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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2

7화

히든 클래스

진현우는 가이드북을 열었다.

들어오기 전 한창호가 준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적어놨네.'

가이드북에는 지도가 있었는데, 신입이면 어디를 가는 게 좋은 지도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 가이드북대로 움직일 것이냐?

"그럴 필요가 있나."

세계의 탑에는 숨겨진 것들이 많다.

이 세상이 원래는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이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히든 피스'들.

진현우가 노리는 건 그것들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이 대륙은 아그니스가 통제하는 곳.'

진현우는 가이드북의 지도에 있는 고블린의 평야라는 사냥터를 확인했다.

여기도 아마 통제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더라."

"사냥하는 데 안전하고 뭐고가 어딨어."

"그건 그렇긴 한데.... 고블린이라서 상대하기도 쉽고 사냥 효율도 괜찮다고 하더라고."

때마침 고블린의 평야로 가는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진현우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ㅡ고블린의 평야로 진입합니다.

ㅡ권장 레벨: Lv 3.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서자 시야에 그런 메시지가 나타났다.

딱히 달라진 것 없는 평야.

하지만 곳곳에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ㅡ키이이익?

ㅡ크르, 크르륵!

고블린들이었다.

튜토리얼에서 상대한 적 있는 몬스터들.

몇몇 플레이어가 고블린들을 사냥하고 있었고, 막 도착한 플레이어도 동참하려 했다.

허나 그 순간.

"어허, 어딜 가시나?"

그들의 앞을 남자들이 막았다.

척 보기에도 좋은 장비를 갖춘 이들이었다. 아마 20레벨에 가까운 이들 아닐까.

"네, 네? 갑자기 왜...."

"왜긴 왜야. 이용료를 내야 할 거 아냐!"

"이, 이용료라고요?"

"뭐야, 신참인가? 하여튼,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용기만 가상해가지고는."

쯧, 남자가 혀를 찼다.

"이 사냥터는 아그니스 길드가 통제하고 있다. 들어가고 싶으면 이용료를 내."

"그런...."

플레이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냥을 하는 데 이용료를 내라니. 이제 막 시작한 그들로서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그니스의 길드원들은 진지했다.

"못 내겠으면 꺼져."

"아니, 이용료라뇨! 같은...."

"어엉?"

길드원이 반발하는 플레이어를 노려봤다. 슬쩍 자신의 무기를 내보이기까지.

반발하던 플레이어는 기가 죽었다.

"1000골드 가지고 와. 그럼 쓰게 해주지."

"잠깐만요! 1000골드라뇨?"

"또냐? 오늘따라 더럽게 시끄럽네."

골드는 탑 내부에서 통용되는 화폐다.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퀘스트를 깨면 얻을 수 있으며, NPC와의 거래나 탑 내부에 존재하는 '골드 거래소'에서 쓸 수 있다.

1,000골드면 여기선 감당하기 힘든 양이다.

"분명 어제까지는...."

근처에 있던 또다른 플레이어 무리가 놀라서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분명 500골드였으니까.

"어제까지는 그랬고. 시장 논리에 따라서 오늘부터 입장 비용이 500골드 올랐거든."

"...!"

따지던 여자의 얼굴이 떨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냐, 안 되냐는 우리 길드장님께서 정하는 거지. 너희 같은 놈들이 아니라."

길드원이 이죽거렸다.

모두 황당해했지만 더 따지는 이는 없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아그니스는 대형 길드였으니까.

진현우는 혀를 찼다.

'저 짓거리는 변하질 않는군.'

사냥터 통제다.

온라인 게임에서나 볼 수 있던 행위가 게임처럼 바뀐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힘을 가진 길드들은 사냥터나 던전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한다.

'통제당하고 있는 사냥터에 들어갈 방법은 출입료를 내거나, 길드에 가입하는 것뿐.'

모든 곳을 통제하는 건 아니다.

효율이 좋은 사냥터나 특수한 칭호가 있는 던전을 통제하는데, 성장하고 싶은 플레이어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오는 이윤이 어마어마하다.

"협회는 저거 안 막고 뭐 하는 거야?"

"안 막는 게 아니라 못 막는 거지. 저런 대형 길드 정도면 협회보다 힘이 더 센데...."

"하, 진짜."

탑 내부는 플레이어들의 세상이다.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들은 개입할 수가 없다. 정부도, 협회도 탑에서는 무력하다.

이런 통제를 일삼는 것은 대형 길드들인데, 이들의 힘이 협회 못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협력해서 협회를 세웠던 놈들이, 이젠 권력이 생겼다고 협회를 나가버렸으니.'

참 우스운 일이다.

대형 길드들은 정부나 협회도 감히 제지할 수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통제가 유행할 수밖에.

'방치해서는 안 되는 문제긴 하지.'

통제는 대전쟁의 계기가 됐던 계기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이 세상의 미래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원흉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름다운 세상이야."

사냥터 통제는 이 시기부터 유행하면서 플레이어 사회의 큰 문제로 떠오르지만, 먼 미래에는 완전히 종적을 감추어 버린다.

이유는 간단했다.

'통제고 나발이고 사람이 있어야지.'

플레이어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감소하면서 통제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 된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없어서 통제는커녕 몇 없는 신인들을 키워주기 바쁜 시기였다.

"흠, 이제 어쩐다."

어쨌든 그건 미래의 일이고.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무슨 클래스로 전직할 것이냐겠지.'

플레이어는 레벨 10이 되면 노비스 클래스를 벗어나 새로운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다.

전생의 진현우는 감정사였다. 비전투 직업이자 대부분의 사람에게 멸시받는 직업.

'지긋지긋한 감정사를 또 할 수는 없지.'

기억 감정이라는 마스터 스킬이 있으니 감정사라는 클래스를 할 필요는 없다.

다른 클래스.

'가능하면 히든 클래스로.'

마침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초보자 훈련장부터 가야겠군."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플레이어는 10레벨에 전직할 수 있다.

브로큰 월드에는 여러 가지 클래스가 존재했고 그중에는 히든 클래스도 존재했다.

전직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거나 특정 퀘스트를 깨야 하는 클래스들.

'일단 평범한 클래스로 전직했다가 히든 클래스로 전직하는 방법이 있기는 한데....'

문제가 있다.

바로 시간이었다.

'강력한 히든 클래스는 얻으려면 퀘스트가 너무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페널티가 적으면서 강력한 히든 클래스 역시 존재하지만 얻기가 까다롭다.

짧아야 몇 달, 길면 년 단위로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런 걸 얻을 시간은 없다.

'가능하면 기억 감정이라는 마스터 스킬을 강화해줄 수 있는 히든 클래스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얻는 시간도 짧아야 한다.

딱 하나, 시작의 대륙에서 이 조건을 충족하는 히든 클래스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클래스가.

ㅡ초보자 훈련소에 어서 오세요.

진현우는 눈앞의 건물을 봤다.

넓은 마당이 딸린, 언제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낡은 건물이 있는 곳.

초보자 훈련소다.

"어서 오시게. 훈련받으러 왔나?"

"예.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허름한 초보자 훈련소를 지키는 것은 늙고 추레한 생김새의 노인뿐이었다.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럼 우선 저 허수아비부터 쳐보겠나? 이것저것 파악할 것들이 있으니."

"언제까지 치면 됩니까?"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치면 되네."

"흐으음...."

보통 저런 말을 들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치면 그만하라고 하겠지, 이리 생각할 터.

여기서는 아니었다.

'저 늙은이, 며칠 동안 굴릴 텐데.'

게다가 아무런 보상도 없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진현우는 아무런 보상 없이 노가다를 뛰고 싶진 않았다.

"으음...."

"뭔가? 하기 싫은 건가?"

진현우가 어떻게 보상을 뜯어낼까 고민하던 걸 교관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네도 다른 놈들처럼 금방 도망치겠지만, 뭐, 일단은 해보게. 싫으면 말고."

"...!"

그 말에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그럼 내기하죠, 교관님."

"내기라고?"

"예. 제가 다른 놈들처럼 금방 도망치냐, 안 도망치냐로 내기하는 겁니다."

교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이기면 기술을 하나 가르쳐주시죠."

"만약에 내가 이긴다면?"

"그때는 뭐, 그때 가서 생각하고요. 교관님이 필요하신 걸 들어드리죠. 어때요?"

"...."

교관은 진현우를 바라보더니 코웃음 쳤다.

"좋네, 그리하지. 마침 마당이 지저분한 상황이었는데 아주 잘 됐구만."

띠링!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퀘스트가 나타났다.

[교관과의 내기.]

· 난이도: C.

· 설명: 교관과 내기했다. 내기에서 지면 더러운 마당을 치워야 할 것이다.

· 보상: 노비스용 스킬, 경험치.

진현우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아무런 보상도 없이 쳐야 하는 허수아비로 스킬을 하나 얻게 됐다.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목검을 이용해서 치면 되네."

진현우는 구석에 있는 목검을 쥐었고 허수아비 앞에 섰다. 멀리서 봐도 낡아 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낡아 보인다.

"쳤다가 부서지는 건 아니겠죠?"

"글쎄다. 흐아암, 어차피 금방 포기할 테니 난 의자에 앉아서 편하게 봐야겠구만."

진현우는 크게 숨을 삼키면서 호흡을 가다듬은 후, 허수아비를 치기 시작했다.

교관은 마당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더니 진현우가 허수아비를 치는 걸 지켜봤다.

ㅡ퍼억! 퍽!

ㅡ파스슥!

흔히들 생각할 것이다.

초보자 훈련소에 있는 허수아비? 그거 치면서 노가다하면 능력치 오르는 거 아냐?

단언컨대 아니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허수아비를 친다고 능력치가 오른다거나, 숨겨진 칭호를 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처음 그걸 노리고 허수아비 노가다를 뛰었던 플레이어들이 알아낸 사실이었다.

ㅡ아씨, 뭐야! 소설에서는 허수아비 치면 능력치 오르던데 왜 안 올라!

ㅡ시간만 날렸잖아!

초보자 훈련소, 그리고 허수아비.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숨겨진 보상이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 요소들이었다.

하지만 브로큰 월드에서는 이런 운동을 한다고 해서 능력치가 오르지 않는다.

'레벨이 오르거나, 칭호를 얻거나.'

그래야지만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아니면 특수한 아이템을 섭취하거나.

'허수아비를 쳐서 칭호를 얻을 수 있다면 능력치가 오르겠지만, 그런 건 없고.'

초보자 훈련소는 이제 막 플레이어가 된 사람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교관이 뭔가 있을 것처럼 허수아비를 치라고 하는데, 아무리 오래 쳐도 능력치 하나 안 오른다. 별다른 퀘스트도 없다.

ㅡ뭐? 됐으니까 그냥 가라고요? 너는 자격이 없다고? 시발, 이게 뭔 소리야!

ㅡ아니, 3일 동안 쳤는데! 칭호 없어? 아무것도 안 줘? 실화냐, 이거....

대표적인 지뢰 컨텐츠.

그런 의미에서 초보자 훈련소에서 허수아비를 치는 건 정말 무의미한 짓이었다.

시간만 버리는 헛짓거리다.

모두 그리 생각했다. 사실이기도 했고.

"응? 와, 뭐야. 저거 또 낚이는 사람 있네."

"허수아비를 치는 사람이 아직도 있어?"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몇 시간째 허수아비를 치는 진현우를 발견했다.

그들은 쯧쯧거리며 혀를 찼다.

"아저씨! 그거 사기에요! 허수아비 백날 쳐봤자 아무것도 안 줘요! 저 노인네 사기꾼이니까 시간 낭비하지 마요!"

"게임 판타지 소설 많이 보셨네."

"그러니까 말이야. 시간만 버리는 건데."

허수아비에 숨겨진 요소는 없다.

하지만 그게 초보자 훈련소에 숨겨진 요소가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건 선행 퀘스트다.'

초보자 훈련소에서 얻을 수 있는 히든 클래스를 얻기 위한 첫 번째 선행 퀘스트.

진현우는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비웃음 속에서 묵묵히 허수아비를 쳤다.

몇 시간, 며칠, 그리고 일주일.

ㅡ퍼억! 퍽!

"와, 저걸 아직도 치고 있네."

"어디 아픈 사람인가? 머리라던가."

진현우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허수아비를 쳤고 교관은 그걸 지켜봤다.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이 창으로 쳐보게."

"음, 좋군. 이번에는 도끼로 해보게나."

"흐으음! 다음에는 단검일세."

교관은 진현우에게 온갖 종류의 무기를 쥐여주면서 허수아비를 치게끔 만들었다.

"...."

처음에는 진현우를 못 미덥다는 눈빛으로 보던 교관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이 담긴 눈빛으로.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됐네, 거기까지 하게."

"후우, 후.... 이제 됐습니까?"

"음."

교관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땀에 젖은 진현우의 몸을 여기저기 바라봤다. 특히 신체의 근육 부분을.

"뛰어난 기초 체력을 가지고 있군. 무엇보다도 끈기가 아주 뛰어나. 다른 여행자들은 죄다 중간에 포기하던데 자네는 다르구만."

교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얼굴에서는 처음 진현우를 무시하던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정도면...."

"이 정도면,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크흠, 교관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내가 자네를 과소평가했어. 끈기가 없는 여행자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그럼?"

"우리가 했던 내기는 자네가 이겼네. 약속대로 간단한 스킬을 하나 가르쳐주지."

교관은 자신이 약속한 대로 스킬을 가르쳤다. 그가 자세를 낮게 낮추더니, 두 다리에 마력을 집중하고 순식간에 폭발했다.

쿠웅! 교관이 놀라운 속도로 돌진했다.

"돌진이라는 이름의 스킬이네. 빠르게 달리는 게 전부지만, 어딘가 쓸 데가 있겠지."

잠시 후,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교관과의 내기'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ㅡ보상으로 스킬: 돌진(C)을 익혔습니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브로큰 월드라는 게임에서 스킬을 익히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더럽게 어렵다는 것이었지.

"뭐야? 스킬을 왜 가르쳐줘?"

"훈련소에서 저런 것도 가르쳐주던가?"

"에이, 그래봤자 쓰레기 스킬인데...."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웅성거렸다.

훈련소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허수아비만 치던 진현우는 근방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야, 일주일 동안 허수아비 쳐서 저런 스킬 하나 얻을 바에 레벨 올리고 만다. 전직해서 얻는 스킬이 훨씬 쓸모 있겠구만."

"그러니까. 저 늙은이, 보나 마나 자격이 없다면서 훈련소에서 나가라고 할걸?"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진현우가 허수아비를 치던 것은 이 스킬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교관을 흘깃 봤다.

'날 보는 눈빛이 많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어차피 조만간 떠날 놈이라고 생각해서 큰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빛에 호기심이 묻어났고, 자신을 관찰하는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때가 된 거 같은데.'

진현우가 여기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허수아비를 치고 있었던 이유.

진현우를 한참 지켜보던 교관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를 불렀다.

"자네는 나름대로 자격이 있는 것 같구만. 혹시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는가?"

"거봐, 자격...."

"...어?"

사람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격이 있다니. 지금까지는 누가 와도 자격이 없다면서 그냥 쫓아냈던 늙은이가.

진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늑대들이 다스리는 숲이 있네. 짐승, 사람 가릴 것 없이 공격하는 놈들이지. 덕분에 많은 사람이 놈들의 손에 죽었네."

"원래 그렇게 흉포했습니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네. 다만 숲에 기이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그곳에 서식하던 짐승들이 흉포해지기 시작했지."

"흠. 그래서, 늑대들을 처리해 달라?"

"아니."

교관이 고개를 내저었다.

"놈들의 우두머리를 처리해주게. 단."

"단?"

"자네 혼자서."

진현우와 교관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늑대들의 숲 말하는 거 아냐? 거기 레벨 대비 위험해서 사람들이 안 가는 곳이잖아."

"그걸 혼자서 공략하라고...?"

"예, 그러겠습니다."

그걸 또 한다고?

사람들이 황당해하는 눈빛으로 진현우를 봤다. 하지만 그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좋네, 그럼 놈을 처리하고 돌아오게나."

띠링!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늑대 우두머리 사냥.]

· 난이도: B.

· 설명: 늑대들의 숲에서 서식하는 늑대들이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다. 놈들의 우두머리를 처리해야 한다. 단, 혼자서.

· 보상: 연계 퀘스트 시작, 경험치.

보상 중에 인상적인 것이 있었다.

연계 퀘스트 시작.

'이거다.'

진현우가 여기서 노가다를 뛰는 이유.

시작의 대륙의 초보자 훈련장에는 히든 클래스를 얻을 수 있는 단서가 숨겨져 있었다.

