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황금우상 상단 (3)
상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중에는 먼 거리를 온 상인들도 있고, 상회에서 극진하게 대접해야 할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숙박시설을 운영하는 것은 당연했다. 규모가 작은 상단이라면 따로 여관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거대한 상인 연합. 당연히 안에 숙박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음... 그래도 이런 시대에 개인 욕탕을 마련해줄 정도라니.'
아이작은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묵은 때를 녹여 냈다.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 들어온 이래로 뜨거운 물에 목욕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날이 서 있던 긴장감도 말랑말랑해지는 것을 느꼈다.
온수는 일일이 장작을 태워서 데우는 구조였기 때문에 아이작이 오래 목욕하면 할수록 돈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아이작에게 눈치를 주거나 독촉하지 않았다.
씻고 나가자 하녀가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하녀는 아이작에게 수건을 건네주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멈춰 섰다.
"왜 그래?"
"아, 아뇨!"
하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황급히 수건을 넘겨주고 허둥지둥 앞서나갔다. 허우적대는 하녀의 뒤를 따라가니 식당이었다. 가운데 아이작을 위해 비워둔 듯한 테이블이 보였다. 아이작이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이, 그를 향해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어이, 저것 봐."
"아니, 저거...."
북적대던 식당은 술렁이는 분위기로 번졌다.
그중에는 아이작이 구해 주었던 상인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조차 아이작을 알아보지 못했다. 때가 가득 타 있던 아이작이 시간을 들여 씻고 나오자 군중을 사로잡을 정도의 외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거....'
아이작은 슬슬 부담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너저분한 꼴로 다니거나 수도원에서 맨날 아는 얼굴만 부딪쳐 실감하기 힘들었는데, 막상 겪어 보니 이것도 꽤 부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 남들 다 바닐라 외형을 쓰고 있을 때 나 혼자 모드 깔고 매력 99 찍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이런 외모를 즐기는 것도 게임 속에서나 하는 거지 실제로 하려니 곤혹스러웠다.
다행히 아이작이 자리에 앉자마자 요리가 나왔다. 향신료와 꿀을 발라 구운 돼지고기와 와인에 절여 끓인 닭 요리, 갓 구운 흰 빵이 먼저 나왔다. 하나하나 풍미가 굉장하고 재료를 아끼지 않은 요리들이었다.
아이작은 시선을 신경 쓰는 대신 음식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불에 닿은 요리를 먹는 것은 거의 2주 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시선은 다른 의미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대체 저 가느다란 체구에, 저 요리들이 다 어떻게 들어가는 거지?
아이작이 상인들 앞에서 중세 스타일 먹방을 찍고 있는 사이, 그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상인들을 구해 준 것치고는 과한 대접이군.'
아이작은 일단 황금우상 상단의 접대 점수에 합격점을 주었다.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이 결코 손해 보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거래와 흥정, 탐구는 신앙이자 교리였으니까.
'아홉 신앙 중 하나인 황금우상... 상인들의 신앙이지.'
그리고 아이작이 이 세상에 넘어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엔딩을 봤던 그 신앙이기도 했다.
황금우상 상단은 그 구조가 특이했다.
음모와 비밀스러운 결사로 이루어진 붉은 성배도 왈라이카 왕국이라는 구심점이 있다.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은 그 어떤 구심점이 되는 국가가 없었다. 곳곳에 무역 거점으로 취급되는, 사실상 황금우상 상단이 지배하는 도시가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관심사는 세금과 규제뿐이었다.
애초에 무역을 위해 온갖 국경을 넘나드는 그들에게 국가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불필요한 긴장감만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대신 그들은 자본을 지배했다.
돈이 필요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물류를 유통시키고,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치거나, 자신들을 적대하는 자들에게 돈을 주고 평화를 샀다.
그 결과 어떤 신앙의 국가든 황금우상 상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언데드로 이루어진 국가인 흑제국에서조차 황금우상 상단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상업이 발달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치안이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치안이 좋은 백제국 쪽에서 황금우상 상단이 제일 번성하고 있었다.
모든 상인들이 황금우상 상단의 신도는 아니겠지만,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분명했다.
***
아이작이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때, 비히크가 찾아왔다.
아이작은 그의 얼굴보다 그가 양손에 들고 온 맥주를 더 환영했다. 하지만 비히크는 아이작의 얼굴을 보고 잠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목이 메이던 아이작은 비히크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맥주잔을 빼앗아 한입에 다 털어 넣어 버렸다.
비히크는 간신히 아이작의 대각선 자리에 앉았다.
"보기보다 호쾌하시군요."
"나는 늑대도 한입에 삼켜봤어."
비히크는 농담이라고 생각한 듯 웃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웃지 않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가 기다리던 한 중년 여인이 다가왔다.
비히크가 재빨리 그녀를 소개했다.
"저희 상회 지부장님이신 캐틀린 쉬버 님이십니다."
캐틀린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모두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 하던 말을 꺼냈다.
"이렇게 잘 먹는 천사분은 처음 보는군. 천국에서는 밥을 안 주는 모양이지?"
"아이작이다. 아리엣 수도원 출신."
캐틀린은 아이작의 짧은 말투에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연장자 대우는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요. 성기사님."
성기사라는 말에 비히크는 눈을 크게 떴다. 실력을 보고 기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성기사까지는 생각 못 한 듯했다. 아이작은 재밌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목욕하는 사이 장비라도 점검했나?"
"그런 무례를 저지를 리는 없지요. 다만 이쪽도 정보가 좀 빠른지라...."
캐틀린은 테이블 위에 얹어둔 물소 해골 문양 동전을 두드리며 말했다.
"...새로 나타난 젊고 아름다운 성배기사님께서 우리 쪽 사람들을 몇 번 구해 주신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동선이 자연스럽게 쇠르로 향하고 있던 것도 알고 있었죠."
"'그' 성배기사님이셨습니까?!"
비히크가 반사적으로 낸 소리에 식당 안의 시선들이 쏠렸다.
"'그' 성배기사라니?"
되물은 것은 오히려 아이작이었다. 비히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새로 성배기사가 나타나 활동한다는 이야기가 상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돌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엘릴을 제외하면 성배기사는 멸종된 거나 다름없다고 여겨지고 있었으니까요. 헛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성배기사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특히나 성배기사라는 개념이 엘릴 왕국을 제외하면 거의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오지나 위험한 곳을 지나다니는 상인들에게는 더 유명한 이야기였다.
'하기사 오락거리가 부족한 시대니까.'
즉, 캐틀린은 비히크가 보고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작이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그녀를 직접 이렇게 찾아올 것이라곤 생각 못 했겠지만.
그제야 아이작은 이 극진한 대접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투자가치가 있는 투자처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황금우상 상단은 전통적으로 성배기사들의 후원자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을 구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주 십시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아이작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부담을 덜어 놓고 편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앓는 소리를 하면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이 황금우상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황금우상 상단이 성배기사들의 후원자인 것 역시 거짓말은 아니다. 성배기사가 객지에 고립되었을 때, 사정이 생겨서 신분을 숨겨야 할 때, 급하게 자본이 필요할 때 의지할 곳은 늘 황금우상 상단뿐이다.
'게임에서도 던전이나 적지에서 적절히 나타난 상인 덕분에 목숨을 건지는 일이 많았지... 뭐, 게임이니까 그렇게 표현되는 거겠지만.'
물론 공짜는 아니다. 한번 빚을 지우면 황금우상 상단은 성배기사에게 돈 대신 보호나 무력을 부탁한다. 다른 신앙의 성기사에게 부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특권이다.
"그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이작은 빈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로어커스 때문에 내게 부탁할 게 있는 거 아닌가?"
***
셋은 식사를 마치고 장소를 옮겼다. 상회 근처에 구성된 시장이었다.
캐틀린과 아이작은 그 시장의 열기를 흠뻑 느끼며 걸었다.
무역거점인 대도시답게 쇠르는 시장의 규모도 어마어마했다. 아이작은 그 안에서 열기만큼이나 짙은 로어커스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욕심의 냄새였다.
시장의 열기가 정점인 곳은 단연 로어커스 거래 시장이었다.
아직 시장에 현물로 도착하지도 않은 로어커스 구근은 물론, 로어커스가 성장한 다음 핀 꽃봉우리의 양, 거기서 나올 새로운 구근, 그리고 그 구근을 팔아서 얻게 될 수익까지 세분화해서 팔고 있었다.
비단 로어커스만이 아니라 로어커스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비료, 농기구, 마차 등등 수많은 것들이 거래되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다른 꽃들의 가격도 덩달아 오르고 있었다.
'이미 다들 정신 나갔군.'
아이작은 생각 이상으로 광기 어린 상황에 기가 막혔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써먹을까 생각했었다.
현대라면 폭락 지점을 예측하고 숏에 배팅하여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경제 시스템은 그 정도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고, 사태가 벌어졌을 때 회수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말려? 아니, 이건 누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어.'
인간의 욕심은 컨트롤할 수 없다. 아이작이 '곧 로어커스가 폭락하고 제국 경제가 망한다'라고 떠들어도 무시당할 것이다. 사실 알면서도 '나는 아니겠지' 하면서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다.
결국 폭락과 거래 시장이 거덜 나는 것은 예정된 미래였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캐틀린이 시장을 벗어나면서 물었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람의 욕심이 미쳐 돌아가는 것뿐인데 어쩔 도리가 있나? 황제라도 찾아와서 거래 금지를 시키면 모르겠지만."
"상단 수뇌부는 걱정이 많습니다."
"폭락 때문에?"
"아뇨. 로어커스 때문에 물류가 막혔습니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시장에는 온갖 농기구와 씨앗들이 거래되고 있었지만, 곧 찾아올 봄을 대비한 종자나 식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지나고 첫 수확을 거두기 직전의 봄이 가장 궁핍한 것은 아이작도 아는 상식이었다.
"어지간한 농부들은 봄을 대비한 종자를 구비해 두지만, 충분한 양은 아닙니다. 우량종자를 계속 공급해 주는 상인들이 있었으니까요. 가뜩이나 봄철엔 식량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인근 주민들의 민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아이작은 상인들을 습격하던 바르바리 산적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아이작보다 상인들을 더 죽이고 싶어 했다. 상인들에게 식량을 맡겨 둔 건 아니겠지만 이득 때문에 로어커스만 만지작거리고 생필품을 다루지 않는다면 원한을 품을 법도 했다. 게다가 그들은 대부분 혹독한 상황 속에서 살고 있을 테니.
"불안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는데, 내가 할만한 일이 있나?"
차라리 상인이나 귀족들을 설득해 다른 유통망을 확보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아직 아이작의 영향력은 그냥 떠돌이 칼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캐틀린은 그에게 확실한 용건이 있었다.
"로어커스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사람이 누군지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화훼 수집가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만, 그 정도 수요로 이런 광기가 형성될 리가 없습니다. 뭔가 다른 배후가 있는데, 저희 쪽 인맥으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알아내지 못했다?"
황금우상 상단의 교리 중 하나는 미지에 대한 탐구다. 그들이 단순히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포기했을 리가 없다.
캐틀린은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쪽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거군."
위험을 교묘하게 덮고 아이작을 끌어들이려 했던 것이다. 아이작의 얼굴에 언짢음이 담기자 캐틀린의 얼굴에 초조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거 저런 거 숨기면서 떠보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저...."
아이작은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아이작은 쇠르에 황금우상 상단에 관련된 성물을 찾으러 왔다. 그리고 상인들을 구해 준 것을 핑계로 정보를 좀 뜯어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쪽에서 아이작에게 부탁해 온 것이다.
협상을 하려면 부탁하는 입장보다는 부탁받는 입장이 낫다.
'이거... 성물 냄새가 나는군.'
어쩌면 그 배후자가 성물과 관련이 있는 놈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이작은 캐틀린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지만,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까탈스럽게 대답했다.
"좋아.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저희는 가진 게 돈뿐입니다. 돈이라면 충분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돈에 미친놈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점잖게 대답했다.
"내 수중에 로어커스가 조금 있는데, 한 달 뒤에 황금우상 상단이 지금 가격으로 전부 사줬으면 좋겠군."
41화. 돈 냄새 (1)
"로어커스... 말입니까?"
캐틀린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녀는 일단 빠르게 아이작의 심중을 살펴보는 눈치였다.
사실 아무리 살펴봐도 아이작이 로어커스를 많이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방랑하는 성배기사의 특성상 많은 자산을 소유할 수 없다. 이는 성배기사의 상징인 청빈과도 연결이 되었다.
캐틀린은 설마 그 청빈하다는 성배기사가 돈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싶었다.
'시장을 잘 몰라서 그냥 한번 건드려보는 건가?'
캐틀린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배기사가 청빈함을 앞세우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정에 돈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배고프고 춥다 보면 좀 더 넉넉하게 여정을 떠나고 싶은 마음도 자연스레 들 테니까. 하지만 용병처럼 돈을 요구하기는 그러니, 여정 도중에 얻은 물품을 처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아마 이 성배기사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지금 가져오신다면 현재 시장가에서 제일 높은 가격으로 쳐 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질 않거든. 수량도 확실치 않고."
"그럼 한 달 뒤에는 가지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참고로 좀 많을 수도 있어."
캐틀린은 아이작의 말에 웃고 말았다.
그래 봤자 개인. 아이작이 마차 열 대를 끌고 오더라도 황금우상 상단에게는 전혀 부담이 아니었다. 황금우상 상단이 유통시키는 물류의 양은 그 백배는 넘을 테니까. 심지어 캐틀린이 뒷조사한 바로는 아이작이 가지고 다니는 짐은 몸에 소지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한 달 뒤에는 지금보다 로어커스 가격이 훨씬 더 많이 오를 텐데요. 왜 굳이 지금 가격으로 사줬으면 좋겠다는 겁니까?"
아이작은 그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돈놀이를 하지 않는다. 지금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당장 팔 수는 없지만, 시세가 올랐다는 이유로 과도한 이익을 챙길 생각도 없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캐틀린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캐틀린은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성배기사가 어쭙잖게 장사에 손을 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에 대한 생각도 했다.
'로어커스 가격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로어커스 가격이 몇 배씩 폭등할 때마다 했던 생각이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열풍인 만큼 갑자기 꺼질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런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이 성배기사가 내가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폭락을 감지하고 있다면....'
