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공동 안을 찬란히 밝힌다. 타시드는 멍한 눈으로 다카르의 칼날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투혼의 축복...."
믿을 수 없는 감각이었다.
터진 물살이 거대한 흐름이 되어 그의 전신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친 육체가 놀라울 정도로 활성화되며 고통이 사라져 간다. 상상도 못 해 본 거력이 두 팔, 두 다리, 전신 근육을 타고 야생마처럼 내달린다.
세상 모든 것이 새로웠다. 장님이 처음으로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기분이 이럴까? 분명 언제나 보고 느꼈던 것임에도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압도적인 감각이 척추를 타고 뇌를 자극해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하하...."
절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미친 듯이 웃고 있는 타시드의 모습에 스테반이 부들부들 떨며 고함을 질렀다.
"이, 이번에는 또 무슨 괴상한 사술을 쓰는 거냐?"
스테반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흑색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핏발 선 두 눈이 타시드의 블레이드 오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럴 리가 없다.
저것이 오러일 리가 없다.
한낱 오크가 그 위대한 힘을 각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현실을 부인하며 스테반이 노성을 터트렸다. 버서커 아머에 의해 극도로 증폭된 육체가 화살처럼 허공을 가르며 타시드에게 쏘아졌다.
"어디서 건방진 흉내를!"
타시드가 검을 횡으로 눕혔다. 조금 전의 흥분이 거짓이기라도 한 듯, 어느새 차분해진 얼굴로 타시드가 눈을 빛냈다.
"가자! 다카르!"
타시드도 마주 몸을 날렸다. 흑색의 대검과 청록색 블레이드 오러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검과 검이 마주하며 불꽃을 피워 대기 시작했다.
흑색의 대검이 잔상을 남겨 가며 허공을 누빈다. 하지만 그때마다 청록색의 칼날이 모든 공격을 차단한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광폭하게 날뛰는 스테반의 공격을 타시드는 모조리 받아넘기며 도리어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이, 이 오크 놈이 감히!"
스테반의 두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토록 믿었던 버서커 아머, 그로 인해 월등히 강화된 그의 육체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하고 빠르게 검을 휘둘러도 모조리 저 청록색 섬광에 가로막혀 버린다.
머릿속이 혼돈으로 가득 찼다.
"그럴 리가 없어...."
불신 가득한 목소리가 스테반의 목구멍을 통해 터져 나왔다.
"저게 정말 오러일 리가 없어!"
참마도를 길게 내리치며 타시드가 한심하다는 듯 외쳤다.
"두 눈으로 보고도 인정치 않는가? 전사의 수치로다!"
참마도에 맺힌 블레이드 오러가 스테반의 대검을 강하게 두들긴다. 압력을 못 이긴 스테반의 두 무릎이 푹 꺾인다. 부들부들 떨며 스테반이 기합인지 절규인지 모를 고함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사실 스테반이 이렇게까지 밀릴 수준은 아니었다. 애초에 버서커 아머는 오러 유저를 상대하기 위한 것, 설사 타시드가 오러를 각성했다 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게다가 이제 막 각성했기에 현재 타시드의 오러 사용 수준은 기껏해야 육체를 강화시키고 칼날에 오러를 구현하는 기본적인 레벨이었다. 스테반이 침착하게 대응했다면 결코 쉽사리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스테반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토록 갈구했던 빛이었다.
그토록 갈구했던 영광이었다.
그 위대한 힘이 비천한 야인의 손에서 구현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가축이나 다름없는 오크 따위가 휘두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으아! 으아! 으아아!"
극도의 현실 부정 속에서 제멋대로 휘두르는 검에 위력이 있을 리 없다. 광인처럼 날뛸 뿐 이미 검술도 아니게 된 스테반의 움직임을 상대하며 타시드는 가볍게 참마도로 원을 그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뇌까렸다.
"끝을 내겠다."
휘이이익!
다카르의 칼날이 허공을 스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거대한 참마도가 마치 면도날처럼 정확 무비한 궤도로 스테반의 공세 사이를 매섭게 파고들었다. 삽시간에 네 줄기 섬광이 스테반의 전신을 유린해 갔다.
푸우욱!
흑색 갑옷, 버서커 아머의 틈새 사이로 선혈이 솟구쳤다. 참격을 날린 타시드가 스테반을 지나치며 붉은 핏줄기를 허공에 흩뿌렸다. 혈우 속에서 스테반이 눈을 부릅뜬 채 무릎을 꿇었다.
"크어억!"
의식이 아득히 멀어진다. 현실을 저주하며 스테반은 천천히 정신을 잃었다.
☆ ☆ ☆
"헤에, 타시드 녀석. 계속 투덜대더니 결국 각성해 버렸네."
타시드의 찬란한 청록색 오러를 보며 러스는 혀를 내둘렀다. 요 며칠 계속 상대하면서 조만간 따라잡힐 거란 경각심은 계속 느껴 왔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잘됐다, 타시드.'
친구의 발전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며 러스는 유서스를 바라보았다.
이미 마갑 엘드라드는 여기저기 금이 가고 파손되어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유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쓰러진 스테반과 타시드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오크가 오러를 쓰는 거지?"
유서스 주위를 돌며 러스가 혀를 찼다.
"그야 저 친구가 그만한 기량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지. 간단한 사실 아닌가?"
러스의 비웃음에 유서스가 발끈하며 다시 공격을 날렸다. 가공할 마법의 폭풍 속에서 황금빛 칼날이 쉴 새 없이 찔러 온다. 하지만 유서스는 그 모든 공격을 쉽사리 피해 냈다. 몇 차례나 공방을 주고받으며 러스는 이미 유서스의 수법을 파악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저 갑옷 때문에 치명상을 못 주니, 쩝....'
러스가 유서스를 거의 농락에 가깝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블레이드 오러가 마갑 엘드라드를 일격에 부술 만큼 강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현재 러스가 가진 가장 강력한 일격은 스피리어스 경에게서 훔친 기간틱 블레이드.
'그걸로 몇 차례나 후려갈겼는데도 찌그러지기만 하고 영 부서지지 않는단 말이야?'
하긴 레펜하르트의 캘러미티 혼을 정통으로 맞고도 소유자 유서스의 생명을 지켜 준 기물이 마갑 엘드라드다. 기간틱 블레이드 정도로는 아무래도 파괴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고 타시드처럼 갑옷 틈새를 노리기도 힘들다.
스테반과 달리 유서스는 만일의 경우 몸을 틀어서 타점을 흘리며 갑옷으로 검을 흘리는 수법에 익숙했다. 평생을 마도구 다루는 수법에 매진해 온 유서스였다. 아무리 러스라 해도 유서스와 맞상대하며 틈새로 칼을 찌르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죽어라!"
