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생활백서(回歸者 生活白書)
서장, 회귀
꿈을 꾼 것 같았다.
어리고 어리던 그 시절.
피가 섞인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운 아버지라는 사람과 내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돌아가셔서 그림으로만 보았던 초상화 속의 어머니.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나쁜 기억들이었다.
나는 이씨 세가의 서자였다. 배경하나 없는 나는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는 신세였기에 어느 순간에건 항상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았다.
크게 거슬리는 짓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소가주 자리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하는 두 명의 형님과,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첫째 어머니와 둘째 어머니는 나를 눈엣가시로 여겼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나를 쫓아내려고 별짓을 다하다가 후에는 암살 시도까지 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생생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고, 이때의 이 치욕스러웠던 기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30년이 흘렀을 때, 나는 삼황칠존(三皇七尊)중 [광존(狂尊)]이 되어있었다.
이게 꿈인지, 저게 꿈인지 헷갈린다.
마지막 죽던 순간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천황(天皇)의 손이 내 심장을 뚫었고 염황(炎皇)의 주먹이 내 단전을 부쉈으며 도존(刀尊)의 도가 내 오른팔을 베었다.
그렇게 쓰러진 내 밑에는 피웅덩이가 자욱했다.
내 피도 있겠지만 전부 내 피는 아니었다.
이미 목이 날아가 뒈져버린 천룡신황과 쌍수마존, 진천창존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
천하십대고수중 6명이 고작 나 하나를 잡으려고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내게 말했다.
-무림공적의 제자라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씨 세가에서 도망쳤던 나를 거둬주신 분이 계셨다.
그분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살아남는 법, 빠르게 움직이는 법, 주먹을 더 잘 쓰는 법, 검을 잘 쓰는 법,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법.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분과 함께했던 시간은 고작 1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10년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던 시간이었다.
스승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무림에 나가거든, 내 제자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말거라.
싫다고 했다.
-어찌 스승의 부탁을 그리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냐.
스승님은 곰방대를 물며 빙긋 웃으셨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일지니, 지키거라.
그렇게 스승님은 내 품에서 조용히 잠드셨다.
나는 그 부탁을 지켰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내가 사용하는 무공들.
그분에게 배웠던 절기들을 최대한 아꼈으나 위기의 순간에 몇 번 사용했었다.
거기에서 꼬리가 잡혔고 워낙 유명하셨던 분이라 최대한 입을 막아보려 해도 막아지지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미 나는 무림공적의 제자가 되어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 소문이 세상에 퍼졌을 무렵에는 내가 칠존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아주 잠시나마 안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건 치밀한 계획으로 이루어진 함정이었고 멍청했던 나는 그 함정에 빠져버렸다.
거듭 말하지만 칠존 중 하나를 잡으려고 천하십대고수 여섯 마리가 몰려오는 상황이라니.
이걸 어떻게 예측하겠나. 아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놈들이 저렇게 단합이 잘 되는 놈들이 아닌데.
그게 내 최후였다.
묵묵히 전신 거울을 바라보았다.
몸 곳곳에 문신 처럼 새겨져있던 수많은 상처들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있어서는 안 될 젖살이 얼굴에 자리해있다.
미치겠다.
이 말도 안 되는 현상을 나는 내 머리로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
한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스승님은 죽기 전 내게 목걸이를 하나 건네주었었다. 유품이었고 나는 그것을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 목에 차고있었다.
흔한 보석 하나 달려있지 않은 낡은 목걸이였는데.
그때 스승님이 하신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것이 언젠가 너를 한번 구해줄 것이다. 후회 없이 살 거라.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황상 이건 현실이고 스승님이 남겨주었던 그 목걸이 덕분에 회귀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석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의문은 나중에 풀자.
고개를 들었다.
거울속의 나를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과거로 돌아온 첫째 날, 아침이 밝았다.
1화
"도련님. 기상하셨습니까."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짧게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린다. 나와 거의 흡사한 체격의 남자가 접시에 다과를 가득 담은 채 빙긋 웃었다.
"시장하실 것 같아, 다과를 조금 준비해봤습니다."
녀석이 다가온다.
내가 다른 건 다 잊어도 이 녀석을 잊지는 않았다.
이름은 평삼.
화전민으로 살던 부모가 산적 떼에게 살해당한 이후 이씨 세가에 거둬진 녀석이다.
"평삼아."
"예. 도련님."
"오랜만이다."
"...예?"
말없이 웃었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 중으로 본가에 도착 할 것 같습니다. 상행을 제대로 마치고 오셨으니 이제 가주님도 도련님을 다르게 보지 않을까요?"
한낱 짐꾼이 할 이야기로는 분명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평삼이의 관계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지금 이 시점이면 내 나이가 대략 열일곱.
녀석은 열여섯이다. 한 살 차이고 녀석이 아홉 살 때 이씨 세가에 거둬졌으니, 그때부터 거의 7년이나 함께 한 셈이다.
내가 녀석을 얼마나 믿냐면, 과거에 이씨 세가를 도망칠 때 녀석과 함께 도망쳤을 정도였다.
묵묵히 손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짚었다.
"평삼아."
"....예. 도련님."
"내가 정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을 잘 해야 돼."
"대답이라면... 어떻게..."
"깊게 생각하지 마. 그냥 사실대로만 답하면 돼."
"...예. 무엇이든 여쭤보십시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산적 떼가 나타 날거야.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녀석이 움찔한다. 그리고는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조금 기대했다. 녀석의 입에서 나올 말을.
하지만 괜한 기대였나 보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산적 떼라뇨, 저희가 가는 곳이 명월산인데, 명월산의 산적들은 오래전에 모두 토벌되지 않았습니까? 너무 괜한 걱정을 하시는 것 같아요."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이정한테 따로 명령받은 게 있어 없어."
"...첫째 도련님이요? 제가 이곳 이씨 세가에서 가장 믿는 게 도련님이라는거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런 도련님을 첫째 공자님이 어떻게 대우하는지 뻔히 아는데 명령을 받다뇨, 농담도 그런 농담을 하고 그러세요."
조용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상행을 시작하고 끝날 때까지, 경과보고를 이원한테 했을 때, 놈한테서 무슨 답장이 왔지?"
"...도련님. 둘째 도련님이랑 제 관계도 잘 아시잖아요. 이원님은 저한테 따로 무언가를 말하거나 그러지 않아요. 왜냐면 제가 누구 사람인지 아니까. 저는 오직 도련님의 사람이에요.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작게 한숨을 터트렸다.
"결국 내가 했던 세 가지 질문에 너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답하지 않는구나."
"...도련님?"
"지금 이 시기쯤이면, 너랑 내가 함께 상행을 마친 횟수가 대략 열 번은 넘을 텐데, 너는 그 열 번 중에 최소 여덟 번은 중간중간 이원에게 보고를 했다. 이번 상행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번 상행에는 걸린 금액이 상당히 커. 이걸 성공시키면 그래, 네 말대로 아버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겠지. 애초에 이건 실패하라고 보낸 상행이었으니까."
"..."
"아마 오늘 전서구로 보고를 했을 때 이원이 이런 말을 남겼을 거야. 산적들을 고용했고, 우리 상단이 지나게 될 명월산쪽에서 그들이 습격을 할 거라고, 우리는 그곳에서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게 돼. 죽이지 않은 이유? 뻔하지. 물건을 빼앗기는 것과 서자이긴 해도 핏줄이 죽는 건 분명 다른 문제니까. 내가 죽게 되면 가주가 가만히 있을까? 걔들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게 맞아. 네 말대로 이번 계획이 성공하면 가문 내에서의 내 입지가 많이 달라질 테니까. 평삼아."
"...예."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어찌 그것을 읽지 못하는 것이냐."
내 말투가 어느 순간부터 바뀌어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든 이해하려 저 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확실했다. 의미 없다.
묵묵히 녀석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를 건네받았다.
"인간이 불러온 재난은 마땅히 인간의 손으로 수습하는 게 맞지."
"도련..."
녀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말없이 접시로 녀석의 머리를 내려쳤으니까.
빠아악-!
밑바닥으로 내려친 게 아니다. 모서리로 내려친 거다.
녀석이 고통스럽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주저앉는다. 녀석의 주변으로 다과들이 쏟아진다.
그대로 발을 휘둘렀다.
뻐어억-!!
녀석의 머리가 옆으로 꺾인다. 모자랐다.
옆에 있던 탁자에 접시를 강하게 내려쳤다. 접시가 부서진다. 자연스럽게 흉기가 만들어졌다.
왼손으로 녀석의 머리채를 잡은 뒤, 그대로 내질렀다.
푸욱-!
"케헥."
목 옆쪽에 박힌다. 피가 왈칵 치솟으며 내 얼굴을 적셨지만 눈조차 감지 않았다.
"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두 번이다. 내가 이씨 세가를 도망치려고 했던 적이."
녀석이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내 팔을 잡아챘지만 의미 없었다.
내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나는 행동했다. 시작을 했으면 제대로 된 끝을 봐야 하는 법이다.
녀석의 살고자 하는 의지는 나의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이겨내지 못했다.
"도..도련님... 왜..."
무시하고 묵묵히 말을 이었다.
"첫 번째는 실패로 끝난다. 왜냐면 네가 내 뒤통수를 쳤으니까."
"...예?"
"빈손으로 도망 갈수는 없기에 이정의 처소에 들어가서 단약이 잔뜩 든 상자를 그대로 들고 도망쳤다. 그러나 하루도 못가서 바로 잡히게되지. 왜인지 아나?"
"그걸 제가 어떻게..."
"방금 말했지 않느냐. 네가 뒤통수를 쳤다고. 그때 네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도련님, 솔직히 도련님이 이씨 세가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누구한테 도움을 주어본 적이 없으시니, 이번에는 제게 도움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그 동안 옆에서 잘 보좌해드렸으니 제가 그 정도는 챙겨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강호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아주 제대로 된 경험이었다고 해야 할까.
생각하면 할수록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내가 지금까지도 잊지 못했을까. 그리고 넌 그날부터 이씨 세가의 최연소 총관이 되었지."
"그게 무슨 말..."
"사람은 안변하더구나."
잠시 말을 멈춘 뒤 접시조각을 더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잘 가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목을 완전히 꿰뚫었으니까.
털썩, 놈의 시신이 힘없이 바닥에 허물어진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란을 듣고 이씨 세가의 무인들 몇몇이 들어온다.
"도련님! 무슨 일...!"
안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입을 떡 벌린다.
묵묵히 말했다.
"이거 치워."
참으로.
상쾌한 아침이었다.
명월산의 산적
무인의 경지는 어떻게 나누는가.
간단했다.
신체를 단련하는 신삼경身三境, 기운을 단련하는 연기사경練氣四境, 마음을 단련하는 천지사경天地四境.
이 모든 단계를 거치면 등선하여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신삼경에는 차례대로 무인이 되기 위해 수련을 시작하는 단계인 연인경(練人境), 기혈을 응축시켜 단전을 형성하는 입기경(入氣境), 몸 안의 탁기를 모두 제거하여 무인으로서 제대로 된 첫걸음을 떼게 되는 주천경(周天境).
그 다음의 경지에는 중단전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연기사경중 양광이현(陽光二現)은 중단전이 열리기 시작하는 단계이며 작은 내공으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오룡봉성(五龍奉聖)은 중단전이 완전히 열린 단계이며 삼화취정(三花聚頂)은 중단전과 하단전을 일체화 시키는 단계다.
이때부터는 몸의 회복력이 압도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오기조원(五氣朝元)은 중단전과 하단전이 완전히 일체화되는 경지인데, 그렇게 해서 만든 [진단전(進丹田)]은 단순하게 축적할 수 있는 내기의 양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켜주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내기들로 아래 계급의 모든 이들을 찍어 누르게 된다.
천지사경도 비슷하다. 천지사경은 상단전이 열리는 단계를 의미하며 이때부터 대자연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조화경(造化境)은 상단전이 열리기 시작하는 단계고 입신경(入神境)은 상단전을 완전히 열어 자연의 기운을 불러오는 경지다.
신화경(神化境) 상단전이 진단전과 합쳐지는 단계인데, 이때부터는 자연지기(自然之氣)를 이용해 자연 그 자체가 된다.
무극경(無極境)은.
무림 역사상 도달한 이가 거의 없는 경지다.
상단전과 진단전이 온전히 합쳐져 무인으로서 완성된다는데, 나조차도 그 경지에 들어서지 못했다.
들어서기는커녕 그 아래에서 머물렀다.
전생의 내 경지는 조화경.
천하십대고수라고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경지였으나, 그럼에도 나는 천하십대고수가 되었다.
비결은 두 가지였다.
스승님께서 내게 알려준 두 가지 무공 덕분이다.
하나는 [혼원일체기공(混元一體氣功)].
이것은 일반적인 심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심법이다.
내 경험상 세상에 존재하는 기운은 총 두 가지다.
하나는 일반기, 그 다음은 자연기.
이 두 가지 기운중의 핵심은 결국 하나다.
진기(眞氣).
흔히들 말하는 선천진기가 맞다.
허공에 떠도는 그 모든 기운들에는 진기가 있다. 보통은 그 진기를 몸 안에 쌓지 못하지만 혼원일체기공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정확히는 그 진기를 새로운 기운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스승님은 그것을 정순지기(正順之氣)라 표현하셨다.
중요한건 정순지기가 쌓이는 속도가 삼류심법들만도 못하다는 거다.
하지만 사용하는 순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할의 기운으로 구 할의 기운을 찍어 누를 수 있게 되니까.
만상의 대근원이라 할 수 있는 영혼과 신체와 기를 일체화시키는 심법, 그것이 혼원일체기공이다.
혼원일체기공으로 만년의 세월을 쌓게 된다면 혼원지기(魂原之氣)라는 것을 사용 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던데,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거기까지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묵묵히 운기에 집중했다.
이 시점에서의 나는 입기경에 진입한지 얼마 안 된 무인이다. 단전을 만들기는커녕 어중간한 형체만 그려놓은 수준이라고 해야할까.
몸 안에 쌓인 탁기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도 문제고 단전조차 제대로 만들지 않았다는 건 더 큰 문제다.
그래서 지금 단전을 만드는 중이다.
운기에 들기 전 다른 하인들을 불러 돈이 되는대로 단약을 사오라 했다. 돈이 된다면 영약(靈藥)을 사고 싶었지만 가진 돈이 없었다.
보니까, 대충 내기의 응축을 돕는 입기단(入氣團)이 대부분이었다. 수준이 높은 단약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내 수준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나름 천하십대고수였는데 단전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나가 죽어야한다.
탁기 제거는 나중으로 미룰 생각이다. 본가에 도착하면 그곳에 준비된 것이 있을 테니까.
단전을 만들면서 나는 다른 작업도 같이 착수했다.
나를 천하십대고수로 만들어준 두 번째 신공.
바로 [환답공(環沓功)]이다.
이것은 무림 그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개념의 무공으로서, 묘리는 간단하다.
일단 하단전 부근에 고리를 만든다. 이것은 단전과 같은 개념으로서 어떻게 보면 단전을 여러 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이 고리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
쌓인 정순지기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존의 하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고리안에서 서로 충돌하고 또 충돌하여 기운을 쪼개고 또 쪼갠다. 정순지기는 말 그대로 진기로서 아무리 작아 진다해도 품고 있는 기운이 사라지거나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인즉, 고리를 한 개 만들면 두 배의 기운을 끌어다 쓸 수 있고 두 개를 만들면 두 배의 두 배, 세 개를 만들면 또 그것의 두 배.
말도 안 되는 무공이기에 부작용도 존재한다. 바로 혈맥이다.
혈맥이 작다면 환답공으로 아무리 고리의 숫자를 늘린다고 해도 사용할 수가 없다. 증폭된 기운은 그 자체로 거대하기 때문에 혈맥이 터져버리거나 아마 내 몸이 터져버릴 것이다.
지금은 상관없다.
그 정도 조절은 가능하니까.
천천히 눈을 떴다.
선명하게 느껴진다.
단전을 감싸고 있는 한 개의 고리.
그리고 완전하게 만들어져있는 하단전.
나는 온전한 입기경에 올랐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명월산의 산적.
과거 그들에게 당했던 치욕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번에는 그때와 많이 다를 것이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뒤 밖으로 나왔다.
이씨 세가의 총관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출발하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충분히 이해는 한다.
고깝게 보던 삼공자가 잠시 대기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런데 이 '잠시'가 거의 세시진 이상이 되었으니 불만이 없을 리 없다.
저런 시선은 본래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지금의 내 위치가 이랬다.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차피 자연스럽게 바뀔 테니까.
***
이씨 세가의 상단이 명월산에 진입했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칼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진다.
무려 이백 명이었다.
이백 명의 산적 떼를 맞이한 이도 일행의 표정이 사색이 되어버렸다. 그럴 만도했다.
이씨 세가는 어엿한 무가다. 여러 가지 사업을 하기에 당연히 이씨 세가의 무인들을 비롯해 표사들을 고용해 사용한다. 하지만 지금 이곳 명월산에 들어선 이씨 가문의 상단을 이끄는 것이 누구인가.
