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은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씨 부인이 이세극에게 독을 먹이고 이세극이 쓰러졌다.
이후 상씨 부인은 의원들을 불러 이세극을 침소로 옮겼는데, 이 과정에서 최대한 입을 틀어막아보려 했지만 그게 쉬울 리 없다.
정확히 이 시점에서 이씨 세가내부에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장씨 세가와 혁리세가가 알게 되었다.
이후 이 두 개 세가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같은 행동을 했다.
장씨 세가의 가주인 장막수와 혁리세가의 가주인 혁리원평이 서로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다.
지금 당장 만나자고.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일단 만나자는 서로의 서신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도착했고 두 남자는 순식간에 비밀회동을 갖게 되었다.
"이씨 세가에서 변고가 터졌소. 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혁리가주께서도 이씨 세가의 상단과 그들의 자금을 눈독 들이는 것으로 아오."
혁리원평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서로가 통했으니, 길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이참에 이씨 세가를 무너뜨리고 반반씩 가지는 것이 어떻겠소?"
"으음..."
"이보시오. 혁리가주, 그대가 신중한 것은 내 잘 알지만 이건 두 번 다시없을 기회요. 솔직히 이 기회를 계속 노려 오시지 않으셨소이까."
"틀린 말은 아니오."
"그렇다면 왜 망설이시는 거요. 장령삼대세가, 이 단어가 저는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장령군을 지배하는 가문은 총 두 개면 됩니다."
장막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장씨 세가, 혁리세가, 우리 한번 손잡고 하늘 높이 날아봅시다."
혁리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가문 내에 있는 무인들을 이끌고 이씨 세가를 급습하면 되니까.
서로 결의를 다진 뒤 각자의 세가로 돌아갔는데, 여기에서 조금 문제가 생겼다.
혁리원평이 생각을 달리 먹은 것이다.
안 그래도 신중을 기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크게 움직여야 할 일은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설령 장씨 세가가 이씨 세가를 전부 집어삼킨다 해도 그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소화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법.
움직이려거든 그때 움직이는 것이 낫다.
그렇게 혁리세가가 빠졌다.
장씨 세가는 그럼에도 움직였다.
가문의 무사들 전부를 동원해 이씨 세가를 급습한 것이다.
그나마 있던 총관 몇 명을 죽이고, 하인 몇 놈과 일반 무사 몇 명을 죽였다.
어차피 이씨 세가의 세력은 상운 상단으로 전부 이동한 상황이다,
손쉽게 점령을 마쳤다.
장씨 세가의 가주 장막수는 묵묵히 가주의 침소로 향했다.
그곳에서 죽은 듯 누워있는 이세극을 발견했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보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보시오 이가주, 내 목소리 들리시오?"
"...끄...으..."
"들리시나보구려. 거참, 그러게 왜 주제에 맞지도 않는 욕심을 부려가지고 이런 사달을 만드시는 거요."
"..."
"소가주 자리를 그냥 미리 확정지어 놨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오."
장씨 세가는 정말 그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미리, 여러 번의 연습을 거쳤으니까.
이씨 세가 내부에서 사달이 날 것은 이미 확정적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반드시 일어난다.
장남과 차남의 나이가 곧 스물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
보통 혼인까지 하고도 남을 나이인데, 아직 소가주조차 되지 못했다?
정말이지.
"어찌 이 미래를 예견하지 못하신 거요. 고작해야 상단 두 개를 손안에 쥐고, 설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드셨소?"
핏발선 이세극의 두 눈에는 웃고 있는 장막수가 비춰지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은 다 이가주가 자초한 일이오."
그렇게 말한 장막수가 천천히 침소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던 장막수는 이내 원하던 것을 찾아냈는지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것을 들고 다시 이세극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보자... 이씨 세가의 장부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있을까."
장막수는 여유롭게 장부를 훑었다.
천천히 넘기면서 으으음, 이런 추임새도 넣어주다가 미심쩍은 게 생겼는지, 이세극에게 물었다.
"이보시오 이가주. 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여기에 적혀있는 이건 대체 무엇이오?"
"..."
"나도 나름 상단 몇 개와 대장간 몇 개, 그리고 객잔도 몇 개 운영하는 입장으로서 지금 이 장부는... 많이 이상해 보이는구려."
멀리 갈 거 없이. 딱 하나가 이상했다.
"'재료비', 이건 대체 무엇이오? 설마 음식을 만드는데 드는 재료는 아닐 것이고, 이거 금액이... 장난이 아니구려."
장령삼대세가중에서 무력이 가장 뛰어난 것은 혁리세가고 그 다음으로 뛰어난 것이 장씨 세가다.
이씨 세가는 무력으로 두 세력에 비해 많이 밀린다.
그러나 이들은 돈이 많다.
"...매달, 이 재료비라는 것에 은자 오백 냥 이상씩 쓰고 있었는데... 허어... 이거 대체 얼마요?"
남는 게 시간이라, 장부 첫장부터 쭉 훑으면서 계산해보았다.
"...말이 안 나오는구려. 은자로만 따져도 대략 10만 냥... 금자 한 개가 은자 스무 개니까, 금자로 따지면 금자 5천...? 이보시오 이가주, 미치신거요? 대체 무엇이기에 재료비가 금자 5천 냥이나 한단 말이오."
이세극은 답을 할 수 없었다.
단혼마독은 그 정도의 독이다.
그저 이 상황 자체에 분노했다는 감정 표현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으음... 그건 차후에 차차 알아보도록 하겠소. 고생 많으셨소이다."
상운 상단에서 이원을 비롯한 이씨 세가의 세력들이 출발한지는 한참 되었다. 하지만 천천히 쉬면서 오는 것 같다는 전서가 있었으니, 대략 지금쯤 도착하지 않았을까.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침소의 문이 부서지며 한 남자가 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그는 데굴데굴 구르더니 장막수의 발치에서 멈췄다.
그게 무엇인지, 아니, 그게 누구인지 확인한 장막수가 크게 놀랐다.
"운...운룡아!"
장씨 세가의 차남, 장운룡이었다.
그가 피떡이 되어있는 상태로 끅끅 거린다.
"...맙소사..."
경악하는 것이 당연했다.
왜냐하면 장운룡의 두 눈은 파여 있었으며 사지는 박살나있었고 단전이 위치해있어야 하는 하복부 쪽에서는 피가 미친 듯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니까.
검으로 한번 관통당한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짧게 묶은 머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도였다.
"네놈이... 이렇게 만든 것이냐!"
이도가 피식 웃는다.
"그럼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이놈... 내 네놈을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 놓을 것이다."
"말로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장막수가 빠르게 검을 꺼내드는것이 보인다.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아직 생일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선물을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선물?"
