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대가 끝나고 나오자마자 날 기다린 건 힐난하는 듯한 에드위나의 매서운 눈빛이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분명 거리를 벌려 대화를 엿듣지 말라 했을 텐데."
"공자님, 지금이라도 병사들을 부르겠습니다."
"미리암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지?"
"공자님!"
에드위나가 이렇게까지 소리 지르는 건 처음이다. 나는 귀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인상을 찌푸리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에드위나도 내 안위를 염려해서 저러는 건데 너무 매몰차게 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를 감시하고 경계하려는 목적도 있다. 하지만 미리암이 마음을 고쳐 먹은 이상 그녀도 위험한 게 사실이니 호위도 겸해야 해. 신뢰할 수 있는 병사들을 배치해달라 아버지께 간언드릴 것이다."
"언제는 포섭할 가치도 없으시다더니."
"미리암을 연민하라 할 땐 언제고."
"그런 적 없습니다. 단지 회유하면 좋지 않을까 말했을 뿐입니다."
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툴툴대는 에드위나를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연민하는 건 미리암이 아닌 그 자식이야."
"미리암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이유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보검을 쥐었다고 자기 살을 째는 놈은 미련한 놈이지."
약간 그런 느낌이다. 안으면 큰일나는 여자가 있다. 미리암은 그런 부류에 속하는 대표적인 여인이었다. 여차하는 순간 날 칼로 찌르려고 준비했던 자객을 뭘 믿고 곁에 둔단 말인가?
누군가는 거기서 스릴과 배덕감을 즐길 수도 있는데, 나는 칼에 찔리면 아파하는 놈이라 차마 그러진 못하겠다. 나는 저만치 떨어진 개울가의 존에게 손짓하며 뒷말을 이었다.
"포섭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도 그대로다."
"예? 하지만."
"이유 없는 선의를 받아들일 여자가 아니었거든."
미리암이야 살인미수라 쳐도 태어났을 뿐인 아이는 고아원 가기도 전에 죽을 위기였다. 아이 하나만 죽어도 꿈자리가 뒤숭숭할 텐데, 심지어 그 아이가 죽는 순간 전쟁까지 일어난다.
미리암에게 했던 말 중에 하나는 순수하게 본심을 담아낸 말이었다. 훗날의 분쟁을 막고자 한 명을 죽여도 진상을 알면 들끓을 판국에 전쟁하겠다고 죽인다니?
이건 뭐 갱생의 여지가 없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미리암의 방을 뒤로 했다.
"뭐. 언젠가 쓸모가 생길 수도 있겠지."
"..."
"어쨌든 도중에 미리암이 유바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거나 역으로 살해당할 가능성. 전쟁의 도화선을 당길 행위는 미연에 방지해놨다. 이제서야 겨우 마음 놓고 수도원으로 가겠구나."
비로소 최종 안전 점검이 끝난 셈이다.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싱글벙글 웃고 있던 찰나였다. 이리로 다가오는 존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고, 공자님! 테르베어 경께서 공자님을 찾으십니다!"
"...누구?"
"테르베어 경! 공자님 형님되시는 분 말입니다!!!"
14. 결혼한 적 없어요
미리암과 만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매처럼 번득이는 눈빛에 매서운 콧날과 짙은 수염은 물론 옷 아래로 윤곽이 드러나는 근육질 몸매까지 갖춘 사내. 나는 기억을 더듬어 이 사내가 누구인지 떠올려냈다.
사내는 날 보자마자 씩씩하고 기운찬 목소리로 방 전체를 쩌렁쩌렁 울려댔다.
"나르바! 요즘 들어 섭섭한 일이 많았다지? 거기 시녀 좀 치워봐라. 남자 대 남자로서 독대해야겠다."
테르베어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둘째 형이자 우리 포위스 공국의 차남으로, 뛰어난 무예 실력과 부하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약탈자들을 격퇴 중인 명실상부한 기사였다. 워낙 중임을 맡고 있다 보니 여태까지 만나지 못한 게 당연했다.
가까운 직계 가족들만 모여 약소한 결혼식을 치룰 때도 약탈자들과 싸우느라 참석 못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래서 딱히 만날 일 없겠거니 여겨 머릿속에서 지웠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 형이 여기 있을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에드위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에드위나는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바깥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에드위나를 위해 시간을 절약하기로 했다. 시작부터 쌍수 올려 허심탄회하게 직설적으로 물어본 것이다.
"한창 바쁘신 와중 아니셨습니까?"
"바쁘기는. 해안가의 약탈자 놈들은 말 타고 쫓아가기만 해도 지들 배 타고 도망치느라 바쁜 놈들인데. 그보다야 우리 동생 챙겨주는 게 더 급하지!"
그리고 테르베어와 몇 마디 나눠본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진짜로 저거 때문에 찾아온 게 맞았다. 해안선을 방비하라는 책임까지 방기한 채 이 곳까지 왔길래 뭔가 엄청난 일이 터졌나 했더니 말이다.
"형님, 진짜 괜찮은 거 맞습니까? 형님이 계셔도 약탈하러 오는 놈들인데 이리 자리를 비우신다면."
"나르바... 이 형을 걱정해주는 거냐? 녀석, 마냥 고마워하지도 않고. 이제 좀 사내 티가 나는구나."
대체 테르베어 머릿속에서 사내는 어떤 존재일지 물어보기가 두렵다. 어쨌든 날 걱정해서 일도 팽개치고 온 사람을 홀대할 순 없었다. 나는 한참동안 테르베어에게 붙잡혀 설득 아닌 설득을 들어야만 했다.
특히 내가 진로를 성직자로 잡았다 말하니 화들짝 놀랐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었다.
"나르바! 성직에 몸을 담겠다니, 귀족 남아로서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훌륭한 기사가 돼서 나와 함께 전장을 누비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겠다는 어린 시절의 맹세를 잊다니!"
"그게."
무심코 변명하려다가 조금 골똘히 생각해봤다. 몸주인의 기억을 죄다 인계받은 나다. 명예가 전부다, 기사도가 전부다 외치던 기억은 커녕 칼자루만 쥐어도 울상을 짓던 기억 밖에 없었다.
나중 가선 훌륭한 기사로 담금질해주겠다는 테르베어를 피해 꽁꽁 숨기까지 했다. 훌륭한 기사 이전에 성실한 종자조차 되지 못한 게 나였다. 나는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반문했다.
"전 딱히 기사 되겠다 한 적 없는 거 같은데요?"
"말에 무슨 무게가 있다고? 말 따위 하지 않아도 된다. 귀족의 남아라면 누구나 훌륭한 기사가 되겠다며 가슴으로 맹세하니까!!!"
"아..."
어쩌면 후계구도가 안정적인 까닭은 차남이 답도 없는 폐급이라서가 아닐까. 테르베어는 딱 기사 따리로 끝나야 모두에게 이로운 인물이었다. 심지어 기묘한 확신까지 지니고 있어 상대하기 몹시 피곤했다.
"네 걱정은 잘 안다, 나르바. 유바스가 저지른 치졸한 모욕은 사내의 자존심을 상처 입히기 충분했지. 하지만 그 정도로 기사의 꿈을 접어선 안 된다. 포위스의 기사로서 단언해주마. 네게는 재능이 있어!"
귀족 남성이라면 누구나 기사가 되어 전장에 나서야 한다. 이게 해가 뜬다는 상식처럼 박혀 있어 도저히 설득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편견과 아집하면 나도 지지 않는다.
특히 꿈인 줄 알았던 첫 빙의 때 기사란 인종을 접한 뒤론 불변의 신념까지 갖추고 있었다. 기사도를 외치는 기사들 대부분은 상종못할 쓰레기라는 신념 말이다.
나는 마음 속 부하나 동료로 두고 싶지 않은 인물 리스트에 테르베어란 이름을 올려놨다. 물론 형이 싫다고 말하는 대신 성직에 몸 담으려는 이유에 조금 살을 붙여 답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느낀 바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그동안 너무 나태한 삶을 살았단 생각이 강하더군요."
"오, 그러냐? 그럼 이 형과 함께 아침 수련을..."
"하인들 상대로도 짜증을 많이 냈습니다. 이게 평정을 잃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형님께서 제 실력 연마를 도와주신다 해도 이런 정신적인 수양까지는 시간이 허락치 않을 겁니다."
"나르바, 그럼 네가 생각하는 곳이 기사 수도회냐?"
여기까지 말하니 시종일관 성직에 부정적이던 테르베어가 처음으로 태도를 바꿨다. 오히려 기사 수도회란 말을 꺼낸 본인이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을 긍정했다.
"우선은 지역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원장의 추천을 받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사 수도회가 아무나 받아주진 않을 테니까요."
"음. 그렇지. 아무나 받는 곳은 아니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엄하게 단련해주겠다 자신하던 사람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테르베어는 딱히 물어본 적도 없는 기사 수도회의 엄격한 규율을 떠벌리며 자신이 어깨를 으쓱대기까지 했다.
"뛰어난 실력이나 굳센 정신 없이는 받아주지 않는 곳이다.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견디기 힘든 곳이고. 땅 좀 받았다고 기사라 으스대는 어설픈 귀족 놈들과 달리 꾸준한 훈련과 진짜 실전으로 심신 양쪽을 단련한 이들만 모였으니 당연하지."
"언제는 귀족이라면 누구나 기사해야 한다면서요?"
"말 타고 칼질은 할 줄 알아야 귀족이지! 나르바, 나는 네가 꼼짝없이 저 농노 땅개들처럼 창질도 제대로 못하는 뚜벅이로 살려는 줄 알았다. 헌데 기사 수도회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니..."
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울고 있었다. 테르베어는 검지로 차오르는 눈물을 훔쳐내며 코를 훌쩍여댔다.
"이 형이 하지 못한 걸 어떻게 알고 대신해주겠다며 자원했을 줄이야. 큼, 크흠!"
"예? 입회를 거부당하신 겁니까? 어째서요?"
테르베어가 생각하는 게 단순해서 그렇지 사람은 참 괜찮다. 실력도 출중한 기사였다. 증명까지 끝났다. 테르베어에겐 이미 해안가로 밀려온 약탈자들을 수도 없이 격퇴한 전적까지 있었다.
이런 테르베어가 거절당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기준이 깐깐하단 말인가? 나는 지금 막연하게 서울대 가야겠다 외치던 고등학생이 현실을 깨달았을 때 느낀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그 때, 내 충격어린 반응을 지켜본 테르베어가 돌연 울음을 멈췄다. 테르베어는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수염을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그게 말이다.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에 집창촌을 좀 들락날락했더니 소문이 거기까지 퍼진 바람에 그만."
"..."
"나, 나르바. 내가 설명해줄 수 있다. 내 가정에 알리기 전에 들어다오. 잘 들어라. 나는 뛰어난 기술을 갖춘 장인을 찾아갔을 뿐이다."
테르베어의 변명은 이러했다.
대충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육욕이 치솟는 혈기 가득한 기사의 인생. 전장에서 고양된 열기로 뜨끈하게 달아오른 몸을 풀어주지 못하면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당장 이 자리에 없는 아내를 불러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아무 여자한테 사랑을 속삭이며 안는 건 아내를 배신하는 행위다. 따라서 어떠한 사감도 엮이지 않은 채 투철한 직업 윤리를 갖춘 성기술 전문가들을 찾아갔다-.
나는 이 변명의 헛점을 단박에 눈치챘다.
"뭐 얼마나 다니셨길래 기사 수도회가 입회를 거절한 겁니까?"
"...세 번."
"겨우 세 번 가지고 그럴 리가."
"하루에 세 번. 무, 물론 한창 왕성했을 때 이야기니 지금은 상관없는 이야기다."
텁. 나는 테르베어의 변명을 더 이상 들을 자신이 없어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어쩌면 우리 가문의 혈통이 끊기는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여기면서 말이다.
덕분에 테르비어를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끝났다. 오히려 기사 수도회를 노리고 있다 말하니 우리 동생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며 응원까지 해줬다.
게다가 테르베어는 가족을 향한 애정도 지극했다. 테르베어는 동생을 극진히 아끼는 마음으로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며 아주 호언장담까지 했다.
"나르바, 내 무슨 일이라 해도 널 한 번 도와줄 테니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특히 네 형수씨나 네 조카들에게 말하면 안 된다. 알았지? 절대다!"
"형님, 그럼 제가 서신을 보내면 수도원에 면회하러 한 번 와주십시오. 수도원 내부에서도 귀천이 갈린다던데 안 좋은 소문이 깔린 와중에 입회를 결정했는지라 혹시 모를 괴롭힘이 염려됩니다."
"뭐냐, 나르바... 무슨 억지를 부리나 했더니 원. 당연히 해야할 일은 부탁하는 게 아니다. 걱정말고 서신만 보내라. 이 형이 금방 가서 감히 동생과 가문을 욕보인 자들을 모두 혼쭐내주마!"
그래. 사람이 흠결 한둘 쯤은 있을 수도 있지. 하는 일도 바쁜 와중에 이렇게까지 동생을 챙겨주는 형제가 어딨을까 싶다. 이 정도면 중세 상위 10% 안에 드는 형제애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있다 해서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 힘든 길을 가기로 했다면 일단 최대한 버텨보는 거다. 알았지? 이 형도 전장에서 기회가 날 때마다 널 응원하고 있으마."
"예, 형님."
테르베어는 이렇게 우격다짐한 뒤 갑작스레 나타났듯이 갑작스레 떠나갔다. 동생의 성장에 흐뭇해하는 형의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이다.
***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예상치 못한 반대자, 테르베어조차 내 다짐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은 덕분이다.
마지막 반대자까지 사라지니 망설일 것도 없었다. 애설튼 공왕이 내 상속권 박탈과 가문에서의 의절, 이후 수도원에 보내겠다는 조치를 선포한 순간 가신단과 봉신들 전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유바스가 드러내려던 격렬한 항의는 나와 손을 잡은 교회가 압박하는 걸로 해결됐다. 성 일레니오 축일 당시 유바스 측에 불참했던 일레니풋의 주교가 나섰기 때문이다.
[미리암 오른 유바스의 정절은 이전부터 의심받았고, 교회 또한 합당한 의문이라 여겼으나 태중의 아이를 안타까워해 불의를 보고도 눈감았다. 하지만 미리암을 받아들인 남편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의 포악한 행동에 경악해 이제라도 어미와 아이를 지키기 위한 결단을 내리니.]
일레니풋의 주교가 이번 사건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교회는 서로의 빛이 엮인 적 없음을 확신하며 혼인이 성사되지 않았음을, 이번 혼사의 무효를 선언한다.]
이로써 혼인 전적이 사라졌다. 나는 열두 살배기 유부남이 아니라 결혼한 적 없는 깨끗한 소년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나는 에드위나를 통해 소식을 전해듣고서 비로소 만족스런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한 시름 덜어놨네."
"한동안은 수도원에 계실 작정이십니까?"
"글쎄. 길게 머무를 수 있을까 모르겠네."
"...?"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에드위나. 나는 그녀를 보며 쓴 웃음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일레니풋의 주교는 확실히 유바스 쪽에 앙심을 품은 게 맞다. 기회가 오자마자 이토록 강경한 모습을 드러내는 게 증거였다.
내가 염려하는 건 다른 쪽이었다.
이 세상 교회도 판타지 국룰 종교집단과 비슷하다. 교구별로 주교가 있고 그 아래에 사제가 있다는 점까지 전부. 일레니풋이 조그마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교황청 직속이라서다.
문제는 다른 교구의 주교들. 예컨데 각 공국마다 하나씩 있는 주교들이었다. 유바스의 주교야 나쁜 말하면 모가지 썰릴 수 있고 다른 교구야 알 빠임? 하니 이해한다만...
"아무래도 적이 하나 더 있는 거 같거든."
우리 포위스 공국의 주교조차 아무 말 안 하는 건 좀 느낌이 싸했다.
15. 첫 승부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곳에 상상을 품곤 한다.
예컨데 금남의 구역 수녀원이나 금녀의 구역 수도원이 대표적이다. 금남금녀라 하니 뭔가 야릇하고 배덕적인 분위기로 가득하리란 기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뭔가 사건들이 넘쳐날 것처럼 보이고 말이다.
절반은 틀린 소리지만 또 절반은 맞는 소리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원장 수녀님과 친분이 있어 남자의 몸으로 수녀원에 들어가본 경험으로 단언할 수 있었다.
수도원은 굉장히 재미없다. 기본적으로 묵언이 강제돼서 누구 하나 입 열지 않는다. 발소리도 시끄럽다고 조곤조곤 다니면서 일만 한다. 사실 일만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되긴 했다.
그냥... 수도원은 일 말고 할 게 없다. 수도원 규칙대로 살면 진짜 인생이 뿌연 매연 안개가 깔린 도시처럼 칙칙하게 물드는 게 당연했다. 딱 하나 있긴 했다.
남들 몰래 즐기는 성관계.
제대로 된 오락이나 유흥거리는 하나도 없는데 한창 육욕에 달아오른 사람들끼리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다 보니 금녀의 구역 수도원에선 동성애가 판을 치고, 금남의 구역 수녀원에선 한 술 더 떠 방문객과 하룻밤 자버린 수녀들이 사생아를 죽여 매장시킨 탓에 아이 유골이 무더기로 나온다는 괴담이 스멀스멀 번질 정도였다.
