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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10

[불곰주먹] 돈지랄 성기사 1-140 @연재

Prologue 돈지랄 성기사

[성바퀴 쉑 더럽게 안 죽네.]

[대체 어떤 병신이 신성력을 현질로 채운다는 컨셉을 만든거냐?]

[아아, 1만 골을 바칩니다! 이 지랄 하면 신성력 풀로 차는 게 말이 됨?]

성바퀴란, '성기사+바퀴벌레'의 준말로 더럽게 안 죽고 강력한 캐릭터라는 의미를 지녔다.

"꼬우면 알지?"

서버 최초의 성기사 오너, 박지훈이 비릿하게 웃으며 모니터 너머의 인파를 바라봤다.

MMORPG, 대륙 온라인.

박지훈은 이 게임 속 최초의 성기사다.

대륙 온라인은 한 캐릭터로 만렙을 찍을 때마다 새로운 클래스가 개방되는 시스템인데, PVP가 잦은 게임 구조 탓에 모든 캐릭터를 개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박지훈은 기어코 모든 캐릭터로 만렙을 찍어 '성기사' 클래스를 개방하고야 말았다.

'이런 사기 캐를 만들었다고?'

써 보니 성능이 미쳤다.

대체 밸런스를 망칠 수준의 캐릭터를 왜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었다마는.

"캬, 레벨이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구나."

돈으로 신성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게.

뭐랄까?

'마지막에 실컷 즐기고 접으라는 의미일지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고작 이틀 만에 박지훈은 만렙을 찍어 버렸다.

가진 다른 캐릭터의 자산을 모두 팔아 치우고, 급기야 길드의 공용 금고까지 탈탈 털어서 마지막 캐릭터 '성기사 에릭'의 신성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만렙을 찍는 수준을 넘어 대륙 공적이 되어 수많은 이벤트들이 생겨났다.

―황제의 비호(庇護)가 전장을 휘감습니다.

―하르힘 마탑주가 광범위 강화 마법을 시전하였습니다.

급기야 NPC들까지 몰려와서 박지훈을 죽이려 들었다.

[저거 죽여!]

[미친 새끼야! 길드 금고를 털어?]

[여기 부활 불가 지역이다.]

유저들과 NPC들이 합세했음에도 성기사 에릭을 어찌하지 못했다.

박지훈이 좁은 통로로 이뤄진 미궁 65계층에서 농성을 하고 들었기 때문이다.

'개미굴 지형이 개꿀이네.'

거대한 체구의 성기사로 좁은 통로를 막아 버리고, 가까이 오는 놈들에게 신성으로 빚어낸 칼을 쑤셔 주기만 했을 뿐인데.

―짐의 기사단이!

황실 근위대가 소멸했다.

딸깍.

박지훈이 한 것이라고는 그저 마우스 왼쪽 클릭으로 작동하는 기본 공격이 전부였다.

성기사 캐릭터로 제대로 된 스킬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기본 공격과 자힐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럼에도 수백억 골드를 갈아 넣은 신성력은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다.

[야, 더 모여!]

[길드원들 빨리 다 접속하라 그래! 저 새끼 스킬 먹으면 답도 없다!]

공용 금고가 털려서 잔뜩 성이 난 길드원들 탓에 수많은 유저들이 미궁 최상층으로 달려들었다.

개떼같이 몰려드는 플레이어들과 NPC들의 향연에 박지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1만 골만 쓰면 신성력 MAX인데, 시간 낭비하기는.'

포기란 걸 모르는 유저들에게 진절머리가 나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미궁이 이변을 탐지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NPC의 대사와 게임 내 크고 작은 일들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시스템 메시지다.

그런데.

저런 메시지는 1만 시간을 넘게 플레이하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신규 업뎃인가?'

어째 말도 안 되는 사기 캐를 줬다 싶었는데.

나름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끼익.

현재까지 개방된 미궁은 65층.

그 위로는 아직 업데이트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랬는데 갑자기 66층으로 향하는 보스 룸 문이 열렸다.

―조건이 충족됩니다.

―1만의 피와 웅혼한 신성.

―미궁이 당신들을 초대합니다.

이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박지훈의 의식은 사라졌다.

1화 속물 성직자 에릭 (1)

미궁(迷宮) 위에 지어진 거대한 도시, 황도 아르만의 아침이 밝았다.

원형으로 만들어진 제국의 수도는 황성이 있는 중앙 제1구역부터 5구역까지 띠 형태로 둘러져 있다.

그중 제3구역에는 미궁과 연결된 거대한 광장이 있으며, 그곳은 매주 첫날 모험가들에게 개방된다.

"자자, 쌉니다, 싸요!"

"연금 마탑 폐기 포션 떨이로 판매합니다!"

투박한 벽돌로 지어진 광장에 7일장이 열렸다.

미궁으로 향하는 드넓은 계단 앞에서 상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깔고 호객 행위를 벌였다.

규모만 보자면 커다란 상가를 방불케 했다.

"저치는 덩치가 무서워서 뭘 사기가 부담스럽구만."

광장 한구석에는 압도적으로 거대한 체구를 지닌 사내가 양반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그 앞에 놓인 돗자리에는 귀한 마탑제(魔塔製) 물건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손님이 없었다.

사내의 압도적인 덩치와 살벌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때 웬 노인이 다가왔다.

"미친놈도 아니고 마탑제 마도구를 왜 이런 좌판에서 파는 게냐?"

키가 2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남자가 앞을 바라봤다.

노인은 체구가 작았고 허리가 굽은 탓에, 앉아 있는 남자와도 눈높이가 맞았다.

금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노인에게 신분 패를 보였다.

그러고는 묻기를.

"살 거요, 말 거요?"

"끌끌, 진짜 미친놈이로구나. 교단 소속이 장사를 한단 말이냐?"

남자가 보여 준 신분 패는 제2구역의 교단 소속 인물임을 증명하는 물건이다.

귀족이나 대부호 고위 성직자에 속하는 이들이 거주하는 제2구역의 신분증은 사칭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대체 정체가 뭘꼬....'

노인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 신분을 사칭한다는 것은, 사형에 준하는 범죄와도 다를 게 없었으니까.

"웬 미친 상인이 손님을 가리지 않는다더니... 소문대로였군. 여깄는 물건은 내가 다 사마."

제2구역에 사는 시민, 그것도 교단 소속의 인물이 왜 이런 곳에서 잡상인 노릇이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체가 뭐가 됐건, 그의 신분은 확실했다.

그래서 노인은 화통하게 질렀다.

"23만 골."

그런데 가격이 조금 이상하다.

1만 골드는 한화 100만 원에 근접한 가치를 지녔다.

아이템 질이 아무리 좋더라도 시세라는 게 있는 법.

"허어.... 바가지도 이런 바가지가 없구나."

"25만 골."

"어허!"

"30만 골."

"사, 사겠네. 사! 눈이 참 좋은 놈이로구나."

"입막음 비용 5만 골은 별도다."

"...이런 미친놈!"

노인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남자에게 순순히 돈을 건넸다.

에릭, 한때 박지훈이라 불렸던 사내는 [인벤토리]에 돈을 넣으며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허어, 일개 상인이 아공간 주머니까지 지녔단 말이냐?"

"수배자도 쓰는 데 뭐가 문제지?"

"끌끌, 말년에 웬 미친놈을 다 보고...."

노인이 중얼거리며 미궁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자.

에릭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 즉시 행인으로 위장한 제국 치안대가 찾아왔다.

"약탈자 쟌슨이다."

"충-! 매번 교단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현상금은?"

"...아, 여기 준비했습니다."

커다란 돈주머니를 받아 들며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Ep. 1 속물 성직자 에릭

파티원의 뒤통수를 쳐 수배당한 범죄자가 노인의 정체였다.

에릭은 노인에게 얻은 35만 골드와 현상금으로 받은 5만 골드를 예배당 단상 위에 늘여 뒀다.

"에릭 형!"

"와, 이거 다 번 거야?"

교회 옆 고아원의 아이들이 몰려와 용돈을 기대하며 소리쳤다.

에릭은 미간을 여민 채 아이들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박지훈이었던 시절, 그는 대뜸 게임 속으로 끌려왔다.

한때는 지루한 직장에서 게임 속 먼치킨 캐릭터가 된다거나 하는 허황된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갓난아기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한사코 한 적이 없었다.

박지훈은 이 세계에서 '에릭'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아로 태어났다.

그리고 아스티아 교단 소속인 스승님을 만나 어찌저찌 살아갈 수 있었다.

[황금신성(黃金神聖)]

[황금을 바치면 그와 비례한 신성력을 얻는다.]

다행히 게임에서 얻었던 개사기 특전은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야만스러운 중세 시대 수준의 제국에서 살아가기란 제법 힘든 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스승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갓난아기 상태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살아났다 해도 오래 살기는 글렀을 거다.

[필요 재화: 200,000,000]

게임과 달라진 점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돈을 쏟아 강해지던 게임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힘을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스킬창이나 스탯창은 사라졌고.

HP나 MP 등을 표기해 주는 UI 지원도 없었다.

진짜 현실이었다.

'돈이 늘 부족해.'

그럼에도 에릭은 적응했다.

15년간의 삶은 그를 박지훈이 아닌 아르만 제국의 에릭으로 만들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에릭, 또 애들 무시하지?"

기다란 금발을 늘어트린 여인이 다가왔다.

굴곡진 몸매와 딱 붙는 성직자의 성복이 어우러져 배덕한 매력을 자아내는 그런 여자였다.

나이는 30에서 40 사이라고 주장하는데, 에릭이 추측하기로는 벌써 40에 근접했다.

"르웰 사제님, 좋은 아침입니다."

에릭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자, 잔소리가 쏟아졌다.

"아침? 해가 중천인데 뭔 놈의 아침이야, 그 돈은 또 뭐고!"

"주님께 바칠 공물입니다."

"아아... 리페로제 님도 왜 저런 아이를 데려오셔서."

"이제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청년입니다만."

아침 댓바람부터 에릭의 돈지랄을 보니 르웰은 뒷골이 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저 얄미운 말투부터, 성직자답지 못한 처세에, 아이들을 개 보듯이 보는 무심함까지.

어쩌다 저런 놈이 나타났는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 달 운영비 50만 골 드릴게요."

그러나 그녀는 에릭을 어찌할 수 없었다.

교단의 위대한 순례자의 손을 붙잡고 왔던 다섯 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에릭이었다.

그때의 에릭은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강건한 신성을 흩뿌리며 미친 소리를 해 댔었다.

뭐랬더라?

"신도들에게 십일조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를 위해 오는 신도들에게 주급의 10%씩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그런 미친 소리였던 것 같다.

그 아이는 자라나며 스스로 돈을 벌어들였다.

위대한 교단 순례자(巡禮者)의 비호를 받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에릭은 성장했고.

그 결과 성스러운 성전(聖傳) 앞에 돈을 늘여 두는 미친 성기사로 자라났다.

그런 생각을 하던 르웰에게 에릭이 재차 물었다.

"안 받습니까?"

"...자, 잘 쓸게."

어려서는 신문을 팔고, 자라면서는 포차라고 불리는 기상천외한 이동식 식품 매장을 운영하더니, 근래에는 정체불명의 상점까지 열었다.

그의 성장 과정에 따라 르웰의 고아원은 수많은 지원금을 얻었다.

덕분에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고 글을 가르치며 재능에 맞는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 미카 상회에서 트롤 지방으로 만든 크림을 판다더군요."

"크흠, 흠. 성직자가 그런 사사로운 미용으로 돈을 쓸 수는...."

르웰이 말끝을 흐렸다.

에릭이 뒤틀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살 거야?

이런 느낌이었다.

'저번 주만 해도 뱀파이어 정수로 만든 립스틱을 샀으면서.'

정작 에릭은 조금 떨떠름한 감상이 들었다.

교단의 성직자는 돈을 돌 보듯이 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르웰은 그런 경향을 보였다.

물론 그것을 바꾼 것은 에릭이다.

잔소리를 듣기 싫어 조금씩 '돈'이 주는 안락함을 느끼게 만들어 줬을 뿐인데.

"그래서 어디서 파는데?"

"제2구역 쟝의 마도구 상점 앞에서 팝업샵이란 걸 연다더군요."

르웰을 치장에 미친 사제로 만들어 버렸다.

제1구역에서 유행하는 딱 붙는 재질의 사제복부터 뱀파이어의 심장을 짓이겨 만든 립스틱과 네일 아트까지.

'조금 과했던 것 같기도....'

뭐, 나쁜 일은 아니니까.

에릭은 덤덤하게 넘어갔다.

게임 속 세상은 미쳐 돌아가는 중이었다.

몇 년 전부터 수많은 빙의자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너무 과하단 말이지.'

에릭 자신도 포차라든가 신문 같은 걸 만들긴 했다마는, 다른 빙의자들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빙의자는 이유불문 즉결 처형 대상이다. 존재 그 자체로 제국 공적임을 황제 에스페로자 로펜 아르만의 이름으로 천명한다.]

급기야, 황제가 직접 저런 선언을 했을 정도다.

어떤 미친놈들인지는 몰라도 온갖 사치품들을 뿌려 댄 탓에 세상은 상당히 복잡미묘하게 변했다.

'왜 나만 한참 전에 태어난 걸까....'

빙의자들은 타인의 몸을 차지하고 살아간다.

에릭처럼 갓난아기부터 시작한 케이스는 0에 수렴했다.

에릭은 늘 그게 불만이었다.

* * *

"어때? 달라진 거 없어?"

고아원에서 수업을 마친 에릭에게 르웰이 다가와 묻는다.

잘록한 허리와 흔들리는 골반, 요염한 자태 위로 새빨간 입술이 도드라진다.

에릭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제님, 그러다 정말 이단 심문회에 회부될지도 모릅니다."

"...뭐가?"

"그 옷이요, 옷! 사십 줄에 결혼이라도 하려 그러십니까?"

"어어! 나 삼십에서 사십 사이라니까! 그리고 이거 황도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이라 아무런 문제 없거든! 흥!"

안 그래도 빙의자들 때문에 신경 쓸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빙의자들은 르웰의 옷차림까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러다 레깅스까지 유행하면 어쩌냐.'

미국, 아니 이제는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보였던 레깅스 패션이 떠오른다.

벽돌 건물로 가득한 중세 도시에 레깅스를 입은 사람들이 칼과 방패를 들고서 돌아다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최소한 로브라도 입으시지요."

르웰은 교단의 성복 가슴 쪽이 시스루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다.

어울리냐 안 어울리냐로 묻는다면, 어울린다.

아주 멋들어지게 잘.

'대한민국보다야 훨씬 자유롭지.'

사실 옷차림 따위로 이단 심문까지 갈 일도 없다.

이 세계는 남녀불문 개방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옷차림이야 미궁을 공략하는 모험가 비중이 높은 탓에 갑옷을 입는다 뿐이지, 애초에 속옷도 없이 다니지 않나?

"에릭, 유독 너는 옷 가지고 그러더라?"

"크흠, 흠. 신을 모시는 입장에서 경건할 필요가 있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르웰 사제님도 이제 40줄 아니십니까?"

그렇지만 어머니와 같은 그녀가 그런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조금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에릭으로 15년을 살았지만, 30년을 유교 보이로 살아온 박지훈으로서의 잔재가 그런 생각에 영향을 주는 걸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화제를 돌렸다.

"삼십 대라니까!"

"쓰읍, 제가 다섯 살 때부터 뻔히 다 기억하는데, 스승님께도 들었습니다만."

옷차림에서 나이로.

"그 영감탱이.... 지는 백 살은 먹었으면서."

"예?"

보통 에릭과 르웰의 대화는 르웰이 당황하며 끝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백 살이 넘어?'

에릭의 스승은 젊다.

20대, 아니 소녀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물론 노화 따위야 강건한 육체와 웅혼한 신성력으로 미룰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백 살 노인이 그런 젊음을 유지했다는 것이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 이건 비밀이다. 성격 알지?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에릭 역시 괴팍한 스승의 성격을 잘 안다.

그래서 르웰의 비밀을 지켜 줄 생각이다.

'빙의자를 키워 줄 만큼 특이한 인물이란 말이지.'

박지훈의 삶을 잊고 에릭의 삶을 받아들인 이유는 순전히 스승과 르웰의 존재 덕분이다.

아무튼.

슬슬 본론을 꺼낼 시간이 왔다.

에릭은 거대한 몸을 숙이며 르웰과 눈높이를 맞췄다.

"르웰 사제님, 저도 이달부로 열다섯이 아닙니까?"

"으응, 그, 그렇지?"

마치 열 살 때, 포장마차란 것을 만들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르웰은 불안했다.

"고아원에 딸린 '교회' 사업을 좀 해 보고자 하는데."

"그, 교회에 고아원이 딸린.... 하아. 사업은 좀. 아무리 리페로제 님의 재가가 있었다 해도! 교회를 건드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운영 방식 자체는 그대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다만, 평민 부유층에게는 십일조라는 이름의 헌금을 거둬 볼 생각입니다."

"...네가 다섯 살 때 했던 그 말 말이니?"

"예."

진중한 눈빛과 무거운 목소리.

너무나도 진지했다.

성기사로 가르침을 내려받지만 않았어도 에릭은 거상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을 지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의 십일조란 것은 이해가 안 됐다.

"상식적으로 주급의 10%를 내면서 교회를 찾을 이유가 있겠니? 오던 사람들도 안 오겠다."

"마음의 안식과 평온, 그리고 치유의 기적을 위해서라면 그 이상을 바쳐서라도 찾아올 겁니다."

반쯤 맛이 간 에릭의 눈빛을 보고, 르웰은 쓴소리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에릭, 네가 지금껏 성공만 해 와서 현실 감각이 떨어진 모양이구나! 너라면 네가 번 돈의 10%를 헌금으로 내고 싶겠니? 귀족들이나 후원이랍시고 돈을 내주는 거지."

정론이었다.

사실 에릭은 1%라고 해도 절대로 단 한 푼도 낼 생각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박지훈으로서의 경험이 있다.

십일조는 무조건 먹힌다.

'면죄부도 팔아야 하는데.'

