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대비 (2)
아스티아 교단은 관대하다.
그런 관대한 교단에서도 금기(禁忌)시되는 것들이 있었으니.
아무리 규율이 느슨하다 해도 집단인 이상 최소한의 선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법이다.
그리고 에릭의 말은 명백히 그 선을 넘었다.
"으읏! 지금 뭐라고...."
르웰은 뒷목을 잡다 못해 뒤로 쓰러졌다.
에릭이 황급히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줬으나, 그 뒤에도 르웰은 연신 휘청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따위 말을 지금 설명이라고-.'
개종하라는 말과 함께 에릭은 그 연유를 알렸는데....
'자기가 빙의자들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됐고 무슨 신전을 얻었고 어쩌구....'
구구절절 말이 많았으나, 요점은 간단했다.
'그러니까 지금 그 GP라는 걸 벌겠다고 나보고 개종하라는 말 아닌가?'
저놈에 돈지랄은 언제까지 그러려는 건지.
골드 골드 노래를 불러서 십일조로 가득 찬 함을 주었더니, 이제 와서는 새로운 화폐를 벌어 달라며 협력을 요구한다.
"아니, 지금.... 나보고 뭘 하라고?"
겨우 정신을 붙잡은 르웰이 다시 물었을 때.
"개종 말입니다."
에릭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또 저런 개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 거니?"
그도 그럴 것이.
아스티아 교단의 최고 금기 사항 중 하나가 바로 배교(背敎)가 아니던가?
개종(改宗)은 곧 교단은 저버린다는 의미였다.
그걸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하다니.
"-이이! 에릭!"
짜악-!
재회의 기쁨을 분노가 이겨 버렸다.
강렬한 등짝 스매시와 함께 르웰이 지익- 뒤로 밀려났다.
어째 저놈의 몸뚱이는 점점 딴딴해지는 느낌이다.
"-아아, 내가 어쩌다가...."
보통 개소리를 들으면 무시하면 그만일 테지만, 르웰은 그러지 못했다.
특별한 사람의 부탁은 원래 그런 법이니까.
'화를 내신다는 건 곧-.'
에릭은 그녀를 잘 안다.
르웰은 결국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생각이겠지.
그렇기에 저토록 분노하는 것일 테고.
에릭은 르웰에게 성큼- 다가서서 물었다.
"설명을 다 드리지 않았습니까?"
개종에 대한 설명도 마친 상황.
이제 남은 것은 선택의 시간이 전부였다.
앞으로 뒤바뀔 세계 정세를 고려한다면, 이는 황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하아-. 진짜 제멋대로구나!"
르웰이 허리에 손을 얹고 몸을 기울인 채 에릭을 노려봤다.
눈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이 아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겉으로는 화를 냈으나, 르웰의 심경은 내심 복잡했다.
'아스티아 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이유가....'
에릭이 미궁에 들어가고 얼마 안 지나서, 그녀는 아스티아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내 품을 떠나 더 넓은 세상을 누비거라-.]
마지막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싶었더니....
이런 이유가 있을 줄이야.
'그분께서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나를 보내 주셨구나.'
신은 신이었다.
그런데도 르웰은 개종에 대해서 두려움이 일었다.
아스티아 님이 보내 주셨다고 한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교황 성하께서 아시면, 난리가 나지 않겠니?"
배교자에게 유독 엄격한 교단이었으니까.
그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성창으로 초토화시킨 배교자들의 마을도 있지 않던가?
하물며, 신께서 이를 허하셨다 해도 교단의 입장에서 함부로 이를 떠벌리기 어려울 터였다.
"에릭,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입장이 달라."
게다가 르웰과 에릭은 교단 내에서 조금 특이한 입지에 있었으니까.
"...나는 리페로제 님 덕에 사제가 된 거고, 에릭 너도 비슷하잖니?"
두 사람의 인연은 리페로제를 따라 분쟁 지대를 전전하며 시작되었다.
본디, 사제가 되고 성기사가 되려면 절차라는 게 있고, 신학을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한 법.
"그 까마득한 절벽에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하나, 에릭이 극구 반대한 탓에 그들은 첫 정착지를 제국으로 삼게 되었다.
"얘네 안 받아 주면, 교황청에서 칼춤 춘다?"
두 사람은 교단의 입적 절차와 각종 시험을 무시한 채로 교인이 된 입장이다.
리페로제의 협박 덕분이었다.
"그래도 잘 풀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나는 사제가 되고 너도 순례자에 성자까지 됐잖니."
그 이후가 골치 아플 뿐이지.
에릭이야 뭐, 성자까지 된 마당에 무슨 문제가 있겠냐마는.
"-안 그래도 내가 사제가 될 때 말이 많았었는데, 퍽이나 개종이 가능하겠다."
르웰은 엄연히 중급 사제다.
하급 사제에서 교황의 방문 이후로 중급으로 승급한 게 전부.
직급으로 따지자면, 성자와는 아득한 차이가 있을 터.
"제가 누굽니까?"
미친놈.
목 끝까지 그 말이 나왔으나, 르웰은 지고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아 냈다.
"-성자."
그것도 최초의 성자다.
그럼 뭐 하랴.
"근데 의미가 없잖아?"
종교를 바꾸면 성자건 순례자건 다 무용지물인 이름이 될 텐데.
그런 상황에서 에릭은 아주 심플한 해결책을 제시했으니.
"개종을 하되 안 들키면 됩니다."
* * *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르웰은 우선 보고 판단하기로 정했다.
그리하여, 에릭의 신전이라는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에릭이 진짜로 신?'
평소 짓궂은 에릭을 떠올리며, 반쯤은 농담이라 생각했던 르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들어오시죠. 사제님이 제 신전에 초대받은 첫 번째 손님입니다."
에릭이 손을 휘저었더니 허공이 쩍- 갈라지고는 이질적인 공간이 나타났다.
"이, 이게 무슨...."
그 광경에 르웰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휘오오오오오―
신성의 바람이 몰아치는, 구름 위에 지어진 고즈넉한 신전.
새하얀 구름 사이로 금빛 다리가 놓였고, 그것들은 에릭의 신전을 향해 이어졌다.
"...아니, 지금 이게-."
에릭은 에스코트 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 천연덕한 얼굴에 르웰은 말문이 막혔다.
"가시죠."
빤-히 바라보며 저렇게 말하는데, 르웰은 손을 마주잡고 그를 따라 걷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구름 위에 올라선 순간 예배실과 이어진 공간의 균열은 사라졌고.
"저도 몸으로는 처음 들어와 봅니다."
에릭은 여상하게 말을 이으며, 구름 사이에 생겨난 다리로 르웰을 이끌었다.
'따듯한 공간.'
르웰은 이루 말하기 힘든 감동이 들었다.
따스한 신성력이 그녀를 반겨 주었는데, 어딘가 그 힘이 평소의 것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 감상을 느끼고 있자니.
"여기가 제 신전입니다."
이윽고 구름 끝에 지어진 거대한 신전이 드러났다.
"와아.... 으응?"
르웰은 신전을 살펴봤다.
첫 인상은 장엄하기 그지없었으나, 오밀조밀 뜯어보니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거대한 금빛 기둥 사이는 휑-하게 비어 있었고.
벽은 조각품 하나 없는 맨들맨들한 민무늬요, 맨 끝에 놓인 드높은 의자 역시 디테일이 부족한 형태였다.
'가구는 로니에 브랜드로 채우고, 촛대는 조금 비싸도 진은으로 맞춤 제작을-.'
무심코 인테리어를 생각하던 르웰은 황금빛 의자 위에 놓인 거대한 석상을 발견했다.
"저, 저거 나 아니니?"
아주 익숙한 몸매.
그런데 디테일이 엉망이었다.
"...네 신전에 내 석상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좋지만-."
그냥 체형만 비슷하다 뿐이지 얼굴은 뭉뚱그렸고 옷은 웬 괴팍한 천 쪼가리를 두르고 있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어, 어떻게 나를 저렇게!"
"제 의지가 아닙니다. 멋대로 저런 게 생겨난 거죠."
에릭은 황급히 변명을 늘어 뒀다.
신전의 외형과 석상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힘을 얻으면서 생겨났다는 것부터.
영혼이 아닌 실제 육체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혼자서는 이 넓은 공간을 관리할 자신이 없더군요."
여기까지 설명이 이어지자 르웰의 눈이 차분해졌다.
"하긴, 에릭 네가 디테일이 부족하긴 하지."
그는 여심은 잘 알되 디테일한 부분이 부족했다.
그래서 에릭은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이러한 디테일을 해결해 왔다.
르웰은 에릭이 처음으로 선물해 준 명품 가방을 떠올렸다.
"아니, 엠보싱을 더! 아니, 그러니까, 엠보싱은 봉긋하게 패턴이 솟아 있다는 의미다."
제4구역의 허름한 고아원에서 어린 에릭은 아이들을 모아 두고 뭘 만들라고 시켰다.
그때의 르웰은 명품이니 뭐니 전혀 모르던 시절이라서 애들이 소꿉장난을 하는구나 싶었다.
"체인이 싸구려 철이면 안 된다고! 명품은 좋은 재료와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진-."
가장 조그마한 에릭이 더 큰 아이들을 이끌고 사방을 누비며 이런저런 물자들을 끌어 왔고.
단순 아이의 놀이라고 여겼던 르웰은 어느 날 이상한 걸 발견했다.
"저거 용 가죽 아니니?"
"예, 포차가 제법 잘돼서, 큰맘 먹고 샀습니다."
그 뒤로 미스릴 체인과 진은으로 만든 버클에 신성을 담아 만든 축성된 로고까지 곁들여지고.
"르웰,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꼬꼬마 에릭은 꽃다발과 함께 가방을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그때가 르웰이 처음으로 명품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최고의 재료와 지극한 정성이 담긴 아주 예쁜 가방이었다.
문제점은 다른 아이들이 심하게 초췌해졌다는 거였지만, 아무렴 어떠랴.
예쁜 꽃다발과 아름다운 가방에 절로 손이 내밀어졌다.
르웰의 가장 행복한 기억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업도 다 그런 식이었지-.'
에릭은 이끄는 자질이 있으나, 디테일은 조금 부족했다.
"음.... 맛이 미묘하게 달라. 조금 더 맵기를 추가해 보는게 좋겠어."
포차라는 이동식 식품 매장을 만들 때도 그랬으며.
"제국일보가 정식 신문으로 채택되려면, 무조건 1면에는 제국과 황제 폐하에 대한 칭송을 넣어라. 내용? 그것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나?"
신문사를 만들 때도 그랬다.
이 모든 것이 고아원의 1기생, 에릭 동기들의 인력을 동원해서 이뤄진 일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르웰은 이 신전에 자신이 디테일을 채워 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만....'
하나, 여전히 불안했다.
들키지 않고 개종을 하라는데, 어떻게 그걸 감수하겠나?
자신만이라면 몰라도 에릭까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때 에릭이 귓가에 속삭이기를.
"이 거대한 신전에서 구름 위를 신도로 가득 채우고 사제님이 주도하는 아름다운 예배가 이뤄진다면-."
그 말에 갈대처럼 흔들리던 르웰의 마음이 우뚝-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환상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천상의 신전에서 수만의 신도가-.'
에릭은 그간 숨겨 왔던 르웰의 스타력을 잔뜩 드러내 줄 생각이었다.
한번 스타가 된 이상, 그녀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본래, 유명인의 삶이란 그런 법.
'그걸 원하지도 않겠지.'
그러니 그녀가 승낙할 수밖에 없는 말을 내뱉은 거고.
"어떠십니까?"
르웰은 망설임을 지워 냈다.
"덩치만 컸지, 여전하네! 에릭 너는 내가 없으면 안 되겠구나?"
그녀는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에릭의 팔을 짝- 치면서 그리 말했다.
'다행이-.'
에릭 또한 기쁘게 미소를 지으려던 순간.
"대신, 빙의자들과 만날 자리를 좀 주선해 줄래?"
그 뒤에 이어진 말에 조금 떨떠름한 감정을 느꼈다.
"여기는 제국도 아니고 격리된 땅이잖아?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다 해 보고 싶거든!"
아니, 오히려 모골이 송연해졌다.
* * *
빙의자 관리국 지하 최심부.
원형으로 둘러진 벽면으로는 2평 남짓한 철창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는 사로잡힌 빙의자들이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수용소 중앙에 서 있는 거대한 성기사를 바라봤다.
드르르륵.
육중한 철창이 동시에 개방되고, 빙의자들은 질서정연한 자세로 앞으로 나서 중앙의 단상 앞으로 도열했다.
빙의자들의 눈빛은 오묘했다.
두려움에 떨렸으나 한편으로는 기대감으로 눈물이 벅차올랐다.
'지, 진짜로....'
단상 앞에 그어진 선명한 신성력의 경계선(境界線).
"흐흐-."
육중한 체구를 지닌 니시다 료가 그 선을 넘나들며, 다른 수용자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제 신성력에 고통받지 않는다고?'
그런 기대감 속에서도 두려움은 여전했다.
성수를 마셔 가며 받은 고통.
신성력에 타들어 가는 작열감.
그것들이 빙의자들의 영혼에 각인되어 있었으니까.
'저 눈빛....'
뚜벅, 뚜벅.
단상 위를 걸으며, 에릭이 빙의자들을 내려다봤는데.
그 시선은 빙의자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박창호, 니시다 료, 강풍호.
세 사람은 미궁을 넘나들며 에릭이 선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나머지들은 달랐다.
'-다 태워 버린다고.'
빙의자라는 이유로 제국의 황자까지 태워 버린 교단의 성기사.
성기사란, 말 그대로 신성(神聖)을 위해 싸우는 존재였다.
그 신성에 배척받는 빙의자들은 명백히 성기사의 적이었고.
'성자님이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고-.'
그런데도 처음으로 일어난 구원에 그들은 기대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 빙의자들의 운명을 거머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자신이 본래 세계에서 특출나게 잘하던 일이 있다, 거수."
침묵 속에서 몇몇 사람이 손을 올렸다.
수용소에 갇힌 빙의자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하나는 레벨이 높거나, 게임 속 지식이 빠삭한 부류.
나머지 하나는 지구에서 전문직에 종사했거나 특수한 기술을 가진 부류였다.
"무슨 일을 했지?"
빙의자 관리국장, 에릭은 손을 든 사람들을 하나씩 짚어 가며 자세한 면접을 진행했다.
"저, 저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그만."
개발자, 건축 설계사, 차량 엔지니어링, 반도체 연구원 등등.
수없이 많은 직업이 등장했으나 에릭은 이들을 모두 뒤로 물렸다.
'하등 쓸모없는 기술.'
지금의 세계에는 그런 게 전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마법과 오러가 있는 세상.
하물며 시속 200km/h로 달리는 차는 잘 단련된 기사보다 느리다.
애초에 전이 마법이 일상인 세상이거늘.
그때였다.
"-이잇!"
단상 옆의 강풍호가 폴짝폴짝 뛰어 가며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에릭은 눈가를 좁히며 이를 무시해 왔다.
"저, 저도 여자라고요!"
강풍호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성별로 살 권리가 있다.
그는 대쪽 같은 면이 있었다.
지구에서는 건강상의 이유로 성 전환이 불가능했으나, 지금의 세상에서는 달랐다.
'에잇, 왜 무시하는 건데!!!'
하여, 에릭이 선별한 모든 인원이 여자임을 파악한 뒤에 손을 든 것이다.
"-더 없나?"
에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원자력 연구원에 우주항공 개발팀 같은 놈들이 왜 있는 건지.... 아니, 애초에 저런 고기술 직종을 어떻게 찾은 건지.'
제국 정보부가 어중간하게 유능했던 탓에, 전혀 쓸모없는 직업들만 모여 있었다.
에릭은 마지못해 강풍호를 바라봤다.
"저, 저는-!"
뭘, 묻기도 전에 강풍호가 재빠르게 소리쳤고.
이어지는 말에 에릭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웨, 웹툰 작가였고요! 부업으로 3D그래픽 디자이너를 했어요!"
르웰이 보고 싶은 지구의 문화와 문물을 재현하기 딱 좋은 직업이 아니던가?
71화 대비 (3)
"...잠시 휴회다."
제국 황궁에서는 국란 회의가 한참이었다.
회의에서 진행된 안건들은 하나하나가 황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그토록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게 말이 되는가?'
북부 대공과 함께 언데드를 몰아내고 막 돌아온 참인데,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온갖 사건 사고들이 수두룩했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죄다 내 허가가 필요한 일들뿐이로군.'
신하들이 물러나고 텅 빈 대전에서 황제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대부분이 성자에 관한 일이니.'
제국의 국란을 극복하기 위한 회의이건만, 태반이 성자 에릭의 대한 얘기였다.
황제는 에릭에 관한 안건들의 요약본을 펼쳤다.
[1안]
남부 대곡창 지대에 재앙급 악마의 강림.
때마침 성자 에릭이 제국 남부 지역 근방에 있어서 이를 해결.
피해 사항 전무.
'하마터면 제국 전체가 굶주림에 시달릴 뻔했어.'
[2안]
수도 한복판에 미궁의 계층주가 출현.
제3구역 아스티아 교단의 교회와 고아원으로 제국 신민들이 피난하여, 큰 인명 피해는 없음.
시민들의 안정에 사제 르웰의 활약이 돋보임.
교회의 주인 르웰 사제에게 제국의 성녀라는 이명(異名)이 붙음.
참모부의 판단으로 백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해당 교회에 '황도 중앙 교회'라는 정식 명칭을 하사함.
'저 교회가 바로 성자 에릭의 집이자 보금자리로군....'
수도 한복판에서 아스티아 교단의 위세가 커진다는 것은 조금 찝찝하였으나.
'제국의 성녀라-.'
묘-하게 어감이 좋았다.
'가만.... 그러면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와 제국의 성녀가 되겠군.'
제국민이 부르는 성녀라는 명칭과 교단에서 인정한 성자라는 이름의 무게는 다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황제는 이를 나름의 길조라고 판단했다.
뭐든 쌍(雙)을 이룬다는 건 그만큼 안정감이 느껴지는 법.
'이 서류가 여기서 멈췄다면 좋았을 것을.'
처음에는 희소식이 대부분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점점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정보들이 나타났다.
'희소식 뒤에는 비보가 따른다지.'
당연한 거였다.
대제국에서 어찌 좋은 일만 있겠는가?
다만, 그 정도가 심했다.
[3안]
엘프들의 군대가 독단적으로 엘프 자치령을 벗어나 제국 서부의 관문소를 습격.
제국군과 전투는 없었지만, 엘프의 군대가 알만정교회의 인사들을 납치해 황도 앞까지 압송한 상황.
엘프군에게 전쟁의 의사는 없으며, 엘프 국왕이 단독으로 황제 폐하와의 알현을 요청.
비고 1: 엘프들은 알만정교회가 재앙급 악마의 강림을 도왔다고 주장.
비고 2: 2황비께서 진노하여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탄원서를 제출.
"허어-."
이게 사실이어도 문제고 거짓이어도 문제로다.
진실이라면, 세계를 삼분하는 종교의 타락을 의미한다.
거짓이라면 엘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이 되고.
'알만정교회가 거기까지 타락했단 말인가-.'
황제의 마음은 전자 쪽으로 기울었다.
알만정교회 교주와의 관계도 그렇고 빙의자 사태 이후로 2황비의 행보에도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기 때문.
'2황비-.'
황족 지상주의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여러 왕국을 멸하며 만들어진 제국이었기에 이를 하나로 묶기 위한 국책 중 하나였다.
시간이 흐르며 종교는 퇴색되고 황권이 강해졌다.
'그녀를 쳐 내야 할 때가 왔군.'
이것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했는데, 다음 페이지가 또 있었다.
이번에는 제국의 네 기둥이자, 한 파벌의 수장이 일으킨 문제였다.
'아론 후작에게 집행부를 보냈다고 이딴 짓을 벌여?'
황제의 거친 주먹이 쿵- 옥좌를 내리찍었다.
[4안]
라핀 공작이 생활 마도구의 생산을 중단시킴.
세부 품목: 각종 편의 마법 스크롤, 마석등이나 마력 화로와 같은 생활 마도구 충전석 등의 민생 밀접 물품 다수.
