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모두가 내게 집착함 (2)
이태백은 후미토를 찾아갔다. 그러고서 막 있었던 일을 핵심만 추려서 짤막하게 이야기했다.
"…그렇게 됐다."
"자, 잠시만! 여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봐!"
설명이 끝나자마자 후미토가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의 방문 앞에서 덩그러니 남겨지길 잠깐.
얼마 뒤, 후미토가 누군가와 함께 돌아왔다.
두두두두.
말할 필요도 없이 강현성이다. 쿵쿵 발꿈치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물소가 돌진하듯 다가왔다.
"태-백아─!"
입매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입꼬리가 정말로 귀에 걸릴 정도였다.
이태백이 끝내 9대대에 잔류를 택했다. 체면이고 뭐고, 마음 같아선 쾌재를 부르고 싶었다.
아니.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실제로 복도가 떠나가라 박장대소했다. 오가던 단원들이 강현성을 실성한 사람 보듯 쳐다봤다.
"강현성 대대장님 왜 저러셔?"
"새벽에 긴급 대대장 회의 열렸다던데, 그때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겠지. 아니면 뇌옥에 다녀온 이후로 머리가 좀 이상해지셨던가."
"9대대에 좋은 일이 있어 봤자 아닌가."
"하긴, 9대대가 말이 좋아 특수 부대지. 사실상 사이코패스들만 모아 놨잖아. 한 명도 빠짐없이."
맞는 말이긴 하다. 눈으로 봐서 잘 안다.
"그건 그렇지."
"저 검은 머리도 봐. 강현성 대대장이 데려온 그날에 제비 제임스 차석한테 개쪽을 줬잖아."
"맞아, 뭐라 그랬더라. '꿇어라.' 이랬던...."
뒷담할 거면 안 들리게 하든가, 이 새끼들아! 엄지가 저절로 우산의 개폐 버튼으로 향한다.
"일단 가자. 괜히 엮여서 좋을 거 없으니까."
단원들은 세 사람을 피해 벽에 딱 붙어서 지나갔다. 흡사 셋 주변으로 결계가 처진 것처럼.
"쪽팔리니까 그만 웃어라. 확 철회해 버릴라."
이태백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아, 하하! 미안. 너무 기쁜 나머지!"
얼싸안을 기세로군. 그러면 파이톤의 총부리로 입안을 차갑게 더듬어 줄 것이다.
"남자 새끼가 징그럽게 그러지 마라. 제발."
"대견해서 그렇지! 생긴 건 기생오라비인데 의리가 아주 쇠심줄 같아! 크하하하!!"
"의리는 얼어 죽을."
이태백이 표정을 휴지 뭉치처럼 구기면서 몸서리를 쳤다. 강현성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계속 히죽거렸다.
고하를 따지면 분명 강현성이 갑이건만. 어째 갑을이 역전된 듯한 기묘한 조직도였다.
뭐, 입장을 바꿔 보면 짐짓 이해는 된다.
다른 조건들이 길 가던 아무나 잡고 설명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원체 파격적이었다.
'내가 태백이었다면.'
못해도 반나절의 유예 기간을 확보한 한 다음에 곰곰이, 그리고 꼼꼼하게 득실을 따져 가며 고민했으리라.
같이 탈옥했다고 해서 이태백이 반드시 9대대로 와야 한다는 의무는 없었다.
그 일은 강현성의 변덕이었을 뿐이다.
빚을 지우려는 의도는 맹세코 없었다.
반대라면 반대였지. 뇌옥에서 썩게 두지 않은 자신이 대견했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태백이는 레지스탕스의 부강에 크게 이바지할 거다.'
먼젓번 임무에서 이태백은 차고 넘치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본인의 소속을 선택할 권리와 자격을 쟁취한 건 오롯이 그의 역량이었다.
'사람 보는 안목이 선구안에 가까운 총대장님이 잠재력 하나는 10익 급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렇기에 이태백의 향후 거취가 어디든. 강현성은 원망은커녕 싫은 내색도 안 할 작정이었다.
다만.
다만, 딱 하나 바라건대 8대대만큼은… 설탕물 새끼만큼은 고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페퍼, 그 미친놈이 설마 차석 자리를 걸 줄은.'
물론 강현성도 번지르르한 조건을 쾌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건을 강행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러지 않았다.
이태백에게 특혜를 몰아준다고 치자, 뇌옥 동반 탈옥과 더불어서 임무도 함께한 전력이 있었다. 그의 거취는 9대대가 유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당장은 좋겠지.
하지만 기존 단원들은?
볼멘소리가 속출할 거다.
풍선 효과. 어느 한쪽으로 크게 기운 균형으로 말미암아 다른 쪽에서 손해를 본다. 그리고 이는 9대대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태백이로 인해 불화의 씨앗이 싹 트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끈끈한 유대로 묶인 9대대였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기에 그런 것이었다.
배신감을 느낀 단원들이 강현성을 믿고 따를까? 레이크 시티에선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이곳에서 정에 호소하는 행위만큼 미련한 짓은 없었다.
강현성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는 유다희. 마스크를 내리는 록. 후미토는… 별 차이가 없을 것 같군.
'태백이를 위해서도, 단원들을 위해서도, 하물며 나를 위해서도. 막 던지는 건 안 좋았어.'
해서 강현성은 현실적이면서도 다른 대대장들의 그것과 비교해도 마냥 뒤지지 않는 보상을 내걸었다. 그게 바로 '이태백의 외부 요원화'였다.
그 순간 후미토가 둘의 대화에 끼었다.
"근데 어떻게 이야기가 잘됐나 보네, 대장. 외부 요원은 원래 엄청 까다롭게 선별되잖아."
정작 당사자 이태백은 심드렁한 얼굴인 데 반해서 후미토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를 보는 눈동자는 부러움과 선망으로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태백이, 넌 잘 모르겠지만 외부 요원은 진짜 되기 힘들거든. 정원도 빡빡하게 정해져 있고."
"아무리 보상이라도 내가 무슨 수로 들어간 거지? 듣자 하니 이미 정원은 다 찬 모양인데."
"마침 한 자리가 부득이하게 비게 돼서."
대꾸한 건 강현성이었다.
"루카켄 제약 회사에 심어 뒀던 외부 요원 있잖아. 그놈이 배신했었더라고. 그거 때문에 트라이어드와 루카켄의 관계를 우리가 전혀 몰랐던 거야. 돈에 눈이 멀어 조직을 팔다니. 쯧쯧."
"그 외부 요원은 어떻게 됐냐."
"아마 자고 있을 거야."
"좋은 곳이네. 배신자에게 잠도 재워 주고."
"침대가 관뚜껑 밑에 있지만."
들으라고 하는 말이군. 와중 '행여 밖에 나갔다고 딴맘 품지 말라'고 넌지시 압박을 넣는 거다.
"아무튼, 태백아. 이젠 정식 단원이네. 대대를 대표해 다시 한번 9대대를 선택해 줘서 고맙다."
"앞으로는 소속 단원인 나한테 너무 저자세로 나오지는 마라. 우리 부대 면이 있지. 안 그래?"
"하하, 그렇지. 나도 참. 맞아, 우리 부대... 어 자, 잠깐."
귀신이라도 발견한 양 확 커진 동공.
"너 지,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라는 말이 강현성의 가슴을 건드렸다.
"우리 부대라고 했지!"
"아니."
"시치미 떼기는! 후미토, 너도 들었지?!"
"미안. 나 성인 ADHD 있잖아. 한눈팔았어."
"야, 임마! 한눈판 게 자랑이야!"
"됐고."
이태백은 소동을 빠르게 일축했다.
한숨을 흘린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비록 외부에서 활동하게 됐지만 9대대에 내 손이 필요하면 도우러 올게, 강현성. 아니-."
이태백은 한차례 심호흡했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내려앉을 만큼 큼지막이.
난생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입술이 자꾸만 오징어처럼 말려서 말 꺼내기가 참 힘들었다.
그렇지만 한 번은.
딱 한 번이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낯간지러운 소리지만.
일단은 고마웠으니까.
이 틈에 얼렁뚱땅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기도 했고. 각 잡고는 도저히 못 할 거 같거든. 그렇다고 말랑한 감성에 젖었다는 식으로 오해는 마라.
혼돈 여신 탐색이라는 항구적인 목적 아래에서 지금 보다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 강현성의 조건을 채택했을 뿐이지.
혹여나 그 제시안이 아니었더라면 다른 대대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말이 구구절절 길어지는데.
어떤 선택을 했는지와는 별개로 강현성한테 감사 인사는 할 생각이었다는 게 골자다.
전기의자의 이슬로 화할 뻔한 이태백이 이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이었으니까.
'그것도 내가 창조한 강현성에게.'
그러니 찰나의 오글거림은 감수할 수 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저, 그러니까."
민망함에 이태백이 입술을 뻥긋, 달싹거리길 한참. 정말 어렵사리 하던 말을 마무리 지었다.
"강현성 대장."
"...."
강현성이 눈을 끔뻑거렸다. 멍했던 그의 표정에 총기가 서린 시점은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그래, 나야말로."
그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바깥에서 보자고."
* * *
레이크 시티의 하층 구역. 명칭에서 지레 실거주민 전원이 하층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상은 조금 달랐다. 작금은 중산층이 주류였다.
한 사람이 겨우겨우 지나갈 법한 소로가 이곳이 상층구역이 아님을 분명히 하나, 아스팔트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하층민 신분과는 맞지 않았다.
거리의 남자들은 수염이 단정했다. 여자들도 각자의 센스를 옷으로 뽐냈다. 돈 냄새가 났다.
물론 종전에는 하층민이 대다수였다. 범죄 소굴, 우범 구역, 불법의 온상지, 슬럼 따위의 꼬리표가 당연히 붙을 만큼 치안이 엉망진창이었다.
당시는 하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헌 양말을 기워 붙인 것처럼 난개발된 건물들만 있었다고.
그런 시대는 갔다. 때 탄 흔적들은 태반이 뒤안길로 숨었다. 고릿적의 잔여물은 빌딩이 만든 그늘 속에 스몄다. 유심히 살펴야 육안에 담겼다.
인구는 자체적으로 새끼라도 치듯이 끝도 없이 늘어났다. 그만치 많이 죽어 나간다지만 사상자 수 대비 인구 증가 추이가 월등히 높았다.
살인적인 인구 밀집.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더불어 메가코프란 거대 자본에 밀려나기까지.
상층 구역에서 상대적으로 빈곤한 자들이 한꺼번에 하층 구역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된 요인들이었다. 이 모든 게 불과 5년 만의 일이었다.
"덕분에 우리 개방도들은 갈 곳을 잃었네."
라고 한 거지가 슬픈 눈으로 푸념했다. 길을 찾던 중에 이태백은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뭐, 이것도 하층 심부 이야기긴 하네. 외곽으로 빠지면 아직도 날것 그대로야. 온갖 갱들이 판치고 있지. 예를 들면 10대 갱 같은."
그냥 무시하고 갈까, 하다가 생각을 고쳐먹은 이태백이었다. 이야기나 들어 주고 길이라도 물어보면 싸게 먹히는 거지.
'거지와의 노가리 타임이라.'
아, 갑자기 현타 오네. 이태백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뒤늦게 깨달았다.
거지 같겠지. 내 기분도 거지 같다.
빌어먹을. 이게 다 레지스탕스 그 매정한 놈들 때문이다. 수송해 주는 차량이 보안상의 이유를 들먹였다. 그러면서 목적지가 되는 가게 근처에 짐짝처럼 떨궈 주고 떠났다.
복지 수준이 참.
하, 말을 말자.
거리를 주유하며 레이크 시티의 지리를 익히라는 뜻 같았으나 한국인 이태백은 효율을 중시했다. 얼른 목적지에 도착해서 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러려면 길 동냥이라도 해야 할 텐데. 이 도시는 이방인에게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시다.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묻기엔 눈빛들이.'
경계심이 잔뜩 응어리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역 이름이 어쨌든 하층 구역이긴 했으니까. 건물과 도로는 번쩍하게 개수했어도 주민 의식은 옛적의 너절함을 계승했다.
'단말기 개통이 아직인지라 지도 사용은 아예 안 되고.'
이태백은 그래서 웬 개방 거지의 한탄을 경청하는 척해 주고 있었다. 부디 후각을 포기한 보람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지. 어우 지린내.
"이야기가 길어졌구먼. 미안허이. 보다시피 개방도한테 눈길을 주는 이가 참 오랜만이라서."
"경우를 아는 거지라 다행이야."
"허허, 곱상한 얼굴처럼 말을 곱게도 하는군."
"반말은 신경 쓰지 마. 말버릇이 그런 거니까."
"말버릇이 그 꼴이면 둘 중 하나겠군. 아랫것만 대하던 귀한 집 아들내미든가, 무뢰배든가."
거지는 눈을 위아래로 움직이며 이태백의 신색을 훑었다. 곧 품평의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척 보니 길을 잃었구먼. 이것도 인연인데 이 촌로의 푸념을 들어 준 삯으로 가는 목적지까지 안내해 주겠네. 자네한테 구걸은 따로 안 하도록 하지."
눈썰미가 좋다. 안내를 핑계로 말벗을 해 달라는 모양인데, 귀 닫고 적당히 끄덕여 주면 그만.
"사양하진 않을게."
"거, 말뽄새하고는. 에잉, 목적지나 말해 보게."
이태백이 호주머니를 뒤져 종이를 꺼내 보여 줬다.
"요즘 같은 세상에 종이라니... 마른하늘에 우산을 들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지만. 자네, 그 상판대기만 아니었으면 딱 우리 과야. 타고난 팔자는 개방도인데, 얼굴은 하늘이 내린 관상이라 배곯지 않고 사는구먼.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살게."
"부모님이 계신지부터 묻는 게 예의다."
"...."
"...."
"음, 어디 보자~."
거지가 면피하듯 획 종이로 고개를 돌렸다.
"위치가… 딱 여기 근처...."
중얼거림이 멎었다. 이태백은 고개를 들어 거지를 확인했다. 그는 지뢰를 밟은 표정이었다.
"…은코바로군...."
"가게 이름 은코바야? 희한하네."
"설마, 자네… 모르고 가는.... 아, 아닐세. 내가 무슨 참견인지."
그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가세나. 약속대로 코앞까지는 데려다주지. 단, 들어가지는 않겠네."
뭔가 꺼림칙하다는 기색인데. 어쨌거나 공짜로 길잡이를 해 주는 거니 좋은 게 좋은 건가.
터덜터덜 앞장서는 거지를 뒤따랐다. 이태백은 전투 감각을 돋워 근육을 긴장시켰다.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길 안내를 빙자해서 갱 소굴로 데려간다든지 하는 그런 얄팍한 수법 말이다. 고백 하나 하자면 불상사가 발생하기를 몸이 원하고 있었다.
이참에 [불릿 타임]을 써 볼 기회가 오려나? 칼을 뽑고 싶은 충동이 연신 손끝을 간질였다.
- 9대대가 말이 좋아 특수 부대지. 사실상 '사이코패스들'만 모아 놨잖아. 한. 명. 도. 빠짐없이.
그 말이 귓전에 맴돈다.
…괜히 신경 쓰이네....
21화 내 칼침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1)
새삼 궁금한 게 생겼다. 어째서 개방도의 이름 중엔 개로 끝나는 경우가 많을까.
이런 실없는 잡념이 든 이유는 하나다.
왜긴 왜야, 길 안내를 자처한 우리의 개방도 때문이지.
"필치가 바람처럼 운치 좋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팔 수만 있으면 수백만 원은 할걸세!"
서풍개가 턱을 들며 으스댔다. 어깨가 자부심으로 승천하다 못해 등선이라도 할 기세다.
"어때, 소협. 내게 사인이라도 받아 갈 텐가?!"
"거지 사인받아서 어디다 써먹어."
"에잉, 개똥마저도 약재로도 쓰이는 것을."
이태백의 초점은 몹시도 탁했다.
서풍개가 주둥이로 독가스를 무차별 살포하는 턱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쪽은 다른 의미로 등선할 것 같다.
"그렇게 서예에 자신 있으면 파는 게 어때. 못해도 하층 구역에선 떵떵거리며 살 텐데."
이태백이 힘겹게 말문을 떼었다. 말허리를 잘라 입막음을 한 것이었다. 흘려들을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는 이쪽 코가 먼저 문드러지리라.
"개방도한테 돈을 벌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 거지는 일을 안 하므로 거지이거늘!"
"구걸보다야 피땀 흘려 하는 노동이-."
"이노오옴! 내 반말은 넘길 수 있지만 개방의 근간을 모욕하는 불경한 발언은 좌시할 수 없다!"
첨언에 오히려 경을 치는 서풍개였다. 이태백은 학을 뗐다. 지구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개방도는 돈을 벌면 안 된다는 내규는 대체 누가 만든 거야.'
무협의 기초적인 지식과 개념은 얼추 안다.
회사 다니는 내내 아주 줄기차게 들었다.
누구한테? 누구겠나.
여기서 빠지면 섭섭한 그 이름.
- 이 대리! 일하는 거지가 어디 거지예요?! 개방의 근간에 어긋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무당파 도사가 고기 뜯는 소리하지 말라구우-!
서 팀장님이시다.
가뜩이나 짬뽕 펑크인 레이컨스에 기어코 무협 요소까지 넣어 혼란한 세계관을 만든 원흉이다.
'예습한 덕분에 개방도와 우연히 만났어도 어떻게 꾸역꾸역 맞장구를 쳐주고는 있네.'
그와 더불어서 거리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영양가 있는 정보를 주워섬기고는 있다만······.
"-갈!!"
"······."
진절머리가 나는 건 사실이다.
'하아.'
한숨이 푹푹 나온다. 단, 숨을 내쉬기만 하고 들이마시지는 말자. 아찔한 구취가 딸려 온다.
"그건 그렇고."
서풍개가 힐끗 곁눈질을 보냈다.
"오지랖인 건 아네만, 내 한 소리 해야겠네."
"알면 안 하면 되잖아."
"어허, 이 사람도. 노파심이니 잠자코 듣게나."
그의 눈빛이 심후하게 가라앉았다.
"자네도 이런 생각 해보지 않았나. '정파니, 사파니 해도 다 똑같은 깡패 새끼들'이라고."
역시 동냥밥을 먹고 살아서 그런가. 눈치 하나는 끝내준다.
"······."
"뭘 그런 표정을. 기실 맞는 말이야. 정파 놈들도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갱들이랑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차이라면 우린 중화기가 아닌 검을 다루고 권을 연마한다는 거네. 알량한 자존심이지."
"무림인이 그런 말을 하니까 확 와닿는군."
"한때는 정사를 구분 짓는 기준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종국에는 거기서 거기인 놈들이야. 우리 개방만 해도 나 같은 오의파는 몇 안 남았어. 황금을 좇는 청의파로 된 형제가 구 할이 넘네."
두 사람은 나란히 일렬로 이동했다. 앞장서던 서풍개가 일부러 이태백과 속도를 맞춘 것이다.
"백도든, 흑도든, 갱이든. 이곳은 자네의 소속이 어디든 상관 안 하는 도시야. 온갖 더러운 군상이 비빔밥처럼 뒤섞인 레이크 시티 아닌가."
