고통이 아니더라도, 상체가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밑을 내려다볼 필요조차 없었다.
아까보다 한층 선명해진 고통과 허공에 붕 뜬 듯한 느낌이 많은 걸 설명해 주고 있었으니까.
방금 일격으로 몸이 동강 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상대에게서 뺏어온 감각이 아직 빠져나가지 않았고 확실하진 않지만 팔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며,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다는 점일까.
"아아악!"
영우는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20미터 거리에 박아 둔 두 자루의 검을 불러들였다.
그러면서 품속에 넣어 놨던 단검을 뽑아 휘둘렀다.
휘잇!
이미 머리통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중이었기에 상대의 발목 언저리를 휘젓게 될 뿐이었지만, 영우의 이 마지막 발악은 큰 효과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잠시나마 신영주의 주의를 돌리는 데엔 성공했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칼 두 자루가 쏜살처럼 날아오고 있다는 걸 조금 늦게 인지할 정도로는 말이다.
쒸이이잇!
"헉."
눈앞을 어지럽히던 홀로그램들이 무얼 의미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신영주.
충주검법이 무조건적인 회피 기동을 주문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이미 칼을 휘둘러 얼리버드를 쳐 내는 중이었다.
이건 순전히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햇빛을 받은 얼리버드가 번쩍이면서 시선을 잡아끈 탓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콰앗!
방금 막 가슴을 뚫고 지나간 시커먼 칼까진 미처 보지 못했다.
"하악...!"
생전 처음 신체에 큰 손상을 입어 본 신영주는 자신의 가슴에서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걸 보고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여, 영우 씨!"
얼마나 경황이 없는지 불과 수초 전 자신이 동강 낸 영우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
그러나 정작 영우는 임무를 마친 흑검이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기묘한 장면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편에 엎어져 피를 쏟아 내고 있는 하반신 말이다.
"…거의 다 됐었는데."
왜인지 의식이 계속 또렷해서, 영우는 극심한 고통과 속이 타는 듯한 억울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다 더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게 된 신영주가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이 난장판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저… 판사님. 판사님도 아직 안 죽었죠?"
신영주의 두 다리가 바르르 떨리고 있기에 물은 것인데, 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어쩌면 금빛 징벌이 부여한 고통을 맛보느라 입을 열 기력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영우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제가 여력이 됐다면 빨리 죽여 드리기라도 했을 텐데. 저도 이제 곧 죽는지 팔이 잘 안 움직여요."
자세히 보니 아까보다 신영주의 떨림이 작아졌다. 그녀 또한 정말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누가 됐든 다음번에 여길 지나가는 사람은 횡재하겠네요."
죽기 전 마지막 너스레를 떨며 소지품창을 띄우려는 순간, 저 멀리 자그마한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키잇....
다름 아닌 유물급 노예 황금 고블린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잽싸게 전장을 떠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어? 여기야, 여기!"
-키잇?
놈은 영우에게 의식이 있는 걸 확인하고도 주변을 기웃거리기만 할 뿐 도움을 주러 오진 않았다.
"…하긴 넌 내가 죽으면 자유일 테니까. 어쨌든 난 조졌네."
결국 여기까지인가.
아무래도 4급 인간 출신의 제일검은 장수하기 어려웠던 걸까.
"채 이틀을 못 살았네. 리셋만 아니었음 3년은 살았을 텐데."
|이름 : 정영우
|역할 : 4급 엑스트라
|기능 : 배경, 보수재
|생성 : 1992년 4월 8일 오후 11시 41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수정.
|소멸 : 2028년 11월 7일 오후 8시 36분, 귀가 중 취객에게 구타당해 사망.
영우는 한때 역겹게까지 느껴지던 자신의 운명록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눈을 천천히 감으려는데.
빠아앙!
별안간 어디선가 자동차 경적이 울리며 그를 다시 깨웠다.
"...?"
그리 멀지 않다.
심지어 바닥을 통해 자동차 특유의 진동이 전해지기까지 했다.
이제 정말 기력이 다해 고개를 돌려볼 순 없었지만,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진 금방 알 수 있었다.
"형님? 어디 계십니까?"
정씨 일가를 내팽개친 종수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54화 15. 별종 (1)
"종수 씨...!"
영우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뜻밖의 방문자를 불러들였다.
스물아홉의 안동 토박이 김종수.
이제 그와 초면까진 아니게 됐지만, 그렇다고 의리를 기대할 정도의 관계냐 하면 그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생각해 보니 몸이 두 동강 난 마당에 누군가가 와 준다고 해서 도움이 될까 싶기도 했다.
"형님, 어디십니까? 도저히 안 보입… 억!"
이윽고 현장 근처에 도착한 종수가 상하체 두 덩이로 분리된 영우를 발견하고서 급정거했다.
끼익!
그러곤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재차 확인했다.
"…형님?"
"예. 여기예요."
"으익!"
소스라치게 놀라며 차 밖으로 뛰쳐나온 종수는 한동안 제자리에 서서 두 눈을 껌뻑이기만 했다.
뭐 하나 만만한 광경이 없는 탓이었다.
빛기둥 안에 갇혀 있는 초대형 바퀴벌레 그리고 그 앞에 홀연히 떠 있는 거대한 눈알… 하지만 저런 것보다도 하반신이 잘려 나간 영우가 멀쩡히 살아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아니, 대체 어떻게 살아 계십니까?"
"그러게요. 원래 사람이 이렇게 돼도 쉽게 죽는 건 아니었나 봐요. 아니면 능력치를 많이 찍어서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되죠. 얼마나 이러고 계셨는데요?"
"아...."
영우는 이쯤 돼서야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오래 버텼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까 열다 만 소지품창을 열어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파앗!
「슬라임의 핵」 - 변이 팔찌
[재생력이 비약적으로 상승.]
슬라임의 핵.
상주제일검 독고세환01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다.
종래엔 머리가 반쯤 박살 나고 몸이 위아래로 찢어졌음에도 숨이 붙어 있던 그 독고세환 말이다.
'맙소사. 이거였구나.'
재생력이 비약적으로 상승, 이라는 문구가 이 정도 효과를 의미하는 것일 줄이야.
'설마 이대로 계속 있으면 잘린 부위가 아물기라도 하나?'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본래라면 일찍이 과다 출혈 내지는 쇼크로 죽었어야 하지 않은가.
물론 이미 잃은 혈액량이 상당하긴 하다만 지금이라도 봉합을 시도한다면....
"저기, 종수 씨."
"옙?"
"괜찮다면 제 다리 좀 가져다가 이 밑에 붙여 주시겠어요?"
"…예?"
영우의 요청에 종수가 귀신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다음엔 공포에 가까운 무언가를 내비쳤다.
"그, 그렇게 하면 몸이 도로 붙기라도 합니까...?"
"어쩌면요."
"...."
영우의 답에 종수가 입을 쩍 벌리더니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그러곤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영우의 하반신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그러니까… 이거를 일단 갖다 붙이기만 하라는 거죠?"
"예, 일단은."
기력이 쇠한 영우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종수도 그를 따라 고개를 까닥였다.
그다음엔 영우의 하반신을 상반신 근처까지 끌고 왔다.
스륵, 스르륵.
이제 남은 건 두 개의 절단면을 적당히 맞대는 일뿐.
그런데 종수가 여기까지 와서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
"종수 씨?"
생각보다 정적이 길어지기에 영우가 종수를 부르자, 그의 입에서 아까와 달리 차분한 음성이 흘러내렸다.
"만약 안 붙이면요? 그럼 이대로 죽으시는 겁니까?"
그럼 그렇지.
영우는 한숨을 크게 쉬었다.
"…예.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절 죽도록 놔둬도 원망은 안 할게요. 제가 종수 씨 입장이었어도 똑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맞지요. 제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형님은 꼼짝없이 말라 죽거나 엄한 놈한테 칼을 맞았을 겁니다."
종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허리띠에 달린 얼리버드를 흘깃 봤다.
그러곤 여전히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외계 상인과 중개자 쿠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제 기분이 얼마나 이상한지 상상도 못하실 걸요."
종수가 이 말을 끝으로 큰 기척을 내기에, 영우는 그가 결국 칼을 뽑으려는 줄 알고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정작 종수가 한 일은 영우의 하반신을 도로 붙여 준 것뿐이었다.
철퍽.
"진짜 이렇게 대놓기만 하면 알아서 붙을 거라고요? 시벌… 난 이런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못 살 거 같은데."
종수가 의구심 가득한 대사를 뱉었지만 영우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흐읍."
종수가 하반신을 붙여 둔 자리에서 타는 듯한 열감이 치솟은 탓이었다.
물론 실제로 몸이 붙고 있는 건지 감염이 진행되고 있어서 그런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저… 혹시나 해서 그런데 앞뒤는 제대로 맞춰 주셨나요?"
영우가 노파심에 묻자 종수가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더니 실소했다.
