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스캐빈저 (1)
기절하고 얼마나 지난 걸까.
'...어디까지 가는 거지?'
묶인 채 이동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건 오래전이었다.
하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그저 시야를 최대한 어둡게 유지한 채로 촉감과 청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운 채 정보를 최대한 습득했다.
까슬까슬하고 서늘한 목재 재질의 바닥.
숲속인 듯 울음소리가 종종 들려오는 바깥에서는 때때로 곡괭이질 소리가 들려왔다.
'외곽인가? 몬스터들의 울음소리로 파악하면... 대충 2층 언저리겠군.'
광업이 발달한 지역이라면 대략 감이 온다.
그렇게 숨죽이고 살피는 사이.
신우주가 감금된 오두막으로 한 남자가 불시에 들이닥치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외쳤다.
"이 거지 새끼, 도대체 뭐야?"
나무 톱밥을 연상시키는 걸쭉한 목소리였다.
"이놈, 저층에서만 돌아다닌다는 그놈 아닌가? 그래도 오래 활동했으니까 돈은 좀 모아뒀으려니 했다마는, 거지새끼잖아?"
"뻔하지."
목소리가 걸걸한 남자에 이어, 상대적으로 가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짜증이 남자 못지않은 듯 표독스러웠다.
"위로 올라갈 희망이 없으니, 돈을 버는 대로 써재낀 거야. 안 그래? 제대로 한심한 놈들이지."
안타깝게도 신우주는 돈을 딱히 낭비하지 않았다.
그의 재산은 통틀어 호주머니가 아닌 은행에 있기 때문.
탑 초창기에 가입한 예금 상품을 통해 열심히 저축해 왔다.
당시 탑이 워낙 위험했던 탓에 그만큼 예금 상품의 이율이 아득히 높았다는 건 유의해 둘 일이다.
"그레고리, 이대로 죽여 버릴까?"
여자의 입에서 서늘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 짧은 말 속에서 신우주는 판단했다.
'그레고리? 내가 아는 그 그레고리인가?'
탑에 들어오는 유망주들의 이름이라면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
그레고리라는 이름은 흔치 않다.
랭커 그레고리... 그놈은 아닐 테지. 하층민 상대로 강도 노릇이나 할 만큼 한가한 놈은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짚이는 건 한 놈.
'스캐빈저 그레고리로군.'
스캐빈저, 같은 모험가를 등쳐먹으며 사는 놈들을 의미했다.
이쪽 그레고리를 모험가 등급으로 분류하자면 추정 4등급에서 어쩌면 5등급 정도일까.
명백히 중견.
좋아, 수준은 파악했다.
그렇다면 아까부터 계속 표독스러운 음색으로 짜증을 흘리고 있는 저 여자의 정체는 아마도.
"줄루, 진정해라. 노동력으로 써먹으면 그만이야. 농장에 사람이 많이 빠졌다."
그래, 이름이 줄루였지.
그레고리와 함께 한패를 이뤄서 활동하는 스캐빈저.
둘이 수준은 비슷했고.
"보스에게 경고를 받고도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렸나? 네 심기가 거슬릴 때마다 송장을 치웠다가는 우리가 먼저 송장이 될 거다."
그건 그렇고 아까 뭐라고 했지?
농장?
정상적인 농장은 아닌 것 같고, 노예 농장이라도 운영하고 있었던 건가?
'탑 치안은 이게 문제라니까.'
조금만 민간 거주지 바깥으로 나가도 바로 무법지대, 동물의 왕국이 되는 것.
하층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탑은 각 층 하나하나가 작게는 섬부터 넓게는 대륙이라고 좋을 정도로 넓으니까.
모험가 길드가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전부 통제할 수는 없다.
그 외진 곳에 스캐빈저 놈들이 숨어들어 지내기 마련.
'일단, 무기는 있다.'
신우주가 조심스레 팔뚝에 신경을 기울여 보았다.
얇은 필름의 형태로 변환해 팔에 씌워 놓았던 무형의 재질감이 선명했다.
[무형]
[랭크: S]
[제작자: 바스커빌]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병기. 형태와 질량, 부피가 자유롭다. 그 한계는 소유주의 정신력에 비례한다.]
승산은 적당하다.
그가 각성한 이래 손에 넣은 힘이 무형 하나가 전부는 아니니까.
하지만 인간 농장이라.
조금 더 상황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두 놈이 전부가 아닐 가능성도 있지.'
보스라고 하지 않았나?
위에 더 강한 놈이 있겠지. 어쩌면 거대한 조직일 수도 있고.
섣부른 행동은 죽음을 재촉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계속 시간을 뺏기고 있기도 좀 뭐하겠다. 밤에 슬쩍 빠져나가 정찰이라도 해 볼까 계획을 세우는 참.
"줄루, 안달하지 마라. 이런 촌구석에서 헛짓거리할 날도 앞으로 며칠 안 남았으니."
귓속으로 솔깃한 말이 흘러들어왔다.
"현자의 돌이 곧 완성된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현자의 돌.
냄새가 났다.
보물의 냄새가.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게 뭘까.
이 질문을 탑에서 묻는다면 아마.
Yehyeh - 몬스터가 제일 위험함(진짜 그럼)
대부분은 몬스터를 꼽으리라.
Catchball - 강한 몬스터를 사냥하려면 공략대가 필수잖아? 단순 개체의 강함으로는 모험가가 못 따라가지. 그러니까 초보자들에게 더 최적화된 공략법을 제공해야 해.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단계는 갈린다.
강한 몬스터들은 모험가 100명이 모여도 꼬리 한번 휘둘러 섬멸시키고는 한다.
무력의 상징, 랭커들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 사이에서의 이야기일 뿐.
절대적으로 몬스터들에 비해 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
kuromi - 쯧,,, 그건 네가 하층민이라 그렇고,,, 조금만 위로 올라가도 모험가가 몇 배는 위험하다,,, 쯧,,,
Sword_master - 사람이 더 위험한 건 맞지. 몬스터는 공략하면 그만이니까.
혹은 모험가를 꼽는 자들도 있으리라.
모험가들에게는 저마다의 특성과 지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군 사이에 섞여들 수 있으니.
인트라에서는 이를 두고 하루 종일 아가리파이팅을 벌이기 바빴다.
Tier_maker - 몬스터 티어 표 신버전 만든다(제작 중)
이 토론에서 결론은 하나였다.
Flexin - 왜 싸움? 그때그때 다르지.
몬스터든 인간이든,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
인트라 대표 중립병자 플랙싱이 쿨하게 정리했다.
Flexin - 길드에 든 애들한테는 몬스터가 제일 무섭고, 혼자 다니는 애들한테는 조직화 된 범죄자들이 제일 무섭고. 아예 저층에서는 스캐빈저가 무섭고.
Flexin - 왜 싸우는지 모르겠네.
Flexin - 이렇게 시간 낭비할 바에는 가서 스킬이라도 하나 더 익힘이?
위험한 적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사회 초년생에게는 당장 월세 50만 원이 눈앞의 칼날만큼 무서운 적이지만, 재벌 3세들에게는 마시다 흘리면 휴지로 닦을 술 한 병에 불과할 테니.
kuromi - 쯧,,,, 중립충 새끼,,, 쯧,,, 간짜장도 중간짜장으로 해 먹을 새끼,,,
Sword_master - 양비론은 나쁘다.
Catchball - 입만 열면 분위기 초치는 자식.
Yehyeh - 저럴 거면 인트라를 왜 들어옴?(진짜 모름)
어쨌든 결론은 이거다.
'막 각성한 저층 모험가들에게는 스캐빈저가 가장 위험하겠지.'
내 상황에는 스캐빈저야말로 당장은 최악이라고.
스캐빈저.
생계의 수단으로 몬스터보다는 같은 모험가들을 사냥하길 택한 자들.
"그럴 타이밍이긴 했어요."
덩치 작은 남자 하나가 곡괭이질을 반복하면서도 입으로는 툴툴거리길 멈추질 않았다.
이름이 잭이라고 했던가?
시끄럽다.
"너무 들떴던 거죠. 각성했어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았는데."
각성하자마자 끌려왔다고 한다.
모아둔 돈을 털어 상단에서 장비를 마련했는데 그날이 제삿날이었다나.
깡!
"형씨는 어때요? 각성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잡혀올 때는 어떻게 끌려왔죠? 어디서 당했어요?"
그건 그렇고 정말 시끄럽네.
깡! 깡!
신우주는 잭의 잡담이 더 길어지기 전에 적당히 말을 끊었다.
"그보다, 여기 구성원은 어떻게 되지?"
"음, 저도 생각해 봤는데 10명 조금 넘는 것 같아요. 보스라고 불리는 사람 한 명 아래로 간부진이 두셋, 나머지는 일반 조직원들이죠."
숫자가 생각보다 많다.
'사리길 잘했어.'
개개인이 그레고리 수준이라면 혼자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덩치였다.
그 위에 보스라는 녀석도 있는 것 같다만.
'정작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벌써 이곳, 인간 농장에 들어와 곡괭이질을 시작한 게 어느덧 사흘이 흘렀다.
깡!
이곳은 생각보다 큰 조직이었다.
산적 산채라고 하면 좋을까?
인적이 드물다 못해 없는 깊은 산속, 탄광을 둘러싸고 지어놓은 산채에 10명에 달하는 스캐빈저들이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다.
그 밑으로 딸린 노예가 스물.
캉! 캉! 쩌억!
사방에서 들려오는 곡괭이질 사이로 채찍 소리와 비명이 함께 울려 퍼졌다.
"끄아악!"
"눕고 싶다면 영영 눕게 만들어 주지. 너 같은 새끼가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나?"
각성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곳의 노예들은 가축 미만의 대접일까.
신우주가 받는 대접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일을 잘해서 채찍은 안 맞는다 정도.
"이런 돌멩이를 왜 캐라고 하는 거지?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나?"
이 채굴 작업이라는 것도 이상하다.
적생석.
희미하게 붉은 빛을 품어내는 돌.
혈액을 묻히면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또 축적하는 성질을 가졌던가?
막상 실용성이라고는 쥐뿔도 없이 기믹만 가진 돌멩이라서 채산성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데.
"대체 목적이 뭐지? 시간 낭비?"
"쉿! 쉬잇! 쉿!"
잭이 질색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목소리 낮춰요. 쓸데없는 의심 가지지 마요. 맞아 죽어요."
"도망치면 되지 않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성공한 사람이 없는데. 다 시체로 돌아오던데요?"
단순 호들갑은 아니다.
어젯밤만 해도 도주하던 노예 한 명이 시체가 되어 질질 끌려오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던가?
"어떻게 한 거지?"
"추적 스킬이라도 가진 거겠죠. 잔인한 놈들이에요."
잭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갑자기 납, 납치당해서는 이대로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 한다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분노를 입으로 중얼거리면서도 탈주할 희망 따위는 옛적에 버린 듯했다.
그만큼 이곳 관리는 삼엄했으니.
'약한 놈들만 모아두기도 했고.'
좀 저항할 능력이 되는 놈들은 사전에 처분하는 모양이었다.
신우주 또한 초기에 보유 스킬을 취조받았는데.
물론.
-목소리를 변조한다고?
-정말 쓸데없는 능력이군.
신도들에게서 얻은 잡다한 스킬 중 적당한 거 하나 보여 줘서 때웠지만.
[목소리 연기술]
[신도: 아바움]
[아바움은 복화술을 이용해 인형극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저주로 인해 몸이 반점으로 뒤덮인 그가 할 수 있는 직업은 별로 없었다.]
여자 목소리 두셋 정도 들려주니까 한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도 참 어지간히 불쌍한 새끼로군. 20년 만에 각성한 능력이 이런 쓰레기라니. 몬스터 앞에서는 없느니만 마찬가지겠군.
공감한다.
전투에서는 쓸 구석이 별로 없지.
하지만 쓰레기라는 말에는 반박할 수 있겠다.
이 어중간한 능력 덕분에 의심을 사진 않은 게 사실이잖아?
참, 신우주가 가진 애매한 스킬은 저거 하나가 아니었다.
[감청]
[은신술]
[동냥]
[소매치기]
[자물쇠 따기]
[변장술(기초)]
...
…
뒷골목 신도들에게서 받은 스킬 보따리가 한가득.
다만 평균적인 수준은 낮았다.
단테에 비해 허접할 건 짐작했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긴 한 게 문제랄까.
'하나하나로 따지자면 잘해야 D급, 아니, E급 스킬들인가.'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써야 한다.
단테의 스킬들은 분명 강하지만, 하나같이 GP 소모가 너무 극심하니까.
'잡담은 이 정도면 됐고.'
신우주가 잭의 수다에서 눈을 돌리며 [감청] 스킬을 발동했다.
한순간 GP가 5포인트 정도 빠져나가더니, 청각이 야생동물처럼 극도로 발달하며 반경 20m 내의 모든 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하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가서 한 대 빨고 오지?
보초를 서던 두 스캐빈저가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좋아, 이제 이곳에는 잭과 그뿐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신우주가 곡괭이질을 멈추지 않은 채 힐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현자의 돌이 뭔지 아나?"
첫날부터 의문을 가져온 그것이었다.
나름대로 조사해 봤지만, 당장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잭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현자의 돌이요? 왜요? 어디서 들으셨는데요?"
"그레고리랑 줄루가 조만간 그걸 처분하겠다며 이야기를 나누던데. 신기해서 말이지. 연금술에 쓰인다는 그건가? 빵을 황금으로 바꿔 준다는 그거."
현자의 돌, 그가 아는 물건이 정말로 여기에 있는 거라면.
적어도 이 곡괭이질의 본전은 뽑을 수 있을 거다.
그가 아는 현자의 돌과 이곳의 현자의 돌이 같은 물건인지는 모르겠다만.
"그게 정말로 존재하는 거였나? 소문이 아니라?"
"아, 그건... 제 추측이 맞다 치면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닌데요."
잠시 고민하던 잭이 손가락을 들어 올린 찰나였다.
"산채 뒤쪽으로 돌아가면 별채가 있는데, 거기에서 현자의 돌을 연단하고 있다고 해요."
"연단하고 있다고? 인위적으로?"
"이곳 보스가 실력 있는 연금술사라고 하는데요."
신우주의 고개가 갸웃했다.
현자의 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었던가?
일게 산채의 두목 따위가?
"혹시라도 훔쳐볼 생각은 하지 말고요. 그 별채 앞에는 매번 보초가 서 있으니까."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인데.
언제쯤이 적당할까?
생각에 잠겨 곡괭이질마저 잠시 멈춘 찰나였다.
"――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멀리서 거대한 비명이 들려왔다.
곡괭이마저 내던진 신우주가 급하게 달려가 현장을 확인했을 무렵.
"뭘 쳐다보고 있어! 자리로 썩 꺼져!"
스캐빈저의 틈 사이로 보인 시체는.
'저건.'
마치 미라와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 안의 모든 혈액이 다 빨려 나가, 손가락으로 톡 치면 바스라질 듯 바싹 말라 버린 듯한 모습의 시체.
그게 스캐빈저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신우주가 직감했다.
이곳에서 말하는 현자의 돌이 무엇인지를.
'산속에 박혀서 뭘 하나 했더니.'
신우주가 저 멀리, 탄광 기둥 뒤에 숨어 빼꼼 고개만 내민 잭에게 다가가서는 겁먹은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탈출시켜 줄까?"
"...?"
대신, 나랑 일 하나 하자.
| 11화. 스캐빈저 (2)
어두운 저녁.
찍-찍-
꺼진 조명 속으로 쥐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어두운 탄광.
"...."
신우주가 번뜩 눈을 떴다.
적막한 밤중에 가만히 눈을 뜨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기를 약 30분.
'대충 보는 눈은 없는 것 같고.'
탄광의 노예 숙소는 기본적으로 개인실 구조로 되어 있었다.
딱히 노예 개개인의 인권을 신경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각성자들을 붙여 놓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분리해 놓은 거겠지.'
신우주에게는 외려 감사할 일이겠다만.
슬슬 시작해 볼까.
'우선 스킬 목록부터.'
그의 신도들은 기본적으로 개개인이 가난하다.
또한, 질이 떨어진다.
날 때부터 사회적으로 박해받아온 탓에 제대로 능력을 기를 신세조차 못 됐던 것.
하지만 짐승들이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능력을 갈고닦듯.
맹인이 잃은 두 눈을 대신하기 위해 귀를 발달시키듯.
['도둑의 직감'을 발동합니다.]
뒷골목에 버림받은 자들 또한, 뒷골목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생존 기술을 갈고닦기 마련이니까.
모진 박해를 당한 이들이 당당하게 사회의 빛을 보기란 어려웠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익힌 기술도 있는 법.
[도둑의 직감]
[신도: 좀도둑 야곱]
[야곱은 평생을 타인의 뒤를 노리며 연명해 왔다.
도둑에게 가장 중요한 재능은 들키지 않는 것.
들키지 않기 위해서 중요한 건 주위를 예리하게 파악하는 것.]
그의 신도들은 그러했다.
['밝은 눈'을 발동합니다.]
[신도: 사냥꾼 갈라르]
[갈라르는 평생을 산속에서 살아왔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오늘을 굶지 않기 위해서는 더 먼저 보아야만 했다.]
하나같이 보장되지 않은 내일보다 당장 눈앞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자들이었으니.
빛 한 점 들지 않는 탄광이라도 실루엣 정도는 보일 만큼 눈이 밝아졌다.
기감이 예리해졌다.
같은 숙소를 공유하는 노예들의 작은 숨소리가 솜털을 스치듯 예민하게 느껴졌다.
['밤도둑의 소양'을 발동합니다.]
몸 주위로 발생하는 소음이 극도로 정숙해졌다.
걸음 소리 정도는 들리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뜀박질하지 않는 선이라면.
['장물아비의 손'을 발동합니다.]
손끝의 감각이 극도로 세밀해졌다.
잘해야 D랭크 수준의 싸구려 스킬이라도, 넷을 겹쳐 쓰자 C랭크 은신술 정도에는 다다랐다.
'이렇게 해서 소모한 GP가 벌써 30인가.'
효율성이 좋다고는 볼 수 없겠네.
하지만 뭐, 대신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네 차례다.'
신우주가 팔을 내려다보았다.
오래 활동한 모험가답게 잔근육이 잘 발달했으며 혈관이 도드라진 팔.
그 위로 순간, 반투명한 물결이 쳤다.
무형이다.
물결의 형태로 변한 무형이 한순간에 손가락 끝으로 몰려가 슬라임처럼 부드러운 질감을 이루었다.
당장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것처럼.
'그래, 그걸로 바꿔 볼까.'
머릿속으로 구체적인 상상을 떠올린 순간, 가벼운 현기증이 엄습하며 무형이 그 형태를 자연스럽게 바꾸었다.
