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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1

☆ ☆ ☆

한창 축제의 밤이 깊어지는 중이었다. 갑자기 오크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다. 웅성대는 분위기에 칼켄과 대작하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 무슨 일이오?"

"아, 양치기들이 돌아온 모양이군."

말술을 퍼마신 주제에 둘 다 전혀 취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둘 다 극도로 단련된 육체에 오러까지 구사하는 자, 어지간히 마셔서는 취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뭐, 둘 다 적당히 얼굴이 붉어진 것이 취기 정도는 오른 것 같지만.

칼켄의 말에 레펜하르트는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니다 싶어 다시 칼켄과 대작하려는데, 축제에 끼어든 양치기 오크들 중 특이한 이가 하나 있었다. 다들 검붉은 피부를 지닌 데 비해 혼자서 녹색 피부를 지닌 건장한 오크, 그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그 오크도 레펜하르트를 보더니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은인이 아니시오?"

전생에 그의 충실한 수하였던 이, 그리고 이번 생애에서 자신의 손에 의해 운명으로 인도했던 미래의 오크 대전사, 타시드였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찾고 있었지만 안 보여 의아해했는데 저기 있었던 것이다.

타시드가 화색을 띠며 레펜하르트에게 달려온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는 그리움을 느꼈다. 더 이상 타시드는 약하고 작은 소년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건장한 체구에 용맹한 표정을 짓는, 기억 속의 친우였다.

"타시드!"

반가워하며 레펜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주 달려와 타시드가 레펜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타시드가 기뻐하며 말했다.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많이 변했는데도...."

타시드가 레펜하르트를 만난 것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의 작은 소년 시절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은인이 자신을 알아보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좋아하는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멋쩍어했다.

"아, 그건...."

사실 그의 기억 속 타시드는 오히려 이쪽이 원본(?)이다. 못 알아 볼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추억 속의 친우와 재회해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칼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는 사이인가?"

"제가 이곳에 오도록 인도했던 은인입니다, 족장님."

타시드가 어떻게 그들, 푸른 곰 부족을 찾게 되었는지는 칼켄도 잘 알고 있었다.

"허어! 이런 우연이 있나!"

칼켄은 새삼스레 레펜하르트를 다시 보았다. 물론 호투의 의식으로 상대가 믿을 만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타시드 건으로 인해 더더욱 신뢰할 수 있는 자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제야 칼켄은 의아해했다.

'그런데 이런 자가 왜 우리를 찾아온 거지?'

한참 전에 떠올렸어야 할 일을 칼켄은 이제야, 싸울 것 다 싸우고 술 마실 것 다 마신 다음에야 겨우 떠올린 것이다. 실로 모범적인 오크다운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마누라가 뭔가 눈치를 주긴 했지?'

이제야 마누라의 눈짓이 뭔지 알 것 같다. 칼켄이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형제여, 이 황야까지 온 이유가 대체 뭔가?"

모닥불에 주저앉아, 레펜하르트가 칼켄에게 말했다.

"푸른 곰 부족에게 이곳보다 더 살기 좋은 땅을 주고 싶소. 그러기 위해서 내게 그대들의 힘을 빌려 주었으면 하오."

그러며 레펜하르트는 현재 크로방스 왕국의 상황과, 그 전쟁에 가담해 영토를 얻는다면 그것이 오크들에게 어떤 이득이 될지 설명했다. 물론 칼켄은 이해하지 못해 연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가 어금니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러니까, 가서 싸움질하면 땅을 준다고?"

"뭐, 지나치게 요약하면 그런 의미요."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바라는 영지, 크로방스 왕국의 서부에 위치한 겔페인 자작령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영지 대부분이 글로텐 산맥을 끼고 있다는 소리에 칼켄이 눈을 빛냈다.

"정말 그곳에서 우리 일족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인간 기준에서야 글로텐 산맥이 험하고 척박하겠지만, 이곳 데스트란드에 비하면 그곳은 천국이었다. 무려 숲도 있고 흐르는 개울도 있고 비도 자주 내리고 몬스터도 허약한 놈들뿐인 것이다.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 군대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칼켄 자신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에겐 일족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인간 군대는 그 수가 많다네. 우리 전사는 강하지만 수가 적지. 인간 군대는 두려운 존재야."

"그 인간 군대가 그대들에게 땅을 준다는 거요. 함께 싸워 준다면."

칼켄은 고민했다. 일족의 안위가 걸려 있으니 바로 결정을 내릴 순 없었다.

칼켄이 고개를 돌리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타시드에게 물었다.

"인간들 속에서 자란 타시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인간 기준이라면 일족의 안위가 걸린 이런 거래는 으슥한 방에서 수장들끼리 조용히 대화를 나누겠지만, 오크들에겐 그런 개념이 없다. 남들에게 못 알릴 일은 나쁜 일이니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좋은 일은 누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어디서 이야기한들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덕분에 아까부터 타시드는 계속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가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인간은 믿을 수 있지만 레펜하르트 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은인께서 거짓을 말하고 있을 리는 없겠지요."

"그 정도는 나도 안다. 내 걱정은 레펜하르트 형제가 실패해 우리 일족의 안위가 흔들리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칼켄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한들, 그 뜻대로 세상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걸 알만큼 노회한 오크였다.

타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첨언했다.

"대모님과 무기아비님의 조언을 구하시지요. 그분들의 지혜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칼켄의 승낙이 떨어지자 타시드가 자리를 떠나 마을 어딘가로 달렸다.

잠시 후 타시드는 스탈라와 약간 마른 느낌의 중년 오크를 동반해 모닥불로 돌아왔다. 중년의 오크가 레펜하르트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투혼의 축복을 받은 용사여, 푸른 곰 부족의 무기아비, 그랄타가 인사 올리겠소."

무기아비란 대장장이를 칭하는 오크들의 표현이었다.

인간이나 드워프들처럼 주물 방식으로 철을 다룰 기량이 없는 오크들은 모든 무기를 망치로 두들겨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광산을 파고 철을 캐낼 기술도 없으니 노천광을 찾아야 광물을 얻을 수 있다.

무수한 몬스터들이 들끓는 거친 황야를 누비며 노천 철광을 찾아, 강인한 근력과 인내심으로 평생 함께할 친구를 낳아 주는 대장장이의 존재는 오크들에게 전사만큼이나 존경받는 존재다. 무기아비 그랄타는 족장 칼켄, 대모 스탈라와 함께 푸른 곰 부족을 이끄는 중요한 멘토들 중 하나였다.

그들을 돌아보며 칼켄이 말했다.

"새로운 형제가 새로운 운명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우리는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일족을 위해서!"

두 오크 모두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 아침, 레펜하르트 일행은 숙취에 시달리며 푸른 곰 부락을 떠났다. 말을 몰아 뒤를 따르며 러스가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이야기가 잘되었나 보군요, 형님."

"그래, 결국 우리에게 힘을 보태 주기로 했다."

한참 상의한 끝에 칼켄와 다른 이들은 레펜하르트의 의견에 동의했다. 안 그래도 데스트란드의 척박한 환경 때문에 푸른 곰 부족의 숫자는 점점 줄어 가고 있었다. 그만큼 소수 정예화된다는 이점도 있긴 하지만, 이대로라면 일족의 미래는 없다.

물론 레펜하르트의 제안은 위험했다. 그의 말대로 되지 않을 경우 푸른 곰 부족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이곳에서 천천히 죽어 갈 것인가?

아니면 일족의 미래를 걸고 화끈하게 도전해 볼 것인가?

용맹한 칼켄, 지혜로운 스탈라, 현명한 그랄타. 푸른 곰 부족을 이끄는 세 명의 멘토들.

오크답게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부락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 칼켄과 스탈라 그리고 백 명의 푸른 곰 부족 오크 전사들이 우리에게 합류할 거다."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 해도, 칼켄이 바로 전사들을 이끌고 레펜하르트를 따를 수는 없다. 전사들이 사라지면 그만큼 푸른 곰 부족의 다른 오크들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부락을 안전한 장소로 옮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부족민을 이끌고 데스트란드를 지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므로 전사들 없이는 이동이 불가능하다.

"전사들이 자리를 비울 경우 사냥할 인원이 없어져 남은 이들이 식량 부족에 시달릴 것이라는 문제도 있었지만, 이건 쉽게 해결했고."

타시드와 칼켄이 잡은 몬스터들의 고기는 사실 어마어마한 양이다. 터틀 라이온과 엘더 드레이크가 좀 거대한 놈들인가? 푸른 곰 부족 전원이 족히 석 달은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단지 보존이 불가능했을 뿐이었는데, 거기에 레펜하르트가 장기 보존 마법을 걸어 두니 한동안 사냥을 떠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물론 마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꺼려하는 오크들도 있었지만, 눈앞에서 레펜하르트와 칼켄이 직접 보존 마법이 걸린 고기를 먹어 보이니 다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솔직히 좀 자신 없었는데, 기대 이상의 결과야."

레펜하르트는 즐거워하며 말했다. 고삐를 쥔 채 러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 친구는 왜 먼저 따라오는 겁니까?"

말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채, 대검을 짊어진 녹색 피부의 오크가 거대한 다이어울프에 탄 채 그들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오늘 아침, 일행에 합류한 타시드였다.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크들이 우리 찾아오려면 이쪽에서도 누군가 마중을 보내야 하지 않냐?"

글로텐 산맥까지야 데스트란드 북부를 경유해 빙 돌아오면 인간과 조우할 일이 없겠지만, 거기서부터는 아무래도 안내자가 필요했다. 레펜하르트와 푸른 곰 부족 사이에 소식을 주고받을 전령의 존재가 필요했고, 그 영광스러운 역할로 선택된 것이 타시드였다.

인간 기준에서는 전령이 그냥 발 빠른 병사, 혹은 말 잘 타는 놈 정도의 의미일 뿐이겠지만 오크들에겐 다르다. 전령으로 선택된 오크는 자신들을 몬스터 취급하는 위험한 인간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양쪽을 오가야 한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필요한 일이고, 인간의 눈을 피해 은신할 줄도 알아야 하며 만일의 경우 홀로 전투를 벌여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의 기량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타시드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주변의 기척을 읽고 자신의 기척을 지우는 데 능숙하다는 의미다. 게다가 그는 칼켄과 스탈라를 제외하면 푸른 곰 부족 최강의 전사였다. 푸른 곰 부족의 세 번째 투사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타시드인 만큼 이 험한 역할에 적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펜하르트를 다시 만난 타시드가 그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전령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오가도 되는데 왜 굳이 오크를 위험한 일에 처하게 했나 싶어서 말이죠."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넌 오크어를 모르잖아? 아무래도 상황을 상세히 주고받으려면 오크들의 공용어 실력으론 무리지. 그렇다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일일이 내가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음, 그건 그렇군요."

그제야 납득하며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레펜하르트 말고 다른 이들 모두가 전령의 자격이 없다.

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레펜하르트도 러스를 전령으로 활용하면 훨씬 편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오크어를 모른다는 것은 핑계일 뿐, 오크들이 공용어에 서툰 것은 어디까지나 구강 구조적 문제이므로 러스의 전언을 알아듣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으니까.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아직 러스가 자기 눈 밖에서 움직이는 것이 꺼림칙했다. 물론 이 시대에 다시 만난 러스가 진정으로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건 인정하고 있었고, 또 의형제의 정 또한 느끼고 있었지만....

'쩝, 역시 검성 사이러스의 모습이 자꾸 겹쳐 보여서....'

전생에서 가장 강력한 적 중 하나였던 러스인 만큼 완전히 신뢰하기에 역시 아직은 무리다. 물론 오크를 걱정해 줄 정도로 사상이 바뀐 그를 보면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지만....

'아니, 사실은 다 핑계고 그냥 내가 타시드랑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랬지.'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전생에 사천왕 중 하나였던 타시드였다.

안타레스 제국을 세우기 전부터 레펜하르트, 시리스와 함께 했던 타시드였다.

셋이 대륙 각지를 모험하며 돌아다니던 그 자유롭던 시절은 레펜하르트에게 가장 즐거운 추억 중 하나였다. 지금 다시 타시드가 곁으로 돌아오니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나 무척이나 유쾌했던 것이다.

타시드가 다이어울프, 흑왕을 몰아 러스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러스를 보며 가슴을 두들겼다.

"카루가 러스! 너 정도 아니어도 나 강하다! 인간 무섭지 않다!"

뒤따르며 이야기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러스가 뜨끔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타시드 경... 경? 뭐라고 불러야 하지? 하여튼 나도 당신이 뛰어난 전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소. 내 무례를 사과하리다."

러스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걸 보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그동안 성격 많이 변했네.'

타시드가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가슴을 때렸다.

"괜찮다! 나 걱정해 주니 나도 좋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카루가 러스!"

"나도 잘 부탁하오, 타시드 경."

잠깐 고민했지만, 러스는 결국 기사의 칭호로 타시드를 불렀다. 칼켄과 스탈라를 푸른 곰 부족의 왕과 왕비라 치면 그 휘하의 전사 계급도 인간의 기사와 비슷하니까.

껄껄 웃으며 타시드가 다시 흑왕을 모는 데 열중했다. 레펜하르트를 향해 러스가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엘프에 드워프, 오크까지라니... 이러다 조만간 트롤도 일행에 합류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으음, 예리한 녀석....'

러스야 농담으로 말했겠지만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트롤의 대주술사, 구루 아틸카를 찾을 생각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참으로 선견지명이라 하겠다.

속으로 웃으며 레펜하르트는 말을 몰았다. 말과 다이어울프를 몰고 러스와 타시드가 나란히 그 뒤를 따른다.

전생에 죽도록 싸워 댔던 숙적이 사이좋게 달리는 모습을 보니 참 기분이 묘했다. 새삼스레,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실감이 났다.

'암, 바꿔야지.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지며 레펜하르트가 박차를 가했다. 시리스와 실란, 틸라도 말의 속도를 높였다.

"자, 서두르자. 어서 크로방스 왕국으로 돌아가야지. 이랴!"

다섯 필의 말과 한 마리 다이어울프가 황야의 대지, 데스트란드의 평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제17장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1

어둠이 가득한 거대한 홀.

