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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드드드득!

공장장 로티스를 호위하던 덩어리, 경호용 안드로이드의 목에서 인공 척추가 길게 뽑혀 나온다.

곧바로 가동을 멈추는 안드로이드.

복부를 반쯤 가르고 들어가 박힌 압축도의 도병을 잡아당겨 회수한다.

콰직-

나는 손을 몇 번 툭툭 털고는 공장장 로티스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놈은 얼굴에 비해 무력이 형편없었는데, 자존심은 또 강해서 손만 대면 지랄발광을 하며 머리를 털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이러는 거냐?"

"알 바 아니다. 넌 내가 누군지 알아?"

"······."

대답이 없기에 머리통을 계속 때렸다.

퍼억! 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잘생긴 얼굴이 불쌍하게 변해간다. 미형의 사내가 처맞으며 울상을 짓자 어째서인지 손찌검을 그만둬야 할 것만 같았다. 루돌프같이 생겼다면 그냥 패죽였을 텐데, 사람의 외모가 이렇듯 중요한 요소이다.

"······도, 도와줘."

"다 죽은 목숨인데 누가 너를 돕겠냐."

"······이런 젠장할, 정말 안 도와주는거야? 제발! 그때 나랑 약속했잖아! 씨발!"

핏발선 눈의 로티스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목숨을 건진 네 명의 낭인 용병들을 째려보며 절규했다. 세 놈은 슬며시 눈을 피하고, 나머지 한 놈이 용기 있게 나서서 말했다.

"우리는 더 싸울생각 없습니다. 목숨만 붙여 보내 주시면 평생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처음에 나섰던 서부 총잡이 놈이었다. 옆구리에 총을 맞았는지 지혈팩을 둘둘 두른 놈은 비척대며 걸어나와 바짝 엎드렸다.

꽤나 올바른 선택이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상황에서 목숨걸고 끝까지 싸우는 용병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다고 해서 크레딧을 더 받아가는것도 아니니 말이다.

"총잡이. 너희 의뢰주 아직 안 죽었다. 포기하는거야?"

"예.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맡겨만 주신다면은 지금 제 손으로 죽여 보이겠습니다."

"정말이냐?"

"저 멍청한 놈을 누구보다 먼저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접니다. 죽일 마법사가 하나 있다고만 전해 들어서 이 사달이 난 거거든요. 이럴줄 알았으면 절대 안 왔을 겁니다."

"그래, 각자 손가락 세 개씩 자르고 떠나라."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놈들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곧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자신의 손가락을 망설임 없이 잘라낸 낭인 용병들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땅바닥에는 갓 잘린 따끈한 손가락들만이 남았다.

차르륵.

나는 죽은 낭인 용병들의 머릿속에서 뽑아낸 칩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 참응조수 "

" 태산괴랑 "

" 양산보법 "

그러면 그렇지.

당연히도 좋은 무공들은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는, 허접한 무공들이 담겨있는 무공칩이 여러 개. 조잡한 걸 보자면 저것마저도 복제품이겠지.

내가 칩을 확인하는 사이, 꿇어앉은 공장장 로티스가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날 죽이면 어차피 너희도 전부 죽어. 빈말로 하는게 아니라 진심이야."

놈의 얼굴 근육이 멋대로 씰룩거렸다. 잔뜩 핏발선 눈은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너도 용병들처럼 살려주면 앞으로 조용히 지낼거니?"

"바, 반드시 그렇게 하지. 내가 약속한다."

"싫어."

"······이 씨발 새끼가! 장담하는데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핏발선 눈으로 뱉는 너무도 상투적인 대사에 나는 그만 깜짝 놀랄 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대협! 여기 찾았습니다!"

창고로 쓰이는 컨테이너를 뒤지던 등평위가 작은 상자를 찾아 들고 온다.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자, 그 안에 가득 들어찬 의문의 가루가 보였다. 손으로 살짝 찍어 코로 들이쉬니 공력의 수발이 금세 버거워졌다. 하레니오 갱단에 대금으로 건네줬을 산공독의 모조품이 확실했다.

나는 곧바로 로티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당가가 되게 좋아하겠다."

"······."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놈이 묵비권을 행사하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동안 공장과 컨테이너, 시체들의 주머니를 싹싹 턴 삼호문도들과 루돌프놈이 두 손 가득히 전리품들을 들고 복귀했다. 그 양이 놀랄 정도로 많았다.

"등평위. 신고한지 얼마나 지났나."

"적어도 30분은 지났을 테지요."

"좋다. 이놈은 빨리 좋은 곳으로 보내주고 같이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끄덕인 등평위가 동산처럼 쌓여있는 전리품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협, 저것들은 어찌 옮기면 되겠습니까?"

"편하게들 가져가라고 오프 로드용 지프를 네 대나 끌고 왔더군."

"삼호문에 두 대 주십시오. 다친 놈 약값은 두둑이 보태줘야지요."

"그래라. 총알은 몇 발이나 남았냐."

"전투가 워낙 치열해 몇 발 안 남았습니다."

"비싼 건데, 아쉽게 됐군."

철컥.

나는 곧바로 테크리볼버를 건네받아 로티스의 머리를 조준했다.

——!

이윽고, 한 발의 총성과 끔찍한 비명이 공장을 떠나갈 듯 울렸다. 안면에 구멍이 뚫려 다시는 알아볼 수 없게 망가진 얼굴의 시체가 앞으로 털퍼덕 쓰러졌다.

하레니오와 거래하던 살인공장은 오늘부로 사라졌다. 퍼져있는 소문처럼 대단한 놈들은 아니었다.

소름 끼치도록 음산한 기운이 귓속을 파고들어와 정신을 갉아먹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 ······죽어버렸네. ]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긋한 음성.

"!?"

실로 기이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존재의 기운이 사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것은 그저 음성에 불과했음에도, 루돌프와 문도 셋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쓰러져 발작을 일으켰다. 녀석들의 사지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리며 흙먼지를 만들어낸다.

"커읍···."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었다.

눈치 빠르게 가부좌를 틀고 운공하며 그 기운에 반항하는 듯했던 등평위마저도, 결국 입에 거품을 물고는 가부좌를 튼 자세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이 모든 일이 눈 몇 번 깜빡일 찰나에 벌어졌다. 근방에 멀쩡히 땅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파랗게 빛나는 로티스의 뒤통수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로티스의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질긴 수트를 칼로 잘라내자, 온몸을 덮고 있는 타투들이 드러났다. 복잡한 문양들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뒤섞여 있는 형태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헛웃음을 뱉었다.

'마나로 새긴 문신. 이런···.'

아까 로티스가 그리 도와달라고 절절맸던게—

"용병 무리에게 했던 말이 아니었군."

로티스의 마나 문신을 확인한 순간, 그간 부려왔던 짜증과 신경질이 눈 녹은 듯 사라졌다. 왜 이리 불안하고 매사에 신경이 날카로웠는지 대번에 의문이 풀렸다.

잠을 못 자서 그랬다거나 루돌프놈의 등신짓이 원인이 아니라, 길이 열린 상단전이 지금의 설명 못 할 현상을 불안감이라는 형태로 경고해 주던 것이었으리라.

이것은 직감, 육감을 넘어서 초감각이라 이름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능력이었다.

[ 왜 죽였어? ]

"······."

그런데 애써 그 경고를 무시하고 호랑이 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왔다.

이게 다 루돌프, 그 한심한 놈 때문이다.

어째서 이 정신 나간 기운을 느끼지 못했을까.

둘 중 하나였다. 나의 경지가 한심할 정도로 낮거나, 저 음성 본신의 힘이 경이로울 정도로 강력해서 그 존재를 완벽히 숨길 수 있거나.

아무래도 정답은 후자일 것이다.

[ 밤일이 괜찮은 아이였는데. ]

상념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정신을 후벼파는 음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해야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밤일이 괜찮은 아이. 그 짧은 문장을 곱씹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죽은 저놈보다 더 튼실할거다. 바지라도 까서 보여주면 믿겠나?"

[ 재미있는 아이네. ]

그 음성의 반응과 동시에, 죽은 로티스의 온몸에 새겨져 있던 타투가 문어 다리같은 모양으로 징그럽게 꿈틀대더니 곧 사체에서 분리되어 떠올랐다.

고도의 지식이 필요해 하나 새기기도 힘든 마나 문신을 저리 자연스레 다룬다면, 고위 술식도 마음대로 변형해 이용할 줄 아는 경지의 마법사.

음성의 주인은 아무리 못해도 몰타왕국의 마탑주 정도의 수준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 8레벨. 어쩌면 그 제국 대마법사에 근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부터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군.

화아악—

입체적으로 일어난 마나 문신은 사람의 형태를 하곤 유령처럼 허공을 걸어 다니다가, 한순간 내 몸을 삼키듯이 달라붙었다.

눈앞이 안갯속을 걷는 듯 흐려졌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온 몸이 찢어질 듯 극심한 고통이 뒤를 이어 찾아왔다. 이대로 가다간 쓰러질 것 같았기에 몽롱한 상태에서도 안주머니에 있던 통감 조절기를 허벅지에 박았다. 육체의 고통이 약간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푸흡-

마치 바늘로 뇌를 찌르는 것 같은, 정신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불손한 마력을 막아내자 거대한 반발력이 일어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찝찔한 쇠맛을 느끼며 목구멍을 막는 피를 연신 뱉어냈다.

취미가 고약한 작자로군.

죽은 저 로티스놈이 처음으로 불쌍해졌다.

내가 어마어마한 고통을 견디는 동안, 목소리는 나른하고도 농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 로키 시티에 와서 나를 찾아. 직접 몸으로 확인해보고 마음에 들면 살려줄게. ]

"이름을 알려줘야 찾아가지 않겠나."

[ 내 이름? 뷔에탕. ]

입에 고인 피를 뱉으며 뜨거워진 머리를 굴렸다. 흔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분명 들어본 이름이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뷔에탕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냈다.

"······카스트라 뷔에탕?"

로키 시티의 신동경에서 군림하는 거물.

마피아라는 대규모 조직의 보스이자, 20년 전 토벌 사건이후 십이제(十二帝)의 자리에서 강제로 퇴출당한 여자.

9레벨 인형사(人形師), 카스트라 뷔에탕.

음성은 자신이 그 뷔에탕이라 말하고 있었다.

쉬이 믿기 힘든 얘기였으나, 지금까지의 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는 차마 그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저 멀리 떨어진 로키 시티에 있을 인간이, 발두르에 있는 나를 상대로 저주를 걸어버린 거다. 그것도 마나 문신에 주입해둔 마력을 매개로 사용해서.

거물급 마법사가 아닌 이상에야 감히 이만한 이적(異蹟)을 내보일 수는 없으리라.

[ 놀랐어? ]

나른한 음성은 잔뜩 구겨진 내 얼굴을 비웃는 것처럼 희게 웃었다.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 문신이 네 정신을 다 파먹기 전에 찾아와. 반년 뒤면 혼이 없는 껍데기만 남을 테니까.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통이 잦아들었다. 정신을 틀어쥐고 뜯어먹는 듯했던 음성 또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

반년 뒤면 뒈질거라는 소리군.

나는 한바탕 거대한 폭풍이 지나간 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 분쯤 지나 기절했던 등평위가 끙끙거리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번뜩 일어난 등평위는 주위를 둘러보며 허탈하게 웃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대협, 선채로 돌아가신 겁니까?"

*

공단의 노동자들이 출근할 무렵.

BCPD소속 선임 검시관과 시티 경찰들이 웨스트 커너의 공장에 도착했을 때는, 땅에 처참히 널브러진 시쳇더미와 이상한 가루가 들어찬 박스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검시관님. 이것좀 확인해 보셔야겠습니다."

스윽-

박스 속의 내용물을 찍어 냄새를 맡아본 검시관이 인상을 찌푸리며 황급히 손수건을 꺼냈다.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은 검시관이 손을 저었다.

"이거 산공독 종류네. 가품일테고."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이딴걸로 메가콥이랑 괜히 엮이면 일생이 피곤해진다. 그냥 산공독 포함해서 여기 싹 불태워버리고 복귀해. 현장 보고서는···아니다. 그건 내가 직접 작성해서 올리지."

"예, 알겠습니다."

"간다."

선임 검시관이 더이상 보기도 싫다는 듯 미련없이 몸을 돌려 사라진다. 얼마 뒤, 커다란 불길이 일어나 공장 부지를 삽시간에 뒤덮었다.

화르륵!

시뻘건 화마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경찰차 몇 대가 빠져나오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 공장의 문은 굳게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22화. 모래폭풍

#22화.

공단의 살인공장은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떠난 후 뒤늦게 도착했을 시티 경찰은 의외로 깔끔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관청의 입장에서도 가짜 산공독 따위로 부담스러운 당가와 엮일 바에 차라리 사건 자체를 무마시켜 버리기로 한 것이리라. 메가코퍼레이션의 드높은 명성과 당가의 지랄맞음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다.

그 뒤로 거래처와 조직원을 잃은 마피아 조직의 '벤데타'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마피아 조직 그 자체인 거물과 얽혀버린 탓이었다.

