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잔혹한 야만의 시대, 수도원은 귀중한 지식과 성물을 보호하는 전초기지기도 했다.
성물을 한 곳에 모아두면 어떤 미친 놈이 한 번에 싹쓸이해갈 수 있으니 미리 분산투자하는 셈이다. 겸사겸사 우리 수도원에 성물이 있노라며 어깨를 으쓱일 수도 있고.
물론 성흔 하나 없는 개백정 망나니들이 우루루 몰려있던 수도원이라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영험한 성물이라 해도 이런 놈들 곁에 있으면 영성이 죄다 빨려나갔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성물은 성물.
럭스 스텔라의 권능이 담긴 물건들은 이세의 옛 신을 섬기는 이교도 무리에게도 탐스러운 보물일 것이다. 뭐 어따 쓰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고 보는 명품 같은 거라 할까.
어디에 쓸모 있는지 모를 가상화폐도 비싸니까 막 사고 그랬다. 어쩌면 럭스 스텔라의 성물도 귀하다니까 일단 뺏고 본다 이런 마인드일지 모르겠다.
누가 아나, 박물관에 처박아두고 나중에 관광객으로 수입 올릴 초장기 계획을 짜놨을 수도 있지. 여기서 중요한 건 불경한 이교도들의 미래 계획 따위가 아니다.
성물은 아주 귀중한 보물이다. 아무리 등급이 낮더라도 말이다.
해서 우리는 본당을 샅샅이 뒤지며 성물함처럼 보이는 걸 죄다 건드리는 중이었다.
"존, 사이한 불신자들에게 성물이 넘어가게 놔둬선 안 된다. 우리처럼 럭스 스텔라께 신실하고 정직한 자들만이 보배로운 성물을 보호할 자격이 있음을 알고 수색에 매진하거라."
"공자님, 은촛대도 싹 쓸어가시던데 그것도 성물입니까?"
"물론이지. 네 급료가 될 성물이니라."
"공자님, 제 부족한 안목으로도 보일 만큼 지하 저장고에 깃든 성스러운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다. 본당만 털... 수색하고 끝내자꾸나."
수색에 가장 열중한 건 역시 존이었다.
알게 모르게 여러 분야에서 맹활약 중인 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즈음. 갑자기 등 뒤에서 심마니도 한 수 접을 만큼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기사 하나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상자 하나를 치켜들고 있었다.
"찾았다! 찾았습니다, 테르베어 경!"
"어디? 어딘데! 어디 있었나?!"
"제단 앞 타일이 묘하게 붕 뜬 느낌이길래 칼로 쑤셔봤더니 나오지 뭡니까!"
성물을 찾았다는 기쁨에 모두들 어깨춤을 들썩이며 경사롭게 떠드는 사이. 눈을 번뜩이던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 한 번 열어봐서 내용물을 확인해봐야지 않겠나? 응? 성물이 무, 무사하신지 봐야지."
"...."
그 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나와 존은 물론이고 테르베어와 기사들까지 전부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30. 단챠는 패망의 길
우리 일행은 아주 엄숙하고 비장한 결의와 함께 일레니풋으로 향했다.
어쩌면 수도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 비틀던 때보다 더 심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칼같이 불침번 교대하며 잠까지 줄인 가혹한 강행군을 거듭했다. 그럼에도 일행의 정신은 또렷하기 그지 없었다.
심지어 밤 중엔 안광까지 희번득거렸는데, 사나운 짐승들도 슬금슬금 다가오다 지레 겁 먹고 도망칠 정도였다. 어딘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적들도 이번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 중엔 분명 우리 일행이 보여준 살기어린 경계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일레니풋으로 향하는 여정은 아무 방해없이 순탄하게 끝났다.
일레니풋은 깔끔한 벽돌집과 딱딱 기워맞춘 구조의 집들이 늘어선, 여러모로 계획도시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하나 더 특기할 사항이 있다면 사람 하나 정도 될 법한 낮은 성벽 뒤로 빼곡히 들어선 종탑들이었다.
성벽에서 가장 가까운 종탑에 자리잡은 종지기가 활로 무장한 걸 보면 망루 겸용인 모양이다. 그렇지만 감상은 이걸로 끝이었다. 우리 일행은 더없이 엄숙한 태도로 경비병을 마주했다.
사슬갑옷의 경비병들은 갑작스레 무장한 기사들이 나타나자 바짝 긴장한 듯 창대를 꽈악 움켜쥐고 있었다.
"정지, 이곳은 교황청 직할 일레니풋 주교령이다. 그대들의 신원을 밝히지 않는다면."
여기선 내가 나설 차례다. 우리 일행은 걸음을 옮기며 철저한 역할 분담을 계획했다. 그리고 나는 테르베어의 빈약한 말재주를 대신하는 언변가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교도 습격자들에게 약탈당한 수도원에서 성물함만 간신히 보전하고 오는 길입니다. 보호를 청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병 하나가 헐레벌떡 성문 안으로 뛰쳐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뒤에야 검은 수단을 입은 사제가 다른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옆구리에 망치보다 더 묵직할 두께의 책을 낀 채로 말이다.
지긋한 연배의 사제는 우리 앞에 서서 옆구리에 낀 책을 펼쳤다.
"어디 보자... 문장이 하얀 바탕인 걸로 보아 초기 개종한 가문이고. 까마귀는 이 근방에서 전통적인 길조의 상징, 상당한 역사를 지닌 가문임을 나타내고. 왼쪽 윗부분에 위치한 청십자성은 성도 아이데아로부터 칭호를 하사받았음을 나타내니."
사제는 한참동안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며 주절주절 읊어댔다. 그러다 책을 덮고선 말에 타고 있는 우리를 올려다봤다.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포위스 공국의 자제 분들께서 어인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사제는 우리가 누군지 단박에 눈치챈 모양이다. 잠깐 시선을 돌려 테르베어를 바라보자 테르베어도 상당히 놀랐는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기껏 안면 가리개를 내린 보람없이 말이다.
테르베어가 주도권을 갖는 건 어려워 보인다. 결국 테르베어를 대신해 내가 직접 질문해야 했다.
"짐작하신 겁니까?"
"가문의 문장은 사람들의 흔한 인식보다 훨씬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지요. 특히 옆에 계신 기사 분의 서코트를 보면 명확합니다."
사제는 입가에 팔자주름을 그리며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십자성은 가주의 허락 없이 쓸 수 없습니다. 가문에 속한 병사나 가신, 기사들의 경우 백십자성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외에도 십자성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에 따라 어디서 분가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만... 문장학에 대한 기초적인 개론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조금 흥미가는 이야기긴 했지만 우리 일행에겐 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내가 눈빛으로 신호를 주자 지금까지 묵묵히 인내하던 충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님, 이것이 저희가 보호한 성물함입니다."
개울가의 존. 그는 자신을 태워준 기사에게 꾸벅 머리를 조아린 뒤에야 소중히 지켜온 성물함을 품에서 꺼내들었다. 그러자 인자한 할아버지 같던 사제의 눈동자가 번득이기 시작했다.
"호오. 좋습니다. 럭스 스텔라를 섬기는 이 테바노가 한 번 봐드리지요."
그 눈빛에 우리 일행은 기다리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진품명품의 시간이었다.
성물은 아주 귀중한 보물이다.
따라서 일레니풋의 주교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우선시한다 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호기심이나 물욕 때문에 변명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주교령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리숙한 인상의 어린 사제가 나타나 손짓발짓해가며 전하기를.
"주, 주교님께서 성물의 안위를 살피는 게 먼저라 하십니다."
일단 성물함부터 확인해보고 오랜다. 해서 우리 일행은 짐을 풀고 오라는 권유도 무시한 채 성물 감정의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성문에서 우릴 알아본 사제, 테바노가 웃음을 터트렸다.
"호기심에 이미 열어보셨을 텐데 뭐 이리들 궁금해하시나 모르겠습니다."
"그야..."
"농담입니다, 농담. 성물을 보호해주신 여러분이니 한 번 살펴보고 특별히 어떤 성물인지도 알려드리겠습니다."
***
노사제 테바노가 우리를 이끈 곳은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마한 예배당 안쪽.
그것도 선선한 한기가 감도는 지하실이었다. 게다가 희미한 촛불을 제외하면 진짜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였다. 어딘가 꺼림칙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에 존이 제 팔을 쓸어댈 정도였다.
"어후, 공자님. 여기 귀신 나올 거 같습니다."
딴에는 우스갯소리로 말한 듯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보였지만 현실은 차디 찼다. 어딘가 빠짝 긴장한 기색의 테르베어가 칼자루를 만지작대며 답한 것이다.
"당연하지. 이 곳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따로 보증인이 없는 무연고자들을 위한 지하 공동묘지다."
"예? 그, 그럼."
"대부분의 무연고자들은 이세의 악마들을 섬기는 이교도거나 그들에게 희생당한 제물일 가능성이 높다. ...귀신이 나오기엔 충분하지."
딸꾹. 존은 새하얗게 질린 양손으로 제 입을 가로막았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복도 벽에서 멀어져 내 곁으로 보폭을 좁혀왔다. 나는 그 모습에 인상을 팍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존, 비켜라. 걷는 데에 방해되지 말고."
"서, 성흔 보유자시면서 너무 짜게 구지 말아주십쇼."
"귀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을 볼 테냐?"
나는 혀를 차면서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밀쳐진 존은 울상 가득한 표정으로 기사들 옆에 착 달라붙었다. 하지만 귀신 무서운 건 다 똑같나 보다. 기사들도 존보다 덜할 뿐이지 어딘가 쭈뼛거리는 모습들이었다.
결국 선두를 이끌던 테바노가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우리 용맹한 기사님들도 두려운 게 있으신가 봅니다."
"크흠, 흠."
"허나 걱정마십시오. 이 곳에 안치된 분들은 럭스 스텔라의 이름을 내건 성전에서 생을 다 하신 명예로운 전사들입니다. 이름만 없을 뿐이지요. 이세의 잔당이나 이교도라면 몰라도 신실한 신도들에게 해악을 끼칠 분들은 아닙니다."
그제서야 다들 긴장이 조금 풀렸다. 몇몇 기사들은 오히려 공포 대신 존경심을 품고 벽면을 향해 성호를 긋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커다란 방 하나가 나타났다.
책이나 두루마리가 잔뜩 꽂혀져 있는 책장부터 시작해 여러 물건들이 빼곡히 차있는 수납장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작업실이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방이었다.
지하 묘지 한가운데 처박히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테바노는 정중앙에 놓인 탁자 위로 성물함을 놓은 뒤 품 속에서 단안경을 꺼내들었다. 그는 정갈한 느낌의 손수건으로 단안경을 뽀득뽀득 닦고서야 성물함의 뚜껑을 땄다.
딸칵.
"흐음... 청동 목걸이라."
꼴깍. 누군가 침을 목 너머로 삼켰다. 테바노는 성물함 안쪽을 유심히 바라보며 침음을 흘려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턱을 쓰다듬던 테바노가 돌연 두 눈을 부릅떴다.
"음?"
"사제님, 뭔가 보이신 겁니까?"
"여기 혹시 뼈는 없었습니까?"
"뼈... 요?"
나는 눈을 끔뻑이며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다들 똑같은 반응이었다. 존이야 뭐 기대도 안했고, 테르베어도 크게 기대 안했다. 그나마 기사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공자님, 저희는 기사입니다."
"아니... 딱히 뭐라 말한 게 아니라."
"기사는 글을 배우지 않습니다. 성물함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고요."
"뼈 본 적 있냐니까?"
"음...."
기사들은 강인한 육체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한 인종이었다. 기사는 지능을 얻기 위해 몇몇 능력을 포기한 현생 인류와는 사뭇 다른 진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짧은 시선 교환과 시답잖은 이야기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해냈다.
"저희가 구경했을 때 뼈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그, 불경하게 먹다 만 뼈를 성물함에다 왜 넣겠습니까."
"보통 닭뼈 같은 건 마누라가 바늘로 만들어야겠다고 가져가지 않아? 아니면 그냥 개한테 주거나."
혹시 존과 테르베어가 봤나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려봤지만.
"없습니다요, 공자님."
"나도 뼈는 못 봤는데?"
결과는 똑같았다.
"그렇답니다, 테바노 사제님."
테바노는 우리들의 답변을 듣자마자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성물함을 닫아버렸다.
"그 수도원, 분명 성흔 발현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겠지요?"
"그걸 어떻게?"
