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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30-40

30화. 인간사냥꾼 사냥 (4)

'4명 정도는 순식간에 정리되는군.'

촉수의 힘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강했다. 아이작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촉수는 이름 없는 혼돈이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기적'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성역에서는 모든 기적의 효과가 강화된다.

아이작이 지힐렛을 처치하고 얻은 성역 효과는 수도원 인근인 이 계곡까지 미치고 있었다. 덕분에 아이작은 촉수가 평소보다 훨씬 강력해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뱀파이어건 뭐건 사람의 형태를 먹는 건 내키지 않지만....'

쥐를 먹을 때 그러했듯이, 이건 촉수가 먹는 것이다. 아이작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사냥꾼을 향해 다가갔다. 마지막 한 놈은 전의를 잃은 듯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다.

붉은 성배 클럽의 성기사라고 할 수 있는 왈라이카 사냥꾼이지만, 어둠 속에서 촉수를 꿈틀거리는 미지의 존재를 눈앞에 두고서는 차분하기 어려웠다.

"사, 살려주십시오."

왈라이카 사냥꾼은 칼을 떨어뜨리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심문을 위해 당장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심문이 끝날 때까지는 살아있을 테니 걱정 마라."

"뭐, 뭐든 말씀드릴 테니...."

"네가 하는 말을 어떻게 믿어?"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놈의 멱살을 쥐고 혼돈의 눈을 발동시켰다.

[카샤 핀스크(B) / 공포]

[직업: 왈라이카 사냥꾼(C+)]

[능력: 탈피의 교리, 심장 찬가]

이름이나 능력은 아무래도 됐고, 아이작은 주변의 눈도 없겠다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위해 집중했다.

["이건 대체 뭐지? 이런 괴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어. 역병신을 죽인 게 설마 이놈인가? 이 정도라면 굴마르 공작님이 오시더라도...."]

"지힐렛하고 역시 뭔가 관계가 있었군. 무슨 수작을 꾸미던 중인지 자세히... 아니다, 됐다. 본인이랑 직접 대화해 봐야겠군."

아이작은 내면을 들여다보던 왈라이카 사냥꾼을 내팽개쳤다. 놈은 무슨 상황인가 하며 바닥을 기다가 이내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붉은 안개가 바닥에 엎드린 그의 팔다리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 잠시만 공작님! 이건!"

놈은 변명을 끝내기도 전에 퍼석 하는 소리와 폭발했다. 뼈와 살점의 파도가 아이작을 덮쳤다. 날카로운 뼛조각은 살갗을 벨 듯 날카로웠지만 아이작은 오히려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어디 똑같은 수작을!"

여덟 갈래 동작이 발동되면서 피보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피보라 뒤쪽에서 아이작을 덮치려던 헤인켈은 아슬아슬하게 검격을 피했다. 그러나 스친 것만으로도 잡아 뜯어내는 듯한 공격이 순식간에 그의 살점을 긁어냈다.

***

콰드드득, 우득!

피와 살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공격을 피한 헤인켈은 떨어진 곳에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여덟 갈래는 계곡의 바위들에 검흔을 새길 정도로 선명한 흔적을 남겼지만, 헤인켈의 가슴에는 오직 두 갈래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톱날로 긁은 듯한 상처에서는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기괴한 검술을 쓴다 했을 때 알아봐야 했는데."

헤인켈이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이미 멸망한 이교(異敎)의 기적을 쓰고 있군. 대체 그 신의 이름을 어디서 알아낸 거냐? 아는 놈은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아냈냐'라고 물어도 아이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지금으로선 어떻게 이름 없는 혼돈과 소통하고 그 힘을 빌리고 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캐릭터 선택할 때 골랐다고 하면 믿어주려나?'

아이작은 촉수가 꿈틀거리는 왼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아는 모양이지?"

"너야말로 그게 뭔지 알고 있냐? 하긴, 모르니까 쓰고 있겠지. 무지한...."

"쉿."

아이작은 그를 향해 손가락을 올리며 침묵시켰다.

"내가 묻지도 않은 설정 떠들지 말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 거머리 같은 새끼야. 이게 뭐냐고."

헤인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헤인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인켈 굴마르(S) / 정상]

[직업: 왈라이카 공작(S)]

[능력: 성배의 교리, 붉은 탄원, 비탄의 식, 쾌락의 비밀]

공작은 역시 공작이었다.

놈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붉은 성배 클럽이 가질 수 있는 기적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이미 붉은 성배 클럽에서 엔딩을 본 적 있는 아이작은 헤인켈 굴마르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하지만 질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이작은 촉수가 얼마나 강한지 아직 끝을 보지 못했지만, 헤인켈이 칼센보다도 강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촉수한테 맡겨서 죽여 버려도 곤란하지....'

마지막 남은 왈라이카 사냥꾼을 죽여 버렸으니 이제 놈을 심문해야 했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에 집중해 좀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혼돈의 권능이라고? 돌아버리겠군. 설마 혼돈신을 직접 모시는 것은 아니겠지? 어디 금서를 훔쳐보거나 변방의 괴물에게 몸이 잠식된 걸 텐데, 아니, 제발 그래야 하는데... 예쁘장한 얼굴이 아깝게 됐군.']

아이작이 헤인켈의 내면을 들여다보던 중, 그가 입을 열었다.

"네가 쓰는 힘의 정체에 대해 알고 싶나? 그건 수백 년 전에나 볼 수 있던 힘이다. 요즘 어린 것들은 그 힘이 뭔지도 모를 거야. 죽느니만 못한 꼴로 살고 싶지 않다면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아이작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헤인켈을 보면서 어이가 없어졌다.

헤인켈이 촉수를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했다. 놈은 은근슬쩍 아이작에게 촉수를 쓰지 말라고 권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이게 위험하다고? 내 피 빨겠다고 덤비는 놈들보다는 건강에 더 좋은 거 같은데?"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가 문제지. 신앙이 없는 바르바리들은 죽어서 천국도 지옥도 못 간다. 그런데 네놈은 괴물을 섬기고 있지. 그런 괴물이 다스리는 천국은 어떤 형태겠느냐?"

헤인켈은 약간 초조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항복해라. 어차피 너 같은 잔챙이는 관심 없어. 내 목적은 이단심문관이다. 어차피 네가 몸에 그런 걸 품고 있다는 걸 알면, 이단심문관은 너도 죽이려고 할 거다. 한배를 탄 셈이니 너는 살려줄 수도 있다. 아니, 나와 왈라이카로 가자."

아이작은 이색적인 제안에 웃고 말았다.

"왈라이카로?"

"너 정도의 미모라면 붉은 성배께서도 기뻐하실 거다. 원한다면 내 양자로 삼아줄 수도 있지."

왕족의 핏줄을 주겠다는 말이다.

헤인켈이 같잖은 소리로 자신을 회유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작은 그의 내면을 보고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인켈은 자신을 양자로 삼아서라도 데려가고 싶어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외모 때문에.

['붉은 성배께서는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시지. 하자는 있지만 이 정도 아이라면 내게 은밀한 비밀 지식을 하나 더 베풀어주실지도 모른다.']

어이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냥 어이없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붉은 성배의 신인 '무희'는 생명과 아름다움, 은닉의 권능을 가졌으며 본인 또한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있었다.

때문에 아이작은 그 매력 수치만으로도 붉은 성배 클럽에서 한자리 꿰찰 수 있었다.

사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공작의 핏줄을 잇는 것은 붉은 성배 클럽에서 최상위 스타트가 될 테니까.

아이작이 네필림이라는 점도 붉은 성배 클럽에서는 큰 단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아이작은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굳이 내가 너한테 피를 구걸할 필요가 있을까?"

아이작이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헤인켈이 굳은 표정으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혀를 차면서 게벨을 찔렀던 것과 같은 창을 꺼내 들었다.

"좋다. 말로 해서 안 된다면 힘을 써야겠군. 네놈들은 정정당당한 대결을 좋아하지? 장단을 맞춰줄 테니 한번 재주를 보여봐라."

그러면서 헤인켈은 조건을 더 붙였다.

"서로 기적은 배제하도록 하자. 내가 기적을 쓰면 네 놈은 형체도 안 남을 테니...."

"쫄아서 하는 소리면서 무슨...."

촉수를 경계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거짓말도 아니었다. 헤인켈이 가진 기적들은 그만큼이나 막강했다. 자칫 잘못하면 둘이 함께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헤인켈은 창의 명수지.'

기적과는 별개로 상급 검술에 비견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거리에서는 검보다 창이 유리하다. 그러면서 배려하는 척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헤인켈은 어서 덤비라는 듯 자세를 낮추고 창을 길게 잡았다.

아이작이 결투를 받아들이는 듯 양손으로 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왼손에서 촉수가 나오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걸 본 헤인켈의 입가의 꼬리가 올라갔다.

'멍청한 놈.'

신호도 없이 바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애당초 헤인켈은 정정당당하게 싸울 생각 따윈 없었다. 정정당당한 결투는 변태나 하는 짓이니까.

헤인켈은 아이작이 첫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창을 던졌다. 아이작은 그 목표 지점에서 벗어났지만, 창은 손을 떠난 순간 피 먼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이작이 움직인 방향을 따라 새로운 붉은 창이 생겨났다.

콰득!

섬뜩한 소리가 순식간에 계곡에 울려 퍼졌다.

아이작은 헤인켈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헤인켈은 미소를 지었다. 길게 드러난 입가의 송곳니가 반짝거렸다.

이내 그 이빨을 따라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헤인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의 목과 척추를 꿰뚫은 이빨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악취와 스멀거리는 살점들의 움직임으로 어마어마한 덩치의 괴물이 그의 몸속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는 것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악취 속에는 익숙한 냄새도 섞여 있었다.

그가 앞서 보낸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피 냄새였다.

헤인켈이 당하면서 어이없는 방향으로 날아간 창은 아이작 근처에도 스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 정체불명의 괴물은 뭐고, 왜 자신을 공격한 건지. 그리고 아이작은 왜 마치 이 괴물이 자기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가오는 건지.

헤인켈이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이 개... 정정당당한... 결투에서...."

"뭔 소리야? 정정당당한 결투는 변태나 하는 짓이지."

***

"이 괴물은... 네가 숭배하는...?"

헤인켈의 첫 번째 추측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이작의 몸을 잠식하고 있는 변방 괴물의 본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뭐야, 모르나? 아, 얼굴이 안 보이는구나."

아이작은 헤인켈의 얼굴을 쥐고 뒤로 돌려버렸다. 우드득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아이작은 이 정도로 헤인켈이 죽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지?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너는 알아봐야지."

그것은 지힐렛의 사체를 아이작이 다 먹어 치우는 대신 '혼돈의 자손'으로 기생시켜 만들어 낸 짐승이었다. 이솔데를 계곡 안쪽으로 끌어들인 정체불명의 짐승이기도 했다.

지힐렛의 외형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붉은 살점과 넘실거리는 촉수들로 이루어진 그것은 그저 여전한 악취를 풍기며 아이작의 명령에 순종할 뿐이었다.

지힐렛의 사체를 모태로 삼아서 그런지 좀 더 복잡한 명령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솔데와 게벨 일행 근처를 지키면서 찾아가는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다 죽여 버린다던가.

'원래 신의 사체를 모태로 삼아서 강할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성역 근처라 그런지 말도 안 되게 세군.'

이제는 아이작의 개가 된 지힐렛은 약하지만 신성마저 가지고 있었다. 천사나 아궁이 짐승처럼 일종의 신수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다. 다만 천사나 아궁이 짐승은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반면, 지힐렛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건만 충족된다면 계속 남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막대한 양의 고기를 섭취해야 한다든가.

와득.

지힐렛은 이미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열 명 가까이 먹어 치웠을 텐데도 여전히 배가 고픈 듯 헤인켈의 살갗에 이빨을 더 깊이 박아 넣었다. 입에 흘러들어오는 피가 식욕을 자극하는 듯했다.

아이작은 지힐렛을 자제시켰다. 아직 헤인켈에게 물어볼 것들이 많았다.

아이작은 보랏빛 눈동자로 헤인켈을 응시했다. 그의 왼쪽 눈은 이미 혼돈의 눈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촉수가 넘실거리며 넘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내 성역을 침범하고 내 계획을 망칠 뻔했다. 그러니 심판을 받아야지."

그 말을 들은 순간 헤인켈이 입을 열었다.

"부... 붉은 성배의 화신이셨나이까? 저의 주제넘은 월권을 심판하시고자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보내신 겁니까?"

31화. 인간사냥꾼 사냥 (5)

"뭐라고?"

아이작은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본 아이작은 헤인켈이 곧 무슨 착각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지힐렛에게 느껴지는 미약한 신성, 아이작의 말도 안 되는 힘.

그리고....

['얼굴을 봤을 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저 외모는 붉은 성배께서 내려보낸 성체임이 틀림없다! 내가 전쟁놀음에 빠져 그분의 계획을 망치고 있었구나!']

아이작의 외모가 그 증거였다.

아무튼 헤인켈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헤인켈은 왈라이카 왕족의 피, 그러니까 붉은 성배로부터 직접 피를 받아 마셨다.

즉, 신의 얼굴을 알고 있다.

'붉은 성배의 신, 무희도 네필림 출신이지. 아마?'

붉은 성배 클럽에서라면 네필림 출신이 단점이 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신은 두 종류로 나뉜다. 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인식과 관념 속에 자연스럽게 태어난 고대 신들, 그리고 대략 천여 년 전 빛의 법전이 '빛의 시대'를 열면서 태어나기 시작한 필멸자 출신의 신들.

아홉 신앙은 바로 그 필멸자 출신의 신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서 붉은 성배 클럽이 숭배하는 '무희'가 네필림 출신이라는 것은 딱히 숨겨진 이야기도 아니다.

무희는 천사였던 아버지를 죽이고 심장을 꺼내 먹는 의식을 통해 신이 되었다. 그 막장드라마 같은 일을 통해서 무희는 붉은 성배의 신이 되었고, 영원한 아름다움과 생명을 관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사연이 있었으니 같은 네필림의 외모를 가진 아이작을 보고 헤인켈이 오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들킬 수도 있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 헤인켈의 오해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하더라도 알아볼 수 있으니....'

아이작은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다른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없느냐?"

"이, 이 근처에는 저희가 전부입니다. 성, 아니, 예지, 아니, 천사님...?"

헤인켈이 아이작을 가리킬 명칭을 찾지 못해 헤매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네가 이미 나를 알아보지 않았느냐. 또 다른 시험이 필요한가?"

아이작은 헤인켈이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언급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붉은 살점의 예지자는 붉은 성배 클럽의 천사 중 한 명이다.

교단마다 신이 따로 있듯이, 천사들도 따로 있다. 소규모 교단인 붉은 성배 클럽도 마찬가지다.

