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DIOSINFERIORENELJUEGO / Chapter 3 - 20-30

Chapter 3 - 20-30

| 20화. 고통 (2)

"장 라크루아, 엑스니힐로의 간부이자 특급 지명수배자."

쩌적!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바닥에 박힌 방패를 빼내며 들으라는 듯 말했다.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만, 등불 밑이 어둡다는 말이 맞았군"

저 먼 곳.

신우주에게서 한 발 떨어져 그림자 속에 가려진 채 주시하던 레온 길버트, 아니, 장 라크루아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범죄자에게 알려 줄 정보는 없다."

"사회성이 결핍됐군요!"

그 순간 소리를 지르는 남자가 있었다.

"날 속인 거냐!"

리자오웨이.

스쿠툼의 팀장급 조사관이자, 다른 의미에서는 똑같이 범죄를 저지른 모험가.

"이 더러운 범죄자 자식이!"

"뭘 남 이야기하듯 말하는 겁니까?"

그를 향해 장 라크루아가 차갑게 조소했다.

"범죄 조작에 가담해 온 당신이라면,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는 분명할 텐데요?"

"...개소리, 난 엑스니힐로가 엮인 일인 줄은 몰랐다!"

"허울만 좋은 말이라는 건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미 공범입니다."

"...."

"실적이라는 변명 아래 무고한 피해자를 몇 명이든 죽이지 않았습니까? 당신, 설마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제정신입니까?"

반박하지 못하는 리자오웨이를 향해 장 라크루아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대로 잡혀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든지, 엑스니힐로에 가담하든지. 전부 당신의 선택입니다만."

기다렸다는 듯 각본처럼 흘러나오는 말에 리자오웨이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 녀석,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너무 순순히 그의 행보에 가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발 나아가 적극적으로 부추겼던 것 같기도―

"귀담아듣지 마라."

레베카 순드블라드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상념을 뚫고 들어왔다.

"장 라크루아는 세뇌의 귀재로 유명하지. 리자오웨이 조사관, 협조한다면 추후 조사에서 정상 참작해 주겠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내뱉는 건 똑같군요. 후후, 경멸하는 마음으로만 가득한 주제에."

"쓰레기,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리자오웨이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이미 불명예가 가득한 삶이지만, 스크툼에 잔류하느냐.

아니면 엑스니힐로로 가느냐.

결론은 빨랐다.

채앵!

"난 신우주를 맡겠다!"

남은 미래는 뻔했으니.

가까스로 방어한 신우주가 팔뚝에 힘을 밀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인상부터 그럴 것 같더라니."

"닥쳐라!"

이대로 돌아가 봐야 가망은 없다.

팔다리를 잘라놓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채 무기징역수로 썩어가는 정도일까.

탑에서는 늙지도 늙어 죽지도 않는다.

초현실적인 회복 능력을 가진 힐러들 탓에 자해조차도 허락받지 못한다.

언제까지일지 모를 굴레 속에서 영원히 썩느니, 차라리 발악이라도 해 보고 안 되면 형장의 이슬이 되는 게 낫지 않겠나.

"레온! 난 신우주를 맡겠다!"

"아니, 맡긴 뭘 맡아. 내가 네 소지품이냐?"

신우주가 가볍게나마 반격해 떨쳐내려니, 저 멀리서 레베카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신우주, 감당할 수 있겠지?"

"랭커 수준은 아니라며?"

"6등급이다."

그럼 해볼 만하지.

"접수."

"믿고 맡기지. 나는 이쪽에 집중하겠다."

신우주가 레베카 쪽을 바라봤다.

엑스니힐로의 간부급이라는 장 라크루아를 레베카가 마크하는 사이, 나는 눈앞의 이 콧수염을 두들겨 패 준다.

상황판단이 끝났다.

'이게 몇 년 만이더라?'

신우주가 피식 웃었다.

몇십 년 동안 솔로 플레이에 너무 적응했는데, 동료가 있으니까 든든하긴 하네.

*

탑에는 범죄자들이 많다.

탑 입장 자격에 인성이나 서류 검사는 없을뿐더러, 바깥세상과는 달리, 초현실적으로 힘센 놈들이 해변의 모래처럼 깔려 있지 않나.

게다가 증거도 잘 남지 않는다.

약육강식.

탑을 공략한다고 위험천만한 몬스터를 사냥하느니, 같은 인간을 사냥하는 방식을 선택한 놈들이 즐비하다.

범죄자들은 홀로 활동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조직을 꾸리기 마련.

탑에 널린 범죄조직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Tier_maker - (속보) 엑스니힐로 올해도 1티어 자리 유지.

탑 내에서도 최악이라 평가받는 범죄조직, 엑스니힐로가 단연 1위이리라.

범죄조직이라면 토벌당할 게 두려워 조직을 베일 속에 감추기 마련인데, 당당하게 드러내고 다닌다는 점에서 더더욱.

Sword_master - 전에 한 놈이랑 싸워 봤는데, 확실히 강하긴 강해. 소수정예 주제에 순수 전력만 따지면 어지간한 초대형 길드보다 낫지.

Catchball - 우리 길드도 전에 테러 한번 당해서 망할 뻔했자너.

Merlin - 마탑은 뭐 그리도 탈주하는 놈들이 많은지. 인신매매 막아놓은 게 그렇게 답답들 하셨나?

엑스니힐로의 수준을 말하자면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평균치가 랭커.

각 길드에서도 최정예 전력으로 평가받는 랭커가 엑스니힐로에서는 잘해야 평균 정도밖에 안 되었다.

아무리 약해도 준 랭커.

그중에서도 근본 범죄조직답게 뼛속부터 사람 잡는 데 특화된 놈들이었다.

'말로는 탑의 질서가 마음에 안 들어서 들고 일어섰다는데.'

혁명조직치고는 너무 구성원들 수질이 나빠서.

콰앙!

신우주가 눈앞으로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 창을 흘려내며 뒤로 물러섰다.

'스쿠툼 팀장이라 그런가? 강하긴 강하네.'

이 녀석 정도면 입단 컷이라는 걸까.

조금만 방심해도 무기째 날려버리겠다는 듯 공격 한 방 한 방이 무겁다.

사무실에서 보였던 우스웠던 모습이 장난이었다는 듯, 전신에서 흉흉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데.

'강해.'

6등급이라고 했지.

본격적인 랭커 수준에는 한참 못 이르렀겠지만, 그 바로 아래 등급.

각성자가 즐비한 탑에서도 강자 소리 듣기에는 충분하다.

준랭커라는 예쁜 명함으로 불리기도 하고.

아차,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놈의 창날이 반짝였다. 반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눈앞이었다.

콰아앙!

"...윽!"

가까스로 받아낸 공격에 신우주가 얕게 신음을 흘렸다.

방어했음에도 온몸이 울리는 충격량.

[접검을 발동합니다.]

가까스로 스킬을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받아내긴커녕 그대로 목숨을 잃을 공격이었다.

"흥미롭군, 나름대로 자신 있는 공격이었는데 이걸 받아내다니. 예상은 했다만, 역시 평범한 놈은 아니었군."

리자오웨이가 주먹을 쥐었다 피길 반복했다.

그의 손아귀는 다진 가죽같이 찢어져, 아래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게 네 스킬인가? 순간적으로 무기의 제어를 뺏긴 기분이었는데, 굉장하군."

부상당한 와중에도 칭찬씩이나 던지는 걸 보니 퍽 여유로우신가 보네.

하지만 딱히 기쁘진 않아서 말이지.

접검은 무기에 실린 힘을 그대로 상대방의 손으로 되돌려주는 기술.

걸린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위력이 극대화되는 기술인데.

'대형 길드 팀장급쯤 되면, 가만히 당해주지도 않는다는 말이지.'

어느새 창날이 날아왔다.

찢어진 손아귀로 휘두르는 창 주제에 어마어마하게 예리하다.

"비리 경찰쯤 되는 주제에 쓸데없이 잘 싸우시네?"

숨 쉴 틈도 없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창날이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중국 무술영화를 연상시키는 창술.

탑 바깥이었다면 짜고 치는 연극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화려했으며, 또한 강력했다.

인간의 피지컬은 옛적에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게 이 녀석의 스킬인가?'

촥!

창날이 신우주의 귀를 가르고 지나갔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강하다.

단순 육탄전이라면 그보다도 훨씬 더.

하지만 극복해야 할 일이다.

저 너머, 레베카와 장 라크루아의 싸움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들 싸움이라고 봐도 좋을 테니까.

콰아아아아앙!

"하하하! 멧돼지가 따로 없군요!"

레베카가 돌진할 때마다 유성이 지상에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것 같다.

붉은 궤적이 선을 그을 때마다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울릴 때마다 건물이 붕괴하고 지반이 무너져내린다.

피하면 사망, 막아도 중상.

그런 공격이 쏟아지고 있는 광경이거늘.

"일직선으로 돌격하는 것밖에 못 합니까?"

장 라크루아는 그게 눈앞으로 닥쳐오는 주제에 기죽기는커녕, 여유로운 목소리로 웃어 재꼈다.

"레베카 순드블라드! 랭킹 7위라는 이름이 울겠습니다! 이렇게 단순해서야 제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댈 수 있겠습니까?"

"닥쳐라."

"후후, 좀 더 재밌게 해 볼까요?"

순간적으로 내던진 단검이 검은색 레이저처럼 뻗어나가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더니, 50m는 족히 떨어진 시계탑을 가볍게 꿰뚫었다.

그것으로도 기세를 꺾기에는 모자랐는지, 경로를 틀더니....

"어?"

원격조종 드론처럼 한 바퀴를 뺑 돌아 신우주를 향해서 쇄도했다.

'이게 왜 이쪽으로 와?'

위협적인 파공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공격에 대비해 신우주가 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한 찰나였다.

콰앙!

어느새 눈앞으로 나타난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방패로 튕겨냈다.

일개 단검이 방패와 부딪쳤을 뿐인데 고막이 먹먹해질 정도의 폭발음이 울리다니.

"괜찮냐?"

"너의 싸움에 집중해라."

레베카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는 다시금 장을 향해 돌진했다.

'이게 최상위 랭커들의 싸움.'

잠시나마 기대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강해지면 비벼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림도 없겠네.'

어제 싸웠던 그 녀석도 리치라는 특성상 운이 좋아서 쓰러뜨릴 수 있었을 뿐, 정면 싸움이었다면 필패였겠지.

외려, 짝퉁이나마 리치여서 쓰러뜨릴 수 있었다고 봄이 옳다.

'입 벌리고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 또한 탑을 공략하려면 언젠가는 저런 녀석들과 싸워야 할 테니.

그럼 우선 이 녀석부터.

눈앞으로 흉흉한 기세를 뽐내고 있는 창잡이 녀석 말이다.

"구경은 다 마쳤나?"

"어."

딱히 친절한 성격이라서 그를 기다려 준 건 아닌 듯했다.

놈의 손아귀를 어느새 회복한 걸 보니.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남은 GP를 우선 확인하자면.

[남은 GP: 440/780]

새로 얻은 신도들 덕분에 GP가 대폭 늘었지만... 안타깝게도 낮부터 감지용 스킬들을 틈틈이 사용한 탓에 절반 정도밖에 안 남았다.

아까 사용한 [접검]도 있고.

'어떻게라도 남은 GP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싸울 방법이.'

그것밖에 없나.

가능하면 천천히 사용법부터 익힌 다음에 써먹으려고 했지만.

'따질 때가 아니지.'

신우주의 능력은 신도들의 질 그리고 양에 비례한다.

조금 전, 새롭게 식량 정책을 펼치며 신도를 대거 영입했지. 그중에는 퍽 재밌는 신도도 하나 있었다.

[프리스트 예시카]

프리스트였다.

하지만 그냥 프리스트가 아니라, 무려 타라 교단의 프리스트.

타라, 고통을 다루는 교단이다.

고통을 주는 것과 받는 것 양쪽을 존중한다고 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가 많은 교단 아닌가?'

왜 타라 신도가 우리 교단에 합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든 선택지가 늘어서 나쁠 건 없다.

스킬 목록을 보거든, 타라에서 익혔던 능력들 전반을 그대로 쓸 수 있는 모양이고.

단테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정상적인 전투원이 들어왔다.

그 녀석 스킬들이 화력은 강해도 하나같이 GP 소모가 과도해서 사리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효율적인 스킬이 생겼으니까.

강자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패배하지도 않는 기술.

'이걸 쓸 수만 있다면.'

상대가 나보다 훨씬 위의 강자.

6등급 모험가라고 해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는다. 소모전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

챙!

어느새 코앞까지 날아든 리자오웨이의 창날을 비껴내듯 쳐내며 신우주가 입을 열었다.

"싸움 좋아하나?"

대답 대신 비껴나간 창이 그대로 바닥을 부쉈다.

콰직!

수다 떨 시간에 공격을 한 번 더 하겠다는 건가. 재미없는 자식.

촥! 촤작!

비현실적으로 화려한 창술이 리자오웨이의 손에서 펼쳐질 때마다 신우주의 몸에 붉은색 선이 그어졌다.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의 통증이 번져나갔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난 싫더라고. 맞으면 아프잖아. 일방적으로 싸우는 입장에서라면 신이 날지 몰라도, 그건 불공평하니까."

"...."

"길드에서 싸우는 애들이 부러웠어. 안전하잖아. 당장 생존율도 엄청 높고."

시간 끌기라고 생각한 건지 쉴 틈 없이 창날이 날아들었다.

시간 끌기가 맞다.

그래서 뭐, 어쩔 건데? 결정타도 못 날리고 사리면서.

축구에서 종종 볼 수 있듯, 시간 끌기도 정당한 전술이다.

"특히 고위직들은 앞에 안 나가고 떠먹여주는 것만 먹기도 하지? 스펙은 엄청 올라가는데, 역으로 그 스펙을 쓸 일은 줄어들고."

떠드는 와중에도 신우주의 몸은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마냥 당하고 있는 건 아니다.

스킬은 이미 발동했다. 그저, 몸이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넌 마지막으로 다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하냐?"

말하는 사이에도 몇 번이고 일방적인 공격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주륵.

리자오웨이의 뺨에 선홍색 줄이 그어지더니, 그 아래로 핏줄기 한 가닥이 흘러내렸다.

"...!"

움찔한 리자오웨이가 폭풍처럼 쏟아내던 창을 마침내 멈추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신우주의 뺨에도 정확하게 같은 자상이 드러나 있었다.

마치 거울에 비친 또 다른 자신처럼.

"아프지?"

시큰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에 신우주가 웃었다.

['고통 분담'을 발동합니다.]

아플 땐 같이 아파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신도: 예시카]

[소모 GP: 40]

[상대와 자신의 신체를 연동한다.

신체가 연동된 적과 부상을 공유한다.

단, 발동까지 상대와 일정 거리 안에서 적정 시전 시간이 소요된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한 자여, 너 또한 같은 피를 흘릴지니.]

멎을 줄 모르고 흘러내는 피에서 스킬이 완성됐다는 걸 직감한 신우주가 리자오웨이의 창을 쳐내며 말했다.

"아플 땐 같이 아파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안 그래?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21화. 공성포 (1)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그렇게 말했다.

종교는 현실의 고통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며, 실질적인 원인 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파했지.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다.

종교가 현실적인 문제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특히 누구나 기댈 곳 없이 저마다의 고독과 맞서 싸워야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추천해 볼 만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실제로 아편 역할을 수행하는 종교도 있기 마련이다.

-타라 교단은 대형 교단입니다.

기사 단테가 말했다.

-아픈 이들에게 돈을 받고 고통을 지워주지요.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 고통의 근원까지도 지워줍니다.

-의사 같은 건가?

-비슷합니다만, 이 능력을 전투에 응용하는 신도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타라 교단은 호전적이니까요.

-전투에 응용한다고? 어떻게?

-타라 교단은 고통을 다루는데, 여기에서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든 다 다루기 마련이라는 거겠지.

총기가 지구 어딘가에서는 같은 사람들 약탈하는 데 쓰이겠지만.

같은 시각 어딘가 산속에서는 물렁한 사람 몸으로도 야생 곰에게 대항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수단이기도 하잖아?

지금, 신우주가 사용한 스킬이 그러했다.

[신도: 예시카]

[소모 GP: 40]

[상대와 자신의 신체를 연동한다.

신체가 연동된 적과 부상을 공유한다.

단, 발동까지 상대와 일정 거리 안에서 적정 시전 시간이 소요된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한 자여, 너 또한 같은 피를 흘릴지니.]

고통 분담.

상대와 나 자신의 신체를 동기화해서, 대미지를 분담하는 스킬.

-타라 교단은 혼자 죽지 않습니다. 머리가 꿰뚫려 죽어가면서도 한 명은 무조건 끌고 가려고 하지요.

타라 교단이 정규 교단임에도 터부시되는 이유라고 했다.

하급 신도조차도 상대 교단의 성기사를 끌고 갈 수 있다고 했던가.

지금의 신우주는 그리 강하지 않다.

단순 전투력이라면 6등급 준 랭커와 정면에서 싸워 이길 정도는 안 되겠다만... 애초에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면 어떨까?

"크윽!"

"왜 그러지? 몸이 굳어 있지 않나."

신우주의 맹공에 리자오웨이가 속수무책으로 뒤로 물러났다.

'이 녀석, 갑자기 기세가....'

쏘아붙였던 조금 전과는 달리 역으로 몰리는 신세.

파박! 팍!

견제차 내지른 창날이 신우주의 팔뚝 피부를 가르고 지나간 순간, 화끈한 통증과 함께 리자오웨이의 팔뚝에도 정확하게 같은 상흔이 드러났다.

흐르는 핏물에 리자오웨이가 눈을 크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이 미친 자식...!"

"감사."

한참 약한 상대에게 공격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게 분통 터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잘못 공격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적어도 고통에 한해서라면, 이들은 운명공동체가 되어 있으니까.

방어 자체를 내던지고 공격에만 몰두하는 신우주를 향해 리자오웨이가 욕지기를 뱉었다.

"부상이 두렵지도 않나? 마조히스트 같은 자식!"

"응, 네가 겁쟁이라는 말 잘 들었고요."

능청거리듯 내지른 칼날이 리자오웨이의 틈을 뚫고 허리를 벴다.

촤악!

"크아악!"

리자오웨이가 고통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일방적인 이득만은 아니다.

['고통 분담'을 발동합니다.]

스킬의 효과로 신우주의 몸에도 약 1초 뒤 같은 부상이 발생하며 고통이 번졌으니까.

그런데 그래서 뭐?

'하루 이틀 아파 봤나?'

이 정도는 어린애 장난이지.

언제나 사지에서 굴러왔던 신우주에게 고통은 오래된 악우와도 같았다.

싫고, 피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할 수는 없는.

식구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하지만 리자오웨이에게는 그러지 않은 모양이었다.

"크아아아악!"

새된 비명을 지르는 것부터가 그 증거지.

"별로 안 아파봤지?"

"이 새끼가!"

"그랬을 거야. 엘리트 코스 밟았잖아. 스쿠툼에 입단해서 조사관으로 어깨 쫙 펴고 다니면서. 안전한 일 위주로 하면서. 스펙업도 쉽게 쉽게 하고."

"네가 뭘 안다고!"

"남한테 죄를 잘도 뒤집어씌워 왔잖아. 그게 다 아픈 게 뭔지 몰랐으니까 그래. 남의 일이니까."

신우주의 일방적인 공격.

의식의 바깥을 뚫고 들어오는 공격에 리자오웨이는 오직 방어만 하기에도 급급했다.

단순히 고통의 부담이 있기도 하지만.

'신우주 이 녀석, 싸움이 능숙하다.'

무언가가 있었다.

스킬의 힘과 무술의 정교함을 넘어서, 싸움 자체가 능숙하다!

상대가 어딜 방어하지 못할지.

어딜 공격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이 모든 걸 본능적으로 계산하는 동물적인 감이.

서걱!

"끄아아아악!"

"큭."

칼날이 발등을 뚫고 들어왔다.

신우주는 긴 비명을 짧은 호흡으로 대체하며 말을 이었다.

