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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8

75화

아빌론 공방전

광휘가 황무지를 밝혔다.

따사로운 빛이 다친 이들의 몸에 깃들었고, 그들이 입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했다.

그리고 카단은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저건...."

이 일대를 에워싸고 있던 사기의 장막이, 마치 눈 녹듯이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무너지는 사기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성기사단에게 격한 공격을 퍼붓던 흑마법사와 카오틱들은 놀란 나머지 공격을 멈췄다.

"뭐, 뭐야? 왜 장막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지하 무덤을 침입자로부터 보호하던 사기의 장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적들은 하늘을 보고는 크게 당황했다.

카단은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적들이... 많이 줄었다.'

진현우와 성기사단이 죽인 것인가?

그건 아니었다. 지하 무덤이 위급해지면서 지상의 병력이 다시 되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놈들은 모두.

- 콰르르르... 콰아앙!

"다, 단장님. 무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

무너진 지하 무덤에 매몰되었다.

남은 적들이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진현우는 마르실의 성검을 빼 들었다.

성기사들이 그에 동참했다.

"이, 이런...."

"우리가, 불리한 것 같은데?"

당황한 카오틱들이 눈치를 살폈다.

기회를 엿보고 달아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진현우는 성기사단과 협력하여 지상에 남은 적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컥, 끄으윽...."

"유일한 왕께, 영광 있으라... 크학!"

마지막 남은 적이 쓰러졌다.

진현우는 적들을 확인 사살 한 후, 쓰러져 있는 카단에게로 걸어갔다.

그런 그의 뒤를 사람들이 뒤따랐다.

지하에 제물로 갇혔던 이들이다.

"죽는 줄 알았소."

"제가 좀 늦었네요. 괜찮습니까?"

"물론이오. 이 정도면 죽지는 않을 테지."

광휘의 치유 효과로 약간 나아지기는 했지만, 카단의 상처는 여전히 심각했다.

그가 씨익 웃었다.

"조금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지하에 갇힌 사람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해하오. 저 사람들은...."

"지하 무덤에 갇혀 있던 사람들입니다. 폭군에게 제물로 바칠 용도로 잡아 뒀던 거죠."

진현우는 사람들을 성기사단에게 맡겼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군."

"예. 성기사단이 맡아 주십시오. 전 바로 아빌론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시간이 없네요."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성기사단! 사람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도록!"

"네, 단장님!"

카단은 기꺼이 사람들을 맡았다.

성기사단은 자신들의 상처를 치료한 후,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진현우는 그리폰을 소환했다.

- 카루루루루!

"그리폰. 으음...."

"다, 다시 봐도 놀랍군요."

날개를 펄럭이는 그리폰.

카단과 성기사단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벤데일 신전의 방어전에서 이미 본 적이 있지만, 다시 봐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리폰을 소환할 수 있다니.

"아직 적들이 좀 남아 있긴 할 텐데, 안전할 겁니다. 벤데일 신전은 저쪽으로 쭉 가면 나올 거고요. 회복하고 바로 출발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소."

진현우는 그리폰에 올라탔다.

힘차게 날갯짓하는 그리폰이 서서히 날아올랐다. 그렇게 아빌론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저, 저기요!"

어린 목소리가 진현우를 불렀다.

누군가 해서 봤더니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모자였다. 아이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아이와 어머니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진현우가 쓰게 웃었다.

"아저씨... 아니, 아저씨가 맞긴 하지."

전생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다.

그리폰이 날아오른다. 진현우는 배웅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아빌론으로 향했다.

* * *

아빌론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 너머에서 거센 해일처럼 몰려드는 언데드들. 플레이어와 병사들은 놈들이 다가오지 못하게끔 최대한 성벽에서 공격했다.

"죽여!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고!"

"마력포 충전 끝났습니다!"

"그럼 쏴!"

길드들은 약속을 지켰다.

파라켈수스와 네메시스, 사자심 길드는 막대한 재산을 써서 방어 시설들을 설치했다.

성벽에 설치된 마력포가 바로 그것이었다.

- 쿠르르... 콰아아앙!

- 캬아아아아!

마력포가 불을 내뿜었다.

구체의 형태로 쏘아진 마력은 언데드 사이에 착탄했고 강렬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걸 본 카오틱들이 혀를 내둘렀다.

"와, 저게 얼마짜리냐?"

"대형 길드들이 지원했다더니, 미쳤네."

"근데 뭐, 저게 의미가 있나?"

카오틱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는 여유롭게 전장을 바라봤다.

"이 물량을 어떻게 감당해?"

그 말대로였다.

마력포 한 방에 많은 언데드가 죽었지만, 그럼에도 언데드들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언데드를 죽이는 것도 무의미했다.

- 무의미한 짓이다.

마력포로 처리한 언데드만큼의 새로운 언데드가 바닥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었다.

폭군 마그누스가 소환하는 것이다.

- 내가 이끄는 군대는 무한하다.

오만한 언동.

하지만 사실이었다. 마그누스는 자신의 힘이 남은 한 무한히 언데드를 소환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이곳은 내 왕국이다. 왕에게 거역하는 네놈들 역시 자비로운 마음으로 품으마.

쿠웅! 마그누스가 땅을 내리찍었다.

그러자 놈을 중심으로 아빌론까지 삼킬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이 전개되었다.

수도에 있던 이들은 모두 긴장했지만, 마법진 그 자체로는 별 위해를 못 가했다.

다만.

"커헉! 끅, 끄으... 그어어어어!"

"미, 미친! 우아악!"

사람이 죽었을 때 효과를 발휘했다.

병사 하나가 눈먼 공격에 당했다. 카오틱의 활 스킬에 머리를 꿰뚫리는 치명상.

남자는 즉사했고, 즉사하자마자 언데드가 되어서 바로 옆에 있던 동료를 덮쳤다.

"조, 조심해! 죽으면 언데드가 된다!"

"저 마법진 때문인 거 맞지?!"

"뭐 저런 게 다 있냐...."

죽으면 언데드가 된다는 사실은 방어 병력의 사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공격이 순간 주춤했다.

언데드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키아아아악!

"시발, 성벽에 달라붙었어!"

"이 새끼들 숫자가 뭐 이리 많아!"

죽어도 계속 돌진하던 언데드들이 기어코 성벽에 도달했다. 수많은 해골과 좀비들이 성벽을 붙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성문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 그어어어어어!

- 쿠우웅!

뼈만 남은 거대한 오우거들이 그 덩치만큼 거대한 둔기로 성문을 후려치고 있었다.

콰앙! 성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성문! 저러다가 성문 부서져!"

"성수! 성수 뿌려!"

"타 죽어라, 이 새끼들아!"

플레이어들이 황급히 병을 투척했다.

파라켈수스가 공급한 최고급 성수가 담긴 병. 언데드를 덮친 성수는 신성한 불길이 되었고, 지상에 있는 수두룩한 언데드들을 불태웠다.

"공중! 스컬 윙들이 온다!"

"쏴!"

마도 병기에서 쏘아지는 거대한 투창이 저 멀리에서 다가오는 스컬 윙들을 꿰뚫었다.

하나 적들의 죽음에 환호할 틈도 없다.

언데드들은 여전히 너무도 많았다.

'씹, 이상하게 돈 많이 준다 싶더라! 좋은 장비도 지원해 주길래 웬 떡인가 했더니!'

'시발, 시발...! 길드장 새끼 미친 거 아냐? 이런 곳을 막으라고 우리를 보낸 거야?'

'과연, 우리를 섭외한 이유가 있군.'

수도 방어전에는 다양한 이들이 참가했다.

각국의 플레이어 협회의 공고를 보고 참가한 이들, 여러 길드에서 보낸 이들 그리고 협회가 특별히 돈을 주고 섭외한 이들까지.

각기 다른 생각이 교차했다.

그래도 모두가 공감하는 생각이 있었다.

'못 막으면 죽는다.'

'더러운 카오틱 새끼들. 저 새끼들이 설치는 꼴을 볼 바에 내가 뒈지고 말지.'

어떻게든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데드한테 붙은 카오틱 놈들이 승리해서 설치고 다니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

플레이어들은 이를 악물며 싸웠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콰아아앙!

그리고 또 하나, 성벽 위에서 단신으로 폭군을 막고 있는 성녀의 존재가 용기를 줬다.

폭군은 손짓 한 번에 수많은 암흑 구를 만들어 낸 후 쏘아 냈다. 하지만 강력한 마법들은 성녀가 만들어 낸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성녀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사람들은 그리 믿었다.

지금은 밀렸지만, 한때는 랭커였으면서 언데드 상대로 엄청난 힘을 보이는 성녀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파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당사자인 성녀는.

'저 괴물, 날 갖고 놀고 있어.'

성녀, 샬럿 로즈우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수도 아빌론의 드높은 성벽 너머, 거대한 폭군은 말 그대로 그녀를 갖고 놀고 있었다.

저 너머, 폭군이 비웃고 있다.

- 호오, 이것도 버티는가? 그럼....

'또, 또!'

폭군이 손가락을 튕겼다.

지상에서부터 솟구치는 뼈로 이루어진 기둥들. 수많은 기둥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폭군의 손짓에 따라 아빌론으로 쏘아졌다.

- 콰드드득!

"흐으윽!"

막아 낸다.

넓게 전개한 방어막이 뒤흔들린다. 샬럿이 가진 신성력이 그 일격에 크게 소모된다.

반면 폭군은, 말도 안 되는 규모의 마법을 전개하면서도 지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움직일 뿐.

- 콰르르... 콰아아앙!

"아악!"

폭군의 등 뒤에 수많은 마법진이 그려졌다.

불길한 마법진이 발동한다. 그러자 마치 드래곤이 브레스를 내뿜는 것처럼, 검붉은 사기가 샬럿이 유지하는 방어막을 강타했다.

"욱... 카학!"

이번에도 막아 냈다.

막아만 냈다. 엄청난 충격에 샬럿이 피를 토해 냈다.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었다.

방어막도 위태롭기 그지없다.

"서,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괜찮, 아니 괜찮지는 않은데요. 괜찮을 거예요. 제가 안 괜찮으면, 저걸 누가... 흐윽!"

- 왜 그러느냐, 입에서 피가 흐르는구나.

성녀가 한계에 달했음은 폭군도 알았다.

훌륭한 사제다. 인간 중에서는 손에 꼽힐 재능을 가졌으리라. 폭군이 먼 과거, 이 왕국을 다스렸을 때도 보지 못한 재능이다.

- 그래 봤자 결국은 인간.

발휘할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무한하게 힘을 공급받는 폭군 마그누스의 공격을 계속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증거로, 보라.

- 콰직, 콰드득!

방어막이 깨지고 있지 않은가.

조금씩 일어나는 균열이 점점 거대해지면서, 이윽고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걸 본 시민들이 비명을 질렀다.

"바, 방어막이!"

"안 돼! 비행형 언데드들이 들어온다!"

방어막은 여태껏 비행형 언데드들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막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그게 부서진 지금은.

- 캬아아아아!

"우아아악!"

"큿, 으윽!"

비행형 언데드들이 진입할 수 있다.

순식간에 안으로 침입한 스컬 윙들이 아빌론에 있던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샬럿이 다급히 신성력을 일으켰다. 빛을 내뿜는 마법진이 스컬 윙들을 일소했다.

- 빛이 너희를 얼마나 지켜 줄 것 같으냐?

사람들을 지키려고 신성력을 일으켰기에 순간적으로 방어막에 신경을 못 썼다.

폭군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 콰아아앙!

"흑, 아아악!"

강력한 사기가 방어막을 파괴했다.

손을 뻗은 폭군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을 빼 들었다.

그가 아빌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 걱정 마라, 계집. 짐은 재능 있는 자를 존중한다. 네가 죽거든, 그 시체는 짐이 특별히 보관해서 강력한 언데드로 되살려 주마.

폭군은 샬럿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폭군 앞에 나서는 저 배짱 그리고 그녀가 가진 성녀로서의 힘.

그런 자를 언데드로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을 섬기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즐거움이다.

"누구 마음대로...!"

- 저항하는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지.

폭군이 다가오고 있다.

샬럿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어떻게든 진현우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그 전에 무너지면 아무 의미가 없다.

'방법은, 있어.'

샬럿은 천사와 눈을 마주쳤다.

신성력이 부족한 탓에 흐릿해진 천사.

'희생 스킬을 쓴다면, 가능해.'

성녀의 생명을 바쳐서 천사를 강림할 수 있게끔 하는 스킬. 그걸 쓴다면 진현우가 돌아올 때까지의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다.

샬럿은 크게 숨을 삼켰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각오를 굳혔다.

샬럿은 두 손을 모았다. 그녀를 지켜보던 천사가 슬픈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를 바...."

- 캬루루루!

그때,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날갯짓 소리. 샬럿은 화들짝 고개를 들어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봤다.

거기에, 그녀가 기다리던 이가 있었다.

"진현우."

고고하게 하늘을 나는 그리폰.

그 위에 선 진현우가 폭군을 응시하고 있었다. 샬럿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었잖아... 하 씨, 죽는 줄 알았네."

미소를 지으면서 내쉰, 안도의 한숨이었다.

76화

쉽던데?

폭군의 무덤에서 생명의 구슬을 챙긴 진현우는 곧바로 수도 아빌론으로 향했다.

영혼 동물이기에 지치지 않는 그리폰은 그를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끌었다.

그렇게 도착한 수도의 모습은 처참했다.

"시발! 이 새끼들 못 올라가게 좀 막아!"

"스컬 윙! 날아다니는 놈들부터 처리해야 해! 저놈들 때문에 성벽을 지킬 수가 없어!"

- 키이이이이이!

수도를 지키던 방어막은 파괴됐다.

엄청난 숫자의 스컬 윙들이 아빌론에 침입했고, 성벽 위의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컬 윙들을 상대하다 보면 성벽 아래의 언데드들은 신경 쓰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 그어어어어!

"올라온다! 이런 개... 크아아악!"

"젠장, 젠장, 젠장...!"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성벽을 기어오른 언데드들이 플레이어와 병사들을 덮쳤다.

듀라한이 병사의 목을 베었고, 구울들이 플레이어의 발목을 붙잡고 밖으로 내던졌고, 해골 기사들이 성벽 위에서 진형을 갖췄다.

"저 새끼들 마법...!"

- 콰아아앙!

거기에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해골 마법사들이 지원 마법을 퍼붓기까지.

샬럿이 유지하고 있던 방어막이 파괴되자, 아빌론은 처절한 전장으로 바뀌었다.

이 광경을 만든 장본인은 하나.

- 이 성의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모두 파괴하고 새로 짓는 것도 괜찮을 터....

폭군 마그누스.

놈은 부하인 언데드도, 적인 인간들도, 갑자기 나타난 진현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망집의 왕은 수도 아빌론을 보면서 자신이 다스리던 옛 왕국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마, 마력포! 저거 못 오게 막아!"

- 콰아아앙!

마력포가 불을 내뿜었다.

강력한 화력을 가진 마력 포탄이 폭군의 전신을 두들겼지만, 무의미한 짓이었다.

폭군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저, 저게 무슨...."

"대미지를, 아예 안 입었다고?"

폭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 이윽고 생각을 끝마친 폭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 음, 그게 좋겠군. 병사들이여, 진군하라. 저 도시에 살고 있는 인간을 모두 죽여라. 성벽을 허물고 인간들의 터전을 파괴해라.

폭군이 거대한 검을 높이 치켜세웠다.

뼈로 만들어진 불길한 검에 흑자색의 기운이 어렸고, 그 기운은 곧 검기로 변했다.

심상치 않다. 샬럿은 직감했다.

"피, 피해요! 얼른!"

비명에 가까운 외침.

하지만 늦었다. 폭군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서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끄, 으윽...!"

"우아아아아악!"

- 콰르르르!

단 일격.

폭군이 내지른 일격에 성벽이 갈라졌다. 대검이 쏘아 낸 흑자색 검기의 위력이었다.

무너진 서쪽 벽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붕괴에 휘말린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 미친."

무너진 성벽을 본 이들이 전율했다.

심지어 폭군의 공격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 흐흐, 흐하하하하!

폭군이 광소를 터트렸다.

놈이 대검을 쥔 오른손을 움직일 때마다 성벽이 유리처럼 무너졌으며, 마법을 펼친 왼손이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쓰러졌다.

처절한 비명이 전장을 울렸다.

- 아, 이 소리! 짐이 그리던 소리로다!

고통에 찬 비명.

폭군이 가장 즐기는 것이다.

한때 현명하고 선정을 베풀던 왕이었지만, 지금은 그 편린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 그래, 모두 파괴하는 거다.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에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리라.

오직 자신만의 왕국을.

옛 기억에 남아 있는 왕국의 모습을.

언데드들이 진군한다. 거슬리던 성녀의 방어막은 파괴됐고, 성벽은 무너졌다.

진군을 막을 장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 캬아아아아!

- 위대하신 그분을 위하여...!

"시발! 저 새끼들 좀 어떻게 해!"

"모, 몰려온다!"

수도에서 처절한 전투가 펼쳐졌다.

진현우는 순간 자신의 도끼, '용맹한 자'가 화난 것처럼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 카리악의 사념은 권위를 내세운 억압을 혐오합니다. 그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그리고 퀘스트가 나타났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다.]

· 난이도: A.

· 설명: 카리악은 당신이 폭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권위를 무너트려라.

· 보상: 사념 강화.

오랜만에 보는 퀘스트였다.

카리악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 땅을 빼앗겼고, 부족원이 모두 학살당했다.

당시 제국의 목적은 풍부한 자원이 묻힌, 부족의 땅이었으니까.

- 우우웅!

카리악에게는 지금 폭군의 모습이 부족원들을 학살하던 제국과 다를 게 없어 보일 터.

그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진현우는 용맹한 자의 진동을 느꼈다.

"카리악, 너도 싫냐?"

진현우는 그리폰을 이끌었다.

거대한 그리폰이 그 덩치에 맞지 않는 엄청난 속도로 폭군을 향해서 쇄도했다.

"나도 그래."

- 음...?

진군하던 폭군이 걸음을 멈췄다.

저 너머에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하늘을 고고히 비행하는 그리폰 그리고 그리폰에 탑승하고 있는 기수의 존재였다.

- 호오, 그리폰을 길들였는가.

흉폭한 그리폰을 길들이는 기수는 폭군 마그누스조차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결국 그 정도의 감상일 뿐.

- 지금은 그리폰 따위보다는 저 계집이다.

폭군은 그리폰을 무시했다.

어떤 존재든, 아무리 강대한 존재라도 폭군에게는 피해를 입힐 수가 없다. 언데드의 상극인 신성력이 아니면 대미지를 입지 않는다.

놈이 두르고 있는 방어막 때문이다.

- 계집, 어디 있느냐. 모습을 드러내라!

그리폰이 폭군을 향해 비행하고 있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도 없다. 그리폰이든, 그 기수든 자신에게 해를 가할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한 건 피를 토하는 성녀뿐이다.

그렇기에 폭군은 성녀를 탐했다.