"장씨 세가를 저에게 통째로 넘겨주시려는 거잖습니까."
"...이 미친 새끼가..."
"감사한 마음이 너무나도 크니, 특별히 고통 없이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때였다.
장막수의 두 눈이 이도의 복부를 향했다.
붉었다.
심지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게 확실하다.
저 정도 상처면 걸어 다니는 것이 힘들 지경일 텐데, 조금 놀라웠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장막수가 자리를 박찼다.
장씨 세가는 검을 쓴다.
이름하여 비봉검법(秘鳳劍法).
숨겨놓은 검을 봉황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일시에 펼치는 기술로서 나름 꽤 이름이 있는 무공이었다.
이 무공으로 장씨 세가의 장남이 제왕검종에 들어간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장막수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싸움의 순간에서 이런 반응은 필패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럴만했다.
지금 이도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눈 전체가 붉게 물들어있었고 그의 양손도 물들어있었다.
이도가 왼손을 들어올렸다.
마치 짜 맞춘 것처럼 장막수의 검이 이도의 손에 잡힌다.
터억.
그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순간 이도의 손이 장막수의 목을 움켜쥔다.
"...자...잠시만..."
의미 없었다.
콰드드득-!
장막수의 목이 그대로 찢어진다. 사방으로 핏물이 비산했다.
툭 떨어지는 장막수의 머리와 힘없이 쓰러지는 육체.
두말할 필요 없이 장막수는 사망했다.
이도가 숨을 몰아쉬었다.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는 더욱 더 많아졌고 팔은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과부하가 온 거다.
내색하지 않았다.
이딴 것에 지쳐 쓰러질 정도였으면 광존이라는 별호는 얻지 못했을 거다.
이도는 매 순간 이렇게 살아왔다.
그대로 걸어갔다.
붉어졌던 눈과 팔이 원상태로 돌아온다.
손에 쥐고 있던 장막수의 검을 고쳐 쥔 뒤 아래로 내려찍었다.
콰직-!
검은 거의 죽기 일보직전이었던 장운룡의 목에 박혔다.
그 상태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도가 천천히 말했다.
"가문의 위계질서는 분명 무너져있었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수련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수련도 수련이지만 그 전에 내부 단속부터 하셨어야죠."
"...쿨럭."
"도와드리고 또 도와드렸는데, 꼴이 뭡니까, 이게."
핏발선 눈으로 이도를 바라보고 있던 이세극의 두 눈에 희망이 깃든다.
살아날 수 있다.
막내 덕분에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 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희망이 무색하게도 이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이세극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시기가 문제였을 뿐, 상씨 부인이 독을 쓸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세극의 옆에 앉은 이도가 묵묵히 말을 이었다.
"단혼마독, 대단한 독이죠. 무림 자체에 거의 없는 독인데... 설마 그걸 구해 올 줄은 몰랐습니다."
"..."
"살려드릴 생각도 있긴 했습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결국 제 아버지 아니십니까. 천륜이라는 게 있는 법이라 나름 최대한 마음을 넓게 쓰자 다짐했거늘, 그런데 돌아오는 게 뭐였습니까."
"..."
"천화루를 가져와도 빼앗고, 약속했던 백년 삼을 달라 해도 주지 않고, 제가 살려드린다면 아마 계속 같은 일이 반복 될 겁니다."
"..아...니...다..."
"기회는 많이 주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
"단혼마독은 말입니다. 문파에서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이들에게 내리는 벌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지의 감각이 사라지고 단전이 부서지고, 미동조차 할 수 없는데 정신은 멀쩡한, 그러면서도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한달 이상이나 겪어야 안식에 들 수 있죠. 제게 해준 것은 없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 고통 없이 갈 수 있도록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도의 손이 이세극의 심장에 포개어진다.
"장씨 세가가 이씨 세가를 습격하면서 가주님을 죽였습니다. 이원은 오늘부로 가주가 될 것이고 장씨 세가는 이씨 세가에 흡수될 겁니다. 장령군 전체가 제 손에 떨어지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천천히 내기를 주입했다.
울컥, 울컥.
이세극의 입에서 핏물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아마 아버지는 보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게 마음 좀 곱게 쓰시지 그러셨습니까."
이세극의 손이 이도의 팔을 붙잡았다.
마지막 불꽃이다.
귀찮다는 듯 그 팔을 뿌리 챈 이도가 툭 던지듯 내뱉었다.
"잘 가십시오."
머지않아.
이세극이 고개를 떨궜다.
천면살수객(千面殺手客)
한 박자 늦게 침소로 들어선 이원과 운씨 부인은 볼 수 있었다.
먼저 침상에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핏발선 두 눈을 부릅뜬 채 미동조차 없는 그 남자는, 입가에서 상당한 피를 토해냈는지 곳곳이 붉었다.
이세극이었다.
죽은 것이 확실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 보고있는 이도.
비록 뒷모습뿐이지만 이 침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도가 무엇을 했는지 이 두 사람은 안다.
이씨 세가를 점령했던 장씨 세가의 무인들은 총 200명이었다.
그중 50명을 이도가 혼자 죽였다.
그들을 무참히 썰어대며 가주전에 당도했고 이곳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죽어있는 또 다른 시신이 보인다.
장막수와 장운룡이었다.
....상황에 맞지 않지만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세극을 죽인 것은 누구인가.
독을 먹인 건 상씨 부인이지만 마지막 숨통을 끊은 것은 설마 저기 있는 막내가 아닐까.
이미 죽은 이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말인 즉, 가주를 죽인 것은 이도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이도가 묵묵히 말했다.
"정리는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끝났다."
"잘 하셨습니다. 둘째어머니."
"...말하거라."
"둘째 형님이 오늘부로 소가주가 아닌 이씨 세가의 가주가 되었습니다."
"..."
"승계식을 준비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마."
조용히 있던 이원이 물었다.
"장씨 세가는 어찌 할 것이냐."
뭐 그런걸 묻냐는 듯, 이도가 답했다.
"멸문시켜야지요."
"..."
"무사들에게 이르십시오. 두시진 정도 휴식을 취하라고."
"...그거면 되겠느냐."
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싸늘한 두 눈이 이원을 직시한다.
"오는 길이 험했고 전투를 치렀는데 연달아 한 번 더 치르면 제대로 된 싸움이 되지 않겠지요."
"..."
"그러나,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닙니다. 두시진이면 충분히 많은 시간입니다. 저는 잠시 운공을 취할 터이니 가서 병사들을 다독이십시오. 이 가문의 가주 아니십니까."
가주가 되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이게, 가주이면서 가주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알겠다. 그렇게 하마."