캐틀린은 상단이 입을 수 있는 손해를 가늠해 보았다. 로어커스의 시세가 지금의 절반, 아니, 1/10 수준으로 떨어지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정도 수준이 되면 상단 전체 거래 물량을 걱정해야 하지, 개인이 취급하는 정도의 물량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이 젊고 가난한 성배기사가 취급할 수 있는 물자의 양이란 결국 정해져 있으니까.
애당초 원래 아이작에게 주려고 했던 보상금을 생각하면 훨씬 적은 액수였다.
'이 세상 물정 모르는 성배기사가 이득을 보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챙겨줘야겠군.'
캐틀린 입장에서는 일만 제대로 마무리된다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거래였다.
"정확히 한 달로 표기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수량은 미정으로 하겠습니다."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틀린은 비히크를 시켜 계약서를 작성했다.
[황금우상 상단은 한 달 뒤 아이작이 가져오는 로어커스를 현재가에 전부 구매하도록 한다.]
옆에는 로어커스의 현재가가 얼마인지도 정확하게 표기했다. 캐틀린은 아이작이 물류의 수송 비용이나 보관 비용 같은 것을 계산했을지 궁금했다.
아이작이 계약서를 검토하고 서명하는 모습이 묘하게 능숙해 보여 마음에 걸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걸로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아이작 님. 황금우상이 이 계약을 보증합니다. 위반자는 청구보증에 의해 정당한 대가가 징수될 것입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용병으로 고용되었습니다.]
[행운이 소폭 상승합니다.]
[안목이 소폭 상승합니다.]
황금우상 상단의 용병으로 고용되자 아이작에게 축복이 부여되었다. 다른 상단에는 부여되지 않는, 황금우상 신앙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하지만 급이 높은 계약은 아니어서 그런지 혜택이 두드러지게 크지는 않았다.
아이작이 계약을 마친 뒤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쇠르의 슬럼이었다.
이 시기의 자본 시장은 제로섬이다. 누군가 더 가지면 다른 사람은 무조건 더 잃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특정 품목만 비대하게 유행하면 반드시 망하는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쇠르의 슬럼은 그런 사람들로 가득했다.
원래 다른 품목을 취급하던 상인이나 유행을 알지 못했다가 크게 손해를 본 상인, 한몫 잡아보려는 욕심으로 기어들어온 용병, 주린 배를 쥐고 흉흉하게 눈을 빛내는 바르바리... 어두컴컴한 골목과 하수구 사이사이에서 사람들이 서성였다.
활기찬 화훼시장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들이 살해당했다 이거지.'
아이작은 아무 생각 없이 바닥부터 헤매지 않았다. 우선 황금우상 상단이 조사하던 정보들을 모두 넘겨받았다. 그 정보들은 이리저리 헤맨 끝에 슬럼을 가리켰다.
양지의 시장에서도 자본이 비정상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음지에서조차 자본이 이상하게 흐르고 있다는 정보였다. 정보원들은 그걸 조사하다가 살해당했다.
'용의자를 꼽기에는 너무 많군.'
살벌한 눈빛들을 보아하니 로어커스 유행으로 손해를 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듯했다. 어깨만 부딪쳐도 죽일듯한 눈빛이었다.
아이작은 그 살의 어린 눈빛을 보며 캐틀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런데, 찾고 나면?'
'예?'
'로어커스를 사들이는 놈을 찾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하지? 해치워 달라고?'
'아, 아뇨. 그런 무도한 짓을 성배기사님께 어떻게 부탁하겠습니까. 그저 저는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로어커스를 사들이는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정말 관상 목적이라면 그냥 큰돈을 날리는 걸 텐데.'
'그러면 우리 사람을 해치울 리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정보니까요.'
로어커스는 관상용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는 그저 마법 저항력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것 말고는 의미가 없었다. 당장 리치나 드래곤을 잡기 위해 모으는 게 아니라면 물가 교란이 일어날 정도로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있는데....'
로어커스 붐 배후에는 단순한 시장 교란이 아니라 뭔가 비밀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황금우상 상단도 그게 궁금해서 아이작을 고용한 게 분명했다. 통제할 수 있다면 통제하면 좋겠지만, 돈벌이가 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자기들도 알아야 할 테니까.
'우선 정보원을 죽인 놈들부터 찾으면 되겠지.'
말끔하게 씻고, 푹 자고 나온 아이작은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도련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도련님에게는 당연히 파리가 꼬인다.
"아가씨! 물건 좀 보세요!"
골목에서 뛰어나온 아이들이 아이작을 둘러싸고 온갖 잡동사니들을 내밀며 사 달라고 독촉했다. 구운 쥐, 비둘기, 어디서 훔쳤는지 모를 특이한 돌... 하지만 녀석들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꼬마 중 한 녀석이 아이작의 허리춤에서 동전 주머니로 향했다. 조용히 끈을 잘라 훔쳐 가려던 순간, 아이작의 손이 녀석의 손목을 낚아챘다.
"악!"
아이작이 달리 팔을 비튼 것도 아닌데 꼬마 아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작의 시선을 끌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멀어졌다. 꼬마의 비명에 거리의 시선이 아이작에게로 쏠렸다.
"어이, 너 뭐야? 왜 애를 괴롭혀?"
꼬마의 비명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기다렸다는 듯 모여들었다. 커다란 솥을 걸어놓은 모닥불 주변에서 서성이던 바르바리들이었다. 꼬마 아이를 구하겠다는 정의감보다는, 꼬투리를 잡았다는 눈치였다.
소도 잡을 것 같은 커다란 칼을 보면서 아이작은 꼬마의 손을 놓아주었다. 꼬마의 손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 이 새끼 애 손을...."
"그냥 긁힌 거니까 놀라지 마라."
정확히는 왼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면서 꼬마의 손을 물어뜯은 흔적이었다. 남자들은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봤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누그러들진 않았다.
아이작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으슥한 골목에, 주변의 시선은 거의 없고,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찾으러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야, 곱상한 놈. 가진 거 다 내놓고...."
"식상한 말은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아이작은 칼집에서 칼을 느슨하게 뽑으면서 말했다. 아이들이 꼬이도록 내버려 둔 것, 비명을 지르게 만든 것, 남자들이 모여들 때까지 기다린 것, 전부 의도한 것이었다.
"너희들 중 신앙인 있으면 일단 손들어."
***
아이작의 검술은 살벌하다.
특히 일 대 다수의 싸움이라면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는 끝을 보기가 힘들었다. 특히 촉수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부족한 체력을 생각한다면 한 번에 한 명씩 죽여 버리는 쪽이 유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작은 여기서도 한 두세 명은 목을 잘라야 나머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여유 있게 칼을 뽑아 들자마자 남자들은 바로 무기를 내리고 손을 들었다.
"뭐야? 너희 다 신앙인이라고?"
"예... 이 친구랑 저 친구는 빛의 법전 신도고, 저쪽은 엘릴, 나머지는 황금우상 신도였습니다."
아이작은 도망치려고 하던 놈들의 오금을 걷어차 주저앉힌 다음 심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어이없게도 그들 중 바르바리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바르바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금우상 신도였다는 자는 사채를 쓰고 계약을 어기는 바람에 지옥에 갈까 봐 무서워서 신앙을 버렸다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바르바리 같은 꼴을 하고 다녀?"
남자들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야 무서워하니까요?"
아이작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이놈들이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을 죽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이 골목에서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다.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이었는데, 거기에 대해 아는 사람?"
"저희는...."
"모른다거나 결백하다거나 하는 도움 안 되는 소리는 닥치고 있고 그냥 아는 것만 얘기해."
놈들은 우물쭈물하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저희가 만나 뵌 적 있는 분 같기는 합니다. 황금우상 상단 분들은 특유의 말투가 있거든요. 저희가 파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더군요. 그래서 그냥 몇 가지 알려드렸을 뿐입니다."
"파는 것?"
"예. 기사님이 오해하시고 계신 것처럼 저희는 강도 같은 게 아니구요...."
"그런 놈들이 칼을 들고 협박해?"
"...그저 좋은 물건을 추천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원래 거리의 남자들은 그런 식으로 친해지는 거잖아요?"
"아, 강매로군."
아이작은 남자들의 수작을 알아보았다. 일부러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 다음 화해를 조장하면서 하찮은 물건을 고가에 강매하는 것이다. 이러면 경비대에 걸리더라도 강도질까지는 아닌 셈이고, 누군가 피를 보거나 죽을 염려도 없다.
나름 순박한 강도들인 셈이다.
"왜? 너희들도 구운 쥐 고기라도 팔려고 했나? 정보원이 많이 배고팠대?"
아이작이 묻자 남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 결국 누군가 입을 열었다.
"기사님, 요즘 로어커스 잘 나가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로어커스?"
갑자기 로어커스 이야기에 아이작은 의아한 듯 물었다.
"예. 그런데 그... 아시겠지만 저희 같은 서민이나 손 작은 놈들은 이런 시장에서 뭐 하나 쥐기 힘들잖습니까. 로어커스 한 송이 사고 쫄쫄 굶는 것도 한계가 있고요."
개인 투자자는 현대나 이세계나 힘든 법이다. 아이작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한 명씩 배 곯으면서 로어커스를 사들일 바에야, 돈을 모아서 우리끼리 세력을 만들자고 합의한 겁니다. 그러다가 로어커스를 팔고 수익이 나오면 그 수익금을 나눠 갖기로 한 거죠."
아이작은 조금 감탄했다. 이들은 기초적인 형태의 펀드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의 감탄은 순수하게 감탄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구야?"
"예?"
"너희들끼리 그런 구조를 만들었을 만큼 똑똑해 보이진 않는데. 똑똑하면 여기서 강도질을 하지는 않겠지. 누가 너희들에게 그런 걸 시켰지? 그리고 강매해서 판다는 건 뭐고?"
그제야 신나서 떠들던 남자는 우물쭈물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로어커스 문양이 투박하게 새겨진 나무 동전, 아니 목전이었다.
"이 로어커스 코인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조직이 가지고 있는 로어커스를 팔 때마다 수익금을 비례해서 나눠줍니다. 저희도 이미 여러 번 수익금을 받았구요."
아이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로어커스 코인이라는 걸 사면."
"그 개수만큼 수익금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걸 나한테 왜 팔려고 하는 거고?"
"판 돈으로 로어커스 코인을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보아하니 자기들이 구매한 것보다 조금 더 비싸게 판매해 차익을 챙기려고 한 모양이었다.
"너희들은 얼마나 샀냐?"
남자들은 머뭇거리면서도 품속에서 수북할 만큼 목전들을 꺼냈다. 먹지도 인정받지도 못할 목전들을 보며 아이작은 뒤통수가 땡기는 것을 느꼈다.
'로어커스 폭등만이 문제가 아니었군.'
폰지 사기에 다단계, 코인질까지.
욕심이 쇠르 시민들의 뺨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42화. 돈 냄새 (2)
로어커스 폭등까지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도 있다. 튤립 폭등도 누군가의 의도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니까. 비정상적인 시장 흐름에 덩달아 사기나 손해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현대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 일어날 법한 사기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이건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시장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상인 한두 명이 머리 맞대고 벌일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 말고 혹시 또 다른 빙의자가 있나?'
아이작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해 봤지만 곧바로 부정했다. 자신이 네임리스 카오스에 빙의하게 된 계기는 세계 최초로 이름 없는 혼돈을 제외한 여덟 신앙을 엔딩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인제 와서 다른 누군가가 추가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의 개입?'
이쪽이 오히려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가장 의심되는 대상은 역시 황금우상이다.
아이작은 황금우상 상단 엔딩을 보면서 그들이 결코 건전하게 돈을 벌어들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전한 상거래는 황금우상의 한 속성에 불과하다.
캐틀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지만, 교단 수뇌부의 판단과 말단의 입장은 다를 수 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이작은 복잡한 집안싸움에 말려든 것일 수도 있었다.
'일단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겠군.'
아이작은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그 로어커스 코인이라는 건 어디서 샀냐?"
"그건 뭐하러 알려고 해?"
당연하지만 이 시건방진 남자들이 한 말은 아니었다.
***
아이작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2층 창문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애꾸눈 여자가 보였다. 그리고 주변에 부쩍 많아진 노숙자와 거지들도. 아이작은 그 넝마들 사이에서 칼붙이들이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작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대답했다.
"손님한테 예의가 없군?"
"코인 사고 싶으면 그 아저씨들한테서 사. 쪼잔한 소매 고객은 취급 안 한단다. 다 유통 단계를 거치는 거지."
애꾸눈 여자는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새 골목은 나가는 길목까지 노숙자들이 짊어지고 온 짐과 망가진 수레로 가로막혔다.
아이작과 대화하던 남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 얼어붙었다. 녀석들은 도망치기 위해 흩어지려고 했지만 살벌한 눈빛의 노숙자들에게 둘러싸이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코인을 팔러 직접 찾아온 것 같진 않았다.
"너희들이 황금우상 상단의 사람을 죽였나?"
"잘 모르겠는데. 본인한테 한번 물어봐. 천국이나 지옥, 둘 중 어딘가에 있겠지."
애꾸눈 여자가 신호를 준 순간, 노숙자들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여자의 말을 듣고 이들이 진짜 바르바리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앙인들은 천국이나 지옥으로 농담하지 않는다. 그걸로 농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바르바리뿐이다.
아이작이 칼을 뽑아 든 순간, 바르바리 암살자들은 그 칼날에 몸을 던지는 대신 넝마를 집어 던졌다. 넝마 속에는 보통 칼로 끊기 힘든 철망이 섞여 있었다.
아이작의 몸이 순식간에 넝마와 철망에 휘감기자, 옥상과 골목 사이사이에 대기하던 궁수들이 가차 없이 화살을 날렸다.
퍽, 퍼퍽.
넝마 뭉치는 삽시간에 화살 꽂이가 되었다. 화살이 연달아 저항 없이 꽂히자 노숙자들 중 한 명이 힐끗 애꾸눈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할까요?'
애꾸눈 여자는 방심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숙자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창을 꺼내 들고 화살 꽂이가 된 넝마 뭉치를 꿰뚫었다.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애꾸눈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쉬운데.'
