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1화. 각성
"저 새끼, 왜 저렇게 겉돌아?"
어두운 숲속.
철컹!
등에 묵직한 도끼를 짊어진 장정이 못마땅하다는 듯 쉴 새 없이 혀를 찼다.
"파티에 끼워 달라고 하길래 기껏 데려왔더니마는, 혼자 저기서 뭐해?"
그의 찌푸린 시선 끝에는 남자 한 명이 일관되게 걸려 있었다.
체구가 왜소해 보이는 남자.
어려 보이는 얼굴은 스물이 조금 안 되었을까. 이목구비가 날카로워 꽤 볼 만하지만, 시니컬한 눈매가 다 망쳤다.
종합적으로 야비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여기에 파티와 벽이라도 친 듯 겉도는 태도까지.
"이름이 신우주라고 그랬지?"
신우주.
저 남자의 이름이었다.
"...."
흙바닥을 짚는가 하면.
"...."
괜히 허공에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고.
"...."
애꿎은 나무껍질을 벗기더니 슬쩍 혀끝에 가져다 대기까지.
머리라도 아픈가.
파티와 동떨어진 채 기행을 일삼는 신우주의 모습에 파티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기 바빴다.
"쟤 뭐하냐?"
"몰라, 입장할 때부터 난리이길래 물어보니까 몬스터가 나오나 수색이라는데, 진짜 뭐 있나?"
"없다니까. 몇 번을 말해. 어둠 숲에 한두 번 오냐? 몬스터 좀 나와 봤자 2층 수준이 뻔하지."
파티원 한 명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신우주, 저거 원래 이상한 놈으로 유명해."
그렇다.
실제로 신우주는 꽤 유명했다.
딱히 실력이 유명한 건 아니고, 조금 다른 방면으로.
"비각성자야. 탑에 들어오고 벌써 50년이 지났는데도."
비각성자라는 점이 그러했다.
남자의 목소리에 자그마한 비웃음이 담겼다.
"50년, 자그마치 50년 동안 탑에서 살아왔으면서도 계속 비각성자 신세."
"와. 그게 가능해요? 여긴 던전인데?"
파티원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믿을 수 없는가.
바로, 각성이라는 게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머, 나한테 도살자 스킬이!]
정육점에서 고기 썰다가 각성하는가 하면.
[이거 꿈인가?]
잠자다가 각성하기도 한다.
요컨대, 탑에서 자그마치 50년을 비각성자로 버틴 신우주는 그 자체로 별종일 수밖에.
"근데 진짜 50년이나 됐어요? 겉보기에는 너무 어린데요? 20살 갓 됐겠는데?"
"뭐야, 너 초짜냐? 탑에 들어오면 노화가 멈추는 것도 몰라?"
"저 지난달에 들어와서요. 근데 저도 첫날에 각성했는데 저 사람은 왜 못해요?"
"탑도 아는 거지. 저런 정신병 있는 놈들 각성시키면 문제 일으킨다는 거. 저기 바닥에 대가리 박고 냄새 맡는 거 봐라. 타조 새끼도 아니고."
동물원 우리 속 원숭이가 저럴까.
들으라는 듯 말하는데도 항변 한 번 없으니 눈덩이처럼 더 부푼다.
말린 오징어처럼 도란도란 씹으려니 한 미남자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자, 자. 여긴 던전입니다. 같은 파티원들끼리 그렇게 헐뜯는 것도 좋지는 않습니다."
이번 파티의 리더, 정현수였다.
신우주와는 달리, 부드러운 외모와 사회적 지위를 겸비한 모험가.
그가 듬직한 목소리로 주위를 환기했다.
"우주 씨는 비각성자니까 더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겁니다."
사바나 초원의 야생동물은 약할수록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는 논리겠지.
정현수의 말에 파티의 긴장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뭐, 우리 대장님께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
이 남자가 정현수이기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길 트레이너.
더 고층을 노릴 실력이 되면서도, 초보자들을 이끌어주기 위해 솔선수범해서 아래층에 머물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저 녀석도 운도 억세게 좋아."
도끼를 등에 짊어진 남자가 혀를 찼다.
"원래는 끼워주는 파티도 없어서 혼자 다닌다는 놈이, 대장이 끄는 파티에 들어와서. 인생 날로 먹...."
"쉿, 잠시 정지."
리더 정현수가 남자의 말을 끊으며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심부에 진입합니다. 마지막으로 장비 점검하세요."
그 선언이 떨어진 순간.
불과 몇 초 전까지 여유만만했던 무리에 무거운 긴장이 감돌았다.
이곳, 어둠 숲은 외곽까지는 일반적인 야생 수림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심부부터는 다르다.
본격적으로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지역. 찰나의 방심조차 죽음으로 이어진다.
"포션 한 병씩 마시시고, 그럼 5분 뒤 진입하겠습니다."
정현수의 허리춤에서 빨간 캔 하나가 나왔다.
통칭 검은 포션.
포션치고 회복 속도는 느리지만, 그 효과는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했다.
흔히 콜라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물건인데, 맛까지도 꽤 좋다 보니 음료수 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사람마저 있을 정도.
치익!
짜릿하게 탄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되려는가 싶은 찰나였다.
"음?"
조금 전부터 무리에서 겉돌던 남자, 신우주의 행동이 이상했다.
'저거, 왜 저래?'
허리춤의 주머니 하나를 빼 들었다.
그야 이상할 게 없다. 장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한 건 다름 아닌 정현수 본인이니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눈빛이 심상치 않은데?'
눈빛이 꺼림칙하다.
신우주는 뭔가 결심한 눈초리였다.
마치 적을 바라보는 듯한. 당장이라도 칼을 뽑을 듯한 시선이 그러했다.
"우주 씨, 잠시 멈추시죠."
정현수가 리더답게 한발 앞서 나가, 신우주의 수상한 행동거지에 제동을 가하려는 찰나였다.
"우선 너부터."
신우주는 짧은 대답과 함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거머쥐더니, 그대로 손을 뻗었다.
― 촥!
흰색 가루였다.
주머니에 들어 있던 가루가 신우주의 손에서 터져 나오더니, 이내 정현수의 안면을 덮쳤다.
"큭!"
하필 무어라 말하려던 참, 정현수가 입안에 들어간 가루를 다급히 뱉어내며 외쳤다.
"엣퉤퉤! 이게 뭐야!"
가루가 뭔가 날카로운데.
게다가 이건 맛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의 선하게 잘생긴 얼굴이 죽상으로 일그러졌다.
'짜!!'
짰다.
신우주가 뿌린 흰색 가루는, 무엇보다도 굉장히 짰다!
근래 느껴볼 일이 드물었던 짠맛에 입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목젖을 부여잡은 찰나.
"너 이 새끼!"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리더가 습격당하는 초유의 사태에 파티원들이 차례차례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이에 신우주가 시큰둥한 표정과 함께 저지른 일은.
"다음은 너희들."
촥!
주머니 속 하얀색 가루, 그러니까 소금을 끼얹는 것이었다. 그것도 입자가 가늘고 맛이 좋아 요리에도 쓰기 용이한 꽃소금을 말이다.
"읍!"
"으아악!"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입에도 들어갔다.
아니, 눈을 부릅뜨고 있던 바람에 눈에도 들어가 버렸다.
"크아아아악!!"
앞선 두 사람이 한순간에 정현수와 같은 꼴이 된 찰나의 순간, 신우주의 다음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짜!"
"눈! 눈에 들어갔어!!"
"신우주 이 새X 존나 빨라!"
파티원들에게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차례차례 소금을 끼얹는 것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한 번 넣었다 뺄 때마다 한 명씩, 초일류 안동 간잽이만큼이나 꼼꼼하게, 그것도 안면에 집중해서!
"으으윽!"
20초.
파티원 대다수가 눈물 콧물을 쏟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았다.
그렇게 모두가 비명을 지르며 눈시울을 붉히는 와중.
"너였구나?"
마침내 한 파티원을 바라보는 신우주의 눈동자에 안광이 희번덕거렸다.
찰칵!
동시에 그의 손아귀가 옆구리에 매달린 쿠크리를 꺼내 들었고, 둔탁한 소음이 어둠 숲의 허공을 뚫고 울려 퍼졌다.
빠각!
"신우주! 이 미친 XX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정현수가 신우주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을 하려나 했더니, 갑자기 팀킬을 저질러?'
숲에 들어선 뒤부터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더라니, 이 순간만 엿본 건가?
'대체 왜? 청부라도 받은 건가? 비각성자가 우리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텐데.'
현기증이 돈다.
이 순간,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철컹!
파티의 리더로서 신속하게 적을 제거하는 것.
정현수가 신우주를 향해 다급히 칼날을 뽑아 든 순간이었다.
"...!"
흰 선을 그으며 날아간 그의 칼날 끝이 신우주의 등 뒤에서 우뚝 멈춰 섰다.
퍽!
퍽!
뻑!
신우주는 숙련된 가죽 장인처럼 무감정하게 쿠크리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 칼끝으로 다져지고 있는 대상이.
"몬스터?"
어느새 액체가 되어 녹아내리고 있는 괴물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비롯해 리더 정현수마저 파티원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그 정체는 바로.
"응, 도플갱어."
도플갱어였다.
도플갱어,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며 무리에 섞여들어, 한 명 한 명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몬스터.
전투력은 몹시 약하지만, 모험가와 구분하기 어려워 랭커들마저도 진절머리를 앓는다는 괴물.
정현수의 표정이 당혹감에 물든 찰나, 순식간에 처리한 신우주가 무감정하게 중얼거렸다.
"딱 감이 왔지."
뒤늦게 소금의 짠기에서 빠져나온 나머지 파티원들의 표정도 충격에 사로잡혔다.
"여긴 기껏해야 2등급 던전인데 왜 최소 4등급 던전 이상에서 출몰한다는 도플갱어가...."
한 파티원의 얼빠진 목소리에 신우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 말대로야, 여기 2등급 던전이잖아. 들어올 만한 모험가들도 그 언저리 뉴비니까 다 전멸해서 안 알려졌겠지. 그보다, 리더라면 모든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신우주의 눈치에 정현수가 찔리는 듯 헛기침을 뱉었다.
"하지만 여긴 2등급 던전...."
"그래, 우리가 여기서 다 죽었으면 앞으로도 2등급으로 알려졌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모두 무사하니."
"공사장에서 무사고 300일이라고 적어놓았으면 뭐다?"
"...."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반박하고 싶다.
하지만 나름 정론을 따라가는 신우주의 말에 반박할 구석을 찾지 못한 정현수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제가 방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옳지.
드디어 올바른 대답이 나왔다.
"이제 알려 주십시오. 어떻게 구분한 겁니까?"
신우주는 정현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바닥을 툭툭 차며 말했다.
"어렵지 않지. 다리 움직임을 잘 봐. 걸음걸이가 어색했잖아. 그리고 발자국마다 물기가 조금씩 남아 있고."
"...!"
주위를 둘러본 정현수가 경악했다.
'정말이다.'
그랬던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축축한 숲속이라 발자국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나.
저런 거로 정말로 구분했다고?
"그리고 소금 뿌리면 동작이 굳어. 진짜 사람이었다면 당황해서 발악했겠지. 그리고 아까 저 친구들 기억하지? 신나서 나 욕할 때도 혼자 조용했잖아?"
"그건...."
정현수가 리더로서 뭐라 사과라도 건네려는 찰나, 신우주가 피식 웃었다.
"변호는 됐고."
말하기를 잠시 멈춘 신우주가 고개를 돌려 숲속을 바라보았다.
"도플갱어는 군집 생활을 하는데."
단서를 꼬리처럼 흘린 찰나였다.
저 먼 곳, 어두운 수풀 너머로 붉은 안광'들'이 번뜩였다.
앞으로 몇 마리나 남았을까.
*
"크어어."
불과 10분이 지났을 무렵, 한 무리의 모험가들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죽는 줄 알았네."
"괴물이네, 괴물."
"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교전의 결과는 이러했다.
"저게 어떻게 비각성자냐."
8마리.
단독으로 뛰쳐나간 신우주가 쿠크리 한 자루만으로 그중 4마리를 해치웠다.
나머지 7명이 가까스로 힘을 합쳐 4마리를. 그나마 리더 정현수가 단독으로 4마리 중 2마리를 해치울 수 있었다.
'혼자 거의 절반을 잡았어.'
'미친.'
질려버렸다.
저렇게 날뛰었으면서도 몸에는 찰과상 몇 개밖에 안 생기다니.
"비각성자...."
"쉿."
파티원들은 언제 그를 깔봤냐는 듯, 이제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한편, 리더 정현수는 허탈하기까지 한 심정이었다.
'저 정도의 실력을 감추고 있었나.'
그의 두 눈이 무엇을 보았던가.
무력이었다.
화려한 스킬이 아닌, 그저 뼈와 근육으로 이루어진 육체와 무기 한 자루로 빚어낸 순수한 무력.
제아무리 4등급 몬스터 최약체라지만, 무려 네 마리를 혼자서 잡다니.
비각성자가 저럴 수 있나?
정현수가 눈을 찌푸렸다.
'비각성자가 아니라면 설명이 돼. 근력이나 신경 강화 계통으로 뭔가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
아마도 패시브로 작동하는 물건.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
사소할지언정, 뭔가 하나는 감추고 있다.
이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의문이 남는다.
'대체 왜 저런 인간이 이런 저층을 맴돌고 있는 거지?'
굳이 실력을 감추는 이유였다.
비각성자는 탑도 제대로 못 오르는데?
어둠 숲이 설치된 2층 정도가 한계.
'애초에 왜 솔로였지? 저만큼 실력이 있는데 그간 혼자 다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네임드 길드에서 한 번쯤은 영입을 제안해야 정상 아닌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닐까.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있다.
잠시 생각 끝에, 정현수는 작은 결론을 내렸다.
'이건 보고해야 한다.'
그의 길드에 보고서를 올려야겠다고.
한시라도 빨리 신우주를 영입하거나, 혹은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말이다.
그렇게 결심한 한편, 그 당사자인 신우주는.
"...이건."
눈앞으로 떠오른 예상 밖의 광경에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울다가 웃으면 미친놈이라는데 거의 그에 근접한 표정을 말이다.
뭐가 그렇게 기쁘냐면.
'드디어!'
각성이었다!
지금껏 기다려 마지않았던 각성, 입으로 전해 들어야만 했던 그것이 마침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대는 긴 세월을 통해 탑의 최정상을 노릴 잠재력과 그 자격을 증명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선물을 선사합니다.]
내가 각성을?
[EX급 스킬...]
하물며 EX급인데.
[...신위(하급 신)를 각성하였습니다.]
하급 신?
신우주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
눈앞으로 작은 세상이 펼쳐졌다.
마치 먼 옛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플레이하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도 같은 세상이.
'게임?'
말 그대로다.
오밀조밀한 SD 캐릭터들이 돌아다니는 중세 세계.
이건 시장바닥인가. 수십 명의 SD 캐릭터들이 물건을 늘어놓고 장사하는가 하면, 그 앞에서 부모를 조르는 아이도 보였다.
손가락 사이즈의 말을 타고 다니는 기사의 모습까지도 SD로.
거지도 SD로. 그 앞에 놓인 모자에 한 푼 던지고...가 아니라, 있던 돈도 뺏어가는 귀족의 모습도 SD로 보였다.
'내가 미쳤나?'
미쳤다는 말을 자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도무지 비현실적인 광경을 직면한 신우주가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이거 아무리 봐도 게임인데.
게임 맞는 것 같은데.
스킬 중에 이런 게 존재하기는 했나? 듣도 보도 못했는데.
[당신은 하위세계의 신으로서 신들의 게임에 참가했습니다.
신도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하위세계의 가장 위대한 신으로 등극하십시오.]
신들의 게임?
하위세계의 신이라고?
'이게 뭔 개소린데?'
무슨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는 말들이 쏟아지는데.
각성한 신우주 본인마저도 긴가민가한 찰나, 곧이어 눈앞에 떠오른 문장은 그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제한 시간: 2시간]
[제한 시간 내에 첫 신도를 영입하지 못하면, 스킬 '신위(하급 신)'를 상실합니다!]
뭐?
상실해?
50년 만에 얻은 스킬을?
| 2화. 하급 신 (1)
어 그러니까....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제한 시간 내에 신도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스킬 '신위(하급 신)'를 상실합니다!]
[신이란 무릇 신도의 믿음에 근거하여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신도가 없는 신은 그 권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후끈 돌던 핏기가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가셨다.
어떻게 얻은 스킬인데!
제한 시간 내에 신도를 못 만들면, 도로 가져가겠다니!
