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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20-30

20화. 역병신(疫病神) (2)

"역병? 역병에 걸렸다고?"

"그렇대. 게벨 님께서 금줄을 치시는 걸 봤어."

수도원에 들어온 이단심문관이 역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금방 알려졌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게벨이 출입을 막기 위해 금줄을 치고 있었고, 예브하르도 역병 치료를 위한 기도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역병 치료를 위해 기도회를 준비한다는 게 현대인이 듣기에는 개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고, 심지어 가장 유효한 치료법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도원에 역병을 퍼뜨린 상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기도문이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었다.

예브하르도 이 사실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사혈 치료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도사들도 저 나름대로 역병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 그 대비책이라는 것이 마른 허브를 얼굴에 문지른다든가 닭발을 줄에 묶어서 목에 건다든가 하는 행위였지만.

사실 이런 행위 중 태반은 빛의 법전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신심 깊은 수도사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미신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한 가지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머리가 다 죽었다고?"

"예."

이솔데에게 사혈 치료를 하던 예브하르는 당황했다. 지난 며칠 동안 1차로 피를 빼내고, 2차로 다시 또 치료하려고 했는데 거머리가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수도원 지하에는 이런 경우를 대비한 치료용 거머리를 수조에서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머리는 이미 모두 사라지고, 대신 검은색 물만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촉수가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아이작은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사혈을 마신 거머리를 통 안에 넣으니까 밤사이 전부 녹아서 사라졌더군요. 아마 역병 때문 아닐까요? 늑대나 곰도 걸린 병이었으니, 거머리도 걸리지 말란 법은 없잖습니까."

놀랍게도 이 핑계는 통했다. 이 시대 생물학적 상식으로는 거머리는 동물보다 액체에 가까운 무언가였던 것이다. 사실 물통에 든 것은 촉수가 대부분을 먹고 역병을 흡수한 거머리 몇 마리를 갈아서 만든 찌꺼기였다.

['거머리'를 포식하였습니다.]

['포식' 특전으로 흡혈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원치 않았던, 기대도 하지 않았던 포식 특전을 얻기는 했지만 거머리는 빨리 소화되기 때문에 크게 도움 될 것 같지 않았다.

예브하르는 거머리가 모두 죽었다는 말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한겨울에 거머리를 구하러 가기는 어렵고... 직접 피를 뽑아야 하나?"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아이작은 예브하르가 야매 의료 지식으로 정신 나간 짓을 하기 전에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수도원장님, 제가 약간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브하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이냐?"

"예. 사실 제가 예전에 이국의 의서들을 좀 본 적 있습니다. 기본적인 간호와 잡일은 저와 게벨 님이 할 테니, 수도사님들과 원장님은 번잡스러운 것에 신경 쓰시는 대신 기도회에 열중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역할 분담이다.

수도사들이 치료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방해만 된다. 하지만 기도회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니 기도회에만 열중하면 된다.

아이작은 '잡일'에 해당하는 방역과 치료에 열중할 생각이었다.

예브하르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보다는 성자의 손을 한번 잡는 것이 더 치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시대였다. 그리고 기적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는 딱히 그런 믿음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미 역병은 수도사들 사이로도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감염되지 않도록 격리되어 있었고, 심지어 게벨에게도 역병의 증상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솔데를 업고 온 아이작은 역병은커녕 기침 한번 없었다.

아이작의 지식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신의 가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행동을 승낙해 주었다.

"좋다. 우리는 기도에 열중할 테니 믿고 맡기마."

***

아이작은 바로 방역 조치부터 들어갔다.

우선 나름 밀접 접촉자라고 할 수 있는 게벨은 자신의 방에 격리시켰다. 실제로 게벨에게도 역병의 전조증상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였다. 그리고 역병의 핵심 근원지인 이솔데의 옷가지는 모아서 모조리 태워 버렸다.

이단심문관의 옷을 태운다는 것을 수도사들이 염려하자 아이작은 담담히 설명했다.

"역병을 불로 정화하는 조치입니다."

그럴듯한 말에 수도사들도 납득했다. 다른 역병의 여지가 있는 물건들도 모두 태웠다.

다행인 점은 수도사들이 고작 16살에 불과한 아이작의 말을 잘 따라주었다는 점이었다.

아이작이 하는 행동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고, 막연하지만 전통적인 미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역에 대한 개념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격리를 시키는 것만 봐도 최소한 역병이 발생하면 그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개념은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추가로 식사 때마다 손을 씻도록 만들고, 수도사들의 로브가 코까지 가릴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마스크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침이 사방팔방 튀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기도회 장소를 분리해달라고?"

"예."

아이작은 거기다 한술 더 떠서 기도회에까지 참견했다. 다들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역병 증상이 생긴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나눠서 기도회를 진행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치유 능력이 있다는 성인의 동상을 찾아, 온 나라를 순례 다니는 것이 상식인 시대다.

때문에 아이작은 기도 장소를 분리해 달라는 부탁에 수도사들이 거부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24시간 가까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예배당을 격리수용시설로 만들 생각이었다.

"기도회가 굳이 비좁은 골방 안에서만 이루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빛의 법전의 이치를 따르려면 건강한 사람들은 태양볕 아래 더 선명한 목소리를 냄이 옳습니다."

빛의 법전 교단의 상징은 태양. 그런데 빛의 법전에게 탄원하면서 골방 안에서 기도를 웅얼거리는 것이 맞는 일이겠느냐?

아이작은 그렇게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제멋대로인 해석이었지만, 예브하르는 그 말 또한 옳게 여겼다.

"좋다. 그렇게 하마."

다행히 예브하르를 비롯한 수도사들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이솔데와 가장 가까이 접촉하고도 증상이 없다는 점과 아이작 본인이 가진 특유의 신비한 매력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에 이미 아이작과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발 이 방법이 통해야 할 텐데.'

사실 이미 역병이 퍼진 상황에서 수도원은 거대한 격리병동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지품을 태우거나 격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상에 따라 환자를 구분하고 청결에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행히 아이작의 조치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아이작이 방역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수도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움직이자 새로운 감염자 수도 줄어들고, 증세가 악화되는 것도 느려지고 있었다.

'일시적일 뿐이야.'

예브하르의 기도회가 효과를 발휘한다면 역병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전에 죽거나 심한 후유증을 앓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제거해야만 했다.

***

이솔데는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환부는 여전히 수포와 곯아 가는 상처들로 가득했다. 절단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쇠약해진 상태에서 하기에는 어려운 방법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버티고 있는 것은 치료 기도회 덕분이었다.

기도회는 확실히 이솔데의 치유력을 북돋고 있었다. 다만 역병을 낫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사혈 치료를 막는 것뿐, 나머지는 기도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안 좋아.'

게벨과 다른 수도사들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기도회는 감염으로 죽는 것은 막아주고 있지만, 감염 자체는 막아주지 못한다. 아이작이 하고 있는 방역 조치도 일시적일 뿐, 피로가 길어지면 다시 역병이 번질 수 있었다.

점점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기도회도 제대로 힘을 못 쓸 것이다.

'그 전에 빛의 법전이 힘을 써서 팍팍 치료되면 좋겠지만.'

마법이며 신이며 기적이 있는 세상인데 어련할까. 문제는 그렇게 정화되기까지 환자들, 특히 이솔데라는 저 이단심문관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란 점이다.

기적에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이작이 해야 할 일은 기도가 아니라 행동이었다.

아이작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촉수를 꺼냈다. 스멀스멀 촉수가 이솔데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기분이 이상하군.'

뭔가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촉수는 이솔데의 환부를 훑기 시작했다. 썩은 부위와 곯아 가는 상처, 수포들을 수많은 이빨들이 빠르게 도려내어 집어삼켰다. 몸에 해가 되는 부분만 제거하는 방법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인간은 먹지 않기로 했던 아이작이지만, 이것은 미묘한 경계에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일종의 거머리 사혈 치료 같은 거지?'

아이작은 그렇게나 멍청하다고 생각했던 거머리 사혈치료를 자신이 하고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역병에 감염된 부위가 떨어져 나갈 때마다 움찔움찔 떨었다.

잠시 뒤, 이솔데의 상처 부위에서는 선홍빛 피가 흘렀지만 감염된 부위는 사라졌다. 치료용 알콜이나 소독제를 구할 수는 없으니 이게 최선의 조치였다.

아이작은 거기서 한 번 더, 거머리의 포식 특전을 발휘했다.

['포식' 특전으로 흡혈 효율이 상승합니다.]

[체력 회복 능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촉수가 울컥울컥 체액을 토해내며 이솔데의 상처 부위를 덮었다. 이솔데의 피와 살을 삼켜서 만든 것들이었다. 일시적인 조치였지만 회복 능력이 깃든 체액이 상처를 덮자, 환부가 아물었다.

'이 정도면 간호는 할 만큼 한 것 같군.'

아이작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이것은 고작 방어에 불과하다.

빛의 법전이 곧 크게 한 방 날려 줄지도 모르지만, 아이작은 신이 복수해 줄 것이라고 믿고 얌전히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슬슬 성과가 있어야 할 텐데."

아이작은 중얼거리며 방 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쥐 한 마리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저 너머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뇌가 마비된 쥐였다. 아이작은 거기에 '혼돈의 자손' 특전을 발동시켰다.

[혼돈의 자손 / '저 너머의 기생충' 특전이 있어야 합니다. 기생충이 숙주를 즉시 잡아먹고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혼돈의 자손'으로 변태합니다.]

아이작이 능력을 발휘한 순간, 쥐가 빠르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내 쥐는 퍽 소리를 내며 물풍선처럼 터져 버렸다.

참혹한 잔해 속에서 겉과 속이 뒤집히듯 무언가가 기어 나왔다.

그것은 쥐의 가죽과 뼈, 살점, 체액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면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는 쥐를 닮아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사방으로 요동치는 촉수가 어설프게 쥐의 형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것이 혼돈의 자손이었다.

[주인님.]

짧고 투박한 메시지가 아이작에게 전달되었다. 혼돈의 자손이 보낸 메시지였다. 쥐라는 동물을 매개로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혼돈의 자손들은 모두 이렇게 짧고 간단한 단어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에게 이솔데의 살점을 나눠주었다.

"이 역병의 근원지를 찾아. 분명 이 산 어딘가에서 시작됐을 거다. 우릴 엿먹이려는 놈이 누군지 알아야지."

혼돈의 자손은 촉수를 꿈틀거리다가 아이작이 내민 살점을 휙 낚아챘다. 녀석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입으로 살점을 삼키고는 쥐구멍 속으로 달려갔다.

아이작은 역병이 시작된 이래로 꾸준히 취해 왔던 이 조치의 성과가 슬슬 나타나길 기대했다.

***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날 밤.

[주인님.]

아이작은 문득 들려온 메시지에 눈을 떴다.

[역병. 시작. 찾음.]

21화. 역병신(疫病神) (3)

펄럭.

아이작은 수도사들이 입는 두터운 로브를 몸에 걸쳤다.

이미 성인에 가까운 키에, 깊게 두건까지 눌러쓰니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허리춤에는 이솔데에게 아직 돌려주지 않은 심판의 검을 장비했다.

지금부터 아이작이 할 일은 누구도 알아봐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작은 어둠에 잠겨 있는 복도로 나갔다. 복도 한쪽 귀퉁이를 응시하자, 벽 틈 사이로 꾸물거리며 혼돈의 자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자."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을 앞세워 녀석이 찾았다는 역병의 근원지로 향했다.

지난 며칠 동안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들을 풀어 역병의 근원을 찾았다. 드디어 그 성과가 나타난 것이다.

'역병 멧돼지를 처음 본 게 2년 전이었던가?'

그때에는 단순한 풍토병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사태를 보면 단순한 역병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아이작은 이 역병에게서 계략과 음모의 냄새를 맡았다.

적어도 지성이 있는 무언가가 몇 년에 걸쳐 계속 수도원을 노렸다. 하지만 수도원을 돌파할 힘이 없어서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성과를 보기 직전인 상황. 놈은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려 할 것이다.

앞장서서 가던 혼돈의 자손이 문득 방향을 틀더니 판자로 막혀있는 틈을 지나 안으로 향했다.

'응?'

아이작은 의아해하며 멈춰 섰다.

이 판자는 폐쇄된 지하실을 막는 가벽이었다.

공격이 수도원 밖에서 시작된 만큼, 당연히 공격의 주체도 외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혼돈의 자손은 분명 지금 수도원 지하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검을 지렛대 삼아 가벽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 뭐가 됐든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은 부서진 잔해를 뚫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이름 없는 혼돈으로부터 메시지가 내려왔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이 성역을 역겨워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이 더럽혀진 성역의 '정화'를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성역?'

아이작은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메시지였다.

이름 없는 혼돈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에게 기도를 하거나 예배당에서 경전을 공부해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심지어 촉수를 욕하거나 대놓고 비난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름 없는 혼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 계단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역겨워하고 있었다.

'뭔가가 있긴 있군.'

***

계단 밑에서는 미적지근하고 끈끈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겨울인데도 느껴지는 미묘한 온기에 아이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뚱뚱하고 땀에 절은 살점에 파묻혀 있는 듯한 온기였다.

그때 아이작은 왼손의 촉수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다.

찍! 기둥 위에서 아이작을 향해 뛰어내리던 쥐 한 마리가 검에 반 토막 나서 떨어졌다. 토막 난 쥐의 크기는 거의 작은 강아지만 했다.

"뭐 이런 돼지 같은...."

다시 또 촉수가 꿈틀거렸다.

퍽.

발에 걷어차인 쥐는 비명을 꽥꽥 질러대다가 달아났다. 그 비명에 반응하듯 어둠 속에서 웅크린 붉은 눈빛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수년 동안 쥐 사냥을 반복해온 아이작은 그것들 전부가 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 이 쥐새끼들. 그렇게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더니만, 여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네?"

아이작은 왜 그렇게 쥐가 끝도 없이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수도원 지하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쥐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과 게벨은 그들도 모르는 사이 역병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던 셈이다.

주변에 술렁거리는 소음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무수한 숫자의 쥐 떼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들풀처럼 움직이는 쥐 떼의 모습에 아이작은 검을 바로 세웠다.

쥐들이 용맹하게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들었다. 쥐들은 혼자 있을 때에는 별것 아니지만 숫자가 늘어나면 자신보다 큰 상대에게도 가차 없이 달려든다.

게다가 놈들은 이미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어둠을 이용해 늑대도, 곰도, 멧돼지도 희생양으로 삼은 적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퍽, 콰드드득!