그녀가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을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보원의 수준은 점점 높아졌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들이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배기사를 고용했다는 이야기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모을 수 있는 인원은 다 모아서 철저한 함정을 파두고 놈을 기다렸다.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렇게 맥 빠지게 이길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녀석이 떠들어대던 말에 비하면 별거 없어 보이는....'
"누구지?"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애꾸눈 여자는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끈적한 공기와 썩어들어가는 피 냄새가 그녀를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내가여 길 올걸 알고 있었 군."
애꾸눈 여자는 목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전해지는 기분 나쁜 온기만으로도 뒤에 있는 '무언가'의 크기가 거의 2, 3m에 이른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어설프게 인간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그것은 뼈인지 칼인지 모를 것을 그녀의 턱 밑에 들이댔다.
"일 단멈 춰."
애꾸눈 여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노숙자들은 공격을 멈추고 창을 다시 뽑아냈다. 아이작을 둘러쌌던 넝마가 피로 흥건하게 물든 것을 보고 그의 죽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철망을 걷고 시체를 꺼내기 위해 손을 내밀자, 빨갛게 물들었던 넝마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노숙자들이 경악하기도 전에 아이작의 검이 넝마 밖으로 튀어나오며 가까이 있던 노숙자의 목을 찔렀다. 단숨에 넝마를 걷어 낸 아이작의 몸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럴 때는 쓸모 있군... 붉은 탄원.'
[붉은 탄원(S)]
[사용자의 신체가 일시적으로 붉은 안개 형태로 변해 지형지물에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붉은 안개 상태에서는 모든 물리적 타격을 무효화할 수 있습니다.]
헤인켈 굴마르를 포식하고 얻었던 능력이었다.
물리 타격을 무효화할 수 있어, 이렇게 기습을 당했을 때 일시적으로 공격을 넘기기에는 유용했다. 넝마에 휩싸였을 때 그대로 붉은 탄원을 쓰고 빠져나가서 반격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아이작은 붉은 안개의 형태를 들키게 된다. 그러면 아이작은 여기 있던 사람들을 전부 다 죽여야 했다.
'그럴 수는 없지.'
자신은 숭고한 여정을 떠나는 성배기사여야 한다. 흉흉한 피비린내 나는 소문이 붙게 둘 수는 없었다.
대신 아이작은 확실한 본보기 몇 개만 만들기로 했다.
가장 먼저 목이 찔린 노숙자를 힘껏 밀어붙여 다른 놈에게 내동댕이쳤다. 궁수들이 그제야 황급히 다시 활을 들어 올렸지만 아이작은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른 노숙자에게 붙어 칼을 휘둘렀다.
아이작이 멈추는 순간은 오직 다른 노숙자의 몸에 칼을 꽂는 순간뿐이었다. 한 번의 칼질에 한 명의 팔, 다리, 혹은 목이 날아갔다. 노숙자들의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호흡을 고르거나 불규칙한 눈빛의 교환조차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목숨을 분쇄해 나가는 아이작의 모습에는 거친 싸움에 익숙한 바르바리 강도들 조차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대장, 대장님!"
결국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작은 힐긋 2층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방 안에 애꾸눈 여자가 창백한 표정으로 꼼짝 못 하는 것이 보였다.
아이작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간신히 항복 선언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분 께내 려다보 면서 말하 지 마 라."
그때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동시에 뭉뚝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단숨에 그녀를 내팽개치듯 2층 아래로 던져 버렸다. 애꾸눈 여자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1층 골목의 쓰레기더미 진창 속에 처박혔다.
그녀는 입안에 들어간 구정물을 토해내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친 것은 섬찟하게 내려다보는 아이작의 눈이었다.
아이작은 2층에서 눈을 빛내는 붉은 눈동자─지힐렛에게 고마운 감정을 보낸 뒤, 다시 그늘 속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원래 축축한 지하에서 잘 살던 쥐답게 지힐렛은 그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잘 숨어들었다.
"항복, 항복한다. 제발...."
애꾸눈 여자가 화급히 아이작에게 항복 선언을 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칼이 여자의 오른손을 찍어버렸다. 여자의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항복은 잘했어. 잘한 일이긴 한데... 부하들이 그렇게 죽어 나갔는데도 본인은 아무런 고통 없이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
애꾸눈 여자는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도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는 냄새가 지독하게 풍겨왔다. 심판의 검이 가진 효과로 인해 바르바리인 그녀의 살과 피가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손등을 중심으로 거뭇하게 탄화된 손은 잘라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혀를 자르지 않은 이유는 물을 게 많아서야. 무슨 뜻이냐면, 내가 묻는 걸 숨길 때마다 쓸모없는 부위들을 자를 거고 혀는 제일 마지막이 될 거란 뜻이다."
***
애꾸눈 여자의 이름은 자클렛이었다. 생각보다 그녀는 고분고분 순순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바다 건너 북부에서 왔다던가, 신앙을 버리게 된 구구절절한 사연과 최근 먹고 살기 힘들어진 사정으로 부하들까지 끌고 왔다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까지 알게 될 정도로.
아이작은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 피하려는 개수작이라고 판단하고 왼손까지 찔러버렸다. 그제야 아이작은 담백한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가 판다고?"
"유크하르 르벤 자작이요!"
자클렛의 남아 있는 한쪽 눈앞에서 심판의 검이 어슬렁거리자 그녀는 발악하듯 이름을 부르짖었다.
자클렛과 이 바르바리 강도들은 유크하르라는 작자에 고용되었는데 딱히 놀라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원래 용병이란 족속은 돈 받으면 용병이고 못 받으면 산적인 법이니까.
그래서 제대로 된 전문 용병들이 인정받는 것이다.
"유크하르 르벤에 대해 말해봐."
유크하르 르벤 자작은 쇠르에서 활동하는 암시장 큰손의 이름이었다.
놈은 귀족 작위를 이용해서 사채부터 밀수입, 암거래, 장물 등 온갖 안 좋은 방식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쇠르 암시장에 유통되는 물자 중 그의 손을 안 거치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 유크하르란 놈이 로어커스 사태 이후 사업 영역을 확장해 다단계와 폰지 사기, 코인질까지 동원해 쇠르 밑바닥에 있는 돈이란 돈을 다 끌어모으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자클렛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슬럼의 거지도 로어커스 코인 한두 개는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나중에 로어커스 가격이 폭등하면 폭등할수록 로어커스 코인의 가격도 급등할 것이라면서.
결국 유크하르는 존재하지도 않는 로어커스를 팔아치우는 셈이었다.
'그 정도 규모로 움직이면 황금우상 상단이 모를 리가 없는데.'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유크하르는 왜 그렇게 쇠르에 모이는 로어커스를 죄다 사 모으고 있지?"
"예?"
아이작은 심판의 검을 자클렛의 왼손에 가져다 댔다. 자클렛은 기겁하며 몸부림쳤다.
"아니, 아니! 질문 내용을 이해 못 해서 그렇습니다! 유크하르는, 그러니까! 로어커스를 많이 사들이고 있긴 한데, 그게 제가 알기로는, 주목할 만큼 엄청 많은 양도 아니에요!"
"많지 않다?"
아이작이 자클렛에게 들은 양은 정말 '별거 아닌' 양이었다. 물론 일반인에게는 많은 양이지만 상단이 다룬다기에는 적은 편에 속했고, 황금우상이 취급하는 로어커스의 양에 비하면 티끌만 한 수준이었다.
'그럼 대체 누가 로어커스를 사는 거야?'
어처구니없지만 결론은 하나로 통했다.
정말로 화훼 애호가들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로어커스 가격이 계속 오를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 수많은 머저리들도.
아마도 절대다수의 로어커스들은 그 투자자라는 이름의 머저리들이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로어커스 가격에 금화 한 개가 더 붙는 데 팔기 쉽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와중에 가격 왜곡이 일어나면서, 유크하르는 갖은 사기까지 동원해 돈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유크하르의 목적은 로어커스가 아니라 로어커스를 통한 가격 왜곡이었다. 놈들은 가격 왜곡과 유행을 일으킬 수 있다면 로어커스가 아니라 뭐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캐틀린이 이 사실을 들으면 어처구니없어 하겠군.'
물론 다른 생각도 해봐야 했다. 황금우상 상단이 과연 이 일과 무관할까 하는 생각.
유크하르가 온갖 사기를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고는 있지만, 최대 수혜자는 가장 많은 로어커스를 끌어모은 황금우상 상단이다.
'뭔가 이상한데....'
아이작은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그가 찾는 것은 로어커스를 누가 사들이는지였다. 유크하르가 로어커스 사태를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그건 돈을 버는 방식이지 로어커스 현물을 사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황금우상 상단의 정보원이 유크하르를 조사하려고 했다가 죽은 것은 확실했고, 놈이 로어커스 유통과 관련 있는 것도 분명했다.
자세한 것은 만나서 물어보면 될 것이다. 하하호호 담소를 나누면서 대화할 일은 없겠지만.
아이작은 자클렛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놈 좀 만나야겠다."
43화. 돈 냄새 (3)
유크하르의 집은 쇠르 중심부에서 약간 빗겨 나간 강변 거리에 있었다. 쇠르를 관통하는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물류의 중심지이자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환락가이기도 했다. 놈의 집은 그중에서도 제일 규모가 큰 집이었다.
"유크하르는... 이 근처에서 제일 큰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쇠르 시장과도 친하다고 들었구요."
쇠르는 황금우상 상단의 무역 거점 중 하나인 만큼 시장 역시 황금우상의 지배하에 있었다. 점점 이 일이 황금우상 상단과 무관할지 의문이 들었다.
자클렛은 아무래도 아이작의 행동이 내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벌인 묘기를 봤을 때,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 확신하기 힘든 눈치였다.
아이작은 자클렛의 말을 무시하고 유크하르의 저택 정문을 바라보았다.
자클렛 말대로 꽤 늦은 저녁임에도 유크하르의 저택 주변에는 경호원들과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이 심상찮게 보였다. 경호원들은 바르바리들과 다르게 제대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경비병들은 건드리기가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암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암흑가의 큰손을 만나러 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이작은 자클렛을 통해 몰래 잠입할 수도 있고, 지힐렛을 이용해 밤중에 은밀하게 숨어들 수도 있다. 혹은 배신자들을 잠입시켜 두건을 씌우고 끌고 나올 수도 있었다.
아이작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성배기사답지 않은 짓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성배기사답게 저택 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쾅.
요란한 굉음이 새벽녘 저택을 뒤흔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환락가라고는 해도 다들 잠에 들 새벽이었다. 허겁지겁 마당으로 모여든 경호원들은 바닥에 엎어진 거대한 철문을 보고 경악했다. 방금 그 굉음은 철문이 넘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그리고 그 위를 성큼 아이작이 넘어오고 있었다.
"무슨... 침입자다!"
경호원들은 서둘러 무기를 꼬나쥐고 아이작을 둘러쌌다. 거대한 철문을 무너뜨렸으니 무슨 힘이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있지만, 다른 누가 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무너진 정문 쪽을 자꾸 돌아보게 만들었다.
"뭐해! 당장 쳐!"
나름 상급자인 듯한 남자가 외쳤다. 경호원 몇이 아이작을 향해 창을 내질렀지만, 아이작은 간단하게 흘려보내며 창대를 후려치고, 발로 밟아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못해도 기사급이다! 자작님께 당장 알려!"
기사급이라는 말에 병사들은 둘러싸기만 하고 거리를 벌렸다. '검술'은 당연하지만 성기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검술을 단련할 수 있었다. 기사들은 그런 검술을 익힌 자들을 의미했는데, 대부분 일반인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을 가졌다.
아이작은 병사들이 충분히 마당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저택 안에서는 무슨 연회라도 하고 있었던 건지 제법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며 나오기 시작했다.
곧 범상치 않은 기세의 사람들과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아이작은 경호원들이 길을 터주는 것을 보면서 저놈이 유크하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유한 놈이니 당연히 기사급에 해당하는 경호원도 데리고 있을 것이다.
"너는 뭐하는 놈...."
"나는 성배기사 아이작이다."
아이작은 충분히 사람들이 모였다고 판단했을 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두가 아이작을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목소리는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작을 둘러싼 사람들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면서 술렁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배기사? 요즘도 성배기사가 있어?"
"아니, 성배기사라고 해도 왜 여기에...."
성배기사라는 호칭 자체는 전설에서 자주 회자되기에 경호원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작의 이름이 퍼지기에는 시간도, 업적도 부족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적어도 한 사람만큼은 다를 것이다.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입술을 깨무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을 다르게 해석한 경비대장이 거칠게 외쳤다.
"웬 미친놈이 오밤중에 와서 행패야? 궁수!"
테라스 위에서 대기하던 궁수들이 저마다 활시위를 매겼다. 그러나 유크하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경비대장이 당황하는 동안 유크하르가 다가왔다.
"유크하르 르벤 자작이요. 성배기사면 밤중에 민가로 쳐들어와도 되는 거요?"
아이작은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유크하르가 이 바닥에서 그렇게 발이 넓다면 아이작이 성배기사라는 것 정도는 이미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죽이는데 경호원을 쓸 수는 없었다.
'성기사를 도시 한복판에서 죽일 수는 없지.'
쇠르는 백제국 영향권에 있다. 귀족인 유크하르는 당연히 빛의 법전 교인이든 아니든 그런 행세를 하고 있어야 한다.
빛의 법전 교인이 빛의 법전 성배기사를 죽인다면 지옥 직행이다. 죽어서 지옥에 가기 싫다면 배교하거나 바르바리가 되는 수밖에 없는데, 가진 게 많은 유크하르도, 다른 경호원들도 그럴 수가 없었다.
즉, 아이작이 정체를 대놓고 까발리며 들어와도 유크하르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이다.
'손을 쓴다면 바르바리를 써야 했는데 그 기회는 날렸지.'
그래서 자클렛의 암습이 유달리 철저했을 것이다. 유크하르가 신신당부했을 테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기서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이작의 목숨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이단의 성물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왔다. 즉시 반납해라."
아이작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
아이작은 경비대원들을 죽이거나 견제당하는 일 없이 흙발로 유크하르의 저택에 들어섰다.