비축분이 없는 저소득층의 가정부터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
이에 더불어 상인 조합이 생필품의 가격을 폭등시킴.
라핀 공작과 그의 파벌인 마도 연합의 주장으로는 성자 에릭의 지시였다고 하나, 평소 성자의 행보를 보면 마도 연합의 독자적인 행위로 추정됨.
뿌득-.
황제의 주먹 위로 은빛 오러가 피어올랐다.
'라핀 공작, 같잖은 수를 쓰는군.'
정보부의 보고로 황제는 에릭이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잘 알고 있다.
홀로 재앙급 악마를 물리쳤다.
그는 제국에 어떠한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홀연히 미궁으로 떠나서 수천의 제국군과 수백의 모험가들을 구원했다.
'돈을 밝힐 뿐이지 놈은 지고한 선업을 행하는 진짜배기 성기사거늘....'
그걸 공작이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이런 미친 짓을 벌였다고?
그 이유가 뭘까.
필시 제 파벌의 삼인자인 아론 후작을 쳐 낸 것에 대한 대응이리라.
'아론 후작에게 무언가 있는 게야.'
마침 근위대의 에리카가 놈을 잡아다 지하 감옥에 가둬 뒀지 않던가?
거기까지 황제의 생각이 이어졌다.
"-아론 후작을 데려와라."
휴식이 끝나고 재개될 국란 회의의 주제가 정해졌다.
그것은 바로, 죄인 아론 후작에 대한 청문회다.
* * *
'신성 관리 창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건 빙의자뿐이다.'
교회의 지하실에 마련된 소파에 늘어지게 누운 에릭.
그는 사색에 잠겨 신전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개종은 어떻게 하는 건데?"
신의 인정을 받는다.
정식으로 신성력을 내려 받으려면 매우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다.
절벽에 지어진 교황청이나 마경에 지어진 수도원에서 기도를 올리며 교리를 깨우치고, 성소에서 신의 인정을 받는 과정이 기본.
'스승 덕분에 해결됐었지-.'
하나, 신성을 세울 수 있는 교단의 고위 인사들이 있다면, 그들에게서 신의 시험을 받을 수 있었고.
르웰은 별다른 신앙 수행도 없이 사제로 인정받았다.
"여기 들어가 보시죠."
그 묘리를 떠올리며 에릭은 자신의 신성을 세웠다.
4티어의 효과 중 하나가 오롯한 자신의 신성을 세우는 일이었으니까.
에릭은 신념을 담은 불씨를 피워 내 르웰에게 건네줬고.
"으윽-! 읏!"
르웰은 웅혼한 신성의 힘에 휘청거리더니 전신에서 금빛을 뿜어 댔다.
이펙트가 과한 느낌이었다만.
분명, 사제들이 신성을 내려 받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때를 회상하다 보니, 문득 어떠한 직감이 떠올랐다.
신과 소통한다는 현지 성직자들.
에릭은 눈을 감고 제 신전과 이어진 감각에 집중했다.
'이런 방식인가?'
지금의 에릭에게 신앙심이란 자신에 대한 믿음이고, 신성력이란 자신이 허가한 힘이다.
이러한 것들이 선처럼 느껴졌다.
에릭은 그 감각에 더욱 날카롭게 집중했다.
"이름이 강풍호? 그렇게 이쁜데 왜 그런 이름을...."
기도를 하지도 않았건만, 르웰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신들이 기도에 화답해 주는 게 이런 방식이겠군.'
은은하게 들리는 르웰의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때였다.
"성자님께서, 저를 인정해 주시지 않으셔서.... 그래도 저는 스스로를 강지나라고 소개해요! ...그렇게 살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에릭 님께서-."
달칵.
에릭의 손에 들린 [개벽의 검]이 살짝 뽑혔다 들어갔다.
전형적인 귀여워 보이려는 코맹맹이 목소리-.
이는 강풍호의 평소 말씨다.
한데, 숫제 귀에 때려 박는 느낌이었다.
에릭의 인상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고.
'하필 저런 쪽으로-.'
에릭은 그런, 귀여워 보이려 노력하는 유의 말투를 질색했다.
하물며 그 내용이 어떤가?
"에? 에릭이? 그럴 리가 없는데?"
"저는 사제님과 다르게 빙의자입니다. 그분께서 제 죄를 사해 주셨지만,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흐윽."
스릉-.
검날이 반 이상 뽑혔다.
그에 보다 못한 잭슨이 한 발 다가섰다.
절뚝.
"보스-."
"아, 잭슨...."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들려오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에릭은 조금 껄끄러운 상황에 놓였다.
"보스, 저를 두고 왜 저런 한심한 놈들을 신도로...."
마침 임명 가능한 신도가 셋이었고, 하필 세 빙의자가 죽기 직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신도로 받아들인 것이지만.
"그런 놈들은 죽게 두셔도 그만 아니십니까? 어떻게-."
한평생 신성력의 인정을 받고자 노력했던 잭슨의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잭슨, 돈이 많이 필요하다. 신도 임명 방식은-."
그에, 에릭은 그답지 않게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 두었고.
"네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자면 필시 수억 골드는 필요하겠지."
"...아, 돈이-."
조금 떨떠름한 눈빛이었으나, 잭슨은 결국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흉터가 꿈틀거렸다.
'그 뚱뚱보가 2억?'
실로 충격적인 금액이 아니던가.
아무런 쓸모가 없는 빙의자가 2억이라면, 자신은 대체 얼마가 될 것인가.
'보스는 수억 정도라 하셨지만 필시 그 이상의 금액이겠지.'
그리하여, 잭슨은 에릭이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돈을 긁어모으실 생각이신 거야.'
그것도 자신의 신도 임명을 위해서.
그 에릭이 견적을 보기도 어려운 액수였으니, 자신을 후순위로 미룬 것이 분명할 테니까.
"보스, 말씀하신 대로 늙은이를 보내 뒀습니다. 하면, 고아원 동기분들도 호출하면 되겠습니까? 마침 고아원에서 수업을 담당하고 계신다니-."
잭슨이 맡은 임무는 에릭이 뿌려 놓은 것들을 규합하는 일이다.
"동기들은.... 그래 걔들도 보긴 해야겠지."
고아원 1기생들에게 넘겨준 사업체들.
"황궁에 납품하는 끈은 내버려 두는 게 어떠실지요?"
"그쪽도 다 불러들이지. 어차피 조만간 황제가 나를 부를 테니까."
그리고 제국 곳곳에 뿌려 둔 정보 길드의 수하들.
에릭은 모든 것을 한데 모아 그룹을 이룬다는 계획을 내밀었으니까.
"잭슨, 맹세하지. 다음 신도는 무조건 너다."
"-제 가족의 복수를 해 주신 순간부터 보스는 영원한 보스십니다."
잭슨이 머리를 숙였다.
섭섭한 건 사실이었으나,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그가 지금껏 봐 온 에릭이라면 결코 이 맹세를 어기지 않을 테니까.
'보스는 진정한 의미로 구원자십니다.'
* * *
[빙의자들은 구원받을지어다.]
요즘 커뮤니티에서 아주 인기 있는 글이다.
너도나도 하루에 한 번씩.
[에릭 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테니.]
진짜 간절함을 담아 게시글을 올렸다.
신성력을 받아들인 세 빙의자가 산증인이었으니까.
그들뿐만 아니라, 수용소에 갇힌 다른 빙의자들도 그 사실을 찍어서 커뮤니티에 올려 댔다.
'...빙의자 자진 신고 기간이 생긴다고?'
전 세계에 퍼진 수십만의 빙의자들.
그들은 조금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니.
'제국을 어떻게 가지?'
국가 간의 전이 마법은 금지되어 있고, 설령 하더라도 초장거리 이동은 감지 및 파훼가 쉬워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빙의자들 중 태반은 [스킬]을 다룰 뿐, 오러나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현지인 기사들처럼 시속 200km로 뛰어다닐 수도 없다.
그때였다.
[조만간 타국 빙의자들을 인도하기 위한 구조대가 파견될 듯.
우리의 주인공, 위대한 창조주 에릭 님께서 그런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다.
빙의자들은 구원받을지어다!
나처럼 ㅋ]
그 뒤로 다른 빙의자들이 제대로 된 설명문을 첨부해 줬다.
이런저런 말이 많았으나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그러니까 제국 황제가 분쟁 지대로 군대를 파견해 주고.... 대수림을 관통하는 길을 내 준다는 거지?'
제국을 중심으로 북동쪽에는 분쟁 지대가.
동쪽으로는 거대한 대수림이 자리했다.
대수림과 분쟁 지대는 삼왕국 입장에서는 천연 요새 역할을 해 주는 '마경'이 도사린 위험 지역이다.
[내가 제국 정보부에 있는데, 아직 국란 회의는 끝나지도 않았음.]
[저거 구라일 가능성 높다.]
[황제가 미쳤다고 빙의자들 데려온다고 군대를 일으키겠냐?]
물론, 운 좋게 몸을 숨긴 빙의자들 중엔 이러한 정보의 진위를 판단할 자리에 있는 사람도 존재했다.
그러나.
"정보부라-."
이를 실시간으로 보고받는 에릭의 입장에서는 그들 또한 자신이 찾아내야 할 빙의자에 불과했다.
"은근히 귀족들 사이에 숨어 있는 놈들이 많은가 보군."
조만간 황제가 자신을 부를 터인데, 에릭은 뭐부터 시작을 할지 아주 많은 고민이 되었다.
"최소한 제국에 있는 모든 빙의자들은-."
"그...."
그런 생각을 하자니, 박창호가 드물게 에릭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건네 왔다.
"뭐지?"
"그, 푸, 풍호는-."
에릭과 함께 나갔던 강풍호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니시다까지 좀 전의 게시글 때문에 독방에 가둬진 상태였기에, 박창호는 불안감을 느꼈다.
'미운 정이라도 들었나?'
그의 질문에 에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정은 확실이 말이 안 되는-.'
니시다를 포함한 세 빙의자들의 관계는 박창호가 하드 캐리를 하는 구도였다.
'아! 소원이 파티를 바꾸고 싶다는 거였지.'
에릭은 신전에서 보았던 박창호의 욕망을 떠올렸다.
평소 니시다와 강풍호의 행실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걱정 마라, 다음 미궁부터는 강풍호를 제외하고 들어가게 해 줄 테니."
그래서 박창호에게 안심의 말을 건네주었다.
"그.... 아, 넵."
어딘가 석연찮은 대답이었으나, 에릭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일들이 수두룩했기 때문.
'로얄가드가 단단히 화가 났군.'
에릭에겐 코앞의 로얄가드의 분노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에릭 국장님,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신 적이 없는데...."
잔뜩 화가 난 로얄가드가 질문을 건넸는데....
그가 에릭을 바라보는 눈빛은 숫제 미친놈을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지엄한 폐하의 명을 사칭해?'
황명으로 에릭을 국장으로 대하는 것이지, 그의 충심은 황제를 향해 있었다.
군대를 일으킨다거나.
대수림을 개척한다거나.
아직 국란 회의는 진행 중인 상황이 아니던가?
"나는 일어날 일을 먼저 얘기했을 뿐이네."
그런 로얄가드를 향해 에릭이 능청스레 답을 주었다.
로얄가드 입장에서는 머리가 돌아 버릴 법한 말이었다.
"성자님이시며 국장님이시니, 제 상관이십니다. 하나, 제 근본은 황제 폐하를 지키는 검이자 방패. 명예로운 황실의 로얄가드-."
에릭은 검집에 손을 얹은 로얄가드를 빤-히 바라봤다.
'전에는 이길 각이 보이질 않았다마는....'
4티어를 개방한 지금.
에릭에게는 확신이 느껴졌다.
로얄가드, 저거 뭣도 아니다.
72화 대비 (4)
진정한 자유란 엄격한 규율과 통제에서 오는 법.
에릭은 적어도 빙의자들에 한해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민주주의건 공산주의건....'
지구에서 살아온 방식은 이쪽 세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서 더욱 강력한 통제가 필요한 거지.'
지구에는 수백 개의 나라가 있다.
각자의 국가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니고 살아온 사람들을 규합하는 일이 쉬울 리가 있나.
그런 빙의자를 한곳에 모으는 건 오롯이 에릭의 과업이다.
'GP를 모으고 경매장을 활성화하려면....'
박창호, 니시다 료, 강풍호.
세 사람으로 증명됐듯이, 자신은 빙의자들의 구심점이 될 존재였다.
그들이 신성력에 배척받지 않게 해 주고, 이 세계의 사람들과 서로 어우러지게 만들 수 있는.
하나, 아직은 황제의 눈이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상황.
달칵.
검의 손잡이를 꾹- 붙잡은 로얄가드가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이는 명백히 위협이다.
대전에서 검을 맞대 본 로얄가드였기에-.
'내가 아직도 자기 아래라고 생각하는군.'
에릭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화를 내지?"
"폐하의 명을 사칭하는 짓은 즉결 처형이 허용될 만큼 중죄에 해당합니다."
에릭은 빙의자 관리국장이다.
하나, 미궁 밖에서는 항상 로얄가드가 따라다녔다.
로얄가드는 자신의 명령에 충실했지만.
'사실은 말 잘 듣는 스토커지.'
그것도 결국 진정한 주인이 시켰기에 따르는 거였다.
"미리 일어날 일을 알리는 것이 어째서 내가 폐하의 명을 사칭하는 게 되는가?"
"-제국의 지존께서 행하실 일을 어찌 미리 예측한단 말입니까!"
로얄가드가 크게 일갈했다.
그러나, 검은 아직도 검집에 꽂힌 상태 그대로였다.
'이 정도로는 안 긁히는군.'
빙의자들은 에릭의 관리하에 있어야 한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아무리 그가 신이 되었더라도.
설령 이 사실을 모두가 인정한다고 해도.
'들킬 위험이 있으니까.'
지킬 사람이 많은 에릭이다.
언젠가는 자신을 아는 빙의자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
밖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게 된 그였지만, 안전을 위해서 숨길 건 숨겨야 했다.
발톱 하나쯤은 숨기고 있는 게 당연한 거였다.
"뽑지도 못할 것을 왜 손잡이만 붙잡고 있나?"
에릭은 특유의 조소를 머금은 채, 로얄가드를 도발했다.
목적은 그가 검을 뽑게 만드는 것.
"국장님을 모시라는 폐하의 명이 있으셨기-."
로얄가드는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 내려 하였으나.
"박창호, 폐하께서 빙의자를 위한 도시를 세워 주신다더군. 아마 내일쯤 말씀하실 거네. 이 말도 커뮤니티에 올려라."
이어지는 에릭의 말에 로얄가드의 이성이 무너졌다.
'지고한 황제 폐하의 명을 제멋대로 지어내는 무례한 놈.'
이 이상 참아 줄 수는 없었다.
에릭을 따르라는 황명은 중하였으나....
주인에 대한 모욕을 참는 건 기사로서 명예롭지 못할 테니까.
"짐은, 너희를 아낀다. 그러니 명령보다 명예를 앞서는 일이 생긴다면, 가슴을 따라 움직여라."
로얄가드로서 서임을 받는 순간.
"신념을 따라 명예를 집행하는 것이 곧 짐의 기사이니라."
황제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제 명예는 오직 폐하를 위한 명예입니다. 제 신념은 폐하의 위대함을 위해-.'
얕고 가벼운 도발이었으나.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대놓고 황명을 날조하는 에릭의 모습에 결국 로얄가드의 이성이 끊어졌다.
"놈-!"
고함과 함께 로얄가드의 허리춤에서 검날이 뽑히고.
분노함 검이 에릭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채앵-!
에릭 또한 검을 꺼내 들며 맞대응했다.
"크윽-. 네, 네놈-!"
교단의 성물, 개벽의 검.
황가의 보물, 월광검.
무기의 우위는 분명 에릭에게 있었다.
하나, 로얄가드는 검을 맞댄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토록 강건한 힘을!'
이 힘의 차이가 무기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콰앙―――――!
국장실 벽이 부서지고 로얄가드가 수용소 정중앙까지 튕겨져 나갔다.
"-어찌 단기간에 이런 경지에 이르렀단 말이냐!"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킨 로얄가드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검을 맞댄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존재가 성자라더니....'
일어난 일은 간단했다.
검과 검이 맞닿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그런 검의 깊이가 담긴 일 합을 나눴다.
'힘뿐만이 아니라-.'
검날을 예리하게 세우고 선을 그린다.
선을 따라 검끼리 맞닿은 일점에 힘을 집중시키는 단순한 묘리의 대결.
'-기술까지.'
파스슥.
부서진 벽 사이로 먼지가 흩어지며, 거대한 성기사가 나타났다.
평소의 신성력은 온데간데없고, 오롯이 육체와 검술만으로 로얄가드를 때려눕힌 에릭.
"오러를 뽑아라."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로얄가드를 내려다보며 그리 말했고.
그 조소 어린 얼굴에 로얄가드가 힘을 개방했다.
"-노옴-!!!"
로얄가드의 검에서 찬연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째앵――――!
다시 검과 검이 부딪치고 수용소 전체로 파공음이 퍼져 나갔다.
푸르른 오러가 은빛 검신을 따라 넘실넘실 춤을 추었고.
거대한 황금빛 신성이 은빛을 찢어발기며 전진했다.
"크윽-."
로얄가드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하염없이 뒤로.
'-이런 미친.'
그 바로 옆에 있던 박창호는 관자놀이를 질끈 붙잡고 몸을 웅크렸다.
그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말 그대로 자연재해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이었으니까.
온몸이 저릿-했다.
파동만으로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박창호를 짓누르는 것은 지독한 고통이다.
'뒷일을 어떻게 하려고....'
그런 와중에도 걱정이 앞섰다.
이제 막 제대로 된 사람 대접을 받겠구나 싶던 차에, 어쩌자고 황제의 측근을-.
그런데....
'우, 웃어?'
에릭의 입가에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커다란 미소가 그려져 있었으니.
게다가 눈앞에 떠오른 화면에 박창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에릭의 지시로 열어 둔 커뮤니티 창에서는 이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중이었다.
[빙의자 관리국장이 로얄가드 패 죽이는 중.]
[로얄가드를 땅으로 패대기치는 사진]
* * *
로얄가드는 이름이 없다.
그들은 황제를 위한 검이요, 때로는 방패이자, 뜻대로 움직이는 수족이나 다름없었으니.
황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존재들, 그리고 이를 말로 내뱉을 자격이 있는 강자.
그게 로얄가드였으니까.
"크윽, 대-대체!"
그런 로얄가드는 열다섯 살짜리 성기사한테 검으로 두들겨 맞았다.
전신 갑주가 우글우글 찌그러질 정도로.
"-치유."
그 뒤에는 신성력으로 완전하게 회복시켜 줬다.
넝마가 된 갑옷을 입은 멀쩡한 로얄가드.
실로 수치스러운 모양새였다.
"폐하께 전해라. 부르시면 언제라도 한달음에 달려가겠다고."
그런 로얄가드를 빙의자 관리국 문밖으로 내몰면서 에릭이 읊조렸다.
로얄가드가 쫓겨난 직후.
쿠웅-!
거대한 수용소의 철문이 닫히고.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친-.'
'로얄가드를 패?'
'대체 무슨 생각으로-.'
빙의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신들을 모아서 이런저런 일을 시킬 것처럼 굴더니, 지금 와서는 마치 폐기할 것 같은 느낌이 아니던가?
'교단이랑 제국이 갈라선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
목숨 줄을 붙잡힌 입장에서 겁을 먹는 건 당연했다.
'아니.... 그냥 미친 걸지도?'
그런 와중에 에릭의 입가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순수하게 기뻤다.
일검을 겨루고 자신보다 강자라고 느껴졌던 존재가, 지금은 한참 나약하게 느껴졌으니까.
'로얄가드를 이겼다.'
국장실로 향하는 에릭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번 싸움으로 얻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
'말 그대로 신의 몸이 됐다.'
신체를 이루며 강해진 육체의 성능을 제대로 확인했다.
순수한 힘은 로얄가드를 압도했으며, 작은 신성력으로 벽을 넘어선 강자의 오러를 찍어 눌렀다.
'올 스탯 ×10에 신성력 증폭 ×10 이 정도 옵션이겠어.'
딱 열 배 정도 강해진 느낌.