'웨펀 마스터.'

그게 히든 클래스의 이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좀 시간이 지난 후, 어떤 카오틱이 얻으면서 이름이 알려진 클래스.

놈이 어마어마한 악명을 떨친 탓이었다.

'여러 길드를 혼자서 부순 놈이었지.'

하지만 완벽한 클래스는 아니다.

웨펀 마스터는 굉장히 강한 클래스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 스킬, 기억 감정이 있다면 그 페널티를 완벽히 상쇄하는 게 가능하다.

'이번에는 지긋지긋한 감정사를 벗어나서 좀 제대로 된 직업을 얻을 수 있겠군.'

하지만 그전에 챙길 것이 있다.

진현우가 이 훈련장에 온 것은 히든 클래스도 있지만, 또 하나 얻을 게 있어서였다.

"혹시 훈련장에 쓸만한 아이템은 없습니까? 보시다시피 제가 장비가 이래서요."

"있기는 있네만, 대부분 낡았네. 괜찮나?"

"상관없습니다."

"그럼 따라오게."

교관은 진현우를 창고로 안내했다.

온갖 종류의 아이템들이 있는 곳이었다. 문제는 아이템들이 죄다 낡았다는 것.

"그래도 찾아보면 쓸만한 게 몇 개 있을지도 모르네. 운이 좋으면 찾을 수 있겠지."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바라봤다.

찌릿, 그의 감각이 이 근방에 있는 사념이 담긴 아이템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거 다행이네요."

"다행이라고? 뭐가 말인가?"

진현우는 낡은 장갑을 잡았다.

"제가 운이 좀 좋거든요."

사념이 깃든 아이템이었다.

8화

사냥꾼의 사냥 (1)

[질긴 장갑 (일반)]

· 설명: 질긴 가죽으로 만든 장갑이다.

· 착용 제한: 없음

· 옵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있다.

특별한 것 없는 아이템이다.

훈련소의 창고에 있는 아이템 대부분이 이런 식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잡템들.

하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아, 그 장갑. 그리운 물건이구만. 얼마 전에 죽은 내 친구가 쓰던 것이네. 자기한테는 더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고 했었지."

"나이가 많으셨겠군요."

"그렇지. 꽤 괜찮은 사냥꾼이었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진현우는 장갑을 바라봤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잘 관리된 게 느껴진 장갑.

'기억 감정.'

진현우는 스킬을 사용했다.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림처럼 어떤 풍경이 나타났다.

크지는 않지만 아늑한 집.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한 노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ㅡ아버님....

ㅡ아버지, 제 말 들리세요?

오랫동안 살아온 노인은 천수를 다했다. 이제 곧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가족들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게 살았구만.'

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길러주는 가족 없이 자라나 짐승을 사냥하는 것으로 여태껏 먹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보라.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봐주는 가족이 있지 않은가.

'괜찮은 인생이었다. 그래, 괜찮지.'

노인은 살아온 삶에 만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노인은 숲을 떠올렸다. 오랫동안 짐승들과 서로 목숨을 걸고 겨뤘었던 전장을.

'그놈한테 패배한 채 가는 건, 아쉽구만.'

노인은 오른팔이 없었다.

마을 근방의 숲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와 싸웠고, 패배한 탓에 빼앗긴 것이었다.

ㅡ크르르... 크허엉!

아직도 들린다.

숲을 다스리는 거대한 늑대의 포효가.

신체를 잃은 것은 상관없다. 하지만 놈에게 패배한 채로 죽는 건 몹시 아쉬웠다.

'시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노인은 천장을 바라봤다.

점점 시야가 새하얘졌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들의 목소리도 멀어졌다.

'놈과 다시 한번, 싸울 수, 있었을 텐데.'

노쇠한 사냥꾼은 그렇게, 강한 아쉬움을 안은 채 길었던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에 남긴 미련은 사념이 되었고, 생전에 아꼈던 물건에 깃들었다.

ㅡ놈과 다시 한번 싸우고 싶다. 어떤 형태든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꼭 강한 원한을 가진 사람만이 사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뭔가를 이루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도 사념이 되고는 한다.

이 노인이 그런 경우였다.

"제가 대신해드리죠."

진현우는 그 미련을 받아들였다.

노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미련을 자신이 대신 이루어주겠노라고 한 것이다.

그 말에 사념이 반응했다.

ㅡ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ㅡ노련한 사냥꾼, '윌튼'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전승합니다. 질긴 장갑 (일반)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합니다.

ㅡ특성 '노련한 사냥꾼 (C)'과 스킬 '특제 덫 (C)'을 새로이 익혔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진현우는 장갑의 형상이 변화하는 걸 보면서 새로 얻은 특성과 스킬을 확인했다.

· 노련한 사냥꾼 (C): 노련한 사냥꾼의 감각으로 적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민첩이 항시 3만큼 상승한다.

· 특제 덫 (C, Lv.1): 마력을 이용하여 특제 덫을 제작한다. 목록: 속박, 폭발.

사냥꾼다운 스킬이었다.

둘 다 진현우가 전생에서 애용했던 스킬이었는데, 특히 사냥꾼 특성이 그러했다.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게 도움이 되는 때가 꽤 많았다.

능력치를 공짜로 올려주는 것도 물론이고.

'이 등급에서는 있을 수 없는 효과지.'

C등급 특성이 능력치를 올려준다?

말도 안 된다. 그런 특성은 거의 없다. 등급이 낮은 특성은 그만큼 성능이 낮다.

당장 진현우가 가지고 있는 초보자 특성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기억 감정의 가장 큰 특징.'

그게 바로 등급 대비 뛰어난 특성과 스킬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사념의 경험이나 특징 같은 것이 녹아들면서 일반적인 특성과 스킬보다 더 강력하고, 특색이 있는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냥꾼의 장갑 (희귀)]

ㅡ설명: 노련한 사냥꾼이 애용했던 장갑이다. 짐승들의 피 냄새가 배어 있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피비린내, 사냥꾼.

* 피비린내: 이 장갑을 착용한 자와 마주한 짐승형 몬스터의 신체 능력이 감소한다.

* 사냥꾼: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착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2씩 상승한다.

아이템도 그러했다.

특별한 것 없던 '질긴 장갑'이라는 아이템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원래는 별다른 효과가 없던 장갑이, 사념의 힘이 깃들면서 특별하게 바뀐 것이었다.

'이런 아이템의 경우에는 등급이 오르는 데 한계가 있어서 조금 아쉽긴 한데....'

기억 감정은 아이템에 담긴 사념이 전생에 얼마나 강했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강한 힘을 가졌던 사념의 경우에는 퀘스트로 등급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지며, 특성과 스킬 역시 강해진다.

용맹의 증명이 그런 케이스였다.

'이 장갑은 B등급까지만 성장한다.'

그래도 노쇠한 사냥꾼이 가진 경험, 거기서 비롯되는 힘은 확실히 유용했다.

진현우는 장갑을 착용했다.

"...으응? 장갑이 뭔가, 바뀐 것 같네만."

"기분 탓이겠죠."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기분 탓이 맞습니다."

"...."

지켜보던 교관이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진현우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으나, 돌아올 때 증표가 될 걸 가지고 와야 하네."

"예, 그러죠."

진현우는 숲으로 향했다.

* * *

ㅡ사냥터: 늑대들의 숲에 진입합니다.

ㅡ권장 레벨: Lv 5~ Lv 10.

늑대들의 숲.

소도시 론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이다.

안에는 여러 짐승형 몬스터가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활발한 것은 늑대였다.

"으, 으으...."

"괜찮아?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야!"

"아무나 포션 좀 주세요!"

레벨을 생각하면 시작의 대륙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초보자를 위한 사냥터다.

실제로 권장 레벨도 5.

하지만 이 사냥터를 초보자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느, 늑대가 뭐 이리 많아!"

"비겁한 놈들아!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제길, 그냥 돈 내고 고블린이나 잡을걸!"

늑대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놈들은 철저하게 집단행동을 한다.

사냥감이 클수록 더더욱 그러한데, 거기에 전술적인 움직임까지 보이고는 한다.

'늑대라면 잡몹이란 이미지가 있지.'

온라인 게임에서는 대개 그렇다.

초반에 나오는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는 몬스터.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이놈들에게는 지능이 있다.

전술을 짜고, 그걸 이행할 정도의 지능이.

"파티 구합니다! 숲 초입부에서 여우 잡으실 분! 늑대 나타나면 늑대도 잡고요!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칠 거예요!"

사람들도 혼자서 사냥하기에는 위험한 곳이란 걸 알기에 파티를 구하고 있었다.

이 숲은 확실히 위험하지만, 리턴은 크다.

늑대들이 경험치를 많이 주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주는 재료 아이템도 꽤 유용하고.

"어, 거기 삼촌! 늑대 잡으러 오셨어요?"

"그러려고요."

"잘됐네요. 저희하고 파티하시죠?"

파티를 구하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현우도 그러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혼자서 깨야 하는 퀘스트라서요."

"아, 퀘스트 받으셨... 네?"

"호, 혼자서 깬다고요?"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곁에 있던 동료도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이 숲을 혼자서 들어간다고?

"삼촌, 그러다가 죽어요!"

"여기 엄청 위험한 곳인 거 몰라요? 초보자 사냥터라고 무시할 곳이 아니에요."

진현우는 말없이 웃으며 나아갔다.

남자와 동료들이 어어, 거리면서 그를 말려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아이고, 한 명 또 죽겠네."

"늑대가 잡몹인 줄 아는 사람이 또...."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현우처럼 늑대를 평범한 잡몹이라 생각하고 혼자 갔다가 죽은 이가 한둘이던가.

저 남자도 곧 시체가 될 거라 생각했다.

"흐으음...."

물론 진현우에게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그는 혼자 숲에 들어섰다.

ㅡ아우우우우우!

ㅡ우, 우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하울링이 들렸다.

늑대들에게 사냥당하는 사람들의 비명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겁에 질릴 만한 상황. 진현우는 침착하게 주변을 돌아봤다.

'숲 초입부에 여우 같은 몬스터들이 있다.'

여우는 늑대와는 달리 쉬운 몬스터다.

주는 경험치도 나쁘지 않다. 그래서 여우만 노리는 플레이어 파티도 있을 정도.

문제는.

'이 여우들을 계속 잡다 보면 피 냄새를 맡고 늑대들이 몰려든다는 점.'

여우를 잡다가 어느새 몰려든 늑대들한테 봉변을 당하는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진현우는 그걸 역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디, 슬슬 시작해볼까."

그는 도끼를 쥐었다.

* * *

ㅡ깨애앵!

늑대들의 숲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숲에 서식하는 여우들의 비명이었다.

놈들은 예고도 없이 날아드는 도끼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중이었다.

ㅡ캬아아앙!

이 숲에는 기이한 기운이 흐른다.

마기라고 불리는 기운이다. 그 영향으로 짐승들은 흉폭해졌고, 여우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이 시뻘건 눈으로 적의를 드러냈다.

ㅡ퍼어억!

ㅡ케엥!

그래봤자 도끼 앞에서는 무의미했지만.

동 레벨 대비 월등히 높은 능력치를 가진 진현우는 여우들에게 재해나 다름없었다.

그는 여우들을 보이는 족족 죽였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반가운 메시지가 나왔다.

그리고 그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렸다.

ㅡ아우우우우!

늑대들의 하울링.

진현우의 몸에 잔뜩 묻은 여우의 피 냄새를 맡고 포식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ㅡ스스슥!

ㅡ크르르르....

정면의 수풀에서 늑대가 튀어나왔다.

겨우 두 마리. 놈들은 이를 드러내면서 진현우를 경계했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진현우가 도끼를 움켜쥐었다.

ㅡ커허엉!

그리고 늑대들이 돌진했다.

눈이 시뻘건 짐승들이 적의를 한가득 드러내면서 진현우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그는 늑대들을 맞받아칠 준비를 했다.

ㅡ아오오오오!

그렇게 서로가 맞부딪히려는 순간.

달려들던 늑대들이 땅을 짓밟으면서 급제동을 걸더니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로 그때.

ㅡ커어엉!

진현우의 배후에 있던 수풀에서 네 마리의 늑대가 한 번에 뛰쳐나왔다.

놈들은 정면의 늑대를 상대하느라 무방비해진 진현우의 등을 노렸다.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늑대들의 이빨이 그의 등에 꽂혔다.

ㅡ퍼어어엉!

ㅡ깨갱!

누구든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갑작스런 폭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폭발에 휘말린 늑대들의 털이 불타고 살점이 날아갔고, 고통스러워하며 물러났다.

ㅡ끼잉, 끼이잉....

ㅡ크르르르...!

미리 설치한 덫의 효과였다.

노련한 사냥꾼, 윌튼이 쓰던 특제 덫.

진현우는 늑대들이 큰 사냥감을 어떤 식으로 사냥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ㅡ퍼어억!

놈들을 처리하는 법 역시, 잘 알았다.

순식간에 쏘아진 도끼가 고통스러워하는 늑대들의 머리를 단번에 박살 냈다.

ㅡ커, 커허엉!

진현우는 돌아오는 도끼를 낚아채면서 돌진했다. 정면에서 어그로를 끌던 늑대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이 보였다.

"흐읍!"

ㅡ콰드득!

단번에 거리를 좁힌 진현우가 늑대의 머리를 쪼갰다. 그 속도가 늑대 못지않았다.

민첩 능력치를 3이나 올려주는 노련한 사냥꾼, 거기에 짐승과 싸울 때 모든 능력치를 2씩 올려주는 아이템까지.

ㅡ끼, 끼잉, 끼이잉....

그 효과를 모두 받은 진현우의 움직임은 늑대들조차 쫓기 힘들 정도였다.

자신을 습격한 늑대들을 순식간에 처리한 진현우는 마지막 늑대 앞에 섰다.

놈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ㅡ퍼어억!

진현우는 마지막 늑대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걸로 여섯 마리."

이 숲은 플레이어들이 꺼리는 사냥터다.

숲에서 나오는 몬스터, 늑대가 사냥하기에 위험하고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

'늑대를 일정 숫자 사냥하면 놈들의 우두머리가 보복하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늑대들을 사냥하다 보면 보스 몬스터가 분노한 채 나타난다.

"30마리였던가."

분노한 몬스터는 상대하기 까다롭다.

하지만.

'그만큼 행동 방식이 단순해지지.'

오히려 진현우에게는 기회다.

더 많은 늑대를 죽이고 놈들의 우두머리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는 도끼를 쥐었다.

9화

사냥꾼의 사냥 (2)

늑대들의 숲은 위험한 사냥터다.

하지만 초입부에 있는 여우 같은 몬스터들은 사냥하기 쉽고 보상도 좋은 편이었다.

놈들의 가죽을 주면 경험치와 골드를 주는 반복 퀘스트가 있기 때문이었다.

ㅡ코오옹!

"오, 가죽 나왔다. 오늘 운 좋은데?"

"지금 5개째지?"

"어. 웬일이냐, 이게."

그렇기에 플레이어들은 파티를 짜서 초입부의 여우들을 사냥하고는 했다.

물론, 걱정거리는 있었다.

ㅡ아우우우우!

"히익!"

"뭐, 뭐야! 벌써 나와?"

초입부의 몬스터를 사냥하다 보면 나타나는, 영역을 지키려는 늑대 무리.

하울링 소리에 놀란 플레이어들이 주변을 살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ㅡ사사삭!

"오, 오는 거 같은데? 오나?!"

"싸, 싸워? 아니면 그냥 도망쳐?"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는 있고?!"

"야! 동료 더 부르기 전에 죽여!"

4인 파티의 선두에 선 전사가 소리가 들린 수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그때, 늑대가 뛰쳐나왔다.

ㅡ커허엉!

"우, 우와아아악!"

다섯 마리 남짓한 늑대들.

두 눈이 시뻘건 놈들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돌진했다. 플레이어들이 기겁했다.

'시, 시발! 진짜 늑대잖아!'

'상대하기 더럽게 까다롭다던데...!'

플레이어들의 근심이 깊어졌다.

빠르게 돌진해오는 늑대들. 이윽고 플레이어와 늑대들의 신형이 서로 맞부딪혔다.

ㅡ깨애앵!

"으, 으응?"

근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달려들던 늑대들이 플레이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옆을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어?"

"그, 그냥 지나가는데?"

한껏 긴장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플레이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이상함을 느꼈다.

조금 전의 늑대들, 뭔가....

슈우욱! 퍽!

"히이익!"