아이작이 검을 골프채처럼 휘두른 순간, 돌풍이 일면서 쥐 대여섯 마리가 날아갔다. 튕겨 나간 쥐들은 벽에 부딪혀 핏자국이 되었다. 하지만 쥐들은 광기에 휩싸여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작은 차분히 물러나면서 달려드는 쥐들을 하나하나 베고 찌르고 토막 냈다. 물결처럼 밀려드는 붉은 눈동자에도 그의 검격에는 망설임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찍, 찌익!

주변에 곰팡내나 역병의 냄새보다 혈향이 짙어지고서야 쥐들이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쥐들이 달려들었는데도 아이작에게 이빨 자국 하나 남긴 쥐가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올라타더라도 아이작이 두터운 로브를 다리와 팔에 감듯이 묶은 탓에 안으로 파고들 수 없었다. 이미 아이작은 역병의 근원지를 퇴치하러 오면서 쥐 떼의 습격쯤은 예상했던 것이다.

'쥐 떼쯤이야 숫자가 얼마나 되든 문제가 안 되지.'

수 차례 검을 휘두르면서도 아이작의 호흡은 평상시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쥐 따위를 베면서 검술을 쓰거나 집중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14살 때 얻은 특전 덕분이었다.

[당신은 저급한 짐승을 언제든 포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촉수를 이용해 쥐를 먹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작과 쥐의 관계가 사자와 병아리만큼 차이가 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완벽한 상위 포식자로서.

병아리가 백 마리건 천 마리건 사자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작의 눈에 쥐 떼들의 움직임은 낱낱이 읽혔고, 그 무수한 숫자에도 전혀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아이작에게는 다른 축복들도 있었다.

[역병 거대 곰의 '포식' 특전으로 괴력을 발휘합니다.]

[역병 늑대의 '포식' 특전으로 약점 추적 능력이 향상됩니다.]

이제까지 아이작이 먹어 치웠던 역병의 짐승들 또한 이제 되레 아이작의 힘이 된 상태였다.

아이작은 약점 추적 능력으로 쥐 떼들의 빈틈을 탐색하고, 지치지 않는 괴력으로 쥐 떼들을 한꺼번에 처치했다. 이런 저급한 짐승들을 상대하는 데 제대로 된 검술을 발휘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원래대로라면 역병 소굴에 들어온 아이작은 이쯤 되면 기침을 하거나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하지만 역병에 대한 저항 능력 덕분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슬슬 머뭇거리기 시작하는군.'

쥐 떼들은 어느새 주변에 자신들보다 사체의 수가 더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쥐는 영악한 동물이다. 쪽수가 모이면 더 강한 상대에게도 가차 없이 달려들지만,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되면 동료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친다. 이내 쥐들 사이로 공포와 패닉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눈동자에 쥐 떼들의 빈틈이 보였다.

쿵.

아이작은 단숨에 앞으로 달려 나가며 촉수를 휘둘렀다.

촉수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마치 갈퀴처럼 쥐 떼들을 휘감았다.

퍼퍼퍼퍽!

벽에 메다 꽂힌 쥐들이 모기처럼 터져나갔다.

촉수들이 게걸스럽게 쥐들을 포식하고 집어삼켰다. 아이작과 함께 왔던 혼돈의 자손도 틈을 타서 열심히 쥐를 잡아 체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살육의 만찬에 쥐들은 완전히 공포에 빠져 벽 사이사이로 도망쳤다. 하지만 아이작은 녀석들을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오늘 완전히 끝장을 봐야겠어.'

아이작은 아직 바닥을 굴러다니며 빌빌거리고 있는 쥐들에게 기생충을 심었다. 기생충에 감염된 쥐들은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퍽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 사체들 속에서 대여섯 마리의 혼돈의 자손들이 태어났다.

"쥐들을 전부 잡아먹어라."

쥐에서 태어난 혼돈의 자손들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하지만 쥐 10마리 정도를 너끈히 상대할 만큼의 힘은 있다. 어차피 혼돈의 자손의 수명은 길어봐야 1주일. 아이작이 이미 산에 풀어 둔 혼돈의 자손들도 같은 명령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돈의 자손들이 벽틈 사이로 사라지고, 주변은 진득한 피 냄새와 고요만이 남았다.

아이작은 급격한 허기를 느꼈다.

'살점 저장고'가 그런 것처럼 촉수의 능력을 사용하면 이미 포식했던 것들을 빨리 소화시킨다. 그리고 충분히 포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촉수의 능력을 쓰면, 아이작 스스로의 체력을 소모한다.

지난 며칠 동안 아이작은 방역과 치료에 전념하느라 제대로 된 포식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아직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촉수가 이전에 늑대와 곰을 배 터지도록 포식한 덕분이었다.

물론 지금 느끼는 이 허기는 포식한 짐승들이 바닥났다는 뜻이 아니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소화되면서 느끼는 감정적인 허전함이었다.

'충분해.'

찍.

그때 어둠 속에서 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 머리가 두 개 달려 있는, 반쯤 썩은 모습의 쥐였다.

아이작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평범한 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와라.]

아이작의 머릿속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머리 둘 달린 쥐가 뒤돌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름 없는 혼돈의 목소리도, 혼돈의 자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다.

역병을 풀고 감염된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던 존재가 무엇인지 알아낸 것이다.

아이작은 상대방이 말한 대로 순순히 뒤따라갔다.

그리고 곧 나타날 상대를 기대하며 입맛을 다셨다.

벌써부터 맹렬하게 허기가 지고 있었다.

***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점점 험해지고 투박해졌다. 아이작은 어느새 주변의 건축 양식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수도원의 정갈하고 단단하게 쌓인 건축물이 아니라, 다소 오래된 느낌이 드는 투박한 양식이었다.

아이작은 벽에 새겨진 그림과 무늬를 살펴보면서, 수도원이 어떤 고대의 건축물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군.'

아이작은 이곳에 와본 적 있었다.

정확히는 '네임리스 카오스'를 플레이할 때 온 적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친숙하게 느껴질 만큼.

툭. 아이작은 계단의 마지막 칸에 도달했다. 계단 맨 아래 지하실에는 제법 큰 공간이 있었다. 지금은 다 무너져가는 폐허였지만, 그 규모와 제단의 크기로 볼 때 꽤 숭배받던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위에 한때 이곳에서 영광을 누렸던 자가 누워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쥐였다.

쥐는 게벨이 맞서 싸웠던 거대한 곰만 한 크기였다. 하지만 몸통은 너무 크고 팔다리는 너무 짧아서 움직이기 어려워 보였다. 오직 배만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채 푸르스름한 녹색 빛을 발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거대한 쥐가 녹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아이작을 응시했다.

[감히 하찮은 피조물을 시켜서 위대한 자의 계획을 방해하다니... 뭐 하는 놈이냐.]

아이작은 거대한 쥐의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거대 쥐가 노성을 토해 냈다.

[닥쳐라, 피조물. 네게 묻는 것이 아니다. 감히 여린 피조물 따위가 내 계획을 감지하고 방해할 수는 없을 터. 분명 너를 조종하는 자가 뒤에 있겠지. 숨지 말고 나와라.]

"거 되게 깝죽거리네, 쥐돼지 새끼가."

잠시 던전이 침묵에 휩싸였다. 거대 쥐는 아이작을 응시하다가 목소리를 냈다.

[네가 지금 누구에게 지껄이는지 아느냐. 나는....]

"대모쥐 지힐렛이잖아."

대모쥐 지힐렛.

역병신이자 만 마리 쥐의 어머니.

유저들이 붙인 별명은 '쥐돼지'.

아이작은 이제야 이곳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아이작이 지난 수년간 살았던 이 수도원은 사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상당히 유명한 던전이었다.

부정한 역병신과 역병신의 사도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굴.

즉, 원래대로라면 여명군이 시작되는 2년 뒤, 수도원은 역병으로 인해 전멸하거나 사람들이 전부 떠나 폐허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지.'

아이작은 게임 속에서 노가다를 하느라 수백 번도 더 해치운 지힐렛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걸 다 먹으면 배가 터지겠군.'

22화. 역병신(疫病神) (4)

지힐렛은 태연하게 자신의 진명을 언급하는 아이작을 보며 흠칫했다.

[네놈... 어떻게 내 이름을....]

"뭐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아이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지힐렛이 거대한 배를 꿈틀거리며 소리 질렀다.

[모르는 척하지 마라! 내 마지막 신도가 죽은 것이 백 년이 넘은 일인데 내 진명(眞名)을 언급하다니! 대체 누구의 명령을 듣고 있는 것이냐!]

"이건 또 무슨 설정인지 모르겠는데...."

파르르르르!

지힐렛이 포효를 토해내자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동시에 아이작은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촉수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공포나 긴장 때문이 아니라, 촉수들이 언짢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자기 손바닥 위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언짢음.

'그냥 머리 위에 뜨던 이름을 알고 있을 뿐인데?'

솔직히 아이작에게는 알 바 아닌 일이다. 지힐렛이라는 이름보다는 쥐돼지라고 더 많이 부르고 다녔으니까. 그리고 지힐렛이 나오는 이 던전을 자주 방문했던 것은, 녀석이 '신성'을 가진 적들 중 상대적으로 가장 잡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뿐이었다.

[이래도 모습을 안 드러내? 그러면 네 놈의 피조물을 갈가리 찢어서 드러나게 해주마!]

지힐렛은 포효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격렬한 피기침을 터뜨렸다.

피기침들은 저마다 끈적한 슬라임의 형태가 되어서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블러드 슬라임이라고 부르는 몬스터 군체였다.

아이작은 역겨운 모습에 반사적으로 촉수를 꺼내 들었다. 촉수는 단숨에 허공에서 블러드 슬라임을 꿰뚫어 갈라버렸다. 퍽. 블러드 슬라임 두 마리가 터지면서 지힐렛의 뚱뚱한 몸에 체액이 튀었다. 놈의 작은 눈이 커졌다.

[이건 무슨... 네놈 대체 무슨 신의 권능을 빌려 쓰고 있느냐...!]

그제야 지힐렛은 뭔가 깨달은 듯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네필림! 네필림이구나! 천상의 피를 훔쳐 쓰는 더러운 족속! 아니, 그러면 대체 네 놈은, 네 놈의 어미는 대체 무슨 족속과 몸을 섞은 거냐!]

"갑자기 패드립을? 점점 더 용서가 안 되는데."

아이작은 이 더러운 환경에서 더 이상 지힐렛과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았다. 놈과 같은 방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수년간 쌓인 역병 저항 능력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고 있을 뿐, 수도사들이라면 진작에 피를 토해 내며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촉수는 블러드 슬라임을 차례대로 꿰뚫고 지힐렛을 노렸다. 지힐렛은 꿈틀거리며 쥐 떼들을 출산하기 시작했다. 대모쥐라는 이름에 걸맞게 녀석은 무수한 숫자의 쥐 떼들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갓 태어난 쥐들은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는데도 촉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쥐들은 아이작이 상대했던 쥐들과 달리 특별한 것인지, 덩치도 크고 기세도 사나웠다.

콰득, 콱.

놈들은 가차 없이 촉수를 향해 이빨을 박아 넣었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널 낱낱이 해부해서 알아내 주마!]

아이작은 생각보다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아이작은 촉수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다만 이때까지 촉수가 상대해왔던 것들은 멧돼지나 늑대, 곰 같은 야생동물일 뿐, 진짜 몬스터는 없었다.

어지간한 짐승들은 촉수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지만, 대모쥐 지힐렛이 만들어낸 쥐들은 달랐다. 평범한 몬스터 수준을 넘어서서 희박하게나마 신수(神獸)의 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촉수가 팡팡 몸을 바닥에 내려칠 때마다 대모쥐의 쥐들은 피떡이 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운 쥐를 포식하여 체력을 보충했다. 하지만 여기서 싸움이 길어지면 평범한 인간인 아이작 쪽이 불리했다.

모자란 놈이라도 '신'으로 모셔졌던 놈이다. 완전히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지치지도 않을 테니까.

다행히 지힐렛은 아이작의 촉수를 경계하는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소환수만을 움직여 공격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을 응시했다.

[어리석다, 어리석어! 이곳은 나의 성역이다! 감히 남의 성역을 침범하고도 나를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나는 천년의 숭배를 받았던 역병신이다! 네깟 놈 따위는....]

'저 녀석, 피조물이니 어쩌니 하면서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군.'

교만함.

아이작은 지힐렛의 감정을 읽었다.

***

지힐렛은 신으로서의 자신이 너무 대단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진 나머지,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작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배후의 존재' 어쩌구 타령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배후의 존재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은 온전히 내 의지지.'

이름 없는 혼돈은 오히려 그 과정에 사용된 도구에 불과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포상을 주든 말든, 아이작은 이 성역을 파괴할 생각이었다.

주된 공격은 촉수가 하고 있었지만, 아이작은 지힐렛의 소환수와 역겨운 가래, 아니, 블러드 슬라임을 피하느라 정신없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게끔 움직였다.

그 사이 아이작은 서서히 심판의 검을 쥐고 지힐렛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놈은 쉴 새 없이 블러드 슬라임과 쥐들을 출산하며 촉수를 몰아붙였다. 아이작은 천천히 지힐렛의 좌측으로 돌아섰다.

이대로 본체를 노리면 소모전을 벌일 필요도 사라진다.

그 순간, 지힐렛의 옆에서 무언가가 일어섰다. 낡고 헤진 로브를 입은 사람이었다. 몸에 착용한 장신구나 무늬로 볼 때 사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로브 안쪽에는 새하얀 백골이 드러나 있었다.

못해도 백 년 이상 이곳에서 썩은 듯한 해골이었다.

아이작은 고개를 기울였다.

"언데드?"

하지만 해골 사제는 대답 대신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이 폐허 아래 묻히지 않고 보존되어왔던 것이 이 해골 덕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언데드를 보자마자 아이작은 배후를 직감했다.

"설마 배후에 불사교단이 있었나?"

언데드는 불사교단의 권능이다. 다른 신앙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사교단의 사제가 어째서 다른 신의 시중을 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해골 사제는 대답 대신 잔뜩 녹슨 검을 치켜들었다. 아이작은 이 해골이 사제인 동시에 이곳을 지키기 위해 놓인 파수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성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지힐렛의 시중을 들고, 뒷바라지를 하면서 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끔 해놓은 장치에 불과해.'

하지만 한쪽 손으로 지힐렛을 상대해야 하는 이상, 아이작은 남은 한 손으로만 검을 써야 했다.