또다시 유서스가 마검 엘드란을 휘두르며 공격을 날린다. 공격을 받아넘기며 러스가 고민할 때였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가만, 그게 있잖아?'
갑자기 러스가 칼끝으로 오러를 집중시키며 찌르기를 날렸다. 정교한 일격이 유서스의 전신을 순식간에 여덟 차례나 찔러 댔다. 하지만 유서스는 교묘히 몸을 뒤틀며 갑옷 표면으로 모든 찌르기를 받아 냈다. 뒤로 물러나면서 유서스가 외쳤다.
"흥! 그 정도로 엘드라드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야, 이 정도로 부서지진 않겠지. 하지만 찔리기는 하잖아?"
"음?"
태연한 러스의 모습에 유서스가 인상을 쓰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찌르기를 허용한 엘드라드 여기저기에서 푸른빛이 나고 있었다. 러스의 오러가 갑옷의 흠집 사이에 스며든 것이다.
"무슨 수작이지?"
당황하며 유서스가 러스를 노려볼 때였다. 러스가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여덟 군데의 오러가 일제히 백열하며 폭발했다. 폭발한 오러가 서로 연계해 충돌하며 더더욱 파괴력을 드높인다.
콰아아앙!
엘드라드가 박살이 나며 파괴의 폭풍이 유서스의 상체를 통째로 두들겼다. 근육이 찢어지며 핏물이 솟구친다. 연쇄 폭발이 일어난 순간 유서스가 피를 토하며 뒤로 날려 가 버렸다.
"커어어억!"
나가떨어지는 유서스를 보며 러스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기술은 스탈라 씨가 참 배울 게 많다니까."
스탈라가 성벽을 부술 때 쓴 바로 그 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나가떨어지는 유서스를 보며 필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유서스 경!"
필레나가 허겁지겁 쓰러진 유서스며 스테반에게로 달려갔다. 러스도 타시드도 굳이 그런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필레나가 울상이 되어 두 사람의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둘 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어서 응급 처치를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중상이었다.
"팰러딘 크리스틴!"
필레나가 크리스틴을 향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성기사 역시 프리스트만은 못해도 어느 정도 수준의 신성 치유 주문을 구사할 수 있으니까.
시리스와 싸우던 크리스틴이 필레나의 외침에 인상을 썼다. 크리스틴도 지금 불리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미 시리스 때문에 여기저기 상처를 꽤나 입은 상태다. 도우러 가긴커녕 자기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인 것이다.
울화통이 터졌는지 크리스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당신들 왜 져?"
"...."
쓰러진 동료에게 한다는 말이 참 주옥같이 곱기도 하다. 필레나가 어이가 없어 말문을 잃었다. 그녀가 당혹해하며 테스론을 바라보았다.
"테, 테스론!"
☆ ☆ ☆
사실 당혹스럽긴 테스론이 더했다. 그는 아직도 레펜하르트에게 달라붙어 관절을 꺾고 있었다. 벌써 시도한 기술만도 수십 개, 그런데도 이 강철 같은 육체는 쉽사리 꺾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지금도 두 다리를 교차해 레펜하르트의 목을 조르며 목뼈를 계속 압박하는 중이었는데....
"이, 이런...."
스테반과 유서스를 물리친 타시드와 러스가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서브미션 계열의 문제점은 일대일에서는 참 강력한데, 다대일 구도가 되면 영 쥐약이라는 점이다. 관절기를 걸어 상대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봉쇄한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자기 움직임도 봉쇄당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제기랄!"
결국 테스론은 레펜하르트를 밀며 멀찌감치 뒤로 물러섰다. 괜히 레펜하르트 붙잡고 있다가 오러 깃든 검에 푹 쑤셔지기라도 하면 지금 육체로는 한 방에 황천 갈 수도 있다. 더 이상 레펜하르트와 엉겨 붙어 있어 봐야 득 될 것이 없다.
"아오, 목이야. 덕분에 살았다. 러스, 타시드."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레펜하르트가 목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목뿐이 아니고 몸 여기저기가 안 쑤시는 데가 없었다. 이렇게 망가져 보긴 제라드 밑에서 두들겨 맞던 이래 처음인 것 같았다.
타시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소, 은인이여?"
"실란 도움 좀 받으면 금방 낫겠지. 괜찮아, 괜찮아."
절뚝거리며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서스와 러스도 오러를 끌어 올리며 그를 응시한다. 테스론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하면 마왕을 해치울 수 있었는데!'
하지만 혼자서 오러 유저 셋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펜하르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포기해라, 테스론!"
레펜하르트의 전신에서 황금의 오러가 솟구친다. 오러 사이로 보라색 마력이 안개처럼 퍼져 나와 오러를 감싼다. 전신의 오러와 마력을 동시에 끌어낸 것이다. 간신히 풀려났으니 더 이상 방심 않고 전력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뚜렷하게 보인다.
"나는 또다시 그대가 내 꿈을 방해하도록 놔둘 생각은 없으니까!"
섬뜩한 눈빛이 갈색 눈동자를 통해 흘러나왔다. 실로 마왕다운 차갑고 살기 가득함 시선이었다. 쓰러진 유서스와 스테반을 흘겨보며 테스론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레펜하르트에 비해 나머지 놈들을 너무 낮게 평가했어.'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강인한지 잘 아는 테스론이었다.
마왕의 마법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도 절실히 느꼈던 테스론이었다.
그래서 계속 힘을 키우면서도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되뇌면서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본 마왕은 그의 상상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테스론이 이 육체에 들어오며 마왕의 두뇌를 제대로 활용 못하는 것만큼, 마왕 역시 그의 육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멋대로 예상했던 것처럼 결코 상대도 안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 그 옆에 붙어 있는 동료들은 그리 강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러스와 시리스의 존재는 미리 알고 있었다. 미래의 오크 대전사, 타시드가 마왕 옆에 붙었다는 것 역시 크리스틴을 통해 들었다.
그럼에도 테스론은 그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전생에서야 검성으로, 그리고 마왕의 사천왕으로 명성을 떨친 이들이지만 그래 봤자 지금 나이에서는 별 볼 일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테스론이 알고 있는 역사 속에서 지금 시기의 러스는 저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다. 지금 시기의 타시드도 벌써 오러를 각성할 리가 없었다. 시리스도 저런 소녀 시절부터 정령술을 구사하지 않았다.
그의 계산으로는 황금기사 유서스와 버서커 아머를 다루는 스테반 정도면 나머지를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실수다, 마왕이 개입되며 일어날 변수를 전혀 계산하지 않았어.'
분위기가 바뀌자 시리스가 검을 거두며 크리스틴과 거리를 벌렸다. 이미 승패가 확연히 갈렸으니 굳이 크리스틴과 더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시리스가 크리스틴을 죽여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냥 사랑에 눈이 먼 처녀일 뿐인데. (지나치게 멀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풀려난 크리스틴이 필레나 곁으로 물러나 스테반과 유서스에게 신성 주문을 걸었다. 실란과 달리 그녀의 신성력은 그리 높지 않기에 간신히 응급 처치를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제대로 치료하려면 조용한 곳으로 옮겨 상당 시간 요양을 시켜야 하리라.