심지어 성흔 발현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까지 단숨에 눈치채자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성물함을 열었을 땐 보이지 않던 뭔가를 알아낸 게 틀림없다.
다들 사제의 신통한 모습에 부풀어오른 기대감을 반짝이는 눈빛으로 드러냈다. 이제 남은 건 저 목걸이가 얼마나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이 목걸이는 엄밀히 말해 성물이 아닙니다."
...는 건데.
"성물함에 있던 건데요???"
워낙 황당한 결론이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행히 눈치 보지 않는 존이 날 대변해 입을 털었다. 그렇지만 테바노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존의 항변을 단호하게 일축시켰다.
"따지자면 이 황금으로 만들어진 성물함 자체가 더 가치있을 겁니다. 성물에 등급이 있고 그걸 9단계로 나눈다면 이 목걸이는."
"이 목걸이는...?"
"12등급."
"사, 사제님. 그럼 숫자가 크니까 좋은 거 아닙니까?"
"12등이 1등보다 더 잘났다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잠깐동안의 침묵. 그러고 얼마 가지 않아 혼란이 찾아왔다. 수많은 의문들이 우리 일행 사이를 휩쓸었다.
성물함 안에 있던 건데 성물이 아니다? 목걸이가 무척 귀중한 줄 알았는데 상자 자체보다 못하다? 그럼 수도원 그 새끼들은 대체 저걸 왜 성물함 안에 쑤셔넣고 있던 거지?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지적한 사람도 있었다. 애초에 성물을 담아두지 않았는데 성물함이 아니라 그냥 상자 아닌가? 이미 다 죽어나자빠진 수도사들을 향해 분노가 슬슬 치밀어오를 즈음이었다.
묵묵히 입 다물고 있던 테바노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니!!!! 어떻게 실망을 안해요!!! 황금 상자 까서 꽝이라는데!!!"
지위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무뇌아 존의 시대상을 초월한 항변은 기사들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았다. 물론 나도 조그마한 지지를 보냈다. 일이 잘못될 경우 목 잘리는 건 존이지만 호기심을 해결하는 건 우리 모두였다.
다행히 테바노는 이런 경우를 종종 봤던 모양이다. 노사제는 침착하게 단안경을 벗으며 성물함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사실 대부분의 성물함들이 다 이렇습니다."
마치 산타클로스만 기다리던 아이에게 사실 산타 따위 없고 네게 돌아갈 선물도 없다 선언하는 부모처럼 말이다.
***
테바노는 우리를 다시 지상으로 이끌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사람들은 성물하면 흔히 목걸이나 우상, 혹은 명검 따위를 연상하곤 합니다. 기적이 깃들어졌다 여기는 물건이면 다 성물이라 여기지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 다만 교회가 말하는 성물은 조금 다릅니다."
"...그게 뭡니까."
실망감에 축 늘어진 기사들을 대신해 입을 연 건 테르베어였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물어본 걸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테바노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뒷말을 이었다.
"럭스 스텔라의 기적이 가장 선명히 깃든 존재. 이세의 악마들에게 맞서길 택한 가장 신실하고 위대한 자들의 유산. 그것이 진정한 성물입니다."
"두루뭉실하군요."
"허허, 구전이란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흠."
테르베어는 영 만족 못했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지만 나는 조금 달랐다. 그냥저냥 넘기려다가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뼈는 없었습니까?'
'럭스 스텔라의 기적이 가장 선명히 깃든 존재, 이세의 옛 신에게 맞서길 택한 가장 신실하고 위대한 자들의 유산.'
어느샌가 나는 테바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테바노도 내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어린 포위스는 한 명 뿐이니... 나르바. 성직에 뜻을 두셨다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이해력이 참 높아 다행입니다. 아마 교황청에서도 좋은 연락이 곧 올 겁니다."
"성물이 꼭 필요한 겁니까?"
"물론입니다. 성물은 존재 만으로도 이세의 악마들을 몰아내는 힘이 있으니까요. 허허, 워낙 영특하시니 그마저도 곧 이해하실 겁니다."
내가 질색하는 걸 보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 끄덕이는 모습에서 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실을 모르는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기껏 성물을 보나 했더니."
"연이 없었나보군."
어쩌면 저들은 성물이 뭔지 몰라서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테바노는 날 기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성물도 확인해봤으니 주교님께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잊자.
잠깐 겉돈 끝에 본 목적을 달성할 때였다.
31. 끓어오르는 효심
우리가 도착한 일레니풋 주교령은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성벽 안 거리 주변엔 정교한 석조 건축물들이 있었는데, 창문마다 신화 이야기를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함을 뽐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놀랍게도 성변 안쪽 거리는 균일한 크기의 돌들로 포장된 돌길이었다. 심지어 말끔하게 마감처리되어 있어 마치 건물 안에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삭막한 건 아니었다. 건물 사이사이 빈 공간마다 조그마한 덤불과 묘목이 심어져 있어 돌무더기 같은 느낌을 덜어낸 것이다.
아마 부유하고 기품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기서 살고 싶어할 터였다. 머리 정수리만 깎은 수도사들과 입을 꾹 다문 사제들이 바글거리지만 않았다면 땅값이 상당했을 거다.
현실은 보다 비정했다. 일레니풋은 어딜 가나 수도사들과 사제들, 말그대로 땀내나는 사내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곳은 따지자면 마을이나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대학이었다.
풋풋한 신입생들이 모이는 그 대학 말고 군대 말이다. 결국 참다 못한 나는 안내역을 자처한 노사제 테바노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주교령들도 다 이렇습니까?"
"설마요. 교황청 직할, 일레니풋만이 간직한 정숙하고 경건한 모습입니다."
"여기는 따로 수녀님들을 받지 않는 겁니까?"
"그 분들은 금남의 구역에 따로 계십니다. 거기서 충분한 실력과 수양을 쌓기 전까지는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됩니다. 알다시피, 안 좋은 마음을 품은 사내로부터 자신의 정절을 지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테바노는 그리 말하며 눈동자를 굴려 우리 일행을 훔쳐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혈기 왕성한 테르베어와 휘하 기사들을 말이다.
기사들은 테바노의 통뼈 들어간 말을 듣자마자 어깨를 움찔하더니 휘파람을 불며 스리슬쩍 고개를 돌렸다. 이후로도 나는 몇몇 사소한 궁금증을 질문했고, 그럴 때마다 테바노는 성실히 답변해줬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자 주교령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많은 건물들 가운데서도 유독 뾰족한 첨탑을 지닌 예배당. 테바노는 그 앞에 서고서야 등을 돌렸다.
"이곳이 주교좌 본당입니다. 다들 안쪽으로 들어오셔서 잠시 쉬고 계시지요. 나르바 공자님은 이대로 주교님을 뵈러 가면 되지만... 테르베어 경도 면담에 함께 참석하실 겁니까?"
"동생이 직접 결정한 일입니다. 사내가 정한 일을 다른 이가 이 이상 참견할 순 없습니다."
테르베어는 기사답게 굳센 표정과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물론 동생을 위한다는 가슴 훈훈한 이유로만 답한 건 아니었다. 골치 아픈 이야기를 듣느니 편안히 쉬겠노란 의지가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노사제 테바노도 어차피 크게 기대하진 않은 모양이다. 노사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내게로 관심을 돌렸다.
"으음.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나르바 공자님."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선뜻 날 보내주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개울가의 존, 내 충직한 시종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이다.
"고, 공자님. 만일 이것도 함정이면 어떡합니까? 공자님이 떨어지시면 어쩌시려구요?"
"존, 녀석."
수도원에서 겪은 일들이 존의 마음에 상흔으로 남았나보다.
"허허, 주인을 섬기는 마음이 갸륵한 시종이군요. 걱정 마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미리 복사들을 시켜 포도주와 간단히 즐길 요식거리를 마련해놨습니다."
"공자님 몫까지 싹 쓸어놓고 있겠습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십쇼!"
아니면 끝내 털어오지 못한 지하 저장고의 포도주들이 아쉬웠다던가.
그럼 그렇지.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노사제 테바노를 따라갔다. 허나 엎친데 덮친 격이란 말이 있다. 정말 불운하게도 테바노는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일레니풋의 주교좌 본당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 음각된 부조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30여 년 전 위대한 예술가라 불리던 조 마르망의 작품으로..."
당연한 말이지만, 테바노가 주절댄 본당 안이 어쩌고 저쩌고하는 건 내 관심 밖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성의없이 답변해도 눈치채지 못했단 사실이다.
그렇게 얼마나 따라갔을까. 슬슬 어디 앉아서 쉬고 싶어질 즈음, 테바노가 복도 옆에 있던 커다란 문짝을 노크 한 번 없이 벌컥 열어제꼈다.
워낙 격식없는 행동인 탓에 되려 따라가던 내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렇게 막 열어도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주교님이 마음 넓으신 분이라 그런 거까지 신경쓰시진 않으십니다. 자자, 어서 들어오세요."
테바노는 그리 말하며 방 안 곳곳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납장 곳곳에서 말린 과일이나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풀쪼가리들이 계속 나왔다.
어찌나 살뜰히 훑던지 도둑도 한 수 접을 지경이다. 나는 슬슬 테바노 사제의 기행을 참지 못하고 은근히 눈치를 줬다.
"주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주 관대하신 분입니다. 거기에 반드시 이 땅을 교화하리란 사명감과 교황 성하와의 긴밀하고 지속적인 신뢰관계는 물론 꾸준히 경전과 주변 정세를 학습하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시죠."
"아니, 거 그만 터시고..."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먹는 듯해 입을 열려던 찰나. 나는 불현듯 찾아온 직감에 내밀던 손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렸다.
그 때, 노사제 테바노는 수납장에서 꺼낸 말린 과일을 입 안에 쏙 집어넣고선 사탕처럼 굴리는 중이었다. 품 속에 넣어둔 단안경을 꺼내들면서 말이다.
이윽고 노사제는 옷장을 열어 안에 든 옷을 챙겨입기에 이르렀다.
"테바노는 제 아명입니다."
주교임을 상징하는 하얀색 사제복, 금테 두른 어깨망토에 자줏빛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 이 모든 걸 차려입은 테바노는 보다 딱딱하고 학자스러운 모습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성직에 종사하면서 얻은 이름은 가니스타. 럭스 스텔라의 부르심과 성하의 명을 따라 일레니풋의 주교로 활동하며 이단적인 배교자들과 맞서는 중입니다."
뒷짐진 채 근엄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주교를 바라보며 든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방금 전 하신 말씀들, 안 부끄러우십니까?"
"허허허."
아부하는 솜씨로 권세를 누리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 얼굴에 금칠하던 거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그리 질문했지만, 주교는 오히려 당당하다는 듯 어깨를 폈다.
"남이 추켜세워주길 바라며 눈치주길 십수 년. 그러다 진정성 있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직접 추켜세우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말입니다."
"..."
"해서 직접 말하고 다닙니다. 덕분에."
주교를 향한 첫인상은 영 좋지 못했다. 럭스 스텔라를 섬기는 자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힘줄이 풀렸나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의혹을 말끔히 씻어낸 건.
"서약을 완수하고 나이 육십 때 비로소 성흔을 하사받았지요."
주교가 직접 들어올린 손, 그 위에 새겨진 십자성 모양의 상처였다.
***
주교의 손등에 새겨진 성흔을 본 나는 조금, 아니. 다소 불경한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성흔이 흔한 편입니까?"
럭스 스텔라가 기적을 남발해도 너무 남발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래보여도 헌신 2단계의 기적 아닌가. 근데 성흔을 얻자마자 다른 성흔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솔직한 이유를 말하자면 순전히 리액션 때문이었다. 최소한 아니!!! 럭스 스텔라께서 성흔을 내려주시다니!!! 하며 오두방정 몇 번은 떨어줘야 예의 아니냐고.
주교는 내 불만이 뭔지 눈치챈 듯 허허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쯤 럭스 스텔라께서 너무 기적을 남발하는 거 아닌가 싶으시겠지요."
"..."
"성흔이 생각보다 흔한 편이냐면, 예. 맞습니다. 하지만 헌신 1단계의 기적치고 흔한 편이냐면... 아니오. 무척 희귀합니다."
"헌신 1단계가 왜 나옵니까. 성흔은 2단계."
"1단계입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상세한 설명이 뒤따랐다.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다.
교회는 일부러 진실을 숨겼다.
무병장수의 기적은 럭스 스텔라를 믿기만 해도 주어지는 헌신 0단계의 기적. 진짜 헌신 1단계는 성흔 발현이다. 그리고 성흔을 가진 자는 지치지 않고 서약을 이행한 만큼 강해진다.