"그건 이따 직접 일어나서 보십쇼."
그리고 이 순간.
"끕."
여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신영주가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꿈틀거리고서 정말 죽었다.
「충주제일검을 인수 합병 했습니다!」
영우의 시야에 칭호 합병 문구가 나타난 것이 바로 그 증거.
이어선 칭호 현황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줄지어 나타났다.
…보유한 충북 지역의 칭호가 1개에 도달했습니다.
…경북 지역의 칭호를 4개 보유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북제일검은 '정영우07'입니다. 1대, 방어 2회.」
'아, 다른 지역 칭호는 별개로 수집되는구나.'
영우가 바닥에 누운 채 신영주의 주검을 쳐다보고 있자, 종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양반, 끝내 싸움 걸어온 거죠? 아까는 그렇게 젠틀한 척하더니만."
"끝까지 고민은 했을 거예요.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영우의 말대로 신영주는 베팅에 실패한 대가로 너무나도 많은 걸 잃게 됐다.
당장 내일 또 다른 변이자가 충주시에 내려올 텐데, 아무리 체계가 잡혀 있다 한들 제일검 없이 그 괴물을 막아 낼 수 있을까?
'더는 제일검이 없으니 질서도 유지되기 힘들겠지.'
본래라면 제일검의 정보가 적혀 있어야 할 지역 현황창은 이제 경고문에 가깝게 변해 있었다.
|현재 체류 중인 지역은 '충주'입니다.
|이 지역엔 제일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충주시민은 저 현황창을 보고도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충주제일검이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했었다는 사실 말이다.
어쨌든 이번 사태로 인해 충주시는 다시 무법지대로 돌아갈 테고, 결국엔 변이자에 의해 궤멸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떻게, 몸은 좀 붙는 거 같으십니까?"
기다림에 지루함을 느낀 종수가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물음을 던졌다.
이에 영우는 허리 상태를 살피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가 깜짝 놀랐다.
"헉."
"…어?"
눈을 휘둥그레 뜬 건 종수도 마찬가지.
영우의 상체가 허리와 복부의 지지를 받으며 똑바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조금 전만 해도 상하체가 분리되어 있던 사람 아닌가.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 뭐야, 씨발."
종수가 경악하며 앉은 채로 뒷걸음질했고, 영우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의를 젖혀 올렸다.
스륵.
그러자 아직 온전하진 않지만 절단면의 살점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이게."
영우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도 봉합은 계속 진행됐다.
그러더니 잠시 뒤엔 극심한 허기가 찾아왔다.
몸이 분리되면서 기능을 잃었던 내장마저 재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게 진짜 된다고? 이러면 더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잖아.'
영우가 앉은 채로 몸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자 저 멀리서 사태를 관망하던 황금 고블린이 후다닥 달려왔다.
영우가 회복 중이라는 걸 알아차린 거다.
"이 새끼가."
종수가 미간을 구기며 발길질하는 시늉을 했으나 고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우의 곁에 자루를 내려놨다.
-키잇.
"너도 어지간히 기회주의자네."
영우는 그새 공손한 모습이 된 고블린을 잠시 바라보다가 종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종수 씨는."
"예."
"왜 절 살리셨어요? 제일검이 될 기회였잖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영우의 말에 종수가 코를 으쓱한다.
그러곤 실시간으로 회복 중인 영우의 신체를 눈으로 훑었다.
"뭐… 굳이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이렇게까진 살고 싶지 않을 거 같더라고요. 몸이 진짜 붙는 걸 보고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렇게까진… 지금 영우처럼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호한 상태로 살아가는 걸 일컫는 걸 거다.
"제가 은근히 고리타분한 타입인가 봐요. 하지만 형님 몸이 안 붙었다면 망설임 없이 칼을 뽑았을 겁니다. 제일검엔 관심 없지만, 강해지는 건 항상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대사.
그래서 영우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제 장비만 챙겨가는 방법도 있긴 했어요."
"예. 그것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그래 봐야 생전의 형님보단 강하기 어려울 거 아닙니까? 그래서 생명의 은인이 되는 쪽을 택한 거죠."
즉, 괴물이 되어서 살기는 싫으니 괴물의 비호를 받기로 했다는 거다.
"공감은 잘 안 되지만 무슨 이야긴지는 알겠네요."
이렇게 말하는 영우는 그사이 몸을 웬만큼 회복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 종수가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꾼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물론 당장 다른 제일검이나 변이자와 싸울 수 있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다음 지역에 도착할 때까진 요양을 좀 해야겠네.'
다행히 종수가 차를 구해 온 덕분에 이동 중에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다.
'종수 씨가 날 찾아온 건 그야말로 천우신조야.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닌 건가.'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봤다.
그러자 맑은 하늘과 더불어 시야 상단에 걸려 있던 타이머가 눈에 들어왔다.
|광고주 도착까지 : 03:04:11
몸을 도로 붙이는 사이 시간이 제법 지나 있었다.
'잠시 뒤면 2시간대네. 빡빡한데.'
이대로라면 다음 지역에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광고주란 존재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운전, 계속할 수 있죠?"
영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묻자, 종수가 차를 슬쩍 쳐다보더니 되물었다.
"예. 물론이죠. 어디로 가십니까?"
"북쪽… 그러니까 서울 방향으로요."
"그럼 이천이나 여주를 가로질러야겠네요."
마치 지도를 그려 보듯, 종수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영우는 가슴에 구멍이 난 채 엎어져 있는 신영주의 시체를 뒤졌다.
의외로 그녀에겐 단 한 푼의 현금도 없었고, 대신에....
'맙소사.'
무려 전설 업적을 소모해야 살 수 있는 서사 장비가 있었다.
55화 15. 별종 (2)
슥.
영우가 문제의 장비를 집어 들자 종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님, 그게 뭡니까?"
"나침반이네요."
"…그게 나침반이라구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영우가 봐도 외적으론 나침반하고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겁난 고양이」 - 서사 나침반
[위협적인 대상을 가리킵니다.]
[--빈 슬롯--]
신영주의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 장비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삼색 고양이 모형이었다.
겁난 고양이라는 이름에 맞게 몸을 잔뜩 웅크린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비활성화 상태인지 고양이의 눈이 감겨 있었다.
'당장은 주변에 위협적인 대상이 없다는 뜻인가?'
영우는 '겁난 고양이'의 작동 방식을 단번에 깨쳤다.
이미 이와 비슷한 장비를 가지고 있는 탓이었다.
「탐욕의 뱀」 - 서사 나침반
[항상 진귀한 것을 바라봅니다.]
리셋된 세계에서, 영우는 신문물을 비교적 빠르게 접한 사람 중 하나였다.
'신영주가 날 바로 찾아낸 것도 나침반 덕분이었구나.'
물론 당시 겁난 고양이가 어째서 이쪽을 위협적인 대상으로 인식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 애초에 제일검하고 싸울 생각이 없었어…. 상인 문제로 갈등이 생길 여지는 있었지만 그래도 대화로 풀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영우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신영주가 죽었으니 영우가 위협적인 인물이었던 건 사실이지 않은가.
"...."
영우는 찝찝한 마음으로 겁난 고양이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왼쪽 팔목을 휘감고 있던 탐욕의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슥.
녀석이 쳐다본 건 다름 아닌 신영주가 줄곧 쥐고 있던 장검이었다.
검의 산에 꽂혀 있던 보급형 검은 아니고, 그렇다고 얼리버드는 더욱 아니어서 내심 궁금했던 차다.
'변이 장비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이 시점의 제일검이라면 변이 장비를 못해도 두 개는 가지고 있을 테니까.
직접 처치한 변이자에게서 얻은 거 하나, 전임 제일검이 가지고 있던 거 하나.
탁.
이윽고 영우가 신영주로부터 장검을 빼내자 그의 시야에 툴팁이 나타났다.
팟!
「언더독」 - 변이 한손검
[사용자보다 체구가 큰 대상에게 위력 25% 증가.]
'오.'
상대적으로 밋밋한 외형에 비해선 특수 능력이 발군이었다.
'이러면 변이자 상대론 상시 적용이겠네.'
툴팁에서 이야기하는 '체구'가 단순히 신장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성인 남성의 태반에게도 발동할 터였다.
반대로 이쪽보다 키가 작은 남성과 대다수의 여성을 상대론 없는 효과나 마찬가지.
철컥.
영우는 허리띠에서 얼리버드를 뽑아낸 뒤, 그 자리에 언더독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종수가 걸쭉한 웃음을 흘렸다.
"싸움 끝나고 시체 뒤적거리는 건 제일검도 마찬가지네요.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됐지."
"…어쩔 수 없죠. 강남제일검도 시체 뒤지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일 걸요."
강남제일검.
영우가 그쪽에 연고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강남이라고 하면 부자 동네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반쯤 농담으로 한 소리였다.
