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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6 - 16

3

"화염의 숨결, 한 자루 화살이 되리, 프레임 애로우! 암운의 외침이 내 손에 임한다, 라이트닝 스피어! 폭렬의 구, 적을 친다, 파이어볼!"

마룬드가 연달아 마법을 발동했다. 경험 많은 마법사인 그는 재생력이 뛰어난 트롤에게 가장 위협적인 공격이 육체를 태워 버리는 화염계와 뇌격계 마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폭염과 뇌전이 아틸카의 사방을 점유하고 날아들었다.

피할 곳이 없어보이자 아틸카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이이익-!

아틸카의 주위로 뿌연 기류가 소용돌이쳤다. 모든 마법이 소용돌이에 가로막혀 폭발하며 흩어졌다. 마룬드가 놀라 외쳤다.

"뭐지, 저건? 마법도 신성 주문도 아닌데?"

블레이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에 들어갔다.

"세이어여, 그대의 종이 아픔을 딛고 새로이 일어서게 하소서!"

블레이의 신성력이 카피르에게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카피르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블레이! 살살 좀 하게!"

당황하며 블레이가 반문했다.

"아니, 그냥 치유술 걸었는데 뭐가 아프다는 건가?"

아틸카의 주술력이 카피르의 체내 오러와 상충하며 블레이의 신성력과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블레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오러 유저끼리 싸운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런 현상이?"

그래도 치유술 덕에 부러진 늑골의 통증이 한층 완화되었다. 카피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브로드 소드를 들었다.

"아오, 아파 죽겠네. 내 저놈을 당장에!"

재차 오러를 끌어낸 카피르가 흥분한 목소리로 아틸카에게 돌진했다. 붉은 블레이드 오러가 두 자루 단봉과 맞부딪쳤다.

콰아아앙!

폭음과 빛의 파문 속에서 카피르와 아틸카가 쉴 새 없이 공방을 주고받았다. 검과 단봉이 교차할 때마다 폭음이 터지며 귀가 멍멍할 정도로 공기가 뒤흔들린다. 마룬드가 재차 마법을 날렸다.

"아이언 스틸!"

4서클 무장 해제 마법, 아이언 스틸이 아틸카의 단봉을 직격했다. 갑자기 무게가 증강되자 아틸카의 두 팔이 바닥으로 축 처졌다. 하지만 단봉을 놓치지는 않았다. 단봉을 쥔 채로 바닥에 주먹을 짚더니 바로 물구나무를 서며 카피르에게 발차기를 날린다.

퍼버벅!

어깨에 연타를 맞은 채 카피르가 신음을 흘리며 물러섰다. 갑자기 상하가 반전되며 머리 위에서 발차기가 날아오다니, 산전수전 다 겪은 카피르로서도 처음 당해 보는 공격이었다. 게다가 그 위력은 오러 유저의 그것과도 맞먹는다!

"크으윽!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틈에 주술력으로 마법을 해제한 아틸카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단봉으로 허벅지의 북을 두드리며 아틸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붉은 하늘이 너를 내리쳐 모래와 먼지가 되어...."

리듬을 타고 또다시 기이한 기운이 요동을 친다. 마룬드가 노성을 터트렸다.

"또 그 수작이냐! 어림없다, 이놈! 그대, 침묵하라! 사일런스!"

아틸카의 입 주위 대기의 흐름이 막히며 노래가 끊겨 버렸다. 상대의 수법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어쨌건 언령言靈의 힘을 쓰는 것으로 보이기에 소리를 막은 것이다. 과연 요동치던 기운이 잠시 멈춰 버렸다.

하지만 그 기운은 이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쿵! 딱! 쿵쿵! 딱!

입이 막힌 아틸카가 발을 구르고 단봉을 서로 부딪치며 리듬을 이어 간다. 주술이 완성되며 바람이 일었다. 폭풍이 망치 형상으로 모여들어 마룬드를 향해 쇄도했다.

휘이익!

"으헤헥!"

기겁하는 마룬드를 보며 블레이가 잽싸게 성호를 그었다.

"세이어여! 당신의 가호를!"

십자 형태의 성광이 마룬드 앞을 가로막아 폭풍의 망치를 막아 냈다. 블레이가 식은땀을 흘렸다. 조금만 타이밍이 늦었어도 오랜 친구를 잃을 뻔했다. 마룬드가 혀를 내두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놈, 진짜 소문대로 트롤 모습을 한 악마라도 되는 건가? 뭐가 저리 센 거야?"

진지해진 얼굴로 카피르가 아틸카에게 돌진했다. 더 이상 그의 눈에 오만이나 방심 따윈 없었다. 저 전설의 트롤은 결코 미신의 존재가 아니었다. 오러 유저인 그가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도 감당키 어려운 마물 중의 마물이었다.

"타아아앗!"

연달아 기합을 터트리며 카피르가 침착하게 아틸카를 압박해 갔다. 마룬드도 숨을 돌리고 공격 마법을 이었다. 블레이가 성력을 끌어 올려 두 사람을 보좌했다.

방심을 버리고 진지하게 세 사람 모두 진지하게 전투에 임하자, 아틸카도 점점 밀릴 수밖에 없었다.

"큭! 크윽!"

하지만 신음을 흘리면서도 아틸카는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위태위태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저 '알 수 없는' 수법을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카피르의 블레이드 오러를 옆으로 흘리며 아틸카가 짧은 호흡을 터트렸다.

"훗훗훗!"

호흡과 함께 연달아 가슴을 튕기며 머리를 빙빙 돌린다. 아틸카의 땋은 머리에 매달린 작은 구슬들이 서로 부딪혀 맑은 방울 소리를 울린다.

찰랑찰랑찰랑!

방울 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기도를 올리던 블레이가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으아악!"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란해지며 멍해진다. 마법사의 정신계 마법에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며 블레이가 치를 떨었다.

"도대체 저 사술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단순한 언령뿐 아니라 리듬과 음악, 춤 등 전신을 이용하는 트롤 주술은 인간의 마법이나 신관의 신성 주문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완전히 처음 상대하는 수법이라 카피르 일행으로서는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아틸카는 항상 인간들과 싸워 왔던 이다. 인간들의 수법은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

'하지만 역시 세 명은 버겁군.'

진땀을 흘리며 아틸카는 눈앞의 인간들과 우리 속 동족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미 너무 시간을 지체했다. 이곳은 인간들의 도시 한복판, 더 지체하다가는 또 다른 인간 무리들이 창칼을 들고 몰려올 것이다.

그렇다고 일격에 해치울 수 있을 만큼 눈앞의 저 인간들이 약한 것도 아니다.

'도망쳐야 하나....'

판단을 내려야 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저들은 트롤의 주술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 한 몸 빼내는 것이라면 아직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고통 받는 일족을 저버리게 된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대로 아틸카가 여기서 버티고 있다 해서 동족을 구할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원통하지만 일단은 자신이 살아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다시 이들을 구할 기회를 얻게 된다.

"미안하오! 나의 일족이여!"

슬픔 속에서 아틸카가 고함을 지르며 양손의 단봉을 맹렬히 후려갈겼다.

"크아아아!"

카피르가 검을 들어 방어했지만 그럼에도 절로 뒤로 밀렸다. 거리를 벌린 뒤 막 아틸카가 도주를 시도하려 할 때였다.

지하 석실 입구 쪽에서 굵은 외침이 들렸다.

"레인보우 포스 레이!"

공기가 일렁이며 일곱 줄기 무지갯빛 섬광이 허공을 갈랐다. 파괴의 빛이 카피르 일행 주위를 두들기며 연달아 폭발을 일으켜 댔다.

콰콰콰콰콰콰쾅!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카피르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 누구냐?"

언제 나타난 것인지 세 명의 그림자가 석실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거구의 사내 둘과 가녀려 보이는 여인의 실루엣이었다.

"간신히 늦지는 않았네요."

"그러게 말이오. 대체 그 안개는 뭔데 기감까지 차단하는 거지?"

"미안하군, 쩝... 아, 트롤 주술 잘 알면서 왜 내가 은신의 안개는 생각 못 했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나누며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일 먼저 얼굴을 비춘 것은 아틸카와 비슷한 키의, 그러나 덩치는 거의 두 배는 됨직한 거구의 인간이었다. 아틸카가 경각심을 끌어 올렸다.

'새로운 적인가?'

우람한 체구의 사내가 안면 가득 미소를 띠운 채 말을 건넸다.

"드디어 만났군, 구루 아틸카. 현명한 자연의 아들이여."

☆ ☆ ☆

아틸카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분명 눈앞의 이 거한은 생전 처음 보는 인간이었다. 맹세코 평생,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도 또렷한 트롤의 언어로!

"누, 누구요? 어째서 내 이름을? 어떻게 우리의 언어를 알고 있는 것이오?"

당황하는 아틸카를 보며 거구의 사내,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나는 트롤의 진실을 아는 자, 그대를 돕고자 이곳에 왔소."

"무슨 소리를 하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아틸카가 말을 더듬었다. 카피르 일행이 자세를 추스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놈은 누구냐?"

"왜 우릴 공격한 거지?"

"명예를 안다면 정체를 밝혀라!"

레펜하르트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지난 사흘 동안 계속 이 저택을 염탐하던 그였다. 저 카피르 일행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트롤들의 해방뿐. 그대들은 그저 잠시 이곳에 머무는 이들이라 들었소. 자리를 비켜 주지 않겠소?"

상당히 정중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카피르 일행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지만, 적어도 저 정체불명의 거한이 괴물 트롤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군! 저 트롤은 이미 수십의 인명을 학살한 마물이다!"

카피르가 고함을 질렀다. 아틸카가 저지른 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늘 어찌 저 마물을 두고 이 자리를 피할 수 있겠는가?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타시드! 시리스!"

레펜하르트의 좌우로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틸카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거구의 오크 전사와, 아리따운 엘프 소녀였다.

"제압해! 죽이진 말고!"

레펜하르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타시드가 참마도를 뽑아 들더니 호탕하게 외쳤다.

"알겠소, 은인!"

그리고 곧바로 카피르에게로 돌진한다.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석실 안을 찬란히 빛낸다. 카피르가 경악해 소리쳤다.

"오크가 오러를?"

콰아앙!

청록색과 붉은색 오러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타시드가 포효를 터트렸다.

"크아아아!"

시리스도 가볍게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신관, 블레이 앞을 가로막고 나서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이자는 제가 맡을게요."

"으헉? 세이어시여!"

블레이가 화들짝 놀라 성호를 그었다. 손짓에 따라 십자 형태의 성광이 생겨나 시리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시리스가 우아한 손짓을 하며 중얼거렸다.

"내 부름에 답해 줘요, 샐러맨더."

전신이 불꽃으로 뒤덮인 도마뱀 형상의 정령이 나타나 십자 성광과 격돌했다. 불꽃의 하위 정령 샐러맨더였다. 단숨에 상대의 신성 주문을 깨부수며 시리스가 검을 휘둘렀다. 블레이가 당황하며 성광의 방패를 만들어 허겁지겁 검격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전투를 시작한 타시드와 시리스를 보며 아틸카가 멍한 음성을 흘렸다.

"오크가 오러를... 엘프가 정령의 힘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노예가 된 자들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에서 문득 아틸카는 몇 달 전 들었던 인간들의 소문을 떠올렸다.

한 인간이 이종족들을 이끌고 나타났다고 했다.

그는 이종족들을 마치 인간처럼 대한다고 했다.

그의 영지에서는 모든 이종족들이 자유를 보장받는다고 했다.

그 이종족들은 노예로 살아가는 동족들과 달리, 인간처럼 명예와 긍지를 아는 '사람'다운 이들이라 했다.

"혹시...."

아틸카는 거구의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로브 차림이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저 덩치는....

"...권왕 레펜하르트?"

☆ ☆ ☆

마법사 마룬드는 당황한 채 전투 중인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대체...."

오러를 쓰는 오크와 정령술을 쓰는 엘프. 상식 밖의 일이지만 마룬드는 요 근래 저런 기이한 놈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은 있다. 대륙 동쪽의 나라, 크로방스 왕국 내전의 소식은 이 머나먼 할라인 왕국까지도 퍼져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 소문의 주인공이 이끄는 이종족 중에 저런 놈들이 있단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마법을 썼잖아?'

레인보우 포스 레이는 6서클의 고위 마법. 그리고 소문 속의 주인공은 분명 이름 높은 권사이자 오러 유저였다.

'오러 유저씩이나 되는 자가 마법까지 익힐 여유가 있을 리 없는데?'

생각해 보면 저런 특이한 놈들을 거느린 인간이 또 없으리란 법도 없을 것 같았다. 세상에 엘프와 오크 노예들이 얼마나 많은데.

'역시 다른 사람인가?'

하지만 저 우람한 덩치를 보면 또 맞는 것도 같고....

혼란에 빠진 마룬드가 잠시 주춤하는 틈에, 레펜하르트가 아틸카에게 손짓을 했다.

"이 자리는 우리들이 맡겠소. 어서 동족들을 구하시오."

"아, 알겠소."

정신을 차리고 아틸카는 강철 우리로 달려갔다. 아직 상황이 완전히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저 거구의 인간이 현재 그를 적대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이 틈에 고통 받는 동족을 구해야 했다. 강철 우리를 부수고 아틸카가 탈진한 트롤들을 우리에서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레펜하르트는 마법사, 마룬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의 주름을 가득 찌푸리며 마룬드가 물었다.

"설마 당신이 그 소문의...?"

"글쎄? 어떤 것 같소?"

싱글거리며 레펜하르트가 손가락을 뻗었다.

"포스 캐논!"

기겁한 마룬드가 잽싸게 마법으로 받아쳤다.

"으윽! 포톤 레이!"

녹색 광탄과 황색 섬광이 허공에서 격돌해 소멸한다. 마룬드가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엘프와 오크를 보면 저 청년의 정체는 소문의 주인공, 안타레스 백국의 권왕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저건 누가 봐도 확실한 고위 마법사인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머릿속이 복잡하시겠지.'

레펜하르트가 연달아 마법을 시전해 날렸다. 혼란해하면서 마룬드도 마력장을 펼쳐 반격했다. 둘의 마력장이 점점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양측의 마력장이 점점 세력을 키우며 서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력이 허공에서 교차하며 거칠게 소용돌이쳤다. 보이지 않는 마력의 기류가 격류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일그러트렸다.

우우우웅!

마법사에게만 들리는 굉음 속에서 마룬드가 점점 마법의 수위를 높여 간다.

"스피어 라인 그레이드 파스트...."

레펜하르트도 수인을 맺으며 상대에 맞춰 따라갔다.

"란티아 보톤 크로드 레이라이드...."

뒤섞인 마력장 안에서 온갖 마법이 발동하려다 차단되고, 또다시 발동하며 상대에게 파훼된다. 마룬드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으윽...."

계속해 마법을 구사하는데도 먹히질 않는다. 수읽기 싸움에서 완벽하게 지고 있다. 게다가 마력 운용 능력은 50년 가까이 마법만 파 온 자신보다도 오히려 노련하다!

'마, 말도 안 돼!'

쩔쩔매는 마룬드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오랜만에 마법사끼리의 전투, 마전魔戰에 임했더니 기분이 상쾌했다. 이제 그도 7서클의 종사자, 어디 가도 꿀리지 않는 훌륭한 마법사인 것이다.

"아으으으...."

마룬드의 입에서 비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의 영역이 점점 밀리며 축소된다. 상대를 밀어붙이며 레펜하르트가 쐐기를 박듯, 시동어를 외쳤다.

"레이 오브 블랙아웃Lay of Blackout!"

뒤섞인 마력장 안에서 묵빛의 섬광이 날아가 마룬드를 덮친다. 이미 세 종류나 되는 공격 마법을 받아치고 있던 터라 도저히 저것까지 처리할 수가 없다. 실신 주문이 마룬드의 머리를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꽥!"

외마디 비명을 흘리며 마룬드는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 ☆ ☆

"타앗! 타앗! 타아앗!"

타시드는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를 연신 휘두르며 가차 없이 카피르를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연신 뒤로 물러서며 카피르가 이를 갈았다.

'크윽, 빌어먹을! 자꾸 오러의 흐름이 끊겨....'

초반에는 제법 타시드와 대등하게 맞서 싸웠던 카피르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실력 차이가 너무 심했다. 그는 오러 각성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오러 유저치고는 상당히 초짜인 것이다. 오러양도 운용 능력도 아직 미숙하기 그지없다.

물론 오러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것은 타시드도 마찬가지다. 아니, 이쪽은 고작 석 달 지났으니 더 초짜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타시드는 전생에서 오크 대전사로서 검성 사이러스와 맞먹는 강자였다. 쉽게 말해 오크 중에서는 러스 급의 천재란 소리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니 같은 오러 유저라도 둘의 실력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헉! 헉! 헉!"

카피르의 호흡이 점점 가빠진다. 실력도 떨어지는데 아틸카와 싸우느라 상당히 지친 상태이기까지 하니 답이 없다. 연이은 타시드의 공격에 결국 카피르가 발이 꼬이며 허점을 드러냈다.

"으윽!"

빈틈을 놓치지 않고 타시드가 스피리츠 웨폰을 발동했다.

"가라, 다카르!"

참마도가 쏜살같이 카피르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역시 오러 유저는 오러 유저였다. 그 와중에도 전력을 다해 몸을 튼다. 간신히 참마도를 피한 카피르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흥! 빗나갔다!"

하지만 그는 빗나간 참마도가 부메랑처럼 빙글 돌아 다시 다가오고 있다는 건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뎅!

"꾸엑!"

카피르의 뒤통수에서 종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눈을 까뒤집으며 카피르가 그대로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아주 게거품을 물고 있는 것이, 제대로 기절했음이 틀림없었다.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흘렸다.

"호오?"

오러로 상대를 베는 것은 쉽지만, 저렇게 위력을 조절해 기절만 시키는 것은 상당히 고난도의 용법이다. 그런데 그냥도 아니고 스피리츠 웨폰과 병행하면서 구사하다니?

'타시드 녀석, 항상 러스랑 붙더니 오러 다루는 솜씨가 아주 경지에 올랐네.'

흐뭇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 쪽을 바라보았다.

'저쪽은 예전에 끝났고.'

그녀는 이미 블레이의 뒷목을 가볍게 때려 기절시킨 후였다. 실란의 사례도 있듯이 프리스트의 전투력은 그리 높지 않다. 그나마 블레이가 지금까지 버틴 것도 주신 세이어의 신관은 다른 성직자들에 비해 전투적인 기도문이 많았던 덕이다. 사실 정령술을 구사하는 현재의 시리스를 상대로 이제껏 버틴 것도 용하다.

그렇게 이 세 중년 사내, 할라인 왕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카피르 일행은 사이좋게 눈 까뒤집고 기절한 상태가 되었다.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보고 있자니 조금 불쌍하긴 했다. 이들은 트롤에게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괜히 공짜 밥 한 끼 잘못 얻어먹고 웬 봉변이냐, 저게?

'역시 공짜 무섭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니까.'

레펜하르트 곁으로 다가오며 시리스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레펜하르트 님, 이들 정말 살려 줘도 되나요? 아무리 오러를 안 썼다지만 그래도 이들 정도면 레펜하르트 님의 정체를 눈치챌 것 같은데요?"

"뭐, 그렇겠지?"

의외로 태연한 대답에 시리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 그래도 되는 거예요?"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일개 무인이 아니다. 명성 높은 오러 유저, 권왕이며 안타레스 백국의 통치자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공인이란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함부로 타국의 도시에 와서, 난동을 부리고도 과연 아무 문제가 없을까?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이것도 계획의 일부거든."

시리스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레펜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정말 철저하게 정체를 숨길 생각이었으면 가면이라도 쓰고 왔겠지? 오러나 정령술도 금지시켰을 테고. 결정적인 것만 드러나지 않으면 돼. 나름 계산이 있어서 한 짓이니까 안심해."

그렇게 시리스를 안심시킨 뒤 레펜하르트는 아틸카를 돌아보았다. 그는 풀어 준 트롤들을 바닥에 뉘이고 주술력을 이용해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우우우...."

"아으으...."

간신히 정신을 차린 트롤들은 오랜 시간 목이 막힌 탓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비참한 모습에 타시드와 시리스도 안색이 굳었다.

레펜하르트의 시선을 느끼고 아틸카가 고개를 돌렸다. 몸을 일으킨 뒤 그가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구루 아틸카, 생명의 은인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정중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틸카를 재촉하며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대꾸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합시다. 언제 다른 자들이 몰려올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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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길드 산타나의 눈물, 남부 지부.

