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콰앙!
가주 이세극이 탁자를 내려쳤다.
"어디 네놈이 입이 있으면 한번 말해보거라."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뭐라? 하.. 네놈이 어젯밤에 한 일을 정녕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그럴 리 없다.
나는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랬으니 대놓고, 구경꾼이 그렇게 많은 곳에서 천화루를 불태우라고 명령을 내린 거다.
묵묵히 말했다.
"천화루를 불태운 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네놈이 왜 그러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네놈이 어젯밤에 한 일은 이씨 세가의 거대한 재산을 날려버린 것과 같다.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 말이다!"
"글쎄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뭐라?"
"계약서에 의하면, 천화루의 주인은 이씨 세가가 아니라 저, 이도입니다. 제 물건을 제가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그게 왜 이씨 세가의 재산입니까?"
"...네놈이 뚫린 입이라고 지금..."
"가주님."
"....말해보거라."
"가문의 규율은 말입니다. 그 가문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 같은 것들을 통칭해서 정하는 겁니다. 아랫사람이 기어오를 때는 단호히 찍어 누르는 것을 비롯해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이씨 세가가 나아갈 길을 닦는 토대가 되는 것인데, 어찌 같은 핏줄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다른 이에게 준단 말입니까."
"...어찌 다른 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남 이정은 너의 친형이다. 그런 친형에게 선물 하나 준다고 생각하면 될 것을 어찌 그리 매정하게 말을 하는 것이야."
어이가 없었다.
고개를 돌려 화가 잔뜩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정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웬만하면 이런 공적인 장소에서는 표정 관리를 하는데 지금은 도저히 안되고있나보다. 옆에 있는 상씨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가주님. 마침 여기 이씨 세가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천화루를 저기 있는 첫째 형님께 맡긴다는 말씀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쥐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전부 거덜 난다는 말씀입니다."
"..."
"정말 부끄러운 말이지만 첫째 형님이 기녀 다섯을 임신시켰던 일은 유명합니다. 천화루의 기녀들이 어떤 기녀들입니까. 장령제일미를 비롯해 장령군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들만 모아놓은 곳입니다. 그런 곳을 첫째 형님께 드린다고요? 이씨 세가의 식솔들을 대체 얼마나 늘리시려고 그런 결정을 하셨습니까."
"....닥쳐라!"
이건 이세극이 한 말이 아니었다. 이정이 한 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이정을 바라보았다.
"마침 말이 나왔으니, 그냥 하겠습니다. 첫째 형님, 저한테 선물 비슷한 거를 주셨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습니까?"
턱 하고 말문이 막혀오는지 이정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도 없는데, 어찌 천화루라는 그 거대한 선물을 받으시고도 제게 고맙다는 말씀 한번을 안 하십니까."
"...그래서 불태운 것이냐."
"예."
"...미친..."
"제가 가질 수 없다면 당연히 부숴버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혼자서 노력해서 가지게 된 제 전리품인데 그걸 어찌 맨입으로 꿀꺽 하시려 하십니까. 제가 정말 두 눈뜨고 조용히 지켜만 볼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
"가주님. 아니, 아버지. 정말 부탁인데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싶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으면 싶다?"
"예. 전공을 세우고 온 장수에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논공행상입니다. 그 논공행상에서 아무런 기여도가 없는 이에게 모든 공을 돌리시면 반드시 화를 입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 나를 가르치는 것이냐."
"조언을 하는 겁니다."
분노한 이세극이 무어라 외치려던 그때였다.
가주전의 문이 쿵 하고 열린다.
그곳에는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듯,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총관 중 한명이라는 것 까지는 알 수 있었다.
이세극이 버럭 외쳤다.
"감히! 회의가 진행 중인데 어찌 들어오는 것이야!"
총관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 급히 아뢰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골이 아파오는지 이마를 짚은 이세극이 말했다.
"말해보거라. 대체 무슨 일이기에."
"...어젯밤에 상운 상단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상씨 부인과 이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연나라로 갈 대규모 화물들이 모조리 불타 없어졌고, 표사 5명이 죽었으며 유성검(流星劍) 형정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모두가 크게 놀랐다. 상씨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정말인 것이냐..."
"예.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유성검 형정문이라하면 우리 상씨 세가의 무인으로서 이미 양광이현의 끝자락에 있는 고수인데.. 어찌 그가 사망한단 말이야."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때 그 남자가 형정문이구나.
상씨 부인의 시선이 잠시 내게 향한다. 나도 상씨 부인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것 보십시오. 아무런 기여도가 없으신 분들이 괜히 욕심을 부리시니 이렇게 큰 화를 입게 되지 않으셨습니까."
"..."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히 패물들만 불태웠고 무인 몇몇만 죽였다는 것은 경고라고 보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너... 너어..."
"만약 저라면, 딱 한번 정도는 경고로 끝내주겠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닐 것 같습니다."
충격을 받은 이들이 너무 많았다. 이건 나를 의심했다기 보다는 상운 상단이 입은 피해에 충격을 받은 거다.
내 말이 귀에 들어올지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상씨 부인과 이정의 귓구멍에는 제대로 박혔을 테니까.
"아버지. 백년삼은 언제 주실 겁니까?"
내 질문에 이마를 짚고 있던 이세극이 한숨을 터트린다.
"...지금 알아보고 있다. 내일이나 모레 안으로 확실히 말해주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것마저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씨 세가를 반으로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포권을 취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자가 어젯밤에 어디 좀 다녀오느라 지금 피곤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대로 몸을 돌렸다.
거울은 없었지만 아마 지금 나는 웃고 있지 않을까.
솔직히 말하면 귀찮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에 의한다면 어쩔 수 없이 움직이겠으나, 그래도 나름 한 식구가 아닌가.
기어오르지만 않는다면 적정선에서 넘어가줄 수 있다.
과거에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았다고 해도 정말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줄 수 있다.
그렇기에 경고로 끝내 준거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아니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다.
전부 죽여 버리는 수밖에.
***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누가 습격을 했는가.
이도의 그 말을 귀담아 들은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도의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그렇게 충격 받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는가.
왜 모두 멍하니 있었는가.
간단했다.
상운 상단이 연나라로 보낼 그 대규모 화물 중에는 이씨 세가의 것도 포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흔치 않은 기회였다.
목적지는 연나라 남경이었는데 그곳의 금혼 상단과 합작하여 연나라 남경의 [전왕(戰王)]에게 바칠 물품들이었다. 전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과 동시에 상단을 더 크게 키울 기회였다.
그래서 두둑하게 준비했다.
그런데 그 화물이 전부 불탔다?
이건.
더 설명할게 없었다.
어마어마한 수준의 손해를 입은 것을 넘어 미래의 계획마저 파기될 지경이다.
충격에 휩싸일 이유로 충분했다.
이세극은 당장 상운 상단으로 갈 것이라며 채비를 하라 이르고는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원로들도 전부 나갔고, 가주전에는 이제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아들만이 존재했다.
상씨 부인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간다.
"...살수를 고용하고자하는 계획은 일단 보류하겠네."
속으로는 절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은 이도를 죽이네 살리네 하는 일이 아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연나라로 가는 상단을 다시 꾸려야한다.
괜히 이런 시기에 살수를 불러 이도를 암살하기라도 하면 분위기는 더욱 더 어수선해질 것이고 그 여파가 상운 상단으로까지 퍼질 수 있다.
안 그래도 아니꼽게 여기는 장령삼대세가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운씨 부인이 말했다.
"예 형님. 형님 말씀이 맞아요. 살수를 부르는 건 시기상조인거 같아요. 어차피 기회는 많을 테니까."
그런 운씨 부인의 말에 상씨 부인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면 됐다.
"그 침입자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아까 총관이 말했던 그게 전부인가?"
일찍 나간 이도는 듣지 못했겠지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다 들었다.
습격자의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가 상운 상단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목격한 이들은 많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일단 모두 자중하고 있으시게. 그리고 거듭 말하지만 이도에 대한 일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 할 것이니 경거망동 하지 말고."
이어서 상씨 부인과 이정이 가주전을 벗어났다.
운씨 부인과 이원, 단 둘만 남게 된 가주전에 침묵이 자리한다. 운씨 부인의 표정과 이원의 표정은 둘 다 좋지 않았다.
이건 습격자 때문이 아니었다.
"...개 같은 년."
운씨 부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원이 흠칫한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이 이씨 세가가 이미 자기 것이라도 된 것인 마냥 명령을 내리는 꼴이라니.
불쾌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옆에서 쪼개고 있던 이정도 마찬가지였다.
쌍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 어머니는 형님과 함께 상운 상단으로 가는 건가요?"
운씨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상운 상단의 일이다. 그들이 가는 것이 맞긴 하다.
이원은 묵혀두었던 의문을 꺼내들었다.
"어머니, 그런데 살수를 고용한다는 말은 대체?"
운씨 부인이 입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쉿, 누가 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행을 신중히 하거라."
"...네. 하지만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셨던 겁니까."
그렇게 운씨 부인은 이원에게 그간 상씨 부인과 계획했던 일을 알려주었다.
"이도를... 죽인다고요?"
"그래, 살막의 살수를 고용해 놈을 죽여 놓은 것이 상씨 부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이원의 표정이 참으로 묘했다.
그건 마치 기회를 잡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생각을 거듭했다.
이도의 재능은 비범하다.
그를 죽인다? 가능한 것을 넘어서 그게 맞는걸까.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왠지.
될 것 같았다.
무릎을 꿇다.
"...하지만, 살수에 의해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우리에게도 좋을 게 없지 않을까요?"
"그러나, 놈이 물을 흐리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다."
그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이원도 잘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이도를 죽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놈이 아무리 성격이 파탄이 났어도 결국 이씨 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이씨 세가의 칼로 사용할 수가 있는데, 왜 이리 경계하는 걸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계획은 보류가 되겠지만, 괜찮다. 이번 일이 해결만 된다면 이도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으니."
이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도가 상운 상단을 습격한건 아닐까요?"
그 말에 시종일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운씨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이 이제는 어미도 웃길 줄 아는구나. 상운 상단을 습격한 그자가 바로 이도다? 하,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다. 가능성은 없다. 유성검 형정문이 누구인줄 아는 것이냐."
자세하게는 몰랐다.
"과거 무너진 점창파의 후손으로서 그의 무력은 연기사경 초입이긴 하나, 이미 수주현에서 만큼은 그에게 필적할만한 자가 고작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없다. 형정문은 이미 양광이현을 넘어 오룡봉성을 넘보고 있을 정도이니, 향후 10년 동안 아무 일이 없었더라면 그는 삼화취정의 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운씨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자를 얼마 전에 주천경에 오른 이도가 죽였다? 무공에 대한 재능이 어마어마하고 싸움의 천재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치더라도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이원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에 생각을 바꿔 먹었다.
"목격한 이들이 그러기를, 침입자는 허공을 딛으면서 사라졌다고 하더구나."
"설마... 허공답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표현된 것들만 나열해도 그것은 분명 조화경 이상의 무인들이 사용한다는 허공답보가 분명했다. 거기다 능공허도를 펼쳤다더구나.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신묘하다 못해 아름다웠다고까지 했으니, 이 말인 즉, 말도 안 되는 고강한 고수가 상운 상단을 공격했다는 뜻이다. 내가 왜 이도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이제 이해가 된 것이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예 소자, 어머니의 말씀을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당분간은 긴장을 유지하고 있거라. 대체 어떤 내막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조사하고 나서, 미뤄두었던 일들을 행할 것이다."
"예."
***
연공을 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내가 죽은 시점은 지금 이 시점으로부터 대략 30년 후다.
3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나는 그 30년 동안 일어나던 모든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씨 세가를 가출한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3달 뒤다.
그 이후에 이씨 세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소문으로 들을 수 있었다.
처참했다.
일단 가주 이세극이 연공중 주화입마를 당해 자리에 몸져누웠고 걷기조차 힘든 상태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장남이었던 이정이 이세극의 직인을 받아 새로운 가주가 되었다.
이후 이정은 이세극이 사실은 독에 당한 것이고 그 배후로 둘째인 이원을 지목한다.
이원을 비롯한 운씨 부인, 그리고 그들을 따르던 총관, 하인, 심지어는 돈을 주고 고용했던 짐꾼까지.
싹다 잡아들인 뒤에 고신에 고신을 거듭한다.
이원과 운씨 부인은 결국 자신들이 이세극에게 독을 먹였다고 자백을 하였고 이정은 그 길로 가문의 모든 무사들을 이끌고 운씨 세가를 습격한다.
자연스럽게 운씨 세가가 가지고 있던 상단과 기루, 객잔, 그 모든 것들을 흡수하고 이원을 비롯한 운씨 세가의 모든 식솔들을 죽인다.
손속의 과함을 논하는 것에 있어서 적어도 그들은 내 손속을 비난하면 안 된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무리 봐도 이세극에게 독을 먹인 것은 상씨 부인이거나 이정,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애초에 둘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으니, 같이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원을 비롯한 운씨 부인은 모함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운씨 부인이나 이원이 아무리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가주한테 독일 먹일 정도로 독하지는 않다.
그럼 뭐, 대충 그려진다.
그런데 중요한건 시기다.
이미 내가 알던 과거와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다.
가주가 독을 먹는 것은 3개월 뒤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게 내일 당장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일어나지 않는다는 가정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다.
천화루를 빼앗아 이정에게 주었던 그 행동의 저의는 이정을 소가주로 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상운 상단과의 관계 때문이고 크게 보면 이씨 세가의 이득 때문이다.
가주 이세극은, 근본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다.
그의 기준에서의 줏대는 주관적인 성격이 강하며 규율을 세운다 해도 그는 절대로 그 규율을 지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나름 아버지고 새롭게 삶을 시작했으니 죽는 것 정도는 막아주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젠 안 되겠다. 뒤지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
받아 갈 것만 받아가고 그냥 조용히 장령군을 뜰 생각이다.
그때였다.
내 감각에 무언가 걸린다.
천천히 눈을 떴다.
문 앞에 누군가 있다.
"크흠, 막내야. 잠시 시간 되느냐."
목소리를 들어보니 둘째인 이원이었다.