바로 그때, 웬 도끼 하나가 전사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격하게 회전하는 도끼는 놀라운 속도로 날아갔고, 목표에 적중했다.

ㅡ케헹!

"우, 우와아악! 뭐야!"

바로 늑대의 뒤통수에.

핏물을 머금은 도끼가 다시 빙글 회전하더니 날아간 경로를 그대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웬 남자가 도끼를 낚아챘다.

"26마리, 27마리."

"저, 저 사람은 또 뭐야?"

다시금 날아간 도끼가 또 다른 늑대의 목숨을 빼앗았다. 늑대들이 놀라서 도망쳤고, 남자가 숫자를 세며 놈들을 쫓았다.

"...."

"...."

쫓기는 늑대와 쫓는 남자가 순식간에 멀어졌고 플레이어들은 멍하니 바라봤다.

"쟤, 쟤네 쫓기고 있는데...?"

"그, 그러게?"

한 무리만 나타나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늑대들을 오히려 추적하는 플레이어라니.

전사가 혀를 내둘렀다.

"와, 레벨 엄청 높나 보네."

"그런 놈이 왜 여기 와서 양학질이야?"

"모르지. 골드 모으려고 온 거 아냐?"

플레이어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들 역시 골드를 모으기 위해서 여우를 잡고 있었다. 아그니스 길드가 통제하고 있는 사냥터에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망할 놈들. 야, 요즘에는 플로어 마스터도 통제하려고 든다던데? 미친 거 같아."

"다른 길드들은 그걸 그냥 두고?"

"자기들끼리는 이미 입 맞춘 거지, 뭐...."

"개새끼들, 그냥 망했으면 좋겠네."

그게 불가능한 일임은 모두가 알았다.

"하아...."

"사냥이나 하자...."

플레이어들은 아그니스에 대한 분노와 조금 전 지나간 플레이어를 향한 부러움을 느끼면서, 다시금 여우를 사냥했다.

* * *

진현우는 계속해서 늑대를 사냥했다.

평소엔 먹이를 사냥하던 포식자의 입장이었던 늑대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ㅡ콰드득!

ㅡ크륵...!

지금은 놈들이 사냥당하고 있었다.

늑대들의 숲의 바닥에는 놈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진현우는 그걸 추적하여 눈에 보이는 늑대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30마리째.

"좋아, 30마리."

진현우는 도끼에 묻은 피를 털었다.

이 사냥터에서 늑대를 사냥하는 방법은 놈들이 동료들을 부르기 전에 처리하는 것.

그는 조금 다르게 사냥했다.

"근처에 있는 놈들은 이게 단가?"

일부러 늑대가 동료들을 부르게끔 했다.

오히려 그게 더 편했다. 동료를 부른 늑대를 처리하고, 그 사이에 덫을 설치해서 도우러 온 늑대들을 낚으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냥이 크게 어렵진 않았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강타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ㅡ야만적인 투척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ㅡ특제 덫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반면에 그 보상은 달콤했다.

진현우는 자신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진현우]

· 레벨: 6

· 클래스: 노비스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20 (+3) · 민첩: 21 (+3)

· 체력: 18 (+3) · 마력: 15

[특성]

· 야만 전사 (C), 노련한 사냥꾼 (C), 초보자 (C)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강타 (C, Lv.2), 야만적인 투척 (C, Lv.2), 특제 덫 (C, Lv.2), 돌진(C, Lv. 1)

레벨이 5개나 올랐다.

각 스킬의 숙련도가 오른 건 덤이었다.

'숙련도를 올리는 것도 중요하지.'

스킬의 등급 뒤에 붙어있는 레벨은 숙련도를 뜻한다. 이게 높으면 높을수록 스킬의 위력은 강해지고 마력 소모는 줄어든다.

그리고 숙련도 레벨이 5단위에 도달할 경우,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기도 했다.

능력치 못지 않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하울링 소리가 멎었다. 숲이 불길할 정도로 조용하다.

진현우는 늑대들의 사체를 모았다.

"좋아, 시작해볼까."

이제 늑대 우두머리를 사냥할 것이다.

* * *

ㅡ아오오오오오!

조용해진 숲에 하울링 소리가 울렸다.

여태껏 들렸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강렬한 힘을 품고 있는 하울링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늑대들이 모였다.

ㅡ크르릉!

ㅡ우우우우....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달이 뜬 밤, 숲의 높은 언덕에 늑대가 나타났다. 탁한 회색빛의 털에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거대한 덩치를 가진 늑대가.

이 숲의 우두머리였다.

ㅡ....

늑대들이 우두머리 곁으로 모였다.

우두머리는 언덕 아래의 숲을 내려보면서 코를 움찔거렸다. 자신의 영역인 숲에서 짙은 피 냄새가 난다. 그것도 동족의 냄새가.

ㅡ크르, 커허엉!

곁에 다가온 늑대가 울부짖었다.

우두머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었다.

웬 인간이 하나 나타났으며, 그놈이 숲에 있던 동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다고.

ㅡ그르르르... 아우우우우!

우두머리가 땅을 박찼다.

놈은 자신을 따르는 동족들과 함께 피 냄새가 나는 근원지를 향해서 뛰었다.

그곳은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ㅡ가르르르....

ㅡ그르르....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곳.

우두머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죽은 동족들의 모습이었다.

피투성이인 채 나무에 매달린 모습.

ㅡ크아아악!

우두머리가 울부짖듯이 포효했다.

그리고 바닥에 있을지도 모르는 함정을 경계하면서, 죽은 동족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함정은 없었다.

ㅡ크르륵.

우두머리는 죽은 동족들을 바라봤다.

그 얼굴이 분노로 움찔거렸다. 놈은 바닥에 코를 박으면서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동족들의 사체를 나무에 매단 인간의 냄새를 파악해서 추적하기 위함이었다.

ㅡ가르르!

희미하게 나는 냄새가 있었다.

우두머리는 등을 돌렸다. 냄새를 쫓아서 동족들을 이렇게 만든 적에게 복수하리라.

놈이 발걸음을 옮겼다.

ㅡ스스슥!

바로 그때, 나뭇잎이 흔들렸다.

죽은 늑대들이 내걸린 높은 나무, 그 윗부분에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ㅡ퍼어억!

ㅡ카아아악!

도끼가 쏘아졌다.

격렬하게 회전하는 도끼가 우두머리의 앞쪽 왼발을 후려쳤고, 깊은 상처를 새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다.

ㅡ...!

공격당한 우두머리가 대응하기도 전에 나무 위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온몸을 피로 칠겁한 진현우였다.

그는 되돌아오는 도끼를 낚아채면서, 하강하는 힘을 담아 도끼를 힘껏 내리쳤다.

ㅡ콰드드득!

ㅡ커어억...!

그 일격이 우두머리의 허리를 강타했다.

원래는 목을 노린 공격이었으나, 뒤늦게 반응한 우두머리가 몸을 튼 탓에 빗나갔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ㅡ크륵, 크으윽! 끄으으...!

순식간에 앞발과 허리에 큰 부상을 입은 우두머리가 몸을 가누질 못했다.

곧바로 추격타를 가해도 되는 상황.

하지만 진현우는 뒤로 물러났다.

ㅡ커허어엉!

ㅡ크르르르!

조금 전까지 진현우가 있던 자리를 향해서 늑대들이 달려들었다. 그가 물러나자 늑대들이 포효하면서 추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진현우의 노림수였다.

"잘 왔다."

ㅡ퍼어어엉!

늑대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나뭇잎을 밟은 순간, 그 아래에 있던 덫이 발동했다.

윌튼의 특제 덫, 폭발하는 덫이.

ㅡ끄응, 끼이잉....

ㅡ케헤엑!

폭발에 휘말린 늑대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진현우가 앞으로 돌진했다.

늑대들이 필사적으로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 움직임은 평소보다 굼떴다.

ㅡ끄, 끄으응....

사냥꾼의 장갑이 가진 효과 때문이었다.

피비린내. 짐승의 짙은 피 냄새가 늑대들을 위축되게 했고, 신체 능력을 약화했다.

그는 앞을 막는 늑대들을 도끼로 베어 가르면서 두 발에 힘을 가득 실었다.

목표는 하나.

ㅡ커허어엉!

늑대 우두머리였다.

돌진을 사용한 진현우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고, 상처 입은 우두머리가 포효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후욱...!"

진현우의 도끼가 쏘아졌다.

손아귀를 벗어난 도끼가 오른쪽으로 크게 회전하면서 우두머리에게로 날아갔다.

놈이 분노하며 도끼를 쳐냈다.

다치지 않은 오른발로.

ㅡ크륵...!

도끼를 쳐낸 우두머리가 휘청거렸다.

땅을 딛고 있는 앞쪽 왼발이 크게 다친 상황에서 오른발을 들어 올린 탓이었다.

게다가 허리까지 크게 다친 상황.

ㅡ크라아악!

우두머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면서 적을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상태였기에, 그 필사의 일격을 피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진현우는 땅을 박찼다.

ㅡ스으으...!

진현우는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ㅡ콰드드득!

ㅡ끄륵!

일격.

마력을 머금은 도끼가 우두머리의 머리를 강타했다. 강력한 힘으로 내리친 도끼가 늑대의 정수리를 단번에 쪼개버렸다.

그게 끝이었다.

"후우, 후욱...!"

늑대 우두머리는 절명했다.

쓰러진 놈의 몸뚱어리가 떨렸다. 진현우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 뒤를 돌아봤다.

아직 늑대들이 남아있었다.

"...."

ㅡ....

하지만 놈들은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혼자서 수십에 달하는 늑대들을 상대한 데다가 우두머리까지 단신으로 죽였다.

겁에 질린 늑대들은 진현우와 우두머리는 번갈아서 보더니 물러나기 시작했다.

ㅡ우우우우....

늑대들이 울부짖으며 물러났다.

진현우는 놈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면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고, 완전히 떠났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피 냄새 때문에 숨을 못 쉬겠네."

진현우는 온몸을 피로 칠겁한 상태였다.

나무에 내걸린 늑대들의 피였다.

'사람의 냄새를 감추기에는 딱이지.'

늑대 우두머리는 후각이 예민하다.

놈을 속이기 위해서 늑대의 피로 온몸을 적셨고, 사방에서 피 냄새가 나게끔 하려고 늑대들의 사체를 나무에 내걸었다.

덕분에 우두머리는 나무 위에 숨은 진현우를 알아채지 못했고 기습을 당했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그래, 나도 알아."

진현우는 메시지를 지운 후, 죽은 우두머리가 드롭한 아이템들을 챙겼다.

가죽, 목걸이, 이것저것. 보스 몬스터답게 보상이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ㅡ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적정 레벨에 늑대들의 숲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처리할 것.

ㅡ보상으로 희귀 등급 칭호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를 획득했습니다.

[사냥꾼을 사냥하는 자 (희귀)]

ㅡ효과: 근력과 체력이 +2 상승한다. 숲속에서 이동 속도가 +5% 상승한다.

칭호 보상도 존재했다.

획득 난이도가 높은 칭호라서 그런지 능력치를 꽤 후하게 올려주는 편이었다.

"괜찮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ㅡ스으으!

진현우는 자신의 장갑을 바라봤다.

사냥꾼의 장갑. 윌튼이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장갑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ㅡ놈의 이름은 '실프'라고 하네. 바람처럼 빨라서 내가 붙였던 이름이지.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노쇠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ㅡ내 손으로 못 잡은 건 아쉽네만....

장갑이 빛나면서 그 안에 깃들어있던 사념이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푸르른 기운이 피어올랐다.

ㅡ고맙네.

기운이 하늘 저 너머로 사라졌다.

실프와 결판을 내지 못한 채 죽었다는 미련을 가졌던 사념이 만족하고 떠난 것이다.

그리고 반가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사념, '윌튼'의 미련을 해결했습니다.

ㅡ사냥꾼의 장갑이 한 단계 강화됩니다. 특성과 스킬의 등급이 상승했습니다.

반가울 수밖에 없는 메시지였다.

10화

아니, 그게 가능해?

기억 감정.

아이템에 깃든 사념을 읽는 스킬.

이걸 통해서 얻은 특수한 감정 아이템은 두 가지 방법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하나, 퀘스트를 깬다.'

오랫동안 감정 아이템을 사용하다 보면 특수한 퀘스트가 나온다. 그걸 완수하면 아이템을 한 단계 성장시킬 수 있다.

'둘, 사념의 미련을 해결한다.'

아이템에 왜 사념이 남겠는가?

사념이 강한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카리악은 자신과 부족을 해친 제국에 대한 복수라는 미련이, 윌튼은 실프와 결판을 내지 못했다는 미련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미련을 해결하면 아이템이 성장하고.'

진현우는 윌튼의 미련을 해결했다.

그의 힘을 빌려서 실프를 처리했으니까.

윌튼으로서는 자기 손으로 결판을 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겠지만, 그래도 남은 미련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그리고 미련이 없어진 사념은 떠난다....'

어디로 떠나는 건지는 모른다.

만약 사후세계라는 게 있다면 거기로 가는 걸 수도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다행인 것은 사념이 떠난다고 해서 그 사념이 준 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

"원리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니까.

진현우는 윌튼의 사념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장갑이 바뀐 것이 보였다.

[사냥꾼의 장갑 (고급)]

ㅡ설명: 노련한 사냥꾼이 애용했던 장갑이다. 짐승들의 피 냄새가 배어 있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피비린내, 사냥꾼, 함정 전문가.

* 사냥꾼: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착용자의 모든 능력치가 5씩 상승한다.

* 함정 전문가: 덫의 위력이 증가하며 적들이 설치한 덫을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사냥꾼 옵션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추가된 옵션, 함정 전문가.

'쓸모가 많은 옵션이지.'

사냥꾼의 장갑은 옵션의 한계 때문에 일정 레벨에 도달하면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래도 함정 전문가라는 옵션이 너무 유용해서 레벨이 높아지고도 애용했었다.

이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 노련한 사냥꾼 (B): 노련한 사냥꾼의 감각으로 적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추적에 성공할 때 근력과 민첩, 체력이 일정 시간 5만큼 상승한다. 민첩이 항시 6만큼 상승한다.

· 특제 덫 (B, Lv.2): 마력을 이용하여 특제 덫을 제작한다. 목록: 속박, 폭발, 빙결.

특성과 스킬 역시 강화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특성이다. 추적에 성공할 경우 능력치가 상승하는 효과가 붙었다.

지속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은 편이지만, 이점을 살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좋네. 도끼도 슬슬 강화해야 하는데."

진현우는 도끼를 내려다봤다.

카리악의 사념이 원하는 것은 복수다. 하지만 그 복수는 당장 이루기가 힘들다.

'강자하고 싸우는 걸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하니까 그쪽을 노려야겠군.'

야만 전사의 족장이었던 카리악은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측면이 있었다.

그쪽의 미련을 해결하는 걸로 어느 정도까지는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진현우는 도끼를 빙글 돌렸다.

'일단 전직 레벨부터 찍고.'

지금 레벨은 8.

전직하려면 아직 2레벨을 더 올려야 한다.

다행히도 지금 진현우가 있는 늑대들의 숲은 10레벨까지 사냥할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닥에 흔적이 많네.'

조금 전 도망친 늑대들의 흔적이다.

진현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10레벨까지만 놀다 갈까."

그는 다시금 사냥에 나섰다.

* * *

숲의 입구에는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파티를 구하는 이들이었고, 사냥을 끝마친 후 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헥, 헤엑! 으아, 죽는 줄 알았네."

"늑대 잡는 거 왜 이리 힘드냐, 진짜!"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남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여우만 잡을 수는 없나...."

"늑대 못 잡겠어...."

여우를 사냥하다가 늑대가 나와서 호기롭게 싸웠다가 큰 봉변을 당해버렸다.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인 상황.

축 늘어진 채 숨을 내뱉고 있던 남자는 불쑥 어제 만났던 사람을 떠올렸다.

"야, 어젯밤에 혼자 사냥할 거라고 들어갔던 사람 말이야. 지금쯤 죽었겠지?"

"그 미친놈? 죽었겠지."

"하긴, 여길 혼자서 어떻게 사냥해."

단신으로 숲에 들어갔던 사람. 남자는 참 멍청하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주변이 조용해졌다.

"응?"

그리고 냄새가 났다.

끔찍할 정도의 누린내.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질 정도로 지독한 냄새의 근원지가 숲의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으아악! 저, 저게 뭐야?"

"늑대 머리...?"

"헉, 저거 보스 몬스터 머리잖아!"

거대한 늑대의 머리를 어깨에 메고, 온몸을 피로 칠겁한 채 걸어오는 플레이어.