그런데 의외로 종수가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그러고 보니 강남에도 제일검이 있겠네요. 아니면 서울제일검 하나로 퉁치나...?"
"글쎄요."
듣고 보니 그렇다.
충주나 서울이나 똑같이 '시'이긴 하지만 인구수는 수십 배나 차이 나지 않던가.
실제로 충주시의 인구는 약 20만 명, 서울시의 인구수는 940만 명이다. 무려 47배 차이인 거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제일검의 숫자 역시 더 많아야 맞긴 했다.
이를테면 구마다 제일검이 따로 있다든지.
그렇게 해도 인구수 대비 제일검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게 서울이었다.
서울은 25개 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진짜 강남제일검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영우가 이렇게 말하자 종수가 들뜬 목소리를 냈다.
"역시 그렇죠? 형님은 안 궁금하십니까? 강남제일검 같은 자리는 어떤 사람이 꿰차고 있을지."
"...."
왜인지 신나 보이는 종수와 달리 영우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직까진 이 모든 일이 게임이나 꿈처럼 느껴져서 그런 걸까?
애초에 갑작스레 동료들을 버리고 이쪽에 붙은 것도 그렇고 제일검이 될 기회를 포기한 것도 그렇고… 영우는 종수가 리셋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 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세요?"
"앞으로요?"
영우의 질문을 받은 종수는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또다시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적당히… 너무 고생은 안 하면서 세상 구경을 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구경이요?"
"예. 세상이 이렇게 된 게 신기하지 않으세요? 며칠 전만 해도 판사한테 칼침 맞게 되리라곤 생각 못 하셨을 거 같은데."
"그야 그런데...."
이로써 확실해졌다.
종수는 리셋 이후의 삶을 일종의 보너스처럼 여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형님, 지금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시죠? 나사 빠진 놈 같다고."
아니나 다를까, 종수가 영우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대사를 꺼냈다.
그래서 영우도 더는 말을 돌려 하지 않았다.
"예. 보통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악하거나 겁에 질려 있기 바쁘니까요. 이런 와중에 세상 구경 하고 싶다는 사람은 처음 봐요. 앞으로도 없을 것 같고."
"하하, 그건 맞죠. 대부분 살아남는 게 최우선 목표니까."
왜인지 억지스럽게 들리는 종수의 웃음.
이에 영우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종수 씨는 생존이 최우선 목표가 아니에요?"
그러자 놀랍게도 종수가 입을 다물었다.
웃음기마저 가신 그의 얼굴은 첫 만남 당시의 인상 그대로 상당히 위압적이어서, 그다음에 흘러나온 대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살기는커녕 죽고 싶었어요. 원래라면 오늘 자살했어야 하는데."
"...?"
영우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자 종수가 코를 찡그리며 확인 사살을 했다.
"운명록 보니까 오늘이 죽는 날이었더라고요. 리셋이 아니었다면 본래 계획대로 진짜 자살을 했을 거라는 거죠."
그리고 이 말인즉슨.
"리셋 전부터 자살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씀이세요?"
"예."
"아니, 왜요?"
영우는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이 세계에서 위험인물로 보일 정도의 뛰어난 피지컬을 지닌 사내 아니던가.
물론 외적인 모습과 속사정은 별개겠지만, 워낙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영우로선 쉽게 믿기 어려웠다.
"이유는…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죠. 이게 뭐 자랑거리도 아니고요."
항상 넉살 좋게 웃던 종수의 얼굴에 그늘이 진 걸 보니 자살을 희망했다는 건 사실인 듯했다.
하기야 운명록에도 적혀 있었다고 하니 리셋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말 죽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은 죽지 않은 김에 산다, 이런 건가요."
"뭐, 비슷한데… 호기심이 좀 큽니다. 재벌들이 용으로 변해서 돌아온다는데 안 보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새 기세를 되찾은 종수가 껄껄 웃는다.
이에 영우도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
전직 자살자와 기묘한 대화를 하며 헛웃음을 터뜨리는 것도 잠시.
영우는 이내 신영주의 시체를 마저 뒤져야 했다.
왜인지 그녀의 몸에서 두 번째 변이 장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1일 차 변이자를 잡은 게 제일검이 아니었나?'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정황상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탐욕의 뱀마저 더는 시체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진짜 없네. 이상하다.'
영우가 심각한 얼굴로 신영주의 주머니를 다시 살피고 있자 종수가 물어왔다.
"왜요? 뭐가 없습니까?"
"장비요. 변이자를 처치하면 나오는 장비가 있는데 그게 하나 없어요. 전대 제일검 중 하나가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래요? 그럼 애초에 전임자도 갖고 있지 않았던 거 아닙니까?"
"예. 정황상 그렇긴 한데."
영우는 이쯤에서 장비 찾기를 그만두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행방불명의 변이 장비가 물약 같은 소모품이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
왜인지 석연치 않았지만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다.
"아직 거래 가능하죠?"
영우가 허공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쿠부에게 묻자, 녀석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 가능합니다. 수수료 역시 변동이 없으나, 이미 거래가 진행된 이력이 있어 거래 대상을 교체할 순 없습니다.
예상대로다.
쿠부가 제공하는 거래 대상 선택은 영우가 선착순자일 때만 가능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죠. 진행해 주세요."
영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쿠부가 눈을 한 차례 더 깜빡이더니 형식적인 대사를 읊었다.
―본 거래의 중개 수수료는 10%이며, 상품 가격에 포함됩니다. 거래 대상은 체옥의 무구 상인입니다.
'체옥의 무구 상인....'
상대의 출신을 알게 된 영우는 자신도 모르게 빛기둥 안에 갇혀 있는 거대 바퀴를 쳐다봤다.
체옥이란 곳이 행성인지 다른 차원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곳에 저런 바퀴가 바글대고 있다는 거 아닌가.
―상품 목록이 완성됐습니다.
이윽고 쿠부가 눈알을 데룩 굴리며 상품이 준비됐음을 알렸고, 이어선 영우의 눈앞에 파란 얼룩들이 나타나더니 인간의 글자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스르릇.
1 ― 「집행자」 - 고대 양손도끼
[일반 무기를 파괴합니다.]
[한 손 사용 시 위력 대폭 감소.]
◇ 70,000 카르마
2 ― 「미올의 수정」 - 영웅 방패
[--빈 슬롯--]
[장착한 보석 효과 두 배.]
◇ 116,000 카르마
3 ― 「선봉대」 - 유물 투구
[이 투구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 310,000 카르마
4 ― 「신기루」 - 유일 신발
[30% 확률로 간파 회피.]
◇ 630,000 카르마
예상대로 5번은 비어 있었다.
앞서 여길 다녀간 신영주가 전설 업적을 주고 나침반을 사 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엔 그 물건이 이쪽으로 넘어 왔으니 영우로선 전설 업적 하나를 아낀 거나 다름없었다.
'나머지도 어마어마하네. 신영주가 상품을 일부러 남겨 둔 게 아니라 현찰이 없어서 못 사고 있던 거였구나.'
그에 비해 현재 영우가 보유한 현찰은 87만 1천 카르마.
'도끼는 이제 의미 없고… 방패도 애매해. 못 쓸 것까진 없지만 지금은 차라리 검을 하나 더 쓰는 게 나으니까.'
따라서 당장 구미가 당기는 건 유물 투구인 '선봉대'와 유일 신발인 '신기루'뿐이었다.
특히 신기루의 경우는 높은 등급만큼이나 툴팁이 심상치 않았다.
'30% 확률로 간파 회피라… 저게 정확히 무슨 효과지?'
간파.
사전적 의미는 상대의 속내를 알아차린다는 뜻이다.
'설마.'
영우는 눈을 크게 깜빡이면서 숨을 들이쉬었다.
리셋 이후의 세계에서 경험한 것 중에 간파에 그나마 가까운 건 '검법'이 제공하는 홀로그램 가이드뿐이었기 때문이다.
'30% 확률로 간파 회피면… 내 움직임의 30%가 홀로그램에 잡히지 않는 건가?'
만에 하나 정말 그런 거라면, 능력치 열세 상태에서 싸워야 하는 영우에겐 필수적인 아이템인 셈이었다.
'신기루가 63만. 충분히 살 수 있긴 하지만 그 대신 투구를 포기해야 해.'
신기루를 사고 나서 남는 돈은 24만 1천.
31만 카르마를 줘야 하는 선봉대까지 사기엔 6만 9천 카르마가 모자랐다.
결코 적진 않은 금액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마물 몇 마리만 잡으면 모을 수 있는 돈인데 그게 없어서 이런....'
스윽.
아쉬운 마음에 혹시나 남은 마물 표식이 없을까 주변을 둘러보던 영우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
그러곤 멀찍이 떨어져서 이 거래를 관전 중이던 생명의 은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종수 씨.
"예."
"돈, 얼마나 있어요?"
"...?"
56화 15. 별종 (3)
"돈이요...?"