'순수 무기로서 지닌 위력은 동급의 네임드 장비들보다 떨어지겠지.'
단순 위력만 보면 그렇다. 위력 면에서는 마을 하나를 지반째 통째로 붕괴시키는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범용성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형은 어느새 락픽이 되어 있었다.
자물쇠를 해제하기 위한 도구.
그대로 탄광 자물쇠에 손을 붙인 신우주가 귀를 기울였고.
[잠금 해제]
[신도: 좀도둑 야곱]
[마법적인 조치가 취해져 있지 않은 선에서 물리적인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있다.
보조 도구가 필요하다.]
자연스럽게 열쇠 구멍에 파고든 무형이 둔탁한 소리를 연발하길 몇 초.
찰캉! 끼이익――
그대로 자물쇠 고리가 흘러내렸다.
[밤도둑의 소양] 스킬의 영향으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게 활용도에서는 참 좋다니까.'
상상력과 의지력만 있으면 뭐든 된다.
딴 무기였으면 어려웠을 일...은 아니고, 힘으로 부쉈겠구나.
대충 넘기고, 쇠창살을 열고 빠져나오며 곁눈질로 잭이 감금된 방을 찾았다.
톡톡.
가볍게 쇠창살을 두드리자 잭이 눈을 빼꼼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찰캉.
똑같이 문을 열어주었다.
좋아, 일단 보험은 됐고.
'얼른 확인하고 튀자.'
숙소를 빠져나오자 입구 바로 옆으로 보초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기강이 해이한지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양새.
'말단이었지.'
조직의 보스 아래로 간부 두셋, 나머지는 특별한 것 없이 말단 조직원으로 보였다.
거리낌 없이 뒤로 접근한 신우주가 목을 감싸 안았다.
"뭐, 뭐야?"
당황한 보초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하다.
각성자답게 어지간한 프로 운동선수 정도는 가뿐히 넘어서는 완력이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지.'
탑에 들어오고 50년, 단 하루도 신체 단련을 거르지 않았을뿐더러.
[보유한 신도들의 능력에 비례하여 신체 능력이 향상됩니다.]
교단 규모가 소형으로 발전하면서 얻은 특전도 있었거든.
신도 한 명 한 명이 아기 손가락 하나 보태 주는 정도로 아주 미세하지만.
그게 자그마치 30명이 넘어서잖아?
단테는 사도급이니 뭐니 수식어가 붙으니 잘하면 어른 팔 정도 되겠고.
"쉿, 기절은 조용히."
"으읍!! 읍!"
호흡 졸리는 소리가 불과 5초도 지나지 않아 뇌로 향하는 산소 공급이 차단된 보초가 제자리에서 혼절했다.
풀썩.
마찬가지로 [밤도둑의 소양] 스킬로 인해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이쯤 치워두고.'
구석으로 대충 치워 놓길 잠시, 시선을 돌려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저녁 숲속을 바라보았다.
당장 2m 앞도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지만 괜찮다.
['밝은 눈'을 발동합니다.]
스킬 발동 한 방에 대낮만큼은 아니고, 딱 초저녁 정도로 시야가 밝아졌다.
잘해야 E랭크짜리 스킬답게 미묘한 효과 속에서 신우주가 어둠을 더듬었다.
'저쪽 별채라고 했지?'
이 산채의 목적이 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단순히 무급 노예들 굴려서 돈 좀 만지려는 농장이라면 모를까, 자칫하면 재앙이 될 수도 있으니까.
걸어서 2분이 채 안 되는 거리.
별채 벽면에 착 달라붙어 창문 안을 흐리게나마 엿본 순간이었다.
신우주의 눈에 들어온 건.
'역시나.'
그의 직감이 정확했다.
바닥에 깔린 붉은색 오망성을 비롯해 갖은 마법적인 문양들이 불길하다.
다른 구석에는 낮에 채굴했던 적생석이 빛을 잃은 채 수레째 굴러다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수분이라고는 없이 바싹 건조된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이 잡동사니처럼 나뒹굴었다.
그리고 저 너머.
플라스크 사이로 한층 격이 다르다는 듯 소중하게 보관된 붉은 보석은 아마... 현자의 돌이라는 그거겠지.
이 별채의 목적이 무엇인지 직감한 신우주가 작게 코웃음 쳤다.
'연금술사는 무슨.'
흑마법사의 실험실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주 사악한.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이곳은 평범한 산적 산채 따위가 아니다.
인간 농장, 아니, 인간 목장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그것도 아주 알뜰한.
'일단 저건 회수해야겠군.'
잠긴 창문을 열고 들어가야겠지.
다행히 구석을 잘 살피자, 창문틀 사이로 명함 카드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좁은 틈이 있다.
이 정도면 보통 열기 어렵겠지만, 그에게는 무형이 있으니까.
신우주가 한층 더 숨을 죽인 채, 깨진 창문 틈으로 액체화시킨 무형을 구겨 넣은 찰나였다.
허공에 벽이 존재하듯 무형의 진입이 가로막혔으며.
[―――――――!!]
부저음을 연상시키듯 뇌를 흔드는 고음과 함께 진동이 산을 뒤엎었다.
역시, 이 정도의 설비를 아무런 보안 장치도 없이 방치하진 않았다는 건가.
"도둑놈이다!"
"저쪽이다!"
저 멀리, 탄광 바로 옆에 설치된 오두막에서 열이 넘는 스캐빈저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손에 저마다의 무기를 꼬나쥔 채로.
'상황이 좀 꼬였는데.'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던바.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신우주가 안배해 두었던 보험이 발동했다.
"불이다!"
"숲에 불이 번졌다!"
갑작스럽게 저 먼 숲속으로 화마가 덮쳤다.
어두운 숲속에서 단박에 눈에 들어올 만큼 붉은색 불길이 울렸다.
'잭, 약속을 지켰군.'
저 너머 어둠 속으로 황급히 달려가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잭이었다.
탈출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낮에 약속했던 게 있었으니까.
[문을 열어 둘 테니까, 바깥이 좀 소란스러워진다 싶으면 탄광 바깥으로 나가서 불을 붙여라. 곧바로 숙소로 복귀하고.]
근데 왜....
'숙소로 안 돌아가?'
탄광이 아닌 저 산 너머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튀나? 언제는 도망가면 죽는다더니?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그동안은 그냥 자물쇠를 못 풀어서 가만히 있었다든가?
어찌 됐든 신우주에게는 호재였다.
"저 녀석이 범인이다!"
"쫓아라!"
"방향은 정반대인뎁쇼?"
"찢어져라!"
스캐빈저 무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좋아, 전원이라면 몰라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하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단체전은 좁은 곳에서 조잡하게, 인질을 잡고 싸울수록 유리해지는 법이니까.
어느새 무형을 오함마의 형태로 바꾼 신우주가 별채 창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하지만.
"...윽."
터엉!
두꺼운 고무 벽을 두드린 듯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튕겨 나올 뿐.
손이 저릿하다.
벽 하나 붕괴시킬 생각에 나름 전력으로 두드렸음에도 미동조차 안 하다니.
중요한 시설임에도 야밤에 허름하게 방치한 근거는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한 방이라면 신우주, 그 또한 자신은 있다.
[발경]
[신도: 기사 단테]
[소모 GP: 80]
[충격을 바라는 장소에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묘리.
무술이란 곧 같은 힘을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공부이다.]
GP는 가급적으로 아껴 둘 생각이었지만.
급할 땐 써야지.
[GP: 350/480]
한 방에 GP가 무려 80이 빠져나갔다.
단테가 보유한 스킬 중에서는 그나마 알뜰한 축인데도 이렇다니.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했다.
'자신감이 솟는단 말이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할 수 있다.
몸에 단테의 경험과 함께 농밀한 기운이 깃들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자,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방어막은 외부의 공격에 저항하기 위해 만드는 만큼, 반대로 내부에서의 공격에는 취약한 법.'
발경이라면 외부에서 공격하면서도 내부에 힘을 전달할 수 있다.
그 묘리를 실어 망치의 형태로 바꾼 무형을 창문에 휘둘렀을 때.
콰아아아아아앙――!!!!
폭탄이라도 터진 소리와 함께.
창문을 넘어, 아예 벽이 통째로 붕괴되었으니 말이다.
주위를 더듬어보자 방어 마법 자체가 통째로 붕괴한 모양인지, 벽 따위는 비슷한 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우왓."
발경, 꼭 필요했을까?
소름이 확 돋았다.
'단테, 이거 진짜 뭐 하는 놈이야?'
묘리라면서.
그럼 사실상 평타 아냐? 랭커들도 잘못 맞으면 훅 가겠는데?
스킬 하나하나가 GP를 무식하게 빨아먹지만, 그만큼 한 방 한 방이 필살기인 게 살벌하기 짝이 없다.
사도급 신도라더니 진짜 뭐가 있나? 동네 뒷골목에서 나돌아다니길래 흔한 수준일 줄 알았더니.
그건 그렇고, 소리가 좀 컸나 보다.
"저 녀석이다!"
"반대쪽으로 도망친 그놈은?"
"공범이다!"
스캐빈저들 여섯 놈 정도가 정확하게 그를 향해 직선으로 몰려오고 있으니.
'일단 구석으로.'
넓은 곳에서 싸우면 손해지.
신우주가 실험기구가 잔뜩 깔린 테이블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쯤 됐을 때 별채 안으로 들이닥쳐 신우주를 포위한 스캐빈저 중, 가장 덩치가 큰 놈.
그레고리가 정색한 목소리로 짐승이 낮게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뭘 생각하고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도록."
그 뒤로 비실이를 닮은 졸개가 덧붙였다.
"넌 끝이야! 포위당했다고!"
참, 이 말을 해 보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못 참은 신우주가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너희한테 갇힌 게 아니라, 너희들이 내가 있는 곳에 갇힌 거다."
"...뭐?"
그레고리의 험상궂은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
신우주는 손을 까닥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잔말 말고 덤비라고."
한 손으로는 붉은 보석, 현자의 돌을 슬쩍 챙겨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면서.
누가 쓰려고 만든 걸까?
그건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봐야지.
| 12화. 스캐빈저 (3)
신우주가 피식 웃었다.
'스캐빈저 여섯 놈이라.'
이제 막 각성한 사람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하지만 믿는 구석은 있다.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처음부터 미련 없이 도망쳤을 테니까.
"뭐해? 안 덤비고."
신우주가 몸통 뒤로 숨겨 둔 팔에 무형을 액체 상태로 만들어 유사시에 대비해 둔 와중이었다.
"풉."
한 놈이 웃음을 터뜨렸다.
상황이 심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우주의 말이 도저히 웃겨서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아, 거 새끼, 잘해야 2등급 주제에 허세 하나는."
여섯 놈 중에서도 유독 마른 한 놈이었다.
신우주는 속으로 녀석을 비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비실이가 웃었다.
"신우주, 하층에서 10년 넘게 허드렛일만 한 놈이 뭐 그렇게 강한 척을 하고 지랄."
오, 신우주를 아는 녀석이었다.
"날 아나?"
"알다마다, 너 유명하잖아. 새끼야, 질릴 줄도 모르고 하층 던전에 기웃거리는 사회 부적응자로."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비각성자로 하루 벌어서 하루 빌어먹는 놈이 잡혀 왔길래 무슨 스킬을 각성했나 했더니, 끽해야 목소리 변조하는 정도라며? 자신감 뭐냐? 뭘 믿고 일을 저지른 건데?"
"...."
신우주는 반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끄럽다는 듯, 기가 죽었다는 것처럼 뒷걸음질을 치기까지.
그 태도가 증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 그런 녀석이었나?"
다른 스캐빈저 무리의 눈빛에서도 차차 은은하게 깔보는 시선이 엿보였다.
"형님, 기다려 보십쇼."
비실이가 보란 듯이 건들건들한 발걸음으로 무리에서 툭 걸어 나왔다.
버러지 하나 처리하는 데 나머지가 나설 것도 없다는 것처럼.
스캐빈저 무리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남자, 그레고리만이 정적인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방심하지 마라.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다 같이 행동한다."
"에이, 신우주입니다. 형님께서는 나서실 것도 없습니다. 저 하나면 충분하죠."
비실이가 신우주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열린 자세로.
뒷골목 양아치들이 급식 삥뜯을 때 보여주는 전형적인 오픈 스탠스라고 해야 하나?
무방비하게 전신의 급소를 드러낸 그 자세였다.
오로지 허세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세.
설마 신우주가 위해를 가할 수 있으리라고는 티끌만큼도 생각지도 않는.
"나를 여기에서 만난 게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새끼야."
그리고.
주눅 든 듯 몸을 움츠린 신우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불과 다섯 걸음이 남았을 때.
빠각!
예고 없이 울린 소리와 함께 신형이 짚단처럼 힘없이 허물어졌다.
쿠웅!
쓰러진 건 당연히.
"뭐 이렇게 비실해? 밥도 못 먹고 사나?"
비실이였다.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단 한 방에. 동공의 초점을 잃고 바닥에 머리를 맞댔다.
"...."
"...뭣."
무리 사이로 적막이 스쳐 지나갔다.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처럼.
그야 그럴 게.
신우주의 일격에서는 스킬을 사용하는 기미조차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실제로도 안 쓴 게 맞았으니까.
"오스카한테 무슨 스킬을 쓴 거지?"
저 비실이 이름이 오스카였구나.
신우주가 앞으로 내민 단봉, 무형으로 만든 것을 숨기지 않은 채로 손목을 뚜둑 꺾었다.
"비각성자 시절에도 이 정도는 상대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세상은 왜 나를 이렇게 무시하지?"
아니지, 무시해 줘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숫자 하나 줄이고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요행은 한 번뿐이다.
"덮쳐!"
눈앞에서 동료가 보이지도 않는 공격 한 방에 쓰러지는 걸 보고도 방심해 줄 사람은 없으니까.
물론, 그래 봤자다.
'어떻게 덮칠 건데? 이 좁은 곳에서.'
포위하겠다는 듯 접근했다만, 대형을 갖추지 못한 채 엉거주춤할 뿐이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장소를 골랐으니까.
"오스카는 우리 중에서 최약체였다. 산 채로 지져주지."
"대사 한번 진부하네."
무리 중 한 녀석이 전신에서 전기를 위협적으로 뿜어냈다.
스치기만 해도 당장 구워질 듯 위협적이다만.
"조심해라! 보스의 연금술 도구들이다!"
"...!"
같은 무리 구성원의 한마디에 기세가 주춤했다.
그래, 너희들은 조심해야지.
하지만 신우주는 거리낄 게 없었다. 남의 재산까지 생각해 줄 필요 없으니까.
온갖 실험 도구가 가득 찬 책장 뒤로 몸을 숨긴 신우주가 책 틈으로 단봉을 쏜살처럼 내밀어 목젖을 가격했다.
"켁!"
한 놈이 저항조차 못 하고 호흡을 멈추더니 그대로 복부를 한 방 더 얻어맞고 쓰러졌다.
좋아, 남은 건 넷.
"한꺼번에 공격해!"
그러고 싶겠지.
상황이 안 나오겠지만.
장소가 워낙 좁으니 입으로만 외칠 뿐, 여전히 구도가 안 나온다.
"에라이!"
한 놈이 호흡을 읽다 지쳤다는 듯 이판사판으로 칼을 휘둘렀다.
그 위로는 예리한 흰색 기운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C랭크 스킬 [예기 방출]이겠지.
절삭력을 극도로 강화해, 어지간한 물건은 닿자마자 썰어버리는 물건.
기능이 단순한 만큼 C랭크 스킬임에도 그 위력만큼은 B랭크 스킬에 비견할 만하지만.
"어, 어어?"
어쩔 건데?
신우주가 기다렸다는 듯 차올린 책상만큼은 그 잘난 스킬로도 차마 베어낼 수 없었다.
신우주? 당사자는 뭐가 부서지든 말든 신경조차도 안 썼지만.
뻐억!
앞으로 세 놈.
"...비겁한 자식."
"여섯이서 한 명 덮치면서?"
슬슬 나머지 셋의 몸에서도 경계의 기운이 짙게 서렸다.
요행도 반복되면 필연이다.
슬슬 그들의 눈빛에도 잘 보였다.
'이게 비각성자의 몸놀림이라고? 그럴 리가.'
육체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어지간한 육체 강화 스킬을 발동한 모험가만큼이나.
실제로도 맞는 말이다.
신도를 30명 넘게 받아들이며 교단의 신체 능력 보조를 받기 시작한 시점이니까.
누가 봐도 가장 실력자라는 듯 묵직하게 맨 뒤에서 도끼를 든 채로 버티는 그레고리가 침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목소리를 꾸미는 스킬 어쩌고 했던 건 블러핑이었던 건가?"
"아니, 진짜."
"거짓말이군."
섭섭하다.
진짜 거짓말이 아니니까.
스킬을 여럿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건 그렇고, 안 오나?"
"...."
"쫄보 새끼."
신중하기는.
그렇다면 이쪽에서 가는 수밖에.
신우주가 책상 위를 살피더니,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플라스크 세 병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하나씩 끼우고는.
"생일선물."
시간 차를 두고 냅다 집어던졌다.
"어, 어어?"
스캐빈저가 그걸 쳐내지도,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는 사이.
뻐억!
신우주의 단봉이 정확하게 명치를 찌르고 들어왔다.
"욱! 우웨에에에에엑!"
빠각!
이제 두 놈.
그레고리를 제외한 나머지 한 명은 이제 숫제 겁에 질려 신우주를 괴물 바라보는 듯했다.
동급의 스캐빈저 넷을 잡몹 처리하듯 한두 방에 퍽퍽 잘도 쓰러뜨렸으니 당연한 일.
"오, 오지 마!"
드드득!
스킬을 발동했는지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솟아난 팔로 반격해 봤지만.
'저 스킬을 저런 식으로 쓰네. 많이 안 싸워봤나?'
제대로 된 공격도 안 맞을 텐데, 저렇게 막무가내로 텔레폰 펀치를 휘둘러서야 맞아 주고 싶어도 맞겠나?
퍼억!
틈을 찌른 카운터 한 방에 신형이 고꾸라지며 앞서 쓰러진 넷의 대열에 고스란히 합류했다.
방의 인테리어가 한층 풍성해졌다는 말이었다.
"이제 한 놈 남았나?"
그들을 내려다보던 신우주가 안쓰럽다는 듯 무기를 들고는.
콰앙!
플라스크 더미를 후려쳤다.
터져나가는 유리 파편을 본 찰나, 그레고리의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래, 어차피 너 정도만 상대가 될 것 같았어.
"인상 펴라,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
"...신우주, 내일부터 뒷입으로 밥을 먹게 만들어 주지."
*
스캐빈저라고 하면 보통은 약한 놈들이다.
