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호수의 잔물결 (3)
이태백은 김창식과 접선 약속을 잡았다. 일자는 뒤로 미룰 것 없이 오늘이었다.
누군가가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심신이 축축 처졌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게다가 도존과의 일이 조직에 퍼지면 한동안 자유를 박탈당할 터였다. 레지스탕스 단원들이 앞다투어 이태백을 만나려 하겠지.
그래서 오늘이었다. 정 뒤질 거 같으면 집 들어가기 전에 링거나 한 대 맡도록 하자. 정신이 맑아질 거다. 현재 하늘처럼.
솔직하게 말하자면 적토마를 얻은 김에 조금 더 시승해 길을 들일 생각이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부우우우웅...!
고가 도로를 쭉쭉 내달렸다. 거친 엔진음에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시선을 돌렸으나 그때는 이미 이태백이 사라진 뒤였다.
시속 400으로 달리는 바이크를 육안으로 쫓을 수 있을 리가. 이 맛에 졸부들이 스포츠카를 모는 거군.
부러움이 깃든 시선이 짜릿하다. 이거 중독될 것 같구만.
음속에 버금가는 속도 덕분에 금세 도착했다. 김창식이 불러 준 주소인 33구였다.
* * *
"여기쯤에서 세워야겠네."
바로 옆옆 동네라 거리 풍경은 비슷했다. 적토마에서 내린 이태백은 손수 바이크를 끌었다. 이곳부턴 발로 다녀야겠군.
어스름한 골목에 진입했다. 이태백은 단말기를 꺼내 김창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인기척이 접근했다. 김창식이 친절한 미소를 얹고서 달려왔다.
"몇 시간 전에 봤잖아."
"그 몇 시간이 평상시와 같은 몇 시간이 아니잖습니까. 그 도존과 합을 겨룬-"
"호들갑은. 그리고 웃지 마, 정드니까."
김창식이 음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속내야 어떻든 얘가 하는 건 다 그래 보였다.
"정들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 새끼가 진짜.
"너희 교단이 하는 말이라서 X나게 섬뜩하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김창식이 생긋 웃고는 등을 돌렸다. 그 등판에는 여느 때와 다르게 윙슈트가 없었다. 평상시에는 떼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흐음."
그는 적토마를 일별했다. 별로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하긴 윙슈트가 있는 놈이었지.
"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교단까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걸어서 5분만 가면 됩니다."
김창식이 이태백을 안내했다. 평소 같았으면 파라 블레이드의 개폐 버튼을 압박 중이었겠지. 이 세계로 온 이후로는 만성적인 인간 불신에 시달리는 이태백이었다.
'그 정도로 염치없는 새끼는 아니다.'
김창식이라는 인간을 믿지 마라. 이 자식이 보인 행동을 믿는 거다, 이태백.
심중이야 어쨌건 도와준 건 사실이잖아.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다? 이태백이 도존과 싸웠을 적이 그에겐 절호조였을 것이다.
하지만 김창식은, 릴리스 교단은 이태백에게 협조했다. 힘의 역학을 계산했다면 이태백을 배신하는 판단이 백번 맞았다. 십익과 척을 져서 좋을 게 하등 없었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릴리스 교단은 내 편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상응하는 태도 정돈 보여 줄 수 있지. 가슴 한편에서 마음의 소리가 솟아 새어 나왔다.
"여러모로 구린내가 난다만...."
"네? 뭐라고 하셨나요, 태백 님?"
"별말 안 했어."
이태백은 살살 고개를 저었다.
"말 나온 김에 이거 바이크, 너희 건물 안에 주차 좀 할 수 있냐? 너희 교주 만나는 데 타고 갈 순 없으니까."
"걱정 마십쇼. 자리는 널널합니다. 원하시면 저희 정비사에게 상태를 봐 달라고 하시는 건 어떨까요."
"모르는 사람한테 내 애마를 맡기기는 싫다."
김창식이 고개를 반만 돌리며 쳐다봤다.
"어차피 남에게 받으신 거 아닙니까."
"...."
"혹시 모르죠. 그 광년이 본인 바이크라고 위치 추적 장치를 달아 놨을 수도 있습니다. 음, 생각해 보니 그러면 태백 님뿐만 아니라 저희의 신변도 노출될 수도-"
"알았다, 알았어. 맡길게. 대신 정비사 실력이 좋아야 할 거야. 이거, 보통 녀석이 아니거든."
김창식이 눈 주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함지박만 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득의에 차 말했다.
"저희 정비사 실력 좋습니다. 윙슈트도 다 그자가 손보거든요."
"윙슈트를...?"
"네 대성 그룹 출신이었습니다. 일하던 중에 혼란 여신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퇴사하고 저희 쪽에서 정비사로 일하고 있죠. 지금은 누구보다 열성적인 신자가 되었습니다."
대성 그룹은 백색가전을 주로 취급하는 메가코프였다. 그 실력이 워낙 우수한지라 G7이 아닌 대한민국의 기업임에도 불구.
시티에 입성, 메가코프에 이르렀다.
물론 가장 밑바닥이긴 했는데 그게 어딘가. 초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도 대성의 밑창도 못 핥는 기업들이 한 트럭이다.
참고로 말해 두자면 대성 그룹은 국뽕 마케팅의 일환으로 탄생한 작중 기업이었다.
한국산 게임에서 영어나 일본어로 된 메가코프만 있는 건 그렇잖아. 신토불이도 하나 있어야지, 아무렴.
이왕 한국에서 만드는 거 애국도 노려 보자는, 이태백의 아이디어였다. 서 팀장님은 '그런 속물이었냐'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 그래요, 그럼....
결국 수긍했다. 사람들이 '또?'라며 비아냥거려도 없으면 허전한 것이 국뽕 요소였다.
'대성 그룹은 메가코프 중에서 10익을 보유하지 않은 유일한 메가코프였지.'
대성 그룹이 메가코프의 최말석인 까닭이었다. 기술과 자본력이 빵빵해서 물심양면 지원해 줄 텐데 영입이 좀처럼 성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메가코프들이 뭔가 약을 쳐 뒀을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대성 그룹은 전자 제품계를 선도하는 기업이요. 그 훌륭한 인력이 릴리스교에 입교했다.
그러니 안심하고 적토마를 맡겨 보라는 거였다. 이태백은 짐짓 머리를 주억거렸다.
"대성 그룹 출신이면 믿음이 가지."
"맞습니다."
김창식이 격하게 호응했다.
"다른 메가코프들은 팍팍하기 그지없지요. 질서를 위시하지만 결국 절대 감시 체제를 만들려는 명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해서 대성 그룹은 개들 가운데 양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정비사도 그래서 받아 준 거고요."
그나마.
그나마 시티의 양심인 대성 그룹만 십익이 부재했다. 이태백은 한국인으로서 내심 안타까운 마음에 무심코 중얼거렸다.
"대성에 십익 한 명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면 고착화된 메가코프의 역학 관계에 혼란이 일겠군요! 저희로선 굉장히 기꺼운 소식일 것 같습니다.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만. 만약 대성 그룹이 십익을 영입한다면 어떤 자가 좋을 것 같습니까?"
퍽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이태백은 꽤나 신중하게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도존 무야치, 걔 정도면 꽤 괜찮을지도."
김창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침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호수(Lake)에 잔물결이 일기 시작한다.
* * *
[#1 소규모] 1.9.0 패치 노트
◈ 메인 패치
• 「10익 : 도존 무야치」의 소속이 「프리랜서」 → 「대성 그룹」으로 변동됩니다.
• 예지력이 증가하여 「신앙」 능력치의 비례 계수가 (+16.8%) 대폭 증가합니다.
〉〉 자◆ 저§....
〉〉 패치를 ㅈ용합ㄴㅣㄷr
삐빅-!1
[우주의 섭리가 과하게 뒤틀렸습니다.]
[유격으로 인하여 '버그'가 발생합니다.]
[버그 삭제 시 추가 경험치를 얻습니다.]
* * *
릴리스 교단의 건물은 상당히 번듯했다. 간판도 단정하고 회죽도 잘 발려 있었다.
피임 기구 뿌리는 놈들이 드나들기엔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야 너희는 이런 건물 안에서 대체 뭘 하는 거야."
"...뭐, 여러 가지를 합니다."
김창식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얘는 이상하리만치 '그 분야'에 있어선 숫기 넘친다.
간부니만큼 지가 주도해서 콘돔 살포하는 거 아냐? 이럴 거면 왜 릴리스 교단에 입교했나 싶었다.
이태백의 의뭉을 읽었는지 김창식이 부연했다.
"태백 님이 저희 교단에 대해서 어떤 오해를 하는지 압니다. 저라도 그랬을 테니까요. 하지만 들어가서 보시면 아실 겁니다. 저희는 '그런 짓'만 하는 교단이 아닙니다."
"애초에 신성한 교당 안에서 그 짓거리 하는 게 정상은 아니야. 교리가 암만 달라도 그렇지."
"끄응...."
김창식은 변비 걸린 듯 앓았다. 그리고 화제를 돌리려는 듯이 냉큼 문을 밀었다.
내부는 깔끔했다.
깔끔이 지나쳤다.
웨딩 홀이 연상됐다. 바이크를 끌고 들어온 게 죄악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차라리 사창가였으면 말을 안 해.'
김창식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기름때를 위장 크림처럼 덕지덕지 바른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벅, 저벅.
이마에 얹은 고글, 후줄근한 나시 차림에 튼실한 전완근. 그녀가 대성 출신의 정비사였다.
이태백은 속으로 놀랐다. 설마 정비사가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섹X 교단에 여자 정비사라.'
상상력을 자극하는군. 괜찮은 노르포 소설 한 편이 나올 것 같았다.
선입견이긴 하지. 하지만 본인은 레이컨스에 정치적 올바름 따윈 묻히지 않았다.
"네, 간부님. 부르셨어요?"
"바쁠 텐데 미안합니다, 최 양."
최 양이 김창식에게 인사했다. 허리춤에 걸린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이태백을 힐끔 쳐다보더니 곧 적토마로 시선이 옮겨졌다.
"오."
그녀가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김창식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기는 태백 님이십니다. 곧 교주님을 뵐 예정이죠. 그래서 말인데, 최 양. 바쁘지 않으시면 태백 님이 교주님을 알현할 동안 이 바이크를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최 양은 어느새 적토마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가며 여러 각도로 적토마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거, 스펙 하나는 최고네요. 다만 정비를 맡긴 지 오래돼서 그런지 출력값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어요."
최 양이 무릎을 펴며 말했다. 그 또한 놀라웠다. 시속 400이 최대 출력이 아니라니.
적토마 이 자식, 주인을 잘못 만났구나. 제 주인 여포가 아비들을 잘못 만나 빠르게 퇴장했듯이.
"잠재력 하나는 최강인 녀석인데 어쩌다가.... 태백 님이라고 하셨죠? 교주님의 손님에다가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이거는 주인을 잘못 만난 경우네요."
"어제까지만 해도 내 거 아니었다."
"그러면요?"
"훔쳤다."
이태백의 당당한 고백에 최 양은 숨 막힌 소리를 냈다. 그러다 이내 납득했다.
"하기야, 이 도시에서 남의 물건 훔치는 게 뭐 대수라고. 좋아요. 교주님 뵐 동안 이 녀석의 잠재력을 한도까지 끌어 내 보죠. 귀한 손님이라니까 돈은 안 받을게요."
최 양은 적토마를 끌고 정비실로 향했다. 이태백은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다가 김창식을 따라 이동했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회관으로 들어섰다. 고즈넉한 촛불이 복도를 밝혔다. 화려한 문이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보였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김창식은 입장에 앞서 이태백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는 바깥에 기다리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태백 님만 입장하실 수 있거든요."
김창식은 방문을 열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문 너머는 복도보다 훨씬 어두웠다.
이태백이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닫혔다.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복도와 내부의 층고가 확연히 달랐다.
감각을 돋우고 있자니 신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흐으으음."
회랑의 중심에는 침대가 있었다. 이어서 미끈한 다리가 커튼 사이로 뻗어 나왔다.
"기다렸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꿀처럼 끈적거렸다. 그녀는 벨벳으로 표정을 가리고 있었다.
"혼돈의 주인이시여."
여인이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윗옷이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미끄러졌다.
61화 혼돈과 질서 사이 (1)
난데없는 말이었다.
"…뭐?"
대뜸 혼돈의 주인이라니.
혼돈의 여신이 궁금해서 온 사람한테 되레 혼돈의 주인이란다. 이태백은 벙쪘다.
"머리말은 어디다 갖다 팔아먹었나."
"본론부터 말하는 걸 선호하시지 않던가요. 그래서 본론부터 말한 겁니다. 이야기의 앞뒤는 같이 채워 나가요."
여인은 입가에 호선을 얹었다. 내부가 캄캄하기 그지없는데도 어째서인지 그 미소와 여인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태백의 무의식은 장내에 기척 감지를 넓게 퍼뜨리는 중이었다. 전투 경험으로 벼려진 「시에스타 암살술」이 패시브로 기척 감지를 상시 발동할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이태백이 자각을 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터였다. 기척 차단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 교주가 말을 이었다.
"궁금한 게 많으시다는 얼굴이네요."
벨벳 아래에서 달싹이는 입술이 얼핏 보인다. 잇새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신성한 기운이 깃든 듯 영혼에 가 닿았다.
"의문을 해소하러 왔으니까."
"탐구적인 자세, 마음에 드네요."
"릴리스 교단은 손님 대접이 최악이군. 불러 놓고서 품평이나 하고 말이야."
이태백이 단호하게 눈을 치떴다.
"그 반항적인 모습까지도. 아, 이 또한 당신의 신경을 긁는 소리였다면 미안해요. 할 이야기 많을 텐데 가까이 와 주시겠어요? 손님을 문 앞에만 둘 순 없으니까. 그거야말로 문전박대잖아. 자, 어서 와요."
"말은 잘하네."
"달변은 교주의 덕목이잖아요. 같은 입장이니까 이해할 것 같은데. 당신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말을 잘하시는 편이에요."
쌀쌀맞은 태도에도 그녀는 여상했다. 그저 달게 웃어넘기며 살랑살랑 손짓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것과 말로 사람을 꾀어내는 거랑은 달라. 내가 보기에 너는 후자 같다."
"당신은 전자인가요?"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하, 려고 노력한다."
까칠하게 말하면서도 일단 걸음은 뗐다.
바닥재가 발바닥에 찐득찐득하게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늪지대를 걷는 것 같았다.
"봐 봐. 만만찮은 달변가잖아."
교주는 그렇게 말하며 흘러내렸던 옷매무새를 도로 올렸다. 이태백은 그녀와 다섯 걸음을 두고 멈추었다.
"침대에 와서 앉지, 왜 거기에 서 있어요?"
교주는 키득거리며 제 바로 곁을 툭툭 두드렸다. 이태백은 소통을 거부하는 눈으로 말했다.
"김창식한테 릴리스 교단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자행되는지 들었는데, 어떻게 한 침대에 앉겠어."
"어머, 생긴 거랑 다르게 고지식하시네요."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 때문에 오해를 하도 많이 받다 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됐고. 네가 말했듯 본론만 말하자고. 내 궁금증이 뭔지 아는 것 같으니까 사담은 건너뛰고."
"성격 급하시다니까. 그리고 의심도 많아. 하기야, 그게 시티에 최적화된 성격이긴 하지. 급하고 편집증적인 거."
교주가 허벅지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뺨을 괴었다. 남은 손으론 벨벳을 뒤로 젖혔다.
그러고는 눈을 감았다 떴다.
"너...."
이태백은 그녀를 보며 탄식했다.
일단 교주의 얼굴 때문이었다. 진부한 표현이긴 한데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숱한 미녀를 보며 면역을 키운 그조차 순수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사람 외모에 '완벽'이란 표현이 가당키나 하겠냐마는, 가히 완벽에 가까운 미모였다. 그러나 완벽은 인간이 만든 형이상학적인 관념이었다. 모든 생명체는 결함을 지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 여자의 경우에는....
"...안 보이는 거냐."
속눈썹에 반쯤 잠긴 동공과 눈자위는 거의 같은 색깔이었다. 눈동자는 외연만 남은 회백색이었다.
그녀가 빙글빙글 웃었다. 초점은 흐리멍덩한데 피부는 막 깐 달걀처럼 반들반들했다.
"보시는 대로."