'물론 지금 상황에서 그런 호사를 바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필레나는 긴장한 눈으로 레펜하르트 일행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들은 졌다. 그건 확실하다. 문제는 저들이 과연 자신들을 살려 줄 것이냐다. 포로로 잡힌다면 어떻게든 몸값을 지불하거나 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겠지만, 저 살기 어린 눈빛을 보니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어보였다.
그때였다. 테스론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리고 씨익 웃으며 레펜하르트를 향해 외쳤다.
"좋아, 오늘은 포기해야겠군! 하지만 다음엔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웃기는군. 이대로 순순히 보내줄 것 같은가?"
"보내 줄 수밖에 없을걸?"
테스론이 히죽 웃었다. 불길한 느낌에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뭐지? 무슨 함정이라도 파 놓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모든 상황을 고려해도 테스론이 빠져나갈 방법 따윈 떠오르지 않는다.
'설마 이 내가 짐작 못 하는 방법을 테스론이 떠올렸다고? 말도 안 되지.'
역시 그냥 허세일 뿐이라고 레펜하르트가 확신하던 참이었다. 테스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짐 언브레이커블! 부르다 저주받을 그 이름이여!"
순간 레펜하르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이 상황에서 왜 느닷없이 기사 멸조의 죄를 행하는 거?
그때였다.
우우우웅!
또다시 사기가 공동 가득 밀려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짐 언브레이커블...."
"짐 언브레이커블!"
"우리의 원한을 풀겠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근육의 파도를 보며 순간 레펜하르트가 혀를 깨물었다.
"켁! 또 이놈들이야?"
4
"당신을 따랐다!"
"당신을 믿었다!"
사방에서 수많은 근육질 악령들이 물 밀 듯이 밀려온다. 두 주먹을 황금빛으로 감싸며 레펜하르트에게 일제히 덤벼든다.
"그 대가가 이것이냐!"
"이것이란 말이냐아아아아!"
악령들의 공격을 쳐 내며 레펜하르트가 억울함에 악을 썼다.
"내가 팼냐? 응? 내가 네놈들 죽였냐고! 왜 나한테 그러는 건데?"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악령들은 과거의 권왕과 지금의 레펜하르트를 구별하지 못했다. 몰려드는 악령들을 상대로 러스와 타시드도 블레이드 오러를 뿌려 대기 시작했다. 시리스도 실란을 보호하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공동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나고 분진이 피어올랐다.
"타압!"
덤벼드는 악령 하나의 옆구리를 길게 걷어찬 뒤 레펜하르트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쓰러진 유서스와 스테반을 부축하는 테스론의 모습이 보였다. 악령들이 주위에서 날뛰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악령들도 테스론 일행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 듯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아니, 왜 저쪽은 안 건드리는 거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멀뚱히 서 있는 실란을 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정상적인 유령이라면 신성력을 지닌 실란에게 우선적으로 적의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악령 하나 실란을 노리는 이가 없었다. 시리스야 실란을 지키겠다고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한 걸음 떨어져 보고 있는 레펜하르트는 확실하게 상황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애초에 악령들이 시리스에게 덤비는 이유는 그녀가 악령들에게 선공을 날렸기 때문이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이 악령들은 절대 반격하지 않는 것이다.
러스나 타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레펜하르트가 공격을 받자 그들이 반격에 나섰기 때문에 악령들도 전투를 벌이는 것뿐이다. 러스나 타시드부터 먼저 공격하는 놈들은 없었다.
여기 있는 모든 악령들이 적의를 불태우는 대상은 단 하나, 짐 언브레이커블의 정통 후계자인 레펜하르트뿐인 것이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공격하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역시나 상황을 파악한 러스가 혀를 차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아니, 그렇지만 싸우고 있는 형님 놔두고 우리가 구경만 하고 있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미 전투를 벌이고 나니 어떻게 발을 뺄 수가 없다. 공격을 해 버린 후라, 이제 와서 러스나 타시드가 전투에서 몸을 뺀다 해서 저 악령들의 표적이 아니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게 레펜하르트 일행이 악령들과 치열하게 사투를 벌이는 동안, 테스론 일행은 느긋하게 쓰러진 이들을 짊어지고 공동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왕창 구겨졌다.
'눈앞에서 적들이 느긋하게 도주하는 모습을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막 들어온 입구로 돌아나가던 테스론이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두고 보자! 마왕! 다음에는 반드시 네놈의 목을 치겠다!"
양쪽으로 쇄도해오는 근육 악령들을 연타로 후려갈기며 레펜하르트는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더라는 관용구는 흔하게 회자되지만....
'정작 역사적으로 보면, 두고 보자는 놈치고 안 무서운 놈 없었거든?'
그러나 악령들에게 발이 묶인 레펜하르트 일행에겐 당장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다. 결국 테스론 일행은 유유히 공동 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정신없이 싸우던 타시드가 기가 막혀 소리를 질렀다.
"아니, 이 유령들은 대체 뭔데 오러로 때려도 이리 안 잘리는 겁니까?"
기껏 오러 각성하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 자만심이 딱 각성 십여 분만에 꺾여버린 것이다. 뭐, 타시드의 전사로서의 앞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이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울화통만 터질 뿐이다.
"진짜, 더럽게 튼튼하네!"
러스도 울분을 터트렸다. 유령 하나하나의 내구도가 거의 마갑 엘드라드 급이라, 기간틱 블레이드로 때려도 뒤로만 밀려날 뿐 영 베이질 않았다. 그래서 지금 러스는 연타로 찌르기를 날려 유령의 여기저기에 오러를 남긴 뒤 연쇄폭발을 일으키는 식으로 근육 악령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콰아앙!
"으어... 우리들의 한이...."
그렇게 간신히 정신 집중하고 하나 해치워 봐야 그 뒤로 십여 명이 넘는 악령들이 가슴 씰룩거리며 뒤를 잇는데, 실로 질려 버릴 지경이다. 낑낑대는 일행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크으,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 캘러미티 혼도 못 쓰겠고....'
다행히 인대나 힘줄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그의 관절 곳곳은 테스론 덕분에 죄다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럭저럭 팔다리를 놀릴 순 있었지만 그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오며 움직임이 제한된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기 캘러미티 혼은 심기체가 완전해야 간신히 구사할 만큼 고도의 비법, 이렇게 부상당한 상태로는 도저히 구사할 수가 없다.