"진짜로 아픈 건 말이야. 칼에 베이거나 망치에 두들겨 맞거나 하는 것 따위가 아니거든. 이건 그래도 공평하지. 진짜로 아픈 건 말이야."

진짜로 아픈 건.

정말로 사무치게 아픈 건.

"날 아프게 한 새끼가, 지는 안 아픈 거야!"

신이라는 새끼처럼.

매일 시련이니 뭐니 잘난 듯 지껄이는 주제에, 정작 자기는 무슨 시련을 받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그 녀석처럼.

그 찰나였다.

"...?"

한순간 갑작스레 공격이 멈춰 들었다.

쏟아지던 소나기가 한순간 멎어 버린 것처럼.

방어에 급급했던 리자오웨이도 움찔하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신우주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에게도 한계가 찾아온 건가?'

하긴, 상태가 그보다 심각하면 심각하지, 여유롭지는 않아 보였다.

당장 스킬을 발동하기 전까지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잖아.

누적된 대미지가 있을 터.

하물며 이쪽은 응급약처럼 쓸 수 있는 비상용 힐링 스킬까지 가지고 있지.

같은 부상을 입더라도 견딜 수 있는 한계치가 크게 다르다.

자세히 보면 몸 상태부터 그렇다. 제대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넝마라고 봐도 좋겠군.

애초에 스킬에는 제한 시간이 있는 법.

"흐, 흐하하!! 흐하하하하하하하하!!! 그럼 그렇지!"

이제 내 차례인가?

라며 리자오웨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은 찰나였다.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할 게 아니야. 나도 참, 창의력이 모자라다니까."

신우주가 무방비한 자세 그대로 검을 들어 올렸다.

어느샌가 일반적인 넓적한 서양식 검보다는 레이피어에 가깝게 길쭉한 쐐기의 형태로 변한 검을.

"...?"

뭘 하려고?

이 전법의 모순을 드디어 깨달은 건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 싸움은 나의 승리―― 라고 생각한 순간 신우주가 검을 내리쳤고.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한계를 초월해 엄습한 고통에 리자오웨이가 눈을 뒤집으며 비명을 질렀다.

"쿨럭! 그래, 후욱, 이게 효율적이지."

신우주의 검날은.

"역시 스킬은, 후욱, 사용법을 연구하기, 나름이라니까. 우욱."

다름 아닌 자신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관통한 부상 부위에서 피가 쏟아진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붉은빛이 빠르게 번졌다.

"크아악! 으아아아악! 카아악!"

리자오웨이의 눈이 충혈됐다.

'저 미친 새끼가!'

자해를 했다고?

자해로 강제로 고통을 전가시켰다고?

효율적이긴 하지만, 그걸 진짜로 실행하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다고?

이대로라면 설령 이겨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운데.

"야, 여기 손가락도 들어가겠다."

거기에 농담까지 던질 여유가 있다니.

그런 주제에 그 자신도 성치 않은 신우주가 피가래를 뱉으며 너스레를 피웠다.

"왜 이깟 싸움 한 번에 목숨을 거냐고?"

"...!"

마음을 정확하게 읽은 신우주의 말에 리자오웨이가 움찔했다.

신우주가 히죽 웃었다.

"원래 다 그러고 살아."

비겁하게 살아온 주제에, 잃어버리지도 않을 목숨 하나 아깝다고 범죄자한테 홀랑 붙어버린 누구 따위랑은 다르게.

레베카 순드블라드와 약속했다.

-신우주, 내가 한 명을 담당하겠다. 녀석은 아마도, 나로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을 실력자일 거다.

-네가? 그게 누군데?

-아직은 말해 줄 수 없다. 심증에 불과하니.

-째째하긴.

-신우주, 네 상대도 만만한 자는 아니다. 리자오웨이는 강하다. 진지하게 수련에 정진했더라면 랭커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자다. 붙잡고 있을 수 있겠나?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기세 좋게 해 보겠다고 말하기는 했다만, 확신은 아니었다.

싸워 보지도 않고 확신하는 행동 따위, 패배의 지름길이니까.

또 이 스킬에는 몇 가지 결점이 있기도 하고.

스킬을 발동될 때까지 짧은 거리에서 긴 교전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

같은 부상이어도, 상대가 고성능 힐링 스킬을 가지고 있으면 자해에 불과하다는 것.

또 고통을 받아들이고 싸우는 자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것.

일격에 목숨을 잃게 만드는 부상이라면, 고통을 상대에게 전달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스킬이 해제된다는 것.

[고통 분담]으로 대미지를 공유하기까지는 1초 정도의 딜레이가 걸리니까.

하지만 이것밖에 없었다.

순간 화력은 랭커급이라도, 밑천 드러나고 나면 물로켓에 불과한 신우주가 6등급 준 랭커를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맞승부를 펼치기 위해서는.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다.'

이쪽도 무엇 하나를 잃을 각오를 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슬슬 끝인가.'

허세로 한껏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이 짓도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시야가 흐릿하고 무릎 아래로 감각이 없다.

한계까지 타오른 뇌가 비명을 지르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멍해졌다.

이 이상 피를 흘린다면 아마도 죽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흘려야 할 피를 안 흘리거든.

"확실하게 죽겠지."

신우주가 다시 한번 칼을 허벅지 위로 내리쳤다.

조금의 주저도 없이.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허벅지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오는 칼날의 고통에 리자오웨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신우주는 넘어질 듯 휘청거릴 뿐 담담했다.

입으로 피거품을 문 리자오웨이의 동공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의문이 박혔다.

'저 녀석, 저 녀석은 왜 아무렇지도 않지?'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나조차도 이 정도인데 저깟 하층민 버러지가 견딜 리가 없는데?

가만, 스킬을 사용한 건가?

고통을 줄여 주는 스킬이라든지.

아니면 뭔가 같이 쓸 만한.

당연하지만.

'죽겠네.'

그런 건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틸 뿐.

'참 공평하지. 죽창 메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

다만, 위험을 감지한 고통이 어느 지점을 통과해 뇌 내 마약 물질을 분비해 고통을 강제로 차단했다.

저쪽은 아직 덜 아픈 모양이다만.

그게 승패를 가르겠지.

"흡."

다시금 들어 올린 칼날을 허벅지를 향해 내려찍으려는 찰나였다.

"항복! 항복! 항복이다!"

더 이상 고통을 못 견딘 리자오웨이가 겁에 질려 외쳤다.

"내가 졌다! 이제 충분하니, 멈춰라!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무조건 항복하겠다!"

한계였던 모양.

단순히 블러핑으로 던지는 말이 아니다.

그 눈동자에는 고통을 향한 진한 공포가 짙게 담겨 있었다. 이미 마음이 꺾여 버렸기에 지을 수 있는 눈빛.

하지만.

"응, 아냐."

신우주는 망설임 없이 다시 한번 칼끝을 허벅지로 향했고.

그게 차마 피부를 관통하기도 전에.

"...끄르르르륵."

리자오웨이가 거품을 물며 기절했다.

음?

'고통을 상상하다가 패닉으로 기절한 건가?'

한심한 자식.

연기는 아닌 것 같고.

끝이 우습긴 하지만 어찌 됐든, 큰일 하나 해치웠다.

"...잠깐 쉬어야지."

여러 결격 사항이 있었지만, 살짝 거품 좀 얹어서 준 랭커급 하나 쓰러뜨렸으니까, 이 정도면 위업을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 정도면 쉴 자격이 충분――

하진 않지.

아직 일이 덜 끝났다.

"후후, 레베카 순드블라드,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만 노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 멀리서 그의 동업자가 뼈 빠지게 싸우고 있으니까.

"도망치는 거냐!"

"도망이라니요. 더 붙어있어 봤자 이득이 없을 판에서는 최대한 빨리 발을 빼는 게 상책 아니겠습니까? 당신, 주식도 안 해 봤습니까?"

"이 명예도 모르는 자식이!!!! 마지막까지 도망만 치다니!"

"하하, 감사합니다."

어느새 저 멀리 도주한 장 라크루아가 하늘을 날았다.

장 라크루아는 여유로워 보이는 한편, 레베카 순드블라드의 옷에는 검댕칠이 가득했다.

마땅히 대미지가 없어 보이는 걸 보면 아마도 혼자 돌격하다가 여기저기 박은 거겠지.

'화가 좀 많이 난 것 같은데.'

그냥 전투에서 농락당해서는 아닌 것 같고.

아, 저거 때문인가?

"덕분에 선물도 받아 가니, 참 고맙군요?"

장 라크루아의 오른손에는 검은색 보석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겉에 복잡하게 룬 문자 같은 게 새겨진 보석이.

저게 뭐지?

"이리 내놓아라!"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이를 갈며 분노하고 있는 걸 보면, 귀중하기는 한 모양인데.

"이미 제 것입니다. 당신의 패배군요."

정면을 레베카 순드블라드에게 향한 장 라크루아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에 비해, 그의 두 시선은 신우주를 줄곧 담지도 않았다.

하층민 따위는 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더불어, 준 랭커와 싸우다가 몸이 걸레짝이 됐으니까.

가치를 못 느낀 거다.

초원의 사자가 한낱 토끼 따위에게 경계심을 품지 않듯이.

하지만 녀석은 한 가지 진실을 놓치고 있다.

엑스니힐로의 전직 조직원, 드미트리를 쓰러뜨린 게 정말로 신우주였다는 사실.

'남은 GP가 대충 400 정도인가?'

토끼?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몬티 파이튼의 유니크 등급 만렙 토끼다.

랭커라도 엿 먹일 정도의 공격 한 방은 넉넉하게 먹일 수 있다.

[공성포]

[소모 GP: ∞]

[전력을 다해서 무기를 집어던진다. 그뿐이다.

어느 전설적인 무인의 공성포는 별조차도 쏘아 떨어뜨렸다고 전해진다.

위력은 상당하나, 사용 후 극심한 반동이 발생한다.]

무기로 쓰는 스킬 주제에 포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스킬.

단테가 가진 기술 중 몇 안 되게 원거리 전투용.

하지만 스킬 매커니즘상 한 번이라도 발동하면 그대로 무기랑 이별하고 빈손이 되니만큼 장기전에는 활용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또 단테의 말에 의하면.

-아파서 잘 안 씁니다.

라는 말도 있었고.

반동이 심하다는 말이렷다.

그래도 어차피 한 번만 제대로 공격하면 될 일 아니겠나?

밑져야 본전이지.

"영차."

신우주가 어기적어기적 걸어가 리자오웨이의 팔을 걷어찼다.

무인답게 기절할 때까지도 꽉 잡고 있었던 창이 바닥으로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재질이 좀 좋아 보이는데, 이것도 바스커빌제인가?'

나중에 니콜라스한테 감정 맡겨 봐야겠다.

비싸게 팔 수 있겠네.

투창 자세가 대충 어떻게 되더라?

소모 GP가 ∞라고 적혀 있는데.

'오, 재량껏 불어넣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고통 분담]을 발동하고 남은 GP가 400이었나.

GP가 줄어드는 속도와 비례해서 창에 담긴 힘이 미친 듯이 늘어나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창간이 진동했다.

"하하! 레베카 순드블라드!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당신의 꼴불견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영광...."

오케이, 이쪽 보지 말고 계속 떠들어 봐라.

스킬 발동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 자세를 유지하는 사이, 저 멀리 레베카가 신우주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신우주가 자세를 유지한 채 턱 끝만 까닥여서 장 라크루아를 가리켰다.

시간 끌어 봐라.

"...."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신우주와 수십 년 전에 맞춘 경험상, 저럴 때면 늘 뭔가가 있었지.

고개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끄덕인 레베카가 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크윽! 분하다!"

옳지.

자,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공성포 발동 최소 요건을 만족시켰습니다.]

[GP를 추가로 소모하기 시작합니다.]

[남은 GP: 340]

[남은 GP: 330]

[남은 GP: 320]

...

자, 더 기다려 봐라.

[남은 GP: 280]

아직 한참 남았다.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22화. 공성포 (2)

지금 신우주의 상태를 평가하자면, 다소 애매하다.

단순 전투력은 준 랭커 이하.

상황을 한정한다면 준 랭커와 비빌 수 있는 수준.

[남은 GP: 240]

다만.

극단적으로 제한한 순수 공격력은 랭커에게도 닿는 급.

그러한 공격력의 정수.

[남은 GP: 210]

[남은 GP: 200]

자그마치 '가로 베기'의 8배, 남은 GP 400을 모조리 때려 박으려 하자, 창이 신우주의 몸을 축 삼아서 웅웅 진동했다.

'몸이 부서질 것 같다.'

항공기 엔진을 맨몸으로 지탱하는 듯한 압박감에 전신이 비명을 내지른다.

이건 못 버틴다고.

쓰러져서 쉬라고.

[남은 GP: 170]

[남은 GP: 160]

[남은 GP: 150]

이미 [고통 분담] 스킬을 발동하며 한계까지 치달은 몸이니까.

하지만 [공성포]는 또 다르다.

[고통 분담]이 의지력의 문제이지 고통 자체는 견딜 만했다면, 이건 숫제 몸을 원심분리기에 통으로 집어넣고 달달 돌리는 느낌.

'무거워.'

창이 무겁다.

[남은 GP: 120]

뇌가 흔들린다.

[남은 GP: 110]

당장이라도 놓고 편해지고 싶다.

[남은 GP: 100]

하지만 남았다.

400GP를 온전히 밀어 넣기에는 모자란다. 아직 몇 방울이 남았다.

[남은 GP: 70]

끝까지 아껴서 밀어 넣겠다.

고통이 너무 크다.

[신경 차단]

[소모 GP: 20]

프리스트 예시카의 스킬을 쓰고 싶지만.

'참는다.'

참아야 한다.

식은땀을 미친 듯이 흘리고, 두 다리가 덜덜 떨리고,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 괴롭지만.

[남은 GP: 50]

그럴 때 사용할 GP조차도 아깝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그럼에도 의식이 흐려진다.

'내가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준 랭커 한 명 잡았으면 1인분은 차고도 넘게 한 거 아닌가?

그래, 아무도 내 탓은 하지 않을 텐데.

신우주의 의지를 물질적으로 거부하겠다는 듯, 뇌가 면죄부를 던져 준다.

[남은 GP: 40]

그렇게 의식이 극한까지 달한 찰나.

'이건.'

신우주의 몸에 한 기사의 기억이 스며들었고.

별을 쏘아 떨어뜨리겠다는, 지극히 무모한 생각을 품었던 한 기사의 기억이.

-

알고 있다.

나는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날 몽상가라며 무시하고 있지.

하지만 세상은 그러한 몽상가들로 인해 변화해 왔다.

저 높은 하늘의 별조차 떨어뜨릴 수 있는 일격이라면, 신이라고 하여서 끌어내리지 못할 이유가 있겠나?

날 무시해도 좋다.

아직까지는.

그날이 온다면 나는 몽상가가 아닌, 혁명가로 불리게 될 것이다.

-

선명하다.

지금까지도 스킬을 사용할 때 희미하게 기억이 흘러들어왔던 때가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이드라인에 가까웠다면.

이건 마치 한 사람의 생을 거슬러 올라가는 감각.

'왜 이런 기억이.'

사내는 혁명가였다.

그에게 [공성포]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남은 GP: 20]

[남은 GP: 15]

[남은 GP: 10]

[남은 GP: 5]

성(聖)이라는 이름의 성(城)을 무너뜨리기 위해 갈고닦은 단 하나의 창.

그 힘이 지금.

[GP가 전부 고갈되었습니다.]

['공성포'가 발동합니다.]

신우주의 몸을 빌려 현현했다.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두 다리가 바닥 깊숙이 닻을 내린 듯 단단하게 몸을 지탱한다.

비 각성자라는 현실에도 체념하지 않고, 단 하루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코어 근육이 제값을 한다.

전신의 떨림이 멎고 한 톨의 낭비도 없이 창 한 자루에 모든 힘이 응축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쏘아냈다.

투창이 아닌, 투석기도 아닌, 레일건이라고 불러 마땅한 빛의 기둥을.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겠다는 듯 파괴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빛.

"하하, 레베카 순드블라드. 역시 명성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 내실은 없는――."

그 검은색 빛이 장 라크루아의 몸통을 향해 쇄도했고.

퍼석.

꿰뚫었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광오하다.

그저, 훑고 지나갔다.

그 섬뜩한 궤적 속에 장 라크루아라는 한 인간이 존재했을 뿐.

"...!"

"...!"

"...!"

하늘을 가로 지은 검은 일직선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셋이 일제히 침묵했다.

'이 공격은?'

피격자, 장 라크루아가 두 눈을 의심했다.

'내 팔이...?'

빛의 궤적이 훑고 지나간 팔뚝이 소멸되며, 손이 허공을 날았다.

레베카 순드블라드의 돌격을 맞아도 몇 번은 버텨냈던 육체가 일부나마 흔적조차 안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치 거대한 산사태가 지나가는 모든 걸 집어삼키듯, 순리를 받아들였다.

그만 경악한 게 아니다.

'신우주, 언제 이런 힘을?'

레베카 순드블라드 또한 장 라크루아를 도발하는 걸 잊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비각성자로 수십 년을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웠지만, 끝내 탑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도태되었던 그의 친우가.

지금, 하늘을 떨어뜨리겠다는 듯 쏘아 올렸다.

너무나도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축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파괴적인 빛의 기둥을.

잠깐.

'결계석!'

황급히 돌진으로 날아간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장 라크루아의 떨어진 팔을 주워들었다.

그 안에 담긴 검은 색 보석, 결계석을 회수하는 데 성공.

'큰일이 날 뻔했군.'

그리고.

'젠장, 빗나갔다.'

신우주가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갔어야 했는데.'

심장을 꿰뚫을 생각이었는데, 너무 오른쪽으로 가 버렸다.

팔 한쪽을 통째로 끊어냈다.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하나 유효타를 넘어 괄목할 만큼의 성과.

불과 얼마 전까지 하층민이었던 신우주가 쏘아 올린 공격이라고는 믿기지 않겠지.

그럼에도.

'젠장.'

실패다.

전투 불능이지, 도주 불능은 아닐 테니까.

적어도 다리 한 짝을 날려버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되면 엑스니힐로에서도 앞으로 나를 표적으로 노릴 텐데.'

엑스니힐로를 적으로 두는 건 상관없다.

어차피 탑을 오르는 이상, 언젠가가 되었든 고층에서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게 될 상대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지, 지금 일어나야 할 일이 아니다.

아직은 엑스니힐로의 말단에게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끝이다.

'아니.'

포기할 때가 아니야.

머리를 짜내면 수가 더 나올지도 모른다.

더 할 수 있다.

신우주가 앞으로 걸어 나간 찰나였다.

"...!"

숨조차도 못 쉴 만큼 끔찍한 통증이 엄습했다.

'이, 이건 대체?'

몸이 조각날 것 같다.

뼛조각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근육을 난도질하는 것 같다.

갈라진 피부 위로 불을 붙인 것 같다.

콘크리트에 파묻힌 듯한 묵직한 피로감과 동시에, [고통 분담]을 발동하고 싸웠던 때조차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 손끝부터 시작해 어깻죽지를 타고 전신으로 엄습했다.

털썩!

그대로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신우주가 땀을 줄줄 흘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냈다.

"으윽, 컥, 욱."

설마, 가능성은 하나다.

반동을 못 견딘 건가.

과하게 강한 힘을 미약한 몸으로 쓴 나머지, 그 반동으로 시전자의 몸 또한 못 버티고 파괴된 건가.

GP조차도 전부 바닥이 났다.

'조졌다.'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이건 의지로 어떻게 극복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단검 하나만 날아와도 죽음이다.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간단하게 목숨을 뺏길 거다.

도박을 실패한 반동으로 신우주가 바닥에 뻗어 옴짝달싹도 못 한 채 식은땀만 흘리는 찰나였다.

"하, 하하, 하하하하."

장 라크루아가 불길한 웃음을 터뜨렸다.

사형 선고처럼 들리는 웃음을.