[제한 시간: 2시간]
그것도 저 짧은 시간 안에!
'장난하나?'
애들 장난도 아니고 줬다 뺐는다고?
게다가 자그마치 EX급 스킬이다.
규격 외라고!
그 널린 각성자 사이에서도 극소수의 강자들이나 가지고 있다는 EX급!
S급은커녕 A급만 가져도 예비 랭커 소리 들리면서 스카웃 제안이 끊이지 않을 정도인데 EX급이면 말할 필요도 없다!
'2시간밖에 없다는 게 골 때리기는 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이 던진 건 아닐 거야.'
신우주가 재빠르게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좋지?
마음속 깊이 그 방법을 갈구한 찰나였다.
[서브 스킬 - 전지(全知)가 발동됩니다.]
[신은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존재입니다.
세상을 잇는 창을 통해 하위세계를 자유롭게 관찰하십시오.]
스킬이 자동으로 발동된 찰나, 신우주의 눈앞으로 펼쳐진 SD 그래픽 중세 세계. 그곳이 VR 헤드셋을 끼고 보듯 바로 눈앞으로 더 깊숙이 들여다보였다.
'여긴.'
지금, 신우주는 이쪽 세상으로 눈만 넘어와, 하늘에서 전지적 시점으로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실제 세계?'
그의 코앞에 비친 세상은 그러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는 SD 그래픽으로 보였었지. 지금 보이는 건 정반대. 다큐멘터리 방송국의 카메라로 들여다보듯 현실적인 세상이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현실이었다.
'중세인가?'
중세 판타지 세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인파로 북적거리는 시장이었다.
말끔하게 깔린 도로에 마차 바퀴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렸다. 부모가 아이 손을 잡고 재잘재잘 떠들었으며, 연인이 달콤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연령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가져온 듯 이상적인 광경.
한편.
도시의 다른 한구석에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고작 한 블록 차이라고?'
삐쩍 말라 시체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부모와 아이가 손을 잡고 있기는 하다.
물론, 아이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울고 있지만 말이다.
한구석에서는 우리에 갇힌 고블린이 그 몸을 흔들어 덜컹거리고 있고.
끔찍하군.
광경이라기보다는 참상이라고 불러 마땅한 모습에 인상을 쓴 찰나, 안내 문구가 떠올랐다.
띠링!
[남은 시간: 1시간 54분]
이크.
그렇지,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
제아무리 좋은 스킬이라고 한들 그걸 감상하다가 써 보지도 못하고 잃어버리면 본말전도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띠링!
[시민에게 목소리를 건네어 그대의 신도로 삼으십시오.]
['권능-전송' 스킬을 사용 가능합니다!]
[물품을 전송할 시에는 GP가 소모되며, 그 용도와 가치에 비례하여 자동으로 소모량이 조정됩니다.]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GP는 신으로서 가진 권능을 발휘하는 데 사용됩니다!]
참 친절하시네.
GP? 이건 마법사들 마나통 같고.
보아하니 100이 기본으로 주어진 상태였다.
'명함은 신이라고 거창하게 달아줬지만, 무한정은 아니고 제한은 있다는 건가.'
구체적으로 100이 얼마나 큰 수치인지는 써 봐야 알겠지.
그건 그렇고.
[권능-전송]
[하위세계로 아이템을 전송하는가 하면, 반대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전송이라.
이게 이 상황을 타계할 열쇠라는 거겠지.
호흡을 깊게 들이마신 신우주가 시선을 돌려 다시금 세상을 바라봤다.
'목소리를 건네면 된다고 했나?'
아무래도 이 스킬은 들여다보는 수준을 넘어, 소통까지도 가능한가 보다.
아무나 한 명만 신도를 만들면 된다고 했지?
적당히 한 명 고르고 보자.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띠링!
[역사적으로 어느 신이든 첫 신도는 훗날 사도라고 불리며 교단의 핵심 인물이 되고는 하였습니다!
신중 하십시오.
살인자를 첫 신도로 삼았다가 다음 날 악신 교단으로 몰려 파멸한 신도 있습니다!]
"...."
아 그래.
아무나 신도로 뽑지는 말라는 말이네.
시스템 창이 참 친절하기 짝이 없는 게 거의 AAA급 게임 속 튜토리얼 안내 문구를 보는 수준이다.
'적어도 남한테 피해는 안 끼치는 사람을 신도로 뽑으란 말이지?'
신우주는 새로이 얻은 지식을 되새기며 다시금 세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제한 시간은 10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럼, 우선은 저 사람.'
당장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시장에서 협상 중인 상인.
얼굴만 봐도 살이 풍채 좋게 오른 것이 꽤나 잘사는 집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옷도 깨끗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에게 굽신거렸다.
뭐 하는 사람일까.
['전지(全知)'가 발동합니다.]
집중하자 GP가 2 줄어들더니 상인의 정보가 눈앞으로 떠올랐다.
[상인 도르트문트 테르지치]
[직업: ???]
[테르지치 상단을 이끄는 테르지치 가문의 셋째 아들.
형제들을 숙청하고 상단을 물려받아 훗날 대륙 제일의 대상인이 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와우.
형제들을 처리하려 한다니. 넉넉한 턱살만큼이나 야심도 두둑한 놈이었다.
하지만 여긴 중세 시대니까 보편적인 도덕관념을 기대하기는 어렵겠지.
당장 리얼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중세 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XX만 해도 형제 숙청 정도는 꽤 흔한 일이니까.
'그래도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건 기억해 둘만 해.'
영향력이 크다는 건 다르게 말하자면 교단의 세력을 확장하기도 좋다는 것인데, 하물며 상인이다.
집단 활동에서 튼튼한 자금줄은 필수 아니겠나.
'이거다.'
시작이 좋네.
신우주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목소리를 건넬 생각을 다잡은 찰나였다.
[경고!]
눈에 확 박히는 붉은색 글씨가 떠올랐다.
[상인 도르트문트 테르지치에게는 이미 소속된 교단이 존재합니다!]
[타 교단의 신도에게 간섭하는 행위는 종교 전쟁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
신우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이 하위세계라는 세상에는 그 외에도 다른 신들이 존재한다는 건가?
하물며 그 신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그의 스킬 [신위] 뒤에 붙은 [하급 신]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랐다.
'내가 하급 신이면, 중급 신이나 상급 신도 존재한다는 말이겠지? 어쩌면 그 이상이 있을 수도 있고.'
생각해 보면 다신교를 존중하는 국가 따위야 얼마든지 존재하지 않나.
당장 인도에는 신이 3억 명도 넘을뿐더러, 일본에는 카스테라의 신, 변기의 신, 돈코츠 라멘의 신도 있다고 하니까.
'아무한테나 손을 대면 전쟁이라는 건가.'
신우주가 경각심을 품었다.
모시는 신이 있는 사람이 쉽사리 믿음을 바꾸겠나.
게다가 탑 바깥에서도 남의 교회 가서 영업 뛰면 고소당하는 게 국룰이잖아?
'침착하게 가자. 아직 시간은 더 있어.'
신우주는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1시간 30분.
불과 18분 남짓한 시간을 남겼을 무렵.
신우주는 한 가지 잔인한 현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없네?"
없었다.
그의 교단의 첫 신도로 삼을 만한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었다.
*
신우주가 황당한 기분에 취해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말이 되나?'
참 꼼꼼히도 찾아보았다.
처음에는 딱 봐도 때깔 좋은 사람 위주로 찾아보았다.
[귀족 보타니카르 디스쿠스 2세]
[상인 팜베리]
[판사 바올로 아바리카 플람]
[프리스트 예시카]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경고!]
[이미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외 없이 모시는 신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아뿔싸, 이미 침을 발라놓은 건가 싶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돌려 보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대장장이 시드는 이미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여관 주인 제임스에게는 이미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어부 쿤누르에게는 이미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외가 없었다.
누구 하나 앞서 섬기는 신이 존재했다.
'이 세상은 대체 뭔데 사람들이 이렇게 독실해?'
단순히 신앙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조금 더 집중하자 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오늘의 양식을 주시옵고 그 뜻에 말미암아 내 피와 살이 되게 하심에 내 길이 있음에 의심 한 점 없사오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오늘의 장사는 덕분에 대박! 대박입니다! 으하하!
-후후, 하여튼 잘난 신을 모시고 볼 일이라니까.
독실하다.
기도가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게 아주 패시브였다. 이쯤 되니 놀랍다 못해 어안이 벙벙할 지경.
'여긴 신이 당연한가?'
나잇대가 어릴수록 신앙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드는 한국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하물며 신우주는 무교였다가 다짜고짜 신부터 되었으니 더더욱.
쉽지 않다.
게다가 신자가 많은 것과는 별개로, 그 인성도 보통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거지새끼들한테는 빵 한 조각도 아까워.
-밥버러지들 같으니.
-후후, 밀가루는 무슨, 절반은 돌가루다! 돌가루!
-썩은 생선을 좋다고 비싼 돈 주고 사 먹네. 호구야, 고맙다!
사람 새끼가 없다.
중세라서 그런가. 속고 속이는 게 아주 기본이야.
소비자 보호원 없나?
여기 시장은 소비자와 생산자 양쪽 모두 일종의 승부를 하는 세상인 건가? 쓰레기를 팔았어도 그걸 모르고 산 소비자 책임인가?
모 만화의 명대사를 되새기던 중 신우주가 움찔했다.
'우왓,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2시간일 때는 까놓고 여유로웠다.
하지만 이제 15분 언저리밖에 안 남은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사형 선고.
기껏 얻은 EX급 스킬을 도로 내놓으라며 손짓하는 저승사자가 보였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어?"
당장이라도 숨을 거둘 것처럼 헐떡거리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피골이 상접한 채 썩은 생선처럼 퀭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숨만 내쉬는 남자가.
피부에는 검은 반점이 잔뜩 피었다.
흉측한 모습이지만, 정말로 흉측한 건 따로 있었다.
-쟤 죽으면 옷은 내가 가져도 되겠지?
-멍청한 놈, 자기 먹을 걸 애새끼한테 막 나눠주더니 내 저럴 줄 알았지.
"...."
아니나 다를까.
속내를 읽어본들 아예 관심이 없다.
돈이 있고 없고 이게 평균적인 인성이 맞단 말이겠지.
'내가 너무 기대가 큰 건가.'
실망한 신우주의 눈에 비친 이곳은 빈자들의 뒷골목이었다.
그것도 중세 뒷골목.
소매치기 정도는 골목마다 한 명도 아니고 두세 명씩 깔렸다.
얼굴에 칼집 난 형님들이 마른 사람을 붙잡고 린치를 가하는가 하면, 말하는 것만 대충 들어봐도.
-제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제길, 일당 후려치고 지랄이야. 돼지 새끼가 멱을 따버릴라.
-배운 것도 없는 계집년 주제에 돈이나 밝히기는. 퉷.
-하여간 수컷들은 좋아하는 척 연기만 해 주면 지갑을 절로 연다니까? 히히.
-아... 나 왜 태어났지?
-신이시여, 저 새끼 좀 저주해 주세요.
행동거지부터 사용하는 어휘까지 하나하나가 천박하기 짝이 없다.
단순히 돈이 없고 지위가 모자라는 정도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성정부터가 좋게 말하면 무식하고 나쁘게 말하면 야생이다.
저걸 신도로 영입해도 될까.
길 가다가 짐보따리 든 노인 있으면 도와주기는커녕 약탈할 것 같은데.
'게다가 섬기는 신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모 빨간색 좋아하는 철학자 가라사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하였던가.
가난한 이라고 해서 신을 아예 안 믿는 게 아니었다.
가난하기에 더 의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슬슬 시간이 없는 게 사실이야.'
신우주가 어금니를 꽉 물었다.
12분 남았다.
남은 12분 내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작금의 모든 고민은 사치가 될 터.
개과천선에 걸고 고쳐 써야 하는가. 아니면 종교 분쟁을 감수해야 하는가.
어느 쪽이든 도박이다.
그렇게 주저하는 와중이었다.
-신이시여, 그곳에 계신다면, 제게 간곡한 청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긴.'
조금 전, 빈자가 죽어가던 골목.
그 빈자의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채 그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제 보잘것없는 목숨이라면 거두셔도 좋습니다. 바라시는 모든 걸 취하시되 부디 이자를 살려 주십시오. 그게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
신우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 2시간, 세상을 돌아본 2시간 동안, 신우주가 처음으로 본 존재였다.
[기사 단테]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묵묵하게 기도하는 존재.
그 존재의 이름이었다.
기사 단테.
'찾았다.'
| 3화. 하급 신 (2)
기사 단테.
신우주의 눈에 처음으로 확 박힌 인물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의 남성.
넝마를 걸친 옷차림에 오랫동안 씻지 않았던 탓인지 노숙자로 보더라도 이상할 차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생겼네.'
딱 봐도 잘생겼다.
단순히 잘생겼다기보다는, 수려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의 본판.
'호감도 하락.'
키도 크고 좋으시겠다.
땟국물 떡칠하고도 저러신데, 잘 씻겨 놓으면 아이돌 비주얼 센터도 하시겠어.
신우주는 괜히 투덜거리며 기사 단테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전지(全知)'가 발동합니다.]
[기사 단테]
[마음속에 숭고한 기사도를 품은 기사.
본디 엘리트 출신이었지만, 세상에 보탬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방랑 기사가 되었다.
신을 싫어한다.]
잘생긴 놈이 설명까지 간지가 흐른다.
잘난 놈이 민초를 위해 발 벗고 나서? 히어로물 주인공 같은 건가.
이 세상의 도덕 수치는 여태껏 본 바로는 현대 사회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시궁창이었는데, 참 놀랍다.
'좋아.'
아슬아슬하던 참에 천운이 따랐네.
어차피 남은 GP는 거의 밑바닥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한참 뒤적이며 전지를 발동한 탓에, 잔여 GP는 처음 소지했던 100에서 불과 5밖에 안 남았다.
[소속된 교단이 없습니다!]
마침 소속 교단도 없다고?
더 좋네.
하지만 걸리는 멘트가 하나 있었다.
[신을 싫어한다.]
뭔가 사정이 있는 걸까.
이 한 명한테서 설득에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겠지. 능력은 기껏 각성한 보람도 없이 잃어버릴 테고.
하지만.
신우주가 힐끗 시선을 돌려 제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어차피 제한 시간도 곧 끝이야.'
남은 시간은 8분 남짓.
1시간 50분 동안 뒤적였는데도 마땅히 신자로 삼을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앞으로 더 찾은들 결과는 뻔하다. 주저할 이유도 없지.
하지만 이 정도 되는 인물에게 다른 신이 안 붙어 있다는 건 뭐라고 해야 할까.
'무슨 일 있나?'
아무리 봐도 뭔가 사정이 감춰져 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식당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아무도 주문하지 않는다면, 뭐가 됐든 간에 이유가 있는 거 아니겠나.
'잘난 놈이 내 눈에만 잘났을 리는 없고.'
전부 거절했나?
아니면 크게 데었나?
그런 것치고는 아까 꽤 간절하게 신을 찾고 있던데.
이런저런 가능성을 고민하기를 잠시, 신우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됐다.
고민해서 뭐 하나. 밑져야 본전인데.
'물불 가릴 때가 아니야.'
하루살이 목숨이라도 일단 살고 봐야 하루는 채우지 않겠나.
'좋아, 해 보자.'
신을 싫어한다는 것.
불신자를 신도로 삼으려면 뭘 해야 할까.
스치듯 시선이 닿은 제한 시간은 앞으로 불과 5분밖에 남지 않았다.
신우주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공수표라도 던지는 게 맞아.'
살고 보자.
*
'지옥이다.'
기사 단테, 시궁창에 피어난 꽃처럼 고운 얼굴을 한 남자가 무릎 꿇고 돌바닥에 앉은 채 미간에 시름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그의 손을 붙잡은 사람이 있었다.
"우...우으으...."
거지이자 병자였다.
피부병이라도 앓은 걸까. 얼굴에는 흉이 가득했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것이 볼이 오목하게 파일 정도로 말랐다.
불과 한 호흡 뒤에 숨통이 끊기더라도 이상하지 않겠지.
'왜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가.'
단테가 어금니를 부서지도록 악물었다.
할 줄 아는 건 칼질이다. 아픈 사람을 구하는 법 따위는 모른다.
의사의 힘도 빌릴 수 없었다.
[풉, 그 흉한 얼굴이 안 보이시오? 신에게 저주를 산 자요. 무릇 누구나 태어난 분수대로 사는 법이지. 사람이 아니니, 사람에게 쓸 약이 아깝소.]