당연히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골 사제는 관절을 비정상적으로 비틀며 아이작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현재 '약점 추적'과 '괴력' 축복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어쨌든, 성기사는 아니지만 성기사단 검술을 배웠다.

쩌억.

검과 검이 맞부딪친 순간, 아이작은 도저히 한 손으로 휘둘렀다고 믿기지 않는 괴력으로 해골 사제의 검을 튕겨냈다. 해골 사제의 얼굴을 박살 난 검의 파편이 꿰뚫고 지나갔다. 그러나 언데드 답게, 개의치 않고 아이작을 공격하려 했다.

아이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베기 동작을 이어 나갔다.

수없이 반복해 왔던 베기 동작.

그 순간 아이작의 몸에 무언가 다른 것이 깃들었다.

하나의 흐름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폭발하듯 터져 나와 쇄도하는 촉수의 물결이었다.

아이작은 단 한 번의 호흡에 촉수가 해골의 검을 튕겨내고, 파고들어서 그 몸을 박살 내고, 지힐렛의 저 뚱뚱한 배를 아래서 위로 갈랐다가, 다시 사선으로 그어서 십자 모양의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단지 상상했을 뿐이었다.

퍼어어억!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아아아악!]

지힐렛이 찢어지는 비명을 토해 냈다.

아이작은 처음부터 이 해골 사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해골을 베는 동시에 지힐렛의 몸통을 아래서 위로 찢어 버렸다.

아이작의 키만큼이나 커다란 상처를 입은 지힐렛은 울컥울컥 체액을 토해 냈다.

아이작은 무심코 자신이 상급 검술을 사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짧은 거리를 자각조차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며 사이에 있던 것들을 베어 낼 뿐이었으나,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발란체 상급 검술을 사용할 때보다 격통이나 부상이 훨씬 덜했다. 통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체력 회복 속도가 훨씬 빨랐다.

대신 아이작은 묘한 공복감을 느꼈다.

'이건... 체력 대신 살점 저장고에 있는 고기들을 대신 소모한 건가?'

그런 것 같았다. 며칠 전에 먹었던 늑대들이 전부 다 순식간에 소화된 상태였다. 얼마 안 남아 있긴 했지만 어마어마한 소화량이었다.

마치 체력 대신 '포만감'을 대가로 가져간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부상을 당하기는 했으나 인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어째서 아발란체 검술을 쓸 때에는 이런 효과가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검술의 형태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군.'

아이작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움직인 궤적을 따라 여덟 갈래의 나선형 흔적이 땅과 지힐렛에게 처참한 상처를 만들어 냈다.

마치 여덟 개의 촉수로 잡아 뜯은 듯한 거대한 상처는 신성을 지닌 지힐렛에게조차 치명상이었다.

[하급 성기사 검술 상승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상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Lv 1)]

[조합된 상급 검술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메시지가 연달아 무어라 떠올랐으나 아이작은 그걸 다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갸아아아아아악!]

지힐렛이 포효를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아이작의 촉수가 빈틈을 노리고 지힐렛의 배를 꿰뚫은 것이다. 동시에 아이작이 입힌 상처에서 무언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해골의 머리통을 덮쳐 으깨 버렸다.

퍼석.

도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해골이 뭉개져 버렸다.

찍, 찌익, 찌이이이익!

지힐렛의 배에서 튀어나온 것들은 다름 아닌 아직 어린 쥐들이었다. 제대로 된 형태도 갖추지 못한 것들부터, 심지어 막 착상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까지.

더럽고 역겨운 모습에 아이작은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왜! 어째서, 네가!]

지힐렛은 피 끓는 외침을 토해내며 외쳤다. 상처를 치료하려는 듯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심판의 검에 깃든 '부정한 것을 태우는 힘' 때문에 아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해골 사제가 박살 난 뒤로 지힐렛은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급격하게 어려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심한 상처도 금방 재생하던 육신이, 이제는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수복할수록 더 많은 부분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해골 사제가 놈의 형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촉매였던 것 같았다.

'임시라고는 해도 하나뿐인 신도이자 하나뿐인 사제. 그게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가?'

[너도 나와 같은... 신일 것이다! 네게서 분명 신성이 느껴진다! 심지어 나와 같은, 어둡고 혼란스러운 영역에 속한... 그런데 왜!]

이름 없는 혼돈이니까 그야 그렇겠지.

아이작은 모처럼 지힐렛과 의견이 맞는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 없는 혼돈이 왜 지힐렛을 경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메시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살려다오! 신성을 가진 존재가 이대로 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않느냐! 저 이름 붙여지지 않은 영역에서 영원히....]

그때 지힐렛은 가래 끓는 소리로 뭔가 웅얼거리다가 숨을 헐떡였다. 자기가 내뱉은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너! 너! 설마 세상에 섞여선 안 될 피가 흘러 들어온 건가!]

"불결한 쥐돼지 따위한테 듣기에는 좀 뭐한 말인데...."

아이작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지만 지힐렛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죽어!]

지힐렛이 마지막 발악을 하듯 소리 지르자 놈이 쏟아낸 태막 속에서 쥐들이 들끓으며 태어나기 시작했다.

부글거리며 막을 찢고 태어나는 쥐들의 모습은 기괴했지만, 제대로 된 형상도 갖추지 못한 채 태어난 쥐들은 나오자마자 죽거나, 바닥을 빌빌거리며 기어 다닐 뿐이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저 고양이를 눈앞에 둔 쥐가 겁에 질려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이제 지힐렛은 그 격조차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역병의 짐승들아, 앓고 고통받는 자들아! 저놈을 죽여라!]

스스스스슥.

아이작은 주변의 벽들을 타고 혼란스럽게 기어 다니는 소리들을 들었다. 수도원과 온 산에 흩어져있던 쥐 떼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작은 지힐렛이 온 산의 모든 쥐들을 불러 모았음을 깨달았다. 아이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압사시켜서 죽여 버릴 생각이라는 것도.

아무리 아이작이라도 그 많은 쥐들을 전부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벽 너머 긁어대는 섬뜩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긴장하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는 다른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쥐, 포식, 흡수.]

[영양, 포식.]

[머리, 몸통, 꼬리, 전부.]

이내 지힐렛도 무언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건지 입을 다물었다.

퍽, 퍼억.

이내 벽에서 무언가 튕기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힐렛이 그토록 기다리던 쥐 떼였다.

하지만 그것은 지힐렛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구원을 청하기 위해,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쥐 떼들의 뒤를 따라 혼돈의 자손들이 버글거리며 쫓아왔다.

이미 수많은 쥐 떼들을 흡수하고 포식한 덕분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놈들이었다.

지힐렛의 경악 속에 아이작은 느슨하게 촉수를 꿈틀거렸다.

"위생점수는 빵점이지만, 간만에 뷔페식이군."

***

콰드득, 콰득, 콱, 우드드득.

아이작은 촉수가 긴 시간에 걸쳐 대모쥐를 포식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대 곰은 제대로 포식하지 못했지만, 대모쥐는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마음껏 먹게 해 두었다. 그리고 다른 혼돈의 자손들도 함께 그 식사를 즐겼다.

별로 식욕이 돋는 장면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다른 곳을 살펴보았다.

이 신전은 확실히 오래된 곳이었다.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을 장소. 아마 지힐렛은 많은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신앙이 몰락하고, 빛의 법전이 들어왔을 것이다.

'그 신전 위에 수도원이 엉덩이로 깔아뭉갰으니, 당연히 원한도 깊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름도 없는 촉수의 먹잇감이다.

야생동물이 사람을 해치려고 했으니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아이작은 지힐렛이 앉아있던 제단을 살펴보았다. 제물을 바칠 때 쓰이는 것처럼 보이는 긴 상에는 대모쥐가 수많은 쥐들을 낳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작은 그 음각을 천천히 스다듬어 보았다.

그 순간 그에게 메시지가 들려왔다.

[오염된 성역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치시겠습니까?]

23화. 성역 정화

"성역 정화라고?"

성역 정화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 네임리스 카오스를 플레이할 때에도 몇몇 중요한 '거점'을 점령하면 그 지역에서는 점령자의 신앙이 더욱더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곳이 바로 성역이다.

그리고 원래 있던 성역의 신앙을 지워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세우는 것이 성역 정화였다.

아이작은 방금 성역에서 보통 괴물이나 짐승도 아니고 쇠락했다고는 하나 한때 신이었던 존재를 먹어 치웠다. 그러니 이때까지와는 다른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설마 이름 없는 혼돈이 성역 정화를 요구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빛의 법전에게 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아이작의 혼란을 예상한 듯 메시지가 나타났다.

[이 성역은 '대모쥐'에 의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된 성역은 어떤 신앙에든 봉헌할 수 있습니다.]

[성역에 남아있는 옛 신의 잔재를 지우고, 일대에 새로운 축복을 부여합니다.]

[해당 성역 안에서 신앙의 축복이 더더욱 강해집니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힐렛의 흔적을 이름 없는 혼돈이 꿰차고 싶다는 뜻이다.

아이작은 고민에 빠졌다.

촉수는 아이작에게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비장의 무기이기도 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없었다면 지힐렛을 상대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지힐렛을 보자마자 신성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전에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겠지.

성역을 바치면 바로 그 이름 없는 혼돈의 축복이 더 강해진다.

'내게는 분명히 이득이겠지만....'

과연 그게 이 세상의 입장에서도 바른 일일까?

아이작은 자신의 몸에서 튀어나온 촉수들이 주변의 생명체들을 남김없이 도륙하고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았다. 이 성역을 계기로 전 세계가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은 아무리 아이작이라도 원치 않았다.

"성역을 정화하지 않으면?"

[성역을 정화하지 않으면 옛 신은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아예 모르는 척 넘어갈까 했던 아이작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지금이야 어떻게 해결했지만, 자신이 없을 때 지힐렛이 부활하면 그때야말로 수도사들은 떼 몰살을 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성역을 바친다고 촉수 괴물이 튀어나와서 세상을 다 뒤엎어 버릴 가능성은 낮았다. 아이작이 게임 시스템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신은 혼자서 무언가를 하기는 어렵다.

그저 신자와 사제, 성기사들을 통해서 기적을 베풀고 방향을 지시할 뿐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설령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 현재 매개체가 될 신자가 아이작밖에 없다면 실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악신들은 정신을 조종한다든가 타락시키든가 한다고 들었지만....'

최소한 이름 없는 혼돈이 아이작의 뇌를 후벼파거나 기괴한 속삭임을 들려준 적은 없다. 반쯤 애원이나 투정 부리다시피 퀘스트를 수행하게 만든 적은 있지만, 그것도 아이작을 쓸데없는 위기에 빠뜨리거나 손해를 준 적은 없다.

아이작은 고민 끝에 결정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 바친다."

성역을 정화하긴 해야 한다. 지힐렛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이름 없는 혼돈으로 덮어쓸 필요가 있었다. 뭣보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성역이 있는 편이 좋다.

***

구우우웅.

아이작이 선언한 순간, 성역을 울리는 기이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손안의 촉수들이 쭉 뻗어나가더니, 제단의 중심부를 향해 파고들었다.

제단의 중심부를 파고든 촉수들은 마치 주변을 뒤덮듯이 곳곳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돌로 만든 제단이 우득거리며 부서지고 으스러지며 비틀렸다. 벽과 바닥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단을 부수며 거대한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

두근.

제단의 심장이 한번 맥박친 순간 아이작은 온몸이 고양되는 힘을 느꼈다. 맥박은 멈추지 않고 뛰며 지하를 울렸다. 아이작은 심장이 맥박칠 때마다 힘이 보충되는 것이 느껴졌다.

뿐만 아니었다. 아이작은 '성역'으로 선포된 수도원 일대가 자신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뒷산에 지힐렛이 남긴 역병의 짐승들이 얼마나 있는지, 풀과 나무가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수도원 안의 사람들이 어디 있으며 얼마나 강하고 약한지까지 모조리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즉, 아이작은 수도원 일대에서나마 전능한 감각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득하게 몰려드는 감각에 아이작은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제단에서 떨어지자마자 아이작은 밀려들던 감각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성역 주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전능한 감각은 오직 제단 가까이서만 일어나는 건가?'

마치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 그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예전에도 성기사나 사제를 플레이해 본 적 있지만, 성역에서 이런 이벤트를 경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이름 없는 혼돈 특유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제단의 심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뻗은 촉수의 부속물들을 보았다.

오래된 양식의 돌벽의 무너진 틈 사이로 근육과 신경 다발들이 꿈틀거렸고, 나무뿌리처럼 뻗은 혈관은 맥동하는 심장에 맞춰 꿈틀거렸다. 은은하게 감도는 붉은빛과 보랏빛이 벽면에 음울하게 번들거렸다. 한때 오래된 신전이었던 수도원 지하는 이제 불경한 괴물의 내장 같은 꼴이 되어있었다.

'수도사들이 이걸 보면 기절하겠군.'

하지만 아이작이 수도원을 엎어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빛의 법전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자기들 발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촉수는 제단을 완성하자마자 다시 아이작의 왼손으로 복귀했다. 아이작은 촉수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요동치는 생명력을 느꼈다. 지금 이 힘이라면 아까 싸웠던 지힐렛을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에게서 들려오는 메시지에서도 만족감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여전히 이게 올바른 일인지 회의감이 느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조금 혼란스럽기는 해도 아이작은 이걸로 최소한 수도원이나 그 주변에서라도 살해당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성역 정화'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갉아먹는 수확자 / 촉수에 송곳니 무리들이 나타나 더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하거나 섭취할 수 있습니다.]

[혼돈의 눈 / 상대방의 심리와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경계심을 품거나 마음을 가리려 하면 읽기가 어려워집니다.]

[기어드는 혼돈 / 제물을 바쳐서 혼돈의 권속에 속하는 강력한 괴물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어쨌건 오랜만에 본 세 가지 보상안이었다. 아이작은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갉아먹는 수확자'는 지금도 강력한 촉수의 공격력을 훨씬 더 배가시켜 줄 것이 분명했다. 보상 카드로 떠오른 환각 속에는 촉수에 톱니바퀴처럼 송곳니들이 돋아난 모습이 보였다.

'기어드는 혼돈' 역시 이번에 혼돈의 자손 특전을 사용해 본 결과, 기대되는 능력이었다. 촉수의 눈에 띄는 형태 때문에 거의 항상 혼자서 움직여야 할 아이작에게는 손발이 되어 줄 부하가 늘 부족할 것이다. 수족을 대신해줄 강력한 소환수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혼돈의 눈'이었다.