- 이리 오라, 계집! 네 비명이 듣고 싶구나!

"음습하기는. 지금 그걸 신경 쓸 때냐?"

- 뭐라?

목소리가 들렸다.

일직선으로 쇄도한 그리폰이 어느새 폭군의 등 뒤까지 도달했다. 폭군의 예상을 웃돈 속도였지만, 그래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날파리나 다름없다. 무시하면 된다.

그런데.

'왜냐? 왜 저놈에게 시선이 가는 것이냐?'

이상하다.

폭군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남자, 저 기수를 막아야만 한다고. 다가오지 못하게끔 어떻게든 막아야만 한다고.

그 이유가 금방 드러났다.

"이걸 보고도 날 무시할 수 있을까?"

- ...!

진현우의 주머니가 열렸다.

그 안에 담긴 자그마한 공간에서 거대한 구체가 튀어나왔다. 붉은 기체가 담긴 거대한 구체. 폭군이 모를 수가 없는 '구슬'.

- 네, 네놈이! 네놈이 그걸 어떻게!

생명의 구슬.

폭군 마그누스가 오랜 세월을 들여서 만든, 엄청난 양의 생명력이 깃든 구슬.

놈에게 무한한 힘을 제공하는 원천.

그리고 놈이 가진 불사성의 이유.

"잘 숨겨 놨더라고. 근데 내가 찾아냈지. 비겁하게 혼자 반칙을 쓰는 건 아니잖아?"

- 그만! 멈춰라! 당장 저놈을 잡아라!

폭군이 크게 당황했다.

여태껏 당황한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폭군이다. 하지만 진현우가 손에 쥔 것을 본 순간, 아무리 그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저놈을, 누구든 좋다! 저 구슬을 뺏어라!

아빌론을 노리던 언데드들이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모든 적이 진현우를 노렸다.

진현우가 씨익 웃었다.

"이미 늦었어."

- 안 돼, 아, 안 돼애애애!

콰득! 파쇄권이 생명의 구슬을 강타했다.

그러자 거대한 구슬에 자그마한 균열이 일어났고, 그 균열은 금세 구슬 전체로 퍼졌다.

결국 충격을 버티지 못한 구슬은.

- 콰지직! 퓨수우우....

완전히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그 안에 담겨 있던 기체도 구슬이 파괴됨과 동시에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전장에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 ...!

전장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던 폭군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해서였다.

놈이 이끌던 언데드들도, 그 공격을 받아 내던 병사와 플레이어들도 폭군을 바라봤다.

그리고 멈춘 것 같은 시간이 흐른다.

- 우오오오오! 윽, 크아아악!

폭군이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내질렀다.

생명의 구슬이 파괴됨과 동시에 놈의 신체를 보호하던 방어막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몸이, 짐의 옥체가!

폭군의 몸에 균열이 일어났다.

발끝부터 시작된 균열이 조금씩 올라가더니,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 윽, 크윽, 크아아아악!

폭군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폰이 한층 더 가속했다. 눈으로 좇을 수조차 없는 속도로 폭군의 바로 앞까지 쇄도했다.

거리가 0에 가까워진다.

"스읍...!"

진현우는 검을 쥐었다.

마르실의 성검. 언데드를 상대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검이 신성한 빛을 내뿜었다.

그는 팔을 높이 들었고.

- 서걱!

- ...!

폭군의 오른팔을 베었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베어 냈다. 마치 나뭇가지를 베는 것처럼, 어떤 공격이든 막아 낼 수 있는 폭군의 신체가 허망하게 베였다.

쿠우웅! 거대한 오른팔이 추락했다.

놈이 쥐고 있던 대검 역시도.

- 이게, 이게 무슨...!

폭군이 경악했다.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진현우의 시선에는 생명의 구슬을 파괴한 결과물이 메시지로 보이고 있었다.

- '폭군 마그누스'가 가진 힘의 근원인 생명의 구슬이 파괴되었습니다. 폭군 마그누스에게 강력한 디버프가 부여됩니다.

- 폭군 마그누스를 보호하던 방어막이 파괴됩니다. 능력치와 내구도가 감소합니다.

- 폭군 마그누스의 불사성이 사라집니다.

폭군이 휘청거렸다.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을 충만하게 만들던 기운이 사라져 가고 있다.

- 이럴, 이럴 수는... 대체 어떻게!

폭군이 경악하며 진현우를 노려봤다.

어떻게.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 도대체 어떻게 그걸 네놈이!

"가지고 있는 거냐고?"

생명의 구슬은 폭군을 부활시키는 데 쓰인 도구이며, 그의 힘의 원천이자, 그에게 무한한 부활을 가능하게끔 해 주는 이유였다.

그 안에 담긴 생명력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는 한, 폭군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그 생명력을 이용하여 무한한 힘을 누릴 수 있다.

"다 돌파했지. 쉽던데?"

- 그런, 그게....

가능할 리가.

생명의 구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온갖 방어 수단을 구비해 뒀다.

그걸 다 돌파했단 말인가.

어떻게? 인간에게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 큭, 크으윽! 누구든 좋다! 이놈을 막아라! 얼른! 마법사단은 당장 마법을 퍼부어라!

먼 곳에서 대기하던 해골 마법사, 놈들을 이끌던 리치가 일제히 흑마법을 펼쳤다.

진현우를 향해서 날아드는 수많은 마법.

- 콰아아앙!

신성한 방패가 흑마법들을 막아 냈다.

그뿐만 아니라 흑마법들을 흡수하더니, 해골 마법사들을 향해 신성한 파동을 내뿜었다.

거리가 멀었기에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하지만 놈들을 마비시키기에는 충분했다.

- 이놈, 짐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이냐!

폭군이 노성을 터트렸다.

놈이 손가락을 튕기자 발아래에서 다수의 언데드가 나타났다. 생명의 구슬이 파괴되었지만, 아직 놈에게는 남아 있는 힘이 있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일단 물러날 수밖에!'

언데드들이 시간을 버는 새에 아군이 있는 곳으로 물러나야 한다.

폭군은 그리 판단했고, 그리 판단했다는 사실에, 굴욕감에 떨었다.

폭군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 키이이이익!

폭군을 대신하듯 나타난 비행형 언데드들이 진현우의 앞을 틀어막았다. 놈들만이 아니다. 전장에 있는 모든 언데드가 몰려들고 있었다.

'앞이 안 보이는군.'

그리폰의 앞이 완전히 막혔다. 이대로 비행하면 스컬 윙들에게 붙잡힐 것이다.

하나 진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샬럿!"

"네! 흐윽...!"

멈출 필요가 없었다.

샬럿이 마지막으로 남은 신성력을 쥐어짜 냈다. 그녀는 피를 토하며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은 수많은 빛으로 된 창들을 소환했고, 진현우를 가로막은 언데드들을 덮쳤다.

"그리폰, 저쪽이다."

- 캬루루루!

그리폰의 앞을 완전히 틀어막았던 언데드들의 사이에 자그마한 틈이 생겼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 키아아아악!

그리폰은 언데드들을 그 몸으로 들이박으면서 억지로 길을 뚫어 냈다.

저 너머에 폭군이 보인다.

- 다가오지 마라! 네놈! 짐에게...!

진현우는 눈을 크게 떴다.

폭군의 몸은 금방이라도 깨질 유리처럼 균열이 가득 일어나 있었다. 그래서일까,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약점이 보였다.

그리폰이 허공을 가른다.

- 우오오오오!

폭군이 마지막 발악을 시작했다.

놈의 배후에 그려지는 수많은 마법진. 흑자색의 사슬들이 진현우를 향해 쏘아졌다.

그리폰이 몸을 한껏 웅크렸다.

- 키루루... 캬아아악!

그리고 힘껏 몸을 펼치면서, 그 반동으로 진현우를 폭군이 있는 곳으로 내던졌다.

그리폰을 속박하는 사슬들. 사방에서 쏟아진 검은 화살에 꿰뚫린 그리폰이 사라졌다.

진현우는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 아, 안 돼! 이럴 수는...!

거리가 좁혀진다.

폭군의 경악한 얼굴이 보였다.

진현우는 성검을 쥔 손을 뒤로 젖혔다.

- 안...!

"너는 말이 너무 많아."

검을 내지른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칼날이 향하는 곳은 한때 폭군의 심장이 있었던 곳.

신성한 검이 폭군을 꿰뚫었다.

- ...!

폭군의 움직임이 멈췄다.

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마르실의 성검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 시선이 다시 진현우를 향했을 때.

- 이놈, 짐은, 짐은, 불멸의....

폭군의 몸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성검이 꿰뚫은 심장에서부터 사지로, 그 몸이 무너지고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마지막으로 그 머리마저도.

- 다시, 내 왕국을....

그게 폭군의 마지막 말이었다.

두 눈을 부릅뜬 폭군의 머리가 사라졌다. 그 흔적이었던 잔해가 눈처럼 흩날릴 뿐.

"커헉! 하, 시발...."

추락한 진현우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그는 전신을 덮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눈처럼 흩날리는 뼛가루를 감상하고 있었다.

"백승현 이 새끼, 참... 고맙다...."

네 덕분에 별 지랄을 다 하는구나.

진현우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은퇴하고 싶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77화

확실한 각인

폭군이 죽었다.

그 사체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본 병사와 플레이어들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포, 폭군이 죽었는데요?"

"내, 내가... 뭘 본 거냐? 저게 말이 돼?"

"저게 가능한 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력포에도 어떤 피해를 입지 않았던 괴물이다. 성녀의 신성력이면 겨우 가능할까.

그마저도 압도적인 힘으로 성녀를 짓누르지 않았던가. 대적할 적이 없는 괴물이었다.

"저 괴물을 혼자서 잡았다고?"

그런 보스 몬스터를 혼자서 처리했다.

사람들은 생명의 구슬의 존재를 모른다. 그렇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진현우가 폭군을 혼자서 처리할 정도의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됐어! 됐다고! 저 새끼가 죽었으면 나머지 언데드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다 죽여! 카오틱 새끼들도!"

"저것들이 굳은 사이에 처리해야 한다!"

아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진현우가 길드들에게 도움을 구한 덕분에 아빌론의 방비는 굉장히 잘된 편이었다.

폭군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 때문에 무너지긴 했으나 언데드들을 상대할 여력은 있다.

- 그, 그어어어?

- 우우우우...?

언데드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폭군의 명령에만 따라서 움직이던 놈들이다. 그 폭군이 죽으면서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당사자가 사라졌다.

- 구우우우....

- 우우, 으어어어어.

언데드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보였다.

알렉산더는 지금이 기회임을 알았다. 놈들이 당황하고 있는 지금 밀어붙여야 한다.

"마력포! 전탄 발사! 해골 마법사들을 노려라! 성벽 위의 병사들은 가진 마법 물품들을 모조리 써서 언데드들을 처리해라!"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멍하니 진현우를 쳐다보던 이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성벽 위에 있던 이들은 그 명령에 따라 보급받은 아이템들을 모조리 썼다.

- 화르르륵! 콰아앙!

- 키아아아아악!

성수와 온갖 연금 포션이 적들을 덮쳤다.

저 너머에 있는 해골 마법사들 한복판에 마력 포탄이 떨어지면서 폭발을 일으켰다.

마법사들과 궁수들은 허공을 비행하는 스컬 윙들에게 무자비하게 스킬을 퍼부었다.

"이 개새끼들아!"

"폭군만 없으면 너희는 아무것도 아냐!"

- 크아아아아!

아직 놈이 소환한 언데드는 남아 있었지만, 폭군이 죽으면서 놈들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런 언데드들을 처리하는 건 아빌론의 지금 병력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야, 이거... 상황이 안 좋은데?"

"계속 싸워 봤자 개죽음이잖아, 이거!"

"도망칠 거면 지금 도망쳐야 된다고!"

카오틱들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했던 폭군은 죽었다.

저 언데드 중에 폭군을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자아를 가진 언데드는 없다.

"계약 파투다! 전부 도망쳐!"

"시발, 이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튀어!"

지금 목숨을 걸고 싸워 봤자 얻을 게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오틱들이 도망쳤다. 전황도 안 좋고, 계속 싸울 의리 따위도 없었다.

이제 전장에 남은 것은 언데드와 몬스터뿐.

"황금 기사단! 비약을 복용하고 나를 따르라! 남은 언데드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

"예! 단장님!"

적들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지금이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알렉산더는 기사들을 이끌고 출진했다.

전장 한복판을 가르는 황금 기사단.

언데드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이야, 잘 싸우네."

진현우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더 싸울 여력도 없었다. 그는 그리즐리 베어의 등에 올라탄 채 성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샬럿이 쓰러져 있었다.

"괜찮아요?"

"요, 용사님! 예! 성녀님은 괜찮으십니다! 잠깐 기절하셔서 저희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용사?"

그녀의 곁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용사라는 칭호가 굉장히 거슬렸지만, 진현우는 무시하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상태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광휘를 사용했다.

- 파아아앗!

"오, 오오... 이건...."

"상처가 낫고 있어. 회복 마법까지...."

찬란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상처가 회복되는 걸 본 병사들이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진현우를 응시했다.

"성녀는 제가 돌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분들을 도와주십시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어차피 더 싸우기도 힘들어서."

병사들은 잠깐 고민했지만, 진현우면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둘을 남겨 둔 채 떠났다.

진현우는 성수를 그녀에게 먹였다.

"음, 으음...."

성수에는 신성력이 담겨 있다.

지금의 샬럿은 신성력이 고갈되어서 기절한 상태. 이 성수가 정신을 차리게끔 해 줄 터.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여긴, 끄응...."

샬럿이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멍한 눈동자가 하늘을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더니, 진현우의 존재를 인식했다.

"...술 마시고 싶어요."

눈을 뜬 샬럿이 내뱉은 말이었다.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말하는 게 압권이다.

"소맥으로. 수경 언니네 바는 다 좋은데 술이 너무 고급이야. 내 입맛에 안 맞아요. 3:7 황금 비율로 소맥 말아서 시원하게, 아아."

"사람들 들으면 이미지 깰 소리를...."

"술 마시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죄는 아니긴 하죠."

샬럿은 이번 공방전에서 진현우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가 오기 전까지 폭군을 혼자서 막아 내지 않았던가.

병사들은 그녀를 진짜 성녀처럼 대했다.

'조금 전의 병사들만 하더라도.'

자기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샬럿을 지키는 걸 우선시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신뢰를 샀다는 뜻이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저는 괜찮아요. 이 정도로는 안 죽어요. 신성력을 쥐어짜 내서 피 좀 쏟은 거예요."

"그게 조금이라고요?"

"조금치고는 좀 많긴 하죠?"

샬럿이 진현우를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그쪽은요?"

"저도 괜찮습니다. 음, 아니지."

진현우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샬럿의 옆에 앉았다. 폭군의 무덤부터 수도 아빌론까지, 조금의 쉬는 시간도 없이 싸웠다.

이제는 일어설 힘도 없었다.

"피곤하네요. 좀 쉬고 싶어요."

"쉬어도 괜찮아요."

샬럿은 성벽 저 너머를 바라봤다.

언데드와 몬스터들을 소탕하는 아군. 그리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적들이 보였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수도 아빌론.

전생에서는 막아 내지 못했던 폭군 마그누스를, 이번 생에서는 막아 냈다.

진현우는 작게 웃었다.

* * *

폭군 마그누스가 죽었다.

세계의 탑 2층, 루윈 대륙의 에픽 퀘스트가 끝났다는 소식은 금방 탑 바깥에 알려졌다.

소식을 접한 이들은 처음엔 걱정했다.

- 언데드들이 그렇게 많이 왔다고? 이 정도면 피해가 엄청 클 거 같은데 괜찮나....

- 하여튼, 카오틱 이 새끼들.

- 동영상 없냐? 동영상으로 보고 싶은데.

대형 퀘스트는 돈이 된다.

플레이어들이 화려한 능력을 쓰면서 몬스터와 싸우는 장면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다.

그런 것도 돈이 되는데 수많은 플레이어가 다수의 몬스터들과 싸우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돈이 된다.

- 어, 찾았음. 여기 올라온 거 있네. 주소 올림. 이거 광고라고 밴하지 마, 제발.

- 대단하다, 진짜. 이걸 용케도 촬영했네.

- 돈만 되면 뭐든 하는 새끼들이 있어, 꼭.

일부 플레이어들은 대형 퀘스트를 기록용 수정구로 촬영해서 업로드하고는 했다.

단점이 많은 아이템이지만, 특수 제작 한 것을 쓰면 화질이나 길이도 오래 유지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촬영된 동영상을 반겼다.

- 미친 ㅋㅋ 실화냐?

- 언데드 숫자 봐. 저것들 카오틱 맞지?

- 와; 저걸 어떻게 막냐? 안 가길 잘했다. 협회가 돈 많이 준다길래 이상하다 싶더라.

수도 아빌론에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

성벽을 지키는 병력들과 아빌론을 향해서 진군하는 언데드의 모습은 압권이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는 폭군도.

- 저게 폭군 마그누스인가? 존나 크네.

- 저 보스는 유저들도 공략법 모른다던데.

- 구라 치는 거 아님? 걔네 자기들 아는 건 입 밖에도 안 꺼내잖아 ㅋㅋ 이기적인 새끼들.

- ㄴㄴ 이번에는 진짜 모르는 듯.

그 뒤부터 펼쳐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폭군의 손끝에서 시전되는 대규모 마법들, 진군하는 언데드, 몬스터와 카오틱들.

그리고 놈들을 막아서는 성녀.

- 미쳤다....

- 와, 옛날 랭커라더니 장난 아니네.

- 이거 막을 수 있는 거 아님?

샬럿 그리고 그녀가 소환한 천사의 위용은 폭군 마그누스를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폭군은 너무도 강대했고, 샬럿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막을 전개해야만 했다.

- 야, 야. 이거;

- 위험한데? 진짜로 수도 털리는 거 아님? 폭군이 칼질 한 번 하니까 성벽 날아가는데;;

-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데?

-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ㅅㅂ; 언데드하고 카오틱들이 2층 아예 먹고 휘두르는 거지.

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들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성녀가 유지하는 저 방어막이 깨진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모두가 직감했다.

그리고 결국 방어막이 깨지려는 순간.

- 와, 미친!

- 저거 그리폰 아냐? 길들인 거임?

- 어, 나 저 사람 누군지 알아. 요즘 유망주 중에 엄청 유명한 사람이잖아? 이름이....

- 진현우임. 부족 전쟁 때 봤음.

한 손에 빛나는 검을 쥔 진현우가, 그리폰을 몰면서 수도 아빌론에 나타났다.

- 에픽 퀘스트도 저 사람이 받았다던데?

- 근데 뭐 ㅋㅋ 의미 있음?

- 유망주 하나 더 왔다고 뭐가 바뀌나.

사람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이미 전황은 절망적이다. 방어막이 깨지면 폭군이 진군할 것이고, 그럼 모두 끝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 어?

- 폭군 쟤 왜 저럼?

- 야, 이거....