진찰이라도 받아볼까 해서 모신 의사의 말이 저러했으니.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을 잡아주는 정도라니.
그마저도 같은 뒷골목 주민들은 비웃는 눈치였다.
"기사 나으리, 곧 죽을 놈한테 뭘 그리 애를 쓰시오? 옮는다니까. 같이 개죽음당하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
저따위다.
"신에게 뜻이 있다면 살겠고, 죽더라도 뜻이 있는 것이지."
단테는 저런 말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신이라는 작자들은 무엇이 그리 잘나서 죽어가는 신도를 외면하는가.
아까부터 애써 기도를 올리고 있거늘, 왜 대답이 없나.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
물론 존재야 하겠지. 신의 사랑을 받아 신성력을 부리는 자들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당장.
[몇 번을 권유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내게 귀의하고 영광된 뜻을 따르라.]
그 또한 몇 차례고 말이 걸려 왔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말이다.
[그대는 어이하여 비천한 이에게 공을 들이는가.]
[죽어야 할 자가 죽는 것이다.]
[충분히 쓰고도 모자람이 없을 재화와 여자를 약속하겠다.]
[필멸자여, 죽어가는 이에게 시간을 쏟는 것은 깨진 양동이에 물을 퍼붓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대는 더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 내게 오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남들이 평생을 살아도 한 번을 못 듣는다는 신의 목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거절해왔다.
저래서야 신보다는 타락한 귀족에 가까울 테니까!
긴박한 상황에서도 저런 유혹을 걸어오는 이들에 대해 단테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신들이여.'
너희 같은 쓰레기들을 신이라고 믿고 받드는 이들이 진심으로 불쌍하다.
부디 저주받아라.
정말로 비천한 건 이들 가난한 자들이 아닌, 너희들이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저... 계십니까?]
"...."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맹랑한 목소리가.
신다운 위엄이라고는 개미 융털만큼도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사촌 동생 같은 평범한 목소리가.
"이 무슨."
아차.
긴장이 풀려버린 단테가 자기도 모르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 신인데요.]
왜 존댓말?
어딘가에 어린아이가 숨어서 놀리고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부터 말할게요. 앞에 저 사람을 살리고 싶은 거죠?]
단테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인 순간 건너편 목소리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좋아요. 도와드리고 싶어요. 도와드릴 수 있기도 하고.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내게 도와줘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도움?
사용하는 어휘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신답지 못하다고나 할까.
'명령하고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너무 유했다.
협박이라면 차라리 모르겠는데.
상대가 정말로 신이 맞기나 한지 의문스러운 상황인데, 이어진 말은 허탈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구해 주는 대신, 절 따르세요.]
자기 신도가 되라는 것이었다.
머릿속의 목소리가 그 문장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이게 제 유일한 바람이며,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도움입니다.]
맥이 풀렸다.
결국에는 순수한 호의는 없고 대가성인가.
'신은 다 이렇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단테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만.'
일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더 뭔가를 바라다가 사람을 죽게 할 수는 없지.
단테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받아들이자.
자존심에 휘둘리다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추하다.
그런 생각을 한 찰나, 마지막으로 작은 궁금증이 떠오른 단테가 그것을 입에 올렸다.
"하나 묻겠습니다만,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제안?]
"그대에게 귀의하지 않겠다면, 이자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말입니다."
[....]
대가 없이도 사람을 위해 행동할 것인가.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영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 같은 말을 해야지.]
역시나.
느낌이 다르기에 기대했더니마는, 다른 신이라는 작자들과 다를 바 없는 건가.
가당치도 않다는 듯 헛웃음과 함께 나온 말에 단테가 실망하려는 찰나, 신우주의 다음 한마디는.
그의 사지 힘이 풀리게 만들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다.
[살리고 봐야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예?"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걸 안 살려? 사람 목숨을 가지고 협상을 해?]
"...."
단테가 눈을 크게 떴다.
마땅히 할 대답을 못 찾은 참인데 저쪽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명심해요. 목숨이라는 건 거래 대상이 아니에요. 백만장자든 거지든 누구나 자기 목숨은 귀중하고, 그걸 남의 잣대로 환산할 수는 없으니까.]
선한 말들이었다.
한없이 입바르기만 한 말임에도, 그가 한평생 신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말들.
말과 말 사이에서 단테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멍하니 듣는 것밖에 없었다.
경청하듯, 혹은 감상하듯.
[왜, 의사들도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일단 살려놓은 다음 의료비 청구한다고 하잖아요?]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아까 진찰 본 의사는 안 그러던데.
벙쪄 있으려니 저 신이라는 자가 혼자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됐고! 시간 없거든요? 나는 내 맘대로 할 거니까, 그쪽도 알아서 합시다.]
시간이 없어?
아, 환자의 시간이 없다는 말인가.
'급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던가.'
사람 살리고 싶다는 게 체면 좋기만 한 말이 아니었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이 가득한 상황.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단 하나 있다면.
'이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목소리 중에서는 유일하게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은 믿을 수 있다.
[지금 보냅니다.]
불과 몇십 초 뒤.
마치 툭 떨구듯 그의 눈앞으로 떨어진 물건은 그의 수려한 얼굴을 충격으로 물들이기에 충분했다.
"빨간색... 병?"
돌바닥 위로 탱! 소리가 나며 빨간색 병이 떨어졌다.
신이 하사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매가리 없이 가볍게 생긴 물건.
단테는 모르겠지만 이건 탑에서 꽤 흔한 물건이었다.
참고로 병이 아니라 캔이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아아, 이건 포션이라는 건데.]
포션은 아주 귀한 것 아닌가.
정밀하게 세공한 유리병에 극히 소량으로 담겨 있는 물건인데.
"이런 건 난생처음 보...."
[미안한데 감상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많이 급하군.
목소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과하게 조급해진다 싶은데 여전히 이름조차 안 밝힌 그가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빠르게 말할게요. 대충 까고, 안에 들어 있는 액체를 환자 입에 넣으세요.]
"저, 어떻게 여는 것인지 사용법이."
[손가락을 고리에 걸... 아니다, 칼질 좀 한다면서요? 대충 대가리 날리고 안에 액체만 꺼내다가 먹이세요!]
그렇구나.
우선 시키는 대로 하자.
그 순간, 단테의 허리춤에 매인 칼집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이 뽑혀 나왔다.
그러고는 불과 0.1초.
마치 정밀 가공 기계와도 같은 날카로운 직선으로 삭 캔의 대가리만을 잘라냈다.
'검은색?'
안에 들어 있는 액체는 검은색이었다.
단테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가 아는 포션이라는 것은 대부분 투명하거나 황금색이기 때문.
'아직 의문스럽지만... 더 따질 시간이 없군.'
무엇보다도, 따져 봐야 더 갈굴 것 같고.
질문을 싫어하는 신 같다.
단테는 검은 액체를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조심스레 환자의 입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잠시 뒤.
"...!"
기적이 일어났다.
*
잠시 뒤.
건너편 세상의 신우주가 이마 위로 맺힌 식은땀을 걷어내며 킥킥 웃었다.
"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권능을 행사하였습니다!]
[GP가 소모됩니다!]
[GP 0/100]
마지막 남은 GP 5포인트, 전부 아이템 하나 보내는 데 쏟아부었다.
그 아이템의 정체는 바로.
'검은 포션, 이것만 한 게 없지.'
검은 포션, 속칭 콜라였다.
회복되는 속도는 느리지만, 그 효과는 신뢰할 수 있었다.
부작용이 전혀 없는데, 열량도 꽤 높으니 영양실조 환자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겠지.
기초적인 아이템이지만, 기초적이라는 말은 곧 널리 검증됐다는 말.
신우주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설마 GP를 5포인트나 받아 갈 줄이야.'
신우주는 이마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제물 거래의 설명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물품을 전송할 시에는 GP가 소모되며, 그 용도와 가치에 비례하여 자동으로 소모량이 조정됩니다.]
자동 계산한다고는 하나 설마 5포인트나 받아 갈 줄이야.
가치에 비례한다라.
탑에서는 꽤 널린 필수품인 검은 포션이 아무래도 저쪽 세계에서는 꽤 귀한 취급인가 본데....
'어? 뭐야?'
효과가 왜 이렇게 좋아?
하위세계 관찰 모니터 속, 병자가 콜라를 마시자마자 효과가 남달랐다.
'거의 뭐 죽은 사람 살리는 급인데?'
피부에 피었던 반점들이 순식간에 걷히더니, 영양실조까지 해결했는지 검푸르게 죽어가던 몸에 생기가 돌아왔다.
일개 싸구려 물약이 아니라 무협지의 영약이라도 달여 마신 것처럼.
'뭐야, 이건 평소에 알던 콜라랑 효과가 달라도 너무 다른데?'
머릿속으로 가볍게 현기증이 돌았다.
콜라가 저렇게 약빨이 죽이는 물건이었나?
아닌데, 회복 속도 자체는 느려도 천천히, 확실하게 재생돼서 쓰는 약이었는데.
부가 효과라면 끽해야 자양강장제에 카페인 섭취 정도일까.
'이렇게 단시간에, 수많은 증상이 한 방에 회복된다고?'
그럴 리가.
그랬으면 탑에서 개나 소나 들고 다니는 생필품 취급이었을 리가 없지.
이상하다 싶은 찰나, 허공에 떠올라 있는 창이 눈에 들어왔다.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보낼 무렵 떠올랐던 상태창이었다.
'권능에 영향을 받는다고?'
저게 설마 그건가?
진짜로 콜라 따위가 명약이 됐다고?
'내가 단테의 마음을 돌릴 만큼 확실한 약빨을 기대했으니까, 그만큼 GP를 빨아가서 끝장난 물건이 됐다는 건가?'
각설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으니 이제부터는 결과만 볼 일.
신앙을 약속받지 못한 상태로 사람 먼저 살리고 봤으니, 저쪽에서 배신하더라도 어쩔 수는 없겠다만.
'그냥 협박하는 방향으로 가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상황이 워낙 촉박하다 보니까 그만.
'아, 괜한 짓 한 건가?'
각성한 보람도 없이 날렸네.
아쉬웠다.
뼈저리게 아쉽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였다.
"음?"
이상했다.
시간제한을 넘겨도 훌쩍 넘긴 것 같은데, 왜 아직 아무런 말이 없지?
게다가 또 하나, 저 구석에 메시지창들이 주르륵 떠 있었다.
['기사 단테'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사도급 신도를 등용했습니다.]
[제한 시간이 해제됩니다.]
합류였다.
뭐?
이렇게 갑자기?
내가 실패한 게 아니었다고?
솜털이 쭈뼛 선 참인데, 단테의 목소리가 다이렉트로 신우주의 뇌에 꽂혔다.
-그렇군, 이건, 성수였군요.
성수.
검은 포션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탑에서는 흔히 콜라라고 불리는 그거 말이다.
신성이 깃들었다.
| 4화. 하급 신 (3)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무언가가 평범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소를 주어도 괴물 소다.
빵을 주었더니 무한 복사 빵이 되었다.
살점을 내어 주었더니 대지가 되고, 피를 뿌렸더니 바다가 되었다.
-성수였군요.
일개 포션이 성수가 되는 정도야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현상.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성수로 받아들이는 건 그렇다 치고.'
단테의 반응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
신우주가 눈망울이 튀어나오도록 눈을 크게 떴다.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골목 끝에서부터 빈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으니까!
-기적이다! 기적이야!
-허물이 떨어지고 새살이 돋고 있다! 오오! 이런 일이 가능했단 말인가!!
-저 검은색 물, 저걸 마셨더니 저리되었네!
기적을 목격했다.
죽어가던 사람이 포션 한 방에 새사람이 되었다.
그러니까, 영양실조로 삐쩍 마른 데다가 피부병이 크게 곯아 눈도 못 뜨던 사람이 한순간에 완치되었단 말이었다.
-성수다! 성수!
신우주가 보낸 검은 포션, 콜라 한 방에 말이다.
-아아, 기적이다!
-신의 기적이 이 땅에 이루어졌다!!
저 뒷골목 빈민들이 무어라 찬양하든, 정작 당사자 신우주가 영문을 모르는 와중이었다.
'저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죽어가는 사람 살렸긴 했는데, 울먹이다 못해서 거의 통곡하고 있는데?
저렇게 기뻐할 일인가?
-살았다!
-아아, 드디어 구원이 오는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질어질하네.
어찌 됐든 잘 풀렸으니 그럭저럭 만사 오케이 취급인 것 같긴 한데.
정말 이걸로 끝인 거 맞나?
신우주가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찰나.
-신께서 제게 계시를 내려주셨습니다.
기사 단테가 경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눈앞의 작은 생명을 구하라. 그리 천명하시고, 성수를 주셨습니다.
와, 말 잘하네.
약 좀 팔아봤나 싶은 순간.
쏟아지는 메시지에 신우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빈자 알두르가 당신의 교단으로 개종 의사를 밝힙니다!]
[빈자 라카시아르가 당신의 교단으로 개종 의사를 밝힙니다!]
[약장수 아슬란이 당신의 교단으로 개종 의사를 밝힙니다!]
...…
...
…
아.
이거 다른 교단에서 눈에 불을 켜겠네.
'내가 꼬드긴 게 아니긴 한데.'
과연 저쪽에서도 그렇게 생각할까?
약장수가 고객 앞에서 약을 팔았는데, 그걸 호객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 같냔 말이다.
'이게 타이쿤 게임이라면 경쟁업체에서 견제 오지게 들어올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띠링!
[신도 다수 획득!]
[GP가 보정됩니다.]
[스킬 {권능-차력}을 습득하셨습니다.]
고생한 대가를 주겠다는 듯 곧바로 추가 스킬이 따라 들어왔다.
[신의 것은 신의 것이되, 신도의 것 또한 마땅히 신의 것입니다.
신은 산하 교단 신도들의 힘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하긴, 이 [신위(하급 신)]라는 게 저쪽 세계에 간섭만 하는 스킬이라면 아무런 의미 없지.
뭐가 되었든 이쪽 세계에서도 영향을 줄 수 있어야 본질적으로 내 삶도 개선되는 것 아니겠나.
'대박인데.'
그럼, 단테는 기사니까 나도 기사들이 보유한 스킬을 똑같이 따라 쓸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다음 줄에 시선이 닿았을 때, 신우주는 생각을 정정했다.
[다만, 그에 비례하여 GP를 소모합니다.]
공짜는 없군.
이것까지도 GP를 소모하는 건가.
마법사들 MP 쓰는 감각인가. 신이라고 해서 전혀 전능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하긴, 공짜면 그것도 너무 사기지.'
이미 사기적이다.
신도만 늘리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능력의 레퍼토리가 늘어난다는 거잖아?
탑의 각성자들을 보면 대개 비슷한 계통의 스킬만 습득하기 마련이었다.
탐지 계통 각성자는 탐지 쪽 스킬만 익힌다든가. 힐러는 힐링 계통만 익힌다든가.
그런 와중에 그는 신도들의 수만큼 다양하게 배울 수 있다면.
'탑의 정상, 정상도 꿈은 아니다.'
눈이 번뜩했다.
새롭게 얻은 힘을 어서 시험해 보고 싶다.
근질거리는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는 찰나였다.
"아, 일어나셨군요."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하위세계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정현수였다.
이번 파티의 리더.
그가 멋쩍다는 듯 웃더니 말했다.
"갑자기 2시간 넘게 멍하니 명상만 하고 계시기에, 어디 정신 공격이라도 당한 건가 싶었습니다."
"아."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돌아갔습니다."
아무래도 홀로 던전에서 복귀하지 않고 신우주를 돌봐주고 있었던 모양.
"당신 혼자서?"
"그렇습니다만."
"고마워."
신우주의 대뜸 감사하단 말에 쓸데없이 고지식한 그가 움찔했다.
그러기를 잠시,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입을 열었다.
"빚 하나 진 겁니다."
"기억해 둘게."
"예, 던전에서 복귀하고 나면 같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다 좋은데, 잠깐만."
신우주가 그의 말을 끊고는 허리춤의 쿠크리를 뽑았다.
"...! 당신!"
심상치 않은 기색에 정현수가 경계 태세로 백스탭을 밟았다.
아직 뭔가 있었던 건가.
하지만 신우주가 바라보는 건 바로 옆의 나무 한 그루였다.
그리고 옆으로 떠오른 상태 창.
[스킬 {권능-차력}을 발동합니다.]
[현재 교단에 소속된 신도 목록을 불러옵니다.]
[빈자 라카시아르]
[빈자 그루비]
...
…
이래저래 목록이 길게 늘어져 있다만, 그가 찾는 건 딱 한 명이었다.