연회 중이었던 저택은 여기저기 초대받은 듯한 손님과 음식들, 그리고 술잔들이 널려 있었다. 유크하르는 그 분위기를 수습해보려는 듯 연회장으로 나갔다.
"별 일 아닙니다. 여러분. 교단에서 오해가 생긴 듯하여 소란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계속 파티를 즐겨주십시오."
고급 옷을 차려입은 손님들은 불안한 듯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더 이상 소란이 벌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술잔을 나눴다. 이제 그들의 눈빛은 불안보다는 흥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시선 대부분은 유크하르와 함께 들어온 젊은 성기사, 아이작에게로 향해있었다.
그때 아이작은 연회장에 있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황금우상 상단의 쇠르 지부장, 캐틀린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아이작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유크하르를 따라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접객실로 안내했다. 그리곤 들어오자마자 하인들에게 최고급 와인과 술상을 차려오라고 지시했다. 어쩌면 술에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칼 든 병사들더러 난입하라는 지시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이작은 어느 쪽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유크하르는 아이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성배기사님."
"아직 업적이라고 할만한 것도 이룩하지 못했는데."
"왈라이카의 인간사냥꾼들로부터 밤새워 추적당하고도 살아남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브리엔트 성기사단의 성기사도 일방적으로 꺾었다고요."
유크하르는 귀족이지만 아이작에게는 정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작이라는 계급이 낮게 취급되어서가 아니라, 아이작을 인정해 준 교단의 권위를 존중해서였다. 이 세계에서 교단의 권위는 압도적이었으니까.
"아부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다. 유크하르."
하지만 아이작은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예의를 차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대방보다 위에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쪽이 유리했다. 이런 놈들은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면 금방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의 생각과 달리 유크하르는 그다지 기가 눌리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찔리는 게 없거나, 아니면 성배기사를 압도할 만한 뒷배경이 있다는 눈치였다.
아이작은 유크하르의 비밀을 찔러보기로 했다.
"네가 가지고 있지? 양치기 목상."
유크하르는 기가 막히게 내심을 숨겼다. 하지만 아이작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왼쪽 눈은 혼돈의 눈으로 보랏빛에 물들고 있었다. 혼돈에서 기어 올라온 보이지 않는 촉수가 유크하르의 내면을 훑기 시작했다.
['그걸 어떻게?']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유크하르는 아이작조차 놀랄 만큼 태연하게 연기했다. 아이작을 경계하는 탓인지 내면에 세워진 마음의 벽이 단단해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충분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꺼풀 뒤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말 것이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부터 양치기 목상을 찾으러 쇠르에 왔다. 그게 어디 있는지는 천천히 수소문해볼 생각이었는데, 이 도시에 로어커스로 난리가 나 있더군."
"...."
유크하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약간의 초조함이 내비쳤다.
당연하지만 아이작은 네임리스 카오스에 있던 모든 성물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만 게임 클리어에 필수적인, 혹은 매우 강력한 성물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중에서 양치기 목상은 게임 클리어에 필수적이지도, 강력하지도 않지만 가진 기능이 특별했다.
바로 일정 수치 이하의 정신력을 가진 존재들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이다.
보통은 이름답게 짐승들을 통제하거나 적대적인 몬스터들을 우호적으로 만들거나 할 때 쓰였다. 양치기가 양 떼를 통제하듯이 쓰는 물건이다.
하지만 인간처럼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는 통제할 수 없다.
"처음에는 이 사태와 양치기 목상을 연결시키지 못했지. 사람은 양치기 목상으로 통제가 안 되니까. 그런데... 문득 왜 로어커스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글쎄요. 왜일까요?"
"간단하지. 로어커스는 마법 저항력을 낮추는 효능이 있거든."
마법 저항력은 마법만이 아니라 신성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크하르는 우선 로어커스를 고가에 대량으로 사들이면서 유행을 인위적으로 퍼뜨렸다. 물론 그 혼자서 시세를 조종할 정도로 큰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욕심은 도미노와 같다.
로어커스를 누군가 급하게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로어커스에 새로운 효능이 발견되었다던가, 해외에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던가.
그러면서 유행에 민감한 상인들도 하나둘 끼어들었다. 온갖 종류의 로어커스들이 쇠르로 밀려들었다. 로어커스가 가진 본연의 능력, 마법 저항력 약화는 구근이든, 개화 형태든, 말려 찧은 것이든 차를 탄 것이든 상관없었다.
쇠르가 로어커스 향으로 가득 차자 자연스럽게 도시 전체의 마법 저항력이 약해졌다.
그 말인즉슨, 평소라면 이런 짓거리에 동참하지 않았을 놈들도 조금씩 동참하게 되었단 소리다. 그리고 양치기 목상으로 군중 의식에 욕심을 부추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진짜 유행을 폭발시키기 위한 단계는 바로 그다음이다.
황금우상 상단을 이 유행에 끼우는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하녀가 술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왔다. 여러 가지 다과들이 테이블에 놓였지만 아이작도 유크하르도 그곳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나가서 기다릴까요?"
"금방 치울 것 같으니 기다리거라."
유크하르의 지시에 하녀는 문 옆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하녀를 가만히 주시했다. 평범한 하녀라기엔 단련한 사람 특유의 움직임과 묵직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독과 병사, 둘 다 준비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작은 태연히 술병을 기울여 유크하르의 잔에 따랐다.
"파티가 꽤 성대하더군?"
"...."
이 최고급 와인, 손님들에게 나가는 모든 술상에도 달콤한 향을 가진 로어커스가 첨가되어 있었다. 유크하르가 충동질하고자 한 진짜 대상들은 군중보다 큰돈을 가진 거상들과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마법 저항력을 크게 떨어뜨리기 위해 직접 로어커스를 탄 술을 먹이고 욕심을 부추긴 것이다.
그 결과 유크하르는 크게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쇠르, 나아가 제국 전체를 삼킬 수도 있는 대폭등의 서막을 열 수 있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문제."
아이작은 테이블을 술이 가득 담긴 잔을 톡톡 두드리면서 말했다.
"사실 로어커스가 유행하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었고, 성물에 의해 조종당했을 뿐이라는 것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
아이작의 손가락이 툭, 술잔을 밀어 쓰러뜨렸다.
44화. 돈 냄새 (4)
주르르륵. 술잔이 테이블을 타고 가득 던지는 것을 보면서도 유크하르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이작의 질문에 즉답했다.
"죽겠지요."
모호한 말이었다. 아이작이 죽는다는 건지, 자신이 죽는다는 건지.
유크하르는 자신의 발언이 너무 도발적이라고 느꼈는지 말을 이었다.
"지금 로어커스에 관계된 권력자, 상인, 기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하다못해 농부들까지도 끼어든 판입니다. 행복으로 머릿속이 불타고 있을 그들에게 '당신들이 사들인 보물은 사실 쓰레기'라고 선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평안한 자세를 유지하며 말했다.
"그들이 당신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전 재산이 걸려 있는데? 당신의 말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좀 더 심각한 일을 벌일지도 모르지요. 가격이 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동요하지 않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양치기 목상이 들키더라도 크게 문제될 거라는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로어커스 사태에 얽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양치기 목상으로 충동질하지 않아도 쇠르 전체가 욕망의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끝에 파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도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성배기사님. 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 말씀 해봐."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황금우상 상단에는 성기사가 없습니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지금 여기서 갑자기 왜 황금우상 상단과 성기사 얘기가 나온단 말인가. 유크하르는 아이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심지어 사제도 없고, 천사도 없다고 하지요. 황금우상 상단에 있는 것은 교인뿐이라고."
황금우상 상단이 아홉 신앙들 주에서도 제일 경계 받지 않고 다른 신앙의 구역에 스며들 수 있는 이유. 그것은 바로 황금우상 상단엔 사제도 성기사도 천사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금우상이라는 신이 있는지조차도 의심받곤 했다.
하지만 상인들은 방랑하는 길에서 신의 은총을 느꼈고, 그의 가호로 파산에서 벗어났으며, 예상외의 행운으로 큰 이익을 거뒀다고 증언했다. 그런 상인들의 믿음 덕분에 황금우상 상단은 상인들 사이에서 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요?"
"사제와 성기사가 있으면 각자의 입장이 있을 테고, 입장이 다르면 분쟁이 생기겠지. 분쟁이 있으면 상인들이 다른 신앙들 사이로 스며들어 거래하기가 힘들어질 테고."
이윤추구라는 제일 중요한 교리를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황금우상 상단으로 이미 엔딩을 본 아이작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기사와 사제는 없을 수 있지요. 천사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황금우상이라는 신은 정말 존재할까요?"
"갑자기 신학 토론인가?"
"다른 신앙들은 사제를 통해 신과 소통합니다. 그런데 황금우상 상단에는 사제가 없습니다. 즉, 신과 소통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정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인지 알겠군. 너 황금우상 상단 교인이냐?"
"예."
아이작은 대충 구도를 알 것 같았다. 쇠르에는 두 명의 지부장이 있었던 셈이다. 한 명은 양지에서 정당한 거래를 추구하는 캐틀린, 한 명은 음지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들이는 유크하르.
캐틀린이 음지에서 일하는 유크하르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분야가 전혀 다르기도 하고, 애초부터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 안에서도 견해가 상당히... 선을 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다른 신앙의 성기사가 와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게 짜증 난다 이거냐?"
"틀린 말은 아니군요."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노려보며 말했다.
"황금우상 상단에도 성기사가 있었으면 당신이 이렇게 와서 행패부리지 못했을 텐데 말입니다. 사제가 당신의 호주머니에 저주를 걸어서 구멍을 낼 수도 있겠군요."
"쫀쫀한 저주로군."
아이작은 코웃음쳤다.
"그러면 나도 한마디 할까?"
"해보십시오."
"내일까지 양치기 목상을 준비해 와. 조용히 넘기면 로어커스 거품도 조용히 꺼지게 해주지. 하지만 내가 다시 올 때에는 고분고분하다고 대화로 끝나지 않을 거다."
"...."
유크하르는 아이작을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아무리 황금우상 상단 교인이라 하더라도 백제국 안에서 빛의 법전 성기사를 죽이는 것은 사회적 자살행위였다.
황금우상 상단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꼬리 자르기를 위해서라도 유크하르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내놓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이상한 게 섞이긴 했어도 좋은 술 같네. 이건 내가 가져간다."
***
"아이작 님!"
아이작이 유크하르의 저택을 나와 숙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캐틀린이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아이작을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내리며 아이작에게 다가왔다.
"방금 어떻게 된 거지요? 왜 르벤 자작의 저택에...."
"저놈이 범죄조직 두목이라는 건 알고 있었나?"
캐틀린은 눈살을 찡그렸지만 몰랐다고 잡아떼지는 않았다.
"르벤 자작이 범죄에 손을 댄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거리를 둘 수는 없지요. 쇠르에서 제일 큰 검은 손이랑 사이가 안 좋으면 장사를 망치기 쉬우니까요."
아이작은 캐틀린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에 탓하지는 않았다. 캐틀린은 장사꾼이지 판사나 영웅이 아니다. 장사꾼은 자기 소속된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물건이나 잘 팔면 그만인 것이다.
"놈이 로어커스로 사기를 쳐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장사를 위해 자주 어울리기는 했지요. 하지만 제가 알기론 로어커스를 많이 사들이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다른 상단과 비슷한 수준이고, 우리 상단에 비하면 1/10수준이었죠."
아이작은 딱하다는 듯 캐틀린을 바라보았다.
캐틀린도 로어커스 술을 마셨을 테고, 양치기 목상으로 욕심을 충동질 당했을 것이다. 이번 로어커스 폭등 사태에 황금우상 상단이 크게 한몫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이용당한 셈이다.
'하지만 양치기 목상으로 조종당하지 않았다면 과연 유행에 끼어들지 않았을까?'
그럴 리는 없다. 결국 그녀는 좋든 싫든 유크하르와 손을 잡게 되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결국 입을 뗐다.
"전부 유크하르에게 조종당한 거다."
아이작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캐틀린에게 설명했다. 로어커스 폭등은 유크하르가 양치기 목상으로 인위적으로 일으켰다는 것. 이를 위해 쇠르의 거상들과 권력자들에게 로어커스 술을 먹이고, 욕심을 부추겼다는 것.
지금 이 로어커스 폭등에는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
캐틀린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특히 로어커스 폭등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을 듣고 뺨을 몇 번이나 만졌다.
"틀림없이 로어커스의 숨겨진 효능이 드러났거나 전쟁 준비 때문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만...."
"세상 모든 일이 근거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캐틀린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면... 로어커스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추적해 봐도 의미가 없겠군요. 다 뿔뿔이 흩어져서 값이 오르길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갔을 테니."
"뭐, 그렇겠지?"
캐틀린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이걸로 의뢰는 끝난 셈이군요."
"유크하르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놈은 상단 안에서 해결하겠습니다. 바르바리를 고용해서 시켰다고는 하나, 같은 상단 사람을 해쳤으니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맞겠지요. 각자 영역을 존중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이야...."
아이작은 캐틀린에게 자클렛을 소개해 주기로 했다. 신앙도 신의도 없는 바르바리이므로 순순히 자백할 것이다. 어쩌면 자클렛의 손에 유크하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
"계약서는 원칙대로 진행하실 생각입니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현금으로 지급해드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게 본론일지도 모르겠다.
캐틀린은 아이작의 말을 듣고 이미 로어커스 가격이 하락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유크하르의 말대로 이미 쇠르는 욕심의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으니 드라마틱한 하락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락은 하락이니까.
어쩌면 지금 아이작과의 계약을 해결하는 게 더 싸게 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하지만 아이작은 이야기를 들어보기나 하기로 했다. 그리고 캐틀린이 제안한 액수는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유크하르의 저택을 사들일 수도 있는 거액이었다.
"그렇게나?"
"상단이 큰 손해를 입을 수 있었던 것을 막아주셨으니 이 정도면 싼값입니다."
오히려 캐틀린은 후련해 보였다.