지금껏 정확한 시기를 몰랐는데, 늘어나는 빙의자를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머지않아 메인스토리가 시작된다.

그가 빙의한 시점은 게임 스토리보다 한참 전이었기에, 몰랐던 부분이다.

게임에서 66층까지 개방되었던 미궁 공략은 아직도 32층에서 빌빌거리는 중이었고.

제국의 정복 전쟁도 아직 재개되지 않은 상태다.

'누가 게임을 하면서 연도 따위를 기억하냐고....'

만렙을 찍었다 뿐이지, 박지훈은 게임 내 주요 스토리라든가 NPC의 대사 혹은 배경 설정 따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빙의할 걸 알았더라면, 중요하게 기억해 뒀겠지만.

'아니지, 나는 환생인가?'

갓난쟁이로 태어난 건지, 갓난쟁이 몸에 빙의를 한 건지.

이 부분만큼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온전한 시스템도 없는 그였다.

"저도 이러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급했다.

에릭은 [인벤토리]에서 스승이 준 신분 패를 꺼내 들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투박한 쇳덩이에는 어딘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청색 문구가 쓰여 있었다.

[전(前) 성전기사단장(聖戰騎士團長), 교단 공인 순례자(巡禮者), 리페로제 아스티아]

요컨대, 아스티아 교단 성기사단의 가장 높은 지위를 지녔던 이가 세계를 떠도는 순례자로서 활동한다는 증명 패였다.

국방부 장관이 암행어사로 살아가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이것을 맡겼다는 것은.

에릭이 그의 대리인이자 후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위로 르웰 사제님을 찍어 누르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그간 온갖 사업을 벌여 온 에릭이다.

포차를 하고 상점을 운영하고 정보 조직까지 만들어 낸 그다.

그럼에도 늘 돈이 부족했다.

게임처럼 현금을 골드로 환전하는 시스템이 사라진 세상에서, 화폐 가치란 그만큼 높아지기 마련.

백억대 재화를 사용해 무한에 가까운 신성력을 얻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곧 2억을 모은다.

'3티어는 찍어 놔야지.'

스킬과 스탯의 부재는 스승의 가르침으로 어느 정도 해결된 상황이다.

메인스토리가 시작되며 펼쳐지는 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다.

[황금신성(黃金神聖)]이라는 힘은 돈을 바치면 신성력 통을 늘려 준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강화도 가능하고, 회복도 되는 개사기 특성이다.

이걸 제대로 쓰려면 돈이 아주아주 많이 필요했다.

"...에, 에릭. 네가 어떻게!"

황망한 듯 입을 쩍 벌린 르웰을 향해 에릭이 읊조렸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2화 속물 성직자 에릭 (2)

'일이라는 게 하고 싶다고 막 이뤄지는 건 아니지.'

십일조를 거두겠다 선언했지만, 바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물밑 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에릭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갈 곳이 많네.'

제3구역에 있는 르웰의 고아원에서 제2구역에 자리한 상점가로 향했다.

미궁 앞에서 열리는 칠일장과는 다르게, 제2구역의 상점가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파리의 샹젤리제를 떠올리게 할 법한 모습이었다.

에릭은 그중 한 가게 앞으로 다가섰다.

[쟝의 마도구 상점]

아스티아 교단의 상징인, 기다란 십자가를 둘러싼 여섯 날개의 조각상이 도드라지는.

조금 특이한 매장이었다.

고급스러운 우드 톤의 매장 문을 열자 웬 덩어리 하나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옵쇼! 오오! 형님 오셨수?"

고급 상점가에 자리한 매장은 에릭의 차명으로 운영되는 가게다.

땅값만 해도 제곱미터당 수천을 호가하는 그런 알짜배기 자리다.

그런 곳에 에릭은 매장을 가지고 있다.

"어쩐 일로 이 시간에 매장을 찾아오셨대...."

정갈한 유니폼을 입은 덩어리 놈은, 스승님과 함께 제국 수도 밖을 순회하던 중에 계도했던 깡패다.

"별문제는 없었나?"

반삭 머리를 벅벅 긁는 한심한 모습의 떡대가 에릭의 물음에 중대 보고 사항을 읊었다.

"거, 뭐냐. 웬 미친놈이 왔길래 쫓아냈수다. 뭔 시스템 상점을 어쩌구 하던데.... 이상한 말을 쓰는 걸로 봐선 말로만 듣던 빙의자가 아닌가 싶었수."

"뭐?"

매장 점검만 간단하게 마치고, 십일조 물밑 작업을 논의하려 했던 에릭인데.

직원놈의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형님 놀라는 건 처음 보는-."

"닥치고 설명해 봐."

"거참, 말을 해도...."

보기 드물게 일그러진 에릭의 얼굴을 보며 깡패 같은 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있었던 일을 읊조렸다.

"이상한 놈이었수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마도구 상점에 찾아왔다.

그러고는 대뜸 시스템 상점의 물건들을 매일 품절시키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쨌어?"

"개 패듯이 패고 쫓아냈수다. 빙의잔지 뭔지 의심되니까 다음번에는 제국 치안대를 불러 버리겠다고 했수."

"인상착의는?"

"거 뭐냐, 인식 방해 계통의 마도구를 썼는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수다."

에릭이 관자놀이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5년 내리 만난 적 없던 빙의자를 여기서 만난다고?'

스승은 떠날 때, 에릭에게 몇 가지 조언을 남겼다.

빙의자와 엮이지 않는다거나, 미궁에 들어가지 않는다거나.

에릭은 그 조언을 철저하게 따랐다.

교단과 제국처럼 확실하게 빙의자와 거리가 먼 집단과만 어울려 온 그였다.

"후우."

아니지.

좋게 생각하자고.

머리가 아플 일은 분명한데,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좋은 일이 된다.

"두식아."

"예?"

"빙의자를 신고하면 포상금이 얼마더냐?"

잔뜩 구겨졌던 얼굴이 펴지고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얀 피부와 오똑하게 세워진 코, 자두 빛으로 물든 입술이 아주 선명했다.

미의 남신을 방불케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거, 참 그 비열한 주둥이만 어찌하면 제국 제일 미남이라 불러도 되겠수다. 이만 골드라 들었수."

그렇지만 그의 입가만큼은 어딘가 교활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 * *

장두식에게 십일조 물밑 작업을 맡기고 에릭은 제2구역과 3구역을 연결하는 관문소을 찾아갔다.

성벽과 연결된 거대한 직육면체 건물이 보인다.

[제국 치안대]

십일조를 위해 전할 말도 있고, 빙의자 신고도 해야 했기에 에릭이 직접 이곳으로 찾아간 것이다.

"누, 누굴 만나신다고요?"

"치안청 제2기사단, 부단장. 벌써 세 번째 말하는데? 귀가 안 좋나?"

치안청 2기사단은 귀족을 전담하는 부서다.

즉, 모든 구성원이 귀족이며 단장과 부단장은 꽤나 높은 작위를 지닌 집안의 자제일 터였다.

"...그, 어느 집안 분이신지?"

대뜸 덩치 큰 놈이 찾아와서 기사단의 부단장을 만나겠다는데.

입구를 지키는 병사는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귀족인가?'

아무리 귀족이래도 그렇지.

2기사단의 부단장은, 무려 공작가의 여식이다.

"에릭이 왔다고 전하면 될 거다. 간단한 말 전하는 일로 언제까지 서 있게 만들 생각이지?"

그런데도 이런 태도라니.

아무리 상대방이 귀족이래도 선을 넘은 느낌이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찾아오는 사람은 또 처음인데.'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에릭의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던 병사였다.

그때였다.

"아스티아 교단분이시다."

상사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네? 교단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기다란 콧수염이 돋보이는, 미스릴제 전신 갑옷을 입은 사내가 병사를 밀어냈다.

"부단장님 찾아오셨죠?"

그러고는 에릭에게 손을 건네며 물었다.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에릭이 성호를 그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오늘도 수배범이 있습니까? 미궁도 닫혀서 한가할 줄 알았는데...."

악수를 하는 콧수염 병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야근을 질색하는 모습이었다.

"오늘은 현상, 흠, 수배범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부단장님께 오늘 저녁 예배에 참석해 달라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찾아왔죠."

"아…. 말씀 전해 드리겠습니다. 용건은 그게 전부십니까?"

"하나 더 있습니다. 빙의자 신고를 좀 할까 하는데."

"빙의자요?"

처음이었다.

교단의 조력자 정도로 알려진 사내가 에릭이다.

별칭은 현상금 사냥꾼 에릭.

신을 모시는 자에게는 너무나도 불경한 말인지라, 앞에서는 절대 꺼내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빙의자?

"신고만 해도 포상금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하하. 그, 그렇죠. 내달부로 신고 포상금은 사라질 예정입니다. 요즘 들어 수가 너무 많아져서요...."

"호오. 그러면 이달까지는 신고만으로도 지급된다는 말이군요."

"그, 그렇죠...?"

에릭은 빙의자로 추정되는 이의 인상착의를 전달했다.

인식 저해 마법을 썼으니, 마탑과의 공조 수사로 빙의자를 찾아내겠지.

"아스티아 님께서 언제나 치안청을 굽어살피실 겁니다."

2만 골드의 신고 포상금을 들고 에릭은 치안청 밖을 나섰다.

떠나가는 에릭의 등을 보며 병사가 물었다.

"대체 누구길래, 기사단의 부단장님한테 말을 전하라 마라 하는 겁니까?"

"현상금 사냥꾼 에릭."

"예? 그분이 교단분이셨어요?"

"그래."

"돈을 어마어마하게... 크흠, 흠."

"밝히지. 돈에 미쳤어. 지금도 봐라, 신고 포상금? 허어, 얼마나 신고를 해 댈지. 치안청장님 머리가 또 빠지겠구만...."

정당하게 성수를 팔거나 치료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현상금과 신고 포상금을 챙기는 성직자.

"문제는 없답니까?"

"몰라."

"예?"

"위에서 그냥 저자한테 최대한 협조하라고만 해서 난 모른다."

"그게 무슨...."

"대귀족의 사생아, 혹은... 교단 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난 주교의 자제 정도로 추정할 뿐이지."

"허어, 근거는요?"

병사가 보기에 참으로 대단한 인물로 보였다.

그렇다고 그냥 믿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같았다.

"근거? 어떤 미친놈이 공작가의 여식이자 치안청의 부단장을 오라 가라 하겠나? 제3구역으로 예배를 보러 오라니.... 평민들 사는 데서 뭔 기도를 하겠다고."

"아...! 저도 평민이라서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병사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봤다.

제2구역과 3구역을 연결하는 통로는 인파로 가득했다.

그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거대한 에릭을 바라보며 병사는 어딘지 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얼른 말이나 전하고 와야겠군. 근무 끝나고 술이나 먹자고."

* * *

에릭이 몸담은 아스티아 교단은 너무나도 정직하고 베풀기만 한다.

다른 교단들은 성수를 팔거나 치료비를 받으며 돈을 긁어모으는데, 이놈의 아스티아 교단은 죄다 무상으로 제공한다.

'그래서 찢어지게 가난하지.'

미궁에서 나오는 성물(聖物)도 몇 점 갖추지 못한 가난한 교단.

그렇지만 에릭은 여기서 가능성을 보았다.

'교인이 압도적으로 많아.'

그래서 기존의 무상 치료 서비스를 유지한 채로, 십일조라는 시스템을 적용해 볼 생각을 했다.

교단 본청 차원에서 제재가 이뤄질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스승의 이름을 댄다면 무마하는 것 정도는 가능할 터였다.

리페로제 아스티아는 교황에게 직접 신의 성을 하사받은 일종의 성인 취급이었으니까.

그런 성인의 직선 제자요, 유일한 후인이 에릭이다.

'족보로 따져 보면 신의 증손자쯤 되는 거지.'

믿을 구석은 충분했다.

'뭐, 내키지는 않지만....'

아직 정식으로 교단에 입적하지 않은 에릭이었기에, 수면 위로 자신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하나, 보험으로는 충분했다.

정체를 들키는 것까지 고려한 결과 실보다는 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분명했으니.

모든 준비를 마쳤고 이제 곧 예배 시간이 다가온다.

"거, 형님 십일조라는 게 진짜 신의 이름하에 이뤄지는 일이 맞수?"

먼저, 바람잡이를 준비했다.

"두식아, 내가 누구냐?"

"...거, 이름을 워낙 많이 쓰셔서."

"처음 봤을 때 말이다."

"에릭입쇼."

"이름을 누가 지었냐?"

"리, 리페로제 아스티아... 님이.... 거참, 형님이 성기사였다는 걸 지금 떠올렸수다."

"지금도 성기사다만."

"크흠. 형님이 시키신 대로 준비는 다 해 놨으니, 이 장두식이가 목숨 걸고 바람잡이 해 보겠수다."

박지훈은 에릭의 삶을 받아들이면서 많은 인연을 얻었다.

스승과 르웰이 시작이라면, 장두식은 과정에 만난 인연이다.

챙길 사람이 늘었다는 말이다.

'왜 이딴 게임을 했을까?'

메인스토리가 시작되면 세상 곳곳에 재앙이 일어나고 세계는 점점 황량하게 변한다.

미궁을 공략하여 멸망을 유예하느냐, 실패하여 멸망하느냐.

치킨 게임이 시작된다.

게임 속에서야 긴박함을 주는 장치였지, 현실에서는 목숨을 건 투쟁이 되는 것이다.

"잘해라, 두식아."

"걱정 마슈!"

매주 첫날에는 모험가들이 미궁으로 향하고 매주 마지막 날에는 미궁이 리셋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 행사는 마지막 날인 주일에 시작된다.

'첫 십일조다.'

에릭은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맞이를 준비했다.

가장 먼저 예배당 입구에 거대한 함(函)을 두었다.

"얘들아, 여기 먼저! 깔끔하게!"

고아원의 아이들을 총동원해서 예배당을 닦고 또 닦았다.

'뭘 팔려면 확실하게 해야지.'

일종의 신앙 서비스랄까?

번뜩이는 실내를 보고 나서야 에릭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 형이 이상해...."

"맨날 못 본 척하더니, 우릴 다 불러서 청소나 시키고."

아이들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차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에릭은 평소 아이들에게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특별히, 다음 주 중에 신성력 수업을 해 주마."

그런 에릭이, 선뜻 보상을 내걸었다.

"뭐어?"

"신성력? 우린 사제 하지 말라면서! 가난해진다고."

아이들은 놀라웠다.

"이젠 아니다. 아스티아 교단의 사제는 누구보다 부유해질 거야."

마법에 재능을 가졌거나 오러를 깨우친 아이들은 조금 서운함을 느꼈다.

신성력은 다른 힘과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검술 수련이랑 마도구 체험도 시켜 주마."

에릭이 말을 덧붙였다.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지구에서 박지훈으로 살 때는 시끄럽기만 하다며 싫어했던 아이들인데, 에릭으로 고아원 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애들도 제 한 몸은 지켜야지.'

그렇게 아이들의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있자니.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르웰이 예배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번뜩이는 실내를 바라보며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고, 자신만만해하는 에릭을 보며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앞에 있는 깡패는 에릭 네가 부른 거니? 그런 무식한 놈을 데려다 놓는다고 십일조가 먹힐 거 같아?"

직위로 찍어 누른 에릭의 행동에 그녀는 기분이 언짢았다.

"뭐, 그래도 기왕 한 거 잘됐으면 좋겠네. 훗."

에릭이 비범하다 해도 열다섯이면 아직 어린 나이다. 기분이 나빴지만 그래도 이해했다.

실패를 겪으면 그 또한 깨달음이 되리라.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두고 보시죠."

때마침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대앵-대앵-대앵-대앵.

손님, 아니 신도들이 시간에 맞춰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허어, 신께서 궁하심에도 우리를 보살피셨다니."

"그간 받은 게 있는데 어찌 이런 푼돈을 아끼겠는가?"

평소와 비슷한 수의 사람이 예배당을 찾았다.

번듯한 의복을 차려입은 평민 계층은 망설임 없이 헌금함에 돈을 넣었다.

"저, 저희는...."

가난한 이들은 망설였다.

어딘가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거참, 신께서 말하시길 가난한 자는 헌금을 내지 말라고 하셨수다."

그들은 장두식의 말에 안도하며 예배당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랬는데.

"과연 그럴까요?"

거대한 남자가 희미한 휘광을 흩뿌리며 예배당 입구에 나타났다.

"장두식 형제님께서는 잘못된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정갈한 예복에는 아스티아 신을 의미하는 길쭉한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금빛 물결에 옷자락이 펄럭였다.

그 너머로 환하고 수려한 얼굴이 반짝였다.

마치 성인(聖人)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에릭이 읊조리기를.

"하지만, 신께서는 스스로를 가난하게 여기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지요."

3화 속물 성직자 에릭 (3)

"가난하게 살면서도 마음만은 부유하라는 말은... 너무한 말 아닙니까?"

"신께서는 스스로를 믿고 찾는 자를 구한다고 하셨지요."

"옳소. 말을 참 잘하시는 사제님이시구려."

마치 성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남자의 한마디에 예배당 입구가 소란스러워졌다.

"이 장두식이도 신을 믿고 나서는 건실한 삶을 살게 됐수다. 원래는 국경 밖 페르안 지역의 깡패 새끼였는데, 지금은 버젓한 제국신민이 돼서 상점까지 운영하고 있수."

"허어, 페르안? 그 분쟁 지역에서 살았단 말이요?"

"먹을 게 없어 사람끼리 잡아먹는다던 끔찍한 곳에서...."

"수도 생활 내버리고 거지꼴로 살기 싫으면, 푼돈 아끼지들 마슈."

거기까지 가자, 가난한 자들도 주섬주섬 가진 돈을 꺼내 예배당 입구에 놓인 함 속에 집어넣었다.

신도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내일 굶어도 아스티아교의 무상 치료 혜택과 기도에서 오는 경건한 신성을 느끼고자 그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교육의 부재가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이야.'

에릭은 그 광경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돈이 쌓이는 것은 좋다.