물론 이는 수도원이 어느 정도 자처한 일이긴 했다. 귀족들한테 기부금 좀 받겠다고 수도 생활에 관심 없던 망나니 년놈들을 입회시키니 물이 흐려지는 게 당연하지.
내가 물 흐리러 가는 망나니인 입장에서 할 말이야 없다만... 귀족이 수도원에 보내진다는 건 대충 이런 의미였다. 너한테 물려줄 재산 따위 없으니 얌전히 수도원에 기어 들어가서 평생 얌전히 살다 죽으라.
심지어 수도사는 원칙상 사제와 같은 성직자도 아니다. 수도사는 수도원에서 살며 신앙 생활을 이어나가는 일개 평신도에 불과하다. 따로 공부해서 사제 서품을 받지 않는 이상 영향력을 끌어모으기도 어려우니 귀족으로서 사형 선고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마차에 오르는 날 배웅하러 온 건 직계 가족들이 전부였다. 애설튼 공왕과 테르베어 말이다. 가신들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첩보관 오버트 경도 혹시나 우리의 밀월 관계가 들통날까 염려해 일부러 가신단과 함께 했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착착 풀려가고 있었다. 나는 마차에 물건을 실어나르는 하인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애설튼 공왕은 이해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뒤틀고 있었다.
"나르바. 정말 기사수도회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냐?"
"누가 그럽니까?"
"너희 형이 아주 자랑스럽다고 떠벌리고 다니더구나."
우리 천방지축 둘째 형이 그새 소문을 다 퍼트린 모양이다. 테르베어의 말에 따르면 나는 수도서원할 지언정 기사로서의 꿈을 저버리지 않은 열혈귀족남아였다.
하지만 꿈과 현실은 차이나는 법이다. 나는 기사도를 꿈꾸는 소년 나르바란 인식을 철저히 부수기로 다짐했다.
"전 다스릴 영지가 없는데요."
"다스리는 영지가 없더라도 사람을 다스릴 순 있는 법이지. 나르바, 기사의 꿈은 어딜 가도 이뤄질 수 있단다! 이 형이 믿고 장담하마!!!"
"영지없이 사람만 끌고 다니는 자유기사들이 있긴 합니다."
보통 제 패거리를 이끄는 자유기사들은 도적이란 명칭으로 불리곤 한다. 프리랜서라는 말의 유래인데, 대충 길 가다 보이는 대로 랜스를 꽂아넣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자유가 항상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산 증인들인 셈이다.
"형님, 수도기사가 될 수 있을지 모르는 판국에 벌써부터 어깨에 힘 넣고 싶진 않습니다. 겸손하게 정진해야 겨우 가능성 있는 일 아닙니까."
"으음. 무인으로서의 마음가짐은 어느 정도 갖춘 모양이구나. 네 결심이 그렇다면야."
물론 진짜로 수도기사가 될 생각 따위 없었다. 이 몸의 기억에 따르면 기사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장원을 가진 일반적인 기사, 다른 하나는 떠돌아 다니는 자유기사, 마지막이 이교도와 영원한 성전을 맹세한 수도기사.
대충 봐도 알다시피 제일 빡세고 제일 힘든 건 수도기사다. 판타지 국룰 성기사랑 가장 비슷한 직종인데 딱히 신성력이나 기적 같은 걸 부린다는 소문을 못 들었다.
신성력 못 쓰는 성기사? 칼질만 죽어라 해대니 실력이야 월등할 테지만 내가 직접 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런 병신같은 직업을 누가 하냐고.
"아무튼 무사히 도착하고 나면 편지라도 적어 보내겠습니다. 초반에 기선 제압할 수 있도록 면회 좀 빨리 와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하지! 우리 동생 기 좀 살리겠다는데 말야."
"테르베어, 약탈자들을 소탕하라는 중임을 내팽개치지 말아라..."
기세등등하게 어깨를 쭉 펴는 테르베어와 혀를 끌끌 차대는 애설튼 공왕. 어디에도 균열은 보이지 않았다. 자다가 비명횡사할 확률이 낮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나는 그렇게 수도원행 마차에 탔다.
***
그리고 마차를 타고 서너 시간쯤 지났을 때 짙은 후회가 온 몸을 감돌기 시작했다.
슬슬 숲 초입까지 왔을 즈음, 억지로 버티던 후유증이 단번에 밀려온 것이다. 생각치도 못한 장애물의 등장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멀미가 무척 심했다.
"우웁. 우웨에엑..."
21세기 현대를 살 적엔 어찌나 심했던지 자동차 시트 냄새만 맡아도 몸이 부르르 떨리며 시큼한 향이 감도는 침이 솟아났다. 새하얗게 질려 바들바들 떨다가 토악질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쭉쭉 깔리고 부드러운 고무 타이어가 굴러가던 시대에도 그랬다. 지금이라면 어떻겠는가. 정비된 가도가 아닌 흙길 위를 가느라 마차가 덜컹덜컹거렸는데, 하도 흔들려서 가져온 침구류를 방석 삼았는데도 이따금씩 몸이 붕 떠오를 정도였다.
결국 속이 몇 차례 뒤집힌 탓에 일행이 멈춰서기까지 했다.
이번 일행의 안위를 맡은 삐죽삐죽 솟아난 염소 수염을 지닌 기사, 토파 경이 난처한 표정으로 시종들을 마주보기까지 했다.
"공자님께서 원래 저리 심하시나?"
"그, 글쎄요. 바깥에 나가셨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어서."
"난처하군... 비록 공자님이 석연찮은 일로 의절당하셨다곤 하나 엄연한 포위스의 핏줄. 저리 고생하시는 걸 보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대로 좀 머물러야겠어. 다들 모닥불 피울 준비를."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손을 들어올렸다. 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무언의 제스쳐다. 그대로 우물우물 거려 위액섞인 침을 모아다 퉷, 뱉은 뒤 입술을 뗐다.
"괜찮다. 마차 안에서 눈 좀 붙이고 있을 테니 마저 가자꾸나."
"공자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의절당했는데 꼬박꼬박 공자라 부르는군."
"그만한 모욕을 받으셨는데 제정신이면 이상한 겁니다. 만일 상대가 무도한 유바스가 아니고, 제가 그 남편이었다면 죽어라 뺨을 후려쳤을 겁니다. 아니, 아예 칼침을 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토파 경은 나를 연민하는 입장인가 보다. 토파 경은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 그 중에서도 기사답게 명예살인이란 개념이 탑재된 현지인이었다. 아주 아내와 아이 둘 다 죽여버렸을 거라며 이를 빠드득 가는 모습이 섬짓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잘 참으셨습니다, 공자님. 포위스의 모두가 공자님께 빚을 진 겁니다. 그걸 모르고 멋대로들 비난하는 꼴을 보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빚을 지다니."
"그 이상 가는 순간 전쟁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의식하셨든 의식하지 못하셨든 그리 판단하셔서 손을 거두셨을 겁니다."
진짜 꿈보다 해몽이다. 얼떨결에 정답을 맞추긴 했는데 알려진 사실이 뭐 있다고 저렇게까지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테르베어도 비슷하게 생각한 걸 보니 기사들은 내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가죽 주머니에 채워둔 물로 입가심한 후 길가에 뱉어버리고서 뒷말을 이었다.
"그랬으면 다행이지. 다시 출발하라. 갈 길이 멀다."
"예! 다들 움직여라!"
그렇다고 멀미가 단숨에 낫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한 번 속을 게워내니 어지러운 게 덜할 뿐이다. 타인을 신경쓸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그 탓에 표정이 계속 썩어있던 건지, 함께 탄 존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보였다.
"할 짓 없으면 석궁 장전하는 연습이나 해라."
"그, 그게. 토파 경이 공자님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일은 하지 말라 하셔서."
"볼트를 매기지 말고 시위 당겨서 거는 연습만 해. 그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존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하는 걸 포착했다. 이상한 쪽으로 직감이 발달한 녀석답게 무언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직감한 모양이다.
"저. 공자님."
존은 석궁의 시위를 당기다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사냥감 잡는 데에 석궁을 쓰면 훼손이 너무 심해 사냥에 안 쓴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다요."
"재미로 한다 그러지 않았느냐. 그런 걸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사냥이다."
사냥꾼들이야 가죽 벗기고 고기 팔아야 하니 그럴 수 있다. 가죽과 고기가 목적이 아닌 사냥이라면 위력에 몰빵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우리 존은 엉뚱한 상상을 떠올린 듯 했다.
갑작스레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푹 숙인 것이다.
"무슨 일이냐? 혹시 심중에 담아둔 고민이 있다면 내 흔쾌히 들어주겠다."
"공자님을 곁에서 모시던 전속 시녀님이 그립습니다..."
"?"
에드위나가 왜 그리워? 설마 존이 에드위나를 마음에 뒀나 싶어서 혹하던 찰나였다.
"시녀님이 계셨으면 제가 마차에서 내리고 바깥에서 걸어다닐 수 있었을 텐데요."
"존, 너는 특혜를 입고 있다. 남들 다 걸어다니는데 마차에 타고 있으니 이득 아니겠느냐?"
이 놈이 배부르고 등따시니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팩트를 나열하며 존의 이성에 호소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존, 너는 엄청난 사치를 부리고 있노라고 말이다.
그러자 존이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고개를 치켜올려 반짝이는 눈동자로 날 바라봤다.
"그럼 바깥의 저 친구랑 바꿔도 되겠습니까?"
"스읍."
"...."
그 뒤로 존은 아무 말 없이 석궁 장전하는 연습을 계속해나갔다. 나도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실컷 춤춰댔다. 그렇게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을 즈음이었다.
석궁 시위를 잡아당기느라 지루해 죽으려던 존이 무심코 바깥을 바라봤다. 덩달아 시선을 옮기니 검청색 울창한 숲 위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때마침 숲에서 날아오르는 새떼가 이 풍경의 감상 포인트였다. 존은 순수한 감탄을 자아내며 입을 헤 벌리기까지 했다.
"이야. 새들이 떼지어 날아가니 장관이네요."
"오는군."
"예?"
해가 저무는 숲 쪽에서 새떼가 날아올랐다. 어디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볼 법한 광경이지만 노려지는 입장에서 보니 편집증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저물기 직전 역광을 받아 숲의 그늘 속에서 움직이니 지금 행군해와도 정확한 위치를 눈치채기 어려울 터.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면 신속하게 숨통을 조여올 것이다.
"존, 가서 토파 경에게 전해라. 서쪽에서부터 적이 올 거라고."
"예? ...적이요?"
"전하고 나면 마차에 있는 석궁들 모두 네가 장전한다."
"이거 다섯 개 아닙니까?!"
나는 이상한 의문을 드러내는 존을 향해 간단한 답을 돌려줬다.
"그럼. 내가 장전하는 게 맞겠느냐?"
"..."
"살고 싶으면 해놓아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명확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나는 이번 싸움의 목표를 정해진 시간동안 버티는 데에 두었다. 문제는 상대의 수준이다.
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숲을 바라보면서 이마를 검지로 톡톡 쳐댔다.
유바스.
드디어 놈들과 정면으로 대면하는 순간이 왔다.
16. 역할 분담
홀쭉한 뺨에 튀어나온 광대뼈, 삐죽이는 수염을 지닌 기사.
토파 경은 불안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인, 존을 바라보며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마차를 세우고 슬슬 하룻밤 자려던 찰나였다. 공개된 장소라 엿듣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적? 습격이 온다고?"
"그, 그것이."
"허튼 소리로 야영지를 꾸리는 자들을 방해하다니. 날 따라와라. 넌 특별히 다뤄주마."
혼쭐이 난 존은 우물쭈물하며 움직이길 꺼려했다. 하지만 토파 경이 몸을 홱 돌려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존은 미간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파일 정도로 울상을 짓고서 토파 경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해가 저물기 직전, 어스름한 석양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비출 즈음.
토파 경은 야영지가 얼핏 보이는 숲 속에 도착한 뒤에야 비로소 존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손등으로 있는 힘껏 뺨을 후려쳤다.
일개 하인이 단련된 기사의 손찌검을 당해낼 리 없다. 존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눈물을 쏙 빼놓아야만 했다. 비명 섞인 신음소리와 함께 말이다.
"아흑!"
"힘은 가감했다. 엄살은 그만 부리고 일어서라."
이빨이 안 부서진 게 기적이다. 존은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을 움켜잡으며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토파 경은 그 모습을 보더니 혀를 차댔다.
"사내가 되어서 원. 단련 좀 해야하지 않겠느냐?"
"..."
"그래서. 공자님을 모시던 네가 무슨 일로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것이냐."
"고, 공자님께서 그리 전하라고만 하셨습니다."
망설이다간 한 대 더 맞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 탓에 존은 필사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했다. 존은 자신이 겪은 경험에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
마차에 탑승해 공자님이 시키는 대로 석궁 장전하는 연습만 거듭하던 도중이었다. 그런데 숲 쪽에서 새떼가 날아오르는 걸 보시더니 갑자기 적들이 올 거라 확신하셨다. 해서 토파 경에게 이를 전하라 명하신 거다.
존은 설명이 끝난 뒤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 억울함까지 호소해왔다.
"전 진짜 맞을 짓 안했습니다요."
그러자 토파 경이 삐죽이는 제 염소수염을 만지작대다 말고 혀를 찼다. 존을 향해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보내면서 말이다.
"남들 다 듣는 데서 습격이 오리라 말하면 어찌될지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냐?"
"예?"
"제대로 훈련받지도 못한 하인들이 습격이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움직이겠느냐. 여차하는 순간 공자님을 대신해 죽어야 할 자들이 멋대로 도망가면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다. 도망치더라도 지금은 안 돼."
"오오오."
토파 경의 논리정연한 말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아무 생각없이 물개박수치고 있던 존은 돌연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았다. 애초에 뛰어난 직감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겨온 존이다.
존은 토파 경이 허리춤의 칼자루에 손을 얹어올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여차하는 순간이요?"
철그럭.
토파 경의 서코트 아래로 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달리 선명하게 들려왔다. 단순히 얹어진 줄로만 알았던 토파 경의 손은 어느샌가 칼자루 전체를 움켜쥔 뒤였다.
"나, 나리."
"잘 들어라. 공자님이 죽으면, 네놈들도 다 죽는다."
토파 경은 존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기사의 살기어린 시선을 받아낸 존은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그제서야 토파 경도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토파 경은 존의 어깨를 토닥이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너는 단순히 이 근방에 산적 떼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염려되는 마음에 월권 행위를 저지른 거다. 이외에 단 한 마디의 사견이라도 덧붙였다간 곱게 가지 못할 거다."
"예, 예."
"그래도 의견이 타당하다 여겨 수용하마. 정량보다 더 배식해줄 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돌아가자."
"예, 나리."
존은 차마 울지도 못하고 넋이 반쯤 빠진 채로 영혼없는 대답만 반복했다. 이윽고 야영지로 돌아오자 동료 하인들이 퉁퉁 부어오른 존의 뺨을 보며 수군댔다.
"어휴, 기사 나리한테 대뜸 먼저 말을 거니 저리 되는 거지."
"공자님 모시느라 머리가 헤까닥 돌아버린 게야."
존은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마차를 향해 돌아가면서 속으로만 하소연했다.
'그냥 말 좀 전하라길래 전했을 뿐인데...'
그렇다고 마차로 돌아간다 해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존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소년이 오만한 미소를 그리며 반겨주고 있었다.
"귀족이 허락하기 전에 대뜸 말부터 건네는 놈이 어디 있느냐?"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검은 반곱슬 머리에 흑요석처럼 매끈하고 예리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핏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투명한 피부에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날선 눈매,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지닌 소년은 가만히만 있어도 자신감 넘치는 것처럼 보였다.
존은 그 밉상맞은 미소를 보고 속으로만 툴툴대며 조용히 찌그러져 앉았다.
"전하라 한 말은 제대로 전했고?"
"예. 덕분에 한 대 맞았습니다요."
"티를 먼저 냈어야지. 평민 출신 기사가 있다 해도 대부분 귀족과 연을 맺은 귀족의 말석이다. 귀족에 맞는 예우를 갖추지 않으면 오히려 더 신경질낼 거다."
"공자님께선 그런 일로 책을 안 잡으시잖습니까."
"내가 특별한 거지. 이 몸이."
"이제 알았습니다, 이제."
존은 나르바에게 재평가할 여지가 있음을 인정했다. 개울가의 존, 겁은 많아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내다. 온갖 패악질로 유명한 개망나니라도 해도 장점이 아주 없진 않았다.
나르바는 마지 못해 인정하는 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언질을 받은 토파 경이 하인들을 득달같이 갈궈대며 방비를 구축하는 중이었다.
"근방에 주제 모르는 산적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더군. 놈들에게 죽임당하기 싫으면 지금 당장 움직여라. 빨리!"
졸지에 봉변을 맞이한 하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마차 안쪽으로 움직였다. 정확히는 석궁의 시위를 당기고 있을 존을 향해서 말이다. 존이 처음으로 마차 안에 있어 다행이다, 그리 여긴 순간이었다.
"그럼 우리도 내리자꾸나."
"예?"
"예는 무슨."