"스쿠툼, 이런 수도 쓸 줄 알았군요. 언제 준비한 거죠? 이런 비밀 병기를."

하지만 다음 순간.

광소와 더불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신우주는 물론, 레베카 순드블라드마저도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저격에 특화된 랭커를 전장에 배치해 뒀을 거라고는."

"...?"

뭐라는 거지?

저격에 특화된 랭커?

그게 누군데.

"처음부터 전면전을 피하고 몰아간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게 전부 이 장 라크루아를 방심시키기 위함이었을 줄이야. 생각보다 치밀하군요. 예, 한 방 먹었습니다."

어?

저 새끼, 진짜로.

'진짜로 착각한 건가?'

진짜로?

내가 공격했다고는 차마 생각조차도 않는다는 눈치인데?

"안타깝게 됐군요. 회심의 일격이었을 텐데 그게 실패해서. 이 장 라크루아를 놓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속이 탈까요?"

어지간히 잘난 듯 떠드시는데.

가만, 잘 생각해 보니까.

'이거 상황이?'

자기보다 아득히 약한 준 랭커 하나랑 사활을 걸고 자강두천하던 하층민이.

반 시체가 돼서 다 죽어가던 주제에 갑자기 랭커 팔짝 날려버릴 공격을 날린다?

'음, 나라도 안 믿겠네.'

안 믿지.

눈치가 빠른 레베카 순드블라드의 분노에 찬 한마디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제기랄."

그것도 그럴 게.

쟤, 인간 거짓말 판독기잖아.

컨셉질 포기 안 한 거 보니까, 장 라크루아는 진짜로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게 맞다.

저 말들이 블러핑이었다면 전투 태세를 가다듬었겠지.

이게 편하네.

"후후, 분한 모양이군요. 뭐, 이쪽도 놓친 게 있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 기회는 언제든 있습니다."

장 라크루아가 미련 없이 떠날 채비를 했다.

"놓아 줄 것 같나?"

이대로 추적하겠다.

레베카가 다음 공격을 준비한 순간이었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바가 아닙니다."

장 라크루아가 품 안에서 꺼내든 스크롤을 찢은 찰나, 그의 뒤로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균열이 일어났다.

포탈이다.

그 안으로 장 라크루아가 몸을 집어넣으며 웃었다.

"크흐흐, 이 빚은 언젠가 갚겠습니다. 그전까지는 눈먼 칼에 맞아 죽지 않기를."

"이 개자식이!"

레베카가 뒤늦게 몸을 던져 뒤쫓았지만, 장 라크루아는 이미 포탈과 함께 사라졌다.

한발 늦었다는 걸 직감한 그녀가 바닥으로 방패를 꽂아 넣었다.

"제길...!"

회심의 기회였는데.

엑스니힐로의 간부급을 사로잡을 기회를 코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적어도 잃기만 한 건 아니다.

조직 내부에 깊게 뻗어 있던 엑스니힐로의 영향력을 뿌리 뽑는 데 성공했으며.

리자오웨이가 더 썩히기 전에 정리했다.

장 라크루아가 가지고 도주하려 했던 '결계석'도 돌려받았다.

하지만 이 셋은... 새롭게 발견한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고개를 돌린 레베카가 저 멀리, 앞으로 뻗은 채 기절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렇게까지 강해진 거지.'

신우주였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벌써.

6등급, 준 랭커 하나를 전면전으로 제압하는 걸 넘어서서, 진짜배기 랭커급 적 하나를 전투 불능 상태까지 몰아세웠다.

'신우주, 대체 어떤 스킬을 각성한 거지?'

문득, 탑이 열렸던 초창기 시절의 그를 떠올려 보았다.

모두가 아마존에 표류한 비행기의 일반인 승객처럼 겁에 질려 있을 때였던가.

-새끼들, 좀 치네. 누가 뒤지나 함 해 보자.

오직 신우주만이 돌을 쥐고 몬스터들과 싸웠다.

비각성자 주제에, 그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각성자가 즐비해진 뒤에도, 한계가 뻔한 비각성자의 가치가 추락한 뒤에도 그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

그랬던 비각성자가, 마침내 힘을 손에 넣었다.

파격적일 만큼 강한 힘을.

저 한 명만 온전히 성장할 때까지 지켜줄 수 있다면, 어쩌면.

"신우주."

넌 다시 한번 나와 어깨를 맞대게 되겠구나.

*

첫 각성은 중요하다.

이후로 성장하며 뻗어 나갈 무수한 가능성 아래 토대가 되기에.

예를 들자면 이런 거다.

Sword_master - 근접전 계통 스킬로 시작해서 그런가? 이후에도 비슷한 근접전용 스킬만 생기네.

전사는 전사 계통의 스킬 위주로 생긴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는 마나 운용에 필요한 기초 스킬이 필요한데, 대부분 그 스킬을 얻고 시작한다.

둘을 함께 얻을 일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가설을 세우기도 했다.

Catchball - 내 생각인데, 각성 전에 굴러먹던 대로 스킬을 얻은 거 아닐까? 주위에 비각성자들 보면 다 그렇던데.

각성 후천론이었다.

각성 후 어느 스킬을 얻을 것인지는 평소의 행적에 달려 있다는 것.

실제로 비각성자 시절에 잘난 놈일수록 좋은 스킬을 얻을 때가 잦았으니.

아무튼, 중요한 건 이거다.

"...."

병상에 누운 신우주가 검정색 액체를 쪽쪽 빨았다.

콜라, 포션이다.

"아침에 3개, 점심에 2개, 저녁에 2개 드세요."

겉보기에는 멀쩡하니 흔적도 없이 다 나은 것 같지만, 의사 말로는 그렇지가 않다나.

그의 옆에 어제부터 달라붙어서 잔소리를 내뱉는 어린 여성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이제 막 고등학생쯤 되었을까.

이름은 야스민.

놀랍게도 탑에 들어온 지 20년이 넘어가는 의사 선생님이시다.

그것도 엄청나게 유능한 그녀가 손에 든 차트를 신우주의 갈비뼈 위로 내리쳤다.

"아악! 환자를 왜 치는데?!"

"쯧, 뼈가 아주 가루가 됐네요. 근육들도 전부 찢어졌고, 연골도 갈렸고. 쯧, 피부는 무슨 사포로 갈았나? 대체 무슨 스킬을 쓴 거죠?"

"그게."

"말하지 않아도 좋아요. 알려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에휴, 쯧."

"아, 네."

침이 튀기네.

평소 신우주였다면 우스갯소리라도 던져 봤겠지만, 이 의사 선생님의 전신에서는 농담을 씨알 하나 안 들어주겠다는 듯 분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그런 스킬을 사용하려거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각오도 해 줘야겠어요."

"그 정도라고?"

"저니까 이 정도로 끝난 거죠. 다른 의사였으면 불구 신세였어요. 살았어도 후유증이 남아서 모험가는 은퇴해야 했겠죠."

"...."

반박하기 어렵다.

치료 스킬이 만능은 아니니까.

상대방의 육체와 부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효과가 천차만별로 갈린다고 했었나?

"레베카 요청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하여간에 사람이 센 척하면서 마음은 약해서. 쯧."

한참을 툴툴거리던 야스민이 다음 환자를 보겠다며 병실 문을 열었다.

"갈게요. 아침 3병, 점심 2병, 저녁 2병, 잊지 마요."

"아침 2병에 저녁 3병은 안 되나요?"

"원숭이세요?"

쾅!

이번에는 그대로 나갔다.

야스민이 나간 출입구를 바라보던 신우주가 피식 웃었다.

'이건 내가 고마워해야겠네.'

설마, 랭커급 힐러까지 붙여 줄 거라고는.

레베카 순드블라드의 개인 연줄이 아니었다면 힘들었겠지.

정작 스쿠툼 내부 일 처리가 바쁘다면서 본인을 못 만나고 있기는 하다만.

'다 낫고 나면 사무실 쳐들어가서라도 이야기 제대로 나눠 봐야겠다.'

이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드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신우주, 건강해 보이는군."

"레베카?"

레베카 순드블라드였다.

골골대고 있는 신우주와는 달리 첫날부터 멀쩡했던 그녀가 대충 걸터앉았다.

무슨 말을 하러 왔지?

팀장급 한 명 빈자리 메꾸는 겸사겸사 내부 적폐들까지 처리하느라 바쁘다면서 농담 따먹기라도 하러 왔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레베카의 다음 말에, 신우주는 그만 마시던 콜라를 뿜을 뻔했다.

"신우주, 언제까지나 내 곁을 지켜 줄 수 있겠나?"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23화. 특별 심사 (1)

"내 곁을 지켜줄 수 있겠나?"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차분하게 내뱉은 말에 신우주는 콜라를 내뱉을 뻔했다.

곁을 지켜달라고?

'누가 누굴?'

이 미친 자야.

너 랭킹 7위야.

싸우는 거 보니까 아주 인간 불도저가 따로 없더만.

달려가는 네 어깨에 스치기만 해도 나는 그대로 소멸할 거다.

...라고 진심을 말할 수는 없다.

가까스로 멘탈을 다잡은 신우주가 입을 열었다.

"구체적으로."

"스쿠툼의 부단장 자리를 주지."

"쿨럭! 쿨럭!"

이번에는 못 참고 살짝 뿜었다.

"부단장? 내가?"

"그래, 스쿠툼의 2인자 자리를 주지. 당장은 안 되더라도, 1년 안에 건네주겠다. 내가 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가치 있는 대가일 것이다."

머릿속에 우주가 떠올랐다.

초거대 길드의 2인자 자리를 제안받다니.

이거 하나면 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을 거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데.'

물론, 레베카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머릿속에서 그려왔던 말이었다.

"처음부터 네 자리였다."

스쿠툼을 처음 창설했을 때부터.

말은 안 했지만, 신우주는 스쿠툼의 대부와도 같은 사람이니까.

길드를 창설할 당시 창업자 자리를 제안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이후 연락을 끊었지.

일이 바쁜 것도 있었고, 신우주에게 부담을 지우기 싫은 것도 컸다.

능력이 없다며 자조하던 참이었으니까.

어설프게 도우려 들었다가는 동정하지 말라며 역정을 냈을 거다.

아니지.

스쿠툼이 말이 대형 길드지, 사실상 탑 내의 치안을 상징하는 존재 아닌가?

"힘 있는 인재는 많지만, 믿을 수 있는 인재는 드물지. 신우주, 너라면 내 옆자리를 기꺼이 내줄 수 있다."

말 한 방 한 방이 가슴에 푹푹 들어와서 꽂혔다.

한없이 매력적인 말들이.

받아들인다면?

'경찰이 곧 내 힘이 되는 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 했을 권력.

그 코앞서 신우주가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싫어."

거절이었다.

"어째서지?"

"난 약하니까. 스쿠툼을 노리는 사람들은 많을 테고. 어중간하게 약한 놈이 앉아 있으면 위험해질 테지."

스쿠툼의 간부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악당들이 노리고 있을 터.

신우주가 그 자리에 앉거든, 생선 냄새 맡은 고양이처럼 달려들 거다.

"내가 돕겠다."

레베카가 반박했다.

"빠르게 강해질 수 있도록 장담하지. 길드의 모든 재산을 동원해서 널 랭커 이상의 강자로 만들어 주겠다. 보장하지."

"아니, 그런 식으로 뒤늦게 낙하산 태워준들 길드 내에서 인정도 못 받을 테고."

신우주가 다시 한번 거절하며 짧게 말했다.

"자리는 탐나지만, 방식이 찝찝해."

아직 준 랭커도 못된 신세다.

리자오웨이를 쓰러뜨린 것도 상호확증파괴를 염두했던 전법 덕분이지, 정상적인 전투였다고 볼 수는 없고.

스쿠툼의 간부진에는 랭커 이상의 강자들이 득실거리지.

애초에 그들이 말을 안 들을 거다.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말들이 나올 거다. 공정하지 못하다고."

"...그 말도 맞군."

설명을 들은 레베카 순드블라드는 납득한 듯하면서도 잠시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완전히 받아들였다.

"존중하겠다. 이번 제안은 없었던 것으로 하지."

"그래, 누가 들으면 큰일이 날 말이니까 입 간수 잘하고."

그래, 이 정도인가.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결국, 내게 친구는 사치군.'

언제나 생각했다.

믿을 수 있는 친구를 가까운 자리에 두고 싶다고.

배신과 의심, 음모 사이에 잡혀 살아왔다.

설령 배신당하더라도, 그 상대가 신우주라면 괜찮다는 생각마저 있었다.

그에게는 목숨을 몇 번이고 빚졌으니까.

하지만 본인이 거절하겠다면 그 의견 또한 존중해야겠지.

"좋다, 용건은 끝났다."

레베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 안 끝났어. 심사면제권 제대로 처리해 놓고."

"...관련 수속은 이미 끝내 두었다만."

오, 일 처리가 빠르네.

"쾌유를 바라지."

그렇게 레베카가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야."

신우주가 그녀의 발을 멈춰 세웠다.

할 말이 남은 건가.

아니면 미련에 마음이라도 바뀐 건가.

레베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선 순간, 신우주가 예의 뒷골목 건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쌩까지 마라."

"뭐?"

"술친구 필요하면 부르라고. 거, 친구비 좀 밀렸다고 손절당한 줄 알고 섭섭해 죽는 줄 알았네. 야, 사람이 좀 능력 없다고 무시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 순간이었다.

"풉."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흐흐, 흐흐, 푸하하하하!"

그 얼굴을 수십 년 전부터 봐온 신우주마저도 놀랄 만큼 시원한 웃음을.

그리고 또.

스쿠툼의 단원들을 비롯하여,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인 의선, 야스민조차 본 적이 손에 꼽는 웃음을.

'내 말이 그렇게 웃겼나?'

정작 신우주 본인은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랐지만.

"야, 사람 무안 주지 마라. 너 진짜 그렇게 사람 민망하게 만들고 그러는 거 아니다."

"오해다. 생각도 못 해 본 말이라."

눈물을 닦은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하지, 나는 일이 바빠서 일찍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으니."

"갑자기? 어떤 일?"

"엑스니힐로."

"아."

"길드 내에 놈들의 끄나풀이 몇 년씩 심겨 있었던 초유의 사태이니까 말이다."

하긴, 이해할 만한 일이다.

바쁘다는 사람을 굳이 붙잡아 둘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곧 보겠지.'

탑의 정상을 노리는 이상, 언젠가는 보기 싫어도 보게 될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얼른 병상을 털고 올라가고 싶어졌다.

"참."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잊고 있었다는 듯 언급했다.

"심사 면제권에 관해서 말이다만...."

"응, 그거 때문에 고생했지."

까먹고 있었네.

뭐 때문에 목숨 걸고 싸웠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게 말이 없었다.

심사면제권은 그가 후발주자로서 탑을 오르는 데 꼭 필요하니까.

저층만 몇 년씩 오를 일 있나?

그런데 왜일까.

"...."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말이 없다.

아까도 말 꺼냈었는데, 애매하게 확답 없이 흘렸던 것 같기도 하고. 관련 수속을 끝내 두었다면서 말이다.

잠깐.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야."

"미안하다."

이 자식, 설마.

신우주가 따지기도 전에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먼저 대가리를 박더니 기습적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일단 들어봐라."

*

레베카가 돌아간 뒤, 스쿠툼에서의 이후 일은 비슷했다.

"아침에 세 병 마시라고요! 저녁에 세 병이 아니라! 원숭이세요?"

병상에 누워 있을 때는 야스민에게 혼나고.

남는 시간에 교단 운영하고.

-성공적으로 정착 중입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방랑자들이 있어, 우선 무리에 받아들였습니다.

"잘하고 있어요. 신도들은 큰 결격 사항이 없다면 되도록 받으세요."

-실례입니다만, 걱정은 되지 않으십니까?

"사람 가려 받는 거 아니잖아요. 또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신도들이 절 믿으니, 저 또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교단 운영하고.

[신앙심이 상승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쿠툼의 단물을 빨아먹는 것.

"대련하죠."

"예?"

"의사 선생님이 병실에 누워만 있지 말고 운동 좀 하라고 해서. 그래야 빨리 낫는다길래."

스쿠툼에는 잘난 전력들이 많으니까.

그들과 가볍게 치고받으면서 탑의 전력에 대해 파악했다.

귀한 기회이기도 하고.

그렇게 한 보름 체류했나.

"스쿠툼의 귀한 손님임을 증명하는 카드입니다. 소지하고 계시면, 필요할 때 편의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나야 좋지."

신우주는 스쿠툼이 준비한 자격 증명과 함께 지부를 떠날 수 있었다.

체감상으로는 한 몇 달 머무른 것 같은데.

마음만 같아서는 더 쉬고 싶다만.

'슬슬 가기는 가야 하니까.'

이쯤이었나?

지부를 떠나 꽤 먼 거리를 걸어온 신우주가 도착한 곳은, 레베카가 미리 언질을 준 곳이었다.

탑의 7층, 모험가 협회에서 시험받으러 오라며 지정해 준 심사장이 이 부근.

그 앞에 선 신우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발을 들이밀었다.

'특별 심사를 받아야 한다니.'

그렇다.

심사 면제권은 결국 못 받았다.

뭐라고 했더라.

-최근 치안 문제가 잦아서 말이다. 엑스니힐로도 그렇지만, 빌런 조직들의 테러 방식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당분간 심사 면제의 발급을 보류하겠다고 했다.

나름의 이유는 있다고 한다.

그래도 특별 심사라는 것으로 대체 받을 수 있을 거라면서.

-그럼 뭘로 심사하는데?

-절대적인 전투력이다.

-전투력?

-심사를 담당한 지부에서 심사관을 배정해 줄 거다. 실력으로 증명하면 된다. 신우주, 너 정도면 할 수 있을 터.

심사관이랑 일대일로 맞다이를 까고, 그걸로 증명하라는 말이었다.

'자기들 맘대로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모험가 협회라는 녀석들은 원래 그렇다.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일방적으로 방침을 정하고, 그걸 강요하지.

사실, 각성자 테스트라는 건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논란의 대상이었다.

Catchball - 자기들이 뭐라고 남을 관리하고 감시해?

Catchball - 스킬을 공개하라고? 돌았냐?

Yehyeh - 돌으신?(진짜 돌음?)

당시에만 해도 각성자 테스트라는 건, 스킬을 공개하고 모든 신상을 협회에 등록하는 절차였으니까.

Catchball - 그거지. 자기들이 탑을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독재 국가 만들려는 거.

Sword_master - 불쾌하긴 하군, 나는 참여하지 않겠다.

보이콧도 일어났다고 하지만, 결국 모험가 협회의 힘이 강해서 오래가지 못했다지.

그렇게 긴 반감의 세월이 끝난 건, 어느 불세출의 천재, 적연금술사가 한 물질을 발견한 뒤였다.

Tier_maker - (속보) 각성자 테스트 개편.

탑에만 존재하는 광물 중, 각성자들에게만 반응하는 파장을 뿜어내는 편리한 물질을 발견해 냈다나?

그 파장을 쬐고, 반응이 드러나나 확인하면 끝.

Sword_master - 그거 좀 찜찜한데? 몸에다가 무슨 마법이라도 걸지 누가 알아?

Merlin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무식한 티를 못 숨겨요.

Sword_master - 너 어디 사냐?

심리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어쨌든 종래의 독재 관리보다는 나았기에 이걸로 낙점.

신우주도 이걸 받았지만....

'이번에는 스킬도 증명해야겠지.'

실질적인 '전투 능력'이 특별 심사의 통과 조건이 된 만큼, 예전처럼 넘어가기는 쉽지 않겠지.

관두면 그만이겠지만, 그럼 시간 문제가 극심해진다.

'스킬을 어느 정도는 드러내야 해.'

무엇을 드러낼 것인가.

"신우주 모험가, 확인 완료되었습니다."

상념에 빠진 채 무작정 걷다 보니, 어느새 건물 내 접수처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심사가 시작될 예정이니, 심사장에 입장해 대기해 주십시오."

"빠르네요?"

"예, 신청 자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뿐더러, 합격률도 낮으니까요."

그중 하나가 나라는 건가.