다름 아닌 이단심문관 때문이었다.

'상태와 심리를 파악한다....'

이 능력이야말로 아이작에게 필요한 능력이었다. 아이작의 종족인 네필림은 어차피 신들에게 미움받는다. 그렇다면 인간들에게 호감을 사 둬야 하는데, 혼돈의 눈은 네필림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데 유용할 것이다.

여론 조작과 선동, 유혹, 지배, 협박, 설득, 거짓말. 모든 것이 아이작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지금 수도원을 찾아온 이단심문관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이런 능력이 필요했다.

'지힐렛을 물리쳤으니 이제 수도원에서 역병은 사라지겠지. 이단심문관도 곧 회복될 테고. 그러면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고,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아이작은 괴물의 왕이 되어서 세상을 지배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감을 띠지 않고 출세 가도를 달리며 성공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단심문관과 같은 말썽을 피하려면 타인의 심리를 읽는 능력이 유용할 것이다.

혼돈의 눈을 선택한 순간, 아이작은 오른쪽 눈이 시큰거리며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가 각막 위로 미끈거리며 지나가는 느낌에 기겁한 아이작은 재빨리 검을 꺼내 비춰 보았다. 매끈한 검날 위로 붉은 촉수 가닥이 눈 표면을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

촉수가 각막 위에 자리를 잡자 원래 짙은 회색이었던 아이작의 눈은 어느새 붉은 눈동자를 가진 것처럼 변했다. 다행히 오드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 절차가 남았군.'

아이작은 지힐렛의 남은 시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촉수가 지힐렛의 시신을 한참 동안 포식했지만 대부분의 고깃덩어리들은 먹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아이작은 지힐렛의 시체를 먹어 치우고 그 능력을 흡수하길 바랐지만 촉수는 그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먹어서는 안 되는 어떤 부분이 남은 건가?'

아이작은 지힐렛의 남은 사체를 응시했다.

이내 그는 남은 사체를 이용할 방법을 떠올렸다.

24화. 수색 및 섬멸 (1)

아이작이 성역을 정화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역병은 사그라들었다.

굳이 다른 환자들을 살펴보지 않아도 이솔데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수도원 안에서 가장 상태가 심각했던 이솔데는 격리실 침상에 잠들어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상처가 아물어 가고 있으며, 병세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늑대에게 긁히거나 물린 몇몇 상처는 흉이 지겠지만 눈에 띄는 곳은 아니었다. 단순히 잠들어있는 것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것이다.

"하루 만에 이런 차도를 보이다니 놀랍군."

"수도사님들의 기도가 하늘에 닿은 것이겠지요."

예브하르는 이솔데에게서 역병의 징후가 사라진 것을 보고 놀란 듯 중얼거렸다. 수도원에서 역병이 물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수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역병에 걸렸던 수도사들 대부분이 예배당에 모여 기도 중이었으니까.

그들은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자 바로 수도원장에게 알렸고, 수도원장 예브하르는 바로 역병이 시작된 이솔데를 찾아왔다.

어차피 이득을 취할 만큼 취한 아이작은 미련 없이 모든 공을 빛의 법전에게로 돌렸다. 하루 만에 이렇게 나을 방법은 어차피 신의 기적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게다가 아이작이 가진 힘과 공은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지. 이건 분명한 너의 공이다. 아이작."

그러나 예브하르는 단순히 신의 덕으로 넘기지 않았다.

"물론 빛의 법전께서 우리를 구해주시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우리 중 몇이나 시험받고 희생된 뒤의 일일지는 알 수 없었지. 이는 단순한 역병이 아닌 게 분명했으니까."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빛의 법전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면, 당신을 대리해서 너를 보내신 게 그 도움일 것이다."

예상치 못한 칭찬에 아이작은 머쓱해졌다. 몇 년 동안이나 한솥밥을 먹고 지낸 사람들이 그냥 죽어 나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도왔을 뿐인데, 이렇게 극찬을 받으니 할 말이 없었다.

"으으음...."

칭찬을 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려던 찰나, 반가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던 이솔데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떠지는 것을 본 아이작은 급히 허리를 숙였다.

"이봐요. 정신이 듭니까?"

잠시 천장에서 초점이 헤매던 이솔데의 눈동자가 아이작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초점을 또렷이 잡지 못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이작의 얼굴과 마주하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아이작은 '의식이 없는 것 같더니 고통이 심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이솔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저를 데리러 오셨군요."

"예? 어, 그렇습니다. 게벨 씨와 제가 직접 나가서 데리러 갔었죠."

"게벨?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분명 저희가 모르는 영웅들도 분명 있었을 테니까요. 이름을 가지신 명천사께서 저를 마중 나오셨다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이솔데는 빨갛게 젖은 눈으로 예브하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게벨 천사님, 저는 마음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뜻을 따르다가 죽는 것을 복으로 여기며 제가 감히 빛으로 가득한 영원한 왕국에 이르는 것을...."

아이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곧 그녀의 오해를 정정해 주기로 했다.

***

잠시 후, 이솔데는 그 눈만큼이나 빨갛게 변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서 대답했다.

"천사가 아니시라구요."

"예. 아닙니다."

아이작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솔데가 얼굴을 감싸 쥐고 무릎까지 파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귓불까지 새빨개진 것을 보아 혈압으로 핏줄이 터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영락없이, 그러니까... 당신 얼굴이...."

"이해합니다. 극단적인 상황이었고 두려우셨을 테니까요."

아이작은 이솔데가 한 층 더 후회할 소리를 하기 전에 서둘러 얼버무렸다. 이솔데는 처음 아이작과 마주쳤을 때에도 '천사?' 같은 헛소리를 하며 기절했었다. 아이작은 실제로 천사의 혼혈인 네필림이니 완전한 오해는 아니긴 했다.

하지만 네필림은 그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고, 정말 네필림이라는 사실을 들켜도 곤란했기 때문에 생각이 그 방향으로 튀지 않게 해야 했다. 이솔데는 다행히 아이작의 변명을 황급히 받아들였다.

"네, 네. 맞습니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라,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얻어서...."

외모 때문에 천사라고 생각했다는 것보다는 죽었다 살아나서 천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 본인도 다른 사람들도 더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이솔데는 스스로 납득하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스스로 납득하고 나자 그녀의 얼굴은 그나마 아까보다는 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와 함께 동행했던 대장장이 도제가 있었어요. 그 아이도 무사히 도착했나요?"

"예. 한스가 아가씨의 위험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건 정말... 다행...."

그제야 이솔데는 자신이 왜 수도원에 왔는지 떠오른 듯 황급히 자신의 짐을 찾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그녀에게 짐꾸러미를 내밀었다.

"옷과 가방은 역병을 막기 위해 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책과 서류, 도구들은 역병이 침투할 수 없는 듯하여 밀봉해 두었습니다. 옷을 태운 것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솔데의 물품들 대부분은 이단심문관의 장비답게 다른 신앙이나 저주에 물들지 않는 처리들이 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그동안 아이작이 몰래 썼던 심판의 검도 있었다. 다만 옷가지 하나하나까지 그런 처리를 하기는 힘들었기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솔데는 자신이 남자밖에 없는 수도원에서 발가벗겨졌던 사연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신없이 짐을 뒤지다가 찾는 물건들이 전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잃어버린 물건은 없군요. 잘 보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혹시 여기 편지와 서류들은 읽어보셨나요?"

아이작과 예브하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의 기밀 서류를 읽는다는 것은 불경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이 수도원에는 찔리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아이작이 성체라는 사실을 숨기는 수도원장까지 합치면 셋. 덕분에 그 서류들을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작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예. 읽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군요."

"아이작!"

예브하르가 놀란 듯 꾸짖었지만 이솔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요. 오히려 읽으셨더라면 상황을 더 빨리 호전시킬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도 이 역병 때문이었으니까요."

"역병 때문이라구요?"

예브하르가 놀란 듯 물었다. 수도원을 휩쓴 역병이 정상적인 역병이 아니라 저주 내지는 음모에 의한 것이란 것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이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왔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 불사교단의 마수가 이 수도원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녀가 눈빛을 불태우며 중얼거렸다.

***

이솔데는 역병으로부터 차단된 가방 안에 있던 여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수도원장실로 찾아왔다. 움직이기 편한 정복 차림에 진한 붉은색 후드를 눌러쓴 복장이었다.

이번에는 게벨도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정신을 차린 이솔데를 만나는 것을 껄끄러워했지만, 이솔데가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저를 구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구한 건 제가 아니라 저기 저 수염도 안 난 새파란 애송이입니다."

게벨은 관심도 사고 싶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벽에 기대섰다. 이솔데는 극구 말을 섞고 싶지 않아 하는 게벨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게벨을 부른 것은 단지 감사 인사를 표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수도원 안에 칼을 쓸 수 있는 분은 얼마나 계십니까?"

"칼이요?"

예브하르는 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여명군 참전 경력이 있습니다. 순례를 돌았던 수도사들도 몇몇 있지요. 하지만 저와 그 수도사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여기 아이작과 게벨 두 사람을 이기지는 못할 겁니다."

이솔데는 그 정도냐는 듯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아이작은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았으면 했지만, 이미 드러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사실 게벨까지 나설 것도 없다. 수도사들만이라면 아이작 혼자서도 감당할 자신 있었다.

"기적이 아니라 칼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까?"

수도원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기적이다. 그러나 이솔데는 칼을 원하고 있었다.

"이번 역병은 불사교단의 음모입니다."

"불사교단... 불사교단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불사교단이 있는 흑제국은 여기서 말을 타고도 두 달은 달려야 하는 거리다. 그사이에는 작은 왕국들도 몇 개나 있었다. 하지만 단지 거리만으로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불과 몇 년 전에 배교자 칼센이 불과 이곳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마을을 습격한 적 있습니다. 생존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끔찍한 사건이었지요."

예브하르는 아이작에게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 관리를 했다.

"그건 성기사단 단장이 배교를 저질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하지요."

"물론 사라진 칼센이 이번 일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영향력이 미칠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소수의 인원만으로 후방에 혼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생각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

불사교단은 수도원 지하에서 생화학 테러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수도원 지하에서 고대신을 부활시키려 했던 겁니다!"

이솔데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아이작은 딸꾹질을 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러나 그녀의 엄숙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브하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게벨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었다.

"그래서요?"

"예?"

"이단심문관님, 그런 거창한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저는 수도원장입니다. 고대 신앙은 부활할 수 없고, 그에 따른 전설도 대부분은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고대신이 부활하면 고대의 부정한 괴물들과 저주들도 함께...."

"설령 정말 부활한다 치더라도 숭배자가 없는 신들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죽은 신이니까요.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갈 뻔했던 이름 없는 혼돈이, 이제는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요."

예브하르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 것 같군요. 예전에는 이 지역에 역병 신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수백 년 전에 그 사원을 무너뜨리고 벽돌을 주춧돌 삼아 이 수도원을 지었다지요. 말씀대로라면 이번 역병은 그 역병신의 영향이란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불사교단은 그런 고대 신앙을 제국 곳곳에서 부활시킬 생각입니다."

네임리스 카오스의 메인 신앙으로는 아홉 신앙이 있다. 하지만 설정상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까마득한 옛날에는 신앙이 수백 가지가 넘었다. 조금이라도 강한 짐승이나 괴물, 특별한 현상을 죄다 신으로 섬겨 왔던 것이다. 하지만 빛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대 신앙은 사라지거나 융합되면서 아홉 가지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아홉 가지 중 일부 신앙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당장 '이름 없는 혼돈' 교단만 해도 아이작 혼자이지 않은가.

"그래서 불사교단에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그야 빛의 법전 안에 내분이 생기면 불사교단의 신자도 늘어날 테니...."

"불사교단만큼 신자 걱정이 없는 신앙도 없을 텐데요. 불사교단의 신자들은 늘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말이죠."

이솔데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뭣보다 아홉 신들이 고대신의 부활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불사황제조차도 어린아이를 불태우고 대학살을 강요하는 고대 신앙들을 무너뜨리는데 협력했습니다. 우리가 이교도들과 뜻이 맞는 부분이 하나 있다면, 고대 신앙은 부활할 이유도 없고 부활해서도 안 된다는 거죠."

고대 신앙과 아홉 신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고대 신앙이 야만의 영역이라면 아홉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 문명의 영역이었다. 당장 아홉 신앙 중 절반이 사람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으리라고 아이작은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 없는 혼돈도 아홉 신앙인데 왜 이 모양이지? 멸망하기 전에는 좀 달랐나?'

아이작은 그런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아무에게도 물어볼 수 없고 물어봐서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이솔데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작은 그녀가 지금 이 반박을 이미 예상했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논박을 이어가려면 더 이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교리 배틀이란 몇 년을 이어가도 끝이 없는 법이니까.

'뭔가 숨기고 있군.'

아이작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이솔데와 예브하르는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어서 아이작을 신경 쓰지 못했다.

예브하르가 입을 열었다.

"이단심문관님, 저희 칼이 필요하거든 솔직하게 말씀해주십시오. 불사교단이 왜 이 근처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겁니까? 같은 신앙의 형제끼리도 나누지 못할 이야기입니까?"

예브하르가 이솔데의 마음을 흔든 순간, 아이작은 새롭게 얻은 능력, '혼돈의 눈'을 사용했다.

25화. 수색 및 섬멸 (2)

두근.

아이작은 눈동자에서 맥박을 느꼈다. 눈앞에 뭔가 일렁거리는 것을 느낀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손으로 부빌 뻔했지만, 이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작고 가느다란 촉수가 그의 눈앞을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간 것이다.

아이작은 가까스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누군가 보기에는 단지 아이작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도는 정도밖에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깨달았다.

이름 없는 혼돈의 힘을 끌어다 쓰는 것은 즉 그 존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다는 것이다. 아이작의 눈꺼풀 아래에서 돋아난 촉수가 일렁이며 눈동자에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내 익숙한 상태창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솔데 브란트(A+) / 쇠약]

[직업: 이단심문관(B)]

[능력: 나방의 교리, 고급 심문, 도가니 짐승]

["수도원장을 어떻게 설득하지? 일단 놈들이 행동에 들어간 이상 서둘러야...."]

그것은 이솔데 브란트에 대한 정보였다.

혼돈의 눈은 상대방의 상태와 심리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상태라는 게 정말 말 그대로 상태창 같은 정보였던 모양이다. 눈에 보이는 하단의 상태창에는 이솔데의 심리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은 얕은 생각만 읽을 수 있는 건가? 이 정도는 굳이 능력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데....'