당황한 존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나르바가 태연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려와 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 바퀴라도 빼놓으면 방벽으로 쓸 수 있지 않겠느냐?"
"바퀴는 누가 뺍니까?"
돌아온 건 매끈한 눈동자 안에 담긴 무언의 지시, 그리고 침묵이었다. 존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한탄하며 나르바를 따라 내려왔다.
***
마차에서 내려오자마자 날 기다린 건 토파 경의 반발이었다.
"공자님, 정말 위험합니다. 저 안에 계시는 쪽이 훨씬 안전합니다!"
날 호위해야 하는 입장에선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일 거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토파 경과 병사들이 밀리면 죽을 목숨이다.
마차 하나 뿐질러서 등을 지킬 수라도 있다면 차라리 그쪽이 승산 있노라 판단했다. 그렇지만 우리 기사들을 설득할 땐 이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견만으론 안 된다.
그들의 충만한 감수성을 움직일 수 있는 감성 어린 발언이 필요했다.
"토파 경, 그대의 행동으로 볼 때 아버지께서 어느 정도 말씀해주셨음을 짐작했지. 허나 내 비록 어린 데다 힘이 없어 그대와 함께 싸우진 못하지만 두 발로 걷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공자님...!"
"내 목숨을 지키는 자들을 믿지 못한다면 마차 안이라고 안전할 리 있을까. 토파 경, 나는 그대와 함께 있을 때 안전하노라."
애초에 자식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애설튼 공왕이 이 기회에 못난 자식들 좀 솎아낼까 생각하는 미치광이가 아닌 이상 제대로 된 인선을 붙여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토파 경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충분히 합격점이었다. 실력은 몰라도 충성심만큼은 확실히 보장된 인재였으니 말이다. 때때로 신뢰할 수 있는 충성심은 그 어떤 능력보다 값지게 돌아온다.
토파 경은 내 말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단호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목숨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미 이런 일을 예견하고 지원을 마련해놨다. 적을 물리치기보다 버티는 데에만 주력하면 숫적 열세라 해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예, 공자님!"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타고 온 마차는 순식간에 고물덩이로 전락했다. 최대한 버티는 게 목적이니 말들을 보호할 필요도 없었다. 뭐든지 인명이 제일 귀하고, 지금은 병사가 말보다 더 귀한 시기다.
단 한 필의 말을 제외하고 모조리 말뚝에 묶여 엄폐물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이 결정에 반대하며 곡소리낸 건 마부 혼자 뿐이었다.
"아이고 내 새끼들! 저 귀한 말들을 어찌?! 차라리 절 묶어주십시오!"
나는 그 소리에 두 눈을 끔뻑이며 마부를 바라봤다.
"진짜로?"
"...가끔 마굿간 관리를 소홀히 하면 말도둑이 들곤 합니다."
이 임시 진지는 서쪽을 등지고서 숲과 길가를 반쯤 걸친 채로 만들어졌다. 진지 내 횃불 같은 조명이 상대에게 바로 흘러가는 걸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함이었다.
내가 사냥을 핑계로 가져온 석궁들도 적당히 분배됐다. 세 개는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았다. 칼 한 번 제대로 쥐지 못한 하인들에게 줘봐야 볼트 낭비고, 병사들에게 주자니 일선에서 막을 병력이 부족해졌다.
석궁 세 개를 쉬지 않고 장전해야 할 신세에 놓인 존은 솔직담백한 말을 꺼냈다.
"공자님. 저희 좆된 거 같습니다."
"연습이나 해둬라."
이쯤 되니 일행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토파 경과 병사들이다. 곧 습격이 오리란 직감에 빡긴장하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다른 하나는 여전히 실감 못한 하인들이다. 시키니까 할 뿐 어딘가 붕 떠있는 느낌을 전혀 지우지 못했다. 진짜 올까 긴가민가해하는 기색들이 역력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후자 쪽이 더 세를 불렸다. 해가 저물고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서 모닥불 주변에 웅크린 사람들이 꾸벅꾸벅 졸 무렵, 병사들도 하나둘씩 나른한 한숨을 뱉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아주 희망적인 관측까지 내놓았다. 하인들 중 몇몇은 이 고요한 밤중에 쓸데없는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워낙 조용해서 다 들린단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이 말이다.
"의절당했다곤 해도 포위스 공국의 자제인데 누가 감히 손을 대겠어?"
"쉿. 대충 기사 나리 하는 말에 맞추는 시늉만 하자고."
"하아아암... 불침번 같은 걸 왜 하는 건지."
반면 인간 경보기 존은 확실히 달랐다. 어느새 이빨을 딱딱딱 부딪히더니 누구보다 빠르게 석궁 시위를 당기고 놓길 거듭했다. 비록 볼트가 매겨진 건 아니었지만, 손놀림에 담긴 필사의 각오만큼은 확실히 드러났다.
"당기고 매기고, 당기고 매기고, 당기고 매기고."
조용하지만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은 야영 시간. 나는 마차를 등지고 앉은 채 저만치 떨어진 모닥불을 바라보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땅바닥의 잎사귀들이 접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사뿐사뿐한 발걸음을 옮긴다 해도 인간이라면 낼 수밖에 없는 소리들이 말이다. 인기척이 필연적으로 자아내는 부자연스러운 정적 탓에 알 수 있었다.
"왔다."
"당기고..."
"왔다니까."
나는 무아지경의 경지에 이르른 존에게서 석궁을 뺏어들고 즉시 앞을 겨냥했다. 그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야영지 전체에 울려퍼졌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하인들 중 한 명이 갑자기 모닥불 속으로 다이빙한 것이다. 아직 상황 파악 못한 하인들은 그걸 또 졸다가 쓰러진 줄 알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야, 야! 진짜 졸면 어떡해!"
"우... 우선 꺼내봐!"
"뭐야? 무슨 일인데?"
호들갑 떠는 목소리에 자고 있던 사람들도 부스스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쓰러진 하인의 대가리에 꽂힌 화살깃을 본 존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공자님?!"
"난 쏘지도 않았다. 아직 장전된 거 안 보이나?"
"그, 그럼 누가..."
이들이 상황을 알아챈 건 화살이 몇 방 더 날아온 다음이었다. 이번 사격은 방금 전처럼 정교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그대로 비껴나가 전혀 엉뚱한 곳에 박혔고, 어쩌다 사람을 맞춰도 팔이나 다리처럼 비교적 덜 치명적인 곳에 맞았다.
하지만 하인들 눈에는 그런 사실이 보이지 않았다.
"습격이다! 습격!!!"
"도, 도망쳐!"
목숨이 위태로운 와중이다. 뒷일 따위 생각 않고 싹 다 도망치는 모습이 딱 평균적인 사람다웠다. 그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시선과 마주했다.
토파 경.
일부러 빛이 들지 않는 그늘 속에 자신을 감춘 기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었다.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딱 예견한 일이 벌어졌다. 날 버리고 도망친 하인들 목소리가 하나같이 끊기기 시작한 것이다.
피가래 끓어오르는 소리와 함께 픽픽 쓰러지거나 목을 부여잡고 쌕쌕대며 기어다니거나. 생명력 질긴 몇몇은 바닥을 기면서 마차 너머까지 다가와 간절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공... 공자님..."
"..."
안타깝지만, 이미 허리를 너무 깊숙히 베였다. 저건 살리고 싶어도 못 살린다. 대신 이들의 죽음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다. 하인들이 도망치다 살해당하는 동안 토파 경과 병사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숲에 깔리기 시작한 단말마 속에는 우리를 습격한 자들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습격을 역이용한 공격은 금새 칼부림 소리에 가로막혔다.
살갖을 가르고자 쇠끼리 긁어대는 소리가 피비린내를 더욱 진하게 숙성시킨다. 이윽고 사람이 토해내는 숨결이 등 뒤에 닿았을 때,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눈을 그렇게 부라리면 모를 것 같더냐?"
"!"
볼트는 주저없이 상대의 미간을 꿰뚫었다. 상대는 갬비슨 위로 거적떼기 하나 걸친 차림이었다. 복장만 보면 진짜 산적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놈이 쓰러지면서도 놓지 않은 검은 산적이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켜 쓰러진 녀석의 손목을 짓밟고 으스러트렸다. 억지로 손아귀의 검을 집어올리자 결코 조잡한 품질이 아님을 단박에 알았다.
어린 아이조차 조금 힘겹게만 느껴질 정도로 우수한 무게 균형. 좁은 곳에서의 난전도 가능한 적당한 길이. 손으로 살짝 쓰다듬었는데도 느껴지는 강철의 표면.
명검까진 무리어도 오래 가는 물건이었다. 나는 석궁을 다시 존에게 던져주며 검을 양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존, 지금부터 네가 원딜이다."
"예, 예?"
"내가 탱하고 네가 원딜... 석궁 쏘라고."
"저 석궁 한 번도 써본 적 없는데요? 아, 아니! 그보다 검은 쓰실 줄 아십니까!?"
원래 원딜은 팀이 으쌰으쌰 떠먹여줘야 하는 법이다. 킬딸만 잘 쳐줘도, 하다 못해 왔다갔다 하며 견제만 해줘도 밥값은 하는 직종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근거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저번에 썼을 때 아주 머저리는 아니더라고."
첫 번째 빙의에서 나는 그럭저럭 칼질 좀 했던 것 같다.
17. 탱커
갈라지는 비명과 피가래 끓는 신음으로 가득찬 숲에서 발소리를 듣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다가오는 걸 파악하긴 더 어려웠다.
내가 일부러 모닥불과 거리를 둔 이유기도 했다. 환한 빛을 가까이 두면 이미 야음에 적응한 자들을 상대하기 어렵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자를 상대할 땐 자신도 그늘 아래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어둠에 적응한 두 눈이 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나는 습격자에게서 빼앗은 검을 양손으로 쥔 다음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칼날에 담긴 모닥불의 불그스름한 빛을 손등으로 가리면서 한 발짝 내디뎠다.
동시에 생애 처음으로 석궁을 쏘게 생긴 존을 위해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겨냥하는 시늉만 해도 된다. 내가 네 이름을 불러 신호할 때까지 쏘지 말아라."
"고, 공자님."
"온다."
호달달 다리 떠는 존을 독려해주고픈 마음은 굴뚝같았다. 하지만 명확한 적의를 가지고 습격해온 적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같이 온 하인들은 다 죽고 호위 병력들 대다수는 발이 묶인 상황.
이런 상황에선 손이 남는 병사 한둘만 보내도 목적을 달성하기 쉬웠다. 아니나다를까. 달조차 구름에 가린 시커먼 밤그늘 아래로 묵직한 윤곽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상대는 갬비슨 위에 후드 달린 망토를 걸친 사내였다. 얼핏 보면 어디 민병대나 산적떼가 왔나 싶을 정도로 빈약한 무장이었다. 갬비슨이란 게 결국 두꺼운 패딩을 입은 셈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열두 살,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의 육신임을 감안하면 결코 쉽지 않다. 심지어 무장만 저럴 뿐이지 상당히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게 훤히 보였다.
단단히 무게 중심을 잡고 내디디는 발걸음. 칼자루를 휘감듯이 움켜쥔 파지법. 흔들리지 않고 꼿꼿이 유지되는 칼끝. 그리고 긴박한 상황에서도 고르게 유지되는 호흡.
저 모습에서 유바스의 진심을 느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어지간히 궁지에 몰린 모양이다. 나는 칼끝을 곧추세워 상대를 겨냥한 뒤 존에게 마지막 조언을 남겼다.
"존, 네가 나보다 키가 크다. 내 어깨 너머로 적을 쏠 수 있다는 뜻이다."
"헉. 허억."
"붙잡아줄 테니 잡아라."
그 때, 힘껏 내달리는 뜀박질 소리가 귀에 닿았다. 나는 상대를 직시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검을 쥔 손을 잡아당겼다. 단숨에 쏘아낼 수 있도록 말이다.
어린 아이가 지닌 순수한 육신의 힘만으론 막아낼 수 없다. 피해다녀봤자 내 체력이 먼저 다할 것이다. 지금은 모자란 힘을 보충해줄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이윽고 상대가 힘껏 칼을 휘두른 순간, 나도 검을 반 바퀴 뒤집으며 힘껏 내질렀다. 사선으로 그어지는 칼날에 먼저 닿은 건 내 칼끝이었다. 여기서 멈췄다면 내 검이 튕겨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 칼끝은 쭉 나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검을 뒤집으며 생겨난 반발력이 상대의 검격을 쳐내는데 충분한 힘을 보탰다. 상대의 칼날은 일시적으로 힘을 잃은 채 내 칼날을 타고 미끄러졌고.
이를 본 나는 순간적으로 폼멜 쪽에 무게를 실어 상대의 검을 걷어올렸다.
이 모든 과정이 이뤄진 건 불과 수 초. 별 다른 설명을 보태지 않고 보인 그대로만 말하자면-.
단 한 번의 반격으로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상대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물론 아직 힘이 부족한 탓에 완전히 무장해제하는 데엔 실패했다. 하지만 상대를 동요하게 만드는 데엔 충분할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칼질부터 하던 습격자에게서 경악이 나온 게 그 증거였다.
"이... 무슨...!"
당황한 음색이 고통어린 신음을 가르고 내 귓가에 닿는다. 하긴, 어린 놈이 칼 들고 설치는 꼴을 보고 방심했겠지. 나는 상대가 느낀 불합리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자세를 고쳐잡고자 발을 움직이고 검을 회수하면서 칼끝으로 땅을 내리짚었다.
"존."
팍! 도자기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길래 뭔가 했다. 존은 내 생각보다 훨씬 명사수였다. 볼트가 상대의 이빨을 깨부수고 그대로 목을 관통한 것이다.
그제서야 상대도 검을 완전히 놓쳤다. 그는 헤엄치듯이 양손을 허우적대다 자기 입에 꽂힌 화살깃을 만지고선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죽어가는 습격자를 대신해 말할 수 있는 건 나 혼자 뿐이었다. 엄밀히 말해 존도 있긴 한데...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습격자를 위해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운이 나빴다 생각해라. 억울해하지 말고. 네 놈도 날 죽이러 올 때 운이 나쁜 놈이라 여겼을 것 아니냐."
"..."
"안 그랬다면 뭐... 죽어도 싼 놈이니 위로 받을 자격도 없을 테고. 참으로 다행이다. 어느 쪽이든 억울하진 않겠구나."
습격자는 내 따스한 위로를 듣더니 피거품을 토해내며 엎어졌다. 죽기 직전 세상에 대한 미련을 접고 성불한 셈이다. 등 뒤에서 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이때였다.
"죽, 죽은 겁니까?"
"원래 죽을 놈이었다. 안심해라."
"예? 그치만 방금 전까지."
"날 죽이러 온 시점에서 죽을 놈이지. 온다. 석궁을 장전해놓던가, 아니면 미리 장전해둔 석궁을 들어라."
괜히 말 끊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한 명이 실패하자 다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로운 녀석도 똑같은 차림이었다. 다만 동지애는 투철한 모양인지, 죽어 나자빠진 동료의 시체로부터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살살 긁으면 상대하기 쉬울 거 같은데... 나는 녀석을 향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모닥불 너머 숲 속에서 칼부림 소리가 계속 들리는 걸로 봐선 토파 경과 병사들이 아직 살아있을 터.
찔끔찔끔 한둘씩 나타나는 걸 보니 돌아가는 상황이 얼추 짐작됐다.
"왜 군대를 동원하나 싶었다. 급하기도 했을 테지만, 혼담을 강제할 때부터 미리 용병 따위의 위조 신분으로 침투시켜놨군. 군사적 긴장을 유도해 용병들이 일거리를 찾아 모여드는 걸 이용했어. 처음부터 이쪽을 노렸을지도. 병력을 미리 잡입시켜놓고 여차할 때 움직일 수 있게끔 준비해놨구나."
"..."
"허나 애초에 습격 개시를 알린 사격부터 부정확한 데다 다음 사격까지 간격도 꽤 있었지. 살상보다는 혼란을 유도하고 몰이하는 데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곳은 포위스의 영역. 너무 많은 병력을 투입해 움직였다간 그대로 포착당해 습격 자체가 불발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여기까지 말하니 상대도 더 이상 동료의 시체를 바라만 보지 못했다. 경악에서 감탄으로, 감탄에서 살기로. 눈빛이 휙휙 바뀌는 데엔 진짜 3초면 충분했다. 그런데도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어 좀 더 긁기로 했다.
"너희, 숫자가 그리 많지 않구나. 기껏해야 스물 아래, 열 다섯 정도. 나머지는 흔적을 지우거나 토파 경의 발을 묶을 예비대로 남겨두고 있나?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나는 검을 들어올리며 힘껏 오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딱 상대가 열받기 좋을 정도로 말이다.
"이 몸은 너희에게 유바스의 지시를 전달해주는 연락책이 누군지도 짐작가는데. 어찌 생각하느냐?"
이번 친구는 리액션이 썩 괜찮은 놈이었다. 내가 빨래판으로 등짝을 문지르듯 벅벅 긁어주니 반응이 제깍제깍 돌아왔다. 녀석은 나름 절도있는 자세로 검을 뽑아들면서 이빨을 드러냈다.
"...포위스의 삼남. 네놈은 방금 스스로 죽을 이유를 더 만들어냈다."