몬스터가 두려워, 던전이 두려워 탑을 오르길 포기했으니까.
그 강함에는 한계치가 있다는 거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가 있다.
Sword_master - 스킬 중에는 있거든. 몬스터보다는 사람을 잡으라고 만든 것들이.
자기 특기가 사람 잡는 거라서, 사람 잡는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한 놈들이.
Sword_master - 사람 잡는 법만 연구하는 놈들이다 보니까 초보자들 입장에서는 난감하겠지.
Sword_master - 저층에서는 대인전 경험을 쌓기 어려우니까.
인트라의 개근 유저, 소드마스터는 그런 의미에서 늘 대인전 훈련의 중요성을 설파하고는 했다.
Sword_master - 고층으로 가면 갈수록 몬스터들도 인간형이 늘어나잖아? 아인종들도 그렇고.
Sword_master - 원래 같은 사람 새끼가 제일 무서워.
Sword_master - 다 사람 사는 세상인데, 사람 써는 법 알아둬서 나쁠 거 없잖아?
말은 그럴듯하지만, 인터넷에서 뭐든 강력하게 주장하면 반발을 사는 법.
Merlin - 저층에서나 먹히는 말이지. 드래곤 타입 몬스터들 상대로 대인전 스킬은 의미 없는 것도 모르나?
대인전 성애자인 탓일까?
몬스터 사냥을 주특기로 여기는 자들은 소드마스터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Merlin - 그래서 그 잘난 대인전 스킬로 드래곤 스케일 뚫을 수 있냐니까?
Sword_master - 괴수형 몬스터는 그쪽에 특화된 애들한테 쓰러뜨리라고 하면 그만. 탑은 파티플로 깨라고 있는 거지.
Sword_master - 각자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효율적이다.
Merlin - 무능하다는 증언을 잘도 돌려서 하시네요^^
Flexin - 둘 다 말조심해라. 내가 보기엔 둘이 다를 게 없다.
뭐, 결국 다 잘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신우주는 소드마스터의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했다.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대인전 스킬이 맞지.'
위로 올라갈수록 인간형 몬스터한테 죽는 비율이 늘어나니까.
오크나 트롤 같은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리치라든지. 야만족이라든지.
또 몬스터만도 못한 사람 새끼들은 더 많은데, 던전 밖에서도 마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더욱 위험도가 상승한다.
통칭 몬스터형 인간.
"야만적인 녀석이네."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든 순간이었다.
바닥에서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 거센소리가 울린 동시에 그레고리의 거대한 근육 덩어리 신체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쇄애액!
동시에 도끼날이 섬뜩한 파공음을 남기며 허공을 갈랐다.
즉, 신우주는 피했단 말이다.
"우왓."
"잽싸군."
파창!
둔탁한 도끼 끝이 플라스크 더미를 차례차례 박살 내며 경쾌한 소리를 울렸다.
이건 좀 놀랐다.
연구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건가?
설마 싶어서 먼저 쓰러진 비실이를 던지며 프렌드 실드를 시전했지만.
"소용 없다."
그레고리는 찰나의 주저조차도 없이 썰어 넘겼다.
"미친 새끼."
이 새끼들은 동료애라는 개념이 없나?
잔인한 것 이상으로 파격적인 광경에 신우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팀킬 좀 많이 해 봤나 봐? 네 보스께서 아시면 화낼 텐데."
도끼날을 슥 닦은 그레고리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저지른 일인가?"
아, 이쪽에 덮어씌우시겠다?
의외로 융통성이 있네.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처럼 생겨서는――."
신우주라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도끼날이 다시 한번 바람을 가르며 그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이크.'
극도로 짧은 간격을 두고 피했다.
아슬아슬했다.
'공격이 날카로워.'
모험가 등급으로 4등급은 무슨, 5등급도 넉넉하다.
명백하게 강하다.
굳이 스캐빈저질을 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게 납득이 안 갈 정도로.
쉐에엑!
다시 한번 도끼날이 신우주의 옷깃을 베고 지나갔다.
아주 조금만 더 깊었으면 살갗이 베였다.
하지만.
부우우웅!
이후로도 그 짧은 거리를 뚫지 못하고, 빈 허공만을 베며 같은 양상을 몇 번이고 반복할 뿐.
'이 녀석, 대체 뭐지?'
그레고리가 시선을 의심했다.
모든 공격을 불과 10cm도 안 되는 거리로 피해내다니.
'방금 그건, 쉽게 피할 공격이 아니었는데?'
단순 신체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도 그럴 게, 그레고리의 공격은 그냥 단순한 도끼질이 아니니까.
['표적 추격' 스킬을 발동합니다.]
C랭크 스킬, [표적 추격] 스킬이 공격 한 방 한 방에 담겨 있어, 팔이 닿는 범위 안이라면 목표까지 최적의 각도를 찾아 자동으로 날아 꽂히는 스킬이니까.
그야말로 자동 유도 미사일을 양팔에 달고 휘두른다고 봐도 무방할 물건.
'설령 랭커라고 해도 모르면 속수무책으로 방어만 하게 될 텐데.'
그레고리가 아는 파해법은 단둘이다.
순수하게 신체 능력에서 앞서거나.
아니면 접근 자체를 않거나.
그걸 저 날벌레는 뒤로 뛰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파훼하고 있었다.
"모기 같은 새끼."
"모기 하나 못 잡나? 못생김에 무능함을 겸비했네."
입가에 작은 여유마저 머금은 채로.
"표적 추격 스킬인가? 멍청하긴. 그레고리, 너한테는 도끼보다 활이 어울려."
"...."
"하긴, 몬스터가 무섭다고 하층에서 같은 사람 등이나 처먹으면서 연명하는 낙오자 따위가 뭘 알겠냐만."
그레고리의 입가가 꿈틀했다.
그냥 던져본 말인데, 의외로 정곡을 찔렀나 보다.
"우왓, 진짜로?"
신우주의 깜짝 놀랐다는 듯한 도발에 그레고리의 턱 근육이 눈으로 보일 만큼 튀어나왔다.
"...하층민 따위는 모르는 세상이 있다."
부우웅!
마치 폭풍우와도 같이 무분별한 공격이 쏟아졌다.
[표적 추적] 스킬은 어디로 갔냐는 듯 마구잡이 도끼질. 공격의 횟수가 는 만큼 정밀함은 사라진 것.
분노가 실려 겉보기에는 위력적이지만, 안 맞으면 의미 없다.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슬슬 들어가 볼까.'
파고들 타이밍.
그레고리와의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던 신우주의 몸이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부웅!
부웅!
도끼가 허공을 무의미하게 가를 때마다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차이로 계속해서 간격을 좁힌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알 수 있을 상황.
그레고리는 계속해서 헛된 도끼질에 체력을 소모하고 있는 한편, 신우주는 착실하게 비축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림수.
분노만이 흘러넘치는 듯했던 그레고리의 입가에 순간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신체 연장술' 스킬을 발동합니다]
숨겨진 또 다른 스킬, 신체 연장술이 발동했다.
일시적으로 몸을 연장해 공격의 리치를 늘리는 기술.
그 랭크는 B에 달한다.
징그러운 비주얼과는 별개로 실용성만큼은 확실하기로 유명한 그 스킬이 발동하며, 그레고리의 팔 관절과 근육이 뒤틀리며 한순간에 사출되듯 뻗어져 나왔다.
콰지직!
그와 신우주 사이의 거리, 한 걸음의 갭 따위는 메우고도 남을 정도로.
"...!"
정확하게 목을 노리며 날아드는 도끼.
"방심했군."
그레고리의 눈꼬리에 희열이 찼다.
[표적 추격]으로 절대적인 명중률을.
[신체 연장술]로 자유로운 공격 반경을 얻어낸다.
이 둘을 섞어낸 순간, 그레고리의 공격은 필중이라고 말해도 좋을 영역에 도달한다.
하지만 아낀다.
아끼고 아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걸음을 더 나아가는 것.
뇌까지 근육으로 이루어졌냐며 지성을 의심받는 그레고리의 필승 전법이었으니.
그럼에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더라니.'
신우주의 입에 걸린 여유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각성자 여섯과 차례대로 겨루고 있는 지금까지.
그는 아직 단 한 번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 13화. 리치 (1)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왜 목숨이 오가는 싸움 앞에서도 굳이 불리한 전법을 고집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네임드 스캐빈저라고는 해도, 딱 이 정도네.'
수준을 알고 싶었으니까.
탑이 열린 게 50년 전.
신우주는 그동안 비각성자로 싸워오며 언제나 의심했다.
작금의 각성자들과 비교해서 그의 수준이 얼마나 되는가.
50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만큼, 많은 사람이 탑에 새로이 들어왔고 또 정착하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
모험가 등급의 변화도 있었다.
20년 전 5등급 모험가라고 한들 지금이라면 4등급도 아슬아슬하다는 게 정설이니까.
Sword_master - 등록증에 적힌 숫자에 자기가 강하다고 착각했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도태되는 일은 흔하지.
그래서 궁금했다.
본격적인 현역 각성자들과 비교한다면, 그의 수준은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을지.
추정 5등급 정도 되는 모험가라면 얼마나 강할지.
'이제 알 것 같네.'
생각보다 큰 차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쪽이 약하다는 생각도 든다.
근육이 잘 발달할수록 뇌를 쓸 이유가 줄어드는 것처럼, 스킬에 의존하는 각성자들에게 신우주의 방식은 촌스러운 춤사위에 불과했을 테니까.
"내 스킬이 궁금하다고 했나?"
그레고리를 바라본 신우주가 단봉의 형태를 취한 무형을 상반신 뒤로 숨겼다.
반투명한 액체로 재구성되며 형태가 무너지더니, 순식간에 칼날의 형태를 이뤘다.
지금부터는 검을 써야 하니까.
"신우주, 무슨 개수작을 부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살려 줄 생각은 버렸으니."
그레고리는 강한 녀석이다.
저층에서 이 정도로 다양한 스킬을 보유한 스캐빈저는 드무니까.
하지만 그래 봤자 C급에서 B급 스킬 정도.
신우주가 정말로 가야 할 곳, 탑의 고층에서라면 비각성자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에.
"네 의견에 동의."
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접검'을 발동합니다.]
신우주의 몸에 한순간 한없이 높은 격의 무의 묘리가 깃들었다.
접검.
이카로스 기사원의 기사들이라면 필수로 습득하게 되는 기술. 그 교관의 가르침이 일순 신우주의 머릿속을 채웠다.
[검을 한없이 가까이 붙여라. 공격을 선이 아닌 면으로 인식해라. 면과 면을 붙여, 힘의 방향을 바깥으로 유도해 흘려내는 거다.]
머리가 이해하기 전에 몸이 깨닫는다.
수천, 수만 번을 넘게 같은 동작을 반복했던 육체의 기억이 신우주의 몸으로 스며든다.
'이런 건가.'
그레고리의 도끼가 느릿하게 보였다.
파괴적이다.
사람을 고깃덩어리로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으리라.
단순 완력으로는 신우주를 명백히 웃돌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정면에서 맞부딪칠 때의 이야기. 그 또한 흘러가는 힘일 뿐이니.
스륵.
신우주가 검날을 부드럽게 내밀었다. 그에 맞닿은 그레고리의 도끼가 하나의 금속처럼 붙었다.
'이건.'
그레고리가 이질감을 감지했다.
위험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능이 적신호를 울렸다. 이대로 가면 패배한다고.
뒤늦게 도끼를 회수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주도권은 이미 신우주에게 넘어갔으니.
[무기를 다루는 자와 싸워 이기는 법은 간단하다. 무장을 해제하면 된다.]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교관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손목이 유려한 각도로 회전했고.
챙!
그레고리의 손바닥 가죽이 찢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도끼가 튕겨 나가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
일순 허망한 눈으로 그 도끼를 바라보았다.
오래 가지 못했다.
정확하게 명치로 엄습하는 격통이 상반신 전체로 울려 퍼졌으니.
쿠웅!
챙그랑!
그 붉게 달아오른 육신이 무너지며 무릎을 꿇은 것과 양손 도끼가 바닥에 떨어진 타이밍은 거의 동시였다.
"쉽지 않네."
명치를 부여잡고 숨을 꺽꺽 몰아쉬며 침을 토해내는 그레고리를 벌레 보듯 내려다 바라보던 신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스킬 없이는 이 정도도 못 이기다니."
"어, 어떻게?"
그레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처음부터 이럴 쿨럭! 목적으로 잠입한 건가? 다 알고 온, 큭... 건가?"
"아니."
몰랐다.
진심으로 몰랐다.
그저 한 가지 차이만 존재했다.
"스캐빈저 수준 뻔하지. 하층민 벗겨 먹으면서 사는 건, 상층민 벗겨 먹으면서 살 능력이 안 돼서잖아?"
불법으로 먹고사는 것 또한, 합법으로 승승장구할 능력이 안 되니까.
'역시, 전면전에서 스킬 하나 안 쓰고 다중 스킬 보유자를 이기기는 어렵네.'
특히 맨손으로는.
[접검]
[신도: 기사 단테]
[소모 GP: 60]
[힘과 힘을 하나로 잇는 묘리.
상대와 나의 호흡이 하나로 이어진 순간, 온전하게 통제할 수 있다.]
스캐빈저 하나 잡는 데 스킬의 힘까지 빌려야 한다니.
갈 길이 까마득하다.
이런 잔챙이는 열 명, 아니, 백 명을 데려다 놓아도 랭커 하나 잡기 어려울 텐데.
'그래도 비각성자 시절이었다면 분명 당했겠지. 역시 스킬이 좋긴 좋네.'
신우주는 긍정적인 해석으로 자기반성을 마치고는 말했다.
"그만 쉬고 일어나."
"끄으윽!"
"면담 시작해야지. 룰은 하나다. 내가 물어볼 테니까, 네가 대답하는 거."
빠악!
내친김에 복부를 한 번 더 걷어찬 신우주가 그레고리의 후두에 칼을 들이밀고는 말했다.
"네 보스의 정체, 리치지?"
이제 진짜 싸움으로 가야지.
*
탑에 들어온 게 50년.
못 볼 꼴을 봐도 너무 많이 봤다.
뱃가죽 뚫리거나, 머리통이 날아가거나 하는 건 예삿일일 정도로.
그 긴 시간, 1세대로 시작한 신우주가 하층 주민으로 살아오며 절실하게 곱씹은 게 하나 있다면.
"...어떻게?"
세상 사람들은 그를 언제나 허접으로 깔고 본다는 것이었다.
"모르겠냐? 단서를 그렇게 질질 흘리고 다니는데."
탄광에서 적생석을 긁어모을 때부터 티가 났다.
"그거, 일반적인 용도로는 쓸 일도 거의 없는 주제에 라이프 베슬 만들 때는 요긴하게 쓰는 원료잖아."
혈액을 흡수하고 나아가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을 한없이 축적하는 성질을 활용한다고 해야 하나?
그 안에 농장 노예들의 생명력을 쪽쪽 갈아 넣었겠지.
거기에 흑마법사 특유의 연구실.
이 둘이면 대충 다 봤다고 해야 한다.
"손에 더러운 피 묻히기 싫으니까 빠르게 끝내자. 리치 맞지? 아니면 리치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거나."
"...대답할 수 없다."
대답 안 하기는 무슨.
얼굴에 정답이라고 적혀 있구만.
"농담으로 하는 말 아니다. 너희들은 살려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리치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성이 말소된 놈들이야. 너희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그레고리가 시선이 무거워졌다.
신우주의 추측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걸 증언하는 것처럼.
"목숨은 소중히 여기자. 왜 굳이 죽으려고 그래. 살려준다니까."
"...네 손에 죽으나, 그쪽 손에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무서운 거군.
뒤처리를 당할까 봐.
신우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어차피 바로 말해 줄 거라고도 기대 안 했어."
악당들의 멘탈이 튼튼한 요점은 그거다.
자기 목 앞에 들이민 칼보다 무서운 일이 너무 많다는 것.
어디 보자.
적당히 협박용 도구로 쓸 만한 친구가... 안 보이네?
'그 줄루인가 하는 여자 스캐빈저 빼고는 친구 없어 보이던데.'
그레고리는 이곳 무리에서도 유독 겉도는 느낌이었다.
홀로 고고한 늑대인 척한다고 해야 하나?
줄루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는 광경만 몇 번 본 게 다인데.
'어디 갔지?'
아까 경보 마법 울렸을 때 무리가 갈라지면서 잭을 따라가는 것 같았는데.
따라가서 잡아 와야 하나?
이쪽 스캐빈저들은 묶어 두고?
'일이 피곤하게 됐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리치급 흑마법사가 나타나서 깽판을 피우는 것보다는 백번 나을 테니까.
최소로 잡아도 랭커.
그쪽과 맞싸움을 벌일 생각은 아직 없다.
나갈 채비를 하며 주위에 밧줄 하나 주워 들고, 스캐빈저들을 어시장 간고등어 묶듯 포박하는 와중이었다.
"잠깐."
그레고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시선 끝을 보자.
'왔네?'
연구실 바깥으로 줄루가 서 있었다.
한껏 정색한 표정으로.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기뻐하는 표정이 아닌데?'
그레고리의 표정이 이상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동료를 만났으면 기뻐해야 마땅할 텐데. 도와줄 사람이 나타난 거잖아?
그런데 지금 그레고리의 얼굴 근육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겁에 질려 있는데?'
보여서는 안 될 광경을 부모에게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제발."
놀라운 건 그다음이다.
그레고리가 갑자기 몸을 바닥으로 절하듯 숙이더니,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머리를 붙이고 빌었다.
"부탁입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발, 제발,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줄루의 변함없이 싸늘한 표정 속에서 신우주가 이상한 기류를 포착했다.
아군이 왔는데 왜 저러지? 기뻐해야 할 일 아닌가?
"너희 둘 친구 아니었냐? 친구 사이에 왜 이래?"
동등한 관계로 보였는데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었던 건가?
아니면 친구비 입금이 밀렸나?
의심한 찰나, 줄루의 입에서 무미건조하게 나온 말에서 신우주는 곧 진상을 유추할 수 있었다.
"계약은 파기되었다. 이 계집은 돌려줄 수 없다."
그렇군.
저 스캐빈저의 몸에 흑마법사의 혼이 깃들어 있었다는 건가?
빙의 계열 마법 중에서는 이런 것도 있다고 들었다. 원주인의 정신을 밀어내고 몸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마법이.
사악하기로는 비길 데 없는 흑마법 중에서도 특히나 사악한 부류.
"너희 쓰레기들의 용도는 여기까지다. 이곳 산채는 오늘부로 폐쇄한다. 네놈의 부하들도 전부 청소해 두었다."
"예?"
"어차피 살려 둘 생각도 없었다.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했던 것만으로도 감사하도록."