"예, 시간 됩니다. 들어오시죠."
문이 열리고 잔뜩 긴장한 표정의 이원이 들어선다. 그는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마치 무슨 비밀 결사대인 것 마냥 결연한 표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원이 내게 다가온다.
"그, 야밤에 이런 말을 하게 되어서 나도 조금은 쑥스러운데 말이다."
그러고는 한참을 망설이는 이원에게 묵묵히 물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신 겁니까?"
"...그래, 있다. 매우 중요하게 할 말이."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하시지요."
이원은 내가 정말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할 말을 내뱉었다.
"...정총관에게 단약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은 내가 맞다."
의문이 생긴다.
"내가 너의 형님으로서 못난 모습만 보였던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어.
웃음도 안 나온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이래.
"이도야."
"예."
".....미안하다."
두 눈을 끔뻑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오는 말도 문제지만 행동이 더 문제였다.
이원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괴롭혔던 것들, 너를 구석으로 몰아 힘들게 했던것들, 내 전부 사죄하마."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갑자기."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필요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무릎을 꿇고 있는 이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잇는다.
"부정하지 않으마. 너는 무공에 재능이 있다.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했을 터인데 그 어린 나이에 주천경에 오르질 않았느냐.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비열하다 생각해도 좋다. 다 맞는 말이니까. 그러나, 너에게 사죄하고자하는 마음만큼은 분명 진심이다."
무언가 말하려던 그때였다.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 내가 지금부터 할 말로 한번 판단 해보거라."
"해보십시오."
"'상씨 부인'이 모략을 꾸미고 있다."
"모략이요?"
"살막에 의뢰를 해 너를 죽이겠다하더구나."
미간이 꿈틀한다.
"의뢰 내용은 이씨 가문의 셋째인 이도를 어떤 방식도 상관없으니 반드시 죽여 달라, 의뢰 등급은 특급이다. 그곳에 금자 100냥을 낼 것이라고 하더구나."
"확실한 겁니까?"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실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상운 상단을 습격하는 바람에 자금에 문제가 생겼으니까. 아까 대화 나누는 것을 들었는데 이번 일이 정리가 되는 대로 의뢰를 넣겠다고 하더구나. 돈이 모자라다면 자신의 귀중품마저 팔 생각을 하고 있던데, 이제 내가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 파악이 되었느냐."
웃고 말았다.
이원의 말이 이어진다.
"너는 분명, 내가 잘못 파악한 게 아니라면 가주 자리에 욕심이 없을 것이다. 맞는 것이냐."
"잘 보셨습니다. 저는 그런 자리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여전히 무릎 꿇은 상태의 이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직시했다.
"그럼 나를 가주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뒷짐을 진채 묵묵히 이원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에 움찔한 이원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내게 말했다.
"이정이 가주가 된다면 이씨 세가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런 앞과 뒤가 다른 머저리한테 가주 자리가 가당키나 한 것이냐. 네가 이씨 세가의 미래를 걱정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가주로 만든다면, 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것이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떻게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고 그러십니까."
"그게 무엇이든 구할 것이다.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어렵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능력이 닿는 선에서 모든 것을 해낼 것이다. 이도야, 아니, 막내야."
"예."
"도와다오."
묵묵히 이원을 바라보았다.
진심인 것 같긴 하다.
잠시 감각을 넓혔다.
주변에는 분명 아무도 없다.
고민이라는 걸 해보았다.
내가 한 가문의 가주가 된다?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굳이 그래야할까.
지금 수련하기에도 벅차다. 하루빨리 전생의 무력을 되찾을 생각인데 가주 자리에 앉아서 서류 작업을 하고 상단을 운영하고 그러고 있겠나.
차라리 말 잘 듣는 허수아비 하나 세워서 굵직굵직한 일들만 보고 받는 게 가장 상책이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어 이원과 높이를 맞췄다.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잘 선택하신 겁니다."
"...그 말은..."
"예. 제가 가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환하게 웃는 이원이었지만 그대로 굳어졌다. 그럴 만도했다. 그의 어깨를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주었으니까.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쥐었다.
"명심하십시오. 한번 저와 손을 잡은 이상, 저와는 끝까지 가야합니다. 만약 제 뒤통수를 치신다면, 그때 말씀드린 그대로 해드릴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원의 온몸이 움찔한다.
그때 말했던 그것은 산채로 두 눈을 뽑아버리고 사지를 찢고 단전을 적출하겠다는 그것을 이야기한다.
"...물론... 물론이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왜 너를 배신하겠느냐."
빙긋 웃었다.
"우리 둘째 형님이 설마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저를 배신하겠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번 해본 소리입니다. 일단 일어나십시오."
이원이 일어섰다.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당장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됩니까?"
"...일반 무사 20명을 포함해 이씨 세가 내부에서는 대략 50명 정도다."
"운씨 세가의 세력까지 포함하면 얼마나됩니까. 일반 무사 다 건너뛰고 입기경 이상의 무인만 말씀해보십시오."
"...입기경의 무인이면... 대략 40명 정도 모을 수 있다. 주천경의 무인은 두명 정도 모을 수 있고."
잠시 생각했다.
운씨 세가의 세력을 지금 당장 데려온다면 상씨 부인의 세력이 눈치를 챌 것이다. 으음.
일단 이원에게 당부했다.
"시기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아랫사람들 관리 잘 하시고, 둘째 어머님에게도 언행을 조심하라 이르십시오. 제가 정한 시기가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참으로 보기가 좋군요. 풍채가 마치 한 가문의 가주같기도합니다."
"그래...? 고맙구나."
이원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진다.
밤이 깊어져가는 시각에 벌어진 일이었다.
혁리세가
운씨 부인은 안다.
적어도 첫째인 이정보다 자신의 아들인 이원이 가주라는 직책에 더 적합하다는 사실을.
이건 팔이 안으로 굽는 것과는 달랐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첫째는 가문을 말아먹을 놈이다.
금전감각? 거의 없다.
애초에 날 때부터 부족한 게 없이 자란 놈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그는 노력하지 않고 대부분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정상적으로 자랐을 리 없다.
여자를 안고 싶으면 그냥 가서 안았다.
기녀 다섯을 임신시킨 일화는 너무 유명해서 두말할 필요 없었지만 이게, 실제로는 다섯이 아니다.
실제로는 거의 열 명이 넘는다.
그 열 명의 기녀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다섯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상씨 부인이 뒤에서 그들을 죽인 것이다. 남은 다섯은 이정의 장난감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정은 심심할 때마다 그녀들을 찾아간다.
그런 놈이다.
그런 놈이 가주가 된다고? 단순히 장남이라는 이유로?
그건 아니 될 일이다.
"이도와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아들을 운씨부인은 대견스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아무 노력 안하는 머저리 같은 첫째 보다 무엇이라도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 둘째가 훨씬 보기 좋은 법이다.
그리고.
이원의 판단은 운씨 부인의 판단과 거의 일치했다.
"이도는 장래가 촉망받는 무인입니다. 심지어 가주 자리에도 욕심이 없습니다. 이씨 세가는 돈이 많지만 제대로 된 무인이 없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그렇기에 장씨 세가가 천화루의 뒤에 있음에도 돈을 받아내지 못하였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반이나 자본이 아닙니다. 무인입니다."
"네가 보기에, 이도가 정말로 가주 자리에 욕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냐."
이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그리 판단한 근거는?"
"우선 첫째, 지금 이도의 최우선 순위는 자리가 아닙니다. 영약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공 경지를 올리는 것이 녀석의 최우선 순위입니다. 그리고 둘째, 이건 첫 번째 이유와 직결되는 이유인데, 만약 녀석이 가주가 된다면 수련 할 시간이 부족해질 겁니다. 안 그래도 무공을 제대로 배운지 오래되지 않은 녀석입니다. 고작 2년 만에 주천경에 오른 것은 놀랍긴 하나 녀석에게는 분명 기본기나 이런 것들이 부족 할 것입니다. 가주가된다면 그것들을 수련할 시간이 없어지겠지요."
"그게 전부인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이도는 단호합니다. 그리고 녀석은 한번 한 말은 반드시 지킵니다. 천화루의 점소이가 이도와 함께했다는 이유로 어떤 자리를 받았는지 아시잖습니까."
"알다마다, 고작 점소이에서 무려 천화루의 부루주가 되었었지. 하루이긴 하지만."
"그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천화루를 불태우기 직전에 적개산의 창고를 부숴 그 안에 있는 모든 패물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하더군요. 녀석은 약속을 지키는 녀석입니다. 거기다 반이긴 하나같은 핏줄이 아닙니까. 저와 이도가 힘을 합친다면 반드시 상운 상단과 이정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구나."
이게 계속 첫째인 이정과 비교를 해서 그런 건지 몰라도,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이렇게 늠름하게 자라다니.
그리고 이렇게 대범한 생각까지 하다니.
천화루에 대한 일들은 분명 이원이 따로 조사해서 알아본 것이 분명했다.
너무 기특했다.
"좋구나. 그래서 이 어미가 도와줄 것이 있느냐."
"예. 몇 가지 있습니다."
이도가 몇 가지 '부탁'을 한 게 있었다.
사실은 명령이었지만 이원은 그냥 부탁으로 알아듣기로 했다.
"우선 장령삼대세가 중 장씨 세가와 혁리세가의 움직임을 면밀히 파악해주십시오."
"...그 두 개의 세력을?"
"예. 현재 저희 이씨 세가는 어수선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운씨 부인은 감탄했다.
늠름하다 못해 이젠 어엿한 청년이 되었구나.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보통 무언가를 준비할 때 뒤도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뒤통수를 칠 것으로 가장 유력한 놈들을 빠르게 파악해놓고 그들의 움직임도 읽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하던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이원이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은 이도가 직접 이야기 해준 거다.
거의 대본을 써줬다 봐도 무방했다. 그걸 그대로 읊고 있는 거지만 운씨 부인이 알 리 없다.
"좋다. 내 운씨 세가의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해놓을 것이다."
"아 그리고 하나만 더요."
"또 무엇이냐."
"저와 이도를 지지하는 이들과 이정을 지지하는 이들의 명단을 추리고 싶습니다."
"으음..."
"아버지께서 소가주를 아직도 확정짓지 않은 상황입니다. 만약 이정을 소가주로 확정짓게 된다면..."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말인 것이냐."
이것도 이도와 했던 대화중 일부였다.
이도는 말했다.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야한다고.
필요하다면 반란이라도 일으켜야한다고.
"어디까지나 대비할 뿐입니다. 소가주로 저를 낙점 할 수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회의적이긴 했다.
소가주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의견을 가주에게 전한지가 벌써 15년이 넘었다.
거의 연례행사처럼 같은 말을 해도 돌아오는 답도 같았다.
'아직 생각 중이오'.
들을 때마다 음식에 독을 타고 싶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참았다.
이정의 나이가 올해로 24살, 이원의 나이가 22살이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시기다.
운씨 부인도 결국 마음을 다잡아야했다.
"...한번 준비해보마."
"감사합니다. 어머니."
***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황금객잔(黃金客棧)].
전각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입구에 있는 환문(歡門)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영업 시작 안했...."
바닥을 빗자루로 쓸던 익숙한 외모의 남자가 반사적으로 말하다 멈칫한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루주님!"
조현이었다.
그가 내게 다가온다. 손에 든 빗자루를 내팽개치고는 냉큼 말했다.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피식 웃고 말았다. 대충 보니 온몸에 멍이 가득하다.
누군가에 구타당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이런 건 보면 안다.
멍이 든 저 모든 자국들은 전부 '혈맥'이 자리한 곳이다.
누군가 혈맥을 타혈해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너무 뻔했다.
"아니... 저 진짜 무인 같은 거 할 생각 없거든요. 하물며..."
주변을 슬쩍 둘러보던 녀석이 목소리를 낮추며 마저 말했다.
"살수라니... 루주님. 저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여요."
녀석의 어깨를 짚었다.
"조현."
"...예. 루주님."
"너는 이곳 무림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지?"
"...그냥 사람 사는 곳?"
어이가 없어서 간만에 진심으로 웃고 말았다.
"그래, 사람이 사는 곳이지. 그런데 힘이 없으면 그 어디서건 잡아먹히는 세상이기도하다."
"..."
"네가 누군가를 죽일 생각이 있건 없건, 흔한 점소이로 산다면 너는 절대로 반격 한번 하지 못하고 항상 휩쓸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네 한 몸을 지킬 정도의 힘만 가지고 있다면 선택지가 늘어난다."
진지한 말에 조현의 시무룩했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다른 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 자신을 위해서 이 기회를 활용하거라. 그런 고수의 눈에 들어 제자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날 믿어라. 네가 그에게 얻은 그 모든 것들은 언젠가 너에게 큰 도움이 될 테니."
"...루주님...."
조금 감동한 듯한 녀석에게 툭 던지듯 내뱉었다.
"그리고 앞으로 호칭을 바로 해라. 난 루주가 아니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주군이라 불러라."
환해진 표정의 조현을 옆에 두고 걸음을 옮겼다.
주방 입구 쪽에 한 남자가 등을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면살수객(千面殺手客), 황노백(凰路伯)이었다.
그가 물었다.
"빈손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허 참... 오늘 처음으로 문을 여는 건데, 그래도 덕분에 요리사에서 객잔 주인이 되었으니 선물 받은 셈 치겠습니다."
"그러든지."
황노백의 표정에 의문이 깃든다.
"왜 오신 겁니까? 안 그래도 이씨 세가가 굉장히 시끄럽던데, 무슨 패물이 불타 없어졌다고... 공자님."
"말해라."
"공자님이십니까?"
"무엇이 말이냐."
"상운 상단의 창고 두 개가 불타 없어진 거요. 공자님 말고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는데... 계속 의문이 생깁니다."
"무슨 의문?"
"정체가 뭡니까? 반로환동의 고수는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능공허도니 허공답보니... 대체 어떻게 빠져나오신 겁니까?"
황노백은 요리사 겸 루주이긴 하나 본업은 살수다.
살수로서 그게 정말 궁금했나보다.
"비밀이다."
"...참 어려우신분입니다."
