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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ENTADEOPERADORNIVELESPA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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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1화 내가 만든 세계 (1)

"-이 대리, 퇴근 안 해요?"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려 깨웠다. 책상에 웅크리듯이 자고 있던 나는 옅게 눈을 떴다.

"…서 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지...."

목소리의 주인은 서 팀장님이었다. 그녀가 혀를 반쯤 빼물면서 앙증맞게 눈을 찡긋한다.

"지갑을 사무실에 놓고 갔지 뭐예요. 그래서 잠깐 들렀어요. 근데 이 대리가 어둠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길래 말 한번 걸어 봤어요. 곤히 자고 있었다면 미안해요.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이분은 내 직속 상사이자 스물아홉이란 나이에 팀장을 단 수재시다.

그런데 서 팀장님은 능력보다도 그 미모로 직원들의 입방아에 자주 올랐다.

아이돌을 했어야 한다나 뭐라나. 내게는 조금도 관심 없는 주제였다.

같이 일하는 사이인데, 팀장님의 얼굴이 예쁘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너무 티 내면서 하는 거 아니에요? 부하 직원이 이러고 있으니까 제가 나쁜 사람 된 것 같잖아요."

팀장님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눈을 끔뻑인 나는 이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은 전체 소등한 지 오래였다. 불빛이라곤 내 모니터가 발하는 빛이 유일했다.

거참, 민망하네.

나는 까치집이 된 뒷머리를 가라앉혔다.

"'레컨'의 베타 서버 오픈까지 이제 7일 남았잖습니까. 시간 있을 때 버그 같은 거 바짝 잡아 놔야죠."

레이컨스. 우리끼리는 줄여서 레컨이라 부르는 게임이자, 다년간 준비한 역작이다.

'개발 기간만 무려 6년이었다.'

장정 6년 동안 회사 전체가 이 게임에 매달렸다. 이거 망하면 회사도 같이 망한다.

'과장이 아니라, 우리 회사의 명운이 정말 레컨에 달렸다.'

새삼 세월 참 빠르지 싶었다. 레이컨스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까지만 해도 신입이었던 탓에 일 처리도 어리숙하고 핀잔도 많이 들었었지.

그랬었던 내가 짬 좀 찼다고 대리로 승진했다니. 월급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하긴, 요새 커뮤니티 활성화가 잘돼서 입소문이 금방금방 나긴 하죠. 괜히 어쭙잖은 완성도로 출시했다가 입소문 잘못 나면, 그대로 매장. 요새 게이머들 눈이 좀 높아요?"

"돈 십만 원 가까이 내고 미완성본 받아 보면 사기당한 기분일 만하죠. 저희야 출시하는 처지니까 살살 해 줬으면 하는 거지만, 그들은 엄연히 고객이니까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이 대리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언제나 게이머 관점에서 말해 주는 거. 자기 객관화가 잘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어쩔 땐 과한 나머지 독불장군 같아서 제가 애를 먹긴 했지만요. 후후."

"분란을 조장해서 죄송했습니다...."

"칭찬이에요, 칭찬. 저도 게임이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이 대리의 열정만큼은 못 따라가겠어요."

팀장님의 공치사에 내가 뺨을 긁적였다. 게임사 태반이 블랙 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업계에 발 벗고 뛰어든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게임이 좋으니까.

'미치도록 좋았으니까.'

나는 자타공인 게임에 미친놈이다.

굳이 하나 꼽으라면 RPG에 환장한다.

캐릭터가 성장했을 때와 히든 피스를 얻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늘 새롭고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단순 게이머 입장으로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나는 어느새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가 되어 있었다.

하물며, 영광스러운 데뷔작이 내 애착 장르인 근미래 디스토피아라서 감회가 남다르다.

마이너 장르긴 하다. 메인스트림인 판타지나, FPS에 비해서 안 팔리는 장르라는 점도 긍정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포문을 여는 맛이 있거든. 모름지기 백마 탄 초인은 허허벌판에 등장하는 법이지 않나?

'내가 게임 업계의 백마 탄 초인이다.'

물론 이쪽 업계에 발 들인 것을 후회한 적 없다면 거짓말이다.

게임 업계가 이 정도로 열악할 줄은 몰랐지.

기간제 근무에다, 야근은 밥 먹듯이 하며, 노동 강도 대비 월급도 박봉이다, X바.

이처럼 그동안의 고생을 열거하자면 날밤을 까도 부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불만들을 모두 상쇄할 정도로 게임이 좋았다.

완벽에 가까운 게임을 내보이고 싶었다. 그 집념이 바로 나를 이 야밤까지 사무실에 붙들고 있는 원동력이었다.

꽈악

주먹을 불끈 쥐는 내 모습을 팀장님이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야 대견할 수밖에. 워라밸을 자진 반납하면서 야근하는 부하가 어떻게 안 예뻐 보일까? 내가 그녀여도 저런 미소를 내보였을 거다.

"이거 받아요."

문득 그녀가 호주머니에서 웬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팀장님의 사원증이었다.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예쁘게 미소 지었다.

"뒷면에 제 아이디가 적혀 있어요. 이 대리 아이디로는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적이죠?"

그 말대로.

직급에 따라 접근 권한에 차등을 둔다. 정보 유출 방지 및 기밀 유지를 위해서다.

"이 대리, 제 아이디로 접속해 봐요. 그러면 버그나 시스템 오류 잡기가 좀 더 수월할 테니까. 제가 옆에서 도와주고 싶은데,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이거, 사내 방침에 걸리는 거 아닌가요."

"말마따나 출시일까지 일주일 남았는데 앞뒤 잴 상황인가요? 그리고 만약 걸린다고 해도 제가 이 대리를 위해서 전부 독박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팔 아프다."

서 팀장님이 사원증을 내 코앞에서 까딱였다. 호의에 못 이긴 나는 엉겁결에 사원증을 건네받았다.

"잘 쓰겠습니다, 팀장님."

"별말씀을."

그제야 팀장님이 외투를 걸치곤 몸을 돌렸다. 떠나기 전에 그녀가 내게 당부했다.

"모니터에 너무 눈을 딱 붙이고 있진 말아요. 그러다가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어떡해요."

"팀장님도 긴장하셨나 보네요. 그런 농담을 다 하시고. 그런 일들은 웹소설에서나 나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잖아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요."

웃어넘기려 했는데 어째 상대는 진지한 기색이다. 그러다 아차 싶었는지 바로 표정을 편다.

"그, 그러니까 제 말은 하여튼 제 말은 쉬엄쉬엄하라는 뜻이었어요. 그럼 고생해요, 이 대리!"

얼버무린 그녀가 급히 사무실을 떴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머물렀던 시선이 모니터로 돌아왔다.

내 입술이 흐느적거렸다.

말은 겸양을 떨었지만 나는 기쁨에 겨웠다. 장소가 회사만 아니었다면 소리 내어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일개 대리인 내가 관리자급 운영자 계정으로 접속할 수 있다니!

겜창으로서 가슴이 웅장해지는 순간이다.

"시작해 볼까."

나는 서둘러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인터페이스가 모니터에 한가득 담겼다.

드르륵.

마우스 휠을 긁던 와중이었다. 눈초리를 가늘게 좁혔다.

인터페이스가 기존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못 보던 항목들이 하단에 추가되어 있다.

"스탯이나 이런 거는 똑같은데."

생명, 정신, 근력, 민첩, 마력, 신앙.

핵심 여섯 스탯은 여상히 그대로다.

여기서 잠시. 장르가 근미래 디스토피아라고 상술해 놓고서 왜 마력과 신앙이 있냐고?

툭 까놓고 말하겠다. 돈 때문이다.

우리도 먹고살아야지. 흙 퍼먹고 살 순 없잖아. 이 게임에 사활을 걸었다니까? 아무튼.

우리는 레이컨스에 판타지적 요소를 많이 첨가했다.

마법사나 성기사 같은 다소 근미래와 동떨어진 직업군도 플레이할 수 있다.

그 요소들의 베이스는 무공이다.

근래 한국에서 가장 선풍적인 장르잖아.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다 준비했어.'

이런 갓겜이 단돈 72,000원....

"나 혼자서 뭔 헛소리 하냐."

나는 고개를 털고 다시 화면을 응시했다.

□ 운영자 모드로 플레이

GM의 권한으로 게임에 접속합니다.

※ 게임 내 밸런스를 해칠 수 있으므로 시스템의 자체적인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제아무리 운영자라도 게임의 재미를 해쳐서는 안 되니까요.

"음."

클릭을 해 봐도 이 이상의 설명은 없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접속해 봐라 이건가?"

그렇다면 뭐, 시키는 대로 해야지.

타닥, 타닥.

나는 캐릭터 닉네임을 실제 본명으로 설정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야 몰입감이 훨씬 살더라고. 드문 이름이어서 다들 실명인 줄도 모른다.

[이름: 이태백]

Level: 1

생명: 5 정신: 5 근력: 5

민첩: 5 마력: 5 신앙: 5

☑ 운영자 모드로 플레이 (활성화)

"외형은 대충 검은 머리에 검은 눈으로 하자."

나는 이윽고 '생성'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설렘이 무르익어 가던 즈음이었다.

[운영자 모드로 게임에 접속합니다.]

['혼돈 여신의 편애'를 추가로 확인.]

[우주의 인과율 조정을 시작합니다.]

"뭐, 뭐야 이건?"

이상을 느낀 내가 마우스로 손을 옮긴 순간이었다. 모니터가 빛을 뿌리며 눈을 기습한다.

번쩍!

나는 눈을 찌푸렸고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여기까지가 지구에서의 내 마지막 기억이다.

* * *

엄숙한 공기가 흐르는 법정. 방청객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저들끼리 웅성거린다.

"오늘 죄인은 사형수라면서요?"

"어머, 어떤 대역죄를 지었길래?"

"시에스타를 건드렸다지 뭡니까...."

그때 법정 문이 열리고 법복을 입은 중년인이 들어섰다. 약속했다는 듯이 수다가 그쳤다.

뚜벅, 뚜벅.

순식간에 드리운 정적만으로 중년인이 대저 높은 위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중년인은 레이크 시티 시 정부 소속의 판사였다. 판사가 경비원을 향해 턱짓했다.

"데려와라."

"예."

판사 뒤로 금속성이 들려왔다. 사슬 따위가 얼기설기 엉키면서 나는 소리였다.

곧이어 경비원 두 명이 삼엄한 표정으로 한 남자를 법정 안으로 질질 끌고 왔다.

이목이 남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색소가 옅은 미남자였다. 먹물을 푼 듯한 검은 머리와 시퍼런 혈관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핏기 없는 피부. 수갑과 족갑으로 결박당한 손목, 발목은 살갗이 벗겨졌다.

남자는 경비원 두 명의 손길에 이끌려 법정 한가운데에 무릎 꿇었다. 판사가 운을 띄웠다.

"본 피고는 레이크 시티의 치안을 위협한바. 따라서 본 법정은 피고에게 국가 교란죄를 선고하는 바이며, 본 피고를 '사형'에 처한다. 사형은 금일부터 열흘 후 14시 15분 53초에 시행될 것이며, 참관인으로서 시의원 세 분께서 동석하실 것이다. 최후의 변론을 할 시간을 주겠네. 피고-"

내 주변 시야가 부드럽게 뭉개졌다. 물속에 잠긴 듯 내 정신이 몽롱했다. 씨발, 이건 꿈인가?

꿈이라기엔 현장 정보가 너무 생생했다. 그렇다면 저놈이 부르는 이름은 나라는 건데.

나는 방청객을 휘둘러 보다가 픽 실소를 터뜨렸다. 어이가 너무 없어서 웃음이 나와 버렸다.

'서 팀장님의 경고가 진짜일 줄이야.'

어째서 이딴 세상에 던져졌는지 알 길이 없다. 아는 거라곤 내 신분이 사형수라는 사실뿐이다.

아, 아니지.

잊을 뻔했는데 하나 더 있긴 하다.

나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

"사형수 이태백!"

그런데 이 파렴치한 세상은 창조주를 죽이려 든다. 싸가지 없는 새끼들. 한마디 해야겠다.

"…거, X나게 땍땍거리네."

충동적으로 뇌까린 이 말이 명을 재촉했다면.

이 몸뚱어리가 꼭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뭐, 뭐뭐, 뭣?! 저놈을 당장-."

난 세상을 비틀어서라도 살아남을 생각이다.

* * *

[#3 대규모] 100.000.000 패치 노트

우주의 섭리와 구조를 재조정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며 바라고 원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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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내가 만든 세계 (2)

퍽! 퍽!

이태백은 경비원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었다. 감히 신성한 법정에서 쌍스러운 욕설을 입에 담은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다.

이태백은 최고형을 선고받은 사형수였기에 형량을 늘려 봤자 의미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몸으로 때우는 중이다. 아파 죽겠다, X부럴.

"어딜 신성한 법정에서 그딴 망발을 지껄여! 사형수라고 아주 막 나가자는 거지?!"

"너 같은 반동분자 새끼가 사형 전에 죽는다고 윗분들이 눈 하나 깜빡할 것 같아? 우리가 여기서 너를 때려죽이나, 굶겨 죽이나 시 정부 간부들은 조금도 관심이 없거든!"

"끄…어어억."

삭신이 비명을 지른다. 양손으로 후두부를 감싸 쥔 채로 웅크렸다.

콩 벌레 같은 조금 불쌍한 자세지만 현 상황의 얼개를 파악해 보자, 이태백.

'얘들은 나를 절대 못 죽여.'

이거 하난 확신한다. 그랬다간 이자들이 사형대에 올라간다.

이 세계는 무고한 자에게 '국가 교란죄'라는 죄목을 덧씌워 전기의자에 앉히는 정신 나간 도시다.

이곳은, 무대의 배경인 레이크 시티는 차가운 크롬과 플라스틱이 범람하는 곳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메마르고, 공기는 오염되다 못해 썩은 지 오래인 미친 세상이었다.