셋째 아들이자, 서자인 이도다.
이씨 세가에서 이도의 위치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것은 지나가는 똥개도 안다. 딸려 보낸 무인의 숫자가 고작 스무 명에 표사가 서른 명이다. 총관이나 짐꾼들은 셀 필요도 없었다.
단순히 숫자로만 봐도 이백 대 오십이다.
몰살당하지 않으면 천만다행일 정도인 것이 바로 지금 상황이었다.
산적들의 두목이 거대한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외쳤다.
"허허허허.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오늘 우리가 대어를 낚는구나. 목숨이 아깝다면 당장 가진 패물들을 그대로 두고 도망치거라. 그리하지 않는다면 모두 삼도천으로 보내버릴 것이니, 잘 생각해보고 행동하거라."
진지하게 이도 일행이 도망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차의 문이 열린다.
이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빙긋 웃으며 두목을 응시한다.
"어허, 웃어? 네놈이 미친것이로구나. 정녕 따끔한 맛을 봐야겠느냐."
"산중의 호걸 분들께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오호... 이거 이제 보니, 예의가 제대로 박힌 놈이었구나. 그래 한번 들어보자."
"당신들이 원하는 건 돈 일겁니다. 맞습니까."
"그래, 잘 아는구나. 그러니 패물을 내려놓고 가거라. 옮기는 건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아니지, 혹시 옮기는 것까지 도와 줄 생각인 것이냐. 내 그러면 그 패물중의 일할 정도를 남겨주마."
몇몇 산적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누가보아도 가지고노는 것이다. 이도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지금 저희에게 은자 오백 냥이 있습니다. 이 오백 냥을 드릴 테니 그냥 물러나주시지요."
"허허. 이놈이... 오천 냥도 아니고, 오백 냥? 우리 산중 식구들이 얼만데 그걸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이더냐."
머리를 긁적인 이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두목의 앞까지 다가간 이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정과 이원에게 부탁받으신 거 압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지금부터 제가 새로운 거래를 제안할 생각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한 듯한 이씨 세가의 무인들이었지만 거의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기에 주변 이들은 듣지 못했다.
두목의 두 눈이 이채를 띈다.
이거, 이씨 세가의 셋째가 병신이라더니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백 명의 '무사'를 앞에 두고 이런 배짱과 기개라니.
그래서 물었다.
"새로운 거래?"
"얼마를 받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상을 드리겠습니다. 거기다 이정과 이원이 상단을 끌고 움직일 때 그 위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걸 습격하십시오. 당연히 어떤 물품을 지니고 있는지도 전부 말씀드릴 겁니다. 어떠십니까."
두목은 순간 오싹했다.
"...이거, 제대로 미친놈이구나."
"그 두 명도 하는 건데, 저라고 못하겠습니까?"
두목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도의 두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저 두 눈.
누가보아도 두목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형들을 향한 것이었다.
이도가 말을 이었다.
"만약 그 두 명을 죽여주신다면 더 많은 돈을 드리겠습니다."
"...얼마를 줄 생각이지?"
"백 냥입니다."
미간이 와락 구겨진다.
"백 냥?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 어찌하여 아까의 오백 냥보다 더 줄어들었단 말이더냐."
"은자가 아니라, 금자니까요."
눈이 크게 떠졌다.
이거, 아무리 봐도 보통 놈이 아니다.
'셋째 놈이 많이 모자른 놈이라더니, 이제 보니 심성이 악하기 그지없구나.'
금자 백 냥으로 자기 상단을 습격해달라니.
두목은 이 와중에도 욕심이 났다.
"이백 냥으로 하자꾸나. 은자가 아니라 금자 이백 냥."
"이백 냥은 너무 많습니다."
"그럼 대화는 없던 일이 되겠지. 그러나, 감당이 되겠느냐."
두목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건 누가 봐도 뜯어먹을게 더 많다는 것을 깨달은 야생 늑대의 그것과도 같았다.
"너는 이미 내게 친형들의 암살을 의뢰했다. 이씨 세가에 소속된 셋째 아들이 자기 가문의 상단을 습격해달라니, 내가 이것을 그 두 명에게 알린다면 네놈은 어찌될까. 혹은 이씨 세가의 가주에게 알린다면?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기마."
이도가 고개를 저었다.
"상상은 가는데, 이 대화가 빠져나가지 않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잘됐구나. 나도 마침 그 방법을 떠올렸는데."
"먼저 들어보고 저의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금자로 오백 냥을 내놓거라. 그러면 이 비밀을 감춰줄 것이다."
금자 오백 냥.
이건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의 이도가 구할 수 없는 돈이다.
"물론 바로 받을 생각은 없다. 시간을 많이 줄 터이니 매달 우리에게 돈을 보내거라. 그리하면 오늘 일은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이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이제 제 방법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단 말이더냐. 좋다. 한번 말해보거라."
이도는 말했다.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거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입기경에 이른 이도의 내기가 폭발하듯 끓어오른다. 그와 동시에 이도의 소매에 숨겨져 있던 비수가.
푸욱-!
두목의 목에 꽂혔다. 그대로 비틀었다. 퍼걱 소리와 함께 목이 끊긴다.
이것이 이도의 방법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숫자가 밀린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하는가.
기백으로 제압해야한다.
이도가 반대쪽 손을 뻗어 두목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비수로 두목의 목을 갈랐다.
서걱, 서걱.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산적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왈칵 치솟아 오른 핏물에 이도의 몸이 완전히 적셔진 것도 그 이유지만 분위기가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다.
잘 안 썰리는지 비수를 두목의 어깨에 꽂은 뒤, 두목이 쓰던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두목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서걱-!
목이 잘린다.
주변이 조용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나보다.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광인(狂人)의 모습이었다.
그대로 두목의 목을 가볍게 던졌다.
툭, 투둑.
목이 굴러간다.
모두의 시선이 두목의 목으로 향해있을 때, 이도의 두 눈은 주변을 훑고 있었다.
숫자는 다섯.
적대감을 품은 자의 숫자다.
이도가 도끼를 내려놓더니 두목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곳에 총 여덟 개의 비수가 있었다. 길이도 제각각이고 재질도 제각각이다. 전부 꺼내들었다.
여덟 개의 비수를 양손에 꽂은 뒤, 그대로 집어던졌다.
그것들은 제각기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퍼버버벅-!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다섯과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셋.
이렇게 총 여덟 명의 머리에 비수가 박힌다.
일제히 쓰러지는 여덟 구의 시신에 나머지 산적들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도끼를 집어 들어 어깨에 걸친 이도가 쐐기를 박았다.
"다 꺼져. 전부 죽여 버리기 전에."
청소
적나라의 장령군은 강호의 사람들에게 촌구석으로 불리긴 하지만 그 정도로 작은 곳은 아니었다. 물론 촌구석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큰 장점이 있는 지역이었다.
북쪽으로는 상업으로 굉장히 발달한 수주현이 있고 동쪽으로 가면 해상이 발달한 위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사월현이 있다.
상업을 하기에 매우 유용한 도시임은 확실했다.
당연히 생각이 있는 가문이라면 상단을 꾸리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이씨 세가도 마찬가지였다.
무림세가인 것은 분명하나, 무림세가라고 상단을 운영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씨 세가는 상단뿐만이 아니라 여러 개의 사업도 한다. 장령군의 이런 입지를 이용해 장령군으로 들어오는 상인들도 많고, 그런 상인들이 고용한 표사들과 짐꾼들도 많다.
당연히 객잔이 여러 개 필요했고 무사이니 무기를 수리하기 위해 대장간도 필요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런 장점이 있는 지역이기에 피 터지는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장령군에는 [장령삼대세가(長嶺三大勢家)]라 불리는 세 개의 가문이 존재한다.
이씨 세가, 장씨 세가, 혁리세가가 바로 그 세 개의 가문이었다.
그중 으뜸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월현으로 보냈던 막내가 돌아왔다.
가주전에 모여 있는 모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럴 만도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전해 들었으니까.
우선 사월현 여관에서 평삼의 목을 접시조각으로 찔러 죽인 것을 시작으로 명월산 산적의 목을 베어내는 등.
그중 압권은 산적의 목을 베어냈을 때다.
그냥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수로 썰었다고 한다. 산적들만이 겁을 먹은 게 아니라 아군 마저 겁을 먹었다.
그 동안 이도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아는 이들이었기에 충격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흡사 사람이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조금은 홀쭉한 외모에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자였다.
그는 매우 유약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지만 두 눈만큼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막내 이도가, 바뀌었다.
이도가 고개를 들어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입가에 묘한 미소까지 그린다. 너무나도 달랐다.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저게 그 이도라고?
가주의 앞이나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항상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던 놈이, 지금 저런 모습을 보인다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연기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이어지는 이도의 저 말에 확신이 생겼다.
단 한 번도 이도는 저렇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해본 적이 없다. 항상 기어가듯 말하던 놈이 지금...
말이 안 나온다.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씨 세가의 가주, 이세극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이도는 묵묵히 이세극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이 자리에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일 이유가 없다.
'고작', 한 번의 상행을 끝내고 왔을 뿐이다.
상행을 한번 끝낼 때마다 이렇게 모든 식솔들이 모인다면 그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기이한 소식을 들었다. 너의 하인이었던 녀석을 네가 네 손으로 죽였다던데, 어찌된 것이냐."
진의.
이세극은 그것이 궁금했고 이도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다.
"평삼은 제 하인이 아닙니다."
"...너랑 평삼이 어릴 적부터 함께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예. 어릴 적부터 함께하긴 했었지만, 녀석은 저를 모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저 말고 저기 있는 제 형님들이 해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세극의 두 눈이 짧은 머리에 덩치가 큰 남자에게 한번 향했고 그 다음으로는 이도의 비슷한 머리 길이에 이도보다 더 유약해 보이는 듯한 남자에게 향했다.
전자가 장남인 이정이고 후자가 차남인 이원이다.
이세극의 눈빛에 두 남자가 움찔한다.
그래도 나름 장남이라고, 이정이 먼저 나섰다.
"막내야. 지금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이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너무 이상했다. 애써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정이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니, 이원 저 녀석이 너의 하인과 조용히 이야기 나누는 것을 여러 번 보았었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원 저 녀석이 말을 해야지."
이정의 말에 이원이 발끈했다. 붉어진 얼굴로 차남 이원이 외쳤다.
"형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삼과 내통한 것은 형님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상행이 성공하게 되면 곤란해질..."
"그만!"
이세극의 외침에 실언을 할 뻔했던 이원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이원을 노려보던 이세극이 한숨을 터트린다.
이세극은 바보가 아니다. 무슨 일이었는지 대충 이해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이도에게 향한다. 기다렸다는 듯 이도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해보거라."
"한낱 종놈 새끼가 어찌 주인을 앞에 두고 다른 이들과 내통을 하면서 주인의 정보를 떠벌린단 말입니까. 저는 이씨 세가의 핏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이냐."
"예. 그리고 오는 길에 산적들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들었다. 네가 그 산적 두목의 목을 베었다고."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고작 산적질이나 하는 버러지들인데, 그런 놈 한두 마리 죽였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습니까. 허나, 그들이 하던 말 중에 꽤나 흥미로웠던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흥미로워?"
"예. 저도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금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앞으로 저희 이씨 세가의 상단이 명월산을 지날 일이 한두 번이 아닐 겁니다. 세가의 무인들을 동원해 명월산의 산적들을 토벌해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이정과 이원이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 둘은 분명히 눈치 챘다. 이정과 이원이 서로를 바라본다. 그런 둘의 귓가로 이어지는 이도의 말이 들려왔다.
"장령군에서 이씨 세가의 입지는 분명 대단합니다. 믿고 따르는 가문들도 여럿 있고요. 그 산적들을 토벌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다른 가문을 노릴 겁니다. 차라리 우리가 먼저 나서서 그들을 토벌하게 되면 그 명예는 오롯이 저희 가문의 것이 될 겁니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이정이 외쳤다.
"막내의 말이 맞습니다. 분명 과거에 모조리 토벌되었던 명월산에 다시 산적이 나타나다니요. 이건 분명 그냥 지나쳐서는 안될 일입니다. 특히 최초 발견자가 우리 이씨 가문이니, 저희가 토벌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정의 시선이 이도에게 향했다.
"막내는 상행을 막 마치고 온 녀석입니다. 피로가 쌓여 있을텐데, 이번 일까지 동참시킨다면 쓰러 질 지도 모릅니다. 차마 그것만큼은 장남으로서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 맡겨주십시오."
이도는 피곤하게 움직 일 생각이 없었다.
알아서 처리 하라고 판을 깔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원도 나섰다.
"제가 형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이번 일로 장령군의 으뜸은 이씨 세가가 맞다는 것을 확실히 알리겠습니다."
가주 자리를 두고 다투는 것은 분명 두 사람이다.
아직 소가주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고, 이번일은 소가주 자리를 확정짓는 일을 계속 미루고 있던 이세극의 두 눈에 들 기회가 분명했다.
물론 이것도 이유긴 했으나, 더 명확한 이유는 입을 막기 위해서다.
이 두 사람은 산적들을 고용해 이도의 상행을 망치려고 했다. 만약 그 일이 진행되었다면 이씨 세가의 두 아들이 고작 막내 하나를 압박하기 위해 이씨 세가를 직접 공격했다는 뜻이 되고 이 일이 이세극의 귀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정말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그런 잡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이세극은 오직 이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그렇게 응시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세극이었다.
"많이 변했구나."
"변해야지요. 무림은 약한 사람에게 살기 좋은 곳은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맞다. 이번 상행이 상당히 의미가 있었나보구나."
"매우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가보거라."
"예."
사무적인 대화가 끝난 뒤, 이도는 그대로 가주전을 나왔다.
이어서 이도가 향한 곳은 본관에 위치한 본인의 거처였다.
그리고 들어간 지 반각도 되지 않아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도의 표정은 굳어져있었다.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고 물었다.
"누구냐."
"...예?"
"내 방을 청소한 게 누구냔 말이다."
이도의 표정이 하도 살벌하여 겁을 집어먹은 하인은 바른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오전에 정 총관이 세 명의 하인을 데리고 공자님의 방을 청소했습니다."
정총관.
그는 이씨 세가 둘째인 이원의 사람이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도가 걸음을 옮긴다. 그가 향한 곳은 총관들이 머무는 청원각이었다.
그곳에 도착한 이도는 곧장 정총관을 찾았다.
하인들과 농담이라도 하고 있던 건지 함밧 웃음을 띄고 있던 정총관이 미간을 와락 구긴다.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가 이도에게 다가왔다.
"왜 부르신 겁니까?"
"오늘 내 방을 청소했다던데, 맞나?"
"예."
"누구 명대로 청소를 했지?"
"그거야, 평소에 하던 거 아닙니까? 방을 워낙 오래 비워두셔서 공자님을 위해 청소를 좀 했습니다. 그게 잘못된 겁니까? 저는 정말로 모르겠는데요."
싸늘했던 이도의 표정이 점차 풀어졌다.
너무나도 부드러운 미소가 이도의 입에 피어오른다.
"청소를 해준 건 정말 고맙지만, 내 방에 있는 단약 상자는 어디에 두었지?"
단약 상자.
이건 이도의 기억 속에도 분명 있었다.
회귀를 하기 전을 기준으로 생각을 해보면 이도는 명월산에서 산적들에게 습격을 받은 이후 그들에게 미친 듯이 두들겨 맞는다. 온몸에 타박상이 생겼고 내기에도 손상이 갔다. 그 상태로 가문에 복귀했고 가주에게 타박을 받은 뒤 의원들에게 치료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도는 자신의 거처에 모아두었던 단약 상자에 상처를 치료하는데 탁월한 도움을 주는 몇 가지 단약이 있다는 것을 의원에게 말했고 의원은 그 상자를 가져와 이도를 치료한다.
알고 있던 미래가 바뀐 것이다.
방으로 들어갔더니 그 단약 상자만 없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정총관의 답이 가관이었다.
"아 그거요? 그거 제가 이원 도련님한테 가져다드렸는데요."
"왜지?"
"왜라뇨, 솔직히 도련님이 드시기보다, 가문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원 도련님한테 드리는 게 응당 맞지 않습니까?"
입가의 미소가 진해진다.
"이원이 가져오라고 한건 아니고?"
움찔하는 정총관이었지만 이내 당당해졌다. 이렇게 뒷배가 있으면 사람들은 대범해지는 법이다.
한낱 토끼 새끼가 뒤에 똥개 하나 믿고 호랑이한테 깝죽거리는걸 보면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명월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들었나?"
"아 들었죠. 산적의 목을 베셨다고 하던데, 대단하더라고요. 그런데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조금 그렇습니다. 공자님. 공자님은 이 집안의 막내입니다. 막내라면 응당 좋은 게 있으면 형님한테 양보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이도는 자신을 향한 시선들이 바로 바뀔 거라고는 생각 안했다.
과거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이건 하루 이틀 만에 쌓인 것이 아니다. 무려 수년 이상동안 쌓인 결과물이다.
과거에는 버텼는데 이제는 못 버티겠다.
