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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1화

침식률 100%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이 있었다.

판타지와 무협 등, 온갖 세계관을 가진 대륙들을 탐험하는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

뛰어난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이유는 모르나 플레이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게임.

세상은.

ㅡ오픈 베타 테스트를 종료합니다.

ㅡ'브로큰 월드' 프로젝트 종료.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플레이어'로 선택되었습니다.

게임에 침략당했다.

어느 날 나타났던 메시지를 시작으로 태평양의 한복판에 거대한 탑이 솟구쳤다.

ㅡ세계의 탑이 솟구칩니다.

그 탑의 이름은 세계의 탑.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의 세계가 층마다 구현되어 있는, 지구와는 별개의 세계.

그리고 그 탑은, 괴물들을 쏟아냈다.

ㅡ세계의 탑은 여러분을 시험할 것입니다.

ㅡ플레이어들은 '침식률'이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탑을 등반해야만 합니다.

ㅡ게이트가 열립니다.

게이트는 수많은 괴물을 내보냈으며, 도시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학살당했다.

그렇게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ㅡ플레이어.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게임 속의 클래스를 갖고, 그에 맞는 특수한 힘을 쓸 수 있게 된 이들.

그들이 괴물들과 맞서 싸웠다.

ㅡ랭킹 19위, 감정사, 진현우.

진현우도 그러했다.

아니, 그중에서도 특출났다.

ㅡ유일한 비전투 직업 랭커.

플레이어 랭킹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전투 직업뿐. 그중에서 진현우만 유일하게 비전투 직업으로 랭킹에 올랐다.

아이템을 감정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감정사라는 직업으로.

ㅡ'EX 등급' 랭커, 진현우 은퇴 선언.

ㅡ부상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능력치 저하로 플레이어 활동 불가능.

그 진현우가 은퇴했다.

"이 정도면 열심히 살았잖아. 더는 삭신이 쑤셔서 못 해먹겠다. 좀 쉬자."

성대한 은퇴식 같은 건 없었다.

멸망해가는 인류한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진현우의 은퇴가 기쁜 일도 아니었고.

"죽을 때까지 백수처럼 살 거다."

진현우는 집을 샀다.

10년 동안 플레이어 생활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의 집은 소박했다.

은퇴 후의 생활도 그러했다.

"끄으응...."

밤 새도록 그동안 못 봤던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같은 걸 보다가 잠드는 생활.

낮 3시가 되면 시체처럼 일어나서 냉장고에 있는 인스턴트를 꺼내 먹는 식생활까지.

백수 그 자체였다.

"뭐 재밌는 거 안 하나?"

진현우는 목을 풀면서 TV를 켰다. 유감스럽게도 방영하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종영했다.

나오는 거라고는 뉴스 뿐.

ㅡ예, 오늘의 소식입니다.

진현우는 멍하니 TV를 봤다.

TV에서는 때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ㅡ시청자 분들도 알고 계시다시피 탑의 '침식률'이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현재 92%.... 이건 정말 위험한 수치 아닙니까?

ㅡ위험한 상황입니다. 안전 지대인 서울 말고 다른 지역은 몬스터에 점령된 상황이고요. 수많은 나라가 게이트 때문에 붕괴했습니다.

ㅡ시청자 여러분도 한 번 보시죠.

화면이 전환됐다.

무너진 나라들. 붉은 포털, 게이트에서 쏟아지는 몬스터가 모든 걸 파괴하고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몬스터들이 점령한 상황이었다.

ㅡ등반한 탑의 최대 층수를 갱신하는 게 늦어질 때마다 '침식률'이라는 것이 오르죠. 이게 높아질 수록 더욱 많은 게이트가 나타나게 되고,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강해집니다.

ㅡ어떻게 낮출 방법은 없을까요?

ㅡ있습니다. 지금 '메사이어' 길드가 최상층부의 공략에 도전하는 중입니다. 이들이 성공한다면 인류는 조금 더 시간을 벌게 되겠죠.

TV 속 사회자는 자료 화면을 멍하니 봤다.

몬스터들 앞에서 무력하게 붕괴하는 각 나라의 모습은 충격적이기 그지 없었으니까.

ㅡ정말... 세기말 그 자체로군요. 협회와 정부는 서울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는데요. 이게 과연 의미가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ㅡ글쎄요, 모르지요. 침식률이 100%에 달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ㅡ만약 메사이어가 실패한다면....

삑.

진현우는 TV를 껐다. 화면이 꺼지기 직전, 전문가의 마지막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ㅡ인류는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침부터 재수없는 소리를 하고 난리야."

세상은 바뀌었다.

세계의 탑이라는 것이 나타났고, 전 세계에 게이트가 나타나면서 몬스터가 출몰했다.

한때 진현우는 최전선에서 탑을 공략했다.

"그러면 뭐 하냐."

진현우는 피식 웃었다.

지금 그의 상태는 처참했다. 팔과 다리는 의지에, 큰 부상으로 시한부 선고도 받았다.

그런데 웃긴 점이 하나 있었다.

'시한부 선고가 의미가 있기는 하냐?'

시한부로 죽기 전에 세상이 멸망할 텐데.

진현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새빨갛게 물든 하늘. 지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뒤섞인 채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었다.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오직 하느님 만이 우리를 이 위기에서 구해주실 겁니다!"

"신이 무슨 소용이야, 병신아! 어차피 우리는 다 죽을 거야. 전부 다 죽을 거라고!"

"플레이어들은 뭘 하는 거야? 빨리 탑이나 공략하라고! 침식률을 낮추란 말이야!"

부정적인 말. 광기에 젖은 사람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세상은, 그리고 인류는 멸망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으니까.

탑 공략에 실패한 탓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이유는 많았다.

플레이어들 간의 대전쟁이 벌어지면서 전력이 완전히 박살 나버렸던 사건.

인류가 탑을 오르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 '대적자'들이 일으켰던 테러로 받은 피해.

그리고 대형 길드들의 지독한 통제까지.

"이야, 생각해보니 용케도 버텼네."

지금까지 버틴 걸 용하다고 해야 할까.

진현우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창문을 홱 닫았다.

더 들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은퇴한 마당에 뭘....'

진현우는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온갖 아이템이 담긴 진열장이 있었다.

그가 플레이어일 때 쓰던 아이템이다. 직접 감정해서 얻은, 일종의 컬렉션들.

어디서 얻었는지도 다 기억하고 있다.

'누가 쓸 수만 있으면 다 줬을 텐데.'

보관함의 가운데에 도끼가 있었다.

다른 아이템들은 화려한데, 그 도끼는 평범한 쇠도끼라 보잘것없어 보였다.

진현우가 조용히 웃었다.

'그립네.'

튜토리얼 때 썼던 무기.

그때는 몰랐었는데, 나중에 감정해 보니까 예상치 못한 보물이란 걸 알게 됐던 도끼.

어차피 이제는 쓸 일이 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있었지."

보관함 구석에 신기한 것이 있었다.

자그마한 큐브. 이건 진현우가 얻은 것이 아니다. 그의 지인이 선물한 것이었다.

그는 편지에 끼워진 편지를 읽었다.

ㅡ메사이어 길드장, 백승현.

조금 전 뉴스에서 나왔던 길드다.

백승현은 진현우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동생이다. 정확히는 같은 길드였던 동료.

메사이어 길드는 한국 최고의 길드로, 항상 최전선에서 탑을 공략하는 이들이었다.

"의미심장한 문구란 말이지."

편지 안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ㅡ모든 것이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형님한테 마지막 희망을 맡깁니다.

"희망은 무슨 얼어 죽을 희망이야?"

작고 네모난 큐브.

별다른 특이한 사항은 없다.

"감정."

진현우는 스킬을 사용했다.

번뜩이는 황금색의 눈. 진실을 꿰뚫는 눈동자가 큐브를 훑었고, 큐브의 정체를 파악했다.

"신화급 아이템인데 설명이 없단 말이지."

아이템은 겉에 큐브가 있고, 그 안에 또 하나의 아이템이 담긴 구조였다.

진현우는 큐브를 열어보려고 했다.

"...."

하지만 안 열렸다.

진현우의 능력치로도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템이 특수한 기믹이 있다는 것.

그 기믹이 뭔지 파악해볼까, 싶었지만.

'됐다, 알아서 뭐 하냐.'

은퇴한 마당에 뭘.

진현우는 목덜미를 긁적이면서 오늘은 뭘 보면서 시간을 떼울까 고민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ㅡ예, 지금 막 속보가 들어왔는데요. 헉!

TV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뒤에 이어진 소식은 더 경악스러웠다.

ㅡ메사이어 길드가 주도한 탑 최상층부 공략이 실패했다는 소식입니다. 공략에 참가했던 플레이어들, 탑 공략을 이끌었던 메사이어 길드 모두... 궤멸했다고 합니다.

"...!"

ㅡ그리고, 아! 지, 지금 이 뉴스를 들으시는 분들은 모두... 치직... 시급히....

라디오가 끊긴다.

ㅡ침식률이, 100%....

하지만 마지막 말은 들렸다.

대피. 진현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랫동안 플레이어 생활을 하면서 깨우친 감각이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저건...."

위험을 피하라고.

진현우는 창밖을 바라봤다.

저 너머, 붉은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ㅡ콰아아아앙!

섬광이 번뜩였다.

진현우가 인식한 것은 그게 다였다.

시야를 가득 채운 빛 때문에 잠깐 눈을 감았던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런, 미친...."

도시의 절반이 사라진 게 보였다.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쏟아지면서 지상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있는 모습도.

"침식률 100%. 이게...."

멸망인가.

진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구멍이 뚫린 하늘 너머에 무언가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건 탑이었다.

ㅡ침식률이 100%에 도달했습니다.

ㅡ서울의 안전 지역 지정이 해제됩니다.

카드득, 콰앙!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탑에서부터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는 규모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다.

ㅡ쿠오오오오오!

"꺄아아악!"

"사, 살려...!"

드래곤, 마족, 언데드, 탑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종류의 몬스터가 지상을 덮쳤다.

지금의 플레이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 지상의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 당했다.

"...."

그 광경을 본 진현우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이렇게 될 것임을, 침식률이 한계에 도달해 멸망이 찾아올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진현우는 창틀을 꽉 움켜 쥐었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10년 동안 생사를 넘나들며 싸웠다.