당황한 기색으로 영우를 쳐다보던 종수는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서 침착함을 되찾았다.
정황상 눈앞의 경북제일검이 현찰 부족으로 곤경에 처한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수는 반사적으로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으려다가 급히 말을 바꿨다.
"알면 놀라실 걸요? 제법 많이 가지고 있는데."
종수가 이 말과 함께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자,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났다.
차락.
배낭 안에서 쇠붙이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 거다.
그리고 이에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영우였다.
사실 6만 9천 카르마라는 게 이쪽에게나 작은 돈이지 대다수의 사람에겐 사활을 가르는 거금이지 않겠는가.
여기에 더해, 저만한 돈을 능력치에 투자하지 않고 현찰로 들고 다닌다...? 일반적으론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게 얼마나 돼요?"
영우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종수가 배낭을 열더니 진홍색 주화를 한 움큼 집어 보였다.
"11만 4천입니다."
영우가 필요로 하는 '잔금'을 한참 뛰어넘는 금액이다.
"세상에. 현금을 왜 그렇게 많이 가지고 다녀요?"
"마물을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미리 넉넉하게 챙겨 둔 거죠. 좀 강한 상대와 싸울 것 같다 싶으면 능력치에 바로 써 버리면 되는 거고."
"그럼 유사시엔 남에게 빌려주기도 하나요? 6만 9천 정도."
영우의 요청에 종수가 끈적한 웃음을 지었다.
"헤헤, 꽤 큰 금액인데요? 빌려드리면 도움이 많이 됩니까?"
"장비 하나를 더 살 수 있어요."
영우의 이 말에 종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배낭에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원하는 만큼 가져가란 뜻이다.
그러자 영우의 발치에 서 있던 황금 고블린이 배낭 안의 주화를 보고 몸을 움찔거렸다.
-킷.
본능적으로 눈이 자꾸 가는데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참고 있는 것이다.
"주화를 골라서 가져올 수도 있어? 할 수 있으면 6만 9천 카르마만 들고 와."
이윽고 영우가 배낭을 가리키며 주문했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블린이 금빛 궤적을 그리며 뛰쳐나갔다.
타탓!
지난번에도 봤듯 엄청난 속도의 움직임이다.
녀석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배낭을 낚아채더니 아공간 주머니를 열고서 진홍색 주화들을 쏟아 넣었다.
촤르륵!
얼핏 보기엔 주화를 세지 않고 마구 붓는 것 같았지만, 녀석은 6만 9천을 털어 내자마자 배낭을 본래 위치로 돌려놨다.
-키잇.
마치 보유액을 확인해 보라는 듯한 고블린의 제스처.
실제로도 영우의 현금 총액은 94만 카르마가 되어 있었다.
투구와 신발을 사고 나면 한 푼도 남지 않는 정확한 금액.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영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상품 목록으로 향한다.
3 ― 「선봉대」 - 유물 투구
[이 투구는 손상되지 않습니다.]
◇ 310,000 카르마
4 ― 「신기루」 - 유일 신발
[30% 확률로 간파 회피.]
◇ 630,000 카르마
아직까진 두 장비 모두 파란색 문자로만 존재했으나.
파앗!
곧이어 영우가 구매 확정을 하자 변화가 생겼다.
쉬아아...!
하늘 어딘가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
"...!"
얼리버드가 처음 떨어져 내려올 때와 비슷한 소리였기에 영우와 종수 모두 하늘로 고개를 들어 올렸고, 이내 보게 됐다.
파아아앗!
두 개의 아주 얇은 빛기둥이 영우를 향해 곧장 내려오는 광경을 말이다.
"…읏!"
깜짝 놀란 영우가 몸을 움츠리는 사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빛기둥이 그를 스쳐 지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열기를 내뿜었다.
화르릇!
"으."
곁에 있던 종수가 뒷걸음질할 정도의 열기였으나 정작 영우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조금 불편해진 점이 있다면.
'아.'
빛기둥이 지나간 직후부터 머리와 발에 약간의 압박감이 느껴진다는 정도.
이미 몇 차례 장비 구매를 해 본 영우였기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상인마다 장비를 채워 주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구나.'
영우가 뺨 근처를 더듬자 역시나 싸늘한 금속이 만져졌다.
발엔 은백색을 띠는 금속체로 이루어진 신발이 신겨져 있었는데, 보기와 달리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유일템 수준이면… 달린다고 찢어지진 않겠지?'
신발을 보자 현실적인 고민부터 드는 영우.
반면 종수는 투구와 신발 덕분에 이전보다도 훨씬 우스꽝스럽게 변한 경북제일검의 모습을 빤히 보고 있었다.
"형님."
"네."
"장비 감추기… 뭐 그런 능력은 없어요?"
"왜요? 그 정도로 이상해 보여요?"
"예. 좀 많이."
종수가 영우를 위아래로 다시 훑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영우는 공장 기숙사에서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위에 흑색 망토를 걸치고 머리엔 투박한 모양의 황동 투구를 쓴 상태였다.
심지어 팔엔 뱀 한 마리와 금빛 팔찌, 장갑을 두르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검 두 자루가 걸린 철제 허리띠와 은백색의 신발까지 더하자 이상한 걸 넘어서 괴상해 보일 정도였다.
"게임에 왜 스킨 같은 게 있었는지 이제야 알 거 같습니다. 그래도 신영주는 봐줄 만했는데 형님이 좀 유난하세요."
"어쩔 수 없죠. 그렇다고 해서 멋 내자고 장비를 덜 찰 순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맨발일 때보단 낫지 않아요?"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종수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몰고 왔던 승용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나신 거지요? 저놈들하고 종일 마주보고 있긴 싫어서요."
종수가 말한 '저놈들'이란 체옥에서 왔다는 이름 모를 무구 상인과 중개자 쿠부였다.
둘의 역할과 출신 성분이 뭐든 간에 종수의 눈엔 똑같이 징그러운 외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예. 이만 가죠. 시간을 많이 지체했네요."
영우는 종수에게 이렇게 말한 뒤, 두 외계인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쿠부뿐만 아니라 거대 바퀴까지도 화답을 해 왔다.
―계속 살아 계시길.
-끄르륵.
***
오후 5시 56분.
도로 위를 한참 달리던 도중 지역 현황창이 바뀌었다.
|현재 체류 중인 지역은 '음성'입니다.
|이 지역엔 제일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엇."
"어, 뭐야."
영우와 종수가 동시에 놀란다.
음성도 충주와 마찬가지로 제일검이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다.
"저기도 다른 제일검이 다녀갔다는 뜻 아닙니까?"
종수의 물음에 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건 음성제일검 칭호 자체가 다른 지역에 흡수돼서 사라져야 나오는 문구예요."
즉, 칭호를 수집하면서 이동 중인 또 다른 자가 있다는 것.
물론 전국적으로 보면 흔한 일일지도 몰랐다.
본인의 소속지를 완전히 정리한 제일검이 다른 변이자를 찾아 이동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친 제일검과 자웅을 겨루게 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고 말이다.
변이자를 누가 처치하느냐를 두고 다투는 것 이전에, 상대의 장비가 탐나서 싸움을 걸어오는 경우도 있지 않겠는가.
영우에겐 충주제일검 신영주가 그런 케이스였다.
"혹시 다음 지역이 음성인가요?"
지역 현황창이 계속 음성에 고정되어 있기에 이렇게 묻자, 종수가 전방의 표지판을 살폈다.
"아뇨. 여주로 가는 중인데… 중간에 음성 지역이 끼어 있었나 본데요."
그리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체류 중인 지역 표시가 '여주'로 바뀌었다.
문제는.
|현재 체류 중인 지역은 '여주'입니다.
|이 지역엔 제일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
"억?"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두 사람 모두 경악했다.
"뭐, 뭐야, 여긴. 누가 싹 다 죽이고 다니나...?"
종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여기부턴 심상치 않은 사건의 연속일 거란 걸 예감한 것이다.
영우도 이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에 긴장했지만, 금방 침착함을 되찾았다.
"음성이 충청북도고, 여주는 경기도죠?"
"예…? 아, 그렇죠. 맞습니다."
"그럼 각각 다른 사람이 다녀간 걸 수도 있어요. 어딘가에는 충북제일검, 경기제일검도 있을 테니까요."
"그게 더 끔찍한 상황 아닙니까...?"
"제가 경북제일검인 것만 봐도… 충분히 일어났을 일이죠."
영우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차창 밖을 바라봤다.
이쪽은 태생이 4급 인간인 데다가 상대적으로 전투에 특화된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운이 좀 따라 주고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낸 덕에 무려 경북제일검이 됐다.
그렇다면 다른 유형의 인물들은 어떻게 됐을까?
이를테면 1차 여과 단계에서 제거되지 않은 무명의 살인마나 강력 범죄자들, 또는 태생 1급 인간들 말이다.