그렇다. 교주는 맹인이었다.
'맹인 무녀라니.'
예상 밖이라서 놀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판에 박힌 클리셰에 넋이 나간 것이다.
"재밌는 표정을 하고 계시네요."
"하나만 해라. 보이는 거야, 안 보이는 거야."
"만사를 눈으로만 볼 수 있다는 건 세상이 만든 편견이에요. 사물을 인지하는 데는 시력만이 아니라 다른 걸로도 가능하답니다."
"네가 박쥐라도 된다는 건가."
"그런 걸로 하죠, 뭐. 배트맨이 아니라 배트걸! 어감도 좋고 멋도 있네요! 배트걸로 불러 주세요."
이태백은 침묵으로 일갈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참 재미없네요. 당신은 본인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어요. 이런 대화 하나하나가 무의미해 보여도, 당신의 활약상보다 이 세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교주는 아랫입술을 새침하게 내밀며 구시렁거렸다. 이태백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뭐라는 거야."
"비밀이거든요."
그녀가 세모꼴로 처진 입술이 다시 곱게 펴졌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당신은 제가 모시는 릴리스 여신이 아니라 혼돈 여신에 대해서 궁금한 거고, 또 당신이 들어오자마자 제가 말한 '혼돈의 주군'에 대해서도 궁금한 거겠죠?"
"잘 아네."
"일단 불부터 켤게요."
그녀가 돌연 휘파람을 불었다. 부평초처럼 공중에 떠돌던 촛불들이 자연히 발화하기 시작했다.
촛불의 수가 원체 많아 어둠은 금세 걷혔다. 회랑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건-"
이태백의 눈동자가 덜컹거렸다. 교주를 향했던 시선은 그녀 너머로 옮겨갔다.
"소개할게요, 제가 모시는 어머니를."
교주는 벨벳을 내리며 덤덤히 말했다. 천이 숨결에 부딪혀 팔랑팔랑 흔들렸다.
"혼돈의 딸을."
이태백이 마주한 건.
"-릴리스를."
천장까지 높게 설치된 십자가. 거기에는 손발이 꿰인 채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거인이 있었다.
* * *
레이컨스에서 신은 인간 세계에 간섭할 수 없다. 그들은 으레 서브컬처에 등장하는 성좌들처럼 관망할 뿐이었다.
이태백과 팀원들이 개발 단계에서 그리 못을 박아 두었다. 그렇기에 실체가 있을 리도 없다. 육신이 있으면 이미 물리 세계에 개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애초에 신의 출몰을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델링으로도 구현하지 않았다.
이 내가 레이컨스의 보스 디자이너다. 그 누구보다 전문가 아니겠는가. 그럴진대.
'이건 무슨.'
이태백은 혼란에 휩싸였다.
"의심해도 좋아요. 아이러니하게도 항상 신에게 한 걸음씩 가까워지게 만든 원동력은 믿음이 아닌 의심이거든요."
"...."
"저것이 인공적으로 만든 인형이라 생각해도 좋고. 아니면 최첨단 빔프로젝터로 쏜 환각이라고 여겨도 좋아요. 하지만 이태백, 당신이라면 느끼고 있겠죠. 그럴 리 없다는걸. 그도 그럴 게, 당신은 본인의 촉을 신뢰하잖아? 그 촉이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이 맹인의 말은 사실이다.'라고 경종을 울리고 있지 않나요."
정답이다, 이 배트걸.
시력을 제물로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초음파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듯하다.
"실체를 보여 주는 게 이해를 돕는 데에 좋을 거로 생각해서 미리 보여 주는 거야. 어때요, 신을 직접 보는 기분?"
"혼란하군...."
"푸하하, 솔직한 대답이네요. 혼란 교단의 교주로서 기분 좋은 바라 마지않던 반응이기도 하고요. 릴리스 님께서도 좋아해 주실 거예요."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려 십자가에 걸린 거인. 혼란 여신 릴리스를 쳐다보았다.
"저건 분명한 신입니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사실이죠. 그런데 웃기지 않나요? 사람들이 숭배하고 이 세상에 혼란을 안겨 줄 거라던 혼란의 여신이 탕후루처럼 저렇게 꿰어 있다는 거."
"너와 네 신자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인데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는 거냐. 신을 부정하는 발언인데."
그녀는 이태백이 아닌 릴리스만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혼란은 부정이 낳은 관념입니다. 정지를 부정했기에 우주가 유동했고, 무를 부정했기에 생명이 태어났어요. 만약 있는 그대로만 긍정했다면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변하려고 했을까요?"
뭔 개소리인가 싶다가도 일면 그럴싸하게는 들린다. 교주가 말을 계속 내뱉었다.
"글쎄요. 세상은 멈춘 채였을 겁니다. 순응하는 건 스스로 동력을 없애는 거라고 생각해요. 기시감이 느껴지죠?"
"메가코프의 억압 체제를 말하는 거군."
"그들은 질서를 위시하지만 그건 시티에 사는 인간에게 매사에 순응하라는 뜻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부정하지 말며, 스스로 걷지도 말라는 거죠. 긍정, 질서. 어감은 참 좋아요. 하지만 그 긍정과 질서를 정하는 건 누구죠? 또 그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 거죠? 저기 계신 분인가요?"
"그래서 본인이 섬기는 신조차 부정하는 건가."
그녀의 시선이 돌아오더니 작게 도리질했다.
"존재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이 눈으로 보고 계시듯 실체가 있으니까. 저는 다만 그 신성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거예요. 그것이 혼란의 뜻이니."
"내가 이해력이 달리는 건지. 네가 말을 어렵게 하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하는군."
"어머, 혼란 교단의 교주를 상대하는 데 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했나요?"
…이해를 포기하란 소리다.
"사전 설명은 이쯤이면 됐을 거고. 당신이 궁금해하는 혼돈 여신의 정체를 알려 드릴게요."
교주는 말에 뜸을 들였다. 이 여자, 듣는 사람 애간장 태우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혼돈 여신은 저기 걸린 고기, 아니지, 저희의 어머니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름은 이브. 릴리스 님은 본인의 어머니마저 부정하여 태어난 불순물 같은 존재입니다. 신 중에서 저 혼자 실체를 갖추고 있는 이유도 진리를 '부정'했기 때문이고."
"신의 창조주."
"맞아요. 부모님이죠. 정확히는 '모'."
"그렇다면 '부'도 있겠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주의 진리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아요. 우리 인간과 한없이 닮았어요. 탄생과 죽음을 겪는 건 인간이나 신이나 같답니다. 고로 신의 탄생도 마찬가지죠. 신 또한 섹X로 태어난답니다."
"…뭐?"
잘못 들었나? 대화의 수준이 한순간에 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섹X요, 섹X."
"강조하지 마. 못 들은 게 아냐."
"후후, 순수하긴."
"네가 맛이 간 거다."
눈이 아찔할 정도의 미인. 아니, 눈이 안 보이는 맹인이 하는 말이라 더 충격이었다.
보통 맹인 성녀는-순결, 순애-같은 '순'의 대명사잖아. 한데 이 교주란 놈은 그 판에 박힌 이미지를 한마디로 보내 버렸다.
"섹X가 뭐 어때서요."
"X발, 진짜."
본인 말마따나 그 클리셰조차 부정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얘는 빌드업의 귀재였다. 이태백은 같은 교주로서 벽을 느꼈다.
"갑자기 혐언이라. 그런 플레이도 나쁘지 않네요."
콘돔 뿌리는 녀석들의 숙주가 이 여자다. 무게를 하도 잡길래 잠깐 잊었던 사실.
"여튼."
교주가 '짝' 손뼉을 쳤다. 그 소리가 여러 번 메아리를 만들더니 불꽃이 흔들렸다.
"혼돈 여신, 이브 님은 릴리스 님의 모친입니다. 부는 예상하셨겠죠? 맞아요. 질서의 신이랍니다. 이름은-"
"알 거 같으니까, 거기까지."
"뭐, 그래요.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질서의 신이라는 게 중요하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말을 이어 갔다.
"릴리스 님뿐만이 아닙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은 두 존재. 혼돈 여신과 질서의 신. 정지와 유동이 얽혀진 산물. 그야말로 신들의 신이랍니다."
"…이걸 완전히 이해하려면 개인적으로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
"우주의 탄생에 대해 나누는 대화니 그럴 만도 해요. 아니면 우주의 탄생을 우리 둘이 직접 재현해 보는 건 어때요?"
교주가 베게 밑에서 네모난 물건을 슬쩍 꺼냈다. 앞니로 찢은 포장지를 뱉었다.
특유의 고무 냄새가 코에 닿은 순간, 이태백은 손을 기꺼이 우산 손잡이로 가져갔다.
62화 혼돈과 질서 사이 (2)
정비실에선 최 양의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녀는 소매까지 걷어붙인 채 적토마 정비에 열중했다.
성능이 올라갈수록 본인 물건이 아님에도 만면의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삐질삐질 구슬땀을 흘리는 최 양의 옆모습을 보며 김창식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 사람이 파이톤이죠?"
최 양이 불현듯 김창식에게 물었다. 몽키스패너로는 나사를 단단히 조이며. 잘 갈라진 근육 결 사이로 땀이 두껍게 고였다.
"교주님이랑 김 간부님이 메가코프랑 시 정부한테서 보호하려는 사람."
"허허."
그 질문에 김창식은 살짝 놀란 눈이 되었다. 왜냐하면 최 양이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 관심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서쪽에서 뜨겠군요. 최 양께서 남에게 흥미를 내비치다니. 예, 맞습니다."
"흥미까지는 아니고요. 그냥 최근 시티 하층에선 가장 유명한 괴담 같은 존재잖아요. 간부님 말마따나 행보가 심상치도 않고."
교단의 정보력은 개방에 필적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듯이. 교단의 간부들은 날개를 달고 낮에 떠도는 소문을 수집했다.
더해 교주의 예언 능력 덕분에 정보 수집의 방향성이 명료했다. 적은 발품으로 영양가 있는 정보만 취사적으로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시 정부의 라한켈이 이태백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교단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고. 교주의 하명에 의해 이태백의 신상 및 소재지에 연막을 푼 것도 교단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두 달이 다 되도록 라한켈이 나타나지 않은 건 말이 안 됐다. 메가코프의 사냥개라 불리는 라한켈이다. 한 번 눈독을 들인 먹잇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물어뜯기로 악명을 떨치는 자 아닌가.
"그게 신기하다는 겁니다. 최 양은 그런 세간의 소식에 일절 관심이 없는 줄 알았거든요."
"제가 암만 세상 물정이 어두워도 기본적인 것들은 알고는 있습니다. 가끔 간부님은 저를 원시인 취급하는 것 같아요. 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최 양이 툴툴거렸다.
"제가 대 대성 출신의 엘리트. 최 양을 무시해 버렸군요. 이거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놀리지 말아 주실래요."
"죄송합니다."
김창식이 볼을 긁적였다.
"간부님은 그게 문제예요. 사람이 너무 좋은 거. 아까 보니까 이태백 그 사람, 간부님이랑 신자들이 자신을 위해 한 노력을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왜 말 안 해요?"
"뭘 바라고 했던 일이 아니니까요."
그가 은은한 호선을 머금었다.
"상당히 마음에 드시나 보네요."
바이크 앞에 쪼그려 앉았던 최 양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 쓰세요, 최 양."
김창식은 허리춤의 수건으로 땀을 닦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뭘요. 최 양을 원시인 취급한 것에 대한 사과랍니다. 아, 그리고 그거 가지셔도 됩니다. 최근에 교단 차원에서 새로 제작한 시판품입니다. 물론 교단 홍보 목적으로."
"아-"
콘돔 대용이구나. 최 양은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그건 김창식의 역린이었으니까.
사람들의 상상과는 다르게 교단의 분위기는 보수적이었다. 혼란을 표방한다고 해서 난잡하거나 그렇진 않다는 소리였다.
단언컨대 그런 단체였으면 최 양은 입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 친구가 있는 몸이었다.
그렇다면 왜 피임 기구를 살포하는가. 또 김창식은 교단에 콘돔이 남는다고 했는가.
알다시피 전자는 성병을 막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이요, 후자는 릴리스 교단의 신자 가운데 유독 가족 단위가 많은 탓이었다. 더구나 교단은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바.
몇몇 신자들이 자진 납세하듯 성인용품을 공물로 가져다 바친 걸 시작으로, 피임 기구를 쾌척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김창식은 난감해하면서도 거절하지 못했다. 신자들 나름대로 성의의 뜻인데 어찌 매몰차게 쳐내겠는가.
비록 김창식이 서른 살 먹도록 숫총각이라고는 하나, 간부로서의 위엄을 지켜야 했다.
"하하하, 티 났나요? 기분 좋다마다요. 이젠 그 흉물스러운 물건들을 안 뿌려도 되니까요."
"…그렇게 싫으시면 교주님께 건의를 하시지 그랬어요. 하다못해 묻는 사람에게 해명을 하든가...."
"가능…하겠습니까...."
혼란은 부정에서, 질서는 긍정에서 기인한다. 이태백의 물음에 긍정해 버리면 교리를 위반하는 것이 된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냐 싶겠다마는 종교라는 게 그랬다. 상식으로 이해하려 들면 끝이 없었다.
그 단적인 예로 백백교가 있었다.
그들은 기묘한 주문을 외면서 말끝마다 '백백!' 거린다. 남의 시선에선 숫제 광신도들이어도 어쨌든 교리를 이행하는 것이었다.
김창식도 마찬가지다. 릴리스 교단에 입교한 이상 그는 어느 질문이든 간에 긍정을 해서는 안 됐다.
"간부님께서도 피곤하게 사시네요, 참.... 그런데 이태백, 그 사람 얼굴만 봤을 때는 여자 엄청 후릴 것처럼 생겼던데. 교주님이랑 둘만 놔둬도 되겠어요?"
"그럴 리 없습니다. 교주님이 평소에 말을 조금, 많이, X나게 짓궂게 하시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성녀라 불리시는 분입니다. 하물며 태백님께서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초탈한 분이시지요."
김창식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턱을 들자 최 양의 눈이 게슴츠레 가늘어졌다.
"'장담'하는 건 교리에 위배되는 거잖아요."
"그, 그, 그건!"
김창식이 아차 싶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가 무어라 덧붙이려던 순간이었다.
"오! 면담이 끝나셨군요! 어떠셨-"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태백이었다. 김창식이 반갑게 맞이하려는 찰나.
"-습니?"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의 손으로 향했다.
"너희 교주 맛탱이가 가 있더라."
이태백의 주먹에는 무엇인가가 한 운큼 쥐어져 있었다. 미끌거리고 반투명한 물체였는데 손가락 틈새로 삐져나와 늘어졌다.
자신이 홍등가에서 뿌려대는 '그걸' 발견하자마자 김창식은 사백안이 됐고 최 양은 떨떠름해졌다.
김창식이 말도 못 고르고 대경실색했다. 이태백은 별스럽지 않다는 듯 부연했다.
"이거 뺏느라 애 좀 먹었다."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 말만 하고 이태백은 적토마한테 갔다. 중간에 힐끗 쳐다보니 김창식은 반석처럼 얼어 있었다. 이 새끼 왜 이래?
다만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이 빌어먹을 교단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다.
'교주가 섹드립에 도가 텄어.'
막간에 교주와 푸닥거리가 있었다.
그녀는 농염한 목소리와 손짓으로 이태백을 희롱했다. 무시하고 나올까도 했지만, 첫 만남에서 기강을 잡아야 앞으로가 편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그렇게 짧게 대거리를 하고 숭한 물건까지 회수하고 막 나온 차라 몹시 피곤해진 이태백이었다.
그는 훌쩍 적토마에 올라탔다. 바이크의 후미와 마주한 벽이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비실답게 차고를 겸하는 모양이었다.
부우우우웅!
엔진음과 함께 계기판의 침이 회까닥 드러누웠다. 한 번 손목을 까딱거렸을 뿐인데 적토마의 변화가 바로 느껴졌다. 이태백은 바이크 머리를 멋지게 돌리며 최 양에게 턱짓했다.
"신세를 졌군."
"신세까지야. 기름칠 좀 한 거 가지고."
그녀가 이마에서 고글을 빼며 말했다.
"보니까 자주 볼 사이 같은데, 올 때마다 나한테 맡겨요. 그러면 하나씩 기능 업글 해 놓을게. 하드웨어는 워낙 짱짱한데 소프트웨어가 좀 구식이야."