"하하하!"
이 새끼 좀 웃긴 놈이네.
"왜. 죽을 이유가 하나만 있으면 덜 죽이고 그러나?"
오순도순 담화는 이걸로 끝이었다. 상대는 묵직한 발걸음으로 달려와 힘껏 검을 내리쳤다. 이건 쉽게 받아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최대한 흘려보내야 한다.
칼자루는 오른손으로, 칼날을 왼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리고 녀석의 날이 내 검면에 닿은 순간, 나는 힘껏 몸을 뒤틀며 검격을 흘려보내면서 외쳤다.
"존, 겨냥만 해라!"
"예, 예이!"
존의 장점은 혼자 도망치지도 못하는 겁쟁이란 데에 있다. 존은 시키지 않으면 뭣 하나 하지 않는 수동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시키면 아무 생각없이 일단 하고 본다.
이것이 내가 존을 이 자리까지 끌고 온 이유였다. 키가 작고 힘이 약하다는 단점도 원딜 하나 있으니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볼트의 날카로운 촉이 자신을 겨냥하며 이리저리 흔들리자 상대의 주의가 산만해진 것이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칼끝이 겨냥하고 날아올 때마다 튕겨낼 수 있던 건 유사원딜 존 덕분이었다. 나와 상대는 마치 합을 맞추듯이 착착 검을 부딪히며 힘겨운 대치를 이어나갔다.
한 쪽은 원딜 신경 쓰느라고, 다른 한 쪽은 온힘을 다해 흘려보낸다고 이 악무는 중이었다.
"...포위스, 정략은 배웠어도 명예는 배우지 못한 모양이군!"
저런 헛소리에 반박할 여유도 없었다. 쉬지 않고 칼끼리 긁어대며 밀쳐내느라 진땀이 뺨을 타고 삐질삐질 흘렀다. 슬슬 검이 무거워진다. 그리고 힘이 빠진다는 사실은 숨길 수도 없었다.
흔들리는 칼끝이 명백한 증거였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눈치 못챌 상대가 아니다. 이 절도있는 습격자는 단숨에 고무되어 두 눈을 희번득거렸다.
"대의를 위함이다. 네 놈의 핏줄, 이 땅의 모두를 위해 흐르리라!"
검격이 내리쳐진 그 순간, 내 힘이 먼저 다했다.
츠르르릉... 맥 빠지는 쇳소리와 함께 내 손이 검을 놓친다. 바들바들 떨리는 양팔과 손을 내려다보면서 스스로 자조했다.
이 정도면 잘 막았지, 잘.
나는 그대로 무너지듯이 무릎 꿇었다. 상대는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날 죽이고자 검을 있는 힘껏 들어올리고 있었다. 찌르려는 건지, 아니면 휘두르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하나.
"존."
놈이 딸피 잡겠다고 눈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존은 이 소란스런 현장에서도 내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시위에 매겨진 볼트가 쏘아졌다.
그리고 이 습격자의 무예 실력은 화살이나 볼트를 칼로 휘둘러 쳐낼만큼 출중하지도 못했다.
"...!"
볼트는 정확히 상대의 오른쪽 눈으로 빨려들어갔다. 놈은 고통에 비명조차 제대로 내지르지 못했고 자세도 휘청거렸다. 그제서야 나도 땅에 떨어진 검을 다시 주울 수 있었다.
나는 그 검을, 칼끝을 정확히 녀석의 목에 박아넣었다. 질긴 근육이 강철에 끊겨나가고 뼈가 긁히는 이 소름끼치는 감촉... 나는 온힘을 다해 녀석을 밀어 넘어트리며 더욱 깊숙히 쑤셔박았다.
칼끝이 놈의 목을 꿰뚫고 땅에 닿을 때까지 말이다. 그러고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옷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어벙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존을 위한 공치사도 빼놓지 않았다.
"잘했다, 존. 덕분에 우리 둘 다 무사할 수 있었다."
"..."
"존?"
"...아까 힘이 다해 쓰러지신 거 아니셨습니까?"
진짜로 내가 죽을 줄 알고 필사적이었나 보다. 나는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 존이 하는 짓은 멍청해도 사람은 참 착해.
"위기를 연출하는 건 상대의 판단을 가장 쉽게 흐트리는 방법이다."
"..."
"마침 저 쪽도 다 정리된 모양이고."
어느샌가 칼부림 소리가 모두 멎어 있었다. 살아남은 쪽은 토파 경과 병사들이었다. 병사 여덟 명이 불과 둘만 남을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살아남았다는 게 중요하다.
토파 경은 피와 지방으로 번들거리는 제 검을 서코트로 슥슥 닦아낸 뒤 고개를 숙여왔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원군입니다."
"원군?"
토파 경과 병사들이 양 옆으로 갈라서자 그 원군이란 사람들이 보였다. 정수리 한가운데만 빡빡 민 괴악한 헤어스타일에 시커먼 로브. 별 다른 장신구 하나 없이 허리춤에 칼 한 자루씩만 찬 수도사 셋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칼자루 아래로 저릿한 피비린내가 풍겨오는 걸 보니 상당한 역할을 해냈을 터. 저 세 명의 수도사 중 푸근한 인상에 뛰어난 풍채를 지닌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됐군요, 나르바 공자님."
***
푸근한 인상의 수도사는 자신을 서텔이라 밝혔다.
그러고선 야영지 주변을 사냥개처럼 휘저으며 돌아다니더니 말뚝에 묶인 말들 앞에서 멈춰섰다. 서텔 수도사는 심상찮은 표정으로 조용히 풀과 건초를 뜯어먹는 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세의 힘입니다."
"네?"
"누군가 이세의 힘을 부려 말들을 진정시켜 놨습니다. 아니, 무감각하게 만들었다는 표현이 옳겠습니다."
이세가 뭔가 싶어 두 눈을 끔뻑이니 다른 수도사 한 명이 다가와 속삭였다.
"이세는 인세 이전 이 땅을 다스리던 옛 신들과 그 추종자들의 시대를 말합니다."
"아..."
분명 들었던 이야기인데.
대충 동화나 신화겠거니 하고 넘긴 그거?
18. 판타지 국룰
이세란 옛 신들이 이종족들을 총애하던 시기로 어쩌구저쩌구...
나는 서텔 수도사의 지루한 옛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보내면서 대충 고개만 끄덕여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복습하는 건 의욕이 뚝 떨어지는 짓이다. 해서 딱 중요한 부분만 골라들었다.
예를 들자면, 서텔 수도사가 이번 일에 이세의 힘이 개입했노라 판단한 근거라던지 말이다.
"자세히 보시면 말의 눈동자 위로 희끄무레한 막 같은 것이 덧씌워진 게 보이실 겁니다."
서텔 수도사는 100% 확신하는 목소리로 얌전한 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 현대의 상식을 지니고 있는 내게는 너무나 빈약한 근거로 보였다. 물론 말하는 걸 듣고 보니 확실히 보이긴 했다.
말들의 눈동자 위로 얇디 얇은 양막 같은 게 보이긴 하는데. 이게 신적 존재의 개입이라 단정짓기엔 좀 너무 막 나간 거 아닌가 싶다. 우리 말들을 쓰다듬어본 내 결론은 이랬다.
"그냥 무슨 병 걸린 거 아닙니까?"
서텔 수도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답해왔다.
"이세의 잔당들이 흔히 꾀하는 일이지요."
"예?"
"이세의 힘, 마법을 멋대로 부리면 교회가 추적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부러 자연 현상처럼 보이게끔 숨기는 겁니다. 놈들의 마법은 눈에 띄는 효과보다 이런 식으로 은닉하게끔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 네..."
생각해보니 이 시절 사람들이 아무리 깨어있어도 나랑 다른 상식과 사회상을 살던 사람들이다. 미개하고 야만적이란 소리를 곱게 포장하면 그렇다. 그리고 살아온 세계관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건 굉장히 미련한 짓이었다.
여기서 내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물이 있는데 그게 세균이고... 세균이 체내에 침투해서 면역력을 이기면... 따위를 줄줄 읊어봐야 무슨 소리를 듣겠는가?
쯧쯧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설치네 응 사악한 악마들이 그런 거야~ 같은 대답이 돌아올 게 훤하다. 물론 진짜 마법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 수도 있었다.
근데 이딴 걸 마법 혹은 신의 기적이라며 추켜세우는 종자들은 망해도 싸다고 생각한다. 짐승 눈동자 위로 양막 같은 걸 씌워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법에 대체 무슨 낭만이 있냐고.
나는 이 따위 마법에서도 꾸역꾸역 이세의 옛 신이니 이세의 잔당이니 하며 낭만을 쥐어짜내는 서텔 수도사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이외에도 불평불만이야 얼마든지 있다만... 어쩼든 사람들이 볼 때 이 세상의 지식인은 내가 아닌 서텔 수도사다.
중세틱 이세계 평균에 맞추려면 서텔 수도사의 의견을 따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야만인 평균에 맞춰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말들을 쓰윽 훑어봤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들도 이대로 처분하면 됩니까?"
"무분별한 살생은 사람의 마음까지 좀먹는 법. 여기선... 럭스 스텔라께서 내려주신 기적을 써야겠습니다."
기적이란 말을 듣고도 내 반응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생애 처음 마주한 마법이 추레하기 그지 없던 탓에 자연스레 기대치가 낮아진 것이다. 기껏해야 하얀 가루 같은 거 뿌리면서 나으라며 기도 외우는 정도로 끝나겠지.
그리 여겼는데, 서텔이 로브 안쪽을 뒤적이며 십자가 목걸이를 꺼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십자가 위에 음각된 기이한 형태의 문자가 샛푸른 형광색처럼 반짝인 탓이다.
서텔 수도사는 왼손으로 그 목걸이를 꽈악 움켜쥐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럭스 스텔라, 이세를 황혼으로 몰아넣으시고 인세의 여명을 끌어올리신 분이시여. 끝나간 시대의 석양을 당신 별빛으로 몰아내 주시옵소서."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시커먼 밤하늘이었다. 모닥불의 불그스름한 빛이 가장 밝은 시간대였고. 하지만 십자가 목걸이가 빛을 발한 순간, 야영지 전체가 샛푸른 빛깔에 휩쌓여 물들었다. 심지어 모닥불까지 푸르스름해질 정도로 말이다.
주변을 뒤바꿀 만큼 환하지만 눈부시진 않은 잔잔한 별빛.
이 신비로운 빛이 말들의 눈동자 위로 닿자 그제서야 서텔 수도사가 이세의 힘이라 단언한 이유를 알았다. 말들의 망막 위로 덧씌워졌던 희끄무레한 양막이 눈 깜짝할 새에 녹아내린 촛농처럼 흘러내리더니 그대로 증발해버린 것이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하나같이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인세의 별빛..."
"기적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는 증거야."
토파 경도, 겁쟁이 존도, 간신히 살아남은 병사도 모두 웅얼대느라 바쁘다. 오직 나만이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신적 존재가 진짜로 영향력을 끼치는 줄 알았으면 불경한 생각도 안하고 살았지.
나는 억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서텔 수도사를 바라봤다. 푸짐한 인상의 서텔 수도사는 로브 안쪽으로 목걸이를 감춘 뒤에야 내 시선을 마주쳤다.
"우리 나르바 공자님 눈빛에서 독실한 신앙심이 무럭무럭 자라나시는 게 보입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본래 나는 습격 당시 마차를 끌던 말들을 전술적 임시 방어구로 쓸 계획이었다.
전술적 임시 방어구란 대충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숭고한 충성심을 지닌 가축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고 날 버려두고 도망친 하인들이 가축보다 못하단 말은 아니었다.
말은 생각보다 훨씬 겁이 많은 동물이다. 말뚝에 박아뒀어도 그 이세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놀라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한낱 짐승과 다르다.
만일 하인들 목에다 쇠사슬을 걸어놨으면 도망쳤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리더십과 관련된 명언을 하나 들은 바 있다. 아랫사람을 탓하기보다 스스로를 탓하라. 나는 권세 있는 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려면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결론은 간단했다. 하인들이 활약하지 못한 건 그들이 비겁해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하인들 목에다 쇠사슬을 채우지 않은 내 부주의 탓이었다.
만일 그랬다면 지난 습격에서 살아남은 우리 애마들처럼 열심히 내 시중을 들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지난 일을 후회만 해서야 쓰나. 나는 미련없이 그들을 훌훌 털어 보내주기로 했다.
"한 곳에 모아 태워주기라도 하자. 이대로 짐승 먹이로 내버려두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구나."
"감히 공자님을 버리고 도망치려 한 불충한 자들입니다. 짐승이 먹든 말든 내버려둬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토파 경은 내 선택이 귀중한 시간과 일손을 낭비하리라 여겼다. 하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면밀히 따지고 보면 나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다.
살아 생전 챙겨주지 못했으니 죽어서라도 챙겨줘야지.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토파 경의 반발을 부드럽게 무마했다.
"사후에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할 이유는 아니다."
"...공자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허나 기습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다."
내 오묘한 확신 어린 대답에 토파 경도 이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이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하자 명색이 신앙인인 수도사들도 가만 있을 순 없었다.
"인세가 그들을 받아주지 못한다면 어느 시기에 받아들여질까. 공자님, 저희도 한 손 거들겠습니다."
듬직하게 떡 벌어진 어깨와 뒷모습을 보니 수도사가 아니라 어디 동네 용역 뛰는 일꾼들 같았다. 혼자서 시신을 여러 구 옮기는 모습을 보면 저 시커먼 로브 아래 어떤 몸매가 숨어있을지 얼추 짐작이 갔다.
그런데 남들 다 군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불만을 토해내는 사람이 있었다.
"어후. 이 놈들이 뭐가 이쁘다고 이런 고생을 하는지."
바로 우리 존이었다.
귀한 신분인데다 아직 한참 어려 힘이 부족한 내가 시체를 질질 끌 수 없던 탓이다. 존은 내 몫까지 대신해 시체를 나르면서 낑낑대는 신음을 흘려댔다.
급기야 시체 나르기를 멈추고 허리를 토닥이며 이쪽을 힐끔거리기까지 했다.
"공... 공자님... 저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나도 가슴이 아프구나."
"예? 공자님은 왜요?"
"허리 아픈 널 놔두고 가느니 함께 보내주는 쪽이 맞지 않겠느냐?"
존과 내 시선이 어딘가를 향해 슬쩍 굴러간 순간이었다. 생전의 갈등과 불화를 잊고 사이좋게 함께 뉘여진 사람들을 본 존은 불끈대는 제 알통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이럴 줄 알고 평소에 허릿심 좀 단련해놨습니다요."
"오냐."
그렇게 시신을 적아 구별없이 땔감과 함께 모아놓고 불을 붙인 뒤에야 간신히 쉴 수 있었다. 시뻘건 불꽃이 시신에서 빠져나온 피를 대신해 빈 자리를 채워줬다. 우리는 힘겹게 흔들리는 불꽃을 보면서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건 토파 경이었다. 그는 서코트 위에 얼룩진 핏자국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님, 이 기회에 제가 승마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지금?"
"예. 혹시나 제가 실패하더라도 도망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습격에서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느낀 모양이다. 토파 경은 살아서 이번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리란 기묘한 확신을 품고 있었다. 사정을 아는 입장에선 그저 고맙기만 할 뿐이다.
"승마 교육은 받겠다만 전사할 걱정은 하지 말아라."
"...뭔가 더 있는 겁니까?"
"당분간은 안전할 거다. 당분간은 말이지."
나는 조용히 두 손 모아 기도 중인 수도사들을 보며 말했다.
***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예상대로 안전했다.
습격자는 커녕 사나운 짐승들도 우리 일행을 보고 알아서 피해갈 정도였다. 나는 이 시간을 토파 경의 승마 강의로 알차게 보냈다. 겸사겸사 서텔 수도사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캐물으면서 말이다.
"듣기로 이세의 옛 신들은 총애하는 자들에게 수많은 기적... 마법을 선사했다 들었습니다."
"허허. 나르바 공자님께서 이세에 참 관심이 많으십니다."
서텔 수도사는 인심 좋은 후덕한 미소를 지으며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갑자기 얼굴을 확 굳히기 전까진 말이다.
"그 전에. 이세의 옛 신들이 아니라 인세의 악마들입니다."
"아..."
솔직히 알 빠냐 싶은데 꾹 참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수도사들한텐 정말 중요한 문제일 수 있으니 이해해줬다. 어차피 중요한 건 악마냐 옛 신이냐가 아니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인세의 신, 럭스 스텔라께선 그런 기적을 주시지 않냐는 겁니다."
참 속물적인 질문인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서텔 수도사가 아주 잠깐동안이나마 이 새끼 뭐지 하는 눈빛을 보내온 걸 보면 똑같이 생각했을 거다. 다만 그는 인내심 강한 수도사답게 금방 표정을 관리했다.
"럭스 스텔라는 물론 대부분의 악마들은 총애하는 자들을 다섯 단계로 분류합니다. 교회가 추적 중인 악마 하나를 예로 들겠습니다. 이 제도의 깊숙한 숲에 자리잡은 걸로 추정되는 악마로 생귀오 실바가 있습니다."