"결론만."
"천마신교."
흠칫.
"······거기만큼은 얼씬도 하지 말게."
서풍개는 경고하고 있었다.
"돈에 뜻을 두는 건 이 도시에서 지극히 당연한 바야. 오의파가 별종인 거지. 하나 마교는 달라. 돈에 뜻을 두지 않아."
서풍개는 어조를 한층 낮게 깔았다. 목소리가 무게추처럼 둔중하게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놈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도일세. 그 종착에 다다르기 위해 인간을 영약 재료로 여기지."
"마탑에서 인간 갖고 장난질한다는 괴담은 들어봤어. ···근데 소문이 마냥 소문은 아니었군."
"본디 소문은 부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훨씬 내면이 가려지기도 하는 법이네."
그 새끼들도 버그다. 언젠간 꼭 없앤다. 이태백이 티 나지 않게끔 뿌득뿌득 이를 갈아붙였다.
그러나 아직은 머나먼.
훗날의 숙원 사업이다.
당장에는 들이받아 봤자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도 못 된다. 바위에 모래알 뿌리기는 되려나.
중원을 떠난 뒤, 레이크 시티에 안착한 마교. 그러니까 '케르겔 마탑'은 메가코프로 부상했다.
"마교 놈들은 무공조차 포기하고 마법으로 대체했지. 마인은 마법사가 되었어. 천마라 불리던 마두부터가 케르겔 마탑주를 자청하고 있으니."
"천마가 진짜 천재 마법사가 될 줄은······."
"응? 뭐라고 했나?"
"별말 아니야. 그냥 개소리."
"개소리? 어째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네만."
···이래서 눈치 빠른 거지란. 관상으로 사람 속을 들여다본다는 말이 마냥 허언은 아니렷다.
"하도 굶어서 그런지 속이 배배 꼬였네. 선의를 베푼 사람한테 그런 폭언은 안 해."
"하기사 그만큼 막돼 처먹은 놈은 아니겠지."
서풍개는 아리송한 얼굴로 갸웃했다. 그러다가 이내 들릴 듯 말듯 낮춘 목소리로 읊조렸다.
"통탄스러운 일이야. 암만 마교라지만 동향 출신이거늘. 강호의 도리가 어찌 땅에 떨어졌는가."
"설명은 고마운데, 초면인 내게 이런 말을 해주는 이유가 뭐야. 돈이라면 나도 댁만큼 없어."
"어른한테 반말 찍찍 내뱉는 놈한테 뭘 바라겠나. 없네. 그냥 노파심에서 무상으로 하는 말이야."
서풍개가 손을 휘적거리며 부정했다.
"그럼 은코 바(Bar)란 곳··· 마탑의 속가?"
"아닐세. 마탑의 속가가 하층 구역에 간판을 달 이유가 하등 있겠나?"
"없지. 굳이, 왜."
"맞네. 굳이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설혹 그럴지라도 백도 세력이 가만 둘 리도 없지. 돈에 매몰됐을지언정 근간을 팔아먹지는 않았으니까."
"당신네 개방처럼 말인가."
"나도 그리 떳떳한 거지는 아닐세. 반대지."
서풍개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꼈는지 곧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새파란 소협을 붙잡고 내가 뭔 말을 하는 건지. 이래서는 천존께서 굽어보시지 않을 텐데."
"혹시 모르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무슨 소림승들이 입에 달고 사는 소리를 하는구먼. 자네도 참 독특한 캐릭터야."
서풍개는 이태백의 한 마디에 한순간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우문에 때아닌 현답이로구나.
"위로는 고맙네만, 소협의 앞가림이나 잘하시게나. 자세한 건 직접 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될 수밖에 없을걸세. 아, 도착했군."
이태백은 서풍개가 눈짓을 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3층짜리 비교적 낮은 건물이었다.
빌딩과 빌딩의 틈새에 비집듯이 자리 잡은 그 건물은 위치선정부터 외관까지. 전부 비범했다.
허리에서 잘린 원통형 건물의 몸체에 뾰족한 지붕을 씌웠다. 꼭 케이크 위에 꼬깔콘을 씌운 모양새.
녹이 잔뜩 슨 배관이 혈관처럼 외벽을 기어다니며 정적인 건물에 생동감을 더했다.
「은코 바」
화룡점정으로 한글이 적힌 간판이 존재감을 뽐낸다. 일견 남루하지만, 상당한 업력이 느껴졌다.
'이곳이 앞으로 내가 머무를······.'
이태백이 은코 바를 황망히 바라보는 가운데, 서풍개가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발길을 틀었다.
"약속한 대로 이쯤에서 빠지겠네. 아, 하나 깜빡할 뻔했군. 무명의 소협, 자네 말이야······."
반만 뒤돌아 바라보던 서풍개가 나직하게 한숨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충고하듯 덧붙였다.
"앞으로 레이크 시티에서 살아갈 거라면 살기는 갈무리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을 거야. 강호인들이 많이 상주 중인 하층 구역이라면 더더욱."
"······."
과연. 사람 속을 귀신같이 읽는다.
"조심성 있는 성격인지라. 속일 생각은 없었어."
"좋은 태도네. 하나 노골적으로 살심을 풍기고 다니면 피 냄새를 맡은 벌레들이 꼬여. 모쪼록 갈무리를 일상화하는 게 좋아."
"저기."
이태백이 걸인을 불러세웠다. 서풍개가 반만 고개를 돌리자 머쓱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또 보게 되면······. 당신이 아니더라도 거지가 있으면, 그땐 적선하지. 지금은 나도 거지라서."
"말만이라도 이미 배가 부르군. 내말 명심하게. 저 가게에 들어서게 되면 필경 마탑과 접점이 생길 거야. 이후론 알아서 판단하고 행동하도록. 소협 얼굴을 보니 내 젊을 적 생각이 나서 하는 소리야."
"새겨듣지."
"하하하, 보기 드문 호연지기로구먼. 대답이 시원해. 여하튼 난 진짜 가 보도록 하겠네. 소협의 무운을 빌지."
걸인은 이가 드러나도록 호방하게 웃었다. 그길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태백과 멀어졌다.
서풍개의 걸음걸이마다 허리춤에 나비매듭으로 묶인 6개의 로프 줄이 주인과 함께 춤을 췄다.
그때까지만 해도 오의파의 법개는 몰랐다.
무명의 소협과 짧은 만남. 이 기점으로 하층 구역에 거대한 파란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을.
* * *
삐걱.
문의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보수를 겉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안 한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가게로 들어선 이태백은 눈만 굴려 주변을 훑었다. 멀건 대낮인데 안은 밤이었다.
그와 같이 들어온 자연광이 조명의 전부였다. 그래도 안력에 힘을 주자 시야가 잡힌다.
암순응이 굉장히 빠르다. 이태백은 생각했다. 이 육신은 여러모로 어둠 친화적이다.
그때였다.
"으으으음."
앓는 듯한 여인의 소리가 공기 중에 흘렀다. 신음성은 막 시야가 확보된 구석이 발원지였다.
"아, 직··· 영업 안 해, 요."
이태백의 고개가 그곳을 향했다. 일자형 소파에 웬 여인이 해초처럼 힘없이 늘어진 채였다.
소파 밖으로 떨어뜨린 손에는 곰방대가 덜렁거렸다. 그 밖에 협탁 위로 술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저녁 일곱 시에 영업 시작이거든. 그때 다시 올래요?"
여인이 상체를 당기며 입을 열었다. 산발 사이로 얼굴이 살짝살짝 드러나는 순간이다.
보기 드문 굉장한 미인이었다.
대번에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 정도였다. 여자에게 일체 관심이 없는 나조차 놀랐다.
'탑급 아이돌처럼 생겼군.'
다만 열애설 같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한순간에 나락을 가버린. 비운의 아이돌 말이다.
"으음? 뭐야. 미성년자야?"
여인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크게 떴다.
"근데 어쩌지. 우리 가게가 이래 봬도 사업자 등록도 한 건실한 업체라서 미짜는 안 받는데."
이태백은 대꾸하지 않았다.
엄지를 조용히 파라 블레이드의 개폐 버튼으로 가져갔다.
"오다가 만난 거지가 마지막으로 그런 말을 하더라. 바에 들어가는 나한테 무운을 빈다고."
적막이 흐르고 시선이 부딪친다. 마르다 못해 서걱서걱한 먼지 때문에 입안이 바싹 탄다.
"술잔은 있으면서 술 냄새가 전혀 안 난다. 게다가 꼭 무방비하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널브러져 있고."
"······."
"무엇보다 문을 열어 놓고 영업시간이 아니라는 건 무슨 경우지. 차라리 닫아라도 놓든가."
여인이 곰방대를 털며 일어섰다.
"총대장이 하도 추켜세우길래 검증 절차 좀 밟아 본 건데. 상황 파악 능력은 얼추 괜찮고. 내가 하숙인으로 아무나 안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었니?"
"안 들었지만, 그럴 것 같다."
"우리 가게의 단골손님들 특성상 제 한 몸 건사할 실력은 있어야 하거든. 웨이터를 시키려는 건 아닌데 칼부림이 정말 허다하게 일어나서."
여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곰방대에 화염이 붙었다. 그걸 시작으로 가게 전체에 불이 들어왔다.
"······마법사."
"정확히는 '였지'. 3년 전에 배교했어."
"용케도 살아있군."
"응. 마교, 케르겔 마탑은 실력 있는 마법사는 바로 죽이진 않거든. 언젠가는 살수를 보내겠지만. 뭐, 그래도 그 특수한 이력 덕분에 이렇게 부업으로 재즈 바도 하고, 다른 일도 하는 거지."
여인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실력 좀 볼까. 참고로 총대장한테 승인받은 거야. 하숙인 받는 조건으로 실력 확인하는 거. 안심해. 죽지는 않게 알아서 힘 조절할 테니까."
"잘됐네, 마침. 나도 내 능력을 확인해 볼 참이었다."
이태백의 엄지가 개폐 버튼을 눌렀다.
22화 내 칼침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2)
짤깍.
개폐 버튼이 눌리는 소리. 파라 블레이드의 심지에서 칼날이 매끄럽게 뽑혔다.
"흐음?"
여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칼날로 옮겨졌다. 칼날에 빛 알갱이들이 반짝거린다.
조명이 내려앉은 것이었다. 건들면 부러질 듯 생겨서는 생각 이상으로 단단해 보였고, 또 잘 벼려진 칼날이었다.
'맑은 날씨에 웬 우산을 들고 다니나 했더니.'
우산검.
여인, 은코 바의 주인은 생각했다. 처음 보지만 암살자가 쓸 법한 형태의 무기다.
"음, 이러면 생각보다 테스트가 길어지긴 하겠는걸."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는 웃고 있었다.
척 봐도 이태백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강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간극이 꽤나 클 터다.
은코 바의 주인, 고은의 전력 분석 및 감상도 이태백과 마찬가지였다.
'눈빛은 좋지만, 아직 덜 여물었네.'
아무렴.
고은이 어디 평범한 마법사인가? 상대도 전력 차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암살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원거리 특화인 마법사와 배후를 노리는 암살자는 본디 상성이 극악이었다.
그도 그럴 게 암살자가 사정권에 진입하면 마법사는 무방비해진다.
그나마 있는 방어 수단이라고 해 봐야 쉴드 마법 정도.
그러나 고은은 그 쉴드 마법마저도 없었다.
왜냐?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 일변도. 그것이 고은이 스스로에게 내건 제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제약 덕분에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마법인 삼매진화의 화력을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이처럼 스킬이나 기프티드에 제약을 걸 시, 그 위력이 상승하는 식으로 상충한다. 조건이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본연의 위력에서 몇 배를 짜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늘 변수가 산재한다.
일견 나약해 보이는 상대일지라도 방심할 수 없는 법이다.
혹여 상대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제약을 걸어서 잠재력을 전부 끌어다 쓸 수도 있는 노릇이니.
'물론 그 모든 걸 상회할 만큼 아득한 격차라면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마주한 상대의 전력을 재단하기가 어려웠다. 기세가 너무 잘 갈무리되어 있어서였다.
비단 암살자라고 해도 눈동자에는 감정의 색을 비추기 마련이거늘.
그는 예외였다.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마치 감정이라는 개념을 학습해본 적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마교 내에서도 저 정도로 감정이 거세된 자는 드물었다.
당장 떠오르는 얼굴이 손에 꼽는다. 기껏해야 세 사람. 광명좌사와 광명우사. 그리고, 천마.
그 세 사람은 전부 최강자의 반열인 10익에 속하는 괴물들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지.
고개를 슬슬 저은 고은은 다시금 전방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시야에 서 있는 상대.
이태백과 그 세 사람이 일순 겹쳐 보이는 착시가 일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황. 필경 자신보다 약할 터인 상대한테서 그 괴물들이 연상된다니.
'아니면 감정을 제약으로 갖다 바친 건가.'
그렇다면 납득은 간다만.
근데 막상 그렇게 생각하자니 또 그런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스르륵.
고은이 관찰하는 사이 이태백이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우선은 칼날을 앞으로 기울였다. 역수로 고쳐 잡은 우산의 윗부분. 접힌 원단은 부착하듯이 등허리로 가져갔다.
그대로 자세를 낮추는 것까지. 몸에 아로새겨진 암살자의 습성이 이태백의 팔다리를 시에스타 암살술의 교범에 맞게끔. 있어야 할 위치로 이끌었다.
"그건 시에스타의······."
그 모습에 그녀가 고운 미간을 좁혔다. 그러길 잠시 굳었던 표정을 풀고서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고은이 곰방대를 문 채로 입을 뗐다.
"전력 분석이 끝나자마자 바로 돌입이라. 터프하네. 옛적 천마신교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그리 말하는 고은의 얼굴은 어쩐지 아련했다. 곰방대의 끄트머리를 문 잇새로 연기가 흘렀다.
"작금의 케르겔 마탑······ 그 이전의 마교."
중얼거림을 뒤로 고은이 돌변했다. 얼굴에서 사연이 있어 보이는 표정도 지웠다.
"바로 시작해볼까?"
이태백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 맞다. 테스트를 통과하면 총대장이 탁송한 보상? 아무튼 그걸 전달할 거고, 못하면 그길로 뒤돌아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돼."
"그러면 그 보상은 당신 손에 들어가겠군."
"맞아. 그래서 난 손속에 사정을 적당히만 둘 거야. 그러니까 죽지 않으려면 최선을 다하도록."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푸하하! 내가 봤을 때 넌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입교를 해야 했어. 성향이 딱 그쪽 과야."
"칭찬이라면 정중히 사양하지."
그녀의 미소가 진해졌다.
"성격은 좀 고쳐야겠다."
고은이 손가락을 튕겼다. 직후 벽면에 연립한 창문이 벌겋게 녹아내리거나 깨지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내부 압력에 못 이긴 화마가 창문을 통해 건물 외부로 탈출했다.
건물 밖에서 보면 집채만 한 불가마가 구멍으로 불길을 토해 내는 모양새였다.
* * *
같은 시각, 레지스탕스 본부.
대대별로 마련된 별실에 9대대 단원들이 모였다. 이태백 한 사람을 제외하고.
강현성이 이태백이 떠난 연유와 과정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한데 강현성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유다희와 록의 표정이 변했다.
전체적으로 좋지 못했다. 후미토만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나 조용했다. 쥐 죽은 듯한 적막이 깨진 건 얼마 뒤였다. 유다희였다.
"그래서 이태백을 '그곳'으로 보냈다고?"
고구마라도 걸린 듯 꽉 막힌 목소리였다.
"응. 그렇게 됐다. 너도 알잖냐. 다른 기관은 티오가 다 차버렸고. 받아줄 만한 협력 업체가 거기밖에 없다는 거······."
"야, 강현성."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게 까는 그녀였다. 탁상 표층에 성애가 앉은 듯했다. 그야말로 살얼음판.
"고은. 그 마녀가 어떤 년인지 알잖아!!"
유다희가 고성을 질렀다.
강현성은 이해했다. 그녀의 과거사를 생각하면 그럴 만했다.
"알지. 알다마다. 일단 진정해, 다희야."
"그걸 아는 놈이 그곳에 보내?! 그딴 곳에 보낼 거면 외부 요원으로는 왜 파견한 건데!"
"다 이해해. 근데 은이도-."
"은이? 으으은 이이이이??"
살벌하게 휘는 유다희의 눈썹에 강현성은 꼬리를 내렸다. 그래도 내가 대대장인데 말이지.
"고은··· 여튼 걔는 진즉에 마교에서 손 털고 나왔잖아. 8대대장, 설탕물 그 새끼가 쥐잡듯이 털었는데 정황이 없으면 진짜 결백한 거라니까?"
"그리로 보낸 우리 요원들이 어떤 꼬라지가 났는지 모르는 인간 여기 있어? 말해봐. 어떻게 됐어."
"······."
"······."
"열 명 중에 여덟 명가량이 반신불수가 되지 않았나?"
대답한 이는 후미토였다. 그는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아, 물론 육체적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고은 그 인간이 귀신같이 외상은 안 남기더라. 신기할 정도야. 어떻게 화 속성 마법인 삼매진화 컨트롤이 극에 달한 거지. 캬, 진짜······ 아아아- 앗!"
록이 신나게 떠드는 후미토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었다. 그의 눈시울에 찔끔 물방울이 맺혔다.
"말 잘했어, 후미토."
유다희가 휙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그 마녀 소굴로 간 단원 중에 맨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어."
"거의 없는 거지,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
"지금 말장난할 때야? 너 이태백이랑 친구라며. 그런 놈이 친구를 사지로 보내냐고!"
"엄연히 말해서, 사지가 아니라 최전선이지. 그리고 전사한테 최전선만 한 교습소는 없어."
강현성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일단은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래서는 진전이 없다.
"교습소는 지랄. 테스트란 명목으로 사람을 반병신 만드는 년이 교관이냐? 사디스트지."
"변호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걔가 행사하는 폭력에는 가학성이 전혀 없어. 마교도 특유의 호전성만 있을 뿐이지. 싸워 봐서 잘 알아."
"네 맘은 안다, 유다희. 그런데 생각해 봐. 태백이가 그냥 당할까? 그 녀석이 어디 보통 놈이야? 여태까지 행보만 봐도 예삿 놈은 아니잖아."
강현성이 차분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희, 너도 사적인 감정을 덜어내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나도 인정할 건 인정할게. 고은이가 마인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과거지."
"······."
"그런데 만약에 태백이가 마법에도 재능이 있다면? 네가 바로 곁에서 봐서 잘 알 거 아니야."
8대대 차석, 제비 제임스의 대굴욕 사건.
"하면 걔만큼 태백이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사람이 있어? 우리랑 협력관계에 있는 마법사 중에 그만한 실력이 있는 사람은 드물어. 아니, 없잖아."
"······."
"게다가 고은이가 그냥 마법사도 아니잖아. 용병 중개업도 겸하니까 태백이가 레이크 시티에 적응할 수 있게끔 도와줄 수 있을 거고."