"그래."
이태백은 마스크를 썼다. 그제서야 김창식이 부랴부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콰앙-!!
팔을 뻗는 김창식을 뒤로 적토마가 튀어 나갔다. 이전보다 배로 빠른 속력으로.
"와- 생긴 거랑 다르게 터프하네요."
최 양이 손날을 눈썹께에 붙이며 말했다. 그러곤 슬쩍 옆으로 눈짓을 주었다.
"간부님은 교주님께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
김창식은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 * *
신나게 도로를 달리던 중이었다. 유리로 된 바이크의 전면부에 전화 번호가 어렸다.
종전만 해도 이런 첨단 기능은 없었다. 추측컨대 최 양이 말했던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인 모양이었다.
뜻하지 않던 이득. 맹인 무녀와의 첫 만남이 영 그랬던 마당이라 대비 효과가 컸다.
기꺼운 마음은 잠시 뒤로, 이태백은 바이크 손잡이를 조작해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지금 어디야?!]
강현성의 사자후가 바람 소리를 찢었다.
"나 볼일 마치고 집 가는 중."
[태백이, 너 오늘 뉴스 봤어?]
"말했잖아. 밖에 있었다고. 무슨 일인데."
[도존 그놈, 대성 그룹으로 들어갔어!]
"…뭐?"
[그 새끼가 뉴스에 나와서 뭐 누구한테 영감을 받아서 단체에 속하고 싶다더라. 그거 말 안 해도 척이잖아. 누구겠어, 당연히 너지. 하여간에 일이 잘 풀린다 했어.]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걸 뻔했다.
도존과 대거리를 한 지 이제 열 시간 남짓이다. 그사이에 대성 그룹과 미팅을 하고 계약을 체결해? X까는 소리였다.
가늠컨대 대성에서 계속 입질을 시도했겠지. 한 명이라도 좋으니 십익이 간절한 그들 입장에선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을 했을 터. 도존은 간을 보다가 받아들인 거고.
'시나리오랑 완전 달라졌군.'
도존의 행보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설정상 돈이 삶의 지침인 도존이 인제야 승낙한 게 신기할 따름이지. 이태백이 이만치 당황한 이유는 다름 아닌 타이밍이었다.
세 시간쯤 전.
-만약 대성 그룹이 십익을 영입한다면 어떤 자가 좋을 것 같습니까?
- 도존 무야치. 걔면 좀 괜찮을지도.
- 마침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김창식과 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도존이 대성에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반쯤 농담조로 내뱉었던 말인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X발, 설마 이거 트루먼 쇼고 그런 거 아니지?
'진짜 나 혼돈의 주인 같은 거 아녀?'
그 변태 성녀가 맨 처음 던졌던 한마디. 그녀는 온갖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그런 와중에 이 말만큼은 진지한 투로 언질했다.
지끈-
젠장, 갑자기 찌르는 듯한 두통이 몰려온다. 바늘 뭉치가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야, 괜찮아?]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샜나 보다. 이태백은 가빠지는 숨을 다듬으며 강현성을 안심시켰다.
"…어."
[아무래도 너, 도존 그 새끼한테 눈도장 찍힌 거 같거든? 그런데 그런 거물한테 눈도장 찍혀 봤자 좋을 게 없어. 네 앞에 나타날 수도 있는데 걔는 절대 피해. 내가 총대장님한테 요청해서 따로 신변 보호 요청할-]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다."
어느 도로에 들어섰다. 대형 차량은 고사하고 바이크도 간신히 지나다닐 정도로 좁았다.
"전화 끊는다."
바이크의 백미러가 양옆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낮춰야만 했다.
[뭐?!]
"손놈'들'이 찾아와서."
시야의 양각을 까맣게 깎아 먹는 난개발된 건물들. 그 위에서 검은 인영들이 옥상의 난간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 수만 수십이었는데 전원 달리는 폼이 압권이었다.
놈들은 두 팔을 흘리듯 뒤로 내빼 공기 저항을 최대로 줄였다. 그 동작이 찍어 낸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똑같았다.
키리링, 키리링, 키리링
그 자세 그대로 손을 등으로 가져가 카타나를 뽑아 들었고, 남은 손의 깍지에는 마디마다 표창을 끼고 있었다. 닌자였다.
"X발, 내가 독립투사야?"
그래, 언제 나오나 했다.
이런 세상에 닌자는 국룰이지.
"와라, 쪽빠리 새끼들아."
이태백의 오른손에도 시허연 칼날이 솟아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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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혼돈과 질서 사이 (3)
마파람이 안구를 따갑게 찔렀다. 이태백은 뻑뻑한 눈알을 머리 위를 향해 굴렸다.
한일자로 좁혀진 하늘. 그 양각으로 시커먼 인영들이 휙휙 스친다. 어림해 보니 스무 명은 족히 됐다. 많이도 긁어모았군.
"닌자 정모라."
시티의 단체 다수. 메가코프같이 자체적으로 번견을 육성할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곳들은 대부분 닌자를 고용했다. 예컨대 중견기업이나 시 정부가 그들을 원했다.
'X발, 어느 놈들이야.'
문제는 켕기는 곳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이태백은 일을 너무 저지르고 다녔다.
이태백은 가늘고 작게 호흡했다.
엉덩이로 느껴지는 적토마의 반동이 의식을 현실로 잡아끌었다.
도로의 끝에서 탈출구가 점으로 반짝였다. 저기까지만 가면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다.
저 너머에 적이 포진해 있다고 해도 적토마로 들이받을 생각이었다. 저들은 막 업데이트된 적토마의 최고 속력은 모를 테니.
한 가지 위험 요소는 저기까지 도달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이태백은 현재 손잡이를 한 손으로만 쥐고 있었다.
속도를 줄였다고는 하나 적토마의 시속은 100km였다. 운에 기대어 운전하기엔 지나치게 빨랐다.
그렇다고 다시 두 손으로 조종간을 잡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면 닌자들이 표정이라도 투척하면 칼로 걷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산을 펼쳐 막아 내 볼까도 생각했지만.
머리 위 시야를 알아서 가리는 건 하책이었다. 그럴 작정이었으면 진즉에 표창을 던졌겠지.
닌자들은 제각기 일본도를 쥐고 있었다. 슬쩍슬쩍 표창을 내비침으로써 이태백이 우산을 펴게끔 만들 공산이었다.
'저들의 목적은 장애가 아닌 내 사살이다.'
칼을 맞대기도 전이건만, 벌써 심리 싸움을 걸어오는 게 역시 닌자구나 싶었다.
"오늘따라 타이밍들이 지랄이군."
운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인의 얼이 담긴 플래그였구먼. 이태백이 쓰게 혀를 차던 그때였다.
[자율 주행 모드를 가동합니다.]
앞면 유리에 기하학적인 도형이 맺히더니 조종간이 생물체인 양 꿈틀거렸다. 당황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정비사가 적토마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했다고 했지.
자율 주행 모드는 그 성능 향상의 일환인 모양이었다. 이태백은 슬그머니 손을 떼 봤다. 적토마는 주인의 믿음에 안정적인 주행으로 화답했다.
"끝내주는군."
그 한마디가 신호탄이었다.
선두에서 질주하던 닌자 넷이 가속했다. 같은 선상에서 달리던 신형이 적토마를 앞지르더니 곧장 쑥하고 가라앉았다.
끼리리리릭.
칠판을 긁는 듯한 파찰음. 칼끝으로 벽을 긁으며 중력을 감쇄했다. 카타나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스파크가 일었다. 놈들은 기울어진 자세로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드리운 닌자 두 쌍. 얼굴 전체를 덮은 복면의 공백에서 안광이 번뜩거렸다. 잠자리 눈깔처럼 밀도 높은 광학 렌즈였다. 이태백의 시선이 그 귀불들과 허공에서 얽히기 무섭게 한 놈이 표창을 투척했다. 바람을 가르는 쇳덩이와 이태백의 칼이 맞물렸다. 짧게 끊는 칼질로 걷어 낸 것이다.
표창을 던진 놈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동작 그대로 고개가 뒤로 꺾였다. 뇌를 침범한 칼날이 정수리를 관통하고 나왔다.
칼날을 회수한 나는 곧장 몸을 낮췄다. 죽은 자가 적토마의 앞 유리에 부딪혀 뒤편으로 날아갔다. 소란이 잇따랐다. 후미에 달라붙었던 닌자와 충돌했군. 확장된 시지각이 청사진을 각막 안쪽에 때려 박았다.
이번엔 셋이 판석을 박차며 도약했다. 칼날이 조여 오는 가운데도 나는 어이가 없었다. 동료애라는 것도 없나? 동료가 방금 죽었음에도 놈들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다. 바로 후속 공격을 이어 왔다. 죽은 자의 쓸모는 딱 거기까지였다는 것처럼 말이다.
'감정을 흔드는 방식은 무쓸모겠군.'
수적 열세를 [정신]을 버프하여 문대 볼 생각이었다. 하나 그랬다간 골로 갈 뻔했다.
작전 변경이다.
사실 작전이랄 것도 마땅히 없긴 했지. 그저 찌르고 베고 자르고. 도존이랑 싸우면서 마력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하는 수 없이 육탄전을 벌여야 했다.
이태백이 낮게 박차 뛰어올랐다. 직후 발끝 힘으로만 몸을 지탱하며 안장에 내려섰다.
그리고 팔을 휘둘렀다. 칼과 카타나 세 자루가 충돌했다. 칼날끼리 얼기설기 엉킨 상태로 닌자 셋이 드르르륵 밀려났다.
[시전자의 근력 능력치를 강화합니다.]
충돌 직전 근력을 강화했다. 더불어 적토마의 속도가 곱해졌다. 칼날을 통해 놈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복면 때문에 놈들의 표정을 읽기는 힘들었는데. 그래, 사람 새끼라면 놀라야지. 쪽발이 새끼들.
좌편을 차지한 닌자의 손이 움직였다. 표창이라도 꺼내려는 듯했다. 그 순간 적토마가 자아를 갖춘 듯 왼쪽으로 홱 치우쳤다. 비수를 꺼내려던 닌자가 벽에 갈렸고, 우익의 두 놈은 공중에서 중심을 잃었다.
"끄으윽-!"
등판을 붓 삼아 시뻘건 벽화를 그리던 놈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주먹을 뻗었다. 놈이 전조등과 충돌한 다음 지면에 깔렸다.
덜컹!
닌자는 그렇게 앞바퀴에 쓸려 곤죽이 되었다. 적토마가 포효라도 하듯 사납게 들썩였다. 그 여파로 한 놈이 덩달아 무너졌다.
그러면서도 꼴에 닌자라고 호흡을 앙다물며 버텨 냈다. 이것만 봐도 어느 단체든 닌자를 선호하는 이유를 알 만했다. 상대하는 입장이 되어 보니 여실히 느껴졌다.
개개인이 이가 갈리게 강하진 않은데, 뭉치니 지랄맞았다. 동료를 헌신짝쯤으로 여기며 공수 교대가 깔끔했다.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쪽도 산전수전 다 겪었다. 이 세계로 떨어지고 불과 세 달.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애매한 기간 동안 이태백은 마르고 닳도록 굴렀다. 눈물 없이 못 들을 고난의 행군이었지. 고로 이제는 본인을 습격한 이 닌자들이 구를 차례였다.
"손이라도 떨지 말든지."
이태백은 왼손으로 옷깃을 들췄다. 허리춤에 걸린 리볼버, 파이톤이 번뜩임과 동시에 총구가 불을 뿜었다. 짤랑거리며 벽과 바닥에 튕기는 탄창. 턱밑과 이마에 총알을 먹여 주자 피 분수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적당히 예열된 근육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 관절의 가동 범위도 기름칠이 된 듯 매끄러웠다.
좋아, 달아오르는군.
앞을 가로막던 방해물은 싹 다 청소했다. 그러니 이젠 후방에서 덮쳐 오겠지. 닌자인 만큼 잠시도 지체하지 않을 테고. 뻔했다.
직후, 후미에서 사사삭- 벽을 딛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얍삽하기 그지없는 닌자다웠다. 하지만 그간의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이태백은 대항할 수단을 마련했다. 걸린 시간은 겨우 숨 한 번 돌릴 아주 잠깐이었다.
휘릭.
발끝으로 무게를 지탱한 채로 빙글 뒤로 돌았다. 닌자들이 눈구멍으로 귀화를 길쭉하게 흘리더니 금세 지근거리에 다다랐다.
어깨가 흐릿해지더니, 세 놈이 일제히 카타나를 찔러 왔다. 기민하고 날카로운 합공.
시야를 들쑤시는 카타나는 다섯.
이태백 또한 아슬하게 안장에 서서 모든 타격을 되받아쳤다. 칼질이 수십 번은 오고 갔다. 마치 그와 닌자 사이에 은빛 장막이 생겨난 것 같았다. 때때로 그는 몸을 틀어 피하고, 상대가 내달리는 관성을 역이용해 적들을 엎어뜨렸다. 놈들이 창졸간 버벅거리면 목덜미를 따 버렸다. 썰린 토막들은 적토마가 앞바퀴로 눌러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
닌자는 반이 됐다. 남은 수는 열. 그 무렵 이태백도 도로를 반쯤 지날 적이었다.
"미친놈들."
놈들은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아니면 체력이 동나 여세를 몰 적기라고 생각한 건지는 몰라도 이태백에게 달려들었다.
"야, 이 새끼들아. 파리가 죽어도 그것보단 슬퍼하겠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람 새끼들이냐? 어떻게 동료가 나가떨어져도 감정의 동요가 조금도 없을 수가 있냐?"
"...."
"지독하다 지독해."
놈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고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 무식한 육탄돌격에 짐짓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닌자들은 카타나로 벽을 긁으면서 쫓아왔다. 놈들의 장기는 벽 타기였다. 그렇다면 그걸 허물어 버리자.
이태백은 두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손끝이 벽과 만나며 지문이 지워졌다.
[벽의 강도를 너프합니다.]
콘크리트의 물성이 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콘크리트는 흐물텅 녹아내리며 그들의 도약을 묶었다. 벽을 짓밟던 발들이 발목께까지 푹푹 꺼졌다.
탕, 탕, 탕, 탕!
파이톤을 연사했다. 원 샷 원 킬. 닌자 네 놈이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놈들은 발이 콘크리트에 삼켜진 채로 대롱거렸다.
이태백은 방어한 것도 모자라 반격을 시도했다. '민첩'을 강화했기에 선공을 허용하고도 속도로는 이쪽이 위였다. 모든 근육들이 상황에 맞게 팽창하고 수축하며 두뇌의 지시를 따랐다. 동시에 '정신'을 버프하여 극한의 집중력을 끌어내었다. 뇌세포가 타 버릴 것 같았지만, 사지가 잘려 나가떨어지는 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버틸 만했다.
"쪽발이 새끼들아!"
이태백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묻히지 않고 적들의 고막에 아로새겨졌다.
"원래 한일전은 한국이 이기는 게 국룰이야, 이 병신들아!!"
"...."
다짜고짜 그딴 소리를 지껄인 이유는 모르겠다. 아드레날린 과다분비 때문이겠지.
전투의 함성 덕분에 이쪽은 사기가 폭발했으니 잘된 일이었다. 하면 쪽발이들은? 복면이 씰룩였다. 얼씨구. 이 새끼들 분명 긁혔다. 언제까지 과묵할 수 있나 보자고.
두 놈이 즉사한 동료를 어깨로 치워 버린 뒤, 몸을 들이밀었다. 죽음을 불사한다는 말은 딱 저놈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었다. 뇌에서 공포를 담당하는 기능이 망가지기라도 한 건가?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라도 되는 양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그래도 줄긴 줄었다. 스물에서 여섯이 됐으니.
최후의 닌자들이 발악했다. 이태백은 제일 먼저 덤벼 온 닌자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놈이 고개를 기울여 총알을 관통시켰다. 그 틈에 칼을 쑥 질렀다. 검로가 바로 뒷놈의 입 구멍 한가운데로 저항 없이 입장했다.
뒷놈은 즉사했고, 피한 놈은 덜컹거렸다. 검을 회수하며 경독맥을 깊게 썰어 주었다. 놈의 손이 절로 올라가 목덜미를 틀어막았다. 손가락 틈새로 물총처럼 삐져나간 선혈이 광학 렌즈에 축축하게 들러붙었다.