그녀 말대로 로어커스 가격이 하락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으니 황금우상 상단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잘 빠진다면 오히려 이득을 남기고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금우상이 보증을 선 계약서가 있으니 합의를 보더라도 어기지 않는 쪽이 좋겠군. 한 달 뒤에 보는 걸로 하지. 내 신앙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은 신이니까...."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황금우상 상단에는 성기사가 없다고 하더군."
"예? 그거야...."
"...그게 정말일까?"
다른 신앙에서는 신의 맹세를 깨뜨릴 경우 저주가 내려지거나 최악의 경우 성기사나 천사가 찾아간다.
하지만 황금우상에는 그런 존재가 없다.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 소속이면서 사제도 성기사도 천사도 없다는 게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결핍을 가진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다른 교단이 그러하듯, 사제의 기적과 성기사의 힘을 원할 것이다.
유크하르가 원하는 것은 돈도 권력도 아니다.
아이작은 자신에게 황금우상 상단의 성기사가 찾아올 것이란 걸 직감했다.
***
늦은 새벽, 쇠르에 깊은 안개가 가라앉았다.
아이작은 캐틀린이 마련해준 고급스러운 시설의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다. 황금우상 상단이 직접 운영하는 이 숙소는 현대인 기준에서 봐도 훌륭한 설비과 접객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그 말은 아주 많은 직원들이 숙소를 위해 일한다는 뜻이었다. 기계가 없는 이 시대에 현대만큼이나 편한 설비를 운영하려면 전부 인력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으니까.
덕분에 낯선 사람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도 그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면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하녀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였으니까.
하녀는 빨래 바구니를 든 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지만 어떤 의심도 받지 않았다. 카운터에서 명부를 확인하고, 마스터키를 빼돌린 뒤 목표 지점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곧 하녀는 한 방에 도착했다. 마스터키로 열고 들어간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녀는 방의 구조를 확인하듯 둘러보다가 침대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침대 위에 서서 잠시 위를 노려보던 하녀는 불현듯 천장을 향해 손을 빠르게 내질렀다. 동시에 허공에서 붉은 창이 돋아나와 단숨에 천장을 꿰뚫었다.
콰쾅. 지붕까지 꿰뚫리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하녀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기대했던 살과 뼈를 꿰뚫는 촉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수수 쏟아지는 먼지 속에서 하녀는 몸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키며 솟구쳐 올랐다. 창으로 뚫린 천장의 구멍으로 붉은 안개가 스며들었다. 재빨리 몸을 원래 상태로 되돌린 하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기대했던 사람은 없었다.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 또 너네야?"
하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목표, 아이작이 갑옷부터 칼까지 완전무장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그 하녀였군. 어쩐지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눈빛이 살벌하더라니."
45화. 등대를 밝히는 자 (1)
"이미 예상하고 있었군."
하녀가 차갑게 말했다.
"예측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지. 다만 그게 왈라이카 인간 사냥꾼일줄은 몰랐는데...."
아이작은 황금우상 상단의 성기사가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성기사가 없다고 알려진 황금우상 상단이 가질 수 있는 성기사.
그것은 바로 용병이었다.
황금우상 상단은 다른 신앙의 성기사들이라도 거리낌 없이 고용하고 서로 싸움 붙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캐틀린이 아이작을 고용하고, 유크하르가 지금 눈앞의 왈라이카 사냥꾼을 고용했듯이 말이다.
그들은 그것을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황금우상 상단이 아닌 다른 신앙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금우상 상단에 고용된 용병들은 황금우상이 내린 행운 버프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쉬익!
하녀는 날카롭게 창을 내질렀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창날의 궤적에서 아이작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아이작이 예전에 계곡에서 상대했던 왈라이카 사냥꾼들을 상회하는 능력이었다.
'거의 헤인켈과 비슷하거나 약간 아래? 상당한데.'
아이작은 바짝 긴장하며 태세를 갖췄다. 순수 실력으로만 부딪치면 아슬아슬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아이작은 정정당당하게 싸울 생각이 없었다. 상대방도 그럴 테니까.
"너 헤인켈 굴마르랑 무슨 사이냐?"
하녀는 아이작의 말을 무시하려는 듯했지만, 창끝이 흔들렸다. 숨기려고 해도 붉은 안개로 변하는 능력이며 창을 다루는 솜씨며, 같은 사람에게 배운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은 이 하녀가 굴마르 공작가 소속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알아보았다.
"설마 헤사벨 굴마르?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는 아니겠지?"
하녀는 이를 악물었다. 숨길 수 없는 표정 변화였다. 들켰다고 화를 내기에는 너무 극적인 감정 변화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치심과 초조함이 담겨있었다.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대체 왜 여기서 하녀 옷을 입고 용병질을 하고 있냐?"
"야!"
하녀는 결국 소리를 지르며 창을 거칠게 휘둘렀다.
와드드드드득! 엄청난 완력에 벽과 기둥이 뜯겨 나가며 거대한 상처를 남겼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어이없는 기분을 느꼈다.
"진짜네?"
헤사벨은 결국 힘이 빠진다는 듯 창끝을 내렸다. 아이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이삭 검술: 여덟 갈래를 발동하면서 빠르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방 안의 벽과 바닥, 천장이 여덟 개의 궤적으로 찢어발겨지며 헤사벨을 향해 쇄도했다.
싸울 의지를 잃고 대화를 준비하려던 헤사벨은 갑작스러운 아이작의 태세 전환에 당황했다. 창이란 무기는 원래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사전 동작이 큰 편이었다.
콰자자자작!
아이작은 자신이 발동시킨 여덟 갈래의 동작 중 두 개의 궤적은 헤사벨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나머지는 모두 튕겨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짧은 틈이지만 헤사벨도 상급 검술, 아니 상급 창술을 발동시킨 것이다. 그녀가 창을 휘두르고 찌른 자리마다 벽이 매끄럽게 관통된 흔적이 보였다.
아이작이 피하거나 막지 않았으면 정확히 그의 몸에 구멍을 냈을 자리였다.
헤사벨의 몸에 톱에 뜯겨 나간 듯한 상처가 두 군데 생겨났지만, 금방 피안개 형태로 피어오르며 아물었다.
아이작은 촉수를 꺼내지 않는 한 상대를 죽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우리 대화할까?"
"이 개...."
그녀는 욕설을 중얼거리려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아이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너희 피빨이들이 백제국 깊은 곳까지 와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황제나 대귀족도 아니라, 변방 도시의 범죄자 대부 밑에서 일하고 있어? 무슨 음모라도 꾸미나?"
아이작은 혹시 왈라이카 사냥꾼들이 아리엣 수도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음모를 꾸미고 있나 생각했다. 물론 정확히는 불사 교단의 음모였지 붉은 성배의 음모는 아니었지만.
헤사벨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창끝을 들어 아이작을 겨냥했다.
"네놈 때문이다!"
"나?"
"백부님이 가지고 있던 분열 예식, 네가 훔쳐 갔지? 나는 그걸 회수하기 위해 왔다!"
붉은 성배 클럽의 성물인 분열 예식. 그거라면 확실히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목숨 걸고 쫓아올 법도 했다. 그렇다고 군대를 끌고 들어올 수는 없으니, 혼자거나 소수정예만 끌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왜 메이드복을 입고 있냐니까?"
"닥쳐!"
헤사벨은 다시 창을 휘둘렀다. 아이작은 헤인켈에게 그랬던 것처럼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흉내 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밖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냐!"
헤사벨이 피운 요란에 뒤늦게 경비대원들과 숙소를 지키는 경호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설비가 훌륭한 숙소인 만큼 경비병력도 많았다. 헤사벨은 아이작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
헤사벨은 금방 쇠르를 덮은 안개 속에 섞여 붉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아이작은 그 붉은 안개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
쇠르의 주요 물류 흐름은 강변을 통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수로가 꽤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쇠르 곳곳으로 통하는 배수로 역시 이 수로를 향해 연결되어 있다.
아이작은 그 지하 배수로 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진입했다.
당연하지만 아이작은 유크하르가 순순히 양치기 목상을 준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유크하르가 사죄와 목상 대신 메이드복 입은 암살자를 보냈으니 도망치든가 저항할 준비를 하든가 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였다.
유크하르가 순순히 성물을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약점을 콱 찔러 버리면 놈이 허겁지겁 성물을 향해 달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 안쪽 에 있습 니 다.'
지힐렛의 의지가 아이작에게 전달되어 왔다. 쥐보다는 고등한 지성을 가진 덕분인지 말투가 어눌하긴 해도 어휘력이 풍부했다. 지힐렛은 쥐새끼 출신답게 암살과 잠입, 추적에 유용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순순히 성물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줄이야.'
아이작은 쓰게 웃으면서도 결국 유크하르가 기댈 곳은 성물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황금우상 상단에서 그의 징계를 결정하고, 쇠르의 권력자들과 상인들도 자기가 조종당했다고 하면 즐거워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수상한 약까지 먹였다고 하면 더더욱.
그가 성물 외의 무엇에 기댈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이 더럽혀진 성역의 '정화'를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아이작의 발걸음이 멈췄다.
'양치기 목상을 성역에 보관하고 있다고?'
쇠르에 성역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중요한 위치에는 으레 성역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이미 황금우상 상단의 성역일 확률이 높으니 굳이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유크하르가 그 성역의 힘을 빌리기 위해 왔다는 것은 뭔가 좀 이상했다.
'황금우상은 몸을 지키기에는 좀... 무력 쪽으론 의지가 안 될 텐데.'
하지만 그가 왜 도망칠 곳도 여의치 않은 여기에 숨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양치기 목상이 그렇게나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는 성역의 힘을 끌어다 써온 것이다.
그리고 유크하르를 지키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안녕,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
헤사벨이 피곤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어제 새벽과 달리 하녀복을 입고 있진 않았다. 대신 왈라이카 사냥꾼 특유의 고급스러운 재질의 사냥복을 입고 있었다.
"이름도 알면서 그렇게 부르지 마라. 날 모욕하는 것 같으니까."
"내 이름은 아이작이다. 알고 있지?"
헤사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바로 싸울 생각은 없는 듯 창끝을 바닥에 댔다.
"분열 예식만 돌려다오. 그러면 방해하지 않고 돌아가겠다."
아이작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돌려줄 생각도 없었지만 대체 왜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가 쇠르의 깡패소굴에서 하녀 노릇까지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왜 유크하르 밑에서 일하고 있었는지 말해봐."
"...네놈 때문이다."
"분열 예식 때문이라면 그냥 밤길에 습격해도 되는 거잖아."
헤사벨은 말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이작은 허리춤에서 분열 예식을 꺼내 들었다. 헤사벨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줄지도."
"너, 너!"
"빛의 법전을 걸고 맹세한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신이지만 헤사벨은 아이작의 맹세에 당황했다. 설마 성기사가 자기 신앙을 걸고 이런 것을 맹세할 거라곤 생각 못한 듯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분열 예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헤사벨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널 추적하다가 여비가 떨어져서...."
헤사벨은 아리엣 계곡에서부터 아이작을 쫓아왔다고 했다.
아이작을 쫓아 분열 예식을 되찾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별 고민 없이 바로 움직인 것이다.
문제는 헤사벨이 혼자서, 그것도 몇 개월씩이나 방랑해 본 것이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헤사벨은 여정이 길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여비도 많이 챙겨오지 않았다.
먹을 거야 피를 빨면 되고, 노숙에도 익숙했지만, 사치스러운 삶을 살던 공작가의 여식에게 겨울의 고된 여정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해를 피하고 은밀하게 사람을 쓰려면 돈이 많이 들었다.
그렇게 여비가 바닥날 무렵, 헤사벨은 쇠르에 도착했다.
"그러다 로어커스 붐에 대해 들었군?"
"...그래."
헤사벨은 여비를 마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남은 돈이 없었다.
"그래서 사채를 썼다."
"...사채? 유크하르에게?"
"그래. 그것도 담보까지 요구하더군...."
신분이 명확하지 않은 그녀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은 뒷골목의 큰손인 유크하르 정도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마저도 담보를 잡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담보 자체가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헤사벨은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 담보로 잡힐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있었다.
아이작은 어이없다는 듯 헤사벨을 바라보았다.
"설마 다른 성물을 담보로 맡겼나?"
"...그래. 그리고 그 돈으로... 로어커스 코인을 샀지."
헤사벨은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었다.
"어이가 없군."
"무겁고 흙냄새 나는 로어커스를 취급하는 것보다 로어커스 코인이 훨씬 더 합리적이지 않나? 게다가 현금은 무지하고 구시대적인 유물이라고 하더군. 앞으로 모든 현금은 로어커스 코인이 대체하게 될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배당금도 꼬박꼬박 줬다고!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배당금 지급이 늦어지면서부터였다. 유크하르는 배당금을 주는 대신 로어커스 가격이 오르니 로어커스 코인 가격 자체도 오른다면서 그걸 팔아 돈을 벌라고 했다. 헤사벨은 그 말을 믿고 로어커스 코인을 더 사들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성물을 맡겼을 때 받은 돈의 1/3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욕심은 무지렁이 농부, 상인,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왈라이카 왕국 공작가의 후계자마저도 집어삼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하지? 혹시 너도 로어커스 술 마셨냐?'
아이작은 목구멍까지 그런 말이 올라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냥 유크하르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안돼. 그러면 성물을 돌려받지 못해."
헤사벨은 창으로 땅을 내리찍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네가 쓸데없는 말을 떠들면 로어커스 가격도 폭락할 거라더군. 나는 로어커스 코인 금화 4.2닢에 물려 있다. 이대로 로어커스 값이 오르면 빚도 갚고 성물도 되찾을 수 있단 말이다. 널 기필코 막아 내겠다!"
42층에서 물린 고층 거주자의 절규가 배수로에 용맹하게 울려 퍼졌다.
46화. 등대를 밝히는 자 (2)
헤사벨의 포효가 지하수로를 쩌렁쩌렁 울린 뒤에, 둘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아이작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입을 열었다.
"내가 분열 예식을 돌려주면 돌아가겠다며?"
그런데 이미 담보로 성물을 맡겼으면 그것도 되찾아야 하지 않나?
아이작의 지적에 헤사벨은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 으음, 음. 그랬지. 내가 담보로 맡긴 성물은... 분열 예식만큼 중요한 건 아니니까... 크게 손해를 보긴 했지만 그래도...."