도저히.
그게 안 된다.
"정총관. 내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하지."
"...들어는 보죠."
"저승에 가거든, 그곳에서는 좀 정신 차리고 살도록."
정총관은 순간 이도의 말을 이해 하지 못했다. 잘못들은건가.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도는 애초에 그의 이해를 바라고 던진 말이 아니었으니까.
이도의 주먹이 휘둘러진다.
뻐어억-!!
정총관의 머리가 젖혀졌다. 그가 균형을 잃는다. 힘겹게 고개를 돌린 정총관은 볼 수 있었다. 이도의 발이 자신의 명치를 향해 뻗어오는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뻐어억-!
명치를 얻어맞은 정총관이 바닥에 쓰러진다.
그대로 목을 풀던 이도가 정총관의 위로 올라탔다. 왼손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은 뒤, 오른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가차 없이 휘둘렀다.
빠아악-!
정총관의 비명은 타격음에 묻혔다. 아마 계속 묻힐 것이다.
이도의 주먹은 계속해서 휘둘러졌다.
뻐어억, 뻐어억, 퍼걱, 콰직, 콰직.
타격음은 어느 순간부터 두부를 후려치는 소리로 바뀌어서 들리고 있었다.
그럴 만도했다.
이미 정총관의 머리는 곤죽이 되어있었으니까.
터진 것도 아니고, 그냥 아예 짓뭉개졌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누가보아도 이미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도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얼굴 전체가 바닥에 깔릴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닥에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계속해서 휘둘렀다.
그렇게 스물다섯 번 정도 후려치고 나서야 이도의 주먹질은 멈췄다.
주변이 조용했다.
정총관의 옷에 묻은 피와 살점들을 닦아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근처에 있는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이거 가서 묻어버려."
조용했다.
이도의 살벌한 두 눈이 주변을 훑는다.
"대답."
그제야, 멍하니 있던 이들이 정신을 차렸다.
"예....예!"
모략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손에 묻은 피는 정총관의 옷으로 대충 닦았으나 여전히 붉었다.
씻을 생각보다 당장 내 단약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곳은 이씨 세가의 전각이 크게 걸려있는, 정문이었다.
그곳에 이정과 이원이 이씨 세가의 무인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쟤들이 명월산에 있는 산적들을 토벌해서 입을 막던지 말든지, 이딴 건 솔직히 관심 없었다.
내 등장을 눈치 챈 두 놈이 나를 바라본다. 내 시선은 오직 한명.
이원에게 박혀있었다.
그에게 걸어갔다.
1장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둘째 형님."
"...그래, 웬일인 것이냐. 아니, 그보다 손에 묻은 그것은 무엇이냐."
손을 들어 올린 뒤 가볍게 말아 쥐었다. 굳어진 핏물이 바닥에 떨어진다.
"아 이거요? 정총관의 피입니다."
"...정총관?"
"예. 지금 막 죽이고 오는 길입니다."
그 말에 이원이 크게 놀란다. 이원뿐만이 아니었다. 이정도 놀랐고 주변에서 대기하던 이씨 세가의 무인들도 놀랐다. 무시했다.
"재미있는 말을 들었지 뭡니까."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감히 정총관을 죽여? 정총관이 누구 사람인지 잊어먹은 것이냐!"
"누구 사람이라뇨. 당연히 '이씨 세가'의 사람 아닙니까?"
"...뭐?"
"둘째 형님, 무언가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이 가문의 모든 것들은 말입니다. 전부 둘째 형님의 것이나 첫째 형님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제 것도 아니고요. 전부 이씨 가문의 것입니다. 종놈도, 총관도, 저기 있는 무인들도."
"..."
"우리는 그저 빌려 쓰는 겁니다. 그나마 소유권을 주장 할 수 있는 거라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구어 낸 것들이겠지요. 제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샀던 단약 같은 것들이 그 예시가 되겠군요."
"..."
"가주전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 감히 종놈 새끼가 어딜 건방지게 주인의 것을 탐합니까. 제가 가서 들어보니 방금 죽인 정총관이라는 이 버러지 새끼가 감히 제 물건을 훔쳐 형님께 주었다던데..."
이원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말입니다. 형님, 일이 커지고 그러면 서로 피곤해지고 그러는게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이원이 무어라 말하려던 그때였다. 한걸음 옮겨 왼손을 뻗었다. 이원은 반응하지 못했다. 내 손이 이원의 어깨를 붙잡는다.
"제 단약,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내 것이다."
"이씨 세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이씨 세가의 것이지만 그중에서도 그나마 소유권을 주장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제가 예시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왼손에 힘이 들어간다. 꽈아악.
"제가 말입니다. 누군가 저를 멸시하거나, 저를 대상으로 장난질하거나, 솔직히 이런 것들은 몇 번의 기회 정도는 주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절대 참지 못하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바로 말을 이었다.
"감히 제 물건을 탐하는 겁니다. 그래도 저랑 피가 반 정도는 섞인 핏줄 아닙니까. 제가 안 그래도 인내심이 없는데, 지금 최대한 참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내 단약, 어디에 있습니까."
"...그건...."
"설마 다 처먹었습니까? 그 많은걸?"
"아니... 아니다... 내 거처에 있다."
빙긋 웃으며 손에 힘을 풀었다.
피가 묻은 손으로 우리 둘째 형님의 어깨에 묻어있는 먼지를 털어내주었다. 이미 굳은 핏물 덩어리들이 묻어나긴 했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더 무인답고 보기 좋다.
"이거 이제 보니 우리 둘째 형님께서 큰 뜻이 있으셨나봅니다."
"큰...뜻? 내가?"
"예. 정총관 같은 놈이 감히 제 것을 탐할 이유가 그거밖에 없지 않습니까. 둘째 형님의 두터운 인망에 감동받은 정총관이 단독으로 제 것을 훔쳐다가 형님에게 건네주었다... 형님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일이라는 것은 충분히 아시고 계셨을 테지만 그래도 정총관처럼 감히 선을 넘는 간신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을 미리 알아보고자 하셨던 거 아닙니까?"
"그게....그렇게 되는 것이냐..."
"그게 아니면 설마 형님이 정총관한테 명령하신 겁니까? 제 것을 훔쳐오라고?"
"...그건... 아니다."
"당연히 아니시겠지요. 이렇게 간신들을 솎아내고자 함정까지 파신 분인데 설마 그러겠습니까."
"..."
"정총관에게 빼앗길 뻔한 제 단약을 '보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한번만 더 지금과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죽여 버릴 겁니다. 사지를 찢어 버릴 거고 산채로 두 눈을 파낼 것이며 너무 희미해서 형체조차 보이지 않는 단전을 그대로 뽑아 버릴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그리고 오늘 가실 산적 토벌 건은 부디 새싹까지 지르밟고 오시길 바랍니다. 비밀은 아는 이들이 최대한 적어야 비밀로서의 의의를 지킬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침을 꿀꺽 삼키는 이원을 바라보다 첫째인 이정을 바라보았다.
"큰형님도 오늘 일 잘 마치시길 빌겠습니다. 부디 상처 없이 돌아오시기를."
나와 이원의 대화를 들은 이정의 표정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내 인사말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둘 다 확실히 친형제가 맞다.
멍청한 표정이 똑같으니 말이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나는 오늘 주천경에 오를 생각이다.
이 비루한 육체는 단련하면 그만이지만 제대로 된 정순지기조차 담지 못하는 혈맥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쳐놔야 한다.
지금, 매우 불쾌했다.
정총관의 일이나 둘째의 일이나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다.
몸 안에 여전히 맴돌고 있는 탁기 때문이다.
끌어올린 내기가 혈맥을 돌아다닐 때마다 계속해서 멈춘다. 탁기가 너무 쌓여서 내기가 제대로 순환을 못하는 거다.
이 기분이 너무 불쾌했다.
그렇게 나는 이원의 거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내 단약 상자를 발견했다.
그대로 들고 나왔다.
과거로 돌아온 두 번째 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
무림세가가 커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가장 확실한건 두 가지다.
하나는 강한 무인을 배출하는 것.
그 무인이 어디 문파 출신이다, 혹은 그 문파의 대사형이나 장문인이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명성이 올라가고 입문하는 제자들도 많아진다. 그중 보석도 있고 원석도 있고.
그들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세가 커진다.
이게 첫 번째 경우였고 두 번째 경우는 더 강한 문파와 혼약을 맺는 것이다.
장령군을 주름잡는 이씨 세가는 분명 작지 않은 가문이다.
버는 돈도 만만치 않고 속해있는 무인들의 숫자도 많다.
문파의 대표 무공이라 할 수 있는 청령검법은 극한의 쾌속을 추구하는 무공이다. 휘두를 때마다 청량한 소리가 나는 것이 그 특징인데 전체 무림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안타깝지만 '괜찮은 무공'선에서 정리가 된다.
그럼에도 문파의 세력 자체는 크기 때문에 혼약을 하려 줄을 섰던 이들이 많았었다.
이씨 세가의 가주인 이세극은 총 세 명의 부인을 두었다.
첫째 부인은 윗동네 상업 도시인 수주현에 위치한 상운상단의 장녀였고 둘째 부인은 장령군 송주현에 위치한 운 씨 세가의 장녀였다.
세 번째 부인만이 배경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장령군의 객잔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사람이었고 이세극의 눈에 띄어 그의 첩으로 들어오게 된다.
배경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거다.
그리고 그녀는 이도를 낳으면서 사망했다.
그 말인 즉, 현재 이씨 세가의 파벌은 총 두개라는 뜻이었다.
하나는 상운상단의 장녀인 상씨 부인과 운씨 세가의 장녀인 운씨 부인.
각각 첫째인 이정과 둘째인 이원을 소가주 자리로 밀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셋째 아들이자 첩의 아들, 즉 서자인 이도가 전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냥 달라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성의가 없을 정도다.
사람이 그냥, 달라졌다.
방금 또 총관 하나를 주먹으로 때려죽였다고 한다.
그 수법이 너무나도 사악하여, 지금 이씨 집안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손속이 과한 것에도 정도가 있어야하는 법인데, 사람 머리를 곤죽이 되도록 후려친 것도 모자라서 때릴 때마다 미소를 잃지 않았다는데.
이게 사람 새낀가.
마두 새끼지.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하인의 목을 접시로 찔러 죽이고, 산적의 목을 비수로 뜯어버리다가 도끼로 내려치고, 총관의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고.
벌써 세 번이다.
이 정도면 이도를 대하는 생각이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게 그 결과다.
그냥 고립시킨 뒤 알아서 자멸하도록 만드는 것이 기존의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 이씨 집안의 체면을 말아먹게 생겼다.
상씨 부인이 말했다.
"이보게, 우리가 서로 가진 아들들을 소가주 자리에 앉히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이긴 하나, 가끔은 손을 잡을 필요가 있어."
"네. 형님 말씀에 동의해요."
상씨 부인과 운씨 부인은, 분명히 말하는데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둘 다 정실부인이긴 하나, 엄밀히 말하면 순서가 있는 법이고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분명히 다르다.
강호의 이름 있는 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부분 장남을 소가주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남 이정이 소가주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절대다수인 것이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운씨 부인은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자신의 아들을 소가주로 만들 생각이다.
그 전에.
치울 건 치워야했다.
"지금껏 있는 듯 없는 듯 쥐 죽은 듯이 있던 이도 그놈이 상행을 한번 갔다 오고는 다른 사람이 되었어. 이미 가주님도 놈을 달리보기 시작했는데... 이쯤에서 우리가 행동해야하지 않겠나?"
"형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혹시 세워둔 대책 같은 거라도 있으신지요."
상씨 부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나 있지."
"그게 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상씨 부인이 검지를 들어올렸다.
"일단 이거 하나는 알아둬."
"뭔데요?"
"이도 그놈이 소가주 자리에 욕심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 아우, 자네나 나나 서로의 아들을 소가주 자리에 임명하고자 뒤에서 이런 노력들을 하는데, 막말로 누가 되었건 간에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방법은 많아."
"..."
"만약 우리 정이가 소가주가 된다면 설마 원이를 어디 한직으로 유배 보내겠나? 그럴 리 없지. 가문의 제대로 된 자리를 넘어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임명 할 것이야.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거고. 설마 나나 정이를 버릴 생각은 아니겠지?"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가 없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씨 부인의 배경 때문이다.
그리고 상씨 부인도 운씨 부인을 막대할 수는 없다. 이것도 그녀의 배경 때문이었다.
이 배경들 덕분에 이들이 이렇게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거다.
"당연하죠. 만약 저희 원이가 소가주가 되더라도 형님과 정이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거에요. 그건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도에게는 우리 같은 배경이 없어."
"그렇죠."
"가주께서 신경을 조금 쓰고 있긴 하나, 어차피 내다버린 자식이고 첩의 자식 아니던가. 놈이 요즘 손속이 지나친 것으로 보아 후에 반드시 해가 될 놈이 분명해. 그러면 어찌하겠나. 설마 이씨 세가에 마두가 탄생하도록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형님의 그 말씀은..."
저의는 너무나도 뚜렷했다.
"죽일 생각이라네."
"...셋째를요?"
"놈이 더 크기 전에, 그리고 가주께서 놈에게 더 신경을 쓰기 전에 미리 치워버리자, 이 말일세."
"하지만 산적들을 고용한건 실패로 끝났잖아요."
상씨 부인의 미소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거야 애초의 목적이 살인은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못 배워먹은 산적 떼들이었으니 그것마저 실패한 거고,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살수'를 고용해볼 생각이야."
"...살수라면...?"
"살막에 의뢰를 넣을 생각이라네. 돈은 내가 낼 테니 자네는 무대만 만들어줘."
상씨 부인이 오른손을 뻗어 운씨 부인의 왼손을 붙잡았다.
"서자가 물을 흐리도록 놔두면 안 되는 것이야. 그것도 한낱 첩의 자식 따위가 이씨 가문을 망쳐서야 되겠나? 응?"
결국, 운씨 부인도 상씨 부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상씨 부인의 손을 붙잡았다.
"아우, 우리 한번 같이 이씨 세가를 키워보자."
"예 형님."
위계질서
두 부인이 꾸민 모략에는 두 아들인 이정과 이원의 의견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일상이었다.
가문의 대소사에 참여하긴 하나 둘의 의견은 결국 두 부인의 의견과 일통했다.
어쩌면 진정한 의미의 수렴첨정으로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크게 보면 두 남자도 결국 두 부인의 말에 순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두 남자는 명월산으로 들어와 산적을 토벌하고 있었다.
발본색원(拔本塞源).
뿌리조차 남기지 말아야한다.
이도의 상행을 실패로 만들어 안 그래도 고립된 가문 내에서 더 크게 고립 시킬 생각이었다.
그 계획이 빠그라졌으나, 그 계획의 저의는 결국 이씨 세가의 소가주 자리를 다투는 두 남자가 합심해서 이씨 세가를 공격한 것과 같다.
아직 가주의 귀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만약 이 일이 이세극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 두 남자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질 것이 뻔했다.
지우는 게 맞다.
그런 두 남자 중, 이원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장령군을 떠나 명월산으로 온지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해야 할까.
'...대체 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월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도에 의해 어깨가 잡혔을 때.
이원은 그 순간만큼은 곰 앞에서 겁을 먹은 비루한 강아지가 되어있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미 입기경에 도달해 주천경을 앞두고 있는 이원이다.
살벌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도 이도의 그 눈빛이 잊히지가 않았다.
당장이라도 목숨이 끊어질 것 같은.
그 자리에서 말 한번 제대로 못하면 그대로 사지가 찢겨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 이상하다.'
이도가 변했다는 것은 이미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이원이 소가주가 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 와중에 이원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도가 만약 소가주 자리에 관심이 없다면?
이도의 그 손속,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듯한 그의 악독함.
그걸 이용 할 수만 있다면 최고의 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둘째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첫째 형님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 차리거라. 아무리 산적들의 수준이 낮다고 해도 눈먼 칼에 맞는 수가 있다."
말투는 걱정이었지만 분위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원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백이 넘는 산적들의 시신은 둘째 치고, 이씨 세가의 무인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지금 이정은 저 시선들을 신경 쓰고 있는 거다. 이정이 다가와 이원의 어깨를 짚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똥을 닦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정신 차려 새끼야. 놀러왔어?"
"...형님..."
"이 병신같은 새끼, 콱 죽여 버리고 싶은데, 그놈의 핏줄이 뭐라고... 쯧."
부드러운 표정과는 너무나도 상반되는 말투였다.
그대로 몸을 돌리는 이정의 뒷모습을 이원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 저런 사람이다.
앞뒤가 다르고 전형적인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사람.
자신보다 지위나 힘이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험한 말도 서슴치 않고 협박 같은 것도 쉽게 한다. 심지어 여자 문제도 지금 굉장히 복잡하다. 이미 기녀 다섯 명을 임신시킨 전력이 있다.
이원은 확신하고 있었다.
저 새끼가 이씨 세가의 차기 가주가 된다면 이씨 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한순간이라고.
문득.
