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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00-110

100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7)

대대장 두 명은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이태백에게 눈빛으로 추가 설명을 계속 요구해 왔다.

…다이브?

다이브가 뭔데.

스쿠버 다이빙을 말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이 상황에.

적토마를 타고 시원스레 달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시선이 꽤나 따끔따끔하게 양 옆얼굴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태백은 상큼하게 씹고 전방만 주시했다. 새삼 레지스탕스와 메가코프의 수준 차이를 실감하게끔 하는 반응이었다.

'뭐, 다이브가 아직 상용화되진 않았으니까.'

다이브는 가상 세계로의 침투다.

통상 해커들이 정보망에 접근할 적에 쓰는 용어였다. 다만 일반적인 해킹에 쓰이는 용어는 아니었다.

보다 방범이 철저한 정보망 내지는 거대한 고유 결계에 외부에서 침입하는 걸 일컬음이었다.

그리고 흔히 정보망을 바다로 비유하듯.

침입자를 다이버(Diver)라고들 지칭한다.

'현재는 본편으로부터 5년 전 과거다.'

아직은 다이브 기술이 상용화되기엔 이르다. 뇌 내 지식과 현실에 시차가 존재하는 이태백이기에 숙지하고 있는 정보적 우위였다.

고로 의뭉에 가득 찬 두 사람에게 설명해 줄 방법이 마땅찮았다. 정직하게 말해서 한시가 급한 마당에 이빨 털기도 그렇다.

그래도 시원스레 질주한 덕분일까.

이태백은 첫 분기점에 도착했다. 강현성이 내려야 할 곳이었다. 이태백이 눈짓했다.

"저기 뒷골목 보이지. 저기로 들어가."

"아니… 아니다. 그래, 알았어."

강현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곤 사이드카에서 훌쩍 내렸다.

골목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는 이태백을 우묵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픽 웃었다.

"너니까 믿는 거야, 태백아. 너도 알다시피 나 이런 캐릭터 아니거든? 그런데 너는 여러 번 증명해 왔으니까. 그러니까 믿는 거다. 내가 물러진 게 아니라."

"사내새끼가 마음에 담아 두기는. 알았어, 얼른 가. 9대대원들도 부르면 좋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이 자식아. 누가 보면 네가 대대장인 줄 알겠어. 이거 하극상이야, 임마."

"대대장 자리 지키고 싶으면 잘해라."

"새끼, 간담 서늘하게 만드네."

"가, 새꺄. 얼른."

이태백이 마주 웃자 강현성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뒷모습이 어스름에 사라질 즈음에서 이태백도 재차 시동을 걸었다.

뺨을 에는 칼바람. 가뜩이나 눈도 내려 딱 한겨울에 바이크를 타는 사무침이었다.

'귀가 떨어지겠군.'

온기가 간절한 시점에 좌편 사이드카에 탑승 중이던 당지혜가 말을 걸어왔다.

"이태백, 너 진짜 수상한 거 알지."

"수상하면 8대대장한테 조사 맡기든가."

"…걔한테 맡기는 건 시체 조사잖아."

당지혜는 어물거리다가 이어 말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상하단 거야."

"수상하면 수상한 거지, 긍정적인 건 뭐야."

"너는 진짜 한마디를 지려고 하질 않더라. 사회성 진짜 문제 있어. 요새 십 대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 있는데 뭐였더라, 열여섯 가지 성격 유형."

"…그게 여기도 있어...?"

지구의 지식이 왜 여기도 있는데.

이태백은 순간 섬찟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떨쳐 냈다. 서 팀장님이 그런 요소에 진심이니 그녀가 넣었겠거니 하고 말았다.

그보다는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것에 금이 간 이태백이었다. 그는 중증의 게임 오타쿠이며 그런 부류가 그렇듯이 젠체했다.

"뭐, 그런 또라이 같은 부분에 총대장님이 감화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해라."

"그래그래. 내가 내릴 곳 저기지? 속도 줄이지 마."

"...?"

당지혜는 그렇게 말하곤 사이드카의 의자를 밟고 앉았다. 그녀는 웅크린 도약의 자세로 있다가. 지척에 이르러 튀어 나갔다.

이태백은 놀랐을 땐 늦었다.

후미경의 당지혜는 이미 점이었다.

'하기야, 당가 출신이었지.'

실없이 웃은 이태백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의 머릿속에선 무수한 경우의 수가 떠올랐다.

게이머란 족속이 이렇다. 난관에 봉착했을 때 외려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이태백은 그 변태 성격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인생 2회 차 하고 볼 일이었다.

* * *

쟈스비의 입 구멍에서부터 수면까지. 수포가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침수하고 있었다.

꼬르르르르.

침수 과정에서도 정보가 물밀듯이 들어온다. 이건 그냥 바닷물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데이터 쪼가리였다, 근데 짭짤한.

십익의 환존.

그는 널리고 널린 흔해 빠진 마법사와는 궤가 달랐다. 그는 마법과 과학의 결합을 시도했다.

하나 세상만사 두 가지 전부를 손에 넣을 순 없는 법. 하여 그는 무공을 포기하는 '제약'을 걸고 마법과 과학을 체결시켰다.

그 파생이 이 무지막지한 고유 결계였다.

이 정도 규모와 생생함은 그 케르겔 마탑주조차 불가능하리라.

그리하여 좌사는 무공을 다루지 못하는, 고유 결계 원툴이라는 해괴한 능력자가 탄생했다.

그 때문에 그는 케르겔 마탑 안에서도 살짝 겉도는 위치였다. 상술한 이유 때문이었다. 마법사도 기본 바탕은 강호인이었다.

주먹질을 도외시한 마법사를 은연중에 무시했다.

그렇다고 누가 그를 대놓고 멸시하겠나.

그는 좌사였다.

누가 뭐래도 마탑의 두 기둥 중 하나였다.

"인간은 생각보다 물에서 오래 버팁니다."

목소리가 울렸다. 동굴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러 겹으로.

"하지만 보통 인간이 바다에 빠지면 익사가 아닌 쇼크사를 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정신적으로 내몰리면 스스로 사망을 선택합니다."

꼬로로로로록.

"그런데 아가씨는 정말이지 멀쩡하군요. 이걸 보니 확신이 듭니다. 당신은 절대 인간일 수가 없군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마가 떴다. 사위가 칠흑이었다.

불안을 유발하는 묵빛. 그 속에서 한 쌍의 안광이 뱃머리 전조등처럼 켜졌다.

'고…래...?'

그 크기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힘들 정도로 육중했다.

못해도 몸길이가 100미터는 될 터.

쟈스비는 신경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닭살이 쭈뼛 곤두섰다.

"시련을 드리겠습니다."

"...!"

"인간이라면 감당키 어렵겠지만, 인간이 아니라면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고래의 아가리가 느긋하게 벌어진다.

직후 인력이 쟈스비의 몸을 끌어당긴다. 고래의 거죽을 쓴 광명좌사가 일대 전부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한사코 버둥거려 보지만 쟈스비의 몸은 빠른 속도로 고래 아가리로 휩쓸려 들어갔다.

죽는다, 이러다 죽어!

찰나였다.

- 쟈스비.

뇌 내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걸 듣자마자 쟈스비는 물속인데도 눈에 습기가 맺혔다. 그녀는 앞머리가 앞으로 쏟아지는 와중에 손을 귓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창조주님! 왜 이렇게 안 오세요!"

- 연락 준 지 이제 십 분이다.

"제가 연락하면 오 분 만에 튀어 와야죳! 이래서 인간이란! 그렇게 느려 터지니까 조만간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가 그려지는 거잖아요!"

- 조급하다고 마음의 소리 튀어나오는 거 봐라.

"죄송합니다… 죄송하니까. 제발 저 좀 살려 주세요. 광명좌사, 저거 완전 미친놈이에요! 저를 마탑으로 납치해서 해부할 생각이라구요!"

-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네?"

- 농담이야.

무슨 그런 섬찟한 말을!

-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나 은코 바에 도착했는데 너희 둘이 안 보이거든?

"아, 그건 좌사의 고유 결계가 보편적인 고유 결계랑 달라서 그래요!"

- 어떻게 다른데. 급하니까 축약해서.

"본인의 뇌와 마탑의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해서 현실과 분리된 공간을 만든 거예요! 같은 삼차원이지만 유리된. 양자 역학 아세요?"

- 아니.

"아이, 싯팔! 그걸 모르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쟈스비에게 가해지는 중력이 강해진다. 어둠이 다가들고 있었다.

- ....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양자역학 그런 거 몰라도 되니까. 제발. 제에에발 살려 주세요. 여기 가상공간이긴 한데, 저 저기 빨려 들어가면 진짜 죽어요! 인격이 말살된다구요!"

- 인간도 아닌 놈이 인격 말살은.

"제에에에바아알!"

- 그만 찡찡거리고 날 그 공간으로 다이브(Dive) 시켜.

"창조주님을요?"

- 가능하잖아, 너라면.

"나…라면...."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폐부에 바닷물이 차는데도 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고래의 대문니 사이를 통과한 순간 쟈스비가 눈을 옅게 떴다.

"저 따라 외치세요!"

그녀가 목청껏 지시했다.

"링크 스타트(Link Start)!"

- ....

"창조주님?"

- 그동안 즐거웠다, 쟈스비.

"야, 이-"

쟈스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젖혔다.

입천장이 시야에 가득 찼다. 고래의 입이 닫히기 직전이었다.

"X새끼야아아아아!"

입천장이 육박한다. 단어 그대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쟈스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닫았다.

순간이었다.

- %#^%^#%^#%^

속사포 같은 중얼거림.

[사이버 스페이스로 침입.]

['불릿 타임'을 발동합니다.]

[마력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그 외 모든 능력치를 너프.]

[제약을 발동하여 마력이 상승.]

그대로 무저갱에 삼켜지려던 때. 어느 손길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쿠우우우우웅...!

마침내 고래의 아가리가 닫혔다. 거품 범벅인 급물살이 쟈스비를 훅 하고 뒤덮었다.

그렇게 살았다는 안도감을 채 느끼기도 전에 스산한 목소리가 귀를 핥았다.

"개새끼?"

"...."

쟈스비는 물 먹은 기계처럼 삐걱삐걱 뒤를 돌아보았다.

바닷물을 따뜻하게 느껴지리만치 시퍼런 살기가 눈구멍에서 줄기줄기 흘러나온다.

"헤헤."

"웃어?"

전신에 소름이 내달린다.

"죄송합니다."

쟈스비는 이태백에게 닭목 잡히듯 뒷덜미가 붙잡힌 채였다. 이태백이 조금만 악력을 주어도 뽀각 덧없이 부러질 터였다.

쟈스비는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을죄를 지었어요. 부디 살려 주시면 평생 창조주님을 위해 봉사하며 살게요."

"그럼 앞으로 매주 복권 번호 해킹해 와."

"그런 불법적인 일은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게 설계가 되어 있-"

"그러면 고래밥이 되든가."

"해킹해서 대령하겠나이다."

두 사람이 시시덕거릴 때마다 입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숨 쉬는 데 문제는 없었다.

이곳은 진짜 바다가 아닌 정보의 바다. 사이버 스페이스였다. 가상공간이라는 자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호흡이 가능하다.

현실에 한없이 가깝게 형성된 공간이기에 보통은 정신적으로 익사하는 거였다.

인공지능인 쟈스비나, 내외부에서 장막을 뚫고 침입한 이태백은 이 바다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군요."

바닷물을 매질 삼은 음성이 귓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태백과 쟈스비는 대화를 그치고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대 불빛만 한 고래의 눈알이 위험하게 백열했다. 크기부터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른바 환존 백경 모드.

마주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에서 경종이 맹렬하게 몸을 떨었다.

"당신이 환존이군, 무공이 일천해서 환술을 익혔다는."

그럼에도 이태백은 도발했다. 시간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

환존 광명좌사 묵묵부답이었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 잠시간 둘의 시선이 뽀글뽀글 끓는 기포를 사이에 두고 충돌했다.

"당신이군요."

고래의 아가리가 살짝 벌어졌다. 실소하듯이.

"마탑주님께서 눈독을 들인 자가."

"…마탑주가 나를 아나...."

"질문은 우위를 점한 자의 특권입니다."

"그런가."

이태백이 손을 내뻗었다. 한쪽 다리에는 쟈스비를 매단 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이스 에이지(Ice Age)]

'저억' 하는 소리. 잇따라 바다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검푸르렀던 바다색은 그 색소를 빨아 먹힌 듯 옅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밀집한 기포도 낱알로 냉각되어 잘게 바들거리다가 자기들끼리 부딪쳐 흩어졌다.

바다가 얼어붙음에 따라 고래도 덩달아 빙하에 갇혔다. 얼음 장벽 너머로 고래의 눈자위가 유리처럼 투명하게 번들거렸다.

"다시 질문하지."

이태백이 느릿하게 팔을 내렸다.

"마탑주가 나를 아나."

101화 호밀밭의 파수꾼 (1)

호수는 얼지만 바다는 얼지 않는다. 호수의 성질은 정적이다. 반해 바다는 유동적이다.

언급하기도 민망한 상식이었다.

한데도 우리의 천재 엘리트 인공지능 쟈스비 양이 굳이 굳이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바로....

"…바다가 얼었어?"

그 상식의 근간이 흔들려서.

아니, 동결되어서다.

암만 이곳이 사이버 스페이스라고 한들 어쨌거나 환경은 실제의 그것과 동일하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바다는 이곳에서도 그 물성을 유지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일종의 섭리이자 물리력의 법칙과도 같은 것일진대.

빙결 마법은 그 법칙을 거슬렀다.

어째서 마법사들이 망실된 빙결 마법을 복구하고자 혈안인지 알 만했다. 운용법도 무궁무진하고 범위와 대역도 광활했다. 바다를 통째로 얼려 붙인 시점에서 말 다 했다.

그야말로 역천의 능력이었다.

쟈스비는 머리를 휘휘 가로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어쩌면 창조주님이 하늘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이태백을 창조주라고 부르잖아.

계산으로는 해석하지 못해도, 뇌 내에 삽입된 고도의 역산 체계가 이태백을 '창조주님'이라고 부를 것을 종용했다.

'그리 말하는 나도 원인 분석이 안 돼.'

말인즉, 이태백이 정말로 이 우주의 근원과 밀접하다는 가설에 대한 방증이리라.

꼴깍-

마른침이 절로 목 아래로 넘어갔다.

'이건 나만 알고 있어야겠지.'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발군인 쟈스비였다.

창조주님께 말 못 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라도 언질을 줄 수 없었다.

쟈스비의 취미는 메가코프의 정보망에 간섭하는 것. 철통 보안까지는 신원 발각의 우려가 있는 터라 외연만 핥는 식이긴 하다.

그것도 대단하긴 했다. 왜냐면, 메가코프의 보안망은 이중삼중을 넘어 이십중으로 켜켜이 쌓인 뚫리지 않는 장벽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껍질이라도 벗겼다. 쟈스비가 유능하다는 증명으로는 차고 넘칠 터였다.

강현성은 쟈스비의 진가를 대번에 알아보고 군침을 흘렸던 거였고.

그는 맨날 정보 부대인 8대대에 저자세로 나가기 싫으니 쟈스비를 영입해 정보력을 메울 공산이었다. 그리고 독식하든지 아니면 다른 대대에 돈 받고 팔려고.