이런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정상일 리 없다. 지위가 높을수록 더 그러했다. 원래 부패한 상류층은 게임 서사에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변태적인 성향의 고위 관료들이 사형 장면을 관람한다. 샴페인과 함께 시시덕대며 역겨운 유희를 즐기겠지.

만약 장난감인 이태백이 전기의자에서 지짐이가 되기도 전에 사망한다면? 재미를 갈취한 자가 전기의자로 직행한다.

이놈들도 그걸 알기에 명치나 머리는 피해서 매질하는 것이다.

그런 후회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따듀밸리 같은 힐링겜이나 만들걸 하는.

한때 태백은 옆 힐링 게임 부서를 소꿉장난이라고 놀렸었....

…따악! 곤봉이 정강이를 때렸다. 타격감이 차졌다.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열렸다.

"아."

뼈 맞았다.

'으아아아아악!'

볼 안쪽 살을 질겅거리며 비명을 틀어막았다. 원래였다면 한 대 맞고 기절했을 텐데 어째서인지 맷집이 튼튼해졌다.

게임에 빙의해서?

'이딴 게임적 허용 필요 없다고!'

잠시 후, 이태백이 꿈틀꿈틀 경련했다.

"하아… 하아...."

두 경비원이 소매로 땀을 훔쳤다. 그네 중 하나가 널브러진 이태백을 향해 씹어뱉었다.

"너, 사형까지 앞으로 일주일이지? 그때까지 우리가 계속 네 주위를 배회할 테니까 자주 보자고."

철문이 닫혔다. 천당과 지옥의 강역이 갈라졌다.

"참고로 창살에는 전기의자와 마찬가지로 20만 볼트 고압 전류가 흐르거든, 태백아?"

떠나기 직전 경비원 하나가 마지막까지 이태백을 향해 이죽거렸다. 비실비실 쪼개면서.

"행여나 건드렸다간 살이 녹을 거다. 네가 손 병신이 되면 우리가 네 수발을 들어야 하니까 말해 두는 거야."

"잠꼬대로라도 만지지 말라고. 어차피 며칠 후엔 전신이 바싹 익을 테지만 말이야!"

납작 엎드려 있는 이태백을 뒤로하고 그들은 떠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얼마 뒤였다. 그가 신음을 앓으면서 이마를 문대듯 매만졌다.

까드득.

그가 남은 손으로 바닥을 움켜쥐듯이 긁었다. 다섯 손톱이 콘크리트를 할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로 안광이 시뻘겋게 번뜩거렸다.

"꼭… 받은 것 이상으로 되돌려주마."

다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맞다.

탈옥 계획을 세워야지.

* * *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태백. 눈두덩이는 퉁퉁 부었지만, 그 틈새로 동공은 침착하게 빛났다.

아득하리만치 비현실적인 상황이 닥치면 사람이 도리어 냉정해진다는 게 사실이구나.

'일단 출신 성분부터.'

팔짱을 낀 채 골똘히 기억을 더듬었다. 사형수였던 네임드 NPC가 있었던가? 없다. 사형수의 99%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태백이 수감된 뇌옥이라는 장소다. 시 정부는 탈옥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철옹성이었다. 과연 일리 있는 자신감이었다. 태백 관점에서도 탈옥은 불가능하다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방비가 삼엄하기 짝에 없었다.

시 정부가 현세에 증축한 무간지옥이 바로 이곳, 뇌옥이었다. 그렇지만 말이다, 세상 어디에든 예외가 꼭 하나씩은 있는 법이다. 뇌옥에 탈옥수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존재한다, 탈옥수가.

딱 한 명.

가설을 세워 보자. 빙의한 이 몸뚱이는 그자인 건가? 아닐 거다. 나이부터가 다르다.

그자가 탈옥을 시도하던 나이가 대략 서른 중반이었나 그랬다. 그에 반해 이 신체는 높게 쳐줘도 이십 대 중반이나 될까 말까다. 무엇보다 그자는 무기수이지 사형수가 아니기도 하고.

"부럽다."

이태백은 한숨을 내쉬곤 벽에 비스듬히 기댔다. 돌벽의 한기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혔다.

'이 육신이 누구인지 특정하는 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군.'

이 세계의 창조주 중 하나인 이태백이었지만 전부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요한 건 여기서 탈출하지 못하면 그대로 전기 통구이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거지."

이태백은 감옥의 모퉁이를 쳐다보았다. 거미가 사냥감을 미라처럼 밀봉하고 있었는데, 딱 이태백 자신의 처지를 반영하는 듯한 장면이다.

이태백은 심란함에 이빨로 손톱을 잘근잘근 뜯었다.

직감이 경종을 울리며 말한다.

여기서 죽으면 그길로 끝이라는 것을 말이다.

찰나였다.

뇌리에 전류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이태백은 각질이 빼곡한 입술을 혀로 축이고 있는 힘껏 외쳤다.

"상태창!"

"...."

"스탯창!"

"...."

"X발럼아!"

간절함이 무색하게도 외침은 벽과 천장, 창살에 튕겨 메아리로 공허하게 흩어졌다.

'빌어먹을. 그럼 그렇지.'

상태창 같은 걸 기대한 게 바보였다. 사형수로 빙의한 시점에서 스캇 운명 확정인 건데.

"운영자 모드로 접속하면 뭐 하나...."

…현실은 빛 한 홉 닿지 않는 무저갱인 것을. 당최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이태백이 그렇게 침울한 기색으로 신세를 한탄하던 와중.

[키워드 '운영자 모드'를 확인했습니다.]

[정보가 많아 처리 시간이 지연됩니다.]

[예상 소요 시간… 60, 59, 58, 57초.]

"어, 어어, 어?"

다짜고짜 눈앞에 어린 글귀들. 태백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잡아 보려 손을 가져다대자.

[정보 처리가 정상적으로 완료됐습니다.]

['운영자 전용 시스템'을 활성화합니다.]

시간이 얼어붙었다.

* * *

고평가받는 게임의 필수 조건이 무엇일까.

바로 게임 밸런스다.

어마어마한 자유도의 게임도, 눈이 아프리만치 화려한 그래픽을 뽐내는 게임도,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는 게임마저도. 밸런스를 못 잡아서 본전은커녕 손익 분기점의 반의반도 달성하지 못한 채 관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래서 게임사는 기를 쓰고 게임 내 밸런스를 잡는다. 꾸준히 패치를 하다 보면 폐사 직전인 게임이 반등하는 사례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밸런스 패치는 게임의 존폐를 결정짓는 운영자의 과업이면서 고유 권한이다.

[버프 (임시 권한)]

설명: 시전자의 '소유물'과 생명, 정신, 근력, 민첩, 마력, 신앙 중 두 가지를 300초 동안 상승시킵니다. 강화 폭과 유지 시간은 레벨과 비례하며, 이 능력은 기프티드가 아닌 권한입니다. 단 아직 시전자의 레벨이 낮아 '임시 권한'임을 명시합니다.

제약: 단, 한 능력치를 연속적으로 강화할 수 없습니다. (※다시 버프가 가능할 때까지의 쿨타임은 300초입니다.)

"기프티드가 아니라 권한이라고?"

이태백은 넋이 나간 표정이 되었다.

레이컨스에는 후천적으로 습득 가능한 스킬이 존재하며, 동시에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기프티드 또한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마력을 '감지하거나 발현'하는 건 재능의 영역임으로 기프티드.

그 이후에 '배우고 사용하는' 마법은 스킬에 속한다.

그런데.

'임시 권한?'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이다. 애당초 게임 안에서 볼 법한 단어가 아니었다. 플레이어였다면 낯설었을, 그러나 운영자에겐 친숙한 낱말.

스킬과 기프티드 대신 권한? 이런 밸런스 X망겜이 있나! 이대로 레이컨스를 출시했다면 대차게 말아먹었을 게 분명하다.

제발 지구와 소통 창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핫픽스해 달라고. 나도 좀 여기서 꺼내 달라고!

"어이가 없네... 응?"

헛웃음이 나오려던 차, 시선을 내린 이태백은 이내 눈을 비볐다. 시력이 나빠졌나 싶었다.

[너프 (임시 권한)]

설명: 시전자와 신체 부위가 닿는 존재의 모든 능력치를 120초 동안 소폭 약화합니다. 약화 폭과 유지 시간은 레벨과 비례하며, 이 능력은 기프티드가 아닌 권한입니다. 단 아직 시전자의 레벨이 낮아 '임시 권한'임을 명시합니다.

제약: 단, 대상과 괴리가 너무 클 시 억제력에 의해 수치가 강제적으로 보정됩니다.

…버프도 인제 막 이태백에게 얼얼한 타격을 선사한 참인데, 너프는 또 뭐란 말인가?

게임사는 통상 밸런스 패치를 할 적에 버프가 아닌 '너프'부터 감행한다.

왜냐면 그편이 훨씬 더 쉬우니까. 튀는 능력 수치를 맞추는 데 있어서 너프가 버프보다 효과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태백이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은, 버프보다 너프가 쉽게 가시적인 효과를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기라는 거다. 그냥 사기도 아니고 개사기다.

이건 규격을 벗어났다. 똥겜이다.

캐릭터가 스캇인 줄 알았건만, 게임 자체가 스캇일 줄이야. 몽둥이찜질을 당했을 때보다 마음이 더 아리다.

이태백이 이십 대를 바친 게임이, 레이컨스가 이대로 세상에 나갔다면 전부 허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박탈감과 상실감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지구였다면 바로 이것부터 핫픽스했다.'

충격의 여파 때문일까. 때마침 수마가 물밀듯 몰려온다. 전조도 없이 쏟아지는 졸음에 이태백의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왔다.

[혼돈 여신의 편애를 활성화합니다.]

[세계를 비틀어 그녀를 불러냅니다.]

스트레스와 폭력으로 진종일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온 건가.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힘 잃은 젓가락처럼 옆으로 기울었다.

[체력 소모가 심하니 유의 바랍니다.]

기실은 모르는 채로 이태백은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이태백을 맞은편 감옥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한 그림자가 씨익 하고 웃었다.

3화 내가 만든 세계 (3)

기상하자마자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새롭게 얻은 상태창을 심도 있게 파 볼 생각이다.

그는 게임이라면 장르 불문하고 전부 섭렵했던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었다. 왕년엔 한창 이름을 날렸었지.

'개발사는 모든 난관에 생문 하나 정도는 반드시 뚫어 두기 마련이었다.'

플레이어가 위기를 재기로 타개하면 뒤따라오는 보상. 그것이 게임이 가진 재미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태백은 그제야 잃었던 미소를 되찾았다. 마음가짐을 달리하니 정신이 개운해졌다.

"뭣보다 내가 만든 이 게임이라면 더더욱."

레이컨스는 샌드박스형 오픈 월드 RPG다.

지형 지물과 플레이어의 기지, 그리고 캐릭터의 능력치를 십분 활용한다면 어떠한 난관도 클리어할 수 있게끔 치밀하게 설계했다.

'첫째, 일단 맵 배치물부터.'

이태백은 주변을 살피다가 시선을 배식구로 옮겨 주었다. 보라색 수프가 썩어 가고 있었다. 뭘 넣고 끓인 건지 수프에서 포말이 부글거렸다.

"저게 전기의자보다 심한데."

그래. 끼니는 깔끔하게 거르자.

양반다리로 정좌했다. 이태백은 그 자세로 전기의자에 앉을 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나는 죽을 생각 없어."

이태백은 등허리에 오소소 일어난 서슬을 떨쳐 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제일이라 했다.

기필코 살아남을 거다, 어떻게든.

다만 이 뭣도 없는 감방에서 타개책을 찾기란 힘들어 보였다. 쇠숟가락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플라스틱 수저로는 수프 뜨는 것도 간당간당했다.

"금수저는 바라지도 않았어. 근데 동수저도 못 되는 플라스틱 수저라.... 과연 사이버 크롬과 플라스틱이 난무하는 세상답다고 해야 하나."

이태백이 자조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희망의 끊을 놓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가 입술만 움직여 운영자 모드라 말하였다.

[이름: 이태백]

Level: 1

생명: 5 정신: 5 근력: 5

민첩: 5 마력: 5 신앙: 5

특성: 운영자 모드 활성화

권한 (임시): 버프, 너프

왼눈이 열리는가 싶더니 곧 양눈이 활짝 커졌다. 버프, 너프 권한들이 보란 듯이 이태백의 육안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상태창을 불러내는 트리거도 알아낸 것이다. 쾌거다!

"이제야 숨 좀 돌릴 수 있겠군."

손 주름 사이로 고인 땀을 닦아 냈다. 그러고서 다시 빤히 상태창을 응시했다. 하도 집중한 탓에 이태백의 시선에 상태창이 뚫릴 듯했다.

"버프는 5분 동안 능력치 중 두 개를 10정도 올려 주는구나."

스탯은 전부 5로 통일.

여기서 10을 더하면 15로 올라간다. 민첩이 10이면 육상 선수만큼 빨라진다. 20은 초인의 등용문이 되는 수치. 초인적인 운동 능력을 수행할 수 있다.

요컨대 15란 능력치는 범인과 초인의 딱 중간. 그 경계선에 있다는 건데… 뭔가 살짝 애매한 수치다. 초인의 등용문인 20이 넘으면 모를까. 민첩 15로 총알을 피하는 건 어림도 없었다.

"뇌옥의 허점이나 방범의 빈틈을 발견했다고 쳐도."

운좋게 포위망에서 빠져나간다 한들 눈먼 총알에 벌집이 되고 말 터다. 발재간으로 도망칠 수 있는 허술한 감옥이었다면 탈옥수가 한 명이라는 전제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숫제 신체 능력으로 뇌옥의 방범을 뚫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접근 방식을 게임으로 바꿔 보자, 이태백.

민첩은 상기한 이유로 기각이다. 정신력도 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나 빛을 발하는 능력인지라 지금 상황엔 딱히 영양가는 없는 능력치고....

이태백은 연역을 계속하며 생명, 정신, 근력, 민첩, 마력, 신앙 가운데서 하나씩 소거해 나갔다.

…그러길 한참. 눈을 감았다가 낮게 반개했다. 곧바로 이태백은 근력을 버프시켰다.