"그건 어디까지나 고은, 그년이 받아줄 때의 이야기잖아. 그 이전에 이태백이 무사히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의 가정이기도 하고."
유다희가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드디어 한결 누그러들었음에 강현성은 내심 안도했다.
"그래. 맞다. 근데 다희, 네 눈엔 태백이가 테스트를 못 통과할 거 같아?"
"힘들긴 하겠지만······ 못할 확률이 더 낮지."
"부상이야 어차피 경미한 부상에서 그치게끔 알아서 조절해줄 거고."
"엥? 근데 바로 직전의 외부 요원은······."
철썩!
"억-."
외마디의 신음. 후미토가 책상에 이마를 심었다. 앞니 사이로 혀가 레드 카펫처럼 흘러나왔다.
록이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러면서 가자미 눈으로 기절한 후미토를 흘겼다.
눈치가 없는 건 괜찮다. 하나 눈치 없는 후미토는 안 괜찮다. 록은 숨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강현성은 피곤한 눈으로 허물어진 후미토를 보았다.
한창 피 튀기고 있을 사람은 이태백이건만, 어째 푸닥거리는 이쪽이 격정적이구먼.
'이래서 다른 대대원들이 우리를 기피하나.'
소강상태에서 강현성이 헛기침했다. 대대장으로서 어떻게든 대화를 봉합하려던 그때.
별실에 공허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강현성은 속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확인했다.
"으, 으응?"
발신지는 레지스탕스와 제휴 관계인 하층 구역의 병원이었다. 강현성은 넋이 나간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곧 재빨리 단말기를 책상 정중앙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스피커 모드로 전환했다.
[강현성 대대장님······.]
"말해."
[그게, 저기.]
모두가 숨죽여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대대장님 지인분이 입원하신 것 같아서 이렇게 바로 전화 드렸습니다······.]
"많이, 많이 다쳤나?"
[상처가 깊지는 않습니다만, 다소 충격을 받으신 모양인지 가벼운 쇼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봐봐!"
유다희가 버럭 소리쳤다.
"그 미친년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잖아!"
[아? 다희 선배님도 같이 계셨습니까? 충성.]
"인사치레는 됐고. 야, 상준아."
그녀는 화면에 코를 박듯이 얼굴을 가져갔다.
"누워 있는 남자. 부상이 어느 정도야. 화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데? 필요하면 내가 바로 가서 도와줄 테니까 말만 해. 이 참에 그 마녀를-."
[저 선배님.]
"본론만."
유다희는 옷깃을 여기며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환자 앞에 두고 시간 끌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착오가 있으신 거 같은데 말입니다.]
"착오? 뭔 착오."
[환자분 성별이, 다릅니다.]
"응?"
문고리를 잡기 직전의 손이 멈칫했다.
[입원하신 분, 남자가 아니라 여자예요.]
23화 내 칼침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3)
피차 기다릴 건 없었다.
딱, 고은이 손가락을 튕겼다. 곰방대에서 불길이 용오름쳤다.
불길은 천장에 닿으리만치 드높았다. 곧이어서 수평으로 눕더니 한 가닥 불화살로 변했다.
그게 겨냥하는 바는.
"······!!"
당연히 이태백이었다.
딱-!
그녀가 한 번 더 손을 튕겼다. 불화살이 시위에 매겨진 것처럼 매서운 기세로 쏘아져 왔다.
쐐애애액!
이태백이 반사적으로 앞발로 진각을 터뜨렸다. 폭음과 삐걱하는 나뭇결 갈라지는 소음.
목질의 바닥재가 몸을 구속하던 나사 따위를 풀어헤친 뒤, 수직으로 벌떡 일어섰다. 물밑에 고여 있던 먼지 구렁과 톱밥이 같이 딸려 올라왔다.
찰나였다.
미간을 노리며 날아오던 불화살이 중간에서 덜컥하며 정지했다. 차폐막에 가로막힌 것이다.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이건 그냥 불화살이 아니다. 마법이다.
그것도 고도로 연마한 삼매진화였다. 여기서 끝날 리가 없다는 건 잘 안다.
엄폐막에 딱 붙었다. 갈비를 가슴으로 모으듯이 몸을 웅크렸다. 자세를 더 낮춰야만 한다.
폭발에 대한 대비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콰아아아아앙-!!
제지당한 불화살이 제자리에서 부글부글 끓다가, 폭발했다. 하나였던 불길은 바닥재를 중심으로 좌우로 쫙 쪼개졌다. 욕 나오는 화력이었다.
자글자글.
차폐막이 테두리부터 시뻘겋게 그슬렸다. 그러더니 끝내 거뭇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힘조절했다는 게 이거냐?!'
가까스로 화火를 면한 그였다. 문자 그대로 한 치 앞에서 폭탄이 터진 격이었으니 말이다.
손에 땀이 뱄다. 식은 땀일 수도 열기 때문일 수도. 다만 당장의 문제는 그딴게 아니었다.
"반응 속도가 제법인데."
고은은 곰방대를 문 입술로 웃었다. 기껍다는 표정. 씨벌, 웃어? 죽일 뻔했으면서 처 웃어?
"가게 살림 다 태워먹을 일 있나."
"없는 살림을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본인 몸부터 신경쓰자. 나는 실전같은 테스트를 지향하거든."
예쁘장한 낯짝이 구겨지는 걸 보고 싶다. 살의에 가까운 충동이 목젖을 툭 치고 올라왔다.
서 팀장님이라는, 도내 제일의 미녀를 상대로도 냉정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랬던 이태백이다. 미녀에게도 평등하게 칼침을 놔주는 건 일도 아니다. 이태백은 그러도고 남을 남자였다.
더구나 자신을 죽이려던 했다. 힘 조절을 했다지만 자칫 꼼짝없이 통닭구이가 될 뻔했다.
전기의자의 악몽이 채 가시지 않은 판국에.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오밤중의 네온처럼 시뻘건 안광이었다. 적의는 즉시 행동으로 옮겨갔다. 칼을 쥔 손아귀에 살심을 한 아름 집어넣었다.
꾸구국.
양손 한가득 칼을 잡고 싶지만, 노는 손이 없었다. 오른손 힘만으로 칼침을 새겨줘야겠다.
그렇다고 감정에 휘말리지 마라.
용기는 부리되, 치기는 억눌러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관찰해.'
실력 싸움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여자는 아직 전력을 내기 전이다.
[불렛타임]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일단은 보다 많은 수를 끌어낸다.'
비장의 수는 최후에 가서 꺼내라.
이내 찰나와 같던 상념이 끝났다.
바닥재가 잿더미로 화해 흘러내린 순간과 동시였다. 그가 굽었던 허리를 빳빳이 폈다.
콰광!
다음으로 바닥을 밀어내듯 박찼다. 가림막이었'던' 것에서 몸을 빼냈다. 그길로 상대와 일정 거리를 재면서 이동했다, 측면을 돌듯이. 스치듯 지나간 자리마다 목재들이 줄지어 기립했다.
고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삽시간에 생성된 나무 벽을 그녀는 빠른 눈으로 훑었다.
앵두 같은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려졌다. 이태백의 행동에 그녀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두뇌파였네?'
첫 공격은 이태백의 대처 능력을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는 그걸 보란 듯이 멋지게 타개했다.
'회피를 유도한 공격이었는데 설마 바닥을 가벽으로 사용할 줄이야. 들은 거 이상이야.'
획기적이었다. 여태껏 꽤 많은 피시험자들이 있었지만, 지금 같은 대처는 이태백이 처음이다.
피시험자의 투력, 강한 적을 상대로 어디까지 버티며, 그리고 사력을 다했을 때 그 저력이 어느 수준인지. 그것이 이번 테스트의 목적이었다.
이태백은 그 세 가지 취지에 더할나위 없이 부합하는 남자였다. 이건 물건이다.
반응 속도는 말할 것도 없었고, 덤으로 머리회전도 비상하다.
찌- 릿.
살의가 나무 벽을 뚫고서 피부에 내려꽂힌다. 이 너머에서 아주 마그마가 끓고 있는 듯했다.
오싹.
방금 본 사이다.
한데 무슨 불공대천의 원수를 대하는 듯한 살기에 절로 모공이 축소되는 기분이었다.
'차폐막을 하나 없애면 바로 사각에서 찔러 오겠지?'
백도 같은 반반한 얼굴에 뱀처럼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은 흑도의 그것이다.
그 뿐인가.
눈독을 들인 적은 반드시 죽이려는 태도는 마교도의 모범이었다.
정사마를 총망라하는 재목이지 않을 수 없다.
고은이 달뜬 미소를 지었다. 별안간 나타난 남자는 무료함으로 지친 그녀를 달래줬다.
"총대장이 모처럼 제대로 된 놈을 보내왔어."
어느새 그녀의 사위로 목재의 진이 형성됐다. 나무로 엮은 새장에 가둔 꼴이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확인해 볼 요량이었는데, 아무래도 실력발휘를 해야겠네."
삼매진화. 응당 마법사라면 누구나 부릴 수 있는 재주.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이라기엔 너무나도 별 볼일 없는 마법.
케르겔 마탑 안에선 담뱃불 붙이는 '것'쯤으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고은은 제약의 묘리를 역이용했다.
거들떠보지도 않는 기초적인 마법.
그 마법'만'을 다룬다는 제약을 스스로에게 걸어서 화력을 한도치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렇게 쥐어짜낸 삼매진화의 위력은 하나하나가 수류탄에 버금간다.
시전자가 외통수에 내몰릴수록 폭발력이 급등하는 모순. 마법과 제약의 요결이었다.
하나 거기서 국한되면 고은이 아니다.
그녀는 온갖 괴물이 득실거리는 마탑 안에서도 촉망 받는 마법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르륵.
고은이 지긋하게도 물고 있던 곰방대를 뺐다. 곰방대를 붓 삼아 열 십자를 그렸다. 글씨는 연기로 한 획씩 허공에서 쓰였다.
화르르르륵...!
그녀 주변으로 화염구 열 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야구공만한 크기의 꽃봉오리처럼 보였다.
"그래도 출력은 기존의 칠 할 정도로 낮췄어. 휘말려도 죽지는 않고 화상 정도로 그칠거야."
"···미친 놈······."
나무 벽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어머머, 누가 할 소리."
고은은 빙긋 웃으며 흘려넘겼다.
"그리고, 마도에 발을 들인 이상 제정신으론 못 살아남아. 모르겠다고? 괜찮아. 차차 알려줄게."
본인조차도 마법에 휘말릴 수 있다는 제약. 그 위력은 거의 다이너마이트다.
따- 악!
한 송이의 화염구가 가슴을 열며 활짝 만개했다. 그렇게 한 송이. 또 한 송이가 연달아.
다섯의 화염구가 올올이 피어났다. 불꽃이 봄 바람 맞은 꽃잎처럼 흐드러지며 만발했다.
"조금 거하게 벌리긴 했어. 하지만 기분인 좋은 걸 어떡해. 이렇게 된 거 꽃놀이를 해야지."
삼매진화(三昧眞火)가 아니다.
삼매진화(三昧眞花)가 걸맞다.
펑!
그 이후로는 폭음 연발이었다.
펑! 퍼- 어어엉-! 꽈릉!
불꽃은 목벽을 발기발기 찢어먹었다. 나무판자로 생긴 진이 타다 못해 녹아내리는 지경이었다.
바 테이블의 유리잔이 열기를 못 이기고 터져 나갔다. 은코 바에 지옥의 축소판이 펼쳐졌다.
"하하하! 그래. 이참에 가구도 바꾸고 좋지!"
화마 덕분에 고은의 시야가 시원하게 뚫렸다. 그러나 그의 신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은은 목만 기울여 뒤편에서 찔러오는 칼날을 피했다. 삼매진화가 마법의 기초라면 눈길이 닿지 않는 사각에서의 기습은 암살의 교범이었다.
"뻔해."
"알아."
이태백은 칼날의 궤도를 휘릭-, 꺾어 올려 쳤다.
고은은 허리를 살짝 젖히며 한 발 물러섰다. 파공음. 칼날은 고은의 귀밑머리 몇 올만을 자르고 나올 뿐이었다.
숨을 짧게 뱉었다. 동작 간의 이음매. 그 공백을 단축한다. [근력], [민첩]을 버프하면 극점으로 치달은 칼날을 잡아끄는 것이 가능하다.
스겅!
사선으로 끊어내듯 당겼다. 이번에는 곰방대를 칼날이 떨어지는 경로에 들이대는 그녀였다.
끼기기긱!
칼날과 곰방대가 부딪치며 불티가 비산했다.
고은은 입꼬리를 당겼다. 허초와 변초, 무엇보다 악착같은 집요함. 마음에 쏙 드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뭔 줄 알아?"
대치 속에서 고은은 여유롭게 눈만 뒤로 돌렸다. 이태백은 칼날을 당긴 자세로 굳어 있었다.
"마법사가 무공을 포기했다고 해서 동체 시력도 사라졌다는 착각. 대개 패착은 거기서 나오더라."
"······."
후우, 그녀가 길게 내뿜었다. 웃음을 실은 연기가 이태백의 얼굴을 엄습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먼젓번처럼 튕기려는 모양이었다.
"전면에서 부딪쳐온 건 판단미스였어. 그래도 테스트는 통과. 은코 바의 하숙인으로 받아들-."
이태백은 남는 손이 없어서 발을 썼다. 그의 뒷발이 고은의 손을 향해 용솟음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손동작이 발길질보다 먼저였다.
따악.
부유하던 다섯 떨기의 불꽃이 불화살의 형태로 빚어졌다.
직후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와 떨어진다.
위험에 노출된 이태백은 발길질을 내렸다. 발을 계속 뻗었다간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다.
다행인 건 근육이 몹시 탄력적이었다. 레벨이 올라서 그런가 운동 수행 능력이 아주 좋았다.
'역수를 고집하며 꾹 움켜잡고 있던 우산이 진가를 발휘할 때는 지금이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전부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다섯에서 네 개가 배후로 접근해 온다는 것.
'파라 블레이드로 막을 수 있어.'
한 발만 어떻게 하면 된다. 딱 한 발.
피할 말미는 없다. 칼로 쳐내야 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말처럼 쉬운 일인가.
가당치도 않았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간을 얼리지 않는 이상에야 말이다.
'그래.'
흐르는 시간을 유보하면 그만이었다.
여자는 당장 가용할 수단은 없을 터였다. 예컨대 공간의 제약, 말마따나 힘조절 때문이었다.
'마지막 수단을 꺼내야 할 적기는 지금.'
지체할 새는 없다.
이쪽에서 필살의 패를 내보이는 순간 여자도 곧장 받아칠 테니까. 나보다 강자에게 공격권을 양보하는 건 멍청한 새끼나 하는 짓이었다.
이태백이 눈을 감았다 천천히 반개했다. 속눈썹에 잠긴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반질거렸다.
[운영자가 불렛타임을 발동합니다.]
뇌에서 번쩍인 빛이 발끝까지 퍼졌다.
[척추 자극. 신경계가 가속됩니다.]
특히 신경이 밀집한 등골이 짜릿했다.
[시간 : 8초. 체감 속도 : 0.6배속.]
집중력이 한 점으로 바짝 모여들었다.
이태백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또 착가하는 게 뭔줄 아나."
모름지기 최고의 복수는.
"필사적인 표정을 보고 그게 싸움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그게 방심인지도 모른 채."
말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제한 시간 : ●●●●●●●●●]
이태백이 칼을 휘둘렀다. 팔의 궤적에 붙은 잔상이 연작처럼 이끌렸다.
고은의 눈이 어벙해졌다. 남자의 움직임과 여자의 인지가 일치하지 않았다.
[제한 시간 : ●●●●●●●●◐]
빨간색에서 출발한 열화상의 그라데이션이 무지개의 끝색인 보라색으로 변한 찰나.
미끄러지듯 나아간 칼날이 불화살을 정확히 쪼갬과 동시에 우산이 오므리고 있던 입을 넓게 폈다.
퍼어- 엉- 퍼어어어- 어어엉-.
고무줄처럼 길쭉하게 늘어진 폭음성이 뒤를 이었다. 소리가 다섯 차례 터질 즈음.
[제한 시간 : ●●●●●●●○○]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시야로 들이닥쳤다. 무림의 유서 깊은 앞잡기.
금나수(擒拿手)였다.
차마 예상치 못한 의외의 공격에 무의식적으로 손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녀 역시 무림인이다.
[제한 시간 : ●●●●●◐○○○]
퍼억!
이태백은 고은의 가슴께를 세게 찼다. 못 이뤘던 발차기의 설욕을 이제야 푸는군.
그녀가 명치를 부여잡으며 밀려났다. 틈을 놓치면 안 된다.
이태백은 파라 블레이드를 던진 후, 멀어지는 그녀의 손을 깍지 끼듯이 움켜쥐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손이 잡힌 채로 휘청- 중심이 무너졌다.
우드득.
고은의 손가락이 가동 범위를 넘어서 뒤로 꺾였다. 다섯 손가락이 너덜너덜해졌다.
[제한 시간 : ●●◐○○○○○○]
[신경 가속이 정신을 자극합니다.]
콰득!
남은 손가락도 분필처럼 부러뜨렸다. 고은은 아프다기보다는 혼이 나간 기색이었다.
이런 건 첫 경험일 거다.
그럼 이것도 처음이겠지.
쩍!
이태백의 뺨에 선지피가 튀어올랐다.
한 번 더.
여인의 허리가 마치 새우처럼 굽었다.
내장을 흔드는 고통에 눈이 뒤집혔다.
손가락이 묶인 탓에 피하 지도 못했다.
[제한 시간 : ◐○○○○○○○○]
그는 단전에 욱여넣은 주먹을 회수했다.
여인은 손이 잡힌 채 무릎이 무너졌다.
[제한 시간 : ○○○○○○○○○]
[불렛타임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피범벅인 주먹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손을 놨고, 흔들어 피를 털었다.
* * *
"그래서 이렇게 된 거야."
"······."
양손이 소시지처럼 붕대로 감겨 있는 모습. 강현성은 병상에 누운 고은에게 사정을 들었다.
"손속이 어찌나 매섭던지. 하마터면 정말 단전이 박살 날 뻔했지, 뭐야!"
"···그러니까, 졌다고? 네가?"
"생사투는 아니어서 전력은 안 끌어다 썼어."
고은의 미소는 해맑고 명랑했다.
"근데 방심한 게 패착이니까. 진 거지."
"아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아."
반면 강현성의 표정은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응을 고를 수가 없는 이야기다.
"···태백이, 다시 본부로 불러들일게."
"아니."
고은이 단호하게 말했다.
"걔, 내가 한번 키워 볼게."
"뭐······? 너를 그렇게 만든 애랑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겠다고? 드디어 미쳤냐?"
"마인들끼리 푸닥거리하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그냥 스킨십이지. 무엇보다 먼저 살수를...."
"살수?"
"아니, 살수 비슷한 걸 쓴 건 나였거든."
강현성이 뾰족하게 노려보자 어물쩍 넘어가려는 고은이었다. 한숨이 좀처럼 끊이질 않는다.
"표정 좀 펴라, 친구야."
"친구는 니미럴."