그런데 준비한 것들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말 몇 마디에 지갑을 여는 신도들의 모습이 안쓰러웠을 뿐이다.

'우리 애들은 잘 키워야겠어.'

현대의 중졸만 되어도 이 세계에서는 아주 똑똑한 측에 속할 것은 분명했다.

에릭이 그런 감상에 빠졌을 때.

"자신을 궁하게 여기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

홍해가 갈라지듯이 사람들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생겨난 길 사이로 기사 하나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기사가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면서 묻기를.

"정녕 신께서 그런 가르침을 내려 주셨단 말이냐?"

벗겨진 투구 아래로 긴 적발이 흘러내리고.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고양이 상의 미녀가 나타났다.

"생각하기에 따라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의미군. 참 마음에 드는 말이야. 절대 네놈이 떠올렸을 말은 아니지만...."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 페르나시아, 공작가의 둘째이자 치안청 제2기사단의 부단장이다.

그런 그녀에게 에릭이 묻자니.

"기사로서 방문이십니까?"

귀족으로서의 행차냐.

치안청 기사로서의 행차냐.

그런 물음이었다.

"둘 다로 하지. 네놈은 그걸 원할 것 같으니...."

에리카가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며 그리 말했다.

에릭이 준비한 함에는 표준형 아공간 주머니의 사이즈와 똑 맞아떨어지는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그러라고 만든 것 아니냐?"

에리카가 돈주머니를 넣으며 물었다.

"공작가와 치안청 모두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실 겁니다."

에릭의 입가가 호선을 그리고.

이내 만개한 웃음으로 번졌다.

"맨 앞줄의 상석으로 모시겠습니다."

에릭은 에리카를 안내했다.

그녀의 자리는 예배당의 맨 앞.

신도들의 기도 자리는 작위와 신분을 기준으로 배치된다.

'성공적이군.'

대귀족의 자제이자 현직 기사가 십일조를 냈고 바람잡이로 데려온 중산층 평민들도 지갑을 열었다.

게다가 4구역 끝자락이나 5구역에 사는 가난한 자들까지 돈을 냈으니, 성공적인 시작임은 틀림없었다.

에릭은 만족스럽게 자리에 앉은 신도들을 바라봤다.

"에릭, 선을 넘었어."

등 뒤에서 르웰이 그의 팔꿈치를 꼬집으며 속삭였다.

"가난한 자들까지 돈을 내게 해야겠니?"

에릭도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의 이름하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거기에 예외란 있을 수 없죠."

"뭐, 에릭 네가 진짜 약자들을 등처 먹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언질을 좀 해 주렴. 놀란 건 사실이란다."

아무래도 화난 척이었던 모양이다.

'르웰도 넘어가 줬으니 목적은 다 이뤘군.'

내심 긴장하고 있던 에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르웰이 단상에 올라 경전을 읽는 동안 에릭은 예배실 뒤에 있는 참회실에 들어갔다.

"신께서 가로시길...."

벽 너머로 르웰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녀의 기도를 따라 교회에 신성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검은 용이 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자 신께서...."

우우웅.

에릭은 신의 기적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진짜 목소리가 들릴까?'

신성을 휘감고 능숙하게 다루는 에릭이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신의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신이 있다는 사실도 납득하지 못한 에릭이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은 맞지.'

어느 정도 타협은 했다.

신 비스므리한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개벽, 천지가 갈라지며 어둠을 지워 버렸으니...."

그도 그럴 것이.

보이는 광경이 그랬다.

사제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기도문이 신도들의 간절함과 공명하더니, 예배당이 신성력으로 채워졌다.

이 현상을 대체 '기적' 말고 뭐라 설명해야겠는가?

'게다가 진짜 성직자들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주장하고 말이야.'

우우우웅.

에릭도 손에 신성력을 휘감았다.

기도로 이뤄지는 연한 금빛 물결과는 다르게, 에릭의 것은 순도 높은 황금처럼 보였다.

하지만 에릭에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힘은 힘이야."

에릭은 손에 모은 신성력을 예배당 전체로 퍼트렸다.

키잉- 하는 공명음과 함께 신도들을 감싼 금빛이 더욱 찬란해졌다.

'십일조가 주는 가시적인 효과.'

간절한 기도가 들려오는 경건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부적절한 의도였다.

그 목적이 십일조의 안정적인 정착이었으니까.

하는 짓만 보면 이단이나 다를 게 없었다.

"오오, 거참. 형님 말이 진짜였수? 역시 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구만요."

기도가 끝난 뒤에 장두식이 내보인 반응으로 보아,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릭은 잘 정제한 신성력을 티 나지 않게 퍼트렸다.

장두식이 몰라봤으니, 다른 사람들도 십일조의 효과라고 여길 것은 분명했다.

"호오, 네 말대로구나. 효과가 있어. 확실하군."

그 근거로 기사 에리카 역시 저런 반응을 내보였다.

에리카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에릭이 있는 참회실에 들어섰다.

"르웰 사제님은... 매번 무상 치유를 베푸시는구나."

그녀의 시선이 예배당 입구를 향했다.

"실로 귀감이 될 분임은 분명해."

신도들을 치료해 주는 르웰을 바라보며 에리카가 감탄했다.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삐딱하게 튼 에릭이 묻기를.

"언제까지 귀족 놀음 하실 겁니까? 눈치 보는 거 뻔히 다 아는데."

장두식이 눈치껏 참회실 문을 닫고 그 앞을 막아섰다.

그제야.

"하하하, 미친놈."

거친 웃음을 내보이며, 에리카의 몸이 흐트러졌다.

각 잡힌 기사가 아닌, 웬 왈가닥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참회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책상 위에 얹었다.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는 눈치를 챙겨야지."

"뭐, 귀족에 기사쯤 되면 그렇긴 하죠."

에릭의 말투도 편해졌다.

"십일조란 걸 했으니, 슬슬 에릭 너도 교단에 입적하려는 생각인 거야?"

"최대한 미루다가 할 생각입니다만...."

에릭은 교단 순례자가 내정해 준 후인이다.

그의 정체는 열다섯에 결코 지닐 수 없는 순도 깊은 웅혼한 신성력의 소유자다.

"쯧, 괜한 의무만 잔뜩 짊어질 게 뻔한데.... 차라리 나랑 방랑 기사나 하는 건 어때?"

그런 그가, 아스티아 교단에 입적하는 순간 온갖 의무를 짊어지게 될 것은 뻔했다.

에릭 또한 아는 사실이다.

그는 피할 생각이 없다.

"앞에 마차도 기다리는데,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죠."

"그래. 귀족이란 게 참 귀찮단 말이지."

떠나가는 에리카의 마차를 보며 에릭은 게임 속 NPC 캐릭터를 떠올렸다.

'저게 어떻게 황실 근위대장이 되는 거지?'

* * *

손님들이 떠나가고.

"금화, 은화, 동화 구분하고 백금화나 지폐는 나한테 따로 가져와."

고아원의 아이들이 총동원되어 함에서 나온 돈 정리에 나섰다.

200석의 자리가 있는 르웰의 교회는 인기가 아주 많다.

자리를 가득 채우고도 뒤쪽까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을 정도였다.

미모의 사제가 읊어 주는 경건한 기도.

절로 신실함이 피어나지 않겠나?

"에릭... 교단 본청에 보고는 올려놨는데, 나는 참 걱정이 되네."

쌓여 있는 돈 뭉치를 보며 르웰의 눈이 흔들렸다.

"곧 다들 르웰 사제님을 따라 하려 들 겁니다."

"...나, 나를?"

"사제님이 이 교회의 책임자가 아니십니까?"

"어어?"

르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놈에 돈 귀신 때문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아무래도 르웰이 십일조를 만들었다고 소문이 날 듯싶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업어 키운 에릭의 일이니까 르웰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목표치는 이뤘어?"

"예. 에리카 님이 무려 200만 골드를 후원해 주셨더군요."

에리카가 준 아공간 주머니에는 백금화 20개가 들어 있었다.

'딱 맞게 돈이 모였군.'

시스템이 요구하는 3티어 신성력의 개방 조건은 '2억 골드'였다.

이곳의 돈으로 2억은 한화로 따져 보면, 200억에 달한다.

'진작 십일조부터 했으면, 이억 골은 금방 모았을 텐데....'

그의 스승은 떠나기 전에, 열다섯까지 교회를 직접 건드는 일은 자제하라는 말을 남겼고.

에릭은 이를 지켰다.

이달부로 열다섯을 넘겼으니, 이제 자제할 필요는 없어졌다.

"얘들아, 슬슬 잘까?"

돈의 분류가 얼추 끝날 때쯤, 르웰이 눈치껏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냈다.

"나, 나 꼭! 신성력!"

"에릭 형, 약속 지켜!"

아이들은 곱게 떠나지 않았다.

무뚝뚝한 에릭이 약속을 잊지 않게끔 한마디씩 말을 덧붙이며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갔다.

텅 빈 예배당에서 르웰이 에릭을 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너 또 무슨 약속을 했니?"

에릭은 사업을 하다 일손이 부족할 때면, 고아원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쓰곤 했다.

대가는 약속의 말 한마디였다.

처음의 약속은 제4구역에서 제3구역으로 이사를 시켜 주겠다였고.

두 번째 약속은 각자의 방을 만들어 주겠다였으며.

세 번째 약속은 원하는 진로 방향에 맞는 수업을 받게 해 주겠다는 거였다.

그 모든 약속은 이뤄졌다.

사실 에릭이 고아원에 돈을 안 썼다면 2억 골드는 벌써 모으고도 남았을 것이다.

"돈은 안 들고 시간을 들이는 일입니다."

"뭔데?"

"신성력을 가르치고 검술이나 마도구를 써 보게 해 준다는 약속이요."

르웰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에릭 너는 참 이중적이야."

기다란 금발 사이로 선명한 청록색 눈동자가 에릭을 바라본다.

"누구 밑에서 자랐는데, 당연한 걸 묻습니까?"

우우웅-!

에릭이 신성력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 거센 금빛 물결이 출렁였다.

예배시간에 일어난 기적처럼, 신성력은 공간 전체를 감싸듯이 퍼져 나갔다.

그렇지만 그때와는 느껴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윽, 정말! 미리 말하라니까!"

웅혼한 신성의 힘에 휘청거리는 르웰을 잡아 주며 에릭이 속삭였다.

"빙의자인 저를 거둬 키워 주신 르웰 사제님만큼 이중적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아, 가끔은 후회가 든다니까."

거대한 체구를 낮추며 에릭이 르웰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3티어 안 볼 거예요?"

"...봐, 봐야지!"

에릭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르웰이다.

그가 2티어 신성력을 개방했을 때, 하급 사제였던 르웰은 아스티아 신으로부터 강대한 힘을 내려 받았다.

[아이를 지켜라.]

계시의 음성까지 함께 들었다.

정작 에릭은 사기꾼 말 듣지 말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르웰은 신의 의지를 느꼈다.

슬픈 과거를 딛고 그녀가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에릭이 보여 준 기적이다.

쿠우웅.

쿠우웅.

쿠우웅.

사방을 감싼 에릭의 신성력은 예배당을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시작합니다."

에릭의 말함과 동시에 그의 [인벤토리]가 개방되었다.

아스티아 신을 뜻하는 여섯 날개에 감싸인 십자가 조각상.

그 앞에 압도적인 수의 금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촤르르르륵.

금화의 물결 속에 꿇어 앉은 거대한 체구의 사내.

에릭이 두 손을 모았다.

그러고는 기도했다.

"바칩니다-."

신실함이라곤 하나도 느낄 수 없는 무미건조한 말투.

그러나 일어난 일은 그렇지 않았다.

파스스스스스―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지는 금화.

그리고 그에 비례해 생겨나는 거대한 신성의 물결.

예배당은 숫제 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아아아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르웰이고 그보다 조금 늦게 에릭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휘오오오오.

파도치는 신성의 물결이 회오리치듯 그의 몸으로 밀려 들어왔다.

쿵쿵- 심장이 뛰고 혈액이 순환하며 그의 몸을 한층 더 경건하게 만들었다.

금빛으로 찬란한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진다.

모든 빛의 향연이 끝나 갈 때쯤.

[3티어 신성력이 개방되었습니다.]

에릭의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어떠한 구체적인 수치도 알 수 없었지만, 한층 더 강해진 신성력을 얻었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느껴지는 바가 그랬다.

쿠웅.

응집된 힘을 느끼며 에릭은 생각했다.

'뭐가 바뀌었지?'

1티어 신성력을 얻었을 땐, 몸을 강화할 수 있었다.

2티어를 개방했을 때는 신성력을 이용해 무장을 강화한다거나 타인을 치유하는 행위가 가능해졌다.

그럼 3티어는 뭘까?

새롭게 얻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진다.

에릭이 신성을 두른 주먹을 쥐자.

콰아아앙.

예배당 끄트머리에 있는 의자가 산산이 조각났다.

'이게 되네?'

4화 신의 총애를 받는 자 (1)

"부단장님, 대체 에릭이란 놈이 뭐라고 3구역까지 내려오고 그러십니까?"

제2구역, 그중에서도 고위 귀족들에게만 허용된 로얄로드로 향하는 마차에서 들려온 물음이다.

에리카가 건너편 자리를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으음, 미친놈?"

"아가씨! 장난치지 마시고요!"

"아버지한테 말할 거지?"

에리카와 마주 앉은 여기사는 공작가의 수호 기사이자 전속 시녀인 메리다.

그녀는 치안청 부단장인 에리카의 부관이기까지 했다.

대충 1인 3역, 쓰리잡을 겸임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한 걸 묻습니까! 제가 아가씨 사고 치는 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해 왔는데...."

"궁금해?"

"예, 당연하죠. 얼굴이야 좀 생겼지만.... 이제 열다섯인 어린놈한테 정이 붙은 것도 아니고."

메리의 말에 에리카의 눈매가 활처럼 휘었다.

"크고 웅혼한 기둥을 가진 남자야."

뭐?

이 미친 아가씨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래?

메리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는 공작가의 충직한 시녀요, 에리카를 평생 보필한 수호 기사다.

"기, 기둥요?"

"하하, 신성을 말하는 거야. 놀랐어?"

"하아, 아가씨 말 한마디에 제 심장이 철렁입니다. 어쩜 어릴 때랑 하나도 바뀐 게 없으신지...."

철부지 어린 시절, 에리카는 자신의 검술 재능에 심취해서 갖은 사고를 치고 다녔다.

대체로 다른 귀족가의 자녀에게 대련을 빙자한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는 일들이었다.

에릭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내 처음을 가져갔지."

"예?"

"이건 진짜야."

"예에에?"

에리카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준 인물이 에릭이다.

'저게 어떻게 열다섯이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에리카가 열일곱일 때, 가주인 공작의 지시로 웬 조그마한 고아와 대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옆에는 그 아버지조차 쩔쩔매는 성직자가 하나 있었는데, 얼굴부터 성별에 나이까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직도 아버지는 그자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는다.

아무튼.

그때 대뜸 열일곱인 자신을 일곱 살짜리 꼬마와 대련을 시켰고.

"처참하게 얻어맞았지."

"아, 그. 대련 말씀이신...."

회상에 잠긴 에리카의 얼굴을 보며 메리는 침음했다.

'사람을 그렇게까지 팰 줄은 몰랐었지.'

가주의 지시에 이뤄진 대련은 메리도 알고 있던 일이다.

근데 결과가 이상했다.

깡마른 일곱 살 꼬마한테 맞아, 반병신이 되어 실려 온 에리카를 보며 가문이 발칵 뒤집혔었지.

작은 체구의 무지렁이 천민 고아에게 패배한 에리카는 한동안 실의에 젖어 살았고.

덕분에 미약하게나마 겸손이라는 것을 익혀 냈다.

"아가씨, 그놈이 아직도 그렇게 강합니까? 지금은 돈에 맛이 간 놈처럼 보이기만 하는데...."

"그걸 강하냐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그 이후로 에릭과 손을 섞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에리카는 그의 강함을 확신했다.

'이제는 간격조차 보이질 않아.'

에릭 그놈은 괴물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까먹고 있던 물건이 떠올랐다.

"아, 이걸 전해 주는 걸 까먹었네. 잔소리 좀 듣겠어."

"아공간 주머니요? 후원금은 넉넉히 보내신-"

"아, 이건 달라, 수배범들한테 압수한 물건들이 들어 있거든."

"그건 국고로 환수해야 하는 것들 아닌가요?"

"그 미친놈은 수배범한테 물건 팔고 우리한테 신고해서 포상금 챙기고, 거기다가 자기가 팔았던 물건까지 다시 챙겨 가는 지독한 놈이거든."

'엑!' 말문이 막힌 메리를 보며, 에리카는 동질감을 느꼈다.

역시 네가 봐도 이상하구나?

'대체 그런 놈이 왜 그토록 지고한 신의 총애를 받는 걸까?'

―Ep. 2 신의 총애를 받는 자

쿵-콰직!

"에, 에릭?"

예배당이 박살 나는 소리에 르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쿵-콰직!

"에릭!!!"

웅혼하고 강건한 신성력에 취했던 그녀는 몽롱함이 깨기도 전에 에릭부터 뜯어 말려야 했다.

아스티아 신의 목소리를 들은 뒤라 기도로 마음을 닦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에릭이 주먹을 쥘 때마다 폭발하는 예배당 의자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쿠우웅-! 빠지직. 콰앙-!

점점 심해지는 파괴의 현장에 그녀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짜악-!

"에에리이이익-!!!"

강렬한 등짝 스매시와 함께 르웰이 뒤로 밀려났다.

이놈의 무식한 몸뚱이는 타격감도 없다.

손이 얼얼했다.

그래도.

"아, 르웰 사제님. 정신이 드셨군요."

에릭을 멈춰 세우는 것에는 성공했다.

에릭은 개박살 난 예배당 내부를 둘러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이것 좀 보시죠!"

쿵. 뻑-!

그가 주먹을 쥐니 예배당 벽에 달린 촛대가 반으로 꺾였다.

"어...?"

그냥 평소처럼 신성을 휘둘러 무차별적인 파괴행위를 벌인다고 생각했던 르웰인데, 자세히 보니 달라진 점이 명확하게 보였다.