왠지 말 뒤에 붙은 '합격률이 낮다'는 소리가 불길한데?

"곧 심사관이 올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곧 최첨단 시설이 눈에 들어왔다.

온 사방이 흰색.

마치 SF 영화 속 운동선수들의 훈련 시설 같다고 해야 하나?

-신이시여, 현재 정착지를 찾는 데 성공한 듯합니다.

"잘했어요."

특별한 건 없어 보이고, 자세히 둘러보는 대신 대충 단테와 노가리를 까고 있는 참이었다.

위이잉.

곧 덩치 큰 남자 한 명이 시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되게 험상궂네.'

라틴 계열인지 서구적인 외모에 자연스러운 구릿빛 피부, 길게 자란 금발을 뒤로 묶어서 넘긴 남자였다.

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핫! 자네가 이번에 특별 심사를 신청했다는 그 맹랑한 모험가인가?"

"그렇다."

"이거 기대되는구만 그래? 아무나 신청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또 누구나 통과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겉으로는 경박해 보이지만, 우습게 볼 인물은 아니겠지.

모험가 협회에서 아무나 특별 심사의 심사관으로 앉혀 뒀을 리가 없으니까.

적어도 전투력은 두고 볼 일일 거다.

최소 준 랭커급.

탑을 자유롭게 오르내릴 권한을 줄 정도라면, 그 정도는 된다고 보는 게 맞겠지.

자기도 못 하는 걸 남한테 심사를 봐주니 마니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최소 준 랭커 정도라고 보고 가자.'

그럼 가능성이 없진 않다.

신우주는 자기 자신의 실력을 이렇게 판단했다.

갖은 상황적인 이점이 따르면 가까스로 준 랭커와 비빌 정도라고.

여차하면 쓰러뜨리면 심사에서 떨어질 일은 없겠지.

"모험가 협회 담당 심사관, 알렉이다. 이거 참, 번거롭기만 하고 쓰레기 같은 절차가 생겼지. 안 그래?"

쓰레기 같은 절차?

간단한 자기소개에 이어서 협회 직원답지 않은 말을 던진 그가 건들건들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피차 바쁜 사람이고 곧 식사 시간이기도 하니까 얼른 끝내고 가자고."

"통과 조건은?"

"그건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내가 알아서 판단하면 되는데, 이만하면 됐다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순간, 그의 눈빛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날 쓰러뜨리거나."

그렇게 나오신다는 거군.

짐작한 바다.

"자, 자. 지금 바로 시작하는데, 치고받기 전에 일단 가볍게 악수 한번 어때?"

저쪽이 장난기 있게 손을 내밀었다. 신우주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잡았고.

꾸드드득!

어마어마한 압력과 함께 손아귀가 짓이겨지는 듯 불쾌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신우주가 인상을 찡그리자, 심사관이 킥킥 웃었다.

"내가 바로 시작이라고 말했을 텐데. 모험가가 이렇게 부주의해서 쓰나?"

"...!"

"뭘 그렇게 굳어 있나?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인데. 자! 견뎌 보시게!"

그 순간이었다.

"크윽...!"

신우주에게 전신을 강하게 짓누르는 중력의 압박이 느껴졌다.

부처님의 손가락으로 꾸욱 눌린 손오공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벌로 지구를 들어 올린 아틀라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몸이 한없이 아래로 꾸드득 눌리며 전신의 뼈마디가 뿌득 뿌드득 비명을 질렀다.

"이...건 너무 비겁...하지 않나?"

다짜고짜 붙어서 스킬을 질러?

힘겹게 입을 연 신우주를 비웃듯 알렉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곧 식사 시간이니까 말이지!"

순간, 시종일관 건들거리는 모습, 선글라스의 검은 장막 속으로 숨겨져 있었던 알렉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이 개자식.

"신우주, 난 자네를 탈락시킬 생각이야."

처음부터 올려보낼 생각이 없다고 생각한 찰나였다.

"그리고 더불어."

알렉의 입에서 최악의 상황이 튀어나왔다.

"내 모험가 등급은 7급이다."

7급.

그 짧은 자기소개에 신우주가 어금니를 갈았다.

젠장, 예상보다 좋지 못한 숫자가 튀어나왔다.

준 랭커 중에서 최상급 혹은.

하위 랭커급이다.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24화. 특별 심사 (2)

랭커.

단순히 요약하자면, 순위권에 드는 사람이라는 말.

이 랭커라는 게 왜 특별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Sword_master - 협회에서 통지가 왔다. 랭킹 변동사항 참고하라고.

이 빌어먹을 모험가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지위니까.

순수 전투력.

탑 공략에 세운 공헌치.

모험가로서 지닌 명성과 영향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각각 점수를 부여해서 정해지는 게 모험가 등급이다.

이런 잡스러운 부분에 있어서 권위자가 있으니.

Tier_maker - (정보) 모험가 등급에 대해서 알려드림.

티어메이커.

인트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서열질을 좋아하는 유저가 그 당사자다.

Tier_maker - 크게 따지면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있음 ㅇㅇ

Tier_maker - 3급까지는 하급. 6급까지는 중급인데, 사실 이 정도만 찍어도 어디에서 무시는 안 당하지? 길드 서류심사도 안 떨어지고.

하지만 사실 6급까지는 애매하다.

6급에 들면 준 랭커라는 멋진 이름을 듣기는 하지만... 동시에 수문장 구간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서 끝나는 사람들이 대다수니까.

회사로 치면 과장 느낌이다.

차장같이 본격적인 간부 코스 이상은 못 올라가고, 짬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치가 탑에서는 딱 6급.

그나마 탑 내부에서 오르내리는 데 대부분의 제약이 사라지는 게 의의라면 의의랄까.

참, 리자오웨이도 6급이었다.

그중에서는 상급이겠지만.

Tier_maker - 진짜는 7급부터임. 왜일 것 같음?

이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누구나 다 이유를 알고 있다.

평가 기준이 급격히 삼엄해지는 탓에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줄어드는 것도 줄어드는 것이겠지만.

Tier_maker - 랭커가 나오니까.

랭커.

탑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등장하며 전투력이 하늘 끝까지 치솟는 게 7급이니까.

Tier_maker - 모험가 협회에서 자기들 기준으로 판단해서 1000명 뽑고, 명함 달아 주는 거임.

비공식적으로는 준 랭커 10명보다 랭커 1명의 가치를 더 높게 칠 정도.

모험가 협회는 랭커들에게 공식적인 지위와 더불어 갖은 특권도 제공해 준다만.

랭커들의 이름을 빛나게 만드는 건 그깟 외부의 인정 따위가 아니다.

"하하! 잘 버티는군!"

본인들의 순수한 강함, 그 자체니까.

"더 버텨 보시게!!"

"크으으으윽...!"

쿠우우우웅!

그 말과 동시에 정수리 끝부터 내장까지 꿰뚫듯 강렬한 압력이 덮쳐왔다.

신우주는 바닥을 박차며 당장이라도 개구리처럼 자빠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했다.

'아, 이런 컨셉이란 말이지? 처음부터 공정하게 평가할 생각은 없었구만?'

신도 수를 늘려서 신체 능력을 강화하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기절했겠다.

"하하하! 잘 버티는군! 재밌어!"

저 남자가 웃을 때마다 몸을 뒤엎은 무게감이 가파르게 치솟는다.

뿌득! 뿌드득!

바닥에 깔린 장판까지 비명을 질렀다.

재밌네.

무슨 수컷들 기 싸움하는 것도 아니고.

'힘을 아낄 때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힘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심사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약해 보이고 싶지도 않으며, 또 지나치게 다양한 스킬을 보이고 싶지도 않다.

과하게 주목받을 테니까.

어떻게 하면 소수의 스킬만을 골라 최대한 효율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스쿠툼에 있는 내내 고민했고.

결론을 내렸다.

신우주가 결정한 '모험가 신우주의 보유 스킬' 컨셉은 이러했다.

['통각 강화'를 발동합니다.]

[신도: 프리스트 예시카]

[소모: 20]

[타라는 인간의 고통을 관장하고 있다.

고통에서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가 하면, 더없이 짙은 고통을 내려 지옥으로 떨어뜨리기도 한다.

타라의 신도들은 고통을 다룬다.

고통을 부여하는 것, 그들이 타라의 아래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기적이다.]

힘을 숨김.

화려한 스킬은 최대한 안 쓰고, 눈에 안 보이는 것 위주로만 골라 쓰겠다.

['무면허 지압법'을 발동합니다.]

[신도: 무면허 의사 스튜어트]

[소모 GP: 8]

[스튜어트의 지론은 간결했다.

통증은 더 큰 통증으로 잊을 수 있다.

아프다. 정말 엄청나게 아프다. 부상이 나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스튜어트는 효과를 확신했다.]

자, 바라는 대로 해 주마.

신우주가 손에 쥔 심사관의 손에 있는 한껏 힘을 불어넣었다.

"끄흐읍?"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개미가 신경을 물어뜯는 듯한 고통에 심사관의 안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고통스럽겠지.'

그도 알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우주 자기 자신한테 써 봤으니까.

고통에 위험을 느꼈을까. 잡았던 손을 다급히 놓고 달아나려는 심사관의 기색에,

"어딜... 도망가?"

꽈드득!

신우주가 한층 더 강하게 손을 쥐었다.

"끄으으으으으으윽...!"

아프냐?

이쪽은 아직 용건 남았거든.

['팔씨름'을 발동합니다.]

[신도: 주정뱅이 아르보]

[소모 GP: 5]

[주정뱅이 아르보는 흥이 오르면 아무에게나 팔씨름 술 내기를 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술주정은 주점 식탁 9개를 박살 내고, 타라 전역의 술집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에도 고쳐지지 못했다.]

중력에 폐가 알루미늄 캔처럼 찌그러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마 위로 비처럼 쏟아지는 땀에도 불구하고 신우주의 눈빛에 광기 어린 웃음이 번뜩였다.

"기, 싸움이, 하고 싶은 거, 아니었나?"

네 말대로,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인데.

신우주, 현재까지 들킨 스킬 0개.

*

지난번 리자오웨이와의 싸움을 복기하며 깨달았다.

"어때? 이거, 재밌지 않아?"

각성자들을 상대하기 좋은 상대법을 깨달았다.

"큭, 끄흐윽!"

고통을 주는 것.

고통 앞에서는 제아무리 강한 상대라고 해도, 자유롭기 어려웠으니까.

['통각 강화'를 발동합니다.]

신우주에게 압박당하는 알렉의 몸에서 식은땀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고통스럽겠지.

이쑤시개로만 찔려도 칼날에 깊게 찔린 듯 신경이 타오른다고 했으니까.

실제로 다치는 건 아니지만, 견디기는 어렵겠지.

치과에서 신경 치료만 받아도 울부짖는 게 사람이잖아?

"이, 이 자식이!"

쿠웅!

일갈과 함께 중력이 한층 더 강해졌다.

하늘에서 거대한 손가락이 내려와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신우주의 입에서 무언가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슬슬 한계점.

그리고.

'이 정도인가?'

적응했다.

그리고 대충 깨달았다.

이 무거운 중력 속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굳이 거스르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이용하자.'

악수를 한 손이 아닌, 다른 손에 붙여 두었던 무형을 보이지 않게 칼의 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알렉의 면전까지 들이밀었다. 올라가던 손이 그곳에서 뚝 멈춰 섰다.

더 올라갈 동력을 잃은 것처럼.

"후, 후후, 후후후! 왜 그러지? 벌써 지쳤나?"

알렉이 고통을 이 악물고 참으며 힘겨운 목소리로 물었다.

적응한 건 신우주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무겁게 짓누르는 중력에 적응했듯, 알렉은 손바닥을 타고 날카롭게 올라오는 고통에 적응했다.

그 말인즉슨.

'고통이 모자랄 때는, 고통을 더 주면 된다.'

이 중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지?

롤러코스터처럼.

그 말인즉슨, 중력을 거스른다고 억지로 들어 올린 팔에서 힘을 풀어 버리면.

슈우우욱!

떨어진 칼날이 정확하게 알렉의 허벅지를 향해 떨어지....

"어?"

려는 찰나, 몸이 가벼워졌다.

짓누르던 중력이 갑작스럽게 해제되며, 신우주의 몸에 자유가 찾아왔다.

그 말인즉슨.

'으앗.'

중력을 거스른다고 스쿼트하듯 허벅지에 힘을 한가득 주고 있었던 탓에, 자기도 모르게 점프해 버리고 말았다.

중력에서 풀려난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뛰어오르며 감탄했다.

'오, 능력을 이렇게도 쓴다고?'

사고적인 허점을 찌른 훌륭한 응용법이었다.

A에 힘을 주게끔 유도하고 중력을 해제해서 B로 튀게끔 하다니.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되지.

"재밌네."

착지하기도 전에 자세를 다잡은 신우주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이야기를 좀..."

알렉이 만류하듯 다급히 양손을 앞으로 들며 멈춰 세웠지만.

'두 번은 안 속지.'

누가 호구로 보이나?

이제 막 시작인데.

신우주는 곧바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크으으으으윽!"

가까스로 무기를 빼 들어 검날을 받아낸 알렉이 신음을 흘렸다.

통각 강화 탓에, 공격을 막았음에도 몽둥이로 뼈를 얻어맞은 기분일 거다.

방어조차도 두렵겠지.

챙! 챙챙!

고통은 사람의 몸을 굳게 만든다.

점차 몸이 둔해진 알렉이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들...."

"응, 안 들려."

"이이익!"

곧 녀석의 앞에 보라색으로 반투명한 장막 같은 게 생겼다.

달려 나간 신우주가 곧장 그 위로 칼날을 내리쳤지만.

'안 들어간다?'

칼날이 허공에서 뚝 멈춘 채, 마치 출렁이는 고무 그물을 벤 듯 반대쪽으로 튕겨 나갔다.

중력이 반대로 향한 것처럼.

'재밌네.'

옛날에 유행했던 RPG 게임 스타일로 이름을 짓는다면 '그래비티 실드' 정도일까?

다시 한번 날아간 신우주가 자세를 다잡았다.

'좋아, 이런 자잘한 공격은 안 통한다는 거지?'

상대는 준 랭커~랭커급이다.

효율적인 싸움만 고집해서는 꺾을 수 없다.

리자오웨이와 싸우며 희생을 감수했듯, 아무리 못해도 녀석보다는 윗급일 이 녀석에게도 그에 맞는 공격이 필요하겠지.

'기본 스킬 하나 공개하고, 통과하면 싸게 먹히는 거지.'

밑천을 아예 숨길 수는 없는 법.

7등급을 상대로는 통상 목숨만 건졌어도 남는 장사였을 테니까.

그 편린만 꺼내 볼까.

['가로 베기'를 발동합니다.]

그리고 스쿠툼에서 깨달은 게 또 하나.

"이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준 랭커씩이나 되면 다들 방어 스킬이든 회피 스킬이든 하나씩은 가지고 있더라고.

신우주의 검에서 뻗어 나온 빛이 당장이라도 알렉을 반토막 내려는 듯 흉흉한 기세를 뿜어낸 찰나였다.

"잠깐, 잠깐, 잠깐, 타임!!!"

그가 다급하게 외치며 신우주를 멈춰 세웠다.

딸그락!

무기를 내던지고 질린 표정으로 손을 휘두르더니, 다급하게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뭔가를 꺼내 들며 외쳤다.

"끝, 끝! 끝이라고! 시험은 여기서 끝! 통과다!"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물건에는.

[알렉 마르티네스]

[모험가 협회 제3 지부장]

참 이해하기 어려운 신분이 적혀 있었다.

"지부장?"

"그, 그래."

알렉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부장이 원래 시험관도 겸하나?"

"특별 심사는 치르는 사람이 워낙 없기도 하고, 지부장에게는 임시로 시험관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권한도 있어서."

"본론만, 짧게."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공식 절차까지 무시해 가며 추천장을 밀어 넣은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했을 뿐이다."

아하.

그런 이유셨다.

"떨어뜨리겠다고 입을 턴 건?"

"그래야 진심으로 덤빌 것 같아서."

한숨을 쉰 신우주가 다시 자세를 잡았다.

"다음."

"아, 좀! 내가 졌다! 졌어!"

"나는 안 끝났는데."

"아니야! 끝! 끝이다! 끝! 눈이 왜 그래? 눈 돌아갔다. 사람 죽이겠어!"

"안 들려."

"잠깐!"

알렉이 시급하게 자세를 잡은 찰나, 신우주가 단검을 빙글빙글 돌려 허벅지의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뭐?"

알렉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냥.

나만 속으니까 좀 억울해서.

그리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놀아 줬군.'

알렉 마르티네스.

랭커 중에서도 꽤 유명한 놈이었다.

Tier_maker - 알렉 마르티네스? 걔는 괴물이 맞지.

Tier_maker - 멀리 있으면 데려와서 때리고, 가까이 있으면 멀리 보내면서 때리고.

Tier_maker - 인간으로 요요 즐기는 새끼.

그 서열충 티어메이커가 따로 글까지 파 가면서 극찬했을 정도로.

정말로 심사만 볼 생각이셨군.

진심으로 싸웠더라면 이런 애들 장난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지.

*

몇 시간 뒤.

신우주가 특별 심사를 통과하고 떠났을 무렵.

"말해 보쇼! 그 녀석은 뭡니까? 평범한 모험가 느낌이 아니던데?"

지부장 사무실, 알렉 마르티네스가 지친 목소리로 수화기를 붙잡고 소리를 박박 질렀다.

"사람 눈이 막 돌아가서는! 시험 보다가 죽는 줄 알았는데!"

-엄살 부리기는.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기세가 그렇다는 거요. 시험을 보러 온 사람의 그게 아닙디다."

-뭐, 신우주니까. 옛날이 더 나았어.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신우주를 잘 아는 듯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잘 아는 걸 넘어서, 마치 옛날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고 하면 좋을까.

"옛날이 더 나았다니,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녀석이라지 않았수?"

-능력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거지. 당장 네 목이 제대로 붙어 있다는 게 그 증거고. 옛날 신우주였으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텐데.

죽었을 거라니?

대체 얼마나 진심으로 싸웠길래?

"에이, 농담하지 마쇼. 내가 아무리 그래도 한참 아래 등급 모험가한테 당할 정도는 아니지."

-신우주에 대해 잘 모르는군.

수화기 너머 상대가 피식 웃었다.

마치 점심시간에 네가 잘하는 곳을 안 가봐서 그래― 라고 말하는 어른처럼.

-영상 촬영하느라 고생 많았고, 조만간 회의에서 보자고.

"잠깐, 이쪽은 아직 할 말이 남――."

뚝.

자기 할 말 마쳤다고 일방적으로 끊긴 통화에 알렉 마르티네스가 인상을 오만상으로 찌푸렸다.

"이 개념 없는 양반이."

가벼운 부탁 하나 들어달라고 해서 가 봤다가 욕만 잔뜩 봤다.

그건 그렇고, 저 수화기 너머의 '그 사람'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의 강자였나?

어지간한 준 랭커에게도 관심 하나 보이지 않는 상대인데?

'쓸 만한 녀석이긴 했다만.'

그럼에도 랭커 수준인가를 따져 본다면, 그건 애매하다.

당장 알렉 마르티네즈, 그부터 가진 힘의 절반조차도 채 쓰지 않았으니 말이다.

단지 밑천을 내다봤을 뿐.

'그 정도면 어딜 가서도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딱 그 정도인데 왜?

탑에 들어온 지 50년씩이나 됐으면서, 아직 마땅히 이룬 것도 없는 녀석에 불과한데.

'이러니까 나까지 신경이 쓰이려고 그러는데.'

호기심이 생겨 버린 알렉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신우주, 첫 행선지로 37층에 들른다고 했던가?"

거기에 뭐가 있었지?

37층이 나름 고층이기는 하다만, 어디까지나 딱 그 정도.

당장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랭커 하나 위치를 물어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딱 그 정도였고.

...라고 생각한 찰나, 알렉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 랭커와 37층의 연관성.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뿐.

'알고서 가는 건가?'