"...이 새끼가!!"
그 말이 자극제였던 걸까.
그레고리는 언제 체력이 다했냐는 듯, 한순간에 충혈된 눈으로 바닥의 각목을 쥐어 들고 달려들었다.
성급한 기습에 신우주가 만류하려고 했지만.
의미는 없었다.
"컥! 커헉!"
도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줄루, 아니, 줄루의 몸을 뺏은 괴물의 손아귀에 목을 붙잡힌 그레고리가 간헐적인 숨을 토해 냈다.
그러더니.
"...끄으으으으으으아악!"
외딴 비명과 함께 이내 전신의 피부가 가뭄의 논밭처럼 마르고 갈라지니, 머리카락이 희게 변모했으며 그마저도 바닥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몇 초 뒤,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비틀어진 미라였다.
생명력을 뽑혀 나간, 얼마 전 탄광 앞에서 본 미라들처럼.
또 이곳 실험실 구석에 널린 미라들처럼.
5등급 수준의 스캐빈저, 그레고리가 반항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제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고도 줄루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마치 캔음료를 쓰레기통에 집어넣기 위해 구겼다는 정도의 감흥일까.
'잔인하네.'
신우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흑마법사라는 족속들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참 볼 때마다 정떨어지는 놈들이다.
'스캐빈저의 몸에 빙의해서, 노예들 등골도 쪽쪽 빨아먹고 같은 스캐빈저도 알뜰살뜰하게 뽑아먹네.'
최악의 상황이다.
남은 GP는 300이 조금 안 되는 정도.
단테의 기술을 최대한 아껴서 써 봐야 대여섯 번 정도일까.
'리치 수준의 흑마법사라면, 힘을 아낄 여유는 없다.'
우리 뒷골목 신도들의 작고 소중한 스킬들은 여기서 도움이 안 되겠지.
좋아, 결정이 섰다면 행동은 빠를수록 좋다.
['가로 베기'를 발동합니다.]
처음 능력을 각성했던 시기, 어둠 숲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던 단테의 스킬.
GP 50을 소모하는 숲의 한구석을 통째로 갈아 버릴 만큼 강력한 참격을 쏟아내는 기술.
몸에 푸른 기운이 깃든 찰나 신우주의 몸이 정직하게 단 한 번의 직선을 그렸고.
콰아아아앙 ―――!!
그레고리와의 전투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던 연구실이 그 잔해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쓸려나갔다.
시약인지 먼지인지 모를 것이 연구실을 가득 채울 만큼 뿌옇게 피어올랐다.
어지간한 하층 모험가라면, 아니, 중층이라고 해도 여기에서 끝났겠지만.
'아직 아니다.'
상대는 격이 다르다.
신우주는 방심하지 않고 [밝은 눈]을 발동시켰다.
GP를 고작 5밖에 소모하지 않지만, 효율이 좋은 스킬.
마찬가지로 5 GP를 소모하는 [도둑의 직감]과 함께 시전하면 어지간한 탐색 스킬이 부럽지 않다.
희미하게 저 너머로 줄루의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멀쩡하군.'
방어막을 두르고 있었던 건가?
당연하겠지.
알았으니까 한 번 더.
[가로 베기]가 잔해를 뚫고 한 번 더 줄루를 향해 쇄도했다.
우지끈! 쿠드드드드드드드득!
격전을 버티지 못한 건물이 기울어지다 못해 아예 붕괴했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다.'
서서히 걷히는 먼지 사이로 줄루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초격과 달리 이어진 2번째 공격에는 차마 대비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상반신은 반쯤 날아가 있었다.
고깃덩어리라고 봐도 좋을 모습이지만, 그걸 본 신우주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제길.'
살점과 뼛조각들이 역재생되듯 빠르게 접합하며 원래 형상을 복구하고 있었으니까.
최악의 가정이 맞았다.
'리치가 맞았나.'
언데드라기에는 영락없이 사람 모습이라서 설마 했더니.
죽어 마땅한 부상조차 곧바로 회복하는 저 비정상적인 재생력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리치가 맞다.
아니면 리치 같은 것이거나.
"강하군."
파괴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회복된 줄루의 표정은 한없이 무미건조했다.
아니, 무료하다고 표현함이 옳으리라.
"발악은 끝났나?"
"...."
"흥미롭군. 한낱 하층 모험가가 이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었을 줄이야. 칭찬하고 싶군. 그런 의미에서."
다음 한마디에 처음으로 흥미가 깃들었다.
"자네를 해부하겠네."
섬뜩하리만치 진한 흥미가.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신우주가 취한 행동은 빠르고 간결했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호주머니 속에 챙겨 두었던 붉은 보석 ― 아마도 라이프 베슬일 것인 ― 을 꺼내.
그 위로 칼날을 내리꽂으며 스킬을 시전하는 것이었다.
['발경'이 발동합니다.]
GP 80을 소모하는 스킬.
그 위력 자체는 절대적으로 봤을 때 높다고 할 수 없다. 총량만 따지자면 [가로 베기]보다도 낮겠지.
하지만 효율적이다.
블록버스터 미사일이 지표면을 뚫고 들어가듯 신우주의 [발경]이 라이프 베슬이라 추정되는 보석을 향해 꽂혔다.
라이프 베슬.
리치가 가진 생명력의 근원이자, 리치를 불사의 괴물로 만들어 주는 생명의 함.
'리치 자체는 아무리 큰 대미지를 입어도 바로 회복하지만, 라이프 베슬은 아니지.'
이게 본체다.
이것만 파괴한다면 제아무리 고위 언데드인 리치라고 한들 속수무책으로 생명력이 새어 나가 붕괴할 터.
하지만.
"...!"
청명하리만치 또렷한 충격음만 울려퍼질 뿐, 효과는 없었다.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줄루가 중얼거렸다.
"아둔하군. 자네라면 자기 심장과도 같은 물건을 그리 무방비하게 방치하겠나?"
애초에 적당한 위력의 공격으로는 파괴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연구실에 가볍게 방치했다는 건가.
건물에 둘러 두었던 방어막은 단순 보험에 불과했고?
"어지간한 랭커의 공격이라도 견딜 수 있도록 방비해 두었지.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닌가?"
목소리는 무미건조하지만, 그 맥락은 자랑하는 듯했다.
치졸한 새끼.
진짜 리치도 아닌 것 같은 새끼가.
"지금까지 보인 수가 자네의 전부라면 어찌하기는 어려울 걸세. 자, 이제 발버둥은 끝났나?"
그래, 까놓고 좋지 못한 상황이다.
남은 GP는 고작해야 100 언저리.
발경 같이 효율적인 기술로도 금 하나 안 갔는데, 100을 모조리 소모해서 다른 스킬을 쓴다고 한들 어찌하긴 어렵겠지.
'진짜 여기서 끝인가?'
정면승부로는 가망이 없다.
남은 GP를 전부 짜낸다면 저 괴물에게서라도 도주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성공할 확률은 잘 쳐 줘야 반반이겠지만.
...라고 생각한 찰나.
신우주의 머릿속에 절망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잔머리가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것도 아이템의 한 종류라고 봐야 하나?'
| 14화. 리치 (2)
리치들은 어떻게 무한한 생명력을 누리는 걸까.
어째서 몸이 그토록 붕괴하면서도 죽지 않고 계속해서 재생하는 걸까?
그 인과는 간단하다.
Merlin - 리치? 그 해골 새끼들은 애초에 그림자 같은 거야.
인트라에서 마법 계통으로 잘난 척이란 다 하고 다니는 유저, 멀린의 해설이 있었다.
Merlin - 본체는 라이프 베슬이지. 해골은 라이프 베슬에서 흘러나온 마력으로 이루어진 아바타일 뿐.
Merlin - 정리하자면 라이프 베슬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라는 거. 쉽지?
리치는 불사가 아니다.
단지 생명의 근원을 옮겨 놓았을 뿐.
Merlin - 리치들이 진짜 사람다운 육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도 이 이유지.
리치라는 생명체 그 자체의 구성 원리도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Merlin - 육체의 토대로 스켈레톤 하나 원격 조종하는 건 할 만해도, 살과 장기까지 육체 하나를 통째로 이루는 건 효율성에서 차원이 다르거든.
Merlin - 그러니까 쉰내 나는 뼈다귀 달각거리는 거지.
신우주는 궁금했다.
저 녀석은 어떻게 저걸 다 알고 있을까?
리치를 사냥해 봤나? 말하는 걸 보면 꽤 혐오하는 듯하다만.
싫어하면 닮는다는데, 멀린 본인이 리치거나 관련해서 상세히 꿰뚫고 있는 흑마법사가 아닐까?
Merlin - 너희 같은 무식한 새끼들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풀어서 설명해 봤다.
Yehyeh - 재수없음(진짜 없음)
게시판에서 저 싸가지 없는 말투를 시종일관 고수하는 걸 보면, 신분이 마법사임은 분명하리라.
길어질 수 있는 키보드 배틀을 단 여섯 글자로 종료했으니.
Merlin - 알려 줘도 지랄.
마법사답다.
그래도 유익한 떡밥이었다.
유저들은 정보를 얻었고, 멀린은 자존감을 채웠다.
게시판에서 썰을 푼 것부터 정말로 타인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기보다는, 지식을 과시하는 목적이 지대했을 테지만.
정말 중요한 건 멀린의 지식 자랑이 지금의 신우주에게 도움이 됐다는 부분.
'저 녀석, 나름대로 리치 흉내를 내고 있기는 한데, 좀 이상하단 말이지.'
줄루의 몸을 빙의한 저 녀석 말이다.
신우주의 두 눈에 비친 저 녀석은 뭐라고 해야 할까....
'짝퉁 아니야?'
이상했다.
정신을 빼서 남의 몸을 뺏어서 쓴다는 것부터가 수상하다.
그런 주제에 사람 형상을 유지하고 있고.
라이프 베슬이 완성되어 있으면 그대로 어디 금고에 숨겨놓고 지낼 것이지, 왜 이런 하층 산속에서 적생석이나 캐면서 양민 학살을 하고 지내겠나?
아무튼, 신우주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리치 아니지. 저거는.'
리치가 되고자 하는 무언가.
혹은 리치의 흉내를 내고 있는 무언가.
그조차도 아니면 정말로 엘더 리치 정도 되겠지만, 신우주는 우선 이 가능성은 배제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도주조차 불가능할 테니까.
"갑자기 조용해졌군."
줄루가 차분하게 읊조렸다.
"그것 아는가? 다가온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도 하나의 용기라고 볼 수 있네. 자네와 싸우고 싶지는 않아. 무의미한 분쟁으로 귀중한 실험체에 상처를 입히는 것 또한 학자로서는 무책임한 행동이니 말일세."
머리에 혈압이 뻗쳤다.
이 새끼, 말만 보면 평화주의자 같은데 이런 씨, 그 실험체가 나잖아.
어쨌든 남은 수는 단 하나다.
라이프 베슬, 그 위로 신우주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모든 이를 향해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알라,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단군왕검님, 세종대왕님, 척준경 님, 존윅 님. 저 새끼 뚝배기 깰 수 있게 도와주세요.'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라이프 베슬을 아이템으로 인식한 신우주가 이론을 되새겼다.
전송으로 하위세계에 생명체를 넣고 뺄 수는 없다.
그저 아이템 정도만 가능할 뿐.
저 녀석이 진퉁 리치라면, 라이프 베슬이 본체다. 진짜 생명을 가진 물건이니까 안 보내지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짭이라면?'
잠시 뒤.
기분 좋게 떠오른 메시지 한 통에 신우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2차전이다, 좀비 새끼야."
손바닥에 들린 라이프 베슬의 감각이 희미해졌다.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
[권능을 행사하였습니다!]
[GP가 소모됩니다!]
이걸 저놈도 느낀 모양이다.
"...무슨 짓을 했지?"
시종일관 신선놀음하기 바빴던 놈의 얼굴에 처음으로 분노가 차오른 걸 보면 말이다.
참, 2차전 종목도 정해 놨다.
"줄다리기 좋아해?"
['곡예'가 발동합니다.]
버텨 보자.
*
같은 시각 하위세계.
단테는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타라에서 무리를 이끌고 나온 것까지는 괜찮았다.
정식으로 신우주의 아래에 귀의한 이들이 약 서른 정도.
그 밖에 딸린 게 쉰 정도 된다만... 딱히 신우주를 믿는 이들은 아니었다.
"밥은?"
"치료해 준다면서. 약 줘."
"어디까지 가는 거야?"
그저 타라에서 먹고살기 막막하니까 미련 없이 바깥으로 따라 나온 자들일 뿐.
'어찌해야 합니까.'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할 텐데.
신우주가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지만, 요즘 따라서 계시가 뜸해졌다.
다른 신들과는 다르리라고 느꼈거늘 그 또한 신이었던 건가.
불경하지만 작게 실망하려는 찰나였다.
톡.
하늘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졌다.
"...이건?"
불길한 물건이었다.
붉은색 보석인데, 안에서 흉흉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게 심상치 않다.
단테는 이것과 흡사한 물건을 기사원 시절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었다.
'라이프 베슬이라고 했던가?'
리치들이 가진 무한한 생명력의 근원.
그런데 이상하다.
'라이프 베슬이 이렇게 사이즈가 거대했던가?'
집 한 채만 했다.
명사적인 의미에서 집 한 채.
이게 대체 왜?
"정지."
대동하던 무리를 멈춰 세운 단테가 칼자루에서 칼을 뽑아 들고 주위를 살폈다.
수상하다.
근처에 흑마법사들의 무리라도 있는 거 아닐까?
적이 근처에 있다면 교전한다.
그런 생각을 품으며 감각을 예리하게 다듬은 찰나.
-급합니다.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시?'
그것도 그간 기다려 마지않았던 신우주의 계시가.
"신이시여, 이 물건은 대체? 당신께서 내려주신 것입니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그 물건을 파괴하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
파괴하라고?
이 특대 사이즈 라이프 베슬을?
그런데 이상하다.
신씩이나 되는 인물이 고작 라이프 베슬 하나를 파괴하지 못하는 건가?
고개를 치켜든 의문에 주저하는 찰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급합니다. 다른 세계의 마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건 마신의 핵입니다.
"...아!"
-이쪽 세계에서는 부술 방법이 없습니다.
단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바깥에서도 성전을 이어 나가고 계셨던 것인가.
'어쩐지 크기가 심상치 않더라니.'
이건 리치의 라이프 베슬 따위가 아니었다. 마신, 진정 사악한 자들이 가진 생명의 원천이 이것의 정체.
그렇다면 이 거대한 사이즈도 설명이 된다.
'쉽지 않겠군.'
일개 피조물로서 상대해야 한다니.
그렇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그가 가진 가장 강한 일격을 써야 할 터.
하지만 사람이 많다.
정말로 강력한 주력기들은 사용할 수 없는 상황.
단테의 주된 공격들은 하나같이 범위부터 위력까지 과도하게 컸으니까.
'그렇다면 급한 대로 여분이나마 사용하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단테가 검집에서 날을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한 채 심호흡을 내쉬었다.
"하아아――."
순간, 공기의 흐름이 멎었다.
소리마저도 멎었다.
중력에 의해 작은 행성들이 거대한 행성으로 빨려 들어가듯, 광대한 들판의 기운들이 단테의 검 한 자루로 압축되듯 빨려 들어갔다.
어느새 검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의심스러운, 검의 형태로 압축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된 찰나 단테가 눈을 떴다.
'오랜만이군.'
기사원의 교관, 벨은 가장 실용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기사였다.
그는 단테에게 이 검을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강력한 공격이 꼭 화려할 필요는 없다.
요리 재료를 썰 때는 그 정도의 칼질을 하면 되고, 사람을 썰 때도 그 정도의 칼질이면 충분하지.
명심해라, 단순한 동작이라도 극한까지 추구한다면 세상의 그 어느 단단한 놈이든 벨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한 동작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 번, 십만 번을 반복해야 습득할 수 있는 비기.
[가로 베기]를 거치고 거쳐, 그다음 단계에 위치하는 기술.
[일자 가르기].
한 톨의 에너지도 낭비하지 않고 압축된 힘을 정면으로 들어 올린 찰나.
검 끝에서 흘러나온 푸른 선이 하늘과 지평선, 땅을 하나의 실로 이어 버리듯 지상을 향해 내려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단테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고작해야 핵에 금 한 줄이 가는 수준밖에 안 되었으니까.
나름대로 자신을 가진 일검이었다.
누구라도 정면에서 맞는다면 일격에 해치울 수준이었는데.
역시 마신의 핵이라는 건가?
'당신께서는 어떤 싸움을 펼치고 계신 겁니까.'
상대는 대체 얼마나 강대한 자란 말인가.
그의 신, 신우주는 또 얼마나 위대한 자인가.
경악한 찰나였다.
-한 번 더!
놀란 가슴 가라앉힐 틈도 없이 앵콜이 들어왔다.
*
술래잡기가 약 3분째.
[기예]의 효과는 단순했다.
단순히 회피력을 증가시켜 주는 스킬.
탑 내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회피 계열 스킬 중에서도 이런 잡동사니는 찾기 어려우리라.
하지만.
"커헉!"
그것만으로도 줄루와 신우주의 격차를 제논의 역설처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쿨럭!"
줄루가 쉬지 않고 피를 토해 냈다.
'대체 무슨 일이?'
기운이 빠질 때까지 추격하고 있을 뿐이다. 리치의 체력은 무한하니까.
신우주의 행동에서 이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이 격통은 대체 무엇이지?'
전신을 마디마디 분쇄하는 듯한, 나아가 존재 그 자체가 흔들리는 듯한 고통이 줄루의 전신에 엄습했다.
이상하다.
더더욱 이상한 건.
'갈수록 회복력이 줄고 있다.'
신체의 스펙이 말도 안 되게 떨어지고 있다는 것.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 한번 뜨고 감았으면 회복됐을 부상이, 지금은 한참 더디게 회복되고 있다.
호흡이 차다.
'설마, 미완성 라이프 베슬이라서?'
신우주의 예측이 맞았다.
그가 만들어낸 건 진짜 라이프 베슬이 아니다.
어느 흑마법사의 기록을 보고 유사하게 만들어낸 모조품일 뿐.
축적된 희생자들의 에너지를 무한히 제공받을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체외 배터리라고 봄이 옳다.
줄루는 그걸 자신의 신체와 연결해 두었다.
진짜 라이프 베슬에 옆에 두면 태양 앞의 전구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하지만 기능적으로는 유사할뿐더러, 내구성에는 특히 자신이 있었다.
예로부터 이런 분야에는 자신이 있었을뿐더러, 어지간한 랭커의 공격에도 금 하나 안 가도록 만들었는데.