사실 지금의 레펜하르트는 그동안 오러를 너무 소모한 탓에 캘러미티 혼은 고사하고 스파이럴 가드 같은 기술도 쓰기 힘든 마당이었다. 결국 모든 일행의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 이 사태를 타개해 줄 유일한 구원자에게로!
'실란!'
'실란 씨!'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것 좀 어떻게 해봐!'
물론 실란도 아까부터 신성력을 모아 가며 열심히 기도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공동을 가득 메운 근육 악령들의 숫자는 자그마치 백 명이 훌쩍 넘었다. 이 모든 악령들을 날려 버릴 만큼 권능을 모으려니 시간이 안 걸릴 수가 없다.
"아으, 그러게 작작 좀 패 죽이지 그랬어요! 도대체 몇 명이야, 이게!"
"그러니까 내가 안 패 죽였다니까! 왜 나만 갖고 그래?"
억울함 가득한 레펜하르트의 외침을 뒤로한 채 실란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두 손이 분홍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눈을 감고 실란이 엄숙한 표정으로 기도를 올렸다.
"필라넨스시여! 이 가련하기 그지없는 이들에게 안식을 내리시어, 맺힌 원한을 풀고 대지의 속박에 벗어나 정명된 이치 속에 스며들게 하소서!"
파아아앗!
엄청난 성광이 거대한 공동 전체를 가득 메웠다. 분홍색 성광의 폭풍이 공동을 가득 휘몰아치며 근육 악령들을 일제히 휩쓸어 갔다. 악령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허락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안식은 있을 수 없으니...."
"이 원한이 풀리지 않으면 안식 또한 없으리!"
비명을 지르며 악령들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사리 사라지진 않는다. 얼마나 원한이 강하고 저주를 퍼부어 댄 건지, 실란이 모든 힘을 총동원한 성광 속에서도 악령들은 한참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실란은 필라넨스 교단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력한 성직자, 심지어 요 몇 달간 온갖 고생을 한 덕에 한층 권능이 높아진 터였다. 지금 실란의 실력이면 주교급을 넘어서 거의 대주교, 하이 프리스트 수준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모든 신성력을 폭발시키며 실란이 악을 써 댔다.
"필라넨스시여! 믿슙니다아아아아!"
파아앙!
공동의 대기를 흔들 정도로 엄청난 성광의 해일이 2차로 밀려왔다. 이미 존재가 흐릿해진 악령들에겐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권능의 힘이 그들을 강타하며, 결국 모든 악령들이 일제히 소멸해 버렸다.
☆ ☆ ☆
"헉헉... 으아, 죽겠네...."
엉덩방아를 찧은 채 실란이 숨을 헐떡였다. 전력을 다한 나머지 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 머리도 띵하고 집중력도 완전히 떨어져 사물이 둘로 보일 지경이다.
"와, 신관 짓 시작한 이래 모든 신성력 바닥까지 탈탈 다 털어 보긴 처음이에요. 굉장한 경험 했네, 이거."
다른 이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텅 빈 공동을 둘러보며 러스가 두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끝난 건가? 이제 다들 승천한 거야?"
"아뇨, 어지간한 악령이면 승천했겠지만...."
실란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뭔 놈의 원한이 그렇게 강한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냥 잠시 현세에서 존재가 흩어졌을 뿐이네요. 조만간 다시 나타날 것 같아요."
그러자 다들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지금 실란이 보인 권능은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이세계의 악마 군단이 나타나도 한 방에 황천 보낼 수 있을 무지막지한 위력인 것이다. 그런 이적을 퍼부었는데도 승천은커녕, 기세를 잃었을 뿐이라고?
기가 찬 시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지박령이 하나하나가 죄다 전설의 악마급이래요?"
허리를 두드리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설적으로 단순 무식한 무문에서 만만찮게 단순한 것들을 모아다 무식하게 패 죽였잖냐? 자고로 원한이란 건 단순할수록 강한데, 짐 언브레이커블의 제자라면 단순하기론 오크들과 비견할 정도니까...."
공동 천장을 올려다보며 레펜하르트가 문득 피식거렸다. 실란의 기도 덕인지 공동 주위를 맴돌고 있던 공간 왜곡의 기운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거참, 흑마법 계열 중에 사기를 극도로 모아 현세를 왜곡시켜 공간을 꼬이게 만든다는 이론이 있기는 했는데, 그걸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10서클 대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조차도 이론상으로만 완성시켰고 현실화하지 못했던 공간 왜곡 현상을 그저 원한만으로 실현시키다니, 정말이지 대단하신 '선배님'들이다. 새삼 짐 언브레이커블의 저력(?)에 혀를 내두르며 레펜하르트가 다른 이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괜찮은가?"
"멀쩡합니다, 형님."
"나도 아직 움직일 수 있소, 은인이여."
"저도 괜찮아요, 레펜하르트 님."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다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나 타시드는 스테반에게 당한 상처가 여전히 몸뚱이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다. 오러를 각성하며 육체가 활성화되어 꽤나 호전되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멀쩡한 상태라고 할 순 없었다.
"으음, 실란. 이들에게 치유술을...."
막 실란을 돌아본 레펜하르트가 멋쩍어 하며 입을 닫았다.
"...쓸 수는 없겠군. 미안."
어느새 실란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도롱도롱 졸고 있었다. 지나치게 힘을 쓴 탓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온 것이다.
'끙,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 버렸으니 테스론을 쫓기도 글렀고....'
"도로롱~ 피야. 나 근육질 됐다. 크리스틴, 저리 가, 저리 가아...."
이제는 숫제 잠꼬대까지 하는 실란을 어깨 위로 짊어진 뒤 레펜하르트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쨌거나 여기부터 빠져나가고 보자. 그놈들 또 나타날라."
지친 와중에도 모두들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 악령들 또 나타난다는 소릴 듣고 나니 지친 육신에 막 활력이 돌 지경이다. 다들 무기를 챙기고 허겁지겁 공동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 ☆
유서스를 짊어진 채 테스론이 빠른 속도로 복도를 질주했다. 그 뒤를 필레나와 스테반을 짊어진 크리스틴이 뒤따랐다. 버서커 아머를 걸친 스테반이면 어지간한 장정이라도 버거울 무게였지만 크리스틴의 덩치나 힘을 감안하면 그냥 적당한 수준이었다. 두 여인 모두 전혀 뒤처지지 않고 테스론을 쫓아가고 있었다.
테스론 곁으로 다가가며 필레나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테스론. 내가 별 도움이 안 되어서...."
테스론이 평소 레펜하르트에게 얼마나 증오를 품고 있는지 잘 아는 필레나였다. 물론 그 증오에 대해 이해는 하지 못한다. 물어본다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대륙을 불태울 사악한 자다.'라는 말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테스론을 믿었고, 그가 기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그것이 델피아의 마탑, 그 저주받은 감옥에서 그녀를 구해 준 것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일 테니까.
미안해하는 필레나의 모습에 테스론이 문득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필레나....'