"뭐, 뭐야?"

주먹을 쥐니까 멀리 있던 촛대가 터졌다고?

그게 뭐야.

신성력을 저런 식으로 활용하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같은 힘을 다루는 자로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르웰에게 세 걸음 성큼 다가온 에릭이 읊조리기를.

"아무래도 3티어 신성력은 원거리 공격 같습니다. 성기사란 게, 딜탱힐이 다 되는 개사기 클래스였나 봐요."

극상의 만족감을 느낀 얼굴이었다.

"대, 대단하네.... 그래도, 예배실은 그만 부숴 줄래?"

르웰이 팔짱을 끼며 말하자, 에릭이 거대한 몸을 숙여 주섬주섬 예배실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신성력을 쓰는 빙의자.'

르웰은 간만에 에릭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는 빙의자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순례자 리페로제의 보증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에릭이 빙의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을 거다.

자신을 빙의자라고 착각하는 정신이 망가진 아이쯤으로 여겼겠지.

'신성력을 쓰는 꼬마의 말을 누가 믿었을까.'

그녀는 에릭의 다섯 살 어린 날을 떠올렸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졌고.

그래서 물었다.

"몸에... 이상은 없어?"

지금이야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커다란 에릭이지만, 어릴 적에는 작고 연약했다.

넘쳐나는 신성력을 주체하지 못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가여운 아이였다.

몸이 터져 죽는 댔었나?

그의 스승 리페로제가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르웰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이미 에릭은 죽은 목숨일 터였다.

그 감사함을 알기에 에릭이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스승님과 몸을 만드는 수련을 마친 뒤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건한 목소리였다.

"다행이야. 리페로제 님도 앞으로 문제는 없을 거라 하셨으니까...."

"걱정 마시죠. 이제는 그만 튼튼해지고 싶을 정도니까요."

쿵-! 쩌억.

에릭이 힘껏 주먹을 쥐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예배실 단상 위에 놓인 경전 지지대가 박살 났다.

마음은 놓이는데....

'대체 저걸 왜 부수는 걸까?'

르웰은 좀 전에 들었던 신의 계시가 떠올랐다.

[그가 뭘 하든 받아들이고 이해하여라. 그게 삶에 이로울 테니.]

역시 신은 옳다.

* * *

며칠간 3티어 신성력을 안정시킨 에릭은 사업을 재개했다.

주일마다 십일조를 거둔다고 기존에 운영하는 사업체들을 놀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필요 재화: 1,000,000,000]

이제 필요한 돈은 천문학적인 단위로 높아졌다.

사실 이쯤 되면 미궁을 공략하면서 성물이나 레전드 아이템을 파밍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미궁 전리품은 면세지.'

에릭은 차명으로 사업체를 운영하되, 세금 같은 건 철저하게 지불해 왔다.

비귀족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세금은 순수익의 50%에 달한다.

귀족은 작위가 높아질수록 세율이 줄어드는 구조로.

흔한 계급제의 폐해였다.

"50%면, 흠...."

제2구역에 만들어 둔 마도구 상점의 매출을 계산해 보니, 약 1천만 골드의 세금을 내야 한다.

기한은 이달 말일까지.

세금을 내기 전에 '3티어 신성력'에 모든 돈을 써 버려서, 여유 자금이 없다.

'성직자, 교단은 면세 사업자긴 한데....'

에릭은 엄연히 말하자면, 미등록 성기사라고 볼 수 있다.

교단 소속인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정식으로 이름을 올리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다.

3티어를 개방한 지금.

망설일 이유는 없어졌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너도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해질 테지. 그 전까지는 몸을 사려야 한다!"

스승의 보증이니 확실할 터였다.

자신 스스로도 어디 나서서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빙의자가 너무 많아졌단 말이지.'

대뜸 이단 심문관을 배정받아 빙의자를 척결하는 임무라도 맡으면 골치가 아파질 터였다.

르웰의 고아원을 벗어나는 것은 에릭이 원치 않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거, 형님, 빙의자로 추정되는 놈들은 닥치는 대로 신고했수다."

심부름을 보내 둔 장두식이 돌아왔다.

그가 20만 골드의 포상금이 담긴 자루를 에릭에게 건네주었다.

슥- 돈의 액수를 눈대중으로 세고는 에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식아, 빙의자가 하루에 열 명씩이나 보이는 게 사실이냐?"

"거참, 오늘 단두대 앞에 줄 서 있던데 못 봤수? 꽁돈이 따로 없수다. 그냥 어리바리한 놈들 잡아다 몇 대 패면 이실직고 하던뎁쇼."

"그러냐? 나도 한번 봐야겠다. 매장 잘 지키고 있어라."

"알겠수다!"

에릭은 2구역 상점가를 벗어나 구역 관문을 통과해 제3구역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미궁 광장이 나타났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에, 그들은 무사히 귀환할지어다."

매주 첫날 미궁이 열리고 둘째 날부터는 미궁 입구가 닫힌다.

셋째 날인 오늘은 미궁에 들어간 모험가들의 무사 귀환을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임이 열린다.

드넓은 광장을 채운 인파들은 각자 믿는 교단의 성직자를 찾아가 기도를 읊조렸다.

미궁의 투박한 지하 계단을 향해 신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서슬 퍼런 단두대가 보였다.

'진짜 줄을 서 있군.'

빙의자란 엄연히 제국 공적이다.

요즘 들어서는 '대륙 공적'이라는 말이 더욱 친숙하게 쓰인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제국과 세 개의 왕국이 존재하고 별개의 세력으로 세 종교가 있다.

그 모든 세력이 악(惡)으로 규정한 것이 바로 '빙의자'였다.

'게임 빙의.'

에릭, 박지훈과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그는 딱히 빙의자에게 연민이나 동정심이나 동질감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미친놈들이 워낙 많아야지.'

빙의자 중에 게임 폐인의 비율이 높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 야만 시대에서 살아온 시간이 적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대다수의 빙의자는 정신병자들이었다.

'흑마법사로 인신 공양에 미궁에서 팀 킬 하고 보상 독점에....'

그 악행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 소위, 꿀빌드라 불리는 것들은 현실에서는 대부분 극악무도한 살인을 동반한다.

비저항인 NPC를 제물로 바쳐 강력한 흑마력을 얻는다거나.

미궁의 보스 공략 직후 모든 동료를 죽이면, 단독 공략 판정이 내려져서 엄청나게 좋은 보상을 얻을 수 있다거나.

'여긴 현실이란 말이지.'

15년을 이 세계에서 살아온 에릭에게 있어서 빙의자들의 행태가 결코 달가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놈들은 진짜 제대로 된 게임 시스템까지 사용한다.

엄연히 배알이 꼴리는 부분도 없잖아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지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이 다가왔다.

에릭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단두대에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게 다 빙의자라고?"

"너무 많은데? 가짜 아냐?"

주변의 반응처럼 에릭이 볼 때도 그 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그 뭐야, 옆집 멜란도 빙의자였잖아. 이제 우리도 어떻게 될 줄 모른다."

줄지어 선 빙의자의 수는 얼추 백을 넘는다.

인구 천만의 제국, 그 수도에서 저 정도 수의 빙의자가 발견된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스릉.

툭.

신성을 빚어 만든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고 목이 잘린 빙의자가 금빛 신성에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믿기 싫어도... 신성력에 불타는 걸 보면, 저것들이 죄다 빙의자란 게 사실이구만."

빙의자란 신성력과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타들어 가는 빙의자를 보며 인파가 소란스러워졌을 때.

"용이 뒤집혔소."

에릭의 뒤로 한 사내가 스치듯이 지나갔다.

남긴 말은 아주 짧았다.

'5구역에 가 봐야겠군.'

에릭은 자세한 연유를 듣기 위해 황도 아르만의 마지막 구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우우웅-!

신성력을 두르자 에릭의 모습이 바뀌었다.

거대한 체구는 그대로였는데, 근육이 더욱 비대해지고 얼굴 근골이 넙데데하게 변했다.

금발의 머리와 동공 또한 흔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아아, 크흠, 흠. 씨이벌."

같은 덩치인데, 느낌이 완벽하게 달라졌다.

욕까지 내뱉으니 뒷골목 암흑가의 보스처럼 보였다.

'오랜만이군.'

준비를 마치고.

에릭은 제5구역 빈민가 안쪽의 음습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성벽에 가려져 햇빛조차 들지 않는 빈민가는 어두웠다. 건물은 죄다 낡았고 창문조차 없는 투박한 통짜 흙으로 지어졌다.

'제국은 돈도 많은 주제에 재개발은 안 하나? 냄새가 뭔....'

제1구역의 황성을 중심으로 점점 지대가 낮아지는 도시 설계 덕분에 제5구역에는 흘러오는 오수로 인한 악취가 진동했다.

에릭은 껄렁이는 걸음걸이로 냄새나는 뒷골목을 헤쳐 나갔다.

건물 사이로 숨어든 범죄자나 구걸을 하는 빈민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모두 에릭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에릭은 가장 후미진 골목의 낡은 나무문 앞에 섰다.

콰앙-!

그러고는 거칠게 문을 발로 찼다.

끼익-쿵.

떨어지는 문 너머로 카드 게임을 하던 조직원들이 보였다.

"어떤 미친 새끼.... 흐음. 큼, 보스 오셨군요."

저마다 칼을 꺼내 들고 순식간에 대응을 하려던 조직원들이 거대한 에릭을 보고는 행동을 멈췄다.

"새끼?"

에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며 묻자니.

"죄, 죄송합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인원들이 자동으로 일렬로 정렬해 고개를 내리깔았다.

뚜벅, 뚜벅, 뚜벅.

"여기 나 말고 문 부수고 들어올 사람이 또 있나?"

방을 돌며 에릭이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고 꿀떡 침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모두가 긴장했다.

"그래서 대체 용이 뭘 뒤집었다고 나를 호출한 거냐?"

"마르코 형님. 기분 푸시죠."

에릭의 물음에, 안쪽 방에서 한 남자가 다리를 질질 끌며 나왔다.

얼굴 반쪽이 화상으로 덮인 중년 사내.

팔에는 칼자국이 가득했다.

"마르코 형님 말씀대로 황실 쪽을 샅샅이 뒤져 봤습니다. 그쪽도 빙의자 수가 늘어 골치를 앓더군요."

에릭은 이곳에서 마르코라 불리며, 뒷골목을 주름잡는 암흑 조직의 보스 행세를 하고 있다.

"그래서?"

에릭의 조직은 표면적으로는 암시장을 운영한다.

그러나 그 실체는 황도 곳곳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단체다.

"황실이 기조를 바꿨답니다."

마저 말하라고 에릭이 턱을 까딱이자.

"빙의자 즉결처형법을 폐지한다더군요."

"뭐어?"

다소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써먹을 게 많다는 걸 알았는지, 내달부로 빙의자는 따로 수용소에 넣어 관리하겠답니다."

열다섯이 지나서 슬슬 교단에 입적을 해야 할 시기인데, 돌아가는 꼴이 아주 우습게 됐다.

"쓸데가 있을 것 같아, 빙의자 한 놈을 하나 잡아 놨는데... 어떻게 형님도 보실랍니까? 이놈 아주 골 때리는 놈이더라고요."

5화 신의 총애를 받는 자 (2)

"이 빙의자 놈이 말하는 게 아주 광대가 따로 없습니다. 껄껄."

웃음바다가 된 지하 감옥에서 에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들이 웃는 이유는 철창에 갇힌 빙의자의 헛소리 때문이었다.

"야, 다시 말해 봐."

"...지, 진짜입니다! 발이 손보다 깨끗합니다!"

"껄껄껄껄!"

"미친놈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네."

에릭이 그 광경에 당황하여, 낄낄대는 부하들을 바라봤다.

"대체 뭘 물었길래 저런 소릴 하는 거냐?"

다소 까칠한 말투였다.

한 조직원이 에릭 앞에 나서며 말하기를.

"그... 빙의자가 알 법한 특이한 얘길 해 보라 했는데."

"그런데?"

"끄흑, 크허허. 발이 손보다 깨끗하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소리였다.

보스 앞에서 표정 관리도 못 하고 다들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잭슨만 묵묵히 고개를 내리깔고 있을 뿐.

"크흐. 사람 손에 무슨 기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있다면서 손이 더 더럽다는데, 크큭, 빙의자란 놈들을 모아다 광대 사업을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빙의자를 잡아다가 그런 얘기나 하고 있는 건가?"

암흑가 보스 마르코의 모습으로, 에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넙데데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흉신악살(凶神惡殺)같이 변했다.

"흐읍. 죄,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유머를 즐길 줄 아는 에릭이지만, 차마 붙잡힌 빙의자를 보며 낄낄거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서는 손이 더 깨끗할지도?'

제5구역 빈민가의 더러운 오물 바닥을 떠올리며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갔는데....

에릭은 애써 잡념을 비워 냈다.

"다 나가 봐."

에릭은 지하 감옥을 텅 비웠다.

남겨진 것은 사로잡힌 빙의자가 전부.

지금부터 이뤄질 일은 간단한 심문이다.

"너 왜 잡혔냐?"

에릭이 묻고.

"...레, 레벨링... 버, 버스를 타려 했는데... 갑자기 납치를...."

빙의자는 답한다.

"레벨링? 버스?"

아주 간단한 문답이기도 했다.

그리고 첫 질문의 답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궁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땅에서 레벨을 올린다.

버스를 탄다.

"...뭘 죽여서 레벨을 올리고 누구한테 버스를 타려한 거냐? 황도에는 몬스터도 나오지 않는데?"

잔뜩 구겨진 얼굴로 묻는데.

"...."

대답이 없더라.

나름 지구 출신이라 그런지 묵비권이라는 걸 행사하는 모양이다.

"헛소리하는 걸로 봐서 착한 놈일 줄 알았더니, 이거 완전 씹새끼였네."

에릭은 잔뜩 화가 났다.

야만스러운 이 세계의 현지인이었다면 당장 잔혹한 고문으로 입을 열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현대인답게.'

야만 중세인들처럼 도구를 쓰거나 그럴 생각은 없다.

에릭은 빙의자의 눈앞에 손바닥을 보였다.

우우우웅.

그의 손에서 금빛 신성이 피어났다.

빙의자가 신성력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소리쳤다.

"...시, 신성? 자, 잠깐! 마, 말할게요!"

에릭은 빙의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법을 안다.

그와는 다르게 다른 빙의자들은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몸에 신성이 닿으면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정신이 마모된다고 하는데....

'고통 내성 스탯도 안 먹히지.'

스승님과의 실험으로 알아낸 사실이다.

빙의자들은 각종 저항력 스탯이나 내성 관련 능력치를 지녔는데, 신성력은 이를 완벽하게 무시한다.

"누가 버스 기사냐?"

금빛 신성을 서서히 들이밀며 에릭이 다시 물었다.

"모, 모르틴이라고, 5구역 검문소에 사는 병사입니다!"

빙의자는 술술 불었다.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놈이 빙의한 지는?"

"이, 이제 일주일 됐습니다."

에릭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냐?"

"어...? 어어? 왜!"

화르륵.

에릭이 손끝에서 성화(聖火)를 피워 냈다.

"자, 잠깐, 다 불었지 않습니까!"

고위 사제나 만들 법한 강건한 신성의 불꽃이었다.

에릭은 그것을 빙의자에게 툭- 얹었다.

"끄아아아악-!!! 이, 씨발 NPC 새끼들이...."

들려오는 비명에도 일말의 망설임은 없었다.

에릭은 감옥 밖을 나섰다.

아무래도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 * *

지하 감옥을 나선 에릭은 방 중앙의 소파에 늘어지게 누웠다.

에릭이 나온 감옥 입구로 비명과 함께 금빛 연기가 흘러나왔고 잭슨은 눈치껏 오러를 퍼트려 기척을 가렸다.

"보스? 기껏 생포한 놈을 왜 태워 버리시는지...."

오른팔 잭슨이 절뚝거리며 에릭의 뒤로 다가갔다.

"저 새끼가 버스 기사다. 잭슨, 감이 다 죽었나 보군."

"예?"

"빙의한 지 일주일 된 허접한 놈이 아니라고."

잭슨이 얼굴에 난 흉터를 긁으며 당황스레 되물었다.

분명 자신이 조사한 바로.

사로잡은 녀석은 빙의한 지 얼마 안 됐을 터였다.

갖은 고문으로 확인한 결과였다.

"...그, 그럼 광대 같은 말은?"

"손보다 발이 더 깨끗하다는 개소리 말인가?"

"예...."

"기만하는 거겠지. 저놈 사로잡힌 경험이 제법 많을 거야. 저런 어수룩한 연기로 경계를 늦추고 뒤통수를 치든가 해서 탈출했겠지."

투박한 갈색으로 변했던 에릭의 눈동자에 금빛 파동이 일었다.

"보이셨습니까?"

잭슨이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마법이란, 심장 혹은 뇌에 만들어진 써클에 마력을 담고 마법진을 이용해 발동되는 힘이다.

오러란, 단전에 쌓인 마나를 정제해 사지근맥에 퍼트려 자신의 몸과 지닌 무구를 강화하는 힘이다.

"노, 놈은 며, 몇 렙이었습니까?"

"28렙. 신성으로 본 결과다."

반면, 신성력은 다르다.

믿음과 신앙으로 쌓아 기적으로 구현되는 힘이 바로 신성력이다.

"허어.... 제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네놈의 실수가 대규모 학살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빙의자 수가 너무 늘어 버렸으니.... 아무래도 우리도 방침을 바꿔야겠다. 애들 좀 모아 와."

잭슨을 보내고 에릭은 조금 전 태워 버린 빙의자의 상태창을 떠올렸다.

[David Smith / Lv.28]

[클래스: 흑마법사]

미국 놈으로 추정되는 빙의자는 레벨이 무려 28이었다.

아직 메인스토리도 시작하지 않은 시기임을 감안하면, 제법 높은 레벨을 가진 것이다.

'얼마나 죽였을지....'

흑마법사는 미궁 사냥에서 효율이 떨어지는 클래스다.