서텔 수도사는 교회가 공개할 수 있는 부분까지 주절주절 읊어놓았다. 기적을 얻기 위해 요구되는 헌신과 기준을 충족시키면 얻게 되는 기적 부분까지 말이다.
"생귀오 실바는 사람의 피를 요구합니다. 자세한 의식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생귀오 실바를 만족시키면 그녀가 지배하는 영역 내에서 다채로운 은총을 받는다 알려집니다. 첫 단계에선 피냄새가 변한다더군요."
생귀오 실바란 악마는 별 거 아니지만 다른 신들은 다르다. 예컨데 전장에 번개를 내리친다던가, 목숨을 두 개로 늘려준다던가 따위의 강력한 기적을 선사했다. 어떤 신이 주는 지는 말할 수 없다며 언급을 삼가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부풀어오른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핵심을 짚었다.
"그럼 럭스 스텔라는 뭘 주십니까?"
"럭스 스텔라께선."
서텔 수도사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무병장수하게 해주십니다."
"...."
19. 창살 없는 감옥
수도원에 도착한 건 여행을 떠난지 10일 가까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처음 출발했을 때와 달리 일행 모두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그나마 위생 관리 좀 하면서 왔는데도 말이다. 이 갖은 고생 끝에 도착한 수도원이 어땠는지는 우리 존이 말해줬다.
존은 두 눈을 몇 차례 끔뻑이다 날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원의 첫 인상은 으레 떠올리기 마련인 조용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랑 거리가 좀 있었다.
"완전 요새인뎁쇼?"
그렇다. 수도원은 조그마한 요새처럼 구축되어 있었다. 내가 도착한 수도원은 완만한 둔덕 위에 사방을 둘러친 석조 성벽과 목책에 상당한 높이의 망루까지 갖춘 곳이었다.
물론 성벽 높이가 아주 높은 건 아니지만 장정 서너 명이 탑을 쌓아야 넘을 정도는 된다. 망루는 비교적 성벽 안쪽, 수도원 중심에 가까워 사방을 감시하기엔 최적의 위치라 할 수 있었다.
그 뿐인가. 망루 위에 올라간 수도사도 허리춤에 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유사시 종을 울린 직후 바로 방비에 나설 수 있게끔 대비하는 것이다. 한 번 스윽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쉽게 도전하기 힘든 방비다.
이렇게 보니 수도원은 사실상 준 군사조직과 다름없었다. 떨떠름한 시선으로 서텔 수도사를 바라보자, 그는 이해한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수도원에는 수많은 지식과 경건한 신앙심으로 제련된 성물들이 있습니다. 허나 약탈자들의 눈에는 한낱 재보로만 여겨지니 노려지기 십상입니다."
"약탈자들은 해안선 위주로 활동하는 거 아닙니까?"
"방어가 취약한 곳은 강줄기를 거슬러 오고, 대담한 약탈자들은 아예 배를 버려둔 채 내륙 깊숙히까지 쳐들어 옵니다. 포위스 일대는 근래 들어 테르베어 경의 활약으로 뜸해졌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기사들을 믿는 것보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절실한 시기란 건 변치 않았습니다."
나라꼴이 병신이니 자기방어가 필수다. 서텔 수도사의 말을 요약하면 이랬다. 약탈자들의 흉포함과 세력이 워낙 강성해 어설프게 저항하느니 그냥 다 털고 돌아갈 때까지 존버하는 게 답이랜다.
하도 당하고 살다 보니 나중엔 빨리 보내는 쪽이 훨씬 낫다며 배 떴다 싶으면 알아서들 집안 재산 긁어다가 한 곳에 모아놓기까지 했단다. 약탈자들을 위한 퀵배송 서비스까지 제공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짓도 한두 번이지, 퀵배송에 맛 들린 약탈자들이 나중 가선 동네 마실 나오듯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다. 도끼나 칼 들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면서 말이다.
끝내 도저히 버티지 못한 영주 몇몇이 상당한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애설튼 공왕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고. 이게 애설튼 공왕이 둘째 형 테르베어를 앞세워 강경 대응을 시작한 계기였다.
서텔 수도사는 이런 사정들을 다 이야기해준 뒤 허리춤의 칼자루를 툭툭 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수도사들 대부분이 무술에 뛰어난 이유입니다."
"아니, 성직자는 살생 금지라 막 둔기 쓴다던지 이런 이유 없습니까?"
판타지 국룰인 성직자들은 날붙이를 못 쓴다는 제약은 어디 갔어? 기사수도회만 칼질하며 사는 줄 알았는데 일반적인 수도원도 칼질하는 거 보고 화들짝 놀라 물었다.
이 질문이 퍽 웃긴 모양이다. 서텔 수도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런 제약이 있다 해도 수도사는 성직자가 아닌 일반 평신도이니 상관없을 겁니다. 하물며 살생 금지가 아니라 자제. 그리고 살생 자제의 교리에는 자기 목숨을 쉽게 버리지 말 것도 포함됩니다. 자기방어를 하지 않는 것도 자기자신을 향한 살생으로 간주되지요. 하여 날붙이를 소지하는 게 원칙상 금지되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게다가?"
"럭스 스텔라의 빛을 외면한 이교도 놈들은 죽어도 됩니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서텔 수도사를 외면했다. 마침 존도 나처럼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건 당연한 일인 셈이다.
존은 말 위에 탄 날 보기 위해 목을 뒤로 젖히면서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여자도 안지 않고 술도 못 마시고 일만 하면서 산다 그럴 때부터 이상하긴 했습니다. 수도사란 양반들, 싹 다 머리 이상한 거 아닙니까?"
"인과가 뒤바뀌었다."
"예?"
"머리가 이상하니까 수도사한 거겠지."
그러자 존의 시선이 한층 더 오묘해졌다. 호기심과 두려움, 불가해한 의문이 뒤섞인 끝에 존은 무언가 깨달은 마냥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하긴, 공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
이윽고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며 나아가길 한참. 마침내 수도원 코앞까지 도착한 우리는 제지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성벽 위로 검은 로브의 수도사 둘이 나란히 올라온 것이다.
"서텔 형제님, 같이 오신 분들은 누구십니까?"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애설튼 공왕의 삼남이자 교회에 뜻을 두신 분일세."
서텔 수도사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발언했다. 그러자 성벽 위의 수도사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미리 언질받은 바가 없던 건지 서로 힐끔거리며 뒷말을 흐리고 있었다.
"아... 그..."
"서텔 형제님, 그 분이 진실로 저희와 함께 하고자 오신 겁니까?"
"입회 여부는 원장님께 가봐야 알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나와 수도원 사이를 가로막던 육중한 철창 문이 위로 들어올려졌다. 여기선 겸손한 태도가 중요하다. 나는 입회 희망자에 걸맞게 말에서 내려와 두 발로 천천히 들어갔다.
하지만 딱 성벽을 넘어간 순간, 사방에서 쏘아지는 시선을 느끼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내 수도원 데뷔가 좀 많이 꼬였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
나는 그동안 내가 지낸 애설튼 공왕의 본성이 몹시 우중충하고 칙칙하다고 생각해왔다. 이게 얼마나 얄팍한 생각이었는지를 수도원 오고서 알았다.
천외천. 모든 일에는 항상 그 너머가 있다. 본성 생활은 우울하고 음침하기론 수도원을 감히 따라갈 수 없었다. 길 가다 마주치는 수도사들만 봐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죄다 짙은 갈색이나 검정색 로브 입고서 발소리 날까 조심조심 걷는데 후드까지 푹 눌러 쓰고 있으니 밤중에 보면 비명을 안 지를 수가 없는 비쥬얼이다.
그나마 채광이 잘 되는 곳은 숨이라도 쉴 수 있지. 가끔 화살 막으려고 창문 폭까지 좁혀서 햇빛이 덜 드는 복도를 걷고 있노라면 왜 창살 없이도 감옥이라 불리는지 이해됐다.
제멋대로 살던 망나니가 이런 데 오면 진짜로 감옥이라 느꼈을 테지. 심지어 성벽까지 둘러치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을 거다. 이런 감상은 다른 사람도 비슷했던지 다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존은 물론, 토파 경과 병사들까지 죄다 말이다.
서텔 수도사와 그 일행은 익숙한 듯 편안한 눈치였지만... 처음 수도원에 온 사람들은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는 이 적막함에 압도되어 움츠러든 뒤였다.
수도원장과의 만남은 이 고비를 모두 넘기고서야 이뤄졌다. 깨끗하게 옻칠된 고급진 나무 문 앞. 서텔 수도사가 아무 말 없이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도 아무 말 없이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텔 수도사가 그제서야 문을 여는 모습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그냥 말로 하면 되는 걸 가지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앞으로의 생활이 어떨지 예고편이 펼쳐진 셈이다.
슬슬 선택을 잘못했나 후회할 즈음, 나는 서텔 수도사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고서 특유의 냄새와 미약한 향초 냄새가 감도는 적당한 크기의 방. 수도원장은 색칠된 유리를 등진 채 자리에 앉아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수도원장은 푸짐한 인상의 서텔 수도사와 함께 나란히 세워두면 퉁퉁이와 홀쭉이라 불릴 정도로 깡마른 사내였다. 그는 눈 아래 짙게 깔린 피곤을 감추려는 노력 하나 없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포위스의 삼남. 그리고 교회와 유바스의 분열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엿본 자."
일종의 시험인가 싶어 빤히 바라봤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표정을 감추는 데에 몹시 능숙한 자다. 나는 어설프게 상대하느니 솔직하게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이야기는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이번 일을 획책했다는 걸 아시는 거 보니 교회 인사들은 다 아시는 모양이고."
이미 다 전해듣고 이게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그리 생각해 다소 오만하게 여겨질 정도로 거친 언사를 드러냈지만, 돌아온 건 수도원장의 깊은 한숨이 전부였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군. 교회는 한 몸이다, 라고."
"그게 무슨?"
"사람들을 물리게. 그럼 답해주지."
시선을 옮기니 토파 경과 병사들, 그리고 존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들어봐야 목숨만 위태로워지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나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퇴거를 허락했다.
이윽고 서텔 수도사까지 함께 나가고 방 안에 수도원장과 나, 단 둘만 남았을 때. 수도원장은 그때서야 비로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줬다.
"교회는 자네 생각처럼 한 몸이 아닐세."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아직 열두 살이라지. 나르바 공자, 자네 계획은 그 나잇대가 아니라도 상당한 통찰력 없이는 꾸미기 힘든 계획이었네. 교회 내부에서도 포섭한다면 큰 이익이라 여길 정도로 많은 기대를 드러냈고."
그때, 수도원장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이제 보니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숙한 게 아니라 그냥 진짜 피로에 찌들어서 드러낼 기운조차 없던 것에 불과했다.
"그게 문제였네."
"문제?"
"자네에게 유바스가 저지른 이단적 행위에 대한 정보를 흘려준 자는 포위스 주교일세. 애설튼 공왕을 보좌하는 주재사제가 포위스 주교의 허가를 받아 자네에게 알려준 것이고."
수도원장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간신히 뒷말을 이었다.
"명석한 자네라면 포위스 주교가 어째서 교회가 공론화하지 않은 사실을 그대에게 알려줬는지 이해할 수 있겠나?"
...촉이 왔다. 일이 꼬였다는 촉이 말이다.
일찍이 애설튼 공왕을 설득할 때, 그리고 성내 주재사제를 설득할 때 꺼낸 논거가 다른 방식으로 날 덮쳤다. 성도 아이데아와 교황청의 개입을 원치 않는 세력이 있다는 그 말.
그 실례가 멀리 갈 거 없이 바로 옆에 있었다.
"유바스가 교황청이 선택한 말이라서 공격했다가, 상황이 바뀌어 교황청과 결탁하려는 자가 나타나니 이를 방해한다? 대체 왜 교회 사람이 그런답니까?"
"...유바스와의 균열은 오래 전부터 시작됐었네. 이세의 유물을 연구하던 건 쐐기 박은 것에 불과하지."
유바스가 하는 꼴 보아하면 그럴 만도 하다. 어디, 근친상간 멈추라고 했다가 미운 털이라도 박힌 건가? 참 추잡한데 또 저지른 일이 있다보니 개연성은 있는 추측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수도원장이 꺼낸 교회와 유바스와의 분열은, 이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중요한 주제였다.
"원인은 주교 서임권이었네."
"..."
"유바스는 자신의 통치에 적합한 인재를 주교로 삼길 원했고, 교황청을 위시한 교회는 보다 종교적인 인물을 주교로 삼으라 권고했었지. 논쟁이 격화된 까닭엔 이 제도의 유일한 성인인 성 일레니오가 머물렀다 하는 일레니풋의 주교 자리라서도 있었고. 결국 성 일레니오의 발자취를 존중하는 쪽이 맞다는 논리가 승리해 교황청의 의지대로 이뤄졌지만 이로 인해 유바스가 마음을 돌린 것도 사실일세."
듣고 보니 유바스가 이세의 유물을 연구하게 된 배경이 충분히 이해간다. 신생 가문으로서 교황청의 권위를 빌린 대가를 혹독히 치룬 셈이다. 유바스는 세상에 공짜 없다는 말을 알기만 했을 뿐 실감하진 못했던 것이다.
"유바스만 마음을 돌린 건 아니었겠군요. 그렇다고 포위스 주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됩니까?"
"교황청은 성직자들의 세습을 원칙적으로 막고 있네. 하지만 어딜 가나 원칙을 우회하는 자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서임권이 세속의 군주에게 있다면, 세속의 군주를 꼬드기기만 할 경우 다음 대 주교로 제 혈육을 선출할 수 있지 않겠나."
"반대로 교황청의 권위가 그들을 압도한다면."
"주교직 세습이 막히겠지. 암암리에 자행되는 사제직 세습과 함께."
나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 세습 눈감아주기 vs 성직자 세력 키워주기의 환장할 대결에 꼽싸리 끼고 만 셈이다. 밥그릇 싸움만큼 더럽고 추잡한 싸움이 없는데 말이다.
어쨌든 이 중요한 사실을 줄줄 읊어주는 거 보니 수도원장도 뭔가 꿍꿍이가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아니나다를까. 수도원장은 오른손의 검지로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나르바 공자. 포위스 주교가 그대의 수도원 입회 및 성직 투신을 허락해선 안 된다며 근방의 모든 수도회과 지역 교회를 압박 중일세."
"딴 데 가라는 겁니까?"
"아예 교황청의 대리자가 될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도록 죽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더군."
수도원장은 여기까지 말한 뒤 반개한 눈으로 날 직시하며 말했다.
"죽이지는 않겠네. 객으로 얌전히 머물게나."
...수도원 보고 감옥 같다 생각했는데, 진짜 감옥이 되게 생겼다.
***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전부 늦어 있었다.
서텔 수도사는 제 동료들과 함께 토파 경과 병사들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후였다. 저 푸짐한 인상의 수도사는 날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무릎 꿇은 토파 경의 목 뒷부분을 칼끝으로 겨냥한 채 말이다.
"인복이 대단하시군요. 다들 충성심 강한 분들이십니다. 공자님이 안쪽에 계신 걸 상기시켜 드리니 알아서들 검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워낙 허물없이 말을 걸어와서 내가 잘못 봤나 싶었다. 나는 서텔 수도사를 빤히 바라보면서, 고개를 숙인 토파 경을 위해 위로의 한 마디를 던져줬다.
"살아남을 길이 있는데 포기한다면 자기자신을 죽이는 짓이지. 토파 경, 그대는 아직 섬길 날이 많다. 자책하지 말아라."
"...예."
말하고 보니 한 마디보다 좀 길어졌는데 토파 경이 답해줬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는 저 푸짐한 인상의 수도사를 향해 호기심 하나를 드러냈다.
"차라리 내가 사전에 요청한 지원 요청을 무시하지 그랬느냐. 손을 더럽힐 일도 없었을 텐데."
"하하하! 공자님, 자식 잃은 공왕 전하의 분노가 저희 수도원을 향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게다가 저희 원장님은 오히려 공자님을 보호하시려는 겁니다."
"보호?"
유폐가 아니고? 잠깐 머리를 굴리니 곧 답이 나왔다.
"이 지경이 돼서도 누가 이기나 간 좀 보겠다 이거지. 럭스 스텔라는 자네 같은 놈들한테도 기적을 내려주시나?"
"부끄럽게도 기적은 아직 못 받았습니다. 대신 성물의 힘을 빌려 이세의 악마들을 몰아내지요."
이건 좀 많이 아쉽다. 저딴 새끼도 기적 받고 살면 나도 기적 받을 확률이 높을 텐데 말이다. 이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태평한 소릴 늘어놓는 건 존이었다.
존은 무릎 꿇린 채 사방을 둘러보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공자님."
"왜."
"공자님이야 이제 곧 수도사 하시니 남는다 쳐도 전 왜 여기 남아야 합니까?"
나는 존을 내려다보면서 답해줬다.
"이 참에 너도 머리 깎자."
차라리 다소 강압적이긴 해도 이 참에 직종 변경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우리 존은 나라서 살려두는 거지, 다른 고용주였으면 진즉에 목 잘릴 친구였다.
20. 사람을 믿는 자
나는 시간을 알차게 쓰고자 노력하는 편이다.