"내가 쉬운 사람은 아니지. 그보다 객잔이 꽤 큰데, 천화루에서 기녀 몇 명을 데려간다 하지 않았나?"
"그랬죠."
"다 어디 있나."
내 시선은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황노백은 지금 이 상황이 정말로 특이한가보다.
"설마 제가 그 기녀들 돈을 훔치고 전부 묻어버렸다거나... 그런 거 생각하십니까?"
"질문을 한 거다. 억측은 하지마라."
"억측이 아닌 거 같은데, 대체 저를 어떻게 보고계신건지 모르겠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정 궁금하시면 저기 있는 식품 창고로 가보십시오. 거기서 양파 까고 있을 테니까."
묵묵히 주방으로 향했다.
한숨을 터트린 황노백이 내 뒤를 따른다. 익숙하게 걸어가 구석에 있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일곱 명의 여성이 쪼그려 앉은 채 양파를 까고 있었다.
"그것 보십시오. 사람을 의심하고 그러십니까."
창고 문을 닫은 뒤 묵묵히 말했다.
"워낙 별에 별 일이 벌어지는 무림 아닌가. 노파심에 확인해본 거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황노백이 물었다.
"자기 사람은 확실히 아끼는 분이신가 봅니다."
굳이 답하지 않았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살수로 살 때도, 살지 않을 때도, 적어도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 본 적은 없으니."
"그래, 그럼 되었다. 그런데, 기루는 운영 안할 셈인가."
"제가 기루를 운영할거였으면 천화루에 있던 모든 기녀들을 데리고 왔겠지요. 제가 데려온 기녀들은 기녀로서 사는 것에 환멸을 느낀 이들입니다. 전부 요리사로 키울 겁니다."
"너는?"
"저도 편하게 요리나 하면서 살 거고요."
"다행이군. 그보다 왜 왔냐고 물었었지."
"그랬죠."
"조현이 잘 있나 보러 온 거다. 그런데 잘 있는 것 같군."
"그래서 가시려고요?"
"갈 거다."
황노백이 헛웃음을 터트린다.
"그래도 기왕 오신 건데, 한 끼 하고 가시죠. 동파육 좋아하십니까."
"싫어하지는 않지."
"그럼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던 황노백이 자리에서 멈칫한다.
나도 멈칫했다.
우리는 동시에 주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세 명의 남자.
그리고 그 남자들 밑에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주저앉아있는 조현.
내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황노백의 미간은 와락 구겨졌다.
무슨 상황인지.
왜 조현은 저러고 있는 건지.
너무 뻔했다.
"허허, 주인장, 거기 있으셨구려. 그보다 아직도 결정 안했소?"
방금 전까지 미간을 구기고 있던 황노백은 없었다.
비굴한 표정의 황장수라는 요리사가 있을 뿐이었다.
"아유, 무사님들, 조금만 더 고민해보고 말씀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왼쪽 끝에 있던 무사가 으름장을 놓았다.
"어허, 우리 혁리세가가 뒤를 봐주겠다는데 어찌 이것에 생각을 하고 말고가 있단 말이냐. 한 달의 상납금은 원래 은자 70냥을 받는데, 우리 혁리세가의 소가주님께서 이 객잔의 이름이 마음에 드신다하여 한 달에 30냥만 받을 것이다. 그러니 바로 수락하거라."
무림 세가를 운영하는 데에는 상당한 돈이 필요하다.
괜히 이씨 세가가 상단을 운영하고 그러는 게 아니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한 지역에서 주름 잡는 가문 같은 경우에 도심으로 나와 객잔을 비롯한 곳들의 뒤를 봐주고 매달 돈을 상납 받는다.
"이 객잔이 기존에 세월객잔이라는 이름의 객잔이었던 걸로 아는데, 그 객잔도 우리 혁리세가가 뒤를 봐주고 있었다. 이름을 바꾼다 해도 건물의 위치가 달라진 것은 아닐지니, 얼른 수락하고 이번 달치 상납금을 가지고 오거라."
하루 만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기존에 있던 객잔을 인수해서 새롭게 개시한 것이 분명했다.
묵묵히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했다.
"혁리세가라고?"
세 명의 남자가 내 쪽을 바라본다. 동시에 셋의 미간이 구겨졌다.
"...공자는 누구시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이도다."
"이도...? 이도라면..."
중얼거리던 남자가 눈을 크게 떴다.
"천화루를 불태운... 이씨 세가의 삼공자?"
"잘 아는구나. 이곳 황금객잔은 오늘부터 내가 뒤를 봐주기로 했다."
"...금시초문인데, 확실합니까?"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다.
"확실하지 않으면 너희가 어쩔 거지?"
세 남자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혁리세가에 일단 보고를 하고 다음 명령을 기다릴 셈이 분명했다. 분하다는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 있었는데, 조금 의아했다.
"누가 가라고 했지?"
세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그런 그들의 앞에.
나는 서있었다.
"어... 언제 여기까지..."
손을 뻗어 왼쪽 끝에 있던 남자의 목을 움켜쥔 채 벽에 박았다.
"커헉... 왜... 왜이러시는..."
"말했지 않나. 이곳 황금객잔은 내가 뒤를 봐주는 곳이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여전히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조현을 바라보았다.
"친절히 설명해주지. 내가 뒤를 봐주는 곳의 점소이를 건드린다는 것은 나를 건드린다는 것과 같다."
천천히 손에 힘을 주었다.
뚜둑-!
목이 부러진다. 그대로 바닥에 집어던진 뒤, 발로 심장을 강하게 내려찍었다.
콰직!
심장 터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지금 이 상황에 당황한 무인이 뒷걸음질 친다.
"한낱 점소이 아닙니까! 진정하십시오!"
"한낱 점소이가 아니다."
"...에?"
"내 사람이다. 내가 뒤를 봐준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건... 그게...."
내 움직임을 파악했는지, 파악하지 못했는지, 이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정중앙에 있던 놈이 피하려했으나 의미 없었다.
그의 얼굴에 적중한다.
꽈아아아앙-!!
놈이 그대로 환문을 부수며 밖으로 날아갔다.
그는 다시 일어서거나 그러지 못했다. 그게 맞다.
머리가 터졌는데 일어서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강시지.
고개를 돌렸다.
나머지 한 사람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름."
"...취... 취삼입니다."
"소속은?"
"...혁리세가 질풍대 일반 대원입니다."
취삼이라는 혁리세가의 무인이 침을 꿀꺽 삼킨다.
"내 이름은 이도다. 너는 지금 당장 혁리세가로 가서 이곳에서 있었던 이 모든 일들을 그대로 고해라. 알겠나?"
"...예...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잠시 고개를 저었다.
경고라는 건 이렇게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그대로 발을 내질렀다.
내 발끝이 향한 곳은 취삼의 단전이었다.
퍼석-!
"꺼..꺼어억..."
그대로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밖으로 집어던졌다.
"가라."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선 취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짚고 있는 황노백이 보인다.
"...미치겠네. 공자님, 큰 계획이 있으신 건 지금 충분히 알겠는데, 왜 여기에서... 하아..."
무시했다.
그대로 조현에게 다가갔다.
주방에 있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는데, 아무래도 머리를 제대로 맞은 모양이다.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 입가에서도 핏물이 흐른다. 머리에 한 대, 볼에 한 대.
솔직히 워낙 불쌍하게 생긴 녀석이라 이상하게 더 아파 보인다.
"괜찮나?"
울먹이는 듯한 표정의 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었다."
아수라검종
이도의 행보는 장령군 전체를 시끄럽게 했다.
처음에는 산적들을 죽이고 세가 내의 총관을 죽임으로써 이씨 세가를 뒤집어놓았고 그 다음으로는 천화루를 집어삼킴으로써 장씨 세가를 뒤집어놓았다.
짜 맞춘 것처럼, 이번에는 혁리세가가 뒤집어졌다.
혁리세가의 가주인 혁리원평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하나는 소가주인 혁리양건, 나머지 하나는 둘째 아들인 혁리철산.
이 둘의 나이가 적지는 않았다. 첫째는 올해로 26세가 되었으며 철산은 그보다 한 살 낮은 25세였다.
그러나, 둘의 무공 재능은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첫째는 아직 주천경에 불과하지만 둘째는 아니었다.
둘째는 이미 연기사경의 초입인 양광이현에 진입했다.
혁리세가의 최정예들로 만들어진 타격대인 질풍대의 대주를 맡고 있는 것이 바로 둘째 혁리철산이다.
그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그 이도라는 놈이 너를 이렇게 만들고 나머지 질풍대의 대원 두 명을 참살했다?"
"쿨럭... 예... 그놈은.... 인간의 탈을 쓴 마귀입니다..."
"그만, 되었다.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
혁리철산은 묵묵히 다른 대원들에게 눈짓했다.
취삼을 의방으로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혁리철산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혁리세가의 가주인 혁리원평과 소가주인 혁리양건이 있었다.
생각이 깊어 보이는 표정의 혁리원평이 철산에게 물었다.
"어찌할 생각인 것이냐."
"똑같이 되갚아줄 것 입니다."
그런 철산의 모습에 원평은 짧게 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씨 세가다."
"상관없습니다."
"아니, 우리 혁리세가가 상관이 있다. 이씨 세가는 지금 어지러운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가주님... 아니, 아버지, 어찌 혁리세가의 식구가 당했는데 대주인 저보고 가만히 있으라 하십니까."
"어허, 자칫하면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안 그래도 패물이 불타는 사건으로 인해 이씨 세가는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이씨 세가를 건드린다? 놈들이 그 배후로 우리를 지목 할 수도 있다."
"저희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어도, 장령군의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혁리원평의 성격은 간단했다.
신중하고, 또 신중했다.
그는 돌다리도 무조건 두 번 세 번씩 두드려보고 건너는 사람이다.
"거기가 내 들어보니 그 이도라는 놈이 무공에 대한 재능이 엄청나다고 하더구나."
"..."
"열일곱의 나이에 벌써 주천경에 이르렀다는데, 아무리 서자여도 그 정도의 재능이라면 이씨 세가에서 큰 자리를 맡을 수밖에 없다. 네가 그놈을 건드리는 순간 이씨 세가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또 다른 이유이기도하지."
"하지만....!"
"참거라.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혁리양건의 입장도 비슷했다.
그가 동생의 어깨를 두드린다.
"아우, 네 감정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어. 지금은 참아야 돼. 때를 기다리자고."
"...때라면 무슨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씨 세가가 휘청 일 때."
"...예?"
양건이 슬쩍 가주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현재 이씨 세가는 아직 소가주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야. 그런데 만약 첫째가 소가주가 된다면?"
"둘째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그래, 그 이도라는 놈의 입장은 모르겠으나 분명 둘째는 가만히 있지 않겠지. 그렇다면 반대는 어떨까."
"...둘째가 소가주가 된다면 첫째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이미 이씨 세가는 반드시 한번 이상은 흔들리게 되어있어. 그때를 노리자."
혁리원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중한 그가 보기에도 무언가를 한다면, 그 적기는 이씨 세가의 혼란이 가중되었을 때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두 분 약속하셔야합니다. 그때는 무엇이든 행동하셔야합니다."
답은 가주인 원평이 했다.
"그래, 약속하마."
"반드시, 그 이도라는 놈은 내가 죽일 겁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너의 재능은 놈의 그것을 능가하니 말이다."
그렇게 모든 의견이 합의가 되었다.
그때였다.
"허허... 아무래도 장령군이 꽤 시끄러워질 것 같구려."
그냥 얼핏 들어도 노인의 목소리였다.
세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동시에 포권을 취했다.
"대협, 오셨습니까."
혁리세가에 가주보다 높은 이는 없다.
태상 가주가 있긴 하나 지금 병으로 투병중이라 걷기도 힘들다.
대협이라 불린 노인이 말했다.
"은원은 무림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반드시 당했으면 갚아주는 것이 도리요. 내 이제 보니 두 아드님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 같구려."
뒷짐을 진채 허허 웃는 흰 수염의 노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했지만 정말 평범할 리 없다.
저 남자의 이름은 묘만리.
그는 비룡대협(飛龍大俠)이라는 별호를 지닌 인물로서 팔대문종 중 하나인 아수라검종(阿修羅劍宗)의 장로였다.
"대협,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아수라검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허허허, 이렇게 남자답게 패도의 길을 걷는 이들을 우리 아수라검종이 어찌 싫어할 수가 있겠소. 그대들이 패도의 길을 걷는 이상 우리 아수라검종이 그대들과 함께 할 것이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왜, 비룡대협이라는 어마어마한 별호를 지닌 그가 장령군의 혁리세가로 와있겠는가.
이건 너무나도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제자를, 찾기 위함이다.
묘만리는 혁리세가의 둘째가 꽤 재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곳에 방문한 것이다.
그런 그가 파악한 혁리철산의 재능은, 나쁘지 않았으나 자신의 제자로 들이기에는 아쉬웠다.
그것 때문이다.
묘만리의 제자가 된다면 장씨 세가가 제왕검종의 배경을 얻은 것처럼 혁리세가도 아수라검종의 배경을 얻을 수 있었을 터인데.
정말 아쉬웠다.
그런 묘만리가 혁리원평에게 물었다.
"헌데, 내 듣자하니 열일곱의 나이에 주천경에 이른 무인이 있다하던데... 맞소?"
"...."
"어찌 말이 없으신거요. 설마 경쟁관계에 있는 가문이라 내게 말하기 싫으신 거요? 이거, 어찌 패도의 길을 걷는 이들이 이리 좀팽이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단 말이오."
"...그게 아닙니다. 어디부터 말씀을 드려야할지 잠시 고민한 것뿐입니다."
"허허허허. 그렇소? 그거 다행이구려. 그래서 고민은 끝나셨소?"
"...예."
"그럼 한번 들어보겠소. 말해보시오."
"...대협께서 알고계신 그 무인이 바로 장령삼대세가중 하나인 이씨 세가의 서자입니다."
묘만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으음... 서자라..."
"예. 어릴 적부터 모자른 녀석이라는 평가가 장령군 전체에 퍼져있었습니다. 실제로 보았을 때도 항상 고개를 숙이고 있고 말을 할 때도 버벅거림이 심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주천경이 되었고, 산적들의 목을 베고 이씨 세가에서 일하는 대총관과 일반 총관을 단숨에 죽였다고 합니다."