[기사 단테.]
찾았다.
우선은 저걸 고르고, 보유한 스킬의 가짓수가.
[이카로스 기사원 기본 검술]
[기사도]
[불굴]
[하늘 긋기]
...
…
좀 많다.
적어도 수십 개.
하지만 옆으로 스킬을 빌려오는 데 필요한 GP 소모량이.
'가장 가벼운 게 50이나 먹는다고?'
단위가 달랐다.
처음 스킬을 습득했을 때 가졌던 GP의 총량이 스킬 두 번 분량밖에 안 된다니.
게다가 가장 비싼 스킬은.
'한 방에 GP 1만 2천? 돌았나?'
[만병의 주인]이라는 것이 그러했는데, 그가 보유한 GP의 총량을 무려 100배나 상회하고도 한참 남았다.
'와, 저건 당장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쓰겠네.'
어디 보자.
다행히도 지금 가진 GP가.
[GP: 105/225]
꽤 많이 늘어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신도들을 획득해서 GP가 보정됐다고 했었지.
그리고 또.
[현재 교단의 규모: 초소형]
[신도 수: 11명]
[30명을 달성 시 소형 교단으로 승격됩니다.]
어딘가 신도 숫자를 늘리면 보상이 있을 것 같은 멘트도.
구조는 알겠다.
신도를 늘리면 늘릴수록 그대로 능력이 강화된다는 건가.
GP도 늘고.
'직관적이네.'
각설하고, 일단 뭐 하나라도 써 볼까.
어차피 정식 기사도 아니고 방랑 기사 신세.
신우주는 기사 단테가 보유한 스킬 중 가장 기초적인 스킬, 가로 베기를 불러왔다.
기사라고는 하지만 뒷골목에서 건진 기사.
하물며 제일 약한 스킬에 불과하니까 그리 대단한 물건도 아닐 테지.
그렇게.
['가로 베기'를 발동합니다.]
[GP 50을 소모합니다.]
신우주가 몸에 차오르는 기운을 손끝 쿠크리에 집중해서 나무 몸통에 쏟아냈을 때.
"어?"
콰가가가가가가가각!
눈앞에서 굴삭기가 바위를 갈아버린 듯한 소음이 터진 뒤.
신우주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 아니, 참사라고 불러 마땅한 것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여기, 뭔가 있었던 거 맞지?'
나무들 수십 그루가 그대로 박살 나 있었다. 아니, 잔해라고 불러 마땅한 형태가 되어 있었다.
이게 스킬 한 방?
최대 네 번밖에 못 쓰는 게 아니라, 네 번이나 쓸 수 있다고?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던 거였다고?
'사기 치나?'
신우주가 당황한 한편.
"...."
정현수 또한 그러했다.
그의 표정은 사신이라도 마주한 듯 사색에 물들어 있었다.
*
며칠 뒤.
서류로 가득 찬 어느 사무실.
실로 귀족스럽다는 말이 적합할 외모를 자랑하는 한 여성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예,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미남자가 곧은 목소리로 답했다.
"신우주는 각성자이며, 원인 모를 이유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
사내의 이름은 바로 정현수.
탑의 저층에서 신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파티 리더이자, 최근 신우주와 함께 [어둠 숲]을 공략한 자.
그가 눈앞의 여성에게 보고하듯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플갱어였습니다. 어둠 숲에서 도플갱어가 나온다는 제보는 들어본 적은 없었습니다만."
"그래서 그 말 하려고 너 정도 되는 남자가 독대까지? 기껏 해 봐야 신인 각성자가 도플갱어보다 중요할 리가...."
"아닙니다!"
정현수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볼륨이 좀 커서 정현수가 소속된 길드, [친절한 이웃]의 리더 한시영이 움찔하고는 말했다.
"...아이씨, 야, 야, 깜짝이야. 여기 길드하우스야. 목소리 낮춰."
"죄송합니다. 그만큼 긴급한 사안이라. 그만큼 신우주가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정말로.
"스킬 한 방에 건물 하나 면적이 파괴됐습니다."
"뭐? 스킬? 그래서 무슨 스킬인데?"
"처음 보는 스킬이었습니다만, 칼을 한번 휘두르자 나무들이 해일에 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수십 그루가 그대로."
정현수가 본 광경이 그러했다.
의문은 스킬 그 자체가 아니다. 신우주가 힘을 감췄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중요한 건 광경이었다.
왜 그런 광경을 보여줬을까.
'입막음?'
가능성 있다.
굳이 사람들이 다 떠난 뒤에야 필요 없는 무력시위를 한다는 말인즉슨.
[시건방진 자식, 너 따위에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언제든 죽일 수 있는 것을 참아주고 있을 뿐이니. 그 입을 잘못 놀린다면, 곧바로 네 길드라는 것까지 몰살시켜 주지.]
입 간수해.
이런 의도가 담긴 게 아니었을까.
백 마디 협박보다 한 번의 칼부림으로 확실하게 보여준 것.
신우주라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심연을 목격한 정현수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빚을 지웠다고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도였겠지.'
이 얼마나 잔학무도한 인간인가.
불과 일격이었지만, 그로서는 감히 그 깊이조차 짐작할 수 없는 수준의 무력이었다.
5등급 모험가, 아니, 6등급.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랭커일지도 모른다.'
랭커가 정체를 숨기고 아래층에서 돌아다닌다면, 그 이유가 대체 뭘까?
"감추고 있습니다."
정현수가 마치 옆 나라의 핵병기 실험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장관이라도 된 듯 외쳤다.
"그 정도의 지식, 그 정도의 실행력. 무명 모험가가 이 수준이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분명 뒤에서 어떤 사정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조사해야 합니다. 포섭하거나."
"음."
꽤 가열찼다.
역시 이쪽으로 이야기를 꺼내는가.
한시영이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카락 끝을 배배 꼬았다.
'으음, 알려주면 나도 피 보는데.'
정현수의 추측은 옳았다.
신우주라는 사람이 왜 여태껏 무명인가. 왜 지금까지 하위권에서 활동하고 있는가.
전부 그의 뒤를 삼엄하게 정보 통제하고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그 잘난 랭커들께서 말이지.'
랭커들이 말이다.
탑의 최상위권 포식자들, 랭커들이 신우주의 정보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윗선.
한시영이 아는 것도 여기까지가 한계다.
그 잘난 작자들이 왜 한낱 비각성자 따위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신우주가 탑의 극초창기 멤버이며, 현 랭커들과 꽤 깊은 무언가가 있다 정도일까.
'후우, 복잡하네.'
한시영 또한 나름대로 중견 길드의 리더이다 보니 어렴풋이 들었을 뿐, 그녀 또한 움직일 힘이 있는 건 아니었다.
정현수를 물끄러미 바라본 그녀가 머리카락을 꼬았다.
'너무 올곧은 사람은 이래서 다루기가 어렵다니까.'
덮자고 하면 덮어줄까.
덮으려고 하면 모른 체해 줄까.
아마 아니겠지.
그럴수록 더 의혹을 느끼고, 뒤에서 단독으로 행동하면서 신우주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더 캐내려고 하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이건 어떨까.
눈이 번뜩인 순간 한시영이 입을 열었다.
"현수가 우리 길드에 들어온 지도 몇 년째지?"
"...이제 4년이 됐습니다만."
"음, 충분히 오래됐네."
영 쌩뚱맞은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정현수를 향해 한시영이 싱글벙글 웃더니 말했다.
"슬슬 중층 이상에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
그 말에 정현수가 눈을 크게 뜬 찰나, 한시영이 말을 이었다.
"현수 정도 되는 인재가 아래층에서 썩는 건 인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알고 싶은 건 신우주...."
"그래, 그게 궁금하겠지."
한시영이 다시금 웃더니 말했다.
"더 위에서 활동하다 보면, 접할 수 있는 정보도 많아지겠지. 그렇지?"
"...."
"요즘은 위층도 인력난이야. 어딜 가나 어중이떠중이는 많지만, 진짜는 극소수지. 나는 우리 현수가 그 진짜라고 생각하는데, 어때?"
그녀의 칭찬을 가장한 회유 속에서 정현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여기까지가 한계다.
더 내줄 생각은 없다.
알고 싶으면, 스스로 알아내라.
정현수는 아무 말 없이 대치하기를 잠시,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쯤 마침내 그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응, 잘 생각했어."
한시영이 피식 웃었다.
고지식하지만 눈치는 있어서 좋네.
"현수, 그럼 가 봐. 올라가서 할 일은 생각해 보고 따로 전달할게."
"예."
"다음에 올 때는 선물 하나 들고 오고. 가능하면 와인...."
"술은 끊으십시오."
"네, 네. 건강 챙겨주는 부하가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정현수가 길드 하우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복도를 뚜벅뚜벅 걷기를 잠시, 아무도 없는 곳에 다다라서야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길드마스터 한시영조차도 쉬이 말할 수 없는 건가.
무려 랭커씩이나 되는 사람이 말이다.
한시영은 랭커들을 경계했지만, 막상 랭커인 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
저층에서 활동하고 있을 뿐, [히치하이커]라는 칭호로 탑 전체에 명성이 자자한 일류 모험가가 그녀니까.
그런 그녀의 태도를 되새기며 정현수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신우주, 곧 파헤쳐주지.'
*
같은 시각.
"우왓."
신우주가 어느 카드 한 장을 손에 쥔 채로 희희낙락 웃음을 터뜨렸다.
"때깔도 좋네. 캬."
유리로 세공된 주민등록증 같은 것이었다.
흔히, 모험가 등록증이라고 부르는 물건이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의 정체였다.
각성자만 발급받을 수 있는 탓에 그동안 손도 못 댔지.
모험가 협회에서 그 가치를 보증하며, 마탑의 협력으로 위조도 불가능하다.
태양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 자태에 신우주가 부르르 떨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군침만 흘렸나.'
남들 다 가지고 있는 등록증 하나 없다고 어딜 가나 더럽게 무시당했지.
고층에 올라가질 못하는 건 물론, 장비나 정보 하나 구하는 데도 더럽게 애먹었다.
전부 비각성자였던 탓이었다.
왜냐고?
비각성자한테는 등록증을 안 내주니까!
수십 년 전, 모험가들의 안전망을 깔겠다며 생긴 조례 탓이었다.
'그 자식, 조만간 얼굴 한번 보자.'
신우주가 부르르 떨었다.
하필 저 조례라는 걸 만든 게 그의 옛 지인이기도 한 탓.
대체 무슨 원한이 있기에 저런 짓을 저질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대고 삿대질 한 방 갈겨주고야 마리라.
하여, 지금의 그가 하려는 일은 실로 단순 명쾌했다.
"공기가 달다, 달아."
마켓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자, 데뷔 기념이다."
맡겨둔 물건 받으러 가 보실까?
| 5화. 테라 상단 (1)
신우주가 포탈을 뚫고 들어간 순간.
"여기지."
청정하게 뚫린 하늘 아래, 거대하다 못해 광활한 광장이 펼쳐졌다.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모험가와 흥정하는 상인들의 목소리로 가득한 광장이.
"500골드, 이 이상은 안 돼."
"눈이 삐었나? 최소 C등급 장비잖아! 더 쳐줘!"
"400골드."
"죽고 싶나?"
"300골드."
"퉷!"
아름다운 우리네 삶.
신우주가 이 순간을 만끽하겠다는 듯 호흡을 폣속 깊이 들이마쉬었다.
"음, 공기도 맑고."
흔히 마켓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모험가들을 위한 장비들을 대거 취급하는 장소.
물론, 마탑의 대규모 공간 왜곡 마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공간이다.
쿠르르르.
온 사방에서 수레 굴리는 소리와 함께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울 고급 장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녔다.
북적거리는 인파는 덤.
'여기 들어오려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냐.'
바깥에도 시장이 있긴 하지만, 여긴 차원이 달랐다.
여긴 본격적인 모험가 자격증을 보유한 이들만 입장 가능하니까!
암시장과는 달리, 탑 내 모험가 협회에서 보증하는 마켓이라 안전하기까지.
신우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50년간 축적한 앵벌이 자본으로 융단폭격을 해주마.'
그간 얼마나 서러웠던가.
알면서도 그깟 자격증 하나 없어서 군침만 흘리는 기분이 어땠나.
하지만 자잘한 쇼핑 따위는 나중에 해도 된다.
신우주는 케이크에서 굳이 고르라면 딸기를 먼저 먹는 타입.
이번에 최우선으로 방문할 곳은 이미 정해두었다.
"어디 보자."
마켓의 구석을 향해 걷기를 한참, 그의 발걸음은 어느 낡아빠진 시계탑 앞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여기쯤이었지?"
벽을 더듬기를 불과 몇 초 뒤, 몇 마디를 중얼거린 그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한편, 누군가는 그 광경을 보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서 처음 본 놈 맞지?"
"잘 찾아왔네."
막 각성한 초심자는 좋은 먹잇감이다.
*
탑 내라고 해서 무력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어딜 가든 자본이 빠질 수 없는 법.
오죽하면 전쟁마저 자본의 순환과정 중 하나라고 말하는 학자마저 존재하지 않나.
탑.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상단에는 여럿이 존재하나,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꼽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곳, 테라 상단이 그러했다.
탑에서도 귀한 인물들만 대접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
대다수 모험가들은 물론, 30층 이상에서 활동하는 중층 모험가의 상당수도 이곳의 이용 권한은커녕 존재 자체도 모르는데.
'...누구지?'
지금, 이곳에 여태껏 듣도 보도 못했던 외부인이 발을 들였다.
외관만 보면 퍽 초라하다. 변변찮은 아티팩트 하나도 못 갖췄다.
하지만 그는 이곳이 무척 익숙한 모양새였다.
"오래간만이네."
신우주가 그러했다.
마치 자기 집 앞마당을 방문했다는 듯한 그를 향해 이곳의 지점장, 니콜라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실례지만 귀객께서는 누구십니까?"
"응, 여기 투자자."
투자자?
그 짧은 단어에 니콜라스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테라 상단의 투자자 중에서 이 정도로 볼품없는 사람이 있었던가?'
최상위권 랭커.
지도자급 아인종.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뒷세계의 거물.
누구 하나 저명한 사람들만 가득한데, 이 사람은 대체.
고급 상단의 지점장답게 랭커라면 모조리 꿰고 있는 니콜라스이기에 한층 더 경계심이 솟았다.
'혹시 용족인가?'
탑 내의 아인종 중에서도 최상위 강자로 꼽히는 일족, 용족이라면 또 모른다.
저 남자의 초라한 외관이 전부 장치에 불과할지도.
조금 더 지켜보려는 찰나였다.
"각설하고, 바쁘니까 본론만."
신우주가 방긋 웃더니 말했다.
"너희 상단 주인장한테 맡겨놓은 물건 하나 받으러 왔는데."
"...예?"
니콜라스가 눈을 깜빡였다.
대표한테 맡긴 게 있단다.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말에 니콜라스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실례된 말입니다만 오해를 정정해 드리는 게 옳을 것 같아 말씀드리자면, 저희 상단에는 주인이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상식이다.
테라 상단의 정회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
테라는 한 명의 대표가 단독으로 운영하는 상단이 아니다.
각자 동등한 권한을 가진 일곱 명의 장로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구조.
그렇기에 테라 상단에 주인장이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저희 테라 상단은 상호 협력과 신뢰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조직입니다. 혹여 착오가 있는 듯하여 알려드립니다."
니콜라스가 귀티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말했다.
누가 듣더라도 정중하기 짝이 없는 말투.
여성향 로맨스판타지에 나올 법한 공작가의 일류 집사가 딱 저럴까.
하지만 그 내면에서 돌아다니는 생각은 조금 달랐다.
'쓰레기가 또 기어 들어왔군.'
평가를 마쳤다.
신우주는 니콜라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손님이 아니었다.
'누군가 했더니, 운 좋게 테라 상단의 이야기를 얻어듣고 찾아온 어중이떠중이였나.'
설마 그가 이름도 모르는 귀빈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한시름 놓았다.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도 모른다면 뻔하지.
정체를 딱히 숨긴 게 아니라, 밝힐 정체조차 없는 놈이겠지!
'사람 긴장하게 만들기는.'
그래도 손님은 손님이다.
적당히 구슬리다가 돌려보내 볼까.
니콜라스가 테라 상단의 지점장답게 본격적인 영업 태세에 들어간 찰나였다.
"아니, 주인장이 있을걸."
신우주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마누엘 이슬라스. 몰라?"
"...마누엘?"
니콜라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누엘 이슬라스라니.
여태 수많은 귀빈을 접하며 정보희 핵심에서 일해온 그로서도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입니다만."