그 거대한 저택에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화염이 저택을 뒤덮고 자욱한 흑연을 밤하늘 가득 피워 올린다.

"불이야!"

"사람 살려!"

저택 곳곳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불타 죽어 가는 연금술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간신히 탈출한 이들이 정신없이 사방팔방으로 달아난다.

그 속에는 혼이 빠진 얼굴로 불타는 저택을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남부 지부장 디플의 모습도 있었다.

"안 돼... 안 돼...."

자신이 맡은 지부가 이 꼴이 되었으니 더 이상 디플의 앞날은 없었다. 모든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해 보상을 위해 전 재산도 압류당하게 됐다. 단숨에 평생 쌓아 온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하게 몰락해 버린 것이다.

쾅! 쾅 콰쾅!

아비규환 속에서 연금술사들의 시약이 잇달아 폭발을 일으키며 화재를 더더욱 키운다. 저택 주변에 거주하던 시민들도 불길을 두려워해 집을 버리고 피신한다. 칼티잔 시의 소방대원들이 허겁지겁 불을 끄기 위해 몰려들고, 시티 가드들이 무장한 채 질서를 잡으려 악을 쓴다.

"다들 진정하시오!"

"차례대로 몸을 피하시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더 큰 피해가 나게 되오!"

구역 전체가 혼돈의 도가니였다. 그야말로 아수라장, 수많은 인간들이 거리로 나와 집 무너진 개미 떼처럼 우왕좌왕 설쳐 대고 있었다.

그 혼란 속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지붕을 건너뛰며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일행과 아틸카, 그리고 그들이 구출한 트롤들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화재는 바로 이들의 작품이었다. 저택에 불을 질러 인간들의 시선을 돌리고 그 틈에 트롤들을 빼낸 것이다. 물론 카피르 일행은 일찌감치 안전한 장소로 옮겨 주었다. 관계도 없는 이들을 불에 타 죽게 놔둘 만큼 레펜하르트는 몰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연금술사들이야 트롤에 대한 죄악이 하늘에 닿았으니 불에 타 죽건 말건 알 바 아니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 주시오!"

아틸카의 외침에 뒤따르던 트롤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우우우...."

"크르르르...."

다들 엉망진창의 몸이었지만, 아틸카의 주술 덕에 일시적으로나마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트롤다운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연달아 지붕을 건너뛰며 열심히 칼티잔 시 외곽으로 향한다. 너무 혹사당해 두 발로 걷지도 못하는 이들은 레펜하르트며 타시드, 아틸카가 각자 짊어진 채였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니, 슬슬 어둠에 휩싸인 칼티잔 남쪽 성문이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주위를 지키던 경비병들은 기절한 채 다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계획대로 미리 이곳으로 달려온 러스와 실란의 작품이었다.

아틸카와 트롤들이 먼저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들과 마주한 러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으음...."

레펜하르트에게 트롤이 사실은 현명하다고 누누이 듣기는 했지만, 역시 그래도 직접 만나게 되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저 흉측한 외모다.

'지, 진짜 무섭게 생기긴 무섭게 생겼네.'

마지막으로 지붕에서 뛰어내린 레펜하르트가 러스 곁으로 달려왔다. 러스의 표정을 보고 레펜하르트가 이해한다는 듯 피식 웃었다.

"왜? 트롤 생긴 게 무섭냐?"

"아무래도 좀 어색해서...."

순간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흘렸다.

"아니, 그럼 오크는 안 어색했냐?"

따지고 보면 오크나 트롤이나 한 인상 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게, 오크는 평소 주변에서 노예로 많이 봐서 그런지 딱히 거부감이 없었거든요."

러스의 대답에 레펜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지금 느긋하게 수다나 떨 때가 아니다.

"보다 보면 정든다. 자, 마차는?"

"성문 밖에 준비해 놨습니다."

레펜하르트 일행은 트롤들을 데리고 일제히 성문을 빠져나왔다. 성문 밖 길가에 세 대의 짐마차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서 붉은 머리의 소년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레펜 씨! 여기! 여기!"

지친 트롤들을 마차 위에 태우고 천을 뒤집어 모습을 감춘다. 레펜하르트가 실란에게 손짓했다.

"실란, 이들 좀 돌봐 줘!"

"네, 네."

필라넨스에게 기도를 올리며 실란이 트롤들에게 치유술을 걸었다. 트롤들을 치료하며 실란이 중얼거렸다.

"헤에, 저 트롤분들은 처음 봐요. 그런데 다들 너무 말랐다. 원래 트롤은 이렇게 근육이 별로 없나요?"

꿈에 나올까 두려운 살벌한 인상들을 앞에 두고도 주시하는 포인트가 그쪽이냐? 하여튼 정말 성격 희한하다. 혀를 내두르며 레펜하르트는 마부석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러스와 타시드도 각자 다른 마차 위로 올라 출발 준비를 갖췄다.

"이랴!"

"이랴!"

바퀴가 굴러가며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세 대의 마차가 어둠 속을 달리며 서서히 사라져 갔다.

☆ ☆ ☆

칼티잔 시에서 한참 떨어진 인적이 없는 으슥한 산속의 공터.

추적자가 없음을 확인한 레펜하르트 일행은 잠시 마차를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타시드가 모닥불을 피우고, 시리스가 커다란 냄비를 불에 올려 보리죽을 끓였다.

"아, 다 됐다."

시리스가 보리죽을 떠 트롤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지금 일행과 조금 거리를 둔 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특히 그 시선은 저만치 떨어져 말을 돌보고 있는 러스와 실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비록 자신들을 구해 준 은인이라지만 인간에게 사로잡혀 그토록 당했으니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드세요."

시리스가 트롤들에게 보리죽을 나눠 주었다. 트롤들이 머뭇거리며 그릇을 받았다. 그래도 엘프인 시리스나 오크인 타시드에게는 경계를 좀 덜 하는 표정이었다. 다들 조심스레 죽을 뜨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츄라프...."

"웅가르 바토...."

다른 트롤들도 저마다 그들의 언어로 뭐라고 말을 건넨다. 시리스는 빙그레 웃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억양과 표정으로 감사하고 있다는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은 공용어를 모르는 모양이네?'

원래 다른 이종족들과 달리 트롤들은 인간의 언어를 익힐 기회가 없다. 다른 이종족들은 노예로서 인간 밑에서 사육되며 공용어를 배우지만, 트롤은 말 그대로 피를 뽑기 위한 가축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붙잡혀 있는 기간도 길어 봐야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제대로 말을 배울 기회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이 숨어 사는 처지라도 트롤들은 대부분 공용어를 몰랐다. 엘프나 오크, 드워프들은 아무리 오지에서 자유롭게 산다 해도 노예로 살던 동족들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간의 언어를 접하게 되지만, 트롤은 그렇지 않으니까.

죽을 모두에게 나눠 준 뒤 시리스는 냄비를 들었다. 냄비를 식히던 중 그녀가 문득 공터 저편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아래, 아틸카와 레펜하르트가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듣던 것과 다르군? 나는 권왕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소."

아틸카의 말에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동안 레펜하르트가 사람들 앞에서 전혀 마법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크로방스 내전 때라던가 크리스틴과의 결투 등, 그가 마법을 쓰는 걸 본 이가 제법 된다.

하지만 내전 때는 마법의 경지와 마력 수준이 엇갈리다 보니 정상적으로 마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놀란 유벨 진영의 마법사들도, 나중에 레펜하르트가 권왕이란 것을 듣고 나름대로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가 한 짓을 마법이 아니라 무슨 고대의 아티팩트를 썼기 때문이라 여긴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틴과의 전투 때는 다른 면으로 화제가 되었다. 실란과의 가공할 스캔들 때문에 그가 마법을 쓴다는 사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안 알려지더라고. 하하."

레펜하르트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 후로도 계속 대놓고 마법을 썼다면 결국 소문이 퍼졌겠지만, 세인들이 마법사와 권사를 얼마나 다르게 인식하는지 깨달은 후부터는 레펜하르트도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오러 유저, 권왕으로만 행세하고 마법은 비밀 병기로 숨겨 두는 것이 여러모로 이롭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권왕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황금빛 오러로 찬란히 빛났다.

"아직도 내 정체를 못 믿겠는가?"

아틸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 오러를 보고도 믿지 않을 수는 없겠지."

아틸카의 눈동자에서 경계심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자는 분명 권왕이었다. 그리고 이자 곁에는 오러를 다루는 오크와 정령술을 다루는 엘프가 있었다. 또한 저 능숙한 트롤어는 레펜하르트가 그의 종족에 대해 깊은 이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권왕이란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가 아닌 동등한 지성체로 대한다는 그 소문은 역시 사실이었나?'

적의가 사라진 아틸카의 얼굴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경계를 푸는데? 역시 실적이 최고구먼.'

안타레스 백국이라는 실적이 있으니 굳이 설득에 목을 매지 않아도 자신의 행보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군. 우리의 언어는 어디서 익혔소? 그리고 내 이름은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안 그래도 왜 저 질문 안 하나 했다.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준비한 대답을 던졌다.

"알고 지내던 트롤이 있었다. 다인하프 숲에 사는 바바드 부족의 생존자였지. 들어 본 적 있나?"

물론 전생의 정보를 이용해 끼워 맞춘 말일 뿐이다. 하지만 다인하프 숲에 바바드 부족이 살았던 것, 그리고 그 부족이 인간의 습격을 받아 궤멸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틸카가 듣기엔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일 것이다.

'사실을 확인할 방법도 없을 테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좀 찔리지만, 시공 회귀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했다가 미친놈 취급 받아 신뢰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

과연 아틸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예전에 한번 들른 적이 있소. 어째서 그대가 우릴 이리 잘 아는지 이제 이해가 가는군."

확실하게 아틸카의 표정이 호의의 빛으로 바뀌었다.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정 나를 믿을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구루 아틸카."

☆ ☆ ☆

레펜하르트는 천천히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가 바라는 세상.

그가 바라는 미래.

이야기가 길어짐에 따라 아틸카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것은 실로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세상을 떠돌며 동족들을 구해 온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수많은 동족들을 구하고, 또 구했다.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하지만 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트롤들은 몬스터 취급을 받고 있었고, 붙잡히는 족족 잔혹하게 살해되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친 레펜하르트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구루 아틸카여, 나를 믿고 내 뜻을 도와주겠는가? 안타레스 백국에는 트롤들을 위한 땅 역시 준비되어 있다."

아틸카는 갈등했다. 저자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는 변하지 않는 이 현실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될 터였다. 그리고 상대는 신뢰할 수 있는 이로 보였다.

머뭇거리다 아틸카가 입을 열었다.

"대답을 하기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하얀 어금니 사이로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은 인간이오. 그런데 어째서 동족도 아닌 우리들을 이렇게 염려하는 것이오?"

이해할 수 없었다. 레펜하르트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일반인이 아닌,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스스로 지닌 힘만으로도 평생 안락하게,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였다.

그런 자가 왜 굳이 자신들을 위해서, 저런 힘든 길을 걸으려 하는 것인가?

아틸카를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왠지 재미있었다. 전생의 아틸카 역시 이와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었다.

향수를 느끼며 레펜하르트가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테이칸 왕국 남방 군도에 가 본 적이 있나, 아틸카?"

"어, 없소만?"

"그곳의 주민들은 한때 식인의 풍습이 있었다고 하더군. 테이칸 왕국의 한 현자가 그들을 교화하기 전까지, 그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남방 군도의 원시인들은 그 현자에게 따지며 물었다.

식인은 자신들의 오랜 문화이며 전통이라고. 당신이 무엇인데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고 이리 대하느냐고.

"그 현자는 대답했지."

그대들의 문화, 전통,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것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내 친구, 내가 사랑하는 이가 그대들에게 먹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식인을 금했다. 이에 대해 어떤 비난을 해도 좋다. 나는 세상에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아는 이들, 나의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노예 취급당하는 것이."

제24장 혁명의 태동胎動

1

그라임 왕국 남부에 위치한 연금술사들의 도시, 알켄부르크.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거대한 5층 타워, '산타라의 눈물' 본부에서 한 무리의 연금술사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아직도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소?"

상석에 앉은 노인이 한심한 듯 물었다. 길드장, 오룬마이드였다. 맞은편의 중년 연금술사가 쩔쩔매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그들은 지금 길드의 남부 지구를 궤멸시킨 범인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칼티잔 시의 소식을 접한 '산타라의 눈물'은 처음에는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에게 지부를 습격당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상아어금니를 붙잡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었으니,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진상을 조사하고 나니, 이번 사건은 여태와는 좀 달랐다. 살아남은 카피르 일행 덕에 다른 이들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오룬마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상아어금니, 그 저주받을 마물이야 자연재해 같은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치겠소. 하지만 인간이 개입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길드의 권위를 위해서도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중년 연금술사가 서류를 펼치며 자신 없어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의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조사하다 보니 범인의 윤곽이 조금씩 잡히긴 했다. 카피르 일행 덕분에 범인에 대한 인상착의도 손에 넣었다. 범인이 거느리고 있던 오크와 엘프 역시 주요 증거 중 하나였다.

억울하게 말려든 카피르 일행이었지만, 연금술사들의 피해가 워낙 크다 보니 차마 성질을 내지도 못했다. 게다가 사기 친 디플 본인은 이미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다. 그래서 화를 풀고 조사에 협조해 주었다.

모든 정황을 조합하니 한 사람이 결정적인 용의자로 떠올랐다. 요 근래 대륙을 떠도는 소문의 주인공, 안타레스 백국의 지배자, 권왕 레펜하르트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권왕 레펜하르트의 황금빛 오러는 그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러나 남부 지부를 습격한 범인은 결코 오러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마법사 마룬드의 증언에 따르면 능숙하게 마법을 구사했다고 합니다."

분명 인상착의가 비슷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범인으로 확정하기엔 정황이 영 맞지 않는 것이다.

다른 연금술사가 발언을 이었다.

"그리고 날짜도 맞지 않습니다."

조사해 본 결과, 레펜하르트가 화재가 일어났던 그 시기에 백왕성을 비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고작해야 보름이 채 되지 않았다.

대륙 동부에 위치한 안타레스 백국에서 대륙 서쪽 끝인 할라인 왕국은 일반적인 여행자가 도보로 여행하면 두 달이 넘게 걸리는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빠른 말로 쉴 새 없이 달려도 족히 한 달은 걸린다. 도저히 보름 만에 왕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룬마이드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대역을 쓴 것이 아닐까?"

"글쎄요, 대역 좀 세웠다고 못 알아볼 만큼 흔한 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인상이 아니라 근상筋狀(근육의 형상)이겠지만... 하여튼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은 대역 좀 세웠다고 착각할 만큼 평범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고민이었다. 분명 레펜하르트가 의심스럽기는 한데, 대놓고 항의를 할 만큼 결정적인 증거도 없다.

"상대가 일반인이었다면 일단 잡아와서 고문하며 실토를 시키겠지만... 상대는 명성 높은 권왕이자 일국의 지배자입니다. 증거도 없는데 함부로 범인 취급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난처한 듯 다른 연금술사 하나가 말을 받았다.

"하지만 바깥에는 권왕 레펜하르트가 트롤들을 구해 갔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길드의 권위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의자를 범인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연금술사들이 이리저리 조사하며 들쑤시고 다닌 덕분에, 세인들은 권왕 레펜하르트가 트롤들을 구했다고 믿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이종족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미 소문이 퍼졌기에 저 이야기 역시 꽤나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오룬마이드가 미간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제길, 골치 아프군. 정황으로 보나 평소 행적으로 보나 분명 그 작자인 것 같은데...."

☆ ☆ ☆

같은 시각, 안타레스 백왕성의 집무실.

레펜하르트는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문득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 연금술사 놈들은 속이 타겠군.'

그가 안타레스 백국으로 돌아온 지도 슬슬 두 달이 넘었다. 그런데도 연금술사들은 여태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산했던 대로였다.

이러려고 일부러 자신의 정체를 애매하게 드러냈다. 자신이 행한 일이라 소문이 퍼지되, 정작 당사자들은 뭐라 할 수 없도록 결정적인 증거를 남기지 않는 방향으로.

예상했던 대로 권왕 레펜하르트가 이종족들을 비호한다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만 갔다. 슬슬 인간의 노예로 사는 오크나 엘프들도 그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하리라. 추후로 계속 이종족들의 협력을 얻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꼭 필요한 인식이다.

반면, 연금술사들은 뻔히 짐작을 하면서도 대놓고 적대하지 못하고 있다.

'공간 포털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아무리 의심이 가도 이쪽은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으니까 말이지.'

그래서 일부러 백왕성에 돌아오자마자 외부 상인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퍼포먼스도 했다. 무술 수행을 하는 척하면서 황금빛 오러로 하늘을 찌른다든가, 기사들과 대련하며 맨살로 칼 튕기거나 하는 식으로. 이러면 대역을 세웠다는 혐의도 벗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고 의심만 하면서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이것으로 족하다.

"초반에 힘을 키우는 동안, 인간들의 협공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레펜하르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완연히 가을이 되었는지 하늘이 실로 높고 푸르렀다. 그 아래, 러스와 타시드의 전용 연무장이 보였다. 그들은 오늘도 여느 때처럼 오러를 뿜어 대며 대련에 열중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은, 그들 곁에 수십 가닥의 땋은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푸른 피부의 트롤 역시 서 있다는 점이었다.

러스와 한바탕 대련을 끝낸 타시드가 트롤을 바라보며 말을 건넨다.

"후우, 좋아. 그럼 아틸카! 그대도 한판 붙어 보지?"

"좋소, 타시드. 준비하시오."

대답하는 아틸카의 입가에는 그의 가장 큰 특징인 상아처럼 긴 어금니가 보이지 않았다. 상아어금니의 흉명이 워낙 자자하기에 레펜하르트가 마법으로 보이지 않게 감춘 것이다. 그래서 안타레스 백국의 인간들은 그저 아틸카가 평범한 트롤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타시드가 참마도를 들어 올려 그를 겨누었다. 아틸카도 단봉을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허업!"

"타앗!"

타시드와 아틸카가 서로에게 몸을 날렸다. 연무장 옆의 회랑을 지나가던 백왕성의 시종인 두 명이 아틸카를 보고 흠칫 놀라다가 이내 신경을 끄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슬슬 딴 사람들도 트롤에 대해 적응한 모양이군."

레펜하르트의 뜻에 찬동한 아틸카는 결국 그와 함께하기로 뜻을 굳혔다. 그리고 구출한 트롤들과 함께 안타레스 백국에 투신했다. 구출한 아홉 명의 트롤들은 미리 마련된 숲 속에 새로이 거처를 꾸몄지만 아틸카는 레펜하르트와 함께 백왕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아틸카의 출현에 카를이며 아스레일 등, 백왕성의 인간들도 처음엔 꽤나 당황했다. 아무래도 트롤은 몬스터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야생의 오크도 인간들에게 몬스터 취급 받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다양한 이종족들을 겪은 이들이라, 이제 와서 트롤 하나쯤 늘어 봤자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레펜하르트는 시선을 옮겼다. 연무장 반대편에서는 어느새 러스와 시리스가 정신없이 대련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켈린과 실란이 사이좋게 마주 보고 앉아 뭔가 열띤 토론을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글로텐 산맥의 클로이 다이만 포털이 활성화된 이래, 마켈린은 수시로 그랜드 포지와 안타레스 백국을 오가며 드워프들을 돌보고 있었다.

"시리스, 타시드, 아틸카, 마켈린...."

저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절로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 왔다.

"모든 준비를 갖췄다...."

창가를 떠난 레펜하르트가 다시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행정은 재상인 카를이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어 그가 딱히 손을 댈 필요가 없다. 이 서류 역시 백국 행정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서류에는 대륙 각지의 거대 규모의 오크 농장과 투기장, 드워프 광산촌, 트롤을 사육하는 연금술사 길드 지부, 그리고 엘프 노예를 거느리는 귀족들의 명단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서류를 들여다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까?"

2

쿵! 쿵! 쿵!

어두운 땅굴 속에 곡괭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는 이들은 작은 키에 건장한 체구, 수북한 수염을 달고 있는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었다. 다들 웃통을 벗은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는데, 강인한 체력으로 유명한 드워프답지 않게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들 뒤에서 가죽 갑옷을 입은 인간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게으름 피우지 말란 말이다, 이 땅강아지들!"

