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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 6

***

테르베어와 기사들이 야음을 틈타 탈출한지 2주가 지났다.

그동안 가니스타 주교는 그들이 이미 도망쳤다 말했지만, 유바스의 군대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함께 대치를 이어나갔다. 주교가 제대로 공조하지 않는다며 대놓고 의심한 셈이다.

이는 교회와 유바스 간의 사이를 더욱 갈라놓는 행위였다. 대국적으로 봤을 땐 언사라도 자중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 일레니풋에 당도한 군대를 이끄는 자는 카르달 오른 유바스.

가문이 처한 입지보다 자신의 영달이 더 중요한 유바스의 핏줄 중 하나였다.

카르달은 나날이 압박하는 수위를 올렸다.

병사들을 성벽 앞에서 사열하는가 하면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찾아왔는지 조목조목 읊으며 용의자를 내놓으라는 선포도 거듭했다. 투박한 방법이지만, 이 노력은 조금씩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카르달은 때때로 몇몇 호위 병력을 대동하고 말 위에 올라탄 채 주교령의 성벽 외곽을 돌아다니며 짐승같은 눈동자를 번득이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그는 주교령의 병사들이 안광에 움츠러들 때마다 조소를 흘렸다.

"장비 수준은 괜찮아도 태세는 우리 징집병들보다 저열해. 유바스의 보호가 아니었다면 살아남지도 못했을 놈들이 감히 반항하다니."

그리고 성벽 외곽을 한 차례 돌고 온 카르달에게 전령이 다가왔다. 전령은 식은 땀 한 줄기 흘리면서 카르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각하, 주교령이 보호 중인 포위스의 삼남이 곧 기적 심사를 받고자 움직일 거란 첩보입니다."

"오."

전령이 보고하면서 땀 한 방울 흘린 순간, 자그마한 눈송이 하나가 카르달의 뺨에 닿았다. 카르달은 삽시간에 녹아내린 눈송이의 흔적을 만지작대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겨울 바다는 위험할 텐데."

37. 네가 와라



뱃사람들은 항상 열정 넘치고 모험심 강하게 그려진다.

어딜 가더라도, 어느 시대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바다가 위험천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잔잔한 바다라 해도 눈 깜짝할 새에 거친 풍랑을 일으킬 수 있었다.

조그마한 파도 한 번에도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도망칠 곳도 없이 오직 제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자들이 뱃사람이다. 그렇지만 바다에서 위험한 존재가 바다 그 자체만은 아니었다.

차가운 바람이 거칠게 두드리는 해수면. 그 위를 힘겹게 저으며 나아가는 노선이 하나 있었다. 노선에 탄 사람들 모두 복잡한 해안선 사이를 조심스레 나아가느라 여념없었다.

다만 너무 분주히 움직였던 탓일까. 이 불행한 선원들은 절벽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시선들을 눈치채지 못했다.

"배가 떠나고 있습니다."

광대뼈가 유독 도드라진 기사가 입을 열었다. 떠나가는 노선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그러자 유달리 존재감 강한 발소리 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닿은 백금발에 짐승처럼 쭉 째진 눈동자. 카르달 오른 유바스였다.

카르달은 따라나서는 호위들을 손짓 한 번으로 제지한 다음, 고개를 숙이며 노선의 갑판 위를 살폈다. 대다수의 경우라면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 소용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달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쿨루스, 콘스펙토르 오쿨루스. 바친 자에게 총애를."

짐승같은 눈동자가 샛노랗게, 영롱하게 반짝인다. 카르달은 그 상태로 떠나가는 노선을 한참동안 노려봤다.

잠시 후, 카르달은 피로 섞인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이라면."

"성흔 보유자를 숨기려는 얄팍한 수다. 효시를 쏴서 선장에게 신호를 보내라. 인근 해역은 겨울이 되면 조류가 본토 반대쪽으로 흐르는 탓에 중간중간 기항해야 할 터."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기사는 눈살을 찡그리며 부동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잠자코 물러설 카르달이, 유바스의 혈족이 아니었다.

"이번 일에 가담한 선장이 똑똑한 친구라면 제도와 본토 양쪽에서 적당히 멀어졌을 때를 노리겠지."

"..."

"나 참. 왜 그리 침울하게 구는 거냐?"

카르달은 묵묵히 고개 숙인 기사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해적의 소행이다. 바다는 원래 위험한 곳이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르달은 안장 위에 몸을 실었다. 호위하던 종자들과 함께. 단 한 사람, 배를 먼저 바라본 기사만은 바닷 바람을 쐬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카르달은 한숨을 푹 내쉬며 타이르기 시작했다.

"어리다고, 늙었다고, 여자라고, 힘없다고 연민하지 말아. 우리는 전쟁을 하고 있다고."

"각하."

"전쟁에 면죄부 같은 건 없다."

그 말까지 듣고서야 기사는 방황을 끝냈다. 기사는 내심 깨달았다.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아야 하는 사람은 있었다.

***

뭐든지 다 부족한 느낌의 중세틱 이세계. 이곳에서 유달리 중요한 물건이 하나 있다.

종교적 의미를 지닌 성유물이나 먹거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보다 실용적이고 훨씬 다양한 곳에서 쓰이는 물건을 위한 빌드업이었다. 이세계에서도 중요한 물건.

바로 지도였다.

가니스타 주교는 가죽을 덧씌운 두루마리를 책상 위에 탁 펼치며 하나하나 짚기 시작했다. 주변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표기된 지도란 게 이렇다.

지도는 아무리 충직한 시종이라 해도 감히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아침녘 제도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거주하는 세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공국 중 네 공국이 위치한 곳이 바로 제도의 남서쪽, 가장 커다란 크기를 지닌 해조각 섬입니다."

사람들은 섬의 크기를 기준 삼아 각자 다른 이름을 붙여줬다.

사실상 제도의 중심지인 이곳은 해조각, 다섯 공국의 영향력이 짙게 드리워진 곳은 달조각, 마지막으로 교회의 영향력이 가장 미진한 곳은 별조각이라 불렀다.

나머지 자잘자잘한 섬들은 별부스러기 군도로 대충 한데 묶었고 말이다.

"여기서 저희가 눈여겨볼 곳은 바로 해조각 섬, 그 중에서도 본토와 거리가 짧은 곳들입니다."

주교의 손가락을 따라 지도를 살펴본 나는 금방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표기된 도시들을 보니 모두 공통점이 있군요. 본토와 가깝다."

아침녘 제도의 도시들은 대부분 남서쪽의 해안선을 따라 발달해 있었다. 물론 모든 도시가 남서쪽에 있다는 소린 아니다. 커다란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도시들도 몇 군데 보이긴 했다.

문제는 이 알토란 같은 땅들 대부분이 유바스의 영역이란 데에 있었다. 이 몸이 나고 자란 포위스 공국은 유바스의 권세에 밀려 서쪽에 찌그러져 있었고.

주교는 내 근심어린 표정을 읽은 듯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녘 제도는 섬이라는 특징과 산재한 이교도 잔당 탓에 군사적인 지원을 굉장히 늦게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과거 인간 왕국의 유산을 상당히 상실한 결과, 성도를 위시한 본토의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요."

"인간 왕국의 유산?"

나는 무심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침녘 제도에서 럭스 스텔라 신앙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한 게 500년 전이다. 그리고 몸주인이 기억하기로 이 땅에 왕국이 있던 적은 없었다.

내 지적을 들은 주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지도의 빈 부분, 별 다른 표기가 없는 동쪽 부분들을 가리켰다.

"1208년 전, 럭스 스텔라께서 응답하시면서 세상 곳곳에서 저희 인간들의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럭스 스텔라께서 최초로 응답하신 곳이 지금의 성도 아이데아. 이세의 지배층들은 성도를 제압하고자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음."

"그 틈을 타 럭스 스텔라의 빛이 닿지 못한 곳들에서도 영웅적인 몇몇 인간들이 봉기를 이끌었습니다. 아직 럭스 스텔라를 모르던 당대 사람들은 지도자를 신격화하곤 했지요. 물론 교회도 나중에 그들을 성인으로 추존함으로써 지역 신앙을 포용했습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항상 아니꼬운 웃음을 흘리던 주교가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아침녘 제도는 유일한 예외입니다. 럭스 스텔라의 빛이 닿기 전에 인간 왕국이 존재한 건 분명하지만... 600년 전, 아침녘 제도의 왕국은 잔존한 이교도와 대해 너머 이교도들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로요."

여기까지 듣게 되니 모순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세의 종족들에 맞서 봉기를 이끈 지도자들이 오늘날의 성인이라고 치자.

불행히도 아침녘 제도에 존재하던 인간 왕국은 교회가 오기 전에 멸망해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 아침녘 제도에는 지역 성인인 성 일레니오가 존재한다.

나는 이런 모순이 어째서 생겼는지 궁금했다.

"성 일레니오는 그럼 뭡니까? 그는 봉기를 이끈 지도자가 아닐 텐데요."

"허허. 성 일레니오께선 인세의 악마들이 자리잡았던 당대에 멸망한 왕국의 유민들을 이끌던 분이십니다."

경전에 따르면 성 일레니오는 럭스 스텔라의 계시를 받아 유민들을 이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세의 옛 신들을 섬기길 거부한 대가로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성 일레니오는 유민들을 무사히 이곳까지 이끌었고, 덕분에 때마침 상륙한 본토의 원정대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 순간 성 일레니오는 자신의 사명이 다했음을 알고 숨을 거뒀다고 한다.

성 일레니오가 유민들을 이끌고 도착한 마지막 행선지이자 숨을 거둔 곳. 이곳이 일레니풋이라 이름 붙여진 계기였다.

참 종교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읽어내야 할 건 성 일레니오의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다른 부분에 있었다. 바로 본토의 원정대가 상륙했다는 대목이다. 나는 지도 위에 표기된 일레니풋을 바라보며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찾아냈다.

"일레니풋은 상륙 거점으로써 뛰어난 곳이군요. 만에 위치해 거친 풍랑에도 배를 보전하기 쉽고, 주변에 강도 있어 식수 공급도 원활해 보입니다. 적당한 방어시설을 갖춘다면 오래 버틸 수 있을 테고요."

단순 최단거리만 따지면 더 나은 입지를 지닌 도시가 있다. 하지만 일레니풋은 본토와 가까운 남서쪽에 위치한 데다 늪지대도 아니고, 탄탄한 지면에 깨끗한 담수와 만이라는 입지까지 갖춘 천혜의 요충지였다.

교회와 협력하며 꿀 빨던 유바스조차 쉽게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유바스와 교회 간의 서임권 갈등이 어떻게 촉발됐는지 얼추 알 수 있었다. 여러 복잡한 요인들 가운데엔 일레니풋 주교령이 지닌 전략적 가치도 있을 것이다.

유바스가 진실로 독립적이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기 원한다면... 일레니풋은 교황청에게 절대 줄 수 없는 곳이었다.

"본체는 사실상 남쪽에 위치한 포구고 주교좌 본당이 위치한 이곳은 육상에서 밀려오는 세속의 병마를 막기 위한 전진요새."

"오오."

"어쩐지 유바스가 이를 바득바득 간다 싶었습니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내가 유바스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쬐끔 이해되기 시작했다. 교황청도 완전 핑신이 아니라 나름 보험으로 일레니풋을 꽈악 움켜쥔 모양인데, 그게 유바스 입장에선 언제든지 본토의 제후들이 개입할 여지처럼 보였을 것이다.

나는 너무 자극해서 분열을 초래한 게 아닌가, 하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허허허... 공자님, 결국 일레니풋을 넘겨줬다면 어찌 됐을런지요. 교황청은 정말 아무 것도 못하고 유바스의 주구로 전락했을 겁니다."

"으으음."

"당장 유바스를 보십시오. 세속의 군주들은 당장의 이익 때문에 언제든지 배교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하께서 서임권을 회수하려는 건 단순한 권력욕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럭스 스텔라만을 섬기는 성직 제후들이, 세속의 이해와 무관한 불가침의 영역에 남아 가장 중요한 요충지들을 지탱해야 비로소 인세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이 터진 지금 돌이켜보면 일레니풋을 움켜잡는단 판단이 옳긴 했다. 배신당했을 때 훨씬 치명적인 쪽이 교황청인 이상 최소한의 보험은 들어놓는 게 맞았다.

교황청 입장을 대변하는 가니스타 주교의 말이 마냥 틀린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유바스는 배교했고, 다른 군주들도 배교하지 말란 보장이 없다. 교황청이 볼 땐 성흔을 지닌 성직 제후들만이 배교의 위협에서 안전한 것이다.

아마 이게 인세의 수호를 내세우는 교황청과 강력한 국가 건설을 희망한 유바스가 충돌한 이유겠지.

나는 이 모든 걸 종합한 뒤, 슬쩍 고개를 들어 주교를 바라봤다.

"어쨌든 일레니풋이 종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교회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곳이란 건 알았습니다."

"역시 공자님다우십니다. 방금 전엔 절로 감탄했습니다."

"그럼."

"그럼...?"

대충 넘어가려면 섭하지. 나는 양손을 마주치고 삭삭 비비며 씨익 웃었다.

"이 뜻깊은 자리에 교황청 직속 기적 심사단이 와주는 것도 가능하겠지요?



38. 혼자 하지 말라고



세월의 야속함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내가 지나간 세월을 느낀 건 덜컹대는 지하철 안에서였다. 좌석에 앉아 시들시들한 콩나물처럼 고개를 꾸벅이고 있다가 문득 깨닫고 만 것이다. 어렸을 적의 나는 시꺼먼 지하 풍경이라도 보고 싶어 창문을 바라봤단 사실을 말이다.

그때의 여유로움과 감성을 되찾고 싶어 게임을 시작했던 건데, 어느 순간 계기마저 잊은 모양이다.

여유는 커녕 누가 죽이려고 쫓아오는 것마냥 효율과 확장에만 눈이 돌아가 급급하던 나날이었다. 막상 힐링하겠단 취지는 이루지도 못한 채 골머리 끙끙 앓으며 누굴 죽여야 하나 머리 싸매기 일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할 경험을 겪고 있으면서 주변을 너무 둘러보지 않았다. 느끼는 게 여러모로 많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시선을 앞이 아닌 옆으로 돌렸다.

일레니풋 주교령에 속한 평야지대를 향해서 말이다.

일레니풋의 평야지대는 완만한 둔덕이 둘러싸고 있어 비교적 트인 느낌을 줬다. 산에 둘러싸인 모 나라보다야 훨씬 낫다. 평야는 사람의 손길이 덜 탄 자연 풍경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동화 속 마을을 연상시켰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햇살은 청명하게 내려와 흔들리는 이삭들을 비췄다.

한가운데선 커다란 강줄기가 평야를 가로질러 흘렀는데, 강변을 따라 버드나무와 버즘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너머로 보이는 강물은 깨끗하고 투명해 바닥의 모래와 자갈들, 작은 돌들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또 초록빛 잡초들과 야생화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어 수수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기도 했다.

물론 농부들 입장에선 다 죽일 놈들일 터였다. 우거진 자연 속에는 낫과 쟁기를 들고 시름 중인 농부들에겐 원수같을 테지.

따지자면 이 평야지대는 사람의 손길이 더 많이 닿은 곳이었다.

꼬리로 엉덩이 툭툭 치며 꾸역꾸역 풀 뜯어먹는 젖소들, 밭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쟁기로 땅을 뒤엎다 허리를 짚는 사내,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며 떨어진 열매를 줏어다니는 아낙네들.

참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광경들이었다.

"공자님, 슬슬 마차 다시 타셔야할 거 같습니다요."

두 발로 걸으면서 계속 만끽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항상 웃기거나 한심하기만 하던 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차갑고 예리하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냥 말 타고 쭉 가면 안 되겠느냐?"

"바꿔탈 말이 없답니다. 말도 쉬엄쉬엄 가야 한다던데요."