대단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군대 있을 적에 자격증 따서 얻은 포상휴가로 자주 나갈 정도는 됐다. 그런 내게 수도원 유폐는 최악보다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중세틱 사회상을 갖춘 이세계에서 수도원만큼 폭 넓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특히 서텔 수도사가 보인 기적을 접한 이후 내 관심은 그리로 쏠려 있었다.
나는 유폐된 와중에도 기적과 관련된 저술을 찾아나섰고, 수도원장도 서텔 수도사와 동행하라는 전제 하에 공부를 허락해줬다. 강압적인 억류로 보이지 않도록 나름 노력을 기울인 셈이다.
나는 수도원장의 위선을 기쁜 마음으로 써먹었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기에 위기다. 세속에서 접하기 힘든 정보들을 얻을 수 있다면 아주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니었다.
졸지에 시종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녀야 하는 서텔 수도사의 얼굴은 사납게 일그러졌지만 말이다.
"어차피 평생 이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셔야 할 텐데 그런 것들 알아서 뭐하시렵니까?"
"제 선택을 후회하느냐? 평생 이 곳에서 살아야하는 건 수도사들일 텐데."
"감옥의 죄수와 간수를 같은 취급하지 마시지요, 공자."
"조언 감사히 받지. 그대 말대로 평생 이 곳에서 살아갈 거, 할 짓도 없는데 책들이나 좀 보겠다."
어차피 서텔 수도사는 날 핍박하거나 죽이지 못한다. 수도원장의 신중한 성격이 핵심이었다. 날 죽이는 순간 애설튼 공왕과 완전히 척을 지는데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느냐 이거다.
생각이 짧은 놈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이득 아니냐, 이럴 수 있는데. 높으신 분들이 제일 잘하는 게 꼬리 자르기인 걸 생각하면 썩 괜찮은 판단은 아니다. 특히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는 입장일수록 그랬다.
아랫놈들의 독단, 일부의 소행이란 핑계가 괜히 있으랴?
이번 일을 획책한 포위스 주교는 애설튼 공왕이 수도원에 죄를 묻는다 해도 가만히 있을 위인이다. 수도원이 박살난 뒤에야 애설튼 공왕이 지나친 반응을 보였다며 지적해올 것이다.
일 시킨 뒤엔 나 몰라라 하며 입 꾹 다물었다가 애설튼 공왕에게 '교회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프레임을 뒤집어 씌운다. 결과적으로 교회 내부의 성토는 표면적으로 교회의 권위를 크게 훼손시킨 애설튼 공왕을 향할 터.
이때, 힘을 실어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애설튼 공왕과 결탁해 후대의 서임을 보장받는다.
여기까지 내가 생각한 포위스 주교의 큰 그림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수도원은 아주 박살이 날 거다. 수도원장도 그걸 아니까 날 인질로 써먹는 거고.
따라서 내가 갑이다. 죄수도 돈 있고 빽 있으면 간수를 부려먹을 수 있다.
"그러니 럭스 스텔라의 기적과 관련된 서적들이 있으면 모두 여기, 보기 좋게 쌓아주셨으면 하는데."
"방자하게 구시지 마십시오. 공자, 말이 좋아 객이지 당신은 볼모입니다. 당신을 괴롭히진 못해도 함께 온 수행원들은 별 거 아닌 놈들이지요."
휘적이는 손짓으로 책 좀 가져오라니까 성깔 못 이기고 이빨부터 드러낸다. 하긴 저들에겐 내가 중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알 바 아니었다. 서텔 수도사는 그들의 신변을 인질 잡아 내 행동을 제지하려 하고 있었다.
이들을 내 머릿속 꽃밭 같은 수도사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욕심이 없긴 개뿔, 놀 게 없으니까 권세와 돈을 모으는 데에 맛 들린 미치광이들이었다. 한다면 진짜로 하겠지.
토파 경과 살아남은 병사들, 그리고 우리 불쌍한 존을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살릴 수 있다면 살려야 한다. 나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 말대로 내가 신경쓸 가치 없는 자들이지. 그런 놈들 잡아다 협박하겠다?"
"허세는 작작 부리시지요. 럭스 스텔라의 대의를 따르는 한 저희는 그림자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 뒤집어 놓겠다는 말을 퍽 고상스럽게 하시는군. 하시게. 잡아다 가죽을 벗기든 말든 알아서들 해. 그 전에 책은 갖다놓고."
내가 그들을 지키려 한다는 인상을 주면 오히려 위험해진다. 그 때부턴 수도사들의 주구로 전락해 이리저리 휘둘리다 이긴 쪽에게 바쳐지는 공물이 될 거다.
그렇게 주구로 굴려진다 해서 인질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인질을 애지중지 살려두는 것보다 그냥 죽이는 게 여러모로 편리하고 쉽다.
살아있으면 돌발 행동할 가능성이 있지만, 죽은 자는 어떤 가능성도 품지 못하니 말이다. 따라서 정말 지키고 싶은 게 있다면 때로는 먼저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보물을 가장 확실히 숨기는 방법은 철통같은 성벽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곳에 둬서 누구도 관심 주지 않게끔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허장성세가 안 먹혀서 진짜 죽일 가능성이 있긴 한데.
그럼 뭐, 복수해야지.
나는 도서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다리를 배배 꼬고서 검지로 책상 위를 까딱였다.
"수도원을 배려해줘서 정말 안 되겠다 싶은 책은 알아서 빼오라고 시키는 건데. 정말 내가 다 꺼내와도 괜찮나?"
"대체 뭘 믿고 그리 오만하신 겁니까?"
참다 못한 서텔 수도사가 미간에 주름을 자글자글 그려놓으며 물었다. 서텔 수도사가 보기에 나란 놈이 좀 많이 이상한가 보다. 휘하에 칼 들고 있는 칼잡이는 없지, 유폐된 입장이라 어디 도움 구할 구석도 없지.
심지어 목숨 노리는 적들까지 있는데도 이렇게 구니까 미친 놈처럼 보고 있나 보다. 오히려 미친 놈 취급 받아야 하는 건 서텔 수도사를 비롯한 이 수도원 전체인데 말이다.
"그대들은 뭘 믿고 날 잡아뒀나?"
"수도원은 신앙 생활의 본거지. 이 지역의 중심이자 다양한 지식과 성물이 자리잡은 곳입니다. 약탈자들도 쉬이 넘볼 수 없는데 럭스 스텔라의 빛을 따르는 자들이 쉽게 치진 못하겠지요."
"아하."
나는 대충 납득한 척하면서 생각을 조금 바꿨다. 이 새끼들은 머릿속에 정원 하나 기르고 있었다. 서텔 수도사는 내 대답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한 듯 조롱 섞인 미소를 보였지만 말이다.
"이제야 실감나십니까? 이제 어찌 그리도 오만하실 수 있는지 들어 봐야겠습니다."
딴에는 조롱 좀 할려고 던진 질문이겠지만, 나는 사심 하나 없이 환한 웃음으로 대꾸할 수 있었다.
"난 사람을 믿는다. 그대가 수도원의 안전을 믿듯이."
"구원의 손길이 닿기 전에 저희가 먼저 행동할 겁니다."
"물론 그러겠지."
서텔 수도사는 내가 애설튼 공왕을 믿는다고 멋대로 단정 지었다. 서텔은 나를 아버지가 자식의 위기에 분노해 어떤 식으로든 수를 써주리라 믿는 꼬마애로만 여겼다.
나는 그 인식에 아주 조금만 변화를 주기로 했다.
"이제 답을 들었으면 책이나 옮기시지. 내가 잠들기 전에 그대더러 동화책 대신 읽게 해달라고 수도원장에게 지랄하면 그가 누구 편을 들어줄 거 같나? 어디 발품도 안 팔고 얌전히 있겠다는데?"
"..."
"옮겨. 내가 직접 읽어줄 때."
***
나는 대충 이런 식으로 서텔 수도사의 친절한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교회가 일부러 풀어놓길 꺼려한 수많은 지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럭스 스텔라의 총애를 사는 방법을 알아낸 건 크나큰 수확이었다.
확실히 알고 보니 럭스 스텔라가 다른 신들과 조금 다르긴 했다. 경전 가라사대, 이세의 옛 신들이 공물을 원한다면 럭스 스텔라는 삶을 원한다.
이게 무슨 말인고 싶어 자세히 뜯어보니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세의 옛 신들은 일시불 쿨거래를 좋아했다. 우리 신님이 좋아하는 거 이만큼 바치겠습니다! 하면서 공양하면 딱 그만큼 총애를 베푼다.
이 과정에서 신이 정한 규칙 몇 개 좀 어겨도 공양물이 화끈하면 호탕하게 웃으면서 넘어가준다. 반대로 공양물이 마음에 안 들면 뒤끝이 좀 심하게 남는 편이랜다.
반면 럭스 스텔라는 공양 대신 '서약'을 받는다. 자신의 남은 일생동안 이거 하나만큼은 지키거나 이루겠다며 신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이 서약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절제의 서약. 금욕적인 삶 속에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수록 헌신을 인정받는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당연히 지키기 어렵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별 거 아니라면서 절제의 서약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댄다.
멀리 갈 거 없이 우리 수도사들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다음은 구전의 서약. 지식을 전파하고 기록을 남길수록 헌신을 인정받는다. 기록은 서적류에만 한정되지 않고 사람들 사이서 떠도는 소문의 형태로도 인정받는다.
정직의 서약. 거짓말하지 않으면 헌신을 인정받는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상황에서도 정직을 지킬 경우 헌신을 더 크게 인정받는다고.
근면의 서약. 열심히 일할수록 헌신을 인정받는다. 본인이 느끼기에 진짜 엄청 열심히 일했다 느끼면 헌신을 인정받는댄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들이 의외로 가장 많이 선택하는 서약이라고 한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들은 이 정도면 됐지~ 하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헌신을 인정받는 경우가 몹시 드물다고.
대망의 마지막은 성전의 서약이다. 가장 간단하지만 의외로 기피되는 서약인데, 이교를 몰아내고 럭스 스텔라 신앙을 퍼트릴수록 헌신을 인정받는다.
정말 간단한 서약인데 왜 픽률이 낮지? 해서 이유를 찾아보니 이세의 옛 신을 섬기는 이교도 무리가 진짜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해서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교도는 걸러지고 또 걸러진 진또배기들이라 이 사람들 족치려다가 되려 포 떠진다는 것이다. 이 탓에 이교도와 영원한 성전을 맹세한 수도 기사 중에서도 성전의 서약을 한 경우는 몹시 드물다고 한다.
나는 이 모든 서약들을 알아본 뒤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럭스 스텔라가 내리는 기적은 무병장수.
첫 번째 빙의에서 치통으로 앓던 거 생각하면 상당히 좋은 기적이다. 이 시대 외과의 수준을 아무리 높게 쳐준들 실수로 사람을 쑹텅쑹텅 써는 놈들일텐데 차라리 찬물 떠다가 기도하는 쪽이 남는 장사였다.
임팩트는 조금 부족하지만, 사실 사람 사는 데 뭐 대단한 기적이 필요하겠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무병까진 아니고 면역력을 올려주는 정도로 그치는 모양이라는데... 이 시대 수준 생각하면 굉장한 혜택은 맞다. 더 중요한 건 헌신에 따른 기적이 더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무병장수는 럭스 스텔라가 내리는 첫 번째 기적에 불과하다. 첫 번째 기적으로도 충분히 광범위하고 강력한데 두 번째 기적은 얼마나 대단할까?
교회는 참 영리하게도 이 두 번째 기적부턴 전혀 서술하지 않았다. 다음은 직접 얻으셔야 합니다, 이리 말하는 것처럼. 첫 번째 기적의 효능을 겪은 사람들이 보다 열성적으로 살아갈 동기를 부여한 셈이다.
그리고 럭스 스텔라가 베푸는 기적이야말로 내가 서약에 끌리는 이유였다.
하... 서약. 할 수 있으면 괜찮을 거 같은데.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수도원에서 딴 건 몰라도 서약을 허락해줄 것 같진 않다. 하긴. 가만히 일상생활 보내기만 해도 신의 총애를 얻는데 누가 그걸 눈 뜨고 지켜봐줄까 싶다.
내가 이리 고심하고 있자 기껍게도 고민을 함께 나눠 짊어지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공자님, 왜 그리 느긋하십니까! 저희 다 죽을지 모른다면서요!"
개울가의 존. 한참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그는 쉬어터진 목소리로 엉엉 울고 있었다.
이럴 때 토파 경이 있으면 쓴 소리 한 번 해줬을 텐데... 토파 경과 병사들은 탈출을 공모할 위험이 있다며 따로 격리됐다. 존은 같이 둬봤자 무해하다 여겨져서 여기 남겨진 거고.
그제서야 상황을 깨닫더니 매일매일 쉬지 않고 저리 통곡하는 것이다. 같은 방을 공유하는 룸메이트로서 정말 끔찍한데, 수도사들이 더 끔찍해해서 그냥 냅두는 중이었다.
"공자님은 그나마 귀하신 분이라 괜찮지, 저같이 비루한 인생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 아닙니까! 공자님 억지 때문에 끌려왔을 뿐인데!!!"
으헝헝 울어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거짓 하나 안 보태고 구구절절 사실만 읊는 존이 내 심금을 울렸다. 위아래도 잊어버릴 정도라니, 어지간히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나는 서약에 대해 저술한 책을 잠시 덮어두기로 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존을 위로해줄 따스한 몇 마디를 준비해놨다.
"존, 나는 사람을 믿는다."
"아니... 아니! 공자님! 지금 믿었다가 이 지경 아닙니까!"
"쯧쯧쯧. 그거 말고."
"또또 헛소리!!!"
울화통까지 터트리는 걸 보니 상당히 몰렸나 보다. 나는 궁지에 몰려 생각이 틀어막힌 존을 보면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존, 생각해보거라. 교황청의 개입을 극도로 꺼려하는 자들이 유바스와 포위스 주교, 이 둘이다. 이 둘은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수많은 수단을 준비해놨고 내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본론만 이야기해주십쇼, 본론만!"
"헌데 수도원장이 내 아버지 공왕 전하의 눈치를 본다고 날 살려두고 있지. 딴에는 중립을 지킨다고 노린 잔꾀겠지만, 과연 그 모습이 내 죽음을 바라는 자들에게 어찌 보이겠느냐?"
"....어."
여기까지 듣자 비로소 존의 흥분이 가셨다. 나는 조금은 침착해진 존을 보며 환히 웃을 수 있었다.
"난 사람의 잔인함을 믿는다. 이 수도원은 어중간한 중립을 노린 대가로 양측 모두에게 공격당할 것이다."
***
어두운 밤, 달빛마저 가느다랗게 찢겨버린 그늘진 복도에서 죄의식에 얼룩진 수도사들의 발소리가 울려퍼진다.
수도사들은 검은 로브로 몸을 가려 빛이 살에 닿지 못하게끔 막았고, 허리춤에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을 차고 있었다. 심장의 떨림을 짓누르고자 부릅뜬 두 눈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안광만을 투영했다.
수도사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복도의 어둠은 물론 얄팍한 죄의식까지 짓이겼다. 공포와 죄책감에 물든 발소리는 한밤 중 고요한 수도원에 물결치는 파문을 자아내는 중이었다.
이 정적을 깨트린 건 다른 방향에서 등불을 들고 나타난 수도사였다. 팔자주름에 희끗한 머리카락을 지닌 그는 그늘 아래 가려진 흉험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형제님들, 다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이리..."
수도사들의 손은 망설임 끝에 칼자루 위로 얹어졌다. 그 순간, 그들은 엄격한 계율과 서약을 지키겠노라 맹세하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하지만 과거의 회상 정도론 결심을 막을 수 없었다.
단숨에 뽑힌 칼날이 달빛을 대신해 목덜미에 스며들었다. 그제서야 순찰을 돌던 수도사도 상황을 눈치채고 다급히 비명을 내질렀지만, 누군가 듣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무고한 수도사는 쏟아지는 피를 한 줌이라도 막고자 제 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겨우 두 손으로 막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는 자신이 쏟아낸 피웅덩이 위로 쓰러지면서 삶을 다했다.
수도사들은 함께 생활해온, 아무 죄없는 자를 죽였다는 사실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가장 먼저 감상에서 깨어난 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움직이게, 형제들. 권세에 홀린 원장을 대신해 우리가 이 수도원을 이끌어야 하네."
그는 자신의 손에 쥐여진 칼날, 그 곳에 남은 범죄의 흔적을 일부러 외면하며 말했다.
"보복이 두려워 정의를 행하지 못하는 자를 대신해 결단할 시간일세."
21. 신앙의 힘
한창 잠들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몸이 붕붕 흔들리나 싶더니 어디선가 곡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꼭 누구 한 명 죽은 것처럼 말이다. 설마 현대로 돌아왔나 싶어서 억지로 눈꺼풀을 떼자.
"공자님, 이렇게 가시면 어떡하십니까!"
바로 옆에 앉아 눈물 콧물 줄줄 흘리고 있는 존이 보였다. 이 새낀 갑자기 왜 이래.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손을 들어 휘휘 내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존, 수도원에 오고부터 지금까지 네 징징대는 울음소리를 견뎌줬거늘 이런 식으로 내 잠을 방해하는 게냐? 정녕 이 손으로 그 구차한 삶을 토막내줘야 정신 차리겠어?"