특별한 능력도 없이 외모만 반반했던 로티스가 마피아와 거래하는 공장을 통째로 깔고 앉아 떵떵거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남색을 밝히는 카스트라 뷔에탕의 눈에 들어 밤을 몇 번 보낸 이후부터라는 건 나중에서야 듣게된 얘기였다.

그리고 그게 벌써 일주일 전 얘기.

나는 정크타운에 입성한 후로 가장 정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일상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육체와 마나 회로를 매일같이 단련하고 남는 시간에는 운공으로 내력을 쌓아나갔다. 가끔 삼호문에 들러 무공의 성취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정도.

"후우······."

오늘도 새벽까지 이어진 연공을 마치고 몸을 일으킨다.

곧바로 샤워실에 들어가 거울로 전신을 비춰보자, 등판과 뒤통수에 빽빽하게 새겨진 마나 문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하학적인 무늬로 이루어진 문신 한 개 한 개가 모두 고위 마법 술식이자 육신을 갉아먹는 흉악한 저주들.

9레벨의 인형사가 직접 마력을 불어넣어 창조했을 이 마나 문신들은 인간의 몸에 들러붙어 정신을 공격하고 진기(眞氣)를 빨아먹는다.

뷔에탕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면 문신에서 흘러나오는 격 높은 마력에 의해 정신은 오염되고 영혼은 없이 육체의 껍데기만 남고 말것이다.

"음."

하기야 이전 생에서도 스물이 되기 무섭게 제국의 늙은 대마법사가 찾아와 내 머리통에 운석을 떨어뜨렸었지. 그에 반해 이번에는 죽지 않았으니 놀랄 것도 없나.

전생이라는 굴레에 갇혀 긴 시간을 살아가는 대신, 일찍 뒈지라고 염불을 외는 귀신이라도 영혼에 들러붙었나 보군.

"카스트라 뷔에탕이라······"

살아있는 전설이자 연방의 신화와 역사를 써 내려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세 명의 최강자 삼존(三尊). 그리고 그런 삼존 다음가는 명성과 힘을 보유한 일곱의 초월자 칠좌(七座).

그 삼존칠좌의 뒤를 잇는 열두 명의 절대강자 십이제(十二帝).

좀비라는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절망적인 앞날만이 남아있는 세상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필요한 연방은 도시의 강자들에게 저렇듯 거창한 명호(名號)를 붙여주었다.

그런데 자그마치 20년 전에도 십이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여자가 바로 카스트라 뷔에탕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그 생각을 하니 돌연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같은 슬럼가 소시민이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존재가 친히 격 드높은 마력까지 써가며 저주를 걸어주니······.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군."

거울을 바라보며 실실 웃던 나는,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이 저주의 파훼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게다가, 그 마력을 오히려 내 쪽에서 이용할 수 있는 수법마저 알고 있다.

전생의 라아기스 대륙에서도 이러한 마나 문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마법사들이 있었다.

흑마법을 익힌 이들이나 제국의 술법사들이 즐겨 사용했는데, 그 악랄함에 이골이 난 왕국 고위 마법사들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연구가 수백 년간 이루어졌고, 종국에는 이 마법의 파훼법과 정신력의 손상을 최소화 하는 방법을 여럿 발견해냈다.

왕국 마법의 대부분을 익히고 이 세상으로 넘어온 내가 기억하지 못할리 없었다.

물론, 뷔에탕과의 수준 차이가 현격한 당장은 문신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력의 침투로 인한 정신의 오염을 계속 막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려면 우선 육신의 진기를 대신할 먹잇감을 문신에 던져줘야 하는데······.

"에센스는 계속 확보해 둬야겠군."

에센스의 기운을 일정 부분 따로 빼두고 주기적으로 문신에 흘려준다면, 진기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뷔에탕과의 강제적인 미팅을 뒤로 미룰 수 있다.

만약 뷔에탕이 눈치채고 날 찾아오는 날에는 끝장이겠지만, 설마 내가 자신의 마법을 파훼할 정도의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

다음은 이 문신을 이용하는 방법인데······

그간 몇 번 시도해본 결과, 꽤 성공적이었다.

문신에 내 마력을 강제로 주입하면 잠시동안 카스트라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이 들불처럼 일어나 주위를 뒤덮는다.

보통의 저주 문신들은 피시전자의 반발을 눌러 놓기 위해 이렇게 설계되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 있던 루돌프는 픽 하고 쓰러져 발작을 일으켰다.

격의 차이로 인해 고작 마력이 잠시 흘러 나오는 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이들은 그 흉포한 기운의 현현을 버틸 재간이 없다.

바꿔 말하면, 내 의지대로 9레벨이 가진 마력의 파편을 잠시나마 내보일 수 있다는 뜻.

비록 단기적으로는 내 몸에 큰 무리가 가겠지만, 적절한 때에 이용한다면 언젠가 한 번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쏴아아-

나는 상념을 끝내고는 물기를 닦았다.

대충 옷을 걸치고 나오자, 한 시간째 마보자세를 취하고 있는 루돌프놈이 눈에 들어왔다.

허약한 놈이 뭐만 하면 픽픽 쓰러지기에 무공을 가르치기로 했다. 저건 기본적인 육체를 단련하는 과정인데, 적당한 외공을 익히게 해서 엄폐물이나 육탄 방어용 경호원으로 쓸 셈이었다.

놈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훈련에 꽤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형님."

마보를 풀고 잠시 숨을 고르며 다가온 루돌프 녀석이 네트워크 단말기를 내밀어 보였다.

"이번 상납 들어온거 확인했습니다."

"그래."

단말기 화면에 표시된 숫자를 확인하자, 17번가의 업장에서 거둬들였다는 상납금이자 보호세의 금액이 보였다.

25,000 크레딧. 생각보다 벌이가 쏠쏠한 편이다.

웨스트 커너 공장단지 노동자의 일급여가 50크레딧 내외. 워낙 못사는 동네다 보니 정크타운 내의 일자리도 상황은 비슷하다.

그런 슬럼가에서 이런 크레딧을 달마다 상납받을 수 있으니, 타운 내의 세력들이 유흥가를 중심으로 업장하나 더 먹겠다며 총격전을 벌일 만도 했다.

슬럼가의 눈먼 크레딧들은 결국 자신들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얼음을 오독 씹어먹으며 말했다.

"돌프야. 너희도 돈 많이 벌었겠구나. 입장료 뜯어먹으면서."

"······예?"

문득, 정크타운에 처음 당도했을 때가 생각난 나는 루돌프놈을 거칠게 폭행했다.

뻐억-! 북 터지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요즘들어 맷집이 좋아져서 그런지 때리는 맛이 훌륭했는데, 내 스승 광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한참을 두들겨 맞은 녀석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 이것도 외공 수련의 일종입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제가 좀···울어도 될까요?"

"그래라."

배를 부여잡고 끅끅대는 루돌프를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타닥-! 타다닥-!

오늘도 증권시장을 휘젓는 중인 레나.

"레반! 이거 봐!"

나를 본 레나가 하던 일을 멈추곤 자랑스레 화면을 가리킨다.

[ 예수금 / 56,400C ]

얼마 전만 해도 마이너스 수준이었던 초기 자금이 다시 불어나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치켜드는 레나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거 보여? 보이냐구!"

"음, 대단하군."

내가 살인과 고문, 협박, 폭행을 일삼아가며 모은 크레딧보다야 한참 적은 소액이지만, 오랜만에 뿌듯해 보이는 레나의 기분을 망치긴 싫었다.

"그런데 레나."

"응?"

"루벤카와 연락은 하고 있나?"

"······연락이 안 될때가 더 많아. 그래도 이틀에 한 번은 하고 있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계속 발할라에서 머물 생각인것 같아."

저쪽도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군.

발할라는 무림계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곳이다. 제아무리 당가라도 마법사들의 본진이자 고향인 발할라 시티까지 쫓아가 무력을 행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시티 스테이션의 검문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다면, 아예 발할라로 가서 터를 잡아도 괜찮겠는데···.

너무 이른 얘기겠지.

반 바이오가 무너진지 얼마 지나지 않은 현재로서는, 스테이션에 레나를 데리고 갔다간 당가에 발각당할 가능성이 높겠지. 아직 세간의 관심이 전부 식지 않았으니.

나는 레나와 이런저런 얘기를 잠시 나눈 뒤 술집 밖으로 나왔다.

17번가의 거리는 유독 시끄러웠다.

- 똑바로 잡으라니까!

- 새끼야! 니가 제대로 쳤어야지! 철조망에 손가락 찡겼잖아!

- 항타기도 칠 줄 모르냐? 등신같으니.

- 네 얼굴은 칠 줄 아는데 보여줄까?

뭔가를 분주하게 준비하는 타운의 주민들.

대부분의 상가가 천막, 철근, 철조망, 파이프등을 이용해 바리케이트를 구축하는 중이었다. 뒤따라 나와 분주한 거리의 광경을 구경하던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형님. 곧 모래바람이 올텐데 저희도 건물 앞에다 뭐라도 쳐야하지 않을까요."

저들이 저러는 이유는 하나.

폭풍 때문이다.

발두르 시티에는 주기적으로 강력한 모래폭풍이 분다.

사막의 폭풍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사능과 각종 오염물질, 중금속이 가득 섞인 모래를 몰고 오는 폭풍.

물론 평소의 도시 외곽은 두텁고 높은 거대장벽과 광역 마나프로텍트, 진법등으로 보호받고 있다.

프로텍트를 버텨낼 정도의 강력한 좀비가 장벽을 뛰어넘어 오는 경우가 아닌 이상, 좀비들이 몰래 침입할 통로는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폭풍이 불 때는 다르다.

사람이 휩쓸려 날아갈 정도로 거세게 불어치는 모래폭풍은, 저 장벽 밖에서 어떤 좆같은 존재를 운반해올지 모른다.

예를 들어 좀비라든가, 좀비라든가, 좀비라든가.

반 바이오에 있을 때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중심업무지구는 강력한 기업들이 넘쳐나는 만큼 보안 인프라가 좋았고, 기업에 소속된 상위 레벨의 강자들이 나서서 폭풍에 휩쓸려 넘어오거나 혼란을 틈타 장벽을 넘어왔을 좀비등의 위협에 철저히 대비했다.

하지만.

시티 외곽에 사는 하층민들에게는 폭풍은 곧 생사와도 직결되는 큰 문제다.

저들은 문을 걸어 잠구고 벌벌 떠는 것 말고는 저렇게밖에 대비할 수단이 없다.

그렇다고 터전을 떠나있을 수도 없다.

폭풍이 지속되는 기간동안 시티 중심가의 모텔이라도 들어가려면 며칠간의 살인적인 숙박비를 감당해야 할 테고, 돌아오면 걸레짝이 된 집이 노숙자들의 아지트로 변신해있을 테니 말이다.

"형님. 라네치아 패밀리 놈들한테 돈만 주면 쉴 곳을 빌려줍니다. 대비하기 귀찮으시면 돈 내고 잠깐 거기로 가시죠."

"갈 테면 혼자 가라. 목만 잘라서 보내주마."

"······."

라네치아 패밀리.

정크타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투레 더 타운' 을 본거지삼아 활동하며, 주택가가 밀집한 구역을 지배하는 놈들이다.

유흥가 주변이 활동반경인 나와는 꽤 멀리 떨어져있다. 살인을 즐기지 않는 나는, 피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놈들과 부딪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하레니오만도 못한, 떨거지 같은 놈들이다.

양아치 놈들까지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

며칠이 더 지났다.

요근래 폭풍을 대비하느라 한참 요란스러웠던 정크타운의 길거리는, 누래지는 하늘에 비례해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 프로틴바는 다 떨어졌는데? 칼로리 스틱만 남았어.

- 젠장. 그럼 스틱 5개 줘.

- 스틱 5개에 30 크레딧.

- 뭐? 칼로리스틱 달라니까?

- 그니까 칼로리 스틱 하나에 6크레딧에 판다고. 싫으면 사지 말고 굶든가? 다른 놈들은 이미 6크레딧에 사갔어.

- 이런 시발같은.···

싼 크레딧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칼로리 스틱과 프로틴바등을 파는 잡화점, 상점들은 모래폭풍을 대비하느라 재고가 다 빠졌다며 쾌재를 불렀다.

그마저도 늦게온 손님들은, 원가의 두 배 이상을 주고 구해야 했다.

또, 많은 주민들이 정크타운 북쪽의 주거밀집구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구역을 지배하는 라네치아 패밀리는 숙소값을 받고 경비를 서준다던데, 그곳이 자신의 집이나 가게보다 안전하다는 계산일 것이다.

도박장, 사창가, 클럽을 포함해 어지간한 곳들은 전부 문을 걸어 잠궜고 친씨아의 총포상도 매장의 문을 두꺼운 철창으로 막아놓았다. 역시 자기 안전 하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여자다.

"멀었나? 슬슬 바람이 차다."

나는 와중에 총포상을 찾았다.

살인 공장과의 사태가 끝을 맺은 뒤에도 며칠간 조용하던 친씨아는, 별 탈이 없자 아무일 없던 것처럼 다시금 나를 고객으로 받아주었다. 확실히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자. 첫날부터 그렇게 원하던 거."

그때, 친씨아가 철창 사이로 뭔가를 내민다.