게임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의 흑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흑마법은 염연히 대량 학살에 최적화된 힘이니까.

아무튼.

그런 빙의자의 상태창마저 꿰뚫어 보는 힘이 바로 신성력이다.

믿음을 구체화하는 힘.

물론 힘을 받쳐 줄 몸과 마음의 단련이 필요하고, 거기다가 지고한 믿음까지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력을 쓰는 존재는 그 수가 적다.

'나는 돈으로 얻지만.'

시스템의 보조하에 돈으로 신성력을 얻는 불합리한 존재가 바로 에릭이다.

하나, 힘이 있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어릴 적에는 가진 신성에 비해 몸과 마음이 허약해서, 스승과 르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지금에 와서는 궂은 단련으로 극복했고.

그 결과.

믿음은 없되 압도적인 신성을 지닌 괴물 성기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다 모았습니다."

잭슨이 에릭을 호출했다.

열린 문 밖으로 도열한 조직의 간부들이 보였다.

에릭은 잭슨이 쳐 둔 오러의 막을 가르고 방 밖으로 나섰다.

"허어... 오러가 두부도 아니고."

"끄히히히, 잭슨 네놈 오러가 두부처럼 연한 거겠지."

잭슨이 허망한 듯 중얼거리자, 비쩍 마른 노인이 이를 받아쳤다.

"보스는 대체 정체가 뭐야?"

"잭슨은 소드마스터만큼 강한데?"

흰색 가면을 쓴 똑같은 체형의 두 여자는 에릭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릭은 대답하는 대신 간부들을 훑어보며 질문을 건넸다.

"빙의자 중에 금지어 쓰는 놈들 없었냐?"

에릭의 정보 조직이 우선순위로 찾는 말들이 몇 개 있다.

"금지어가 워낙 많아서...."

"음, 횟수만 따지면 24회야."

NPC 제물작, 빙의자가 아닌 사람을 제물로 바쳐 성취를 이루는 작업.

필드에서 레벨링, 미궁이 아닌 현실에서 레벨을 올리는 작업으로 주로 평민 학살로 이뤄진다.

그 외에도 PVP작, 생명력 흡수작, 버스 등등 수없이 많은 말들이 있었는데....

"최고 등급 금지어를 말하는 거다."

에릭이 가장 눈여겨보는 말은 따로 있다.

"아, NPC 호감작이라는 단어가 1회 발견되었습니다."

"그 외로 제물작, 오프 모임, 팀킬 후 히든피스 찾는 법 등 총 23회의 고위험 금지어를 찾았습니다."

"딴건 됐고. 호감작? 그거 어떤 새끼야?"

"이미 처형된 놈이라 보고는 생략했습니다."

에릭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르코의 모습을 한지라 아주 무서운 얼굴이었다.

"보스 무서워."

"악마 같아."

가면을 쓴 여자들이 고개를 획 돌리며 뒤로 물러섰고.

"끄히히, 악마 맞지. 악마야, 악마."

노인은 센소리로 중얼거리며 정신 나간 듯이 웃었지만.

"아! 제국, 황실은 호감작 정도는 넘어가 줄 수도 있겠군요."

잭슨만큼은 에릭의 의도를 파악했다.

에릭은 기분이 아주 엿 같았다.

"그래, 하필 이 시기에 즉결처형법을 폐지하다니."

게임 속에는 '호감도작'이 가능한 NPC가 존재했다.

호감작이란, NPC에게 대화를 걸고 나타나는 선택지를 골라 호감도 %를 올리는 작업이다.

이걸 100%로 만들면 NPC를 부인으로 삼는다거나, 동료 혹은 시종으로 만들 수 있다. 어떤 캐릭터는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

에릭을 거둬 키워 준 르웰 역시 호감도작이 가능한 NPC였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에릭이 어릴 적.

한 빙의자가 르웰을 노린 적이 있었다.

대뜸 르웰을 찾아온 그놈은 게임 속 대사를 치며 그녀에게 작업을 걸었다.

하나, 이곳은 게임이 아니다.

놈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신성력에 불타 사라졌다.

"이이익! 이 정신병자!"

'르웰이 빙의자를 패다가 신성력이 새어 나왔고 놈은 그대로 신성에 타 죽었었지.'

그 당시에는 빙의자란 존재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점이었고.

박지훈 시절의 그는 NPC의 설정이나 외모 따위에 관심이 없는 부류였다.

그래서 그가 이런 정보 조직을 만들게 된 것이다.

생각을 마친 에릭은 결심했다.

"슬슬 나설 때가 됐군."

마르코의 모습으로 만들어 낸 불법적인 정보 조직의 존재 의의.

그것은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 * *

"흥흥~ 흥."

콧노래를 부르며 르웰은 제3구역에 있는 교회를 바라봤다.

양손에는 2구역 상점가에서 산 미용 용품이 가득했다.

트롤 지방으로 만든 크림에 성수로 만든 샴푸와 1써클 진동 마법진이 새겨진 마사지 기구까지.

에릭이 소개해 준 덕분에 '쟝의 마도구 상점'에서 쉽고 편하게 원하는 것들을 구할 수 있었다.

가격까지 아주 저렴했다.

"참 잘 키웠어."

에릭의 전생과 현생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에릭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한다.

'외모도 너무 잘났단 말이지-.'

어딘가가 조금 망가졌을 뿐이지, 에릭은 참 따듯한 사람이다.

'빙의자들 말로는 츤데레랬나?'

200석의 자리를 갖춘 적당한 크기의 교회와 그 옆에 딸린 거대한 고아원을 바라보며, 르웰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국 최신식 건축법으로 지어진 교회, 그 옆으로 연결된 고아원에는 교실도 있고 1인 1실이라는 아이들의 개인 공간까지 갖춰졌다.

'내가 누구?'

뾰족한 지붕 위로 조각상까지 곁들여 지어진 것이, 귀족들이 사는 제2구역에나 있을 법한 모습이다.

'최신식 교회 오너.'

에릭에게 들었던 빙의자식 농담을 떠올렸다.

이 교회는 르웰의 자부심이자, 유대를 의미하는 장소다.

기분 좋게 교회 정문으로 들어서려던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당황한 듯 멈춰 섰다.

"어?"

거대한 아치 형태의 정문 앞에 마차들이 줄지어 섰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교회 앞에서는 마차에서 내린 자들과 교회를 지키는 경비대가 말다툼을 벌였다.

"병사 따위가! 교단의 상급 사제를 교회에 못 가도록 막는 게 말이 되나? 이게 제국의 법도인가?"

"죄송합니다. 저희는 치안청 제2기사단 소속으로, 지엄한 제국의 명이 아니라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게 네놈의 뜻인 게냐? 아니면, 치안청 전부의 뜻인 게냐?"

르웰이 보건대 상황이 아주 심각해 보였다.

십일조를 할 때부터 예상은 했는데, 벌써부터 교단 본청에서 찾아올 줄이야....

'누구지?'

펄럭-!

마차 위에 꽂힌 깃발에는.

기다란 십자가를 감싼 여섯 날개의 문양이 선명했다.

깃발의 높이로 보건대, 최소 상급 사제 이상이 타고 있는 마차일 것이며.

'주교?'

문 앞에서 꼬장을 부리는 노인이 상급 사제였으니, 마차에 대기 중인 것은 주교일 터였다.

"후우."

르웰은 한숨을 내쉬었다.

표면적으로 십일조란 것을 만들어 낸 사람은 그녀인 바.

책임이란 것을 질 생각이다.

아직 에릭이 날개를 펼 시기는 아니고 그의 스승 리페로제 아스티아 또한 행방불명인 상태다.

'에릭 너는 대체... 어디까지 내다 본 거니?'

이미 오래전부터 에릭은 이런 사태를 준비해 뒀다.

준비까지 다 된 판에 책임 하나 못 질까?

그녀는 지킬 생각이다.

"무슨 일이시죠?"

르웰이 긴 금발을 휘날리며 당당한 걸음걸이로 교회 정문으로 다가갔다.

"호오, 르웰인가? 신성력이 몰라보게 늘었군."

"대체 무슨 수로 신성력을 그렇게까지 늘린 게냐?"

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두 노인이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잠시 뒤, 가장 중앙에 있는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하얀 로브를 두른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잡담은 그만들 하지. 우리는 집행을 하러 오지 않았나?"

그의 말 한마디에 노인들의 기도가 바뀌었다.

눈빛이 예리해졌고 구부정했던 허리가 반듯하게 펴졌다. 노인들은 목청을 가다듬고 의복을 정제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하급 사제 르웰, 너에게는 빙의자와 내통했다는 의혹이 있다."

"십일조에 대한 것부터, 이 불법 증축 된 교회의 모습까지 소상히 해명해야 할 게다."

요컨대.

"지금 이 시간부로 하급 사제 르웰의 지위를 박탈하며, 이단 심문회에 회부한다."

"또한, 고아원의 아이들에게도 같은 혐의가 적용될 것이며, 교단의 허가 없이 증축 및 이전된 교회의 소유권과 권리를 박탈한다."

에릭의 보금자리를 모두 없애 버리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럼에도.

"고작 주교 따위가 그걸 결정하겠다는 건가요?"

르웰은 당당했다.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허리에 찬 명품 가방에서 황금패 하나를 꺼내들며 묻는데.

"...어? 그, 그건. 설마!"

그것은 교단의 주교를 따위로 만드는 물건이었다.

6화 신의 총애를 받는 자 (3)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르웰의 교회에 주교가 찾아온 시점에 에릭에게도 문제가 발생했다.

"거... 형님, 미쳤수?"

전이(轉移)의 기적을 행해 마도구 상점에 나타난 에릭을 보며, 장두식이 잔뜩 성을 냈다.

"형님! 여길 왜 와서!"

에릭은 제5구역에 있는 정보 조직의 본부를 옮기고 일부를 양지화 할 계획이었다. 그 상의를 위해 장두식을 만나러 온 건데....

대뜸 욕을 얻어먹은 것 아닌가?

'벌써 맞을 때가 됐나?'

이런 하극상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내가 그렇게 긴급 통신 마도구로 알림을 보냈는데, 왜 여기로 온 거요?"

우우웅-!

에릭은 덤덤한 표정으로 몸에 두른 신성을 지웠다.

넙데데한 마르코의 얼굴이 사라지고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에릭의 본모습으로 돌아왔다.

"5구역에 있었다. 일단 설명부터 듣지."

"허어, 재수도 없게 5구역에 있었수? 지금 문 앞에 근위대가 와있수다."

"근위대?"

"치안청 2기사단도 함께요."

짧은 시간, 에릭은 생각했다.

'뭐가 문제지?'

귀족 손님과의 트러블.

혹은 판매한 물건에 대한 문제일 것인데....

시스템 상점의 물건에 문제가 있을 리가 없고.

'귀족을 패고 다닌 건 어렸을 때였으니....'

전혀 걸리는 것이 없었다.

하여 물었다.

"두식아, 너 또 누굴 팼냐?"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수? 내 형님의 가르침 덕에 사람같이 살고 있는데...."

장두식은 매장에 설치된 방어 장치를 가동한 상태였다.

"그럼 어째서 방어 마법까지 둘둘 두르고 숨어든 거냐?"

대답을 듣기 전에, 에릭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쾅쾅쾅쾅-!

"황실 모독죄로 마도구 상인 쟝, 네놈을 체포한다!"

"당장 마법을 해제하고 지엄한 황실의 집행에 따르라!"

금빛 갑주를 두른 제국의 황실 근위대가 매장 정문을 때려 부수고 있었다.

"거, 씨벌, 형님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요?"

이번에는 역으로 장두식이 에릭에게 물었다.

에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어?"

장두식의 얼굴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2미터를 훌쩍 넘는 에릭이 장두식을 내려다보더니.

"형님? 말로!"

빠악.

"두식아, 생각 중이니까 큰 소리 내지 마라."

에릭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끅. 인상만 쓰면 나찰이 따로 없수다."

처 맞고도 계속 떠드는 장두식을 내버려 둔 채 에릭은 고민했다.

'황실이 왜?'

뜬금없이 황실과 엮여 버리니 뇌정지가 와 버렸다.

"왜 하필 황실이지?"

몬스터야 죽이면 그만이고 인간 말종 흑마법사도 죽이면 그만인 세상이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빙의자도 마찬가지.

때에 따라서는 귀족도 팰 수 있는 것이 에릭이지만.

'하필 황실이냐.'

황실은 답이 없다.

"형님, 대체 언제까지 그럴-"

콰앙-!

결국 20중첩 방어 마법진이 무너지고 황실 근위대가 들이닥쳤다.

"다들 움직이지 마라!"

순식간에 마도구 상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벽에 진열된 마도구나 스크롤 따위가 파직- 하고 마력을 흩뿌렸다.

황실 근위대가 두른 항마(降魔) 속성의 아이템 때문이다.

"형님! 내가 몸으로 막겠수다! 그 순간이동의 기적으로 도망치슈!"

장두식은 에릭을 창고로 밀어 넣으며 문을 막아섰다.

에릭은 장두식을 바라봤다.

각오가 섰다.

'조금 이르지만... 어쩔 수 없나?'

쓰기 싫지만 아주 좋은 패를 떠올렸다.

"두식아."

"뭔 수가 있수?"

영민한 에릭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말해 주리라.

그리 생각했던 장두식인데.

"에스페로자 루펠 아르만, 황제의 이름이다."

"거... 황실 모독죄가 누명이 아닌 거요?"

들려온 말이 이상했다.

장두식의 눈빛이 흔들렸다.

"장두식, 네놈 이름이다."

"미친 거 아니요? 왜, 왜! 내 이름을 황제 폐하의 이름이랑 같이 놓고 그러는 건지...."

에릭의 두 눈이 형형했다.

마치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그래서 장두식은 말끝을 흐리고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이 뭐냐?"

"그... 처음 봤을 땐 에릭이었고 순례를 돌 땐 마르코였고 여기서는 마도구 상인 쟝 아니요?"

황군이 들이닥친 상황에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이상한 거 없냐?"

"모, 모르겠수다."

콰앙-! 쾅-!

"끅-!"

문을 막아선 장두식의 몸이 들썩거렸다.

에릭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상식적으로 에스페로자같이 간지 나는 이름을 가진 황제가 있는 나라에, 장씨 성을 가진 두식이가 있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

"...진짜 미쳤수?"

장두식은 고개를 갸웃했다.

에릭이 종종 미친 소리를 하긴 했는데, 황제를 가지고 저럴 정도는 아니었다.

키이잉―

"두식아, 봐라."

공명음과 함께 에릭의 손에 금빛 물결이 일어났다.

마력도 아니고 오러도 아니다.

순수한 황금빛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형님이 성기산데, 신성력은 당연한 거지. 뭘 어쨌다는 거요?"

천상에 계신 신의 힘.

지고한 믿음으로 위업을 쌓아야만 발휘된다는 총애의 증거.

그것이 바로 신성력이다.

"네 눈에 신성을 씌워 주마."

에릭이 찬란한 금빛 구체를 장두식의 눈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허어."

장두식은 말문이 막혔다.

"이, 이게 무슨...."

알 수 없는 문자열의 나열이 어지러이 떠다녔다.

장두식의 눈에는 수많은 데이터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판이 보였다.

뭔가 너덜너덜한 느낌이었다.

"그.... 형님, 그, 뭐야. 허어... 빙의자였수?"

"그래."

장두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어째 신묘한 지식이 많다 싶었수다."

"너는 안 이상하냐?"

"거, 뭐. 열 살도 안 된 꼬마가 분쟁 지대 전쟁터를 전전할 때부터 이상했수다. 지금이 열다섯 아니요? 근데 빙의자가 뭔 대수라고...."

장두식은 에릭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작고 마른 꼬마가 분쟁 지대의 흑마법사들을 패 죽이고 다녔다.

그것보다야, 빙의자 정도는 이상한 일도 아니지.

"두식아, 너는 내가 왜 여기서 살아가는 줄 아냐?"

"...거, 뭐야. 돈 벌려고 아니요?"

"너 같은 새끼가 있어서 그렇다. 내가 빙의자라는데도 별 감흥이 없는...."

* * *

콰앙-!

결국 마법진이 무너지고 황군이 들이닥쳤다.

"저항이 거센 놈들이다."

"팔다리는 썰어야겠군."

잔뜩 성이 난 근위대들이 황금갑주를 내세우며 칼을 들어 올리자.

"투항."

에릭이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짧은 두 글자 말을 읊조렸다.

"...나, 나도 투항하겠수다."

장두식도 그를 따라했다.

"허어... 갑자기 투항?"

황실 근위대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들의 몸에 강력한 구속구를 둘둘 둘렀다.

그러고도 모자라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누가 같이 왔나?'

숨만 잘못 쉬어도 목이 뎅강 잘릴 판이었다.

"황자 전하, 준비되었습니다."

어째 단순 체포치고는 행차가 거창하더라니.

딸려 온 놈이 있었다,

"저, 저 새끼야! 저 울퉁불퉁한 반삭 대가리!"

웬 배 나온 뚱뚱보가 몸을 뒤뚱이며 다가오더니, 대뜸 장두식을 가리켰다.

"거, 뭐야? 저 새끼 마력 파장이 그때 그 빙의자 놈 같은데.... 어? 저, 저거 뻘건 눈 아니요? 은발에 붉은 눈? 씨이벌-."

장두식이 팼다던 빙의자.

그놈이 황자 놈인 모양이다.

'은발에 적안....'

장두식이 인식 저해 마법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 때 눈여겨봤어야 했는데....

인식 저해 마도구도 아마, 황실 마탑에서 만든 물건이겠지.

'어째 수사가 오래 걸린다더니....'

아무튼.

요점은 이거다.

위장하고 찾아온 빙의자를 개 패듯이 패고 쫓아냈더니.

하필 그 정체가 황제의 개망나니 막내아들이었다.

"혀, 형님 차라리 나를 버리슈!"

다급한 장두식과 달리 에릭은 고요했다.

"두식아, 걱정 마라."

자신을 드러낼 마음을 먹었기에 나오는 여유였다.