그 홀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벽이라곤 존재치 않는 이 무한의 공간은 은의 시대 유적을 이용해 창조해 낸 유사 공간일 뿐이다.

그 어둠 속에 흑발의 미청년이 서 있었다. 새하얀 로브를 입고 가슴에 은빛 성표를 단 그 청년은 자못 엄숙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갑자기 홀 중앙에서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기둥 안에서 역시나 하얀 로브를 걸친 인간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수염을 배까지 기른 노인이었다.

마법 영상으로 자신을 드러낸 노인이 청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의 노고를 치하한다, 현자 레스틴."

현자 레스틴, 속세의 이름으로 테스론이라 불리는 청년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수호자 다오스."

인류의 관리자, 은의 현자.

노인은 그중에서도 모든 비밀을 관리하는 최상위, 13인의 수호자 중 한 명이었다.

노인, 다오스가 테스론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일을 처리했더군. 만족스럽다."

한 달 전, 테스론은 수호자 다오스의 명령에 따라 살카나 던전을 탐사한 이들을 전멸시키는 임무를 맡은 적이 있었다. 이후 그는 한 달에 걸쳐 세상에 알려진 살카나 유적에 대한 정보를 없애고 유적 탐사대에 대한 흔적을 조작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모든 것이 이제야 끝나 다오스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겸양하며 테스론이 그동안의 일을 요약한 보고서를 노인에게 건넸다. 보고서는 종이가 아니라 정보를 저장시킬 수 있는 보랏빛 마법의 수정이었다.

수정을 받아 들며 노인이 온화한 목소리를 건넸다.

"위험한 지식은 올바른 관리 속에 유지되어야 하는 법. 그대는 별일 아니라 여길지 몰라도 그 또한 인류를 지키는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테스론은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노인이 수정을 쥐고 눈을 감은 채 안의 정보를 읽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테스론은 속으로 혀를 찼다.

'후우, 저 위치까지는 아니어도 최소 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까지는 빨리 올라가야 할 텐데.'

그동안 마왕에 맞서기 위해 한껏 힘을 키우고 정보를 모았다. 황금기사 유서스도 동료로 끌어들이고 스테반과 필레나를 거두어 은의 시대 유물로 그들의 검과 마법적 실력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부족했다. 테스론 자신의 육체와 마왕의 두뇌를 가진 레펜하르트는 실로 두려운 존재였다.

보다 더 강한 힘, 보다 더 강력한 동료가 필요했다.

그런 만큼 테스론은 현재 자신의 지위에 불만이 많았다. 은의 현자 내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권한도 강화된다. 지금처럼 관리 단계의 특급 아티팩트가 아닌, 현 시대에는 완전히 사용이 금지된 절대적 권능을 지닌 유물들도 사용할 수 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눈앞의 노인을 붙잡고 마왕이란 존재의 위험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펼치고 싶은 기분이다만....

'하지만 환생에 대해 말해 봐야 정신병자 취급만 당할 테니 당장은 어쩔 수 없지. 간신히 얻은 은의 현자 자리는 지켜야 하니....'

이 시대에 환생해 은의 현자에 가입했던 때를 떠올리며 테스론은 입맛을 다셨다.

☆ ☆ ☆

레펜하르트를 상대하기 위한 힘이 필요했던 테스론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이라나드 공작부터 찾았다. 이미 전생의 정보를 통해 그는 이라나드 공작이 은의 현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를 만나 적당히 말을 꾸며 냈다.

대륙의 역사를 보고, 추측하여 인류를 관리하는 집단의 존재를 유추했다고.

그래서 '개인적으로 정보를 얻어' 이라나드 공작이 그들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다고.

전생에서 들었던 내용을 몽땅 자기가 추리해 낸 양 떠들어 대는 테스론을 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그를 놀라운 직관력과 현명한 두뇌의 소유자라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제거하기엔 그의 무위와 나이가 아까울 테니, 결국 테스론은 기대했던 대로 은의 현자에 받아들여졌다.

그 정보를 제공한 전생의 인물이 바로....

'빛의 마도사, 제이드 아크라이트.'

마왕 레펜하르트가 한창 안타레스 제국의 세력을 넓히고, 떠돌아다니던 권왕 테스론도 조국을 버릴 수 없어 바실리 왕국의 신하로 열심히 그에 맞서 싸우던 때의 일이다.

그때, 동료였던 제이드로부터 은의 현자란 집단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고대의 모든 비의를 알고 있다고 했다.

위대한 은의 시대에 대한 진정한 계승자라고 했다.

현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알고 있는 이들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은의 현자의 일원이었던 그를 통해 테스론은 진실의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들의 자부심, 그 근본을 뒤흔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위대한 은의 시대, 그 주역은 인간이 아니었다. 저 위대한 문명의 주인은 바로 세계수를 지닌 엘프였고, 대지를 지배하는 드워프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 시대에 인간들은 무엇을 했는가?

저 위대한 고대인이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조상으로 삼고 있단 말인가?

이 의문에 대한 진실만은, 은의 현자라 할지라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저것만으로도 인류의 정체성을 흔들기에는 충분히 무시무시한 의문이었다. 그래서 은의 현자는 인류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수백 년을 걸쳐 역사를 조작해 왔다.

그중 한 예가 바로 '은의 시대'라는 명칭이었다.

사실, 왜 고대를 은의 시대라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테스론도 한때 의아해했던 적이 있었다. 은의 시대라 부르는 고대 문명이 있었다면 황금의 시대나 청동의 시대, 강철의 시대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다른 건 하나도 없는데 뜬금없이 왜 은의 시대만 툭 튀어나온단 말인가?

제이드를 통해서 테스론은 그제야 진실을 알 수 있었다.

원래 천여 년 전만 해도, 어지간한 고서에는 옛 고대 문명에 대한 명칭이 따로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며 엘프, 드워프들이 붙인 명칭이었다.

그 문명은 이렇게 불렀다.

엘드라스 문명과 알하트란 문명.

고대어에 능숙한 이라면 저 단어들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엘드라스는 엘디아의 축복.

그리고 알하트란은 알 포트의 은총.

누가 봐도 명확하게 고대 문명에 엘프와 드워프의 신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조작한 것이 과거, 은의 현자들이었다. 그들은 고서를 불태우고 역사를 조작해 저 문명의 이름을 없애 버렸다. 수백 년에 걸친 대작업이었지만, 인류가 번성해 점점 힘을 키우며 결국 은의 현자들도 작업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다.

진실을 지우려면 그만큼 그럴듯한 거짓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대신 붙인 이름이 은의 시대였다.

-고대 엘프들은 지금의 엘프들과 달리 귀가 짧고 모두가 눈부신 은발이었습니다. 던전의 벽화 등을 통해 보면 고대의 엘프들은 그냥 은발에 장신의 인간으로만 보이지요. 그래서 유적 탐사자들 대부분은 그런 벽화 속 고대인을 보며 은의 시대라는 명칭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고대 드워프들이 주로 애용한 금속은 예나 지금이나 진은, 미스릴이었습니다. 물론 현재의 드워프들과 달리 미스릴과 다른 광물을 합금하여 월등한 금속을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색은 분명 은색이지요.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유물들도 은색인 것이 많았고, 그래서 유물을 연구하는 이들도 은의 시대란 명칭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던 겁니다.

이렇듯 은의 현자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음지에서 정보를 조작해 왔던 것이다. 인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하여.

제이드에게 이 모든 사실을 들었을 때만 해도, 사실 테스론은 그렇게 경악하지는 않았다.

그때만 해도 테스론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후계자다운 깔끔한 뇌 주름을 지니고 있었다. 심히 무식했다는 이야기다. 과거야 어쨌건 지금은 엘프건 드워프건 별 볼 일 없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 싶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와 싸울 때만 해도 '얘만 조지면 다들 멀쩡해지겠지?'라며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고, 월등한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지녀 전생을 되새겨 보니 은의 현자들이 왜 저리 역사를 감추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 소속감과 전통, 조상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만큼 머리가 좋아진 것이다.

'그리고... 은의 현자들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말이지....'

스테반이나 필레나 앞에서는 입장상 진실을 알려 하지 말라며 호통을 친 테스론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지금 은의 현자가 하는 짓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전생에서, 초반 안타레스 제국은 실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륙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레펜하르트의 강력한 마법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은의 현자는 인류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역사를 조작했다. 그리고 자긍심을 지닌 인류는 결국 다른 종족들을 억누르고 세상의 패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은의 현자는 분명 인류의 수호자라 칭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일을 행해 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들의 간섭은 지나친 과보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은의 현자의 정보 조작이 극에 달한 현재, 인류는 이종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엘프, 드워프, 오크, 트롤.

비록 지금은 노예로 전락했다지만 한때는 인간과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이들이다. 언제 다시 조상의 힘을 깨우칠지 모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종족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원래부터 저런 존재이려니 하고 넘겨짚으며 아무도 그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다. 인간의 자부심을 높이려 한 사상 공작이 도를 넘어서, 현 인류는 대륙 전체를 지배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안타레스 제국 초기, 인간의 왕국들이 맥없이 무너져 간 이유였다. 이종족들이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와도 고작 노예가 뭘 하겠냐며 코웃음 치다가 다들 죽어 나간 것이다. 안타레스 제국이 성립될 때쯤에는 인간들도 비로소 현실을 깨닫고 경각심을 높였지만, 그때는 이미 세 개의 왕국이 무너진 후였다.

'결국 수적 우세를 이용해 최후에는 우리가 승리하긴 했지만, 그 피해도 어마어마했지....'

그때 슬슬 보고서를 전부 검토한 다오스가 테스론을 불렀다.

"수고했다, 현자 레스틴."

"네, 수호자 다오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테스론이 고개를 숙인 뒤 정해진 구호를 외쳤다.

"그럼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

빛과 함께 사라지며 다오스 역시 근엄한 얼굴로 구호를 받았다.

"모든 것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서."

다오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다. 빛의 기둥이 꺼지고 홀이 다시 암흑으로 가득 찬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테스론이 다오스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인류의 수호라... 하지만 인간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키겠다며 당신들이 해 온 그 모든 짓이 결국 현재의 인간들을 약하고 어리석게 만들고 있거늘...."

2

전 국왕 고트린 1세와 왕위 계승자 텔리온이 사망한 지 석 달이 지난 지금, 크로방스 왕국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 번째가 카르사스 폰 페르난도를 지지하는 일파.

페르난도 공작가와 브로젠 후작가가 주축이 된 이들은 지방의 영주들과 귀족 가문의 힘을 입어 카르사스야말로 진정한 왕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휘하에 두 명의 오러 능력자를 두고 일만 오천의 병력을 지닌 카르사스는 현재 가장 크로방스의 왕위에 가까운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유벨 렌 크로방스.

올해 열여덟 살인 이 청년은 전 국왕 고트린 1세와 애첩 사이에서 태어난 이였다. 왕국 최대의 상인, 페오닌 가문을 외척으로 둔 유벨은 상인 출신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왕실의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 귀족 몇몇도 유벨의 손을 거들었다. 비록 혈통에 흠이 있긴 했지만 유벨이 전 국왕 고트린 1세의 유일한 적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하지만 휘하에 오러 유저도 없고 대흉년이 국토를 덮쳐 용병들도 떠나 버린 지금, 유벨에겐 삼천 정도의 병력만이 남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꽤나 밀린 신세였다.

그럼에도 아직 카르사스가 스스로 왕이라 칭하지 못하는 이유는, 유벨 왕자 측이 크로방스의 왕관과 국왕의 인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크로방스 국왕은 왕관과 인장을 소유하고 왕궁의 신성한 홀, 브라스티나에서 대관식을 치러야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카르사스는 왕도 크로틴을 제압해 신성한 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왕관과 인장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카르사스 공자 측은 타오반 상회와 접촉, 거금을 들여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다시 전쟁을 재개할 준비를 척척 갖추는 중이었다. 그에 비해 유벨 왕자 측은 더 이상의 여력이 없다. 이 왕위 계승 전쟁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이미 카르사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다 이긴 싸움이었는데 말이야...."

회색빛 석탑의 한 응접실에서 피터란 백작은 서류 하나를 살펴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갈대처럼 푸석푸석해 보이는 갈색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이 중년 사내는 카르사스 공자 측, 브로젠 후작가의 세력에 속한 자였다. 영지가 근처인 덕에 델피나 자작령으로 후퇴한 유벨 왕자군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지금 손에 쥔 서류 역시 델피나 자작령에 몰래 침투시켜 놓은 그의 첩자가 알아 온 정보였다. 서류에는 유벨 왕자 측이 새로운 조력자를 영입, 막대한 군량미를 손에 넣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껏 자금줄을 다 막았더니 이건 또 뭐지?"

피터란 백작은 혀를 찼다.

상인들에게 금전이 주어지면 얼마나 무서운 무기가 되어 돌아오는지는 내전 초기에 충분히 맛보았다. 그래서 카르사스군은 대흉년이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탄 공국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유벨 왕자 측 상인들의 자금 흐름을 끊는 것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군량미를 손에 넣을 방법은 없을 것이라 안심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조력자가 나타나 곡식을 대 주다니?

'쳇, 운도 좋군, 유벨 왕자.'

정보에 의하면 그 군량미의 양은 자그마치 금화 10만 닢의 가치를 지녔다 했다. 이 정도의 군량미가 유벨 왕자에게 들어가면 다 이긴 전쟁에서 패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이 뻔했다.

피터란 백작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어떻게 그런 조력자를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자고로 보급을 차단하는 것은 전쟁의 상식이다. 게다가 저 정도의 곡식이라면 현 크로방스 왕국에서는 상당한 재산이었다. 저런 보물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보급에 허덕이는 건 카르사스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정도 군량을 탈취한다면 그 공이 적지 않을 터, 내 위치도 상당히 올라갈 수 있겠군.'

처음엔 조금 놀랐지만 생각해 보니 다시없는 기회였다. 좋아하면서 피터란 백작은 계획을 세웠다.

타오반 상회와 곡식을 거래하는 것은 카르사스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타오반 상회가 곡식을 관리할 때 습격할 수는 없다.