짜악!

날카로운 채찍이 비틀거리는 한 드워프의 등짝을 후려갈긴다. 혈선이 생기며 핏물이 튀어 오른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채찍을 맞은 드워프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드워프들이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관리관이 다시 채찍을 날리자 움찔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 땅굴은 세텔라드 산맥 서남쪽에 위치한 철광이었다. 그라임 왕국의 귀족, 켈베른 자작이 경영하는 곳이다. 이 드워프들은 자작의 노예인 스틸해머 일족이었다.

"쉬고 싶으면 일을 끝내란 말이다! 일을!"

관리관의 호통을 들으며 드워프들이 이를 갈았다.

"크으...."

벌써 이틀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쉬지도 못하고 땅을 파고 있다. 아무리 강인한 그들이라 해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원래 켈베른 자작도 자신의 노예 드워프들을 이렇게까지 학대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올해 초의 겨울, 켈베른 자작성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권왕 레펜하르트가 그라임의 황금기사를 적대하며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켈베른 성을 거의 반파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때의 전투로 성벽 한쪽이 모조리 무너지고 건물 일곱 채가 박살 났으며 정원과 마당은 봄날 보리밭처럼 잔뜩 갈아엎어졌다. 피해가 실로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이후, 피해액을 보충하기 위해 켈베른 자작은 평소보다 훨씬 가혹하게 드워프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엘류시온 유적에서 건진 유물이라도 받았으면 피해를 좀 메울 수 있었을 텐데, 허세 부린다고 거절했던 것이 문제였다. 평소의 유서스라면 아무리 자작이 거절했다 해도 저 정도 피해를 보았으니 유물을 나누어 주었겠지만, 당시 그는 레펜하르트와 러스에게 연달아 충격을 받은 후였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챙긴 유물 홀랑 다 들고 가 버린 것이다.

덕분에 죽어나는 것은 스틸해머 일족뿐이었다.

"빌어먹을 인간들...."

"제기랄...."

땅을 파던 드워프들이 문득 증오의 눈으로 감시하는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놈들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곡괭이 등 광산 도구는 훌륭한 무기도 된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

드워프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관리관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어쭈? 이것들이 어디서 눈을 부라려? 앙!"

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그들의 소중한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일족의 노인과 여자, 아이들은 켈베른 성 인근의 지하에서 철통같은 감시하에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간 바로 저들의 생명이 위태로우리라.

그리고 문제는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아다만티움은 발견되지 않았나?"

탄광 입구에서 로브를 걸친 30대 중반의 사내가 나타나 관리관들을 닦달해 댔다. 관리관들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법사 파블. 열심히 독촉은 하고 있지만 아직...."

진금眞金 엘드릴, 진은眞銀 미스릴, 진동眞銅 오리하르콘, 진철眞鐵 아다만티움.

이 네 종류의 마법금속은 각자 금광과 은광, 동광과 철광에서 극히 소량만 발견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그 가격도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히 철만을 계속 캐어서는 도저히 단시간에 피해액을 메울 수 없으니, 켈베른 자작은 소유 광산에서 오리하르콘이나 아다만티움이 발견되길 기대하며 쉴 새 없이 드워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대지의 소리를 듣는 드워프들이 계속 이 광산에는 더 이상의 아다만티움이 없다고 설명을 했지만 믿지를 않았다.

파블이 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작님께서 많이 노하셨네. 좀 더 진행을 빨리 하게!"

마법사를 바라보며 드워프들이 우울한 눈으로 목을 만졌다. 그들의 목에는 금속으로 된 개목걸이가 채워져 있었다.

이 개목걸이에 부여된 폭파 마법은 저 마법사가 간단한 시동어만 외워도 바로 발동한다.

'할 수 없지, 우리의 생명이 저들에게 달렸으니....'

포기하며 드워프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반항할 여지가 없다. 숨을 헐떡이며 드워프들이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에휴, 구원자께서 좀 살살 싸우셨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 갑자기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으아아악!"

인간의 비명이었다. 드워프들이 놀라며 광산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던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른 것이다.

"응?"

"무슨 일이지?"

☆ ☆ ☆

"뭐야, 이놈들은!"

병사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육중한 배틀 해머가 병사의 복부를 가격하며 그 외침을 막아 버렸다.

퍽!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병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배틀 해머의 주인, 슬로이틀이 굳은 얼굴로 병사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대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고용인일 뿐일 터. 생명까지 빼앗지는 않겠다."

이미 슬로이틀의 주위엔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혼절한 채 땅바닥과 키스하고 있었다. 모두 켈베른 자작가의 병사들이다. 함께 온 그랜드 포지의 다섯 전사들 역시 서른 명 정도의 인간 병사들을 상대로 가차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기도 마저 처리해야겠군."

슬로이틀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육중한 배틀 해머가 병사들 사이를 요란하게 오갔다. 상대는 고작해야 시골 귀족의 병사들, 굳이 오러를 구현하지 않아도 상대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망치가 스치는 곳마다 무기가 박살 나고 뼈가 부러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악!"

"으아악!"

병사들이 모두 쓰러지는 데는 채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하나같이 바닥에 엎어져 좀비처럼 희미한 신음을 흘린다. 슬로이틀과 드워프 전사들이 손에 사정을 둔 덕에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저 정도 부상이면 앞으로 칼 밥 먹고 살기는 영 힘들 것이다.

"무슨 일이냐!"

뒤늦게 광산 안에 있던 두 명의 관리관과 마법사 파블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슬로이틀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망치를 던졌다.

휘이이익~ 퍽! 퍽!

"꽥!"

"꾸에엑!"

앞장섰던 관리관들이 사이좋게 망치에 얻어맞고 대자로 뻗어 버렸다. 파블이 주위를 둘러보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이 드워프들은 뭐지? 어디서 이런 놈들이 튀어나온 거야?"

배틀 해머를 회수하며 슬로이틀이 앞으로 나섰다. 차가운 음성이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흘러나왔다.

"동족들을 압제에서 구하러 왔다, 인간 마법사여."

"뭐, 뭐?"

파블이 황당해하며 슬로이틀과 드워프 전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작 땅강아지 따위가 감히 반란을 일으키다니?'

하지만 우스워하기에는 주위에 널브러진 병사들의 참상이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파블이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우, 움직이지 마라! 내가 손만 까닥해도 저들의 목은 모조리 날아간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파블이 손가락을 들었다.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시동어를 외칠 생각이었다.

'흥! 한 열 마리쯤 목을 날리고 나면 저것들도 감히 덤비지 못할 터!'

슬로이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알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함부로 손을 쓰지 못했지."

"응?"

지나치게 태연자약한 반응에 파블은 인상을 썼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슬로이틀의 등 뒤로 또 한 무리의 드워프들이 보였다. 전사들과 달리 짜리몽땅한 몸을 로브로 가린 다섯 명의 드워프들이었다.

나타난 드워프들이 일제히 손을 앞으로 뻗으며 입을 열었다.

"프니아 아를하이드 에가스트...."

"정명한 흐름이여...."

"내 손에 임하라, 내 뜻에 따르라...."

"뚫린 것을 막고...."

"풀려진 것을 다시 가둘지니!"

파블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드, 드워프가 마법을?"

예전 레펜하르트가 그랜드 포지에서 머물 때, 재능 있어 보이는 드워프들을 뽑아 마법의 기초를 닦아 준 적이 있었다. 바로 그랜드 포지 마법병단이었다.

그 후 이들은 틈날 때마다 안타레스 백국에 유학(?)을 와서 레펜하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기량을 높이곤 했다. 드워프들이 배움이 느리긴 하지만, 워낙 스승이 좋다 보니 다들 슬슬 2서클의 경지에는 들어선 상태였다.

드워프들이 일제히 시동어를 외쳤다.

"룬 오프레션rune oppression!"

억제의 마력이 파블을 향해 쏘아졌다. 파블이 놀라며 개목걸이에 걸린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어느새 드워프들이 그의 마력장을 누르며 발동을 억눌러 버렸다. 파블도 고작 4서클 초반의 시골 마법사일 뿐이라서, 비록 개개인의 경지는 낮지만 다섯 명이 힘을 모으니 파블의 마력장을 제압할 정도 위력은 나와 주고 있었다.

"으으윽!"

마법이 억눌린 파블이 신음을 흘렸다. 슬로이틀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퍼억!

두꺼운 주먹이 명치에 파고들자 파블은 이내 정신을 놓았다. 기절한 파블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슬로이틀이 광산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는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 그대들을 구하러 왔소, 스틸해머 일족이여!"

학대받던 드워프들이 하나 둘 밖으로 나오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드워프 마법사들이 그들에게 손짓했다.

"차례대로 오시오! 목에 걸린 마법의 족쇄를 해제해 주겠소!"

스틸해머 일족의 사내들이 반색을 하며 줄을 섰다. 드워프 마법사들이 손에 작은 양피지 하나를 든 채, 계속 그것을 곁눈질하며 순서대로 개목걸이를 풀기 시작했다.

"에, 이렇게 하는 거군. 하룬 바이드 타카라...."

"나는 가둔 흐름을 푸는 자...."

"풀고 뚫고 흐르게 하리...."

양피지에 적힌 것은 레펜하르트가 마련해 준 전용 해제 마법이었다. 족쇄에 걸린 마법은 4서클의 것이었지만 이렇게 해답을 알고 있으면 2서클 수준으로도 그럭저럭 해지할 수가 있다.

철컹! 철컹! 철컹철컹!

여기저기서 풀린 개목걸이가 금속성을 내며 땅에 떨어졌다. 저주받을 운명의 족쇄가 드디어 풀린 것을 보며 스틸해머 일족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오오!"

"드디어!"

모두들 감격의 표정을 지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문득 감격하던 드워프 사내, 러타이크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슬로이틀에게 말했다.

"아, 하지만 우리에겐 인질이 있습니다! 이들을 해치운 사실이 들통 나면...."

슬로이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 걱정 마시오, 동족이여. 그쪽에도 이미 동료가 가 있으니."

☆ ☆ ☆

켈베른 성으로부터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커다란 지하 동굴 입구.

작은 소녀가 체구에 걸맞지 않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타아앗!"

두꺼운 도끼날이 두 병사의 뺨을 연달아 강타한다. 강철의 따귀를 맞은 병사들이 이빨을 내뱉으며 일거에 기절해 버린다. 뒤이어 소녀가 도끼를 휘두르며 다른 병사들에게 몸을 날렸다. 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폭풍이 불며 병사들이 쓰러져 간다.

"아으으...."

최후의 한 명이 비명조차 채 흘리지 못하고 바닥에 자빠진다. 그제야 도끼를 거두며 작은 소녀, 틸라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좋아, 다 처리했다."

이걸로 주변의 감시 병력은 모두 해치웠다. 틸라는 서둘러 동굴 안쪽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니 이내 40미터 높이의 거대한 공동이 보였다. 그녀의 집이자 고향, 스틸해머 일족의 거주지였다.

문득 틸라가 눈시울을 붉혔다.

"아...."

떠난 지 고작 1년이 채 안 되었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다. 감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틸라의 귀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틸라가 소리쳤다.

"헤토스 할아버지!"

머리가 새하얗게 선 드워프 노인이 그녀를 보더니 놀라 외쳤다.

"틸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레펜하르트 님이 저를 보내셨어요. 모두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오오! 구원자께서!"

늙은 드워프의 갈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드디어 이곳을 떠날 때가 왔구나."

헤토스가 허둥대며 발길을 돌렸다.

"참, 그렇지. 어서 겔파이드 신관님께 연락을 해야겠구나."

뒤따르며 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빨리 사람들을 모아 주세요."

"알았다!"

틸라를 만난 겔파이드 신관이 빠르게 온 마을에 전갈을 알렸다. 별로 넓지 않은 마을이라 이내 모든 노인과 아낙,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다들 기본적인 생필품 몇 개만을 챙긴 가벼운 차림이었다.

일족을 향해 틸라가 손짓했다.

"강으로 가요."

스틸해머 일족의 마을에는 강과 통하는 비밀스러운 땅굴이 있다. 레펜하르트가 동동 떠내려 왔던 바로 그 굴이다. 틸라의 인도에 따라 예순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땅굴을 통해 강변으로 향했다.

강변에는 이미 백여 명의 드워프들이 도착해 있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온 드워프들과, 그들이 구출한 스틸해머 일족의 사내들이었다. 가족을 만난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에게 향한다.

"오오! 파멜라!"

"여보!"

"프리모!"

"아빠!"

상봉의 기쁨으로 여기저기서 눈물과 웃음이 흐른다. 그리고 그 기쁨을 누리는 것은 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틸라!"

구출된 드워프 사내 하나가 그녀를 보며 놀라 외쳤다. 틸라가 반색을 하며 사내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빠!"

"하하하하!"

사랑스러운 딸을 품 안에 안고 러타이크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틸라의 풍만한 가슴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말했다.

"우리 딸, 정말 많이 컸구나. 이제 시집가도 되겠는데?"

인간 아버지가 딸의 특정 부위를 보며 이런 소릴 했다면 당장 잡아 가둬야겠지만, 드워프들에겐 이쪽이 정상이다. 눈물을 닦으며 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한편 슬로이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그토록 꿈꿔 왔던 장면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늙은 드워프 신관이 다가왔다.

"겔파이드라 하오. 그랜드 포지의 전사라 하셨소?"

"그렇습니다, 신관님. 슬로이틀입니다."

다른 이들은 재회의 기쁨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겔파이드는 신관답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제 어찌할 것이오? 이 주위는 온통 인간들의 마을로 가득하니, 이 많은 숫자가 움직이다간 이내 잡히고 말 텐데."

"걱정 마십시오. 안 그래도 슬슬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간?"

의아해하는 겔파이드를 뒤로한 채 슬로이틀이 강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망치를 들더니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연녹색 오러가 밤하늘을 밝히며 솟구친다. 그대로 슬로이틀이 망치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자 어둠이 짙게 깔린 강 저편에서 희미한 등불이 반짝였다.

겔파이드가 의아해하며 노안을 크게 떴다.

"저건?"

등불이 점점 강변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 불빛 뒤로 커다란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하천용 선박이었다. 십여 척의 선박이 강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그랜드 포지에서 배까지 준비를 했소?"

겔파이드의 질문에 슬로이틀이 고개를 저었다.

"그랜드 포지에서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점점 가까워지며 선박의 모습이 확연히 보였다. 노를 젖는 선원의 모습을 보고 드워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헤토스가 놀라 물었다.

"저건 인간이 아닌가?"

선박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재상님! 배를 강변에 댔습니다요!"

"수고했다."

경쾌한 음성과 함께 갑판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얼굴 가득 검은 수염을 수북하게 기른 인간 사내였다. 강변에 오른 남자가 드워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안심하시오! 우리는 그대들의 동지요! 그대들이 이곳을 떠나는 걸 돕기 위해 배를 몰고 왔소!"

드워프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동지라고?"

"인간이 우리의?"

믿기지 않지만 저자가 드워프들을 도우러 왔다는 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당황하면서도 드워프들이 하나 둘 호의를 가지고 사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틸라가 러타이크 곁을 떠나 인간 사내에게 달려갔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그녀가 외쳤다.

"카를!"

"틸라!"

카를이 활짝 웃으며 틸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틸라가 폴짝 뛰어 사내 품에 안겼다. 두 남녀의 신장 차이는 자그마치 40센티미터, 하지만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품에 안으니 눈높이가 맞는다.

틸라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카를이 부드럽게 웃었다.

"무사했구려, 걱정했다오."

배시시 웃으며 틸라가 카를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입술을 뗀 뒤 감동한 얼굴로 그녀가 속삭였다.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수하들만 보내지 그랬어요?"

"하하, 당신의 가족들을 만나는 일인데 어찌 빠질 수 있겠소?"

...그리고, 러타이크는 경악한 채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저, 저, 저, 저!"

뭐냐, 저 인간은? 아니, 저 사내놈은? 저 알콩달콩한 분위기는 대체?

잠시 못 본 사이 귀한 딸에게 웬 벌레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틸라가 러타이크에게 다가와 둘을 소개했다.

"카를, 이분이 저의 아버지예요. 아버지, 제 연인 카를이에요."

물론 러타이크는 그때까지도 혼백이 반쯤 빠져나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카를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장인어른."

순간 빠져나가려던 혼백이 쏙 들어왔다. 러타이크가 버럭 호통을 쳤다.

"누, 누가 당신 장인이야아아아앗!"

3

할라인 왕국 서부 최대의 도시, 디알로.

디알로 시는 제지製紙와 직조織造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도시다. 할라인 왕국의 주요 수출품목인 종이와 할라인 옷감이 이곳에서 생산된다. 종이와 옷감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약품을 생산하는 것이 바로 연금술사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이곳에도 연금술사들의 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산타라의 눈물' 디알로 지부.

그 거대한 건물은 지금 폭연 속에 파묻혀 있었다.

"상아어금니가 저기 있다!"

"화염탄을 던져!"

앞마당에 도열한 연금술사들이 일제히 손에 든 도자기병을 던져 댔다. 건물 앞마당에 연달아 폭발이 일어났다.

쾅! 쾅! 콰앙!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지나간다. 푸른 피부의 트롤이 연기 속을 헤치고 나오며 연금술사들을 노리고 달려간다. 그 앞을 서른 명이 넘는 전사들이 가로막았다. 모두 길드 소속 전사들이었다.

"이 괴물 같은 놈!"

"어림없다!"

전사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트롤을 몰아붙였다. 트롤이 괴이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듯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 툼후이 라바 포린치 문도 나만타치...."

섬뜩한 어금니를 드러내며 풍차처럼 연신 몸을 회전해 전사들을 걷어차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들의 몸을 그어 댄다. 여기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큭!"

"으윽!"

하지만 죽은 이는 없었다. 하나같이 값비싼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장비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가차 없이 날려 가면서도 전사들은 트롤의 움직임을 효율적으로 막고 있었다.

틈을 타 전사 하나가 소리쳤다.

"다시 화염탄을!"

또다시 수많은 도자기병이 트롤에게 쏘아졌다. 폭발이 정원 여기저기 터지며 일렁이는 화염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불꽃이 두려운지 트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중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어떠냐, 상아어금니! 화염탄의 위력이!"

칼티잔 남부 지부의 궤멸 이후, '산타라의 눈물'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경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든 저 마물, 상아어금니가 트롤을 탈취하려 나타난다 해도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든 전사들에게 비싼 전신 갑옷을 입혀 놓고 화염탄도 잔뜩 출하해 연금술사들을 무장시킨 것이다.

던지기만 하면 반경 10여 미터를 불바다로 만드는 이 화염탄은, 사실 위력에 비해 그리 널리 쓰이는 무기는 아니었다. 전문 연금술사가 아니고서는 감히 다룰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취급법이 까다로웠다. 워낙 상태가 불안정해 잘못 다루면 오히려 자신이 폭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처음 화염탄이 개발되었을 때는 각국의 군대도 관심을 보였지만 이내 정식 병기로 채택하길 포기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무기가 아니라면, 어차피 마법이 존재하는 이상 굳이 화염탄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상아어금니에게는 이 화염탄이 제대로 먹혔다. 저 괴물 트롤은 어지간한 마법은 모두 무시하는 특이한 술수를 부리는 것이다. 반면, 화염탄의 불꽃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피하고만 있다.

사방이 불바다가 되자 트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트롤어로 중얼거린 탓에 아무도 알아들은 이는 없었다. 잠시 후, 트롤이 몸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사와 연금술사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상아어금니가 도망간다!"

"저 마물을 무찔렀다!"

건물 입구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서부 지부장, 롬드란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나는 디플 같은 무능한 놈이랑은 다르다. 아무리 상아어금니라도 내 트롤들을 건드리지는 못해!"

그렇게 한참 롬드란이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건물 안쪽에서 두 명의 연금술사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그를 불렀다.

"로, 롬드란 님!"

"지부장니이임!"

표정에 경악이 가득하다. 롬드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연금술사들이 헐떡이며 외쳤다.

"트롤들이 도망쳤습니다!"

"응? 상아어금니는 방금 우리가 물리쳤는데?"

"상아어금니가 아닙니다! 정체 모를 놈들이었습니다! 상아어금니에 정신이 팔린 사이 놈들이 트롤을 탈취해 갔다고요!"

롬드란이 기겁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 하는 게냐? 그쪽에도 다 병력을 배치해 놓았잖아?"