내가 이 중세 비스무리한 세상을 살면서 가장 충격받은 사실이 하나 있다. 말은 생각보다 지구력이 약하다. 정확히는 품종과 혈통에 따라 성능 차이가 심각하게 난다.

당연히 비싸고 좋은 말은 빠르고 오래 가지만 대다수 말들은 오래 달리지 못했다. 사람을 등에 얹고 터벅터벅 걷는 것조차 지치기 일쑤라 못해도 2교대로 돌려야 한댄다.

결국 한 사람 옮기겠다고 말을 2교대로 돌리느니 그냥 말 두 필로 여럿이 탈 수 있는 마차 끄는 게 훨씬 경제적이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울 거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일까?

답은 이 세상의 마차가 몹시 저급한 수준이란 데에 있었다. 삐그덕대고 덜컹대는데 심지어 포장도로까지 없다. 억지로 참아보려 해도 위장에서 만들어진 칵테일이 웩웩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나는 이 끔찍한 도로환경에 불평불만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뭔 놈의 마차가 그리 흔들리느냐. 지진이 나도 그보단 얌전할 게다."

"공자님. 걷느라고 발바닥에 물집 잡힌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하시면 괭이질 당하십니다."

존이 그새 깐죽거림을 못 참고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길래 한 대 패려다 말았다.

왜 하류층 사람들이 상류층 사람들을 못 죽여서 안달났는지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차타고 가는 것조차 멀미나서 말타고 다니면 안 되냐 묻는데, 대다수 사람들은 도보 말고 방법이 없었다.

맨날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본 나는 마차 타는 것도 엉덩이 아프다며 싫어하는 금수저 개후레자식인 셈이다.

하지만 나도 억울하긴 매한가지였다.

중세든 중세틱 이세계든 미개하고 구린 걸 나더러 어쩌라고? 중세에서 수저 자랑해봐야 포장도로 씽씽 달리던 버스에 5분 간격으로 역에 도착하던 전철 타고 다닌 현대인 입장에선 다 같은 놈들이었다.

나는 어디 하소연도 못한 채 한숨만 푹푹 쉬다가 몸을 일으켰다.

"딱 하루만 타면 돼서 탄다. 딱 하루만 버티면 돼서."

"어휴. 전 그냥 공자님이 평생 마차에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자님이 이렇게 차분하신 분이란 걸 마차 덕분에 알았습니다요."

그리고 촉새처럼 나불대는 존이 느껴야 할 건 말의 무게였다.

잠시 후, 마차 위에 올랐을 때 존은 눈물 찔끔 흘리면서 퉁퉁 부어오른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존을 본 주교는 어깨 망토를 여미며 눈썹을 치켜떴다.

"저 친구는 벌침에 쏘였나 봅니다."

"제 혀에 제가 당한 것이지요. 그보다 주교님, 굳이 제가 포구까지 가야 합니까?"

그랬다. 나는 굳이 기적 심사하겠다고 바다를 건널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 성흔이 발현된 사실을 공표해 권위를 실어주겠다는 교회의 판단이 싫은 게 아니다. 바다란 곳이 워낙 변수가 많아 계획이 어그러지기 쉬워서였다.

대한민국의 자랑, 백전백승의 이순신 제독님처럼 조류에 주변 해안선 일대를 달달 외운 정도가 아니라면 함부로 도전해선 안 된다. 더군다나 21세기 현대에서도 해적이란 게 존재하는데 이 세상은 어떨까?

굳이 해적이 아니라도 문제는 많았다. 항해, 특히 옛날식 항해에 낭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다면 정신차려야 한다.

미비한 통신 기술로 육지와는 소식 불통, 빈약하고 저열한 식단에 인생 막장까지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배에 오른 선원들이 일궈내는 그들만의 닫힌 사회가 선상 생활이다.

귀한 식수로 몸을 씻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벌레가 파고든 건빵도 고기라 생각하며 눈 질끈 감고 먹어야 했다. 이런 생활을 버티는 게 상남자라면 그냥 씹게이하고 만다.

지금 마차 타는 것도 버겁고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가혹하고 혹독한 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낭만도 내가 수용할 수 있어야 낭만이지, 강제되는 순간 부조리에 불과하다.

이것이 내가 일레니풋이 지닌 역사적 종교적 의미를 달달 외우며 교황청에 특례를 요구한 배경이었다.

다행히 교황청은 사안의 중대함에 겸사겸사 끼워넣은 유바스의 위협까지 심대히 고심한 결과 특례를 허락해줬다. 딱 한 가지 부분에서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교황청의 대변인인 가니스타 주교의 말에 따르면 이랬다.

"공자님께서 종교적인 의미로 설득하셨으니 교황청도 종교적인 의미를 더욱 내세우려는 것입니다. 성 일레니오께서 숨을 거두신 건 저 남쪽의 포구이니 말입니다."

거 대충 좀 넘어가지. 나는 입맛만 다시며 조용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교황청은 상상 이상으로 깐깐하게 구는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까 세속 군주들이 뭐만 하면 독립각부터 재겠지.

그래도 아주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주교는 내 시큰둥한 반응을 보고 손자 달래주듯이 소식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포구하니 생각나는군요. 며칠 전, 먼저 떠나보낸 함선을 따라가는 군함 한 척이 목격됐다고 합니다. 미끼를 문 모양입니다."

아직 마차가 출발하기 전이다. 일행을 보좌하는 시종들이 툴툴대며 짐 정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덕분에 편해진 속과 차분해진 머리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노렸던 바다. 기적 심사를 언제 한다는 건 널리 알렸지만 교황청이 특례를 허락했단 사실은 일부러 숨겨놨다. 자체적인 해군을 가지고 있는 유바스가 해안을 봉쇄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한 가지 염려되는 건, 유바스가 그 정도로 핑신일까 하는 부분이었다.

"적들이 미끼를 눈치채는 데에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쉽게 눈치채진 못할 겁니다. 제가 따로 독자적인 대비책을 강구해놨습니다. 유바스는 반드시 습격할 겁니다."

가니스타 주교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정작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떨떠름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몇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반드시 습격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의 주의를 일정 부분 돌리는 걸로 충분합니다. 어차피 습격하고 나면 눈치챌 텐데 불필요한 희생을 감수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허허허허."

주교는 내 반론에 복잡한 감정이 깃든 웃음소리로 답했다. 누군가는 조롱처럼 느끼고, 또 누군가는 몹시 기꺼워 만족하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오묘한 톤이었다.

주교는 그렇게 한참을 웃고난 뒤에야 진지하고 경건해진 표정으로 양손을 모아 합장했다.

"한다면 최고의 결과를 얻어야지요. 유바스가 해적으로 위장해 미끼를 습격한다면 기적 심사 대상조차 안전하지 못하단 인식이 퍼질 터. 교황청은 유바스의 해로 경비가 부족하다는 명분 하에 주변 제후나 기사 수도회를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당장은 무리여도 초석을 쌓는 셈입니다."

"...."

"그리 되면 유바스의 자랑인 군대에 비하면야 모자라도... 향후 주요 길목과 해안선을 요새화하는 데엔 충분할 겁니다."

우리 교황청은 다 생각이 있나 보다. 주로 음습한 쪽으로 말이다.

실리적으로 보면 나쁠 거 하나 없는 생각이긴 하다. 그렇지만 교황청과 내 플레이 성향은 조금 어긋나는 모양이다. 살인이야 할 수 있지만, 살인하는 동기와 살인으로 얻으려는 결과에서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교황청은 상대를 천천히 말려죽이기 위해 차도살인지계를 쓰고 있었다.

반면, [판타지 모나크]를 플레이하던 나는 상대가 대비하지 못하도록 충격적이고 신속한 암살을 추구했다. 이런 어긋남이 생긴 이유야 간단하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주교가 은근슬쩍 묻어가려 한 부분을 콕콕 찝어냈다.

"그런 식으로 명분 쌓아서 평판을 더럽히기보다 절 내세운 뒤 적당한 시점에 유바스가 배교했단 사실을 밝히고 파문 때리면 알아서 붕괴할 텐데."

"...허허."

"성하께선 막상 유바스의 권세가 완전히 붕괴하는 건 피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교황청은 남의 것을 최대한 온전하게 먹으려고 작업치는 성향이었다.

나랑은 정반대다. 나는 잘게 부숴놓고 소화하기 쉽게 한 조각씩 꼭꼭 씹어서 넘기는 성향이었다. 슬슬 싸해진 분위기에 존이 쭈뼛거리던 찰나였다.

바깥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 중 한 사람이 마차로 다가왔다.

"다들 준비됐습니다. 나으리,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그리 하거라."

"예이."

나는 한동안 가니스타 주교와 마주보며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다음부터는 서로 숨기는 거 없이, 독자적으로 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자님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신 모양입니다. 그리 하지요. 공자님처럼 귀중한 인재의 마음을 함부로 다룰 수야 없으니 말입니다."

말로만 하면 못 믿을 걸 안 모양이다. 주교는 손등을 들어올려 성흔까지 보여주며 말했다.

그제서야 나도 짜증을 멈출 수 있었다. 이 시대 나일롱 신자들은 대충 살지만 진짜 성직자들은 다르다. 딴 건 몰라도 성흔을 내밀며 하는 말은 다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믿음에 거짓말하는 셈이니까 말이다.

***

습격은 교본적이었다.

추격이 시작된지 이틀.

육지가 수평선 언저리에 머물 무렵, 경험이 미숙해 해류에 발이 묶인 함선을 상대로 갈고리들이 던져졌다. 도선을 위한 판자가 배 사이에 걸쳐졌고 칼날들이 검집에서 뽑혀나왔다.

선상 백병전은 압도적이었다.

습격당한 함선은 선원들로 모자라 노잡이들까지 동원해가며 맞서 싸웠지만 상대는 유바스였다. 유바스의 수병들은 미약한 네 공국을 대신해, 교회의 동반자로서 이교도 해적들을 무찔러온 정예들이었다.

유바스의 수병들은 비명까지 토막내가며 갑판 위의 모든 걸 치워냈다. 그리고 헐떡이는 숨소리조차 멎었을 즈음, 배 안쪽에 숨어있던 소년들이 울부짖으며 갑판 위로 끌려나왔다.

"어흑, 컥. 어, 엄마."

"사, 살려주세요."

소년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수병들을 향해 손을 빌어댔지만 소용없었다. 소년들을 살피는 수병들의 눈동자는 침잠한지 오래였고, 그들을 이끄는 선장의 시선도 싸늘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윽고 마지막 소년까지 질질 끌려나오자 수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포로 여덟 명. 그 중에 귀족다운 면모나 기사다운 기질을 보이는 소년은 없었습니다."

"성흔은?"

"전원 손등에 십자성 모양의 칼자국이 나있습니다. 딱지가 앉아 아물지 않도록 선원들이 매일 칼로 짼 모양입니다."

모든 게 일목요연했다. 눈치채지 못하는 게 멍청할 정도로.

선장은 모자의 챙을 내리며 눈을 가렸다.

'미끼.'

아침녘 제도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약탈자들의 거듭된 침공은 가난한 떠돌이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땅 한 조각 얻겠다고, 굶주림을 달랠 빵 한 덩이 얻겠다고 자식을 팔아넘기는 자들이 허다하다.

연고없는 소년 여덟 명 따위는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런 세상에서 선장은 비교적 양심있고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선장님."

"..."

잠깐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부하들을 향해 지시했다.

"단칼에 죽여라. 너무 오랫동안 아프지 않게."

39. 기적 심사단



소달구지보다 더 흔들리던 마차를 타고 속 뒤집히며 꼬박 하루를 보냈다.

이제 헛구역질할 기력조차 떨어져 축 늘어진 채 흐느적거릴 즈음 기쁜 소식이 귓가에 닿았다. 가니스타 주교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공자님, 아직 주무십니까? 방금 성문을 지났습니다."

"...도착했습니까?"

"예. 이곳이 바로 성 일레니오께서 숨을 거두신 성지입니다. 지역을 보다 정확히 구분하고 싶은 사람들에겐 성 일레니오의 발가락이라 불리는 곳이지요. 곧 묵을 곳에 도착할 테니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과연 그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춰섰다. 마차가 멈추자 기나긴 한숨 소리와 에구구 하는 신음 소리가 잇달아 들려온다. 바깥의 시종과 하인들도 지치긴 매한가지였나 보다.

하인들이 마차 안을 신경쓴 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똑 똑 똑.

"주교님, 그리고 나리. 얼추 짐 정리가 끝났습니다."

마차 안에 있던 우리 일행은 이 말에 제각각의 반응을 보였다.

"공자님께서 속이 언짢으신 모양이다. 속을 달랠 만한 음료라도 준비해두거라."

"예이. 과일 하나 달여놓고 있겠습니다."

가니스타 주교는 내 안색을 살피며 따로 지시를 내렸고.

"...뭘 또 그런 걸."

나는 체면 좀 차린다고 손사래 쳤지만 막상 웃고 있었으며.

"공자님, 저도 한 모금 마셔도 되겠습니까?"

"..."

그동안 잠자코 입다물고 있던 존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짝댔다.

평소 같았으면 한 대 패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무리다. 손사래치는 것조차 버거워 흐느적대고 있었다. 나는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려왔다.

드디어 바깥 세상이다. 나는 제일 먼저 온힘을 다해 숨을 들이마셨다.

"음. 이 정감가고 안심되는 정취. 좁디 좁은 마차 안의 꿉꿉하고 불쾌한 공기와는 확실히 달라."

"저, 공자님. 마차에도 창문 휑하니 뚫려 있는뎁쇼."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거랑 두 팔과 두 발로 직접 겪는 거랑 어찌 같겠느냐."

존의 지적질을 듣고 있노라니 속담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좁쌀만한 뱁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랴. 어디 개잡코인에 천만 원 집어넣은 친구가 자주 하던 말이다. 옥편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옛 선현의 말씀에서 배우겠다던 진성 또라이였다.

결국 그 새끼는 코인이 떡락함과 동시에 옥편을 갖다 버렸지만, 하는 말들이 워낙 주옥같았던 놈이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이란 건 결국 듣는 이가 제일 중요한 법이다. 존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은 어휘와 비유로 이해시키려던 내가 병신이었다.

"쯧. 됐다. 과일 달여놓은 물 가져올 때 세 잔 가져오거라."

"예? 왜 세 잔입니까?"

"마시기 싫으면 두 잔 가지고 오고."

한 입충에 시달린 건 1차 빙의로 족하다. 기미할 때 그냥 덜어먹지 왜 한 입 처먹냐고 따지니 돌아온 답이 살벌해서 입 꾹 닫았던 게 천추의 한이었다.

내 딴지에 노복이 비장한 얼굴로 조목조목 이유를 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음독으로 독살하려는 자들을 우습게 여기지 마십시오. 가장 맛 좋은 부위에만 독을 칠하거나 식기를 더럽히는 방식으로 기미 단계를 회피한 경우가 이미 수두룩합니다.'

내가 왕이었을 무렵엔 이미 덜어먹는 정도론 안전하지 못했댄다. 기미 시종까지 매수당한 경우가 자주 있어서 그 새끼들이 멀쩡한 부분 쏙 빼먹고 괜찮다 아가리 털면 꼼짝없이 당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들을 거쳐 나온 한 입충 기미는 죽일 거면 너도 같이 죽을 각오로 해라는 극단의 대책이었다. 지금 와서는 참 후회되는 일이다.

어차피 나라 망할 거 그냥 멀쩡한 음식 처먹었어야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은 순간,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존, 만일 한 모금만 마시겠다고 내 잔에 입술 갖다대는 순간 자비고 뭐고 없다."

"아이고, 물론입니다요. 세 잔! 정확히 세 잔 가져오겠습니다!"

***

다음날, 나는 존을 데리고 관광에 나섰다.

성 일레니오의 발가락은 한적한 시골보다 적당히 복잡한 관광도시 같은 곳이었다.

폭 좁은 길 양옆으로 쭉 늘어진 상가와 이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부터 그랬다. 다 사람 사는 곳이라는 듯 호객 행위에 열심인 상인들로 가득했다.