전생에서는 마왕의 죽마고우였던, 하지만 단순히 그뿐이었던 마법사 필레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지금의 테스론처럼 이른 시기에 델피아의 마탑을 나서지 않았다. 마탑의 시스템 속에서 레펜하르트를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선배 마법사들에 의해 20대 후반까지 묶여 있다가 간신히 세상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때 필레나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후였다. 음습하고 괴팍한 마법사들 사이에서 여인이 제대로 마법사로 커 나가기는 쉽지 않다. 제대로 된 귀족가의 영양이라면 모를까, 필레나처럼 평민 출신의 여마법사는 사실 고위 마법사들의 창녀 역할로 주워진 것이나 다름없다. 전생의 그녀는 온갖 능욕을 당하면서, 그래도 여전히 레펜하르트에 대한 연심을 가슴속 한구석에 품은 채 각종 성병에 걸려 조용히 죽어 갔다.
이것은 레펜하르트 본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테스론도 마왕에 대한 정보를 접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여러 하찮은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지금의 필레나는 테스론에 의해 6서클 후반까지 경지를 높인 당당한 고위 마법사였지만, 전생에서는 흔해 빠진 실패한 인생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어쨌건 그 정보 속의 필레나는 레펜하르트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여인이었지.'
그리고 그 사랑은 지금 온전히 테스론에게 향해 있다. 그래, 이제 필레나는 레펜하르트가 무슨 짓을 하건 그를 배신하지 않는다.
미래에서 돌아온 저 근육질 거한이 사실은 그녀가 사랑했던 진정한 레펜하르트라 할지라도 지금의 필레나는 오직 테스론만을 바라볼 뿐이다. 현세의 그녀를 구해 주고, 힘을 주고, 아껴준 이는 분명 이 육체 속에 들어간 테스론이니까.
'그렇다는 건....'
그 사실은 또 하나의 진실을 떠올려 테스론의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사이러스를 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군.'
유서스를 상대하는 전생의 친구, 사이러스의 표정을 보았다. 마왕을 형님이라 부르던 지금의 사이러스는 과거 레펜하르트에게 이를 갈던 그 검성이 아니었다. 그저 마왕을 향한 순수한 호의와 우정, 그리고 경외의 빛만을 가진 어린 청년일 뿐이다.
당연하겠지. 현세의 사이러스를 구해 주고, 힘을 주고, 아껴 준 이가 바로 그의 육체 속에 들어간 레펜하르트일 테니까.
'미련을 가져서는 안 돼. 지금의 사이러스는 내 적이다. 그것이 변할 수 없는 진실.'
그렇다 해도 고작 필레나 '따위와' 미래의 검성, 사이러스를 맞바꿨다는 생각이 드니 참 억울하긴 했다. 씁쓸한 기분을 애써 떨치며 테스론은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전생에 와 보았던 곳이기에 테스론의 발길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통로가 갈라질 때마다 조금도 주저 없이 한쪽을 택하며 그는 밖으로 향하는 길을 계속 뛰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테스론이 복도 끝,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그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계단을 오르려던 필레나가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테스론? 빨리 피해야지?"
복도 끝에 위치한 석실을 바라보며 테스론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의아해하는 두 여인을 뒤로한 채 테스론이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이 10여 미터쯤 되는 작은 석실이었다. 네모반듯한 그 공간 안에 장식이나 가구 따위는 일체 없었다. 중앙에 돌로 된 제단이 있고, 그 위에 한 개의 거대한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크리스틴이 물었다.
"이것은?"
테스론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짐 언브레이커블의 비기, 캘러미티 혼. 그 5중첩 이후를 이끌어 줄 비전을 새긴 석비다."
석비엔 공용어로 온갖 오러 사용법과 그에 따른 무리武理가 적혀 있었다. 테스론이 잠시 추억에 감싼 채 그 석비를 바라보았다.
한때 그에게 보다 높은 경지를 안겨 주었던,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래된 석비.
이것이야말로 제라드가 제자에게 남겨 주었던 진정한 선물이었다.
전생에 하산했던 테스론은 몇몇 용병일로 돈을 모으며 세상에 대해 배우고 난 뒤 바로 이곳부터 찾았다. 그리고 수백의 악령들과 싸운 후 극도로 날카로워진 감각 속에서 이 석비를 읽으며, 결국 4중첩의 경지를 넘어 5중첩의 캘러미티 혼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난 당연히 마왕도 벌써 이곳을 지나쳐 5중첩의 경지에 다다랐을 줄 알았지. 그래서 그토록 그를 두려워했다.'
테스론이 쓴웃음을 지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어. 지금의 그는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 둘 다 완성되지 않은 마법사이며 완성되지 않은 무인일 뿐!'
그의 손에 들려진 장검이 싯누런 오러를 발했다. 테스론이 검을 들어 석비를 겨누었다. 비록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랜 보물이며 추억이 어려진 물건이지만....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외침을 터트리며 테스론이 석비를 향해 검을 길게 찔렀다.
"스파이럴 블레이드!"
소용돌이치는 오러가 석비를 강타했다. 두꺼운 석비가 산산이 박살 나며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부서지는 석비 앞에서 테스론이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 레펜하르트! 비록 오늘은 패했지만 그냥 물러가진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허탕치고 어디 한번 울화통 터져 봐라!"
☆ ☆ ☆
레펜하르트 일행은 열심히 통로를 달렸다. 길 따윈 몰랐지만 헤매지는 않았다. 바로 조금 전 테스론 일행이 발자국 대놓고 남기며 앞서 간 덕분이었다. 능숙한 사냥꾼이기도 한 타시드에게 이 정도 발자국이면 이정표를 남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열심히 테스론 일행의 자취를 따라 가다 보니 계단이 나오고, 통로 끝에 위치한 석실이 보인다. 발자국이 석실과 계단 양쪽으로 향해 있는 걸 보고 타시드가 의아해했다.
"어라? 은인, 발자국이 둘로 갈라집니다."
"응? 어째서?"
발자국을 유심히 살핀 뒤 타시드가 대답했다.
"일단 저 석실을 갔다가, 다시 계단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입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석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이들도 뒤따라 들어갔다. 시리스가 중앙의 제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뭔가 부순 자국이 있는데요?"
네모반듯한 바위 같은 것이 박살 난 흔적이었다. 살펴보니 부서진 파편마다 공용어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무슨 묘비 같은 건가?'
파편이 너무 사방으로 퍼져 있어 이 글자들이 무슨 문장을 이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마법으로 검사해 보았지만 무슨 마도구나 은의 시대 유물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마법도 부여되지 않은, 흔해 빠진 돌조각일 뿐이었다.
도망가기도 바쁜 와중에 대체 이 비석을 왜 부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다 결국 결론을 내렸다.