그래서 피터란 백작은 습격 시점을 유벨 왕자 측이 타오반 상회로부터 곡물을 넘겨받는 크로방스 왕국 서부 관문 도시, 카드바를 지난 후로 잡았다. 전 왕국이 흉년으로 시달리는 지금 타오반 상회의 곡식은 그야말로 모두의 생명줄이다. 괜히 밉보여 척을 지게 되면 중립을 유지하는 다른 귀족들의 비위를 거스를 가능성이 높다.

"흥, 비겁한 작자들."

중립을 유지하는 귀족들을 떠올리며 문득 피터란 백작은 욕설을 뱉었다. 진정한 국왕에게 힘을 보태는 이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그들은, 피터란 백작에게는 유벨 왕자군만큼이나 미운 존재였다.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로열나이츠 단장인 하츠버겐 경 등 주로 오러 능력자의 가문들이었다. 현재 크로방스 왕국에 존재하는 오러 유저는 모두 다섯, 그중 셋은 이 내전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있었다.

명목은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대상은 국왕이니, 아직 즉위식을 올리지 않은 이상 어느 쪽도 손을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피터란 백작은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오러 능력자라 안심하고 있는 것이겠지.'

보통 귀족이 중립을 표방하게 되면 차후 국왕이 된 이에게 당연히 미운털이 박히게 된다. 하지만 오러 유저는 국가적 차원에서 귀한 존재, 적이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보듬어 안아야 하는 것이다. 저들도 그걸 아니까 안심하고 중립을 선언해 가문의 힘을 보전하겠다는 수작이 뻔했다.

그렇게 툴툴대면서 피터란 백작은 계속 '군량미 탈취 계획'을 짰다. 그리고 시종을 불러 명을 내렸다.

"다들 출병 준비를 하라 일러라!"

☆ ☆ ☆

테르마니아 관도官途.

크로방스 왕국 남부를 관통하는 이 대로는 서부 관문 도시 카드바부터 시작해 왕국의 동쪽 경계인 글로텐 산맥까지 이어져 있다. 차탄 공국이나 그라임 왕국의 관도처럼 제대로 포장된 도로는 아니지만, 오랜 세월 행인들의 발과 마차 바퀴로 다져진 이 테르마니아 관도는 크로방스 왕국의 주요 교역로 중 하나였다.

그 관도 위로 기다란 마차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백 마리의 소와 말들이 짐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며 걸음을 옮긴다. 마부석에는 엘프며 오크 노예들이 고삐를 쥐고 마차를 모는 중이다. 그 주위로 백여 명 정도의 병사들이 마차 행렬을 호위한다.

말 울음소리와 소 울음소리가 한적한 관도 곳곳에서 은은히 울렸다.

음메!

히이잉....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마차 행렬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테르마니아 관도 인근에 위치한 이름 없는 작은 숲.

그 울창한 수풀 속에서 한 무리의 군세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유벨 왕자군의 군량을 포획하기 위해 매복중인 피터란 백작군이었다.

수풀 사이로 마차 행렬을 지켜보며 피터란 백작이 혀를 찼다.

"이것 참... 유벨 왕자 측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저 군량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호위 병력이 고작 백 명 남짓인가?"

곁에 서 있던 젊은 기사, 피터란의 부관인 마이어 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많은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무리일 테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오백 명은 동원할 줄 알았는데...."

피터란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군량미에 대한 정보를 취득한 피터란 백작은 우선 마탑에 전갈을 보내 카르사스 공자에게 자신의 출전에 대한 사후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바로 병력을 동원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군략을 배운 피터란 백작은 유벨 왕자군의 숫자가 대략 기사 20기에 보병 오백은 될 것이라 판단했다. 저 군량미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삼천 병력 모두를 동원해도 지나침이 없겠지만, 그랬다간 델피나와 인근 영지, 즉 본진을 털릴 위험성이 있으니 오백 명 정도가 한계인 것이다.

그래서 피터란도 확실한 승리를 위해 지닌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기사 30기에 팔백의 보병대였다. 만약 전투에서 이겨 군량을 탈취하면 제일 좋고, 적들의 반항이 거세어 탈취하지 못한다 해도 군량미를 불태우고 후퇴하기엔 충분한 전력이었다.

그런데 예상보다도 상대 병력이 너무 적은 것이다. 승리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으니 좋아해야 할 일이나, 지나치게 예상 밖이니 오히려 의심이 간다.

"이미 믿을 만한 병사를 보내 주변 정찰을 마쳤다. 분명 달리 숨겨 놓은 병력은 없을 터인데...."

고민하는 피터란 백작을 보며 마이어 경도 진지한 태도로 조언을 건넸다.

"혹시 모르니 저들의 면모를 상세히 살펴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대 말이 옳다. 마이어 경, 마법사 헤로트를 불러 주겠나?"

"예, 백작님."

곧이어 갈색 로브를 걸친 늙은 노인이 백작에게 다가왔다. 피터란 가문의 마법사, 헤로트였다. 백작은 그에게 명해 원견遠見의 마법을 시행하라 일렀다. 커다란 대야에 물을 붓고 잠잠해지길 기다려 헤로트가 주문을 외우니, 이내 수면 위로 마차 행렬의 상세한 모습이 비쳤다.

주문을 외운 뒤 헤로트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원견의 마법에 전혀 저항이 없습니다. 저들 중 마법사는 없는 듯합니다."

눈앞에서 보듯 마차 행렬을 살펴보며 피터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뇌까렸다.

"이상하군."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들 두 발로 걷거나 마차 위에 올라타 있었다. 말에 올라 탄 이는 둘뿐이었는데 그나마 한 명은 인간 기사가 아니라 사나워 보이는 오크였다. 아마도 검투사 출신 노예인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인간이었는데 역시 기사 같지 않았다. 전혀 마상 전투에 대비하는 차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장도 하프 플레이트 메일 차림에 검 한 자루만 달랑 허리에 차고 있다. 마상 창이나 투창, 방패 등의 무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사라기보다는, 그냥 검사가 말을 몰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저게 기마병의 전부인가?'

도무지 납득이 안 간다. 게다가 황당한 기분은 저, 백여 명의 호위 병력을 보고 나니 더해질 뿐이었다.

백 명의 호위 병력은 마차 행렬 옆에서 일렬로 행군하고 있었다. 다들 커다란 로브를 입고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상태였다. 등에 도끼 창이며 망치 같은 장병기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원견의 주문으로 가까이서 보니 대부분 신장이 하나같이 참으로 작았다.

'저렇게 작은 병사들이라니?'

피터란 백작은 혀를 찼다. 아무래도 병력이 없어 다 자라지 않은 아이들마저 병사로 차출한 것 같았다.

옆에서 함께 수경을 지켜보던 마이어 경이 나름 짐작을 내놓았다.

"아마도 유벨 왕자군은 이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우리들의 습격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테지요. 그렇다면 행렬에 대한 위협은 굶주린 난민들뿐, 아무리 어린 소년들이라도 저렇듯 품 넓은 로브로 가리고 무기만 들려 주면 겉보기엔 병사들로 보일 테니 난민들도 함부로 덤벼들진 못할 테니까요."

"그건 너무 도박이 아닌가? 저 군량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하다못해 정규병 삼백 명 정도는 붙여야 할 텐데?"

"백작님이야 여유가 있으니 그리 생각하시겠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그것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마이어 경이 고개를 저었다.

"유벨 왕자 측에선 지금 병력을 나눌 처지가 못 됩니다.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인데, 그랬다가 우리 군이 쳐들어오면 큰일이니까요. 카르사스 공자께서 지금 바로 진군하지 않는 것이 패배를 두려워해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힘을 비축하시는 것이지요."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저들이 군량미를 포기할 수도 없지요. 그러니 행운을 기대하며 고육지책으로 저런 작전을 택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마이어 경의 조리 있는 설명에 피터란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마이어 경."

주변 정찰도 충실히 행했고, 원견의 마법으로 본진의 상황도 살펴보았다. 저들에게 어떠한 함정도 없음을 확실했다. 그렇다면 분명 마이어 경 말대로 운에 맡기고 저런 가련한 작전을 세웠을 터이다.

"생각보다도 유벨 왕자군의 사정이 더 안 좋은 모양이군."

혀를 차며 피터란 백작은 공격 준비를 명했다. 매복하며 이제나저제나 공격 명령만 기다리던 기사들이 일제히 눈을 반짝인다. 말에 올라타 투구의 안갑을 내린 뒤, 창을 들고 피터란 백작이 휘하 기사들에게 말했다.

"상대는 가련한 소년병, 적당히 겁만 줘도 정신없이 도망칠 것이다. 다들 손 속에 사정을 두도록 하라."

기사들도 어차피 본격적으로 살육할 생각은 없었다. 다들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무장을 갖췄다. 소풍 가는 듯 가벼운 마음으로 피터란 백작이 소리쳤다.

"전원, 돌격하라!"

피터란 백작과 30기의 기사들이 숲을 뛰쳐나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마차 행렬을 향해 돌진했다. 보병대도 열심히 뛰며 뒤를 따랐다.

두두두두!

대지가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기사대가 단숨에 1킬로미터라는 거리를 좁히며 행렬을 급습했다. 피터란 백작이 창을 들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진정한 국왕, 카르사스 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모두 검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거대한 말에 올라타고 두꺼운 강철 갑옷으로 전신을 두른 기사라는 존재는 평범한 보병들에게는 그야말로 움직이는 성이라 할 정도로 대처 불가능한 무위를 지니고 있다. 그런 기사가 30기나 몰려오는데 용기 따위가 남아 있을 리 없을 터, 피터란이 승리를 확신했을 때였다.

순간 그의 눈동자에 기묘한 빛이 떠올랐다.

"으응?"

아무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다.

오히려 보병 전원이 기다렸다는 듯 후드를 젖히며 무기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으하하하!"

"왔구나!"

"기다렸다! 이놈들!"

소년이라 생각했던 이들의 입에서 실로 중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후드 속, 소년은 고사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그 얼굴들을 보며 피터란 백작이 놀라 외쳤다.

"...드워프?"

☆ ☆ ☆

우와아아아!

드워프들이 우렁찬 함성을 터트리며 30기의 기사들을 향해 달려온다. 기본 신장이 1미터가 조금 넘는 난쟁이들이 거대한 말과 기사들을 상대로, 도망은커녕 오히려 돌격해 오는 것이다.

기사 중 하나가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황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드워프들이니, 소년병보다야 조금 낫지만 어차피 미천한 노예 종족일 뿐이다.

피터란 백작이 기가 막혀 중얼거렸다.

"아니, 어떤 미친 작자가 땅강아지들을 데려다가 병력으로 쓴 거야?"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마이어 경이 코웃음을 쳤다.

"곡괭이질이나 하던 것들이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며 기마를 상대로 달려오는 저 모습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한다. 단숨에 드워프들 무리로 다가간 마이어 경이 마상 창을 길게 뻗었다. 과녁은 제일 선두에 선 도끼 창을 든 드워프. 단숨에 꼬치 꿰듯 꿰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앗!"

기합을 터트리며 마상 창을 찌르는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상대가 과녁에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상황을 이해 못 한 마이어 경이 멍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의식이 끊겨 버렸다.

"...아?"

마이어의 머리가 피를 뿌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피터란 백작이 경악해 외침을 터트렸다.

"마이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도끼 창을 든 드워프가, 창이 찔러 오는 그 순간 절묘하게 몸을 비틀어 피하더니 어이없게도 3미터가 넘게 '날아올라' 마이어 경의 머리를 베어 넘긴 것이다.

머리 잃은 마이어 경의 몸뚱이가 저만치 달려가서야 말 위에서 굴러 떨어진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려 나간 마이어 경의 얼굴에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 남아 있을 정도, 아마도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인식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어떻게 단 일격에? 아니, 그보다 저 도약력은 대체?'

피터란 백작은 혼란에 빠졌다. 그냥 인간이 저 높이를 뛰었어도 경악할 일인데, 그걸 드워프가 해냈다. 저 짧은 다리로!

마치 오러 능력자를 연상케 하는 초월적인 움직임이 아닌가?

'마, 말도 안 돼....'

그러는 와중에도 선두에 선 또 다른 두 명의 드워프들이 비슷한 몸놀림으로 두 명의 기사를 베어 넘겼다. 기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다.

"뭐야, 저건?"

"무슨 저런 말도 안 되는!"

단숨에 귀한 기사 셋의 목숨이 허무하게 날아간 것이다. 다들 마상 높이까지 휭휭 날아다니는 저 드워프들의 움직임에 기겁할 때였다. 다른 드워프들도 기사들에게 덤벼들었다.

"으랏차차!"

"썰어 봅세!"

"덤벼라, 인간들아!"

다행히 저런 무시무시한 도약력을 지닌 드워프는 세 명뿐인 듯했다. 하지만 다른 드워프들도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다들 점프하는 대신 달려오는 말 앞에 거침없이 몸을 던진다. 기사들의 당혹이 더더욱 깊어졌다.

"이놈들은 대체!"

"이, 미친놈들!"

당황하면서도 기사들이 평소 행한 대로 좌우로 창을 휘둘러 댔다.

원래 보병들을 상대할 땐 그저 말을 달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를 보는 법이다. 말발굽을 울리며 전진하고, 좌우를 창이나 마상 검으로 훑어주면 그것만으로도 보병들은 베어 놓은 수숫단처럼 썰려 나가기 마련이다.

그 당연한 상식이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드워프들은 밟아 오는 말발굽을 절묘하게 피하며 도끼를 휘둘러 대고 있었다. 그때마다 말들의 뱃가죽이 찢어지고 내장이 쏟아지며 기사들이 낙마한다. 낙마한 기사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육중한 망치가 그들의 머리통을 부수어 버린다.

원래대로라면 자살행위여야 할 무모한 짓, 그러면서도 다들 전혀 긴장하거나 겁먹은 모습들이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태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카다마이트처럼은 못하지만...."

"어차피 덩치 큰 놈이랑은 만날 싸워 봤는데, 뭘?"

"말 타고 칼 든 것 정도야, 켄타우로스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다들 말발굽을 피해 좌우로 빠지고 기사의 공격을 받아 넘기며 반격해 댄다. 그 동작이 실로 능숙해 수천 번을 해 온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뛰어든 지 채 몇 분 지나지도 않아 스무 명이 넘는 기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죽어 간 기사들의 피가 대지를 가득 적신다. 그 참혹한 모습에 피터란 백작이 울부짖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 ☆ ☆

두 발로 땅을 박찬다. 단숨에 말을 탄 상대의 머리 위까지 뛰어오른다.