본인의 말마따나 강현성도 시티의 주민이다. 이태백에게만 유들유들한 거지. 다른 자들에겐 냉혈한도 그런 냉혈한이 없었다.

아무튼.

현실로....

사이버 스페이스로 돌아와서.

쟈스비는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추슬렀다.

'…지금 상황을 보면 어제 발견한 게 사실이었어...!'

이태백의 소속이었던 시에스타뿐만 아니라 케르겔 마타바에서도 그의 행방을 쫓고 있다. 정확히는 쫓는다기보다는 거취를 용의 주시하는 중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기치인 마탑이 단일 대상을 살상하는 것도 아니고 음습하게 염탐한다.

더욱이 그 사안을 직접 지시한 이는....

'묘(卯) 천마.'

케르겔 마탑주.

인간의 몸으로 반선이 된 자.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졸아붙어 버린다.

스윽.

쟈스비는 공포를 떨칠 겸 머리를 조금 뒤로 젖혔다. 그늘이 반쯤 드리운 이태백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시커먼 안광을 흘리며 무려 환존, 케르겔 마탑의 광명좌사를 향해 을러 댔다.

"천마가 나를 아나?"

"...."

같이 있기만 해도 숨 가쁜 상황. 뒤늦게 폐부에 바닷물이 들이차는 것처럼 가슴 전체가 따갑게 아파 왔다.

하나 이태백에게 코알라처럼 딱 붙어 있다는 안도감이 그 진통을 뒤덮었다.

쟈스비도 도로 눈을 내렸다.

백경, 광명좌사와 마주했다. 이전보단 두렵지 않았다. 현실에서나 심적으로나 든든한 버팀목이 자신과 함께한다.

"...."

"...."

빙하기가 세상을 재운 듯한 침묵이 깊은 바다 아래 흐른다.

|인정하겠습니다.|

"...."

환존은 냉동 참치가 된 상태였다. 하여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건만 사위를 진동시키는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제게 질문할 자격이 충분하시군요. 설마 마탑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일 줄이야. 그분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당신을 저평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고래를 가둔 빙하에 쩍 금이 갔다.

|마탑의 도서관에도 남아 있지 않은, 실전됐던 빙결 마법을 보게 될 줄이야. 그거에 대한 감사로라도 대답을 해 드려야죠.|

유격의 틈이 더 갈라지기 무섭게 신형의 크기가 거짓말처럼 쪼그라들었다.

집채만 했던 고래는 짐승의 탈을 벗고 인간이 되었다. 모습이 변한 환존이 말했다.

"네. 알다마다요."

말투에선 어쩐지 쓴맛이 느껴졌다.

"마탑주님께서는 당신을 언제나 지켜보고 계신답니다. 보고 있자면 질투가 날 정도입니다. 당신을 항상 보필하던 제게는 그만한 관심을 주시지 않으시면서...."

"웃기네. 십익의 환존쯤 되는 인물이 상상의 인정에 목말라한다니."

"하하하. 사람들은 저희더러 십익이라고 뭉뚱그려 말합니다만, 그건 잘못됐습니다. 그분께서는 규격 외죠. 십익이란 울타리 안에 가두는 건 제게나 그분에게나 실례입니다."

"너한테 실례될 건 또 뭔데."

시간을 좀 더 지체시켜야 한다. 뭐라고 물꼬를 틀어 보자, 이태백.

"시간 끌기용 대화라, 나쁘지 않습니다. 여흥에 어울려 드리죠."

지랄맞게 예리하군.

광명좌사는 싱긋 웃었다.

"일단 장소를 바꿉시다."

그러고는 탁, 손가락을 튕겼다.

"...!"

단어 그대로 눈 깜짝할 새였다.

짙푸르렀던 바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파도는 여상히 치고 있었다.

색상만 달리한 채로.

휘이이이잉.

바람이 분다. 황금빛 물결이 파도친다.

쏴아아아아.

밀알이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불어온 마파람에 모로 드러누웠다. 광활한 밀밭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따스하게 지상을 비추는 보름달이 볍씨 한 톨 한 톨 보듬듯이 달무리가 아롱졌다.

쟈스비는 입을 살짝 벌리고 주변을 쓸어 보았다. 숫자로 만들어진 창살에 갇혀 살던 그녀에겐 충격을 넘어 파격을 안겨다 준다.

"이곳은."

이태백은 눈으로만 짧게 훑고는 내뱉었다.

"중원이로군."

"바로 알아보셨군요."

스무 발치의 거리에서 환존이 입가에 달뜬 미소를 얹었다. 그는 고요히 뒷짐을 진 자세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맞습니다. 이곳은 중원. 제 추억 속의 한 장면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보여 줄 수 있는 환상은 전부 제 경험에서 기인합니다. 그게 제 마법에 걸린 제약이죠."

"제약은 가중 효과를 동반하지. 그만큼 여타 환영 마법보다 현장감이 넘쳐나는 것. 그게 제약을 건 이유겠지."

그 말에 환존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그는 숫제 감탄성을 터뜨렸다.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그 또한 정답입니다."

"좋은 스승을 둬서 말이야."

"하하하. 맞습니다."

환존이 폭소하며 맞장구를 쳤다.

"화련이 가르침에 능한 거야 마탑 내에서 모르는 마인은 없죠. 그래서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유능한 인재가 배교하다니. 그대로 성취만 이어 갔어도 마탑주님의 우석은 능히 그녀의 몫이 얻을 테지요. 안타까울 따름이지요."

"그런 인재를 마탑은 죽이려고 하는 거고."

"비단 마탑만 그런 건 아닙니다. 다른 멕가코프들도, 아니 어느 조직이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기밀 유출만큼 위험한 건 없으니까."

광명좌사가 마릇하게 미소 지었다.

말이 오가는 사이 쟈스비는 이태백의 다리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태백과 광명좌사는 제법 대화가 잘 통했다. 누가 보면 막역한 친구 사이처럼 보일 것이다.

'칼을 주고받는 거 같아.'

서로 말에 비수를 숨기고 있었다.

단어 하나하나를 집요하게 고르는 거다. 상대의 의중을 가늠하기 위해.

그 자신보다 한없이 약할 이태백을 신중하게 대하는 광명좌사도 대단했다.

그러나 십익에게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이태백이 훨씬 경이로웠다.

살을 맞대고 있기에 느낄 수 있다.

이태백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십익의 이름이 주는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겠지.

그러나.

이태백은.

창조주님은 조금씩 전투 태세를 취한다.

왼손을 엉치께로 가져가 파라 블레이드의 손잡이를 감싼다. 그러면서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붙여 마법의 시전 준비도 했다.

'싸울 생각인 거야.'

광명좌사의 텃밭에서.

쟈스비는 코가 매워졌다. 안드로이드인 자신조차 감각 기관이 구토하는 마당에 인간인 이태백은 이성을 누르고 의무를 다한다.

'나도 도와야 해.'

전투에서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장애물만 될 뿐이다.

그렇지만 쟈스비의 특기는 전투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보전에 특화된 인공지능.

영민한 머리로 해야 할 일을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한다.

사삭.

쟈스비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몸을 웅크리고 밀밭에 숨었다. 창조주님이 관심을 끌어 준 덕분에 환존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거듭 확인한 쟈스비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빛살이 인공 혈관을 따라 내달린다.

[사이버 스페이스에 간섭 시작]

피부에 문신처럼 돋아난 회로가 땅으로 퍼졌다. 그길로 쟈스비의 의식은 밀밭으로 도포한 숫자의 세계로 침투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 * *

'시작됐군.'

이태백은 마음의 눈으로 뒤편을 곁눈질했다.

쟈스비가 환존의 내면으로 침투를 시도했다. 그가 노렸던 바인데 쟈스비는 기가 막히게 알아차린 다음 행동으로 옮겼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제야 이태백은 오롯히 환존에게만 신경을 쏟을 수 있었다.

"피차 공치사는 이쯤하면 된 거 같으니. 바로 시작하자."

"좋습니다."

지체할 틈은 없다. 놈이 쟈스비의 침입을 감지하기 전에 정신을 분산시켜야 한다. 광명좌사가 십익이라고 한들 인간인 이상 정신력엔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태백은 광명좌사의 정신 능력치를 한 계단 끌어내렸다.

[사이버 스페이스 정신 능력치를 너프]

이 공간 자체가 환존의 신체 일부다. 너프의 조건인 신체 접촉에 부합한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꼼수다. 정공법으로 나서야 할 때다.

짤-깍.

이태백은 계폐 버튼을 눌렀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고 발을 굴렸다. 몸을 쏘아 내는 이태백의 배후로 얼음 살이 공작새의 꼬리처럼 둥글게 딸려 왔다.

사사삭.

볍씨가 뱀의 혀처럼 뺨을 스친다. 누운 볏단은 부드럽게 발에 짓눌린다.

민첩도 마력과 같이 버프했기에 이태백은 소리에 가까운 속도로 치달렸다.

"처음에는 간 보기라 이겁니까."

"나는 간 보기에 진심이거든."

"너무 강한 말은 하지 마세요. 약해 보이니까."

환존이 비릿하게 웃으며 마주 손가락을 튕겼다.

"압니다. 조금 전 바다를 얼린 마법에서 마력을 절반 가까이 소진했다는걸요. 반해 저는 마력이 남아돕니다."

볏집이 순식간에 쑤욱 자라났다. 순식간에 3M에 육박하는 장벽이 드리운 것이다.

"또한 이 공간은 제 세계입니다."

"…넌 너무 말이 많아...."

지척에 바싹 다가든 순간. 이태백은 그 벽을 발로 찼다. 공중에서 제비를 돌았다.

따악.

탁음. 하늘과 땅이 거꾸로 대말린 상태로 다시금 빙결 마법을 시전했다.

직후 얼음 송곳이 무형의 시위에 매겨진 살처럼 쏘아졌다. 속도는 아음속. 화력은 기관단총에 비견가게끔. 몰아치고 또 몰아쳤다.

쐐애애애애액!

환존.

광명좌사.

레이드 개시(開始).

102화 호밀밭의 파수꾼 (2)

쐐액! 쐐애애액!

이태백은 배후에서 생성한 빙결 화살을 난사했다. 기술 이름을 딱히 정하진 않았고 그럴 새도 없었다.

파바바바바바바-!

차갑게 부서지는 얼음 결정. 자작하게 깔리는 새하얀 분진. 달무리만 머금었던 밀알들에 성애가 어리기 시작한다.

황금빛 물결과 하얀 눈발이 조합된 연출은 다른 곳에선 보지 못할 황홀경이었다.

"하하하하! 굉장합니다."

별안간 터진 환존의 웃음소리는 바람이 되어 볍씨들 반대 방향으로 드러눕혔다.

밀알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살갗이 쓸리면 분홍색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통상적인 밀밭일 리가 없잖아.'

이태백은 빙결 마법의 시전과 동시에 얼음 발판 역시 생성한다. 이어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달밤을 누비었다.

얼음 발판은 밟히는 즉시 설탕 과자처럼 가루로 부서졌다. 마력의 양이 아슬아슬한지라 튼튼하게는 못 만든다. 이태백은 그럴 바에는 얇게 많이 조형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쪽이 허공답보라는 기예를 시연하는 가운데, 광명좌사는 뭐가 그리 기쁜지 미소가 짙어졌다. 박수갈채라도 보낼 얼굴이로군.

"부족한 마력을 메우기 위해 마력이 적게 드는 화살 형태로 조형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정밀성에서 감탄이 나올 따름이군요."

"말뿐인 금칠보다는 당당하게 앞에 나와서 싸우는 게 어때. 환존 양반."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 무공은 일천합니다. 당신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진 않군요."

긁어 봐도 타격이 없었다.

"사내새끼가 전투력이 없다는 게 자랑은 아닐 텐데."

"괜찮습니다. 무공을 포기한 덕분에 당신이 저를 위해 재롱을 떠는 걸 볼 수 있으니까요. 몸소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능글맞게 말한 놈이 대뜸 팔을 양옆으로 뻗었다.

"무공을 포기한 덕분에 제 세계는 완성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면서 보는 사람이 다 목이 아플 정도로 목을 확 뒤로 꺾었다. 관중의 환호성에 휩싸인 독재자 내지 연설가를 흉내 낸 것.

"처음에는 저를 한심하게 보는 치들이 많았습니다만. 다 이곳에서 제 손에 죽었습니다."

환존의 두 눈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구멍에선 귀불이 흐르다 못해 넘친다.

'이 황홀경은 광명좌사의 고유 결계.'

환존의 의사에 따라 배경과 지형지물이 변할 터.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변주를 주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본인이 전개한 고유 결계라고 한들 영향력을 100% 끼치면 효과가 뚝뚝 떨어진다.

'마법의 요체는 '제약'에 있다.'

총구가 가느다란 물총이 멀리 나가는 원리와 같다.

환존의 의지가 더욱 많이 반영될수록 이 고유 결계의 가용성은 반대급부로 적어진다.

그렇기에 광명좌사는 초장부터 총력전으로 나서기보다는, 일단은 수세를 취함으로써 이태백의 전력을 재단해 보려는 공산.

'젠장.'

십익이나 되면 방심 정도 할 만하잖아.

으레 악당이 할 법한 대사를 던지며 으랴! 하고 전력 투구를 했으면 차라리 좋겠다.

환존 광명좌사는 그런 계열은 아니었다.

아니. 십익 열 명 전원이 이런 식이었다.

쐐애애액!

밀알 한 다스가 불쑥 자라나 목덜미로 짓쳐 들어왔다. 이태백은 탄력적인 몸놀림으로 피했다. 간담으로 예리함이 느껴졌다.

'X발. 왜 십익을 이따위로 설계해서는.'

멍청한 악역으로 조형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크 시티를 나름 무력으로 십 분 하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전원에게 '신중' 속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 업보를 이태백이 치르고 있었다.

휘릭-

이번에도 피했다.

까-앙

이번에는 우산으로 막았다.

후우웅!

막은 태세 그대로 드르르륵 밀려났다.

이태백은 등 뒤로 얼음 장판을 겹겹이 쌓아 밀려나는 충격을 완화. 다시 발판을 박차고 전선으로 복귀했다.

그걸 보는 환존이 묘한 탄성을 흘린다.

"호오."

이태백이 용케 잘 막고 잘 피하니 이후로는 공세가 가열 차게 바뀌었다. 공수 교대가 자연스레 이뤄졌다.

퍼붓는 건 난데 실질적으로 타격하는 쪽은 광명좌사였다. 전력 파악이 얼추 끝난 모양이지.

초상현상에 가까운 공박이 오고 갔다. 여태껏 전투와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칼끼리 부딪치지 않고 주먹으로 상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법사 간의 전투였다.

원시적인 싸움 형태에서 괴리된.

하나, 사이버네틱 의체 같은 문명의 이기 또한 배제된.

서로가 쌓아 올린 이론으로 자웅을 겨루는 방식. 내게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를 다음 경지로 이끌어 줄 토대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귀중한 경험이란 뜻이다.

'하.'

맛이 갔다는 건 아는데 그 정도가 심각해진 듯하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상황에서.

거기에 상대가 십익임에도 실실 쪼개는 걸 보아하니.

다만 이 또한 도존과의 공박을 겪어 봤기에 쫄지 않고 환존에게 맞설 수 있는 것.

목숨을 도박판에 올리고 싸워 왔지.