하지만 성흔이 지니는 사회적 의미는 이보다 훨씬 거대했다. 가니스타 주교는 자신의 손등을 가리키며 성흔이 어떤 존재인지 상세히 설명해줬다.
주교의 말에 따르면 성흔은 한때 성직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었다. 신에게 헌신한다는 증명 없이 성직에 가담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고 외설스러운 행위였댄다.
갓 설립됐을 무렵의 초대 교회는 성흔 없는 자, 감히 교회의 문턱을 넘지 말라 엄포할 정도였다고. 문제는 시간이었다. 어딜 가나 늙음이 웬수인 것처럼 말이다.
"인세의 여명은 이세의 공포를 지워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심까지 함께 지워버렸습니다. 럭스 스텔라께서 강림하신지 1208년째, 이세의 공포는 그저 어린 아이들을 겁주기 위한 옛 신화로 전락한지 오래입니다."
민중들이 당장의 이익을 쫓아 옛 신앙으로 회귀한 경우도 있었고 교회 지도부나 지역 교회가 타락해 내전을 겪은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서약같이 귀찮은 일을 해가며 기적을 받느니 그냥 옛 신한테 공물바치고 만다는 마인드로 개종하겠다.
이런 마음가짐은 다 똑같나 보다. 굳이 이세의 옛 신들을 믿지 않아도 독실하지 않은 건 다 비슷비슷했다. 어차피 안 지켜도 별 다른 처벌도 없겠다, 서약해놓고 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이랜다.
그나마 서약이라도 하면 양반이었다. 아예 서약 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지 오래. 상황이 이렇다보니 교회 내부에서도 성흔을 지닌 자가 가파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차아암 가슴아픈 이야기다. 하지만 이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이야기 속에도 날 흥분시킬 감동과 교훈이 담겨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오늘날 성흔을 지닌 자는 성직이 아니라도 서품받은 사제의 대우를 받으며, 본인이 희망한다면 주교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주교좌까지 단숨에..."
뭐 귀찮은 연공서열 따지지 않고 단박에 주교로 꽂아넣어준다는 말에 혹하려던 찰나. 나는 까먹을 뻔했던 상식을 떠올리고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으레 간과하기 쉬운데, 성직자만큼 정치적인 인종이 달리 없다. 특히 세속의 일에 관심많은 주교가 허투루 이런 말을 꺼냈을 리 없었다.
나는 가니스타 주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닫고 혀를 차야만 했다.
"...보내주겠다 단언할 정도로 성흔 보유자가 적다면 기존 교구들을 운영하기 힘들었을 터. 자연스레 성흔 없는 자들이 주교를 맡았을 테고, 이 과정에서 세속 군주들이 개입해 영향력을 행사했을 겁니다. 어차피 성흔 없는 자들인데 교구 관할에 보다 나은 인재가 낫지 않겠냐면서 말입니다."
"오."
"설사 성흔 보유자가 있다해도 세속 군주들이 그 수의 적음을 내세워 기존 교구론 다스리기 어렵단 이유로 새 교구를 신설하거나 본래 있던 교구를 쪼갰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교회가 암묵적으로 행사하던 서임권이 세속 군주의 손에 명시적으로 넘어간 계기였을 테지요."
"허어."
"결국 주교좌까지 단숨에... 그거, 교황청의 서임권이 인정받는 직할 주교령에서나 먹히는 말 아닙니까."
여기까지 말하자, 가니스타 주교는 아무 말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박수를 친 뒤에야 다시 뒷짐지며 운을 띄웠다.
"공자. 유바스에 회유당한 포위스 주교를 그대로 냅두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어차피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합니다. 대신한다면 포위스를 다스리는 애설튼 공왕의 자식인 공자가 최선이고요. 문제는 포위스 주교를 어떤 방식으로 끌어내리느냐."
가니스타 주교는 그 말과 함께 단안경을 만지작거렸다.
"현재 애설튼 공왕의 빈약한 통제력으론 현 주교를 해임하거나 살해하는 순간 휘하 봉신들이 반발한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고립될 미래가 훤히 보입니다."
"..."
"반면 애설튼 공왕의 서임권이 아니라 성흔을 중시하는 교황청의 방식대로 서임할 경우 독실한 신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의 지지는 물론이지요."
가니스타 주교가 대변한 교황청의 입장은 이러했다.
날 주교로 만들어주겠다. 대신 공왕의 서임권을 교황청에 넘겨라. 이건... 아주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였다.
나는 꼴깍, 침 한 번 삼킨 뒤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주교님, 만일 주교직에 지원한다면."
"듣고 있습니다."
"따로 공부해야 합니까?"
"허허허허."
가니스타 주교는 무색건조한 웃음을 흘린 뒤 답했다.
"공부는 성흔 없는 놈들이나 하는 겁니다."
***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테르베어와 기사들 그리고 존은 고깃죽을 퍼먹고 있었다.
"어? 나르바, 일은 어떻게 됐느냐? 표정이 요상하구나."
"형님."
테르베어는 내 진지한 목소리를 듣고 그릇을 내려놓은 뒤 옷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그러고선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경계하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일이 틀어진 게냐?"
"아버지께."
"...듣고 있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애설튼 공왕을 향한 효심을 토해냈다.
애설튼 공왕, 아니.
아버지!
"...아버지께 제 몫의 유산은 필요없다 전해주십시오."
원래 놀고 먹으려고만 생각했는데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32. 말이라도 못하면
내가 아버지와 가족들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노라 다짐한지 어언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 전, 주교와 면담하자마자 교황청이 건넨 제안에 도장 쾅쾅 찍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교황청이 자리잡은 성도 아이데아와는 거리가 멀다길래 오래 걸리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리 땡겨받은 유산, 공국의 서임권을 선조치 후보고로 교황청에 넘긴 보람이 있던 모양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주교가 부르길래 옷 입고 배 벅벅 긁으며 갔더니 선물이 있었다.
"성하께서 보내신 답변입니다."
"벌써?"
나는 단안경을 쓴 주교가 건네준 서신을 엉거주춤 받아들었다. 서신은 옛날 문방구에서 팔던 반짝이 가루를 뿌린 듯한 샛푸른 촛농으로 봉해져 있었다.
나는 편지를 몇 번이고 뒤집어본 뒤 떨떠름한 기분으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성도 아이데아는 배 타고 본토로 건너가서도 오래 걸린다 들었습니다. 아무리 재촉해도 회신이 벌써 올 리 없을 텐데."
"허허허."
"...준비하고 계셨습니까?"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냥 대놓고 묻기로 했다. 애초에 빙빙 돌려가며 깎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사과 껍질도 깎기 귀찮아서 그냥 씹어먹던 놈이 바로 나였다.
가니스타 주교는 내 직설적인 반응에 눈썹을 뒤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청은 서임권을 확보하기 위해 계승구도에서 벗어난 지역의 유력귀족들을 항상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거기에 세속의 권세보다 교회의 대의를 추종하는 자는 어딜 가나 있는 법. 포위스 주교 휘하의 사제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말 잘 안하려는데 좀 많이 음습하네요. 게다가 회신이 빨랐던 이유라기엔 너무 두루뭉실하고."
"첩보와 용인술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본토에서 이번 일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만 알아두십시오. 합당한 이유도 있고 말입니다."
"아, 예."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아 적당히 잘랐다. 대충 교회는 이세의 옛 신들과 이교도들에 맞서 인세를 지키고 있다 이런 주장일 테지.
게다가 하는 짓을 보니 어째서 교회와 세속 군주들 간에 사이가 나쁜지 알 거 같았다. 이 새끼가 뭐하는지 음침하게 감시하면서 남들 몰래 이단... 확실... 화형... 이딴 거 적고 있으면 호감형일 수가 있나.
대신 관심을 들어올린 서신 쪽으로 옮겼다. 샛푸른 촛농으로 봉인된 교황청 직통 서신 말이다. 그러자 주교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청랍법서를 이곳에서 뜯어보실 겁니까?"
"어차피 한 배를 탔는데 뭐 어떻겠습니까."
그보다 청랍법서는 또 뭐야. 교황청 직통 서신을 굉장히 고풍스럽게 부르는 모양이다. 하긴 저런 어휘 하나하나가 모여 권위를 만드는 거겠지.
나는 시큰둥하게 손톱으로 촛농을 그어 뜯어낸 뒤 서신을 펼쳤다. 서신에 적힌 내용을 적당히 쳐내고 요약하면 대충 이러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성직에 오르는 건 합당한 자격이 필요한 바, 하여 기적심사를 하겠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끔뻑이길 몇 차례. 나는 고개를 들어올려 눈앞에서 허허 웃고 있는 가니스타 주교를 바라봤다. 거의 노려보다시피 말이다.
"공부 안해도 된다더니?"
"공자님께서 몇몇 오해를 하신 모양입니다. 공부 안해도 된다, 맞습니다. 시험을 치지 않는다, 아닙니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식으로 사기치는 놈들이 제일 싫다. 다행히 중세는 월급 타먹고 퇴근하기만 기다리는 경찰한테 민원 넣는 게 아니라 자력구제가 가능한 시대.
방에 두고 온 칼을 가져오려고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성흔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시험입니다. 공자님께서 책장을 펼칠 필요는 전혀 없는 시험이지요."
흠. 단순히 설명이 늦었던 모양이다. 머쓱한 나머지 괜히 주교를 탓하는 마음이 들었다.
거 말 좀 똑바로 하시지. 하마터면 제대로 된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 전락할 뻔했잖아.
나는 너스레 떨면서 다시 주교를 바라봤다.
"그런 걸 먼저 말씀해주셔야죠. 사람 헷갈리게."
"물론 공자님의 신앙심 간증을 위해 경전에 나오는 경구를 조금 외우시긴 하셔야 합니다."
"...."
***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남이 볼 땐 등신 같아도 본인 딴에는 진지한 이유일 수 있었다.
다행히 교황청이 주도한다는 기적심사는 남이 봐도 이해할 만한 이유였다. 가니스타 주교는 어째서 기적심사가 필요한지 간단하게 요약해줬다.
"성흔 위조자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칼로 짼 상처거나 최악의 경우 이세의 악마들이 내린 마법을 럭스 스텔라의 기적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은 지역 교회가 성물을 들고 찾아가면 해결된댄다. 우리가 수도원에서 들고 온 그 12등급짜리 등급외 성물도 이세의 힘을 몰아내는 데엔 충분하다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말 강력한 이세의 힘일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살아남은 이세의 옛 신들과 이교도들은 교회의 추적을 피하고자 눈에 최대한 덜 띄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럭스 스텔라의 기적으로 위장해 교회 지도부에 침투하는 것.
"굳이 이교도들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나 자신의 권위를 드높일 의도로 스스로를 시성하거나 추대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적심사와 성인 시성이 철저히 이뤄지는 까닭입니다."
성인에 대한 기준이 모호했던 옛날엔 개나소나 성인을 자처하기도 했댄다. 그 결과, 약 천 년의 세월을 거치며 교회는 성인을 지정하는 기준과 절차를 몹시 까다롭게 잡았다.
주교는 여기까지 말한 뒤, 꽤나 흥분한 눈초리로 날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거기에 성흔이 발현했다 해서 교황청 직속 기적심사단이 움직이는 경우도 무척 드뭅니다. 지금은 무척 이례적인 경우지요."
"음."
꿀보직이란 소리를 너무 풀어서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대충 이런 의문이 들 즈음이었다.
"귀띔하자면... 기적심사단은 합당한 가치. 예컨데 성인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은 자가 나타나지 않은 이상에야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
그제서야 왜 기적심사를 받아야 하는지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시험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시험이란 핑계로 이뤄지는 교황청의 영향력 행사였다.
그리고 서임권을 넘겨주면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단 말의 실체이기도 했다. 교황청은 나름 유서깊은 집안의 삼남이자 성흔까지 발현한 나를 확실한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는 중이었다.
당장 성인 시성까진 못해줘도 이 친구 높은 확률로 미래에 성인될 거임~ 하는 언론플레이를 펼치면서 말이다. 이는 성흔이 발현되지 못한 포위스 주교를 끌어내릴 때 강력한 무기가 될 터였다.
성흔이 발현되지 못한 채 수작질 부리는 현 주교 vs 열두 살이지만 성흔 발현한 데다 교황청 인증에 공왕의 혈육이기까지 한 나.
누가 봐도 싸움이 안 된다 이건.