"어차피 나도 이편이 편해. 한 지붕 아래에서 음흉한 마음 품는 놈보다야 차라리 손이 매운 놈이 낫지."
강현성은 눈가를 덮었다. 전두엽이 욱신거렸다. 손을 내리자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이태백··· 너는 대체······."
그 말밖에 안 나온다.
24화 사이코패스 아닙니다 (1)
마법이란 신비와 추상의 역학이다.
뭔 말이냐고? 강현성도 잘 모른다.
마법이 모태를 무공에 뒀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그러나 종국에는 마법과 무공은 결이 판이하게 갈렸다.
뿌리가 같다는 점 외에는 공톰점이 없다. 애당초 정사마 중에서 유달리 유리되었던 천마신교다.
한데, 레이크 시티에 안착한 이후로 마탑은 보다 더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다.
깡그리 갈아엎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름부터 천마신교에서 '루카켄 마탑'으로 바꾸지 않았나.
이처럼.
탄생 과정, 행보, 이념,
모든 게 비범해서일까.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도 과연 범상치 않다.
마법사들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로, 마법은 시전자의 성향을 반영한다.
입 아프게 가타부타 부연해서 무엇하랴? 누구보다 좋은 표본이 코앞에 누워 있는 것을······.
강현성이 병상을 응시했다.
고은이 깁스한 손으로 반대쪽 어깨를 짚으며 빙글빙글 돌려본다. 깁스 바깥으로 빼꼼 튀어나온 열 손가락이 오동통하게 부어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 저 정도고, 내상은 하마터면 치명상으로까지 번질 뻔했다.
마법사에게 있어 단전이 파괴된다는 건 기실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요컨대 고은은 단어 그대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그럴진대.
그랬던 그녀는.
"오랜만에 맞아서 그런가? 왜 이렇게 개운하지?"
마치 남 일이라는 양 힘이 넘치고 쾌활하다.
"이태백, 화끈해서 좋아! 마음에 들어쓰!"
또 가히 불같다. 그녀의 마법, 삼매진화처럼.
"웃음 좀 집어넣어라. 내가 다 어질어질하네. 걔가 구급차를 불러 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단전을 폐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번질 뻔했잖아."
"그렇게 됐으면 어쩔 수 없지."
정작 고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살수··· 비슷한 걸 쓴 시점에서 반쯤 생사결이나 다름없는 건데. 단전이 박살 날 뻔한 걸로 끝난 거잖아? 진짜 박살 난 것도 아니고. 그럼 됐지. 끝난 일에 뒤끝 부리는 건 너무 좀생이 같기도 하고. 내 성격상 그건 무리야."
때 묻지 않은 화창한 표정에 강현성은 어이가 없었다. 친구랍시고 걱정해 준 사람을 무색하게 만드는 반응. 그는 괜히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유다희가 그러더라. '고은, 그 사디스트 년한테 단원을 맡기냐고'. 근데 내가 보기엔 아니야. 넌 사디스트가 아니라 마조다! 변태 새끼야!"
"뭐라니. 아, 다희는 잘 지내? 걔는 어째 나만 보면 총구부터 들이밀려고 하더라. 난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너, 걔 사정 다 아는 놈이······ 어휴, 됐다."
체념의 한숨을 쉰 강현성이 말했다.
"고은, 너 혹여라도 다희 보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입단속해라. 알았냐?"
"왜? 또 나한테 총부리 들이밀까 봐?"
"아니! 내가 휘말릴까 봐, 새끼야!!"
"일인천살 강현성이 몸보신하는 꼴하고는."
"오늘 일인천살에서 한 명 더 추가해 줘?"
"쏘리."
"하아아."
그건 그렇고.
이태백도 여간 미친놈이 아니다. 병 주고 약 주고를 제대로 실천한 사람은 또 오랜만이었다.
성격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뇌옥에서 빼내 온 거긴 하다.
······그렇지만.
광기의 정도가, 그의 상정 이상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마법사의 특징 두 번째.
마법사들은 태반이 광인. 즉 미쳐 있다.
마기에 매몰되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진짜 마법사의 말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과 달랐다.
광인이 마법을 배우는 거다. 그것이 옳은 인과 관계라고.
"타고난 광기가 높을수록 마기에 대한 저항력도 높아."
그녀는 입술에서 장난기를 지웠다.
"마법을 시전해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거든. 광기에 취할수록 마법의 위력은 계속 떨어져."
"······미칠 수밖에 없는데 냉정해야 한다니. 모순이야, 굉장히 비합리적이고."
"마법은 기적을 부르는 신비. 기적이란 모름지기 모순과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법이거든."
강현성은 귀를 기울였다. 마법사가 직접 설명해 주는 마법의 모체는 귀하다. 무엇보다 강현성의 '숙원'을 위해서는 주의 깊게 들어야 했다.
"삼매진화만 해도 '라이터 같은 가연성 소재 없이 불을 피우는 방법이 있나?'에서 출발한 발상이거든. 여기서부터가 이미 모순인 거지. 생각해 봐. 원시인 때부터 부싯돌로 불을 피워왔는데, 굳이?"
"그것도 그렇네."
"통용되는 상식. 합리성을 벗어야지만 궁극의 마도로 향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도 이지는 유지해야 한다는 모순. 그것 때문에 일반인이랑 마법사랑 대화하면 말이 안 통하는 거야."
강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네 말이 이해가 안 됐었는데, 내 이해력 부족 때문은 아니었군."
"하?! 나 정도면 제법 사회성 갖춘 마법사거든? 최소 상위 5퍼센트야!"
"네가 상위 5퍼센트면, 95퍼센트는 일상생활은 가능하냐? 마탑은 어떻게 유지되는 거야, 대체?"
"일반적인 마인들은 대화를 안 해. 왜냐? 걔네 눈엔 범인들이 모순적인 벌레들이니 살인에도 거리낌이 없지."
고은은 퉁퉁 분 검지를 세워 강조했다.
"타고난 내공량. 그러니까, 마력량도 중요하긴 한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휘몰아치는 비합리성에서 자아를 붙잡아 둘 천성, '광기'. 그래서 마법사들은 마력의 총량보다도 항마력(抗魔力)이라 부르는 자질을 으뜸으로 치지."
"항마력이라······."
"마력은 시간이 지나면 단전에 쌓이지만, 천성은 단어 그대로 태어나기 이전에 정해지는 거잖아. 반로환동만 하면 대충 해결되는 문제야."
반로환동(反老還童)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재능이란 노력으로 바꿀 수 없기에 재능이야. 그런 맥락에서 항마력이 높은 사람. 광인일수록 마법사로서는 천부적이야. 광명우사, 마탑주의 오른팔이 가장 좋은 예시고. 봐서 알잖아."
"그렇다면 이태백은······."
"더할 나위 없지."
고은이 천천히 침대 위로 등을 묻으며 말했다. 이불보에 주름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항마력도 항마력인데 이태백이 쓰는 능력 있잖아. 상대방의 힘을 빼놓는? 내가 볼 땐 기프티드인데, 그런 기프티드는 살아생전 본 적이 없어."
임시 권한인 [너프]를 말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스피드가 변화막측하게 변하더라. 처음에는 느릿하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후반에는 정말 눈으로도 간신히 쫓았어. 근데 딱 본능적으로 느껴져. 그것도 이태백의 전력이 아님이."
"그럼."
"항마력, 기프티드, 잠재력. 전부 갖춘 괴물이란 거지. 내가 걔랑 대치할 때 순간 누가 떠올랐는지 알아?"
'천마'. 고은은 이태백을 그 괴물에 빗대었다.
"총대장의 저의를 알겠어. 슬슬 마탑에서 살수가 올 것 같은데, 갈 땐 가더라도 그 전에 내 지식을 넘기고 갈 사람이 필요했거든. 여생에 제자 육성이라. 이게 강호의 참된 도리지."
"······."
이것이 마법사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특징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대물리려는 습성이 있다.
마법사들은 도제 형식을 취하여 여러 명의 제자를 길러낸다. 그게 기명제자(記名第子)다. 그렇게 나름대로의 선별 작업을 거친 뒤, 한 명의 정식 제자를 고른다. 그리고 마법사 자신의 지식을 정식 제자에게 전부 전수하는 형식이었다.
마법사의 단 하나의 목적이자 과업.
마도의 종착역인 '기적'에 도달코자.
달성자가 비단 스승 본인일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의지를 이은 자가 이룩해도 만족하는 족속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목숨마저 경원시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헌납하는 자들.'
그러므로 마교이고 마법사다.
고은의 말마따나 미치지 않고서는 마법에 발도 채 못 디딜 터다.
'태백이를 얘랑 둬도 괜찮을까?'
고은을 보는 강현성의 안색은 해쓱했다. 그러다 머리를 내저어 근심을 훠이훠이 날려버렸다.
"퇴원일은 언제야."
"의사 소견으론 2주라는데, 어떻게든 빨리 나가봐야지. 객을 혼자 둘 순 없잖아."
고개를 주억거린 강현성이 일어났다.
"당분간 저녁은 시간 비니까. 닷새 정도는 호법 서줄게. 그때마다 운기해라."
"······."
고은은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곧 싱긋이 미소 지었다. 허리를 반듯이 세운 그녀가 좌정했다.
끼익.
강현성은 소리 죽여 문을 닫았다.
병실을 나온 그는 팔짱을 낀 채 문에 어깨를 기대었다.
"이, 태··· 백."
괜히 그 이름을 입으로 곱씹어 본다. 이런 양파 같은 인간이 더 있을까? 뇌옥에서 지금까지.
이태백의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녀석은 좋게 대화로 푸는 법이 없으며, 폭력을 행함에 있어 머뭇거림이 없었다.
복도 창문에선 노을이 나른하게 기울었다. 불야성이 타오르기 직전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이내 실소를 흘렸다.
'시에스타의 번견 출신.'
강현성이 알고 있는 그에 관한 정보 전부다.
그러나.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이 환장할 도시에선.
레이크 시티에서는 그 정도면 차고 넘쳤다.
* * *
상기했듯이 은코 바는 총 3층짜리 상가 건물이다. 지금에선 잿더미가 된 1층은 영업장이었고, 그 위의 2, 3층이 주거 공간인 모양이었다.
건물주인 여인이 입원하는 동안 손님 이태백은 나 홀로 2층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2층에 터를 잡은 이유는 가재도구가 침대밖에 없는 걸로 보아 손님용 객실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입자가 집주인을 입원시킨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개판이었다. 하나 한 가지, 없는 짐 싸서 나가야 할 상황임은 분명하다.
하여 떠나려 했는데, 웬걸?
강현성한테서 연락이 왔다.
오늘로 사흘 전의 일이다.
[안 나와도 돼. 집주인이 괜찮다잖냐. 테스트를 진행한 시점에서 그 정돈 감수하는 거지. 라고 전해 달란다. 그러니까 당분간 쉬고 있어.]
통화 당시엔 떨떠름했다. 초주검을 낸 당사자를 집 안에 들이는 걸로 모자라 편히 쉬라니.
화통한 것도 유분수지. 이건 숫제 마조히스트잖아.
그러는 한편, 마법사란 자들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법은 시전자의 정신 상태나 성격 등을 속성에 맞게끔 개조한다. 이름하여 마개조란 것이다.
이 역시도 나의 아이디어였다.
그 덕을 볼 줄 누가 알았으랴.
'덕분에 찝찝함이 가시는군.'
이태백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성격이 나도 모르게 마개조 된 시점. 더 나아가 게임 속 이방인이 된 원인까지 가을철의 연어처럼 타고,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어차피 차차 알아 나가야 할 부분이다.'
그걸 파헤쳐 보고자 외부 요원이 되었다. 후미토가 말한 혼란의 교단을 추적하기 위함이다.
죄책감 같은 하등 쓸데없는 감정에 잠길 바에야. 으레 소설이나 만화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낯선 천장이나 쳐다보며 멍을 때리는 게 낫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
이태백은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쳤다. 누운 자세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왜 다들 낯선 천장, 낯선 천장 거리는 지 알겠다. 생각 정리하는데 이만한 게 없거든. 페이커의 취미가 괜히 명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짓거리를 장장 사흘 내내 했더니 뇌 주름에 곰팡이가 피는 것 같았다.
이곳에 떨어진 이래 이처럼 잔잔한 나날이 있던가. 갖은 장애와 목숨을 건 생사투 뿐이었지.
하면, 축난 몸이 모처럼의 휴식을 반길 만도 하건만. 뇌가 자극에 중독된 탓인지 안락하다기보다는 권태로웠다.
'시시해서 죽고 싶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
아닌 게 아니라 [불렛 타임]이 선사했던 감각에 지금도 등허리가 짜릿했다. 비유하자면 전기의자의 열화 판이었다. 전기 자극은 내면에 파문을 일으켰으며 수그리고 있던 폭력성을 일깨웠다.
사회적 시선과 통념으로 움츠러들어 있던 야수성의 해방.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사흘의 명상 끝에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게임이 주는 재미와 상통했다.
게임 내에서 살육은 억압된 폭력성의 발산이다. 그때만큼은 사회가 입에 물린 재갈을 벗어던지고 마음껏 사냥하며, 성장하고, 보상받는다.
그 과정이 즐거웠다. 말했다시피 그는 게임에 미쳐 있었다. 개발도 좋았고 플레이는 더 좋다. 이런 그가 게임 속에 들어왔다.
거기에 더해서.
'버그 색출'이라는 운영자로서의 목적성과 '혼돈 여신의 탐구'라는 방향성까지 정해진 차였다.
자신은 부정하고 있지만 이태백은 현재를 즐기고 있었다. 자아가 인지 못 했다 한들 심장은 부서져라 흉막과 갈비뼈를 두드리고 있었다.
'감질난다.'
고은과의 전투가 떠올랐다.
그녀의 마법과 제약의 활용이 누리끼리한 천장을 캔버스 삼아 그려진다. 제약을 [불렛 타임]에 적용해 볼 순 없을까? 이미 제약이 걸린 상태라도 중복으로 적용할 순 없을까? [너프]와 [버프]는? 겜창의 성장 회로가 가속한다. 이유 모를 웃음이 나온다.
'실전이 필요해.'
길거리로 뛰쳐 나가 갱이라도 족치고 싶었다.
"하아······."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도 자각하고 있다. 걸핏하면 사고를 친다는 것쯤은.
강현성의 목소리에서 시름이 느껴졌다. 마냥 못 본 체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염치였다.
"고은인가 뭔가가 돌아와야지만, 릴리스 교단에 관해서 물어볼 수 있으니. 그때까지는 반강제적으로 유유자적 백수 라이프를 즐기자고."
이태백은 손의 깍지를 풀고 휙 돌아누웠다. 머리맡에 몸을 기댄 파라 블레이드가 보였다.
꾸욱.
파라 블레이드를 향해 손을 뻗어 보던 그가 끝내 허공을 움켜쥐었다. 이걸 잡아 버리면 폭력성에 불을 싸지르는 꼴이니.
이태백은 눈을 감았다. 내면이 언제 출렁였냐는 듯 금세 잠에 들었다.
* * *
[#1 소규모] 1.6 패치 노트
◈ 메인 패치
• 「운영자 포인트」를 이용해 「불렛 타임」에 제약이 중복으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 「운영자 포인트」를 이용한 「너프」 「버프」의 제약 중복은 중간 규모 패치에서 가능합니다.
◇ 기타 패치
• 「컨셉 : 사이코패스 (진)」이 심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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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풍개님! 나가셔야 합니다! 여기가 어딘지 아시잖습니까?!"
"잠시만 있어 보게, 분타주. 내 확인해 볼 게 있네. 잠시면 돼. 불안하면 먼저 나가서······."
바닥재를 뚫고 들려오는 대화. 이태백은 눈을 뜨기에 앞서 손부터 뻗어 파라 블레이드를 잡았다.
전투 반사가 이성을 앞질렀다. 비로소 두 눈을 떴다. 허리를 튕기듯 침대를 벗어난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걸음을 옮겼다.
25화 사이코패스 아닙니다 (2)
"서풍개님······! 얼른 나가셔야 합니다."
턱살이 세 겹으로 접히는 남자가 서풍개에게 속삭였다. 31구의 분타주 진소방이다.
"아네, 알아. 하지만 말하지 않았나. 잠깐이면 돼. 자네는 문밖에서 망 좀 보고 있어."
"어찌 삼결인 제가 법개를 앞장세우고 뒤에서 망이나 본단 말입니까! 낮말도 거지가 듣고 밤말도 거지가 듣는 하층 구역에서 말입니다!"
서풍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짚신은 이빨 빠진 듯 듬성듬성한 나무 바닥을 피해 다녔으며 늙수그레한 눈은 내부를 살피는 데에 열중했다.
"으음."
서풍개가 나직이 신음했다.
실내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원래가 세월이 쌓여 누런빛이 돌던 벽면은 이제 여백을 찾기 어려울 만큼 까맣다.
"허."
그 사악한 마법사가 기어이 사달을 냈구나!
'젊은 소협을 뜯어말리지 못한 내 책임이다.'
조약에 얽매여 어린 양을 마굴로 내몰았다.
그게 못내 아픈 가시로 남아 양심을 찔렀다.
하여 사흘이 지난 오늘 이곳에 들른 것인데.
'모든 게 잿더미구나······.'
서풍개의 동공이 움직일수록 속도 타들어 간다. 눈매가 자꾸만 사납게 올라간다.
진소방은 그를 빨빨빨 쫓아다니며 설득을 시도했다. 그는 다른 의미로 애가 탔다.
"서풍개님!"
"시끄럽네."
서풍개는 귀찮다는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망을 볼 마음도 없고 내 행사에 훼방만 놓을 거면 썩 나가시게. 그러게 왜 따라와서는."
"31구에서 제 인사를 받지도 않으시고 어디론가 급히 가시니 분타주 된 자로서 어찌 안 쫓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목적을 이뤘으면 인제 그만 나가주게, 분타주. 이건 자네의 선배로서 하는 말이네."
"아무리 서풍개님의 말씀이라도 그 뜻엔 항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은공이잖습니까."
서풍개는 그제야 다그치는 진소방에게 시선을 주었다. 누더기로 간신히 몸을 가린 자신과는 차림새부터 달랐다.
'호사스럽기 그지없구나.'
시선을 조금 더 내렸다.
허리끈을 꽉 졸라맨 여파로 언덕처럼 삐져나온 뱃살과, 그 아래에서 애처롭게 떠는 세 결의 로프가 눈에 담긴다.
뿐이랴. 넉넉한 길이의 옷소매 밑으론 강철 손가락이 빼꼼 그 끄트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그 비싸다는 사이버 의체였다. 중산층이 주류가 된 작금의 하층 구역에서도 구경하기 힘들다는 귀물이었다.
같은 개방도이면서도 극명히 대비되는 차림새는 진소방이 청의파임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십 년의 세월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하지만 자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변했군, 분타주."
서풍개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빈정거렸음에도 진소방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예전처럼 소방이라고 불러 주시오, 어르신."
"이 사람아. 자네가 전 같지 않은데 내 어찌 격 없이 대하겠는가. 지금의 자네는 분타주란 칭호가 부르기 편해."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서풍개님께서도 하루빨리 구시대의 악습을 청산하시고 청의파로 전향하시는 것을 감히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진소방은 겸손하게, 하나 꿋꿋하게 말했다.