아이작은 좀 더 집중하며 이솔데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눈가의 촉수가 다시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기겁하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이단심문관 앞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이다가 무슨 경을 칠지 모른다.

다행히 수도원장실은 어두웠고, 그늘진 곳에 있던 아이작을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선을 돌리기 직전 아이작은 이솔데의 좀 더 깊은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아직 증거도 이유도 못 찾았는데...."]

"증거도 이유도 못 찾았나요?"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이솔데가 휙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은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입술을 만졌다. 이솔데가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불사교단이 왜 여기서 활동하는지 이유도 증거도 찾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증거가 없다니요? 죽은 역병신이 수도원을 노렸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단심문관들은 그 직책상 증거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여차하면 사람 한두 명 목숨은 물론이고 집단까지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직업이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행동 윤리에 어긋나는 셈이다.

"저희 조력을 필요로 하시는 이유가 성기사단을 움직일만한 근거가 없어서 아닙니까?"

아이작의 말에 예브하르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예브하르도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이단심문관이라면 성기사단을 동원할 권한이 있죠. 단 그럴만한 근거가 있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수도원에서 칼을 찾는다는 것은 근거가 없기 때문이군요."

결국 이솔데가 칼 쓸 사람을 찾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가 가진 증거와 논리가 빈약하다는 뜻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원망스럽게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이 구해준 것과는 별개로, 상황이 답답해진 것이다.

아이작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했다.

사실 이번 사태 배후에 불사교단이 있다는 그녀의 의심은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직접 수도원 지하에서 불사교단의 졸개를 봤으니.'

지힐렛의 시중을 들던 그 언데드 사제 놈. 녀석이 불사교단의 권속이었다.

하지만 이솔데의 모든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는 그놈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러려면 그놈을 어디서 찾았는지도 이야기해야 하고, 그곳은 현재 맥동하는 이름 없는 혼돈의 심장으로 뒤덮여 있는 상태였으니까. 결국 이솔데가 설득할 만한 근거를 마련해 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저는 불사교단이 활동한다는 첩보와 놈들의 동태, 흔적들을 발견했습니다."

이솔데는 어떻게든 호소하려는 듯 필사적으로 말했다.

"녀석들이 왜 이 백제국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활동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믿습니다."

"믿으시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분명... 예?"

"믿는다고요. 수도원을 공격한 것은 고대신을 부활시키려던 불사교단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그 말에 예브하르와 게벨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예브하르는 아이작의 담대한 모습과 주장에 홀린 듯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이작?"

"할 수 있으니까요."

"뭐라고?"

"그놈들은 늙어도 죽질 않아서 그런지, 평생을 빛의 법전을 엿 먹이는 데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변경의 병사들이 꼭 전략적으로 행동한 게 아니라도 흑제국에게 골탕을 먹일 수 있는 일들을 저지르곤 하지 않습니까?"

아이작은 그러면서 게벨을 슬쩍 돌아보았다.

성기사단 출신인 게벨이라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분쟁지역의 병사들은 굳이 상부 명령이 아니더라도 흑제국 쪽에 끔찍한 도발을 감행하곤 한다. 게벨은 짚이는 부분이 있는 건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대신을 부활시키려고 하다니?"

"말씀하셨던 부분이라면, 정말 고대신이 부활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약해빠진 놈들이니 수도원 하나 괴롭히는 수준이겠죠. 설령 정말 부활한다 치더라도 금방 토벌될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브하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대신 부활이나 세계를 양분하는 두 신앙 간의 대립이 고작 말단들의 장난질이라고?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고, 실제로 아이작도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솔데의 내면을 읽은 아이작은 그녀도 아는 게 없는데 추궁해 봤자 의미 없다고 판단했다.

"중요한 건 놈들이 정말로 그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고, 우리가 당했다는 겁니다."

아이작은 화제를 슬쩍 앞으로의 방향으로 돌렸다. 중요한 건 불사교단이 개입하는 중이란 거지 증거나 이유가 아니다.

이솔데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돌려줘야죠."

자세한 정보는 놈들을 더 찾게 된다면 그때 가서 물어보면 될 일이다.

***

회의가 끝나자마자 아이작과 게벨, 이솔데는 곧장 짐을 꾸려 수도원 밖으로 향했다. 수도원 안에는 당나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예브하르는 셋에게 아낌없는 축복과 충분한 식량 등을 나눠주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빈약한 논리에 수도원장과 게벨이 돕기로 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두 사람이 아이작에게 가진 호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예브하르는 이단심문관의 속내까지도 떠보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작의 논리에는 쉽게 넘어가 주었다. 이것은 네필림의 매력이 발동한 결과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너무 매력적인 탓이군.'

"감사합니다. 아이작 씨."

그때 앞장서서 걸어가던 이솔데가 아이작과 발걸음을 속도를 맞추며 말을 붙였다.

"사실 불사교단이 이 근방에서 활동 중이라는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전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증거를 찾지 못했었죠. 이 수도원에 손길이 닿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도 최근의 일인데 이런 결정적인 증언까지...."

"괜찮습니다. 저희 수도원 일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사실 이솔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작은 적당히 공을 세우면서 수도원을 떠날 명분을 찾고 있었다. 이솔데는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으니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괜찮은 인맥이 될 수도 있다.

'언제 어느 시대든 감찰관과 친해지는 게 유리하지'

어쨌든 이솔데는 고마운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이작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이단심문관치고는 상당히 때 묻지 않은 순진한 성격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혹은 마을 하나쯤은 학살해도 끄떡없는 사이코거나.

사실 이단심문관으로서 유능하다면 후자일 확률이 더 높았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된다면 교단에 아이작 씨를 추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작 씨는 성기사 수련생이지요? 제가 아는 성기사가 있는데...."

"이단심문관님."

게벨이 그때 뒤에서 굳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먼 곳이라면 마을에서 말을 빌리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는 마을에서 멀어지는 길 같군요."

이솔데는 자신이 수도원 인근에 불사교단이 개입했다는 흔적을 발견한 곳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목적지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서둘러 말했다.

"아, 수도원 근처에 있는 계곡으로 가는 중입니다. 주민들은 아리엣 계곡이라고 부르던 것 같군요."

아이작과 게벨도 잘 아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낸 것은 이솔데가 아닌 두 사람이니까. 실제로 뭐가 숨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험한 곳이었다.

이솔데는 게벨에게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했고 어떤 증거를 잡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벨은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그녀에게서 아이작에 대한 관심을 떼어 놓은 것으로 만족한 것 같았다.

'다행이군.'

아이작은 문득 '혼돈의 눈'을 발동했던 오른쪽 눈을 매만졌다.

이제 촉수가 꿈틀거리는 이질감은 사라졌지만, 떠나기 전 확인했을 때 한동안 핏발 선 기색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동공에 옅은 보랏빛도 감돌고 있었다. 약간 더 깊게 들여다보려 시도한 것만으로도 눈의 색이 변할 정도였던 것이다.

'이 능력도 함부로 쓰기 힘들겠군.'

사기적인 능력이지만 함부로 쓰기 힘들다는 점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얕은 생각을 알아보는 정도라면 눈에 띄지 않겠지만, 상대의 심층 심리를 파헤치려 능력을 강하게 발동할수록 숨길 수 없는 흔적이 드러날 것이다.

만약 누군가에게 눈에서 촉수가 꿈틀거리는 꼴을 들킨다면?

'죽일 수밖에 없겠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일찌감치 부작용을 알아내서 다행일 뿐이었다.

***

"여깁니다."

이솔데가 긴장한 기색으로 계곡에 발을 딛으며 말했다. 뾰족한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놓인 계곡에는 건기인 겨울이어서 그런지 마른 하천의 흔적만 보였다.

아이작도 이곳은 지나가면서 봤을 뿐, 직접 발을 딛는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라면 발을 딛기도 힘들 만큼 험한 곳이었는데, 하천이 마른 덕분에 바닥은 평평했다.

"여기서 불사교단의 흔적을 발견하셨다구요?"

"정확히는 놈들을 봤다는 증언과 언데드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다 역병에 감염된 짐승들과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불길한 흔적들을 발견해서...."

이솔데는 그렇게 말하며 계곡 초입부에 놓인 커다란 돌 하나를 툭 발로 찼다.

아이작은 그 돌에 무슨 의미가 있나 했지만 이솔데는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뭡니까?"

결국 게벨이 먼저 물었다. 그러자 이솔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예? 당연히 우상숭배의 흔적이잖습니까. 잘린 석상의 머리잖아요."

아이작은 다시 그 돌을 살펴보았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워낙에 마모된 흔적이 심하긴 했지만 부자연스럽게 잘린 단면과 어쩌면 눈 코 입일지도 모르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다시 보면 쥐같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계곡 안에 들어가면 이런 흔적들이 더 많습니다. 높은 산 위에서 떨어진 것 같더군요."

"음...."

아이작은 이런 게 한두 개라면 이솔데가 착각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조사해 볼 필요는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고고학의 영역일 뿐 이단의 증거는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병에 감염된 짐승들이 나타나고, 수도원까지 공격당했다면 이는 명백한 공격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계곡을 조사하면 분명 배후가 숨어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조사해보니 옛날에는 이 계곡 안쪽에서 이교도의 신전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솔데는 나름 확신을 가진 듯해 보였다. 게벨은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기색이었지만 이솔데를 빨리 쫓아내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조사하고 싶어 했다. 오히려 설명을 듣고 난처해진 것은 아이작이었다.

'이거 이러면 성역까지 조사가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

지힐렛이 숨어있던 성역은 수도원에서도 계단을 타고 상당히 내려가야 했다. 계곡과 이어진다는 말도 사실일지 모르는 셈이다. 이솔데의 쓸데없는 유능함이 성역의 발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일찌감치 실행하기로 했다.

'조금 천천히 하다가 지칠 때쯤 증거를 뿌릴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지.'

아이작의 가방 안쪽에는 이솔데가 만족할 수 있는 증거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뿌릴 수는 없었다. 이솔데가 조사를 마친 곳에 증거가 나타나면 이상하니까. 그리고 아이작은 그 전에 이솔데가 속을 만한 그럴듯한 상황을 연출해야 했다.

'움직여라.'

아이작의 의지가 어딘가를 향해 전달되었다.

이내, 계곡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가 느리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26화. 수색 및 섬멸 (3)

아이작은 의지를 전달하는 동시에 이솔데를 향해 말했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조사를 진행해 보도록 하죠. 아, 그런데 이단심문관님?"

"예?"

"만약 불사교단 족속들이 여기 있다고 친다면, 이 임무의 정체성은 뭐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정찰? 조사? 토벌?"

당연하지만 아이작은 지금 이 임무의 목적이 불사교단 권속들에 대한 토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렇게 백제국 깊은 곳까지 그 허연 뼈다귀들이 직접 기어들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지에서도 얼마든지 '징집'이 가능한 것이 언데드 족속들이다.

때문에 아이작도 이번 임무가 정찰이나 조사, 만약의 경우가 벌어진다 해도 경호 정도라고만 생각했을 뿐 토벌하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솔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1차적으로는 조사입니다만, 발견 즉시 토벌로 바뀝니다."

이솔데의 당당한 태도에 아이작은 당황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단심문관이 아무 생각도 없이 적들이 매복 중인 장소로 오진 않았을 것이란 것이 떠올랐다. 이솔데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의 경우 시간만 끌어주신다면 놈들을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요."

만약의 경우 시간을 끄는 것. 그것이 아이작과 게벨의 임무인 듯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곡 깊은 곳으로 향했다.

***

그 사이 계곡 깊은 곳에서는 아이작이 뿌린 혼돈의 자손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계곡 안쪽에 어떤 놈들이 있는지 찾아내라. 확실하게.'

지힐렛과의 전투를 통해 혼돈의 자손들은 쥐 떼마냥 불어났기 때문에 정찰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이솔데는 신중하게 석상 하나하나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엄청난 이단의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 말대로 무너진 사원의 잔해들이 계곡 곳곳에 가득했다.

"사람들은 왜 이 역병신이라는 걸 위해서 사원까지 지었을까요? 역병이 뭐가 좋다고."

아이작이 투덜거리며 물었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그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아홉 신앙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고대신이니 어쩌고 하는 것들은 게임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다른 게임에서 '고대신'이라면 무시무시한 히든 보스 떡밥이거나 그렇겠지만, 네임리스 카오스에서는 기껏 해봐야 필드 보스 수준이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신들은 대부분 천사를 통해 명령을 전달할 뿐, 불사 황제를 제외하면 신이란 존재는 얼굴 맞대기도 힘들었다.

"옛날에는 신이 아주 많았다고 하더군요."

이솔데는 의외로 선선하게 대답해 주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에 신의 이름을 붙였다고 해요. 아마 옛날 이 지역에 큰 역병이 돌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죽으니까 역병에 이름을 붙이고 신으로 모시면서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었겠지요."

"용서요?"

"가뭄이 들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고, 홍수가 일어나면 비를 멈춰달라고 빌잖아요. 그렇게 역병의 신은 치유의 신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치유의 신 지힐렛이라. 병을 준 놈은 약도 줄 수 있다는 논리군.'

아이작은 대충 그렇게 이해했다.

"하지만 빛의 법전이 루앗딘을 통해 여명의 석판을 내려주면서 이런 잡신들은 뭉개지고 사라졌지요.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다른 여덟 신앙들도 있잖습니까?"

이솔데는 못 들은 척했다. 그녀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숨겨진 말이 뭔지는 아이작도 금방 알아차렸다. 고대신들을 뭉개고 없애버린 것은 빛의 법전뿐만이 아니라 아홉 신앙 모두가 합의해서 한 일이다. 이것은 게임 설정에서도 나오는 사항이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등대지기 루앗딘이 여명의 석판을 들고 나타난 일은 야만의 시대와 이성의 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일명 '빛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니까.

빛의 시대라 불리는 천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고대 신앙들은 박멸되고, 빛의 법전에 협력하거나, 복종하거나, 조화를 이루게 된 여덟 신앙만이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등장한 불사교단조차도 빛의 법전이 주도하는 질서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직 이름 없는 혼돈만이 사라졌지.'

아이작은 이 미묘한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름 없는 혼돈이 분명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아홉 신앙'이라고 언급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후두두두둑.

그때 아이작은 절벽 위쪽에서 떨어지는 자갈을 발견했다. 이솔데도 계곡 위쪽을 올려다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먼저 행동을 취한 것은 아이작이었다.