헤사벨은 끙 앓기는 했지만 쉽게 로어커스 코인을 포기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분열 예식을 되찾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이대로는 크게 손해만 보고 돌아가게 될 테니까.
물론 아이작은 분열 예식을 돌려줄 마음 따윈 조금도 없었다.
"좋아. 한심한 이유였지만 호기심은 해결됐군. 난 또 유크하르가 왈라이카 사냥꾼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수완이 좋은 줄 알았지."
이만큼 한심한 사람이 헤사벨 외에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 물론 로어커스 폭등에 낚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테니 성기사 몇 명쯤 끼어 있을지도. 유크하르가 묘하게 아이작 앞에서 담대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겠지 싶었다.
"자, 그러면 되찾으러 와봐. 네 큰아빠의 실력은 한심했지. 조카딸은 얼마나 대단한가 보자."
"분열 예식을 돌려주지 않겠다고? 빛의 법전을 걸고 맹세했으면서?"
"빛의 법전께서 돌려주지 말래."
거짓말이다. 헤사벨은 성기사인 아이작이 신을 걸고 맹세했는데도 바로 어겼다는 사실에 인지부조화를 느끼는 듯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성기사나 사제들에게는 곧바로 그 대가가 날아올 테니까. 하지만 애당초 빛의 법전 성기사가 아닌 아이작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이작은 바로 헤사벨을 향해 쇄도했다.
헤사벨은 잇소리를 내며 창을 들어 올렸다. 창끝이 날카롭게 아이작을 찔러 들어갔지만,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분열 예식이었다.
"야 이!"
그녀는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가까스로 창끝을 틀었다. 분열 예식이 아슬아슬하게 헤사벨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무기가 아니야, 이 미친놈아!"
"알아."
분열 예식은 제례용 검이다. 제물을 바치거나 의식을 치를 때 쓰는 탓에 뼈를 자를 정도로 날카롭지만 단단하지는 않았다. 그걸 잘 아는 헤사벨은 자신의 창과 잘못 부딪쳐 분열 예식의 날이 상하거나 깨질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즉, 아이작은 왈라이카의 국보 1호쯤 되는 물건을 들고 휘둘러대는 셈이었다.
"적당히 해!"
적의 무기와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공격해야 하다니, 헤사벨에게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자신의 몸을 붉은 안개로 변화시켰다. 아이작의 배후로 파고들어 그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아이작의 몸도 붉은 안개로 변화했다. 두 붉은 안개가 거칠게 뒤섞였다.
콰드득, 쿵!
이내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거칠게 튕겨 나갔다. 헤사벨은 지하수로 바닥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이게 무슨?!'
안개 형태로 변화하는 것은 자주 했던 일이지만, 다른 안개와 뒤섞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안개는 섞이자마자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강력한 장력에 의해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것은 아이작이 붉은 성배의 기적인 '붉은 탄원'을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붉은 탄원을?'
그 순간 헤사벨은 아이작이 빛의 법전을 두고 했던 맹세를 태연하게 어겼다는 사실과, 헤인켈이 죽었던 자리에서 붉은 살점의 예지자를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불길한 상상은 그녀의 마음속을 삽시간에 사로잡았다.
'설마? 진짜로?'
"이거 영 느낌이 별론데."
어느새 일어난 아이작은 헤사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몇 가지 실험해 보고 싶었는데 이 정도면 됐다."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가 헤사벨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 주변에는 소름 끼치는 촉수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빛의 법전 성기사가 가질 몰골은 아니었다.
"이건... 무슨...."
"이제 대화는 그만하자고."
헤사벨은 반사적으로 아이작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아이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왼팔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헤사벨의 창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팔뚝만 한 굵기의 그것은 창을 마치 이쑤시개처럼 부러뜨리고는, 파편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헤사벨은 강철보다 단단한 피의 창을 부숴 버린 촉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사이 촉수는 뱀처럼 헤사벨의 몸을 기어올라 그 끝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어둠에 익숙한 헤사벨은 그 촉수 사이사이에 넘실거리는 이빨과 가시, 눈동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비명과 함께 즉시 그 자리에서 달아났다.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헤사벨은 미궁 같은 쇠르의 지하수로를 헤매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출구는 대체 어디야?'
지하수로의 구조는 복잡하고 어두웠다. 지하수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듯 층층이 다른 양식과 다른 재질의 돌들이 쌓여 있었다. 그녀는 어둠을 친숙하게 느끼는 뱀파이어지만, 이 해묵은 어둠은 그녀마저도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아니, 진짜 두려운 것은 어둠 너머에서 그녀를 추격해 오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다.
"헉, 헉...."
차오르는 숨에 헤사벨의 동작이 느려질 무렵, 등 뒤에서 더운 숨결과 끈적한 체온이 느껴졌다. 헤사벨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로 변신해서 달아나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사용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는 능력인데, 이미 모두 써버린 탓이었다. 게다가 상대방도 붉은 안개로 변신할 수 있는데 그걸로 따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저건 대체 뭐죠, 백부님? 당신은 대체 뭐와 싸운 겁니까?!'
공포가 그녀의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공포감이 너무 극심한 나머지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잡아먹히면 그래도 몸은 편해질지도.
하지만 그녀가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저것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붉은 성배 클럽의 신도들은 죽으면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초대된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고 미식과 쾌락을 즐기는 것이 붉은 성배의 천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만찬장에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만찬장의 메뉴가 될 위기였다.
'죽어도 되는 건가? 저것에게 잡아먹혀도 정말 괜찮은 건가?'
어떤 종류의 죽음은 보통의 죽음보다 끔찍한 죽음을 선사한다. 신도들에게 보장된 사후세계를 빼앗아 가는 것이다. 한때는 바르바리에게 살해당하면 천국도 지옥도 못 간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론 신에게 저주받거나 만나선 안 될 존재에게 살해당할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헤사벨은 아이작의 정체가 만나선 안 될 존재가 아닌지 걱정했다.
결국 그녀가 조금의 발걸음도 옮기기 힘들 만큼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목숨 걸고 용맹하게 싸워서 명예롭게 붉은 성배의 만찬장에 입성하거나.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아니면 비굴하게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거나.
마침내 헤사벨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아이작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도박을 벌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잃어버린 성물의 행방을 쫓고, 가문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뭣보다 아무 데서나 객사해서는 안 될 신분이었다.
차라리 헤사벨은 아이작이 정말 붉은 살점의 예지자이길 바랐다.
만약 정말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예지자거나 그의 대리자라면, 그의 계획을 방해한 것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라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어떤 끔찍한 장소에 헤매게 되겠지만.
헤사벨은 진창에 머리를 박은 채 아이작의 자비를 기다렸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저 어둠 너머에 아이작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더운 지하수로의 공기에서 묵은 피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그때, 헤사벨은 자신의 목덜미를 무언가가 더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그녀의 창을 씹어 삼켰던 그 촉수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것이 창에 대고 그랬던 것처럼 목과 머리를 씹어 버린다면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을 것이 뻔했다.
"살려주세요...."
그럼에도 헤사벨이 할 수 있는 것은 모기 같은 목소리로 비는 것밖에 없었다.
헤사벨은 잠시 응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다가, 문득 따끔 하는 목덜미의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뒤, 헤사벨은 천천히 눈을 떴다.
죽은 건가 생각했지만 만찬장도 없고, 지옥 같지도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축축한 지하수로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더 이상 덥지도 않았고, 역한 냄새도 풍겨오지 않았지만 그녀가 고개라도 들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거의 10분쯤 지나서였다.
헤사벨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바로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소리가 너무 큰 것 같자 다시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반쯤은 울고, 반쯤은 웃으면서 헤사벨은 다짐했다.
'절대로 저 인간 가까이 가지 말아야지. 절대로....'
***
'흠, 그냥 먹을 걸 그랬나.'
아이작은 묘한 공복감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원래는 진창에 엎드려 있는 헤사벨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한동안 먹은 것이 별로 없기도 했고, 애당초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상대를 살려 둔 적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사벨을 살려 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상위호환인 헤인켈 굴마르를 먹어서 딱히 더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 어쩐지 죽일 기분이 싹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속마음을 알 수 있으니 쓸데없이 동정심이 생기는군.'
만약 혼돈의 눈으로 헤사벨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면 그냥 먹어치우고 후환을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혼돈의 눈으로 들여다본 헤사벨의 속내는 아이작에 대한 공포와 두 번 다시 아이작에게 덤비지 않겠다는 다짐뿐이었다. 그 결심이 쉽게 바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이작은 그녀의 목덜미에 '저 너머의 기생충'을 박아 넣었다. 만약 헤사벨이 아이작에 대해 누설하거나 배신한다면 그녀의 뇌가 폭발할 것이고, 아니라면 한동안 두통에 시달리면서 살 것이다.
'목숨을 건진 대가치고는 싼 편이지.'
아이작은 계속해서 지하수로로 발을 옮겼다.
그가 헤사벨의 머리에 기생충을 박고 풀어준 것은 그녀가 유크하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는 속셈이기도 했다.
허겁지겁 쫓기던 헤사벨이 유크하르가 있는 곳에 도착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결국 이리저리 헤매다가 이렇게 끝난 것이다.
하지만 아쉽긴 했어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성역의 기척을 찾아낸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채근하지 마라."
아이작은 지하 배수로를 따라 걸으면 걸을수록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성역에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증상이었다. 아이작의 심장이 아니라 촉수가, 저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름 없는 혼돈의 눈동자에게서 전해져 오는 맥동이었다.
지하수로 모퉁이 너머에서 은은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렁이는 불빛 너머로 다가가자, 이내 넓은 공간과 함께 기대했던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곳이 황금우상의 성역이었다.
방 구석구석 찬란한 금은보화와 마른 로어커스 꽃잎들이 가득 쌓여 있는 방이었다. 가운데에는 기묘한 의식이라도 치른 듯한 문양과 장식, 그리고 유크하르가 앉아 있었는데, 그는 품 안에 양치기 목상을 으스러질 듯 꽉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황금우상 상단에는 교단다운 교단이 없어서 슬펐어? 그래도 다른 교단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던 거냐?"
아이작을 응시하던 유크하르의 입이 이내 쩍 벌어졌다.
[이 한심한 인간은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황금우상을 대신하는 진짜 황금우상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더군.]
유크하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상대방이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너도 고대신이냐?"
47화. 등대를 밝히는 자 (3)
유크하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목상이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아이작은 그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느꼈다.
유크하르가 양치기 목상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반투명한 무언가가 유크하르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돼지 같은 모습이었으나 워낙 이것저것 뒤섞인 외형이어서 정확히 알기는 힘들었다.
"이름이 뭐냐?"
[아직 이 인간도 내 이름을 알지 못한다만... 너, 천사와 인간의 부정한 교합으로 이루어진 잡종이라면 내 이름을 들어도 감당할 수 있겠지.]
반투명한 돼지는 몸을 꿈틀거리며 이름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냥 알려주면 재미없겠지. 수수께끼를 내마.]
"수수께끼?"
[그래... 나는 차가운 태양이며....]
"재물신 골루와루."
[....]
골루와루는 당황한 듯 말을 잃었다.
아이작은 돼지의 외형을 본 순간 이미 알아차렸다. 게임 속에서 골루와루는 정해진 장소 없이 등장하는 이벤트성 몬스터였다. 뜬금없이 나타나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레벨에 맞지 않는 몬스터들을 쏟아부어 플레이어를 죽이곤 했다.
설정상으로는 탐욕스러운 자의 냄새를 맡고 쫓아가 죽여 빼앗는 거라던가.
어쨌든 돼지 외형에 수수께끼를 내는 고대신은 골루와루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크하르가 끌어낼 만한 고대신도 그놈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안 거냐, 잡종아? 이제 내 이름도 다 잊혔을 텐데.]
"아무도 답을 알지 못하는 문제를 내려고 했던 거냐? 정신 나간 놈이군."
아이작은 고대신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도 않았다. 성역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익숙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흥분하고 있었던 것도 성역 때문만이 아니라, 고대신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지힐렛의 신성을 씹어 삼킨 후 이름 없는 혼돈은 다른 신성에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아이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치장과 장식들을 보았을 때 이곳은 원래 황금우상의 성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크하르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장소를 타락시킨 것 같았다.
"여기서 뭘 할 생각이었지? 아니, 사실 관심 없어. 그냥 죽어라."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공격하기 위해 촉수를 뽑았다. 그리고 배수로 구멍 속에 숨어서 기습을 준비하던 지힐렛에게 공격을 지시하는 동시에, 아이작도 함께 달려들었다.
양쪽에서 암습을 당한 골루와루는 어느 쪽도 대비하지 못했다.
아니, 대비할 능력이 없었다.
아이작의 촉수가 유크하르의 가슴을 꿰뚫고, 지힐렛이 목을 물어뜯었다. 목숨을 앗아 가기에 충분한 치명상을 두 군데나 입은 유크하르는 단숨에 절명했다.
"성질이 급하군. 잡종 성기사."
그때 목이 부러진 유크하르가 입을 뻐끔거리며 말했다. 유크하르의 목소리긴 했지만 아이작은 그 본질이 골루와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골루와루는 반투명한 모습을 한 채 유크하르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촉수를 회수했다.
"너는 강력해... 하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실과 비현실, 양쪽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지. 나를 물리적으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골루와루를 반이라도 살아 있게 만들어 놓는 매개가 유크하르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양치기 목상도 아닐 것이다. 그만큼 강한 성물이 아니니까.
골루와루는 유크하르의 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러니 불필요한 싸움을 할 필요는 없다. 성기사. 나는 싸움을 좋아하지도 않아."
"그럼 자살해 주게?"
"...나는 탐욕과 금은보화의 신이다. 성기사, 나와 거래하자."
골루와루는 탐욕신, 혹은 재물신으로 불리며 황금우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인들 사이에서 숭배받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황금우상이 형태야 어쨌든 남과 손을 잡는 거래와 시장, 금융을 상징한다면, 골루와루는 그저 홀로 모으기만 하는, 독점을 추구하는 탐욕 그 자체였다.
"사악한 고대신이 성기사한테 거래를 제안하는 거냐?"
"네가 모시는 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등대지기의 하수인은 아니군. 그러면 상관없지 않나? 나는 네가 누구라도 상관없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으니까."