진현우가 생명의 구슬을 깨트리기 전까진.

눈에 띄게 고통스러워하는 폭군. 그때부터 전황이 바뀌고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진현우였다.

- 와, 미친. 폭군 오른팔 그냥 날아갔어.

- 저 커다란 방패는 뭐임? 성기사 스킬임? 흑마법 다 막아 내는데 저런 스킬도 있었나?

- 근데 저 사람 성기사 아닌 걸로 아는데?

- 클래스가 대체 뭐야?

시끄럽던 채팅 창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피를 토하면서 진현우의 앞길을 터 주는 샬럿, 쏟아지는 공격을 대신 몸으로 받아 내면서 진현우를 폭군에게 보내는 그리폰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 푸욱!

폭군의 심장을 꿰뚫는 진현우의 모습까지.

그 모든 장면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아서, 사람들이 채팅을 칠 겨를도 없었다.

거대한 폭군이 무너진다.

아빌론을 모조리 파괴할 것 같던 괴물이.

- 미쳤다.

누군가 홀린 듯이 올린 채팅.

그걸 시작으로 여러 채팅 창에, 각종 커뮤니티에 미친 듯이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주제는 모두 똑같았다.

- 대체 어떻게 잡은 거임? 아예 대미지도 안 들어가던 놈 같던데 설명해 주실 분;;

- 처음에 뭐 깨트리던데 그거랑 연관 있는 거 아냐? 뭔가 기믹이 있든가 그럴 듯.

- 다른 나라 커뮤니티 반응 퍼 옴 ㅋㅋ

- 죄다 난리 났네; 저 사람 이름이 뭐라고?

진현우.

뛰어난 유망주로 꼽히던 그의 이름이 전 세계에 확실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78화

이 정도 보상은

세계의 탑이 시끄럽다.

여태껏 몇 번 나타나지 않았던 에픽 퀘스트, 그걸 깬 진현우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그렇게 탑의 화제가 된 진현우는.

- '폭군 마그누스'를 토벌했습니다.

- 수도 방어전에 성공했습니다. 에픽 퀘스트 '폭군의 복수'를 완수했습니다. 퀘스트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진현우에게 상위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더럽게 기네."

보상을 확인하고 있었다.

수도 방어전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진현우가 받기로 한 보상을 받는 것이었다.

- 믿을 수 없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당신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루윈 대륙 전역을 울리고 있습니다. 명성이 6,000 상승했습니다!

- 100만 골드가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 레벨이 5단계 상승합니다.

-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영혼 동물 소환, 광휘의 숙련도가 두 단계 상승합니다.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이름값을 했다.

경험치, 골드, 거기에 칭호 보상까지.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다시금 정복을 꿈꾸며 부활한 폭군 마그누스를 처리할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왕 시해자 (효과: 모든 능력치 +20, 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10%)]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에픽 퀘스트를 성공하여 수도 아빌론을 지킬 것.

- 보상으로 영웅 등급 칭호 [루윈 대륙의 영웅 (효과: 루윈 대륙의 선(善) 성향에 속하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음, 루윈 대륙의 퀘스트 보상 +100%)]를 획득했습니다.

-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다수의 언데드를 처리하고 강력한 언데드를 처리할 것.

- 보상으로 고급 등급 칭호 [언데드 버스터즈 (효과: 언데드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5% 상승)]를 획득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칭호들이었다.

압도적인 능력치 상승에 진귀한 옵션인 보스 몬스터에게 주는 대미지 10% 상승까지.

루윈 대륙의 영웅은 말할 것도 없었다.

'50레벨이 되려면 아직 멀었단 말이지.'

지금 진현우의 레벨은 45레벨.

위층으로 올라갈 권한을 얻기는 했지만, 가능하면 50레벨은 채우고 올라가고 싶었다.

그 시간을 크게 단축해 줄 것이다.

폭군을 잡은 보상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냈습니다. 최고 등급의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 폭군의 진노 (전설)를 획득했습니다.

- 망집의 자취 (전설)를 획득했습니다.

진현우의 앞에 아이템이 나타났다.

굉장히 낡은 왕관과 작은 결정체였다.

[망집의 자취 (전설)]

· 설명: 폭군의 힘이 담긴 결정체다. 지금은 이용할 방법이 없지만,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후 정화해서 복용하여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이 아이템은 진현우에게 귀속되었다.

· 효과: 알 수 없음.

[폭군의 진노 (전설)]

· 설명: 폭군이 사용하던 왕관이다. 지금은 이용할 방법이 없지만,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서 정화하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 효과: 알 수 없음.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등급답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그 효과를 알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과정... 뭐, 뻔하지.'

그 과정이 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진현우는 둘 다 주머니에 따로 챙겨 뒀다.

이것 말고도 폭군이 드롭 한 것들이 많았다.

- 폭군의 뼈 (영웅) ×5, 불사자의 정수 (영웅) ×3, 사기의 결정체 (영웅) ×5, 폭군의 부러진 검 (영웅)을 획득했습니다.

"전부 재료 아이템이군."

진현우는 재료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재료들이면 방어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군단 여왕의 갑옷을 꽤 오랫동안 써 왔는데, 슬슬 새 갑옷을 장만할 때도 된 것 같다.

'이걸 다룰 사람을 찾는 게 일이긴 한데.'

한 명 짚이는 사람이 있긴 했다.

아마 소개를 받아야 하겠지만, 어렵지 않은 일이다. 진현우는 재료들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

- 폭군 마그누스라는 강대한 권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당신에게 카리악이 크게 만족했습니다. 관련된 아이템과 스킬이 강화됩니다.

- '용맹한 자'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 '분열 투척'이 '선풍'으로 강화됩니다.

카리악이 주는 보상이 남았다.

진현우는 도끼를 꺼냈다. 용맹한 자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면서 바뀌는 것이 보였다.

[용맹한 자 (영웅)]

- 효과: 용맹의 증명, 회귀, 무기 파괴, 광분.

* 용맹의 증명: 근력, 민첩, 체력이 +8 상승한다. 이 효과는 적을 죽일 때마다 강화되며, 최대 3배까지 강화된다.

* 광분: 적을 공격할 때마다 공격 속도가 상승한다. 최대 50%까지 상승할 수 있다.

외형이 살짝 날렵해지고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또 하나, 스킬.

· 선풍 (A, Lv.5): 있는 힘껏 도끼를 투척한다. 투척한 도끼는 강력한 돌개바람을 동반하며, 많은 마력을 담을 경우 도끼가 분열한다.

* Lv.5: 스킬의 위력이 20% 증가한다. 도끼가 분열하는 숫자가 4개로 늘어난다.

분열 투척이 선풍으로 강화되었다.

도끼를 투척하면서 강력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스킬로 바뀌었는데, 유용할 것이다.

스킬의 등급이 오르면서 숙련도 효과의 분열하는 숫자가 줄어든 게 살짝 아쉽긴 했다.

"이게 마지막인가? 더럽게 많네."

얻은 게 많다 보니 정리도 오래 걸렸다.

진현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건....'

저 너머에 성이 보인다.

루윈 대륙에만 있는 일종의 화폐, '명성'을 쓸 수 있는 상점이 성 내부에 있다.

원래라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지만, 다행히도 진현우는 왕에게 초청받은 상황.

- 현재 명성치: 8,000.

"명성이나 쓰러 가야겠다."

진현우는 왕궁으로 향했다.

샬럿도 같이 초청을 받았으니, 중간에 만나서 함께 왕궁으로 가면 될 것이다.

* * *

왕궁의 사람들은 몹시 분주했다.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상황. 뒷처리도 해야 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도 정해야 한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

"휴, 휴. 저 사인 한 장만 해 주세요."

"...."

샬럿이 서 있었다.

휘파람을 불면서 히죽히죽 웃는 모습으로.

왕궁의 사람들은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두면서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냐?"

"헤헤, 뭐긴 뭐예요. 요즘 워낙 인기가 많으신 분이니까 미리 사인 좀... 아야!"

"가자. 왕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손바닥 아파...."

슬쩍 내민 샬럿의 손바닥을 찰싹 때렸다.

이번 방어전에서 진현우가 보인 활약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인기가 많은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에이, 나는 뭐, 흐흠! 옛날부터 인기 있었지! 나한테 이런 인기는 익숙하다고나 할까?"

"사람들한테 알코올 의존증인 거 알려도 되냐?"

"되겠어?! 내 이미지는 어쩌라고!"

샬럿이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잘난 척을 하는 모습을 보니 굉장히 아니꼬워졌다.

그녀는 기겁하며 진현우의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당연하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요 며칠 동안 술도 안 마셨어!"

"못 마신 거겠지,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응, 사실 그렇긴 해. 게다가 술도 좀 고급지더라고요. 으응, 내 입맛에는 안 맞달까...."

"손 떠는 거 같은데 괜찮냐?"

"안 떨어! 나 의존증 아니라고오...."

수도 방어전 이후, 샬럿이 진현우를 대하는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편해졌달까, 가까워졌달까. 샬럿 쪽에서 먼저 말을 놓자고 제안할 정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 지, 직업 퀘스트! 내 직업 퀘스트가! 지, 진현우 님! 제 직업 퀘스트가 깨졌어요!

- 말했잖아요, 깨질 거라고.

- 우, 우욱....

샬럿의 직업 퀘스트가 완료되었으니까.

폭군이 영면하면서,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 온 직업 퀘스트도 함께 완료된 것이었다.

- 우아아아앙! 고, 고마워요오!

- 오지 마세요. 껴안으려고 하지 마세요. 아 씨, 콧물 묻히지 말라고. 야! 저리 안 가?

- 흐어어엉....

그렇게 샬럿은 엉엉 울어 댔고, 그 뒤부터 진현우를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뭐, 나쁠 건 없지.'

샬럿은 전생에 친분이 있던 사람이다.

어쨌든 같은 메사이어 길드였으니까. 그녀가 친구처럼 대하는 게 나쁘진 않았다.

옛 생각이 떠올라서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맞다, 현우야. 보고서는 썼어?"

"보고서? 써야지."

플레이어 협회가 요구한 것이다.

평범한 퀘스트도 아니고 에픽 퀘스트를 깬 거니까 자세한 경과를 적은 보고서를 달라고.

플레이어 등급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쓰기는 더럽게 귀찮긴 한데.'

손해 볼 것도 없고 오히려 이득이니까.

돌아가는 대로 보고서를 쓰는 수밖에.

"아, 도착했다! 자자, 제가 문 열어 드릴게요. 요즘 인기 많으신 스타분이시니까!"

"너부터 먼저 들어가라."

"앗, 잠깐, 저는, 히, 힘이 너무 세...!"

진현우와 샬럿은 알현실에 들어섰다.

그런 둘을 반기는 것은.

"고맙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진현우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는 윌리엄 2세였다. 그가 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근처의 신하들이 경악했다.

진현우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갑자기 이러시면...."

"저, 전하! 무릎을...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 나라를 구한 용사인데 내 무릎이 뭐가 아깝겠는가? 고맙네, 진심으로 말하는 걸세."

윌리엄 2세의 손은 쭈글쭈글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인이다. 여태껏 대를 거듭해 온 왕국이 자신의 대에서 멸망하는데 아무것도 못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우리 왕국은 오랫동안 희망을 잃은 채 살아왔네. 몬스터들 때문에, 언데드들 때문에, 무법자들 때문에, 가진 걸 빼앗기기만 했지."

그런 부담감이 이제야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라도 감사를 표하고 싶은 걸세."

진현우와 샬럿이 눈을 마주쳤다.

당연하지만, 윌리엄 2세 역시 단순히 감사 인사만 하고 입을 닦을 생각은 없었다.

논공행상은 확실해야만 한다.

"알렉산더! 그걸 가져오게."

"예, 전하."

기다리던 알렉산더가 자그맣지만 굉장히 고급스러운 상자를 두 개 가져왔다.

윌리엄 2세가 웃으며 열어 보라고 말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왕의 훈장 (전설)]

- 설명: 역사에 남을 영웅에게 전하는 헌사. 루윈 대륙에서 쓸 수 있는 명성이 4,000 증가하며, 명성의 소모치가 40% 감소한다.

그리고 특수한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

진현우의 두 눈이 번뜩였다.

얼핏 보기에는 이게 뭔가 싶다. 대단한 아이템을 줄 것처럼 굴어 놓고는 훈장 하나 주고 치우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명성으로 살 수 있는 아이템들을 생각하면 소모치를 40% 줄여 주는 건 엄청 크다.'

그뿐만이 아니다.

- 특수한 상점.

왕궁에는 명성을 화폐로 쓰는 상점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점이 아니긴 하다. 여신상에 명성을 바치고 하사받는 개념이니까.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상점이 있다.

"여행자들이니 잘 알고 있겠지. 프레아 왕국에는 그대들이 쌓은 명성에 따라서 선물을 주는 신성한 여신상이 하나 있다."

"예, 전하. 알고 있습니다."

"음. 그중에서도 우리 왕족이 기도를 할 때 쓰는 여신상이 있다. 그 여신상은 훨씬 귀한 선물을 준다더군. 그만큼 더 까다롭다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VIP 상점.

진현우도 전생에 이용하지 못한 상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플레이어로 활약할 때 프레아 왕국은 이미 멸망한 상황이었으니.

특수한 여신상도 파괴된 뒤였다.

"그 여신상을 쓸 수 있게끔 해 주겠네. 내 생각에는, 이게 지금 우리가 그대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보상이 아닐까 싶군."

진현우와 샬럿이 다시금 눈을 마주쳤다.

'그래, 이 정도 보상은 줘야지.'

특수한 여신상은 이용할 기회도 얻기 힘들다. 누군가 한 번 이용하고 나면 오랫동안 누구도 이용하지 못하게끔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국도 각별히 관리하는 것이다. 그만큼 감사하게 여기기에 쓰게 해 주는 것이고.

"맞습니다, 전하."

진현우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의 저한테는 그 무엇보다도 좋은 보상입니다.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애초에 진현우가 노리던 보상이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79화

명성 상점

진현우를 특수한 여신상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은 건 알렉산더였다.

왕궁의 지하, 엄중한 보호를 받고 있는 곳.

그곳에 여신상이 있었다.

"빛나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은 아니지?"

"어, 나도 그렇게 보여."

날개로 감싸인 아름다운 여성의 조각상이 방을 가득 메울 정도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진현우와 샬럿은 그 앞에 섰다.

"신께서 직접 가호를 내리셔서 저런 걸로 알고 있다. 저 빛이 사라지면 쓸 수 없는 거고, 다시 빛이 생기면 쓸 수 있는 거지."

"직관적이라서 좋네요."

"그럼, 마음껏 이용하게. 우린 나가 있지."

"네, 감사합니다."

알렉산더는 둘을 배려해서 나가기로 했다.

신중하게 골라야 하는데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방해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샬럿은 멍하니 여신상을 바라봤다.

"왜 그래?"

"으응? 아니, 저거 진짜 특수한 여신상이긴 한가 봐. 막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어지네?"

"난 안 그런데. 클래스가 달라서 그런가."

샬럿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게다가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야,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둘은 함께 여신상 앞에 앉았다.

"자, 기도합시다~ 기도하는 건 처음이지? 날 따라서 기도하면 돼. 으흠, 이렇게!"

"집중할 거니까 조용히 해라."

"씨잉, 도와준다니까."

샬럿이 입을 비쭉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현우가 헛기침을 했다.

"야,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부탁? 응, 괜찮아. 뭐든지 말해."

"저 여신상 말이야. 아마 클래스에 맞춰서 상품을 보여 줄 가능성이 커. 넌 사제 계통이니까 신성력과 관련된 물건을 보여 주겠지."

"아, 정말?"

샬럿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 말이 맞는다면 잘된 일이다. 저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좀 의아했지만.

"그래. 거기서, 음... 저주를 해제할 수 있는 아이템이 있으면 좀 사 줄 수 있나 해서."

"저주 말이지? 응, 좋아."

"생각해 보고 대답한 거 맞지?"

"내가 바보야?"

샬럿이 다시금 입을 비쭉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현우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너한테 받은 은혜가 있는데 그런 걸로라도 갚을 수 있으면 나야 좋지. 그리고, 흐흥, 나도 네 덕분에 명성을 꽤 많이 챙겼거든."

그러니까 그 정도는 별것 아니다.

샬럿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 고맙다."

"천만에. 그럼 같이 기도나 하실까요?"

진현우는 눈을 감으며 기도했다.

그 모습이 여러 번 해 본 것처럼 익숙해 보여서, 샬럿도 신기해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지하에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 화아아악!

여신상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주변이 점점 아득해진다. 진현우는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 환영한다, 용사여.

목소리가 들렸다.

더없이 신성하고, 거룩한 목소리였다.

- 그대가 이 대륙에서 이루었던 것들을 보았다. 원래는 멸망할 대륙을 구한 용사여, 그대의 용기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노라.

여신의 목소리가 진현우를 칭송했다.

세계의 탑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 진현우가 이전에 만났던 오크의 신이 그 증거다.

당연하지만, 여신 역시 실제로 존재한다.

- 그대가 쌓은 명성에 따른 보상을 내리겠다. 이건 그 누구도 쉽게 누릴 수 없는 특별한 기회일 터이니, 신중하게 생각하거라....

목소리가 점점 흐려진다.

그와 교차하듯 거대한 창이 나타났다.

- 얼어붙은 심장 (전설): 명성 4,200.

- 영혼석 (전설): 명성 3,000.

- 승리의 깃발 (전설): 명성 4,200.

- 기사단의 영혼 (영웅): 명성 300.

- 황가의 대검 (전설): 명성 2,600.

- 고대 갑옷 (영웅): 명성 200.

- 작렬하는 창....

명성 상점. 그중에서도 왕국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일종의 VIP 상점.

그 명단은 보기만 해도 호화롭다. 제일 낮은 등급이 영웅이고, 대부분은 전설 등급.

진현우의 클래스가 웨펀 마스터라서 그런지 무기나 갑옷 종류가 유독 많이 보였다.

'눈이 돌아갈 정도의 아이템들이구만.'

전생의 사람들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엄청난 아이템을 파는데, 가격이 미쳐서 하나 사기도 힘들다고. 그래서 말하기를.

'계륵이다.'

어지간한 플레이어가 루윈 대륙에서 날고 기어 봤자 얻을 수 있는 명성은 2~3천 정도.

정말 큰 활약을 했다면 4~5천 언저리다.

눈앞의 상점에 적힌 아이템의 가격들은 생각보다 저렴하지만, 이건 할인된 가격이다.

'원래 가격은 7, 8천 정도 하는 아이템들.'

할인도 못 받는 일반 플레이어들이 무슨 짓을 해도 살 수 없는 가격의 아이템이다.

이 상점은 좋은 아이템을 싸게 파는 곳이 아니다. 철저하게 제값에 맞게 파는 것이지.

그렇기에.

"나한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다."

윌리엄 2세가 준 왕의 훈장에는 명성의 소모치를 40%나 감소해 주는 효과가 있다.