"저기!"

툭, 투툭.

절벽과 절벽 사이로 거대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산짐승인가 했지만, 명백히 이질적인 실루엣이었다.

이솔데의 눈이 커졌다.

"저건 대체?!"

"안쪽으로 갑니다!"

아이작과 게벨은 우선 칼을 뽑아 들었지만 움직이는 대신 이솔데를 바라보았다. 이솔데는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더니, 호루라기를 길게 불었다.

삐익─.

계곡을 찢는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늘 위로 갈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아이작이 이미 기생충을 심은 적 있는 그 갈까마귀였다. 갈까마귀는 이솔데와 호흡이 오랫동안 맞았는지 곧바로 계곡 위에서 짐승을 쫓아 날아갔다.

"따라갑시다!"

이솔데는 갈까마귀의 동선을 쫓아 움직였다. 먼 거리에서도 그녀는 갈까마귀가 어디에 있는지 놓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짐승은 계곡과 계곡 사이, 절벽 틈이나 모퉁이 너머로 언뜻 실루엣을 보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맹렬한 추격 때문에 도저히 도망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인하는 기색이 선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유인하는 게 맞지.'

짐승의 정체는 바로 아이작이 만든 혼돈의 자손이었다. 덩치가 커다란 생물을 모태로 만든 탓에 커졌지만, 덕분에 이렇게 눈에 띄는 임무를 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특유의 형태 때문에 정확한 실루엣을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좋아. 이대로 유인하다가 계곡 밖으로 내보내면....'

여기에 뭔가 있었지만 달아났다는 뜻이 될 테고, 추적 대상을 잃어버린 이솔데는 결국 사태를 마무리 지을 것이다. 어차피 불사교단의 사제는 죽었으니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정 깔끔하게 끝내고 싶다면 저 혼돈의 자손을 이솔데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줘도 된다.

***

"잠깐만, 아무래도 우리를 유인하는 것 같습니다!"

짐승이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 듯 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움직이자 이솔데도 상황을 파악했다. 이동속도가 느려지자 자연스럽게 추적하던 정체불명의 짐승 역시 동작이 느려졌다. 갈까마귀를 통해 동선이 그대로 잡히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유인하고 있다면 매복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고 저 불길한 짐승을 놔줄 수는 없지요. 두 분은 천천히 따라와 주십시오."

이솔데는 그렇게 말하더니 목걸이를 입가로 가져가 무언가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누덕누덕한 잿빛 가루들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나방의 교리.'

아이작이 이미 파악했던 이솔데의 능력 중 하나였다.

빛의 법전은 빛을 상징한다. 나방은 빛을 쫓는다.

나방의 교리는 그 중 교단 안에서 은밀한 행동이 요구되는 사람들이 배우는 교리의 기적이었다.

눈앞에 있는데도 길가의 자갈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희미해진 이솔데는 곧장 지금까지와는 다른 동선으로 추적을 재개했다.

만약 저 짐승이 아이작 일행을 유인하는 중이라면, 나방의 교리를 사용한 이솔데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솔데가 짐승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아이작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혼돈의 자손을 조심스럽게 조작할 수 있었다.

"...."

이솔데는 나방의 교리를 사용하고도 거리를 좁히지 못하자 초조해진 기색이었다.

그때 아이작에게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시체. 발견.]

아이작이 뿌린 혼돈의 자손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시체라고?'

모태가 된 쥐의 사고력이 낮은 탓에 정확한 메시지를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시체가 있다는 것은 긴장할 만한 소식이었다. 혼돈의 자손은 시체를 향해 다가가려다가 움츠러들었다. 누군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 순간, 혼돈의 자손으로부터 의지 전달이 툭 끊어졌다. 상대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강해봤자 고양이 정도의 전투력이긴 하지만, 이렇게 맥없이 당했다는 것은 야생 짐승에게 당한 것이 아니란 뜻이다.

'전부 모여서 조사해.'

아이작은 혼돈의 자손들을 조종해 시체가 발견된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사냥이 아니라 추적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지가 끊어진 장소는 지금 있는 곳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설마 진짜 매복이 있었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이작은 놀랐다. 성역의 제단을 장악한 이후, 그는 수도원과 인근 지역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한 기색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나타났다는 것은 성역의 능력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존재거나, 지난 밤 사이에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이솔데 씨!"

아이작은 엉겁결에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이솔데는 즉시 멈춰 섰다. 그 순간 그녀가 앞서가던 동선으로 화살 몇 대가 꽂혔다. 그중 한 대는 이솔데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몸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잿빛 가루들을 관통해 지나갔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여파로 나방의 교리가 깨진 것인지 이솔데의 모습이 드러났다.

"누구냐!"

게벨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계곡을 울렸다. 그러자 계곡 바위틈 사이에서 사냥꾼 복장에 석궁을 든 사람 대여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근 마을에서 온 사냥꾼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방금 전에 기괴한 짐승이 머리 위를 지나가서 그 짐승인 줄로만 알고...."

"그렇다고 화살을 마음대로 쏘아붙이나!"

아이작은 화를 내면서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사냥꾼들은 고급스러운 복장의 이단심문관과 수도사 복장의 아이작과 게벨을 보고 잘못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특히 아이작이 화를 내며 다가오자 그들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다.

네필림 특유의 매력이 이번에는 그들의 죄악감을 압박하는 형태로 다가온 것이다.

"우리도 그 짐승을 쫓고 있는 중이니 용서하겠습니다! 그 짐승은 어디로 갔습니까?"

"저쪽으로 절벽을 타고...."

그 순간 아이작은 벼락같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휘둘러 남자의 목을 찔렀다. 동시에 게벨과 이솔데도 호흡을 맞추듯 빠르게 달려들었다.

감히 자신들을 공격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든가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들 셋은 이미 사냥꾼들을 보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솔데는 일반인 사냥꾼이 나방의 교리를 꿰뚫고 공격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게벨은 그들의 석궁이 사냥꾼이 쓰기에는 너무 고급스럽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아이작은 자신이 찌른 남자의 손에 혼돈의 자손을 죽이고 남은 피가 묻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챙, 까드드드득!

어떤 기합이나 합의된 소통도 없이 동시에 공격이 이루어지자 사냥꾼들은 순식간에 부상을 입고 밀려났다. 하지만 당장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컥, 헉, 그르르륵!"

심지어 아이작에게 목이 꿰뚫린 사냥꾼마저도 뒤로 물러나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놈의 구멍 뚫린 목에서 피가 넘실거리며 살갗을 꿰매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솔데 역시 그걸 발견하고 으르렁거리듯 이를 갈았다.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왔나!"

왈라이카는 흑제국과 백제국 사이에 있는 군소국가 중 하나다. 수많은 분쟁 속에서 여기저기 빌붙으며 살아남은 국가답게 역사가 복잡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흑제국에 더 가까운 세력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의 귀족층이 바로 언데드였기 때문이다.

흔히들 뱀파이어라고 부르는 흡혈 종족이었다.

그리고 이 귀족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위해 '인간 사냥'을 자주 나서곤 했다.

"쳐, 라!"

아이작에게 목이 꿰뚫린 뱀파이어는 그들 중에서 지위가 꽤 높은 놈이었던 건지 부상당한 목으로도 지시를 내렸다. 뱀파이어들은 정체가 탄로 났다는 것을 깨닫고 검집에서 검붉은 칼을 뽑아 들었다.

왈라이카 귀족들이 사용하는 무기였다.

아이작은 약간 긴장했다.

'왈라이카 귀족이라면 게임 상에선 성기사와 동급의 전력이었는데....'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뱀파이어들은 성기사 여섯 명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성기사들 간에도 수준 차이는 있지만 뱀파이어들은 특히나 인간을 상대하는데 최적화된 존재들이다.

아이작은 이번 전투가 꽤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컥, 허억!"

하지만 정작 싸워보니 생각보다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아이작은 눈앞에 달려드는 뱀파이어의 검을 아래서 위로 가볍게 쳐내고 칼을 비틀어 팔을 베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주춤거리며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내 실력이 이 정도였나?'

아이작은 자신의 검술이 실전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함을 느꼈지만, 금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햇볕 때문이군.'

이곳은 계곡이 깊은 곳이다. 그래서 빛이 드는 부분이 많지 않았지만, 드문드문 비치는 햇볕만으로도 그들에게 고통을 주기 충분했다. 그들의 습격이 실패했을 때 사냥꾼인 척하고 넘어가려 했던 것도 아직 낮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됐군.'

아이작은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흡혈귀들이 당황하는 사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지금 상황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27화. 인간사냥꾼 사냥 (1)

아이작은 뱀파이어들이 마음껏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칼을 찔러넣었다. 아이작은 최대한 체력을 아끼기 위해 오직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할 때에만 칼을 휘둘렀다. 때문에 그의 칼이 번뜩일 때마다 피와 재가 튀어 올랐다.

뱀파이어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밀리면서 계곡의 그늘진 부분으로 후퇴하자 기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세와 기상의 열세를 받아들인 뱀파이어들이 차분하게 대응을 시작했다.

조직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아이작은 일단 거리를 벌렸다.

'힘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동작을 최대한 아껴야 해.'

다행히 아이작을 상대하던 뱀파이어들은 그에게 상처 한두 군데를 입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쉽사리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이솔데와 게벨의 상태를 살폈다.

게벨은 셋을 상대로 몰아붙이고 있었고, 이솔데는 홀로 객지를 떠도는 이단심문관답게 한 놈 정도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솔데는 오히려 아이작을 걱정했던 건지 감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아가씨가 내 실력을 직접 본건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겠군.'

균형이 깨진 것은 게벨이 상대하던 세 놈 중 한 명의 목을 날려 버리면서였다.

한 놈이 쓰러진 후에도 놈들은 패색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지만,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게벨은 일방적으로 뱀파이어들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선을 돌린 뱀파이어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놈은 기겁하며 검을 쳐내려 했다.

순간 아이작의 검이 마치 뱀처럼 기묘하게 휘어져 들어가며 심장을 꿰뚫었다.

살과 뼈가 통째로 뜯겨 나가며 짐승이 물어뜯은 듯한 구멍이 남았다.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처를 들여다보다가 빈 자리에 손을 허우적거렸다.

"이 녀석들 성기사입니다!"

뱀파이어 중 하나가 비명 지르듯 소리쳤다.

"엄밀히 말해 성기사는 아무도 없지만 말야."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이단심문관과 은퇴한 성기사, 그리고 성기사 지망생뿐이다. 그러나 성기사라는 외침에 뱀파이어들은 이를 갈면서 거리를 벌리려 했다.

게벨과 아이작은 놈들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이어가려 했으나, 갑자기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워져 멈칫하고 말았다.

'무슨?'

머리 위에 붉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걸 본 게벨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고, 반면 뱀파이어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번졌다.

붉은 안개가 계곡을 단숨에 덮쳐 왔다.

콰드드드드득.

붉은 안개가 계곡을 덮친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붉은 안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뱀파이어 둘을 마치 이빨이라도 달린 것처럼 물어뜯기 시작한 것이다. 뱀파이어 둘의 시체는 산산이 분해되어 안개와 한 몸이 되었다.

붉은 안개는 뱀파이어들의 시체를 모두 먹어 치웠지만, 살아있는 다른 뱀파이어는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놈은 이제 이쪽을 노리듯 꿈틀거렸다.

붉은 안개의 실루엣이 언뜻 사람의 형상을 띄었다가 다시 흐려졌다. 동시에 빠르게 아이작을 향해 쇄도해왔다.

그러나 아이작은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했다.

뱀파이어들과 마주한 순간부터 기도문을 준비하고 있던 이솔데는 눈앞에 닥쳐오는 붉은 안개를 향해 꾸짖듯 마지막 시구를 외쳤다.

"...그리고 주인께서 틈새 밖의 빛을 길들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순간 찬란한 빛이 계곡 안을 가득 채웠다.

찬란한 빛에 휩싸여, 도저히 구체적인 형상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어두컴컴하던 계곡 안은 순식간에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백지 같은 볕 아래 놓이게 되었다.

엄청난 광채에 붉은 안개는 순식간에 씻기듯 사라졌다.

아이작은 눈이 아픈 와중에도 그 빛으로 이루어진 짐승을 바라보았다.

밝은 빛에 휩싸여 있어서 정확한 실루엣은 볼 수 없었지만, 거대한 나비 날개를 가진 고양잇과 형태의 짐승이었다.

[아궁이 짐승(A)]

이 세계에서 신을 찬양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빛의 법전의 찬란한 빛, 그 영광의 불꽃에 홀려 다가가다가 나방처럼 불에 타 죽은 존재들도 허다하다. 그리고 '아궁이 짐승'들은 아궁이 속의 잿더미 속에서 재탄생한 존재들이었다.

'...뭐 그런 설정이지. 중요한 건 바로 그 짐승에게 광휘 효과가 있다는 거고.'

아궁이 짐승은 천사나 신수 같은 초월적 존재를 제외한 소환수 중에는 상위권에 속하는 존재다. 하지만 형태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소환자의 역량에 따라 크기와 힘이 달라진다.

그러나 아궁이 짐승이 공통적으로 가진 속성이 바로 '광휘 효과'.

태양빛과 같은 효과를 가진 이 특성은 아무리 작은 놈이라도 뱀파이어를 상대로는 극상성이었다.

역시나 뱀파이어들은 아궁이 짐승이 나타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이솔데는 소환을 오래 유지하지 않고 금방 돌려보냈다. 아궁이 짐승이 사라지자 계곡은 상대적으로 밤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이솔데는 소환의 여파인지 다소 창백한 표정으로 묵주를 만지작거렸다.

"놈들이 사라졌군요."

아궁이 짐승이 아니라 천사나 제대로 된 신수였다면 도망가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수 있었겠지만, 여기까지가 이솔데의 한계였다.

"추적해야죠!"

이솔데가 일부러 힘차게 말했다. 아이작은 그녀가 아직 소환할 여력이 있음을 의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추적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게벨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단심문관님."

"왜죠?"

"곧 밤이 되거든요."

게벨은 하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

계곡에는 밤이 빠르게 찾아온다.

아직 하늘이 밝을 때 전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이 쇠약해지긴 했어도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계곡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밤까지 되어 버리면 아이작 일행은 정말 제 실력을 발휘하는 진짜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들을 상대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주변에 널린 뱀파이어들이 남긴 흔적과 증거품들을 수집해야만 했다.

"다 살펴봤어요?"