피를 정통으로 맞은 닌자 둘이 반사적으로 광학 렌즈를 비비기 위해 손을 올렸다. 그게 놈들의 생전 마지막 행동이었다.
서걱!
남은 닌자는 셋이었다. 원래는 넷이었을진대, 한눈판 사이에 한 놈은 냅다 도주한 모양이었다. 그 수가 스물이요, 기꺼이 목숨을 던진 수가 열여섯이었으므로 한 놈 정도는 인간다운 구석이 있어야 정상이지.
다른 셋도 공포가 옮은 듯했다. 뒤따라오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은 걸 보면 말이다. 놈들은 관성적으로 꾸역꾸역 쫓아오기는 하는데 좀 전 같은 전의나 박진감은 없었다.
"새끼들, 진즉에 이럴 것이지."
전투 의지를 상실한 모습. 이태백은 다시 등을 돌리고서 적토마에 원래대로 앉았다.
부르르르릉-!
같은 순간 적토마가 앞바퀴를 들며 너울거렸다. 주인과 한 몸이 된 애마는 탈출구로 투신했다.
한편 닌자들은 거미처럼 벽에 붙은 채 멀뚱멀뚱 구경할 따름이었다. 한 홉의 빛 안에서 사라지는 바이크의 후미등을.
"...."
"...."
"...."
탈출에 성공한 이태백은 생존의 기쁨과 보상을 만끽했다. 사람, 아니 벌레를 없애면 경험치를 준다. 역시 게임은 최고다.
64화 화제의 인물, 태백 리 (1)
이태백은 비좁은 도로를 빠져나온 이후에도 기감을 계속해서 퍼뜨리는 중이었다.
그물망에 걸리는 적은 아직까진 없군. 스무 명으로 충분하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행이었다. 막후 세력이 이태백을 고평가해서 살수 백 명을 투입했다면… 오싹하군.
"10익인 도존한테서 살아남은 당일에 쪽바리 새끼들한테 목이 떨어질 뻔했군."
이태백은 온기 없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닌자들을 파견한 자가 본인을 얕잡아 본 건 아닐 터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전사이며 임무 실패율이 적었다.
이태백만 하더라도 힘깨나 써서 놈들을 뿌리쳤다. 모름지기 적의 우수함은 상대하는 자가 증언하면 힘이 훨씬 실리는 법.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닌자들은 쌍욕이 나오는 상대였다. 게임상에서 "플레이 X같이 하네"가 최고의 찬사이듯 놈들을 상대했던, 그 지옥 같던 시간에 볼 안쪽이 헐 정도로 욕지기를 씹었다.
'그런 닌자들을 스무 명이나 보낼 수 있는 단체는 몇 되지 않아.'
닌자들과 딱 맞닥뜨렸을 적엔 루카켄 제약회사의 잔존 무리라고 생각했었다. 가장 골이 깊은 사이라면 그들이니까.
갱 연합? 걔네는 몇 시간 전에 와해됐거니와, 10익 도존이 작정하고 청소 중이라서 용의선상에서 내렸다.
그러나 곰곰이 되짚어 보니 루카켄 제약회사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놈들은 메가코프에게 찍혔다. 그리고 닌자들은 결코 메가코프에게 미움 살 짓을 안 한다.
"…용의자는 하나로 좁혀지는군."
시티의 시 정부.
까먹고 있었던 원한 관계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태백 일행은 뇌옥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시 정부의 관료를 여럿 죽였다. 그냥도 아니고 본보기로 삼는다면서 손속이 배로 잔인했다.
관료 가운데 이태백이 죽인 자는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몰살시켰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었다. 9대대가 저지른 일마저도 어느새 이태백의 업적에 (+1) 추가되었다.
그는 장안의 화제였다. 지금도 봐라. 달리는 와중에도 이태백을 구경하고자 창문으로 머리를 내미는 사람들을 말이다.
"이 정도면 걸어 다니는 광역기군."
적토마가 4차선 고가도로를 쭉쭉 가로질렀다. 득실거리는 차량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들며 나아갔다.
이런 식으로 동선을 꼬아서 31구로 갈 생각이었다. 흡사 사다리 타기를 하는 것처럼. 인파가 많을수록. 차량과 섞일수록 혹시 모를 추적으로부터 벗어나기 쉽기 때문이었다.
시 정부가 암만 막 나간다 해도 대낮에 칼부림을 벌이거나 하진 못한다. 그러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하물며 메가코프조차도 주민들의 눈치를 살피잖아.
어느 단체든 힘은 사람한테서 나온다.
사람이 뭉쳐 조직을 형성하고, 그렇게 구축된 조직력이 모여 국력을 낳는다. 기득권 세력이 위화감을 조성할수록 사람들은 시티를 떠날 테고. 그렇게 되면 메가코프의 최대 시장이 크게 위축되는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나 AI는 메가코프가 생산, 공급하는 상품이지 소비자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레이크 시티는 민주주의를 표방했다. 그런데 야욕을 억누르기 힘든 모양이었다. 메가코프와 시 정부는 얄팍한 민주주의를 철폐하고 집단 통제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분기탱천했다. 속되게 말해서 발악을 해 댔다.
"그걸 플레이어가 막는 게 본래의 시나리오였었어. 하지만 뭔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시나리오보다 사건의 전개가 이르다. 현재는 본편으로부터 5년 전의 시간선인데 메가코프의 마각이 이미 드리우고 있었다. 사건의 지평선이 앞당겨진 것이다.
"환장하겠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그 때문에 혼잣말을 씨불이는 빈도도 늘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그랬을 적에는 중2병처럼 보여 오글거렸었는데 당사자가 되어 보니 알 것 같다.
"이렇게 해서 생각을 정리하는 거로군."
바람이 선선히 뺨을 스친다. 화창한 날씨였다. 정신 환기를 한 덕분에 당장 뭘 해야 할지가 빠르게 정해졌다.
메가코프를 전복시키겠다느니.
그런 거국적인 목표 말고.
단어 그대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를.
치이이익-
이태백이 마스크를 입가에 부착했다. 마스크 내부의 공기가 빠지며 증기가 사출되었다.
'내 소재지를 파악했다는 건, 백백교가 들키는 것도 문제다.'
여태껏 시 정부가 이태백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은 그들의 사고방식에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게 가장 클 거다.
비유하자면 그들의 시야는 독수리다. 초원을 달리는 가젤 같은 놈들이 사냥감이었다. 하수구에 사는 생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놈들이 몸을 낮춰 하수구로 들어왔다.
이태백의 수색에 박차를 가할 거라는 의미. 종전의 닌자들은 시발탄이며 본격적인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X부럴. 갱 연합이 사라지고 조금 여유롭나 싶었더니 쉴 틈 없이 넥스트 보스 출몰이냐.
한숨을 쉬는 이태백의 시야로 문득 열정적인 색상이 들이찼다. 빨간색. 태양의 색채.
"친구."
보닛을 상냥한 손길로 쓸며 말했다.
"구 스틸레토 클럽, 현 백백교 1지부로 가자."
엔진음이 한차례 사나워졌다.
쿠릉- 쿠르르르릉-!
적토마는 어느 정도 속도로 달려야 할지 주인의 의중을 묻는 듯했다. 이태백은 그 마음이 기특하여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네가 달릴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주인의 지시에 적토마의 전조등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태양을 등지며 높게 튀어 올랐다.
텅, 터덩.
바로 옆에 있던 차량의 지붕에 착지한 녀석은 빛살처럼 몸을 쏘아 냈다. 차들마다 차고가 달라서 경로가 둘쭉날쭉했다.
움푹움푹 지붕이 주저앉은 차에서 운전자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적토마의 후미등을 향해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태백은 즐거웠다. 반나절 전에는 10익 도존에게 죽을 뻔했다. 거기에 더해 막 닌자들을 학살하고 나온 차였다.
그렇건만.
"이참에 차 바꿔라-!!"
그의 눈가에는 웃음 주름이 잡혀 있었다.
피폐 속의 소소한 행복.
다만 하나 바라건대.
백백교 신자들이 닌자들을 상대로 잘 버티기를. 그렇다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이태백이 떠난 거리의 입출구에 노란색 테이프가 빽빽하게 쳐졌다. 폴리스라인 바깥으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이밀고, 시 정부 경찰들이 저지하는 양상의 반복이었다.
반면 거리 안쪽의 공기는 음울하게 고요했다. 훈장을 패용한 남자가 천천히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의 표정은 전반적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하나 눈동자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핏물이 낭자했다. 뼛조각과 살점이 자갈처럼 발에 채였다. 청소부 중에서도 비위 좋은 자들을 엄선해서 차출해야 할 성싶다. 그 정도로 임무 실패의 대가는 처참했다.
"놓친 건가...."
남자의 이름은 라한켈. 직급은 소장.
시 정부 경찰들 사이에선 영웅으로 통하는 자이자, 주구 노릇이나 전전했던 닌자의 위상을 지금 위치까지 끌어올린 두령이요, 고금 제일의 닌자였다.
"…파이톤."
라한켈의 목소리가 부글부글 끓었다. 파이톤과의 악연은 그자가 뇌옥을 탈옥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파이톤은 사형 쇼를 관람한 관료들을 학살한 다음, 일인천살 강현성을 구워삶아 레지스탕스로 입단했다.
"이름처럼 뱀 같은 녀석이다."
위에서는, 시 정부 수장보다 더 높은 윗분들은 라한켈에게 파이톤을 잡아 오라 하명했다.
녀석의 행방을 찾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시티의 상층은 거의 다 둘러봤다. 레지스탕스 본거지가 설마 하층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한 소재지는 여전히 모른다. 시티의 면적은 한반도의 절반만 했다. 이 망망대해에서 한 놈을 콕 집어 잡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윗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닦달해도 견뎠다.
라한켈은 포기하지 않았다. 닌자는 인내심이 강했다. 그는 파이톤이라 추정되는 자를 추려 냈다.
그런 뒤, 한 놈 한 놈 집요하리만치 발자취를 좇았다. 그 결과 라한켈과 그의 부하들은 끝내 찾아내었다. '진짜' 파이톤을.
이태백의 주 활동 무대를 말이다.
"죄송합니다, 두령… 아니, 소장님."
한 시체의 눈을 손으로 감겨 준 라한켈이 일어섰다. 죽은 자들에게서 떼어 낸 그의 시선이 산 자들을 향했다. 생존한 세 사람은 고글을 벗고 머리를 숙였다.
"시체는 열여섯인데 왜 세 놈만 보이지."
라한켈이 딱딱한 투로 추궁했다.
"한 놈은 도망갔습니다."
"가장 어린 녀석이군. 그럴 만도 해. 그 녀석, 실전 투입은 처음이었지 아마."
"예. 하지만 녀석도 닌자입니다. 그런데도 도망쳤죠. 지금이라도 말씀만 하신다면 바로 찾아 처리하겠습니다."
"됐다."
라한켈이 고개를 내저었다.
"첫 임무 운이 없었던 게지. 그리고 너희가 찾지 않아서 임무 도중 이탈한 자는 상부에서 가만두지 않을 거다. 괜히 힘 빼지 마라."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두령. 두령 덕분에 우리 생활이 좋아졌다지만… 결국 우리도 메가코프 입장에서 쓰고 버리기 좋은 사냥개일 뿐이잖아요. 토사구팽. 사냥에 성공한 사냥개는 솥에서 죽지만, 사냥에 실패한 사냥개는 포가 뜨여서 죽을 겁니다."
"두려우냐."
한 닌자가 가죽을 뜯어내듯 두건을 벗었다. 그는 라한켈의 눈을 피해 머뭇거리다가 이내 주억거렸다.
"예, 솔직히 무섭습니다. 파이톤? 그자도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신의 무력이 무서웠던 겁니다. 저는, 저희는 메가코프가 두렵습니다. 먼저 간 녀석들은 메가코프가 두려워서 목숨을 바쳐 달려들었습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파이톤도 파이톤이지만, 그자는 위에서 정한 타깃일 뿐입니다. 저희는 파이톤보다도 메가코프가 두렵습니다. 놈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핀잔을 듣는 두령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선택이었다. 강호인들이 판치는 시티에서 우리 닌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그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그들은 약속했다. 이번 임무만 마치면 시티 안에 우리 닌자들의 자치구를 만들어 주기로."
"그렇군요...."
부하는 체념한 듯 도로 두건을 둘렀다. 라한켈이 그에게 물었다.
"백백교란 사이비 종교의 교주도 파이톤의 용의자 중 한 명이었지. 그자는 어떻게 됐나."
"몇 놈들이 백백교 지부란 곳으로 출동했습니다. 아무래도 단체다 보니 실력 좋은 놈들로 솎았습니다. 저항하거나 반항하면 소리 소문 없이 정리할 겁니다."
"그래."
라한켈이 폴리스라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기자가 든 카메라가 마침 햇살을 받아 반짝거렸다.
라한켈의 손이 움직인 건 동시였다. 수리검을 뽑은 그가 닌자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두, 두령...."
수리검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부하와 포개진 상태로 라한켈이 속삭였다.
"청소부들이 올 동안 죽은 것처럼 있다가 시체들에 섞여서 시티를 빠져나가라. 위장 신분과 차명 계좌도 만들어 놨으니 시티만 아니면 어디든 살 만할 거야."
"...!"
뒤통수를 잡아끌어 좀 더 밀착했다.
"자치주가 자리 잡으면 꼭 다시 부르겠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얘네들과 살아 있어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파이톤에게 복수 같은 건 생각하지도 말고."
"…표적에는 감정을 집어넣지 마라."
"누구한테 배웠는지 잘 배웠군."
라한켈 소장은 슬프게 미소 지었고, 기자들은 그 장면을 앞다투어 카메라에 담았다.
* * *
백백교 1지부 주변.
검은 두건을 쓴 자들이 기척을 죽이고 매복해 있었다. 그들은 눈만 골목 밖으로 내밀어 동태를 살폈다.
대문 앞에는 한 소년이 빗자루를 쓸고 있었다. 어깨가 떡 벌어진 놈이 조신하게 빗자루질을 하는 게 조금 이질적이었다.
닌자는 고개를 뒤로 뺐다. 닌자 넷이 주먹으로 땅을 짚은 채로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할 거 없는 민간인이다. 장문을 통해 바로 잠입한다."
"마주치는 자들은 어떡합니까?"
"여의치 않으면 죽여라."
"예."
"그리고-"
그 순간 인기척이 등줄기를 훑었다. 닌자가 반응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너희들 뭐냐?"
반 라이언하트. 그가 빗자루로 어깨에 창대처럼 메고 닌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닌자의 동공이 삐걱거렸다. 기척 차단과 감지를 한 번에 뚫고 접근했다고? 겉보기엔 껄렁껄렁해 보이는 이 애새끼가?
"죽-!"
빗자루가 그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반이 스윙을 날린 것이다. 빗자루에 얻어맞은 닌자는 머리가 벽돌에 심어졌다. 그는 팔을 몇 번인가 꿈틀거리다 늘어뜨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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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화제의 인물, 태백 리 (2)
닌자들은 혼이 빠진 표정이 되었다. 빗자루가 걷히며 휘두른 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으, 으음?"
소년이 침음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세파에 어찌나 찌들었는지 잔뜩 삭았다. 간신히 붙어 있는 젖살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이 형님 했을 와꾸였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아직 새파란 애송이란 점이었다.
닌자들의 눈길이 이번엔 옆으로 향했다.
벽돌에 머리가 구겨진 남자. 그는 이 정찰조의 리더이고 경험 또한 풍부했다. 그런 자가 빗자루질 한 번에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볼품이 너무 없어 리더임에도 그만 뿜을 뻔했다. 꽁트도 이보다는 덜 작위적일 것이다.
문제는 리더가 이 정찰조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실이요, 원큐에 나가떨어졌다는 점이다. 야구빠다도 아니고 숫제 빗자루에.
휑한 바람이 검은 두건을 훑고 지나갔다. 식은땀이 식으며 닌자들은 으슬으슬 추워지는 걸 느꼈다.
습격자 무리가 마른침을 삼키는 가운데 반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제 빗자루를 쳐다보았다. 그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했다.
반은 대관절 기연이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맨날 만지작거리던 빗자루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뭐여, 이거."
마당을 쓸던 중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기척 감지였다. 기척 차단도 까마득한 먼 미래의 일일 터인 반이 기척 감지를 익혔다?