이도의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비밀은 아는 이들이 최대한 적어야 비밀로서의 의의를 지킬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이상하게 조금 다른 방식으로 들려온다.
만약 세 명이 어떤 진실을 알고 있을 때, 두 명이 입을 맞추면 나머지 한명은 어떻게 될까.
그건.
결국 입을 맞춘 두 사람의 말이 진실이 되는 게 아닐까.
"둘째야. 뭐하는 것이냐. 마무리하지 않고."
애써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이도와 이야기를 해야 할 듯싶었다.
***
천천히 눈을 떴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방 안에서 진동하는 썩은 내는 내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몸이 너무나도 상쾌했다. 단전의 기운을 살짝 끌어올려보았다. 막힘없이 혈맥을 흐른다.
혈맥 내부에 쌓여있던 모든 탁기들이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전생에서 주천경에 이른 것은 스물두 살 생일이 지났을 때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고작 열 일곱의 나이에 주천경에 이르렀다.
장족의 발전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썩어버린 옷을 버리고 몸을 씻고, 비수로 긴 머리를 잘랐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신체는 약 육척.
유약했던 몸이 전체적으로 조금 커졌다. 웃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그때였다.
"저... 도련님. 기침 하셨습니까."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른다. 아마 이씨 세가에 소속된 하인이나 총관의 목소리겠지.
"무슨 일이냐."
"저 그게... 가주님께서 급히 보자고 하십니다."
"가주님이?"
전생에는 거의 찾지도 않던 사람이 이제는 알아서 부르기까지 한다.
귀찮음보다는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바로 가주전으로 향했다.
***
고개를 들었다.
독대를 기대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그리고 가주인 아버지.
그리고 그 뒤쪽에는 네 명의 원로가 있었고 총관 여러 명과 모든 총관들을 관리하는 대총관까지.
저번에는 그냥 가족회의였다면 이거는.
흡사 청문회와도 같았다.
두통이 있는지 관자놀이를 질끈질끈 누르고 있던 이세극이 한숨을 터트린다.
"너를 이리 부른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예."
난 당당했다. 이세극이 말했다.
"정총관을 죽였다고 하더구나. 그것도 주먹으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걸 이제야 들었나보다. 어이가 없었다.
"그게 잘못된 겁니까?"
"그래서 너를 부른 것이다. 그 명확한 이유를 알기위해."
물끄러미 이세극을 바라보다 양쪽에 있는 두 명의 부인을 바라보았다. 으음.
"명확한 이유라 하셨으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정 총관은 제 물건을 훔쳤습니다."
"물건을 훔쳤다?"
"예. 제가 상행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멋대로 제 처소를 청소하였고 제가 지금껏 모아두었던 단약 상자를 훔쳐 둘째 형님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럼 둘째가 너의 것을 훔쳐오라 시켰다, 이 말인 것이냐."
잠시 운씨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고 맞은편에 있던 상씨 부인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잠시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다.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정 총관이 단독으로 벌인 범행입니다. 둘째 형님은 정 총관 같은 간신이 얼마나 더 되는지 지켜보려 잠시 제 물건을 맡아주었던 것 입니다. 이게 내막입니다."
운씨 부인이 당황하고 상씨 부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나는 지금 둘째를 띄워주었다. 이건 다르게 보면 혹시 셋째인 내가 둘째인 이원을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저 두 명이라면 분명 무슨 모략 같은 것을 꾸몄을 테지만 둘 사이에 있는 신뢰는 종잇장보다 얇다.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둘째 형님 덕분에 가문내에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벌레 하나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지요."
"다행이다? 그런데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수준으로 만들었더구나, 우리 이씨 세가는 마도를 숭상하는 가문이 아니다. 세상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너무 과했다."
"가주님. 누군가를 죽일 때 어떻게 죽여야 하는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차이가 있을 터이니 길게 말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허나, 이 모든 일들에 관련해서 소자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입장을 말해보겠다? 좋다. 해보거라."
시선을 옮겨 이세극의 뒤에 있는 중년의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씨 가문의 위계질서가 이따위 수준으로 추락했단 말입니까."
"...뭐라?"
"한낱 총관 따위가 이씨 세가 핏줄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종놈만도 못한 버러지가 감히 이씨 가문을 건드린 것이란 말 입니다. 헌데, 왜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저기 있는 저 대총관 아닙니까?"
대총관이 식겁한다.
무시했다.
"소자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대총관의 능력이 얼마나 무능하고, 얼마나 인품이 좋지 않았기에 아랫것들이 감히 주인의 것을 탐한단 말입니까. 이건 근본적으로 위계질서의 문제로서..."
"도련님. 계속 듣고 있었는데 말씀이 너무 과하신 것 같습니다."
대총관이었다.
그가 도저히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중간에 끊은 것이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이보시오 대총관."
"예. 도련님."
"잠시 이리 와보시오."
헛웃음을 터트린 대총관이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온다. 단상을 하나하나 내려오며 마침내 내 앞에 선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리 정 총관이 잘못을 했다하여도 손속이 너무 과하셨습니다. 차라리 제게 말씀하셨더라면 어떤 식으로든 벌을 주었을 터인데,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이제 보니 내가 확실히 잘못한 게 맞나봅니다."
대총관이 실소를 터트린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
"정 총관이 아니라, 너를 죽였어야했는데."
"...뭐요?"
이젠 말하기도 귀찮았다.
즉시 손을 뻗어 대총관의 목울대를 잡아챘다. 나보다 약 반척 정도 컸던 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가주전에 있던 이들이 반응하기도 전이었다.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다.
콰직!
목울대가 그대로 움푹 파인다. 모자랐다.
오른쪽 주먹을 뒤로 젖혔다. 단전이 깨어난다. 내기가 혈맥을 순환한다.
오른손에 미세하게나마 하얀 빛이 스며든다.
그대로 뻗었다.
푸욱-!!
내 주먹은 그대로 대총관의 심장을 관통했다.
가주전이 조용해진다.
그대로 빼낸 뒤, 대총관의 시신을 뒤쪽으로 집어던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뒤쪽에 있던 무인 한명에게 말했다.
"이거 가서 야산에 묻어버려."
"...예...예?"
"정총관 옆에 같이 묻어버리라고. 들개 새끼들 먹이로 주게."
무사가 입을 떡 벌린다. 무시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이세극을 바라보았다. 손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며 묵묵히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가문의 위계질서가 참으로 처참한 수준입니다."
"..."
"어찌 대총관 따위가 감히 허락도 없이 이씨 부자간의 대화에 끼어든단 말입니까. 이것은 가주님의 권위를 깔보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놈이 대총관이라는 자리에 있으니 아랫놈들의 수준이 그 따위인 것이고요."
천화루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상씨 부인이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는 것이냐! 이런 못 배워 처먹은 놈 같으니라고, 어찌 대총관을 죽인단말이냐. 이 멍청...."
"너."
상씨 부인의 말을 끊은 것은 내가 아니다. 가주인 이세극이었다.
그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상씨 부인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당황이었다.
"...주천경에... 오른 것이냐."
"예. 그 단약 상자 덕분에 올랐습니다. 정 총관이 빼돌린 채 도망갔더라면 아마 꽤 오랫동안 입기경에서 머물러야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세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난 살면서 가주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본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열일곱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주천경에 오를 수가 있단 말이더냐. 이것은 이씨 가문의 복이 분명하다. 그 동안 내가 너를 잘못 보고 있었던 것이구나."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허허허허."
실실 웃는 가주가 못마땅했나보다. 상씨 부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가가, 지금 저놈이 대총관을 죽였습니다. 손속이 저 정도로 과한데 어찌 웃음을 보인단 말입니까, 저건 필시 미래에 마두가 될 것이 분명하니, 벌을 내려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상씨 부인의 말에 동의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대충 봐도 저기 구석에 쳐 박혀 있는 늙은 원로 네 마리와 이 자리에 있는 일곱 명의 총관, 그리고 운씨 부인까지.
반대로 말하면 가주랑 나를 제외한 전부였다.
이세극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지금 막내가 한 이야기 못 들었소?"
"...예?"
"내가 그동안 무림맹의 일에 치이고 가문의 일에 치여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정말 가관이구려. 어찌 가문의 위계질서가 이따위로 추락할 수가 있단 말이오."
"그게 무슨 말씀..."
"당신부터가 지금 감히 가주 앞에서 언성을 높이니, 밑의 것들이 사리분별을 못하는 것이 아니오!"
상씨 부인은 충격을 먹은 듯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손속이 과하다? 강호에 나가 무인으로 살아본 적이 있긴 하오? 저 정도 손속은 과한 게 아니라 단호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이오. 무엇보다 이번일로 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었소."
가주의 두 눈이 주변을 훑는다.
"가문에 제정신이 박혀있는 사람이 저기 있는 막내와 둘째 둘밖에 없었다니, 어찌 총관이 감히 이씨 가문 핏줄의 물건을 탐한단 말이오. 정총관이 그따위 행동을 한데에는 마땅히 대총관도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한데, 마침 책임을 제대로 졌구려. 가문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준 막내에게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벌을 내려야한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대체 그게 어느 세상의 법도란 말이오."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난 가주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본다.
하긴.
지금 내 나이가 열 입곱 인데, 이 나이에 주천경에 오른 이들은 극히 드물다.
주천경이라 하면 진정한 무인으로 첫걸음을 떼게 되는 경지인데, 얼추 주천경에 오른 무인이면 대충 다른 세가에 가더라도 타격대 하나의 부대주 정도는 맡을만하다.
물론 중소세가를 말하는 거다. 대문파 같은 곳으로 가면 대충 일대제자 정도라고 봐야한다.
절대 적은 경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지금 이 시점에서의 내가 지금까지 무공 수련을 얼마나 했냐는 거다.
내가 무공에 입문한 시기는 열 살 때다.
벌모세수? 그딴 건 꿈도 못 꿨다. 서자에게 무슨 벌모세수인가. 그렇다고 제대로 된 단약이나 영약의 지원? 없었다.
무공에 입문한 것은 열 살이지만 제대로 배운 시기는 열다섯 정도부터다.
즉,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지금 나는 고작 2년 만에 주천경에 오른, 이른바 무공의 천재인 것이다.
어느새 나를 벌주기 위해 열린 청문회는 다른 식으로 바뀌어져있었다.
"그 동안 너에게도 신경을 못써주었던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하거라."
"괜찮습니다. 사람이 바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그래도 내 도저히 미안해서 안 되겠구나.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거라."
당연히 주변에서 만류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씨 가문의 주인은 가주 이세극이다.
이세극의 말이 법이고 이세극이 향하는 길이 질서다.
원하는 거.
딱 하나 있다.
"영약이 필요합니다."
"영약?"
"예. 약방에서 구할 수 있는 단약 같은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영약 말입니다."
"한번 구해보마. 혹시 따로 원하는 영약이라도 있는 것이냐."
있었다.
"백년삼이 필요합니다. 변질되지 않은 최상급의 백년삼이요."
순간 이세극이 흠칫한다.
백년근은 절대로 싼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조금 웃겼다. 원하는 게 있으니 말하라해서 나름 현실적인 것을 말했는데 저런 모습이라니.
"...백년삼이라면 대략 은자 삼천 냥쯤 하는 것으로 아는데... 좋다. 내 한번 구해보마."
"감사합니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우리 가주님께서는 할 말이 더 있으신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네가 지금껏 상행만을 동행했을 뿐 가문의 대소사에 직접 나섰던 적은 없는 것 같구나."
있으면 그게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던 내가, 어찌 상씨 부인과 운씨 부인의 배경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가문의 대소사에 너도 참가하거라."
그때였다.
정말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운씨 부인이 냉큼 말했다.
"가가, 그렇다면 '그 일'을 맡기시는 게 어떨까요?"
"그 일?"
"예."
"...설마 천화루를 말하는 것이오?"
"예 가가. 그들이 갚지 않은 돈이 이자를 포함해 벌써 은자 구천 냥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혀 갚을 생각이 없어 보이니, 이 일을 한번 막내에게 맡겨보는 것이 어떠실련지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이세극이 내게 물었다.
"해보겠느냐."
음.
"그렇다면 백년삼을 한 개 더 구해주실 수 있습니까?"
"...좋다. 이 일만 제대로 해결한다면 백년삼에 이어 좋은 검도 한 자루 하사할 것이다. 그러니 한번 제대로 해보..."
붉어진 얼굴로 최대한 조용히 듣고 있던 상씨 부인이 버럭 외쳤다.
"가가! 한 개도 과한데 어찌 하나를 더 주려 하십니까. 거기다 검 한 자루라니, 이건 아닙니다. 이씨 가문의 가주인 가가께서 명령을 한 것인데 대가를 달라니, 이건 정말 아닙니다."
의미 없었다.
"부인, 지금 가주가 가주전에서 말을 하고 있는데 어찌 가주의 말을 끊는 것이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말을 끊다니, 내가 그리 우스워 보이는 것이오?"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한번만 더 내 말을 끊으면 그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결정했으니 불만이 있으면 모아두었다가 천천히 하시오. 물론 설득할 자신이 있다면.
상씨 부인이 다시 자리에 앉는다. 분한 표정이 역력해보였지만 관심 없었다.
그리고 좋은 검이라고 해봤자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래도 주면 받을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러다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가주님.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래, 말해보거라."
"그 구천 냥을 반드시 돈으로 받아와야합니까?"
가주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에 합당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면, 충분하다."
"알겠습니다. 오래 안 걸립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걸음을 옮기려는 내게 가주가 묻는다.
"설마 혼자 가려는 것이냐."
당당하게 말했다.
"예."
"....좋다. 가거라."
분명 가주는 말했다.
반드시 돈이 아니어도 된다고.
그렇게 나는 장령군 중심지에 위치한 천화루로 향했다.
***
장령군은 분명 작은 지역은 아니었다.
상인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고 온갖 문파들도 있다.
특히 밤거리가 꽤나 화려했다.
그 밤거리를 책임지는 기루가 정확히 네 개 있는데, 그중 가장 으뜸은 바로 천화루였다.
천화루는 요리사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적나라 황실에서 경력을 쌓은 황실 부수석 요리사가 모든 음식을 책임지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표했다.
왜 황실에 있던 요리사가 이곳 장령군같은 촌구석으로 내려왔는지.
솔직히 그 정도 경력이면 황실에서도 더 높은 자리를 노려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수도 근처에 있는 이름 있는 대단한 곳에 소속될 수도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을 집어치우고 장령군으로 오다니.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의 출신이 장령군이었기 때문이다.
장령군에서 가장 돈을 많이 주는 곳에 소속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천화루가 으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요리가 맛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속된 기녀들의 수준이 근방 어느 곳을 뒤져보아도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장령제일미라 불리는 연화라는 이름의 여인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이 몰려올 정도다.
지금은 해가 하늘 높이 서있는 시간이다.
그런 기녀들은 찾아볼 수 없다. 다 자러갔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는 먹을거리도 팔지 않는다.
영업 준비 시간.
딱 그 단어가 적당했다.
너무나도 한산한 천화루에 이도가 들어섰다.
한창 청소 중이던 점소이가 다가온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직 영업 준비 시간인데..."
"안에 루주 있나?"
"루주...님이요?"
"그래 루주, 이름이... 적개산? 대충 들어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맞나?"
"예. 맞습니다. 분명 저희 천화루의 루주님 성함인데, 혹시 미리 약속이 되어있으신 건가요?"
"아니."
"...그럼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이도가 빙긋 웃었다.
"이씨 세가에서 왔다고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점소이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만, 갈 필요 없다."
굵직했다.
점소이가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 부루주님."
그렇다. 이 남자가 천화루의 부루주, 청헌이다.
그가 이도의 앞으로 걸어왔다.
덩치가 상당히 컸다. 이도도 나름 육척의 장신이지만 이 남자는 더했다.
머리 하나가 더 클 정도다.
"이씨 세가에서 오셨다고?"
"그래, 왜 왔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글쎄, 한번 말해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나는 이씨 세가에서 왜 온 건지 도무지 모르겠거든."
이도가 고개를 들어 청헌의 두 눈을 직시했다.
"모른다?"
청헌의 미간이 꿈틀한다.
"정말 모른다고?"
"...모르겠는데."
"좋다. 무지는 죄가 아니니 내 친히 설명해주도록하지. 이씨 세가에서 빌린 원금이 은자 7840냥, 이자가 948냥. 합쳐서 8788냥, 전부를 받으러왔다. 그리고 한번만 더 말까면 이 자리에서 목을 찢어 죽여 버릴 것이니, 언행을 신중히 하도록."
평소였다면 청헌은 지금 이도가 한말에 실소를 터트렸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느껴지는 이 기이한 느낌.
그의 기세.
그리고 온몸을 따끔하게 만드는 살기.
애써 미소 지었다.
"...허허, 이씨 세가의 삼공자께서 제 언행이 많이 불편하셨나봅니다. 늦었지만 사죄드리겠습니다."
"받겠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좋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가문의 일을 시작하신 모양인데, 첫 번째로 하게 될 일이 실패로 끝나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안타깝다?"