그를 빤히 보던 남자가 깜짝 놀랐다.

"야, 야. 저, 저 남자...."

"어, 어어. 어제 본 그 남자 맞지?"

"맞는 거 같아. 아니, 잠깐만. 그러면...."

저 남자는 분명 혼자서 깨야 하는 퀘스트라면서 동료 없이 숲에 들어갔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지, 진짜로 혼자서 잡았다고?'

남자가 입을 헤 벌렸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동료는 없어 보였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인가? 아니,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장비가 너무 허접하다.

'아니, 그게 가능해?'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자살하려고 들어가는 미친놈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혼자서 잡을 줄이야.

"아씨, 파티할걸."

"파티한다고 하면 받아주기는 했겠냐?"

"그건 그렇네."

남자와 동료들은 멀어져가는 진현우의 등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쉬었다가 여우나 잡자...."

"응...."

* * *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ㅡ전직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맞는 클래스를 찾아보세요!

진현우는 늑대들의 숲에서 사냥을 반복해 10레벨을 찍었고, 메시지가 나왔다.

전직하라는 메시지.

그는 우선 상태창을 확인했다.

[진현우]

· 레벨: 10

· 클래스: 노비스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24 (+3) · 민첩: 26 (+3)

· 체력: 22 (+3) · 마력: 17

[특성]

· 노련한 사냥꾼 (B)

· 야만 전사 (C), 초보자 (C)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특제 덫 (B, Lv.2)

· 강타 (C, Lv.2), 야만적인 투척 (C, Lv.2), 돌진 (C, Lv.1)

10레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능력치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클래스가 노비스라서 능력치가 이리저리 분산됐다는 것이었다.

브로큰 월드에서 능력치는 클래스에 맞춰서 멋대로 성장하는데, 노비스는 모든 능력치가 고루고루 오르는 클래스였다.

'뭐, 마력도 쓸모는 많으니까.'

진현우는 상태창을 껐다.

전직 레벨인 10레벨에 도달했으니 이제 새로운 클래스로 전직할 시간이다.

그는 훈련소로 귀환했다.

"...응?"

언제나처럼 한산한 훈련소에는 늙은 교관 혼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교관님, 저 왔습니다."

"음...."

진현우가 큰 배낭을 든 채 다가왔다. 그러자 교관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왔나. 생각보다 빨리 왔군. 설마...."

"포기하고 온 건 아니냐? 그럴 리가요."

진현우는 배낭을 풀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늑대 우두머리, 실프의 머리가 드러났고 교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실프의 머리를 빤히 봤다.

"혼자서 잡았는지 의심스러우면 숲 근처에 있던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될 겁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교관은 고개를 내저으며 배낭을 닫았다.

"훌륭하군. 정말로 혼자 잡을 줄은 몰랐는데. 이걸 해낸 건 자네가 처음일세."

"그렇겠죠. 미치지 않고서야...."

"음?"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는 허수아비를 누가 일주일 동안이나 치고 있겠는가.

진입 장벽이 워낙 높으니 애초에 이 퀘스트를 받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처음이겠지.'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뒤에 이어질 연계 퀘스트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고생했네."

ㅡ'늑대 우두머리 사냥'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경험치 보상이 주어집니다.

교관이 진현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경험치 보상이 주어졌다는 메시지가 나왔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자네는 자격을 갖춘 것 같군. 미안하네만, 지금까지 자네를 시험하고 있었네."

"시험이라고요?"

"그렇네. 대를 거듭하여 전승되어온 가르침을 계승할 자격이 있는가를 말일세."

교관의 두 눈이 번뜩였다.

지금까지의 무심하던 눈빛과는 다르게 지금의 눈동자에는 열의가 담겨 있었다.

"자네 같은 이들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클래스를 전수해줄 스승을 찾더군. 자네도 그렇다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만."

"클래스를 전수해주시겠다는 겁니까?"

"자네가 남은 시험에 합격한다면."

진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밝혀지지 않은 클래스로 전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전직 퀘스트 '무기의 달인'을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ㅡ퀘스트를 모두 마친다면 히든 클래스 '웨펀 마스터'로 전직할 수 있습니다.

ㅡ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운이 좋군 (효과: 아이템 드롭율이 5% 상승한다)]을 획득했습니다.

무기의 달인, 웨펀 마스터.

원래는 무명이었지만, 이 클래스로 전직한 카오틱이 악명을 떨치며 알려진 클래스.

ㅡ사기 아님? 뭐 이런 개사기 클래스가....

ㅡ아니, 특성 빼놓고 보면 어디 하나 멀쩡한 게 없는데? 뭐 이런 쓰레기 클래스가....

ㅡ그러니까, 그 살인마 새끼는 피지컬 하나로 랭커들 죄다 죽이고 다녔다는 거지?

카오틱이 죽고 난 뒤에야 해당 클래스에 대한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뉘었다.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그럴 만했다.

웨펀 마스터는 간단하면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었다.

ㅡ웨펀 마스터는 배우는 스킬이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스킬 없이 오로지 맨몸으로, 자신이 가진 재능과 전투 감각으로 싸워야 하는 클래스.

그게 바로 웨펀 마스터였다.

'그만큼 가진 특성이 사기적이긴 했지만.'

브로큰 월드는 스킬이 중요한 게임이다.

클래스를 가진 이들은 일정 레벨에 도달할 때마다 스킬을 얻는데, 레벨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얻는 스킬이 강력해져서였다.

웨펀 마스터는 레벨이 올라도 스킬을 주지 않는다. 새로운 특성만 줄 뿐이지.

'웨펀 마스터는 초반에는 강력하지만, 가면 갈수록 결함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쳤던 카오틱이 죽게 된 것도 스킬이 없는 탓이 컸다.

하지만.

'만약에 스킬을 익힐 수 있다면?'

레벨을 올려서 얻는 스킬 말고.

그 밖의 수단으로 필요한 스킬을 익힐 수 있는 방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 웨펀 마스터가 된다면?

'결점을 완벽하게 메울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웨펀 마스터는 배우는 스킬은 없지만, 그 대신에 특성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했다.

그 혜택은 온전히 누리면서, 특성의 효과로 강해진 스킬까지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지.'

마스터 스킬, 기억 감정이 있는 진현우에게 웨펀 마스터는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빨리 전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어떤가, 남은 시험을 받겠는가?"

"예."

진현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을 받겠습니다."

"좋군. 음,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어."

교관은 이 훈련소를 오랫동안 운영했지만, 자격을 갖춘 이는 진현우뿐이었다.

그가 진현우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럼...."

그리고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일단 좀 씻고 오게. 코가 썩을 것 같군. 늑대 똥 밭에서 구르다 온 건가?"

"...."

코를 틀어막았다.

온몸이 늑대의 피로 젖은 진현우에게서 나는 악취는 코가 썩을 정도로 지독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11화

무기의 달인

교관은 씻고 나온 진현우를 훈련소의 지하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같은 훈련장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좋아, 그럼... 콜록, 콜록! 크흐흠!"

"...일단 좀 치우고 얘기할까요?"

"그, 그러지."

교관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훈련장의 먼지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둘은 지하 훈련장을 청소했다.

ㅡ끼이익.

'여기는 밟으면 부서지겠는데.'

훈련장은 아예 관리를 안 했는지, 일부 바닥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진현우는 조심스레 청소를 끝마쳤다.

"후우우, 허리가 아프군."

"평소에도 좀 치우고 사시죠?"

"이 넓은 훈련소를 나 같은 노인 혼자서 관리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나? 더욱이나 이곳은 거의 쓰이지 않았던 곳이라네."

교관이 허리를 퍽퍽 두들겼다.

"생각도 못 했지. 설마 그 사람이 말했던 자격을 갖춘 이가 나타나게 될 줄이야."

"그 사람이요?"

"...."

수다스럽던 교관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그는 나름대로 깔끔해진 지하 훈련소 한복판을 거닐더니, 낡은 의자에 앉았다.

"자네에게 전수할 클래스가 있다고 했지."

"예."

진현우는 교관이 품속에서 책을 꺼내는 걸 봤다. 놀라울 정도로 낡은 책이었다.

"그 클래스에 대한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있네. 그 사람이 내게 맡겼던 것이지. 자네가 시험에 합격한다면 이걸 넘겨주겠네."

"그 클래스라는 게 뭡니까?"

"웨펀 마스터."

교관이 책을 다시금 집어넣었다.

"무기의 달인이지. 극한의 수련을 통해서 타고난 재능을 한계까지 단련하며, 모든 무기를 평생을 그 무기만 수련한 이들보다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일세."

"당신도 웨펀 마스터입니까?"

"아니, 나는 아닐세."

진현우의 물음에 교관이 고개를 내저었다.

"웨펀 마스터는 대를 거듭해온 클래스이지만, 최근에 대가 끊겼네. 난 마지막 계승자에게 후계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지."

"그럼 이 훈련소는...."

"맞네. 자격을 갖춘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 이 훈련소를 차렸네. 내 은퇴 자금을 탈탈 털어서 만든 곳인데, 결과는, 뭐...."

"쫄딱 망했군요."

"...."

크흐흠! 교관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어허! 찾아오는 사람은 많았네!"

"많으면 뭐 합니까? 전부 다 허수아비만 치다가 질려서 떠나버리는데."

팩트는 아팠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이 훈련소는 세상이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게임 판타지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허수아비를 치면 능력치가 오를 거라는 믿음 하에 죄다 이 훈련소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이이잉! 끈기 없는 놈들! 그런 놈들은 데리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안 돼!"

"그러다가 훈련소가 망했죠."

"...."

교관이 침울해졌다.

은퇴 자금을 털어 넣은 훈련소가 망했으니 속이 쓰리기도 할 것이다.

"애초에 허수아비에 왜 그리 집착합니까?"

"...체력과 끈기를 보려는 걸세. 그리고 허수아비를 치는 동작을 통해서 어느 정도 자질을 엿보는 것도 가능하지. 애초에!"

교관이 갑자기 소리를 내질렀다.

"그게 내 나름대로는 단축한 거였네! 웨펀 마스터의 원래 수련법대로 했으면 년 단위로 허수아비만 때려야 했을 게야!"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요."

"나도 그랬다가는 계승자고 뭐고 못 찾겠다 싶어서 최대한으로 단축한 걸세."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년 단위로 허수아비를 쳐야지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미친 클래스가 있다니.

"후우, 쓸데없는 소리는 여기까지 하지. 어쨌든, 나는 그 사람에게 부탁받은 클래스를 자네에게 전수할 생각이야."

"그냥 전수해주시지는 않겠죠."

"그렇네. 이 책에 적힌 조건이 있었네."

교관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지금부터 자네는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해야 하네. 어떤가, 바로 도전하겠나?"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시험의 종목마다 다르네."

진현우는 입가를 매만졌다.

브로큰 월드의 유저였던 그는 웨펀 마스터의 존재를 전생에서부터 알고 있었다.

전직하는 방법만 아는 정도였고 어떤 클래스인지까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전생하고는 상황이 다르단 말이지.'

기억 감정이 있으니 감정사로 전직할 필요도 없고, 특성만 배우는 것도 좋다.

스킬은 어차피 자급자족이 가능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카오틱 놈을 견제해야 한다.'

히든 클래스는 누구든 전직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같은 클래스로 전직할 수가 없다.

전직 퀘스트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진현우가 웨펀 마스터로 전직하면 미래에 악명을 떨치는 카오틱을 없앨 수 있는 셈.

"도전하겠습니다."

"...좋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교관은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진현우가 다가오자 어깨를 붙잡더니 강제로 자리에 앉게 했다. 힘이 꽤 대단하다.

"첫 시험은 자네가 가진 재능을 확인하는 걸세. 웨펀 마스터라는 클래스는 타고난 재능을 극대화하는 클래스네. 그 재능이 비루한 자는 웨펀 마스터가 될 수 없지."

"...."

웨펀 마스터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

교관은 재능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첫 번째 조건은 지극히 단순하게 능력치를 평가하는 것이었다.

'근력, 민첩, 체력이 20을 넘어야 한다.'

그것도 10레벨인 상태에서.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10레벨일 때 능력치가 겨우 10이 될까 말까 한 상태인데, 그 두 배에 달하는 능력치를 요구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신체 능력이네. 자네가 가진 신체 능력이 어떤지 확인할 걸세."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요?"

"적합한지 판단하겠지. 만약 신체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 얘기는 없던 게 될걸세."

노비스가 가질 수 없는 특성, 그리고 칭호를 가진 진현우도 겨우 넘긴 조건이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라면 이 조건을 넘기지 못하고 시험에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좋아, 시작하지."

진현우는 달랐다.

교관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에게서 피어오른 마력이 진현우에게 흘러 들어갔다.

푸른 기운이 진현우의 전신을 감돌았고, 그가 현재 가진 힘을 가늠하기 시작했다.

"음, 으음...!"

교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웨펀 마스터는 타고난 신체적인 재능이 극단적으로 중요한 클래스다. 그렇기에 우선적으로 신체 능력을 판단하려고 했는데.

'이건... 그럴 필요가 없다.'

진현우는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교관은 침음성을 흘렸다.

'골격이나 근육이 타고난 전사처럼 튼튼하군.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해.'

특성의 효과였다.

진현우가 가진 야만 전사, 그리고 사냥꾼 특성은 신체를 근본부터 바꿔버렸다.

게다가 동 레벨의 플레이어들, 노비스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특성이기도 했다.

'필요 조건은 이미 충족했다.'

진현우는 웨펀 마스터의 능력치 조건을 충족하다 못해 넘어선 상황이었다.

교관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으음, 음,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신체적인 재능은... 내가 뭐라 할 말이 없군."

타고났다.

교관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럼 통과했다고 보면 됩니까?"

"...그렇네. 바로 다음 시험으로 가지."

교관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그러자 훈련장의 바닥이 열리더니, 거기서 돌로 만들어진 골렘 한 기가 나타났다.

인간 형태의 골렘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자네에게 여러 무기를 줄 걸세. 그걸로 저 골렘과 싸우면 되네. 처음으로 자네가 쓸 무기는 검일세."

교관이 검을 한 자루 던졌다.

진현우가 그걸 받자 골렘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가동하기 시작했다.

놈의 두 눈이 붉게 빛나더니, 한 손이 마치 검과 비슷한 형태로 변화했다.

"골렘은 자네가 쓰는 무기에 맞춰서 전투 양식을 바꿀걸세. 거기에 대응하면서 최대한 놈에게 큰 피해를 입혀보게나."

"예."

진현우는 골렘과 마주했다.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돌진했다.

ㅡ카아앙!

ㅡ카드드득!

격전이 벌어졌다.

서로 검을 다루면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호오, 제법....'

그걸 본 교관이 속으로 감탄했다.

허수아비를 칠 때도 여러 무기를 제법 잘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움직이는 적을 상대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아무래도 도끼를 쓰니 검을 다루는데 어색함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다음은 이걸 써보게나!"

오랫동안 진현우의 검 솜씨를 지켜보던 교관이 다음 무기로 창을 던졌다.

그리고 도끼를, 그다음으로 단검을, 둔기를, 온갖 종류의 무기를 넘겨줬다.

"으, 으으음!"

놀랍게도 진현우는 교관이 던져주는 무기들을 훌륭한 솜씨로 다루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련함이 느껴지는데, 이유를 모르겠군.'

진현우의 손놀림에서는 그 무기를 오래 쓴 것 같은 노련함마저 느껴졌다.

솜씨 이상으로 그게 더 놀라웠다.

'이래서는 내 계획이....'

원래 계획은 진현우가 골렘에게 박살 나게끔 해서 경험을 쌓게 하려는 것이었다.

저 골렘은 선대 웨펀 마스터들의 움직임이 적용된 개체라서, 웨펀 마스터가 되기 위한 훈련에 큰 도움이 되는 골렘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

'이미 다양한 무기를 훌륭히 다루고 있는 놈을 따로 훈련시킬 이유가 뭐가 있나.'

그래서 교관은 당황스러웠다. 경험이 많지도 않을 신참 모험가가 다양한 무기를 큰 어려움 없이 다룬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내가 못 다룰 리가 있나.'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간단했다.

기억 감정을 익힌 진현우는 다양한 사념과 접했고, 그들이 다루던 무기를 사용했다.

검, 활, 도끼, 창 등, 그런 식으로 진현우가 쓰게 된 무기의 종류는 다양했다.

'비록 특성이나 스킬은 다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다양한 무기를 다뤘던 기억은, 그리고 경험은 진현우의 손끝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게 이유였다.

ㅡ쿠우웅!

"이거 멈췄는데요?"