"연방군용 수류탄이야. 조심해서 써."

"고맙게 잘 쓰지."

"우리 사이에 이런거 가지고 뭘. 단골 고객이 죽으면 누구한테 가서 돈을 받겠어? 이번 폭풍은 꽤 강력할 거라던데 몸 조심하고 끝나면 다시 봐~"

친씨아의 간드러진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철창이 내려와 굳게 닫힌다. 그녀의 모습은 총포상 안으로 사라진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랑자도, 아이들도 사라진 슬럼가의 길거리는 쥐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하다.

나는 17번가의 아지트로 돌아왔다.

루돌프와 삼호문을 시켜 창문에 덧대어놓은 철판과 문 앞에 둘러놓은 놓은 철조망. 건물 앞에 박아둔 날카로운 쇠철심과 헝겊으로 덮어 위장해둔 지프.

좋다. 완벽하다.

예전에 문지기의 목을 찔렀을 때 흐른 혈흔이 바닥에 남아있는 것을 제외하곤, 어떤 곳보다 깔끔하고 튼튼해 보이는 외관이었다.

"돌프야."

"예, 형님."

"이전 모래폭풍이 3개월 전이었냐."

"그쯤이었을 겁니다. 뭐······실종된 놈도 있고 죽은 주민도 많았는데, 딱히 큰 일은 없이 넘어갔습니다. 저는 하레니오 새끼들이랑 2층에서 포커 치고 있었죠."

하기야 갱단이 자기들 아지트로 썼던 만큼 일반적인 상가보단 조금 낫겠지. 저번에도 큰 무리 없이 넘어갔다고 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최소 며칠.

갱스터고 노숙자고 할 것 없이 건물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철컥.

나는 마지막으로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곤, 잔뜩 쟁여둔 콜라 하나를 따 입에 들이부었다.

그날 저녁.

휘이이잉-!

문밖의 바람 소리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모래알갱이가 섞인 강풍이 철판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간다.

좀비들의 괴성이 바람결에 실려 올 것만 같은 기분에,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23화. 입마로다

#23화.

두 눈을 감자 심상이 나를 덮어 눌렀다.

순식간에 그 속에 가라앉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매번 나를 늪으로 처넣던 망상병이 지금 도진 것인데, 이따금 나타나선 내 의지와 상관없는 심상에 빠뜨리곤 했다.

고강한 무공과 마법을 가지고, 정 아니라면 지금 당장의 힘을 가지고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 무너져 내린 세계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정신이 멀쩡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 미안허이···미안허구먼···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음식을 빼앗으려던 치매 노인은 죽지 않았을테지.

— 저,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제발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친절한 여자였는데.

다리를 다쳐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조금이나마 더 살아보겠다고 애원하는 여자를 어둠 속에 버려두고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까.

— 이것 좀 열어줘! 제발! 그냥 코피라고 씨발! 왜 안 믿어줘! 왜! 끄아아악!

나는 그 현관문을 열어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리했겠지. 그저 잠금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 그들을 도와주려고 했는지, 솔직히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거기에 내 잘못은 없었는데 어째서 기분이 이리도 더러워야 하나. 그것도 평생을 말이다.

왜 하필 나한테 와서 징징댄 거야. 이 개같은.

가만, 어차피 얼마 못 가 죽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래.

도와주었더라도 그 치매 노인은 곧 죽었을 거다.

실은 그냥 편하게 죽고 싶은 마음에 내 식량을 훔치려 들었던 것 아닐까? 지금와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히 총을 들고 있었다.

정말로 이기적인 노인네였네.

편히 죽고 싶어서 그랬던 거구나.

좀비 무리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보단, 총탄 한 방에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더 행복하고 존엄한 죽음일 테니까.

······이거 어쩌면.

나는 그 노인을 구원한게 아니었을까.

—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꺼져.

—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조금만 나눠주면 안 되겠나? 이 허기만 채우고 곧바로 떠나겠으이.

아닌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래,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그 지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아.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지옥같던 기억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심상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똑···! 똑···! 똑···!

떠밀려간 곳에서 나는 강호인이 되었다.

불가의 청량한 목탁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한 땡중이 맛없는 절밥을 강요하며 말했다.

— 시주께서는 승려가 되지 않는다면 필시 미치광이가 되고 말겁니다.

— 평생 풀만 먹을바에 광인이 낫지요.

— 허허허, 도로 아미타불이로군요.

그러자 목탁 소리가 슬그머니 사그라들더니, 차려져있던 절 밥이 주우욱 늘어나며 저 멀리 사라졌다.

또 다시 심상 속 어딘가로 내던져진 나는, 자욱하고 장엄한 안갯속에서 눈을 떴다.

장강(長江)의 어느 지점이었다.

늙고 마른 사공이 모는 나룻배는 고고하게 장강 물길을 타고 떠내려간다.

노를 젓던 사공은 어느 곳에 이르러 깊고 거센 물길을 만나자 삶과 애환을 노랫말에 담아 풀어냈다. 한 구절이 반복되는 단순한 노랫말이었는데, 그는 절절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힘겹게 노를 저었다. 수수깡같은 노인의 팔에 앙상한 근육들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 늙은 사공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사공이 보여주는 광경이 사뭇 대단하여 사공의 노랫말을 이해하고 터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 뜻모를 노랫말을 풀어내면 급류가 멈추고 광명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한참을 사공의 노랫말과 씨름하고 있는데, 갑자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에라, 등신같은 놈.

시커먼 강물 속, 비쳐 보이는 스승의 모습.

나는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스승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내 대가리 속에는 두 명의 젊은 사내가 들어차 있었는데, 나룻배에 걸터앉은 스승을 노려보는 순간만큼은 만두를 먹으러 객점에 들린 거렁뱅이 꼬마였다.

— 삶의 굴곡이 깊다고 하여 그따위 입마(入魔)조차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끄러워서 어디 제자라고 내놓을 수 있겠느냐!

사공의 나룻배 앞에 걸터앉은 스승이 어울리지 않게도 근엄한 척을 했다. 꼭 고지식한 명문대파의 늙은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만큼 정신나간 광인의 일갈을 듣자, 깊고 어두운 장강물 속으로 가라앉던 정신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것 같았다. 이를테면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 제자야, 장강은 원래 이리저리 꺾여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스승은 나룻배의 머리를 밟고 뛰어 올라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스승의 말을 거듭하여 되풀이했다.

그는 한없이 가볍다가, 언제는 한없이 미쳤다가, 또 어느 때는 한없이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이윽고 거센 물살을 빠져나온 나룻배는 다시금 강을 유유히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스승의 말을 곱씹다가 한순간 머리를 탁 쳤다.

장강은 본래 이리저리 꺾여있기에, 급류가 이는 곳은 잠시였다.

어차피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참이니, 경험많은 뱃사공은 이를 구실삼아 뱃삯을 더 요구하기 위해 혼신의 연극을 펼친 것이었다.

콰르르륵-

그 순간, 강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소용돌이치는 장강물이 나룻배를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것을 보며, 이것이 사실 심마(心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듯한 심상 속에서 어떠한 깨우침을 얻었더라도 그저 도로 아미타불이었을 것이다.

천근을 올려놓은 듯 무거웠던 눈꺼풀이 이내 가벼워졌다.

"······."

주위는 심마에 빠져들기 전보다 고요했다. 밖은 시간이 많이 흐른듯했다. 폭풍은 거세게 몰아치기 직전이 가장 조용한 법이라던가.

- 거 드럽게 안 일어나네.

"뭐라고?"

어디선가 들려온 루돌프놈의 비아냥이 나를 깨웠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저 멀리 서있던 놈이 화들짝 놀라며 쩔쩔맸다.

"아, 일어나셨어요 형님? 하루가 넘도록 계속 눈을 감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하하."

"드럽게 안 일어난다고?"

"······예?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기억나게 해줄까."

이제 완벽히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헝겊을 꺼내 압축도를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닦을 참이었다.

안정적인 무게감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스르릉-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루돌프놈을 응시하며 압축도의 도신(刀身)에서 광이 날 때까지 닦았다.

"형님, 제가 생각해보니까 그거 방금이 아니라 어제 했던 말 같은데요···죽을 잘못까지는 아니지 않나요?"

"칼날이 아주 잘 닦였다."

"······네?"

"누구 하나 담궈버리기에 딱 알맞겠군."

훌륭한 외공을 극성까지 단련하면 칼로는 생채기도 낼 수 없다던데, 아마 저놈은 극성까지 익히기는 힘들것이다. 지금도 내 손이 근질대며 멋대로 칼을 휘두르려 하지 않는가. 이놈은 필시 도검불침의 경지를 밟기 전에 내 칼에 찔려 죽을 팔자였다.

"다들 밑에서 뭐하고 있어?"

한참 칼을 닦고 있는데, 2층의 레나가 층계를 내려와 나를 부른다. 어딘가 불안한 표정과 행동은 어릴 적 응석을 부리던 레나를 떠올리게 했다.

"나도 레반이랑 같이 1층에 있을래."

발두르 중심가가 아닌 타지역에서 모래 폭풍을 맞이하는 건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위축된 듯한 레나는 쫄래쫄래 내려와선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레나의 등장에 가만히 있던 휴머노이드 바텐더가 고저없는 음성으로 묻는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하는 '오늘은 어떤 술' 타령이었다.

- 오늘은 어떤 술이 필요하십니까?

술이라······

주독이야 나중에 내공으로 날려버리면 그만인데.

괜찮은 술을 몇 병 마시면 지금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

- 오늘같이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에는 바다 위의 해적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해적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강렬하고 뜨거운 럼주를 추천해 드립니다. 아니면 럼 원액에 콜라를 섞어 달콤한 럼콕을 즐기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죠.

휴머노이드 바텐더의 긴 멘트가 끝나자.

삐리리링!

먼지 쌓인 아케이드 게임기 하나가 제멋대로 켜지더니 껐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강한 바람이 어딘가에 튀어 나와있을 전선다발을 자극한 탓이겠지.

레나는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흠칫했으나 곧 안정을 되찾았다.

"돌프야. 가서 꺼라."

"예."

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더 이상 1층에 있기 싫어졌다.

"2층으로 가자. 여긴 너무 시끄럽다."

그렇게 올라온 2층, 매일 증권시장의 업데이트 된 정보를 알려주던 디스플레이에 오늘은 다른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 자~이미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요. 발두르 시티는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모래 폭풍의 영향권에 들었답니다! 아~벌써부터 불어오는 모래에 눈이 따가운 것만 같은데요. 대비들은 철저히 해뒀나요? ]

거기에는 우스운 의상에 과장스러운 행동을 곁들여가며 시티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넷 리포터가 보였다. 그는 시티 방송국 채널의 유명한 진행자였다.

통이 큰 모자에 가죽바지와 부츠를 신었는데, 그 기괴한 부조화가 은근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 시티 중심가의 양복쟁이 친구들은 환기구를 닫아서 방사능이나 독성물질의 유입을 방지하시기 바랍니다! 마법사들의 대기 정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환기는 참아주세요! 어쩌면 시체들이 열어둔 환기구로 기어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

[ 또 시티 외곽의 주민분들께서는, 오늘 밤부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꼭꼭 숨어 있어야 할 겁니다. 왜냐구요? 집이 없어서 슬픈 친구들이 사탕대신 감염이라는 선물을 들고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문 열어주면 큰일 납니다! 하하핫! ]

[ 아! 방금 시티 남쪽 외곽의 '루차쿤토 타운' 에서 들어온 소식이 있네요. 의문의 독성물질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여럿 발생했다고 하는데요? 벌써부터 재수 없는 소리네요. 창문좀 잘 닫으라니까 그러네. ]

폭풍은 엄청난 양의 이물질을 몰고 온다.

모래폭풍의 발원지는 광활한 황무지와 끝도 없이 펼쳐진 발두르 근방의 사막지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그곳에서 날아오는 미상의 것들을 전부 막아낼 수는 없다.

문득, 고이 묻어두었던 나노로봇 카트리지가 생각났다. 사람이 걸어서 지나다닐 일이 없는 곳에 깊이 묻었기에 여간해서는 문제가 없겠으나, 세찬 폭풍이 불어 땅을 파헤치기라도 할까 괜스레 근심이 되었다.

하기야, 노상 땅에만 처박아 두는 것도 반 회장의 유작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위협적이던 놈들도 몇 사라졌으니, 이 폭풍만 끝나면 시술 실력이 좋은 의사를 찾아보리라 다짐했다.

쾅!

바람에 날아온 무언가가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 모래 폭풍은 점점 더 세를 불려 나가고 있다.

쐐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는 칼바람. 거기에 더해 작은 알갱이가 철판을 긁는, 길거리의 무언가가 날아와 문을 연신 때리는 소음이 그 강도를 높여간다. 모든 문을 철저히 막아뒀는데, 내 귀가 이리도 밝았나 싶었다.

텅텅. 텅!

꽤 두꺼운 판을 덧대 놓았음에도 폭풍이 어찌나 강한지, 바람에 눌린 철판과 창문틀이 연신 부딪힌다.

[ 대협, 그곳은 상황이 어떤지요? ]

별안간 삼호문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폭풍이 심해지면 넷 통신망도 전부 먹통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군.