붉은 성배 클럽의 명천사인 '붉은 살점의 예지자'는 피부가 벗겨진 외형에 세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존재였다. 무슨 가장 생명력 넘치고 본질적인 매력을 드러내는... 어쩌구한 설정이었는데 아이작이 보기에는 그냥 그로테스크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는 지금의 지힐렛의 외형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쪽도 아이작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아이작 본인이 한때 붉은 성배 클럽으로 엔딩을 본 적 있었기 때문에 그럴듯한 흉내를 낼 수 있었다.

헤인켈은 당치도 않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가 자신을 시험해 보려 했다는 것을 이미 내면을 통해 알아내고 있었다.

['내가 큰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붉은 살점의 예지자께서는 대관절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 수도원을 타락시킨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 거지?']

붉은 성배 클럽을 신앙으로 숭배하는 국가는 왈라이카뿐이다. 하지만 식인과 흡혈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름다움과 영생을 위해 몰래 신앙을 바꾸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대상은 대개 귀족이나 장군 같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

헤인켈도 처음에는 아이작이 이 수도원을 타락시키기 위해 숨어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체 이 수도원을 타락시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헤인켈이 벌써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을 보고 결심했다.

"고개를 들어라."

명령하기는 했지만 지힐렛이 직접 찍어 누르고 있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 헤인켈은 그제야 아이작의 얼굴을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헤인켈은 그 얼굴을 마주하자 피어올랐던 의심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막막한 공포감을 느꼈다.

새빨간 선혈에 물든 아이작의 모습은 아버지의 심장을 삼킨 무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헤인켈은 겨우 싹트려던 의심의 씨앗마저 완전히 밟아 버렸다.

'네필림의 매력... 너무 잘 먹히는 거 아니야?'

아이작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신뢰를 주는 외모, 사기라는 걸 알아도 속아 주는 외모라는 게 이런 걸까. 하지만 아이작은 그가 가지고 있는 일말의 의심까지 걷어 내기로 했다.

"헤인켈 굴마르."

"예, 예."

"네가 감히 붉은 성배의 허락도 없이 불사 황제를 돕고도 용서받을 성싶었느냐?"

아이작은 불사황제를 언급한 순간 그가 심리적으로 완전히 굴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것까지 알아내시다니, 역시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분명하시다. 내 욕심이 내 명줄을 끊는구나. 이 의뢰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굴복당한 헤인켈의 정신은 완전히 열렸다.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깊은 내면의 감정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아이작은 그가 왜 이렇게 쉽게 동요한 건지 알게 되었다.

"네 입으로 네 잘못을 실토해 보아라. 얼마나 뻔뻔한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들어야겠다."

지힐렛은 헤인켈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헤인켈은 바닥에 바싹 엎드린 상태로 자신이 아는 바들을 쏟아 냈다.

***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도 헤인켈의 말은 논리정연했다.

허나 그다지 아이작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은 아니었다.

불사 교단은 헤인켈에게 한가지 의뢰를 했다. 주기적으로 사제를 보내면 그들이 국경을 넘어 빛의 법전이 지배하는 영토 쪽으로 넘어가게 돕는 것.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군.'

왈라이카 왕국은 불사 교단과 같은 '어둠의 세력'으로 분류되지만 사실 신들끼리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 뼈만 남은 언데드들과 영생을 찬미하는 탐미주의자들이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다만 강대한 흑제국의 영토가 더 가까워서 정치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을 뿐이었다.

헤인켈 굴마르는 이 영향력을 원해 불사 교단을 도왔고, 사제들의 밀입국과 후속 조치들을 도왔다. 그러던 와중 바로 이곳에 있던 불사 교단 사제와 연락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고 상황을 알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도울 상황이라면 돕고, 이도 저도 아니라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불사 교단이 왜 고대신들을 건드리는지는 헤인켈도 모르는 거군... 어쨌든 2년 뒤 여명군 원정 때 일어난 고대신들의 부활이 불사 교단의 전략 때문이었던 건가?'

네임리스 카오스를 플레이할 때 실질적으로 게임이 시작되는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2년 뒤, 여명군이 조직되면서부터다. 그때 대륙 곳곳에서 고대신들이 부활하는데, 사실 세계관 전체에 영향을 줄 만한 영향은 없었다.

그저 필드 보스나 중간 보스가 늘어나는 정도의 느낌뿐이었다.

천사조차도 상대하기 힘든 아홉 신앙에 비하면 고대 신앙은 이제 조금 강한 괴물에 불과했으니까.

아이작은 헤인켈에게서 뽑아낼 정보는 다 뽑아냈다고 생각하고 놈의 처분을 고민했다.

녀석이 지금 당장 아이작에게 순종하는 것은 죽음의 위기,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힘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서 그 카리스마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즉, 이 장소를 벗어나면 의심이 다시 생길 확률이 높았다.

"너는 내 계획을 망칠 뻔했다."

"며,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면 책임을 져야지."

헤인켈은 그 말에 입술을 깨물며 목을 옆으로 젖혔다.

"저를 마셔주소서. 제 육으로 만찬을 즐기시고 연회에 제 살점을 올려주십시오!"

"네 부정한 살점이 연회에 올라올 가치가 있을 것 같으냐."

아마 헤인켈은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서 그런 말을 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굳이 불필요한 용서를 하는 대신, 헤인켈의 목에 촉수를 꽂아 넣었다. 헤인켈의 얼굴에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경악이 스쳤다.

그러나 촉수는 순식간에 그의 피를 듬뿍 빨아들였다.

['헤인켈 굴마르(S)'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매력 능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흡혈' 특전 효율이 강화됩니다.]

['붉은 탄원(S)'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헤인켈의 피를 전부 다 먹어 치우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이작이 헤인켈이 붉은 성배로부터 나눠 받은 왕족의 피까지 먹어 치운 순간, 난생 처음 느껴 보는 쾌락이 찾아왔다.

아찔한 감각에 아이작의 의식이 몽롱해졌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때 이름 없는 혼돈의 알림이 들려오고, 아이작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아니, 세상에. 이거 위험한데?'

아이작은 방금 자신이 겪은 것이 흡혈의 쾌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쪽에 내성이 없는 아이작에게는 마약이나 다름없는 쾌감이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의 알림이 들려온 순간 아이작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본래 상태를 되찾았다.

겪어 본 적 없는 강력한 쾌락이었지만 다시 겪고 싶진 않았다.

자기 자신을 잃는 감각은 쾌락보다 끔찍했으니까.

헤인켈은 붉은 성배의 피를 빼앗기자 이내 형태를 잃고 먼지가 되어 바스러졌다.

아이작은 부스러지는 헤인켈을 보며 약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칼센도 그렇고 이놈도 원래 2년 뒤 여명군이 조직되면 꽤 높은 자리 하나 차지하는 인물인데... 여기서 어이없이 죽는군. 이제 어떻게 되려나?'

더 위험한 놈이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지만, 놈을 살려 둘 수도 없었다. 놈이 의심하는 것도 의심하는 거지만 헤인켈 굴마르 같은 거물을 포식할 기회가 다음에 또 있으리란 법이 없었다.

'포식으로는 후천적인 능력들을 얻을 수 없나 보군.'

아이작은 헤인켈을 포식하고 얻은 특전을 살펴보았다.

매력 능력이 지금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지금도 왈라이카의 공작이 껌뻑 넘어가는데 더 강해지면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힘들었다.

'사이비 교주라도 해야 하나?'

다만 '붉은 탄원' 스킬을 얻은 것은 엄청난 소득이었다.

손을 펼치자 손가락 끝이 붉은색의 안개로 바스러졌다. 헤인켈이 자주 활용하던 붉은 안개가 바로 이 능력이었다.

놈이 가지고 있던 다른 능력들은 모두 붉은 성배에게 허락을 받아 배운 기적들이다. 하지만 붉은 탄원만큼은 왕족의 피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이었기 때문에 포식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붉은 탄원을 사용해 보았다.

그의 몸이 순간 형태를 잃으면서 순식간에 이동하고, 수직에 가까운 벽까지도 타고 올라갔다. 헤인켈처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은 어려울지 몰라도 적에게 순간 혼란을 주거나 잠입할 때에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도 포만감을 소모하는군....'

정확히는 피, 아니, 체액을 소모하는 것 같았다. 순간 아이작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니, 설마 뱀파이어가 된 건 아니겠지?'

피를 빨아먹고 안개로 변신하는 것이 영락없는 뱀파이어다. 하지만 그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붉은 성배의 저주는 더 강한 저주로 인해 침범하지 못합니다.]

"...."

더 강한 저주라는 것은 아마도 이름 없는 혼돈으로 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자신이 흡혈귀가 되는 꼴은 면했지만 대신 여전히 촉수 괴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인지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아이작은 바스러진 헤인켈의 몸에서 쓸만한 물건이 없는지 뒤져 보았다.

대부분의 장비들은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금방 풍화되어 사라졌지만, 먼지 더미 속에서 눈에 띄는 물건을 발견했다.

'검?'

아이작은 먼지 더미 속에서 얇고 좁은 형태의 검을 발견했다. 별다른 장식 없이 무거운 묵색을 띠고 있는 검이었다.

'헤인켈이 이런 무기를 쓰는 건 본 적 없는데?'

아이작은 의아해하며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아이작의 앞에 무기에 관한 정보가 나타났다. 그걸 본 아이작은 순간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성물?"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입 밖에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 여기서 얻어서는 안 되는, 그리고 얻을 수도 없는 무기였다.

32화. 성배기사 (1)

성물.

기적이 사람의 몸에 서린다면 성체라고 불리듯, 기적이 서린 물건은 성물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성물 중에서도 급이 있다.

아이작이 한때 가졌던 광휘석 목걸이도 일종의 낮은 등급의 성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눈앞에 있는 이 검은 급이 달랐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화재나 국보 같은 것으로 보관해야 할 물건이었다.

[분열 예식(EX)]

[무희가 제왕과 결별하기로 했을 때, 그 심장을 꺼낸 칼. 이 잔혹한 의식을 통해 하나의 존재가 두 명의 신으로 분열했으니, 이를 분열 예식이라 한다. 붉은 성배 클럽과 엘릴 교단의 고급 의식에 사용 가능.]

이것은 아홉 신앙인 붉은 성배와 엘릴을 탄생시킨 단검이었다.

천사가 기적을 내린 물건도 가치를 따지기 힘든데, 신과 직접 관련된 성물이라면 교단이 직접 관리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심지어 그런 성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성배기사 같은 클래스도 있지....'

성배기사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검을 발견한다면 눈이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 단검은 무기로서는 가치가 없었다. 단순히 의식용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의식에서 이 단검의 진가가 발휘된다. 강대한 기적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제물이나 기나긴 기도, 약품, 시간, 상황 등등.

하지만 이 칼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히 많은 조건들을 무시할 수 있었다.

'이게 지금 대체 왜 여기에?'

아이작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헤인켈은 단순히 불사교단을 데려다주기만 한 게 아니라 의식을 수행하는 것을 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서둘러 단검을 숨겼다.

이걸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온갖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특히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눈이 돌아가서 행방을 쫓을 것이 분명했다.

어마어마한 말썽이 일어날 가능성을 품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무섭다고 대박의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담겼다.

'헤인켈, 너... 정말 아낌없이 주는 녀석이었구나.'

아이작은 헤인켈 굴마르가 내세에서 붉은 성배의 천국에서 잘 지내길 기원했다. 피를 몽땅 빼앗기고도 천국에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계곡 너머에서 해가 뜨는 것이 보였다. 스며들어 오는 아침 햇살이 손등에 닿았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기분 좋은 햇살이었다.

***

"게벨 님,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조금만 더...."

게벨은 신음을 흘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헤인켈의 공격에는 깊은 저주가 서려 있었는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표정은 창백했고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지만 이솔데는 그를 멈추지 않고 끌고 갔다.

자길 일단 버리고 먼저 나가서 성기사단에게 구조 요청을 먼저 하라고 말했다가 뒤통수를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간 것이 새벽의 일이다. 게벨도 이제는 더 이상 이솔데를 설득하지 않았다.

그때 이솔데가 문득 멈춰 섰다. 이내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계곡을 울리며 점점 커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이내 계곡 모퉁이를 돌며 백색의 갑옷을 입은 성기사단의 말들이 자갈을 밟아 부수며 달려왔다.

선두에는 이솔데가 익히 아는 성기사가 머리통만큼이나 큰 망치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로튼해머 단장님!"

"로튼해머?"

게벨은 놀라서 중얼거리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만나선 곤란한 사람이었다.

로튼해머는 이솔데와 게벨을 발견하고 황급히 성기사단을 멈춰 세웠다. 당장은 선발대만 온 건지 성기사는 다섯 명뿐이었지만, 전원 중무장 상태에 온갖 기적과 가호로 무장하고 있었다. 로튼해머가 투구를 벗어 올리자 회색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중노년의 얼굴이 드러났다.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이단심문관님, 부관! 부상자를 치료해라."

게벨의 상태를 보고 상황의 위급함을 안 듯 로튼해머는 인사와 온갖 절차를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교도는 어디에 있습니까? 갈까마귀를 보내주시면 즉시 추적하겠습니다."

"왈라이카의 사냥꾼들이 매복하고 있었어요. 그중에는 굴마르의 공작도 있었습니다."

왈라이카 사냥꾼이라는 말에 성기사들 사이로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로튼해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가 갈까마귀의 연락을 받았을 때에는 불사 교단이라고 보고를 들어 그에 맞춰 전투준비를 해왔습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뼈뿐인 언데드를 상대하는 것과 무한정 재생하는 뱀파이어를 상대하는 방법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솔데도 자신이 경솔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서둘러 성기사단을 부르지 않았다면 지원이 늦었을 것이다.

"문제가 될까요?"

"전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로튼해머는 투구를 다시 내려쓰며 말했다.

"해가 뜨고 있으니 도망은 빨리 못 치겠군요. 이 지역 일대를 싹 정화한 후 돌아오겠습니다. 혹시 인원은 이게 전부입니까? 낙오된 인원은 없습니까?"

이솔데는 로튼해머의 말에 괴로운 표정을 했다.

"동료 한 명이 뒤에 남아 시간을 벌어주었어요."

로튼해머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막 해가 뜬 아침. 밤 동안 시간을 벌어 주었다면 동료는 어떻게 되었을지 뻔하다.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미라가 되거나, 붉은 성배의 피에 중독되어 구울이 되었거나.

후자라면 끝을 내는 것은 로튼해머의 손이 될 것이다.

로튼해머는 담담히 말했다.

"영웅적인 청년이었군요."

"저보다도 어린 청년이었는데... 차마 말릴 수가 없었어요.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한 실력과 기적까지 발휘할 수 있어서 분명 훌륭한 성기사가 되었을 텐데...."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작은 한 번도 이솔데 앞에서 기적, 특히 빛의 법전에 관한 기적을 발휘한 적 없었다. 하지만 이솔데의 기억 속에서 아이작은 천사 같은 외모와 검술 실력을 가진 성인으로 미화되고 있었다.

"이런 변방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도 못 한 검술 실력에 역병을 치료한 지혜... 그리고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정신, 무엇보다 빛의 법전께서 직접 손으로 빚으신 듯한 얼굴을 한밤중에 마주쳤을 때에는 정말 천사가 만든...."