"성 일레니오의 발톱을 갈고 빻아서 만든 성인의 발톱가루! 액운을 몰아내고 사이한 저주를 쫓아내는 신묘한 효험을 지닌 물건!"

"성 일레니오께서 마지막으로 뱉으신 숨결이 겨울철 추위와 만나 얼어붙은 끝에 만들어진 서리! ...를 녹인 물입니다! 지금 은화 2개에 팝니다!"

"성 일레니오께서 저희 선조께 선물해주셨다는 묵주입니다. 저희는 충분히 행복해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려 하니, 덜도 말고 더도 말고 딱 은화 1개만 가져와 주십시오."

나는 존과 함께 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세상사 다 똑같구나."

어디 지역에 유명한 사람 하나 나오면 온갖 걸로 둔갑시켜 판매하는 게 장사치들 속성인가 보다. 척 봐도 사짜들로만 가득찬 거리인데,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이 혹하는 마음으로 주머니를 열곤 했다.

"공자님, 성 일레니오의 발톱가루랍니다. 저걸 제 머리에 뿌리면 제 머리털을 앗아가는 사악한 마귀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내 옆의 순진무구한 누구처럼 말이다. 저거 다 거짓말이라고 한 마디하려다 그만뒀다.

거리의 상인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존도 간절해서 하는 짓이다. 나는 고심 끝에 서로의 명예와 생계를 존중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서라. 네 머리털이 빠지는 건 마귀의 소행이 아니라 럭스 스텔라께서 점지하신 네 운명이니라."

"공자님... 말씀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나는 존의 울먹이는 탄식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마저 걸었다.

성 일레니오의 발가락이라.

이 시장에서부터 선착장에 이르기까지 작지만 번잡하고 알찬 곳이었다. 이곳은 물건 옮기는 인부들과 짐을 하역하는 선원들,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상인들과 마냥 신기하다는 듯 기웃대는 순례객들로 가득했다.

선착장엔 적당한 크기의 배들이 대략 스무 척 정도 정박해 있었다. 그 주변을 술집과 여관, 때때로 묘한 웃음을 흘리는 여인들이 자리잡았고 말이다.

뱃사람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무리지어 그리로 향하기 일쑤였다.

"이 근처에 끝내주는 노름판이 있다던데. 함 가자고. 응?"

"어허. 성지에서 그런 말하면 사제님이 혼내신다. 점잖게 비인가 환전이라고 불러라."

"옘병. 그건 또 뭔 지랄이래."

"크크, 고리타분하신 사제님들이 그렇지 뭐."

"사제님들은 뭔 재미로 사시나~. 술도 맘대로 못 마시고 아랫도리도, 으이? 쑤시지도 못하고~."

"지랄맞은 놈. 얌전히 술집으로나 가 임마."

서로 클클대며 고성방가까지 하는 모습이 참 익숙하다. 하지만 모두가 저런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무리지어 다니는 뱃사람들을 삿대질하며 목청을 드높이는 사람도 있긴 있었다.

"저저, 천벌받은 후레자식들! 성 일레니오께서 목숨을 걸고 유민들을 인도하신 끝에 숨을 거두신 이 신성한 의미 있는 땅에 계집질이라니!"

"탕녀와 술주정뱅이들을 물리쳐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피켓만 안 들었지 영락없이 시위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얼굴로 환락가를 가리키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심지어 무리지은 건 저 열성깊은 광신도들만이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에 새로운 무리가 난입한 것이다.

"웅얼웅얼웅얼... 럭스 스텔라... 찬미 받으소서..."

"성 일레니오의 행적을.... 인세의 별빛이시여..."

시커먼 로브를 입은 순례객들이 후드를 푹 눌러쓴 채 거리를 돌아다니며 묵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광신도와 뱃사람들 사이를 말그대로 바다 가르듯이 헤쳐나오면서 말이다.

그러자 당장 달려들려던 광신도들도, 술집가서 놀 생각하던 뱃사람들도 진짜 광기에 압도되어 주눅든 채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여기까지 본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존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존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공자님, 제가 못 배운 놈이라 그런지 성지가 이런 곳일 줄 몰랐습니다요. 역시 제가 모자란 겁니까?"

"괜찮다. 나도 그러니까."

진짜 성지같은 곳은 북새통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둔덕, 비문이 적힌 기념비 아래 시들시들한 화환이 놓여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 굽이치는 좁은 길을 쭉 따라가다 보니 나왔는데, 슬슬 싸늘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야생화가 아직 남아있어 휑한 느낌은 아니었다.

분위기를 우중충하게 만드는 시커먼 로브의 순례객들도 없었고 말이다.

"딱 좋을 때 왔네. 존, 너도 뭐 기도할 게 있다면 지금 해두거라."

"성 일레니오님... 부디 저를 가여이 여기시어 럭스 스텔라께 이 잔혹한 운명을 거둬가주십사 청해주소서..."

나는 무어라 딴지를 걸려다 말았다. 존의 간절하고 처절한 기도 소리를 듣자 목에 뭔가 턱하고 얹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찌 제 머리털 한 올조차 그리 앗아가시나이까..."

사람이 가장 절박해지는 순간은 아무 것도 없을 때가 아니다. 가진 게 얼마 없을 때 가장 절박해진다. 어쩌면 존에겐 지금이 바로 그때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존은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찾은 모양이다. 성 일레니오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기념비의 부조를 보면 확실하다.

...성 일레니오는 대머리였다.

"..."

나는 이루기 힘든 기원을 비는 존을 외면하고서 기념비에 적힌 비문을 읽어갔다.

[성 일레니오, 인세의 악마들이 내미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멸망한 왕국의 유민들을 이끌어 럭스 스텔라께 인도한 자. 그 육신은 악마들의 저주로 병마에 시달렸으나 영혼만큼은 정결한 빛 아래서 거둬졌노라.

그러나 그 마음은 여전히 이 땅에 묶여 있나니.

별빛이 닿기 전에 조각난 왕국을 기리며 그 파편과 함께 숨을 거두셨도다.]

딱히 뭔가를 숨기려는 비유 같은 게 아니다. 대충 별빛은 럭스 스텔라일 테고 파편은 왕국의 유민들일 테지. 나는 시큰둥한 기분으로 비문에서 눈을 뗐다.

그 순간, 수평선에서 순풍을 타고 오는 배 한 척이 시야에 들어왔다.

단순히 정박하러 오는 배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 직감은 평범한 배가 아니라며 호통치고 있었다.

"존, 관광은 이 정도면 됐다. 돌아가자."

***

왔던 길을 돌아가 선착장에 도착했을 땐 방금 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죄다 사라져 있었다.

삿대질하던 광신도나 사제들을 흉보던 뱃사람들까지 전부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몸을 배배 꼬는 중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니 선착장에 답이 있었다.

방금 전 순풍을 타고 온 배가 정박해 있었다. 항해할 때까지만 해도 계양하지 않은 깃발을 돛 위에 당당히 펼치고서 말이다.

금테 두른 하얀 바탕에 한가운데에 박힌 청십자성 문장.

비록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 떠올리기 쉬웠다.

"교황청."

"예?"

"기적 심사단이다."

존의 되물음에 상세히 답해줄 시간이 없었다. 기적 심사단은 순식간에 성지 전체를 압도하며 배에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순례객들처럼 시커먼 로브지만 질적으로 뭔가 달랐다.

심사단에 속한 이들 모두 얇은 금테가 둘러진 검은 어깨망토는 물론, 허리춤에는 올곧은 느낌의 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선착장에 들어온 즉시 자리잡은 환락가를 바라보더니 혀를 차기 시작했다.

"꼬라지하곤."

"형제님, 이교도 잔당들이 아직까지 남은 곳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어쩔 수 없습니다."

기적 심사단은 교황청 직속답게 상상을 초월하는 꼰대들이었다.



40. 출세해서 귀환함



기적 심사단의 예고없는 등장은 성지 전체를 진동시켰다.

누가 봐도 고급지고 위압적인 금테 두른 흑색 어깨망토에 패검까지 한 사람들이 오와 열을 맞춰서 걸었다. 칼끝보다 섬뜩한 눈빛으로 반발하는 목소리들을 죄다 찍어누르면서 말이다.

"성 일레니오의 발톱가루? 만일 네놈이 팔고 있는 게 진품이라면 성유물 훼손죄로 가족 모두 이단심문에 회부다."

"아이고,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이건 제 발톱가루입니다!"

"성유물 사칭죄로 고발한다."

지역 경비병이 나설 새도 없었다. 금테 두른 흑색 어깨망토의 사제들은 칼을 몽둥이 삼아 가판을 다 때려부쉈다. 어찌나 깔끔하게 잘 때려부수던지, 가판이 부싯깃처럼 바스라졌다.

상인은 울지도 못하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졸지에 봉변당한 사람이 상인 혼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매춘부가 대낮부터 활동하다니, 수치심을 잊은 게냐?"

"매춘부라뇨?! 전 그냥 멋진 만남을 기다리고...!"

"쉿, 쉬잇! 헤, 헤헤. 이 년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이렇습니다. 교황청 어르신들을 몰라뵐 정도로 말입니다."

"데리고 꺼져라, 포주. 해 뜨는 동안만이라도 정숙해라."

모두가 헐레벌떡 도망치는 가운데, 유일하게 저항한 건 이제 막 계집질하려던 뱃사람들이었다. 뱃사람들은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건들거리며 허세를 부려댔다.

"거 사제님들 너무하신 거 아뇨?"

"서약도 하지 않은 버러지들이 무분별하게 성지에 발 디딘 걸로 모자라 매음굴을 들락날락하다니..."

문제는 기적 심사단이 몹시 대노한 상태란 데에 있었다.

"그 방정맞은 언행과 불량한 품성, 신성모독으로 간주한다."

험한 바닷일하며 단련된 악바리 근성과 구릿빛 육신도 심사단 앞에선 소용없었다. 심사단의 사제들은 칼을 뽑지도 않고 검집채로 매타작하기 시작했다.

그 살벌함에 절로 이빨이 떨릴 지경이다. 뱃사람들은 중학교 시절, 방학일기 30일치를 한 장에 몰아썼다고 대걸레 자루가 뿐질러질 때까지 쳐맞던 나보다 더 아프게 맞고 있었다.

"자... 잘못 했습니다... 꼬추는 제발 때리지 말아주세요..."

"네놈의 잘못이 아니다. 성지에서조차 삿된 생각을 품게 만드는 네놈 아랫도리의 잘못이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못나서 그렇습니다... 흑흑..."

"그럼 네놈이 맞겠다고?"

"예, 예! 제가 맞겠습니다!"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이시여. 당신 가르침을 담아 이 자를 계도하나이다."

나는 사람이 걸레짝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심사단은 사나운 기질의 뱃사람들을 모두 너덜너덜하게 만든 뒤에야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끌벅적하던 방금 전의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성지에 무척 만족한 모양이다. 심사단은 공포와 전율로 침묵한 거리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까지 띄웠다.

"이제 좀 성지답군."

"형제님, 저희 사명은 기적 심사입니다. 이런 놈들 하나하나 패다간 끝이 없다 하신 성하의 말씀을 떠올립시다."

"아무리 그래도 기적 심사를 매음굴과 사기꾼들이 판치는 곳에서 할 순 없지. 저들을 모조리 퇴거시키지 않은 게 내 최선의 양보일세."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심사단은 한동안 그렇게 미소를 띄우다가 돌연 몸을 돌렸다. 멀뚱히 서서 지켜보던 나와 존이 있는 곳을 향해서 말이다. 혹시 내 뒤에 누가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심사단이 시선을 보낸 즉시 재빠르게 산개한 뒤였다. 그제서야 심사단이 날 바라봤음을 알았다.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성지에 도착하자마자 탄식을 내뱉더니 다 때려부순 자가 먼저 말했고.

"당신이 심사 대상자입니까?"

곁에서 조용조용한 말투로 제지하던 자가 뒷말을 이었다.

다른 사제들은 이 두 사람 뒤에서 침묵을 지키며 잠자코 사열해 있었다. 모종의 위계서열이 있는 게 분명해보인다. 나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마주본 다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성흔 보유자입니다."

***

기적 심사단이 올 때까지는 비교적 느긋하고 차분한 시간이었다.

바깥 경치 구경하다가 토악질 좀 하고, 존이랑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면서 천천히 시간도 떼우고. 사람이 마냥 바삐 달릴 순 없으니 풀어지는 시간도 필요하긴 했다.

그렇지만 심사단이 도착하면서부터 내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심사 대상자는 양 손등을 들어올려 성흔을 보여주십시오."

성 일레니오를 기리는 기념비 앞에서 입을 연 자는 조용조용한 말투의 사제였다.

스스로 밝히기를 기적 심사단의 부단장 마르첼로랜다.

그는 꼬불꼬불한 곱슬머리에 얇은 입술을 지닌 차분한 인상이었다. 마르첼로는 내가 손등을 들어올리자 턱을 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양손 모두 모양이 일치합니다. 칼로 계속 쨌을 때 도드라지는 딱지나 빈혈 끼도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성도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 말을 받은 자는 성지 꼴에 탄식하던 사제, 기적 심사단을 이끄는 단장 보니체고였다.

그는 배에서 챙겨온 독서대 위에 두꺼운 책 하나 얹어놓고서 쉴새없이 깃털펜을 움직여댔다.

"1차 통과. 다음."

"성물로 이세의 힘인지 검증하겠습니다."

마르첼로는 가져온 상자들을 뒤적이며 십자성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다른 사제들은 날 에워싸듯이 원형으로 포진해 있었는데, 왜 그러나 싶다가 문득 깨달았다.

기적 심사단은 럭스 스텔라의 기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심사 도중 이세의 옛 신들이 개입한 게 확인되면 즉시 처형자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 가설을 증명하듯 사제들은 칼자루 위로 손을 올려놓고서 아무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첼로는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기도문을 외웠다.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이시여. 이세를 황혼으로 몰아내주소서."

그러자 마르첼로 손에 들린 십자성 목걸이가 샛푸르게 반짝였다. 일찍이 서텔이 보여줬던 대로다. 하지만 모든 게 그때와 똑같진 않았다.

십자성 목걸이가 발광한 순간, 내 손등 위의 성흔도 샛푸른 빛깔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르첼로는 그 즉시 십자성 목걸이를 거두고서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세의 개입은 없습니다. 심사 결과, 청십자성 확인. ...성흔입니다."

이 말을 기점으로 심사단의 태도가 완전 뒤바뀌었다.

살기가 깃든 눈빛들이 사그라드나 싶더니 하나둘씩 칼자루에서 손을 뗐다. 날 둥글게 에워싸고 언제든지 처형할 수 있도록 준비하던 자들이 무릎 꿇으며 날 경애했다.

심사단의 사제들은 일제히 무릎 꿇고, 동시에 고개 숙이며 목에 걸린 십자성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깃털펜을 분주히 움직이던 단장 보니체고와 심사를 주도한 마르첼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선착장에서 보여준 오만하고 콧대높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단장 보니체고는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럭스 스텔라의 산 증인을 맞이합니다."

나는 알게 모르게 흐뭇함을 느끼면서도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서약을 제대로 이행했다면 발현하는 게 성흔이다. 몹시 드물지만 아주 희귀한 정도는 아니라 했는데 눈앞의 사제들은 어떨까.

해서 조금 많이 뾰족한 질문을 던져봤다.

"사제님들도 성흔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말씀을 거두소서. 이제 곧 중임을 맡으실 분과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중임?"

답변이 생각보다 훨씬 술술 나오길래 별 생각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보니체고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걸 봤다.

"성직에 종사하는 자의 조건. 럭스 스텔라께 삶을 공양하길 서약하고 징표로 성흔을 드러낼 것."

그리고 교황청이 단순히 아무 생각없이 기적 심사 장소를 이리로 옮긴 게 아니란 것도 눈치챘다.

"성흔을 가진 지역 연고자가 나타났으니 성흔 없는 자가 물러설 차례입니다."