에릭의 두 눈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적발을 휘날리며 기사 에리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근위대와 황자 사이에 서서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에리카 경, 아무리 그대가 재상 각하의 장녀여도 엄연히 황실근위대를 지원 나온 입장이 아닌가? 황자 전하도 계신데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이오!"

"대, 대화로 해결해야 합니다!"

에리카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똑바르게 에릭을 향해 있었다.

비릿하게 뒤틀린 입가.

그리고 꿈틀거리는 승모근.

'웃어?'

어릴 적 그녀를 반병신으로 만들었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말려야 했는데....

"씨발, 장난해?"

3황자가 입을 열었다.

뚝- 하고 세상이 멈춘 듯이 근위대원들이 정지했다.

"개새끼들이 황자 말이 우습지? 웬 잡것이 앞을 막고 지랄이야! 재상 딸? 난 아빠가 황제야!"

"전하, 제가 재상 각하께 항의하겠습니다. 부디 진정...."

"진정? 지인저엉? 내가 친히 암행을 나섰다가 웬 깡패놈한테 얻어맞았다는데, 장난해?"

개망나니 삼황자.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알려진 삼황자의 행실 그대로였다.

'병신 그 자체군.'

상식적으로 그래.

황족이 빙의자인데, 어떻게 안 들켜?

'저게 21세기 문명인이 빙의한 모습이라고?'

근데, 저놈의 행실을 보아하니 안 들킬 만했다.

"1호!"

"네, 네엣!"

"가서 저년의 뺨을 때려라."

"...."

황실의 수치 삼황자.

그 별명다운 모습이었다.

시녀한테 한다는 짓이....

'빙의하기 전후에 차이가 없어.'

원래부터가 지엄한 황실의 무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그럼에도 놈이 살아 있는 이유가 있다.

'뒷배가 알만정교회란 말이지.'

알만정교회는 대륙을 삼분하는 세 종교 중 하나다.

에릭이 속한 아스티아 교단과는 대립 관계에 있는 상태고.

어쨌든, 삼황자의 어머니가 알만정교회 대목사(大牧師)의 딸이다.

'흠... 황제의 막내아들이며, 알만교 대목사 딸의 아들.'

나는 어떤가?

리페로제 아스티아의 직선 제자.

'즉, 아스티아 신의 증손자.'

삼황자는 황제의 아들이지만, 모계(母系) 쪽이 애매한 놈이다.

종교적으로 따져 보면 직계 자손이 더 세지 않나?

"에릭, 네놈이 세상으로 나가, 나의 후계자임을 알릴 때만큼은 화려했으면 좋겠구나."

마침 스승의 말도 있었겠다.

조금 화려하게 저지를 생각이 들었다.

'황자까지 빙의자인 마당에.'

빙의자는 몸을 사린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쯤 되니 확실해졌다.

"1호? 또 징벌의 시간이 필요한가?"

망설이는 시녀를 향해 삼황자가 뺨을 내리치려던 순간.

쿠웅.

묵직한 진동이 일었다.

"뭐, 뭐냐! 검이 왜? 네놈 뭘...."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황실 근위대였다.

목에 칼을 대고 있었는데, 절로 칼날이 밀려나는 게 아닌가?

쿠웅.

또 진동이 일었다.

에릭의 피부 위로 희미한 금빛 신성이 피어났다.

쨍! 쩌적.

에릭의 목에 닿았던 검날에 금이 갔다.

"다들 황자 전하를 보호해라! 사술을 쓰는 놈...."

황자의 옆에서 소리치려던 근위대장이 말끝을 흐렸다.

사술?

쿠웅.

세 번째 진동이 끝나고.

에릭의 몸을 찬란한 금빛 휘광이 감쌌다.

신의 총애요, 거룩한 힘이다.

저게 사술?

'성기사....'

근위대장이 에릭의 정체를 파악했을 때.

"흐이이익-! 흐으.... 그, 근위대장! 저, 저 역도를 당, 다, 당장 죽여라!"

삼황자가 뒤뚱거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 * *

2구역 상점가 한복판에 황실을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였다.

"삼황자가 왜 상점가를 오고 난리야...."

마법 스크롤 납품업자 조나단은 머리를 조아렸다.

"저, 저 망종이 또 누굴 조지려고...."

"듣겠다, 조나단 입 닥치고 있어."

삼황자의 악행은 유명했다.

놈은 종종 평민으로 위장해서 행패를 부리곤 했으니까.

"저, 저거 쟝의 마도구 상점 아니냐?"

만일 여기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나면, 3황자는 '암행'이었다 주장하며 황실 근위대를 불러와 끔찍한 처벌을 내리곤 했는데.

"미친, 저기서 우리한테 대 주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

하필 2구역 상점가의 유명인, 쟝이 그 타깃이었다.

"저거, 쟝 옆에는 사제님 아닌가? 르웰님 교회에 있는 덩치 큰 분."

반삭 머리를 한 장두식의 옆에, 덩치 큰 사내가 보였다.

키가 압도적으로 커서 모두가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오, 맞네. 맞어. 십일조였나? 참 좋은 말씀을 해 주셨었지. 젠장, 하필... 삼황자한테 걸려서."

조나단은 일순 반가움이 일었으나, 앞으로 일어날 일이 떠올라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르웰 사제님이 슬퍼하시겠구나...."

제3구역에 있는 교회의 르웰 사제님이 아끼는 아이.

에릭은 그 정도 인식이었다.

"공개 처형을 하려나...."

목에 칼이 닿은 채 끌려가는 두 사람을 보고, 조나단이 한탄했다.

그때였다.

쿠웅-!

쿠웅-!

쿠웅-!

"어?"

거대한 울림이 들려오더니 사방에서 금빛 섬광이 번쩍거렸다.

익숙한 신성의 감각에 조나단은 고개를 들었다.

"흐어어.... 씨, 씨발! 빠, 빨리 죽이라고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것은.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제국의 삼황자였다.

'사, 삼황자? 젠장, 하필 내 쪽으로....'

조나단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려던 때였다.

쿠구구구구구궁-!!!

대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금빛 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웅대한 황금빛이 사방으로 신성력을 흩뿌렸고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기쁨을 선사했다.

"아아...."

"아스티아 신이시여."

따스함과 안정감은 아스티아 교단의 특징이다.

그 힘에 취해 다들 고개를 올려 거대한 금빛 기둥을 바라봤다.

조나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런 거대한 신성은 주교님 축복 기도에서나 봤는데...."

기둥의 빛은 순식간에 응집되어 한 사내에게 모여들었다.

"저, 저거.... 저분? 서, 설마 성기사?"

거대한 몸으로 신성력을 두른 에릭의 모습은 마치 성기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에이, 설마. 성기사는 아니겠지. 성기사가 왜 황실 근위대랑 싸워?"

보통 황족의 행차에 이런 잡담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에리카 부단장님은 벌써 도망가셨고... 우리는 어쩌죠?"

그러나 근위대와 치안청의 통제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치안청 제2기사단 역시 거대한 신성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황실근위대장도 그냥 서 있는데요? 정신이 나간 것 같습니다만."

"그냥 지켜보고 어떻게 되든, 사후 처리를...."

기사단의 단장은 나름 대책을 내세우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저, 저건 또 뭐냐?"

그 강건한 신성의 주인이 하늘 높이 손을 치켜올렸는데....

그대로 삼황자가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게 아닌가?

모두의 이목이 그곳으로 쏠렸다.

"삼황자...?"

"축복을 내려 주는 건가?"

보이는 모습은 신성으로 축복을 받는 느낌이었는데, 어째 당사자의 말은 달랐다.

"흐어... 으어어-! 그, 근위대장! 나, 나를 지켜라아-! 나, 나를 시해하려는! 여, 역도-"

뒤룩뒤룩 살이 오른 뚱뚱보가 하늘 높이 떠올라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삼황자와 족히 백여 미터는 떨어진 곳에 웅혼한 신성의 주인이 서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아스티아 님께서 말하시길. 성화(聖火)는 부정한 것들을 태운다 하셨다."

그 말에 모두가 당황했다.

"응?"

저거 빙의자를 처형할 때 하는 말 아닌가?

제3구역 처형장에서 단두대가 내려오기 전에 들려오는 말이었다.

익숙한 말이었는데, 어째 그 대상이 이상했다.

"끄아아악-! 근위대장!!! 끄악!"

게다가 성화에 휩싸여 희뿌연 연기를 내뿜는 삼황자의 모습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어어? 서, 성화가! 저, 저거 단두대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서, 설마 황자님이...?"

황자가 불타는 모습은 단두대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빙의자의 모습과도 같았다.

단지 차이점은 목이 잘리기도 전에 타오르고 있다는 것 정도겠지.

"끄아아아아... 씨이바아알-! 개, 개 같은 NPC-."

삼황자의 몸에서 백색 연기가 피어났고, 그는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 댔다.

그 소리에 인상을 찌푸린 에릭이 하늘 높이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주먹을 쥐었다.

콰직-!

"끄아아아악-!!!"

허공에서 신성력에 짓뭉개진 삼황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타닥, 타다다닥.

찌부러진 삼황자의 몸이 금빛 성화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흩어지는 핏방울마저 신성력에 증발하고.

더 이상의 비명은 없었다.

성화가 남긴 잿가루만이 흩어져 하늘 위로 둥둥 떠다녔다.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7화 신의 총애를 받는 자 (4)

"흥흥~."

교회에 찾아온 '주교 따위'를 가볍게 처단한 르웰은 기분 좋게 에릭을 만나러 상점가로 향했다.

'어떻게 에릭이 재상의 보은패를 가지고 있지?'

에릭이 르웰에게 맡긴 물건은, 제국 황실에서 제공하는 보은패(報恩牌)로, 뒷면에는 르웰의 고아원 및 교회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과 십일조에 대한 지지 성명이 새겨져 있었다.

날짜는 무려 5년 전.

주교가 트집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5년 전이면, 빙의자가 표면으로 드러나기도 전이니까.

'쇼핑 좀 하다 보면, 찾아오겠지.'

늘 그렇듯이, 그녀가 물건을 고르다 돈이 모자르면 에릭이 찾아올 터였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제2구역의 상점가 한복판에 거대한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데, 어째 성벽에서 매일 보던 그림이었다.

붉은 대지와 검은 하늘 그리고 은빛 달.

'황실?'

게다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린 채 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다.

습관적으로 그녀는 익숙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쟝의 마도구 상점]

중무장한 기사단이 르웰의 단골 가게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일 있나?'

일단 눈치껏 르웰도 자세를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으응...?"

기사단이 매장 앞에 선 거대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더라고.

르웰이 고개를 갸웃하자니.

"르, 르웰 사제님! 큰일입니다! 지, 지금-!"

귀찮은 여자가 나타났다.

에릭에게 집적거리는 공작가의 둘째 딸, 에리카였다.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지만, 르웰은 본심을 숨기며 인사를 하려 했다.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지, 지금 에릭이 삼황자를 패 죽이려 합니다!"

그랬는데 대뜸 미친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에, 에릭이 누굴 패요?"

"삼황자요!"

삼황자가 누군가?

제국의 수치요, 제국 신민들을 괴롭게 하는 악종이었다.

그렇다고 황족을 패?

"에릭이?"

그럴싸한 말이었다.

르웰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구궁-!!!

숫제 대지를 뒤흔들며 웅혼한 신성력의 기둥이 솟구치는 게 아닌가?

"흐익-! 저, 저는 먼저 가 보겠-"

에리카는 트라우마적인 반응을 내보이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고.

남겨진 르웰은 멍하니 에릭의 신성력을 바라봤다.

"아아... 이, 이 따스함! 아스티아 님의 힘이로구나."

"...화, 황자님께 축복을 내리는 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은 신성에 취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르웰의 눈은 다른 곳을 향했다.

"막아-!"

"아니, 죽여!"

"저, 저 괴물!!"

황실 근위대에게 둘러싸여 공격받고 있는 에릭이었다.

신성으로 기척을 가려 둔 탓에, 일반인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황실 근위대랑 싸운다고?'

그가 강하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나, 황실 근위대가 상대라는 것은 또 다른 말이었다.

"에, 에릭!"

르웰은 놀랐다.

"어?"

그러다가 의아해졌고.

"에릭?"

의연해졌다.

'힘을 드러내?'

그를 향해 검을 내리치는 자들은 누군가?

황금 갑주를 입은 자들은 제국 황실 근위대요, 그 옆을 보조하는 것은 치안청의 기사단이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에릭을 죽이려 드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에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티잉-! 채앵! 팅!

칼날은 에릭을 감싼 금빛에 모조리 튕겨 나갔다.

르웰은 안도하며 주변을 살폈다.

'저건 누구지?'

웬 뚱뚱한 놈이 바닥에 쓰러져 뒷걸음질을 쳤다.

"흐아아아-! 제, 제발 오지 마!"

우우웅-! 쿠웅.

묵직한 신성의 울림이 느껴졌다.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이구나.'

르웰은 그 힘의 정체를 알아챘다.

'에릭, 대체 뭘 하려는 거니?'

그때.

"끄아아악-! 근위대장!!! 끄악!"

뒤룩뒤룩 살이 오른 뚱뚱보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달빛처럼 빛나는 은발과 새빨간 눈동자가 인상 깊은....

'엥? 진짜 황자네.'

눈색과 머리카락 그리고 체형으로, 익히 소문난 개망나니 삼황자임을 알아봤다.

말려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멀찍이서 에릭이 묵직한 중저음으로 읊조리기를.

"나의 아버지, 아스티아 님께서 말하시길. 성화(聖火)는 부정한 것들을 태운다 하셨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삼황자의 몸에서 불길이 일고.

"끄아아아아... 씨이바아알-! 개, 개 같은 NPC-."

에릭이 주먹을 쥐었다.

콰직-!

"끄아아아악-!!!"

허공에서 신성력에 짓뭉개진 삼황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찌부러진 삼황자의 몸이 금빛 성화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에릭... 대체 무슨 짓을?'

오, 맙소사.

르웰은 뒷목을 부여잡은 채 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뭘 하든 받아들이고 이해하여라. 그게 삶에 이로울 테니.]

'천상에 계신 아버지께 묻나니.'

대체 삼황자를 쥐어짜서 죽인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 * *

"...형님? 대책이 황실 감옥에 갇히는 거였수?"

황궁의 깊은 지하 감옥에서 장두식이 물었다.

"두식아, 기다려라."

"벌써 열흘이나 지났지 않았소!!"

"아직까지 목이 안 잘렸으니, 잘될 거다."

삼황자를 불태운 뒤, 에릭은 정신이 빠진 근위대장을 불러 자신을 체포하라 명했다.

그러고는 곧장 황실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허, 거참. 열흘 내내, 계속 인상 쓰고 눈을 감고만 있으니.... 내 뭐라 할 말이 없수다."

"두식아, 걱정 좀 그만해라."

에릭은 차분한 마음으로 심신을 수양하는 중이었다.

제국의 삼황자고 뭐고.

미친 흑마법사 클래스를 잡아 죽였는데,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 처지가 너무 화가 났다.

'아직 빙의자 즉결처형법이 폐지되기 전인데 말이야.'

아, 황족은 예외인가?

그들은 법 위에 있는 존재다.

내부가 빙의자여도 그 육체를 멋대로 없애 버렸으니.

"슬슬 때가 됐는데."

"뭔 때 말이요? 처형식 말하는 거면...."

어찌 됐건 잘 풀릴 거라는 확신이 있는 에릭이었다.

예상대로였다.

"면회다."

"다?"

"며, 면회입니다...."

"내가 누구라 했지?"

"리페로제 아스티아 님의 후계자이자 직선 제자라 하셨습니다!"

"근데 왜 반말을?"

"죄, 죄송합니다!"

에릭은 감옥에서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거대한 신성을 내보인 덕에 엄청난 수의 시민들에게 목격되었고, 마침 르웰을 찾았던 교단의 주교가 에릭의 기척을 눈치챘다.

'늙은이들이 잘해 준 모양이군.'

면회를 온 르웰에게 듣기로는 교단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사후 처리를 잘해 준 모양이었다.

"두식아, 봐라. 내 말하지 않았-."

툭.

갑자기 옆에서 투덜거리던 장두식이 바닥에 쓰러졌다.

복도를 지키던 병사는 흐릿해진 눈으로 벽을 바라보고 섰다.

'뭐지?'

정적이 흐르는 철창 앞 복도에서 정돈된 발소리가 들려온다.

"허어.... 리페로제한테 이런 후계자가 있었을 줄이야."

흐릿한 인상의 사내가 에릭이 갇힌 뇌옥 앞에 다가섰다.

"아스티아 님이시여.... 저게 진정 열다섯이란 말입니까?"

희미한 시선이 에릭을 훑고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어찌 저런 막대한 신성을!"

에릭은 의복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발에 감긴 아다만티움 수갑이 부러졌다.

에릭이 정중하게 기다란 십자가 형태의 성호를 그리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에릭이 볼 때, 그는 늙었으면서도 젊었고.

허리가 구부정하면서도 곧았다.

신성 또한 아주 강렬했으나 없다시피 했다.

모순적이었다.

"교황이라 한 적은 없거늘...."

"제 눈을 뛰어넘는 신성의 주인이 교황 성하 말고 또 있겠습니까?"

"그으래? 그래, 그렇지. 이래야 리페로제의 제자지!"

에릭은 그 모순을 간파하려고 눈에 신성을 담았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회복하였습니다.]

실로 간만에 신성력이 바닥났다.

에릭은 [인벤토리]에 담긴 돈을 사용했다. 회복된 신성을 계속해서 두 눈에 눌러 담았다.

교황은 진득하게 에릭이 하는 짓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탄식했다.

"허어.... 너 또한 괴물이로구나. 아니지, 열다섯이니 너는 리페로제보다 더한 괴물이라고 봐야겠어."

에릭은 흐릿하게나마 교황의 본모습을 봤다.

'아이?'

신의 힘이란 게.

참으로 모호했다.

"가르침을 하나 주자면, 힘의 양보다는 방향성이 중요한 게야. 부수고 죽이는 것만이 신성이 아니다. 뭐, 리페로제가 그런 걸 가르쳤을 리는 없을 터이지만...."