거기다가 제대로 된 4티어 신성력을 사용하고 [스킬]까지 더한다면 말도 안 되는 위력을 선보일 수 있을 테지.
"검을 맞대는 것이 곧 배움이다."
간만에 스승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배움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더니.'
강해진 능력을 깨우침과 동시에 아쉬운 부분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로얄가드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강자였으니, 당연했다.
'역시 검이 아쉽네.'
에릭은 아스티아식 중검술을 중점으로 익혔다.
어릴 적에는 체구가 왜소해서 크게 효율을 못 봤던 검술이, 지금에 와서는 아주 유용했다.
중검술(重劍術).
말 그대로 무거운 검이다.
본래는 아주 커다란 검을 들어야 했으나, 에릭의 주무장인 [개벽의 검]은 작고 얄쌍한 모양새였다.
"음-."
해결법은 간단했다.
[강화권]을 쓴다면, 검의 외형을 바꿀 수 있게 된다.
물론, [2티어] 강화까지 마쳐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대, 대체-."
한구석에서 몸을 덜덜- 떠는 박창호를 발견했다.
뭘 어쩌려고 그랬냐는 모습.
"빙의자들의 도시를 만들려면 필요한 일이다."
에릭은 덤덤하게 그리 말했다.
로얄가드와 검을 맞댄 것은 단순히 전투력을 측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로얄가드는 자신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일종의 요구 사항을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황제는 뜻을 이해할 거다.'
제국의 황제는 호쾌하며, 뭐든 심플한 것을 좋아하니까.
게다가 그 심플함 속에 숨겨진 뜻을 헤아리는 것을 즐기는 일종의 변태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족의 특징 같은 거지.'
마법에 환장하는 황녀라든가.
망나니 짓에 미쳐서 빙의자에게 몸을 뺏긴 삼황자라든가.
거기다가 전쟁터를 제집 삼은 이황자와 미궁 공략에 목숨을 내건 일황자도 있다.
'전례도 있으니까.'
일전에 알만교의 성물을 가져다줄 때 그랬지 않던가?
분명 이번에도 황제는 자신의 의중을 잘 헤아려 줄 터였다.
'내게 빚진 게 있으니, 빙의자 문제에서는 황제가 손을 떼 줄 가능성이 높아.'
에릭은 그런 의도였으나, 박창호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사고방식이-.'
그냥 무서웠다.
* * *
"-폐하!"
아직 휴회 중인 상황에, 대전에 로얄가드가 들이닥쳤다.
황제는 그들을 아꼈고, 중요한 일이 생기면 대전으로 바로 올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해 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폰, 무슨 일이지?"
로얄가드의 이름을 아는 건 황제가 오직이며, 유일했다.
"에, 에릭 국장이 반란을!"
'으음-.'
황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에릭이 반란을?
'사실이겠지만, 그의 시점에서만 사실이겠군.'
황제는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그의 기사를 훑어봤다.
그러자 짙은 흥미가 일어났다.
'잔뜩 일그러진 갑옷에 멀쩡한 로얄가드라-.'
무언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황제는 로얄가드에게 일어난 일들을 물었다.
"-검을 먼저 뽑은 점은 명백히 제 잘못입니다."
설명을 마친 로얄가드가 고개를 내리깔았다.
황제가 턱을 쓸었다.
보고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놈이 빙의자 관리국에서 황명을 날조해서 유포한 뒤에 로얄가드를 두들겨 팼다.'
-이 정도가 되겠는데.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건방진-.'
하나, 나는 로얄가드보다 강하다.
둘, 빙의자 문제에 신경 쓰지 말았으면 한다.
셋, 제국에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나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니, 그럴 자격이 있군.'
한편, 빙의자 관리국.
에릭이 로얄가드를 보내고 삼십 분쯤 지났다.
황도 제1구역에 있는 빙의자 관리국이니, 황제가 있는 대륙궁까지는 금방일 터.
"빙의자를 잘 아는 내가 관리하는 게 더 좋지 않겠나?"
그 30분 동안 에릭은 박창호에게 이런저런 자신의 생각을 알려 주었다.
그들의 생태계를 잘 아는 자신이 통제하고 관리하는.
빙의자들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주겠다는 말.
그래야 그들도 행복할 거라는 말이었는데....
'미, 미친놈-.'
박창호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동물 생태계 조성하는 것도 아니고....
에릭이 빙의자라는 것을 모르는 박창호의 입장에서는 공포에 질릴 만한 말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마음에 안 들면, 다 패 버리는-.'
장두식도 패고.
자신과 니시다, 강풍호도 팼다.
재앙급 흑마법사도 패 죽였고.
이번에는 로얄가드까지 팼다.
'이쯤 되면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 부수는 게....'
그런 생각을 하자니.
"-너희가 평범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 생각이다."
에릭의 포부를 담은 선언이 들려왔다.
"황제폐하께서도 내게 전권을 주시겠지."
그 말에 박창호는 진짜 기절할 것 같았다.
방금 로얄가드를 패서 쫓아내고 저런 말을 한다고?
뇌가 인지할 수 있는 스트레스를 아득히 넘은 느낌.
"-안정."
그런데 그때마다 에릭이 신성력으로 스트레스를 없애 준다.
'아아.... 이 신성-.'
더 미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삐이――――――.
국장실 한복판에 놓인 수정구가 소음을 흩뿌렸다.
황제와 연결된 직통 영상 마도구가 내는 소리였다.
'화, 황제-!'
박창호는 황급히 몸이라도 숨기고 싶었는데, 에릭이 휙- 하고 손을 휘저어 수정구의 연락을 받았다.
뚝.
거대한 옥좌와 함께 거친 은발을 쓸어 넘긴 황제가 나타났고.
"폐하."
에릭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잠시간의 정적.
-아득하게 강해졌구나.
그리고 시작된 대화.
-신의 총애라, 그렇다기엔 도통 말이 안 되는 속도야.
-그거 아는가? 짐은 한평생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
그것은 대화라기에는 황제가 혼잣말을 내뱉는 수준의 일방적인 소통이었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작금의 인류는 산을 베어 내고 대지를 갈라 버리지.
지고한 강자에게만 가능한 일들이었지만....
-과거 하늘을 지배하던 용종은 지금에 와서는 사냥감이 되었고, 인간을 식량으로 여기던 뱀파이어들은 사람을 피해 깊은 어둠으로 숨어들었네.
분명 인간의 힘으로 도달한 위치였다.
-신이라, 신. 생각해 보게.
-백성들은 제국에 터를 잡고 살아가다 죽는다.
-하나, 그들의 일생은 제국의 번영을 가져왔네. 그리고 자손을 남겼지.
제국의 황제가.
열다섯의 성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아주 무거운 얘기였다.
-황제는 그러한 제국 신민들의 믿음과 삶을 쌓아 만들어졌다.
강직한 어조로 뇌리에 박히는 중후한 음성.
-그래서 신이라는 작자들 또한 아득히 강해진 인간이 아닐까, 황제가 백성과 성장했듯이 그들은 신도와 함께 성장한 게지.
대화는 명백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황제로 살다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더군.
혼자 하는 말이었으나, 그것은 분명 에릭에게도 뚜렷하게 전해졌다.
-그래서,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명한 적안(赤眼)이 에릭을 향해 꽂혔다.
'제국의 황제가 신을 부정한다.'
둘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박창호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지구에서 무교였던 박창호지만, 이 세계에서 신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을 여실히 느껴 왔다.
그래서 잘 알았다.
'황제를 상대로도 굴하지 않을 거야.'
에릭은 손속이 과하되 대의를 지닌 남자다.
그러니, 제 믿음을 부정하는 황제에게도 굴하지 않을 거였다.
박창호가 그런 생각을 하자니.
쿵-.
한껏 자세를 낮췄던 에릭이 올곧게 서서는 황제를 바라봤다.
수정구를 사이에 뒀으나 두 사람이 코앞에서 눈을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금안(金眼)과 적안(赤眼)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고.
이내, 에릭이 입을 열었으니.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말은 사뭇 충격적이었다.
신의 자식, 성자(聖子)가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하하하하-!!!
황제는 광소를 터트렸다.
73화 영웅(英雄) (1)
"달이여, 내 고민을 좀 해 봤네."
미궁에 체계가 잡히기 전, 세상은 팍팍했다.
인류의 땅은 좁았고.
몬스터의 영역은 드넓었다.
강자들은 미궁을 공략해 인류를 구원하려 들었으나.
"아무리 공략대가 미궁을 막아 준다 해도 돌아온 지상이 불바다가 돼 있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남아 있는 약자들은 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지독하게 전쟁을 벌여 댔다.
"달이여, 이 폐허를 보게, 그대도 느껴지지 않는가? 내가 이 불더미를 지키려고 미궁으로 간 것이 아니거늘-."
미궁에서 돌아온 강자들은 멸망한 도시를 보며 한탄했다.
제국의 초대 황제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 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네. 들어 보게나."
그는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밤하늘의 달을 바라봤다.
"지고한 강자가 대륙을 하나로 통일해 다스린다면, 그 혈육들이 영원토록 그 땅을 지켜 준다면! 이 세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가히 천재적인 발상.
초대 황제의 눈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무슨....]
밤하늘의 달빛이 흔들렸다.
웬 미친놈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달이여-. 그 힘을 내려 어둠을 밝혀 주시게나."
초대 황제는 그런 달빛을 무시한 채 여상하게 말을 이었고.
"그리하면, 제국은 대륙을 하나로 만들어 만백성을 지키는 방패가 될지어니."
그 말은 위대한 달과 지고한 제국의 맹세가 되었다.
[황제 너는 미쳤다. 그렇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오오! 그래, 달이여, 그러면-."
[대륙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염원. 내가 너희를 지켜보겠노라.]
달은 그 꿈에 화답해 초대 황제에게 달빛의 힘을 내려 줬다.
맹세는 곧 맹약이 되어 황족의 의무를 만들었고.
"백성이 있기에 황족이 존재한다."
그 의지는 세월을 따라 자식에게 이어져 왔으니.
일황자, 레오나르도가 어릴 적 들었던 아르만 황가의 탄생 설화.
"레오, 초제 황제 폐하께서 남기신 왕관이다. 들어라, 그리고 느껴라. 이 무게는 곧 백성들의 목숨이다."
그때 아버지, 황제는 그에게 아주 무거운 왕관을 들게 했다.
'왕관이 아주 무거웠지.'
그 의미를 헤아린 레오나르도는 미궁의 공략대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황제의 첫째 자식이 짊어지는 건 미궁 공략의 의무였으니까.
그 의무를 위해 레오나르도는 기나긴 시간을 미궁 속에서 살아왔다.
"리페로제 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그가 짊어진 수호의 의무는 예상보다 빠르게 끝이 났다.
미궁에 대격변이라 불리는 이변(異變)이 발생했고, 리페로제의 도움으로 최상층을 공략한 덕분이다.
"이 은혜는 꼭, 보은하도록 하겠습니다. 달에 맹세하겠습니다!"
공략대의 수장, 일황자가 백발의 소녀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그 태도가 아주 정중한 것이.
어째 황제를 대할 때보다 더 극진했다.
"하하! 은혜를 입었으면 응당 갚아야 하거늘.... 당연한 걸 가지고 무슨 선심 쓰듯이 말하는구나."
그런 황자를 향해 주먹을 들어 올린 리페로제가 웃어 보였다.
주먹 사이로 중지 부분이 살짝 튀어나온 것이 마치 꿀밤을 때리려는 모양새였다.
움찔-.
"그, 그게...."
황자가 황급히 뒷걸음질 치며 놀라 있자.
"농담이다."
리페로제가 등을 휙- 돌리며 저렇게 말했다.
'왜 백발의 마녀라고 하는가 싶었더니....'
그녀는 괴팍했다.
제멋대로였고 황족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황자는 그녀에게 예법 따위를 기대할 생각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강했다.
그것도 아득히.
'게다가 계시인지 뭔지는 몰라도, 계층주의 모든 것을....'
황자는 리페로제의 등을 바라봤다.
그녀는 계층주의 패턴과 약점은 물론 나타날 보상의 종류까지 꿰고 있었다.
최상층의 최초 공략 보상은 압도적인 수준으로 뛰어났지만.
"내 몫은 전언을 전하면서 나의 제자에게 건네주거라."
그녀는 계층주를 사냥한 직후 보상마저 양보하고는 홀연히 떠나갔다.
레오나르도는 눈을 비볐다.
'정말 귀신에 쓰인 기분이군-.'
열다섯 꼬마한테 이런 물건을 건네주라니....
욕심이 없다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그녀의 뒷모습은 왔을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새하얀 성복과 커다란 대검.
황자가 그녀의 등을 향해 물었다.
"정말 나가지 않으실 겁니까?"
계층주가 사망한 직후, 공략대의 앞에는 거대한 비석이 솟아올랐다.
이는 계층 공략의 증거요, 최상층에서 미궁을 나갈 유일한 방도였다.
'다음 층이 개방될 때까지 미궁에 있으실 생각은 아니겠지....'
미궁 상층을 반복하는 건 인간성을 무너뜨린다.
게다가 신규 계층이 개방될 때는 공간의 괴리가 일어나 더욱이 위험하다.
황가에 전해지는 금칙 사항 중 하나였다.
"나는 그놈을 데려가야 한다."
백발 옆으로 백옥 같은 손등이 부드러이 움직였다.
나풀나풀 손을 흔드는 것이, 뒷모습이었음에도 매우 귀찮아 보였다.
이는 단호함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그러다 리페로제 님께서 척살자처럼 정신이 무너지시면-."
"이 내가?"
황자의 우려에 리페로제가 신성을 일으켰다.
쿠웅――!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십자가의 형상이 피어올랐다.
십자가에서 솟구친 여섯 날개는 리페로제를 둘러싼 채 알의 모습을 만들었고.
그 힘을 보니....
어떠한 삿된 것도 그녀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지켜 주실지어다."
그녀는 고개만 돌린 채 황자를 바라봤다.
모든 것이 새하얀 리페로제였으나, 그 눈빛만큼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으니-.
게다가 동공이 아주 확장된 것이 사냥 직전의 고양이처럼 느껴졌다.
흠칫.
'또 저 광신-.'
그 즉시, 공략대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미, 믿습니다!"
"와아아아아-!!!"
그 광신적인 눈빛에 겁을 먹고는 모두가 아스티아 신을 찬양하고 들었다.
황자 또한 그들 사이에 섞여 함성을 내지를 정도.
'지독한 신앙이군-.'
"와아아아-!!! 아스티아 님 만세!"
공략대의 함성은 리페로제가 시야에서 없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붉은 용암 위로 하얀 점이 사라진 뒤에야, 황자는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탈출 비석에 손을 얹었다.
'저런 광신자 마녀의 제자를....'
비석에 열린 포탈을 보며 황자는 그녀가 남긴 전언을 떠올렸다.
"에릭이라는 꼬마를 찾아라."
"엄청 귀여운 꼬마인데, 다 크면 아주 잘생겨질 게다. 그래서 자라나길 기다리는 중이지."
"아무튼 꼬마한테 내 말을 전해라. 기왕이면 잘 챙겨 주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황자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p. 16 영웅(英雄)
'제국에 이런 배경이 있었을 줄이야.'
황제와의 대화를 마친 에릭.
그 또한 제국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왜 그토록 대륙 통일에 집착하나 싶었더니....'
황족은 대대손손 어딘가 나사가 빠졌다.
대신 그들은 자신이 꽂힌 무언가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재능을 보였다.
미궁에 대해 면역 수준의 적응력을 보이는 일황자.
전쟁의 천재 이황자.
마법의 총애를 받는 황녀.
'간혹 삼황자처럼 망나니가 태어나긴 한다만-.'
어느 명가든 자식 한둘 중에 실패작이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이는 크게 신경 쓸 거리는 아니다.
에릭은 그보다 황제의 집념에 집중했다.
'분명 대륙통일전쟁은 일어난다.'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사실.
제국 최강 군대의 이름은 대륙통일군이며, 황제가 사는 가장 크고 호화로운 궁전의 이름을 대륙궁으로 지을 정도.
이는 현(現) 황제의 의지며, 대대로 내려져 온 황가의 목표였다.
"-전쟁이라. 필요한 일이지."
에릭은 박창호를 바라보며 그리 결론지었다.
분쟁 지대의 지독한 전쟁터.
거기서 겪은 삶은 에릭을 날카롭게 벼려 줬다.
전쟁은 잔혹하나, 필요할 때는 반드시 일으켜야 하는 무기였다.
'마침 시기도 적절하지.'
그것도 대격변 패치와 같이 세계적인 변화가 일어난 상황에는 더욱 효율적일 테니까.
"박창호, 들어서 알겠지만, 빙의자 문제도 비슷하다. 그들의 생계를 잘 아는 강자가 빙의자를 모아서 영원토록 관리한다면-."
에릭은 국장실 코너에 웅크린 박창호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너희들의 삶은 평화로워지지 않겠나?"
박창호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미친 세상....'
황제와 에릭의 대화는 심상치 않았다.
박창호는 듣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많이 들어 버렸다.
'아론인지 뭔지-.'
대제국의 후작위(侯爵位)를 지닌 자의 공개 청문회부터.
나라를 지탱하는 네 기둥 중 하나인 라핀 공작의 파벌을 뜻대로 휘두르겠다는 말에.
'대륙전쟁까지.'
평화를 위해 대륙 전체를 전쟁에 휩쓸리게 만들겠다는 미친 발언.
거기다 에릭은 황제와 비슷한 맥락으로 자신이 빙의자를 다스리겠다며 중얼거렸는데....
전쟁으로 평화를 이룩하겠다거나.
엄격한 통제와 관리로 빙의자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거나.
'너무 모순적인-.'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더욱 친숙한 박창호의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박창호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 살려-."
습관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려던 박창호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날 죽일 이유가 있나?'
지금껏 봐 온 에릭이라면 무언가 쓸모가 있어서 자신을 이곳에 뒀을 것 같았다.
그는 체구부터가 위압적이다.
또한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거침없는 것이 아주 두려운 인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빙의자들의 구원자다.
박창호를 이 세계에 배척받지 않게 만들어 줄 그런 존재.
게다가 경매장까지 지닌 이상, 에릭은 이를 사용할 빙의자들이 필요할 터였다.
하여, 박창호는 용기를 냈다.
"-제게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수억이 바라보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자답게 담대하게.
웅크린 몸을 세워 에릭을 올려다봤다.
"폐하와의 대화는 다 들었나?"
"...예."
"그러면 말이 쉬워지지. 들었다시피 미궁은 인류에게 60일의 시간을 줬다."
에릭은 박창호를 이끌고 국장실 앞으로 데려갔다.
로얄가드로 인해 무너진 벽 너머로 철창들이 가득했다.
철창 속의 빙의자들의 시선은 박창호와 에릭을 향해 있었다.
"건축 관련 종사자들, 네크로맨서 클래스를 모아서 도시 설계에 대한 기획을 만들도록."
에릭 또한 그들을 훑어보며 그리 말했다.
'미궁 공략보다 도시를 먼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었으나, 박창호는 영민하게 해야 할 말을 읊었으니.
"뭐든 해내겠습니다!"
에릭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집이 있어야 살아갈 노력도 하는 거다.'
에릭 또한 돌아갈 곳이 생긴 후에야 이 세계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 * *
"-폐하, 에릭 국장이 왔습니다."
평소였다면 황궁의 전령이 나팔을 불며 에릭의 칭호를 읊조려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 어떤 귀족도 영광스러운 입궁 알림을 들을 수 없다.
국란(國亂)에 있어 위에 선 자들이 축복을 읊조릴 수는 없는 법.
왕후장상은 물론 황제라도 마찬가지.
이는 곧 제국의 뜻이니라.
"국란 회의를 재개하겠노라."
에릭의 거대한 체구는 일순 시선을 끌었지만, 이내 모든 귀족과 관료들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뭇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황제는 손을 들어 올렸다.
투박한 주먹이 쥐어지자.
"죄인, 아론 후작을 데려오라."
검은 제복을 입은 황실 집행부들이 아론 후작을 끌고 왔다.
집행부 사이로 피폐한 얼굴의 후작이 나타났다. 다만, 의복과 몸은 온전한 형태였다.
귀족에 대한 수사는 정신 마법을 기본으로 하기에 가능한 일.