무모한 투쟁의 역사가 빛을 발할 때다.

따악, 따악!

이태백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쥐어짜 내 볍씨로 구축된 장벽을 폭격했다. 하지만 단단함은 부드러움에게 진다는 속담이 있듯.

푹, 푹, 푹.

빙결 화살은 볏단에 쑥쑥 무상하게 박힐 뿐이었다. 관통하여 환존에게 닿지 않는다.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투정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스르릉.

이태백의 손끝에서 빛살이 돋아났다. 파라 블레이드의 칼날이었다.

발밑으로는 빙판이 굽이치며 목적지, 장벽 앞까지 뻗어 나갔다.

간이 스키장. 얼음 미끄럼틀. 뭐라 표현하든 상관없다. 용도는 환존에게 접근.

자세를 낮췄다.

쑥 쏘아지듯 미끄러졌다. 공간을 접어 달리듯 빨랐다. '민첩'을 버프했거니와 '불릿 타임'도 발동했기 때문이다.

볏짚 틈으로 언뜻 보이는 환존의 표정은 그때까지도 여유로웠다.

십익쯤 되는 강자니 이런 퍼포먼스야 처음은 아닐 테지. 한데 그 반응이 이태백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미끄러지며 생각했다.

'저 자식의 가장 큰 무기는 이 고유 결계가 아니야.'

방심하지 않는 것.

케르겔 마탑의 한 축이면서 이태백을 얕보지 않는 그 신중한 성미가 제일 위협적인 무기였다.

한데 지금.

처음으로 방심의 기색을 내비쳤다. 방심이 아닐지라도 표정 변화가 인 건 분명하다.

노릴 때다.

손가락을 튕겼다.

파바바바바바바박!

다시금 쏘아지는 빙결 화살. 장벽에 구멍이 옅게 파였다.

직후 그걸 메꾸기 위해 볍씨가 생명체처럼 꾸물거리며 여백을 채운다. 외곽부터 야금야금 갉아먹는 거라고 판단했는지 중심부의 두께를 얇게 하고, 바깥쪽의 밀도를 높인다.

'저거다.'

이 황홀경에서 환존의 마법은 바로 '조작'이었다.

일면 생성처럼 보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대가 광야기에 그렇게 보이는 거고.

아마 고유 결계를 전개할 시 지형지물을 추가할 수 없다는 제약을 걸었으리라. 그리하여 볍씨에 살상력을 불어넣은 거겠지.

이 세계는 잘 조성되어 있다.

하나를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내가.'

이태백이 그리 설계했다.

후욱.

지근거리에 도달할 차. 황금빛 장벽에서 볍씨가 꼬챙이처럼 뾰족하게 돌출되었다.

이태백은 우산으로 전방을 방어. 혹시 모르니 파라 블레이드의 경도를 버프했다.

그 덕분에 황금 가시들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쐐애애애액!

뒤편에서 들이쳤다.

막지 않았다. 이쪽에서 나설 차례다.

파라 블레이드를 틈새로 쑥 내질렀다.

"뻔합니다, 뻔해요."

장벽 너머에서 어깨를 두 치 빼내 칼날을 흘려 낸 광명좌사가 절레절레 도리질했다.

회피한 스스로가 기특한 모양이다. 하긴 한평생 무공에 자격지심이 있는 그가 칼날을 피했으니.

십익의 시선에선 무지렁이인 이태백의 공격에도 크게 의미를 부여할 터. 입술을 축였다.

이런 순간을 좋아한다. 기고만장해진 상대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는 이때를.

잡념에 비해 흐른 시간은 찰나였다. 이태백이 입꼬리를 있는 힘껏 당기면서 말했다.

"일신의 무력이 덜 떨어져서 그런가. 칼질 한 번 피했다고 좋아하는 꼬라지 하곤."

"...."

환존의 눈동자에 금이 갔다. 분노로 아랫입술을 달싹인다.

이태백은 목을 옆으로 확 기울었다. 딱 하나 남겨 놨던 빙결 화살이 머리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었다. 보름달을 맞아 화살촉이 빛난다.

쏘아냈다.

귓불을 아슬하게 치고 나아가는 화살. 파공성은 파육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낌새를 눈치챈 환존이 틈새를 꽉 오므려 빙결 화살을 제지했다.

페르르르-

꽂힌 화살이 꼬리를 애처롭게 떨었다.

"마법사에게."

환존 광명좌사가 조소를 걸었다. 지금만을 위해 아껴 놨다는 듯 함지박만 했다.

"수 싸움은 교양이다."

"그러냐."

이태백도 씨익 마주 웃었다.

"근데 어쩌지. 게이머한테 수 싸움은 교양이 아니라 기본이거든. 그 분야에서 넌 나한테 안 돼."

"...뭔."

이태백은 화살 꼬리를 만졌고.

[빙결 화살의 크기를 버프합니다.]

빙결 화살이 팽창한다. 비대하리만치 두꺼워진다. 얕던 틈새가 점점 두꺼워진다.

목소리만 들렸던 환존의 얼굴이 점차 드러난다.

"...!!"

이건 예상치 못했는지 당혹감이 어렸다.

여기서 그치면 섭하지. 이태백은 마법을 영창했다.

[氷山(Iceberg)]

화살이 빙산으로 일변했다.

시허연 창살이 황금의 장벽을 찢어발긴다. 환존의 동공이 경악으로 열렸다.

"놀라기엔 일러."

한 번 더 영창했다.

빙산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바람구멍만 남기곤 덧없이 증발한 것이다.

드디어 찌를 각이 생겼다. 경동맥이 오늘따라 눈부신 자태를 뽐낸다. 하여 칼을 쑥 집어넣었다.

"캬흑!"

날카로운 비명이 듣기 좋았다.

환존이 목덜미를 붙잡고 황급히 물러나려 했다. 뜨끈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제아무리 방심하지 않으려 열을 올렸다고 해도 환존은 십익. 명명백백히 나보다 강자였다.

내심 나를 낮잡아 보고 있었겠지. 표층 의식이 이불처럼 그걸 덮고 있었을 뿐이고.

말마따나 마법사의 덕목은 고절한 심계.

달리 말해.

그 튼튼한 심계에 이격이 일게 되면 한없이 취약해지는 생물이 마법사란 족속이다.

환존이 엄지와 검지를 붙인다. 얼마나 강하게 쥐었는지 손끝이 희게 질렸다. 고유 결계의 형태를 바꾸려는 거다.

이태백이 목청껏 외쳤다.

"지금-!!"

그 찰나, 기다렸다는 듯 쟈스비가 눈을 떴다. 잇새로 건조한 기계 음성이 새어 나왔다.

[사이버 스페이스의 해석을 완료]

[광명좌사의 고유 결계 해체 개시]

[프로토콜 진행 상황 99.99999%]

[해체 소요 예정 시간을 계산(...)]

"저, 저건 뭔?!"

환존이 단전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기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쟈스비의 망막엔 0, 1의 수식이 쏟아지다가 이내 뚝 끊긴다.

[소요 예정 시간까지 0.0000028초]

[광명좌사의 고유 결계를 즉시 해체]

다음 순간 섬광이 안구를 기습한다. 이태백은 말할 것도 없고 환존도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일제히 눈을 떴다. 그렇게 우리를 반긴 건 황금빛 평야 대신 익숙한 천장이었다.

환존이 장내를 휘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건 말도 안-"

그때 빙결 화살과는 차원이 다른 파공성이 그 말을 잘랐다.

이태백은 어느새 쓰러진 쟈스비를 안고 냅다 도망쳤다.

영문을 모르는 환존은 음원지. 조명이 진동하는 천장으로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하층 구역을 울리는 폭음.

고깔 모양의 지붕이 주저앉는다.

귀 아픈 벽력을 동반한 화살이 환존에게 내리꽂혔다. 십익의 술, 궁존의 것이었다.

103화 모략가 이태백 (1)

잔해와 파편을 뚫고 손이 뻗어 나왔다.

"크윽...."

묻혀 있던 환존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먼지와 잔해를 던져 치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잡티 하나 없던 옷은 이리저리 헤졌고, 목덜미에서 출발한 핏물이 쇄골에 고였다. 그중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빌어먹을...!"

…왼쪽 옆구리로 바람이 잘 통한다.

환존 광명좌사가는 왼팔의 절단면을 부여잡고 욕설을 씹어뱉었다. 그는 팔이 잘린 것이다.

그의 고유 결계에서가 아닌 현실에서 말이다. 생육신에 부상을 입은 건 반추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랜만이었다.

더욱이 이런 중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선천적으로 약골인 환존은 누군가와 육탄전을 벌인 적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첫 골육상잔의 대상이 다른 이도 아닌.

"좌사야, 오래만이구나-!"

구름을 찢어발기는 목소리. 하필, 하필이면 원숭이 궁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환존은 고개를 치든 채 숨을 헐떡였다.

남자가 시티를 오시하듯 구름을 밟고 서 있었다. 활로 어깨를 두드리며 실실 쪼개는 모습은 고급진 옷차림새에도 싯누런 야성이 흘러나오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오랜만이오, 형제."

"크하하! 미친놈! 내가 왜 네 형제냐! 네 형제 자매들을 죽인 게 바로 나지 않느냐!"

"피차 나눈 피가 많으니 그게 피로 맺어진 형제 아니겠소. 너무 타박하진 마시게."

"얼씨구. 여전히 달변이구나. 한데, 말에 모순이 좀 있구나. 네가 직접적으로 피를 흘리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늘. 어디서 무골인 척을 하느냐. 세상 사람 중에 좌사, 네가 무력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

환존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궁존은 냉소를 흘리더니 이내 발걸음을 떼었다. 딛고 있던 구름에 구멍이 뚫린다.

궁존의 신형은 살에 걸린 활처럼 쏘아졌다. 소리보다 빠르게 도약한 그는 어느새 지상에 강림한 채였다.

그러고는 적당히 멀짱한 의자를 하나 끌고 와 등을 기대었다.

짐짓 여유로운 태도인 원숭이에 반해 돼지, 환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유 결계에서 전투를 막 치르고 온 차다.'

뿐인가. 본인의 세계에서 상처를 얻고 나왔다. 방심이 공격을 허용했다. 곧 죽어도 안 하는 방심을 딱 한순간 해 버렸다.

그렇다는 건 적이, 이태백이 환존의 방심을 유도한 셈이었다.

잘린 왼팔에 손도장처럼 찍혔다. 절단면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이었다.

이태백.

'미친놈이다.'

전력에서 차이는 분명했다.

마력 보유량은 말하면 입 아프고, 운용법도 환존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암만 빙결 마법이라고 한들 이태백의 마법은 일차원적이었다. 범용성을 도외시한 공격 일변도....

"서, 설마."

그마저도 노린 건가?

급기야 사고가 뒤엉킨다. 이제는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헷갈렸다.

'뱀 같은 놈.'

이태백의 전투 스타일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그의 전투 사고는 허를 찌리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때를 보고 독니로 물어 버리는 독사처럼.

'그 어린 년도 변수였다.'

어쩌면 그마저도 이태백의 계획하라면.

놈의 전투 사고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자 전율이 역류했다.

'전투 사고에 있어선 마탑주님을 넘었다.'

그건 그렇고 어디로 튄 것이냐. 기척 감지를 살포해도 놈의 신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놈은 고유 결계가 깨지자마자 어린 년을 데리고 줄행랑을 쳤더랬다.

설마....

그것도 네 계획이었냐...?

환존의 안색이 천천히 질려 가는 가운데 궁존이 이죽거렸다.

"그래, 그래. 충분히 곱씹거라."

"...."

"방구석 마법사인 네가 언제 이런 경험을 하겠냐, 돼지야.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소중한 경험이니 부디 양껏 소화시키거라."

"...."

"잘 소화시켜서 다음 생에 꼭 써먹거라."

궁존은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한쪽 다리를 턱 무릎에 얹었다. 그는 환존이 분노를 뜯고 씹고 맛볼 시간을 주기로 했다.

강자의, 그것도 본인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생각했던 적에게 당한 강자의 일그러진 얼굴은 별미였다. 게다가 십익의 것이라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까 말까했다.

광명좌사가 파리한 입술을 움직였다.

"시에스타 일은 유감이오, 황 형. 시에스타가 이토록 위대한 인재를 놓쳤구려."

"배짱은 좋구나. 이런 상황에서 나를 도발하다니."

궁존이 건들거리는 기색을 갈무리했다. 환존은 침착하게 말을 덧붙였다.

"도발이라니 가당치도 않소.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황 형의 실력은 건재하구려."

"칭찬은 고맙구나. 하나, 어찌지. 내게 생긴 변고에 네 입김이 작용했다는 걸 방금 듣고 온 참이다."

강현성과 개방이 만나 일은 파급효과였다. 그들은 일부러 궁존의 정보망이 서성이는 뒷골목에서 환존에 대해 떠들었다.

거짓말이 가장 큰 힘을 가질 때는 구할의 진실에 구라를 일할 섞을 적이었다.

그들은 뜬소문처럼 말하면서도 관련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전문 지식을 첨가하며 주의를 잡아끌었다. 이태백의 지시였다.

"모함이구려, 황 형. 우리 케르겔은 시에스타와 접점이 조금도 없소이다."

"케르겔은 몰라도, 돼지, 너와는 조금 있다는 걸 내 안다. 그도 그럴 것이 네놈의 그 잡기는 마법과 과학의 산물 아니더냐.

사이버 서페이서… 뭐, 이름까지는 내 알 바 아니지. 하여튼 시에스타의 기술력이 가미된다는 정보를 며칠 전에 입수했다."

"별 시답잖은 정보까지 입수했군."

궁존이 짧게 혀를 찼다. 잘린 팔에서 쏟아지는 핏물의 양도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나는 놈들에 대한 정보는 닥치는 대로 수집할 것이다."

"황 형, 어찌 그리 추해지셨소."

"닥쳐라!"

노호성에 사위가 들끓었다. 궁존의 눈 주변에 핏대가 불거졌다.

"돼지, 너야말로 추하기 그지없다! 생사공락을 같이한 마탑을 배신하고 막후에서 시에스타와 손을 잡는 놈이 추함을 입에 담다니!"

"헛소문이외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안 나는 법이지."

냉정을 되찾은 궁존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 말을 과연 그 토끼 년이 곧이곧대로 받아 줄는지 모르겠군."

그 말에서만큼은 환존은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마탑주님의 귀에 들어간다면 필경 죽는다. 마탑주의 성격이 그러하다.

의심이 간다 싶으면 사실 확인을 하기 전에 살처분한다. 광명좌사도 예외는 아니다.

마탑주에게 자신은 언제든 갈아 낄 수 있는 많고 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차기 좌사 후보만 하더라도 이미 다섯이 넘는다.

십익의 타이틀? 그것도 균형을 맞추기 위한 허울일 뿐. 환존과 천마를 같은 계제로 놓을 순 없다. 물론 저 원숭이도 포함해서.

"크하하! 표정이 볼 만하구나.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야."

"혼자만 봐라, 천둥벌거숭이 새끼야."

뇌까리기 무섭게 환존은 공간 이동 마법을 영창했다.

필름이 지나가듯 바뀌는 풍경에 궁존은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 넓게 둘러보았다.

"하여간에 마법 하나는 봐줄 만하구나."