만약 알고 가는 게 맞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녀석은 정말 미친놈이 맞다.

"녀석은 마조히스트인가?"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25화. 37층 (1)

탑을 오를 때는 일반적으로 '시련'이라는 것을 통과해야 한다.

각 층에는 저마다의 시련이 존재하고, 이 시련을 통과하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포탈이 생성되는 방식.

다만, 생성되는 포탈은 하나가 아니다.

둘이다.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포탈 외로, 클리어된 시련을 다시 한번 받을 수 있는 포탈이 생성된다.

물론, 모든 층이 이러한 방식인 건 아니다.

오픈 월드라고 해서 단순히 하나의 세상이 오롯이 펼쳐져 있는 층이 있는가 하면.

안전지대, 아무런 위협도 없이 거쳐 가는 게 전부인 층도 존재한다.

이러한 곳들에는 주로 생산기지, 주거지구가 형성되고는 하였다.

Catchball - 개척단 업무 제휴차 48층 방문했다. 알지? 오픈월드 중에서도 제일 큰 곳. 여긴 아직도 밀림이야.

Merlin - 마탑을 44층 안전지대로 옮긴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탑이 열리고도 어느덧 50년이 흐른 현재, 상위권 모험가들의 주 무대는 40층에서 50층 언저리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이게 탑이 공략된 전부라는 건 아니다.

공식적으로 봤을 때, 현재까지 공략된 탑의 최종 층수는 55층에 해당하니까.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약 15년 전.

아직 40층 공략을 채 마치지 못했을 때의 이야기다.

37층.

이 층의 시련은 유명해졌다.

Sword_master - 나도 많은 공략대에 나서 봤지만, 하나만 뽑으라면 37층이지.

Sword_master - 거긴 지옥이었어.

공략에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가 잔혹했기 때문.

Sword_master - 당시에도 공략대에 합류했었는데, 한 80% 죽었나?

Sword_master - 37층 공략대는 당시 기준으로 최소 6등급 이상의 모험가만 모은 정예였는데.

Sword_master - 죽은 랭커만 40이 넘었지.

그 시련 내용이 유독 지랄맞았다.

서바이벌.

Sword_master - 포탈 타고 들어가니까, 섬이었지. 지금 37층. 휴양지로 쓰이는 거기. 거기가 당시에는 시련 무대였어.

Sword_master - 몬스터들 수준도 적당해서 좀 쉽게 가나 싶었는데, 시련이 며칠이 지나도 끝나질 않더라고.

생존 경쟁의 시장이었다.

100명가량의 공략대가 입장해서는, 아무런 기약도 없이 몬스터들을 해치우며 무작정 버텨야 했다.

Sword_master - 갈수록 몬스터들의 수준도 올라갔지.

몬스터의 수준이 5일 단위로 계단식으로 올라갔다.

더 끔찍한 건, 이게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는 것에 있다.

인트라는 일단 계정만 등록해 놓으면 탑의 어디에 있든 실시간으로 통신할 수 있는데, 그 탓에 바깥에서도 공략대 참가자의 생생한 중계를 받아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오리가미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모험가가 있었다.

-

Origami - (탐사 개시 22일 차) 지금 절반 정도 죽음.

-

평소 글을 올리는 정황상 출신지는 일본으로 추정되지만,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

인트라에서는 신분을 감추는 게 기본이니.

그가 참상을 밝혔다.

-

Origami - (탐사 개시 29일 차) 식량 동나기 직전. 몬스터들 시체 고기 정화해서 먹는 방법 고려 중.

Origami - (탐사 개시 32일 차) 한 달 찍었는데 안 끝나네.

Origami - (탐사 개시 35일 차) 몬스터 고기 의외로 먹을 만하다. 잡내가 좀 심하지만.

Origami - (탐사 개시 46일 차) 보스를 발견했다.

Origami - (탐사 개시 46일 차) 랭킹 8위 알지? 검귀, 걔가 보스랑 전투 개시했다.

Origami - (탐사 개시 48일 차) 실패했다. 랭킹 12위도 싸우다 같이 죽었어.

-

그 이야기는 끔찍했다.

매일 같이 공략대 이야기를 올렸다.

-

Sword_master - 네 외로움 해소하는 건 상관없는데, 내부 이야기 유출 조심해라.

-

익명으로나마 같이 공략대에 참가한 소드마스터가 자제를 요청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참상만 가득하기도 했고.

Origami - (탐사 개시 49일 차) 열심히 버티긴 버텼는데, 나도 곧 죽을 것 같다. 그동안 고마웠다. 덕분에 정신병 안 걸리고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50일 차.

웨이브는 기적같이 종료되었다.

모두가 내심 포기하던 참에 이루어 낸 기적 같은 성과.

살아 돌아온 이들은 영웅으로 추대받았지만, 표정은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이해한다.

기뻐하기에는 죽은 동료들의 시체가 눈에 밟혔을 테니.

당시 돌아온 생존자는,

공략대 전체를 통틀어 단 6명이었다고 전해진다.

100명 참가.

6명 생존.

40명의 랭커 그리고 56명의 6등급 이상 모험가가 생존률 6%의 지옥 속에서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물론, 시련을 통과한 덕에 37층에는 38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형성되었다.

또한, 37층 필드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한껏 살려 모험가들의 피로를 씻어주는 유명 휴양지로 거듭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

Origami - 나, 은퇴하려고.

-

오리가미는 살아 돌아왔다.

머지않아 한 일본인 출신 랭커가 보장된 부와 지위를 포기하고 모험가에서 은퇴, 37층에 식당을 차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

Sword_master - 누군가 했더니.

-

같은 랭커들이 유독 자주 찾아오는 식당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흠, 이쯤이 맞는 것 같은데."

현재, 신우주가 방문한 층이었다.

*

"진짜 지랄 맞게 넓네."

이곳은 37층.

한때는 공략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고 하지만... 지금의 광경은 죽음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사람 뒤진 게 장난이야? 뭐야? 무슨 관광지로 만들어 놨네."

그렇다.

시련이 끝난 지 오래인 37층은, 그저 시원하게 탁 트인 섬이 되어 있었다.

날씨도 푸르고, 바닷가에서 시원하게 밀려 들어오는 파도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이며 부서진다.

"꺄아아악!"

비명이 들려오긴 하지만, 공포에 질린 비명이 아니다.

"잡히면 죽어!"

"와하하하! 잡아 봐라!"

연놈들의 즐거움에 찬 비명이다.

물론 엄연히 상층 도입부 취급받는 37층이니만큼 저들 또한 최소 5등급에 해당하는 모험가들이겠지.

그 증거로 숨바꼭질의 스케일이 만만치 않았다.

여유로운 미소와는 달리, 시속 70km 이상의 속도로 달아나는 여성의 발목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탈라리아?'

그 스킬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전령신 헤르메스의 신발로 유명한 그것.

A랭크 스킬이었던가?

"헉, 허억,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스킬은 반칙이잖아...."

곧 쫓아가던 남자가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자빠졌다.

...라는 건 훼이크.

'수인화?'

몸에 털이 나더니, 트럭과도 같은 기세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치이면 전치 12주는 확정이겠군.

모험가들의 사랑놀음은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휴양지에 걸맞게 보기 좋은 광경이다만,

"시체 위에서 잘도 노네."

그걸 바라보는 신우주의 웃음은 비릿하기 짝이 없었다.

37층의 참상을 알고 있으니까.

당시 비각성자라는 이유로 공략대에 참가하지는 못했다만.

'하긴, 아름답게 포장하긴 했지.'

영웅들이 탑의 미래를 위해 결사 항쟁한 끝에 공략할 수 있었다고.

멋들어진 위령비까지 만들어 주면서 동네방네 홍보했지.

값진 희생이었다고.

그 희생이 누굴 위한 희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여기, 배 빌릴 수 있어요?"

"1시간에 200골드."

더럽게 비싸네.

배를 빌린 신우주가 곧 섬이 희미해질 정도의 거리까지 노를 저어나갔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해놓고 왔던 참이라.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저 멀리 섬이 점으로 보일 만큼 한참을 시원하게 나아가던 신우주의 배가 어느 팻말 앞에 멈춰 섰다.

[거대 해수 출몰지역. 돌아가시오.]

섬뜩하기 짝이 없는 문구.

하지만 신우주가 찾던 그것이 맞기도 하였다.

"이쯤에서 놀고 있다고 했지?"

길드에서 들었던 말에 의하면,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이 이곳이었다고 했던가.

-그 사람을 찾고 있었군. 37층이라. 아름다운 곳이지. 하지만 자네가 찾는 그 남자는 꽤 위험한 곳에 있다만? 해수들을 피할 수 없을 걸세.

해수.

바다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들을 칭하는 말이었다.

어쨌든.

'이걸 여기에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은... 없다.

신우주가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마신의 핵 조각, 그거 보내 줘요."

곧 손가락으로 손톱 사이즈의 핵 조각 몇 개가 나타났다.

[조공]받은 것.

[권능-전송]에 딸려 있는 기능이었다.

이쪽에서 물건을 보낼 수 있듯, 신도들이 올린 제물을 받을 수도 있다.

이것도 GP를 소모하지만.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돌려받은 물건은 원래 그랬듯, 유사 라이프베슬의 파편이 되어 있었다.

'저쪽 세계의 물건을 그대로 받을 수 있으면 너무 사기이긴 하지.'

뭐, 보냈다 도로 받았다만 반복해도 아이템이 복사가 될 것 아닌가?

일단 됐고.

라이프 베슬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자체로 인간의 생명력이 극도로 응축되어 있다는 것. 유사 영구기관처럼 쓸 수 있을 정도로.

이건 파편이 되었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 특징이다. 라이프 베슬을 이루는 재질 그 자체의 특징이니까.

그리고 몬스터들에게도 특징이 있다.

Merlin - 몬스터들은 단순히 시각과 청각으로만 인간을 감지하는 게 아니야. 인간의 본질적인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지.

Merlin - 동양 괴담에서는 귀신들이 인간의 생기를 본다고 했던가? 그거랑 같다.

응축된 인간의 생명력을 감지한다는 것.

쉽게 말하면 이거다.

어그로가 끌린다.

들고만 있어도 몬스터들이 군침을 들고 달려들 정도로.

뭐, 하위세계로 보내 놓으면 문제없지만,

"훠이."

라이프 베슬 부스러기를 바다로 뿌리고 불과 몇십 초가 흘렀을 무렵.

잠잠함이 폭풍전야처럼 느껴졌을 때.

'오?'

바다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 비스무리한 게 점점 올라오더니.

콰아아아아아아앙!

생물이라기에는 다소 과하게 거대한 형체가 수면을 뚫고 위로 올라왔다.

"...우왓."

이번만큼은 신우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졸라 크네."

시 서펜트라고 하던가.

한 4층 건물 정도 되겠는데.

그 생김새는 용이 되다 만 뱀을 닮았다.

동양의 이무기라고 보기에는 훨씬 추하다. 지느러미부터 생선 느낌이 물씬 풍겼으며, 눈에는 야성만이 번뜩였다.

5등급 모험가가 파티를 꾸려야 공략할 수 있다고 알려진 괴수, 시 서펜트가 이 괴물의 정체였다.

하지만 넌 미끼다.

진짜 용건을 꾀어내기 위한 미끼.

"잠깐 나랑 놀고 있자."

신우주가 웃으며 무형을 검의 형태로 다듬었다.

-샤아아아아아아악!

시 서펜트가 뱀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포효를 내질렀다.

본격적으로 한번 싸워 볼까.

이 괴수가 만만한 녀석은 아니겠다마는, 신우주는 자신 있었다.

사실, 그간 단테의 스킬을 한 몸으로 온전히 받아낼 만큼 피통 든든한 녀석이 없었으니까.

한 번쯤은 그 힘을 아낌없이 쏟아내 보고 싶었다는 말이다.

'가로 베기부터 천천히.'

신우주가 숫자를 세며 천천히 스킬을 준비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스킬을 쓸 때마다 몸이 학습한다고 해야 하나? 단테가 다루는 기술들을 빌려서 쓰는 수준을 넘어.

마치 운동선수들의 몸에 고된 반복운동 끝에 머슬 메모리가 새겨지는 것처럼.

'이렇게 하는 거구나.'

본질적인 원리를 알게 된다.

아주 본능적으로.

신우주의 몸이 그 기억을 되짚어 올라가 준비 자세를 취한 찰나였다.

-그르르륵?

시 서펜트가 당황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겁에 질려 오갈 데 없는 짐승처럼.

'뭐지?'

신우주가 곁눈질을 흘렸다.

상대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건가?

만만한 먹이라고 생각해서 찾아오고 봤더니,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겁에 질린 건가?

'...라기에는 아직 뭘 안 했는데?'

이게 아니라면.

'잠깐.'

신우주의 눈에 들어온 광경이 있었다. 정면이 아니다. 아래다.

'언제부터 바닥이 이렇게 검었지?'

그렇다.

어느 사이에 바닷물이 심해를 연상시키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위세계에 경작석으로 만들어 둔 흑토가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런데 바다에 흑토가 보일 리는 없고.

그렇다면 이거.

짐작할 수 있는 건 하나인데.

"X됐네."

신우주가 헛웃음을 터뜨린 순간 불안한 수면과 함께 배가 흔들렸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앙아아아앙!

물속에서 TNT가 대량으로 폭발한 듯한 충격음과 함께 '그것'이 나타났다.

아니.

머리를 드러냈다.

-크라라락!

-샤아아아악! 샤아아아아아아아악!

머리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시 서펜트의 머리부터 목까지를 한입에 구겨 넣더니, 몇 번이나 씹었다고 머리가 뚝 끊긴 시 서펜트의 시체가 힘을 잃고 수면으로 가라앉았다.

모습을 드러낸 지 십여 초 만에 시 서펜트를 목구멍으로 꿀꺽 삼킨 괴물의 정체는.

-카아아아악!

똑같은 시 서펜트였다.

다만, 사이즈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게 문제일까.

'최소 20미터, 혹은 25미터 그 이상.'

현실의 야생동물들도 그렇지만, 몬스터들의 힘은 일반적으로 그 덩치와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작다고 무조건 약한 건 아니지만, 크면 대부분 강하다.

그러니까 저 사이즈에 저만한 시 서펜트를 한 번에 씹어 넘기는 힘을 고려하면.

"젠장."

자이언트 시 서펜트.

놈이 분명했다.

"저건 랭커가 나와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7등급 몬스터다.

즉, 7등급 이상의 모험가. 가급적 랭커의 출동이 규범화되어 있는 괴물이라는 말씀.

몬스터의 등급은 처리하기에 적정한 모험가의 등급과 같으니까.

'랭커급 괴수라.'

미끼를 뿌린 게 자신이니까 이런 말 하긴 민망하다만, 이런 놈이 끌릴 거라고 생각하고 뿌린 건 아니었는데.

일 났군.

'이길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일반 시 서펜트라면 손맛 좋은 샌드백이겠지만, 자이언트 시 서펜트라면 이쪽도 샌드백 취급당할 각오를 해야 할 테니까.

-시이이이익.

고민하기엔 늦었다.

이미 놈은 신우주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마치 이 짙은 생명력은 네게서 나온 것이냐는 것처럼.

그 거대한 아가리 속은 그림자가 져서 시 서펜트의 파편 따위만 간신히 보였다.

하지만 신우주의 눈은 여전히 담담했다.

"X까."

생선밥 되려고 온 거 아니거든.

한번 까 보자.

['가로 베기'를 발동합니다.]

이제 익숙해진 그 일격이 빔 레이저처럼 신우주의 무형-검에서 뿜어져 나가더니, 그대로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목을 덮치며 거대한 물보라와 운무를 자아냈다.

콰아아아아아앙!

직격이다.

어지간한 랭커라고 해도 제대로 맞으면 빈사 상태에 빠질 만한 에너지량.

피통 든든한 괴수라고 해도 좀 아프긴 할 거다.

...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화만 돋운 모양이었다.

"오 이런."

피부가 노릇노릇하게 그슬린 걸 보니까 아주 만만했던 건 아닌 모양인데.

'이걸 정면에서 맞고 버티네?'

역시 괴수 소리 듣는 몬스터가 다르긴 다르다.

육체적인 능력에 모든 걸 꼬라박은 값어치는 한다는 건가?

뭐, 됐어.

이 정도 몬스터를 잡으면서, 스킬 하나로 끝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마침 검증해 보고 싶은 스킬도 있었던 참이고.'

화력전 말고, 장기전으로 가 보자.

시간은 넉넉하니까.

신우주가 무형을 초기 계획대로 작살의 형태로 바꾸려는 순간이었다.

-퍼억!

어딘가에서 종이 한 장이 날아오더니, 시 서펜트의 목에 박혔다.

손바닥만 한 종이지만, 아주 확실하게.

"어?"

잠깐, 저건.

신우주가 눈을 크게 뜬 찰나.

수십, 수백 장의 종이 무리가 저 멀리서 메뚜기떼처럼 날아왔고.

탁!

타다다닥! 퍽! 퍼벅! 탁!

수십, 수백의 종이들이 계속해서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목에 박혔다.

마치 기관총의 총알이 박히듯, 섬뜩하리만치 대량의 종이가 날아와서는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목구멍에 집요하게 박혔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캬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아악!

바다뱀이라기에는 용의 것에 가까운 포효가 울려 퍼지며 수면에 지진과도 같은 파동이 일었다.

이쯤 되자 목에 박힌 종이마저 마치 용의 비늘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격의 횟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어나기만 했고.

-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죽음을 직감한 자이언트 시 서펜트가 급히 물속으로 잠수하려고 했지만.

휘이익!

어지간한 인간 사이즈보다도 거대한 종이 한 장이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목을 스쳐 지나갔을 때.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며, 괴물의 눈빛에 깃들었던 야생의 빛이 사라졌다.

'죽었군.'

섬뜩한 공격이었다.

살해 그 자체에 목적을 둔 듯 집요하리만치 효율적인 공격.

하지만 이 공격의 형태는 눈에 익었다.

"누군가 했더니."

신우주가 피식 웃으며, 종이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말했다.

"아직 안 죽었네?"

그곳 빈 허공에서 종이 더미에 감싸인 채 나타난 중년 남자가 놀란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우주, 아직 살아 있었군."

"뭐래, 제사 지내냐?"

남자는 흰 머리와 흰 수염을 하고 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잔근육에, 바다 사람 특유의 구릿빛 피부가 건강하게 빛났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지 않나."

신우주, 그에게는 친한 친구가 있었다.

37층.

이곳 37층의 주민이자, 동시에 해변가 식당 '별무리'의 주인.

또 과거 랭킹 30위권의 강자이자 인트라의 네임드 유저 '오리가미'였던 남자.

이세 우메노가 멋쩍게 웃었다.

"밥은 먹었나?"

"아니."

"잘됐군. 지금 막 좋은 횟감이 생겼는데."

종이 한 장이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사체로 날아갔다.

| 26화. 37층 (2)

일반적으로 탑의 주민들은 안전 구역에 주거지를 마련하는 경향이 있다.

오픈월드 형태의 층은 기피당한다.

아니, 몬스터가 출몰하는 층이라면 어디가 됐든 기피당하기 마련.

37층.

이곳은 시련이 클리어되며 그럭저럭 안전해졌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몬스터 출몰지라는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높게는 7등급 이상 몬스터까지 튀어나오니 더 할 말이 없지.

아무튼.

이런 위험천만한 장소에 가게를 차린 사람이 제정신이겠나?

당연히 뇌에 에러 하나 생긴 놈이지.

끼익.

입구에 들어서자, 신우주의 눈에 들어온 건 전형적인 이자카야였다.

'가게 이름이 별무리라고 했나?'

신우주가 방문한 식당, 37층의 명물 [별무리] 또한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저거 다 몬스터 시체?"

"관점에 따라서는."

이세 우메노가 부정하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조금 더 까다로운 식재료에 불과하다고 본다만."

응, 네 기준에는 그렇겠지.

자이언트 시 서펜트도 너한테는 횟감에 불과할 테니까.