죽음은 이미 각오한 일. 이렇게 죽는다고 해서 무섭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실패했다는 게 아쉬울 뿐.'

여러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세계의 탑을 공략하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자신과 동료들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해 왔던 결과물이 무용지물이 됐으니까.

진현우는 오롯이 선 탑을 바라봤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ㅡ그러면 이 결말을 바꿀 수 있습니까?

"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컬렉션이 보관된 진열장에서 뭔가가 빛나고 있었다.

큐브였다.

"이거, 왜 빛이 나냐?"

키리리릭! 네모난 큐브가 벌어졌다.

복잡한 기계 장치가 돌아가면서, 큐브 안에 보관되어있던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다.

ㅡ화아악!

그건 빛이었다.

큐브 안에는 찬란한 빛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ㅡ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노라. 사람들이 죄악에 빠졌을 때, 만악의 근원이 흩어지리라. 그리고 마침내 모든 근원이 사라졌을 때.

"큭?!"

강렬한 빛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진현우에게로 뭔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힘이 침식하고 있다.

ㅡ희망이 그들을 반기리라.

"...!"

진현우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고 사방을 에워싼 빛에 삼켜졌다.

그는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 소리는 새하얀 적막에 묻혀 사라졌다.

"...."

붕 떠오른 진현우의 몸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머리는 깨질 것처럼 아프고, 몸은 기분 나쁠 정도로 가볍다.

ㅡ형님한테 민폐를 끼칠 것 같습니다. 근데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저로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 속에서, 백승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현우의 '감정'이 가진 특수한 힘이 큐브에 남아있던 기억을 읽어내고 있었다.

ㅡ과거를 바꿀 방법은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형님한테, 저 대신 맡기겠습니다.

마치 진현우가 들을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백승현이 말하고 있었다.

흘리듯, 바람에 묻혔던 뒷말.

ㅡ미래를... 부탁합니다.

파아앗!

시야가 완전히 꺼졌다.

* * *

끼릭, 끼릭.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 초침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소리.

진현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흐름에 떠밀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 전투 튜토리얼인가?"

"어. 빨리 죽고 끝낼까? 시간 아까운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어차피 밖에 나가면 길드원 형들이 도와줄 텐데...."

째깍거리던 초침 소리가 멈췄다. 그 대신, 사람들이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진현우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여태 안 움직이던 몸이 움직인다.

'전투 튜토리얼? 길드원?'

들려서는 안 되는 단어가 들린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진현우는 떠지질 않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발악했다.

"큭!"

그리고 눈을 떴다.

끝없이 이어지던 부유감도, 귓가에 들리던 태엽 소리도 사라졌다.

진현우는 앞을 봤다.

"여긴...."

그가 있는 곳은 넓은 공동이었다.

넓기는 더럽게 넓고, 아무것도 없는 공동.

근데 이 회색빛의 공동이 그에겐 익숙했다.

"튜토리얼?"

그래, 여긴 튜토리얼 시험장.

처음 플레이어로 각성한 자가 소환되어, 게임에 관한 것들을 배우고 익히는 곳.

플레이어가 된 지 10년이 지난 진현우가 올 리가 없고, 와서는 안 되는 곳이다.

"...!"

진현우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멀쩡하다. 완전히 날아가서 의수, 의족으로 바꿨던 부위인데.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통증도 사라졌다.

ㅡ미래를 부탁합니다.

백승현이 한 말이 떠올랐다.

시계 초침 소리, 이 장소, 멀쩡해진 몸.

진현우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과거로... 돌아왔다?'

10년 전, 과거로.

진현우가 처음으로 플레이어가 된 그날로.

"아니, 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2화

그 짓거리를 나더러 또 하라고?

주변을 돌아봤다.

더럽게 넓은 회색빛의 공동에 모인 40명 남짓한 사람들. 모두 한껏 긴장한 상태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ㅡ기초 튜토리얼을 완수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곧 전투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ㅡ10분간 휴식을 취하십시오.

먼 과거에 들은 적이 있던 목소리다.

그리고 그 내용에 담긴 기초 튜토리얼이라는 말. 틀림없다. 여기는 튜토리얼이다.

시험의 탑의 0층에서 펼쳐지는 튜토리얼.

'꿈인가?'

아니, 그럴 리가. 꿈이라기에는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너무 생생하다.

오랫동안 플레이어로 활동해왔던 진현우는 빠르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익숙한 얼굴이 있군.'

10년이 훌쩍 지난 튜토리얼에서 봤던 이들의 얼굴까지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몇몇은 안다.

여기 튜토리얼을 나와서, 플레이어로 제법 이름을 떨치는 이들이 있어서였다.

'젊다.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들도....'

예전에 탑 공략에 실패해서 죽었던 이들이, 과거의 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현우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부정할 수가 없군. 여긴... 과거다.'

이유로 짐작 가는 건 큐브뿐이었다.

백승현이 그에게 맡겼던 신화급 아이템.

탑의 최대 층수 갱신에 실패하고, 침식률이 100%에 도달하여 세상이 멸망했을 때.

큐브가 작동했다.

'내 손으로 과거를 바꿔 달라고 했었지.'

백승현은 그렇게 말했었다.

모든 정황이 하나의 사실을 가리켰다.

진현우는 과거로 돌아왔으며, 그걸 가능케 한 것은 백승현이 준 큐브라는 것.

ㅡ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ㅡ그러면 이 결말을 바꿀 수 있습니까?

회귀하기 전 들렸던 목소리.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목소리는 진현우에게 익숙했다. 바로 백승현의 목소리였으니까.

'왜 네가 아니라 날 보낸 거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

· 클래스: 노비스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5 · 민첩: 5

· 체력: 5 · 마력: 5

[특성]

· 초보자 (C)

[스킬]

· 강타 (C, Lv.1)

숨이 턱 막혔다.

미래의 진현우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상태창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 초보자 (C): 레벨 10이 될 때까지 경험치 획득량이 소폭 상승한다. 이 특성은 전직하면 자동으로 제거된다.

· 강타 (C): 적을 강한 힘으로 타격한다.

노비스.

모든 플레이어는 노비스라는 초보자 클래스로 시작하며, 10레벨에 전직한다.

"내 시간, 내 피땀 눈물이...."

10년이다.

진현우는 무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플레이어로서 살아왔고 성장해왔다.

그 세월이 한 번에 사라진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진현우는 침음성을 흘렸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이 하나 있었다.

'그 스킬을 어떻게 얻었는데!'

회귀하기 전, 진현우는 감정사였다.

비전투 직업에 일반적으로는 쓰레기라고 불리는 클래스로 전직한 것이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감정사라는 직업을 연마했고, 마침내 그 끝을 보았다.

그 보상으로 얻었던 스킬.

'마스터 스킬이 날아갔다고? 미치겠군.'

정신이 아찔해졌다.

진현우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으면서 다시 한번 상태창을 확인했다.

'잠깐, 근데 이 칭호는....'

뭔가 색다른 것이 보였다.

칭호에 본 적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시간을 거스른 자 (신화)]

ㅡ이치를 벗어난 힘으로 과거로 돌아왔다.

ㅡ효과: 큐브가 당신이 가진 힘을 저장했습니다. 단 하나, 원하는 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건...."

진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칭호의 설명은 그렇다 치고, 칭호가 가지고 있는 효과가 그의 예상을 넘어섰다.

미래에 가지고 있었던 힘을 되찾아준다.

그가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ㅡ칭호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ㅡ큐브가 저장한, 소유자가 회귀 전에 가지고 있었던 힘들의 목록을 작성합니다.

눈앞에 기나긴 스크롤이 나타났다.

ㅡ냉혈 (S)

ㅡ대도둑의 은신 (S, Lv.1)

ㅡ괴력난신 (S)

ㅡ....

ㅡ....

미래, 감정사로서 랭커 19위의 자리에 올랐던 진현우가 가졌었던 특성과 스킬들.

그것들이 스크롤에 적혀 있었다.

ㅡ선택하십시오.

ㅡ종류 불문하고 당신이 가졌던 힘이라면 무엇이든지 단 하나, 되찾을 수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스크롤에 적힌 특성과 스킬들은 감정사와는 연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미래의 진현우는 감정사가 아닌, 다른 클래스들의 특성과 스킬들을 배운 상태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ㅡ스르륵.

특수한 마스터 스킬을 익혔으니까.

진현우의 손가락이 스크롤을 내렸다.

빠르게, 조금 더 빠르게. 그가 미래에 익혔던 마스터 스킬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손가락이 멈췄다.

'있다.'

진현우의 손가락이 어떤 스킬을 가리켰다.

· 기억 감정 (Master): 아이템의 잔류 사념을 확인하여 기억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사념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이 있었다.

뛰어난 게임성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유저들을 제외하고는 하는 사람이 없던 게임.

진현우는 그 게임의 몇 안 되는 유저였고, 오랫동안 게임을 판 헤비 유저였다.

'그래서 알고 있었지.'

누구에게나 무시당하는 쓰레기 직업, 감정사라는 직업의 정점에 도달한다면.

강력한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마스터 스킬.'

브로큰 월드의 시스템 중 하나다.

특정 클래스로 전직한 후, 레벨을 올려서 얻을 수 있는 특성과 스킬을 모두 배운다.

그리고 익힌 스킬들의 숙련도를 모조리 최대치까지 도달해서, 정점에 도달한다면.

'클래스를 마스터했다는 의미에서 특수한 스킬, 마스터 스킬을 하나 부여한다.'

마스터 스킬은 '고유'하다.

똑같은 클래스의 정점에 도달한 이라도 다른 마스터 스킬을 가지게 된다.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마스터 스킬이든 특수하면서 강력하다는 것.

'얻으려고 별 고생을 다 했었지.'

플레이어로 각성하고 긴 세월 동안 저층을 전전하면서 감정사로서 성장하려 발악했다.

감정사는 모든 스킬을 저레벨에 배운다.

그것들을 연마하면 마스터 스킬을 얻을 수 있기에 했던 기행.

말이 쉽지, 년 단위로 밤을 새 가면서 숙련도를 쌓는 고행의 행군이었다.

'...날 보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미리 전제해둘 것들이 있다.