게다가 교황청이 정치적인 이유로만 날 선택한 게 아님을 드러내기에도 딱 좋았다. 기적심사를 통과했다는 점을 강조해 교황청의 서임 기준이 세속 군주와 다른 게 뭐냐는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과연 교황청이다. 천 년동안 세속 군주들과 투닥거리며 해쳐먹은 짬밥은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완벽해보이는 방법에도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유바스를 너무 자극하는 거 아닙니까?"
이건 병사만 안 움직였을 뿐이지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다. 우리 공국을 탐낸 유바스의 야망에 내려지는 사형 선고이자 버려진 찐따가 군대없이 할 수 있는 사상 최대 최악의 복수였다.
그도 그럴게, 아버지 유산을 수십 년 먼저 땡겨받은 내가 교황청의 측근으로서 충효를 다해 도와드릴 거 생각하면 유바스 입장에선 졸도할 일이었다.
하지만 내 우려를 들은 일레니풋의 주교, 가니스타는 얼굴 위로 음험한 미소를 띄웠다.
"허허허허."
유쾌통쾌해서 웃는 게 아니다. 주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웃음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저는 차라리 놈들이 움직여주길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세와 관련된 부분은 함부로 공론화할 수 없지만, 기적심사를 방해하는 건 얼마든지 비난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흠."
확실히 교황청은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다만 [판타지 모나크]를 플레이하던 내 입장에서 볼 땐 아쉬운 점 몇 개가 유난히 돋보였다.
태생이 종교 조직이라 그런 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특정 유형의 모략을 꾸미는 데에 경험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본래라면 이 아쉬운 점을 이용해 상대방의 대계를 어그러트리는 게 내 플레이지만.
"주교님, 그렇게 끝내지 마시고 좀 더 보완해봅시다."
언제 내릴진 몰라도 오래오래 한 배 탈 거, 조금이라도 도와줄 차례였다.
***
주교와 의기투합한 나는 우리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식당으로 향했다. 밥상머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며 그럴싸한 의견 좀 얻으려 한 건데... 뒤늦게 알아차렸다.
우리 무식한 기사들과 존이 이 복잡한 일을 이해할 리 없었다.
내가 최대한 나긋나긋 설명해줘도 글줄 외우는 걸 고문으로 여기는 인종들답게 먹거리 즐기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나마 격식과 지위를 중시하는 기사들은 듣는 시늉이라도 했지.
존은 딱딱한 빵접시를 양손으로 들고 혀를 쭉 내밀며 개처럼 핥아대기까지 했다.
"베에. 헤러러러럽. 헤러럽, 쩝."
"..."
불행은 이곳의 식문화가 폭 넓고 다양하다는 중세에서도 하필 제일 미개한 쪽을 닮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동안 중세가 야만하다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자 일부러 외면했던 현실인데.
"어? 이야, 공자님! 여기 스튜는 장난 아닙니다! 접시에 스며든 맛이 예사롭지 않아서 혀로 핥는 재미가 있다니까요!"
"그래. 많이 먹어라."
포크로 찍은 다음 나이프로 고급지게 썰어 먹는 식사 예절 따위 없다. 있는 거라곤 딸랑 숟가락 하나였다.
기사들도, 존도 후려치면 사람 골통 부술 정도로 딱딱한 빵접시에 스튜나 수프를 담아놓고 수저로 떠먹고 있었다. 나중가서야 숟가락질조차 귀찮아진 존이 유달리 더럽게 먹었을 뿐이다.
식탁 한가운데 올린 고기도 할머니가 죽죽 찢어주시던 김장독 김치처럼 손으로 죽죽 찢어 먹고 말이다. 그나마 식탁 아래에 손 닦는 대야나 수건이 있다는 게 위안이었다.
여기서 좀 깨끗하고 절도있게 식사하는 건 테르베어 혼자였다. 심지어 썩어도 준치라고 공왕의 자식답게 내가 꺼낸 말을 대충 이해하기까지 했다.
"자세히는 모르겠다만 유바스가 열 받을 소리란 건 알았다."
듣지도 않는 놈들 사이서 이 정도면 우등생이다. 꼴통 학교에서 전교 1등을 보는 담임 선생의 마음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르바, 유바스가 이번엔 어찌 나올 거 같으냐?"
테르베어는 내가 보여준 면면들을 보고 나이에 대한 편견을 접은 모양이다. 가족애와 낭만만큼은 중세 상위 1%인 형이었다. 나도 테르베어를 존중해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우선 눈에 가장 거슬리는 사람부터 치우겠지요. 여차하는 순간, 커다란 힘이 되어줄 조력자부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차분한 설명이 테르베어의 역린을 건드렸나 보다. 테르베어는 갑자기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호방한 웃음을 터트리며 식당을 둘러봤다.
"하하하하! 유바스가 동료들과 함께 있는 날? 감히? 단 열 기로 수십 수백의 약탈자들을 물리친 우리를 쉽게 물리칠 거 같으냐!"
테르베어의 웃음은 역병과도 같았다. 입 안으로 우악스럽게 음식을 집어넣던 기사들도 하나둘 접시와 수저를 내려놓더니 웃기 시작했다.
"테르베어 경, 아직 공자님이 저희의 무용담을 다 듣지 못했나 봅니다."
"크으~. 이럴 땐 맥주라도 있어야 하는데."
"후후후... 무용담 듣느니 직접 보는 게 나을 터. 테르베어 경, 공자님께 일일 종자체험 몇 번 시켜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딱 그말대로였다. 기사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속에서, 테르베어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가슴을 두드리며 날 바라봤다.
"나르바, 걱정말거라. 포위스 공국 최강의 기사들이 널 보호할 거다."
어쩌면 이 말에 가장 깊이 감동한 건 내가 아니라 존일지 모르겠다.
듬직한 기사들을 본 존은 너무 핥아대서 물렁해진 빵접시를 오물거리다 말고 내려놓더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토해냈다.
"정말 듬직합니다. 공자님, 군대라도 끌고 오지 않는 한 절대 이길 수 없어요 이건!"
"아."
***
시끄러운 종소리가 우릴 반긴 건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 그러니까 일레니풋에 도착한지 10일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딱따구리보다 더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릴 듣고도 잠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조금 체념한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엔 도화지보다 더 새하얀 안색의 견습 사제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손짓발짓하고 있었다.
"유, 유바스의 군세가 도착했습니다. 보고되지 않은 기병들이 나타났다면서..."
"...."
폭력은 싫어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존의 아가리엔 손따귀 좀 날려야겠다, 그리 여긴 순간이었다.
33. 놈들이 사술을 쓴다
내가 존과 함께 거리로 나왔을 때, 주교령의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는 종적을 감춘지 오래였다.
느긋이 팔자걸음 휘휘 내디디며 혼잣말로 기도문을 웅얼대던 수도사나 사제들은 더 이상 없었다. 그들 모두 쉴새없이 들려오는 종소리를 듣고 혼란에 빠져 헐레벌떡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수도사나 사제들이 저러는 건 이해한다. 군대가 직접 다가온다는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실컷 욕하는 와중에도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어, 하는 낙관적인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믿고 있던 교회의 권위가 의외로 안 먹힌 걸 봤으니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성내 경비병들의 반응이었다.
"왜 하필 내가 근무할 때...!"
"집합, 집합! 전원 성벽 위로!"
이 친구들도 사제와 수도사들처럼 생각한 모양이다. 설마 유바스가 직접 군세를 이끌고 나타날 줄 몰랐다는 듯 경악한 얼굴들이었다. 그걸로 모자라 허겁지겁 창칼을 꼬나쥐고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부여잡고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테르베어와 기사들은 이 혼란스런 무리를 헤집으며 나타났다.
"주교령의 병사들은 평화에 찌들어버린 모양이군."
규율은 커녕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인상을 팍 찡그린 채로 말이다. 다른 기사들도 똑같은 감상을 받은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러다 한 명이 깜빡 잊은 걸 떠올렸다며 질문해왔다.
"그러고보니 공자님 곁의 그 촉새같은 시종이 오늘은 유독 조용하군요."
"..."
"입술도 어제보다... 음. 원래 저렇게 입술이 두꺼운 녀석이었나?"
"존은 말의 무게를 느끼는 중입니다. 저는 감각을 깨우칠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줬을 뿐이고요."
존은 팅팅 부어오른 입술을 가리키며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지만 항소는 허락할 수 없었다. 어쨌든 우리 일행이 모두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됐다.
테르베어와 나는 서로를 마주본 후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성벽 위. 이제껏 제대로 보지 못한 유바스의 저력을 이 눈으로 직접 살펴볼 기회였다.
우리는 술렁이는 소리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 아우성치는 병사들을 물리치며 나아갔다. 이윽고 깨끗이 다듬어진 성벽 계단을 오를 즈음, 선선한 바람이 바깥에서부터 불었다.
처음엔 그저 바람이 차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겐 직감이란 게 있다.
바람이 지나가고 얼마 안 가 피부에 와닿는 게 아닌, 등골을 싸악 훑고 지나가며 폐부를 쓸어내리는 듯한 서늘함이 뒤늦게 몰려왔다. 토해지는 숨결이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유바스..."
항상 호방하고 자신감있는 태도를 지켜오던 테르베어가 빠짝 긴장했다. 다른 기사들도 우스꽝스런 면모를 싹 지운 채 준엄한 태도로 성벽 아래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곳곳에 나부끼는 검을 문 사자가 그려진 깃발. 멀리서 봐도 고급진 광택을 흘리는 갑옷과 예리하게 반짝이는 창칼들. 거기에 대오를 갖추고서 쭉 늘어선 채 부동자세를 유지하는 병사들까지.
수십 단위의 소규모 추격대가 아니다. 말그대로 최소 수백, 많으면 1천은 족히 될 숫자의 군대였다. 나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오른손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형님. 형님이 보시기에 저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 되는 거 같습니까?"
"...못해도 1천이다. 마필과 기수들의 숫자로 보아 기병은 50여기 정도."
유바스가 보낸 군대는 보병이 절대다수였다. 당연히 기동성이 뒤쳐질 수밖에 없고, 한 술 더 떠서 겨우 10일만에 1천의 군대를 동원해 주교령까지 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고 혀를 찼다.
"일레니풋으로 올 때 어쩐지 너무 조용하더라니."
유바스는 습격이 실패했다는 걸 눈치채고 오는 길을 습격하느니 병력부터 소집했다. 처음부터 무리한 추격전 대신 무력시위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이토록 자주 소집하다니. 부자라곤 들었는데 상상 그 이상인가 보다. 어쩌면 유바스의 권세를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대제국의 야망을 품고 내달리던 정복자도 칼침 주사 한 방이면 작살나기 마련이었다. 유바스처럼 약점많은 권세라면 충분히 도모할 수 있었다.
나는 유바스의 약점을 알고 그 틈새를 억지로 벌릴 줄도 안다. 유바스가 어디 성군처럼 지냈다면 모를까, 모략과 술수로 맞상대한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를 그리 다독이고 있자 기사 한 명이 우려섞인 목소리를 꺼냈다.
"유바스가 주교령을 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뇨. 그러진 않을 겁니다. 이전처럼 단순 무력시위를 할 뿐입니다. 딴에는 내세울 명분도 있으니까요."
"명분? 주교령을 겁박하는 일에?"
"범죄자나 의심스러운 자가 교회 안으로 숨어들었을 때 진을 치고 대기하는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리 여기고 있을 겁니다."
이번엔 유바스가 나름 세련되게 접근했다. 물론 군대 소집 자체야 투박한 술수지만 내세운 명분 자체는 썩 괜찮았다.
실상은 옛 사위를 겁박하는 행위지만 말로는 국경을 몰래 넘어온 중무장한 무리를 쫓고 있다 이리 말한 셈이다. 어감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하는 게 이 때문이었다.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이 느끼는 바도 달라진다. 유바스는 의도적으로 내 존재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번 대치가 자신들과 교황청 사이의 갈등으로 보이게끔 유도할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무력시위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르베어를 바라봤다.
"형님, 유바스가 목표를 바꾼 것 같습니다."
"...."
유바스가 그린 찬탈 계획의 핵심은 계승권을 지닌 자식이다. 그리고 유바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장남 에덜레드는 아버지를 대신할 만큼 군주로서의 소양을 갖춰 괴뢰로 삼기 어려웠다.
차남인 테르베어는 강력한 기사라서 사로잡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딱히 권력욕도 없어서 회유가 어려웠다. 결국 삼남인 날 상대로 수작질 부리다가 내가 미친 짓해서 간신히 떼낸 게 지금이다.