"포위스 주교를 교체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그것이 성하께서 저희를 보내신 까닭 중 하나입니다."

보니체고는 당당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를 본 다른 사제들도 잇달아 일어서더니 보니체고를 중심으로 모여 하나의 군대처럼 대열을 갖췄다.

아니, 오히려 이 시대 평범한 세속의 군대보다 더 군대같을지 모르겠다. 보니체고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심사단의 정체를 드러냈다.

"여기 모인 전원이 기사 수도회 출신 수도기사이자 수도사제."

"...."

"저희는 기적 심사의 결과를 부정하는 자에게 럭스 스텔라의 뜻을 관철하라는 성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역시 뒷배를 잘 둬야 한다.

교황 성하께선 감히 지역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세습하려는 악독한 목회자를 용서하실 생각이 없으셨다.

당연하지만, 태도가 변한 게 기적 심사단만은 아니었다.

심사단과 함께 숙소로 돌아오자 소식을 접한 가니스타 주교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잔을 홀짝이던 주교는 날 보자마자 몸을 일으켜 악수를 청해왔다.

"포위스 주교후를 뵙습니다."

나는 살벌한 분위기로 뒤따라온 기적 심사단의 존재를 의식해서 일부러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일단 내밀어진 손을 마주 잡은 채로 말이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성하께서 포위스 주교후께 거신 기대가 무척 크시더군요. 허허, 사실 기적 심사가 끝나는 즉시 포위스 주교후로 삼으시겠다 제게 귀띔하셨습니다."

아무래도 교황청이 정말 목이 빠져라 기회를 노리고 있었나 보다. 유바스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낀 모양이지. 내가 귀족 혈통이긴 해도 일단 제대로 된 성직 제후인만큼 아주 팍팍 밀어주겠단 의도가 훤히 보였다.

내게 나쁜 일은 아니다. 따지자면 정말 좋은 일이었다.

정말 좋은 일인데...

"소식이 금방 퍼질 겁니다. 곧 파직당할 주교가 방비를 세우기 전에 서둘러 포위스로 돌아가셔야지요."

이 세상의 이동 수단을 생각하면 인상부터 팍 찡그려지는 게 당연했다. 꼬박 하루를 버티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나는 미간에 팔자주름 꼬깃꼬깃 구기고서 날선 질문을 던졌다.

"마차로?"

"허허허. 거 참... 가난한 주교령에 마필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 승용마를 그리 노리십니까. 얌전히 마차 타고 가십시오."

"가난하다니요?"

아무 것도 모르는 순례객들 등쳐먹는 상인에, 인생 종쳤겠다 계집질 한 번이라도 더하려는 뱃사람들은 물론 매춘부와 포주까지 나뒹구는 성지가 돈이 없다니?

가니스타 주교는 이 모든 궁금증이 함축된 질문에 허허허 웃으며 명쾌한 답을 돌려줬다.

"저치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겠습니까?"

"아..."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인 이유였다. 나는 입술만 뻥긋대다 조용히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니스타 주교는 생각보다 쌓인 게 많았던지 하소연을 계속 토해냈다.

"경비를 보내도 쉬쉬하며 넘어가고, 사제들 중에도 남몰래 즐기는 자들이 있던 판국입니다. 오히려 심사단 분들께서 이리 쓸어주시니 앓던 이가 빠진 거 같습니다."

"교회 이거 괜찮은 거 맞습니까?"

"그러려니 해야지요, 그러려니. 허허허... 커헉, 컥. 크흠."

마지막에 헛웃음치다 사레 들린 걸 보니 어지간히 시달린 듯 하다. 하긴, 제대로 된 성직자라면 성지 꼴 보고 한탄하는 게 맞긴 했다. 당장 날 따라온 보니체고부터 벌써 눈동자를 부라리고 있었다.

"성지에서조차 매음굴을 막지 못할 정도라니. 아침녘 제도의 상황이 성하의 걱정보다 더 심각하군."

"저... 형제님. 성도 아이데아에도 매음굴은 있습니다."

"뭐라고? 매, 매음굴이 성도에 창궐해? 이, 이이익! 내 돌아가면 당장 형제들을 이끌고 싸그리 불태우겠다!!!"

"이래서 말씀드리기 싫었습니다..."

나는 인류 사회의 뿌리깊은 업보를 놓고 길길이 날뛰는 보니체고와 한숨 푹푹 내쉬는 마르첼로를 외면했다. 대신 눈에 들어온 장면이 있어서였다.

금테 두른 흑색 어깨망토를 입은 수도사제 겸 수도기사들 사이에 잔뜩 움츠러든 사내 한 명이 있었다.

"존. 그러고보니 평소처럼 깐죽대지 않고 왜 이리 조용하느냐?"

"아이고, 주교님! 제가 뭐라고 그 무슨 천벌 받을 짓을 하겠습니까요!"

***

내가 성지에 머문 건 정확히 사흘이었다.

오자마자 숙소에 골아떨어지고, 이틀째에 기적 심사 받고, 그 다음날인 사흘째에 성지를 떠났다. 감상을 말하자면 성인의 발자국 사이서 피어난 질긴 잡초같은 사람들로 가득찬 곳.

생각보다 훨씬 사람 사는 냄새 물씬 풍기는 그런 곳이었다.

"으랴, 으럇!"

나는 속도를 붙이는 마부의 호령소릴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억지로 눈을 붙일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눈 붙인다고 잘 수 있으면 아무데서나 골아떨어졌을 거다.

슬슬 속이 울렁거릴 즈음, 익숙한 목소리가 잔뜩 식겁한 채 날 흔들어댔다.

"공... 아니, 주교님이신가? 스읍. 뭐라고 불러야 하지."

"그냥 하던 대로 해라."

"공자님! 큰일, 큰일입니다! 여, 옆 언덕을 보십시오!"

존은 여러모로 양면적인 인물이었다. 깐죽거림이 짜증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럭저럭 괜찮을 때가 있었고, 또 알게 모르게 위협을 탐지하는 데에도 뛰어났다.

그런 존이 이토록 진지하게 호소한다면 진짜다.

나는 즉시 눈을 뜨고서 마차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과연 존이 호들갑 떨만한 이유였다.

저 멀리 펼쳐진 능선을 따라 말을 탄 무리가 하나 보였다. 그냥 기수도 아니고 때깔 좋게 반짝이는 무구로 중무장한 기사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가져온 깃발엔 익숙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검을 문 사자.

"유바스의 기병이다."

"고, 공격해오는 거 아닙니까?"

"아니."

나는 유바스의 깃발을 바라보다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이미 내 주변엔 마차를 호위하고자 촘촘히 에워싼 스무 명 가량의 기적 심사단원들이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눈치채는 게 조금 늦었다."

41.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



내가 본 유바스는 이랬다.

패도적인 성향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저지른다. 그리고 내 목숨은 이제 유바스가 감당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기적 심사를 통과해 성흔을 공인받은 존재가 바로 나다.

이 기적 심사란 건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권위를 갖고 있었다. 강력한 군대를 지녔단 이유로 온갖 폭거를 일삼는 유바스조차 쉽게 무시할 수 없던 것이다.

야영지의 모닥불 앞. 나는 옹기종기 모여앉은 일행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심사단 단장 보니체고의 말에 따르면.

"기적 심사가 이뤄진 즉시 지역의 주교들은 이 사실을 공표할 의무를 가집니다. 오지의 변두리 교회에서도 새로운 성흔 보유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끔 말입니다."

이 시대 가장 촘촘하고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교회가 대놓고 홍보에 나선댄다. 럭스 스텔라가 여전히 인간과 함께 한다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설령 의무를 방기했어도 상관없습니다."

보니체고는 모닥불보다 훨씬 사납게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럭스 스텔라와 성하의 의지는 반드시 관철될 겁니다."

부단장 마르첼로는 활활 타오르는 보니체고를 바라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성하께서 보니체고 형제님을 보내신 건 이래서입니다. ...부러진 뼈를 지탱하는 건 부드러운 천이 아니라 딱딱한 나무 판자라 하셨습니다."

"이해했습니다."

대충 보니 견적이 나왔다. 보니체고는 교황청 내부에서도 원리원칙을 악착같이 쫓기로 유명한 초강경주의자였다. 유들유들하게 말로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한, 꽉꽉 틀어막힌 진또배기 말이다.

함께 부대끼고 살면 참 피곤한 인간 군상이지만 이럴 때만큼은 신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의문이 모두 가시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왜 자꾸 주교후라 부르시는 겁니까? 포위스 교구는 독립적인 성직 제후가 다스리는 곳이 아닐 텐데요."

내가 서임권 팔아넘겼다고 독립적인 지위를 주겠다는 건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상도덕이 있지, 이건 불효막심한 짓이었다.

아버지 영지를 반으로 갈라 와구와구 먹는 셈이니 말이다. 하지만 보니체고와 마르첼로는 이 질문에 뚜렷한 답을 내놓는 대신 입을 다물거나 미심쩍은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흠."

"하하, 주교후께서 승직하고 나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아직은 말해줄 생각이 없다 이건가. 일단은 넘어가야겠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나저래나 이들은 내 든든한 뒷배이자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다. 당장 공국 최강의 기사라 자부하던 테르베어조차 존경심을 팍팍 드러내던 수도기사들이니 말이다.

그러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포위스로 돌아가는 길, 누가 봐도 사주받은 걸로 보이는 도적 무리와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유바스가 미친 놈이란 게 아니라 수도기사들이 미친 놈들이었다.

"다섯이서 일개조! 산개!"

"형제여, 합을 맞춥시다!"

제식 훈련을 해본 적 있으면 경악할 것이다. 수도기사들은 흩어지고 합쳐지길 자유자재로 반복했다. 더욱 경악스러운 건 그들이 보여준 진형과 전술, 놀라운 합격술이었다.

심사단은 훨씬 수가 많은 산적들이 일제히 돌격해오자 질량을 맞받아칠 수 없다 판단해 산개했다. 대신 다섯 명이서 조 하나를 이뤄 각자 꼭지점으로 거듭났다.

앞장선 셋이 적과 일대일 대치하며 하나하나 죽인다면, 뒤에 남은 둘은 측후면의 공격을 걷어내는 일을 맡았다. 때때로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적의 맹공에 기세가 밀리면 자연스럽게 전후열을 교대하며 소모를 막았다.

이걸 반복하는 동안 산적들은 쑹텅쑹텅 베여나갔고 말이다.

그 결과, 무려 백여 명을 이끌고 습격해온 산적들은 충돌 직후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자신만만한 인사말 하나 없이 칼부터 휘두른 놈들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당황이었다.

"혀, 형님! 뭔가 이상한 거 같습니다!"

"형님들, 이 새끼들 안 지칩니다!!!"

딴에는 숫자로 밀어붙이면 될 줄 알았나보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결국은 사람. 심지어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닌, 사실상 평복 차림의 사제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시간을 끌면 된다 여겼겠지.

만일 성흔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다. 나는 교회가 어째서 기적을 숨기려드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굳이 교회만이 아니다.

나는 지금, 강호에서 힘의 몇할은 숨기라던 무협지의 격언을 비로소 이해했다. 바로 앞에 도적놈 하나 무릎 꿇리고 피 철철 쏟게 만들면서 말이다.

"카, 칼질 솜씨가 무슨... 뭐하던 새끼냐?"

"늙은이와 여인, 그리고 어린 아이를 조심하라. 네놈은 클리셰를 우습게 여긴 죄로 죽는다."

"이런 시발... 헛소리나 지껄이는 놈들한테..."

도적의 마지막 유언은 세상을 향한 증오로 가득차 있었다. 안타까운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손목을 돌려 칼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뒤늦게나마 뽑아낸 피를 돌려줬는데 받아먹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하긴 남의 피눈물 쪽쪽 빨아먹으며 먹고 살던 놈인데 죽을 때라도 뱉고 죽어야지.

모처럼 감상에 젖어 고개를 끄덕일 즈음, 사방에서 들려오던 칼부림 소리가 이미 멎어있었다. 보니체고와 마르첼로가 이끄는 심사단이 죄다 도살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피에 절어 묵직해진 어깨 망토를 훌훌 털어내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래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 이름이 나름 알려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덕분에 양민의 피를 빨아먹는 버러지들을 잡았으니. 주교후님께선 먼저 들어가시지요. 정리하고 출발하겠습니다."

방금 습격당한 사람들치곤 참 차분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겁쟁이 존조차 차분하기 그지 없었다. 마차에 올라타니 등받이에 기대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존이 보였다.

"걱정도 안 하는 게냐?"

"어? 벌써 다 죽이셨습니까?"

"됐다."

인간경보기 존이 호들갑 떨지 않을 정도면 어지간히 실력차가 난다는 소리다. 덕분에 의심을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번 습격, 적어도 유바스의 소행은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 주교님이 어지간히 쫄리시나 보다."

그러자 존이 입가의 침을 슥슥 닦아내며 멍청한 질문을 던져왔다.

"주교님은 공자님이시잖아요."

"됐다니까. 넌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자기나 하거라."

***

이 습격이 분수령이었다.

무력으로 제지하는 게 불가능해진 순간부터 내 여정은 고속도로 위를 씽씽 달리는 것보다 빨라졌다. 물론 방해가 아주 없던 건 아니다. 가끔씩 의도가 모호한 병사들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긴 했다.

그럴 때마다 나눈 문답을 간추리면 대충 이랬다.

"정지! 이 곳은 토워드 백작령이다. 허가받지 않은 자는."

"교황청 산하 예부성성 직속 기적 심사단. 새로이 부임하시는 주교후를 모시는 중이다."

"토, 통과! 어서 지나가십시오!"

아무리 기세등등하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기적 심사단이란 소릴 듣자마자 질색하며 단숨에 양옆으로 갈라지기 일쑤엿다. 사실 교황청이란 말을 듣는 순간 새하얗게 질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우리 일행은 그렇게 수많은 장원과 백작령을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그러나 간혹 기적 심사단이라 말했는데도 물러서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아주 강단있고 또라이같은 몇몇이 그랬다.

"저희는 듣지 못했습니다. 확인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음. 현 주교의 소행인가?"

"알지 못합니다."

교황청 산하인지 몰라봤다는 무지렁뱅이 컨셉으로 시간을 끌 속셈이다. 여기선 내가 나섰다. 보니체고가 나서서 살계를 펼치기 전에 나름대로 구명줄을 던져주기 위해서였다.

"포위스 공국 애설튼 공왕의 삼남,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다. 형님이신 테르베어 경의 도움을 받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고 귀환하는 중이다."

"으음...!"

비록 애설튼 공왕이 지배력을 상당히 잃었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귀족 사회에서의 일.

말단 병사들이나 민간인들 인식 속에선 여전히 애설튼 공왕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이름에 한 술 더 떠 공국 최강의 기사까지 언질하자 눈에 띄게 동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에도 쉽게 결단하지 못하는 동료를 향해 다른 기사가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영주님께서도 에덜레드 경의 체면을 최대한 고려해 적당히 하는 시늉만 하라 하셨잖아요."

"에덜레드 경?"

나는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 것에 대해 깜짝 놀랐다. 내가 짐작하는 바가 맞나 싶어 물어보자 기사들도 마음을 돌린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해줬다.

"에덜레드 경께서 근방 영주님들을 설득하셨습니다. 공왕 전하께서 교황청과의 관계 수립에 힘 쓰시고 계시니 교회 내부의 권력 다툼에 너무 힘쓰지 말아달라 하시더군요."

"..."

"테르베어 경의 방문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하는 뒷말도 덧붙이셨구요."

그제서야 얼추 사정이 짐작갔다. 유바스의 군대를 피해 달아난 테르베어가 장남 에덜레드를 찾아간 모양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에덜레드는 현 주교와 영주들이 결탁해 내 귀환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노선을 튼 게 분명했다. 이 순간, 나는 알게 모르게 커다란 감동을 느꼈다.

[판타지 모나크].