로튼해머가 잠시 헛기침을 했다. 이솔데는 자신이 헛소리로 성기사단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가라고 손짓을 했다.

아이작을 추모할 시간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로튼해머는 이솔데의 손짓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곡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단심문관님."

"예?"

"혹시 그 천사 같다던 영웅이 지금 저기 걸어오는 피투성이 청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왈라이카 사냥꾼들과 헤인켈을 처리하느라 밤까지 샌 덕분에 피곤할 법도 했지만, 아이작은 의외로 멀쩡했다. 흡혈 덕분에 체력 회복의 효율이 훨씬 더 올라간 것 같았다. 덕분에 아이작은 바로 계곡 밖으로 향할 수 있었다.

계곡에서 걸어 나오던 아이작을 맞이한 것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성기사들이었다.

백색의 갑옷에 아침 햇살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성기사들은 빛의 법전의 수호자라 하기 부족함이 없으리라... 아이작은 그런 감상적인 생각에 빠졌지만, 그들이 자신을 지나치고 포위하듯 둘러싸자 감상은 달라졌다.

밤새도록 애써 싸운 보람이 사라지게 하는 호로자식들 같으니.

하지만 아이작은 칼을 뽑아 들거나 덤벼들지 않았다. 그들이 왜 이러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작?"

성기사들이 포위한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늙은 성기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로튼해머 루만이라고하네. 혹시 다쳤나? 상처를 입었다면 치료부터 하면서 이야기하지."

"제 피가 아닙니다."

아이작은 양팔을 들어 올리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 주었다. 하지만 로튼해머의 표정은 한층 더 굳어졌다.

"그럼 미안하지만 몇 가지 확인을 해야 할 것 같군. 이단심문관님을 구하기 위해 밤새도록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유인했다고 들었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지. 혹시 피를 마셨나?"

한밤중 계곡 한가운데서 왈라이카 사냥꾼들, 그것도 공작이 낀 무리에게 쫓긴다? 그것은 현직 성기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로튼해머조차도 기적 없이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상식적으로 아이작이 계곡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왈라이카 사냥꾼들과 한패가 되는 것뿐이다.

'아니라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니오."

아이작은 이미 쥐를 먹을 때부터 촉수와 자신을 분리할 정도로 뻔뻔했다. 피를 빤 것은 사실이지만 촉수가 한 일이지 그가 한 일은 아니다.

"제가 흡혈귀가 되었다면 이렇게 태양볕 아래 뻔뻔하게 돌아다니겠습니까?"

계곡은 그늘진 곳이 많긴 했지만 햇볕이 드리운 곳이 많았다. 물론 뱀파이어가 아니라 그 피에 중독된 노예, 구울이 된다면 햇볕 속에서도 돌아다닐 수 있다. 그래서 성기사들은 쉽사리 아이작의 말을 믿기 힘든 듯했다.

하지만 로튼해머는 뚫어져라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최대한 초롱초롱 맑은 눈빛을 띠길 바라며 그를 마주 보았다.

이내 로튼해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였다.

"구울이라면 저런 정의에 넘치는 눈빛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아이작은 효과가 조금 과했나 싶었지만 로튼해머는 웃음기 가득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한밤중에 추적을 당하고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다니, 정말 대단하군! 과연 이솔데 아가씨 말대로야. 어린 영웅이 탄생했어."

'이솔데 아가씨'라.

브란트 가문과 개인적인 친분이라도 있는 건가? 아이작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튼해머는 다른 성기사들에게 지시했다.

"너희 둘은 이 어린 영웅을 데리고 복귀하게. 밤새 계곡을 헤맸으니 피곤할 거야."

"예!"

"나는 이제 풀이 죽어있을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추적해 모조리 박살 내고 올 예정이네. 놈들이 밤새 우리 편을 괴롭혔으니 이제 우리가 낮 동안 놈들을 괴롭혀줄 차례다!"

아이작은 이미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아이작이 밤새도록 놈들을 유인하고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업적이다. 거기서 사냥꾼들은 물론 헤인켈 굴마르까지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해 버리면 터무니없는 것을 넘어 기괴한 존재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우리 어린 영웅이 밤새도록 이룬 업적에 대해 듣는 것은 잠시 미뤄야겠군. 이단심문관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서둘러 가서 만나보도록 하게."

***

"무사할 줄 알았다. 아이작."

아이작이 제일 먼저 만난 것은 게벨이었다.

게벨은 브리엔트 성기사단 본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략 성기사 10명 정도와 50여 명의 수련생, 그리고 지원병을 끌고 온 것 같았다. 그들 대부분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보다는 수색과 포위망 구성에 나설 것이다.

"몸은 괜찮구요?"

"실력 좋은 사제님이 계셨다."

저주를 걷어 내자 게벨의 안색은 한층 더 나아 보였다. 하지만 찔린 부위 자체가 워낙에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게벨은 한동안 꼼짝 못 하고 요양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아이작은 붕대로 감싼 게벨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빌어먹을 촉수 같으니.'

누굴 죽이고 찢어발기는 건 기막히게 잘하지만 고치거나 치유하는 것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작이 가진 치유 능력은 그가 가진 특전인 '죽은 신의 내장'에서 오는 것이었으니까.

"그 이단심문관 계집애는 어디 갔어요? 간호라도 하고 있을 것이지."

아이작은 이솔데가 자신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진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감사를 받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지만 괘씸하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었다.

"간단한 회복 기적만 받고 수색대에 포함되어서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인상착의를 알려주러 떠났다. 전투 인원이 한 명이라도 많을수록 좋다고. 나랑 밤새 걸어온 건 마찬가진데 대단하지."

괘씸한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잘 아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이단심문관이 간호나 하고 있는 것도 재능 낭비였다.

아궁이 짐승을 부르고 어제 아침부터 새벽까지 쉬지 않고 걸었으니 지칠 법도 한데, 다시 전투에 나서려 하다니.

물론 그 '전투 대상'은 전부 촉수가 맛있게 먹고 없으니 헛고생이었다.

"게벨 씨가 죽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죠."

"그건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밤새 쫓기고도 살아남은 사람한테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음."

게벨은 잠시 기침을 토해내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잠시 막사 천장을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뜬금없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작. 확인 삼아 한번 물어보마."

게벨은 아이작을 똑바로 응시했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다 죽인 거냐?"

아이작은 잡아떼려고 했다.

하지만 게벨의 말투는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냥 떠본다는 투였다. 그래서 아이작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게벨은 다시 말을 이었다.

"굴마르 공작도?"

"...."

"놀랍군. 대체 어떻게... 아니지, 아니다. 묻지 않겠다."

게벨은 입을 꾹 다문 채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핏줄이 바짝 섰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마라. 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살아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로튼해머 단장과 이단심문관은 지금 텅 빈 계곡을 뒤지고 있겠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널 처음 수도원으로 데려온 날부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칼센의 습격으로부터 살아남았던 그날부터."

33화. 성배기사 (2)

아이작은 조금 긴장했다. 게벨은 이 세계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기도 하고, 그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에 대해 어렴풋이라도 눈치채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사실 네가 성체건 악마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너를 데려온 날부터 그렇게 결심했다. 특히 네게... 검술을 가르치기로 한 날부터."

"복수를 위해서요?"

"복수를 위해서."

이미 게벨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가 소속됐던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전멸과 관련된 사연이라고.

게벨은 이제 완전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전멸했다고 말했었지. 사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시체는 전부 불사 교단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데스나이트가 되었지. 영혼이 동의하지 않는 한 데스나이트가 될 수 없으니까, 놈들은 결국 배교를 저지른 셈이야. 덕분에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이미 변방에서는 사실상 배교자로 낙인찍힌 상태다."

"아니...."

"아발란체 검술을 알아볼 사람은 이제 없다. 같은 검술을 쓰는 성기사가 아닌 이상. 그러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아이작은 머쓱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사실 걱정한 적 없다고 말할까 생각했다. 어차피 아발란체 검술은 그의 몸에 큰 부하를 준다. 직접 만든 이삭 검술이 훨씬 더 효율이 좋았다.

그때 게벨이 폭탄 선언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발란체 성기사단 전멸의 배후에 등하맹인 중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작은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등하맹인. 빛의 법전 교단의 핵심에 대한 멸칭이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배교자로 찍힌 것은 억울한 일이었지만, 지금 이 발언은 교단 전체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게벨은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칼센을 기억하느냐?"

칼센 밀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아이작의 첫 포식 대상이자, 검술에 대한 재능은 그의 능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니까.

"칼센은 이번에 천사가 될 것이 예정되어 있었고, 명천사가 될 것으로도 기대받던 자였다. 그런데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변방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전멸당하고 배교자로 찍힌 지 몇 년 안 돼서 칼센도 배교자가 되었다. 이게 우연일까?"

"칼센이 배교자가 아니란 말인가요?"

"아니, 아니다. 칼센은 배교자가 분명하다. 제 부하들을 팔아먹고 같은 신앙의 동포들까지 가차 없이 살해했지."

게벨은 손가락을 탁탁 부딪치며 말했다.

"하지만 칼센이 배교자가 되게끔 꼬드긴 자가 있고, 자기 부하들을 희생시켜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게끔 만든 등을 떠민 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그렇게 된 것처럼."

"불사 교단이...."

"개입은 했겠지. 하지만 놈들만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못 한다. 교단 내부에 진짜 배신자가 있다."

게벨의 눈에는 살의와 갈등이 번갈아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게벨이 아이작과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벨은 이제 아이작을 만나는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언제 다시 들려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배교자로 낙인찍힌 신분이어서 대놓고 조사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네게... 부담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내 원한을 대신 맡기기로 했지."

게벨은 미안한 마음을 품고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계속 숨기는 게 좋겠다. 네 성정은 믿는다만 정체가 불분명한 힘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올바른 곳에 쓴다 해도 두려움을 살 수 있으니... 특히 지금 교단 수뇌부는 의심이 많은 자들이다."

"예."

"성기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지, 아이작."

게벨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너는 분명히 훌륭한 성기사가 될 수 있을 거다. 아니, 언젠가는...."

교단의 핵심에 접근할 수도 있겠지.

게벨은 그때 아이작이 칼센이나 아발란체 성기사단처럼 희생당하는 대신, 차라리 교단의 핵심이 되어 부패한 부분을 도려내길 바랐다. 그러려면 우선 아이작을 이곳에서 보내주어야 했다.

"좋아. 때가 된 것 같다."

"예?"

"수도원으로 돌아갈 필요 없다. 란셀 수도원으로 갈 필요도 없어. 브리엔트 성기사단이 훨씬 더 규모도 크고 실력도 좋다. 로튼해머 단장은 이교도에겐 가차 없지만 아군에게라면 인품도 실력도 훌륭한 사람이지."

아이작은 게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벙찐 표정을 했다.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가라구요?"

"로튼해머 단장에게는 내가 이야기하겠다. 내게 빚이 있으니 들어줄 거야. 이단심문관님도 잘 이야기해 줄 테니 입단은 어렵지 않을 거다."

아이작은 게벨의 갑작스러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원래 가려고 했던 란셀 수도원의 성기사단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거기서 일반 수련생 과정을 거치면서 성기사가 된다면 한참 걸릴 것이다. 공을 세우는 것도 늦을 테고. 하지만 브리엔트 성기사단이라면 그 과정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브리엔트 성기사단으로 가야 했다. 이쪽이 훨씬 더 실전적이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을 테니까.

***

로튼해머는 해 질 무렵쯤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사제가 소환한 듯한 빛의 법전의 신수들이 광휘를 뿜어 내며 돌아다닌 덕분에 주변은 대낮 같았다. 성기사단의 위용을 보여 줄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로튼해머의 표정은 탐탁지 않아 보였다.

'역시 왈라이카 사냥꾼은 한 명도 잡지 못한 모양이군,'

아이작은 합류하기 전에 풀어놓았던 혼돈의 자손들로 계곡 전체를 뒤져보았다. 아이작에게 포식당한 헤인켈 굴마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왈라이카 사냥꾼들은 남아 있지 않았다.

"벌써 다 도망친 모양이군요."

"으음, 그런 거 같군. 놈들이 머물렀던 소굴을 발견해서 소지품도 뒤져봤는데 정말 왈라이카 사냥꾼이 맞더구만. 말들도 사라진 걸 보니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글렀다고 생각하고 도망친 모양이야."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타고 온 말들은 지힐렛이 전부 잡아먹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증거를 남겨 두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힐렛은 몇 주는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부른 상태였다.

"그래도 낮이라 좀 굼뜰 줄 알았는데 공작가 직속 사냥꾼들은 뭔가 다른 모양이다. 혹시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 숨어있을지도 모르니 신수들을 풀어 수색 중이지만 솔직히 기대는 안 되는군."

그때 그의 뒤에서 이솔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솔데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앞으로 나왔다.

"...목숨을 세 번이나 빚졌습니다.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세 번? 그만큼이나 구해줬나?'

생각해 보니 늑대를 만났을 때 한 번, 수도원에서 한 번, 계곡에서 한 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재수 없는 팔자인 모양이다.

"저한테 감사하기보단, 이 지방이 이단심문관님께 재수 없는 곳인 것 같으니까 빨리 여기부터 뜨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사실 원래 이 지방이 그녀가 죽을 자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아이작이 억지로 살려낸 거고.

이솔데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고, 로튼해머는 이게 걱정인지 배배 꼬인 못된 말인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아이작도 이솔데를 그렇게 타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솔데는 그녀의 일을 잘 해냈다. 이 수도원에 역병신을 부활시키려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조사하러 왔고, 계곡에 숨어있는 자들도 찾아냈다. 심지어 자신의 결과에 확신을 가지고 성기사단을 빠르게 불러들였다.

아이작이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전부 합리적인 판단이었고, 이단심문관으로서는 유능하게 행동한 셈이다.

죽은 이단심문관이 될 뻔했지만.

'이단심문관들이 제명에 죽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딱히 이솔데가 불운한 것은 아닐지도....'

"뭐, 그 얘기는 됐습니다. 덕분에 게벨 씨도 치료받고 빠르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뇨. 제가 세 번 빚졌으니 저도 세 번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빛의 법전의 이단심문관으로서, 브란트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저 개인으로서요."

빚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지우게 되다니. 아이작은 이솔데의 결연한 눈을 보면서 그녀가 어디서 객사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뽑아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로튼해머는 이솔데의 말에 제법 놀란 듯해 보였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는 들어가서 쉬도록 하시지요. 어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주변 영주들에게 공문을 보내고 수색 범위도 넓히고 있으니 이제 아가씨가 하실 일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이솔데는 사과와 감사 인사를 마치자 긴장이 풀린 듯 비틀거리며 막사로 돌아갔다.

이제 그녀는 곯아떨어질 시간이었다.

"그럼 우리는 저 안에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할까? 자네가 계곡에서 한 일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아."

