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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10화 예절주입기 에릭 (2)

"미리 말하겠지만, 나는 거짓말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야."

서걱서걱.

종이와 펜이 내는 소음 사이로 묵직한 중저음이 내려앉았다.

에릭이 금빛 안광을 흩뿌리며 뇌옥에 갇힌 빙의자들에게 엄포를 놓는 소리였다.

'뭘 어떻게 증명하려고.'

빙의자 수용소의 고참, 박창호는 에릭의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흠... 흑마법사 클래스군."

"흐익-!"

[박창호 25세, Lv.29]

[클래스: 전사(주무장 쌍수 레이피어)]

[보유 스킬: 대륙 공용어, 리먼 왕국 제식 검술, 찌르기 Lv.9, 백스텝 Lv.3, 허공답보 Lv.10, 검기 Lv.7, 고통 내성 Lv.9]

[보유 자산: 초보자 전용 레이피어×2, 중급포션 6병....]

서류를 써 내려가던 박창호의 손이 멈췄다.

에릭이 싸늘한 말투로 옆방의 죄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마법사의 씨를 말렸다던....'

선배 빙의자들이 그 이름조차 언급하지 말라던, '리페로제 아스티아'가 떠올랐다.

흑마법사라는 하나의 클래스를.

한때, 멸종까지 몰아넣은 여자가 리페로제다.

그런 괴물 NPC의 제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거대한 사내였다.

[...3400골드-]

곁눈질로 옆방을 바라보며 박창호는 마저 서류를 쓰려 했다.

그랬는데.

"보유 자산도 속였고, 내 말이 우습나?"

어째 들려오는 말이 이상했다.

빙의한 플레이어들끼리도 서로의 인벤토리 내용물을 알 수 없는데, 뭘 속였다고 자신하는 건지....

내심 산전수전 다 겪으며 29레벨을 만든 박창호였기에, 이 또한 허세일 거라 생각했다.

"흠, 흑마법사 전용 의식 해골 지팡이라. 상점에서 해금 조건이 66킬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엘릭서 개수도 1개로 줄여 썼군."

"그, 그걸 어떻게...."

들려오는 대화에 박창호 역시 당황했다.

'뭐지?'

옆방에 갇힌 사내는 쑨웡이라는 이름의 중국 유저다.

'배신자가 있나?'

수용소에서는 철창 사이로 넣어 주는 싸구려 식사를 받아 먹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빙의자 수용소에 갇힌 이들은 서로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때 쑨웡이 자랑했던 아이템 중에 분명 '의식 해골 지팡이'가 있었다.

'인벤토리 내용물을 어떻게 알지?'

박창호가 놀라 있자니, 철창 사이로 샛노란 빛이 스며들었다.

'앗 따거-.'

고통 내성 스킬을 꿰뚫고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작 빛이 스며드는 정도로 고통을 느낀다고?'

박창호가 빛에 닿은 손등을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의 힘은 숨겨진 모든 것을 밝혀 주신다."

옆방에서 사뭇 두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성화는 부정한 것들을 태워 버리지."

"자, 자, 자잠깐!"

"네놈이 숨긴 아이템은 저승길 노잣돈으로 쓰도록."

화륵.

불길이 이는 소리와 함께 박창호의 철창으로 희뿌연 금빛 연기가 스며들었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도 함께였다.

'미친놈이구나.'

박창호는 소름이 돋았다.

그 제국의 정보부 요원들조차, 빙의자를 죽일 때 최대한 인벤토리의 물품을 꺼내게 만들고 죽였다.

그런데 저 에릭은 그런 것도 없다.

[...34만 2천 골드, 엘릭서 8병, 중급 방어 스크롤 76장.]

박창호는 곧바로 인벤토리의 물품을 정직하게 기입했다.

달콤한 신성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는 것이 영 기분이 싸했다.

[고유 특성: 제육감(第六感)]

그의 감각이 말하길, 스킬과 클래스 등 모든 것들을 소상히 적어야 할 것 같았다.

박창호가 수정을 마쳤을 때, 에릭이 그의 철창 앞에 섰다.

"흠. 쌍수 레이피어라, 2차 전직은 쌍수 검사로 하려는 건가?"

서류를 바라보는 박창호의 위로 에릭의 그림자가 뒤덮였다.

박창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올려 에릭을 바라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과 등 뒤에 뿌려진 신성의 휘광이 더없이 찬란했으나.

그의 입가만큼은 어째 뒤틀린 것이 꼭, 사신처럼 느껴졌다.

"워, 원하신다면, 클래스 변경도 할 수 있습니다! 캐시템, 아니, 그... 빙의 전에 '클래스 변경권'을 사 둬서 인벤토리에...."

살기 위해 입을 놀리는 박창호를 향해 에릭이 말하기를.

"가진 템 다 꺼내 두고 장두식, 내 뒤의 덩어리 놈을 따라가라."

숫제 깡패가 돈을 뺏는 느낌이었다.

"거, 형님, 이놈이 첫 빠따요?"

뒤따라온 반삭 머리의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하는 것이, 더욱이 그래 보였다.

진짜 무슨 범죄 영화에 나오는 조폭을 중세 시대로 옮겨 놓은 느낌이었다.

* * *

에릭은 한때 박지훈이었다.

가장 효율적으로 레벨링을 해서 서버 최초로 성기사 캐릭터를 얻어 낸 그런 존재였다.

그가 빙의한 뒤로 게임에 추가적인 업데이트는 없었다.

그저 순차적으로 빙의자들이 끌려왔을 뿐.

"두식아, 우리가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하냐?"

빙의자들의 물품 압수 및 인원 추리기를 마친 에릭은 장두식과 함께 아이템 정리를 시작했다.

"소름 돋게 왜 그런 소릴 하수?"

빙의자들의 아이템을 분류하며 에릭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왜, 네놈 고향을 멸망시켰던 흑마법사 놈 말이다."

"휴우, 난 또 뭐라고. 뒷골목에서 만났을 땔 말하는 줄 알았수다. 그, 흑마법사 놈이 뭐 있수?"

"그놈도 빙의자다. 아니, 빙의자였다."

"...어째 그럴 것 같았수다. 활활 타 죽는 게 섬뜩하더라니...."

에릭이 스승을 따라 수행하던 시절, 그는 '진짜 빙의자'의 위험성을 몸소 목격했다.

"그때 죽은 사람이 66만이다."

"허어... 제국령 전체를 합쳐도 인구가 천만 아니요?"

"미친 숫자지. 근데, 좀 전에 타 죽은 놈은 66명을 죽였더라."

에릭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빙의자를 싫어하는 쪽에 더 가까운 그였다.

"딴 건 몰라도, 흑마법사는 다 뒈져야지."

"다른 놈들은 어쩌실 거유?"

"써먹어 보고, 50렙을 찍을 가능성이 보이는 놈들만 추릴 거다."

에릭은 나름의 생각이 있다.

황제가 권한을 준 이유는 당연하게도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다.

에릭이 증명해야 할 부분은 바로, 미궁 공략이다.

"최대한 터프한 놈들로 추려야 미궁도 공략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따지면, 흑마법사 놈들도 쓸 만한 것 아니요?"

빠악-!

"끅."

"두식아, 생각을 좀 해라."

신성을 두른 꿀밤이 내려쳐치자 장두식이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그런 장두식을 보며 에릭이 덧붙이기를.

"터프하다는 말이, 사람을 팍팍 죽이는 미친 새끼들을 찾는다는 게 아니잖냐? 살인 따위 안 하고도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놈들이란 의미다."

"내 오해했수다."

"그래, 알면 됐다."

에릭은 이 세계에서 15년을 살아오면서, 대단히 많은 고민을 해 왔다.

'대격변 패치.'

게임 속에서는 메인스토리의 이름일 뿐이었지만.

현실인 이곳에서는 끔찍한 재앙의 시작이 되는 이벤트다.

우선, 대륙 곳곳에 마경이 늘어나고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생겨나게 된다.

그 뒤로 미궁의 계층 공략에 시간 제한이 생겨나고, 이를 어길 때마다 대륙 한 곳에 랜덤한 재앙이 펼쳐진다.

'기간은 몰라도 반드시 일어나겠지.'

진도 20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동면기에 접어든 고룡(古龍)이 깨어나 도시를 멸망시킨다거나.

미궁 입구가 있는 각국의 수도에 몬스터 웨이브가 들이닥치기도 했는데.

'저걸 왜 꿀잼이라 생각했을까?'

에릭은 지구에서 게임을 즐기던 박지훈 시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건, 박지훈의 기억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주요 NPC라든가 게임 내의 이스터에그 같은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미궁의 경험, 즉 공략에 대해서는 나름의 일가견이 있었다.

플레이어로서, 정점을 찍어 본 만큼 자신이 있단 말이다.

"그래서 형님, 미궁은 대체 어떤 곳이요?"

아이템 정리를 마친 장두식이 에릭에게 물었다.

에릭은 실제로 미궁을 겪어 봤다.

스승을 따라 두 번을 다녀왔고 그 뒤로 에릭은 미궁에 들어갈 생각을 완벽하게 접었었다.

"위험이 확정된 곳을 미쳤다고 내 발로 가?"

에릭도 한때는 이런 보신주의적인 사고를 했었다.

5살, 작고 마른 어린 에릭은 거대한 몬스터들이 참으로도 무섭게 느껴졌었다.

6살, 작지만 신성을 제법 다루는 에릭에게도 몬스터는 끔찍하고도 강력한 괴물이었다.

"좁밥이다."

그런데 열다섯 에릭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빙의자들조차 피하는 미궁 말하는 거 맞수?"

"그래."

"그걸 믿어도 되는 거요?"

"그럼 내가 너 죽으라고 데려가겠냐?"

"허... 그건 또 그렇수다."

장두식은 에릭을 잘 안다.

자신보다 배는 어린 에릭이었지만, 그는 에릭을 완벽하게 형님으로 모시고 있었다.

빙의자인 것을 안 뒤로는 더욱이 깍듯해졌다.

'형님은 괴물 같은 꼬마였수.'

강제로 패배해 모시게 된 형님이 에릭이었다.

함께 지내면서 충성심이 피어나 형님으로 대했지만, 내심 나이에 대한 부분이 신경 쓰이던 장두식이었다.

그런데 에릭은 자신이 빙의자임을 알려 줬다.

'진짜 형이었을 줄은 몰랐수다.'

실제 나이로도 형님인 걸 알았을 때, 장두식은 매우 기뻐했다.

옛날에는 7살 꼬마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라다니는 것이 불만이기도 했었는데....

생각에 잠긴 장두식에게 에릭이 물었다.

"두식아. 저층만 돌 건데, 원딜은 너 하나면 되겠지?"

"그걸 내가 어찌 알겠수? 미궁은 가 본 적도 없는데...."

"근딜은 한 놈 있는데, 원딜에는 지원자가 한 놈도 없다."

소지품 압수 후에, 에릭은 미궁에 자원할 사람을 모집했다.

박창호라는 [전사]를 제하면, 그 누구도 지원자가 없었다.

"거참, 빙의자 놈들도... 죄다 쫄보들이구만."

* * *

"미궁의 저층은 최대 5인으로 인원 제한이 있고 중층은 최대 10인 파티로 구성된다."

에릭은 빙의자들을 모아 두고 조촐한 출병식을 진행했다.

1평 남짓한 철창을 나온 빙의자들을 서슬 퍼런 단두대 앞에서 에릭의 일장 연설을 들어야 했다.

'미개한 NPC 새끼, 뻔한 소리를.... 한 시간 내내 늘어 두네.'

일부 차출된 빙의자는 그런 상황에 억하심정이 들었다.

"다들 현실에서 미궁은 처음일 테니 집중해서 듣도록."

에릭은 5인 파티를 만들었다.

장두식과 지원자 박창호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서류에 쓰인 상태창 정보와 에릭이 직접 확인한 스펙을 종합해 선정했다.

"저, 저는 1레벨인데, 진짜로 미궁에 들어가나요?"

단발머리를 한 늘씬한 체형의 여자가 눈시울을 붉히며 애원하듯 물었다.

귀엽고 동그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너는 무조건 들어가야 한다."

[강풍호/34세, Lv.1]

[클래스: 궁수]

[고유 특성: 빠른 성장]

"저, 저는 정말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잘못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네가 적합해서 선정됐을 뿐이지."

에릭은 궁수 클래스의 강풍호를 바라보며 냉혹한 말을 뚝뚝 내뱉었다.

"연약한 여자를 이렇게...."

에릭의 눈으로 볼 때.

'고유 특성이 엄청 희귀하고... 정신 상태가 이상한....'

강풍호는 이레귤러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여자다.

그리고 단발머리의 늘씬한 몸매를 지닌 여자 강풍호는 원래 남자였다.

"강풍호, 서류에는 강지나라는 이름을 써서 냈더군."

"헛-! 미친, 그, 그걸 어떻게?"

"말했지 않나? 신성력으로 못 볼 건 없다고."

에릭의 한마디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빠른 성장] 특성도 아주 특이한 케이스긴 하다마는.

그보다는 남자가 여자로 빙의한 사례가 더욱 희귀하게 느껴졌다.

'스승님조차 두 번밖에 못 봤다는데....'

빙의자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잡은 것이 에릭의 스승인 리페로제 아스티아다.

못해도 동접자가 백만 명은 넘던 게임이었으니, 에릭의 스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의 빙의자를 접해 왔을 거였다.

"여, 여캐를 골랐는데...."

"흠, 또 거짓말을 하는 건가?"

게임 속에서는 여캐 남캐 선택이 불가능하다.

'정해진 캐릭터로 플레이하는 게 전분데 어딜 개소리를.'

에릭이 검지 끝에 성화를 붙이자.

"죄, 죄송합니다...."

강풍호가 고개를 내리깔았다.

1레벨의 무해한 빙의자일지라도 에릭은 경계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거참, 빙의자 놈들은 성별도 멋대로구만."

잠깐의 성별 이슈가 끝나고.

에릭은 빠르게 출병식을 끝냈다.

"무장은 미궁 안에서 나눠 주마."

각자의 클래스에 맞는 포지션을 선정하고 신성력으로 힐을 받지 못하는 빙의자들을 위해 회복 포션을 제공했다.

제국에서 제공한 포션은 모두 상급이었는데.

"하, 하급 포션은... 진짜 찰과상밖에 안 고쳐 주잖아요!"

에릭이 지급한 것은 하급 포션 10개가 전부였다.

"치유의 기적이 있다."

신성을 피워 내며 그리 말하는데, 빙의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깡패도 아니고....'

그들은 강제로 차출되어 미궁을 공략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러웠을 뿐이다.

에릭은 단두대 단상 위에 도열한 파티원들을 데리고 미궁 입구로 향했다.

"쌉니다, 싸요!"

"마탑제 떨이 포션 팝니다!"

거대한 광장에 열린 칠일장.

미궁으로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는 인파.

제3구역의 미궁 광장은 그야말로 사람으로 가득했다.

"에릭-!"

다른 빙의자들과는 다르게, 에릭에게는 배웅해 줄 가족이 존재했다.

"에릭 혀어엉-!"

"올 때 선물 가져와야 해!!"

"얘들아! 떽!"

르웰과 고아원의 아이들이었다.

에릭은 아이들을 지나쳐 르웰의 앞으로 걸어갔다.

"르웰 사제님."

눈가에서 자랑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르웰을 바라보며 에릭이 고개를 숙였다.

"흥흥, 에릭 순례자님이라 불러야 되나?"

"지금 맡은 일은 빙의자 수용소 관리국장의 업무입니다."

"그래? 그럼 에릭 국장님?"

"낯부끄러우니까 그러지 마시죠."

에릭은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장성한 자식을 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이렇지 않을까?

'지구에서도 못 봤던 걸 여기서 다 느껴 보네....'

정말이지 뭔가 찡했다.

선물까지 받으니 더욱이 그랬다.

"하나는 가서 먹을 도시락이고, 이거는 리페로제 님이 전해 주라 한 거야."

르웰은 어깨에 맨 명품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아공간 주머니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르웰의 특제 도시락과 스승의 맡겼다는 물건이 정체인데, 후자의 것은 시기적으로 말이 안 됐다.

"스승님이 뭘 맡겨요? 사라진 지가 5년이 넘었는데."

"네가 미궁에 들어갈 때 주라고 5년 전에 맡기신 거란다."

르웰의 말에 에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에릭이 아공간 주머니에 든 물건을 꺼내 들려는 순간.

"어어? 그-"

한 빙의자가 르웰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호-."

무언가를 말하려고 들었다.

11화 예절주입기 에릭 (3)

'미개한 NPC 새끼들.'

일본인, 니시다 료는 에릭에게 강제로 차출된 마지막 빙의자다.

게임에서는 피지컬 부족으로 적극적인 PVP가 이뤄지는 미궁을 기피했던 그였다.

대신 이스터에그나 히든피스를 찾고 그것들을 판 자산으로 길드홈을 구매해, 그 안을 미녀 NPC들로 채우는 행위로 게임을 즐겼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진짜 자신의 몸이었다면, 게임 세상에 빙의해서도 무쌍을 찍을 수 있었을 테지만....

하필 뚱뚱한 체형의 남자로 빙의한 탓에, 모험가가 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제국령 외곽의 하급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렸다.

그렇게 살다가 운도 좋게 우연히 호감작이 가능한 NPC를 마주쳤다.

제국 수도 근방의 마을 주민으로, 미녀 NPC로 유명한 캐릭터였다.

"농민으로 태어나 죽기보다는 함께 모험을 떠나 보는 건 어때?"

게임에서 나왔던 선택지대로 니시다 료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요? 너무 기대돼요!"

그녀는 산뜻하게 웃으며 그를 마을 어귀에 마련된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었다.

그리고 재수도 없게 하필 그곳에서 대기 중이던 제국 감찰대에 잡혀 버렸다.

[수용소 탈출은 불가능한가요?]

[구조대 모집 1/999]

[빙의 다년 차 고인물들아 불쌍한 수용자들 구조 좀 해 줘!]

커뮤니티에 열심히 구원 요청을 해 봤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감금 생활에 익숙해질 때쯤.

"특성이 특이하군."

빙의자 관리국장이라는 직함을 지닌 거대한 성기사가 찾아왔다.

'미개한 NPC 새끼, 뻔한 소리를.... 한 시간 내내 늘어 두네.'

에릭에게 끌려간 료는 막 단두대 앞에서 강압적인 출병식을 진행한 참이었다.

'어쩌다 미궁에 끌려가서....'

빙의자 선배들조차 미궁을 꺼리는 판국에, 야만스러운 현지인 종교쟁이한테 끌려가는 것이 상당히 불만이었다.

아주 못마땅한 일들만 일어나 료는 기분이 안 좋았다.

'이대로 미궁에.... 어어?'

그때, 빙의자 관리국장을 배웅 나온 여자가 료의 눈길을 빼앗았다.

'저거 설마...?'

게임보다 자극적으로 변한 시스루 차림의 성복이 눈에 띄었다.

그래픽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미모와 몸매였다.

"어어? 그-."

본능적이었다.

대륙 온라인에는 진짜 상상을 초월하게 아름다운 NPC들이 몇몇 존재했다.

그들은 모두 호감작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름이....'

눈앞에 있는 여인은 분명 아스티아 교단의 하급 사제로, 특정 키워드를 통해 쉽게 길들일 수 있는 그런 NPC였다.

'르웰이었나?'

원채 조심성이 떨어지고 판단 능력이 부족한 료였기에 그의 무의식은 떠올린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었다.

"호-."

료는 무의식적으로 그 단어를 내뱉으려 들었다.

그랬는데.

쿠우웅.

갑작스레 세상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크흡!"