"예. 저희도 이씨 세가에서 빌린 돈을 당연히 갚고 싶지요. 하지만 이게 천화루의 사정이... 보기보다 그렇게 좋지가 않습니다. 최대한 돈을 마련 해볼 터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관심 없다. 8788냥, 그대로 가지고 오도록."
"...공자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저희가 돈을 갚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 이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기녀들의 수당도 그렇고 음식 재료들도 그렇고, 기존에 들어가던 경비보다 더 큰 경비가 들어가고 있어서 요즘... 힘듭니다."
천화루가 장령군의 돈을 쓸어담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입에 침하나 바르지 않고 하던 청헌은 그제서야 이도의 분위기가 가라앉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도가 말했다.
"돈 받으러 왔는데 뭐 그런 거까지 알아아 되나?"
"..."
"그럼 제안을 하지."
"...말씀해보시지요."
"8788냥을 전부 내 앞으로 가지고 오던지, 아니면 그에 합당한 가치를 지닌 것을 내게 주던지."
청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합당한... 가치요?"
"그래, 합당한 가치."
이도가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화루는 5층짜리 건물이다.
입지도 굉장히 괜찮다.
장사? 충분히 잘된다.
요즘 사정이 어렵다느니 이딴 건 전부 개소리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다.
상당히 괜찮은 건물이다.
가지고 싶을 정도로.
"천화루, 그 정도라면 그 가치에 합당하겠군."
".....뭐요?"
"이 천화루를 내가 가지겠다, 이 말이다."
"...미치셨습니까?"
"미친 걸로 보이나?"
"미친 게 아니라면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나. 그렇게 안 봤는데 이씨 세가가 이런 양아치 짓을 하다니, 네놈은 지금...."
"내가 아까 뭐라 했지?"
"...뭐?"
"한번만 더 말까면 목을 찢어 죽이겠다 했는데, 기억이 안나나?"
청헌이 무언가 말하려했지만 너무 늦었다.
기회는 여러 번 주었다.
이도의 왼손이 그대로 뻗어가 청헌의 오른쪽 목을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다.
그대로 잡아 뜯었다.
"커컥."
곧장 오른손을 뻗어 반대쪽 목도 잡아 뜯었다.
피가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목뼈만 보이는 그것을 부여잡은 청헌이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이도와 눈이 마주친다.
청헌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도의 발이.
뻐걱-!!
청헌의 얼굴을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털썩 쓰러지는 청헌의 시체는 이제 관심 밖이었다.
이도의 시선이 자리에 주저앉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점소이에게 향한다.
"뭐해?"
"예...?"
"가서 루주 불러와."
조작
천화루의 루주 적개산은 지금 들은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누가 죽었다고?"
"부루주님이요. 지금 이씨 세가의 삼공자님이 오셔서..."
대략적인 경위를 들었다.
전부 듣고 난 이후, 적개산은 당황하지 않았다.
분노했다.
"감히! 우리 천화루를 건드려!"
파들파들 떨리는 그의 턱을 보고 있던 점소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도 인성이 좋은 사람은 아닌데 저렇게까지 화가 나면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사달이 난다.
"장운룡한테 연락해."
"지금요?"
"그럼 뭐 며칠 있다가 할래? 지금 당장 새끼야."
괜히 불똥 튀기 싫은 점소이가 냉큼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적개산의 주먹이 덜덜 떨렸다.
이 개 같은 새끼.
감히 내 사람을 죽여?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었다.
장령군을 주름잡는 세 개의 세가.
장령삼대세가는 분명히 경쟁하는 사이다.
경쟁을 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보이지 않는 곳이든 보이는 곳이든 온갖 수작질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왜 천화루의 루주는 이씨 세가에게 돈을 받고도 갚지 않는가.
왜 이씨 세가는 그런 천화루를 제대로 압박하지 못한 채 돈의 수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던 것인가.
이 모든 것에는 전부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장령삼대세가 중 장씨 가문이 천화루의 뒤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장씨 세가의 둘째인 장운룡이 계획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 장운룡이 어떤 사람이냐.
그는 장씨 세가의 실질적인 '소가주'라고도 불린다.
그럴 만도했다. 장씨 세가의 장남이자 소가주인 장운연은 현재 무림 팔대문종 중 하나인 제왕검종에 속해있다.
단순한 입문 제자, 일대 제자 이런 게 아니라 제왕검종에 존재하는 육대 장로 중 한명의 직전 제자다.
재능이 출중하여 향후 제왕검종의 이름을 세상에 드높일 재목으로 평가받는 이가 바로 장운연이다.
이것이, 그의 친동생인 장운룡이 천화루의 뒤에서 수작을 부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씨 세가가 돈을 받지 못한 이유? 장운룡의 친형이 제왕검종 사람이니 간접적으로라도 그들이 나설 명분이 생긴다.
적개산의 명을 받은 점소이는 곧장 장씨 세가로 향했고 그곳에서 장운룡을 만날 수 있었다.
전후사정을 들은 장운룡이 피식 코웃음을 친다.
"이씨 세가의 삼공자? 설마 이도라는 이름의 그 머저리를 말하는 것이냐."
이도는 유명했다. 좋지 않은 의미로.
"그 머저리가 부루주를 죽었다? 하하, 제법이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던데 그놈에게 그 정도의 배짱이 있었을 줄이야. 이거 정말 다시 보게 되는군."
"...저... 그 삼공자가 천화루 전체를 가지겠다고 하던데요."
"천화루를 가져? 하, 날 웃기려고 한 말이겠지?"
"...직접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제가."
"그럼 그 셋째 놈이 '처음'으로 하는 살인에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구나. 어이, 거기 너."
장운룡의 손짓에 지나가던 하인이 냉큼 다가온다.
"정린에게 가서 전하거라. 당장 천화루로 가서 이씨 세가의 셋째 놈을 흠씬 두들겨 패주라고."
정린이라면 장씨 세가의 무인중 하나로서 경지는 양광이현이다.
중단전을 열기 시작하는 단계로서 적어도 장씨 세가는 물론 장령군 전체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무인이었다.
포권을 취한 하인이 곧장 어딘가로 달려갔다.
장운룡이 히죽 웃었다.
"자, 이제 해결되었구나. 그러니 내 소중한 시간 빼앗지 말고 가서 천화루의 탁자나 닦거라."
"...예."
***
의외로 이도는 천화루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반각이 지나고, 거의 반 시진에 가까워져가는데도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분위기가 너무나도 요상하여 천화루의 무인들이나 점원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죽어있는 부루주의 시신조차 치우지 않은 게 그 증거다.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걸까.
부루주를 죽일 때만 해도 무슨 천화루를 죄다 박살내 버릴 것 같은 기세였는데, 갑자기 왜.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윗층에서 묵묵히 대기하던 천화루의 루주 적개산과 장씨 세가로 갔던 점소이가 들어온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점소이는 굵직한 인상에 굵직한 덩치를 가진 한 남자와 함께 왔는데, 그의 등에 채워진 검의 크기가 심상치가 않았다.
적개산이 주변에 몰려있는 이들에게 손짓했다.
"다들 나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일단 현재 천화루의 주인은 적개산이다.
그의 명령에 점소이와 장씨 세가의 무인을 제외한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적개산이 웃으며 물었다.
"이씨 세가의 삼공자님. 내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리에 앉아있던 이도가 해보라는 듯 턱짓했다.
미간이 살짝 구겨진 적개산이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어차피, 곧 저 이도라는 버르장머리 없는 쌍놈의 새끼는 뒈지게 얻어맞은 뒤 바닥에 굴러다닐 테니까.
"우리 부루주를 죽인 일은 내 없던 걸로 해주겠습니다. 물론 그 대가가 있어야겠지요. 저희 천화루가 빌렸던 돈과 이자, 그 전액이면 충분하겠군요."
"그러니까, 돈이랑 저기 있는 저놈의 목숨이랑 교환하자?"
"말귀를 잘 알아들으시는걸 보니 두 번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예, 맞습니다. 앞으로 우리 천화루는 이씨 세가와 전혀 관련이 없게 될 터이니 이제 그만 나가주시지요."
"싫다면?"
"싫으시면 저기 있는 정린님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실 겁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벽력검 정린. 장씨 세가의 무인이자 이미 연기사경에 진입한 고수입니다. 말귀를 잘 알아들으시니 두 번 말씀안드려도 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 꺼져주시지요."
피식 웃은 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벽력검 정린과 눈이 마주친다.
정린이 천천히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들더니 가볍게 옆을 베었다.
검의 궤적 안에 있던 탁자가 반으로 베이고, 그 너머, 거리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탁자도 반으로 베였다. 그 너머의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리로 따지면 무려 4장이다. 4장 안에 있던 세 개의 탁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내기의 방출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또한 위력적이었다.
연기사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하단전뿐만이 아니라 중단전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과도 같았다.
간단했다.
중단전이 열리면 더 작은 기운으로도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지금 정린은 아주 작은 기운으로 탁자 세 개를 베었다.
놀라운 기예였고 이도도 꽤나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놀라움이었다. 이도가 말했다.
"이렇게 재롱을 잘 부리는 애가 있는데 왜 장사가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걸까."
"...뭐라?"
"좋은 구경이었어. 그리고 할 말 다 끝났으면 내가 해도 될까?"
분노한 정린은 둘째였다.
적개산이 말했다.
"하지 말고 그냥 꺼지시라고."
이도가 고개를 저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갚을 생각이 없다는 건 내 충분히 이해했다. 그러니 이제 계약서를 가지고와라."
"...뭐요? 계약서? 무슨 계약서?"
뭘 새삼스럽게 그런 걸 묻냐는 듯, 이도가 말했다.
"천화루의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양도 계약서, 당장 가지고 오도록."
"...미치셨소? 설령 갚을 돈이 없다 해도 천화루의 가격이 얼마인지 알고 말하시는 거요? 오히려 내가 돈을 받아야한다 이 말이오."
피식 이도가 웃는다.
"가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 시간이 대충 반 시진 정도 된다. 일각 당 금화 천 냥으로 쳐서 도합 금화 사천 냥에 은자 8788냥, 이걸 전부 감당할 수 있나?"
"대체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어디에 있긴 여기에 있지. 말 두 번하는 건 나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번만큼은 너그럽게 넘어가주지. 돈을 갚을 의지도 없고, 시간도 넉넉히 주었음에도 빚쟁이가 오히려 큰 소리를 내는 상황에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났다. 천화루 전체를 가질 것이다. 계약서를 가지고와라. 당장."
적개산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조용히 지켜만 보던 정린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네이놈! 내 듣자하니 주제를 모르고 선을 넘는구나. 이 천화루가 누구의 것인지 아는 것이냐."
"괜히 대화 길게 끌지 말고, 핵심만."
"핵심? 좋다. 이 천화루는 우리 대 장씨 세가가 뒤를 봐주는 곳이다. 천화루를 건드리는 것은 결국 장씨 세가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뒤를 봐주었다? 그럼 일이 편해지지.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한 대가로 천화루는 내가 가지고 기존의 천화루가 우리 이씨 세가에 졌던 빚은 너희에게 받으면 되겠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그래봤자 이도를 제외하고 세 명이긴 하지만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저게 사람 새끼의 머리에서 나올법한 생각인가?
"정린이라고 했나? 8788냥은 내가 직접 장씨 세가로 가서 청구 할 테니 내가 간다고 말을 전해 놓거라."
"...네놈이 지금... 내게 명령을 하는 것이냐."
귀찮다는 듯, 얼른 꺼지라는 의미로 대충 손짓하자 정린의 표정이 구겨진다.
아니지.
이건 단순히 구겨진 게 아니다. 극도로 치밀어 오른 화가 얼굴 표정 자체를 일그러뜨린 거다. 억눌린 목소리로 정린이 말했다.
"...이씨 세가의 셋째가 유약하고 생각이 없으며 인간 자체로서도 매우 부족하다는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을 줄이야. 네놈, 지금부터 다섯을 셀 것이다. 그 안에 천화루에서 꺼지거라. 그러지 않는다면 내 이 자리에서 감히 나를 능멸한 죄로 사지를 부숴버릴 것이다."
한숨을 터트린 이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매무새를 대충 다듬고는 정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눈높이가 비슷하다. 이도가 정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세 보거라."
"...뭐?"
"다섯을 센다 하지 않았느냐. 한번 세보거라."
"...진정, 미친것이냐."
"셈을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세지 않는 것이냐."
"..."
"친히 내가 세주도록하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멍한 표정의 정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도는 아니었다.
"감히, 능멸, 사지를 부순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나?"
"...네놈이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그만, 이 정도면 되었다."
경고도 없이 이도의 주먹이 위로 올려쳐진다.
빠아악-!
정린의 고개가 하늘로 솟구쳤다. 턱이 얼얼하다. 골이 흔들리는 기분이다. 내기를 끌어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것과 동시에 검을 집어 들었다.
이씨 세가의 핏줄을 건드리는 것은 정린의 입장에서 큰 부담이긴 하나, 선제공격을 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
기운을 끌어올렸다.
이제 이놈을 미친 듯이 뚜드려 팰 것이다.
이씨 세가에서도 어차피 놈의 편은 없다. 장씨 세가도 딱히 정린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무림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명분(名分)]이 생겼으니까.
그때였다.
정린은 볼 수 있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아있는 이도의 두 눈과 이도의 오른 주먹에 몰리고 있는 내기를.
코웃음이 나왔다.
보아하니 주천경에 이른 것이 분명하다.
알고있던 경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긴 했으나, 상관없다.
괜히 신삼경과 연기사경을 나누는 게 아니다.
나눌만 했으니까 나누는거다.
신삼경의 무인은 아무리 용을 써도 연기사경 초입의 무인을 이길 수 없다.
오십명이 모이면 그나마 싸워볼만하고 백명이 모이면 이길 수 있겠으나, 이곳에는 그 정도의 숫자가 없다.
우스웠다.
정말로 싸워 볼 생각이었던 것인가.
이제 보니 주제도 모르는 놈이 아니던가.
이도가 주먹을 뻗었다. 정린은 반응했다. 들고 있던 검을 세우며 방어한 것이다.
네놈의 힘이 아무리 강해봐야 내게는 닿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가장 큰 패착이었다.
꽈아아아앙-!!
검이 박살나며 정린의 몸이 그대로 날아가 탁자 아홉 개를 부수고는 벽에 쳐 박혔다.
모두가 정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보지 못했다.
이도의 입가에서 흐르는 한줄기의 핏물을.
대충 훔쳐낸 뒤 쓰러진 정린의 앞으로 걸어갔다.
정린은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말도 안 되지만 지금 이도의 내력이 정린의 그것을 완전히 압도해버린 것이다.
"뭐냐...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굳이 답하지 않았다.
이도는 묵묵히 정린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쿨럭, 무엇을...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 줄 생각이다.
뻐걱-!
오른팔이 사람의 신체 구조상 꺾이면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인다. 그 다음은 왼팔이었다. 그 다음은 오른쪽 허벅지였고 그 다음은 왼쪽 허벅지였다.
사지를 부숴버린 것이다.
이걸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발끝에 내기를 담은 뒤, 강하게 내려찍었다. 목표는 정린의 하복부 쪽이다.
꽈아아앙-!!
"커어어억-!"
엄청난 양의 핏물을 토해내며 정린이 툭 고개를 떨어뜨린다.
죽지는 않았으나 아마 죽은 것과 거의 흡사한 수준의 타격을 입은 것이 분명하다. 그게 맞다.
사지가 부숴지고 '단전'이 부숴졌으니까.
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겁먹은 적개산이 보인다.
그대로 다가가 적개산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방금 되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었더군."
이 뜬금없는 소리에 적개산은 의아했지만 이어지는 이도의 말에 경악하고야 말았다.
"무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장씨 세가의 촉망받는 무인인 정린의 사지를 부수고 단전을 부수다니."
적개산이 경악했다.
대체 지금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불의를 보고 지나치면 이씨 세가의 핏줄이라 할 수 없지. 무엇보다."
어느 순간부터 생겨나있던 이도의 미소가 매우 차가워진다.
"천화루를 내게 양도하겠다는 계약서에 서명까지 해주다니, 정말 고맙다."
이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미친놈이다.
그 단어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놈은 상황을 조작 할 생각이다.
"...정린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의 입을 네놈이 어찌 막으려는것이냐."
그 말에 이도가 깜빡했다는 듯, 다시 정린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머리채가 잡힌 적개산은 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함께 이동했고 이내, 적개산은 볼 수 있었다.
이도의 발이 정린의 목을 부숴버리는 것을.
뻐걱, 그 소리가 너무나도 섬뜩하게 들렸다.
"마두가 따로 없구나. 사지와 단전을 부쉈기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무인인데, 그의 목까지 부숴버리다니."
"....."
말도 안 나왔다.
적개산 스스로가 이미 천화루의 식구들을 모두 내보냈기에 목격자는 오직 한명밖에 없다.
저기 구석에서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는 점소이.
수년을 일한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이름도 모른다.
만약, 적개산이 천화루의 모든 권리를 이도에게 건넨다는 양도 계약서에 서명을 했고 곧장 정린을 죽였다는 증언을 저 점소이가 한다면 어찌 될까.