"또한 제가 암만 돈에 찌든 청의파라고 한들 개방도에 몸담은 놈입니다. 은공께서 마녀의 집으로 홀로 들어가시는데 호위 역을······ 읍!"
손금에 때가 잔뜩 낀 손바닥이 진소방의 입을 누르듯이 덮었다.
악취로 인해 순간 토악질이 쏠리는 가운데 서풍개가 검지를 제 입술 중앙으로 갖다 붙였다.
"쉿."
차가운 적막이 지배한 장내. 돌연 인기척이 일었다.
뒤이어 발소리가 들려온다. 사위가 시커멓게 먹칠 된 턱에 긴장감이 몇 배로 고조된다.
꿀꺽-.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근원지를 향해 미끄러졌다. 시선이 향한 곳은 계단 쪽이었다.
삐걱.
누군가가 한 걸음, 한 걸음 고요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삐걱.
마침내 하반신이 보일 무렵에서 진소방이 다급히 전음을 쐈다.
- 대협! 이제라도 나가셔야 합니다!
"······."
절박한 외침은 서풍개에게 가 닿지 못했다. 서풍개는 노기 어린 시선으로 계단을 노려보았다.
'대협께서!'
진소방은 입이 막힌 채로 움찔했다. 서풍개가 저리 격분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느긋한 초로인 서풍개이나, 매서운 눈초리를 할 때는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만다.
서풍개가 괜히 육결이겠는가? 그 역시나 풍운의 뜻을 품은 무림인이다. 서글서글한 태도는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가면이었다.
주먹으로 뜻을 세워, 일방의 위상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뼛속 깊이 오의파다.
오의파가 비럭질하는 비렁뱅이라고 해서 알맹이마저 비루하진 않다. 그들은 많은 것을 포기했고 그만치 힘을 기르는 데 시간을 쏟았다.
그런데.
오의파에서도 두 손에 꼽히는 고수가 이같이 이를 갈다니. 진소방의 턱살에 식은땀이 고였다.
'고은, 저 마녀는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건가?'
정마불가침.
정파와 마교는 서로서로 건들지 않겠다는 불문율. 정사마밖에 없던 강호와 달리 레이크 시티엔 메가코프라는 신세력이 버티고 있다.
메가코프란 무림의 적은, 지리멸렬하게 물고 뜯고 싸우던 정사마의 휴전 선언이라는- 강호 역사에서 전례가 없던 협정이란 결실을 나았다.
단, 이는 평화의 시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행여라도 명분을 제공하면 협정이 깨지진 않더라도 실금 정도는 확실히 새겨질 터다.
그렇기에.
진소방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은코 바를 피했다.
적어도 그 산하의 방도들만큼은 이곳에 얼씬도 못 하도록 일러두었다.
진소방은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내다.
은코 바에 들어설 마음은 맹세컨대 추호도 없었다. 은공인 서풍개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기랄, 어떻게든 내 선에서 끝내야!'
그 사이.
발소리의 주인이 바닥을 밟았다.
삐걱.
다만 시간대도 땅거미가 앉은 저녁인 데다가. 사위가 온통 시커먼 탓에 좀처럼 식별이 안 된다.
'고은, 그 마녀인가?'
손목이 가는 걸 보면 얼핏 여자 같아 보이지만.
그렇다기엔 골반이 굴곡 없이 뚝 떨어진다.
뭔가 손에 들고 있기는 한데.
그때, 진소방의 입을 틀어막은 서풍개의 손이 스르륵 내려간다.
숨을 고른 진소방이 안력을 돋웠다. 눈이 살집에 숨으려는 찰나와 동시였다.
파밧!
판석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상대방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순간 여자로 헷갈릴 만도 한 곱상한 이목구비. 일단 마녀가 아닌 건 맞는······.
'손에 저건!'
양손 가득 잡고 있던 두 막대기.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진소방이 눈을 크게 떴다.
"···뭔 실내에서 우산을······."
왼손에는 접힌 우산, 다른 손에는 꼬챙이에 가까운 칼이 쥐고 있었다.
칼끝의 표적은 다름 아닌 자신, 진소방이었다.
진소방은 과도하게 상반신을 뒤로 꺾어 접었다. 칼날의 예리함이 코끝을 스쳤다.
다음 순간 진소방은 허리의 탄력성을 살려서 몸을 뒤집었다. 이후 거북이처럼 등을 말아서-.
쿵-!!
서풍개의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등살에 밀린 서풍개가 벽까지 날아갔다. 철산고(鐵山靠)였다.
"벌충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어르신!"
진소방을 대피시킨 후, 자리를 박찼다. 훌쩍 상대와 거리를 벌린 그가 호흡을 추슬렀다.
"잠깐 이 사람아!"
서풍개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외쳤다.
"압니다. 서풍개님이 이곳을 찾으신 이유가 저자 때문인걸요. 그래서 제가 나서는 겁니다."
진소방은 그리 말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보기 드문 미남이 그를 마주 바라본다.
'심마에 빠진 이들이 저런 얼굴이었다.'
정황의 얼개가 진소방의 뇌리에서 짜 맞춰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마녀에 의해 마개조를 당한 것.'
진소방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말했다.
"저자는 지금 주화입마에 빠졌습니다. 대협께서 암만 손속에 사정을 둔다고 해도 저 소협은 다칠 겁니다. 격차가 너무 나니까요."
진소방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강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쇠끼리 맞물리며 파찰음이 냈다.
끼릭, 끼릭.
기계 팔의 꿈틀거림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진동의 여파로 바닥에 깔린 톱밥 가루가 떠올랐다.
"그나마 제가 나서면 소협의 몸이 덜 상할 겁니다. 그러니 이 못난 놈을 한 번만 믿어주십시오."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는 그저 한발 물러났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협."
"말마따나 심마라면 필히 사정을 두게."
"예."
진소방이 이태백을 향해 걸어갔다. 눈빛이 달라지자, 공기의 압도 무거워졌다.
그가 말했다.
"최대한 속속에 사정을 두겠네만··· 소협이 계속해서 살초를 쓰는 이상 몸이 상할 수도 있네."
콰앙!
진소방이 몸을 날렸다. 비대한 체구가 믿기지 않는 속도. 강철 손가락이 칼을 쥔 손목을 덮친다.
이태백은 어깨를 두 치만큼 뒤로 물렸다. 진소방의 강철 손아귀가 허공을 움켜잡았다가 활짝 펼쳐진다.
휘끽!
그 순간이다.
이태백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파라 블레이드가 진소방의 관자놀이를 후린다.
"빠르긴 하나!"
고개를 비틀어 피하는 진소방이었다.
"너무 정직하다!"
진소방은 자세를 고치고 곧바로 출수했다. 등 근육이 주먹을 짜냈다. 공수의 전환이 깔끔했다.
치열한 공방이 이었다. 진소방이 몰아붙이고 이태백이 피하며 반격하는 형세였다.
"허."
서풍개가 헛웃음을 흘렸다.
"청의파로 전향했다 해서 수련을 게을리하진 않았구나."
진소방은 명색이 31구의 분타주다.
온갖 유혈사태가 난무하는 하층 구역에서 분타주는 중재자의 구실을 해야 한다. 따라서 우범지대의 생리에 따라 분타주는 그에 걸맞은 무력이 요구된다.
지금은 살이 투실투실한 돼지처럼 보여도 진소방이 실력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취이이이익!
강철 팔에 뚫린 배기구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정권에 추진력을 더했다.
'쾌권이다.'
주먹을 내지르는 진소방의 뺨이 증기에 부딪혀 뒤로 당겨질 정도였다.
손속에 최대한 사정을 두겠다던 말이 무색해지는 어마어마한 주먹을 연거푸 뻗어냈다.
진소방은 바닥의 공백을 피하며 몰아쳤다. 주먹이 수여 개의 잔영을 만들어 낸다.
쐐애애애액!
그걸 이태백은 계속해서 흘려낸다.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민첩하다.
이태백의 열화상이 그라데이션으로 이끌린다. 본체 대신 그림자가 손에 잡힌다.
땀 한 줄기가 뺨을 쭉 가로질렀다. 몰아칠수록 되레 이쪽의 체력이 갉아 먹힌다.
절제된 움직임.
또한 민첩하다.
초장엔 칼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으면서 지금에선 다리만 움직이고 있다. 심마(心魔)에 시달리는 자라기엔 이상했다.
'······이건.'
꼭 비무를 보는 듯하다.
하나 과한 억측이었을까?
'더는 안 되겠다.'
인내심이 바닥난 진소방이 뒷발을 굴렸다. 바닥이 주저앉았다. 톱밥이 흩날린다. 얼마 남지도 않은 가재 살림살이를 아예 날려 버릴 작정인 듯했다.
"······."
이태백의 눈이 가라앉았다. 멧돼지처럼 돌진해 오는 진소방을 정면에서 받아내야 한다. 진소방이 도약한 옆쪽의 바닥이 터지듯 폭발했다.
후우우웅!
광풍이 일었다. 선풍기 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것처럼 이태백의 머리카락이 젖혀졌다.
그러다 무심코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서걱서걱한 공기가 폐부로 밀고 들어왔다.
훅, 하고 진소방의 얼굴이 확대됐다.
한 치 앞으로 다가온 그는 남은 손을 펼쳤다. 언제 갈무리했는지 모를 톳밥을 뿌렸다.
진소방의 주먹이 이태백의 몸을 밀어내듯 가격했다.
콰아아앙!
이태백이 벽창호에 처박혔다. 먼지 속에서 그가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후우, 후우.
진소방이 무릎을 짚으며 숨을 헐떡였다.
'아뿔싸!'
흥분하여 진소방은 살초를 써버리고 말았다.
의체의 살상력은 중화기에 필적한다.
운이 좋아 봐야 중상. 보통은 병풍 뒤에서 향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젊은 소협이 가까스로 몸을 빼내 준 덕분에 주먹이 골반 근처에 처박혔다.'
서풍개가 신신당부했음에도 젊은 소협을 죽일 뻔했다는 소리다. 원수지간도 아닐뿐더러 육 결인 서풍개의 질타를 무릅쓰고 나선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진소방의 기계 팔이 소협의 가슴에 구멍을 뚫었더라면······.
냉병기를 엄금하는 개방 내에서 기계 팔을 이식한 그에게 꽂히는 눈총은 가뜩이나 따갑다.
가장 험한 동네인 31구의 분타주라서 묵인해주는 것이지, 의체 사용자는 개방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그런 마당에 파편을 뿌리는 비겁한 살초까지 써버리다니.'
대문니가 더욱 아랫입술을 파고든다.
여차해서 소협이 죽었더라면 문책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천만다행히도 소협은 죽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진소방도 구사일생했다.
'그래도 어떻게 한시름 덜었······.'
그때였다.
"순수한 불릿 타임만으로는 의체를 상대로 버티는 게 고작인가."
진소방의 어깨가 들썩였다.
이태백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섰다. 진소방의 얼굴에 안도와 경악이 교차했다.
"여기에 제약을 걸면 또 모를까."
눈으로 보이는 외상은 경미했다.
그는 옷을 마저 털어내니 조깅 다녀온 사람보다 깨끗한 모습이다.
진소방이 질린 안색으로 고개를 툭 떨궜다. 둔덕만 한 뱃살에 발자국이 뚜렷이 찍혀 있다.
'안 그래도 때리는 맛이 심심하다 싶었는데!'
충돌 직전 이태백은 진소방의 두툼한 뱃살을 밀어서 완충시킨 것이었다. 영악하다. 이성이 마비된 자의 대처가 아니다.
아니지.
이태백이 말을 건넨 시점에서 심마에 사로잡혔을 거라는 확신 아닌 확신은 깨졌다.
"너, 너 심마에 지배당했던 게 아니냐!"
"뭔 소리야. 대련 상대가 필요해서 말을 안 했을 뿐이야. 그럴게 의체 사용자는 귀하잖아."
이태백이 목 주변을 문지르며 뭉친 근육을 푼다. 진소방이 재차 기함했다.
"분명 초장에 살초를 쓰지 않았느냐!"
"그건 진짜 도둑인 줄 알았거든. 그래도 저 할배 보고서 도둑이 아닌 걸 알았다. 그리고."
이태백이 외투 자락을 툭 털 듯 걷어내자, 허리춤에서 빛이 번쩍했다. 리볼버가 걸려 있었다.
"살초를 썼을 거면 총을 쐈겠지."
"······."
"애초에 목소리 높여도 되는 사람은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아닌가? 나야 처음에만 당신들의 정체를 모르니 호신 차원에서 칼을 썼을 뿐. 주거 침입하면 총으로 응사해도 되는 게 레이크 시티의 법이다."
정론이다.
무법의 온상지인 하층 구역에서 그나마 지켜지는 법규가 주거침입죄였다. 문답무용으로 대포를 쏴 갈겨도 면책 사유로 인정된다.
"내, 내 말을 일단 들어보게. 난 이 31구의 분타주일세. 내가 들어온 건 그저."
"변명은 됐고."
이태백은 시선을 진소방에게 고정한 채로 그 너머를 향해 턱짓했다. 서풍개가 거기 있었다.
"저 영감한테 분명 살초 쓰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막판에는 톱밥까지 뿌렸잖아."
"그, 그건."
"씹, 아직도 눈 따갑네. 의체도 낀 양반이 뭐가 그렇게 치졸해? 무슨 가랑이도 의체로 붙였나."
진소방은 입술을 스읍 빨아들였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당신한테 발언권은 없어. 그렇잖아? 도둑질에, 폭력 행사, 거기에 집안 꼬라지를 아주 박살을 내 놓질 않나. 31구의 분타주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와도 되는 거야?"
이태백이 칼날을 집어넣으며 선선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진소방은 주춤거리며 진땀을 뺐다.
"일단 진정하고. 내 일단 사과 하겠네."
"사람을 진정시키려면 말뿐인 사과가 아니라."
털썩.
이태백이 발로 잔재를 밀어 치운 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합당한 배상을 해야 하는 거야."
맞은편을 가리키는 눈짓. 앉으라는 뜻.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한테 돈을 뜯기게 생겼다.
분타주인 그가 말이다!
그것도 개방 거지······ 청의파라서 거지라기엔 어폐가 있지만, 어쨌건!
하지만 진소방은 끝끝내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일단 앉지."
서풍개가 선선히 걸음을 이끌었다.
"대협······!"
"소방아."
지엄한 한마디에 진소방은 흠칫했다. 이미 한 번 항명했던 그는 그 이상 불복할 수 없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어르신."
"됐다. 일단 들어나 보자꾸나."
진소방은 서풍개 곁에 자리를 잡았다.
26화 사이코패스 아닙니다 (3)
진소방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쾅 내리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날벼락의 현장이니까.
"일단 당신이 개 박살 내 놓은 여기 보수비 견적이...."
이태백이 줄줄이 뱉어 대는 내용들이 청천벽력이 되어 진소방의 뇌리를 진탕 흔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볼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대충 3억 정도 들 것 같군."
후려치는 가격임을 이태백도 알고 하는 말이다. 다 쓰러져 가는 가게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보수하는 데 돈이 그만치 들 수가 없다.
그래, 알고는 있다.
"준비해."
알고만 있으려고.
"현찰, 캐쉬로."
"그게 무슨 소린가! 이 골방만도 못한 칵테일바 하나 뜯어고치자고 3억을 토해 내라니! 그리고 현찰은 또 뭔 소리야!"
"내가 아직 계좌가 없어서. 아, 말하는 김에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단말기도 하나 개통해 줘. 아니, 해라."
진소방이 듣다못해 고통에 몸부림쳤다.
"으아아아아아!"
진소방 혼자였더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자리를 박찼을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용."
그러나 그는 서풍개와 함께였다.
"채신머리 없게."
"…죄송합니다, 어르신."
"쯧."
서풍개가 눈길을 돌렸다.
"그래, 이태백. 시원하게 다 말해 보게. 내 일단 들어는 주겠네."
그러고는 누렇게 웃었다.
저건 조소인가, 미소인가.
뭐가 됐든 나는 떳떳하다.
"들어만 보겠다는 뉘앙스인데."
"언어란 본디 듣는 사람 나름일세.
"…대협, 저놈 저거 어르신을 대놓고 하대하는데 말입니다."
진소방이 서풍개에게 속닥였다.
"소방이 자네, 꼰대인가?"
"예?"
"가만히 있으란 소릴세."
"아, 예...."
뺨을 긁적인 진소방이 고개를 돌렸다.
"소협."
"이태백."
"이 친구야."
"이태백."
"...."
"소협 아니고."
"...."
"친구 아니고."
"...."
"이태백이다."
진소방의 이마에 시퍼런 핏대가 솟는다.
"이태백이든! 태백산이든! 뭐든 간에! 네 요구는 너무 과하다고! 3억? 3어어어어억?"
"3억 5천에서 2천 더. 3억 7천."
"이런 날강도가! 천존이시여! 저를 굽어보시옵소서!"
이태백은 멀리 보며 귀를 후볐다.
아쉬운 입장은 뚱땡이 아재였다.
저, 저거 봐라. 야단법석을 떨면서도 영감 눈치 슬슬 살피는 모습을.
'도와주기를 바라는 애절한 눈빛.'
서풍개가 나서 주지 않는 한 진소방이 할 수 있는 건 시름밖에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법개가 잠자코 들으라잖아.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영감의 의중을 알 길은 없으나, 이태백에게 보내는 시선 자체는 호의적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자.'
방법은 간단하다.
머리를 치켜들고.
시선을 맞춰 준다.
"3억 2천."
그리고 강짜를 놓는다.
"뭐, 뭔...!"
"말대꾸? 3억 5천."
"이런 날강도가 있나!"
"야밤에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서 주먹 휘두르고 흙 뿌리는 게 강도지, 내가 강도냐?"
"그러니까 그건 사과한대도!"
"그러니까 사과는 돈으로 받겠다고."
십 년 전쯤의 일이다.
소상공인 몇몇은 의도를 갖고 개방에 적선을 했다. 갱들로부터 업주들의 울타리가 되어 달라는 명목이었다.
구파일방의 일각인 개방도다. 개방이 마음만 먹으면 갱들은 하층 구역에서 종적이 지워진다.
그러나 개방은 일선에 나서지 않는다는 기풍이 만연했다. 중원에서는 그랬었다.
개방의 근간을 성토하던 거지 중 몇몇이 레이크 시티의 배금주의에 굴복했다.
'돈맛을 본 거지.'
특정 개방도들은 상납금을 축적했다. 암암리에 금기시되어 있던 저축을 시작한 것.
- 거지가 어찌 저축을 한단 말인가!
개방의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다만 돈맛을 본 개방도들은 이미 파벌을 형성했다. 명칭도 청의파로 개명한 뒤였다.
그들은 괜한 분란이 일기 전에 먼저 떠났다.
그 덕에 같은 개방으로 묶일 수 있었다.
하나 찢어진 관계는 봉합되기 요원해 보였다.
이것이 개방이 둘로 갈라지게 된 비사.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숨겨서 뭐 하나. 수식할 말도 마땅찮다.