그러더니 숨이 턱 막혀 왔다.

짧은 숨 넘어가는 소리만 냈을 뿐인데....

'수, 숨이!'

무언가가 입을 막은 듯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타들어 가듯이 뜨거워졌고 목울대는 누군가가 움켜쥔 듯이 조여 왔다.

그런 와중에 주변 상황은 평범했다.

"도시락 잘 먹겠습니다."

에릭은 그렇게 말하며, 또 하나의 아공간 주머니를 확인하려 했고.

"에릭, 리페로제 님이 주신 주머니는 미궁에 들어가서 열어 봐야 해. 꼭 이 말을 전하라 하셨어."

르웰은 그에게 전언을 전했다.

'누, 누가 나 좀!'

숨이 턱 막힌 료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만 내버려 두고 세상이 멋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사, 살려....'

정말 기절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뻐억-!

"거참, 이 새끼 눈깔을 뭐 그렇게 뜨고 지랄이야?"

"커헉-! 크흐윽...."

장두식의 폭력 덕분에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얻어맞은 명치가 아팠다.

그럼에도 니시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하려던 말, 끝까지 뱉었으면 너는 이미 뒈져 있었을 거다."

장두식이 속삭인 한마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 * *

에릭은 평온한 얼굴로 르웰과 작별 인사를 마쳤다.

"에릭? 뭐가 불만이야?"

그를 오랜 시간을 봐 온 르웰이다. 그녀는 에릭이 상당히 언짢은 상태라는 것을 알아챘다.

사실 에릭은 얼굴 표정에서 티가 팍팍 나는 부류다. 숨겨봤자 르웰이 볼 때는 별 차이도 없었다.

"르웰 사제님은 못 속이겠군요. 아무래도 스승님이 준 선물이라니까 괜히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에릭은 미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르웰에게 거짓말을 늘어 두었다.

"...리페로제 님이 좀 괴팍하긴 하시지."

조금 떨떠름해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그녀도 어느 정도 납득한 눈치였다.

원래 아이들과 잡담도 좀 나누고 미궁에 들어가느라 못 한 수업에 대한 보충 과제까지 내 주려 했던 에릭이었는데.

'빙의자 새끼들.'

당장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황제폐하의 명인 만큼,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겠습니다."

에릭은 정중하게 성호를 그리며 르웰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 다녀와! 애들은 내가 잘 보고 있을게!"

손을 흔드는 르웰을 뒤로한 채 에릭은 성큼성큼 미궁입구로 향했다.

그 발걸음이 급했다.

"비켜라! 형님 지나가시는데, 어딜 길을 막냐!"

매주 첫날에 개방되는 미궁 입구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장두식은 기다랗고 뭉뚝한 몽둥이를 휘휘 휘저으며 줄을 선 모험가들을 위협하고 들었다.

"줄 안 보여? 미친 새낀가...."

"너 어디 클랜이냐? 제국에서 미궁 입장은 선착순인 거 몰라? 저어기 선배 모험가님들도 줄 서 계신데."

미궁에 들어가는 이들은 대다수가 모험가다.

목숨을 내걸고 모험을 통해 수입을 벌어들이는 자들로, 다들 한 성깔 하는 부류였다.

"웬 깡패 같은 놈이.... 어?"

장두식을 보며 화를 내던 모험가들은 그의 뒤에 선 거대한 남자를 보며 당황했다.

가슴팍에 아주 유명한 휘장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황실?'

황실 직속 기관을 의미하는 붉은 달의 표식과 잔뜩 일그러진 에릭의 얼굴이 두려움을 이끌었다.

"...죄송합니다!"

미궁으로 향하는 지하 계단이 활짝 열렸다.

'저건 누구지? 교단 놈인가?'

고위 모험가들도 에릭에게서 풍겨 오는 기척에 순순히 길을 터 줬다.

에릭은 인파들 사이로 생겨난 길을 무뚝뚝하게 걸어 내려갔다.

""충-!""

계단의 끝에는 커다랗고 낡은 아치 형태의 나무문이 보였다.

미궁 앞을 지키는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에릭은 미궁의 입구로 다가섰다.

그러고는 문에 손을 얹었다.

끼이익.

스산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며 미궁으로 향하는 문이 좌우로 개방되었다.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시꺼먼 어둠.

"가지."

어두컴컴한 문 앞에서 에릭이 등 뒤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꿀꺽.

뒤에 붙잡혀 온 빙의자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솔직히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다르게 몸은 미궁으로 향했다.

눈앞의 거대한 남자가 잔뜩 성질났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거, 형님. 기분 좀 푸시는 게 어떴수?"

"화 안 났다."

아주 평이한 어투였으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에릭은 그만큼 화가 났다.

'미궁에 신성력에 미치겠네.'

빙의자들은 미궁의 어둠과 화난 에릭을 사이에 두고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다들 잘 따라와라."

에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궁의 어둠 속으로 발을 밀어 넣었다.

―인간 다섯, 미궁의 시련을 받는다.

그 즉시, 사람을 반기는 미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궁의 저층, 1~10층까지는 한 번에 다섯 명까지만 같은 장소로 보내진다.

그 이상이 함께 들어간다면, 각기 다른 장소로 흩어지기에 저층의 공략대는 소수 정예로 이뤄진다.

"오랜만이군."

에릭은 사방이 검은색인 미궁의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그, 호, 혹시 국장님께서는 미궁에 몇 번이나 들어가 보신...."

시꺼먼 어둠 속을 묵묵히 걷기를 한참, 지루함을 못 이긴 한 빙의자가 입을 열었다.

[빠른 성장] 특성을 지닌 강풍호였다. 그녀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도도한 걸음걸이로 에릭의 옆에 나란히 섰다.

미녀로 빙의한 자신을 믿고 답답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한 것이다.

"닥치고 걸어라."

돌아오는 말이 싸늘했다.

강풍호는 옆에 있는 두 명의 빙의자들을 바라보았다.

[고유 특성: 제육감(第六感)]

박창호는 죽은 사람처럼 기척을 죽인 채 고개를 내리깔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징조였다.

본인을 여자로 알고 친절하게 대해 준 박창호가 무언가 언질을 주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는 절대 고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강풍호는 오른쪽을 바라봤다.

달달달달.

숫제 지진이 난 듯 입과 턱을 덜덜 떠는 료가 보였다.

퉁퉁한 체형의 료는 수용소에 갇혀 있을 적 몇 번 대화를 나눠 본 사이다.

'분명 고유 특성이....'

[즉사 감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게임 속에서는 크게 쓸모없던 특성이었다.

보통 보스 몬스터가 쓰는 즉사기 직전에 발동해서 막상 써먹을 일이 잘 없던 특성이다.

"...흐으으으."

그가 죽어 가는 사람처럼 신음을 흘리는 것이 몹시 불길해 보였다.

여자로 빙의한 강풍호가 보건대, 두 사람의 반응이 일반적이진 않았다.

'분명, 호...라고 했었지?'

대충 맥락상 료가 뭔 말실수를 해서 이 사달이 났다는 건 눈치챘다.

그때였다.

쿠웅. 쿠웅. 쿵!

세 번의 진동이 일고 어둠 속에 갑자기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화륵! 화르륵! 화르륵-!

미궁 벽면에 달린 횃불에 불이 붙으며 어두컴컴한 어둠 속을 밝혀 주었다.

일렁이는 불꽃과 그에 따라 춤을 추는 그림자.

미궁을 이룬 거대한 동공의 천장에서는 똑똑- 물방울이 떨어졌다.

"NPC, 호감작, 히든피스, 파밍."

그 너머로 에릭의 거대한 등이 보였다.

꿈틀거리는 승모근 너머로 익숙한 언어들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아직도 여기가 게임 같냐?"

에릭이 몸을 돌려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금빛으로 빛나는 안광이 선명했다.

'예절 교육부터 해야겠어.'

에릭은 단단히 화가 났다.

빙의하고 멋모르고 설치다가 수용소에 갇혀 있던 놈들이,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제 멋대로 떠드는 꼴이 우스웠고.

그걸로 자신의 은인을 욕보이려 한 것이 더욱 열받았다.

"호감작에 나오는 선택지."

에릭이 료를 내려다보며 말하기를.

"그건 이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건드는 말이다."

아주 무미건조한 말투였는데, 그래서 더욱이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죄, 죄, 죄송.... 아, 아, 아니, 사, 살려 주세요!"

털썩.

육중한 체구의 료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희들은 게임 속 세상에 온 게 아니다. 이 세상을 본 딴 게임을 하다가 미궁의 농간에 끌려든 거지."

툭.

에릭이 아공간 주머니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봐준다."

* * *

"거참, 형님이 저놈들 다 태워 죽이는 줄 알았수다."

"두식아, 저런 놈들도 써먹을 수 있어야 진자 성인이 아니겠냐?"

빙의자들에게 무장을 던져 주고 에릭은 장두식과 함께 미궁 통로를 살펴봤다.

"맞는 말이요. 형님이 성직자란 걸 이럴 때 실감하고 있수다."

"뭐, 네놈도 새 사람이 되었는데, 빙의자라고 못 될 건 없지."

에릭은 장두식의 개과천선을 떠올리며, 빙의자에게도 기회를 줬다.

'흑마법사라거나... 인간 실격 업적이 없다면야.'

아무나 살려 두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입구가 뭐가 다른 건지 아슈?"

"어릴 때랑 느낌은 다른데, 막상 차이점은 모르겠다."

반구 형태의 거대한 동굴 벽면을 따라 여섯 개의 길이 보였다.

각각의 입구는 전부 다른 길로 연결된 구조로, 몇몇 스킬이 아니라면 길은 순전히 운으로 정해진다.

"저, 저... 준비 끝났습니다!"

당연하게도 에릭은 빙의자들 옆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엄연히, 빙의자들은 현지인의 몸을 빼앗은 존재로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에릭도 빙의자들을 그렇게 대했다.

"일렬로 서 봐."

에릭은 무장을 마친 빙의자들을 살펴봤다.

'나름 쓸 만해 보이네.'

쌍검을 든 근접 딜러.

활과 화살을 든 궁수.

칼과 방패를 든 뚱뚱보.

"쌍수 레이피어, 현실에서는 효율이 떨어져서 쌍검사는 병신 취급을 받지."

"...그,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클래스 변경권이 있어서...."

"아니, 나도 안다. 너희는 스킬트리를 통해 쌍검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에릭 또한 한때 쌍수 검사로 만렙을 달성해 본 경험이 있다.

"나는 너희가 주어진 일만 잘해 준다면, 게임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도 봐줄 생각이다. 애초에 황제 폐하께서 그걸 원하시지."

진짜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는 점을 제하면, 빙의자는 현지인들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물론, 극(極)에 달하면 조금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건 그때 얘기지.'

에릭은 당장의 효율을 먼저 추구했다.

"고유특성이 발동하는 길이 있나?"

에릭은 통로를 두고 빙의자에게 질문을 건넸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습니다."

처음은 [제육감].

"흐으.... 그, 그, 에릭 국장님이 말을 거실 때마다...."

그 다음은 [즉사 감지].

생각 외로 길을 찾는 것에 [고유 특성]은 효과가 없었다.

"두식아, 대충 하나 골라 봐라."

"허어...."

대신 에릭은 특성이 살심(殺心)에 반응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죽이고 싶다는 감정에 반응하는 스킬이라....'

시스템창이 불완전한 에릭에게, 빙의자는 새로운 기회였다.

'분명 전용 상점을 개방할 방법이 있을 거야.'

에릭은 '상점 시스템'을 제대로 써 보고 싶었다.

이것만 돼도 돈벌이는 더욱 쉬워질 터였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자니.

"거, 왼쪽으로 갑시다."

장두식이 방향을 정했다.

에릭은 빙의자들을 앞장세워 보냈다.

"뒤따라 갈 테니 너희끼리 먼저 가 보도록."

위협에 대한 방지, 그런 건 아니고 순수하게 그들이 얼마나 잘 싸울지 궁금한 마음에서였다.

'...장난하나?'

한참을 뜸을 들이는 빙의자들에게 에릭이 한 소리 하려던 순간.

"제, 제가 일선 서겠습니다."

레이피어 두 자루를 든 박창호가 먼저 통로에 발을 디뎠다.

쿵, 쿵, 쿵, 쿵, 쿵.

그 즉시 남은 다섯 개의 통로가 거대한 바위로 막혔다.

대신 왼쪽 길에 횃불이 켜졌다.

환한 불빛이 밝혀 주는 곳에는.

크르르르르르르.

괴성을 흩뿌리는 몬스터가 보였다.

"저, 저, 미친. 저게 뭐야?"

미궁(迷宮) 1층에 나오는 몬스터는, 고블린이다.

여느 게임에서도 가장 최하급으로 취급되는 몬스터로, 대륙 온라인에서도 고블린은 가장 약한 몬스터였다.

"...저, 저게 고, 고블린이라고?"

미궁에 처음 들어온 빙의자들은 두려움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게임과는 다르게 2미터는 훌쩍 넘는 크기를 지닌, 거대한 녹색 괴물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역시, 빙의자도 몬스터의 위압은 못 이겨 내는군."

공포에 질린 빙의자들을 밀쳐 내며, 에릭이 고블린을 향해 걸었다.

"조금 자라서 그런지 이제는 눈높이가 맞는구나."

12화 예절주입기 에릭 (4)

"거참, 진짜 좁밥이었네."

무식하다.

그렇지만 굉장했다.

쿠웅-!

거대한 고블린과 맞붙은 성기사의 모습은 그런 감상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한낱 인간이 순수한 힘으로 몬스터를 압도했다.

2미터는 넘는 거대한 고블린.

비슷한 키의 커다란 성기사.

둘 다 괴물 같았다.

'피지컬이 미쳤수다.'

장두식은 에릭의 무력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은 평소와는 조금 달랐으니.

그가 주로 목격한 에릭의 힘은 보통 흑마법사라든가 극악무도한 빙의자들을 신성으로 정화하는 방식이었다.

거대한 몸과 잔뜩 압축된 근육으로 미루어 보아 에릭이 육체적으로도 강력하단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크라아아악-!!!

고블린을 순수한 힘으로 내리찍어 무릎 꿇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쿠웅-!

녹색 괴물이 위를 올려다봤다.

사람을 증오하며, 포식하는 것이 몬스터의 본능이다.

놈들은 오직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인류의 천적과도 다름없는 존재다.

에릭은 미궁의 몬스터를 압도했다.

'더 이상 두렵지 않구나.'

지상의 몬스터와 다르게 미궁 속 몬스터는 '위압'이라는 힘을 사용한다.

인간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어릴 적 스승을 따라 왔을 때, 에릭은 작고 연약했다. 그때는 몬스터의 위압에 압도당해 두려움에 떨었었다.

그러나 열다섯인 지금은 달랐다.

"약해."

뿌드득.

에릭은 양손으로 고블린의 손을 붙잡은 상태였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그대로 고블린의 팔이 뒤로 꺾였다.

크르르....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팔이 꺾인 고블린의 눈빛이 변했다.

증오와 살의가 가득했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툭.

에릭은 고블린을 넘어뜨렸다.

그러고는 텅 빈 오른손을 펼쳤다. 손바닥 너머로 몇 미터 뒤에 쓰러진 고블린이 보였다.

우우웅.

손바닥 위로 금빛 물결이 몰아친다. 에릭은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퍼엉-!

고블린의 머리가 터지고 사방으로 녹색 핏물이 낭자했다.

에릭은 허공으로 손을 휘둘렀다.

금빛 휘광이 튀어 오르는 핏물을 증발시켰다.

"두식아, 내가 뭐랬냐?"

에릭이 장두식을 보며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후련해 보였다.

그의 등 뒤에서, 기름 부은 장작처럼 고블린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허어...."

장두식은 그 광경에 허탈한 듯 침음을 내질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거참, 형님은 괴물이요.

그 흔한 감탄사도 목 너머로 나오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 오는 거대한 몬스터를 힘으로 찍어 누르더니, 기적을 일으켜 머리를 터트려 죽이는 괴물 성기사한테 대체 뭐라 말을 해야겠는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빙의자들도 다 타 죽겠수다."

장두식은 빙의자를 걱정하는 걸로 말을 돌렸다.

에릭의 무위를 논하는 것보다야 훨씬 쉬운 대화 주제였다.

"아플 리가 없는데?"

에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스승과의 실험으로 에릭은 빙의자들에게 타격이 덜 가게끔 신성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놈들도 쓸모가 있으니, 신께서 자꾸 불러들이는 거야."

스승의 주장은 그랬다.

무신론자인 에릭과 다르게 리페로제는 광신론자였다.

분명 빙의자들 중에 신에게 막중한 임무를 내려 받은 놈들이 존재할 거다.

리페로제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신은 개뿔.'

에릭은 쥐뿔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 진짜로 안 아프네."

"어어. 왜 안 아프지?"

"끄윽, 나, 나는 아픈데?"

빙의자들은 에릭을 보며 각자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고통은 없되 두려운 기분이 든다는 것이 빙의자들의 말이었다.

물론 한 명은 3도 화상 정도의 고통을 느꼈다는데, 에릭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중요한 점은.

'다들 정신을 차렸군.'

빙의자들도 장두식도 에릭의 무위에 취해 위압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현실의 미궁이 어려워진 이유는 여럿 있다.

몬스터를 마주하면 '위압' 상태에 걸린다는 것이고.

"게임과 달라진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스케일이다. 몬스터도 미궁도 전부 몇 배에서 수십 배 이상으로 커다래졌지."

그다음으로는 미궁의 규모와 몬스터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커졌다는 점이 있다.

"홉고블린은 작은 놈도 키가 3미터가 넘는다."

단순히 키만 커진 게 아니다.

"움직임도 더 빨라졌지. 몸도 더 단단해졌고. 다행인 점은 게임과 다르게 머리를 터트리거나 심장을 짓뭉개면 몬스터도 즉사한다는 거다."

차분히 설명을 시작해서 다들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마?'

'우리보고 잡으라는 건가?'

'흐으. 너무 뜨겁다.'

세 빙의자는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았다는 것은, 적당히 눈치가 빠른 빙의자라는 의미였으니.

"질문 있나?"

에릭은 간략한 설명만 마치고 빙의자들을 실전에 투입하려 했다.

그때.

"너, 너무 뜨겁습니다!"

르웰에게 몹쓸 발언을 하려 했던, 니시다 료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에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 병신은 왜 잡아 둔 거지?'

눈치도 없고, 하는 짓도 둔하고.

빙의한 신체가 뚱뚱보인 걸 떠나서, 하는 행동이 하나하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제국 감찰대가 저 니시다 료라는 폐급 빙의자를 살려 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성이나 클래스는 아니야.'

제국에는 [고유 특성]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니, [즉사 감지]특성 때문은 아닐 것이고.

그의 직업은 흔하디흔한 전사로, 수용소에서 족히 50명은 겹치는 클래스다.

'그럼에도 황실이 살려 뒀다라....'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건데.

참 난감했다.

'일단 저놈에게 무슨 쓸모가 있는지 알아야겠어.'

에릭은 니시다 료에게 붙여 놓은 신성의 힘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흐익-!"

두려움에 떨며 니시다가 뒷걸음질 쳤다. 얼마지 나지 않아 미궁 벽에 그의 등이 닿았다.

에릭은 료의 앞에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묻기를.

"너는 뭘 잘하지?"

동굴 벽에 달린 횃불이 에릭을 환하게 비추었다.

환한 얼굴과 비릿하게 뒤틀린 입매가 선명했다.

* * *

딱, 딱-!

따닥, 딱!

"저 빙의자 놈은 정신병자인가 싶수다."

연신 동굴 벽을 검집으로 내리치는 빙의자를 보며 장두식이 중얼거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미궁 1계층의 동굴 벽을 두드리는 것이....