그것이 이도의 말과 합쳐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실이 될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미친놈들이 득실거리는 아사리판.
이곳이 강호다.
"잘 가거라."
"자... 잠시만, 제발....!"
거기까지였다.
반대쪽 손을 곧게 폈다.
이도의 수도가.
뻐걱-!
적개산의 목을 그대로 부숴버렸다.
계산
돈을 받으러갔던 이도가 두 시진 만에 돌아왔다.
가문의 사람들은 별 생각 안했다.
천화루에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얽혀있다.
그 수많은 이해관계를 해결해야만 돈을 받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장씨 세가의 관계를 해결해야한다.
멀리 갈 거 없이 장씨 세가의 소가주가 가장 큰 문제였다.
제왕검종 장로의 직전 제자라는 건 정말 큰 문제다.
천화루도 그것을 알기에 장씨 세가에 붙은 거다.
이 일은 적어도 막내인 이도가 해결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도뿐만이 아니라 이씨 세가 전체가 나서도 해결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맡긴 거다.
원래 첫 번째로 맡기는 일은 실패하기에 가장 유력한 일로 정하는 것이 맞다.
처음부터 성공가도를 달리면 후에는 분명 큰 좌절을 맛볼 테니 그것을 미리 겪게 만들 의도였다.
그런데.
돌아온 이도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해 이씨 가문이 뒤집어졌다.
"반드시 돈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씀이 있으셔서 천화루를 통째로 가지고 왔습니다."
"...뭐...?"
"그리고 장씨 세가의 정린이라는 무인이 사망했습니다."
이세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충격적이었기에 이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정린이 누구인가.
장씨 세가의 촉망받는 무인으로서 무려 양광이현의 고수다.
"천화루의 루주인 적개산이 사실은 무공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린을 죽이고 저도 죽이겠다고했지만 장씨 세가의 고강한 무인이었던 정린님이 동귀어진의 각오로 적개산을 제압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정린님은 사지가 부서지고 단전이 박살난 채로 살아계시다가, 마지막에 숨을 거두셨는데, 제게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무슨 유언을 남겼느냐."
"장씨 세가가 천화루에 개입했던 일들은 묻어 달라, 제게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얼핏 들어보면 말이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상황 자체가 이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적개산이 그런 고강한 고수였다고? 정린이 사망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정말 사실이더냐."
"예. 그 자리에는 저 말고 다른 증인도 있었습니다."
"...증인?"
이도가 뒤쪽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들어오거라."
가주전의 문이 열리고, 잔뜩 겁먹은 듯한 표정의 남자가 천천히 들어왔다.
천화루의 점소이였다.
그에게 이세극이 물었다.
"지금 이도가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인 것이냐."
침을 꿀꺽 삼킨 점소이가 이내, 단호한 결심이 선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사실입니다."
허어...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점소이가 다시 쐐기를 박았다.
"천화루의 루주였던 적개산은 마두였습니다. 그가 장씨 세가의 정린님과 동귀어진 하였지만 이도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적개산을 죽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적개산이 왜 하필 이도에게 천화루의 모든 권리를 양도한다는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냐."
힐끗, 이도를 바라본 점소이가 바르게 말을 이었다.
"사실 적개산은 장씨 세가와 이씨 세가의 사이를 분열시켜놓으려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천천히 제대로 설명해보거라."
"돈을 갚기 싫다면 천화루 전체를 넘기라는 이도님의 말씀에 적개산이 계약서를 가지고 왔고 먼저 서명을 한 이후에 이도님에게 와서 서명을 하라했습니다. 그리고 공증인으로 정린님이 옆에서 지켜 봐 달라 하였고, 자연스럽게 정린님과 이도님 그리고 적개산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세분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고 이도님이 서명을 하는 순간 적개산이 정린님을 공격하셨습니다."
"...공격을 했다? 적개산이 먼저?"
"예. 정린님을 먼저 죽인 이후에 이도님을 죽일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계약서는 그저 정린님에게 기습을 가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입니다. 최후 승자가 된 적개산이 계약서를 그대로 파기해버린다면 그 안에서 있었던 일들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너의 그 말에는 단 한 점의 거짓도 없는 것이 분명 하렸다."
"예. 제 모든 것을 걸고 이씨 세가의 가주님께 드린 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이도는 그런 점소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점소이, 조현의 심장이 쿵쿵 뛴다.
거짓이긴 하나, 어떻게 보면 이게 진실일수도 있다.
왜냐면 모든 상황을 아는 것은 조현과 이도 단 두 명이니까.
이 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는지가 가장 중요한 거다. 그게 진실이 될 테니까.
조현은 아직도 기억한다. 이도의 말을.
-평생 점소이만 하면서 인생 종칠 생각인 것이냐.
-...예?
-잘 들어라. 오늘부터 이 천화루는 내 것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주점을 관리할 시간이 되지 않는다. 지금 마침 루주 자리와 부루주 자리가 비었군.
-...
-처음은 부루주 자리를 너에게 맡길 것이다. 일을 배운 뒤에 루주 자리를 꿰차거라. 네가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이 된다면 묵묵히 넘겨줄 것이니.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인생일대의 기회였다.
-이름이 조현이라 했나?
-예. 공자님.
-그래, 조현, 좋은 이름이구나. 내 제안을 거절 해도 되고 수락을 해도 된다. 선택은 너의 자유다.
거기까지면 충분했다.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조현이 냉큼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이도가 명쾌하게 답했다.
-좋다.
-감사합니다!
-단,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이든 하명만 하십시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두 명의 입이 맞춰진 거다.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맞다.
그 자리에 있던 이도의 경지가 주천경이긴 하나, 신삼경의 무인과 연기사경의 무인은 근본적으로 너무나도 거대한 차이가 있다.
웬만하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신삼경의 무인 수십 명이 달려들어도 연기사경 초입에 있는 무인을 당해 낼 수가 없는 법이다.
중단전의 존재 유무는 그 정도의 차이다.
결국 이세극은 이도와 점소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결정지었다.
그리고 한 시진 후.
이번에는 장씨 세가가 뒤집어졌다.
***
장씨 세가의 가주, 장막수는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씨 세가의 막내아들.
듣기로 어머니가 점소이였고, 흔한 배경 하나 없어서 이씨 세가 내에서도 매우 배척받는 존재.
보고받은 대로라면 그의 성격은 매우 유약하여 개미 새끼 하나 죽이지 못할 정도였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주눅 드는 것이 일상이라 큰일은커녕 작은 일 조차 맡길 수 없는 재목이라 하였거늘.
대체 지금 눈앞에서 저리 당당하게 서있는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게 그 셋째가 맞는 것인가.
지금 그가 와서 천화루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지만 눈앞에 보이고 있는 이도의 태도는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도가 말했다.
"방금 들으신 것이 진실입니다. 이제부터 천화루는 이씨 세가의 것입니다."
장막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의 말이 정말 진실인 것이냐."
"예. 여기 증인도 있지 않습니까."
장막수의 시선이 이도의 옆에 서있는 점소이 조현에게 향했다.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이 세차게 흔들리는 저 조현이라는 점소이의 말도 이도의 그것과 같았다.
마치, 짜 맞춘 것처럼.
"관청에서 제대로 된 조사가 시작된다 해도, 지금처럼 정말 진실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냐."
분명 장막수의 태도는 이세극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리고 이도도 마찬가지다.
같지는 않았다.
"수사관이든 뭐든 그 누가 조사를 하러 와도 있던 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곳에 이렇게 직접 온 것은 저를 살려준 정린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입니다."
"...정린, 그래, 그는 우리 장씨 세가 무사들의 구심점이었지. 가진 힘도 대단하고 경지도 대단했어. 저기 있는 운룡이를 도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재목이 분명했지."
"예. 그런 그가 마두와 싸우다 사망하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
"본래는 천화루가 지었던 빚을 장씨 세가에 청구할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은혜를 받아놓고 청구를 한다는 건 인면수심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일이겠지요."
"그래, 그것이 맞지."
장막수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구천 냥에 가까운 은자는 분명 큰돈이다.
그것을 갚지 않도록 압박한 것도 장씨 세가가 맞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것을 묻고 천화루의 소유권을 인정해 달라.
장막수는 이도의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이도는 누군가에게 '인정' 받고자 온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이미 가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 같은 것은 필요 없다.
이도가 말했다.
"오는 길에 장부를 대충 살펴보았는데, 외상이 참 많으시더군요. 특히 운룡 공자님과 여러 명의 무사들이 이번 달에 쓴 돈만 은자로 이천 냥이 넘습니다."
"....."
"그리고 정린님이 적개산과 싸우는 와중에 탁자 네 개와 의자 두 개, 그리고 파인 바닥이 대충 여섯 군데, 특히 바닥에 스며든 피가 상당히 짙어서 완전히 들어내야 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한번 견적을 내보았는데 대략 은자 이백 냥 정도 하는 것 같습니다. 허나, 제가 사람인데 어찌 그것까지 청구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은 그러할진데 천화루의 주인이 바뀐 이상 또 전과 같은 기조를 유지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 주인이 바뀌었는데 전과 같은 기조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지."
"예. 그래서 지금 외상을 전부 받으려고 합니다. 조현."
"예. 공자님."
"가서 그거 건네 드리고 와."
조현이 냉큼 가서 장막수에게 두툼한 종이 뭉치를 건네주고는 다시 이도의 뒤로 왔다.
묵묵히 종이 뭉치를 하나씩 걷어내던 장막수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진다.
"보시는 대로 은자 8,933냥입니다. 이번 달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천화루에서 외상을 했던 그 모든 내역이지요. 뒤에 우수리는 떼고 그냥 8,900냥만 받겠습니다."
"...계산법이 이상하구나. 어찌 소흥주(紹興酒)의 가격이 은자 50냥 일수가 있는 것이냐. 내가 알기로 은자 10냥이면 먹는 술이 아니더냐. 그리고 여아홍(女兒紅), 이것의 가격도 말이 되지 않는구나. 한 병에 은자 100냥? 백화로(百花露)는 더 이상하구나. 어찌 이거 한 병에 400냥 일수가 있는 것이냐."
"잘 아시겠지만 소흥주는 절강성 소흥에서 난 매우 특별한 술입니다. 일반적인 가격은 은자 10냥이겠지만 천화루에서는 아닙니다. 기녀들의 웃음이 포함된 가격인데 그걸 외면하시면 안 되죠. 소흥 지방의 명주인 여야홍과 백화로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의 가격이 이상하다고 하셔도 드신 분들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아실 겁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장운룡의 입이 떡 벌어진다.
솔직히 있는 집 자식이 언제 무언가를 먹을 때 돈 생각 하면서 먹었겠나.
한 병에 얼마 하는지, 장운룡은 모른다.
대부분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인 정린에게 맡겨왔으니까.
솔직히, 지금 이도가 가격을 터무니없는 수준으로 부풀린다고 해도 알아 낼 수가 없다.
그날그날 술의 가격이 바뀌는 게 천화루의 기조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주인이 바뀌었고 기존의 주인은 이미 뒈져버렸는데 누가 그걸 따질 수 있겠나.
"설마 장령삼대세가의 그 대단한 장씨 세가가 빌린 돈을 갚지 않으실 리는 없고."
기존에 천화루가 이씨 세가에게 갚아야 했던 돈과 천화루를 수리해야 하는 비용을 더한 액수가 지금 이도가 요구하는 액수와 일치했다.
참으로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일시불로 계산 해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히 은자 8,900냥입니다."
장막수가 할 말을 잃었다.
이런 미친 새끼.
누가 천화루의 주인인가
묵직한 무게의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이 안에는 금자와 은자가 섞여있다. 대충 환산하면 전부 8,900냥이다.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조현이 말했다.
"...몰랐어요."
"무엇이 말이냐."
"8,900냥을 이렇게 순순히 줄 거라고는 생각 안했는데... 왜 준걸까요?"
묘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 나이가 몇이라 했지?"
"저 올해로 스물입니다."
"어리진 않구나. 그럼 설명해주어야겠지. 장부를 조작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음에도 왜 이 돈을 주었는가, 간단하다. 이건 장씨 세가에서 보내는 사례금이다."
"사례금이요?"
"정확히 말하면 '합의금'이라고 해야겠지. 장씨 세가가 천화루에 개입해 이씨 세가의 돈을 꿀꺽하려했다는 것은 분명 작은 일이 아니다."
"그런가요?"
"그래, 공론화를 시작하게 되면 두 가문간의 전면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사건이지. 아무리 장씨 세가의 장남이 제왕검종의 사람이어도 근본적으로는 가문간의 싸움이다. 장씨 세가가 잃는 것이 많을지 얻는 것이 많을지는 주판을 튕겨봐야 아는 사실이고, 이런 촌구석의 가문이 제왕검종의 이름을 빌려 쓰는 것까지는 괜찮아도 그들을 개입시키는 건 그들로서도 출혈이 클 수밖에 없다. 장남을 위한다면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일지니, 현재로서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의지가 바로 이 돈 인 것이다."
조현이 머리를 긁적인다.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좋은 거네요?"
"그렇지. 좋게 생각하거라. 그런데 점소이 생활을 얼마나 했다고?"
"제가 열 살 때부터 했으니까, 십년이요."
"십년이면 대충 천화루가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겠군."
"잘 알죠."
"좋다. 오늘 영업 개시하기 전에 천화 루에 속한 모든 직원들을 불러모으거라."
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이 바뀌었고 부루주도 바뀌었는데 인사 한번쯤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천화루의 부루주 조현.
출세에 성공한 그가 환하게 웃었다.
"예 맞습니다. 제가 한번 제대로 준비해보겠습니다."
주천경에 오르긴 했으나, 근골이나 이런 것들이 아직은 부족하다.
연기사경에 진입하기 직전에 몸을 극한까지 단련시켜 놔야한다.
그렇게 조현은 천화루로 향했고 나는 다시 이씨 세가로 향했다.
***
자신들이 벌인 과오를 덮기 위해 명월산의 산적들을 모조리 토벌하러갔던 이씨 세가의 장남과 차남이 오늘 그 모든 일을 끝내고 가문에 복귀했다.
환대를 기대했었으나, 들려오는 건 환대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두 번째로 들었을 때는 이게 꿈인가 싶었다.
청천벽력.
말도 안 된다.
막내가 주천경에 오르고 천화루에 떼인 돈을 전부 받아오는 것을 넘어서 천화루 전체를 집어삼켰다고?
심지어 장씨 세가에 홀로 가서 은자 8,900냥을 받아왔다?
이게 뭔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린가.
그러나 사실이었다.
고작 하루에서 이틀이다.
그 사이동안 모든 것이 바뀌어있었다.
첩의 아들인 이도를 다르게 보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가주 이세극도 포함되어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막아야한다.
두 남자는 곧 두 명의 부인에게 호출됐고 계략을 짜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두 남자가 함께 밖으로 나온다.
이정의 표정은 밝았고 이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정이 말했다.
"원아."
"...예, 형님."
"너무 섭섭해 하지 말거라."
"..."
"결국 이씨 세가의 소가주가 되는 것은 장남인 나다. 차남인 너는 무슨 수를 써도 결국 소가주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무림이다."
틀렸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무림이다.
"술시경에 회의가 시작된다고 하니, 그만 가서 쉬거라."
"...예, 형님. 형님도 가서 쉬십시오."
***
나는 스승님에게 총 다섯 가지 무공을 배웠다.
[혼원일체기공(混元一體氣功)], [환답공(環沓功)].
이 두 개는 심법과 신공으로서 내기를 쌓는 것과 활용하는 것에 집중된 무공이다.
나머지 세 개의 무공.
스승님은 처음 이것에 대해 설명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먹을 잘 쓰는 법, 빠르게 달리는 법, 빠르게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법.
권법과 신법, 그리고 보법이었다.
권법의 이름은 [아수라파천오결(阿修羅破天五訣)].
다섯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있는 이 권법은 가능하면 위기의 순간에서만 꺼내 사용했다.
이것을 본 사람.
느낀 사람.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완전한 내 편을 제외하고 모조리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피곤해지니까.
신법은 권법만큼은 아니었다.
신법의 이름은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과거 멸문한 대곤륜의 무공으로서 대성하게 되면 공중에서건 뭐건 순식간에 방향을 여덟 번 전환할 수 있다.
신묘한 신법으로서 도망칠 때도 용이하고 도망치는척하다 반격을 할 때도 용이했다.
나머지 하나는 천기신보(天驥神步)다.
이것도 대곤륜의 무공으로서 그 어떤 무공들과도 호환이 된다.
근원적으로 보면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공격을 하거나 회피하기에 가장 일정한 간격을 유지시킬 수 있는 보법이기에, 나는 이 보법을 정말 많이 사용했었다.
지금 내가 연습하고 있는 이것이 천기신보다. 운룡대팔식은 최소 연기사경 이상에 이르러야 유의미한 효과를 볼 수 있기에 지금 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쉴 새 없이 발이 움직인다. 땅이 파이고 흙더미들이 치솟는다.