이원과 운씨 부인이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이도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잠시 멈칫했다.
바닥에 떨어진 장부가 보인다.
그대로 집어 들었다.
조금 궁금했다.
이씨 세가는 분명 돈을 많이 버는 집안인데 이상하게 사용하는 돈은 인색했다.
전부 어디 금고 같은 곳에 숨겨두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이도는 그냥 묵묵히 장부를 펼쳐들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재료비?"
장막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도도 이상함을 느꼈다.
말이 안 되는 액수다.
이건 정말 이상했지만 일단은 덮어두었다.
이 일은 장씨 세가의 일까지 정리하고 확인해보면 된다.
그대로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상운 상단에서 가져온 영약들과 전에 상운 상단을 털며 얻어냈던 금환단 하나.
이 전부를 그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이미 육체와 정신은 준비가 끝났다.
영약의 기운으로 막혀있는 나머지 모든 혈맥들을 모조리 뚫어버린 뒤, 연기사경에 진입할 것이다.
두시진이면 충분하다.
눈을 감았다.
반각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복면을 쓰고 몸에 착 달라붙은 복장을 한 남자가 미끄러지듯 침소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도를 바라보다가 벽에 몸을 숨겼다.
***
장령군 전체가 떠들썩한 것과는 다르게 혁리세가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있었다.
가주 혁리원평이 침소에 죽은 듯 누워있는 차남을 바라보았다.
숨은 쉬고 있다.
그냥 잠을 자고 있는 거다.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왜 혁리원평은 장씨 세가와 함께 이씨 세가를 습격하지 않았는가.
그가 신중한 것은 맞지만, 분명 이씨 세가는 거의 빈집이었다. 장씨 세가의 병력과 혁리세가의 세력이 뭉친다면 이도는 물론 남은 이씨 세가의 세력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었다.
못 먹어도 시도하는 게 맞다.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으니까.
그러나 혁리원평은 모든 계획을 취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남자의 방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혁리원평의 목에 칼을 겨눴다.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그게 중요하냐고 답했고 혁리원평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씨 세가는 가만 놔두거라.
목소리가 굉장히 중후했고 등 뒤에 있음에도 압도적인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고인은 누구시오.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혁리원평, 나는 장령군이 이 이상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모든 계획을 취소해라. '그'와 척을 지지 말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건 승산이 높은...
-정말 승산이 높다고 생각하나?
-...
-나조차 그의 한계를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너처럼 얼어있는 것과 다르게 그는 내 살기를 우습게 여겼으니까. 너와 그는 근본적으로 그릇이 다르다. 행동 방식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살고 싶었다.
뒤에 있던 남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내 약속하지. 혁리세가가 이씨 세가의 싸움에 끼어들게 된다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저기 쓰러져있는 차남은 단순히 수혈을 짚었을 뿐이지만 다음에는 내가 사혈을 짚을 필요도 없이 죽을 것이다. 누구에게 죽는지는 상상에 맡기지.
목에 겨눠져있던 칼이 거둬진다.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혁리원평의 머릿속으로 남자의 목소리가 꽂힌다.
-명심해라.
그렇게 사라졌다.
그래서 계획을 취소한 거다.
혁리원평의 손이 덜덜 떨린다.
대체 어떤 고강한 고수이기에 이씨 세가를 옹호하는가.
"...묘만리...? 아니, 그 남자일리 없다."
머리를 짚었다.
그럼 대체 누구지?
골이 아파왔다.
***
눈을 떴다.
그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벽을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했다.
"다시는 무림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늘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을 쓴 남자였다. 체격 전체가 굉장히 얇았는데, 정체를 몰랐더라면 정말 다른 사람으로 알았을 것이다.
"안돌아오려고 했는데, 처음으로 받아들인 제자가 애걸복걸을 하더군요."
복면을 벗지는 않았으나, 목소리가 똑같았다.
천면살수객 황노백.
"조현이?"
"예. 제발 가서 도와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쯧, 그냥 오랜만에 움직였습니다."
"그러한가. 호법을 서준 것에 대해서는 고맙다. 이 보상은 추후에 두둑히 하지."
"됐습니다. 객잔 열도록 돈도 두둑히 주셨으니 그냥 그 은혜 갚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노백이 말을 잇는다.
"잘 모르실 것 같아 말씀드리는 건데, 장씨 세가와 함께 계략을 짰던 혁리세가는 제가 중간에서 잘 정리했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허어, 대체 얼마나 피를 봐야 멈추실 겁니까."
무시하고 복부의 상처를 살폈다.
완벽하게 아물지는 않았으나, 전보다 훨씬 낫다.
그럴 만도했다.
지금 나는 임독양맥을 타통했다. 끝이 아니었다. 명치 한중간에 작은 단전 하나가 더 생겨나있었으니, 이로서 온전한 연기사경에 오른 것이다.
임독양맥을 타통하면서 남은 영약들로 몸 안의 상처를 치료했다.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
물론 외부보다는 내부의 상처가 더 극심했기에 외부를 전부 치료하기에는 약의 기운이 부족했다. 그래도 만족스럽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지만... 연기사경에 오르신 거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그런데, 올해 나이가 열일곱 아니십니까?"
"맞는데. 문제가 있나?"
"문제... 있죠. 그 나이에 연기사경에 진입한 후기지수는 내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웃고 말았다.
"네가 들어본 적이 없다하여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열둘의 나이에 연기사경에 진입하고 열여덟의 나이에 천지사경에 진입한 사람을 알고 있다."
이 말에 황노백이 크게 놀랐다.
"...그런 사람이 존재합니까?"
"존재한다."
"..."
"그나저나, 정말 무림으로 복귀하지 않을 생각인가?"
"하게 되면 요리하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군. 그럼 되었다. 조만간 객잔에 들릴 터이니 가보거라."
"...거참...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황노백이 자리를 박차려던 그때였다.
잠시 자리에서 멈춘 그가 깜빡했다는 듯, 내게 말했다.
"제왕검종 사람 중 하나가 장씨 세가에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황노백이 허탈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제왕검종까지 건드리신다면 그때는 저도 어떻게 해 드릴수가 없습니다. 만약 제왕검종이 장령군으로 몰려온다면 아무리 조현의 부탁이 있다 해도 저는 외면할겁니다."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노백."
"예. 공자님."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있었나?"
"...없었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내가 하는 일들은 너희와 무관하다. 조현은 내 사람이긴 하나 너의 사람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는 피바람이 가득할 테니 이곳으로 들어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으나 강요는 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이미 생겨버린 은원에 제왕검종이 숟가락을 올린다면 나는 제왕검종도 부숴버릴 것이다. 싸움의 시작은 그들이 했을지라도 멈추고 말고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싹을 짓밟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
"...공자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해라."