원래라면 루윈 대륙의 운명을 바꿀 정도의 활약을 한 진현우도 겨우 하나만 샀겠지만.

지금은 여러 아이템을 사는 게 가능하다.

'사야 할 아이템들은....'

이미 정했다.

보자마자 뭘 사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진현우는 세 가지 아이템을 골랐다.

[얼어붙은 심장 (전설)]

- 설명: 한때 얼음의 정령왕이었으나 타락했던 자가 남긴 심장. 악으로 물들어 있었으나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복용할 경우 최대 S 등급까지 성장하는 A 등급의 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획득 시 귀속한다.

[승리의 깃발 (전설)]

- 설명: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전쟁왕의 깃발이다. 사용할 경우 S 등급의 스킬 '영역 선포'를 습득할 수 있다.

획득 시 귀속한다.

말이 필요 없다.

하나는 S 등급까지 성장하는 특성이고, 하나는 극히 구하기 힘든 스킬을 주는 아이템이다.

'세계의 탑에서는 스킬을 얻기가 힘들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회가 몹시 적다.

레벨이 오르면서 얻는 클래스 스킬을 제외하면 애초에 얻을 기회가 많지 않다고 할까.

예전에 진현우가 얻었던 돌진 같은 스킬이면 모를까, A 등급 이상의 스킬이라면.

'사실상 얻는 건 불가능하지.'

진현우가 감정사라는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기억 감정을 얻기로 한 이유가 뭐였던가.

브로큰 월드에서는 스킬을 익히기 힘드니까.

그런 상황에서 무한히 특성과 스킬을 익힐 수 있는 기억 감정의 가치는 너무도 높으니까.

'그 귀한 S 등급 스킬을 준다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영혼석 (전설)]

- 설명: 강대한 영혼이 깃들게끔 하는 영혼석이다. 현실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효과를 다수 지니고 있다.

영혼석.

진현우는 고민에 빠졌다.

앞의 두 가지는 당연히 가져가야 하는 게 맞는데, 이 아이템은 살짝 고민이 됐다.

'원래는 무언가를 봉인하는 용도의 아이템.'

상대할 방법이 없는 강대한 적이나 무한히 부활하는 적을 봉인할 때 쓰는 아이템이다.

그게 일반적인 용도다.

하지만 진현우에게는, 조금 달랐다.

'으음, 영혼 중재가 있다면....'

진현우에게는 특성이 있다.

샤먼의 특성, 영혼 중재. 짐승의 영혼을 중재하여 영혼 동물로 소환하게끔 하는 특성.

전생에서 시험해 본 적이 있다.

중재한 영혼을 영혼석에 담을 경우, 해당 영혼을 '펫'으로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 펫 시스템.

브로큰 월드에 있는 시스템이다.

마음이 통하는 동물들을 길들여서 펫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인 동물은 다양한 방식으로 주인인 플레이어를 돕는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평범한 펫을 기르니까 크게 도움을 못 받기는 하는데.'

좋은 펫이라면 다르다. 그중에 특수한 스킬을 가진 녀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진현우에게, 그런 좋은 펫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 영혼석은 굉장히 질이 좋아.'

강력한 영혼을 담는 것도 가능하다.

그래, 설령 보스급 몬스터라도. 전설 등급 영혼석은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

진현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 시기에 펫으로 삼을 만한 짐승형 몬스터가 있었던가.

하나 있었다.

'요호(妖狐).'

요괴 여우.

구미호가 되고 싶어서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는 놈인데, 녀석과 관련된 게이트가 열린다.

그리고 대참사가 펼쳐진다.

'길드 몇 개가 전멸했었지.'

평범하게 죽은 것도 아니다.

우애가 돈독하기로 유명하던 길드는 서로 싸우다가 죽었고, 어떤 길드는 전원 자살했으며, 어떤 길드는 정신이 무너졌다.

요호가 가진 특수한 힘 때문이다.

'기록을 읽을 때마다 탐났던 능력인데.'

요호를 펫으로 삼는다.

굉장히 매력적이다. 요호가 가진 능력이 대체할 수 없는 능력이라서 더더욱 그랬다.

일반적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괴물.

그런 괴물을 펫으로 삼을 수 있다면.

'성장할 수 없는 영혼 동물과는 달리, 성장할 수 있는 괴물을 펫으로 삼을 수 있다면.'

영혼 동물은 성장하지 않는다. 녀석들에게 레벨 같은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펫은 플레이어처럼 성장할 수 있다.

그 강력한 요호가 더 성장할 수 있다면.

'그럼 아주 강력한 도구가 생기는 거지.'

진현우의 고민이 끝났다.

그는 세 가지 아이템을 구매하고, 남은 포인트로 기사단의 영혼을 두 개 구매했다.

[기사단의 영혼 (영혼)]

- 설명: 오로지 왕국을 위해 싸우고 명예롭게 전사한 기사단의 영혼을 소환한다. 기사단은 일정 시간 당신을 도와주고 사라질 것이다.

유령 기사단을 소환하는 아이템이다.

이건 다음 층에서 꽤 유용하다.

'3층은 한창 전쟁 중인 층이니까.'

그렇게,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샀다.

- 얼어붙은 심장 (전설), 승리의 깃발 (전설), 영혼석 (전설), 기사단의 영혼 (영웅) ×2를 12,000 명성을 소모하여 구매했습니다.

지금 진현우가 가진 명성은 12,000.

딱 떨어지게끔 산 거라서 뭔가 뿌듯했다.

여신상이 다시금 찬란한 빛을 내뿜었고, 진현우의 손아귀에 구매한 아이템들이 생겼다.

그리고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

"...."

진현우와 샬럿이 동시에 눈을 떴다.

옆에 있는 샬럿을 보니 뭔가 충격적인 걸 본 듯 입을 헤 벌린 채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야, 침 흐른다. 뭐 샀냐?"

"헤? 스으읍! 너, 너무 좋은 아이템이 많아서 나도 모르게.... 으흐음!"

샬럿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자기가 산 것들을 보여 줬다.

그녀의 손아귀에는 척 봐도 좋아 보이는 십자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이 있었다.

"십자가는 전설 등급 무기고, 알은 펫이야. 내가 마침 펫이 없었거든. 잘됐다 싶어서."

"아직 부화하기 전인가 보네."

"응. 신성력 먹이다 보면 부화한대."

샬럿이 헤실거리면서 웃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백색의 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알이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다.

"아, 맞다. 그리고 이거! 아까 말한 거."

샬럿은 십자가를 진현우에게 건넸다.

신성한 빛을 내뿜는 십자가였다. 진현우가 아까 말한 저주를 해주하는 아이템이다.

"고맙다."

"고맙기는. 은혜를 입었으니까, 조금이라도 갚아야지. 나도 양심은 있거든. 으흠."

샬럿이 가슴을 활짝 펼쳤다.

그 모습이 웃겨서 진현우는 피식 웃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전직 퀘스트는 못 깼을 거야. 어떻게 깨야 하는지 방법도 몰랐겠지. 그리고... 네 말대로, 아무것도 안 했을 거고."

후회.

전생의 샬럿 로즈우드는 후회했다.

이 시기에 좌절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프레아 왕국이 멸망하는 걸 관망한 것을.

"...."

진현우는 샬럿을 가만히 응시했다.

웃고 있다. 전생의 그녀와는 모습이 적잖게 다르지만, 그 미소는 전생과 똑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 안 하지?"

"응."

샬럿이 환하게 웃었다.

대답을 들은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샬럿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3층으로 올라갈 거야?"

"어. 볼일 끝났으니 올라가야지. 너는?"

"난 한동안은 2층에 남아 있으려고. 오랫동안 있던 곳이라서 할 일이 좀 많거든. 이것도 내가 인기가 많아서 그런 거겠지!"

"아, 그래...."

전생에서 샬럿과 나눴던 것과 비슷한 실없는 문답을 나누며, 진현우는 지하를 떠났다.

이제 2층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3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해야 한다.

80화

의뢰 수락

세상은 여전히 진현우 때문에 시끄러웠다.

그는 누구인가? 2층의 에픽 퀘스트를 깨기 전에는 어떤 업적을 달성해 냈는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디에 소속되었는가.

그리고 가장 큰 의문점은.

- 어떻게 그리폰을 소환한 것인가?

그게 가장 큰 화제였다.

진현우가 쓴 스킬 대부분이 놀라웠지만, 그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 소환 스킬이었다.

브로큰 월드에서도 귀하다는 소환 스킬.

소환한 몬스터도 다른 게 아닌 그리폰이다.

- 고산지대의 폭군, 보스 몬스터.

평범한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 몬스터를 소환해서 다뤘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다양한 길드들이 반응했다.

여태껏 움직이지 않던 길드들이.

"하! 상회 입찰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했던가. 이거, 이번에는 해야 할 거 같은데."

전원 무투파 길드원으로 그 이름에 걸맞는 용맹함을 가진 사자심 길드.

"네메시스와 성향이 비슷한데도 영입을 거절했다? 흠, 뭔가 목적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도 '고객'이 되어 줄 수는 있겠지."

"언제 초대장이나 보내야겠군."

뛰어난 정보력을 가졌으며 어둠 속에서 적들을 처리하는 전문가들을 지닌 추혼 길드.

"얘, 우리 층에는 언제 오냐? 뭔가 느낌이 좋아. 흐흐, 나한테 운을 갖다줄 것 같거든?"

수많은 무법자가 속해 있으며, 뛰어난 '직감'을 가진 자가 이끄는 아웃로우 길드.

"뭐? 진현우? 제법이긴 한데, 그래 봤자...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시기나 하겠냐?"

"역시 그렇죠? 일단 체크만 하겠습니다."

"그래."

5대 길드 중 단연 최고라고 꼽히는, 최고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는 유일한 길드.

제우스 길드까지.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5대 길드가 진현우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에픽 퀘스트의 무게감이라는 거겠죠."

평범한 업적이 아니라 위업.

여태껏 몇 번 나타나지도 않은 것이 에픽 퀘스트였고, 그 난이도는 하나같이 극악하다.

이번 '폭군의 복수'도 그렇다.

"5대 길드라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퀘스트였어요. 특히 그 레벨이라면 더더욱."

"기믹 때문인가요?"

"네. 시간을 들인다면 깰 수 있는 기믹이지만, 이번에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죠."

네메시스의 길드장, 윤서희가 말했다.

진현우는 지구로 귀환했고, 돌아오자마자 협회의 요청대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에픽 퀘스트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걸 읽은 윤서희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피해는 최소화했어. 게다가 기믹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움직임까지.'

그걸 봤기에 단언할 수 있었다.

"5대 길드, 심지어 그 잘난 제우스 길드라도 진현우 씨가 한 것처럼은 못 했을 거예요. 플레이어든 왕국이든 큰 피해를 입었겠죠."

자신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유저'라면 알 것이다. 폭군의 무덤을 돌파해야지만 이 퀘스트를 깰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그 정도인가요?"

"네. 그 정도입니다."

그녀의 얘기를 듣던 네메시스 길드의 부길드장, 윤하연이 두 눈을 반짝거렸다.

"언니, 그런 사람이니까 영입하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 높이라고 했죠?"

"씨잉, 가족인데 진짜. 네, 네, 알았어요! 그런 눈으로 좀 보지 마. 나 간 떨려...."

친동생인 윤하연을 보는 윤서희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금방이라도 씹어먹을 듯한 기세.

윤서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이, 언니도 영입하고 싶다며? 언니답지 않게 여러 번 달라붙고 그랬었...."

"너 진짜 죽을래?"

"...."

윤하연이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윤서희가 한 사람을 이렇게 오랫동안 영입하려 한 건 처음이니까.

"생각이 바뀌었어요."

"뭐가 바뀌... 아니, 바뀌셨다는 말씀은?"

"누구 밑으로 들어갈 사람이 아니에요."

윤서희는 진현우를 그렇게 정의했다.

한 집단에 다수의 우두머리가 있을 수는 없다. 오직 우두머리는 하나여야만 하고, 그 우두머리를 도와줄 인재들이 있어야만 한다.

"네메시스에 들이면 당연히 좋겠죠. 저 사람은 앞으로 더 많은 업적을 이룰 테니까. 근데 저 남자를 들이면 제 존재감이 죽어요."

"그 정도예요?"

"예. 네메시스라는 길드를 아예 저 남자한테 맡길 생각이라면 그것도 괜찮겠죠. 흐음."

윤서희가 갑자기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을 본 윤하연이 황당해했다.

"아니, 길드장님. 진심이에요?"

"아뇨, 아니에요. 네메시스는 제가 이끌어야 해요. 굉장히 매력적인 아이디어긴 한데."

"매력적은 무슨 매력적이야... 에요!"

순간 정말로 혹했다.

윤서희는 진현우가 신입일 때부터 지켜봤다. 그가 어떤 일을 해 왔는지 잘 안다.

그리고 그게.

'나는 할 수 없는 일들이었어.'

1층에서 아그니스의 지배를 끝낸 것.

그리고 카오틱과 몬스터들에게 시달리던 프레아 왕국을 놈들로부터 완전히 해방한 것.

두 가지는 윤서희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 사람이...."

윤서희는 스크린을 응시했다.

보이는 것은 그리폰을 소환하고, 강대한 폭군을 쓰러트리는 진현우의 모습이었다.

"길드를 만든다면."

세계의 탑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고이다 못해서 썩어 버린 이 탑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까.

그런 기대가 들었다.

그리고 만약 진현우가 그렇게 한다면.

'전적으로 지원할 텐데.'

5대 길드 중에서도 별종으로 꼽히는 네메시스는, 그렇기에 별다른 아군이 없었다.

진현우라면 아군이 되어 줄 것이다.

그가 이끄는 길드라면.

"하아...."

윤서희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가 나온 화면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모습. 이상하기도 하고, 여태껏 본 적이 없는 광경이라서 윤하연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언니, 사랑에 빠졌어? 여태껏 모태 솔로였던 우리 언니가 드디어...."

"너 진짜 뒈질래?"

윤서희가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깨갱했지만.

그렇게 여러 길드가 진현우에게 감탄하는 와중에, 분노를 드러내는 길드가 있었다.

"그리폰... 하, 이 개새끼가."

칼리 길드. 그 길드장인 임천우.

진현우를 강압적으로 영입하려다가 그 보복으로 길드 하우스도, 재산도 잃은 남자.

일련의 사건 때문에 칼리 길드는 명성을 잃고 계속 쇠퇴해 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시발, 누군가 했더니 이 새끼였네?"

임천우는 길드 하우스가 불탄 게 칼리 길드에 원한이 있는 길드의 소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 그리폰의 존재가 그걸 증명했다.

"그래, 뭔가 이상하다 했지. 고산지대에 있을 그리폰이 길드 하우스에 왜 나타나냐고."

"...저놈이 소환한 걸까요?"

"멍청아, 그걸 말이라고 묻냐?"

어떤 집단이 노린 것인지 찾기 위해서 여태껏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 복수하기 위해서.

칼리 길드는 원한은 무조건 갚는다.

"...기회를 만들어야겠어."

임천우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저 새끼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 * *

진현우는 한동안 루윈 대륙에 머무르면서 다양한 종류의 퀘스트를 수행했다.

폭군이라는 재앙이 사라진 루윈 대륙은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기에 할 일이 많았다.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한계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해당 층에서 경험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50레벨에 도달했다.

루윈 대륙의 입장 가능 레벨은 50레벨까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은 셈이다.

진현우는 곧바로 지구로 귀환했다.

"음, 일단 협회부터 가야겠군."

지구로 귀환한 진현우는 에픽 퀘스트에 대한 보고서를 쓴 후, 자격증을 갱신했다.

그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아니, 이게... 한 번에...."

자격증 갱신 업무를 맡은 플레이어 협회 직원의 예상은 아득히 넘어섰지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격증을 건넸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자격증을.

"A, A 등급으로 승급하셨습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음, A 등급 혜택은...."

A 등급.

최하 등급이었던 진현우의 등급이 단번에 상위 등급인 A 등급에 도달한 것이다.

여태껏 거의 없었던 일이었기에 협회 직원도 감정을 숨길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혜택, 뭐 이것저것 많기는 한데.'

각종 지원이나 혜택 등 많다.

다만, 지금의 진현우에게 크게 유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A 등급으로 승급하는 걸 선택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 어떠신가요?"

"좋네요. 오랜만에 나온 김에 게이트나 공략할까 싶은데 명단 좀 보여 주시겠어요?"

"아, 네! 등급은...."

"A 등급만 입장 가능한 걸로."

바로 이것이다.

게이트 입장 조건. 입장 레벨이 높은 게이트는 플레이어 등급까지 따질 때가 있다.

그래서 좋든 싫든 자격증 갱신을 해야 한다.

"네, 여기 있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진현우의 눈앞에 게이트 목록이 나타났다.

A 등급 이상의 플레이어만 공략 가능한 게이트들. 당연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세다.

그는 재빠르게 목록을 훑었다.

'이번에 에픽 퀘스트를 공략했으니 어느 게이트를 가든 환영받겠지.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그리폰을 드러냈다.'

진현우가 그리폰을 다룰 수 있는 걸 세간에 드러냈다. 딱히 능력을 숨길 생각은 없지만.

문제는 그리폰에 엮인 사건이 있다는 것.

'칼리 길드가 병신이 아니고서야....'

자기네들 길드 하우스에 갑자기 나타난 그리폰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고산지대의 지배자였던 그리폰이, 고산지대도 아니고 생뚱맞은 곳에서 나타났는데.

굉장히 의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폰을 다루는 사람이 있다?'

의구심이 모두 풀리는 순간이다.

칼리 길드는 이제 누가 범인인지 알 것이다. 그럼 그걸 플레이어 협회에 알릴 것인가?

그건 아니다.

'임천우의 성격을 고려하면.'

직접 죽이려고 들 터.

뭣보다 놈들도 떳떳한 입장이 아니다. 카오틱을 썼고 진현우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그럼 얘기는 간단하다.

"내가 판을 직접 깔아 주면 되겠지."

지금 칼리 길드는, 임천우는 진현우를 살인 멸구 할 수 있는 판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 판을 만들어 줄 생각이다.

겸사겸사 요호도 찾으면서.

'찾았다.'

게이트 목록을 훑던 진현우가 멈췄다.

그가 찾던 게이트의 이름이 보였다.

[현혹의 숲.]

· 분류: 침식형 게이트.

· 난이도: A.

· 레벨: Lv.50~Lv.80.

· 최대 인원: 30명.

· 목표: 현혹의 숲의 파훼.

· 게이트 오픈까지 남은 시간: 64:35.

· 설명: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현혹의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혹의 숲은 방문하는 자들을 홀리는 곳. 미로와도 같은 숲을 돌파하여 현혹의 숲을 완전히 파훼하여야만 한다.

* 추가 사항 1. B 등급 이상 플레이어만 참가 가능. 개인으로 지원할 경우는 A 등급 이상.

* 추가 사항 2. 현혹의 숲이라는 이름답게 정신 계통의 공격이 있을 거라 예상됨. 그에 맞는 방어는 철저하게 갖추고 진입할 것.