두 남자는 폐공장으로 이동했다. 치렁치렁 걸린 비닐이 폐암 환자의 허파처럼 나부꼈다.

"공간 이동을 50킬로미터나 할 줄이야."

두 십익의 존재만을 가위로 오려 낸 듯 똑 떼 와서 폐공장에 붙여 넣었다. 방금까지 골려 먹었지만 환존의 마법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괜히 십익이 아니지.'

궁존은 픽 웃던 때.

오소소소.

등줄기에 소름이 곤두섰다. 이상을 느낀 건 환존도 역시였다. 둘은 반사적으로 기척 감지를 흩뿌렸고 살기의 원흉을 발견했다.

장년인이 구름을 등지고서 녹물이 뚝뚝 떨어지는 철근을 밟고 고요히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들."

쓰촨 코퍼레이션의 회장.

거존과 더불어 유이하게 메가코프 소속이 아닌 십익.

유(酉), 독존.

"나도 여흥에 끼워 주게나."

그가 차가운 분노를 담아 내뱉었다.

* * *

이태백은 쟈스비를 사이드 카에 태운 다음 그대로 고가도로를 질주했다. 바로 탈 수 있게 은코 바 근처에 정차해 놨다.

부아아아아아앙.

폭심지(은코 바)에서도 일정 거리 떨어진 곳이었던지라 차질 없이 탑승한 뒤, 도망칠 수 있었다.

'비록 집이 죄다 박살이 났지만.'

환존과 궁존. 십익 둘한테서 탈출했으니 싸게 먹힌 거였다. 이참에 31구 분타주 진소방에게 연락해 새로 지어 달라 해야겠군.

리모델링한 지 두 달이면, 바꿀 때도 됐다.

각설하고.

이태백은 적토마를 조자함과 동시에 생명과 정신 능력치를 버프했다.

전투의 피로를 지워 냈다.

도로 운전에 집중하려던 찰나, 눈이 몽롱하게 풀려 있던 쟈스비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창조주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십익이랑 붙었다가 살아남은 사람한테 질문은 좀."

습관적으로 한 번 틱틱거려 준 후.

"그래도 쟈스비, 네 덕이 컸으니까. 얼마든지 질문해. 뭐 얼추 예상은 간다마는."

상대를 칭찬한다. 가스라이팅의 기본.

쟈스비는 살짝 감격에 찬 눈망울이 되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어디까지 계획하신 거예요? 저를 놓고 간 것? 환존이 오고나서? 궁존이 온 것까지? 어디서부터 창조주님의 계획이었는지 가늠이 안 가요."

"그게 뭐 중요한가."

"살아남은 게 더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서요. 계산을 아무리 돌려 봐도 변수가 너무 많은 계획이었거든요. 사실상 실현될 수 없던 계획이었어요. 한데, 타이밍에 맞게 창조주님의 머릿속 계획대로 돌아가는 게 그냥 너무 신기해서...."

그러게나 말이다.

정작 제일 궁금한 이가 이태백이었다.

계획이란 어휘로 표정은 했다만 정직하게 "이게 되네?"라는 생각이었다. 운적인 요소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오롯이 운에만 기대야 했는데 이차저차 성공했다.

'나 진짜 뭐 되나.'

작두라도 한번 타야 하는 거 아냐?

바람이 뺨을 때려도 의뭉이 떨쳐지기는커녕 가열차진다.

"전에 나한테 누가 그러더라."

고민 끝에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았다.

"나보고 혼돈의 군주래."

"혼돈의 군주요...? 그게 뭐예요?"

"글쎄다."

이태백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대충 오늘 같은 거 아닐까 싶다."

* * *

[#2 중간모] 2.1.0.3 패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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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과율을 비틀어 「술, 궁존」과 「해, 환존」, 그리고 「유, 독존」의 대치를 성사시켰습니다. 원안엔 없는 상황이지만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인해 최근 평가에 긍정적인 평가가 더해집니다.

• 하여 그 낙수를 이 상황을 연출한 「이태백」이 받게 됩니다.

• 모든 능력치의 비례 수치가 균일하게 10% 증가합니다!

• 「신앙」 능력치의 비례 수치 증가량이 도합 51.3%로 절반을 넘어 예지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합니다. 고로 「이태백」의 발언이 현실로 치환되는 대역 폭이 크게 증가합니다.

• 「돌발 퀘스트 : 고래 싸움에서 새우 등 터진다」를 클리어. 운영자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운영자 포인트를 사용하여 「운영자 메뉴」의 평가를 올려 보세요. 그리하면 「운영자 : 이태백」 권한(임시)의 해제에 임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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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104화 모략가 이태백 (2)

지금쯤이면 고래 셋이서 박 터지고 싸우고 있겠지. 당지혜가 시킨 대로만 했으면 독존도 그 판에 끼어 있을 터다.

'독존은 손녀인 당지혜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것은 일종의 피붙이에 대한 집착이었다.

혈통 중심의 사천 당문에서도 손녀를 향한 독존의 집착은 가히 병적이었다.

그는 아들 내외마저 잃었다.

하여 그 혈육인 당지혜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겠다. 그런 모종의 '기어스'가 뇌리에 심어진 것이다.

당지혜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당가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외부인인 체 하지도 않는다.

그녀도 어쩔 수 없는 당가인이었으므로.

"독존은 어떻게 판에 꾀어 내신 거예요, 창조주님? 궁존을 저기에 앉힐 때랑 마찬가지인가요?"

"비슷하면서도 달라."

"무슨 대답이 그래요!"

삐져서 고개를 휙 돌렸지만 쟈스비는 그 이상 보채지 않았다. 인공지능에게도 염치가 있다.

쟈스비의 자의와는 무관하게 이태백의 계획의 일환이었을지언정, 어쨌거나 그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점은 바뀌지 않는다.

만약 이태백이 그녀를 헌신짝 정도로 취급했다면....

꽈강!

공포의 번개가 일었다.

사지가 뜯겨 사냥꾼 집에 걸린 사슴인 양 박제됐을 모습을 상상했다. 환존 광명좌사는 그러고도 남을 냉혈한.

'살려 줘서 감사해요.'

그런 생각이 스치니 쟈스비는 마냥 감사했다.

그리고, 그 마음가짐을 읽어 낸 이태백은 그녀가 썩 기특했다. 판에 억지로 끼워 넣은 것에 대해 내심 미안함 마음도 있었고.

"음."

이왕 이렇게 된 거. 곧 그녀를 내려 줄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 전까지 간단히 내막을 설명해 줘야겠다.

"사실 당지혜를 개방에게 만나게 한 건 블러핑이야."

"…블러핑이요?"

흥미가 이는지 눈알만 돌려 나를 봤다. 깜찍한 녀석.

"어. 원래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잖아. 독존이 우리의 적은 아니지만 어쨌든 호의적이진 않을 거란 말이지."

"창조주님 말씀은 당지혜 님을 속였다는 말이신 거죠?"

이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 적토마가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이태백은 뺨을 치는 바람을 맞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이 사단이 있기 전에 릴리스 교단이란 곳 다녀왔거든. 걔네에 대해 쉽게 말하자면 내 정보통이자 전서구 같은 거야. 여튼 그때 슬쩍 지인한테 부탁했어. 당지혜 주변 인물들 좀 조사해 달라고."

"듣고 있어요."

"걔가 대대장인 3대대는 외부 활동 자체가 뜸해. 이런 말 좀 그렇긴 한데 당지혜는 친구가 별로 없다는 거지. 그러니 걔와 가까운 지인이라고 해 봤자 대대 사람들이 전부일 테고, 그네 중 속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면 범위가 확 좁아지지."

"그래서요, 그래서요."

흥미가 이는지 쟈스비는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대대 차석. 그러니까 마라탕 가게의 주인장 장취엔이 당가의 쁘락치였다. 그는 주기적으로 독존과 비밀리에 만나 당지혜의 소식을 전했다.

장취엔이 독존의 사람이여서 그런 게 아니다. 그는 줄곧 당지혜의 사람이었다.

'그 낭만 아재가 쁘락치 노릇을 한 사유는 어디까지나 당지혜를 지키기 위해서야.'

이 매정한 도시를 단신으로 헤쳐 나가는 건 결코 녹록지 않다. 무력이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시티는 각종 조직의 군집이다. 집단을 힘을 빌려야 버틸 수 있다. 이태백이 레지스탕스에 아직까지 남아 있고 은코 바에 의탁하고 있는 까닭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하물며 십익도 메가콥에 속해 활동한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도시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는 무엇 하나 꾸릴 수 없는 세계. 레이컨스란 그런 세계다.

"그럼 당지혜 님을 은코 바 인근에다가 내려주신 건, 위험에 적당히 노출되게 하기 위함이었고... 그걸 쁘락치인 장취엔이 바로 독존에게 보고할 거란 걸 계산하신 건가요?!"

"그런 셈이지."

"아, 아니!"

쟈스비는 가슴이 막히는지 주먹으로 콩콩 때리며 말했다.

"그것도 너무 운에 기댄 작전이었잖아요! 만약 그 장취엔이란 사람이 그냥 흐린 눈 했으면. 그랬으면 말짱 무용지물이잖아!"

"그렇긴 한데, 성공했으니까 된 거 아닌가."

"…하아. 창조주님에게는 상식을 요구하는 게 그냥 제 욕심처럼 느껴지네요. 그럼 한 가지 더-"

그때 시티의 밤하늘이 떨렸다.

쿠르르르르릉-

사이드카에 탄 쟈스비가 폭심지로 시선을 옮겼다. 울창한 빌딩 숲 너머에서 굉음이 연달아 울려 댔다.

아닌 밤중에 불꽃놀이라도 하듯 빛이 번쩍번쩍했다. 빌딩들에 빛 무리가 아롱졌다.

행인들도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뭔데 이거."

"그그, 그러니까. 어? 왜 몸이 계속 떨리지?"

"너, 너너, 너도? 나도 그런데."

행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왜냐하면 본능이 경종을 때렸기 때문이다.

"진짜 말세긴 한가 보다."

"여름에 눈이 내리질 않나."

"어차피 망할 세상 회사 말고 홍등가로 출근하는 건 어때."

"좋지. 가자고. 여기 왠지 무서워서 더는 못 있겠다."

사람들은 십익 세 명의 전투란 걸 알진 못했다. 하나 공기압이 변한 것에서 저 불길한 빛이 재앙의 편린임을 알아차렸다.

'쿵', '쿵', '쿵'. 불길한 울림이 세 번을 연달아 시티를 흔들었다. 건물을 잇는 전선줄이 힘없이 낭창거렸고, 가로등이 갈대처럼 휘청거렸다.

쾌속으로 달리는 바이크에 타고 있는데도 진동이 느껴졌다. 엉덩이를 얼얼하게 만드는 전율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를 친다.

"환존이 궁존을 끌고 간 장소를 어떻게 알았냐."

이태백은 기어비를 바꾸며 말했다.

"그게 마지막 질문인 거지."

"예...."

쟈스비는 한껏 움츠러든 목을 끄덕였다.

"그건 말 못 해 주겠다."

"...?"

그걸 말하면 스포거든.

'레이컨스가 아직 발매 전이라서.'

이태백은 싱긋 웃곤 적토마를 작동했다.

그들의 목적지 백백교 2지부가 목전이었다.

* * *

백백교 2지부에선 신도들이 서로 어깨를 맞댄 채로 오들오들 떨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고은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걱정하면서도 난감함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녀는 이 재난의 원인에 자신의 책임도 있음을 넌지시 아는 눈치였다.

강력한 마기가 비강을 파고든다. 이만 한 마기를 발산할 수 있는 마법사는 고은이 아는 한에선 세 손가락에 꼽는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기파를 감각만으로 추정해 보건대 필경 궁존의 화살이었다.

거기서 또 느껴지는 싸한 기운.

'이건 독존의 살기야.'

같은 강호인 아닌가. 기백으로 대상을 특정 지을 수 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십익의 독존이었다. 강호에서 방귀 좀 뀌었다 싶으면 그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가 있었다.

중원 시절 고은도 화련이란 이름으로 날렸던 몸이고, 종래에는 케르겔 마탑에서 마법사들을 가르치는 중책이었다.

'궁존과 독존이 있다면.'

환존 광명좌사는 세트로 있을 터.

한 가지 의문은 어째서 십익 셋이 박 터지게 싸우고 있냐는 거였다. 무엇을 계기로? 갑자기? 그것도 여생을 정리하기 위해 백백교 1지부를 거쳐 2지부에 방문했을 때? 사태파악도 안 되는데 타이밍도 공교로웠다.

"고, 고은 님...."

고은이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레온이 바싹 곁으로 붙었다. 풍채가 헌앙했어도 그 또한 십대 소년이었다.

"괜찮아, 레온. 괜찮아."

"저, 저저, 저는 괜찮은데 아이들이."

어찌나 떠는 지 성대가 골골거린다. 레온도 느꼈다. 마그노스트롬이 쳐들어왔을 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장이 200km 떨어진 폐공장에서부터 여기까지 닿았다.

"흑흑흑. 개파조사님."

"마지막으로 뵙고 싶었는데, 백백...."

아이들이 흐느꼈다. 침통한 소리가 비산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 어쩔 줄 몰라 방황하던 고은은 정신을 다잡고 일어섰다.

"레온, 나 나갔다 올 테니 애들 좀 챙기고 있으렴."

"누, 누누, 누님! 그치만-!"

고은이 등을 보이며 말했다.

"너 생긴 거랑 다르게 똑똑한 애잖아. 대충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줘. 앞으로 반찬은 못 가져다주겠지만 이태백한테 말해서 요 근처에 밥집 하나 연결해 줄게. 그 집 솜씨가 나보다 좋을 거야."

"...."

레온은 입을 악 다물었다.

코가 매웠고 눈시울이 뜨끈했다.

왜 모르겠는가. 이것이 고은의 마지막 유언이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보는 누님의 어깨가 잘게 들썩이고 있었다. 말마따나 레온은 눈썰미가 좋았다.

그는 상층 구역에서 태어났으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입학했을 기재였다. 고은은 알아보고 레온에게 공부를 시켰다.

'요새 누님의 방문이 잦았었어.'

본인에게 문제집을 주겠다는 핑계로. 음식이 남았다는 핑계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수시로 찾아왔었지.

참 솔직하지 못한 누님이다.

'그냥....'

그냥 오고 싶다고 말하면 되는 걸.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되는 걸.

고은이 정확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저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법사고 레온과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을 거다.

누님은 언제든 길 가다가 칼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이다.

'젠장!'

다만 아이들이 떨고 있었다.

또한 불안감을 가중시킬 수 없었다. 레온은 치미는 울음을 눌러 담았다.

그렇게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고은이 발걸음을 뜯어 내려는 순간.

우지끈ㅡ

경첩 채로 뜯기며 문이 열렸다. 모두가 그곳을 보자마자 헤드라이트가 안구를 따갑게 기습했다.

"아, 아, 아."

그가 훌쩍 바이크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터벅터벅 걸어 전조등을 등지고 섰다. 영롱한 섬광이 그만을 조명한다.

"백- 백-!!"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 * *

이태백이 입장하자 공기가 반전되었다.

장례식장 같았던 백백교는 분위기의 낙차 때문인지 전에 없던 활기가 맴돌았다.

신도들이 이태백의 이름을 연호했다.

"백백! 백백! 백백! 백백!"

눈알이 맹목적인 신앙으로 번들거렸다.