'금이 가고 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대체 하층민 따위가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그의 라이프 베슬에 거대한 대미지가 들어가고 있었다.
"한 번 더!"
신우주가 신명 나게 고함을 외칠 때마다 말이다.
"더 세게!"
"크악!"
"다른 걸로 또!"
"쿨럭!"
"세게! 완전 세게!"
"커어어어어억!!"
줄루가 피를 토했다.
마침내 두 다리를 지탱할 힘도 없어 바닥을 나뒹굴면서.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현상에 줄루의 눈동자에 핏줄이 터졌다.
'공격하는 기색은 보이지도 않는데, 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언령이나 용언이라도 쓰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발생하는 에너지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거의 다 됐다! 더!"
"크아악!!!"
"좋아, 좋아."
줄루가 지금까지 뿜어낸 적 없는 피분수를 성대하게 분출했다.
아프다.
죽을 만큼 아프다.
제아무리 현상이 이해가 안 간다고는 하나, 결과만큼은 보인다.
'죽, 죽는다. 이대로면 확실하게 죽는다.'
자그마치 5년 치를 축적해 두었다.
5년 치 에너지를 축적해 둔 라이프 베슬인데,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 죽을 수는 없다.
살아남기만 하면, 어떻게든 목숨만 연명하면 다음 계획을 짤 수 있다.
패배를 직감한 줄루가 급하게 외쳤다.
"잠시!"
"응?"
"살려다오!"
다행히 상대방은 하층민.
그가 제시할 수 있는 물건은 많고도 많다.
돈이 되었든 지략이 되었든.
"내 패배를 인정한다. 협상을 바란다!"
"무슨 협상?"
신우주의 눈빛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됐다.
죽음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눈앞으로 피어올랐다.
"바라는 게 무엇이든 주겠다. 말만 해라. 힘을 바라나?"
"진짜?"
"그래!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줄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라면 널 탑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만들어 줄 수 있다! 흑마법을 가르쳐 주겠다면 어떻지?"
뭘 내주든 괜찮다.
몸만 회복되고 나면, 철저하게 연구해서 복수해 주겠다.
그래, 오늘의 수모를 극복할 수 있게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살과 뼈를 갈아 마셔 주겠다.
'몸을 뺏어도 돼.'
이 몸을 손에 넣었을 때 그러했듯,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아, 잠깐만. 내가 잘못 들어서 그런데."
신우주가 다시금 설명을 요구했고.
"지금 그거 한 번만 더...."
-받들겠나이다!
기사 단테의 우렁찬 목소리가 짙은 사명감을 품고 울려 퍼지는 동시에.
쩌적.
줄루의 가슴속으로 번져 나가는 격통과 함께 라이프 베슬에 갈라져 있던 금들이 거미줄처럼 줄기줄기 이어지더니.
"아."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시원한 소리와 함께 찬란한 붉은 기둥을 하위세계 하늘 끝까지 분출하며 파괴됐다.
줄루의 눈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였다.
신우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잠시 바라본 하위세계 창에서는 단테가 칭찬을 바라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더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해냈습니다!
알아.
| 15화. 리치 (3)
신우주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일요일 저녁, TV 개그 코너에 일일 게스트로 출연한 아이돌이 썰렁한 개그를 자신 있게 던지고, 그걸 고정 출연자들이 떠받드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처럼.
"...."
이게 말이 되나?
당장이라도 숨 거둘 것처럼 죽어 가는 놈이 하도 필사적이길래, 무슨 말이나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고 물어본 참이었는데.
-제가 해냈습니다!
저놈, 기사 단테가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하위세계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당장이라도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제 미약한 검이 당신의 자그마한 성전에 보탬이 되었을까요?
그래, 됐다.
너무나도 잘됐다.
[권능-전송]의 영향을 받아 어지간한 오두막 한 채 사이즈로 전달된 라이프 베슬을 순수 무력으로 뚝딱뚝딱 조각내 버렸으니 잘됐다고 볼 수 있지.
아이템을 하위세계로 보낼 때, 꼭 그가 바라는 방향으로 성능이 조정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신우주가 전송하며 머릿속으로 한 생각은 이거였으니까.
[제발 파괴하기 좋은 형태로!]
그래서 바뀐 거겠지.
짝퉁 라이프 베슬이라고 해서 집채만 한 물건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큰 소득이 있었다.
그런데.
"끄어어어...."
눈앞의 저놈, 줄루가 예상치 못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지.
"원통...하다...."
"응, 마름모꼴하진 않지."
"저런... 녀석에게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는.... 아직 이뤄야 할 비원이 많이 남았거늘...."
라이프 베슬과 생명력이 연동되어 있었던 탓일까?
하위세계로 전송된 라이프 베슬이 박살 나자마자 머리가 희게 세더니, 피부가 마르며 폭삭 늙어버리는 와중이었다.
"복수해야 할 일이 남았거늘.... 이 시궁창...에서 몇 년을... 숨죽이고... 버텼는데...이런 얼굴도 본 적 없는 녀석에게...."
잠깐, 아직 안 죽었나?
생각보다 말을 유창하게 잘하는데?
입 열 때마다 급격하게 미라화가 진행되는 것 같은데?
"야, 잠깐, 조용히 해 봐."
"나는 해야 할 일이... 아직...."
"아가리하고 조용히."
나 할 말 있으니까.
죽기 전에 숨겨둔 재산 같은 거 있으면 알려 주고 가.
"연구실의 그것도... 복수를 위해 힘겹게 입수한 그것도... 아직 못 써 봤거늘...."
오, 알았다.
"야, 이제 가도 된다."
"이 드미트리가 이런... 보잘것없는... 하층 버러지 따위에게... 초라한... 싸움으로...."
"잠깐,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죽을 때는... 죽더라도... 더... 강대한 존재와...."
따지고 싶었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줄루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정체조차 모르는 스킬에 농락당하다가 죽은 게 세상 원통하다는 듯, 그 누구보다도 억울한 표정으로.
파삭!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아예 고운 먼지가 되었고,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저 멀리 날아갔다.
"에라이."
신우주가 혀를 쯧 찼다.
그래도 대충 뭐, 정보는 먹었다.
'이름이 드미트리라.'
싸운 놈이 누구인지도 몰라서 찜찜하던 참이었는데, 짝퉁으로나마 리치가 되려고 시도할 수준의 흑마법사라면 동명이인은 드물겠지.
복수를 꿈꾸는 것 같은데.
누군지 몰라도 악연이 있었다면 그쪽에 보상을 더 요구해 봐도 될 것 같다.
아무튼, 뭐 하는 놈인지는 차차 조사해 보면 될 것 같고.
"연구실에 뭔가 숨겨 놨다는 거지?"
고개를 돌려 라이프 베슬을 탈취했던 곳을 바라보자, 그곳은 폐허였다.
기둥째로 박살 나 매몰된 건물의 잔해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우주가 거듭해서 혀를 찼다.
'어느 과격한 놈이.'
참, 내가 그랬지.
그건 그렇고, 저거 뒤집고 안에 있는 물건 빼낸다 뭐다 하려면 혼자서는 하루 종일 걸려도 모자랄 것 같은데.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숨겨둔 재산 같은 거 분명히 있을 텐데.
"아."
마침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서 엉거주춤하게 무기를 든 채, 그를 바라보는 스캐빈저 몇 명이.
잔당이 남아 있었구나.
눈을 마주치자 애매하게 피했다.
"더 해보게?"
그들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상관이 속수무책으로 가루가 되는 꼴을 본 모양.
신우주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너희가 올래? 아니면 내가 갈까?"
"...."
"전방 십자인대를 일자인대로 만들기 알아서 두 발로 걸어와라. 참, 가서 다른 노예들도 풀어 주고."
*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도합 스물에 달하는 인력이 생겼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런 메시지가 떠올랐겠지.
띠링!
[무상노동 인력 스물(을)를 손에 넣었습니다!]
상부상조가 이런 거지.
누가 엄선한 인력 아니랄까 봐 작업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스킬이 좋긴 좋아.'
일당 맨몸 노가다꾼 다섯 명 일감은 충분히 한다.
빠르게 진전되는 수색 작업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으려니 군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린 피해자 아닌가?"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지?"
"탄광 안에서 바깥으로 나왔다뿐, 하는 일은 딱히 안 바뀐 것 같은데."
"풀어 주는 거 맞아?"
이 자식들이.
신우주가 눈을 흘기자 그중 대장쯤 되어 보이는 양반이 곧 헛기침을 뱉었다.
"크흠, 여보게들, 은인께 무슨 말씀인가. 구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지. 염치는 챙깁세."
암, 그렇고말고.
침묵 속에서 작업이 재개됐고 신우주는 곧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 뭔가 나왔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한 노예가 목걸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불에 그을리고 먼지가 덕지덕지 묻었으면서도 명확히 비싼 티가 나는 목걸이를.
생각보다 별거 없었던 연구실에서도 티가 나는 수확.
그런데 이거 문제가 있다.
'그래서 뭔데? 이게.'
모르는 물건이다.
식견만 밝지, 감정 스킬이 없는 신우주로서는 못 알아볼 물건.
그렇다고 흑마법사 연구실에서 나온 물건을 들고 대뜸 공인 감정소에 들고 가기는 좀 그렇고.
"감정 스킬 가진 사람 손."
스물에 달하는 인력이 일제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쓸모가 없어."
누구 하나 도움 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면 비밀을 지켜줄 수 있고, 또 실력도 보장되는 인물로.
"아."
순간,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삼 장로가 그거 줬었지?'
테라 상단과의 직통 채널을 뚫어 주겠다면서 준 선물이 있었다.
반지 하나.
방금 막 빼앗겼던 개인물품들을 되찾으며 회수했다.
뭐였더라?
여기에 대고, 테라 상단과의 만남을 요청하면 파견 직원이 나올 거라고 했던가?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중얼거려본 와중이었다.
부웅!
눈앞으로 노란색 타원이 그려지더니, 그 안에서 한 정장 차림의 미남자가 격식 넘치는 걸음걸이와 함께 튀어나왔다.
"고객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그 버터를 바른 듯 매끄러운 얼굴이 심히 익숙했다.
"품격 있는 VIP를 위한 테라 상단의 현장 파견 서비스를 담당한 니콜라스...."
"야, 너였냐?"
"음?"
"너, 나 알잖아. 오래간만이네."
"...."
그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니콜라스.
얼마 전 테라 상단을 방문했을 때, 신우주를 상대로 허세 부리다가 삼 장로가 등장하자마자 깨갱했던 그놈이었다.
지점장이라고 했던가? 직속 채널이라길래 말단 하나 보내주나 했더니 지점장이 직접 나오네.
"...."
"테라 상단이 일을 참 잘해. 근데 기억해? 너, 나 죽이려고 했잖아. 쿨룽의 창이었나? 그때 꺼냈던 게. 간담이 서늘했는데."
니콜라스가 식은땀을 줄줄 흘러내렸다.
"용서를.... 부디 장로님께는 말씀하지 않아 주셨으면...."
얘 왜 이래? 고장 났는데?
왜 이렇게 비굴해?
'원래 잘나가던 놈 아니었나? 자존심도 굉장했던 것 같은데.'
가만, 뒤에서 삼 장로한테 뭔가 언질이 있었나?
하긴, 테라 상단이 VIP한테 보복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뭔가 있었겠지.
그럼 내 쪽이 갑이라는 거지?
그렇단 말이지?
씨익 웃은 신우주가 입을 열었다.
"야, 이제 우린 친구 사이다. 감정 의뢰도 받지?"
니콜라스가 재빠르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리고 급격히 깍듯해진 태도로 업무로 복귀하기를 몇 초.
곧바로 결과가 나왔다.
"어째서 이런 높은 수준의 아티팩트가 여기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커졌으니, 결과물은 짐작할 수 있었다.
득템했군.
"마르바스의 신기루. 어떤 마법이든 한 번 빨아들여 저장해 둔 뒤, 바랄 때 사용할 수 있는 1회성 아티팩트입니다."
"귀한 건가?"
"예, 상단에서도 최우선 순위로 수집 중인 물건입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딱 봐도 좋아 보이는데, 큰 소득을 올렸다.
복수할 때 사용하려고 구해 뒀다더니, 복수 상대가 같은 마법사라도 됐던 건가?
"매각할 의향이 있으시다면, 테라 상단에서 가장 높은 시세로 매입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고."
좋은 물건이면 써야지.
"사용 방법은?"
"마법이 근처에 존재할 때, 아티팩트를 마법의 방향으로 꺼내 들고 사용하고 싶다고 강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좋아, 그럼 기왕 온 김에 친구 사이로서 긴밀하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예."
뭘 부탁하려는 걸까.
니콜라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하길 잠시.
신우주가 저 멀리 아직 덜 수색을 마친 연구실 잔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같이 가서 치우자."
"예?"
"남들 고생하잖아. 너도 쉬지만 있지 말고 가서 도와."
그러니까, 저 더러운 곳 청소를 도우라고?
감히 테라 상단의 지점장인 나한테?
신우주의 요구에 지독한 부당함을 느낀 니콜라스가 규정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건 제 업무가...."
"삼 장로."
"맞는 것 같습니다."
띠링!
[무상노동 인력(고급)을 손에 넣었습니다!]
니콜라스의 합류와 함께 작업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괜히 테라 상단의 간부씩이나 된 게 아니다. 고급 인력이 좋긴 좋군.
정장이 더러워지도록 일하는 니콜라스를 향해 옆에 스캐빈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말을 붙였다.
"이봐. 저 싸가지, 성격 더럽지 않아? 우리 손잡고...."
"닥쳐라, 천한 것."
"...."
그러시구나.
잠시나마 꿈꿨던 역모가 사그라든 스캐빈저가 곧 일자리로 돌아갔다.
이후로는 같은 과정의 연속.
"금괴를 발견했습니다!"
"니콜라스, 감정."
"예."
"그럴듯한 검 한 자루를 발견했습니다!"
"니콜라스."
"예."
"로브가 고급스럽습니다!"
"감정."
"예."
새벽 동이 틀 무렵,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송구스럽지만, 지점장으로서의 업무가 있기에."
"그래, 돌아가 봐."
니콜라스가 복귀하고, 스캐빈저들은 밧줄로 묶었다.
이제 남은 재화들을 가지고 탑 내 상업지구로 복귀해서 신고만 하면 끝.
'아, 고생 많았다.'
탐색을 마쳤다.
미르바스의 신기루 이후로 나온 물건들은, 고생한 것치고는 소소했다.
[전체적으로 상태가 훼손되어 제값을 받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파괴한 것 같은데....]
누가 재물손괴를 일으켜서.
아마도 그레고리겠지.
돈은 줄루인지 드미트리인지 그 흑마법사가 연구비용으로 다 써 버렸는지, 생각보다 남은 게 없지만.
'자잘하게 남은 아이템들이 있으니까 처분하면 되겠지.'
참, 아직 이곳 사람들에게는 밝히지 않은 소득이 하나 더 있다.
니콜라스에게조차 보여주지 않은 '진짜 소득'이 말이다.
'이제 돌아갈까. 신고는 어디에 하지?'
고민하길 잠시.
신우주는 곧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의 책임자가 맞습니까?"
누군가, 삐까번쩍한 흰 갑주를 두른 인물이 난데없이 등판했으니까.
가슴 한복판에 멋들어진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말이다.
'스쿠툼?'
스쿠툼.
탑 내부 치안을 담당하겠다며 자경대를 자처한 길드의 이름이었다.
이 바쁜 놈들이 이 외진 곳에 왜?
"누구지?"
"스쿠툼의 조사관입니다. 신고가 접수되어 찾아왔습니다만."
조사관이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뱉었다.
"귀하의 성함은?"
"신우주."
짧게 대답하고 턱을 뻗어 주위를 살피니, 조사관의 저 멀리 나무 뒤로 고개를 빼꼼 내민 놈이 하나 있었다.
"잭?"
너, 살아 있었구나.
도망치다 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잘했다.
일 뒷정리하기 곤란하던 참인데, 전문가 데려오면 잘한 거지.
'나이스 플레이.'
신우주가 그를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스쿠툼의 조사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우주, 당신 또한 공범일 가능성이 있으니 따라와 주셔야겠습니다."
응?
| 16화. 스쿠툼 (1)
잠시 싸늘한 분위기가 흘러갔다.
스쿠툼의 조사관의 눈동자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치하던 신우주가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공범이라고? 내가? 이 사람들, 내가 다 구해 준 건데?"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조사관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신우주, 당신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럼 설명이 빠르겠――."
"각성한 지 보름이 채 안 지났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왜?
어찌 됐든 옆으로 스캐빈저와 전직 노예들이 입을 쩍 벌렸다.
"갑자기 각성하자마자 잡혀 오고는, 스캐빈저들이 득실거리는 요새를 단신으로 무너뜨렸다라. 그것도 납치된 지 일주일이 채 안 흐른 시점이라니.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지요."
"의심의 여지? 무슨?"
"당신의 자작극일 가능성 말입니다."
자작극은 개뿔이.
어느 지점에서 그렇게 느낀 것인지 묻고 싶은데, 조사관이 먼저 답해 주었다.
"겉으로는 하층민 신우주를 연기해 정체를 숨기고, 실제로는 스캐빈저 그룹의 우두머리로 사리사욕을 취하던 중, 목적을 달성해 증거를 인멸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렇게 판단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떤 남미의 마약왕처럼?
초대형 마약 마피아의 수장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타코 장사꾼의 신분이라 미국의 정보기관도 눈치를 못 챘다는.
하지만 이 조사관 녀석은 오해한 게 있다.
"미안한데, 이 쓰레기들한테는 대가리가 있으니까 그 녀석들한테 물어보――."
구체적인 예시를 보여주며 설명하려던 참에 신우주의 입이 일시 정지했다.
"아."
그 둘, 아니, 셋 다 죽었지.
그레고리는 팀킬로 미라가 된 다음 연구실 폐허에 묻혔고.
줄루인지 드미트리인지는.
'지금쯤 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겠구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증언을 요구하기에는 저쪽 전직 노예들은 계속 탄광에 갇혀 있어서 못 봤을 테고.
스캐빈저들은 글쎄다.
뭘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아까부터 복수심에 눈빛이 번들거리던데 굳이 증언해 주려고 할까?
"이런."
요컨대, 증거라고 할 만한 게 일절 없는 상황.
"혹여 저항하지 않길 바랍니다."
조사관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몸에는 신체 반응에 이상이 생기거든, 본대에게 신호가 가게끔 스킬이 걸려 있으니."
씁.
외통수다.
일단 순순히 따라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신우주가 한 일은 둘이었다.
[권능-전송을 발동합니다.]
스쿠툼에 압수당하기 전에 재화를 보낼 수 있는 대로 하위세계에 싹 빼돌려 놓기.