"진짜?"
의외인 건 그 말에 대한 신우주의 반응이었다.
"나 때는 꽤 유명했는데, 요즘 애들은 모르나?"
"요즘 애들?"
또 영문 모를 말이었다.
자기가 뭐라고 니콜라스의 앞에서 무슨 몇 기수 위 선배처럼 말하는가.
테라 상단의 지점장쯤 되면 랭커들조차 눈독을 들일 인재다.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 배려해 주는 나 적당히 스윗해요."
신우주는 아예 농담 따먹기를 시작한 모양새.
하여, 니콜라스가 보일 반응은 하나였다.
"재미없는 말장난이군요."
되는대로 내뱉기 바쁜 불청객을 이 격 높은 장소에서 추방하는 것.
파지직!
니콜라스의 허리 뒤로 숨긴 한쪽 손에서 푸른 번개 줄기가 튀어 올랐다.
A급 아티팩트, 쿨롱의 창이 이것이었다.
가끔 무례를 일삼는 고객들을 제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
손가락질 한 번, 딱 한 번이면 이 번개 줄기가 그대로 신의 창이 되어 신우주의 목을 꿰뚫을 것.
상단의 명예를 우롱하는 진상들에게는 무력이 필요하다.
물론, 죽이지는 않고 쓴맛만 보여주는 정도로 끝내겠지만.
파지직!
니콜라스가 비릿한 웃음을 그 잘난 입가에 머금은 찰나였다.
끼이이이익―――
허공 어딘가에서 쇠사슬로 바닥을 긁듯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큭!"
니콜라스가 움찔한 찰나 이번에는 마음을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희 직원이 실례했군요.]
그와 동시에, 빈 허공을 찢고 한 노신사가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바라본 니콜라스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테라 상단의 다섯 겹 보안 마법을 뚫고 마치 자기 마당 앞처럼 자연스럽게 드나들다니.
이것만 해도 마법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경악하기에 부족함 없는 일이거늘, 니콜라스가 식겁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삼 장로?'
상단을 대표하는 일곱 명의 거인, 칠장로 중 한 명.
랭커.
그중에서도 상당한 강자.
일개 지점장의 신분으로는 말조차도 붙일 수 없는 괴물의 등장에 니콜라스의 눈빛이 경악으로 사로잡힌 찰나, 노신사가 입을 열었다.
"저희 직원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무례랄 것까지야."
신우주가 유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요즘 애들이잖아. 애들이 뭘 알아.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관대하게 넘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괜찮다니까."
니콜라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마치 영업사원이 거래처의 사장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모양새이지 않나.
하물며, 테라 상단의 지점장인 니콜라스를 당연하다는 듯 애 취급하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표정이 거듭 경악에 사로잡혔다.
'삼 장로가 접대하고 있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테라 상단의 장로급이 되면, 같은 랭커가 아닌 이상 손님으로 받아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일개 무명인에게 저렇게까지 공손한 거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약 34년 전입니다."
"우왓, 시간 한번 빠르네. 마누엘은?"
"잠시 은거에 드셨습니다."
"어쩐지, 얼굴 마주치기 좀 껄끄러웠는데. 얼른 볼일 보고 가야겠다."
아니다.
저건 영업 직원과 대표라기보다는 어르신과 어린아이.
마누엘 이슬라스가 정말로 테라 상단의 주인이라는 사람이라 치고, 그런 사람을 34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면.
'설마, 용족?'
니콜라스가 다시금 예의 그 망상을 시작한 찰나였다.
"지금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삼 장로의 말과 함께 신우주를 그의 아공간으로 모시고 갔다.
부웅-
어느새 홀로 남은 니콜라스는 소음 하나 없는 접대실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나, 해고당하는 건가?'
해고면 다행이지.
테라 상단의 정보 통제력이면....
니콜라스의 복잡한 망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
온 사방이 보이는 투명한 엘리베이터.
연결된 케이블이라고는 보이지 않거늘 목적지를 향해 주저 없이 내달렸다.
그렇게 아래로 1분.
흡사 지층을 뚫고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없이 내려가는 와중, 삼 장로가 입을 열었다.
"미스터 신,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누구 덕분에."
신우주가 킥킥 웃었다.
"근데 나 아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대. 테라 상단 지점장 정도 되면 좀 알아도 되는 거 아니야?"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사정, 설명해 봐."
"죄송하지만 당장은 어렵습니다."
신우주가 그러려니 하면서도 슬쩍 아쉬움을 남겼다.
'역시.'
그의 정보가 어딘가에서 통제당하고 있다는 정도는 느꼈다.
아예 하급 모험가들은 그를 아는데, 역으로 좀 짬이 찬 중견 모험가들이 하나같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 개자식이 뒤에서 건드린 건가.'
탑에서 지낸 기간이 오래된 탓일까.
신우주에게는 은원관계가 좀 있었다.
그중에는 신우주가 탑을 오르지 않길 바라는 사람도 있었고.
"이 빌어먹을 카드, 이것만 아니었어도 진즉 만나러 왔을 텐데."
신우주가 툴툴거리며 모험가 등록증을 꺼내들었다.
마켓에 못 들어왔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고.
"테라 상단 또한 모험가 협회의 구성원인 이상, 규정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이해는 해, 이해는. 괘씸해서 그렇지."
떠드는 사이 한참을 달리던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투명한 벽 너머로 보인 바깥은 심해를 연상시키듯 한없이 어두운 공간이었다.
위잉.
문이 열림과 함께 바깥으로 발을 내디딘 신우주가 찌뿌둥하다는 듯 기지개를 켰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규칙은 규칙이지. 계약서를 준수하는 게 상단의 명예고. 아까 그 잘생긴 놈 이름이."
"니콜라스입니다."
"그래, 니꼴 뭐시기가 그랬잖아. 테라 상단은 신뢰를 기반으로 돌아간다고. 그러니까 내 계약서의 신뢰도 지켜 주길 바라."
그렇게 말하는 신우주는 언제 불쾌했다는 듯, 얼굴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계약서를 쓸 날이 다 오네.'
각성자들만 접근 가능한 곳.
마켓.
그 마켓의 이용객 중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상단.
테라 상단.
그 테라 상단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장소.
금고.
그곳에서도 더 깊은 곳.
신우주가 지금부터 발을 들이려는 금고는.
다름 아닌.
"마누엘 이슬라스의 비밀 금고가 여기라는 거지?"
테라 상단 주인의 금고였다.
"파밍, 파밍, 파밍."
신우주가 경쾌하게 콧노래를 부르기를 잠시,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여기 있는 물건 중 하나는 무조건 내 거."
현 테라 상단의 주인, 마누엘 이슬라스가 아직 뉴비였던 시절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작성한 계약서.
자그마치 40년을 묵혀 온 도토리를 회수할 순간이 왔다.
| 6화. 테라 상단 (2)
탑 내부의 정보 교환 및 모험가들의 교류를 중계하는 커뮤니티.
인트라.
실시간으로 탑의 이야기를 나누며 갖가지 고급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곳.
현 최상위 랭커 '실크로드'의 주도하에 개통된 이래, 탑의 주민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Tier_maker - 랭커 티어 표 정해봤다.
...은 명목일 뿐, 할 일 없는 자들끼리 아가리 파이팅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용도의 90%를 점하는 커뮤니티.
Flexin - 저 새끼 저거 또 왔네.
Sword_master - 인트라는 차단 기능 없냐? 왜 없냐? 좀 추가해라. 완장은 관리 손 놓았냐?
kuromi - 쯧,,,,,, PC 게임 대신 콘솔 게임하는 사람들 멍청한 거 아님? 쯧,,,,,,
Yehyeh - 솔직히 랭커들도 시기를 잘 만난 물로켓 아님?(진짜 모름)
고급진 사교의 장보다는 싸구려 뒷골목 펍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트라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탑에서는 마땅히 즐길 취미랄 게 별로 없으니 이런 곳에 매달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 가입만 해 뒀다면, 스마트폰처럼 이동하면서도 간단하게 사용 가능하다는 점도 포인트겠고.
kuromi - 쯧,,, 쯧,,, 랭커 없었으면 아직도 저층에서 빌빌거렸을 버러지들이,,, 쯧,,,
Yehyeh - 그래서 님 스킬 랭크가?(진짜 궁금함)
이렇게 시간 죽이기에 특화된 인트라에서도 주기적으로 타오르는 떡밥이 있다면.
Tier_maker - 장비 티어 표 의견 받는다(작업 중)
Tier_maker - 스킬 티어 표 의견 받는다(작업 중)
장비와 스킬.
어느 게 좋고 나쁜 지겠지.
그중에서도 장비.
왜, 스킬은 안 돼도, 장비는 노력해 보면 어떻게 한두 점쯤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중에서도 핫한 카테고리라면.
Catchball - 바스커빌 공방 무기들은 일다 1티어에 넣어야 함. 최소 2티어.
바스커빌.
탑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무기들이 그러했다.
Flexin - 바스커빌은 인정, 이름값만으로도 반은 깔고 들어가지.
Sword_master - 범용으로 구할 수 있는 장비 중에서는 1티어.
Yehyeh - 바스커빌 좋음(진짜 좋음)
탑을 오르는 모험가라면 누구나 바스커빌 무기 한 점쯤은 버킷리스트에 소중히 간직하는 법.
하지만 꿈에도 모를 거다.
그 고귀한 바스커빌 공방 무기의 태반이.
'이게 다 얼마야?'
여기, 테라 상단의 금고 속에 고이 잠들어 있었으리라고는.
"휘유, 아주 탑 전체에서 싹싹 긁어모았네. 돈 많다야."
상단주 마누엘 이슬라스의 금고는 뭐라고 해야 할까.
금고라기보다는, 거대한 실내 운동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규모.
하물며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어려울 정도로 많은 보물이 천장 끝에 닿도록 쌓여 있었으니.
하물며 각각의 질도 최상급.
이 사치스러운 창고는 마누엘 이슬라스의 아공간 창고와 실시간으로 연동되어 있다.
"상태 좋다? 다 새것 같네."
"보관한 물건을 관리하는 것까지가 테라 상단의 서비스입니다."
삼 장로가 앞장섰다.
'테라 상단, 부자가 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수준일 줄은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며 세상이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상단주 마누엘 이슬라스도, 그도.
최전선에서 칼날을 휘두르며 시선을 독차지하던 그는 퇴물이 되었고, 겁먹어 숨어 있기 바쁘던 마누엘은 탑에서 손에 꼽는 거물이 되었으니.
아,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네 물건, 내가 들고 갈 수 있는 거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줘. 그게 널 살려서 보내주는 조건이다.]
계약을 써먹을 날이 당도했으니.
"한 점입니다."
TTS로 출력한 듯 감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읽히지 않는 목소리.
삼 장로가 한없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계약상, 당신이 가져갈 수 있는 주인님의 소장품은 단 한 점으로 제한됩니다."
"알아."
그렇지.
'딱 하나, 그거면 충분해.'
어차피 많이 챙길 생각은 없었지.
제 몸 하나 감당 못 할 뉴비가 지나치게 많은 재화를 가지고 있어 봐야 황금 고블린밖에 더 되겠나.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챙긴다.
되도록 남들이 봐도 귀한 줄 모를 물건으로. 수수하고 작고 휴대하기 좋은 거로.
애초에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정해뒀다.
'마누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거.'
바스커빌제 장비가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것 없이 훌륭한 건 사실이나, 개중에서도 격의 차이는 존재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손에 꼽는 게 있다면.
'어딨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창고 자체에 뭐가 많은 것도 있지만, 아무리 걷고 뒤적인들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분명 마누엘 이슬라스가 입에 침이 닳도록 자랑했던 물건이 있는데.
그게 안 보인다.
수수한 형태로 바꿔서 숨겨둔 건가?
"장로, 이건 뭐지?"
신우주가 창고 안에서도 최대한 수수한 물건을 짚었다.
이 화려한 금고와는 어울리지 않게 나뭇가지를 중간에서 톡 잘라둔 듯한 형태의 물건이었다.
"세계수의 가지, 바스커빌제 무기 중에서도 7번째 자식입니다."
"그리고?"
"봉류 무기 중에서는 최고로 꼽는 물건입니다. 사용자에게 무한한 체력과 회복력을 제공하지요. 무기 그 자체의 성능은 부족하지만, 장기전이 이어질수록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삼 장로의 설명은 문장 그 자체를 읊는 것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인 바스커빌은 그의 몽크 친구가 다치는 걸 싫어했고, 해서 직접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그런 게 어쩌다가 여기에?"
"어느 실력 있는 검객이 몽크의 팔 자체를 잘라냈습니다."
아주 귀한 물건이다.
바스커빌제라는 것만 해도 특별한데, 그중에서도 특급이다.
탑 바깥으로 꺼낸다면 소규모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겠지.
하지만 내가 찾는 물건은 아니다.
고개를 저은 신우주가 또 다른 사소한 물건을 가리켰다.
"그럼 이건?"
새하얀 장갑이었다.
세탁에 편집증을 가진 사람이 세탁한 듯 이질적으로 새하얗다는 것 외엔 그 어떠한 특징도 찾을 수 없는 물건.
하지만 그 정체는.
"마우스, 무엇이든 집고 들어올릴 수 있는 장갑으로서, 바스커빌의 48번째 자식입니다."
앞선 것과 비교해서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명기였다.
"일단 손에 쥘 수 있는 크기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들고 옮길 수 있지요."
귀하다. 한없이 귀하다. 전재산과도 교환하자는 랭커들이 줄을 서리라.
하지만 그가 찾는 물건은 아니었다.
"다음, 이건?"
둔탁한 방패였다.
"평범한 방패입니다. 바스커빌제는 아니지만, 실력 있는 장인이 잘 만들었습니다."
"그래? 이건?"
다음은 검은색 빨대였다.
"뱀파이어의 주둥이입니다. 상대의 정기 그 자체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더럽네, 이건?"
이번에는 투구였다.
"광인의 머릿가죽입니다."
"효과는?"
"온갖 정신 공격에서 면역이 됩니다. 다만, 광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게 도움이 되나?
한 걸음 떨어진 삼 장로의 설명이 큐레이터처럼 이어진다.
그렇게 세 시간은 돌았을까.
확인한 물건만 무려 102개.
무엇 하나 마누엘 이슬라스의 컬렉션이니만큼 다 귀한 물건이다만, 정말 안타깝게도.
"빛의 한 조각, 단 한 번이라면 어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생존을 보장하는 방패입니다."
신우주가 정말로 간절하게 찾는 물건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여기에는 그런 게 없으니 단념하라고 조롱하는 것처럼.
'어디에 숨겨 둔 거지?'
분명 봤다.
마누엘 이슬라스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던 무기. 하지만 사용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던 그 무기.
'은거했다면서. 그때 같이 들고 갔나?'
가져간다면 그걸 받고 싶은데.
금고 안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질문 좀 하지, 내가 찾는 무기를 찾아줄 수 있나? 내가 구체적인 특징을 알고 있다면?"
"불가능하겠군요. 제가 받은 지시는 손님을 정중히 응대하라는 지시뿐이었기에."
삼 장로가 여전히 석조 조각상처럼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안내까지가 제 서비스입니다."
속에 구렁이가 내려앉은 녀석.
딱 봐도 제 주인에게 명령받았겠지. 어중간한 물건 하나 집어가게끔 유도하라고.
애초에 내 편도 아니다.
친절하다고 해서, 그 친절이 의무 사항은 아니라는 거겠지.
"한 번 더 둘러봐도 되지?"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시간은 충분하니."
그래, 느긋하게 가자.
마음을 먹은 것도 잠시, 어느덧 두 바퀴를 더 돌았다.
그럴수록 의문만 짙어졌다.
'뭐 하는 짓이지?'
어디에 숨겨둔 거야.
과시를 즐기는 마누엘 이슬라스의 성격이라면 대놓고 보이는 곳에 전시해 놨을 것 같은데.
그 녀석은 자기 물건 자랑하기 좋아했으니까.
하물며 자기만의 비밀 금고 속에 감춰둔 물건이다. 남 눈치도 안 보고, 가장 화려하게 놔두었을 터.
그의 심미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든 의문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함정이었다면?'
마누엘 이슬라스는 치밀한 녀석이다.
계약 내용에 따라, 녀석은 내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 하물며 물건을 숨길 수도 없다.
평생 고민했겠지.
언젠가 계약을 청산해야 할 날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어떻게 해야 덜 귀중한 물건으로 땜빵할 수 있을지.
계약의 구체적인 조건은 한 줄이었다.
[네 물건, 내가 들고 갈 수 있는 거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 줘. 그게 네 목숨의 대가다.]