아공간에서 고깃덩어리 ― 아마도 자이언트 시 서펜트임이 분명한 ― 를 꺼낸 그가 이내 종이를 손에 들고는, 익숙한 손길로 거침없이 삭삭 썰어내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군.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게. 탑 바깥의 생물들과 이곳의 생물들 사이에는 외형의 갭만 있을 뿐, 본질적인 차이 같은 건 없어."

"알아."

"대형 몬스터라고 해서 못 먹을 건 없지. 그저 고정관념의 문제일세. 닭처럼 생긴 몬스터라고 해서 몬스터가 아니던가?"

안다.

잘 안다.

다만, 신우주가 놀랐던 건 그런 게 아니다.

'강해졌네.'

은퇴한 지 한참이 흘렀음에도 15년 전, 한창 현역이었던 시절보다 아득히 더 강해졌다.

자이언트 시 서펜트를 익숙한 듯 도륙하는 광경에서 짐작하긴 했다만.

'랭커급이다.'

이미 옛날에도 랭커였지만.

전체적으로 모험가들의 수준이 상향평준화된 지금도 마찬가지.

어쩌면 더 빠르게 강해졌을지도.

'아이러니하게도, 은퇴하고 홀로 활동하면서 더 강해진 건가.'

그래도 시 서펜트를 별미처럼 취급하는 건 공감대의 부재가 있다.

신우주가 속으로 말을 삼켰다.

몬스터 요리가 좋다고 가게 차린 놈한테 네 음식 못 먹겠다고 반박해서 뭐하나?

식재료를 산지 직송하겠다고 37층, 그것도 바닷가 앞에 가게 차린 미친놈인데.

"신우주, 자네는 운이 좋아. 시 서펜트는 덩치가 클수록 육질이 탄탄해지고 그에 비례해 맛도 깊어지지. 광어와도 같네."

봐라, 목소리는 무뚝뚝한 주제에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애정이 뚝뚝 흘러내리잖아?

아주 장인정신이 넘치시네.

하지만 덕분에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신우주가 바닷가까지 나가서 시 서펜트를 찾겠다고 난리를 쳤던 것부터가.

'이 녀석이라면, 바닷가에서 시 서펜트를 사냥 중일 거라고 확신했으니까.'

그가 아는 이세 우메노라면 반드시 이럴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드시게."

인트라에서도 몇 번 언급된 유명 식당 아니랄까 봐.

이세 우메노의 요리 솜씨는 훌륭했다.

보글보글 끓는 국.

신선한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고기를 한껏 활용한 요리들.

에피타이저부터 메인디시까지 흠잡을 곳이 없는 구성까지.

외관으로는 어느 초일류 레스토랑 뺨칠 수준이지만....

아무래도 시 서펜트를 전부 먹는 건 비위가 못 버텨주는 부분이 있어서.

-고기다!!!

-드래곤의 고기인가? 크기가 미쳤다!

-맛있어!

-신이시여!! 당신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나니!

나눠 먹기로 했다.

입에 집어넣는 순간 [전송]을 통해 하위세계로 토스.

신과 신도가 같은 걸 나눠 먹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신앙심이 상승합니다!]

[신앙심이 상승합니다!]

[신앙심이 상승합니다!]

아무튼 좋은 일이다.

아무튼.

"이번 요리는 시 호그를 수비드한 뒤 로스팅한 요리로, 그 위에 42층에서만 자라는 화염광산의 타오르는 소금을 가미했지."

그렇게 말하며 음식 설명을 늘어놓는 이세 우메노는 마치 벌레 채집에 열중하는 소년처럼 즐거워 보였다.

"...야, 넌 이게 정말로 맛있냐?"

"요리를 꼭 맛으로만 먹을 필요는 없네. 때로는 필요성으로 먹을 수도 있지."

"아니, 그래도 생선은 찜이 낫지 않냐?"

"구이가 낫네."

"찜."

"구이."

"ㅉ...."

"신우주, 구이가 낫네."

눈빛이 심상치 않다.

조금만 더 우기면 주방에서 부엌칼이라도 들고나올 기세라서 참았다.

"기다리게. 곧 디저트를 내오지."

어느새 주방으로 향한 이세 우메노의 등을 바라보던 신우주가 피식 웃었다.

사람이 달라지긴 했네. 그 전투광이 맞나?

아무래도 인트라의 네임드였던 랭커 오리가미는 없어진 모양이다.

그저, 식당 '별무리'의 주인 이세 우메노가 남아 있을 뿐.

"들게."

"오, 감사."

디저트는 푸딩이었다.

벌써 수십 년 동안 먹어본 적 없는 요리.

처음으로 나온 정상적인 비주얼과 못지않게 훌륭한 맛에 신우주가 숟가락질을 쉬지 않던 한순간이었다.

"맛있나? 세이렌의 알에서 추출한 노른자를 활용해서 만들었지."

"...."

이 정도 먹었으면 충분한 것도 같다. 어차피 먹는 척만 했지만.

딸깍.

신우주가 숟가락을 내려놓은 찰나였다.

"그래서."

자리에 앉은 이세 우메노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지금까지는 친구 '이세 우메노'였다면.

앞으로는 '오리가미'라는 것처럼.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각성은 성공한 모양이군."

"뭐, 그렇지."

"아공간 스킬도 가진 모양이었고."

"어느 정도는."

자이언트 시 서펜트의 사체를 일부 하위세계에 전송하고 왔다.

그래도 7등급 몬스터의 사체를 바다에 방치하고 오기에는 너무 아까울뿐더러, 아공간 인벤토리 정도는 흔한 스킬에 속하기도 하니까.

"잘된 일이군. 신우주."

갑작스레 찔러 들어온 이세 우메노의 말에 움찔했다.

"뭐가?"

"자네는 언제나 각성을 꿈꿔 왔으니."

이세 우메노가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37층 시련을 공략할 생각인가?"

"응, 보상이 필요해서."

신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아니다. 처음부터 37층에 방문할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37층 시련 공략이 전부라면, 그대로 직행하면 될 일.

"날 굳이 찾아온 이유는?"

굳이 이세 우메노를 찾아온 이유라면.

확인해 둬야 할 일이 하나 있어서.

"그 소문 사실이냐?"

"무엇이 말이지?"

"37층 공략 당시, 모험가 길드에서는 사전에 클리어할 수 있었던 걸 의도적으로 클리어하지 않았다는 소문."

"...."

이세 우메노가 곤란하다는 듯 말을 감추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때로는 침묵이 확답 이상의 대답이 되기 마련이니까.

"히든피스에 관한 이야기인가?"

"응."

거짓말은 어차피 안 통하겠지.

상대를 '오리가미'라고 생각하며 신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서 들었지?"

"인트라."

"역시, 아직 하고 있었군."

"초창기 모험가잖아. 그래서 대답은?"

"글쎄. 내가 이것을 말해 줘도 될지 모르겠지만, 먼저 한 가지를 묻고 싶군."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전부 사라졌다.

이세 우메노는 사라졌다.

지금의 그는 완전한 오리가미.

15년 전의 망령이 천천히 이빨을 드러냈다.

"자네는, 모험가 길드를 믿나?"

증오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 눈빛은 마치 카지노 테이블의 상대를 떠보는 듯했다. 목까지 칼날을 들이미는 듯하다.

대답 한 번에 따라서 제아무리 막연한 인연이라도 베어버리겠다는 것처럼.

수백 자루의 칼이 온몸을 겨눈 듯 진득하게 묻어나는 살기에 신우주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힘 좀 풀어라. 자식아. 나 거품 물겠다.'

옛날 친구라고 이제 삭막해졌나.

탑의 최대 조직이자 사실상의 정부라고 불러도 될 모험가 길드를 믿느냐는 말에 어떤 저의가 숨겨져 있을까.

어떤 대답을 꺼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무형을 대비해 두는 동시에, 신우주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였다.

"아니."

그 쓰레기들을 믿느니, 길거리 포교하는 사이비 종교쟁이를 믿고 말지.

처음부터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다.

"잠재적인 적이다."

"후우."

이세 우미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라면 그럴 것 같았네. 자네야말로 그들 길드의 최대 피해자라고 봐도 무방할 테니."

"꿉꿉한 옛날이야기는 치우고, 그래서 대답은?"

"그렇군."

바랬던 대답이었을까.

이세 우미노의 호흡은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

"사실일세."

"...!"

역시.

인트라의 그 루머들이 사실이었단 건가.

"길드가 정말로 바랐다면, 희생자가 거의 없이 37층 시련을 클리어할 수 있었을 게 분명하네."

"추측?"

"추측이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진실에 한없이 가까울 걸세."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광기에 가까운 확신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감수하면서 남았다는 건...."

짚이는 바는 하나다.

"찾는 물건이라도 있었나?"

37층에 뭔가가 감춰져 있었다는 것.

모험가 길드는 그걸 손에 넣으려 했고, 방법을 찾다가 끝내 포기했다.

"아마도."

"37층 시련을 클리어하고 벌써 15년은 지났는데, 그동안 여전히 못 찾는 건가?"

"일개 소문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겠지. 혹은 불가능하다고 여겼거나."

"그런가."

애매한 대답이다.

확실하게 도움이 됐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대답.

하지만 신우주에게는 이 수준의 당사자 검증만으로도 충분했다. 0과 1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으니까.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군."

어느새 오리가미는 사라졌다.

그의 눈앞에 앉은 건 다시 이세 우메노.

은퇴하고 자기 식당을 차린 모험가일 뿐.

"야, 됐어. 애초에 옛날 친구들 얼굴 볼 겸사겸사 온 거야."

"옛날 친구들?"

그 순간 이세 우메노의 표정이 변했다.

전례 없이 심각해진 그가 이마 주름을 한껏 찡그리며 물었다.

"친구들? 지금, 친구들이라고 했나?"

"뭐, 왜?"

"그건, 신우주, 자네한테 친구가 복수로 존재했다는 말이지 않나?"

"...."

어쩌라는 거야.

말꼬투리 오지게 잡네.

신우주가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껄껄 웃은 이세 우메노가 목걸이를 하나 건넸다.

"정말로 37층 시련에 입장할 생각이라면 이걸 가져가게."

"이게 뭔데?"

화려하지는 않다.

특별한 기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탑 내부에 즐비한 고급 아이템들에 비해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

"내가 제작한 액세서리일세. 큰 기능은 없지만, 악운을 피하게 만들어 줄 물건이라고 해 두지. 자네의 목숨을 구해 줄 걸세."

아, 그런 거.

액받이라고 하던가?

일단 감사히 받아 넣었다.

누군가는 미신이라고 하겠지만, 신우주는 미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

"다녀오게."

"다시 올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간다."

'별무리'를 나온 뒤.

신우주는 곧바로 포탈로 향했다.

37층 시련 포탈로.

하지만 이곳은 아무 때나 입장할 수 있는 게 아니다.

50일에 1번만 열린다.

나머지 날 동안은 손가락을 쪽쪽 빨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하지만 일단 입장하고 나면, 처음에 열렸던 시련과 내용물은 동일하다.

클리어하면서 이런저런 보상을 습득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그런데, 37층 시련은 엄밀히 말해서 인기가 저조했다.

보상이 짜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신우주가 여기에 찾아온 이유의 절반은 차지했다.

왜?

남들이 안 건드니까.

'난이도 대비 보상이 쓸 만한 시련은 다른 길드에서 다 차지하고 계신단 말이지.'

시련을 공략하는 데 얼마나 공헌했는가에 따라, 대형 길드들이 사이좋게 슬롯(우선권)을 점유하고 있다.

일반 모험가들에게도 모험가 길드 주도하에 조금이나마 도전권이 주어지긴 하지만.

'그거 기다렸다가는 한세월이지.'

인기가 많은 48층 시련의 경우, 입장까지 대기열만 3개월은 서야 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스쿠툼의 제안이 솔깃했던 게 사실.

그 정도 대형 길드가 가진 슬롯을 타 먹는다면, 입장하고 싶은 시련마다 막힘없이 쭉쭉 입장할 수 있었을 테니까.

괜히 대형 길드로 사람이 몰리는 게 아니다.

이 빌어먹을 탑은 스노우 볼링처럼 대형 길드 소속 길드원만 한없이 더 강해지는 구조니까.

하지만.

37층은 다르다.

'슬롯 따위 아무도 주장 안 하지.'

과거에 하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던 탓일까?

공략법이 밝혀지며 사망률이 극도로 낮아진 지금에 이르러서도, 수지가 안 맞는 시련이라는 인식이 짙게 남아 있다.

자연히 길드들도 기본적으로 입장하려고 하지 않았다.

굳이? 라는 인식.

기본적으로 고인물들이 많은 인트라에서도 비슷하게 보는 편.

Yehyeh -거길 왜 감?(진짜 모름)

Sword_master - 37층 시련? 차라리 대형 길드에 붙어서 40층대 시련에 도전하는 게 유리하지 않나?

Flexin - 남들이 가는 데는 이유가 없을 수 있어도, 안 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Merlin - 37층은 보상이 짜지. 재미도 없고. 수확도 없고. 사서 고생하는 게 목적이라면 말리진 않는다.

이해야 한다.

애당초 섬에서 무작정 생존하라는 방식부터 너무 번거롭지 않나?

시간 대비 효율이 하도 구리니까.

하지만 신우주에게는 달랐다.

'내 스킬이면 오히려 좋지.'

생존 서바이벌이잖아?

가진 스킬 특성상 식량 문제는 없다고 볼뿐더러.

보는 눈이 드물면 드물수록 오히려 좋다.

사람 수 적으면 실컷 싸울 수 있잖아? 얻은 스킬들 실험해 보기도 좋고.

"후딱 해치우고 나와야지."

신우주가 반쯤 산책하는 마음으로 포탈 안에 발을 뻗었다.

그렇게 그가 입장하고 불과 몇십 분이 지나지 않을 무렵이었다.

"파밍 좀 하겠는데?"

그 뒤로도 여러 무리가 차례차례 몰려왔다.

평소 37층 시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굳이 여길 입장해야 하나?"

"불평하지 마라. 갈 곳이 하도 없으니. 여기라도 가야지."

"선택지가 없어서. 후우, 우리 같은 개미들만 죽어나지."

무기를 짊어진 모험가들이 속속들이 포탈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이 무리 중에는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무리도 존재했다.

"이번 시련은 풍년이군."

"몇 명이나 입장했을까?"

"상관없다. 전부 죽이면 그만이니."

"그래, 맛 좀 보자고."

| 27화. 스크리미르 교단 (1)

탑에 입장한 뒤.

신우주를 반겨 준 광경은 이러했다.

"야생이네."

야생의 무인도.

조금 전까지 그가 두 다리를 디디고 있던 섬에서, 인적이 완전히 자리를 감추었다.

인간 대신 야생 몬스터들이.

건물 대신 성기게 자란 수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얼핏 평화로워 보이는 푸른 하늘과 수평선은 그대로지만.

'저런 것에 속으면 거기서 끝이지.'

이 섬은 온전한 야생이다.

독초와 맹수로 가득한 아마존의 밀림조차 동네 뒷산으로 만드는, 지구의 것과 궤를 달리하는 진짜 야생.

물 한 모금조차 함부로 마셔서는 안 된다.

어지간한 5등급 몬스터보다도 위험한 기생충들이 위장을 집어삼킬 테니까.

모험가 협회에서 배부한 공략 매뉴얼은 이러했다.

-권장 파티 인원은 최소 10명.

-그중 해독 해열 계열 스킬을 가진 모험가를 파티에 둘 이상으로 구성할 것.

-불가능할 경우, 다용도 해독제를 준비하길 권장.

이건 필수다.

배고프다고 열매 하나 잘못 주워 먹었다가는 사망이지.

그럼, 식량을 챙겨가면 그만 아니냐고?

-최소 50일 치, 권장 70일 치 이상의 대용량 보존 식량을 준비해 들어갈 것.

-아공간 스킬 혹은 장비를 가져갈 것을 강력히 권장함.

식량을 챙기는 것 좋지. 그 양이 과하게 많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기후 변화가 극심하니, 빠르게 간이 텐트를 치거나 동굴 속으로 피신할 것.

-단, 동굴에 진입하기 전에는 내부에 불을 지펴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섬에서는 최대 7등급 몬스터까지 등장하니, 비상시를 위한 도주 경로를 계산해 두어라.

의식주 하나하나가 문제다.

Flexin - 순수 몬스터로 인한 사망률은 생각보다 낮다. 문제는 생존 그 자체지.

환경의 위협이 제일 컸다고 한다.

당시에만 해도 '생존형 시련' 따위는 밝혀진 바가 없었으니까.

식량은 길어야 1달 치를 마련했고, 간이 숙소 따위를 누가 준비해 가겠나? 침낭이나 챙겨가지.

그런 주제에 시련이 스스로 폐쇄될 때까지 50일을 버텨야 한다.

보스를 클리어하는 것도 답이겠지만, 이건 37층 돌아다닐 수준의 모험가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그래도 못 하는 것과 어려운 것의 차이는 크다.

울며 겨자 먹기로 챙기고 다녀야지.

"이 정도면 딱 괜찮을 것 같은데."

한참을 돌아다니던 신우주가 발을 멈춘 곳은, 다소 평이한 숲속이었다.

바로 3분 거리에 호수가 있고, 그 옆에는 풍부하게 나무가 깔린 습지.

자원이 풍부한 만큼 사방에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부터 몬스터들과의 조우를 최대한 회피하며 챙겨온 자원으로 생활하는 모험가들이라면 어지간하면 택하지 않을 곳이겠다만.

뚜둑.

목을 한번 꺾은 신우주가 [감지] 계통 스킬 셋을 겹겹이 발동시킨 뒤, 주위 인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말했다.

"준비해 둔 물건 보내세요."

그 순간이었다.

50에 달하는 GP가 쑥 빨려 나감과 동시에.

쿠우우우웅!

빈 허공에 갑작스럽게 오두막 한 채가 통째로 떨어졌다.

무려 20평을 넘어서는 초호화 오두막이.

끼익.

겉으로 보기에도 썩 그럴듯한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 갖춰진 건 그 이상이었다.

언제든 불을 피울 화로부터, 앉아서 쉴 침대와 의자, 책상까지 충실하게 갖추어진 완벽한 오두막.

"좋네."

만족스러워하고 있으려니, 하위세계의 메시지가 순차적으로 날아 들어왔다.

-목공을 기용해 완성했습니다.

-내구성은 물론, 덧칠해 방수까지 충실하게 갖췄습니다.

-마물의 접근을 막을 수 있게끔 고등급 마물의 체취를 시공 과정에 틈틈이 발라 두었습니다. 인간의 코로는 맡기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

이 오두막의 정체는 바로.

"내가 못 하는 일은 하청이 최고라니까."

하위세계에 맡긴 하청의 결과물.

어지간한 아공간 용량 따위로는 옮길 수도 없는 거대한 고품격 주거 공간이 통째로 전송되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슬슬 배가 고픈데."

중얼거린 찰나였다.

후두두두두둑!

바구니째로 과일과 건조육류가 오두막 중앙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삭!

하나를 집어 들고 베어 물자 그 맛이 썩 괜찮았다.

'전송 스킬이 이게 참 좋다니까.'

이거야말로 신우주가 생각한 37층 비책.

'의식주를 하위세계에 의탁하기' 전략이었다.

신우주 쪽에서 하위세계로 제물을 보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하위세계의 공물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을 응용한 것.

'내가 물건을 보내면 보통 강화되지만, 저쪽에서 보낸 건 거의 그대로 온단 말이지.'

공물의 특성은 그랬다.

단, 신우주가 한번 보낸 물건을 돌려받을 때는 다시금 재조율된다.

'GP 소모가 살짝 있지만, 확실하게 안정된 의식주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면 뭐.'

백번 남는 장사지.

여기에 독 문제도 간단하다.

최근에 영입한 신도 [프리스트 예시카]에게는 간단한 해독 스킬들이 있거든.

'너무 유능하니까 오히려 불길할 정도인데.'