숫제 미친놈을 보는 것 같았다.

"형님 페르안 지역 빈민굴이 기억나지 않수? 거기서도 흑마력에 생기가 빨린 놈들이 이지를 잃고 저렇게 벽을 두드리며 똥칠을 했었는데.... 거, 왜 인상을...."

"내가 시킨 거다."

"아.... 어째, 똥칠하던 놈들과는 다르게, 일정한 간격이 있다 싶었수다."

에릭은 장두식의 빠른 태세 전환에 '큭.'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 맛에 두식이를 놀려 먹지.

한 시간 내리 벽만 내리치는 빙의자 료를 보는 것도 지루해지던 참이었으니.

딱-! 터엉.

"어?"

그때 료가 한쪽 벽면에 멈춰 섰다.

"후욱, 후욱, 후욱. 여, 여기인 것 같습니다."

검집으로 한참을 벽을 두드려 댄 료였다. 그의 팔은 후들거렸고 전신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길 부수면 뭐가 있다고?"

"후욱, 후우-. 모, 몬스터룸이랑 보물 상자가 있습니다."

에릭은 긴가민가했다.

그 역시 한때 고인물이었던 바.

'저런 기믹이 있었나?'

공략 사이트에서도 본 적 없던 내용이다.

에릭이 료에게 뭘 잘하냐고 물었을 때.

"몬스터 사냥이랑 레벨링, 캐릭터 육성을 뺀 모든 걸 할 줄 압니다!"

이런 정신 나간 대답을 들었었다.

'그럼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히든피스! 이스터에그! 제가 그쪽은 정말 빠삭합니다! 미궁 속 히든피스도 중층까지는 빠삭하게 꿰고 있습니다."

에릭이 하는 수 없이 료의 처분을 고려할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그래도 제국이 잡아 둔 빙의자였기에 에릭은 한번 속는 셈 믿어 주었다.

'한 시간을 허비한 건 아니겠지?'

에릭은 료가 서 있던 동굴 벽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다를 게 없는 평범한 벽이었다.

"미궁 벽을 부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군."

에릭은 벽을 관찰했다.

횃불의 생김새나 벽의 모습은 평범했고 신성으로 눈에 기적을 일으켰음에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미궁의 벽만큼은 파괴 불가였다. 게임 속에서도 그랬고 현실에서도 그랬다.

"네 말과 다르다면, 직접 신성으로 축복을 내려 주마."

에릭은 그렇게 말하며 주먹에 신성을 둘렀다.

그러고는 곧장 벽을 향해 정권을 내질렀다.

후웅-!

내지르는 주먹을 바라보며 에릭은 간만에 고통을 느낄 각오를 했다.

'좀 아프겠군.'

파괴 불가 속성의 벽을 내리치는데, 아무리 괴물 같은 몸뚱이어도 아플 것은 분명....

콰앙-!

콰르르르릉.

미궁 벽이 무너졌다.

"뭐지?"

드물게 에릭이 놀랐다.

벽이 무너진 걸로는 놀라진 않았고 무너진 벽 안을 보고 놀랐다.

'고블린이랑 보물 상자?'

몬스터룸이란, 길을 지나다 만나는 함정과도 같은 곳이다. 몬스터로 가득한 공간으로 현실에서는 '죽음의 방'이라는 이명을 지녔다.

보물 상자란, 말 그대로 보물이 나오는 상자로 '미궁의 꽃'이라 불린다.

모험가들의 주 수입원이자, 미궁을 공략하는 원동력이다.

'대체 어떻게....'

크르르륵.

크르륵!

무너진 벽 안에 열댓 마리의 고블린들이 보였고 놈들의 한가운데에는 보물 상자가 놓였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함께 있는 그런 이상한 광경이었다.

'진짜 이런 게 있었다고?'

에릭은 당황했다.

보물 상자가 뭔가?

랜덤한 등급의 아이템을 100% 확률로 제공해 주는 기물이다.

미궁의 꽃이요, 모험가들의 정수다.

"거, 형님. 그냥 미궁만 돌아도 금방 부자가 되지 않겠수? 한 시간 만에 저런 걸 찾고 말이요."

장두식의 말대로였다.

보통은 10층까지 가면서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것이 보물 상자다.

'진짜 이놈만 아는 건가?'

빙의자의 수는 처형된 자들만 족히 천이 넘는다.

리페로제가 잡아 죽인 것도 그쯤이니, 대략 잡아도 만 단위가 빙의해 있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니시다라고 했나? 너는 이 시간부로 24시간 특별 관리에 들어간다."

에릭은 그리 말하며 몬스터룸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본래 빙의자들의 무력을 확인하는 것이 우선순위였는데,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 * *

'사, 살았다.'

니시다 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보다 한참 커진 미궁에서 히든피스를 찾아내기란 참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하필 뚱뚱한 몸에 빙의한 탓에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고, 미궁이 주는 압박감 때문에 손에 든 검집이 아주 무겁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는 움직였다.

[즉사 감지]

빙의자에게 랜덤하게 부여되는 고유 특성이 연신 경종을 울려 댔기 때문이다.

제국 감찰대에 붙잡혔을 때에도.

빙의자 수용소에서 성수(聖水)로 고문을 당할 때조차 발동하지 않았던 특성인데.

에릭을 만난 뒤로는 쉴 새 없이 경고를 울려 왔다.

'사신이 목에 낫을 대고 있는 느낌....'

두렵고 무서웠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신성력과 그것이 주는 끔찍한 고통의 모순 속에서 니시다 료는 더욱 공포에 질렸다.

'이대로만 잘하면 될....'

보물 상자를 둘러싼 몬스터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에릭을 보며 안도에 한숨을 내쉬려던 그였지만.

쿠우우우웅.

그 압도적인 신성을 보니, 다시금 불안감이 고개를 들쳐 올렸다.

그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꼈다.

'괴물 같은 NPC들....'

처음 마주친 고블린과의 싸움과는 궤를 달리했다.

게임에서보다 몇 배는 커다래진 고블린들을, 성기사 에릭은 고작 주먹을 쥐는 걸로 터트려 죽였다.

뿌찍. 뿌찍.

주먹을 한 번 쥐면 한 놈씩 머리가 터졌다.

머리가 뭉개진 상태 그대로 고블린들의 몸이 신성력에 타들어 갔다.

'나, 나도... 수틀리면....'

자꾸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빙의자가 대륙 공적이 된 이유는 바로 신성력에 대한 반응이 몬스터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회복의 기적을 걸어 줘도 타들어 가며 고통받는 것이 빙의자다.

눈앞의 몬스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빙의자는 몬스터룸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흐, 흐익-!"

열다섯 마리의 고블린들을 활활 태워 버린 에릭이 몬스터룸 입구를 향해 되돌아왔다.

지레 겁먹은 빙의자들은 뒤로 물러섰다.

에릭은 빙의자들을 무시한 채 장두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두식아, 축복받을 준비 됐냐?"

"거참, 성직자가 아직도 그런 미신을 믿는 거요?"

확률형 아이템은 게임에서 수익을 위해 만든 사기 수법이 아니다.

에릭이 살아오며 경험한 바로는 '세계의 법칙'이 확률형 아이템을 만들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에릭은 웅혼한 신성력의 주인이지만, 운이 없는 편이다.

특히 이런 쪽으로는 더.

"미신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에릭은 그리 말하며 신성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구궁-!!!!

거대한 에릭의 몸을 둘러싸고 금빛 원기둥이 솟구쳤다.

미궁 바닥의 돌조각이 하늘로 떠오르고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던 물방울이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천장으로 떠올랐다.

그야말로 기적을 방불케 하는 모습이었다.

"아아...."

그 빙의자들조차 찬란한 신성이 주는 아름다움에 눈길을 빼앗겨 감탄사를 흘렸을 정도였다.

"확률을 올려 주십쇼-."

그런 웅장함 속에 투박하고 대충 내뱉는 기도문이 들려왔다.

건성인 기도문에 웅혼한 신성이 감응해 움직였다.

우우웅.

빛의 기둥이 에릭의 손을 타고 장두식의 머리로 스며들었다.

반삭 머리의 덩어리가 반짝였다.

깡패 같은 놈조차 찬란하고 거룩하게 만드는 그런 빛이었다.

"기, 기적...."

빙의자가 절로 감탄을 내뱉을 만큼 아름다웠으나.

"머리통이 간질간질한 게 축복은 영 적응되지 않수다."

정작 축복을 받는 장두식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가 가지고 온 몽둥이 끝으로 이마를 벅벅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곧 끝난다. 간지러워도 참아."

키이이잉-!

선명한 공명음이 울리고 장두식을 둘러싼 빛이 사라졌다.

"이거 뭐, 그냥 열면 되는 거요?"

방 한복판에 놓인 보물 상자로 걸어가며 장두식이 물었다.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겠수다."

장두식은 눈을 끔뻑이며 보물 상자를 열었다.

투박한 낡은 목재 상자가 열리자, 상자 위로 아이템의 이름이 떠올랐다.

빙의자들에게만 보이는 요소였다.

"어...?"

"미, 미친. 저런 템이 있었어?"

현실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게임의 캐시 아이템 상점에서나 볼 법한 그런 이상한 생김새였다.

아이템 위로 떠오른 네임태그를 읽어 보니, 어째 게임에서도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형님, 대체 이게 뭐길래 저러는 거요?"

장두식이 에릭에게 기다란 티켓 다발을 건네주며 물었다.

"역시 빙의자를 불러들인 건 미궁이었어."

에릭이 감탄하며, 기다란 종이 티켓 한 장을 뽑았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니시다 료를 향해 다가갔다.

티켓을 들이밀며 에릭이 묻기를.

"이걸 쓰면 너는 어떻게 되지?"

"흐이익-!"

폐급 빙의자, 니시다 료는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저게, 아니, 저딴 게 왜 나와!!"

13화 예절주입기 에릭 (5)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보고 있을 것이다.

뭐, 이런 말이 있지 않나?

'아마도.... 게임을 통한 간접 체험을 이유로 빙의자들이 이곳에 끌려온 거야.'

에릭 자신 또한 마찬가지일 터였다.

'미궁을 탐하면, 미궁 또한 너를 탐하리라.'

이곳에서도 비슷한 격언이 존재했다.

모험가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일종의 종교적인 말인데.

빙의자를 보아하니, 단순 미신으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다.

"이런 아이템이 있는 걸 보면, 마냥 옛 속담으로 생각하긴 어렵겠어."

에릭이 보물 상자에서 나온 아이템을 보며 읊조렸다.

금빛 눈동자가 티켓 형태의 종이 쪼가리를 샅샅이 파악했다.

[빙의자 외형 변경권]

이런 종이 형태의 아이템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게임 속에서나 '헤어스타일 변경권', '눈동자 색 변경권'과 같이, 외형을 꾸미는 용도의 캐시 아이템으로 존재했을 뿐.

생김새가 비슷한 걸 보면, 빙의자의 모습을 바꿔 주는 기능임은 틀림없었다.

"흐, 흐이익... 저, 저리 가!"

"니시다 료, 왜 도망가는 거지?"

에릭은 '빙의자 외형 변경권'을 테스트해 볼 생각이다.

"조사한 바로, 너는 평소 빙의한 육체에 불만이 많았다고 알고 있다."

제국법상, 빙의자가 들어선 존재는 '사망'으로 취급된다.

그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사라진 몸의 주인을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법적, 신앙적 검증을 마쳤으므로 이는 곧 사실이다.

"...그, 그게...."

"지구에서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네가 가장 적임이라고 생각한다만?"

빙의자들 눈에도 에릭이 든 아이템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빙의자 외형 변경권]

[빙의자의 몸을 원래 세계의 몸으로 바꿔 준다.]

"물론, 몸의 주인에게 몸을 돌려주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여자가 된 강풍호라든가.

뚱뚱한 돼지에 빙의했다며 한탄하던 니시다 료는 충분히 기뻐해야 마땅했다.

"근데 왜 자꾸 뒷걸음질로 도망치는 거지?"

에릭은 순수하게 그 모순적인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원래 세계에서 근육질의 거구라고 했던가?'

키보드를 누르기 힘들 정도로 주먹이 커다랬다고 들었다.

'전사 클래스니까, 지금 몸보다는 훨씬 낫겠지.'

에릭의 신성으로도, 빙의자들이 원래 세계에서 어떤 육체를 가졌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그저 그렇다니 그렇구나 이해했을 뿐.

"시, 싫어-!"

화르륵.

미궁 1계층 동굴 벽에 박힌 횃불이 흔들리고.

쿵- 하고는 니시다 료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제, 제발 그것만은.... 사, 사실은...."

애걸하다시피 료가 입을 열었다.

간절하고 처절한 눈빛이었다.

* * *

"이런 미친 새끼를 다 봤나."

사정을 들은 에릭은 뒷골이 당겨 왔다.

"거, 형님. 저놈 말이... 원래 세계의 몸이 150킬로에 달하는 돼지라는 것 맞수?"

"그래. 뭐? 근육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주먹이 커서 키보드를 못 누르는 게 아니라, 살덩이라 그런 거였어....'

에릭은 덜덜 떠는 니시다 료를 앞에 두고 장두식과 대책 논의에 나섰다.

"일단, 료, 저 놈는 지금 육체로 사는 게 더 효율적이겠어."

"지금 몸은 100킬로 정도로 보이니, 그렇겠수다. 그럼 누구한테 시험해 볼 생각이요?"

에릭의 눈이 남은 두 빙의자를 훑었고.

"히익-! 저, 저는 여자로...."

칼같은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강풍호가 대뜸 소리쳤다.

에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빙의 기준이 정신병자인 건가?'

근 몇 년 사이에 빙의한 놈들은 대부분이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부류였다.

'보통은 사업을 하다 문제가 생기고.'

로켓 배달이라는 이름의 배송 판매 사업을 한다거나, 무한 동력을 만들겠다고 귀족을 속였다거나.

할부 금융사를 설립해 100% 이자를 받다가 걸렸다거나....

작게는 이런 쪽이고.

'혹은 사람을 NPC로 규정짓고는 학살을 저지르지.'

흑마법사로 전직해 마을 하나를 통째로 제물로 바쳐 버렸다거나.

미궁에서 모험가들에게 게임 속 버그를 알려 줘, 미궁 공략에 지장을 끼친다거나.

크게는 이런 문제가 있었다.

"거참, 여자로 살겠다는 놈은 또 처음 보지 않수?"

성 정체성이 뒤바뀌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식아, 내가 이상한 거냐?"

"형님은 특이... 아니, 특출나신 거고, 저놈들은 이상한 게 맞수다."

증명할 수 없는 지구의 신체로 허세를 부리는 빙의자에, 여자의 몸으로 살아가겠다는 놈까지.

"생각해 보니까 강풍호 너는 지구에서도 여자였다고 거짓말을 쳤었군."

강제로 테스트를 해 봤자 큰 의미는 없을 거였다.

마나과 오러, 신성력을 다루는 세계에서 성별에 따른 육체적 차이도 미비할 터였으니.

'뭐, 놈들이 딱히 극악무도한 범죄자도 아니고.'

이제 남은 놈은 하난가?

에릭이 쌍수 레이피어를 쓰는 박창호를 바라본 순간.

"제가 해 보겠습니다!"

기세등등하게 박창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제국 남부, 바바리안의 피를 물려받은 육체에 빙의한 박창호다.

근접 직군으로는 나쁘지 않은 몸일 터였다.

"괜찮겠나?"

"예!"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티켓을 건넸다.

'괜히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에릭보다야 한참 작았지만, 나름 이쪽 세계에서 먹어 주는 피지컬임은 분명했다.

정작 박창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티켓을 받아 들었다.

"찢겠습니다."

일사천리로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박창호를 바라보며, 에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육감이 발동한 건가?'

놈의 고유 특성은 '감'에 대한 부분이다.

인간의 '감'만큼은 신앙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었다.

그걸 보조해 주는 스킬이 바로 '제육감(第六感)'이다.

'인간의 감이라....'

게임에서야 별 볼 일 없던 스킬이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매우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에릭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찌직.

파아아앗-!

박창호가 들고 있던 티켓을 찢어 버렸다. 그 즉시 푸른색 반투명한 빛이 뿜어져 그를 둘러쌌다.

'마치 3D 모델링 같군....'

컴퓨터 그래픽으로 캐릭터 생성을 하는 느낌이었다.

빙의자랑 엮인 탓일까?

15년 간 본 적 없던,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에릭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팟-!

빛이 멎어들었을 때.

"어어? 그, 펜싱 금메달리스트!"

강풍호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라 팔짝 뛰었다.

두 다리를 모으고 뛰는 것이, 어딘가 예능에서 볼 법한 여자 아이돌의 반응이었는데, 그의 본질은 강풍호라는 남자다.

에릭은 또다시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그와 별개로.

"자신 있는 이유가 있었어."

박창호의 본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하하, 제가 나름 유명했었거든요."

박창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190정도의 키.

잘 다져진 압축된 근육.

그리고 국가대표 펜싱 선수라는 이력.

'하나하나가 자질이 있어.'

하프 바바리안의 몸보다 재능이 출중해 보였다.

에릭의 두 눈은 박창호의 몸속에 '오러'를 받아들일 자질이 깃들었음을 확인했다.

'지구의 몸이 현지인처럼 변했군.'

대단한 발견이었다.

마치 세계가 자신에게 전하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빙의자들을 계도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라.'

뭐, 이런 거일지도....

그 일환으로 [외형 변경권] 같은 아이템이 등장한 게 아닐까?

빙의자들이 개차반으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역시 생판 타인의 몸에 빙의해 버려서다.

당혹스러운 입장일 것은 분명하고, 아무런 연고 없는 세계에 애착을 가질 리도 만무했다.

본래의 육체를 가지게 된다면, 최소한 미친 짓은 덜 하지 않을까?

'나름의 가능성은 되겠어.'

뜻밖에 빙의자 관리국장이 되었다가 예기치 못한 횡제를 한 기분이 들었다.

에릭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실력 좀 보지."

* * *

"흐으...."

펜싱 국가대표이자 금메달리스트 박창호는 게임 속에서도 기다란 레이피어 무기를 즐겨 썼다.

펜싱 칼과는 조금 달라도, 느낌적인 게 비슷했다.

'미치겠네.'

본래의 몸을 얻어 어색해진 감각도 되돌아왔고, 거기다가 게임 시스템이나 레벨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렇다고 몬스터와 싸울 준비가 되진 않았다.

"왜 가만히 있지?"

에릭은 파티원들을 이끌고 미궁 1계층의 동굴을 파고들었다.

구불구불한 동굴을 헤쳐 나가길 한참, 에릭은 고블린 한 마리를 잡아 끌어 빙의자들 앞에 데려왔다.

"미, 미궁 몬스터는 처음...."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지."

필드의 몬스터와 미궁의 몬스터는 존재감부터가 다르다.

크기도 크고, 더 사납고, 영악하게 행동한다.

애초에 2미터짜리 고블린을 미궁이 아니면 어디서 보겠는가?

'이래서 빙의자 선배들이 미궁에 가지 말라는 거구나.'

코앞에서 마주한 고블린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다행인 점은 박창호 혼자서 고블린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는 건데.

"흐이익-!"

강풍호는 겁에 질려 동굴 틈에 몸을 숨겼고, 니시다 료는 뒤뚱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젠장....'

그래도 괴물 같은 무력을 가진 에릭이 도와주진 않을까?

박창호가 슬쩍 뒤를 돌아봤는데.

"나는 지켜만 보겠다."

팔짱일 낀 채 에릭은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체 언제 움직였는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박창호는 마지막 대안으로 반삭 머리의 장두식을 바라봤다.