들고 갈 수 있는 물건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가 들고 갈 수 없는 형태로 가공해 두었다면?
예를 들어, 너무나도 거대한 것 말이다.
육중한 무기 따위가 아니다. 자유의 여신상이라든지. 피라미드라든지.
'대충 알겠네.'
어쩌면, 그가 찾고 있는 바스커빌 제 장비는 처음부터 눈에 보였을지도 모른다.
뚜둑.
목을 꺾기를 잠시, 주위를 둘러본 신우주가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던 목검을 주워들었다.
"써 봐도 되지?"
"상품 가치에 훼손만 가지 않는다면, 상관없습니다."
"설명해 줘."
"고정좌표. 목검입니다. 단순히 그뿐이지만, 그 내구성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요. 검이 손상되는 데 불만을 느꼈던 대장장이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모든 충격을 주위로 흘려내 어떤 상황에서도 부러지지 않을뿐더러, 추가적인 정비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삼 장로가 덧붙였다.
"바스커빌 공방의 장비군요. 17번째 자식입니다."
훌륭하군.
종결 장비로 챙겨가도 될 정도로.
하지만 신우주가 찾는 건 여전히 이 목검 따위가 아니다.
[GP: 225/225]
GP는 어느새 완벽하게 회복됐다.
대충 전부 소진하더라도 몇 시간 정도면 차오르는 모양.
'내가 가진 스킬 중에서 제일 좋은 게 뭐가 있지?'
보유한 신도는 어차피 한 명뿐이다.
[기사 단테]
그가 익힌 수십 개의 스킬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을 단 하나만 고르라면 뭐가 있을까.
오래 지나지 않아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깊게 찌르기]
깊게 찌르기.
이름은 단순하지만, 소모하는 GP는 무려 200으로, 이전 숲에서 시험 삼아 사용했던 그것의 무려 4배에 달했다.
가진 GP를 모조리 활용해야 할 정도.
시선을 집중하자 곧 설명이 떠올랐다.
[이카로스 기사원에서 가르치는 기본기 중 하나. 전신의 근육을 수축시킨 뒤, 한 점에 모든 걸 쏘아낸다.
절대적인 파괴력의 총량은 크지 않다. 하지만 면적을 극단적으로 응축시켜 어느 단단한 방패라도 확실하게 뚫어낼 수 있는 일격을 완성했다.]
바라던 게 맞군.
자세를 취하자, 곧 GP가 소진되는 감각과 함께 몸 전체에 옹혼한 미증유의 기운이 감돌았다.
한평생 검만 수련한 달인, 타고난 무골의 재능이 몸에 깃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 감각이, 그 기억이 신우주의 뼈와 근육에 덧씌워졌다.
스으―.
호흡부터 달라진 변화에 삼 장로의 표정에 작은 울림이 찾아왔다.
'사람이 바뀌었군.'
저건 대체?
그가 파악한 신우주는 미약한 자였다.
대단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 경력이 무색하게 지닌 실력은 탑의 수많은 모험가 중에서도 삼류, 잘해야 이류.
상단주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곳 금고에 발을 들이기는커녕 테라 상단의 고객조차 못 됐을 수준.
그랬던 자가.
'강해졌다.'
지금의 그는 탑의 포식자, 랭커와도 비견될 수준의 기운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방심했다가는 그조차도 일 섬에 양단해 버리겠다는 것처럼.
검에 평생을 바쳐 온 달인과도 같이 섬뜩한 예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지금까지 숨겨왔던 건가? 실력을?'
눈에 보이지 않는 놀라움을 삼킨 찰나.
"흡."
호흡을 삼킨 신우주의 신형이 총알처럼 뻗어 나갔다.
다리가 바닥을 박찬다.
몸이 스포츠카의 잔상처럼 흐려진다.
목검을 든 손이 수학적인 의미에 한없이 근접한 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낭비 일체를 배제하고 오직 찌른다는 본연의 동작에 육신의 기능 일체를 쏟아부은 일격.
그 검 끝이 금고의 벽을 향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 거대한 금고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하지만 건재하다.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저, 울렁거렸다. 어지간한 백화점 한 층보다도 거대할 이 장소가 붕괴할 듯 울렁였다.
홀로그램이 흐려지는 것처럼. 잔 속에 채워둔 와인이 출렁거리는 것처럼.
그 끝에는.
"찾았다."
흘러내렸다.
벽이, 마그마에 닿은 쇠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녹아내린 벽은 마치 탑에 들어오기 전 한창 즐겨 했던 게임 그래픽의 물리엔진 버그를 본 듯했다.
명백히 이질감이 느껴질 광경.
세상이 망가졌다면 이럴까. 누구든 이질감을 느끼고 달아나리라.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신우주가 찾았던 것이니.
"여기 있었네."
신우주가 괴리감이 들게 녹아내린 벽을 씨익 웃으며 바라봤다.
그곳에는 또 하나의 벽이 드러나 있었다.
화려하게 치장된 금고가 아닌, 컨테이너 혹은 폐공장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벽.
금고는 2중 구조였다.
진짜 금고 안으로 내벽이 한 겹 더. 그 안을 단단하게 받쳐 주던 내벽이야말로 신우주가 바라 마지않았던 보물이었으니.
뚜벅.
뒤를 돌아본 신우주가 삼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금고 벽, 나 줘."
| 7화. 테라 상단 (3)
"이 금고 벽, 나 줘."
신우주가 벽을 짚으며 말했다.
"내벽으로 두르고 있던 이거."
"...."
벽 그 자체를 계약의 보상으로 달라는 그 말에, 삼 장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찾아내고야 만 건가.'
끝까지 숨기려 했거늘.
마누엘 이슬라스가 가진 산더미 같은 보물을 잡동사니로 만드는 진짜 보물.
이걸 가져가려는 것인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계약에 따른 정당한 요구겠지만, 이를 용인해도 될지 주저됐기에.
훗날 상단주, 마누엘 이슬라스가 깨닫거든 길길이 날뛸 광경이 보지 않아도 눈에 들어올 듯 훤해서.
'테라 상단이 뒤집어지겠군.'
어쩌면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장로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른다.
자못 거래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 게 상인의 실력.
같은 계약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을 내주었다는 건, 상인으로서 쌓아온 모든 명성을 잃는 것과도 같으니.
하지만.
"좋습니다."
상인에게 명성보다 무거운 게 한 가지 있다면, 그건 신용이다.
신용을 잃은 상인은 사기꾼에 불과하다.
[이 탑에는 신용이 없다. 그래서 세워 볼 예정이다. 내 이름을 기둥 삼아서.]
상단주 마누엘이 늘상 입에 올렸던 가르침대로, 삼 장로의 입술이 움직였다.
"이름은 없습니다. 형태와 부피, 재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소유자가 바라는 형태와 기능에 맞춰 자유로이 변화하며,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소유자가 그에 상응하는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만 있다면."
"그리고?"
추가 설명을 요구하는 신우주의 표정에 삼 장로가 숙련된 집사의 매너처럼 상반신을 살짝 기울였다.
"바스커빌 공방의 주인, 바스커빌의 100번째 자식입니다. 그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손에 꼽는 한 점. 테라 상단에서도 견줄 물건은 손에 꼽겠지요."
설명이 친절하네.
바스커빌의 역작, 형태와 기능은 물론, 이름마저도 아직 없음.
'내가 찾던 그거네.'
순간 금고 전체가 반짝였다.
이내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고, 한 점에 뭉쳐 곧 하나의 정육면체 은색 쇳덩어리로 변했다.
주사위만 한 크기의 쇳덩어리로.
벽이 흘러내린 금고의 본 모습은 폐공장 창고처럼 무미건조했다.
'이렇게 감춰놨단, 아니, 전시해 뒀단 말이지. 창고 그 자체라는 모습으로.'
그 음흉한 놈답다.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주사위를 손가락으로 주워 든 신우주가 삼 장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사용하지?"
"손을 얹고 상상하면 됩니다. 단,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상이라.
당장 생각이 닿는 물건이라면.
'성검?'
티어메이커의 장비 티어 최상위권에 늘 이름을 올리는 그것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윽!"
아찔하리만치 현기증이 돌 정도로 전신에 피로가 휘몰아치더니, 잠시 출렁거릴 뿐 곧바로 주사위의 형태로 되돌아왔다.
안 된다.
10km를 쉬지 않고 전력으로 질주한 것처럼 체력만 잔뜩 뺏겼다.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게 이런 말이었나.'
아찔했다.
뇌가 얼얼하게 타오르는 게, 하루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과로한 느낌이다.
조금만 더 억지를 부렸더라면 혼절했더라도 이상하지 않겠네.
사용자의 격이 안 받쳐 주면 체력만 빨아간다는 말인가?
'그럼 이 창고 내벽을 통째로 유지한 마누엘 이슬라스는 대체 뭐야?'
얼마나 괴물이 되어 있었던 거지? 이게 최상위 랭커와 지금의 나의 차이인 건가?
그래도 따라잡아야지.
너무 채근하지 말고 천천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그럼 제일 간단한 걸로.'
체력이 가볍게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액체처럼 변화한 주사위가 곧 팔을 감싸더니.
그대로 피부와 일체화되었다.
팔과 손 전체를 감싸는 장갑이 된 것.
'좋네.'
착용감이 좋다.
팔 위에 뭔가 덧씌웠다는 느낌은 들지도 않을 정도로 착 감겼다.
마누엘 이슬라스도 이렇게 장갑 형태로 들고 다녔지.
급할 때는 이대로 팔을 들어서 공격을 막기도 하면서.
실전에서 사용해 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이게 최선이 맞을 것 같다.
흡족한 미소를 떠올린 신우주가 입을 열었다.
"좋네, 이거로."
이거 줘라.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감히 요청하겠습니다만, 생각을 재고하실 생각은 없겠습니까?"
삼 장로가 마지막으로 만류하듯 물었다.
"내가 왜?"
"중요한 물건입니다. 값어치도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의미가 깊은 물건입니다."
상단주, 마누엘 이슬라스에게.
저 말에는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너무 과욕을 부렸다가는, 그가 직접 추격해서 회수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런 나름의 경고이자 배려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지.
상인답게 실책을 만회하려는 발버둥일지도 모르겠지만.
"알아, 그러니까 이거야."
이거밖에 없다.
그야, 누가 협상에서 상대방 사정까지 고려해 주나?
"그렇군요, 확정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 보류할게."
위이잉!
머릿속이 진동하듯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경고, 당신의 신도가 위험합니다.]
스킬 신위(하급 신)가 발작을 시작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마른하늘에 벼락처럼 난데없이.
몰던 차가 접촉 사고가 일어났을 때와 같이 쿵 하는 감각과 함께 경고문이 떠올랐다.
[신도들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주의- 신도를 전부 상실할 경우, 보유한 스킬을 영구히 상실하게 됩니다.]
아니.
진짜 좀.
기껏 아이템 먹어서 기쁜 참인데 이건 또 무슨 개지랄이지.
[서브 스킬 - 전지(全知)가 발동됩니다.]
사태 파악이 먼저다.
급히 하위세계를 들여다보려니, 그곳에는 기상천외한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뭐야?"
그사이 신도들이 모조리 죽거나 도망가 하나만 남게 된 것. 게다가 그의 유일한 신도인 기사 단테가 짐승처럼 사냥당하고 있었다.
중세도시 더러운 골목길에서 수십 명의 잘 무장된 병사들에게 몰린 채.
그 뒤로 몇 명의 병자 무리를 감싼 단테의 기운이 희미했다.
[신도들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상황에 정말 1도 이해가 안 된다 싶은데, 핏물로 점철된 단테의 입이 열렸다.
-내가 모시는 신은, 악신 같은 것이 아니다.
악신?
뭐라는 거야?
나 말하는 건가? 설마?
*
어두운 골목.
지구상의 그 어느 하렘가와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더러운 뒷골목에서, 한 미남자가 흰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지친 호흡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미남자의 뒤로는 추레한 옷을 걸친 자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십이나 우리 속 동물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골목 반대편의 양상은 달랐다.
깔끔한 옷을 입고 무기를 갖춘 이들이 대략 스물.
그런 이들의 앞으로 한 남자가 걸어나오더니 진득한 웃음을 흘렸다.
"버러지들이."
이 더러운 뒷골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사내의 신분이 고귀하다는 걸 증명하듯 갖은 장식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한편, 손에는 대조적으로 메이스를 들었다.
"이름이 단테라고 하였던가?"
남자가 웃음을 그쳤다.
"한심하구나. 스스로 저지른 죄의 경중마저도 모르다니."
이단 심문관, 제프리가 끈적한 웃음 속에서 어금니를 드러냈다.
성스로운 도시 타라.
이 도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신인 타라를 모시는 이단 심문관이 그의 직책이자 사명이었다.
"제프리."
"그 입 닥쳐라! 버러지 같은 이단 따위가 내 이름을 올리지 마라!"
이단, 이 도시에서는 죽음과 동일시되는 단어였다.
갑주를 입은 미남자, 단테가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응했다.
"내게는 죄가 없다."
"개소리! 증언이 있었다. 네가 검은색의 무언가를 뿌려 버림받은 자들을 해방했다는."
그런 이단이지.
한 줄기 빛을 좇던 기사의 앞으로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을 구원한 것이 죄라는 말인가?"
고통받는 자를 구했을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구한다는 것이 꼭 선량한 행위로 해석되진 않는다.
이 성스러운 도시에서는.
"죄인의 죄를 누구 마음대로 사하는 것이지? 죄다. 모르겠나? 치러야 할 죗값이란 게 있단 말이다! 죄를 짊어진 벌레들을 무슨 자격으로 구원한 거지? 이러고서도 이단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개같은 논리다.
병자들이 고통받는 게 이들에게 원죄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건강한 이들이 건강한 건 그들이 선량하기 때문인가.
히틀러의 우생학이 그러할까.
"고통을 부여하는 것이 신인가?"
제프리의 고급스러운 로브와는 달리, 망토 곳곳에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채로 단테가 충혈된 눈으로 제프리를 바라보았다.
"고통받는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진정 신이 해야 할 덕목 아니었던가?"
"오, 이단이여, 오만하도다!"
제프리가 킬킬 웃었다.
"그런 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하물며 내가 판단할 일도 아니지!"
"...."
"신의 뜻을 미천한 피조물들이 어찌 알겠나?"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직감한 단테가 칼집에 손을 얹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목은 주겠다. 그 대신, 저 가여운 자들이라도 놓아줄 수 있겠나?"
생면부지의 자들을 구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산과의 등가 교환.
그게 단테의 뜻이었다.
"저 구더기들을 구하겠단 말인가?"
제프리가 광소를 터뜨렸다.
"지금도 그대를 버리고 달아날 생각만 하는 저 구더기들을 정말로?"
"...."
거짓말이 아니다.
저 병자들은 발 벗고 나선 단테를 돕긴커녕, 달아날 길을 찾아 두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기 바빴으니까.
제프리의 지적에 그들이 흠칫한 사이, 단테가 한없이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피조물로 태어나, 조금이라도 더 살아 숨 쉬고자 하는 본능을 어찌 죄라고 할 수 있겠나."
예정된 결말에 피가 거꾸로 돌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한편, 심장이 뛰는 건 단테 한 명뿐이 아니었으니.
'이런 젠장!'
보이지 않는 창을 통해 이쪽 하위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신우주 또한 마찬가지.
'무슨 말이야? 목숨을 교환하겠다니? 미치광이들을 상대로 무슨 협상을 하고 있어?'
상대는 광신도들이다.
말 그대로 미친놈들.
역사서든 판타지 소설에서든 익히 증명된 일이 있다.
종교에 미친 놈들은 살인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 그 모든 악행을 신이 허락했다고 생각하니까!
단테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멀쩡한 몸이었다고 해도 제 한 몸을 보전하기가 어려울 터.
하물며 뒤로 딸린 짐 덩어리만 어림잡아 서른이 넘었다.
상대는 잘 무장한 병사로만 스물이다!
'이대로면 무조건 죽겠는데?'
달아나는 게 맞다.
철저히 이성에 근거한 판단이다.
우선 달아나, 전열을 가다듬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옆집 아홉 살배기 철수도 동의할 거다!
'고귀한 거랑 고지식한 건 다른데.'
단테는 고지식한 쪽인가.
신우주의 속이 탔다.
혼자서 죽는다면 또 모를까, 단테는 그의 유일한 신도. 잃어버리면 스킬을 잃는다.
"그대의 목숨을 대가로, 저들을 살리겠다는 건가?"
"그렇다."
그렇다는 개뿔이.