"허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카다마이트는 도끼 창을 길게 횡으로 휘둘렀다. 또다시 기사 한 명이 허리째 잘리며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피를 뿌렸다. 피터란 백작은 두 발로 뛰어다니며 마상의 기사들을 상대하는 그의 무위에 경악했겠지만, 오러 능력자인 카다마이트에게 이런 평범한 기사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실 서른 명의 기사 모두를 혼자 상대할 자신도 있었다.

'구원자께서 오러를 구현시키지 말라 하셨으니, 시간은 엄청 걸리겠지만.'

그렇게 네 명째 기사를 베어 넘긴 뒤 카다마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사 말로이드. 전사 슬로이틀.

그랜드 포지의 또 다른 오러 능력자들도 가뿐히 기사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그들도 카다마이트처럼 직접적으로 오러를 도끼나 망치에 씌우는 짓은 하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드워프들의 진정한 전력을 보다 극적으로, 가장 화려한 무대에서 연출하기 위해 지금의 전투에서는 오러 유저임을 숨기라 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다들 아이를 데리고 노는 것처럼 쉽게도 기사들을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저 오러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오러 유저는 충분히 초인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 굳이 오러를 구현화시키지 않아도 이 정도 기사들을 상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부상은 고사하고 갑옷에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 상대를 도륙하고 있었다.

한편 피터란 백작은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토록 아끼고 보살펴 온 기사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간다. 월등한 무위를 보이는 저 세 명의 드워프도 두려웠지만, 다른 드워프들조차도 하나하나가 기사들과 맞먹는 괴물들이었다. 서른 명의 기사들이 대부분 쓰러지는 동안 저들은 경상을 입은 이조차 하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팔백의 보병대가 전장에 도착했다. 피터란 백작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보병대! 돌격하라! 돌격하라아아아!"

보병대가 드워프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팔백 대 백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전황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백 쪽이었다.

백 명의 드워프 병사들이 양 떼에 뛰어든 늑대들처럼 거침없이 보병대를 유린해 갔다. 피가 튀고 비명이 하늘 높이 아우성쳤다.

이미 그들의 우두머리, 기사들의 비참한 패배를 본 보병대였다. 평소 받은 훈련 덕에 명령이 떨어지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이미 사기는 꺾일 대로 꺾인 후인 것이다. 보병대 여기저기서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사기충천했어도 어차피 상대는 안 되었겠지만.'

마부석에 앉아 전황을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보기엔 팔백 대 백의 전투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 이들은 그랜드 포지의 최정예 전사들인 것이다.

인간들은 농사짓던 농민들도 병사라며 차출해 기본 동작 대충 가르치고 창 들려서 전쟁터에 내보내곤 한다. 하지만 인구가 귀한 드워프나 오크들은 전사와 생산직 종사자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들에게 전사라는 존재는 인간으로 치면 기사와 동등하다.

즉, 이 전투는 사실 백 명의 기사가 팔백 명의 일반 병사들을 유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평범한 인간 기사와 달리 이 드워프 전사들은 하나하나가 험한 환경 속에서 극도로 단련되어 추리고 추려진 이들 뿐이다. 전투의 베테랑인 이들을 일반 병사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힘들게 여기까지 데려온 보람이 있구먼.'

그동안의 여정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실실 웃었다.

크로방스 왕국으로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타오반 상회에 곡물을 인수하러 갈 때 공간 포털을 이용해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을 일제히 크로방스 왕국으로 이동시켰다. 그랜드 포지에서 다이만의 돌을 이용해 차탄 공국으로 이동한 뒤, 거기서 전원 로브를 입혀 타오반 상회의 호위 병력으로 위장하고 세텔라드 산맥 남부를 넘은 것이다. 공식적으로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은 레펜하르트의 개인 노예 신분, 타오반 상회의 정식 인가가 있는 노예 문서가 있으니 차탄 공국을 통과해 크로방스 왕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현재 크로방스 왕국으로 이동한 드워프들이 오러 능력자인 카다마이트와 말로이드, 슬로이틀, 그리고 백 명의 전사들이었다. 비록 마법병단은 아직 수준이 높지 않아 그랜드 포지에 남았지만 이들만으로도 피터란 백작의 군세를 상대하는 것은 넘치고도 남았다.

마부석 옆에서 전황을 지켜보며 혹시 나올 부상자를 치유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실란이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일 줄은 몰랐어요."

"그야, 이쪽은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고 저쪽은 전략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방비였으니까. 객관적인 전력도 이쪽이 높은데 약한 놈이 방심까지 했으니 결과가 오죽하겠냐?"

레펜하르트의 말에, 곁에서 같이 앉아 있던 시리스가 상대편 지휘관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피터란 백작은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고함만 질러 대고 있었다.

"싸워라! 저놈들은 고작 드워프들이다! 저 천한 난쟁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생각해 보면 피터란 백작도 절대 무능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 참가한 노련한 기사였고 이번 전투에 임할 때도 철저히 준비해 모든 요소를 점검했다. 그의 행동에 군사적으로 잘못된 점은 없다.

단지, 피터란 백작은 체스를 준비했는데 레펜하르트는 장기말을 꺼내 들었달까? 아예 룰이 달라 버리니 예측도 대처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한들 상대가 드워프, 그중에서도 오러 유저가 셋이나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할 테니까.

'그걸 예측하면 군사학이 아니라 점술의 영역이지.'

누가 봐도 확연할 정도로 승세가 기울자 카다마이트가 미리 들은 대로 고함을 질렀다.

"도망치는 이들은 쫓지 마시오! 우리 임무는 이 마차를 호위하는 것일 뿐이니!"

이것은 아군에 하는 말이 아니라 피터란 백작 측 병사들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도망쳐도 쫓지 않는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살아남은 보병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무기를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아아아!"

피터란 백작이 목이 터져라 외쳐 댔지만, 병사들의 도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모든 휘하 기사들과 병사를 잃고 홀로 적진 한가운데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런...."

그제야 피터란 백작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떠올랐다. 피가 흥건한 무기를 손에 쥔 채 드워프 전사들이 히죽거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은 표정이다. 피터란이 분노와 공포로 부들부들 떨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들의 주인이 누구냐!"

이 상황까지 와서도 그는 여전히 이 드워프들이 누군가의 노예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양식 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생각이니까.

그런 피터란 백작의 눈에, 말을 탄 채 저만치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관전하고 있는 청년 검사가 보였다. 러스였다.

원래 레펜하르트 일행은 혹시나 드워프들의 호위망이 뚫릴 때를 대비해 마차 곁에 머물고 있었다. 혹시 저들이 곡식에 불이라도 지르면 안 되니 그런 것인데, 드워프 전사들이 워낙 잘 싸우다 보니 할 일이 없어 그냥 구경꾼 신세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러스도 말을 탄 채 마차 옆에서 전황을 보고만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피터란 백작에게는 드워프들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피터란 백작이 죽음을 각오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소리쳤다.

"정녕 도리를 아는 자라면, 기사를 천한 것들의 손에 죽게 하지는 않을 터이다!"

드워프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재수 없네."

"몰라서 저러는 거잖아. 할 수 없지."

"하긴, 못 배워서 저런 거니 미워할 수도 없구먼."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드워프답게, 피터란 백작이 지금 패배를 인정하고 기사답게 '명예로운 죽음'을 원한다는 걸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은 진지하기 그지없으니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고쳐 들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할까?"

검은 수염의 드워프, 말로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망치를 치켜들었다.

"아닐세, 카다마이트. 내가 하지."

다른 드워프 전사들도 웅성대며 만류했다.

"어, 내가 하면 안 되나?"

"그러게. 댁들이 나서면 한 방에 끝이잖소?"

"많이 썰었으니 좀 쉬소."

딱히 드워프들이 전공을 탐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딴 사람들 힘 많이 썼으니 좀 쉬고 자신이 힘든 일 대신 해 주겠다는 아름다운 품앗이 정신에서 이렇게 나온 것이었다.

물론 듣는 피터란 백작 입장에선 혈압 올라 뒷목 잡고 쓰러질 대화들이었다.

"이, 이 미천한 것들이!"

발작한 피터란이 박차를 가했다. 말을 달리며 창을 들고 용맹하게 드워프들 사이로 뛰어드는 그 모습은 정녕 기사의 귀감이리라.

그때 저쪽에서도 누군가가 말을 몰고 달려왔다. 드워프가 아니라 전신에 흉터가 가득한 오크 검투사였다. 그가 마상검을 들고 피터란 백작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며 외쳤다.

"탈카타! 너 죽인다!"

그 모습에 피터란 백작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 더러운 오크 따위가!"

노련한 오크 검투사들이 기사와 맞먹는 기량을 가진 이가 간혹 있다는 사실은 백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땅 위에서의 이야기이다.

오크가 감히 기사에게 말을 타고 덤비다니?

"이 나를 이렇게까지 우습게 본단 말이냐!'

기마술을 배운 오크 따위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는 피터란 백작 입장에서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분노로 수염을 부들부들 떨며 피터란 백작이 오크 검투사, 탈카타와 격돌했다. 서로의 검과 창이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고....

서걱!

피를 뿌리며 피터란 백작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툭!

데구르르....

머리 잃은 피터란의 몸이 말에서 떨어진다. 그의 애마가 주인을 잃고 조금 달리다가 제자리에 선다. 떨어진 피터란의 머리를 검을 뻗어 꿰어 올린 뒤, 탈카타가 당당하게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아갔다.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고 피터란의 목을 내밀며 탈카타가 오크어로 외쳤다.

"나의 주인이여, 적장의 목을 베었나이다!"

"으, 응. 잘했다."

레펜하르트는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그리고 눈앞의 오크, 탈카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쩝.... 교육은 되었지만 그래도 사상은 아직인가...."

레펜하르트가 타오반 상회를 통해 데려온 이는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 롤페인 상회의 테리크를 죽이고 엘프와 오크 노예들을 거두어 타오반 상회에 맡긴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인간의 교육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지금, 슬슬 기회가 왔다 싶어 다시 데려온 것이다.

'계획은 반쯤 성공했는데 말이지.'

오크 검투사였던 탈카타는 그동안 기마술을 정식으로 배워 이제는 어지간한 기사 수준의 마상 전투가 가능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머슴 신세였던 오크들도 검투사 탈카타 밑에서 검술을 익히고 전사의 정신을 배워 쓸 만한 무사로 탈바꿈했다. 성노였던 엘프 여인들은 회계 부기며 각종 상인의 수법을 배워 현재 능숙하게 군량미를 관리 중이다.

타오반 상회주 시볼트 역시 이들이 '인간처럼' 지식을 배우고 익히자 그 효과에 놀라 자신의 노예들도 비슷한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차탄 공국의 다른 상회들도 비슷한 짓을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는 레펜하르트의 계획대로 되었는데....

'정작 노예들은 아직도 사상 변화가 그리 안 보인단 말이야.'

기대했던 노예들의 자유 의식은 영 깨우쳐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 것이다. 맡겨 두었던 엘프와 오크들은 분명 예전보다 유능하고 영리해졌지만, 그만큼 레펜하르트를 진정한 주인으로 생각하고 충성심만 깊어져 있었다. 이들이 의리가 있고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주인이라 생각해 맹목적으로 섬기는 것은 문제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개가 늑대로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보다 충견이 되어 있다.

'하긴, 고작 반년 지나 놓고 뭘 벌써부터 결과를 바라냐? 나도 참....'

잠시 고민했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이건 금방 효과를 볼 거라 기대하고 세운 계획이 아니었다.

마켈린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도 요원한 것이 그가 걸어야 할 길이라고. 지금이야 인간다운 교육을 받는 것이 '특권'이라서 저리 충성을 다하지만, 모두가 노예를 교육시키기 시작하고 그것이 '당연'해지면 노예들의 사상도 분명 변화가 오리라.

서두를 필요는 없다.

여러 씨앗을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싹이 트리라 믿고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충성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탈카타에게 물러가라 손짓하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쟤도 얼른 칼켄이랑 스탈라에게 맡겨서 정신 교육 좀 시켜야지.'

저들이 여전히 노예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관없다. 그럼 자유로운 동족들 사이에 집어넣으면 된다. 그러면 저들은 자유 의식을 가질 것이고, 저들이 배운 인간의 교육은 이종족들에게 자유를 찾을 훌륭한 힘이 되어 주겠지.

호위를 위해 다시 마차 선두로 말을 몰고 가는 탈카타의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 드워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슬슬 출발할 준비를 합시다!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알겠소, 구원자시여."

안 그래도 드워프들은 실란을 주축으로 열심히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죽은 기사들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고,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실란이 치유술을 펼친다. 드워프들도 보병들에겐 딱히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기에 대부분 도주하고, 남은 부상자는 많지 않았다. 넘치는 신성력으로 실란은 부상자들을 전원 운신 가능한 수준까지 치료하고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동안 먹을 곡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저 녀석, 잘하네.'

레펜하르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실란 입장에서는 그냥 성직자다운 인도적인 자세를 보인 것이지만 인간 병사들에겐 의미가 다르다. 그들이 노예로 치부한 드워프들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런 자비로운 대접까지 받은 것이다. 그동안의 인식이 있어 차마 대놓고 감사를 표하진 못하지만 다들 드워프를 바라보는 표정들이 바뀌어 있다.

전투가 정리되자 오크 무사들이 다시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곡식의 양과 보존 상태를 점검하던 엘프 여인들도 길 떠날 차비를 갖췄다. 드워프들도 다시 로브를 걸치고 마차 옆을 따라 걸었다.

곡식을 실은 마차 행렬이 다시 관도를 따라 덜컹덜컹 움직이기 시작했다.

2

델피나 남작가 2층의 커다란 응접실, 그곳에 지금 스무 명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유벨 왕자군의 주축인 그들은 페오닌 백작과 하론 남작, 스팔 백작 등 크로방스 왕국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거상 출신의 귀족들과 고트 후작이며 라이드 공작 등 역사 깊은 가문의 귀족들로, 테이블 하나를 두고 서로를 마주 본 채 회의에 열중하고 있었다.