골루와루는 아이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탐욕이 느껴진다, 성기사. 사람들의 인정을 원하나? 그 손에 승리를 움켜쥐고 싶나?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다. 신을 네 아군으로 삼는다면 든든할 텐데?"
아이작은 재밌다고 느꼈다.
확실히 보수적인 빛의 법전이라면 모를까, 다른 신앙들도 자신들의 교리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거래 자체를 배교 행위로 보지는 않았다.
"무슨 거래?"
아이작은 골루와루가 무엇을 제안할지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았다.
역시나 골루와루는 예상했던 답변을 내놓았다.
"내가 황금우상의 신이 되도록 도와다오."
***
유크하르는 황금우상 상단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황금우상 신도들을 가호하는 무언가가 있기는 하다. 우연과 행운, 예감 속에서 유크하르도 그 존재를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현상일 뿐, 분명한 신적 존재로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신을 원했다.
다른 신앙들처럼 기도에 답해주고 기적을 베풀어 인도해 줄 사제와 다른 신의 신봉자로부터 지켜 줄 칼을 든 성기사를 원했다.
그래서 유크하르는 양치기 목상과 재물신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어쩌면 자신이 황금우상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크하르는 관념적인 신에게 인격을 씌우고자 한 거지."
"인격?"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감동하고, 분노하고, 상을 주고, 벌을 주는 인격신 말이다. 엘릴이나 붉은 성배, 불사 황제가 그러하듯. 유크하르는 자기가 황금우상의 인격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를 이용해서."
골루와루는 즐겁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놈은 나를 부활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빌렸지. 아마 불사 황제의 권속들의 힘을 빌린 것 같더군."
'또? 하긴, 고대신이 얽힌 시점부터 또 그놈들일 줄 알았지.'
하기야, 불사 교단 말고 또 어디서 손을 빌릴 수 있을까?
쇠르는 백제국 변방에 위치한 무역 거점 도시다. 수상한 사람이 들어오는 일도, 외국의 정체불명 물자가 들어오는 일도 흔하다.
유크하르는 지힐렛이 그랬던 것처럼 왈라이카 사냥꾼의 손을 빌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고용한 셈이 되었지만.
"그리고 나의 부활을 위해... 쇠르에 욕심의 불길을 지폈지. 나도 도와줬고. 양치기 목상의 위치와 때마침 유행 조짐이 보이던 로어커스를 활용한 투기 전략 등을 알려주었다. 아, 돈이라는 것은 모으면 모을수록 정말 즐거워지지."
아이작은 골루와루의 전략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고대신들이 부활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도도 없고,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쇠르의 욕심쟁이들을 시작으로 황금우상 신도들을 홀라당 먹어 버릴 전략을 세운 것이다.
황금우상 신도들은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필사적으로 로어커스 폭등에 매달릴 테고, 그 탐욕은 골루와루의 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골루와루는 결국 부활하지 못하잖아?'
게임에서 골루와루를 이벤트 몬스터로 만날 수 있기는 하지만 지힐렛과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중간보스 수준이다. 결코 신앙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기껏 해봐야 플레이어들을 괴롭히고 짜증나게 하는 정도.
결국 골루와루의 전략이 실패하기는 한다는 건데, 그게 어떤 시점에 왜 일어나는지는 아이작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빈약한 인간은 내 몸으로 삼기에 너무 나약하고 늙었다. 그리고 너한테 정체를 들키자마자 나한테 달려와서 헐레벌떡 방법을 달라고 애원했지."
골루와루는 코웃음 치며 유크하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원하는 게 내 몸이냐?"
"그러면 가장 좋겠지만... 별로 내키지 않겠지?"
골루와루의 반투명한 몸 너머에서 두 눈동자가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건강하고 어린, 심지어 천사와의 혼혈이라 신성까지 품고 있는 성기사라니. 숙주로 삼기에는 최상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서투른 욕심으로 가진 것을 잃을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욕심으로 차근차근 무너뜨리다가 삼키는 것에 능했다.
유크하르를 무너뜨렸을 때처럼.
"뭐, 어때."
하지만 아이작은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팔을 벌리고 다가온 것이다. 골루와루는 당황해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몸을 주겠다고?"
"정체 모를 촉수 괴물보다는 말도 통하고 전략적인 고대신이 낫지. 그리고 황금우상 상단을 집어삼켜 신이 되겠다며? 그러면 단숨에 내 세력도 생기는 셈이군."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의 터무니 없는 비교에 분개합니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정말 괜찮다는 듯 유크하르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골루와루는 아이작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이 수작을 부린다 해도 자신을 해칠 수는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이미 쇠르의 탐욕을 통해 힘을 얻고 있었고, 완전히 육신을 가지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그 탐욕이 유지되는 한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작이 빙의하자마자 자기 자신을 해칠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골루와루는 아이작 안의 거대한 욕심을 읽었다.
놈은 자신을 정말로 삼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크하르한테 그랬던 것처럼.
골루와루는 이내 광소를 터뜨리며 아이작을 향해 덮치듯 달려들었다.
"크하하하! 그 욕심이 마음에 드는구나! 좋아, 우리는 좋은 조합이 될 거다! 세상을 집어삼켜 보자꾸나!"
유크하르의 몸이 으스러지면서, 골루와루의 반투명한 육체가 아이작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이작은 팔을 한껏 벌리고 골루와루의 침입을 받아들였다. 골루와루는 아이작의 몸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과 짙은 신성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을 느꼈다.
***
'뭐지? 이게 대체 뭐지?'
골루와루는 어떤 인간의 내면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한 공허를 맞닥뜨리고 당황했다.
죽은 신이라 해도 신성을 가진 신. 영혼의 격과 크기에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골루와루는 아득한 심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 피라미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건... 이게 대체?'
골루와루는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을 느꼈다.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재물신에게는 지식 또한 재물이다. 그는 새로운 지식을 얻고 탐구하는 것 역시 좋아했다. 새로운 경험을 낯설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어둠, 이 공간은 달랐다. 골루와루는 이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순간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안다는 사실에, 알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비명을 질렀다. 비명은 자신의 존재감만큼이나 나약했다.
하지만 그 비명을 듣고 누군가 깨어났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어둠 너머에서, 그 어둠만큼이나 거대한, 하지만 수천, 수백 개에 이르는 눈동자들이 집요하게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골루와루는 뒤늦게 시커먼 어둠 속을 표류하는 어떤 존재를 발견했다.
그가 익히 아는 존재였다.
역병신 지힐렛. 표류하는 신의 사체였다. 이내 그것을 다진 고기처럼 박살 내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촉수들이 기어 올라왔다.
골루와루는 깨닫기도 전에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
"아아아아아아아!"
골루와루가 아이작을 덮치고 다시 튕겨져 나가기까지는 3초도 안 되는 시간이 걸렸다. 적어도 아이작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유크하르의 몸으로 돌아온 골루와루는 산채로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고 기어가며 도망치려 애썼다.
"윽."
콰드드드득!
아이작도 멀쩡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광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서 촉수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작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원래는 왼쪽 손바닥에만 나타나던 촉수가 온몸을 째며 튀어나왔다.
아이작은 삽시간에 온몸이 촉수로 넘실거리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여전히 분노한 듯 유크하르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아이작은 어쩔 수 없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 들어가라고!"
마치 말 안 듣는 개를 패기라도 하듯 몇 번이나 때리고 다그치고서야 촉수가 하나둘 씨근거리며 몸 안으로 사라졌다. 일부러 의도한 일이긴 했지만 과한 반응에 아이작이 당황할 정도였다.
마침내 촉수들이 다 들어가고서야 이름 없는 혼돈이 경고하듯 메시지를 날렸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은 자신의 소유임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48화. 등대를 밝히는 자 (4)
"그래, 그래."
아이작이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이 캐릭터를 만들 때 이름 없는 혼돈을 골랐으니 그 업보도 감당해야 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니 죽일 수 없다던 골루와루는 예상대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튀어나왔다.
"그대로 안에서 잡아먹히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나온 걸 보니, 쇠르에서 벌인 일이 나름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야?"
아이작은 골루와루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가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오줌을 지린 흔적과, 엉망이 된 몸과 영혼을 질질 끌고 어딘가로 도망친 듯한 흔적이었다.
"그러게 감당할 수 없는 걸 먹으려고 하니까 탈이 나지."
아이작은 그 흔적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흔적은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
"살... 살려...!"
골루와루는 고통스러운 몸을 뒤틀며 계단 위를 올라갔다. 아이작의 몸에서 도망치기 위해 골루와루는 제 영혼의 대부분을 떼어 놓고 도망쳐야 했다. 그의 영혼의 격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그나마의 생명력도 보존하기 위해 유크하르의 몸에 전력으로 기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크하르의 몸 역시도 다 죽어 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체나 다름없는 꼴로 살아있을 수 있던 것은, 그동안 쇠르에서 끌어모은 탐욕의 기운 덕분이었다.
실낱같은 신성이 탐욕을 끌어모아 그의 목숨을 붙여 놓고 있었다.
'살려줘!'
골루와루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권세가 황금우상에게 서서히 잡아먹힐 때에도, 그를 토벌하기 위해 엘릴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에도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신성을 가지고 있는 한 다시 부활할 기회를 노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작의 안에서 본 그것.
그것은 달랐다. 그것은 골루와루의 몸을 무참히 자르고 찢으며 씹어먹었다. 신성조차도 간식거리라도 되는 듯 이빨 아래 뭉개졌다.
"꺄아아아악!"
어디선가 그의 것이 아닌 비명이 들려왔다.
골루와루는 마침내 자신이 배수로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로어커스 향이 가득한 시장 한복판이었다. 시장 상인들과 주민들이 시체나 다름없는 유크하르가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는 꼴을 보며 경악했다.
제정신으로 판단하긴 힘들었지만, 골루와루는 잘하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잡종 성기사, 아이작이라는 자는 어째선지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밝은 곳에선 그 촉수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살, 살려...."
골루와루가 힘겹게 말을 꺼내자 그제야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본 주민 몇이 다가갔다. 그들은 유크하르의 육신이 어떻게 살아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돕기 위해 상태를 살피고, 몇몇은 사제를 부르거나 붕대를 구하러 뛰어갔다.
그 순간 골루와루의 눈이 번뜩였다.
[오라!]
골루와루의 발악 같은 외침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골루와루는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 짜내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곧 자신을 쫓아올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골루와루는 양치기 목상을 높게 들어 올리며 그들의 욕망과 탐욕에 속삭였다.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기사가 나타났다! 탐욕의 성전을 무너뜨리기 위한 기사가!]
양치기 목상에는 특정한 감정을 부추기는 힘이 있을 뿐,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골루와루는 그들의 욕망에 호소하고 있었다. 골루와루는 유크하르의 기억 속에 있는 사실과 정황들을 모조리 털어 냈다.
로어커스 폭등과 조종당한 권력자와 큰손들, 이를 위해 이용당한 사람들까지.
자백이나 다름없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골루와루는 인간의 욕심을 믿었다.
이제 로어커스 유행은 쇠르뿐만 아니라 제국의 중심부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탐욕의 불길이 대륙을 불태우면 너희들은 태산만큼 많은 돈을 쥐게 될 것이다.
골루와루의 달콤한 속삭임은 동시에 두려움도 함께 밀어 넣었다.
지금 다가오는 성기사는 너희를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온 괴물이다.
너희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직업을 잃게 만들 것이다.
바닥에 주저앉아 나무껍질이나 벗겨 먹을 것인가? 보릿고개를 버틸 식량을 팔아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가 지금 쥐고 있는 그 황금빛 미래를 시궁창에 박을 것이냐!
[나를 지켜라, 지키지 않으면 너희는 나와 함께 파멸한다!]
오직 한 사람.
한 사람만 이곳에서 묻어 버린다면 더 큰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상인들은 골루와루가 쥐어 짜낸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도 직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했다.
자신들은 속았다.
속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속지 않으면 그들은 파산한다.
앞으로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어야만 살 수 있다.
그러려면 성기사가 죽어야 했다.
그들은 광기로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한곳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야."
그곳에 성기사가 있었다.
***
아이작은 시장을 가득 메운 상인들과, 그들 사이에 숨어 허겁지겁 몸을 빼려는 유크하르를 보았다. 그는 미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설마 이 많은 민간인들을 전부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비록 괴물의 본성을 숨기고 있을지 몰라도, 위선을 부리는 한 본색을 드러낼 순 없겠지!'
골루와루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골루와루가 아이작이 괴물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까발릴 수는 없었다. 믿어 줄지도 의문이지만, 아이작이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생각하고 괴물이 되어 버리면 그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골루와루가 아이작을 저지하려면 그의 사회적 체면을 이용해야 했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장 상인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상인들은 그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띤 채 어디선가 주워 온 무기들을 하나둘 꼬나쥐고 있었다. 그들 자신도 이걸 들고 어쩌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군중의식은 무서운 법이다.
이들 중 한두 명만 아이작에게 달려든다면 책임은 사라지고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조용히 눈감게 될 것이다.
아이작은 일단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 익숙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헤사벨 굴마르였다.
도망친 줄 알았던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골루와루의 군중 통제에 휘말린 것인지, 아니면 아이작에게 미련이 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헤사벨 본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과 눈이 마주치자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다시 시장 상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경전에 시장은 만민이 부족함을 나누는 곳이라 하지 않았더냐?"
아이작은 딱히 연설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다지 말재주가 좋지 못한 것도 있고.
하지만 연출을 위해서는 적당한 대사가 필요했다.
아이작은 적당히 성경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너희는 시장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짧고 담담한 꾸짖음과 함께, 아이작은 처음 시험 삼아 사용해 본 이후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궁극기: 파수자의 등대'를 사용했다.
그 순간 아이작의 머리 위로 둥근 후광이 비추며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시장을 가득 뒤덮었다.
***
황금우상 상단의 상인 비히크는 시장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시장 한쪽에 갑자기 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인가 확인하려다가 갑작스러운 충동에 휩싸였다.
성기사를 죽여라!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머릿속에 완벽한 내적 논리가 잘 짜여 있는 의지였다. 비히크는 그 충동에 거부감과 두려움을 먼저 느꼈지만, 그보다 이후 자신에게 찾아올 파산의 공포가 더 강력했다.