이 저주받을 게임에서 혈족이란 다 쳐죽일 놈들이었다. 허구한 날 땅 달라고 유산 나눠달라고 징징대며 반란을 일삼기 일쑤인, 원수보다 못한 놈들이 혈족이었다.

그래서 가족은 다 솎아낸다는 마인드로 플레이하곤 했었는데.

"주교후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가족이란... 이렇게 따스한 존재였군요."

슬프게도 내가 느낀 이 감동을 다른 이는 쉽게 공감하지 못했다.

"하인, 주교후님이 원래 자주 저러시나?"

"쇤네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려니 합니다요."

어쨌든 우리 일행은 혼자가 아니었다.

든든한 뒷배인 교황청과 알게 모르게 이면에서 조력 중인 에덜레드. 이 두 존재 덕분에 우리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포위스 교구의 주교좌 본당까지 겨우 6일만에 도착할 정도로 말이다.

***

그리고 주교좌 본당 앞, 모자이크 타일이 깔린 고급진 광장에는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다.

"이 늙은이가 탐심에 눈 멀기 전 자리에서 물러나는 걸 허락해주소서!!!"

축 늘어지고 비대한 몸뚱이를 지닌 늙은이가 맨몸으로 넙죽 엎드려 있었다.

정황상 저 놈이 날 죽이려 설치던 포위스 주교다. 모든 수가 다 막히니 오체투지해서 알량한 목숨 아니면 사생아라도 구명하려는 속셈이었다.

최대한 비참하게 꾸며 동정심을 얻어내려는 얄팍한 수작이다. 이걸로 여론을 호도하려는 모양인데...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감히 검버섯 숭숭 난 주름진 살덩이를 필터 하나 없이 내게 보여? 네놈이 정녕 죽고 싶구나!"

엎드린 주교를 본 순간, 나는 일말의 망설임까지 전부 버릴 수 있었다.

42. 대추나무 열매 걸렸네



포위스 교구의 주교 바르나르도.

한미한 가문의 차남으로 태어나 일찌감치 상속권을 포기하고 교회에 투신, 불철주야 경전과 고전을 끼고 살며 공부를 거듭한 끝에 32세의 나이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절제와 구전의 서약을 맹세하고 꾸준히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성흔 발현엔 실패. 대신 남들보다 근면한 모습과 이교도에 적개적인 태도로 당대 공왕, 애설베어의 호의를 사 주교직에 서임된다.

하지만 주교직에 올라서고부터 마음의 긴장이 가파르게 무너졌다. 주교가 된 바르나르도는 잦은 사치와 향락,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며 무수한 구설수를 불러들였다.

결국 당대 공왕 애설베어가 바르나르도의 파직을 고려하기 시작했단 소문이 돌 즈음, 애설베어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돌연사하면서 포위스 공국은 혼란에 빠졌다.

바르나르도가 개입한 건 수많은 계승권자들이 난립하려던 순간이었다.

바르나르도는 애설베어의 동생인 애설튼을 주교좌 본당으로 부른 뒤 자신이 갖고 있었던 애설베어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장에는 애설튼을 정식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유언장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는 드물었다.

그러나 영주들 사이에선 강대한 유바스를 옆에 두고 내전을 벌이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애설튼은 바르나르도의 지지를 받으며 즉위했고, 영주들은 애설튼을 자신의 주군으로 받아들였다.

일단은 말이다.

애설튼 공왕은 불안정한 지지 기반을 가진 탓에 주교 바르나르도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유바스의 압박에 영주들이 바로 등을 돌린 까닭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애설튼 공왕은 상당히 위태로운 입장이었다. 장남인 에덜레드가 영주들의 호의를 사는데 뛰어나지 않았다면, 또 차남 테르베어가 충분한 군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언제든지 도전받았을 정도로.

불행히도 누군가의 위기는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기 마련이다.

애설튼 공왕이 휘청거릴수록 주교 바르나르도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가령 교회법이 관습법, 도시법과 충돌할 때 공왕을 은근히 압박함으로써 유리한 판결을 얻어낸다던가. 주교의 부정부패를 누군가 고발하며 청원해도 자신이 지닌 권세를 내세워 묵살시킨다던가.

바르나르도는 권력의 달콤함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권력을 잃었을 때 얼마나 비참해질지도 잘 아는 인물이었다. 특히 슬슬 마음 가는 사생아 한 명한테 주교직을 물려주고 싶을 때라 더 그랬다.

강대한 유바스가 탐탁찮던 이유?

빈약한 기반의 애설튼 공왕과 달리 헛수작질이 안 먹힐 가문이니까.

교황청과 휘하의 신학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

고리타분한 옛 전통을 들먹이며 교구와 교회의 세습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자들이니까.

바르나르도는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쫓으며 움직였다. 교리나 대의 같은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부분들을 비웃으면서 둘 사이서 줄타기해왔다. 자식에게 가진 걸 물려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러나 줄타기는 언제나 위태로운 법이다. 줄타기가 아슬아슬한 까닭은 떨어지는 순간 목숨이 위험해서다.

그리고 바르나르도, 전 포위스 주교는 줄 위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제, 제 땅이 원래 교회에 속한 땅이었더래요. 영주님께 소작료 드렸다니까 머, 멋대로 바친 거니 제 잘못이라면서."

"럭스 스텔라의 성은을 내려준다길래 딸을 보냈더니 덜컥 임신했지 뭡니까? 처녀수태랍니다, 처녀수태! 애 엄마는 그걸 믿고요!"

"값을 어찌나 후려치시던지, 그 값엔 못 판다니까 이 거리서 장사하기 싫으면 계속 그러라는데 어떻게 안 깎습니까?"

온갖 군상의 사람들이 본당 앞으로 밀려와 울부짖으며 하소연했다.

기워입은 옷의 농노, 처녀수태(아님)을 당한 애 아버지, 강제로 할인해준 장사치에 이르기까지. 이 뿐만이 아니다. 바르나르도가 파직됐단 소문을 듣자마자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이 앞다퉈 나오며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교회 앞에 마련된 임시 법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증오어린 청원으로 가득 차 아우성치는 중이었다. 바르나르도는 차마 그들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궜다.

'내 앞에선 한 마디도 지껄이지 못하던 연놈들이!'

문제는 무지렁뱅이들의 청원 따위가 아니다.

바르나르도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옆을 흘겨봤다. 그곳에 애설튼 공왕의 삼남, 나르바가 있었다. 바르나르도가 앉던 의자에 대신 앉고서 턱을 괸 채로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르바는 혀를 끌끌 차기 시작했다.

"전임 주교, 어떻게 단 한 사람도 좋은 말을 못해줍니까?"

"흐... 흐흐. 그, 그러게 말입니다."

깔보는 듯한 말투에 울컥한 것도 잠시. 바르나르도는 나르바의 주변을 지키는 사제들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금테 두른 흑색 어깨망토는 그만큼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성하께서 단단히 각오하셨다. 설마 소문이 아니라 진짜로 보내셨다니. 내가 너무 설쳤구나...!'

모르는 사람들은 색 배합 괜찮네 하고 대충 넘어가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르다. 흑색 어깨망토는 교황청이 인정한 수준의 무술을 지닌 성직자와 수도사만 착용 가능했다.

한 술 더 떠 어깨망토에 둘러진 금테는 지역 교구의 권위보다 우선시되는 다양한 권한을 상징한다. 한 명만 보내도 지역 교회 입장에선 벌벌 떨어야 하는 셈이다.

'검은 금테'로 불리는 교황청의 핵심 요원들.

그들이 한 명도 아니고 스무 명이나 온 시점에서 바르나르도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운명에 맞서 도전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늙은 몸뚱이를 이끌고 알몸으로 넙죽 엎드리는 한이 있어도 말이다.

비록 지금은 강압에 못 이겨 옷을 입고 있지만, 바르나르도는 사랑하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었다.

"저... 주교님."

"주교후."

"주, 주교후님. 제 잘못은 통감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이 늙은이가 참 못살았습니다."

"그럼 교수대 가야겠죠?"

올가미에 매달린 채 대롱대롱 흔들릴 미래를 생각하니 벌써 아찔해진다. 바르나르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의식을 유지했다.

"저야 그렇지만. 제, 제가 차기 주교 후보로 점찍고 있던 부제는 이 늙은이랑 아아아아무 연관 없습니다."

"이상하다. 서임권은 공왕 전하께 있지 않았습니까?"

"흐, 흐흐. 저, 전하께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 말입니다."

"으음. 추천."

바르나르도는 지금, 자신의 사생아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 중이다.

대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적 심사단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을 본다는 행위 자체가 세습의 위험 때문에 관습상 금지되는 행위였으니까. 그나마 나르바는 대놓고 적대적이진 않았다.

의뭉스런 미소를 실실 흘리며 검지로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건드리길 한참.

"좋아. 그럼 상태 한 번 봅시다."

"예?"

"상태 보고 괜찮으면 둘 다 살려주고. 영 아니다 싶으면 둘 다 갑시다."

어디로 갈지는 불보듯 훤했다.

광장 한복판, 교수대 위에 열린 큼지막한 열매 두 덩이가 돌팔매질에 피떡될 미래도 함께 보였다. 바르나르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주, 주교후님. 연... 연좌제만큼은."

"스읍. 누가 보면 억울하게 묶어 매다는 줄 알겠네. 자신 없으시면 그냥 지금 갑시다."

"아... 아닙니다."

"주교후님! 그냥 저 놈 쳐죽여주십쇼!!!"

"카아아악, 퉷! 잘 간다 씹놈아!"

군중들의 뜨거운 열의 속에서 바르나르도가 동의한 순간, 별도의 지시없이 수색이 시작됐다.

마르첼로가 스스로 자처해 몇몇 심사단원들을 데리고 사생아 색출에 나선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바르나르도는 얌전히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채 필사적으로 기원했다.

'아들아, 제발 공손하고 겸손한 태도로 끌려와다오. 부디 네가 내게 보여준 선량하고 아름다운 품성으로 이 아비까지 구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르나르도의 기원이 아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과연 교황청이 자랑하는 검은 금테다웠다. 색출에 나선지 불과 수십 분만에 청년 한 명이 마르첼로에게 붙들려 끌려나왔다.

"놔라, 교회놈이면 알아들어야지! 바르도, 몰라? 내 아빠가 포위스 주교님이라고! 네놈들 이러는 걸 알면 우리 아빠가 가만둘 거 같아?!"

이리저리 발버둥치는 건 물론 왁왁 외쳐대면서 말이다.

마르첼로는 주교의 아들, 바르도를 한심한 눈초리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성난 군중들이 몰려드는 와중에도 자기 아버지를 자랑스레 떠벌리고 있길래 찾기 쉬웠습니다."

"놓으래도! 이이익... 넌 두고보자. 공왕도 한 수 접는 사람이 바로 우리 아빠니까!"

결국 마르첼로는 참다 못해 진절머리 난다는 태도로 바르도를 집어던졌다.

엉겁결에 땅바닥을 구른 바르도는 성난 얼굴로 쏘아붙이려 했다. 새하얗게 탈색된 제 아버지를 임시 법정 위에서 보기 전까진.

바르도는 화내기보다 깜짝 놀랐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아빠? 그 후줄근한 튜닉은 뭐에요?"

"...."

"평소에 비단 아니면 입지 않으셨으면서... 옆에 꼬마는 뭔데 아빠 의자에 앉아있어?"

여기까지 들은 나르바는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았다.

나르바는 딱딱하게 굳은 바르나르도의 옆구리를 손가락 끝으로 콕콕 찔러대며 실컷 웃어댔다.

"자식 농사 잘 했네. 누가 봐도 자식이야."

"..."

"근데 주교직까지 올라간 성직자가 아무 생각없이 싸질렀을 리는 없고. 비슷하단 이유로 전임 주교의 자식임을 사칭하는 무뢰배 아닌가? 성흔을 보유한 신실한 성직자가 봤을 땐..."

"주, 주교후님."

이 세상에서 연좌제는 미개하고 야만적이며 악독하고 잔인한 법률이다. 주군을 향한 충성맹세를 어긴 반역자조차 연좌제의 굴레를 쓰진 않는다.

그러나 연좌제가 적용되는 대죄가 하나 있었다.

"교회와 성직자가 지닌 권위와 도덕성에 흠결을 내려는 이교도 혹은 이단 같은데."

럭스 스텔라와 인세를 부정하면서 이세를 추종하면 이교도. 럭스 스텔라와 인세는 인정하지만 사익을 쫓아 이세와 결탁하면 이단.

이 두 가지 혐의 모두 배교의 대죄라 하여 연좌제가 적용된다.

나르바의 발언은 배교의 대죄를 적용하겠단 엄포였다. 이에 바르나르도가 물에 잠겨 익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 순간, 나르바는 남들이 듣지 못할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교황청은 유바스를 완전히 고꾸라트릴 생각이 없다. 이 나라도 유바스를 무너트릴 힘이 없고, 다른 공국들은 아직 사태를 가늠하며 관망 중이지. 사태를 전환하려면 서로 물러나거나 나서서 타협할 계기가 필요하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정보들.

바르나르도는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슨 머리를 힘차게 굴리며 나르바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했다. 다행히도 나르바는 몹시 친절한 사람에 속했다.

"나는 유바스가 저지른 배교의 혐의를 네놈에게 덤터기 씌우려 한다. 공식적으론 부정부패와 민중의 분노로 알려질 테지. 자세한 건 교황청과 계속 대화를 나누며 조율하겠지만, 무리수를 거듭해 대내적으로 안정을 꾀해야 하는 유바스 입장에서도 교회와의 관계 회복이 나쁜 건 아닐 터. 이 시기를 노려 서로 섣부른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다섯 공국 간의 평화를 주선할 계획이다."

"...제가 얻는 게 뭡니까?"

바르나르도는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바르나르도는 더없이 간절한 얼굴로 나르바를 바라봤다.

그러자 나르바는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법정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빠! 왜 그러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대체!?"

"못된 놈을 죽여라!"

"매달아버려!!!"

전임 주교 바르나르도의 사생아, 바르도는 주변을 둘러보며 당혹스러움에 가득 차 계속 외치고 있었다. 단지 성난 군중들 사이에 있어서,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아 메아리처럼 흩어질 뿐이다.

나르바는 사생아 바르도를 바라보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철부지 사생아와 네 사이의 모든 관계를 부정해주마. 배교의 혐의는 적어도 네 사생아를 피해갈 것이다."

한동안 둘 사이엔 침묵이 감돌았다.

주변을 가득 메운 건 성난 군중의 외침이다. 군중은 나르바가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빨리 매달아버리라며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침묵 끝에 입을 연 건 바르나르도였다.

그는 나르바가 최대한의 자비와 관용을 보였음을 잘 알았다.

"주교후님, 저는 주교후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죽는다. 네 자식도 사칭죄로 채찍질 좀 맞을 거다."

"...?"

그리고 나르바는 묘하게 감동한 바르나르도가 달라붙는 걸 단칼에 쳐냈다.

"털어서 죄 지은 게 많으면 배교가 아니어도 죽겠지. 자식이 착하게 살았길 빌어라."

***

"...."

"아, 아빠! 이... 이건 아니지! 놔, 놔! 억..."

우드드득.

목 부러지는 소리가 유달리 선명하게 들렸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난다.

나는 대롱대롱 매달린 두 부자를 보며 그 말을 절실히 실감했다. 마르첼로가 곁에서 읊어준 사생아 바르도의 죄목만 무더기였다.

차라리 배교 혐의 하나로 죽는 게 명예로웠을지 모르겠다.

"아녀자 겁탈에 길가던 상인을 상대로 한 강도, 타인의 집에 침입해 절도하고 무전취식은 기본이고 주교의 자식임을 내세워 재판에 입회한 배심원과 판사들을 겁박.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했습니다."

"그나마 살인은 안 했네."

"실종자 몇몇이 있다는 호소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수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데, 정황상 전임 주교가 은폐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고 고놈 참 잘갔다. 나는 고소함에 입맛을 다시며 매달린 전임 주교를 바라봤다.