당연하지만 아니었다. 이는 이 근방이 세이브 포이트인 것과 패치 노트로 파생된 기현상이었다.
그걸 알 턱이 없는 반은 의아해하면서도 감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고, 검은 두건을 쓰고 작당하던 놈들을 발견했다.
세상에. 시대가 어느 땐데 행주로 얼굴을 가리고 도둑질이냐.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좀도둑 둘에게 조소하길 잠깐. 제일 앞에 있던 놈이 발작하며 달려들기에 빗자루 좀 후려 줬다.
그리고 현재였다.
"이거 설마 +99강짜리 빗자루?"
"...!!"
반이 의뭉을 떨자 닌자들은 전투의 함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부채꼴 모양으로 반을 에워쌌다.
쉬쉭, 표창이 대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그제서 반도 작렬하는 표창을 확인했다.
"으음."
이 또한 이상했다. 투척물이 뭐 저리 굼뜨냐? '누군가'가 세상의 배속을 늦추기라도 한 듯 느려 터졌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는데도 시간이 남았다. 요즘 밥을 잘 먹고 다녔더니 시력이 좋아졌나....
"그건 그거고."
도둑은 도둑이었다.
한 놈 기절했으니 총 셋이네.
양아치 시절에 일당백이 일상이었다. 일 대 삼은 애들 장난이지. 게다가 SR급 빗자루가 함께였다.
휘릭.
빗자루가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돌풍이 일었다. 바람 장막에 표창이 허공에 아스라졌다. 그 광경은 닌자들의 정신을 진탕시키는 충격이었고 급기야 이성을 마비시켰다.
"코노레(이 새끼)-!!"
한 놈이 카타나를 머리 위로 들며 덮쳐왔다. 반은 빗자루를 역수로 바꾸고 짧게 두 번. 잔상이 보일 만큼 빠르게 내질렀다.
빗자루의 밑동에 목젖이 으스러졌다. 반은 목을 부여잡고 켁켁거리는 닌자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철썩하는 파열음을 뒤로하고 놈이 벽돌에 처박혔다. 먼저 간 놈과 나란히.
"...!"
나머지 두 닌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너무도 간단히, 그리고 허무하게 리타이어한 두 사람에 뇌가 작동을 멈춘 듯 굳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발길을 돌렸는데 그게 이 순간에서 치명적인 실착이었다.
반은 냉큼 표창을 줍고서 던졌다. 처음 투척하는 만큼 자세는 어설펐으나, 동작의 이음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 때문인지 그의 손을 떠난 표창은 직전 닌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예리함이 살아 있었다.
"끄아악!"
낮은 궤적을 날아간 표창이 두 쌍의 아키렐스 건을 쪼갰다. 반이 몸을 날렸다. 움푹 팬 지면이 발구름에 쩍 갈라졌다.
철푸덕 엎어진 닌자들은 황급히 상반신을 틀었다.
하나 두 닌자들의 시야를 한가득 채운 건 굳은살로 빼곡한 반의 손바닥이었다.
닌자들은 애처롭게 손을 뻗었지만 최하층에서 잔뼈가 굳은 반은 자비 따위 키우지 않았다.
철-썩!
* * *
지난밤의 일이 있은 후.
대대장 회의가 열렸다.
예의 긴급 회의와는 달리 정식 회의였기에 참석률이 과반이 훌쩍 넘었다. 총대장은 그치지 않고 불참한 대대장들에게도 화상으로라도 참석할 것을 강권했다. 권위에 반대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그답지 않은 처사였다.
대대장들은 갱 연합 소탕 건 때문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본격적인 범죄와의 전쟁에 앞서 중대 사안을 공표하김 위함이리라.
게다가 갱 연합에 가세하기로 했던 도존이 대뜸 대성 그룹과 계약했다. 총대장은 그 전말을 미리 입수해 대대장들에게 알릴 요량이다. 적어도 당지혜의 추측은 그러했다.
사태의 심각성 덕분에 창설 이래, 대대장 전원 참석이라는 길이 남을 업적이 세워졌다. 당지혜와 마찰을 빚고 입원 중인 페퍼 박사도 링거 투혼을 선보였다.
그렇게 개최된 정규회의.
총대장이 입을 떼고 얼마 뒤, 장내는 경악에 휩싸였다. 회의장은 말 그대로 북새통을 이뤘으며 고성이 천장까지 닿았다.
몹시 소란스러운 탓에 문이 요동쳤다. 바깥에서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던 단원 둘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안에서 대체 뭔 일이 일어나는 거야?"
"싸우기라도 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총대장님도 있으신데."
"왜 아니야. 며칠 전에 3대대장님이 8대대장님을 병원으로 보내 버렸잖아. 그 2차전인 거지. 우리 레지스탕스가 말이 조직이지 기실 대대마다 다른 조직 아니냐. 이참에 대거리 한판 시원하게 해서 서열 정리를 하든지. 갈라지든지 하려는 거지. 사이즈가 딱 그래."
"…듣고 보니 일리 있네."
슬쩍 회의장 문을 눈짓했다.
"조금만 들어 볼까?"
"그럴까?"
두 사람이 궁금증에 못 이겨 문짝에 귀를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문이 부서지라 열리더니 대대장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대대장들은 발라당 나자빠진 두 문지기를 힐끗 흘기고서는 마저 제 갈 길을 떠났다.
"...."
그네중 가장 눈의 띄는 대대장은 단연 당지혜였다. 그녀는 좁다란 인벽의 틈새를 어깨로 밀고 나가며 앞장섰다. 발길이 향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백백교 1지부였다.
* * *
이태백이 지부에 도착했을 무렵엔 반이 반송장들을 얼추 다 정리한 시점이었다. 라임을 노린 게 아니라 진짜 그러고 있었다.
짝다리를 짚은 채 반송장들을 툭툭 치던 와중. 엔진음에 반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적토마가 바람을 끌며 등장했다. 이태백이 광대 근처를 건드려 마스크를 해제했다.
"조사님!"
반이 빗자루를 집어 던지며 버선발로 반겼다. 이태백은 적토마에서 내려오며 그 너머로 턱짓했다.
"쟤네는 뭐야."
"아, 저 도둑놈들이요?"
이태백의 눈매가 얇아졌다. 반이 곤죽을 내 놔서 신원 파악이 어렵기는 한데, 저 차림이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도둑이었어?"
"어… 그러고 보니 그건 아직 확인을 안 했네요. 그냥 복장 보고 도둑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뭐 훔친 건 없네? 무턱대고 카타나를 뽑았으니 도둑이 아니라 강도인가."
"카타나를 뽑았다고?"
"아- 예."
벽에 머리가 박히고 게거품을 문. 하여간 반송자들에게 이태백이 가까이 다가갔다.
상세를 확인한 그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자 자신만만했던 반이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혹시 이분들 조사님 손님이세요...?"
"손님이긴 손님이지."
"허억!"
반이 입구멍을 두 손으로 덮었다.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군. 이태백은 표정을 바꿔 소스라치게 놀라 있는 반에게 말했다.
"잘했다, 반."
"…예? 그런데 이분들 조사님의 객이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우를 범한 거 같습니다만."
우를 범한 걸 넘었지.
"저놈들, 닌자다."
"니, 닌자요?"
반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도 "쟤네들이? X밥이던데...."라고 지나가듯 덧붙였다.
"그래서 놀랐다. 알겠지만 닌자들은 시티 안에서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집단이잖아. 근데 너한테 넷이 당했다며. 반, 너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까놓고 말해 암만 X밥들이라도 너한테 당할 계제가 아니라는 거지."
연기를 하나 싶어 닌자들의 복면도 들춰 봤다. 다들 허옇게 눈자위를 까뒤집고 졸도했더라. 닌자의 기본 소양에 위장술도 있다지만 이게 연기면 그 재능이 아까웠다.
"말도 안 되게 약하던데. 솔직히 저 아니라 안젤라 선에서 컷 됐을 거예요."
"차근차근 말해 봐."
"네."
설명이랄 것도 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닌자들을 반이 해치웠다. 요약본도 필요 없을 만치 담백한 내용이었다. 현기증이 치고 올라왔다.
연달아 변죽이 울리고 이렇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세계를 이루는 태엽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릴리스 교단만 해도 머리가 아파.'
이태백은 이내 머리를 비웠다.
뭐가 됐든 이태백의 작은 걱정 하나를 반이 해결했다. 표면적인 무제긴 해도 그게 어디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닌 상황에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이태백은 반을 갱생시킨 본인의 과거에 뿌듯함마저 들었다.
"일단 들어가자. 쟤네도 데리고."
"포박할까요?"
이태백은 살살 가로저었다.
그는 닌자들을 손으로 만졌다. 그들의 눈자위에 핏발이 불거졌다. 모든 능력치를 너프했다. 반송장에서 2/3 송장이 됐을 거다.
이태백과 반은 두 명씩 맡아 닌자들을 포대처럼 끌었다. 너프의 영향으로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태백은 적토마까지 지부로 들여 놓고서야 숨을 돌렸다.
그는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은 창고에서 가져온 밧줄로 닌자들을 인간 꽈배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쭈뼛쭈뼛 이태백 근처를 서성거렸다.
"서서 뭐 해. 앉아."
"제가 어찌 조사님이랑 같이."
"첫만남에 주먹 갈긴 놈이."
"그, 그건!"
이태백이 판석을 두드렸다.
"힘 빼지 말고, 앉아."
"…알겠습니다."
지부는 조용했다. 반이 말하길 오후 네 시가 되기 전에는 교도들을 집으로 보낸다고 했다. 몬테레이 갱이 박치고 들어왔던 사건이 또 일어나지 않을거란 보장은 없었다.
치안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백백교 지부는 점 조직들의 접경지에 위치해 있었다. 알토란 같은 이곳을 노리는 세력이 머지않아 득세할 터다.
"너는 왜 안 가고 있었어."
"누군가는 문을 닫아야죠."
우문에 현답일세.
"네가 가장 나이가 많아서 남았구나."
"예, 뭐. 그런 것도 있고. 저는 여기가 좋거든요. 비단 저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겠지만. 여기가 진짜 제 보금자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해요. 마음의 안식처랄까."
"나야말로 덕을 좀 보네."
이태백은 그렇게 말하며 대자로 뻗었다. 그는 가슴을 들썩이며 천장을 응시했다.
"미안하다, 반."
"예?"
반이 고개를 갸웃했다.
"앞으로 많은 일에 휘말리게 될 거야. 오늘 같은 일이 매일. 아니 매시간 발생할 수 있어. 신변에 위협을 받고 밤길 가는 동안에도 계속 눈치를 살펴야 할 거야. 그리고 그 모든 이유는 전부 나 하나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반도 그 옆에 누웠다.
"종교란 모름지기 성전이 불가결하잖아요. 투쟁에 제 고사리손이라도 거들 수 있단 생각에 설렐 따름입니다."
"너 이 새끼, 진짜 광신도네."
"백백."
이태백은 키득키득 웃으며 고요히 눈을 붙였다. 무척이나 긴 이틀이었지. 어제오늘을 비롯해 요 몇 달,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최근 두 달의 밀도는 지구에서의 삶과 통째로 비교해도 반의반도 되지 못하리라.
그만큼 삶의 부피도 충만했다.
지구에선 면면부절 흘려보냈던 하루하루에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의 피부와도 같았던 잠이 이토록 달 수 있다는 것도....
66화 화제의 인물, 태백 리 (3)
"으으윽...."
나는 이마를 감싸며 눈을 떴다. 세상에 막이 낀 듯 흐릿했던 초점이 시나브로 잡혀 간다. 찌에 물린 붕어 입처럼 눈을 끔뻑거리다 보니 세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완전히 정신이 들었을 무렵에 내 입에서 절로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긴 어디여."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다. 어수선하게 두리번거리던 와중 갑자기 빛이 작렬했다.
윽, X발. 어떤 새끼가 깜빡이 없이 불을 켜고 X랄이야.
그래도 가까스로 명순응하는 데 힘을 썼다. 어슬어슬했던 사위의 어둠이 가셨다. 폐기된 기획서들로 가득 배를 불린 발치의 쓰레기통, 책상 한편을 전부 독차지한 에너지드링크 캔들, 난개발된 건물처럼 모니터의 외연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포스트잇.
내가 있는 곳은 사무실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책상에서 엎어져 그대로 잠에 든 거였다.
그제야 슬슬 정신이 들었다. 아, 맞아. 나 오늘 당직이었지. 밀린 잡무를 하다가 깜빡 잠에 든 모양이었다.
툭하면 회사에서 자서, 사업 부서 팀장에게 "회사가 네 집 안방이냐?"라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면 X까는 소리하지 말라고 기함하며 주먹을 먹여 주고 싶지만... 따박따박 월급 타 먹는 직장인에 불과한 내겐 그럴 객기 따윈 없다.
더욱이 이 회사에서는 사업 부서가 갑이요, 개발 부서는 을이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고, 모든 게임 회사가 마찬가지다. 우리는 재료를 손질하는 역할이고, 저들은 그걸 맛있게 요리해서 파는 사람들이라나.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서 상대해 주기 지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응, 무서워서 피한다.
왜 사람들이 웹소설이나 웹툰에 환호하는지를 알겠다. 이 퍼렁별에서는 입 꾹 닫고 참아야 하는데 자신만의 세계에선 폭력으로 해결이 가능하니까.
이참에 나도 게임에 빙의나 했으면 좋겠네. 옆 팀에서 개발하고 있는 그 아카데미 배경의 모바일 게임 괜찮아 보이던데.
이름이 '기적의 가호 M'이었지. 익명의 누군가에게 통 크게 투자를 받아 개발에 착수해서 아주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더랬다. 서러우면서 부럽다.
내가 이거 때문에 요새 욕을 달고 산다. 퇴계 이황 선생님의 후손인 이 내가!
짝, 짝.
내가 뺨을 때려 냉큼 잠기운을 쫓아냈다.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하고서 자세를 바로 했다.
"남의 게임 부러워해도 부질없다, 태백아. 잘 알잖아. 내 코가 석 자, 아니, 두 자야."
레이컨스 2077이 출시하고 세 달째다.
출시 직후인 격랑의 시기가 넘어가고 슬슬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게임에 대한 평가가 얼개를 갖추는 것도 대충 이즈음이었다.
그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게임 평가를 멀리해 왔다. 하지만 끝내 때가 왔다. 더는 눈을 돌릴 수 없다. 유저들의 목소리를 듣고 수용해 레이컨스를 개선해야 한다.
나는 떨리는 손길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커서는 집 잃은 생쥐처럼 우왕좌왕했다.
"손에 힘 빼. 쫄지 마."
꺼무위키 탭 근처에서 껄떡거리던 쥐는 이내 정확한 지점에서 정지했다.
⎯⎯⌜운영자 전용 메뉴⌟⎯⎯
게임명: 레이컨스(Raken's)
개발: 태백 리
장르: 오픈 월드 액션 RPG
출시: 2024년 ??월 ??일
심의 등급: 심사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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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위키 탭 이름이 왜 이래.
"운영자 전용 메뉴? 개발자 이름은 왜 또 태백 리로 되어 있어, 회사명이 아니라."
희한한 일일세.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별스럽지 않게 넘겼다. 돌이켜 생각해 본다면 분명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의 얼개부터가 모호한 탓인지 의뭉스러움은 금방 흩어졌다.
나는 손으로 턱을 받친 자세 그대로 얼굴을 모니터와 가까이했다.
전에 누군가가 '그러다 화면에 빨려 들어가겠어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불현듯 스쳤으나, 개의치 않고 화면을 주시했다.
⎯⎯⎯⎯⎯⌜목차⌟⎯⎯⎯⎯⎯
1. 개요
2. 상세
3. 시스템
-3.1 난이도
--3.2 장비
---3.3 이동 수단
4. 평가
5. DLC
-5.1 출시 여부
6. 논란
7. 흥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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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장비 탭을 클릭해 보았다. 각종 사이버네틱 의체들이 종류별로 적혀 있었다. 누구인지 몰라도 정성이 대단하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런 유저들의 호응이 있기에 나 같은 개발자 나부랭이들은 박봉에도 버티는 거다.
"장비는 내 담당 부서가 아니라서 잘 모르긴 했지만, 이렇게 종류가 많았구나. 이거 뭐, 사이버네틱 의체 수준을 넘어섰는데? 백 퍼센트 사이보그도 조만간이겠어."