그는 에릭의 옆에 있었는데.

"거참, 재밌겠수다. 원래 좁밥들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거 아니요?"

몽둥이로 어깨를 두드리며 그리 말하는 것이, 결코 도와줄 기미가 안 보였다.

크르르르륵.

에릭이 꿀밤으로 제압했던 고블린이 정신을 차렸다.

사라졌던 위압이 피어나고.

"윽!"

세 빙의자를 옥죄려 들었다.

2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고블린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참으로 공포스러웠다.

차라리 뒤로 도망가면 에릭이 도와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키이잉-!

선명한 공명음이 울리고 빙의자들의 뒤편으로 신성의 장막이 펼쳐졌다.

찬란한 빛을 머금은 장막은 그 어떠한 마(魔)도 들어서지 못하게 막아 줄 것이리라.

다만 문제점은....

'저기로 가면 그대로 증발한다.'

빙의자에게 신성은 독이다.

저렇게 웅혼한 빛이니, 분명 즉사에 준하는 독일 터였다.

"우, 우리끼리 해 봅시다!"

나름 29레벨인 박창호가 팀원들을 바라보며 힘차게 소리쳤다.

"...화, 활을...."

강풍호는 손을 덜덜 떨며 활시위에 화살을 얹었고.

"젠장."

니시다 료 역시 부들부들 몸을 떨며 방패를 올려 들었다.

그들도 뒤에 펼쳐진 신성의 장막을 봤기에 몸을 움직였다.

타 죽는 것보다야 몬스터랑 싸우는 게 낫지.

"후우."

박창호 역시 한숨을 내쉬고 양손에 레이피어를 들었다.

미궁 1계층의 고블린.

게임 속에서야 학살이 가능한 허접한 몬스터였지.

"적정 레벨 30이니까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현실에서는 다르다.

시작부터가 게임 속 중층에 준하는 난이도였다.

"가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피이잉. 피슛!

1레벨 강풍호가 활시위를 놓자 화살이 고블린을 향해 날아들었다.

티잉. 하고 피부에 튕겨 나간 화살촉이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르륵.

고블린은 화살이 부딪친 어깨를 툭툭- 털고 그대로 강풍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흐아아압-!"

니시다 료가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고블린에게 방패를 들이밀었다.

20레벨의 니시다 료는 고블린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대로 고블린은 강풍호의 단발머리를 뽑아 버릴 생각이었다.

하나, 고블린은 제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크르륵?

료의 방패 위로 붉은빛이 일렁이고, 고블린은 붉게 빛나는 료의 방패에 정신을 빼앗겼다.

[도발]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잠시의 텀이 생겼다.

세 빙의자들 중 유효타를 줄 수 있는 것은 박창호 하나뿐.

티잉- 티잉- 팅!

그가 [허공답보] 스킬을 사용해 동굴 벽과 허공을 밟으며 입체적인 움직임을 선보였다.

몸을 내지르며 한 쌍의 레이피어에 [검기]를 덧입혔고.

푹-! 푸푹! 푹!

순식간에 고블린의 목덜미를 네 번 찔렀다.

레벨이 부족해 2차 전직을 못한 박창호에게는 쌍수 무기에 대한 스킬이 없다.

'대단하군.'

그런데도 펜싱 선수의 육체와 경험 그리고 1년을 넘게 이 세계에서 쌓은 실전이 박창호의 움직임을 스킬처럼 만들어 줬다.

'사연격 스킬 같아.'

에릭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크라라락-!!!

고블린의 목에는 네 개의 구멍이 뚫렸다.

피가 줄줄 새더니 금세 멈췄다.

길쭉하고 얇은 레이피어가 커다란 몬스터를 잡는 데 효율적일 리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고블린은 열만 잔뜩 뻗혀서 박창호를 내리치려 들었다.

퍼어엉-!

"히끅!"

갑자기 박창호의 코앞에서 고블린의 머리통이 터져 버렸다.

금빛 연기가 피어나는 것이, 누가 봐도 에릭이 손을 쓴 느낌이었다.

'지루했나?'

설마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걸까?

불길한 생각이 잔뜩 들었다.

황족의 몸을 태워 버린 괴물 성기사가 에릭이다.

"...저, 저희끼리도...."

"충분히 잡았겠지. 대신 한 두 시간은 걸렸으려나?"

박창호는 기회를 얻어 볼 요량으로 입을 열었는데, 에릭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도 빙의자들의 효용성은 확인했다. 너희를 키워서 미궁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은 하겠어."

에릭은 동굴에 쳐 둔 장막을 거두고 성큼성큼 빙의자들에게 다가섰다.

"그 상태창이라는 것도 많은 쓸모가 있겠군."

에릭의 눈은 빙의자들의 상태창과 스킬의 발동의 상관관계를 살폈다.

'걸레짝 같은 상태창....'

에릭의 상태창은 칼로 난도질당한 종이처럼 너덜거렸다.

일부 문구가 지워졌다거나 [시스템 상점]버튼이 반 정도 잘려 나갔다거나 뭐 그런 식이었다.

'될 것 같은데...?'

해석할 수 없는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상태창인데, 3티어 신성을 얻은 뒤로는 조금 달라졌다.

빙의자들의 상태창을 관찰한 결과, 느낌이 왔다.

지금이라면 상태창을 일부나마 고쳐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들 물러서라."

에릭은 동굴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정좌(正坐)로 앉았다.

'기적.'

타인의 상태창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았고 느꼈으니, 신성력의 힘을 빌려 미흡한 부분을 재현할 수 있을 거다.

키잉-!

에릭이 앉은 자리 위로 휘광이 피어났다.

어두운 미궁의 동굴 속에 피어나는 찬란한 신성의 빛에 모두가 눈길을 빼앗겼다.

"거, 녹아 버리기 싫으면 저 멀리 가슈."

장두식은 정신을 붙잡고 빙의자들을 멀찍이 떨어뜨려 놨다.

"바칩니다-."

대충 읊는 기도문이 들려오고 에릭은 점점 더 깊은 신성의 세계로 침전했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채웁니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채웁니다.]

[1만 골드를 사용해 신성력을 Max로 채웁니다.]

.

.

.

'제발....'

수도 없이 소모되고 충전되기를 반복했다.

이러다가 미궁이 정화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 만큼 찬란한 신성력의 향연이 이어졌다.

'좀-!'

인벤토리에 남은 비상금이 거덜 나기 직전이 되고서야.

에릭이 그토록 바라던 [직업 전용 상점]이 나타났다.

"아아, 드디어."

에릭의 눈에 보이는 상태창이 달라졌다.

여전히 걸레짝 같고 난도질당한 모습이었지만.

[시스템 상점]

[직업 전용 상점]

아래로 한 줄의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14화 예절주입기 에릭 (6)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샛노랗게 변한 미궁의 벽을 바라보며 빙의자들이 겁에 질렸다.

순도 높은 신성의 향연에 온몸이 저릿저릿했고 머리털이 쭈뼛쭈뼛 섰다.

겁에 질린 빙의자들을 향해 장두식이 몽둥이를 들이밀었다.

"닥치고들 있어라."

빙의자들은 침을 꿀떡 삼켰다.

먼 신성력도 무섭지만, 가까운 몽둥이는 더욱 두려웠다.

"거참, 대체 몇 시간을...."

장두식이 슬슬 에릭을 깨워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참이었다.

에릭은 여전히 찬란한 금빛에 휩싸여 정좌로 앉은 상태로, 마치 신상(神像)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거의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

그동안 에릭은 단 한 순간도 움직이지 않았다.

번뜩.

에릭의 눈이 떠졌다.

뚜둑, 뚜두둑.

거대한 몸이 일으켜지고 사방을 감싼 신성이 귀신같이 사그라졌다.

미궁 벽면에 에릭의 거대한 등판 형태로 금빛 자국이 남았다는 것만을 제외하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후우."

"형님 무슨 성취가 있었수?"

한숨을 내쉬는 에릭에게 장두식이 다가가 물었다.

에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직업 전용 상점]

에릭은 자신의 눈앞에 떠다니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실로 간만에 제대로 된 게임 시스템을 쓰게 된 것 아닌가?

[성갑(聖鉀) 알만의 바르바닐: 150,000,000골드]

[성창(聖槍) 루-솔라스의 쐐기: 200,000,000골드]

'알만정교회 성물에 루-솔라스교의 성물까지 있다니.'

에릭은 기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미치겠군.'

무려 타 종교의 성물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1억 5천만 골드니 2억 골드니 하는 터무니없는 가격임에도 아무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

'저걸 사서 되팔면....'

이게 얼마냐.

부르는 게 값일 건 뻔했다.

'그게 끝이 아니지.'

[스킬]

[별부름: 100,000,000골드]

[개벽: 250,000,000골드]

.

.

.

[부활: 10,000,000,000골드]

에릭에게도 스킬의 존재가 생겨났다.

'성기사'는 돈지랄을 해서 강해지는 컨셉이다. 에릭은 제게 무언가 문제가 있어 [스킬창]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래야 컨셉에 맞지.'

가장 싼 것이 1억 골드고 가장 비싼 것은 무려 100억 골드에 달하는 정신 나간 가격이었지만.

에릭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에릭은 시스템을 이용할 껀덕지가 별로 없었다.

돈을 내고 신성력을 얻는 게 전부였다. 애초에 그의 무위는 전부 스승과의 수련으로 얻어 낸 것.

그런 에릭에게 [스킬]은 존재만으로도 아주 달가웠다.

'부활이라고?'

'별부름'이니 '개벽'이니 무슨 능력인지 알 수 없는 것들 천지였다.

그런데도 가장 비싼 스킬이 '부활'임을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이 강력할 것은 분명했다.

신이 있고.

신성력이 존재하며.

오러와 마법이라는 기이한 힘까지 넘쳐 나는 세상.

그럼에도 사자(死者)의 부활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미궁을 나가야겠다."

생각을 마친 에릭은 곧장 행선지를 정했다.

"허... 벌써 나간단 말이요?"

미궁 1일 차, 밖에서는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건데.

장두식은 어이가 없었다.

미궁은 안과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밖에서의 하루가 미궁에서의 열흘과도 맞먹고 보다 깊은 계층으로 내려갈수록 시간비는 더욱 커지는 구조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진면목이 바로 미궁의 시간 비율이다.

"손실이 막심하겠수다."

"손실?"

에릭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식아, 여기서 나가면 마도구 상점을 성물 상점으로 바꿔도 될 거다."

에릭이 당당하게 내뱉은 말이다.

* * *

미궁은 2계층부터 나갈 수 있는 포탈이 생겨난다.

중층 혹은 상층과는 달리 5층 아래에서는 계층주를 공략하지 않아도 다음 층을 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에릭은 일사천리로 미궁을 공략해 나갔다.

계층주 보상은 나중에 챙겨도 그만.

"...저, 저희는...."

"거, 타 죽지 않게 거리나 더 벌리슈."

빙의자 셋은 멀뚱멀뚱 장두식의 등 뒤를 따라 걸었다.

눈앞에서는 학살의 현장이 펼쳐졌다.

쿠웅-! 쿠웅-! 쩌저적.

미궁 1계층은 고블린 동굴로, 말이 동굴이지 규모가 압도적으로 거대하다.

동굴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만나게 된다.

깊어질수록 고블린들 사이로 더욱 커다란 홉고블린까지 나타나는데....

쩌억-! 뿌직.

에릭이 신성력을 두른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녹색 핏물을 흩뿌리며, 고블린들이 터져 나갔다.

홉고블린이건 일반 고블린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모, 몬스터룸!"

에릭이 성큼성큼 나아가며 길을 직접 고른 탓에, 일행들은 예기치 못한 위험을 마주쳤다.

고블린 수십 마리가 들어 있는 몬스터룸을 벌써 열 번은 만났다.

이번에 만난 몬스터룸에는 무려 상위종 홉고블린으로 가득했다.

'게임에서도 만 번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일인데....'

뉴비 킬러라 불리는 상위종 몬스터룸은 현실에서는 더욱 악랄했다.

크르르르르륵.

3미터가 넘는 거대한 홉고블린들이 에릭을 내려다봤다.

거인 같은 에릭을 내려다보는 몬스터에 빙의자들은 겁에 질렸고.

"거참, 형님을 내려다보는 건 또 오랜만에 봤수다."

장두식은 몽둥이로 어깨 찜질을 하며 감탄했다.

저 거대한 에릭을 내려다보다니.

곧 눈높이가 맞아지겠군.

쿠우우우웅-!!!

장두식의 예상대로 에릭이 거대한 신성을 일으켰다.

에릭은 열댓 마리의 홉고블린들을 향해 두 손을 펼쳤다.

마치 박수를 치려는 모양새였다.

에릭이 두 손을 모아 합장(合掌)을 하자.

후웅- 거대한 풍압이 일며 동굴 전체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한발 늦게.

콰아아앙-!

폭음이 들려왔다.

'소, 손바닥을 마주쳤더니....'

'대기가 터져?'

'우리가 지금 뭘 보는 거지?'

세 빙의자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콰직-! 쩍.

방 안의 모든 홉고블린들이 압축 프레스에 찍힌 것처럼 찌부러졌기 때문이다.

일어난 일 자체는 간단하다.

에릭의 금빛 손바닥을 맞부딪치자 공간째로 고블린이 납작하게 짓눌렸고.

뭉개진 홉고블린들은 그대로 금빛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 갔다.

"오."

에릭이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이렇게 쓰는 거였어.'

3티어 신성력의 이능은 원거리 공격인데, 쓰다 보니 그 활용법에 익숙해진 것이다.

밖에서는 결코 시험해 볼 수 없는 방식으로.

미궁에서만 가능한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저거 계단 아닌가요?"

찬란한 신성이 홉고블린의 몸을 완벽하게 지워 버리자, 뒤편으로 계단이 드러났다.

'시스템이건 상태창이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박창호는 계단 앞에서 허무하게 에릭의 등을 바라봤다.

나름 '시스템'을 이용해 현지인들보다 강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박창호다.

"...저, 저게 현지인?"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니시다 료가 입 밖으로 생각을 그대로 꺼내 버렸다.

"죄, 죄, 죄송합니다!"

빙의자들의 옆에는 장두식이 있다. 몽둥이를 든 반삭 머리 깡패의 눈치가 보였는데....

"큭큭, 우리가 다 그런 건 아니고 형님이 아주 특출난 거니까 그런 줄 알거라."

정작 장두식도 빙의자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보였다.

현지인인 장두식의 눈으로 볼 때도 에릭은 비정상적인 존재였다.

빙의자이되 이 세계의 주민으로 살아가는 에릭.

문득 에릭이 보여 줬던 그의 상태창이 떠올랐다.

'그 상태창이라는 게 걸레짝 같을수록 강한 거일지도 모르겠수다.'

옆에 있는 한심한 세 빙의자를 바라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미궁의 2층에도 고블린이 나온다.

다만 필드가 숲으로 바뀐다.

숲이되, 미궁의 천장 아래에 놓인 숲.

휘오오오오오오―

숲 한복판에 금빛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의 형태를 취했는데 그 위력은 대륙 동쪽 대해(大海)의 파도를 보는 것만 같았다.

"대, 대주교?"

한 모험가 파티가 광활한 고블린 숲에서 '마석 채취'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고블린 사체의 심장 부근에 박힌 작은 결정이 마석인데....

"운수 잡쳤네."

파스스스스스스스.

금빛 물결에 모든 것이 소멸하고 있었다.

2계층의 고블린들은 죽어 마석을 남기고, 홉고블린은 마석과 귀를 남긴다.

미궁의 성과란 보물 상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친 새끼도 아니고.... 대체 왜 저급 모험가 밥줄을 다 태워 버리는 거야?"

"성기사단이라도 왔나?"

"...귀족들 미궁 투어 하는 걸지도 모르지."

모험가 파티는 숲을 관통하듯 뿜어진 거대한 금빛 물결을 보며, 한탄스레 주저앉았다.

몬스터야 미궁이 어련히 채워 주겠지만....

"마석 손실이 얼마냐."

"귀 잘라 놓을걸.... 우리가 잡은 홉고블린도 다 증발했다."

하루 치 수입이 날아간 건 기정사실이다.

싸아아아-

때마침 신성의 잔향이 불어왔다.

"공짜 힐로 만족하자고."

"크, 피로가 싹 가시는구만."

금빛 신성력을 만끽하며, 체력을 회복하던 모험가 파티였다.

몬스터가 다 타 버린, 드물게 안전해진 미궁 속에 모험가 파티는 늘어지게 누워 있었다.

"미궁에서 이런 휴식이 어디냐."

저층의 모험가 파티가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신성이었기에.

나름의 긍정 회로를 돌렸다.

그때였다.

쿠웅-! 콰지끈.

미궁 2계층의 숲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지?"

"그만한 신성에 살아남은 개체가 있다고?"

모험가 파티는 곧장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신성에 잠시 늘어졌어도, 엄연히 그들은 모험가다. 미궁의 위험을 감수해 보물을 탐하는 자들이다.

재빠르게 모험가 파티는 무기를 들어 올렸다.

치잉. 궁수가 당긴 활에 푸른빛 오러가 깃든다.

전사는 방패를 들고 몬스터를 붙들 각오를 다졌다.

콰아앙-!

미궁 2계층의 숲, 거대한 나무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키이이이잉-!

금빛 신성을 빛내며 거대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손끝에 신성으로 빚어낸 칼날을 들고 미궁 2계층의 숲을 베어 내고 있었다.

"서, 성기사?"

"저게... 뭐야."

미궁의 나무를 베어?

무슨 나무꾼이 벌목하듯이 툭툭 나무를 자르며 나아가는 거대한 남자를 바라보며, 모험가 파티는 겁에 질렸다.

2계층의 나무는 베고 싶다고 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드마스터급이나 미궁의 식생을 벨 수 있지 않나?"

"휴우. 일단 적은 아니겠어."

나무가 점점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험가 파티와 남자의 사이로 길이 뚫렸다.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는 물끄러미 파티를 내려다봤다.

그가 묻기를.

"흐음. 약탈자인가?"

그제야 파티원들은 자신들이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렸다.

"무, 무장해제 해!"

다들 일사천리로 무기를 내려놓고 좌측으로 몸을 비켰다.

에릭은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세 빙의자와 장두식이 따랐다.

'최소 성기사급이다.'

모든 일원이 그들을 지나쳤다.

모험가 파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저, 저게 무슨 성기사야.'

빙의자들이 볼 때는 악마, 혹은 마왕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몬스터를 죽이는 거긴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크으, 형님은 대체 왜 미궁을 이제야 들어온 거요?"

"...그러게나 말이다."

경악한 빙의자들을 내팽개치고 에릭과 장두식은 잡담을 나누었다.

그들의 앞에는 미궁을 탈출할 수 있는 거대한 비석이 보였다.

'프리패스도 아니고....'

빙의자 박창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에 들린 한 쌍의 레이피어가 무슨 이쑤시개처럼 느껴졌다.

'나름 레어 등급인데....'

상태창의 스탯과 스킬.

시스템 상점의 고등급 무기.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였다.

'박수 한 번에 몬스터 군집이 쓸려 나가는데....'

대체 빙의자가 왜 필요한 거지?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빙의한 것도 서러운데, 쓸모까지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면....

그런 섬뜩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거, 형님 허리춤에서 뭐가 계속 반짝거리지 않수?"

"음.... 계속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건 좀 위험해 보이는군."

이상한 대화가 들려왔다.

'뭐가 위험하단 거야?'

에릭의 제복 허리춤에서 레이저처럼 금빛 물결이 뿜어지고 있었다.

결국 [인벤토리]를 뚫고 에릭의 물건이 허리띠 위로 솟구쳤다.