"시작하라."
아론 후작과 집행부가 대전 중앙에 도착하자, 황제가 손을 내리그었다.
그 즉시.
촤르륵.
집행부가 거대한 두루마리를 펼쳐 아론 후작이 저지른 죄를 읊기 시작했으니.
"폐하께서 직접 임명하신 빙의자 관리 국장이자 제국과 우호 관계에 놓인 아스티아 교단의 성자, 에릭의 가족을 모욕한 죄."
신변 보호를 위해 모욕의 대상이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르웰 사제.'
그녀는 제국의 성녀라 불리며 추앙받는 황도 최고의 인기인이었으니까.
대격변이라는 국란에서 민심이 향한 상직적인 존재는 중한 법이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분위기 속에서 집행부의 말이 이어지자.
"빙의자 즉결 처형법이 있던 시점부터 빙의자를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해 온 죄."
귀족들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 정도는 다들 알음알음 해 오지 않았나?
황제 바로 앞쪽에 앉은 북부 대공조차 빙의자를 이용한 사업을 대놓고 해 왔는데....
'고작 저 두 혐의로 집행부를 불렀다?'
아무리 지엄한 황명이라 해도, 납득이 안 가는 수준.
집행부의 행차는 가문의 멸문에 준하는 위기였다.
"-아론 후작에게는 정신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고위 흑마법의 관여를 의심해 보았지만...."
조사 결과를 읊조리던 집행부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들의 시선은 황제를 향했다.
마저 말해도 되는 거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
황제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고.
"후우-. 아론 후작이 빙의자로 밝혀졌습니다."
집행부에서는 아주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아론 후작은 빙의자였다.
어떻게?
'삼황자님도....'
생각해 보면 간단했다.
황족조차 빙의자였던 마당에, 후작이 빙의자일 가능성도 있을 터.
삼황자 사태 이후로 귀족과 황족에게 따로 신성 축복을 내려 본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제국은 황족 지상주의 국가였으니까.
신성력에 기대면 황제의 위세에 영향이 갈 터였다.
제국의 귀족들은 무신론자들이 태반이며, 간간히 체면을 위해 헌금 정도만 하는 수준.
'그래서 폐하께서 성자를 제국으로 받아들인....'
그쯤 되니 모두의 이목이 에릭을 향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작 팔짱을 낀 채 앉아 있는 에릭은 주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으로 후작을 노려볼 뿐.
'차예린-.'
공작의 마탑에서 봤듯이, 그녀는 빙의자다.
하나, 공개적인 처벌을 위해 에릭은 그녀를 황도로 압송한 것이다.
삼황자처럼 처분할 수는 없다.
에릭은 그녀의 공개 처벌을 바랬으니까.
[차예린 / Lv.87]
[클래스: 마법사 – 원소술사]
[고유 특성: 심상구현(具現)]
그의 영혼은 한국인 여자며, 2차 전직까지 마친 걸로 보아 최소 빙의 몇 년 차는 되어 보였다.
다만, 문제는 레벨.
미궁에 들어가지 않고서 저 레벨을 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아론 후작은 '살인의 쾌락, 학살자'와 같은 민간인을 죽여 얻는 칭호도 없었으니까.
즉, 현지의 귀족들이 그의 레벨링을 도와줬다는 말이 된다.
'제국이 이 수준이면 타국은 말할 것도 없겠어.'
에릭이 걱정하던 현실이 도래하고 있다.
빙의자들의 문명과 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뒤섞이기 시작하겠지.
빙의자를 도와 이득을 취하는 귀족도 많아질 거고.
'저놈이 동탄 미시룩을 풀어 놨다.'
빙의자 관리국장인 자신의 사람에게 빙의자들의 옷을 보낸 아론 후작.
처음에는 이를 빌미로 제국의 거대 파벌인 마도 연합에 대한 견제 정도를 의도했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론 후작에 대한 의심은 커져 갔다.
'라핀 공작-.'
공작의 마탑을 보아하니, 조력자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고작 마법으로 재현했다고 보기에는 자동화 마도구 공장의 설비와 시스템이 아주 대단했으니까.
'제국 전체의 생활 마도구를 만드는 공장.'
실제로 공장을 운영해 봤거나, 그에 준하는 지식이 있어야 구현이 가능한 규모였다.
'귀족들 사이에 빙의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삼황자와 아론 후작이 그랬듯이, 높은 위치의 인물들은 빙의자 심문을 받기가 어렵다.
커뮤니티만 봐도 제국 정보부에 있다거나, 그런 말들이 왕왕 나오지 않던가?
"허어. 황자 전하에 이어서 후작까지!"
"이게 무슨...."
"자, 잠깐. 자네 요즘 행동이 이상하지 않았나?"
"이보게, 요르흰 백작. 치사하게 파벌로 그러긴가?"
"마도 연합의 삼인자가 빙의자라는데, 연합의 중진인 자네를 의심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소란스러워진 대전.
라핀 공작의 파벌, 마도 연합을 향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황제는 이를 수습할 생각이다.
"-그만."
소란은 멎었지만, 서로를 의심하는 눈초리는 여전했다.
특히 마도 연합 파벌 쪽이 심각하게 의심의 눈초리를 샀다.
"자네들의 걱정은 이해하겠네. 다만 에릭 국장에게 해결책이 있다니 다들 들어 보지."
황제의 한마디 말에 모두의 이목이 에릭을 향했다.
맨 앞줄, 제국의 관료들이 앉는 자리에서 에릭이 몸을 일으켰다.
싸아아아아―
그는 찬란한 신성을 일으키며, 귀족들을 바라봤다.
"폐하의 허가하에, 제국의 귀족 여러분께 신성의 축복을 나누고자 합니다."
말이 축복이지, 숫제 사상 검증을 하겠다는 느낌이었다.
74화 영웅(英雄) (2)
제국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바로, 지고한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만인지상의 위치에 놓인 황제였으니 당연한 말이다.
얼마나 당연하냐?
제국법에는 황제와 관련된 법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욕죄도 없다.
굳이 문서로 남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제국에서 황제란 절대적인 존재였기 때문인데....
'폐하가 이를 허하셨다니-.'
오늘 그 전제가 깨졌다.
제국의 귀족이라 함은 황제의 신하들이다.
그런 자들에게 교단의 성자가 신성력으로 검증을 하겠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머리를 대시지요. 직접 머리에 접촉해야 축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거대한 사내가 찬란한 빛을 뿌리며 귀족들의 앞을 거닐었다.
그 북부 대공조차 주저 없이 머리를 들이미는 통에, 그보다 작위가 낮은 자들이 함부로 이를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축복."
심지어 축복 기도조차 건성이다.
신실함은커녕, 그냥 툭툭- 내뱉는 수준.
귀족들은 일종의 모멸감을 느꼈다.
'저, 저따위로 축복을 읊어 대는 놈이....'
에릭을 향해 점점 따가운 눈초리가 몰려갈 때쯤.
"-가, 감히! 폐하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냐!"
한 귀족이 자신의 차례에서 호통을 쳤다.
'오, 결국 남부 귀족이 먼저 나섰군.'
기다란 갈색 머리칼을 지닌, 남부의 여백작, 로벤 아일란이 그 주인공이었다.
무력은 한미하나 재력은 남다른 것이 제국 남부 귀족의 특징으로.
제국의 식량을 책임지는 자들답게 콧대가 높았다.
그녀는 에릭을 향해 쏘아붙이듯이 소리쳤다.
"나이도 어린놈이! 어! 제국의 귀족을 뭘로 보고!"
"쓰읍!"
에릭은 삿대질을 하는 로벤 백작에게 짧게 일갈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꺄아앗-!!! 감히 귀족의 몸에 함부러 손을 대려 하느냐!"
그 손길에 로벤 백작이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팔로 가슴을 감싸는 것이 마치 성추행을 당한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소음에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어, 어딜 만지려고-! 이 음흉한 놈이!"
에릭의 승모근이 꿈틀거렸다.
하나,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 슬쩍-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도 황제는 에릭의 손을 들어 줬다.
"짐의 명령을 어기면서 황제의 권위를 논한다라. 로벤 백작, 참으로 모순적인 말이 아닌가?"
황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 물었다.
로벤 백작은 꾹- 입을 닫았다.
'흐음-.' 황제가 턱을 쓸며 느긋하게 중얼거리자.
"으으으...."
로벤 백작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머리칼이 쭈뼛쭈뼛 서서 사자의 갈기처럼 솟구쳤다.
하나,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 전에 에릭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머리통을 꾸욱- 짓눌렀기 때문.
쿵!
다시 의자에 앉은 로벤 백작.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에릭은 옴짝달싹 못 하게 손에 힘을 꾹- 주고서는 투박한 두 글자 말을 읊조렸고.
"-축복."
그의 손끝에서 미약한 신성이 일어났다.
그 즉시.
"꺄아아악-!!!"
로벤 백작이 몸을 뒤틀며 괴성을 질러 댔다.
머리 위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 나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그녀 입장에서는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운 좋게 남부 귀족으로 빙의한 덕에, 수도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녀다.
하나, 대격변 패치로 국란 회의가 개최되었고 그녀는 귀족의 의무를 위해 수도까지 가게 되었다.
'재수도 없지-.'
로벤 아일란 백작, 아니 빙의자 강서현은 스스로를 한탄했다.
'하필 이 시점에 성자를 만나서....'
그냥 게임 좀 즐겼을 뿐인데, 그녀는 대뜸 게임 속 세상으로 끌려갔다.
빙의 후 먼치킨은커녕 들키면 대륙 공적 취급을 당하면서 화형당하는 세상이었다.
"저, 저는 지, 진짜 억울합니다! 흐으으윽."
강서현은 필사적으로 살았다.
정보를 규합해 빙의한 육체의 습관이나 행동을 파악하고.
아랫것들과의 대화로 최대한 부자연스러움을 없앴다.
운도 좋게, 로벤 백작의 일기장을 발견해서 그의 본심이라든가, 숨겨진 비밀까지 알게 되었다.
'영지 경영도 필사적으로 했는데-.'
굵은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마침 빙의자 수용소에 관리자 직급이 필요한 참이었다."
하나, 에릭은 그녀의 억울함을 무시했다.
그저 싸늘한 한마디 말을 내뱉을 뿐.
에릭이 말을 마친 직후, 검은 제복을 입은 집행부가 그녀를 끌고 갔다.
남겨진 귀족들을 꿀떡- 침을 삼켰다.
'저, 저게 무슨....'
진짜 빙의자가 나왔다고?
마법사로 이뤄진 마도 연합의 삼인자, 아론 후작에 이어 무력이 한미한 남부 귀족까지 빙의자라니.
그 말인즉슨.
빙의자 사태에 파벌이 의미 없어졌다는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저놈, 뭐가 바뀐 것 같은데?'
모두가 옆 사람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다음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에릭은 속도를 올렸다.
충분히 무게를 잡았으니, 이제는 속전속결로 빙의자만 쏙쏙 골라 낼 생각.
에릭은 성큼- 몇 사람씩 건너뛰면서 특정 인물을 지목했다.
그의 눈빛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으니.
'둘만 더 잡으면 끝이네.'
종횡무진 귀족들 사이를 누비는 에릭.
빙의자 색출 작업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에릭은 빙의자의 상태창을 꿰뚫어 볼 수 있으니까.
"아아악-! 어쩌다!"
"하아.... 하느님-."
집행부에 끌려가는 나머지 빙의자들을 보며, 에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빙의자가 셋밖에 없다는 건 다행이지만....'
제국의 전(全) 귀족이 모인 자리.
적발된 빙의자 수가 예상보다는 적었다.
하나, 여태껏 셋이나 들키지 않았다는 건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시사했다.
적발된 빙의자들의 공통점은 둘.
적발된 그들이 전부 남부 귀족이라는 사실과 빙의 후 최소 1년 이상이 지났다는 것.
'커뮤니티 때문에 몸을 사리는 법을 빨리 배우는 거야.'
영지 경영을 하면서 들키지 않는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하물며, 경영만 하는 귀족이 남부의 귀족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다음 안건을 시작하지-."
황제가 곧바로 국란 회의를 재개했다.
빙의자를 적발한 건 그대로 끝.
이제 논의할 것은.
"라핀 공작과 마도 연합의 부정에 대한 처분을 발표하겠노라."
아론 후작을 방치한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 * *
"...그, 로벤, 아니 강서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박창호입니다."
로벤 백작으로 살던 강서현은 실로 오래간만에 문명인다운 대화를 시작했다.
"호, 혹시 펜싱 선수 아니셨어요? 그, 와플 폰 광고 찍으셨던."
"아, 알아보시네요.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 같은데...."
"그럼요. 저 별스타 팔로우도 했어요!"
집행부에게 끌려와 결박당한 채 2평 남짓한 철창 안에 갇혔음에도, 강서현은 살아 있음을 느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박창호와 나누는 소소한 대화 덕분이다.
"그, 서현 씨는 직업이?"
"나, 남부 백작령의-."
"아니, 지구에서요."
"죄송해요! 거의 강박적으로 외웠더니-. 후우. 저는 뭐. 소소하게 작은 사업 했어요."
"오오-. 싸장님?"
"말이 사장이죠. 대박도 아니고 그렇다고 쪽박도 아닌, 그냥 먹고 살 만큼 버는 작은 컨설팅 회사였어요."
두 사람은 마치 지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박창호가 느끼는 감상은 더욱 진했다.
'귀족으로 살다 온 사람은 다르네.'
매일같이 신세 한탄만 늘어 두던 수용소 동료들과는 달리, 그녀와의 대화는 정말 신선하게 느껴졌다.
니시다 료만 해도 지금 근신 처분을 받고 독방에 갇힌 상황이 아니던가?
'풍호도 그 사제님한테 불려 간 상황이고....'
니시다보다 낫다뿐이지, 강풍호도 특이한 면모가 있기는 마찬가지.
그런 와중에 이런 정상적인 지구인, 그것도 대한민국 사람과의 대화란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았다.
박창호는 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사장님이죠."
"에이~. 와플 광고까지 찍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랑 같나요?"
서로 금칠을 해 주며 친목을 도모하던 중.
문득, 강서현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 생각해 보니까 빙의하고 동양인은 처음 보네요!"
"아, 하하. 그렇죠."
박창호는 얼떨떨함을 느꼈다.
"거참, 노란 인간은 또 처음 보는구만."
어떻게 사람이 노란색이냐며 볼을 잡아당기던 장두식과는 천지 차이의 반응이었다.
"와, 저도 진짜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빙의자 외형 변경권이라고-."
"아아! 그거 커뮤에서 봤어요. 진짜 지구 모습으로 돌아가는구나."
"그렇죠."
서글서글한 박창호를 보며, 강서현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러면 그.... 호, 혹시, 신성력에 인정받는다는 것도 진짜에요?"
커뮤니티 여론은 반신반의.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런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빙의자가 신성력에 인정받는다는 건, 고작 [사진] 인증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 인증이란 게....
"아, 안 그래도. 정신병자 같이 글을 써서 작성자는 지금 독방에 갇혀 있습니다."
"그, 그래요?"
강서현은 살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전에 봤던 인증 사진 중에, 분명 박창호가 쓴 글이 있지 않았나?
'저 사람, 겉만 멀쩡하고 속은 이상할지도....'
니시다가 그를 사칭한 것이었으나, 이를 모르는 강서현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할 법했다.
슬쩍- 철창에서 물러난 강서현.
'역시, 주인공이 어쩌고 하는 개소리를 믿긴 어렵겠지.'
박창호는 자기 나름대로 그녀의 반응을 해석하며, 재빠르게 진실을 알려 줬다.
"그럼요. 저 진짜 신성 축복도 받을 수 있어요."
이어지는 박창호의 행동을 본 강서현은 입이 쩍- 벌어졌다.
"와아...."
좀 전까지 그를 의심하던 것도 잊어버릴 만큼 놀랐다.
"크으. 성수가 진짜 맛있어요. 정보부에 잡혀 가서 고문당할 때는 몰랐던 건데...."
말을 마친 박창호가 성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기 때문.
그냥 원샷을 때려 버렸는데.
"보세요. 괜찮죠?"
그는 정말 멀쩡했다.
심지어 한 병 더 까서 마시고 싶어 하는 눈치.
'부럽....'
강서현이 멍-하게 박창호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 그래서. 에릭 국장님이 서현 씨한테 따로 시키신 일이 있을까요?"
박창호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뭐 경영 이런 걸 맡기시려나-.'
귀족의 신분으로 살아온 빙의자는 매우 드물었으니까.
그런 박창호의 질문에 강서현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아, 그 개새끼!"
"예? 뭐요?"
"에, 에릭 그 망할 놈만 아니었어도, 내가 들킬 일은-."
함께 험담이나 하려 했던 강서현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말을 멈췄다.
철창 밖을 바라보자.
"감히-!"
박창호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조, 조울증인가?'
좀 전까지 하하호호 하며 떠들더니, 갑자기 180도 변해 버린 태도에 그녀가 의아함을 느끼기도 잠시.
스윽-.
철창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가 뭐라고?"
찬란한 휘광을 꺼내 들며 에릭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 아직 국란 회의 중인데 어, 어떻게...."
제국의 국란 회의는 절대적이다.
하물며, 에릭은 수많은 안건들과 직접 엮여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왜, 벌써 밖으로-.'
강서현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쳐 봤으나, 2평짜리 감옥 속에서 그녀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쯧, 관리직 대신 미궁 공략을 시켜야 하나-."
다행히도 에릭은 그녀에게 관심을 꺼 버렸다.
겁에 질린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에릭은 박창호에게 시선을 돌렸고.
"박창호, 인원 선별은 끝났나?"
"옛! 네크로맨서 클래스 13명, 건설업 종사자 9명을 모집했습니다!"
각 잡힌 군인처럼 차렷 자세를 유지한 박창호의 보고가 이어졌다.
그의 말에 에릭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전원 소집해서 나갈 채비를 한다."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아무런 말도 없었고 박창호 또한 어떠한 질문도 건네지 않았다.
'빙의자들을 데리고 나간다고?'
이를 바라보는 강서현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드르르륵.
수용소 철창이 열리고 박창호는 선별된 빙의자들을 모아 수용소 중앙으로 소집했다.
하나둘 걸어가는 빙의자들은 들뜬 표정이었다.
"지, 진짜 밖으로 나간다고?"
"네크로맨서가 빛을 보는 날이 오는구나...."
들뜬 빙의자들을 보며, 강서현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뭔데 저렇게 좋아해? 아, 좀만 조심해서 말할걸-.'
괜히 귀족처럼 허세나 부리다가 첫인상을 망친 것에 강서현이 한탄하고 있자니.
"음-. 강서현도 데려오도록."
"예! 알겠습니다!"
에릭이 마지못해 그녀를 불러들였다.
* * *
드높은 성벽 아래로 어두침침한 풍경이 펼쳐졌다.
더러운 냄새와 그림자가 드리워진 뒷골목, 퀴퀴한 지하도에서는 제1구역부터 흘러 내려온 오수가 흘러넘쳤다.
코를 틀어막아야 할 악취로 가득한 장소였으나.
"와아-!!!"
빙의자들은 열광했다.
마치 로또 청약에 당첨된 사람처럼 한껏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 창호 씨, 이게 진짠가요? 이렇게 넓은 땅을-."
"에릭 국장님의 말은 진리입니다."
강서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오염된 땅을 보며 희망을 느꼈다.
제5구역, 황도 아르만에서 가장 더럽고 낮은 땅이지만, 면적만큼은 최대를 자랑하는 장소.
"지, 지평선 끝까지 빙의자들의 도시를 짓는다고요?"
"제가 듣기로는 제5구역의 4분지 1 정도를 어스타운으로 만든다고 하더군요."
그 제5구역의 서쪽은 전부 에릭의 땅이 되었다.
넋이 나간 빙의자들을 보며, 에릭은 이제부터 진정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화통한 덕분이지.'
그동안 에릭은 제국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해 줬다.
물론, 자신 또한 얻을 게 있으니 그리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에릭에게는 대의가 있었다.
그가 헤쳐 나간 일들은 하나하나가 죄다 굵직한 사건들이었다.
황제는 이를 알아주는 대범한 사내였기에.
"땅과 권력 그리고 돈을 원한다 했나?"