[ 아직 별일 없다. ]

[ 이쪽은 벌써 문패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못으로 잘 고정해두었는데······바람이 저번보다 강해서 그런듯 합니다. ]

[ 떨어진 김에 바꿔라. 별로였다. ]

[ 대협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문패가 밋밋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이왕 이리된 거 더 화려하게 바꿔야겠지요. ]

[ 네 마음대로 해라. ]

나는 즉시 통신을 끊어버렸다.

네온사인 따위로 치장해놓은 문패는 진정한 무협이 아니다. 속으로 그 망할 문패가 떨어져 박살 나기를 기도했다.

*

하루가 느리게 지나갔다.

문이란 문은 전부 막아둬서 건물 밖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음으로 대강 유추해볼 뿐.

쐐애애액-!

아침부터 어제의 칼바람은 애교였다는 듯, 폭풍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있다.

"하아아······."

새벽 내내 밤잠을 설친 레나가 죽을상을 한다. 하기야 철판이 쨍쨍대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 하는 지경이었으니. 심지어 불면증까지 있는데 죽을 맛이었겠지.

[ ... ]

오늘은 넷 통신망마저 먹통이다.

디스플레이 안에서 제멋대로 떠들던 리포터도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있다.

어수선하고 어두운 분위기 속.

조명에 의지해 셋이 다닥다닥 붙어 있자니, 커다란 고래 뱃속에 삼켜진 조난자들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 ······!

아주 짧은 찰나간.

어디선가 작게 들려오는 비명.

옆 건물에는 지금 아무도 없을 텐데.

쾅-!

쾅쾅쾅-!

이제는 확실했다.

누군가 밖에서 1층의 출입문을 두들기고 있다. 아주 문이 부서져라 두들겨대는데 그 다급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듯했다.

- ······열어줘!

이 거대한 모래 폭풍 속에서 바깥을 돌아다니며 남의 집 대문을 두들기는 미친놈이 대체 누굴까.

- 나 알지? 섹스토이! 섹스!

나는 섹스라는 단어를 들고는 고심했다.

이 문을 열어야 하나, 열지 말아야 하나.

밖에서 소리지르는 저것이 사람은 맞나.

원래라면 당연히 열어주지 않는게 맞겠지.

고민하던 내가 따라 내려온 루돌프에게 물었다. 레나는 몸이 돌처럼 굳어 있어서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돌프야."

"예."

"저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아니냐? 나는 들어봤던 것 같다."

그러자 루돌프가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형님."

"왜."

"저는 문을 존나게 두들기는 소리밖에 안 들립니다. 무슨···누구 목소리요? 지금 무서우라고 농담하시는 거죠?"

"그래. 너는 못 들었겠구나."

내 귀가 루돌프놈보다 훨씬 밝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하여튼 문을 열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야 당연히 열어주면 안 되죠. 형님, 우리 다 같이 손잡고 좆될일 있습니까?"

아주 정상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놈이 사람이면 죽지 않겠냐."

"···예? 형님이 그런것까지 신경 쓰시는 분이셨어요? 아니 폭풍이 부는데 밖에 기어나간 새끼가 미친놈이죠."

"그것도 그렇긴 하지."

덜컥.

나는 그리 대답하며 창고 문을 열었다.

그리곤 방진 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썼다.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출입문에 덧대놓은 철판 앞으로 다가갔다.

쾅쾅쾅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 나 좀 살려줘! 부탁이다! 나 그 골목! 300크레딧! 거지!

콰드득!

대못이 박힌 철판을 강제로 뜯어내곤 압축도를 뽑아 든다.

문 앞에 선 내가 다시 루돌프에게 물었다.

"열까 말까."

"······."

"네가 한 번 기탄없이 말해보렴."

"형님."

"그래."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차피 형님 꼴리는 대로 하실 거 아닙니까?"

놈은 눈치를 챙기곤 마땅히 할 말을 했다.

나는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는 루돌프놈에게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도 고민은 없었다.

철컥!

1층 출입문이 시원하게 열린다.

——!

끔찍하리만치 강력한 바람이 화악 불어왔다.

그저 문만 열었을 뿐인데, 바 선반 위의 무거운 술병들이 뒤로 넘어가며 우르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마스크 위를 때리고, 황색 먼지까지 덮쳐와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어둑한 누군가의 형체가 드러났다.

쐐액-!

목덜미를 노리고 단숨에 출수한 압축도.

그러나 혼탁하고 걸걸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나아가던 칼날이 형체의 코앞에서 정지했다.

"흐억! 나 좀 살려주쇼!"

일전에 개방도로 의심했던 그 거지놈이었다.

놈은 말 그대로 넝마주이였다. 걸레처럼 다 찢어진 옷에 산발한 머리, 온갖 구정물에 모래와 검댕이를 잔뜩 묻힌 꼴.

더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었다. 얼굴이 떨어뜨린 만두처럼 일그러지고 새하얗게 질려서는, 마치 달걀귀신을 보는 듯했다.

"쪽박 다 깨지고 여기로 도망왔군."

"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

나는 내뻗은 도를 즉시 회수하고는, 거지놈의 멱살을 잡아채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문을 다시 잠근뒤 철판을 박아넣고 있는 사이, 놈은 술집 내부를 황급히 둘러봤다.

푸닥거리며 달려간 놈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무거운 아케이드 게임기를 문 앞까지 끌고와선 바짝 붙여 세워뒀다. 냉장고보다 커다란 게임기가 문 앞을 막고 섰다.

놈이 그렇게 봉인하다시피 출입문을 막아둔 그때.

톡- 톡-

밖에서 또 들려오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거지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바깥에 서서 문을 소심히 두들기고 있다. 비명이나 살려달라는 말도 없이 오직 손가락을 이용해 툭툭 치는 소리였다.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의 거지를 향해 물었다.

"뭘 끌고온 거냐?"

"······시체지요."

"그렇군."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크게 매질을 하더라도, 지금은 같이 살 궁리를 해봅시다."

심마의 늪에서 헤어나와 심신을 새로이 단장한 내게 이런 빌어먹을 불운이 찾아오다니.

다시 입마(入魔)로다.

콰직-

찰나간, 아케이드 게임기의 화면 속에서 거무튀튀하고 길다란 손가락이 솟아났다. 어지간한 사내의 손가락보다 배는 두꺼웠는데, 여러 갈래로 갈라진 손톱이 휘적휘적 천천히 허공을 파냈다.

삐로로롱-

그 충격 때문인지 아케이드 게임기에 불이 들어오며 아기자기한 물고기들이 나타나 빈 화면을 속속 채워나갔다. 빠찡코 종류의 도박 게임기이긴 하지만, 화면 안에서 손가락이 솟아난다는 얘기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이 다시 쑤욱 빠져나갔다. 게임기의 화면에는 뻥 뚫려있는 괴상한 구멍만이 남았다.

"······."

나는 일단 후안무치한 저 거지놈의 처분을 뒤로 미뤄두고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심마에서 빠져나온 후, 첫 번째 굴곡이었다.

#24화. 수완좋은 거지

#24화.

개방(丐幫).

모든 넷을 통틀어 가장 점유율이 높은 포털 사이트 "백만방도"의 주인.

하루에도 수억 명의 이용자가 사용하는 넷 포털인 '백만방도' 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기업의 광고를 포털 메인에 노출시킴으로써 크레딧을 쓸어담고 있다.

과거 개방은 검색 엔진이었던 백만방도를 중심으로 동영상 서비스, 시티 방송국 같은 플랫폼 사업에도 진출했고 그들간의 촘촘하고 유기적인 상호 네트워크를 구축해두었다. 결국 콧대 높은 언론과 미디어사의 새로운 소식들도 백만방도 사이트의 뉴스란을 통해 먼저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개방은 세계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정보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포털 이용자들이 저도 모르게 물어오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덕분이었다. 백만방도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데이터들을 수집, 분석, 체계화했고 그것은 곧 거대한 하나의 데이터베이스이자 개방만이 취급할 수 있는 정보 자산이 되었다.

개방이 모르는 정보는 세상에 없다! 라는 소문이 정설처럼 나도는 이유였다.

허나 개방은 지금도 7개 거대 도시의 길바닥마다 방도들을 파견해 현장에서부터 정보를 수집해 올리고 있었다.

먼 과거에서나 쓸 법한 방식이었으나, 이는 전대로부터 내려오던 절대적 불문율이었다.

"거지로 밥 빌어먹고 살려면 발로 뛰어라! 흐흐, 빌어먹을.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꼬질한 부랑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본래 알 헤임달 시티의 한 지역을 맡아 관리하는 당주였으나 어떠한 일로 인해 총타(總舵)원로들의 미움을 샀고, 그 바람에 정크타운으로 좌천되어 온 개방의 오결개(五結丐) 왕초삼이었다.

그는 6개월 전, 이곳에 도착한 뒤부터 동네 꼬마들에게 두들겨 맞으며 시간이나 때우다가, 가끔 사설의뢰나 받아 크레딧을 챙기는 신세였다.

그냥 이렇게 대충 살다가 언젠가는 알 헤임달의 길거리로 돌아가 엘프나 신나게 희롱하는 것이 왕초삼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쪽박깨질 동네같으니. 폭풍이 또 와?"

그리고 몸 성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번 모래폭풍을 견딜만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두 번째로 발두르의 모래폭풍을 맞는 왕초삼이 은신처로 택한 장소는, 이번에도 타운 지하에 있는 오래된 지하수로였다. 원래의 역할은 빗물 통로지만,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탓에 오물로 버무려진 시궁창이 되었다.

아무리 거지라도 이런 곳에 몸을 숨기는 것은 내키지 않았으나, 길에서 빌어먹던 걸개가 갑자기 다른 이에게 크레딧을 쥐어주며 몸을 의탁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지극히 더럽고 깜깜하며 냄새가 지독한 탓에, 도망친 채무자를 잡으러온 도박장의 업자들도 감히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 수로.

왕초삼은 짬이 찬 거지답게 그곳에 당당히 자리를 깔고 몰아칠 폭풍이 조용히 지나가길 기다렸다.

모래폭풍이 심히 불던 어느날.

대(大)자로 누워 잠에든 왕초삼은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시궁쥐 무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아흠."

침을 질질 흘리며 일어난 그는 배를 북북 긁었다. 몸에 들러붙어 있던 벌레들이 황급히 떨어져 나간다.

그런데.

휘이이잉-

일어나보니, 고요해야 할 수로의 반대편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통로를 타고온 텁텁한 모래 알갱이가 얼굴을 때렸다.

"퉷!"

왕초삼이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으며 부스스 일어났다. 모래폭풍이 더 심해지기 전에, 어디선가 열렸을 수로 뚜껑을 닫으러갈 생각이었다.

한데 어디선가 갑자기 철벅! 철벅! 하는 걸음 소리가 수로를 타고 메아리쳐 울리는 것이 아닌가.

'수로에 사람이 있었나?'

요상한 느낌에 안력을 돋운 왕초삼은 어두운 수로의 건너편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리고 그런 왕초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존재들이었다.

"······시, 시체? 이런!"

피륙위로 올라온 혈관과 부러진 뼈가 제정상인 인간의 그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형체치고는 너무 뒤틀려있는 것.

본능 깊은 곳에서부터 불쾌함이 치고 올라와 왕초삼의 목젖을 거세게 때렸다.

철벅. 철벅. 철벅.

목이 뒤틀린 시체가 네발로 기어 온다. 놈의 입에선 침과 뒤섞인 혈액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저 네발 달린 놈이 아니었다.

네발 시체의 뒤쪽에서 개를 산책시키듯 여유로이 걸어오는 또다른 시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놈이 줄줄 흘리는 흉포한 살기가 길바닥 생활로 단련된 피부를 거세게 난도질했다.

'이거 뭔가 잘못되었구나.'

어찌 저런 괴물이 여기에 있단 말인가.

섬뜩한 소름이 왕초삼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흐으."

겨우겨우 바닥에 붙은 발을 뗀 왕초삼. 걸개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 그가 수로의 반대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등 뒤로 뼈 뒤틀리는 소리와 철벅대는 발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철퍽철퍽-!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차오르는 생존본능.

쾅-!

무쇠로 된 수로 뚜껑을 쳐부수고 길에 올라선 왕초삼은 냅다 경공까지 사용해가며 재빨리 수로와 멀어졌다. 타운 길거리에는 세찬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오랜 길바닥 생활로 다져진 왕초삼도 버티기 힘들 만큼의 세찬 폭풍. 구름다리를 이루던 철근과 목재들이 위협적으로 휘날린다.

이런 좌천지에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다짐한 왕초삼의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8번가의 사무소와 1번가 총포상이었다. 정크타운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무력과 세를 보유했으며 자신과도 안면이 있는 이들.

하지만 지금 있는 15번가에서 그곳까지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그렇다면······.

가까운 17번가에 있는 그 사내뿐인가.

"젠장!"

어차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왕초삼은 생각을 마침과 동시에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 * *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같이 살 궁리를 해봅시다."

목숨을 건 왕초삼의 도박은 적중했다.

그는 누런 이를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다만 아주 커다란 문제가 남아있었다.