첫 번째, 이 큐브는 사용자가 막 플레이어가 된 시점으로 돌려보내는 힘을 갖고 있다.

두 번째, 백승현은 이 큐브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 사실들을 전제로 깔아둔다면, 자신을 과거로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백승현은 후발주자였지. 반면에 난 비교적 초창기부터 플레이어로 활동했었고.'

백승현은 지금 이 시점으로부터 3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플레이어로 각성한다.

그 시기로 회귀하면 너무 늦다. 이미 온갖 큼직한 사건이 다 터지고 난 뒤니까.

'거기에 되찾을 수 있는 힘은 하나 뿐.'

백승현이 미래에 가졌던 힘 하나를 되찾는다고 한들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현우는 달랐다.

그는 10년 전의 과거로, 세상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이 터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억 감정만 있다면 미래의 내가 가졌던 힘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아.'

그리고 단언컨대.

오직 하나의 힘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진현우만큼 가성비가 뛰어난 인물도 없다.

기억 감정은 그런 스킬이었다.

하지만....

ㅡ휴식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ㅡ모든 참가자는 중심부에 집결해주십시오.

상념에 빠지려던 진현우를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일깨웠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공동의 중심부로 향했다.

"아, 튜토리얼 더럽게 지겹네."

"이미 다 아는 것들인데, 시간 아깝게. 스킵할 수 있게 해주면 누가 덧나나."

"그러니까. 이제 몬스터랑 싸우던가?"

모인 사람들의 숫자는 50명 남짓.

플레이어들은 하루 남짓 이어진 튜토리얼에 질린 나머지 불평을 내뱉고 있었다.

ㅡ지금부터 여러분은 전투 튜토리얼에 임하게 됩니다. 다수의 몬스터가 나타날 테니 그들을 상대로 실전을 경험하십시오.

ㅡ튜토리얼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끝까지 생존하거나, 혹은 사망할 경우 전투 튜토리얼은 종료하며 해당 참가자는 귀환합니다.

ㅡ어떤 식으로든 튜토리얼을 통과한 플레이어는 '탑'의 입장권을 얻을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목소리가 말하는 것만 들으면 일종의 데스 게임처럼 느껴진다. 끝까지 생존하면 통과할 수 있고 사망하면 실패하는 게임.

하지만 아니었다.

"어차피 죽어도 안 죽잖아."

"어. 형은 그냥 빨리 죽고 나오라던데?"

애초에 목적이 다르다.

이 튜토리얼의 목적은 하나. 앞으로 펼쳐질 세상이 게임이 아님을 가르치는 것이다.

게임 같지만 게임은 아니다. 다치면 통증을 느끼며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

그걸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ㅡ무기를 선택하십시오.

그때, 거대한 진열대가 나타났다.

수많은 무기가 나열된 진열대였다. 검, 창, 도끼, 활... 필요한 모든 무기가 있었다.

"대충 하고 끝냅시다."

"열심히 해봤자 못 깨잖아요, 이거. 난이도가 더럽다고 소문 다 났던데."

"네. 1레벨로는 절대 못 깨요. 그냥 한번 죽어보라고 만든 거라던데요?"

"악취미네...."

사람들은 대충 무기를 골랐다.

전투 튜토리얼의 난이도가 악랄하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빠르게 죽고 끝내는 걸 선호했다.

"별다른 보상도 없잖아요."

그것도 큰 이유였다.

보상도 없고, 난이도만 어려운 튜토리얼을 사람들이 제대로 임할 리가 만무했다.

대충 무기를 고른 이들이 떠났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진현우뿐이었다.

"...."

진현우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머릿속이 더없이 복잡했다.

'그 짓거리를 나더러 또 하라고?'

10년 동안 플레이어로 살아왔다.

그 세월은 진현우에게 악몽이었다. 수없이 싸웠고 수많은 동료를 잃어야만 했다.

명백하게, 진현우는 지쳐 있었다.

싸우는 것에도, 동료를 잃는 것에도, 모두.

ㅡ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동시에.

이건 진현우가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ㅡ모두, 그렇게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메사이어의 동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보다 이전에, 진현우와 인연을 쌓았던 친우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죽어가던 모습도.

'이게 있다면, 바꿀 수 있다.'

예정된 멸망을.

비참하게 죽었던 동료들의 죽음도.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켰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눈앞에 여전히 스크롤이 보였다.

그가 미래에 가졌었던 특성과 스킬들. 그는 그중에서 한 가지, 유일한 스킬을 택했다.

ㅡ칭호의 효과로, 소유주가 미래에 익혔던 힘을 전승합니다....

ㅡ축하합니다! 기억 감정을 익혔습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진현우에게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진현우는 진열대를 바라봤다.

"...."

여러 자루의 도끼가 보였다.

죄다 비슷하게 생긴, 최하급의 도끼들. 그는 여러 도끼를 살피며 뭔가를 확인했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들이 의아해했다.

"왜 저래?"

"몰라. 무기마다 뭐가 다른가? 똑같은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몇몇 플레이어가 진현우를 비웃고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도끼를 뒤적거렸고, 찌릿하면서 감각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원하던 것을 찾아낸 것이다.

'이 서늘한 감각, 익숙하군.'

익숙한 그립감, 그리고 형태.

오랜 기간 써온 아이템이다. 미래의 진현우가 컬렉션으로 삼았었던 그 도끼.

[낡은 도끼 (일반)]

· 설명: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도끼다.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있다.

마스터 스킬, 기억 감정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 '사념'을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진현우는 도끼를 움켜쥐었다.

ㅡ무기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ㅡ이제부터 전투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ㅡ장소를 변경합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회색빛의 공동에 짙은 녹색이 칠해졌다. 순식간에 장소가 넓은 숲으로 변했다.

ㅡ몬스터가 나타납니다.

사방에 있는 나무에서 하나둘씩 키 작은 녹색 피부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블린이다.

근데 그 숫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ㅡ키익, 키이이?

ㅡ캬으으....

처음에는 의아한 듯 주변을 둘러보던 고블린들이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인식했다.

놈들의 입가에 침이 흘렀다.

ㅡ꿀꺽.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ㅡ캬하아아악!

"으, 으아! 온다!"

"그냥 고블린이잖아! 뭘 쫄아!"

"나, 나도 알아! 근데...!"

고블린들은 강한 몬스터가 아니다.

3레벨 정도의 몬스터. 능력치로 따지면 1레벨의 플레이어보다 약한 수준.

브로큰 월드를 플레이했던 극소수의 유저들은 어렵지 않은 상대임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놈들이 내뿜는 살기였다.

ㅡ키이익!

ㅡ크흐으으!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고블린들은 강렬한 살기를 내뿜고 있고 플레이어들을 명백히 '먹이'로 인식하고 있다.

최근에 세상이 격변했다고는 하나, 여태까지는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들. 게다가 브로큰 월드를 해본 경험 역시 없었다.

ㅡ푸욱!

"컥...!"

살기가 그들의 몸을 묶었다.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의 허벅지에 단검이 꽂혔다. 자세가 무너진 그에게 고블린 하나가 올라타더니 등을 힘껏 내리찍었다.

"끄아아아악!"

"히, 히익!"

처절한 비명을 내지른 남자에게 고블린들이 달려들었고, 그 몸을 난도질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똑같은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주, 죽었어?"

"멍청아! 여기선 죽어도... 크헉!"

소리치던 남자의 머리를 돌멩이가 강타했다. 고블린들이 휘청거리던 남자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놈들의 체격이든, 능력치든. 평범한 플레이어면 1:1로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놈들에게는 지능이 있다.

서로 협력하면서 공격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악랄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으아아악!"

"끄윽!"

겁에 질린 플레이어들이 도망쳤고, 몇몇 이들은 일부러 고블린들의 손에 죽었다.

튜토리얼은 현실과는 별개의 세상. 이곳에서 죽는다고 현실의 나까지 죽진 않는다.

그런 생각에서였다.

'그럴 수는 없지.'

후방에 있던 진현우는 무너지는 플레이어들의 진형을 보며 숨을 삼켰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챙겨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선 그 칭호부터 챙겨볼까.'

진현우는 자신의 목표를 정했다.

예정된 멸망을 피하는 것. 그걸 위해서는 미래를 바꿔야만 하며, 그동안 일어났던 여러 큼직한 사건들을 막아야만 한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다.

"은퇴하고 쉴 생각이었는데."

진현우는 도끼를 바라봤다.

스킬을 사용한 그에게서 신묘한 기운이 흘러나왔고, 그 기운이 도끼를 휘감았다.

"그래, 내 팔자에 은퇴는 개뿔이."

사람들은 언제나 궁금해했다.

도대체 어떻게, 전투 직종도 아닌 '감정사' 따위가 랭커가 되었느냐고.

그 비밀은 지극히도 간단했다.

진현우는 '기억'을 읽을 수 있다.

ㅡ강한 사념이 남아있는 아이템입니다. 기억을 읽을 수 있습니다.

ㅡ기억을 감정하시겠습니까?

아이템의 기억을.

그 기억에 담긴 사람의 일생을.

그리고.

"기억 감정."

그들이 가진 힘을 얻을 수 있다.

진현우의 오른쪽 눈이 순간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는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ㅡ파아앗!

그의 눈앞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3화

카리악

광활한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숲. 그곳에는 흔히들 야만족이라고 부르는 전사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전사들이 다스려왔던 숲.

ㅡ야만족을 죽여라!

ㅡ이 땅은 이제부터 제국의 것이다!

그 숲이 지금 불타고 있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존되어온 희귀한 자원을 탐낸 제국이 침공해온 것이었다.

ㅡ전사들이여, 물러서지 마라! 선조들의 땅을 침범한 침략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ㅡ족장을 따르라!

야만족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선대 족장을 이어 새로운 부족장이 된 젊은 족장의 지휘를 따라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는 용맹했고, 아직 어리지만 뛰어난 전사가 될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ㅡ감히, 미개한 야만족 따위가....

ㅡ그렇기에 두려움을 모르지! 문명인!

ㅡ마법 병기를 가지고 와라! 저 야만족들에게 마법이 무엇인지 가르쳐줘라!

하지만 적들은 끝이 없었다.