*
스쿠툼.
탑에서도 손에 꼽는 초대형 길드이자, 동시에 경찰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이들.
이들의 평판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러했다.
Catchball - 짭새조무사 새끼들 졸라 거들먹거리는데 꿀밤 마렵네.
짭새조무사.
요컨대 경찰의 멸칭인 짭새 미만이었다.
Catchball - 맨날 정의가 저쩌고 치안이 어쩌고 지들 용건만 강요하는데,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다니까?
Catchball - 전에는 길드 사무실 찾아와서 검문하겠다며 종일 죽치고 있는데.
Catchball - 진심 삥 뜯으러 온 건가 의심스러웠다.
까놓고 말해서 독선적이다.
탑 바깥, 지구에서는 CCTV라도 있었지.
여긴 물증 수집도 어려운 세상이다 보니까 보통은 눈과 귀에 의존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기 마련.
'CCTV나 녹음기 비스무리한 게 있긴 하지만, 그건 마법사들의 영역이고.'
마법사들의 몸값이 좀 비싸던가?
일반적인 하층 모험가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은 상황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제 막 각성한 사람이 어떻게 강력 범죄자를 이렇게 대거로 생포할 수 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 당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각성자였다면서? 무려 50년 동안이나."
바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 무한히 심문을 반복하는 거다.
흰색 제복으로 깔맞춤한 직원들로 꽉 찬 스쿠툼 길드 사무소, 1층에 위치한 일명 태초 마을 지부.
그곳에서 신우주가 앞서 몇 번이고 반복한 말을 다시 한번 내뱉었다.
"아오. 내가 구해 준 애들한테 물어보라니까요? 내가 싸워서 잡은 거 맞다니까?"
"헛소리, 그쪽 조직의 간부, 그레고리랑 줄루 두 놈이 범죄자 중에서도 보통 유명한 놈인 줄 알아? 그걸 어떻게 네가 쓰러뜨려?"
"아니, 그 둘도 둘인데, 보스는 드미트리인가 하는 놈이었다니까? 흑마법사 드미트리, 한번 찾아보라고!"
"훗, 랭커도 아니고 너 따위가 그놈을 잡았다는 말을 믿으라고? 증거 하나도 없는데? 하다못해 머리카락이라도 한 가닥 들고 와서 우겨 보든가."
대놓고 안 믿는 직원의 태도에 신우주의 머리에 열십자로 혈관이 불거졌다.
'확 능력을 까 버려?'
아니, 그건 안 될 일이지.
방법으로 따지면 제일 쉽겠지만, 때가 아니다.
[신위(하급 신)]라는 게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도 아직 정확히 모르는 상황 아닌가.
밝힐 때는 밝히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애초에 밝힌다고 제대로 믿어 주리라는 확신도 없을뿐더러.
'없는 놈이 스킬만 좋으면 셋 중 하나지. 포섭되든가 사냥당하든가. 산 채로 실험 표본이 되든가.'
셋 다 바라는 바가 아니다.
적당히 강한 놈으로 인식되며 바닥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게 그의 목표.
"당신, 이대로면 사형이야. 알아?"
탁!
이마 위로 서류뭉치를 구겨서 만든 방망이가 부딪쳤다.
"이 더러운 범죄자 자식아!"
조금 전부터 유독 신우주를 향해서 오버액션을 취하던 놈이었다.
콧수염을 느끼하게 기른 황인종 모험가.
이곳 1층, 스쿠툼 태초 마을 지부의 팀장급이라고 했던가?
속셈은 알겠다.
'날 잡아넣어서 대형 사건 해결했다고 명성 한번 떨쳐 보겠다. 이건가?'
이 새끼들이.
순간 신우주의 이마 위로 혈압이 솟았다.
'그래, 스쿠툼은 이런 새끼들이지.'
아까 스쿠툼을 탑의 경찰이라고 했는데, 경찰들이라는 게 다 믿음직했나?
가끔은 뇌물 받아쳐 먹는 비리 경찰도 있고, 실적에 미쳐서 일 골라 먹는 실적주의자도 있는 법.
스쿠툼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저 독선적인 부분에서도,
"에휴, 이래서 하층 지부에서 일하면 피곤하다니까."
하층민을 은근히 깔본다는 점에서도.
'이 새끼들, 진짜 일 뭣같이 하네.'
물론, 스쿠툼이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이었던가.
탑이 열린 직후, 완벽한 무법지대로서 모두가 죽어 나갈 때, 탑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장소로 만들겠다며 자경단 창설을 선포했던 랭커가 있었다.
레베카 순드블라드.
현 탑의 랭킹 7위이자, 스투쿰의 길드장이 그녀.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당하기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무도 그 사람들을 안 돕겠다면, 적어도 내가 같은 편에 서고 싶어.
의지는 존중한다.
실제로 레베카 순드블라드는 숭고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럴 능력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때의 '모험가 개인'으로서의 레베카 순드블라드와 '초거대 길드의 길드장'으로서의 레베카 순드블라드는 다른 사람이겠지.
'그 녀석이 이렇게까지 큰 길드의 대가리가 될 줄은 몰랐는데.'
신우주도 면식이 있었다.
뭐, 길드 창설 당시에는 같이 일해 보지 않겠냐면서 제의도 받았고.
거절했던 탓에 사이가 틀어졌지.
지금에 와서는 저쪽에서 그를 상대조차 안 해줄 거다.
아무튼, 돌아가서.
"좋아, 이렇게 나온다면 나한테도 다 방법이 있어."
"얼씨구. 기세는 좋네."
조금 전부터 신우주를 조롱하기 바쁘던 콧수염 조사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 계속 그렇게 우겨 보든가. 네가 살아서 나가나, 죽어서 나가나."
놓아 줄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있으니까. 가능한 한 이런 수는 쓰고 싶지 않았지만.
네놈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참을 수 없지.
"후우."
신우주가 호흡을 한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1초 뒤.
"레베카 순드블라드 나와――!!"
쩌렁쩌렁한 포효가 스쿠툼의 2층 지부 사무실을 한가득 채웠다.
"뭐, 뭐?"
콧수염 조사관이 움찔했다.
"이, 이 범죄자 새끼가, 누구 이름을 입에 놀려? 안 닥쳐?"
응, 너랑은 말 안 해.
소통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한 순간, 신우주는 결심했다.
"레베카 순드블라드!! 레베카 순드블라드 나오라고 해!! 레베카 순드블라드!!!!!"
들어 줄 만한 사람을 부르기로.
"...저 미친놈이 길드장님 이름을?"
"레! 베! 카! 레!! 베!! 카!!"
어쩔 건데?
계속해서 자백을 요구하는 걸 보면, 너희들한테도 물증은 없다는 거잖아?
그럼 결백하다는 증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부를 수밖에.
"집어넣어!"
"닥쳐라!"
당장은 역효과가 났지만.
"레베카 순드블라드! 레베카! 레베카! 듣고 있냐!"
"용의자가 폭주하고 있다!"
스쿠툼의 실적이 실시간으로 증가했다.
"레베카 순드블라드 나와아아아아아!!!!"
*
스쿠툼의 구조는 이렇다.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직접 맡은 8층이 본부이며, 그 외에도 각 층마다 크고 작은 지부가 있다.
그중 태초 마을에 위치한 지부의 내부 가장 화려한 사무실에서 지부장이 고개를 굽신굽신 숙였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눈앞의 훨씬 더 젊어 보이는 적발 여성을 향해서.
"덕분에 크게 시름을 놓았습니다. 단장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큰 희생자가 더 발생했을지."
당장이라고 불리는 여성의 이름은 놀랍게도.
"레베카 단장님 덕분에 이 탑도 조금이나마 치안이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레베카 순드블라드.
스크툼의 길드장이 그녀의 정체였다.
심판관이라는 이명을 가지기도 한 레베카 순드블라드 말이다.
방금 막 거물 범죄자를 때려잡고 온 그녀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렇게 치켜세우지 마십시오. 탑의 치안을 위해 봉사하는 한 모험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단순히 겸손해 보이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의 목소리 속에서 자부심 따위의 감정은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그저 할 일이기에 했을 뿐이라는 지독한 권태감만 있을 뿐.
"잊지 마십시오. 우리 스쿠툼의 존재의의는 헌신에 있다는 사실을. 스쿠툼은 탑의 주민들을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방패이니, 그것에 특권 의식을 느끼지도 않기를."
"헤...헤헤, 맞지요. 예, 단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부장이 쩔쩔맸다.
지부장, 그 또한 랭커로서 탑 내에서는 상당히 높은 신분의 모험가겠다만, 아무래도 단장에 비하자면 초라하다.
길드 내에서의 서열은 물론, 모험가로서도 아득한 실력 차이가 있었으니.
순간, 딱딱한 어조로 말을 늘어놓기 바쁘던 레베카의 이마에 짙은 시름이 드러났다.
"하지만 설마, 상층의 범죄자가 하층으로 내려와서 잠적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군요. 치안이 이렇게까지 악화되고 있었을 거라고는."
"그건...."
아부하기 바쁘던 지부장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아마 엑스니힐로겠지요."
유명 범죄 조직 '엑스니힐로'의 구성원이 하층에 내려와 있었다.
레베카가 직접 나선 덕에 생포에 성공했지만, 까딱하면 수백 명 단위로 사망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던 일.
"이해하기 어렵군요. 지부에서는 위치를 파악했으면서도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그건."
마땅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하는 지부장을 내려다보는 레베카의 눈빛이 한겨울처럼 차갑게 식었다.
결국 무능했기 때문이다.
지부장이 굽신거리고 있는 이유도.
범죄자들이 아래층에서 활개를 치는 것도.
스쿠툼이라는 조직이 충분히 유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정하겠습니다. 부디 시간을 주신다면 정찰대를 꾸려...."
이 순간을 면피하기 위한 발언의 연속.
달갑지 않은 광경 속에서 레베카의 머릿속으로 한 남자가 떠올랐다.
'이럴 때일수록 그 녀석이 생각나는군.'
있었다.
탑 내에서도 몇 안 되는 사명감과 또렷한 목적의식을 함께 지녔던 녀석이.
스쿠툼이라는 조직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주었던 그 녀석이.
-남들이 안 나서는 게 답답해? 왜 징징거려? 네가 하면 되잖아. 뜻 맞는 사람 모아다가.
과격했지만 늘 정론만 말하는 녀석이었다.
정작 본인이 말한 그 뜻이라는 게 안 맞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능력의 밑천이 드러나서 함께할 수는 없었지만.
그 녀석이 옆에 함께 있어 줬더라면.
'힘들 때 한잔할 말동무라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벌써 수십 년 전의 이야기다.
업무로 피곤해질 때면 은단처럼 곱씹던 기억을 끊어낸 레베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치안이 계속해서 불안정해지는 와중입니다. 지부장님께서도 연일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아! 물론입니다! 참, 단장님. 말씀이 나온 김에 이번 일은 대외적으로...."
"사건이 종료되기 전까지는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니, 부하 직원들까지 모두 함구하길 바랍니다."
"예, 예! 물론이지요!"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와중이었다.
"―――! ――!!!!! ―――!!!!!"
어딘가에서 건물 전체에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더라도, 멀리서 누가 뭘 외치고 있다는 건 들릴 정도로.
다만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인 게.
"방금 그 목소리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움찔한 지부장이 한심하다는 듯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헛기침을 뱉었다.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한 것치고는 썩 성실한 부연 설명을 달아서.
"어느 막 각성한 하층 모험가가 단신으로 스캐빈저 조직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하지 뭡니까."
"그 조직의 구성원은?"
"단장님께서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레고리와 줄루라는 놈들입니다."
그레고리와 줄루.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 이름을 몇 번 곱씹던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곧 떠올렸다.
'랭커 그레고리는 아닐 테고.'
아, 그 둘인가.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다.
하층에서는 꽤나 악명이 자자한 2인조 범죄자들이라고.
"놈이 말하기로는 위에 흑마법사 드미트리도 있었다고 하지만,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니었지요. 어디서 그 이름을 주워듣고 입에 놀리는지 원. 하하, 정말로 그 드미트리였다면 그렇게 멀쩡하게 탈출했겠습니까?"
흘끔 시선을 돌려 레베카가 흥미로워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지부장이 덧붙였다.
"짜고 치는 일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같은 공범일 수도 있고. 알리바이가 정확해야 하니까 더 조사해 보려는 참이었습니다. 그게 스쿠툼이 해야 할 일이니."
여기까지였으면 그럴듯했을 거다.
작은 일까지도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일하는 지부장 정도로 인식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는 레베카 순드블라드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오판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게다가, 이 용의자가 말하길, 자기가 주제에 길드장님과 막역한 사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쉽게 넘길 수 없는 말이 나왔다.
"웃기지도 않지요. 신우주라고 하는 놈인데, 무려 요 몇십 년 동안 하층에서만 기웃거리는 지박령 놈입니다. 명물이죠. 아주 한심한 놈 아니겠습니까? 랭커가 하는 말이라면 또 모르니까 들어나 보겠는...."
"잠시."
레베카가 말을 잘랐다.
"신우주라고 들었습니다."
"예? 예. 분명 그런 이름이었습니다만."
갑자기 왜 이러지?
한없이 집중한 레베카의 모습에, 한창 떠들던 것도 잊어버리고 움츠러든 지부장이 작은 목소리로 물은 찰나였다.
"그것은 왜...?"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1층 지부에 방문한 이래, 처음으로 밝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앞장서시지요. 지금 당장 만나 봐야겠습니다."
| 17화. 스쿠툼 (2)
꼬르르륵.
엉덩이가 저릴 정도로 투박하고 차가운 감옥 돌바닥.
"레베카... 후."
몇십 분째 쉬지도 않고 '레베카 순드블라드 불러와!'라는 문장만 줄기차게 외치던 신우주가 마침내 목소리를 멈췄다.
딱히 기운이 빠져서는 아니고, 슬슬 목이 쉴 것 같아서.
"저놈 진짜 독종이네, 독종이야."
스쿠툼의 간수들이 저 멀리서 철창 너머 신우주를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되는 거 알았으면 좀 적당히 묻고 넘어가지. 계속 따져서 피곤하게."
"설마, 길드장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면 진짜 자기 같은 잔챙이를 만나러 오실 거라고 생각하나?"
저 녀석들, 목소리부터 눈빛까지 한심하다는 감정이 뚝뚝 배어난다.
정말 레베카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있군.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신우주는 바보가 아니다.
애초에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서야,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안 보여서 나섰을 뿐.
원래 경찰들은 시끄러운 민원인에게 더 친절한 법이니까.
'레베카가 정말로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가 아는 모험가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민할 것도 없다.
'절차, 절차를 제대로 지켰겠지.'
누구에게나 공평한 그녀였으니까.
남을 사지로 몰아세우기 전에, 그 자신이 가장 앞장서서 모범이 되는.
또 강자 앞에서는 죽음을 불사하며 싸우는 주제에, 약자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여렸던 그녀였으니.
부당한 피해자는 단 한 명도 남기려고 하지 않았겠지.
- 세상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지키는 것. 그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흰색 갑주를 입은 채로 최전선에서 적갈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방패를 휘둘렀던 그 모습.
벌써 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선명했다.
그래, 바로 지금처럼.
지금처....
"...."
이상하다?
뭔가 선명한데.
좀 과하게 선명했다.
"오랜만이군."
말도 하네?
여태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내가 지금 지쳐서 환청까지 보고 있나? 비슷한 사람인가? 흔하지 않은데?
눈을 비빈 신우주가 입을 열었다.
"레베카 순드블라드?"
다시 봐도 실물이 맞는데.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기억해 줘서 고맙군."
"실물이냐?"
"그럼 내가 가짜라도 되겠나?"
"진짜라고 치고, 그래서 네가 왜 여기 나타나는데?"
"그야...."
초대형 길드 스쿠툼의 주인,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듯 되물었다.
"여기는 내 길드니까?"
응, 맞네.
집주인이 집 온 거지.
흔히 겨울을 닮았다는 말로 묘사되는 그 서늘한 눈빛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려니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피식 웃었다.
"그 저돌적인 성격은 전혀 안 변한 모양이더군. 재수 없는 얼굴도."
"남이사."
탑에 들어오면 노화가 멈추기 때문일까.
레베카 순드블라드는 50년 전과 전혀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왜?"
"업무차 방문했던 참에 네 목소리를 들었다. 날 부른 건,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개지랄을 떨었던 보람이 있는 셈인가?
운이 좋군.
그녀 어깨 너머를 보아하니, 비아냥거리기 바쁘던 간수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벽에 바짝 붙어서 스켈레톤처럼 이빨을 딱딱 부딪치기 바빴다.
내가 저들이었다면, X됐다고 마음속으로 복창 삼창하고 있지 않았을까?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틀었다.
"신우주. 괜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부터 진행하지."
영차.
바닥에 가부좌를 틀며 털썩 앉은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듣고 판단하겠다.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어떻게 된 건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
수십 년 만에 재회한 상황에 본론부터 나오는 게 영 기분이 묘하지만.
'듣고 판단하겠다는 게 참 본인답네.'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몇 분.
신우주와 레베카 사이에서 이야기가 정리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때, 증명됐나?"
"충분하다. 믿겠다, 신우주. 네 말은 전부 진실이군."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베카 순드블라드의 스킬은 그런 거니까.
대화를 나누며 상대가 하는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스킬.
[마음을 재는 천칭]
대화를 나누는 도중 발생하는 온갖 감정 변화가 그녀의 두 눈에는 색깔로 보인다고 하였던가.
특히나 거짓말은 곧장 티가 난다고.
CCTV도 없는 이 탑에서 레베카가 경찰 노릇을 하고 다닐 수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거다.
인간 거짓말 탐지기, 그게 레베카 순드블라드니까.
이름 뒤에 [심판자]라는 칭호가 따라붙는 그녀다운 능력이다.
스킬은 소유자의 행적을 따라 생겨난다는 게 상식. 즉, 레베카 순드블라드는 무엇이든 판단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껍질 안에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 보려 노력한 결과물이 저거겠지.
물론, 전투에 있어서도 유용한 능력이다.
대인전에 한해서라면 수 싸움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서게 만들어 주니까.
"스쿠툼을 대표해서 사과하겠다. 이번 일은 추후 지부 전체를 샅샅이 조사해 길드원들에게 엄중히 책임을 묻지."
순간, 그녀의 눈에 감회가 맴돌았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각성했군?"
"어쩌다 보니."
"대충 50년 정도 걸렸나? 동기 중에서는 네가 제일 늦었다."
"알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뭐 하러 언급한대.
"다시금 탑을 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잠시 옛 추억 되씹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할까.
대충 용건은 끝난 상황임에도, 신우주는 그녀의 흐지부지한 대화 속에 아직 여지가 남아있다고 느꼈다.