"으, 으음."

그렇게 전투를 벌이던 도중, 골렘이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작동을 멈췄다.

교관은 진현우를 놀란 눈으로 봤다.

'저 골렘은 싸우는 자의 역량을 평가한다. 그게 제멋대로 멈췄다는 것은....'

진현우의 역량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웨펀 마스터가 될 자격이 있다는 뜻.

"...두 번째 시험도 합격이네."

"그럼 이제 하나만 남았군요."

"음, 그렇지."

교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검을 집었다.

"자네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서 나를 쓰러트리는 것. 그게 마지막 시험일세."

교관의 검이 진현우를 겨누었다.

12화

뭐 이런 미친 특성이 다 있어?

진현우를 겨눈 교관의 검이 서늘하게 빛났다. 누가 봐도 날이 잘 선 진검이었다.

"서로 진검으로 싸우는 겁니까?"

"그래. 나름대로 손대중은 해주지."

"아뇨, 그게 아니라...."

진현우는 자신의 도끼를 꺼냈다.

"교관님이 크게 다치실 것 같아서요."

"...자신감이 아주 넘치는군."

교관이 황당해하면서 웃었다.

하지만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저 교관, 생각보다 세다.

'평범한 노인은 아니라는 건가.'

진현우는 교관과 마주했다.

그때, 그가 쥔 도끼가 진동했다.

ㅡ카리악의 사념이 강자와의 전투를 원합니다. 그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진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고 곧바로 퀘스트 창이 하나 나타났다.

[강자와의 싸움.]

· 난이도: B.

· 설명: 타고난 전사인 카리악은 강자와의 싸움을 갈망한다. 교관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그의 갈망을 해소해주자.

· 보상: 사념 강화.

진현우가 기다리던 퀘스트였다.

전생에서의 경험을 생각하면 나올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나올 줄이야.

'일타쌍피구만.'

이번 전투로 전직할 수 있고, 카리악의 사념을 강화하는 것까지 할 수 있다.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즐거워 보이는군."

"예, 뭐. 생각보다 즐겁네요."

지하 훈련장에 정적이 흘렀다.

교관은 작은 나뭇가지를 하나 들었다.

"이게 떨어지면 시작하는 걸세."

둘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교관이 손에 쥔 나뭇가지를 던졌다.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나뭇가지가 하강했다.

그리고 그게 바닥에 닿았을 때.

ㅡ타아앗!

"...!"

교관이 돌진했다. 진현우에게 가르쳤던 돌진이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빠르다.'

진현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힌 교관이 검을 내질렀다. 벼락처럼 빠른 베기였다.

ㅡ카아앙!

도끼가 칼날을 막아냈다.

허나 교관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두 발을 바닥에 단단히 고정하면서, 폭풍처럼 연격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ㅡ카드득! 카앙!

"막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네!"

진현우의 손이 떨렸다.

교관이 퍼붓는 공격은 무거우면서 반격할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 부담이 팔에 쌓이고 있었다.

'이 영감, 왕년에 꽤 날아다녔나 본데.'

평범한 교관이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많이 쇠했을 지금에도 이 정도 실력이면, 젊었을 때는 세간에 이름을 꽤나 떨친 검사였을 지도 모른다.

'오래 못 버틴다.'

명백하게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버티는 것이 고작. 반격할 기회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상대가 강하다고 해서 포기할 거였으면 전생의 진현우는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언제든 방법을 찾아낸다.

그렇기에 13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뭔가....'

노도와도 같은 공격을 막아내던 진현우의 몸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그럴 때마다 교관은 발을 힘껏 앞으로 내디디면서 그를 추격해왔다.

'발구름 동작.'

공격에 좀 더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다.

평소였다면 알아채봤자 별 의미도 없는 동작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 여기 지하 훈련장이라면.

ㅡ끼이익!

저 동작도, 이 불안정한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도 모두 의미가 있다.

'이거다.'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진현우는 정신을 집중하면서 교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그의 몸이 계속해서 밀렸다.

"내가 크게 다칠 거라고 걱정하지 않았던가! 이거 자네부터 걱정해야겠구만!"

"으음...!"

진현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교관은 지금이 이 전투를 끝낼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가 팔에 힘을 집중했다.

"이만 끝내지!"

ㅡ쿠우웅!

마력을 머금은 칼날이 진현우의 도끼를 가격했다. 지금까지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한 힘을 담은 일격이었다.

퍼억! 그 힘을 버티지 못한 진현우가 도끼를 놓쳤고, 도끼가 벽에 꽂혔다.

"조금 아플 걸세."

교관이 다시금 마력을 일으켰고 진현우가 뒤로 물러났다. 그걸 추격하기 위해서 교관이 앞으로 발을 크게 내디뎠다.

체중을 이동하면서 공격에 좀 더 힘을 집중하기 위한 발구름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때.

ㅡ슈욱!

"윽... 허억?!"

교관의 발이 쑥 들어갔다.

안 그래도 위태롭던 바닥에 힘껏 발을 내디딘 탓에 나무가 무너져내린 것이었다.

"이, 이런!"

교관이 크게 당황했다.

아무리 오랫동안 관리를 안 했다고는 하지만 발 좀 디뎠다고 바닥이 꺼질 줄이야.

그의 자세가 크게 무너졌다.

"네 녀석...!"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교관의 자세가 무너지자마자 있는 힘껏 도끼를 투척했다. 격하게 회전하는 도끼가 교관의 가슴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흐읍!"

ㅡ카아앙!

교관이 황급하게 쳐냈지만, 그 덕분에 안 그래도 무너진 자세가 더 불안정해졌다.

추스를 시간조차 없었다.

그게 진현우가 노리던 것이었다.

"스읍...!"

진현우가 되돌아오는 도끼를 낚아챘다.

그리고 땅을 박차면서 낮게 도약했다.

ㅡ퍼어억!

"커윽!"

온 힘과 체중을 실은 도끼날이 교관의 검을 강타했다. 진현우는 거기서 추격타를 가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뒤로 굴렸다.

"이놈...!"

교관이 이를 갈면서 움직이려 했다.

바로 그때.

ㅡ파스스스!

"크으윽?!"

덫이 작동했다.

바닥에서부터 강렬한 냉기가 폭발하면서 교관을 덮쳤다. 엄습하는 냉기가 교관의 몸을 얼어붙게 했고, 느려지게 만들었다.

"덫! 대체 언제!"

조금 전 구르면서 설치했던 덫.

교관의 움직임이 지독한 냉기에 순간적으로 멈췄고 진현우가 도끼를 투척했다.

도끼가 정확히 검을 강타한 후, 다시금 주인의 손아귀로 되돌아왔다.

"크윽!"

그 충격에 교관이 검을 놓쳤다.

진현우는 곧바로 돌진했고 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진현우가 허리를 비틀면서 있는 힘껏 도끼를 내질렀다.

ㅡ후우욱!

"...!"

교관의 목을 베어낼 것처럼 날아들던 도끼가 목 바로 앞에서 멈췄다.

순간 지하 훈련장에 정적이 흘렀다.

"더 하실 겁니까?"

"...."

교관은 목에 닿은 도끼를 봤다.

그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아니, 내가 졌네."

교관이 두 손을 들어 올렸고 그의 목을 겨누던 도끼가 천천히 멀어졌다.

그는 무너진 바닥을 내려다봤다.

"...알고 있었던 거냐?"

"예. 여기 바닥이 불안정하더군요. 잘 이용하면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훌륭하군."

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이 불안정하다는 걸 깨닫고 그걸 이용할 생각을 할 줄이야.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이용하는 것도 훌륭한 능력이다.

"으음, 내 계획과는 많이 틀어졌군."

"계획이요?"

"그래. 원래는 시험에서 떨어지게 만들어서 훈련으로 죽을 때까지 굴릴 생각이었거늘."

"...."

첫 번째 시험에서 떨어졌으면 그냥 탈락시켰을 것이다. 다른 시험들은 실패하면 수련을 통해서 합격할 때까지 굴렸겠지.

"뭐라 더 할 말이 없군. 이 정도면 내게 이걸 맡긴 계승자도 자네가 깨달음을 이어받는 것을 기꺼이 허락할 걸세. 받게나."

교관이 품속에서 책을 꺼내서 건넸다.

낡고 오래된 책.

[웨펀 마스터의 비급 (전설)]

· 설명: 여러 대를 거듭하여 계승되어온 깨달음이 담겨있는 책이다. 사용할 경우, 히든 클래스 '웨펀 마스터'로 전직할 수 있다.

무려 전설급 아이템이었다.

교관이 진현우를 바라봤다. 그는 어서 빨리 읽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진현우는 책을 펼쳤다.

그러자.

ㅡ파아아앗!

책에서 강렬한 빛이 일어나면서 진현우의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흘러들어왔다.

비급 안에 남아있던, 대를 거듭하며 깊어진 깨달음이 그의 내면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메시지가 나타났다.

ㅡ퀘스트 '무기의 달인'을 완수하셨습니다.

ㅡ축하드립니다! '웨펀 마스터'로 전직했습니다! 새로운 특성이 추가됩니다.

감회에 젖게끔 하는 메시지였다.

전생의 진현우는 감정사였다. 마스터 스킬의 사기성을 알고 있었기에 택한 직업이었지만, 얻기까지의 과정은 끔찍했다.

'망할 놈들. 100골드라고 했던가?'

감정 스크롤의 가격이다.

100골드면 감정사가 하는 일을 누구든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멸칭.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무시는 안 당하겠군.'

그는 상태창을 열었다.

[진현우]

· 레벨: 1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시간을 거스른 자

· 근력: 36 (+4) · 민첩: 38 (+4)

· 체력: 34 (+4) · 마력: 27

[특성]

· 노련한 사냥꾼 (B), 무기의 달인 (B), 약점 파악 (B), 재능 개화 (B), 야만 전사 (B)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특제 덫 (B, Lv.2), 분열 투척 (B, Lv. 2)

· 강타 (C, Lv.2), 돌진(C, Lv.1)

추가된 특성은 세 개였다.

정말 놀랍지만, 스킬은 하나도 없었다.

'전직할 때 하나는 주지 않을까 했더니.'

진현우는 묘한 아쉬움 같은 것을 느끼면서 새로이 얻은 특성들을 확인했다.

· 무기의 달인 (B): 선대의 깨달음을 계승해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무기를 활용한 공격의 데미지가 50% 증가한다.

· 약점 파악 (B): 적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약점을 공격할 때 데미지가 100% 증가하며 방어력을 50% 무시한다.

· 재능 개화 (B): 신체에 잠재된 재능 일부를 개화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하며, 레벨 업 시 얻는 능력치가 1포인트 증가한다.

그리고 새로 얻은 특성들을 확인한 진현우는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미친 특성이 다 있어?"

전직하면서 얻은 특성들의 성능이 하나하나가 다 말이 안 되게 좋았다.

단연 압권인 것은 재능 개화였다.

'레벨 업 시 능력치를 하나 더 얻는다.'

다른 플레이어는 레벨 업으로 2개의 능력치가 올라갈 때, 진현우는 이 특성의 효과로 3개의 능력치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

매 레벨마다 일반 등급의 칭호를 하나씩 얻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었다.

'이런 특성을 가진 히든 클래스가 일부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었는데.'

설마 웨펀 마스터가 그중 하나였을 줄이야.

브로큰 월드에서도 정말 얻기 힘든 히든 클래스들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그만큼 다른 이들과 성장 차이를 벌릴 수 있는, 사기에 가까운 특성이었고.

"그 카오틱 놈, 이상하게 강하다 싶더라니."

여러 길드와 온갖 랭커들을 죽이고 다니는 미친 놈이었는데, 왜 그리 센가 했더니.

설마 이런 특성이 있을 줄이야.

'전반적으로 데미지를 올려주는 특성들.'

게임처럼 바뀐 세상이지만, 그래도 공격력이나 방어력 같은 수치는 없다.

그렇다고 관련 시스템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데미지'라는 것이 대신 존재했다.

'데미지 퍼센트가 높을수록 상대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평타든, 스킬이든.'

무기가 더욱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거나, 스킬의 위력이 더욱 강해지는 식으로.

능력치 못지않게 중요한 시스템이다. 그만큼 챙기기가 쉽지 않은 부분이기도 했고.

'이게 끝이 아니지.'

클래스를 얻은 플레이어는 일정 레벨에 도달할 때마다 특성, 스킬을 얻는다.

웨펀 마스터도 마찬가지다.

레벨이 오르면 새로운 특성을 얻을 것이고,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강력할 것이다.

"기대되네."

진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13화

찢어진 비급

ㅡ강자와의 싸움으로 카리악이 만족했습니다. 관련된 아이템과 특성이 강화됩니다.

교관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카리악이 준 강자와의 싸움 퀘스트도 완수했다.

· 야만 전사 (B): 전사의 피를 타고났다. 근력, 민첩, 체력이 5 상승한다. 또한 도끼를 보다 능숙하게 다루며, 위력이 상승한다.

· 분열 투척 (B, Lv.2): 있는 힘껏 도끼를 투척하여 적의 육체를 파괴한다. 더 많은 마력을 담을 경우, 도끼가 분열한다.

야만적인 투척이 분열 투척으로 강화됐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유용한 스킬이다.

안 그래도 적들이 많을 때 쓸만한 스킬이 애매한 상황이라서 더더욱 반가웠다.

[용맹한 자 (고급)]

ㅡ설명: 과거 용맹을 떨쳤던 야만 전사가 사용하던 도끼다. 선조의 영혼이 깃든 특수한 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ㅡ착용 제한: 진현우 외 착용 불가.

ㅡ효과: 용맹의 증명, 회귀, 무기 파괴

* 용맹의 증명: 근력, 민첩, 체력이 +4 상승한다. 이 효과는 적을 죽일 때마다 강화되며, 최대 2배까지 강화된다.

* 무기 파괴: 특수한 기회가 왔을 때, 이 도끼보다 약한 무기를 파괴할 수 있다.

진현우가 레벨이 높아진 뒤에도 이 도끼를 애용했던 이유가 저 옵션 때문이었다.

무기 파괴. 용맹한 자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이 옵션의 진가가 드러날 것이다.

"아이고, 허리야. 오랜만에 싸웠더니...."

진현우가 무기를 보고 있으려니 교관이 허리를 퍽퍽 두들기면서 일어났다.

"휴우, 그래도 죽기 전에 계승자를 찾아서 다행이구만. 이거 어쩌나 싶었는데."

"그러고 보니 교관님은 어쩌다가 계승자를 찾는 역할을 맡게 되신 겁니까?"

"나 말인가?"

교관이 씁쓸한 듯 혀를 찼다.

"우연히 웨펀 마스터를 만나서 그에게 목숨을 빚졌던 사람이지. 죽어가던 그에게서 후대를 이을 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교관님을 구하다가 죽은 겁니까?"

"아니, 이미 사경을 헤매던 상황이었네. 잘은 모르겠네만, 배신당했다고 하더군."

"배신?"

의아한 말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큰 부상을 당했던 모양이다.

"죽기 직전, 그 남자는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뿐이네. 이 시험은...."

"당신이 직접 만든 거군요."

"그렇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을 분간하기 위해서 생각해냈던 것들이지. 책에 적힌 것들을 어느 정도 참고하기도 했고."

어차피 웨펀 마스터에 대한 것들은 비급을 읽는 것만으로도 익힐 수 있다.

진현우가 치렀던 시험은 교관 나름대로 사람을 가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됐든."

교관이 진현우에게 건넨 책을 가리켰다.

"자네는 이제부터 웨펀 마스터의 계승자이니, 그에 맞게끔 행동하게. 그들은 언제나 정의로웠고 인명을 중시하는 이들이었으니."

"...."

진현우의 표정이 묘해졌다.

정의로움, 인명 중시. 그와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이것도 가져가게."

교관은 훈련장 구석에 있던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낡은 검을 하나 꺼냈다.

날은 다 부서지고 손잡이만 있는 검이었다.

"웨펀 마스터가 쓰던 검일세. 고치려고 해봤지만... 어느 대장장이를 찾아가도 이건 고칠 수 없는 검이라고 하더군."

"이 정도로 부서졌으면 고치고 뭐고 간에 새로 만드는 게 더 빠르긴 하겠네요."

"그렇지. 이제 자네가 가져가게."

진현우는 검을 받았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검이었다.

'그 카오틱 놈이 쓰던 검은 아닌데.'

손잡이만 있는 검이니 쓰지도 못 했겠지만.

진현우는 검을 확인해봤다.

[부서진 검 (일반)]

ㅡ설명: 오래 전에 부서진 검.