'벌써 외곽지부터 칭호가 다 털려 있는 걸 보면 안쪽엔 어마어마한 강자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게 분명해.'
기시감이 든다.
사방이 강도 천지라 퇴로를 찾을 수 없던 리셋 첫날의 환전소가 떠올라서였다.
"계속 가십니까? 이제 곧 여주로 들어갑니다. 그다음엔 이천이구요."
종수가 확인차 물어오기에, 영우는 허리춤의 검 두 자루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계속 가야죠. 그래서 장비를 잔뜩 사 온 겁니다."
"예. 그럼 형님 믿고 밟습니다."
종수가 액셀을 거세게 밟자 창밖의 풍경이 한층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바아아앙!
여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길을 가로막은 차도 거의 없이 상당히 깔끔했고, 덕분에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주시 관할지가 시작됨을 알리는 이정표를 볼 수 있었다.
"오, 이제 여줍니다."
물론 아직까진 주변에 야산뿐이라 다음 지역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근방에 건물이라곤 방금 지나친 자그마한 휴게소 하나가 전부였다.
"진짜 삭막하네요. 역시 싹 다 죽어서 그런가?"
종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과아아아...!
이쪽의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사나운 엔진음이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은 후방.
"어 씨, 외제차네."
잽싸게 룸 미러로 뒤쪽을 확인한 종수가 헛웃음을 짓는다.
이에 영우도 후면창을 통해 종수가 말한 '외제차'를 시야에 담았다.
과아아아!
'미친놈들인가.'
종수가 헛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아우디 컨버터블 두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색상도 흰색, 노랑으로 눈에 띄었다.
"아까 그 휴게소에서 대기 타고 있었나본데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 동네는?"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차량은 구형 소나타.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종수가 영우의 복부를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 우리 이제 곧 따입니다."
차가 느려서 조만간 추월당할 거란 이야기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전투가 가능하겠냐고 묻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영우는 주머니에서 서사 등급 나침반 '겁난 고양이'를 꺼냈다.
「겁난 고양이」 - 서사 나침반
[위협적인 대상을 가리킵니다.]
[--빈 슬롯--]
그러곤 나침반을 도로 집어넣으며 파트너에게 일렀다.
"차 세워요. 지금 싸웁시다."
57화 15. 별종 (4)
도로 위에서의 갑작스러운 추격전.
리셋이 일어나기 전이었어도 보통 긴장되는 일이 아닐진대, 종수는 이 험악한 세상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으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틱.
감속을 시작하기 전에 비상등을 켜서 뒤차에게 경고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가 이렇게 침착할 수 있던 데엔 뒷좌석의 경북제일검이 한몫했다.
추격자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경북제일검보다 더 강한 자일 확률은 극히 낮았으니까.
하지만 종수가 그보다도 더 신경을 썼던 것은 다름 아닌 추돌 사고였다.
만약 불시에 급제동을 했다가 뒤차들이 이쪽을 들이받기라도 하면....
'그럼 난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그 사고에서 몸이 성할 수 있느냐는 둘째 치고라도, 당장 이동 수단이 없게 되니 제일검의 기동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종수는 자연스레 버려지게 될 터였다.
그래서 어떻게든 차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던 것이다.
바아앙....
종수가 비상등을 켠 채 도로 가장자리로 빠지며 감속하자, 맹렬한 기세로 쫓아오던 두 대의 아우디도 빠르게 속도를 줄였다.
끼이익!
한 대는 종수와 영우를 추월해 진행 방향을 가로막으며 정차했고, 다른 한 대는 퇴로를 막겠다는 듯 뒤쪽에 바짝 붙은 채로 멈춰 섰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요."
종수가 앞뒤를 번갈아 보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차량을 포위한 두 대의 아우디에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벌컥!
활짝 열린 문짝 안에서 나타난 상대방의 정체는 바로.
"...?"
"어? 애들이잖아."
종수의 진술 그대로였다.
기껏해야 1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소년 소녀들 말이다.
숫자는 총 다섯.
물론 저마다 흉기를 들고 있는 탓에 단순히 '애들'이라고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했으나 어쨌든 두 사람의 예상보다 훨씬 어린 건 사실이었다.
"이 어린놈의 새끼들이… 아직 면허도 없을 텐데? 진짜 말세 아닙니까, 형님?"
종수는 평소 입에 '형님'을 달고 사는 장유유서의 화신이었다.
그러니 그가 이런 볼썽사나운 하극상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있었겠는가.
벌컥!
아니나 다를까, 종수가 눈에 불이 들어온 채로 운전석 문짝을 밀어냈다.
뒷좌석의 영우를 믿는 것도 있지만, 본인도 일반인 중에선 나름 고수 축에 끼는 편이었기에 호기를 부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해도 무리를 지어 차량 강도를 하는 녀석들이 보통내기일까.
홰앳!
종수가 운전석 문을 완전히 열기도 전에 호리호리한 소년 하나가 뛰쳐나오더니 몸통으로 문짝을 받아 내며 도로 닫았다.
콰앙!
"깝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외모만큼이나 앳된 목소리다.
차창을 통해 운전석 안쪽을 살피는 눈에선 비릿한 느낌마저 났다.
"뭐? 이 씹새끼가."
결국 본래 성질이 나오기 시작한 종수가 차 문을 도로 밀어내려 했으나, 이번엔 그의 옆쪽에서 날카로운 기척이 일었다.
콰작!
별안간 조수석 창문이 깨지며 기다란 창대가 쑥, 하고 들어온 것이다.
"이...!"
옆으로 고개를 돌린 종수가 벌써 자신의 어깻죽지까지 다가온 창날을 보고 경악하는 순간.
텁!
뒷좌석에서 튀어나온 손이 창대를 붙들었다.
그러곤 마치 과자를 부러뜨리듯 창대를 간단히 동강 냈다.
"…형님!"
영우의 실력 행사임을 직감한 종수가 뒤를 돌아봤고, 차를 포위하고 있던 '어린놈의 새끼'들도 일제히 뒷좌석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먹잇감에게 동승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까진 충분히 예상했지만.
"왼쪽으로 바짝 붙어요, 종수 씨."
그 동승자가 차 안에서 길이 5미터짜리 흑검을 휘두를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쒸아아아앗!
뒷좌석에서 길게 뻗어 나온 칼날은 종수를 노렸던 창잡이와 조수석을 한꺼번에 동강 내며 큰 반원을 그렸다.
"왁, 씨발!"
맞은편의 창잡이가 토막 나는 걸 본 '호리호리한 녀석'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뒷걸음친다.
그러자 종수가 차 문을 열고 나와 녀석의 정강이를 후려 찼다.
뻐억!
"아악!"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비행 청소년.
때맞춰 영우도 뒷좌석 문짝을 걷어차며 바깥에 모습을 드러냈다.
퍼어엉!
"세상에. 하나같이 다 어리네."
때는 오후 6시 21분.
아직 해가 지기 전이라 경북제일검 정영우07의 신형(身形)은 괴이할 정도로 빛이 났다.
황금비 업적으로 얻은 금빛 장비와 은백색의 신기루가 자연광을 반사한 탓이다.
"…헉."
"뭐야, 이게...?"
사실 외형만 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모두가 방금 이 괴인의 무위를 목도한 터라 그 누구도 우습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고 종래엔 두려워졌을 뿐이다.
"아, 아저씨… 살려 주세요. 죄송해요."
마침내 강도단 중 유일한 여자아이가 빠르게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떨어뜨리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번만 봐주시면 다시는 절대 안 그럴게요. 네?"
여자애의 호소를 시작으로 영우 근처에 있던 나머지 두 소년도 차례대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이 녀석들도 무기를 버리며 항복을 선언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영우는 잘 알았다.
이들이 이전에 마주쳤을 약자들에겐 결코 자비를 보이지 않았을 거란 점 말이다.
다짜고짜 운전석에 창을 쑤셔 넣는 공격 방식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심지어 가장 먼저 무기를 버렸던 여자애의 칼날은 핏기가 잔뜩 배서 불그스름하기까지 했다.
"...."
영우는 나머지 녀석들의 무기도 조금씩 붉게 물들어 있음을 확인한 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아저씨도 악당이니까."
"...?"
"네?"
예상치 못한 답변에 비행 청소년들이 고개를 번쩍 든다.
그리고 곧 그들의 위로 영우의 건조한 목소리가 끼얹어졌다.
"어리다고 봐주는 타입은 아니라고. 너희, 여기서 죽을 거야."
"...!"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던 세 청소년은 영우의 대사를 듣자마자 표정을 싸늘하게 바꿨다.
그러곤 서로 무언의 신호를 주고받더니.
타탓!
아주 잽싸게 각자의 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셋이 동시에 영우를 치려는 속셈이었던 거다.
그러나 상대는 경북제일검 아닌가.
쉬이잇!
녀석들이 기척을 내기 무섭게 시커먼 궤적이 허공을 갈랐고, 곧이어.