"채찍질만 몇 대 치고 끝내려 했는데 자식이 너무 막 살았구나."

"..."

"다음엔 애 교육 좀 잘하고 삽시다."

워낙 개차반처럼 살던 놈들이라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사람들은 매달린 두 부자를 향해 손에 집히는 족족 실컷 던져대느라 바빴다.

"이 시발놈!"

"허어어억... 속이 뻥! 뚫렸다!"

"아주 걸레짝을 만들어야 해!"

중세, 그 야만의 시대.

교수형당하면 시체도 편히 쉴 수 없다. 동네사람들 욕받이나 과녁이 되어 줄창 맞아야 했다. 나는 퍽퍽 터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끌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한테 개지랄하던 놈 하나 보내니 마음이 후련하다. 모여든 사람들도 무척 후련한 모양인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슬슬 피떡된 몸뚱이를 보고 삿대질하기보다 새로운 권력자에게 아첨할 시간이 왔기도 했다.

"새 주교님 만세!"

"역시 소문은 소문이여! 웃을 때까지 종 친다던 미치광이란 소문은 다 거짓이었구먼!"

"내 살면서 이렇게 화끈하고 명쾌한 판결은 처음일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덩실덩실 어깨춤 추는 광경을 보니 되려 이쪽이 훈훈해진다.

그렇게 내가 만족감에 젖어있는 사이, 잠자코 서있던 보니체고가 다가왔다.

"주교후님, 민심을 잡으신 건 좋습니다만."

"?"

"이제 슬슬 공왕 전하께 서임권에 대해 말씀드리러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아.



43. 탕자의 귀환



항상 우중충한 분위기에 한숨 푹푹 내쉬기 일쑤던 사람도 가끔은 웃기 마련이다.

바로 오늘, 집무실에서 소식을 맞이한 애설튼 공왕이 그랬다. 측근인 첩보관 오버트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다.

"...오랜만에 웃으십니다."

"확실히 그런 거 같네."

애설튼 공왕은 책상 위를 오른손으로 훑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덜레드도, 테르베어도 각자 제역할을 충실히 해줬더군. 나르바도 의외의 부분에서 나름 활약해줬고. 형제간 우애가 괜찮은 건 반길 일이지 않나."

특히 장남 에덜레드의 시의적절한 도움이 매우 컸다. 에덜레드는 정식 후계자답게 영주들의 이탈을 막는 걸로 모자라 삼남 나르바의 귀환을 도왔다.

비록 바쁘게 돌아다니는 와중이라 직접 대면해 공치사할 순 없었지만 기특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물론 그렇다해서 다른 자식들의 공훈을 폄하할 순 없었다.

"테르베어도 습격자를 잘 막아줬지만... 나르바 이 녀석.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그 무거운 교황청을 움직인 건지 원."

테르베어야 원래 잘 싸우던 아들이니 감동이 덜했다.

애설튼 공왕이 진심으로 감동한 부분은 나르바가 교황청을 움직인 부분이었다. 성흔이 발현됐다, 그래서 교황청의 비호를 받았다던가. 소문을 떠올린 애설튼 공왕은 흐뭇함에 입꼬리를 계속 씰룩거렸다.

첩보관 오버트는 그런 공왕을 보며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가신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오버트는 양주먹을 불끈 쥐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 안 그래도 그 일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음?"

"나르바 공자님이 교황청의 지원과 비호를 받기 위해 어떤 거래를 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흥미롭군. 그래, 나르바가 대체 무슨 수로 교황청을 설득한 건가?"

자식의 활약상을 듣고 싶어하는 팔불출 아버지가 눈앞에 있었다. 오버트는 울컥이는 심정을 참지 못해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이럴 땐 인상을 지우는 구불구불한 앞머리가 있어 다행이라 안심하면서.

오버트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최대한 느리게, 그리고 또렷하게 말했다.

"거래의 공증인인 일레니풋 주교로부터 온 서신에 따르면."

"일레니풋 주교라면 교황청의 측근일 터. 신빙성이 높아지는군."

"...공자님이 거래하신 건 포위스 교구의 서임권이랍니다."

"응?"

애설튼 공왕이 귀족으로서의 체면도 잊고 반문한 순간이었다. 공왕은 두 눈을 끔뻑이며 오버트를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과연 교황청인가. 이런 뜬 소문을 퍼트려 날 압박하겠단 속셈일 테지."

"...."

"허나 나 애설튼, 분별력 없는 소문과 상대의 겁박에 짓눌리지 않겠다. 나르바가 온전히 돌아오면 전후맥락까지 상세하게 들은 후 판단할 것이다."

애설튼 공왕은 나름대로 능력을 갖춘 수완가였다. 빈약한 지지 기반과 언제든지 이반할 준비가 된 봉신들을 뒀음에도 국체를 보전한 게 증거다.

애설튼 공왕은 타협과 양보만이 능사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땐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나르바를 향한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르바는 곧장 본성으로 귀환한다던가? 듣기로 교황청이 보낸 특사들과 함께 있다던데."

"특사들의 정체가 확실치 않습니다. 행색만 보면 짐작가는 바가 있긴 합니다만..."

"추측의 영역이라도 들어보겠네."

애설튼 공왕의 집요한 질문은 결국 오버트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데다 등장 자체가 황당무계한 일이라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들에 대해서 말이다.

"퍼지는 소문에 따르면 금테 두른 흑색 어깨망토를 착용했다 합니다. 소문이 사실이라 가정할 경우, 어깨망토로 지위의 고하와 권한을 상징하는 교회의 전통을 고려하면... 지금 공자님 곁에는 즉결심판권을 지닌 수도 기사 스무 명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

세상에는 크게 두 개의 법률 질서가 공존한다.

교황청을 주축으로 한 교회법과 지역별로, 세속의 이치대로 흘러가는 관습법. 이 두 법률 체계는 범죄자가 있는 곳의 법률을 따른다는 속지주의를 내세우되 상호존중하며 적당히 타협하곤 했다.

가령 세속 군주 아래서 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주교령에 숨어들 경우, 주교가 처벌하는 대신 범죄자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쫓아내는 식이다.

그러나 교황청은 사안이 몹시 중대하다 여길 경우 이 아름다운 전통을 무시하는 강력한 집행자를 보낸다. 계급적인 의미가 짙은 일반 기사보다 훨씬 단련된 수도 기사들을 말이다.

당연히 세속 권력과의 충돌을 감내해야 하는 만큼 어지간해선 절대 보내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이 움직일 때는 세속 권력과 맞붙길 각오했거나 지역 사회가 제압하지 못하는 배교자를 찾아냈을 때 뿐이다.

잠시 후, 애설튼 공왕은 몹시 심각해진 표정으로 오버트를 올려다봤다.

"오버트 경. 나르바가 에덜레드나 테르베어와 사이가 나쁘진 않았겠지?"

데려온 전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일이었다.

***

떠날 때는 모두가 날 비난했다. 내 사력을 다한 망나니 연기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준 것이다.

간혹 진짜 나를 미치광이로 여긴 자들이 있긴 한데, 그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람은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이 세상보다 훨씬 발전한 현대에서 살던 사람이 바로 나다. 사회상만 보면 거의 천 년을 앞서간 셈인데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친 놈처럼 보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 됐다.

지금, 나는 마차 밖에 모여든 민중을 향해 손을 훌훌 흔들어주느라 바빴다.

"주교님 만세!"

"주교님, 성흔 한 번 보여주세요!!!"

"우리 아이에게 안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땅 갈고 풀 베다 말고 허겁지겁 달려와 이것저것 요청해댔다. 나는 가장 들어주기 쉬운 부탁부터 들어줬다. 내가 장갑을 벗어 손등을 보여준 순간.

"럭스 스텔라, 인세의 별빛이시여!"

"저 신령한 색깔... 진짜다. 내, 내 살면서 성흔을 직접 보게 되다니."

"아이고, 내 돈! 노름을 하는 게 아니었어! 세상에 성흔 있다는 거 다 거짓부렁이라더니 언 놈이 지껄인겨...!"

신이 실재한다는 증거, 성흔을 보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리고 성흔을 직접 본 사람들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좀비떼처럼 뭉터기로 허우적대며 날 만지려 들었다.

"주교님, 한 번만! 한 번만 만져보겠습니다!"

"다 비켜! 내가 만져볼 거야!"

"허억, 헉... 신의 증거... 서, 성흔!"

저 물건너 왜국에서 온갖 인간군상을 맞이한다는 지하아이돌들이 이랬을까 싶다. 다행히 내게는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못할 최강의 전력들이 있었다.

보니체고와 마르첼로를 위시한 기적 심사단이 두 눈을 부릅뜨며 칼자루를 깔짝이기만 해도 소란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냥 주교가 아니라 주교후님이십니다. 병자와 민중을 돌보시는 일은 공왕 전하께 부임을 알린 이후 시작하실 예정입니다. 우선 다들 길을 비켜주시지요."

"시찰은 곧 이뤄질 겁니다! 다들 일단 물러나십시오!"

덕분에 길은 금방 금방 났지만 되려 내 마음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아버지, 애설튼 공왕에게 말하려 하니 마음 한 구석이 쿵하고 짓눌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거짓 하나 없이 나 자신에게 사실을 털어놓을 때가 온 모양이다. 알게 모르게 외면하고 부정했던 사실.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존을 겨냥한 채로 말이다.

"존, 우여곡절 끝에 가까워진 너라서 말해주마."

"저. 주교님. 저희 다시 멀어지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보이는 모습과 달리 부모님 속을 자주 뒤집던 말썽꾸러기였다."

"?"

존이 혼란해하는 게 당연하다. 내가 중세틱 이세계로 빙의하기 전, 현대인으로 살던 때의 일이니 말이다. 아버지, 애설튼 공왕을 뵈러 가는 길이다 보니 그 시절 기억도 생생히 떠올랐다.

때는 바야흐로 명랑 여덟 살. 파릇파릇하게 자라나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적 일이다.

'너 진짜 이러고 살래? 받아쓰기 0점이 뭐야?! 이리 와, 엄마한테 좀 맞자!'

'엄마! 저 맞기 싫어요! 때릴 거면 그냥 팬티 차림으로 동네 돌아다닐 거에요!'

'너, 너! 그래! 어디 한 번 해봐 욘석아!'

그 때의 나는 서예를 즐기시던 할아버지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듣고 있었다.

남아일언 중천금!

사나이라면 무릇 자신의 말에 천금의 무게가 있음을 알고 항상 주의하되 뱉었다면 반드시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가 해주신 말씀대로 살았다.

팬티만 입고 동요를 부르며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주걱을 드시던 어머니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 보니 부모님도 참 쉬운 분이 아니셨다.

결국 주걱을 피해 동네 열 바퀴 더 돌고온 뒤에야 몽둥이찜질을 피할 수 있었지.

"그때와 달리 중대한 사안이라 그런지 마음이 심란하구나."

"그...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그때도 중요하지 않았겠슴까?"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예, 뭐. 쇤네가 듣는 걸로 괜찮으시다면야."

존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존의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

그리하여 이뤄진 부자상봉은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나르바! 무사했구나!'

"아버지,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본성 앞에 도착하자마자 성문이 열리더니 아버지가 뛰쳐나오셨다. 그걸로 모자라 마차에 있던 날 번쩍 들어올리고선 빙글빙글 돌기까지 하신다.

열두 살 소년이라 결코 가볍지 않을 텐데도 지친 기색 하나없이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바퀴 빙글빙글 돌고서야 날 내려놓으셨다.

"장하다. 네가 해낸 일들은 네 또래가 결코 감당 못했을 일들이란다. 항상 놀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널 알아봐주지 못한 듯해 미안하고 또 미안하구나."

내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 애설튼 공왕의 손길은 부드럽고 따스했다. 과연 중세 상위 1% 아버지다운 면모였다.

문제는 내가 중세 하위 1% 자식이란 데에 있었다.

물론 내로라하는 패륜아들에 비하면야 별거 아니지만, 거의 1년만에 만난 부자간의 감동적인 해후를 단숨에 냉각시킬 정도는 된다. 그래서 쉽게 말문을 트지 못하던 찰나였다.

"주교후님."

"..."

"주교후?"

나는 의문을 드러내는 아버지를 보며 착잡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교황이 보니체고를 보냈는지 알 거 같다. 이 새끼는 융통성이란 게 티끌만큼도 없었다. 마르첼로와 다른 사제들마저 경악해 질색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휘휘 내저을 정도로.

결국 나는 크게 심호흡 한 번 했다.

"아버지."

폐가 빵빵 불어오를 정도로 힘껏 숨을 들이마신 뒤.

"저 유산 먼저 가불 받겠습니다!"

당당히 선언했다.



44. 괘씸죄



대략 1년. 내가 이 몸에 빙의하고 흐른 시간이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배 부른 미혼모를 아내로 맞을 뻔하지 않나, 몇 차례의 습격을 피해 달아나질 않나... 와중에 사람도 적지 않게 썰었다.

하나같이 사람을 변화시키고도 남을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그 수많은 고난 끝에 찾아온 안락한 휴식 시간. 나는 차분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미처 느끼지 못한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1년만에 돌아온 본성이었고 내 방이었다. 처음 눈뜬 곳이다 보니 감상에 젖어들기 쉬웠다.

21세기 현대 지구를 살아가던, 박학다식하고 교양까지 갖춘 문명인으로서 응당 느꼈어야 할 수많은 감상들을 말이다.

특히 수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산적 떼를 돌파하던 순간.

나는 내면에서 메아리치는 현대 문명인의 간절한 목소리를 매몰차게 외면하고 말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란 말로 다독이고 효율을 생각하라 다그치면서.

결국 모든 게 끝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후회하며 곱씹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다 담가버려야 했다."

비통어린 후회가 뼈에 사무쳤던 걸까. 탄식이 절로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성전의 서약을 날로 먹을 수 있던 기회를 날린 게 은연중에 회한이 되어 있었나 보다. 낯익은 발소리가 다가온 건 바로 이때였다.

"공자님은 아직 어리시군요. 고귀한 혈통이라 해도 어렸을 적부터 뭐든지 해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오, 에드위나. 잘 지냈니?"

"예. 공자님께서 안 계신 동안 자알 지냈습니다."

에드위나가 희끄무레한 유리잔에다 포도주를 담아왔다. 나는 기쁜 마음을 주체 못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존은 이런 걸 직접 챙겨주는 경우가 드물었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시중을 받으니 기쁘구나."

"...존이라 하시면, 연금술사에게 발모약을 사려한 그 하인 말입니까?"

"그래. 덜 떨어진 또라이 같지만 은근히 쓸모 많은 친구다. 가끔 짜증날 때도 있지만 쉽게 배신은 안 할 친구."

홀짝. 한 모금 마시니 썩 고급진 포도주는 아니었다.

조그마한 씨앗 조각이나 알갱이가 씹히는 저품질. 만일 아직도 망나니 연기 중이었으면 대번에 뿜어버렸을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최고급 아니면 현대인 입맛엔 다 도토리 키재기다.

나는 찌꺼기 섞인 포도주를 우물우물 씹어마시며 달큰함에 취했다. 겸사겸사 왠지 모르게 냉막한 에드위나를 달래기로 마음 먹었다.

"에드위나."

"예, 공자님."

"내가 뭔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이냐?"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상처입힐 수 있다. 배려심과 이해심으로 가득 찬 현대인인 나조차 예외는 아니다.

아예 척지고 살 거라면 상관없지만, 에드위나는 앞으로도 원만하게 지내고 싶은 상대였다. 차라리 지금처럼 직설적으로 묻고 오해를 푸는 쪽이 나으리라.

그리 여겨서 던진 질문이었는데 정답이었나 보다.

에드위나는 구슬같은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면서 앉아있는 날 내려다봤다.

"공자님... 진지하게 물어보신 거군요."

"듣고 있다."

"...지금 성에서 사람들이 공자님을 부르길."

"경청하마."