잠시 하위세계를 관찰하자, SD 캐릭터로 보이는 예시카가 잠시도 쉬지 않고 뽈뽈 돌아다녔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있는 부상은 아니군요. 고통을 덜어 드릴 테니, 숙소로 돌아가서 많이 쉬십시오.

-성녀님! 감사합니다!

-전 그런 거창한 존재가 아닙니다.

언제나 싸늘하리만치 감정 한 톨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으로 환자들을 챙길 뿐.

이게 전부일까?

숫제 교단의 기본적인 운영 전반마저 그녀가 담당하고 있었다.

-목재가 부족하군요. 3조는 앞마을에 방문해 목재를 구해 오십시오. 거절당하거든, 나무꾼 페트에게 부탁해 벌목을 다녀오십시오.

-아무 물이나 마셔서는 안 됩니다. 정화 주문을 걸어 드릴 테니, 꼭 사전에 제게 찾아오길.

왜 저렇게 유능해?

전체적으로 너무 다재다능하다.

기사 단테가 전투원으로는 쓸 만해도, 사실 좋은 리더라고 보긴 어려웠다.

전형적인 의욕만 가득 찬 요리사라고나 할까?

요리는 잘하지만, 정작 식당 운영은 몰라서 장사 망하는 그런 타입 말이다.

여기에서 예시카가 보조를 맞춰 주니, 비로소 교단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구색이었다.

-자매님, 당부했던 몬스터를 잡아 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껍질을 벗겨내 채찍으로 가공하도록 하지요.

-...용도가?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또 쇠사슬과 못도 준비해 주십시오.

고통으로 유명한 타라의 신도라서 그런지 고문 도구에 유독 관심을 기울이는 게 불안하긴 하다만.

-저, 여기가 신우주 교단의 성지가 맞나요?

일을 잘하는 게 숫자로 드러난다.

['부랑아 유고'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부랑아 자비스'이 교단에 합류합니다.]

['부랑아 필'이 교단에 합류합니다.]

큰 계기 없이도 외부에서 신도들이 제 발로 찾아올 정도로 말이다.

한 가족 살기에는 부족함 없는 오두막이 매일같이 새로 늘어났다.

농사는 매번 대박이라 굶을 걱정 따위 하지도 않는다.

치안은 단테가 칼같이 지키고 있고.

무엇보다도.

-자, 식사에 들기 전에 우리의 자비로운 신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시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행복한 삶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는 걸 기대할 수 있는 삶이 곧 행복이었군요.

-타라에서는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이제 내일 아침을 생각하며 잠들어요!

식전 기도를 올리는 이들의 곁에서 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아이들의 기름기 오른 얼굴만 봐도 영양 상태가 썩 좋아졌다는 걸 알 수 있다.

타라에서 탈출했을 당시에만 해도 거지꼴을 못 벗어났던 것과 비교하자면 괄목상대할 만큼의 변화.

우주 교단이 드디어 채집 수렵 사회를 넘어섰다!

"흠."

잠시 하위세계 관찰에 푹 빠져 있던 신우주가 턱을 긁적였다.

'일단 잘 굴러가는 것 같기는 한데.'

왜 불안하지?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 씨, 이거 아닌데.

불길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문득, 탑에 들어오기 직전에 있었던 러시아 전쟁이 떠올랐다.

한창 전쟁이 이어지던 중, 어느 민간 군사 기업의 지도자가 러시아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수도까지 진격하는 길이 뻥뻥 뚫려 있어서 직감했다. 아, 이번 쿠데타는 실패한 거라고.

빈 수도가 곧 미끼였지.

쿠데타를 굳이 막을 필요조차 없었기에 교전하지 않았던 것.

그 PMC 사장은 곧 목이 날아갔다.

요점은 이거다. 뭐든 과하게 잘되면 불길한 법이라는 거.

'뭔가 일이라도.'

신우주가 [전지] 스킬을 본격적으로 발동시켰다.

곧 SD화되어 있었던 하위세계가 본격적인 현실로 덧씌워지며, 세상이 한층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범위가 은근히 좁단 말이지.'

전지라고는 하나,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신도들의 활동 반경 안에서 보인다고 해야 하나?

신도들이 홍대 입구에 터전을 틀었다면, 마포구 정도가 잘 보이는 정도다.

그 바깥은 짙은 안개가 깔린 듯 관찰에 제한이 있었다.

'어디 보자.'

그래도 최대한 봐야지.

신우주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던 참이었다.

"어?"

안개가 스산하게 깔려 시야가 불분명한 언덕 위, 뭔가 펄럭이는 게 보였다.

안개 속 사이로, 천 같은 게 펄럭였다.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하자 그 위로 새겨진 문양도 보였다.

그리고.

그 깃발을 들고 있는 가죽 갑옷 차림 남자와... 남자가 탄 말까지도.

이쯤 되었을 때.

조금 전 [프리스트 예시카]가 목재를 구해 오라며 보낸 3조가 조금 더 접근하며 시야가 트였다.

그리고 신우주가 어금니를 까득 물며 중얼거렸다.

"미친."

군세였다.

최소 100명에 달하는 군사.

그들이 언덕 위에서 진을 치고 신우주의 신도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적어도 호의적이지는 않은 눈빛으로.

*

-올 것이 왔군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단테가 푸념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내 곧 받아들였다는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이곳은 스크리미르 교단의 영역입니다.

스크리미르.

바위산의 거인으로 자주 묘사되는 자이자, 그 추종자들은 특정한 거점 도시를 두지 않고 영역 안을 넓게 돌아다니며 반 수렵 사회로 살아가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너무 늦기 전에 알아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세의 확장이 순조로웠으니, 그만큼 다른 교단의 견제를 받을 시기가 된 것입니다.

올 것이 왔다는 말에 신우주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보잘것없는 난민 무리였을 때라면 모를까, 무리가 안정된 이상 눈치를 보는 것도 시간문제였다는 건가.

"피할 수는 없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이건 교단의 자존심 문제가 걸려 있기에.

"그렇다면 조금 더 교세가 약한 지역에 방문한다거나?"

-그것 또한 쉽지는 않습니다. 이 근처에서는 이들 교단이 규모가 가장 작을뿐더러, 또 온건한 축입니다. 타 교단이라면 영역에 발을 들였을 때 이미 성전으로 간주해 공격당했더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쪽 교단에서 지금까지 편의를 봐주었다는 말인가.

단테가 굳은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까지고 떠돌이로 지낼 수는 없습니다.

터전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부분.

신우주가 신이니만큼 강하게 요구한다면 의견을 접겠지만, 그건 신우주가 지양하는 바가 아니다.

"온건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같은 영역 안에서 공존할 수 있게끔 자매 교단을 제안하는 건?"

-아마, 거절당할 것입니다.

"어째서지요?"

-그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보통은 그렇기에.

이것만으로는 근거가 부족한데.

신우주가 의견을 더 깊게 캐물어 보려는 찰나였다.

단테와 독대하던 막사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온 여성 한 명이 있었다.

-예시카 자매님.

-실례합니다.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제가 감히 대답을 드릴 수 있는 부분 같아서 그만.

엿들은 것치고는 퍽 당당하네.

다 들렸나? 평소 신도들한테 다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다 보니까, 자칭-스피커폰 모드로 해 놓은 탓이었다.

"앞으로는 주의해야겠군요."

그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은 찰나였다.

-신이시여! 제가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단테가 급발진했다.

-제가 그만 익숙함에 안주해 부주의했기에! 당신의 말씀을 바닥에 흘리는 짓을...! 이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를 씻기 위해 이 작은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아니, 사과는 괜찮습니다."

신우주가 다급히 물렸다.

너 죽으면 나도 죽어.

평소 오락가락하다가도 요새는 신앙심이 부쩍 올라서 역으로 부담스럽네.

"머리를 맞댈 사람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차라리 잘되었군요."

안 그래도 실질적인 교단 운영을 잡아먹은 예시카의 의견을 듣고 싶었던 참이었다.

평소 소통은 단테를 통해서만 했다 보니까.

'또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기도 하고.'

예시카의 표정은 생각보다 침착했다.

혹은 침착한 척을 하는 것일지도.

-물론, 저 같은 신입 신도의 말이 신뢰하기 어려우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습니다. 하여, 제 지식을 잘 활용하실 수 있게끔 의견을 정리하여 단테 형제님께 조언할 시간을 감히 간청드리옵니다.

거, 방식 귀찮네.

한 다리 거쳐서 뒤에서 은밀하게 깔짝거리겠다는 건데.

뭘 그렇게 번거롭게?

"예시카, 말 나온 김에 그대도 여기 앉아서 함께 의견을 나눕시다."

-예, 예? 예?

왜 당황해?

-하지만 제가 감히 당신께 직언을 드리는 건....

"그거야말로 바라는 바죠. 배우는 거."

-배, 배운다니요? 제가 감히 그럴 수는....

왜 거기서 갑자기 자기 자신을 낮춘대?

뭐야, 너도 그런 거였냐?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신우주가 피식 웃었다.

"왜요?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한테 배우는 게 뭐가 이상해서?"

-하지만 당신은 신....

"비유는 비유로 넘어가죠."

이제 신기하지도 않다.

신이랑 직접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람을 한둘 봤어야지.

"시간은 금입니다. 바쁘니까 본론만 바르게 갑시다."

-예, 예!

오케이, 상황 정리됐고.

곧 그녀가 준비했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고는, 청산유수처럼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스크리미르 교단은 우리 교단에서 공존을 제안한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지요?"

-그들이 본질적으로 유목 민족인 까닭입니다.

"더 자세히."

-유목 민족이 특정한 땅에 안주하지 못하고 떠도는 데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떨렸던 예시카의 목소리에 작은 확신이 찾아왔다.

-스크리미르 교단이 소유한 영토는 넓으나, 어디까지나 넓기만 할 뿐입니다. 그들은 척박하고 가난합니다.

아, 문득 최근 있었던 일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신우주 교단이 거지 신세로 떠돌았음에도, 이들 교단이 굳이 터치하지 않고 방치했던 것.

못 버티고 알아서 떠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먹여 살릴 입에 비해 실질적으로 가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희 교단의 것을 뺏으려면 뺏지, 더 양보하려고 하진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객관적인 현실에 입각한 조언이었다.

신앙심과 주관으로 가득 찬 단테의 것과는 다른 방향.

참, 그러고 보니 문득 최근 들어 교단에 제 발로 찾아와 위탁하는 신도들이 늘었단 사실이 떠올랐다.

'다 배고파 보였지.'

그들 중에는 스크리미르 교단의 신도들도 더러 있었다.

아마 떠돌이 생활을 견디다 못해, 그나마 가진 게 있어 보이는 신우주 교단에 찾아왔던 게 아닐까.

'잠깐, 그렇다면.'

탑에 들어오기 전까지 경제를 멀리하고 살아왔던 신우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토건족이 그렇게 잘 먹고 산다던데. 우리 애들, 요새 건물 좀 많이 지었지?'

별게 연금술이냐?

땅 개척하고 집 지어주고.

그러면서 대가 넉넉히 챙기면 이게 곧 현실에 강림한 연금술이지.

그건 그렇고....

'스크리미르 교단, 쟤네 신도 중에도 쓸 만한 인재 좀 있겠지?'

예시카처럼.

| 28화. 스크리미르 교단 (2)

스크리미르.

교단 중에서는 소형 교단에 속하나, 그 전투력과 지배 영역은 어지간한 중형 교단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이들.

그들의 특징이라면 역시 그거였다.

'야만스럽군.'

단테가 긴장을 잔뜩 끌어올린 채로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으로 진열한 백 기 이상의 기병들.

모두가 스크리미르 교단의 신도들인데, 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있었다.

흉흉한 기세가 흘러나온다.

그들에게서 타라 교단의 신도들과 같은 정렬함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방인들이여, 그대들 교단의 명칭은 신우주 교단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그쪽은 스크리미르 교단인가?"

"잘 아는군."

교단이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막상 이들을 교단이라는 단어로 묶어도 되는 걸까?

그들 스스로도 교단보다는 부족이라는 인식이 더 강할 텐데.

제사장이며, 동시에 부족장을 겸하고 있는 남자이자, 그 누구보다도 흉흉한 워페인트를 칠한 남자, 하콘이 짐승과도 같이 끓는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는 아버지 신, 스크리미르의 자손. 이 땅을 터전 삼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주인들이다."

늙은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은 한없이 날카로웠다.

르네상스의 조각처럼 우람한 근육은 덤.

등에 짊어진 거대한 도끼에서 협상의 여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들은 우리 어머니와 어버이의 땅을 침범했다. 당장 떠나라."

스크리미르 교단의 당장이라도 전쟁을 감수하겠다는 듯한 기세와 대조적으로, 신우주 교단은 겁에 질려 있었다.

"...엄마."

"이 어린 양을 도와주소서."

전투력으로는 승부가 안 되겠지.

단테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하콘의 등 뒤에 걸린 핏빛 전쟁 도끼만 보면 당장이라도 칼을 꺼내 들고 그의 주특기 [깊게 찌르기]를 사용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그 순간 신우주를 따로는 100여 명의 신도들이 하콘의 부하들에게 몰살당할 거다.

-싸워야 할 때는 싸우더라도, 그건 명분이 따를 때여야만 합니다.

단테는 신우주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신우주 교단을 대표하여, 귀 스크리미르 교단에게 협상을 제안하겠다."

"협상?"

"그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일이다."

"살 곳도 없이 떠도는 네깟 것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마."

하콘이 코웃음을 쳤다.

마치 한참 아랫것들의 발버둥을 바라보는 것처럼.

단테는 당장이라도 칼을 뽑고 싶은 욕망을 꾹꾹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스크리미르 교단의 영역은 그 환경이 척박해, 잘 지은 집과 기름진 땅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들었다."

"어쩌라는 것이지? 이방인들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

"신경 쓸 문제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럴 기회를 줄 것 같나?"

단테가 그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눈을 왼쪽, 예시카가 서 있는 쪽으로 흘겼다.

"스크리미르 교단과는 달리, 우리 교단이 어떻게 이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나?"

단테의 질문과 함께 예시카가 앞으로 차분하게 걸어 나왔다.

몇몇 스크리미르 신도가 발작하듯 튀어나오려 했으나, 하콘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나서지 마라."

예시카가 이어 바닥에 검은색의 돌멩이를 심은 찰나였다.

"...호오."

갑작스럽게 검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대지.

마치 심해 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불길한 색깔이 반경 30m가량을 검게 물들였다.

흉흉한 기색에 스크리미르 신도들이 타고 온 말이 비명을 질렀다.

"저주다!"

"놈들이 수작을 부렸다!"

"부족장님을 지켜라!!"

스크리미르의 일반 신도들이 경악한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하콘은 오랜 세월에 거쳐 대지에 그 뿌리를 내린 암석처럼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토로군."

후우, 알고 있었군.

시간을 아꼈다는 생각에 단테가 식은땀을 감추며 말했다.

"그래, 흑토다. 뭐든 심기만 하면 풍작을 거둘 수 있지."

"대답해라. 어떻게 한 거지?"

"이거다."

단테가 품에서 경작석을 꺼냈다.

"경작석,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우리 교단의 비전이지. 이것만 있으면 그 어느 모래사장이라도 풍작을 거둘 수 있다."

"...오오."

저 멀리 스크리미르 신도의 작은 감탄이 들려왔다.

"저 작은 것에 그러한 힘이...."

"신우주 교단, 생각보다 대단한 곳인 건가?"

그들로서는 경탄할 일이리라.

지난 수백 년, 이들이 유목 민족이라는 미명 아래 떠돌이로 지내야만 했던 서러움이 정면에서 부정당한 셈이니까.

"이건 일부에 불과해요."

예시카의 차례가 왔다.

"주거지를 꾸리는 일에 관해서도 우리 교단은 탁월하니까요."

"우리도 우리가 살 집을 지을 수 있다."

"아니요."

걸어 나온 예시카가 하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름에 지은 집을 겨울에 버려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겠지요."

대답이 없다.

정곡을 찔렀군.

"이 근방의 나무들은 건조될수록 심하게 휘고 금방 갈라지니까요. 강성도 모자라고, 굵기도 모자라고. 결함이 있어서 정착하지 못하고 천막을 고수했던 것 아닌가요?"

"...."

하콘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이방인, 건방 떨지 마라. 그깟 재료 따위는 사 오면 그만이다."

"어떻게요? 가진 땅은 넓지만, 정착할 곳이 없을 텐데. 애초에 모두에게 보급할 수는 있나요?"

쿡쿡 찔러 들어오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은 무엇 하나 사실이었으니까.

'이미 확인했어.'

몇 번이고 벌목팀을 보내서 확인했다.

집을 짓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곳의 목재 자체의 성질을 알아내기 위한 조사대였다.

"우리 교단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시카가 그 입을 연 찰나였다.

저 하늘 위에서 빛이 쏟아지더니.

"...!"

산.

평야에 굉음과 함께 목재의 산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르르르르!

광이 날 정도로 품질이 좋으며, 거대하니 다듬기에 따라서 무엇이든 지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목재들이.

최상급 목재들의 향연.

최소한의 원리라도 짐작할 수 있었던 경작석과는 다르다.

돈을 준들 구할 수나 있을까?

감히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눈앞의 광경에 하콘의 이마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이방인, 무슨 사술을 부린 거냐."

"사술이 아닙니다."

예시카의 얼굴에 맑은―그녀 딴에는 맑다고 지었지만, 타고난 얼굴의 특성상 차갑게만 느껴지는―미소가 떠올랐다.

"기적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기적?"

"예, 우리가 모시는 신께서 저희를 어여삐 여기어 내려주신 기적입니다."

살 곳을 달라 기도하니, 그곳에 터를 이룰 토대가 생겼다.

['권능-전송'을 발동했습니다.]

*

같은 시각.

"후욱, 훅!"

신우주는 나무를 패기 바빴다.

'와, 씨, GP가 남아나질 않네.'

섬에 썩어 넘치는 나무들을 말 그대로 쉬지 않고 패느라 바빴다.

"어우, 땀 나."

37층 시련의 배경은 섬이다.

하지만 섬이라는 게 꼭 탁 트인 광경만 의미하는 건 아니다.

주 무대는 숲속.

수목이 빽빽하다 못해 한 3분만 정면으로 걸어 나가도 그대로 조난당할 듯 험한 수목이 진짜배기 무대.

['가로 베기'를 발동했습니다.]

그 안에서 신우주가 계속해서 나무를 잘랐다.

새삼스럽지만, 가로 베기는 나무를 잘라내기에 최적의 스킬이다.

콰아앙!

빛이 쏟아질 때마다 나무들이 몇 그루씩 떼거리로 우지끈 무너졌다.

그러고는.

['권능-전송'을 발동했습니다.]

보냈다.

['권능-전송'을 발동했습니다.]

['권능-전송'을 발동했습니다.]

['권능-전송'을 발동했습니다.]

몇 번이고 손을 얹고 바로 하위세계로 보내길 반복.

처음 하는 일이 아닌 듯 익숙했다.

사실이다.

처음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 결과물 또한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균일하지 못하게 자란, 평범한 목재에 불과했던 것이 일단 '전송' 스킬을 통하고 나면.

-이건, 말할 것도 없이 최상등품이군요.

강성부터 단열까지 집을 짓기에 최적화된 특급 목재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물품을 전송할 시에는 GP가 소모되며, 그 용도와 가치에 비례하여 자동으로 소모량이 조정됩니다.]

목적을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집을 짓기 좋은 목재.

이게 목표였다 보니까 대신 GP가 파죽지세의 기세로 고갈됐지만, 뭐.

'효과 좋잖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걷어내며 신우주가 씨익 웃었다.

그는 알았다.

자고로 집 짓는 데는 돈 아끼는 거 아니라는 진리를!

협상 자리에서 신의 기적을 보여주기에 이만한 방식도 없겠지.

그 결과 또한 말할 것도 없고.

-세상에.

-진짜로 신이 돕고 있는 건가?

-아버지 신이시여....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다.

스크리미르 교단 신도들이 동요하고 있다.

그들에게도 보이는 거다.

신우주의 교단과 협력하거든, 그들 또한 더 나은 삶을 얻어낼 수 있으리라는 미래가.