[시전자가 근력을 버프했습니다.]

이변은 직후였다.

힘이 솟구치고 근육이 속에서부터 꿈틀댔다. 전신에 혈관이 울긋불긋하게 올라왔다.

'해 보자.'

그가 양팔을 활짝 벌렸다. 수갑을 이은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허파가 크게 부풀었다. 이마에 핏발이 불거지고 깨문 이가 사납게 맞물렸다.

'끄으으으으으윽!'

핏물이 엉겅퀴처럼 사슬을 타고 중심 지점에서 방울졌다. 쇠사슬이 허공에서 파르라니 떨릴 때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아, 하아."

사슬이 축 늘어지며 아래로 포물선을 그렸다. 아니나 다를까 쇠사슬은 건재했다.

"쓰바… 팔목 잘리는 줄 알았네...."

이태백은 쓰라리고 아픈 팔뚝을 번갈아 매만졌다. 역시 힘으로 사슬을 끊기란 어려웠다.

'뇌옥인데 일반적인 수갑일 리가 없지.'

첨단 과학을 녹여 낸 특수 제조한 수갑일 게 분명하다. 튼튼하긴 X나게 튼튼하네, 염병.

씨익.

그래도 한쪽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어쨌든 이번 시도로 버프의 효과를 체감했다.

"근력이 3 정도만 더 높았다면 족쇄를 끊어 낼 수 있었어."

그러나 긍정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상황은 냉정하게 봐야 한다. 어림해 보건대 근력 15로 이 쇳덩이를 자르려면 일주일은 꼬박 걸릴 터.

이것도 운이 좋았을 때의 가정. 즉슨, 이상론이다.

뇌옥에서 일하는 간수들은 하나같이 우수하다. 그들은 사소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수상한 낌새를 대번에 눈치챌 것이다.

설령 사슬을 끊어 낸다고 해도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태백이 옆으로 고개를 돌린 차에 때마침 날파리 하나가 창살 위로 살포시 착지했다. 비동하던 파리와 쇠창살이 만나려 하는 그 순간이었다.

파스슷!

즉시 파리가 그 자리에서 증발했다. 불쾌한 탄내가 한 생명이 남긴 덧없는 영혼의 잔흔으로 피었다.

"역시 감옥 이름에 번개 뇌 자가 버젓이 들어갈 만한 출력이네.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잔인한 아이디어야."

이태백은 짐짓 끄덕였다.

새삼 상기시켜 주는 장면이다. 철창을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다.

…잠깐 왜 그걸 잊고 있었지? 눈앞에 버젓이 일렁거림에도 간과하고 있었다니.

[너프 (임시 권한)]

설명: 시전자와 신체 부위가 닿는 존재의 모든 능력치를 120초 동안 큰 폭으로 약화합니다. (....)

태백은 '존재'란 단어에 주목했다.

사전적인 의미로서 존재란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모든 물질을 뜻한다. 그 맥락으로 따지면 전기 또한 존재의 범주에 속하지 않을까?

만약 된다면. 전력을 낮춘 다음 생명과 신앙을 버프해서 체력과 자가 회복 능력을 올린다면, 전기의자와 대결 구도가 성사될 수도 있겠지.

그렇겠지만.

생명과 신앙이 15라 할지라도 버틸 수 있는 제한 시간은 5분이다. 아득바득 전기의자를 버텨 내도 결국엔 자력만으로 탈출은 불가능했다.

결국 외부의 개입이나 도움이 필수구나. 생각해 보면 유일한 탈옥수조차 자력으로 탈옥한 게 아니라, 뒷배가 있었기에 뇌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

단체명에서 알 수 있듯 어디서나 등장하는 저항군 세력이었다.

단, 다른 게임에서 저항군 세력은 흔히 비루한 취급인데 반해서 레이컨스에서는 그 힘이 막강했다. 얼굴에 칼자국을 새긴 갱단들도 레지스탕스에게는 알아서 설설 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게, 시 정부가 주적으로 설정한 단체인데 걔네가 빌빌거리면 시 정부의 위상도 덩달아 실추하잖아.

하지만 그래 봤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태백은 천애고아도 못 되는 혈혈단신 그 자체였다.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기초적인 연고는 개뿔. 그나마 안면 있는 놈들이 이따가 자신을 몽둥이질하러 올 경비원 새끼들뿐이라니.

그러고 보니 곧 맴매 맞을 시간이네....

"하, 하하, 하하하하!"

웃자. 웃자, X발.

이태백이 체념의 파안대소를 흘리고 있던 그때였다. 그는 피부로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관자놀이에 비지땀이 솟았다. 기상 직후까지만 해도 그 어떠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상대가 의도적으로 기척을 지웠다는 건데.'

이 세계에서 기척 차단은 최상위 강자만의 전유물이다.

그것만으로 스탯 전부가 최소 30은 웃돈다는 뜻이었다. 말했듯 능력치 20이 초인이라면, 30은 그냥 괴물이다. 통상적으로 최소 5위계의 강자이며 5서클의 대마법사 취급이다.

그런 괴물이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무 시끄러웠나?

이태백은 삐걱거리는 시선을 창살 너머로 던졌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부딪쳤다.

"...!"

다음 순간, 그가 당혹감에 눈을 부릅떴다.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경악성을 내지를 뻔했다.

"기척을 지운다고 지웠는데, 그쪽을 구경하다 보니 잠시 기척 차단을 해제한 모양이네. 흥미로워서 그만. 저승길 준비를 방해했다면 미안해."

시선의 주인이 침묵을 갈랐다. 그는 계피색 피부에 헌앙한 체구였다. 캐릭터 디자이너였던 이태백이 의도한 위압적인 얼굴을 빼다 박았다.

"나름 변명을 하자면 사형수가 자네처럼 분기탱천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신기해서 말이지."

남자가 송곳니를 보이며 위험하게 웃었다. 입매에서 야수성이 짙게 묻어났다.

"눈빛이 싱싱한 것도 그렇고. …마치 이 뇌옥에서 탈옥이라도 할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형언키 어려운 안도감과 환희가 가슴을 적시었다.

'그자다.'

뇌옥의 유일한 탈옥수. 그자가 말한다.

"그쪽만 괜찮다면 전기의자에 앉기 전까지 말동무라도 해 주고 싶지만. 아, 그 전에 통성명을 깜빡할 뻔했군."

남자가 자신을 무어라 소개할지 이태백은 짐작하고 있다.

"야마모토다. 주변 동료들은 편히 야마라고 부르는데, 자네도 원하는 대로 불러라. 곧 이승을 하직할 사람인데 박하게 대할 순 없지, 하하하!"

야마모토는 가명이다.

남자는 자신이 인정한 자에게만 본명을 알려 준다.

그는 디스토피아에서 전사적 기풍을 중시하는 낭만파의 괴짜이면서, 자신의 기치를 견지할 정도의 무력을 겸비한 괴물이다.

거기다 최초로 뇌옥을 탈옥하여 레지스탕스의 위세를 널리 떨친 저항군의 전설이었다. 저자에게는 저자세로 나가선 안 된다.

[시전자가 정신을 버프했습니다.]

이태백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초조, 긴장, 불안. 부정적인 감정들이 설탕처럼 바스러졌다.

"…박하게 대할 수 없다면서 가명을 대는 건 무슨 경우지."

이내 나직이 운을 뗐다. 턱도 살짝 들며.

"레지스탕스 제9 특수 소대 소속 강현성 대대장. 내가 네 얼굴도 몰랐을 거라 생각한 거냐."

"...."

"뭐, 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상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구김살로 채워질지언정, 이태백은 말로 구워삶을 자신이 있었다.

"…당신 말이야. 지금 뭔 말을 입에 담는 건지는 아는 거냐? 죽고 싶어서 환장한 모양이군."

"사형수에게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니. 꽤 웃기는 농담이네, 강현성. 간수들이랑 놀아 주기 전에 사전 작업으로 괜찮았어. 아무튼 사설이 길었네."

강현성을 빚은 조물주가 누군가?

바로 이태백이다.

"반갑다."

마지막 말은 진심이다, 현성아.

4화 내가 만든 세계 (4)

솔직히 말하겠다.

반말은 실수였다.

'썩을.'

수상쩍게 돌려 말하지 말고 정공법으로 강행 돌파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과했던 나머지 잠시 무의식이 뇌를 앞질러 버렸다.

이태백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와중에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사실 현 상황에 반말이 그렇게까지 악영향을 끼치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너무 섣불렀다는 점이다.

강현성의 살기가 오랏줄처럼 심장을 옥죄었다.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통스러웠다.

"…어디서 왔지."

강현성이 으르렁거리며 낮게 내뱉었다. 언제 호의적으로 보았냐는 듯이 그의 눈에선 짙푸른 귀기가 피어올랐는데, 무슨 도깨비 같았다.

"대답에 따라서 자네는 오늘 죽을 수도 있어. 부디 신중하게 대답해라, 이태백."

'기백에 눌리지 마. 어차피 이러려고 했잖아.'

운명의 주사위는 굴러갔다. 이 포문이 승부처가 될지 공수표가 될지는 이빨 털기 나름이다.

"내 이름이나 외모를 보면 딱 눈치챘을 거 같은데. 강현성, 너와 같은 한국 출신이라는 걸."

한순간이나마 씰룩이는 눈썹. 이태백은 그 자그마한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서방인 레이크 시티면 모를까. 한국에서 강현성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걸. 적어도 암흑가에 한 다리 걸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허."

"안 그래? 일인천살... 아니지, 망나니 개백정 강현성이라 불러 줘야 하나?"

망나니 개백정이란 별명까지 나오니 표정 변화가 확연했다. 이태백은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내가 있었던 조직에서 따로 너를 조사했기에 얼굴을 아는 거지, 일반인이었다면 몰랐을 거야. 아, 그리고 안심해. 내가 조직을 나올 때 너에 관한 자료를 포함해서 전부 태워 버렸거든. 어쩌면 이제 강현성이란 사람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뇌옥에만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 한 명도 엿새 후면 사라지니, 일인천살의 얼굴은 레지스탕스가 아니라면 알 수 없겠고."

"…이태백, 네가 몸담았던 조직이 어디지. 오해는 마라, 이건 질문이 아니라 협박이니까."

휘말리면 안 된다.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강현성, 내 죄목은 알고 있나."

이태백의 동공은 눈썹에 반쯤 잠겼다.

"서울에서 테러에 가담하여 국가 교란죄로 붙잡혀 왔다. 시에스타를 탈출한 뒤, 서울 시 정부 정규군 열 명의 목을 베었거든. 그 전에 나는 시에스타 그룹의 번견. 그러니까 사냥개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강현성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메가코프의 일각인 시에스타를 탈출했다니.

"늦었지만 일인천살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은 건 사과하지. 알겠지만, 시에스타 번견 출신들은 젖먹이 시절부터 교단에서 길러져서 사상 교육을 받아. 그때 경어를 배우지 못했을 뿐이야. 왜, 그런 말이 있잖아. 무식은 죄지만,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나는 단지 존댓말을 모를 뿐이야."

한 박자 늦게 사죄한 것 역시 이태백의 계산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난 다음, 최악이었던 첫인상을 뒤집는다. 말하자면 반전 효과였다.

"그런 것치곤 말이 청산유수군."

"혀가 길면 오래 못 사는 법인데. 그래서 내가 이 꽃다운 청춘에 사형수가 됐나 보군."

기왕 컨셉을 잡았으면 잡아먹혀라. 어설프면 되레 역효과다. 이태백은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나는 메가코프에서 사냥개였다.'

시에스타 그룹은 우리의 신이다. 그들에게 은덕을 입은 몸이다.

그러니 질서의 미명 아래 전부 통제하고 혼란을 척결해라. 손에 피를 묻히는 한 있어도.

일인지하 만인지상. 시에스타 번견들의 교범이다.

"시에스타를 탈출해서 레이크 시티로 흘러 들어온 번견이라. 재밌는 각본이야."

어느새 팔짱을 낀 강현성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직은 이태백의 말을 못 믿는 기색이었다.

"동향 사람인 걸로 흔들어 보려는 전략은 썩 나쁘지 않았어. 내가 서울에서 깽판을 치긴 했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 안 갔거든."

…해치웠나?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해. 내가 더 혹할 만한 소재를 갖고 와 봐."

쓰바. 빌어먹게 신중하네.

하기야, 의심이 많아야 하는 위치긴 하지. 이태백은 강현성을 그런 멍청이로 만들지 않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어떻게 시에스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네 말마따나 지리멸렬할 정도로 사상 교육을 받았을 텐데."

"염증을 느꼈다."

이태백은 씁쓸한 미소를 가장했다.

"내 입으로 하긴 민망한 말이지만, 나는 재능 있는 암살자였다. 약관이 안 된 나이에 정식 번견으로 승급했으니까. 그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난 암살자로서 긍지를 갖고 살았다."

이태백은 머리를 크게 떨구었다. 그는 바닥을 보며 이상한 감탄성을 흘렸다.

타인을 속이기 위해선 스스로를 속이라던가. 즉흥적으로 짜낸 컨셉인데 그 자신도 혼란이 올 정도로 메소드 연기다.

'정신력 버프 효과가 엄청나긴 하네.'

레이컨스에서 정신은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특이한 능력치다. 화자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지만, 청자의 정신은 흔들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생생하잖아.

아니면 빙의한 이 육체가 정말로 시에스타 번견 출신이었던 거 아니야? 그러면 개소름인데.

"임무 중이었다. 여느 때처럼 타깃을 없애려고 했고 그자는 내게 살려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번견에게 선택지가 있을 리가. 단칼에 목을 쳤다."

이태백은 고개를 숙인 채로 읊조렸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춰 내듯 힘겨운 신음도 앓았다.

"그러다가 그자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어. 돌이 갓 지난 딸과 같이 찍은 사진이더군. 그때 나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살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순간이었어."

"그자가 타깃이 된 이유는 뭐였지?"

"시에스타의 비리를 내부 고발하려고 했었다."

"별 같잖은 일로 사람을 죽이는 게 딱 메가코프답군."