제국의 후속 부대는 각종 병기를 갖고 왔고, 그걸 이용해 숲을 공격했다.

이윽고 거대한 마법까지 펼쳐졌다.

ㅡ수, 숲이....

ㅡ이럴 수가.

매서운 겁화가 숲을 불태웠다.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숲이 제국군의 발아래에 파괴되고 있었다.

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마법의 힘 아래 무너져갔다.

ㅡ이제 네놈들이 마지막이다.

ㅡ....

용맹한 전사들은 부족의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젊은 족장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몸까지 휘청거리고 있었다.

ㅡ제법이더군, 야만인. 허나 그래봤자 짐승에 불과할 뿐. 이제 네놈들 모두....

제국의 지휘관이 손을 들어 올렸다.

마법과 화살이 족장을 겨누었다.

ㅡ죽어라.

ㅡ지금이다! 몸을 바쳐라!

ㅡ뭣...!

그때, 전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용맹한 전사들은 자신들의 몸을 방패막이로 삼아 화살과 마법을 막아냈다.

ㅡ족장! 지금이오!

쓰러지는 전사들.

그 사이로 도끼가 쏘아졌다.

ㅡ커, 헉...!

ㅡ네놈을 길동무로 삼아주마...!

번개처럼 날아든 도끼가 지휘관의 가슴께를 강타했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휘리릭! 심장을 단번에 으깬 도끼가 다시금 족장에게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다.

ㅡ대, 대장님! 죽여라! 저놈을 죽여!

ㅡ찔러 죽여라!

족장이 다시금 도끼를 휘두르기 전, 뒤늦게 반응한 병사들의 창이 그를 꿰뚫었다.

그의 몸이 멈췄다.

ㅡ잊지 말고 기억해라, 제국의 개들아.

천천히, 그의 손에서 도끼가 떨어졌다.

푸욱! 화살이 그 심장을 꿰뚫었다.

ㅡ우리들의, 원한을....

그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떠나지 못하고 숲에 남았다. 분노와 고통으로 울부짖는 지휘관의 모습을, 불타는 숲의 모습을 지켜봤다.

ㅡ용서하지 않겠다. 잊지 않겠다. 이 원한과 분노, 언젠가는, 반드시 갚을 것이다.

까드득! 원혼이 분노를 토했다.

ㅡ만약 네놈들이 죽었다면 그 영혼에라도, 썩은 시체에라도 원한을 갚으리라!

아득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원혼은 떠나지 못했다. 그 영혼에 새겨진 지독한 분노는 세월이 씻어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해소할 방법은 단 하나.

"그 원한을 풀 수 있게끔 해주지."

원한을 갚는 것뿐.

진현우가 사념의 분노에 응답했다.

어둠 속에 홀로 떠 있던 낡은 도끼. 그는 도끼를 향해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ㅡ그 약속, 지킬 수 있겠는가?

"네가 도와준다면."

사념이 그 부름에 응답했다.

스르륵, 도끼가 서서히 움직였다.

ㅡ좋다. 네가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네 힘이 되어줄 것이다.

도끼가 진현우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 안에 잠들어있던 힘이, 원혼이 가지고 있던 힘이 그에게로 흘러들어왔다.

"함께 가자, 카리악."

진현우는 눈을 떴다.

* * *

"크으으윽!"

ㅡ키이힉!

숲에서는 여전히 전투가 이어졌다.

튜토리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플레이어들은 이미 고블린의 손에 죽은 상황.

남은 플레이어들은 이를 악문 채로, 고블린들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였다.

'시발! 20마리는 잡아야 하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서 나오는 20마리의 고블린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일반 플레이어들은 튜토리얼에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없다 생각하지만, 아니었다.

'보상은 있다.'

그 조건이 더럽게 어려워서 얻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렇지.

플레이어가 되기 전의 남자는 펜싱 은메달리스트였다. 그걸 눈여겨본 길드와 거래해서 튜토리얼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망할, 가입한다고 약속해서 받은 정본데! 이대로 아무것도 못 얻고 죽을 수는...!'

비명이 들렸다.

남자의 앞에 있던 플레이어가 고블린 4마리에게 포위됐다. 고블린 중 하나가 전방에서 요란스러운 움직임으로 남자를 공격했다.

"이 개새끼들이!"

ㅡ캬아아악!

ㅡ크히이!

플레이어가 그 공격을 쳐낸 순간, 근처에 있던 고블린들이 연계해서 공격했다.

허벅지를 찌르는 칼날. 동시에 큼직한 돌이 플레이어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 연격에 플레이어가 휘청거린 순간.

"끄륵, 컥...!"

고블린들이 그를 난도질했다.

그 광경을 본 남자가 몸을 떨었다.

'젠장, 젠장!'

고블린은 강한 몬스터는 아니다.

일 대 일이라면 몇 마리가 몰려오든 상대할 수 있다. 문제는 이 고블린 놈들이 그럴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놈들은 3, 4마리씩 무리를 이룬 채 서로 연계하면서 공격해오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상황을 보고....'

남자가 뒤로 물러났다.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명목에서였지만, 사실은 겁에 질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어?"

그때, 묘한 광경이 보였다.

웬 남자 하나가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도 도끼 한 자루를 쥔 채.

'저기서 뭘 하는 거지?'

바로 앞에서는 고블린들이 밀어닥치고 있다. 눈을 감고 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냥 죽으려는 건가? 하긴.'

튜토리얼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면 저럴 수도 있다. 자신도 보상이 있다는 걸 몰랐으면 그냥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아니까 이리 발악하는 거지.

ㅡ키익!

ㅡ키히이이!

고블린들이 진현우를 인식했다.

석상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인간. 놈들에게는 탐스러운 먹이였다.

남자도 진현우에 대한 관심을 껐다.

'어차피 죽겠지.'

그걸 생각하고 있을 시간에 20마리의 고블린을 어떻게 잡을 건지 생각해야 한다.

남자는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블린 4마리가 진현우에게 접근했다. 조금 전의 플레이어를 죽인 놈들이다.

ㅡ키히히....

ㅡ크르아아악!

고블린 하나가 돌을 들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돌. 놈은 비열하게 웃으면서 아이가 공을 던지는 것처럼.

휘이이익! 돌을 투척했다.

ㅡ뻐어억!

ㅡ켁...!

바로 그때.

고블린의 머리가 날아갔다.

"...어?"

돌을 던졌던 고블린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돌을 던지려고 했던 고블린이, 머리가 박살 난 채로 쓰러졌다.

그 이마에는 도끼가 꽂혀 있었다.

ㅡ키, 키이익?!

ㅡ캬하악! 크르아악!

고블린들이 발작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누구냐, 대체 누가 그런 것이냐. 주변을 살피던 놈들의 눈에 먹이의 모습이 보였다.

진현우. 그가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

"...."

그가 손을 뻗었다.

고블린의 머리를 박살 낸 도끼가 떠올랐다. 놈들의 시선이 저절로 도끼로 향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ㅡ키, 키륵?!

진현우가 돌진했다.

그는 땅을 박차면서 앞으로 돌진했고, 고블린과의 거리를 재빠르게 좁혔다.

ㅡ캬, 캬아아악!

도끼가 진현우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그는 가장 선두에 있던 고블린의 에게로돌진했고 도끼를 뒤로 힘껏 젖혔다.

그 손아귀에 붉은 기운이 모였다.

"흐읍!"

ㅡ캬학...!

도끼가 고블린의 허리를 강타했다.

우드득!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면서 놈의 허리가 부러졌다. 진현우는 바로 놈의 머리채를 휘어잡더니 오른쪽으로 내던졌다.

ㅡ캬악!

옆에서 공격하려던 고블린이 내던져진 동족과 부딪혔다. 놈의 몸이 휘청거렸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득달같이 달려들더니, 고블린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땅바닥에 내다 꽂았다.

ㅡ푸욱! 푹! 스걱!

ㅡ키... 키아아아악!

그리고 무자비하게 고블린을 난도질했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죽은 세 마리의 고블린. 이젠 하나만 남았다.

놈이 겁에 질린 눈으로 진현우를 봤다.

ㅡ퍼억!

도끼가 고블린의 머리를 꿰뚫었다.

다시금 날아오는 도끼를 받은 진현우는 날에 묻은 피를 무성의하게 털어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줍고는 고블린들의 한복판에 홀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살육이 펼쳐졌다.

"흐읍!"

진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고블린들을 베어 가르고, 으깨고, 걷어차면서 전진했다.

계속해서 싸우고 있음에도 그의 몸은 지치지 않고 오히려 활기를 되찾아갔다.

ㅡ콰드드득!

ㅡ케엑...!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진현우는 싸울수록 기분이 고취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받아들인 카리악의 사념의 영향이었다. 기억을 감정한 효과로 그 주인이 과거에 가졌던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와라, 이 짐승 새끼들아!"

진현우는 거친 포효를 내지르면서 고블린들 한복판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놀란 나머지 입을 헤 벌렸다.

도무지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야?"

튜토리얼에서는 모두 공평하다.

어떤 플레이어든 같은 클래스로, 똑같은 능력치를 가진 채 시험을 치르게 된다.

'나랑 같은 레벨, 맞지?'

그런데 저렇게 싸울 수 있다니.

마치 다른 플레이어보다 레벨이 몇 단계는 더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 * *

ㅡ퍼어억!

ㅡ크헥!

진현우는 싸움을 이어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고블린들을 베어 가르면서 나아갔다. 그가 멈춘 것은 더는 싸울 수 있는 고블린들이 없게 됐을 때였다.

"허억, 헉!"

진현우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아직 신체는 완전하지 않다. 팔과 다리가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돌아왔지만, 육체의 능력치가 낮아도 너무 낮았다.

'이 몸에 적응하는 것부터가 우선인가.'

그나마 도끼를 통해서 얻은 카리악의 힘 덕분에 전투를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었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

· 클래스: 노비스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8 (+3) · 민첩: 8 (+3)

· 체력: 8 (+3) · 마력: 5

[특성]

· 야만 전사 (C), 초보자 (C)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강타 (C, Lv.1), 야만적인 투척 (C, LV.1)

근력과 민첩, 체력이 3씩 올랐고, 새로운 특성과 스킬이 추가된 것이 보였다.