칼티잔 지부 궤멸 사건으로 인해 연금술사들은 상어 어금니에게 협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롬드란도 만일을 대비해 저택 뒤쪽과 트롤이 있는 지하실 역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아어금니를 상대하는 내내 다른 쪽에선 아무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기우라고만 여겼었는데....

"전부 당했습니다!"

연금술사가 원통하다는 듯 소리쳤다. 멍하니 서 있던 롬드란이 갑자기 허겁지겁 지하실로 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설사 오러 유저라도 그렇게 은밀하게 그 많은 병력을 다 해치울 수 있을 리가...."

도착해 보니, 진짜로 트롤용 우리가 텅 비어 있고 달빛이 흐릿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롬드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곳은 지하실, 달빛이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다.

역시나... 천정이 동그랗게 뻥 뚫려 지상까지 이어진 것이 보였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언제?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 ☆ ☆

그믐달이 희미하게 어둠을 밝히는 밤하늘.

푸른 피부의 트롤이 지붕으로 뛰어넘으며 디알로 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한참을 이동한 아틸카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골목으로 내려왔다. 그가 품에서 팔찌 하나를 꺼내 차며 시동어를 외웠다.

"일루전."

그러자 아틸카의 어금니가 흐릿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만들어 준 마법기로 어금니를 숨긴 뒤 골목 구석에 미리 숨겨 놓은 천으로 전신을 가린다. 완벽하게 정체를 숨긴 뒤 아틸카가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코너를 돌아 으슥한 곳까지 도달하니 강인한 인상의 오크 여인과 20대 후반의 인간 청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탈라와 러스였다.

스탈라가 아틸카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고생했구려, 아틸카."

고개를 끄덕이며 아틸카가 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탈라. 저의 일족들은 무사합니까?"

스탈라가 옆을 곁눈질했다. 탈진한 듯 보이는 십여 명의 트롤들이 벽에 기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저택 앞에서 난동을 부릴 때 저들이 몰래 트롤들을 빼낸 것이다. 아틸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계획대로 되었군요."

아틸카는 주술을 펼쳐 트롤들에게 활기를 넣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러스가 눈을 빛내며 스탈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스탈라 씨, 대체 아까 그 기술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응? 무엇 말인가, 카루가 러스?"

"왜, 그 지하실까지 땅 판 기술요."

둘이서 트롤이 잡혀 있는 지하실로 갈 때의 일이었다.

러스가 주위 경비병들을 기절시키는 동안 스탈라가 땅을 슥 노려보더니 대뜸 단검을 던진 것이다. 그러자 오러를 발현한 것도 아닌데 땅 일부가 푹 꺼져 버렸다. 심지어 붕괴하는 소리조차도 나지 않았다.

"오러도 발현 안 하고 어떻게 그런 위력이 나옵니까? 게다가 소리는 또 어떻게 지우고?"

스탈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벽에 쿡 꽂으며 말했다.

"아, 이거?"

빛도 소리도 없이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은밀했는지, 벽이 무너졌음에도 주거인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설명 한마디 없었는데 러스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게 하는 거였군요."

그리고 그 역시 롱 소드를 뽑은 뒤 벽에 쿡 꽂았다. 또다시 은밀하게 벽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누가 천재 아니랄까봐 시연 한 번 더 보더니 바로 용법을 파악한 것이었다.

스탈라가 흐뭇해하며 웃었다.

"한번 보여 주면 바로바로 이해하니 예쁘기도 하지. 타시드, 그 둔한 녀석은 한 대여섯 번은 보여 줘야 하는데."

"하하...."

대여섯 번 본 것만으로 따라 할 정도면 타시드도 충분히 천재는 천재다. 왠지 친구 욕 먹인 기분이 들어 러스는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어쨌거나 또 좋은 거 배웠다. 아, 역시 스탈라 씨 따라오길 잘했지!'

그렇게 러스가 싱글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골목 저편에서 늙은 드워프 하나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알 포트의 하이 프리스트, 마켈린이었다. 그는 골목 주위에 은밀한 신성 결계를 쳐 디알로의 시민들이 혹시나 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마켈린이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애꿎은 남의 집 담벼락은 왜들 부수고 있소?"

스탈라와 러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틸카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오셨군요, 마켈린. 이들의 치유를 부탁합니다."

"맡겨 두시게."

마켈린이 트롤들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알 포트시여, 이들을 보살피사 모든 상처를 치유하소서."

찬란한 은빛 성광이 트롤들을 감싸며 그들의 안색이 놀라울 정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트롤들이 눈을 뜨더니 저마다 손을 내려다보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키, 키탈...?"

놀란 트롤들이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크렐트?"

놀랍게도 완벽하게 나아 버렸다. 단순히 상처가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심신이 모두 숲 속을 뛰어다닐 때의 가장 건강했던 상태로 돌아갔다.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굉장한 권능이군.'

아무리 강한 재생력을 가진 트롤이라지만 그동안 당한 고초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틸카의 활기의 주술이나 실란의 치유술로도 다들 간신히 기운이나 좀 차릴 뿐 바로 회복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마켈린은 그런 이들을 단 한 방에 완치시켜 버린 것이다. 과연, 알 포트의 지상 대리자다운 어마어마한 신성력이다.

마켈린이 손짓을 했다.

"자, 그럼 어서 이 도시를 떠나세."

트롤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에 힘이 넘쳐 나는 지금이라면 인간이 세운 성벽쯤은 간단히 타고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이 굳이 마켈린이 이 자리에 온 이유였다. 트롤들이 두 다리로 뛸 수 있기만 해도 탈출 난이도가 팍 떨어지는 것이다.

활기찬 일족의 모습을 보며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이리도 쉽게 일이 풀리다니....'

예전에는 절대 이렇게 쉽게 일족들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혼자였고 인간의 힘은 강했다. 아무리 지부를 습격해도 일족을 구출하는 경우는 다섯에 한 번 정도였다. 게다가 지친 일족을 인간의 도시 바깥으로 탈출시키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종족의 조력을 얻으니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간단히 일족을 구하고, 간단히 그들을 치유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다.

'정말 이대로라면, 모든 일족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마켈린이 멍하니 서 있는 아틸카를 보며 의아해했다.

"뭐하나, 아틸카? 갈 준비 안 하고?"

"음? 아, 네...."

정신을 차린 아틸카가 바로 주술을 발동, 은신의 안개를 피웠다. 안개가 피어올라 골목 너머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흐릿해진 시야를 확인한 뒤 아틸카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됐소, 갑시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인간과 트롤, 오크와 드워프가 어깨를 마주 하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4

라스틸 공국 북부, 켄트리 시.

대부분의 큰 도시들이 그렇듯, 켄트리 시 역시 거대한 투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크 검투사들의 목숨을 건 결투는 민중들에게 인기 높은 구경거리였고 그에 관련된 도박도 대단히 성행했다. 한 도시의 챔피언쯤 되는 오크 검투사를 가지고 있는 노예 주인은 그 배당금만으로도 엄청난 액수를 챙길 수 있었다.

그래서 오거스트는 눈앞의 오크 수컷을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대, 대박이다!'

오거스트는 켄트리 시의 유력 인사 중 하나로, 와일드베인이란 검투사 양성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오크 검투사를 다루어 온 만큼 오크들을 보는 안목도 높았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볼 때, 이 녹색 피부의 오크는 실로 완전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오크들을 보았지만 이 정도 자질을 지닌 놈은 처음이야!'

전신의 균형도, 근육의 짜임새도 완벽하다. 덩치도 다른 오크 검투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이런 놈을 고작 하인으로나 썼었다니!'

내심 혀를 차며 오거스트는 오크 곁에 서 있는 흑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낡은 녹색 드레스 차림에 단정하게 양손을 앞으로 포갠, 꽤나 기품 있어 보이는 소녀였다.

그녀는 켄트리 시 외곽의 작은 농장주라 자신을 소개하며 오거스트를 찾아왔다. 요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데리고 있던 오크 노예 몇 명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통 오크 노예들은 근처 농장에 팔았지만, 이 녹색 오크는 힘도 세고 싸움도 자주 해서 혹시 검투사로 쓸모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를 찾았다고 했다.

소녀가 초조해하며 물었다.

"저기, 혹시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오거스트가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흠흠,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 같군요.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소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그럼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보통 오크 노예들의 적정 가격은 금화 다섯 닢 정도지만...."

표정을 관리하며 오거스트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소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평소 이런 거래를 해 본 적이 없는지, 내심이 아주 표정에 여실히 드러난다.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니 절로 조소가 나왔다.

"...검투사로 써먹을 수 있는 놈들은 좀 다르죠. 금화 일곱 닢 쳐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실제 오크 검투사의 가격은 평균 금화 열 닢 정도, 오거스트는 슬그머니 값을 깎으며 눈치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것도 모르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조, 좋아요!"

"그럼 바로 거래를 하지요. 자, 여기 계약서에 사인을."

계약서를 건네며 오거스트는 사인을 종용했다. 소녀가 계약서에 농장 이름을 적고 서명을 했다.

처음 들어 보는 농장이었지만 오거스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켄트리 시 외곽에 소규모 농장들은 널리고 널려 있었다. 그보다는 이 녹색 오크를 어서 챙기는 것이 중요했다.

오거스트가 계약서를 거두고, 소녀가 금화 일곱 닢을 받아 소중히 품에 넣음으로써 거래가 끝났다. 오거스트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으하하! 이런 놈을 얻게 될 줄이야.'

이 오크가 만약 켄트리 시의 챔피언이라도 된다면 그 배당금만도 금화 수백 닢에 달할 것이다. 그런 놈을 고작 일곱 닢에 사들이다니?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소녀가 녹색 오크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슬픈 듯 중얼거렸다.

"이 아이가 이래 봬도 굉장히 착해요. 가끔 다른 오크들과 싸우기는 했지만 제 말은 얼마나 잘 듣는데요? 그러니 많이 예뻐해 주세요."

순간 오거스트는 실소했다. 제 딴에는 칭찬한답시고 한 말인가 본데, 성격이 온순하다는 것은 검투사 입장에서는 마이너스 요소일 뿐이다.

녹색 오크가 슬픈 얼굴로 소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주인님, 나 더 열심히 일한다. 나 팔지 마라."

소녀도 울상을 지으며 눈가를 훔쳤다.

"미안해, 새 주인 밑에서 열심히 살아가렴. 말 잘 듣고."

아주 둘이서 신파극을 찍고 있다. 오거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여자애 혼자서 데리고 다닐 정도면 정말 성격은 순한가 보군. 아무래도 혹독하게 성격 개조를 시켜야겠어.'

모든 검투사 양성소가 그렇지만, 와일드베인은 특히나 오크들을 혹독하게 대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한 달 정도만 지내게 되면 저 양처럼 순한 오크도 미친 황소처럼 날뛰게 될 것이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실라 양."

"네, 오거스트 씨."

소녀를 밖으로 안내한 뒤 오거스트가 경비병을 불러 녹색 오크를 데려가게 했다. 경비병 두 명이 오크의 손목에 족쇄를 채우고 안으로 끌고 갔다.

화려한 저택을 지나 옆에 위치한 허름한 석조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회반죽벽으로 둘러싸인 투박한 공간이 나왔다. 사방에 쇠창살이 쳐 있고, 그 안에서 수십 명의 우락부락한 오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몸을 단련하고 있었다.

창살을 열고 녹색 오크를 안으로 밀어 넣으며 경비병이 외쳤다.

"신참이다! 이 짐승 놈들아!"

경비병이 다시 창살을 잠그고 위로 올라갔다. 녹색 오크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없이 구석으로 가 앉았다. 오크 검투사들이 눈을 빛내며 오크어로 외쳤다.

"새로운 놈이 왔군."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애송아! 크크큭!"

조롱 섞인 목소리가 사방에서 쏟아졌지만 녹색 오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회색 피부의 오크 검투사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자네도 참 못 올 곳에 왔군. 이름이 뭔가, 젊은이?"

녹색 오크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중년 오크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까의 양순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 차가운 표정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크로타의 아들이자 칼켄의 검을 물려받은 자, 타시드라 하오."

☆ ☆ ☆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달빛이 검투사 숙소 내부를 흐릿하게 비췄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오크 검투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주사위를 돌리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군."

"하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아, 버릭이 죽었을 때 이야기 혹시 들었나? 우리의 주인님 오거스트가 했던 개소리 말이야."

"뭐라고 했기에?"

"죽은 버릭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더군."

오크 검투사가 고개를 들고 오거스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외쳤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갑옷을 피해서 칼을 맞았어야지! 아까운 갑옷 하나를 날리지 않았느냐!"

이야기를 듣던 이들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개 같은 놈."

"빌어먹을 새끼...."

힘없는 분노를 터트린 오크 검투사들이 이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며칠 뒤에, 자신의 처지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저주받은 운명, 저주받은 생애, 결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미래....

문득 오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처지가 서글프구나. 세상에는 투혼의 축복을 받아 인간들과도 대등하게 맞서는 오크들도 있다던데...."

"그거 안타레스 백국 이야기지? 그 권왕 레펜하르트가 세웠다던...."

다들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타레스의 오크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며 인간들에게 멸시받지 않고 오히려 당당히 맞선다는 그 소문은 이들 역시 들었다.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망상을 품은 적도 있다.

"그들은 진짜 전사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던데...."

"진정한 오크로서의 영혼을 품은 자들이라던데...."

나이 든 오크 검투사가 버럭 호통을 쳤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처자, 이것들아! 어차피 우리와는 관계도 없는 이야기가 아니냐!"

그때 숙소 구석에서 진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관계가 있다면 어찌하시겠소?"

오크들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질문을 던진 것은 오늘 들어온 신참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안타레스의 오크들, 그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어찌하겠냐는 말이오."

"무슨 소리 하는 겐가, 타시드?"

나이 든 오크의 말에 녹색 오크, 타시드가 족쇄 찬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족쇄에서 청록색 광채가 솟구쳤다.

콰앙!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며 강철 족쇄가 단숨에 산산이 박살 나 바닥으로 흩어졌다. 오크들이 경악해 소리쳤다.

"오, 오러?"

"맙소사! 투사다!"

당황이 물결처럼 숙소 전체로 퍼진다. 데굴거리고 있던 다른 오크들도 놀라 이쪽으로 달려왔다. 나이 든 오크가 놀라 외쳤다.

"누, 누구요? 당신은?"

타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안타레스에서 온 자, 형제들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왔소."

"우리를 가두고 있는 이 벽은 내가 부술 수 있소. 그 이후 무기고로 달려가 모두 무장을 하면 저택 경비병쯤은 상대가 되지 않지. 그 후 도시를 빠져나가면 되오. 길은 내가 알고 있소. 안내만 잘 따르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거요."

타시드는 차분히 탈출 계획을 설명했다. 오크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간다고? 이곳을?"

"이 지옥을 나갈 수 있단 말인가?"

이곳을 빠져나가는 상상을 안 해 본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노예로 살아왔고, 평생 인간의 명령을 들어 온 그들이었다.

"마, 만약 그랬다가 인간들에게 붙잡히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마수에게 먹히게 될 텐데...."

뼛속까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었으니, 결코 쉽게 그것을 떨쳐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주저하는 오크들을 본 타시드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오크들의 머리 위로 타시드의 호통이 떨어졌다.

"그대들은 전사인가? 아니면 말하는 가축인가? 지금 뛰고 있는 그 심장에 전사의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단 말이냐!"

분노와 한탄, 슬픔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서서히 오크들의 얼굴 위로 수치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평생 겪어온 노예로서의 삶, 그 위로 핏속에 흐르는 위대한 조상들의 영혼이 덧씌워진다.

오크들이 하나 둘 결심하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나, 나는...."

"물론 전사다...!"

타시드가 등을 꼿꼿이 세우며 가슴을 활짝 폈다. 오러가 이글거리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수십 명의 오크 검투사들을 마주 보며 외쳤다.

"진정 전사라 자부한다면 일어나라! 일어나 무기를 쥐고 싸워라!"

오크들은 강자를 숭상한다. 그리고 타시드는 투혼의 축복을 얻은, 그들이 상상조차 못 했던 힘을 지닌 진정한 강자였다. 위대한 투사가 지금 그들에게 일어나라 외치고 있었다. 흥분이 전염되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전사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진정한 전사다!"

"그대를 따르겠소! 투사 타시드!"

대다수의 오크 검투사들이 타시드의 뜻에 동조해 소리를 질렀다. 몇몇 오크는 여전히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흐르니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형제들이여, 이제 길을 열겠다."

타시드가 달빛이 흘러들어 오는 창가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외침을 터트렸다.

"오라! 나의 맹우, 다카르!"

휘이이익!

바람 소리가 울리며 무엇인가가 벽을 강타했다.

콰아앙!

굉음이 울렸다. 두꺼운 석벽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사방으로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그 속에서 타시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참마도, 다카르가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건...."

"진정한 전사만이 가진다는 영혼의 무기...."

오크들이 전율하며 몸을 떨었다. 노예였던 아비, 어미에게 전설처럼 전해 들었던 위대한 선조들의 모습이 지금 현실이 되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타시드가 검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가자! 형제들, 긍지 높은 전사의 후예들이여!"

☆ ☆ ☆

와일드베인의 화려한 저택에서 피와 비명이 강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택 경비병들이 창을 휘두르며 절망적인 외침을 터트렸다.

"으악!"

"이 더러운 오크 놈들이!"

그 뒤를 성난 오크의 포효가 매섭게 따라붙었다.

"크아아아아!"

"다 죽여 주마, 더러운 인간들!"

오크 검투사들이 사나운 맹수처럼 경비병들을 해치워 간다. 타시드의 계획대로,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갖춘 그들의 힘은 저택 경비병들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오크 검투사 하나가 문득 눈을 빛냈다. 테이블 밑에 공포에 질린 시종 하나가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간!"

눈빛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막 그가 검을 찌르려던 차였다. 갑자기 거대한 참마도가 날아와 그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타앙!

쇳소리와 함께 오크 검투사가 고개를 돌렸다. 타시드를 바라보며 흥분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투사여, 왜 나를 막으시오?"

"그자는 시종일 뿐이다."

"이놈도 인간이오!"

이를 갈며 오크 검투사가 재차 검을 들어 올렸다. 타시드가 소리쳤다.

"형제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자유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물론 둘 다 원했다. 하지만 그는 타시드가 바라는 대답이 이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오크 검투사가 검을 거두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알겠소."

오크 검투사가 시종을 놔둔 채 자리를 떴다. 참마도를 거두며 타시드가 모든 오크들에게 소리쳤다.

"불필요한 살생을 피하라!"

오크 검투사들이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시드가 말을 이었다.

"한 명을 살리면 열 명의 인간이 그를 보살피기 위해 남을 것이다. 한 명을 죽이면 열 명의 인간이 원한을 품고 우리를 쫓을 것이다."

차분한 목소리로, 깊은 설득력을 담아 오크들 하나하나의 뇌리에 음성을 심어 갔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전부 납득한 것은 아니지만, 저들을 죽이는 것보다 살려 놓는 것이 더 이롭다는 것쯤은 다들 알아들었다. 흥분이 남아 있었지만 오크들은 투사 타시드의 의견을 존중했다. 벌벌 떠는 시종들을 놔두고 다시 타시드에게로 모여들었다.

계속해서 경비병들을 상대하며 타시드와 오크들은 저택 바깥쪽으로 달렸다.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죽였지만, 타시드의 외침이 있은 후론 경비병들도 목숨을 빼앗지 않고 부상을 입혀 쓰러뜨리는 수준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경비병들을 쓰러뜨리니, 호위가 없어진 오거스트가 반쯤 넋 나간 얼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 배은망덕한 놈들! 내가 네놈들을 얼마나 정성껏 보살폈는데! 역시 오크는 은혜도 모르는 짐승일 뿐이구나!"

그는 진심으로 오크들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이 진정 오크들을 보살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고함이 이어질 때마다 오크들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진다. 오크 검투사 한 명이 빠드득 이를 갈며 타시드를 돌아보았다.

"저자에게도 관용을 베풀어야 하오?"

타시드가 주저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용은 남발하면 싸구려가 되게 마련이지."

단순한 고용인과 달리 오거스트는 이 검투사 양성소 전체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타시드도 오거스트까지 살려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타시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오크들의 눈동자에 번들거리는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군!"

"흐흐흐...."

"이날을 언제나 꿈꿔 왔다...."

분노와 증오를 담아 오크 검투사들이 오거스트에게 몰려갔다. 잠시 후,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악!"