강현성이 짧게 혀를 찼다. 신들린 이태백의 구라에 제법 몰입한 듯했다. 좋아, 거의 다 왔다.

석질의 벽에 등을 기대었다. 벽의 한기가 느껴졌다. 이태백은 눈을 감은 채로 나만의 상상을, 구체적인 청사진으로 승화하고 구현해 낸다.

"내 삶 전부를 바친 시에스타가 악이었다는 것을. 질서란 겉만 번지르르한 단어로 오염된 인생이었다는 것을. 메가코프는 단순히 공포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었던 거고, 우리 번견들은 그걸 위한 부품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이태백은 손바닥을 봤다. 핏기름의 끈적한 질감이 느껴진다.

"시에스타 탈출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정규군은 왜 죽인 거지?"

서사는 갖춰 줬다. 지금부터다. 강현성에게 이태백의 가치를 증명할 시간이다.

"그냥."

"그…냥...?"

미치광이 전략.

스스로 광인을 자처하면서 상대에게 자신을 자극하지 말라 선언하는, 대외 정책의 방법론 중 하나다. 그 왜, 치와와가 사람만 보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그거. 이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시에스타를 탈출한 나를 붙잡으러 왔길래 다 쳐 죽였다. 나는 암살자로 태어나고 길러졌다. 존댓말도 따로 배우지 않았기에 초면인 너한테도 반말을 하는 거고. 또한 소통을 칼로만 배워 온 내게 총구를 들이미는데 어떡하겠어. 죽였지."

"전부?"

"응."

"서울 시 정부의 녹봉을 받아먹는다곤 해도 정규군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들이야. 그런데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데는 죄책감이 없었다는 말이냐? 지금 네 말이 앞뒤가 맞는다고 생각해?"

"정규군 천 명을 죽인 일인천살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강현성, 한 가지 경고하는데...."

내가 서늘하게 눈을 치떴다. 물론 허세다.

"나한테 설교하지 마라. 야마모토라는 옆 나라 쟈폰의 이름을 가명을 쓰는 매국노한테 들으니 더 불쾌하네. 너는 부끄러움도 없나?"

강현성이 입꼬리를 히쭉 말아 올린다. 호감의 표시다. 본인을 욕했는데 저리도 좋아하다니.

둘 중 하나다. 강현성의 국뽕을 자극했거나 미친놈이거나. 생각해 보니 둘 다일 수도 있겠군.

"그것도 모자라서 이름도 죄목도 속인 채 뇌옥이라니.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분명 시답잖은 일이겠지. 여튼 이제 당신의 여흥에 맞춰 줄 시간은 없어. 방해하지 말고 벽 보고 자위나 하라고. 강현성, 아니 '야마모토 상'."

"크하하하하하하!"

강현성이 대뜸 광소를 터뜨렸다. 오싹한 웃음이다. 광인 전략을 저쪽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너, 나사가 단단히 빠졌군. 시에스타에서 썩기엔 아까운 인재였어! 거기 배식구의 수프처럼."

옳거니, 광인 전략이 먹혔다!

"늦게라도 알아줘서 고맙군."

"그래 봤자 뭐 하나. 며칠 후면 불귀의 객이 될 예정인데. 말동무가 된 기념으로 하나 묻자.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곳을 나갈 수만 있다면 뭐부터 하고 싶지? 어디 사형수의 포부나 들어 보자."

강현성이 주먹으로 묵직하게 뺨을 괴었다.

"뇌옥에서 나간다고? 염병."

이태백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앞으로 조금만. 들썩이는 입술을 조금만 더 붙잡자.

"사자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말을 남긴다지.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말해 봐."

"일단 시에스타 그룹부터 무너뜨린다. 그걸 위해서 본사가 위치한 레이크 시티로 온 거니까."

유언을 레지스탕스의 목적과 일치시킨다.

"더불어… 다른 메가코프들까지 싸그리."

"하! 올해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어이없는 소리군! 그래 다른 메가코프들은 왜."

마지막 멘트는, 그래.

광인전략의 화룡점정으로는 이게 좋겠다.

"별 이유는 없다. X같아서."

"...?"

"그게 전부다."

"...."

교착 상태에 접어들었다.

강현성은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멀리서 간수들의 발소리가 다가오기 시작한 건 동시였다.

저벅, 저벅.

이태백은 엉덩이가 달싹였다. 대답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과연 도박이 성공했을까?

이내 강현성이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수염으로 거뭇한 입가엔 미소가 함지박만 하게 걸렸다.

"이태백, 네 사형일인 15시 00분."

마침내.

"수다는 그때 마저 하지."

성공이다.

* * *

[#1 소규모] 1.1 패치 노트

「운영자 모드」와 「혼돈 여신의 편애」를 근거로 세계관의 배경과 설정이 갱신됩니다.

추가 긴급 수정 사항이나 설정 변경은 「운영자: 이태백」이 수면 상태일 때 적용됩니다.

업데이트 내용은 플레이어의 기상과 동시에 휘발되어 기억에서는 완전히 지워집니다.

※업데이트 내용이 세계관을 너무 심하게 비틀 시, 게임 오류인 '버그'가 발생할 확률이 상승합니다.

◈ 메인 패치

• 「사형수 → 시에스타의 번견 출신 사형수」로 해당 인물의 배경 설정 및 직업이 수정되었습니다.

• 「생명」의 비례 수치가 (+4.7%)로 상승했습니다. 체력과 함께 고통 내성이 증가합니다.

• 「신앙」의 비례 수치가 (+5.5%)로 상승했습니다. 회복 능력이 소폭으로 증가합니다.

• 「근력」의 비례 수치가 (+6.8%)로 상승했습니다. 운동 능력이 소폭으로 증가합니다.

• 「암살자 검술 (초급)」을 습득했습니다. 능력의 숙련도는 사용자의 레벨에 영향을 받습니다.

◇ 기타 패치

• 「컨셉: 사이코패스 (진)」을 획득했습니다.

• 컨셉은 취사선택하여 성격에 덧입히기가 가능합니다. 상황에 맞게 재량껏 사용해 보세요!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5화 내가 만든 세계 (5)

엿새는 쏜살같이 흘렀다.

기다리는 이벤트가 다름 아닌 사형인 탓인지, 시간의 흐름이 찰나로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그것도 야속하리만치 빨랐다.

근 며칠, 경비원들이 허구한 날 찾아와 두들겨 팼다.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널 찾아와 주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지? 어때 눈물 나게 고맙지 않아? 반동분자 이태백."

이태백은 원독의 질감을 곱씹었다.

'인정을 베풀지 않아서 고맙다.'

이태백은 어금니를 갈면서 그날만을 학수고대했다. 사형 집행일인 그날을 말이다.

새벽이 채 가시기 전인 어스름한 아침.

침대에서 연신 몸을 뒤척거리던 이태백이 이내 조용히 일어났다. 시선이 줄곧 등살을 찔러 댔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감방 이웃사촌이겠지.

"사형일인데 기분이 어때."

"대신 죽어 줄 거 아니면 묻지 마라."

"하하하하하!"

감옥에 시계가 있을 리 만무했으므로 이태백은 시간 감각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는 접근하는 발소리로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태백은 눈을 홉떴다.

피가 식는 기분이다. 근심을 읽었나. 강현성이 목소리를 깔았다.

"이태백, 네가 말했잖아. 시에스타 암살 대대에 있었을 때 고문 훈련을 질릴 만큼 받아 봤다고. 그 결실을 보는 날이 오늘이라고 생각해라."

"...."

"살아서 보자고."

강현성의 진심이 담긴 독려에 이태백은 애써 여유 있는 척하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6분 버텨 볼게. 그 안에만 와라."

이 지리멸렬한 뇌옥과도 안녕이다.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곳에 돌아올 일은 없다.

* * *

경비원의 인솔하에 사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형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절그럭, 절그럭.

혹여 사형수가 중간에 도주할까 봐 발목에 족쇄가 추가로 이중삼중 채워진 까닭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예의는 잊지 마라. 이건 명령이 아니야. 부탁이다. 제발. 아, 알겠지?"

오늘이 장날이긴 한가 보네. 줄기차게 때려 대던 경비원들이 비굴하게 나오는 걸 보면.

"죽으러 가는 사람 귀찮게 하네, 쯧."

이태백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죽더니 당치도 않는 변명을 했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린다고! 우리야 나쁘다지만 걔네는 뭔 죄야!"

사형 직전에 이태백이 행패라도 부린다면 이들에게 책임을 물 수도 있다.

"부모 잘못 만난 죄."

"야! 이태백!"

이태백이 어깨를 치며 앞지르자, 그들이 허둥지둥 따라붙었다.

사형장은 오페라 극장을 연상케 했다. 중앙에 무대가 있었고 그 한복판에 전기의자가 있었다.

구경꾼들의 차림새는 훨씬 더 가관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턱시도나 드레스를 빼입고 있었다. 동물 가면도 쓰고 있었는데, 여우와 토끼 가면도 보였다.

실소한 이태백이 경비원을 싸늘한 눈으로 일별했다.

"여우 마누라랑 토끼 자식들. 저거냐?"

"...."

그때 이태백을 발견한 여우 가면이 호들갑을 떨었다. 곁에 앉은 토끼 가면을 구박했다.

"저 사형수 내가 사면 안 돼? 저런 외모였으면 미리 언질 정도는 줬어야지!"

"불가합니다. 저자는 다른 곳도 아닌 시에스타 그룹의 서울 지부를 건드렸거든요."

"시에스타...."

토끼의 말에 여우 여인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 곧 절레절레 도리질했다.

"집행에 앞서 죄인의 생전 마지막 참회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사형수 이태백, 앞으로."

경비원이 마이크를 이태백의 입술로 가져갔다. 잔뜩 긴장한 기색. 물론 알 바는 아니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둘, 하나둘."

이태백의 목적은 조금이나마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사형 집행 시간을 몇 초라도 유보한다.

"레이크 시티의 연놈 여러분."

이태백이 입을 열었다. 간드러진 미성이다.

"나는 중죄를 저질렀다. 나를 제압하러 온 서울 정규군들을 죽였지.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만 남는다. 하아, 정말이지."

양각을 지키고 서 있던 경비원들의 눈 두 쌍이 휘둥그레 커졌다. 깽판이라도 칠 줄 알았던 모양인데, 막상 그의 태도나 말씨가 썩 공손했다.

하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

"메가코프."

장내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시에스타든 시 정부 정규군이든 닥치는 대로 다 죽였어야 했다! X 같은 메가코프 놈들!"

"이이, 이이, 이 미친놈아!"

창백하게 질린 경비원들이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이태백의 몸을 누르며 의자에 앉혔다.

털썩.

과학의 첨단을 달리는 도시의 사형 수단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견 투박한 나무 의자였다

그럼에도 포박 능력 하나만큼은 과연 뇌옥의 물건이라는 듯 끝내줬다. 아주 옴짝달싹을 못 하겠군. 척추에 밀집한 신경계 중추가 맵싸했다.

쿵쿵쿵쿵.

심장이 부서져라 갈비뼈를 노크해 댄다. 죽음과 마주하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불가지의 공포는 이태백이 돌발 행동을 하게끔 만들었다.

"시 정부의 개들아! 그 배후에서 제 입맛대로 주물럭거리는 메가코프들까지 싹 다 없애 주마!"

최후의 순간까지 이태백이 발악을 쥐어짜 내던 찰나, 경비원들이 조종 장치를 당겨 내렸다.

끼리릭!

꽈릉! 콰르르르릉!

* * *

200만 볼트의 전기가 근육을 투과한다. 피부 아래 뭘 숨기고 있는지 내용물을 환히 보여 준다.

뼈대와 내장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전류가 지나간 자리에는 살집이 불그스름하게 녹아내린다.

탄내가 자욱해진다. 그 무렵에서 육체는 해면체처럼 느물거리며 끝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고작 1분이다. 하나의 생명이 전기의자에 잡아먹히기까지 60초뿐이 안 걸린다.

그런데.

형을 집행한 지 4분 20초째다.

꽈릉! 콰강! 꽈르르릉!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피부가 새카맣게 타들어 가도 악다구니로 버티면서 명줄을 꽉 움켜쥐었다.

"뭐뭐, 뭐야! 왜왜, 왜 죽지를 않아!"

"벌써 5분이 경과했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고! 몸이 고무로 된 것도 아니고!"

사형장에 섬광이 쉴 새 없이 번쩍거렸다. 발밑 어귀에선 동심원을 그린 핏물이 혈무를 피웠다.

꽈릉! 번개 형상의 강렬한 에너지가 시커먼 무의식에 내리쳤다. 탁했던 초점에 생기가 어렸다.

"흐어억...."

이태백은 말 그대로 죽었다 살아났다.

'생환의 감상에 젖을 겨를 따위는 없다.'

그는 곧바로 '신앙'을 강화하여 망가진 몸을 회복했다. 탄성을 잃고 끊어진 근섬유를 봉합했다.

그러면서 '생명'을 강화한다. 얼마 남지도 않은 체력을 밑바닥까지 싹싹 그러모으기 위해서다.

'반대급부인 너프로 전력을 반절로 떨어뜨린다.'

이태백은 이러한 섬세한 조정을 꺼질 듯 말 듯 한 정신으로 해내었다.

'갸갸갸갸갸갸갸갸갹!'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게임 개발자였던 이태백이다. 그런 그가 현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악랄한 고통인 작열통과 맞서 싸우고 있다.

"이, 이 새끼. 왜 안 뒤져!"

"좀 죽어! 제발 좀 죽으라고!"

"출력 높여 봐. 확실하게 보내 버리게!"

이태백은 짜증이 치밀었다.

걱정은 못 해 줄망정 자신을 죽일 생각만 가득해 보였다.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매단 리볼버를 뽑아 들어 이태백의 관자놀이에 갈길 기세였다.

엿 같아서 안 되겠네. 한마디 해야겠다.

경비원들과 학예회라도 온 양 동물 가면을 쓴 방청객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메가코프들. 그 전부에게 이태백이 일갈한다.