***

아이작과 로튼해머가 대화하기 위해 들어간 곳은 게벨이 휴식 중인 막사였다. 원래 기사단장용 막사로 부르려 했지만 아이작은 게벨을 함께 끼워서 대화하고 싶어서 그를 불렀다. 로튼해머와 아이작이 들어가자 게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 수도사 양반. 몸은 좀 쉬셨소? 상처는?"

로튼해머는 게벨을 단순한 수도사로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게벨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전히 정정해 보이시는군요. 로튼해머 단장님."

로튼해머는 자신을 안다는 말투 속에 고개를 기울였다. 게벨은 그가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자 수염이 부숭부숭한 턱을 손으로 가렸다.

그제야 로튼해머의 눈이 커졌다.

"게벨? 그 미친개 망나니? 아니, 세상에. 그새 폭삭 늙었군."

미친개 망나니... 아이작은 게벨이 젊었던 시절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졌다.

게벨은 오랜만에 듣는 별명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알아봐야지! 지난 여명군 때 자네와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데! 그래, 그렇구만. 이솔데가 자네 실력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더라니 그럴 만했어. 그런데 자네가 이런 수도원에 있다니, 세상일 정말 모를 일이군."

로튼해머의 감탄이 이어졌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힐긋 아이작에게로 향했는데, 대충 아이작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 것 같다는 눈치였다.

게벨 덕분이라고 한다면 절반만 사실이겠지만.

"그런데 린데 단장은? 자네가 단장은 못 해먹을 인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수석기사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수도원에 있는 건가?"

"린데 단장은 죽었습니다. 아발란체 성기사단도 전멸했습니다."

막사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로튼해머는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여명군이 끝났을 당시에만 해도 성기사단도, 린데도 살아있었으니 전쟁 때문은 아니군. 솔직히 린데만 죽었다고 한다면 결국 자네가 성질 못 이기고 죽인 다음 수도원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거야."

"솔직히 그 꼬장꼬장한 할망구를 죽이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긴 했죠. 그리고 저만 했던 생각도 아닐 겁니다."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다고는 못하겠군."

아이작은 두 늙은이들이 자기들만 아는 추억을 가지고 킬킬거리며 수다 떠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전장에서 칼밥 먹고 자란 남자들이 누군가를 추모하는 방법인 듯했다. 한참 대화가 이어지다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듯 멈췄다.

로튼해머는 긴 한숨을 뿜어내고 입을 열었다.

"누가 죽였지?"

"모릅니다."

"모른다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저는 도망쳐서 보고 들은 것이 없고요. 그 뒤로 이 수도원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비겁자에게 어울리는 결말이지요."

아이작은 게벨이 알아볼 수 있는 최대한 알아보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갈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못한다면 대신할 사람을 찾아내서라도. 하지만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면 로튼해머도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에 비겁자가 되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군."

하지만 로튼해머는 게벨을 비겁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이미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듯.

"그러니 저 대신 이 아이를 신경 써주셨으면 합니다."

로튼해머의 시선이 게벨에게서 아이작으로 옮겨갔다.

"제가 어쭙잖게 가르쳐서 기초를 망쳤습니다만 그래도 단장님이 키워주시면 실력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솔데 아가씨도 이 청년에 대한 칭찬을 질릴 정도로 하셨지."

로튼해머는 아이작의 손을 살펴보고 팔을 주물러 보았다. 로튼해머의 쇠뭉치 같은 손과 두터운 팔다리에 비하면 아이작의 몸은 가녀리다 못해 빈약했지만, 그는 퇴짜를 놓지 않았다.

"성기사가 되고 싶으냐?"

"예."

로튼해머는 그걸로 대답이 충분하다는 듯 게벨을 돌아보았다.

"내가 신경 써줄 수는 있겠지만 내 독단으로 성기사로 만들 수는 없네. 일단 내 객이자 수련생 정도로 데리고 다니면서 실력을 보도록 하지. 하지만 자네 밑에서 배웠다면... 이미 내 수련생들 정도는 가지고 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부족하지는 않을 겁니다."

"좋다. 그러면 이름이 아이작? 너는 내가 책임지고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넣어주마."

로튼해머의 단언에 아이작은 약간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음, 그거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로튼해머 단장님."

"응?"

"저는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34화. 성배기사 (3)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로튼해머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성기사가 되고 싶다면서?"

"예."

"그런데 우리 브리엔트 성기사단에는 들어오지 않겠다고? 내가 시원찮아 보이는 건가?"

"물론 로튼해머 단장님의 실력은 전혀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아이작은 이걸 어떻게 돌려 말해야 그가 곱게 받아들일까 생각했다.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아이작이 한참 동안 신중하게 고민한 다음 내놓은 결론이었다.

아이작이 그대로 수도원에 있었다면 게벨이 하자는 대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계곡에서 왈라이카 사냥꾼들과 싸우면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동안은 수도원이라는 단단한 껍질 안에 있었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인생의 중대기로란 뜻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경고 아닌 경고를 아이작은 무시했다.

'이 게임의 공략법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플레이어는 게벨도, 로튼해머도 아니다.

자신을 이 세상으로 끌고 온 눈깔 많은 촉수 괴물이 아니다.

'이 게임의 엔딩을 보는 건 나야.'

아이작은 그렇게 다짐하며 로튼해머에게 단언했다.

"저는 성배기사가 될 생각입니다."

***

성배기사.

성물을 찾아, 온 세상을 방랑하며 악한 존재들을 퇴치하고 약한 자들을 돕는 정의로운 기사들. 수많은 서사시와 노랫말의 주인공이 된 고독한 기사들.

게임에서는 성기사의 2차 전직 클래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성기사들과 같은 계열로 취급했다. 다만 성기사들이 전우들과 함께하는 무력집단이라면, 성배기사들은 성물을 찾아 홀로 방랑하는 전사들이다.

끝없이 방랑해야 하기 때문에 단단한 신앙심은 물론이고 소유할 수 있는 물건도 제한된다. 성물을 찾으러 다니다 보면 억울한 사람들도 돕고 악한 존재들도 상대해야 한다.

결국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명성뿐.

그나마도 이제는 시대에 뒤처진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나한테는 최선이지... 아니, 최고의 길이다.'

아이작은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막사 한가운데 마련된 공터에 서서 생각했다.

성기사가 된다면 많은 특전을 누릴 수 있다.

성기사단이 가진 자원, 요새, 검술, 스승, 동료, 금전, 사회적 특권 등등, 누릴 수 있는 혜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성배기사는 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전부 포기해야 하는 혜택들이다.

대신 성배기사는 명성과 업적에 따라 '숭고한 여정' 버프를 받는다. 이 버프는 적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강한 적과 마주할수록 효과가 강해진다. 특히 찾아낸 성물의 가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기적 능력이 더욱 강해진다.

성배기사의 영웅적인 업적은 바로 이 버프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강력한 성물을 찾는다면 혼자서 성기사단에 비견되는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대부분의 성배기사는 그 전에 죽지만.'

무엇보다 지금 아이작의 등에는 헤인켈에게서 빼앗은 성물, '분열 예식'이 있었다.

신들의 탄생에 얽힌 성물은 성물 중에서도 최상위급이다. 아이작이 지금 소속된 빛의 법전과는 다른 신앙의 성물이라 능력을 100% 다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아이작은 빛의 법전에서 유래된 성물의 성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성배기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단한 성물을 수탐(搜探) 끝에 찾아냈는지다.

다른 신자들이 무릎 꿇고 공손히 다룰 성물이라고 해봤자 아이작에게는 그저 좋은 도구일 뿐이었다.

'어차피 성기사단의 힘이 필요하다면 나중에라도 들어갈 수 있어.'

게임상에서는 2차 전직 클래스인 성배기사가 다시 성기사로 전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다. 성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특권인 기적을 쓸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성기사단은 나중에라도 들어가도 괜찮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성기사로서의 명성과 인정.

아이작은 그것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 너."

아이작이 공터에 멍하니 서서 자갈을 툭툭 차고 있을 때 가벼운 갑옷을 걸친 한 청년이 지나가면서 말을 걸었다.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청년은 재차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수도원에서 왔나? 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청년은 아이작을 병사로 착각한 건지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멈칫했다.

아이작은 녀석을 슥 훑어보았다.

'갑옷이 반질반질한 걸 보니 갓 성기사가 된 놈이군. 길어 봐야 몇 달?'

아이작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청년은 어째선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흠, 성기사단이 왔다고 신기해서 마을에서 왔나 본데 여기는 위험한 곳이야. 무서운 남자들이랑 어른들이 많다고.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따라와."

갑자기 친절해진 태도에 아이작은 청년이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청년이 기묘한 착각을 어떻게 하다가 하게 되었나 생각하면서 뒷머리를 쓸었다.

'한동안 머리를 안 자르긴 했는데... 벌써 그만큼 길어졌나?'

아이작의 외모는 머리카락만 길면 다른 성별로 착각 당하기 쉬웠다. 그동안 수도원에만 있어서 그런 착각을 당한 일은 거의 없었지만, 여기 이 어리숙한 성기사는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해? 따라오라니까."

"여기 용건이 있어서 아직 안 되겠는데."

청년은 아이작의 말에 당황했다. 변성기를 거쳤지만 여전히 아이작의 목소리는 매력 보정 덕분에 중성적인 톤의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덕분에 여전히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던 청년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이안, 그 친구에게 볼일이 있나?"

로튼해머가 다가오고 있었다.

"단장님."

이안이라고 불린 청년은 서둘러 몸을 바로 세웠다.

"그 친구가 내가 얘기한 밤새도록 왈라이카 사냥꾼들에게 쫓기고도 상처 하나 없이 빠져나온 녀석이다. 덕분에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하는 것 같아서 내가 버릇을 고쳐주려고 하는 중이지만."

이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왈라이카 사냥꾼 수색은 끝났고, 음모를 파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범인들은 하나도 잡지 못했다는 찜찜한 결말로 끝이 났다. 물론 교단 상부에서는 지금부터 시작이 될 것이다. 왈라이카 왕국에 화도 내야 하고 외교력도 행사하고 으르렁대기도 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것은 이제 아이작과 상관없는 일이다.

아이작과 상관있는 것은 로튼해머가 아이작의 '어린놈의 철없는 생각을 고쳐 주겠다'면서 마련한 이 공터였다.

'뭐,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로튼해머가 보기에는 재능있는 인재가 사지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노랫말이 되는 영웅의 발밑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다고 했다. 성배기사들 중 늙어 죽는 이들은 거의 없다. 무모한 모험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타지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대부분의 성배기사들에게 찾아오는 결말이다.

"아이작 군, 준비됐나?"

로튼해머는 게벨에게 부탁받은 청년이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두들겨 패서라도 마음을 돌려놓기로 한 것이다.

"로튼해머 단장님, 약속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래. 약속대로 세 명을 꺾으면 이긴 걸로 해주마."

다만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은 로튼해머가 아니었다. 로튼해머가 직접 아이작을 두들겨 패기에는 격이 맞지 않기도 하고, 그를 추천한 게벨 입장에서도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로튼해머는 아이작에게 결투를 제안했다.

"이기면 약속대로...."

"너를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이름으로 성기사로 임명하고, 빛의 법전 이름 아래 합법적으로 성배 수색 여정 중인 성배기사임을 인증하는 문서를 써주마."

"좋습니다. 조건은 어떻게 되죠?"

"일 대 일. 사제들도 있으니 진검으로. 일격에 죽일 수 있는 공격은 피할 것. 그렇게 네가 총 3명을 꺾으면 이긴 걸로 인정하지. 단."

"단?"

"30초 안에 승부가 안 나면 한 명씩 더 추가된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단장이 제안하는 조건치고 너무 졸렬한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로튼해머의 표정은 엄격했다.

"성배기사는 혼자 다닌다. 일 대 다수로 싸울 일이 훨씬 많다는 뜻이지. 빠른 시간 안에 승부를 볼 실력이 안 된다면 그만두는 게 낫다."

아이작은 로튼해머가 단순히 '어린놈 버르장머리 혼내 주겠다'는 생각으로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라 정말로 그가 성배기사로서 걸맞은 실력을 가졌는지 알아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약 정말 혼내 줄 생각이었다면 그 본인이 나와도 충분했을 테니까.

'성배기사로 전직하려면 우선 성기사가 되어야 하는 법. 나쁠 거 없지.'

아이작은 동의했다.

***

첫 번째로 나온 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수련생이었다.

제법 기초를 닦은 놈처럼 보였다. 하지만 검을 부딪친 순간 각도를 미묘하게 비틀자 놈의 손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놈이 손목을 쥐고 끙끙대며 검을 떨어뜨리자 로튼해머는 어이없다는 듯 엉덩이를 차며 쫓아냈다.

두 번째도 수련생이었다. 이번에는 덩치도 크고 스물은 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아이작은 놈이 이미 기초를 다질 영역을 넘어섰으며, 성기사가 될 과정을 밟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첫 번째 수련생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로튼해머가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체면치레는 해줘야겠군.'

아이작은 녀석과 검을 네댓 번 부딪쳤다. 하지만 너무 대충해 준 탓인지 아이작이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녀석은 발끈했는지 다소 무모한 공격을 감행했다. 아이작은 사소한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검을 휘감아 손등을 검 옆면으로 때렸다.

"와!"

마지막에 아이작이 보여 준 묘기에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성기사들의 불만 어린 눈빛이 쏟아졌지만, 그 탄성을 내지른 사람이 이솔데였기에 다시 거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동요하는 기색이 번지고 있었다.

아이작은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수련생들 중에서도 어린 축에 속했다. 그런데도 나이가 더 많은 수련생들조차 아이작에게서 30초도 뺏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방금 상대한 수련생은 성기사 임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성기사들 본인조차도 아이작을 상대할 때 과연 방금 그 수를 버틸 수 있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는 사실이었다.

그걸로 아이작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나 확실히 세긴 센 모양이군.'

왈라이카의 공작까지 꺾어 놓고서 무슨 헛소리냐고 싶겠지만, 솔직히 아이작은 검술 쪽에서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산의 짐승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힐렛은 특수한 괴물일 뿐이며, 왈라이카의 사냥꾼들은 피 빨아먹는 암살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이작의 지론이었다.

이렇게 기사 대 기사의 정정당당한 칼싸움은 게벨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상급 검술을 하나라도 쓴다는 게 대충 번듯한 한 명의 성기사라는 기준인 것 같으니... 성기사로 치면 평균 정도는 하려나?'

그러면 수련생들이 상대도 안 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붙어 로튼해머를 응시했다.

"다음 상대는 누굽니까? 안 나오고 숨어있다가 30초 지났다면서 두 명 나오는 거 아니죠?"

게벨은 아이작에게 적당히 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면서도 내심 뿌듯한 기색을 숨길 수 없는 듯했다.

나름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후예라고 할만한 어린 제자가 다른 성기사 수련생들을 걷어차고 있으니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안, 나가라."

"예?"

이안은 자신이 호명되자 예상 못 했다는 듯 되물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로튼해머는 두 번 말하지 않았다. 이안은 머뭇거렸지만 자존심을 내세우진 않았다.