"그거 르웰 사제님이 준 주머니 아니요?"

에릭은 르웰에게 두 개의 주머니를 받았다.

하나는 도시락이고, 또 하나는 스승이 전하라 했던 주머니다.

'대체 뭘 준 거지?'

르웰에게는 핑계처럼 말했지만, 그의 스승이 남긴 선물이란 것이 정말 찝찝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쳐다도 안 보고 인벤토리에 박아 뒀거늘....

'봉인식?'

파지직.

강력한 신성으로 봉인된 아공간 주머니가 금빛 전격을 내뿜으며 진동했다.

'대체 뭘 넣었기에....'

스승이 봉인까지 해 둔 것인가?

괴팍한 스승의 성격을 고려하면, 상위 몬스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두식아, 방어 마법 세팅해 둬라. 너희 셋은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발록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른다."

에릭은 신중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쑤욱.

에릭은 그대로 잡힌 물건을 뽑아 들었다.

"어어어??"

"미친... 저게 왜?"

"...헛!"

동시에 세 명의 빙의자가 놀라움에 입을 쩍 벌렸다.

숫제 눈알이 튀어나올 기세였다.

"거, 뭐냐. 대체 저 낡은 칼이 뭐라고 저렇게 설치는 거요?"

장두식이 에릭을 향해 겨눈 몽둥이를 내려놓으며 묻자니.

"...성물(聖物). 이 미친 스승님."

에릭이 상당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낡은 철검을 바라보았다.

철검 위로 아이템의 설명창이 나타났다.

[개벽(開闢)의 검(劍) -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

[등급: 성유물(聖遺物)]

15화 성물 (1)

'제 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건 선을 너무 넘었지 않나?'

에릭은 물끄러미 낡은 롱소드를 바라봤다.

투박하고 낡은 검신에는 여기저기 회색빛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생김새만 보면, 창고에 수십 년은 박혀 있던 싸구려 철검과 다를 게 없었다.

하나.

[개벽(開闢)]

검신에 새겨진 투박한 두 글자가 검의 정체를 명확하게 증명해 줬다.

'성유물이라니....'

스승이 준 아공간 주머니에는 교단에서 사라졌다는 성물이 들어 있었다.

"저, 저거... 엔드 스펙...."

게임 속에서 성유물은 미궁 50층 보스에게 랜덤한 확률로 드랍되는 아이템으로, 최종 졸업템이라 불렸다.

게임과 다르게 스탯이라든가 특수 효과에 대한 설명은 사라졌지만, 최고 등급 아이템을 뜻하는 '성유물'이란 단어가 선명했다.

경악한 듯이 검 위로 떠오른 네임태그를 바라보는 빙의자들처럼 에릭 또한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친 스승... 이걸 훔쳐?'

현재 아스티아 교단에서 사라진 성물이 바로 이 검이다.

교황이 아주 아끼는 무기로, 범인을 잡으면 공개적으로 회개시켜 버린다고 선언하였으니....

공교롭게 에릭은 그 범인을 알아낸 셈이고 없어진 성물까지 찾은 상황이 되었다.

'5억 골드.'

가난한 교단에서 내건 포상금.

그 외에도 순례자의 지위를 증명받고 추가적인 권한까지 얻어 낼 만한 업적으로 충분했다.

'성능 좀 볼까?'

에릭은 검에 신성을 담았다.

금빛 신성이 칼날을 타고 이리저리 빛을 내뿜었다.

"형님? 칼이 반짝거리는뎁쇼?"

영롱한 빛을 보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제 몸처럼 신성력을 순환시키는 검의 모습에 에릭의 마음이 기울었다.

'고작 5억에 이걸 줄 순 없지.'

게다가 스승의 작별 선물인 셈 아닌가?

에릭은 검에 신성력을 담으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시스템 상점만 쓸 수 있어도 단박에 10억은 넘게 벌지 않을까?'

키이이잉-!

검날이 번뜩이며 미친 듯이 신성력을 빚어내고 있었다.

"와...."

빙의자들은 무의식적으로 검이 내뿜는 신성의 빛을 향해 다가섰다.

홀린 듯이 검을 바라보는 빙의자를 향해 에릭이 검날을 쥔 채 칼의 손잡이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묻기를.

"한번 들어 보겠나?"

―Ep. 4 성물

에릭을 보며, 빙의자 박창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성유물] 등급의 아이템이 보였다.

오싹한 감각에 박창호는 정신을 부여잡았다.

'들어 보고야 싶지만....'

게임 속에서도 껴 본 적이 없던 [성유물] 아이템이 눈앞에 놓였다.

신성을 머금어 백금빛을 내뿜는 검이 박창호의 시선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손을 뻗지 못했다.

'스치면 그대로 타 버리겠지.'

박창호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저 검은 말 그대로 성(聖)이 붙은 아이템이었고, 그걸 쥔 사내가 에릭이었으니 당연한 말이다.

저 검은 신성력의 총집합체일 터였다.

만지면 소멸할 테지.

"와아.... 지, 진짜요?"

그때 박창호의 옆으로 니시다 료가 홀린 듯이 다가왔다.

입을 쩍- 벌린 채 반쯤 정신이 나간 모습으로, 찬란한 백금빛에 매료된 느낌이었다.

그에 에릭이 고개를 돌려 니시다 료를 바라봤다.

"흐이익-! 시, 신성!"

그제야 정신을 차린 니시다 료가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에릭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빙의자들 중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가 바로 니시다 료가 아닐까?

저런 얼빵한 놈이....

"거, 형님. 대체 리페로제 님이 뭘 줬길래 빙의자 놈들이 부들거리는 거요?"

유일한 현지인인 장두식은 도무지 상황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게 뭐냐고?"

에릭의 얼굴이 명료하게 변했다.

눈빛이 또렷해지고 뒤틀렸던 입가가 함박웃음으로 번졌다.

그러더니.

"하하하하-!!!"

에릭이 대뜸 광소를 터트렸다.

쩌렁쩌렁한 그의 목청이 고블린 숲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빙의자야, 저게 대체 뭐냐?"

에릭이 광기에 휩싸여 대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장두식은 박창호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걸 말해도 될까?'

몽둥이로 자신의 어깨를 툭툭 내리치는 장두식을 보며, 박창호가 머뭇거렸다.

성유물 등급의 아이템.

빙의자로 사로잡히기 전까지 박창호는 제법 이 세계의 정보를 많이 접했다.

게임과 달라진 부분이 많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존재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아이템의 가치였다.

'느낌이 안 좋아.'

현지인들은 [성유물]이라는 등급 표기 대신, 성물이라 불렀지만.

박창호가 조사한 바로, 현실에서도 성유물은 교황이나 대주교 혹은 황족들이나 만져볼 법한 귀물(貴物)이었다.

즉.

"저, 저도 잘 모르겠...."

목격자를 살인멸구할 가치가 충분한 아이템이란 말이다.

"뒈지고 싶냐?"

"그, 그게...."

어깨에 얹힌 장두식의 몽둥이와 광소를 터트린 에릭의 사이에서 박창호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두식아, 이게 아스티아 교단에서 사라졌던 성물이다."

에릭이 입을 열었다.

뚝- 하고 웃음을 멈춘 채 뚜벅뚜벅 장두식을 향해 걸었다.

장두식의 머리 위로 거대한 에릭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 뭐야. 리페로제 님이 사라질 때...."

장두식은 오 년 전에 일어난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 도난 사건을 떠올렸다.

교단의 성전 기사단과 이단 심문관, 성기사단이 동원돼 대륙 전역을 쑤시고 다녔던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교황이 화병으로 드러누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허어, 거참. 그, 뭐야. 형님, 그게 왜 여기 있수?"

"음... 아마도 내가 쓰라고 주신 것 같다."

"그럼 목격자는 다 지워야 하는 거 아니요?"

장두식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놀라 물었다.

에릭에게 대답은 없었고 미궁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싸아아아아―

고블린 숲에 바람이 몰아친다.

울창한 나무에 드리워진 숲 속의 공터는 스산한 느낌을 자아냈다.

공터 한복판에는 투박한 회색빛 비석이 놓여 있었다.

'목격자를 지워?'

'주, 죽인다는 말인데....'

'흐이익-!'

미궁 밖으로 향하는 비석을 앞에 두고 세 빙의자는 겁에 질렸다.

비석에 손을 얹으면 밖으로 나가는 포탈이 열린다.

탈출구임은 분명했다.

'묘비 같구나.'

한데 빙의자들의 눈에는 마치 죽을 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때 에릭이 입을 열었다.

"두식아, 그거 기억하냐? 페르안 용병들한테 했던 거 말이다."

"그 뭐냐, 제약 마법 말이요?"

"그래. 그거 걸고 살려 두자."

다행이도 에릭은 자비로웠다.

'왠지 쓸데가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는 눈앞의 빙의자를 살려 둘 생각이다.

박창호와 니시다 료의 [제육감]과 [즉사 감지] 둘 다 쓸 만한 특성이며, 강풍호의 [빠른 성장]은 단독 딜러로서 최상급 특성이다.

에릭이 턱을 쓸며 빙의자들을 바라보자.

"형님, 무슨 제약을 걸 생각인지...?"

몽둥이를 고쳐 잡으며 장두식이 물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발설 시 내부에 담긴 신성력이 폭발한다는 조건으로 발설의 제약을 걸지."

"알겠수다."

장두식이 투박한 나무 몽둥이에 마력을 일으켰다.

우우웅-!

푸른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며 몽둥이가 반짝였다.

마치 마법사의 스태프를 보는 모양새였다.

"...."

"손등!"

움찔거리는 빙의자들을 향해 장두식이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내민 손등 위로 둥근 띠가 생겨나고 안쪽에 어지러운 문자열이 들어섰다.

복잡한 형태의 문양과 수식들이 나열되고 [제약] 마법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빙의자의 손등 위로 푸른색 큐브가 솟아올랐다.

"형님, 신성력 좀 담아 주슈."

허공에 떠오른 푸른색 큐브에 에릭이 손을 뻗었다.

푸른빛 마력으로 빚어진 큐브에 신성력이 담기자, 장두식이 마법을 완성시키기 위한 주문을 읊조렸다.

"-상호 동의하에 이뤄지는 마나의 맹세로, 빙의자 박창호는 오늘 목격한 일을 발설할 시 손등의 신성력이 터져 죽을 지어다."

이어지는 맹세의 말이 없자, 에릭이 한마디 거들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터져 죽는다만?"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세 빙의자의 손등 위로 동일한 형태의 마법진이 새겨졌고 마력으로 봉인된 큐브에 에릭의 신성력이 가득 담겼다.

"좋군. 다들 터지지 않게 입조심하도록."

모든 일이 끝나자 에릭이 밖으로 나가는 비석 위로 손을 얹었다.

쿠우우웅-!

기묘한 소음이 퍼지며 비석 앞에 포탈이 생겨났다.

검은색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포탈을 바라보며 에릭이 말하기를.

"장두식은 7서클 마도사다. 마탑주의 직계 제자급이 아니라면 손등의 마법진은 풀 수 없으니 헛된 생각은 버리도록."

그 말에 빙의자들은 경악했다.

'저 깡패가 7서클 마도사?'

'그 복잡한 수식을 외웠단 말인가?'

'흐이이익.'

* * *

"허... 벌써 돌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미궁 저층은 1:10의 시간비를 지녔다.

중층은 그보다 시간비가 커지고 심층으로 가면, 그 차이는 아득해진다.

고작 하루 만에 빙의자 관리국으로 돌아온 에릭을 보며 로얄가드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무위로 하루 만에 왔을 리가 없을 텐데.'

에릭은 강자다.

게다가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다. 미궁 공략과 몬스터 사냥에 최적화된 인재란 말이다.

'설마....'

로얄가드는 에릭의 뒤에 선 빙의자들을 바라봤다.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혹시, 빙의자들이 쓸모가 없는 겁니까?"

그 말에, 빙의자들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에릭은 재빠르게 오해를 풀어 줬다.

"빙의자들은 생각보다 쓸 만하더군. 다만, 황제폐하께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어 이렇게 빨리 나온 거지."

로얄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변을 발견한 모양이군.

그런 생각이었다.

"폐하께 마도 통신을 연결하겠습니다."

국장 에릭을 모시고 로얄가드는 집무실로 이동했다.

그 태도가 아주 정중했다.

멀뚱멀뚱 따라오는 빙의자들을 향해 에릭이 손을 휘-휘- 저었다.

장두식은 눈치껏 빙의자들을 이끌고 방향을 틀었다.

"거, 형님. 나는 빙의자 놈들을 감시하고 있겠수다."

장두식은 제국군과 함께 빙의자들을 수용소 안으로 인도했다.

'대체 뭘 어쩌시려고....'

에릭이 황제를 앞에 두고 어떤 미친 소리를 할지 몰라 불안했다.

떠나가는 장두식을 뒤로한 채 에릭은 로얄가드를 따라 걸었다.

"제국에 영광을!"

로얄가드가 벽을 바라보며 소리치자.

끼리릭.

복잡한 마법진이 작동하며 수용소 최심부에 자리한 방문이 개방되었다.

통짜 아다만티움 벽이 미닫이문처럼 벽을 뚫고 사라지자.

[국장실(局長室)]

번뜩이는 현판이 드러났다.

에릭은 신성을 퍼트려 공간을 파악해 봤고.

'미쳤네.'

이 방이 하나의 방어 장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가 빙의자를 써먹기로 마음먹은 만큼, 대비책도 확실했다.

건물을 통째로 사라지게 만들 대마법들이 심긴 수용소에서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가 국장실이었다.

'황제가 나를 높이 사는군.'

좋은 소식이었다.

"황제 폐하와 연결된 직통 수정구입니다!"

로얄가드는 거대한 수정구로 에릭을 데려갔다.

번뜩거리는 수정구 위로 황실을 뜻하는 은빛 달이 반짝였다.

뚜웅. 뚜웅. 뚜웅.

반복되는 기계음을 들으며 에릭은 하고자 하는 얘기들을 정리했다.

뚝.

소리가 멎고 수정구에 화려한 알현실 풍경이 드러났다.

대칭 구조로 지어진 알현실의 좌우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자리했고, 기둥 사이사이로 머리를 조아린 귀족들이 늘어섰다.

정중앙의 길에는 레드카펫이 깔렸는데, 그 끝에는 위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끝에 놓인 화려한 옥좌가 찬란하게 에릭을 반겼다.

"제국에 영광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에릭은 수정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 * *

'벌써 미궁을 나왔다라.'

황제는 의아했다.

로얄가드가 판단하길 에릭은 강자였다.

그런데도 벌써 미궁을 나왔다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알현실 정중앙이 놓인 거대한 수정구를 바라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말해라."

짧은 세 글자의 말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대답은 없었고 정적이 이어졌다.

툭-툭-

황제는 옥좌의 팔걸이를 건들며 미간을 여몄다.

아래에 도열한 대신(大臣)들은 황제가 답답할 때 하는 행동을 보며, 괜한 긴장감이 들었다.

꿀꺽.

누군가가 침을 세 번쯤 삼켰을 때쯤 에릭이 입을 열었다.

-폐하, 3억 골드를 융통해 주신다면, 알만정교회에 큰 빚을 지워 둘 수 있습니다.

수정구 너머로 에릭이 거대한 몸을 숙여 머리를 조아린 채 내뱉은 말인데....

너무 뜬금없는 말이었다.

'허어.'

옥좌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리를 조아린 재상은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구구절절 미사여구를 싫어하는 황제의 성격을 감안해 곧장 본론을 꺼낸 것일 터지만....

'여전하구나.'

일곱 살 꼬마가 자신에게 딸 교육을 맡기라며 으름장을 놓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패기와 자신만만한 행동은 참으로 일관적이었다.

황제에게도 변함이 없을 줄이야.

'다행이군.'

재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재상은 에릭에게 인생 베팅을 한 것에 보람을 느꼈다.

'폐하가 재밌어하시겠어.'

예상대로 황제의 반응이 기꺼웠다.

"알만정교회, 요즘 시끄럽던 참이었지."

황제, 에스페로자 로펜 아르만은 생각해봤다.

생략된 부분이 많았지만, 대략적으로 상황이 이해가 갔다.

삼황자의 죽음으로 2황비가 시끄럽던 참이었다. 무시했더니 황비가 본가인 알만정교회를 내세워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성물이겠군.'

3억 골드라는 금액과 알만정교회라는 두 단어로 황제는 에릭의 말의 본질을 깨달았다.

황제는 요약하고 축약하는 것을 선호했다.

생략된 부분을 헤아리는 일은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성물을 가져오거라. 해낸다면, 내 친히 식사에 초대하도록 하지."

황제는 그런 즐거움을 준 자에게 시험을 내린다.

성공에는 영광을.

실패에는 죽음을.

"만찬을 준비하거라."

16화 성물 (2)

"대체 황제한테 돈을 어떻게 뜯은 거요?"

일을 마친 에릭은 제2구역의 마도구 상점으로 돌아왔다.

이 주가량 비워진 매장은 삼황자를 죽였을 때의 여파로 반파된 상태였다.

"뭐, 대충 그런 일이 있었다."

에릭이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자, 장두식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한두 푼도 아니고 삼억 골드라니.... 역시, 형님은 미쳤수다."

바닥에 흩어진 스크롤 조각을 치우며 장두식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감탄스러운 일이지만, 납득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거, 형님. 대체 무슨 생각인거요?"

에릭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장두식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갔다.

"타 종교의 성물을 가져와서 아스티아 교단에 바치고.... 그걸 황제의 중개로 알만정교회에 팔아먹겠다는 발상이 대체 어떻게 나온 거요?"

에릭의 계획은 심플했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을 가지겠다고 다짐한 바.

대비책을 확실하게 만들었다.

"두식아, 너는 머리 쓰는 쪽에 소질이 없다."

매장 카운터에 늘어지게 앉은 에릭이 장두식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거참, 말을 하셔도...."

"내가 누구냐?"

"미친 형님?"

에릭이 몸을 일으켜 장두식을 향해 걸었다.

"거, 거, 말로!"

빠악-!

에릭은 찬란한 신성을 담아 장두식의 머리에 꿀밤을 내려쳤다.

그러고는 장두식의 두 눈을 가리켰다.

"눈?"

"그때 보지 않았더냐?"

장두식의 머리가 말끔해졌다.

팟-! 하는 기분이었다.

"거, 빙의자들이 쓰는 시스템을 이용하겠다는 말씀이신지...."

"그래. 보니까 1억 5천 골에 성물이 한 점이더라."

끔뻑. 끔뻑.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장두식이 머리를 휘휘 흔들었다.

"성물이 1억 5천 골드밖에 안 한단 말이요?"

"그래."

"받은 돈이 삼억 골든데.... 그러면 알만정교회 성물을 한 점 사고,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을 한 점 살 수 있지 않수?"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굳이 성물 한 점으로 '아스티아 교단', '알만정교회', '제국 황실' 세 집단을 돌려막기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순례자 지위는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로만 인정되는 거 아니요?"

"나는 성물을 가져온다 했지, 어느 교단 성물이라 말한 적은 없다."

"그럼 왜 삼억을 달라 한 거요?"

비릿한 미소를 짓는 에릭을 보며 장두식이 머리를 기울였다.

"두식아, 내가 미궁에서 뭘 얻었냐?"

"말하지도 않은 걸 내가 어찌 알겠수?"

에릭은 너덜너덜한 상태창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상점창에 손을 얹었다.

[직업 전용 상점]

버튼을 누르자 두 개의 창이 떠올랐다.

[무구]

[스킬]

에릭은 스킬 창에 손을 얹었다.