콰직-

수로에서 마주했던 그 괴물놈이 기어코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냄새를 쫓아왔을 시체는, 손가락 하나로 철판을 덧댄 문을 뚫어버린것도 모자라 두꺼운 게임기까지 단박에 뚫어버렸다. 무슨 탄지공을 익힌 것도 아닐진대, 실로 끔찍하리만치 강한 완력이었다.

"살아 보자니까 왜 대답이 없어! 도와주지 않을 거요?"

답답했던 왕초삼이 결국 역정을 냈다.

매일 두들겨 맞는게 일상인 거지라지만, 그래도 오결개에 당주까지 했던 몸. 혼자라면 몰라도 저 시체놈의 시선을 끌어주는 이가 있다면 수를 낼 수 있었다. 혹시 저자가 겁을 먹어 도와주지 않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같이 죽은 목숨이었다.

게임기가 꿰뚫리는 광경을 보자마자 술집 안의 모든 가구를 끌어와 출입문을 틀어막은 레반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걸 묻는군. 그럼 내가 너랑 같이 뒈지려고 문을 열었겠냐."

"하하하!"

왕초삼은 그 삐뚜름한 대답이 기꺼워 박장대소했다. 저번부터 보았지만,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아니고 목숨을 구걸하는데 성공했으니, 세상천지에 나보다 수완좋은 거지는 이제 없구만."

그 호탕한 대답에 레반이 피식 웃었다.

원래 같으면 당장 손발톱을 뽑은 뒤 죽여도 모자란 놈이지만, 지금은 참아야했다. 저 밖에 어찌 생겼는지도 모를 괴물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콰직-!

또 한번 두꺼운 손가락이 문과 가구들을 꿰뚫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뽑혀 나온 레반의 압축도가 그 손가락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서걱-

놈의 손가락 끝 한 치가 잘려나간다.

콰앙-! 콰앙-!

그러자 놈이 격노해 문과 건물 외벽을 마구 때려댔다. 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덜컹거렸지만 결코 열리는 일은 없었다.

바깥의 존재는, 몇 분이 지나서야 드디어 발광을 멈추었고.

—쨍그랑. 콰지직.

"!!"

2층 창문을 출입구로 택하는 기염을 토했다.

모두가 1층 출입구에 신경을 쏟는 사이, 외벽을 때려 소동을 부리면서 1층이 아닌 다른 진입로를 찾고있었던 것이다.

"""······."""

숨 쉬는 소리도 없이 고요해진 술집 내부.

새로운 손님의 출입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휴머노이드 바텐더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술을 권유했다.

- 오늘같이 정열적인 날씨에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 칵테일, 블러디 메리는 어떨까요? 갈아 넣을 토마토즙은 진작에 다 떨어졌지만요.

끼리릭.

바텐더의 몸이 정 반대편으로 돌아가고.

감정없는 기계의 시선이 계단을 향한다.

뒤이어.

철벅-

철벅-

쑤욱!

무언가의 머리가 계단 난간 위로 쑥 튀어나왔다.

눈만 내놓은 채로 밑을 내려보는 이형의 존재. 섬뜩하게 생긴 눈과 커다란 머리통이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다.

"······."

- 키힛.

과거에는 인간이었을, 허나 현재는 인간이 아닌 존재.

쑤욱. 쑤욱.

놈은 마치 장난치는 어린애처럼 혹은, 나약한 먹잇감들을 농락이라도 하듯이 난간 위로 커다란 머리를 연신 빼꼼 댔다.

상대를 마치 장난감으로 보는 듯한 행동. 어차피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실로 여유로운 태도였다.

주둥이에 흥건히 고인 체액이 계단 밑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륵그륵 가래끓는 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울려퍼졌다.

- 끼힉.

섬찟한 살기가 농도짙게 내리깔렸다.

레반은 고개를 들어 놈을 마주했다.

머릿속 깊은 곳에 꼭꼭 처박혀있던, 총탄에 꿰뚫려도 쓰러지지 않던 좀비의 얼굴을 몇 회차의 생이 지나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레반은 놈의 첫인상을 조용히 뇌까렸다.

"정말 못생겼군."

"어, 어떡합니까 형님?"

밴스는 덜덜 떨면서도 기절하기 직전의 레나를 이끌고 벽에 바짝 붙었다. 위험한 상황임을 인식한 전뇌 컨트롤 칩이 행동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 겍.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

피부에 울긋불긋 올라온 혈관.

사람보다 크고 과할 정도로 뒤틀린 상체골격.

절반쯤 거꾸로 돌아간 목과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두꺼운 팔.

우직- 우지직-

머리를 뒤로 굽힌 시체가 그 커다란 몸체로 비좁은 층계를 꾸역꾸역 통과해 내려오자, 온 몸이 딱딱하게 굳은 루돌프가 창백한 얼굴로 소곤댔다.

"혀, 형님. 우리 토마토즙 되는 거 아닙니까?"

"토마토즙이 될지도 모르겠군. 물론 너 혼자만."

탕-!

레반은 그 말과 함께 테크리볼버를 뽑아 격발했다. 시체가 얼굴을 보호하며 긴 팔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피격당한 시체의 팔뚝이 순간 휙 젖혀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질긴 팔을 꿰뚫지 못한 탄알들이 이내 바닥으로 팅팅 떨어지고, 하릴없는 먹잇감의 발악을 확인한 시체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 끼힉!

그 광경을 목도한 레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총이 안 통해?'

분명 4레벨급 이하의 시체는 일반적인 화기로도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저 놈은······

"이 걸개가 한 방 먹여줄 테니, 시선만 끌어주쇼."

왕초삼의 입에서 대뜸 나온 말이었다.

"?"

사뭇 자신있는 얼굴의 왕초삼이 바닥을 강하게 밟았다.

철컥-

왕초삼의 팔에서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자, 레반이 왕초삼의 행색을 이제야 자세히 살폈다.

'오른쪽 어깨부터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이버웨어치고는 투박하고, 생김새를 보아하니 가스 터빈 건틀릿인가? 평범한 개방도 따위가 쓰기에 과한 물건일텐데.'

레반의 시선에, 지금까지 바보 천치마냥 행동하던 개방도놈의 분위기가 일변해선 자세를 바로잡는 것이 보였다.

마치 발경(発勁)과도 비슷한 기수식.

곧 요상한 파장이 기감을 간지럽힌다. 주변의 공기가 왕초삼의 건틀렛 뒤쪽으로 후욱- 빨려 들어가더니 기관차 엔진실에서나 들릴법한 쇳소리가 났다. 이윽고 고온의 열이 뿜어져나와 얼굴이 불이라도 덴 듯 화끈해졌다.

그는 무언가를 큰 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돌프야. 저 괴물놈 대가리만 쏴라."

"예!"

레반은 그 사실을 금방 알아채고는 밴스와 함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둘의 탄창이 거의 다 동나갈 즈음.

"옆으로 비켜서!"

왕초삼이 벽력같이 일갈하며 눈을 부릅떴다.

기이이이잉-

밴스가 레나를 이끌고 휴머노이드 바텐더 뒤쪽으로 피신하기가 무섭게 거대한 파장과 폭발이 건틀렛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쩌어엉!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었다.

전방에 있던 모든 것이 폭탄에 맞은듯 산산조각이 났다. 층계는 반쯤 무너져 내렸고 팔을 앞으로 내밀어 공격을 막으려던 시체의 왼쪽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갔다.

시체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자, 숨을 몰아쉰 왕초삼이 약간의 여유를 되찾고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어."

부서진 층계에서 전광처럼 도약한 시체의 거대한 오른손이 무방비한 왕초삼을 파리잡듯 후려 갈겼다.

콰아아아앙!

미처 피하지 못한 왕초삼은 포탄처럼 튕겨져 나가며 아케이드 게임기 다섯 기를 연달아 박살 내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커헉-

피분수를 내뿜으며 뒤로 넘어가는 왕초삼. 눈대중으로 보았을 때 숨은 겨우 붙어있는 듯 했으나,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윽고 레반이 시체와 다시 눈을 마주했을 때는, 통째로 날아갔던 놈의 왼쪽 상반신에서 뽀얀 새 살이 차오르는 중이었다.

"······."

- 그겍. 그게겍.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듯 무서운 속도로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는 이형의 존재.

걸쭉한 체액이 여기저기에 튀었다.

#25화. 너 이빨 되게 많다

#25화.

뚝···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체액.

거지를 파리잡듯 후려쳐 날려버린 놈은 침을 질질 흘려대며 고개를 까딱거릴 뿐, 내게 덤벼들지 않았다.

육신을 재생할 시간이 필요한 건가.

혹은 또 다른 힘을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는 건가.

나도 당장은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도 좀비는 수없이 봤지만, 솔직히 숨어다니기 바빴지 칼을 꼬나쥔 채로 이리 마주해본 적은 없었으니까.

'쯧, 그러게 멀쩡한 난간을 왜 박살내서는.'

층계 난간을 무너뜨린 것이 저 거지놈에게 큰 독으로 돌아갔다. 비좁은 층계에 끼어 운신이 불편했던 놈을 도리어 편히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준 꼴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상반신의 절반이 뜯겨나간 상태에서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분명 건틀릿이 뿜어낸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전방을 통째로 갈아버리는 그 파괴력을 생각하면, 일전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개방의 왕초삼이라 했던가? 저런 건틀릿을 쓰는걸 보면 절대 급이 낮은 방도는 아닐텐데.'

다만, 그런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곧바로 움직이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겠지. 인간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기행이다.

시체는 가만히 있어도 세상의 기(氣)가 저절로 몸에 쌓여 강해진다 했다. 그렇다면 저 괴물놈은 과연 몇 년이나 살았을까.

30년? 40년?

무슨 오래 묵힐수록 좋은 뱀술도 아니고.

꾸르륵—

살이 뽀얗게 차오르는 저 꼴을 보니 2회차 기억 속의 한 좀비가 떠오른다. 절단한 곳을 불이나 강산으로 지져버리지 않는 이상, 계속 신체를 재생하는 놈이었다.

좀비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았고 가진 능력은 다양했다. 그것이 좀비라는 존재가 탄생한지 20년밖에 안 되었던 세계였다.

그러니 이 세계의 좀비들은 더욱 독하면 독했지, 절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륵.

그렇기에 매사 침착하고 신중하기로 유명한 사내인 나는, 저 괴물놈이 또 어떤 개같은 능력을 가졌는지 근심걱정이 되었다.

선뜻 달려들어 선공을 취하기가 심히 꺼려졌다.

하지만.

왕초삼이 애써 뜯어놓은 상반신을 다 회복할 때까지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내가 결단을 내리고 움직이려던 그때였다.

사사사삭.

"?"

나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개를 무섭게 끄덕이던 놈이 돌연 몸을 돌리곤 무너진 층계를 풀쩍 뛰어올라 2층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일련의 행동이 얼마나 조용하고 신속했던지 발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노림수는 따로 없었던 모양이다.

2층으로 올라가 거꾸로 머리를 빼놓은 놈은, 동향 파악이라도 하듯 나를 뚫어져라 주시하다가 눈을 숨겼다. 귀신같이 긴 산발의 머리칼이 1층으로 치렁하게 내려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스르륵-

바닥을 스치며 딸려 올라가는 놈의 머리카락.

이제 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나 흉흉한 기척은 그대로 느껴진다. 다시 창문 밖으로 도망치기 위해 올라간건 아니다. 아직 머리 위에 숨어있다는 얘기인데···

상처를 회복하기 전에 잡으려면 놈이 눈을 부릅뜨고 기다릴 2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생김새가 저리 좆같아서 그렇지, 아마 어지간한 어린아이보다 똑똑할 것이다.

놈이 2층으로 도망친 뒤, 술집 내부는 잠시간의 소강상태를 맞이했다.

"형님, 바로 지금입니다!"

그때, 빼액 고함을 지르는 루돌프놈.

"?"

"지,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거 또 언제 내려올지 모르잖아요. 딱 봐도 따라 올라갔다간 존나게 위험할 것같고···그러니까 그냥 나가서 다른 곳을 찾아보죠! 뭐든 여기보단 나을겁니다!"

좀비가 줄줄 흘려대는 흉험한 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공포에 잠식되어, 그냥 되는대로 뱉는 한심한 소리였다.

저 놈이 그러면 그렇지. 괜히 귀 기울였군.

'어차피 1층은 저놈이 날뛰기에 비좁았다.'

레나와 루돌프, 심지어 왕초삼까지 있으니 1층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터.

차라리 잘 되었다고 판단한 내가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친씨아가 생색을 내며 내어주었던 무기.

연방군에 납품되는 대 시체용 세열수류탄이 품속에서 그 든든한 자태를 드러낸다.

딸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클립과 핀이 뽑혀 나오고.

휘익!

몇초 뒤, 깔끔한 포물선을 그린 수류탄이 층계 벽에 튕겨 2층으로 올라갔다. 시야에서 자취를 감춘 수류탄이 바닥을 또르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돌프야."

"예, 예! 지금 도망치면 되는 겁니까?"

"호 안에 수류탄."

"······?"

그 말과 거의 동시에.

꽈과광-!

고막을 먹먹하게 때려 울리는 폭음.