나는 어떠한 비평이라도 겸허히 수용하겠노라 다짐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였다. 물론 멘탈이 살짝 아플 테지만, 이 악물고 감내해야 할 일이다.

나는 곧 돌아올 냉혹한 비평에 맞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열두 살에 아버지를 혓바닥으로 쓰러트린 패륜아랍니다."

설사 그게 팩트에 기반한 선동과 날조라 해도 말이다.

***

근래 들어 아침녘 제도에 알음알음 퍼지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나르바 오른 스트레고스 글레리오 포위스.

이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나르바? 들었지. 새로운 성인 후보시라며? 이게 얼마만에 나오는 지역 성인이야?"

신앙심 깊은 신실한 신도들은 성 일레니오 이후 수백 년만에 진지하게 거론된 성인 후보란 데에 주목했고.

"카르달이 놓쳤다는군."

"전하, 그럼."

"카르달이 쌓아올린 군공과 정직하게 실패를 보고했단 점을 높이 사 3개월. 가택연금으로 끝낸다. 다만 지휘권은 다른 이에게 줘라."

"예, 전하!"

바이르 오른 유바스.

아침녘 제도 최강의 세력, 유바스 가문의 가주는 심드렁하게 넘겨들었다. 물론 속내는 조금 달랐다. 휘하 가신단에 티를 내지 않았을 뿐, 나르바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눈썹을 꿈틀거렸으니까.

"들었으면 나가라. 홀로 생각할 일이 있다."

답도 허락되지 않았다. 가신들은 아무 말 없이 몸을 숙인 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바이르는 모두를 물린 뒤, 한동안 턱을 괸 채 지도를 내려다보다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교황청이 공멸의 길을 택하지 않아 다행이군."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나르바와 가까이 지내는 포위스 공국, 특히 본성의 사람들은 침 마를 새도 없이 나르바에 대해 떠들어댔다.

따로따로 나열해도 등골이 오싹할 수준의 괴담같은 기행들을 뭉터기로 엮으면서 말이다.

"나르바 공자님...? 그, 짐 쌀 준비하라길래 짐 싸드렸더니 지금 쫓아내는 거냐면서 역정 부리신 그 분?"

"넌 뭘 잘못 아는 거 아냐? 난 공자님이 웃을 때까지 종치고 다니셨다 들었는데?"

"헛소문들 떠들지 말고. 내가 알기로 공자님은 하인들이 일 제대로 하나 감독하시겠답시고 한나절을 붙어계셨댄다."

"아이고, 이 사람들 큰일날 소리하네."

폭풍같은 귀환에 다들 웅성대는 사이,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 힘든 이 소문들을 한데 엮은 건 다름아닌 존이었다.

존은 서로 내가 맞네 우겨대는 하인들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지금 공왕 전하를 말 몇 마디로 기절시킨 희대의 기린아, 주교후 나르바님을 업신여기는 겁니까!!!!"

존은 나르바의 행적을 과소평가하고 축소하려드는 사람들을 훈계하며 진실을 전해줬다. 다행히 존의 헌신적인 노력은 곧 빛을 봤다.

얼마 안 가 포위스 공국의 사람들은 나르바를 가리켜 이렇게 불렀다.

열두 살에 아버지를 쓰러트린 희대의 기린아, 라고.

참 다행스럽게도 나르바의 아버지, 애설튼 공왕은 잠깐동안 혼절했을 뿐이었다.

그는 하루가 지나자 말짱한 모습으로 정신을 차리고선 중세 상위 1% 인성과 가족애를 갖춘 아버지답게 자상한 면모를 드러냈다.

자신의 침실에 나르바만 따로 불러 침착하게 다독인 것이다.

"나르바. 네게 근신을 명한다. 내가 따로 명하기 전까진 절대 나오지 말아라."

한때 공국을 돌아다니며 약탈자들과 맞서싸우던 기사 애설튼.

그는 끓어오르는 외침을 핏대선 목 아래 꾹꾹 눌러담았다. 대신 파르르 떨리는 입술만 움직이며 사랑하는 자식을 향해 무언의 경고를 남겼다.

절 대 로.

***

나르바의 폭풍같은 귀환은 포위스 공국에게 커다란 난제를 떠넘겼다.

애설튼 공왕은 측근인 오버트 경을 대동한 채 핏줄 선 이마를 꾹꾹 누르며 복도를 걸었다. 애설튼 공왕은 상처입은 맹수처럼 신음하면서 아주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르바는 조용히 있나?"

"...예. 정말 아주 조용히 계십니다."

"...."

차라리 설치기라도 하지. 그랬다면 시원하게 반쯤 패죽이는 정도로 끝냈을 텐데.

애설튼 공왕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할 소망에 괴로워했다. 포위스 공국만 난제를 받은 게 아니었다.

나르바는 과연 미운 자식인가 고운 자식인가.

놀라운 결단력과 재빠른 판단력에 역시 내 자식이라며 장하다는 느낌 반, 허락도 없이 저질렀단 사실과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 받아내겠다는 괘씸함에 환장하겠단 느낌이 반이었다.

"교황청의 특사들은?"

"...응접실에서 사열하고 있단 보고입니다."

"이게 무력시위랑 뭐가 다르단 말이냐."

교황청 직속의 수도 기사만 스무 명이랜다. 애설튼 공왕 입장에선 무례하다며 내칠 수도 없었다.

이래나저래나 자식인 나르바를 성인 후보로 추대했을 뿐 아니라 오는 길을 안전하게 호위하기까지 했다. 입은 은혜가 있다 보니 무력 시위라며 세속 권력의 독립성을 주장하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차기 주교로 내세우기까지.

만일 교황청이 원하는 게 서임권이 아니었다면 이쪽에서 쌍수들고 반겼을 일이다. 서임권만 아니었다면...

"...전하,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

"물론 공자님의 무계획적이고 돌발적인 결단이었습니다만, 설사 전하께서 다른 주교를 서임한다 하신들 휘하의 봉신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

애설튼은 그 말에 마냥 부정못하는 처지가 한스러웠다. 봉신들이 본 애설튼은 파직당한 주교 바르나르도와 결탁해 형의 자리를 빼앗은 찬탈자였다.

바르나르도의 전횡에 질린 애설베어가 바르나르도를 파직하려던 찰나, 애설베어는 후계를 남기지도 못하고 돌연사해버렸다. 이제 누가 계승하냐를 놓고 다들 팔 걷어올리는 와중에 문제 그 자체인 바르나르도가 나섰다.

애설베어가 남긴 유언을 대신 받았다면서 말이다.

봉신들이 볼 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친형인 애설베어의 후계없는 급사와 갑작스레 주교가 들고 나타난 유언장에 이르기까지 전부 석연찮았으니까.

"교황청의 권위를 내세워 나르바 공자님을 주교로 서임한다면 다소의 반발은 있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공자님께서도... 이리 될 걸 염두하셨을 겁니다. 사정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오버트는 음울한 인상의 앞머리를 만지작대며 말을 마쳤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그러다 애설튼 공왕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오버트, 그대 말대로군.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나르바가 아주, 몹시 괘씸하긴 하지만!"

아직 분노가 전부 가신 건 아니다.

애설튼 공왕의 눈동자엔 여전히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렇지만 가슴 한 켠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기대감과 흐뭇함이 안개처럼 분노를 가렸다.

"멋대로 떼간 만큼 이쪽도 확실하게 부려주면 되겠지."

"...."

자식은 아버지를 닮는다. 당연히 아버지도 자식같은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빈약한 정통성에 시달리느라 그렇지, 본래 기사출신답게 한 번 다짐하면 무소의 뿔처럼 직진하는 자가 애설튼 공왕이었다. 오버트는 내심 나르바를 연민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변호는 다했습니다...'

응접실에 도착한 건 공왕의 다짐이 끝난 이후였다.

그리고 애설튼 공왕과 오버트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금테 두른 흑색 어깨망토의 사제들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문을 바라본 것이다.

그 정중앙에 심사단장 보니체고가 침착한 모습으로 합장하고 있었다.

"별 보는 까마귀. 성 일레니오의 뜻을 받들어 가장 먼저 럭스 스텔라를 받아들이신 포위스의 자손을 뵙습니다."

"...이게 교황청의 방식인가?"

"세속적인 만남을 원하신다면 그리 하지요."

보니체고가 한 발 물러섰다. 대신 나선 건 피곤한 인상의 부단장 마르첼로였다.

"전하와의 협상을 주도할 마르첼로라고 합니다."

마르첼로는 품에 낀 두꺼운 법전을 응접실의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45. 세속의 논리



포위스 공국과 교황청 간의 협상은 한동안 지지부진했다.

서임권이 지닌 의미를 양측 모두 잘 알기에 생긴 일이었다. 특히 애설튼 공왕은 불리한 처지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탐탁찮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성하께서 많은 배려를 해주셨음은 알겠네. 하지만 포위스 교구의 서임권을 우리 가문이 가진 게 자그마치 400년일세. 400년 동안 아무 말 없다가 이제 와서 서임권을 내놓으라는 저의가 뭔가?"

애설튼 공왕이 공격적인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교는 단순히 사람들을 위로하는 정신적 지주가 아니다.

이 시대, 이 세상에서 럭스 스텔라를 섬기는 성직자들은 사제 그 이상의 역할과 사명을 지닌 지식인 계층이었다. 그 중에서도 주교는 보다 세속적인 임무들에 관여했다.

행정, 입법, 사법, 자선, 교육, 연구, 사목.

주교가 관여하는 일곱 가지 항목만 봐도 그 영향력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세속 군주일수록 주교의 영향력이 무척 컸다.

더군다나 세속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수도회들을 관리하는 것도 주교다. 영향력만 놓고 따지자면 왕작 이상의 군주들이 임명한다는 재상에 가까운 위치였다.

이처럼 주교가 지니는 권한과 상징이 너무 큰 탓에 애설튼 공왕도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하지만 쉽게 물러설 수 없는 건 교황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심사단의 부단장 마르첼로는 거뭇거리는 눈 아래 기미를 꿈틀대며 맹반격에 나섰다.

"본래 주교의 서임권은 교회에 있었습니다. 시대가 흐르고 신앙이 얇아지면서 성직자의 기본 조건인 성흔 발현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 데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세속 군주들에게 임의적으로 판단을 맡겼을 뿐입니다."

교황청은 초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무기로 휘둘렀다.

교황청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성직자들은 전부 성흔을 발현해야 한다. 하지만 신앙이 쇠락하며 성흔이 드물어졌으니 어쩔 수 없이 교회가 양보했다는 입장이었다.

애설튼 공왕은 이 말을 듣자마자 등받이에 기대며 비웃음을 흘렸다.

"성문화되지도 않았던 초대 교회의 관습을 빌미 삼겠다고?"

"그러는 전하께선 너무 교만하십니다. 논란 많은 승계로 위태로운 전하를 위해 성하께서 많은 배려를 보여주셨는데 이리 매몰차시다뇨."

"당연한 일이다. 서임권을 내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쉽게 물러선다면 선대 공왕들을 무슨 낯짝으로 뵙겠는가."

"전하께서 가문을 그리도 지극히 생각하셨다면 전하의 형제, 애설베어의 죽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셨어야 했습니다."

그 말에 애설튼 공왕의 눈동자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선왕 애설베어의 죽음은 애설튼 공왕의 역린이다. 등 뒤에 시립한 채 잠자코 지켜보던 오버트는 어느새 뒷짐진 손을 꼼지락대며 식은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전하..."

오버트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성하께서도 날 의심하고 계신가? 나, 애설튼이 제 형제를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고?"

이미 눈 돌아간 애설튼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첼로를 포함한 기적 심사단은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거운 쇳덩이처럼 제자리를 지키며 애설튼 공왕을 바라봤다.

"성하께선 전하의 승계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나 전하의 봉신들, 애설베어의 충신들은 달리 생각할 것입니다."

"날 염려하는 척하지 말아라."

애설튼 공왕은 손을 휘휘 내젓다 그대로 이마를 짚었다. 공왕은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역린을 자극당한 탓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르첼로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눈동자를 굴렸다.

마침 심사단장 보니체고도 비슷한 시기에 시선을 옮기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찰나의 순간, 입술만 뻥긋대며 간단히 의사를 주고받았다.

'단장님 판단은 어떠십니까?'

'자리를 노리고 제 형제를 살해할 만큼 모진 사내는 아니다.'

선대인 애설베어의 갑작스럽고 의문스런 죽음은 애설튼 공왕을 잠재적인 친족 살해자로 몰아갔다. 애설튼 공왕은 애설베어의 죽음을 추도하고 오랫동안 기려왔지만, 사람들은 그 의도를 쉽게 믿지 못했다.

그마저도 위선이 아닐까 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애설튼 공왕이 가정에 충실했던 건 가족을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과 친족 살해자란 오명을 씻기 위해서일지 모른다. 그리고 심사단이 파견된 목적 중엔 애설튼 공왕의 진의를 파악하라는 밀명도 있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보니체고는 짧은 순간동안이지만 특유의 통찰력으로 공왕을 살핀 뒤 결론을 내렸다.

'권력을 견제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주교후와 반목할 성정은 아니다.'

이익은 때때로 사람의 마음을 왜곡시키고 무너트린다.

같은 피를 나눈 혈육조차 재산을 나눌 순 없다며 암암리에 죽이고 죽어가는 세상이었다. 더 빨리 권세를 누리고 싶어하는 후계자와 자식에게 권좌를 뺏기기 싫은 군주 간의 골육상쟁이 드물지 않은 세상.

고작 부자지간이란 이유로 불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는 자가 어리석다. 교회는 오랫동안 인세를 수호해왔기에, 누구보다 인세의 빛과 어둠을 가늠해왔기에 잘 알았다.

'주교후의 조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애설튼 공왕을 배제하는 대신 포섭하는 쪽으로 가닥잡는다.'

'예, 단장님.'

보니체고의 지시를 전해들은 마르첼로는 마른 기침을 몇 차례 뱉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제스쳐였다. 그제서야 고개 숙이고서 앓는 소리내던 애설튼 공왕이 흥미를 보였다.

쩔쩔 매던 오버트도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마르첼로는 방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눈빛과 미소로 애설튼 공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물론 전하의 어려움을 기회 삼아 서임권을 되찾으려는 성하의 뜻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수도?"

"음. 원망스러우실 겁니다."

마르첼로는 여전히 삐딱하게 구는 애설튼 공왕을 향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성하께선 결코 사사로운 이익으로 이러심이 아닙니다. 성하께서 보여주신 배려를 생각하십시오. 차기 주교후로 전하의 삼남이신 나르바 공자를 지목했을 뿐 아니라 교회가 실을 수 있는 최대한의 권위까지 세워주셨습니다."

"...내가 모를 거 같나? 유바스를 도와주다 유바스가 기어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니 대안을 찾는 것 아닌가."

"그 유바스에 맞설 수 있는 영향력과 존재감을 포위스 가문에 주신 겁니다."

마르첼로의 매끄러운 혓놀림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역린을 자극당해 날카로워진 애설튼 공왕이 한 수 물러설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고 애설튼 공왕이 날선 모습을 전부 잃은 건 아니었다. 공왕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유바스를 파문하면 되지 않나?"

***

의문을 품은 게 여태껏 유바스에게 시달리며 생긴 적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왕은 꽤나 신랄한 말투로 교회의 모순을 지적했다.

"유바스를 파문하기만 해도 잠자코 지켜보던 다른 공국들이 당장 군대를 일으킬 테고, 유바스 내부의 불평분자들도 합세해 갈기갈기 쪼갤 터. 교회 입장에선 잘게 쪼개진 공국들을 다스리는 쪽이 훨씬 수월한 일일 것이다."

"..."

애설튼 공왕이 곰곰히 생각해봤을 때, 아침녘 제도에서 교회가 우세를 점하는 최고의 방법은 갈라치기였다. 누구도 통일하지 못하게 방해하면서 혼란에 휩쓸린 사람들을 감언이설로 유혹해 합류시키면 될 뿐이다.