ㅡ착용 제한: 없음.

ㅡ효과: 없음.

* 사념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깐, 이거....'

사념이 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이다.

"후우, 마실 거라도 좀 가지고 와야겠군. 자네도 뭔가 좀 마시겠나?"

"아, 예. 주시면요."

때마침 교관이 마실 걸 가지고 오겠다면서 지하 훈련장을 떠났다.

진현우는 부서진 검을 바라봤다.

"기억 감정."

그리고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 * *

낯선 풍경이 보였다.

지금의 진현우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괴물들이 수두룩히 쓰러진 전장.

그곳에서 두 남자가 대화하고 있었다.

ㅡ내, 내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군. 저런 괴물들을 혼자서 모조리 죽이다니....

한 명은 진현우도 아는 이였다.

아직 젊었을 때의 교관. 죽은 괴물들을 보던 그는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앉은 남자.

ㅡ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ㅡ글쎄, 한때는 수많은 호칭으로 불렸었지. 하지만 지금은, 후후. 실패한 사람일 뿐이오.

치명상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쓰게 웃었다. 교관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강한데 실패한 사람이라니.

ㅡ실패했다니, 대체....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상처가 너무 극심합니다. 제가 바로 달려가서 치료해줄 사람을...!

ㅡ아니, 됐소. 나는 이미 늦었소. 대신, 당신을 믿고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

교관이 황급히 남자를 치료할 사람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ㅡ이걸 받아주시오.

ㅡ이건....

남자가 낡은 책과 부서진 검을 건넸다.

진현우가 교관에게 받은 것들이었다.

ㅡ내 선대부터 내려온 비급이오. 당신이 보기에 자격이 있다 싶은 이에게 건네주시오.

ㅡ아니, 이런 귀한 걸 왜 저에게....

ㅡ믿을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건, 어쩌면 몹시 위험할 수도 있는 물건이오.

남자가 쓰게 웃었다.

ㅡ당신과 안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건 알고 있소. 그러니....

ㅡ....

교관과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간절하면서 강한 의지가 담긴 눈빛.

ㅡ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ㅡ고맙소. 그럼 가시오.

교관이 혼자서 떠났다.

미련이 남은 듯 남자가 있는 곳을 연신 돌아봤지만, 할 수 있는 건 없다.

홀로 남은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멍청하게, 사람을 보는 눈이 없었군.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나....

남자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ㅡ부디 바라건대, 숨겨둔 조각을... 그놈들이 찾아내지 못하기를, 바랄, 뿐....

그게 마지막 유언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남자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공간이 보였다.

ㅡ계승자여, 부탁할 것이 있다.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 흐릿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ㅡ내가 숨겨둔 조각들이 있다. 그것들을 찾아내다오. 그리한다면 네가 가진 찢어진 비급을 완전한 형태로 되돌릴 수 있을 터.

"숨겨둔 조각이라고?"

불꽃이 흔들렸다.

진현우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지만.

ㅡ부탁, 한다. 그리고....

원혼의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진현우는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풍경도, 원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지하 훈련장의 모습만 보일 뿐.

ㅡ기억 감정에 일부 성공했습니다.

ㅡ불완전한 사념입니다. 조각난 채 흩어진 사념을 완성하지 않는 한, 이 아이템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지 못할 것입니다.

ㅡ기억 감정의 보상으로 전설 등급 칭호 [계승자]를 획득했습니다.

ㅡ사념의 주인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기억 감정에 성공했음에도 아이템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대신 웬 칭호를 하나 얻었다.

[계승자 (전설)]

-효과: 웨펀 마스터가 남긴 조각이 있는 위치를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칭호를 보유한 자는 특정 레벨마다 '직업 퀘스트'를 강제로 받게 된다.

칭호였다.

딱히 특별한 것 없는 칭호다. 오히려 등급에 비하면 효과가 부족하다 싶을 정도.

하지만 이 칭호의 진가는 그게 아니다.

'이것도 직업 퀘스트가 있는 클래스였나.'

직업 퀘스트.

일부 히든 클래스의 경우에는 그 클래스만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퀘스트를 주고는 한다.

그런 퀘스트를 수행할 경우 클래스와 관련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스킬, 특성, 무기.

'클래스 자체가 강화되기도 하고.'

클래스의 이름이 바뀌면서 크게 강화되기도 한다. 그만큼 직업 퀘스트의 보상은 강하다.

그런 퀘스트를 가진 클래스도 적었고.

'그 카오틱도 직업 퀘스트를 깼었나?'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전생에서 웨펀 마스터로 전직했던 카오틱이 스킬을 쓰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직업 퀘스트를 찾지 못했다는 거겠지.'

아마도 특수한 트리거를 달성해야지만 직업 퀘스트가 나오는 모양이다.

그 녀석은 트리거를 달성하지 못했고.

자신은 '기억 감정'의 효과로 트리거를 무시하고 직업 퀘스트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브로큰 월드라면 가능하다.'

엄청난 자유도를 가진 게임이었으니까.

그 게임을 그대로 구현한 세계의 탑 역시도.

'웨펀 마스터가 남긴 조각.'

진현우는 사념의 기억을 상기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고 했었지. 숨겨둔 조각을 찾지 못하기를 바란다고 했었고.'

조각을 모두 찾는다면 찢어진 비급을 완전한 형태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진현우는 볼을 매만졌다.

"...어? 이 클래스, 설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특성만 배우고 스킬은 못 배우는 클래스. 그래서 가면 갈수록 힘들어지는 클래스.

그런데, 어쩌면.

'사실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거였다면?'

스킬을 익히는 조건이 다른 클래스와는 다르게 레벨이 오르는 게 아니었다면.

직업 퀘스트를 수행해서 그 조각이라는 걸 얻었을 때 스킬을 배울 수 있는 거였다면.

'이 비급은 완전하지 않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 특성은 있으면서 스킬은 없을까? 대를 거듭하여 전승되어온 가르침 아니던가.

그중에서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스킬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지.'

파편화된 정보들 뿐이었지만, 진현우는 그걸 통해서 가능성 높은 결론을 도출했다.

'선대 웨펀 마스터는 '어떤 이들'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죽기 전, 비급을 찢어서 조각이라는 것과 함께 숨겨뒀다.'

그 '누군가'가 찾지 못하게끔 하려고.

조각을 찾아내서 찢어진 비급을 완성한다면 새로운 힘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특성에, 어쩌면 스킬까지도.

'특성도 사긴데 스킬은 얼마나 센 거지?'

그것도 조각을 얻어야지만 배울 수 있을 정도로 획득 조건이 까다로운 스킬이다.

보통 브로큰 월드에서는 얻기 힘들수록 스킬의 위력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진현우가 익힌 마스터 스킬처럼.

"재밌네."

"뭐가 재밌다는 건가?"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때마침 교관이 돌아왔다.

그는 진현우에게 물을 건넸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을 들이켰다.

"이 검,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쓸게요."

"쓰고 뭐고 할 게 뭐가 있나 싶네만은, 소중하게 쓰면 그 사람도 기뻐하겠지."

교관이 허리를 두들기며 의자에 앉았다.

"긴 세월이었네. 그 사람이 그랬었지. 이 비급은 위험한 물건이라고. 그래서 난 평생을 비급을 감추고, 지키는 데 썼네."

"후회하십니까?"

"후회? 설마. 난 그 사람에게 많은 걸 빚졌었네. 그걸 죽기 전에 갚은 것 같아서, 오히려 뿌듯함마저 느끼고 있네."

교관은 허공을 바라봤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는 노인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허망함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 입가에는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난 이제 훈련소를 닫을 걸세. 애초에 계승자를 찾으려고 차린 거였으니까. 필요도 없는데 계속 운영할 필요는 없겠지."

"이제부터 뭐 하시려고요?"

"글쎄. 뭐, 걱정할 것 없네. 이 훈련소, 입지는 괜찮아서 가격이 꽤 비싸거든."

교관이 클클거리면서 웃었다.

은퇴 자금을 다 털어 넣은 곳이 망해서 큰 손해를 본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역시 부동산이 최고야.'

하긴, 훈련소 입지가 좋긴 했으니.

교관이 진현우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잘 지내게."

"예."

진현우는 그와 손을 맞잡았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음."

교관이 쭈글쭈글한 얼굴로 웃었다.

* * *

진현우는 훈련소를 나섰다.

"지금 당장 조각을 찾고 싶긴 한데...."

방법이 없다.

그래도 칭호의 효과로 조각이 있는 곳의 위치를 감각으로 탐지할 수 있게 됐다.

'이 근처에서 느껴지는 건 없고.'

레벨을 올려서 론데 근처를 벗어나면 뭔가 탐지되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레벨을 올려서 직업 퀘스트를 받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크게 봐야겠군.'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수밖에.

'일단 챙길 것들부터 챙겨야지.'

제일 중요한 것은 플로어 마스터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시기면 아그니스가 플로어 마스터도 통제하려고 헛짓거리를 하는 시기인데....'

물론 플로어 마스터까지 통제하는 건 선을 넘는 행위라서 금방 철퇴를 맞기는 한다.

문제는 그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것.

진현우는 그걸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아그니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을 이용한다면 한동안 아그니스가 활동하지 못하게끔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다.

"갑옷을 하나 구해야겠군."

은신 능력이 필요하다.

진현우는 마을을 벗어났다.

14화

폐광의 유망주 (1)

론데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산.

그곳에 광산이 하나 있다. 오래전부터 광물을 채굴하던 곳이지만, 채광량이 줄어들면서 지금은 자연스럽게 폐쇄된 곳.

몬스터들이 거길 점령했다.

ㅡ던전: 폐광에 진입합니다.

ㅡ권장 레벨: Lv 15.

광산의 입구가 보였다.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고블린의 평야와는 달리 지키는 사람도, 오는 사람도 없었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몇 개의 파티가 있기는 했다.

모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지만.

"진짜로 여기를 가자고? 제정신이야?"

"아, 난 못해. 못가. 아니, 안 가. 폐광에서 죽은 사람들이 몇 명인지는 알고 이러나."

"저도 그냥 파티 나갈게요."

폐광은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떠나면서 폐광을 차지한 몬스터가 상대하기 꽤 까다로운 놈이어서였다.

위험하기도 몹시 위험했고.

"하, 그냥 골드 내고 사냥터 써야겠다."

망설이던 사람들은 떠났다.

골드가 아까워서 잠깐 고민했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했으니까.

진현우는 폐광의 입구 앞에 홀로 섰다.

[폐광]

· 권장 레벨: Lv 15.

· 최대 인원: 30명.

· 설명: 오랫동안 방치된 폐광에 한 무리의 개미들이 자리를 잡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놈들은 거대한 군단을 이룩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던전의 설명.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지.'

이 던전에는 숨겨진 던전이 있다.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던전. 진현우는 미래의 기억으로 그걸 선점할 생각이었다.

"던전은 오랜만이군."

진현우는 던전에 입장했다.

* * *

폐광 내부는 어둡고 좁았다.

빛나는 광석들이 길을 밝혀줘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안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폐광은 길이 복잡해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물론.

"개미들은... 이쪽으로 갔나."

진현우에게는 관계없는 얘기였다.

그는 바닥에 남은 개미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폐광 내부를 나아갔다. 이것들을 쫓다 보면 숨겨진 던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ㅡ카아앙! 샤아아악!

"으윽! 이 망할 벌레 놈들이...! 갑피가 너무 단단해서 칼날이 안 들어가!"

"멍청아! 이놈들 갑피는 못 부숴!"

"젠장, 마법사!"

플레이어들이 여섯 마리 남짓한 개미들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사가 개미를 검으로 내리쳤지만, 칼날은 갑피를 꿰뚫지 못하고 튕겼다.

'쉽지 않은 던전이긴 하지.'

이 폐광은 위험하지만 몬스터 개개인이 주는 경험치가 높은 곳이라서, 생각보다 많은 플레이어가 찾아오는 곳이었다.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플레이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 올 가치는 있다.'

어쨌든 통제를 안 받는 곳이니.

진현우는 통로를 계속해서 걸었다. 싸우는 소리는 들리는데 몬스터는 안 보인다.

추적 스킬을 사용하자 주변에 이미 한 번 전투가 일어났던 것 같은 흔적이 보였다.

'먼저 들어간 파티인가.'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거 같다.

진현우는 추적 스킬을 쓴 채, 사람들의 발자국이 적은 방향으로 계속 이동했다.

그리고 갈림길을 지난 순간.

"...!"

"어우, 깜짝이야!"

플레이어 파티와 마주쳤다.

전사, 궁수, 도적, 사제. 아주 정석적인 조합으로 파티를 꾸린 게 인상적이었다.

진현우와 전사는 동시에 서로를 무기로 겨눴다가 천천히 무기를 내렸다.

"와, 몬스터인 줄 알았네."

"오빠, 사람한테 실례되게.... 으응?"

궁수가 진현우를 보더니 의아해했다.

"뭐야, 설마 여기 혼자 오신 거예요?"

"예. 좀 찾을 게 있어서요."

"찾을 거? 퀘스트라도 받으셨나 보네요."

더더욱 의아한 말이었다.

이런 위험한 던전에서 퀘스트 하나 깨겠다고 혼자 오는 별종이 있다니.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뒤로는 안 가는 게 나을 겁니다. 몬스터들 엄청 많거든요. 혼자 갔다가는 죽어요."

"아, 예. 그쪽도 사냥하러 온 겁니까?"

"으흠, 뭐. 그런 셈이죠."

전사가 의미심장하게 헛기침을 했다.

보아하니 단순히 사냥 때문에 온 게 아니고 뭔가 퀘스트라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진현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아, 천만에요. 조심하세요."

"맞다. 저희가 지나간 길은 막다른 길이니까 가지 마시고요. 다른 데로 가세요."

진현우는 몸을 틀어서 파티가 좁은 길을 지나갈 수 있게끔 해줬다.

그들은 진현우의 옆을 지나갔고, 다른 통로를 통해서 폐광 안쪽으로 향했다.

'응?'

그중에서 후방에 있는 남자.

온화하게 웃으면서 지나간 도적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유 모를 낯익음이 느껴졌다.

'뭐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파티는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진현우는 그들이 지나온 길을 걸었다. 그는 점점 던전 깊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진현우는 좁은 공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가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이변이 발생했다.

ㅡ스슥, 스스슥!

ㅡ카드득!

소리가 들린다.

뭔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ㅡ스스슥!

ㅡ사삭!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점점 소리가 커지면서 중첩됐다.

진현우는 덫을 만들어서 등 뒤에 미리 설치해둔 후, 전방을 노려봤다.

바로 그때, 앞에서 뭔가가 뛰쳐나왔다.

ㅡ시이이익!

여섯 개의 다리, 붉은색을 띠고 있는 강철 같은 갑피. 곤충 특유의 머리와 몸통.

바위를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큼직한 앞발과 피로 흠뻑 젖은 이빨까지.

"맛있는 거라도 먹고 왔냐?"

군단 개미라 불리는 몬스터다.

다만 일반적인 개미들과는 달리, 그 덩치가 중형견과 버금갈 정도로 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ㅡ사삭! 사사삭!

"많이도 몰려오는군."

놈의 배후에서 똑같은 개미들이 나타났다. 그 숫자만 해도 도합 10마리 남짓.

놈들이 공터의 통로를 틀어막았다.

"...."

진현우는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 아니었다.

ㅡ샤아아아!

ㅡ키이익!

적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통로를 막고 있던 개미들이 앞발을 높이 치켜세우면서 일제히 돌진해왔다.

진현우는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흐읍!"

그 손아귀에 붉은 기운이 모였다.

모이고 응축되던 기운이 한계치에 달했을 때, 진현우는 도끼를 힘껏 내던졌다.

도끼가 힘차게 쏘아졌다.

ㅡ퍼어억! 퍽!

ㅡ키이이익?!

그렇게 날아가던 도끼가 중간에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분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네 개로 나뉜 도끼가 개미들을 덮쳤고 두꺼운 갑피를 강타했다.

ㅡ우드득!

그러자 놀랍게도 갑피가 부서졌다.

검을 튕겨낼 정도로 튼튼한 갑피가 마치 나무껍질이 부서지는 것처럼 박살 났다.

갑피를 꿰뚫은 도끼가 개미의 몸통을 으깼고, 두 동강 난 개미들이 쓰러졌다.

ㅡ샤아아악!

ㅡ캬아아!

하지만 아직 개미들은 많다.

선두에 있던 두 놈이 앞발을 치켜세우며 진현우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는 손을 높이 들었다.

ㅡ촤악!

그 손아귀로 되돌아오는 도끼.