할 말을 좀처럼 못 꺼내고 있다고 해야 하나.
대화가 알맹이 없이 맴돌고 있다.
무뚝뚝한 척하지만, 레베카는 의외로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말이다.
"할 말이 있다면 꺼내 봐라. 들어는 줄 테니까."
"눈치가 빠르군."
역시나.
신우주가 피식 웃은 동시에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허심탄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뒤.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꺼낸 제안은, 신우주로서도 완전히 예상했던 범위 밖의 일이었다.
"당분간 피의자 신분을 유지해 주길 바란다."
"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외이도부터 달팽이관에 걸쳐 청각을 의심한 신우주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혐의를 못 벗고 계속 이대로 지내보라고?"
"이해가 빨라서 좋군."
이게 길드장이 할 말인가?
스킬로 무죄가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으면서도 덮고 넘어가겠다고?
"이거, 순 도적놈이 따로 없네? 무고한 사람 붙잡아 놓고, 그걸 또 써먹겠다고? 야, 설마설마했는데 레베카 너, 진짜 정치인 다 됐...."
"오해하지 마라."
레베카 순드블라드가 그의 말을 잘라냈다.
"지부에 미심쩍은 사건이 많았다. 다들 실적에 미쳐버려서 말이지."
실적.
그 단어를 들은 순간 신우주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
"설마 그거냐?"
"그래."
레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 과정에서 실적을 쌓기 위한 업무 비리가 일어나고 있다. 보고서와 실제 현장 조사에서 괴리가 있더군."
바깥 세계의 경찰 조직에서도 몇 번이고 일어났던 일.
비리 수사였다.
피해자들을 도와줘야 할 경찰이 역으로 가해자를 감쌀 때가 오죽 많았던가.
"스쿠툼이?"
"특이할 것 없다. 스쿠툼은 크고 오래된 조직이다. 물은 고이면 썩는 법이라고 하였던가? 어쩌면 내통자가 존재할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날 이용해서 도려내시겠다?"
"그래, 아직은 정황상이지만, 결정적인 한 방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딱 타이밍도 맞아떨어지겠다.
터울 없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에, 능력도 되니까 도와달라는 말이군.
내가 그 미심쩍은 사건의 당사자니까.
안 될 건 없지.
하지만 레베카의 이 제안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내가 왜?"
대가가 없다는 것.
레베카는 그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말했다.
"가만히 부탁을 들어주면 네가 아니지."
"맞아."
"네가 뭘 바라는지는 알고 있다. 나, 레베카 순드블라드에게 개인적으로 지우는 빚과 더불어, 지금의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겠다."
다음으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말 그대로 신우주에게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물건이 맞기는 했다.
"길드가 보증을 서는 형태로, 탑의 등급 심사를 면제받도록 돕지."
"오."
이건 솔깃한데?
*
스쿠툼 사무실.
그곳으로 충격적인 소식이 울려 퍼졌다.
"신우주, 그놈이 가석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우주가 구금에서 풀려나 일시적인 자유를 얻었으며.
"뭐? 어떤 놈이 풀어 준 건데?"
"그게... 단장님께서 직접 오셔서 명령하셨다고."
하물며 단장이 직접 조사해 보고 내린 명령이었다는 것.
그 말에 사무실로 정적이 오가길 잠시.
"...아뿔싸."
콧수염 팀장의 탄식이 섞인 목소리가 이내 사무실을 채웠다.
"단장님께서 명령하셨다고? 사실인가?"
"예, 직접 대화를 나눠보시고 확인하셨습니다. 신우주의 사건 정황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으니, 추후 조사과정을 전수조사해서 확실하게 밝히시겠다고."
딱 절차대로의 과정이다.
조사과정에 문제가 있었으니, 그걸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정도의 정정.
여기에 근거까지도.
"또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 있는데, 기억 추적 스킬을 보유한 랭커급 모험가를 부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뭐?"
저런 버러지 하나 때문에 그런 귀한 스킬 보유자까지 부른다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필요한 일이라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길어도 3일이면 도착할 예정이라 하더군요."
합리적인 판단이다.
무고한 피해자라면 한 명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레베카 순드블라드다운 행동.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제기랄, 이대로면 내 목이 달아난다.'
이 수사를 뒤에서 지시한 게 콧수염 팀장, 리자오웨이였기에.
'신우주, 그 하층민 버러지가 정말로 길드장의 연줄이었다고?'
허세인 줄만 알았더니.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엄밀히 말해서, 이번 조사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억지가 맞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리자오웨이 본인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강행한 이유가 있다면.
조만간 스쿠툼의 새로운 지부장 선출이 있기 때문.
-내년이면 지부장님께서 단장님 직속 위원으로 직무를 변경하신다고 하더군. 자리가 하나 빌 거다.
그전에 큰 실적 하나를 남겨 둘 생각이었다.
하층에 거대 범죄조직을 운영하던 녀석이 하나 있었고, 직접 조사해 처리했다는 방식으로.
리자오웨이는 팀장임에도 위치가 어중간한 사람이었으니까.
탑에 들어온 게 30년 전.
스쿠툼에 입단한 게 벌써 20년에 달해가고 있다.
그동안 동기들이 지부장이니 단장 직속이니 점점 치고 올라가는 사이, 리자오웨이는 팀장 직위에 머물렀다.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부장 선출이라는 둘도 없을 기회를.
마침 그에게는 실적을 늘리려면 늘릴 권력이 얼마든지 있었고, 또 스쿠툼에 입단할 때만 해도 가졌던 사명감은 빛바랜 지 오래였기에....
-살인마 자식이 말이 많군.
저질렀다.
없던 죄를 뒤집어씌우며 잡아넣고, 필요하다면 목을 친 사람이 한둘이었던가.
처음에만 마음속 도덕 삼각형이 갈려 나가는 기분에 거부감을 좀 느꼈다.
하지만.
-리자오웨이 조사관, 요즘 들어서 실적이 좋군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쾌감이었다.
다섯 번쯤 저질렀을 때는 확신마저 느꼈다.
-하던 대로만 계속하게.
-이대로면 차기 지부장도 노려봄직하겠어.
양심을 저버리면 저버릴수록 그의 평판은 더더욱 올라갔으니까.
하지만 작은 일만 만지작거려서는 한계가 있다.
큰 한 방, 그 한 방이 필요하던 참에.
-신우주라는데, 자기가 랭커급 범죄자가 소속된 조직을 하나 소탕했다고 합니다.
눈앞에 좋은 먹잇감도 떨어졌다.
신우주.
뒷배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가진 것도 없는데 정황만큼은 우기면 우기는 대로 먹혀갈 놈이었지.
녀석은 정말로 범죄조직의 끄나풀이 맞았으며, 리자오웨이가 소탕해 추가 피해를 간신히 막을 수 있었다고.
또 남은 잔당마저 잡아넣으며 스무 명에 달하는 인질을 구출했다고.
남은 건 영웅이 되는 일뿐이었는데.
'젠장! 이딴 건 말이 안 돼!'
상황이 꼬였다.
'하필 그 녀석이 단장의 오랜 지인이었고, 이번 사건을 쥐 잡듯 뒤지겠다고?'
운이 나빠도 심각하게 나빴다.
결과는 뻔하다.
레베카 순드블라드.
신우주가 정말로 그녀와 친하다는 가정하에. 조금이라도 무죄인 정황이 있으면 놈을 풀어 줄 게 분명할뿐더러.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라도 시작한다면?
'난 끝이다.'
왜 하필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런 일이?
리자오웨이가 안절부절못하고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하는 와중이었다.
"팀장님."
"...!"
어떤 녀석이 나를?
리자오웨이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제 발 저려서.
혹시라도 벌써 그에게 의심의 화살이 돌아갔을까 봐.
하지만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건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레온."
레온 길버트.
5년 전, 스쿠툼에 입단해 그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조사관임에 동시에.
-이대로 가면 지부장도 노려볼 만하겠어.
-레온, 또 자네인가?
초고속으로 실적을 쌓으며 길드 내부에서도 훗날 간부급이 될 것이라며 촉망받고 있는 인재.
이미 개인의 무력으로는 평범한 7등급 모험가 수준을 넘어 랭커 직전에 다다랐다는 평가마저 받는 자.
50년 전에 탑에 들어와 하층민으로 빌빌거렸던 신우주와는 다르며, 30년 전에 들어와 팀장에서 멈춰선 그와도 다르다.
그리고 또.
"제가 필요한 상황, 맞지요?"
리자오웨이가 실적을 조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기도 했지.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계획대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계획?"
"신우주는 범죄조직 '엑스니힐로'의 끄나풀이었다. 하층에 내려와 목적과 정체를 감추고 스캐빈저 조직을 이끌고 있었고."
다음 순간.
리자오웨이는 암벽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을 느낄 수 있었다.
"스쿠툼에게 발을 밟히자, 엑스니힐로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입막음당했다."
레온 길버트가 싱글벙글 웃었다.
"구류 중이라서 놈들도 못 건드렸는데, 마침 길드장에게 가석방을 받아서 풀려난 참에 살해당했다고 하면 문제가 될 게 없지 않겠습니까?"
잔인한 시나리오다.
증거 인멸에 가깝지만, 리자오웨이의 입가로 웃음이 올라왔다.
어떻게든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이.
"레온, 네가 할 테냐?"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18화. 의식주
탑을 오르는 시스템은 간단하다.
-한번 공략한 층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
처음 공략할 때는 한정된 인원으로 공략대를 꾸려야 하지만,
일단 공략에 성공했다면, 탑 내부 전원에게 개방된다.
누구나 오르내릴 수 있게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탑 내부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 등급제를 시행하겠습니다.
어느 랭커가 선언했다.
공공의 발전을 위해 탑의 층 입장 조건을 제한하겠다고.
특정 모험가 계급을 달성해야 진입할 수 있는가 하면, 아예 특정 길드나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지정된 층도 존재했다.
신우주와도 같은 비각성자는 심사 자체가 불가능하니 피를 토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인증받은 모험가들의 사정도 낫지는 않았다. 모두 하층에서 사이좋게 같이 피를 토할 일이었다.
Merlin - 고층에 올라가야 스펙을 올릴 수 있는데, 고층에 올라가려면 스펙이 필요하다니. 가진 놈들의 말장난에 불과하지.
철저한 등급제.
아무튼, 탑 구조가 이제 막 탑을 오르려는 초심자들에게 불리함은 분명했다.
Sword_master - 날고기는 천재가 제아무리 빠르게 탑을 올라도 최소 2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군.
Tier_maker - 정보, 30층까지 가장 빠르게 도달한 모험가의 기록은 374일이었다.
심사를 통해 등급을 충족하지 못하거든, 높은 층에는 올라갈 수 없다.
뒤에서도 말이 나올 법하다만, 의외로 큰 분쟁은 없었다.
Yehyeh - 꼬우면 칼 들고 덤벼야지. 별수 없음.(진짜 없음)
저 등급제를 시행한 게 랭커들이니까.
또 탑을 사유재산화하는 게 그들 대다수의 공통된 바람이었으니까.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탑에서, 이 제도를 반박한 자들은 대개 상대적인 약자였으니까.
굳이 이런 사유가 아니더라도.
Sword_master - 무능한 놈들이 돈 냄새 맡고 위험 지역에 달려들었다가 맨날 개죽음당하잖아. 그 꼴 막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
나름의 대의명분도 존재했고.
Merlin - 도전하다가 죽는 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몫 아니던가?
Sword_master - 선택권 존중한다고 전 국민한테 총기 보급하는 소리 하네. 보급형 자살의 시대냐?
인트라에서는 매일같이 터지는 논쟁거리라 한번 물꼬가 터지면 끝이 없다.
Merlin - 사다리 걷어차기를 참 우아하게도 포장하는군.
Sword_master – 이렇게 안전장치가 있으니까 너 같이 입만 터는 놈도 안 뒤지고 살아 숨쉬는 거 아닐까 생각한다만?
물론, 이 제도에도 예외는 있다.
비각성자든 각성자든 뒤에 보증인이 있다면 등급 심사와 상관없이 높은 층을 들락날락할 권리를 대여할 수 있다는 것.
스쿠툼 같은 대형 길드에게는 TO가 존재했다.
높은 탑에도 때때로 상인이니 파발이니 하는 것들이 필요하니 말이다.
요컨대, '힘 있는 놈들'이 만든 제도가 꼬우면 그 '힘 있는 놈들'에게 꼽사리를 끼는 것도 한 가지 방법.
레베카 순드블라드는 그걸 신우주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했고.
'다 좋은데, 꼭 여기에서 이래야 하나?'
덕분에 신우주는 이른 대낮부터 한량처럼 온갖 인적 드문 곳을 돌아다니는 와중이었다.
-피의자가 수사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잦았다. 신우주, 너 또한 비슷할 터. 아마 목숨이 노려질 거다.
레베카의 말은 유도하자는 것이었다.
뒤에서 수사 조작의 냄새가 풀풀 풍기니까, 아예 수사 조작하기 좋게끔 미끼를 던져 보자고.
'문제는 언제 놈들이 덮칠지 모른다는 건데.'
레베카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무혐의 처리를 해 주는 건 물론, 탑을 오를 수 있게끔 TO도 제공해 주겠다니.
나쁠 건 없다.
나쁠 건 없는데, 이 찜찜함은 뭐지?
'나 요즘 기습 좀 자주 당하지 않았나?'
기습 납치.
기습 수사.
왜 이렇게 기습이 잦지?
내 뒤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문득 레베카가 먼 옛날에 했던 말이 난데없이 떠올랐다.
-신우주. 얄미운데 여기서 살아 돌아간다면 뒤통수 한 대만 때려보면 안 되겠나?
"...."
그나마 이제 기습을 유도하는 단계로 발전했으니 기뻐해야 하나?
"힘없는 사람은 참 슬프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강해져야지.
강하고 소중한 모험가가 되도록. 내 쪽에서 기습하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저벅.
한참을 걷던 신우주의 발이 어느 거대한 공원 벤치 앞에서 멈춰 섰다.
아예 종이가방에 들어 있던 짐들을 풀어 놓았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서는 책들이 튀어나왔다.
도서관에서 갓 빌려온 따끈따끈하게 책들이.
"내 손으로 이런 걸 읽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름 아닌, 종교 역사 및 운영에 관련된 책들.
'능력을 개발해야 강해진다는 건 분명하니까. 해야 할 일이었지.'
[권능-전지]를 통해 내다본 하위세계 속 그의 신생 교단 '우주교단'은 하루하루 막장에 치닫고 있었다.
-왜 밥을 안 줘?
-밥도 안 주는 게 신이 맞긴 해?
-이름이 우주라면서? 나는 그런 신은 들어본 적도 없어.
이름 붙이면 뭔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쥐뿔도 없었다.
-우주 교단? 그게 뭔데?
-이름만 교단이지 거점도 없고, 거처도 없고.
정착할 곳도 없이 땅을 찾아 무한히 헤매기만 할 뿐.
아직 교단의 구색도 못 갖추고 있다.
아니, 교단이라기보다는 언제 아사할지 모르는 거지들의 무리라고 말하는 게 맞겠지.
'지금까지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전혀 못 도와주고 있었다만.'
왜, 납치당하자마자 구금당했으니까 말이다.
언제가 됐든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교단의 성장이 곧 그의 성장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언젠가는 저것도 써야 하고.'
파괴한 라이프 베슬의 잔해는 그대로 수레에 실려 잘 운반되고 있다.
원래부터 심상치 않았던 게 하위세계에서는 그야말로 '마신의 핵' 소리를 듣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강력해졌지.
저것도 조만간 쓸 건데, 그러려면 일단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먼저다.
드륵.
신우주가 책 한 권을 들어 올렸다.
[한 권으로 배우는 지구의 종교사]
얼핏 친숙해 보이는 제목 아래로는 추천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쉽다! 즐겁다! 친절하다!]
[문맹도 이해할 수 있다!]
[종교사는 어렵다는 편견에 던지는 유쾌한 반란!]
[책을 덮었을 무렵, 비로소 나는 이 세상과 친해질 수 있었다.]
[찢었다]
음.
책의 신뢰도를 얻을 수 있는 명문들이다.
'탑에서도 책으로나마 지구의 지식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사실 당연한 일이겠지.
탑 주민이라고 다 쌈닭만 있는 건 아니니까.
글쟁이들은 글쟁이였고, 그들은 탑에 들어와서도 변치 않고 책을 집필했으니까.
펄럭, 펄럭.
책을 시원시원하게 독파하며 때때로는 이마를 찡그리길 반복하길 한참.
신우주는 곧 결론을 내렸다.
'일단, 우리 교단에 당장 필요한 건.'
식량이다.
-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종교라는 것은 곧 의식주의 문제였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으며,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자들이 종교의 리더가 되었다.
어째서 절대권력을 과시했던 중세의 왕들조차 파문을 그리 두려워했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파문이 곧, 종교가 제공하는 의식주 서비스에서의 퇴출을 의미하였기 때문이었다.
-
그래, 식량이 중요하다는 거지.
일단 거지 신세부터 탈출시키고 볼까.
자리를 이동한 신우주가 곧바로 시장으로 향했다.
농작물 종묘사가 곧 눈에 들어왔다.
종묘사, 농작물을 비롯해 땅에 심는 온갖 종류의 씨앗을 파는 곳.
신우주는 그중에서도 유독 깨끗한 것이,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는 느낌이 팍팍 드는 종묘사를 골랐다.
"안녕하세요."
둘러보길 3초, 스스로 농사에 아무런 견문도 없다는 걸 자각한 신우주가 곧바로 직원을 호출했다.
"사장님, 여기에서 제일 기르기 쉬운 게 뭐죠?"
싱글벙글 웃는 여직원이 머리에 밀짚모자를 쓴 채로 나타났다.
"손님, 농사는 처음이신가요!"
"예."
"지을 목적과 토양의 환경을 알려 주시면 더 추천하기 좋을 것 같아요!"
"음, 잠시만요."
고개를 돌려 하위세계를 바라본 신우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먹여 살려야 할 입이 한 100명 안 되는 정도인데, 척박한 평야네요."
"...네?"
100명?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여직원이 움찔했는데 설상가상이었다.
"참, 농사는 제가 직접 짓는 건 아니고 그쪽에 시키는 건데, 일단 시키면 성실하게 할 거예요. 아마도?"
남한테 시켜?
여직원의 표정이 대략 멍해졌다.
그러더니 낮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더니 말했다.
"혹시, 길드 운영하시나요?"
"아뇨,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긴 한데."
"고아원?"
"비슷해요."
이끌고 보살펴 줘야 할 사람들이니까 비슷하지 않을까.
굳이 깊게 설명하고 싶진 않고.
고아원 정도면 적당하겠네.