오거스트를 처리한 뒤 타시드와 오크들은 저택 밖을 향해 걸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오크들의 뒷모습을 30대 초반의 한 남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오거스트에게 고용된 비정규 마법사, 덴버드였다.

고작 3서클밖에 안 되기에 덴버드는 마탑에서 연구는커녕, 던전 탐사나 마물 사냥을 따라갈 실력도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도시의 유력 인사 옆에 붙어 자잘한 일처리를 하며 하루하루 먹고사는 처지였다.

저택에서도 가장 으슥하고 볼품없는 방을 받을 정도로 푸대접받는 처지인 그였지만, 지금은 그 덕분에 오히려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뒤늦게야 오크들이 봉기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오크들도 그가 있는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기둥 뒤에 숨어 오크들을 바라보며 덴버드는 히죽 웃었다.

'후후후, 오크들은 아무리 강해도 간단한 정신계 마법 한 방에 침몰하는 법이지.'

오크들이 마법에 극도로 취약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인간들은 모른다. 하지만 오크 검투사 양성소에서 일하는 덴버드는 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팔자 고칠 절호의 기회였다. 저 오크들의 반란을 제압한다면 그도 상당히 유명세가 오를 것이었다.

'시에서 보상금도 푸짐하게 나오겠지, 흐흐흐.'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며 덴버드가 신중하게 마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노에 프 위파엔 렐프, 그대 멈추리라, 석상처럼 굳으리라...."

캐스팅을 하며 덴버드는 마법의 범위를 가늠했다. 운 좋게 놈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어 범위 잡기도 편했다. 바로 손을 떨치며 시동어를 외쳤다.

"와이드 패럴라이즈!"

광역 마비 주문이 타시드와 오크 검투사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타시드가 고개를 돌리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윽!"

지금 그는 노예로 잠입하느라 평소 걸고 다니던 항마용 부적을 벗은 상태였다. 덴버드의 기척 자체야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냥 숨어 있는 시종인 줄 알고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와이드 패럴라이즈의 마력장이 오크들 주위를 뒤덮어 갔다. 덴버드가 제대로 걸렸다고 막 좋아하려던 참이었다.

"필라넨스시여! 저들에게 흔들리지 않은 정신을!"

낭랑한 외침과 함께 수십 명이나 되는 오크들의 전신이 분홍빛 성광으로 빛났다. 자신의 마법이 무효화되는 걸 느끼며 덴버드가 놀라 외쳤다.

"뭐지? 왜 필라넨스의 신관이?"

타시드가 대뜸 덴버드에게 참마도를 던졌다. 위력을 조절한 참마도가 허공을 질주하며 마법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퍼억!

검등으로 때린 것이기에 죽지야 않았지만, 코피를 질질 흘리며 엎어져 있는 모습이 족히 반나절은 일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덴버드가 서 있던 기둥 반대편에서, 흑발에 연한 녹색 드레스를 입은 작은 소녀가 호들갑을 떨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거스트에게 타시드를 팔아넘긴 소녀, 실라였다.

"우와! 아슬아슬했네! 저 마법사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뭐, 사실은 소녀도 아니다. 타시드가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공용어로 감사의 말을 건넸다.

"좋은 도움이다. 고맙다, 실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여장을 한 것이다. 실란이 품에서 목걸이 두 개를 꺼내 타시드에게 던졌다.

"이거나 받아요."

실란이 만든 항마부降魔符와 레펜하르트가 제작한 '의사 전달의 목걸이'였다. 부적과 목걸이를 받아 타시드가 목에 걸자 그제야 자연스러운 공용어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옷 좀 갈아입고 오지 그랬어? 혹시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나?"

"혹시 몰라서 계속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던 거예요.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헤, 그쪽 취미가 있는 건 아니고?"

은근슬쩍 놀려 대는 타시드의 말에 실란이 콧방귀를 흘리며 팔짱을 꼈다.

"흥! 이것도 며칠 안 남았어요! 이제 곧 근육질이 되어서 이런 옷 따윈 들어가지도 않는 몸이 되어 줄 테니까!"

글쎄, 지금의 저 '아리따운' 꼬락서니를 보면 며칠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난들 영 가망은 없어 보인다만... 그렇다고 저 사실을 지적할 만큼 타시드가 못된 성격은 아니다. 그냥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오크 검투사들이 실란을 보며 의아해했다. 분명 인간인데도 타시드가 이상하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다.

"저 인간은?"

"누구지?"

"동료입니까, 투사 타시드?"

타시드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어린 성자다."

그러자 모든 오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성자의 명성은 크로방스 내전으로 인해 대륙 전체에 퍼져 있어, 이 오크 검투사들조차도 실란을 알고 있었다.

"아, 저 인간이 바로 그...."

"안타레스 백국의 어린 성자...."

"권왕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아니거든요!"

문제는 그 내용이 좀 엉뚱하다는 점이었지만, 어쨌건 명성이 퍼진 것은 사실이다.

'돌겠네, 대체 저 소문 몇 개 국어로 퍼진 거야?'

그동안 이래저래 오크들 만나는 일이 잦다 보니 슬슬 실란도 간단한 오크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오크어로 번역(?)된 자신의 소문을 듣고 있자니 참으로 서글펐다.

툴툴거리며 실란이 쓰러진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타시드가 물었다.

"뭐 하나?"

"정체 들키면 안 되는데, 기억 지워야죠."

레펜하르트의 황금빛 오러처럼, 필라넨스의 분홍빛 성광 역시 굉장히 튀는 색상인지라 이래저래 알아보기가 쉬운 것이다. 물론 지금은 변장한 상태니까 그냥 필라넨스의 여신관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다.

"필라넨스시여, 당신의 어린 종들을 보살피사 이들의 아픈 기억을 지워 주소서."

그렇게 뒤처리를 끝낸 뒤 실란이 타시드를 재촉했다.

"자, 이제 가요!"

타시드도 오크 검투사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갑시다, 형제들!"

탈주 소식이 알려지기 전 어서 도시를 탈출해야 한다. 요란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타시드와 실란, 오크들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5

바실리 왕국 북동부, 라키드 산맥과 인접한 버키프 남작령.

영지 중심에 위치한 남작가 저택에서 지금 화려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새하얀 테이블보로 뒤덮인 식탁 위에는 온갖 화려한 만찬이 아름답게 세공한 은촛대 아래 끝도 없이 차려져 있고, 연회장 한쪽 편에서는 음악가들이 부드러운 음색을 쉴 새 없이 연주한다. 가을의 풍성함을 상징하듯 사방에 위치한 벽난로 위에는 색색의 꽃망울과 이파리 돋은 나뭇가지들이 장식되어 있다.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연회장, 그 안에서 서른 명 정도의 귀족들이 술잔을 들고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훌륭한 연회를 준비하셨습니다, 버키프 남작. 이런 연회는 수도에서도 보기 드물 것입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허허허."

겸손한 듯 손을 저으면서도 버키프 남작은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그가 들인 금액은 상당했다. 음식도 음악도 모두 최고의 것만을 준비했다. 게다가....

"보잘것없다니요? 모든 하녀를 엘프로 채우다니, 이렇게 격이 높은 연회는 수도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상대가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고상하게 차려 입은 남자들과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 그들 사이로 스무 명 정도의 하녀들이 시중을 들며 오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놀라운 미모에 뾰족한 긴 귀를 지닌 엘프였다.

엘프 노예는 워낙 비싸 지방 귀족들은 기껏해야 한둘 정도를 데리고 사는 것이 고작이다. 버키프 남작은 오늘의 연회를 위해 인근 귀족들에게 특별히 저 엘프 노예들을 빌려 온 것이다.

"덕분에 눈이 호강하고 있습니다, 하하핫."

"허허, 즐겨 주시니 저도 기쁘기 그지없군요."

여기저기 대화가 오가며 웃음꽃이 핀다. 물론 웃음꽃이 피는 것은 귀족들뿐, 엘프 하녀들은 하나같이 극도로 긴장한 채였다. 높은 분들이 잔뜩 모인 이 자리에서 자칫 실수라도 한다면 호된 매질을 당할 것이다. 채찍의 고통을 기억하는 그녀들은 그저 귀족들의 눈치만을 보며 조심조심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던 중이었다. 문득 귀족 한 명이 술잔을 기울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식탁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촛대들, 그 수많은 촛불들이 어째 점점 거세게 타오르며 커져 가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이상을 깨닫고 촛대를 바라보았다.

"뭐지?"

"불량품인가?"

그때였다. 촛불이 일제히 커지며 불도마뱀의 형상으로 변했다.

화르르륵!

수십 마리의 불도마뱀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연회장 상공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벽난로에서도 불길이 일렁이며 커져 갔다. 불길이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바뀌며 벽난로 안에서 몸을 빼고 연회장 안에 우뚝 선다. 귀족들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 무슨 해괴한 사태인가?"

"버키프 남작!"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후끈한 열기가 연회장을 달군다. 모두가 공황 상태에 빠져 있을 때였다.

쨍그랑!

연회장 2층 창문이 깨지며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깨진 창문을 통해 밤바람이 백금발을 휘날리며 길고 뾰족한 귀를 드러낸다.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에, 엘프?"

대부분의 귀족들처럼, 버키프 남작 저택의 연회장도 1, 2층을 통째로 틔우고 2층 창가를 따라 발코니를 세운 형태였다. 발코니에 서서 엘프 소녀가 소리쳤다.

"샐러맨더! 이그나시스! 저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줘요!"

허공을 날던 불도마뱀들이 몇몇 귀족들을 덮쳤다. 폭발과 함께 불길이 피어올랐다. 눈앞에서 사람이 불타는 걸 본 귀족 부인들이 비명을 터트렸다.

"꺄악!"

"사람이 죽었어!"

"피, 피하시오! 모두들!"

귀족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이 상황이 장난이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처럼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르르 연회장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허공을 날던 불도마뱀들이 도망가는 이들의 뒤를 쫓았다. 불꽃의 거인도 두 팔을 휘두르며 귀족들을 몰아붙였다.

펑! 펑! 퍼펑!

연회장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화염이 치솟고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회장을 빠져나가며 버키프 남작이 처절한 고함을 터트렸다.

"경비병! 경비벼어엉!"

그것이 버키프 남작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쫓아온 불꽃의 거인이 남작에게 돌진해 폭발한 것이다. 벽이 흔들리며 불길이 치솟아 연회장 입구를 막아 버렸다.

귀족들이 빠져나간 연회장 안에는 엘프 하녀들만이 남아, 바닥에 주저앉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감히 노예 주제에 귀족들을 젖히고 먼저 도망칠 수 없다 보니 뒤에 남겨진 것이었다. 이제 입구가 불타고 있으니 달아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다들 한 자리에 모여 공포에 질린 눈으로 저 백금발의 엘프 소녀를 바라보았다.

엘프 소녀가 발코니에서 몸을 날렸다. 새처럼 가벼운 몸놀림으로 2층에서 뛰어내려 엘프 하녀들에게로 향했다. 하녀들의 표정이 더더욱 창백해졌다.

"사, 살려...."

"살려 주세요...."

"부디 자비를...."

분명 상대가 같은 엘프란 걸 알면서도 하녀들은 그저 살려 달라 빌고만 있었다. 도저히 무시무시한 힘을 보인 저 백금발의 소녀와 미천한 자신들이 동족이라는 걸 인식할 수가 없었다.

엘프 소녀가 서글픈 미소를 띠우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시리스라고 해요.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왔어요."

어째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온화한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에요."

예상 밖으로 상냥한 음성에 하녀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엘프 여인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노예가 아니라니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자랐고 노예로 살아온 이들에게 저 소리는, '당신은 이제 엘프가 아니에요.'란 소리처럼 들렸다. 뭔 짓을 하건 자신들이 엘프라는 건 변함이 없는 사실인 것이다.

"하아...."

시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들에게 자유의 개념을 가르치려면 하루 이틀로 될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경비병들이 달려오기 전, 어서 이들을 이끌고 빠져나가야 했다.

나직한 영창과 함께 시리스가 허공에 수인을 맺었다.

"알 하르드 디판 제이한, 대지여, 내 뜻에 따라 그 몸을 허물라! 테라 브레이크!"

우르릉!

3서클 암석 붕괴 주문이 발동하며 연회장 벽 일부를 무너트렸다. 두꺼운 벽이 뚫리며 사람 하나가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생성됐다. 통로를 만든 뒤 시리스가 엘프 하녀들을 독촉했다.

"일단 가요. 여기서 빠져나가서 마저 이야기해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시리스의 눈치만 보며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시리스는 연회장 밖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을 설득할 시간이 없었다.

'별로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오른손을 들며 시리스가 소리를 질렀다.

"이그나시스!"

펑!

불꽃의 거인이 소환되며 시리스 옆에 섰다. 이그나시스가 팔짱을 낀 채 이글거리는 미소를 띠우며 엘프 하녀들을 내려다보았다.

"히, 히익!"

"히이이익!"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에 하녀들이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시리스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호호호, 일단은 좀 시키는 대로 해 주실래요?"

"네!"

"뭐든지 시켜 주세요!"

노예근성이 뼛속까지 박힌 이들이라 명령조로 나서자 오히려 순순히 움직인다. 시리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 ☆ ☆

버키프 남작 저택 외곽의 낮은 구릉.

시리스가 이끄는 엘프 하녀들이 구릉을 따라 허겁지겁 뛰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명이 쉰 넘는 기사와 병사들이 쫓았다. 버키프 남작가의 병력이었다.

"쫓아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남작님을 살해한 자다!"

다들 살기등등한 얼굴로 엘프들을 쫓고 있었다. 버키프 남작의 원수도 원수지만, 저 엘프 하녀들은 전부 인근 귀족들에게서 대여한 노예들이다. 놓쳤다가는 그 보상금으로 버키프 남작가가 몰락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의 밥줄도 끊길 터, 남의 일이 아니다 보니 다들 죽어라 추적에 나서고 있었다.

점점 거리가 좁아진다. 엘프 하녀들은 대부분 체력이 그리 좋지 않기에 아무래도 발이 느렸다. 가까워지는 엘프 여인들의 등을 보며 이들의 우두머리인 시레드 경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뛰어 봐야 벼룩이고 도망쳐 봐야 엘프지!"

그러던 중이었다. 갑자기 길 옆에서 붉은 로브를 걸친 사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덩치, 머리까지 후드를 뒤집어써 도저히 신원을 알 수가 없는 사내였다. 사내가 추적자들을 향해 손을 뻗으며 굵은 외침을 터트렸다.

"월 오브 파이어!"

화르르륵!

거대한 불길의 벽이 추적자들과 엘프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다들 당황하며 걸음을 멈추고 붉은 로브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엘프 도둑놈의 동료인가?"

사내가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여기서 더는 갈 수 없다."

그는 시리스의 원호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레펜하르트였다. 마법으로 빛의 굴절률을 왜곡시켜 그 큰 덩치를 평범해 보이게 바꾼 것이다. 평범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전신이 일그러져 어색했겠지만, 품이 큰 로브로 전신을 가리고 있으니 꽤나 자연스러웠다.

당황한 시레드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마법사다! 마법 쓸 틈을 주지 말고 해치워!"

선두에 선 기사 세 명이 빠르게 레펜하르트에게 돌진했다. 바로 거리를 좁히며 검을 찔러 가는 모습이, 이들이 상당히 경험 많은 전사들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세 줄기 칼날이 막 레펜하르트의 전신을 찔러 가는 그 순간.

"합!"

짧은 기합과 함께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크게 휘두르며 모든 공격을 걷어 내 버렸다. 칼날이 엉뚱한 데로 쓸려 가며 기사들이 일제히 왼쪽으로 자빠졌다.

"어?"

"으익!"

우당탕!

기사 세 명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볼품없이 포개져 나뒹굴었다. 보고 있던 시레드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뭐야? 저 기술은?'

보통 기술이 아니었다. 그냥 공격을 쳐 낸 것이 아니라 절묘하게 기사들의 검격을 흘리며 상대의 힘을 이용해 내동댕이친 것이다.

"마, 마권사였나? 하지만 마권사가 어찌 저런 고도의 기술을...."

평생 무술을 수련해 온 시레드 자신도, 도저히 저런 흉내를 낼 자신이 없었다.

쓰러진 기사들을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흠, 힘의 흐름은 이제 좀 느껴지네."

테스론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그도 진지하게 무술을 대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그라운드 레슬링만 배운 것이 아니었다. 평소 수행을 할 때도 기술 하나하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파고들었다. 가벼운 주먹질, 발길질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심사숙고하며 내질렀다.

오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틈날 때마다 러스며 타시드를 상대해 숙련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오러의 흐름을 느끼고, 그것을 제어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또다시 테스론에게 그렇게 비참하게 당할 수는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쓰러진 기사들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일렉트로닉 스턴!"

파지지직!

전격이 쏘아져 쓰러진 기사들을 강타했다. 그렇게 기사들을 기절시킨 뒤 레펜하르트가 다른 놈들을 노려보았다.

'저것들도 마저 처리해야지?'

시레드가 고함을 질렀다.

"상대는 마권사다! 전원 돌격해 사방에서 공격하라!"

마법사와 달리 마권사는 광범위 마법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이 전장의 상식, 그래서 크게 퍼져서 공격을 시킨 것이었다. 기사며 병사들이 포위진을 펼치고 레펜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적들이 불규칙적인 움직임으로 달려온다. 레펜하르트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감을 펼쳤다.

'흡!'

감각권이 반경 30미터를 모조리 뒤덮는다.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가 생생히 느껴진다. 여기까지는 원래도 할 수 있었던 경지.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간격과 호흡마저 느껴진다.

진정한 무인은 스피드나 파워보다는 오히려 간격과 호흡을 중시하는 법, 진지하게 무술을 대하기 시작한 레펜하르트는 이제야 저 무리武理를 깨닫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다.

"빛이여, 내 손에 임하라, 파멸을 부르는 섬광이 되어라."

기감을 통해 파악한 적들의 간격과 호흡, 위치를 파악한다. 그 '정보'를 이용해 마법사다운 연산력으로 저들의 공간 좌표를 측정한다.

'타겟팅!'

무인으로서의 통찰력으로 저들의 전후 움직임을 예측해 수많은 동선을 그린다. 마법사로서 쉰 개의 동선이 겹쳐지는 교차점을 일일이 뇌리에 각인시킨다.

'마킹!'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펼쳤다. 전신의 마력을 끌어 올리며 시동어를 외쳤다.

"아케인 스트라이크 파이널 디시전!"

콰아아아아앙!

사방으로 수십 줄기의 섬광이 뻗어 갔다. 섬광이 달려드는 모든 기사와 병사들의 전신에 꽂히며 일제히 폭발했다. 들판 가득 폭발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 흐드러지게 불꽃을 수놓았다.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섬광에 적중당해 비명을 지르며 날려 갔다.

"으아아아악!"

날려 가며 시레드는 흐릿한 정신 속에서도 기가 차 중얼거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마법이...."

한 방에 적들을 싹 침몰시킨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 떨어진 버키프 남작의 저택이 보였다. 연회장에 붙은 불이 번졌는지 밤하늘 위로 화광이 비치고 있었다.

가주를 잃고 빌린 엘프 노예들까지 도둑맞았으니 더 이상 버키프 남작가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 막대한 빚을 진 채 작위를 잃고 비참하게 몰락할 일만 남았겠지. 엘프 노예를 쓰는 귀족들은 대륙에 얼마든지 있는데 저들만 저런 꼴이 되었으니, 생각해 보면 꽤나 억울해할 법도 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모두가 죄를 짓는다 해서, 자신만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렀다 해서 그것이 억울해할 일은 아니지."

레펜하르트가 발길을 돌렸다. 이미 엘프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시리스가 약속한 대로 집결 장소로 잘 이끌고 있겠지.

시리스 외에도 대륙 곳곳에서 그의 동료들이 이종족들을 구하고 있었다.

드워프, 트롤, 오크, 엘프.

자유가 없는 자들, 자유를 잃은 자들, 자유를 잊은 자들, 자유를 모르는 자들....

운명 속에서 학대받던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억울해할 자격이 있는 이들이었다.

시리스와 합류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레펜하르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 저들의 눈물이 이 세상에 얼마나 스며들어 있었는지를."

☆ ☆ ☆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거대한 순백의 공간.