이내 그는 검을 뽑아 들고 아이작 앞으로 나섰다.

아이작은 이안이 정식 성기사라는 것을 떠올리고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자기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안은 아이작을 쏘아보다가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네가 왈라이카 사냥꾼들한테서 살아남았다고? 계집애처럼 비리비리한 게 빨아먹을 피도 없어서 무시하고 간 거 아냐?"

'뭐야, 왜 저래?'

아이작은 그의 태도에 의아해하던 도중, 그가 아까의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괜히 아이작의 외모를 가지고 트집 잡는 것이다. 아니면 도발이라는 훌륭한 실전적 스킬을 사용 중이거나.

'과연 성기사인가? 신앙의 증명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는 없다는 건가?'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아이작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던졌다. 하지만 아이작은 도발에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검을 쥔 채 거리를 좁혔다. 오히려 이안이 자기가 한 말에 흥분한 듯 검 끝이 흔들렸다.

"그렇게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노려본다고 내가 또 얼굴에 넘어갈...."

"이안!"

이안의 반복되는 도발에 로튼해머가 경고하듯 소리쳤다. 그 순간 이안의 검이 움직였다.

아이작이 꾸준하게 좁혀 가던 간격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둘이 부딪쳤다.

'와.'

아이작은 그 짧은 순간 이안과 눈을 마주하면서 가볍게 감탄했다. 아까 흥분으로 흔들리던 검 끝이 거짓말인 것처럼 이안의 눈빛은 서늘했다.

'세상에, 진짜 의도된 도발이었군.'

아직 임관도 안 한 초면의 상대에게 도발을 던지고 흥분한 척 연기까지 하다가 다짜고짜 기습을 가한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지금 펼치는 공격은 상급 검술이었다. 이 정도면 이안으로선 진짜 전력을 다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아이작에게는 온갖 감상이 지나갈 만큼 느린 순간이었다.

'이 정도로 전력을 다했으면 나도 예의 정도는 보여줘야겠는데.'

35화. 성배기사 (4)

이안의 공격은 처음으로 보는 다른 기사단의 상급 검술이었다.

아이작은 자신이 유일하게 배운 상급 검술과 다른 기사단의 상급 검술이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이안에게 바로 반격을 하는 대신, 수세에 몰린 듯 방어에 전념했다.

쉭, 스걱.

쇳소리 나는 바람이 귓가에 서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은 이안의 공격을 한 수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이안의 검이 아이작의 검과 연이어 부딪쳤다아이작이 공격을 모두 막아내자 그의 눈빛에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상급 검술인가?'

아이작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게벨과 비교해서 한참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작이 처음으로 사용했던 전조 동작과도 날카로움이나 속도, 모두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어딘가 비슷한 것 같은데.'

하긴 게벨은 검술이란 결국 찌르고, 베고, 내려치는 동작의 반복일 뿐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성기사들의 검술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이상 비슷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은 있었다.

쩍.

아이작은 검에서 미세한 파열음이 들려왔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안의 검술은 미숙하지만 공격들이 한 곳에 집중된다는 특징이 있었다.

'그 공격들이 전부... 한 지점으로?'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검술은 전장의 검술이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살아남고 포위를 깨뜨리기 위한 기술이다. 반면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검술은 굳이 예시를 들자면 적을 절대로 놓치지 않고 죽이기 위한 기술에 가까웠다.

모든 성기사단의 상급 검술이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만, 그 검술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미세한 색채와 속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까가가각, 각!

마지막 파열음이 들린 순간, 아이작이 들고 있던 검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이안의 얼굴에 승리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작이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검술을 분석하기 위해 지켜본 수십 차례에 걸친 공방.

그동안 이안은 전부 아이작의 검의 한 지점, 실금 같은 딱 한 지점을 노리고 공격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기술이지만 상급 검술이란 개념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역시 성기사는 성기사군.'

그 역시 이 정도 수준에 이르기 위해 피가 마르는 노력을 반복했을 것이다. 아이작은 이안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제 자신의 상급 검술도 보여 주기로 했다.

'대충 원리는 알겠으니.'

검이 부러지긴 했지만 아이작에게 문제가 되는 지점은 아니었다.

"그만 끝...."

검이 부러졌으니 승부가 결정됐다고 이안이 선언하려 했지만, 오히려 아이작이 앞으로 나서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작은 다친 곳도 없고 전의가 꺾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순간 아이작이 파고들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텅텅텅! 까각, 깡!

"어, 어어?"

아이작의 검이 절반 이상 잘려 나갔기 때문에 공격 가능한 거리가 훨씬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과 검을 세 번 부딪치자마자 이안의 검도 부러졌다.

그럼에도 이안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시 아이작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자 그 역시도 허겁지겁 상급 검술을 사용했다.

깡, 깡, 깡, 깡!

기이할 정도로 단조로운 소리가 망치질하듯 울려 퍼졌다. 그제야 이안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하면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상급 검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방금 보았던 이안의 검술을 그대로.

아이작의 검은 절반이 부러진 탓에 힘이 더 강하게 실리긴 했다. 하지만 단검이나 다름없는 길이인데도 똑같이, 아니 더 능숙하게 흉내 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작의 수준이 압도적이라는 뜻이었다.

까드드드득, 깡!

또 한 번 이안의 검이 부러져 나갔다. 이제 이안의 검도 아이작의 검만큼이나 짧아졌다. 하지만 그는 아이작 같은 묘기를 할 자신도 없었고, 싸울 의지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음, 슬슬 마무리해야겠군.'

아이작은 이안이 더 망신당하지 않도록 끝내기로 했다. 게다가 그의 몸도 슬슬 익숙하지 않은 상급 검술의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뭣보다 동시에, 아이작은 내면이 슬금슬금 간지러워지는 미묘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전투가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강해지는 식탐이었다.

'이 녀석도 포식하면 뭔가 더 얻을 수 있나?'

아이작은 그런 기묘한 충동을 자각한 순간, 즉시 아발란체 검술의 전조 동작을 펼쳤다.

쉬릭, 쾅.

아이작의 검이 주변을 세 번 벤 순간, 폭풍 같은 먼지가 일어났다.

먼지가 잦아들 무렵, 희뿌연 먼지 속에서 주저앉은 이안과 아직 서 있는 아이작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다가가려다가 엉거주춤하게 멈춰 선 브리엔트 성기사 둘의 모습도 나타났다.

아이작은 뒤늦게 그 둘을 발견했다.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로튼해머를 향해 돌아보았다.

"아... 30초 지났네. 그러면 한 명을 더 상대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기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로튼해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룰 때문에 끼어든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이지만 이삭이 정말로 위험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아이작의 검술은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끼어들 틈이 없었다.

현직 성기사들이 개입할 틈조차 주지 않은 맹렬한 공격에 놀라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로튼해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게벨."

"예."

"지금 나더러... 성 아르테의 현신을 가르치라는 거냐?"

로튼해머의 말에는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겨있었다. 성 아르테는 성기사단 검술의 모태가 되는 시조이자 빛의 법전의 명천사다. 아이작을 보면서 성 아르테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극찬 중의 극찬이었다.

하지만 게벨은 로튼해머의 미묘한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작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성 아르테의 현신 운운하며 극찬을 들었던 사람이 있었다.

'칼센 밀터.'

검의 천재, 빛의 법전의 칼끝.

아이작의 놀라운 실력을 보면서 그 이름을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로튼해머가 성기사들에게 손짓을 하자 조용히 물러났다.

"네가 이겼다, 아이작. 한동안 도적들과 이교도들은 목을 조심해야겠구나."

***

아이작은 성기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며 막사로 돌아갔다.

자기 측 성기사가 패배했으니 화를 내거나 짜증이라도 느낄 법도 한데 관심만 보인다는 것은 이상했다. 일방적으로 패배한 것이 분명한 이안에게도 타박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오히려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놀릴 뿐이었다.

'예의를 차려줬다는 걸 안 건가?'

그들은 아이작의 실력을 똑똑히 확인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이작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애당초 실력 테스트 성격에 가까웠으니 오히려 털어 버리기 쉬웠다.

'그래도 괜히 검술을 훔치려다가 시간을 너무 끌었어.'

아이작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겨우 펼쳐서 상태를 확인했다. 손바닥 가득 터진 상처와 물집이 잡혀 있었다.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리자 아이작은 서둘러 소매를 쥐고 지혈했다.

아이작의 몸은 여전히 상급 검술을 능숙하게 펼칠 만큼 튼튼하지 않았다. 오래 쓸수록 손바닥의 피부부터 시작해 근육, 뼈까지 부하를 받는 것이다.

'이렇게 리스크가 크면 성기사가 아니라 사제를 하는 게 나았으려나?'

실제로 네필림 종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이 사제이기도 했다.

아이작은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곧 부정했다.

성기사는 전공으로 빠르게 성공할 수 있지만, 사제는 내부에서 신앙심을 증명하고 공부해야 한다. 빛의 법전 기적도 쓸 수 없는 아이작이 사제로 성공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몸에 부담을 안 주려면 직접 만든 검술을 쓰면 되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흉흉하지.'

아이작은 쓰게 웃었다.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검술과 비교해본 덕분에 각 성기사단의 검술이 비슷비슷한 원형에서 출발해 목적에 따라 갈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삭 검술'은 아이작이 느끼기에도 그 기세와 위력이 남달랐다. 톱날로 잡아 뜯는 듯한 그 기세는 자칫 흉흉한 이미지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아발란체 성기사단 검술을 사용했는데, 다행히도 친근한 이미지를 준 듯했다.

'하지만 그때 그 허기는....'

이안과의 전투 막바지, 아이작은 강렬한 허기와 포식의 충동을 느꼈다.

직후 그는 즉시 상급 검술을 써서 전투를 끝내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이안을 잡아먹을까 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 분별은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충동을 느꼈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아이작은 지힐렛이나 헤인켈 굴마르도 맛있게 잘 먹었다. 멀쩡히 말하고 사유하는 헤인켈을 포식한 뒤에도 별 생각이 안 들었으니, 이안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이작은 이안을 포식한 뒤에도 별생각이 안 들까 봐 걱정이었다.

'괴물처럼 행동하다 보니 괴물이 되어 버린 건가?'

아이작은 생각이 복잡해졌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는 찬사와 존경을 받고 싶은 것이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이작은 더 이상 이 주제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이작 씨, 들어가도 되나요?"

이솔데였다.

아이작은 갑자기 그녀가 왜 찾아왔나 하면서도 들어오라고 했다.

"이단심문관님."

"이솔데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브란트 아가씨."

"이솔데."

이솔데는 기묘한 고집을 부렸다.

아이작은 이 여자가 왜 이러나 하다가 그녀가 들고 온 붕대와 연고를 발견했다. 이솔데는 아이작의 손을 쥐고 준비해 온 연고를 바른 다음 붕대로 감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하루도 지나지 않아 회복될 테지만 너무 빨리 나으면 이상한 시선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적당한 시점까지는 붕대로 가려 두는 것이 좋아 보였다.

"실력은 좋은데 힘이 부족한 모양이네요? 저도 검을 처음 배울 때 손을 자주 다쳤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만...."

"빚진 걸 조금이라도 갚는다고 생각해 주세요."

아이작은 정색했다.

"목숨 빚을 겨우 붕대 감는 걸로 퉁치시려구요?"

이솔데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퉁칠 만한 걸로 하나 말씀드릴까요?"

"뭐죠?"

"게벨 씨가 아발란체 성기사단 소속이라는 것을 잊겠습니다."

아이작은 잠시 이솔데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솔데는 붕대를 감는 데 전념할 뿐 떠보거나 보란 듯한 미소를 짓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게벨 씨가 평범한 수도사가 아니란 건 한눈에 알아봤어요. 몇 마디뿐이지만 대화하면서 대충 성기사란 건 알아냈죠. 그러면 왜 정체를 숨기신 걸까요? 이후 몇 가지 습관 등으로 그가 사막에 익숙한 사람이며, 변방 풍습에 능숙한 사람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사막과 변방에 익숙하다는 것은 성전에 참여했다는 의미죠. 그리고 공교롭게도 저는 이단심문관이라 배교자로 찍힌 집단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성전에 참여했으며 배교자가 된 성기사단. 짜잔, 아발란체 성기사단밖에 안 남았네요."

게벨의 장담대로 아발란체 검술이 들통난 것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능력인 '고급 심문'이 허투루 달린 건 아니란 걸 실감했다.

추론을 늘어놓던 이솔데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아이작을 보고 잠깐 놀랐다.

"아니, 제가 설마 생명의 은인을 두고 허튼 생각을 할까요?"

"그게 이단심문관의 일 아닌가요?"

"하지만 탈영병을 쫓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죠."

이솔데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게벨 씨의 처지를 더 낫게 만들어 줄 수 있어요. 게벨 씨는 배교자로 찍힌 아발란체 성기사단의 탈영병이자 생존자예요. 그 사실만으로도 게벨 씨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직위를 던진 것이라 할 수 있죠. 배교자가 아니라 오히려 모범적인 신자입니다."

불사 교단에 전멸당한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언데드가 되었다. 그렇다면 살과 피를 가지고 살아있는 게벨은 배교자라고 할 수 없으리라... 당연한 판단이었다.

아이작은 이솔데의 말이 반가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반면 이솔데는 조심스러워하며 아이작의 눈치를 살폈다.

"아이작 씨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게벨 씨가 지금처럼 눈치 보며 숨어 사실 필요 없을 거예요. 제가 '문제 없다'는 인장만 찍어드리면 되니까."

"과연...."

"이걸로 이단심문관으로서 진 빚을 해결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솔데가 약속했던 세 가지 빚. 그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작은 승낙하기로 했다. 어차피 추궁하면서까지 받아낼 생각은 없었고, 호의 정도만 사뒀다가 필요할 때 써먹을 생각이었으니까.

'뭣보다 게벨이 배교자 낙인을 벗고 나면 내가 누구에게서 검술을 배웠는지 숨길 필요도 없게 되지.'

아이작의 신분이 한층 더 떳떳해지는 것이다.

아이작은 겸사겸사 혹시 촉수에 대해서도 인증을 받을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사실 얼마 전부터 몸속에서 촉수를 키우게 되었는데 이것도 괜찮을까요? 생긴 건 좀 그래도 살아있는 것들을 생으로 씹어먹는 걸 빼면 튼튼하고 말도 잘 듣습니다....'

상상해보니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었다.

아마도 평생 그녀에게 이런 부탁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작."

아이작이 절대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있을 때, 로튼해머가 들어왔다.

오늘 그에게 많은 손님이 찾아올 예정인 듯했다.

36화. 성배기사 (5)

넓지 않은 막사였기 때문에 세 사람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꽉 찬 기분이 들었다. 로튼해머는 아이작의 손에 붕대를 감아주는 이솔데를 보고 멈칫했다.

"선남선녀가 그렇게 자상하게 챙겨주는 걸 보니 아주 보기 좋군요."

"생명의 은인을 돌봐주는 거니 아이작 씨가 부담스러워할 말은 마세요. 단장님."