에릭은 교황의 말뜻을 이해했다.

'십억을 모아서 4티어를 올리라는 말이군.'

아득했다.

그렇지만 그리 멀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

'교황이 찾아왔으니까.'

교단의 정점이 왔다는 것은 그만한 의미를 지녔다.

"교황으로서 묻겠노라."

진중한 중년 사내의 모습으로 교황(敎皇)이 입을 열었다.

아이 같은 반말도.

노인 같은 모습도.

모두 사라졌다.

"리페로제 아스티아의 직선 제자, 그리고 순례자의 증표를 지녔으니...."

"흐음."

"으으으음."

진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교황이 우유부단하게 고개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뭐냐...?'

그의 스승도 그렇듯이, 교황도 어딘가 나사가 빠진 모양이었다.

"어렵구나. 배분으로 따지면 에릭 너는 대주교와 맞먹는 위치가 된다."

우유부단할 만했군.

에릭은 곧바로 납득했다.

'열다섯짜리가 대주교랑 맞먹어?'

표정 관리는 하되 마음속으로는 기꺼이 웃었다.

어찌 즐겁지 않겠나?

'십일조가 복사되겠어.'

제국과 제국을 둘러싼 세 개의 왕국, 나아가 무국적 분쟁 지대에도 교회는 존재한다.

대한민국만큼은 아니어도, 이 세계에도 제법 교회가 많이 있다.

대주교에 준하는 직위면, 멋대로 교단의 시스템을 고쳐 나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돈을 모은다면....

'4티어도 금방 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스티아 교단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순례자의 지위는 이양할 수 없겠구나."

찬물이 끼얹어졌다.

"저는 스승님께 모든 자격을 인정받았습니다."

"아아, 그렇지.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야. 그렇지만 너는 아니다."

대체 왜?

"엄연히, 너는 교단에 입적조차 하지 않은 외인이 아니더냐?"

교단이란 직위에 따른 체계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도 신의 이름하에.

윗사람이 후임으로 정했다 치더라도, 곧바로 높은 곳에 오를 수는 없는 법.

"요는, 실적을 쌓으라는 말이다. 나와 리페로제가 허가했더라도 너는 너무 어리다. 고작 열다섯이 아니더냐?"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위에서 내정해 준 열다섯 꼬마가 대뜸 순례자의 지위를 이어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낙하산 취급은 당연한 거고.

'내부에서 들고일어나겠지.'

교단이 부패했다며 난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스티아 교단은 청렴결백을 내세운 종교니까.

돈만 주면 사제가 되는 여타 종교와는 다르다.

"성기사 시험부터 하나씩 단계를 쌓다 보면....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게냐?"

에릭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고 교황이 말을 멈추었다.

"먼저 지위를 인정받고, 난이도가 높은 방식으로 증명을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불허! 엄연히 절차가 있거늘. 성기사의 자격을 인정받고 미궁에 들어가 실적을 쌓아라. 그래야 순례자의 지위도 논할 수 있는 게다."

순례자란, 교단의 굴레를 벗어나 자발적인 집행이 가능한 존재다.

세상을 멋대로 떠돌며, 자유롭게 교단의 힘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일종의 전략 병기다.

'대외적으로는 대륙의 평화지만.'

순례자는 아스티아 교단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지위로.

주목적은.

"성물을 찾아오겠습니다."

"...서, 성물?"

성물의 확보다.

"저희 교단의 가장 큰 문제가 성물의 부재 아닙니까?"

성기사 시험은 제국 밖 오지에 지어진 성소에서 이뤄진다.

최소 오 년은 걸리는 일로, 구원과 학살에 대한 과업을 증명하는 기간이다.

'오 년은 너무 길지.'

에릭은 결코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대안은 미궁 공략과 성물 확보.

이 정도 업적이면, 성기사 시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미궁도 게임이랑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에릭은 자신이 넘쳤다.

"성물이라, 성물. 리페로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게야...."

교황이 고민하자니.

"제 지위를 먼저 인정해 주신다면, 한 달 내로 성물을 한 점 가져오겠습니다."

에릭이 쐐기를 박았다.

"허! 한 달?"

교황은 말문이 막혔다.

열다섯짜리 에릭이 내보이는 패기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힘에 취해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그 리페로제가 첫 성물을 찾는 데, 반년이 넘게 걸렸다.

고작 열다섯인 에릭이 한 달?

믿을 수 없는 말이었는데.

"아버지께 맹세하겠습니다."

에릭 저놈이 아스티아 신을 거는 게 아닌가?

교황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 아버지는 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명심하거라."

8화 신의 총애를 받는 자 (5)

"아버지를 걸었으니, 교황으로서 거부할 수 없겠구나."

결국 에릭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에릭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에릭이 교황을 보았듯이 교황 또한 에릭을 보았다.

'신성력 양이, 어지간한 주교는 찜 쪄 먹겠구나.'

거대한 몸에 담긴 신성(神聖).

압도적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심지어 차오르는 속도도 말도 안 되게 빨랐다.

저게 열다섯?

다른 교단이었으면, 교황이 직접 데려다가 후임으로 키웠을 수준이다.

심지어 에릭에게는 순례자 리페로제라는 믿음직한 보증인까지 있는 셈 아닌가?

'성물을 얻어 온다라.'

교황은 에릭에게 순례자의 지위를 이양해 주기로 정했다.

오 년 전 리페로제가 사라질 때, 교단의 성물 몇 점이 없어졌으니.

에릭의 말이 참이라면 손해 볼 일은 없을 터였다.

"이 시간부로 리페로제의 순례자 지위는 에릭 네게로 넘어갔다. 이를 교황의 이름으로 보증하마."

"교황 성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에릭이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자, 교황이 철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에릭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툭- 하고 가볍게 손을 얹었는데, 에릭의 눈가에 아스티아 교단의 상징이 새겨졌다.

'이게 순례자의 징표구나.'

우측 눈의 아래쪽, 광대 부근에 생겨난 여섯 날개에 감싸인 기다란 십자가가 그 존재감을 발했다.

'신성을 담아?'

쿠웅.

머리에 얹어진 교황의 손을 타고 신성력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단의 심벌은 교황의 신성력을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허어."

교황은 짧게 탄식했다.

'반이나....'

순례자의 징표는 교황의 신성력으로 증명의 표식을 드러내는 구조다.

그런데 에릭의 징표는 달랐다.

'이 또한 아버지의 뜻이옵니까?'

자신의 신성력을 무려 반이나 먹어 치운 게걸스러운 에릭의 표식을 보며 교황은 나직이 눈을 감았다.

"오오.... 역시 교황 성하십니다."

에릭은 순수하게 기뻐했다.

단순한 표식이 아니다.

교황의 초고농도 신성력을 담은 일종의 신성력 배터리와도 다름없었다.

'이걸 쓸 방법은 따로 연구를 해 봐야겠어.'

돈으로 산 에릭 자신의 신성력과는 느낌이 달랐다.

무거운 것이 영 뜻대로 움직이지 않더라고.

'끄응.... 신성력에 이런 무게감이 말이 되나?'

낑낑대는 에릭을 보며 교황이 말했다.

"우선 나오너라."

에릭은 두 손에 자신의 신성을 담아 감옥의 철창을 구부렸다.

끼이익.

아다만티움으로 만들어진 철창이 쇠젓가락처럼 휘었다.

에릭은 쓰러진 장두식을 어깨에 둘러메고서 지하뇌옥을 빠져나왔다.

"몸으로 신성을 다루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짤게 감탄을 읊조리고는 교황이 앞장서서 걸었다.

지하 뇌옥의 입구에는 성전 기사단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스티아 님께 영광을-!""

성전 기사단(聖戰騎士團)이란, 말 그대로 성전을 위해 존재하는 기사단이다.

그들은 갑옷도 없이 한 자루의 검과 거대한 방패만을 짊어지고 전장을 누비는 존재다.

"가지."

교황이 그들과 함께 왔다는 의미는 간단하다.

거룩한 신의 이름을 걸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서, 성전 기사단이 대체 왜, 죄인을 데려가는...."

요컨대.

길을 막지 말라는 의미다.

"다, 다들 비켜라!"

"젠장, 간수장님. 저걸 두고 봐야 합니까?"

"우리 선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기다란 흰색 성복을 펄럭이는 성전 기사단의 위용에, 제국 병사들은 길을 터 줄 수밖에 없었다.

성전 기사단의 정중앙에는 교황과 에릭이 있었다.

'끗발 미쳤고.'

에릭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교황을 따라 걸었다.

황도 한복판을 거닐며 교황과 에릭은 잡담까지 나누었다.

"네놈 교회를 제법 멋들어지게 만들어 놨더구나."

"제 나름의 미학을 추구해 보았습니다."

"그런 쪽으론 리페로제와는 딴판이구나. 한데, 어째서 고아원이 교회보다 더 큰 게냐?"

"믿음은 마음의 크기가 중요하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사는 공간이 더 중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호오, 그럴듯한 말이구나."

마치 나들이를 나온 부자(父子)의 대화 같기도 했고.

할아버지와 손주의 대화를 보는 듯하기도 했는데.

으득.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 하시더냐?"

제국 근위대에게는 그들의 모습이 조롱처럼 느껴졌다.

"재상 각하께 들은 바로는, 무력 충돌은 금물이라 하셨답니다."

"허어.... 저, 저 얄미운 얼굴을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이냐?"

"...그."

"그?"

"어차피 몇 시간 뒤에 열릴 재판에는 출석해야 하니, 그때를 도모하시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재판이라, 내 꼭 참관인으로 들어가야겠어."

황성을 나가는 아스티아 교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국의 인사들은 각오를 다졌다.

황제의 나라에서 이뤄진 만행.

그들은 그런 생각을 품었다.

에릭의 표정이 그만큼 얄미웠다는 말이다.

* * *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이 직접 성전 기사단을 데려와서...."

지엄한 제국 황실.

단순히 표현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황제의 성격이 그랬다.

"삼황자를 태워 죽인 놈이 뭐?"

거대한 대전 중앙에 세워진 정갈한 옥좌, 그 위에 앉아 있는 커다란 사내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대체 그놈이 뭐라고 교황이 직접 데려간단 말이냐?"

잘 정돈된 찬란한 은발과 새빨간 적안이 인상 깊은, 제국의 황제 에스페로자 루펠 아르만.

중년과 노년의 사이에 있는 황제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다.

검으로 다져진 투박한 손이 옥좌의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라고 합니다."

붉은 머리를 조아리며 재상이 조심스레 답했다.

볼을 타고 땀방울이 흐르는 것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뚝.

"순례자?"

연신 옥좌를 건들던 손가락이 멈추고 대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폐하... 부디 진정-."

"진정? 고작 열다섯이 순례자라는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게냐?"

뇌옥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에릭을 그 누구도 막아서지 못했다.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이 직접 성전 기사단을 동원해 그를 데리고 나갔기 때문이다.

"설령 순례자라 쳐도 놈이 나가는 것을 짐의 군대가 구경만 했고, 재상 그대가 그러라고 명했다는 사실을 내 어찌 받아들여야 하겠나?"

그 소식을 들은 황제는 극히 노했다. 여차하면 공작을 벌준 뒤, 제국 땅에서 아스티아 교단을 몰아낼 생각까지 했다.

그랬는데.

"전하, 참으셔야 합니다. 그 '에릭'이 방금 말씀드린 순례자이옵니다."

재상이 말에 황제의 노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에릭?"

익숙한 이름이었다.

수년 전부터 재상이 사적 자리에서 많이 떠들던 이름으로.

무슨 주입기라는 별명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났다.

"제, 제 딸과...."

"아, 그 흑마법사를 죽이고 다닌다던 꼬마 말이군. 그놈이 벌써 열다섯이란 말이더냐?"

"예...."

지엄한 황제는 제국을 가장 우선시하는 인물이다.

에릭이란 놈은 수년 전부터 싹이 보이는 인재였다.

"아무리 삼황자가 빙의자라 하여도 놈은 황족의 몸을 멋대로 처분했다. 내 어찌 참아야 한단 말이냐?"

"제가 순례자 리페로제와 따로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에릭이란 놈을 제국에 묶어 놔야 한다는 것이 재상의 충언이다.

"리페로제는 놈의 스승이지. 그놈이 스승의 말을 듣는다는 보장이 있는 게냐?"

"리페로제 님도 그렇고 에릭 그놈도 그렇고 약속은 천금같이 무겁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게다가 에릭 그의 모든 것은 이 제국 안에 있습니다."

리페로제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는 제국의 공작인 재상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에릭의 편의를 봐주고 여러 지원을 해 주면, 훗날 에릭이 제국을 위해 힘써 줄 것이라는 약속이었다.

"약속조차 모호하구나, 대체 무슨 힘을 써 준다는 말이냐?"

재상의 설명에도 황제는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빙의자, 혹은 다가올 재앙에 대한 일이 아닐지...."

빙의자라는 단어에 황제의 미간이 좁혀졌다.

빙의자들이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대격변 패치'라는 말이 떠올랐다.

"빙의자 수백이 같은 말을 주장했으니, 거짓은 아닐 것입니다."

"이 대륙이 전란에 휩싸이고 미궁이 그 원흉이라는 얘기 말이더냐?"

"예."

"충분히 대비해 왔지 않더냐?"

황제는 빙의자의 존재를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외부적인 대비도 제법 해 뒀다.

다만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하필 아들놈이 빙의자였을 줄이야. 대체 어떤 망종이 빙의를 했길래, 그 누구도 사람이 바뀐 것을 몰라봤단 말이냐...."

황제 역시 난감한 입장이었다.

빙의자를 죽이라고 천명한 것이 황제인 바.

체면이 말이 아니다.

'쓰레기 같은 아들놈, 아니지, 빙의자 놈.'

그 육신은 자신의 피가 흘렀을 터이지만.

'잘 죽었다.'

내심 후련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속이 쓰레기인 몸뚱이보다는 전도유망한 성기사를 붙잡아 두는 것이 제국을 위한 길일 테지."

"그렇습니다."

황제는 당연하게도 에릭의 가치를 높게 샀다.

'공작의 여식에게 예절을 주입했다 했나?'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놈의 별명도 기억이 났다.

'예절주입기 에릭이랬지.'

고작 열 살도 되기 전에 제국의 내로라라는 기재들을 패고 다녔던 어린 아이가 에릭이다.

"정말 성기사 수준이더냐?"

"황실 근위대 대장이 보증하였습니다."

열다섯인데 성기사급이다.

"게다가 순례자의 지위를 인정받았다라."

"아스티아 교단에서 아무런 증명도 없이 이런 지위를 내려 준 것은 전례 없는 일입니다."

교단에서 막대한 지위까지 인정받은 에릭이다.

"전무후무한 기재로구나."

하도 인재가 없어서 빙의자를 가져다 쓸 생각까지 하던 황제였다.

'신성력을 쓰는 데다가, 빙의자에게 가차 없는 광신도.'

황제는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놈을 불러 보거라. 내 친히 얘기를 나눠 보고 생각하지."

"마침, 재판 전에 대기시켜 두고 있었습니다."

영민한 재상은 황제의 의중을 파악해 미리 준비를 해 두었다.

에릭이 뇌옥에서 나온 직후, 교황과 접선해 에릭을 손수 대전의 대기실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 * *

'최대한 몸을 사렸는데....'

황실 대전의 대기실에서 에릭은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수 없게 황자 놈이 엮이냐.'

앞으로 시작될 메인스토리에는 '대격변 패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수많은 빙의자로 검증된 사실로, 최소한 대격변 패치까지 정면에 나설 생각은 없던 에릭인데....

정말 뜬금없이 나타난 삼황자 때문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세상만사가 제 뜻대로 될 리는 없다마는.

'그래도 교황이랑 황제를 제일 먼저 만나는 건 좀.'

시작부터 세계관 최강자들과 엮이게 되는 건 조금 다른 얘기였다.

'너무 과한 감이 있지 않나?'

뜻대로 안 풀리는 것을 넘어, 숫제 재앙이나 다를 게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알현을 허하셨습니다."

"...이건 뭐지?"

때마침 황궁의 시종이 에릭의 입장을 안내해 주러 왔고.

에릭은 시중이 건네준 물건을 보며 의문을 가졌다.

"저는 그저 명에 따를 뿐입니다. 이유는 직접 확인하시지요."

시종이 건네준 것은 기다란 롱소드 한 자루였다.

'검을 왜?'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서....

'보통 있던 무기도 빼앗는 게 정상 아닌가?'

대뜸 칼 한 자루를 준다는 게....

'뭐 칼춤이라도 추라는 건가?'

에릭은 난감했다.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 에릭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시종은 곧바로 에릭의 입장을 알렸다.

드르르르륵.

거대한 대전의 문이 개방되었다.

좌우로 열리는 거대한 문에는 제국을 뜻하는 은빛 달이 조각되었고 문 사이로는 붉디붉은 벨벳 양탄자가 깔렸다.

에릭은 고개를 조아리고 붉은 카펫에 발을 얹었다.

'황제....'

에릭이 침을 꿀떡 삼키며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스릉.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기습?'

갖은 실전으로 다져진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에릭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강자다.'

기다란 함 위에 놓인 롱소드를 들고 재빠르게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채앵-팅!

에릭이 대전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검이 그를 향해 내리쳐졌고 에릭은 이를 막아 냈다.

심장이 쿵쿵- 울리고 그에 따라 신성력이 몸을 강화했다.

'어떤 새끼야?'

에릭은 체중을 실어 막아 낸 검을 찍어 눌렀다.

"끄흡."

괴물 같은 몸뚱이에 신성이 덧입혀지자, 습격자는 조금 뒤로 밀려났다.

그 역시 오러를 두르고 맞대응하려던 차에.

"그만."

지엄하고도 위엄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성으로 예민해진 본능이 말하기를.

'황제군.'

에릭은 검을 내려놓았다.

습격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얄가드?'

에릭은 그제야 습격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황실을 지키는 제국 근위대 위에는 황제를 지키는 로얄가드가 있다.