"이 호로 새끼들아아아아!"

그는 침을 튀겨 가며 포효했다. 분노가 천장까지 닿았는지 높게 걸린 샹들리에가 비척거렸다.

"내 기필코 너희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효수해서, 레이크 시티의 시민들 앞에 걸어 둘 것이다! 언제까지고 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이 메가코프의 개돼지 놈들아!"

외침에는 제법 울림이 있었다. 먼젓번에 얻게 된 컨셉들이 성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한낱 사형수 따위가 레이크 시티에서 내로라하는 시 정부 관료들을 꾸짖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길길이 날뛰며 이태백에게 삿대질을 날려 댔겠지.

다만 방청객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묘하게 변했다. 뭐랄까, 엄숙해졌다고 해야 하나.

"레이크 시티의 국시는 자유, 평등, 우애다!"

"...."

"근데 네놈들을 봐라! 이 중 하나라도 너희가 지키는 게 있나?!"

"...."

"뚫린 입이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 봐!"

"...."

"개… 돼지… 새끼들...."

이태백은 새된 숨을 내쉬며 기침했다. 목구멍이 튀겨졌는지 침 대신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때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정전이었다. 난데없는 암전 사태에 구경꾼들이 부산스러워졌다.

"꺄아아아! 뭔데!"

"무, 무슨 일이야!"

토끼 가면이 근처에 있는 경호원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에 경호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그게… 아무래도 전기의자가 몇 분이고 계속 작동된 탓에 방전된 것 같습니다."

"그그, 그렇군. 얼른 비상 연락망으로 제어 센터에 전화한 다음 재개하… 잠깐만...."

문득 하던 말을 주워섬긴 토끼 가면이 고개를 돌렸다. 시커먼 덩어리의 윤곽이 육안에 담겼다.

그림자 속에서 핏발 선 안광이 번들거렸다. 살기가 맺힌 그 시선에 토끼 가면이 돌처럼 굳었다.

"웨, 웬 놈이냐?!"

"나?"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그와 함께 뻗어 나온 손이 토끼 가면의 머리통 전체를 감쌌다.

"크어어억!"

"저기서 전기 찜질 당하고 있는 애 친구다, 이 X벌럼아."

"켁켁- 뭔, 개소리-."

토끼 가면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는 우악스런 팔뚝을 붙잡으며 다리를 번갈아 휘적거렸다.

번쩍!

장내에 다시 불이 들어온 건 동시였다. 암순응을 막 끝난 참이라 판사는 반사적으로 찡그렸다.

"커억, 너너, 너는!"

손가락에 가려진 얇은 시야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봤다. 그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콰지직!

으깨지는 파열음이 퍼졌다. 머리통을 잃은 몸뚱어리가 실 끊긴 인형처럼 볼품없이 허물어졌다.

"레지스탕스의 얼굴을 봤으면 죽어야지."

강현성이 얼굴에 튄 오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전기의자로 다급한 시선을 던졌다.

완전히 넝마가 된 이태백이 거기 있었다.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는데 용케도 살아 있다 싶었다.

"썩을 놈아… 6분 안에는 온다며...."

이태백은 곧 죽을 것처럼 벌벌 떨면서도 기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저놈 저거, 진짜였구나.

직전 강현성은 들었다. 이태백은 최후의, 최후까지도 메가코프에 항거하며 자유를 울부짖었다.

"연기로라도 그거는 불가능하지."

부유하던 의심의 찌꺼기가 가셨다. 오히려 이태성을 응시하는 두 눈엔 경외가 차올랐다.

그것은 투혼이었다. 전기에 살라 먹히는 와중에도 이태백은 저항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뭐야, 바로 사형장에 들르자고 한 게 저 살아 있는 시체 때문이었어?"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간 여인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안경 아래 눈가엔 피곤이 찌들어 있다.

"이따 정식으로 소개하겠지만 일단 이름은 이태백이다. 내 깜빵 전우지."

"전우라고 해서 남잔 줄 알았는데 여자였어? 강현성, 너 목련 씨 두고 양다리 걸치는 거야? 그런 놈인 줄 알았는데 진짜 그럴 줄은 몰랐네."

"뭐라는 거야, 유다희! 저놈 시커먼 남자라고!"

유다희라는 이름의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죄수복에 뚫린 구멍으로 맨살이 얼핏 보였다.

"흐음. 다시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다희, 네가 보기엔 저 친구 어때."

"근성 하나는 인정. 총대장님이 특히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다. 그분이 미친놈 컬렉터잖아."

"그렇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끄덕인 강현성이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구출에 앞서서 할 일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 강현성 대대장."

"전부 없애자. 한 놈도 빠짐없이."

강현성이 하이얀 코트를 여미었다. 흰색은 레지스탕스의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색상이다.

"아, 저 경비원 두 놈은 살려 둬라. 태백이가 저 자식들과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을 거거든."

두 사람이 양 갈래로 찢어지며 바닥을 밀어내듯 찼다.

이어 총성과 비명이 높게 맞물렸다. 펄럭이는 백의에는 로마 숫자 IX가 새겨져 있었다.

* * *

한바탕 곤욕을 치른 직후 상태창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전기의자와의 사투'를 달성.]

[2,214의 경험치(EXP)를 획득했습니다.]

[태백의 레벨이 1에서 2로 상승했습니다.]

[이름: 이태백]

Level: 2(↑1)

생명: 8(↑3) 정신: 9(↑4) 근력: 7(↑2)

민첩: 6(↑1) 마력: 6(↑1) 신앙: 7(↑2)

찰나였다.

[경험치 보너스 10% 이벤트가 발생합니다.]

[914의 경험치(EXP)를 추가 획득했습니다.]

'아무 전조도 없이 경험치 보너스 이벤트?'

돌발 퀘스트도 돌발 퀘스트지만, 경험치 이벤트는 그야말로 사전 정보라는 게 전무했다.

"으, 으으으… 염병… 산 채로 튀겨졌네. 당분간 프라이드치킨은 입에도 안 댄다, X벌."

사위가 조용해지자 태백은 눈을 들었다. 보상을 확인하는 사이 상황은 이미 끝난 모양이다.

6화 내가 만든 세계 (6)

사슴 가면이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강현성이 비스듬하게 목을 기울였다.

"내 친구가 죽는 과정을 구경하며 낄낄거리던 녀석을 내가 뭐가 예쁘다고 살려 둬야 하지?"

강현성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최고조로 치달은 분노는 차고 시리다.

가면이 미끄러지더니 공포에 질린 낯짝이 드러났다. 바짓가랑이가 싯누렇게 젖어 들었다.

"지, 지급할게...! 내내, 내 목숨값! 원하는 대로 불러 봐, 어?! 너희 레지스탕스지? 자유니 뭐니 해도. 결국 다 돈 때문에 하는 거잖아...!"

"너희는 돈이면 뭐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강현성은 와락 이맛살을 구겼다.

사슴 가면 사내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기색으로 반문했다.

"다, 당연한 거 아, 아니야? 레이크 시티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거 뭐가 있다ㄱ-!"

콰직!

남자의 턱뼈가 이상한 방향으로 이탈했다. 그의 하관에서 혓바닥이 시계추처럼 덜렁였다.

쐐애애액.

강현성이 주먹을 꺾어 치자 광대뼈가 폭삭 주저앉았다. 내부의 압력에 눈알이 뽑혀 나왔다.

"시 정부 놈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인지. 이 정도면 인적 검사라도 하는 거 아니야?"

유다희가 발부리로 시체를 찼다. 그녀 뒤로는 시체가 둔덕을 형성했다. 족히 열은 넘었다.

"그래도 저 이태백이란 애가 복덩이긴 하네. 사형일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경비 수도 적고 전투력도 그닥? 이었어."

유다희가 그나마 피가 덜 묻은 외투의 앞자락으로 안경을 닦으며 말했다.

"게다가 저 친구가 오 분 넘게 버텨 준 덕분에 뜻하지 않게 우리가 입은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해. 여러 의미로 인재긴 하네."

"감탄은 그 정도만 하고. 얼른 이태백이한테 가서 몸 상태 체크해."

"어우. 누가 대대장 아니랄까 봐 명령조하고는."

"의사가 환자부터 살펴야지. 어떻게 살린 사람보다 죽인 사람이 더 많냐. 그러니까 네가 '유 다이'라고 불리는 거 아니야. 사람 죽이는 의사."

"이름값 한 번 더 해 줘?"

유다희가 눈매를 새침하게 찢자 강현성은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다시 안경을 썼다.

"그리고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었으니 그만 보채. 하여간 남자 놈들 의리하고는."

짧게 혀를 찬 유다희는 발길을 막는 시체들은 발 옆면으로 대충 치우며 전기의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송장들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윽고 유다희가 이태백의 발치에 섰다.

한차례 퉁명스러운 시선을 보내다가 말문을 열었다.

"강현성이 마음에 들 만하다."

유다희가 돌연 얼굴을 훅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이태백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뒤틀었다.

서로 숨결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웠다. 아슬한 거리에서 그녀는 이태백을 여러 각도로 관찰했다.

"진짜로 전기의자를 6분이나 버텼네… 전신을 고무 의체로 도배해도 불가능할 텐데 말이지."

"얼굴 좀 치우고 말하지."

이태백이 눈을 치뜨며 응수했다. 그러자 유다희가 입술을 둥글게 오므리더니 한 발짝 물러났다.

"눈빛도 터프한 게 딱 우리 과네."

왜인지 유다희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미소가 낯익었다. 서 팀장님과 굉장히 닮은꼴이었다.

단, 외모만 그렇고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서 팀장님의 다크 버전. 그녀가 세파에 찌들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인상이었다.

"음."

"...!"

유다희의 표정에 순간 금이 갔다. 곧바로 그녀가 시선을 이태백에 고정한 채 총을 뽑아 들었다.

타앙-!

총구멍에서 따끈따끈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착탄 지점에서 단말마의 신음성이 들려왔다.

"크어… 어얽."

경비원이 사격 자세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가 미간을 관통한 바람길로 피를 뿌리며 자빠졌다.

"강현성이 경비원 두 놈은 살려 두라고 했지만, 총구를 들이미는 놈은 예외겠지."

유다희는 입김을 불어 화약 냄새를 흩날렸다.

"안 그래?"

"어. 잘했다! 1킬 추가했네. 의사 유다희!"

강현성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호응했다. 그는 카메라로 면면을 찍고 있었다. 사상자 중에 무고한 자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강현성도 막 감옥을 나온 참이지만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는 출소의 기쁨을 내비치지 않았다. 확실히 대대장은 대대장다웠다.

"후우. 끝났군."

부패의 잔상에 머물렀던 시선이 무대로 옮겨졌다. 그가 널찍하게 공간을 점유하며 다가왔다.

"이태백이 몸 상태는 어때."

강현성이 유다희와 나란히 서며 물었다.

"혈관이 찢기고 근육은 전부 파열됐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쏘쏘한데. 본부 데려가서 치료하면 완치될 거야. 근데 그런 건 둘째 치고...."

그리 대꾸한 유다희는 강현성을 못마땅하다는 듯 흘겼다.

"강현성, 너 말이야. 나 포함한 소대원들 걱정은 거의 안 하더니 얜 왜 이렇게 챙기는 거야?"

강현성은 엄지로 눈썹께만 긁적거렸다.

"그래, 그래. 미안해. 오랜만에 같은 대한민국 사람을 만나서 조금 들떴던 건 인정할게. 그러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말자고. 우리 몇 달 만에 본 거잖아!"

듣고 있으니 묘하다. 그러니까 이태백이 만든 캐릭터가 유독 본인을 챙긴다는 건데… 그냥 빨리 이 포박 좀 풀어 줬으면 했다. 그만 좀 떠들고.

"아, 맞다."

드디어구나, 이태백이 반색하던 차였다.

강현성 대뜸 이 무대의 커튼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찌지직-.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찢어 버렸다. 마지막 생존자인 경비원이 웅크린 자세로 떨고 있었다.

덥석.

목덜미를 붙잡더니 이태백의 발아래로 짐짝처럼 던졌다.

쿵, 찧는 소리. 바닥이 잘게 들썩였다.

"사사, 살려 주세요! 죄죄, 죄송합니다!"

강현성은 경호원을 무심하게 굽어보았다. 그동안 유다희가 이태백의 수갑에 손을 가져갔다.

"…보안 코드가 영 까다로워. 사형수 수갑이라 그런지 강현성 거랑 코드 체계도 다르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녀는 미소했다.

"한 20초쯤 걸리겠어."

유다희가 말을 마치자마자 안경 위로 초록색 글자들이 어리기 시작한다. 1, 0의 이분법 수식이 곡률 있는 유리알을 타고 비 오듯 쏟아진다.

철컹.

잠시 후, 거짓말같이 구속구가 해제됐다. 이태백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손목을 까닥까닥 주억거려 봤다. 기름칠이 덜 된 기계 부품처럼 관절과 인대에서 녹슨 소음이 났다.

…그래도.

'일주일 만에, 손발의 자유를 되찾았다.'

상황상 티는 못 내지만, 이태백은 뛸 듯이 기뻤다.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서 문제지.

"태백아."

목소리가 굵직하게 그의 등에 떨어졌다. 움찔하며 뒤돌아보자 쇳덩이가 시야에 한가득했다.

총이었다. 것도 리볼버. 강현성이 총을 거꾸로 잡아서 손잡이 방향으로 이태백에게 들이밀었다.

"방금 죽었다 살아나서 정신이 없겠지만, 네게 주는 선물이다."

강현성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가에 웃음 주름을 잡고는 있지만 동공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강현성은 그에게 살인을 종용하고 있다. 자기 눈앞에서 경비원을 죽이라는 것이다.

'결백을 증명하라는 거다.'

그는 이태백이 시에스타의 첩자라는 의혹을 갈무리하지 않았다.

그런 속내를 딱히 숨길 마음도 없어 보였다. 찰나라도 사살을 망설였다간 대번에 리볼버를 역수로 바꿔서 이태백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겠지.

'레이컨스에서 말 몇 마디로 곧이곧대로 믿으면 그게 더 나사 빠진 얼간이지.'