[개벽: 150,000,000골드]

아무런 설명이 없었지만, 에릭은 본능적으로 이 스킬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인 [개벽의 검]과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빙의자들의 특혜.'

상태창을 닫은 에릭이 장두식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남은 돈으로는 내 스킬을 사 볼 생각이다."

"그, 그러면, 황제 폐하 돈을 삥땅 친다는 말이 아니요?"

에릭의 발언에 장두식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황자를 터트릴 때부터....

'아니지. 일곱 살 때였나?'

흑마법사들을 멸절하던 시절부터, 에릭의 광기는 익히 알고 있었다마는.

제게 빙의자임을 밝힌 직후 이런 행보를 보일 줄이야.

"두식아 세상일은 무릇,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다."

"거,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는...."

장두식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에릭의 전신을 웅혼한 신성력이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참, 형님을 빙의자라 고발해도 미친놈 취급만 받겠수다."

신성력을 쓰는 빙의자.

그 사기성에 장두식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 * *

매장 정리를 마친 에릭은 르웰의 교회로 돌아왔다.

"국장님 벌써 왔네?"

예상보다 한참 일찍 온 에릭인데, 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에릭 형!"

"우리 수업 안 까먹었지?"

르웰과 아이들 모두 환하게 웃으며 에릭을 반겨 주었다.

"누가 보면 몇 달은 못 본 줄 알겠습니다."

에릭이 아이들을 지나쳐 르웰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리페로제 님이 사라지신 뒤로 에릭 네가 고아원을 하루 이상 비운 건 처음이니까."

뒷짐을 진 르웰이 산뜻하게 에릭을 향해 미소 지었다.

기다란 백금발이 찰랑였고 그녀의 뒤로 예배실에 놓인 칠판이 보였다.

"저 대신 수업을 해 주셨군요."

칠판 위로 곱셈과 나눗셈, 사칙연산 등의 기본적인 수학 문제들이 빽빽하게 나열되었다.

"신성력도 가르쳐 놨어. 적성이 있는 애들이 제법 많더라고."

르웰이 자랑스레 허리에 손을 얹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나하나가 에릭처럼 재능이 넘치는 아이들이었다.

"제인이랑 유라가 신성력에 재능이 있어."

"오! 마침 둘 다 검을 잘 다루니, 성기사로 키워도 되겠군요."

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아이를 바라봤다.

'검술 수업을 먼저 해야겠어.'

아이들은 에릭의 뒤틀린 입매를 보며, 괜스레 두려움을 느꼈다.

2미터를 훌쩍 넘는 거대한 에릭은 찬란한 외모를 지녔음에도 아이들에게 무서운 인상을 주었다.

"다들 검술 수련은 잘하고 있겠지?"

에릭은 아이들의 우상이자, 가르치는 선생님이며, 지켜 주는 보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에, 에릭 형?"

"설마...."

에릭의 수업은 다소 엄하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소화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우, 우리 하루 종일 수업했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기마 자세랑 근력 운동 하고...."

"낮에는 수학 수업 했고! 이따 저녁에는 마법이랑 검술 수련도 하는데!!"

"오늘은 놀아야 하는데!!"

"응? 에릭 형?"

아이들의 하루 일과는 빡빡하다.

평균 연령 10세에게는 큰 부담인 수준이었다.

하나, 에릭에게 예외란 없다.

"오늘은 일과 끝난 뒤에 검술 수련부터 시작하자. 다들 알다시피 내 일정이 많이 바빠졌거든."

에릭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리 말하며, 예배당을 나섰다.

'곱셈 나눗셈만 다 떼면, 수학 수업은 끝내야겠어.'

지식은 기본만 알면 된다.

이 세계는 무력이 전부다.

죽지 않고 살아가려면, 강해져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에릭은 그만큼 험난한 어린 날을 겪었다.

그렇기에 비정할지언정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애들 학원 뺑뺑이 돌리던 대한민국보다야 널널한 스케줄이지.'

중간중간 쉴 시간을 두었으니, 아이들에게도 큰 부담은 아닐 터였다.

학원에서 학원으로, 대한민국 아이들의 삶보다는 분명 여유로웠다.

언제나 에릭의 '최소한의 기준'은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맞춰졌으니까.

"에릭! 성기사단이라도 만들려 그러니?"

성큼성큼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에릭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르웰이 뒤따랐다.

'언제 내 뒤로?'

에릭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르웰 사제님, 신성력이 엄청나게 느셨군요."

"헤헤, 몰랐어?"

"대단하십니다."

에릭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르웰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향해 돌아갔다.

"잠깐만 기다려! 애들 들여보내고 올게."

에릭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신성력의 개성이 더 뚜렷해지셨구나.'

에릭은 빙의자로서 신성력을 다룬다.

그와 다르게 현지인 성직자들 중에는 신성력에 개성이 깃드는 경우가 있다.

힐이나 축복 혹은 강화와 같은 일반적인 신성력의 사용법과 다르게, '개성'이라는 능력은 말 그대로 특이한 성질을 보인다.

'빙의자들의 고유 특성이랑 비슷한 느낌이지.'

오러나 마법에도 이런 종류의 개성이 깃든다.

'개성'은 누구에게나 있되 깨닫는 자는 극히 드문 힘이다.

그만큼 간절함이 있고.

절박함을 가졌을 때 발현되는 것이 바로 힘의 '개성'이다.

'은밀함과 나눔이라....'

르웰은 현재 두 개의 개성을 지녔다.

'은밀함은 계륵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단하군.'

에릭이 3티어 개방을 겪을 때, 르웰도 영향을 받아 신성력의 총량이 늘어났다.

그 덕분인지, 르웰의 개성이 주는 힘 또한 강해졌다.

'안전 문제로는 한시름 놓겠어.'

에릭이 생각을 마치자.

"휴. 에릭, 언제까지 애들한테 그럴 거야?"

르웰이 눈앞에 서 있었다.

에릭은 정말로 놀랐다.

"이렇게까지 개성이 강해지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그러게. 나도 사실 천재였던 게 아닐까?"

르웰은 조금 쑥스러운 듯이 손끝으로 머리칼을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묘하게 손가락이 부각되었다.

'반지?'

그녀의 손가락에는 못 보던 반지가 껴져 있었다.

에릭은 빤히 그 손을 바라봤다.

"예쁘지?"

에릭의 시선을 느낀 르웰이 환하게 웃으며 자랑스레 손을 내밀었다.

'설마 자랑하려고 이걸 끼고 나온 건 아니겠지?'

에릭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잘 시간도 아닌데, 아이들 핑계를 대며 되돌아간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재상 각하께서 주신 선물이야!"

검지에 끼워진 반지의 중앙에는 반투명한 분홍빛 보석이 박혀 있었다.

크기가 아주 커다랬다.

"뭐랬더라.... 무슨 드래곤 하트를 녹여 만든 거랬는데-."

"재상이요?"

르웰의 말을 끊고 에릭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재, 재상 각하는 공작-."

"머리가 빨간 놈 맞습니까?"

"어, 그, 그렇지? 에릭 왜 화가 난 거니?"

에릭은 두 눈을 부릅떴다.

'재상 이 씹새끼가?'

빠득- 이가 맞부딪치고 에릭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상한 목적으로 온 건 아니고! 에릭 네가 빙의자 관리국 국장이 된 걸로-."

"그런데 왜 반지를 줍니까?"

"그, 그러게? 아마도... 내가 너무 예뻤나 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리카의 아버지.'

하나, 용납이 안 됐다.

"제국 치안청 2기사단의 부단장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 에리카 경 말이지?"

"그녀의 아버지가 재상입니다."

"에에?"

르웰은 에리카의 어린 시절을 잘 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설치는 개망나니 열일곱의 에리카는 대뜸 르웰의 교회를 찾아왔다.

"리페로제가 검을 제일 잘 쓴다던데, 어떤 녀석이냐?"

그 시절에 르웰의 교회는 제4구역에 있었다.

귀족의 행차로 사방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물론, 괴팍한 리페로제의 기분이 상하기까지 했었다.

그때, 리페로제는 에리카를 질질 끌고서 공작을 만나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 말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르웰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면 그 공작이 재상?"

"그 개망나니 딸을 만들어 낸 아버지입니다. 결코 믿을 놈이 못 되죠."

르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녀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꺼내 휙- 던졌고.

에릭은 르웰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반지를 붙잡았다.

"아깝게 왜 버리고 그러십니까."

"설마...."

"제가 아는 경매상이 있으니 그쪽으로 잘 처분하겠습니다. 반지는 더 비싸고 좋은 걸로 제가 하나 맞춰 드리죠."

에릭은 그리 말하며 교회 밖으로 걸었다.

거대한 등판을 향해 르웰이 소리쳤다.

"에릭! 방금 돌아왔는데 또 어딜 가려고!!"

교회 입구에 놓인 거대한 아치형 대문 앞에서 에릭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오랜만에 공작님을 한번 봬야겠습니다."

매우 정중한 말투였지만 어딘가 싸늘한 목소리였다.

* * *

[로얄로드]

제국의 중진들이 산다는 제2구역의 로얄로드가 소란스러워졌다.

황도 제1구역과 가장 가까운 장소요, 타고난 귀족들의 거리다.

그곳에 거대한 성직자가 나타났다.

쿵. 쿵. 쿵. 쿵.

화려한 휘장이 잔뜩 박힌 제국의 정복과 압도적인 체구.

그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선명하게 잘생긴 얼굴.

그런 에릭이 미간을 구긴 채 성큼성큼 로얄로드 한복판을 걸었다.

좌우로 늘어선 대저택들과 중앙에 놓인 넓은 가도.

"구, 국장님! 아무리 공무여도 공작님의 저택을-!!"

그리고 질질 끌려가는 제국 근위대들.

그 너머로 작은 성에 준하는 대저택이 보였다.

담장에 박힌 붉은 용의 실루엣은 페르나시아 공작가를 뜻하는 표식이다.

"애초에 그쪽은 문이 아닙니다!"

"에릭 국장님!! 어어?"

에릭은 망설임 없이 담장에 정권을 내질렀다.

주먹이 찬란하게 빛났다.

콰앙-!

담장이 폭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담장 너머의 연무장이 드러났다.

"-히끅!"

철그렁-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던 에리카가 검을 놓치며 딸꾹질을 했다.

갑자기 벽이 무너지고 에릭이 나타났기 때문인데.

"왜, 왜 화가 난 게냐?"

그 얼굴이 아주 섬뜩했다.

오래전 자신의 예절 교육을 하던 그때의 얼굴이었다.

"에리카, 공작은 어디 있지?"

꿈틀거리는 에릭의 승모근을 보며 에리카가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버지는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 금방 오실 테니 응접실에 있는 건 어떻겠나?"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깨닫자, 에리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실수한 건 아니었군. 아버지가 대체 뭘 하셨길래....'

그 에릭이 저렇게 열이 받았는가?

에리카의 긴장은 여전했으나, 그녀는 정신을 부여잡고 상황 정리에 돌입했다.

가주가 없을 때, 저택의 주인은 그녀였다.

"김 집사! 여기 담장 치워!"

"공작가의 손님이 맞으니 근위대는 돌아가도 좋다."

"메리-!!! 당장 응접실에 차를 준비해 두거라!"

무너진 담장 청소.

에릭에게 끌려온 근위대원 정리.

손님 '에릭'을 위한 응접실 세팅까지.

에리카는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에릭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에릭 국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녀가 에릭을 안내하러 나왔다.

에릭은 시녀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편하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응접실에 놓인 오거 가죽 소파에 몸을 눕히자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화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귀족은 귀족이군.'

응접실의 모습이 대단했다.

과거 에리카 교육을 위해 왔을 때보다 더욱 고풍스럽게 변해 있었다.

바닥과 벽에 수놓인 흑색 타일이 도드라졌다.

'저것만으로도 억은 족히 넘겠군.'

미궁 속 자재로 만들어진, 아주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에릭은 응접실에 자리한 물건들의 가치를 헤아리며, 제국의 부(富)를 가늠했다.

'대를 이어 온 재산이니까.'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겠군.

작위(爵位)가 있고 신분 계급이 나뉜 세상이다.

귀족은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부를 쌓아 왔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에릭인데....

배알이 꼴렸다.

에릭이 그런 생각을 하던 때였다.

끼익-.

노크도 없이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그 말인즉슨, 이 저택의 주인이 찾아왔다는 말이다.

또각, 또각.

선명한 구두 굽 소리와 함게 정갈하게 차려입은 공작이 나타났다.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공작이 에릭을 바라봤다.

"내 에릭 그대의 편의를 그토록 봐주었는데, 어찌 이런 무례란 말이냐?"

무너진 담장에 대한 것부터 약속도 없이 쳐들어온 무례한 에릭.

공작이 그를 한껏 꾸짖으려 들었는데, 에릭이 대뜸 몸을 일으켰다.

쿠웅.

거대한 에릭이 내려다보는데, 그 눈빛이 아주 살벌했다.

그가 말하기를.

"남의 어머니에게 집적거리는 자에게 어찌 예의를 차리겠습니까?"

17화 성물 (3)

"어머니? 네놈은 고아가 아니더냐?"

공작이 에릭을 향해 발끈했다.

"뜬금없이 무례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있지도 않은 어머니 타령이라니...."

숫제 미친놈을 보는 듯이 말을 쏘아 붙였다.

'찔리긴 하나 보군.'

그 발언에 에릭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공작의 딸, 에리카와의 첫 만남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런 거지 무지렁이 천민 고아를 내 교육 상대로 붙인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냐!!! 빼애액-!"

'딸은 무지렁이 천민 고아라고 하더니, 그 아비는 어미 없는 고아라고 지껄이는군.'

에릭은 입이 텁텁했다.

타고나길 귀족이요, 자라나길 귀족이며, 책임지길 귀족이다.

그게 제국이다.

'잘 알지만....'

열받는 건 열받는 거였다.

그렇다고 들이박자니, 아직은 부족함이 많았다.

'언젠가 공작도 예절 교육을 해 줘야겠어.'

당장은 무리였다.

에릭은 조금 순하게 공작을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

철혈의 재상이 눈앞의 남자였다.

"제가 다섯 살 때부터 르웰 사제님의 품에서 자랐습니다."

에릭은 감정을 갈무리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피가 섞이진 않았지만 제 마음은 어머니로 생각합니다."

진중한 목소리가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거대한 체구의 에릭이 굳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공작은 차마 말을 잇기 어려웠다.

'권력을 좀 밀어줬다고 막 나가는 줄 알았건만....'

고아에게도 어머니란 게 생길 수 있다니.

공작은 내심 에릭의 입장을 이해하려 턱을 쓸며 사색에 잠겼다.

그때였다.

"그런 어머니와 같은 존재에게 반지를 건네며 작업을 거셨으니, 제가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허어...."

공작은 침음을 삼켰다.

거대한 체구와 아이답지 않은 처세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열다섯답구나.'

피가 이어지지 않은 인연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치기 어린 느낌이 물씬 풍겨 왔다.

공작은 턱을 쓸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주의하도록 하마."

그 리페로제의 제자며, 순례자의 지위를 이양받은 에릭이다.

'밉보여서 나쁠 건 없지.'

오래전부터 에릭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기에, 공작은 르웰에 대한 구애를 조금 미룰 생각이다.

'그 미모에 인품이 아깝군.'

고아원에서 썩히기에는 르웰은 참 대단한 존재였다.

"내 정중히 사과하고 반지를 돌려받으러 가야겠네."

진정 첫눈에 반해서 준 반지였다.

드래곤 백 마리를 잡아도 얻기 힘든 것이 핑크색 드래곤 하트다.

하물며 그걸 녹여서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 낸 반지다.

체면이 조금 무너지더라도, 다시 되찾아야 할 귀물이었다.

'피의 다이아몬드란 이명이 붙은 물건이지.'

공작은 핑크 드래곤 하트를 얻기 위해 용 사냥꾼들을 엄청나게 투입했다.

제국군의 협력까지 받아 용종의 서식지를 통제하며, 적국과 대치까지 벌였었다.

'체면 따위가 문제일까. 그 핑계로 얼굴이나 한 번 더 봐야겠군.'

한데, 한참이 지나도록 에릭에게 대답이 없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

"흐음."

공작의 고개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에릭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크흠, 흠. 르웰 사제님께서 값비싼 물건인 줄 모르고 버렸다고 하십니다."

"버, 버려?"

공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에릭은 진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취향이 아니셨다더군요."

"그 반지가?"

미중년이란 말이 어울리는 공작이다.

잘 단련된 몸과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옷차림.

공작은 당연히 반지가 불만일 거라 여겼다.

한데 에릭의 눈빛이 오묘했다.

"둘 다였던 느낌입니다."

"내, 아무리 에릭 그대와 친분이 있다 한들 농이 과하군."

에릭은 공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편하게 생각하시지요."

공작은 정말 편하게 생각했다.

'리페로제의 제자라 그런지, 은근히 사람을 찌르는 재주가 있군.'

살살 신경을 긁는 에릭을 보며 공작이 너그럽게 웃었다.

"그래, 역시 반지가 문제였어."

묘하게도 짓궂은 얼굴이었다.

공작은 진지한 얼굴로 에릭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애송이군.'

어려도 한참 어리구나.

건방진 에릭의 발언에 공작이 가벼이 입을 열었다.

한 수 가르침을 내려 줄 생각이다.

"다음엔 더 좋은 반지를 구해서 찾아가야겠군. 자네의 어머니 같은 존재라 하여도, 그녀가 허락한다면 또 모르지 않는가?"

에릭이 발끈할 모습을 상상하며 공작이 말을 마쳤는데, 기대했던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에릭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성직자라 감정을 잘 참는....'

"여차하면 제가 다리를 놔 드릴 수도 있습니다."

"뭐어라!"

응접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작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내게 항의하려던 목적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름의 결론을 낸 공작이 고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묻기를.

"뭘 원하는가?"

* * *

저택을 나선 에릭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르웰 덕을 크게 봤어.'

조금 팔아먹은 느낌이 있긴 하다마는.

충분히 이해해 줄 터였다.

'애초에 내가 뭘 한다고 이뤄질 리가 없지.'

에릭이 생각하건대, 르웰이 공작을 좋아하게 될 확률은 0%였다.

세계가 공작을 돕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그녀의 취향은 확고하다.

'괜히 공작한테 미안해지는군.'

아무리 대단한 사람을 데려다 놔도 르웰이 만족할 리가 없었다.

'빨리 가서 사제님께 양해를 구해야겠어.'

에릭이 자신이 부숴 버린 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중.

"에릭, 기분이 풀린 모양이구나!"

연무장 옆의 야외 테라스에서 에리카가 말을 건넸다.

"오늘은 쉬는 날이십니까?"

"그래."

테라스에 놓인 해먹에 늘어지게 누운 에리카를 향해 에릭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인사는 해야겠지.'

거대한 몸집이 에리카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역광으로 어두워졌음에도 에릭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다.

오늘따라 유독 그랬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에리카가 늘씬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얇은 수련복이 흘러내렸다.

'또 이러는군.'

에릭의 미간이 여며졌다.

예절 교육은 에리카가 성인이 되면서 끝이 났다.

그 뒤로, 그녀는 종종 에릭을 향해 미인계를 걸어왔다.

'이게 먹힐 거라 생각하나?'

에릭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시선을 거두고 무너진 담장을 향해 걸었다.

그대로 공작저를 떠날 생각이었는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해먹에서 몸을 일으킨 에리카가 에릭의 앞을 막아섰다.

"대체 아버님과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공작의 둘째가 에리카다.

장남은 미궁 속에서 귀족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라, 현재 소가주의 지위는 그녀에게 있다.

'어차피 알게 되겠지.'