회의의 휴식 시간에 황제는 에릭을 불러서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결과.
'수도의 한 구획을 통째로 주다니-.'
그는 지평선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땅의 주인이 되었다.
본래의 계획은 황족 직할령으로 수도 옆에 빙의자의 도시를 세우는 거였다.
하나, 에릭이 워낙 큰 공을 세운 덕에 황도에 땅을 얻게 되었다.
'수도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지구로 따져 볼 때, 최소 은평구와 마포구를 합친 영토의 주인이 된 것과도 같았으니.
에릭은 제도(帝都)에 실질적인 영토를 보유한,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책임 없는 권력까지 얻었고.'
황제는 에릭에게 하사한 땅에 준하는 권력까지 내려 줬다.
즉, 이제 에릭에게 거리낄 것은 없어졌다는 말.
쿠웅-.
에릭은 한 걸음 내디뎠다.
성벽 아래로 보이는 제5구역의 풍경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저기까지 아파트로, 이쪽에는 상가를....'
에릭의 눈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스윽-.
꿈에 부푼 에릭이 손을 들어 올리자, 조금 전까지 감탄을 늘어 두던 빙의자들이 곧장 오와 열을 맞춰 도열했고.
에릭은 그들을 향해 당찬 포부를 알렸다.
"지금부터 우리는 제국 황도 제5구역의 재개발을 시작한다."
미궁에서 나오고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
에릭은 대지주(大地主)이자, 황도 특별 구획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
75화 영웅(英雄) (3)
"김 집사, 왜 그렇게 전전긍긍 애닳는 얼굴인가?"
황제의 명으로 보물고에 다녀온 김 집사는 똥 마려운 개처럼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고.
그에 황제는 너그러이 그에게 질문을 허락했다.
"너, 너무 과한 상이 아니신지요."
황제가 에릭에게 내준 보상들은 하나하나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런 거액을....'
김 집사는 방금 전 황제의 지시로 마지막 보상을 가지러 보물고에 다녀왔다.
그래서 결단할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보상을 주기 전에 폐하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이다.
"뭐가 과하단 말인가?"
하나, 황제는 그런 김 집사의 우려를 매몰차게 무시했으니.
'제가 감히 폐하께 충언을....'
김 집사는 황제의 충신이다.
해야 할 말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충신이 아니던가?
"아무리 그가 제국을 위해 많은 것들을 해 줬다지만...."
황도의 주인은 황제가 유일하다.
한데, 황제는 일부를 똑 떼서 에릭에게 하사했다.
그것도 5구역의 한 구획을 통째로.
"거기에 달의 편린까지 내려 주셨는데...."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다.
제국에서 아주 큰 권력의 상징인 위대한 달의 조각을 나눠 주기까지 했다.
이것만해도 과한 보상이었다.
한데, 황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니-.
'보물고까지는 지나친 보상이옵니다.'
뭐든 과하면 독이 된다.
하물며 에릭은 생긴 것과 다르게 한참 어린 나이였다.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이룬 성공은 인성을 무너트리기 마련이지요.'
그러다 망가진 귀족 영애와 영식들이 몇이던가?
아직은 바로잡을 기회가 있을 터였다.
그래서 김 집사는 오래간만에 황제의 뜻에 반하는 말을 내뱉었다.
"소신의 생각으로는.... 황도의 일부에 달의 편린까지 주셨으니, 이미 충분히 과한 보상인 것 같습니다. 부디! 마지막 보상은 재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 집사는 보물고에서 엄청난 거금을 챙겨왔다.
황제의 말로는 이 돈도 에릭에게 건네줄 보상이라고 하는데-.
"전쟁을 앞두고 이렇게 큰돈까지 주시는 건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옵니다!"
대영지의 연 예산에 준하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물론 거대한 제국의 입장에서는 큰 출혈은 아니었지만, 시기가 시기였다.
'정복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이런 거금을....'
앞으로 전쟁에 들어갈 군자금을 생각하면, 아주 큰 지출이 예상되는 상황.
김 집사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쟁이란 건 끝나기 전까지 무한정 소모만 이뤄지는 그런 일이었으니까.
"하하-! 김 집사, 이게 과하다고 느껴지는가?"
그런데도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어 보일 뿐.
김 집사는 속이 타들어 갔다.
평소에 비해 황제의 업무가 많이 늘어난 상황.
그래서 이렇게 과한 판단을 내리신 것이 아닐까?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너무 많구나.'
김 집사는 황제의 집사다.
말이 집사지 그가 담당하는 일들은 아주 많았다.
황명을 전달하는 서류를 만든다거나, 각종 대소사를 논하는 사안을 추려서 정리한다거나.
혹은 황제가 내리는 보상을 전달하는 것도 김 집사의 일이었다.
거기다가 각종 행사의 의전은 기본이요, 황제의 평소 의복과 식사까지 도맡아 관리하는 것이 김 집사의 일이다.
'에릭 국장 때문에 폐하의 일이 너무 많아지셔서....'
그런 김 집사였기에 아주 잘 알았다.
황제가 과부하에 걸릴 법도 하다는 것을.
평소 황제는 국정을 재상에게 일임하고 옥좌를 지키며 제국의 안녕을 바라보는 걸 즐겼다.
그런 황제가 앞장서서 수많은 일들을 해치워야 했으니, 판단력이 흐려질 법도 하지.
"폐하-."
김 집사는 황제에게 잠시 후 재개될 국란 회의를 미루고 휴식을 간언하려고 하였지만-.
"-김 집사, 내가 과하다고 느껴지는가?"
덤덤하게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게 되었다.
황제를 한평생 모시고 산 김 집사는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지고한 뜻이-.'
좀 전까지의 우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고고하며 위엄 서린 목소리가 황제의 의지를 표명했으니.
에릭에게 과할 정도로 보상을 퍼 준 황제에게는 과연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인가?
김 집사는 귀를 쫑긋 세우고 황제의 말을 기다렸고.
"에릭은 성자지. 아스티아 교단의 인물이란 말이네. 다들 여기에 눈이 멀었더군."
황제는 굳건한 눈빛으로 김 집사를 내려다봤다.
"신성력을 다룰 뿐이지, 그의 본질은 성직자와는 전혀 다르다."
황제가 에릭에게 제국 탄생의 비화를 알려 줬을 때.
'그가 다루는 힘이 신성일 뿐.'
에릭은 자신은 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적 없다는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신 또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여기더군."
신상심도 없는 놈이 말도 안 되는 신성을 지녔다.
세상에 출현한 적이 없는 괴상임은 분명했으나, 황제는 그러한 일들을 잘 알았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는 달의 힘을 다루셨다."
최초로 달을 움직였던 황가의 시조(始祖).
"대륙의 삼신은 신성이란 힘을 처음으로 창시했네."
타인을 치유할 수 있으면서도 흑마법사과 몬스터에게 치명상을 주는, 신성력이라는 새로운 힘을 창시한 세 명의 신.
"최초의 흑마법사는 마왕이라 불렸으며, 실존하지 않는 악마를 만들어 냈지."
본래, 세계의 최초라는 건.
말이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세상은 그런 최초를 이룩한 자들을 영웅 혹은 마왕이라 불렀네. 아, 때로는 신으로 불리기도 했군."
영웅 혹은 마왕.
위대한 칭호에는 그에 걸맞은 업적이 따르는 법.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황제가 김 집사에게 묻기를.
"김 집사, 자네가 볼 때 에릭 국장은 어느 쪽일 것 같나?"
"그가 구원자라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 그가 걸어온 길은 영웅의 길일세."
황제는 영웅을 키우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영웅은 일반인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존재다.
그런 자들을 다루는 법은 간단했으니.
"위대한 업적에는 합당한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
아낌없이 주는 것.
그게 바로, 황제가 아는 영웅을 키우는 방법이다.
* * *
4구역 성벽 위에서 5구역을 내려다보던 에릭이 강서현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그래서 어디에 건물을 먼저 올리는 게 좋겠나?"
"그.... 제, 제가 볼 때는 4구역과 연결된 성벽에 붙여서 짓는 쪽이 가장 안정적일 것 같습니다."
강서현은 소름 끼친다는 듯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내, 내 특성을 어떻게?'
그녀는 [고유 특성: 측량(測量)]을 지녔다.
게임 속에서는 길드홈을 짓거나, 미궁 밖에서 이뤄지는 영지전에서 방어진을 구축할 때나 가끔씩 쓰이는 특성으로.
딱히 좋은 인식은 아니었다.
'보통은 특성 뽑기로 교체하는 편이지만....'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특성의 재설정이 어려웠다.
캐시템을 살 방법도 없고, 상위 전직을 할 때나 한두 번 기회가 주어지는 수준.
'애초에 나는 빙의자인 걸 들킨 게 처음인데....'
사실, 그런 인식보다는 특성 자체를 간파당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일으켰다.
강서현이 빙의자임을 들킨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물며, 커뮤니티에도 자신의 정보를 올린 적 없었다.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아본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서쪽 구획으로 삐져나온 집들이 제법 많군. 경계선은 정확한가?"
겁에 질린 강서현을 향해 에릭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녀의 특성은 상시 발동형으로 마력이나 오러 등 어떠한 소모값도 없다.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는 그냥 생각만 하면 자동으로 대지 면적이라던가 건물의 초안 같은 것들이 3D 그래픽으로 떠오르는데-.
"저 판잣집은 북쪽 구획입니다."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없으므로, 이를 설명하는 건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구획 정리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주민들이 다 빠지면 곧장 재개발에 들어갈 예정이다."
에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에서 별로였던 특성이 현실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제법 많네.'
박창호의 제육감이라든가.
니시다 료의 즉사 감지라든가.
이번에 발견한 [측량] 역시 매우 효율적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은 빙의자 강서현이 어떤 능력을 지닌 인물인지 확인하는 것.
들키지 않을 정도로 영지 경영을 잘한 만큼, 그와 관련된 일을 해 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강서현, 지구에서는 무슨 일을 했지?"
"...그-."
강서현은 잠시 고민을 했다.
상태창을 꿰뚫어 보는 존재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자신의 직업을 이 야만 세계에 맞춰서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 고민이 들었을 뿐.
'경영 컨설턴트를 뭐라고 설명하지?'
일종의 자문업.
그녀는 회사나 관공서를 상대로 경영 시스템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개선점을 전달하는 전문적인 컨설팅을 해 왔다.
심지어 유능했다.
해외 유명 기업에 소속되어 있다가 한국으로 와서 독립된 회사까지 차린 능력자였으니까.
'...영지 컨설턴트? 아니, 컨설팅 자체가.... 영지 자문관?'
그러나 이 세계에 경영 컨설턴트 같은 직종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못하는 일은 잘하는 사람을 시키는 것이 귀족이나 유력가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평민 중에서도 유능함을 보인다면 등용해서 쓰는 게 대부분.
그런 고민에 잠겨 있자니.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에릭 국장님께서는 그 누구보다 빙의자들을 많이 연구하신 분이니까요."
박창호가 그런 말을 건넸다.
조금 이상한 말이었으나, 강서현은 그를 믿고 에릭에게 자신의 직업을 알렸다.
"경영 컨설턴트였습니다. 그 사업체나 영지 같은 곳을 분석해서 문제점을-."
"오, 마침 딱 좋은 직업이군."
강서현의 말을 끊은 에릭.
그는 그녀가 귀족으로서 들키지 않고 살아남은 비결을 이해할 수 있었다.
'들키지 않은 게 다가 아니지. 영지가 성장세였다고.'
지구에서의 능력을 이미 현지에서 증명한 셈.
"강서현, 네게 새로 지어질 어스타운의 관리직을 맡기지."
도시경영?
에릭은 그런 잡무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
그에게 있어 빙의자들의 도시, 어스타운은 GP 생산 공장이자 지구인들을 보호하고 살아가게 해 줄 터전일 뿐.
'한국인들은 땅이랑 집만 있으면, 무조건 적응할 거야.'
아파트까지 지으면 금상첨화겠지.
에릭은 빙의자들에게도 집으로 여길 장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내 집은 여기가 아니지만-.'
그는 5구역을 빠르게 철거하고 재개발에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 바로 다음 일들을 처리할 생각이다.
그래서 실무진을 소집했다.
무려, 네크로맨서로 이뤄진 빙의자 집단.
"저, 정말로 저희를...."
네크로멘서 빙의자들은 에릭을 보며, 정말 감동한 듯이 고개를 숙였고.
에릭은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알렸다.
"너희는 선택받은 존재들이다."
네크로맨서.
게임 속에서는 3차 전직을 마치기 전까지 별 볼 일 없는 클래스다.
심지어 3차 전직 후에도 겨우 1인분을 하는 수준.
현실 세계에서도 비슷하다.
네크로맨서를 유사 흑마법사 취급 하면서 배척하는 기조가 강하다.
그런 폐급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클래스였으나, 에릭은 이들에게서 가능성을 보았으니.
'일종의 건설 장비 같은 거지.'
열댓 명의 네크로맨서 클래스들이 소환한 스켈레톤을 바라보며, 에릭은 그런 감상을 느꼈다.
이게 무한 동력이 아니고 뭐겠나.
"저, 정말로 저희한테 쓸모가 있다고...."
인식 탓에 모험가 길드에 가입조차 못 한다는 네크로맨서 클래스.
하물며 같은 빙의자들도 허접네크라며 무시하는 판국에.
"곧 철거를 시작할 거다. 새로운 도시를 지으면서 너희의 가능성을 느껴라."
그들에게 유일하게 쓸모를 주장하는 거대한 사내.
에릭은 네크로맨서 빙의자들의 희망이 되었다.
* * *
"그, 창호 씨."
강서현이 조심스레 박창호를 불렀다.
"네?"
"재개발을 바로 시작하신다는 게 무슨 말이신지...."
아래로 보이는 5구역의 서쪽 구획은 북새통이 따로 없었다.
제국 치안대가 빈민가의 거주민들을 불러내 다른 구획으로 몰아넣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인데.
밀려 나온 주민들 때문에 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주민들 내쫓는 데만 한나절은 걸릴 텐데....'
수도의 마지막 성벽인 제5구역의 대성벽을 지키는 병사들까지 나와 쫓겨난 주민들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데 동원될 정도였다.
"살던 사람들을 쫓아냈으니 빨리 새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시더군요."
박창호는 그리 말했으나, 에릭을 처음 보는 강서현의 입장에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울의 어지간한 구만큼 커다란 구획을 재개발한다는 계획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도....
"그, 그걸 어떻게-."
저 넓은 땅을 지금 바로 밀어 버리겠다는 에릭의 발언.
심지어 밀자마자 새 건물을 올리겠다는 말이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에릭 국장님을 보십쇼."
박창호가 손을 뻗어서 하늘 위를 가리켰다.
날개를 뽑아 든 에릭이 공중에 떠서 이리저리 손을 휘젓고 있었다.
그걸 보니 강서현의 의문은 더욱 커져 갔다.
'제정신인가?'
대마법사가 메테오를 써도 될까 말까 한 규모.
하물며 메테오를 써도 큰 문제다.
바로 옆 구획으로 따닥따닥 빈민가가 이어져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큰 피해가 일어날 터였다.
하물며 아직 주민들도 남아 있지 않나?
강서현이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에릭님께서 된다고 하면 되는 겁니다."
박창호가 이상한 말을 꺼내 들었다.
눈빛이 살짝 맛이 간 것이 약간 광신적인 모습이 느껴졌다.
그에 강서현은 하나의 확신을 얻었다.
'역시, 커뮤에 주인공 어쩌고 한 놈이 박창호가 맞네.'
반면, 박창호도 강서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의 불경한 얼굴의 보아하니, 아무래도 첫인상과는 다르게 문제가 많아 보였다.
'귀족으로 살아서 그런지 더 이상한 면이 많은 것 같기도.'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본 판국에, 에릭을 향해 저런 태도를 내보인다는 것이....
그녀도 신전에 가 보면 느끼게 되겠지만.
'원래의 나는 죽었고....'
신전에서 다 봤다.
지구에서 이뤄진 자신의 장례식.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확신.
죽음과 생을 아우르는 위대한 일들을 겪지 않았던가?
게다가.
'아-. 이 청량감. 마음의 안정!'
술술- 잘 통하는 신성력이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박창호가 하늘에서 풍겨 오는 신성의 잔향을 음미하고 있을 때.
"으윽-!"
강서현이 비명을 질렀다.
옆을 바라보니 다른 빙의자들도 고통스럽다는 듯이 성벽 뒤편으로 몰려갔다.
'아, 저 사람들은 이걸 못 느끼겠구나.'
싸아아아아아.
수도 제4구역과 5구역 사이.
푸른 창공을 가르고 에릭의 황금 날개가 펄럭였다.
그 잔향이 성벽 위까지 흘러 들어올 정도.
'이것이 바로 세계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박창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렸다.
그런 그의 옆으로 풍성한 갈색 머리칼이 스쳐 지나가고.
"아, 아직 시민들이!"
강서현이 다급히 박창호를 바라봤다.
치익- 그녀의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나는 상황.
"저, 저 사람! 대체 무슨 짓을!"
그런데도 그녀는 시민들을 걱정했다.
그 에릭이 일반인들을 해칠 리가 없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슨 메테오를 뿌리려는 것처럼 보이겠네.'
박창호는 그녀에게 안도의 말을 건네줬다.
"에릭 국장님은 성자이십니다. 그분이 일반 시민들을 해칠 리가-."
하나,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으니.
쿠웅-.
창공을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금색 구체.
'어?'
성벽 위로 드리워진 거대한 둥근 형태의 그림자.
미궁에서 몬스터를 쓸어버리던 그 거대한 유성우가.
"저거 메테오 아닌가요?"
제도의 하늘 위로 떠올랐으니.
'작은 태양 같은....'
어째, 미궁에서 봤을 때보다 더 커진 느낌이 들었다.
"어, 어어?"
근데 문제는 그게 계속 커지고 있다는 건데.
"저, 저거 떨어지는-."
76화 영웅(英雄) (4)
미궁 광장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점점 높은 층의 생존자들이 나타나는 상황.
대격변 패치라는 세계를 휩쓴 비보 속에 피어난 한 줌의 희소식이었다.
"오오! 장군! 이번에는 14계층에서 생존자가 나왔습니다!"
언제나 재앙 속의 희소식은 모두의 메마른 마음 속에 단비를 뿌려 주는 법.
"...그렇군."
하나, 그런 와중에도 황도군 장군만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폐하를 봬야 하거늘....'
최상층의 공략은 확실해졌다.
그런데도 장군은 차마 마음 놓고 기뻐하지 못했다.
'성자 에릭.'
아직도 장군의 머릿속에는 미궁에서 처음으로 탈출했던 거대한 성기사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황도 한복판에 그런 세력이-.'
제국의 성녀가 운영하는 황도 중앙 교회.
그곳은 에릭의 본거지다.
'생각해 보니....'
잭슨의 기예와 르웰의 은밀함에 놀라서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어린아이들이 오러와 신성을 뿜으며 전쟁놀이를 벌였었지.'
일전의 방문에서 장군은 기감을 넓혀 교회 옆 고아원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걸 감독하던 놈은.... 분명히 제국일보의 국장이었다.'
처음에는 단순 후원차 방문이라 여겼었지만.
'하필 제국일보의 국장이-.'
이쯤 되니 모종의 의도가 있어 보였다.
황가의 위대함을 담아 전달하는 곳이 바로 [제국일보]다.
한데, 그 주인이 왜 성자의 고아원에 있는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신성력이라는 이름의 독이 제국을 잠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미궁 입구를 지키다 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지만, 장군은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장군! 16계층에서도 생존자들이!"
미궁의 최상층이 공략되었다.
그 사실은 곧 제국의 황태자가 될, 1황자의 귀환을 의미했으니까.
'일황자 전하께서 귀환하시겠군.'
황성에서는 국란 회의가 한참이니, 일황자 레오나르도를 마중 나올 황족이 없을 터였다.
애초에 황제가 생환자 문제를 자신에게 일임한 상황.
'한 시간에서 두 시간에 한 번씩 생존자들이 나오는군-.'
장군은 언제쯤 황자가 나타날지 시간을 가늠해 봤다.
최소 하루는 지나야 32계층의 공략대가 돌아오지 않을까?