"너무 곧게 뻗은 검은 언제고간에 반드시 부서지기마련입니다."
"굽힌다면 후회를 남기게 되겠지."
"죽는 것보다 차라리 후회를 남기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고개를 저었다.
"후회 없이 살고자함에 있어 어찌 굽힐 수가 있겠는가. 부러지고 박살날지언정 나는 절대로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무(武)다."
"...패도를 걷다가 마도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무너지지 않았는데, 패도건 마도건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그 말에 큰 깨달음을 얻은 건지 황노백이 묘한 감탄사를 터트린다.
"...분명 열일곱인데.. 혹시 반로환동 하신 노고수십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려거든, 가라."
"예. 갈 겁니다. 정말이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이 다 끝나시거든 객잔으로 오십시오. 그때 드리려다 말았던 동파육을 다시 해드리겠습니다."
"오냐."
그렇게 황노백이 사라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채비를 마친 이씨 세가의 무사들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 상기된 표정의 이원도 보였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이원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끝났다."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목적지는 장씨 세가다.
제왕검종
장씨 세가의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남인 장운룡과 가주인 장막수의 사망 소식이 장씨 세가에 전달되었으니까.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이건 너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도라는 놈의 힘이 상상 이상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주천경에 불과한데, 단신으로 장씨 세가 최정예 무사들인 단리대의 대원들을 무려 50명이나 죽였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다.
그게 손쉽게 가능했더라면 무인의 경지가 나눠질 이유도 없고 강한 무인을 세가 내로 들여오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 정도로 비상식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단리대 대원 50명을 죽인 이도가 연이어서 차남인 장운룡과 가주인 장막수를 죽였다고 한다.
그 둘의 경지도 주천경이다.
이걸 어떻게 머리로 이해할 수가 있겠나.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든 대비해야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망치는 것.
그나마 남은 식솔들을 데리고 장령군을 멀리 벗어나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 처음에는 이 선택지를 고려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선택지가 생겨났다.
장씨 세가의 가주인 장막수의 아버지는 장태산이라는 이름의 인물로서 50대의 이른 나이에 아들인 장막수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준 뒤 유유자적 생활하던 사람이었다.
이젠 차남도 없고 가주도 없다. 소가주인 장남이 제왕검종으로 갔으니 어쩔 수 없이 장태산이 장씨 세가의 가주 역할을 해야 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우연의 일치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필연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운이 좋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왕검종의 일대 제자 원후.
그가 약 한 시진 전에 장씨 세가에 방문한 것이다.
'장운연'은 제왕검종에서도 매우 촉망받는 재능의 남자다.
이미 오룡봉성에 진입했고 삼화취정을 앞두고 있다.
중단전과 하단전을 일체화 시키는 작업에 돌입했다고 하니, 촉망받을 수밖에 없다.
향후 천하 십대고수가 될 것이 가장 유력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끝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위의 평가들은 제왕검종 밖에서의 평가다.
제왕검종 내부에서는 이미 차기 종주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의 인품? 더 말할 것도 없다.
멀리 갈 거 없이 이 자리에 원후가 왜 와있겠나.
수련하기에 바쁜 장운연에게 부탁을 받고 온 거다.
목적지는 장령군이 아니었는데, 지나가는 길에 장령군에 들러 자신이 제왕검종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무슨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달라는 그의 부탁에 원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했다.
그리고 우연찮게 지금 사건이 터졌다.
장씨 세가의 가주가 사망하고 장운연의 동생이 사망했다.
그리고 장씨 세가의 무력부대도 거의 전멸했다.
가문이 멸문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걸 해결해야한다.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으니 멸문이라도 막아야한다.
태상 가주의 손을 꼭 붙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제왕검종의 사람입니다. 또한 장운연님도 제왕검종의 사람입니다. 멸문만큼은 반드시 막겠습니다. '우리'가 장씨 세가와 함께하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구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문이 벌컥 열린다. 장씨 세가의 하인이 사색이 된 얼굴로 외쳤다.
"이씨... 이씨 세가의 무사들이 오고 있습니다!"
원후의 표정이 결연해진다.
허리춤의 검을 움켜잡으며 몸을 돌렸다.
이번 위기를 해결 한 뒤, 차기 종주로 유력한 장운연의 신임을 받을 것이다.
날아오를 일만 남았다.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
맨 앞에 있던 이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태상 가주 장태산, 당신이 아직 장령군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놈... 여기까지만 해라. 당장 무사들을 물러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무림에는 법도와 질서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 이대로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끝을 봐야겠다? 네 녀석이 지금 이러고도 무사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당연히 무사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허어,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보았나. 관청에서 관리가 파견될 것이다. 장령군을 이토록이나 시끄럽게 만들었으니 네놈도 분명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도가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렸다.
"시작은 장씨 세가가 했는데 어찌 책임을 저희에게 물으십니까. 이씨 세가를 전부 집어삼키려했으니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도 물러서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그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예.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장씨 세가의 가주인 장막수가 저희 이씨 세가의 모든 무사들과 식솔들에게 존경받는 가주님을 살해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인 것이냐-! 이세극이 죽은 것은 너희 집안 내부 싸움 때문이 아니더냐!"
"무슨 그런 해괴한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저희 집안 첫째와 상씨 부인이 독을 쓴 것은 맞지만 그 독이, 사실은 '산공독(散功毒)'입니다."
"...뭐?"
"그냥 내공을 흐트러뜨리는 별거 없는 독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믿었던 장남과 상씨 부인의 행동에 충격을 먹고 자리에 몸져누우신 저희 가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마음이 너무 넓으신 분이라 상씨 부인과 첫째를 용서하셨지만 저와 둘째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두 연놈을 추살했고 뒤이어 병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상운 상단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곳으로 토벌하러간 것 입니다. 그런데 비어 있는 저희 이씨 세가를 장씨 세가가 습격하였고 장막수가 저희 가주님의 심장에 칼을 꽂았습니다."
"...상황을... 어찌 그리 조작하는 것이냐. 관리들이 바보로 보이더냐. 그렇게 허술한 상황을 그들이 믿겠느냐 이 말이다!"
"이보시오 태상 가주."
"...."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먼저 드렸어야했는데, 조금 늦었습니다. 장막수가 저에게 장씨 세가를 통째로 선물로 주었는데, 빈손으로 오면 그게 사람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도 선물을 좀 준비해보았습니다. 염길성."
염길성은 이씨 세가의 하인 이름이었다.
이도의 처소 청소를 비롯해 이도에게 여러 소식을 알려주는 등의 일을 배정받은 남자로서 이도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하인중 하나다.
뒤에 있던 그가 냉큼 다가오며 말했다.