"어, 어엇! 공... 공자님! 그럴 때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허튼 소리를 늘어놓으면 모가지에 손날치기 좀 세게 날려줘야겠다. 그리 다짐하면서 뚱한 표정으로 귀를 열어줬다. 존은 내 태도를 보더니 눈물 자국을 감출 새도 없이 헐떡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수도원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뭔가,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
내가 이 답답한 친구를 데려온 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수도원까지 따라올 하인이 드물어서고, 두 번째는 특유의 놀라운 위기 감지 능력 때문이다.
존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닥쳐오는 걸 느끼면 안절부절해하며 극도로 편집증적인 태도를 보인다. 뭐 때문에 위협이 다가오는지는 모르면서 말이다. 어쩌면 이유를 아는데 제대로 표현을 못하는 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면 훌륭한 인재였다. 주인을 해칠 깜냥도 없고 적당히 선량한데 비밀을 알려고 노력조차 않는 사내가 존이었다. 인간 경보기로서 이보다 적임이 있을까 싶다.
그 인간 경보기가 지금 앵앵 울어대는 것이다. 나는 상황의 심각함을 느끼고 즉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가릴 수 있다면 가려라. 촛대도 가져와. 최후의 방어 수단으로 쓸 거다. 너는 책이라도 들어 칼침 한 방이라도 막거라."
"도, 도망은 안 치시는 겁니까?"
"아직은."
자세한 사정을 알기 전까지 섣부르게 움직일 순 없었다. 어설픈 탈출을 시도하다 수도원장의 경계심을 사면 앞으로 외부와의 접촉은 물 건너간다. 무엇보다 내 목숨의 안전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였다.
"존, 너도 섣불리 도망치지 말아라. 굳이 이 시간에 소요를 일으킨 걸 보니 제대로 된 의도를 지닌 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예, 옙!"
"준비를 다하면 잠깐동안 대기하면서 바깥 분위기를 적당히 살피자꾸나."
존과 나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로 했다. 탁자를 엎어 문을 가로막고, 이불을 찢어 밧줄을 만들고, 촛불로 촛대 끝부분을 살짝 달궜다. 여전히 두려워하는 존이 슬기롭게 헤쳐가게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엎어트리면 네가 그 이불을 상대 머리에 뒤집어씌워 교살해야 한다. 숨을 못 쉬게 짓눌러야 우리가 산다. 알아들었지?"
"교... 교살."
"왜. 망설여지는 게냐?"
"교살이 뭡니까?"
"...."
숨 못 쉬게 목을 꽈악 조이라고 말해주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대충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길 한참. 이 쯤 오자 존이 느낀 심상찮은 분위기가 뭔지 알 수 있었다.
흔히 흉가나 폐가에 들어가면 온몸이 쭈뼛거리고 서늘한 감각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흉가에 정말 유령이 있는진 확신할 수 없지만, 오래 머물 경우 자기 신변에 뭔가 위험이 닥쳐오리라 확신해서다.
인간이 머물다 부자연스럽게 사라진 곳에 남는 그 특유의 분위기. 으스스한 밤공기 속 너울대는 옷자락, 그 아래 감춰진 스산한 한기. 거기에 가래 끓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확실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묵을 깨트렸다.
"사람 죽는 소리다."
"사람이요? ...수도원에서요?"
"그럼 사람이 죽을 때 꽥, 하고 비명을 내지르는 게 쉬운 일 같으냐? 물론 쉬운 일이긴 한데."
죽을 거 같아서 내지르는 비명과 죽기 직전 뱉는 소리는 다르다. 둘 다 사람 등골 송연하게 만들 정도로 섬뜩하단 건 똑같지만 말이다. 중요한 건 저 '같아서'라는 부분이다.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위협이라고 느꼈으면 도주하거나 방어하려고 시도하면서 어떻게든 급소 부위, 주로 얼굴과 목을 지키려 들었겠지. 아닌 걸 보니 희생자를 방심시켰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죽이러 왔다면 무기를 손에 들고 있을 거 아닙니까?"
"평소에 무기를 차고 다니는데도 의심받지 않을 종자들이 널려 있지 않느냐."
존은 무슨 수수께끼를 들은 것처럼 아리달쏭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모르는 대로 살아라 그냥. 어쨌든 내 추측대로라면 지금 수도원 내부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그 학살을 자행하는 쪽은 같은 수도사. 입장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인지는 모른다. 짐작되는 바가 있긴 한데...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내가 우려한 바가 옳았다는 것이다.
내 목숨을 노리는 유바스의 계책.
지금, 수도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살육이 진짜 주공이다.
***
나는 다시 한 번 유바스의 치밀함에 내심 박수를 보냈다.
성벽에 둘러쌓인 수도원은 습격에서 안전하다. 수도사들 본인도 강력한 전사들이니 방어하기 쉽다. 해서 수도원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할 거다. 이 상식이 상대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려 방심을 유도한 셈이다.
특히 속세와 단절된 채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수도사들이라면 물욕이 없어 회유하기도 어렵겠지, 하는 이 막연한 상상을 겨냥한 게 제일 컸다.
안과 밖을 뒤집는 순간, 성벽은 외부의 도움을 단절시킬 창살이 된다. 강력한 전사들인 수도사는 위협이 되고 어렴풋이 떠올린 수도사의 이미지는 그들을 훌륭한 암살자로 뒤바꾼다.
유바스... 대단한 놈들이다. 이렇게까지 추잡하려면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 진심인 것이다. 그러나 나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호구가 아니었다.
특히 걸린 판돈이 목숨이라면 더더욱.
그때 생명의 잔향, 피가래 끓는 소리가 복도를 걸어오다 방문 앞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게있는 뭔가가 문에 기대어 주르륵 미끄러지는 소리에 안 그래도 겁많은 존이 이를 부딪히기 시작했다.
"세, 세세세, 세상에."
아무리 절제했어도 감출 수 없는 인기척이 방문 너머에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존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새로 온 상대는 참 정중한 태도로 방문을 똑똑 두드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익숙한 목소리기도 했다.
"나르바 공자. 무사하십니까?"
푸짐한 인상에 푸근한 목소리, 거기에 엇나간 심보를 지닌 서텔 수도사였다. 그가 지닌 칼춤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침착하고 냉정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기색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뒷짐을 지고서 방문을 사이에 둔 채 서텔 수도사와 문답을 나눴다.
"그대 덕분에. 습격자들은?"
"상황을 짐작하셨나 보군요. 마치 이런 일이 생길 걸 이미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내가 말했었잖나. 대체 뭘 믿고 날 유폐했느냐고. 내 죽음을 바라는 자들이 움직일 걸 정말 몰랐단 말이냐."
"...같은 수도사들. 제 형제들이었습니다."
아하. 습격이 올 줄은 알았는데 그게 같은 수도사일 줄은 몰랐다? 본인들도 정치질 때문에 사람 뒷통수 후려갈긴 주제에 수도원 내부엔 정치질 없다 여기는 게 코미디다.
나는 서텔 수도사의 회한 어린 목소리를 단박에 일축시켰다.
"그치들은 자네 형제보다 윗사람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지. 수도원이라 해도 직책이 있고 암묵적인 지위가 있는데 뒷배를 얻었다면 노리지 않을 까닭이 뭘까?"
"공자님, 조롱은 그만 두시지요. 저희 사이의 해묵은 일은 잠시 내려둬야 합니다. 이대론 공자님이 위험합니다. 원장실로 안내해 드릴 테니 부득이하게나마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애설튼 공왕 전하가 분노하시겠지."
유바스 혹은 포위스 주교에게 회유당한 수도사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애설튼 공왕이 분노하기 전에 둘 중 하나가 행동에 나서리라고 말이다. 그리 되면 수도원은 안전하게 남을 수 있다 여겼겠지.
아마 높은 확률로 그 반대일 거다.
애설튼 공왕이 분노해 수도원을 작살낸 걸 [명분]으로 노려서 움직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 쪽이 지역 교회의 반발을 무마하고 환심을 사기 딱 좋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런 사실을 구리구리하게 읊어주기보다 훨씬 확실한 답을 돌려줬다.
"헌데 서텔, 그대에게 중요한 건 분노 따위가 아니라 보답 아닌가?"
"공자, 지금... 절 의심하시는 겁니까?"
"의심이 아니라 보다 확실한 제안을 건네주는 거지."
이 새끼는 진짜 내가 속을 줄 알았나 보다. 서텔이 내 목숨을 구하고자 장판파 조자룡처럼 적진을 뚫고 왔으면 칼부림 소리 한 번이라도 났을 거다.
하물며 제대로 된 놈이었다면 당장 나한테 뛰쳐오기보다 종을 울리거나 소리를 질러 습격을 알렸겠지. 서텔 수도사가 누구한테 회유당했는지는 알 바 아니다.
"원장실을 굳이 갈 필요가 있나? 삿된 마음에 홀려 수도원장을 살해할 놈들이 이 곳에 널려 있는데."
"공자, 그런 소리로 현혹하려 들지 마시지요."
"내 죽음을 약탈자들의 소행이라고 우겨봐야 공왕 전하도 믿지 않으실 테지. 원장이 살해했다 날조해도 애설튼 공왕의 분노, 혹은 증거를 인멸하려는 주교나 유바스가 자네들을 입막음할 수도 있고."
말은 저렇게 해도 강경행동에 나서진 않는다. 솔깃한 거다. 지금이 쐐기 박을 순간이었다. 나는 유바스도, 포위스 주교도 얼버무렸을 부분을 지적하며 화끈한 제안을 건네줬다.
"서텔, 생각해봐라. 포위스 주교도 결국 서임권 때문에 공왕 전하께 기어야 하는 입장이다. 공왕 전하가 꼬우면 교황청에게 머리 숙여야 하는데 죽어도 그러진 않을 테지. 유바스가 이 땅을 통치한다면 자기네 사람을 쓰지, 그대를 쓸 이유가 뭘까? 허나 만일 이번 일을 책 삼아 현 주교를 규탄할 수 있다면 주교직도 공석이 될 터."
"..."
"한동안 후임 주교 자리를 놓고 서로 눈치 좀 볼텐데, 그 때 어느 후보에게 힘을 딱 실어줄 수도원장이 큰 역할을 맡을 것이다. 현 주교의 부정한 개입을 증언하고 애설튼 공왕 전하의 지지를 받는 자가 말이다."
자기 재산을 지나치게 아끼는 자들은 공수표도 쪼잔하게 내민다. 그래서 기껏 포섭한 사람들에게 흔들릴 여지를 주고 마는 것이다. 포섭된 자가 현실적으로 가당키냐 하겠냐는 말로 스스로를 채찍질한들 소용없다.
이미 이득에 홀려 신념을 저버린 인세의 괴물한테는 현실성이나 위험 따위 알 바 아니다. 그들은 오직 실현 가능한 이득, 이론상의 숫자만 바라본다.
서텔 수도사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공자님, 대체 뭘 믿고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난 사람을 믿는다."
중의적인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자가당착의 함정에 빠트리기 딱 좋았다. 나는 서텔이 제 욕심을 못 이긴다 한 말이지만, 서텔은 내 말을 달리 해석했다.
애설튼 공왕의 자식을 아끼는 마음을 믿는다고 알아들은 것이다. 이윽고 잠깐동안 숨이 멎을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길 한참. 어느 순간 칼날이 뱀처럼 미끄러지며 칼집에서 뽑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텔이 아닌 다른 이가 다급히 말한 것도 이때였다.
"서텔 형제. 설마 이제 와서..."
서텔 수도사가 다른 건 몰라도 칼솜씨 하나만큼은 수준인가 보다. 아니면 상대를 기습하는 실력이 뛰어나거나. 함께 온 동료 수도사들이 뭐라 대응하기도 전에 픽픽 쓰러지는 게 훤히 상상됐다.
피가래 끓는 소리, 후두둑 핏방울 떨어지는 소리. 가끔 쉭쉭대며 바람 빠지는 소리까지 들려왔는데 비명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살생 자제의 교리도 이쯤 되면 진짜 있긴 한가 싶다.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몸을 돌렸다. 우리 둔감한 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챈 듯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존, 이제 됐다. 문 앞을 가로막은 탁자를 치워 서텔 수도사님을 안으로 모시거라."
"고... 고고고, 공자님. 미, 미친 짓 같습니다. 미... 미치신 거 같습니다!"
"어허. 참된 정의가 뭔지 알아주신 분한테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어서 열어드려라."
애가 진짜 겁 먹으니 눈에 뵈는 게 없다. 서텔 수도사님한테 미치신 거 같다는 게 할 말인가? 사실도 말할 수 있을 때가 따로 있는 법이다. 나는 엄격한 태도로 존을 꾸짖은 후, 얼마 가지 않아 삐그덕대며 열린 방문 너머를 바라봤다.
서텔 수도사는 일찍이 본 적 없는 정중한 태도로 허리까지 넙죽 숙이고 있었다. 덕분에 로브가 얼마나 물 먹었는지도 보였다. 시커먼 로브라서 망정이지, 새하얀 색이었으면 이미 시뻘겋게 칠해져 있을 거다.
"나르바 공자님. 그럼 어디로 모셔드려야 할까요?"
서텔, 푸짐한 인상의 수도사는 인심 좋은 미소를 지으며 존과 나를 반겼다. 간악한 습격자들을 처리한 후폭풍으로 얼굴 언저리까지 피가 튀어 있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띄우며 미리 점찍어둔 곳을 말했다.
"본당."
"본당은 입구가 넓고 방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달리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럭스 스텔라의 제단이 있는 곳이다. 신심을 모두 저버리지 않았다면 당장 칼부터 뽑진 않겠지."
결국 신이 있는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신앙 뿐이다.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신심을 느끼며 독실한 신자로서 결단을 내렸다.
"혼란 속에서 도망친 내가 그리로 몸을 피해 신의 가호를 바란다 꾸밀 테니 서텔, 그대는 정체를 숨긴 채 무리에 섞여 매복해 있다가 적이 검을 내려놓은 틈을 타 단숨에 썰어버려라."
"...."
존이 입을 쩍 벌린 건, 아마 내가 이토록 독실할 줄 몰라서일 것이다.
22. 독실한 신자들
가끔 존이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면 왜 데리고 왔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개울가의 존, 겁이 조금 많을 뿐 해야할 일은 제대로 하는 사내다. 알면 알수록 우러나오는 진국 같은 사람이었다. 온갖 호들갑을 다 떨어도 막상 시키면 잘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울상 지으면서 고개를 붕붕 내저어도 말이다.
"저더러 수도사 역할을 하라니요? 심지어 혼자서 종 울리러 가라고요?!"
이 반응을 죽어도 못하겠다는 파업이나 거부로 이해해선 안 된다. 훌륭한 리더가 명확한 목표와 과정을 제시해 성과를 노리듯이, 훌륭한 동료도 자신의 업무 성과를 고취시킬 동기를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나는 존의 의욕이 샘솟도록 동기 부여할 의무를 지닌 셈이다. 하여 문 밖에 널부러진 수도사 시체를 가리키면서 최대한 간결하게 설명해줬다.
"후드를 눌러쓰지 않느냐. 설령 벗어 보이라 해도 어차피 머리 빵꾸 내고 사는 놈들이니 이미 머리에 구멍 뚫린 너라면 위화감없이 잠입이 가능할 거다."
"아니! 공자님!!!"
"내 명료한 주장에 대해 반박할 근거가 있는 게냐?"
"공자님... 절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애초에 수도사들끼리 죽고 죽이는 판국에 수도사처럼 꾸미기만 한다고 되겠습니까?!"
별 다른 기대없이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존은 내가 따로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먼저 지적해왔다. 능력을 숨겼던 것일까, 아니면 내 곁에 오래 머문 덕분에 무언가 배우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죽을 위기라 여기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덕분일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존이 보여준 또 다른 면모에 감격해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물론 존의 걱정은 다행히 기우로 끝났다. 새로 합류한 인물이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걱정말거라. 다행히도 우리에게 협력하기로 해주신 서텔 수도사님께서 자세한 지침을 내려주실 거란다."
내 소개가 허파에 바람 좀 솔솔 불어넣은 모양이다. 서텔은 푸근한 국자에 건더기 가득 담은 수프를 담아 한 그릇 부어줄 법한 자상한 아버지의 미소를 지으며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춤에 칼을 찬 자, 그 중에서도 오른쪽에 찬 자. 동료일 경우 칼자루를 배쪽으로 향해 보이고, 반응이 없을 경우 적으로 간주하라. 적으로 간주했을 경우 즉시 검을 뽑아 절명시킨다."
"..."
"이번 일을 획책한 간악한 무리들의 피아 구별법입니다. 놈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들어뒀던 것을 이로이 쓸 수 있게 되다니. 실로 럭스 스텔라의 안배가 따로 없습니다."
서텔 이 새끼도 정말이지... 대단한 놈이다. 이 새끼 얼굴을 강판에다 갈면 강판이 되려 갈려나갈 거다. 그렇지만 개새끼도 내 개새끼란 말이 있다.
개 짖는 소리를 듣고도 웃어줄 수 있어야 진정한 주인이다. 나는 흐뭇한 웃음과 함께 조그맣게 박수까지 쳐줬다.