하지만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테르베어가 제일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만일 가신다면 여자는 실컷 안으실 듯 합니다."
"나르바, 이 형님은 기사이지 종마가 아니다. 날 아내와 가정에 부끄러운 남자로 만들지 말아라."
테르베어는 진지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답했지만 알맹이없는 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비장한 태도로 유바스의 진형을 바라보던 기사들조차 단숨에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누가 그들을 탓할 수 있으랴. 애처가 테르베어는 참 구슬프게도 성기술 전문가의 처방을 자주 받아야 하는 환자였다. 테르베어의 오랜 지병에 눈물을 찔끔 훔칠 때였다.
"오우오우이! 어이 오이오!"
"존, 당분간 말의 무게를 느끼라 하지 않았느냐."
한동안 잠자코 있던 존이 갑자기 방방 뛰기 시작했다. 조용히 말의 무게를 손바닥에 담으려던 찰나, 목청 찢기는 듯한 날카로운 외침이 성벽 위에 울려퍼졌다.
"전령, 전령! 유바스가 접견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
유바스와 일레니풋 주교의 접견은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가니스타 주교가 순전히 우리 일행을 배려해서였다.
주교는 나와 테르베어를 자신의 집무실로 부른 뒤 상세한 설명에 나섰다. 주교 가라사대, 갑작스레 접견이 이뤄질 경우 우리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여 대비책을 강구할 시간을 벌었댄다.
가니스타 주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몇몇 제안을 건네오기까지 했다.
"포위스의 자제 분들께서 동의하신다면 제가 유바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수납장에서 꺼낸 말린 과일을 하나씩 나눠주며 건넨 제안이었다. 테르베어는 덥썩 줏어먹었지만, 나는 턱을 괴어 궁리해야만 했다. 결론은 꽤나 긍정적으로 나왔다.
확실히 괜찮은 제안이다. 내가 유바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꽤나 단편적이었다.
문장은 검을 물고 있는 사자. 현 가주가 야심을 품은 근친충. 교황청과 결탁했다가 서임권을 두고 싸워 결별, 최근 이세의 힘에 홀림. 그리고 현재 아침녘 제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지금까지는 이 정도로도 의도를 때려맞출 수 있었지만 이제 한계였다. 상대의 의도를 탐색하려면 보다 많은 정보를 알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방법도 있긴 한데.
"이 형은 너만 믿고 있으마."
말린 과일을 오물거리며 답하는 테르베어를 보니 차마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유산을 수십 년 먼저 땡겨받았다는 죄책감, 서임권을 양도했다는 소식을 접하실 아버지를 향한 효심, 그리고 테르베어를 향한 불신어린 편견을 모두 취합하여 결론을 내렸다.
"듣겠습니다."
"좋습니다. 테르베어 경께서도 공자님께 일임하신 듯하니 잘 들으셔야 합니다."
가니스타 주교의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던 사실들에 디테일을 불어넣었다. 대부분 유바스가 지닌 권세가 정확히 어느 정도인가에 치중된 디테일이었지만... 전부 듣고 나니 교황청이 쩔쩔 매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유바스는 진정한 왕을 눈앞에 두고 있었군요."
"다른 네 가문을 완전히 복속시켰다면 그리 됐을 겁니다."
주교의 말대로다. 유바스는 아침녘 제도의 통일을 실현할 뻔한 세력이었다. 거 삼국지로 치면 하북과 중원을 다 먹어버린 조조나 원소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비옥한 농토나 무역이 왕성해 발달한 도시들을 다수 보유한 데다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양성된 군대와 함대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주교는 유바스의 군사적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수치로 짐작하고 있었다.
"유바스가 보유한 군함만 17척. 본토에서 수입하는 마필의 숫자만 따지면 이론상 2천에 달하는 기병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휘하 기사들을 모두 소집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
"교회는 유바스가 완전 소집령을 내릴 경우 1만 5천에서 최대 2만에 달하는 군대를 모을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교회와의 반목이 두드러지자 신도들이 등을 돌리면서 지배력이 약화됐지요.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가능한 수치이지, 실제론 불가능할 겁니다."
"그래도 자릿수가 좀 많이 다른데..."
어른들은 두루뭉실하게 말하면 어리둥절해하다 숫자로 말하면 깜짝 놀란다고, 딱 내가 그랬다.
2만? 내가 잘못 들었나? 만일 교회가 유바스와 계속 손을 잡았다면 나머지 공국 네 개도 금방 복속됐을 미래가 훤히 보였다. 그리 됐다면 나도 목이 성하진 않을 테지.
그렇지만 숫자에 압도될 필요는 없었다. 자릿수가 달라서 놀라긴 했지만 그 뿐이다. 유바스는 카탈로그 스펙이 높을 뿐이지, 실제 스펙에선 하자가 많이 있었다.
물론 가볍게 여길 순 없었다. 내 목숨과 공국의 미래,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의 인생이 걸린 일이다. 나는 주교의 이야기를 몇 번이고 곱씹고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러자 가니스타 주교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단안경을 벗었다.
"공자님께서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접견을 이 이상 미루는 건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
유바스와의 접견은 주교좌 본당의 응접실에서 이뤄졌다.
성벽 바깥은 너무 위험하니 안쪽, 누구나 칼을 들지 못할 교회에서 만나자 하니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적어도 당장은 음험한 술수를 저지를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술수를 부릴 생각이 없다고 예의를 갖춘단 소리는 아니다.
유바스 측 인물은 쫄딱 굶은 사람처럼 삐쩍 골은데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를 지니고 있었지만 승모근만 봐도 단련을 허투루 하지 않은 진또배기 기사였다. 우리 테르베어나 다른 기사들처럼 말이다.
그는 형형한 안광을 흘리며 다짜고짜 선언했다.
"최근 장원들 사이서 심상찮은 무리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하나같이 중무장한 데다 승마하기까지. 단순한 여행객으로 치기엔 지나친 규모인 데다 그들은 저희 주군께 어떠한 언질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의도를 의심하기엔 충분합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성인의 땅을 침범하는가?"
가니스타 주교가 침착한 어조로 방어에 나섰지만.
"주교님, 저희의 고충을 이해해주십시오. 요근래 멋대로 전쟁이 날 거라 여겨 모여든 용병들이 일감이 없자 약탈자로 돌변해 무고한 양민을 해치는 경우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들 중 몇몇은 정당한 처벌을 피해 교회에 숨어들기도 합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순례길에 오른 기사들에 불과하네."
"그렇습니까? 누구를 섬긴답니까? 돈?"
유바스의 기사는 냉소를 흘리며 가볍게 맞받아쳤다. 그는 오히려 주교가 아닌 나와 테르베어를 흘겨보며 칼자루를 깔짝대기 시작했다.
"용병이란 이름의 약탈자들이, 자유기사란 이름의 도적들이 판치는 시기입니다. 서코트 위에 그려진 문장 따위 까짓거 양심과 미래만 버리면 누구나 꾸며낼 수 있지요."
나야 알 바 아니지만,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 테르베어에겐 무척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테르베어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고래고래 외쳤다.
"네 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면서 모욕하는 게냐!"
"누군지 모릅니다. 당신이 누군지 알길 원한다면, 그리고 본인에게 떳떳하다면 순순히 신병을 저희에게 양도하십시오. 당신의 신분 증명은 제 주군께서 헤아리실 일입니다."
울그락불그락 사납게 외치는 테르베어 앞에서도 태연하게 답하는 기사를 보니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보아하니 유바스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으니 일단 취조하겠다, 따라오라는 전술을 쓸 모양이다. 이건 접견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보여줄 명분을 얻기 위한 통보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 통보가 지체높은 귀족을 모욕하는 행위란 거다. 아무리 우리 공국이 힘 없어도 명색이 공왕 가문인데 이건 죽여도 할 말 없다. 유바스가 이를 모를 리 없을 테고 말이다.
심지어 유바스의 보여온 성향상 꼬리를 자르면 잘랐지 보다듬어주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히 제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내 곁에 모인 칼잡이라곤 서텔 그 간잽이 하나 뿐이었는데, 유바스는 대체 뭐라고 이런 기라성같은 인재들이 모여든단 말인가. 습격을 지휘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내게 달려들던 습격대장까지 하필 이때 떠올라 억울함이 배가 됐다.
결국 나는 칼을 뽑아 들려는 테르베어도 막을 겸, 호기심도 해소할 겸 몸을 일으켰다.
"형님,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나르바."
테르베어가 칼 뽑아서 써는 건 다음 일이다. 지금 나는 유바스를 이해할 게 아니라 유바스를 섬기는 자들을 이해해야 한다.
나는 테르베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뒤 유바스의 기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바스가 네 가족들을 그리 챙겨주더냐?"
"저는 어디까지나."
"유바스가 저지른 짓들을 보아라. 그런데도 계약을, 충의를 지키는 이유가 무엇이냐?"
"...."
그 순간, 태연자약하던 유바스 기사의 얼굴 위로 미묘한 표정이 자리잡았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며 솔직하게 답했다.
"제 주군께 흠결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주군이 약탈자들과 범법자들이 감히 넘보지 못할 만큼 강대하고 굳건한 국가를 세우려 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것이 교회의 뜻을 반한다면."
"저는 안정과 평화를 약속하신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일체의 주저도 없이 답하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나는 칼자루 위에 올라간 테르베어의 손 위로 손을 포개며 넌지시 말했다.
"보내주셔야 합니다."
"아무리 네 말이라도... 이것만큼은 안 된다. 어찌 기사가 모욕을 참고 넘기란 소리냐?"
"놈은 죽을 생각으로 왔습니다."
그제서야 테르베어도 움찔거리며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유바스의 기사는 아쉽다는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평생 망부석처럼 굳어있을 기세다. 솔직하게 답해준 그를 위해 이번엔 내가 솔직해질 차례였다.
"유바스는 지금도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유바스 자신이 원한다면 말이다."
"...."
"돌아가라. 귀한 목숨 이딴 일에 막 쓰지 말고. 그리고 고작 주교령 하나 치겠다고 괴이한 수작은 부리지 말라 전해."
당연한 말이지만 접견은 단숨에 파토났다.
그리고 나는 유바스가 내 상상 이상으로 미친 놈이란 걸 알았다.
34. 당신에게 드리는 찬사
사람과 안면을 트는 건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하물며 날 죽이려던 놈들과 말문이 트인 건 정말 긍정적인 신호였다.
가장 커다란 수확은 유바스 휘하 인재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게 됐단 사실이다. 가니스타 주교가 말해준 유바스의 강력한 권세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였다.
그간 보고 듣고 겪어온 이 세상 상식들과 조합하면 얼추 답이 나왔다.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해안선의 약탈자들. 하나로 뭉치지 못한 채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지역귀족들. 서임권을 두고 벌어지는 교회와 세속 권력 간의 대립. 성도 아이데아가 위치한 본토와 동떨어진 탓에 우세를 점했어도 절대적이진 못한 럭스 스텔라 신앙.
이 모든 요인들로 인해 아침녘 제도는 개판이었다. 따지자면 판타지 국룰인 박살난 제국이나 왕국 클리셰보다 칠왕국 시절 영국에 가깝다.
굳이 가깝다고 말하는 건 아침녘 제도의 정세가 더 안 좋아서였다.
세력만 놓고 보면 유바스가 압도적이다. 만일 교회와 쭉 동맹을 이어갔다면 자연스레 왕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유바스는 서임권을 양보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일찍부터 말했다시피 유바스를 지탱해줄 지지세력과 정통성을 모두 상실한 셈이다. 아마 단기간 동안은 별로 체감 못했을 거다. 법적 절차라는 게 당장 어길 땐 좋아보이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괜히 정통성을 따지는 게 아니다. 누가 1등이 되는데 법도 전통도 다 필요없댄다. 그럼 내가 1등하지 뭐하러 고개 숙이고 살겠는가?
뭐 봉신들이 봉신 계약 한 번하면 간이고 쓸개고 내줄 거 같나? 절대 아니다. 충신이 숭앙받고 귀한 대접 받는 까닭은 정말 귀하신 분이라서다.
땅주인한테 땅 임대 받았다는데 땅주인이 죽을 거 같댄다. 그럼 목숨 걸고 도와주는 게 아니라 땅주인 죽을 때까지 기다린 뒤 은근슬쩍 원래 내 땅이다 주장하는 게 사람 심보였다.
나는 이 사실을 순수악의 대전, [판타지 모나크]에서 절절히 느꼈다.