"예. 공자님."
"아까 준비했던 거 이 앞에 내려놔."
"예."
염길성이 곧장 뒤에서 두 개의 주머니를 들고 오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익숙한 과정이었다.
상운 상단과의 싸움을 시작할 때도 이 과정이 벌어졌었다.
제대로 묶지 않은 건지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줄이 풀려 안에 있던 내용물이 공개되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것은 장막수와 장운룡의 목이었다.
"아... 아아아!!"
장태산이 자리에 주저앉는다.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드시나봅니다. 그렇게 대성통곡 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씨 세가가 빈집이었던 것처럼 지금 장씨 세가가 거의 빈집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인 몇 명이 보이긴 하나 수준이 낮다.
이 모든 것들을 죽이는데 반각도 안 걸릴 것이 확실했다.
이도가 시작하려던 그때였다.
"허어... 어찌 무인이라는 작자가 이 정도로 사악하단 말이오."
긴 머리에 흰색 도복을 입은 남자였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이도의 시선이 그에게 옮겨진다.
누구냐고 묻는 그 눈빛에 남자가 답했다.
"제왕검종의 일대 제자, 원후라고 하오."
"그래서?"
"..."
"장씨 세가와 관련이 없는 놈이면 꺼져라. 귀찮게 하지 말고."
"...대화에 끼어든 것이 예의가 아니었으니, 내 한번은 넘어가드리겠소. 이름이 이도라 하였는데, 맞소?"
"맞다."
"그런데, 당신이 이씨 세가의 소가주요?"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이도가 피식 웃었다.
"어찌 소가주도 아닌 사람이 대표인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이오. 거기 옆에 있는 소가주님은 배알도 없으시오? 왜 조용히 있냐 이 말이오."
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이도에게 잡아먹힌 지 오래다. 부정할 생각도 없고 거역할 생각도 없다. 그래서 그냥 무시했다.
그런 이원의 태도가 이도는 참으로 마음에 들었나보다.
웃으며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괜히 말 질질 끌지 말고 본론만하지."
"본론... 좋소. 장씨 세가는 오늘 많은 것을 잃었소.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시오."
"왜 그래야하지?"
"방금 말했지 않소. 많은 것을 잃었다고. 당신이 진정 의와 협을 아는 무인이라면 이쯤에서 멈추시는 게 맞소. 무엇보다 우리 제왕검종과 장씨 세가는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그것이 당신들에게도 나쁘지 않을 거요."
이도가 뒤를 둘러보았다.
조용했으나, 대부분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제왕검종.
이 무림의 팔대종문중 하나인 그 이름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
다시 원후를 바라보았다.
"잃은 것으로 따지면 우리 이씨 세가가 더 많을 터인데, 이대로 물러나라? 제왕검종의 수준이 이토록이나 추락해있었을 줄이야."
"...뭐요?"
"장씨 세가가 이씨 세가의 가주를 참살했다. 비어있는 이씨 세가를 점령했고 하인들과 무사들을 죽였다. 이대로 물러나라고? 제왕검종이 같은 경우라면 물러서겠나?"
"미안하지만 이씨 세가는 제왕검종이 아니오. 어찌 팔대종문중 하나인 제왕검종과 비교하는 것이오. 아직도 모르시겠소? 장씨 세가를 건드리면 제왕검종의 한을 사게 되는 것이오. 장씨 세가의 소가주가 누구요. 차기 종주가 될 사람으로 유력한 장운연이오. 그와 그의 스승님이신 금천신검(金天神劍)님이 분명 직접 오셔서 이씨 세가를 무너뜨릴 것이 분명한데, 그 한을, 당신은 감당하실 수 있겠소?"
"감당이라...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물러나면 제왕검종의 원한도 사라지나?"
원후는 순간 말문이 막혀왔다.
이도가 실소를 터트린다.
"당연히 아니겠지. 여기서 무엇을 하건 결국 생겨버린 은원은 여전 할 것이다. 그 은원은 고작 너따위 놈이 내뱉는 말로 해결 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도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원후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가, 원후를 내려다본다.
"그깟 놈들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말을 조심하시오.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는 수가 있으니."
이미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려둔 원후였다.
제왕검종은 검을 잘 쓴다.
발검? 발군이다.
베어내는 것? 더 말할 것도 없다.
제왕검종의 일대 제자면 절기중 하나인 창궁극쾌검법(蒼穹極快劍法)을 익힌다. 순식간에 뽑아들어 순식간에 적을 베어내는 극쾌의 검술.
원후는 이 자리에서 검을 뽑으면 이도의 목을 딸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꺼져라. 제왕검종마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마두가 따로 없구려. 안되겠소. 당신을 이 자리에서 죽여 놓는 것이 내게 마음이 편할..."
"그런데, 장씨 세가를 멸문시키면 장운연과 금천신검(金天神劍)이 온다고 했나? 그럼 너를 죽이면 누가 오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검황(劍皇), 그 늙은이가 오나?"
"...말을 조심하라 분명 말했거늘, 당신은 모든 기회를 저버렸소."
원후는 이미 마음을 먹었다.
그가 검을 뽑아들었다.
이도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제왕검종의 절기중 하나인 창궁극쾌검법을 펼쳤다.
아니.
펼치려고 했다.
콰직-!
지켜보던 이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후는 안다.
검을 뽑아들고 휘두르던 그 순간에 이도의 주먹이 움직였다.
그 주먹이 원후의 목젖을 강타했다.
숨이 턱 막힌다.
즉시 이도의 반대쪽 손이 검을 들고 있던 원후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 늙은이는 요즘도 처녀들 겁탈하고 다니나?"
"무.. 쿨럭, 무슨 말..."
"되었다."
이도의 하단전이 꿈틀거린다.
피어오른 정순지기는 곧장 고리를 타고 중단전으로 이동했다.
순식간에.
거의 폭발적인 정순지기가 이도의 주먹에 몰린다.
팔을 뒤로 뻗은 뒤, 그대로 내질렀다.
꽈아아아앙-!!
원후의 머리가 폭발했다. 머리 잃은 시신을 쓰레기 버리듯 옆에다 대충 던져버린 이도의 행동에 모두가 경악했다.
이도가 말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이씨 세가의 무사들이 정신을 차린다.
장태산을 바라보며 이도가 말을 이었다.
"장씨 성을 쓰는 놈들을 전부 죽여라."
이씨 세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멀리 있는 칼보다 바로 앞에 있는 주먹이 더 무서운 법이다.
제왕검종의 위협? 그딴 건 모른다.
지금은 이도가 더 무서웠다.
철혈마제
적나라의 북쪽에는 만련산이라는 곳이 있다.