장남이 살아 돌아오기 전까지는 에리카가 공식적인 후계자란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약조하신 3억 골드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에릭이 담백하게 툭- 내뱉자.

"오, 선금을 받았나 보네."

에리카가 당연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에릭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대체...."

조금 소름이 돋았다.

에리카는 그런 에릭을 흥미로운 듯이 바라보며, 테라스 탁자에 놓인 아공간 주머니를 건넸다.

"이것도 가져가."

"뭡니까?"

"수배범들 압수품, 그때 주는 걸 까먹었어."

"아."

다소 놀란 듯이 있던 에릭은 주머니를 받아들며 평온함을 되찾았다.

'하긴, 나를 잘 알긴 하지.'

첫 만남은 예절 교육이었으나, 근래에는 수배범과 현상금 문제로 자주 얼굴을 맞대던 에리카다.

자신이 뭐에 기뻐하는지 알아볼 법했다.

'오래 본 사이다만....'

그렇게 얻어맞고도 은근하게 선을 넘어오는 에리카.

매력적인 적발을 지닌 고양의 상의 미녀였지만, 에릭의 기준에는 한참을 못 미쳤다.

'괜한 여지를 줘서 희망 고문을 하긴 싫단 말이지.'

조금 덩치가 클 뿐이지, 에릭은 자신이 한 외모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얼굴값을 할 거면 좋게 해야지.'

그런 생각이었다.

에릭이 성호를 그리며 작별을 고하려던 때.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

"에릭, 역시 르웰 사제님 같은 분이 취향인가?"

에리카가 말을 끊고 대뜸 돌직구를 날렸다.

에릭은 에리카를 빤히 바라봤다.

'르웰이랑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데....'

에릭은 잠시 고민했다.

르웰의 외모와 비교하자니, 에리카에게 조금 몹쓸 짓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해?

그건 또 내키지 않았다.

'음... 이러면 되겠군.'

차분히 생각을 마친 에릭이 말하기를.

"에리카 경께서는 저보다 열 살이나 연상이지 않습니까?"

"어어?"

고장 난 듯이 멍해진 에리카를 내버려 둔 채 에릭은 저택을 떠났다.

'빙의하기 전까지 치면 내가 연상이지만....'

공작저를 벗어난 에릭은 제2구역의 로얄로드를 거슬러 상점가로 발길을 향했다.

목적지는 [쟝의 마도구 상점]이다.

"형님 오셨수?"

가게 안쪽을 다 정리했는지, 입구를 재단장하는 장두식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덩어리의 모습에 에리카로 혼란해졌던 머리가 말끔해졌다.

"두식아."

에릭은 밝게 웃으며 마도구 상점으로 들어섰고.

"거, 형님. 뭐 그리 좋은 일이 있어서 그렇게 미친놈처럼 실실 웃고 있는 거요?"

장두식의 매를 버는 말이 들려왔다.

"마, 말로!"

장두식은 무의식적으로 헛소리를 내뱉은 자신의 입을 부여잡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랬는데.

'왜 아무런....'

보통이라면 꿀밤을 내리쳤어야 정상인데, 에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얼굴로 장두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수?"

"3억. 선금을 받아 왔다."

"허어.... 뭐더라. 황제폐하께서 전령을 통해 준다 하지 않았수?"

"재상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더군."

스승 리페로제와 함께 만났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공작이 스승에게 겁을 먹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자신과 거래를 하는 기분이었다.

에릭이 간략하게 재상에 대한 평가를 읊조리자.

"미치겠수다. 어쩌다가 이렇게 거물이 되셨수?"

장두식이 눈을 끔뻑끔뻑 뜨며 물었다.

"그러게 말이다."

에릭은 가벼이 웃으며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인벤토리]에 든 3억 골드를 [상태창]으로 옮겨,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다.

에릭은 실행에 앞서 장두식의 의견을 물었다.

"거, 형님 4티어 개방은 10억이라 하지 않았수?"

"그렇지."

"하면, 차라리 조금씩 더 삥땅 치고 모아서 10억을 쓰는 게 좋아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슈?"

개인의 성장과 장비를 선택하라면, 전자가 우선시되는 게 당연할 터였다.

한데, 에릭은 달리 생각했다.

"지금 4티어를 개방하면,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

갓난아기로 태어나 스승에게 주워져 자란 에릭.

그는 어린 날 뭣도 모른 채, 1티어 신성력을 개방했다.

그것도 모자라 2티어까지 개방했고 그 때문에 신성력을 견디지 못해 그대로 몸이 터져서 죽을 뻔했다.

'르웰과 스승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진짜 죽었겠지.'

그때를 떠올리자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루하루가 끔찍한 고통이었어.'

2티어에서 3티어까지 10년을 걸려 몸을 만들었다.

아직 3티어 신성력도 완벽하게 못 다루는데, 4티어를 욕심내는 건 자살이랑 다를 게 없었다.

'앞으로는 르웰 사제님도 못 도와주신다.'

미궁에서 힘을 쓰며 깨달은 사실인데, 어지간한 사람은 자신의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할 터였다.

"4티어 개방이 아니면, 형님 말대로 진행하는 게 좋겠수다."

에릭이 생각에 잠긴 사이, 장두식이 계산을 마쳤다.

"알만정교회 성물을 사서,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님께 넘기고, 황제 폐하의 중개를 받는.... 거참, 말하면서도 이상하구만요."

본래 에릭의 계획을 읊었을 뿐인데, 말도 아닌 거물들이 거론되었다.

"두식아, 내가 이 정도다. 조만간 마탑주에게 개인 과외를 받게 해 주마."

에릭은 그리 말하며, 금빛 물결에 휩싸여 사라졌다.

* * *

"보스, 웬일로 마르코 모습이 아니신지...."

에릭은 제5구역에 자리한 은신처로 몸을 옮겼다.

전이의 기적으로 방 한복판에 나타난 에릭을 보며, 잭슨이 말끝을 흐렸다.

"보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잭슨이 얼굴에 난 흉터를 긁으며 물었는데, 말투가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토록 찬란한 미소를 지은 에릭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마르코의 모습이 익숙한 잭슨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에릭은 대답 대신 휙- 하고 아공간 주머니를 던졌다.

"잭슨, 암시장에 팔아라. 어지간하면, 귀족가에 소문도 좀 흘리고. 특히 공작가 위주로."

그러고는.

"2황비에 대한 정보를 모아라."

간략한 지시 사항을 덧붙였다.

"하면 고아원 보호는 어떻게 할까요? 정보 수집으로 돌리면 인력이 모자를 것 같습니다만."

"내가 있는 동안 고아원에 경비는 필요 없다. 미궁에 갔을 때만 잘 챙겨 주면 된다."

"이건 언제까지.... 허어."

에릭의 지시대로 팔 물건을 확인하던 잭슨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참이 지나고 그가 묻기를.

"이, 이거. 피의 다이아몬드 아닙니까?"

"잭슨, 견문이 넓군."

"제국에 단 두 점밖에 없는 물건인데...."

"운이 좋았다."

잭슨은 흉터가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운?'

고작 운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물건인데....

그 마르코, 아니 에릭이라면.

보스라면.

"역시 보스십니다."

찬란한 신성의 주인답게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잭슨은 체념하듯이 타협했다.

"이건 경매로 처분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값만 제대로 받도록."

에릭의 모습으로 왔을 때는 보통 용건만 마치면 그대로 떠나 버리던 보스다.

"보스, 무슨 일이 더 있으십니까?"

한데, 에릭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잭슨이 의아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보고 있자니, 에릭이 몸을 일으키며 지시 사항을 읊조렸다.

"잭슨, 보안 수준을 최대로 높이고 내가 부를 때까지 개미 한 마리 못 들어오게 막도록."

마력 방해 장치, 인식 저해 등등.

마탑에 준하는 보안을 갖춘 것이 보스 마르코의 아지트다.

'여기서 사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구매하려는 물품이 [성물(聖物)]인 만큼, 보안이 철저할 필요가 있다.

"보스, 임무로 떠난 쌍둥이를 제하면 전부 집합했습니다. 늙은이 말로는 2시간이면 황실 마탑의 눈도 가릴 수 있다더군요."

잭슨이 보고를 마치자 에릭이 손을 저었다.

"보스,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시길."

잭슨이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다.

드넓은 방에 혼자 있는 에릭이었는데, 거대한 체구와 선명한 존재감이 방을 좁아 보이게 만들었다.

그만큼 에릭은 들뜬 기분이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에릭은 설레는 마음으로 상태창에 손을 얹었다.

[상점]을 눌러 수많은 성물들의 리스트를 살폈다.

'돈이 복사가 되겠어.'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

제국의 황제.

알만정교회의 대주교.

하나의 성물로 세 집단을 뒤흔들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하하하하-!!!"

에릭은 광소를 터트리며, 구매 버튼에 손을 얹었다.

[성갑(聖鉀) 알만의 바르바닐: 150,000,000골드]

18화 성물 (4)

"끄히히히히-!!! 보스가 드디어 미친 게 분명하구나!"

황도 아르만의 제5구역.

가장 구석지고 음습한 땅에 지어진 낡은 목조 건물에서 비명과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끄히히! 언제까지 나를...."

퉁퉁한 노인이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터질 듯이 부푼 배와 지방으로 가득한 턱살이 부들부들 떨리고 시시각각 부피가 줄어 갔다.

"늙은이, 참아라. 보스의 명령이다."

잭슨이 절뚝이는 걸음으로 노인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그의 허리춤에는 반쯤 뽑힌 검날이 보였는데, 검 위로 푸르른 오러가 일렁였다.

늙은이라 불리는 노인은 검날을 흘겨보며 침음을 흘렸다.

"끄히히. 어쩌다가 내가 이 꼴이 됐을꼬...."

"흑마법사로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도록."

자신의 생명력을 바친다는 기괴한 방식으로 흑마법을 익힌 자가 늙은이다.

그렇기에 에릭을 마주하고도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끄히히히-. 그래, 그러니 내가 이리 종의 삶을 사는 걸세."

노인이 연신 입을 놀리자 잭슨이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의 흉터들이 일그러져 구불구불한 주름이 잔뜩 생겨났다.

"늙은이, 그 입 좀 닥치지. 너는 살덩이만 태우면 그만이지만, 나는 오러를 써야 한단 말이다!"

제5구역의 빈민가에서도 가장 후미지고 낡은 건물에는 수십 겹의 보안 장치가 둘러져 있다.

그것도 모자라 소드마스터와 흑마법사의 힘까지 더해졌다.

'잭슨이 오러로 기막을 치고 흑마법으로 기척을 지웠는데....'

애초에 이 건물에 둘러진 마법진만 몇 겹이던가?

늙은이는 궁금증을 참기 어려웠다.

"잭슨, 대체 보스가 무얼 하길래 내 마력을 이렇게 빨아먹는 게냐?"

2시간은커녕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힘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잭슨 또한 답을 몰랐기에, 괜한 농담을 건넸다.

"늙은이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변했군."

말을 아껴야 할 시기를 지나, 뭐라도 내뱉지 않으면 의식을 잃을 판이었다.

"끄히히히,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는 너보다야 낫지."

두 사람이 힘이 다해 죽겠다 싶을 지경이 돼서야.

끼이익.

에릭이 있던 방문이 열렸다.

서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찬란한 휘광이 들이닥쳤다.

싸아아아아―

흑마법사를 태우는 신성의 잔향이 문틈으로 스며들자.

"끄히이익-!"

늙은이가 경악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뚱뚱했던 체구는 어느새 깡마른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졌고 그 위로 신성의 빛이 스쳐 갔다.

노인의 피부가 갈라졌다.

"늙은이, 움직이면 소멸한다."

잭슨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늙은이의 앞에 오러의 막을 둘렀다.

끼이익-쿵.

문이 활짝 열렸다.

"보스.... 대체 그건?"

생각보다 쉽게 막히는 신성에 잭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 에릭의 신성력이 고작 오러에 막힌다고?

잭슨과 늙은이가 유심히 살펴보니, 신성의 빛 너머로 갑옷의 형체가 보였다.

갑옷 너머로 압도적인 체구의 에릭이 우뚝 서 있었다.

"알만정교회의 성물이다."

중후한 음성이 내려앉고.

활짝 열린 문 너머의 거대한 에릭 앞에서 황급빛 갑주가 반짝였다.

흉터를 긁적이며 잭슨이 묻자니.

"그, 보스는 아스티아 교단 소속이 아닙니까?"

에릭이 좁은 문지방을 지나쳤다.

문의 프레임이 어깨 형태로 푹- 파였다.

"끄히히히히, 또 미친 짓을 벌이는 게야!!!"

황망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잭슨과 바람 빠진 웃음을 내지르는 늙은이.

에릭은 물끄러미 그들을 지켜봤다.

"으음, 보스 이마에 땀이?"

에릭은 힘에 겨웠다.

고작 아이템의 기척을 붙잡는 데만, 신성력을 한참이나 잡아먹고 있었다.

'성물은 성물이군.'

잭슨과 늙은이 그리고 은신처에 쳐 둔 보안장치의 보조를 받음에도 힘에 부쳤다.

아무래도 슬슬 한계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성물이다."

잭슨과 늙은이는 의아했다.

신성력을 다루는 에릭이 성물을 지녔는데 뭐가 문제인가?

당연한 말을 왜 하는지.

"흠, 보스가 타 종교의 성물을 신경 쓸 것 같진 않고...."

"끄히히히, 보스라면 날름 다 집어먹을 게야!"

에릭은 아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다마는.

"안타깝게도 신성력을 제어할 수가 없더군."

조만간 성물의 기척이 사방을 뒤흔들 터였다.

"그, 그러면...."

"끄히히? 보스?"

에릭이 말하기를.

"당장 멀리 튀어라!"

* * *

황도 아르만이 소란스러워졌다.

불청객이 찾아온 탓인데, 제국의 입장에서 함부로 쫓아내기 어려운 불청객이었다.

"알만정교회 교주님이 오신다!"

대목사의 손자, 삼황자를 기리기 위해서라는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차의 행렬이 끝도 없구나."

황도 끝자락의 빈민들은 알만교의 행렬을 열렬히 환호했다.

알만정교회의 수장, 무려 교주가 나섰다. 그들은 지나가는 길에 금화를 뿌리며 다녔다.

"대로는 양방통행으로!"

"샛길은 모두 일방통행이다! 돌아서 이동하도록!"

알만정교회의 행차로 온 도시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치안청과 근위대, 황도수비대까지 동원되었는데....

"젠장, 황도의 시민이랑 시민은 죄다 거리로 나온 모양이군."

겨우 질서를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말 그대로 금화를 뿌리는 교주의 마차는 수백 수천의 인파를 몰고 다녔다.

이대로는 사람들끼리 서로 압사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의 혜안 덕분에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빙의자들의 안전책이 효과를 볼 줄이야."

"역시, 무턱대고 죽이는 것보다 써먹는 것이 효율적이군요."

에릭이 관리국장이 되기 전, 제국의 황제는 빙의자들의 기술과 지식을 일부 수용했다.

그중 '내진 설계', '안전 대비' 등의 비중이 컸다.

"역시 황제 폐하의 혜안이 제국을 밝혀 주시는 구나."

소란 속에서 황제에 대한 찬양이 이어졌다.

"황궁도 정신없겠어."

대륙을 삼분하는 한 교단의 수장의 참석.

당연하게도 황궁 또한 분주해졌다.

황제의 명을 받고 몰려드는 귀족들이 황성 앞에 줄을 서 있을 정도였다.

'네 개의 공작가가 한자리에 모였다니.'

국교가 없는 제국에 한 종교의 수장이 찾아온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아스티아 교단 때와는 다르게, 무려 공식적인 방문이었으니까.

'로얄가드 전원에....'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이 '성전기사단'을 데려왔듯이, 알만정교회의 교주도 '황금기사단'을 내세웠다.

감히 지엄한 황실에 기사단을?

제국의 귀족들이 열받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 대공이 북부를 비우고 내려올 줄이야.'

제국의 최강자 북부 대공이 발끈해서 참석할 정도였다.

전이 마법진을 썼다지만, 대공이 북부를 비우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알만정교회 교주의 방문이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대체 왜 아무도 말을....'

제국의 네 공작가, 북부 대공.

그 외, 수많은 귀족들이 전부 대전(大殿)에 모였다.

가장 안쪽의 옥좌를 중심으로 좌우로 도열한 중진들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툭. 툭.

황제가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황제의 거대한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아 있었다.

"폐하, 알만정교회의 교주가 알현을 요청하였습니다."

정적 속에서 철혈의 재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

삼황자는 2황비의 아들이며, 빙의자였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2황비는 계속해서 황제에게 에릭의 처분을 요청해 왔다.

"하도 징징거리길래 유폐해 놨더니, 교단을 죄다 끌고 왔군."

불만스러운 황제의 한마디에 알현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묵직하며 위압적인.

패도적인 기운이 사방에 감돌았다.

'대목사가 아닌 교주가 직접 나섰다라.'

타고나길 지배자요, 자라나길 정복자인 황제다.

때에 따라서는 유연한 사고를 발휘하는 명석한 판단력을 지닌 대제국의 수장이다.

하나, 그는 종교에 대해서만큼은 배타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세 교단을 경쟁 붙여 뒀어야 했거늘....'

제국이 험난했던 시절, 어쩔 수 없이 했던 결혼.

명분만 쥐여 준 꼴이 되었다.

'에릭이 성물을 가져온다면....'

일이 쉬워지겠지.

황제가 화려한 옥좌에 몸을 눕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고작 열다섯에 괴물같이 강한 에릭.

하나, 고작 첫 미궁에서 성물을 얻어 올 리가 만무했다.

'하루 만에 나왔다던가?'

한 달이라는 기한을 들었으니, 고작 미궁 일 회 차에 성과를 기대할 순 없었....

그런 생각을 하던 황제가 갑자기 침음을 흘렸다.

"허."

고작 열다섯에게 기대려는 건가?

'이 내가?'

황제는 머리를 털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은발이 찰랑이고 위협적이었던 공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위엄이 서렸다.

"들라 하거라."

황제가 그리 말하자.

드르르르륵.

거대한 알현실의 문이 개방되었다.

"알만정교회의, 팔리아 알만 교주님 입장하십니다!"

좌우로 열리는 아치형 문에서 달빛이 반짝였다.

고작 조각인데, 진짜 달을 빚은 느낌이었다.

파스스스-.

그 달빛을 밀어내며 밝은 신성의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신성력의 중심에 화려한 지팡이를 든 교주가 보였다.

"교주, 오랜만이군."

교주가 채 들어서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말을 건넸다.

황금빛 로브를 휘날리며 교주가 지팡이를 바닥에 땅- 내리꽂았다.

"대목사의 손주면 제 증손주나 다름이 없지요. 그가 신의 품으로 떠났다는데, 이제야 발걸음 한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진중한 발언과 달리 말하는 어조가 나긋했다.

그의 손짓에 신성이 일렁이고 기다란 백발이 나부꼈다.

"교주, 많이 늙었군."

그 모습에 황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허, 겉이 늙었다고 내 믿음이 흔들렸을 리가 없지. 애송이도 많이 컸구나."

그런 황제를 향해 교주가 대뜸 반말을 내뱉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중에, 뜬금없이 북부 대공이 발끈했다.

"감히-."

"그만, 괜찮다."

거대한 오우거 같은 북부 대공의 움직임이 뚝- 하고 멈췄다.

크르륵- 황제의 명에 대공이 괴성을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애송아, 내 증손주가 왜 죽었느냐?"

알만정교회와 제국 사이에는 미묘한 선이 존재했다.

지금은 결혼과 아이로 이어져 있던 선이 끊긴 상황.