내가 유서깊은 제국의 봉신으로 플레이할 때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강력한 외세에게 침략당해 동쪽 국경을 다 따이면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이 때, 동쪽 국경을 지키던 유저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님들 나라 망할 위기임!!!! 도와주셈!!!!]
당시의 나는 아직 한참 순수했던 초보 시절이라 막연히 우리나라 지켜야지 하는 생각을 품었다. 해서 병사를 소집하려던 찰나였다.
[우리 영지 아닌데?]
[황제가 요구하는 병역 의무 이미 다 이행했는데 뭔 도움임? 이미 도와주고 있잖음?]
[쩝... 나한테 상속권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영지 준다면 생각해볼지도~.]
그렇다. 봉신들은 기본적으로 회사 사원이라 여기면 된다. 정말 애사심 깊은 사원이라면 다소의 손해를 감수하고 회사와 운명을 같이 하겠지만 대다수는 아니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의무는 다 이행하지만 그 이상 하라하면 눈치 보는, 딱 그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서도 명예 따위 챙기지 않는 족속들이라면 더 지독했다.
[우리나라 망한다고!!!!]
동쪽 국경의 유저는 다 같은 운명공동체임을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우리나라가 아니라 황제 나라지~ 내 나라 아님~ 수고혀~.]
[와 근데 나라 망했네 진짜. 슬슬 독립해야 하나?]
[황제 새끼 내 군대 더 가져가고 싶으면 세금 낮추던가 ㅋ]
우리 유저 봉신 연합은 딱 잘라 구분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 자기 영지를 보전할 각이 보이면 나라 망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누구는 아예 나라가 흔들리는 걸 보더니 다른 유저들에게 제안하기까지 했다.
[님들 나라 개판인데 걍 제가 황제함. 쿠데타군 모집 시작합니다. 지금 오시면 관직 하나씩 드림.]
[오오 지금 갑니다.]
[님 저 독립하고 싶은데 가담해도 됨?]
[제가 나라 씹창낼 동안 독립하셈 ㄱ]
물론 이런 명예도 모르는 족속들이 많은 건 아니다. 봉신들이 신의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강조하려는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했다. 이런 놈들은 정통성이 있어도 무시할 놈들이다.
하지만 만일 나라가 충분한 힘, 대표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면 감히 대들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이게 내가 접견에서 알아낸 사실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주교의 집무실에서 최대한 풀어 설명했고.
"과연..."
"나르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거냐?"
이내 고개를 주억거리는 가니스타 주교와 인상부터 팍 찡그리는 테르베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역시 먹물 먹은 종이가 까맣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르베어를 설득하려면 구구절절 풀어서 설명하기보다 한줄요약하는 게 훨씬 나았다.
"유바스가 내부 통제를 위해 주먹을 휘둘러 과시하길 택했단 소리입니다. 럭스 스텔라 신도들을 회유하기보다 권력을 쫓는 지배층을 목적으로 두고요. 강력한 군대를 지닌 우리는 교회의 권위에도 맞설 수 있다. 이걸 알리려는 게 핵심입니다."
어. 말하다 보니 한줄요약이 아닌데. 잠깐 궁리한 나는 이 기나긴 문장을 실전압축시켰다.
"놈들은 주교령을 패서 자신들이 더 강하단 걸 알리고 싶어합니다."
"허어. 그런 거였다니!"
아마 우리 형제를 노리는 것도 목적이긴 할 거다. 하지만 주목적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쪽일 터. 유바스의 권세는 여전히 건재하니 딴 생각하지 말라 광고할 생각이겠지.
나는 이걸 굉장히 낙관적인 조짐이라고 판단했다. 어째서 계획과 실행력이 이토록 차이나는지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힘없는 짐승이 더 사납게 짖고 여유없는 자가 내달리며 나약한 자는 잔인하게 군다.
유바스는 이제 힘을 휘두름으로써 본인들의 빈약한 정통성을 감추려는 중이었다.
게다가 하나 더 있었다. 치밀하고 복잡하게 탄탄히 쌓아올린 계획과 달리 초조감에 쫓겨 무리수를 남발하는 이유 말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탄성을 거듭하는 주교를 노려봤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유바스의 모략이 어딘가 아쉬운 이유는 아마 계획에 가장 중요한 추가 빠져서일 것이다. 따지자면 내 도박같은 계책이 성공한 것도 교회의 조력이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반대도 가능했겠지.
"..."
"음? 공자님, 시선이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됐습니다. 모른 척하실 거면 평생 모른 척 하십시오. 저도 모른 척하고 살 테니까."
"허허허. 아무래도 오해를 산 모양입니다. 언젠가 풀리셨으면 좋겠군요."
서텔 그 간잽이는 끝까지 간만 보다 절여졌지만 교회는 노회한 정치가였다. 한 배를 타야할 땐 화끈하게 탄다. 나는 가니스타 주교의 오묘한 얼굴을 보며 이 사실을 절절히 느꼈다.
그래. 본인들도 한 배 탔다고 억지 부정은 하지 않았으니 봐준다. 이제 내 뒷배기도 하고.
나는 속으로만 툴툴대면서 테르베어를 바라봤다. 마침 테르베어는 자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럼 유바스는 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가?"
"아마 그럴 수 없으리라 여겨서일 겁니다."
"파문을 못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할 수 있다면 진즉에 했겠죠."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진실만 봐도 일목요연하다. 본토야 어떨지 몰라도 아침녘 제도에선 유바스의 영향력이 아슬아슬하게 더 강했다.
당장 유바스는 이세의 유물을 교회 몰래 독단으로 연구했다. 그런데도 공론화는 커녕 축일날 주교가 불참하는 소극적인 대처 정도로 끝났고. 이건 파문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지역 교회들이 이 기세를 노려 교황청에서 완전히 독립할까봐, 유바스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결과 아침녘 제도에서 교황청의 영향력이 축출될 걸 염려해 그 이상 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교황청이 날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건 이 때문이었다. 교황청은 유바스를 대신할 새로운 인물을 원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다.
이제 한 배를 탄 사이인데 굳이 교회의 치부를 들출 순 없었다.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가니스타 주교의 안색을 살폈고.
"테르베어 경, 여기엔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설명하자면 조금 길어지는데."
"음. 괜찮습니다. 교회의 일이라면야."
주교는 내 의사를 눈치채자마자 성호를 그으며 미소를 띄웠다. 바로 학을 떼며 손을 내젓는 테르베어를 사이에 둔 채로 말이다.
***
그날 밤, 가니스타 주교는 성벽 위에서 차디찬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주교는 망토 위에 모래 알갱이처럼 엉킨 서리를 쓸어내며 시선을 옮겼다.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머쓱하게 어깨를 토닥이는 나르바와 달리, 테르베어는 분함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유바스의 군대를 물리게 만들 수단으로 내세운 나르바의 제안이 무척 치욕스러웠기 때문이다.
"형님, 놈들이 무력시위할 명분으로 형님을 내세워 사로잡고자 하니 그대로 당할 순 없습니다. 다행히 놈들은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추격하는 데에 여러 장애물이 기다릴 겁니다."
"설마 이 내가 네 신변을 위협하게 될 줄이야."
"제 걱정은 마십시오. 저는 교황청의 비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나르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여기까지라면, 내 반드시 에덜레드 형님이라도 찾아가마."
주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되려 손윗형제인 테르베어를 다독이는 나르바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한참 어린 나이 탓에 주도적으로 뭘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다섯 공국 가운데 최약체라는 포위스 공국의 자식인 이상 예정된 일이었다.
하물며 일찌감치 안정된 계승 구도로 인해 상속받을 유산은 물론 후계자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천부적인 감각과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도 꾸준한 교육과 조언으로도 함양하기 어려운 덕목을 말이다. 주교는 어깨 망토로 단안경의 렌즈를 닦아내며 고심했다.
'단순히 누군가 괴뢰로 내세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열두 살 소년이 진정으로 척척 해낼 수 있으리라 여기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주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르바에게 그쪽 방면에서 뛰어난 전문가가 붙어 있노라 판단했다.
더군다나 감성의 문제도 있었다. 순진무구해야 할 아이가 수많은 미덕들 아래 감춰진 인세의 음험한 그림자를, 인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치부를 덥썩덥썩 꺼내니 위화감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괴뢰가 아니라면. 진정으로 본인이 지닌 천부적인 감각을 쫓아 확신을 가지고 판단을 하는 거라면. 주교는 뒷말을 삼키며 그 무시무시한 결단력에 찬사를 보낼 준비를 마쳤다.
마침 나르바와 테르베어도 헤어질 준비를 끝낸 뒤였다. 나르바는 여유롭게 뒷짐 지면서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띄웠다.
"먼저 귀환하시지요. 저는 천천히 둘러보고 돌아가겠습니다."
"녀석. 크흠! 알겠다. 이 형도... 할 일을 하러 가마."
동생이 저리 태연하게 구니 테르베어도 더 이상 청승맞게 굴지 못했다. 테르베어는 달아오른 눈시울을 연신 훔쳐대다 냉큼 몸을 돌려 안장 위로 몸을 실었다.
이게 신호가 됐다. 테르베어와 함께 온 다른 기사들도 안장 위로 몸을 싣고서 나르바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자님, 이 이상 모시지 못하는 저희를 용서하십시오."
"차라리 저 하나라도 남는 건 어떻겠습니까?"
개중 몇몇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테르베어와 나르바를 번갈아보며 제안했지만.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형님을 보내는데 경들이 남으면 어떡합니까."
"...공자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르바는 웃는 얼굴로 단칼에 잘라냈다.
그렇게 야음을 틈탄 탈출이 시작됐다. 유바스의 군대가 밀고 들어오기 전에 명분으로 지목당한 테르베어와 기사들이 도망친다. 간단하고 무모한 계획이었다.
이윽고 나르바가 계단을 올라 주교 곁에 왔을 즈음, 성문이 열렸다. 그렇지만 테르베어는 바로 떠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올려 나르바를 한 차례 더 본 뒤에야 비로소 박차를 가했다.
"이럇!"
거친 말발굽 소리가 바닥을 두드렸다.
나르바는 성벽 위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넌지시 말했다.
"생각해보니 포위스 주교는 몰라도 유바스가 절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가 없더군요."
흑요석처럼 매끄러운 눈동자가 이번엔 주교를 향하기 시작했다.
"주교님. 계획을 앞당기시죠. 제 기적심사에 관한 소식을 지금 당장 풀어야겠습니다."
그러자 가니스타 주교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품을 뒤적였다. 잠시 후, 주교의 손에는 말린 과일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나르바는 말린 과일과 주교를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미간을 팍 찡그렸다.
"뭡니까?"
"제 개인적인 찬사입니다. 이 늙은이가 절대 나눠주지 않는 먹거리를 나눠준 것이니 마음껏 자랑하셔도 됩니다."
35. 중세식 고민 상담가
나는 원래 건포도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맛있는 포도를 그냥 먹으면 될 걸 왜 말려먹냐면서 말이다. 특히 건포도가 알알이 박힌 백설기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감이 치밀어올랐다.
어찌나 혐오스러웠던지, 내게 건포도 박힌 백설기란 바퀴벌레 박힌 백설기와 똑같은 말이었다. 아직도 생생하다.
씹으면 찐득한데 상큼함은 커녕 꾸덕꾸덕한 뒷맛이 혀를 문지를 때 등골을 오소소 타고 흐르는 불쾌감.
진짜 줘도 안 먹었다. 만일 이곳이 먹거리 풍부한 현대였다면 쭉 안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한동안 쭉 음미했을 터였다.
"흐아암~. 공자님, 문안 드리러 왔습니다요."
"으어아라."
"엥? 아침부터 뭘 드시고 계십니까?"
내 방에 찾아온 사람은 존이었다. 평소라면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면서 부스스한 느낌으로 들어왔을 녀석인데 이번엔 좀 달랐다. 존은 아침부터 빠릿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오오아."
"건포도? 아니, 공자님! 그런 걸 어디서 나셨습니까?!"
"우아어어."
"누가 줬다고요? 세상에. 누구요? 제가 공자님 몫까지 더해서 냉큼 받아오겠습니다!"
속셈이 훤히 보인다. 나는 우물거리며 쪽쪽 빨아먹던 걸 멈추고 챱챱 씹어대다 목 뒤로 넘겼다.
"넌 내가 옹알이하는데 잘도 알아듣는구나."
"아니, 공자님! 당연히 공자님의 귀한 말씀이신데 제가 귀 딱 열고 들어야죠! 그래서 건포도는 누가 주신 겁니까?"