합리화. 거지한테 돈 뜯기 위한 핑계다.
따지고 보면 청의파는 허울만 개방이다. 그들은 돈이 많다. 어마어마한 부자다.
하층 구역에 상주하는 이유는 단순히 수입처가 여기기 때문이다.
상대가 오의파인 서풍개였으면 가책을 느끼겠지만 청의파를 상대론 말이 다르지.
뽑아 먹는다.
골수까지 쪽쪽.
"개방 거지에게 돈을 뜯는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문자 그대로 거지의 간을 빼먹는...!"
"요새 거지는 비단옷에 사이버네틱 의체까지 달고 다니는 게 거지면, 돈 없어서 사흘 굶은 나는 뭐, 거지보다 못한 새끼라 이거냐?"
이태백은 진소방의 주장을 묵살했다.
"훕!"
서풍개가 어깨를 들썩이며 대놓고 웃었다. 뻘쭘한 듯 헛기침을 하는 진소방이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알잖소...."
진소방이 어조를 바꿔 말했다.
"모르겠는데."
"…사죄드리오."
"사죄는 돈으로 받겠다."
"전생에 돈에 한이라도 맺혔소?"
"응."
블랙 기업에서 굴렀거든.
"여, 여하튼 미안하오. 거기에 나도 모르게 살초를 쓴 점, 그 또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진심이오. 요컨대 돈 때문에 이리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래서 치료비도, 보수비도 못 주겠다? 그 유서 깊은 구파일방. 정파의 개방이? 이거 뭐, 사파가 없구먼. 지금 이 작태. 딱 갱의 그건데."
"아, 아니… 말을 그렇게까지 할 거 있나 소협… 아니, 이태백."
"은근슬쩍 소협 붙이네. 저기요, 아재. 지금 소협처럼 나오는 게 누군데. 청의파면서 어디서 거지 코스프레야. 그쪽은 돈 많잖아. 저 영감은 몰라도."
이태백이 시선을 옮겼다. 초로의 거지가 재밌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풍개. 길에서 우연히 만난 거지. 그의 허리춤에 시선으로 향한다.
여섯 개의 로프 매듭. 레이크 시티에 오만 가득한 거지들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초고수란 상징.
그런 서풍개가 [기척 차단]을 유지한 채 이태백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기척 차단]은 모든 스탯이 30을 웃돌아야 발동할 수 있는 초인들의 절기다.
'이 말 많은 분타주가 절절맬 만하군.'
진소방은 수위에 드는 강자였다.
"혀가 길어도 너무 길어. 강호의 도리는 입은 무겁고 손이 가벼워야 하는 법 아니었나."
"끄으으으응."
겉모습이 주는 가벼운 인상은 차치하자.
진소방을 상대로 잠시간 동수를 이룰 수 있음은 살초를 의도적으로 배제했기 때문.
봐줬음에도 체감상 약에 취한 하이옌을 뛰어넘는 공세로 이태백을 수세로 몰았다.
'[너프]와 [버프]를 활용했으면....'
정직해지자, 이태백.
진소방이 처음부터 죽자고 달려들었으면 불 보듯 뻔한 자신의 패배였다.
'사흘 전에도.'
그 곰방대 마법사가 작정했으면 이태백은 그 자리에서 잿더미로 화했을 거다.
방심을 유도해서 승기를 점할 수 있었던 거지. 그것도 실력이라면 할 말은 없다만.
전력 차가 심하게 났다는 건 받아들여야 한다.
인정해라. 요령껏 운빨로 살아남았다는 걸.
그 행운이 언제까지고 이태백의 편일 거란 보장이 있나? 없다.
설사 세상의 편애를 받고 있다 해도 그렇다. 알량한 마음가짐이 수명을 폭삭 단축시킨다.
자기 객관화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주기적으로 자존심을 꺾어라. 냉정과 부동심을 유지해.
정리하자면 진소방은 사이버네틱 의체도 의체인데 그냥 사람 자체가 강했다.
실력과 경험은 첨단 기계로도 대체 불가한 영역이니 말이다.
그러니 한 구역을 전담하는 분타주다.
'분타주들을 한 다스로 부리는 게 법개고.'
그 두 사람에게서 삥을 뜯어야 한다.
이태백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내건 돌발 퀘스트였다.
'집주인을 입원시키고 살림을 아주 개 박살을 내놨으니까. 갑을 관계를 조장할 수 있는 원천에 차단한다.'
하숙인으로서 체면치레도 하고 겸사겸사 생활비도 벌어 보자는 공산이었다.
'전투 욕구에 못 이겨 냅다 칼부터 쑤시려 했던 사실은 나만의 비밀.'
솔직하게 말해서, 이태백이 내심 바라는 보상은 돈이 아니다. 돈은 수단일 뿐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최종 탈취 대상은 오의파의 서풍개.'
어쨌든 여기서만큼은 자신 있었다.
이럴 때 특히나 진가를 발휘하는 능력이 있지 않던가? 초인과 잠깐 평수를 이룰 수 있는.
[시전자의 정신 능력치를 버프합니다.]
이태백의 동공에서 총기가 맴돌았다.
"과실은 인정하네만! 돈의 액수가...!"
진소방이 가열한 어조로 소리쳤다. 검지를 뻗으며.
턱.
이태백의 손바닥이 벽처럼 손끝을 막았다.
[상대방의 정신 능력치를 너프합니다.]
그 즉시 진소방에게 변화가 일었다.
조금 전까지 열변을 토하던 진소방의 안색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처럼 표백됐다.
"어, 어...."
진소방은 툭 치면 공황에 빠질 듯했다.
오만한 이태백의 얼굴이 대비 효과를 일으켰다.
"3억 5천."
"그, 그게...."
지금, 이 순간.
진소방 시점엔 이태백의 눈에서 시퍼런 귀불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효과 지리는데.'
전 스탯을 약화시키지 않고 정신 스탯만 낮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비살상 대상에게 [너프]의 능력을 노출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늘의 아군이 내일의 적으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은 도시잖아.
둘째는 진소방의 능력치를 전부 낮춘다 한들 그 곁에는 서풍개가 있어서였다.
대관절 진소방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면 서풍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다.
하나 단언하건대, 나쁘면 나빴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너프]에도 제약이 통하는지 실험해 보고 싶었다. 이게 가장 컸다.
하나의 능력만 낮추면 효과가 커지지 않을까, 이 가설을 증명해 보고자 함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입으로 말하면서도 소름이 끼친다.
'대사 수준하고는....'
언제쯤 적응할 수 있으려나.
어쩌면 영영 못 할 것 같기도.
이것도 '두 가지 능력치를 버프'하는 효과를 하나의 능력치에 몰빵해서이지 않을까?
이미 알게 모르게 제약을 활용하고 있었군.
쪽팔림이야 어쨌든 파급력은 상당했다.
강경하던 진소방이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렸다.
"드드, 드리겠습니다...."
이태백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미소 지었다.
돈도 돈이지만 [버프]와 [너프]를 어떻게 사용할지 드디어 감이 잡힌다.
"5천은 안 받을 테니 원래대로 3억만 붙여."
"아, 알겠습니다...!"
진소방이 절대복종하겠다는 듯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인다.
스톡홀름 증후군. 극한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는 심리를 뜻한다.
[너프], [버프]에 제약을 건 뒤, 정신이란 하나의 능력치에 병용하면 일이 거짓말처럼 쉬워진다.
좋군. 다른 능력에도 써먹어 봐야지.
"이거 참, 보면 볼수록 기이하군."
중립적인 태도를 고수하던 서풍개가 급기야 헛웃음을 뱉었다.
"이 정도로 [기척 차단]에 능할 줄이야."
어… 아닌데?
"자네가 기세를 드러내자마자 분타주가 이렇게 덜덜 떨다니. 기척 차단에 도가 텄군."
"..."
"어쩐지 아까도 이상하다 싶었네. 하,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가는군. 손속에 사정을 둔 건 분타주가 아니라 소협, 아니 이태백 자네였구먼."
오해의 눈덩이가 굴러간다. 이태백의 말투도 강자가 부리는 여유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신을 버프했음에도 난처함을 숨기기 어렵다. 처신을 고민하기 잠깐.
스윽.
머리를 들고 시선을 맞췄다.
불과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역시, 눈치가 좋군."
다만, 상황과 기분은 반대다.
* * *
◈ 메인 패치
• 「기척 차단」을 익히기에는 아직 능력치의 레벨이 모자라나, 비례 수치를 상승시켜 「기척 차단 (임시)」를 획득합니다.
• 「민첩」의 비례 수치가 (+7.9%)로 상승했습니다. 「은신」의 효과가 크게 상승합니다.
• 「마력」의 비례 수치가 (4.0%)로 상승했습니다. 「제약」에 대한 이해도가 오릅니다.
• 「신앙」의 비례 수치가 (+6.5%)로 상승했습니다. 「자기 확신」이 크게 오릅니다.
• 「정신」의 비례 수치가 (+5.8%)로 상승했습니다. 「컨셉」들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 「암살자 검술 (초급)」, 「기척 차단 (임시)」의 시너지가 발동했습니다.
• 「암살자 검술 (중급)」으로 격상합니다!
◇ 기타 패치
• 「컨셉: 날강도 (진)」를 획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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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사이코패스 아닙니다 (4)
서풍개는 뭔가를 바지춤에서 꺼냈다.
"손속에 사정을 둬 준 대가일세."
동그란 금속체였다. 망설이는 눈빛으로 그것을 몇 번이고 손안에서 조물조물했다.
예스러운 동전(?)이었다.
그러다 결심을 굳혔는지 동전으로 나무 바닥을 긁으며 이태백에게 내밀었다.
"어, 어르신! 그, 그, 그, 그건!"
이에 기겁한 자는 진소방이었다. [너프]로 약화됐던 정신이 대번에 깨어났다.
"대충 이 물건의 정체를 아는 눈빛이군. 어때, 진소방 이 친구의 목숨값으로 받아 줄 텐가?"
이태백은 멍하니 그것을 내려본다. 고개를 들어 서풍개를 직시한 건 얼마 뒤였다.
"아들이라도 되나? 하나도 안 닮았는데."
"개방끼리는 다 같은 식구일세. 식구 목숨값으로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것이지."
"그렇다면야."
이태백이 손끝을 뻗어 '그것'을 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뭐야."
어째 당겨지지가 않는다?
서풍개가 힘을 잔뜩 준 채 놔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톱에 낀 때만큼이나 미련이 가득했다.
부르르르.
이태백과 서풍개. 두 사람 분의 손가락을 허리에 인 동전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동전을 놓고 씨름하기를 잠깐. 서풍개가 한숨과 함께 손끝에 집중된 힘을 풀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 만...."
그러면서 슬그머니 떠본다.
"자네가 청구한 금액도… 줘야 하나?"
이런 속이 노란 거지를 봤나.
당연한 걸 당연치 않게 묻네.
이태백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 * *
새벽녘, 은코 바의 문이 열렸다.
두 남자가 양 문을 가르며 걸어 나왔다. 서풍개와 진소방이었다. 그들이 입장한 지 벌써 네 시간이 흘렀다.
여명의 푸르스름한 공기를 머금은 바람이 두 개방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빨랫감처럼 축 처진 진소방의 볼살이 애처롭게 나부꼈다.
터벅, 터벅.
서른 발자국쯤 옮겼을 때, 진소방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빠안-히.
이태백이 팔짱을 끼고서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로 그들이 떠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끼이이익.
두 도둑이 손바닥으로 가려질 만큼 가게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가게 문을 닫았다.
쿵!
오늘 장사는 이걸로 충분하다는 듯이. 철컹, 빗장이 걸리는 금속성이 잇따른다.
'독한 놈.'
진소방은 그렇게 뇌까리고는 마저 가던 길을 갔다.
아닌 밤중에 구미호를 만나 정기를 쭉 빨린 사람같이 걸음걸이가 비척거렸다.
수척해진 얼굴은 애수를 불러일으켰다. 서풍개는 측은한 눈빛으로 진소방을 바라보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분타주, 너무 그런 얼굴 하지 말게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3억도 그렇게 큰돈이 아니야."
"예… 어르신."
진소방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 시든 꽃처럼 머리가 무겁게 추락한다. 대답도 영 신통치 못했다.
그러나 서풍개는 무례를 눈감아 주었다.
자신과 동행한 탓에 분타주의 3억이 게 눈 감추듯 증발했기 때문이다.
3억이면 하층 구역의 도박장에서 VVIP로 대접받을 정도의 금액.
서풍개는 다시 진소방을 힐끗했다. 그가 느끼는 부채감은 이윽고 암석이 되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진소방의 동행은 정마불가침을 위배한 나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던가.'
서풍개는 진소방을 속 좁게 대했다는 것이 새삼 미안했다.
개방이 두 파벌로 쪼개진 건 단순히 이념의 차이 때문이었다. 피 튀기는 내분 같은 건 일절 없었다.
단지....
서풍개가 구제하고 직접 개방으로 거둬들인 자.
진소방이 청의파로 전향했다는 그 행보에 서풍개가 개인적인 실망감을 드러냈을 뿐이다.
'무소유로 등선을 목표로 하는 개방도가 돼서는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여 버렸구나.'
부끄러웠다.
"미안허이."
서풍개는 재차 면목 없음을 표했다.
"내 자네 대신에라도 냈어야 하는 건데, 거지라서 어쩔 수 없었네. 분타주,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게."
"아닙니다. 고개 드십쇼, 서풍개 어르신. 은공께 대가를 바란다니요. 적어도 저와는 은원에 연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르신께 빚진 게 얼만데요."
"그 말에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군...."
서풍개가 씁쓸하게 자조했다.
진소방은 냉큼 고개를 내저었다.
"되레 저 진소방이 어르신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 때문에 어르신이 그 패악 무도한 놈한테 '협전'을 뺏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뿌득 어금니를 갈아붙였다.
"협전을, 그 협전을...!"
진소방은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며 씨근거렸다. 그는 자기 물건이라도 강도당한 양 진심으로 분노했다.
'개방의 협전.'
협전이 무엇인가? 보기엔 누렇게 뜨고 자그마한 모양새지만, 개방의 전 지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귀보 중의 귀보다.
'모든 개방도에게'.
'청의파, 오의파.'
세력을 망라한다.
지역도 막론한다. 레이크 시티는 물론이요, 중원에 잔재 중인 소수의 개방도도 원한다면 호출이 가능하다.
게다가....
하필이면 서풍개의… 아니, 이젠 이태백의 소유물이 된 협전은 삼품(三品)이었다 진소방은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육결 이하의 배분만 오만 명이다. 협전이 그 날강도 손에 들어간 순간 부로....
'자그마치 오만 명이.'
…무고한 개방도 오만 명이 군말 없이 그놈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
그것도 삼품 협전이라서 세 번이나!
그 오만이라는 숫자엔 진소방 자신도 포함이다.
'으아아아아아아!'
기계손이 주인의 머리를 헤집었다. 동시에 그 낯짝이 뇌리를 스친다.
- 씨익
협전을 쥐었을 적 입에 걸리던 조소가!
- 주니까 사양은 안 할게. 아, 진소방 당신은 가만있어 봐. 닦아야 할 거 같아서.
이태백이 진소방의 팔소매를 가져가 협전을 닦으며 한다는 말이었다. 사이코패스가 틀림없다.
'가장 들어가선 안 되는 녀석의 손에 협전이 들어갔다.'
어르신은 개방에서 현인으로 통하시는 분이다. 레이크 시티에 적을 둔 개방 전체의 거시적인 향방은 대개 그의 턱짓으로 결정된다고 보면 된다.
눈높이의 차이일까. 막 호주머니를 통째로 뜯어 간 발칙한 얼굴이 떠올라서일까.
이번만은 어르신께서 그른 선택을 한 것 같다는 상념을 지우기가 힘들다.
지나가던 거지 아무나 잡고 물어도 백이면 백 진소방의 의견에 당연히 표를 던져 줄 터였다.
심마가 찾아왔다. 울혈이 단전, 간장, 위장을 두루두루 통과한 끝에 혀뿌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쇠맛이 난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잠시만 무당파에 빙의해 속을 달래 보자....
"안 되겠습니다, 어르신!"
결국 몸을 돌리는 그였다. 처진 볼살 가죽이 이끌렸다.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회수해 오겠나이다. 가는 김에 3억의 약속도 물리고요! 그 발칙한 날강도 새끼!"
서풍개가 어깨를 잡아채며 제지했다.
"어허, 이 사람."
"하지만 어르신...!"
"난 괜찮네."
제가!
오만 명의 개방도가 안 괜찮다고요!
대협이 암만 육결이시더라도 그렇지.
만방에 깔린 개방도들의 생사여탈권을 그렇게 홀라당 넘기셔도 되는 건가요, 예?!
'이리도 무심하셨나이까!'
언제부터 우리 개방이 X소 식으로 굴러가기 시작했소, 어르신!
"끄으으응."
울분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다. 그러자 서풍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유를 설명해 달라는 눈이로군."
"부탁드립니다...."
서풍개가 짐짓 턱수염을 긁적거렸다.
"자네가 피부로 겪었으니 나보다 잘 알겠지. 그자가 [기척 차단]을 해제하니 분타주인 자네가 기에 눌려서 마음이 꺾이지 않았나."
"...."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이태백이 기세를 바꾸자마자 깨갱 소리를 낸 당사자가 바로 진소방이었으므로.
'내가 이토록 배알이 뒤틀리는 까닭도.'
어쩌면 당시의 무기력함과 쪽팔림이 촉발한 알량한 자존심 탓일지 모른다.
그때를 떠올리니 진소방은 입술이 바싹바싹 탔다. 당시 같은 그런 기분은....
'십익 중 하나이신 용두방주 님을 만났을 때 이후론 처음이었다.'
개방의 방주 용두방주, 거존.
그분께선 삼재칠존(三災七存)으로 구성된 십익의 일원이시며 개방의 전설이시다.
문득 거존을 알현할 적이 떠오른다.
그의 전유적인 존재감에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었다. 그럼에도 이성을 붙들었다.
'소개를 주선했던 어르신도 버틴 것만으로도 장하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지.'
한도까지 고평가해 줘도 이태백이 거존보다 약자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어째서.
'기세만으로 마음을 꺾어 버리다니.'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놈이 지니고 태어난 자질.
'패왕으로서의 잠재력이 거존님 이상이라는 뜻!'
하늘 위의 하늘.
"천외천(天外天)."
진소방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정녕 우주의 사랑을 독식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과하다.
가도 너무 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 번 심어진 의혹은 쉬이 씻기지 않는다. 세상엔 간혹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고작 인간이 우주의 의지를 재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단적인 예시가 당금에 진소방과 같은 도시에 발 붙이고 살고 있다.
루카켄 마탑의 주인.
삼재이자 고금제일마.
'천마.'
순간이었다.
"분타주."
심란함을 읽었는지 서풍개가 진소방의 등을 쓸어 주었다.
"죽상 짓지 않아도 되네."
따스하다. 현기가 묻어나는 손길이다.
"어르신."