"들었지, 존. 저기 수도사님들 시체에서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입고 종탑까지 향하거라. 서텔 수도사, 그대는 잠깐 주변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경계하게."
"함께 온 자들은 구하시지 않는 겁니까?"
이 혼란의 시기에 아군을 늘린다. 서텔이 건넨 제안은 지극히 상식적이었지만 지금은 상식 외의 시기였다. 나는 서텔의 시선을 일부러 외면하며 코웃음 한 번 흘렸다.
"그들과 함께 다니면 대번에 탈출하고 있다고 여겨질 텐데 어느 쪽이든 태도를 바꿔 날 죽이거나 자네를 죽이려 들겠지. 아군이 아니라 적을 늘리는 행위다. 오히려 서텔, 그대에게 의존하는 것이 여러 모로 안전할 거다."
"과연."
"그럼, 이 친구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경계를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염려 마시고 준비하시길."
서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지만 목소리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의도한 함정이다. 서텔 수도사는 본인의 이익에 민감하고 즉각 판단하는 자.
그는 여기서 토파 경과 병사들을 구할 경우 본인의 입지가 축소될 걸 알고 있었다. 만일 여기서 내가 그들을 구하러 갔다면 칼끝이 나를 향해왔을 것이다.
어차피 목격자도 없겠다, 괜히 공적을 나눠 가지느니 날 죽여 본래 목표를 이루는 쪽이 나으리라 여길 테니까. 나는 저 살벌한 칼잡이가 조금 거리를 벌린 뒤에야 간신히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마침 존이 피에 젖은 로브를 툭툭 건드리며 질색하던 찰나였다.
"존, 잘 들어라. 종이 울리면 수도원 전체가 전장으로 변할 거다. 약탈자로 위장한 적군이 근처에 있을 공산이 높다. 서텔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예?"
나는 존의 뒷통수를 툭툭 치면서 일부러 격앙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제대로 활약 못하는 존을 타박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말이다. 이 기회를 노려 서텔의 시선을 피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용을 정리하면 이랬다. 수도사들이 원장과 날 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걸 보니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다. 이는 누군가 사전에 시기를 잡아줬거나 기한을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
그렇다면 왜 시기와 기한을 정해놨을까. 단순히 어르고 윽박지를 용도로 여길 수 있지만 상대는 유바스와 포위스 주교다. 둘 사이에 공통된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서로 협력하는 걸로 추정되는 이상 쉬이 넘어갈 순 없다.
하물며 내 죽음으로 무언가 얻길 간절히 바라는 자들이 흉수와 흑막이 명확한 암살로 제 명분을 더럽히길 원할 리 없으니... 확고한 명분과 내 확실한 죽음을 얻기 위해 진정한 공격을 준비해놨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내가 짐작한 바를 하나도 남김없이 존과 공유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살육은 유바스의 진정한 주공이 맞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짜 주공을 위한 준비 단계에 가깝지. 수도원 내부의 혼란으로 방비를 약화시켜 단숨에 돌파할 생각일 게다."
"마, 맙소사."
"그리될 경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간단하고 명확한 신호가 필요할 터. 수도원에서 그럴 만한 신호라면... 종소리만큼 확실한 신호도 없을 것이다.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이 혼란 속에 진정한 의도를 감추고 있던 자들이 문을 열어 바깥의 약탈자들을 반길 테지."
"그럼... 그럼 지금 이래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거 아닙니까?"
"걱정말거라."
나는 벌써 포기하려 드는 존을 격려하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널 죽게 놔둔 적이 있더냐?"
"..."
존은 이 순간 참 많은 감정을 느낀 듯 했다. 입술을 오물대며 뭔가 말하려다가 온 몸을 파르르 떨더니 그대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존, 이런 말 몇 마디로 감동하다니.
이제 보니 우리 둘째 형 테르베어처럼 감수성 충만한 사내다. 아니, 의리와 낭만이 넘친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는 존의 어깨를 토닥이며 슬슬 몸을 일으켰다.
"널 믿고 있으마. 최선을 다하거라. 그리하면 나와 함께 살아서 해를 보고 있을 거다."
***
"존, 꼭 종 울려야 한다!"
"내 팔자야..."
그렇게 울상짓는 존을 떠나보낸 후, 나는 서텔과 함께 이 음산한 수도원 복도를 거닐었다.
군데군데 사람 시체로 장식까지 된 걸 보니 유령의 집이 따로 필요없겠다. 하지만 이쯤 오니 당하는 쪽도 마냥 손 놓지만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부산한 발소리가 조금씩 울림을 키워나간 것이다.
이윽고 발소리끼리 얽힌 순간, 쓰라릴 정도로 날카로운 쇳소리가 수도원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흔들었다. 서텔과 나는 뒤바뀐 분위기를 눈치챈 즉시 서로 눈을 마주쳤다.
"계획대로 갑니까?"
"계획대로. 본당 내부에서까지 칼싸움할 정도면 그 틈을 노려 탈출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알겠습니다."
때때로 서텔의 전 동료들과 마주치는 순간도 닥쳐왔다. 본당과 원장실이 조금 거리가 있던 모양인지, 그들은 날 보자마자 인상을 팍 찡그리곤 했다. 심지어 그늘 아래인데도 말이다.
"공자께서 어쩐 일로...?"
"...밤중은 몹시 위험합니다, 공자."
그리 말하면서 은근슬쩍 칼자루 위로 손을 얹는데 살벌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서텔의 능청맞은 대꾸가 빛을 발했다. 서텔은 동료 수도사들을 한 번 훑은 뒤 너스레 떨기까지 했다.
"원장님께서 공자님을 따로 부르실 일이 있어 날 시키셨는데 가는 길에 좋지 못한 의도를 지닌 자들이 보이더군. 위험하다 여겨 한창 돌아가는 길일세."
"벌써 거기까지 갔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흉한 의도를 지닌 자들이 있던 모양이야."
"이 무슨. 당장 그리로 가 마저 정리하겠습니다."
"형제님들이 그리해주게나."
이 새끼들이 말하는 흉한 놈들은 아마 자다가 목 잘린 수도사들일 것이다. 나도 놈들 눈에는 이미 목 잘린 것처럼 보일 테지. 원장실로 데려가 죽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은 대놓고 살의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칼잡이 수도사들은 서텔의 변명을 듣고서야 짜증어린 눈동자를 굴리면서 몸을 틀었다. 순간, 서텔이 칼자루 위로 손을 얹는 게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서텔의 행동을 제지했다.
잠깐 시간이 흐른 후. 우리를 심문한 수도사들이 모습을 감추자 서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자님, 기회이지 않습니까?"
"주변에 공조하는 무리들이 있을 수 있다. 갑작스레 시체가 생겨나면 이쪽의 기행이 의심받을 것이다. 어차피 종이 울리고 나면 격화될 싸움, 그 때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치우면 된다."
"과연...!"
과연은 무슨. 이 새끼 의심받는다 치면 내 목부터 잘라버릴 거면서 감탄하는 건 대체 뭐냐. 서텔이 급발진 밟아봐야 위험한 건 나 뿐이다. 서텔이야 본인이 짊어지는 위험이 적으니 저리 생각없이 구는 거고 말이다.
나는 속으로 꿍시렁대면서 복도를 쭉쭉 나아갔다. 중간에 시체도 만나고, 목 없는 시체도 만나고, 가끔 가다 죽어가는 사람도 만났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절로 질문이 나올 정도의 광경이었다.
"살생 자제의 교리가 있긴 하나?"
"필요한 살생은 주저하지 말라."
돌아온 대답을 들어보니 럭스 스텔라, 의외로 무시무시한 신일지 모르겠다.
"제 개인적인 신념입니다."
아니면 그냥 이 새끼가 미친 새끼일 지도.
새삼스레 느꼈다. 역시 나는 중세 야만인 종자들한테 안 된다. 격을 아득히 뛰어넘는 광기에 혀를 내두르며 질색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아늑한 현대가 그립다.
하지만 이 몸이 누군가.
"본당에서도 똑같이 해주길 바라겠네."
"물론입니다, 공자님."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인으로서 이런 새끼도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는 관용과 이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참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은 서텔 같은 종자들이 활약하기 딱 좋은 야만의 시대였다.
이윽고 본당에 도착했을 때, 나는 젖혀진 대문 너머로 럭스 스텔라의 제단을 처음 볼 수 있었다.
본당은 높은 천장에 길쭉한 모습을 갖춘 전형적인 교회의 구조였다. 샛푸른 십자성이 그려진 유리. 그 십자성을 본받은 정십자가가 제단 한가운데에 공손히 놓여져 있었고.
저 샛푸른 십자성을 형상화한 정십자가가 럭스 스텔라의 우상이다. 나는 십자성을 바라보며 서텔에게 지시했다.
"혹시 단검 같은 날붙이가 있나?"
"단검... 말입니까?"
"우리는 이제 한 몸이다. 그대에게만 위험을 전부 떠넘길 순 없지."
그 뭐야. 무좀이나 사마귀도 지져서 떼내기 전까지 한 몸이긴 하다. 서텔은 이 말을 퍽 인상깊게 들었는지 품 속에서 단검을 바로 꺼내들었지만 말이다.
"공자님의 뜻이 그리 하시다면 기꺼이."
"고맙다."
나는 서텔이 건네준 단검을 받아들고 저 십자성을 향해 한 발짝, 또 한 발짝 내딛기 시작했다. 마침 딱 적절하게 사방에서 발소리들이 울려퍼지는 중이었다.
내 방도 가보고 원장실도 가본 수도사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으리라. 그리고 모두의 주의가 내게 쏠린 지금, 존이 한결 수월하게 종탑으로 향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나는 십자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노리는 건 바로 나 자신의 팔뚝. 칼끝의 차디찬 감촉이 살갗을 타고 오를 즈음, 나는 자연스럽게 입을 열고 있었다.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
나는 가장 대화하고 싶었던 상대에게, 가장 전하고 싶던 말을 이제서야 던질 수 있었다.
"이세를 황혼에 몰아넣고 인세의 여명을 끌어올린 신이여."
이세의 옛 신들이 공물을 바치라 요구할 때, 럭스 스텔라는 앞으로의 삶을 요구한다.
럭스 스텔라 덕분에 인간은 다른 종족과 다른 방식으로 힘을 얻었다. 서약함으로써 스스로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대신 보배로운 공물 없이도 기적을 내려받은 것이다.
기적을 얻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지만 각오보단 쉬운 방법. 그게 서약이었다. 본당을 노린 까닭은 서텔에게 말해준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따지자면 이쪽이 진짜 의도에 가까웠다.
"이세의 유물에 현혹된 치세가 정녕 그대의 바람인가?"
-모두가 방해할 서약을 지금, 이 기회를 노려 성사시킨다.
23. 손에 손잡고
유폐된 와중에 서약에 대해 공부하면서 커져간 의문이 하나 있었다.
서약이란 이세의 옛 신들과 럭스 스텔라를 구분 짓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이다. 단순히 공물 한 번 바치고 땡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건지 스스로 다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어감이 중요하다. 럭스 스텔라는 하나라도 어기면 끝장이 아니라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면 힘을 내어준다. 물론 기준은 무척 빡빡한 듯 했다.
나보다 몇 년은 수도사로 살았을 서텔이 아직도 성물 없이는 기적을 못 부린다는 게 증거다. 어... 기준이 널널했어도 서텔은 힘들 거 같긴 한데. 어쨌든 핵심은 서약의 종류에 있다.
절제, 구전, 정직, 근면, 성전.
좀 배우고 나니 딱 보였다. 흔히 알려진 착한 사람처럼 살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서약 몇 개가 말이다. 심지어 서약을 하나만 해야한다는 제한도 없었다.
할 수 있는 놈은 해봐라. 럭스 스텔라가 그리 말하는 듯해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거 다섯 개 다 지키고 사는 놈은 어지간한 또라이 아니면 없을 거다.
서약을 위반할 경우 닥쳐올 패널티가 뭔지 모르는 입장에선 막중한 위험 부담을 피해갈 수밖에 없고. 물론 그렇다고 진짜 서약 하나만 띡 하는 놈은 미련한 놈이었다.
나는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생각해봤다. 신의 총애를 얻겠다는 놈이 벌써부터 서약 못 지킬 걱정하면서 조심스럽게 하나만 고른다? 내가 신이었으면 어휴 못난 놈 꺼져라고 외쳤을 것이다.
어딜 가나 자신감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나친 겸양은 겸손이 아니라 주변 사람을 짜증나게만 만들 뿐이다. 지금, 신 앞에서 서약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 자신감을 끌어올릴 적기였다.
나는 책에 적힌 절차대로 행동했다.
서약을 위한 첫 단추. 날붙이로 자신의 팔뚝을 그어 피를 흘림으로써 최소한의 각오를 증명하라. 그 말대로 나는 주저없이 단검을 역수로 쥐고서... 혀를 쭉 내밀며 아주 조금, 아주 살짝만 팔뚝을 그었다.
내 각오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타인을 괴롭힐 각오다. 겨우 자해 따위로 신앙심을 증명할 수 있다는 얄팍한 생각 따위 품지 않았다. 변명처럼 느껴진다면 참으로 얕은 생각이다.
마음의 눈물과 육신의 눈물. 둘 중 뭐가 더 소중한지는 럭스 스텔라 같은 신도 잘 알 것이다. 나는 피가 배어나오는 팔뚝을 들어올리며 당당하게 외쳤다.
"럭스 스텔라. 내가 그대에게 비추는 건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
뒷통수로 시선이 꽂힌다. 아직 수도사들이 도착한 건 아닐 테고, 슬슬 뒤로 빠지고 있던 서텔의 시선이 분명했다. 내가 갑작스레 서약을 시도할 줄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서텔은 워낙 당황해서인지 내 서약을 저지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럭스 스텔라의 우상, 십자성이 올려진 제단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럭스 스텔라, 인세의 여명을 밝힌 그 별빛으로 나를 보아라!"
책 가라사대, 서약할 때 중요한 건 자신감과 솔직함이다. 책의 저술에 따르면 서약할 때 충분한 각오가 확실히 드러나야 한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책의 경고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어설픈 형식에 얽매여 본래 의도가 왜곡되느니 자신을 담백하게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각오를 드러냈으니 남은 건 무엇을 서약할지다.
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제단을 향해 나아가며 힘껏 외쳤다.
"서약한다,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모든 일에 열중할 것을!"
근면의 서약. 내가 느끼기에 최선을 다 하면 헌신을 인정받는다.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내게는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부모님 등골 빨아먹으면서 백수짓할 때도 최선을 다하다 한 번 쫓겨났을 정도로 말이다.
"서약한다, 내가 깨우친 모든 것을 후세에 남길 것을!"
구전의 서약. 지식을 전파하고 기록을 남길수록 헌신을 인정받는다.
이건 뭐 거저 먹는 거다. 생각하기보다 칼부터 뽑고 보는 야만인들로 가득찬 세상이다. 보다 발전된 사회를 살아온 지구 출신 현대인인 내가 이 미개한 중세틱 이세계를 계몽하면 된다.
참 쉬운 일 아닌가?
"서약한다, 황혼으로 밀려난 이세를 지평선 아래로 쳐박겠노라고!"
성전의 서약. 이세의 옛 신을 섬기는 이교를 몰아내고 럭스 스텔라 신앙을 퍼트릴수록 헌신을 인정받는다.
뭐 본인이 다른 신앙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꾸거나 종교가 싫은 무신론자라면 절대 안했을 텐데. 나는 군대에서 초코파이 준다는 말에 교회 가고 햄버거 준다는 말에 성당 갔다가 피자 준다길래 법명까지 지은 놈이다.
게다가 럭스 스텔라 신앙은 앞으로 내 밥그릇이 될 종교다.
머지 않은 미래에 럭스 스텔라의 성직자로서 살아갈 내게 이세의 옛 신을 섬기는 이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밥그릇 깨졌으면 얌전히 꺼질 것이지, 손으로 퍼먹겠다고 감히 내 쌀독에 모여들어?
심지어 밥그릇 깨진 사이한 놈들한테 혹한 새끼들이 있었다. 이럴 경우 본보기가 필요하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은 종교의 자유 따위 용납되지 않았다.
"이세의 종자들, 이세의 힘에 홀린 자들까지 전부!!!!"
내 쌀독을 노리는 놈들에게 예외란 없다. 전부 싸그리 쓸어버린다.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깨끗한 결의를 담아 외쳤을 때, 나는 제단 코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스스로 도취한 탓에 이제서야 눈치챈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럭스 스텔라의 결정 뿐이다.
"..."
좀... 걸리시네? 송수신 상태가 영 안 좋은가? 뭐, 럭스 스텔라를 못 기다릴 만큼 여유 없는 건 아니다. 나는 조그맣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신의 선택을 기다렸다.
수많은 발소리가 겹쳐진 건 이때였다. 수도사들이 마침내 본당에 도착했다. 저 막나가는 친구들이 닥쳐온 건 서약에 모든 걸 쏟아내고 나른한 기분이 들었을 즈음이었다.
내가 십자성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 본당의 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히고 난폭하게 입당한 것이다.
얼마 안 가 옷자락끼리 쓸리는 소리가 사방을 메우더니, 곧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얌전히 내려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