페오닌 백작, 크로방스 최대의 상회였던 페오닌 가문의 주인이자 유벨 왕자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그가 허연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공, 그대의 도움에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실제로 페오닌 백작은 눈앞의 이 거구의 마법사를 진심으로 환대하고 있었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레펜하르트를 이렇게 환영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외국인인 데다가 마법사이기까지 한, 이런 수상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믿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현재 유벨 왕자군 측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를 잃고 이곳 델피나 남작령까지 후퇴한 처지였다. 이미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전쟁, 거기서 레펜하르트가 들고 온 군량미는 그야말로 지옥에 내려온 한 줄기 구원의 동아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유벨 왕자군의 귀족들은 레펜하르트의 합류를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내건 조건, 크로방스 왕국 내에 이종족을 위한 자치령을 달라는 그 요구마저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너무 시원시원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어 상당히 설득에 난관을 겪을 거라 예상한 유벨이나 레펜하르트가 되려 의아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유벨 왕자 측 상황은 이미 모든 말을 잃고 체크메이트 직전까지 간 체스판이나 다름없다. 레펜하르트가 꿍꿍이를 지니고 접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믿은 다음 뒤통수를 맞건 믿지 않고 레펜하르트를 내치건, 어차피 유벨 왕자군에 남은 것은 파멸뿐이었다.

그리고 저 자치령의 조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자신의 영지를 잃고 목이 달아날 판이다. 제 영지를 떼어 준다 해도 울면서 승낙해야 할 판인데 별 가치도 없는 적측의 영지를, 그것도 승리하고 나면 달라니?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페오닌 백작이 난색을 표하는 것은 또 다른 레펜하르트의 요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대의 요구는 너무 어이가 없구려."

처음, 레펜하르트가 마차 가득 곡물을 싣고 나타났을 때는 모두가 환호를 터트렸다. 그가 드워프며 엘프들을 잔뜩 데리고 온 것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저 정도 부자라면 노예를 잔뜩 거느리고 있는 것도 당연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 앞에서 레펜하르트가, 이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전사들로서 유벨 왕자군에 가담하러 왔으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동맹의 자격으로 그들과 교류한다고 선언했을 때는 다들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저들은 야생의 드워프와 엘프들이다. 그것들과 교류를? 마치 늑대나 호랑이 무리와 교류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이자의 의견을 묵살했다간 소중한 군량미가 날아갈 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 그렇군요.'하고 대충 넘어가긴 했지만 솔직히 레펜하르트가 제정신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레펜하르트는 지금 회의에서 자신이 데려온 드워프와 엘프 들을 정식 병력으로 인정하고 인간 용병처럼 계약을 맺은 뒤 전투에 참가시켜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들의 참전이 제가 군량을 대는 조건 중 하나입니다."

여전히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저 '정신 나간' 마법사를 바라보며, 페오닌 백작은 미간의 주름을 찌푸렸다.

'마법사라 했으니 뭔가 마법으로 저들을 길들인 모양인데 그렇다고 저것들이 사람처럼 대하자니... 하여튼 마법사들의 괴팍함은 못 말리겠군.'

하론 남작이 달래는 목소리로 레펜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공께서 영지 내에서 무슨 뜻을 세우시건, 그것은 저희들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니 뭐라 하지 않겠습니다."

자고로 뛰어난 상인의 조건은 흥정을 잘하는 것이다. 하론 남작은 자치령에 대한 조건을 흔쾌히 넘기는 관대함을 보여 준 뒤 바로 레펜하르트의 요구를 반박했다.

"하지만 노예 종족들을 내세워 반격에 나선다니? 이것은 전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몽상일 뿐이외다. 어찌 고집을 피우시는 게요?"

다른 귀족들도 열심히 옆에서 거들었다.

"그렇소, 레펜하르트 공. 저것들이 나름 싸움 좀 할 줄 안다고 칩시다. 그렇다 한들 고작해야 백 명 남짓한 이들이 뭘 할 수 있겠소?"

"정확히는 126명이지요. 그리고 자유로운 오크들, 푸른 곰 부족 역시 합류할 것입니다."

"야생의 오크라 봐야 야만성이나 떨칠 줄 알지 대규모 전쟁에서 쓸모가 있을 리 없지 않소?"

다들 귀족도 아닌 레펜하르트에게 공이라는 칭호까지 써 가며 열심히 비위를 맞추려 했다. 사실 유벨 왕자 앞이라 말을 못할 뿐이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삼천밖에 남지 않은 병력, 보급이 확보된다 해서 이 전쟁에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저 정도 군량이 있다면 장기간의 농성은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카르사스 측과 좋은 조건으로 협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당히 토지를 빼앗기겠지만 영지도 어느 정도는 돌려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협상 속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이 유벨 왕자의 목일 터, 그래서 지금 이 회의에서 대놓고 안건을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여튼 이미 자신의 영지를 빼앗긴 이들 입장에선 레펜하르트의 군량미가 기사회생의 기회였다. 그런데 자꾸 상황 파악도 못 하고 고집만 피우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젊은 축에 끼는 갈린 남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공, 드워프와 엘프들의 가격이 얼마인데 그들을 전장으로 내보낸단 말입니까? 차라리 저것들을 팔아서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 정도 숫자의 드워프와 엘프들이란 차탄 공국에서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상회를 알아보도록 하지요."

순간 레펜하르트가 눈을 부라렸다. 그가 또다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어디까지나 동맹의 입장으로서 그들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다들 한숨을 내쉬며 각자 입을 열었다.

"아니, 드워프 따위가 뜻은 무슨 뜻?"

"원시적인 야생 엘프가 무슨 전투를 한단 말인가?"

"답답하도다...."

다들 가슴을 치며 한탄을 터트린다. 분위기를 지켜보며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충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어차피 전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슬슬 레펜하르트는 카드를 꺼내 들기로 결심했다.

"저들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당연한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드리지요."

귀족들이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 뒤, 레펜하르트가 좌중을 둘러보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우리들만의 힘으로 시나이 요새를 함락시켜 보이겠습니다."

모든 귀족들의 안색이 일제히 굳었다. 페오닌 백작이 주름진 얼굴을 찌푸리며 뇌까렸다.

"지금... 시나이 요새라고 하셨는가?"

"그렇습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른 이들이 발작하며 외쳐 대기 시작했다.

"뭣이?"

"장난하는 건가? 시나이 요새가 무슨 산적 부락인 줄 아는 거냔 말이다!"

"고작 피터란 백작 정도를 물리쳤다 해서 스스로가 명장이라도 된 줄 아는가?"

시나이 요새.

크로방스 왕국 중부에 위치한 거대한 이 성은 드워프들의 기술로 지어진, 왕도 크로틴을 수호하는 관문 요새다. 현재 카르사스군이 차지하고 있는 이 요새는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병력도 삼천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시나이 요새 주둔군만으로도 유벨 왕자군의 전력과 맞먹는 것이다.

게다가....

"모르는 모양인데, 시나이 요새는 왕국 최강의 기사, 테츠발트 경이 있는 곳이라오."

하론 남작이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테츠발트 폰 페르난도.

향년 쉰다섯의 이 노숙한 무장은 마흔다섯에 각성해 10년째 오러를 수련해 온 노련한 오러 유저다. 현재 로열 나이츠 단장 하츠버겐과 함께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기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페르난도의 성을 받을 만큼 충성스러운 인물이었다. 카르사스의 가장 믿음직한 후원자라 할 수 있었다.

지금 레펜하르트는,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오러 능력자와 삼천의 병력이 지키는 두터운 요새를 고작 백여 명 남짓한 병력, 그것도 노예 종족들만으로 함락시키겠다는 소리를 한 것이다. 다들 그를 성토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리석도다...."

"역시 마법사라서 전쟁을 모르는군!"

뭐, 이것 역시 익히 짐작했던 반응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귀족들의 태도를 무시한 채 테이블 상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까부터 회의를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유벨 왕자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말을 건넸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대우만 받는다면 저들은 유벨 왕자님께 승리를 안겨 줄 것입니다."

그러자 유벨 왕자가 손을 들었다. 귀족들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유벨이 좌중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난 그대들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소. 무엇이 문제요? 시나이 요새를 점령하면 더 좋을 수가 없고, 못한다면 그대들의 말이 옳다는 증명이 되겠지. 우리 군이 피해 볼 일은 없지 않소?"

갈린 남작이 고개를 저으며 유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왕자님, 아까운 노예들을 의미 없이 죽게 하는 일입니다."

백 명의 드워프와 엘프들이 얼만데? 그 보물을 그냥 길바닥에 버리자는 말인가! 뼛속까지 상인인 갈린 남작에게는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벨은 갈린의 말을 묵살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노예가 아니라 군량 쪽 아니었소? 아, 군량미는 다 놓고 가는 것이지, 레펜하르트 공?"

말하다 말고 유벨이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일주일 치 식량만 지참한 채 움직일 것입니다."

"그럼 군량미는 대부분 그대로 이곳에 있겠군. 고작 백여 명, 그들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겠소? 우리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듯한데?"

귀족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듣고 보니 정말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군량미인 것이다. 감정적으로야 여전히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반대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았다.

"왕자님 말씀이 실로 옳소. 난 저자의 제안에 찬성하겠소."

고트 후작이 편을 들며 나섰다. 후작 곁에 앉아 있던 귀족들도 찬성의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상인 출신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귀족들로 유벨의 혈통을 존중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었다.

전쟁에 패할지언정 결코 그릇된 왕을 섬길 수는 없다는 귀족다운 의식을 가진 이들은 상인 출신 귀족들의 보신주의에 질려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섬기던 주인의 목을 건네고 자기 안위를 꾀하는 행위는 실로 치욕스러운 불명예인 것이다. 그런 만큼 딱히 노예들이 비싸다느니 아깝다느니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고트 후작이 찬성표를 던지자 상인 출신 귀족들도 차마 반대할 수가 없었다. 하나 둘 레펜하르트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페오닌 백작도 결국 찬성의 뜻을 표하자 유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벨이 천천히 걸어가며 오른손의 반지를 들었다. 왕가의 인장을 내세우자 레펜하르트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유벨이 왕자다운 위엄을 보이며 엄숙하게 말했다.

"레펜하르트 공, 크로방스 왕가의 정통한 후계자로서 명한다. 그대에게 시나이 요새 함락 임무를 맡기노니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신 레펜하르트,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 유벨 전하!"

☆ ☆ ☆

회의실에서 나온 레펜하르트는 바로 델피나 남작의 성을 벗어나 인근 숲으로 향했다.

성문을 통해 숲 속을 조금 걷고 나니 이내 수십 개의 천막이 설치된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천막 근처에서 수많은 이종족들이 화로를 걸고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전사들과 레펜하르트가 데리고 온 엘프, 오크 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 숲 속 공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유벨 왕자군이 허름할지언정 제대로 된 나무 막사에서 생활하고 있는 걸 감안하면 꽤나 푸대접이라 하겠다. 하지만 어차피 푸대접을 각오하고 온 이들이라 불만 따윈 보이지 않았다.

사실 유벨 왕자 측도 레펜하르트의 체면을 보아 이들에게 남작령 한쪽에 숙소를 마련해 주기는 했다. 하지만 그곳은 어디까지나 노예들이 생활하는 곳이었다. 자유인임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좁은 방에 열댓 명씩 집어넣는, 위생도 안 좋고 공기도 잘 안 통하는 노예들의 숙소에 비하면 차라리 숲 속에서 맑은 공기 마시며 천막 치고 자는 게 더 낫기도 했다.

공터를 조금 걸어, 레펜하르트는 외각의 커다란 천막에 도착했다. 그의 일행들이 묵고 있는 곳이었다. 일행들에겐 특별히 남작 저택에 제법 그럴듯한 숙소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다들 거절하고 이종족들과 숙식을 함께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발소리가 들렸는지, 천막 차양이 열리고 백금발의 엘프 소녀가 밖으로 나왔다.

"아, 시리스. 타시드는 예정대로 떠났어?"

"네, 조금 전에 흑왕과 함께 출발했어요."

"음, 제 시간을 맞춰야 할 텐데...."

"회의는 잘 끝났나요?"

"응, 계획대로 됐어."

뒤이어 러스와 실란, 틸라도 밖으로 나왔다. 실란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정말 우리들만으로 시나이 요새 함락하러 가는 거예요?"

"푸른 곰 부족의 전사 백 명도 합류할 테니 우리들만은 아니지."

"그래도 그렇지. 삼천 대 백, 아니 삼천 대 이백이라니...."

자고로 공성전에서 성을 공격하려면 방어 병력의 세 배가 필요하다는 것이 군사 상식이다. 이쪽이 병력이 많아도 모자랄 판에 고작 이백 명으로 요새를 점령하겠다니? 딱히 전략가가 아니더라도 모두들 헛소리로만 치부할 일이다.

러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승산이 있다는 거지."

드워프와 오크 전사의 무력은 인간 기사를 아득히 상회한다. 양쪽 다 만나 본 러스는 그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오크 전사들은 다이어울프 라이더이기도 하니, 드워프 전사에게는 없는 기동력마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방어와 공격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들은 평범한 보병은 물론이고 인간 기사 대여섯도 충분히 홀로 상대할 수 있다.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딱히 크로방스 왕국의 기사들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랜드 포지와 푸른 곰 부족의 전사들이라면 드워프와 오크들 중에서도 최강자 집단이란 말이지. 한 종족의 최강 병력 둘이 모였는데 그 정도도 못할 리 없지."

"사기 치는 기분이네요."

시리스도 쓴웃음을 지었다. 러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게다가 계획대로만 되면 시나이 요새엔 형님 빼고도 오러 유저만 여섯 명이 모이게 되는 것 아닙니까? 하, 여섯 명의 오러 능력자라니... 대륙 역사를 통틀어도 흔치 않은 광경일 겁니다."

한 왕국의 오러 유저가 다섯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오러 유저의 존재는 귀하다. 시나이 요새 사방에서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치는 것만으로도 상대 병사들의 사기는 사정없이 떨어지리라.

"대륙 전체에서 오크와 드워프의 위상이 엄청 오르겠네요."