후두둑....
앙증맞은 머리통 세 개가 땅바닥에 연달아 떨어졌다.
물론 이 장면을 본 건 영우와 종수 그리고 아직 바닥에서 정강이를 부여잡고 있는 '호리호리한 녀석'뿐이었다.
"음, 어...."
이윽고 종수가 발치에서 벌벌 떨고 있는 최후의 소년과 저만치 굴러간 세 개의 머리통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우물거렸다.
여전히 이 녀석들이 악인이고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도 잘 알지만, 막상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 걸 보자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
이에 그를 빤히 쳐다보던 영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의외네요. 종수 씨도 산전수전 다 겪어 보지 않았어요?"
"그야 그렇지만… 아무래도 괴물을 죽이는 거랑 사람을 죽이는 건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본능적으로다가...."
종수가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영우는 웃지 않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종수가 들고 있는 얼리버드를 보면서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그 칼 때문에라도 환전소에서 살인을 안 해 볼 수가 없었을 텐데요."
환전 선착순자에게 주어지는 특전, 얼리버드.
영우의 경우 칼을 받아들자마자 다수의 사람이 달려들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종수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환전소에서요...? 먼저 칼을 쥐었는데 살인까지 불사할 상황이 생깁니까? 그때부턴 제가 위협이 됐으면 됐지...."
"...."
종수의 말을 들은 영우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해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종수는 영우보다 체격이 좋고 인상마저 위압적이지 않던가.
그런 그가 얼리버드를 갖게 되자 주변의 그 누구도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전혀 만만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반면 당시 영우는....
'제기랄.'
묘한 패배감이 든다.
지금 표정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정말 억울했다.
세계가 리셋됐다고는 하지만, 실은 모두가 같은 세계를 경험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태 사람을 한 명도 안 죽여 봤다고요?"
"예… 싸움이 일어날 뻔한 적은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이 정도로 미친놈들까진 없었거든요."
물론 이것도 피지컬이 좋은 종수의 일방적인 경험담이었다.
영우는 제일검이 된 이후조차 자신을 얕본 도전자들과 계속 싸워야 했으니까.
"으음, 어쨌든 형님… 이렇게 무작정 다 죽이는 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무작정이 아녜요. 우릴 죽이려던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거지."
"그건 맞죠… 맞긴 한데."
종수가 씁, 하는 소리를 내며 신경질적으로 턱을 쓰다듬는다.
그에겐 살인이란 게 엄청난 부담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행위였던 거다.
어찌 보면 종수가 지극히 정상인이었다.
"못 하겠으면 비켜요. 전 단 한 명도 살려서 보낼 생각 없습니다."
영우가 시커먼 살기를 내뿜으며 마지막 강도에게 다가서자, 종수가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러자 여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년이 경기를 일으키며 종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혀… 형! 제발 저 아저씨 좀 막아 주세요! 저희가 잘 몰라서 그랬던 거잖아요! 제발요...!
그러나 소년의 읍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영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둘렀고, 종수는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종수가 확실히 본 거라곤.
툭.
눈 깜짝할 사이에 소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머리통뿐이었다.
"…헉."
종수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털며 뒤로 물러서자, 머리 잃은 시체가 허공을 휘잡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푸욱.
"이, 이게 진짜 맞습니까? 형님?"
경황이 없는 투로 말을 흘리는 종수.
반면 영우는 망자의 주머니를 담담히 뒤지며 말했다.
"정 이해가 안 되면, 지금까지 이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들이 죽기 직전에 어떤 마음이었을지도. 전 조금 겪어 봐서 알 거 같거든요."
영우는 여기까지 말한 뒤 반쯤 박살 난 구형 소나타를 흘깃 봤다.
"저건 이제 안 굴러가겠죠? 새 차로 갈아탑시다."
소나타를 앞뒤로 가로막은 아우디를 이야기하는 거다.
그러곤 영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찢어지고 싶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횝니다. 차도 마침 두 대니까 마음이 바뀌었다면 지금 가요."
58화 16. 혼돈의 땅, 경기도 (1)
"...."
지금이 찢어질 기회라는 영우의 말에 두 대의 아우디를 번갈아 보는 종수.
그러더니 안면 근육을 꽉 붙들며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에이, 제가 가긴 어딜 가겠습니까. 형님이 아니었으면 저 어린놈의 새끼들한테 진즉 죽었을 텐데요."
종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다섯 구의 목 없는 시체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살아가는 방법도 바뀐 거겠죠.... 그래도 형님이 힘 있는 사람 중에선 가장 선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종수는 이 말을 끝으로 흰색 아우디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노란 건 눈에 너무 띄니까 좀 그렇겠죠? 서울에 또 어떤 놈들이 있을 줄 알구."
덜컥.
운전석 문짝을 열어젖힌 종수가 시트에 엉덩이를 붙인다.
그러곤 차량에 시동을 걸어 요란한 엔진음을 뿜어냈다.
바아앙...!
주변에 또 다른 강도단이 있다면 와 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
이에 영우는 주변을 둘러본 뒤, 고블린을 시켜 사방의 시체들을 뒤졌다.
-킷!
지시가 내려지자마자 쏜살처럼 튀어나간 고블린이 가지고 돌아온 전리품은 8천 카르마였다.
종수에게 진 빚 6만 9천을 갚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돈이다.
'굉장히 가난한 놈들이었네.'
생각보다 강도질 수익이 좋지 않았던 걸까?
타인에게 빼앗은 돈을 족족 능력치에 투자한 걸 수도 있지만, 머릿수에 비해 보유한 현금이 적은 건 분명했다.
'하긴 마물 출현 시간이 지났으니 돈을 벌 방법이 얼마 없긴 하지. 강도질 아니면 일퀘 정도인가.'
영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퀘스트난으로 옮겨간다.
[일일] "일용할 양식"
<임무> 아무 음식의 석화 상태를 해제하십시오.
<보상> 1천 카르마
[일일] "척후병"
<임무> 마물과의 거리가 10미터가 될 때까지 접근하십시오.
<보상> 3천 카르마
놀랍게도 여주시의 일일 퀘스트 난이도는 여태 보아 온 그 어떤 지역보다도 낮았다.
'척후병은 어느 지역이든 고정인 것 같고… 다른 하나만 무작위로 정해지나 본데.'
이제 모두가 회사로 출퇴근을 하는 대신 사냥을 통해 생계를 이어 가게 되리란 첫날의 예감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일일 퀘스트조차 마물과의 대치를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10미터면 퀘스트 완료와 동시에 줄행랑을 친다고 해도 생환을 보장할 수 없는 거리다.
'하지만 보상이 3천 카르마나 되는 데다가 기회도 하루에 한 번뿐이니까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일 테고.'
현재 시각, 오후 6시 36분.
지금까지의 패턴대로라면 오늘 중에 마물이 더 출현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다시 말해 굳이 마물을 피하지 않는 영우도 당장은 척후병 퀘스트를 수행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남은 건.
"...."
영우는 그사이 발치로 다가와 대기 중인 황금 고블린을 바라봤다.
"네 자루 안에 석화 상태인 음식도 있지? 내가 꽤 모아 놨던 거 같은데."
영우가 이렇게 묻자, 고블린이 눈알을 데룩 굴리더니 오른손 검지를 펼쳐 하늘을 가리켰다.
-켓!
그러자 녀석의 검지 위쪽으로 푸른빛을 띠는 글자들이 나타났다.
"어...?"
그건 다름 아닌 아공간 주머니에 든 물건 현황이었다.
|음식 : 21
|도구 : 13
|장비 : 11
|특수 : 1
마치 시스템창처럼 놈에게도 나름의 인터페이스가 있던 것이다.
"도구가 13개… 밧줄 같은 것까지 전부 포함인 건가."
고블린이 띄워 올린 주머니 현황을 짚어 가던 영우는 마지막 항목인 '특수'에 이르러 멈칫했다.
"특수? 이건 뭐지?"
영우가 이렇게 묻자, 고블린이 주머니 안에서 조그마한 검은 보석을 꺼내 들었다.
-키잇!
녀석이 보석을 높이 치켜듦과 동시에 영우의 시야에도 툴팁이 떠올랐다.
「케키다이트」 - 영웅 보석
[슬롯 : 이능 저항 10%]
"아."
케키다이트.
이 노예 녀석과 함께 구매했던 아이템이다.
장비의 빈 슬롯에 착용할 수 있는 일종의 강화 아이템.
'이능 저항은 처음 봐서 일단 사 뒀던 건데… 이참에 써 봐야 하나.'
지난번에 본 서사 목걸이 '이율배반'을 통해 화염, 냉기 같은 원소 저항이 존재한다는 게 확인됐다.
워낙 직관적인 옵션인 만큼 그 효과가 무엇일지도 충분히 짐작됐고 말이다.