로튼해머가 놀리려는 듯 말했지만 이솔데는 능숙하게 넘겼다.

"여튼 제가 얘기한 것 게벨 씨에게 여쭤봐 주시고 답변 주세요. 게벨 씨의 결정이 중요하니까."

이솔데는 붕대를 챙겨 들고 나갔다. 로튼해머와 아이작이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이란 걸 알아본 눈치였다. 아이작은 게벨에게 좋은 일인데 왜 그의 결정이 중요한가 생각했지만, 물어볼 기회를 놓쳤다. 로튼해머는 잠시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이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리 세대에 천재가 또 하나 더 나타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다른 또 한 명의 천재가 누구인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 천재가 바로 제 뱃속에서 소화됐지만 말입니다....'

아이작은 적당히 겸손을 표하기로 했다.

"이안이라고 했던가요? 그래도 실력이 대단하던데요.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이라서 그렇지 나이를 생각하면...."

"신입? 하하."

로튼해머는 소리내어 웃었다.

"이안은 내 아들이자 직접 가르친 제자야. 수련생이었던 시절에도 바르바리 토벌에 데려가 몇 번이나 실전을 경험했고. 상급 검술을 다루는 데에는 미진한 감이 있지만, 또래 중에서는 그 아이를 이길 수 있는 아이가 없다고 자신하네."

"...."

"원래는 다른 신입 성기사를 내보내려 했었지. 그런데 자네 실력을 보니 보통이 아니더군. 그래서 급하게 바꿨어."

그런 녀석이 차세대 성기사들의 미래라니. 생각보다는 성기사들 수준이 떨어지는 모양이다.

아니면 아이작이 먹어 치운 칼센의 재능이 미쳤거나.

아이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치챈 듯 로튼해머가 미소 지었다.

"늙은이 같은 말이지만 여명군을 경험해 본 세대와 아닌 세대의 수준 차이가 크긴 해. 게다가 최근에는 성기사들 수준도 전체적으로 많이 떨어졌고. 아무래도 산적 토벌과 성전은 다르니까."

"아... 그렇군요."

아이작은 금방 납득했다.

게벨만 해도 대단한 실력이다. 로튼해머도 싸우는 걸 직접 보진 않았지만 느껴지는 기세가 게벨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차세대를 기대할 만한 희망도 있긴 했지. 어이없이 꺾이긴 했지만."

또 칼센 이야기다. 자꾸 언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튼해머는 아쉬움과 동시에 기시감, 그리고 아이작에 대한 경고를 칼센이라는 인물 하나로 계속해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로운 미래를 본 것 같군."

"제게 과분한 기대를 걸고 계신 것 같은데요."

"내가 키운 제자를 일방적으로 짓밟아 버린 천재에게 어찌 기대를 안 하겠나? 게다가 그 천재가 힘들고 고생만 하는 숭고한 성배기사의 길을 걷겠다고 자청하는데."

'이건 비꼬는 건지 말리는 건지.'

아마도 말리는 것일 것이다. 자꾸 칼센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뒤이어질 로튼해머의 말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권하네. 아이작, 브리엔트 성기사단에 들어오게."

***

아이작은 미묘한 침묵을 지킨 채 로튼해머를 바라보았다.

"자네라면 내가 전적으로 밀어줄 수 있네. 내 후임 자리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고."

"이안이 실망하겠는데요."

"자네라면 납득할걸. 납득 못 하겠다고 하면 코뼈를 눌러놓게."

로튼해머는 진지해 보였다. 성기사단의 자산을 전적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겠다는, 어마어마한 선택지였지만 아이작의 결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튼해머가 저렇게 부득부득 아이작을 꼬드기려고 하는 데에는 그의 실력 말고도 다른 이유가 엿보였다.

그를 감시하기 위함이리라.

"제가 혼자 나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꼬드김에 속아 배교라도 할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로튼해머는 쓴웃음을 지었다. 속내를 들켰다는 민망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되레 당당하게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내가 왜 걱정하는지도 알겠군."

"칼센 밀터 얘기겠지요. 그냥 터놓고 말씀하십시오."

"좋아. 나는 칼센을 수련생이었던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네. 조용하고, 겸손하고, 상냥한 젊은이였지. 아무도 녀석이 배교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러나 가장 뼈아픈 배교는 가장 독실한 신자가 저지르는 것이니.

"솔직히 나는 자네를 보면서 강한 기시감을 느꼈네. 뭐, 녀석만큼 겸손하거나 상냥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나이에 맞지 않는 재능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지."

"그래서 옆에 두고 감시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렇지. 그러면 안 될 거 있나? 명예와 부, 모든 것이 녀석에게 보장되어 있었어. 심지어 명천사가 되는 것까지도! 그런데도 녀석은 배교를 선택했지."

로튼해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솔직히 녀석이 주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배교할 만큼의 사정이 뭐였는지 궁금할 정도야."

아이작은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자칫 잘못하면 로튼해머도 배교자로 몰 수 있는 발언이었다. 칼센과의 관계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의 배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분명했다.

평생을 빛의 법전에 헌신해온 성기사단 단장을 흔들 만큼.

"나는 녀석이 주변인들과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들었네. 그래서 엉뚱한 결론을 내린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로튼해머는 강렬한 눈빛으로 아이작을 응시하며 말했다.

"자네도 황야를 혼자 돌아다니다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을 뿐이네."

아이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말씀드렸지만, 그 건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지?"

아이작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짚으며 말했다.

"저는 예브하르 수도원장님께 증명을 받았습니다."

빛의 법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할 경우 화상을 입히는 기적.

잘못하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기적이지만, 아이작은 그것을 몇 년 전 수도원장에게 받았었다. 로튼해머는 잠시 멍한 표정을 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믿음의 증명? 배교했다는 증인이 있을 때에나 실행하는? 그걸 너만큼 어린애한테?"

확실히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작은 속으로 수도원장을 욕했지만 그 역시도 대가를 치렀으니 조금만 하기로 했다.

"예. 그리고 수도원장님의 손목이 불타서 재가 되었지요."

"기적을 수행한 수도원장의 손목이 날아갔다고?!"

로튼해머는 막사 바깥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이게 어느 정도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이나 충격적인 일인 듯했다.

아이작은 재빨리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예브하르 수도원장님께 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니 떠들지 말아주십시오. 수도원장님은 신중하신 분입니다. 분명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셨겠지요."

로튼해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군. 너 정도의 재능과, 불과 얼마 전 이 근처에서 칼센이 배교를 저지르고 사라진 사건을 생각하면...."

또 칼센과 연결 지어서 어떻게든 납득한 모양이다.

어쨌든 '믿음의 증명' 기적을 받았다는 말은 로튼해머에게 대단한 신뢰감을 준 것 같았다. 로튼해머는 더 이상 아이작이 배교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순수하게 그의 실력을 탐내게 되었는지, 계속해서 브리엔트 성기사단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

"아직은 곁에 두고 한참 가르쳐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만...."

아이작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튼해머는 어쩔 수 없이 약속대로 그를 성기사로 인정해주기로 했다. 물론 성기사로 인정받는 과정은 '인정합니다' 한마디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 기사들처럼 봉토와 충성맹세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임에서야 성기사단이 소속된 수도원을 찾아가서 퀘스트 받고 가입하는 걸로 땡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적어도 실력을 보증해 줄 상급 성기사와 사제가 한 명씩 필요했다.

어찌됐든 그리하여 아이작을 성기사로 임명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소는 아이작의 결투를 위해 마련된 공터가 사용되었다.

첫 번째 문제인 증인이 될 사제와 성기사들은 차고 넘쳤다. 아이작의 실력을 인정해 줄 로튼해머의 직위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단심문관인 이솔데까지 증인으로 나서 주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성기사단마다 전해지는 일종의 '전통'을 수행해야 했다.

여기서 아이작은 조금 긴장했다. 게벨이 '성기사단마다 가입할 때 절차가 다 다르다'고 했는데, 예로 든 것들이 전부 기상천외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다섯 번은 토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성기사들이 단체로 달려 들어서 구타를 하거나, 뺨을 한 대씩 얻어맞거나... 아무래도 군사 조직이다 보니 주로 얻어맞는 것들이 많았다.

'성기사단이란 사실 대학생들이랑 크게 다를 게 없을지도.'

"준비됐나?"

로튼해머는 아이작을 향해 씩 웃으며 다가갔다. 아이작은 이빨 몇 개 날아가는 것까지는 각오했다. 하지만 로튼해머가 칼을 뽑아 들자 정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 숙이고."

다행히 칼로 얻어맞는 건 아닌 모양이다. 로튼해머는 의외로 평범한 기사 작위식처럼 검을 옆면으로 눕혀 아이작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나,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로튼해머는 세상에 질서와 빛을 가져다주신 빛의 법전의 이름으로 아이작에게 묻겠다."

"예."

"그대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 약한 자를 괴롭히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예."

"그대는 악에 맞서고 힘 있는 자의 부조리에 분노할 것을 맹세하는가?"

"예."

"나, 브리엔트 성기사단 단장 로튼해머는 세상에 질서와 빛을 가져다주신 빛의 법전의 이름으로 성기사 아이작의 숭고한 여정을 축복한다."

딱. 로튼해머는 검 옆면으로 아이작의 양쪽 어깨를 두들겼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이내 아이작은 로튼해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났다. 사방에서 성기사들과 수련생들이 몰려와 아이작의 성기사 임명을 축하해 주었다.

아이작은 얼떨떨해진 기분으로 축하를 받았다.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이게 전부인가? 싶을 때 로튼해머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쉽군. 우리 성기사단에 들어오면 얼굴에 똥을 바르고 성기사들에게 한 대씩 얻어맞는 전통이 있는데... 성기사 임명까지만 해서 입단 신고식은 치르지 못하겠군."

아이작은 그저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아이작의 의심을 깨뜨리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성기사로의 전직이 진행되었습니다.]

[전직 조건 완료!]

[성물을 소지하고 있어 성배기사로 전직이 가능해집니다.]

[성배기사로 전직하시겠습니까?]

의식보다는 오히려 이쪽이 진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이작은 '예'를 선택하기 전에 잠깐 고민했다.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십 번 반복해서 결론을 내렸듯, 아이작은 결정했다.

단지 버프가 좋아서, 혼자 다니는 게 편해서...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나는 혼자 다녀야 해.'

아이작은 붕대에 감싸여 있는 왼손 손바닥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헤인켈을 처치하면서 느꼈다. 그가 가진 검술의 재능도 분명 대단하지만, 이 빈약한 몸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아이작은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야 이 세계에서 버티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배기사를 함으로서 받을 수 있는 '숭고한 여정' 버프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아이작은 혼자 다녀야만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컸다.

예를 들어 아이작의 지금 검술 실력으로는 로튼해머나 게벨을 이길 수 없다. 동시에 일반 성기사 둘만 상대해도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촉수를 사용한다면, 어떤 적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미 명천사가 될 예정이었던 칼센까지도 처치해 버린 마당에 어지간한 적들은 다 죽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성기사단은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지만, 촉수를 들키면 오히려 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

아이작의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배기사를 택했지.'

중요한 것은 결과다.

촉수만 직접 보지 않는다면 아이작이 무모한 곳에 뛰어들었다가 적의 머리를 들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를 칭송하고 떠받들 것이다.

물론 평생 혼자 돌아다닐 생각은 없었다.

'2년. 여명군이 시작되기까지의 2년 동안만 성배기사로 돌아다니자.'

그동안 아이작은 적당히 명성을 떨치고, 강한 놈들을 포식하고, 성물을 찾아 강해지면 된다.

그때쯤이면 굳이 촉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37화. 성배기사 (6)

[성배기사로의 전직을 진행합니다.]

[신들이 당신의 숭고한 여정을 지켜봅니다.]

['숭고한 여정' 특전이 부여됩니다.]

[신체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신앙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난관에 처할수록 특전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아이작이 성배기사로 전직한 순간 알림들이 줄줄이 떴다.

아이작은 신체와 신앙 능력 30% 상승 효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히 전직한 것만으로도 1/3은 더 강해진 셈이다. 심지어 난관에 처하면 특전이 강해진다고 했으니, 이것은 최소치에 불과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닌 걸로 아는데... 분열 예식 때문인 모양이군.'

게임에서도 구하기 힘든 EX급 성물이라 버프의 효과도 큰 모양이다. 여기서 성물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 효과도 중첩되어 강해질 테니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인가, 우리 성배기사?"

아이작에게 성기사 임명식을 마친 뒤, 로튼해머와 브리엔트 성기사단은 본거지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게벨과 이솔데뿐이었다.

아이작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근처를 돌아보면서 북쪽으로 갈까 합니다."

"북부? 엘릴 왕국으로 가는 것도 좋을 텐데."

성배기사의 기원은 엘릴 왕국에서 시작되었다. 성배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붉은 성배 클럽'이 훔쳐간 엘릴의 심장에 대한 은유다.

패왕 엘릴의 승천 후, 그 후계를 이은 왕들은 무희가 훔쳐 간 성배, '엘릴의 심장'을 되찾아오는 것에 집착했다. 신앙을 위해서든 영광을 위해서든 많은 성배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여정을 떠났지만, 무희는 사람들 속에 숨어 지내는 은밀한 종교가 된 상태였고, 결국 성배는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여정을 떠난 성배기사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수한 업적과 전설을 남겼다. 이제 성배는 단순히 하나의 성물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 신앙의 이상향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빛의 법전에서도 성배기사를 우대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성배기사를 아직도 가장 크게 후원하는 곳도 엘릴 왕국이고, 유명한 성배기사들도 주로 그곳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게벨이 추천하는 것이었다.

"저도 그쪽을 생각해보긴 했는데, 뭐라도 들고 방문해야 좀 더 대우받지 않겠습니까?"

사실 아이작이 가진 '분열 예식' 성물은 붉은 성배 클럽의 성물이지만, 동시에 엘릴 교단의 성물이기도 하다. 심지어 무희가 엘릴의 가슴을 째고 심장을 훔쳐 갈 때 쓴 칼이 바로 이 칼이다.

신의 피가 묻은 물건이니 다른 성물이고 자시고 아이작이 이 칼을 들고 가서 정체를 밝히기만 한다면 정말 성배라도 찾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겠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보상은 잠깐이야. 어차피 들고 다닐 수도 없고.'

아이작에게 중요한 것은 2년 뒤 있을 여명군에서 충분히 한자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금전적인 보상보다는 분열 예식을 직접 사용하는 것이 나았다.

"북쪽에 성물이 있다고 로튼해머 단장님이 얘기해 주시더군요. 우선 그곳을 뒤져보려고 합니다."

"그렇군."

사실 로튼해머가 해준 말은 아니고, 아이작이 미리 알고 있는 정보였다. 지금 이 수도원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성물이기도 했다.

아이작의 예상대로라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적이니 방해가 될 만한 놈들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 정보는 여명군이 시작될 무렵의 정보니까 완전히 일치하진 않겠지만....'