그 광경을 상상하며 실란이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 곁의 천막에서 중후한 인상의 엘프 사내가 다가오며 대화에 끼었다.

"엘프들 역시 그 자리를 양보할 생각은 없다네. 우리 역시 결코 예전 같지는 않을 테니까!"

단하임 일족의 수장, 렐하드였다.

레펜하르트는 그랜드 포지의 병력을 이동시킬 때 공간 포털을 통해 단하임 일족에도 잠시 들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종족들의 힘을 세상에 보이는 것, 엘프들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단하임 일족의 숫자가 적어 많은 병력이 오지는 못했다. 현재 렐하드는 스무 명의 엘프 전사들만을 이끌고 이곳에 합류해 있었다.

하지만, 그 스무 명의 엘프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작렬하는 불꽃의 친우여!"

렐하드가 나직하게 읊조리며 한손을 들었다.

화르륵!

불길이 일어나며 거대한 불의 거인이 허공에 나타났다. 불의 정령, 이그나시스였다. 선명한 정령의 형태를 순식간에 구현한 것이다. 예전 렐하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지의 정령술이었다.

"은인 덕에 엘븐하임이 부활하였으니, 인간들도 더 이상 우리 엘프들을 허약한 종족으로 매도하지 못할 것이오."

품속의 나뭇가지를 매만지며 렐하드가 각오를 다진 표정을 지었다. 마궁 니힐렌을 이용해 레펜하르트가 부활시킨 세계수, 엘븐하임의 가지였다. 그들은 엘븐하임의 성장을 돕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 뒤 그 잘린 가지를 항시 품에 두고 정령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그나시스의 위용을 보며 실란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우와, 대단하네요?"

"세계수가 존재하니 그리 대단할 것도 없지."

불의 정령을 거두며 렐하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고작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단하임 일족의 엘프들은 놀라운 속도로 과거의 정령술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들의 기량이 대단하다기보다는, 세계수가 존재하면 원래 엘프들은 다들 이 정도는 한다고 보는 쪽이 옳다.

"지금은 세계수가 아직 작아 근처에서 벗어나면 이렇듯 가지를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른 엘프들 역시 엘븐하임의 부활을 느끼게 될 거요."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레펜하르트의 말에 렐하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때 숲 저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리스가 그 청년을 알아보고 놀란 눈으로 말했다.

"유벨 왕자님?"

다른 귀족들은 이 공터를 노예들의 숙소라며 천시해 결코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자 주제에 이곳에 오다니? 놀란 시리스를 보며 유벨이 어깨를 으쓱였다.

"피니아가 다른 드워프들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러고 보니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드워프 처녀, 피니아가 그랜드 포지의 다른 드워프들을 만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기쁨 가득한 얼굴로 뭔가 떠들고, 간간히 웃고 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유벨이 문득 레펜하르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리 짠 대로 떠들기는 했는데, 정말 승산이 있긴 있는 것이오?"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승산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목숨을 각오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겠지만."

아무리 푸른 곰 부족과 단하임 일족,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이 강력하다 한들 수적인 열세는 확실하다. 삼천 대 이백이라는 전력 차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유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미소 지었다.

"하여튼 피니아의 웃음을 보니, 좋긴 좋구려."

그리고 레펜하르트를 향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레펜하르트 공, 사실 난 그대가 진심으로 내 신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소."

레펜하르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었다. 다른 귀족들 앞에서야 신하인 척하며 무릎을 꿇었지만, 솔직히 정말 유벨을 섬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전생에 황제까지 한 몸인데 이런 촌 동네 왕자에게 충성심이 생길 리가 있나? 어디까지나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발판으로 이용하는 것뿐이다.

'그 피니아라는 드워프 처자가 가르쳐 주었겠군. 하여튼 진실의 소리는 귀찮아.'

그때 유벨이 표정을 풀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상관없소. 어차피 그대의 뜻이 내 것과 일치하는 이상, 충성하는 신하들보다도 더 믿을 수 있는 인물일 테니까."

"그리 생각해 주시니 고맙군요."

유벨의 표정이 왕자의 얼굴 대신, 연인을 사랑하는 청년의 얼굴로 변했다.

"그러니 그대가 원하는 대로 행하시오. 내가 그대를 돕겠소. 설사 레펜하르트 공이 패한다 해도 난 원망하지 않을 거요. 저 미소를 본 것만으로도 그대에게는 감사하고 있으니까."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승리였다.

그것이 지극히 적은 확률이긴 하지만, 희망이 생겼다.

유벨은 그것만으로도 레펜하르트에게 감사하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3

겨울의 흔적이 자취를 감추고 슬슬 햇살이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완연한 늦봄.

시나이 요새 한편에 위치한 널찍한 연무장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짙은 청색의 오러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오러의 주인은 건장한 체구의 중년 사내, 그는 군청색 오러로 빛나는 클레이모어를 한 손으로 가뿐히 휘두르며 연신 땀을 흘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중년 사내가 검을 거두며 숨을 골랐다.

"후우, 아침 수련은 이쯤 해 둘까."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쪼르르 달려와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받으세요, 테츠발트 님."

"고맙다."

땀을 닦은 뒤 테츠발트는 다시 시종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건물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지루한 하루가 시작되겠군."

그가 이곳, 시나이 요새를 맡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테츠발트가 한 것이라곤 이렇듯 하루 종일 연무장에 처박혀 검을 휘두르는 일뿐이었다.

"고작해야 반역자의 잔당 따위, 지금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거늘...."

회랑을 따라 걸으며 테츠발트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시나이 요새가 요충지 중의 요충지라는 점은 물론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왕국 최강의 오러 능력자인 테츠발트와 정예 중의 정예인 페르난도 기사단, 그리고 삼천 병력이 수호해야 할 정도는 아닌 것이다.

원래는 저 간악한 유벨 왕자군을 맹렬히 몰아치는 태풍이 되어야 할 그의 병단이 이렇듯 요새에 처박혀 있는 이유는 카르사스 공자의 명 때문이었다.

-이미 승리는 확정된 것, 서두르느라 병사들의 피를 더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전의 준비를 갖출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승리를 눈앞에 두고도 수하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그 모습은 실로 성군의 것, 그러니 기뻐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전투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지루한 것도 사실이었다. 차라리 유벨 왕자군이 화끈하게 쳐들어와 주면 참 좋겠다만....

"밑천 다 털린 저놈들이 그럴 리는 절대 없겠고."

그렇다고 시간을 때울 다른 취미 같은 것을 지니지도 못한 처지다. 덕분에 테츠발트는 하루 종일 검만 휘두르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랑을 통과한 테츠발트가 막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

부우웅, 부우웅, 웅!

길게 두 번, 짧게 한 번.

적이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응?"

테츠발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현재 유벨 왕자군에서 반격할 여력 따위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곧이어 그의 부관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적습입니다, 테츠발트 님."

테츠발트는 순간 당황했다. 부관의 표정이 너무 담담했다. 아니, 뭔가 놀란 표정이기는 했는데, 그것은 결코 적을 맞이하는 이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신기하고 해괴한 것을 본 표정이랄까?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테츠발트의 질문에 부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그게, 적이 쳐들어온 것 같기는 한데...."

"오면 온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온 것 같다니?"

"으음...."

말을 고르다 말고 부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는 쪽이 나을 것 같습니다."

간단한 무장만 갖춘 채 테츠발트는 바로 성벽으로 올랐다. 요새 밖, 완만하게 깎여 있는 능선을 바라보는 순간 그는 왜 부관이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게 되었다.

"...저게 뭔가?"

부관이 어색해하며 대답했다.

"적...일까요?"

기사답지 않게 똑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미를 흐리는 부관이었다. 평소라면 테츠발트도 그런 부관의 태도를 나무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요새 밖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능선에는 한 무리의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다들 무장을 갖추고 깃발까지 올린 것을 보면 분명 군대는 군대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구성원이 심히 괴상했다.

"인간은 거의 없고 순 드워프들뿐이 아닌가?"

"잘 보면 엘프나 오크들도 사이사이 서 있기는 합니다만...."

테츠발트의 의문에 부관이 머리를 긁으며 대꾸했다. 깃발에 새겨진 문장을 보며 테츠발트가 혀를 찼다.

"문장은 분명 유벨 왕자군의 문장인데...."

전투에 앞서 깃발을 흔들어 개시를 알리는 것이 전장의 약속. 그리고 저들은 분명 전투 개시를 행하고 있었다. 하는 짓을 보면 저들이 유벨 왕자군의 군대로, 시나이 요새에 전투를 걸겠다는 의지는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고작 저 숫자로?"

테츠발트는 요새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병력이 있나 싶어서였다.

없었다.

틀림없이 저 눈앞에 있는 백 명 조금 넘는 인원이 전부였다. 고작 백 명 정도의 드워프 전사와 스무 명 정도의 엘프, 그리고 대여섯 명 정도의 인간들이 말도 타지 않은 채 이 철통같은 시나이 요새에 전투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어이가 없어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저것들 왜 저래?"

"노예들이야, 주인이 시키면 따르는 것 아닙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저 비싼 노예들을 대체 왜? 돈을 허공에 뿌릴 셈인가?"

"...뭔가 함정이 아닐까요?"

"그렇군."

너무나 상황이 괴상하니 함정이라는 확신마저 든다. 테츠발트가 안색을 굳혔다. 그가 부관에게 명을 내렸다.

"경계를 강화하고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게. 마법사들에게 원견의 주문으로 주변을 정탐하라 시키고."

고개를 끄덕이며 하달할 명령을 고르던 부관이 문득 물었다.

"그럼 저것들은 무시합니까?"

테츠발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야 카르사스 공자님의 체면이 떨어지지. 전투를 준비해라. 기병 백에 보병 삼백, 궁사대 백이면 되겠군. 기사 열 명을 골라 그들을 이끌라 명하라. 지휘자는 잘트 경이 적당하겠군."

테츠발트의 말에 부관이 놀라 물었다.

"과하지 않습니까?"

고작 노예 종족에게는 너무 과한 병력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테츠발트에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만약 함정이라면 그 정도 병력은 되어야 빠져나올 수 있을 게야. 그리고 저것들을 그냥 죽이는 것도 아깝지 않은가?"

드워프는 그렇다 쳐도 엘프는 상당한 고가품인 것이다. 오러 능력자다운 시력으로, 테츠발트는 저 스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엘프들 중 절반이 여성임을 놓치지 않았다.

"드워프와 엘프 수컷들은 모두 죽이고, 저 엘프 암컷들은 잡아 오너라. 검을 든 엘프 암컷이라면 슬레이어일 터, 수하의 전공을 치하하기에 아주 좋은 전리품이 될 것이다."

부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시나이 요새 성문이 열렸다. 열 명의 기사가 오백의 병력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전선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 ☆ ☆

시나이 요새의 기사들이 흙먼지를 피우며 돌격했다. 노예들로 구성된 유벨 왕자군도 함성을 내지르며 마주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잘트 경이 전방을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살다 보니 별 우스운 일도 다 생기는군."

함께 달리던 다른 기사들 역시 같은 표정이었다. 저 작달만한 털북숭이 난쟁이들이 우워우워 하며 달려오는 꼬락서니를 보고 조소 외에 무엇을 흘릴 수 있단 말인가?

잘트 경이 안갑을 쓰며 주위를 향해 외쳤다.

"자 자, 엘프 암컷들은 생포해야 한다! 다들 알고 있겠지!"

"네, 잘트 경!"

긴장이라곤 전혀 없는 대꾸였다. 점차 드워프 무리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겨누고 더더욱 속력을 높였다. 이대로 저들을 싹 밀어붙이고 지나가면 뒤따르는 오백의 병력이 남은 잔당들을 처리할 것이다.

"카르사스 님의 이름으로!"

두두두두!

10기의 기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축을 흔들며 돌진한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강철로 벼려진 거대한 창!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던 테츠발트가 뒤이어질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드워프들의 선두에서 세 줄기 광채가 솟구쳤다.

부우우웅!

섬뜩한 굉음과 함께 세 명의 드워프가 거대한 도끼 창이며 망치, 대검을 든 채 기사들의 정면으로 날아올랐다. 적갈색, 연녹색, 진홍색의 세 줄기 빛이 기사들을 휩쓸어 갔다.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갔다.

"커억!"

"으악!"

"으아악!"

사방으로 피 분수가 솟구친다. 세 명의 드워프, 그들로부터 발현된 파괴의 빛이 10기의 기사들의 목을 일거에 날려 버린 것이다.

성벽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던 테츠발트가 놀라 외쳤다.

"...블레이드 오러?"

진군 속도가 팍 떨어진다. 뒤따르던 병사들도 전원 눈앞의 광경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잘트 경이 쓰러지셨어?"

"허억!"

"어떻게 기사님들이?"

선두에서 적들을 유린하고 그들을 이끌어야 할 기사들이 순식간에 죽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저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낳은 이들은 여전히 찬란한 빛을 무기에 머금고 자신들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갑시다, 말로이드!"

"알고 있네, 카다마이트!"

기사들을 참살한 세 드워프가 또다시 몸을 날렸다. 이번 목표는 기마병들, 초인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갔다.

잘트 경이 이끌던 오백의 병력은 정석대로 선두에 백의 기마병을 두고 삼백의 보병대가 뒤따르며 궁사대 백 명이 엄호하는 진형을 짜고 있었다. 기사들을 열심히 따라오던 기마병들이 달려오는 드워프 오러 유저를 향해 비명을 터트렸다.

"맙소사!"

"저건 드워프가 아냐! 난쟁이 괴물이다!"

패닉에 빠진 기병들 사이로 뛰어든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휘둘러 댔다. 그때마다 적갈색 블레이드 오러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말과 사람이 동시에 두 동강이 났다.

카다마이트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간악한 인간들! 이제야 동족의 한을 푸는구나!"

말로이드도 대검을 휘두르며 연거푸 기병들을 베어 갔다. 검날이 스치는 곳마다 진홍색 오러가 진홍색 피를 뿌리며 무수한 비명을 낳았다.