가상의 적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검이 휘둘러진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 치 차이로 코앞을 스쳐지나간다. 뒷발이 땅을 밀어내며 허리의 근육과 팔의 근육이 동시에 움직인다.
파앙-!
허공이 강하게 터진다.
허상이 아니었다면 최소 목이 터졌을 것이다.
가상의 적을 두 명 만들었다.
두 명의 검과 주먹이 허공을 어지럽힌다. 그것에 얽히듯 내 발도 어지러워졌다. 공격들이 스치고 스친다.
양손을 양옆으로 강하게 뻗었다.
파아앙-!!
양쪽 허공이 터져나간다.
묵묵히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허상의 경지는 대략 주천경에서 양광이현쯤으로 설정했는데, 애매하다.
영약이 필요했다.
백년삼 하나면 연기사경으로 진입할 확률이 오할 쯤 되고, 백년삼이 두 개면 구할 이상의 확률로 연기사경에 진입할 수 있다.
고개를 들었다.
해가 조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몸을 씻고 천화루로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저 공자님?"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냐."
"...가주님께서 공자님을 찾고 계십니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요즘 들어 계속 나를 찾는 건지 모르겠다.
"독대인 것이냐."
"...아닙니다. 중요한 회의이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가볍게 혀를 쳤다.
생각해보면 회의가 열릴 때마다 일이 한 번씩 벌어지긴 했었다.
혹시.
백년삼이 벌써 준비된 건가.
몸을 대충 씻은 뒤 가주전으로 향했다.
***
여느 때와 같았다.
가주가 있고, 뒤에는 원로 네 명이 있고 두 명의 부인과 장남과 차남.
이들은 이번에도 흡사 청문회를 하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들어서는 이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구도가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러려니 했다.
애도 아니고 이런 걸로 뭐라고 하기에는 이도가 살아온 세월이 상당히 험했기에, 유유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은 아니었다.
이건 이도가 생각하는 '선'을, 아득히 넘은 것이었으니.
"오늘 정이와 원이가 명월산의 산적들을 토벌하고 왔다. 인사는 했느냐."
이세극의 말에 이도가 답했다.
"수련하느라 바빠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주천경에 이른 무인이니 그럴 수도 있지. 오늘 이 두 녀석의 행동으로 이씨 가문의 명예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상황 자체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원래 명월산에는 산적이나 도적이나, 심지어 화전민도 없다. 그런데 산적이 나타났다. 그 산적을 대체 누가 불렀나.
저기 있는 '네 명'이 부른 거다.
두 명의 어머니, 그리고 두 명의 형.
저들로서는 그들을 전부 토벌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밀을 아는 자가 많아지면 그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으니까.
이도는 본능적으로 꺼림칙함을 느꼈다.
명예를 드높이고 자시고, 이딴 건 관심 없었지만 왜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저 말의 저의는 무엇인가.
이세극이 말했다.
"네 녀석이 천화루를 관리할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총관한테 들었든 저기 있는 두 명의 여인에게 들었든, 이것도 관심 없었다.
"그런데, 정말 네가 할 수 있겠느냐."
다른 건 관심 없어서 그냥 시큰둥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무슨 의도로 말씀하시는 건지 소자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가 말을 너무 돌려했구나. 천화루의 관리를 여기 있는 장남에게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와락, 미간이 구겨졌다.
"점소이 한명을 부루주로 삼고, 루주 자리는 비워두되 네 녀석이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어서 운영을 하려한다고 들었는데, 이것도 맞는 것이냐."
"예."
"하지만, 천화루가 어디 작은 기루도 아니고 한낱 점소이가 어찌 부루주의 자리에 앉을 수가 있단 말이더냐. 천화루가 이씨 세가의 것이 되었으니, 아랫사람들을 관리하려거든 응당 이씨 세가 사람이 파견되어 관리하는 것이 맞는 법이다."
일단은 그냥 잠자코 들었다.
"그러니 첫째인 이정을 천화루의 루주로 앉히고 이정을 보필할 사람으로 양 총관을 임명 할 생각이다. 양 총관은 과거 기루를 운영했던 경험이 있고 작긴 하나 상단 하나를 운영했던 경험도 있다. 어찌 생각하느냐."
이도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첫째 부인 상씨였다.
상씨 부인이 버럭 외쳤다.
"이놈! 가주님이 질문을 했는데 어찌 입을 꾹 닫고 있는 게야!"
이도의 시선이 상씨 부인에게 향한다.
닫혀있던 이도의 입이 열렸다.
"전에 했던 말씀 기억 안 나십니까?"
"무어라?"
"이씨 세가의, 가주님과 제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겁니다. 끼어들 때랑 끼어들지 않을 때를 왜 구분 못하십니까."
"...이놈이 말하는 버르장머리가... 네 녀석이 지금 주천경에 이르렀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냐!"
"잘 보입니다. 너무 잘 보여서 문제죠. 아버지."
"..그래, 말해보거라."
"지금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뭐...뭐라? 지금 뭐라 한 것이냐."
이도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천화루를 누가 가지고 왔습니까."
주변이 침묵에 잠긴다.
"장씨 세가에 가서 은자를 받아온 건 누구입니까."
"..."
"제가, 제 힘으로, 저 혼자서 이루어낸 일들입니다. 대체 첫째 형님과 첫째 부인이 대체 무엇을 했다고 제 것을 그대로 저 두 명한테 주려하는 것 입니까."
이번에는 이정이 나섰다.
"막내야.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내 충분히 알겠으나, 네가 그때 그러지 않았느냐. 우리 개인의 것은 없다고, 전부 이씨 가문의 것이라고."
"예.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런데 이해를 잘못하신모양입니다."
"응?"
"그 어느 것 하나 저희의 것이 없으나, 개인이 직접 손으로 일구어 낸 것들만큼은 소유권을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닙니까?"
"...그래서, 천화루가 너의 것이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럼 천화루가 형님 것입니까?"
"...장차 이 가문을 이끌어갈 사람은 나다. 그런 내게 막내로서 선물을 준다 생각하면 편하지 않느냐."
굳이 대꾸할 필요도 없었다. 이도의 시선이 이세극에게 향한다.
"확실히 말씀해주십시오. 이것이 전부 아버지의 의지입니까?"
"..."
"옆에서 부추기는 사람, 좋은 말만 일삼으며 떠드는 사람, 전부 제하고 오직 아버지가, 이씨 세가의 가주로서 내린 결정이냐, 이 말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이세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결정한 일이다. 이도야, 너의 공로는 알겠으나 너는 지금 무공에 집중할 시기다. 기루의 관리 같은 것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너는 그것에 전념하거라."
새삼스럽지만 이 가문에서 이도의 편은 없었다.
한명한명,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정, 상씨 부인, 네 명의 원로, 이원, 운씨 부인.
마지막으로 이세극.
천천히.
이도의 입가에.
너무나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다.
"예. 그리 하시지요."
그대로 이도가 몸을 돌렸다.
그런 이도의 얼굴은 지나치게 싸늘했다.
흡사.
불이라도 지를 것 같은 사람처럼.
불을 질러라
회의가 끝났다.
상씨 부인이 이정을 불렀다.
두 사람의 표정은 같았다.
함박웃음.
이건 진심으로 행복해서 웃는 거다.
"어머니! 결국 해내셨습니다."
"그래 해냈다."
이건 단순히 천화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아버지께서 이미 저를 소가주로 내정한 게 맞지 않겠습니까?"
"맞다. 이도가 무엇을 했건 간에 그것을 빼앗아 너에게 주었다는 것은 이미 마음속으로 너를 소가주로 삼겠다고 다짐하지 않은 이상에야 나올 수 없는 결정이다."
"요즘 들어 둘째가 자꾸 기어오르던데, 이제 그런 일을 안 봐도 될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어머니."
"어허, 이놈이. 다른 놈이라면 몰라도 둘째에게는 잘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유는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알죠. 알지만... 결국 운씨 세가도 이씨 세가에 소속된 가문 아니겠습니까. 이씨 가문을 가지게 된다면 운씨 세가는 물론 세가가 운영하는 상단도 저희의 것이 될 터인데, 굳이 잘해주어야 합니까?"
상씨 부인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탄식을 애써 삼켰다.
이 철없는 놈들 대체 어찌 해야 할까.
"이 녀석아. 한 가문의 가주가 된다는 것은 그 가문에 속한 이들을 책임진다는 뜻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이 따르게 하려면 너도 그들에게 잘해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라. 그들 모두가 너를 우러러보며 네가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너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야지, 어찌 벌써부터 눈에 거슬린다고 치울 생각을 하는 것이냐."
뜨끔한 이정이 난처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을 듣건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천화루다.
장령군에서 기녀들의 수준이 가장 뛰어난 곳이었으며 이정이 주로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그곳의 주인이 된다.
그곳에 속한 모든 기녀들이 이정의 것이 된다는 소리였다.
상씨 부인이 혀를 끌끌 찼다.
"적당히 하거라."
"어머니, 저 정신 차렸습니다. 전의 제가 아닙니다."
"쯧, 그래도 다시 한 번 말하마. 천한 것들에게 너의 씨를 생각 없이 뿌리지 말거라. 뿌려도 나중에 제대로 된 가문의 여식에게 뿌려야하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어머니."
물론 말만 그렇게 할 뿐, 지금 이정의 머리속에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 펼쳐져 있었다.
***
거침없이 걸었다.
깊게 생각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모든 과정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상씨 부인이 이세극을 구워삶았고 이세극은 넘어갔다. 이정은 이게 웬 복이냐는 듯 받아 처먹을 생각만 하고 있는 머저리 새끼였으니, 이 이상 뭐가 필요한가.
나는.
감히 내 것을 빼앗으려는 이들을 단 한명도 가만 놔둔 적이 없다.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천화루 안으로 들어선 나를 모두가 반긴다.
"새로운 루주님이십니다."
밝게 웃는 조현에게 조금은 미안해졌다.
대충 손을 휘저었다.
모두가 입을 다문다.
묵묵히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어떻게 말해야할지는 이미 오면서 모두 정리해 놨다.
"주목."
시선이 집중된다.
"첫 만남이지만 이 말을 하게 되어서 유감이다."
의문이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묵묵히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천화루는 문 닫는다."
"...예?"
"조현."
"예...예?"
"서류 가지고와."
녀석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미리 준비해놨던 서류 뭉치를 내게 건넸다.
대충 쭉 훑어보았다. 녀석에게 준비해놓으라고 했던 [고용계약서]가 맞았다.
"적개산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 많더군. 적게는 은자 한 냥부터 많게는 수천 냥까지."
내 시선이 점소이들을 넘어서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서있는 기녀들에게 향했다.
"그중에는 팔려온 사람도 있고."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저마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이 계약서에는 너희들에 대한 모든 정보가 적혀있다. 취미, 갚아야 할 돈, 이름, 고향,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도 힘들군."
"..."
"나한테 이건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지만 너희에게는 족쇄일 것이다."
묵묵히 반대 손을 튕겼다. 손가락 위에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 불꽃을 그대로 서류뭉치에 가져다댔다.
치지직.
불은 천천히 붙었지만, 덩치를 키워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머지않아 모든 서류가 불타 없어졌다.
"이제 족쇄가 사라졌군."
"어... 루주님...?"
당황한 조현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적개산에게 개인 금고가 있었을 거다. 찾았나?"
"...찾긴 했는데, 열쇠는 못 찾았습니다."
"상관없다. 가져와."
뒤쪽에 있던 두 명의 점소이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던 조현이 거대한 금고를 들고 내려왔다.
쿵.
장정 세 명이 들기에 벅찬 무게가 분명하다.
대체 무엇을 처박아둔 것 일까.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긴 했다.
묵묵히 걸어갔다.
발끝에 기운을 몰아넣은 채, 그대로 내질렀다.
꽈아아앙-!!
금고의 이음새 부분이 그대로 박살난다.
금고 안이 훤히 드러났다.
휘황찬란했다. 적개산 이 새끼는 확실히 갚을 돈이 없던 게 아니었다. 대충 봐도 은자로 만 냥이 넘는다.
"조현."
"예."
"여기 총 인원이 몇 명이지?"
"...루주님을 제외하고 저를 포함해 총 49명입니다."
49명.
적당했다.
"다 나눠줘."
"...이걸 전부요?"
"그래, 강제로 일자리를 빼앗았으니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욕심 안 나세요?"
"안 난다. 그 정도면 인생을 새로 시작할 돈으로는 충분할 테니 오래 일한 사람, 가장 고된 일을 한 사람, 기여도가 높았던 사람, 대충 추려서 나눠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름이 황장수였나?"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서있는 한 중년의 남자였다.
내 부름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황실 요리사 출신이자, 천화루의 모든 식사를 책임지는 남자.
그의 두 눈은 굉장히 또렷했다.
마치, 무림인처럼.
"예. 제가 황장수입니다."
"따로 좀 보지."
뒤쪽으로 턱짓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황장수와 함께 잠시 천화루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물었다.
"저를 따로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있지. 계속 요리를 할 생각인가?"
"예."
"왜지?"
"...요리가 하고 싶으니까요."
"그렇군. 그럼 다시는 무림으로 안 돌아올 건가?"
황장수의 미간이 꿈틀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피식 웃었다.
"그만, 내 앞에서는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
"...연기라니요 무슨..."
"분명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천면살수객(千面殺手客), 황노백(凰路伯)."
순간이었다.
황장수의, 아니, 황노백의 몸에서 엄청난 수준의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노백이 당황한다.
"...어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다."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신 겁니까?"
"있지. 저기 있는 애들 중에 쓸 만한 애들이 있으면 데리고 가라."
"왜 명령조이십니까."
웃었다.
"왜냐면 아직은 내가 네 고용주니까."
"...제 별호를 아신다면 제가 어떤 경지에 있는지도 아실 텐데요."
모를 수가 없다.
천면살수객(千面殺手客)이라는 별호는 지금쯤 거의 사라진 별호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 별호를 굉장히 두려워한다.
약 20년 전.
천면살수객의 손에 죽은 무인들이 정확히 76명이었다.
그 76명중 6명을 제외한 70명 모두가 연기사경 이상의 고수들이었다.
알려진 바로 천면살수객의 경지는 최소 오기조원 내지, 천지사경 중 첫 단계인 조화경.
지금 이 시점으로부터 약 10년 후에 정마전쟁이 발발한다. 그 전쟁에서 천면살수객은 다시 등장했고 무림맹의 맹주를 죽이려다 실패한다.
여담인데 그 무림맹주가 과거 나를 죽였던 천하십대고수중 하나인 천황(天皇), 여중천(餘重天)이다.
왜 습격한 건지는 모른다. 거기까지는 관심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용모파기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장령군의 천화루에서 요리사로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체 제 정체를 어찌 아셨는지, 그것을 들어야겠습니다."
그의 기세가 사나워진다. 내 몸에 쏟아지는 그의 살기에 내 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눈살을 찌푸린 채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
"살기를 거둬라."
"거두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답하기 너무나도 간단했다.
"죽일 거다."
"...제 별호를 아시면서, 저를 죽이시겠다고요?"
"왜? 못할 것 같은가?"
"보통 주천경의 무인은 오기조원의 고수에게 닿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죽였던 정린과 저는 다릅니다."
"아니, 다르지 않다."
"...예?"
그대로 검지를 뻗어 황노백의 가슴에 가져다댔다.
"네가 누구건, 내가 죽이고자한다면 너는 죽는다."
"..."
"처음은 당황으로 인한 살기였으니 넘어가줄 것이고, 두 번째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으니 넘어가줄 것이다. 세 번째부터는 없다. 한번만 더 내게 살기를 보이거나 기어오르면 이 자리에서 두 눈을 파버리고 단전을 부숴버릴 것이다. 알아들었나?"
물끄러미 자신의 심장에 겨눠진 내 검지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살기를 거둔다.
"...참으로 특이하신분이십니다."
"알면 되었다."
나도 손을 내렸다.
방금 말은 진심이었다.
보는 눈이 많긴 하지만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이들은 없다.
분명히 말하는데, 방금 나는 이 검지로 황노백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전부'를 죽여야 했으니까.
확실히 무언가를 느낀 건지 황노백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천화루는 대체 왜 문을 닫는 겁니까?"
"굳이 알아야하나?"
"알고 있으면 좋겠지만, 보아하니 말씀하고 싶지 않으신 것 같군요. 그럼 묻지 않겠습니다."
잠시 조현을 비롯한 천화루의 식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한 말은 유효하다. 객잔이나 주점을 세우고도 남을만한 돈을 줄 터이니 저들 중 데리고 가고 싶은 이들이 있으면 데려가라."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결국 남남 아닙니까? 그렇게 큰돈을 쥐어주시다니요."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저기 있는 천화루의 식구들을 말하는 거다.
"남남이어도 내가 일자리를 빼앗지 않았나. 그럼 그에 마땅한 보상 정도는 주어야지. 아니 그런가?"
"...보통은 안주고 내쫓죠. 빚이 있으면 그걸 받아내려고 억지로라도 데려가거나. 공자님은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군요."
굳이 설명하고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저 큰돈을 저들이 가지고 간다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건, 화를 입건, 결국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 아니더냐."