이태백의 다리 뒤에 숨은 쟈스비는 좀처럼 나서질 못했다.

'이, 이게 뭐야!'

인공지능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광기의 현장. 시에스타에서도 자체적으로 교단을 만들고 신도를 빙자한 전사들을 육성한다.

'그에 비할 바가 아니야.'

종교라는 홀리한 단어로 퉁 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표현할 길 없는 상황에서 이태백이 고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나랑 같이 좀 가자."

"이 상황에 어딜."

"어디긴 어디야, 너희 집이지."

이태백이 손목을 낚아챘다.

타이밍이며, 분위기며, 대사며.

삼박자가 맞물리니 숫제 프로포즈다.

그러나 이태백은 그 가능성을 쳐냈다.

"케르겔 마탑으로 가자."

"...."

…뭐, 요?

"마탑주를 한번 만나자고."

한순간에 장내의 소란이 멎었다.

신도들은 환호하던 그 자세 그대로 얼어 버렸다. 다만 빙결 마법의 효과는 아니었다.

105화 모략가 이태백 (3)

"떠나셨네...."

레온이 아연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노을과 그림자를 반반씩 담고 있었다. 복잡한 심경을 반영하듯이.

다른 백백교 신도들의 반응도 레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똑같았다.

미어캣처럼 서서는 촉촉한 눈동자로 개파조사님이 떠나고 남긴 발자취를 곱씹었다.

전원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누군가가 우두머리인 레온의 곁에 찰싹 붙었다. 그러면서 분위기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가셨네요."

레온은 눈길을 사선으로 기울였다. 작달막한 꼬마애가 광해로 얼룩진 시티의 지평선을 응시했다.

아기 천사 같은 이목구비에 어쩐지 관록이 묻어나는 주름 진 눈동자가 시선을 끈다.

음, 근데 얘는 뭐지?

"쟈스비예요."

응? 의문을 품기 무섭게 쟈스비가 턱을 들어 레온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곤 옷춤에 손을 슥슥 닦고는 악수를 청했다.

"창조주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태백은 말한 적 없었다. 쟈스비가 멋대로 백백교 지부 통신망에 간섭하여 알아낸 사실이었다.

다만 접근 의도가 이태백 입장에서 썩 불순하지 않았다. 쟈스비의 손길이 닿은 덕에 통신망의 방범이 이전보다 훨씬 튼튼해졌다.

'밥값은 해야지.'

좆소기업 '따위'의 접근은 전기 포충기에 지져지는 날벌레처럼 일소시킨다.

기필코 해킹하려거든, 메가코프의 요추가 작정하고 덤벼들어야 가능할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

상념을 뒤로한 쟈스비가 다시 반색했다.

"이름이 레온이시죠? 들은 것 이상으로 듬직하게 생기셨네요."

"그, 그래?"

공치사에 레온의 입술이 해벌쭉 세모꼴을 그렸다.

그걸 보는 쟈스비는 겉으로 생글생글 미소하면서 영혼의 입가엔 비릿한 조소를 새겼다.

'인간의 감정을 좌우한다는 거.'

짜릿해.

인공지능으로서 음습한 욕망이 심장을 맥동시킨다. 중독될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개파조사님은 왜 누님을 데리고 갑자기 마탑으로 향하신 거야. 이유를 알아, 쟈스비?"

"음.... 확실치는 않은데 대충은 알 거 같아요. 근데 설명은 못 해 드리겠네요."

"그렇구나. 알았어."

쟈스비의 말에 레온은 선선히 수긍했다. 애간장을 태울 셈이었는데 그녀의 계획이 허무하게 주저앉았다.

"그렇게 바로 포기하시는 건가요?"

"포기가 아니라 믿는 거지. 개파조사님이나 그분이 직접 데려온 쟈스비, 너나."

"…그게 무슨 의미죠."

"믿음에 뭔 의미가 있겠니. 의미를 갖는 순간 믿음은 믿음이 아니게 돼. 현실을 회피하려는 면피책일 뿐이지."

왜일까. 쟈스비는 허파가 쑥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뭐지.

설마.

'내가 믿음이라는 걸 이해한 건가?'

다소 중2병스러운 마음의 소리였지만 쟈스비에겐 파급력이 컸다. 그럴 리가. 나는 그렇게 설계된 적 없어.

쟈스비는 잡념을 흩어 냈다. 그러면서 이 까끌까끌한 기분을 지워 내려 목소리를 짜냈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시네요."

"그런가? 다 고은 누님 덕분이지. 이 돌대가리를 데리고 어떻게든 책상머리에 앉혀 놓고 공부를 시키셨으니까."

"...."

"나는 두 분을 믿어. 어떠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결국엔 우리를 위해서 발 벗고 나서 주시고 있다는걸."

"그 믿음엔… 당연히 근거는 없죠?"

"어린 게 이해력이 좋네!"

레온이 이를 드러내 웃으며 쟈스비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들어가서 밥 먹자."

그길로 레온은 아이들을 데리고 건물로 들어갔다.

쟈스비는 정수리를 두 손으로 덮은 채로 우두커니 있다가 끝내 총총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창조주님.'

잘 해결하실 거라 믿을게요.

그녀는 저 혼자 끄덕거렸다. 오늘따라 인공 혈관에 흐르는 냉매가 따뜻했다.

단순히 기분 탓일지라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쟈스비는 믿고 싶었다.

강철의 도시에 드디어 피가 흐른다.

* * *

적토마는 늘 이태백을 위해 몸을 혹사한다. 그러나 오늘은 유달리 더 바퀴에 불이 날 정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부아아아아앙!

인간 불신에 시달리게 만드는 레이크 시티. 그곳에서 이태백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동반자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적토마다.

갱 연합의 수장 레비에게서 탈취한 것이 시작이었으나, 적토마는 이태백을 그 자리에서 주인으로 인정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이 바이크가 자아를 가진 게 아닐까. 그런 착각마저 들었다.

인공지능 쟈스비까지 집에 들인 마당 아닌가. 바이크에게 캐릭터를 부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지. 오히려 레이컨스의 장르 특성에 딱 맞는 설정이었다.

'오늘만 고생하자.'

이태백은 미안함을 담은 손길로 손잡이를 꽉 움틀었다. 옆에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던 사이드카는 냉큼 뜯어 버렸다.

"야-! 좀 천천히!"

등 뒤에서 앙칼진 소리가 꽂힌다.

"눈이! 눈이 따갑다고!"

"적토마의 최소 시속이 200km이야."

고은이었다. 그녀는 이태백의 날개뼈 언저리를 꽉 붙잡고 바짝 밀착했다. 인간의 온기와 부드러운 감촉이 등허리를 데웠지만.

"계기판에 둥글게 적혀 있는 숫자들은 장식이냐?! 70이 번듯하게 쓰여 있구만!"

이태백에겐 알 바 아니었다. 그간 얻은 컨셉들로 그는 대뇌피질의 여러 부분이 마비되고 말았다. 이성을 향한 관심과 성욕도 포함된다.

그보다도 사나이의 행사에 말대꾸를 한다는 점이 신경을 건드린다. 해서 톡 쏘는 감정을 그대로 뱉어 냈다.

"남자는 100 이하의 숫자는 세지 않아."

"얼씨구. 첨단을 달리는 도시에서 굉장히 시대에 뒤처지는 야만스러운 발언. 잘 들었습니다."

고은이 툭 농을 던졌다.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 긴장감을 덜어 내려는 것임을 이태백은 안다.

하지만.

이태백은 사이코패스(진)이다. 그 외에도 해괴한 컨셉들이 뒤섞인 괴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역시 '그녀'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정신이 살짝 망가진 상태였다.

그의 호응은 일반인과는 핀트가 한참을 엇나간 것이었다. 물론 고은도 마법사고 대가리에 나사가 풀리긴 매한가지지만 그걸 참작해도 이태백은 쌍또라이였다.

"첨단 도시에서 시속 300으로 달린다고 겁먹는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다."

"...."

"그리고 네 발언은 내 애마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었어. 감히 적토마에게 속도를 낮추라고 해? 어이가 없군."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그냥 가던 대로 가자."

"지랄."

"…뭐?"

일갈한 이태백이 두 손목을 젖히듯 크게 꺾었다. 계기판의 묘침이 회까닥 모로 드러누웠다. 그 여파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

느껴졌다.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게.

이태백은 특이 취향이 눈을 뜨는 것을 느끼며 속도를 있는 대로 높였다.

적토마는 요령 좋게 차와 차 사이를 헤쳐 나갔다. 백미러를 야멸차게 부서뜨리면서. 사실상 길을 개척하는 거긴 했지만, 하여튼.

"하아...."

"한숨 쉬지 마라. 운전하는 사람 불안하게. 복마전으로 들어가는 건 피차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왜 사서 불구덩이로 들어가겠다는 건데.... 그냥 못 본 척하고 살면 좀 좋아."

"그걸 타파하는 게 레이컨스의 묘미야."

"생뚱맞게 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있어."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릉!

대항하는 도중에 간간이 굉음이 울려 퍼졌는데 기세가 훅훅 사납게 변한다. 독존, 궁존, 환존이 싸우는 소리였다.

그들의 전투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누구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부상을 입은 환존이 가장 불리하긴 하다. 하나 그의 교활함은 다른 두 존을 웃돈다.

게다가 [마력]과 [신앙] 능력치는 서로 상응하는 성질을 가진다. 경미한 검상쯤이야 일찌감치 회복했을 터다. 찰나의 실수가 승패의 명암을 가를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시티의 앞날에도 변화가 일겠지.'

뒤에서 고은이 계속 쪼아 대도 기어이 케르겔 마탑주를 보러 가는 까닭이었다.

그 변화를 최소화하면서도 집주인을 구원할 방법은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장 짜낼 수 있는 뾰족한 묘수는 그거뿐이었다.

이번에는 어찌저찌 밀봉했다고 한들 마탑은 지속적으로 살수를 파견할 거다.

미봉책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그 원천을 잘라 내야 한다.

'여기까지가 이지의 목소리.'

전신의 감각은 비명을 지르다 못해 구토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부의 감정이 진창처럼 이태백의 정신을 발목부터 저며 가고 있었다.

일견 실없는 농을 주고받는 것도 서로 긴장감을 낮추려는 행위의 일종이었다.

'천마는 괴물이란 말로도 부족해.'

과학, 마법, 물리. 전 분야의 장벽을 넘어섰다. 현세에 머물고자 인간의 탈을 빌린 사실상 신이었다.

릴리스 교단과 지하 투기장에서 봤던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짜배기였다.

격 자체는 두 존재가 더 높을지언정 그들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다.

반면 천마는 삼라만상에 개입할 수 있었다. 전신에 피가 질주하는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꾸욱.

손잡이의 패턴이 손바닥에 문신처럼 새겨질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희게 탈색된 그 손을 본 고은이 한차례 입술을 달싹였다.

"...."

그러다 아랫입술을 하얗게 깨물었다.

그새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잠시 동안 이태백과 고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조금 전까지 진절머리 치던 게 무색하게 그녀는 조용히 이태백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약간의 들썩거림.

하나, 이내 떨림이 줄어들고 엇박으로 뛰어 대던 기색이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 * *

상층의 초입부터는 적토마로 진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속도 박치기로 시 정부의 방범을 뚫는 건 살자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걸 위해서 용두방주 홍걸개와 교분을 텄다.

지하철역 근처에서 대기하던 개방에게 적토마를 맡겼다. 발렛파킹의 개념이었다. 지금에선 표현 따윈 뭐라도 좋았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홍걸개의 구색 맞추기용 인형 틈 바구니 속에서 이동했다.

덜컹, 덜컹.

간헐적으로 선로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심장도 덩달아 물리적으로 철썩인다.

두 사람은 고요히 서로의 어깨에 의존했다. 두 남녀의 눈엔 이성적인 감정이 끼어들 여백이 없었다.

케르겔 마탑이란 이름의 복마전으로 향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종착지에 도착했다.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린 뒤, 두 사람은 지상으로 올라왔다.

대리석이 주단처럼 입구까지 길을 알려왔다. 두 사람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깨끗한 판석을 밟으며 나아갔다.

천마는 마탑의 본사에 기거하지 않는다. 동양풍으로 멋스러운 별관에 따로 살았다.

설명만 들어도 우동사리가 꼬이는 방범 시스템은 없었다.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는 듯 고고하게 응당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다.

또각, 또각.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고은이 바싹 타는 목청을 가다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화련이 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반질반질한 판석에 여러 번 튕기었다. 메아리에 이어 세상이 정지한 듯한 적막이 감돈다. 그런 줄 알았다.

쿠구구구구!

묵직한 울림.

하면 대문이 활짝 열리는 게 순서거늘.

"저건...."

우리는 전방을 보지 않았다. 목이 아플 정도로 꺾어 위를 봐야만 했다.

먹구름이 둘로 쪼개짐과 함께 하늘의 게이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마치 괴물의 입처럼 보이는 그것은 도망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탐욕스러운 아가리를 벌렸다.

중력이 거꾸로 작용했다. 어어- 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은 하늘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106화 삼재, 천마 (1)

두 사람은 하늘로 용오름 쳤다. 어느샌가 시티의 정경은 부루마블처럼 작아졌다. 거꾸로 뒤집힌 그들의 발은 구름에 잠길 것만 같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이태백은 금세 감정을 다듬었다.

부동심이라거나 그런 접근이 아니었다. 그 전반은 일신상의 이유로 조형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천마에게도 그의 손길이 닿았던바.

케르겔 마탑주가 지금 두 사람에게 뭔 수작을 부리는지 두어 박자 일찍 알아차렸다.

'고유 영역.'

레이컨스에서는 일정 경지에 도달한 인간은 반신의 입구를 두드릴 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합격 목걸이가 고유 결계의 발현 유무였다. 십익 열 명 중에서도 단 네 명만 가능했으니 말 다 했다.

그들 중 고유 영역만을 위해 여타 능력들을 전부 버리는 것으로 제악을 건 환존은 배제하는 게 옳다.

그리되면 남게 되는 십익은 셋.

흔히들 삼재라 부르는 괴물이었다.

또한 이태백이 기억하기로는, 천마는 그 세 명 가운데서 고유 영역을 가장 등한시하는 삼존이었다. 강호인의 천성을 못 버렸는지 마법사면서 꼴에 피와 살이 튀는 상잔을 즐긴다던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늘에 대문짝을 만든 이 고유 영역은, 천마에게 있어선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이란 거다.

헛웃음이 터졌다. 고금제일마를 보러 가는 길이건만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잘못 생각했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환존의 주특기인 만큼 그가 시티 최고일 거라 생각했는데 속단이었다.

천마가 위였다.

누군가와의 비교가 실례다.

실제 신을 비롯해 시티에서 강한 자가 저 하늘의 궁전에서 이태백을 끌어당긴다.

"그래, 어디 한번 상판 좀 보자."

너무 이르게 최종 보스와의 만남이 성사되었군. 하지만 이건 공략하러 가는 게 아닌 협상을 하러 가는 거였다.

'되도록이면 나중에도 안 만났으면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만일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천마의 낯짝을 눈에 박아 둬도 나쁘지 않겠지.

괜히 강한 말은 안 하고 싶다.

그런데 이 상황이면 조금 약해 보여도 상관없다. 천마 앞에선 모두 평등하게 약자이므로.