현혹의 숲.

전생에 큰 악명을 떨쳤던 게이트다. 플레이어 원정대를 몇이나 잡아먹었던 게이트.

그러고 실패해서 게이트가 해방되었고, 그 일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안에 있던 요호가 해방된 건 당연했고.

'하, 이게 A 등급 게이트라니.'

이 게이트는 A 등급 난이도가 맞다.

'원래는' 그랬다. 지금은 그보다 더 높다.

'64시간이면... 나타나고 2주일 지났나.'

현혹의 숲을 공략하는 법은 간단하다.

이 게이트가 나타나자마자 공략하면 된다. 안에 있는 놈들에게 시간을 줘서는 안 된다.

'시간을 주면 놈들은 성장한다.'

요호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먹고 한층 높은 단계에 도달해 버린다.

이번 원정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게이트에 진입하고, 그 결과 처참하게 실패한다.

아주 처참하게.

'흠, 그래도 일단 A 등급 게이트니까.'

임천우는 실력이 있는 플레이어다.

실력도 없는데 야바위로 칼리 같은 대형 길드의 우두머리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자신감이 이번에는 독이 되겠지."

진현우는 게이트 의뢰를 수락했다.

현혹의 숲 게이트를.

81화

강제 협조

진현우가 신비로운 숲 공략에 참가한다.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한 단체는 이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남자를 찾아갔다.

"그러니까, 자리를 좀 만들어 달라?"

비욘드의 길드장, 정석만.

이번 신비로운 숲 게이트 공략을 주도하는 길드로, 최근 나름대로 이름을 떨치는 길드다.

지금 그는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니, 이해는 했지. 근데 뜬금없어서."

"자세한 사정은 알 필요 없잖아."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정석만은 맞은편에 앉은 칼리의 길드장, 임천우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우리 길드가 메인인 게이트다. 자세한 사정도 알려 주지 않고 칼리 길드원 5명을 받아 달라는데,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어차피 A 등급 게이트잖아. 인원 5명 공백이 생겨도 크게 어려울 건 없잖아. 안 그래?"

"아니, 그게 무슨...."

"그 인원에 나도 있을 거다."

정석만이 입을 꾹 닫았다.

이건 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신비로운 숲 게이트에... 네가 직접 참가하겠다, 지금 이 말인가?"

"잘 아네. 바로 그 말이야."

"흠."

정석만은 고민에 빠졌다.

칼리 길드원들이 참석하는 거면 그리 달갑지 않다. 분쟁만 일으킬 확률이 높으니까.

하지만 임천우가 참석한다면?

'이건 또 괜찮지.'

게이트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성격은 개차반이고 뒷소문도 안 좋지만, 어쨌든 임천우는 실력 있는 플레이어니까.

괜히 칼리의 길드장이 아니다.

"그건... 나쁘지 않군."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거라 봐도 되나?"

"흠, 그 전에 하나. 목적이 뭐지? 왜 참석하는 건지 대강이나마 알아야 할 거 같다만."

임천우는 정석만을 빤히 봤다.

자신에게, 그리고 칼리 길드에게 빚진 게 있는 놈이다. 입단속은 확실히 할 수 있을 터.

그렇게 판단했기에 입을 열었다.

"죽일 놈이 하나 있거든."

그 게이트에 참석하는 플레이어.

진현우를 신비로운 숲에서 죽이겠노라고.

*

협회에서 게이트 참석 신청을 한 후.

진현우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파라켈수스 길드의 이수경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바빠 보였다.

"흠, 이 정도 가격으로 쳐준다고? 괜찮네. 이건 2층으로 보내. 그리고 이것들은...."

"프레아 왕국이 자재를 원한다. 이 가격이면 오히려 우리가 손해인데. 뭐, 좋아. 이 기회에 왕국과 좋은 인연을 쌓으면 이득일 테니."

"이 재료들은...."

여러 길드원에게 바삐 명령을 내리는 모습.

진현우는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수경이 그의 존재를 인지했다.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계셨겠군요."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예.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요, 뭐."

예의상 주고받는 인사였다.

진현우는 어제 이수경에게 만나서 부탁할 것이 있다고 미리 연락을 보냈다.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많이 바쁘신 것 같군요."

"예. 샬럿이 루윈 대륙을 복구하는 걸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얻을 이득이 꽤 크다고 판단해서 길드 차원에서 돕고 있습니다."

루윈 대륙은 피해를 복구하고 있다.

그게 끝난다면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려 할 터. 이 과정에서 큰 공헌을 한다면, 어쩌면 쓸 만한 점령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수경은 그리 판단했다.

"그래서, 여기로 오신 이유는...."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혹시 '불꽃의 씨앗'을 네 개 만들어 주실 수 있을까요? 거기에 회복 마법진하고 사일런스 스크롤도."

"불꽃의 씨앗 말입니까?"

이수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꽤 귀한 재료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만들 방법은 있으니까.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있었다.

"불꽃의 씨앗은 섬세하게 다뤄야 하는 아이템입니다. 잘못 다뤘다가는 대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그렇다면, 음...."

이수경은 진현우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길드원에게 불꽃의 씨앗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이 아이템은 워낙 특수해서 따로 재고를 만들 수가 없는 아이템이었다.

"제작이 완료되거든 일주일 안에는 무조건 사용하셔야 합니다. 기간을 넘기면 안에 담긴 기운이 모조리 사라지는 아이템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리고 말씀드릴 게...."

이수경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게이트를 공략하신다더군요."

"네. A 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려고요."

"비욘드라는 길드가 있습니다. 대형 길드는 아닌데, 나름대로 실력은 있는 길드입니다. 그 길드가 게이트 공략을 주도한다고 들었습니다."

진현우도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다.

이수경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비욘드는...."

"칼리 길드하고 친분이 있겠죠?"

"...."

이수경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하려는 말을 미리 예측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선수를 쳤으니, 그럴 수밖에.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압니다. 칼리 길드하고 친분이 있는 길드니까 게이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 아닌가요?"

"음, 예. 맞습니다. 잠깐 조사했었는데, 칼리 길드하고 트러블이 있으시더군요."

"감사합니다. 근데 뭐, 상관없어요."

진현우가 피식 웃었다.

"생각대로 안 될 테니까."

자신이 넘치는 말.

진현우가 여태껏 이뤄 온 일들이 그 말에 신빙성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

불꽃의 씨앗은 금방 완성됐다.

이수경과 헤어진 진현우는 집으로 향했다.

"아, 잡초 더럽게 많네."

마당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정기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단독 주택의 마당은 정글을 보는 듯했다.

정원이 있어서 더더욱 그래 보였다.

"다 태워 버릴까."

그런 욕망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진현우는 도끼로 마당의 잡초들을 대강 베어 낸 후, 마당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리고 아이템들을 꺼냈다.

"일단, 음. 이것들부터 처리해야겠군."

이번 여정에서 얻은 아이템들.

그중에서 특이하게 생긴 결정체와 낡았으면서 어딘가 불길한 왕관을 꺼냈다.

[망집의 자취 (전설)]

· 설명: 폭군의 힘이 담긴 결정체다. 지금은 이용할 방법이 없지만, 제대로 된 과정을 거친 후 정화해서 복용하여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이 아이템은 진현우에게 귀속되었다.

· 효과: 알 수 없음.

[폭군의 진노 (일반)]

· 설명: 폭군이 사용하던 왕관이다. 지금은 쓸 수 없으나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서 정화한 후 감정하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 효과: 알 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망집의 자취와 폭군의 분노였다.

지금은 쓸 방법이 없는 아이템. 그냥 썼다가 자칫 잘못하면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

[해주의 십자가 (전설)]

· 설명: 강력한 해주의 힘이 담긴 십자가다. 일정 범위 안의 저주를 완벽하게 해주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 십자가다.

이것 말고 해주의 힘이 담긴 아이템이면 뭐든 상관없다. 다만 전설 등급보다 낮은 아이템이라면 엄청난 숫자를 써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완전히 해주는 안 될 테고.

'샬럿한테 새삼 고마워지는데.'

이 정도 아이템이면 많은 명성이 들었을 것이다. 그걸 진현우를 위해서 써 준 셈이니까.

고마워할 수밖에 없다.

"좋아, 어디...."

진현우는 십자가를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망집의 자취와 폭군의 진노를 십자가 반경에 놔둔 후, 무릎을 꿇었다.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 파아아앗!

사방을 가득 메우는 강렬한 빛.

잠시 후, 소리가 들렸다. 푸쉬이익! 하는 무언가가 불타는 것 같은 소리. 그리고.

- 끼아아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였다.

심약한 이가 들었으면 바로 기절할 정도로 끔찍한 비명이었지만, 진현우는 무심했다.

단지 빛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릴 뿐.

이윽고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 해주의 십자가가 '망집의 자취 (전설)'와 '폭군의 진노 (일반)'를 정화했습니다.

- 두 아이템에 깃든 저주가 사라졌습니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망집의 자취 (전설)]

· 설명: 폭군의 힘이 담긴 결정체다. 강력한 저주가 깃들어 있었지만 완벽하게 정화됐다.

사용할 경우 A 등급의 특성 하나를 승급하며, A 등급의 특성 하나를 생성한다.

이 아이템은 진현우에게 귀속되었다.

[폭군의 진노 (일반)]

· 설명: 폭군이 사용하던 왕관이다. 굉장히 강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 효과: 알 수 없음.

* 강한 사념이 남아 있다.

망집의 자취를 본 진현우는 고민에 빠졌다.

'특성을 하나 생성하는 건 좋은데, 지금은 승급할 만한 특성이 마땅치가 않아.'

그게 문제였다.

지금 진현우가 가진 A 등급 특성은 영혼 중재와 신성한 마력, 이 두 개뿐이다.

'이것들을 승급시켜 봤자....'

A 등급으로 제 성능을 다 내는 특성들이다.

승급시키면 더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쓰기에는 망집의 자취가 너무 아깝다.

진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묵혀 둬야겠군."

따로 방법이 없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기겠지. 진현우는 망집의 자취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폭군의 진노를 바라봤다.

'기억 감정을 쓰는 건 오랜만인데.'

이 안에 담긴 사념이 누구의 것인가.

말할 것도 없었다. 폭군의 것이다. 진현우는 쓰게 웃으면서 기억 감정을 사용했다.

- 화아악!

눈앞에 보이는 것은 폭군의 기억.

꽤 뛰어난 왕이었던 그가 어떻게 타락했으며, 왜 불사에 집착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보여 주고 있었다.

- 영원히 살고 싶다. 짐은 영원히 살아서 이 나라를 영원토록 다스릴 것이다. 반드시!

하지만 폭군은 그리하지 못했다.

그게 놈의 미련이었다. 영원히 나라를 다스리고 싶었는데 그리하지 못했다는 미련.

진현우가 해소해 줄 수 없는 미련이다.

무엇보다.

- 짐이 네놈에게 힘을 빌려줄 것 같으냐? 짐을 죽인 반역자에게 그리할 것 같으냐!

"음, 그건 그렇지."

폭군은 진현우에게 힘을 빌려줄 의향이 없었다. 애초에 놈을 죽인 당사자였으니까.

기억 감정은 사념에 남은 기억을 읽고, 그 사념이 가졌던 힘을 빌릴 수 있는 스킬이다.

진현우가 회귀하고 지금까지 만났던 사념들은 나름대로 그에게 우호적인 편이었다.

'나한테 우호적이지 않거나, 성향이 안 맞아서 힘을 빌리기 힘든 사념이 있단 말이지.'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빌려주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 뭐? 큭... 크아아아악!

바로 앞에 폭군의 사념이 보였다.

새까만 진흙처럼 생긴 사념. 진현우는 그 사념을 붙잡고 천천히 짓이기기 시작했다.

"힘은 강제로 빌릴 수도 있거든."

- 자, 잠깐, 으으... 으아아아아!

콰득!

무언가 완전히 짓이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난 후,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기억 감정에 성공했습니다.

- 잔혹한 폭군, '마그누스'의 사념이 가지고 있던 힘을 강제로 전승합니다. 폭군의 진노 (일반)가 원래의 형태를 되찾습니다.

- 스킬 '영역 선포 (S, Lv.1)'를 새로이 익혔습니다!

· 영역 선포 (S, Lv.1): 폭군의 영역을 전개한다. 폭군을 섬기던 언데드 부대를 소환하며, 이를 목도한 적들의 능력치가 감소한다. 또한 영역 안에서 죽은 적은 언데드로 부활한다.

* 일주일에 한 번 사용 가능하다.

진현우는 손을 털며 코웃음을 쳤다.

"곱게 줄 것이지, 까불고 있어."

82화

빙정

[폭군의 진노 (전설)]

· 설명: 폭군이 사용하던 왕관이다. 그가 잔혹한 통치를 펼쳤다는 상징물이다.

- 효과: 폭군의 힘, 검은 가호, 폭정, 강화

* 폭군의 힘: 모든 스킬의 대미지가 20% 증가하며 스킬의 자원 소모량이 30% 감소한다. 또한 소환한 언데드들을 강화한다.

* 검은 가호: 사이한 기운이 착용한 방어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또한 암흑 계통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을 50% 증가시킨다.

* 폭정: 착용자에게 공포를 느낀 적을 상대할 경우, 대미지가 30% 추가로 증가한다.

* 강화: 모든 능력치가 +13 상승한다.

감정 아이템을 확인한 진현우는 휘파람을 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아이템이었다.

단독으로 모든 능력치를 13이나 올려 주고, 그밖의 옵션도 하나같이 좋다.

'전설 등급 값어치를 하네.'

그리고 영역 선포.

일종의 광역 버프 스킬이었다. 대규모 전장 같은 곳에서 쓰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언데드를 소환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어.'

전장의 흐름을 바꾸기에 적합한 스킬이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때 쓰기도 좋았고.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쿨타임이다.

'일주일에 한 번. 이건 숙련도를 올리면 어느 정도 해결될 것 같기는 한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진현우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템을 봤다.

"쓰읍."

얼어붙은 심장과 불꽃의 씨앗. 상극의 기운을 가진 아이템들이라 굉장히 대조적이었다.

진현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생 좀 하게 생겼군."

이 뒤에 올 고통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안 쓸 수도 없는 상황.

'하는 수밖에 없겠지.'

진현우는 두 아이템을 집었다.

[얼어붙은 심장 (전설)]

- 설명: 한때 얼음의 정령왕이었으나 타락했던 자가 남긴 심장. 악으로 물들어 있었으나 지금은 원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복용할 경우 최대 S 등급까지 성장하는 A 등급의 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획득 시 귀속한다.

얼어붙은 심장.

특성을 준다는 점에서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아이템이다. 하지만 하나 부작용이 있다.

'그냥 섭취하면 죽는다.'

설명에 있는 '하지만....'이라는 문구가 단서다. 척 봐도 불길해 보이는 문구였다.

뭣 모르고 먹으면 온몸이 얼어서 동사한다.

즉, 준비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걸 만들어 달라고 한 거지."

진현우는 불꽃의 씨앗을 살폈다.

[불꽃의 씨앗 (영웅)]

- 설명: 지독한 불길이 담긴 씨앗이다. 무언가를 만드는 용도로 쓰거나, 씨앗을 해방하여 강렬한 불길을 일으키는 용도로 쓸 수 있다.

일단은 씨앗이기에 먹을 수는 있지만....

영약이나 그런 게 아니다.

단순한, 아니 꽤 고급스러운 재료 아이템일 뿐, 먹는다고 뭐가 생기거나 하진 않는다.

대신에 뭐가 일어나기는 한다.

'내 몸속에 불을 지르지.'

말 그대로 불을 지른다.

씨앗이 소화되는 순간부터 몸속이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씨앗의 설명에 적힌 문구는 절대로 먹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문구인 셈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먹을 일도 없고.

'근데 먹어야 하는 상황이 와 버렸네.'

얼어붙은 심장 때문이다.

이 아이템은 복용하는 순간부터 몸 안팎을 얼린다. 심장이 다 소화될 때까지 계속 얼어붙는데, 이걸 못 버티면 그대로 죽는다.

사실 정석적인 방법은 따로 있다.

'근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얼어붙은 심장을 소화할 수 있는 정석적인 방법을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럴 여건도 안 됐고.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일단 회복의 마법진부터 설치하고."

파라켈수스 길드에 불꽃의 씨앗 제작을 의뢰하면서 마법진이 담긴 스크롤을 샀다.

[회복의 마법진 (영웅)]

- 설명: 마법진 위에 있는 자들을 치유하는 마법진이다. 10분 정도 유지되며, 적과 전투 중일 때는 마법진의 효과가 반감된다.

이런 종류의 스크롤은 가격이 비싸다.

진현우는 10만 골드를 주고 산 스크롤을 찢었다. 그러자 신성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 마법진이 조금이라도 도와줄 것이다.

진현우는 마법진 위에 선 후.

"헙."

- 불꽃의 씨앗을 섭취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위가 뜨거워집니다....

곧바로 불꽃의 씨앗을 섭취했다.

불길, 아니 용암을 삼킨 것만 같다. 엄청난 열기를 가진 것이 식도를 지나가서 위로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위에 도착하고, 잠시 후.

- 쿠웅! 치이이익!

"흐읍!"

몸속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위에 도착한 불꽃의 씨앗이 녹아내리면서 그 안에 담긴 불길이 해방된 것이다.

그렇게 해방된 불길은 장기를 불태우고, 살을 태우고, 진현우를 삼켜 버릴 것이다.

- 얼어붙은 심장 (전설)을 사용합니다.

- 지독한 냉기가 몸속에 스며듭니다. 적절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냉기가 당신의 몸을 얼리기 위해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 얼어붙은 심장을 사용했다.

진현우에게 흡수되면서 사라지는 심장. 그 뒤에 체내에서부터 지독한 냉기가 일어났다.

냉기가 온몸을 얼릴 것처럼 움직였고.

- 쩌적, 쩌저적!

- 화르르륵!

이미 몸속을 태우고 있던 불길과 충돌했다.

진현우의 전신을 얼리려고 하는 냉기와 진현우를 삼키려고 하는 격렬한 불길.

두 기운이 서로 맞부딪쳤다.

'새끼들, 더럽게 싸워 대네.'

장기가 불탄다. 살이 얼어붙는다.

피부가 녹아내리다가 얼어붙었다.

진현우는 그 고통을 온전히 느꼈다. 고통을 덜어 낼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 화아아악!

최후의 승자는 냉기였다.

전설급 아이템인 얼어붙은 심장의 냉기는 불꽃의 씨앗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게 진현우에게 좋은 소식인가?

- 쩌적!

그건 아니었다.

방해물을 치우는 데 성공한 냉기는 이번에야말로 진현우를 얼리겠다는 듯 움직였다.

그렇기에 진현우는 한 번 더.

- 불꽃의 씨앗을 섭취했습니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위가 뜨거워집니다....

불꽃의 씨앗을 복용했다.

다시금 불길이 피어오른다. 진현우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고문당하는 기분이군.'