저 놀란 표정을 봐라. 왜 그런 손해만 보는 짓을 하냐는 눈빛이잖아.
상당히 공감한다.
"그렇군. 내 그대의 뜻을 존중하지."
"고맙다."
받아들이는 건가.
숭고한 한숨이 나온 찰나였다.
제프리의 눈 흰자에 다시금 쾌락이 번졌다.
"...하나, 그렇다고 두고 볼 수는 없지! 마침내 신께서는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저 기생충들을 청소하는 것! 그것이 신의 뜻이다!"
단테의 생각은 틀렸다.
저 타라 교단은 처음부터 병자들을 이 도시에서 지워버리고자 한다.
신우주가 답답한 마음에 단테에게 바로 회선을 연결하고는 외쳤다.
-일단은 도망쳐요!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잖아!
사는 게 먼저다.
하지만 단테는 그럴 수 없는 듯했다.
"나는 기사입니다."
그는 기사이기에.
위대한 자가 아닌, 약한 자의 편에 서겠다고 결심했기에.
퉷, 입속의 피를 뱉어낸 단테가 지친 얼굴로나마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아니면, 누가 이들을 돕겠습니까."
합리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그저 올바르게 살고 싶다.
그게 기사이기에.
스릉.
칼을 들어 올렸다.
신을 믿었던 적이 없다.
신들의 존재를 믿을지언정, 그들의 선의를 믿은 적은 없었다.
단테의 귀에 들려왔던 목소리는 언제나 계산을 우선시하기 바빴으니.
하지만.
혼미한 정신 속,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신의 힘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신이시여."
능력이 미약하기에.
제 한 몸으로 기적을 행할 수 없기에.
신이라는 자가 정말 존재한다면, 선하다면 그의 도움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신다면, 구해주소서."
제가 아닌, 저 여린 이들이 다음 날의 아침 해를 두 눈에 담을 수 있게 하소서.
간절한 기도를 입에 올린 찰나였다.
"...."
잠시 적막했다.
그 짧은 기도가 너무나도 고결했기에, 누구도 감히 적막을 깰 수 없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나도 구해주고 싶은데! 구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저걸 어떻게 구해주냐니까?'
신우주였다.
누가 돕기 싫대? 돕고 싶지!
그런데 가진 GP가 25밖에 없다! 아까 금고의 진실을 확인한답시고 오버해 버린 탓에 GP를 깡그리 날려버렸으니까!
설령 GP가 충분하다고 해도 문제다.
'쟤들을 어쩔 건데?'
몰려든 저놈들 숫자를 봐라. 밥 잘 먹었는지 영양 상태부터 남다른 놈들이 완전무장한 게 스물이다.
반대로 이쪽은 거지가 서른.
이걸 회복 좀 시킨다고 승부가 되겠나?
더 지저분한 소모전으로 끌고 가는 게 한계다!
승산이 없다고!
'이것만으로는 안 돼.'
더 끝내주는 해결책이 필요하다!
판세 자체를 뒤집어엎을 신의 한 수가 필요하다.
"들러붙지 마라! 더러운 자식아!"
뻐억!
휘두른 창의 봉에 두드려 맞은 빈자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튀었다.
거지가 짚단처럼 쓰러지는 사이, 정작 창을 휘두른 자가 오히려 두렵다는 듯 몸서리치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 히익, 저주가 옮을 뻔했다."
그 순간이었다.
-가만.
저주?
이거, 잘하면 방법이 있겠는데?
| 8화. 테라 상단 (4)
신은 공평하지 않다.
신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선별하여 돕는다.
목장 주인들이 울타리 속의 가축을 선별하여 길러내듯.
그게 이 세상의 상식이다.
마음에 든 동물은 좀 더 먹이에 신경 쓰겠지.
한기와 꿉꿉함, 그림자가 절묘하게 섞여 불쾌함이 다리를 타고 끈적하게 올라오는 골목.
그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숭고한 기도가 이어지길 한참.
"하하!"
이단심문관 제프리가 광소를 터뜨렸다.
"네 이름도 모를 신이라는 자는 겁쟁이인 모양이구...."
그 순간이었다.
툭!
"음?"
제프리의 이마 위로 물줄기 하나가 툭 떨어지더니, 광대를 따라 턱 아래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손으로 훔친 제프리가 눈을 좁게 떴다.
'끈적한 액체?'
끈적했다.
밥을 먹다가 소스를 소매에 묻혔을 때처럼 어중간하게 기분 나쁜 끈적함이 그의 손가락 끝에 감돌았다.
'누가 장난질을.'
대낮이다. 날씨는 눈이 시리도록 쾌청하다. 비가 내릴 기미는 당장 없다.
당연히 누군가의 장난이리라는 생각에 고개를 든 찰나였다.
"...!"
제프리의 두 눈에 지진이라도 인 듯 요동쳤다.
툭, 투두둑, 툭.
어느새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들. 마른하늘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쏟아지며 세상을 적셨다.
게다가 그 빗물들이.
'검다.'
한없이 검은색이었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칠흑 속 숲을 불빛 하나 없이 거니는 것처럼, 죽은 생선의 초점 없는 눈동자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저 검었다.
"비다!"
"검은색 비가 내린다!"
어두운 골목으로, 대낮에 한없이 검은 비가 추적추적 쏟아졌다.
세상을 검은색으로 물들이겠다는 것처럼.
"이건 대체."
현세에 있을 수 없는 광경에 제프리가 중얼거린 찰나였다.
"...마신이야."
그의 뒤로 나열된 무리가 중얼거렸다.
"마신이다! 마신이 저주를 내리는 거다."
패닉의 시작이었다.
"저주가 옮는다!"
"닿았어! 내 몸에 닿았어!"
붕괴됐다.
신앙으로 똘똘 뭉쳤던 타라 교단의 신도들이, 한순간에 와해되며 비명을 내질렀다.
"도, 도망쳐!"
"타라시여, 타라시여, 타라시여!"
공포가 옮는다.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이기에, 신의 공포 또한 믿는다.
빗물과 함께 일제히 공포가 번져 나갔다. 마치 닿기라도 하면 저들 병자와 똑같은 신세가 될 것처럼, 일제히 패닉에 빠져 하나둘 뒷걸음질 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에 심취한다는 건, 미신에 심취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으니.
"겁먹지 마라! 쓰레기들아!"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은 제프리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이깟 빗물에 닿는다고 저주를 받을 리가 있겠느냔 말이다! 기생충들의 얕은 수작에 불과하다! 놀아나지 마라!"
"하, 하지만... 으억!"
퍼억!
제프리가 겁에 질린 신도의 관자놀이를 칼자루로 후려치고는 외쳤다.
"설령 정말로 마신이 저주를 내렸다 한들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우리는 타라의 신도들이다! 그분께서 지켜보시는 이상, 두려울 게 없단 말이다!"
효과가 없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들, 이미 제프리 본인의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었기에 억지만이 느껴질 뿐.
"이 빌어먹을 개새끼들아! 마신이고 지랄이고 우리가 더 많다!! 기생충들 따위를 두고 달아날 셈이냐!"
소용없다.
떨림이 멎지 않는다.
신도들을 넘어, 제프리 본인마저도 그 현실을 두 눈으로 느꼈다.
"으아아아아아아...!"
겁에 질려 있다.
그의 일갈은 단테의 고요한 몇 마디보다 한없이 호소력이 부족하다.
한결 끈적해지는 피부에 호흡이 덜덜 떨려왔다.
하지만.
"낫고 있어."
그 반대로 호흡이 안정되어 가는 자들도 존재했다.
"이 빗물, 이 빗물이 닿을 때마다 고통이 멎고 있어."
병자들이었다.
"기적이다."
"신이시여."
"성수다!"
병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골목 구석구석에서 환자들이 뛰쳐나와 빗물을 저마다 몸에 문지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낫는다!"
"저주가 지워지고 있어!"
"간지럼증, 간지럼증이 멎었다!"
소리가 더 큰 소리를 이끌었다.
부풀어 오른 소리만큼, 더 큰 숫자가 뭉친다.
"신이시여!"
골목이 신의 이름으로 찼다.
이름을 모르는 신이다. 그렇기에 그저 신이라는 대명사를 외쳤다.
마치 그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신이라는 것처럼.
'이런.'
단테가 두 눈을 의심했다.
불과 몇십 초 전, 그의 객기 어린 선의가 작은 기적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진짜 기적이 필요하다.
그 기적은 바로.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몇몇 병자들의 손에 저마다 나타나고 있는 무기가 그러했다.
[권능을 행사하였습니다!]
[GP가 소모됩니다!]
[물품을 전송할 시에는 GP가 소모되며, 그 용도와 가치에 비례하여 자동으로 소모량이 조정됩니다.]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마누엘 이슬라스의 창고 무구들.
그게 병자들의 손 위로 속속들이 소환됐다.
"깃발?"
-꽉 쥐고, 손에서 놓치지만 마세요. 쥐고 있으면 최소 죽지는 않으니까. 다친 동료들이 자동으로 회복될 겁니다.
더불어 신의 음성까지.
한평생 목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던 자들에게, 처음 접하는 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포, 포크?"
-찍으면 마비됩니다. 스치는 수준으로도 괜찮으니까, 조금씩 건드려요.
신우주가 보낸 물건들이었다.
마누엘 이슬라스의 창고 속 물건들을 실시간으로 전송해, 병자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사용법은 완벽하게 숙지했다.
창고를 직접 두 발로 돌며 삼 장로의 친절한 상품 설명을 들었으니까!
"이게 무엇입니까?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으면 나이프가 무한으로 나올 겁니다. 붙어서 싸울 생각하지 말고, 멀리서 던지세요. 주위 사람들한테도 좀 나눠 주고.
그렇게 이어지는 설명 뒤로는 한마디가 뒤따랐다.
-나중에 반환해야 합니다.
조건부 대여라는 것.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신께서 우릴 도우신다!"
병자들의 기세가 타올랐다.
위대한 신이 직접 그들에게 말을 걸며, 힘을 빌려주고 있다는 것.
"나는 의자다!"
"거울을 주셨다!"
신이 존재한다는 걸 아나, 말로만 들었다. 그들의 기적을 눈으로 목도했을지언정 신의 목소리를 한평생 직접 들은 기억이 없다.
지금은 어떠한가?
-포션입니다. 다친 사람한테 뿌리세요.
신이 직접 전언하고 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들린다!
신이 쥐여 주고 있는 무기도 있다.
신이 그들과 함께한다.
저들의 신은 모르겠지만, 우리의 신은 굽어살피시고 계신다!
"할 수 있다!"
"나한테도 말씀을 주셨어!"
"살아간다! 무조건 살아서 돌아갈 거야!"
이단 심문관은 무섭다. 하지만 병을 고칠 수도 있다는 희망의 빛이 두려움을 넘어설 만큼이나 크게 타올랐다.
신의 목소리가 용기를 복돋았다.
'말도 안 돼.'
제프리의 턱이 빠질 듯 튀어나왔다.
'저런 버러지들을 신이 돕는다고? 직접 나서가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은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을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고귀한 손에 오물을 묻히려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단심문관, 교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그조차도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적은 없을진대.
"신의 은총이다!"
저 버러지들은 신과 마치 소통하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된다.
눈앞의 광경이, 갑작스럽게 치솟아 오른 기세가.
"이놈들, 이상하게 튼튼합니다!"
"심문관님! 어서 지시를!"
저런 버러지들이 타라의 군세와 맞서 싸우고 있다는 현실이.
제프리의 두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기적이다.'
저건 기적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적이다.
저 버러지들이 낫고 있다는 것도, 어딘가에서 소환된 병기를 휘두르며 타라의 신도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까지 하나하나가 기적이다.
하지만.
"죽이면 그만이다!"
제프리가 칼을 뽑았다.
"악신 따위가 따른다 한들, 결국에는 악신의 하수인일 뿐!"
입으로는 거친 말을 외치지만 그 또한 두렵다.
저 무기들, 심상치 않다.
정말로 신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자들 따위가 신을 업고 득세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흐름을 억지로라도 끊어내야 한다!
"타라여! 그대의 종이 증명하나이다!"
한 놈 죽이자.
피가 바닥을 흠뻑 적실 때쯤이면 놈들도 현실을 직시할 터.
"크아악!"
기합과 함께 칼을 휘두른 순간이었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둔탁하게 나뒹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는.
"크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이!!"
제프리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 앞으로 예기를 뿜어내는 칼 한 자루가 서슬 퍼렇게 놓였다.
"고통을 아는 자였구나."
단테였다.
쏟아지는 검은 빗길 속, 단테가 한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제프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구해달라고 빌어 보아라."
"뭣?"
"나의 신께서 그러하였듯, 너의 신에게도 구해 달라 빌어 보아라."
제프리가 이를 까드득 물었다.
파악!
남아 있는 한쪽 손으로나마 바닥의 흙을 퍼 올려 단테에게 던지고는, 황급히 달려가 다시금 도끼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
단테의 검날은 어느새 제프리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차가운 검날의 감촉이 그의 피부의 주름을 파고들었다.
죽는다.
두려움에 혀뿌리마저 굳은 제프리가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네 신은 보잘것없는 자인 모양이구나. 아니면, 네게 가치를 못 느끼거나."
대답은 없었다.
촤악!
검날의 피를 털어내고 검집에 집어넣은 단테가 외쳤다.
"우린 떠날 것이다. 차별받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곳을 향해."
*
"...한숨 돌렸네."
긴장이 풀리며 뼛속까지 기진맥진한 신우주가 바닥에 주저앉아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와, 진짜 이게 말이 되나.'
능력을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잃을 뻔하다니.
이런 게 말이 되나?
명색이 EX랭크 스킬씩이나 되면서 언제나 잃어버릴 걱정을 하면서 지내야 한다고?
하지만 위력도 그만큼 되니까 의심할 수도 없고.
어쨌든 당장 걱정은 넘겼다.
'GP가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큰일 날 뻔했어.'
GP가 부족했다.
[깊게 찌르기] 하나만으로도 보유한 GP 200을 전부 소모해버린 탓에, 그대로 단테를 잃을 뻔했다.
이걸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임기응변 덕분.
-들리십니까? 그대를 구하겠습니다.
-누, 누구십니까?
병자들이었다.
-신앙을 맹세하세요.
단테를 비롯해 처음 신도들을 받아들일 때 보유 GP가 단번에 늘어났었지.
100에서 225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병자들을 새 신도로 삼아 가용 GP를 확보하는 게 목적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내 사도, 단테가 그대들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음은 그대들 차례겠지요. 살고 싶다면, 신앙을 맹세하고 귀의하세요.
-네, 네?
-죽기 싫으면 어서.
닥치는 대로 병자들을 신도로 받아들였다.
살고 싶으면 우리 교에 들어오라고.
뭐 어쩔 텐가?
어차피 주류 교단에게서 기생충이니 버러지니 취급받으면서 뒷골목에 버림받은 자들이다.
-계속 쓰레기로 살 겁니까?
한마디면 충분했다.
['좀도둑 야곱'이 교단에 합류합니다.]
['창부 로제트'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열쇠공 페튼'이 교단에 합류합니다.]
['부랑아 크룩'이 교단에...]
['구두닦이 메이슨'이…]
...…
...
…
갈퀴로 쓸어 담았다.
그래 봐야 인당 수급된 GP가 인당 5에서 10 정도로.
이유는 모르겠다만, 단테 때보다는 현저히 낮은 수치.
하지만 충분했다.
'아슬아슬했어.'
갖고 있던 검은 포션들을 모조리 저쪽 세계로 던져넣기에는 말이다.
캔 따서 먹일 시간도 없어서 액체째로 쏟아부었는데, [권능-전송] 스킬을 통하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다.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비가 내렸다.
죽어가는 사람 살려달라고 빈 게 아니라, 그냥 하늘에서 뿌리기만 해서 그런지 소모 GP도 적었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병자들이 회복됐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회복된 병자일 뿐. 구색 좀 갖췄다고 전력이 될 리가 없다.
상대는 건강은 기본, 거기에 기술과 장비까지 곁들였으니까.
그래서.
"신기하군요."
이쪽 창고의 힘을 빌렸다.
"거래 감사합니다."
삼 장로와 마누엘 이슬라스의 창고를.
여전히 사무적인 표정을 거두질 않는 삼 장로를 향해 신우주가 시선을 꿈틀거렸다.
"사악하시네, 이렇게 폭리를 취하시다니. 상인이 이래도 되는 거 맞나?"
"오해가 있군요. 수요에 걸맞은 가격을 제시했을 뿐입니다만."
"웩."