그랜드 포지의 세 오러 유저들, 그들은 순식간에 백이나 되는 기마병을 유린했다. 한 번 휘둘러 기병 셋의 머리통을 동시에 으스러트린 뒤, 슬로이틀이 연녹색으로 빛나는 배틀 해머를 번쩍 들며 고함을 질렀다.

"동지들! 저들에게 우리들의 힘을 보여 줍시다!"

☆ ☆ ☆

"허허허...."

테츠발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눈앞의 광경을 보니 너무도 어이가 없어 화조차도 나지 않았다.

백 명의 드워프 병사들은 몇 배나 되는 시나이 요새군을 가차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 드워프들 하나하나가 무서운 기량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칼 한번 휘둘러 보는 병사들이 없었던 것이다. 다들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다.

반면 저 드워프들은 사망자는 고사하고 경상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전력 차가 참혹하게 나는지, 늑대가 양 떼를 덮치는 광경도 저것에 비하면 온화해 보일 지경이었다.

성벽을 내려다보며 부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저들 모두가 마치 기사와 같은 무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궁사대 역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난전이 되어 버리니 화살을 날리면 아군도 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황이 오기 전에 일제사격을 가해야 했었지만, 궁사대를 지휘하는 부대장도 순간 당황한 탓에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결국 보병대와 궁사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대지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고작 백 명이 다섯 배 가까이 되는 병력을 학살하는 데는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이끌어 낸 세 명의 주역, 하나같이 눈부신 빛을 무기에 머금고 악귀처럼 날뛰는 저 드워프들을 향해 테츠발트가 신음을 흘렸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지만 지금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러 유저라니... 드워프가 오러 유저라니!"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부관이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어쩌지요, 테츠발트 님?"

테츠발트 역시 멍한 눈으로 부관을 마주 보았다. 상식 파괴의 향연이 풀코스로 이어지고 있으니 노련한 그도 판단력이 제대로 가동하지 않았다. 그때 곁에 서 있던 노인 마법사, 웨스트라드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테츠발트 경, 저들이 진짜 오러 유저라면 성문이 위험합니다만...."

그는 명에 따라 원견의 주문으로 요새 주위를 정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매복이 없다는 보고를 올릴 때가 아니었다. 웨스트라드의 말에 테츠발트가 정신을 차렸다.

시나이 요새 선발대를 전멸시킨 드워프들이 기세를 올려 성문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오러 유저의 힘이라면 두꺼운 시나이 요새의 성문이라도 충분히 부술 수 있다. 당장 테츠발트 경 자신도 가능하니까.

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렇지... 일단 요새 방호 마법을 가동하도록 하시오, 마법사 웨스트라드."

명을 받은 웨스트라드가 허겁지겁 성벽을 뛰어갔다. 이미 성문 위쪽 초소에는 네 명의 마법사가 마법진 위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페르난도 공작가의 후원을 받은 마법사들이었다.

"모두들 방호 마법을 시작하시오!"

웨스트라드의 말에 전원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권능이여, 내 손에 임해...."

"오래된 계약에 의해 요청하노라...."

"나무는 바위가 되고...."

"바위는 강철이 되어...."

"파괴되지 않는 굳건한 방패가 될지니!"

요충지 중의 요충지이니만큼, 시나이 요새는 강력한 마법이나 오러 유저의 공격에 대비해 성 전체에 고위 방어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다섯 명의 마법사가 힘을 합쳐 성문에 각인된 방호 마법을 발동시켰다. 미리 배치되어 있던 마력석이 그들의 마법을 증폭시키며 성 전체에 강력한 수호의 힘을 깃들였다.

그때 막 성문에 도착한 슬로이틀이 배틀 해머를 휘둘러 일격을 가했다.

콰아앙!

연녹색 오러가 성문 중앙에 정확히 가격한다. 장렬한 파문이 사방으로 퍼지며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하지만 성문은 부서지지 않았다. 배틀해머가 적중한 순간, 희미하게 빛나며 모든 파괴력을 사방으로 흩어 놓은 것이다.

해머를 거두며 슬로이틀이 혀를 찼다.

"쳇!"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웨스트라드가 한숨을 쉬었다.

"후, 다행히 늦지 않았군."

성문을 부수는 데 실패한 슬로이틀을 향해 수십 대의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당황해 헤매던 시나이 요새 주둔군도 슬슬 전투 준비를 갖춘 모양이었다.

화살들을 망치로 쳐 내며 슬로이틀이 뒤로 물러선다. 곧이어 무수한 화살들이 드워프 병단 전체에 비처럼 쏟아진다.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가리며 드워프들이 일단 화살의 사정거리 밖으로 몸을 피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시나이 요새쯤 되니 설치해 놓은 방어 마법진도 수준이 높구먼."

현재 레펜하르트는 요새가 보이는 능선 한쪽에 본진을 치고 전황을 살피고 있었다. 뭐, 본진이라고는 해도 시리스며 실란 등의 일행과 보급 마차를 담당하는 엘프 여인들, 그리고 탈카타가 다였다. 애초에 병력이 백 명 조금 넘으니 본진도 열댓 명이 전부인 것이다.

수세에 몰린 드워프들을 보며 실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불리한 거 같은데요, 레펜 씨?"

"괜찮아. 이것도 예상했던 일이다."

레펜하르트가 한 손을 올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드워프들 사이에 끼어 있던 스무 명 정도의 엘프 전사들이 진형에서 분리되어 나란히 섰다. 그리고 전원 두 손을 허공에 올리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작렬하는 불꽃의 친우여!"

거대한 불꽃의 거인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스무 명 전원이 불의 정령, 이그나시스를 불러낸 것이다. 불꽃의 거인이 대기를 달구며 일제히 성으로 달려갔다. 당연히 요새군도 화살로 반격하긴 했지만....

"훗, 실존하는 물질이 아닌 불꽃 그 자체인 정령 이그나시스에게 평범한 화살은 먹히지 않지."

달려가는 정령을 바라보며 엘프, 렐하드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강력한 마법이나 성력, 혹은 오러의 힘 없이는 결코 저들을 막지 못하리라!

스물이나 되는 불의 거인들이 일제히 요새 여기저기를 들이받았다. 그때마다 폭음이 울리며 불길이 치솟는다. 오러나 마법력, 신성력에는 강력한 저항 능력이 있는 방어 마법진이다. 하지만 정령력에는 전혀 무방비, 이그나시스들은 요새의 방어 마법을 뒤흔들며 마법진의 마력을 무서운 속도로 소모시켜 갔다.

콰아아앙!

결국 렐하드가 보낸 마지막 이그나시스가 일격을 날리며 방어 마법진을 깨트렸다. 성벽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갔다.

"꺽!"

"크어억!"

희미하던 성문의 빛이 이내 사그라진다. 테츠발트가 한층 기가 찬 표정으로 외쳤다.

"저건 또 뭐야?"

가끔 마법사들이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그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저 엘프들의 수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마법사가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소환 마법진이 필요하다. 문외한이 옆에서 봐도 알아보기 쉬울 만큼 요란한 빛의 문양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엘프들은 아무런 소환진 없이 대뜸 정령을 불러 버렸다.

부관이 도무지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애들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정령술 같군요...."

테츠발트도 어린 시절 동화책 꽤나 본 적이 있었다. 그가 기가 차 중얼거렸다.

"허? 엘프 따위가? 자기들이 무슨 동화 속 미녀 정령사인 줄 아나?"

사실, 원래 버전 동화에서는 그 미녀 정령사가 바로 엘프다. 하지만 모든 동화와 설화가 인간 기준으로 개편된 지금은 엘프가 정령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아는 이가 없는 것이다.

"수고하셨소, 렐하드!"

화살을 쳐 내고 있던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치켜들고 렐하드에게 감사를 건넸다. 이제 저 성문을 방호하는 마법진이 사라졌으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가 적갈색 오러를 길게 내뿜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허어어업!"

우렁찬 기합과 함께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린다. 대지와 공명하며 끌어 올린 기운을 더더욱 증폭시킨다. 그 상태로 카다마이트가 도끼 창을 내리쳤다. 적갈색 오러가 길게 뻗어 나가며 시나이 요새 성문을 정확히 가격했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톱밥과 목재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그 두껍던 성문이 일격에 박살이 난 것이다. 요새의 모든 이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성문이 부서졌다.

저 악귀들이 성안으로 들어온다.

눈부신 오러를 휘두르는 괴물들을 앞세우고 악몽처럼 몰려온다!

아무리 머리가 굳은 테츠발트라 해도 이 지경까지 왔는데 넋 놓고 상황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페르난도 기사단! 전원 출격하라!"

외침을 터트린 뒤 그 자신도 검을 뽑았다. 이를 갈며 그가 중얼거렸다.

"저놈들은 내가 직접 맡겠다."

사실 성문이 무너졌다 해도 드워프들의 숫자는 여전히 적다. 성의 구조물을 이용해 공성전을 벌이는 것이 사실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테츠발트도, 다른 이들도 결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고작 노예들 따위에게 성문이 무너진 것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하물며 요새 안까지 저들의 더러운 발자국을 허락하란 말인가? 그것 자체가 이미 패배나 다름없는 것이다!

"저 괴물들을 물리쳐라!"

테츠발트가 자신의 애마를 타고 용맹하게 성문으로 돌진했다. 페르난도 기사단도 고함을 지르며 뒤를 따랐다.

"진정한 국왕을 위하여!"

"저 천한 것들에게 진정한 기사의 힘을 보여 주자!"

4

테츠발트가 출동하자 요란한 기세와 함께 이천이나 되는 병력이 요새 동문과 서문을 통해 달려 나왔다. 요새를 지키는 천 명을 제외하고 전부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비록 정면에서 당당히 승부를 걸었다고는 하나, 드워프들의 공격은 사실 정신적인 기습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다들 질서 정연하게 대열을 맞춰 진군하며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이 상당한 정예병들이라는 증거였다.

비록 개개인의 기량이 월등하다고는 하나 고작 백여 명에 불과한 드워프-엘프 연합군으로서는 이천이나 되는 병력 차는 역시 감당하기 쉽지가 않다. 카다마이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말로이드! 슬로이틀! 동지들을 지키시오!"

"알겠네!"

말로이드와 슬로이틀이 사방으로 흩어져 세 방향을 막아섰다. 오러 능력자가 미처 방어하지 못한 쪽, 그곳을 향해 페르난도 기사단이 일제히 말을 몰았다. 창을 겨누고 속도를 높이며 드워프들을 향해 돌진해 간다. 드워프 병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기사들의 돌격에 맞서 방패를 들었다. 인간 방책이었다.

달리는 기마를 상대로 고작 방패로 막을 셈인가? 저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기사 하나가 소리쳤다.

"모조리 꿰뚫어 주마, 이 멍청한 것들!"

순식간에 기사대가 드워프 병사들을 덮쳐 갔다. 육중한 말발굽이 막 드워프들을 방패째로 짓밟으려는 바로 그 순간.

"허어어업!"

놀랍게도 드워프들이 방패를 쳐올리며 오히려 기사들을 내동댕이쳐 버렸다!

히이이잉!

"으아아악!"

말 울음소리와 비명이 어우러지며 선두의 기사들이 일제히 낙마했다. 순간적으로 근력을 열 배까지 올리는 대지 공명의 힘이었다. 아주 일순간만 사용할 수 있는 제한된 기술이었지만, 노련한 드워프 전사들은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 기사들의 돌격을 막아 낸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방패를 든 병사가 아니라 굳건한 성벽이나 다름없었다.

"거스 경!"

"제기랄!"

다른 기사들이 욕설을 내뱉어 댔다. 첫 공격은 간신히 막아 냈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기사들의 숫자는 훨씬 많이 남아 있다. 동료의 죽음에 분노한 기사들이 흥분해 드워프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요새 밖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대체 이놈들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이냐?"

군청색 오러를 연거푸 뽑아내 휘두르며 테츠발트가 이를 갈았다. 스무 배 가까운 전력 차임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고 있는 쪽은 오히려 시나이 요새군이었다.

이 드워프 전사들은 일반 병력 상대로는 거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저들이 사용하는 무기며 갑옷의 성능이 무시무시하게 좋다는 것도 그 이유였다.

상대의 일격에 찌그러져 버린 방패를 버리며 기사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대체 이놈들 무기는 왜 이리 좋은 거야?"

드워프들 손재주 좋은 것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들의 무장은 그 정도가 심했다. 페르난도 기사들 역시 귀한 금속을 벼려 만든 드워프제인데도 저들의 무기와 부딪치면 금방 날이 상하거나 찌그러져 버리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 입장에선 당연한 결과였다.

똑같은 드워프제라지만 저쪽은 마지못해 만들어 상납한 것이고, 이쪽은 조상들의 기술을 온전히 이어받은 이들이 일족의 전사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최상의 품질만 뽑은 것들이다. 비교가 될 리가 있나?

비명이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의 비명은 시나이 요새 주둔군의 것이었지만 개중에는 엘프와 드워프의 것 역시 끼어 있었다. 이십 대 일의 무식한 전투이니 아무리 드워프와 엘프의 최정예들이라 할지라도 전혀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비명은 대부분 군청색 오러를 휘두르는 크로방스 최강의 기사, 테츠발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천한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욕설을 내뱉으며 테츠발트는 연달아 적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벌써 열 명이 넘는 드워프 전사들이 그의 손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다른 쪽에서 공세를 막고 있던 카다마이트가 그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카다마이트가 몸을 날려 테츠발트에게로 향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카다마이트가 선공을 날렸다. 적갈색 오러가 둥근 궤도를 그리며 테츠발트의 머리를 노렸다.

"그대는 내가 상대한다!"

"시건방진! 땅강아지 주제에 감히 오러 유저 흉내를 내는 것이냐!"

고함을 내지르며 테츠발트가 공격을 쳐 냈다. 오러와 오러가 맞붙으며 강렬한 반동이 서로에게 임했다.

쿠우웅!

파문이 퍼지며 두 사람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자세를 바로 하는 테츠발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사실 테츠발트는 여전히 이들을 얕보고 있었다. 운 좋게 오러를 각성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드워프는 드워프일 뿐, 제대로 된 '인간' 오러 능력자에 비하면 반푼이에 불과할 것이라며 멋대로 단정 짓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그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결코 내 밑이 아니잖아?'