마음이 편안해진 진소방은 부드럽게 웃었다. 코딱지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허허. 그런 표정 짓지 말래도."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내가 진소방, 자네였어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걸세."
"하지만, 법개 어르신께선-."
"무슨 말인지 아네. 자네가 맞아. 나였다면 정신이 무너지거나 하진 않았겠지만 나 역시 분명 당황하긴 했을 거다, 이 말일세."
서풍개가 시선을 돌린다. 중원과는 다른 지평선. 들쑥날쑥한 마천루의 향연이었다.
"중원이 좁은 것 같아 거존께서 이 삭막한 도시로 이전을 명하셨건만. 바다라고 생각했던 이곳마저 호수(Lake)에 불과했구나."
"그렇다면 풍개 어르신께서 협전을 선뜻 주신 건 투자였습니까?"
"그것도 있지만, 전부는 아니네."
"하면."
"얼마 전에 뇌옥에서 사형수가 간수들을 전부 죽이고 탈옥했지만, 뉴스에선 다르게 보도했다는 사실. 곧 청의파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오의파의 정보력은 레이크 시티 제일이다. 거지들의 정보 수집 능력은 중원 시절부터 유서가 깊었다. 최근 레지스탕스의 8대대가 제법 바짝 쫓아왔지만, 여전히 그들만 못한 게 현실.
"예. 현장 사진 몇 개를 봤는데 아주 끔찍했었습니다… 허억!"
진소방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서, 설마?"
"들리는 말로 '그 사형수'는 흑발과 흑안에 미려한 외모를 가진 청년이라고 하더군."
"허, 허허."
"누군가 딱 떠오르지 않나?"
"...."
"시에스타를 시작으로 메가코프들이 앞다투어 사형수의 행방을 쫓는다더군. 언제나 그렇듯 일선에 나서지 않고 시 정부를 앞장세워서 말이야. 관이 포쾌를 내세우듯."
"어째서입니까?"
"파악 중이네."
서풍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이어 이 이야기의 핵심을 짚었다.
"메가코프가 작심하면 한 달도 채 안 돼서 찾아낼 걸세."
"하여 바람막이를 자처하신 겁니까? 그놈은 사형수입니다. 죄목이 어떨 줄 알-."
"죄목이 어떻든 메가코프만 하겠나. 그리고 소방이, 자네도 많이 물러졌군. 강호인의 기본 소양은 비정함임을 잊지는 않았겠지. 중원에서 이태백 정도는 흑도 축에도 못 껴."
"...."
"지금이야 정마불가침 때문에 마교나 메가코프가 가만있겠지만. 모름지기 불가침이란 힘의 균형이 맞아야 하는 법일세. 자네가 보기에 작금의 정파 세력이, 메가코프는 고사하고, 마탑의 깜냥이나 될 성싶어 보이던가? 아니.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보네."
"...."
"나는 이태백이 앞으로 우리의 희망이 될 거라 보네. 전대미문의 후기지수인 셈이지. 현재는 덜 영글었지만, 언젠간 만개하리라 보네. 그러니 그전까지 내 지켜볼 생각이네."
진소방이 긴장한 얼굴로 묻는다.
"설혹 그자가 마인이 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리되면 내 직접 수급을 거둘 걸세."
그길로 서풍개는 빙글 몸을 돌렸다. 이후로는 병렬로 말없이 발걸음만 옮겼다.
저벅, 저벅.
두 개방도 사이에 적막이 깔린다.
막 여명이 가신 댓바람이라 어스름한 정적이었다.
절그럭.
잠시 후, 진소방이 팔소매를 툭툭 걷어 내곤 법개를 향해 포권했다. 주먹 쥔 손이 사이버네틱 의체였다.
"과연 현인이십니다, 대인. 저 진소방이가 미력하나마 그 뜻에 함께하겠나이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여튼 수고하게."
"수고라 하시면...."
아, 맞다. 3억.
서풍개가 친절히 부연했다.
"단말기도 제공하기로 했잖은가."
상기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 허허, 허하하하하하하하하하핳!
* * *
그 시각.
은코 바에선 이태백이 예의 자세로 누워 있었다. 엄지로는 협전을 높게 튕긴다.
핑그르르르.
천장에 닿을 듯 고점을 찍은 협전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그 짓을 반복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너무 과한 대가는 의심하고 봐야지."
배상으로 협전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진소방을 몰아넣으면서도 서풍개에게 시선을 계속 던졌다.
핑그르르르.
이태백은 회전하는 협전을 응시했다.
정말 후하게 쳐줘도 일품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최상인 삼품 협전이 손에 들어왔다.
착!
일품 협전을 주는 대가로 돈을 뱉으라고 했어도 흔쾌히 그리했을 거다.
하지만 서풍개의 묘한 반응에 3억도 꿀꺽 하자로 태세를 전환했다.
"전기의자 이후로 일이 술술 풀린단 말이지."
운이 수상하리만치 좋으니 찝찝함이 가시지를 않는다. 이럴 때마다 혼돈 여신의 편애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메아리를 만든다.
경마 건도 그렇고, 기묘한 행운의 연속. 사건들로 말미암아 혼돈 여신을 유력한 의심 군으로 상정했다.
"릴리스 교단 수색을 앞당겨야겠는걸."
메인 퀘스트를 설정했다. 협전이 천장에 부딪혔다가 보다 빠르게 낙하했다.
핑그르르르.
"앞면."
착!
이태백은 곧장 손을 펼쳐 보았고 이내 실없이 웃고 말았다. 이게 뭐 하는 뻘짓인지.
"엽전에 앞뒷면이 어딨겠어."
이태백은 바지 주머니에 협전을 넣고서 지퍼를 끝까지 채웠다.
레지스탕스에서 제공한 특수 바지라 그런지 튼튼한 지퍼가 이중삼중으로 달렸다.
이부자리를 정돈한 그는 곧 잠에 들었다. 뇌 주름이 펴질 것 같은 단잠이었다.
31구 분타주, 진소방이 부하를 시켜 3억과 단말기를 보낸 건 이튿날 정오였다.
28화 사이코패스 아닙니다 (5)
똑똑똑똑.
이태백은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었다. 리볼버 파이톤은 허리춤에 꽂힌 채였다.
"안녕하십니까, 이태백 님이시죠?"
남자가 한 손에 더플 백을 들고 서 있었다. 실눈이다. 마스크로 얼굴 하관도 덮었다. 아직 말을 섞어 보기 전이지만 앞뒤 꽉 막힌 타입의 사람일 것 같다.
"분타주님께서 파견해서 온...."
진소방의 부하가 말을 쏟아 냈다.
무슨 무슨 '개'로 끝나는 개방도식 이름이라 애초부터 머리에서 과감히 지웠다.
비슷한 이름이 많으면 뇌리에서 캐릭터가 꼬인다.
이태백이 시큰둥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입력값을 있는 대로 출력하는 것처럼 사무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이래서 보낸 거군. 그나마 덜 휘둘릴 부류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뻔하다.
실눈이 팔을 뻗어 가방을 건넸다.
"여기, 이 가방에 3억이 들어 있습니다."
받자마자 더플 백을 잡은 이태백의 손이 덜컥하고 내려갔다. 깽값으로 3억.
몸으로 땜빵한 보람이 있군.
'다친 건 없지만.'
노동의 가치가 낮아지는 느낌도 든다. 씨바, 내 이십 대 청춘은 뭐였단 말인가.
"아, 그리고."
한창 회한이 젖어 있는 가운데 실눈은 뒤로 손을 가져갔다.
이태백의 손도 덩달아 내려갔다. 바로 칼을 뽑을 수 있게. 레이크 시티에서 만성적인 의심은 필수 덕목 중 하나다.
하나 실눈이 뒷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보자 이태백의 손이 정지했다. 단말기였다.
"이것도 전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실눈이 단말기를 내밀며 말했다.
"조작법은 아실 거라 생각하고 설명 안 드리겠습니다."
이태백은 손안에서 단말기를 이리저리 굴려 보며 물성을 피부로 익혀 보았다.
단말기의 디자인은 스마트폰과 비슷했다.
실제로 조작법도 지구의 스마트폰과 얼추 같다. 개발자였던 이태백이 일부러 게이머 편의를 위해 익숙한 디자인을 채용했다.
"거기에 제 전화번호를 넣어 놨습니다. 분타주님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저를 통해서 전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눈은 뒷걸음질로 문에서 멀어졌다. 정마불가침 때문에라도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참고로, 단말기 명의는 '이무기'로 분타주님이 임의로 정했습니다. 단말기를 의뢰하신 데서 본명을 숨기고 싶어 하시는 듯한데, 부디 제 추측이 맞으면 좋겠군요."
"…왜 하필 이무기지...?"
국어사전을 펼쳐서 아무 낱말이나 찍어도 이무기보단 나을 것 같은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타주님께 따로 여쭤볼까요?"
"됐어."
이걸로 꼬투리 잡고 더 뜯어내야겠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시면 가능한 한 들어드리라는 분타주님의 첨언도 있었습니다."
"필요한 거라."
이태백은 괜스레 단말기와 가방끈을 번갈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실눈을 보자 크게 움찔했다.
"혹시 릴리스 교단이라고 들어 봤나?"
"으음, 죄송합니다. 기억에 없군요."
"그렇군."
실눈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그럼 저는 이만."
"아직 필요한 거 말 안 했는데."
"…예? 그 질문이 필요한 거 아니었습니까?"
실눈은 당황했다. 눈두덩이 사이로 동공이 살짝이나마 커진 게 보일 정도였다.
"대답이 됐으면 모르겠는데, 아는 게 없다며. 그럼 다른 걸 내놔야지."
"그그, 그게 뭔."
실눈은 진소방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 자식 아주 날강도다. 뻔뻔하기는 사파에다가 심계는 마교 같은 악랄한 놈이야.
그 말이 이 뜻이었나? 예의상 한 말인데 이 인간은 무슨 맡겨 놓은 듯이 말한다.
"마스크, 좋아 보인다."
"예?"
"좋아 보인다고, 마스크."
"저… 그게 이건. 유압 실린더로 제작된 특제 마스크라서 드리고 싶어도...."
"와, 유압 실린더였어? 그럼 알아서 얼굴 유관에 딱 맞게 조정되는 거잖아. 나한테도 잘 맞겠네. 네 생각은 어때?"
"…인물이 훤하셔서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공치사에 이태백이 해맑게 웃었다.
"고마워."
남자는 텅 빈 표정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옹이구멍 같은 실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눈물이 맨얼굴을 서럽게 타고 흘렀다.
* * *
지면 아래에는 맨틀이 있듯이, 하층 구역 밑에는 최하층 구역이 존재한다.
시가지라 할 수 있는 32구부터 40구까지. 31구 이하의 구를 그렇게들 불렀다.
인생이 파탄 난 사람들과 갱단이 범람하는 우범 지대. 레이크 시티의 심연 그 자체.
이웃 주민이 갱이나, 매춘부, 죄인인 비일상이 그곳에선 일상이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험한 곳이었다.
출시 예정이었던 레이컨스에서는 구현하지 못한 구역이었다. 심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는 훗날 DLC로 낼 계획이어서였다.
치이익.
마스크를 입가에 갖다 댔다. 그러자 필터에서 증기를 배출하며 하관의 면적에 맞게끔 크기를 보정했다.
이태백은 착용 상태를 점검했다.
과연 청의파가 쓰는 물건답게 품질이 좋다. 피부와 마스크의 밀착도도 자연스러웠다.
"최하층 구역에 가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그렇다.
최하층 구역. 더 정확히는 35구.
이태백은 그 무법의 온상지로 향할 작정이었다. 릴리스 교단의 전수 조사 차원에서.
'집주인이 언제 퇴원할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고 방구석에서 넋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곳은 범죄의 요람이기도 하지만 정보의 메카이기도 했다. 특히 세간에 떠돌지 않는 소문은 대개 최하층 구역에서 맴돈다.
'개방마저 들어 본 적 없다면.'
최하층 구역뿐이었다. 상세를 살피기 위해선 결국 거기에 들러 봐야 했다.
"발품 좀 팔면 뭐라도 알아내겠지."
채비를 마친 이태백은 가게를 나왔다.
회백색의 도시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라 블레이드를 들고 다니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단말기 GPS가 가리키는 길을 따라 이동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빴다.
'이게 문명 사회의 극단의 모습이군.'
노면전차를 이용했다. 그마저도 34구까지였고 이후로는 철로가 끊겨 걸어가야 했다.
민생 인프라를 개나 줘 버린 최하층 구역답달까. 이태백은 짧게 혀를 차며 노면 전차에서 내렸다.
의외로 거리는 한산했다. 밤에 화려한 장소여서 그렇다. 다만, 난립한 건물 사이사이로 유독 뒷골목이 많았다.
건물이 만든 그림자에서 무법자들이 안광을 번뜩이며 이태백을 노려봤다. 사냥감을 노리는 눈빛이었다. 그들 발 어귀로 시체도 여럿 보였다. 저들의 희생양일 터다.
이태백의 걸음에는 망설임은 없었다. 그새 담력이 늘었는지 살기등등한 눈초리를 받고도 끄떡없었다.
오히려 저들이 시비를 걸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그였다.
하지만 그의 위풍당당한 기세에 무법자들은 살벌한 안광을 거두고 사라졌다.
이태백은 짜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발길은 어느새 판자촌에 다다라 있었다.
짓다 만 건물은 양반이었다. 대부분이 철근만 남아서 스산한 기운을 발산했다.
"여기서부턴 GPS도 먹통이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단말기를 넣었다.
"어이- 거기!"
날카로운 시비조였다. 고개를 돌려 보니 괴한 세 명이 골목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 있었다. 더불어 피식피식 비소를 흘리며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불량배의 모습에 이태백은 허, 하고 웃고 말았다.
"형님, 저 새끼 웃는데요?"
"냅 둬, 겁에 질려서 저러는 거지."
괴한 원, 투, 쓰리가 이죽거렸다.
"저 새끼 근데 속눈썹 엄청 긴데요? 여자 아닙니까?"
"야, 이 빙신아. 가슴이 저 모양인데 여자겠냐?"
쉭쉭 새는 발음, 눈에 익은 문신.
일전의 트라이어드 갱의 그것이었다.
"그게 뭔 상관입니까! 전 가능입니다."
"나도 가능."
"만장일치 가능."
잔당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하기야, 밀거래에 갱 전체를 데리고 가진 않았겠지.
상념에서 벗어난 이태백은 그들에게 다가갔다. 괴한들이 경박스럽게 골반을 튕겼다.
"오우~ 알아서 걸어와 주는데? 잘 생각했어. 괜히 저항해 봤자야."
"우리 트라이어드거든? 들어는 봤지?"
"이 형아들이 상냥하게 대해 줄게, 낄낄."
우산을 오므리고 개패 버튼을 눌렀다.
[운영자가 불릿 타임을 발동합니다.]
[제한 시간: ●●●●●●●●●●]
* * *
[※버그를 핫 픽스했습니다.※]
[※기본 경험치를 얻습니다.※]
[※추가 경험치를 얻습니다.※]
[※상세 내용은… (더 보기)※]
알림창을 끈 이태백이 팔을 움직였다.
스걱.
두개골을 침범한 칼날이 뇌를 헤집고 나왔다. 갱 하나가 동태눈을 끌며 쓰러진다.
다른 갱이 소리를 질렀다.
"사, 살려 줘... 아니, 살려 주-!"
그러면서 뒤로 숨긴 손을 슬금슬금 꼬리뼈로 가져갔다.
"주-욱여 버리겠다!"
이태백의 칼날이 점으로 찔러 갔다.
촤악!
돌바닥의 틈새를 따라 핏길이 생겨났다. 철퍽, 새빨간 소리.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살려 주욱여 버리겠다는 뭔 개소리야."
이태백은 기계적인 손길로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칼날에 묻은 피를 훔쳤다.
그러곤 보여 주듯이 천천히 납도했다. 기나긴 검울림이 멎고 나서야 걸음을 뗐다.
'갱은 어차피 도망치기엔 그른 상태다.'
그러니 공포감을 조성해 심문 효과를 최대로 끌어 낸다는 게 이태백의 생각이다.
'이 행동도 일반인이 할 법한 발상은 아니긴 해.'
어쨌든 그 의도는 적중했다.
갱은 동료들이 눈앞에서 장난감처럼 죽는 꼴을 보자 대경실색했다. 그의 몸은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네 동료잖아. 대신 설명이라도 해 봐."
이태백이 눈을 낮게 뜨며 말을 걸었다.
"워, 원래도 병신 같은 놈이었습니다!"
"병신은 병신이랑 같이 다니는 법인데."
"…어우우우, 고놈, 그게 특히나, 아주아주 잔인한 놈이었습니다. 조금 전의 패악질도 귀하가 공놀이 중이신 놈의 대가리에서 나왔습니다. 저는 그저...."
태백은 조용했다.
한 걸음 내디딜 뿐.
"오, 오오, 오지 마!"
그저 또 한 걸음.
"오, 오지 말라고!"
갱은 팔을 뻗었다.
근데 곧 후회했다.
이태백이 그 손목을 꼬듯이 낚았다.
"이 새끼들은 뭐 이리 학습 능력이 떨어져. 움찔하다 막 죽은 친구는 그새 잊었냐?"
파열음. 갱의 팔이 행주처럼 쫙 짜지며 뼈가 팔꿈치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순간 갱의 육안에 불똥이 튀었다.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린 손에서 단검이 흘러나왔다.
"하이옌 생전에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았냐? 하는 꼬라지가 어째 다 거기서 거기야."
"으아아, 으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악!"
"상상력을 발휘하면 칭찬이라도 하지."
이태백은 우산을 바닥 틈에 박아 넣고 주먹을 쥐었다. 죽으면 안 되니까. 살살.
뻐억!
머리통이 튕겨 젖혀졌다. 의식을 잃을 뻔한 차, 이태백이 갱의 멱살을 당겼다.
"이놈의 버그 새끼들은."
갱의 얼굴이 제자리로 되돌아온 순간.
"없애도 없애도 바퀴벌레같이 튀어나오더라!"
주먹이 한 번 더 뻗어지며 코를 함몰시켰다. 짧게 치고 빠지는 주먹질이 잇따랐다.
빠각! 빠각! 빠각!
갱의 멱살을 놓은 이태백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격의 여파로 주먹 뼈가 상했군.
[신앙]을 버프하자 곧장 회복됐다.
손을 쥐락펴락해도 아프지 않았다.
이태백은 그림자 바깥의 영역 양지로 눈길을 돌렸다. 행인들이 애써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며 발만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레이크 시티에서도 최하층 구역이 유독 이럴 거다. 골목 밖에서는 어린 부랑자들이 빼꼼 고개를 내민 채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태백이 떠나면 저들은 쥐 떼처럼 시체를 뒤져서 은 이빨 하나까지 모조리 챙겨 가겠지.
하지만 막을 생각은 없다.
저들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저 갱단 꿈나무들은 노획품들을 팔아 일주일을 버틴다. 본래 최첨단의 이면은 원시림과 하등 다를 바 없다. 현대의 위선을 한 꺼풀 벗겨 낸 민낯이야말로 디스토피아다.