그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고문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몸속이 녹아내리고 얼어붙는 고통은 무릇 사람이라면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이었다.

'그래도 뭐, 이 정도면.'

하지만 진현우는 견뎌 냈다.

끔찍한 고통인 것은 맞으나, 진현우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고통에 적응했으니까.

'흐, 옛날에 이랬던 적이 있었지.'

진현우는 오랫동안 탑에서 생존했다.

수많은 일을 겪었다. 몸이 녹아내린 적도, 조각난 적도, 완전히 파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진현우는 이 자리에 서 있다.

그 모든 것을 견뎌 냈다는 뜻이다.

"후우우우...."

그렇기에 이번에도.

- 지독한 냉기가 사그라듭니다. 얼어붙은 심장의 기운을 온전히 흡수했습니다.

- A급 특성 '빙정(氷晶)'을 습득했습니다.

고통을 견뎌 낼 수 있었다.

진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 빙정(氷晶) (A): 얼음의 정령왕의 기운을 흡수했다. 냉기 저항력이 60% 증가하며 얼음 계통 스킬의 대미지가 30% 증가한다.

마력이 담긴 공격에 얼음 속성을 부여할 수 있으며, 얼음 정령과의 친밀도가 상승한다.

하지만 그걸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진현우는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해 냈다. 피에는 녹아내린 내장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고통은 감내할 수 있었지만, 그의 몸에 새겨진 치명적인 부상까지 극복할 수는 없었다.

"젠장, 별짓을... 다 하는구만."

이대로는 죽는다.

진현우는 손을 떨면서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템, 왕실의 비약을 다급히 마셨다.

- 왕실의 비약 (전설)을 복용했습니다.

- 모든 능력치가 +15 상승합니다. 복용자가 입은 치명적인 부상을 완벽히 치료합니다.

진현우는 빈사 상태에 이르렀던 신체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왕실의 비약의 효과였다.

'또 하고 싶은 짓거리는 아니야.'

고통을 견디는 것은 익숙하지만 죽어 가는 걸 느끼는 것은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다.

하지만 그 결실은 달콤했다.

진현우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콰아앙!

그리고 허공을 힘껏 강타했다.

파쇄권이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켰고, 그 충격파에 날카로운 살얼음이 낀 것이 보였다.

날아간 살얼음이 땅에 꽂혔다.

'마력 소모 한번 살벌하네.'

빙정, 스킬에 빙결 속성을 부여하는 특성.

당연하지만 마력 소모는 더 커졌다.

속성 부여에 스킬 대미지 30% 증가까지 붙었으니,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럼 어디, 오랜만에....'

진현우는 착용한 아이템을 전부 벗었다.

그러곤 상태창을 확인했다.

[진현우]

· 레벨: 50

· 클래스: 웨펀 마스터

· 칭호: 왕 시해자

· 근력: 175 · 민첩: 160

· 체력: 155 · 마력: 115

[특성]

· 영혼 중재 (A), 신성한 마력 (A), 빙정 (氷晶) (A)

· 노련한 사냥꾼 (B), 야만 전사 (B), 무기의 달인 (B), 약점 파악 (B), 재능 개화 (B), 격투의 달인 (B), 각인된 심장 (B)

[스킬]

· 기억 감정 (Master)

· 영역 선포 (S, Lv.1)

· 선풍 (A, Lv.5), 섬광 (A, Lv.4), 영혼 동물 소환 (A, Lv.3), 광휘 (A, Lv.3)

· 특제 덫 (B, Lv.5), 진각 (B, Lv.4), 파쇄권 (B, Lv.5), 피에는 피 (B, Lv.2), 검은 화살 (B, Lv.3), 대분쇄 (B, Lv.3)

[직업 스킬]

· 제1식: 유수 (A, Lv.1)

· 제2식: 해일 (S, Lv.1)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훌륭한 상태창이었다.

진현우는 특성을 가만히 바라봤다.

'슬슬 특성들 레벨이 오를 때가 됐는데.'

50레벨이 넘으면 직업 특성이 하나둘씩 승급하기 시작한다. 웨펀 마스터의 특성이 A 등급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진현우는 상태창을 닫았다.

'좋아. 그럼 마지막으로 남은 건.'

폭군이 드롭한 재료 아이템들이다.

이걸 맡길 만한 곳은 한 곳뿐.

"네메시스로 가야겠군."

진현우는 네메시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이템 제작, 특히 대장장이 쪽으로 유명한 것이 네메시스였으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는 윤서희에게 연락한 후 집을 나섰다.

* * *

- 윤서희: 강대훈 어르신한테 말씀드렸어요. 만나시겠다고 하셨으니 부탁해 보세요.

진현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네메시스는 다양한 분야의 장인이 모인 것으로 유명한 길드다. 대장장이는 특히나.

거기에 아이템 제작을 의뢰할 생각이었다.

"더럽게 늦었군.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네메시스 측에게 연락을 해 둬서 그런지, 1층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노인. 그리고 그를 모시는 것으로 보이는 제자들이 몇 명 보였다.

'오, 이 사람이 여기 있네?'

진현우도 알고 있는 사람이다.

명장 강대훈. 네메시스에 소속된 장인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장장이 계통의 히든 클래스로, 미래에는 직접 길드를 차려서 운영하기도 했었다.

'하긴, 아직은 네메시스가 멀쩡하니까.'

강대훈이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진현우는 흘깃 시계를 봤다.

"시간은 맞춰서 온 거 같은데요."

"이잉, 이놈이 말대꾸를. 어르신하고 약속을 했으면 1시간은 일찍 와야 할 것 아니냐."

"그러기에는 제가 좀 바빠서요."

"아주 한마디를 안 지는구만."

강대훈이 혀를 내둘렀다.

진현우와 전생에서 인연이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저 노인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도 않는다.'

실력에 자신 있기 때문이다.

진현우와 만났다는 것 자체가 관심이 있다는 뜻. 말투는 까칠하지만 속정이 깊다. 그리고 자기한테 살짝 대드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너무 까부는 건 안 좋아하고.'

좀 까다로운 사람이기는 한데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다. 아니, 오히려 좋다.

강대훈은 오랫동안 살아남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재료는 가져왔나?"

"예. 확인해 보시죠."

"음, 흐으음."

진현우는 아이템들을 건넸다.

폭군의 뼈와 불사자의 정수, 사기의 결정체와 폭군의 부러진 검 같은 전리품들을.

그걸 본 강대훈의 눈빛이 달라졌다.

"에픽 퀘스트를 깼다더군. 거기서 얻었나?"

"그렇죠, 뭐."

"어쩐지 진귀한 것들만 있다 싶었지. 이걸로 내가 뭘 만들어 줬으면 좋겠나?"

"갑옷이 필요합니다."

군단 여왕 세트는 좋은 아이템이지만 15레벨에 착용하는 아이템이다. 이제 50레벨에 도달한 진현우가 쓰기에는 레벨이 너무 낮다.

아이템을 바꿀 때가 됐다는 뜻이다.

"갑옷, 갑옷이라. 그것도 좋지. 음!"

강대훈은 진현우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현우는 딱히 피하지 않고 눈빛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참을 쳐다보더니.

"나쁘지 않군. 좋아, 갑옷으로 만들어 주지."

"...!"

강대훈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곁에 있던 제자들이 놀란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일주일은 필요하겠군. 잘못 다루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아이템들이야. 각별히 신경 써서 작업해야 할 것 같구만."

"적당하네요. 그렇게 해 주세요."

"일주일 뒤에 찾아오게."

강대훈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지하로 향하는 그를 제자들이 뒤따랐다.

진현우는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이제 신비로운 숲으로 가면 되겠군.'

게이트를 공략할 때가 됐다.

83화

여우?

비욘드 길드.

창설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실력이 제법이라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길드다.

아마 이대로 성장하면 대형 길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 정도.

하지만.

'대형 길드는 개뿔, 죄다 죽는데 무슨.'

비욘드는 대형 길드가 되지 못한다.

그 전에 처참하게 멸망한다. 신비로운 숲 게이트에서 완벽하게 실패하면서 길드장과 핵심 길드원들이 죄다 죽었기 때문이다.

핵심 전력을 잃었는데 길드를 어떻게 유지하겠는가. 비욘드는 그렇게 해체됐다.

'딱히 살릴 가치는 없는 길드긴 한데.'

칼리 길드하고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놈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텐데도 참석하게끔 놔둔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겠지.

"둘 다 처리해야겠군."

임천우는 죽인다.

비욘드 길드원들은 놔두더라도 정석만은 죽여야 한다. 놈은 살려 둘 이유가 없다.

진현우는 받은 건 되갚아 주는 성미를 가졌다. 그냥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모두 모였나?"

신비로운 숲 공략대는 울산에 모였다.

울산에 있는 넓은 공장. 그곳을 엄청난 규모의 장막이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장막 너머에는, 말 그대로 별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숲이군요."

"그래. 신비로운 숲이다. 침입자를 홀린다는 숲. 제길, 신비롭게 생겨서 더 기분 나쁘네."

공장 지대에서는 볼 수 없는 광활한 숲.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연보랏빛의 기운이 감도는 신비로운 숲이 장막 너머로 보였다.

- 침식형 게이트.

간단하게 말하자면 탑 내부에 있는 던전이 지구에 나타난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게이트 주변 일대가 게이트 너머, 그러니까 탑 내부 지역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이다.

마치 탑 내부의 세상이 덧씌워지는 것처럼.

그걸 '침식'이라고 부른다.

'편하기는 방출형 게이트가 편하긴 한데.'

예전에 진현우가 대형 마트에서 공략했던 게이트가 방출형 게이트였다.

우르르 나타나는 몬스터를 처리하고 보스 몬스터까지 처리하면 닫히는 게이트.

그거에 비하면 침식형 게이트는 좀, 귀찮다.

"어제 회의에서 설명했던 건 다 들었겠지?"

공략대는 장막의 입구에 도달했다.

여기로 오기 전, 신비로운 숲 공략에 참가하는 플레이어는 모여서 회의를 열었었다.

게이트 설명이나 필요한 걸 얘기하는 회의.

정석만은 회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신비로운 숲의 기믹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상태 이상과 관련된 기믹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어떤 상태 이상인지는 모르죠?"

"어.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상태 이상에 대비할 수 있게끔 보급품들을 준비하긴 했다."

정석만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불안하긴 한데, 시발. 일단 해 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버티다가 빠지자고."

"쓰읍, 그래야겠죠."

침식형 게이트의 가장 큰 특징은 공략 도중에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당연하지만 자유롭게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회는 딱 한 번. 그리고 게이트 내부에서 일정 시간을 버텨야지만 탈출할 수 있다.

'이게 없으면 너무 부조리하긴 하지.'

침식형 게이트 자체가 워낙 위험한 데다가 제대로 된 설명도 없기에 주는 혜택이었다.

이런 혜택마저 없었으면 게이트를 공략하는 도중에 많은 플레이어가 죽었을 것이다.

있어도 많이 죽지만.

"일단, 아... 우리는 선발대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공략할 수 있으면 공략하고, 힘들면 안전지대에서 버티다가 탈출하는 거다."

"협회에서 해 달라고 한 게 있었죠?"

"어, 그래. 공장에 있던 사람이 침식에 휘말렸다더군. 갇혀 있는 민간인들 위치 파악하고,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달라고는 하던데."

정석만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우리는 생존자가 없다고 전제하며 움직일 예정이다. 게이트가 나타나고 시간이 오래 지난 상황이라서 생존 확률은 극히 낮으니까."

"우리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잘 아네. 민간인 목숨은 개뿔이."

민간인을 구할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것보다는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석만은 그리 판단했다.

"안에 들어가면 모두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으니 기억해 두도록."

"예."

정석만은 경험이 많은 플레이어다.

공략대의 대장 자리를 믿고 맡겨도 될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진입한다."

일행은 게이트에 진입했다.

화악! 빛이 시야를 가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일행은 신비로운 숲에 진입한 상태였다.

- 게이트, '신비로운 숲'에 진입했습니다.

숲은 그 이름대로 신비로웠다.

다양한 식물이 피어 있었는데,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리고 숲을 감싸고 있는 연보랏빛의 기운.

- 알 수 없는 기운이 감도는 숲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이런 시발!"

신비로운 숲에 감도는 연보랏빛의 기운이 손님을 반기는 것처럼 공략대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플레이어는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이....

"씹, 정신 계열 상태 이상인 거 같은데? 전원 보급품에서 면역 포션 꺼내서 마셔라!"

"헉! 네, 네!"

정석만의 말에 플레이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션을 복용했다. 미리 준비해 둔, 정신 계통 공격에 저항력을 갖게 해 주는 포션이다.

공략대가 준비한 건 그게 다가 아니었다.

"반지를 나눠 줄 테니까 착용해라. 정신 계통 공격에 저항력을 갖게 해 주는 반지다."

"예, 착용했습니다."

"좋아, 이 정도면 버틸 수는 있겠지."

협회는 이번 게이트를 열심히 준비했다.

여러 상태 이상에 저항할 수 있게끔 다양한 장비와 아이템을 보급품에 포함해 뒀다.

이걸로도 안심은 할 수 없긴 하지만.

"조금 전의 감각은 느꼈겠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거. 그게 정신 계열의 공격을 당할 때의 감각이다. 똑같은 감각이 느껴지거든 나한테 보고하고 포션을 마시면 된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으음, 그럼."

정석만은 긴장한 듯이 숨을 토해 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숲. 공략대는 신비로운 숲을 파훼해야만 한다.

"일단 이곳에서 잠깐 대기하면서 주변 상황부터 파악하지. 궁수하고 도적은 미리 정해 둔 대로 조를 나눠서 주변을 탐색해라."

"예. 만약 적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위험하면 도망쳐라. 멀리 탐색할 필요는 없고 주변 상황만 파악하도록."

정석만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고 궁수와 도적은 주변을 탐색하기 위해서 떠났다.

공략대는 정찰대가 돌아올 때까지 주변을 경계하면서 대기하기로 했다.

"흠, 정신 계통 공격이면 생각보다 할 만한데. 공략을 노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게다가 '그 녀석들'도 데리고 왔으니까...."

"정석만."

정석만은 공략대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이들이 있었다.

굉장히 평범하게 생긴 플레이어들이었다. 과하게, 마치 '평범함'을 꾸민 것처럼.

"임천우, 게이트에서는 말 걸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

"죄다 쫄았는데 누가 우릴 본다고."

과하게 평범한 플레이어의 얼굴이 순간 흐릿해지더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칼리의 길드장, 임천우였다.

아이템으로 얼굴을 바꾼 것이었다.

"하, 제발 조심 좀 해라. 그래서, 저 새끼 맞나? 네가 저번에 말했던 놈 말이야."

정석만과 임천우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했다. 공략대 사이에 섞인 진현우가 있는 곳을.

임천우가 이를 갈았다.

"그래. 내 길드 하우스를 턴 놈이다."

"길드 하우스를? 허, 배짱 두둑한 놈일세."

"미친 새끼지. 감히 날 털어?"

정석만은 혀를 내둘렀다.

다른 길드도 아니고 칼리의 길드 하우스를 털 생각을 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임천우가 저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죽이는 건 좋은데, 다 끝나고 해라."

"왜,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죽일 것 같나?"

"그럴 생각이 가득한 눈빛이구만. 어쨌든 A 등급 게이트야. 실력이 있는 놈이니까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거기에다가...."

정석만이 히죽 웃었다.

더없이 비열해 보이는 미소였다.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면 힘이 빠지겠지."

"그때 조용히 처리하자?"

말없이 웃는 정석만.

임천우는 그 미소에 화답했다.

"내가 바라던 그림이군."

"이번 일을 도와준 대가는 기대해도 되나?"

"물론. 저번에 약속했던 대로...."

"흐, 좋아. 만약에 게이트 공략에 실패하더라도 처리할 수 있게끔 자리를 만들어 주지."

"믿는다, 정석만."

임천우가 히죽 웃으며 물러났다.

게이트 공략에 실패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게 생겼으니 정석만도 굉장히 흡족했다.

'하여튼, 저 새끼들.'

임천우와 정석만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진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하는 게 너무도 뻔해서였다.

'처참하게 실패하는 놈이 욕심만 많아서.'

정석만은 게이트 공략에 실패한다.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이 공략대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대강은 알 것 같았다.

'정석만은 꽤 신중한 편이다. 도중에 게이트 공략이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겠지.'

그래서 최대한 버텨서 게이트를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게 치명적인 실책이 되었을 것이고.

'이 게이트는, 아니 이 숲은.'

진현우는 사방의 숲을 돌아봤다.

'한번 들어오면 탈출할 수 없는 곳이야.'

들어온 이상 무조건 공략해야 한다.

자신을 죽일 기회만 엿보는 놈들이 가득한 공략대에서는 게이트를 공략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놈들은 먹이가 되어 줄 필요가 있다.

'기회를 엿봐서 따로 움직여야겠군.'

진현우는 그렇게 결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찰대가 귀환했다.

"주변 상황은 어때?"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습니다. 몬스터도 보지 못했고요. 일단 지도를 그려 왔습니다."

"흠, 좋아."

정석만은 정찰대가 그려 온 지도를 살폈다.

"일단 여기를 베이스 캠프로 삼고 주변을 탐색하자고. 간단하게 야영지부터 만들지."

침식형 게이트의 경우, 입장하고 일정 시간 동안 게이트 근처가 안전지대로 설정된다.

플레이어에게 유용한 버프가 주어지고 몬스터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막는 안전지대.

그래서 보통은 게이트 입구 근처에 야영지를 차린 후 내부를 탐색하는 경우가 많았다.

"출발한다. 일단 목표는 탐색이다. 주변 상황을 파악한 다음에 야영지로 돌아오자고."

공략대는 걸음에 나섰다.

숲 내부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연보랏빛의 기운 덕분에 시야는 확보할 수 있었다.

정석만은 크게 숨을 삼켰다.

"사제, 마법사는 중심부로. 우리 비욘드 길드가 앞장서겠다. 궁수하고 도적들은 길을 파악하면서 접근하는 적이 있는가 파악해라."

공략대는 정석만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빠르게 진열을 갖추는 공략대. 거기서 진현우만 유일하게 역할이 없는 상황이었다.

정석만이 진현우를 봤다.

"후열은 진현우가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저 혼자서 말입니까?"

"음. 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아서 말이야.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가장 실력이 좋은 사람이 후열에서 아군을 지켜 줬으면 한다. 어때?"

얼핏 들으면 좋은 말이다.

근데 실상은.

'나는 위험할 때만 써먹겠다, 이거군.'

기여도 때문이다.

공략대 차원에서 대처할 수 있는 적들은 자기들끼리 대처하면서 기여도를 챙기고.

위험하다 싶을 때만 진현우를 부르는 식으로, 최대한 기여도를 조절하겠다는 뜻.

'속내가 뻔히 보이기는 한다만.'

거절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진현우가 바라던 결과였으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후열은 제가 맡겠습니다."

"좋군, 좋아!"

정석만은 만족스레 웃었다.