"성깔 못 이겨서 난동이라도 부렸나? 하긴, 그 양반 예전부터 다혈질이긴 했지."
아무것도 모르는 레펜하르트는 그냥 어깨만 으쓱이며 바로 석실을 빠져나갔다. 뭐, 아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울화통 터질 일도 없는 것이다
"쯔쯔, 하여튼 성질하고는...."
혀까지 차며 레펜하르트는 바로 계단으로 향했다. 지상으로 올라가며 러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형님, 대체 그 테스론이란 자는 누구입니까? 보니까 형님이랑 굉장히 잘 아는 사이 같던데."
안 그래도 그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 중이던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테스론의 존재를 어찌 설명할까?
궁여지책으로 레펜하르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랑 고향 친구 같은 사이인데... 음, 일종의 동문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처음부터 친한 사이는 절대 아니었어. 이종족에 대한 의견이 많이 차이가 났거든. 그쪽은 내가 이종족을 해방시키는 것이 인류에 지대하게 해를 끼친다고 믿고 있지. 그래서 나를 적대하고 죽이려 한달까...."
애매하게 설명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또 틀린 말 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레펜하르트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하며 이 시대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인지는 러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긴... 극단적인 반응 같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군요."
납득하며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안도하며 레펜하르트는 어깨에 짊어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실란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설명이면 실란도 러스처럼 납득을 하리라.
"어쨌거나 빨리 이 저주받은 곳에서 떠나자, 치 떨린다."
☆ ☆ ☆
계단은 짐 언브레이커블의 초대 무문이 위치한 그 폐가 뒷산을 통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타시드가 감격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오오! 태양이다! 태양! 저 태양이 이리 반가워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소."
"전적으로 동감이다."
뒤따라 밖으로 나오며 러스도 어깨를 으쓱였다. 뒤이어 시리스와 실란을 짊어진 레펜하르트도 땅 위에 발을 디뎠다. 주위를 살펴보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쩝, 역시 테스론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군. 하긴, 그토록 시간을 지체했는데 여태 이곳에 머물고 있을 리가 없지."
시리스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요, 레펜하르트 님. 괜히 이곳에 오자고 해서...."
그녀가 이곳으로 오자고 하지만 않았어도, 괜한 고생할 일도 없었고 다른 이들이 저토록 부상을 입을 리도 없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덕분에 정신을 차렸어. 이곳에 와서 진짜 다행이다."
딱히 시리스를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레펜하르트는 진심으로 테스론과 조우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마법만 되찾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줄 알았지. 그건 오만이었어."
아직도 테스론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침이 마른다. 그만큼 테스론의 기술은 그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렇게 당했는데도 대체 뭘 어떻게 당한 건지조차 모르겠어. 분명 내 목을 조르고 있는 팔을 풀었는데 그게 더 내 목을 조르질 않나,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조여 오는데...."
그것이 레슬링 계열 관절 기술의 무서움이다. 타격기나 검술 같은 무술은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라 잘 모른다 해도 감각적, 본능적으로 센스가 있으면 어떻게든 대응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래플링 기술은 그렇지 않다. 서로의 육체적 성능이 절대적으로 차이 나지 않는 이상, 모르면 무조건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스가 혀를 찼다.
"저도 형님 정도 되는 무인이 그라운드 레슬링에는 그렇게 문외한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검사도 아니고 권사시면서...."
아무리 기사라도, 낙마했을 때라든가 무기를 놓쳤을 때를 대비해 어느 정도 레슬링 기술에 대해 익히는 법이다. 애초에 레슬링이라는 것 자체가 갑옷을 입은 상대에게 피해를 입히기 위해 출발한 기술인만큼 러스도 기본적인 소양은 지니고 있었다.
"우리 무문은 쪽팔리게 땅바닥에서 구르지 말라고 가르치거든."
"그, 그건 확실히 공감이 가지만... 어쨌건 레슬링 계열은 연습 좀 하면 방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시간 나는 대로 좀 가르쳐 드릴까요? 전문적인 것은 무리지만 기술 안 들어오게 방어하는 기법은 좀 아는데."
"제발 좀 부탁한다."
의외로 레펜하르트가 진지하게 러스의 의견을 승낙했다. 참 호되게 당하긴 당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딱히 그 기술뿐만이 아니더라도... 난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조차 제대로 쓰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반성하며 레펜하르트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딱히 그래플링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테스론은 무인으로서 모든 점에서 그를 압도했다. 분명 육체적으로 월등히 뛰어난 레펜하르트를! 이것은 결코 무시하고 지나갈 부분이 아니다.
생각해 보면 하산한 이래 그의 무인으로서의 기량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워낙 기본적인 성능이 뛰어나다 보니 이 육체만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했다. 그래서 오로지 마법을 되찾는 데만 급급했다.
'틀린 생각이었어.'
모든 것이 바뀐 지금, 그는 더 이상 마왕이 아니다. 그렇다면 마법만큼이나 무술 역시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
돌아가면 진지하게 무술 쪽 수련도 매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가 어깨를 폈다. 뭐, 이것이야 그 자신의 문제일 뿐이다. 여전히 시무룩해 있는 시리스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건진 게 없지는 않아. 저기 또 하나의 오러 능력자를 당당히 건졌잖아?"
그제야 시리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런 거예요?"
타시드가 가슴을 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 덕분에 나는 드디어 투혼의 축복을 받았다. 시리스,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행운도 없었겠지."
껄껄 웃는 타시드를 보며 시리스도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런 둘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타시드가 벌써 오러를 각성할 줄은 몰랐지. 10여 년 뒤에나 각성해야 정상인데.'
전생의 타시드가 오러 능력자가 되는 것은 푸른 곰 부족에서 나와 세상을 떠돌 때의 일이다. 그는 인간들 세상 속에서 항상 쫓기며 온갖 강자들과 맞서 싸웠고 그때마다 새롭게 자신의 한계를 부쉈다.
'그러다가 할라인 왕국의 오러 능력자 카메룬과 맞서 싸우며 오러를 각성하게 되었다고 했지?'
생각해 보면 지금의 타시드는 전생보다 훨씬 일찍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크로방스 왕국 내전을 통해 온갖 전투를 겪으며 성장했고, 꾸준히 러스와 붙어 가며 오러에 대한 감각도 많이 잡았다. 칼켄이나 스탈라와 달리 러스는 인간 오러 유저였고, 그래서 오크 오러 유저만을 상대할 때에 비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버서커 아머를 쓰는 스테반을 맞이해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 들면서 결국 막혔던 둑이 터진 것이다.
'행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황당한 일인 것만도 아니지.'
"어쨌건 원래 목표였던 제룬팅도 찾았고, 예상외의 보너스도 얻었으니 이번 여행은 결과가 좋군요."
러스의 말에 동의하며 타시드도 말을 받았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푹 좀 쉽시다."