그런 신우주의 태도가 여직원에게는 다르게 보인 모양이었다.
'고아원은 무슨. 아마 노예 상단이라도 이끄나 본데?'
탑에서 노예제도는 금지되어 있지 않나?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착각이겠지. 아니겠지. 그래야만 해. 아는 척하면 안 된다.
'일단, 스케일이 큰 손님이기는 해.'
밑에 농부만 100명 규모로 농사를 지을 정도라. 그렇다면 이 손님 하나만 거래를 잘 터도 가게 유지비는 나올 정도 아닐까.
개업한 지 얼마 안 돼서 단골도 없는 가게로서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손님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신우주의 뒤로 후광이 비추었다.
"기다려 보세요!"
그걸 꺼낼 날이 온 건가.
창고에 들어가서 뒤적이길 잠시, 다시금 나타난 그녀의 손에는 주먹만 한 씨앗이 들려 있었다.
씨앗이라기보다는 광물 혹은 타조알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물건이.
"이게 뭐죠?"
"마탑에서 개량한 최신형 경작석이에요!"
"경작석?"
뒤에 석이 붙는 것만 봐도, 일단 씨앗은 아닌 것 같은데?
"탑은 토양이 나빠서, 아무 데나 식물을 심으면 안 되거든요."
"이게 도와준다?"
"네! 바닥에 심기만 하면 끝! 농사 초심자분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땅인데, 그걸 한 번에 극복해 주는 거죠."
"흐음, 이거 안 쓰고 그냥 씨앗 뿌리면요."
"...아마 말라 죽겠죠? 못 먹을 만큼 품질이 떨어지거나?"
농사가 쉽지 않구나.
신우주는 농사 과학의 발전과 타인에게 물어볼 생각을 했던 자기 자신의 현명함을 칭찬했다.
"경작석을 심어서 토양을 개량하고, 그다음에 아무거나 심으시면 금방 자랄 거예요."
"아무거나라고 하면?"
"고추 같은 개복치 작물만 아니면 돼요."
"최대한 빠르게 자라고,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 걸로요."
"그럼 감자죠. 저희 가게는 감자도 개량종이라 2개월이면 수확할 수 있어요."
굿.
"또 오세요!"
빠르게 거래를 마친 신우주가 가게에서 튀어나오며 하위세계로 곧바로 전송했다.
[권능-전송을 발동합니다!]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GP가 쭈욱 빨려나가며 가벼운 현기증이 돌았지만 기분만큼은 상쾌했다.
우리 아가들, 밥 먹자.
*
하위세계를 바라보는 창 너머,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경작석을 바라보던 단테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신이시여, 이건 대체?
말이 짧네.
요새 빈민 무리 이끈다고 고생해서 그런가 보다.
나 같아도 신앙심 흐려지겠네.
이해해줘야지.
"처음에 보낸 건 땅을 경작하는 돌인데, 그거 먼저 심고 다음으로 나머지 씨앗들 뿌리면 됩니다."
단테가 피로에 찌든 시선으로 경작석을 바닥에 심었다.
그 등 뒤로 다른 신도 및 신도가 아닌 부랑자들의 시선도 눈에 들어왔다.
-뭘 하려고.
-이상한 일만 매번 시키지,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건 안 주는군.
-굶기 싫으면 농사라도 지으라는 건가? 쯧, 지금 막 씨앗을 심으면 해골이 돼서 포식하겠군.
시선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농사는 어디까지나 청사진일 뿐.
배급제도 함께 생각하고 있으니 그쪽도 진행해야겠다 싶은 참이었다.
뭐지?
토양 색깔이 좀 검은색으로....
'검은색?'
반경 운동장만 한 면적이 모조리 콜라처럼 진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마치 밟기만 해도 저주를 받을 듯 한없이 검은 땅으로.
-마신이다.
아잇.
저거 또 뭔데.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19화. 고통 (1)
신우주가 눈을 꿈틀거렸다.
'지금도 마신이니 악신이니 오해 사는데, 이건 진짜 마신 아니면 이상한 수준이잖아.'
말 그대로다.
땅이 모조리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스X크래프트에서 바닥에 해처리를 깔면 바닥이 보랏빛으로 물들 듯, 경작석을 바닥에 심고 흙을 덮자마자 운동장 면적이 모조리 검은빛으로 뒤덮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 멀리, 그 두 배는 족히 채우는 면적까지 그러데이션을 그리며 점점 커피색-보리차 색깔로 옅어졌다.
'난 분명 모두를 배불리 먹일 만큼 성능 좋게 만들어지길 바랐는데.'
저게 그거라고?
신우주가 두 눈을 의심하는 사이.
-으아아악!
신도와 난민들이 섞인 부랑아 모임에서 쉴 새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 도망쳐!
-땅이 검게 물들었다!
-세상이 망할 징조야!!
-밟았어! 밟았다! 난 이제 죽는 건가?
진짜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것 같네.
-신이시여,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아니, 그렇게 물어봐도 말이지.
'진짜 뭔데.'
나도 몰라.
불량품 준 거 아니야?
어쩐지 가게 연 지 얼마 안 된 초짜 같더라니.
'과하게 친절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 친절한 태도가 맘에 들었던 게 몇 분이나 지났다고 바로 의심으로 돌아선 찰나였다.
-흑토?
한 노인이 비틀거리는 몸을 지팡이에 의존해 천천히 바닥까지 굽혔다.
그러고는 흙을 한 움큼 집어 보더니 감탄했다.
-이건, 흑토가 맞군!
-어르신,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알고말고. 모를 수가 없지.
잠시 추억을 회상하듯 부들부들 떤 노인이 입을 열었다.
-농사를 짓기에 가장 완벽한 흙으로 구성된 땅이야. 위대한 어머니 땅의 기운이 흘러넘친다네. 흑토라면 그 위에 무엇을 심든 대풍작으로 이어지지.
-그럴 수가. 전 그런 것도 모르고...!
단테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신우주의 의도를 의심했던 게 부끄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아, 제대로 받았구나.'
신우주도 잠시나마 종묘사 여직원을 의심했던 과거의 자신을 반성했다.
호의로 대해 주는 사람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봤다니.
하층민이라고 해서 그를 깔봤던 지금까지 대략 네 자릿수의 사람들과 그가 다를 게 대체 무엇이었던가.
-이보게, 젊은이. 같이 내려 주신 것이 있지 않았나?
-예, 씨앗으로 보입니다만.
-심어 보게나.
단테가 조금은 달라진 몸짓으로 감자 씨앗을 꺼내, 바닥에 뿌린 찰나였다.
"어?"
뭐지.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드드드드드드드드드 진동했다.
진짜 뭔데?
그러더니.
뽁!
바닥을 뚫고 초록색의 거대한 잎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열대야의 야자수들을 떠올리게 할 만큼 거대한 잎이.
엮으면 해먹으로도 쓸 수 있을 듯 거대한 그 잎 다음으로는.
'기둥?'
잎 아래로 어린아이 몸통만 한 초록색 기둥이 쑤우우우욱 뻗어 나왔다.
하위세계 창 너머로 본 감자 씨앗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감자라기에는 커도 좀 이상하게 커서,
무럭무럭이라는 수식어로 표현하기에는 과하게 빠른 성장을 바라보고 있길 잠시.
'원래 감자가 나무에 열리는 식물이었나?'
신우주의 머릿속이 의심으로 가득 찼다.
'아무리 봐도 감자 같지가 않은데?'
신우주는 탑에 들어오기 전, 강원도의 감자 농장에서 감자 수확 체험에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두 눈에 담았던 싱그러운 감자들은 이곳에서 보이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아이 씨, 경작석인가 그건 그래도 제대로 받은 것 같은데, 이건 진짜 이상한데?'
종묘사 그 여직원, 첫 번째는 제대로 하더니 두 번째가 좀 별로인데?
일 처리가 너무 어눌한 거 아니야?
친절하다고 다 되는 게 아니지.
당장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면 어쩌려고.
하지만 몇 초가 지났을 무렵, 신우주는 깨달아야 했다.
이번에도 그가 틀렸음을.
-흡.
단테가 그 거대한 초록색 기둥을 양팔로 감싸 안고는.
뿌드드드드드드드드득!
그대로 뽑아냈다.
그 아래 지각을 뚫고 딸려 나온 건.
"할렐루야...."
여행용 캐리어만 한 사이즈의 갈색 알맹이들이었다.
그렇다.
저 어린아이 몸통만큼 굵은 것이 나무 기둥 따위가 아니라.
'줄기?'
그저 감자 줄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지극히 감자 줄기처럼 생긴, 단지 심하게 거대한 감자 줄기 말이다.
"아잇."
무슨 식물이 이렇게 빨리 자라? 줄기는 또 왜 저렇게 크고?
알 사이즈 봐라. 하나하나가 성인 10명은 족히 먹고도 남겠다.
놀란 건 그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건....
단테가 칼을 꺼내 가죽만큼 질긴 껍질을 베어내고, 안의 황금빛 알맹이를 확인한 뒤.
-감자군요.
멍한 표정으로 읊조린 그 순간이었다.
-오오오오오오! 감자다! 감자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짜? 저게 감자라고?
-나도! 나도 볼 거야!
-감자가 맞다! 이거 다 감자야!!!
쉰을 한참 넘어서는 부랑아들이 인간의 파도처럼 달려들더니 사탕에 달려든 개미처럼 혈안이 되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신우주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강원도에 여행 갔을 때도 저만큼 큰 감자들은 본 적이 없는데.'
마탑이 대체 뭘 만든 거지?
아니, 마탑에서 개량한 게 문제였나?
아니다.
[권능-전송 스킬을 통해 보내진 아이템은 사용자의 권능에 영향을 받아 변화합니다!]
저 메시지.
언제나 떠오르는 저 대책 없는 메시지가 이 과성장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먹어도 되는 건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신이시여!
-마침내 저희를 굽어살피시나이까!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헐뜯지 않겠습니다!
-저희를 배불리 먹이시옵고....
신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있는 걸 보면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찰나였다.
[당신은 어린 신도들을 위해 먹고살 수 있는 땅을 제공하고, 그 땅에 싹을 틔웠습니다. 그대의 자손들은 축복받은 검은 땅 위에서 영원히 번성할 것입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앙심이 상승합니다!]
[신앙심에 비례하여 스탯의 상승치가 보정됩니다!]
[신앙심에 비례하여 GP 소모량이 줄어듭니다!]
어?
이건 또 뭐야.
'신앙심이 따로 있었어?'
그 신앙심에 효과가 좀 좋다.
신체 컨디션이 좋아져 가는 게 대놓고 느껴질 정도로.
아직도 메시지의 파도가 끝나지 않았다.
[신앙심이 상승합니다!]
실시간이었다.
얼마나 됐다고 자이언트-감자를 정상적인 감자 사이즈로 조각내서 나누고, 불을 피워 굽고 있는 부랑자들도 있었으니까.
-맛있다!
-달아! 감자가 달아!
-으흐흑, 이제 굶지 않아도 돼!
차마 제대로 익지도 않은 감자를 허겁지겁 입안에 욱여넣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저자들을 보아라.
'신앙심을 챙길 필요가 있겠어.'
단순히 신도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도들이 진정 행복하게 살아가며, 믿음을 품을 수 있게끔 도와야겠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다 떠나서 뭐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흐뭇하긴 하네.'
성격 더러운 신우주에게도 아빠 미소를 짓게 만드는 성질의 광경이었다.
왜, 까놓고 말해서 내 새끼들이잖아?
-그분께서 심으라 하시며 돌을 주었으니 땅이 기뻐하고, 씨앗을 주었으니 세상이 기뻐하였다.
조금 전 이 땅이 흑토라는 걸 밝혀낸 노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우주는 개의치 않았다.
어딜 가나 노인들의 주접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참, 이럴 때면 늘 뒤따르는 메시지가 있다.
['마술사 키튼'이 교단에 합류합니다.]
신도들이 늘어나는 소리였다.
['사기꾼 엘리자'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무면허 의사 스튜어트'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주정뱅이 아르보'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여전히 구성원은 좀 미묘하지만.
그러던 중이었다.
['프리스트 예시카'가 교단에 합류합니다.]
프리스트?
뭔가 하나 건진 것 같다.
그런데 [전지] 스킬을 사용해서 보려니 그냥 프리스트가 아니었다.
'타라 교단 출신?'
고통의 교단, 타라의 신도가 들어왔다.
그의 교단에.
*
늦은 저녁.
신우주가 하위세계를 내다보며 농사 타이쿤에 집중하는 사이.
어둠 속에 숨어 복면을 뒤집어쓴 채 신우주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뭘 하는 거지?"
"글쎄요. 실성한 사람으로밖에 안 보입니다만."
둘이었다.
신우주를 알고 있는 둘.
"네 생각도 그런가? 레온."
"이름을 언급하는 일은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군요."
"...알았다."
레온과 리자오웨이.
스쿠툼 지부의 수사 조작을 주도해 온 두 조사관이었다.
범죄자를 조사하러 간다는 명목하에 함께 바깥으로 나와, 신우주가 풀려난 대낮부터 뒤에서 그를 감시해 왔다.
언제가 됐건, 기습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빠르게 해치우기 위해서.
신우주가 놀린 입이 레베카의 귀에 닿기 전에 말이다.
그런데.
"너무 빈틈이 많으니까 오히려 접근을 못 하겠군."
수상했다.
계속해서 빈틈을 드러낸다고 해야 하나?
지나치게 틈이 많다.
낮에 생각 없이 계속 걸어 다닐 때도 그랬지만, 공터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졌을 때도 그랬다.
'마치 기습하길 바라고 있는 듯한.'
당장 지금도 그렇다.
"그래, 잘 먹어라. 있을 때 먹어야지."
말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먼 거리다만, 아까부터 계속해서 허공에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지 않나.
정신질환자인가?
아니면 외부와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있는 건가?
'파리지옥을 보는 것 같군.'
단내에 이끌려서 접근한 순간,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
"들리십니까?"
레온의 목소리에 리자오웨이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아직도 마음을 못 굳히셨습니까?"
"...기습하기에는 타이밍이 오히려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평소에는 잘도 없는 죄를 만들어서 덮어 씌어온 주제에.
막상 큰일 앞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는 리자오웨이의 모습에 레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엑스니힐로가 어떤 조직입니까? 민간 테러도 대놓고 저지르는 놈들이죠. 작정하고 입막음하려고 했으면, 이렇게 상황을 재겠습니까?"
오히려 밖에 드러나든 말든 신경도 안 쓸 거다.
민간인들의 피해도 달게 감수하겠지.
"움직여야 합니다. 시간이 없군요. 조직에서도 저희를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
"아니면 설마,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시는 겁니까?"
"...알았다."
레온의 채근에 리자오웨이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이 녀석 말이 맞다.'
스릉.
등에 걸친 창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당분간은 본부의 눈치도 삼엄해질 터.
이게 마지막이다.
신우주의 부주의한 뒷모습이 보였다. 기습해 달라고 유혹하는 듯한.
['초상비'를 발동합니다.]
초상비.
무협에서는 경지를 뜻하는 말이지만, 이곳에서는 스킬의 이름이다.
풀을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기척을 지워 주는 은신 계통 스킬.
단순히 이동부터 기습까지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으며, 그 다재다능함에 걸맞게 B+ 랭크가 책정되어 있다.
리자오웨이가 이 스킬을 얻은 건, 언제나 안개처럼 희미하게 깔린 채 살아왔던 탓이기도 하겠지.
매사에서 타인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활동하고 싶은 음습한 습성의 반영일 수도 있겠다.
그는 이 스킬에 힘입어, 박무(薄霧)라는 칭호를 얻어냈다.
어쨌든.
'정말 이게 맞을까?'
다시 한번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다. 오늘의 그는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다.
혼란스럽다.
그간의 범행이 드러날 위기라고 해서 겁이라도 먹은 건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타인의 삶을 망쳐 왔으면서?
바람을 가르며 달려 나간 그의 몸은 어느새 신우주의 지척에 있었다. 창을 크게 휘두르면 바로 닿을 정도의 거리에.
'그래, 마지막이다.'
박무, 리자오웨이가 희미한 안개인 채로 거머쥔 창을 강하게 찔러넣은 찰나였다.
캉!
창이 막혔다.
"...!"
신우주가 갑자기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책 하나에 가로막혀서.
리자오웨이가 눈을 부릅떴다.
아차, 감지 계통 스킬 보유자였나?
기를 쓰고 스킬을 감추더라니.
'그보다 무슨 책이 이렇게 단단....'
손이 저릿하게 울렸다.
막히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치더라도, 책 따위에서 나올 소리가 아닌데?
가까이서 잘 보니까 금속으로 되어 있다. 이런 책이 만들어지긴 하나?
완전한 고체라기보다는 반쯤 액체처럼 표면이 꿀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어쩐지."
고개를 돌린 신우주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언제 오나 기다리느라 다리에 쥐 나는 줄 알았잖아, 쥐새끼 같은 새끼들아."
잠깐, 짐작하고 있었다고?
그것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언제부터?"
"네가 엄마 속 썩이던 무렵부터."
이 새끼는 대체 뭐지?
혈압이 치솟았다.
더 묻고 싶은 게 많지만, 리자오웨이의 질답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건.'
신우주가 품속에서 꺼내 든 스크롤이 있었으니까.
막아야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저걸 이대로 방치하면 끝난다고.
리자오웨이의 창이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궤도로 휘어졌지만, 신우주가 더 빨랐다.
찍!
스크롤이 찢어진 순간.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지려는 듯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고.
어쩐지 세상의 색온도가 올라간다는 직감이 들었을 무렵, 리자오웨이는 그게 착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운석?'
하늘에서 붉은 운석 하나가 이쪽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으니.
콰아아아아아아아앙――!
공기를 찢으며 날아와, 바닥과 충돌하자마자 크레이터를 일으킨 그것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제야 찾았군."
심판자.
거대 길드 스쿠툼의 단장.
현 탑의 랭킹 7위.
레베카 순드블라드.
그녀가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방패, 메이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엑스니힐로의 구린 냄새가 나더라니."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리자오웨이를 향해 있지 않았다.
저 먼 곳,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곳을 바라보는 금발 미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레온 길버트, 아니, 장 라크루아."
장 라크루아.
리자오웨이는 그 이름의 무겟값을 알았다.
거대 범죄 조직, 엑스니힐로의 간부.
장 라크루아, 스쿠툼이 오랜 시간 쫓아왔던 주요 표적 중 하나.
휘말린 건 어쩌면 그일지도 모른다.
"아, 그렇게 된 거구만."
근데 그래서 그게 누군데?
신우주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게 누군지 몰랐다.
진짜로.
왜 지들끼리만 아는 이야기 하는데?
게임 속 하급 신이 되었다
| 20화. 고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