강력한 고대의 권능으로 형성된 이 유사 공간 속에 거대한 신전이 있었다. 너무도 깨끗하고 반듯하며 한 치의 흠집조차 없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순백의 신전, 그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홀에 지금 열세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성별도 나이도 제각각인 이들은 전원 새하얀 로브를 입고 가슴에 은빛 성표를 달고 있었다. 인류를 수호하는 은의 현자, 그중에서도 최상위인 은의 수호자들이었다.

중후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수호자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소."

젊어 보이는 금발의 사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권왕 정도의 오러 유저라면 미꾸라지라 할 순 없지요. 안 그런가요, 수호자 쉬툴란?"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바꿨다.

"뱀장어 한 마리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소."

"...."

금발의 사내가 황당해하며 수호자 쉬툴란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 양반이 웃기려고 저러나? 하지만 표정이 진지하기 그지없는 것이, 전혀 그럴 의도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은의 현자가 가진 진정한 힘을 생각해 보면 오러 유저를 뱀장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새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이 손을 들며 발언했다.

"권왕 레펜하르트는 오러 유저, 유명한 오러 유저나 9서클의 대마법사는 인세에 영향력이 크지. 함부로 처리하면 부자연스러워 보일 가능성이 있소. 역시 하던 대로 그자의 주변을 정리하며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좋지 않겠소?"

오러 유저나 대마법사쯤 되는 이가 기이하게 죽으면 사람들이 의심하며 조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은의 현자의 존재가 드러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금발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수호자 다오스, 현자 레스틴을 가입시킨 그대가 비밀 유지를 걱정하니 그것도 우습군요."

그는 현자 레스틴, 속명 테스론이라는 은의 현자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원래 은의 현자는 결코 타인을 받아들이는 집단이 아니다. 오직 믿을 수 있는 가문 내에서만 그 지위를 대대로 물려받으며 함부로 외부인에게 비밀을 노출하지 않는다.

즉, 은의 현자의 일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은의 현자였던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부의 존재가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인다 한들 그들을 은의 현자로 끌어들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은의 현자는 무슨 용병 집단이 아니라 극도로 은밀한 비밀결사다. 강한 무인이나 마법사가 나왔다고 넙죽넙죽 가입시키고도 비밀이 유지될 리가 없지 않은가?

수호자 다오스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수호자 아크라이트, 현자 레스틴은 이미 은의 현자에 대해 알고 있었소. 그리고 우리의 뜻에 찬동하며 찾아온 자, 관례에는 어긋나지만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소."

금발의 사내가 두 손을 들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뭐, 틀렸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냥 우습다는 거죠."

"자중해 주길 바라오. 지금의 의제는 현자 레스틴이 아니오."

"네, 네."

금발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실었다. 곁에 있던 또 다른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수호자 다오스의 말도 옳소. 그렇기에 일단은 두고 봤소. 그냥 특이한 취향일 가능성도 있기에.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확실하오. 권왕 레펜하르트는 확실하게 불순한 사상을 지니고 있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자는 가끔 나오는 이종족 애호가 정도가 아니에요. 자신만의 명확한 사상과 비전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머리가 새하얗게 센, 젊은 시절엔 꽤나 미남이었을 잘생긴 노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자의 나이는 젊지. 그리고 그자의 사상은 확고하며 이질적이다. 기존의 것을 부술 새로운 사상은 결코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는 법, 감정적 변화를 거치고 점진적으로 사상을 체계화시키며 이성적 판단을 내려야 비로소 자신의 사상이 완성된다. 그자의 나이를 볼 때 모든 것을 온전히 스스로 깨달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승이 있겠군요. 그자에게 사상적 가르침을 준 스승이."

"그렇다면 그 스승도 가만둘 수는 없겠군."

수호자들이 연달아 동의의 뜻을 표했다.

"이미 대륙에 그자의 영향이 미치고 있소. 좌시할 수 없소."

그가 보랏빛 수정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다른 수호자들도 품에서 수정을 꺼냈다. 금발의 사내 역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수정을 손에 쥐었다.

쉬툴란이 물었다.

"모두 결정하셨소?"

열두 개의 보랏빛 수정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열두 개의 빛의 기둥을 보며 다오스가 중얼거렸다.

"만장일치로군."

쉬툴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인류의 수호자, 은의 현자의 이름으로...."

열한 명의 남은 수호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쉬툴란이 쐐기를 박듯 선언했다.

"이 시각 이후, 은의 현자는 권왕 레펜하르트를 말살 대상으로 지정하겠소. 그와, 그에 관련된 모든 것을."

<8권에서 계속>

8권

제25장 세이어의 눈

1

대륙 중서부에 위치한 신성 바슈탈론 제국.

북으로 그라임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남으로 할라인 왕국과 인접하며 동으로 라스틸 공국, 테이칸 왕국과도 연결되어 있는 신성 바슈탈론 제국은 천 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강대국이었다.

영토 자체는 그라임 왕국이나 할라인 왕국에 비해 나을 것이 없으나 인구와 국력 면에서는 대륙 최강을 자부하는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별칭은 '주신 세이어께서 축복하신 땅'.

세이어 교단의 총본산인 교황청 판테온이 위치한 곳이며 교황청으로부터 인류의 지도자로 선택되어 황제를 칭할 권위를 가진 유일한 국가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 동부 영지, 요드 백작령에 있는 세이어의 신전.

고해 성사실에서 한 젊은이가 나무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해를 하고 있었다.

"신관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를 구합니다."

가림막 건너편에서 온화한 대답이 들려왔다.

"세이어께서는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죄를 고하고 죄 사함을 받으세요."

젊은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제 가문에서 부리는 엘프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비록 엘프지만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우며 마치 꾀꼬리처럼 노래를 부릅니다."

대수롭지 않은 죄였다. 귀족 젊은이가 노예로 부리는 엘프와 관계하는 것은 물론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죄의 경중으로 치면, 수간보다는 조금 덜하고 창녀를 안은 것보다는 좀 심한 정도다. 그래서 신관도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엘프를 탐하는 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나, 젊을 때의 욕망 역시 억누르기엔 힘든 법이지요. 그대가 그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였으니, 세이어의 이름으로 모든 죄는 사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신관의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을 이었다.

"아니요, 나는 그녀를 사랑한 것이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그녀와 함께 가문을 나갈 생각입니다. 그녀와 떳떳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남은 부모님들이 걱정하실 걸 생각하면 그 죄를 어찌 감당할지...."

신관이 표정을 심각하게 굳히며 대답했다.

"으음, 잘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그대는 아직 젊소. 정욕에 눈이 멀어 그런 기분이 들 법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때일 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보시오.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는 법입니다."

"저는 이미 진정한 사랑을 찾았습니다."

단호한 태도였다. 신관이 안타까워하며 차근차근 설득했다.

"세이어께서 말씀하시길 그들을 인간의 노예로 운명 지었다 하셨습니다. 한때의 즐거움을 찾는 것은 몰라도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고해 내용을 바꾸시겠습니까? 세이어께서는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고해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완강한 태도로 젊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받으리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단지, 남겨진 부모님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이곳을 찾았지요. 부모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 그것에 대해 속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출이라니... 어디로 갈 생각이오? 어디 간들 엘프는 노예일 뿐이오. 그렇다면 굳이 가출을 할 필요가 없지 않소? 일단 하녀로 곁에 두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안타레스 백국으로 갈 것입니다."

신관의 말을 가로막으며 젊은이가 말했다. 신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 뜬소문을 믿는단 말이오?"

"저에겐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후로도 신관은 계속 젊은이를 설득하려 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헛된 미몽에 빠져 인생을 망치는 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젊은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결코 태도를 바꾸려하지 않았다. 신관이 한탄을 흘렸다.

"안타깝도다... 그저 그대가 어서 미혹에서 벗어나기를 세이어께 기도드리는 수밖에."

젊은이가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해 성사실을 나가려다 말고 문득 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혹시 저희 부모님께 말씀드리거나 하는 건...."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신관은 이미 이 젊은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일대에서 엘프 노예를 부릴 정도로 권세 높은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요드 백작가의 후계자, 루웬 공자밖에 없는 것이다.

신관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아니오. 고해실에서 일어난 것은 설사 일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알아낼 수 없지. 하지만 잊지 마시오. 세이어께선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걸."

굳은 얼굴로 젊은이, 루웬 공자는 신전을 떠났다. 신관에게 고해성사를 했어도 전혀 가슴은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에 걸린 듯 콱 막힌 기분일 뿐이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하지만 저는 제 마음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베레티는 단순히 주인의 명령으로 동침하는 그런 엘프들과 달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도 진정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엘프와 인간이라는 것은 진정한 사랑 앞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루웬과 베레티가 사랑을 이룰 방법은 없었다. 아무리 루웬이 베레티를 아끼고 사랑한다 해도, 그녀는 어디까지나 성노였고 애완용 엘프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이가 저런 취급을 당해도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을 듣게 되었다.

뜬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많은 이야기가 들려왔고, 또 신빙성이 있었다. 그리고 루웬은 저런 뜬소문이라도 잡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이제 그녀와 함께 떠나야지. 떳떳하게 함께 살 수 있는 곳으로....'

루웬은 슬쩍 품속을 더듬어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가문에서 몰래 훔친 금화와 보석이 담긴 주머니였다. 이 정도 금액이면 안타레스 백국으로 향할 경비와, 그곳에서 자리 잡을 충분한 자금이 될 터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루웬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지금쯤 베레티도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벅찬 가슴과 흥분,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담은 채 그는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연인과 약속했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그곳에 베레티는 없었다. 루웬이 멍하니 고개를 들어 느티나무 위쪽을 바라보았다.

느티나무 가지 아래, 아름다운 흑발의 엘프가 목을 맨 채 길게 혀를 빼물고 매달려 있었다.

"아...."

바람이 불어온다. 시체가 바람에 흔들린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루웬이 바들바들 떨며 시체로 다가갔다.

"베, 베레티?"

시체 밑에 종이가 있었다. 루웬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루웬 님.

저는 엘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미천한 몸.

감히 루웬님과 함께 하는 죄악을 저지를 수 없어요. 그것은 신의 분노를 사는 일, 우리의 영혼이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에 고통받게 될 거예요.

좋은 여인을 만나세요. 저 같은 천한 엘프가 아닌, 진정 당신의 짝이 될 고귀한 인간의 여인을.

그녀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 저희 같은 미천한 이들을 위한 올바른 길이랍니다.

그동안 주제넘게 당신을 유혹한 저를 용서하세요.

루웬은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베레티가 이런 유서를 남겼다고? 그리고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어제까지만 해도 희망에 부풀어 있던 그녀였다.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 그리고 대륙 여기저기서 은밀히 들려오는 엘프들의 탈주 소식을 듣고 나서 흥분한 루웬을 응원한 것도 그녀였다.

"그런 베레티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태도를 바꿀 리가 없어!"

이를 갈며 루웬은 유서를 살펴보았다. 혹시 자신의 계획을 알아챈 부모님이 남긴 가짜 유서인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분명 베레티의 필적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몇 번이고 되살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습관, 버릇, 흔적과 자취가 필체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아아악!"

루웬은 절규했다.

"왜!"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니다. 그녀와 함께 살며, 그녀를 당당히 내 아내라고 소개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옆에서 남들처럼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대체 왜!"

눈물이 터졌다.

"으아아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시체 아래, 흔들리는 그녀의 유서를 든 채 루웬은 울고 또 울었다.

☆ ☆ ☆

할라인 왕국과 테이칸 왕국의 경계를 형성하는 쥬란 강.

강가에 위치한 오두막에서 한 40대 초반의 여인이 집필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 옆에는 수많은 원고들이 잔뜩 쌓여 있는 상태였다. 신들린 듯이 펜을 휘갈기다 말고 문득 여인이 화색을 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아, 끝났다."

여인, 트루디는 뿌듯한 눈으로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수백 장이 넘게 쌓인 두꺼운 원고, 그 표지에는 '과수원의 오크 아저씨'라는 가제가 붙어 있었다.

트루디는 주신 세이어를 섬기는 여신관으로 쥬란 교구 내 지역 신전에 파견된 성직자였다.

쥬란 강 중부 유역에 자리 잡은 이곳은 전통적으로 포도나 복숭아 농사가 흥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영지 대부분은 과수 농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밀이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은 규모에 비해 사실 손이 그렇게 많이 가지는 않는다. 바쁜 시기에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농한기에 접어들면 또 한가해지는 법이다.

하지만 과수 농사는 사시사철 쉴 틈이 없다. 곡식처럼 일제히 베어서 탈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과실을 일일이 따야 하고, 농한기에도 쉴 새 없이 벌레를 잡아 주어야 하며 겨우내 나무가 얼어 죽지 않게 보살피기도 해야 한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 과수 농원들은 전부 수백의 오크 노예들을 부리는 대규모 농장들뿐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만큼 노예들을 부려서 얻는 이득도 컸다. 개인이 경작하는 과수원으로는 도저히 이들과 생산성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교구 내 거주민들 대부분이 농장 주인들이니 트루디도 자연스럽게 오크 노예들을 접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접하며 간혹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아무리 노예라지만, 오크들의 생활은 너무 비참했다. 하루 세 끼 적은 양의 식사만을 하며 쉴 틈 없이 일만 하는 삶이었다.

농장주들은 오크들이 워낙 멍청해서 힘든 줄도 모른다고 하지만, 트루디가 본 오크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이어 교단의 가르침은 저들이 사람이 아니라 가축일 뿐이라 했지만, 트루디가 보기엔 오크들 역시 사람 같아 보였다.

하지만 트루디는 딱히 이 현실에 대해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설 속의 성자가 아니라 일개 지방의 하급 신관일 뿐이었다. 감히 교단의 가르침에 반박할 만큼의 용기도, 신념도 없었다. 그저 인간으로 태어나 다행일 뿐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트루디의 생각이 변한 이유는 크로방스 내전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녀만이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처럼 생각하는 이가 세상에 또 있었다.

그 사실은 소심한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평소 언제나 보아 왔던 오크들의 삶을 조금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냥 사실적으로 적었다. 그것이 이 '과수원의 오크 아저씨'였다.

"이걸로... 조금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꿔 줄까?"

원고를 정리하며 트루디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딱히 세이어의 가르침을 거역하려는 생각은 없다. 오크들의 삶을 세상에 알려 조금이라도 저들의 처우를 개선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출간인에게 보이기 위해 트루디는 원고를 자루 안에 넣었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를 올렸다.

"세이어시여, 비록 교단의 가르침과는 다르지만,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 믿습니다...."

양손을 곱게 가슴에 포개고 약간의 긴장과 흥분 속에서 트루디가 기도를 이어 가던 때였다.

갑자기 오두막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트루디는 놀라며 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신지요?"

검은 재킷을 입은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 여행자인가 싶어 트루디가 재차 입을 열었다. 신관다운 정중한 태도로 그녀가 물었다.

"저는 세이어를 섬기는 종, 트루디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

대답은 없었다. 사내는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트루디와 그녀가 쓴 원고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원고 위에 적힌 제목을 보더니 사내가 중얼거렸다.

"틀림없군."

갑자기 사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트루디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내가 낀 금속 장갑, 그곳에서 전격이 튀어 트루디를 강타했다.

번쩍!

섬광이 번뜩였다. 비록 지위는 낮지만 트루디도 엄연한 세이어의 성직자, 어느 정도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편이다. 그런데 전격은 조금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녀를 직격했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트루디는 그대로 절명해 버렸다. 너무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라 죽은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의 빛조차 없었다. 그저 약간의 당혹감만이 표정의 전부였다.

트루디의 심장이 멈춘 걸 확인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되었군."

사내가 책상 위로 걸어가 트루디의 원고 중 한 장을 들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30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금속 막대를 꺼냈다.

막대를 횡으로 뉘이고 원고에 갖다 댄 뒤 사내가 중얼거렸다.

"스캐닝."

막대로부터 빛의 장막이 뿜어져 원고 위를 훑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내가 원고를 놓고 빈 종이를 들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잉크를 몇 방울 뿌린 뒤 그 위에 막대를 가져간 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움직였다.

"프린팅."

잉크가 춤추듯 움직이며 빈종이 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벽하게 원고의 글씨, 트루디의 필체를 재현하며 새로운 글을 적고 있었다. 불현듯 세이어의 뜻을 느끼고 순례자로서 여행을 떠나니 찾지 말아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완벽하게 가짜 편지를 만든 뒤 사내는 원고가 든 자루를 챙겼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혹시나 원고 내용을 따로 적은 종이가 있는지도 철저히 확인했다.

모든 흔적을 없앤 뒤 사내는 트루디의 시체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말없이 오두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원형으로 된 거대한 회장, 그곳에서 수많은 마법사들이 자리에 앉아 회장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50대 초반의 중년 사내가 거대한 도표를 옆에 띄워 놓고 마법사들을 향해 말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던전 피에타 속에서 여러 아티팩트를 찾고 또 연구했소. 그리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소."

이곳은 그라임 왕국의 유서 깊은 마법학회, 마라그랑드 타워였다. 할라인 왕국의 신비의회,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태양탑과 함께 대륙의 3대 마법 학회 중 한 곳이다. 새로운 마법 이론이나 새로운 은의 시대 유물의 발굴 소식 등이 모두 저 마법 학회들을 통해 세상에 공표되곤 한다.

현재 단상에 올라 연설 중인 중년 사내의 이름은 아트레스, 현 대륙에서도 열 명이 채 안 된다는 9서클의 종사자였다.

세인들은 보통 8서클의 경지를 넘어선 마법사들은 대마법사라 칭하며 높여 부르곤 한다. 대마법사로 이름 높은 아트레스는 특이한 성품으로도 유명했다. 대부분의 대마법사들은 그 경지에 오르게 되면 마탑을 세우고 제자를 키우거나 궁정 마법사로 지내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법이다. 하지만 유독 방랑벽이 심한 아트레스는 9서클의 경지에 들어서도 던전 탐구자로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지내며 이렇듯 대륙 각지의 던전을 탐사하고 연구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던전 피에타에서 본인이 발견한 것들은...."

아트레스가 던전 피에타의 성과를 발표할 때마다 회장에 모인 마법사들이 질시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자는 이번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군...."

"역시 9서클의 대마법사, 단신으로 저런 위업을 이루다니...."

사실 던전 탐사는 설사 오러 유저라 할지라도 소규모로 덤비다간 목숨을 잃고 마는 위험한 일이었다. (바실리 왕국의 어리석은 오러 유저, 알티온 경의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다.) 하지만 아트레스는 9서클에 들어선 후 다른 던전 탐사자들처럼 대규모 탐사대를 꾸리는 짓을 하지 않았다.

전사도 신관도 없이 제자 두어 명만 데리고 던전 탐사를 행하는 그의 행보는 괴팍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지만 그만큼 이득이 엄청나게 컸다. 밑천은 들지 않고, 모든 유물을 홀로 독식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다.

아트레스는 강력한 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그라임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갑부인 것이다.

"이 유물들의 성능과 마력 흐름에서, 기존의 마법 몇 개를 개조하여 보다 빠르고 마력 소모가 적으며 위력을 높일 수 있는 운용법의 개념을 조금 떠올릴 수 있었소."

아트레스가 오만한 웃음을 지으며 도표를 넘겼다. 도표 위로 신 개념의 마학 이론이 포괄적으로 적혀 있었다.

천여 년 전만 해도 마법사는 절대 자신의 지식을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해 이렇게 새로운 이론을 학회를 통해 발표할 정도가 된 것이다.

서로의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마법학의 수준 역시 크게 높아져 마법사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늘었다. 인간이 대륙의 패권을 쥐게 된 가장 큰 공로자 중 하나가 바로 저 3대 마법 학회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폐쇄적인 것은 여전해서, 이 발표회장에 참석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6서클 이상의 종사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또한 협회에 소속되기 위해 매년 막대한 회비를 지불해야 했다. 발표되는 마학 이론 역시 대략적인 것일 뿐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감춰진 상태였다.

지식은 곧 힘이니, 자격 있는 자만이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마법사들의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아트레스가 목청을 높여 신 마법 이론을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이 기존과 다른 점은...."

수많은 마법사들이 발표에 집중하고 있는 회장 2층 발코니, 그곳에 귀빈들만이 자리할 수 있는 로열석이 있었다. 비록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라그랑드 학회에 많은 공헌을―정확히는 기부를― 한 고위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마법사도 아닌 이상 어려운 마법 이론 따위, 들어 봤자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이 로열석은 보통 비워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두 남자가 로열석을 차지하고 진지한 얼굴로 단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때는 마라그랑드도 제법 성세가 흥했었군."