"그보다, 판매한 포션과 빌려준 물건들은 전부 어디로 전송한 건지 묻고 싶군요. 개인 인벤토리? 그게 당신의 스킬입니까? 아공간 스킬입니까?"
"비슷한 거야."
창고에 쌓인 물건을 '대여'해서 저쪽 세상의 야매 신도들에게 다시 한번 '대여'해 주었다.
그리고 돌려받았다.
지금 옆으로 쌓여 있는 물건들이 그 증거.
"고르기 전에 막 써 봐도 된다고 했잖아. 다시 돌려줬으니까 됐지?"
"...."
돌려받긴 돌려받았다.
계약대로 물건을 써보겠다고 요청하고는, 그대로 아공간에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다시 뱉어냈다.
이 모든 과정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던 삼 장로의 시선이 깜빡거렸다.
'상태가 조금 이상한데?'
피랑 얼룩으로 눅진한 것이.
아니, 그보다.
'저게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아공간을 만들어 내는 계통의 스킬이라고 해서, 그게 쉽던가.
이 창고는 그렇게 간단한 공간이 아니다.
마누엘 이슬라스의 인벤토리와도 같을뿐더러, 바깥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보안 스킬만 무려 여덟 겹이 씌워져 있다.
눈앞의 남자는 그걸 뚫은 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그걸 뚫고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라고?'
들어본 적도 없다.
탑 바깥까지도 물건을 거래할 수 있다는 테라 상단주, 마누엘 이슬라스 본인이라고 한들 가능할까?
'이 남자, 대체 누구지?'
삼 장로가 그 짙은 눈빛을 번뜩였다.
| 9화. 테라 상단 (5)
상인에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구슬려 협상하는 능력?
마누엘 이슬라스는 평소 이렇게 밝혔다.
-상인에게는 필요한 걸 세 가지 말하자면, 첫 번째는 말할 것도 없이 안목, 두 번째는 당연히 안목, 세 번째도 안목이다.
좋은 상품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좋은 상품을 발견한 뒤, 그것에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상인의 본질이다.
여기에서 상품이란 단어는 재화만 포함하는 게 아니다.
정보부터 시작해 노동력 혹은 서비스.
나아가 사람과 스킬까지도.
가치를 지닌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상품이 될 수 있으니.
-가치가 낮을 때 발견해서, 가치가 높을 때 팔아라.
상단 내에서 세력과 전투력이 모두 부족했음에도, 오직 안목 하나로 이 자리에 오른 남자.
마누엘 이슬라스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상인, 삼 장로가 작게 경탄했다.
'내가 모르는 스킬이 아직도 존재했다니.'
신우주가 보인 무력에 말이다.
"지금 사용한 스킬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
대답이 없다.
알려주지 않겠다는 건가.
'하긴, 스킬의 값어치는 그 누구보다도 소유자 자신이 잘 알 터.'
모르기에 탐이 난다.
하지만 추측할 수단은 있다.
신우주 본인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금고 안에서 B랭크 이하의 스킬은 봉인된다.'
마누엘 아슬라스의 금고는 그 자체로도 거대한 아티팩트니까.
B랭크 이하라면, 어떠한 스킬도 발동시킬 수 없다.
신우주가 보였던 스킬들은 아무리 낮아도 A랭크 이상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A랭크 스킬이 탑의 하층에서라면 출세 티켓처럼 취급받을지 몰라도, 테라 상단의 인재풀에서는 평균보다 조금 위 정도.
더 들여다보면.
'아이템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아공간에 오갔지.'
어딘가에 숨긴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이 세상에서 그 존재가 지워진 듯했다.
그 과정이 어찌나 깔끔했으면 경보 마법이 발동조차 하지 않았다.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금고에 걸린 보안만 자그마치 8중으로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흘끔 벽면을 보자, 지금도 실시간으로 아티팩트가 발동하고 있었다.
'그걸 전부 뚫었다면 최소 A랭크 이상이겠지.'
그게 전부였던가?
아까 내벽을 파괴할 때 사용했던 그 스킬도 가지고 있지 않았나.
그것 또한 순수 위력으로만 추정해도.
'최소한으로 잡아도 A랭크 이상의 스킬이 둘이라.'
포텐셜은 최소 랭커급.
충분한 지원이 뒷받침되면 그중에서도 상위권에 다다르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저 남자가.
'S랭크 스킬 보유자라면?'
탑에서도 극히 소수의 인간만 보유하고 있으며, 단순히 보유하는 것만으로도 거대 길드에서 주요 전력에서 취급받는 S랭크 보유자라면.
하물며 그런 스킬을 복수로 지니고 있다면.
'탑의 균형이 바뀔지도 모른다.'
짧은 사이 신우주의 가치 책정을 마친 삼 장로가 입을 열었다.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테라 상단에 전속으로 합류하지 않겠습니까?"
살 수 있다면, 지금 사야 한다.
아직 이 남자의 몸값이 낮은 바로 지금.
"뭐?"
장비를 가지고 놀기 바쁘던 신우주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 뒤를 돌아봤다.
"약속하지요. 조건은 톡톡히 쳐 주겠습니다. 천만 골드면 어떻겠습니까? 당장 내일 작은 상단을 하나 차릴 수도 있을 겁니다."
천만 골드.
어지간한 건물을 10채는 구매하고도 남을 재산이었다.
평생 모험가로 산들 손에 넣을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비용.
신우주가 탑 초창기부터 부를 쌓아온 알부자라고는 하나, 투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이기에 어림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 계산 실수가 있다면.
"돈은 먹고살 만큼이면 돼서."
신우주는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테라 상단이 돈이 많긴 많네? 대뜸 액수부터 부르고."
그렇군.
이 정도 되는 인재는 돈에 휘둘리지 않지.
삼 장로는 너무 쉽게 먹으려고 했다고 직감하며 입을 열었다.
"부족하다면, 거기에 A랭크 이상의 장비를 세 점 추가하겠습니다."
"...!"
A랭크, 하층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고급 장비들이다.
다름 아닌 바스커빌제 장비들이 A랭크부터 주로 포진되어 있으니까.
이만한 제안이면 거절하기 쉽지 않겠지.
신우주의 눈동자에 잠깐이나마 욕심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테라 상단에서도 쉽지 않은 지출이다.'
하지만 삼 장로의 평가가 옳다면 신우주의 가치에 비교하자면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었다.
화로 앞의 촛불이 그러할까.
'테라 상단의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삼 장로의 야망이 잠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과거와 현재를 보고 미래에 투자하는 게 상인의 덕목이라면, 지금이 바로 적기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끔 지원하지요. 제 아래에서 향후 10년간 일하는 대가입니다."
삼 장로의 아래여야 할 것.
테라 상단 안에서도 다름 아닌 그의 아래여야만 한다.
장로 사이에서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의 값어치, 그 미래를 눈앞의 초라한 남자에게서 보았다.
하지만 신우주의 판단은 빨랐다.
"거절할게."
"예?"
부결이었다.
"내가 코인에 박았다가 전 재산 꼴은 경험이 있어서."
탑 바깥 시절, 신우주는 전형적인 코인 개미였으니까.
...라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지금 내 몸값을 저렇게 본다면, 나중에는 더 오르겠지.'
상인들은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들이 과한 제안을 건넸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설마 이렇게까지 시원하게 거절당할 줄은 몰랐던 걸까. 잠시 굳어져 있던 삼 장로가 추가로 손가락을 펼쳤다.
"앞서 제안한 것에 더불어, 장비를 한 점 더 추가한다면?"
"테라 상단이 돈이 많기는 많은가 봐."
"당신이 앞으로 받을 지원에 비하면 미약할 겁니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끔 총력을 기울이지요."
혹하기는 하네.
거대 상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폭발적인 성장이라.
하지만 그뿐이다.
테라 상단이 가고자 하는 길은, 신우주가 지향하는 길과 다르니까.
"말은 고마운데, 난 솔플이 좋아서. 이만 간다."
더 붙잡기 전에 떠나자.
신우주가 재빠르게 바지를 털고 일어난 찰나였다.
상인답게 줄곧 무미건조한 눈빛을 고수했던 못내 미련이 남았다는 듯 삼 장로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렵니까?"
궁금한 건가.
'뭐, 이 정도는.'
나름대로 호의도 받았겠다. 이 정도는 말해 줘도 좋겠지.
손을 들어 올린 신우주가 저 하늘 위, 하늘이라 칭하지만 그 본질은 천장 혹은 뚜껑인 것을 가리켰다.
"저 위, 네 주인이 있는 곳까지."
"그렇군요."
삼 장로가 비로소 희미하게 웃었다.
기특한 후배를 보는 것처럼. 혹은 몹시나 그리운 어느 시점의 과거를 되새기는 것처럼.
뭘 이렇게 웃지?
사람 세워놓고 음험하게.
의심병이 발작하려는 찰나 삼 장로가 웃음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입단을 권유할 수는 없겠군요. 대신, VIP와 거래를 튼 기념으로 개인적인 선물 하나를 드리지요."
선물?
공짜로 준다면 거절하지는 않겠는데.
테라 상단은 공짜가 없는 집단이라 의심스러운 참인데 삼 장로가 말했다.
"당신에게 투자하겠습니다. 조건 없이."
*
"다시 볼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래."
형식적인 웃음과 함께 마무리 짓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솔직히 상인이 제공하는 호의라는 게 아무리 공짜여도 찜찜해서.
은근히 소름 끼치기도 하고.
'속에 무슨 타입의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을지 모른다니까.'
대신 연락처를 받았다.
테라 상단과 직통으로 통하는 개인 거래 채널이 뚫린 반지 하나인데, 번거롭게 직접 방문할 것 없이 마음속으로 요청하면 이쪽에서 방문할 거라나?
-고급 아티팩트부터 잡동사니까지, 요구하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 처분할 수 있을 겁니다. 또 내부 경매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담당 직원은 추후 배정하도록 하지요.
테라 상단과의 직통 채널이라니.
바스커빌 공방 장비 몇 점에 비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큰 수확이다.
'어떻게든 끈을 남겨 놓고 싶었구나.'
하지만 이 정도라면야.
테라 상단에 종속되는 건 싫지만, 거래 상대라면 또 나쁘지 않다.
게다가 덕분에 득을 보지 않았나?
그쪽 장비들을 무상으로 잔뜩 사용했던 덕분에.
[신도 수: 33명]
타라 뒷골목에서 데리고 나온 신도의 숫자가 족히 30명을 넘겨, 동네 소형 교회 수준은 달성했을뿐더러.
[GP 55/480]
보유한 GP가 자그마치 2.5배로 늘었으니까.
신도들 개개인은 그 질이 낮은 탓인지 단테와는 달리, 스킬도 보잘것없지만.
'뭐, 어찌 됐든.'
없는 것보다는 나을뿐더러, 결국에는 거쳐야 할 단계였다.
[교단의 규모가 30을 돌파했습니다!]
[현재 등급: 소규모 교단]
종교다운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보유한 신도들의 능력에 비례하여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전송의 효율성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더 이상 '전지' 스킬 발동에 GP를 소모하지 않습니다!]
교단 규모가 커졌다고 강해진 것도 강해진 거지만.
[교단의 이름을 지어 주십시오.]
왜, 신은 신자가 있어야 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많잖아?
[교단의 이름은 곧 신의 이름과도 같습니다.
교인들은 교단의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며, 그 안에서 자부심을 얻습니다.
특히, 교단을 홍보하는 데 있어서 교단의 이름이 가지는 중요성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단 이름이라.
테라 상단의 쓸데없이 긴 입구를 빠르게 빠져나오던 중 생각에 사로잡혔다.
'단순하게 우주교? 아니면 간지나게 이니셜로?'
신이 됐다는 체감이 확 드네.
단테 한 명만 있을 때는 동네 지박령 느낌이었는데.
-타라를 떠날 겁니다. 신도들과 함께 새로이 둥지를 틀려고 합니다.
그 뒤로 수십 명의 신도들이 무리 지어서 따르고 있지 않나.
추레한 행색만 보면 교단보단 피난민 무리에 가깝겠지만, 숫자는 교단 구색이 좀 갖춰졌다고 볼 수 있겠다.
땅 한 점 없는 거지 교단이라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어디로 갈 겁니까?"
관찰 스킬로 들여다본 하위세계 속, 선두에 선 단테에게 말을 붙이자 그가 기도하듯 말했다.
-구체적으로 정해두지는 않았습니다만, 새로이 정착촌을 일구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왕 정착할 거라면 다른 도시를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말 대신 뒤를 돌아본 단테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기성 교단에 박해받은 자들이 많기에.
신의 말씀에 반박을?
하지만 신우주와 단테가 일반적인 신과 신도의 관계는 아니니까.
또 단테는 생각보다 괜찮은 리더였다.
훌륭한 인성도 인성이지만, 무력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나.
-네가 데리고 온 돼지 새끼 한 마리만 멱 따면 우리가 한 달은 배불리 먹겠는데?
교단에서 간혹 천박한 행동을 포기 못 한 자들이 두각을 드러낼 때.
-같은 신도들끼리 약탈은 금물입니다. 형제님.
단테가 칼자루를 흔들며 정중하게 부탁하면 이내 언변에 예의가 깃드니, 이 얼마나 정겨운 풍경이겠나.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터.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 필요해.'
겉으로는 무리를 이루고 있지만, 속으로는 점조직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출신으로, 성별로, 나이로.
공통점이라면 기존 교단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정도일까?
교단이 교단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저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 줄 교리가 필요하다.
'문제라면 내가 종교에 식견이 얕다는 건데.'
평생 무교로 살아온 탓에 잘 모르겠다.
-아까 그 연놈들 봤나? 가진 게 좀 많아 보이던데.
-슬쩍 호주머니 좀 구경하고 올까?
애초에 저게 교단이 맞기나 한가? 도적단 아닌가?
하지만 불평은 금물이다.
당장은 초라하더라도, 저 교단을 종자 삼아 사바나 초원의 바오밥나무로 길러내야 한다.
교단의 규모만큼이나 그의 능력도 무럭무럭 자라날 테니까.
그동안은 단테가 어떻게든 관리할 터.
'부탁해.'
만약 단테처럼 고급 인재를 잔뜩 들여와 육성할 수만 있다면.
'탑의 정상도 꿈만큼은 아니다.'
상단에서 나가면 도서관부터 가야겠다.
교단의 운영법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한번 연구해 봐야지.
'일단 자금줄이 먼저려나?'
그보다 몸이 심각하리만치 피로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하위세계의 스킬들이라는 게, GP 소모량과는 또 별개로 심신 양면으로 극심하게 체력이 고갈되는 면이 있다고 해야 하나.
고작 스킬 하나 강하게 쓴 정도에 불과함에도.
험한 산맥을 오르내리다가 체내 글리코겐이 소진된 것처럼, 헬스장에서 하체를 과하게 조진 날처럼 몸이 천근만근이다.
눈앞은 세상에 황사가 낀 듯 무겁다.
'체력 관리에 신경을 써야겠어.'
각성자라고 해서 무적의 육체를 지닌 게 아니다.
그저 특수한 힘을 지녔을 뿐.
최상위 스킬을 손에 넣고 스스로를 무적이라고 착각했던 루키가 눈먼 칼날 한방에 목숨을 잃었다거나 하는 건 드문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 신우주의 스킬은 이제 막 각성한 자가 다루기에는 과도하게 강하다.
자칫하면 반동이 그 자신을 파괴할 정도로.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스킬 활용에 몸이 적응할 때까지는 당분간 어디 안전한 곳에 잠수라도 타야겠어.'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
이미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기다렸으니까.
거기에 몇 년 추가된들, 바위 위에 조약돌 하나 더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라는 생각을 하며, 여전히 하위세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단 바깥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한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눈앞에 검은 장막을 친 듯 시야가 어두컴컴해졌다.
"...!"
이건 설마.
'기습?'
아티팩트? 아니면 스크롤?
대체 어떤 놈이 상회 앞에서 대낮에 간 큰 짓을.
퍼억!
순간 뒤통수로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과 함께 신경이 쭈뻣 서며 몸이 목각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퍼억!
어떤 새끼들이?
찰나의 순간에도 몸을 돌려 칼을 휘두른 순간, 연이은 충격이 뒤통수에 뻐근하게 퍼졌다.
'이, 자식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데.'
이번에는 못 견딘 신우주의 몸이 볏단처럼 풀썩 쓰러졌다.
"퉷, 그 짧은 사이에 반격까지 해? 망할 새끼. 분명히 테라 상단 고객이었지?"
"확인했다. 아마 스크롤 값은 할 거야."
흐려지는 의식 속, 두 남자의 대화 소리가 귓가로 울려 퍼졌다.
| 10화. 스캐빈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