이 만련산은 위로는 마수군, 남쪽으로는 수미군, 서쪽으로는 환군, 동쪽으로는 안성군의 정확히 중앙에 위치한 산으로서 이 산에는 그 유명한 제왕검종이 자리해있다.
동서남북으로 그 거대한 땅들에도 수많은 문파들이 있지만 각 지역에서 주름잡는 이들조차 자신들이 그 지역의 으뜸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감히 그럴 수가 없다.
이 네 개의 지역의 으뜸은 제왕검종이다.
제왕검종은 만련산에서 이 네 개의 지역을 지배하다시피 한다. 적나라의 황실조차 감히 어쩌지 못하는 세력.
그것이 제왕검종이다.
사실 제왕검종뿐만이 아니라, 무림에 존재하는 팔대문종은 전부 이런 식이다.
만련산에서 긴 머리에 백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절기중의 절기인 천풍제왕검법(天風帝王劍法)이 제왕군림보(帝王君臨步)와 함께 펼쳐진다.
그의 검 끝에 선명한 강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치켜든 검이 우뚝, 멈췄다.
남자의 두 눈이 번뜩였다.
정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베어 낼 것처럼, 크게 내려찍었다.
콰아아아앙-!!
정면에 있던 절벽이 그대로 무너진다. 그 여파로 울리는 엄청난 굉음에 천지가 진동 할 정도였다.
천천히 검을 갈무리하며 몸을 곧게 펴는 남자의 귓가로.
짝짝짝.
여러 명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린 남자가 크게 놀란다.
그는 곧장 포권을 취했다.
"종주님을 뵙습니다."
"허허. 되었다."
흰색 머리에 흰색 수염.
굉장히 자애로운 듯한 모습의 노인이었지만 그의 신체는 자애와는 거리가 멀었다.
거의 7척에 달하는 상당한 신체와 허리춤에 매어져있는 6척에 달하는 장검까지.
이 남자가 바로 천하십대고수 검황, 군무결(涒無缺)이었다.
"너의 성취가 참으로 놀랍구나. 벌써 삼화취정(三花聚頂)이라니, 마 장로가 참으로 기뻐하겠구나."
"과찬이십니다."
"어허, 과찬이라니, 이 녀석아 네 나이에 삼화취정에 이른 이는 극히 드물다. 겸손도 좋지만 인정할 땐 그래도 인정해야하는 법이다. 허허허, 정말이지... 감탄이 나오는구나. 네 녀석 정도면 향후 천하십대고수를 논할만한 재목이 분명하도다."
"과한 칭찬에 소인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녀석.."
군무결이 장운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건 마 장로의 복뿐만이 아니라, 우리 제왕검종의 복이기도 하다. 내 종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보거라."
장운연은 잠시 고민하는듯하다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향에 좀 다녀오고 싶습니다."
"음... 고향이라면 장령군을 말하는 것이냐."
"예."
"허나, 지금은 중요한 시기다. 팔대문종중 두 곳이 천년마교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머지않은 시일 내에 큰 전쟁이 벌어질 터, 당분간은 검종에 남아있거라."
장운연은 불만족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검황은 이곳 제왕검종에서 절대자나 다름이 없다. 그가 그렇게 말하면 그게 맞는 것이다.
"예. 그럼 고향으로 가는 것은 추후로 미루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하였다. 그것 말고 따로 원하는 것은 없는 것이냐."
"...조심스럽지만, 한 가지 청이 있긴 합니다."
"말해보거라."
"천서각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으음..."
"세시진 정도면 됩니다."
천서각은 제왕검종의 무공서들을 정립해놓은 곳이다.
과거 이름을 떨쳤던 고수들의 무공은 물론 제왕검종 출신의 고수들이 남겨놓은 무공들이 즐비하다.
군무결이 웃는다.
"좋다. 천서각의 입각을 허락하마. 단 시간은 세시진이 아니라 여섯 시진이다. 고향으로 가는 것을 막았으니 그 정도 보상은 해주어야하지 않겠느냐."
"감사합니다."
"그래, 지금 당장 들어가보거라."
"예."
그렇게 장운연을 천서각으로 보낸 군무결이 절벽위에서 뒷짐을 진다.
언제 봐도 질리지가 않는 절경이었다.
그런 군무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백발인 군무결과는 다르게 흑발의 노인이었고 마찬가지로 신체가 굉장히 다부진 남자였다.
이 남자가 바로 제왕검종의 팔대 장로중 하나인 마흑랑이다.
장운연을 처음으로 발굴하여 제왕검종으로 데려온 그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종주님. 정말 숨기는 게 맞는 겁니까?"
군무결이 고개를 돌렸다.
잔뜩 걱정하고 있는 마장로의 얼굴이 보인다. 군무결이 한숨을 터트렸다.
"알지 않는가. 삼화취정에 오른 녀석의 재능은 비범하다는 것을."
"알지요... 알지만 그래도 알아야할 사실이잖습니까."
"굳이 지금 알아도 되지 않는 일이오. 가문의 멸문을 지금의 녀석이 받아들이면 잡생각만 머릿속을 어지럽히겠지. 그리되면 성장은 멈출 것이고 그 정체기가 계속 이어 질수도 있소. 잘 알지 않소."
"알지만... 하아, 어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참으로 의문입니다. 가문의 멸문이라니..."
군무결도 안타까웠다.
장운연의 재능은 의심할여지 없이 대단하다.
그리고 지금 그 재능을 계속 꽃피워야한다.
가문이 멸문 당했다는 소식을 녀석이 알게 되면, 그건 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고 성장이 멈추는 것을 넘어서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다.
그건 아니 될 일이다.
"그리고 일대 제자 원후도 죽었다는데, 그 흉수의 이름이..."
"이도입니다."
"이도라..."
"예. 들리는 바로는 열일곱의 나이에 주천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 재능은 가히 운연이의 그것과 비견할만하나... 이미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군무결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마장로의 뜻을 읽었다.
"시간은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보름이면 충분합니다."
"보름, 좋소. 가보시오."
이건 단순히 이 절벽에서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종주. 제가 가서 이 일을 미리 처리해놓겠습니다."
"내 노파심에 말하는데, 이도라는 그놈의 행동력과 심성이라면 추후에 무림을 어지럽힐 마두가 될 여지가 충분하니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시오. 아시겠소?"
"물론입니다. 가서 깔끔하게 '멸문'시키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마장로도 떠났다.
홀로 남은 군무결은 묵묵히 다시 절경을 감상했다.
제왕검종은 그 이름답게 제왕 같은 행보를 보여야한다.
건드리는 이가 있다면 뼈가 저릴만한 후회를 안겨 주어야한다.