노비스 클래스는 익힐 수 없는 것들.

· 야만 전사 (C): 전사의 피를 타고났다. 근력, 민첩, 체력이 3 상승한다. 또한 도끼를 보다 능숙하게 다루며, 위력이 상승한다.

· 야만적인 투척 (C, Lv.1): 있는 힘껏 도끼를 투척하여 적의 육체를 파괴한다.

카리악의 특성과 스킬이다.

마스터 스킬, 기억 감정의 효과였다.

아이템에 깃든 사념의 기억을 읽어서, 그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흡수하는 것.

'사념이 전생에서 애용했던 기술.'

카리악의 경우에는 그게 투척이었다.

보통은 스킬 하나만 익히는 선에서 끝나는데, 운이 좋으면 특성도 익힐 때가 있다.

'이걸 얻으려고 온갖 고생을....'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 감정을 얻으려고 했던 노가다들이 떠올라서였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런 노가다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기억 감정이라는 마스터 스킬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감정사가 될 필요는 없지.'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머릿속에는 미래에 알려졌던 여러 히든 클래스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노비스는 레벨 10이 되면 전직할 수 있다. 그는 정보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제일 유용한 히든 클래스로 전직할 생각이었다.

"좋아, 그럼...."

진현우는 도끼를 쥐었다.

"보상들이나 얻으러 가볼까."

4화

업적 달성

ㅡ키륵, 키이이익!

ㅡ캬아아악!

고블린들이 다가온다.

다른 플레이어를 죽인 놈들이 이번에는 진현우를 죽이기 위해서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들고, 힘을 집중했다.

'고블린. 약하다고 무시하기 쉽지만....'

고블린들은 철저하게 무리를 갖춘 후, 투박하지만 연계하면서 공격해온다.

생각보다 까다로운 놈들이다.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자라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이쪽에서 먼저 공격한다.'

놈들을 상대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제대로 연계를 갖추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공격해 무리를 무너트리는 것이다.

ㅡ퍼어억!

ㅡ히이이이...!

도끼가 고블린의 가슴께를 박살 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동족의 모습을 본 다른 고블린들이 적잖게 당황했다.

놈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돌진해서 남은 고블린들을 단번에 처리해버렸다.

'교활한 놈들이지만 용감하지는 않다.'

고블린들은 자신들이 포식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는 꽤 잘 싸운다.

역으로, 자신들이 먹잇감보다 약하다는 걸 알게 되면 금방 겁에 질려버린다.

이끄는 대장이 없는 이상에는 그렇다.

ㅡ키히이익!

ㅡ흐아악!

고블린들이 겁에 질려 도망쳤다.

하지만 진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전진함 앞을 가로막는 고블린을 죽였다.

플레이어들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됐다. 그는 숲속 한복판에 있었다.

"이게 마지막인가?"

진현우가 멈춘 것은 고블린들이 모조리 죽고 더는 상대할 적이 없을 때였다.

몸은 무겁고, 팔은 떨어질 것 같다. 변화한 몸에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쉴 수는 없었다.

"환장하겠네."

진현우는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죽은 고블린들을 모았다. 그리고 놈들의 피를 이리저리 흩뿌리면서 주변을 더 참혹하게 만들었다.

"피 냄새를 맡고 오겠지. 기다려볼까."

진현우는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리는 게 있기도 했고 체력을 채울 시간도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도끼를 바라봤다.

'지지리도 약하구나. 지금 몸뚱어리는.'

미래의 진현우가 큰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능력치는 꽤 높은 편이었다.

지금의 몸은 그것보다 훨씬 약했다.

이 도끼가 주는 옵션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지쳐서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용맹한 자 (희귀)]

ㅡ설명: 과거 용맹을 떨쳤던 야만 전사가 사용하던 도끼다. 선조의 영혼이 깃든 특수한 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용맹의 증명, 회귀

* 용맹의 증명: 근력, 민첩, 체력이 +3 상승한다. 이 효과는 적을 죽일 때마다 강화되며, 최대 2배까지 강화된다.

* 회귀: 주인의 곁을 떠나더라도 반드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온다.

브로큰 월드의 아이템 등급은 총 여섯 가지다. 일반, 희귀, 고급, 영웅, 전설, 신화.

기억 감정을 통해서 얻는 아이템은 같은 등급의 아이템보다 성능이 뛰어나다.

이 용맹한 자는 거의 고급 등급에 속하는 아이템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게다가 성장시킬 수도 있지.'

기억 감정으로 얻은 아이템은 오랫동안 쓰다 보면 특수한 퀘스트가 나온다.

그 퀘스트를 깨면 감정 아이템이 강화되고, 사념에게서 얻은 힘도 한층 강화된다.

"이 짓거리를 또 하게 될 줄이야."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그의 곁에는 수많은 고블린이 죽어 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대강 15마리 이상.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죽인 것이었다.

그 보상은 두둑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전투 튜토리얼에서 고블린 20마리 이상을 죽일 것.

ㅡ보상으로 희귀 등급 칭호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을 획득했습니다.

칭호.

브로큰 월드의 시스템 중 하나다.

특수한 조건을 달성했을 경우 칭호를 얻을 수 있다. 칭호는 능력치를 올려주고, 일부 칭호는 특수한 효과롤 갖고 있다.

놀라운 점은.

'칭호를 착용하지 않더라도 칭호의 효과를 그대로 누릴 수 있다는 점.'

B라는 칭호를 착용하고 있을 때도 A 칭호의 효과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능력치든, 강화 효과든, 무엇이든 간에.

덕분에 같은 레벨의 플레이어라도 보유한 칭호의 차이로 능력치의 우위가 달라진다.

전투의 양상이 달라지는 셈이었다.

[처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희귀)]

ㅡ효과: 모든 능력치가 +2 상승한다.

그런 의미에서, 튜토리얼에서 얻을 수 있는 이 칭호는 몹시 뛰어난 칭호였다.

저 정도의 효과라면 같은 레벨의 플레이어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이걸 이렇게 얻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현우는 쓰게 웃었다.

저 칭호는 미래의 그도 가지지 못했던 칭호다. 애초에 그런 게 있다는 것도 몰랐다. 이 튜토리얼은 게임에도 없던 것이었으니까.

'접촉해오는 길드가 없었고.'

길드는 재능 있는 플레이어를 원한다.

그들은 운동이나 학문, 여러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인 예비 플레이어에게 접근한다.

정보를 줄 테니까 길드에 가입하라고.

그 정보 중 하나가 튜토리얼에 대한 것이다.

ㅡ튜토리얼에서 고블린 20마리를 잡으면 능력치를 올려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놈들도 모르는 게 있다.

이 튜토리얼의 보상은 그게 다가 아니다.

'정확하게 두 개 더 얻을 수 있지.'

이 시점으로부터 2년 뒤에 튜토리얼을 완수한 플레이어 덕분에 밝혀지는 보상이다.

진현우는 그걸 얻을 생각이었다.

ㅡ키, 키륵?!

ㅡ캬아아악!

고블린들의 비명이 들렸다.

숲 저 너머에서 나타난 고블린들이 진현우와 그 주변의 풍경을 보고 경악한 소리였다.

사방이 동족들의 사체였다.

"뭐, 너희들도 덤빌 거냐?"

ㅡ키이, 크르륵... 캬아악!

ㅡ크아앗!

진현우가 도끼를 까딱거렸다.

그 모습을 본 고블린 무리, 정확하게 세 마리는 잔뜩 겁에 질려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여튼, 겁은 많아가지고."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블린들이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다. 땅바닥에는 놈들의 발자국이 짙게 남아있었다.

"그래, 너희 대장한테 가라."

진현우는 자세를 낮췄다.

* * *

고블린들은 겁에 질린 채 달아났다. 어찌나 급한지 제 발에 넘어지는 놈들도 있었다.

진현우는 그 뒤를 추적했다.

ㅡ히이익, 키히이익...!

ㅡ헥! 헤엑!

짐승 같은 소리를 내던 고블린들이 도착한 곳은 숲의 깊숙한 곳에 있는 공터였다.

거기에는 꽤 많은 고블린이 있었는데, 그중에 유독 큰 놈이 하나 있었다.

ㅡ키, 키륵! 키이익!

ㅡ그르륵....

고블린 리더라 불리는 몬스터였다.

평범한 고블린에 비해서 덩치가 1.5배는 크고 사납게 생긴 놈. 지능도 좀 더 똑똑해서 고블린들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고블린들은 놈한테 다가가더니 손짓, 발짓을 섞어가면서 자신이 본 것을 설명했다.

아마도 진현우에 대한 얘기를.

ㅡ그르르... 크아아악!

ㅡ캬악!

고블린 리더가 분노를 터트리더니 보고한 고블린의 얼굴을 방패로 후려갈겼다.

얻어맞은 놈이 피를 뱉으며 쓰러졌다.

'어디 보자. 숫자는 10마리 정도. 저놈이 대장이고, 그 뒤에 있는 놈은....'

고블린 리더가 부하들에게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진현우는 근처의 수풀에 몸을 숨긴 채, 고블린 무리의 구성을 확인했다.

한 놈, 거슬리는 놈이 있었다.

'고블린 샤먼. 저놈은 까다로워.'

고블린 리더의 바로 뒤에 있는 나이 든 고블린. 투박한 지팡이까지 가지고 있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놈이다.

아직 1레벨, 가진 사념도 카리악의 것밖에 없는 진현우에게는 부담스러운 상대다.

물론 어떻게 처리할지는 생각해뒀지만.

'슬슬 때가 됐는데.'

한창 분노를 터트리던 고블린 로드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놈은 코를 찡긋거리더니, 흡사 개처럼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ㅡ킁... 크륵?

고블린 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하인 고블린 놈들의 역겨운 체취 말고 묘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익숙한, 피 냄새.

ㅡ퍼어억!

ㅡ캬아아아악!

그걸 인지한 순간, 도끼가 날아들었다.

빙글 회전하면서 날아온 도끼가 고블린 로드를 노렸다. 정확하게 머리를 겨눈 투척. 고블린 로드는 몸을 비틀면서 도끼를 피했다.

그리고 그 결과, 도끼는.

ㅡ끄륵....

ㅡ키, 키이이익!?

애꿎은 고블린 샤먼의 목에 꽂혔다.