툭···툭···

수류탄 폭발에 일부분 무너져내린 천장 사이로 놈의 것으로 추정되는 혈액이 배어 나왔다. 아무래도 수류탄이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었다.

탓!

즉시 신형을 쏘아내며 층계를 뛰어올랐다.

고개를 2층 위로 내밀자, 전신에 쇠구슬만한 크기의 구멍이 송송 뚫린 좀비놈이 밀려오는 격통에 목구멍을 한껏 열고 소리죽인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

수많은 쇠구슬 구멍에서는 새파란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저 상처들이 다시 재생될 일은 없을것 같았다. 뽀얗게 재생되던 상반신마저 불타오르며 재생을 멈추었다.

역시, 시체 사냥꾼들이 선호하는 화기답군.

피륙 곳곳에서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이내 꺼지자, 분노로 눈이 홰까닥 돌아간 좀비의 팔이 순간 두텁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조금 전 왕초삼을 후려쳤던 그 공격.

쐐액-

채찍처럼 휘어지는 긴 팔의 궤적에 허리를 한계까지 젖힌 나는, 휘어졌던 허리의 탄성을 이용해 바닥을 박찼다.

단전에서부터 기맥을 타고 용솟음치는 내력.

'나머지 오른팔도 마저 잘라낸다.'

스아악.

거미줄 같은 혈관이 울룩불룩 솟아있는 팔이 귓볼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그 옆으로 압축도가 느릿하게 떨어진다. 루돌프가 휘두른대도 이것보단 재빠를 것이었다.

하지만.

서걱!

총탄도 막아냈던 시체의 질긴 팔이 느릿느릿한 압축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썩둑- 잘려 나간다.

- 끼엑!? 그에엑!

설마 잘릴 줄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이다.

겉보기에는 거북이처럼 느려 보여도, 모든 공력을 전부 쏟아부어 내려친 참격이었다. 강철이라도 두부처럼 잘라낼 자신이 있었다.

촤아악-

갓잡은 생선처럼 펄떡대며 주변에 피를 흩뿌리는 잘린 팔. 그 징그러운 신체를 대강 걷어찬 내가 울부짖는 놈을 향해 다시금 쇄도했다.

푸욱!

순식간에 비어있는 옆구리쪽으로 파고 들어가 허벅다리에 압축도를 쑤셔 박는다. 팽팽한 근육이 잘려 나가는 느낌이 손에 생생히 느껴졌다.

이제 도를 뽑아 회수하려는데, 칼 끝이 어딘가에 덜컥 걸렸다. 아무리 힘을 줘도 뽑혀 나올 기색이 아니었다.

아마도 놈의 질긴 근육이 도를 붙잡고 있는듯 싶었다.

'괴물은 괴물이군.'

당장은 회수가 불가능 하다고 판단한 내가 칼을 놓고 놈의 등 뒤에 달라붙어 뱀처럼 목을 휘감았다. 여차하면 힘을 주어 이대로 목뼈를 부러뜨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

뚜두둑-

놈의 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회전하고.

뒤통수가 있어야 할 곳에 얼굴이 생겨난다.

비웃는듯 실처럼 가늘어진 눈알이 목을 조르려던 나를 노려본다. 놈이 입을 벌리자 진득한 체액이 주욱 늘어지며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난다. 당장이라도 내 얼굴을 뜯어먹을 기세였다.

"우와, 너 이빨 되게 많다."

그때, 밑으로 팔을 뻗어 허벅지에 박혀있던 압축도를 회수한 내가 벼락처럼 팔을 뿌렸다.

쿠직.

놈의 어두운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어간 칼이 뒤통수를 뚫고 나온다.

- 그륵.

"!?"

헌데도 놈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칼날이 입을 지나 뒤통수를 관통했음에도 멀쩡하다. 죽지않는 시체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뿌직-

무언가 거죽을 뚫고 나오는 소리.

옆을 보자, 날아갔던 왼쪽 상반신에서 팔이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불로 지져도 재생시킬 수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제 더 이상 놀라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놈은 방금 갓 재생시킨 팔을 입 속에 넣었다. 박혀있는 도를 뽑아내기 위한 동작이었는데, 이는 내게 천금 같은 기회였다.

스륵.

쥐고 있던 도병을 그냥 놓아버렸다.

목을 조르던 반대편 팔까지 풀곤, 놈의 몸뚱이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총을 뽑았다.

"그래. 어디 열심히 한번 뽑아봐라."

쿠직-

테크리볼버의 총구를 도를 뽑아내려 몸부림치는 놈의 상처에 쑤셔박는다. 나는 그 상태에서 방아쇠를 마구 당겨댔다. 수류탄의 파편이 뚫어둔 상처를 다시 한번 비집고 들어가는 총탄. 팔로 압축도를 빼 보려던 놈이 하늘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다.

- 끄에에에엑!

결국 압축도를 빼는 것을 포기한 놈이 고통에 허리를 숙였다. 때를 노린 내 무릎이 압축도에 꿰어져 있는 놈의 얼굴로 솟구쳤다.

으직!

뒤통수를 안테나 처럼 뚫고 올라오는 칼.

이젠 손잡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케에에엑! 키헥!

혈액과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좀비의 고개가 뒤쪽으로 홱 젖혀진다. 부러진 이빨 조각들이 반쯤 으스러진 턱 밖으로 마구 뛰쳐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래도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

이 끔찍하리만치 징그러운 생명력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다.

이제 확실하게 목숨을 끊어 놓으려면 나도 위험을 감수해야할 듯 싶었다. 품에 지니고 있던 고농도 마나액 주입기 두 개를 꺼내 허벅지에 박았다.

후우우우-

단숨에 불타는듯 달아오르는 심장부근.

두 개의 마나 회로를 이용해 한계까지 마나입자를 빨아들인다음 고속으로 회전시킨다.

에센스까지 잘 챙겨 복용한 몸.

농도 높은 마나액도 박았으니 한 번쯤은 어찌어찌 버텨주겠지.

이윽고, 한계까지 응축된 마력이 내 두 팔에 터질 듯 스며들었다.

- 케에에엑!

끔찍한 괴성에 이은 육탄 돌진.

좀비놈은 이젠 머리를 관통한 압축도를 뽑아내길 포기했는지, 입에 칼이 쑤셔 박힌채로 나를 향해 짓쳐들었다.

허나.

찰나간 놈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 게겍!

폭발적인 속도로 내 옆을 돌파해 다시 1층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가볍게 손을 뻗었다.

꽈득.

그러자 도망치던 놈의 긴 머리칼이 손바닥에 휘어 잡혀 들어왔다. 내 양 팔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이 자석처럼 놈을 끌어 당기고 있었다.

나는 버둥거리며 머리카락을 끊고 도망치려는 놈의 귓가에 속삭였다.

— 필살기를 쓰는데 도망치는 법이 어디있니.

이윽고 직선을 그리는 마나의 궤적.

폭력적인 주먹질이 시체의 뒤통수로 떨어진다. 주먹에 가득 응축된 마나가 폭발하며 질긴 피륙을 녹여버린다.

쾅! 콰득! 콰앙!

강렬한 폭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머리칼을 단단히 잡힌 채 목을 거꾸로 돌려가며 발광하던 놈의 머리뼈가 부러지고, 눈알은 터져 멀어버린다.

어느새 얼굴이 걸레짝이 되어버린 놈.

찌걱!

놈이 정신이 없을 때를 노려 출수한 내가 입천장에 박혀있던 압축도를 무 뽑듯 뽑아냈다. 혈액과 무엇인지 모를 진액이 도신을 타고 줄줄 흘러나왔다.

——!!!

귀청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괴성.

놈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발악하며 어떻게든 1층으로 기어 내려가려고 수를 썼다. 두 허벅지를 풍선처럼 부풀린 놈이 높이 뛰어 올랐다가 바닥을 밟자, 그간 약해질 대로 약해진 2층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뚜둑!

그 눈물겨운 노력에 감복한 놈의 머리카락마저 끊어진다.

- 궤에엑!

그렇게 원하던 1층으로 떨어지는데 성공한 놈은 입을 찢어져라 벌리더니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놈의 목이 파도처럼 꿀렁이고, 입 속에서 무언가 시커먼 액체가 차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시커먼 액체가 세상 바깥을 구경하는 일은 없었다.

놈이 1층으로 떨어졌을 때는 이미 나의 도가 호선을 그려낸 뒤였으니까.

그 두꺼운 목에 얇은 혈선이 생겨나더니, 머리통이 몸과 분리되며 비스듬히 흘러내렸고.

쿵!

수박통처럼 커다란 좀비의 대가리가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갔다.

콰직-!

나는 놈의 머리를 밟아 부수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

과거 지니에게 주입받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차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언데드의 개체수는 최소 200억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어. 〕

이런 놈들이 장벽 밖에 200억 마리나 더 있다고?

씨발.

"여긴 대체 150년을 어떻게 버틴거야?"

#26화. 잘 지내보자

#26화.

푹! 푹!

확인 사살.

목 잃은 시체의 몸뚱이를 난도질한다.

정신나간 재생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터진 대가리는 버리고 몸통 속에서 새로운 머리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푸욱! 푸욱!

피륙을 찌르고 베어가자 몸뚱이의 거죽이 금세 너덜너덜해졌다. 약간의 움직임도 없는걸 보면 놈은 확실히 죽은 게 맞았다.

"이렇게 강한 놈들을 상대로 150년이라···."

방금의 전투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생에서 보았던 놈들과는 격이 다르다.

2회차의 그 악몽들이 졸지에 우습게 느껴질 정도.

고작 한 마리를 상대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만약 왕초삼의 발경과 이것저것 쟁여둔 무기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목이 날아간게 놈이 아닌 나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괴물이 최소로 잡아 200억 마리.

이것보다 약한 개체도 많겠지만, 연방이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일곱 거대 도시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거라더니······

연방을 비롯한 시티의 권력자들이 합심해 좀비에 관한 정보들을 통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군.

과거 지니에게 주입받은 지식을 비롯한, 여태껏 이곳의 좀비에 관해 내가 알고 있던 내용들은 현실과 꽤 동떨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론으로 배운 것과 실전은 다르다.

하기야 좀비와 마주할 일이 없는 대부분의 시티 주민은 알 필요도 없는 내용이다. 괜히 절망적인 소리를 해서 혼란을 키울 필요는 없을 테니까.

순간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부모도 없이 태어난 뒤 배양 시설에서 시종으로 키워져 20년을 꾸역꾸역 버티다가 이제 탈출한지 겨우 한 달도 안 되었는데···

그야말로 힘이 쭉 빠지는 일이 아닌가.

푸욱! 푸욱!

나는 화풀이로 시체의 몸뚱이를 더욱 처참하게 도륙냈다. 온 사방에 혈액이 튀었다.

그러자 루돌프가 레나를 어딘가 숨겨둔 채로 어정쩡히 다가와 나를 말렸다.

"혀, 형님?"

"왜."

"저 괴물새끼 이제 죽은 것 같은데요. 혹시 뭐 아픈 곳은 없으시죠? 하하."

무언가를 숨기는 티가 역력한 얼굴이다.

숨통이 끊어진 시체에다 대고 계속 칼질을 하고 있으니, 내가 감염이라도 된 건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심이겠지.

그 한심한 의심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갑자기 사람 피가 마시고 싶구나. 그륵."

"이, 이런 씨발!"

쿠당탕-

내가 대충 목 긁는 소리를 내자,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황급히 뒷걸음을 치는 루돌프놈.

기겁한 표정이 아주 꼴불견이었다.

사내란 자식이 저리 대가 약해서야.

촤악-

나는 칼에 묻은 피를 털며 말했다.

"돌프야. 넌 어째 날이 갈수록 한심해지는구나."

녀석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속았다는 걸 눈치챈 듯, 반가운 말투로 되물었다.

"······아, 형님이십니까? 역시 형님 맞죠?"

"그륵그륵."

"으허억!"

한심한 놈을 놀려주던 그때였다.

—콰앙!

루돌프와 내가 벌이는 소란에 기절에서 깨어난 듯한 왕초삼이 벼락같이 달려들어 좀비의 몸뚱이를 걷어찼다.

머리 잃은 몸뚱이가 주르륵 밀려난다.

아니, 이 거지놈은 또 왜 이래?

쿵···

밀린 몸뚱이가 칼바람에 나부끼던 문을 누르자, 구멍난 문 사이로 들어오던 바람의 위력이 줄어들었다.

짧은 고요가 내려앉았다.

산발의 왕초삼은 이내 다리를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죽었···?"

바닥에 굴러다니는 좀비의 대가리를 뒤늦게서야 확인한 왕초삼은 그 자리에 황망히 주저앉더니 격한 기침을 했다.

기침할 때마다 검붉은 핏물이 배어나온다.

쿨럭- 쿨럭-

왕초삼의 상황은 몹시 좋지 않아보였다.

추측하건대, 심각한 수준의 내상을 입었으리라.

재수가 없으면 진기가 손상되었을 수도 있었다.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급히 가부좌를 튼 왕초삼은 내상을 다스리기 위한 운공에 들어갔다.

하지만 운공으로 틀어막을 수 없을 테지.