"호오... 죽였다? 이씨 세가의 가주가 그것을 보고만 있었소?"
"듣기로는 위계질서의 문제라고 하더군요. 감히 자신의 물건을 훔친 총관과 부자간의 대화에 감히 끼어든 대총관을 죽임으로써 질서를 만들었다는... 해괴한 소문이 들려왔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묘만리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박수까지 쳤다.
"그거 참 마음에 드는구려. 그것이 진정한 패도의 길이지. 그는 어디 있소? 내 한번 그를 만나봐야겠구려."
이씨 세가의 위치를 알려주려던 그때였다.
묘만리의 입 꼬리가 휘어진다.
그대로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럴 필요 없으실 것 같구려."
"...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묘만리의 시선을 따라 혁리세가의 세 명도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혁리세가 입구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의 모습을.
이도였다.
이도가 지금, 겁도 없이 홀몸으로 혁리세가에 방문한 것이다.
혁리철산이 당장이라도 놈을 죽여 버릴 듯 기운을 끌어올렸으나, 손을 들어 올린 묘만리에 의해 저지되었다.
허허허.
"행보 하나는 정말로 마음에 드는구려."
묘만리의 목소리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마치.
제자로 삼아버릴 것처럼.
***
보자마자 미간을 와락 찌푸리고 말았다.
저 미친 노인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비룡대협 묘만리.
저 남자를 내가 모를 리 없다.
아수라검종의 팔대장로중 하나로서, 대장로의 자리를 맡고 있기도 하다.
아수라검종에는 부종주라는 개념이 없다.
오직 종주가 있고 그 밑에 대장로가 있다.
그 말인즉, 아수라검종에서 서열이 두 번째인 고수중의 고수라는 뜻이다.
무력만큼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것은 그의 인성이다.
설마 별호가 비룡대협이라 정말 대협처럼 늠름하고 대단한 성품을 지녔을 리 없다.
다른 곳도 아니고, 패도로 유명한 아수라검종의 사람인데 대협 소리를 듣는다? 이건 그 저의를 의심 해봐야 한다.
내가 아는 저 남자는 절대로 대협 소리를 들을 남자가 아니다.
그리고 저렇게 호감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냥 무시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혁리가주님."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자 떨떠름한 표정의 혁리원평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마침 방금 소식을 들은 참이었는데... 꼭 그랬어야했느냐."
"죄송한 말씀이지만, 황금객잔은 저 이도가 뒤를 봐주기로 한곳입니다. 그곳의 점소이든 요리사든, 그게 누가되었건 뒤를 봐주겠다는 뜻은 그들을 지켜주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눅 들지 않았다. 당당하게 할 말을 했다.
"보고를 들으셨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때였다.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덜덜 떨고 있던 한 남자가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외쳤다.
"네이놈! 그게 사람 입에서 할 말인 것이냐! 어찌 사람을 그리 쉽게 죽이고 단전을 부순단 말이더냐! 그냥 경고만 했어도 충분했을..."
"그게 경고입니다."
"...뭐?"
"'무려' 한명이나 살려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의 자비를 베풀었는데 어찌 화를 내시는 겁니까."
"이.. 이놈이... 내 당장 네놈을 이 자리에 죽여 버릴...."
"어허! 그만!"
혁리원평의 외침에 혁리철산이 움찔한다.
"그만하거라.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설마 같은 말을 두 번 해야 알아듣는 것이냐."
"...가주님..."
"그만 되었다. 철산이 너는 그만 가서 그 취삼이라는 녀석을 돌봐주거라."
이를 으득으득 씹어대던 혁리철산이 나를 잠시 노려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혁리원평이 내게 물었다.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이해해 줄 것이라 믿는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부족한 아랫사람의 잘못은 결국 윗사람의 잘못이기도하니, 얼마나 분하겠습니까."
내 말 한마디한마디가 속을 긁어놓는 건지 이번에는 소가주인 혁리양건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히 무시했다.
혁리원평이 한숨을 터트렸다.
"...그래서 왜 온 것이냐."
왜 온 것인지.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수리비를 받으러왔습니다."
그 말에 어이가 없는 건지 혁리세가의 부자가 눈을 끔뻑였다.
"수리... 수리비?"
"예. 아까의 그 일로 인해 황금객잔의 벽과 환문이 부서졌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혁리세가의 무사들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당연히 그 수리비용을 이곳에 청구하는 게 맞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혁리원평의 입이 그대로 다물어진다. 신중하기로 유명한 그의 두 눈에 살기가 깃든다.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장족의 발전이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억지가 과하구나."
"어찌 이게 억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저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총 수리비 은자 603냥입니다. 제가 사비로 수리를 하고 이후에 이자까지 붙여서 청구하는 방법이 있고, 지금 당장 603냥을 제게 주시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너, 이도가 맞는 것이냐."
웃고 말았다.
"그럼 제가 누구로 보이십니까."
"...정말 다른 사람 같구나. 어렸을 때 눈도 못 마주치던 그 꼬마가 이리도 변할 줄이야. 흡사 사람 자체가 변한 것 같다. 혹시..."
"마귀에 씌인 게 아니냐,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거라면 아닙니다. 저는 이도가 맞고 지금 돈을 받으러 온 겁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혁리원평은 가장 먼저 옆에서 발작하려는 소가주 혁리양건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입이 열린다.
"말도 안 되는 억지는 다른 곳에 가서 부리거라 우리는 돈을 줄 수 없..."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묘만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혁리가주."
"...예, 대협."
"내가 보기에 아무래도 자네가 돈을 주는 게 맞는 것 같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게 억지라는 걸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억지라니, 저것이 바로 패도가 아니겠소. 응당 받을게 있다면 받아오는 게 맞소. 앞에 무슨 장애물이 있건 전부 헤쳐 나갈 배포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
"허허허, 이거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구려. 혁리가주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묘만리가 내게 다가오더니, 자기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었다.
"자, 여기에 대략 은자 천 냥 정도가 들어있느니라, 내가 그 수리비를 대납 해줄 터이니, 화를 푸는 것이 어떻겠느냐."
비룡대협 묘만리.
나는 안다.
이 자가 미래에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제자를 구하겠다는 명목으로 황실에 난입해서 그곳의 동창들을 죄다 쓸어버린 이후 '황녀'를 납치한다.
여기까지였으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는 황녀를 강제로 범한 뒤 그녀에게서 낳은 아이에게 자신의 무공을 가르친다.
말은 안했는데, 적어도 현재 시대에서 내가 죽기까지 무림공적이면서 '대마두'라는 이름을 동시에 듣는 이는 총 세 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바로 눈앞의 묘만리다.
그리고.
그는 남자도 범한 전력이 있다.
묘만리가 히죽 웃었다.
"너,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첫째의 난
귀찮은 혹을 달고 다니는 기분이다.
"왜 따라 오십니까?"
"따라오다니, 내가 가는 길에 우연히 네 녀석이 있는 것뿐이다. 허허."
처음에는 황금객잔으로 가려했으나, 이런 귀찮은 혹이 생긴 이상 황금객잔으로 가는 것은 절대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천면살수객의 경지를 다른 이들이라면 몰라도 묘만리는 반드시 눈치 챈다.
괜히 사달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지금 이씨 세가로 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따라오던 묘만리도 걸음을 멈춘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거? 하나 있지."
묘만리의 입가에 호감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
"..."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왜 제가 마음에 드십니까?"
"왜라니, 네 녀석이 지금껏 걸어온 행보, 참으로 인상적이더구나. 패도를 중시하는 우리 아수라검종의 미래가 되어도 무방할 정도의 행보였다. 그렇다면 너의 심성은 어떠한가. 혁리세가같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볼 때는 마두로 보겠지만 내가 볼 땐, 너는 그저 단호할 뿐이다. 손속이 과한 것은 맞으나 결과가 중요하지. 너는 결국 그 모든 결과들을 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지 않았더냐."
묵묵히 들었다.
"또, 모르는 이들을 그 모든 것들을 결국 '운'이 좋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정말 모르는 놈들이나 하는 소리고. 이 모든 것들은 운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면 강호가 왜 강호 겠느냐. 너는 그 모든 것들을 계산하고 움직였다. 내 말이 틀리더냐."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맞는 말이긴 했다.
"장씨 세가도 건드리고 혁리세가도 건드리고, 장령군 전체를 먹을 생각이라는 걸 내가 정말 모를거라 생각했느냐. 요 앙큼한 녀석."
난 모든 것들을 계산하고 움직였다. 조현의 머리를 강타한 혁리세가의 무인들의 경우는 그 계산하는 시간이 매우 짧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이득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혁리세가?
당연히 치울 생각이다.
장씨 세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계산하면서 움직일 생각이다.
"말을 하면서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주천경에 이른 재능과 그 단호한 심성, 그리고 철저하게 계산이 가능한 머리까지. 좋구나. 정말 좋아. 도저히 안 되겠다. 지금 당장 가자."
"어디를 갑니까?"
"아수라검종, 그곳으로 가자. 나를 따라오면 내 비전 절기인 오뢰분마검법(五雷焚魔劍法)과 신영귀단공(神影歸段功)을 네 녀석에게 전수해줄 것이다."
"호의는 감사하나 거절하겠습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히 말하는 내 태도에 묘만리가 크게 당황했다.
"...이 녀석이? 잘 생각해보거라. 다른 곳도 아니고 아수라검종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의 대장로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너는 아수라검종 대장로의 직전 제자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장령군같은 촌구석에서 서자로 살 바에야 더 큰 물로 올라와서 노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죄송하지만 이미 제 마음은 확고합니다."
"...허허... 절대로 멍청한 녀석은 아닌데, 내 제안을 거절한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터.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구나."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고.
나는 이미 스승을 모시고 있다. 비록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만나지도 못했지만 내 일평생, 나의 스승은 오직 한명이다.
"말하고 싶지 않다?"
"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이러고 계실 시간이 있으신 겁니까?"
"응? 그건 또 무슨 말인 것이냐."
"아수라검종에 소집령이 떨어진 것으로 아는데,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묘만리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제법이구나. 그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작은 재주입니다."
"그게 작은 재주일리 없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넓고,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그럼 잠시 나와 대련을 한번 해보자꾸나."
묘만리는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의 손이 뻗어온다. 잡아챘다.
터억.
"호오... 확실히 일반적인 주천경은 아니구나."
묘만리의 발이 신묘하게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한 치 차이로 나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가 어깨를 깊숙이 밀어 넣는다.
철산고(鉄山靠)다.
나는 즉시 뒤쪽으로 자리를 박차며 충격을 완화시켰다. 뒤로 한걸음 정도 물러섰다.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두 눈이 번뜩인다.
상대가 팔대검종의 대장로건, 천하십대고수건, 천하제일인이건.
나를 공격했다면 그도 똑같은 대가를 치러야한다.
즉시 자리를 박찼다. 놀란 표정의 묘만리가 그대로 몸을 뒤로 젖힌다. 내 발이 그의 얼굴 앞을 스쳐지나간다. 그대로 발의 방향을 바꾸며 밑으로 내려찍었다.
균형을 완전히 잃은 것 같았던 묘만리의 몸이 움직인다.
쿠웅-!
내 발은 땅을 강타했다. 이미 내 옆으로 이동한 묘만리가 히죽 웃고 있다. 보법을 밟았다.
천기신보(天驥神步)가 땅을 어지럽힌다. 왼쪽 팔꿈치를 휘둘렀다. 묘만리가 팔을 들어 막는다. 닿기도 전에 내 발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몸이 그대로 회전한다. 내 오른쪽 팔꿈치가 묘만리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묘만리가 고개를 돌린 순간.
뻐어어억-!
내 팔꿈치가 그의 턱을 강타했다.
그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나보다.
"...허어.....허어어...."
기이한 소리까지 내는 것으로 보아 혹시, 내 공격이 그의 머리에 큰 충격을 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묘만리가 내기를 끌어올리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나름 조화경의 고수다.
그의 일반적인 육체는 보통의 인간들의 그것과 궤를 달리한다.
턱을 매만지던 묘만리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아무리 너의 육체에 수준을 맞췄다고 해도 이 정도라니...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너를 아수라검종으로 데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거 참 잘되었군요. 말이 통하는 분이라 참 다행입니다."
"그래, 분명 너를 아수라검종으로 데려가게 된다면 종주 놈이 너를 빼앗아 갈 것이 분명하다."
말이 조금 이상했다.
"...대단하구나. 움직임, 보법, 판단력, 너의 그것은 주천경에 이른 이들의 그것과 다르다. 천부적인 재능이 분명하다. 무공 재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판단력도 대단하고 거기다 싸울 때의 판단력은 더 대단하니, 너를 아수라검종으로 데려가는 것은 내게 있어서 좋은 일이 아닐 것 같구나."
"..."
"내가 아수라검종을 나오게 된다면 그때 너를 내 제자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 그것이 낫겠구나."
말이 조금 이상한 게 아니라 많이 이상했다.
그가 품에서 두 권의 서책을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받거라."
"뭡니까 이게?"
"일단 받고 보거라."
원래 공짜로 주는 것을 마다하지는 않는 성격이라, 일단 받았다.
하나의 서책에는 오뢰분마검법(五雷焚魔劍法)이 적혀있었고 다른 한권에는 신영귀단공(神影歸段功)이 적혀있었다.
"오뢰분마검법에는 그것과 상응하는 무명보(無命步)가 함께 적혀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배우거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런 촌구석에서 그런 고강한 무공을 얻을 수는 없을 터이니, 일단 배워놓으면 너에게도 좋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린 것이냐."
침묵으로 답했다.
"입이 참으로 무겁구나. 그래서인지 더 마음에 드는 것 같구나."
묘만리가 웃는다.
"다음에 보자꾸나. 허허허."
그렇게 묘만리가 자리를 박찼다.
참으로 기이한 하루였다.
손에 들린 두 개의 비급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사람을 잘 믿지는 않는다.
묘만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명확했지만 그 세부적인 것까지는 자세하게는 몰랐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비급서를 펼쳐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한 시진 정도였을까.