게벨은 잠시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문득 게벨이 잠깐 동안에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미 나름대로 다 준비가 된 것 같으니 내가 더 조언해줄 필요가 없겠구나."

"그동안 도움을 주신 것만으로도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니지, 이거 하나만 더 챙겨가라."

게벨은 수도복 안에 입고 있던 가슴받이를 벗었다. 정강이받이와 벨트까지도 풀어서 아이작에게 넘겨주었다. 아이작은 당황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게벨은 완고하게 내밀었다.

"전부 성기사 장비들이다. 낡고 안에 깃들어있던 기적들도 마모되어서 사라졌지만, 그래도 쓸만할 거다."

"아니, 이런 것까지는 필요 없는데...."

"널 위해서가 아니라 성기사들의 명예를 위해서다. 성배기사란 놈이 거렁뱅이처럼 돌아다니면 정신병자 취급받을 테니 최소한의 갑옷은 갖춰 입어야지."

게벨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복장이 신분을 보증해 주는 세상이다. 로튼해머에게서 성기사임을 인정받은 증표를 받긴 했지만 일일이 다 확인시켜 줄 순 없다. 게벨은 아이작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갑옷들을 억지로 씌웠다.

아이작은 체구 차를 고려하면 그에겐 꽤 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벨의 몸에 딱 맞아 보이던 갑옷들은 아이작의 몸에 닿은 순간 그 이음새들이 수축하며 아이작 몸에 바싹 밀착했다.

처음부터 맞춤 제작된 것처럼.

"딱 맞지? 그 기능은 기적이 아니라 세상의 화로 장인들이 손댄 거라 사라지지 않을 거다. 좋은 칼도 한 자루 있으면 좋겠다만...."

아이작이 툭하면 검을 부숴 먹기 때문에 남은 검이 없었다. 물론 분열 예식도 정말로 '좋은' 검이지만, 그건 함부로 꺼내 들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제 검을 빌려드리죠."

그때 이솔데가 나서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심판의 검'을 꺼내 들었다.

아이작도 게벨도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 장비 아닙니까?"

"분실했다고 하죠. 그리고 드리는 게 아니라 빌려드리는 거예요."

이솔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성배기사라면 언젠가 성유물을 반납하기 위해 교단으로 돌아오시겠지요.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날 날도 올 겁니다. 그때라면 아마 이 검보다 더 좋은 검도 가지고 계실 테니, 그때 돌려주시면 됩니다."

심판의 검이라면 이미 게임 안에서도 중상급에 속한다. 그걸 대체할 정도의 검이라면 아이작이 꽤나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앞으로 이름을 날릴 성배기사가 맨손으로 돌아다니게 할 순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아이작은 게벨 때와 달리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아들였다. 갑옷은 그다지 욕심이 없었지만, 심판의 검은 정말 탐나는 물건이었던 탓이다. 그 자체로 교단의 높은 사람임을 인증하는 장비이기도 했고. 만약 교단과 문제가 생긴다면 심판의 검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때 이솔데가 아이작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게벨 씨는 어떻게 하겠다고 하시던가요?"

아이작은 이솔데의 제안을 떠올렸다. 게벨이 원한다면 성기사로 복직시켜 명예를 되찾아 줄 수도 있다던 제안. 아이작도 그것 때문에 게벨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게벨은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게벨 씨는 아발란체 성기사단에서 탈퇴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렇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솔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게벨이 배교자의 멍에를 벗는다는 것은 아발란체 성기사단이 배교자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게벨이 더 이상 그 조직에 속하지 않고, 탈퇴했음을 증언해야 한다.

하지만 게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아발란체 성기사단은 그저 무고한 희생자였으니까.

"뭐, 언젠가는 게벨 씨의 억울한 사정도 밝혀지겠지요. 아무리 숨어지낸다 해도 두각을 드러낼 사람이니."

이솔데 입장에서는 노골적으로 교단의 판단에 맞설 수 없었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중립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도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애초에 게벨이 계속 수도원에 있을 것이라고는 아이작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벨은 여명군이 시작될 때 아이작의 곁에 있게 될 테니까.

***

이솔데는 보고를 위해 교단으로 돌아가고, 게벨은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게벨에게는 수도사들에 대한 작별 인사도 대신 부탁했다.

예정에 없이 수도원을 나서게 되었지만 갑작스럽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

이솔데가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이미 아이작은 떠날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그녀가 방문한 이유는 자신과 상관없었지만, 덕분에 이렇게 바로 훌쩍 떠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개인 소지품은 많지도 않았고, 포식 능력 때문에 식량도 준비할 필요 없었다.

'드디어 떠나는군.'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오긴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자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지나치게 허전함을 느끼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침 그에게 이정표가 되어 줄 새로운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성배기사가 되면서 찾아온 변화는 버프만이 아니었다.

[파수자의 등대(EX)의 조건이 만족되어 활성화되었습니다.]

아이작은 성배기사로 전직한 뒤 나타났던 메시지 하나를 다시 떠올렸다.

도무지 활성화 조건을 알 수 없어서 그냥 그림의 떡으로 남겨 두고 있던 파수자의 등대.

칼센 밀터의 궁극기이기도 했던 그 스킬이 마침내 활성화된 것이다.

'헤인켈의 예를 보면 포식으로는 선천적인 능력만을 습득할 수 있는데... 칼센이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성체였다는 뜻이겠군.'

대체 성체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배교를 저질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파수자의 등대는 빛의 법전에서도 최상위급 기적이다. 칼센의 탄생에 적어도 천사나 신의 의지가 개입했다는 뜻이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

중요한건 '바로 그 칼센'의 궁극기가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게임 속에서 파수자의 등대는 아주 강력한 방어 스킬로 묘사된다.

일정 시간 동안 무적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주변에 강력한 버프 능력을 부여한다고.

하지만 설정상 묘사되는 것은 다르다.

'파수자는 혼란으로 가득 찬 우주에서 질서의 기준을 잡는 자이며, 등대는 어둠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이정표이자 변하지 않는 존재를 은유한다. 파수자의 등대는 혼란과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골라주는 무오(無誤)한 존재이며... 뭐 그렇게 묘사되던 것 같은데.'

너무 거창한 설명이라 대체 어떻게 구현될지조차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이작은 모처럼 얻은 궁극기를 맥 빠지게 사용하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효과도 모른 채 사용했다가 곤란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작은 몸을 가다듬은 뒤, 파수자의 등대 능력을 발동시켰다.

이내 그의 눈이 밝은 섬광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성기사단이 휩쓸고 지나간 계곡은 을씨년스러웠다. 민간인 피해를 염려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곳곳이 기적으로 그을리고 박살 난 바위들로 가득했다.

계곡에 안개가 스며들 무렵, 희뿌연 안개 속에서 사냥꾼 복장을 한 세 사람이 등장했다.

2m에 이르는 장신의 사냥꾼 두 명과 그 가슴팍에 올까 말까 한 작은 체구의 소녀였다.

사냥꾼들은 성기사들이 뒤집어놓은 이 계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쓰며 사방을 경계했지만, 소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가 찾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혈흔을 찾고 있었다.

이 계곡에서 뱀파이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혈흔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했다. 뱀파이어의 피는 해가 뜨면 모두 먼지가 되어서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찾고 있는 혈흔은 특별했다. 지워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문득 소녀는 계곡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바닥을 더듬더듬 더듬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바닥에 손을 꽂아 넣었다. 손은 바닥을 두드리는 대신 마치 액체처럼 퍼지면서 사방에 붉은 피를 흩뿌렸다. 잠시 후 손을 뽑아 들자, 상처 하나 없는 손이 나타났다.

그 손에는 짧은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검은 이내 형태를 잃고 흐물흐물 무너지다가 소녀의 손을 타고 다시 흡수되었다.

"엘릴의 피다. 확실하군. 여기서 분열 예식이 적출됐다."

사냥꾼들 사이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설마 헤인켈 공작님께서...."

"아니. 백부께서는 돌아가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군. 다행히 아버지 걱정처럼 배교를 저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다시 무언가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검을 찾을 때처럼 손을 땅에 박아넣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이내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춰 섰다.

"뭐지?"

소녀는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시체가 끌려가거나 재가 된 게 아니다. 먹혔어. 이 자리에서."

38화. 황금우상 상단 (1)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에게 식인이나 흡혈은 어색한 풍습이 아니다. 오히려 권장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이나 신앙에서는 그런 행동을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소녀의 말은 같은 교단 안에 헤인켈을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소녀는 허리를 세우며 사냥꾼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돌아가라. 여기서부턴 나 혼자 추적하겠다."

"소공녀님."

"분열 예식을 잃어버린 상태로 돌아갈 순 없어. 가문의 물건을 무단 사용한 것은 백부님이니 우리 가문이 책임지고 찾아와야 한다. 하지만 이게 다른 가문과도 얽힌 문제라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돌아가."

사냥꾼들은 그녀를 두 번은 말리지 않았다. 왈라이카 사냥꾼들의 힘의 척도는 노련함이나 단련보다는 혈통에 달렸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소녀였다. 사냥꾼들이 돌아간 뒤에도 소녀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차마 사냥꾼들에게 말하지 못한 정보 때문에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에라도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가문이 뒤집힐 수도 있는 정보였기에 그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대체 왜 여기서 언급되는 거지?'

남은 혈액에서 읽어낸 정보는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부르짖는 비명으로 가득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지난 3개월 간, 아이작은 수도원을 벗어나 북부로 향했다.

게임에서 묘사된 것도 그랬지만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국경의 개념이 일반인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애당초 빛의 법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백제국조차도 원래는 '게르토니아 제국'이라는 번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이작이 지내던 수도원 역시 백제국 산하의 작은 공국에 포함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배자보다는 종교가 더 중요하다 보니, 같은 신앙끼리는 거의 같은 나라처럼 묶어 취급하곤 했다.

'일반인들은 그냥 백제국, 그리고 반대되는 불사 교단쪽 나라들을 흑제국이라고 부르는 거고....'

나라는 자주 바뀌고 통치하는 사람도 바뀐다. 하지만 신앙은 그 자리에 계속 남는다. 그래서 '빛의 법전'이 중심을 이루는 나라는 다 백제국으로 부르고 적대 국가는 흑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영역은 우호적인 신앙끼리도 묶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엘릴 교단은 엄연히 다른 신앙이지만 빛의 법전에서 파생되었고, 사이도 좋았기 때문에 백제국의 영역으로 묶였다. 반면 붉은 성배 클럽은 불사 교단과 결코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빛의 법전으로부터 배제당하는 입장이라 흑제국으로 엮이는 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작은 아무리 먼 거리를 여행하더라도 어지간하면 백제국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백제국은 영토가 아니라 개념의 영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백제국이라고 다들 똑같은 신앙, 똑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바르바리 같은 놈들이 그렇다.

"가진 거 다 내놔!"

"다 내려놓고 도망치면 목숨은 살려준다!"

아이작은 산비탈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목소리들은 아이작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아이작을 보더라도 과연 그들이 똑같은 말을 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지난 겨울 내내 산짐승을 잡아먹으며 헤맨 아이작의 꼴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산적 같은 꼴이라는 뜻이다.

산적들이 상인들을 포위하고 창칼로 위협하고 있었다. 상인들은 벌벌 떨면서도 마차를 둘러싼 채 스태프나 창 비슷한 것들을 들고 맞서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산적들의 수가 상인들보다 적었다. 산적들은 6명인데 반해, 상인들은 마차 밖에 있는 인원만 8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싸움은 사기긴 하지만.'

적을 죽일 각오가 되어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겁먹은 군중이 부딪치면 모래알처럼 부서지는 것은 군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적들은 꽤 살벌한 기색을 내뿜고 있었다. 싸움이 붙는다면 상인들 중 절반 이상은 죽을 것이 뻔했다. 아니, 항복하더라도 살려둘지 의문이었다.

아이작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상인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산적들은 아이작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고서야 화들짝 놀라 창칼의 방향을 바꿨다.

반대로 상인들은 아이작을 산적 일당 중 하나라고 생각한 건지 비명을 지르며 창으로 찌르려고 했다. 하지만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은 바닥을 찔렀다. 뭘로 어떻게 쳐낸 것인지 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아무도 없었다.

"넌 뭐야! 너도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산적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제야 상인들은 화색을 띠었다. 산적과 일당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안심할 수 있었다.

"용병입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저희 좀...!"

"케산 지방에서 출발해 쇠르로 가는 상단 맞습니까?"

상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아이작을 보았다. 아이작은 마차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 자기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작은 검집의 칼을 느슨하게 뽑으면서 산적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자, 나는 신앙이 없다. 거수."

갑작스러운 말에 산적들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놈들은 아이작의 여유로운 태도와 아까 창을 쳐내던 모습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한 놈이 창으로 간을 보듯 대범하게 찔러왔다.

아이작은 좀 더 강한 '설득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빡!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대가 부서지고, 산적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그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두가 볼 수 있었다. 아이작이 그렇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아이작은 간단하게 창대를 낚아챘다. 산적은 창을 비틀어 빼앗으려고 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작의 왼손에 손바닥만큼 스며 나온 촉수와 빨판과 이빨이 창대를 꽉 물고 있었다. 아이작을 통째로 들어 올리지 않는 이상 창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이작은 그대로 창을 빼앗고는 남자의 머리가 바닥에 처박힐 정도로 내려쳤다.

굳이 칼을 휘두르지 않고 묘기를 부린 이유는 한가지 뿐이었다.

"너희들 다 죽이면 이 한겨울에 땀난다. 쫓아가서 죽여도 마찬가지지. 곧이곧대로 말하면 살려줄 테니까 말해. 나는 신앙이 없다, 거수."

땀이 나고 말고는 중요한 문제였다. 우선 아직 추운 계절이었고, 둘째로 아이작의 체질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잔챙이들을 쫓아다니면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산적들은 아이작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우물쭈물하다가 하나둘 무기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유독 눈에 띄게 살기를 띠던 두 놈은 기어코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개새끼가!"

아이작은 일찌감치 놈들이 결국 달려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도적질보다 살인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작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심판의 검이 겨울 햇빛을 여러 갈래로 부서뜨렸다.

***

두 구의 시체와 기절한 한 명을 정리한 뒤, 아이작은 다른 네 명을 꽁꽁 포박한 뒤 무릎 꿇려두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인 두 명을 물끄러미 관찰했다.

바르바리 산적들이 다른 산적들에 비해 유독 포악한 것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사후세계를 포기한 이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게 없으니까. 하지만 이들은 증오에 가까운 살의를 보였다. 그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상인들한테 원한이라도 있나? 내가 알기론 그냥 평범한 상인들인데.'

그 점이 신경 쓰여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한 상인이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저... 기사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응? 아, 아이작이다."

아이작은 상대가 자신을 기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지난 겨울 동안 그가 성기사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후줄근한 행색도 행색이지만 도무지 건장해지지 않는 체구와 여리여리한 외모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방금도 상인들이 자신을 용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아,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얘기인가?'