"그럭저럭. 다만 놈들이 어중이떠중이 구울이 아니라 왈라이카 사냥꾼이라는 것밖에 모르겠던데."

아이작 일행의 기습이 워낙에 성공적이었던 탓에 놈들은 수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갔다. 그렇다고는 해도 야영 중이었던 터와 장비뿐이었지만, 이솔데는 그게 세상 보물인 것처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봐요. 이단심문관님. 그건 나가서 살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바닥에 엎드려 모닥불 밑바닥까지 살펴보던 이솔데는 아이작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뭐 좀 알아냈어요?"

"별로 쓸만한 건 없군요...."

"어쩔 수 없죠. 애당초 뱀파이어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도 아니고... 아니지, 뱀파이어 공작이 개입했다는 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 아닐까요?"

아이작이 별 생각 없이 말했다가 경악하는 이솔데의 시선과 마주쳤다.

"뱀파이어 공작? 그걸 어떻게?"

"예? 아, 그거야...."

아이작은 자신이 뱀파이어 공작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실 아까 그 붉은 안개의 정체를 아이작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미 아이작은 왈라이카 왕국이 섬기는 신앙, '붉은 성배 클럽'으로 엔딩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들을 마치 추리해 낸 것처럼 언급했다.

"뭐, 그야 뱀파이어가 모닥불을 피우고 야영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대낮에 일반인인 척하고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을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보아하니 이곳은 초소쯤 되는 것 같군요. 아마 더 안쪽에 그 귀한 신분이 쉬고 있던 동굴이나 임시 숙소가 있을 겁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호위로 거느리는 거창한 신분이라는 거죠."

이솔데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사실 아이작은 그 공작의 이름도 맞출 수 있었다.

헤인켈 굴마르.

"실력도 범상찮더니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군요. 예. 왈라이카의 왕족인 헤인켈 굴마르 공작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이건 중요한 단서지요. 하지만 역병신과의 관계를 알아낼 단서가 없군요."

게벨이 딱딱한 어투로 물었다.

"헤인켈 굴마르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대낮에 붉은 성배의 기적을 쓸 정도로 강한 왈라이카 사냥꾼 집단은 왈라이카 안에서도 헤인켈 공작가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움직일 만한 공작가 사람은 셋뿐인데 후계자가 위험한 여기까지 올 것 같지는 않고, 가주는 최근 그 거성에서 꼼짝도 안 하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남은 건 굴마르뿐이죠."

"상황 더럽게 됐군. 왈라이카의 공작이면 왕족이잖습니까. 그럼 밤에 절대로 마주치면 안 됩니다. 일단 빨리 계곡부터 빠져나가죠."

왈라이카 왕국은 혈통이 즉 계급 그 자체다.

왕족들은 말 그대로 그들이 모시는 붉은 성배에게서 피를 나눠 받았기 때문에 반신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귀족들은 그런 왕족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권능을 나눠 받는다.

당연히 하위 계급으로 갈수록 힘 또한 약해진다.

왈라이카 왕국은 그런 수직적인 혈통 카스트로 구성된 국가였다.

헤인켈 굴마르는 공작의 형제로, 왕족으로부터 고작 한 다리 건너 피를 나눠 받은 존재였다. 그 힘은 적어도 한 개 성기사단 전체가 나서거나 천사급을 불러내야 격이 맞았다.

지금 이 셋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솔데의 반응이 이상했다.

"적어도 성기사단은 와야 공작을 상대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제 밤이 되면...."

게벨은 이솔데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벌써 성기사단을 불렀군요?"

"예. 오늘 아침에요. 갈까마귀가 갔다 올 정도의 거리니 슬슬 저희가 밖으로 나갈 때쯤이면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도착해 있을 겁니다."

"증거가 없으면 성기사단을 부를 수 없다더니 무슨...."

게벨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이솔데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솔데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증거를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했지요. 그리고 이렇게 발견했잖습니까? 뭐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런 건 행동이 앞서가야 하는 법이니까요."

"성기사단이 왔다 하더라도 아직 우리 옆에는 없습니다. 놈들이 그 전에 습격해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아이작은 이솔데의 표정을 보고, 그녀가 서두르지 않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솔데는 오히려 바로 그 상황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면 반갑지요. 범인들이 도망가면 쫓아가기 힘들 테니까."

게벨은 이솔데의 발언에 갑갑하다는 듯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아이작도 한숨이 나온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고 있군.'

이솔데의 계획은 아이작이 원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

원래 아이작의 계획은 성역을 숨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뱀파이어들이 나타나면서 이 조건은 충족되었다. 이제 이솔데는 성역보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찾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아이작은 여기서 뱀파이어들을 보고 한가지 계획을 더 추가했다.

이단심문관에게 빚을 지우고 그럴듯한 성과를 남기는 것.

'성기사단을 불러들였다고? 오히려 좋아.'

아이작은 어차피 성기사단에 입단할 계획이었다. 이솔데가 불렀다는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맘에 들지 않는다면 추천서라도 받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성기사단장과 이단심문관의 추천을 받은 성기사 지망생이라니.

'괜찮은 데뷔가 되겠군.'

실력도 있으니 귀찮은 수습 과정을 건너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솔데의 계획은 결국 아이작이 목표와 일치하는 셈이었다.

'그 와중에 내 수도원을 엿먹이려고 한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을 박살 내는 것도 겸사겸사 할 수 있겠지.'

사실 이쪽이 본심이긴 했다. 저것들이 그의 영역 근처에서 무슨 의도로 움직이는지를 알아내야 했으니까.

다만 상대가 왈라이카의 공작이라는 게 걸리긴 했다.

'게임상에서는 네임드 보스급인데....'

칼센보다는 약하겠지만 지힐렛처럼 죽다 만 신보다는 강할 것이다.

아이작은 그놈까지 잡지는 못하더라도 솔직히 이런 상황이라면 이단심문관을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고 생각했다.

역시 최선은 뱀파이어들의 습격 없이 무사히 이 계곡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28화. 인간사냥꾼 사냥 (2)

해가 저문 계곡은 평지의 밤보다 어두웠다.

한밤중에 뱀파이어들을 상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던 게벨과 아이작은 서둘러 계곡 밖을 향해 나섰다. 이솔데도 불필요한 위험에 빠지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건지 둘을 빠릿하게 따라왔다.

언제 습격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작은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성기사단은 일단 '유사시 버티기만 하면 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적은 성기사단이 달려오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것이기에 버티기만 하면 이길 수 있었다.

"놈들이 다시 돌아올까요?"

"겁나냐?"

게벨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작은 발끈하는 대신 담담히 승률을 계산해 보았다.

"아궁이 짐승을 본 이상 밤이라도 놈들이 함부로 달려들긴 힘들겠죠. 하지만 이단심문관 아가씨가 아궁이 짐승을 밤새도록 부를 수는 없을 테니...."

"아마도 아궁이 짐승을 먼저 불러내게끔 만들겠지."

그리고 지친 이솔데가 아궁이 짐승을 돌려보내고 나면, 헤인켈 굴마르 공작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요점은 간단했다.

이쪽이 가진 패는 아궁이 짐승, 저쪽이 가진 패는 굴마르 공작.

어느 쪽이든 패를 먼저 꺼내는 쪽이 지는 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이작 일행은 아궁이 짐승 없이 한밤중에 왈라이카 사냥꾼들과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대충 승률이 반반 정도 되려나?'

낮에 보여준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한심한 실력은 기대 이하였지만, 밤이라면 다를 것이다. 놈들이 붉은 성배 클럽의 성기사로 취급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숫자가 얼마나 더 늘어날지도 가늠해야 했다.

반반으로 계산하긴 했지만 이쪽 세 명 중 한두 명은 죽거나 중상을 입을 것으로 가정해야 했다. 물론 아이작 본인이 죽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촉수를 쓰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계산한 거니까.'

만약 이번에도 치명상을 입고 촉수가 튀어나온다면 칼센에게 벌어졌던 일이 똑같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 주변의 모든 것을 다 집어삼켜 버리는 것이다. 이솔데도, 게벨도.

설령 어떻게 살아남더라도 촉수를 들킨다면 이솔데만큼은 확실히 죽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이단심문관한테는 비싼 값을 받아내기로 하고... 당장 내가 살려면 일단 이 둘을 떼어놔야겠어.'

아이작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면서 위로 향했다.

계곡 경사면을 따라 미끄러지듯 실루엣들이 달리고 있었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안개가 빠르게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이작의 시선을 보고 게벨과 이솔데도 눈치챈 듯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행히 붉은 안개는 보이지 않았고, 놈들의 수도 많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놈들이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어디에 매복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단심문관님, 나방의 교리를 쓰십시오."

"예!"

게벨의 조언에 이솔데는 순순히 기적을 사용했다. 그녀의 옷에서 먼지 같은 잿가루가 날림과 동시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이전에 사냥꾼들에게 들킨 적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아이작이 던진 미끼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그런 것이었다.

이솔데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들을 추적하던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움직임에 이상이 생겼다. 놈들 입장에서는 가장 주의해야 할 상대가 이솔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큰 위협이 사라진 셈이니 동요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놈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

쉿쉿 거리는 날카로운 신호음이 계곡 사이로 울려 퍼졌다. 동시에 머리 위쪽에서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후욱!"

게벨은 한 대를 화살을 단숨에 검으로 쳐냈다. 하지만 그와 같은 묘기를 할 자신이 없던 아이작은 재빠르게 계곡의 바위에 몸을 숨겼다. 바위에 박힌 화살에는 묵광 처리가 되어있었다. 인간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놈들다웠다.

동시에 뒤쪽에서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은 낮에 겪은 수모 때문에 꽤나 이를 간 듯 기세가 흉흉했다.

아이작은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위쪽에 둘, 아래에 둘.'

흉악해지긴 했지만 낮에 봤던 얼굴이었다.

'낮에 둘은 붉은 안개가 조각내 버렸으니 이게 전부인가?'

아이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들어 찔러 들어갔다. 낮과 똑같은 공격에 왈라이카 사냥꾼은 귀까지 입이 찢어지는 미소를 지으며 비웃었다. 놈의 손이 마치 안개처럼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움직였다. 낮과는 확연하게 다른 우아하고 정교한 동작이었다.

'쉽지 않겠군.'

아이작의 검끝이 왈라이카 사냥꾼의 검과 맞닿았다. 그대로 튕겨 나가는가 싶은 순간 둘 모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와득, 하는 소리와 함께 왈라이카 사냥꾼의 검이 꿰뚫렸다. 덕분에 놈의 손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아이작과 사냥꾼, 모두 상황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검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대로 검으로 왈라이카 사냥꾼의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놈의 칼이 함께 쑤셔 박힌 덕분에 녀석은 스스로 얼굴을 벤 꼴이 되었다.

"아히히아아!"

"뭐라고 하는 거야?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이작은 의외의 결과에 놀라긴 했지만 황급히 검을 빼냈다. 이미 균열이 간 왈라이카 사냥꾼의 검은 얼굴에 박힌 채로 박살 났다. 녀석은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뭐지? 이놈들 왜 아직도 약하지?'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확실하게 강해졌다. 놈들의 움직임은 낮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교해졌고, 동시에 우아해졌다. 게벨조차도 왈라이카 사냥꾼을 단숨에 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아이작의 검이 더 빠르고, 정교하고, 부드러웠을 뿐이다.

'어... 혹시 나 강한 건가?'

물론 이 셋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것이 게벨이니, 게벨에게 강한 실력자가 붙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따져볼 변수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실력이 평균 이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성기사들 수준에서도 통할지 모른다.

아이작은 놈을 향해 다시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히아!"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왈라이카 사냥꾼이 다시 뭐라고 소리쳤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겠지만 뱀파이어답게 녀석의 얼굴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다만 얼굴에 부서진 칼날이 박힌 통에 발음이 어려워 보였다.

게벨을 상대하던 다른 왈라이카 사냥꾼은 그 모습을 보고 도와주려는 듯했지만, 게벨의 매서운 검격을 떼어 놓기도 어려웠다.

쾅, 쾅. 게벨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굉음과 함께 놈의 칼이 갈대처럼 낭창낭창하게 휘어졌지만 쓰러지진 않았다. 힘으로 맞서려고 했다면 진작에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다. 게벨은 놈에게 착실하게 부상을 입히다가 마침내 발등에 칼을 꽂아 넣었다.

발이 뚫린 놈,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놈, 둘 다 제대로 싸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분명했다. 계곡 위에서 이솔데를 찾아내려 애쓰던 놈들도 상황을 그렇게 판단한 게 분명했다.

쐐액! 텅, 터텅!

다시 머리 위로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계곡의 비탈에 붙어 있던 안개가 기마병처럼 돌진해 왔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상황에서도 차분했다.

'놈들의 목적은 우리가 아니야. 이솔데를 찾아내는 거다. 이솔데가 없어야 그 붉은 안개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

지금은 이 자리에 이솔데를 붙잡아 놓기 위해 아이작 일행을 공격한 것이다. 실제로 이솔데는 공격도 못 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유사시 그녀가 아궁이 짐승을 불러내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력은 모자라지만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판단도 잘못된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실력이... 한참 모자라군.'

그들도 아이작과 한밤중에 이 정도로 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후우우우욱.

안개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며 점점 중무장한 기사의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리 없는 말이 소리 없이 달려왔다. 아니, 다리가 없는데 그것을 달려온다고 묘사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저 유령처럼 미끄러져 내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덮쳐올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주하는 게벨의 시선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담담히 검을 세울 뿐이었다. 아이작은 게벨과 등을 마주 댄 채 긴 숨을 내뱉었다.

'촉수는 쓸 수 없지만... 촉수처럼.'

아이작은 지힐렛을 처치할 때 썼던 상급 검술을 떠올렸다. 정확한 동작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마치 스킬처럼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몸에서 여덟 개의 촉수 팔이 넘실거리며 솟구쳐 나오는 것을 상상했다. 상상 속의 촉수들은 단숨에 유령 말의 돌진을 저지하고, 머리를 베고, 심장을 후벼파고, 왈라이카 사냥꾼을 끌어내리고 팔다리를 뜯어내고,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그리하여 놈들의 부정한 피로 성역을 더럽힌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아이작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

아이작을 향해 달려가던 왈라이카 사냥꾼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여리게만 보였던 아이작에게서 말도 안 되는 괴이한 기세가 느껴졌다. 왈라이카 사냥꾼의 머리에 갑자기 자신이 말도 안 되는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논리적인 생각이 스쳤다.