그렇게 다 고칠 수 있으면 의사가 왜 있겠어.

분명히 오장육부가 크게 망가지고 상했을 테니, 수술 솜씨가 좋은 외과의를 찾아가는게 먼저다.

부웩-

아니나 다를까, 왕초삼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검붉은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냈다. 덩어리진 피에 내장 조각이 군데군데 섞여나오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얼마 못 가서 죽겠군.'

왕초삼놈도 그 사실을 아는지,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괜찮니."

내가 그리 묻자.

쿨럭-

피 섞인 기침을 연신 하며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낸 왕초삼이 힘겹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곧, 철패 매듭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진다.

방도들이라면 가지고 있는 개방의 표식.

이윽고 철패 매듭의 가장자리에서 뻗어 나온 홀로그램 불빛이 허공에 다섯 개의 매듭을 꼬아 올렸다.

"오결개였나?"

생각보다 힘이 있는 거지였군.

구결은 개방의 장, 용두방주.

팔결은 방주의 후계자나 원로.

칠결은 개방의 장로급.

그리고 육결과 오결은 원로나 장로의 직전제자나, 한 지역의 당주에게 주어지는 꽤 높은 급의 철패였다.

어째서 이런 슬럼가에 오결개가 있는지 모르겠군.

왕초삼은 의아할 정도로 높은 배분의 거지였다.

또한 배분 높은 거지답게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오결이니까 도와달라?"

"끅."

"내가 치료 마법이라도 써주길 원하나? 네놈 덕에 다 뒈질 뻔했는데?"

"끅."

왕초삼놈은 꺽꺽거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어찌 대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

입술 밑으로 검붉은 피가 연신 흘러나왔다.

"초삼아. 나도 싸우느라 많이 지쳤다. 지금 널 치료하려면 모가지를 걸어야해."

부르르-

그 말을 들은 왕초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픈 심정일 것이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건틀릿, 나한테 넘겨라."

"······."

그러자 왕초삼은 쥐죽은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버텨볼만 한가 보구나."

"······."

부르르르-

이제는 거의 자명종처럼 부들대는 왕초삼.

아마 지금 머릿속에서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고 있지 않을까.

사실 건틀릿에는 욕심이 나지 않았다.

어차피 저걸 빼앗아 봐야 총포상에 헐값으로 팔아치우기밖에 더 하겠나.

대신 욕심이 나는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스르릉-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살려주마. 이제부터 가만히 있어라."

"······?"

움직이지 못하는 왕초삼의 가슴팍에 도를 들이댄다.

이윽고 칼끝을 이용해 놈의 살갗을 그어갔다. 칼끝이 피부에 옅은 상처를 내며 만들어 내는 것은 복잡한 문양의 상처였다.

바로 로티스의 등판에 있던 문신과 비슷한.

부르르-

부르르-

왕초삼이 몸을 사시나무 떨듯 계속 떨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대충은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은 차마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했다. 그랬다간 무조건 죽을 테니까.

"초삼아. 거의 다 되어가고 있다."

마나 문신을 매개로 거는 저주 마법은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고위 마법사만 사용할 수 있는건 아니다.

고농도 마나액의 효과가 남아있는 지금의 나라면 제한적인 저주 마법 정도는 시도해볼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 마력 수준으로 왕초삼같은 고수의 육신에 저주를 거는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놈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

때마침, 약한 마력에도 항거할 수 없는 최상의 상태라는 뜻이다.

정의롭고 선한 사내인 나로서는 이런 악독한 마법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독한 사내가 되어보기로 했다.

사아아-

내 회로를 휘돌던 마력이 왕초삼의 살갗에 그린 상처를 타고 흘러 들어가 심장에 자리 잡았다.

『 느림의 미학 』

제국이 첩자들에게 사용하던 육체 저주.

정해진 기간 안에 마력을 보충해주지 않으면 심장이 조금씩 느리게 뛰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멎게된다. 제국의 첩자들은 이 저주 때문에 제국을 배신하지 못했다.

강대한 마법사들은 한 번의 마력을 주입한 것으로 몇 년의 기간을 유예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내 마력으로는 일주일이 한계로군.

말이 저주지,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거다.

뷔에탕의 그것처럼 정신까지 갉아먹는 마법은 아니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거 어렵지 않지?"

"······."

"앞으로 잘 지내보자."

"······."

왕초삼은 이내 체념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초삼이의 소중한 목숨을 담보로 잡아두었으니, 담보의 가치를 유지해야겠지.

나는 왕초삼의 등 뒤로 가서 앉았다.

툭- 툭-

혈도 몇 개를 짚고 등에 손을 가져갔다.

곧바로 내기를 불어넣어 안쪽의 상황을 확인했다. 놈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밀고 들어오는 기운에 반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죽은 목숨이라면, 나같이 정직한 사내에게 목숨을 맡겨보는 것도 꽤 좋은 경험 아니겠나.

내상은 예상대로 심각했다. 내장이 심히 망가지고 기혈이 죄다 뒤틀렸기에 자력으로 뭔가를 시도하기에는 많이 벅찼겠지.

"초삼아. 버텨라."

길게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내력을 움직여 왕초삼의 틀어진 기혈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잠시 뒤.

왕초삼의 호흡이 터져 나오는 걸 느끼며 손을 뗐다. 놈은 아직도 어딘가 버거워 보였다. 그러나 기침은 멈추었고 검붉은 피도 더 이상 토하지 않았다.

폭풍이 끝나는 대로 의사를 찾아가면 살 수 있을것이다.

이제 문제는 내 몸 상태다.

"···후."

심장 부근이 불덩이처럼 뜨겁고 뇌가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고농도 마나액을 두 개나 꽂아가며 과한 마법을 사용한 주제에, 없는 내력까지 짜내어 운용하니 육체가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슬슬 발가락 끝부터 타오르는듯한 열통이 엄습했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끌어다 사용했으니, 필히 후폭풍을 견뎌내야 했다.

촤르르륵-

나는 미니바 냉동고에 있는 온더락용 얼음을 전부 긁어모은 나는, 옷 안쪽에다 얼음을 가득 붓고는 나머지 얼음들을 와작와작 씹어 삼켰다.

그리고 가장 도수가 높은 보드카를 바에서 꺼내어 머리에 콸콸 부었다. 등신같아 보이지만 어떻게든 끓어오르는 열을 낮추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곧 얼음의 차가운 냉기가 피부와 호흡을 통해 스며들자 약간 숨 쉬기가 편해졌다.

"······."

그렇게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되어 뒹굴고 있는 좀비의 사체를 구경하고 있자니, 오만가지 기억과 상념들이 한데 뒤섞였다.

그리도 두려운 존재였던 놈을 잡아 죽였다.

지난 회차에서 수없이 해왔던 망상처럼.

내가 쌓아온 힘으로.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거나 날 괴롭히던 트라우마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었다.

휘이잉-

나는 어느정도 열을 내린 뒤, 좀비의 시체를 번쩍 들고 2층으로 올라왔다. 몸뚱이를 휙 던져놓고, 놈이 부순 창문에 철판을 덧대 닫아걸었다.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곳곳이 박살난 2층.

레나의 증권거래용 디스플레이 화면들이 일제히 켜지며 피칠갑된 실내를 밝힌다.

나는 그곳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그 뒤.

두 시간이 지나 무거워진 몸으로 겨우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했는데도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당장이라도 몸이 찢어질듯한 통증이 뇌를 거세게 두드린다.

"······."

마나 회로는 차가웠고, 단전도 허전했다.

앞으로 며칠간은 힘도 못 쓰고 개고생하겠군.

"형님!"

"레, 레반! 괜찮은 거야?"

1층으로 내려오니 루돌프와 레나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옆을 보니 왕초삼은 아직도 식은땀을 흘리며 내상을 다스리는 중이었고, 술집 내의 풍경은 가부좌를 틀기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괜찮다."

어디에나 핏자국이 낭자했고.

모든 벽면은 처참하게 패어 있었다.

2층 바닥이자 1층의 천장은 곳곳이 폭삭 무너져 내렸고, 아직 위태위태하게 버티고 있는 천장도 언제 내려앉을지 몰랐다. 이미 건물의 축 자체가 틀어졌을 테니, 수리로 고쳐볼 만한 단계는 지났을 것이다.

구멍난 2층 바닥 사이로는 아까 올려놓았던 좀비의 몸뚱이에서 모인 혈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피가 떨어지는 곳에 양동이 같은걸 가져다 놓았다. 바에서 얼음을 모아둘 때 쓰는 바스켓이었다.

그런데.

똑···

"?"

별안간 혈액 사이로 미끄러지는 희끄무레한 액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말짱한 눈을 몇 번 끔뻑였다.

혈액의 붉은 색감과는 조금 다른 것.

체액과 섞이지 않고 분리된 액체가 1층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커다란 양동이를 절반쯤 채운 혈액 위에 수은처럼 망울져 맺힌다.

똑···똑···똑···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채야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잔뜩 들이켠 바로 그 에센스와 비슷했으니까.

조금 다른걸 꼽자면, 꿀꿀이 죽마냥 혼탁했던 찌꺼기급의 에센스보다 월등히 맑고 깨끗하다는 것.

그리고 양이 꽤 되어 보인다는 것.

"······."

나는 그 두가지 다른 점을 확인하곤, 소리라도 지르며 한바탕 웃고 싶었다.

하지만 마나액 후유증으로 뇌가 울려 웃지는 못했다.

그저 흡족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똑—

#27화. 그럽시다

#27화.

"형님. 찾았습니다."

무거운 시체를 자르고 옮기느라 땀에 흠뻑 젖은 루돌프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놈은 넷에 접속해 뽑아낸 에센스를 복용해도 되는지 알아보던 중이었다.

"백만방도에 검색해보니까 갓 뽑아낸 에센스를 그냥 마셨다가 재수가 없으면 배탈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답니다. 되도록 여러번 거르고 불로 팔팔 끓여서 먹는게 그나마 안전하대요."

"그러냐."

"예. 확실합니다."

그럼 그냥 먹어도 상관없다는 얘기군.

나는 걱정을 한시름 덜고는 자리에 앉았다.

바라본 술집 안의 풍경은 참으로 기이했다.

한 거지는 죽을둥 살둥 땀을 흘리며 내상을 다스리고 있었고, 두 사내는 천장에 매달린 사체만 뚫어져라 바라봤으며, 한 심약한 여인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리고 아까 쓰레기처럼 내팽개쳐져 있던 좀비의 몸뚱이는 귀하게 모셔진 뒤 몸통과 팔, 다리. 총 다섯 조각으로 분리되어 꼬치처럼 꿰이는 신세가 되었다.

우지직-

압축도에 일렬로 꿰어진 좀비의 그것들을 2층의 무너진 바닥 구멍 사이에 놓아 1층으로 피가 빠지도록 만들었는데, 무게가 무게인지라 바닥이 무너질 것처럼 우지끈거렸다.

놈의 근육은 인간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오밀조밀하고 두꺼웠다. 근질부터가 다르다고 할까. 아무튼 다리 한 짝에 적어도 일백근은 족히 넘을듯 했다.

좀비의 기형적인 신체 부위들이 칼에 꽂힌 채로 천장에 매달려있는 그 경관은 실로 흉물스러웠다. 붉은 조명만 있으면 정육점인줄 알 정도로.

뚝—

박쥐처럼 거꾸로 뒤집힌 사체의 목과 상처에서 새어 나온 피가 방울져 떨어진다. 확실히 빠른 속도로 피가 빠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까 전에 내가 화풀이를 한답시고 몸뚱이에 칼집을 숭숭 내둔게 유효했다.

뚝—

떨어진 핏물 위로 몽글몽글한 에센스가 맺혀 수영장 위의 튜브처럼 둥둥 떠다닌다. 그렇게 되면 루돌프가 동동 떠다니는 에센스를 빈 보드카 병에 조심스레 옮겨 담았다.

확실히 저번의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더 진한 색감. 최하급품 에센스 따위보다 질이 월등히 좋아 보인다.

나는 시체에서 피가 다 빠지길 기다렸다.

중간에 좀이 쑤셔 축기를 한 번 시도해 보았으나, 혈도와 기맥만 더 고통스러울 뿐 허전한 단전이 채워지진 않았다.

결국 멍하니 앉아 눈만 끔뻑이는 수 밖에.

아무튼 보기만 해도 흡족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찌릿.

문득, 어디선가 느껴지는 오싹한 기척이 전신을 찔렀다. 당연히도 미간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좀비가 더 있었나?'

설마 사람 피 냄새가 밖으로 빠져나간 건가.

나는 내력을 돌리고 있을 왕초삼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물론 놈은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새 문 앞까지 당도한 누군가의 기척.

일단, 출입문에서 급히 떨어졌다.

꾸드득!

그와 동시에, 막아 두었던 1층 문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며 커다란 눈알이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슬처럼 엮인 신경에 달려있는 눈알이었는데 그 눈이 괴상하게 움직였다.

- ······.

이윽고, 주먹보다 조금 큰 눈알이 열 개가 넘는 눈알로 갈라졌다. 작은 눈알들이 서로 다른 곳을 향하며 이쪽을 훑어봤다.