반면 상인은 아이작이 성을 언급하지 않은 걸 보아 귀족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모처럼 얻은 우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성기사도 귀족으로 취급되기는 마찬가지다. 신분제를 좋아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들은 마음껏 누리는 특권을 굳이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아이작은 웃사람의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왜 그러지?"

"저놈들 살려두실 겁니까? 이 계곡에서 죽은 사람들이 꽤 됩니다. 산적들 중에서도 흉포한 놈들이죠. 고아하신 마음씨는 잘 알겠습니다만 분명 살려두면 또...."

상인들은 자신들을 위협했던 산적들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새였다. 어쩌면 그들의 지인들의 복수가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작정하고 살인하던 놈들은 방금 다 죽였다. 살아있는 놈들한테는 용건이 있어."

"하지만...."

아이작은 다시 한번 상대방의 착각과, 신분제의 편리함에 감사했다. 아이작은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상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인은 아이작에게서 알 수 없는 강렬한 위압감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그제야 그는 상대방이 방금 사람 둘을 죽였으며, 그 사실에 눈 깜짝도 안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다시 되새겼다.

"어쨌든, 케산 지방에서 출발한 상단 맞지?"

"예. 그런데 왜 저희를 찾으신 건지...."

"딱히 너희들을 찾은 건 아니다. 케산 지방에서 물건을 사간 상인들을 찾고 있었거든."

아이작은 마차에 다가가 짐칸의 모포를 훌쩍 젖혔다. 상인들은 어어 하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안에는 두터운 포대에 감싸여 있는 식물 구근들이 잔뜩 실려있었다.

아이작이 맡은 냄새는 그 구근의 냄새였다.

아이작이 포대를 내려놓자 상인들은 서둘러 다시 짐칸을 정리했다.

"로어커스 구근을 실은 마차라, 가져가면 돈 좀 벌겠군."

"어, 어떻게 그걸...."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로어커스는 향이 풍부한 꽃이다. 예쁘기도 하고, 게임에서는 마법 저항 능력을 낮추는 포션 재료로도 쓰이지만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이 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로어커스 값이 엄청나게 오르고 있다고?'

아이작이 케산 지방에서 트롤에게 잡아먹힐 뻔한 상인 한 명을 구해 주고 얻은 정보였다. 상인은 가진 돈이 얼마 없었고, 대신 돈이 될 만한 정보를 주었다.

북부 대도시인 쇠르에서 로어커스가 유행해 가격이 폭등 중이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이한 모양, 특이한 향을 내는 로어커스는 다른 로어커스에 비해 10배, 20배 가격에도 사들인다고 했다.

이 정보를 접한 상인들은 서둘러 로어커스를 짊어지고 쇠르로 향했다. 하지만 봄가을에 피는 로어커스는 이 한겨울에는 다 시들어 버린다. 때문에 취급하는 것은 대부분 구근이었다.

"어떤 모양으로 필지도 모르는 구근을 금화를 주고 사들인다면서?"

"예, 예. 들을 때마다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돌아가고 있지요. 다들 가져가서 한몫 잡아보려고 합니다."

"이 구근을 내게 팔 생각은?"

상인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작에게 돈이 있는지 없는지가 의문스러워서가 아니라 파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 구근은 이미 사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 사람한테 팔면 되지 않나?"

"그러니까 이게... 그 팔 권리를 산 사람이 또 있는데, 기사님께는 다소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상인은 뭔가 구구절절 설명하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어차피 아이작은 상인이 팔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상인은 아이작이 복잡한 개념을 피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반대였다.

아이작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더욱 놀라운, 현대적인 개념이었다.

'선물거래잖아?'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쇠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튤립 파동과 비슷했다.

물품의 비정상적인 폭등과 그 거래 물품을 둘러싼 복잡한 거래방식. 이게 꼬이고 꼬이면서 로어커스의 가격이 원래의 가치보다 훨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로어커스 가격이 오를 것을 예상하고 미리 로어커스를 사들이고, 누군가는 로어커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소유권을 판다. 여기에 경쟁이 붙으면 로어커스를 '거래할 권리'까지도 사고팔게 된다.

전형적인 선물거래였다.

상인은 로어커스를 단순히 운반할 뿐 이미 소유자는 이리저리 오가는 상태였다. 결국 누가 로어커스를 갖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이 이 사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 가격 폭등이 결국 여명군의 시작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어커스의 가격 폭등은 튤립이 그랬던 것처럼 끔찍한 폭락으로 이어지고, 백제국 경제가 거덜 나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킨다.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백제국은 전쟁을 선택한다.

물론 겨우 로어커스 파동 하나 때문에 여명군이 일어나진 않는다. 여명군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하는 사건이니까.

다만 그중 한 축 정도는 차지할 것이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들끓으면 위정자들은 전쟁으로 시선을 돌리는 법.

당시에는 게임적 배경에 불과했지만 지금 아이작에게는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

'여명군이 일어나는 게 나한테는 좋지만...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는 없을까?'

39화. 황금우상 상단 (2)

아이작은 어차피 성물을 찾으러 쇠르로 가는 길이었다.

기왕 이 사태에 휘말리게 된다면 최대한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하고 싶었다.

"저, 그러면 사례금은 얼마나 원하시는지...."

그때 상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작은 공짜로 도와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상인이 먼저 입을 열어 준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는 푼돈으로 만족하기 위해 쇠르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고맙지만 나도 쇠르로 가는 길이니 사례는 거기서 받도록 하지."

"쇠르에서요?"

"상단 조합이 있지 않나? 거기서 얘기하지."

상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임시방편으로 사례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뜯어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목숨을 구원받았으니 별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곧 바뀌었다.

"황금우상 상단이지? 거기 지부장에게 내가 방문할 거라고 전해."

상인은 황금우상 상단을 언급하자마자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아이작의 말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그런데 방문하실 예정이라면 저희와 함께 동행하시는 게 아닙니까?"

"아니야. 나는 저 친구들한테 볼일이 있어서."

아이작은 산적들을 가리켰다. 살아 있는 산적들에게 용무가 있다고 했던 아이작의 말을 떠올린 상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이작에게 전했다.

소의 머리뼈가 새겨진 동화 한 닢이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었다.

"제 이름은 비히크라고 합니다. 방문하시거든 안내원에게 그걸 보여주십시오."

"그래. 고맙군."

상인들은 다시 한번 아이작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에 마차를 끌고 움직였다.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작은 다시 산적들을 향해 돌아섰다. 산적들은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이제 이 산적들에 대한 용건을 해결할 차례였다.

"자... 그러니까 너희들 전부 신앙이 없다는 거지."

"...예."

"저기 기절한 놈도?"

"예."

신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그 이름으로 기적도 부리며, 심지어 살아있는 신이 땅 위를 배회하는 세상인데 신앙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약자를 자처하는 일이다. 신앙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아이작조차도 눈앞의 '무신론자'들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니 이 세계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가.

사람들은 그들을 단순히 '이상한 사람'을 넘어서 '문명화되지 못한 자들', '가르침 받지 못한 자들', 심지어 '신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족속', '야만인', '신을 이해할 수 없는 모자란 지성'으로 취급하곤 했다.

보통은 '바르바리'라고 부르며 멸시했다이런 바르바리들은 아홉 신앙을 믿는 국가 어디서도 주류에 속할 수 없었다. 쫓겨나거나 배척당하면 양호한 수준으로, 자연히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산적이나 강도, 화전민, 유목민 정도니 로튼해머가 해 왔던 것처럼 토벌당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바르바리들을 그렇게만은 보지 않았다. 애당초 아이작의 눈에는 아홉 신앙의 신들 모두 그냥 게임 캐릭터나 설정처럼 보였으며, 그중에서도 이름 없는 혼돈은 당최 왜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아이작이야말로 진짜 중의 진짜 바르바리였다.

그래서 아이작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너희 신앙 가져볼 생각 없냐?"

"...신앙이요?"

바르바리들 사이에서 거부감이 스쳐 지나갔다.

바르바리들이 신앙을 갖지 않게 된 이유들은 다양했다. 아홉 신앙에 원한을 가져서, 그냥 세상에 없는 새로운 신을 믿고 싶어서, 이미 믿고 있던 고대신이 죽어 버려서, 신앙 자체에 회의감을 가져서, 교단에 죄를 짓고 도망치거나 쫓겨나서... 등등.

신앙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거나, 가질 생각이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들을 위해 대체재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무슨 신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꼭 지금 알려고 할 필요 없고."

아홉 신앙 중 어떤 것을 말하냐는 뜻이었지만 아이작은 대답을 회피했다.

"일단 들어봐. 진지하게 믿을 필요도, 제물을 바칠 필요도 없어. 그냥 간단한 규칙만 몇 가지 지키면서 살면 되니까."

바르바리들은 미심쩍은 것을 넘어서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칼 든 상대 앞에서 싫다고 뺄 수도 없었다. 그러다 한 바르바리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 신앙을 가지게 된다면 기사님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아니. 그렇게 쉽게 힘을 가지려고 하면 도둑놈이지."

"그러면 왜 저희가 그 신앙을 가져야...."

"그러면 내가 살인강도인 너희들을 왜 살려두어야 할까?"

그걸로 설득은 끝이 났다.

바르바리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아이작의 말에 귀 기울일 채비를 마쳤다.

"자, 그러면...."

그렇게 바르바리나 다름없는 성기사는 날강도 같은 포교를 시작했다.

"우선 저 하늘 위에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

"좋아, 그러면 내가 가르쳐준 것들 명심하고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아."

"예. 어르신."

아이작은 설교를 마친 뒤 바르바리들을 포박에서 풀어 주었다. 바르바리들은 이렇게 쉽게 풀려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결국 한 바르바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어르신. 좋은 가르침이기는 했습니다만 이 말씀이 저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작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염이 부숭부숭한 피곤한 안색의 중년 남자였다.

'산적 치고는 좋은 놈이군.'

사실 아이작 앞에서 그냥 알아들은 척하고 도망간 다음 잊어버렸어도 될 일이다. 아이작도 당연히 말 몇 마디로 그들을 개종시켰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아이작의 설교에 흔들렸으며, 개종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냥 신앙이 있다고 아니꼽게 구는 놈들이 있어서 해준 말이야. 그냥 앞으로 '나한테는 지켜야 할 신앙이 있다' 정도만 생각하고 살아."

각 신앙에는 나름의 도덕과 규율이 있고, 거기에 맞춘 사후세계를 보장한다. 하지만 바르바리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막 살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아이작은 그걸 좀 바로잡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작은 그동안 느슨한 도덕 규범을 만들어서 전파하면서 다녔다.

이름 없는 혼돈은 통째로 교단이 날아갔기 때문에 교리도 경전도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아이작이 새롭게 즉흥적으로 새롭게 써야 했다. 게다가 이름 없는 혼돈의 규범에는 나쁜 짓을 하면 지옥에 가고, 좋은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법칙조차도 없었다.

그냥 가급적이면 나쁜 짓 하지 말고 남들한테 너무 신경 쓰면서 살지 말라는 것이 전부였다. 과연 이 느슨한 교리가 누군가를 교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긴 했다.

하지만 오히려 느슨하기 때문에 지키기도 쉬웠다.

이들 대부분은 메이저 종교의 엄격한 규율과 제약에 거부감이 있어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겐 '남들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남을 신경 쓰면서 살지 말라'는 느슨한 교리가 색다르게 다가갔다.

혹은 아이작의 남다른 외모와 매력에 쉽게 넘어갔거나.

항상 그러했듯, 이번에도 아이작은 교리 전도에 성공했다.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가 전파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름 없는 혼돈의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아이작이 교리 전파를 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난 메시지였다.

4명 모두 아이작의 말을 귀담아들은 상태였다. 아이작의 매력 스탯은 이 사이비 교주스러운 구도에서 강력하게 발휘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임의로 만든 교리였지만 시스템은 이를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로 인식하는 듯했다. 어쩌면 아이작이 세상의 유일한 신도이자 교리 전파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이름 없는 혼돈의 교리를 받아들일 때마다, 아이작은 그의 기척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아직 눈앞의 바르바리들은 이제 막 아이작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둔 정도기만 한 듯, 뚜렷하지는 않았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바르바리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이작에게 인사한 뒤 시신을 수습해 돌아갔다.

아이작은 돌아가는 그들의 영향력이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이걸로 바르바리 산적들의 본거지 위치도 추적할 수 있겠군.'

아이작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분명한 기척은 아니지만, 어차피 온 세상에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라고 할만한 사람은 극소수였기 때문에 위치를 특정하기는 쉬웠다.

언젠가 아이작은 이렇게 흩뿌린 신앙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자신이 언제고 이름을 날리고 명성을 높이다 보면 자신만의 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전도는 그때를 위한 씨앗이었다.

다른 신앙들로부터 버림받고 주린 자들이야말로 아이작의 지지기반이 되어 줄 것이다.

"지힐렛."

아이작이 부르자 숲속에 있던 기이한 짐승이 튀어나왔다. 아이작이 역병신 지힐렛의 사체를 기반으로 만들어낸 혼돈의 자손, 지힐렛이었다. 한동안 마음껏 포식하지 못한 지힐렛의 몸은 많이 줄어든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말만 한 덩치였다.

아이작은 능숙한 태도로 그 등 위에 올라탔다.

지힐렛은 별 명령이 없어도 아이작의 의지를 느끼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탑승감이 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인적이 드문 숲속이나 계곡 사이를 달리기에는 말보다 훨씬 나았다. 사람들의 시선만 없으면 벽도 탈 수 있으니까.

'로어커스 사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쇠르로 가자. 어차피 거기서 성물을 찾기로 했었으니까.'

***

아이작은 쇠르에 도착하자마자 후끈한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남부 지방 곳곳에서 올라온 마차들에서 흙과 로어커스 구근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제 초봄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곧 로어커스를 심을 때가 온다. 너무 늦기 전에 농부들에게 팔기 위해 서둘러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 농부는 거의 보이지 않고 머리가 벌게진 상인들만 보였다. 상인들은 복잡해진 거래 시스템에 핏대를 올려 가며 흥정하고, 싸우고, 간신히 협상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광기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시장 분위기였다.

아이작은 시장을 지나쳐 중심가에 있는 한 상회에 도착했다.

금색 황소가 간판에 그려진 상회였다.

"어서오세...."

상회의 안내원은 꾀죄죄한 차림새의 아이작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가 내민 동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둘러 어딘가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익숙한 얼굴이 뛰어 내려왔다.

아이작이 구해 주었던 바로 그 상인, 비히크였다.

"기사님, 오셨군요. 바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비히크는 그를 서둘러 안내하려다가 곧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아이작을 돌아보았다.

"저, 그런데 아이작 님."

"왜 그러지?"

"바로 지부장님께 안내해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식사와 목욕, 휴식 중 급하신 것은 없으십니까?"

그제야 아이작은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도, 목욕을 한 적도, 지붕 있는 곳에서 쉰 일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지금 아이작은 자기가 얼마나 냄새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비히크의 처지를 이해해 주기로 했다.

"우선 좀 씻도록 하지."

40화. 황금우상 상단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