"일 없다. 내가 받은 게 마지막이다."
가니스타 주교는 내게 말린 과일, 건포도 딸랑 하나 주면서 자랑해도 된다고 말했었다. 아마 존이 달라고 간청해봐야 허허허 웃으며 뺨을 싸갈길 게 훤하다.
존이 뭐 이쁜 애기도 아니고, 머리 빠지다 만 다 큰 사내놈이 눈치없이 칭얼대봐야 폭력만 부를 뿐이다. 나는 존이 한 대라도 덜 맞길 바랐기에 일부러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존은 실망감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모처럼 단맛 좀 느끼나 했더니."
"여기서 탄식하지 말고 가서 포도주나 마시거라."
"어휴. 제가 기사 나리들보다 먼저 어떻게 마십니까. 나리들 마실 때까지 기다려얍죠."
전에 혼쭐낸 게 학습되긴 했나보다. 기사들이 입 대기 전엔 입도 뻥긋 안하겠다며 손사래 치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발전하는 자에게 보답이 있어야 하는 법.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존이 기뻐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괜찮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마. 오늘부턴 내키는 대로 마셔도 될 거다."
"예? 정말입니까?"
"그럼."
햇살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온후하기 그지 없는 아침. 나는 환하게 웃을 존을 기대하며 먼저 웃기로 했다.
"테르베어 형님과 기사들은 철수했거든."
"오오, 마실 사람이 없으니 이제 제가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기대와 달리 존의 얼굴은 시시각각 구겨지기 시작했다.
"공자님, 그거 좋은 소식 아닌 거 같습니다."
"너무 얼굴 구기지 말거라. 좋은 면을 봐야지. 게다가 나쁜 소식도 하나 있다."
"기사님들이 안 계셔서 보호받기 어려워졌다는 겁니까?"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다른 건 몰라도 제 안전과 관련된 부분에선 비상함을 발휘하는 존 다웠다. 마음 같아선 박수 쳐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오답이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담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정답을 공개했다.
"유바스가 날 반드시 죽이거나 제압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만들었다. 하여 유바스는 철수한 테르베어 형님과 동료 기사 분들을 쫓기보다 날 주시하는 데에 힘을 쏟을 것이다."
처음에 존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공국 최강의 기사이신 테르베어 경을 사로잡을 절호의 기회인데 이 때를 놓치겠습니까?"
"존, 테르베어 형님을 그렇게 존경하고 있는 줄 몰랐다."
바퀴벌레도 생명의 위협이 닥쳐왔을 때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다는 소릴 들은 적 있다. 존이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존이 이렇게 말을 잘하는 친구일 줄 몰랐다.
"물론 공자님이 중요하신 분은 맞지만, 아직 테르베어 경을 대신할 만큼은 아니다 이거죠. 테르베어 경이 어떤 분이십니까? 해안선에 밀려오는 약탈자들을 슥삭! 쉬지 않고 내달리면서 온갖 무기를 자유자재로 쓰시는 최강의 기사 아닙니까!"
"유바스 진지에 가서 홍보라도 할 작정이냐?"
무용담을 퍼트리고 다닐 종자들도 이 정도로 열성이진 않을 터였다. 나는 테르베어의 놀라운 무용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 존에게 고마움과 흐뭇함을 느꼈다.
존이 테르베어를 이토록 염려할 줄이야.
안 그래도 숭숭 빠지는 머리털, 이렇게 걱정하다간 금방 사라지고 말 거다. 나는 존의 쓸모없는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안심하거라."
"공자님, 역시 제 말대로겠죠?"
존의 불안한 눈초리를 보니 거듭되는 걱정에 사로잡힌 게 분명했다. 이런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굳건한 자신감과 강력한 확신을 담아 말해야 한다.
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최대한 간결히, 단호하게 답해줬다.
"유바스가 테르베어 형님보다 날 죽이는 데에 열성이 되게끔 아주 중요한 이유를 만들었다. 테르베어 형님은 비교적 무사히 귀환하실 게다."
"아니!!!! 공자님!!!!!"
***
어제, 유바스와 접견을 가진 나는 한 가지 확신을 품었다.
유바스가 목표를 열두 살짜리 소년인 나에서 우리 공국 최강의 기사인 테르베어로 바꿨다고 말이다. 사실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테르베어가 계획에 여러모로 유리하긴 했다.
기사 수도회가 입회를 거부할 정도로 여인의 품을 좋아하는 사람이 테르베어다. 육욕에 약한 만큼 미인계에 금방 넘어갈 테고, 그동안 안아왔을 여인들을 생각하면 사생아가 얼마나 있을지 걱정이 앞설 정도다.
테르베어를 먼저 철수시켜야 한다는 내 주장이 먹힌 건 이런 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한 건 아니었다. 테르베어는 철수해야 한다는 내 주장에 반감을 가지고 그토록 싫어하는 말다툼까지 강행했다.
'나르바, 여인을 안는 건 사내로서 당연한 덕목이다. 어찌 이 형님을 불명예스럽게 여기는 게냐?'
'형님, 만일 미리암과 관련된 혼담이 형님에게 왔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미리암... 확실히 아름다운 여인이었지. 물론 네 자존심을 해친 건 잘못된 일이지만 그녀에게도 가슴아픈 일이었을 거다. 이 형님은 마냥 비난하지 못하겠구나. 나였다면... 사정있을 게 분명한 그녀를 용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윽하고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테르베어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순간, 나와 가니스타 주교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 두 사람은 아마 똑같은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이건 사로잡히는 순간 끝이다.
미인계에 홀라당 넘어간 테르베어가 자기 자식들을 위해 땅 좀 떼어달라는 미래가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외가가 될 유바스가 개입할 경우 계승 구도를 흔들기엔 차고 넘쳤다.
결과적으로 테르베어가 걸어온 말싸움은 내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테르베어가 추격을 피해 혹시 있을지 모를 포위망까지 무사히 돌파할 수 있도록 휘하 기사들을 몽땅 데려가야 한다는 내 의견이 적극 수용된 것이다.
물론 가니스타 주교의 무조건적인 지지도 한 몫했다.
문제가 있다면 유바스의 집요함이었다. 공식적으로 가문에서 축출된 나 하나 잡아 족치겠다고 용병으로 위장해서 한 번, 이교도로 위장해서 두 번. 심지어 수도원 습격까지 강행한 놈들이다.
실행력 하나만큼은 감히 견주기 힘든 놈들이 유바스였다. 유바스는 테르베어가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도망친다 해도 쉽게 놔주지 않을 놈들이었다.
이런 찰거머리 같은 새끼들의 주의를 어찌해야 돌릴 수 있을까.
나는 그 방법을 성흔과 교회에서 찾았다.
교황청은 선조치 후보고로 서임권을 넘긴 날 새로운 장기말로서 택했다. 지역 귀족 출신인데다 성흔까지 지닌 내게 성인 혹은 그에 준하는 권위를 실어줌으로써 지역 교회를 장악하려 한다.
아침녘 제도에서 언급되는 성인이 성 일레니오 한 명 뿐임을 감안하면 이는 무척 파격적인 조치일 것이다. 교황청도 이 사실을 알고 내 기적 심사를 꾀했을 테고 말이다.
이게 핵심이었다.
단순히 가문에서 축출당한 패륜아라면 후순위로 처리해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교황청이 인증한 성인 후보로서 지역 교회를 압박할 권위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어떨까.
집어 삼키려 한 포위스의 핏줄이 성인 후보로 등극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압박이다. 유바스 입장에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지하고 싶어질 터였다. 그렇지만 일레니풋은 엄연히 유바스의 영역 내에 있다.
내게 문제가 생길 경우 모든 의혹이 자신들에게 쏠린다. 안그래도 불화설이 나도는 판국에 성인 후보를 죽였다는 의혹까지 쏠리면 럭스 스텔라 신도들이 등돌릴 것이다.
단 한 가지, 단 하나의 활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간 주교의 집무실 안.
테르베어와 기사들이 떠나 한적해진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가니스타 주교였다. 주교는 단안경의 렌즈를 뽀득뽀득 닦은 뒤 말했다.
"공자님의 뜻대로 기적 심사에 대한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이 유바스의 직할지까지 닿으려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아마 3, 4일은 족히 더 걸릴 테지요. 하지만 최근 대치를 보고 도망치는 난민들을 통해 흘렸으니 지금 주둔 중인 유바스의 군대는 보다 빨리 접할 겁니다."
"그럼 길을 순순히 열어주겠군요. 오히려 호위에 나서줄 테니 가는 길은 안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꽤나 그럴싸한 의견이었는데 정작 듣는 사람들은 아니었나 보다. 잠자코 듣고 있던 존과 눈앞의 가니스타 주교 모두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교는 왼손으로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물론 남쪽의 포구로 갈 때까진 안전하겠지요. 기적 심사를 위해 뱃길을 쓰는 순간부턴 보장 못할 테지만 말입니다."
참 걱정 많으신 분이다. 주교님도 우리 존처럼 걱정에 사로잡히기 직전이었다.
나는 주교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차분한 어조를 꾸며 답했다.
"항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암초에 예상치 못한 풍랑에 기이한 역병이나 풍토병까지."
중간에 손날로 목을 툭툭 치는 퍼포먼스까지 겸사겸사 넣으면서 말이다.
"누군가 갑작스레 죽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공자님, 이 늙은이가 뭐라 답해야겠습니까?"
"첫 대면 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서신 전달속도만 믿고 있겠습니다."
"끄으응...."
교회의 본거지인 성도 아이데아는 아침녘 제도가 아니라 본토에 있다. 배 타고 바다를 건너야 갈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교황청 직속이라는 기적 심사단도 저 바다 건너에 있었다.
"하나 더."
그리고 바다는 예나 지금이나 위험했다.
"가능하면 유바스가 지니고 있다는 함대의 숫자를 계속 주시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주아주 변덕스럽다는 점에서 특히 더 그랬다.
***
유바스의 군대는 강하다.
다른 제후들의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리 한낱 징집병조차 사슬갑옷을 입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풍요로운 물산과 무수한 전리품을 얻게 해준 연승가도가 강군을 일궈냈노라 여겼다.
그렇지만 유바스의 군대가 진정으로 강한 까닭은 솔선수범에 있었다.
유바스의 모든 혈족은 생득권을 인정받지 못한다. 모두들 가주가 제시하는 엄격한 기준에 맞춰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고, 때로는 귀족답지 않은 가혹한 환경에 던져지기도 했다.
그나마 계승권을 지닌 직계 혈통들은 안전한 편이다. 유바스는 포로로 잡힌 계승권 바깥의 혈족들을 위해 몸값을 대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유바스의 혈족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는 방법은 오직 군역 뿐이었다.
이처럼 가혹한 가풍은 유바스의 혈족들이 기사와 종자, 그리고 상비군 휘하의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분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빛나는 전훈을 세우거나 꾸준한 충심을 증명한 자가 군대를 이끈다. 혈족 가운데 그런 자가 없다면 아무리 한미한 출신이라 해도 기꺼이 기용한다.
덕분에 유바스는 항상 진취적이고 열성적인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출난 영웅은 없어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이들이 모여 강군을 일궈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양면이 존재한다. 유바스가 일궈낸 강군이란 신화 이면에는 그만큼 짙고 무거운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기적 심사?"
유바스의 군영 내에서도 가장 커다란 천막 안.
상석에 앉아 다리를 배배 꼰 채 휘파람 불던 사내가 돌연 호기심을 드러냈다. 소식을 가져온 전령은 감히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해 고개를 숙인 그대로 답했다.
"성에서 몰래 빠져나오던 무리들이 한 말입니다. 주교령에 성흔을 가진 소년이 있어 교황청이 확인할 거라고..."
그 순간, 사내 옆에 시립해있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기사는 오래 굶은 사람처럼 삐쩍 말라있어 광대뼈가 유달리 도드라지게 보였다.
그는 특유의 형형한 안광을 가리고자 눈을 감고 있었다.
"제가 말씀드린 포위스의 삼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 그... 내 매제될 뻔한 애."
"나이답지 않은 면모를 가졌습니다. 저희 가문에 가진 반감까지 고려하면 설령 성흔이 없더라도 교황청이 괴뢰로 내세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과연. 성흔이 있든 없든 교황청이 내세울 놈이다."
상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제서야 사내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났다.
어깨까지 기른 백금빛 머리칼에 고양이처럼 어두운 곳에서 희번득거리는 눈동자. 평범한 이가 마주치는 순간 얼어붙을 정도로 맹수와 닮은 동공이 처음으로 활짝 열렸다.