이제는 모두 안타레스 백왕성을 집이라 칭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집이란 표현을 쓰는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래, 돌아가자. 우리의 집으로."
제22장 붙잡힌 자, 풀려난 자
1
울창한 열대 수림 사이로 세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숲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우둘투둘한 피부에 거미처럼 길고 깡마른 팔다리를 지닌 종족, 트롤이었다. 성인으로 보이는 장신의 트롤이 돌칼로 정신없이 수풀을 가르며 두 명의 어린 트롤들을 이끌고 있었다.
"헉헉헉!"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며 바위를 뛰어넘고 덤불을 헤친다. 어린 트롤 하나가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울상을 지으며 트롤 아이가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헉, 헉, 헉! 더 못 뛰겠어, 우트랑!"
"쓰러지면 안 돼! 인간들이 쫓아온다!"
"하, 하지만...."
가슴을 할딱대는 어린 트롤들을 보며 우트랑은 난처해했다. 이미 성년식을 치른 그와 달리 이 어린 트롤들은 아직 재생력이 발달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폐를 혹사시키다간 생명이 위험하다. 설령 팔다리가 잘린다 해도 끼니 좀 잘 챙겨 먹으면 말끔히 치료되어 버리는 성인 트롤들에 비해, 어린 트롤들은 과로나 과다출혈만으로도 쉽게 죽음에 이르는 연약한 존재였다.
초조해하며 우트랑이 숲 저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인간들에게 잡혀 버릴 텐데...."
트롤들으로부터 200여 미터쯤 떨어진 열대 우림 저편, 커다란 넝쿨이 어지럽게 얽힌 숲 사이로 한 무리의 인간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석궁이며 창칼을 든, 질 좋은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중년 사내가 숲을 헤치고 나가며 외쳤다.
"흔적을 찾았나?"
앞장서서 바위며 흙바닥을 살피던 청년 하나가 손가락질을 하며 대답했다.
"저쪽으로 도망갔습니다, 런든 대장!"
중년인, 런든이 히죽 웃으며 석궁에 화살을 재었다.
"좋아! 좌우로 포위망을 좁히면서 예정대로 몰아라!"
"알겠네!"
런든의 명에 따라 다른 이들도 빠르게 숲 사이로 사라져갔다.
이들은 할라인 왕국 남부, 덴키드 지방에서 제법 명성이 있는 마물 사냥꾼들이었다. 마물들의 피며 생체 조직은 연금술사들에게 귀한 재료였기에, 연금술사 길드의 의뢰를 받아 각종 마물을 사냥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높은 마물이 바로 트롤이었다.
트롤의 피는 힐링 포션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원래 힐링 포션은 연금술사들이 여러 귀한 약초들을 조합하고 마법사가 마력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트롤의 피가 있다면 저 과정이 대폭 줄어든다. 싸구려 약초를 써도 트롤의 피 몇 방울만 넣으면 정통 힐링 포션 못지않은 약효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마법사의 마력도 필요 없어진다.
힐링 포션은 한 병에 은화 열 닢은 족히 나가는 비싼 물건, 당연히 트롤의 피는 같은 무게의 황금과도 맞먹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런 트롤을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트롤 자체가 어지간히 노련한 마물 사냥꾼들이 아니면 잡기 힘든 강력한 몬스터였고, 게다가 깊숙한 숲 속에서만 서식하는 습성 때문에 쉽게 인간들 눈에 뜨이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런든은 운이 좋았다.
마물 사냥을 하던 중 우연히 묵은 밀림의 한 마을에서, 트롤 하나가 근처에 나타났으니 퇴치해 달라며 부탁해 온 것이다. 그리고 런든과 그의 일행들은 트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만큼 노련하고 강력한 마물 사냥꾼들이었다.
일주일 동안 마을 주변 밀림을 샅샅이 뒤진 끝에, 결국 트롤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데 성공했다. 런든이 욕심 가득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렵게 찾은 대박인데 놓칠 수야 없지, 후후후."
☆ ☆ ☆
인간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 온다. 우트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저들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데리고는 불가능하다.
'내 실수다!'
통한의 심정으로 우트랑은 가슴을 쳤다. 부락을 이끄는 구루 마테로의 말을 듣지 않고 금지 구역 밖으로 향한 것이 문제였다.
'그 폭포에 가서는 안 되었는데.'
금지 구역 바깥쪽에 영기가 고인 폭포를 발견한 것이 화근이었다. 훌륭한 주술사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몸인 우트랑에게 그 폭포의 정갈한 영기는 실로 탐나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무리 금지 구역이라도 인간의 마을과 한참 떨어진 곳이니 큰 문제 생기겠냐 싶어 몰래 그곳을 들락거렸던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결국 폭포수를 맞으며 수행하던 우트랑은 마을 주민의 눈에 띠었고, 공포에 젖은 마을 사람들은 트롤 퇴치를 위해 사냥꾼을 모았다. 문제는 그때까지도 우트랑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폭포를 들락거리며, 심지어 친하게 지내던 부락의 어린 트롤까지 데리고 나오는 우를 범해 버린 것이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자신뿐 아니라 귀한 아이들까지 인간에게 쫓기는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 한탄하며 우트랑은 머리를 굴렸다.
'어찌해야 하는가?'
해답은 금세 나왔다.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 우트랑은 자연의 섭리 속에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깨달았다.
'둥지가 위험에 처하면 물떼새는 다친 척 일부러 포식자 앞에 자신을 드러내 알을 보호한다.'
결심한 우트랑이 나무 밑을 파기 시작했다. 어린 트롤들이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구덩이를 판 우트랑이 아이들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둘 다 여기 숨어 있어! 알았지?"
트롤들이 구덩이로 들어가자 우트랑이 낙엽을 모아 그들의 모습을 가렸다. 아이들이 놀라며 물었다.
"어? 우트랑은?"
대답 없이 우트랑이 씨익 웃었다. 트롤답게 툭 튀어나온 광대뼈와 긴 턱 사이로 처연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어린 트롤들이 울면서 말리기 시작했다.
"안 돼! 우트랑!"
우트랑이 두 손을 뻗어 어린 트롤의 머리 위에 하나씩 올렸다. 그리고 구덩이로 도로 밀어 넣었다.
"너희들이 어른이 되면, 그때 다른 아이들을 보살펴 주렴."
"싫어!"
"우트랑!"
아이들이 난동을 부리며 울음을 터트리려 한다. 이대로라면 위치를 들키게 된다. 살짝 당황하며 우트랑이 연거푸 손가락을 튀겼다.
딱딱! 따다닥!
"솜구름, 실려 오는, 양귀비의, 밤."
비록 구루의 경지에 오르진 못한 우트랑이었지만, 그래도 간단한 잠의 주술 정도는 쓸 수 있었다. 리듬감 있는 핑거 스냅 소리가 아이들의 귓가를 흔들었다. 아이들의 발버둥이 사그라지며 조용해졌다.