그렇게 문에 삼켜지기 직전.

쿵, 쿵, 쿵, 쿵.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충격파. 세 본좌끼리 박 터지게 싸우면서 일어난 진동. 눈높이가 달라진 탓인지 어쩐지 그들이 낮게 느껴졌다.

"…어쩌면 난 신의 영역에 발을 담그는 것일지도 모르겠네...."

말은 거창해도 사이버 스페이스임은 인지하고 있다. 닻처럼 바닥에 심어 둬야 자신을 잃지 않는다.

물론 알아차렸다 뿐이지 마땅히 할 수 있는 처사가 없는지라,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갈 것 같은 심장이나 붙들고 있는 거다.

위를, 아니 이젠 아래라고 표현해야 맞을 '하늘'을 내려다보려는 찰나. 탈력감을 느끼며 두 사람은 복마전에 완전히 잠식되었다.

* * *

[#3 대규모] 100.000.000 패치 노트

.

.

.

* * *

사위가 격동한다.

"…으."

신음이 앞니를 뚫고 나온다.

젠장,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에 더욱 그랬다.

"이 대리-!"

그때 한 목소리와 함께, 아무 전조도 없이 뒷덜미가 차게 식었다.

나는 문자 그대로 소스라치게 놀라며 휙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처럼 입가에 해사한 미소를 걸고 서 팀장님이 캔 커피를 흔들었다.

서 팀장님이 왜 여깄지?

'애초에 이 질문을 왜 하는 거야.'

회사니까 당연히 팀장님이 계시지. 나 어제 진짜 술이라도 마신 건가?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빼고는 마셔 본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내가 엉거주춤하게 굽은 허리를 펴자, 서 팀장님이 아랫입술을 삐죽이며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 대리가 회사에서 자는 거야 예삿일은 아니지만, 낮에 자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서 좀 골려 주려고 했더니. 치, 노잼이야!"

그녀가 손톱으로 캔을 땄다.

"저 잤던 겁니까?"

"네, 잤어요."

"얼마나요."

"못해도 반나절 아닐까요."

킥킥거리며 캔을 입으로 가져가신다.

"…그 정도 잤으면 누구라도 깨워야 정상이 아닌가요...."

"이 대리는 모르나 본데, 사내에서 이 대리한테 막 말 걸고 이럴 수 있는 사람 나밖에 없을걸? 다들 이 대리 눈치를 얼마나 보는데."

그래도 그렇지.

"사우인데 자는 사람도 못 깨울 정돈가."

"그럴 정도예요."

"이 세계에 인류애는 이제 없군요."

"그쵸. 우리가 개발하는 게임처럼."

게임이라....

기시감이 드는데.

"…그게 전부 꿈이었던 건가."

내뱉으면서도 나는 흠칫했다.

그 꿈이라는 게 뭔지조차 모르는데 무심코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으윽-

빌어먹을, 또다시 두통이다.

다만 이상했다. 내가 아픔을 호소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 팀장님은 무신경했다. 맞은편 책상에 엉덩이를 붙인 채 커피만 홀짝거리신다.

"이 대리는-."

침묵 속에서 그녀가 재차 입을 연다.

"프랙털 우주론 알아요?"

"유사 과학이잖아요. 뭐였더라‚ '이 세계는 한 거인의 머릿속 내지는 꿈?' 대충 그런 해괴한 논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대리, X발 T예요?"

"그거 그렇게 쓰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그리고 은근슬쩍 욕 끼워 넣기 하는 것 같은-."

"공감 능력이 없어."

아침나절부터 욕을 들어먹으니 더할 나위 없이 배가 부르다. 나는 한숨을 흘리며 팀장님이 주신 캔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내 목젖을 관찰하듯 응시하더니 곱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맛이."

"커피가 어떻긴요. 당연히 달...."

…어?

소리까지 내며 입맛을 다셔 봤다. 혓바닥으로 입안을 두루 훑어보았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직장인의 생명수를 수혈했는데도 뇌가 먹먹했다. 두 모금이면 깨어날 법도 하건만.

"그런 말 있죠, 꿈에서는 통증이나 맛이 마비된다나. 총을 맞아도 아프지 않고, 산해진미를 먹어도 자갈을 씹는 것 같은. 뭐, 그렇다네요."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러다가 이내 냉정을 차리고 팀장님의 말을 곱씹었다.

"…이거, '제가' 꿈을 꾸는 건가요?"

"에이, 그럴 리가요. 조금 전에 말했잖아. 꿈에서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니까. 그런데 이 대리는 어땠어요. 일어나자마자 머리 부여잡았잖아."

"그런데 그것도 가설일 뿐이잖습니까."

"가설은 가정. 즉, 상상이죠."

뭐지.

이 느닷없는 선문답은.

팀장님이 손목을 빙글빙글 돌렸다.

캔 안에서 조금 남은 커피가 잔망스레 철썩이는 소리가 들린다.

"모든 것은 상상에서 출발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긴 한데."

"...."

그녀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레X비를 마저 비웠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이 대리의 꿈이 아니라 제 꿈이라는 거였어요. 가설, 가정, 누군가의 상상. 이 현장의 발원지는 전부 제 머릿속이란 소리죠."

"...."

정보 과다다.

다른 의미로 머리가 지끈거린다. 거기다 멎은 것 같던 두통이 겹치니 헛구역질이 나올 지경이다.

"그렇다면 레이컨스는 어떤가요."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그곳은 이 대리의 세계입니다."

"그건… 팀이 다 같이 만든...."

"아뇨."

작은 도리질이 돌아왔다.

팀장님의 눈이 심유하게 가라앉는다. 머리칼을 몇 올 머금은 채.

"손을 보탰다고 해서 만든 건 아니죠. 창조라는 건 모름지기 피조물을 향한 애정이 있어야 해요."

욱씬.

"우리 회사에서 이 대리만큼 레이컨스에 열과 성을 다한 사람이 있었나요?"

욱씬.

"…팀장님도...."

"이 대리에 비할 바는 아니죠."

뇌압이 너무 높다. 뇌가 안에서 두개골을 밀어내는 느낌. 나는 한쪽 눈만 간신히 뜨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눈은 하나뿐이나 최대한 홉떴다.

안와 너머에 저 얼굴을 새기고자. 이 순간이 지나면 그녀를 영영 만날 수 없을 듯했기에.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팀장님."

"레이컨스는 오롯이 이 대리의 세계예요."

그녀가 책상 모서리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스륵.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위해서일까. 서 팀장님을 자세를 낮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그곳에 간섭할 수 없어요."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내 시선은 바닥에 꽂힌 채였다. 해서 발밑의 변화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

유리로 만든 투병한 바닥.

팀장님이 발아래를 가리켰다.

"저들의 꿈은 이 대리를 보는 겁니다."

그 아래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붙이고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나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 백백교의 신도들이다.

몇 초전까지 생활 오염으로 찌들었던 바닥은 나의 세계. 레이컨스를 투영하는 화면으로 일변한 것이다.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팀장님이 조금 더 얼굴을 디밀었다.

아찔하다. 입술이 포개질 것만 같다.

"이 대리의 꿈에서 꿈을 꾸는 자들을 저버릴 건가요?"

"...."

머리를 흔들었다.

"당신의 영역에서 멋대로 설치는 자들을 가만히 놔둘 건가요?"

"...."

거듭 고개를 저었다.

"그래야죠."

설풋 미소를 얹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끌리듯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 머리가 멍하다.

그러나 안개가 자욱했던 머릿속이 말끔히 개었다. 두려움으로 식었던 가슴이 조금씩 온도를 되찾고 있었다.

"팀장님은 정체가 뭔가요."

"글쎄요."

그녀가 능글맞게 대꾸했다.

"어쩌면 이 대리의 꿈에 등장하는 엑스트라 1, 2. 그런 존재지 않을까 싶은데."

"적어도 엑스트라는 아니에요. 저는 당신이 좋거든요."

"에, 에?!"

눈에 띄게 당황하시네.

이로써 엑스트라가 아님은 자명해졌다.

"이성 관계,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전 당신을 존경했거든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살면서 팀장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까."

"…뭐야‚ 그런 의미였어...."

"아쉬워요?"

"전혀요."

나는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통 유리창에 암막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에 거대한 괴수가 나타나 만든 그림자처럼.

팀장님도 나와 같은 방향을 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내가 먼저 입을 뗐다.

"저희, 다시 볼 수 있나요."

"이 대리는 절 보고 싶어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면요."

"...."

우리 사이로 기류가 흔들린다.

바로 대답이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지 눈을 몇 차례나 끔뻑이신다. 입술이 벌어질 때마다 보이는 하얀 이에 어쩐지 애가 탄다.

"변했네, 좋은 의미로."

그리 말하시면서 가볍게 이마를 때렸다.

"이 대리가 원한다면 볼 수 있죠."

"왜냐하면...."

내가.

"당신이."

만든 세계니까.

"'그자'에게 알려 줘요."

그녀의 뺨이 내 심장과 가까워졌다.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와장창-!

일대가 풍비박산이 났다. 서 팀장님의 세계가 나의 세계, 레이컨스로 흡수되는 과정임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우주의 섭리와 구조를 재조정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며 바라고 원하는 대로.]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107화 삼재, 천마 (2)

고은은 무릎을 꿇고 두 팔로 무게를 버텼다. 공기가 등을 누른다. 외부와 비교해 중력이 못해도 세 배는 더 작용하리라.

그녀의 턱 끝에서 땀방울이 두껍게 떨어졌다. '똑, 똑, 똑' 떨어지는 땀방울이 수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여인의 얼굴이 이지러진다.

"오랜만이구나, 화련."

굴종한 고은의 정수리에 목소리가 꽂혔다. 그녀는 입술을 지르물다가 힘겹게 말을 쥐어짜 냈다.

"…화련. 인사드립니다."

"돌고 돌아서 결국엔 내 앞에 있구나."

이 광활한 장내 전체에 번질 정도로 패력이 깃든 음성이건만. 수심이 낮은 이 호수에 파란을 일으키는 건 고은의 땀방울뿐이었다.

"이 모든 게… *쿨럭!*, 하아… 하아.... 다… 교주님의 보은 덕분입니다. 아니었으면 저, 화련이 지금껏 목숨을 보전하진 못했을 테니까요...."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내가 네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예외를 두는 것이 본교에 좋지는 않으나, 너는 내게 뜻깊은 아이니까. 그렇기에 좌사나 우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너를 오래도록 지켜만 봤던 거란다."

"하면, 어째서 이 시기에 저를 처분하려고 하신 겁니까, 교주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저, 화련. 이승을 뜨기 전에 그거 하나는 선물로 알고 가고 싶습니다."

"여전하구나."

대답과 함께 오연하고 고고한 시선이 느껴졌다.

"속내를 숨기는 게 어설퍼."

"…확인차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고은은 이마를 간신히 들었다. 이마 선에 맺혔던 비지땀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얼굴이 흠뻑 젖었다.

고은의 마법으로 저항하기란 역부족이다. '저분'의 존재감과 마력은 다대하다.

'이 도시조차, 아니 이 세계마저 저분을 담기엔 보잘것없이 작은 그릇이니까.'

더욱이 이 일대는 저분의 영역이었다. 바닥은 호수요, 그녀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거대한 보리수나무였다.

곁가지는 지옥의 가마솥에서 탈출하려는 죄인들처럼 삐죽삐죽 곤두선 채였으며, 한 '존재'가 아궁이의 화염으로서 가부좌를 틀고 안장 있었다.

잔가지의 야윈 그림자가 얼굴과 흉부를 보듬어 안는다. 그 때문에 성별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워낙에 몸 선이 가는 탓도 한몫했다.

고오오오오오.

돈오한 수행자의 모습과는 반대로 이 공간은, 저분의 심상 세계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깨달음을 갈구하는 현자의 수행을 시늉하려는 악마 내지는 마왕. 마라 파피야스(मार पापीयस्)로 보였다.

천마재림 만마앙복

天魔再臨 萬魔仰伏

메가코프 케르겔 마탑의 주인.

묘, 삼재의 천마. 그녀가 빙긋 웃는다.

"내 대답은 네 옆에 있지 않느냐."

"...."

고은은 슬쩍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바로 곁에서 이태백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녀가 〈기척 감지〉로 확인해 본 바 생체 신호가 미미하게나마 잡힌다. 숨은 붙어 있다. 숨만 붙어 있었다.

이태백은 영육이 분리되었다. 말하자면 가사 사망 상태다. 그마저도 천마의 선심성 시혜였다.

뿌득.

고은의 앞니가 붉게 물들었다.

"처분은 저만 받으면 되는 거잖아요, 교주님. 이자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

"과연 그럴까?"

'탁', 천마가 손을 튕기자 호수가 일변했다. 고은을 비추던 거울은 십익 셋이 각축을 벌이는 현장을 반영했다.

콰과과과광!

폐공장의 동량이 허무하리만치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주먹이 일으킨 바람에 철골이 부러지다 못해 가루로 화한다. 매캐한 분진이 화면을 뚫고 고은을 덮치려는 그때.

탁.

그 장면 그대로 정지했다. 역시 석상처럼 고은에게 천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태를 초래한 자가 화련, 네 옆의 그 사내 아니더냐. 좌사는 우리 마탑의 대들보다. 한데 그 사내 때문에 우리는 대들보를 잃게 생겼어. 그에 대한 책임을 응당 져야겠지."

음영 밑에서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다 알고서도 저런 말을.'

천마의 〈기척 감지〉는 말 그대로 극점을 찍었다. 그리고 극에 달한 기척 감지는 세계의 소리를 듣는다. 흐릿한 윤곽으로나마 미래를 들출 수 있었다.

천마는 알고 있었다.

이태백과 환존이 우연찮게 마주칠 것을.

그녀 본인의 왼팔을 벼랑으로 내몰 것을.

이후에는 고은을 데리고 천마를 찾아올 것임을.

이쯤 되니 고은은 분하지도 원통하지도 않았다. 부조리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우주도 실수할 때가 있구나 싶었다. 실수가 아니고서야 저런 존재가 이 시대에 살아가는 건 말이 안 된다.

"…죽이세요."

고은이 말했다.

"저만 죽이고 끝내세요. 부탁드립니다. 제 피만 보시고 이자는 살려 주세요."

"네 목숨의 가치를 너무 높게 잡은 게 아닌가 싶구나. 네 혈겁이 배교와 좌사의 목숨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뭐라도 하겠습니다. 종으로 부리시려면 부리고, 마법 피실험체로 쓰실 거면 쓰세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자를 비호하느냐."

모른다.

"사모하느냐?"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가족처럼 느껴지더냐?"

가까웠지만 그것도 대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냐."

천마의 목소리에서 체향이 느껴졌다. 걸쭉한 점성. 죽음의 냄새였다.

'그렇구나.'

고은은 그제야 깨우쳤다. 이건 감정에서 촉발된 항거가 아니었음을.

그녀는 마법사다. 감정이란 말랑말랑한 개념은 줄 쭉 긋고 치운 지 오래였다.

'항거를 위한 항거.'

이태백은 매사에 틱틱거린다. 남이 보기엔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성격이지만 그는 성격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태백은 체제의 부품이 되기를 강요하는 이 도시에 지속적으로 신바람을 불어넣는다. 그 파급 효과는 암존, 환존, 궁존의 다툼이 증명한다.

"당신이."