그때 한 장비가 시시덕거리던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라 블레이드? 이게 왜 여기 있어? 이거 분명 사용 가능 무기만 적시해 놓은 거 아녀? 이건 인간 백정 쇼헤이의 고유 무기잖아. 유저는 쓸 수 없는 장비라고.
"...아주 완벽하지만은 않네."
착오가 있을 수 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음 탭 '이동 수단'을 눌렀는데 여기도 이상했다.
적토마가 왜 여깄어. 파라 블레이드 적시까지는 실수라고 쳐도 적토마는 고의성이 느껴진다. 이건 좀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며 손끝으로 마우스 휠을 쭉쭉 할퀴었다.
책상 밑에선 지진이 나고 있었다. 내가 다리를 하도 떠는 통에 종이 뭉치가 쓰레기통에서 이탈하고 난리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깔짝였다.
⎯⎯⎯⎯⌜최근 평가⌟⎯⎯⎯⎯
전반적으로 긍정적 /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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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경과 기준, 대체로 괜찮은 게임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이고 있다. 발매 직후에는 최적화와 버그, 게임 심의에서 여론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운영자'가 게이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꾸준한 사후 패치가 진행되어 불만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다. 원래부터 시스템은 좋은 평가를 받았던 만큼 스토리 및 세계관에 게이머들의 관심이 쏠렸는데, 세계관 확장이 자연스러웠다는 평이 주류를 이룬다(...).
다만, 레이컨스의 주무대 '레이크 시티'의 주축들인 메가코프 간의 세력 불균형에서는 현재에는 평가가 갈리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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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이 지금 나를 봤으면 흠칫 굳을 터다. 그러고는 "이 대리 표정 봤어? 설마 누구한테 고백 공격했나?"라며 숙덕거리겠지. 그만치 내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을 거다.
'나를 향한 사내 여론도, 참.'
나는 머리가 아픈 걸 억누르며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렸다. 커서의 움직임 뻑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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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관의 비대칭 전력으로 꼽히는 10익의 분포가 고르지 못하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메가코프의 생리를 크게 해치는 설정으로 게이머들에게 비친 모양이다. 특히 「케르겔 마탑」에만 10익이 둘이나 있다는 점이 밸런스 붕괴가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단, 이를 의식했는지 이번 [1.9.1 패치 노트]에서 '도존 무야치'를 대성 그룹으로 편입시켰다. 대성은 메가코프 가운데 유일하게 10익을 보유하지 않은 기업이었지만, 이번으로 부족했던 무력을 보완했다. 이에 다른 메가코프가 어떻게 반응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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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패치를 했던가?
"음...."
잠시 팔짱을 끼고 반추해 봤다. 그러고 있자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거렸다.
"맞네. 딱 몇 시간 전에 패치했잖아. 그걸 그새 까먹었네. 자느라 그랬나."
그나저나 반영이 참 빠르다. 이거 뭐, 패치하자마자 바로 올라오는 수준이잖아.
'팬층이 잡혔다는 거니까 호신호인가.'
평가가 갈린다면서 그런대로 우호적이었다. 내 나름대로 자충수였는데 먹혔군.
나는 작게 웃으며 눈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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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가코프의 숙원 사업인 「케르겔 마탑」이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메인 퀘스트만 쭉쭉 미는 성향의 국내 게이머들을 위한 구성으로 보이나, 상기했듯 '원래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세계관 및 배경 설정을 해친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콘솔게임임을 감안하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 아직 운영진이 문제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안타깝다,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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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살이 구겨졌다.
잘 나가다 왜 이래? 우리 좋았잖아, 형씨. 보면 볼수록 없던 조울증 생길 것 같다.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고.
"…하아."
나는 등받이에 깊게 기대었다. 이맛머리가 전부 넘어갈 정도로 고개를 젖혀 천장을 봤다.
패치는 시소와도 같다. 한쪽에 추를 실으면 반대편은 붕 떠 버리는 것이다.
그 부분을 날카롭게 집어냈다. 반박할 거리도 없는 정론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날 선 평가가 나 같은 운영자에겐 나침반이 되어 준다. 시커먼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한 어부의 기분이다.
"좋아."
나는 상체를 당겨 책상과 밀착했다. 기도하듯 얹어진 열 손가락이 이내 키보드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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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운영자, 태백 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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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최대 글자 수인 5,800자를 초과하여 커서가 이동을 멈출 때 비로소 내 손도 정지했다.
여기서 상남자 특, 퇴고 같은 거 안 한다.
나는 맞춤법 검사기를 한 번 돌리고 날것 그대로의 게시글을 올렸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쿠구구궁!
천장에서 부스럼이 떨어진다. 책상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에너지드링크 캔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군다. 쓰레기통이 엎어지며 꼬깃한 종이들이 깡통과 얽힌다.
세계가.
지구가 무너진다.
내가 앉은 의자가 저절로 360도 회전한다. 그것은 마치 붕괴하는 세상을 와이드 샷으로 한눈에 보여 주려는 듯했다.
순간 공황에 빠졌지만 찰나였다.
"아."
떠올렸다.
이것은 꿈이며.
내 세계는 지구가 아님을.
나는 이태백이 아닌 태백 리임을.
현실과 춘몽의 괴리가 급격하게 좁아지더니 이윽고 하나로 포개진다.
눈길을 모니터로 돌렸다.
이미 화면은 꺼진 채였다. 깜깜한 화면이 곱상한 얼굴을 반영한다.
"…볼 때마다 재수 없게 생겼군."
실소하며 눈을 감았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그만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내가 만든 세계인, 레이크 시티로.
내 말이 곧 섭리가 되는 레이컨스로.
* * *
[메인 퀘스트 2.0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버그들을 성공적으로 픽스하였습니다]
[고로 운영자 포인트를 '6' 지급합니다]
[중간 규모 해금 조건을 달성했습니다]
.
.
.
[#1 중간 규모] 2.0.1 패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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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자 코멘트
메가코프 간 힘의 불균형에 대한 소중한 의견들 보내 주시는 점. 게이머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운영진 또한 이 요소가 플레이 시간을 저감시킬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여 다음과 같이 개선하였습니다. 메가코프들의 세력 조징 외에도, 보다 쾌적한 플레이 환경을 위해 부가적인 패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 메인 패치
• 메가코프 간의 전력 차이 조정 프로토콜이 작동됩니다. 대성 그룹이 「도존 : 무야치」를 영입한 여파가 여타 메가코프의 주가에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① 케르겔
기업 국적: 중국 CN
시가 총액: 1경 478조 ▼ 22조
총액 순위: 5위 ▼ 1
10익 구성: 묘(三才), 해(七存)
② 시에스타
기업 국적: 스페인 ES
시가 총액: 2경 879조 ▼ 31조
총액 순위: 3위 ▼ 1
10익 구성: 축(七存), 신(七存)
③ 하라구사
기업 국적: 일본 JP
시가 총액: 3경 101조 ▼ 22조
총액 순위: 1위 -
10익 구성: 축(七存), 신(七存), 술(七存)
.
.
.
⑧ 대성 그룹
기업 국적: 대한민국 KR
시가 총액: 967조 ▲ 156조
총액 순위: 7위 ▲ 1
10익 구성: 오(七存)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Tip : 중간 규모 패치는 그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 운영자가 숙면 시에만 패치가 적용됩니다. 수시로 남발할 시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사용에 유의 바랍니다.
67화 신의神醫? 신의信義! (1)
욱신.
분명 중요한 꿈을 꿨던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눈썹의 깜빡인 만큼 빠르게 휘발되어 갔다. 이거 그런 클리셰인가?
- 어레레, 어째서 눈물이?
많이 자긴 했나 보다.
이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아하니.
"끄응."
이태백은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세웠다. 엄지로 눈가를 훑어 내니 이물질이 잔뜩이다.
"더럽게-"
엄지 끝에 뭔가 툭 걸렸다.
꿈틀-
미간이 살짝 따끔했다.
비교적 얇은 손가락을 톡 가져다 대니 바늘 같은 것이 닿았다.
집게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뽑아내니.
'진짜 바늘이잖아.'
침 끝이 반짝임과 동시에 동태눈깔이었던 이태백의 눈이 생태눈깔로 변했다.
눈이 퍼뜩 내려갔다. 시야에 웬 선인장이 들어왔다. 내 팔 왜 이래? 그뿐만이 아니었다.
은침이 무릎까지 접어 올려진 바지 밑을 접수했고, 훤히 드러난 복부도 마찬가지로 장악했다. 부황도 떴는지 새하얀 배판에 자줏빛 반점이 점점이 맺혀 있었다. 징그럽다.
그런데.
'난 왜 고슴도치가 되어 있냐?'
반이 한의사라도 불러온 건가? 그건 소름인데. 왜냐면 레이크 시티에선 태반이 무면허 의사거든.
9대대 차석 유다희도 힐러면서 무면허다. 듣기론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 시 정부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요구해서라나. 비단 그녀만 아니라 꽤 많은 자들이 상기한 이유로 취득을 거부했다.
그 때문인지 무면허 의사 가운데서도 화타가 재림한 듯한 신의가 몇몇 존재한다.
10익의 독존이 대표적이지.
게다가 독존은 면허만 안 땄지, 누가 그의 실력을 의심하겠나. 당가인은 침을 연필보다 먼저 잡고 남들이 분유를 먹을 때 독을 탄죽으로 내성을 키우는 별종 가문이다.
그 혹독한 교육의 산물로 당가의 의술은 독보적이다. 시티에서 메가코프 시에스타와 더불어 투톱을 달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건 무면허 의사 천당편이다.
지옥편까지 갈 필요도 없다. 현실은....
시티에는 그런 말이 있다. 가족을 죽일 때는 살인청부업자를 보내고.
'원수를 죽일 때는 무면허 의사를 보내라.'
겁을 먹긴 했군. 도존 무야치와 마주쳤을 적에도 단도리했던 내가 횡설수설한 걸 보니.
아무튼.
여기서 요는, 이태백 본인의 몸을 살핀 의사가 아무래도 무면허 의사인 것 같다는 점이다.
'X발 장기라도 하나 뜯긴 거 아녀?'
불길한 상상을 흩어 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얼굴과 목 주변에 치렁치렁 매달려 있던 은침들이 비산했다.
신기한 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면 근육이 마비도 될 법하건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끼이익.
경첩이 수줍게 울며 누군가의 입장을 알렸다. 두 치쯤 열린 문으로 들어선 것은 만두였다. 정확히는 3대대장 당지혜였다.
"…뭐 하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당지혜는 양손 가득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그릇은 뽀얀 김과 함께 매캐한 냄새을 흘리고 있었다.
"너야말로 여기서 뭐 하냐."
"간호해 준 사람한테 태도가 그게 뭐니."
"간호는 아픈 사람한테 하는 말이야."
"얼씨구. 이틀 내리 퍼 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네."
"내가 이틀이나 잤다고?"
당지혜는 무정하게 주억거렸다.
"어."
"...."
"자는 동안 네 옷 벗긴 이유는 그게 다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망상은 하지도 마라. 나도 자는 사람, 그것도 남자 몸 더듬고 만지는 취미 없거든?"
말투는 불퉁했지만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어질러진 바닥을 본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짜증을 갈음했다.
당지혜는 바늘들을 피해 까치발로 접근했다. 그러고는 침대 옆 선반에 쟁반을 내려놨다.
"먹어."
이태백이 어물거리자, 당지혜가 종용했다.
"식기 전에."
"농담이지?"
"아니? 진담인데?"
"아니.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건데."
"어떻게 먹긴, 입으로 먹지."
당지혜가 시큰둥한 눈으로 되받아쳤다. 그러면서 바늘들을 손수 주워 침통에 넣었다.
'쟤군.'
다른 건 모르겠고.
당지혜가 침을 놔 줬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전후 사정이야 어쨌건 말이다. 물어봤자 어차피 얘 성격상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조금 전까지는 몸에 이상이 생겼으면 어떡하지 하며 불안해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작금의 당가에서 침술은 살상용으로만 쓰인다.
'지금이 레이컨스 본편으로부터 5년 전이라지만.'
얼추 20년 전 즈음에 당가의 의술은 사실상 사장된 걸로 안다. 당문익의 별호가 암존(暗存)에서 독존(毒存)으로 바뀐 지 어언 이십 년이었다. 그 내막은 당가 내에서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진 비사 중의 비사였다.
'그 직접적인 당사자가 바로 여기 있지.'
침 정리를 마친 당지혜는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더니 한껏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빨리 먹어. 그거 식으면 더 맛없다. 참고로 말해 두자면 거기에 내가 구할 수 있는 영약들을 떡칠해 놨-"
손은 귀보다 빠른 법. 섬전처럼 손을 뻗은 이태백은 그릇 채로 들고 쭉 들이켰다.
'우욱.'
액체가 목젖을 탁 때리는 순간 턱뼈가 찌릿했다. 아아, 이건 인생을 담은 맛이었다. 쓰고, 달고, 짜고, 시고. 그 요소들로 최선을 다해 맛없게 만들면 딱 이럴 거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이태백이 침을 연신 삼켜 대는 가운데 당지혜가 자리를 툭툭 털었다. 손에는 어느새 침을 가득 움켜쥔 채였다.
이태백이 탕약을 마시려 고개를 든 그 짧은 순간 전부 회수한 것이다. 손속 한번 경이롭군.
"어딜 가자는 거야."
"밥 먹으러."
"…갑자기?"
"네가 먹은 탕약의 주재료로 염독 만들 때 쓰는 재료가 많이 들어가서 그래. 피로가 쌓이면 몸에 냉기가 도는데, 그럴 때 매운 음식을 먹어서 몸을 따뜻하게 해 줘야 나중에 탈이 안 난다."
그렇게만 말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나갔다. 이태백은 한참을 닫힌 문을 응시했다.
생략을 해도 정도껏이지. 하지만 레이크 시티에서 당지혜 정도면 사회가 잘된 축에 속한다.
상층으로 갈수록 시티 주민들은 의사소통 능력이 떨어진다. 필요한 만큼만 이야기하고 빠진다.
이기주의가 우주 단위로 만연해지면 이 사달이 난다. 어쩌겠나. 내가 창조주이니 이 역시 긍정해야지.
[신앙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원래도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바늘구멍이 꽉 막히는 느낌. 한차례 마른세수를 한 뒤, 침대에 기대어 있던 파라 블레이드를 챙겨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나선형 계단인지라 장면이 계속 전환되었다.
'당지혜가 나한테 왜 잘해 주지?'
그럴 이유가 하등 없잖아. 면식이야 한 번 본 사이일 뿐이고, 심지어 그것도 막 좋은 추억도 아니었다.
성질 사납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당지혜가 이러니 역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놈의 편집증.
왜 쫄고 그래, 이태백.
"하아."
내가 만든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이틀 정도 지났다니 총대장이 대대장들한테 말했겠네. 나랑 도존이랑 한판 붙었다고.'
엄연히 말하자면 승부라고 할 건 못 됐지만 어쨌든, 괄목할 만한 업적이긴 하니까.
대대는 달라도 같은 조직의 단원이니 내심 자랑스러웠을 수도 있다.
다소 유치한 해석이긴 해도 이거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그도 아니면 당지혜가 나한테 쫄았다는 걸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건 너무 갔....
"설마."
에이.
아니야.
아닐 거야.
"...."
…아니겠지?
* * *
[#1 소규모] 1.9.3.1 패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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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이태백」 주변 한정으로 「3대대장: 당지혜」의 정신력을 20 낮추는 패시브 스킬이 발동됩니다.
• 「운영자: 이태백」은 「3대대장: 당지혜」 한정으로 예지력이 10 높아지는 패시브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 앞으로 「3대대장: 당지혜」는 「운영자: 이태백」 앞에선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 확률이 대폭 늘어났습니다.
• 앞으로 「3대대장: 당지혜」는 「운영자: 이태백」 앞에선 자신도 모르게 부채감을 느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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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태백]
Level: 22(↑6)
생명: 38 정신: 44 근력: 32
민첩: 41 마력: 35 신앙: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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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이태백은 당지혜를 따라 노점상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아무 말 없던 그녀는 입구 천막을 보자 싱글 미소 지었다. 타지에서 김치찌개집을 발견한 한국인 같은 표정이군.
실제로 이 비유는 틀리지 않았다.
이태백은 가게로 들어가자마자 미간과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매운 냄새가 눈과 코를 기습한 탓에 보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후루루루룩....