놈은 일전의 좀비보다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꼬치 신세가 된 좀비와의 전투에서 이미 대부분의 힘을 쏟아부은 뒤였다.

여기서 몸을 더 혹사해 힘을 끌어낼 방도가 있다해도, 분명 그 여파가 막심할 것이다. 자칫하면 며칠이 아니라 몇 개월을 내리 고생해야 할 수도 있다.

'젠장, 저걸 일회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운데······.'

결국 뽑아낸 에센스로 시선이 몰렸으나.

서걱—

이어진 상황에 그 걱정들이 전부 무색해졌다.

갑자기 모든 눈알이 단말마를 빽 지르고는 멈춰버리는 것이 아닌가.

찰나간의 침묵이 흐른 뒤.

얼떨결에 밖을 내다본 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쩌억-!

놈을 양단하는 하나의 실선.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담백한 참격이다.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일직선으로 잘린 눈알 좀비의 몸뚱이가 부질없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쿵.

조금 전, 오싹한 기척의 주인은 눈알 좀비가 아니라 용린으로 촘촘히 짠 듯한 철갑옷을 전신에 두르고 있는 저 사내였다.

6레벨 사무라이 륭.

언제부터 밖을 돌아다니고 있었을까.

허리에 감겨있는 쇠밧줄에는 이미 죽은듯 보이는 좀비가 여럿 매달려 있었다.

그때, 륭이 들고있던 도검을 납검하고는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었다. 좀비가 난동을 부려 생긴 외벽의 흔적을 눈치챈 듯 했다.

"괜찮다면 들어가서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대답을 고심했다.

눈앞의 사내가 에센스를 보고선 욕심을 낼까 미덥지 못했던 탓이다.

하지만 좀비를 저렇게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걸 보면, 에센스에는 별 관심이 없는듯 했다. 애초에 저 사내를 막을 수단도 없었다.

그리 생각한 내가 흔쾌히 문을 열자 일언반구도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온 륭은 내부의 기괴한 광경에도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

천장에 매달린 좀비의 사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던 그는, 대뜸 좀비의 피를 손으로 찍어 냄새를 맡았다. 그 다음으로 좀비의 허벅지 뼈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돌리곤 입을 열었다.

"나중에 사무소에 잠시 들러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유를 묻지 않고 그리하겠다고 하자, 륭은 그제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두 갈래로 나뉜 눈알 좀비에 구멍을 뚫어 허리의 쇠밧줄에 건 그가 묵묵히 모래폭풍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그리고."

"?"

"바깥에 일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누가 찾아오더라도 놀라지 말고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십시오."

륭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뒤를 돌더니, 의문스러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정말로 사라졌다.

—지이익.

사체를 질질 끄는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

하루가 지났다.

그간 정양하던 왕초삼은 이제 말 정도는 할 수 있을만큼 기운을 차렸다. 개방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오결개이니, 배워익혔을 심법도 범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깨어난 왕초삼은 어렵지 않게 저주에 걸린 현실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내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은 목숨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뭐 제까짓 놈이 억울했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흐흐, 매질을 당할 각오는 했는데 설마하니 이렇게 당할줄은 몰랐다. 헌데 기왕이면 멋있게 그려줄 것이지, 그림 실력이 형편없군."

나는 폭풍이 끝날때 까지는 시간이 널널했기에, 깨어난 왕초삼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약 반나절간 왕초삼으로부터 뜻밖의 정보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내게 좋은 내용도 있었고 좋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녀석은 허심탄회까지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선 좋지 않은 소식은, 일주일 전쯤 1번가 총포상에서 의뢰를 받은 왕초삼이 나와 레나의 정보를 그쪽에 넘겼다고 고백했다.

이로써 나와 레나가 반 바이오 컴퍼니의 도망자인걸 친씨아 그 여자까지 알게 됐군. 어찌 되었건 개방에 돈까지 내가며 뒷조사를 했던걸 보면, 내게 보였던 관심은 나름 진심이었던듯 싶다.

사실 이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래서, 뭐하는 여인인데 날 그리 좋아하나."

"뭐 하는 여인이냐고?"

내가 묻자 왕초삼이 실실 웃었다. 놈은 그러다가 옆구리를 붙잡고는 심히 고통러운 얼굴로 바닥을 뒹굴었는데 아직 내상이 심해보였다.

끙끙대던 왕초삼은 곧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친씨아는 상선의 사람이다."

화물 운송조합 "상선"

발두르 시티에서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발두르 시티로 오고가는 공중 화물중 무려 30% 가량을 상선의 캐리어들이 책임진다.

세계의 육로는 좀비로 인해 사실상 막혔기에 공중 수송이 전부나 다름없는 상황인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상선은 현재 약 100여 척의 화물 운송용 대형 캐리어를 운영하며 시티에서 시티로 화물을 운송하고 있다. 압도적인 운행 데이터로 7개 도시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안전한 항로망까지 보유하고 있으니 다른 운송 기업들을 제치고 좋은 일감을 몰아 받는 것이다. 사실 정치권력자들과 커넥션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상선은 엄밀히 따지자면 기업은 아니다.

그러나 화물운송업을 통해 얻는 막대한 자금을 뿌려가며 발두르 시티 전반에 큰 영향력을 끼쳐왔다. 오랜 세월 발두르에 뿌리를 내린 덕에 정치권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어 발두르 시티 안에서만큼은 여느 대기업 이상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쩐지 하는 꼴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근데, 그치들의 관심은 당신의 일신상 전혀 좋을게 없어."

왕초삼이 말하길.

상선의 친씨아는 그간 화물운송 캐리어로 들여오는 연방군의 무기들을 일부 빼돌려 무기 암거래를 해왔는데, 아무래도 발두르의 정치 권력자들이 그 뒤를 적당히 봐주며 상생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최근 탄로 나는 바람에, 시티의 정치인 몇의 입을 막아야 할 일이 생겼다.

즉, 정치인을 암살할 만한 수준의 히트맨이 필요해진 것.

총포상의 친씨아라는 여자는 마음껏 쓰고 탈 없이 버릴 수 있는 외부 암살자를 구하려던 거다.

와중에 내가 눈에 들었고 친씨아는 왕초삼을 부려 나와 레나가 당가로부터 쫓기는 중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흐흐, 그러니까 조만간에 못참고 부를거야. 별 해괴한 조건을 내걸어 살살 꼬드기려 들 텐데 어떻게든 엮이지 마. 어지간해선 반드시 죽을 테지. 당신도 나도."

친씨아의 얘기를 끝으로 왕초삼은 더 이상 알려줄 것이 없다며 다시 운공에 들어갔다.

뜻밖의 비사를 듣게된 나는 일단, 복잡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지운 뒤에 가부좌를 틀고 바닥에 소담스레 놓인 보드카 병을 집어 들었다.

안에 담겨있는 내용물은 술이 아니었다.

바로 루돌프놈이 뜬 눈으로 밤을 새가며 에센스를 옮겨 담던 병이었는데, 어느새 보드카 한 병이 좀비의 에센스만으로 가득 찬 것이다.

출렁-

그러모아둔 에센스가 미세하게 출렁거렸다.

나는 지체없이 에센스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에센스의 맛이 시원한 콜라보다도 더 달게 느껴졌다.

*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오늘은 문 바깥이 잠잠했다.

바로 모래폭풍이 끝나는 날이기에 그렇다.

장벽 밖에서 시체들을 몰고 와 슬럼가에 팽개쳐놓은 모래 폭풍은, 이틀이나 더 지나고 나서야 완전히 멎었다.

끼이익-

모래먼지에 파묻혀 삐걱대는 출입문을 밀자, 1년에 몇 번 보기 힘든 햇살이 내리쬔다.

바람이 더러운 대기를 휩쓸고 간 덕일까.

어두운 사방을 뒤덮었던 네온사인과 LED 조명 없이도 정크타운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꽤 신선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좆같은 모래폭풍이 드디어 끝났는데도 밖으로 나와보는 주민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겠지.

따라나온 루돌프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사흘 전에 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바깥에 일이 생겼습니다. 나중에 누가 찾아오더라도 놀라지 말고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십시오. ]

그말대로 타운에 무언가 이상이 생긴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철컥-

어디선가 군복을 갖춰 입은 무리가 나타나더니 슬쩍 총을 들이밀었다.

개중에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앞으로 나와 신분증을 내밀었다. 신분증에 크게 박혀있는 연방군 마크. 그는 친근한 얼굴로 웃으며 동행을 종용했다.

"그럽시다."

내가 순순히 손을 내밀자 곧바로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

뒤이어 루돌프와 왕초삼, 레나까지 수갑을 채우자, 군복을 입은 이들의 태도가 약간 강압적으로 변했다.

아마 저들의 머릿속에선 이런 대화가 이뤄지고 있지 않을까.

—정크타운 17번가 감염의심자 네 명 발견. 격리 시설로 즉시 이송 조치하겠음.

나는 아직도 몸속에서 다 흡수되지 못한 채 발버둥 치는 에센스의 기운을 갈무리하며 그들을 따라나섰다.

#28화. 불쾌지수

#28화.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닭장을 얹어 놓은 것처럼 생긴 수송 트럭의 짐칸에 올라타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신들은 서쪽 장벽에 있는 14호 격리 시설로 이송될 거다."

그 말에 루돌프가 손을 번쩍 들고는 물었다.

"거기에 며칠이나 있어야 합니까?"

"3일 안에 증상이 없으면 내보낸다. 그러니 허튼짓 하지마라."

"아 3일이요···."

부우웅-

트럭의 속도에 맞춰 날아다니며 호위 중인 드론 몇 기. 포탑이 달린 공격용 드론이거나 자폭 드론이었는데 그 비행음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트럭 위의 연방군 병사들은 서로 잡담하며 담배를 태우는 등 일견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허술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지난 이틀간 얼개를 잡아두었던 내 계획이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어그러졌기 때문이다.

본래 계획은 묻어둔 나노로봇 카트리지를 꺼내와서 왕초삼이 안다는 의사를 같이 찾아갈 예정이었다. 과거 연방에서 일하던 사이버 닥터라고 했는데, 지금은 개방의 지부를 돌며 빈객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 사이버 닥터가 나노로봇 시술 경험이 있는 의사라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금 가지고 있는 나노로봇을 시술받으면 현재의 마나액 후유증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긴 시간 정양해야 할 내상이나 육체 단련으로 인한 피로도 그 기간을 확연히 단축시킬 수 있을 테니까.

지금처럼 나약한 몸이 아닌 진정한 무인의 육체가 완성되면 에센스의 기운을 흡수하지 못해 사방팔방으로 날뛸 일도 없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에센스가 깃들 예정만 남아있었다.

그런데 가축처럼 잡혀가는 꼴이라니.

나는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내였지만,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병사들이 면전에 소총을 들고 있었다. 인권이니 존엄성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다.

그때그때 분위기를 잘 파악해가며 할 말을 하는게 바로 나라는 사내의 장점이었기에 눈에 띄지 않게 입을 꾹 닫았다.

뭐, 이들이 당가인이 아닌게 어디인가.

더해서 연방군의 눈 밖에 나서 좋을건 하나도 없었다. 좀비와 접촉한 주민들을 격리시키는 것은 본래 정상적인 절차니까.

그리고.

수송 트럭에 올라타 얻은게 없지는 않았다.

"형님, 여긴 아주 개박살이 났네요. 저희가 운이 좋았나 봅니다."

륭의 마지막 조언과 17번가에 어째서 사람들이 없는지에 대한 의문은 수송 트럭을 타고 가며 말끔히 해소되었다.

"진작 죽었거나 격리구역 어딘가에 끌려갔겠군."

17번가 유흥지대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18, 19번가는 물론이고 30번가 근처 주택과 상가들까지 폭탄이라도 터진 듯 죄다 반파되어 있었다.

방비가 허술한 건물에서 한 두 명쯤 죽어 나가자 진동하는 피냄새를 맡은 좀비들이 흥분해 이곳으로 몰려 들었을거다.

사람을 물어 뜯거나 감염시키려는 좀비의 행위는 인간의 식욕, 성욕과 비슷한 맥락이다. 웬만해서는 거스를 수 없는 생물의 본능.

피냄새만 났다하면 득달같이 몰려드는게 좀비니까.

하기야 사람이 죽어나가든 말든 신경조차 안쓰던 곳이 정크타운인데, 경찰도 아닌 연방군이 움직였을 정도면 시티 정부에서도 사안을 심각하게 판단했다는 거겠지.

이번 폭풍이 유달리 강했던 탓에 장벽을 보호하는 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을테고, 평소보다 좀비가 많이 딸려온 것이 분명했다.

'쯧.'

그 광경을 뒤로하고 정크타운을 벗어난 수송 트럭은 어느 작은 동네에 멈추어 사람을 몇 명 더 태웠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한 몰골에 정신이 불안정해 보였다.

"이제 근방의 소도시는 전부 돈 건가?"

"그렇습니다!"

나이 지긋한 군인의 목소리에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까 보인 신분증의 계급이 낮지 않았고 느껴지는 기도가 꽤 훌륭한걸 보면, 아마 이 병사들의 지휘관이리라.

"집결지로 출발하지."

지휘관의 말에 수송 트럭이 속도를 높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