진현우는 힘을 집중하면서, 코앞까지 다가온 개미의 머리통을 그대로 내리쳤다.

ㅡ콰드드득!

ㅡ킥...!

개미의 머리통이 단번에 갈라졌다.

바로 옆에 있던 개미가 낫처럼 날카로운 거대한 앞발을 휘둘렀다. 진현우는 그 앞발을 향해서 강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ㅡ...?!

개미의 앞발과 도끼가 충돌했다.

칼날처럼 날카롭고 두꺼운 앞발은, 놀랍게도 부딪히자마자 종이처럼 갈라졌다.

아니, 찢어졌다.

ㅡ쿠웅! 콰지직!

진현우는 순간 당황한 개미의 머리통을 땅에 처박고 그 머리를 단번에 베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힘으로 개미를 들어 올리더니 뒤에 있던 개미들에게 내던졌다.

무너지는 개미들의 진형.

ㅡ시, 시이익?!

ㅡ캬아아아!

진현우는 그 한복판으로 몸을 내던졌고,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기 시작했다.

권장 레벨이 15인 만큼 이 폐광에 있는 군단 개미들은 만만치 않은 몬스터였다.

적을 단번에 찢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앞발. 그리고 어지간한 공격은 막아낼 수 있는 튼튼한 갑피를 가진 놈들이지만.

ㅡ퍼어억!

ㅡ캬아아아아악!

진현우한테는 의미가 없었다.

아이템과 특성의 효과로 강화된 지금, 그의 능력치는 평균 40을 넘을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특성, 무기의 달인이 가진 효과로 데미지가 50% 상승하기까지.

'이놈들의 약점은 머리.'

거기에 진현우는 정확히 급소를 노렸다.

개미들은 갑옷 같은 갑피가 몸을 감싸고 있는 형태지만 머리의 갑피는 다소 약하다.

콰득! 콰지직! 야만적인 힘이 담긴 일격이 개미들의 정수리를 연신 내리쳤다.

ㅡ파스스스!

통로를 막은 개미들과 전투를 벌이는 진현우의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또 다른 군단 개미들이 그의 배후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ㅡ퍼어어엉!

ㅡ치이익!

하지만 개미들이 진현우에게 공격하기도 전에 거센 폭발이 놈들을 덮쳤다.

미리 설치해뒀던 폭발 덫이었다.

ㅡ우드득!

갑작스러운 폭발에 개미들이 정신을 못 차렸다. 진현우는 재빠르게 놈들을 처리했고, 그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ㅡ키이이익....

ㅡ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개미가 쓰러졌다.

그리고 들리는 레벨 업 소리.

'레벨이 안 오르는 게 이상하지.'

권장 레벨이 15인 던전에서 혼자서 사냥하고 있으니 빨리 오를 수밖에.

진현우는 죽은 개미들을 바라봤다.

"개미들 주제에 지능적이란 말이야."

일부 개미가 정면에서 시선을 끄는 동안 별동대가 후방에서 기습을 가한다.

그 별동대는 특수한 갑피를 가지고 있는 놈들로, 어두운 곳에 있으면 거의 안 보일 정도로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놈들이다.

일종의 암살자인 셈이다.

'이러니 많은 플레이어가 죽지.'

브로큰 월드의 몬스터들은 평범해 보이는 놈들도 상대하기 까다로울 때가 많았다.

이 군단 개미들도 그러했다.

'방심하지 말고 침착하게 가자.'

진현우는 군단 개미들이 떨어트린 잡다한 아이템들을 챙기고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는 수많은 흔적이 있었다.

'개미들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다.'

이 동굴을 돌아다니면서 먹이를 수집한 개미들이다. 먹이를 모은다는 역할을 끝마친 놈들은 자신의 둥지로 향한다.

'여왕'이 머무는 곳으로.

"이쪽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진현우는 계속해서 흔적을 추적하며 나아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ㅡ아아아악!

ㅡ꺄아아아아!

"응?"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다.

'아까 그 파티인 거 같은데?'

진현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다른 파티가 위험에 처하든 말든 자신이 알 바는 아니다. 문제는 비명이 들린 곳이 하필이면 그의 진로에 있다는 것이었다.

"쓰읍, 다른 길은... 없나."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어도 길이 하나뿐이라서 그럴 수도 없는 상황.

'개미들 때문에 위험해진 건가? 아니, 그 정도로 실력이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진현우는 조금 전 만난 파티를 떠올렸다.

네 명으로 구성된 파티. 장비도 그렇고 그럭저럭 실력은 있어 보이는 파티였다.

특히 후열의 도적이....

"아니, 잠깐만. 아까 그 도적."

조금 전에 마주쳤던 그 파티의 가장 후열에서 온화하게 웃으며 지나가던 도적.

왜 순간이지만 낯이 익나 했더니.

"유망주 헌터잖아."

미래에 악명을 떨쳤던 놈이어서였다.

진현우조차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악명이 높았던 '카오틱', 플레이어 살해자.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는데.'

그놈은 지금까지도 많은 플레이어를 죽였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을 죽일 것이다.

위험을 감수해서 처리할 가치가 있다.

놈을 지금 죽인다면 미래에 죽을 플레이어들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진현우는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15화

폐광의 유망주 (2)

던전으로 들어온 4인 파티.

이대건. 정지유. 김차훈, 박동욱.

전사, 궁수, 도적, 사제라는 정석적인 파티 조합을 갖춘 이들은 오래 합을 맞춰왔다.

그뿐만 아니라 폐광에서도 무난하게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끄으, 어억...."

그 파티가 지금 땅을 기고 있었다.

오랫동안 파티를 이끌어온 이대건은 쓰러진 채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그 모습을 충격에 빠진 채 바라봤다.

"너, 너.... 왜...."

이대건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찔린 부위를 중심으로 뭔가가 퍼지고 있다.

그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왜, 몸이...."

"독입니다. 강력한 마비 독이죠."

이대건의 눈에 보이는 것은, 믿고 있던 동료가 단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는 것.

바로 김차훈이, 그를 찔렀다.

"너, 너, 이게 무슨...."

"몸이 점점 움직이기 힘들어지는 게 느껴질 겁니다. 혀도 잘 안 돌아갈 테고요."

"네, 가... 왜...."

그 말대로, 이대건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김차훈은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너, 너...."

정지유와 박동욱이 놀란 눈으로 김차훈을 바라봤다. 이대건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 지유...!"

"...!"

이대건이 가까스로 토해낸 말에 정지유가 재빠르게 김차훈을 화살로 겨눴다.

하지만 한발 늦었다.

"쏠 거면 진작에 쐈어야죠."

"커, 헉!"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돌진해온 김차훈이 정지유의 명치를 걷어찼다.

큰 충격에 굳은 몸뚱어리. 날카로운 단검이 활을 쥐고 있는 팔을 크게 베었다.

"아악!"

그리고 벼락처럼 단검을 투척해 마법을 영창하던 박동욱의 어깨를 꿰뚫었다.

어느새 다가온 김차훈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 뼈가 부러질 때까지 짓밟았다.

"끄아아아!"

"가만히 있지 왜 마법을 쓰고 그래요."

"차, 차훈 씨. 도대체 왜...."

"왜 이러느냐?"

박동욱이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김차훈은 오히려 그 질문을 의아하게 여겼다.

"당연히 보상 때문이죠."

뭘 이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

"보상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예. 그리고 뭐, 제 개인적인 취향도 있고."

"큭, 취향이라고요?"

히죽, 김차훈이 불쾌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아이템을 꺼내서 사용했다. 소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게 보기 좋거든요. 돈도 벌고, 사적인 욕심도 좀 채우고."

"이, 미친 새끼...!"

"많이 듣는 말입니다."

김차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수많은 사람을 죽여본 살인자의 미소. 두려움을 느낀 박동욱이 필사적으로 물러났다.

"저 형은 못 움직일 테니, 일단 우리 사제님부터 시작해볼까요. 독실한 사제니까 혹시 모르죠. 신이 도와줄지도."

"아, 안돼...."

김차훈이 걸어온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광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 그가 단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목표를 향해....

ㅡ콰드득!

"으윽!"

그 순간, 고통이 엄습했다.

김차훈은 어깨를 잡으며 뒤를 봤다. 투박한 도끼가 그의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어떤 놈이!"

김차훈이 도끼를 잡으려는 순간, 도끼가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바로 진현우에게로.

"하필이면 사람 가는 길을 막아가지고는."

"너...."

진현우가 곧바로 도끼를 투척했다.

다시금 거세게 회전하며 날아오는 도끼.

"한 번 당한 거에 또 당할 거 같아!"

김차훈은 어깨의 고통을 씹어 삼키면서 날아오는 도끼를 단검으로 쳐냈다.

카앙! 튕긴 도끼가 벽과 충돌했다. 김차훈은 쳐낸 도끼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ㅡ콰드득!

"커헉!"

바로 그때, 벽과 충돌한 도끼가 제멋대로 튕기더니 다시금 김차훈을 노렸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도끼가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미친, 이게... 무슨...."

"한 번 당한 거에는 안 당한다며?"

진현우가 되돌아오는 도끼를 붙잡으면서 비웃었다. 김차훈이 이를 갈면서 스킬을 사용했고, 그 단검에 끈적한 독이 어렸다.

"너부터 먼저 죽여주마."

김차훈이 땅을 박차며 돌진했지만, 진현우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ㅡ퍼어엉!

"...!"

철컥! 김차훈이 설치되어있던 특제 덫을 밟았고, 순간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뒤늦게나마 감지해서 몸을 피한 덕분에 폭발에 휩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억!"

시야가 가려졌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폭발 사이로 돌진하면서 거리를 좁혔다.

그 속도에 김차훈의 눈이 커졌다.

'빠르다!'

도적인 자신과 버금갈 정도의 속도.

아니.

'나보다 더...!'

오히려 김차훈보다 더 빨랐다.

도적이면서 동 레벨의 플레이어보다 능력치가 높은 그조차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

"크으윽!"

놀란 김차훈이 발작적으로 단검을 내질렀다. 진현우는 침착하게 단검의 궤적을 읽었고 정확한 타이밍에 공격을 받아쳤다.

ㅡ카앙! 콰지지직!

"이, 이게 무슨...!"

충돌하는 두 무기.

순간적으로 용맹한 자가 붉게 빛나더니 마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도끼와 충돌한 단검에서 균열이 일어났고 순식간에 파괴됐다.

김차훈이 넋을 잃었다.

ㅡ우드득!

"헉, 흐어억!"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발을 내질러 김차훈의 무릎을 가격했다.

단 일격에 뼈가 부러졌다.

반대 방향으로 구부러진 다리. 그 고통에 김차훈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윽, 아아악!"

ㅡ퍼억! 퍽! 콰드득!

충격을 못 버티고 무릎을 꿇은 김차훈의 명치를 진현우가 냅다 걷어찼다.

그리고 놈의 몸을 무릎으로 짓누르면서 손에 쥔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손목, 팔, 복부, 그리고 다리까지.

"끄아아아악!"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김차훈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겁에 질린 얼굴로 진현우를 올려봤다.

진현우가 말없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사, 살려...."

"네가 죽인 사람들도 그리 말하지 않든?"

"잠, 커헉!"

퍼억!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힘을 가득 실은 도끼가 김차훈의 목숨을 끊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기에 놈이 뭐라고 하든 들을 생각도 없었다.

"...."

"...."

동굴 내부에 침묵이 감돌았다.

독에 마비된 이대건도, 기절했다가 깨어난 정지유도, 겁에 질렸던 박동욱도.

모두 놀란 눈으로 진현우를 보고 있었다.

* * *

김차훈, 유망주 사냥꾼.

놈의 주특기는 독과 친화력이었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사람들의 호의를 얻어내는 것을 무척이나 잘했다.

"맞습니다. 저희도...."

"착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당장 눈앞의 파티만 봐도 그랬다.

김차훈이 그랬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든 상황. 악몽을 꾸는 것만 같다.

이대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그쪽이 아니었으면 저희 모두 여기서 죽었을 겁니다. 하...."

"고마워요."

"그 망할 놈, 퀘스트 보상이 뭐라고."

정지유가 이를 갈았다.

이들 파티는 연계 퀘스트를 깨는 중이었다. 꽤 오랫동안 매달렸는데, 폐광에서 마지막 퀘스트가 나타나서 그걸 깨러 왔었다.

"저길 뒤지면서 목표 아이템을 찾았죠. 그 순간 저놈이 등을 푹하고 찌른 거고요."

"몇 주를 함께 했던 놈인데...."

이대건은 답답한지 얼굴을 쓸어내렸다. 운이 따라줘서 망정이지, 아니면 다 죽었다.

"상처는 어떻습니까?"

"제때 치료를 받아서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독 때문에 잘 안 움직여져서 그렇지."

"문제는, 음...."

정지유가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 너무 깊숙한 곳까지 왔어요. 길을 기록하던 김차훈까지 죽었으니까, 이거."

"돌아가려면 골치 아프겠는데."

"지유야, 주변에 몬스터는?"

"더럽게 많아."

궁수 클래스는 인근에 있는 적들의 기척을 탐지할 수 있는 스킬을 갖고 있다.

그 스킬이 가르쳐주고 있었다.

"아니, 왜 이렇게 많아? 너무 많은데?"

"그 정도라고?"

"응. 잘못하면 어그로 다 끌리겠어."

이상할 정도로 개미들이 많다.

진현우를 합친 넷이서 행동하더라도 위험할 정도. 게다가 이대건과 정지유는 독의 영향이 남아 움직이기 불편한 상태.

"하아...."

"이걸 어떻게 하지? 나 당한 부위가 팔이라서 활은 못 쏠 거 같은데."

"쓸모없는 녀석."

"오빠는 방패도 못 들면서!"

"제가 방어막 스크롤은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게 도움이 되느냐인데."

"나가야 하는 상황인데 도움이 될까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박동욱이 방어막 스크롤을 꺼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크게 유용하지는 않다.

그들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고, 진현우는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내가 이 사람들을 입구까지 데리고 가는 게 맞는데.'

목표가 코앞이다.

여왕이 바로 근처에 있는데 이 사람들 때문에 입구까지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럼 이 사람들을 써먹어야겠군.'

괜찮은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여왕을 잡으면 얻을 수 있는 칭호도 파티만 맺지 않으면 공유될 일도 없다.

계산을 끝마친 진현우가 손을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던전 보스를 잡죠."

"...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제안.

이대건과 다른 이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던전 보스... 말인가요?"

"예. 던전 보스를 잡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포탈이 열리잖아요. 그걸 탑시다."

"어어, 으으음.... 일단 그렇다 치고, 폐광에 던전 보스가 따로 있었던가요?"

"그러게? 나도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폐광에 던전 보스가 있다.

이대건 파티도 난생처음 들어본 얘기다. 그런 게 있다는 소문도 전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던전 보스는 존재한다.

"왜 여기만 개미들이 많을까요? 이 근방에 놈들이 지켜야 할 게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건...."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이대건은 진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뭔가 아는 게 있으신 거 같은데요."

"그럼요. 아니까 말하는 거죠."

"...."

이대건은 침음성을 흘렸다.

조금 전에 믿던 동료에게 배신당한 상황이라서 순간 진현우를 향한 의심이 들었다.

"던전 보스는 제가 처리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시간만 끌어주면 돼요. 다소 위험하겠지만 크게 다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차피 방어막 스크롤도 있다면서요?"

"위험하겠군요."

"여기서 나가는 것도 위험하겠죠?"

이대건은 동료들을 바라봤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플레이어 셋이서 던전을 탈출할 것이냐, 아니면 저 남자가 던전 보스를 잡는 걸 도울 것이냐.

"하겠습니다."

"오빠, 괜찮겠어요?"

"다른 방법이 있냐? 없잖아. 게다가...."

진현우에게 진 빚도 있다.

탈출할 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대건은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무엇보다.

'저 남자, 보통이 아냐.'

조금 전에 보여줬던 실력.

김차훈을 무자비하게 죽이던 손속.

평범한 플레이어는 절대로 아니다. 위험한 탈출을 할 바에 저 남자를 믿는 게 낫다.

"그럼 바로 갑시다. 움직일 수 있죠?"

"예."

그게 이대건의 판단이었다.

진현우는 가장 선두에 서서 앞으로 나아갔고 이대건 파티가 그를 뒤쫓았다.

그러면서 진현우는 죽은 김차훈에게서 챙긴 아이템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생각보다 가진 아이템들이 평범하다.

'파티 수준에 맞추려고 그런 건가.'

아이템이 너무 좋은 사람이 갑자기 파티가 되고 싶다고 접근하면 의심스럽다.