'결국 성자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건 나중으로-.'
그리 결론지으려던 찰나에.
쿠웅―――!
제국의 황도를 둘러싼 대공 방어 마법진에 균열이 일어났다.
"장군-! 하, 하늘에-."
"메, 메테오가 황도를-!!!"
국제 마법 학회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한 것이 도시를 표적으로 한 메테오 마법이다.
"-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황도군 장군은 눈가를 좁혔다.
모두가 푸른 창공을 가르고 나타난 금빛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장군의 눈은 그 아래에 떠 있는 거대한 성기사를 향해 있었고.
'저놈이-.'
장군은 검에 손을 얹은 채 한마디 말을 남겼다.
"내가 간다."
쿵-.
장군의 거대한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호기롭게 나선 장군은 들러리로 전락했다.
"아아-! 어찌, 지엄한 뜻을 어기십니까!!!"
4구역 성벽 위에 도착한 직후,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자신을 막아섰다.
에리카 페르나시아.
'재상의 딸이 어째서?'
장군은 기세를 갈무리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폐하의 명입니다!"
그녀는 장군을 향해 황명이라는 말을 내뱉었으니.
'폐하께서-.'
에리카의 설명을 들은 장군은 이걸 믿어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황제가 에릭에게 황도의 땅을 하사하고.
그곳을 운석으로 밀어 버리라는 허가를 내줬다는 말인데.
'설마 폐하께서-.'
장군은 하늘 높이 떠 있는 에릭을 바라봤다.
입가에 호선을 그린 에릭의 손에는 선명하게 빛나는 은빛 돌이 들려 있었다.
그 얼굴이 어딘지 얄미웠다.
"...사실이로군. 폐하께서 그것까지 내려 주셨단 말인가."
[달의 편린]이라 불리는, 물건이 에릭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찌 계승권을 뜻하는 물건을 저놈에게-.'
장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모든 것을 이해했으나, 납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상에는 아직 사람들이 남아 있는 상황.
'저 아래의 신민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던 차에.
쿠웅-.
제5구역 서쪽 구획의 경계선을 따라 거대한 금빛 기둥이 솟구쳤다.
신성의 빛이 번쩍인 뒤, 사방이 고요해졌다.
그곳에 남은 것은 텅 빈 건물들뿐.
"어어-."
"여기는...."
장군은 수많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빈민가에 살던 주민들이 성벽 위와 옆 구획의 평지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저런 대규모 전이를 마법사도 아닌, 성기사가....'
이어지는 광경은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콰앙―――――――!
주민들이 이동이 끝난 직후.
거대한 유성우가 제5구역의 판자촌 위로 떨어졌다.
짧은 굉음과 함께 거대한 파공음이 일고 사방으로 풍압이 일어났다.
신성의 빛을 내뿜는 거대한 구체는 지상에 도달한 직후, 모든 것을 밀어 버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낙하 지점부터 점점 넓어지는 평지.
곰팡이로 눅눅한 나무집들이 소멸해 버리고 오밀조밀 뭉쳐 있던 빈민가가 평지로 변해 버렸다.
그 여파가 엄청날 테지만, 구역의 경계선을 따라 솟구친 금빛 기둥이 이를 모조리 지워 냈다.
'전쟁에서 쓴다면 최소한 군을 쓸어버릴 위력이군.'
장군이 그런 감상을 품고 있자니,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은 뭔 스케일이 저래요?"
"신의 뜻을 행하는데 어찌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성벽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강서현과 박창호의 대화.
그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 말이 안 되는 광경이라 놀랄 생각도 잊어버렸다.
"원래 시, 신성력이 저런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힘은 힘입니다. 다만 그 방향성이 더 다양할 뿐이죠."
"그, 그런가요?"
"잘린 팔을 돋아나게 하고 거대한 땅을 평평하게 밀어 버릴 수도 있죠. 그렇기에 신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강서현은 현지의 종교인들처럼 신앙심이 가득한 박창호의 말에, 눈가를 좁혔다.
"아-. 잔향만으로도 이런 안정감이라니! 서현 씨도 빨리 그분의 은혜를 입으셔야 할 텐데."
그 광신에 찬 눈빛이 너무 부담스러웠으니까.
'진짜 종교쟁이처럼 말을 하네.'
아프지 않은 신성력을 겪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뜨거워 죽겠네-.'
강서현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하나, 그녀는 금세 그 행동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이 물리력을 행사하는 건 사실이나, 소환이나 대규모 이동과 같은 힘은 분명 사제들이 벌이는 기적이다."
'...미친. 장군이 왜?'
그녀의 우측으로 거대한 은빛 갑주를 입은 황도군 장군이 서 있었기 때문.
"-그들도 기사와 마법사처럼 성기사와 사제로 나뉘어 구현하는 힘의 종류가 달라지지."
본디 백작위를 유지하던 상태였다면, 말이라도 섞어 볼 수 있겠는데....
'하필 빙의자인 걸 들키자마자 장군을 마주치냐.'
아직 공표가 되지 않아서 모를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래, 로벤 백작. 빙의자였다고?"
"...죄송합니다."
이놈에 제국은 정보부 탓에 비밀이랄 게 없다.
강서현은 고개를 내리깔았다.
"내 꼭 폐하를 만나 뵙고 놈의 진실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이 말을 전하거라-."
장군은 그리 말하고는 성벽 위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미궁 광장에 돌아온 장군을 향해 황도군 병사들이 다가왔다.
"장군! 저 운석은-."
"황제 폐하의 허가를 받은 일이더군. 신경 쓸 필요 없네. 우리는 주어진 임무에 집중하면 된다."
부하들을 진정시킨 장군은 금빛으로 가득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재상의 딸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공작의 딸이 저런 꼴이 될 정도라-.'
어쩌면, 그녀가 처음에 말했던 '지엄한 뜻'의 주체가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 *
'이렇게 깨끗한 5구역은 처음 보는군.'
에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평평해진 땅을 바라봤다.
신성의 구체는 건물을 밀어 버리면서, 각종 오물과 같이 지저분한 것들을 싹 다 정화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매끈한 평지.
그야말로 신이 새로이 빚어낸 땅이 아닌가?
거기에 더불어.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보유 GP 97,835]
[보유 GP 147,835]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GP가 크게 올랐다.
'크게 두 번 올랐는데, 그중 앞에 것은....'
처음에 5만에서 9만으로 훅- 뛰어올랐을 때.
분명, 에리카가 성벽 위로 올라왔다.
'벌써 일 처리를 끝냈다고?'
에릭은 그녀에게 엘프군과 협력해 '흑마법사 빙의자', '알만정교회의 배신자'들을 압송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녀가 나타났다는 의미는,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됐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이만한 수치가 올랐다는 건....'
은연중에 느꼈듯이, 에리카의 연심이 광신으로 진화한 것이 분명했다.
'대단한 믿음-.'
언젠가는 보답을 해 줘야겠지만, 당장은 잭슨이 우선이다.
'신도를 늘려야 되겠지.'
[임명 가능한 신도 추가]
[100,000GP]
10만 GP를 넘겼으니, [3/3]으로 가득 찬 신도의 수를 확장할 수 있을 터.
'추가된 신도에 잭슨을 임명하려면....'
황제가 준다는 돈을 받아야겠지.
그러려면 다시 황궁을 방문해야 할 거고.
GP로 신도 슬롯을 늘린 뒤에, 골드를 써야 빙의자를 신도로 만들 수 있으니까.
'잭슨이 대체 얼마일지 가늠도 되지 않지만....'
황제가 말하기로는 마지막 보상으로 아주 큰돈을 주겠다는데, 액수가 보통이 아닌지 잠시 뒤에 다시 오라는 말을 남겼다.
'잭슨이 아무리 비싸도-.'
황제를 기준으로 큰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였다.
'황궁에 가려면 재개발부터.'
에릭에게 있어 골드와 GP 확보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골드는 그의 원동력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흐름을 정리하고 에릭은 행동을 시작했다.
"네크로맨서들은 아래로 내려가라. 원주민들이 살 집을 먼저 짓는다!"
재개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철거다.
그런데 이 철거가 순식간에 끝난 상황.
"미리 준비한 대로, 건축 자재부터 챙겨라!"
에릭은 일사천리로 빙의자들을 통솔했다.
그런 에릭을 보며 제국군 또한 일을 시작했다.
"5구역 서쪽 구획 주민들은 이쪽으로!"
성벽 위의 주민들은 제국군의 안내를 받아 임시 거주 지역을 배정받았다.
그런데 그 과정이 지나치게 짧았다.
'옆 구획에서 노숙하라는 게 임시 거주 지역이라니.'
일 처리가 빠를 수밖에 없다.
빈민들에게는 본래부터 자신의 집이랄 것이 없었으니까.
'제국은 그나마 나은 편이지.'
여느 빈민가가 그렇듯이, 그들의 삶은 팍팍했다.
본래 황도 제5구역은 방어를 위한 성벽이 전부였다.
애초에 4구역과 5구역 성벽 사이의 공간은 거주가 아닌 수성(守城)을 위한 공간이었으니까.
하나, 제국이 커져 가면서 이곳에는 빈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반은 길거리 노숙자며, 나머지는 작은 집에 수십 명이 옹기종이 모여서 산다.
'환경이 바뀌어야 삶도 바뀐다.'
에릭은 도시를 짓는 김에, 빈민들의 삶도 바꿔 줄 생각이다.
그 역시 빈민가과 다름없는 분쟁 지대의 삶을 살아 봤기 때문이다.
"저쪽으로 기둥을 박아!"
"2번 일꾼들은 벽 쌓고, 3번은 물자만 옮겨!"
성벽 위에서 멀뚱거리는 시민들은 이게 꿈인지 생신지 눈만 끔뻑거렸다.
"저, 저게 뭐냐."
"와...."
"지, 진짜 저기서 우리를 살게 해 준다고?"
"...성자님께서. 아아-."
처음으로 가져 보는 제대로 된 집.
인구가 한둘이 아니라서 연 단위로 걸릴 거라 여겼던 재건축은 며칠이면 될 것 같아 보였다.
"저기에 쌓인 물자들이 다 미궁산 재료고...."
"기, 기사님들이 그걸 오러로 잘라 주신다고?"
"소환수들이 저걸 다 옮기는-."
"건물을 저렇게 조립하듯이 짓는 게 말이 되나?"
분업화.
소환수를 이용한 자동화.
지구의 모듈 건축을 따와서 진행되는 조립식 공법.
건설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 * *
"그래서 지나야, 이건 어때?"
"헤헤, 언니 스타일이 진짜 좋은데요? 저는 그런 스타일은 소화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강풍호는 르웰의 옆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유용함을 어필했다.
"그래? 에릭 말로는 구닥다리 스타일이라던데-."
"에이, 신께서도 사제님만큼 안목이 있진 못 하죠. 제가 빙의하기 전에는 레트로라고 해서 2000년대 의복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그런 스타일이 다시 트렌드가 됐어요!"
우선적으로 스타일에 대해 체계적인 조언을 할 수 있는 안목을 자랑했다.
'사제님이 패션에 엄청 관심이 많으시네.'
강풍호는 여성의 스타일에 민감했고 이를 잘 숙지하며 이해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걸 그림으로 구현할 실력을 지녔다.
"예전에 빙의자한테 들었는데, 지구에는 무슨 피부에 막처럼 겹치는 옷이 있다고 그랬거든! 지나야, 혹시 아니?"
"그런 쪽은 스타킹이라고 부르는...."
처음으로 여자들끼리의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무심코 말실수를 해 버렸다.
강풍호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 죽을지도.'
에릭이 신신당부했던 것들 중 하나가 스타킹 아니던가?
'제멋대로인 에릭님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
하나, 강풍호는 이미 이 교회의 힘의 균형을 파악한 상태.
"아! 그, 사실 신께서 이거 말하면 죽는다고...."
그래서 르웰에게 사실을 읊었고 르웰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지나야, 내가 누구?"
"제국의 성녀.... 신의 여인-."
"에이, 여인이라니. 가족이지, 가족."
강풍호는 은근히 좋아하면서도 불편해하는 르웰의 표정을 읽었다.
'아직 관계가 정립되진 않으셨나.... 에릭 오빠도 참. 그런 건 은근 서투른 것 같기도-.'
이 화제를 이어 나갔다가는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도 있다.
강풍호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여 여러 스타킹을 그려 냈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선호하는 르웰의 취양을 참고해 조금 자극적인 그림을 선보였다.
"와... 이건 좀. 에릭 기절하겠다."
"망사 스타킹이라고, 그물처럼 다리를 덮는 형태예요! 혹시 모르니 다른 것들도 보여 드릴게요!"
스슥-슥.
커피색 스타킹, 살색 스타킹과 하얀색의 스타킹.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투명한 검은색 스타킹까지.
'그냥 노출이 문제가 아니라, 세련되면서도 은근하게 몸매를 드러날 수 있는 스타일을-.'
그간 일러레로 활동하며 얻은 수많은 경험을 살려, 르웰의 취향을 파악해 냈다.
"오-! 이걸 검스라고 부른다고?"
그리하여 정해진 것은.
허벅지 쪽에 띠 형태로 레이스가 달려 있는 검정색 스타킹.
"지나야, 이거 만들어 줄 애가 지금 여기 와 있거든, 옆에 고아원에서 수업을 해 주고 있어서. 어때? 같이 보러 갈래?"
77화 영웅(英雄) (5)
"그대들이 궁금한 것들이 참 많을 게야."
제국의 사주(四柱).
황제는 제국을 떠받드는 네 기둥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그들의 앞에서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에릭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구나.'
옥좌 앞에 모인 네 명의 공작들은 안도의 마음으로 황제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간 벌어진 일들이 워낙 현실적이지 못한 탓에 의문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제국의 재상인, 페르나시아 공작은 더욱 그랬다.
'대체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에릭이 대단한 업적을 이룬 건 사실이나, 황제가 내준 보상들은 너무나도 과했다.
'갑자기 수도의 땅을 내주시고 달의 편린을 하사하더니, 급기야 황실 보물고에서 억만금을....'
재상은 이런 의문을 풀 여유도 없이 연신 이어지는 회의에 지쳐 가는 중이었다.
최소한 납득이 가야 무슨 말이라도 하지.
비단, 재상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명의 공작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대들이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 최소한의 납득은 필요하겠지."
황제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대화를 시작했다.
"-먼 옛날, 성서의 초본에는 삼신과 영웅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기록조차 없던 고대의 얘기였다.
"-황족에게만 전해지는 제국의 시조에 대한 얘기에서도 영웅이 나타나지. 그대들도 잘 알 게야."
황제의 말은 여상하게 이어졌고, 그 끝은 에릭이 영웅의 자질들을 타고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에 재상이 숨을 삼키며 물었다.
"폐하-. 정녕 그가 영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재상, 페르나시아 공작이 황제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도통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에릭이 대단한 존재이며, 제국의 차세대를 이끌 강자라는 것은 분명 인정한다.
하나, 그 호칭만큼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찌 영웅의 이름을 황족도 아닌 이에게....'
눈이 휘둥그레진 재상의 앞에서 황제는 '흠.' 턱을 쓸었다.
재상의 붉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결국 재상은 참지 못했다.
그는 침음하듯이 말을 내뱉었다.
"어찌, 초대 황제 폐하의 잊혀진 이름을.... 그의 근본은 무국적 지대의 고아가-."
"근본이라."
에릭은 분쟁 지대의 고아 출신이었다.
하면, 황제가 탄생하기 전에는 무엇이었는가?
대화는 제국의 근본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그대들은 잘 알겠지. 제국의 사주는 결국, 그 영웅을 따라 제국의 틀을 잡은 자들의 후예가 아니던가?"
초대 황제는 처음부터 황제가 아니었다.
초대 황제는 마경의 진탕 속에서 태어난 고아였다.
자라면서는 전사가 되었고.
이내 영웅이라 불리며, 빛을 이끄는 존재로 거듭났다.
그 빛이 모여 국가를 이뤘고.
빛이 퍼지며 대륙을 밝혔다.
그리하여 제국이 되었으니.
"-믿기 힘든가?"
황제가 옥좌 아래의 면면들을 하나씩 바라보며 물었다.
재상, 페르난시아 공작.
마도 연합의 수장, 라핀 공작.
남부 대곡창 지대의 주인, 마스티아 공작.
동부의 지배자, 마로크 공작까지.
'어찌 제국의 시조를 에릭과 동일 선상에 놓는....'
재상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리깔았다.
'성서의 재현-.'
가장 먼저 납득한 것은 라핀 공작이다.
그는 성서에서 읽었던 장면을 직접 목격한 입장이다.
에릭이 내리그은 일섬은 대지에서 하늘까지 이어졌고, 거대한 흑룡을 집어삼켰다.
"-저는 이해했습니다."
라핀 공작은 아론 후작의 건으로 여러 페널티를 받았다.
'폐하께서는 확신이 있으신 게야.'
제 파벌에 대한 통솔권부터, 마도구 생산 공장의 소유권에, 휘하 영지에 대한 관리감독권까지.
이 모든 것이 에릭에게 넘어간다는 다소 과한 벌이었다.
그런데 그가 영웅이라면, 그것도 황제가 인정한 영웅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얘기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남겨 주셨군.'
하나, 황제는 단 하나의 권한만큼은 빼앗지 않았고.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라핀 공작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신 제네딕 라핀은 공작위를 후계에게 물려주고 일어날 전쟁의 선봉에 서고자 합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권한.
그것은 휘하 마도 병단의 명령권이다.
"하하-! 좋다. 내 대공과 공작을 나란히 최선봉에 세워 주마."
황제는 호쾌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고는 남은 세 공작들을 바라봤다.
'정녕, 영웅의 거름이 되라는 말이셨군.'
라핀 공작의 빠른 태세 전환을 보며, 나머지 공작들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성자 에릭에 대해서, 저희 사주는 무조건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합의는 순식간에 이뤄졌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축객령을 내렸고 세 공작은 재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재상이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황자 전하께서 돌아오시지 않습니까."
"그렇겠군."
"한데, 계승권을 뜻하는 물건까지 주실 필요가 있으셨는지...."
"걱정할 필요 없다. 에릭 그놈은 황위에 일말의 관심도 없을 테니."
"그, 그게 말처럼-."
"내게 그러더군."
잠시 뜸을 들인 황제는 알현실 문을 바라봤다.
황제에게는 거대한 성기사의 기척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돈을 받고자 찾아온 것이 분명하겠지.
"대, 대체 뭐라고-."
"자기는 돈과 책임 없는 권력을 원한다더군."
재상은 대답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 역시 에릭을 잘 아는 입장이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타인이라면 몰라도 에릭에 대해서만큼은 황제의 말이 옳아 보였다.
"재상, 영웅이 태어나면 세계를 밝히는 빛이 되네. 그 빛은 어둠을 몰아내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내려앉지."
황제의 눈은 아득한 과거를 향해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영웅이라는 이름은 잊혀지게 되네."
"...."
"세계가 하나가 된 후, 영웅이 뭘로 기억될지 궁금하지 않나?"
난세에 빛난 영웅은 평화에 바래진다.
황제는 평화를 바랬다.
평온한 대륙에서 잊혀진 영웅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고대했다.
* * *
'잊혀진다는 건 참 슬플 일이네.'
에릭은 황제를 기다리면서 씁쓸한 마음을 느꼈다.
[신앙을 획득했습니다.]
[보유 GP 64,125]
추가되는 GP의 양이 압도적으로 줄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철거를 위해 [별부름]을 사용했고,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이 수만에 달하는 상황이다.
한데, 벌써 이렇게 줄어들다니.
'미궁의 제국군보다 빠르게 줄어드는군.'
본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 덕분에 사람이 미치지 않고 살아가는 거라고 들었다.
'하긴, 분쟁 지대의 삶이 계속 선명하게 기억났다면, 나도 미쳐 버렸겠지만....'
분명 이해하는 바였으나.
줄어드는 GP의 양은 에릭의 마음 한편을 아쉽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를 해 대는 건가...?'
그 순간 에릭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지상의 삼신, 세 종교의 근원.
이 팍팍한 세상에는 교회와 성당, 신전 따위가 가득했다.
지구랑 비슷한 수준이었다.
'잊혀지지 않으려고-.'