딱 그 정도 자리에 못 박힌 채로 비급서를 읽었다.
턱.
비급서를 덮자마자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럼 그렇지.
무공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인상적이기도 하고.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이 심공, 신영귀단공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마지막 구결들이 얽혀있었고 꼬여있었다.
내 모든 것을 걸고 말하는 건데, 신영귀단공을 계속 익힌다면 추후에 분명 혈맥은 물론 정신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이건 묘만리가 수작을 부려놓은 것이 확실하다.
아마 생각 없이 이걸 곧장 배운다면 부작용을 뒤늦게 눈치 챌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필시 묘만리에게 의지하게 될 터이니, 그는 손쉽게 나를 제자로 삼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과연.
괜히 대마두가 아니었다.
그러나 오뢰분마검법만큼은 꽤 쓸 만했다.
두 개의 비급서를 품에 넣은 뒤, 이씨 세가로 향했다.
***
상운 상단에 도착한 이씨 일가의 일행들이 상운 상단의 간부들과 마주해있었다.
이미 여러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지금.
상운 상단의 단주인 상명길이 인상을 와락 찌푸린다.
"...그러니까, 지원 해 줄 수 없다, 이 말이오?"
"그렇소."
이세극은 당당했다.
"이번일은 어디까지나 상운 상단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오. 그런데 그 손해를 어찌 이씨 세가에서 나눠서 부담하라는 말을 하실 수가 있소."
"...이보시오 이가주, 아니, 사위, 자네가 내게 이러면 안 되지."
이세극이 한숨을 터트렸다.
"장인,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지만 저희 가문에도 규율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번 피해로 저희 가문도 큰 피해를 보았으나, 그 배상에 대해서는 청구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전왕께 드릴 진상품을 '다시' 준비해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돈을 우리 상운 상단에서 어찌 전부 대란 말인가. 너무 많은 양일세. 특히 그곳에 있던 [양영환]은 이미 값이 너무 올라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야. 이건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상명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이 개 같은 새끼.
지 아쉬울 때는 받아쳐먹을 건 죄다 받아쳐먹던 새끼가 이제는 손해 보게 생겼으니 자기와는 관계가 없다?
손해는 알아서 메꿔라?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는지 상명길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상명길뿐만이 아니라 상운 상단의 간부들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세극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뻔뻔하기가 거의 천하제일 수준이었다.
"세가에 밀린 일이 많습니다. 이제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정말로 이세극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에게 상명길이 물었다.
"...이보시오 이 가주."
"예. 말씀하시지요."
"소가주 자리는 대체 언제 확정지으실 생각이오?"
이세극이 묘한 미소를 짓는다.
"때가 되면 확정 지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그 '때' 라는 게, 작년에도 그렇고 재작년에도 그렇고, 그 전년에도 또 그 전년에도 항상 말하지 않았소. 대체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인 것이오?"
"글쎄요. 그건 가주인 제가 알아서 판단 할 일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 말고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
"가보겠습니다."
이세극이 몸을 돌려 회의장을 나섰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이정과 상씨 부인이 같이 나가려던 그때였다.
"영아야."
아버지의 부름에 상씨 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이리 와보거라."
이세극이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부녀간의 시간을 갖게 해 줄 생각이었다.
상씨 부인이 상명길에게 다가간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상인답게 눈치가 빠른 이들이다. 순식간에 회의장이 비워졌다.
상명길이 물었다.
"네가 볼 때 저놈이 정이에게 소가주 자리를 줄 것 같으냐."
"네."
"확신하느냐."
"...네."
"말에 망설임이 있구나.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지금 저놈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수가 없다.
이세극은 상운 상단과 운씨 세가를 한손에 틀어쥔 채 그 권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소가주 확정이라는 것에 때가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세극은 두 세력을 동시에 휘두를 수 있는 권력에 취해 그 때를 놓쳤다.
지금 첫째를 임명해버리면 운씨 세가는 돌아설 것이다. 아마 전과 같은 지원은 없게 되겠지.
둘째를 임명해버리면 상운 상단과의 관계는 더 냉랭해질 것이다.
"내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했는데, 언제까지 그렇게 물렁하게 살 생각인 것이냐."
"...예? 아버지 그게 무슨..."
"놈이 소가주 자리를 넘기지 않는다면 우리 상운 상단이 그간 이씨 세가를 지원해준 자금들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놈은 여전히 상운 상단과 운씨 세가를 손에 틀어쥔 채 권력을 누릴 생각만하고 있으니, 어쩌겠느냐. 행동하는 수밖에."
"...행동이라면...?"
상명길이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들고는 상씨 부인에게 건넸다.
"판단은 네가 하거라."
"아버지. 이게 뭐죠?"
"독이다."
"...독이요?"
"[단혼마독(斷魂魔毒)]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섭취하게 되는 순간 주화입마에 걸린 것처럼 몸 안의 모든 혈맥들이 꼬일 것이며 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걷는 것은 물론 육체를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다. 살아도 산 게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이지."
"....설마..."
"그래, 어쩌겠느냐. 놈의 저런 태도를 십 수 년 동안 지켜보았다. 내가보기에 저놈은 우리의 앞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치워야하지 않겠느냐."
대체 어젯밤에 잃은 돈이 얼마인가.
단순하게 잃은 돈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전왕과 거래를 틀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는 거다.
지금 당장 구할 수 없는 품목들이 넘쳐났고, 상운 상단의 가주는 이세극에게 도와 달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상운 상단이 거대하긴 하나 그 모든 것들을 단번에 부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자금이라는 게 있으니까.
이 사정들을 이세극도 분명히 안다.
알지만 남일 이라는 듯,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듯한 저런 태도에 이미 상명길은 마음이 돌아섰다.
"때가 되었을 때 시작하거라. 뒷일은 우리가 책임지마."
"...알겠어요. 아버지."
"그래, 마음 독하게 먹거라. 정이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상씨 부인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당연하죠. 걱정 마세요. 그리고."
"또 뭐?"
"...돈을 좀 빌려주세요."
상명길이 고개를 갸웃했다.
"돈?"
"살막에 의뢰를 넣을 생각이에요."
"누구를 죽이려고?"
"셋째요."
상명길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그 남자 구실도 못하는 그놈 말이냐?"
"옛날의 그놈이 아니에요. 아버지, 열 일곱의 나이에 벌써 주천경에 이르렀다고요."
상명길이 크게 놀랐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무공의 재능이 남다른 모양이구나. 아무래도 이세극의 피보다 그 첩년의 피를 더 물려받은 모양인 게지."
"..."
"좋다.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직접 의뢰를 넣으마. 특급으로 넣으면 되겠지?"
상씨 부인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제 거슬리는 놈들을 전부 치우고, 이씨 세가를 집어 삼키는 일만 남은 셈이다.
"고마워요 아버지."
"오냐."
때가 되었다.
묵묵히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주천경에 이른 몸이긴 하나, 진지하게 말하면 지금 이 육체는 무인으로서 매우 약한 몸이다.
근육의 밀도는 처참하고 육체의 균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수련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신 수련과 기의 수련은 그래도 경험이라는 게 있어서 나름 지름길로 움직이며 빠르게 성장이 가능하지만 육체는 아니다.
다듬고, 또 다듬어야한다.
천기신보를 두 번 정도 사용하면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세 번 정도 사용하면 근육이 끊어진다.
네 번 다섯 번 사용하면 거의 하루 이틀을 앓아 누워야했다.
이 모든 것들을 단약과 영약의 기운으로 다스렸던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난 지금 침상에 누워 며칠을 요양해야했을 거다.
이래선 안 된다.
머릿속에 계속해서 백년 삼이 아른거린다.
백년 삼 한 개면 중단전을 열어젖힐 가능성이 오할 정도고 두 개면 구할 이상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아무리 여러 일이 있었어도 백년 삼을 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두 개는 몰라도 최소 한 개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구했을 거다.
"도련님!"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익숙했다.
"이름이, 염길성이었나?"
"어...예, 맞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억해주셔서."
기억은 무슨.
"되었다. 가주님에 관련된 소식만 들려오면 네 녀석이 와서 알려주지 않았느냐. 이쯤 되면 이름을 외울 법도 하지. 그래서 무슨 일인 것이냐."
"상운 상단으로 갔던 가주님과 첫째 부인, 그리고 이정님이 복귀하셨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지금 어디계시지?"
"방금 막 가주전으로 들어가셨으니... 가주전에 있지 않을까요?"
"그래, 고맙구나. 가보거라."
지금까지 항상 가주자 나를 호출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내가 직접 갈 생각이다.
나는 묵묵히 가주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
운씨 부인과 이원이 했던 일들은 결국 준비였다.
상씨 부인이 상명길에게 받은 단혼마독도 결국은 준비였다.
아직까지는 이세극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제대로 된 정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의 입장이라는 게 생겨버렸고 미래에 대한 의구심을 품어버렸음에도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세극은 그 미래를 보지 못하고 또 다시 코앞에 있는 것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세가로 복귀한 그의 귀에 들려온 소식은, 또 이도에 대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혁리세가를 건드렸단다.
혁리세가는 그나마 장령삼대세가 중에 중립을 지키는 이들로서 뒤에서 수작질은 거의 부리지 않는 가문이기도 했다.
이미 양광이현의 고수로서 장령군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둘째인 혁리철산이 질풍대라는 곳을 이끄는, 절대로 무시 못 할 가문이기도 했다.
그런 가문을 건드렸다고 한다.
질풍대의 대원 두 명을 죽이고 한명의 단전을 부수다니.
이 미친놈.
이세극은 당장 이도를 호출했다. 그의 명을 들을 하인이 이도를 데리러가기도 전에, 가주전의 문이 열리고 이도가 들어섰다.
"오호, 잘 되었구나. 내 마침 네놈을 부른 참이었다."
네놈이라는 말에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이도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잘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가주님을 보고 싶었으니까요."
"하, 그래, 요즘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것 같은데, 좋다. 그럼 이제 한번 변명 해보거라."
의아했다.
"변명이요?"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혁리세가를 건드렸다고 하더구나. 총관들을 죽인 것도 넘어가주었고 천화루를 불태운 것도 넘어가주었다. 대체 어디까지 봐주어야 네놈이 정신을 차리려는 것이냐. 주천경에 이르렀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냐."
무슨 말을 하나했더니.
이도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표정관리를 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혁리세가를 건드린 건 아닙니다."
"허어, 내가 보고를 받았는데, 질풍대의 대원 두 명을 죽이고 한명의 단전을 박살냈다더구나. 이게 건드린 게 아니다?"
"예. 엄밀히 말씀드리면 그들이 저를 건드린 거고 저는 대응했을 뿐입니다. 장령군의 황금객잔은 제가 뒤를 봐주기로한..."
"누가, 그리 결정하였느냐."
와락, 미간이 찌푸려진다.
"황금객잔이든 뭐든, 어찌 이씨 세가의 대소사를 함부로 결정하는 것이냐. 네 녀석이 지금 장남과 차남을 제치고 소가주가 되려 마음먹은 것이 아니냐 이 말이다."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말씀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이씨 세가가 뒤를 봐주는 게 아닙니다."
"...무어라?"
"이씨 세가가 아닌 저, 이도가 뒤를 봐주는 겁니다."
"...네놈이 미쳤구나."
"왜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가주님 입장에서는 좋은 거 아닙니까?"
"어찌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냐."
"장령삼대세가 중 으뜸은 이씨 세가가 아닙니다. 세간의 멋모르는 이들이 아무리 나불거려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네놈이 지금...!"
"장령군의 으뜸은 혁리세가입니다. 멀리 갈 거 없이 우리 세가에 연기사경에 이른 무인이 단 한명이라도 존재합니까?"
"...그건 상운 상단에..."
"여기는 이씨 세가지 상운 상단이 아닙니다. 장씨 세가의 소가주가 지금 양광이현을 넘어 오룡봉성에 진입했다고 하더군요. 제왕검종의 사람이라 그런지 재능이 참으로 출중한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장령군으로 복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제왕검종의 배경을 신경 쓰는 거 이전에 그 장남이라는 놈한테 장령군 전체가 먹힐 겁니다.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이씨 세가는 약하기 때문이지요."
이세극이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도의 말 하나하나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틀린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씨 세가는 그저 돈이 많을 뿐이다. 그걸 뒷받침하는 무인이 없다.
괜히 이도의 입지가 변한 게 아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이도는 이씨 세가의 희망이다.
그의 무력이, 이씨 세가에는 필요하다.
"지금 소가주니 뭐니 이런 거에 신경 쓰시기보다 가문의 힘을 키워야하는 것이 소자는 맞다고 생각합니다."
"....좋다. 혁리세가를 건드린 것에 대한 변명은 잘 들었다. 황금객잔은 이씨 세가와 관련이 없다. 오직 너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알겠느냐."
이건 선을 그은 것이다.
상관없다.
애초에 이씨 세가에 뭘 기대하고 행동한 게 아니었으니까.
뭘 가져오면 뺏는 것이 일상인 이 버러지 같은 집구석에 큰 기대를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정도는 기대 해볼 법 했다.
"예. 소자,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골이 아픈지 머리를 부여잡은 이세극이 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백년 삼은 언제 주실 겁니까?"
이세극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지금 세가의 상황을 알고도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오히려 그 말에 이도가 의아했다.
"그건 저희 세가의 문제가 아니라 저기 있는 첫째 어머님의 문제 아닙니까?"
"...상운 상단의 일을 이씨 세가의 일과 나누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패물이 불타올랐을 때 이씨 세가의 패물도 함께 불타올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따로 놓고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은 것은 이도뿐만이 아니었다.
상씨 부인과 이정도 포함되어있었다.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새끼가 상운 상단에게 뭐라고 했는가.
상운 상단의 일은 상운 상단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통보했다.
상씨 부인은 그나마 있던 정도 다 떨어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백년 삼에 대한 것은 미안하지만 일단 나중으로 미루는 게 옳다고 본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 아비는 말이다. 이씨 세가를 키우는데 온 힘을 다 쏟는 사람이다. 백년 삼은 상태가 좋은 최상급의 경우 은자 4천 냥 정도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3천 냥은 넘는다. 당연히 둘 다 최소치로 잡아야한다. 지금 세가가 이리도 어려운 상황인데 그만한 지출을 할 내력이 없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세극이라는 사람을 많이 봐오지는 않았으나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만한 충분한 사건과 시간이 있었다.