'붉은 성배시여!'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그가 비명을 내뱉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음 순간 왈라이카 사냥꾼은 땅에 머리부터 처박혔다. 힘없이 바닥을 구르던 왈라이카 사냥꾼은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곧 자신이 머리통만 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잠시 아이작의 실루엣이 흐려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마치 여덟 개의 톱날들을 든 것처럼 그의 몸을 으스러뜨리듯 찢어발기며 스쳐 지나갔다.

사냥꾼의 몸은 이제 어설프게 형체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불길하고 흉한 검술이었다.

'바르바리들의 영역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검술이... 어떻게 빛의 법전 영토에?'

왈라이카 사냥꾼은 이 말도 안 되는 짓에 항의하듯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제 그의 목은 목소리를 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였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아이작도 잘린 머리통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굉장한 공복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아... 지힐렛을 먹어두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군.'

공복감은 심리적인 것일 뿐, 아직 살점 저장고에는 고기가 적잖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방금 펼친 상금 검술이 강력한 만큼 여러 번 쓰기 힘든 기술임은 분명했다.

[상급 성기사 검술 숙련도 상승!(Lv 2)]

[조합된 상급 검술의 이름을 정해주세요.]

겨우 두 번 썼을 뿐인데 레벨이 올랐다. 아이작은 저번에도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아발란체 검술이라고 지었잖아? 그러면....'

촉수 검술이라고 할까 했지만 남에게 소개할 때 민망해질까 싶어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이작 검술이라고 하는 것도 민망했다.

'이삭 검술. 그리고 여덟 개의 검흔이 남으니까 여덟 갈래라고 하지 뭐.'

지금부터 이 동작은 '이삭 검술'의 '여덟 갈래' 동작이다. 아이작은 그렇게 정했다.

[이삭 검술: 여덟 갈래(A)가 완성되었습니다.]

아이작은 그 동작이 스킬처럼 머릿속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포만감을 소모하는지도 깨달았다.

아이작은 온몸이 뻐근함을 느끼면서 게벨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쓰러뜨릴 정도라면 게벨도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을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본 것은 예상 외의 것이었다.

"게벨 씨!"

붉은 망토가 너울거리는 늙은 왈라이카 사냥꾼이 게벨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있었다.

뱀파이어 공작, 헤인켈 굴마르였다.

게벨도 헤인켈의 가슴팍을 찌르고 있었지만 힘이 더 이상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헤인켈은 게벨을 끝장내려는 듯 어깨에 힘을 주었지만, 불현듯 등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나방의 교리를 사용한 이솔데였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이솔데가 헤인켈의 등을 찔렀다. 깊게 파고든 심판의 검이 맹렬한 열기를 피워올리며 헤인켈의 살과 피를 태웠다. 이솔데가 힘껏 검을 뽑아 내자 피보라가 튀면서 헤인켈 공작의 배부터 옆구리까지 길게 찢어졌다.

29화. 인간사냥꾼 사냥 (3)

헤인켈이 창을 놓고 안개처럼 미끄러지며 물러났다.

창이 피 먼지가 되어 사라지자 게벨은 휘청거리며 무너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티고 섰다.

누가 봐도 헤인켈의 피해가 더 심했다. 하지만 헤인켈은 태연하게 게벨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게벨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헤인켈의 상처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빠르게 살점을 잇기 시작했다.

"부하의 몸속에 숨어있다가 튀어나왔는데도 오히려 반격을 하다니... 대응이 빠르군, 성기사. 제대로 갑옷을 입고 기적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어려운 상대였겠는걸."

헤인켈은 드러내 놓고 나타나지 않았다. 제 부하의 가죽 속에 몸을 숨기다가, 근접했을 때 몸속에서 튀어나와 공격한 것이다. 형태의 변환이 자유로운 뱀파이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게벨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게벨이 기적을 쓴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가 성기사 직위를 내려놓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빛의 법전이 그에게서 기적을 거둬갔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던 탓이다.

헤인켈의 시선이 아이작에게 잠시 머물렀다.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담긴 눈빛이었다.

오히려 그는 경계심 담긴 시선을 이솔데에게로 돌렸다.

"아궁이 짐승을 소환해라, 이단심문관. 아니면 당장 죽을 테니."

"...그리고 주인께서 틈새 밖의 빛을 길들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이솔데의 고함 같은 기도문이 터져 나온 순간, 계곡에서 밤이 사라졌다. 아궁이 짐승이 다시 한번 그 잿더미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헤인켈 굴마르 역시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녹아내리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강대해도 뱀파이어가 이 광휘 아래서 버틸 수는 없었다.

"그게 너희 죽음을 조금은 늦춰주겠지...."

이내 헤인켈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밝은 빛 아래서 아이작은 게벨의 상태를 서둘러 살폈다.

상처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사냥감'의 피를 많이 흘리게 하는 것을 부도덕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다.

게벨 역시 외상은 적었지만 심한 내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다.

"아이작 씨!"

이솔데가 다가왔다. 그녀가 불러낸 아궁이 짐승은 작은 나방 정도의 크기였다. 일부러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작은 것을 부른 것 같았다.

"죄송해요. 설마 자기 부하의 몸속에 숨어있다가 몸을 산산조각 내면서 나타날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게벨 씨와 아이작 씨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은 이솔데의 표정을 보고 헤인켈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게벨은 이제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면 이제 이단심문관이 아궁이 짐승을 불러내도 헤인켈을 일시적으로 쫓아낼 뿐이다. 이솔데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아궁이 짐승을 돌려보낸다면 헤인켈이 다시 습격해올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일행을 모두 죽이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헤인켈이 한가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제가 남아서 유인하겠습니다. 게벨 씨를 데리고 계곡을 빠져나가 주세요."

이솔데는 아이작의 말에 경악했다.

"아이작 씨!"

"희생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두가 살아 나갈 방법이었다.

아이작은 헤인켈에 대해 강한 분노와...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저는 이단심문관님은 몰라도 게벨 씨는 꼭 살려 보내야겠습니다. 제게 생각이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세요. 둘이 같이 나가세요."

***

후우우우욱.

계곡의 으슥한 틈 사이로 붉은 안개가 밀려들었다. 이내 붉은 안개는 한곳에 모여 뭉치다가 이내 헤인켈 굴마르 공작의 모습으로 변했다.

심판의 검에 찔린 부위는 아직 낫지 않고 부글거리며 치유가 이어지고 있었다. 권능이 직접 맞닿은 부위는 치유가 어려웠다.

헤인켈은 고개를 돌렸다. 아궁이 짐승의 광휘가 닿지 않는 계곡의 은밀한 어둠 속에 붉은 눈동자들이 빛나고 있었다.

헤인켈은 그 어둠 속의 눈동자들에게 말했다.

"준비는 끝났다. 아궁이 짐승이 사라지면 모조리 죽여라."

"예, 공작님."

12명의 사냥꾼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원 왈라이카 사냥꾼들이었다.

헤인켈이 손짓을 내리자 사냥꾼들이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별다른 작전 지시는 없었다. 그들에게 이런 암습은 끼니를 때우는 것만큼 늘상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헤인켈 역시 이번 일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평상시와 달리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헤인켈은 자신이 뭘 놓쳤는지 돌이켜보았다.

'게벨이라고 했던가? 실력이 제일 뛰어난 놈이었는데 간을 찔렸으니 더 이상 싸우지는 못할 터. 이단심문관은 아궁이 짐승을 빼면 실력 자체는 사냥꾼 다수를 상대하기 힘들어 보였지. 그러면....'

헤인켈은 그 곱상하게 생긴 기사 수련생을 떠올려 보았다.

밝을 때에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어둠 속에서 마주친 그 얼굴은 낮보다 훨씬 또렷하게 보였다. 확실히 기억에 남을 만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검술 또한 보통은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뿐이었다.

헤인켈은 자신이라면 10초도 지나기 전에 거꾸러뜨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물론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정정당당한 대결 따위는 변태나 하는 짓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의 이야기였다.

자신이 빠지더라도 사냥꾼들이 차륜전을 벌인다면 그 수련생은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터였다.

'그러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동물적인 감각.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본능적인 감각이 그에게 강한 경고를 내리고 있었다.

육신의 쾌락과 감각을 중요시하는 붉은 성배 클럽은 본능 또한 중요하게 여겼다.

헤인켈은 쓸데없는 불안감이라고 흘려넘기지 않았다. 붉은 성배가 그에게 내린 피의 경고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관."

헤인켈 곁에는 떠나지 않은 두 명의 부관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이작이라는 놈이 있다. 함부로 상대하지 말고, 팔다리는 잘라도 좋지만 가급적 생포해라."

헤인켈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계집보다 이쁘장하게 생겼으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둘을 보내주는 대신 인질로 잡히라고 하면 받아들일지도 모르지. 가서 지시를 전달해라. "

***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어둠 속에서 아이작 일행을 추적하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아궁이 짐승이 등불처럼 그들의 위치를 표시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그 광휘를 마주했다간 눈이 타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냥꾼들이 직접 아이작 일행을 관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빛이 옅어지는 범위에서 포위하며 빠져나가는 자가 없도록 세심하게 추적했다.

하지만 그 추적도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아궁이 짐승은 이미 사라질 것을 강제로 붙들어 맨 것처럼 서서히 빛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수화로 신호를 보냈다.

어둠 속에서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안개처럼 흐릿한 실루엣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끼리는 대낮처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이단심문관도 지칠 대로 지쳤을 테니, 전력이 되기 힘들 것이다.'

'아이작이라는 수련생은 가급적 생포하라.'

싸울만한 전력이 하나밖에 없다면 사냥은 더 쉬워질 것이다.

이내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하자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석궁에 화살을 장전했다.

이윽고 아궁이 짐승의 광휘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어둠에 잠긴 계곡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만 조용히 들릴 뿐이었다.

사냥꾼들은 일제히 계곡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작 외에는 모조리 화살 꼬치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화살 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맸다.

"무슨...."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은 아이작 하나뿐이었다.

아이작은 별다른 설명 없이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응시했다.

"이렇게 단순해서야 사냥꾼이라고 할 수 있나?"

"속았다! 놈이 아궁이 짐승을 미끼로 썼다!"

아궁이 짐승이 없으면 한밤중에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상대할 방법이 없다. 유일한 구명줄이니 당연히 같이 이동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이작은 아궁이 짐승을 오히려 미끼로 쓴 것이다.

그 사이 게벨과 이솔데는 나방의 교리를 써서 먼저 계곡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 사이에서 긴급한 눈짓이 오갔다. 순식간에 반으로 인원을 나눠 여섯 명이 이솔데와 게벨을 추적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여섯 명은 아이작을 생포하기 위해 다가갔다.

"어차피 팔다리를 잘라서라도 생포하기로 한 놈이다. 알아서 항복해 주니 다행이군."

왈라이카 사냥꾼 중 한 명이 들으라는 듯 비웃으며 쏘아붙였다. 원래 그들은 사냥감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지만, 속았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화가 나 있었다.

그들은 아이작이 미끼이자 인질이 되기 위해 남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비웃었다.

"항복?"

"반항하면 칼부림 한 번에 손가락을 하나씩...."

"아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비명이 터져 나왔다. 6명의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게벨과 이솔데를 쫓아간 방향이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정숙을 덕목으로 삼기 때문에 비명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그들은 당황해하면서도 아이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직 기사가 살아있는 모양인데, 어차피...."

하지만 비명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고 여러 번, 연달아 터져 나왔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씨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들이 당하고 있다는 것보다 그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한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비명은 설령 피해자의 것이더라도 충분히 천박한 것이다.

오직 조용히 흐르는 피와 그 피를 삼키는 목울대의 소리만이 한밤에 허락되는 예절이었다.

아이작은 삐딱하게 서서 물었다.

"무슨 상황인지 안 봐도 되겠어?"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상황 파악만을 위해 두 명의 사냥꾼을 더 보냈다. 네 명의 사냥꾼만으로도 아이작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심산이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른다는 것. 그게 네놈들이 여기서 죽는 이유야."

자꾸 말을 끊고 들어오는 아이작의 말투에 사냥꾼은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작은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네놈들이 어디서부터 언제까지 쫓아오는지 계속 지켜봐 왔다. 딴 데로 안 새고 멍청하게 쫄래쫄래 따라오는 모습도 봤지. 너희는 계속 내 수중에 있었어."

헛소리.

왈라이카 사냥꾼은 비웃으며 아이작을 향해 덮쳐들었다.

하이에나 떼가 동시에 사냥감을 물어뜯듯이,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저마다 다른 팔다리를 노리고 덮쳤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작의 팔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작의 팔은 순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휘어져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게 무엇인지도 깨닫기 전에, 촉수가 놈들 중 하나의 머리를 꿰뚫었다. 왈라이카 사냥꾼의 몸뚱이가 망가진 인형처럼 휘적거렸다.

아이작은 바로 채찍처럼 촉수를 휘둘렀다. 동료가 당하는 모습을 보고 대비하던 사냥꾼은 검으로 촉수를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촉수는 그대로 그를 휘감아 버렸다.

그리고 가득 붙어있는 빨판마다 달린 이빨들이 놈의 살갗을 물어뜯었다.

"끄아아아아악!"

그들이 그렇게 천박하다고 여기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그대로 놈을 팽이처럼 휘둘러 버렸다.

물고 있던 살점들이 일제히 뜯기면서 사방에 선혈이 튀었다. 정신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얼굴이 동료의 피로 흠뻑 젖었다.

아이작은 촉수로 사냥꾼을 움켜쥔 채 다른 한 놈을 향해 철퇴처럼 휘둘렀다. 사냥꾼은 허둥지둥 팔을 들어 올려 막으려고 했지만, 충분한 무게와 속도가 합쳐지면 방어 동작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쾅. 굉음과 함께 두 사냥꾼은 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뱀파이어'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흡혈'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흐릿한 그림자(임시)'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임시 특전은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아이작은 새로 획득한 '흡혈' 특전을 이용, 한 덩어리로 합쳐진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체액을 피부로 흠뻑 빨아들였다.

놈들의 몸통이 풍선처럼 짜부라들었다.

"피를 빤다는 게 이런 맛이군."

어둠 속에서 아이작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왈라이카 사냥꾼은 자신이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빛의 법전 수도원의 수련생이라고?!'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저건 빛의 법전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좀 더 어둡고 포악한 영역, 원시적이고 혼란한 근원으로부터 기어 올라온 존재였다.

어둠 속에서 아이작이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눈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여긴 나의 성역(聖域)이다. 발을 잘못 디딘 대가를 치러야지."

30화. 인간사냥꾼 사냥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