"아버지께 보고해. 단, 공식적인 방법이 아니라 눈에 덜 띄는 쪽으로."
"..."
"그리고 수도에 정박해있는 군함들. 거기 선장들 중에 아는 사람 하나 있나?"
"실패의 책임을 홀로 짊어지실 수도 있습니다."
기사는 낮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리스크를 경고해왔다. 하지만 맹수의 동공을 지닌 사내에겐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성공의 대가도 홀로 차지한다."
기사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발언은 유바스라는 가문 전체를 관통하는 말이었다.
기사를 침묵시킨 사내는 심상찮은 분위기에 넙죽 엎드린 전령을 내려다보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저, 저는."
"여기서 물러나겠느냐, 아니면."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범인의 두 배는 족히 될 법한 높이의 키였다. 거인이라 불려도 흠결없을 위세가 내딛는 발걸음에 담겼다.
전령은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를 더욱 깊숙히 쳐박았다. 하지만 사내는 외면하거나 도망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령의 투구가 벗겨졌고, 사내는 전령의 머리칼을 움켜잡고서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컥, 케엑."
전령은 고통과 공포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눈앞을 바라봤다. 검을 문 사자가 음각된 인장 반지. 그 너머에 사냥감을 향해 이빨 박아넣기만을 기다리는 짐승의 눈동자가 있었다.
"지금 내 반지에 입을 맞추겠느냐?"
카르달 오른 유바스.
어린 사자의, 짐승의 이름이었다.
36. 거짓말쟁이
찌를 던졌으면 잠길 때까지 기다려야 물고기를 낚을 수 있다.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초등학생인 날 그 지루한 낚시터에 끌고 가놓고 내가 도망치려 할 때마다 꿀밤 날리시며 했던 말이라 생생히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매운탕을 싫어하는 이유기도 하다. 주면 잘 먹긴 하는데, 보통 아버지가 매운탕 함 끓여묵을까? 하면 낚시터 가자는 이야기인 지라 절대 안 먹게 됐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아버지가 놀기 좋아하는 초등학생이 아닌, 적적한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내를 데려갔다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내가 사내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셨고 그 결과 낚시를 극혐하는 아들을 얻었다.
모략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고 사람을 가만히 놔둬야 할 때가 있다.
모든 계책의 핵심은 의심이었다. 의심을 지필 땐 입김 후후 불어가며 타오르게 하다가 불붙었다 싶으면 간간히 땔감만 던져주면서 지켜봐야 하는 법이다.
이것이 내가 섣불리 움직이는 대신 주교령에 틀어박힌 이유였다. 당연히 모처럼 얻은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도 않았다.
내가 머무르는 이곳, 일레니풋 주교령은 명색이 교황청 직할이었다.
이 말은 저번에 있던 수도원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보관 중이란 소리다. 오직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책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근래 들어 부쩍 호기심이 늘어난 내가 주교령의 장서 보관고를 들쑤시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주교령엔 금덩이 하나를 줘도 사지 못할 귀중한 보물들이 책꽂이에 다닥다닥 꽂혀 있었다.
"커흡, 켁. 공자님, 저는 책이랑 안 맞는 거 같습니다요. 이 꿉꿉한 책 냄새 지긋지긋합니다."
"천금보다 귀한 물건을 만지면서 불만이 많구나."
"금... 그러고 보니 금 때문에 제가 이곳까지 온 거였슴다."
툴툴대던 존은 어느샌가 어둑한 벽을 바라보면서 감상에 잠겨들었다. 평범한 시종에 불과하던 존의 인생을 뒤바꾼 그 순간을 추억하는 모양이다.
"나중에 술집에 가거든 마음껏 자랑하거라. 너처럼 다양한 경험을 한 이가 얼마나 있겠느냐?"
"공자님을 처음 뵌 곳이 감옥이었습니다... 이곳처럼 칙칙하고 어둡고 꾸리꾸리한 냄새가 감돌던 곳..."
"쯧."
표정이 풀어진 게 한동안 저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존의 탄식을 뒤로 한 채 책상 위에 쌓아올린 장서들을 바라봤다. 장서라 해서 다 제본된 형태는 아니었다.
오래된 연식을 증명하듯 양피지 두루마리나 부드러워질 때까지 삶아낸 나무 껍질 따위도 섞여 있었다. 잘못 다뤘다간 그대로 바스러질지 모른다. 책을 만지는 내 손길이 조심스러운 이유였다.
나는 고대의 장서를 천천히 펼친 후, 주교가 따로 챙겨준 사전을 그 옆에 뒀다. 딱딱한 선과 사각형으로 이뤄진 글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외우자 나온 제목은.
"인간 노예를 향하는 질척하고 음흉한 눈길 ~엘프 여왕의 숨길 수 없는 음탕한 욕망?"
이 시발... 이게 뭐야.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책을 찢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주교가 건네준 사전 귀퉁이에 적힌 주석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석을 읽고서야 책 제목이 어째서 이런지 알 수 있었다.
"...과연."
이세의 인간들은 책을 읽고 쓰는 행위가 거의 불가능했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강력한 검열과 통제 하에 진행됐으며, 이로 인해 알고 있는 지식을 주고 받는 것조차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이세의 인간들은 목숨을 걸고 가진 지식을 나눴다. 걸리는 순간 인신공양의 제물로 끌려갈 만큼 불경하고 모독적인 제목으로 내용을 감추면서 말이다.
이것이 강렬한 제목들이 양산된 까닭이었다. 인간의 저술들은 읽는 것 자체가 이세의 지배층을 향한 모독이라며 금서로 지정됐다. 하지만 덕분에 이 추잡한 제목들을 내세워 설사 체포된다 해도 내용이 읽히는 걸 막을 수 있었다.
당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피로 얼룩질 제목 아래 이세의 종말을, 인세의 도래를 기원하며 알고 있는 모든 걸 적어내려간 것이다.
맥락을 알게 된 나는 어느덧 무거워진 마음을 느꼈다.
제목을 보고 그저 추잡한 물건이라고만 여겼는데 그 실상은 비장한 각오와 처절한 기원에 있었으니까. 기약 없는 미래를 희망하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당대의 인간들을 향한 존경심이 알게 모르게 솟아났다.
나는 숙연한 심정으로 당대의 기록을 읽고자 책장을 넘겼고-.
[엘프 여왕은 인간 노예를 향해 채찍질하며 한 편으론 형용하기 어려운 욕망을 품었다. 과연 저 채찍질이 자신을 향하면 어떨지 생각하며.]
-모든 기록이 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다행히 장서들이 죄다 저 모양인 건 아니었다.
나는 사본의 사본으로 전해진 이세 시절의 기록들을 훑으며 상당히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럭스 스텔라가 어떤 신인지,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또 그가 언제 어떻게 강림했는지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교회가 어째서 럭스 스텔라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서술하는지도 알았다. 어디 교황청도 아니고 주교령에 보관된 장서들을 고작 며칠 봤을 뿐인데 말이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개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부분이 있었다.
[엘프들이 신들의 공물 요구에 지쳐 새로운 신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자신들의 섬김을 받기에 충분한 고결하고 강대한 신을.]
[주인들이 새로운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동포들이 끌려간다. 새로운 신을 위한 의식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서로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주인들은 새로운 신을 모실지 말지를 놓고 싸우는 중이다.]
제대로 된 언급은 없지만 정황상 저 새로운 신은 높은 확률로 럭스 스텔라다. 하지만 럭스 스텔라의 특징이 하나도 언급되지 않아 마냥 확신할 순 없었다.
이후로 별 다른 부분 없이 이세의 종족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유의미한 기록은 정말 가뭄에 콩나물 나듯이 나왔다. 나와도 고작 한두 줄에 불과할 뿐이지만 추려서 정리하자면 이랬다.
[별빛은 주인에게도, 우리에게도 답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한참 찾아 나서니 얼추 가닥이 보였다. 이 [새로운 신]은 끝끝내 자신의 정체와 진명을 밝히지 않았다.
이세의 종족들에게도, 그리고 그 아래서 핍박받으며 신의 총애를 갈망하던 인간들에게도 말이다. 정황상 새로운 신이 럭스 스텔라인 건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럭스 스텔라란 이름조차 당시 멋대로 붙여진 이름이 와전되고 뒤틀리며 굳어진 대명사일 뿐이다. 이세의 종족들은 이름도 모르는 강대한 신의 총애를 얻고자 무수히 많은 제물을 바쳤지만 결과는 무시로 돌아왔다.
결국 새로운 신은 이세의 종족들 사이서 가파르게 잊혀지기 시작했다. 단 하나, 어떤 신의 총애도 받지 못한 인간들을 제외하면. 그럼에도 새로운 신은 오랫동안 응답하지 않은 모양이다.
기록의 추정연대가 최근에 가까워질수록 보다 절박하고 처절한 묘사들이 늘어났다.
[별빛이시여,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저희를 부디 굽어 살피옵소서.]
[옆 도시에서 새로운 신을 향한 기원이 발각됐다. 주인들은 기원하던 동포들을 본보기로 삼았다. 우리의 영육이 그들의 신이 아닌, 새로운 신을 향한 번제가 되기를.]
[우리의 영육으로는 새로운 신의 마음을 얻을 수 없는가?]
그리고 이 모든 기록 끝에 후렴처럼 적힌 경구가 하나 있었다. 아마 나중에 첨삭됐을 게 확실한 경구였다.
[나약한 자들이여, 별빛을 찬양하라. 우리에게 제물이 아닌 삶을 원하셨도다.]
나는 기록마다 남겨진 청십자성을 바라보다 손등 위로 시선을 옮겼다. 십자성 모양으로 죽죽 째진 상처엔 핏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흘러내리지도 않고 딱지로 굳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본인 이름도 아직 밝히지 않은 겁니까?"
기록대로라면... 럭스 스텔라는 어지간히도 세상에 개입하기 싫어한다.
인신공양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본인이 직접 나서서 다 뒤엎는 건 극도로 꺼려했다. 오히려 인간이 럭스 스텔라의 선택을 받은 게 몹시 이례적인 경우다.
요약하자면, 인간에게 우호적인 건 맞지만 인간이 필요하진 않은 신.
이 사실을 알고나니 서약과 관련된 부분도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럭스 스텔라는 인간이 자신을 믿든 말든 별로 상관없다. 그럼 서약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정직, 절제, 근면, 구전, 성전.
겉으로 대충 보면 잘 지키고 살라는 계율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르다. 다섯 서약은 개인의 인성을 함양하기보다 마치...
"인세와 인간 문명을 수호하고 보전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지요."
...가니스타 주교의 말대로였다.
나는 보고 있던 기록들을 옆으로 치우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교는 몹시 기꺼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럭스 스텔라는 대체 왜 인간을 택한 겁니까? 진짜 이름은 뭐고요?"
"허허허허."
꿉꿉한 고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서고 안. 고요하기 그지 없던 곳에 가니스타 주교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주교는 먼지 묻은 단안경 너머로 날 바라보며 한참을 웃어댔다.
"공부하기 싫으시다더니 알아서 잘하십니다."
"..."
"물론 당연한 의문입니다. 궁금하지요. 럭스 스텔라께서 무수한 이들 가운데 인간을 택하신 이유. 그 분의 진정한 이름과 정체, 그리고 그 분을 믿는 자에게 내려지는 가호와 기적들..."
이 기나긴 서론의 끝은.
"그건 공자님이 주교가 되신 다음에 알 수 있습니다."
흡사 대학교 들어가면 놀 수 있어~ 외치던 부모님의 말씀과 닮아 있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당한 짓이다. 나는 냉소적인 반응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주교 되는 데에 공부 필요없다더니."
"성흔이 있으면 주교는 그냥 한다, 맞습니다. 성흔이 있다고 주교직 수행도 그냥 된다, 아닙니다. 되는 것과 하는 것엔 차이가 있습니다."
"어휴."
존은 말하는 대로 이뤄져서 문제고 주교는 말하는 족족 지랄맞아서 문제다. 나는 주교의 말버릇에 신경 쓰느니 흘려보내기로 다짐했다. 무의미한 말싸움 대신 본론을 짚으면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장서고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공자님께서 알아서 공부하신다기에 기특해서 찾아왔습니다. 마침 공자님의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지난 2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시는 사이, 준비하신 일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 말씀은..."
"예."
주교는 웃음을 지우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봤다.
"기적 심사하러 움직이실 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