하지만 이능 저항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건 뭐 레퍼런스가 없단 말이야. 게임에서 흔히 쓰는 개념도 아니고.'
따라서 영우로선 막연히 강력한 변이자나 외계인들과 관련이 있으리란 추측만 할 뿐이었다.
'어쨌든 슬롯도 꽤 남으니까 안 쓸 이유는 없고.'
영우는 곧바로 장비창을 열어 빈 슬롯이 있는 아이템들을 추렸다.
팟!
「성난 고블린」 - 변이 반지
[매일 근력 100 증가]
[--빈 슬롯--]
「살인귀 손가락」 - 유물 반지
[대인전에서 능력치 10% 증가]
[--빈 슬롯--]
「겁난 고양이」 - 서사 나침반
[위협적인 대상을 가리킵니다.]
[--빈 슬롯--]
현재 가진 보석 슬롯은 총 3개.
'널널하군.'
문제는 케키다이트를 어느 슬롯에 박느냐였다.
게임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비춰 봤을 때, 이런 강화 보석은 대개 일회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도로 빼낼 때 뭔가를 지불해야 하거나.'
보석 착용과 관련한 별다른 안내문이 없었기에, 영우의 심증은 '한번 박은 보석은 다시 빼내거나 교체할 수 없다.'였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최악을 상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결국 영우가 내린 선택은.
피잉!
「살인귀 손가락」 - 유물 반지
[대인전에서 능력치 10% 증가]
[이능 저항 10%]
유물 반지인 살인귀 손가락이었다.
성난 고블린의 경우 언젠가 능력치 총합이 수만에 달하면 더는 쓸모가 없어질 수도 있겠지만, 살인귀는 효과가 보유 능력치에 비례하는 형태라 굉장히 오래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겁난 고양이도 오래 활용할 가능성이 높지만 서사 등급이므로 보류.
'혹시 또 모르잖아, 고등급 장비를 분해해서 뭔가를 얻거나 거래를 해야 하는 때가 올지도.'
이건 인터넷 방송을 하던 시절에 수많은 게임을 플레이 하며 얻은 직관이었다.
"형님! 안 가십니까?"
때맞춰 종수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물어 왔다.
이에 영우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비닐 포장이 된 빵 두 개를 꺼낸 뒤, 종수의 흰색 아우디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돈 남은 거 있죠? 이거 풀어서 먹어요."
"예? 무슨...."
종수가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그의 미간 위로 한 뼘 크기의 돌덩이가 날아들었다.
홰앳!
"억!"
깜짝 놀란 종수가 반사적으로 돌덩이를 잡아내자, 영우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출발 전에 간단히 요기라도 하는 게 좋을 거 같더라고요. 일퀘도 있고."
"요기요?"
종수는 영우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방금 날아온 게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단 한 끼의 식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방금 알게 됐고 말이다.
그리고 식사를 오래 거르고 있던 건 영우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전부터 느껴지던 허기가 지금은 명치를 뚫고 나올 기세였으니까.
[크림빵 : 1,000]
영우가 집어든 건 한손에 꽉 차는 크기의 크림빵이었고, 가격은 무려 1천 카르마였다.
'1천…? 자전거 가격이 3천이었는데 이게 지금 말이 되나?'
리셋 2일 차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절대다수에게 1천 카르마는 거금일 게 분명했다.
즉, 물가가 말도 안 되게 설정된 것이다.
'퀘스트 보상이 1천 카르마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딱 한 끼만 보장해 주겠다는 뜻이네.'
하지만 척후병을 제외하곤 지역별로 매일 다른 퀘스트가 나타나므로 한 끼를 보장해 주는 것도 오늘 한정인 셈이었다.
쉬아앗.
이윽고 영우가 크림빵의 석화를 해제하자, 흰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잿빛 껍데기 아래에 숨겨져 있던 포장지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1천? 가격이 완전 미쳤는데요?"
종수도 이제 막 석화를 해제했는지, 어이가 없다며 투덜거렸다.
"숨통을 더 죄려나 봐요."
영우가 하늘을 쳐다보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퀘스트 보상이 떨어져 내렸다.
핑!
1천 카르마에 해당하는 진홍빛 주화 1개.
'결국 본전치기구나.'
전 재산이 다시 8천 카르마가 된 영우는 이걸 그대로 운전석의 종수에게 건넸다.
"8천 갚습니다. 그럼 이제 6만 1천 남는 거죠?"
그러나 종수가 받질 않았다.
"형님, 저 밥 먹는데 체하겠어요. 나중에 몰아서 갚아 주십쇼."
"몰아서 갚으라구요?"
"예. 어차피 당장 돈이 막 필요하지도 않고요."
짤막하게 답을 한 종수는 빵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뒤, 영우가 뒷좌석에 올라타는 걸 확인하고서 액셀에 발을 얹었다.
"바로 출발합니까? 시간 여유가 많지 않다면서요."
이제 정말 영우에게 운명을 위탁했다고 생각하는지, 도리어 종수가 서두르라며 다그치는 듯했다.
그래서 영우는 결국 빵 포장지를 뜯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출발합시다, 식사야 이동하면서 해도 되니까."
***
오후 6시 40분.
광고주 도착까지 대략 1시간 26분이 남은 시점.
영우와 종수 두 사람을 실은 백색 아우디는 계속해서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저쪽이 아마 여주 시내일 텐데 뭐 보이는 건 없네요."
종수가 도로 오른편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한다.
이에 영우도 여주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기대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굳이 가 볼 필요는 없을 거예요. 일일 퀘스트가 존재한다는 건 변이자가 잡혔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아… 그것까진 몰랐습니다."
"대부분 모르죠."
일일 퀘스트는 2일 차 변이자가 처치되어야 적용되는 기초 복지 중 하나다.
따라서 나름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종수라고 해도 저런 사실까진 모르는 게 당연했다.
"그럼 형님은 변이자나 마물이 있는 도시만 방문하시는 겁니까?"
"예. 당장은 그렇죠. 파밍이 주목적이니까요."
"그럼 그 파밍이 다 끝나고 나면요?"
"...."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자 영우의 말문이 막혔다.
생존을 위한 파밍이 끝나는 시점이 있을까도 의문이지만, 애초에 이 세상이 정확히 어떻게 변한 건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잖은가.
별안간 리셋이 일어난 건 그렇다고 쳐도, 느닷없이 외계 상인들이 들어와 장사를 하기 시작한 배경에 대해선 그 누구도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쪽의 경우 얼마 뒤면 외계에서 온 광고주란 존재까지 만나게 된다.
광고.... 누가 무엇을, 그리고 하필 왜 지구란 행성을 광고 지면으로 쓴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리셋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을까.
'…골치 아파. 뭐가 뭔지 모르겠다.'
정말로 두통이 오는 듯해서 영우가 이마를 짚으려는 순간, 운전석의 종수가 침음을 흘렸다.
"아, 저건 또 뭐지."
영 불길한 예감이 드는 뉘앙스였기에 영우도 얼른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살폈다.
스윽.
그러자 이번엔.
두두두두두...!
맞은편에서 힘차게 달려오는 한 마리의 소가 눈에 들어왔다.
'소...?'
그리고 곧이어.
"이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소의 뒤를 쫓는 십여 명의 사람도 나타났다.
소와의 거리가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 걸 보니 '일반인'에 가까운 사람들인 게 분명했고, 따라서 지금 영우와 종수가 보고 있는 건....
"형님, 저 사람들 설마 음식이 없어서 소를 사냥하는 겁니까?"
"정확히는 음식이 없는 게 아니라 석화를 해제할 돈이 없는 거겠죠."
"아. 그런데 소는 생물이라 돌이 되지 않아 가지고."
사태를 파악한 종수가 대충 알겠다는 듯이 무릎을 탁 쳤다.
일부 인류가 수렵시대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59화 16. 혼돈의 땅, 경기도 (2)
"좀 도와줄까요? 저 사람들."
이쪽으로 곧장 달려오고 있는 소를 보며 종수가 물었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허리춤의 얼리버드에 닿아 있기까지 했다.
영우가 승낙만 하면 차에서 내려 소의 머리를 치겠다는 거다.
저 녀석 하나면 지금 저기 떼 지어 달려오고 있는 사람 전부가 배를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
이에 영우는 측은한 눈빛의 소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이 근처 상황도 물을 겸."
"옙."
영우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종수가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갔다.
덜컥.
그러자 이번엔 소를 쫓던 사람들이 주춤하며 속도를 줄였다.
그렇지 않아도 흔히 보기 어려운 게 '움직이는 차'인데 그 안에서 웬 거구가 얼리버드까지 들고 나타나니 겁이 난 것이다.
-우...!
도주 중이던 소도 종수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도로 가장자리를 향해 머리를 틀었다.
팟!
계속 방해하면 이마로 들이받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거친 움직임.
그러나 종수도 보통내기가 아니어서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다렷!"