이세극이 말하는 '나중'이라는 것은, 그냥 기약 없는 기다림과도 같다.
이러다 흐지부지 될 것이 유력했다.
이도의 두 눈이 가라앉는다.
"아버지. 한 말씀만 더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해보거라."
"약속이라는 건 말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아야 그 의의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가가 이리도 어려운데 백년 삼을 뜯어가야겠다? 네놈이 정말 이씨 세가의 자식이 맞는 것이냐!"
도리어 호통을 치는 이세극은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도의 두 눈이 가라앉은 의미를.
그리고 이때다 싶은지, 상씨 부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가, 이번엔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해보시오."
"이제 소가주 자리를 확정지을 때가 온 게 아닌가 싶어요."
"또 그 소리요? 내 말하지 않았소. 다 때가 되었을 때 정할 것이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상씨 부인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아니요. 지금이 적기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처럼 소가주 자리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니 가문이 어수선 한 것 아니겠어요? 지금 일만 봐도 그래요. 저기 있는 이도가 가문의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 백년 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겠어요? 다 가문의 소가주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죠."
"그게 어찌 그것과 관계가 있단 말이오."
"가가, 만약 소가주 자리가 확정되어 있었더라면 이 정도의 일은 소가주의 선에서 정리가 가능 했을 거에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혁리세가에 관련된 일도 그렇고 여러 가지 일도 전부 소가주 선에서 정리했다면 지금처럼 가가가 괜히 열을 올릴 필요가 없었겠죠."
"..."
"장령군 내에서 별 해괴한 소문이 다 돌고 있어요."
"무슨 소문을 말하는 거요?"
"사실 이씨 세가의 소가주 자리는 이미 내정되어있다, 그리고 그 내정자는 이씨 세가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세가 밖에 있는 인물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가가께서 이미 다른 여인과 정을 통하여 낳은 배다른 자식이 이씨 세가에 곧 들어온다는 뜻이겠지요."
콰앙, 이세극이 탁자를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체 어떤 놈들이 그런 해괴한 소문을 퍼트린단 말이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분명 그런 소문이 있어요. 전부 잠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소가주 자리를 확정하시지요. 마침 가문의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던 이세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가주 자리는 내 나중에 확정지을 것이오. 지금은 아니오."
"...가가!"
"어허, 어찌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오. 소가주에 대한 일은 그렇게 알고 있으시오. 그리고 상운 상단에서 세가로 올 때까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지 않소. 한번만 더 내 앞에서 소가주 이야기를 꺼내면 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겠소. 아시겠소?"
"....네."
상씨 부인의 두 눈이 가라앉았다.
잠시지만, 이도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고 이렇게 느꼈다.
저건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이라고.
천천히.
이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괜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리 판단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백년 삼에 대한 것은 나중을 기약하겠습니다."
"그래, 그리 말해주니 좋구나. 원래 혁리세가에서 있었던 일로 징계를 줄 생각이었는데 그래도 네 녀석한테 미안하니 그냥 묻어두마."
"아버지의 은혜에 저 소자는 감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는 이도의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낀 것은 오직 차남인 이원 한명이었다.
"가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도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때가 되었다.
오늘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겁니다.
때가 되었다.
상씨 부인은 그리 판단했다.
저 빌어먹을 새끼와 수십 년을 함께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다.
아버지께 받은 단혼마독을,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당장이라도 이걸로 놈을 죽이고 싶었다.
"정이야."
"예 어머니."
"오늘 저녁이다."
"..."
"오늘 저녁, 가주 자리가 공석이 될 것이다."
이정이 침을 꿀꺽 삼켰다.
국가로 따지면 이건 반란이다. 내전이든 뭐든 아무 단어가 나가져다 붙여도 상관없다.
"소가주 확정을 저렇게 미루는 그 의도가 너무나도 뚜렷하니,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구나. 소가주 자리는 건너뛰고 바로 가주 자리를 꿰찰 것이다."
"...예. 어머니."
"우선 우리 쪽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으거라. 그리고 원로들도 설득하거라. 아니다. 원로들은 내가 설득하마."
"오늘 안에 가능할까요?"
상씨 부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원래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는 법이다.
오늘 저녁부터 내리게 될 그 서리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한번 결정을 내리니, 그 동안 너무 돌아갔나 싶었다.
이렇게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우선 무사들에게 이르거라. 이세극이 쓰러지게 되면 우리는 그 배후로 '운씨 세가'를 지목할 것이다."
"...운씨 세가를 멸문시키실 생각이신가요?"
"아니지. 흡수할건 흡수하고 버릴 건 버려야지. 이 모든 일들은 신속하게 처리되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장령군의 다른 세가들이 우리의 뒤를 노릴 터이니, 일단 일이 시작된다면 너는 당장 소가주 자리에 올라서거라."
"가주가 되는 게 아니었나요?"
"어허, 어찌 그리 서두르는 것이냐. 가주 자리가 비어있게 된 상황이라면 응당 소가주가 가주의 일을 대행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너는 소가주이면서 가주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고 이세극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너는 바로 이씨 세가의 가주가 되는 것이다."
이정이 들었을 때 이것은 너무나도 완벽한 계획이었다.
아비에게 독을 먹이겠다는 어머니의 말은 참으로 가혹했지만 애초에 가혹하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이긴 하나 결국 원하는 것을 계속 주지 않았던 사람이기도 하니까.
은혜보다 원망이 더 크다.
검은 머리 짐승인 이정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자, 시작하자꾸나."
"예. 어머니."
***
그렇게 어머니와의 독대를 끝낸 이정이 향한 곳은 바로 막내인 이도가 머무는 처소였다.
마침 수련을 하고 있던 이도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고개를 돌린다. 이정이 밝게 웃었다.
"막내야."
"웬일이십니까?"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이정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다.
서자라 무시당했던 것들은 전부 과거의 일이긴 하나, 그 모든 것들을 주도했던 것은 이정이다.
솔직히 차남인 이원에게는 그렇게 큰 지분이 있지 않았다.
이원의 입장에서는 굳이 무엇을 해봐야 어차피 막내고, 굳이 위협도 되지 않는다. 세가내의 사람들 모두가 이도를 무시하니 그냥 덩달아 이도를 무시했던 차남이었고, 장남은 뒤에 있었다.
뻔뻔함이 극에 이른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이정이 말했다.
"웬일이긴, 장남으로서 막내인 너를 보러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 것이냐."
이정의 웃음은 여전했다.
"참으로 놀랍구나. 네가 주천경에 오르다니,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본론만 하시지요."
웃고 있던 얼굴에 쩌적 금이 갔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본론이라.. 좋다. 너는 앞으로 어찌 할 것이냐."
"뭘 어찌합니까?"
"만약에 말이다. 이씨 세가 내부에서 내전이 벌어진다면 나와 이원 둘 중에 어느 쪽에 설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도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제가 얻는 게 있습니까?"
"얻는 거? 있지. 일단 원하는 게 뭔지 말해보거라."
"백년 삼 두 개에 오백년 삼 하나가 필요합니다."
"...과하구나. 어차피 너의 무공 재능이 뛰어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백년삼이라니, 그런 게 있으면 당연히 장남인 내가 먹는 것이 맞다. 과한 욕심 부리지 말고 단약 정도에 만족하거라. 그러다보면 내가 너에게 '하사'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어이가 없었다.
"으음, 그러니 이렇게 하자꾸나."
뭘 어떻게 하자는 건지 이도가 묻기도 전이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거라."
"...?"
"무릎을 꿇고 나를 '주군'으로 모시겠다 맹세하거라. 내 그리하면 너를 살려줄 것이다. 또한 너는 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끼가, 어디서 쳐 본 건 있어가지고.
"첫째 형님."
"그래, 말해보거라."
"주접 떨지 마시고 그냥 가시죠."
"...뭐라?"
이도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는 묵묵히 손을 뻗었다.
나름 주천경에 이른 이정이었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과거 멸문한 대곤륜의 신묘한 수법인 '운룡금나(雲龍擒拿)'를 어찌 그가 반응하겠나.
터억,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형님."
"....그래."
"모든 일에는 때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
"딱 한번, 과거에 있던 그 모든 것들을 털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딱 한번입니다."
"..."
"가서 '저에 관련한 일'을 없던 일로 만드십시오. 만약 '그게' 실행된다면 그때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압도적인 위압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둘째 형님에게 그러했듯, 나름 핏줄이니 단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냐고?
당연히 안다.
이정이 이도의 손을 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삿대질하며 외쳤다.
"네이놈!! 이제 보니 네놈이 소가주 자리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로구나!"
물끄러미 그런 이정을 바라보았다.
"미친놈, 어찌 서자 따위가 그런 귀한 자리에 욕심을 내는 것이냐. 남우충수라는 말도 모르느냐. 감히 내게 그런 속을 보이다니, 이런 구제불능 같으니라고."
여전히 이도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네놈은 지금 선을 넘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너의 말을 철회하고 내게 사죄하거라. 그럼 내 넘어가줄 것이다."
"첫째 형님."
이도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기회는 분명히 드렸습니다."
"...건방진 새끼, 네놈은 지금 이 일을 후회 할 것이다!"
그대로 이정이 몸을 돌려 사라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도는 이정의 몸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형님, 이제 그만 나오시죠."
벽 뒤에 밀착하고 있던 이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도가 고개를 돌렸다.
이도의 표정은 단호했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오늘인 것이냐."
"예. 오늘입니다. 일망타진 할 것이니 모든 무사들을 불러서 한곳에 모아두십시오. 그리고 일이 시작된다면 형님은 저를 따라오시고요."
"...알겠다."
***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이씨 세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시작될 것처럼.
일촉즉발의 상황.
그 분위기를 읽지 못한 것은 이씨 세가의 주인, 이세극이었다.
"가가,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업무를 보고 있던 이세극이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 문 앞에서 차 한 잔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첫째 부인이 보였다.
"...설마 또 소가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라면, 없소."
"그런 거 아니에요."
상씨 부인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차를 이세극의 앞에 내려놓았다.
"다 가가에게도 나름의 뜻이 있을 텐데 조금 조급해서 그랬어요."
"으음..."
"그 정도는 이해 해주실 수 있잖아요. 제가 소가주 자리에 왜 집착하는지도 아실 거고요."
"알다마다."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약속드릴게요. 이제부터는 소가주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주면 고맙긴 하겠소만, 정말이오?"
"네.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이건 저기 먼 만년설궁의 궁주들만 마신다는 설영차에요.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으음... 그리 말해주니 정말 고맙구려. 차는 잘 마시겠소."
이세극은 단순히 이씨 세가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씨 세가는 무림맹에 속해있다. 비록 그 끄트머리에 이름이 있긴 하나 그래도 무림맹 소속은 분명하다.
이세극은 이씨 세가의 가주이자, 무림맹 장령군 지부의 지부장이기도 하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묵묵히 차를 마신다.
한 모금 마시더니 맛이 괜찮았나보다, 쭉쭉 들이켰다.
턱.
그렇게 내려놓는 잔은 비어있었다.
아주 깔끔하게 먹은 그가 맛있었다며, 이 차 한잔으로 화가 풀렸다는 등의 말을 하려고 했다.
그저, 하지 못했을 뿐이다.
쿠웅.
가장 먼저 심장이 크게 뛰었고 온몸의 혈맥에 이상이 생겼다.
"커..헉...."
입에서 검은색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핏발선 눈으로, 상씨 부인을 노려보았다.
"이.. 개 같은 년이..."
상씨 부인은 그런 이세극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속 드렸잖아요. 소가주 자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하지 않을 거라고."
"...쿨럭... 독... 독을 먹인 것이냐..!"
"가가, 그럼 내가 정말 당신 좋으라고 그 먼 곳에서 가져온 귀한 차를 내주겠어요?"
"..."
"소가주 자리를 안주시니 어쩌겠어요. 가주 자리를 먹는 수밖에."
핏발선 두 눈이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지만 상씨 부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간 고생 많았어요. 한 몇 달 정도만 살려두었다가 편하게 죽게 해드릴 테니, 그냥 다 버리고 가세요."
천천히, 이세극의 눈이 감겼다.
털썩, 힘없이 쓰러지는 그의 육체를 상씨 부인은 받칠 생각도 없었나보다. 슬며시 뒤로 물러섰다.
물끄러미 그런 이세극을 내려 보다가 크게 외쳤다.
"가가!! 가가!! 밖에 누구 없느냐!! 가가가 독에 당했다!"
그 자리에서 무릎까지 꿇고는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대단한 연기가 아닐 수 없었다.
***
이정은 처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이제 드디어 이씨 가문의 소가주가 된다.
아니지.
정확히는 가주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가문 내에서 자신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주가 곧 법인데 어찌 그의 말에 토를 달겠는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절로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머지않아 문이 열린다.
그곳에는 한껏 상기된 표정의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
"그래, 준비는 다 해놓았느냐."
"예. 지금 모두 평운각에서 대기 중입니다."
평운각은 이씨 세가의 무사들 중 최정예인 무사들이 거주하는 장소다.
수련을 하는 곳이기도 하고 잠을 자는 곳이기도 한 그곳은 이씨 세가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중의 하나였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처소에 누워있다. 의원 여러 명이 갔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 그때 이야기했던 대로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운씨 부인과 원이를 잡아들이는 것이지요."
"잘 아는구나. 그 다음에는 그 둘을 지지하는 무사들과 총관들을 모조리 잡아넣어야한다. 원로들은 내가 설득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예. 그럼 이제 바로 시작하시지요."
"좋다."
그렇게 두 사람이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끼이익.
닫혀있던 문이 열린다.
그곳에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이도와 이원이었다.
두 모자가 동시에 경악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이도는 굳이 설명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말 자체가 필요 없었다.
묵묵히 다가가 상씨 부인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소매 안에 숨겨두고 있던 비수를 역수로 고쳐 쥔 뒤 내려찍었다.
푸욱-!