고은이 비척비척 두 발로 섰다. 유인원이 짐승의 탈을 벗고 직립으로 보행하는 그 순간처럼.

"그걸 바라―"

그와 동시였다.

후우우우우우우웅.

물비늘에 파란이 일었다.

"...?!"

바람은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이태백으로부터 발원했다. 멍하게 열린 고은의 눈이 퍼뜩 전방으로 미끄러졌다.

머리그늘 속에서 번뜩이는 귀화.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

그 천마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태백이 누운 자세로 둥실 떠오른다. 죽음의 무게가 낮아지고 생명의 부피는 팽창한다.

스르륵.

그의 의식이 스르륵 융기하며 수면 위로 솟아난다. 외로 누운 이태백이 공중에서 반듯이 도도하게 기립한다.

눈을 떴다. 동공의 윤관은 흐릿하나 뿜어내는 정광은 천마의 안광만 못지않았다.

"내 세상에서 이곳을."

시선을 슥 휘둘렀다.

그러고는 잠결에 취한 채.

"내 눈앞에서 치워라."

드디어 운영자가 입을 뗐다.

호수가 대번에 사라졌다. 보리수 나무의 가지가 끄트머리부터 석쇠 위 오징어처럼 굽으며 시들었다.

천마의 심상이 증발하고 건조한 목소리를 투영하려는 듯 사막이 펼쳐졌다.

[상대방의 마력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상대방의 정신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상대방의 생명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운영자의 마력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운영자의 정신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운영자의 생명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너는."

천마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엇이냐."

이태백이 수인을 맺으며 일축했다.

"꿇어라."

쿠우웅.

"머리가 높다."

모래가 잘게 들썩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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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 저―

…띠링!

[새로운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

〈돌발 퀘스트 ― 이길 수 없는 적〉

퀘스트 내용: 이길 수 없는 적을 굴복시키고 '사이코패스(진)', '날강도(진)'... 등등을 이용하여 야멸차게 원하는 바를 뜯어내 보세요!

보상: 30pt, 예정 보상의 1.2배.

실패 시: ―

+

〉〉 자동 저장······.

〉〉 패치를 적용합니다

* * *

십익의 셋이 박 터지게 싸우던 폐공장은 창졸간 교착에 접어들었다. 은근한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세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폐공장이 엉망인 건 물론이요, 그 인근도 평야가 되었다. 폐품 사이로 잡목만이 듬성듬성 머리를 내밀었다. 오늘부로 한 중소기업의 공장지대였던 47구는 사람들의 뇌리에 폐허로 기억되겠지.

"으으으으, 죽겠다."

궁존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팔에 난 상처를 쭉 짜내자, 연둣빛 액체가 물총처럼 솟구쳤다.

극독이었다.

궁존이 만독불침을 이룬 지 장장 십 년.

한데 성취가 무색하게 독존의 극독은 궁존의 혈관에 침투했다. 그래도 괜히 만독불침이 아닌지 장기까지는 닿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쯧."

응급 처치를 못 했으면 위험할 뻔했다.

궁존은 먼 발치에서 마찬가지로 몸 상태를 훑는 독존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체념의 헛웃음과 함께 다짜고짜 친근한 말씨로 말을 걸었다.

"간만에 보는데 선물은 못 줄망정 독부터 디미느냐! 사내가 말이야. 그런 약에 의지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 모르나! 그리고 너, 정파잖아!"

"닥쳐라! 원숭이 놈아!"

독존이 눈을 사납게 홉떴다.

"아이쿠, 깜짝이야. 왜 소리치고 지랄이냐, 닭 새끼야! 내공 실어서 외치면 고망 찢어질 수도 있다고!"

"그 정파라는 감투는 버린 지 오래다!"

"그래? 언제부터?"

안하무인. 궁존의 정체성이다.

"네놈이 내 모든 걸 앗아 간 때부터다!"

"모든 걸 앗아 갔다면서 넌 용케 살아 있구나. 아직 생에 미련이 많이 남은 모양이지?"

"닥쳐라!"

원숭이와 닭이 대거리를 하는 동안, 돼지 환존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동수를 이루고는 있다.'

그러나 실상은 사몰하기 직전이었다. 왜냐하면 환존은 마법사 체질이다. 순수 무력으로 십익에서 사위를 다투는 두 존재에게는 몇 끗발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 밑천은 머지않아 드러날 터. 이대로는 불귀의 객이 된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태백...."

그 뱀 같은 새끼를 족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광경을, 사이버 스페이스로 구현해 선물해 주리라.

그러려면 저 두 십익의 협조가 필요했다. "손 좀 보태 주십쇼." 이런 접근 말고 보다 은밀한 방식으로.

어디서부터 정할지는 이미 정했다.

저기 저 활쟁이. 파렴치하기로는 시티에서 둘 째가라면 서러운 인성 개차반 원숭이 놈.

환존의 인성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닌데 원숭이한테는 다섯 수가량 접어 줘야 한다.

'그놈을 죽이려면.'

집념이 상념을 끊어 냈다.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이태백을 향한 분노가 환존의 이성을 장악했다.

"보시오들."

"대화하는 거 안 보이냐."

미친놈, 그게 대화냐?

"왜 그리 까칠하시오, 황 형."

"마법사는 말 한마디에 열 개의 흉계를 숨기는 놈들이다. 그 주둥이에 난 혓바늘부터 없애고 말해라. 아니면 내가 그 혀를 잘라 주랴?"

"너무 화내지 마시고 들어 보시오."

"아까부터 뭘 그리 들어 보라는 거냐."

환존은 턱뼈에 불거지는 십자 혈관을 꾹꾹 집어넣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모든 사달의 원흉은 따로 있소. 우리가 이리 붙게 된 거나, 황 형이 시에스타에서 내 처진 원인 말이오."

"뒤지고 싶구나."

"단어 선택에 실수가 있었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황 형이 횡액을 당한 이유는 이 내가 아니라, '다른 자'에게 귀책이 있다는 거요."

"그 다른 자가 누군데."

넘어왔군. 원숭이 새끼.

"그자의 이름은...."

바람 소리가 들풀을 타고 불어쳤다. 이어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에 셋은 얼른 머리를 젖혔다.

별안간 생긴 균열. 밤하늘이 주둥이를 벌리듯 쩍 갈라지더니 세상을 빨아먹으려는 듯 흡인력이 발생했다.

"내가 귀책을 물어야 하는 자."

궁존이 다시 환존을 보았다.

"…케르겔 마탑주를 말하는 거냐?"

108화. 삼재, 천마 (3)

노력으로는 결코 십익의 자리를 거머쥘 수 없다.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탁월하다'란 말로는 부족한, 한 시대를 풍미하는 불세출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야 레이크 시티에서 수위에 들 수 있었다.

독존, 환존, 궁존.

세 사람 역시나 타고나길 재능이 특출나다. 그렇기에 약자의 심정을 느낄 기회가 적었다. 이를테면 두려움이나 공포 같은 가장 원초적인 감정조차 그들에겐 특이점이었다.

그런 셋이 한데 모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공포에 전율했고 누군가의 등장에 압도되었다.

고오오오오오.

공기의 밀도가 높아지니 덩달아 뇌압도 치솟았다. 버르적거리던 독존은 관자놀이 부근을 붙잡고 신음했다.

환존은 얼빠진 기색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으며 궁존은 활시위를 당기려다가 손가락에 힘이 풀려 실이 이탈했다.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균열 사이는 질척거리는 석유색. 이 두 초상 현상을 동반하는 존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시발."

욕지기를 씹어뱉은 원숭이 궁존이 환존을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두 쪽이 난 하늘이 스산하게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야, 이 돼지새끼야.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 내가 귀책을 물어야 하는 자가 정녕 천마라 이 말이냐?!"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한 식구면서. 것도 왼팔을 자처하는 새끼가 천마의 속내를 모르면 누가 알아!"

환존이 파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그저 저분의 주구야."

"어우, 저 새끼 망가졌네, 저거."

궁존은 짐짓 고개를 저었다. 핀잔하긴 했어도 천마와 환존의 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말이 좋아 광명좌사, 천마의 왼팔일 뿐. 천마에게 있어 환존은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존재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사이버네틱 의체를 들 수 있겠네.

오히려 취급이 더 나쁘다. 사이버네틱 의체는 귀물이기라도 하지.

천마의 눈높이에서 광명좌사'쯤' 되는 인물은 지천에 대체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를 방증하듯 그녀의 눈엔 늘 권태가 끼어 있었으므로.

"…마침 모습을 비추시는군."

인영이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뒷짐을 지고 한없이 거만한 시선으로 세상을 오시하면서.

당장이라도 저 미간에 화살을 꽂아 주고 싶다만, 그 전에 이쪽 목이 먼저 허공을 날겠지.

"천마재림 만마앙복."

그때 환존이 두 손을 치켜들고 넙죽 엎드려 절했다. 궁존은 그걸 보며 눈을 찌푸렸다가 태연함을 가장하며 외쳤다.

"천마야! 오랜만이구나!"

"...."

천마가 지상을 밟은 건 동시였다.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폐허를 넓게 쓸었다.

"간만이로군."

말을 건 이는 궁존이 아니었다.

"강호에서 보고 처음이지, 아마."

"그렇소...."

독존이 손등으로 뺨을 훑어냈다.

"암존이라 불렸던 사내가 어찌 독을 탐독한단 말인가. 그건 일개 편법이로다."

"내가 보기엔 장사께서 내공을 태워 부리는 '마법'이란 잡기도 하등 다를 바 없소이다. 어찌 강호의 본질을 멋대로 재해석한단 말이오."

"시대는 변하고 그에 적응한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이네. 그게 우주의 순리이니. 한낱 미물인 나는 그저 따를 따름이지."

독존은 속으로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호모 사피엔스에서 동떨어진 존재가 과하리만치 겸양을 떠는구나.

하나, 그녀의 말에는 조금의 기만도 묻어 있지 않으리라.

'눈높이'의 차이다.

고작 뛰어난 범부에 불과한 본인과는 바라보는 시야가 다른 것이었다.

"천마야―!!"

따가운 기함에 그제야 천마는 기꺼이 시선을 주었다. 궁존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인사를 했으면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과거에 잠깐이나마 각축을 벌였던 나인데. 어찌―"

"짐승이 우는군."

탁, 소리와 함께 궁존의 뺨 옆으로 예리함이 치고 갔다. 귀 부근이 뜨거웠고 곧이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어?"

귀였다. 다름 아닌 궁존의 귀.

독존이 기를 쓰고 공격해서 팔에 생채기 낸 게 고작이었다. 한데 천마는 손짓 한 번으로 십익의 신체 부위를 절단 냈다.

궁존이 넋이 나간 채 입을 뻥긋거렸다. 그는 아래와 천마를 번갈아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 이년이! 감히 귀를! 내 귀를!"

"완전한 농아가 되고 싶으면 더 지껄여 보거라."

"…이, 이."

천마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참고로 아직 내 손속이 부족하여 마법의 미세한 컨트롤이 부족하다."

"...."

"다음 '참격'에 그대의 귀가 날아갈지, 목이 날아갈지는 나조차도 모른다는 말일세."

"...."

핏물이 궁존의 턱을 타고 굵직하게 흘렀다.

그 철면피인 궁존이 분을 꾸역꾸역 삭이면서 주먹만 떨고 있었다.

귀가 잘린 건 궁존이건만, 독존도 입술이 바싹 탄다. 그는 조금 전의 '참격'을 복기했다.

천마의 고유 마법은 〈심필중검心必中劍〉이다.

심상을 검으로 빚어내는 심검과 상대를 반드시 베고야 마는 필중검의 묘리를 섞은 마법.

강호를 제패한 천마답게 그녀는 검술의 극의를 터득한 지 수십 년이었다. 단 일격으로 적을 절멸시키는 즉살기.

그러나 적어도 이 우주에는 완전무결이란 개념은 없다. 완벽의 근사치인 심필중검에도 약점이 있기는 있다는 뜻이다.

'단발성.'

심필중검은 한 발로 끝이었다.

연달아 퍼붓지 못한다. 물론 그 한 방에 대개 황천행이었지만....

꿀꺽.

독존은 천마를 보았다.

'저 여자의 기준은 달라.'

천마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터다.

그래서 포기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참격에 반드시 적을 베는 절기를. 제약을 건 것이다.

'반드시 벤다'의 필(必)을 버린다. 기껏해야 한자병기 하나 뗐을 뿐이지만 '반드시'란 개념을 포기한 파급 효과는 무지막지하다.

그로 말미암아 단발성인 기술은 연속기로 바뀌었다. 한 번의 마법 시전으로 대략 천 번의 참격을 쇄도시키는 광역기로 말이다.

천마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중(中)을 포기했다. 그로 하여금 위력은 대폭 감소한다. 하지만 속도가 껑충 뛰었다.

천마의 참격은 소리를 우습게 추월하는 수준이었다. 제약의 활용이 이토록 무궁무진한 것이다.

'포기만 하진 않았지.'

아니.

그녀는 전부를 독식하고 싶어 한다. 우주의 섭리에 반하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한 두 글자. 천마는 필과 중을 숙련도로써 다시금 원상태로 복원하고 있었다.

하나를 취하려면 하나는 내줘야 하는 게 법칙이건만.

'날카로워졌다.'

또한 단칼에 궁존의 귀를 절삭할 만큼만 각도를 조절했다. 천마는 정녕 역천의 장벽을 손수 허물고 있었다.

사납게 들썩거리던 공터는 소강상태를 맞이한 가운데 천마가 이번에는 환존을 돌아보았다.

"좌사야."

"예...!"

"내가 네게 하명한 것이 무엇이냐."

"화, 화화, 화련을 처분하라 명하셨습니다."

천마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네 눈엔 저 둘이 화련으로 보이더냐."

"…감히 말씀드리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읊어라."

초근거리까지 다가온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우처럼 말린 환존의 등줄기에 서슬이 일었다.

"배교자 화련을 처분하고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웬 훼방꾼이 등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분부대로 화련의 행방을 물었고 그자는 칼부터 뽑아들었습니다."

"그자가 그대보다 강했는가."

"아…닙니다."

"하면 어째서 그 손에 그자의 수급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이냐."

"그, 그그, 그것은!"

"도탄스럽구나. 우리 마탑에서 나 다음을 자처하는 자가 훼방꾼 하나 처리하지 못해 이리도 쩔쩔매다니. 하물며 원숭이와 닭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지도 못하는구나."

환존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천마와 시선이 만났고 그는 직감했다. 저 버석한 눈동자에서 본인은 더는 '생물'이 아니었다.

"본교가 준 휘장의 가치를 더럽혔으니 그대는 배교자나 다름없다. 그러니 살처분해야 옳겠지."

"교주님―!"

"잘 가시게, 좌사."

천마가 손가락을 튕겼다.

피륙음. 환존의 형체가 밑동부터 분쇄되기 시작했다. 쪽파보다도 고운 입자로 갈려 나간다.

환존은 그렇게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세상에서 지워졌다. 암만 한바탕 전투를 치렀다고 한들.

열 강자 중 한 축의 죽음이라기엔 초라하기 짝에 없었다. 천마의 눈이 궁존을 향했다.

"자네는 어째서 좌사와 혈투를 벌이고 있던 것인가. 독존과 자네의 골은 내 안다마는, 좌사와 그대는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을 터인데."