그것이 제왕검종의 정신이다.
***
대부분의 문파에는 원로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원로원은 대체 무엇인가.
이씨 세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기존의 가주였던 이세극이 가주가 되기 전부터 그와 함께 했던 가문의 구성원들을 뜻했다.
넓게 보면 핏줄도 포함되고 일반적인 무인도 포함된다.
너무나도 오랜 기간 동안 세가에 속해있었고, 심지어 헌신했던 이들을 헌신짝 내버리듯 유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을 대우해주어야 하기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원로원이었다.
이건 대부분의 문파들이 비슷했다.
현재 이씨 세가의 원로는 총 네 명이다.
그들은 과거 이씨 세가가 커지기 전부터 이세극과 함께 했던 이들이었다.
총관 출신도 있고 이세극의 선대 때부터 최근까지 자금을 관리하는 재경각주의 자리에서 무려 30년을 일했던 남자도 있었으며 이씨 세가의 독문무공인 청성검법의 토대를 만들고 발전시키며 무인들을 훈련해왔던 무각의 각주도 있었다.
이들 네 명은 지금 원로원에 모여 있었는데, 모두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거처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니...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이씨 세가에 해준 게 얼마인데, 어찌 이리 찬밥 대우를 한 단 말이오."
이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이씨 세가는 지금 명실상부한 장령군 최고의 세력이 되었다.
상운 상단이 온전하게 흡수되었고, 장씨 세가의 모든 것들도 흡수했으며 운씨 세가가 이씨 세가 내부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날아오를 일만 남은 것이다. 아니지, 이미 날아올랐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가주 즉위식이 열리고 있었다.
차남인 이원이 결국 가주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들 네 명은 초대받지 못했다.
다른 세력도 아니고 이씨 세가의 식솔인데 즉위식에 초청받지 못하다니.
그냥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저마다 불만을 토해내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원로전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도였다.
그를 보자마자 네 명의 원로가 저마다의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어찌 이리 대우 할 수 있냐.
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
수십 년이 넘도록 이씨 세가에 충성해왔거늘 어찌 외부 세력들 모두가 와서 축하하는 자리에 얼굴조차 비추지 못하게 하는 것이냐.
등등등.
그 모든 말들을 이도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한동안 시끄러웠던 원로들이 하나둘씩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조용해지자 그제서야 이도가 입을 열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
"그럼 이제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선배님들, 많이 섭섭하십니까?"
조용히 있던 전대 재경각주 악귀광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우리가 이씨 세가에 헌신한 세월이 얼마인데 이리 찬밥 대우를 하는 것이야!"
직위로 따지면 직계인 이도가 높긴 하지만 이들은 원로다.
가문의 규율상 원로는 가장 존중받는 자리임과 동시에 가주에게 직접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리다.
이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다.
이도가 품에서 '장부'를 꺼내들었다.
"길게 말 안하겠습니다. 이 장부에 적힌 '재료비'가 무엇인지 아는 분, 계십니까?"
"...지금 그걸 물어보려고 온 것이냐."
"그건 아닌데, 겸사겸사 묻는 겁니다. 아는 분이 계시다면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잘못들은 줄 알았다.
마지막에.
"...뭐라고?"
"두 번 말하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나이도 있으신 분들이고 사리분별도 제대로 안되시는 것 같으니 한번 넘어가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매달 은자 오백 냥 이상씩 나가는 이 재료비에 대해 알고계시는 분이 있다면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죽일 생각이냐."
오히려 이도가 의아해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게 어찌 당연하다는 것이냐! 우리는 원로다! 수십 년 이상 이씨 세가와 함께하며 세를 불린 일등공신이란 말이다!"
이도가 고개를 저었다.
"이씨 세가가 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상운 상단과 운씨 세가의 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청명검법, 이딴 쓰레기를 독문무공이랍시고 가르치니 이씨 세가가 장령군에서 가장 수준이 딸린다는 평가를 받게 만드신 거고, 재경각주님은 재정 관리가 이리도 안 되고 있는데 원로 자리에 계시니 밥만 축내는 버러지에 불과하고 총관 출신이신 분은 상씨 부인의 말에 넘어가 나머지 원로 분들을 설득하신분이고, 저기계신 의문각의 각주님은 의원 출신으로서 이세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무인들을 일부러 죽이는 등, 온갖 일들을 벌이셨는데 일등공신이요? 지금 저랑 장난하십니까?"
이도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원로들의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대체 저걸 어떻게...
이도는 이제 말로하지 않았다.
소매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오른손으로 말아 쥔 뒤, 그대로 집어던졌다.
푸욱-!
원로 한명의 이마에 박힌다. 손잡이만 보일정도로 깊게 박혔다.
털썩, 총관 출신의 원로가 시체가 되어 쓰러진다.
"세 명 남았군요. 재료비에 대해 말씀하실 게 있으시다면 빨리 결정하셔야할 겁니다."
이도는 천천히 걸어가 총관 출신 원로 이마에 박힌 비수를 뽑아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대로 집어던졌다.
비수는 마치 뱀의 그것처럼 허공에서 곡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다가 푸욱, 무각 출신의 원로 이마에 박혔다.
털썩.
이제 두 명 남았다.
재경각 출신의 원로인 악귀광과 의문각 출신의 원로인 강해순.
천천히 걸어갔다.
이마에 박힌 비수를 뽑아들기 전, 악귀광이 외쳤다.
"그만! 내 말하겠다."
이도는 대답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그대로 비수를 집어던진 것이다.
푸욱-!
악귀광이 움찔했다. 그와 2장 거리에 떨어져있던 강해순이 천천히 쓰러진다.
그의 이마에 박힌 비수를 보자마자 털썩,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모르는 이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고, 그나마 아는 분이 계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강해순에게 다가가 비수를 뽑아든 이도가 악귀광의 앞으로 다가왔다.
"뭡니까? 이 재료비라는 거."
"...전대 가주는 오래전 한 가지 기연을 얻었었다."
"기연 말입니까?"
"...그렇다.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철혈마제(鐵血魔帝)가 남긴 유산이라는 거, 이 정도만 안다."
조금 의아했다.
"그 유산이랑 돈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철혈마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냐."
솔직히 말하면 이도는 식견이 넓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400년 전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그 대마두 철혈마제를 정녕 모르는 것이냐..."
"모릅니다. 이 재료비를 어떻게 썼는지 좀 알아야겠습니다."
"...가주 침소의 침상을 옆으로 젖혀 보거라. 그럼 그곳에 비밀 공간이 있다. 지하로 통하는 그 공간에는 거대한 철문이 막고 있는데 그건 함정이다. 그 옆에 있는 벽을 보면 작게 튀어나와있는 모서리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곳을 누르면 숨겨진 또 다른 공간이 나온다. 나도 이 정도만 안다."