"..."
"그 선택지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세상에 극히 드물다. 어떤 선택을 내릴지, 어떤 결과를 맞이할지는 그들에게 달려있는 것인데, 내가 그것까지 신경써야하나?"
"...하긴, 일확천금의 기회를 주신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긴 합니다."
그보다.
"저기 있는 조현, 네가 보기엔 어떻지?"
"부루주가 되었다며 좋아하던 모습과 지금 모습의 차이를 말하는 겁니까?"
고개를 저었다.
"네 제자로 어떤지 묻고 있는 것이다."
"...재능이 없지는 않으나, 제가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면 너무 늦은 나이에 무공을 입문한 것이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받아들일 생각은 있고?"
"뭐... 심성은 나쁘지 않아서 데려가고 싶은 생각 정도는 있었습니다."
"그럼 되었다. 데려가라."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남자이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고개를 돌려 황노백과 두 눈을 맞췄다.
"만난 시간이 중요한가?"
"보통은 중요하죠."
"아니,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내 사람이 되었는가, 되지 않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녀석은 의리를 지켰고 약속을 지켰다.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부루주의 자리를 주고 머지않은 세월 내에 루주 자리를 주려했으나 일이 틀어졌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어야하는 것이 맞다. 내 말이 틀렸나?"
"...보통의 무림인들은 당신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보통의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데려가라. 그리고 자기 한 몸 지킬 수 있을 정도까지는 단련시켜라."
황노백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이미 고용 계약서도 다 태워버리시고 천화루도 문을 닫았는데 아직도 제가 피고용인입니까?"
"그래서 대답은?"
황노백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좋습니다. 조현과 저기 있는 기녀 몇몇과 점소이 몇몇을 데려가겠습니다. 단, 돈은 두둑하게 주셔야합니다."
"음식점을 세울 생각인가?"
"예."
"원하는 만큼 챙겨가고 전부 밖으로 내보내라."
"공자님은 어쩌실 겁니까?"
"나는 지금 나갈 거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천화루 밖으로 나온 뒤, 그대로 뒷짐을 졌다.
어둑어둑해진 시각, 하늘에 떠 있던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머지않아 천화루 안에 있던 이들이 모두 나온다.
조현에게 물었다.
"다 나온 게 맞나?"
"예. 완전히 비웠습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다시 천화루를 바라보았다.
4층짜리 건물.
솔직히 말하면 아쉬웠다.
이것을 완전히 가진 뒤에 나중에 스승님을 모시고 올 생각이었다.
완벽한 은신처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빠그라졌다.
내 것을 빼앗으려는 이들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이들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묵묵히 말했다.
"불을 질러라."
"...예?"
그들이 가져갈 것은 잿더미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 말하게 하지마라. 흔적도 없이 타버리게 불을 질러라."
빼앗길 바에는 부숴버릴 것이다.
불길에 휩싸이다.
이씨 세가가 뒤집어졌다.
아니, 이번에는 이씨 세가뿐만이 아니라 장령군 전체가 뒤집어졌다.
천화루가 불타 없어졌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장령군 전체로 뻗어나갔고 아주 잠시지만 매우 달콤한 꿈을 꾸고 있던 이씨 세가의 상씨 부인과 장남 이정은 꿈에서 깨어나야 했다.
"이 미친 새끼가!"
주먹으로 탁자를 부숴버렸다.
도저히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이정의 행태를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상씨 부인도 마찬가지였고 운씨 부인도, 그리고 둘째인 이원도 가만히 있었다.
저마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이원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주 꼴이 좋구나.
못마땅한 것을 넘어서 역겨울 지경이었다. 막내의 것을 빼앗았다느니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천화루를 '혼자' 먹을 생각을 하고 있던 버러지 같은 저 이정 새끼가 분해하고 있는 꼴이라니.
그래도 최대한 감정을 조절했다.
침묵에 잠겨있던 상씨 부인이 가장 먼저 두 아들을 내보냈다.
두 명만 남게 되자 상씨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이보게, 아우."
"예, 형님."
"아무래도 그때 말했던 '그것'을 해야 할 것 같아."
그것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정말로 의뢰를 넣으시려는 건가요."
상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지금이 아니라 전에 살수를 불러 이도를 죽이려했다.
하지만 그건 잠시 동안 보류되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주 이세극이 장씨 세가가 얽힌 천화루의 일을 이도에게 맡겼으니까.
그 일은 반드시 실패 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이도의 입지는 다시 바닥을 칠 것이고 눈에 안 보이는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리면 된다.
그 정도 입김은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유배지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때 살수를 보내 조용히 죽여 버리는 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렇게 하면 시끄러워질 일도 없이 그냥 조용히 모든 일이 끝나게 될 테니까.
그래서 보류했던 거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천화루를 놈이 가져왔다고 해도 결국은 이씨 세가의 것이다.
놈은 그것을 불태워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놈을 치워버려야 한다.
그렇게 밤이 깊어져갔다.
그 시각 이도는.
상씨 부인의 배경인 상운 상단이 존재하는 수주현에 와있었다.
***
수주현.
솔직히 이곳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긴 했지만 이런 촌구석까지 돌아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충 귀동냥으로 정보를 수집했고 나름 살아온 세월이 있다.
수주현에서 가장 으뜸가는 상단은 어디인가.
바로 상운 상단이다.
그 상운 상단의 단주인 상명길은 나름 입지적인 인물로서 빈손으로 시작해 수주현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상단을 만들어냈다.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볍게 자리를 박찼다. 옆에 있던 건물의 지붕으로 올라섰다.
천천히 정면을 응시했다.
드넓은 저 정원이 바로 상운 상단의 본관이다.
두 눈에 내기를 집중시켰다.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질서정연했다. 무인도 여러 명 보인다. 입기경의 무인은 흔했고, 주천경에 이른 무인도 꽤나 많았다. 극소수이긴 하나 양광이현에 이른 무인도 보인다.
그중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확히 세 곳이었다.
한곳은 상단의 주요 인물들이 머무는 곳이 분명했다.
나머지 두 곳은 곳곳에 빈 수레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다른 곳은 볼 필요도 없다. 저 두 곳만 보면 된다.
천천히.
숨을 죽였다. 몸의 힘도 풀었다. 주변과 동화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움직였다.
다리에 살짝 힘을 준채 몸을 띄웠다.
몸이 붕 뜨며 상운 상단의 전각에 착지한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몸을 낮춘 채 다시 움직였다.
미끄러지듯 내 몸이 움직인다.
벽이 있었다. 가볍게 짚고 넘었다. 이번에도 소리조차 없었다.
주변에 순찰을 도는 표사들이 여러 명 있었으나 내 존재를 눈치 챈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빈 수레가 즐비한 창고에 도착했다. 창고의 입구 쪽에 경비를 서고 있는 세 명의 표사가 보인다. 그래서 옆으로 돌아왔다.
최대한 아래쪽의 벽을 손으로 짚었다.
천천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내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벽에 스며든다.
퍼석.
벽에 개구멍이 뚫렸다. 내 몸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다.
묵묵히 내부로 들어갔다. 불빛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대낮처럼 훤히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품 보관 창고가 맞았다.
거대한 상자가 보이고, 곡식도 보인다. 내일 당장 어딘가로 가져가야 할 것들이 분명했다.
상당했다.
가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될 것이다.
그런 내 시선에 아주 작은 상자 몇 개가 보인다.
조용히 가서 열어보았다.
"...으음..."
소리를 참지 못하고 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대는 안했는데 이건 영약이 분명하다.
단약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태을환이나 소환단, 심지어는 대환단이나 공청석유, 백년삼, 이런 종류의 영약이다.
정확한 이름은 금환단(金丸丹).
이걸 여기에서 볼 줄은 몰랐다. 금환단은 금장환문이라는 곳에서 제조하는 영약인데 오래전에 멸문하면서 제조법도 함께 실전되었다.
내가 알기로 이걸 가지고 있는 사람 자체가 드물다.
금환단에 담겨있는 기운은 등급에 따라 다르다.
보통 50년 정도의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을 최상품으로 치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금환단이 그 최상품이다.
그 옆에 있는 상자들도 열어보았다.
전부 금환단이었다.
숫자가 다 합쳐서 3개다.
그렇다면 얼추 150년의 기운이라는 건데.
웃고 말았다.
묵묵히 세 개의 영약을 챙긴 뒤 불이 가장 잘 타오를 것 같은 짚더미들로 향했다.
그곳에 손을 얹은 채, 기운을 끌어올렸다.
아까 천화루에서 보였던 그 작은 삼매진화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순지기가 폭발적으로 치솟아 오른다.
순식간에 짚더미에 불이 붙었다. 잘 옮겨 붙도록 주변에 흩뿌렸다.
창고 전체가 타오르기 전에 곧장 개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이대로 이씨 세가로 돌아갈 생각?
없었다.
감히 내 것을 탐했고, 내가 내 것을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공평해야하지 않겠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가 잃은 것만큼은 그들도 잃게 만들 것이다.
상씨 부인의 배경은 상운 상단이다.
창고에 있는 모든 물품들을 죄다 불태워버릴 것이다.
가문 전체가 휘청할 정도의 타격을 줄 것이다.
그대로 자리를 박찼다.
그런데, 방금 창고를 불태울 때 생각보다 많은 내기를 사용해서일까. 몸이 살짝 흐트러진다.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시하고 자리를 박찼다.
"쫓아라! 침입자다!"
앞에 모퉁이가 있었다. 그대로 모퉁이를 돌며 뒤쪽에 몸을 밀착시켰다. 숨을 죽이고 오른쪽 소매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꺼내들고는 역수로 고쳐 쥐었다.
모퉁이 쪽으로 두 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급한 표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 있다. 망설임 없이 비수를 내질렀다.
푸욱-!!
무인 한명의 목에 박힌다. 즉시 뽑아낸 뒤 옆에 있던 무인의 목을 향해 뻗었다.
놈이 검을 휘두른다. 채앵, 비수가 하늘로 솟구치고 놈의 검도 하늘로 솟구친다.
서로의 빈틈이 만들어졌고 먼저 행동한 것은, 놈이 아니라 나였다.
왼쪽 손을 뻗어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오른손을 옆으로 펼쳤다. 하늘로 솟구쳤던 비수가 자연스럽게 내 오른손에 떨어진다. 강하게 말아 쥔 뒤 그대로 내질렀다.
푸욱-!
즉시 옆으로 비틀었다. 피가 왈칵 치솟는다.
묵묵히 놈의 시신을 옆에다 집어던진 뒤 다시 자리를 박찼다.
나머지 한 개의 창고.
내가 오늘 뒈지는 한이 있어도 그 창고는 반드시 불살라버릴 것이다.
막는 놈이 있으면 그놈도 죽일 거다.
뒤쪽이 소란스러워진다. 끝이 아니었다. 대낮처럼 뒤쪽이 환해졌다. 폭발음도 들려온다.
아무래도 방금 작업한 창고가 제대로 불타올랐나보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순식간에 나머지 창고에 도착했다.
문 앞에 대기하던 세 명의 표사가 보인다. 한명이 휘파람을 부르려는 것이 보인다. 들고 있던 비수를 집어던졌다.
푸욱, 그의 이마에 비수가 박힌다.
다리가 땅을 강하게 밀어낸다. 옆에 있던 표사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졌다.
손끝을 세운 뒤 그대로 뻗었다.
퍼걱-!
표사의 목에 박힌다. 즉시 몸을 회전시키며 옆에 있던 나머지 표사의 머리를 향해 발을 휘둘렀다.
꽈아앙-!!
표사의 머리가 터졌다.
순식간에 세 명의 표사를 정리한 나는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아까와 같았다.
분명 이곳 말고도 다른 창고가 있을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내가 노린 건 오직 상운 상단 본관에 위치한 물품 창고니까.
세상의 이치라는 게 그렇다. 가장 중요한 물품은 가장 중요한 장소에 있는 법이다.
표사의 옆에 있던 횃불을 집어든 뒤 망설임 없이 짚더미를 향해 집어던졌다.
모자라다. 온몸의 기운을 강하게 끌어올린 뒤 오른팔로 모두 옮겼다.
오른팔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화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것은 [적룡신공(赤龍神功)]이라는 이름의 신공으로서 자연의 기운중 화속성의 기운을 강하게 끌어올리는 신공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꽤 이름을 날리고있을 무림맹 청룡단(靑龍團)의 단주인 [적룡신군(赤龍神君)]의 독문무공이기도 하다. 이걸 내가 어떻게 알고 있냐면 적룡신군을 내가 죽였으니까.
그의 가슴팍에 적룡신공의 비급이 있었다. 쓸만해보여서 익혀두었던 건데 이렇게 쓸 줄은 몰랐다.
또 영약이 들어있는 상자가 없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뒤지면서까지 찾고 싶지는 않았다.
그대로 창고를 빠져나왔다.
다리에 기운을 몰아넣은 채 자리를 박찼다. 이제 빠져나가면 된다.
자리를 박차던 나는 순간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땅에 닿은 발의 움직임에 변화를 넣었다.
천기신보(天驥神步).
동시에 허리에도 힘을 주고 목에도 힘을 주었다.
목과 허리가 뒤로 젖혀지며 내 몸이 그 자리에서 회전한다.
그런 내 얼굴 위로 검 한 자루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즉시 채비를 갖춘 뒤 거리를 벌렸다.
한 남자가 놀라움이 가득한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미간이 구겨진다.
아까 지붕에서 이곳 상운 상단을 바라보았을 때 느꼈던 양광이현의 고수는 분명 세 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분명하다.
"...놈, 제법이구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없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글쎄."
"허어... 나이도 어려 보이는 놈이 손속에 자비가 없던데, 대체 어찌 이리도 악독하단 말인가. 당장 대답해라. 누가 사주한 것이냐."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사람은 없었다. 인기척도 없다.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은.
내게는 행운이고 저 남자에게는 불운이었다.
"입이 무거운 것은 인정하마. 그러나 고신까지 버티지는 못하겠지. 일단 제압해놓고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남자가 자리를 박찬다. 빨랐다.
얼마 전에 천화루에서 죽였던 정린보다 훨씬 강한 것이 분명하다. 그가 검을 휘두른다. 이 비루한 육체로는 궤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는 경험이 있다.
어디로 내려올지, 어떤 방향으로 휘둘러질지.
직감이 외친다.
몸을 옆으로 틀었다. 사각, 검 한 자루가 내 옆머리를 가볍게 베어낸다.
즉시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의 균형을 잡았다. 그 와중에 주변을 한 번 더 살폈다.
아무도 없다.
그럼 되었다.
단전에서부터 정순지기가 끓어오른다. 고리를 타고 증폭된다.
온몸에서 기운이 용솟음친다. 좁은 혈맥에 거대한 내기가 가득 들어선다. 두 눈이.
붉어졌다.
남자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뭐... 뭐냐 그것은...."
그 이상 남자는 말하지 못했다.
이미 내 손이 남자의 심장에 닿아있었다.
[아수라파천오결(阿修羅破天五訣)]
[삼결(三訣), 자양마염수(紫陽魔焰手)]
증폭된 정순지기가 내 손에서 뻗어나오며 남자의 몸으로 스며들어간다.
그렇게.
퍼어어어어엉-!!
남자의 육체가 폭발했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몸 안의 기운들이 혈맥을 비롯해 내 육체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미간이 구겨진다. 간만에 고통스러웠다.
현재 육체와 경지의 수준이 너무나도 낮기에 내 기운에 내가 잡아먹히게 생겼다.
빠르게 아까 챙겼던 함을 열어 금환단 하나를 꺼내 삼켰다.
혼원일체기공(混元一體氣功)을 운용하며 영약의 모든 기운을 찌그러지고 있는 혈맥으로 보냈다.
최대한 안정화 시켰다.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훔쳐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다리에 힘을 몰아넣은 뒤 자리를 박찼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한 번 더 박찼다. 박차고 또 박찼다.
몸 안의 내기를 전부 방출시켜 버릴 생각으로 전부 쏟아냈다.
하늘에서 여덟 번의 방향을 전환한 뒤 거대한 나무에 다리가 닿았다. 또 다시 자리를 박찼다.
소멸했던 과거 대곤륜의 운룡대팔식이 수주현 촌구석의 하늘을 어지럽힌다.
나는 그렇게 장령군으로 돌아왔다.
기회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대체 이도 이놈은 어디로 간 것이야!"
이세극의 외침이 이씨 세가 곳곳에 울려 퍼졌다.
모두는 생각했다.
아, 삼공자가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변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사람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천화루라는 그 거대한 돈줄을 그대로 불태워버리나.
이건 아주 막나가기로 작정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미친놈이라는 단어가 너무 잘 어울렸다.
애초에 얼마 전 대총관과 총관 한명을 무참하게 죽인 이도에게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는 총관들은 삼공자가 유배당할지 아니면 즉결 처형당해 오늘자로 명을 달리할지 내기 판이 벌어질 정도였다.
아침.
해가 모습을 드러내는 그 시각, 이도가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장 가주 전으로 불려갔다.
총관들은 이제 들려올 소식을 기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