심중을 읽은 건 이태백만이 아니었다. 경비원이 애걸복걸할 대상을 이태백에게로 돌렸다.

"태, 태… 태백아...!"

들어 줄 가치도 없는 말이다.

이태백은 솥뚜껑만 한 손에서 잽싸게 리볼버를 낚아챘다.

검지를 방아쇠에 걸며 엄지로 공이치기를 눌렀다. 짤깍, 쇳소리가 손끝을 자극한다.

총신을 중심으로 경비원이 양분된 것처럼 보였다. 영점은 정확하다. 자, 불을 뿜을 차례다.

타앙.

총성이 둔중했다. 죽은 자가 스러지자 비로소 커튼콜이 닫히듯 사형장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접힌 팔오금을 천천히 폈다. 묵직한 반동이었다. 총을 놀린 손이 어깨 뒤까지 넘어갔으니.

하지만 한 생명의 무게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우리라.

이 경험과 세계는 이태백에게 있어서 실제이며 현실이다. 이 맥락대로 경기를 일으키거나 질겁을 하는 게 통상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태백은 차분했다. 어떻게 감정을 거세하고 이성만으로 판단하는 행동 원리를 얻은 걸까.

투욱.

이태백의 한쪽 어깨가 내려갔다. 강현성이 어깨동무를 한 것이다. 그가 대견하다는 듯 주먹으로 이태백의 가슴을 가볍게 때렸다.

"누가 시에스타 번견 출신 아니랄까 봐,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사격이었어!"

살인하고 칭찬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따지자면 살인 자체가 신선한 첫 경험이었지만.

"사격하는 모습을 네 눈으로 직접 봤어야 했어. 눈빛이 얼마나 침착하던지 상대한테 조금의 연민도 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니까?"

"알았으니까, 그만."

강현성은 불쾌한 티를 내기는커녕 히죽거리더니 이렇게 부연했다.

"리볼버는 안 줘도 돼. 내가 주는 출소 선물이야. 그거 요새 구하기 힘든 구형 모델이야. 모델명은 콜트 MK5 파이톤. 파이톤은 비단뱀이란 뜻이다. 미끈한 게 딱 뱀 같지? 그거 돈 있어도 못 구하는 거야."

이태백은 손에 들린 콜트 파이톤을 내려다봤다. 개머리판의 가죽이 조금 벗겨진 것 말고는 멀끔했다. 관리를 잘했는지 총신에선 은빛 윤이 흘렀다.

"고맙다."

그것을 어색하게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바짓단이 살짝 처졌다. 다리를 감싸는 온도가 차다.

"나가자."

강현성은 이번엔 역으로 이태백의 팔을 제 목에 걸어 어깨동무했다. 부축을 다 해 주네.

"그래, 나가자. 진절머리가 난다."

"나가면 뭐부터 하고 싶냐?"

"밥. 제발 밥다운 밥을 먹고 싶다."

"하하하! 나랑 같은 생각이군!"

이태백과 강현성은 그렇게 문 쪽을 향했다. 유다희가 그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며 뒤따랐다.

사형장을 빠져나와 복도로 들어섰다. 전투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총상 대신 검흔인 걸 보니 유다희의 작품은 아닌 것 같았다.

상당한 실력자다. 검에 일자무식인 이태백의 눈으로도 일류의 것임을 알아볼 만큼.

그자의 정체는 유다희가 툭 던지듯 밝혔다.

"후미토가 정리해 준 모양이네."

좀 더 걷자 차분한 공동이 드러났다.

양옆에는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다. 공동의 소실점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두 치만큼 열린 틈새로 바깥세상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강현성이 남은 손으로 문을 밀었다.

끼이익.

창졸간에 망막을 찌르는 가시광선. 명순응이 얼추 끝난 시점에서 이태백이 눈을 떴다. 곧이어 엷은 눈두덩이에 사이한 동공이 거세게 떨렸다.

"아...."

상어 이빨처럼 돋아난 고층 건축물들. 까마득한 마천루와 이웃하여 햇무리가 아롱졌다. 아래로는 도시 도처에 깔린 홀로그램 광고. 공중 차량이 하늘과 빌딩 사이에서 자정 작용을 하듯이 부유했다. 빛이 넘치는 상층과 일조권도 허락받지 못한 하층 구역의 분리는 명암처럼 극단적이었다.

"어때, 눈이 번쩍 뜨이지?"

강현성이 송곳니를 반짝이며 말했다. 와중 도시가 태양을 잡아먹는 듯 노을이 부스러진다.

'아.'

이곳이 어딘지 이제야 실감이 난다.

"환영한다, 서울 촌뜨기."

숨 쉬며, 느끼고, 밟고 있는 이 땅은.

"여기가 레이크 시티다."

내가 만든 세계다.

7화 주목받기 싫어요 (1)

레이크 시티를 보며 어스름한 감동에 젖어 있던 와중이었다. 뒤편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태백이 소리의 주인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유다희가 선수를 치듯 먼저 입을 열었다.

"끝냈어?"

"대충은. 날을 잘 잡긴 했나 봐. 경비 인력이 평소의 반의반도 안 되더라. 전투력 수준도 그냥저냥 그랬고. 아, 록은 탈출 차량 탈취하러 갔어. 아마 3분 내로 합류할 거-."

남자가 목을 좌우로 마사지하며 대꾸했다. 그러던 그가 강현성을 발견하고는 활짝 반색했다.

"…대, 대장!!"

"오랜만이다, 후미토."

강현성이 씩 웃자 후미토가 냉큼 달려왔다. 직후 두 남자는 주먹을 부딪치며 뜨겁게 해후했다.

"어우야, 얼굴에 군살 빠진 것 좀 봐. 콩밥이 입에 잘 맞았나 봐? 신수가 이제 좀 훤하네."

"말도 마라. 뇌옥에 갇혀 있는 동안 열 끼도 못 먹었다. 특히 수프가 최악이었어. 뭘 넣고 끓였는지 맛이 썼다니까. 이 세금 도둑 새끼들."

"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출소 기념으로 두부라도 한 모 싸 들고 오는 건데 깜빡했네."

그들은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태백은 생각했다. 유다희가 강현성을 대할 적에도 느낀 건데, 레지스탕스의 조직 체계는 수평적인 것 같았다.

"여튼 고생했어, 대장."

"너도. 이번 작전에서 네 비중이 가장 컸잖아."

"대장만 하겠어? 석 달 동안 콩밥 먹었으면서."

그러는 사이 태백은 후미토를 훑었다.

후미토의 외투는 앞선 두 사람의 것들과는 다르게 디자인이 어지러우리만치 화려했다. 이런 옷을 특공복이라 했던가?

게다가 등에는 기다란 일본식 장도 오오타치를 메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호신용 일본도인 와키자시를 찼다.

짐작해 보건대 백병전에 특화된 행동대장 포지션일 터.

태백은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후미토의 얼굴과 옷매무새가 깨끗했기 때문이다.

신발마저도 때 하나 없이 번쩍번쩍 광이 흐른다. 한바탕 백병전을 치르고 온 사람이 맞나 싶었다.

"얼른 본부로 돌아가자. 여사님께 대장이 가장 좋아하는 고추 듬뿍 넣은 된장찌개 끓여 놓으라고 부탁해 놨거든. 칼칼해서 목이 뻥 뚫릴 거야."

"으음! 군침이 싹 도는군."

"근데 그건 그렇고...."

떨리는 눈으로 보고 있자니 후미토도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그의 실눈이 태백에게 옮겨졌다.

"…누구, 세요?"

"인사해. 이름은 이태백. 내가 감방에서 새로 사귄 친구인데 레지스탕스 본부로 데려갈 거다."

강현성이 대신해서 이태백을 소개했다.

"오, 뭐야. 현장에서 바로 채용한 거야? 이런 적은 없었잖아. 어지간히 인재인가 보네."

"어지간할 뿐일까. 걔, 전기의자를 버텼어. 무려 360초 동안이나. 그것도 맨몸으로."

잠자코 있던 유다희가 불쑥 대화에 끼었다.

"시에스타 번견 출신이래. 그래서 그런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경비원의 미간에 빵-! 하더라고. 같은 총잡이로서 존경심마저 들 정도야."

"유다희,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고?"

태백을 한차례 응시하더니 손을 내민다.

"반갑습니다. 쇼헤이 후미토라고 합니다."

풀네임을 듣는 순간, 벼락같은 소름이 등줄기를 관통했다. 감동이 가신 것도 동시였다.

'시점의 괴리가 착오를 일으켰구나.'

인간 백정 쇼헤이.

가장 악명 높은 사이코패스이자,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선 네임드 보스가 되는 캐릭터다.

강현성이 탈옥한 시기는 5년 전의 사건. 그리고 지금 이맘때는 시간상 본편의 프리퀄이다.

그러니까, 이 서글서글한 인상의 폭주족은 아직 악명을 떨치기 이전의 인간 백정이란 거다.

"편하게 후미토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원하시면 언제든지 먼저 말씀 놓으셔요."

훗날 그렇게 될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저 손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힐지 가늠이 안 된다.

아니지, 지금도 잔뜩 죽이고 온 참이었지.

'나도 그렇고.'

입맛이 쓰거나 그러진 않았다. 이 척박한 디스토피아에서 살인은 별 대수가 아니었다. 목적을 위한 수단쯤으로 여겨야 한다. 미지근한 도덕관념은 죽음을 부른다. 태백은 그런 세계로 떨어졌다.

"이태백."

그래서 손을 맞잡았다. 설령 후미토가 시한폭탄일지라도 그를 통해 '얻을 것'이 있기에.

"잘 부탁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라. 그렇지만 반드시 선은 지켜라. 그게 최소한의 양심이다.

"왔다."

때마침 3톤 크기의 탑차가 전조등을 뿌리며 발치에서 정차했다. 도피용 위장 차량이었다.

끼이익.

트렁크의 양 문을 열어젖힌 유다희가 먼저 타라는 듯 트렁크 안을 향해 눈짓을 했다.

가장 먼저 태백이 양각에서 강태성과 후미토의 도움을 받으며 비척비척 트렁크에 탑승했다.

'오.'

트럭의 실내는 남루한 외부와 다르게 각종 무기와 디스플레이 같은 첨단 장치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휘 통제실의 축소판이었다.

"생각보다 제대로인데."

"저희 9 특수 소대는 레지스탕스 내에서도 보급이나 지원이 좋은 편에 속한답니다."

태백이 무심코 뱉은 말을 후미토가 받았다.

"맞다. 먼저 말 놨으니까 나도 말 편하게 할게, 태백아."

"편할 대로."

"어쨌든 그만큼 임무 난이도가 높지만, 레지스탕스에 몸담은 이상 몸 사릴 입장은 아니니까. 어차피 위험한 전선에 투입되는 거, 지원 보급이라도 풍족히 받는 게 낫잖아. 자부심도 느껴지고."

"꽤 긍정적인 마음가짐이네."

"긍정이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거든."

사이코패스 유망주가 칠 법한 대사는 아닌데.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안 그러면 시 정부 놈들 죽일 때 '죄책감'이란 게 들어 버릴 것 같아서. 나는 그런 기분 느끼기 싫거든. 생각해 봐. 나는 바퀴벌레 잡는 데도 일일이 몸서리친다고. 으… 상상만 해도 불쾌하네. 퉤퉤."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네. 얜 미친놈이 맞다.

"태백이, 너는 시에스타의 번견 출신이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대충은 이해하지?"

몰라, 나는 너처럼 사이코패스가 아니라서. 그래도 반목하지 않으려면 맞장구는 쳐줘야겠지.

"당연한 걸 일일이 묻지 마."

"오오-!"

예상보다 열렬한 반응이다. 어떻게 얻어걸렸나 보군. 몰려오는 현타는 무시하도록 하자.

세 남자는 그렇게 순서대로 자리를 잡았다. 이어서 맨 마지막 순번인 유다희가 문을 닫았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둘, 하나둘."

유다희가 천장에서 마이크를 끄집어내었다.

"출발하자, 록. 손님도 있으니까, 속도 줄여서 '천천히' 달려 보자고. 경로는 브리핑한 대로."

[치지직- 라져.]

기다렸다는 듯 전자음과 함께 시동이 걸렸다. 트럭이 배기가스를 토해 내며 바람처럼 질주했다.

후미등이 길쭉하게 늘어졌다. 심홍색 띠처럼 빛살을 이끌면서, 차량은 시원스레 고가도로를 갈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럭의 빛무리는 레이크 시티의 조명 속으로 기꺼이 삼켜졌다.

이후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메꾸듯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고, 경광등이 번갈아 어룽거렸다.

시 정부의 공수 부대가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 * *

"라한켈 소장님!"

숨을 헐떡이던 남자가 곧 절도 있게 경례했다.

"상황 보고 올리겠습니다."

"전파는 안 돼. 구두로."

라한켈 소장이 고개를 반만 돌렸다.

가슴과 어깨를 장식한 휘장들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하나하나가 역전의 용사라는 증거다.

그 옆에는 묘령의 여인이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있었다.

"이번 탈옥 건은 레지스탕스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확인해 본 바로는 '위험 등급 5단계'로 지정된 강현성을 옥내에 미리 심어 뒀습니다."

젊은 군인이 계속해서 보고했다.

"그렇군."

라한켈은 새삼 놀랍지도 않다는 기색이었다. 그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공손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드 밑 하관에서 입술이 움직였다.

"어떡하긴. 언론 보도부터 막아야지."

군인은 헛바람을 먹었다. 감히 사령관을 하대할 수 있는 자는 몇 없었다. 이를테면 메가코프.

판단은 빨랐다. 군인은 기립 자세를 고쳤다.

"거기, 젊은 군인분."

여인이 군인을 불렀다. 목소리가 향긋했다.

"예, 예...!"

"혹시 방금 보고한 사실. 당신 외에 아는 분이 있을까요?"

"어어, 없습니다! 방금 뇌옥의 데이터 센터를 뜯어 본 다음 바로 달려왔습니다!"