옆에 앉은 중년 귀족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응? 무슨 소리인가, 테스론 군? 언제는 마라그랑드 학회가 망하기라도 했었나?"

"아,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라나드 공작님."

테스론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의 전생에서 마라그랑드 학회는 3대 학회의 명성을 잃고 꽤나 세력을 잃은 처지였다. 마라그랑드 휘하의 마탑, 델피아에서 역사상 최악의 마법사가 배출된 탓이다.

암흑제국 황제, 레펜하르트.

저 인세에 강림한 마왕을 배출한 마라그랑드 학회는 그 후 대륙의 다른 국가로부터 항시 견제를 받게 되었다. 누리고 있던 권한 대부분을 신비의회와 태양탑에 빼앗기고 학회 고위층 역시 죄인이나 다름없는 감시를 받았다. 또다시 저런 괴물이 탄생할까 두려워한 이들의 짓이었다.

'솔직히 마라그랑드 입장에선 억울하겠지만 말이지.'

전생의 정보를 떠올리며 테스론은 피식 웃었다.

마왕 레펜하르트가 전설적인 경지에 오른 건, 순수하게 본인이 잘난 덕이지 마라그랑드 학회랑은 무관하다.

'까놓고 말해서 그 작자는 어디에 데려다 놓았어도 결국 그 경지에 올랐을걸?'

레펜하르트가 스물일곱에 마탑에서 나올 때 6서클 후반의 마법사였던 것은, 그의 재능에 비하면 오히려 굉장히 낮은 경지라고 봐야 했다. 그의 재능을 두려워한 델피아의 마법사들이 4서클 이후로는 거의 가르침을 주지 않고 지식을 제한했었으니까.

이후 세상에 나와 제대로 마법의 지식을 접한 레펜하르트의 성장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매년 기록을 갱신하며 7서클, 8서클을 연달아 돌파하더니 결국 서른 살에 9서클 대마법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아마 지식을 제한받지 않았다면 20대 초반에 마법의 극에 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진도가 안 나가지?'

문득 테스론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마왕의 두뇌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6서클 후반에 머무르고 있었다. 은의 현자 덕분에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마법 지식을 접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렇다. 뭔가 조금만 더 하면 7서클에 입문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조금' 나아가는 것이 영 힘들다.

'에잉, 똑같은 두뇌를 지니고 있는데 누구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척척 경지를 올렸고, 누구는 답안지 펴 놓고도 이해를 못해 낑낑대다니....'

따지고 보면 마왕 역시 그의 육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으니 억울할 것이야 없다만, 그래도 입맛이 썼다.

그렇게 테스론이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막 아트레스가 발표를 마쳤다.

"...이걸로 새로운 마법 이론에 대한 발표를 끝마치겠소."

마법사들이 박수를 보냈다. 새로운 마법 이론은 '아트레스식 마력 운용법'이라 명명하고 공식적으로 그의 이름을 기록에 남겼다.

마법학의 역사에 정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은 마법사들에게 지극히 명예로운 일이다. 모두들 모두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아트레스를 바라보았다.

다음 발표를 준비하던 아트레스가 문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오늘의 본론이었다.

"이 대부분의 아티팩트들은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 제가 성과를 보았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오."

그가 품속에서 작은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고대어를 해독해 이름을 알아낸 고대의 아티팩트, 온기의 목걸이였다.

"이것은 온기의 목걸이, 착용자를 어떤 추운 환경에서도 최적의 체온으로 유지시켜 주는 아티팩트입니다."

마법사들이 의아해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했던 발표에 비해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아티팩트인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트레스가 말을 이었다.

"이 온기의 목걸이는 단순히 착용자를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도표를 넘겼다.

"보시다시피...."

도표에는 목걸이를 착용한 여러 샘플들의 신체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착용 전, 착용 상태, 그리고 착용 후.

목걸이를 자주 착용할수록 착용자의 신체 수치가 눈에 보이게 변화하는 것이 숫자로 명확히 적혀 있다.

"온기의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이라도 이렇게 체질 개선이 되어 추위에 강한 체질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법사들이 그제야 눈을 빛냈다. 착용자의 상태, 조건을 변화시키는 마법이나 마도구는 많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인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마법은, 마력이 사라지면 육체 역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육체 자체를 영구히 변화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성직자의 신성 주문뿐이다.

"이 아티팩트는 착용자의 신체를 영구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발동 원리는 아직 알 수 없으나...."

테스론이 인상을 쓰며 아트레스의 손에 들린 아티팩트를 바라보았다. 꽤나 익숙한 물건이었다. 프리즈랜드에서 그가 직접 사용했던 그 유물이다.

"저거, 금기 물품 아니었습니까?"

"맞지, 금기 물품."

"그런데 저렇게 발표하게 놔둬도 되나요?"

"어쩌겠나? 미리 알았다면 손을 썼겠지만, 이미 발표해 버렸는데."

"그럼 저대로 놔둘 겁니까?"

"저자는 9서클의 마법사다. 저 정도 되는 이가 갑작스럽게 죽는 건 너무 부자연스럽지. 잘못하면 은의 현자의 존재가 드러날 위험성이 있다."

발표 내용을 유심히 듣고 있던 이라나드 공작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품속을 매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 지식이라면 허용 범위 내로군. 다행히 이 자리에서 저자를 암살해야 할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되었어."

이라나드 공작이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발코니에 가려진 그곳에는 커다란 수정판이 있어, 회장의 모든 마법사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온기의 목걸이는 회수해 둬야지."

테스론도 그 수정판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진실의 창窓'이라 불리는 은의 시대 유물이었다. 미세 표정과 동공 변화 등의 생체 반응을 통해 비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는 기능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수정 표면에 비친 마법사들 중 몇몇이 붉은 빛으로 지적되어 있었다.

"이들을 기억해 두게. 또 다른 온기의 목걸이를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니."

그들은 모두 아트레스의 발표 시 특정 반응을 보인 마법사들이었다. 쉽게 말해 '아, 저 유물, 나도 가지고 있는데? 저게 저런 것이었어?'라는 생각을 한 자들을 표정 변화를 통해 분류한 것이다.

마인드 리딩 등의 정신계 마법으로 강제로 기억을 읽으려 한다면 마법사들인 이상 뭔가 눈치채겠지만, 이렇게 원거리에서 모습만을 비추고 표정을 읽는 것이면 알아챌 도리가 없다.

테스론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혀를 찼다.

"은의 현자들은 참 귀찮게 일을 처리하는군요."

이자들을 일일이 감시해 은밀하게 온기의 목걸이를 빼돌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차라리 싹 죽여 버리거나 하면 안 되나?

이라나드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기억해 두게. 모두를 잠시 속이거나, 소수를 영원히 속이는 건 쉬워도 모두를 영원히 속이는 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기에 아직도 세상이 은의 현자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라네."

수정판, 진실의 창을 챙기며 이라나드 공작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류는 은의 현자의 존재를 몰라야 한다. 사실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살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인류는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룰 수 없을 테니까. 은의 현자는 어디까지나 음지에서 수호하는 존재, 인류를 이끌고 지배하는 이들이 아니다."

아트레스의 발표가 끝나자 두 사람은 자리를 떴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이 없었다. 회장 밖으로 향하며 문득 테스론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온기의 목걸이가 금기 물품인 겁니까? 솔직히 말해서 별로 대단한 성능도 아닌 것 같은데...."

체질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놀랍지만 그래 봤자 추위에 약하던 이가 추위에 좀 강해지는 것뿐이다. 온기의 목걸이를 평생 걸고 있다 한들, 냉기 자체에 면역이 된다거나 하는 초월적인 신체로 바꿔 주진 않는 것이다.

솔직히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사안인가 싶다.

이라나드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저 자체로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 하지만 인간의 육체를 직접적으로 개조하는 마법은 결코 인류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순간 이라나드 공작의 눈빛이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그것은 궁극으로 가면 불로불사의 길과 연결이 되니까."

테스론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것이 가능한 거였습니까? 혹시 은의 현자 중에서도?"

"글쎄, 은의 현자들 중에서도 제한적인 불로의 힘을 지닌 자는 제법 있지. 불멸성immortality이나 영원성eternity은 무리겠지만. 자네도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누구이기에?'

호기심 가득한 테스론을 바라보며 이라나드 공작이 잠시 경계의 표정을 지었다. 그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그 이상은 알려 하지 말게. 자네의 권한 밖의 일이니."

테스론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라나드 공작이 앞으로의 일을 당부한 뒤 앞서서 먼저 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테스론이 뺨을 긁었다.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하나 더 있었지만 아무래도 가르쳐 줄 눈치가 아니군."

그동안 은의 현자의 명령에 따라 여러 일을 처리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의아하게 여긴 점이 있다.

'도대체 은의 현자들은 어떤 식으로 정보망을 운용하는 거지?'

처음에는 각국의 정보망이나 마탑의 연락을 통한다고 생각했다. 뭐, 은의 현자들이 사실은 대륙 각국의 고위층이니 저런 정보망 역시 분명 운용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정보망인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프리즈랜드에서 마법사 할을 죽일 때였다.

'분명히 그 할이란 마법사가 도중에 마탑과 연락을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미리 살카나 던전에 뭐가 있는지 알고 간 것도 아니야. 그런데 대체 아무 접점이 없는 이들의 동태를 어떻게 파악한 거지?'

은의 현자가 전지全知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만약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 있었다면 아트레스가 온기의 목걸이에 대해 발표하는 것을 사전에 막지 못했을 리 없다.

'전지적일 정도로 엄청난 정보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렇게 허술한 부분이 있다. 대체 어떤 식인지 모르겠군.'

팔짱을 낀 채 테스론은 안색을 굳혔다.

은의 현자가 그에게 숨기는 비밀은 비단 이것뿐이 아니다. 비록 현자의 칭호를 받았다지만 테스론은 여전히 외부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진짜 중요한 비의는 알려 주는 일이 없고, 시키는 일 역시 자질구레한 뒤치다꺼리가 전부다.

'이대로는 곤란해. 뭔가 상황을 바꾸어야 하는데....'

저들의 인원이 되었음에도, 은의 현자는 겹겹이 비밀을 둘러싸고 결코 그에게 속살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은의 현자의 속살? 뭔가 미묘한 표현이 되어 버렸군.'

잠시 킥킥거린 뒤, 테스론도 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순백의 거대한 홀 아래, 수만 개의 수정이 사방의 벽을 뒤덮고 있었다. 체스 판처럼 촘촘히 연결된 수정들 위로 온갖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영상이 되어 비친다. 홀 한가운데엔 커다란 은색 기둥이 자리하고 그 밑에 데스크가 놓여 있어 십여 명의 남녀가 열심히 콘솔을 조작하는 중이었다.

수정 위에 띠워진 수만 개의 영상들, 그중 몇몇 영상들이 계속 은색 기둥 쪽으로 옮겨져 점멸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30대 외모의 금발 청년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권왕의 영향을 받고 움직이려는 이들이 많아. 당분간 바쁘겠군."

데스크에 앉아 있던 사내 하나가 청년을 향해 말했다.

"처리된 안건들을 분류하겠습니다, 수호자 아크라이트."

"그렇게 하시오."

청년이 승낙을 하자 바로 점멸하는 영상들 중 수십여 개가 기둥 아래로 이동해 사라졌다. 그중에는 고해성사를 하는 한 청년의 모습과, 무엇인가를 열심히 집필 중인 여신관의 모습도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희생된 저들에겐 좀 미안하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일, 그것을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다. 수호자 아크라이트는 이내 찜찜한 감정을 떨치고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영상을 비추는 거대한 순백의 홀, 이것은 은의 현자가 가진 가장 강력한 아티팩트 중 하나인 '세이어의 눈'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세이어의 신관들, 세이어의 이름으로 신성력을 구사하는 이들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이 아티팩트를 통해 은의 현자에게 전해진다. 신관이 아닌 평범한 신자라 할지라도 세이어에게 기도를 올리는 동안만은 '세이어의 눈'과 연결되어, 그들의 눈과 귀가 곧 은의 현자의 정보망이 된다.

이 '세이어의 눈'이 바로 은의 현자가 세상을 암중에 지배할 수 있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였다.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세이어의 신관과 신자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정보원이 되어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제공하니 실로 신의 권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단 말이지. 주위에 영 세이어를 믿는 자들이 없으니... 이 친구, 세이어 교단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나?'

금발의 청년, 수호자 아크라이트는 은빛 기둥에 비친 영상들을 살피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세이어의 눈'이 기적에 가까운 권능을 지닌 아티팩트인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제약도 있었다. 오직 세이어의 신관과 신자들에게만 그 영향력을 발휘하니, 세이어의 교세 밖에 있는 자들은 완벽하게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노예 종족에 대해 저런 사상을 지니고 있으니 제대로 된 세이어의 신관이라면 그를 가까이 할 리가 없겠지.'

잠깐 투덜거렸지만 청년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어차피 '세이어의 눈'만이 은의 현자가 가진 모든 정보력은 아니다. 은의 현자에 소속되어 있는 각국의 고위층, 그들이 자체적으로 가진 정보망도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면 될 문제였다.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내 임무는 그자로부터 비롯된 영향을 사전에 방지하는 일뿐이니까.'

레펜하르트에 대해 신경을 끈 뒤, 청년은 계속 은빛 기둥의 영상들을 검토했다.

'세이어의 눈'이 파악하는 정보의 양은 막대하다. 도저히 몇몇 인간의 힘으로 모든 정보를 검토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수많은 정보들을 자동으로 분류해 주는 것이 바로 중앙의 은색 기둥, '세이어의 율법'이었다.

기둥의 표면 위로 계속 영상들이 비친다. '세이어의 율법'이 걸러 준, 인류의 수호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된 정보들이었다. 영상을 살피며 금발의 청년은 몇몇은 기각시키고 몇몇은 처리 안건에 올렸다.

그러던 중이었다. 청년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자 아크라이트."

금발의 청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은발의 소녀가 순백의 로브를 걸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호자 세렐라인, 그대가 어쩐 일로 여기에?"

"그냥 잠시 들렀을 뿐이야."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한 뒤 소녀가 은색 기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른 볼일이 있는 김에 잠깐 상황을 살피러 온 모양이었다.

청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소녀에게 물었다.

"권왕 레펜하르트에 대한 일은 잘 처리하고 있나?"

기둥 위 영상에서 눈을 떼며 소녀가 별것 아니란 어조로 대꾸했다.

"그대의 동생을 보냈다. 아무리 강하다 한들 권왕은 오러 유저일 뿐, 고대의 마법으로 무장한 그의 상대는 되지 못할 테지."

차가운 표정으로 소녀가 다시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완전히 모습을 감춘 상대를 보며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오러 유저일 뿐이라고?"

청년이 기둥 앞 데스크로 다가가 콘솔을 매만졌다. 잠시 후, 기둥 위로 전투를 담은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세이어의 성기사, 크리스틴의 시야에 비친 두 남자의 전투 영상이었다.

그걸 보며 청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친구, 마법 쓰는데?"

2

높이가 10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석실, 그 중앙에 아치 형태의 문이 놓여 있었다.

무릇 문이라는 것은 가로막힌 벽 사이를 오가기 위한 통로로써의 역할을 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치형 문은 좀 이상한 구조였다. 좌우로 어떤 벽도 없이 덜렁 문만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틀림없는 '문'이었다. 이 아치는 단순한 문이 아니라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위대한 은의 시대 유물, 클로이 다이만 포털이었으니까.

웅웅웅!

조용하던 아치 형태의 문 안쪽에서 희미한 소음이 일어나며 이내 눈부신 빛을 뿜었다.

잠시 후, 그 빛 속에서 한 무리의 일행이 걸어 나왔다. 녹색 피부의 건장한 오크와 귀엽게 생긴 적발의 소년,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흉터투성이의 오크들이었다.

오크들이 석실을 살펴보더니,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여, 여긴 대체?"

"이럴 수가?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장소였는데?"

이들은 그라임 왕국 서부에서 탈출한 오크 검투사들이었다. 타시드와 실란의 인도에 따라 인간들의 도시를 탈주, 세텔라드 산맥까지 도망친 뒤 다이만 터미널의 공간 포털을 통해 이곳, 글로텐 산맥의 클로이 던전까지 온 것이다.

오크들을 문에서 떨어지게 한 뒤 적발의 소년이 품에서 작은 돌을 하나 꺼냈다. 포털의 빛을 향해 돌을 가져가며 소년이 중얼거렸다.

"사용자, 실란 필 마르시스. 인증번호 352525. 락다운lockdown."

돌 표면에서 룬 문자가 떠올라 공간 포털에 빛을 뿜었다. 소용돌이치는 빛 무리가 이내 사그라지며 다시 평범한 아치형 문으로 바뀌었다. 키 스톤을 다시 품에 넣은 뒤 실란이 힐끔 오크 검투사들을 바라보았다.

실란이 녹색의 오크, 타시드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이 공간 포털, 비밀로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아는 사람이 늘어나도 되려나?"

타시드가 살짝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공간 포털을 쓰지 않으면 저들을 이리 안전하게 이동시킬 수가 없지 않은가?"

지난 두 달간, 레펜하르트와 그의 동료들은 수많은 이종족 노예들을 구출해 안타레스 백국으로 데려왔다. 물론 소중한 재산을 잃은 인간들이 가만있을 리 없으니 당연히 그때마다 추적대가 조직되어 도망친 노예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도망친 노예들을 붙잡은 인간들은 아무도 없었다. 달아난 노예들의 흔적이 죄다 몬스터가 들끓는 오지 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추적대들은 당황했다.

오지는 사람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오지인 법이다. 아무리 인간이 두렵다 한들, 몬스터가 들끓는 험지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전에도 가끔 탈주 노예들이 있었지만 감히 오지 쪽으로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인적 드문 산속에 숨어 지내며 지나가는 행인을 털어 연명하다가, 결국 군대에 토벌당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지 저런 식으로 도망가 버린 것이다.

기이하게 여기면서도 추적대들은 달아난 노예들을 포기했다. 오지 너머까지 저들을 쫓기엔 너무 위험 요소가 많았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놈들, 모두 죽은 셈 치고 포기했다. 공간 포털의 존재를 모르는 이상 저들이 저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만큼, 외부에 포털의 존재가 알려지면 곤란할 텐데... 비밀로 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포털의 존재를 알고 있고... 하지만 비밀을 지키겠다고 소수만 저 포털을 사용하게 해서는 좋은 이동 방식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격이고...."

중얼거리는 실란을 보며 타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실란의 등을 툭 치며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은인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나는 그분을 믿네."

"아니, 나도 안 믿는다는 건 아닌데... 레펜 씨가 꼼꼼해 보이면서도 은근 허술한 데가 많아서...."

연신 구시렁대는 실란의 모습에 타시드가 피식거렸다.

"뭐, 그런 걱정은 내가 할 몫이 아니지. 나는 그저 그분을 믿고 따를 뿐."

그리고 오크 검투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자! 다들 따라오시오!"

타시드와 실란이 앞장서 석실 밖으로 나섰다. 오크들이 긴장 반, 흥분 반의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 ☆

한때 온갖 마물과 악마들이 들끓었던 던전 클로이.

하지만 지금 클로이 던전은 말끔히 청소된 후였다. 안타레스 백국이 외부와 소통하는 중요한 거점인 만큼 계속 몬스터들이 들끓게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던전 입구를 구성하는 허물어진 건물은 드워프들에 의해 보수되어 멀쩡한 외관으로 변했고, 공간 포털까지 이어지는 통로 역시 더없이 안전한 상태였다. 주위 몬스터들을 모두 소탕해 백왕성까지의 통행로 역시 확보했다.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 건물 주위로 병영과 막사를 세우고 주위를 높은 담으로 둘렀으니, 이제 이곳은 더 이상 던전이 아닌 훌륭한 요새였다.

클로이 가드라 명명된 이 투박한 요새 속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크아아!"

"카오오오!"

넓은 연병장 위에서 수백 명의 오크들이 땀범벅이 되어 무기를 휘두른다. 하나같이 다루기도 벅찰 만큼 거대한 거검이나 도끼, 해머들뿐이다. 힘겹게 손에 든 무기를 휘두른 오크들이 숨을 헐떡이며 두 팔을 벌벌 떨었다. 평생을 전투와 단련만으로 보낸 그들에게도 이 무기들은 너무도 크고 무거웠다.

힘겨워하는 오크들의 머리 위로 추상같은 호통이 떨어졌다.