아무래도 꽤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았다.
평생 존경이라는 것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였는데 아무래도 이 선물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일말의 존중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나는 살려주는 것이냐."
이도가 빙긋 웃는다.
그 웃음을 악귀광은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고맙다... 내 앞으로 더 열심히 일하마. 관리들이 조사를 나왔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걸려 본적이 없다. 분명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도가 손을 뻗어 악귀광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원로님."
"...그래, 말해보거라."
"원래 새 술은 새 포대에 담는 게 맞지 않습니까?"
"....뭐?"
"살려는 준다고 했지 온전하게 살려준다고는 안했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사지를 자르고 두 눈을 파낼 겁니다. 말도 못하게 혀도 뽑아 버릴 것이고요. 그리고 이씨 세가 뒷산에 던져 버릴 겁니다."
"...너... 너어...!"
"이렇게 좋은 정보를 주었는데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둘 수는 없지요.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한 것이 첫 번째 선택지고 두 번째 선택지는 지금 제 손에 죽는 겁니다. 고통 없이."
"...이... 마귀 같은 놈."
이도는 그걸 대답으로 알아들었다.
망설임 없이 비수를 내려찍었다.
콰직-!
악귀광의 머리가 그대로 쪼개진다.
이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상씨 부인과 함께 이씨 세가를 뒤엎을 생각을 했던 이들이다.
살려둘 생각? 처음부터 없었다.
"염길성."
이도의 부름에 밖에서 대기하던 하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씨 세가에서 이도의 충신이 된 녀석이었다.
"전부 뒷산에 버리고 오거라."
녀석이 해맑게 웃는다.
"예. 공자님."
마공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이씨 세가의 새로운 가주 이원.
그는 가주전의 가장 끝, 상석에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높게만 보이던 자리였다.
실제로 앉아보니 확실히 높긴 높다.
비어있는 자리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괜찮다.
앞으로 천천히 채워나가면 되니까.
흐뭇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가 보인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이어서 어머니의 옆에 있는 중년 남성을 바라보았다.
"외삼촌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허... 내가 고생한 게 뭐가 있겠느냐. 다 네 녀석이 한 거지."
호칭에 대한 문제는 차차 개선해나가면 된다.
이 자리에는 운씨 세가의 세력과 소수의 이씨 세가의 세력이 있었다.
이원이 이씨 세가의 가주이긴 하나 이번 일에 운씨 세가의 도움이 컸다.
상운 상단과 장씨 세가, 이 두 개의 세력이 지니고 있던 사업체들을 아직도 전부 흡수하지 못한 상태다. 그 정도로 먹을 게 많았다.
그걸 다 흡수하게 되면 대체 어느 정도의 돈을 벌어들이게 될지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넉넉하게 잡아서 일단 장령군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1년 내로 가능하고, 그에 따라 무력을 갖춰야하기에 무림에서 이름 난 고수들을 초청해 식객으로 모시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그때였다.
운씨 부인이 손을 휘저었다.
구석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간다.
가주전에는 총 세 명이 자리하게 되었다.
운씨 부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덩달아 이원의 목소리도 잦아든다.
"...예 어머니."
"지금 우리가 이렇게 좋아할 때가 아니다."
"...갑자기요?"
"갑자기가 아니다. 가장 먼저 시급히 처리해야할 일이 하나 있지 않느냐."
그게 무엇인지 이원은 몰랐다. 이어서 이원의 외삼촌 운무정이 말했다.
"상운 상단을 비롯해 장령군에서 벌였던 막내 놈의 일들은 전부 수습이 가능했다. 하지만 장씨 세가에서의 일은 아니다."
그렇다.
"제왕검종이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침을 꿀꺽 삼켰다.
제왕검종의 위명을 이원이 모를 리 없다. 팔대문종, 검을 가장 잘 쓰는 가문.
감히 제왕검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그런 가문이 지금 이씨 세가의 적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니지.
"이씨 세가의 적이 아니라, 그 막내 놈의 적이다."
"...외삼촌... 지금 그 말씀은..."
"그렇다. 선을 그어야한다."
무림은 절대로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것을 넘어서 어떠한 일을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일상인 세상.
그곳이 무림이다.
"장씨 세가의 일은 그 막내 놈의 독단으로 몰고가야한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이건 솔직히 말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이원을 비롯한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심지어 이씨 세가에 존재하는 똥개까지 포함해서 제왕검종의 적이 될 것이냐 이도를 버릴 것이냐, 둘 중 택하라고 한다면 백중 백은 후자를 택한다. 그것이 맞다.
그러지 않으면 싸그리 몰살당한다.
이도가 건드린 것은 제왕검종의 차기 종주로까지 거론이 되는 장운연의 가문이었고 그것을 넘어 일대 제자인 원후까지 죽였다.
제왕검종의 넓은 아량에 기대야한다. 정상참작이라도 될 수 있게 이도를 바쳐서 목숨을 건져야한다.
그것이 운씨 부인과 운무정의 생각이었다.
이원은 망설였다.
"...어허 이 녀석이, 무엇을 망설이는 게야."
어머니의 말에 이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는 가주다. 한 가문의 가주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가문의 안정이다. 특히 지금은 여러 세력을 흡수한 상황이라 그 안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어머니, 이도 덕분에 우리가 이씨 가문을 차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말도 모르는 것이냐."
운씨 부인의 말은 날카로웠다.
"놈은 첩의 아들이다. 서자인 놈이 무공 재능 하나가 좋다고 하여 그 재능과 이 가문의 운명을 맞바꿔서야 되겠느냐. 이런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를 고민하다니. 내 네 녀석을 그리 가르쳤더냐!"
이원은 도리어 자신에게 호통 치는 어머니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택의 기로다.
팔랑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귀의 무게가 많이 가벼운 이원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말씀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이 사실을 알게 될 이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기 시작했다.
온몸이 오싹했다.
"....일단 고민해보겠습니다."
"어허.. 이 녀석이...!"
"어머니. 저는 이제 단순한 이씨 세가의 차남이 아닙니다."
"...뭐?"
"이씨 세가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머니여도, 그리고 아무리 외삼촌이어도 앞으로 호칭에 신경써주셨으면 합니다."
말문이 막힌 두 사람에게 이원이 말했다.
"머리가 복잡하니, 일단 나가십시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미 답이 나와 있는 문제인데 어찌 고민을 한단..."
"나가십시오."
"..."
"나가라고!"
얼굴이 붉어진 이원의 모습에 운씨 부인도 어쩔 수 없었다.
운무정이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홀로 남은 가주전에서 이원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