상씨 부인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피가 왈칵 치솟는다. 이도의 얼굴 전체를 덮었지만 이도의 표정과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비수를 그대로 비틀었다.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이정과 눈이 마주친다. 그가 뒷걸음질 쳤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건 아니다.
주춤, 그렇게 물러서던 이정의 눈에 상씨 부인의 목에 박혀있던 비수를 뽑아낸 이도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우뚝, 이정의 발이 멈췄다.
지금 어머니가 죽었다.
어찌 아들로서 도망칠 수 있겠는가.
"이 미친 새끼!"
이정이 허리춤에 채우고 있던 검을 뽑아든 뒤 이도에게 달려들었다.
이씨 세가의 독문 무공인 청명검법이 펼쳐진다.
그러나.
검이 궤적을 그리기도 전에 터억, 이도의 손에 검이 잡혔다.
시종일관 침묵하고 있던 이도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기회를 주었지 않습니까."
"기...회...?"
"됐습니다. 잘 가십시오."
이도가 쥐고 있었던 비수는 상씨 부인의 목, 정확히 중간을 찔렀었다.
지금도 같았다.
같은 부위에, 그것도 같은 강도로 비수가 박혔다.
"커헉..."
꿈틀거리는 이정의 목에서부터 핏물이 치솟아 올랐다. 이도는 묵묵히 비수를 비틀었다.
퍼걱, 목뼈가 완전히 끊긴다.
그렇게.
이정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피칠갑을 한 이도가 개운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든 모습들을 지켜보던 이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어느 순간부터 막내인 이도가 다르게 보였다.
이도가 몸을 돌린다. 천천히 다가와 이원의 어깨를 잡아챘다.
"둘째 형님."
"어...어?"
말이 이상하게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도는 웃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이원은 이도가.
무서웠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도의 감정 없는 목소리에 이원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본색원
상씨 부인은 상운 상단의 장녀로서 이곳 이씨 세가에 시집을 왔다.
그런데, 상씨 부인이 이씨 세가에 홀몸으로 왔을까.
그럴 리 없다.
상운 상단에서 상씨 부인을 따르던 여러 명의 무인들이 있었다.
그들도 함께 왔다.
그들 중 가장 강하며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씨 세가의 무력부대인 [청운대]의 대주인 문관월이었다.
그의 무력은 주천경.
곧 양광이현으로 올라설 것이 유력한 인물로서 청운대에 속한 모든 이들에게 모범이 되는 남자이기도 했다.
청운대에 속한 무인은 총 145명이다.
그중 100명이 이정과 함께하기로 했고 이들이 지금 평운각에 모여 있었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있는데.
"...어찌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인가."
이미 모든 계획을 들었다.
가주가 쓰러지고, 그 배후로 운씨 부인과 차남을 지목 할 것이며 지시가 내려오는 즉시 그들을 생포하라.
그들을 따르는 이가 있다면, 투항하는 이는 살려두되 반항하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죽여라.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에 대해 모든 동선도 다 짜놓았다.
지금 지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미 술시가 지난 상황이다.
왜 조용한 거지.
그때였다.
평운각의 문이 열린다.
드디어 왔구나.
차기 가주가 될 이정이 분명하다.
고개를 돌린 문관월이 그 자리에서 크게 당황했다.
"....삼공자? 그리고.... 이공자?"
그 둘만 왔다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그들의 뒤에 나머지 청운대 소속의 무인들이 즐비해있었다.
...하나밖에 없다.
실패.
그들 중 이도가 묵묵히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였는데, 그 모습이 정파 계열의 무인이라기보다는 흡사 사마계열을 뛰어넘은 진정한 의미의 마인 같기도 했다.
자리에서 멈춰선 이도가 문관월을 비롯한 상씨 부인 쪽에 섰던 무인들을 바라보았다.
이도의 시선은 시종일관 싸늘했다.
그가 말했다.
"딱 한번만 말 할 테니 귀 열고 잘 들어라."
"..."
"지금 투항하는 자는 강등 내지 감봉 정도의 선에서 처벌이 결정될 것이다. 당연히 목숨도 빼앗지 않을 것이며 사지를 부수지도 않을 거고 단전을 박살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분하여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조차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도의 말이 이어진다.
"투항하지 않는 자, 즉결처형이 시작된 이후 투항하는 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죽일 것이다. 포로도 필요 없고 정보도 필요 없다. 반드시 죽일 것이다. 운이 좋게 세가를 빠져나간다 해도 상관없다. 중원 끝까지 찾아가서라도 죽일 것이고 너희와 조금이라도 엮여있는 이들 모두를 찾아 죽일 것이다. 지금부터 정확히 다섯을 셀 것이다. 다섯 안에 결정해라."
이도는 묵묵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상씨 부인 쪽에 섰던 청운대의 무인들이 동요한다.
하나를 세고, 둘을 세고, 셋을 셋을 때였다.
약 백 명의 무인 중 일곱 명이 투항했다.
넷을 셋을 때였다.
또 다시 일곱 명이 투항을 했다.
다섯을 셋을 때였다.
열 명이 투항을 했다.
대주인 문관월을 포함한 총 101명의 무인들 중 무려 스물 네 명이 투항을 한 것이다.
"둘째 형님."
뒤쪽에서 대기하던 이원이 냉큼 다가왔다.
"그래, 가문에 반기를 들었으니 당연히 이것은 즉결처형이 마땅할 터, 지금부터 이놈들을 이 자리에서 도륙내..."
"전부 데리고 나가십시오."
이도의 말에 이원이 두 눈을 끔뻑였다.
"...응?"
"전부 나가고, 문을 걸어 잠그십시오."
"...그게 무슨 말 인 것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 하지 마시고 알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냥 다 데리고 나가세요."
재차 말하려는 이원이었지만 이내 이도와 눈이 마주쳤다.
싸늘하게 가라앉아있는 그 두 눈을 본 순간, 오금이 저려왔다.
"나가라고."
"...아... 알았다."
이원이 뒤에 있는 병사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보냈다.
마지막으로 이원이 나가기 전, 이도가 말했다.
"한 번 강조하자면,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는 이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죽을 겁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 처신하십시오."
"....그래, 명심하마."
이윽고 이원도 나갔다.
덜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린다.
이 자리에는 오직 이도와 청운대의 반역자들만이 남았다.
문관월은 이 상황이 조금 우스웠다.
"이제 보니, 둘째는 허수아비고 결국 삼공자님이 모든 것을 주도하신 모양이군요."
"그래서 달라지는 게 있나?"
"..."
"없으면 입 닥치고 기다려라."
어이가 없는지, 문관월이 질문했다.
"대체,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뻔 한걸 묻고 그러나. 당연히 너희 모두를 죽이려고 준비하고 있는 거지."
"준비? 그것보다, 혼자서요? 주천경에 오르셨다고 너무 기고만장해 하시는 거 아닙니까?"
문관월의 말에 이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내 이도는 품에서 작은 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열더니 안에 들어있던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단환을 입안에 그대로 집어넣었다.
왜 저러는지 문관월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단약이 목에 넘어가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나.
왜 저렇게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이 많은 이들을 정말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이도는 묵묵히 아까 이정의 처소에서 주워온 검을 뽑아들었다.
오랜만인 것 같다.
검을 쓰는 건.
이도가 눈을 감았다.
고민? 그런 건 안했다.
전부 내보낸 이유? 하나밖에 없다.
천천히 눈을 떴다.
이도의 두 눈은 시뻘겋게 물들어있었다.
원래.
무공이라는 건 자주 사용하고 그래야 익숙해지는 거다.
아무리 스승님의 무공이어도, 세상에 들키는 순간 반드시 본 이들 모두를 죽여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무공일지라도.
위기의 순간에 꺼내들려면 이 무공을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이 그때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검 자체도 붉게 물들었다.
그렇게.
이도가 자리를 박찼다.
***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원은 이도의 말대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그리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지도 못하게.
꽤 거리를 둔 채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귓가에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살려 달라.. 피해라... 도망쳐라... 죄송하다... 등등.
그 목소리들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절박했지만 그것과 거의 동시에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잘려나가는 소리들이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 더 삼켰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저런 소리들이 들려온단 말인가.
주천경에 이른 이도가 정말로 혼자서 저들을 모두 도륙내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왜 모두를 나가게 한 걸까.
그런 이원의 귓가에, 평운각 내부에 있는 한 무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인이다-!! 저놈은 마인이다!!"
그 절규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도가 마공을 배운게 아닐까.
그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모두를 나가게 한 게 아닐까.
안 그래도 손속이 과한 것 같았는데 그게 다 마공을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도가 지금 이원의 이런 생각을 눈치 못 챘을까.
그럴 리가.
챘을 확률이 높다. 아마 확률보다는 그냥 그렇게 의도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이미 이도와 손을 잡았다. 끝까지 가게 될 것이 유력한 상황이다. 덮어줄건 덮어주고, 치켜세울 건 치켜세워야한다.
그런 이원에게 황급히 다가오는 여인이 있었다.
운씨 부인이었다.
"원아!"
"...아.. 어머니."
"어찌 된 것이냐.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
운씨 부인의 말이 멈췄다.
지금 평운각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어오고 있었기에.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이도입니다."
"..."
"이도가 안에서 상씨 부인 편에 섰던 청운대를 상대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예."
이원은 보지 못했다.
지금 운씨 부인의 두 눈을.
그녀는 지금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이원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이대로면 이원이 가주가 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이도가 가주라 불릴 수도 있다.
이원이 허수아비가 된다는 뜻이다.
그건 안 된다.
"뭣들하고 있는 것이야! 당장 가서 가문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지 않고!"
그러나 이미 이도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 움직이는 이들은 없었다.
운씨 부인이 짜증을 내며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어젖히려고 잠겨있던 문을 풀려던 그 순간, 뒤에 있던 이원이 운씨 부인의 어깨를 잡아챘다.
"안됩니다."
"...너까지 이럴 것이냐. 이대로면... 안된단 말이다!"
"...아니오. 어머니, 이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틀어집니다. 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소자를 믿어주십시오."
진지한 아들의 태도에 운씨 부인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멍청한 놈.
이대로면 네가 허수아비가 된단 말이다.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하지 못했다.
쿠궁.
밖에서 걸어 잠근 걸쇠가 그대로 부서졌다.
끼이익, 문이 열린다.
운씨 부인과 이원은 동시에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끝났습니다."
묵묵히 말하는 이도의 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색이었다.
전부 핏물이다.
더 놀라운 건 이도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는 거다.
그리고.
이도의 뒤쪽으로 펼쳐진 그 모든 광경이 두 모자의 눈에 들어온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시산혈해.
멀쩡한 상태의 시신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목이 잘리고, 사지가 잘리고, 몸이 반으로 토막 나고.
온통 붉었고 곳곳에는 살점들이 난무했으며 벽에는 시체들이 박혀있었다.
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거지?
단신 아니었나?
혼자서 저게, 가능하다고?
이도가 말했다.
"정리하시고, 운씨 세가와 이씨 세가의 세력을 전부 불러 모으십시오."
"...끝났다고... 하지 않았더냐."
이도의 싸늘한 두 눈이 이원을 향한다.
끝?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이씨 세가에서의 일이 끝난 거지, 모든 일이 끝난 건 아닙니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 두 모자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도는 생각보다 친절한 남자였다.
"상씨 부인의 배경이 어딥니까."
"...상운 상단?"
발본색원.
한번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하는 법이다.
이도는 일을 시작했을 때 단 한 번도 그 일을 어중간하게 끝내 본적이 없다.
이빨을 들이 밀었으면 그 이빨을 뽑아버릴 것이고.
검으로 위협을 했다면 그 검을 빼앗아 몸을 토막 내버릴 것이며 한 가문을 무너뜨리려했다면, 상대의 가문을 무너뜨려야한다.
그것이 이도가 살아온 세상이었다.
"수주현으로 갈 겁니다. 준비하십시오."
살수
상운 상단의 상명길은 집무실에 앉아 편한 모습으로 차를 한잔 마시고 있었다.
저 멀리 북해에서 얻어온 설영차다.
심신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효능이 있는 이 차는 굉장히 귀했다.
상운 상단 정도 되니까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거다.
연나라로 가는 패물이 죄다 불타오른 문제는 아직 수습하지 못했으나, 다른 문제들에 대한 조치를 전부 끝냈다.
아까 서신을 받았다.
이씨 세가로 시집갔던 장녀에게서 온 서신이다.
오늘 술시에 일을 시작 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는데, 이미 술시가 훌쩍 넘었다.
이 말인 즉, 이미 지금 이씨 세가는 상운 상단의 손에 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앞으로의 계획은 간단했다.
우선 이씨 세가의 차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운씨 세가도 통째로 흡수할 것이다.
상운 상단은 수주현이라는 촌구석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도 되었다.
이씨 세가를 필두로 장령군 전체를 손에 넣은 뒤 세를 불려갈 것이다.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울 방법 또한 이미 구상해두었다.
우선 셋째였던 이도.
놈을 죽이기 위해 의뢰를 넣었다.
무려 금화 100냥이다.
의뢰 등급은 특급.
오늘이나 내일, 그 무공 재능이 대단하다는 셋째는 반드시 죽는다.
상운 상단은 수주현의 관청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장령군의 관청에도 줄을 대는 것으로 무력에 대한 방비를 할 수 있을 터.
이것이야말로 황금빛 미래였다.
먼 미래가 아니라, 코앞으로 다가올 미래.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그나저나.
슬슬 이씨 세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는 소식이 들려야하는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단 말인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기우라도 되는 것처럼, 문이 벌컥 열렸다.
"단주... 단주님!"
흡사 산적과도 같은 차림새의 남자였다.
머리가 덥수룩했고 수염도 덥수룩했다. 덩치도 컸다.
이 남자가 바로 상운 상단의 부단주 왕진혼이다.
기다리던 소식이 온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상명길은 왕진혼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저건 무슨 사달이 터졌을 때 나오는 표정이다.
"밖에... 밖에..."
"밖에 뭐! 말을 제대로 하거라!"
"밖에... 이씨 세가의 사람들이 와있습니다."
"...뭐?"