"교주, 빙의자를 손주로 여기는군. 알만정교회 또한 빙의자를 악으로 선언했지 않는가?"

"허허, 그걸 어찌 믿겠나? 웬 열다섯 애송이가 신성력으로 터트려 죽였다는 건 이미 들은 얘기일세."

에릭의 화려한 퍼포먼스 탓에, 신성력에 타 죽었다는 것보다 터져 죽었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졌다.

툭.

'종교는 이게 문제지.'

교회와 신전, 성소 따위가 가득한 세상.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졌다.

이미 소멸한 삼황자를 부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옛 정을 생각해서 소정의 공물을 받고 넘어갈까 싶네."

황제를 바라보며 교주가 입을 열었다.

시작부터 본론이라니.

'동부 대수림을 내 달라 하겠군.'

황제는 내심 속이 썼다.

제국과 알만정교회가 상호 협력하에 개발해 온 동부 대수림.

노림수는 뻔했다.

'병력 손실은 제국에서 다 보고 이득을 챙기기도 전이거늘....'

미궁, 대격변 패치를 앞둔 시점에 이런 압박이라.

어쩔 수 없나?

추후 다시 뺏어 오면 그만이다.

황제가 나름의 계산을 마치고 입을 열려던 순간.

"폐하!"

북부 대공이 황제의 앞을 막아섰다.

그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황도 끝자락에서 거대한 신성의 빛이 솟구쳐 올랐다.

교주의 지팡이는 황제를 겨눴고.

북부 대공의 거대한 대검은 교주를 노렸다.

"애송이, 제법이구나. 성물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 * *

"이런 미친."

잭슨과 늙은이가 대피한 직후 에릭은 성물을 가두었던 힘을 풀었다.

콰아아아아앙-!!!

숫제 굉음이 몰아치며 수직으로 신성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그 근원은 에릭의 눈앞에 놓인 갑옷이었다.

[성갑(聖鉀) 알만의 바르바닐]

[알만정교회 전용 아이템입니다.]

아이템의 세부 스펙이 나오진 않았어도 신성력과 관련된 물품다웠다.

에릭은 충분히 그 가치를 알아봤다.

'광범위 신성 강화, 초회복, 신성 축복.'

교단은 다르되, 같은 힘을 다루는 자로서 느끼는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게다가 파괴 불가까지 있군.'

그야말로 성유물 등급에 어울리는 옵션이었다.

"...내가 쓸 수 없는 성물이 있을 줄이야."

에릭은 엄연히 [아스티아 교단] 소속이다.

게임처럼 소속이나 직업에 제약이 있는 아이템을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빙의자들은 절대 못 쓰겠군."

막상 아이템 주제에 아이템답지 않은 구석이 많았다.

[네임태그]가 선명하건만, 인벤토리 수납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성물의 힘을 다룰 방법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쿠구구구구궁-!!!!

솟구친 신성력의 기척을 온 세상이 알아본다는 의미였다.

에릭은 차분히 [알만의 바르바닐]을 바라봤다.

거대한 갑옷에는 화려한 금장이 둘러졌고 가슴과 어깨 등 연결 부위에는 보석들이 빼곡했다.

어차피 퍼져 나간 성물의 기척이다.

"쓰읍.... 안 떼지는군."

최대한 이득을 뽑아 보려고 보석을 건들던 에릭은 체념했다.

성물과 하나라도 되는지, 갑옷을 이룬 어떠한 물건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 교황 성하가 먼저 올지, 저쪽 교주가 먼저 올지 모르겠군.'

대신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에릭 역시 알만정교회 교주의 방문을 알았다.

'그리 광고를 하고 다녔는데.'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어도, 수도 전체를 관통하며 지나친 행렬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조금 일이 꼬인 느낌인데....

'교황 성하, 부디 빨리 오시지요.'

일타삼피, 일석삼조.

성물 하나로 세 집단에 빚을 지워 둘 기회다.

대격변 패치가 다가오는 시점에, 더 공고한 입지를 다져야 했다.

에릭은 미친 듯이 순례자의 표식에 힘을 퍼부었다.

교황을 향한 신호였다.

그때.

키이이잉-!

에릭의 눈앞에 선명한 금빛 십자가가 생겨났다.

길쭉한 십자가 위로 여섯 날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날개에 감싸진 채 십자가 형태로 허공이 갈라졌다.

갈라진 공간은 곧 전이의 기적을 뜻하는 것이며.

'다행이군.'

기다란 십자가는 에릭이 속한 아스티아 교단을 뜻하는 거였다.

에릭은 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아스티아 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거대한 몸을 숙인 채 에릭이 덧붙이기를.

"약조한 대로 성물을 가져왔습니다."

그에 교황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네놈 왜 타 교단의 성물을 지닌 게냐?"

19화 성물 (5)

"약속은 약속이지 않습니까?"

다른 교단의 성물을 들고 와 놓고는 천연한 얼굴로 그리 묻는데....

'허, 저걸 어찌할꼬.'

교황은 말문이 턱- 막혔다.

"아버지께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감히 교황에게 이런 태도라니.

거리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여기까지 내다본 건 아닐 테지.'

다른 물건도 아니고 무려 성물(聖物)이다.

계획한다고 쉽게 얻을 리가 만무한 물건이었다.

하물며 타 교단의 성물이라니.

"교황 성하."

재촉하듯 연신 말을 거는 에릭을 향해 교황이 다가섰다.

머리 두 개만큼 큰 에릭이 무릎을 굽혀 교황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럴 필요 없다."

에릭은 어느새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커 보이는 교황을 보며,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소름 끼치는 힘이었다.

조금 전까지 노인 같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굳건한 성기사 같은 풍채다.

'진짜 교황답구나.'

제멋대로 자신의 외형을 바꾸는 것에, 절로 기적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

"그래, 약속은 성물을 가져오는 것이었지."

에릭을 내려다보며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커졌군.'

에릭은 실로 간만에 누군가를 올려다봤다.

뒷목이 뻐근했다.

하나, 이어질 교황의 말을 기대하면서 꿋꿋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툭.

교황은 말없이 에릭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따스한 기운이 에릭에게 스며들었다.

'르웰 사제와 리페로제의 품에서 자란 아이라.'

성소(聖所)에서 길러지고.

성기사 훈련소에서 자라나며.

신성한 의무로 벼려진 일반적인 성기사들과는 달랐다.

'실로 태연자약하도다.'

능구렁이 담 넘어 가듯이 구는 처세와 능청스러운 태도.

타 교단의 성물을 들고 와 인정해 달라는 소릴 하면서....

저런 순박한 표정을 짓다니.

'집단의 유연성도 중요하지.'

신성한 신의 이름하에 움직이는 집단이어도.

저렇게 능글맞은 성기사가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리페로제가 사라진 뒤로 아스티아 교단의 개성이 죽은 느낌이 없잖아 있던 차에.

'그녀의 제자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에릭이라는 신성(新星)이 달가운 것도 사실이었다.

교황은 에릭의 머리에 얹은 손을 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인정하마."

에릭이 감탄하여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스승님 말대로군.'

황제가 그러했듯이, 교단의 교황 역시 열린 사고를 지녔다.

가히 대해(大海)와도 같은 마음씨였다.

'다음 말을 해도 될까?'

타 교단의 성물을 인정받은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

에릭은 과거, 스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교황이 어떠냐고? 흠, 사람들 앞에서 체면만 세워 주면 둘이 있을 땐 유한 편이었지. 안 된다는 것도 냅다 드러누우면 들어주곤 했으니까."

음.

되겠군.

그의 스승이라 가능했던 일이지만....

'내가 스승의 대체제다.'

지금은 에릭 자신이 비슷한 위치에 다가서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에릭은 교단의 순례자요, 제국과 협업하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에릭은 화통하게 교황에게 협력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에릭이 교황을 올려다봤는데.

'언제?'

어느새 그는 작은 아이처럼 작아져 있었다.

에릭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교황 성하, 황제 폐하의 중개를 통해 알만정교회의 성물을 판매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허어."

그토록 찬란한 미소를 지은 에릭을 보며 교황은 침음을 삼켰다.

* * *

"준비할 것이 있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에릭은 교황을 내버려 둔 채 전이의 기적을 행해 사라졌다.

교황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알만정교회의 성물을 바라봤다.

'이 나를 성물 지키는 용도로 쓰는 게냐?'

그 방자함에 절로 혀가 내둘러졌다.

하나, 마냥 밉지는 않았다.

'리페로제, 살아는 있는가?'

사라졌던 오랜 친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꼭 지 같은 놈을 후인으로 만들어 놨더구나.'

대뜸 할 말만 내뱉고 사라져 버린 에릭의 행동 또한 리페로제와 다를 게 없었다.

'그깟 성물이 뭐라고.'

그녀도 사라진 교단의 성물을 찾겠다며, 어딘가로 훌쩍 떠나 버렸다.

"에릭 이놈은 뜬금없이 어딜 갔을꼬...."

교황이 생각에 잠겨 있자니.

키이이잉-!

허공에 십(十)자 형태로 신성의 힘이 새겨졌다.

"허!"

교황은 잡념을 털고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전이(轉移)의 기적.

어마어마한 신성력을 잡아먹기에, 아무나 쓸 수 없는 힘이다.

하물며, 이동하고자 하는 곳을 명확하게 떠올릴 줄 알아야 했다.

'전이하는 시간이 말도 안 되게 짧군.'

하물며 왕복을 몇 분 만에 해낸다?

말도 안 되는 기재였다.

"대단하구나."

신성력으로 허공을 가르고 나타나는 에릭을 보며 교황이 감탄했다.

그에 에릭이 말하기를.

"스승님이 전이의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탓에, 제가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요컨대, 에릭이 리페로제의 전이 셔틀로 살았다는 말이었으니.

"리페로제가 신출귀몰해졌던 원인이 너였구나!"

교황은 무릎을 탁-! 치며 감탄했다.

머리가 나쁜 탓에 전의의 기적을 행하지 못했던 리페로제인데, 십여 년 전부터 훌쩍훌쩍 사라지는 일이 잦았었다.

그 원인은 에릭이었다.

"하면, 그 어린 나이부터 전이의 기적을 쓸 수 있었다는 말이 아니더냐?"

문득 교황은 이상함을 느꼈다.

'지금이 열다섯이니, 다섯 살 때 그 복잡한 것들을 이해했다는 말인가?'

좌표를 이해하고 공간이라는 개념을 파악해야 가능한 일인데....

교황이 고개를 갸웃거리자니, 에릭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매만 한 게 없더군요."

"매?"

"스승님께 얻어맞으면서 배웠더니, 절로 외워졌습니다."

"허어."

교황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에릭을 바라봤다.

그 역시 교황이 되기 전에는 일개 성기사였다. 수련을 하던 시절 리페로제와 동기였던 바.

"고생이 많았겠구나."

에릭의 '얻어맞으면서 배웠다.'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교황이 창시했다고 알려진 아스티아식(式) 중검술(重劍術)은 사실상 리페로제와 함께 창안했다.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던가?

"고생...."

에릭은 울컥했다.

스승, 그 리페로제와 함께한다는 고난과 역경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니.

역시 교황인가?

한 종교의 수장다운 이해심이었다.

"스승님과 함께한다는 고충을 이해해 주시는 분은 처음 뵙습니다."

"그렇겠지, 보통은 그 대단한 사람이 스승인데 뭐가 아쉽겠냐는 말을 했겠구나."

"...역시 교황 성하십니다."

본래 적정 금액을 뜯어낼 생각이었던 에릭인데, 교황을 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에릭 역시 교황의 눈빛에서 비슷한 마음을 느꼈다.

"교황 성하, 제가 최대한 많이 받아 보겠습니다."

똑똑.

때마침 제5구역의 오두막 앞에 손님이 찾아왔다.

끼이익.

서서히 문이 열리자.

"충-!"

화려한 깃발을 나부끼며 제국 치안대 2기사단이 나타났다.

미스릴 갑주를 입은 부단장 에리카가 오두막에 들어와 투구를 벗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꿇어 앉았다.

기다란 적발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낡고 더러운 제5구역의 나무집에 공작의 둘째이자 기사단의 부단장이 꿇어 앉은 상황인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격에 겨워 몸을 들썩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아스티아 신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정중하고 예의 바른 자세로 신실함을 담아 인사하는 에리카를 보며, 교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축복이 네게 깃들지어다."

교황이 인사를 받아 주고 나서야, 에리카가 몸을 일으켰다.

교황은 에릭을 바라보며, 기사단을 데려온 연유를 물었고.

에릭은 덤덤하게 답했다.

"성물을 팔 생각이니, 포장지가 필요한 법이지요."

"허어, 포장이라?"

교황은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기사단을 포장지로 쓰겠다는 말이 참으로 재치 넘치는 표현이었다.

에릭 또한 '하하-!' 마주 웃었다.

성물이 그만한 물건이긴 하지.

'...미친놈.'

기사들과 함께 성물을 마차에 옮기던 에리카는 머리를 흔들었다.

저놈의 얼굴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거리를 뒀을 텐데....

마차에 실린 성물을 점검하고 있자니.

스윽.

"-흐익."

에리카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만한 체구는 에릭이리라.

순간 놀라서 작은 비명을 내질렀지만, 금세 정신을 붙잡았다.

담대한 척 무표정을 유지하던 에리카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황궁으로 가면 되겠나?"

공무 중인 상황에 위엄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공작가의 직계요, 제국의 기사다.

그런 에리카를 보며 에릭이 조소를 지었다.

그가 에리카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기를.

"체통을 지키시지요, 공녀님."

* * *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제국의 핵심 인사들과 알만정교회의 교주가 모인 자리였다.

"어머니의 기척이 분명한데 어찌 앞길을 막는가?"

두 집단 모두 신성의 파동을 느꼈다.

알현실 창밖으로 기다란 기둥이 선명하게 보였다.

"물건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어찌 멋대로 나가려 드는가?"

성물의 찾으러 나가려는 교주와 이를 막아서는 황제의 대립.

물론, 황제와 교주는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채앵-! 팅.

"대공, 비켜라."

"크르륵."

황금기사단의 단장과 북부 대공의 검이 맞닿았다.

"감히 폐하의 앞에서 검을 뽑는가!"

제국의 귀족은 강자다.

대를 이어져 내려온 무(武)의 정수를 뽑아 만들어진 것이 귀족이다.

"교주님의 앞길을 막지 마라!"

알만정교회의 황금기사단 역시 강자다.

태어난 순간부터 신앙을 바탕으로 갖은 고난의 수행을 거쳐 만들어진 전략 병기였다.

툭, 툭.

황제는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턱을 괴었다.

손끝으로 정보부에서 보낸 암호문이 전해졌다.

[에릭 성물 교황]

세 단어를 한데 모아 두니, 황제의 스트레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마안-."

지엄한 황제가 한껏 힘을 품어 소리치자.

"폐하."

북부 대공이 검을 집어넣었다.

등 뒤에 황금기사단 단장이 칼을 들고 있는데, 그냥 그대로 물러서 버린 것이다.

제국의 황제란 절대적이다.

"그만들 하거라."

교주도 황제를 따라 기사단을 물렸다.

'선수를 빼앗겼군.'

황제가 먼저 나선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 애송이가 저렇게 변했단 말인가?'

수십년 전에 보았던 황제와 지금의 황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제법 군주다운 모습이 아닌가?

"곧 성물이 도착한다."

굳은 얼굴로 지팡이를 바라보는 교주를 향해 황제가 입을 열었다.

감히 알만교의 성물을 제 것인 양 말하는데....

"애송아, 아스티아 교단이 성물의 주인이겠구나."

황제가 제국의 주인이듯이 교주는 알만정교회의 주인이다.

당연히 그에 걸맞은 힘을 지녔다.

교주가 성물 [지팡이]를 만졌을 때 미래의 편린이 보였다.

"에릭이란 놈과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이 함께 오겠지."

황제는 담대하게 교황을 내려다봤다.

하나, 속은 썼다.

'신의 힘이라.'

참으로도 부조리하지 아니한가?

제국 전체에 촘촘하게 깔아 둔 정보부와 황실 마탑을 총동원해 만든 암호화 체계에 들인 비용을 떠올려 보니 절로 배알이 꼴렸다.

저 종교쟁이들은 지팡이만 툭- 짚으면, 미래를 보듯 상황을 알아내지 않는가?

"애송이, 제국 또한 신을 섬겨야 할 게야."

그런 황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교주가 껄껄- 웃었고.

"늙은 교주가 신의 품으로 가면 고려해 봐야겠군."

황제도 마주 웃으며 옥좌를 툭-툭- 두드렸다.

두 사람 모두 갖은 대로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였다.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 성하, 순례자 에릭 경 입장하십니다!"

알현실 앞의 전령이 나팔을 불며 소리쳤다.

나팔 소리가 아주 경쾌했다.

뿌우우우우우―

"흠, 분명 내가 들어올 때 나팔은 없었지 않느냐?"

그에 교주가 물었고.

"제국은 환영하는 이에게만 나팔을 불어 주지."

황제는 답했다.

'미치겠구나.'

대신들과 교주의 기사단은 칼집에 손을 얹은 채 서로를 노려봤다.

황제와 교주의 대화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았다.

드르르르륵.

활짝 열린 알현실의 문 사이로 에리카 페르나시아 부단장이 들어섰다.

그녀가 검을 뽑아 하늘 높이 올리더니 가슴에 툭- 붙였다.

제국의 영광을 뜻하는 군례(軍禮)였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가 기꺼이 웃었다.

"성물에 주인이 있다 하지 않았나?"

"...제국에는 국경이 있지. 하나 종교에는 국경이 없다."

그에 질세라 교주가 발끈했는데.

"실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에리카를 지나쳐 나타난 교황의 한마디에 패색이 짙어졌다.

'일이 어렵게 됐구나. 왜 아스티아 교단이 나섰단 말인가?'

알만정교회의 교주가 눈을 흘겼다.

삼황자의 죽음으로 뭘 뜯어 갈 생각으로 왔는데....

아니지.

차라리 잘됐다.

'성물을 뜯어 가면 되지.'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 뒤로 나타난 거대한 사내, 에릭을 바라보니 교주의 마음이 바뀌었다.

알만정교회의 신은 반짝이는 것들을 좋아한다.

에릭의 손에 들린 신성한 빛을 내뿜는 갑옷에 교주의 눈이 꽂혔다.

'역시 알만 신께서 쓰시던 물건이로구나.'

본래 삼황자의 죽음을 빌미로 압박할 생각이었는데, 교황의 존재가 이를 어렵게 만들었다.

'아버지께 맹세한다. 이 한마디면, 할 말이 없어지겠군.'

같은 종교인으로서 잘 안다.

이는 절대적인 핑계거리였다.

하여, 교주는 생각을 바꿨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에릭을 보며, 교주가 입을 열었다.

교주 역시 뒤틀린 입매였다.

"우리 알만정교회의 성물이 분명하구나. 우리가 지닌 아스티아 교단의 성물과 교환하는 게 어떤가?"

대답은 없었고.

툭. 툭.

황제가 옥좌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긴 침묵을 깬 것은 아스티아 교단의 교황이었다.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교황 성하, 그간 격조하셨습니까."

서로가 정중한 모습에 교주의 심사가 뒤틀렸다.

그때 교황이 말하기를.

"저희 교단은 장사와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하여, 이 성물의 처분을 맡기고자 합니다."

황제가 산뜻하게 웃었다.

교황은 슬쩍- 시선을 돌려 에릭을 바라봤다.

'리페로제의 제자라 그런지 정신이 이상해졌구나....'

에릭은 숫제 미친놈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는 길에 에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교황 성하께서 황제 폐하께 성물의 중개를 맡겨 주십시오. 그러면, 최소 10억 이상은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20화 성물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