"…녀석이 내가 시에스타에서 방출된 까닭과 연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지금에야 아무래도 상관없소만...."

궁존의 말투가 부쩍 공손해졌다. 천마가 까딱 턱을 들어 보였다.

"설명하라."

"녀석은 본인의 사이버 스페이스를 확장하기 위해서 그 분야의 첨단을 달리는 시에스타와 주기적으로 밀회를 가졌소."

"그렇군."

"알고 있었나 보군."

천마는 이제는 공허한 빈자리를 일별했다.

"환각에 의존하는 자가 딴 맘을 품는 건 예삿일은 아니지."

"뭐, 댁네 부하 관리야 내 소관은 아니지."

"...."

"경솔했소."

궁존은 슬슬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그 중간 과정에서 좌사가 이상한 말을 했소. 정확히는 다른 누군가를 언급하더군. 이름이 뭐였더라. 꽤나 특이한 이름이었는데. 이, 태...."

"이태백."

"맞소! 그 이름이오."

직후 궁존의 표정이 굳었다.

"…한데 교주께서 어째서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요?"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게 그자니까."

…뭐?

궁존과 독존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보냈다? 단어 선택이 잘못된 거 같은데.

그 누가 천마를 현장으로 파견한단 말인가? 두 사람이 혼이 빠지자 천마가 툭 던지듯 말을 덧붙였다.

"두서를 생략했군, 거래를 했네."

"…교주가 누군가와 거래도 하시오?"

독존이 끼어들었다.

"합당한 대가를 제시하면 못 할 건 또 뭔가. 다만 지금껏 내게 원하는 걸 줄 만한 자가 나타나지 않았지.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일이 됐군."

"대, 대체 이태백 그자가 누구요?"

천마의 눈썹이 굽었다.

이마저도 독존은 놀라웠다. 왜냐면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해 줄 수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군."

"이거 하나만 알려 주시오. 나도 사건의 당사자이니. 강호의 도리로서 그 정돈 말해 줄 있지 않소?"

"받아들이지."

"그 거래 품목이 설마 좌사의 목숨이었소?"

천마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녀에게 침묵은 곧 긍정.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이태백이 제시한 바는 무려 십익 하나의 목숨과 맞먹는 것이었다!

독존이 그 세 글자를 똑똑히 새기는 와중이었다. 천마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상공에서 재차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싸움을 막을 생각은 없네만, 내 거래자는 가급적이면 둘의 흉금을 후일에 풀기 원하더군."

"...."

"...."

"이건 그저 첨언이니 무시해도 좋네."

천마가 천천히 하늘로 비상한다.

"그건 그렇고―"

잠시 후, 그녀의 신형이 균열 사이로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전음이 울렸다.

"어떻게 유지되었던 열 명에서 한 명이 빠지게 되었군."

독존과 궁존은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린다고 느꼈다.

"보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109화 시티의 풍운아 (1)

낮게 눌린 숙덕거림이 정신을 깨웠다.

시야의 테두리가 삐죽삐죽 갉아 먹힌 채였다. 이태백이 눈을 끔뻑거리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어 댔다.

탄성과 환호가 뒤섞인 소리가 고막을 엄습한다. 막 깨어난 참인데 사위가 격정으로 치달으니 잠이 냉큼 달아난다. 그때, 인파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누님! 조사님이 깨어나셨어요!"

아직 뿌얘서 얼굴로는 식별이 안 되지만, 귀를 찌르는 목청과 '누님'이란 호칭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레온임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관절 그가 누워 있는 장소 역시나.

'백백교 지부구나.'

무작정 케르겔 마탑으로 처들어갔다.

직후 마탑주가 생성한 사이버 스페이스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고서....

안타깝게도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마탑주를 만났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의 상황도 깔끔하게 지워졌다. 마음의 소리가 말한다. 그 만남이 케르겔 마탑주와의 만남보다 더 중요했다고.

답답하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다.

'항상 이런 식이다.'

기틀을 잘 닦아 놓으면 뭐 하나. 정작 제일 중요할 때 기절해서 기억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이태백은 거기서 어떤 의지를 느꼈다. 기억의 필름을 가위로 난자하는 이는 따로 존재하리라.

그가 인상을 쓰며 착잡해하자 백백교의 신도들이 숨을 죽였다. 슬슬 눈치를 살핀다.

그에 그만 허핍한 웃음이 터졌다.

"미안하다, 애들아."

"저, 저희에게 미안하실 건...!"

"아냐. 일어나자마자 너무 무게 잡았네."

"바, 바, 바로 일어나지는 마세요! 조사님 무려 사흘을 주무셨거든요...!"

사흘을 내리 잤다고? 그런 거사를 치르고 아무 일 없이 사흘이 지났단 말이야?

'이거 꿈 아녀?'

이태백은 기상하기에 앞서 볼을 꼬집었다. 긴가민가하다. 이건 꿈인가 현실인가. 해서 레온에게 부탁했다.

"나 한 대만 때려 봐."

주변의 아이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레온은 문파에서 추방 통보를 받은 제자처럼 망연자실했다.

"제, 제가 어떻게 그런 불경한 짓을!"

"너, 나 처음 봤을 때 생각 안 나니."

"그건...!"

"한 대만 살짝. 어깨 쳐 봐."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레온은 끙끙 앓았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부탁에 못 이겨 주먹으로 내 어깨를 쳤다.

"어떻게 조사님을 때릴 수 있지?"

"불경해… 당장 화형시켜 버렷!"

"아아, 형님. 당신을 존경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당신은 저의 하늘을 가격했습니다."

"레온 오빠, 그런 사람인 줄은 알았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었구나. 기대도 없었는데 실망이야."

아이들은 호들갑을 떨었고, 이태백은 어깨를 매만졌다. 적당한 진통이다. 이로써 꿈이 아닌 건 증명되었다. 이게 꿈이면 그냥 여기서 눌러 살도록 하자.

바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질책의 시선을 받아 내는 레온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려 주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백백교 신도의 미덕은 용기다."

"...?!"

"네 용기를 내가 치하하마."

"배, 백백!"

성흔을 입은 듯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로 사이비 교단의 수장이 된 기분이었다. 뭐, 더는 현실 부정할 것도 없나. 이태백은 백백교의 교주다.

"나는 언제나 레온 오빠를 믿고 있었어. 혹시 정수리 냄새 좀 맡아도 될까? 조사님의 체향을 조금이나마 코에 저장하고 싶어서."

이태백의 치하 덕분에 거짓말처럼 레온에게 쏘아지던 핀잔이 멎었다. 태세 전환 속도가 참....

"나 오늘 머리 안 감았는데."

"앞으로도 감지 마."

저 위험한 눈빛의 핑크 머리.

이름이 안젤라였던가. 이태백한테 직접적으로 말을 걸진 않으면서 벽 뒤에서 뜨겁게 시선을 보내는 소녀였다.

이태백이 누굴 데려오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경기를 일으키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는 복잡한 캐릭터였다.

"감을 생각하면 그 대갈통을 잘라 버릴 거야. 감히 오빠 따위가 조사님의 체취를 털어 낼 생각을 해?!"

"조, 조사님-! 살려 주세요-!!"

"밥들 먹고 있어."

"조사니이이미이."

이태백은 신도들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올라갔다.

'마지막에 니미라고 했던 거 같은데.'

에이, 설마.

이태백은 그렇게 매캐한 담배 냄새를 쫓아 방 앞에서 멈춰 섰다. 무의식적으로 살포한 [기척 감지]가 인기척 둘을 잡아내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고은이 창틀에 걸터앉아 곰방대를 뻐끔거리고 있었다. 쟈스비는 책상에서 노트북을 붙잡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앞에서 쿨하게 흡연을 때리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이태백을 발견했다. 잠시 사이를 두고 고은은 곰방대를 머금은 채로 싱긋이 웃었으며 쟈스비는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창조주님!"

쟈스비가 와다다 달려와 폭 안겼다.

"괜찮으세요? 어디 머리 다치신 곳은 없고요? 이상이 있으시면 저한테 바로 말해 주세요. 제가 의료용으로도 개발된 AI라서 그런 방면에 있어서는...."

"오버는 그만."

"칫."

"연기도 그만하고."

흥, 비음을 흘린 쟈스비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노트북을 두드렸다. '걱정해 줘도 뭐라 그래'라고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지만 이번만은 봐주기로 했다.

"몸은 좀 어때."

고은이 곰방대를 꺼뜨리며 말했다.

"말짱해. 하도 말짱해서 사후 세계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야. 내가 마탑에 다녀온 사실도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니까. 고은, 너 데리고 거기 갔던 거 꿈 아니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지거든...."

태연한 척하지만 고은의 목소리엔 그날의 긴장이 채 떠나지 않았다. 그날의 아찔한 대치.

그 괴이쩍은 광경은 그녀에게 있어서 두 번은 겪지 못할 충격을 선사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이태백의 말에 고은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채 식지 않은 곰방대를 품 안에 집어넣은 뒤, 쟈스비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밥 좀 먹고 올게요."

쟈스비는 눈치껏 노트북을 들고 방을 빠져나갔다. 둘 간에 모종의 이야기가 오고 간 모양이었다. 아니면 쟈스비의 빛나는 지성으로 스스로 추리해 냈든가.

뭐가 되었든 심상치 않은 상황인 건 분명해 보였다. 이태백의 눈에 의뭉이 들어차는 가운데 별안간 고은의 마른 손가락이 어깨끈을 툭 털었다. 손짓 한 번으로 그녀는 반 나신이 되었다.

"...뭐, 뭐야 갑자기."

이태백은 당황했다.

"말했지. 그 얼굴로 그런 쑥맥 같은 말 하지 말라고. 그리고 네가 상상하는 그런 모먼트 아니야."

고은은 딱 잘라 말했다. 창문을 마주하고 등을 내보인 그녀는 상담 같은 뒷머리를 옆으로 살짝 치워 냈다. 그러자 이태백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전까진 없던(예전에 부득이하게 고은의 등을 본 적이 있었다.) 웬 문신이 고은의 등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기실 문신이라기보다는 문양처럼 보였는데, 이태백은 그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뭔지 대충 짐작 가지?"

"...."

이태백은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박이다.'

마법은 내공의 재해석이요 무릇 내공 내지 기연은 자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강호인들의 본래 터전인 무림에 숲(林)이란 글자가 끼어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는 게 그들의 기조며 자연에서 잠시 힘을 빌린다고 생각한다.

마(魔)란 글씨에 어울리지 않게 마법사는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자들이다. 자연에 의념을 더해 불, 물, 공기, 번개의 세를 형성할 뿐이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 저주다.

그리고 주박은 저주의 일종이었다.

주박, 주언, 주구, 주령. 주 자 돌림이면 대개 저주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중 주박은 마력 혹 내공에 개인의 사념을 듬뿍 담아낸 다음 '단일 대상'을 지정하여 결박함을 뜻한다.

주박은 저주 가운데 그 효과가 가장 강력하다.

그만큼 제약도 까다로웠다.

일단 상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운 걸 알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촉매를 상대 몸에 새겨야 비로소 주박이 성립된다.

그래, 고은의 등에 그려진 문양처럼.

이태백은 침음을 음미하듯 한참을 입안에서 뇌까렸다. 죄악감이 심장을 조였다. [주박]이란 개념을 창조한 자는 그였으며 누구보다 부작용을 잘 아는 사람 또한 이태백이었다.

"…마탑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하지 못하게 천마가 주박을 걸었군...."

이태백이 마탑에서의 기억을 잃은 것도. 두 사람이 사지 멀쩡하게 그곳에서 나올 수 있던 것도. 전부 다.

그 모든 부채를 고은이 짊어지기로 한 거다. 왜 그렇게까지? 같은 얼빠진 소리는 그녀에게 실례다. 기억의 공백에 필경 변수가 발생했고 그걸 무마하고자 고은은 주박을 달게 받았을 테니까.

홧김에 역정을 내면 고은의 희생을 모욕하는 셈이었다. 하여 이태백이 한다는 말은 변명이었다.

"내가 널 살리려는 방법은 그런 식은 아니었어. 좌사를 마탑으로 물리는 대신 내가...."

"좌사는 죽었어."

몰랐던 사실이다.

"걱정 마. 이건 주박에 엮이지 않은 이야기라서 이 정도는 말해도 돼."

"...."

"너는 천마와 '모종의 계약'을 체결했어. 천마는 그것을 승낙했고, 거래를 즉시 이행했지."

"그 거래 내용에 좌사의 처분도 있었나?"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알겠다...."

고은은 어느새 몸을 돌려 왔다.

그녀가 헐벗고 있든 말든 간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태백은 그저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아직 계약은 남아 있고 천마는 머지않아 그걸 차례차례 이행할 거야. 그리고 그게 끝날 때 대가를 받으러 너를 찾아오겠지."

"딱 잡아서 '나'라고 말한 건, 너한테 더 이상 받을 게 없다는 뜻인가?"

"주박까지 걸린 마당에 나한테 더 받아 갈 게 뭐가 있겠어. 나 아니었으면 그냥 죽여 달라고 애원했을 테지만, 나야 원체 강호서부터 험하게 굴러 온지라."

고은이 어깨를 으쓱했다. 달덩이 같은 살결이 훤히 드러났다. 이태백은 눈을 돌리며 괜히 날 서게 말했다.

"나이도 어려서는 꼰대같이도 말하네."

"삶의 밀도가 다르잖아, 삶의 밀도가. 하기야, 삶의 밀도로 따지면 너도 한 풍파하지. 시에스타 번견에, 사형수에, 레지스탕스에, 종국에는 십익 몇이랑 맞짱을 뜨고. 하물며 천마랑 계약까지. 혼자 다 해 먹고 사네, 아주."

"...!"

순간 뇌리에 섬광이 스친다.

'주박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제가 불가능하다.'

케르겔 마탑이 마법 하나만 위시하고도 메가코프로 위명을 떨칠 수 있는 까닭은, 과학으로도 신비의 영역을 대체할 수 없어서였다. 하물며 마법 이상으로 묘리가 까다로운 저주 계열을 말해 봤자 입만 아프다.

그러나 이태백이 누구던가.

보스 디자인 담당자다. 보스가 유저한테 거는 상태 이상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하며 설계했던 사람이다.

'주박을 해제할 방법.'

딱 하나 있다.

비정상적인 방법이고 그 수단을 어지간해선 찾을 수 없어서 그렇지.

하나 그 찾기 지랄 맞게 어려운 수단이 마침 떠오른다. 정확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찰나였다.

쿵쿵쿵쿵.

벽의 석벽이 요동친다. 일련의 무리가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였다. 아이들의 그것이라기엔 기개가 느껴진다.

'호랑이도 제 생각하면 온다던가.'

강현성이다. 발소리가 여럿이었다. 쟈스비가 이태백이 깨어난 걸 알려 9대대가 통째로 몰려왔을 터.

이태백은 피식 미소 지었다.

그런데, 잠깐....

뭔가, 뭔가 상황이 이상했다.

'씨발.'

이태백이 다급히 고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보통 위기를 감지했을 때는 늦는 법이다.

"태배애애애액...!"

강현성의 말꼬리가 뚝 고꾸라진다.

"…너희… 뭐 하고 있었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9대대원들이 강현성 옆으로 목을 빼더니 저마다 탄성을 내질렀다.

아, 빌어먹을.

110화 시티의 풍운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