신의 힘을 지니게 된 에릭은 그러한 이유를 확신하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신은 신도로부터 힘을 얻고, 신도들 중 일부는 그 힘을 나눠 받는 구조-.'
이를 [시스템]으로 옮겨 놓는다면, 자신의 [신성 관리]기능과 비슷하게 작용하겠지.
에릭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들어가시지요."
때마침 황실 시종이 에릭의 안내를 위해 나타났다.
황제가 알현을 허가한 모양이었다.
"왔군-."
"폐하를 뵙습니다."
에릭은 거대한 옥좌 앞에서 고개를 숙였고, 황제는 김집사를 불러 억만금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쿠웅-!
'이, 무슨-.'
쿠웅-!
쿠웅-!
황실 로얄가드들이 아주 커다란 상자를 에릭의 눈앞에 쌓아 두기 시작했다.
규모가 엄청났다.
쿠웅- 마지막 상자가 쌓임과 동시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에릭 국장, 돈이면 다 된다고 그랬나?"
평소였다면 아주 크게 함박웃음을 지었어야 할 에릭인데, 지금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장두식처럼 눈을 땡그랗게 뜨고는 눈앞의 거대한 상자들을 바라볼 뿐.
'저게 다-.'
뚜껑이 열린 상자에는 금화가 한가득이었다.
그것도 진은을 섞어서 만든 백금화였다.
"-100억 골드다."
헉.
에릭은 눈만 끔뻑거렸다.
'뭐?'
얼마라고...?
10억도 아니고 100억이다.
한화로 치면, 1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걸 다?
"대제국의 황제가 가장 쉽게 줄 수 있는 게 돈이다."
그런 에릭을 향해 황제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덤덤한 어조였지만 엄청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제야 에릭은 정신을 붙잡고 황제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가슴 깊이 감동했습니다."
그의 입가에는 싱그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숙인 에릭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묻기를.
"에릭 국장, 회의는 귀찮다고 그랬나?"
분명, 그리 말했던 에릭인데.
100억 골드를 받으니 마음이 달라졌다.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됐다."
황제는 몹시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다음 안건은 대륙 통일 전쟁이다."
대신, 이뤄질 회의의 안건을 알려 주었다.
"그대 덕분에 제국의 귀족들이 진정한 하나가 되었으니, 마음이 편하군."
빙의자에 대한 얘기였다.
숨어 있던 빙의자는 에릭이 모두 찾아낸 상황.
제국의 귀족은 전부가 제국인이 된 셈이다.
그중에서 라핀 공작의 파벌은 전부 에릭의 뜻을 따라 황제파에 동의표를 던지기로 했으니, 전쟁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앞으로 바빠지겠군.'
즉, 황제의 말은 이제부터 진행될 회의가 '전쟁의 찬반'이 아니라, '전쟁 준비'에 대한 내용으로 이뤄진다는 의미였다.
"미궁은 60일의 유예를 줬네. 제국은 대륙전쟁을 준비할 생각이지."
그의 예상대로, 황제는 60일의 유예 기간 동안 전쟁을 준비한다고 그랬다.
"에릭 국장, 그대는 그 기간 동안 무얼 해낼 생각인가?"
황제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에릭이 무얼 하려는지 궁금했다.
에릭이 말하기를.
"마경으로 가, 흑마그룹의 본거지를 찾을 생각입니다."
그의 눈빛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황제는 흡족하게 웃었다.
'왜 아스티아 교단에 붙어 있는 건가 했더니....'
황제는 신을 부정하는 성자가, 왜 굳이 교단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느꼈는데.
흑마그룹을 찾는다는 말에 곧장 납득해 버렸다.
'성전을-.'
황제는 인간이 사는 대륙을 정복한다.
에릭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마경을 파괴한다.
대충 그런 얘기였다.
* * *
100억 골드를 챙긴 에릭은 성큼성큼- 교회를 향해 걸어갔다.
획득된 GP로 슬롯을 확장했고, 추가된 자리에 잭슨을 집어넣을 생각이다.
'총알은 충분하다.'
진짜 억만금이다.
잭슨이 신도가 되는 것도 문제가 없을 테지.
돈이 남으면 그걸로 [스킬]을 잔뜩 구매할 의향도 있었다.
그런 좋은 일들을 앞둔 에릭은 잔뜩 인상을 구긴 상태였다.
'강풍호 이 새끼가-.'
에릭은 신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일전에는 잭슨의 방해로 정확히 확인하지 못했던 능력인데, 그 주체를 명확하게 알아냈다.
'사제님이 아니라 빙의자가 주축이었군.'
저번에도 코맹맹이 소리에 애교를 섞은 강풍호의 음성이 유독 크다고 느껴졌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니! 지, 진짜로 저 지켜 주시는 거죠?"
"그러엄! 지나야, 걱정 말고 얘한테 디자인만 보여 주면 돼!"
불필요한 지구의 지식을 남발하는 강풍호의 모습에 에릭은 절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제1구역을 지남과 동시에 전이의 기적을 사용했다.
번쩍-.
에릭의 신형이 빛과 함께 사라지고.
"여기는 강지나. 이번에 에릭 덕분에 사면받은 빙의자야! 지구의 의복을 최대한 흡사하게 그릴 수 있다네."
"바, 반갑습니다."
"여기는 세리. 우리 고아원 1기생인데, 에릭의 누나랑 비슷한 존재라고 보면-."
키이이잉-.
강풍호의 등 뒤로 피어나는 선명한 금빛 십자가의 형상.
르웰은 말을 멈췄다.
'으으....'
강풍호는 르웰의 청록색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등 뒤로 나타난 기적.
그 사이로 나타난 거대한 성기사.
에릭이다.
흠칫-.
강풍호의 어깨가 흔들렸다.
칼같이 다듬은 단발머리가 찰랑였다.
등 뒤로 느껴지는 거대한 기척.
강풍호는 침을 꿀떡 삼켰다.
"제가 없는 동안 재미난 얘기를 나누고 계셨나 봅니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강풍호는 르웰의 눈동자를 통해 에릭을 살폈다.
그는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었으니-.
'제발....'
강풍호는 애원하듯이 르웰을 바라봤다.
다행이도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에릭-. 너 지금 은근하게 지나 위협하는 거 아니니?"
"...그, 지나가 아니라, 풍호. 크흠. 아닙니다."
르웰의 매서운 눈초리에 에릭은 한수 접고 들어갔다.
'개종까지 해 주셨는데-.'
자신을 위해 배교까지 해 준 르웰인데, 고작 빙의자 문제로 트러블을 만들 순 없는 법.
아스티아 교단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르웰과 그녀의 교회는 에릭의 입장에서 아주 중요한 입지에 놓였으니까.
"-후."
에릭은 복잡한 심경을 접어 두고 르웰을 향해 다가섰다.
강풍호는 자신을 지나치는 에릭을 숨죽이며 바라봤으나,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대신 르웰의 옆에 있던 고아원의 1기생, 세리에게 말을 건넸다.
"세리, 오랜만입니다. 아, 세리 누나라고 해야죠."
제국의 사치품과 명품을 다루는 기업 '에르웰'의 수장, 세리 블란드가 흠칫- 놀라며 에릭에게 손사래를 쳤다.
"...부, 부탁해. 누나라고 부르지 말아 줘."
분쟁 지대의 고아 시절, 세리는 에릭을 정신 나간 꼬맹이라 불렀었다.
"정신 나간 꼬맹아, 귀여운 거 믿고 자꾸 기어오르지 말고 누나라고 불러 보렴!"
자신의 정신 연령은 서른 살이 넘었다고 주장하며, 르웰 사제님에게 결혼이 어쩌구하던 꼬마였으니 그리 말했던 거지만....
"이제 와서 부담스러우십니까?"
열 살쯤부터 매달 10cm씩 커지는 에릭을 보며,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에릭은 자신을 닦달해 무지성 노가다를 시키면서 명품이란 걸 만들게 했다.
그는 될 때까지 시켰다.
'게다가 지독하게 팼지.'
그녀가 독립할 나이가 되자 에릭은 그녀를 귀족 가문의 양녀로 들여 명품 브랜드까지 만들게 했다.
그렇게 해방된 지 벌써 수년이 흘렀는데.
'어쩌다가....'
대격변 패치라는 재앙 탓에 그녀는 또다시 에릭의 부름을 받았다.
"뭐, 누님께는 딱히 시킬 일이 없긴 하지만-."
지긋이 바라보는 에릭의 눈빛.
'뭘 바라는 거지...?'
분쟁 지대에서의 삶과 제국의 황도 제4구역에 살던 시절까지.
뼈에 새겨진 세리의 기억은 에릭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해 냈다.
'설마 이걸 만들지 말라는 건가?'
조금 전 르웰이 제게 건네준 종이 뭉치로 눈길이 갔다.
에릭은 흙바닥에 대충 그림을 그려 두고 구현하라는 말을 내뱉었었는데....
'이토록 정교한-.'
그것과 달리 이번에 받은 종이에는 아주 정교하고 디테일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리며 에릭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에릭은 르웰의 목을 슥- 바라보고 다시 세리를 향해 지긋한 시선을 보냈다.
그제야, 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을 주었다.
"나는 하던 거나 열심히 할게."
수초의 짧은 시선은 에릭으로 하여금 옛 추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나름 가족인가?'
눈빛만 봐도 서로의 의도를 알아보는 것이, 아주 달가웠다.
눈치 백 단.
그야말로 에릭의 동기다웠다.
'수상한데....'
뭔가 미심쩍은 대화였으나, 르웰은 그 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르웰이 에릭에게 물었다.
"그래서 에릭, 무슨 일로 온 거니?"
"잭슨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 잭슨? 잭슨은 마크랑 같이 있는데, 갑자기?"
제국일보의 국장, 마크.
그 또한 에릭의 고아원 동기다.
"마침 그놈한테도 시킬 일이 있는데, 다행이군요."
그리 말하며 에릭은 르웰의 귓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훅- 가까워진 거리감에 르웰이 놀라 숨을 멈췄다.
그때 에릭이 속삭이기를.
"빙의자를 신도로 만드는 것, 보고 싶지 않으신지요?"
78화 마경(魔境) (1)
"교황 성하, 몬스터 웨이브가 멈췄습니다."
성전기사단장 율리우스가 콧잔등을 슥- 문지르며 그리 말했다.
코에 붙어 있던 시꺼먼 살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킁!
그 뒤 율리우스는 한쪽 코를 막고 콧바람을 불었다.
시꺼먼 핏물이 콧물처럼 바닥으로 튀었다.
웬 시정잡배 같은 모습이었다.
평소라면 체통을 운운하며 한 소리 했을 교황이지만.
"총 스물세 명의 형제가 아버지의 품으로 떠났구나."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마경의 범람으로 교단의 성기사들은 한시도 쉬지도 못 한 채 전투를 이어 왔다.
대격변 패치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심지어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 웨이브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는 상황.
그래도 잠시나마 숨 돌릴 틈이 생겼고, 이 짧은 여유에 교황은 기도를 시작했다.
"아버지, 아스티아 님이시여. 먼저 간 형제들을 굽어살펴 주소서."
"형제들을 보듬어 주소서."
교황이 기도하자, 율리우스도 마주 기도했다.
그 뒤로 수많은 추모가 이어졌다.
모든 성기사들과 성가대가 합창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형제의 영혼을 반겨 주소서-!"
세상천지가 신을 부르짖는 목소리로 가득해졌다.
키이잉―.
그러자 교황의 위로 거대한 십자가가 떠올랐다.
십자가의 뒤로 여섯 개의 날개가 솟구치더니 새하얀 영혼들을 감싸 안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아버지께서 형제들을 보살펴 주실지어다."
짧은 추도문을 끝으로 장례식이 끝이 났다.
검소한 아스티아 교단답게, 장례 또한 지독하게 단출했다.
"율리우스, 다음 웨이브를 준비하라."
"예, 성하."
추모의 시간 뒤에는 치혈한 전투가 재개될 뿐.
'마경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몬스터라니.'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미궁 상층에서 흘러온 대형종(大型種) 몬스터의 기척이었다.
평소에는 마경의 심연에 자리 잡고 움직이지 않는 놈들인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일반 사제들과 견습 성기사들은 모두 교황청으로 돌아가거라."
경험이 미흡한 신도들이 상대하기엔 너무 벅찬 적이었다.
어린 사제와 기사들을 물린 직후, 교황과 율리우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교황 성하,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닙니까?"
"고대부터 미궁이 변화할 때는 마경이 흘러넘치곤 했지. 하나, 이런 일은 교황의 기록서에서도 본 적이 없구나."
대격변 패치로 마경의 범람이 일어난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오래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무언가 달랐다.
"몬스터가 교황청으로 좌표를 찍는 것도 아니고...."
율리우스가 콧잔등을 슥- 문질렀다.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이.
느낌이 싸했다.
"마치 누가 조종이라도 하는 것 같구나."
교황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몬스터란 파괴와 살육에 대한 본능만이 남은 존재다.
미궁에서 넘어온 것이 마경의 몬스터로, 대륙에 퍼진 작은 몬스터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리고 그런 마경의 몬스터는 인간의 기척이 강한 곳으로 몰려드는 습성을 지녔다.
천만 인구의 제국이라든가, 수백만이 살아가는 세 왕국이라든가.
"어찌, 삼만 신도가 사는 교황청으로 몰려온단 말인가?"
"혹시 누군가가 교황청으로만 오게끔...."
율리우스가 말끝을 흐렸다.
까마득한 절벽 위의 교황청으로 몬스터들이 밀려드는 상황.
이미 절벽 아래는 몬스터들의 사체로 가득했으며, 그 높이가 절벽의 반을 메울 지경이었다.
"목적이 무엇일꼬-."
교황이 턱을 쓸며 마경의 한복판을 바라봤다.
시꺼먼 어둠밖에 없건만, 교황의 눈은 어떠한 것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교황의 동공에는 어느새 기다란 십자가의 형상이 피어나 있었다.
그에 율리우스가 놀라 묻기를.
"성하, 설마.... 계시를-."
"마경의 위로 이상한 눈이 보이는구나."
교황이 눈가가 더 좁혀졌다.
"아무래도 놈들이 이쪽 마경에 자리 잡은 모양이야."
수년을 숨어살던 흑마그룹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놈들이 코앞에 있었구나."
교황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Ep. 17 마경(魔境)
"잭슨, 마크는 어딨지?"
에릭은 제국일보의 국장이자 고아원 동기인 마크 러셀을 찾아 방 안을 훑었다.
텅 빈 방 안에는 [제국일보]의 원고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영락없이 급하게 도망친 모습이었다.
"보스, 마크는 벌써 도망쳤습니다."
"지시는?"
에릭은 난장판이 된 방 안을 훑어보며 잭슨에게 물었다.
"보스가 말한 건 다 전달했습니다. 다만, 황실의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빙의자 자진 신고 기간을 1면에 실어도 되는 건지 의아해하더군요."
"그래서?"
"하긴 하겠답니다."
에릭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의 회의가 길어지는 만큼, 미리미리 처리할 것들을 해결해 두려는 의도였다.
'도시를 짓는데 사람을 모아야지.'
[커뮤니티] 여론이 좋은 상황이니, 당분간은 미친 듯이 빙의자들이 몰려들 터였다.
"근데 50만이 넘는 빙의자가 몰려들면 그건 누가 데려옵니까?"
"에리카를 시키면 된다."
"그.... 고작, 근위대 기사단으로 되겠습니까?"
"공작가의 힘을 쓰겠지. 거기에, 페하께서도 손을 써 주실 거고."
영락없이 에리카에게 짬 처리를 하는 에릭의 모습에 잭슨이 혀를 내둘렀다.
"...그렇군요."
절뚝-.
말을 마친 잭슨이 에릭의 앞으로 다가왔다.
묘하게 절뚝이는 걸음걸이가 강조된 느낌이었다.
"그, 보스. 억만금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에릭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잭슨을 바라봤다.
그래서 뭐?
그런 모습이었다.
"...보스?"
잭슨의 흉터가 꿈틀거렸다.
일그러진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때였다.
"에릭!"
짝-!
르웰이 등짝 스매시를 날리며 뒤로 밀려났다.
"자꾸 장난칠래?"
"큭-."
에릭은 웃음을 터트리며, 잭슨을 바라봤다.
"잭슨, 그토록 고대하던 시간이 왔다."
"오오-!!! 저, 저도 그러면!"
드물게 잭슨이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점점 장두식을 닮아 가는군.'
에릭은 수하들의 '두식화'에 조금 걱정이 들었으나, 이내 목적을 상기하며 신전을 개방하였다.
쩌엉―――!!!
공명음과 함께 허공을 가르고 황금빛으로 가득한 공간이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툭- 하고는 잭슨의 몸이 쓰러졌다.
"에릭, 잭슨은 갑자기 왜?"
"가서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에릭은 허리를 낮추며 르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그래."
르웰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처음과 달리 어딘가 부끄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잭슨이 이 모습을 본다고?'
수만 제국민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녀인데, 어째 신전 속의 에스코트는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 망설임을 느낀 에릭은 반대 손을 르웰의 등에 살포시 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가, 갑자기?'
한 손을 맞잡은 채 등을 잡아 주는 에릭의 모습의 르웰은 화들짝 놀랐다.
이거 그거 아닌가?
'무도회 같은데서 귀족들이 한다는....'
르웰은 조금 더 가까워진 에릭의 에스코트를 느끼며 신전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신성의 구름 사이로 놓인 금빛 다리가 반짝거리며 두 사람을 반겼다.
구름 위를 걷는 발걸음이 산뜻하게 느껴졌다.
'아아-.'
르웰은 감상적인 기분이었다.
황홀한 풍경에 설레는 경험.
"지금은 잭슨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이 공간 전부가 르웰의 기도를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겠죠."
그리고 가슴 떨리는 한마디 말.
에릭의 다정한 목소리는 르웰의 심장을 움직였다.
'...이런 감정.'
두근.
심장이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근원은 무엇인가?
"사제님, 도착했습니다."
르웰이 답을 내리기도 전에, 그녀의 앞에는 뭉뚝한 신전이 드러났고.
"보, 보스, 여긴!"
신전 한복판에는 눈을 휘둥그레 뜬 잭슨이 서 있었다.
"에릭, 잭슨은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르웰 역시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에릭은 두 사람에게 일목요연하게 신전의 기능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빙의자는 영혼 상태로만 넘어오고, 세계의 주민들은 육체가 넘어올 수 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궁금한 게 많은 르웰과 달리, 잭슨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흉터가 잔뜩 일그러졌다.
"보, 보스, 저건...."
빙의 후 45년.
잭슨의 삶을 살며 잊고 있던 모습이 구름 사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아-. 기욤!"
영정 사진과 그 앞에서 오열을 하는 한 여자.
"누님이 나를...."
잭슨은 잊고 지내던 과거를 마주했다.
"잭슨, 진정되면 신전으로 올라와라."
에릭은 잭슨에게 시간을 주고, 르웰과 함께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르웰이 힘의 개성을 발휘해 에릭과 자신의 기척을 지웠다.
"에릭, 저건 지구의 모습이야?"
"그렇죠.... 한데, 잭슨이 저런 멸치였을 줄은 몰랐군요."
"멸치라니! 말이 좀.... 큼."
잭슨의 체형은 장두식과 비슷하되, 더 정제된 근육을 지녔다.
한데, 영정 사진 속 지구의 잭슨은 호리호리한 체구의 미청년의 상이었다.
사실, 잭슨 또한 에릭처럼 환생한 존재였으니, 과거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에릭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그보다 저놈 저보다 30년 먼저 빙의했는데, 왜 영정 사진이 나오는 걸까요?"
"으음.... 각자의 죽음을 보여 주는 게 아닐까?"
르웰이라고 답을 아는 건 아니지만, 그녀 나름의 추측은 가능했다.
그리고 에릭은 그녀의 말이 제법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빙의 전 육체의 죽음을 보여 주는 신전이라...."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였다.
그에 르웰이 에릭의 앞을 막아섰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게 해 주는 신전이지."
산뜻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말에, 에릭의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가 들려왔다.
"보스!"
잭슨이 기분을 추스르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 45년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애초에 잭슨은 지구에서보다 여기서 산 세월이 더 길지.'
에릭 또한 그런 잭슨의 모습에 납득했다.