누구 하나 강성해지면 도덕적인 흠결을 꼬집어 반발하는 자들을 규합시킨 뒤 무너트리고. 이런 과정을 거듭하며 교회의 권위가 자연스레 세속 권력을 압박하도록 만들면 되는 일이다.

실제로 아침녘 제도의 세속 군주들이 가장 염려하는 미래이기도 했다. 과연 이런 생각을 지적당했을 때 교회가 어찌 나올지 궁금하지만, 후일이 두려워 차마 묻지 못하기도 했고.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마르첼로는 조그마한 한숨과 함께 이를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했다.

"성하께선 인간의 분열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말은."

"전대와 전전대, 그 훨씬 이전부터 교황청이 유바스를 비호한 건 별다른 이해관계 없이 오직 아침녘 제도의 통일과 안정에만 몰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세의 잔당들로부터 인세를 수호하기 위해... 말입니다."

마르첼로가 뒷말을 흐린 건 애설튼 공왕과 오버트, 두 사람의 반응이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뭐 씹은 마냥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애설튼 공왕과 오버트는 세속 권력과 교회가 본질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언행으로 드러냈다.

"성하라 해도 사람의 두려움을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모습은 변치 않는군."

"...교회는 항상 똑같군요. 천 년도 전에 끝난 이세를 들먹이다니."

공왕과 오버트가 짜증을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세가 저물고 인세의 여명이 떠오른지 1208년째.

옛 주인으로 군림했다던 이세의 종족들은 전설이나 신화로만 남았고, 이교도들은 교회의 끈질긴 추격에 하나둘씩 사멸하는 중이다. 게다가 악마라는 어휘로 폄훼당한 이세의 옛 신들은 철저한 기록말살 끝에 조금씩 잊혀지는 중이었다.

이교도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다는 변방, 아침녘 제도에서조차 공식적인 이교도들은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렇다보니 교회에 속하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이 볼 때 이세는 옛적에 끝난지 오래였다.

반면, 교회에 적을 올린 사제들은 달랐다.

여태까지 침묵을 지키며 사열해있던 심사단원들 모두 조금이나마 분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움켜쥔 주먹 위로 힘줄이 솟구친 것이다. 협상을 주도하던 마르첼로와 뒤로 물러선 보니체고도 마찬가지였다.

마르첼로는 방금 전까지 보인 차분한 태도를 집어던지고 눈매를 사납게 끌어올리며 언성을 높였다.

"이세는 저물었으나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세의 황혼, 인세의 여명이란 말에 담긴 의미를 멋대로 곡해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아직."

보니체고가 어깨 위로 손을 얹어 제지할 때까지 말이다.

"단장님."

"세속의 인물에겐 세속의 논리로. 주교후의 주군이자 동맹이 되실 분이니 성하께서 염려하시는 바를 시원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니체고는 흥분한 마르첼로를 대신해 애설튼 공왕을 마주봤다.

"유바스는 대해 너머의 이교도들을 막을 방패입니다."

"방패? 그 무도하고 위아래없이 패악질을 일삼는 무리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애설튼 공왕이 힐난을 퍼붓었지만, 보니체고의 반응은 단호하기 그지 없었다.

"예. 교회는 일찍부터 아침녘 제도의 불안정한 정국이 이교도의 발호를 돕는다 여겨 통일을 주도해왔습니다. 유바스는 그 중에서 기존 이해관계나 논리와 상관없이 신실한 신도로서, 아침녘 제도의 통일을 기원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꼴인가. 자네들 말대로면 테르베어가 베어넘기는 자들은 이교도가 아니라 어디 연극놀이하는 철부지들이었나 보군."

이미 해안가로 쉴새없이 쳐들어오는 약탈자들 때문에 진절머리난 애설튼 공왕다운 반격이었다.

만일 보니체고의 뒷말을 듣지 못했다면 나름 만족했을 것이다.

"추산 10만입니다."

"...?"

"대해 너머에서 이교도들 간의 항쟁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은빛 늑대 망토. 최소 5만의 무리를 이끄는 자. 성하께선 항쟁이 완전히 끝날 경우 10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판단하셨습니다."

애설튼 공왕과 오버트는 잠깐동안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자릿수가 다르다.

그 강대하다는 유바스조차 5만까진 동원하지 못하리란 게 아침녘 제도 군주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 와중에 최소 5만에서 10만까지 각오하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뒤에 이어질 내용에 비하면 충격이 덜했다.

"그리고 은빛 늑대 망토는 헌신 5단계로 추정됩니다."

46. 복주머니 터짐



아득히 먼 옛날, 이세라 불리던 시절 인간은 이종족들과 함께 어울리며 살았다.

특출난 면모가 없어 수많은 신들에게 외면받은 채로 말이다. 신들에게 외면받은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첫 번째, 이세의 종족들에게 복종을 맹세하여 그들의 하인이자 인신공양을 위한 제물로서 살아간다.

두 번째, 신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수많은 동포들을 제물로 바친다.

이러한 방법론의 차이는 금방 두드러졌다. 외계에서 도래한 신, 럭스 스텔라가 강림한 순간 세상은 이세와 인세로 나뉘었다. 하지만 인간 모두가 인세에 가담하진 않았다.

제물로서 살아가던 인간 대다수는 럭스 스텔라의 이름 아래 결집해 인세를 꿈꿨다. 반면, 이미 신들의 총애를 얻은 인간은 외계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그들의 현세를 지키고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모두가 입장을 고수한 건 아니다.

인세를 꿈꾸던 자들 중에도 이세의 옛 신들이 약속한 축복에 눈이 멀어 배교한 자가 있었다. 옛 신을 섬기던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세가 지속되는 한 인간은 영원히 최약체로 살아가리란 사실을 깨닫고 인세에 투신한 자들도 있었다.

-보니체고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애설튼 공왕은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유바스를 파문하지 않는 이유, 포위스가 서임권을 넘겨야 하는 까닭, 그리고 대해 너머의 이교도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단 사실과 연관있나?"

빙빙 돌려 말하는 건 교회에 속한 이들의 안 좋은 버릇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서없는 것처럼 보이는 설명을 늘어놓는 게 주특기였다. 때때로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정도로.

하지만 이런 화법은 상대의 주의를 늦추기 위해, 또 상대가 먼저 조바심을 내도록 유도할 때 유용하다. 보니체고는 애설튼 공왕의 인내심을 충분히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화제를 돌렸다.

"유바스는 배교자 출신입니다."

"나르바를 통해 얼추 들었네. 이세의 유물을 멋대로 이용했다고."

애설튼 공왕은 다 아는 사실을 왜 말하냐는 핀잔을 살짝 돌려말했다. 보니체고가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식의 화법을 구사하리라곤 예상 못해서였다.

"유바스는 600년 전, 인세의 별빛이 닿기 전 이 땅에 존재했다 알려진 인간 왕국. 그 나라를 멸망시킨 이교도의 후손입니다."

"뭐?"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년 전, 대해 너머에서 벌어지던 상잔과 만행에 질려 아침녘 제도로 건너오며 개종을 천명했습니다. 대해 너머의 정세와 이교도 잔당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을 함께 넘기면서."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무수히 많은 소문들이 떠올랐다.

유바스. 기원이 불분명한 신생 가문. 교황청의 압도적인 비호를 받으며 보신적이던 기존 지역 귀족들을 병합하고 강대한 군세를 이룩해낸 군도 최강의 세력.

애설튼 공왕과 오버트는 어느새 서로를 마주보며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가장 먼저 냉정을 되찾은 건 첩보관 오버트였다. 드디어 퍼즐 조각이 모두 맞춰지고 있었다.

"그 천박하고 무도한 성정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만 합니다."

"음."

애설튼 공왕은 길게 말하는 대신 헛기침 한 번으로만 짧게 답했다.

귀족이라기엔 지나치게 짧은 이름부터 시작해 툭하면 힘에 의존하는 성향까지. 확실히 전통있는 명문가라기보단 야만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설마 20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러고 살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애설튼 공왕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진절머리냈다.

"하마터면 그런 놈들과 통혼할 뻔 했다니. 가문에 지우지 못할 수치를 남길 뻔했다."

"..."

오버트는 순발력을 발휘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혼인이 이뤄진 적 없던 걸로 처리됐으니 공왕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때로는 사실을 지적해봤자 아무런 영향도 끼지치 못하는 법이었다.

보니체고는 어깨 한 번 으쓱인 뒤 뒷말을 이었다.

"어쨌든 유바스의 개종은 교회가 대해 너머 이교도들을 명확히 인지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이후 유바스와 교회는 서로가 지닌 지식과 힘을 백분 발휘해 아침녘 제도의 통일과 국가 건설에 최선을 다했지만, 지난 일레니풋 주교령의 서임권 논쟁에서 입장 차이가 생기고 만 겁니다."

"입장 차이?"

"유바스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힘의 차이가 분명하니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이교도들과 협상한다. 이교도들은 유바스의 영역을 존중하고 보전하며, 유바스는 자기 영역 바깥에서 럭스 스텔라 신앙의 무조건적인 수호를 포기한다. ...아주 이단적이고 괘씸한 생각이지요."

얼핏 보면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고급지게 다듬어진 어휘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기 전까진 말이다. 애설튼 공왕은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인물이 아니었다.

"시간 끌기. 다른 공국들을 미끼로 내던져 힘이 소모되길 기대하는 거로군. 이뤄져봤자 힘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 가차없이 찢길 허울 뿐인 조약일 테고."

"교회의, 성하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교황청이 수도 기사 스무 명이란 전력을 보낸 이유. 본론이 여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성하는 아침녘 제도의 통일이 지역 귀족들의 반발로 이뤄질 수 없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전히 최대한 많이 병탄해야 한다는 유바스와 달리, 기존 공국 체제를 견고히 유지하여 하나의 거대한 방위 동맹으로 발전시키려 하십니다. 동시에 기나긴 전면전을 각오하고 본토에서 지원물자를 비축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침녘 제도의 통일보다 이교도들의 침공이 먼저 시작되리라. 암울한 미래를 확신한 교황청은 여전히 하나의 국가를 외치는 유바스와 다른 노선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보니체고는 기적 심사단이 아니라 교황이 보낸 특사로서 말하고 있었다.

"방위 동맹 체제를 위해서라면, 성하께선 몇몇 교구를 제외한 아침녘 제도 모든 교구의 서임권을 포기하실 생각이십니다."

"...우리 가문만 빼놓고?"

울컥한 애설튼 공왕이 자신도 모르게 쏘아 붙이자.

"전하, 서임권의 회수에만 연연하지 마십시오. 성하께선 성 일레니오의 첫 번째 추종자이자 유바스 다음으로 일레니풋에 가까운 포위스를 최후의 보루로 선정하셨습니다. 배교의 위협과 이교도 침공이 현실화된 이 순간, 상륙 거점인 일레니풋은 날이 갈수록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거듭날 터."

보니체고는 교황청이 그리기 시작한 큰 그림을 보여줬다.

"성하께선 궁극적으로 일레니풋과 배후지 역할을 맡을 포위스 교구의 병합을 추진하고 계십니다."

"!"

그제서야 삐딱하게만 굴던 애설튼 공왕도 눈빛을 바꿀 수 있었다. 권력의 움직임에 민감한 첩보관 오버트도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보니체고를, 기적 심사단을 일제히 둘러봤다.

오버트는 자신의 주군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서임권이 세속 군주에 묶여 있을 경우, 일레니풋 주교까지 겸직했다간 다른 세속 군주들이 자신의 서임권이 더 정당하다며 일레니풋을 노릴 테지만."

"성하께서 초대 교회의 관습을 내세우며 서임한 성직 제후는 그런 논쟁에서 보다 자유롭습니다. ...성흔이 없다 해도 말입니다."

보니체고의 뒷말은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교황청은 나르바가 성흔을 발현하지 못했다 해도 여러 정치적 요인을 고려해 성직 제후로 내세웠을 것이다. 포위스 교구와 일레니풋 주교령의 합병을 위해서기도 하고, 무엇보다 유바스를 대신할 강력한 현지 동맹을 갖기 위해서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애설튼 공왕의 마음을 돌린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성하께선 후보를 추천하는 권한을 전하께 드릴 예정입니다. 온전한 서임권이 아닌데다 심사를 거쳐야 하겠지만, 전하가 모든 걸 잃는 건 아닌 셈입니다."

"나르바를 꼬박꼬박 주교후라 부른 까닭이 있었군."

교황청은 유바스의 변심과 배교의 위협을 보고 많은 걸 느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배교하지 않을 성직 제후야말로 기나긴 싸움에 승리를 가져올 터. 동시에 지역 귀족들의 반발을 최대한 억누를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이어야만 했다.

나르바가 주교후로 불리는 건 이 때문이었다.

포위스 가문과 나르바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이교도에 맞서 아침녘 제도 내 유일한 성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받은 셈이다. 애설튼 공왕은 조용히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결코 배교하지 않을 신실한 신도로서, 신의를 지킬 명예로운 귀족으로서 인정받은 셈이다. 애설튼 공왕은 뒤늦게 특사를 상대할 때 걸맞는 예의를 되찾았다.

"...성하께서 보내주신 특사께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허나 그 부분을 먼저 이야기해주셨다면 미숙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끝부분에서야 말씀해주신 겁니까?"

딴에는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고 꺼낸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애설튼 공왕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야 성하께서 전하가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전하의 본성에 따라 저희가 취할 행동도 달라졌을 겁니다."

"...."

교회가 미움받는 건 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이다.

***

내가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며 사과를 오물대고 있을 때였다.

먹음직스럽게 깎은 사과를 쟁반 위에 올려놓던 에드위나가 또 호기심을 드러냈다.

"공자님, 그러고보니 같이 오신 사제 분들께서 주의를 주셨습니다."

"우이?"

"예. 그, 주교님이 아니라 주교후님이라면서요."

거 참. 뒤에 한 글자 안 붙인다고 오질나게 빡빡히 구는 모양이다. 하긴 성도의 매음굴 싹 다 불태우겠노라 결의할 때부터 심상찮은 또라이들이라 알아보긴 했다.

"주교후랑 주교가 많이 다릅니까?"

나는 사과 조각을 목구멍 너머로 꿀떡 삼키며 고민해봤다. 주교후라는 직함을 얻긴 했는데 뭐가 다르진 모르겠다.

"글쎄. 하는 일은 비슷할 거 같은데."

"주교님들은 그럼 무슨 일을 하시나요?"

"음."

여태껏 크게 생각하지 않은 문제였다. 살면서 주교를 마주친 적이 몇 번 없다보니 더 그랬다. 주교라. 대충 십일조 걷어다 탱자탱자 놀면서 얻은 삶의 여유로 다른 사람들을 챙겨주는 사람 아닌가?

그... 아니면 가니스타 주교처럼 자화자찬하며 살아가거나.

일단 내가 마주친 가니스타 주교랑 파직당한 바르나르도의 사례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본 주교들은 일반 사제인 척하면서 힘을 숨기다 짜잔하고 놀래키거나, 아니면 사치 부리면서 여자 겁탈하던데."

"?"

"좀 음흉한 짓을 꾸미기도 하더구나."

가니스타 주교는 일하는 사람 같긴 했다. 나 몰래 멋대로 뭔가 해대서 문제지. 그런데 이외에 뭘하는지 모르겠다.

곰곰히 생각할수록 주교 이거이거...

이 험난한 세상에서 달달하게 꿀 빨 수 있는 숨겨진 꿀이었다.

"그래도 할 일은 크게 없는 듯 했다."

"하긴. 주교님들이 무슨 일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가긴 합니다."

햇빛 하나 제대로 안 받고 사는 고운 샌님들. 중세인들이 볼 때 성직자들은 다 이런 이미지인 모양이다. 나도 그런 꿀을 빨 수 있다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흐뭇했다.

물론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 말하긴 했지만...

할 일이 없으면 놀 수밖에 없지 않겠냐?

47. 아버지의 자식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