"이 정도로 우는 소리 해서야 진정한 전사가 될 수 있겠는가!"

호통을 터트린 단상 위의 흉터투성이 오크, 탈카타를 바라보며 오크들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탈카타가 등에 찬 대검을 번쩍 들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도 그대들과 다르지 않다."

대검을 허공으로 던진다. 검풍이 불며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대검이 연병장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폭음이 울리며 대검이 저만치 떨어진 땅바닥에 강렬하게 꽂혔다. 탈카타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와라! 스칸달!"

대검, 스칸달이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며 탈카타에게로 날아가 그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자신의 맹우, 영혼이 소통하는 자신만의 무기를 번쩍 들어 보이며 탈카타가 모두를 독려했다.

"보라! 이것이 진정한 오크의 힘이다! 그대들도 할 수 있다!"

오크들의 눈빛이 변했다. 기합을 터트리며 다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으아아!"

"크아아아!"

이들은 대륙 각지에서 도망친 오크 검투사들이었다.

레펜하르트는 구출한 오크 검투사들을 한 부대로 편성한 뒤 탈카타로 하여금 이들을 이끌게 했다. 처음부터 푸른 곰 부족의 휘하로 오크 검투사들을 집어넣어 버리면 불화가 생길 위험이 있다. 하지만 탈카타는 이들과 같은 검투사 출신, 80전 이상의 승리를 거두고 무사히 은퇴한 존경할 만한 선배인 것이다. 오크 검투사들도 탈카타의 권위를 존중해 순순히 그의 명령을 따랐다.

땀 흘리는 오크들의 머리 위로 탈카타의 외침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손에 쥔 무기가 어색하고 다루기 힘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금 손에 들린 그것이야말로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벗이다! 이제까지 휘둘렀던 모든 무기는 잊어라!"

"네!"

"알겠습니다, 탈카타 대장!"

오크 검투사들이 이곳에 합류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푸른 곰 부족으로부터 그들만의 무기를 부여받는 것이었다.

오크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은 아무 무기로나 구현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무기아비의 집중된 사념이 깃들어야 비로소 영혼이 소통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이들이 휘두르는 모든 검과 도끼, 망치들은 그랄타를 비롯한 푸른 곰 부족의 무기아비들이 심혈을 기울여 벼려 낸, 오크만의 무기였다.

지나치게 거대하고 육중한 무기에, 이제껏 익힌 것과는 전혀 다른 무기술.

인간의 무기에 익숙해진 오크 검투사들이기에 처음에는 어색해했다. 하지만 반발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다들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그들과 같은 검투사 출신인 탈카타가 직접 그 위력을 보이는 것을. 자신도 저 위대한 조상들의 비전을 익히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더더욱 구슬땀을 흘릴 뿐이다.

탈카타 곁으로 쌍검을 찬 오크 전사 한 명이 다가왔다. 연병장을 훑어보며 그가 감탄을 흘렸다.

"다들 노력이 대단하군요. 이 수련 강도라면 우리 부족의 전사들에게도 쉽지 않을 터인데."

탈카타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투기장에서도 다들 이 정도 단련은 언제나 해 왔다오, 잘카토 형제. 무엇보다 지금은 희망이 있지 않소? 자유라는 희망이."

잘카토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정도로 열정적이니 우리도 가르치는 맛이 납니다, 하하."

잘카토는 몇몇 푸른 곰 부족의 다른 전사들과 함께 이곳에 파견 나와 있었다. 오크 검투사들에게 스피리츠 웨폰을 가르치기 위한 교관 역할이었다. 탈카타가 비록 스피리츠 웨폰을 터득하긴 했지만, 역시 수련 시간이 너무 짧아 아직 경지가 낮았다. 제대로 가르치려면 역시 숙련된 이들이 필요했다.

연병장 여기저기서 교관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선택한 영혼의 벗을 믿어라!"

"영혼의 울림을 들어라!"

"깨달아라! 손에 든 검이 바로 네 자신임을!"

연병장을 가득 메우는 오크들의 열기를 느끼며 탈카타가 감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강해질 것이오."

죽을 것 같은 수련 시간 사이에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오크들이 연병장 여기저기 퍼진 채 가쁜 숨을 헐떡였다. 그들 사이로 걸어가며 탈카타가 물었다.

"힘드냐?"

무기를 쥔 채, 젊은 오크 하나가 대꾸했다.

"솔직히, 힘들긴 하군요."

투기장에서도 온갖 단련을 해 온 그였지만, 이곳의 수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진정한 전사가 되겠다는 꿈이 없었다면 예전에 쓰러져 버렸을 것 같았다.

탈카타가 실소를 흘렸다.

"이 정도는 약과야. 대모님 손에 걸렸으면 네놈들 전부 피똥 쌌다."

불현듯 스탈라 밑에서 행했던 '고행'이 떠올라 탈카타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젊은 오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대모란 오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저 용맹한 노검투사의 표정에 저리도 공포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으, 그건 진짜 지옥이었지. 암, 지옥이지."

심지어 잘카토와 다른 교관들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 덕에 이렇게 빨리 맹우와 영혼을 통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 음."

질린 표정을 짓던 탈카타가 문득 다른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게으름 피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다. 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진도 느린 놈들은 자신께서 친히 보살핀다고 하셨으니까."

오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잘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절대 저 '대모님' 선까지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하나 둘 다시 무기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클로이 던전 입구에서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입구를 통해 타시드와 실란, 그리고 한 무리의 오크 검투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구려, 카루가 타시드!"

반색을 하며 탈카타가 달려가 그들을 맞이했다. 비록 나이는 자신보다 한참 어리지만, 탈카타는 투혼의 축복을 받은 이 젊은 오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타시드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등 뒤를 손짓했다.

"자, 신참 받으쇼."

수많은 동족들을 바라보며 뒤따르는 오크 검투사들이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주저앉아 있던 연병장의 오크들이 하나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반겼다.

"오! 이 친구들이 이번 신병들인가?"

"자유의 땅에 잘 왔다, 형제들."

어색해하면서도 오크 검투사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말로만 듣던 자유로운 오크들을 보니 절로 흥분된 것이다. 잘카토가 그들을 손짓해 불렀다.

"이리 오시오, 형제들이여. 그대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 있으니."

그렇게 잘카토가 오크 검투사들을 이끌고 연병장 너머로 향했다. 남은 탈카타에게 실란이 물었다.

"레펜 씨는 백왕성에 있나요? 아니면 또 시리스랑 엘프 구출하러 갔으려나?"

"아니오, 백왕님께선 지금 전장에 계십니다."

"엥? 전장? 안타레스 백국 어디랑 싸움 났어요?"

"그건 아니고...."

머리를 벅벅 긁은 뒤, 탈카타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한 손 거들러 가셨다던데요?"

☆ ☆ ☆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메마른 대지, 작은 시골 마을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가옥을 뒤로한 채 촌민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 다니고 중무장을 한 백여 명의 용병들이 그 뒤를 쫓는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악!"

"신이시여!"

절규를 터트리는 노인의 등 뒤로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깊숙이 박혔다. 절명한 마을 노인으로부터 검을 거둔 뒤 거친 인상의 중년 용병이 고함을 질렀다.

"체타스 남작님의 명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지도에서 지워라!"

"맡겨 주쇼, 레콜트 단장!"

"이런 거야 우리 전공 아니겠소? 으히히히!"

용병들이 희희낙락하며 마을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시골 마을을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만든 이들은 크로방스 왕국 남부와 바실리 왕국 북부에서 악명을 떨치는 로커스트 용병단이었다.

지나치게 흉폭하고 잔인하여 같은 용병들조차 기피하는 이들, 지나간 자리에 풀뿌리 하나 남지 않아 마치 메뚜기 떼locust가 쓸고 지나간 것 같다 하여 저런 이름이 붙었다. 경멸이 담긴 칭호인데도 오히려 자랑스럽게 그 이름을 부대명으로 삼은 자들이다.

"크하하하!"

"사내놈은 모두 죽여라!"

"계집은 범하고 죽여라!"

"애새끼 따윈 쓸모없다! 다 죽여 버려!"

험악한 용병들이 살의로 눈을 번들거리며 마을 주민들을 쫓아간다. 그중에는 딸아이를 품에 안은 젊은 부부의 모습도 있었다. 도주로가 막히자 남편이 용병들을 향해 목숨을 구걸했다.

"제, 제발 살려 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날이 남자의 가슴을 깊게 베어 갔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남편의 모습에 아낙이 눈물을 쏟았다.

"여보!"

"아빠아아아!"

"어차피 죽을 놈들이 시끄럽다!"

용병이 아낙을 후려갈겨 쓰러트린다. 다른 용병 사내가 쓰러진 아낙을 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허리춤을 풀며 그가 눈을 번득였다.

"시골 촌년치고 제법 얼굴이 반반한데?"

"운이 좋군."

"흐흐흐...."

사내는 죽이고 여인은 범하는 것, 이는 로커스트 용병단이 언제나 해 오던 짓이었다. 당연히 죄책감 따위 느끼는 자들도 없었다. 음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보며 여인이 벌벌 떨었다.

"아아... 제발 자비를...."

"내 사전에 자비란 단어는 없다!"

용병 사내가 비웃음을 던지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어이, 계집. 맞고 벗을래, 벗고 맞을래?"

"저 변태 새끼, 또 성격 나왔군."

"킬킬킬...."

곧 다가올 지옥을 떠올리며 여인이 모든 희망을 버렸을 때였다.

휘잉....

부드러운 미풍이 불었다.

여인은 눈을 깜빡였다. 잠깐 불어온 바람이 눈을 간질여 무심코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다. 그런데 그사이 눈앞의 광경이 변해 있었다.

"...아?"

눈을 부릅뜬 채, 모든 용병들의 목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아니, 잘 보니 뒤틀린 것이 아니었다. 전원 목이 반쯤 잘려 그렇게 보인 것이었다.

푸아아악!

곧이어 피분수와 함께 용병들이 뒤로 넘어졌다. 당황한 여인의 등 뒤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를 데리고 피하세요."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백금발의 아름다운 엘프 소녀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은...."

멍한 여인을 향해 엘프 소녀가 다시금 손짓을 했다. 정신을 차린 여인이 얼른 딸아이를 안고 자리를 피했다. 다른 곳에서 살육과 강간을 행하던 용병들이 동료의 죽음을 깨닫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뭐지?"

"어떤 놈이 감히?"

"엘프 암컷 주제에 칼을 들었어? 혹시 슬레이어인가?"

엘프 소녀가 양손을 털었다. 양손에 쥔 두 자루 시미터에서 붉은 핏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차디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살아갈 가치가 없는 자들...."

소녀를 본 용병들의 안색이 굳었다. 저 소녀의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결코 단순한 슬레이어가 아니었다.

"백금발에 갈색 피부...."

"은색의 시미터...."

"설마...?"

저 소녀는 크로방스 내전 이후 너무도 유명해진 한 여검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월도, 시미터를 다루는 얼음처럼 냉혹한 백금발의 엘프 여검사.

용병 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신월新月의 검사!"

"시리스 발렌시아다!"

전장에서 이름난 기사들을 무수히 학살한 저 엘프 마녀의 명성은 한낱 용병들과 비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문제는 저 엘프 여검사의 존재뿐만이 아니었다.

"그럼... 저 마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용병들이 공포에 질려 시리스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뒤로 거구의 사내가 걸어오며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참혹한 마을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참으로 말초적으로 살아가는 놈들이군."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간단한 조끼만을 걸치고 있었다. 그 덕에 두꺼운 가슴이며 복근, 우락부락한 팔 근육이 여실히 드러난다. 남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육체를 완벽히 구현한 그 모습에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권왕 레펜하르트!"

레펜하르트가 오른 주먹을 들었다. 황금의 오러가 주먹을 뒤덮으며 터질 듯 요동친다. 분노한 얼굴로 그가 나직이 뇌까렸다.

"죽음도 네놈들의 죄를 씻지는 못하겠구나!"

중후한 중단 찌르기가 용병들을 향해 뻗어 갔다.

"스트레이트 캐논!"

오러가 실린 펀치가 허공을 강타한다. 대기가 찢어지고 파문이 일며 투기의 폭풍이 용병들을 일제히 뒤덮었다.

콰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땅거죽이 파이며 주변 가옥들이 휩쓸려 날아갔다. 그 가공할 파괴 앞에 수십의 용병들이 산산이 박살 나 버렸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 안개가 허공 가득 흩뿌려졌다.

"으아아아악!"

☆ ☆ ☆

백금발을 휘날리며 시리스가 몸을 날렸다. 그녀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중무장한 용병들이 일제히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용병들이 당황하며 소리를 질렀다.

"포위망을 구축해!"

"그래 봤자 고작 엘프 계집일 뿐이다! 쫄지 마!"

피 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시리스의 주위로 창을 든 용병들이 일제히 몰려왔다. 사방에서 섬뜩한 창날이 그녀를 노리고 찔러 들었다.

순간 시리스가 낭랑하게 외쳤다.

"나와! 사라나!"

바람의 정령, 사라나가 반투명한 모습으로 허공에 나타났다. 한숨을 쉬며 사라나가 어깨를 내밀고 얼른 밟으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표정을 보니 이젠 그냥 자존심이고 뭐고 다 포기한 것 같았다.

"고마워, 사라나!"

바람을 밟고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시리스가 공중제비를 넘었다. 두 자루 시미터가 좌우로 원을 그리며 죽음의 춤을 췄다.

파아아악!

시리스를 중심으로 핏물이 원형으로 퍼져 바닥을 짙게 물들였다. 메마른 겨울의 대지에 붉은 선혈이 태양의 형상을 그린다. 포위한 모든 용병들이 시체가 되어 피 웅덩이 속을 뒹굴었다.

"으아악!"

"괴물이잖아, 저거!"

용병들이 전의를 잃고 등을 돌린다. 시리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시미터를 고쳐 쥐었다. 도주를 허락할 생각 따윈 없었다. 저들은 이 마을의 참극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아압!"

기합을 터트리며 그녀가 재차 날아올랐다. 나름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 애써 칼과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프, 나의 검에 머무르렴."

바람의 정령력을 검에 깃들인 채 시리스는 야수처럼 용병들을 베어 넘겼다. 창도 칼도 방패도 저 두 자루 신월도를 막을 수 없었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이 심혈을 기울여 벼려 내고 거기에 이제는 마력이 받쳐 주는 레펜하르트가 온갖 강화 마법까지 부여한 무구다. 시리스의 정령술 역시 경지에 올랐으니, 이미 평범한 용병들의 무구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으아아악!"

"도, 도망쳐!"

경험 많은 선배 용병들조차 가차 없이 썰리는 모습에 용병들이 전의를 잃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리스가 시미터를 허공에 교차했다. 그리고 땅에 내리꽂았다.

"테라투스! 저들의 앞길을 막아 줘요!"

쿠우우웅!

소음과 함께 대지가 솟구치며 거대한 흙 거인의 형상으로 화했다. 대지의 정령 테라투스가 두 팔을 벌린 채 용병들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발걸음을 멈춘 채 용병들이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댔다.

땅에 꽂은 검을 뽑은 시리스가 용병들을 겨누며 외쳤다.

"오랜 맹약에 따라 그대를 불러요, 우다르 묠니르!"

파지지직!

검극에서 전격이 튀며 뇌전으로 이루어진 거한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번개의 정령, 우다르 묠니르가 양손에 든 우레 망치를 던졌다. 퇴로가 막힌 용병들을 두 줄기 뇌격이 강타했다.

우르르릉!

뇌성이 울리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모두가 숯이 되어 시꺼멓게 탄화되어 버렸다. 멀리 떨어져 도망치던 로커스트 용병단 단장, 레콜트가 기겁하며 외쳤다.

"말도 안 돼! 신월의 검사가 저런 수법을 쓴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어!"

홀로 수십의 기사를 학살했다는 소문을 들으며 코웃음을 쳤었다. 고작 엘프 슬레이어 따위가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는가? 과연 소문답게 과장된 부분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오히려 소문은 저 마녀의 힘을 10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퇴하라! 모두 후퇴하라!"

정신없이 소리치며 레콜트는 시리스를 피해 달아났다. 하지만 도주는 불가능했다. 시리스의 맞은편에는 진정한 공포, 권왕 레펜하르트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허업!"

거구의 사내가 용병들을 향해 포탄처럼 돌진한다. 저 육중한 체구 어디에 저런 스피드가 나오는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오른 주먹을 뻗어 투기의 파동을 뿜어낸다.

"스트레이트 캐논!"

콰아아아앙!

황금빛 장막이 용병들을 휩쓸어 가며 사지를 분쇄해 갔다. 피안개가 짙게 깔리며 박살 난 팔다리가 우박처럼 대지 위로 쏟아졌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했던가? 퇴로가 막힌 용병들이 악을 쓰며 무기를 들었다.

"제, 젠장!"

"지가 오러 유저면 다야?"

"그래 봤자 같은 인간이야!"

"찌르면 피 흘리는 건 우리랑 똑같아!"

핏발 선 눈으로 용병들이 칼이며 도끼를 들고 레펜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방어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그는 그대로 두 팔을 들었다. 두꺼운 육체 곳곳에 칼날이 내리꽂혔다.

타타타탕!

손아귀가 저릿한 느낌을 받으며 용병들은 눈을 부릅떴다. 칼날을 내리친 두꺼운 대흉근과 복근, 그곳에 피는 고사하고 긁힌 흔적조차 없었다.

머리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랐느냐?"

용병들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 육체는 강철이다."

흥분했던 가슴이 싹 식는다. 그제야 권왕,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 것이다. 미친 짓도 유분수지! 저 '언브레이커블'에게 칼질을 하다니!

두 다리를 후들거리는 용병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실소를 흘렸다.

'...큰일 났네. 나 슬슬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어색하질 않아졌어.'

앞장선 용병의 복부에 왼 주먹을 갖다 댄다. 순간 그의 전신이 회전하며 강렬한 파괴력이 주먹을 통해 뻗어 나갔다.

"제로 임팩트!"

퍼엉!

일격에 용병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며 뼈와 살이 허공에 난무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충격파가 그대로 관통하며 그 뒤에 선 용병들까지 차례로 박살이 나기 시작했다.

퍼퍼퍼펑!

시산혈해 속에서 레펜하르트는 무심한 얼굴로 주먹을 거두었다.

스트레이트 캐논에 제로 임팩트.

모두가 제라드에게 가르침 받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기들.

이제까지는 딱히 쓸 필요가 없어 그냥 대충 연습만 해 뒀던 기술들이다. 굳이 비기를 쓰지 않아도 단순한 주먹질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진지하게 무술을 대하기 시작한 뒤로, 무술 역시 마법처럼 실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비기로써의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비기는 기본기만도 못하지. 익숙한 하위 서클 마법이 실전에선 오히려 서툰 고위 서클 마법보다 유용한 것처럼.'

후드드득!

박살난 용병들의 잔해가 허공에서 비처럼 떨어진다. 선혈의 소나기 속을 뚜벅뚜벅 걸어오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용병들이 겁에 질려 주저앉았다. 일격에 수많은 동료들이 고혼이 되는 걸 보니 도망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으아아아..."

벌벌 떠는 용병 사내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솥뚜껑 같은 거대한 손아귀가 사내의 머리통을 통째로 쥐고 들어 올린다. 머리가 깨지는 공포에 용병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제, 제발 자비를...."

비웃음이 돌아왔다.

"네놈 사전에 자비란 단어는 없다더니?"

"아니,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닌...."

콰직!

그 튼튼한 인간의 두개골이 두부처럼 으깨져 버렸다. 시체를 던진 뒤 레펜하르트는 다른 놈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용병단은 궤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살아남은 것은 단장 레콜트를 비롯한 대여섯 명에 불과, 바닥에 주저앉은 레콜트가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살려 주시오! 우리는 그저 체타스 남작의 명에 따른 것뿐이오!"

차분한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레콜트와 용병들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잔당을 전부 처리한 시리스가 곁에 다가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싸늘한 조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알고 있다. 네놈들이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건."

"그, 그럼?"

왠지 살려 줄 것 같아 레콜트가 눈을 빛냈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오른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것이 네놈들이 살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부우웅!

권풍이 일어나며 레콜트를 비롯한 모든 용병들의 머리통이 일제히 박살 났다. 쓰러지는 머리 잃은 시체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싸늘하게 뇌까렸다.

"명령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저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한 것은 분명 네놈들의 손과 칼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