로어커스를 사들이기 위해 진 빚과 용병들에게 낸 대금, 자릿세, 마차 대여금... 다른 거부감과 두려움은 시장에 있는 모두가 나눠 가지고 있었지만, 파산의 공포는 오로지 그 혼자만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기사를 죽여라!
비히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상인이 팔던 식칼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걸 왜 쥐고 있는지, 이걸로 뭘 할 생각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혼란에 휩싸인 와중, 갑작스러운 빛이 그를 덮쳤다.
'너희는 시장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짧은 꾸짖음과 함께 강렬한 빛줄기가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빛과 어둠, 바른 것과 그른 것, 진실과 거짓, 모든 것이 분리되고 명암이 선명해졌다.
동시에 비히크의 머릿속도 맑아졌다.
땡그랑.
그의 손에서 식칼이 떨어졌다.
'내가 무슨...?'
비히크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상황을 명료하게 알아차렸다. 외면하기에는 성기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다음 찾아온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수치심에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군중의 반응을 보면서 파수자의 등대 효과를 명확히 확인했다.
파수자의 등대.
게임상에서는 강력한 방어 스킬이자 오러 능력으로 표현된다.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면, 혼란과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준다는 양 온갖 거창한 표현을 다 동원해 서술해 놓았다.
그러나 누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한단 말인가? 대체 어떤 존재가 그것을 정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제 아이작은 누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고르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등대의 빛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아이작이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한 순간, '빛의 법전'의 규칙이 후광의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뒤덮었다. 황금 우상의 기적도, 골루와루가 흩뿌렸던 선동과 탐욕의 속삭임도 순식간에 걷혀 나갔다.
'대충 광역 디스펠 정도의 효과로군.'
빛의 법전은 빛과 열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는 일반 물리 법칙의 신이기도 하다. 파수자의 등대로 시전된 후광 속에서는 모든 기적, 마법, 허구와 기만은 사라지고 아이작이 고른 '정상'의 세계만이 남았다.
여기서는 어떤 신앙의 기적도 존재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범위가 빛의 법전의 성역,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이러니 파수자의 등대가 강력한 방어 오러 스킬 정도로 표현되지.'
그 어떤 신앙의 성기사나 사제도 파수자의 등대 안에서는 빛의 법전을 상대로 힘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것으로 파수자의 등대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작이 희망하는 바에 따라 등대의 방향을 돌릴 수도 있었다.
즉, 아이작은 지금 이 성역을 황금 우상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고, 붉은 성배의 것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해당 신앙에 대한 이해도만 충분하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게임 속에서 칼센은 불사 교단의 성역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이작은 처음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 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이름 없는 혼돈'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꿨었다.
그때 이후로 아이작은 두 번 다시 파수자의 등대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몸이 서서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파수자의 등대를 꺼뜨렸다.
마치 태양빛이 사라지듯 그의 머리 위에 있던 후광이 붉은 노을처럼 사라졌다.
파수자의 등대를 시전한 시간은 몇 초 안 될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시장 상인들에게 영향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골루와루가 퍼뜨린 욕심과 선동의 목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심지어 놈이 그동안 상인들에게 퍼뜨렸던 로어커스 폭등을 위한 욕심마저도 완전히 걷어 낸 상태였다.
남은 것은 강렬한 현실 자각뿐이었다.
그들에겐 분노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 다가올 차가운 미래를 깨달았을 뿐.
상인들은 서서히 무너지듯 아이작 앞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감히 아이작에게 어쩔 생각조차 품을 수 없었다. 애초에 골루와루의 선동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아이작은 그들을 응시하며 말했다.
"돌아가라."
상인들은 힘없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돌아가서 가족들과 인사하고 그들을 안아주거라."
아이작은 상인들 사이를 지나 골루와루를 찾아 나아갔다.
49화. 계약성립 (1)
골루와루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것인지 그새 또 도망친 뒤였다. 그러나 상인들은 골루와루가 사라진 자리를 향해 손가락질해 가르쳐 주었다. 누구 하나 아이작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놈은 멀리 도망갈 상태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시장의 한 골목 안에 들어섰다.
벽을 짚고 몸을 질질 끌고 간 흔적 속에 골루와루가 멀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이 시장통 속에서 골루와루를 어떻게 완전히 처치할지 고민하며 걸어갔다.
그리고 이내 멈춰 섰다.
그의 앞에 헤사벨 굴마르가 서 있었다.
아이작을 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녀는 양손에 잘라낸 유크하르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다. 아이작은 그 잘린 머리통에 깃들어있는 골루와루가 입을 뻐끔거리며 비명 지르는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작이 다가가자 헤사벨은 재빨리 무릎을 꿇으며 유크하르의 머리통을 내밀었다.
아이작은 왼손을 내밀어 유크하르의 머리통을 촉수로 씹어먹었다.
으슥한 골목 안에 뼈와 뇌수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짧게 울려 퍼졌다.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헤사벨은 고개를 숙인 채 결코 들어 올리지 않았다.
아이작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왜 돌아왔지?"
"당신을 섬깁니다... 진정한 선지자시여."
솔직히 말해 헤사벨도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작 앞에 무릎 꿇은 채 계속 그 사실을 생각했다.
아이작으로부터 도망쳤을 때, 헤사벨은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하 배수로의 시커먼 어둠 속을 헤매는 내내 그녀는 아이작의 시선을 느꼈고, 그가 짚었던 목 뒤에서 여전히 그 감촉을 느꼈다.
그제야 헤사벨은 깨달았다. 자신은 그에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음을.
아이작이 자신을 쫓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아이작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음을 안 것이다.
헤사벨은 붕괴 직전의 정신 속에서 한 가지 가능성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작이 정말 붉은 살점의 예지자이길 바라는 것.
그녀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저는... 저는 당신께서 붉은 살점의 예지자라 믿습니다."
아이작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짓궂게 물었다.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건데?"
헤사벨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실 아니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아이작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면 그의 애완견이라도 되어야 할 처지였다. 헤사벨이 아이작을 붉은 살점의 예지자라고 믿는 것은, 단지 이 배교나 다름없는 짓을 저지르면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알 수 없는 살점들을 조종하고 혼란의 영역에 속한 짐승을 움직입니다. 그것은 결코 빛의 법전이나 엘릴, 황금 우상, 세상의 화로 같은 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헤사벨이 말한 신앙들은 백제국이나 그 동맹에 속해있는 신앙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빛의 법전 성기사단의 인증을 받았으며, 그들과 함께 살았으며, 당당한 후광으로 사람들을 무릎 꿇렸습니다."
"그래서?"
"이는 당신이 기만에 능하고 배후에 움직여 혼돈을 퍼뜨리는,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헤사벨은 스스로 논리까지 완벽하게 세워 아이작을 추종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혼돈의 눈으로 그녀의 내면을 살펴보고 그 결과에 놀랐다.
'이거 각오가 장난 아닌데.'
헤사벨은 보통 각오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설령 진짜 붉은 살점의 예지자가 나타나더라도 그녀를 가짜로 부정하고 아이작을 진짜 천사처럼 숭배할 각오였다.
그 광신적인 신뢰에 살짝 오싹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헤인켈처럼 당장의 공포에 굴복해 일시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확신하고 완전히 자신을 납득시킨 것이다.
'겁을 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아이작은 이유를 고려해 보다가 자신의 매력 수치가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특히나 네필림의 외모는 탐미적인 붉은 성배의 신도들에게 더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매력은 심리적 효과에 영향을 미치니, 그녀가 공포로 굴복당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아이작의 눈앞에 낯선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헤사벨 굴마르(A)를 사도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사도가 되면 신성을 소모하여 기적을 베풀거나 힘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바르바리들에게 어설픈 포교를 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메시지였다.
그것도 신도가 아니라 사도라니? 종교에 어설픈 아이작도 사도가 아주 높은 직급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작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신앙에서 차지한 위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교황이자 메시아 격인 내게 직접 가르침을 받아 신도가 되었으니... 사도인 건가?'
아이작은 어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헤사벨은 이름 없는 혼돈의 가르침이고 뭐고 받은 게 없었다. 그녀는 신앙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문득, 아이작은 헤사벨을 사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사벨은 이름 없는 혼돈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다. 아이작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교리고 체계고 정해진 게 하나도 없는 이 신앙에는 그 점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그녀의 무릎 꿇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움찔하는 떨림이 전해졌다.
아이작은 온갖 망상을 하면서 떨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를 내 첫 사도로 임명한다."
사도라는 말에 헤사벨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아이작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올려다본 아이작에게서는 소름 끼치는 기운이 너울 치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사도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린다."
***
아이작은 다시 지하수로로 돌아왔다.
아까 마저 하지 못했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였다.
'골루와루를 먹어도 역시 별로 크게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군.'
지힐렛을 먹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신을 먹었으니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기대했는데,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먹었다는 느낌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신성의 효과는 아이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아이작은 지금 자리에 없는 헤사벨에 대해 의식을 집중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눈앞에 헤사벨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다.
[헤사벨 굴마르(S)]
[직위: 사도]
[상태: 맹목적 광신]
[붉은 탄원, 저 너머의 기생충, 흡혈]
'신성을 소모해서 신도를 강화할 수 있다라....'
신성은 신의 포만감과도 같았다. 소모하면 신도나 사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새로운 기적을 선물하는 것도 가능했다. 덕분에 아이작은 헤사벨의 등급을 A에서 S로 상승시키고 기생충을 만들어 심는 기적까지 선물했다. 적지 않은 신성이 소모되었지만, 덕분에 그녀의 신뢰를 단순한 복종에서 맹목적 광신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신앙에 묶이면 묶일수록 신도의 존재감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만약 헤사벨이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 해도 아이작은 그녀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배신할 일은 없을 테고.'
지힐렛을 위한 선물도 준비했다.
[지힐렛(S)]
[직위: 신수]
[상태: 절대적 복종]
[상시 위장, 포식, 가죽 아래에, 혼돈의 손길, 하급 지배]
지힐렛은 수명이 한정되어 있던 혼돈의 자손에서 신수로 격이 급등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신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덕분에 '가죽 아래에' 같은 예상치 못한 능력도 생겼다. 아이작이 처음 이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 제안받았던 능력 중 하나인 이것은, 대상을 포식하고 그 가죽을 빌려 쓸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걸로 지힐렛은 짐승의 형태를 넘어서 어느 정도 인간으로 위장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 셈이었다.
***
이제 아이작은 자신의 진짜 용건을 위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앞에 골루와루가 지배하고 있던 성역이 나타났다.
[이 성역은 '재물신'에 의해 오염되어 있습니다.]
[오염된 성역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치시겠습니까?]
이 성역을 황금 우상에게 돌려주는 것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 성역은 오랫동안 황금우상 신도들로부터 꽤 방치된 것 같았다. 아마도 유크하르가 은밀하게 관리하던 것이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 성역은 그 자체로는 중요성을 알기 힘드니까.
'어차피 버린 거 내가 잘 써먹어야지.'
아이작은 제단 위에 손을 얹어 말했다.
"이 성역을 이름 없는 혼돈에게 바친다."
지힐렛의 성역에서 그러했듯, 손에서 빠져나간 촉수가 성역 안쪽에 맥동하는 심장을 심어 넣었다. 두근거리는 맥박 소리와 함께 아이작은 놀랍도록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파수자의 등대를 쓰면서 소모되었던 기운이 다시 빠르게 회복되었다.
['성역정화'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경계의 낫 / 촉수의 단면을 톱날처럼 만들어 닿는 모든 것을 뜯어먹습니다.]
[심연에서 부르는 자 / 상대방을 광기에 빠뜨려 구속하고 느리게 만듭니다.]
[저 너머의 색채 / 일대에 시야를 가리는 어둠을 퍼뜨리고 혼란을 부여합니다.]
"으음...."
아이작은 기다렸던 선택지가 떴지만 얕은 신음을 흘렸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전부 다 아이작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골루와루와 싸우면서 아이작은 물리적 공격이 통하지 않는 적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 경계의 낫이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통칭한다면 그런 존재에게도 통하는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공격력이 아쉬워지는 시점도 아니고 그런 적이 많을 것 같지도 않으니... 제외.'
다음은 심연에서 부르는 자였다. 저 너머의 색채와 똑같은 디버프기라는 점에서 비슷해 보였다. 다만 심연에서 부르는 자는 단일 대상으로 하는 대신 더 강력하고 빠른 디버프기 같았고, 저 너머의 색채는 다수 대상으로 한 광역 디버프기 같았다.
'효과는 심연에서 부르는 자가 낫겠지만.'
특히 이런 종류 스킬은 매력의 영향을 받는다. 헤사벨 같은 강력한 적이 나타나도 광기에 빠져 아무것도 못 하거나 아군을 공격한다면 매우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작이 결국 고른 것은 저 너머의 색채였다.
다른 것이 아니라 '시야를 가리는 어둠'이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남의 눈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커.'
하지만 어둠을 불러내는 이 스킬이 있다면 밤은 물론이고 낮에도 어느 정도 시야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어둠을 틈타 이삭 검술이든 촉수를 사용하든 할 수 있다면 어려운 상황을 더욱 쉽게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은근히 역설적이게도, 아이작이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단 하나의 강력한 적이 아니라 다수의 적들이었다. 장기전을 벌이기에는 네필림 종족의 체력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아쉬움은 있어도 제일 최적의 선택지는 '저 너머의 색채'였다.
아이작은 성역의 효과로 쇠르 전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파악되는 것을 느꼈다.
파수자의 등대에 직접 노출되지 않아 걷어 내지 못했던 탐욕의 효과마저도 성역 선포의 효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이제 아침이 되면 모든 사람들의 정신이 맑아지고 현실이 닥쳐올 것이다.
아이작은 쇠르 시장을 중심으로 퍼지는 분위기와 동요까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골루와루 말대로 하루아침에 그들의 욕심이 다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와 목숨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상황을 미리 읽고 움직여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분일 것이다.
아이작은 특히 황금우상 상단 쇠르 지부장인 캐틀린의 당혹감을 읽으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 어디 한번 수금하러 가볼까."
50화. 계약성립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