검으로 느껴지는 오러의 반발력 때문에 아직도 손아귀가 저리다. 진지한 표정으로 테츠발트는 말에서 내렸다. 오러 능력자끼리의 싸움에서 말의 기동성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

테츠발트도 드디어 카다마이트를 제대로 된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펑! 퍼펑!

적갈색 오러와 군청색 오러가 연달아 부딪치며 굉음을 울린다. 카다마이트의 도끼 창과 테츠발트의 장검이 쉴 새 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치명적인 일격이 연거푸 서로에게 쏟아지며 아슬아슬하게 상대를 빗맞고 다시 투로를 따라 흐른다.

전투에 임하던 다른 기사들이 그 광경에 놀란 목소리를 터트렸다.

"뭐지, 저놈은?"

"드워프가 오러 능력자인 것도 놀랍거늘...."

"테츠발트 경과 맞상대를 할 수 있다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평생 검을 수련해 왔고, 또 오러를 각성한 후에도 결코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테츠발트였다. 그런데 고작 드워프 따위가 크로방스 왕국 최강의 기사로 10년 넘게 명성을 떨쳐온 테츠발트를 상대로 호각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휘이이익!

군청색 오러가 채찍처럼 휘어져 옆구리를 노린다. 도끼 창을 비스듬히 세워 공격을 흘러 넘기며 카다마이트는 침착하게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역시 인간은 만만치 않아.'

테츠발트 경은 과연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강력한 오러 능력자였다. 대해처럼 밀려오는 그의 군청색 오러와 수십 년을 갈고 닦은 검술은 150년을 살아온 카다마이트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기량만으론 오히려 카다마이트보다도 우위에 있는 것 같았다.

'저 나이면 검술을 수행한 기간은 기껏해야 40~50년 일 터, 그런데도 나보다 낫다니....'

요란스럽게 파고드는 테츠발트의 오러를 튕겨 내며 카다마이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인간은 빠른 종족이다.

같은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익힌다면 엘프나 드워프는 결코 인간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새삼 인간의 저력에 혀를 내두르며 카다마이트가 더더욱 맹렬히 도끼 창을 휘둘러 댔다. 드워프다운 강렬한 일격으로 카다마이트가 압박을 가하면 테츠발트가 노련한 검술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두 오러 유저는 그렇게 찬란한 파괴의 빛을 사방으로 피우며 연신 검을 마주했다. 둘 다 전력을 다해 상대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또 휘둘러 대고 있었다.

☆ ☆ ☆

"다행히 카다마이트가 테츠발트를 상대할 수 있군."

전장 한복판에서 맹렬히 싸우는 두 사람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크로방스 최강 기사, 테츠발트의 이름은 레펜하르트 역시 전생에서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안타레스 제국을 세울 때쯤에는 너무 늙어 노환으로 사망한 후였지만, 그래도 전성기의 테츠발트가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카다마이트가 강력한 오러 유저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 해도 테츠발트를 상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는데....

'보아하니 적어도 지지는 않겠어.'

일단은 안심이다. 레펜하르트는 다른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카다마이트가 테츠발트를 잘 막고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전황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세 드워프 오러 유저의 분투 덕에 진형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엘프들도 강력한 정령술로 보조해 잘 싸우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군 측에 큰 피해는 보이지 않았다. 늘어나는 시체의 대부분은 시나이 요새 주둔군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적들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다.

수백 명이 쓰러졌지만 여전히 삼백 가까운 기사들이 남아 있고, 적병 또한 천이 넘었다. 압도적인 숫자로 계속해 진격하는 요새군의 모습은 마치 몰려오는 해일과도 같아, 여전히 보고 있자면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드워프-엘프 연합군이 튼튼한 둑이 되어 물살을 막고는 있지만 다들 지쳐 가는 기색이 역력했다.

러스가 검자루를 움켜쥔 채 이를 악물었다.

"형님! 상황이 이런데도 저희는 계속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까?"

러스는 레펜하르트와 함께 본진에서 대기 중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이번 전투에서 그의 참전을 허락지 않은 탓이었다.

-이 전쟁은 이종족들의 힘과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 너나 내가 끼어들어서는 안 돼. 일단 여기서 승리한 후에는 함께 싸울 수 있겠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저들의, 이종족들의 힘만으로 승리해야 의미가 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라 승낙은 했지만 역시 저 군청색 오러를 뿜어 대는 노기사를 보니 아쉽기 그지없는 러스였다. 그의 꿈은 무인으로서 명성을 떨쳐 당당하게 테네스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저 테츠발트는 크로방스 왕국에서 위명이 자자한 오러 능력자였다. 명성을 떨칠 절호의 기회를 손 놓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 초조하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미안해하며 그런 러스를 달랬다.

"이번만 참아 줘. 다음에는 마음껏 싸우게 해 줄 테니."

"그건 이제 괜찮습니다만... 그것도 이 전투에서 패해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끙, 그건 그렇지."

일단 둑이 한번 터지면 저 무수한 병력은 거센 물살이 되어 드워프-엘프 연합군을 덮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적으로 열세인 이들은 몰살당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저 기세를 꺾어 흐름을 돌릴 물길을 틀 필요가 있는데....

레펜하르트가 입술을 깨물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이 작자들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초조해하던 차였다. 본진이 있는 능선 언저리, 그 너머로 한 기의 다이어울프가 용맹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녹색 피부의 건장한 오크, 타시드가 대검을 든 채 그에게 외치고 있었다.

"은인이여! 나의 형제자매들이 왔소!"

그 뒤로 백여 명의 오크들이 다이어울프를 탄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칼켄과 스탈라가 이끄는 푸른 곰 부족의 오크 전사들, 그들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늦었잖소!"

레펜하르트가 기뻐하면서도 툴툴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칼켄이 대검을 뽑아 들고 껄껄 웃었다.

"미안하오, 형제! 인간들 눈을 피하다 보니 좀 늦었구려!"

그러자 레펜하르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윽, 그 생각을 못했군.'

전투 전, 그는 시나이 요새군 측에서 원견의 주문으로 주변 정찰을 할 것임을 예상해 오크들을 한참 떨어진 숲 속에 배치시켜 놓았다. 그리고 시간 맞춰 이쪽으로 달려올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오크들이 인간의 눈을 피하느라 빙 돌아오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실수다. 처음부터 저것까지 감안해서 이동 경로를 짰어야 했는데....'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머리통을 툭툭 쳤다. 전생의 그라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였다. 역시 이놈의 돌대가리 테스론의 두뇌가 문제다. 잘나가다가도 꼭 이렇게 한두 군데씩 허술해지곤 하는 것이다. 엘류시온의 목소리로 꽤 성능을 올렸는데도 여전히 이래저래 부실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끙, 육체가 바뀌었으니 부작용이 없을 수 없지. 그냥 감안하고 살아야지.'

오크들을 태운 다이어울프들이 흙먼지를 피우며 레펜하르트의 본진을 지나친다. 선두에 선 스탈라가 주먹을 들며 오크어로 고함쳤다.

"가자! 푸른 영혼의 전사들아!"

"크아아아아!"

오크들이 다이어울프를 몰고 전장 깊숙이 돌진하며 함성을 질러 댔다. 어느새 함성이 노래로 변해 갔다. 오크족에게 전해져 오는 전투 고양의 노래가 전장의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전사의 칼날이 하늘을 찢는다!

용사의 도끼가 대지를 가른다!

우리는 위대한 푸른 영혼의 전사들!

뜨거운 피가 승리를 이끈다!

검을 들어라! 도끼를 휘둘러라! 덤벼 오는 적들의 머리통을 쪼개 버려라!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심장이 터질 때까지 싸워라!

전사의 영혼이 우리를 가호하리라!

☆ ☆ ☆

다이어울프의 기동력을 앞세워 오크 전사들은 삽시간에 능선을 질주해 전장으로 들이닥쳤다. 맹수를 탄 흉악한 외모의 야수들이 일제히 요새군의 대열 옆구리를 창처럼 찔러 갔다.

"으악!"

"오크다!"

"세상에 저런 오크가 어디 있어?"

"괴물이다! 괴물들이 또 나타났다!"

그들의 모습을 본 병사들이 소리를 질러 댄다. 돌진하던 오크들이 일제히 입을 벌리고 포효를 터트렸다.

"크허어엉!"

야수의 울부짖음처럼 원시적인 포효가 시나이 요새군을 덮쳐 갔다. 오크족 특유의 수법, 위협의 포효였다. 스피리츠 웨폰처럼, 오크들은 자신의 사념을 맹수에게 실어 길들이는 테이밍 기술도 지니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냥 열심히 달래서 맹수와 뜻을 통한다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 응용 기술이 이것이었다.

무생물보다는 똑같이 사념을 지닌 상대에게 잔존 사념을 싣기가 더 쉽다. 돌덩이에 지박령이 생기는 것과 그냥 보통 사람 세뇌시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쉽겠는가? 무기에 사념을 담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맹수를 길들이는 것은 며칠이면 되고, 사람을 상대할 때는 이렇듯 순간적으로도 효과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오크들의 외침에 담긴 사념력이 일순 병사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렇잖아도 갑작스러운 기습에 정신까지 제압당하니 순식간에 선두가 무너졌다.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균형도 깨졌다.

"으악!"

"사람 살려!"

모두들 공포에 질려 비명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진형이 붕괴되며 도망자가 속출한다. 기사들이 연신 고함을 지르며 떨어진 사기를 올리려 애썼다.

"제기랄! 정신 차려라! 고작해야 미물들일 뿐이다!"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정작 그 기사들의 사기도 바닥까지 떨어진 것이다. 나타난 오크들은 하나같이 겉보기에도 무시무시한 거대한 무기들을 휘두르고 있었다. 단련을 거듭한 기사들조차도 질릴 크기였다.

기사 중 한 명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저렇게까지 무기를 크게 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무술의 상식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일이다. 하지만 오크들은 그 거대한 무기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휘두르며 시나이 요새군을 참살하고 있다.

레펜하르트가 기막혀하는 기사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놀랍겠지, 지금 시대의 인간들에게는 이종족의 전술은 고사하고 사소한 정보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까."

대륙에 존재하는 다섯 지성 종족들.

그들의 무예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확실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엘프는 가볍고 예리한 무기를 선호한다. 타고난 빠르고 정교한 움직임이 검술에 반영된 만큼, 무기 역시 저런 류가 가장 적합하니까.

드워프들은 무조건 긴 무기를 최고로 친다. 다른 종족들보다 신장이 짧은 그들은 불리한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다루는 쪽으로 무술을 발전시켜 왔다.

트롤들은 사람의 손이 탄 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의 힘을 다루는 주술력을 구사하는 트롤의 주술사, 구루들은 가공하지 않은 무기에서만 힘을 쓸 수 있기에 겉보기엔 조악한 돌도끼나 뼈로 만든 칼, 혹은 나무 몽둥이 등을 주로 애용한다.

그리고 오크들은 무조건 크고 아름다운 무기가 최고라 믿는다. 그들의 종족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의 위력은 무기가 크면 클수록 위력도 강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반면 인간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범용성이 큰 만큼 무기 타입 역시 정형화되어 있지 않았다. 뭐, 굳이 타입을 분류하자면....

'비싼 무기를 선호하지, 인간은?'

어쨌든 각 종족 별로 신체가 조금씩 차이 나는 만큼 무술이나 전술에 대한 것도 당연히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종족들은 설욕을 꿈꾸며 인간의 무술에 대한 대처법을 항상 연구해 왔다. 반면 인간들은 저들의 전술이며 무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크아악!"

"아아악!"

오크 전사들이 검을 던져 댈 때마다 기사들의 비명이 아우성쳤다.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시킨 거대한 무기들이 스스로 허공을 날며 적들에게 향한다.

"귀신 붙은 검이다!"

"사람 살려!"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했다. 기사들도 검이 알아서 날아다니는 이 괴상한 광경에 얼이 빠져 있었다. 다들 생전 처음 당해 보는 전법에 허무하게 쓰러져 가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곁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실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그렇다 해도 삼백이 넘는 기사들이 너무도 쉽게 백 명의 오크 전사들에게 유린되고 있는 걸 보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크 전사들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페르난도 기사단도 이름 높은 정예 중의 정예인데 저렇게 차이가 나나요?"

"몰라서 그렇지."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사실 스피리츠 웨폰도 알고 보면 허점이 꽤 많아. 당장 지금만 해도 침착하게 대응하면 못 막을 것도 아니거든? 저쪽이 숫자는 여전히 많잖아. 대열을 갖춰서 한쪽은 날아다니는 검을 상대하고 남은 쪽은 그냥 오크들을 상대하면 되는 문제라고."

하지만 한창 전투가 진행되고 있는데 저런 발상이 떠오를 리가 없다. 이들이 오크에 대해 아주 기본적인 사항만 알고 있었다면 충분히 대응을 했겠지만....

"무지란 참으로 무서운 법이지."

쓴웃음을 짓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실란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이종족들에 대해 호의가 깊다 하지만 그는 역시 인간이었다. 눈앞에서 인간이 다른 종족들에게 멍청하게 당하고 있으니, 아무리 적이라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레펜하르트가 실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 세상은 이종족들만 바보로 만들지 않았어. 인류 역시 바보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다들 깨닫기를 원하니까."

참으로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 하지만 눈앞의 광경을 지켜본 실란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역시 눈앞에서 인간이 죽어 가니 기분이 좋지는 않지?"

"아무래도 그렇죠, 뭐. 저도 인간인데."

"하지만 잊지 마라. 엘프도 드워프도 오크도, 비록 종족은 다르지만 인간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다른 이였다면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현 시대에 '사람'이라는 단어는 '인간'과 동일한 의미로 쓰이니까.

하지만 그동안 많은 이종족들을 만나 본 지금의 실란은 레펜하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성을 가지고, 지성을 지니고, 감성을 갖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분노할 줄 아는 존재가 사람이라면....

엘프도 드워프도 오크도, 모두 사람이다.

실란은 납득하는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참상은 역시 참혹했지만, 그는 현실을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레펜하르트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그런 전쟁이다. 그리고 저들은 저 피를 흘리게 할 자격이 있다. 저들이 그동안 흘려 왔던 피는 이것의 수백, 수천 배가 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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