그들은 제국 정점의 일각으로, 압도적인 무위와 그보다 굳건한 충성심을 지닌 존재다.

그런 로얄가드가 옥좌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진짜이옵니다."

에릭은 뜬금없이 벌어진 상황이 의아했다.

'뭐가 진짜라는 거지?'

멍하니 서 있는 에릭을 두고 황제와 로얄가드는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수준이더냐?"

"신성력과 오러는 서로 다른 힘이지만.... 그가 목숨을 걸고 덤벼든다면, 로얄가드도 제법 애먹을 수준이 확실하옵니다."

거대한 몸체만큼 웅혼한 신성력의 주인이 에릭이다.

거기다가 로얄가드가 인정한 검술까지 지녔다.

황제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내 그대를 벌주는 대신, 일을 하나 맡기고자 하노라."

여태껏 에릭은 황족을 해친 것에 대한 재판, 혹은 심문에 준하는 일이 벌어질 거라 여기고 있었다.

'재판을 하는 게 아니었나?'

그도 그럴 것이, 무려 황족의 몸을 태워 버리지 않았나?

나름 교황에게 사형을 면할 꿀팁까지 전수받고 온 상황인데, 어째 재판은 열리지도 않을 분위기였다.

"순례자 에릭, 황자 시해에 대한 죄를 사하는 대신 그대에게 빙의자 관리국장의 자리를 주겠노라."

생각과 달리, 황제라는 놈이 제법 호쾌한 모양이었다.

"빙의자들을 통솔하여 미궁을 조사하거라."

9화 예절주입기 에릭 (1)

"정녕 황제 폐하께서 그런 결정을 하셨단 말인가?"

재판 아닌 재판이 열렸고 귀족회(貴族會)의 일원들이 참석하기도 전에 황제가 모든 것을 끝내 버렸다.

죄는 있으나 이를 사했고.

대신 빙의자를 관리하고 미궁을 조사하는 '빙의자 관리국'의 국장 자리를 임명했단다.

"말로는 벌이라 하셨지만.... 사실 엄청난 상이 아닙니까?"

"허어. 그 노다지를 웬 종교쟁이 놈이 처먹을 줄이야."

"꿀단지 같은 빙의자들을 미궁으로 보내 버려야 한다니."

귀족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뒷구멍으로 빙의자들을 꿍쳐 두고 수많은 사업을 벌이던 귀족들이었다.

"차라리 즉결처형법이 있을 때는 숨겨 둘 수라도 있었는데...."

"이제 호시절은 다 갔구만."

귀족들이 의무만 다해 준다면, 황제는 꽤나 너그러운 태도를 보여 준다. 제국의 귀족은 그만한 무게의 의무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폐하께서 직접 놈들을 써먹을 생각이신가 보오."

그러나 황실이 직접 손을 댄 부분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이 없다.

전쟁과 미궁 관리가 대표적인 예고, 이제는 빙의자 문제가 추가되었다.

"미궁에 보내는 게 어찌 써먹는 겁니까?"

"죽으라고 보내는 거긴 하지요."

현실 세계는 게임과는 많은 것이 다르다.

미궁 또한 마찬가지.

난이도가 괴랄해졌다.

"쯧, 엄청나게 죽어나겠구만. 하필 미궁으로 보낸다니."

괜히 빙의자들이 흑마법사를 골라 살인으로 레벨을 올리려 드는 게 아니다.

현실의 미궁은 데이터 쪼가리로 만들어진 게임이랑은 그 궤를 달리했으니까.

"답이 없군...."

"손해가 막심하겠어."

회의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캐지 않은 미스릴 광산과도 비슷한 것이 빙의자다.

귀족들이 아쉬움에 몸서리칠 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 에릭이란 놈을 통한다면.... 빙의자들이 죽기 전에 써먹을 방법이 생겨나지 않겠나?"

가로로 째진 눈과 기다랗게 말린 콧수염이 돋보이는 남자였다.

"공작께선 대안이 있으십니까?"

제국을 지탱하는 네 개의 공작가, 제네딕 라핀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론 후작, 그대는 립스틱 사업으로 크게 벌지 않았나? 한조 백작은 의복 사업으로, 심지어 그 북부 대공조차 예티 털가죽으로 사업을 벌여 예티코트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네."

빙의자 사업에 대한 얘기였다.

'굳이 떠나간 마차를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

다른 귀족들은 라핀 공작의 말에 의문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다들 궁금할 게야."

공작이자 마탑의 주인이 바로 라핀 공작이다.

다들 귀를 활짝 열었다.

"아스티아 교단의 순례자, 사실 종교쟁이들은 귀족들 눈으로 볼 땐 깡패나 다를 게 없는 놈들이지."

다소 문제가 될 발언이었다.

"순례자라는 이름만 믿고선... 제멋대로 대륙을 들쑤시는 놈들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무식하게 강하지 않소?"

그런데도 귀족들은 공감했다.

교단의 위세가 커져 감에 따라 그들에게도 불만이 생겨난 것이다.

"빙의자 관리국장이라는 지위는 어떤가? 황제 폐하가 친히 국장이라 정했으니, 어지간한 직급보다야 높을 것은 뻔하지."

국교조차 없는 황제의 나라가 제국이요, 그런 제국의 황제가 권력을 내려 준 것이 에릭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지...."

"그런데 그 에릭이란 놈이 고작 열다섯 아닌가?"

뚝.

하고 귀족회의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게 열다섯이란 말입니까?"

"몰랐나?"

거대한 체구와 성직자라는 인식이 에릭의 나이를 가늠키 어렵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순례자라 함은 노화를 미룰 만큼 강해진 노괴들이 되는 직위였다.

"열다섯이라, 마침 내 딸과 비슷하군."

귀족들은 행복회로를 굴렸다.

아스티아 교단은 성직자의 결혼을 막지 않는다.

"허어, 외견으로 보면 제 딸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큭큭, 자네 딸은 삼십이 넘지 않았나?"

"내 아들도 있다만."

혼인으로 가볍게 시작된 대화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본격적인 돈 얘기가 시작되었다.

"어린놈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지요."

"그 무한동력이란 걸 만들 수 있는 빙의자도 찾을 수 있겠군."

"마석 없이도 마력이 무한하게 생겨나는 기관...."

"그게 전부가 아니지.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있지 않소?"

"대륙을 뛰어넘는 비행 물체! 대체 빙의자들의 세계는 어떤 곳인지 참으로 궁금하구만."

"허허!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곧 제국에서 보게 될 것인데!"

귀족들은 자신들이 사로잡은 빙의자에게 얻은 정보를 읊어 가며, 저마다의 꿈을 꾸었다.

그러다 문득 한 귀족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왜 재상 각하께선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는지요."

황제와 가장 가까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재상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재상의 작위는 공작으로, 그 역시 귀족회에서 꽤나 힘을 쓰는 입장이다.

"흐흐흐흐. 자네들."

재상이 붉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하기를.

"에릭의 별명은 예절주입기라네. 그 따위로 굴다가는 아주 큰 곤혹을 치를 게야."

고작 일곱에도 스승을 믿고 귀족들을 패고 다니던 아이가, 열다섯이 되었다.

'열다섯에 힘과 지위를 다 가졌다라.'

앞으로 제국이 어떤 변화를 맞이할까?

재상은 그게 궁금했다.

'일단 저 귀족 놈들의 머리에 낀 기름때는 다 빠지겠군.'

―Ep. 3 예절주입기 에릭

"황제 성미가 급하다더니...."

"거, 형님, 황궁에서 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수?"

에릭은 장두식과 함께 빙의자 수용소를 찾았다.

황제의 패기랄까, 시원시원한 성격이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까?

"두식아, 감옥에 열흘을 가둬 두고는 나오자마자 대뜸 일을 시작하라는데, 당연히 열받지 않겠냐?"

"허어.... 형님은 참, 뭐랄까.... 황실의 귀가 무섭지도 않수?"

에릭은 장두식의 말을 흘려 넘겼다.

'들으라고 하는 거다.'

황제의 성격은 호탕하다.

아주 칼같이 예의를 차릴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에릭처럼 막 나가는 것도 호감을 살 법한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실적이 없으면 얄짤 없이 단두대행이지만....'

황실에도 귀가 닿은 에릭의 정보 조직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황제의 기호나 성격 따위야 사실 비밀로 칠 수준도 아니다.

원체 그 행동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정말 황궁 한복판에 빙의자를 수용해 놨구만요."

"두식아 로얄가드랑 황실 마탑은 허수아비가 아니다."

에릭은 대전에서 겨뤘던 일검을 기억했다.

스승과 비교할 바는 못 되도, 아득한 무위였다.

'그래서 3티어는 찍으라 하신 거구나.'

스승은 에릭에게 열다섯이라는 나이 제한과 3티어 신성력 개방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 전까지는 뭘 하지 말라는 엄포였다.

괜한 꼬장을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황궁에서 진짜 강자들을 마주해 보니 백분 이해가 갔다.

황실의 대단한 점은 무력만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구나.'

에릭은 황궁의 규모에 감탄했다.

거대한 성(城) 일곱 개를 합쳐 놓은 것이 제국의 황궁이다.

성 사이사이에는 각종 실무를 보는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에릭과 장두식은 그중 가장 투박하게 생긴 건물 앞에 서 있었다.

"형님, 나는 대체 왜 데려온 건지...."

"두식아, 너도 같이 미궁에 들어가야 하는데, 당연한 걸 묻냐?"

막 새로 만들어진, 대륙 공용어로 쓰인 간판이 번들거렸다.

[빙의자 수용소]

간판을 바라보며 장두식이 입을 쩍 벌리고는 자신의 머리통을 마구 내리쳤다.

"꿈 아니다, 두식아."

"거... 진짜, 나를 미궁에 데려간단 말이요?"

에릭은 대답하는 대신 빙의자 수용소 앞으로 다가갔다.

""충-!""

황실 근위대 소속 병사들이 에릭에게 경례를 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으로 빼곡히 새겨진 마법진이 드러났다.

"허! 형님. 저거 다 폭발 마법진인데.... 우리 뒈지러 가는 거 아니요?"

장두식이 겹겹이 둘러진 마법진들을 보며 경악했다.

에릭은 성큼성큼 어두운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대체 황실 마탑은 뭐 하는 놈들이길래... 저런 대규모 전략 마법을 고작 수용소에 넣는 거요?"

복도의 벽면에도 온갖 마법진들이 둘러져 있었고 대부분이 극악한 파괴와 관련된 마법들이었다.

장두식은 사뭇 흥미로운 표정으로 벽을 훑어봤다.

그러다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여기... 신성 폭파 마법도 있수다."

"쫄지 마라, 두식아. 내 몸뚱이가 신성 그 자첸데."

장두식은 에릭이 빙의자라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신성력을 쓰는 빙의자....'

그렇기에 이만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거겠지.

장두식의 은인이 에릭이다.

'형님 빙의자 새끼들이 뒤통수 못 치게, 내가 지켜 주겠수다!'

누가 누굴 지켜?

뒤통수를 처맞을 걸 알기에 굳이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지만, 장두식은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

"거참. 형님은 괜찮아도.... 저 정도 고농도 신성은 빙의자가 아니어도 터져 죽는단 말이오!!!"

빠악.

어색한 감정에 괜한 말을 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장두식이다.

"끄윽."

뒤통수를 비비며 고개를 치켜드니, 어느새 빙의자를 가둔 감옥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절차가 있으니, 잠시 기다리시오."

입구를 지키는 로얄가드가 잠시 대기하라는 말을 건네고는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동안 에릭과 장두식은 잡담을 나눴다.

"두식아, 제국에서 뽑아 준 새 옷이 어떠냐?"

에릭이 정갈한 예복을 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허, 거참. 한순간에 권력자가 다 되셨수다."

근육으로 터질 듯이 부푼 새하얀 슈트가 눈에 뛴다.

유독 가슴 쪽이 그랬다. 수많은 휘장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휘장이란, 해당 인물의 지위와 권력을 보장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대체 지 아들을 태워 죽였는데, 왜 이런 특혜를 준 거요?"

장두식은 에릭이 얻은 막대한 권한에 혀를 내둘렀다.

"뭐, 황실의 치부를 가려 줄 대안 정도로 생각하나 보지."

에릭이 가슴의 휘장을 매만지며 그리 말했다.

'황제가 미친 걸지도?'

자신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주어진 권한이 말도 안 됐다.

'황실 직속 기관'을 의미하는 붉은 달의 표식. '즉결처형권'을 의미하는 서슬 퍼런 단두대 그림.

'제국과 아스티아 교단의 협력 관계'를 뜻하는 의미로, 제국의 국기와 교단의 심벌이 나란히 에릭의 가슴에 달려 있었고.

가장 높은 어깨 견장에는 '순례자'를 뜻하는, 낡은 철패 하나가 돋보였다.

"그래서 권한이 어느 정도요?"

"뭐, 대충 빙의자 혐의에 관해서만큼은 즉결처형을 할 수 있고, 귀족에 대한 단독 수사가 가능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허어.... 종교쟁이한테 황제가 직접 직위를 내려 준 건 처음 아니요?"

에릭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선을 바꿔야겠어.'

차분하되 어딘가 싸늘함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예정보다 빠르게 자신을 드러내게 된바, 욕심을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식아, 어느 정도 성과면 제국이 국교를 만들겠냐?"

"허어....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 황제고, 신보다 앞선 게 황제인데, 그게 가능하겠수?"

"뭐, 일단은 그렇게만 알아 둬라."

슬슬 빙의자들을 만나 볼 시간이 되었다.

끼릭.

빙의자 수용소 최심부.

각종 마법진이 도배된 육중한 감옥 문이 열리고.

"충! 빙의자 관리국장님을 뵙습니다."

로얄가드가 정중한 태도로 에릭에게 경례를 올렸다.

하오체를 쓰던 조금 전과는 달랐다. 에릭이 의문스레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황제 폐하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지금 이 시간부로 에릭 국장님께서는 제 상관이십니다."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이놈의 제국은 별명이 무려 충성의 제국이다.

황제의 압도적인 지지율.

그리고 그에 걸맞은 인재 풀.

'진짜 리더란 말이야.'

게다가 황제는 상당히 유연한 사고를 지녔다.

빙의자 활용법만 해도 그렇지.

"우선 빙의자들 낯짝부터 봐야겠다."

에릭은 아주 자연스럽게.

명령조로 로얄가드에게 지시했고.

"충-! 개체별로 놈들을 분류해 놨습니다. 여기 표를 참고해 보시면 됩니다."

로얄가드는 당연하단 듯이 에릭의 명령을 따랐다.

에릭은 건네받은 서류를 훑어보며 생각했다.

'제국도 나름의 빙의자 구별법이 있는 거야.'

[클래스-전사] - 53마리.

[클래스-궁수] - 34마리.

[클래스-마법사] - 14마리.

[클래스-흑마법사] - 1마리.

[클래스-네크로맨서] - 7마리.

.

.

.

뭐, 인권도 없이 '마리'로 표현되고 있는 빙의자였다마는....

에릭에게는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 * *

거대한 성기사가 나타났다.

장소는 제국의 빙의자 수용소.

거기서도 가장 깊은 지하 감옥이었다.

"씹.... 이게 진짠가?"

20레벨을 넘겨 커뮤니티 기능을 개방한 박창호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왜?"

"어차피 우리 써먹으려고 가둬 둔 건데, 쫄지 마."

제국 수용소에 갇힌 빙의자들은 약 200여 명으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이곳에 감금되었다.

처음 끌려온 자가 1년을 넘게 있었으니, 다짜고짜 단두대로 보내지지는 않을 터였다.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커뮤글 빨리 확인해 봐.... 우리 다 죽게 생겼다고."

박창호가 절망감에 중얼거렸다.

[빙의자 생존 팁 – 제국 정세 변화]

[오 년 전 실종된, 리페로제 아스티아의 후임 등장. 흑마법사 플레이어들을 0명까지 줄였던 사람이 리페로제고 그의 제자가 지금은 제국과 협력 관계에 놓임.

업적: 삼황자가 빙의자라고 태워서 죽임, 터트려 죽였다는 목격 썰도 있음. 누명 아니고 진짜 빙의자였음. 황제가 존나 맘에 든다고 바로 빙의자 관리국장 자리 줌.

세 줄 요약.

1. 미친 빙의자 학살범의 제자가 에릭임.

2. 열다섯이라는데 말도 안 되게 쎔.

3. 빙의자라는 이유로 황자까지 태워 죽이는 미친놈이니 다들 조심해.]

[사진]

낯선 세상에 끌려온 빙의자들은 커뮤니티 기능을 개방해 서로 소통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아왔다.

보는 것은 문제가 안 되지만,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쓰려면 20레벨을 넘겨야 한다.

제국이 잡아 둘 정도면, 대다수가 10레벨은 넘겼고 20레벨 이상도 제법 많았다.

"어...? 황족을 태워?"

빙의자도 현지 정보를 얻어 왔다.

제국이 어떤 나라인가?

국교조차 없는 황족 지상주의 국가가 제국이다.

"그러고 유능함을 인정받아?"

원래 지구에서도 그랬듯이, 게임 속에 빙의한 후의 커뮤니티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굵직한 사건이라 함은, 보고 놀랄지언정 나와는 연이 없는 그런 것이 대부분일 터였다.

근데 이번은 달랐다.

끼리릭. 끼릭.

기계장치가 돌아가며 수용소 정문이 개방되었다.

문틈으로 선명한 황금빛 물결이 햇살처럼 스며들었고 빙의자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시, 신성...."

"진짜로 엄청 크네."

이윽고 활짝 열린 문 너머로 거대하면서도 수려한 외모를 지닌 사내가 나타났다.

찬란한 금발과 선명한 금안.

그리고 백옥처럼 하얀 얼굴이 돋보였다.

"에릭이다."

그자가 무심하게 감옥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 뒤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각자 인벤토리에 보관된 자산의 총액을 기입하고 시스템 상점이 몇 티어까지 열렸는지 소상히 기록하도록."

아주 찬란한 신성력을 내보이는 것이, 어겼다가는 타 죽을 느낌이었다.

10화 예절주입기 에릭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