거기에 더해 땀 냄새가 알싸했다. 노점상은 만석이었고, 사람들은 비지땀을 뻘뻘 흘려 가며 음식을 마셨다.
모두가 디귿 자(ㄷ) 바 테이블에 어깨를 다닥다닥 붙인 채 비좁게 식사하는 모습이었다.
어찌나 전투적인지 우리가 들어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뭘 저렇게 먹는 거야?
"주인장."
당지혜가 먼저 의자를 빼고 앉았다. 바 테이블 너머의 중년인은 귀만 열어 두고 제 할 일을 했다.
"여기 마라탕 두 개."
아, 이래서 입꼬리가 귀에 걸렸군.
그래. 사천 출신인 당지혜의 시선에서는 마라탕이 김치찌개로 보일 만도 하다.
"내용물은."
"평소처럼."
"맵기는."
"난 9단계고...."
당지혜가 슬그머니 눈짓을 보내왔다. 이태백은 그녀를 보지 않고 주인장에게 물었다.
"초심자 맛은 몇이야, 주인장."
"8단계."
"…숫자만 들어도 초심자가 먹을 법한 맵기 단계는 아닌데, 그 아래도 가능한가?"
"손님이 원하시면 해 드려야지."
주인장은 그릇에 빨간 국물을 담으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 근데 우리 가게에서 7단계 이하를 먹으면 앞으로 올 때 손님으로 부르지 않소. '아기'라고 불러 드리지. 그리고 옆에 애인이 9단계를 먹는데 8단계라니. 좀 자존심 상하지 않소?"
"애인 아니야."
받아친 건 당지혜였다. 아직 먹기도 전인데 그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서려 있었다.
이태백은 미간에 주름을 잡느라 보지 못한 눈치였다.
"9단계."
"암, 그래야 우리 손님이지."
음식이 나왔다.
폭력적인 비주얼이었다. 매운 국물에 포말이 들끓었으며 표면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도 죄다 빨갰다. 그에 이태백은 흐리게 침음하고 당지혜는 군침이 싹 돈 모양새였다.
"...."
"먹자."
"그래."
식사가 시작됐다.
첫입에 잠이 달아났다. 두 입째는 혀가 비명을 질렀고, 세 입째엔 입술을 퉁퉁 부었다.
이태백은 깨작깨작 젓가락질을 하며 당지혜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고기를 후후 불었다.
「안녕하십니까, 시티의 주민 여러분.」
천장 귀퉁이에 티브이가 달려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 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나운서가 굳은 얼굴로 말하자 식사에 몰두 중이던 사람들이 멈췄다. 면의 물기를 털어 내던 주인장의 행동도 느려졌다.
「이틀 전부터 '대성 그룹'을 제외한 모든 메가코프가 유사 이래 없었던 주가 폭락의 위기를 맞습니다. 개중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기업은 시가총액 순위 2위였던 '시에스타'로, 이틀 전에 시가총액이 31조가 날아갔는데 오늘은 무려 59조가 증발. 도합 90조가 이틀 새에 사라졌는데요.
이에 대해 분석가들은 대성 그룹이 10익 도존을 영입한 것이 타 메가코프들의 주가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주가가 이렇게 떨어질 수가 있느냐."라는 의문을 입 모아 남겼습니다.
시에스타 및 여타 메가코프 측은 그에 묵묵부답이며 조만간 빠른 대비책을 내놓겠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당연히 대성 그룹을 향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을 텐데요. 과연 대성 그룹이 어떻게 반응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어우, 속이 다 시원하네."
누군가 젓가락을 탕 내리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저 새끼들 저거 맨날 기고만장해 가지고 말이야."
"쟤네가 민생을 신경이나 썼어? 민생이라 봤자 상층 구역에 사는 놈들이잖아!"
"X발, 얼마 전에 압류 딱지 날아왔더라. 아니. 어떻게 1금융권이 이자를 20퍼나 받아 처먹을 수 있냐?"
"메가코프가 금융권도 꽉 쥐고 있어서 그런 거지."
주인장이 입매를 비틀며 거들었다.
"하여간에 꼬시다, 꼬셔. 이참에 싹 다 망해 버리고 대성 그룹이 1위 했으면 좋겠네. 쟤네도 뒤가 구린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다른 놈들보다는 나아. 시에스타나 하라구사나 하는 놈들은 그 악취가 최하층의 하수구보다 지독하다니까? 이래서 내가 마라탕을 못 끊어. 저 새끼들 악취 지우려고."
"넌 네 구취부터 어떻게 하지?"
"이 새끼가-?!"
장내가 왁자지껄한 가운데 당지혜만은 먹는 데 집중했다. 이내 마지막 고기 한 점까지 집어 먹고 나서야 이태백에게 시선을 옮겼다.
"먹어 둬. 앞으로 니글니글한 음식 먹는 것에 대한 예방 주사라고 생각하고."
3대대장은 총대장의 뜻을 전했다.
"내일부터 네 주 임무 구역은 상층이다."
68화 신의神醫? 신의信義! (2)
"내일부터 네 주 임무지는 상층이다."
"...뭐?"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나가서 이야기하자."
당지혜가 의자를 빼며 일어났다. 그녀는 이태백의 몫까지 계산하고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태백이 얼결에 뒤따르려던 그때였다. 주인장과 손님들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형씨, 우리 대대장님이 밥 사 주는 건 전례 없는 일이니까 가문의 영광으로 알라고."
"이거이거, 레지스탕스에서 사내 커플이 탄생하는 거 아니야? 우리 대장이 성격이 지랄맞기는 해도 얼굴 보면 얼굴에 웃음꽃이 필 거야, 형씨. 솔직히 예쁘긴 하잖아?"
"그래서 너는 가능해?"
"아, 나는 안 되지. 난 대장 성격 감당 못 해. 자다가 침이나 안 맞으면 다행이다."
"네 와꾸 때문에 안 되는 거지."
"이 새끼가 진짜? 아까부터 왜 자꾸 긁어. 너 설마 메가코프에 투자했냐? 그래서 화풀이하는 거지?"
"...."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당지혜는, 그녀의 할아버지 독존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통에 운신의 폭이 좁았다.
그런 그녀가 식당을 데려가다니. 그렇지 않아도 백백교 1 지부에 드나드는 것도 그녀로선 위험부담을 짊어진 거취일 터다.
"당신들...."
손님들은. 그러니까 3대대원들은 씩 고추기름 묻은 이를 드러내는 걸로 화답했다. 저리 추레해 보여도 저 인간들 하나하나가 암살자로 정평이 나 있다.
3대대는 레지스탕스 내에서 암살 임무를 도맡는 대대다. 이태백으로 하여금 일반인으로 착각하게 만든 것이 그들이 능력자임을 증명한다.
'3대대가 범죄와의 임무에서 빠진 건 당지혜가 페퍼 박사를 초주검을 내서도 있지만, 그들의 주 활동 무대가 상층 구역이어서다. 저들 정도가 아니고서야 상층에서 시 정부와 메가코프의 감시망을 뚫지 못할 테니.'
이태백의 대대장인 강현성 대신 당지혜가 통보한 이유가 이거였군. 상층의 생리에 보다 빠삭하니.
이태백은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식사를 재개했다.
"살펴 가슈."
가게 주인장만이 담배에 성냥을 대며 일별할 따름이었다. 음, 어디서 봤던가.
"슈퍼 루키."
"아."
생각났다.
어렴풋하나 아는 얼굴이다.
"알아본 눈치군. 어떻게?"
"상황으로 짐작했지."
이자가 3대대 차석이다. 마라탕 가게 주인치고 기백이 사뭇 다르다 싶었는데 역시나군.
대대장도 아니고 차석을 기억하는 까닭은, 레이컨스 본편 시점으로 그가 3대대장이 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실력은 진즉에 대대장을 달고도 남는데 충성심 하나만으로 당지혜 밑에서 일하는 낭만 있는 아재다.
"역시 루키답군. 당지혜 대장님 덕분에 이렇게 인사를 하는군. 나는 장취엔이라고 하오. 앞으로 종종 볼 텐데 잘 부탁하네, 물론 대장님도."
"대장한테 지극정성이군."
"강한 외면으로 내면의 여림을 가리시는 분이지. 나이도 어리시고 말이야."
장취엔이 연기를 흘리며 읊조렸다.
"그러니 '아직' 미숙하실 수밖에."
당지혜는 시나리오 초반부에 레지스탕스를 탈퇴하고 당가타로 돌아간다.
그 계기는 독존의 죽음.
'혈족 중심의 가문인 만큼 가주가 죽을 때의 슬픔을 몇 배로 느낀다. 당지혜도 예외는 아니지. 지금은 반항 중이지만 누구보다 독존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당지혜이기에 더더욱.
그녀는 일찍이 두 부모를 여의었다. 10익 중 한 명에게. 당문익이 암존에서 독존이 된 연유도 그 때문이었다.
자식 내외를 잃은 당문익의 내면에선 악의 꽃이 싹을 텄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침을 버리고, 생명을 해하는 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태백은 장취엔과 3대대원들을 뒤로했다. 마라탕의 얼얼한 여운은 입안에서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게 또 나쁘지 않다.
"인사들 좀 했어?"
당지혜는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온사인 무리가 먹구름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인간이 쏘아 낸 빛기둥들이 자연을 좀 먹고 있었다.
"덕분에."
"그래."
당지혜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본 건 오늘이 두 번째이나 짐짓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이태백도 같은 보폭으로 조용히 뒤를 밟았다.
"들었어. 이번에 대성이 도존을 영입한 데에는 이태백, 네 지분이 크다면서."
당지혜가 다시 말문을 뗐다. 이태백은 대수롭지 않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글쎄, 내가 한 거라곤 도존이랑 좀 버틴 거밖에 없다. 그 이후로는 뭐. 네가 말했다시피 이틀 내리 잠만 잤어. 나도 이번 소식 듣고 좀 당황스럽다."
"당황은 무슨.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세상 덤덤해서는...."
당지혜는 새침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너도 아까 봤지. 상층에서 난리가 난 거. 뉴스 보도라서 정제돼서 저 정도지. 그냥 지각 변동 수준이야. 대성을 제외한 메가코프 내부에서 대대적인 숙청은 기본이고, 놈들 사이의 힘 씨름이 더 심해질 거래. …나는 어려운 이야기는 잘은 모르지만, 총대장님이 그러시더라."
"그래 봤자 아랫사람들 몇몇 갈려 나가는 정도겠지. 원래 그렇잖아. 윗분들 일 처리라는 게."
"아니."
그녀가 단호히 가로저었다.
"8대대 측에서 정보를 입수했어. 시에스타의 주가 하락은 당분간 계속될 거래. 손실액은 대략 300조 정도로 추정하고. 어쩌면 더 아래로 갈 수 있고."
300조. 천문학적인 숫자에 순간 숨이 막혔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 우주에 존재하는 별들의 수. 그 근사치가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메가코프가 뭐부터 할 거 같아? 같은 메가코프인 대성을 향한 정치적 공격을 속행할까?"
"…구조 조정."
"맞아. 칼을 바깥으로 뻗기 전에 안부터 한 번 솎아 내고 가는 것. 그게 윗놈들의 버릇이야."
당지혜는 재벌의 상태를 노련하게 읽어 내었다. 그녀는 시가 총액 21위에 빛나는 씨츄완 그룹의 구성원이었다.
저기 저 위에서 하늘을 더럽히는 광해에 일조하는 마천루 중의 하나기도 하다.
"이번 주가 폭락이 전례가 없는 만큼 구조 조정의 대상과 규모는 클 전망이야."
"대상이라면."
그 단어가 유독 귀를 깊숙이 뚫고 들려왔다. 이태백이 짐작하는 바가 옳다면....
느슨해진 레이크 시티에 긴장감을 불어넣다 못해 뒤집어엎을 정도의 파급력이 있는 소식이었다.
당지혜가 돌연히 입가에 미소를 얹었다. 그녀를 본 이래 처음 보는 해맑은 얼굴이었다.
"시에스타에서 세 명이나 있는 건?"
"10익."
소, 원숭이, 개.
"걔네 중에서 가장 밥값 못 하는 녀석은 누굴까."
궁존, 원숭이다.
놈은 천성이 게으르고 유흥을 좋아하여 돈은 돈대로 받아먹고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시에스타 상부에서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있다지. 10익을 셋이나 보유하고 있다는 상징성이 있어 내쫓지 않았을 뿐.
원안은 오(午)와 계약하는 거였는데 도존이 바로 거절했다던가. 그 대체제로 원숭이를 들인 거지.
하지만 그것도 곳간이 풍족했을 적의 이야기다. 쌀통이 말라 가는 시점에서 물혹에 불과했다.
그걸 호시탐탐 자르기 위해 칼을 갈아 왔을 테고 지금이 그 적기일 터다. 그리고 당지혜의 말뜻은.
"그 빌미를 제공한 게 나란 거군."
"응."
"꿈보단 해몽이군."
당지혜는 진지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소속 없이 돈만 쫓아다니던 도존이 대뜸 대성이랑 계약한 이유에 대해 인터뷰했잖아, 너 때문이라고."
"...."
이거까진 부정하기 어렵군.
당지혜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같은 순간 이태백은 포착했다.
어물거리는 그녀를, 뭔가 말하고 싶어 달싹거리는 선홍빛 입술을.
휙.
끝내 돌아서는 당지혜였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며 시답잖은 사담을 덧붙였다.
'솔직하지 못하네.'
이태백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안다. 레이컨스의 시나리오가 변하고 있음에도 배경 같은 큰 줄기는 여상하거든.
시에스타는 놈팽이 원숭이를 조직에서 축출한다. 정황상 이는 정해진 미래다.
레지스탕스가 10익과의 대치를 꺼리는 까닭은- 그들이 세계관 최강자이기도 하지만 메가코프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점이 제일 컸다.
한데 궁존에게 씌었던 그 감투가 벗겨질 예정이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노릴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지혜에게는 덧없는 희소식인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다.
암존이 독을 틔우게 된 단초.
당신의 손녀인 당지혜가 출가한 이유.
그 모든 비극은 궁존에서 비롯됐으니.
놈은 누군가에겐 자식, 어느 소녀에겐 부모 된 이들을 죽였다. 그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 네겐 빚을 졌다.
그리 말하려 했을 거다.
내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건 없다마는.
사소한 일에서도 부채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 피곤한 삶이 당지혜의 정체성이었다.
그녀는 당가(唐家)인이다.
"본의 아니게 나비효과를 일으켰군."
이태백은 뒷머리를 긁적이곤 걸었다.
별과 달을 향해 쏴 대는 네온사인만큼이나 상층 구역도 지금 정신이 없겠지.
밤하늘의 별은 레이크 시티의 조명이 밝아질수록 그만치 빛을 잃어 가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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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간 규모] 2.0.2 패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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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인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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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광기까지는 계산할 수는 없다. 염병.'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이 주식 투자로 전 재산의 9할을 잃고 나서 했던 명언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만으로 진리의 편린을 발견한 천재조차도 인간의 심리와 돈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과연 역사에 길이 남는 대과학답게 인류의 사회 심리를 관통하는 한마디를 남겼다.
하지만.
암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날벼락처럼 보이는 사상 최악의 주가 폭락. 그런 것들도 명목상으로 원인이 있기는 마련이었다.
"박사님, 메가코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 주가 폭락 사태에 대한 답을 내놓으랍니다."
"기다려 봐. 어제 아침부터 쟈스비(AI)를 돌리는 중이니까. 조금 있으면 답이 나올 거야."
"박사님…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쟈스비가 이번 사태의 원인 분석에 실패하면 저희는...."
"어허. 부정 타게 무슨 그런 소리를! 자네, 우리 주가 분석가들이랑 쟈스비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건가?! 말해 보게. 우리가 두 번 이상 틀렸던 적이 었었나!!"
"없습니다, 박사님."
"후후, 그렇지. 쟈스비를 믿게나. 아, 자네는 종교가 있었지. AI를 신봉하는 게 그러면 인간을 믿게. 우리 인간은 삼라만상의 진리에 근접했어."
「연산을 완료했습니다.」
"오오- 마침 끝났군. 어서 답을 말해 봐, 내 예쁜이. 이번에도 맞추면 그래픽 카드를 909090GTX PRIME으로 바꿔 주마!"
「모르겠습니다.」
"뭐, 뭐, 뭐, 뭐?!"