자신도 그와 비슷한 처지였으니, 더 잘 이해했다.
다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실의에 빠지지 않은 건 좋다마는....'
은근하게 독촉하는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빨리 자신을 신도로 만들어 달라는 눈빛.
"보스?"
에릭은 슬쩍- 잭슨의 눈길을 피했다.
놀리려는 의도는 아니고.
[잭슨 – 1,000,000,000]
'10억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비용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 금액은 빙의자의 쓸모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폐급 니시다 료가 2억인 이유는 그가 지닌 지식 때문일 테니, 잭슨이 10억인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다만, 4티어 신성력만큼 비싼 금액이 부담됐을 뿐.
에릭이 고민에 잠겨 있자니.
절뚝-.
잭슨이 잔뜩 과장된 걸음걸이로 에릭을 향해 다가왔다.
다만, 독촉의 말은 멈췄다.
'장난치시는 건 아니군.'
저 표정은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르웰 역시 놀란 듯이 에릭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보스의 표정이 진짜라는 건데?'
잭슨은 오랜 경험을 바탁으로 에릭의 상태를 파악했다.
저런 얼굴은 보통 에릭이 돈 걱정을 할 때 짓는 표정이며, 억만금을 받은 그가 저 상태라는 의미는.
'대체 내가 얼마길래....'
분명, 자신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뜻이었다.
"후우."
짧은 고민이 끝나고 에릭이 잭슨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잭슨, 너는 10억이다."
잭슨은 물론, 르웰까지 입을 쩍- 벌렸다.
잭슨은 침묵을 택했고.
"에, 에릭. 10억이라고?"
르웰은 되물었다.
'봉헌 기도를 열 번을 더 해야 저만큼을 번다는 거야?'
이번 기도로 1억 골드를 벌어들인 르웰의 입장에서는, 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르웰과 잭슨은 납득하지 못했으나, 정작 돈을 쓰는 입장인 에릭이 가장 빠르게 받아들였다.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제일 믿을 만한 놈인데."
에릭은 평정심을 유지하며, 여상하게 말을 이었고.
이내, 행동으로 옮겼다.
[신도가 임명되었습니다.]
[신앙의 증거로 '제약(制約) - 신성을 거부하는 영혼'이 무효화됩니다.]
에릭의 눈앞에는 [4/4]로 가득 찬 신도 슬롯이 나타났고.
"보, 보스-!"
[이름 없는 신의 신도가 되셨습니다.]
잭슨의 눈앞에는 그를 위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드, 드디어!!!"
잭슨의 눈에서 희열의 눈물이 흘러넘쳤다.
신성력에 인정받고자 노력해 온 세월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 설움은 해소되었다.
* * *
['이름 없는 신'이 '보스'로 격상되었습니다.]
신전을 벗어난 직후, 에릭에게도 좋은 일이 벌어졌다.
"보, 보스!! 제 상처가! 다리가!"
잭슨이 숫제 광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을 찬양하며 교회 전체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믿음인가?'
지고한 믿음을 쌓아 신앙을 이루리라.
이 세계에 퍼진 종교적인 말은 대부분이 사실이다.
[보스]
심지어 격상된 '신명(神名)'을 통해, 에릭 자신이 직접 확인한 일이었다.
에릭은 황금빛 상태창을 바라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빙신보다는 낫지.'
문득, 니시다 료가 지껄였던 개소리가 떠올랐다.
처음 들었던 신명이 워낙 병신 같아서 그런지, '보스 정도면 꽤나 멋지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사실 에릭은 이름 같은 데 큰 의미를 두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이름은 이름일 뿐이다.'
신도가 늘고 자신이 위업을 쌓을수록 호칭은 더 멋지게 변할 테니까.
아무튼, 이 난세에는 이름 따위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
"사제님, 제가 했던 약속 기억하십니까?"
"설마...."
르웰의 청록색 눈망울이 흔들렸다.
기대감이 만연한 모습.
"황궁 데이트?"
르웰이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으며 들뜬 듯이 물었다.
그녀의 초록 눈망울을 보며,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장두식이 황녀에게 끌려가 황궁 어딘가에 있는 상황.
'마경을 뒤지고 다니려면 잭슨과 두식이를 데려가야겠지.'
마경 탐사를 하는 김에, 에릭은 분쟁 지대에 있는 교황청에 르웰의 보호를 부탁할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두식을 챙기러 황궁에 들를 필요가 있다.
겸사겸사 구경도 좀 하고.
"흥흥, 황궁이라니! 옷 좀 갈아입고 올게!"
르웰은 골반을 잘록이며 재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종종- 달려갔다.
홀릴 듯이 요염한 뒷모습이었으나.
'옷을 갈아입는다고?'
에릭은 관자놀이를 질끈 붙잡았다.
'황궁에 시스루 사제복을 입고 가는 것도 어지러운 판국에....'
설마 그 옷을 입고 나타나려는 건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79화 마경(魔境) (2)
후우웅-!
꿀밤이 내리쳐졌다.
어린 에릭의 머리 위로 금빛 신성이 피어올랐다.
인지하기 어려운 찰나의 순간 그 신성은 덧없이 사라지고, 결국 그의 머리 위로 주먹의 뾰족한 중지 부분이 맞닿았다.
꽈앙――――!!
에릭을 중심으로 파동이 일며, 흙먼지가 날아다녔다.
"끄윽-."
그는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그런 에릭을 향해 하얀 백발이 흐드러지듯이 다가왔다.
"에릭, 아직도 못 하겠느냐?"
스승은 한심하다는 듯이 조그마한 제자를 내려다봤다.
으득-.
에릭이 이를 씹으며 고개를 치켜올렸다.
작고 귀여운 꼬마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는데, 리페로제는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미친년-.'
아름다운 소녀의 가르침에서 배움이란 건 찾아볼 수 없는 거였다.
맞고 난 뒤로 묘하게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거나 고통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긴 한데....
'더럽게 아프네.'
맞는 순간부터 한동안은 두개골을 쪼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지독하게 아팠다.
이건 그냥 폭력이다.
"에릭, 배움이 더디구나."
정녕 이게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방식이란 말인가?
에릭이 그런 의문에 빠져 있자니.
슥-.
아주 미묘하게 리페로제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작은 근육이.
그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의지가.
그리하여 제 머리통을 내리치겠다는 폭력의 의도가.
쿵!
에릭은 바닥을 구르며 신성력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솟구친 신성력은 재빠르게 그의 두개골을 감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완성된 신성 방벽 위로 주먹이 떨어지자.
꽈아앙――――!!!
굉음이 일고 사방이 진동했다.
하나, 에릭의 신성방벽은 굳건하게 그의 머리를 지켜 주었다.
금이 가고 너덜너덜해진 방벽이었지만, 머리를 지킨다는 목적을 이룬 셈.
이를 보며, 소녀가 생긋 웃었다.
"봐라, 되지 않느냐?"
"그게 무슨 개소리...."
"어허, 또 예절 교육을 받고 싶은 게냐?"
이세계에서 겪은 폭력은 박지훈의 의지를 앗아 갔다.
제 잘난 맛에 살던 박지훈은 에릭이 되며 겸손을 익혔다.
에릭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입만 안 열면 참 귀여운데 말이야-."
나풀나풀 장포를 휘날리며 리페로제가 에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본래 몸은 정직하다."
그 뒤 그녀는 에릭에게 가르침을 정리해 줬다.
"꿀밤을 맞으면 아프다. 아프기는 싫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지. 그러니 몸은 아프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의 기능을 끌어내게 된다."
미친 소리였지만-.
'묘하게 말이....'
아니, 실제로 그런가?
몇 년을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맞으면 된다는 것이 실로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깃든 신성은 이러한 작용을 극단적으로 빠르게 이끌어 준다. 물론, 그만한 고통이 따르지. 하나, 에릭 너는 이미 하루하루가 고통이 아니더냐?"
과도한 신성을 얻은 반작용으로 여차하면 터져 죽는 것이 에릭이다.
힘을 최대한 쏟아 내지 않는 이상 그는 매일 밤 지독한 고통에 시달린다.
르웰과 스승이 없다면 잠이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래도.... 저런 미친 생각을-.'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럼에도 에릭은 그녀의 생각을 존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지독하게 아픈데, 꿀밤 정도는 괜찮으니라. 어딜 자르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기본적인 사고방식이 지독하게 달랐으니까.
'이 야만적인 세상 같으니.'
에릭은 이판사판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리페로제가 슬쩍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묘리로 저 무식한 놈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느냐?"
흠칫-.
그들은 마경 초입의 동굴 속에서 수행을 하는 중이었다.
동굴 구석에는 반삭 머리의 깡패가 있었는데, 그는 리페로제의 시선을 보고는 황급히 도망을 치려 했다.
"깡패야, 내가 잡으러 가야 겠느냐?"
"거, 거! 나, 나는 왜 자꾸 끌고 다니는 거요!!"
그녀의 한마디 말에 장두식은 황급히 도망치던 발걸음을 돌렸다.
"에릭, 덧셈을 가르쳐 봐라."
"아니, 저놈 나이가 몇인데, 이제 와서 되겠-."
"에릭, 너와 저 깡패가 만난 것은 신의 안배임이 분명하다! 내 몇 번이나 강조를 하지 않았더냐?"
그녀의 눈에서 황금빛이 번뜩였다.
광신적이었다.
'이럴 때 반항하면 진짜 죽기 직전까지 맞는다.'
꼬꼬마 에릭은 성호를 그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후우-. 한번 해 보겠습니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그들이 수행을 한 지도 어느덧 몇 달이 지났을 때.
"두식아, 5×6가 뭐냐?"
"거, 30 아니요?"
"그러면 245+34는 뭐냐?"
"...형님, 279 아니요?"
"자꾸 앞에 '거'나 '거참'이라든가, '형님'을 붙이면서 생각할 시간을 버는 건 아니겠지?"
"진짜로 다 외웠수다!"
장두식은 곱셈과 덧셈을 마스터했다.
"2,354×126이 뭐냐?"
"296,604요!"
완벽하게 네 자릿수 곱셈까지 암기했다.
아니, 해내 버렸다.
다만 문제는....
"사과 이십 개와 배 삼십육 개가 있다. 이걸 합친 후 반으로 쪼개서 두 배로 늘리면 몇 개가 되냐?"
"...그게 무슨 개소리요?"
장두식이 '이해'라는 행위를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
'미친놈....'
에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응용력이 0이다.
"스승님, 얘한테 마법식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그때, 리페로제가 에릭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뿐인데 에릭은 순식간에 신성력을 일으키며 그녀를 향해 방벽을 세웠다.
거기에 더해 제 몸을 강화하고 신성력으로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쏜살같은 속도로 하얀 장포가 휘날렸다.
후웅-.
꿀밤이 날아들고 에릭의 신성력은 주먹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그 뒤 에릭은 몸을 숙이며 후속타를 대비했다.
휙- 하고 하늘하늘한 장포 아래로 늘씬한 다리가 곡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에릭은 몸을 굽혀 바닥을 굴러 이를 피해 냈다.
그 뒤 리페로제에게 신성의 검을 내질렀고.
스륵-.
그녀는 잔상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여기까지가 1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되지 않더냐?"
리페로제는 에릭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에릭을 향해 있었고-.
'귀여운 놈. 부디, 이대로만 자라 다오.'
에릭은 그 눈빛에 소름 끼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 * *
"...그, 에릭 국장. 그대의 방식은 실로 잘못되었다."
황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갑작스레 쳐들어와서 장두식을 데려가겠다는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에릭을 반길 수가 없었다.
'두식이의 마법은....'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것이 수식과 마법진이다.
그래서 황녀는 장두식에게 그의 마법 발현 속도에 대한 질문을 건넸고, 그리하여 들은 대답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거참, 숨기는 게 아니래도! 진짜 될 때까지 맞았수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자란 황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런 걸 이해해서는 안 됐다.
'이 제국은 저런 폭력의 세계를 없애고자 만들어졌다.'
황녀에게 굳은 의지가 피어올랐다.
하물며, 제 남편 될 두식이를....
황녀는 장두식에게 들은 얘기들을 꺼내며 에릭에게 소리쳤다.
"어찌! 황가에 들일 사람을 그토록 때릴 수가 있단 말이냐!!!"
쥘부채를 촥- 펼쳐 들며 황녀가 에릭을 바라봤다.
마력의 가시화 현상이 일어나며, 사방이 일그러졌다.
툭- 하고 튀어오른 마력 파장이 에릭의 피부를 긋고 지나갔다.
한 줄기 핏방울이 흐르고 이내 상처가 자연 치유 되어 원상태로 돌아왔다.
'공격을 한다고?'
그에 에릭이 슬쩍- 몸을 움직였다.
'중지를 살짝만.'
그녀도 맞아 보면 생각이 바뀔 거다.
'이참에 황녀를 신성 마법사로 개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에릭!"
그때 르웰이 에릭의 앞을 막아섰다.
그녀는 슬그머니 에릭의 손등을 잡으며, 생채기가 났던 자리를 바라봤다.
"네 동생 아내면 제수씨가 될 사람인데, 그러면 되겠니?"
청록색 눈망울이 에릭을 올려다봤다. 물리적인 폭력은 안 된다는 눈빛이었다.
에릭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체 뭘 하려고....'
르웰은 우아하게 몸을 돌리며 황녀를 바라봤다.
황녀와 르웰이 코앞에서 서로를 마주본 상황.
은발에 붉은 눈을 지닌 화려한 황녀와 고고하며 요염한 르웰의 분위기는 서로 상반되었으나, 묘하게도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황녀 또한 르웰과 비슷한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
스윽.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는 르웰의 눈빛.
르웰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자애로운 성호를 그려 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같은 동탄 미시룩을 입은 절세 미녀가 둘이나 있는 상황.
하나, 우위는 명확했다.
'르웰도 잔인한 면이 있군.'
에릭은 거기서 르웰의 의도를 읽어 냈다.
마치 르웰이 에리카를 대할 때와도 비슷한 모습이었으니까.
파르르-.
그 시선에 황녀의 쥘부채가 떨렸다.
"두 번째로-."
장두식이 내뱉었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녀는 황녀다.
"일개 사제가 황궁에 들어오는 건 처음 보는구나."
황녀는 위엄 있게 르웰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제깟 게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었다.
"훗, 미흡하지만, 제국의 성녀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두 여인의 눈빛 사이로 불똥이 튀기는 느낌이었다.
에릭은 유치찬란하면서도 누구보다 날카로운 전장에 발을 디뎠다.
"서로 인사도 나눴으니, 다음 얘기는 차차 해 갑시다."
짧은 기 싸움이 끝나고.
에릭은 르웰과 나란히 걸으며 황궁을 구경했다.
"와아! 저게 진짜 달 조각이야?"
"듣기로는 그렇다더군요."
지구와 달리 진은(眞銀)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제국의 황실이다.
실제로 진은은 은에 달빛을 담아 만드는 광물로, 아주 비싸다.
그 비싼 걸 아무렇지 않게 늘어 둔 곳이 황궁이다.
사방 천지에서 은빛이 반짝였고 그 사이사이로 아이보리색 달 조각 장식들이 황궁 내부를 꾸며 냈다.
"그렇다. 여기가 바로 황족들이 지내는 내궁이니라."
황녀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자신만만하게 그리 말했다.
그에 에릭이 싸늘하게 물었다.
"그래서 두식이는 대체 어딨습니까?"
"...저쪽이다."
황녀는 두 사람을 황실마탑과 연결된 전이 마법진으로 데려갔다.
"벌써 끝?"
"다음에 폐하를 뵐 때 더 자세히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그 마법진 앞에서 르웰이 아쉬움을 토로했고, 에릭은 또 한 번의 데이트를 약조했다.
거기까지 대화가 끝나자.
우우웅-!!!
마법진이 빛나며 반삭 머리 덩어리가 나타났다.
"오오-! 형님!"
장두식이 환한 얼굴로 에릭을 반겼다.
황녀를 슬쩍 본 장두식은 획 고개를 돌렸다. 황녀 또한 쥘부채를 파르르- 떨었다.
그에 에릭이 묻기를.
"둘이 싸웠냐?"
"거, 마누라가-."
"두식아, 원래 내 여자랑은 싸우는 게 아니다."
"내 마누라가 왜 형님 여자요?"
"아니-. 쓰읍. 후. 자신의 여자와는 싸우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에릭은 간략하게 설명을 더해 줬다.
무릇 남자란 자기 여자한테는 무조건 져 줄 줄도 알아야 한다.
물론, 정도는 봐 가야 하지만, 황녀씩이나 돼서 너한테 무슨 대단한 잘못을 했겠냐.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
"마누라보다는 마누라가 데려온 그 영감이 더 문제요!"
이때다 싶었는지, 장두식이 황급히 소리쳤다.
황실마탑주는 허명(虛名)이다.
가르치는 걸 더럽게 못한다.
이런 얘기였다.
"하루 종일 무슨 원리니 개념이니 떠드는데, 거참, 어이가 없어 가지고."
그 말에 에릭은 황녀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리고 말하기를.
"황녀 전하, 제 방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황녀는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다.
* * *
"잭슨, 스승님이 오러를 어떻게 가르쳤냐?"
"오러를 뽑을 때까지 신성력을 쏟아부으셨죠."
잭슨은 절름발이가 되는 대가로 소드마스터에 도달했다.
게다가 이제는 죄를 용서받아 다리까지 치료한 상황.
"-그때는 억울했지만, 확실히 리페로제 님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두식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거, 당연한 걸 묻소. 황실마탑주보다 리페 누님이 그림 꺼내 두고 외우라고 패는 게 더 효과적이었수다."
"르웰 사제님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좀 과격하긴 한데, 네가 이토록 성공한 걸 보면 틀린 전제는 아니야. 물론, 너무 어린 애들한테는 좀 그렇지만...."
르웰도 여기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하면 된다.'
에릭 또한 이런 가르침에 동의하는 바였다.
자기가 그래 봤으니 잘 안다.
비단, 무(武)에 대한 얘기만이 아니다.
명품 브랜드, 신문사, 포차, 건축.
그간 이 방법으로 성공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그러니.
"잭슨, 빙의자들도 오러나 마법을 깨우치게 해야겠다."
"좋은 생각입니다."
차후 빙의자 도시의 육성 방식이 정해진 순간이다.
"형님, 근데 왜 전이의 기적을 이렇게 멀리 쓴 거요?"
"교황청 근처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이번에 힘을 얻으면서 에릭은 다중 전이가 가능해졌다.
빈민가의 한 구획을 통째로 옮긴 것에 이어, 제법 강자에 속한 존재들까지 한 번에 전이시킬 수 있게 됐다.
그러고도 한참 여유가 남았다.
다만, 문제는 전이의 힘을 막는 무언가가 교황청 주변에 생겼다는 것.
'마력.'
공간 이동은 상당히 예민한 힘이다.
대놓고 샛길을 뚫어 두는 게 아니라면, 대규모 교란 마법이나 마나의 맥을 뒤틀기만 해도 좌표가 일그러진다.
신성력으로 이용하는 힘 또한 공간 자체를 건들면 전이가 막히곤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이 까마득한 무국적 지대의 절벽 위를 하염없이 걷게 된 것이다.
"치유."
초고속으로 이동하나 계속해서 체력을 회복시켜 주는 에릭 덕분에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휘오오오오오―
시꺼멓고 반투명한 장벽에 둘러싸인 교황청이었다.
"에릭- 저거."
르웰이 화들짝 놀라 에릭의 팔을 붙잡았다.
"[격리] 스킬이군요."
에릭의 눈이 좁혀졌다.
흑마법사 빙의자들의 고등급 스킬, [격리].
단절 주문의 상위 호환 스킬로, 이는 특정 범위 자체를 세계로부터 격리시킨다.
'교황과 성전기사단장이 있는데 저걸로 될 리가.'
교황청 주변으로 거대한 몬스터들이 가득했지만, 문제는 없을 터였다.
몬스터 웨이브는 시간을 잡아먹을 뿐, 교단의 존속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쿨타임도 30일이나 되는 스킬을 왜 여기다 썼지?'
에릭의 사고가 가속했다.
놈들이 뭘 노리고 교황청을 가둬 버렸는가?
답은 금세 나왔다.
'나다.'
80화 마경(魔境)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