"그렇구나~ 고생했어요."

여인은 흥미가 식은 시선을 옮겼다. 태백이 미간에 구멍을 뚫어 준 경비원의 주검을 향해서다.

얇은 손가락이 구멍으로 쏙 들어갔다. 검지를 빼내자 구부러진 총알이 손끝에 딸려 나왔다.

"콜트 사의 MK5 파이톤이네. 개인적으로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는 귀물인데."

총알의 형태만 보고 종류를 간파한다. 노련한 군인도 저렇게까지 빠르게 식별은 못 할 터다.

여인이 총알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릎을 짚고 일어서며 라한켈에게 하명했다.

"입단속."

"…예."

순간 라한켈의 어깨가 흐릿해졌다. 그의 손을 떠난 표창이 군인의 목젖을 가볍게 쪼갰다.

"끄어어어억- 서… 어… 장님...!"

군인이 목 주변을 할퀴듯이 더듬었다. 라한켈은 그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으며 입을 뗐다.

"상관으로서… 면목 없네… 자네의 가족에겐 내가 책임지고 보상을 약속하지. 정말 미안하네."

파열음. 핏물과 뇌수가 라한켈의 얼굴에 고루 튀었다. 두개골을 온전히 악력만으로 터뜨렸다.

"다음 임무는 알지? 잡아 와."

여인이 손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작전명은 무엇입니까."

라한켈은 호의를 거부하듯이 뒷짐을 졌다. 오물이 피눈물처럼 무뚝뚝한 뺨을 타고 흘렀다.

"파이톤. 그게 좋겠다!"

"받들겠습니다."

라한켈은 훈장에 손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뒤통수에는 격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 * *

아스팔트의 거친 질감이 발바닥에 전해진다. 기묘한 방향 감각이 수시로 멀미를 유발했다.

"우욱...!"

구토가 목젖을 샌드백 치듯 계속해서 건드려 댔다. 용케도 참아 내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봉투 줄까?"

"…괜, 찮아."

유다희의 권유를 고개 저어 사양했다. 지금 속을 게워 낸다면, 피를 한 되는 쏟아 낼 거다.

그리되면 능력치를 버프하면서 버텨 낸 게 말짱 허사가 되고 만다. 생명에 경종이 울린다.

"한국의 판판한 도로랑은 다르지?"

유다희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레이크 시티의 도시 설계가 지X맞기로 유명해. 그래도 넌 잘 버티는 거야. 나나 강현성이나 처음에는 시트지에 토악질하고 아주 난리였었지."

"내내, 내가 언제!"

"어디 보자. CCTV에 녹화본이 있을 텐데~."

가뜩이나 어질어질한데, 둘의 푸닥거리를 보고 있자니 안구 아래에서 전두엽이 욱신거린다.

'어쨌든 지금은 5년 전이라는 건데.'

태백은 눕듯이 기대며 상황을 반추했다.

세계관은 기존의 레이컨스와 공유하겠지만, 자잘한 요소들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지닌 게임 지식에만 기대는 건 어리석다.

그야 우연과 변수가 넘쳐날 테니까. 빙의자의 특전인 배경 지식이 일부 날아간 셈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네임드 보스들이 쓰는 각종 무기나, 아이템들을 선점할 수 있다는 거잖아.'

레이컨스의 보스들은 각자 사기적이면서 개성적인 무기를 다룬다. 그래야 보스에게 매력을 느끼고 도전 욕구로 이어질 테니까.

그리고 태백은 무기의 성능과 효과에 대해서 빠삭했다.

알 뿐이랴. 만든 게 본인이었다.

지난 생에서 캐릭터 디자이너였던 그의 담당 파트이자 특기 분야였다.

'가용 지식을 잃은 대신 가변 지식을 얻었다.'

후미토를 힐끔 쳐다봤다.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무기 전부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나 그중에서도 역작은 있기 마련. 인간 백정의 것이 그러했다.

'파라 블레이드.'

우산검이라는 독보적인 디자인. 뛰어난 성능과 넓은 활용도 탓에 회사에서도 평가가 좋은 무기였다.

특히 팀장님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 파라 블레이드는 레이컨스의 흥행 요소 중 하나가 될 거예요, 이 대리! 확신합니다.

그 회심의 역작을 탈취할 셈이다.

'무엇보다 내 권한인 너프, 버프와 상성이 좋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상의 선택지는 없어.'

문제는 파라 블레이드가 어디 있는지 출처를 모른다는 건데… 어차피 시기상으론 조만간이다.

"미안하다, 쇼헤이."

친구비라고 생각해라.

너무 억울해하진 말고.

8화 주목받기 싫어요 (2)

[#1 소규모] 1.2 패치 노트

◈ 메인 패치

• 「탈옥수」가 해당 인물의 배경 설명에 덧씌워지면서 능력치를 걸맞게 수정합니다.

• 「능력치: 정신」의 하위 항목 「근성」의 비례 수치가 (+2.3%)로 상승했습니다.

• 「능력치: 신앙」의 섬세 조정으로 「패시브: 수면 시 자동으로 근성장」을 획득했습니다.

"STAGE 0 튜토리얼을 완료했습니다."

"12,945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STAGE 1 '레이크 시티'로 입장합니다."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태백아, 일어나."

끔뻑거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열었다. 뿌연 시야로 떡 벌어진 어깨가 들어왔다. 강현성이다.

태백은 엄지로 눈곱을 떼어 내고는 주변을 짧게 둘러보았다. 그러자 강현성이 혀를 내두른다.

"너도 진짜 강심장이다. 어떻게 생판 처음 타는 차에서 그렇게 잘 자냐?"

그러더니 피식하고 웃었다.

"하기야, 전기의자도 버틴 인간인데. 게다가 그만큼 실력에 자신 있다는 거기도 하고."

"...."

강현성의 착각을 태백은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에 멍한 정신을 깨우는 데 집중했다.

'대체 언제 잠이 든 거지.'

태백은 가능한 한 수마에 지지 않으려고 안력에 힘을 주었다. 편집증적으로 경계심을 벼리는 이유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레이크 시티니까.

최첨단, 최고, 과학의 정수.

수식어는 번지르르하나 레이컨스의 생태는 비단 정글이나 다름없다. 방심하면 잡아먹히고 만다.

암만 반정부 단체라 해도 태생은 레이크 시티. 윤리관이 지구와는 판이할 것이다.

레지스탕스는 봉사단체가 아니다. 선의의 조직도 아니다.

아무렴, 암흑가를 평정하고 시 정부와 대치하는 주적인데 그럴 리가.

암흑가는 존엄은 멀고 폭력은 가까운 세계다. 레지스탕스라고 조직의 성질이 다르지는 않다.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저항이라는 이념으로 뭉쳤으니 구성원 모두가 반골. 즉, 한 성질씩 하는 성격일 확률이 높다.

강현성과 유다희, 후미토가 대표적인 레지스탕스의 군상들이다. 록이란 녀석도 안 봐도 비디오고.

'다행히 별일은 안 일어났네.'

내심 안도한 태백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짐짓 이상을 느꼈다. 분명 자기 전까진 파김치였던 몸이 쌩쌩했다.

맷집 하나는 끝내주네. 따로 의체를 이식한 것 같지도 않은데.

"소대원들은 먼저 가서 기다린대. 나나 걔네나 네가 하도 곤히 자서 건드리기가 좀 그렇더라."

그 차에 강현성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근데 총대장님이 호출하셔서 어쩔 수 없이 깨웠어. 잠은 들어가서 편히 자고 일단은 움직이자, 태백아."

"그래, 그러자."

태백은 강현성과 함께 트렁크에서 내려왔다.

"으윽!"

"크크. 공기가 살짝 찌릿하지?"

"살짝? 이게 살짝이냐?"

"적응해라. 통로는 여기 하나뿐이거든."

정신이 아찔해지는 악취가 콧속을 후볐다. 목 안에 이물질이 달라붙은 것처럼 가래가 끓었다.

콰르르르!

거대한 구멍이 연둣빛 오수를 꿀렁꿀렁 토해 내고 있었다.

너비가 20M는 될 법한 터널은 그 자체만으로 위압감을 과시했다. 입구는 괴물의 아가리처럼 어둠과 바람을 게걸스레 빨아먹었다.

그 하수구 옆의 사다리가 잘게 경련했다. 사다리의 꼭대기에 뚫린 또 다른 통로로 향하는 용도이리라. 여기가 시궁창인 건 잘 알겠는데....

'본부랍시고 도착한 곳이 왜 시궁창이냐?'

레지스탕스 본부로 가는 거 아니었어? 당혹감에 주춤거리던 태백의 뒤꿈치로 무언가가 밟혔다. 물컹물컹한 촉감이 영혼을 건드렸다. 쥐다.

'X발.'

태백은 발바닥을 노면에 비비고서 다시 강현성과 나란히 섰다. 발목께에서 시취가 맴돌았다.

"아니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태백이 당분간 몸을 의탁할 장소가 하수 처리장인 건 아니지 싶었다.

"맞는데."

강현성이 눈썹 어림을 긁적거렸다.

"진짜?"

"응. 레지스탕스 본부 맞아."

"왜?"

레지스탕스는 나름 암흑가를 평정한 조직이잖아.

하다못해 레이크 시티의 최빈곤층도 최하층 구역에 거주하지, 하수구에 서식하지는 않는다.

이건 뭐, 일조권의 사각지대도 아니었다. 그것을 뛰어넘는 생명권의 사각지대라 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긴 왜야. 초대 총대장님이 여기에 터를 잡았으니까 그런 거지. 아, 참고로 사다리는 한 명씩 올라가야 해. 아니면 무너지거든."

터를 잘못 잡았잖아, 새끼야! 태백은 한 손으로 눈가를 덮어 버렸다.

"자자, 일단 들어가자. 이게 겉보기엔 이래도 안은 시설이 좋다고. 눈이 번쩍 뜨일걸?"

차마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태백은 사족을 달고 싶은 충동을 추슬렀다.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해라. 그리고 오늘 저녁 메뉴는 너도 후미토한테 들었지? 김치찌개래! 얼마 만에 김치찌개냐. 크으, 우리 식당 여사님 음식 솜씨가 장난 아니거든."

정직하게 말해서 김치찌개란 말에 구미는 당긴다. 이딴 장소만 아니었다면 턱뼈가 찌릿했겠지.

"하여튼 잘 보고 따라와."

강현성이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시연하듯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오른다.

삐그-덕.

괜히 보는 사람이 긴장된다. 그만큼 사다리의 상태가 아슬아슬했다.

"올라와!"

사다리 위에서 강현성이 머리를 내밀며 손을 흔들었다. 이젠 이태백의 차례였다.

지지대를 움켜잡으며 사다리를 등반했다. 발을 옮길 때마다 페인트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삐그덕.

뇌옥에서의 시련은 서막이다.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 비로소 메인스트림에 진입했다.

삐그덕.

'나는 레지스탕스를 기만해야 한다.'

삐그덕.

레지스탕스는 다음을 위한 디딤돌. 이 사다리가 현 상황의 제법 적절한 비유였다.

"잡아라."

"치워. 내가 애냐."

강현성이 손을 내뻗었으나 태백은 거절했다.

'미안하다, 강현성. 구해 준 건 고맙지만 나는 조만간 레지스탕스에서 탈출할 거거든.'

강현성이 순수한 마음으로 숫제 호의를 베푸는 거로 생각하진 않는다. 레이크 시티에서 인간을 재단하는 척도는 가치와 증명, 이 두 가지다.

'어차피 얘나 나나 서로서로 이용하는 관계야. 알량한 죄책감은 가질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좁은 터널로 들어섰다. 통로가 낮고 좁기에 구부정한 자세로 재게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고인 공간 속에서 강현성이 앞장서고 태백이 그 뒤를 따르며 이동했다.

이 행렬도 힘의 역학 관계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태백 '정도'에게는 등을 보여도 된다는 강현성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찰박.

구정물이 무릎께에 튀었다. 불쾌했지만, 그래도 뇌옥에서 내성이 생겼는지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후각이 제 기능을 잃고 마비될 무렵.

강현성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벽면을 더듬거리더니, 어느 지점에서 손이 쑤욱 들어갔다.

지이잉-

강현성의 손바닥에서부터 그물망처럼 빛이 뻗어 나갔다. 빛의 색감은 창백한 녹색이었다.

- 9대대장 강현성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직후 격자무늬 그물망이 통로 벽면 전체에 발라지듯이 펼쳐지다가 도로 원위치로 모였다.

벽면에 이격이 생기더니 스르륵- 뒤로 물러났다.

강현성이 손을 떼어 낸 자리에 쪽문이 생성됐다. 틈으로 샌 은은한 빛이 어둠을 양분했다.

강현성이 고개를 반만 뒤로 돌렸다. 어깨 너머로 드러난 옆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들어가자."

강현성이 먼저 입장하고 태백이 그다음이었다. 태백은 반개하다가 곧바로 동공이 좁아졌다.

문 너머는 방금의 풍경들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눈이 시리도록 새하얗고 상쾌한 공간이었다.

"내가 말했지? 내부는 좋다고."

길게 뻗은 공간은 양옆은 통유리였다. 유리 너머에선 삼차원 입체 지도가 사방팔방에 일렁이며 레이크 시티의 도처를 시시각각 반영했다.

좀 더 걷자, 천장에서 내려온 기계 팔들이 섬세하게 작동하며 미래형 장치들을 조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왔어?"

유다희가 툭 던진 말이었다. 머릿결이 축축하고 두 손으로 목에 감은 수건의 끄트머리를 각각 잡고 있었다. 씻자마자 마중을 나온 모양이었다.

"총대장님이 강현성, 너 찾으셔. 출소하자마자 미안하지만 바로 보고를 들어 봐야겠다면서."

유다희가 물기를 부드럽게 털어 내며 말했다.

"이거 참. 쉴 틈을 안 주는구먼. 하기사, 바로 안 올라오고 늑장 부린 건 나니까."

"총대장님 표정이 퍽 좋아 보이시더라. 혹시 모르지, 9 대대에 포상금을 줄지도? 얼른 가 봐. 이태백, 얘는 내가 식당까지 안내할게."