당장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니다. 하지만 마법을 쓰려면 어떻게든 영창을 해야만 한다.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마법은 봉인된 셈.

그리고 그건 진현우에게 기회였다.

ㅡ캬, 캬아아악!

수풀 사이로 진현우가 불쑥 뛰쳐나왔다.

그는 방패를 앞세우면서 자세를 낮췄다. 다리에 힘이 모였고, 한계까지 응축한 순간.

ㅡ쿠우웅!

ㅡ크학!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졌다.

앞을 가로막던 고블린을 방패로 밀쳐내면서 고블린 리더에게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놈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ㅡ키, 키익... 키히힉!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블린 리더는 진현우의 손에 무기가 없음을 깨달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방패뿐. 고블린 리더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파악했다.

도끼가 꽂힌 고블린 샤먼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 고블린 리더가 길을 막았다.

그리고 그건 진현우가 원하던 것이었다.

'거슬리는 방패부터 처리한다.'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진현우가 오른손을 뻗었다. 뭘 하려는 거지? 고블린 리더가 의아해하는 순간.

도끼가 그 손아귀로 날아왔다.

ㅡ키, 키이익?!

"스읍...!"

진현우의 팔 근육이 울룩불룩 솟았다.

힘껏 내디딘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회전하면서 팔에 집중된 힘을 단번에 해방시켰다.

고블린 리더가 다급히 방패를 들었다.

ㅡ콰드득!

그리고 충돌.

전신의 힘을 담은 강타가 방패와 충돌했다. 나무로 만든 방패는 제법 튼튼했지만, 그 일격을 버티기에는 부족했다.

방패가 박살 난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ㅡ크, 크르아아악!

고블린 리더는 경악했지만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놈이 손에 쥔 단검을 내질렀다.

노리는 곳은 진현우의 몸.

ㅡ푸우욱!

ㅡ키, 키히힉!

단검이 진현우의 복부에 꽂혔다.

고블린 리더가 비열한 미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애초부터 피할 생각도 없었다.

진현우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ㅡ촤아악!

ㅡ캬아아아아악!

도끼가 고블린 리더의 손목을 내리쳤다.

단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단번에 날아갔다. 진현우는 놈의 복부를 걷어찼다.

끔찍한 격통에 놈이 울부짖었다.

"아프냐? 덜 아프게 해주마."

진현우는 고블린 로드의 오른팔을 붙잡더니 놈의 다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고블린 로드의 몸이 나자빠졌다.

ㅡ쿠웅!

ㅡ캬하악!

진현우는 곧바로 놈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빠르게 올라가면서 복부를, 다음으로 가슴께를, 마지막으로 어깨를 내리쳤다.

ㅡ크르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퍼졌다.

그 광경을 다른 고블린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누구도 대장을 돕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ㅡ히익, 히이익....

ㅡ키이이이!

진현우에게서 나는 동족의 피 냄새 때문에 저도 모르게 겁에 질린 것이었다.

온몸을 피로 칠겁한 진현우가 고블린들을 노려봤다. 그 발밑에는 조금 전까지 놈들을 이끌던 대장이 쓰러져 있었다.

ㅡ햐아아악!

ㅡ힉, 히익!

겁에 질린 고블린들이 도망쳤다.

고블린 리더가 돌아오라는 듯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걸 듣는 놈은 없었다.

진현우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부하들을 잘 대해줬어야지."

ㅡ크, 크흐으....

고블린 리더와 진현우의 두 눈이 마주쳤다. 놈은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현우는 싱겁게 웃더니, 퍼억! 일말의 자비도 없이 놈의 목을 내리쳤다.

그걸로 끝이었다.

"쓰읍, 더럽게 아프네."

단검이 꽂힌 배가 아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고통을 잊게 해줄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기다리던 보상에 관한 메시지.

미래의 진현우는 얻지 못했던, 튜토리얼에서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5화

D급 플레이어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은 공평하지 않다.

튜토리얼만 해도 그렇다. 정보는 공유되지 않고 보상은 숨겨져 있다. 그걸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뿐.

진현우는 튜토리얼에 대한 정보는 몰랐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전투 튜토리얼에서 고블린 로드를 죽일 것.

ㅡ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튜토리얼을 정복한]을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현우는 칭호의 설명을 확인했다.

[튜토리얼을 정복한 (영웅)]

ㅡ효과: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한다.

영웅 등급이라는 높은 등급을 가진 칭호답게 그 효과도 화끈한 편이었다.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진현우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돌아간다. 생각한 적은 있지만 가능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허나 진현우는 과거로 돌아왔고, 그때에는 얻지 못했던 것들을 손에 넣고 있었다.

"그래, 필요하지. 미래를 바꾸려면...."

지금은 2024년.

시기도 적절하다. 지금보다 늦은 시기로 돌아갔다면 일이 까다로워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라면 아직 숨겨진 요소들이 제대로 발견되지 못했을 테니까.'

세상이 게임으로 바뀌었지만, 브로큰 월드의 지식이 완벽하게 대응되는 건 아니었다.

달라진 것들이 있었고, 브로큰 월드를 하던 극소수의 유저들도 모르는 요소들도 많았다.

이 튜토리얼도 그중 하나다.

'게임에서는 전투 튜토리얼이 없었는데.'

허수아비 따위를 치면서 어떻게 스킬을 사용하는지만 가르쳐주는 정도였다.

나름대로 플레이어를 배려해서 만든 것 같은데, 구성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난이도가 더러워서 그렇지. 뭐, 애초에 튜토리얼의 진짜 목적을 생각한다면....'

여기 있는 고블린 리더와 고블린 샤먼.

이 둘은 평범한 1레벨의 플레이어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기는 놈들이다. 애초에 레벨이 다르고, 능력치도 놈들이 더 높다.

놈들을 이길 방법은 하나.

'튜토리얼에 소환된 플레이어들끼리 뭉쳐서 힘을 모으고 놈들과 싸우는 것.'

지금으로부터 2년 뒤, 처음으로 전투 튜토리얼을 깬 플레이어가 그런 방식으로 깼다.

다른 노비스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특수한 스킬을 가진 플레이어였는데, 그 스킬의 힘으로 사람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었다.

덕분에 해당 시기의 튜토리얼은 최소 희생자를 내는 기록을 세우기까지 했었다.

"2년이라... 멀군."

그리고 진현우가 넘어온 10년이라는 시간 역시 아득할 정도로 멀었다.

그는 한숨 같은 숨을 내뱉었다.

"이제 튜토리얼이 끝날 때까지 버텨볼까."

아마 한 시간 정도 남았을 것이다.

진현우는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보상을 얻기 위해서 고통을 억눌렀다.

ㅡ전투 튜토리얼을 종료합니다.

ㅡ최종 생존자 1명.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전투 튜토리얼에서 끝까지 생존할 것.

ㅡ보상으로 모든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정확히 한 시간 뒤, 메시지가 나왔다.

그리고 눈앞에 포탈이 나타났다. 말할 것도 없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포탈이다.

"후우, 기절할 뻔했네."

복부에 입은 부상 때문에 골골거릴 때 나온 메시지라 유독 반갑게 느껴졌다.

진현우는 포탈에 발을 내디뎠다.

ㅡ화아아악!

포탈 너머의 풍경은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파괴되지 않은 현대 문명의 풍경.

도로가 멀쩡하고, 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밝은 얼굴로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다.

'과거의 풍경이다.'

미래의 풍경은 처참했다.

도시는 반쯤 무너졌고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돌아다녔다.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그래. 아직 사태를 극복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지.'

미래에는 무참히 박살 날 희망이지만.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백승현.'

자신을 과거로 보낸 동생.

멸망이 예정된 미래에서, 어떻게든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 발버둥 쳤던 녀석이었다.

'설마 이래서 날 은퇴시킨 건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진현우는 원래 은퇴하지 않고 계속 싸우려 했었다.

그런 그를 설득한 게 백승현이었다.

ㅡ안 그래도 시한부 인생인데 더 빨리 가시려고요? 형님한테 따로 부탁할 일이 생길 지도 모르니까 일단 은퇴하시고 쉬세요.

부탁할 일이 뭔가 했었는데.

'과거로 보내는 미친 짓을 할 줄이야.'

백승현은 진현우를 과거로 보냈다.

그라면 과거를 바꿀 것이고, 세상이 멸망하는 미래를 바꿀 거라 생각한 것이다.

진현우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할 일이 많겠군.'

진현우는 주변을 돌아봤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식당이었다.

점원이 그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응? 잠깐만."

불현듯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내 집이 어디였더라?"

무려 10년.

자신이 살던 원룸이 어디였는지 잊어버리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 * *

다행히도 단서는 있었다.

품속을 뒤져서 찾은 신분증에 주소가 나와 있었다. 그가 살던 원룸의 주소였다.

문제는 몇 호인지 모른다는 거였는데, 타이밍 좋게도 운이 하나 따라줬다.

"어머, 총각! 오랜만에 보네! 그 뭐야, 플레이언가 뭔가 됐다며? 우리 아들도...."

"제가 몇 호에 살았죠?"

"뭐? 총각, 어디 아파?"

마침 쓰레기를 정리하던 집주인을 만났다.

아줌마가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지만, 어쨌든 집이 몇 호인지도 알 수 있었다.

"더럽게 좁군."

실내를 본 진현우가 혀를 찼다.

조그마한 방에 화장실 하나가 전부인 방. 사람 하나가 겨우 살 정도로 좁다.

그는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2024년 10월 20일."

세상이 게임처럼 바뀐지 2년하고도 8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다.

처음 게이트가 열리면서 생겼던 피해를 복구하고 본격적으로 탑을 공략할 시기.

'그리고 슬슬 통제가 문제가 될 시기지.'

대형 길드들은 탑 내부의 사냥터나 던전을 통제하거나 독점하고는 했다.

그걸로 인한 문제가 터질 시기다.

"흐음, 돈이 얼마나 있더라?"

진현우는 은행 앱을 열었다.

비밀번호를 몇 번 틀려가면서 가까스로 잔액을 확인해본 결과는 처참했다.

"20만 원...."

그게 진현우가 가진 전 재산이었다.

실소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돈부터 벌어야겠어.'