소를 향해 비스듬히 달려가더니 얼리버드를 양손으로 쥐고서 힘차게 내려벴다.
쏴아악!
섬뜩한 소리가 나기 무섭게 전차처럼 돌진해 오던 소가 바닥에 몸을 처박는다.
퍼벅!
녀석의 커다란 머리통이 허공으로 튕겨 올라간 것도 이때였다.
방금 그 일격으로 머리가 잘려 나간 것이다.
"...!"
이 장면에서 소를 쫓던 사람들은 종수가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력질주 중인 소를 일도양단하는 데엔 엄청난 힘과 내구력이 필요할 터였으니까.
물론 영우도 이 사실을 잘 알았고, 그래서 오히려 종수를 걱정했다.
'저 정도 공격은 웬만한 스탯으론 감당이 안 될 텐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나름 능력치를 차근차근 쌓아 올리며 성장해 온 영우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으읍."
아니나 다를까 팔에 상당한 부담이 있었는지 종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팔꿈치가 부러지거나 한 것 같진 않았다.
"괜찮아요, 종수 씨?"
영우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묻자, 종수가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며 웃어 보였다.
"예. 생각보다 힘이 좋은데요, 저놈."
종수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엎어진 소를 쳐다본다.
그러곤 멀찍이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뭐 해요, 거기서? 이리 오십쇼."
이에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씩 종수와 소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총 11명.
머릿수가 많을뿐더러 각자 칼, 도끼 따위의 무기를 들고 있기까지 했지만 위협적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
눈에서 강자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탓이었다.
이 세계에서 '성공의 경험'을 해 본 자가 내뿜는 기운 말이다.
언제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언가를 또 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에서 비롯되는 기세.
쉽게 말하면 자신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를 쫓아 달려온 11명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이들의 얼굴엔 패배감과 근심만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게 죽기 살기로 쫓던 먹잇감을 느닷없이 나타난 포식자에게 빼앗긴 처지 아니던가.
여태 그랬듯, 이번에도 실패한 것이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이윽고 11인 중 하나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설마 상대가 자신들을 위해 소를 죽였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경험상 얼리버드를 가진 놈들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면 같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으니까.
"...."
이에 종수는 옷에 튄 피를 보며 미간을 구긴 다음, 저 멀리 굴러 나간 소머리를 칼끝으로 가리켰다.
슥.
"먹으려고 하던 거 아니에요? 저 한우. 그래서 도와준 건데."
"아."
종수의 말에 11인이 거의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이때쯤 차 안에 앉아 있던 영우가 뒷좌석 문을 열고 도로 위에 발을 디뎠다.
찰각.
유일 등급 신발인 신기루가 아스팔트와 맞닿으며 아주 이질적인 소리를 낸다.
덕분에 종수에게 쏠려 있던 11인의 시선이 일제히 영우에게 옮겨 갔다.
그리고.
"엇?"
"헉."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11인 전원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갑자기 뭐야?"
종수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하며 얼리버드를 칼집에 꽂았고, 영우도 예기치 못한 '환대'에 의문을 품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영우가 이렇게 묻자, 11인 중 가장 앞쪽에 엎드려 있던 자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서울에서 오신 분들 아닙니까...?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이렇게 하라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요?"
영우의 되물음에 상대가 고개를 조금 더 들더니 아주 이상한 대사를 읊었다.
"서울 사람을… 만나 본 사람들한테요."
"...?"
서울 사람을 만나 본 사람들.
영우가 이 해괴한 문장을 곱씹고 있자 종수가 대신 질문을 던졌다.
"대체 서울 사람이 뭔데요?"
"그, 그야...."
비로소 11인이 고개에 이어 상체까지 비스듬히 일으켰다.
눈앞의 두 사내가 '서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이 차를 타고 온 방향도 서울이 아니라 경기권 외곽이지 않던가.
"아, 서울에서 오신 게 아니군요...?"
"...."
11인의 얼빠진 대사에 영우와 종수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서울에서 어떤 놈들이 왔다갔기에 그들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조차 벌벌 떤단 말인가.
"그쪽으로 가는 중이긴 하죠."
영우는 이 말을 하면서 '겁난 고양이'를 꺼내 들었다.
이 나침반에 따르면 여전히 주변엔 위협적인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서울이 왜요? 그쪽 사람들이 내려와서 칼질이라도 하고 다닌답니까?"
영우가 나침반을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으며 묻자, 11인이 아무 말 없이 영우를 쳐다보기만 했다.
정말 '서울 사람'들이 내려와 칼질을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정말입니까? 제일검끼리 싸우는 것도 아니고 길 가다 보이는 아무나 죽인다구요?"
영우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11인의 대표 격 되는 자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괜히 눈에 거슬려서 좋을 건 없다는 것이죠. 실제로 마물 사냥에 방해가 되는 자들은 다 죽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영우는 '마물 사냥'이라는 말을 듣고서 이 기이한 상황을 단번에 납득했다.
"서울에서 경기권의 마물까지 손대고 있다는 거군요. 그래서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은 죽이기도 한다는 거고."
어쩌면 여주에 제일검이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 아닐까.
|현재 체류 중인 지역은 '여주'입니다.
|이 지역엔 제일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권다툼이구나. 세상이 벌써 이렇게까지....'
하기야 각자의 목숨과 직결된 일이니 그럴 만도 했다.
강해진다는 건, 앞으로 어떤 존재를 만나든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서울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영우는 북서쪽, 그러니까 문제의 서울이 있는 방향을 힐끗 본 뒤, 11인의 경기도민에게 일어나란 손짓을 했다.
"어쨌든 저희는 서울 사람이 아니니 그러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영우가 말한 '이게 다 무슨'엔 피를 쏟으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포유강 경우제목 소과의 짐승도 포함이었다.
"아무쪼록 식사… 잘 하시구요."
왜인지 속과 마음이 거북해진 영우는 뒷걸음치듯 아우디 안으로 몸을 들였다.
그러자 잠시 뒤 종수가 운전석에 들어와 앉으며 룸 미러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형님, 이대로 출발합니까? 저쪽에 더 물을 건 없으시구요?"
이에 영우는 이쪽의 눈치를 보느라 주춤거리면서도 '한우' 근처로 은근히 모여들고 있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설마 저대로 날고기를 잘라 먹는 걸까?
"서울 사람을 직접 본 적도 없다잖아요. 뭘 더 물어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진 않겠어요."
"예. 그건 그렇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빨리 올라가죠. 그럼 뭐라도 만나 볼 수 있을 테니까. 서울 사람이든 뭐든."
현재 시각, 오후 6시 54분.
차창 밖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운 좋게 오늘 한 끼를 해결하게 된 저 사람들도 서둘러야 할 터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이상기후가 찾아오기 전에 방을 구해야 할 테니까.
물론 그건 영우와 종수도 마찬가지였다.
***
바아앙...!
두 사람은 계속해서 북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리고 아까처럼 소를 쫓는 사람들을 세 차례나 더 보게 됐다.
아무래도 근처 어딘가의 목장에서 소들이 풀려난 듯.
어쨌든 사람들이 칼을 휘두르며 짐승을 쫓아다니는 광경은 몇 번을 봐도 기괴했다.
"저런 것도 잠깐이겠죠? 당장 오늘 세금 못 내는 사람들은 싹 다 죽잖아요."
종수는 언젠가부터 소 쫓는 사람들을 도와주자는 이야길 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 저러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차피 수일 내에 다 죽을 처지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오후 10시, 세금 징수.
오후 11시, 이상기후 발생.
운 좋게 마물과 변이자의 눈에 띄지 않아 살아남았다고 해도, 최소 두 개의 생존 허들을 더 넘어야만 한다.
그것도 매일.
그런데 당장 음식을 확보할 돈도, 소보다 빨리 달릴 능력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심지어 서울에선 이제 경기도 사람들이 자기 지역의 마물조차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니 목숨을 건 베팅조차 불가능해졌다.
'한번 넘어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일어서기 힘든 세상이 돼 버렸구나.'
영우는 그사이 한층 더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봤다.
여기가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대로라면 지구상엔 초인들만 남아서 매일 떨어지는 변이자들과....
'잠깐.'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영우는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다른 나라는?'
리셋.
첫날 본 공고에 따르면 '리셋'은 전 인류에게 적용된 특단의 조치였다.
「이는 세계에 적의를 가진 인류가 과반수를 초과했다는 의미이며, 이에 따라 리셋 기능이 강제 발동되었습니다.」
즉, 이건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미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곳도 이 사태를 겪고 있을 거란 뜻 아닌가?
'맙소사.'
끔찍한 장면들이 떠올라 미간을 구기려는 찰나, 그의 시야에 안개를 휘감은 시커먼 문구가 나타났다.
「1시간 뒤 광고주가 방문합니다.」
「귀빈을 위한 답례품을 준비하십시오.」
60화 17. 민폐제일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