"그래, 고맙다. 태백이 넌 다희 따라서 식당에 먼저 가 있어. 나머지 팀원들도 거기 있을 거야."

강현성은 그 말을 남기고서 떠났다. 어색한 적막이 그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태백이 입술을 달싹이려던 차에 유다희가 짧게 턱짓하며 말했다.

"이쪽."

태백은 유다희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두 사람은 오가는 대화 없이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래. 어색하게 대화할 바에 이편이 낫다.'

쭉 뻗은 복도를 걷던 중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지? 상대방 쪽에서 먼저 반색했다.

"다희 씨!"

목소리의 주인이 발을 굴리며 접근해 왔다. 이목구비의 균형이 잘 잡힌 금발 미남이었다.

"쯧."

저런 미남이 반갑게 인사하면 뒤로 자지러질 법도 한데, 유다희는 짧게 혀를 찰 따름이었다.

"이번 임무는 어땠어요?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죄송합니다만, 식당으로 가던 길이라서. 길 좀 비켜 주시겠어요? 8대대 차석님."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막았군요!"

유다희가 불편한 심기를 대놓고 드러내자, 갈피를 잃은 남자의 시선이 태백에게로 넘어왔다.

"…이쪽은 누구신지?"

경계심이 잔뜩 어린 투다.

"아, 이번 임무 중에 저희 강현성 대대장님이 직접 스카우트해 온 인물이에요."

남자가 가는 눈으로 태백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김이 팍 샌다는 듯 실소를 흘린다.

"9대대가 암만 인력 부족으로 허덕인다고 해도, 이런 가녀린 분을 들일 줄은 몰랐네요."

이 미남은 별 지랄 같은 말을 웃는 낯으로 지껄이는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한없이 유치해진다더니 사실이었군.

태백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폭력적인 성향과는 괴리된 태백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주먹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마음처럼 내지르지는 못하는 까닭은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레이크 시티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경계가 명징하다. 레지스탕스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을 침묵하고 넘긴다면 가치와 증명이라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이는 셈이다.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 내 가치를 조금이나마 증명하려면… 해 보자, 그걸.'

마침 피험자가 필요했던 차였는데. 상념하는 사이 남자가 입가에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다희 씨도 다음에."

금발이 태백의 옆을 지나치면서 어깨를 부딪쳤다. 지극히 고의성이 다분한 충돌.

그때였다.

[상대방의 모든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금발은 일순간 형언할 수 없는 탈력감에 휩싸였다. 몸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기우뚱 스러졌다.

그러다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혔다.

"이, 이... 무슨?"

퍼뜩 치켜올린 파란 눈이 자신을 무릎 꿇린 자의 시선과 만났다. 무심한 검은 눈.

백열등을 훈륜처럼 등에 진 이태백이 입을 열었다.

9화 주목받기 싫어요 (3)

태백의 입술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반나절 간의 소요 사태로 인해 레벨이 2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버프와 너프의 위력은 레벨과 비례한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사용해 보지 않으면 상승폭을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서 금발 미남으로 실험해 본 거다.

그런데 아뿔싸.

이태백의 예상 이상으로 상승폭이 컸다. 살짝 맞대응이나 해 주려던 심산이었는데.

'어떡하지.'

얕보이지 않으려다가 자칫 불공대천 원수가 되게 생겼다. 당장 혀라도 깨물고 싶을 터.

금발은 모멸감을 증명하듯 잘생긴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수모를 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너...! 나한테 뭔 짓을 한 거냐!"

금발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는 당장이라도 태백을 자근자근 씹어 먹을 기세였다.

외침을 들었는지 근처를 오가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좁은 복도에 금세 병목 현상이 일었다. 그들은 입을 가리며 서로에게 속삭였다.

"저기 무릎 꿇으신 분, 8대대 차석님이잖아. 저기서 뭐 하시는 거지?"

"야, 눈치 없게. 제비 제임스 차석이 요새 9대대 유다희 차석한테 집적거린다잖아. 저 인간 여성 편력이야 원래 유명했고."

"제임스 차석도 진짜 어지간하다. 얼굴값 못 한다는 게 딱 저런 사람이지, 쯧쯧. ...그건 그렇고 저 검은 머리 남자는 누구지?"

"딱 그림 나오잖아. 저 검은 머리가 유다희 차석 애인이라서 어찌어찌 찾아온 거고-."

치정, 결투, 패착.

시나브로 몸집을 부풀린 추문은 상처 입은 제비 제임스의 가슴에 소금을 뿌려 댔다. 그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으며 아랫배에 힘을 짜내었다.

"하아… 하아.... 묻겠다. 내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그리고 이 일로 부대 간에 분란이 일어나면 네가 책임질 건가?"

제임스는 마음 같아선 이 빌어먹을 사단의 화근인 검은 머리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나 당최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부대 간에 분란은 X랄.'

의도치 않게 치사량의 쪽팔림을 선사한 건 태백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먼저 시비 건 사람이 이딴 식으로 나오면 이쪽도 깡패가 되는 거다.

게다가 태백은 막 여러 컨셉을 획득한 참이었다. 지구에 있을 적에는 죽은 동태 눈깔 같던 눈동자는 어느새 낮게 가라앉은 채였다.

"레이크 시티에서 강자는 책임지지 않아."

그 우묵한 눈으로 제비 제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의 경험을 통해 멘탈이 단단해진 것이리라. 당사자인 이태백은 그리 생각할 따름이었다.

"이 새끼가!"

제임스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평소라면 입에 담지도 않을 저렴한 욕설이었다. 조금 전의 수치심과 태백에 대한 미증유의 공포가 촉매제였다.

제임스는 손을 있는 힘껏 태백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검은 눈.

명경지수처럼 잔잔하면서, 그러나 차가운 감정이 어린 검은 눈이었다.

제임스가 발악하건 말건, 그는 그저 따분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마치 도자기 인형처럼 무기질적인 눈에 제임스는 흠칫했다.

이, 이 자식 정체가 뭐야? 손아귀에 저도 모르게 힘이 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이태백은 채 반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프의 효력이 가시기 전일 텐데 멱살에서 느껴지는 악력이 상당한 탓이었다.

경험상, 이런 부류는 애매하게 넘어가면 후환이 남는다. 앙금을 무럭무럭 키워 중요한 순간에 배신하는 그런 캐릭터 있잖은가.

추후를 위해서라도 초장에 기강을 잡아 놓자. 그래야 뒤탈이 없지.

태백은 제임스의 손아귀를 감싸듯 채어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네가 선택한 거다."

제임스가 뭐라 반문할 새는 없었다. 직전보다 더한 탈력감이 이미 그를 덮친 뒤였기 때문이다.

[시전자의 근력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상대방의 모든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직후 팔다리에 걸린 실이 하나둘씩 잘린 것처럼 제임스의 몸이 허물었다.

이어서 이마를 바닥에 심었다. 항거할 수 없는 압력이 등을 눌렀다.

"...!"

구경하던 모두가 놀랐다. 제임스는 태백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채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이이, 이건 대체.'

제임스는 숫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수작질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당했다.

대문니를 바득바득 갈았던 게 무색하리만치 두 번이나 굴종했다.

돌연 심장이 저려 왔다. 그건 무슨 꼼수 같은 게 아니었다.

실력 격차가 아득해서 이런 거지. 그렇게 착각하는 제임스였다.

태백은 그런 제임스를 낮게 굽어보다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적당히 수습하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역시 사람은 싸움 구경에 환장하는구먼.

'그래. 차라리 잘됐다.'

실력의 밑천이 까발려지기 전인 지금이 적기였다. 태백은 전투 능력이 전무했다.

이목이 집중된 지금 모두의 앞에서 허장성세를 내보여서라도 X밥이 아니란 인식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뭔 웹툰 대사밖에 생각이 안 나냐.'

문제는 머릿속을 맴도는 대사들이 하나같이 맨정신으로 하기 어려운 것들이라는 점이다. 긴장한 탓에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서였다.

태백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인간의 존엄을 포기할 시간이다. 옅게 뜨인 동공에 이채가 어렸다.

[시전자의 정신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 * *

끼이익.

총대장실의 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섰다. 문을 닫은 그는 손날을 눈썹께에 붙이며 경례했다.

"부르셨다고요, 총대장님."

"신수가 훤해졌네, 현성아. 살찌기 전에 목련 씨네 가게나 들러 봐. 하여튼 그동안 고생 많았다."

새하얀 도포를 입은 자가 쌍수 벌려 강현성을 환대했다. 옷소매가 날개막처럼 얇게 펼쳐졌다.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아첨하시다니. 이건 하극상이 아니라 상극하라고 불러야 합니까?"

"하하, 나한테 이런 말 하는 건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다른 대대장들은 나를 너무 딱딱하게 대해서 말이지. 네가 없던 석 달 동안 내가 얼마나 심심했었는지 알아? 보고 싶었다, 현성아."

"남자한테 보고 싶단 말 듣는 게 썩 유쾌하진 않군요."

총대장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잡음이 잔뜩 섞인 기계음이었다. 그가 슬슬 소파로 걸어왔다.

"난 날 한 번도 남자라고 한 적이 없는데?"

"그럼 총대장님은 여자십니까."

"그것도 비밀."

총대장은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는 안면 스크린에 이모티콘을 띄워 표정 변화를 내비쳤다.

"비밀이 많으신 분이시군요."

"레지스탕스의 총수니까."

"슬슬 본론을 말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 출소 후 첫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부름에 응한 겁니다."

"미안. 사담이 길었지."

총대장이 부채질하듯 손을 파닥거렸다. 찰나 옷소매가 살짝 내려갔지만, 긴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맨살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름, 인종, 목소리, 하물며 성별마저도. 총대장은 존재 외의 모든 것이 불분명한 사람이었다.

"하루 쉬게 한 다음에 내일 호출하려고 했었는데,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도 그럴 게."

맞은편 소파에 앉은 총대장이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받치며 말했다. 그가 그 자세로 헬멧이 갸웃거리자 시커멨던 벽면이 밝아졌다.

번-쩍!

세계 각지의 언어로 수식된 홀로그램 전광판. 눈길 가는 곳곳마다 네온이 들어찬 광해의 바다가 디스플레이에 한가득이었다.

빛이 넘치는 도시 레이크 시티에서 여자 기자가 속보를 전달한다.

[좋은 밤입니다, 레이크 시티의 거주민 여러분 ... 2시간가량 전, 뇌옥에서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 정부의 발 빠른 대처로 인하여 사상자는 없었다고 하는데요 ... '질서 여신 아키라'의 은덕이라는 말을 덧붙임과 함께 시 정부 측은 이를 계기로 민생 치안에 더욱 힘쓸 것이라고....]

"…보도가 조작됐군요."

먼저 입을 뗀 건 강현성이었다.

안면 스크린 위로 실선이 호를 그렸다. 총대장이 미소한 것.

"이번 탈옥 건을 계획한 이유가 뭐였지?"

"레지스탕스의 단원이 뇌옥에 구류되더라도 탈옥시킬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시 정부에 심어 주기 위함... 사실 이건 명분에 불과하고 시 정부 너머에 존재하는 그 괴물 '고래'들의 관심을 끄는 것. 그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습니다."

"근데 보도상으로는 단순히 '내부적인 소란'이라고 발표했어. 시 정부가 자존심이 더럽게 높은 건 맞지만, 사실을 왜곡할 정도로 얼치기는 아니야. 아직 양심을 긍정하는 군인들이 몇몇 있으니까."

강현성은 이마를 긁적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안면 스크린에 걸린 호선이 높게 솟았다.

"고래."

"…설마!?"

강현성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들이 직접 손을 댔다. 긁어 보려고 별 짓거리를 다 해 봤지만, 부스럼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놈들이. 분명 그랬을진대....

"고래가, 메가코프가 직접 개입한 거야."

총대장은 강현성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시선이 피부를 관통하고서 뇌로 직접 꽂혔다.

"이번 임무에서 누군가를 데려왔다고 들었어. 근데 암만 생각해 봐도 이번 메가코프의 개입은 그 '누군가'와 연관된 것 같은데. 내 추측이 틀린 걸까?"

태백을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성은 아랫입술을 질겅이다가 끝내 체념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모양새가 어째 제가 숨기려고 한 것처럼 보이는데, 보고가 늦었을 뿐입니다-."

삐리릭.

그때 벨 소리가 산통을 깼다. 총대장은 김이 새는 걸 느끼며 헬멧 측면을 톡톡 때렸다.

[초, 총대장님!]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비서였다.

"급한 일 아니면 이따가 5분 후에 다시 하고, 급한 일이면 짧게 이야기해."

[그, 그게. 8대대 차석과 9대대 차석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만 거기에 외부인이 끼어 있었던 모양인데....]

"문제? 무슨 문제? 설마 태백이한테?"

강현성이 내뱉은 침방울이 세상 구경을 하며 총대장의 안면 스크린에 파편처럼 들러붙었다.

[아, 9대대장님이시군요. 충성.]

"쉬어."

[어쨌든 9대대장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 에, 그러니까… 8대대 차석이 땅에 이마를 박고 있는… 중이시라고 합니다...?]

어안이 벙벙하길 잠시. 강현성이 눈을 들었다. 타액으로 얼룩진 스크린에 눈웃음이 그려졌다.

"관망만 하던 고래들을 움직이게 만든 사람. 그게 네가 애타게 부르짖던 '태백'이라는 친구려나?"

"...."

[지지직- 지지직- 총대장님? 들리시나요?]

"위치 보내. 현성이랑 직접 가 볼게."

[예? 왜 총대장님이, 직접-.]

총대장은 재차 측면을 두드려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기대되네."

강현성의 동공에 불안의 빛이 스쳤다. 총대장이 도포 밑단을 그림자처럼 끌며 걸음을 옮겼다.

* * *

"꿇어라."

쪽팔림의 뒷감당 같은 일은 내일의 내게 맡기자.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고뇌 끝에 이태백이 내놓은 해답이다.

10화 주목받기 싫어요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