과거든, 미래든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딱 좋은 곳이 있다. 진현우는 인터넷으로 플레이어 협회의 위치를 찾았다.

'지금 가기에는 늦었나.'

시간은 저녁.

도착하면 늦은 밤이 될 것이다.

진현우는 내일 가기로 하고 오늘은 일단 쉬기로 했다. 몹시 피곤하기도 했다.

"...."

낡은 싸구려 침대에 누운 진현우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상태창을 열어봤다.

[진현우]

· 레벨: 1

· 클래스: 노비스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16 (+3) · 민첩: 16 (+3)

· 체력: 16 (+3) · 마력: 13

[특성]

· 야만 전사 (C), 초보자 (C)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강타 (C, Lv.1), 야만적인 투척 (C, LV.1)

레벨 1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능력치.

이 게임은 레벨이 오르면 직업에 맞는 능력치 두 개가 하나씩 오른다. 노비스의 경우에는 모든 능력치가 번갈아서 올랐고.

지금의 진현우는 능력치만 보자면 10레벨 대의 플레이어와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부족해.'

지금도 동레벨의 플레이어에 비하면 아득히 높은 능력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일종의 '기초 체력'을 쌓아야 한다.

ㅡ강해지고 싶습니까? 그러면 세상을 탐험하고 숨겨진 것들 찾아야만 할 겁니다. 단순히 사냥만으로는 충분히 강해질 수 없습니다.

언젠가 브로큰 월드에 올라왔던, 개발자가 직접 쓴 개발 노트의 내용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개발자가 평범한 인간이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서는 레벨만 올려서는 강해질 수 없다. 업적을 달성해서 칭호를 얻어야 한다.

'알고 있는 건 뭐든 활용해야겠군.'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그리고 지금 가진 것들을 최대한 이용해서 강해져야 한다.

'미래를 바꾸려면,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 *

늦은 밤, 서울의 한 카페.

"아니, 그러니까 제가 봤다니까요?"

"...후우, 정길상 씨."

두 남자가 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정장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고 정길상이라 불린 남자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그쪽이 한 말을 요약하자면, 특출난 거 없는 1레벨의 플레이어가 도끼 하나 들고 튜토리얼에서 무쌍을 벌였다, 이거 아닙니까?"

"맞아요! 그렇다니까!"

"그것도 노비스가."

정장의 남자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이 안 되죠. 참 신기하네."

"...."

정길상이 허허 웃었다.

튜토리얼에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지만, 눈을 믿을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정장의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네메시스 길드로 오십시오. 플레이어 협회로 가서 이것저것 처리할 것들이 있으니."

"옙, 알겠습니다. 유민혁 스카우터님!"

"...."

정길상은 남은 레몬 에이드를 후루룩 들이켜더니 재빠르게 카페를 떠났다.

혼자 남은 유민혁은 생각에 잠겼다.

'노비스가 말이지....'

정길상이 한 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별다른 스킬도 없는 노비스가 도끼로 적을 도륙한다?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원래라면 알아볼 필요도 없으나.

'예외가 아예 없지는 않다.'

정말 드물지만, 플레이어 중에는 처음부터 추가적인 스킬을 갖고 있는 자도 있다.

아니면 능력치가 좀 더 높다거나.

'이레귤러'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일단은 조사해봐야겠군."

만약 정길상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마어마한 대어 유망주를 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플레이어 협회라는 것이 있다.

세상이 게임에 침략당한 후, 정부와 유명 플레이어들이 힘을 합쳐서 만든 조직.

대한민국 내의 플레이어들을 관리 및 서포트하는 곳인데, 튜토리얼을 무사히 통과한 플레이어는 반드시 이곳을 들려야 한다.

"네, 플레이어 자격증 말씀이시죠. 등록된 정보가... 있으시네요. 잠시만요."

자격증 때문이다.

이게 없으면 탑으로 들어갈 때 귀찮아지고 협회의 시스템을 이용할 수가 없다.

여러모로 있는 게 낫다.

"...네, 여기 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진현우는 자격증을 건네받았다.

얼굴 사진과 클래스, 그리고 플레이어 등급이 적혀 있다. 최하 등급인 D등급.

'원래는 EX 등급이 적혀 있어야 하는데.'

전생의 진현우가 가졌던 등급이다.

최상위권의 랭커였던 그였기에 가질 수 있었던 등급. 플레이어 협회의 핵심 전력.

그게 전생의 진현우였다.

'이제는 상관없는 얘기지.'

별 불만은 없었다.

진현우는 자격증을 챙겼다. 주변을 뒤적거리던 직원이 그에게 상자를 건넸다.

"신입 플레이어 분들한테 드리는 지원 물품들이에요. 한 번 확인해보시겠어요?"

진현우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여러 포션과 노비스가 착용할 만한 기본 장비, 그리고 주머니였다.

[작은 아공간의 주머니 (고급)]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작은 아공간, 귀속.

* 작은 아공간: 주머니 안에 아공간이 있어 주머니보다 더 큰 물건을 넣을 수 있다.

* 귀속: 착용 시 귀속된다. 사용자가 죽을 경우 주머니 안의 아이템 일부가 드롭한다.

플레이어라면 무조건 챙기는 아이템이다.

주머니 안에 아공간이 있어서 여러 물품을 넣어둘 수 있다. 인벤토리 같은 느낌이랄까.

꽤 비싼 아이템이다.

"그 주머니 비싼 거라고 팔거나 하진 마시고요. 식별 넘버가 있어서 찾을 수 있어요."

"팔면 크게 혼납니까?"

"엄청요. 지원 받기도 힘들어지겠죠?"

직원이 단단히 경고했다.

애초에 팔 생각도 없기도 했다.

"그럼, 음, 탑으로 가실 거죠?"

"예. 서울에 전이문이 하나 있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요. 지금 서울에 있는 전이문이 점검 중이라서.... 기다리시거나 다른 지역에 있는 전이문을 쓰셔야 할 거 같아요."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죠?"

직원이 화려하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잠시 후, 홀로그램이 눈앞에 나타났다. 부천시에 있는 전이문의 위치가 나온 지도였다.

"음, 가장 가까운 곳은 부천이겠네요. 안전지대 바깥이기는 한데, 부천이면 관리가 잘 되는 곳이라 안전한 편이에요."

"제가 직접 가야 합니까?"

"아뇨, 튜토리얼을 막 나오신 분들은 협회 차원에서 안내해드려요. 투어 느낌으로."

안전지대.

게이트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다.

세계의 탑에는 특수한 퀘스트가 열릴 때가 있는데, 그걸 깨서 얻은 보상이었다.

서울을 안전지대로 지정하는 것.

'안전지대 바깥은 언제나 게이트가 나타나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도시라도 경계를 늦출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안전지대인 서울은 비교적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예. 그럼...."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활동비 지원이나 좀 해주세요."

"활동비 지원이요? 아, 네. 알겠습니다."

탑으로 가려면 필요한 것들이 많다.

진현우는 우선 지원부터 받기로 했다.

6화

세계의 탑

탑으로 출발하기 전, 진현우는 플레이어 협회를 통해서 활동비 지원을 받았다.

지원금은 정확하게 100만원. 덕분에 계좌에 있는 돈은 120만원으로 늘어났다.

한 마디로 가난하다는 뜻이었다.

'돈, 돈.... 머리가 아프군.'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난은 익숙하다. 어렸을 때부터 고아였기에 돈에 시달리면서 살아왔고, 플레이어가 된 후로도 꽤 오랫동안 가난했으니까.

'돈은 플레이어로 활동하면 따라오겠지.'

진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탑을 공략하다 보면 돈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정 급하면 게이트를 처리하면 될 일이다.

"신입 플레이어 여러분은 여기로 와주십시오! 정확하게 1시간 뒤에 출발합니다!"

협회의 주차장에 버스가 한 대 보였다

신입 플레이어들을 전이문까지 안내하는 버스. 그 앞에 플레이어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예, 자격증 보여주시고... 진현우 씨. 확인했습니다. 타시고 편한 자리에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버스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진현우는 가장 뒷좌석에 앉았다.

"후우...."

버스에 앉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세상의 멸망을 눈으로 봤고, 갑작스러운 회귀까지 경험했다. 지칠 만도 했다.

'조금만 쉴까.'

진현우는 눈을 감았다.

* * *

ㅡ그럼 오늘은 박상철 전문가님을 모시고 한 번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ㅡ안녕하세요.

ㅡ예, 반갑습니다.

라디오 소리가 시끄럽다.

진현우는 눈을 떴다. 버스는 한창 도로를 달리는 중이었다. 좌석은 절반은 빈 상태.

신입 플레이어가 많지는 않은 모양이다.

ㅡ세상이 게임으로 바뀐 지 2년하고 8개월이 지나가는 시점이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 게임, 브로큰 월드 말입니다.

ㅡ네, 박상철 전문가님.

ㅡ알면 알수록 수상한 점이 많단 말이에요. 최초의 가상현실 게임이었다는데 왜 아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유저 수도 그렇고요.

ㅡ겨우 백 명 정도만 플레이했었죠.

버스 내부는 끔찍하게도 조용했다.

그래서 라디오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하고 있었다.

브로큰 월드에 대한 이야기였다.

ㅡ그 사람들 말로는 게임성도 뛰어났다고 하더군요. 근데 전 세계 유저 수는 극소수였다. 이거 참,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지요.

ㅡ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ㅡ글쎄요....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의아하게 여겼던 부분이다. 10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기도 했고.

'내가 했던 게임이기는 한데.'

브로큰 월드를 플레이했던 극소수의 사람들을 '유저'라고 부른다. 진현우는 그 유저에 속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사람이 너무 없어서 서버를 내릴까봐 여기저기 홍보도 했었는데, 효과가 없었다.

'브로큰 월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세상은 게임으로 바뀌었다. 하는 사람이 없던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으로.

ㅡ브로큰 월드를 했던 극소수의 유저 상당수가 플레이어로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죠. 게임의 지식을 가졌기 때문인데요.

"흠, 그렇지."

게임의 지식을 가졌다.

진현우가 감정사가 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어떤 직업이든 정점에 다다르면 마스터 스킬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브로큰 월드에서 했었던 클래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마스터 스킬이었다.'

그렇기에 선택했었다.