[제한 시간: ○○○○○○○○○]
[불릿타임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원하는 걸! 워, 원하는 걸 말해 주십쇼!"
갱은 남은 손으로 코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손가락 마디 사이로 코피가 콸콸 샜다.
"릴리스."
다짜고짜 꺼낸 본론에 갱은 얼을 탔다.
그러자 이태백은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예로부터 기억력 증진엔 매만 한 게 없지. 염라대왕 앞에서는 어버버하지 마라."
"기, 기억났습니다! 그 홍등가 새끼들!"
"홍등가?"
이태백이 머리를 갸웃했다.
"예에! 한 달 전인가. 32구에 자칭 릴리스를 모시는 신자들이라는 놈들이 왔습죠."
"계속."
"와서 늙은 매춘부 상대로는 구휼미를, 손님으로 온 사람들한테는 무료로 콘돔으로 뿌렸습니다. 아, 섹X토이 소독제도 같이요!"
홍등가, 매춘부, 콘돔, 섹X토이.
게임 장르에 충실한 라인업이군.
뿌듯하면서도 정신이 혼미하다.
이래서 혼란 여신의 교단인가?
"안내해."
"살려 주시는 겁니까?"
"한 대 더 맞으면 눈알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올 것 같은데, 괜찮겠어?"
"바로 지름길로 안내하겠… 으윽-."
갱은 신음하면서도 쩔뚝쩔뚝 다리를 옮겼다.
"엄살 부리지 마. 다친 건 팔인데 왜 다리를 쩔뚝거려. 다리 불구로 만들어 달라는 시그널이냐?"
이놈은 기계(Cyber)다.
"…다리에 쥐가 나서… 죄송합니다."
"지랄하네. 길고양이 이렇게 많은데."
또 싸이코(Psychos)다.
둘이 합쳐져서.
사이버 사이코.
"안 웃어?"
이태백이 우산으로 갱의 등골을 찔러 종용했다. 갱이 비굴한 미소를 만들었다.
"하,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찍! 찍! 이리 온 고양이들아~ 내 쥐 좀 잡아 주련!"
푹-.
"으윽!"
"재미없다."
진짜 미친놈인가? 곱상한 눈매랑 별개로 정신은 곱게 미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가자."
"…예."
갱이 걸을 때마다 팔꿈치로 떨어진 핏물이 이정표처럼 바닥에 시뻘건 점을 찍었다.
"흑흑...."
갱이 구슬픈 어조로 중얼거렸다.
"현생은… 몰라도 전생에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길래...."
"그러니까 말이다."
이태백도 한탄에 동참했다.
"전생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개고생을 한다냐."
"아무리 봐도 즐기시는 것 같은데, 요."
"약빨이 다시 도는구나. 쥐가 말하네."
"찍! 찍!"
그렇게 두 사람은 이태백의 목적지(?)인 홍등가로 향했다.
야오오오옹.
길고양이들이 머리를 추켜올리며 그들을 배웅했다. 어린 부랑자들이 골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건 동시였다.
그들은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우악스레 몸을 날렸다. 갱들의 시체를 향해서.
"XXXX!"
저렴한 욕설이 빗소리에 실려 왔다.
"...."
시선만 뒤돌려 그 광경을 일별했다. 싱숭생숭하다.
그는 그길로 갱을 앞장세워 도시의 심연 안으로 스며들었다.
'X같은 세상을 만들었군.'
가는 내내 입안이 쓰디썼다.
29화 내가 믿는 건 오직 (1)
골목길의 더 깊숙한 곳으로 진입했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동혈처럼 보였던 뒷골목의 끝에는 더 화려한 세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바깥이 한산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네.
감탄만 나오는 풍경이다. 태양을 대신해 홍루가 거리의 소실점까지 줄지어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홍등가구나."
"형님도 참. 처음 온 척하시긴."
"넌 오늘이 여기 마지막이겠네."
"...."
갱이 제대로 안내해 준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바로 왔다. 혹여 살려 주지 않을까 싶어서일 터다.
이태백은 뒤통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단칼에 보내 줘야겠군.'
홍등가는 인파로 왁자지껄했다. 장정 다섯이 걸으면 꽉 차는 너비의 거리인데, 수용 한계를 넘어서 몸이 짜부가 될 지경이었다.
구색만 갖춘 판자 건물 내부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몸에 열을 내는 턱에 지진이라도 난 듯 판자 건물이 휘청거렸다. 대기용으로 비치된 의자가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 ♥! ♥♥-!
거리로 나온 여성들은 몸을 빌빌 꼬며 온갖 교태를 부렸다.
"씨발, 저거."
무당파 도사를 발견했다. 눈을 비비고 봐도 장삼의에 박힌 태극 문양은 건재하다.
파계승은 들어 봤는데, 파계 도사는 처음이군. 갱이 얼른 말을 보탰다.
"손님 중에 삼 할이 강호인일 겁니다."
"왜 하필 강호인이지?"
"적당히 돈이 많잖습니까. 상층의 업소는 시 정부 고위 관료나 메가코프 간부가 아니고서야 못 가거든요."
"…어이가 없네."
이태백이 옅게 탄식했다.
"무당파 도사야 말할 것도 없고 빡빡이도 왕왕 올 정돕니다. 과반은 갱단일 거구요."
"개방은."
"거의 없습니다. 돈이 없으니까요. 개방이 그나마 정파다운 놈들입죠."
"갱은 포주 역할인가?"
"그렇슴다. 가게마다 뒤를 봐주는 갱이 다릅니다요. 10대 갱. 아차, 우리 갱은 궤멸 됐지. 9대 갱이 나눠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상층은 시 정부, 하층은 강호 세력, 최하층은 갱 연합이 관할하고 있다.
메가코프는 예외다.
그들은 레이크 시티 전체의 제도와 법을 사유화했다. 요컨대 규격 외란 것이다.
아무튼.
갱 연합의 입김은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앞선 세력들에 못지않았다.
연합의 수장으로 있는 인물부터가 게임 중반부의 중간 보스로 등판하는 강자다.
10익이나, 레지스탕스의 총대장만은 못하나 최하층의 패자를 자처할 체급은 된다.
새빨간 바이크가 트레이드마크인 폭주족 스타일의 보스다. 제법 공들여 조형했다.
여담으로 바이크의 별칭은 '적토마'로, 시속 400km까지 밟을 수 있는 굉장한 녀석이다. 게임에서는 플레이타임을 대폭 줄여 버릴까 봐 보스를 죽이면 같이 터지게끔 설계했었는데.
'게임이 현실이 되어 버린 나라면, 어떻게 내 걸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되다 만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니 자가용이 절실해진다.
하물며 적토마면 더할 나위 없지. 출력 가능한 시속만 치면 SSS급이었다.
불현듯 어린 시절 뭇 SF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스친다.
후미등을 끌면서 네온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 그게 낭만이지. 공감 못 하겠으면 냉큼 거시기를 떼자.
'끝내주는군.'
이건 흥분된다. 홍등가의 관능적인 풍경은 알 바 아니다.
이런 외골수적 성격 탓에 서 팀장님과 팀원들이 그를 볼 때마다 학을 뗐었더랬다.
- 서 팀장님, 이태백 저 사람, 연애는 할 수 있을까요?
- 엄청나게 실례되는 말이네요.
- 네?
- 이 대리와 연애하게 될 미상의 대상한테 실례되는 말이라구요.
- 아하, 역시 팀장님!
이런 적도 있었지.
- 이 대리는 연애 안 해요?
캔 커피로 뺨을 치며 말을 걸던 서 팀장님에게 이태백은 이렇게 반문했었다.
'연애해야 하나요? 사람들은 연애가 필수라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돈 낭비, 시간 낭비죠. 전 그 시간에 일이나 자기 계발을 하는 게 낫다는 주의입니다.'
- 교과서적인 모쏠의 설명 잘 들었어요.
'....'
- 과외비는 커피로 퉁 쳐요. 그럼 수고~
잠시간 이태백이 딴생각하는 동안 길라잡이 갱은 9대 갱 연합에 대해 열심히 떠든다.
"말재주 좋네."
그래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갱이 헤헤 얼빠지게 웃자 팔라 블레이드의 끝으로 옆구리를 쿡 깊게 찔렀다.
"그 혀로 아까 나보고 '가능'이라고 한 거지?"
"그그, 그건!"
혀가 길어지기 전에 일축했다.
"저기 어두운 건물까지 가서 좌로 꺾어."
"예...."
이태백은 걸으면서 면면을 관찰했다.
협상에 실패한 손님들도 더러 보였다. 말마따나 대부분이 비강호인이었다.
저벅, 저벅.
여인이 미혹하는 음성이 보이지 않는 손길이 되어 이태백의 간담을 간질였다. 당장에라도 마스크를 벗어서 벅벅 긁고 싶었다.
'이 얼굴로 벗으면 진짜 X된다.'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니까. 주관이 아니라 엄연히 남의 입에서 나온 평가였다.
'거울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지.'
진소방의 부하에게 마스크를 빌린 이유도 너무 튀는 외모여서다. 얼굴이 이쯤 되면 여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다.
게다가 누구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피차 민망해지잖아.
"아이잉! 오빠아~ 다 보잖아아아."
"울 애긔 오늘 씻은 건 아니겠지?"
웃음과 교성이 이곳저곳에서 산개한다.
사람들은 빈사 상태인 갱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인간의 목숨보다 침대 속 사정이 훨씬 비싼 세계였다.
"이 동네는 DLC로도 못 내겠는데."
"DLC가 뭡니까, 형님?"
"닥치고 걸어."
이태백이 차갑게 말을 쳐냈다.
"내가 언제부터 형님이야. 네 형님들은 지금 염라대왕의 심판대에 있는 놈이잖아."
"흑으윽… 저승이 어딨다고."
"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그니까 계속 걸어라. 저기 사람 한 명 없는 곳까지."
야릇하면서 눅눅한 체취가 진해질수록 갱의 눈물은 굵직해져만 갔다. 이승을 하직할 순간이 정말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형님들, 어찌 아우만 두고 가셨소!'
그때 빗줄기가 갱의 귀에 내려앉았다.
'곧 상봉할 테니 슬퍼하지 말거라.'
먼저 떠난 형들이 악마처럼 웃었다.
* * *
실눈이 사무실로 복귀했다.
"분타주님… 돌아왔습니다."
"고생 많았다. 너, 마스크는."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아, 아, 아...."
실눈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대략적인 사정을 눈치챈 진소방이 침음했다.
그 날강도 녀석이 기어코....
밥 먹듯 남의 물건을 탐하다니!
'갈(喝)!!!'
고질적으로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이, 아주 그냥 하늘이 내린 탐욕의 화신이다.
이태백 그놈 그거, 강도질하다가 사형수 된 거 아니야?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실눈은 홍등가에서 동정이라도 뺏기고 온 숫총각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침울한 얼굴에 진소방은 두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지만, 그것도 얼마간이었다.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어쨌거나 이태백을 물심양면 지원하겠다고 서풍개와 약조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따질 용기가 좀처럼 안 난다.
"마스크값 청구해. 더 좋은 걸로 사 줄게."
진소방이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분타주님."
실눈이 몇 번이고 말을 고르는 듯 입을 우물거리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뗐다.
"하나 질문이 있습니다."
"안 하면 안 될까?"
"네?"
"아니다, 농담이야."
농담 아닌 거 같은데. 그럼에도 실눈은 안력에 힘주고 꿋꿋하게 기치를 이어 갔다.
"다름이 아니라 어째서 이태백 님한테 '이무기'라는 명의로 단말기를 드린 겁니까?"
"아, 그거."
진소방이 입을 꾹 다문다.
서풍개 어르신이 비밀스레 전한 비사다. 그걸 함부로 누설해도 될는지 고민이 된다.
'연락책이니 전모를 알긴 해야겠지.'
더군다나 가장 신뢰하는 부하였다.
질타를 무릎 쓰고 청의파로 전향했을 적에도 군말 없이 자신을 따라와 줬다.
얍삽한 인상 때문에 오해를 사긴 하지만 의리 하나는 넘치는 녀석이었다.
살짝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진소방이 다시 눈을 떴다. 그가 말했다.
"걔가 이번에 뇌옥에서 탈옥한 사형수다."
"...!"
실눈의 눈이 열렸다. 맨날 눈두덩이에 파묻혀 있어서 몰랐는데 저리도 컸던 말인가.
"서풍개 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길 메가코프에서 그자를 찾고 있다더라, 시정부를 앞세워서."
"서, 서풍개 어르신께서요? 이태백 그 날강…, 아니 그자를 아신단 말입니까?"
거존이 개방의 전설이라면, 서풍개는 개방의 영웅이다.
십 년 전의 '그 사건'으로 삼 결인 분타주에서 육 결 법개로 세 단계나 뛰었다. 그 일화는 개방 사이에서 신화처럼 회자된다.
"내가 날강도랑 엮이게 된 것도 어르신을 통해서야. 부탁하시더라. 뒤를 좀 봐 달라고."
"…그거랑 이태백 님의 명의가 이무기인 거랑 무슨 관계가...?"
"너, 라한켈 소장 알지?"
"모를 리가 있나요. 닌자 부족의 두령이었잖습니까. 지금은 시 정부의 주구이고."
"정확히는 메가코프의 앞잡이지."
진소방은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올려 받쳤다. 실눈을 바라보는 눈빛이 가라앉는다.
"요새 하층 구역을 들쑤시고 다닌다더라. MK5 파이톤 쓰는 놈 못 봤냐고."
"파이톤."
…파이톤의 뜻은.
진소방이 덧붙였다.
"비단뱀."
"그래서 이무기군요. 뱀이며 성은 '이' 씨니까. 저는 다른 뜻으로 생각했습니다."
"뭔 의미로 생각했는데."
실눈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0익마다 각자 상징하는 동물이 있잖습니까.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자축인묘오미신유술해...."
토끼, 양, 닭. 묘미유가 삼재.
남은 일곱 동물이 칠존이다.
"으음."
"그래서 혹시나 했습니다."
"글세."
진소방은 깍지를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또 모르지."
* * *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이태백과 갱은 홍등가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거기서 한 번 더 샛길로 빠지자 막다른 길이 나왔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퍽! 꿰엑!
죽상인 갱을 발로 밀어 넣은 이태백은 후방을 살피고 뒤따랐다. 그들의 인영이 어둠에 잠겼다.
두 사람은 홍등가에서 유리됐다. 사람 죽이기에 이보다 제격인 장소가 있을까 싶었다.
'씨발.'
그쯤 되니 갱도 깨달았다.
쓰임이 다한 자신의 앞에는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 갱은 철렁이는 가슴을 어떻게든 추슬렀다.
호굴로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했다. 막다른 길이라도 기지를 발휘하면 이 곱상한 사이코패스한테서 살아남을 수 있다.
갱은 하나 있는 주먹을 쥐었다. 꼬챙이가 살가죽을 꿰뚫고 나왔다. 술김에 시술한 싸구려 비수였는데 마침 써먹을 때가 왔다.
"아이고오오오오, 제가 죄송합니다. 정말이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형님을 보고 가능이라뇨. 그때 제가 불가능을 외쳤어야 하는 건데!"
갱이 무릎 꿇고는 무턱대고 목숨을 구걸했다. 고글을 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어차피 말로 구슬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건 몸으로 맞아 가며 배웠다. 차라리 비굴한 척 연기하며 때를 노리는 게 좋았다.
스릉.
이태백은 칼날을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네 형님들은 왜 죽은 거 같냐."
"그, 그그, 그건."
갱의 동공이 번들거렸다.
"너를 먼저 죽이지 않아서다아아!"
갱이 세찬 기합을 지르며 무릎을 폈다.
손에 돋은 가시로 목젖을 쪼갤 기세로 달려들었다. 발목 힘으로 밀어 치는 추진력!
그러나.
'응?'
이태백의 어깨가 흐느적거린다.
칼날이 떨어지는 빗방울을 쪼갠다. 빛살이 목을 스치며 갱의 시야를 거꾸러뜨렸다.
텅, 텅.
머리가 몇 번인가 공허하게 튕기더니, 데굴데굴 굴러 막다른 길에서 부딪쳤다.
"원래라면 불구 정도로 끝내려 했는데."
이태백은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갱이 꽉 쥔 주먹이 꽃봉오리처럼 열리며 비수가 드러났다.
"어쩌겠냐. 너희의 태생이 버그인 것을."
[8,764의 경험치(EXP)를 획득합니다.]
[태백의 레벨이 2에서 4로 상승합니다.]
[이름: 이태백]
Level: 5(↑1)
생명: 16 정신: 19 근력: 13
민첩: 20 마력: 17 신앙: 15
[운영자 이태백이 버그 픽스를 성공.]
[경험치 보너스 50% 이벤트가 발생.]
[가장 낮은 스탯 두 개에 적용됩니다.]
['근력'이 13에서 15로 상승합니다.]
['신앙'이 15에서 17로 상승합니다.]
"잔재는 없어서 운영자 포인트는 안 주나 보네."
이태백은 중얼거리며 알림창을 닫았다. 괜히 볼멘소리를 한 거지 기분은 좋다.
운영자 버프 덕에 한 자릿수 레벨임에도 불구하고 전 능력치가 20에 임박했다.
제약을 잘만 활용하면 초인의 등용문인 능력치 30도 노려 봄 직했다.
그러면 9대 갱 보스까지....
는 오만이고, 중소 갱의 보스와 육탄전에서 우세를 점할 정도는 된다. 험하기 짝이 없는 최하층에 막 온 시점이니, 이번 레벨 업은 그 어느 때보다 값어치 있다. 마침 내리는 단비처럼 말이다.
이태백은 도로 우산을 펼쳤다. 손에 묻은 피는 우산 바깥으로 빼서 씻어 냈다.
그건 그렇고, 이런 발 디딜 틈도 없는 도가니탕에서 교단의 신자들을 어떻게 찾지.
인상착의 정돈 듣고 보냈어야 했는데.
"또 구휼미랑 콘돔이랑 섹, 뭐시기는 어떻게 뿌리는 거야? 리어카라도 끌고 다니나."
너무 성급하게 죽였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 참 좋-."
투두!
투두두두두!
아태백이 투덜거리기 무섭게 공기가 갈려 나가는 굉음이 도처에 내리깔렸다.
감정을 고조시키는 소리다. 헬리콥터가 착륙하기 직전의 딱 그거였다.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건물에 있던 자들도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천사들이다!"
이태백도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하늘에서 멈췄다.
등에 윙 슈트를 장착한 괴인들이 홍등가의 상공에서 비행하는 모습. 강철의 날개가 구름을 찢는 장면이 시야에 똑똑이 박혔다.
"설마."
에이, 아니지?
하나, '설마'라는 추임새엔 국룰이 있다.
염병. 예지력만 날이 갈수록 오르는군.
촤르르르륵!
천사를 사칭하는 괴인 무리에게서 흡사 깃털이 흩날리듯 숭한 물건들이 쏟아졌다. 피임 기구, 섹- 뭐시기. 그런 것들.
"허허, 세계관 돌아가는 꼬라지하고는."
릴리스 교단은 등장부터 혼란했다.
30화 내가 믿는 건 오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