만약에 진현우가 거절했으면 설득한다고 시간을 잡아먹을 뻔했는데 다행이다 싶었다.

공략대는 길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숲. 다소 까다롭긴 하지만 결국 A 등급 게이트. 이 정도면....'

무난하게 공략할 수 있다.

정석만은 그리 생각했다. 이번에 데리고 온 이들은 비욘드의 정예 길드원들이었다.

정석만과 함께 여러 공격대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A 등급 게이트를 공략한 이들.

"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런데...."

"진짜 이쁘다, 그치?"

"어. 감탄을 안 할 수가 없네."

신비로운 숲에서도 풍경을 보고 감탄할 배짱을 가진 이들이었다. 오만이 아니라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아름답긴 하군."

그리고 실제로 풍경이 놀랍긴 했다.

아름다운 숲에 연보랏빛의 기운이 가루처럼 흩날리는 광경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정석만도 내심 감탄할 정도였다.

"경치 보는 건 좋은데 방심하진 마라."

"아, 오빠. 우리를 뭘로 보고."

"게이트 공략하는 게 하루 이틀이야? A 등급 게이트 공략이 처음도 아닌데, 나 참."

"사람이 감수성이 메말랐다니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일반 플레이어와는 달리 비욘드는 수다를 떨며 나아갔다.

그러던 도중, 궁수가 걸음을 멈췄다.

"적이다. 저쪽."

"...."

일행은 모두 궁수가 가리킨 곳을 봤다.

흐르는 긴장감.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고, 수풀에서 무언가가 불쑥 뛰쳐나왔다.

공략대는 곧바로 공격하려고 했지만.

"...여우?"

뛰쳐나온 것을 보고는 공격을 멈췄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것은 여우였다. 몸체가 흐릿하고 연보랏빛의 털을 가진 여우.

특이하게도 꼬리가 두 개였다.

"귀엽게 생겼네요."

"야이, 귀엽고 나발이고 간에 죽여! 게이트 안에 있는 여우가 평범한 여우겠냐!"

- 크르르... 캬아아앙!

정석만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말대로였다. 귀여워 보이던 여우가 꼬리를 흔들자 주먹만 한 불꽃들이 만들어졌다.

공략대를 노리는 불꽃이었다.

"죽여!"

화살과 마법, 여러 공격이 수풀에서 뛰쳐나온 놈을 덮쳤다. 그리고 울리는 비명.

날아오던 불꽃이 흩어졌다.

- 끼이잉...!

여우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했다.

온갖 공격에 당한 여우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흐릿한 몸체가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주먹만 한 불꽃이 나타났다.

일렁거리는 연보랏빛의 혼령 불이.

- 파아아앗!

"큭!"

혼령 불이 강렬한 빛을 내뿜었다.

공략대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우에게서 나타난 혼령 불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석만은 황급히 주변을 경계했다.

"뭐야? 야, 어디 이상한 점 없지?"

"예.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일단 잠깐 상태를 점검한 뒤에 출발한다."

공략대는 여우에게 뭔가 당했는가 상태를 확인한 후, 다시금 길을 나섰다.

그런 그들의 배후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 쿠후, 쿠후후후....

불길하기 그지없는 웃음소리.

그걸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상 현상이 공략대를 덮치기 시작했다.

84화

환각?

여우는 계속해서 나타났다.

매번 숫자가 조금씩 많아졌지만, 공략대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은 똑같았다.

죽을 때마다 혼령 불이 터지는 것도.

"A 등급 게이트에 여우라."

"당연히 저놈들만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젠장, 뭔가 마음에 걸리는데."

정석만은 방심하지 않았다.

A 등급 게이트다. 저 여우들은 단순한 부하고, 더 강력한 몬스터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쓰읍, 길이...."

얼마나 많은 여우를 처리했을까.

앞서 걸어가던 도적과 궁수들이 다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그것도 당황한 눈빛으로.

"왜, 헤매고 있는 건가?"

"예, 예.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이상합니다. 표식을 보고 움직이는데도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헤매고 있어요."

도적이 나무와 바닥을 가리켰다.

이런 곳을 돌아다닐 때는 길을 헤맬 수 있으니 다양한 곳에 표식을 두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 표식들이 있는데도 길을 잃었다니.

"표식을 보고 움직이는데도 그렇다?"

"예, 그렇습니다. 알 수 없는 힘이 길을 찾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거 잘못하면 돌아갈 때도 길을 헤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험한 것 같은데요."

"후우, 머리가 아프군."

정석만은 이마를 붙잡으며 잠깐 생각하려고 했지만, 숲은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 바스락.

"서쪽! 적입니다!"

"또 여우겠지. 빨리 죽...!"

숲에서부터 불쑥 적이 튀어나왔다.

정석만은 곧장 창을 내질렀지만, 적의 모습을 본 순간 손아귀의 힘이 빠졌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저, 저 괴물이 왜 여기서...."

- 그어어어어.

정석만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진흙.

슬라임 계통의 몬스터다. 온몸이 산성으로 되어 있고, 적을 삼켜서 양분으로 삼는 놈.

그리고 그의 트라우마였다.

"으, 크윽!"

정석만이 지금보다 레벨이 낮을 때, 탑의 던전을 탐험하던 도중에 만났던 몬스터였다.

그가 처참하게 실패했던 던전.

함께 던전 공략에 나섰던 동료들은 모조리 저 몬스터들에게 집어삼켜졌다.

- 끄아아아아아!

- 아, 아파! 내 몸이... 녹고 있어!

- 날 먹지 마, 이 괴물 새끼야!

보스 몬스터에게 삼켜지는 동료들.

거기서 정석만이 선택한 것은, 도주였다.

- 서, 석만아! 어디 가! 우리를 돕고...!

- 이 개새끼야! 너만 살겠다고!

- 헉, 허억! 우아아아!

그렇게 정석만은 살았다.

탑에 들어섰을 때부터 함께했던 동료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치는 비참한 형태로.

그 기억은 그의 트라우마로 남았다.

트라우마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심해! 온몸이 산성인 놈이다! 잘못 접근하면 삼켜져서 저놈의 양분이...!"

"사, 산성이요? 언데드 아닙니까?"

"뭐? 네 눈엔 저게 언데드로 보이냐?!"

남자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정말로 그의 눈에는, 숲에서 튀어나온 적이 언데드로 보였다.

그것도 평범한 언데드가 아니라 고위급.

"저, 저한테는 데스 나이트로 보이는데요?"

"데스 나이트? 그게 뭔 개소리야!"

"오우거! 미친, 여기서 오우거가 왜 나와!"

"오우거라고?"

뭔가 이상하다.

정석만은 눈을 비볐다. 자신의 눈에는 진흙 괴물로밖에 안 보였다. 눈이 맛이 간 건가?

아니,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포션! 포션을 마셔라!"

이 숲은 정신 계열의 공격을 가한다.

사람을 홀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걸 감안한다면 지금의 이상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각자의 트라우마가 보이게끔 해서 공략대의 정신이 무너지기를 노리는 것이다.

"헉, 허억!"

"화, 환상이었나."

아니나 다를까, 포션을 마시자 조금 전까지 보이던 진흙 괴물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에 여우를 죽였을 때와 똑같은 혼령 불이 나타나더니 흔들리면서 모습을 감췄다.

장석만은 한숨을 내쉬며 스크롤을 찢었다.

"안정 스크롤을 썼으니 도움이 될 거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마법이 담긴 스크롤. 공략대가 진정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공략대는 정신을 추스른 후 길을 나아갔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상 현상이 이어졌다.

- 흐흐흐흐....

"길드장님, 어디서 목소리 안 들립니까?"

"목소리? 무슨 목소리?"

"아뇨, 어디서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괴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 길이!"

"숲이...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시야에 보이는 숲이 갑자기 물감처럼 녹아내리더니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아주 기괴한 풍경으로.

"화, 환각! 이것도 환각이다!"

"길드장님! 저쪽에 또 적입니다!"

"제길, 무시해! 어차피 가짜잖아! 고블린만 죽이고 다른 놈들은 그냥 무시하고 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환각으로 된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공략대를 공격해 왔다.

놈들 사이에는 여우들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여우의 생김새가 이상하다.

"저, 저 여우 새끼 뭐 저리 커졌어?!"

"크아악! 불꽃이...!"

여우들의 덩치가 커졌다.

처음과 비교하면 명백하게 커졌고, 놈들이 쏘아 내는 불꽃의 크기도 마찬가지로 커졌다.

이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젠장! 포션 숫자가 얼마 없어. 환각은 무시하고 저 망할 여우들부터 죽여라!"

"예, 예!"

매번 포션을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환각이니 피해를 주지도 못할 터. 정석만은 과감하게 놈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미, 미친! 이게 뭐야!"

그게 실수였다.

정석만의 눈에는 진흙 괴물로 보이는 놈이 공략대의 검사를 공격했다.

검사에게는 거대한 오우거로 보이던 괴물. 놈의 발이 검사를 그대로 짓밟았고.

"컥, 끄르르륵...!"

검사의 온몸이 짓이겨졌다.

무거운 것에 짓밟혀서 압살당한 것처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명령을 내렸던 정석만은 더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환각... 아니었습니까?"

환각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했던 괴물이 명백한 실체를 가지고 있었다.

진짜 오우거인 것처럼 사람을 압살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포션... 포션을 마셔라."

정석만은 멍하니 포션을 마셨다.

눈앞에 있던 환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시, 시발! 이 새끼 어디 갔어?!"

"대장님! 아까 다친 놈이 사라졌습니다!"

"...."

환각에게 당했던 검사도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처럼, 원래 없었다는 것처럼.

공략대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넋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여우들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 쿠후, 쿠후후.

- 인간들, 바보 같아. 쿠후후.

"이, 이 새끼들이!"

정석만이 노성을 터트렸지만, 여우는 재빠르게 도망쳐서 모습을 감췄다.

남은 건 넋을 잃은 공략대뿐이었다.

'이상하다. 이건, 뭔가 이상해.'

다수의 게이트를 공략한 정석만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견디기 힘든 불안감도.

이 게이트는, 뭔가 잘못됐다.

"...계획을 바꾸지. 베이스 캠프로 귀환하자. 공략이고 뭐고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어."

"공략은 포기하는 겁니까?"

"일단은."

정석만은 크게 숨을 삼켰다.

"빨리 움직이지. 시간이 없으니."

정석만은 숲을 바라봤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숲. 그는 이 숲이 현실인지, 자신이 서 있는 땅이 진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환각인 것만 같다.

"가자."

기이한 침묵 속에서 공략대는 뒤돌아갔다.

그렇게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는 공략대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 쿠후후, 인간들은 참 바보 같구나.

그건 여우였다.

집채만 한 크기의 여우. 흉악한 얼굴에 붉은 눈동자, 흐릿한 연보랏빛의 몸체를 가진 괴물.

숲에서 공략대를 덮치던 여우를 크게 늘려 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차이점이 있었다.

놈은 꼬리가 여섯 개였다.

- 바보 같은 인간들, 내 분신들을 죽인 순간부터 네놈들은 내 환각에 빠져든 것이니라.

거대한 여우의 이름은 요호.

요호의 곁에는 그보다 작은 여우들이 모여 있었다. 놈이 만들어 낸 분신들이었다.

요호는 웃으면서 분신들을 보냈다.

- 가라. 밑작업은 이제 끝났느니라. 저 인간들을, 내 성장을 위한 거름으로 써야겠으니.

요호의 여섯 꼬리가 살랑거렸다.

원래는 다섯 꼬리였지만, 처음 이곳에 있던 인간들의 정기를 흡수하면서 하나 늘어났다.

- 아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느니라. 더 많은 정기를 먹어서, 나는....

요호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질 것이니라.

* * *

공략대는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게이트 입구에 있을 안전지대로 향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환각... 시발! 언제까지 나타날 셈이야!"

"저 망할 여우 새끼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환각.

포션의 숫자에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 포션은 계속 마실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약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몇 명이 사라졌나?"

"두, 두 명입니다."

"시발."

몬스터들의 환각은 일정 시간을 두고 나타났고, 그때마다 일행 중 일부가 사라졌다.

정석만에게는 몬스터 환각에게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시체가 사라졌으니 알 수가 없다.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맞나?"

"모, 모르겠습니다."

"미치겠군."

게다가 방향마저 잃었다.

정석만은 이마를 짚었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A 등급 게이트인데 이 정도 위력의 환각이라고? 이건 등급 산정이 잘못된 것 아닌가?'

정석만이 처음 A 등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몇 번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난이도에 맞춰서 준비를 해 왔는데, 이건 뭔가 다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정석만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 사태를 어떻게 타파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그때, 비명이 울려 퍼졌다.

"끄아아악!"

"이 괴물 새끼! 언제 내 옆에 온 거냐!"

"미, 미쳤어? 같은 편이야!"

길을 걸어가던 플레이어가 갑자기 옆에 있던 동료의 배를 칼로 쑤셨다.

환각 때문에 아군을 적으로 본 것이다.

다른 이도 마찬가지였다.

"나한테 다가오지 마!"

"그만! 제길, 저놈들 다 못 움직이게 막아!"

"흐아아아아아!"

"어, 어디로 가는 거냐! 돌아와!"

동료를 공격하는 플레이어를 막는 사이, 몇몇 이가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났다.

그들 중 하나가 정석만을 돌아봤다.

"저기예요! 저기로 가면 돼요!"

"뭐라고?"

"목소리가... 목소리가 들려요!"

그러면서 뛰어가는 플레이어들.

정석만과 아직 정신이 멀쩡한 플레이어들은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만 볼 뿐이었다.

인원수가,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지, 진현우! 임천... 아니, 어디 있나!"

정석만은 황급히 진현우와 임천우를 찾았다. 한 명은 에픽 퀘스트를 깼고 또 한 사람은 성격은 개차반이나 실력은 좋은 사람.

둘의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나와서... 아니, 둘 다 어디로 간 거야?"

"모, 모르겠습니다. 없는데요?"

"시발, 그 둘도 홀린 거냐?"

정석만이 휘청거렸다.

마지막 노림수였는데 그 둘마저 사라졌다니. 점점, 아주 확실하게 희망이 사라져 간다.

이대로면 죽는다. 이 게이트 속에서 동료들끼리 싸우다가 죽거나, 환각에게 죽거나.

'죽는다, 어떤 식으로든.'

정석만은 크게 숨을 삼켰다.

순간이지만 참을 수 없는 공포가 뇌리를 잠식했다. 정신이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 후후, 길을 잃었니?

"뭐, 뭐야?! 어떤 새끼가...!"

- 집으로 돌아가고 싶니?

"당장 이리 안 나와?!"

목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홀릴 것만 같은 매혹적인 목소리. 정석만은 황급히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 겁에 질렸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돌아갈 방법이 없어서 두려운 게냐?

"닥쳐! 튀어나오라고!"

- 이리 오렴.

정석만은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너머, 누군가 걸어오고 있다. 그가 여태껏 본 적이 없는 눈부신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 네 동료들에게로 안내해 주겠느니라.

"...!"

여성의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거친 외침을 내지르려던 정석만의 움직임이 멈췄다. 눈동자에 남은 빛이 흐려졌다.

- 날 따라오거라.

"다, 닥쳐! 나는!"

조금 전과는 다른 단호한 명령.

정석만은 자신의 뺨을 치면서 포션을 들이켰다. 그러자 여자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이 시발, 안 꺼져?!"

- 쿠후후후... 제법이구나. 내 마안에 아직까지 저항할 수 있을 줄이야.

여성의 웃음이 들렸다.

비웃는 것 같은 소리. 그녀는 자신을 떨쳐 내는 정석만을 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 입이 불길하게 찢어졌다.

마치 괴물처럼.

- 어차피 넌 이 숲에서 벗어날 수 없느니라.

그렇게 여성은 사라졌다.

정석만은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서로를 몬스터로 여기고 싸우는 동료들이 보였다.

'이건... 실패다.'

이번 공략은 실패했다.

정석만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미쳐 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개판이네, 개판이야."

그 일련의 과정을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진현우는 혀를 찼다.

85화

보고 싶었다

'슬슬 빠져나가도 되겠지.'

공략대가 실시간으로 환각에 미쳐 가는 동안, 진현우는 그들 모르게 빠져나갔다.

환각에 걸린 척 돌아다니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곧바로 은신해서 들키지 않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난 뭐, 홀리려야 홀릴 수가 없으니.'

베논의 마도서에 빛의 수호까지.

정신 계열 공격에 강한 저항력을 갖게 해 주는 아이템들을 갖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환각은 버틸 수 있다.

'환각은 의지력이 제일 중요하다.'

흔들리지 않는 의지력만 가지고 있다면 강한 환각에 맨몸으로 저항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이템이 주는 저항력은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늘려 주는 것. 결국은 의지의 문제다.

의지가 약해지면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환각에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

'공략대는... 완전히 맛이 갔군.'

전생에서 '신비로운 숲' 게이트는 여러 공략대를 잡아먹었던 고위험 게이트였다.

그러고도 공략에 실패해서 게이트가 해방되었고, 울산 전역이 큰 피해를 입었었다.

실패한 이유는 간단했다.

'요호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숲을 배회하고 있는 공략대의 곁을 떠다니고 있는 흐릿한 기체가 보였다.

기체는 일렁거리면서 모습을 바꾸었다. 여인의 모습으로, 기괴한 여우의 모습으로.

요호다.

'사람을 홀리고 정기를 흡수하는 괴물.'

지금 신비로운 숲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현상의 원인은 저 요호라고 볼 수 있다.

요호는 마안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정신에 간섭해서 환각 따위를 보여 주는 마안이다.

거기에 강한 매혹까지.

그뿐만이 아니다.

'요호는 이 숲을 자신의 요새로 삼았다.'

요호는 숲에 거대한 결계를 구축했다.

정신 계열의 공격을 강화하고, 인간의 의지력을 점점 약화하는 효과를 가진 결계를.

그리고 이 숲 자체를 변화시켰다.

'저 연보랏빛 기운.'

신비로운 숲에 감도는 저 연보랏빛의 기운은 단순히 관상용 조명이 아니다.

저 기운이 천천히 의지를 꺾는다. 숲에 오래 있을수록, 심층부로 갈수록 심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략대가 계속 만났던 여우.'

그건 요호의 분신이다.

죽이면 혼령 불이 소환되는데, 불이 터질 때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씩 환각에 빠지게 된다.

중첩되면 중첩될수록 증상은 더 심해진다.

- 쿠후후, 이리 오렴. 날 따라오렴....

저 먼 곳에 홀린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그들은 여인의 모습으로 둔갑한 요호의 손에 이끌려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마안에 홀린 이들이다.

'사람들의 정기를 흡수한다.'

그게 숲의 결계가 가진 마지막 효과였다.

정기를 흡수해서 결계의 효과를 더욱 강화하고, 더 나아가서 요호를 강하게 만든다.

- 어, 그래. 공장에 있던 사람이 침식에 휘말렸다더군. 갇혀 있는 민간인들 위치 파악하고, 구할 수 있으면 구해 달라고는 하던데.