또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아버지 신이시여, 그대는 어찌 침묵하시나이까.

새삼스럽지만, 이쪽 세상의 신들은 신도들의 고통에 한없이 무관심해 보였으니까.

뭐, 덕분에 이쪽은 편하지만.

눈앞의 하위세계 모니터가 그 증거.

-믿기 어렵지만, 그대들의 말은 사실이군.

그 하콘이 설득당하고 있었다.

'좋아, 일단 눈앞의 위기는 해결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 신우주는 식겁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방인들이여, 내가 그대들과 협력하여 힘을 빌리느니, 가진 것을 뺏고 노예로 삼는 게 빠르지 않겠나?

"...!"

이런 미친.

무역 트자고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더니, 감히 플랜테이션에 약탈 콤보를 시도해?

어느 멀티버스에서 온 대영제국이야?

잠시나마 블러핑이길 바랐지만, 하콘은 진지한 듯했다.

-애초에 이상했다. 그대들이 신과 긴밀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 봐야 약소한 교단 아니던가? 협상은 비슷한 격을 갖춘 이들끼리 하는 것이다.

격이 안 맞으니까 거절하겠다고?

기적의 논리 속,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단테가 비로소 검을 검집에서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

-부족장, 현명하게 생각하라. 우리 신이 가만히 있을 듯싶은가?

-이방인이여, 우습군.

하콘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단테를 바라보며 도끼를 겨눴다.

-그대들의 신이 그토록 훌륭하다면, 그대들이 터전 하나 없이 비참하게 떠돌 이유가 있었겠나?

그렇게 몇 초.

하콘의 입가에 광소가 떠올랐다.

-그대들의 말대로 그대들에게는 쓸모가 있다. 절반은 살려주도록 하지.

젠장, 협상 결렬이다!

상황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

'개 꼬였다.'

이렇게 된 이상.

아껴 뒀던 '그거'라도 쓰는 수밖에 없나?

식은땀을 흘리는 동시에 남은 GP를 계산해 봤다.

아슬아슬하지만 가능은 하다!

대신 모든 신도를 살릴 수는 없다.

또 GP가 회복될 때까지 섬에서의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겠지만, 신도들의 절반이 목숨을 잃고 나머지도 다른 교단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라고 생각한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버지, 당신은 늙었군.

하콘의 부하 중에서 가장 앞에 서 있던 근육질의 남자가 말에서 내리고는,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어서 단테와 하콘의 사이로 끼어들어 와서 도끼를 뽑아 들고는.

철컥!

하콘에게 그 도끼날을 위풍당당하게 내밀며 외쳤다.

-당신은 늙었다. 올바른 판단 하나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바카르, 무슨 짓이지?

-기회가 왔는데도 부족민들을 굶길 셈이냐? 그깟 아집을 근거로?

-네게는 판단할 자격이 없다.

-그 말이 옳다. 내게는 아직 자격이 없다.

-알았으면 자리로 돌아....

-그래서 지금부터 갖추기로 했다. 따라서.

바카르.

하콘의 아들이 조금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계승식을 요청하겠다.

계승식?

여기에서?

그게 뭔데?

신우주가 가질 추리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바카르, 애송아, 넌 오판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자리로 돌아간다면....

-정말로 늙었군.

바카르가 힘껏 집어던진 도끼가 그대로 하콘의 이마에 박혔으니까.

쩌억!

"뭐?"

하콘의 동공이 굳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말 위에 꼿꼿이 앉아 있던 육신이 그대로 기울어지더니, 바닥을 나뒹굴었다.

쿠웅!

흑토가 잔뜩 묻은 그 시체에서 도끼를 회수한 바카르가 씨익 웃었다.

-이런, 내가 오판하긴 했군.

"...."

-인사차 던진 도끼 하나도 못 피할 줄은.

진짜 뭐 하는 새끼지?

대화하는 사람한테 냅다 도끼 던져 놓고, 그거 못 피했다고 티배깅을 박아?

계승식이라는 게 존속살해를 의미하는 거였나?

어이없어할 겨를도 없이 바카르가 하콘의 도끼마저 회수하더니, 바닥에 자루가 쿠웅! 소리가 나게 박아넣으며 선포했다.

-지금! 나! 바카르는 부족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전대 부족장 하콘으로부터 지위를 물려받았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의 부족장이자 제사장이다!!! 불만을 가진 자는 앞으로 나와라!!!!

포효 한 방에 상황 정리를 마쳤다.

부족장이 바뀐 게 겸사겸사라고 느껴질 만큼의 임팩트.

다소 미친 것 같은 상황이지만, 정작 스크리미르 부족민들은 침착했다.

-어쩔 수 없군.

-적법한 절차였으니, 바카르가 지금부터 우리의 부족장이다.

-나는 바카르를 따르겠다.

-바카르는 강한 전사다. 그라면 목숨을 맡길 수 있지.

도리어 엄숙하다.

이게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다는 것처럼.

비로소 계승식의 의미를 깨달은 단테를 향해, 바카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외지인, 지금부터는 내가 협상을 이어 나가겠다. 불만은 없겠지?

-...그래.

단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동족상잔하더니 그렇게 됐다는데 뭘 할 수 있겠나?

-좋아, 그렇다면 내 첫 번째 요구는 하나다.

하지만 다음 한마디에서, 신우주는 바카르라는 저 새끼가 상상을 한참 초월한 미친놈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희들의 신, 신우주와 직접 협상하겠다.

진짜 제정신 맞나?

| 29화. 스크리미르 교단 (3)

하위세계 모니터 속.

바카르가 당당하게 외쳤다.

-너희들의 신, 신우주와 직접 협상하겠다.

그 당돌하기 짝이 없는 선언에, 신우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미친놈인가?'

이쪽 세계의 신이 아무리 흔하다고는 해도, 동네 친구처럼 부르면 만날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교단의 중진들조차 살면서 평생 목소리를 들을까 말까 할 정도.

굳이 말하자면 신우주가 기형적으로 말이 많은 편인데.

-왜, 안 될 것 있나?

바카르라는 저놈의 태도는 숫제 맡겨 놓은 물건 찾아가겠다는 듯하다.

-미쳐 버린 거냐? 협상은 내 앞으로 해라.

-이방인의 수장, 너와는 못 나눌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야기라면 이 자리에서 꺼내서도 안 될 것이다.

-말했을 텐데, 긴밀히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다고. 아니면 네가 신의 모든 의사를 대변할 수 있다고 주장이라도 하려는 거냐?

- ...윽

은근히 말빨도 강하고.

하긴, 신에게 직접 전해야 할 말이 있다면, 직접 전하는 게 맞겠지.

신우주는 작은 즐거움마저 느끼며 결단을 내렸다.

[경고!]

[이미 교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고 말을 붙여 보기로.

"단테, 자리를 비워 주세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마침 대화를 나누고 싶은 참이기도 하였으니."

-그렇다면.

단테가 곧 자리를 비켜 주었다.

바카르와 신우주만 남은 벌판.

"재밌군요."

신우주가 말을 붙인 그 순간이었다.

-세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기 짝이 없었던 바카르가, 말 한마디에 눈을 크게 뜨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정말로 존재했다고? 말도 안 돼.

"이제부터는 말이 될 겁니다. 여기에 존재하니까."

-...아니, 어째서 존댓말을?

"꼭 반말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만? 그보다 이만하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잠, 잠깐. 이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저 프리스트가 수작을 부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잖아? 증거를 받고 싶다.

"증거라."

-이곳에 있을 수 없는 물건을 보여달라. 무엇이든 좋다.

거, 의심이 많네.

대화 좀 나누자고 자기 입으로 요청까지 해 놓고, 부탁을 들어주니까 왜 더 증명을 요구하는지 모르겠는데.

호쾌한 게 아니라, 단순히 안하무인인 성격인 건가 싶은 참이었다.

-내게는 중요한 일이다. 간곡히 부탁하겠다.

어째서일까.

신우주는 바카르의 말속에서 어떠한 절실함이 느꼈다.

증명을 요구하는 게 아닌,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의 그것이.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그 자그마한 직감이 신우주를 움직였다.

신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라.

'돈? 먹을 것? 자재?'

아니다.

그딴 걸로는 안 된다.

어지간한 건 보내 봐야 100% 믿지는 못할 터.

정말 상상하긴커녕 꿈도 못 꿨던 무언가를 보내야 먹히지 않을까.

평생 찾아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던 기적과도 같은.

그래, 예를 들자면.

'아, 저거다.'

반쯤 폐허가 된 숲속을 한참 맴돌던 신우주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진짜 기적이라고 부르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저세상 끝까지도 이어질 듯 한없이 넓게 펼쳐진 푸른 천.

바다였다.

'평야 한복판이었지? 그것도 꽤 척박한.'

바다가 가까웠다면 이들이 느꼈을 고충의 태반은 없었을 거다.

역사적으로 해안가에는 유목 민족이 발생하지 않았다. 설령 자리를 잡더라도 바로 정착했고.

왜냐고?

바닷가 앞은 강수량이 많거든.

강수량이 많은 동네에선 농업이 금방 발전하고, 따라서 유목민으로 살 이유가 없다.

여차하면 낚시나 교역으로 먹고살았으면 그만이었을 테고.

'어디 짠물 맛 좀 보여 줄까.'

결과는 어떻게 될까?

신우주가 가슴속으로 기대를 품는 동시에 하위세계를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대비하세요."

-위험하다고? 뭘 하려고?

해 봤던 그거다.

목적은 좀 다르지만.

어느새 탑 37층의 바닷가 직전까지 다다른 신우주가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찰랑거리는 수면이 손끝과 맞닿자 기분 좋은 청량함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그의 손은 통로가 될 것이다.

['권능-전송'을 발동합니다.]

GP가 아찔하리만치 빠르게 빨려 나갔다.

GP라는 건 일으키는 기적의 양과 질에 따라서 소모량이 바뀌는 면이 있었는데.

지금 신우주가 일으키려는 기적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질은 모르겠지만, 스케일로 따지자면 여태껏 보내왔던 그 어느 [전송]보다도 압도적일 테니까.

['권능-전송'을 발동합니다.]

[남은 GP: 380/810]

100명에 가까운 신도를 거느리며 축적한 GP가 어느새 800을 조금 넘었다.

전에 뭐였더라?

검은 성수-콜라-를 양만 부풀려서 타라 골목길에 진창 들이부었을 때 한 30 들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서 치유력 강화 같은 부가적인 기적은 제거하고, 순수하게 바닷물 그 자체를 전달만 하면 데만 집중하면 어떨까?

[신앙심에 비례하여 GP 소모량이 줄어듭니다!]

농사를 전파하며 얻은 신앙심 GP 소모 보정은 약 20% 정도.

그걸 감안해도.

[남은 GP: 200]

200GP.

실로 압도적인 GP를 바닷물 전송 하나에 쏟아부었을 무렵.

그 순간.

콰르르르르르르릉!

하위세계에 폭우, 아니, 뇌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질량 병기로서의 물.

그 자체가 이 세상을 뒤엎겠다는 듯한 물의 질량이.

*

세상이 멸망할 듯한 물.

아니, 실제로 교단 신도들이 보는 신우주의 물은 그것이었다.

"비다."

"비가 쏟아진다!"

"짠데?"

"잠깐, 이거 설마 바닷물인가?"

"바닷물이다!!!!!"

스크리미르 교단의 신도들이 비명을 질렀다.

신우주 교단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은 나름 익숙했다. 신우주의 기적이라는 것에.

하지만 스크리미르 교단은 다르다.

"으아아아아아아!! 비다!!!!!"

단순히 비, 그것도 양이 좀 과하게 많은 소나기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경탄과 공포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왜냐고?

"...신우주 교단, 그들은 정말로 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단 말인가?"

이들은 유목 민족이니까.

'물'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평생을 떠돌이로 살아야만 했던 아픈 과거를 가진 자들이었으니까.

"바닷물이 이 망할 오지까지 올 수는 없지."

바카르가 허공을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신우주, 그대는 진정으로 신이 맞다."

쩔그럭.

이 비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맞겠다는 듯, 무기마저 흙바닥에 내려놓고 온몸이 흠뻑 젖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이나 빗물을 받아들이던 바카르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우리의 위대한 아버지 스크리미르는 이러지 못했는지."

그 목소리에는 애증이 묻어 있었다.

"내가 모시지 않는 신조차, 처음 본 나를 위해 보이는 이 기적을 지난 수백 년간 어째서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신우주의 신도조차 아니다.

협상을 요구하는 외부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우주는 그의 신도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기적을 선보였다.

바카르.

하콘.

스크리미르 부족.

그 모두가 간절히 빌고 또 빌어도, 그들의 신 '스크리미르'가 들어줄 생각조차 않던 그 빌어먹을 기적을 말이다.

"신우주, 나는 신이 싫었다."

-그런가요?

그의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제 현실성이 없다 못해 신성하게마저 들렸다.

"아버지 신, 바위 거인, 그럴듯한 이름이지. 몇백 년이나 아무런 말도 없었다는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신우주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듣기만 하였다.

"매일같이 물었지만, 무엇 하나 대답해 주지 않았다."

-....

"허울만 좋은 이름 아래 왜 그리고 많은 부족민들이 굶어 죽어가야 하는가? 왜 떠돌며 고통받아야 하는가? 옆의 타라 교단은 어린아이도 배에 기름기가 올라 떵떵거린다는데, 왜 우리는 농사 지을 땅 한 줌의 기름기조차 모자란가?"

바카르의 말은 회한이었다.

스크리미르의 신도로서 그를 충실하게 섬기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모두 빗물에 쓸어내리듯.

폭우의 소리에 묻히길 바라며 신우주에게 숨기지 않고 감정을 전했다.

"부족의 아이들이 가난 앞에서 견디지 못해 몇 명이고 죽어 나갔다. 하콘은 그걸 섭리이자 축복이라고 말했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그의 분노 속에는 합리성이 있었다.

또 의심이 존재했다.

"그런 건 신이 아니다. 적어도 나의 신은 아닐 것이다. 신우주, 그대도 스크리미르의 교리에 동의하나?"

-글쎄요.

저 신은 신중했다.

확신하듯 말하지 않고, 자신의 말이 진리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 가지 의견을 조심스레 제시했다.

-눈앞에 아픈 사람이 있다면, 돕고 싶은 게 자연스러운 마음 같은데요.

"그런가?"

스크리미르의 교리를 잘 모르겠다라.

"마침, 동의하던 참이다."

바카르가 미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몇십 초나 웃었을까.

그리고 홀가분해졌다.

확신이 섰다.

"그쪽 교단에 남는 자리 있나?"

*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부족장 바카르'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사도급 신도를 등용했습니다.]

[GP가 대폭 증가합니다.]

[현재 GP: 160/920]

부족장 바카르, 스크리미르의 우두머리를 먹고 있는 놈이 합류했다.

신우주의 교단에 날래.

"아니, 이건 또 뭔데."

다른 교단은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며.

그런데 왜 저쪽은 저래?

그보다 함부로 타 교단 건드리면 분쟁 생긴다고 경고 떠오르지 않나? 당장 나한테 현피 신청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가만.'

이거 설마?

짚이는 가능성이 하나 있다면.

'스크리미르, 이 신이 설마, 일개 미신에 불과했다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저 원시 신앙으로서의 스크리미르가 존재할 뿐.

혹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거나.

"...."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다.

신이 보란 듯이 활개 치는 세상이라고 하여서, 미신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법칙은 없으니까.

당장 탑 바깥 지구가 그런데.

하지만 바카르를 등용했다고 해서, 그 산하 신도들까지 신우주 교단에 딸려 왔다는 말은 아니었다.

-난 부족장이다. 부족장에게는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주어지지. 내가 그대를 믿는다는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하겠다.

복잡한 사정, 아니, 신분이 있으니까.

그래서 정리하자면 이거다.

-지금부터 우리 스크리미르 교단은 신우주 교단과 한 몸이다!

자매 교단이 되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을 모시는 교단과 말이다.

바카르가 도끼를 쥔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들기며 외쳤다.

-형제의 적은 우리의 적이며!!

-형제의 적은 우리의 적이며!

바카르가 목청을 터뜨릴 때마다 메아리가 울리듯 연호하는 목소리가 지평선을 타고 울렸다.

-형제의 아군 또한!!

-형제의 아군 또한!

-우리의 아군이 될 것이다!!

-우리의 아군이 될 것이다!

-으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 이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현상을 일으켰다.

[타 교단과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타 교단과의 협력으로 인해, 교단의 정통성이 대폭 강화됩니다.]

"어?"

이게 뭐야?

신우주가 두 눈을 의심했다.

[신앙이란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 기성 교단과 협력을 맺었다는 말은 곧 상대 교단에게 신앙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정통성의 강화로 이어집니다.]

아, 그러니까 우리 신도를 늘리는 것만 세력을 키울 방법이 아니었다고?

스크리미르 교단과 연대 보증을 선 셈이라고?

듣고 보니까 합리적이긴 한데.

[교단의 명성이 증가합니다!]

[신도들의 신앙심이 눈에 띄게 상승합니다!]

[GP 소모가 감소합니다!]

[새로운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올 확률이 증가합니다!]

[기성 교단의 경계심이 소폭 감소합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앞으로도 타 교단과 전투만 반복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걱정을 많이 덜었다.

'잘하면 메이저 교단은 몰라도 지역 유력 교단 정도는 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무협에서도 구파일방 못 찍어도 천산파 정도 되면 취급 괜찮잖아?

떠돌이 신세도 청산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 신이여, 긴히 물을 게 있다.

바카르가 존경심 어린 표정 속, 호기심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땅은 염토가 되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데, 이건 어떻게 할 것인가.

아.

가만, 아.

'아.'

퍼포먼스에 집중해서 놓쳤다.

바닷물을 내륙 지방에 뿌려 버리면 개쩔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빠져서.

바카르의 목소리에 기대감이 줄줄 흘러넘쳤다.

-그대라면 분명 활용 방안을 생각해 둔 바가 있겠지? 실로 믿음직하다.

아니다.

그거 아니다.

이 망한 땅을 어떻게 써먹지?

'아!'

그거다!

제갈량에 빙의한 신우주가 주제에 당당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부터 이 땅은 우리 두 교단이 맺은 화합의 증거로서, 이대로 손대지 않고 영원히 보존할 것입니다."

방치다.

망한 땅은 안 쓰면 된다!

-오! 그렇군!

바카르는 마음속 깊이 감탄했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답이 없어 보여서 둘러댄 게 먹혔다.

효과는 탁월했다!

-역시 제대로 된 신은 다르군! 그런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는!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습니다."

-계획! 계획은 좋은 것이지!"

계획 아니다.

질러 놓고 까먹은 거다.

하지만 물론, 맞는 말이라고 우겨야지.

"자, 그럼 이동합시다. 제대로 자리 잡을 장소를 찾아야 하니. 다 같이 일단 거점을 합치는 것도 좋겠군요."

-오! 그럼 일단 마시는 건 어떻겠나?

"마신다면?"

-모르는 건가? 그야 당연히 술이다!

"술?"

-친해지는 데는 술이 최고다! 우리 부족은 물 대신 곡주를 즐겨 마신다! 그래서 어린아이들도 얼굴이 빨갛지!

가만, 위아래로 알콜 중독 부족이라고?

일단 저것부터 어떻게 해야겠는데.

농업용 급수와 식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단을 어떻게 찾는데?

그렇게 모처럼 교단 운영에 빠져 있는 참이었다.

저벅.

뒤통수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교단 운영에 너무 집중해서, 섬 쪽에 긴장을 과하게 놓았다.

'누구지?'

지척까지 다가온 상대에 긴장하며 뒤를 돌아본 찰나였다.

"살...려주...."

한 여성이 채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눈앞까지 걸어와서는 풀썩 쓰러졌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하리만치, 전신이 처참하리만치 너덜너덜해진 피투성이 차림으로.

하지만 그 부상의 흔적은 몬스터가 저질렀다기에는 너무 반듯했다.

'같은 모험가에게 기습당했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 30화. 스크리미르의 축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