예상보다 마스터 스킬을 얻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온갖 고통을 받긴 했지만.

그 과실은 달콤했다.

ㅡ근데 이게 참, 문제에요. 그런 극소수의 유저들은 자기가 가진 정보를 공유하지 않거든요. 자신이 강해지는 용도로만 쓰지.

ㅡ그거참 문제네요. 그럼 어떻게....

뚝.

갑자기 라디오가 끊겼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한 탓이었다.

"예, 여러분. 부천시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내리시고요. 인원 확인하고 탑으로 갈게요."

도착한 곳은 부천시였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비하면 꽤 쇠퇴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사는 도시.

버스가 한 공원에 도착했다.

"전이문도 오랜만에 보는구만."

공원의 한복판에 거대한 문틀이 있었다.

중세 시대에 볼 법한 양식으로 만들어진, 꽤 호화롭게 생긴 문틀. 그리고 그 문틀 안에 어딘가로 이어지는지 모를 포털이 있었다.

탑으로 향하는 '전이문'이다.

'저 문을 통과하면 탑으로 갈 수 있다.'

이 세상이 게임처럼 바뀌면서 함께 나타난 '세계의 탑'은 태평양 한복판에 있다.

탑에 드나들려면 매번 비행기를 이용해야 하는 상황. 번거롭기 그지없다.

전이문은 그걸 보완하기 위한 장치다.

"아, 모두 모이신 것 같네요."

신입 플레이어들이 공원에 모였다.

그들을 여기까지 인솔한 남자가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한 것 같네요. 제 이름은 한경호입니다. 2년차 플레이어고요. 지금은 협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경호는 전이문 앞에 섰다.

"여러분에게 탑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온 건데요. 일단 먼저 탑으로 가보죠."

한경호가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신형. 다른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한경호를 따라했다.

ㅡ스으윽!

진현우도 전이문 앞에 섰다.

어딘가로 이어지는지 모를 포털. 그곳으로 발을 내딛자,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오랜만이네."

거대한 탑이 보였다.

태평양의 한가운데, 세상이 게임으로 바뀌었을 때 만들어진 섬의 중심부.

그곳에 드높은 탑이 세워져 있었다.

"저게 세계의 탑입니다. 이 세상이 변하면서 함께 나타난 탑이죠. 지금 지구에 나타나는 모든 게이트의 원흉이기도 하고요."

한경호가 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세 시대에 으레 볼 수 있을 법한 탑처럼 생겼지만, 저 내부는 별 세계였다.

말 그대로 층마다 다른 '세계'가 있다.

'내가 저 탑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진현우는 쓰게 웃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은퇴했었다. 탑을 다시 들어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그것도 이런 형태로.

"후, 드디어 2층이다. 1층에서 빌빌거리던 내가 2층으로 올라가는 날이 올 줄이야...."

"이번에 퀘스트 깨면 차나 살까."

"자격증 보여주고 가셔야 합니다!"

탑 근처에는 수많은 플레이어가 있었다.

탑으로 들어가려는 이들. 그리고 탑의 경호를 서고 있는 협회 소속의 플레이어들이다.

세계 각지의 플레이어 협회가 서로 협력해서 세계의 탑 근처를 경호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네요. 원래 이렇나요?"

"예. 플레이어 숫자가 꽤 되거든요. 저기 경호를 서는 사람들은 협회 소속입니다."

"왜 경호를 서는 건가요?"

"카오틱들을 걸러야 하거든요."

"카오틱...."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는 살인자, '카오틱'.

그 이름을 들은 신입들이 몸을 떨었다.

"같은 플레이어를 왜 죽이는 거죠?"

"글쎄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쾌락형 살인도 있고, 힘을 얻기 위한 것도 있죠."

"힘을 얻는다고요?"

"예. 탑에는 플레이어가 탑을 오르는 걸 막으려고 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거든요."

신입들이 눈을 가늘게 떴다.

튜토리얼 전에 교육에서 들은 것 같은데, 세력의 이름이 제대로 기억이 안 나서였다.

한창호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대적자'라는 세력입니다. 플레이어들에게 힘을 주겠다면서 유혹하고 카오틱으로 만드는 놈들이죠. 여러분도 꼭 조심하셔야 합니다."

"만약 카오틱이 되면...."

"한국에 발을 디디기는 힘들겠죠?"

한창호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신입들을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어이, 저거 봐. 신입인가 본데?"

"저기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 궁금하네."

"일주일에 절반은 죽지 않겠냐?"

"...."

신입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신입처럼 보였다. 그걸 본 플레이어들이 이죽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저런 비꼬는 말은 무시하세요. 하지만 일주일을 못 버티고 탑 내부에서 죽는 신입 플레이어가 상당히 많다는 건 사실이에요."

"탑 내부가... 그렇게 위험한가요?"

한창호는 말없이 웃었다.

"탑에는 여러 층이 있습니다. 각 층마다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의 대륙이 구현되어 있죠. 어떤 층은 황무지고, 어떤 층은 지하고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가실 곳은 1층인데...."

"시작의 대륙, 맞죠?"

"예. 브로큰 월드에서는 처음 게임을 시작하면 도착하는 대륙이라더군요. 그런 만큼 사냥터나 던전의 난이도도 쉽습니다."

저 신입들에게도 쉬울 지는 의문이지만.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려면 '플로어 마스터'라는 존재를 죽이면 됩니다. 그러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죠."

"많이... 위험한가요?"

"예. 괴물입니다. 저도 겨우 이겼죠."

한창호가 등을 돌렸다.

신입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다. 모두 곧 시작될 탑의 생활에 긴장한 모습이었다.

'응?'

근데 한 명, 이상한 사람이 보였다.

진현우. 그는 조금의 긴장도 하지 않은 채, 익숙한 것처럼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입 치고는 눈빛이 특이한데.'

한창호는 탑 옆에 있는 표지판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35%라는 숫자가.

"저 숫자는 뭔가요?"

"침식률입니다. 탑을 등반하는 속도가 느려지면 저 침식률이 오르죠. 높아지면 더 많은 게이트가 나타나고, 또 위험해집니다. 우리 플레이어가 탑을 등반하는 이유입니다."

"...."

진현우는 복잡한 눈으로 표지판을 봤다.

저 침식률이 100%에 도달해서 세상이 멸망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왔다.

이번에는, 반드시 달라져야만 한다.

"시작의 대륙에 가거든 명심하십시오. 뭘 하든 파티를 짜서 활동하는 것. 절대로 무리해서 사냥하면 안 됩니다. 죽게 될 테니까요."

충고하는 한창호의 얼굴은 진지했다.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신입들이 더욱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각자 가이드북을 받으시고, 저 문으로 가십시오. 그러면 탑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여정을 응원하겠습니다."

한창호는 거기까지 말하고 물러났다.

신입들이 탑에 들어가는 걸 지켜보려는 것처럼. 하지만 탑에 들어서는 이가 없었다.

조금 전의 충고 때문에 긴장한 탓이었다.

'긴장할 필요 있나.'

그중에서 진현우가 가장 먼저 나섰다. 신입과 한창호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이미 수없이 드나든 탑이다.

긴장할 것도 없었다.

'정말로 오랜만이군.'

세계의 탑은 문이 없다.

그렇다고 어떻게 들어갈지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진현우는 탑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앞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문을.

ㅡ세계의 탑에 방문한 것을 환영합니다.

ㅡ현재 탑은 7층까지 개방되었습니다. 당신이 입장할 수 있는 층은 1층까지입니다.

ㅡ1층으로 입장하시겠습니까?

메시지들이 나타났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진현우가 입을 열었다.

"예."

ㅡ1층: 시작의 대륙으로 향합니다.

ㅡ입장 가능 레벨: Lv.1~Lv.20.

거대한 문이 열렸다.

문 너머는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진현우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발을 내디뎠다.

그가 들어서자 문이 제멋대로 닫혔다.

ㅡ쿠우웅!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딘가로 끌려가는 듯한 감각.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그 감각이 사라졌을 때.

ㅡ화아아악!

진현우는 다른 '세계'에 와 있었다.

"파티 구합니다! 5레벨 던전 가실 분!"

"전사! 전사 필요하신 파티 없습니까! 어느 파티든 갑니다! 불러만 주세요!"

"칼리스타 길드가 신입 길드원을 모집합니다. 관심 있는 분은 여기로 와주세요!"

"골드 받고 퀘스트 공유해드립니다!"

보이는 것은 이세계의 풍경.

판타지 배경의 게임에서 볼 법한 마을.

서양풍의 여러 건물이 있고, NPC들이 생활하며, 플레이어들이 활동하고 있다.

ㅡ'론데' 지역으로 진입합니다.

마치 브로큰 월드 속 세계처럼.

진현우는 눈앞에 뜬 메시지를 봤다. 흡사 게임의 지역을 설명하는 것 같은 메시지를.

[론데 지역.]

ㅡ권장 레벨: Lv.1~Lv.20.

ㅡ설명: 이제 막 모험을 시작한 초보자들이 성장할 수 있는 지역이다. 소도시 '론데'를 중심으로 적당한 사냥터와 던전이 펼쳐져 있다.

ㅡ점령 길드: 아그니스.

* 이 지역은 '아그니스' 길드가 영주의 허가를 받고 점령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실제로 여긴 브로큰 월드의 세계였다.

이 대륙, 그리고 이 마을. 둘 다 진현우가 브로큰 월드를 할 때 본 적이 있던 곳이다.

'게임이 스케일만 더럽게 커서는.'

여러 대륙이 있었고, 마족이 사는 세계가 있었고, 끔찍한 괴물이 사는 지저세계도 있었다.

탑의 각 층은 그런, 브로큰 월드의 대륙과 세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층을 오를 때마다 더욱 어려운 세계가 플레이어를 기다린다.

'전생에서는 결국 실패했다.'

플레이어들은 탑 등반에 실패했었다.

'대전쟁', '대적자', 그리고 '통제.' 여러 가지 요인이 합쳐지면서 결국 실패하게 됐다.

이번에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면 힘부터 쌓아야겠지."

숨겨진 요소들, 그리고 사념까지.

이 탑에서 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챙기면서, 최대한 빠르게 탑을 올라갈 것이다.

'반드시.'

멸망하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7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