바로 이게 이 게이트가 A 등급에 걸맞지 않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이유였다.

침식에 휘말린 민간인들의 정기를 흡수하면서 요호가 한층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플레이어들의 정기까지 흡수한다면?

'더더욱 대처하기 힘들어지겠지.'

전생에서 신비로운 숲 게이트의 공략에 여러 번 실패하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진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숲을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우를 비롯한 몬스터들을 상대하지 않고 가장 빠른 속도로 숲 심층부로 가야 한다.'

전생에서 신비로운 숲 공략 성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남자가 남긴 메모였다.

그것 말고 방법이 또 하나 있다.

'요호의 마안을 버틸 힘을 가지든가.'

정신 계열 공격에 대한 강한 저항력과 의지력,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

각종 아이템을 가진 진현우는 그에 알맞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숲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다. 어쨌든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니까.

'그 전에 숲을 공략해야 하는데....'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시발, 그 새끼 어디 갔어?"

"이쪽입니다. 발자국이 여기 있어요."

"무조건 죽인다. 죽일 생각으로 해."

진현우는 저 아래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인지했다.

임천우. 그리고 칼리의 길드원들.

"잘 걸렸다, 이 새끼들."

저놈들이 진현우가 공략대와 따로 움직여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두 번째 이유다.

여기서 귀찮은 것들은 처리하고 간다.

진현우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 * *

"시발, 이건 진짜 조졌네."

임천우는 공략대 꼴을 보며 혀를 찼다.

망했다. 정석만도 반쯤 멘털이 나간 상태고 공략대도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거면 될 것도 안 된다.

"기, 길드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전부 다 눈이 맛이 간 거 같은데요?"

공략대 일부는 넋을 잃었고, 일부는 서로를 몬스터로 여기며 싸우고 있었다.

명백하다. 이번 공략은 실패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

"길드장님?"

"아, 새끼야. 입 좀 닥치고 있어 봐!"

생각하고 있는데 거슬리게.

임천우의 노성에 길드원이 주눅 든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저렇게 노성을 질렀을 때 입을 열었다가는 못 볼 꼴을 보게 된다.

'볼 것도 없다. 이 숲 때문이겠지.'

신비로운 숲에 홀린 것이리라.

물론, 그것도 이상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대비를 했는데도....'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 계열 공격에 저항할 수 있는 아이템과 각종 소모 아이템을 가져왔었다.

그런데도 홀렸다니.

'시발, 이거 나도 위험하겠는데?'

다행히도 임천우는 특수한 아이템을 가져서 정신 계열의 공격에 대한 저항력이 높은 편이었다.

그가 가진 의지력이 강한 편이기도 했다.

'뭐가 됐든 여기 더 있는 건 위험해.'

어쩔까 고민하던 임천우의 시야에 홀린 것처럼 어딘가로 걸어가는 진현우가 보였다.

"...."

"형님, 설마...."

"야, 일단 저 새끼부터 처리하고 보자."

"진심이십니까?"

칼리 길드원들이 경악했다.

게이트인 데다가 위험한 상황이지 않은가. 원수라도 진현우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다.

근데 지금 그를 죽이겠다니.

"시발, 난 저 새끼 안 죽이고는 못 참아. 감히 내 길드 하우스를 털어? 죽으려고."

하지만 지금 임천우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것보다는 자신의 원수인 진현우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새끼 때문에 내 길드가...!'

오크 부족 전쟁에서 최유성 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그걸 고발한 게 저놈이었다.

그다음으로 그리폰을 이용해서 몬스터들이 습격한 척 길드 하우스를 털었다.

두 사건이 이어지면서 칼리 길드는 성장 동력을 잃었고 크게 쇠퇴하게 됐다.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 반드시!'

이 순간만 기다렸다.

환각에 홀려서 혼자 공략대로부터 멀어진 지금이 진현우를 죽일 최적의 기회.

임천우는 이걸 놓칠 생각이 없었다.

"추적한다. 따라와."

"아니, 아, 알겠습니다."

칼리 길드원들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누구도 임천우를 거역하지는 못했다.

거역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잘 아니까.

임천우는 눈을 크게 뜨더니 욕을 내뱉었다.

"시발, 새끼 걷는 거 존나 빠르네. 너희 때문에 놓쳤잖아. 야! 발자국 추적해 봐."

"예, 예. 여깁니다."

잠깐 얘기를 나누는 사이 진현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임천우와 칼리 길드원들은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서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 근처입니다."

"확실하냐? 아니면 뒈진다."

"네, 네! 여기서 발자국이 끊겼습니다!"

"수색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일행은 다급히 진현우의 위치를 쫓았다.

홀린 것처럼 보였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찾고 있으려니, 칼리 길드원 하나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혀, 형님. 진짜로 하실 겁니까?"

"아, 시발!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이 새끼 멈춘 거 안 보여? 지금이 기회라고!"

"그래도 게이트 안이잖습니까. 일단 게이트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난 다음에...."

쯧, 임천우가 혀를 찼다.

"병신아, 게이트 공략은 이미 조졌어. 저 새끼 하나 있다고 깰 수 있는 게이트가 아니라고. 공략은 포기하고 살 생각을 해야지."

"그, 그런 겁니까?"

"야, 내가 A 등급 게이트를 한두 번 공략한 줄 아냐? 공략은 못 해도 살 방법은 있어. 나하고 정석만 그 새끼가 같은 수준인 줄 아나."

임천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실제로 임천우는 여태껏 다수의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그중에 A 등급 게이트가 있는 건 당연했다.

"게이트 입구 근처로 가면 돼. 입구 근처에는 일정 시간 동안 유지되는 버프가 있어서 매혹이든 나발이든 버틸 수 있을 거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나나 너나 아이템 때문에 한동안은 안 홀려. 남겨 둔 표식 따라서 돌아가면 되는 거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임천우는 게이트 공략을 포기했다.

그러니 첫 번째 목표인 진현우를 죽이는 것만이라도 어떻게든 이루려는 것이다.

일행은 그렇게 주변을 탐색했고.

"형님, 저깁니다!"

"시발, 드디어 찾았네."

임천우가 찾던 것이 드디어 보였다.

진현우. 그가 숲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것도 복부에서 피를 흘리는 채로.

"뭐야? 저 새끼 피는 왜 흘려?"

"누군가한테 기습이라도 당한 걸까요?"

"주변에 따로 기척은 안 느껴지는데."

임천우는 부하들을 널리 흩어지게끔 한 뒤 진현우를 포위했고,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눈에 초점이 아예 없다.

"야, 완전히 맛 간 거 같지?"

"예. 아까 공략대가 환각에 홀렸을 때하고 똑같습니다. 홀린 거 같은데요?"

"좋아, 신중하게 접근하자. 내가 신호를 보내면 한 번에 달려들어서 죽인다. 가자."

임천우는 할버드를 움켜쥐었다.

무조건 죽인다. 저 새끼만 죽여도 이 게이트로 온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가 진현우를 포위했다.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

"...."

"...."

진현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임천우는 할버드를 높이 들면서 신호를 보냈다.

- 아우우우우우!

"...!"

임천우가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내려는 찰나, 근처에서 늑대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파스스스!

"허억!"

땅에 숨겨져 있던 덫들이 폭발했다.

지독한 냉기가 터지면서 얼음 결정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렇게 피어오르는 얼음 연기 사이로 도끼가 회전하며 날아들었다.

"컥... 케르륵!"

말 그대로 번개 같았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날아든 도끼가 칼리 길드원의 목덜미를 짓이겼다.

남자가 목을 부여잡으면서 쓰러졌다.

- 휘릭!

"뭐, 뭐야! 이 새끼, 홀린 게...!"

진현우가 손을 펼치자 도끼가 되돌아왔다. 그는 숨을 삼키며 힘껏 도끼를 투척했다.

그러곤 한 손을 높이 들었다.

- 파아아앗!

"크아악! 내 눈이!"

"시발! 뭔 섬광이라도 터트린 거야?!"

손아귀에서 터진 광휘가 적들의 시야를 마비시켰다. 그리고 도끼가 분열했다.

- 화아아악!

맹렬하게 회전하는 도끼는 바람을 일으켰고, 그 바람은 곧 작은 돌개바람으로 변했다.

그것도 날카로운 살얼음이 낀 바람으로.

"크아아아악!"

"흐어, 으으으윽...!"

칼날이나 다름없는 살얼음이 칼리 길드원들의 몸을 찢었다. 이윽고 도끼가 놈들의 몸에 적중했고, 바람이 그들을 높이 띄웠다.

쿠웅! 그리고 추락하는 몸뚱어리.

"커헉, 어어억...."

일격에 만신창이가 된 칼리 길드원들이 신음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땅을 박찼던 진현우가 섬광과 같은 속도로 질주했다.

아직 시야가 어지러운 임천우를 향해서.

- 쿠우웅!

"이, 씹!"

임천우는 스킬을 쓰려 했다. 하나 늦었다.

그보다 먼저 진현우가 그의 복부를 어깨로 들이박았다. 쿠우웅! 섬광으로 강화된 속도는 단순한 태클에 엄청난 위력을 실어 줬다.

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커헉! 윽, 크으윽!"

바닥을 나뒹구는 임천우와 진현우.

진현우는 임천우의 멱살을 붙잡고 놈을 땅에 짓눌렀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끔 배 위에 올라탄 뒤 짐승처럼 사납게 웃었다.

"야, 우리 초면이지?"

임천우를 내려다보는 사나운 눈빛.

진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보고 싶었다, 이 새끼야."

콰드득!

주먹이 임천우의 얼굴을 강타했다.

86화

원한은 잊는다

소리가 울려 퍼진다.

- 퍼억! 퍽! 콰드득!

"컥! 끄으윽!"

고요한 숲에 살을 짓이기고 뼈를 부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도.

"씹, 이, 개새... 꺼억!"

주먹이 임천우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강타하는 소리였다. 건틀릿을 낀 주먹과 진현우의 근력은 단순한 주먹질도 흉기로 뒤바꿨다.

"억! 크학! 아아아아악!"

코가 부러진다. 그다음에는 광대뼈.

입술이 터지고 턱이 무너졌다. 진현우의 주먹은 임천우의 얼굴을 짓이기고 있었다.

거기에 허공에서 불길하기 그지없는 검은 화살이 나타나더니 임천우를 꿰뚫었다.

'일어나야 한다, 어떻게든!'

임천우는 진현우를 밀쳐 내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억누르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

"크아아아아아악!"

임천우가 발악하듯 비명을 내질렀다.

시야가 뒤흔들린다. 머릿속은 어지럽다. 이 상황을, 지금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내가 왜 이런 꼴을!'

칼리 길드 그리고 임천우.

둘 다 플레이어 사회에서 입지를 가진 이름이다. 최근에야 몇몇 이슈 때문에 흔들리고 있다지만, 그 전까지는 누구나 두려워했었다.

임천우는 성격이 불같았기에 더더욱.

- 콰득! 퍼어억!

"꺽, 끄흑...!"

그 임천우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까지 그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쓰러지고 있었다.

진현우가 임천우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잘 생각했어야지."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진현우는 얼굴을 들이밀며 사납게 웃었다.

"날 죽이기 좋은 기회면 역으로 너희도 죽기 좋은 기회잖아. 안 그러냐? 응?"

"컥! 자, 잠... 끄아아악!"

팔꿈치가 임천우의 명치를 강타했다.

놈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얼굴은 이미 만신창이, 뇌가 흔들려서 몸도 안 움직인다.

'다, 다른 새끼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아직 살아 있는 칼리 길드원들이 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안 돕는 거지? 임천우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 아우우우우!

"으윽! 이 늑대 새끼들이!"

"시발, 늑대가 뭐 이리 세?!"

영혼 늑대들 때문이었다.

달이 뜬 밤의 효과로 강화된 영혼 늑대들은 칼리 길드원들에게도 버거운 상대였다.

놈들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지금은 몸 상태도 엉망이었으니.

- 커허어엉!

"크아아악!"

영혼 늑대들이 칼리 길드원들을 사냥했다.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동안에도 임천우는 진현우의 주먹에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성난 눈동자가 임천우를 직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 나하고 이름도 비슷하네? 쓰읍... 이건 좀 기분이 나쁜데."

죽는다.

이대로면 정말 죽는다.

임천우는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여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각이었다.

"다음 생에는 다른 이름으로 태어나라."

진현우가 주먹을 높이 들었다.

그 주먹이 시퍼렇게 빛났다. 강철도 일격에 부수는 일격이 임천우에게 쏘아졌다.

그렇게 파쇄권이 얼굴을 부수려는 찰나.

"우, 우아아아!"

"기,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뒤늦게 정신 차린 길드원들이 진현우를 들이박았다. 그리고 처절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이 자리에서 살아남으려면 임천우를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하에 한 발악.

그 대가는 처절했다.

- 크르르릉!

"컥, 끄르륵...!"

늑대들이 길드원들의 목을 물어뜯었다.

그건 이미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던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에 충분한 일격이었다.

칼리 길드원들이 단말마의 비명을 토했다.

"헉, 허억! 케흑!"

그들의 희생 덕분에 임천우는 진현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부상은 심각했고, 시야는 혼미하다.

이미 너무 큰 타격을 입은 뒤였다.

"이런, 씹... 대체 어떻게...."

밀려났던 진현우가 일어났다. 그의 양옆으로 피가 잔뜩 묻은 영혼 늑대들이 섰다.

임천우는 이를 악물며 할버드를 쥐었다.

"개새끼가... 죽, 죽여 주마...!"

"그 꼴로? 잘도 죽이겠다."

"크아아아악!"

노골적인 비웃음.

임천우가 노성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진현우를 지키던 영혼 늑대들이 돌진했다.

안 그래도 큰 늑대들이 달이 뜬 밤의 효과로 더욱 커져서 이젠 사람보다 더 크다.

- 커허어엉!

- 아오오오오!

"이 똥개 새끼들이!"

임천우는 할버드로 바닥을 긁었다.

화르륵! 그러자 할버드의 날에서 거센 불길이 일어나더니 영혼 늑대들을 덮쳤다.

불길에 휘말려 휘청거리는 영혼 늑대 한 마리. 다른 한 마리가 거리를 바짝 좁혔다.

"머리통을 쪼개 주마!"

임천우는 할버드를 뒤로 힘껏 젖혔다. 그의 두 팔의 근육이 한계치까지 부풀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늑대의 머리통을 후려치려는 찰나, 그의 직감이 무언가를 경고했다.

"허억!"

- 카드드득!

임천우는 황급히 할버드를 휘둘러서 무언가를 쳐 냈다. 그건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었다.

저 너머, 활을 쥔 진현우가 보였다.

"이 새끼가!"

진현우는 활을 내던지며 도끼를 쥐었다. 임천우는 자세를 다잡으며 그를 경계했다.

그리고 진현우가 땅을 박찼다.

순간 그의 신형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돌진기. 바로 내 앞까지 오겠지.'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지만 경로만 예측할 수 있다면 대처하지 못할 것도 없다.

임천우는 곧 자신의 앞에 나타날 진현우를 예측하며 할버드를 휘두를 준비를 했다.

'일단 막는다. 그리고, 어?'

순식간에 임천우의 코앞까지 도달한 진현우가 갑자기 주먹으로 허공을 타격했다.

왜 허공을 주먹으로 때리는 거지? 임천우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소리가 들렸다.

- 콰아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진현우가 타격한 지점에서 강렬한 충격파가 일어나더니 그대로 임천우를 엄습했다.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과 함께.

"크윽!"

- 화르르륵!

임천우가 땅을 힘껏 짓밟았다.

그러자 바닥에서부터 불길이 솟구치면서 날아드는 얼음 결정들을 막았다. 그리고 미처 막지 못한 충격파는 할버드로 막으려 했지만.

- 커허어엉!

"끄아악!"

덕분에 자세가 흐트러졌다.

임천우의 근처에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영혼 늑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진현우가 도끼를 높이 들었다.

- 콰아앙!

"이런, 씹...!"

도끼가 할버드를 강타했다.

임천우가 필사적으로 막은 덕이었다. 아니었다면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을 것이다.

진현우가 다시금 도끼를 뒤로 젖혔다.

'일단 막는다. 막으면서 기회를...!'

격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도끼를 내리찍는 진현우와 그걸 할버드로 막아 내는 임천우.

막기만 하면 된다. 막으면서 기회를, 어떻게든 반격할 기회를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헉, 크윽! 으, 으으으윽!"

- 콰앙! 쾅! 콰드득!

빠르다.

도끼를 내리치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아니, 점점 빨라지고 있다. 아까도, 지금도.

임천우가 도끼를 막아 낼 때마다 진현우가 도끼를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도끼, 용맹한 자가 강화되면서 생긴 광분이라는 옵션의 효과였다. 적을 공격할 때마다 공격 속도가 최대 50%까지 오르는 옵션.

진현우가 강렬한 맹공을 이어 나갔다.

"큭, 아악! 크아아아악!"

- 콰직, 우드득! 카아앙!

맹공을 막아 내던 할버드가 부서진다.

할버드를 쥔 팔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땅을 딛고 있는 발이 점점 파묻힌다.

이대로 막고만 있으면 죽는다. 반격할 기회를 찾아야만 한다. 어떻게든 반격을.

'반격을, 어떻게 해?'

임천우는 그제야 깨달았다.

반격할 기회 따위는 찾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걸 깨달은 두 팔에 순간 힘이 빠졌다.

진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 파아앙!

"커헉!"

진현우의 주먹이 허공을 타격했다. 강력한 충격파가 임천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고통을 버티지 못한 임천우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순간, 도끼가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일격.

- 콰드드득!

"미, 친...!"

도끼와 할버드가 맞부딪쳤다. 이미 한계에 달했던 할버드가 허망하게 갈라졌다.

강렬한 기운을 머금은 도끼는 할버드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 임천우의 몸을 갈랐다.

"으, 흐아...!"

상처가 단번에 얼어붙었다.

끔찍한 고통과 추위를 느낀 임천우의 몸이 굳었다. 진현우는 도끼를 힘껏 젖혔다.

임천우가 두 눈을 부릅떴다.

'죽는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임천우, 칼리 길드의 길드장.

아직은 하위 랭커지만 뛰어난 잠재력을 가졌고, 더 높이 올라갈 거라 평가받던 잠룡.

최근에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이것도 잠시일 뿐, 금방 수습하고 다시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죽는다고?'

이제 겨우 3층에 올라오는 플레이어한테.

자신과 레벨 차이가 한참 나는 놈한테, 이렇게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고?

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실수했다.'

진현우와 임천우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임천우는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삼켰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건드리지 말았어야....'

퍼어억! 도끼가 임천우의 목을 쳐 냈다.

"끄륵!"

털썩, 시체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는 많이 흐르지 않았다. 빙정의 효과로 상처 부위가 단번에 얼어붙었기 때문이었다.

진현우는 시체를 내려다봤다.

"칼리 길드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부터는 잊게 되겠군."

- 크르릉.

칼리 길드의 종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