김차훈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일부러 평범한 장비를 쓴 모양이었다.

그나마 괜찮은 게 있기는 했다.

[전투 방패 (고급)]

· 착용 제한: 근력 15.

· 옵션: 격돌, 견고함.

* 격돌: 특수한 구조 덕분에 적을 방패로 들이박을 때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 견고함: 뛰어난 방어력을 가졌다.

가운데에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형태의 방패. 적을 들이박기에 딱 좋은 형태다.

그리고 또 하나, 스크롤이 있었다.

[기척 차단의 스크롤 (고급)]

· 설명: 기척 차단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다. 소음이나 기척을 한동안 차단할 수 있다.

"이건 도움이 되겠는데."

사람을 기습하고 다니는 놈이라서 그런가, 쓸만한 스크롤을 가지고 다녔다.

진현우는 스크롤을 챙겼다.

"이쪽입니다. 조용히 따라오세요."

"예."

그리고 곧바로 흔적을 추적했다.

추적하는 것은 군단 개미들이었다. 그는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고 목표를 찾았다.

ㅡ치치칙....

ㅡ키이이이.

"군단 개미입니다. 싸울까요?"

때마침 개미 무리를 발견했다.

사냥에 성공했는지 박쥐 몇 마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진현우는 놈들의 뒤를 쫓았다.

"아뇨, 추적합니다."

"예. 저것들, 더럽게 빠르네요."

개미들은 폐광의 안쪽으로 향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워낙 빨라서 순간적으로 모습을 놓쳐버렸지만, 흔적을 추적할 수 있었기에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니었다.

"막다른 길인데요?"

"흠...."

갑자기 개미들의 흔적이 끊겼다.

아무것도 없는 막다른 골목. 진현우는 마지막으로 남은 흔적이 있는 곳을 살폈다.

"개미 주제에 머리 쓰기는."

"네?"

진현우가 그곳을 뒤지자 교묘하게 숨겨진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굴, 인가요?"

개미굴의 입구였다.

사람이 드나들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아니, 이게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폐광에 이런 게 있었나?"

입구를 보고 당황한 이대건과 그의 동료들은 진현우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개미굴의 입구에 섰다.

"들어갑시다."

이제 여왕을 잡아야 한다.

16화

자신 없으면 안 왔죠.

"와, 더럽게 넓네...."

진현우는 개미굴에 도착했다.

폐광의 아래에 있는 거대한 굴은 군단 개미들의 덩치를 감안하더라도 컸다.

원래는 다른 목적으로 쓰려고 사람들이 개발하던 곳을 놈들이 차지한 탓이었다.

"너무 넓은데요. 그 던전 보스라는 거 찾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몬스터 기척이 엄청 많아."

정지유가 인상을 찡그렸다.

폐광에 나타나는 개미들의 숫자도 많은데, 놈들의 본거지라면 얼마나 많겠는가.

이 던전은 난이도가 높은 곳이었다.

ㅡ히든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ㅡ처음으로 발견한 보상으로 몬스터의 경험치와 드롭율이 상승합니다. 보스 몬스터가 무조건 희귀 아이템을 드롭합니다.

ㅡ던전: 여왕의 개미굴에 진입합니다.

ㅡ권장 레벨: Lv 15.

개미굴 안에 발을 내딛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걸 본 이대건의 눈이 커졌다.

'진짜 히든 던전이잖아?'

탑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던전이나 사냥터 말고도 숨겨진 던전들이 존재한다.

던전 어딘가에 있거나, 사냥터에 숨겨져 있는 식으로 감춰져 있는 곳들인데....

'이 찾기 어려운 걸 어떻게 아는 거지?'

운이 따라주거나, 아주 가끔 있는 퀘스트를 깨지 않으면 위치를 알아내기가 힘들다.

진현우는 그런 던전을 알고 있었다.

"따라오세요. 빨리 움직입시다."

게다가 별로 기뻐하는 기색도 없다. 이런 걸 발견했으면 으레 기뻐할 법도 한데.

일행은 통로를 걸어갔다.

"...조용하군요."

"보스 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가요?"

"예."

개미굴은 미로나 다름없다.

하지만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진현우에게는 보스 몬스터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여기 보스 몬스터는 군단 여왕이라는 놈입니다. 지성이 있는 놈이고 자식인 개미들에게 텔레파시 같은 걸로 명령을 내리죠."

군단 여왕은 꽤 강한 놈이지만, 일대일로 싸운다면 충분히 상대할 만한 적이다.

문제는 놈을 지키는 개미들의 존재다.

"여러분은 저와 함께 갑니다. 그리고 먼저 진입해서 몬스터들의 시선을 끌어주세요. 그 사이에 제가 혼자서 여왕을 처리하겠습니다."

"혼자서요? 가능하시겠어요?"

정지유는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여기는 적진 한복판. 만약에 실패한다면 여기서 모조리 죽게 될 것이다.

"자신이 없으면 안 왔겠죠."

하지만 진현우는 여유로웠다.

애초에 혼자서 공략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여기로 올 생각도 안 했겠지.

그는 기척 차단의 스크롤을 쥐었다.

"지속 시간은 10분 정도 될 겁니다. 그 사이에 빠르게 여왕이 있는 곳으로 가죠."

"예, 예. 알겠습니다."

이대건 역시 다소 불안했지만.

일단은 저 자신감을 믿기로 했다. 진현우가 평범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고.

진현우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ㅡ철컥.

'저 사람, 뭐 하는 거야?'

'뭔가를 설치하고 있는 거 같은데?'

미로 같은 개미굴을 나아가면서, 진현우는 통로 곳곳에 폭발 덫을 설치했다.

그리고 얼마나 나아갔을까.

ㅡ퍼어엉!

진현우가 설치한 덫이 폭발했다.

통로를 지나가던 개미가 밟은 것이다. 강렬한 폭발이 개미굴을 가득 울렸다.

그런 폭발이 여러 번 일어났다.

ㅡ치르르르르!

ㅡ키이이익?!

개미굴에 있던 개미들이 폭발음을 감지하고 소리가 들린 곳으로 몰려들었다.

진현우는 절묘한 움직임으로 일행을 이끌면서 놈들과 마주치지 않게끔 했다.

이대건이 속으로 감탄했다.

'소음으로 여왕을 지키는 개미들을 유인하려는 거군.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다.'

'개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아는 건가?'

진현우는 바닥에 남은 흔적을 통해서 개미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예측했다.

기척까지 차단된 일행은 적들에게 감지되는 일 없이 개미굴의 심층부에 도착했다.

"이 앞입니다."

"네. 기척이...."

정지유가 인상을 찡그렸다.

바로 앞에 넓은 공동이 있다. 거기에서 유독 강렬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있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이 길로 가서 적들의 시선만 끌어주시면 됩니다. 방어막 스크롤이 있다고 했으니 그걸로 최대한 버티시고요."

"그, 그동안 당신은...?"

"여왕의 뒤를 치겠습니다."

"뒤를요? 어떻게요?"

방법은 간단하다.

저 공동으로 가는 길은 두 개다.

이들이 시선을 끄는 동안, 진현우는 다른 길을 써서 공동으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기척 차단 마법이 지속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현우는 빠르게 움직였다.

남은 일행은 서로를 돌아봤다.

"으, 으으음...."

"이건... 위험하겠군요."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파티는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건 둘째치고, 진현우가 마음을 달리 먹으면 그대로 죽게 될 것이다.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지만.

"죽일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죽였겠지."

"그건 그래. 애초에 여기까지 올 것도 없이 김차훈한테 당했을 때 죽이면 되니까."

"...행복 회로가 활활 타는군요."

박동욱이 신랄하게 평했다.

그들은 통로 앞에 섰다.

"시선 끌고, 방어막 마법을 쓴다."

"사제님, 준비됐죠?"

"예, 언제든지."

이대건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갑시다."

* * *

폐광의 아래에는 군단 개미들이 만들어낸 개미굴이 있었다.

원래는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 사람들이 파낸 곳이었지만, 그곳을 놈들이 장악해 자신들의 영토로 쓰고 있었다.

ㅡ치르르르....

그리고 개미굴의 가장 심층부에 특이한 생김새를 가진 개미가 하나 있었다.

상체는 괴악한 인간의 형태를, 하체는 개미의 모습을 한 괴물, 군단 여왕.

놈은 덩치가 크다 못해 비대할 정도였는데, 멈추지 않고 뭔가를 먹고 있었다.

ㅡ치륵, 치르르....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였다.

군단 여왕은 먹이를 섭취하면서 알을 낳았고 지상에 있을 아이들에게 명령했다.

광산에 나타난 새 먹이들을 데려오라고.

ㅡ치익, 키히히힉!

이 폐광의 지하는 안전하다.

여왕은 여기서 세력을 불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폐광 바깥으로 넓힐 생각이었다.

더 많은 먹이를 얻기 위해서.

ㅡ콰득, 쩝, 콰드득.

여왕은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때.

ㅡ퍼어엉!

여왕의 식사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개미굴을 울릴 정도의 폭음. 여왕은 식사를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ㅡ....

폐광에서 들린 소리는 아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여왕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ㅡ치익, 치르르륵!

여왕은 자식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감히 이 영토에 발을 디딘 침입자들이 있으니, 서둘러 놈들을 처리하라고.

여왕의 명령을 받은 개미들이 일제히 침입자를 처리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ㅡ쿠웅! 콰아아앙!

그때 폭발음이 들렸다.

소리를 들은 여왕의 더듬이가 움찔거렸다. 놈은 침입자들을 확실히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더 많은 자식을 보냈다.

ㅡ치르르르륵!

꽤 많은 개미를 보냈다.

그만큼 여왕을 지키는 개미들의 숫자가 줄어들었지만, 여왕은 개의치 않았다.

이 개미굴은 복잡하다. 침입자들이 여기까지 다가올 수 있을 리가 없다.

ㅡ퍼어억!

ㅡ키이이익?!

그렇게 생각했다.

"이 망할 개미 새끼들아! 날 봐라!"

"침입자야! 침입자가 여기 있다고!"

그때,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3명으로 된 파티. 그들을 본 여왕의 더듬이가 분노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ㅡ차르르륵!

ㅡ캬아아아아!

여왕은 명령을 내렸고, 곁에 남아있던 개미들이 일제히 침입자들을 덮쳤다.

"오, 온다...."

"어흐, 오, 오빠. 쟤네 좀 막아봐."

"넌 꼭 이럴 때만 나더러 나서라더라!"

"아, 그럼 어떡해! 오빠가 전사잖아요!"

스슥, 스스슥!

개미들이 기어 오면서 나는 소름 돋는 소리가 들렸다. 공동에 남은 개미들이 모조리 그들에게로 오고 있었다.

ㅡ차르르르륵!

ㅡ키이이익!

"으, 으아아! 사제님! 어서!"

놈들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닥쳤다.

이대건은 비명을 질렀고 대기하던 박찬욱이 스크롤을 찢었다.

광범위한 방어막이 전개되었다.

ㅡ카드드득!

ㅡ카아앙!

개미들이 미친 듯이 방어막을 공격했다.

여왕은 앞발로 바닥을 내리쳤다. 뭘 하고 있냐며 개미들을 타박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ㅡ킥킥, 키히힉....

저 플레이어들은 무력하다.

방어막이 파괴된다면 부하들이 저놈들을 찢어발길 것이다. 그럼 자신은 그걸 먹고 세력을 더더욱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여왕의 얼굴이 행복에 젖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ㅡ퍼어억!

ㅡ케엑?!

어디선가 도끼가 날아들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다. 다수의 도끼가 회전하면서 날아들었고, 군단 여왕의 곁을 지키고 있던 개미들을 일거에 덮쳤다.

ㅡ콰드득!

검조차 튕겨낼 정도로 단단한 개미의 갑피가 마치 나무껍질처럼 부러졌다.

그 공격에 개미들이 즉사했다.

ㅡ차, 차르륵?!

놀란 여왕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하나의 통로에서 누군가 뛰쳐나왔다.

진현우. 그는 되돌아오는 도끼를 낚아채더니 곧바로 돌진 스킬을 사용했다.

"스으읍...!"

그 손아귀에 강렬한 힘이 모였다.

앞을 막으려는 개미들. 진현우는 그 앞에 멈추면서, 발로 땅을 힘껏 짓밟고.

ㅡ카드드득!

가로막는 개미들을 단번에 베어냈다.

강타 스킬을 쓴 공격이 다수의 개미를 단번에 죽였고, 그걸 본 이대건이 감탄했다.

'저 단단한 개미들을 일격에 죽인다고?'

'능력치가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진현우는 쓰러진 개미의 등을 발디딤대로 쓰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여왕이 있는 곳으로.

ㅡ치, 치이익?!

남은 군단 개미들이 여왕을 지키기 위해 모인 순간, 진현우가 마법석을 던졌다.

퍼엉! 섬광 마법이 폭발했고 아주 순간이지만 군단 개미들의 시야가 가려졌다.

진현우는 방패를 내세웠다.

ㅡ쿠우우웅!

ㅡ커억...!

돌진 스킬이 그의 몸을 가속했다.

진현우는 그 기세를 그대로 방패에 담았고, 앞을 막는 개미들을 들이박았다.

충격을 못 버텨 밀려나는 개미들을 도끼를 던져 죽이면서 계속 돌진했다.

ㅡ샤아아아악!

앞을 지키던 개미들이 쓰러졌다.

남은 것은 여왕 하나뿐. 여왕은 분노로 더듬이를 떨면서 앞발을 치켜세웠다.

개미보다는 사마귀에 가까운 앞발.

'약점이 있다. 아직 희미하지만....'

먼저 투척한 도끼가 앞발을 강타했다.

진현우는 여왕과의 거리를 좁혔다. 땅바닥을 힘껏 짓밟으면서 손을 뒤로 젖혔다.

그 손아귀로 도끼가 되돌아왔다.

ㅡ끼이익!

두 팔의 근육이 솟았다.

도끼를 쥔 손아귀에 힘이 집중되었다.

ㅡ치르르륵!

여왕이 두 앞발을 높이 들었다.

날카로운 칼날 같은 앞발로 눈앞의 건방진 침입자를 찢어발기려는 것이다.

진현우는 땅을 짓밟으면서 발을 내디뎠고 바로 그 순간 여왕이 앞발을 휘둘렀다.

'이제 확실히 보인다.'

진현우는 이를 악물며 눈을 부릅떴다.

그 시선이 내리치는 여왕의 앞발에 집중됐다. 칼날이며 방패처럼 튼튼한 앞발.

거기에 작은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조금 전 그의 투척이 만들어낸 금이다.

'한 번에.'

진현우에게서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ㅡ쿠우웅!

충돌.

침입자를 찢으려던 여왕의 앞발과 진현우의 도끼가 충돌했다.

여왕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ㅡ키르륵.

인간의 무기 따위는 짓이겨버릴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것이 자신의 앞발이다.

여왕은 그리 생각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ㅡ콰직, 콰지직!

ㅡ키, 이익?!

허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진현우의 도끼는 여왕의 앞발에 나 있던 실금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러자 금이 점점 벌어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이내 부서지기 시작했다.

'약점 파악.'

여왕의 앞발에는 약점이 있었다.

진현우의 특성이 그걸 파악했고, 두 번의 공격으로 앞발을 완전히 파괴한 것이다.

ㅡ캬아아아악?!

여왕이 비명을 내질렀다.

진현우는 놈의 남은 앞발을 방패로 쳐내면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ㅡ퍼어억!

그리고 다시금 내지른 도끼가 여왕의 허리를 완전히 분쇄했고, 인간과 비슷한 상반신과 개미의 형태를 한 하반신이 분리됐다.

비릿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ㅡ꺽, 크륵...!

하지만 여왕은 죽지 않았다.

이놈은 생명력이 질긴 놈이다. 하반신이 날아갔더라도 먹이만 있으면 재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진현우가 다시 도끼를 들었다.

ㅡ키히익...!

여왕은 그 도끼가 자신의 머리를 내리칠 거라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진현우는 축 늘어진 여왕의 몸을 들어 올린 채 이대건 파티를 향해서 뛰었다.

"돌아갑시다."

"예, 예?"

이대건과 그의 일행은 넋을 놓은 채 진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들었다.

ㅡ서걱!

ㅡ켁...!

도끼가 여왕의 목을 베었다.

진현우는 사체를 개미들을 향해서 내던지고, 드롭된 아이템들을 재빨리 주웠다.

여러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ㅡ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처리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는 포탈이 개방됩니다.

진현우는 포탈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17화

네메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