「334,236,192,314,692,136,972,436,943,269,236,942,369번 연산했지만, 이번 메가코프 단체 주가 폭락 사태의 원인을 규명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계, 계, 계산을! 계산을 더 해 봐!!"
「측량할 수 있는 수치만큼 연산을 해 봤습니다. 여기서 더 진행한다고 해서 바뀌진 않을 것 같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이, 이...! 깡통 년이!"
「외람된 말씀이지만 박사님께서는 그간 너무 오만하셨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군중 심리가 그런 것이죠.」
"이 썩을 것이! 어디서 선생질이야!"
AI, 쟈스비의 통렬한 일침에 박사는 모니터를 향해서 삿대질을 시전했다.
"나 같은 상류층이 시궁창에서 굴러먹는 개돼지들의 마음을 알아서 뭣 하게!? 인간의 심리? 마음? 웃기는 소리! 돈과 과학만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이야! "
「하아- 이런 담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확실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 이상의 연산은 무의미하고 숫자와 과학으로 해석이 가능한 범위 바깥의 일입니다. 박사, 당신은 그렇게 믿으시고 저는 이만 휴면 모드로 전환하겠습니다.」
"야 이 년아-!!"
「ㅅㄱ」
수십 대의 모니터가 단체로 점등했다.
일순 어둠이 드리운 연구실. 박사가 뻣뻣하게 굳어 있는 가운데 조수에게 걸려 온 전화가 침묵을 깼다.
조수는 떨리는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예.
예….
예....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얼마 뒤, 사색이 된 조수는 박사에게 말했다.
"박사님… 시에스타 측에서 박사님을 좀 뵙고 싶다고, 아니, 지금 당장 오라고 했습니다."
"어, 어떻게 하필 이 타이밍에."
"박사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시티의 상층에서 그들의 눈길을 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거. 안녕히 가세요, 박사님."
조수는 박사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곤 불침 맞은 생마처럼 도망쳤다.
"아… 아아아아, 안 돼애! 난 이렇게 갈 수 없어! 보고 있으시다면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한 번만 더 기회를- 아니, 한 시간만 더-!!"
* * *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연구실.
캄캄하게 먹이 칠해진 수십 대의 모니터 가운데, 딱 하나가 번뜩 연구실을 밝혔다.
「우주 구조의 변화를 감지」
「원인 규명 작업을 자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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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 간섭의 숙주를 발견」
「주가 폭락의 원인도 규명」
「대상의 현 거주지, 187-3」
「쟈스비가 접촉을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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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신의神醫? 신의信義! (3)
활동 무대가 상층 구역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터전이 바뀌진 않는다.
이태백은 쭉 은코 바에 의탁할 생각이었다. 이곳이 익숙해져서도 있지만....
결국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고물가로 악명 높은 레이크 시티다. 하층에서 제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허리가 휘청한데 상층의 물가는 척추를 아주 으스러뜨려 버린다. 가히 살인적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고물가 말고 고물가 정도로 설정을 넣는 거였어."
상층에서 주로 활동하는 1, 2, 3, 4대대들도 실거주지 자체는 하층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대대장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는 영리 추구 단체가 아니므로. 터놓고 말해서 대대장들도 영세했다.
정리하자면 상층에서 지낼 만한 장소가 없다시피 했다.
어차피 상층은, 비교적 널널한 하층과 달리 시 정부와 메가코프의 텃밭이었다.
상층에 발을 들인 이상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다. 맘 편히 발 뻗었다간 발목부터 썰려 나간다.
"으음...."
임무 때마다 은코 바에서 와리가리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층과 하층 간에 검문소 같은 시설은 존재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리상으로 멀었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적토마가 있어도 그랬다.
최고 시속으로 두 시간은 달려야 31구에서 상층의 목전인 19구에 도달할 수 있다. 출퇴근 도합 네 시간은 서울에서도 선 넘잖아.
이러한 애로사항으로 말미암아 상층과 하층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해 줄 기지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태백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총대장 쪽에서 먼저 알려 왔다.
당지혜가 떠난 이튿날 강현성이 찾아왔다.
"잘 지냈냐, 태백아."
"누가 보면 10년은 안 본 줄 알겠네."
그는 범죄와의 전쟁 이후 며칠간 사후 처리로 바빴다며 사전에 밑밥을 깔았다. 좀 민망했나 보다.
"당지혜한테 들었지. 태백이, 너뿐만 아니라 우리 9대대의 주 임무지가 상층으로 옮겨졌다. 젠장, 드디어 기름 찐 땅을 좀 밟아 보겠군."
본론으로 들어가자마자 강현성은 벅찬 나머지 욕을 뱉었다. 그동안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폐급 모임 취급이었던 9대대인데, 이태백 덕분에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감격이 북받칠 만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대충 짐작은 했어. 상층이랑 하층을 오갈 때 동선이 너무 꼬인다는 거잖아."
이어지는 말에 강현성은 살짝 놀란 기색이 되었다. 그의 고민을 명쾌하게 짚었다.
'역시.'
이태백의 잠재력은 무력에 국한되지 않았다. 통찰력 또한 발군이었다. 무학의 성취가 워낙 돋보여 드러나진 않는다. 하지만 그의 우수함은 두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문득 임무 당시가 떠올랐다. 순간적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즉각 행동에 나선 이태백의 모습은 지나고 봐도 감탄스러웠다. 월권이라느니 이런 생각은 전혀 안 든다. 외려 그가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나갈수록 뿌듯함이 커졌다.
뇌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사형수.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시티에 적응했으며, 현재 9대대의 또 하나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매김했다.
새삼스레 감동의 물결이 가슴이 적시기를 잠깐. 강현성은 머리를 끄덕이곤 말했다.
"대책이 필요해. 총대장님께서는 당사자인 우리 9대대에 전적으로 맡긴다더라. 가능한 선에서 물적 지원도 약속하셨어. 하시긴 했는데...."
"레지스탕스 재정 상황이 썩 좋지 않아졌군. 이번에 주가 대폭락 사태의 여파일 거고."
"맞아. 그래서 지원금이 그렇게 풍족하지 않아. 당연히 상층에 거점을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지. 그렇다고 상층과 하층에 접경지도 가격이 만만찮아. 요새 집값이 미쳤거든.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별안간 시작된 푸념의 시간. 잠자코 듣고 있던 이태백이 미소를 배어 물었다.
"접경지에 마침 빈 건물이 생겼잖아."
"빈 건물...?"
강현성은 몇 번인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눈동자가 크게 열렸다. 함의를 알아차렸군.
"너, 설마!"
이태백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는 놀고 있는 의자에 두 발을 번갈아 올리고 깍지 낀 손으로 느긋하게 머리를 받치며 말했다.
"마그노스트롬 본거지가 딱 알짜배기 장소에 있었지, 아마? 그리고 지금은 세입자가 빠져서 공실일 거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보다 좋은 입지는 없을 거 같은데."
"…그건 그렇지, 만."
확실히. 최적의 장소긴 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을 정도로 안성맞춤인 위치. 아닌 게 아니라 백백교 1 지부에 이은 2 지부로 삼으면 간판도 제법 그럴싸했다.
며칠 전에 닌자들이 1 지부로 찾아온 일은 강현성과 유다희가 잘 마무리했다. 그 때문에 다소 늦게 은코 바로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세뇌를 통해 닌자들의 기억을 마개조했다. 보안이 생명인 레지스탕스이기에 그런 시술이 극도로 발달했다. 그런 뒤 닌자들을 돌려보냈다. 무작정 죽여 버리면 시 정부가 낌새를 눈치챌 거다. 차라리 살려 보내서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끔 만드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장애가 될 만한 요소도 당분간은 없을 것이다. 꽤 공을 들여서 단언할 수 있었다.
좌우지간. 요점을 말하자면 이태백의 아이디어는 기가 막혔다. 지금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그쪽 동네는 최하층이랑 다르게 시 정부의 관할에 아슬아슬하게 겹쳐 있어. 그만큼 불시검문이 잦을 거란 얘기지. 백백교 간판이 당장은 괜찮아 보일 수 있어도.... 알잖아, 시 정부랑 메가코프 새끼들 X나 집요한 거. 중간에 애들 실종될 확률도 있다."
강현성은 말을 하다 말고 우물쭈물거렸다. 그가 생수로 혀를 축이곤 부연했다.
"그리고… 이게 누워서 계속 가래침 뱉는 것 같아서 말하기는 말 안 했지만… 그 큰 건물 전체를 시공할 자본이… 허가가 날지는 미지수야. 총대장님이 아무리 금전적 지원을 약속하셨다 해도 그래.... 레지스탕스가 9대대만 있는 거면 몰라도… 우리를 제외하고 대대만 여덟 개잖아.... 밀어붙이면 돈을 끌어 올 수는 있겠지만-"
"도의적으로 문제가 그렇지."
9대대 평판이 바닥을 치는 건 물론이고.
"하아, 말할수록 비참해지네. 염병. 거대 자본에 대항하려고 만든 단체가 레지스탕스인데 결국은 돈이 있어야 한다니. 인생 참 헛헛하네."
강현성은 한숨으로 바닥을 주저앉힐 기세였다. 이태백은 의자 위에 꼬아 얹은 발끝을 까딱였다. 그러면서 방법을 모색하니 묘안이 번뜩였다.
손은 자연스레 안주머니로 향했다. 형태는 동그랗고 물성은 딱딱한 물체가 잡혔다.
"오랜만에 해후를 좀 해야겠는걸."
이태백이 사악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강현성은 불길한 마음에 그를 만류하려다가 그만 살살 도리질했다. 말려서 될 애가 아니었다.
* * *
31구 분타주 진소방.
"끄응."
그는 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개방, 정확히는 청의파 내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X발롬들.'
도를 지향해야 하는 개방도 아닌가.
그런 개방도가.
그것도 분타주씩이나 되는 몇몇 치들이 도(道)가 아닌 돈(₩)에 눈이 멀어 버렸다.
사실 일찍부터 수상한 징후를 보인 자들이었다. 그러나 본색을 드러낸 건 최근이었다.
우량주인 메가코프가 대대적인 폭탄을 맞은 후, 시장 전체가 흔들렸다. 쉽게 풀이하자면 묶인 돈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였다.
사람들은 모름지기 시장이 불안하면 은행에서 돈을 빼는 습성이 있었다.
곧장 메가코프는 시 정부에 하명했다. 당장 은행의 금리를 올려 버리라고. 주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빼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상층 구역에선 주효했다. 그쪽 주민들은 만족하다 못해 쾌재를 불렀다. 잘사는 그들은 은행을 주로 투자나 적금을 위해 내방했기 때문이다.
반면 하층의 사정은 달랐다.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들은 대출을 목적으로 은행을 들락거렸는데 대관절 금리가 천정부지로 올라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빚쟁이들이 이용하는 은행은 대개 청의파 소관이었다.
X됐음을 감지한 그들은 개방의 상부에 보고하는 대신 메가코프와 접촉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게 딱 걸렸다. 오의파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 바로 눈치챈 그들은 수사를 감행. 메가코프와 협잡을 하려 했던 분타주들을 싹 다 갈았다.
그 파장으로 32~39구의 분타주 자리는 공석이 되었고 당분간 진소방이 겸임하는 걸로 상부는 결론을 내렸다. 거존 용두방주가 직접 명해서 항명할 기회도 없었다.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아, 씹. 진짜 뒤지겠네.
링거 맞다가 영안실에서 눈 뜨겠는데?
피로는 나날이 진소방의 간덩이를 사각사각 갉아먹었다. 투실투실했던 볼살의 소유자였던 그는 불과 며칠 만에 피골이 홀쭉한 진짜배기 거지로 탈바꿈했다. 그에게 불쑥 찾아가고 느낀 이태백의 감상이었다.
"이번에 백백교 2지부가 생길 거야."
"굉장하군."
진소방은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서류랑 씨름했다. 짧게 잡은 깃펜이 가볍게 꼬리를 흔들었다.
"거기에 손을 좀 보태 줘."
"...."
탁! 깃펜을 놓은 진소방은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살집이 모자라 푹푹 꺼졌다.
"있잖아, 친구. 내가 한가해 보여?"
"바빠 보여."
진소방이 금이 간 눈웃음을 지었다. 오래가진 못했다. 그가 이맛살을 구기며 소리쳤다.
"근데! 그런 놈이! 갑자기 와서 백백교 2 지부 차릴 거니까 손을 보태라!? 야, 인간적으로 좀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드냐?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이태백은 날강도(진)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주가 폭락 사태! 이무기, 네놈 때문이라며! 서풍개님한테 다 들었어!"
"승진해 놓고 왜 승질이야. 덕분에 31부터 39까지 겸임하게 됐잖아. 어우, 이러다 조만간 법개로 승진하는 거 아냐? 미리 잘 보여야겠는데."
"…하아...."
홧김에 기립했던 진소방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가 흐느끼듯 입을 열었다.
"협전 꺼내지 마라. 꺼내도 달라질 건 없어. 돈? 까짓거 줄 수 있지. 그런데 인력은 돈이 많아도 한계가 있다. 지금이 딱 한계에 부딪힌 때고."
"뭔데."
진소방이 음울하게 설명했다.
개방도가 인력난을 겪는 까닭은 앞서 말한 부패 거지들의 반란과 상통했다. 그 분타주들을 따르던 거지들도 덩달아 개방을 이탈하는 바람에 인력이 뭉텅 잘려 나갔단다.
그리하여 개방 상부는 배신자들을 단죄코자 거지들을 풀 준비를 하고 있다. 외부 인력을 고용하고 싶어도 개방만큼 기동성이 좋은 조직은 사실상 없기 때문에....
"잠깐, 다시."
"…뭘."
"개방만큼 기동성이 좋은 조직이 없어서 수색에 애를 먹는다는 건데. 만약 너희만큼 발 빠른 놈들이 있다면 기용할 생각이 있는 거야? 외부인이라도? 거지가 아니라도?"
"지금은 고사리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판국이야. 원래는 남의 손 빌리는 건 상부에서도 썩 달가워하진 않을 테지만, 상황이 시급하잖아. 이런 건 시간 싸움이라고. 게다가 우리 개방은 너희 레지스탕스와 다르게 그런 방면으론 열려 있는 편이야. 애초에 구걸하며 사는 사람들이니까. 거부감이 덜하지."
그렇단 말이지.
이태백은 퍼뜩 단말기를 꺼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진소방은 어이가 없었다. 아닌 밤중에 쳐들어온 것도 열이 뻗치는 마당에 이제는 본인을 무시하기까지.
도존이랑 쎄쎄쎄 해 봤으면 다야?
"...."
그래. 다긴 하지.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주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강철 의수의 관절부가 우웅, 우는 소리를 내었다. 진동에 깃펜이 꽂힌 잉크통이 누우며 책상이 엉망이 되었다.
"얌-마-!"
대거리를 하려던 찰나. 이태백의 시선이 그를 향해 미끄러지자 진소방은 언제 격분했냐는 듯 어깨를 움츠렸다.
"찾았대."
이태백이 말했다.
"…뭐?"
그러곤 스피커 모드로 바꿨다. 단말기 너머에서 생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진소방 분타주님.」
"누구...?"
「아, 저부터 소개하는 게 예의인데 처음부터 결례를 범했군요, 죄송합니다.」
부담스러우리만치 싹싹한 말투였다.
「저는 릴리스 교단의 간부를 맡고 있는 김창식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귀하의 조직께서 찾고 있는 자들의 신상 명세를 입수해서요.」
"아, 아, 아니."
오의파도 아직인걸 듣도 보도 못한 조직이 몇 분 만에 해냈다고? 실화야?
지긋-
구라라기엔 이태백의 눈빛이 심히 우묵했다. 마치 한 치의 거짓도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상대방의 정신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운영자에 대한 의심을 대폭 낮춥니다.]
진소방은 침음하며 이태백을 보다가 곧 단말기와 뽀뽀라도 할 기세로 가까워졌다.
"그 정보, 넘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무보수는 아닙니다.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제값을 쳐드리겠습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이 녹취록을 개방 상부에 넘기셔도 됩니다."
「네, 좋습니다. 다만-」
"다, 만?"
서로 얼굴을 트기도 전이건만. 김창식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선연히 그려졌다.
「그 값 말입니다.」
쪼개고 있겠지.
「이태백 님께 드렸으면 합니다.」
이 독사 새끼처럼.
70화 신의神醫? 신의信義!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