"뿐만 아니라 운씨 세가의 무사들도 이끌고 왔습니다. 그 숫자가 이백이 넘습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나밖에 없다.
실패.
상명길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모든 무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린 뒤 밖으로 나왔다.
먼저 가장 앞에 서있는 남자가 보인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그 남자는 눈을 감은 채 검 한 자루를 땅에 꽂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심히 위압적이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와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명길은 움찔, 뒤로 한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이 말도 안 되는 기백은 무엇이란 말인가.
"상운 상단의 상명길, 맞나?"
"...맞다. 네놈은 누구냐."
"그것까진 알 필요 없다. 오늘 이씨 세가에서 난이 일어났다. '상화영'에게 들어보니, 네놈에게 사주를 받아 단혼마독으로 이씨 세가의 가주를 암살하려했더구나."
상화영은 상씨 부인의 본명이다.
상명길은 딸의 이름이 나오자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상단 일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상명길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단혼마독? 내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다. 설령 내가 사주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우리 집안 장녀가 이씨 가문의 가주를 암살하려했겠는가."
"그거까지는 내가 모르지. 하지만 결과가 이미 나왔다. 이씨 가문의 가주님은 현재 혼수상태이며 상화영과 그년의 아들인 이정이 가문을 뒤집어엎으려 무사들을 모았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그의 귓가에 부단주 왕진혼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저놈이 이씨 세가의 셋째입니다."
크게 놀랐다.
"...그 머저리라고? 저놈이?"
"예."
너무 달라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전과 비교했을 때 전체적으로 신체가 커졌고 머리도 짧아졌다.
상명길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씨 가문의 셋째로서 내 화가 나는 것은 알겠으나, 어찌 사실 관계없이 이리 행동하는가. 이 녀석아,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그래도 우리는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인 사이다. 일단 들어오거라.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한 이후에 결과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
"..."
"설영차를 준비해두었다. 북해에서 구해온 아주 귀한 차지. 어서 들어오거라."
이도는 물끄러미 상명길을 바라보다가, 뒤쪽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뒤쪽에 있던 이씨 세가의 하인, 염길성이 두 개의 함을 가지고 오더니 이도의 앞에 내려놓았다.
"상단주. 대화하기 이전에 내가 선물을 두 개 준비했는데, 먼저 확인해보는 게 어떻겠나."
"...선물?"
이도는 발로 함 하나를 툭 건드렸다.
그러자 함이 열린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자마자 상명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이.. 개... 새끼가..."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했다.
하나의 함에는 상화영의 목이 들어있었으니까.
"말하지 않았는가. 두 개라고."
그리 말한 이도가 나머지 함을 발로 툭 건드렸다.
함이 열린다.
그곳에는 이정의 목이 있었다.
상명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랑하는 딸과 손자의 목이 지금 저기 있다.
개 같은 새끼. 빌어먹을 새끼.
이도가 묵묵히 말했다.
"전부를 가지기 위해 시도했다면 전부를 잃을 각오도 했어야하지 않겠나."
"....라..."
"잘 들리지 않는군. 그 대단한 상운 상단의 단주 목소리가 어찌 이리 기어들어가는 것이냐."
상명길이 크게 외쳤다.
"당장! 저놈을 잡아 쳐 죽여라!"
이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래, 그래야 상단의 주인답지."
"죽여!! 죽이란 말이다! 저 개새끼를 죽여! 당장!!"
발작하는 상명길의 명에 상단의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도가 검을 뽑아들었다.
"포로는 필요 없다. 오늘 우리 이씨 세가는 상운 상단을 가질 것이다."
뒤에 있던 이씨 세가의 무인들도 일제히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이도의 말이 이어진다.
"상단을 운영할 인력이 줄어들면 그 인력을 외부에서 보충하겠는가. 아니면 내부에서 보충하겠는가."
모두의 눈에 탐욕이 깃든다.
"죽이면 죽일수록 너희들에게 갈 보상이 커질 것이다. 그러니 목숨 걸고 죽이거라."
"...예!"
그렇게.
두 세력의 무사들이 부딪쳤다.
***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는 것이 맞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곳.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칠지모르고 누가 누구의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곳.
그것이 진짜 무림이다.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서걱-!
달려오던 상운 상단 무사의 목이 베어진다.
자리를 박찼다.
천기신보가 땅을 어지럽힌다. 검을 앞으로 뻗었다. 푸욱, 한 무인의 목에 박힌다. 발을 뻗어 무인의 몸을 걷어차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검 한 자루가 턱 밑을 스친다.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두 개의 검을 튕겨냈고 하나의 목을 베어냈다.
검을 역수로 고쳐 쥔 뒤, 몸을 옆으로 틀었다. 뒤쪽에서 검을 내지르던 무인의 검이 내 옆구리를 한 치 차이로 스쳐지나간다. 역수로 고쳐 쥔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서걱-!
한 무인의 머리가 하늘로 솟구쳤다.
내 시선의 정면에는 상명길이 있었다.
거리는 약 10장.
다른 놈들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오늘 저 상명길만큼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반드시 오늘, 죽여야 한다.
자리를 박찼다.
두 명의 무사가 앞을 막는다. 한명이 검을 횡으로 휘두르고 한명이 검을 내지른다. 땅을 밟았다. 천기신보가 펼쳐진다.
뻗어지는 검은 옆으로 흘리고 횡으로 휘두르는 검은 고개를 숙여 피했다.
순식간에 두 무인의 뒤를 잡았다.
두 무인이 고개를 돌린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중단전의 '내기'가 용솟음친다.
압축된 어깨의 근육을 이용해 강하게 휘둘렀다.
방향은 좌상단에서 우하단.
콰르르릉.
미약한 벼락 소리와 함께.
서걱-!
두 남자의 몸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진다.
오뢰분마검법(五雷焚魔劍法).
이것은 자연의 기운 중 뇌기를 이용하는 검법인데, 묘리를 보니 대성하게 되면 한번 검을 휘두를 때 다섯 번의 벼락이 내리치는 무공이었다.
지금은 아직 수준이 미약하여 한 줄기의 번개, 그것도 번개의 형태만 유지한 번개 비스무리한 것 만 불러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인원을 상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거리는 8장.
재차 자리를 박찼다. 무인 한명이 검을 휘두른다.
생각 없이 휘두른 것이 분명했다. 검의 궤적이 눈에 훤하다. 발을 휘둘렀다. 쾅, 굉음과 함께 무사의 검이 하늘로 솟구친다. 즉시 비수를 내려찍었다.
퍼걱-!
무사의 이마에 깊숙하게 박힌 비수 너머로 한 무인이 달려 오고 있었다.
굵직한 인상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양광이현에 다다른 고수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뻗어온다. 쥐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쿠웅!
검이 튕겨져 나간다. 그는 타격이 없었다. 내기가 강하게 응축되어있는 그의 팔을 보고 있자면, 양광이현이 분명했다.
그가 땅을 강하게 밀어내며 내 목을 향해 반대쪽 손을 뻗는다.
터억, 목이 잡혔다. 몸이 뒤로 밀려난다.
"놈! 무력에 자신 있는 것 같으나 고작 주천경밖에 되지 않느...!"
반대쪽 손을 뻗어 놈의 명치를 잡아챘다.
강하게 말아 쥐었다.
운룡금나(雲龍擒拿).
"음...!"
손에 내기를 몰아넣은 뒤, 강하게 회전시켰다.
자연스럽게 놈의 몸도 공중에서 회전했다.
땅이 하늘에있고 하늘이 땅에있는.
그의 눈을 노려보며, 팔꿈치를 내질렀다.
퍼걱-!!
공중에서 뒤집어져있던 그의 하복부에 적중한다.
다른 이들이 들었을 때는 단순한 타격음에 불과했을 테지만 나와 이 남자에게는 아니었다.
지금 단전이 깨졌으니까.
"커헉-!"
땅에 어정쩡한 자세로 엎어지는 그의 목을 향해 발을 내려찍었다.
콰직!
목이 박살난다. 고개를 들었다. 상명길과의 거리는, 아직 8장이다.
하지만 아까와 달라진 것은 이제 막으려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거다.
묵묵히 걸었다.
사방에 시체들이 즐비했다. 상명길이 뒷걸음질 친다.
옆에서 다가오는 무인 한명이 보인다. 고개를 뒤로 젖힌 뒤 손을 뻗었다.
운룡금나(雲龍擒拿).
이것은 단순한 금나수가 아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것과 동시에 절대로 풀어낼 수 없는 족쇄를 채우는, 금나수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무공이다.
상대의 얼굴을 잡아챘다. 그대로 돌려버렸다.
상체는 그대로고 목만 서너 바퀴 회전했다.
무인이 쓰러진다.
땅에 떨어져있던 검 한 자루를 잡아챘다.
천천히 걸었다.
뒷걸음질 치던 상명길이 털썩 주저앉는다.
그의 옆에 있던 산적같이 생긴 남자가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검을 집어던졌다.
푸욱-!
놈의 목에 박힌다. 그대로 쓰러지는 그의 시체를 바라보던 상명길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의 앞에 있었다.
"사... 살려주게. 제발..."
묵묵히 말했다.
"말하지 않았나.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했다면 실패했을 때 전부를 잃을 각오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실소가 터져 나온다.
"상운 상단은 잘 쓰도록 하지."
그대로 발을 내질렀다.
퍼걱-!
상명길의 머리가 터지며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한다.
몸을 편뒤 숨을 몰아쉬었다.
끝났다.
몸의 긴장이 풀어지려던 그때였다.
내 시야에 이상한 게 들어온다.
상명길은 가장 후방에 있었다.
그에게 가장 먼저 도달한 이는 누구인가.
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가 상명길에게 근접한 이후 죽인 사람의 수는 몇 명인가.
상명길과 저기 있는 산적처럼 생긴 남자, 총 두 명이다.
그런데.
어찌 이곳에 시체 하나가 있는 것인가.
긴장의 끈이 다시 조여지는 것과 동시에 그 시체가 벌떡 일어서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움직임이.
매우 신속하고 빨랐다. 양광이현? 아니다.
오룡봉성이 분명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 움직임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두 눈이 번뜩인다.
푸욱-!
그의 비수가 내 복부에 박혔다.
뒤로 물러서지도, 비명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오른손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잡아챘다.
"...살막인가."
"....크으... 괴물 새끼..."
손에 힘을 주었다. 놈도 비수에 힘을 주었다.
비수가 점점 깊숙이 박힌다. 상관없다.
고통? 익숙하다.
구결을 읊었다. 적룡신공.
화르륵.
온몸에 화기가 깃든다.
내 몸을 타고, 내 팔을 타고 피어올랐던 불꽃이 살수의 몸에 옮아 붙었다. 놈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서려했지만 그게 가능할리 없다.
운룡금나(雲龍擒拿)에 잡히지 않았는가.
밀리지도 않을 것이고, 밀릴 생각도 없었다.
머지않아.
불꽃에 휩싸인 놈이 비명을 내지른다. 손에 힘을 주며 놈의 입을 그대로 틀어막아버렸다.
반대쪽 손을 곧게 핀 뒤, 그대로 내려찍었다.
뒤늦게 반응하려던 살수였지만 그게 가능할 리 없다.
퍼걱-!
내 수도가 살수의 목에 적중한다.
부숴버리려 했으나 부수지 못했다.
그럼.
부서질 때까지 내려치면 된다.
다시 내려찍었다.
퍼걱-!
한 번 더.
퍼걱-!
"크흐...그만.. 그만해라..."
무시했다.
한 번 더.
뻐걱-!
목이 박살난 살수가 털썩 쓰러진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복부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살막.
이 고통에 대한 대가는 조만간 받으러 갈 생각이다.
고개를 돌렸다.
싸움은 어느 순간부터 멈춰있었다.
상운 상단의 무사들이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명백한 투항의 의사였다. 이어서 살아남은 이씨 세가의 무인들도 무릎을 꿇었다.
짧게 말했다.
"고생했다."
오늘 상운 상단이 이씨 세가에 흡수되었다.
잘 가십시오.
복부의 상처를 대충 지혈한 뒤 고개를 돌렸다.
"이도야."
이원이었다.
"예."
"...고생 많았다. 그런데 괜찮은 것이냐."
"일단은 괜찮습니다. 형님."
"그래, 말하거라."
"이곳의 정리는 운씨 세가에 맡기고 이씨 세가의 무인들만 데리고 장령군으로 복귀하시지요."
"...이곳에서 더 머물지 않고?"
"예."
이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너는 우리를 믿는 것이냐."
빙긋 웃는 걸로 답했다.
믿냐고? 절대 안 믿는다.
"한 가지 원칙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원...칙?"
"뒤에서 무언가를 챙겨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 제가 달라고 하는 것, 제 부탁, 그것들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아시겠습니까?"
"알다마다, 너와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설마 내가 모르겠느냐."
그거면 되었다.
"상운 상단에 있는 영약 중 30년 이상의 영약을 전부 챙기십시오. 그중 한 개 정도는 챙겨도 뭐라 안하겠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가지고 오시면 됩니다."
"알겠다. 걱정하지마라."
그렇게 해서 이원이 상운 상단에 있는 모든 영약들을 싹다 긁어왔다.
안타깝게도 백년 삼에 비견될만한 영약들은 없었다.
들어보니 그때 연나라로 갈 패물 중에 버젓이 백년 삼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그때 창고를 뒤질 때 조금만 더 뒤져볼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다.
영약들을 챙긴 뒤, 우리는 이씨 세가로 복귀했다.
마차 내에서 최대한 상처를 회복시켰다.
꼬박 하루가 지나서야 우리는 이씨 세가로 돌아 올 수 있었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었다.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히죽 웃고 있는 장운룡이 보인다.
"이제야 오는 것이냐."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빈집털이라고 해야 할까.
숫자는...
대략 200명 정도.
그들이 이씨 세가를 완전히 점령한 상태였다.
"우리 장씨 세가를 우습게 볼 때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거라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
"멍청한 놈들. 가문 내부에 일이 벌어진다면 당연히 외부의 일도 신경을 썼어야지."
장운룡이 검을 꺼내들었다.
"당장 투항하거라. 내 그리하면 목숨 정도는 살려줄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