"휴우...."
우트랑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밀림 여기저기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인간들이 거의 근처에까지 다가왔다.
돌칼을 빼 들고 우트랑이 우렁찬 외침을 터트렸다.
"으아아아!"
☆ ☆ ☆
수풀이 흔들리며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뛰쳐나온다. 모습을 드러낸 트롤을 보며 사냥꾼들이 소리를 질렀다.
"나왔다!"
"트롤이다!"
비교적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이 트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트롤은 듣던 대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괴물이었다. 2미터가 넘는 장신에 기형적으로 긴 팔다리, 나무껍질 같은 피부 위에는 괴상한 문신 같은 것이 그려져 있고 얼굴은 악마처럼 흉측하기 그지없다. 일반인이라면 저 괴물과 마주하는 것만으로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크아아아!"
트롤이 포효를 터트리며 사냥꾼들 사이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공격하는 것인가 싶었는데, 그냥 돌칼을 휘두르며 밀림 저편으로 질주한다. 런든이 허겁지겁 소리쳤다.
"놈이 도망간다! 화살을 쏘아라!"
석궁이 일제히 당겨졌다. 수십 대의 화살이 트롤의 등 위에 꽂혔다. 달려가던 트롤이 움찔하며 속도를 늦춘다. 런든이 재차 소리를 질렀다.
"쫓아라! 놓쳐서는 안 돼!"
느려진 트롤, 우트랑이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려야....'
통증으로 인해 발이 느려진 우트랑을 사냥꾼들이 금방 따라잡았다. 포위망을 구축하며 사냥꾼들이 투창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타아앗!"
"발을 묶어!"
"모두! 다리를 노려라!"
우트랑이 돌칼을 휘둘러 창을 쳐 내려 했다. 하지만 아직 완성된 구루가 아닌 그에게 그 정도 기량은 없다. 허공으로 돌칼이 빗나가며 투창이 그의 사지 여기저기에 박혔다. 고통으로 우트랑이 비명을 질렀다.
"크어어억!"
연거푸 돌칼을 휘둘러 사냥꾼의 접근을 막으며, 우트랑은 남는 손으로 허겁지겁 몸에 박힌 투창을 뽑았다. 깊숙했던 상처가 창이 뽑히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아물기 시작한다. 성인이 된 트롤의 재생력은 실로 가공한 것이라, 이 정도 부상쯤은 부상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다.
"놈이 재생합니다!"
"그물을 던져 움직임을 막고 불로 지져라! 그래야 재생을 막을 수 있다!"
포위망 밖에서 사냥꾼들이 그물을 던져 대기 시작했다. 그물에 뒤덮인 채 우트랑은 계속 두 팔을 놀렸다. 사냥꾼 중 몇몇이 창과 칼을 들고 가까이 다가와 공격을 가했다.
그러던 중, 정신없이 휘두르던 우트랑의 돌칼에 사냥꾼 하나가 정통으로 두들겨 맞고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크어어억!"
"디란드!"
동료가 쓰러지자 사냥꾼들이 한층 분노하며 트롤을 몰아붙인다. 창칼이 연신 우트랑의 사지를 베고 찔러 갔다. 불붙인 막대기가 청색의 피부 여기저기를 태운다. 고통 속에서 우트랑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으로 인해 점점 정신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계속해 상처를 회복하는 그 힘이 우트랑의 정신마저 뒤덮기 시작한다.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이 고개를 든다. 일단 한번 고개를 든 방어 본능은 점점 커져 그의 뇌리를 채울 뿐, 결코 꺼지지 않는다.
"아아아!"
우트랑은 한탄을 터트렸다. 그들의 종족의 피 속에 새겨진, 또 다른 자신이 눈을 뜨고 있었다. 트롤들의 축복이자 저주인, 추악하고 난폭한 본성이 우트랑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불길이 뇌리를 태우는 끔찍한 감각 속에서 우트랑은 결국 정신을 잃었다.
트롤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런든이 그의 변화를 감지하고 외쳤다.
"조심해라! 거대화다!"
우득, 우득, 우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그물에 갇힌 트롤의 덩치가 부풀기 시작했다. 깡마른 몸이 무서울 정도로 커지며 근육이 붙는다. 가는 허리며 허벅지도 몇 배로 커진다. 2미터 조금 넘는 키였던 트롤이 3미터 가까운, 오우거만한 덩치로 변하며 포효를 터트렸다.
"으, 아, 아, 아!"
대기를 울리는 광포한 외침과 함께 트롤이 그물을 주욱 찢었다. 시뻘건 눈으로 트롤, 이제는 더 이상 우트랑이 아닌 진정한 마물이 사냥꾼들을 노려보았다. 두꺼운 손톱이 사냥꾼의 머리 하나를 후려갈겼다. 머리통이 박살 나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아, 아, 아!"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트롤이 사냥꾼들을 향해 돌격했다. 두 팔을 거침없이 놀릴 때마다 사냥꾼들이 낙엽처럼 이리저리 날려 간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중년 사냥꾼 하나가 치를 떨며 소리쳤다.
"크윽! 실로 괴물이로다!"
런든이 모두를 독려하며 침착하게 외쳤다.
"모두들 당황하지 마라! 저것이 진짜 트롤이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 아닌가!"
평소의 트롤은 그렇게까지 강력한 마물은 아니다. 하지만 위기에 몰리게 되면 그들은 놀랄 정도로 거대해지며 실로 광폭하게 날뛰게 된다. 그때의 트롤은 오우거와도 비견될 강력한 마물, 이야기 속에 전해져 오는 끔찍한 괴물로서의 트롤은 모두 저 모습에서 기인된 것이다.
날뛰는 거대한 트롤의 공격을 피해 사냥꾼들이 포위망을 풀었다. 런든이 뒤로 물러나며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다들 침착하게 저 마물을 함정으로 유인하라!"
☆ ☆ ☆
밀림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페룸.
현재 페룸의 모든 주민들은 마을 중심에 위치한 커다란 중앙 회관에 모여 있었다. 반나절 전 트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 생업을 멈추고 유일한 석조 건물인 회관으로 대피한 것이다.
회관 창문을 통해 주민들이 연신 불안해하며 밀림을 바라본다. 젊은 처녀 한 명이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리가 들려요."
숲 저 편에서 흐릿하게 포효 소리가 들렸다. 트롤의 울음소리였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며 저 멀리 하늘 위로 새떼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중년 사내가 여인을 달래며 말했다.
"사냥꾼들이 트롤을 유인하고 있는 걸 게다. 조금만 참으렴."
트롤을 마을로 유인해 함정에 빠트려 퇴치한다는 계획은 이미 사냥꾼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주민들의 시선이 일제히 회관 밖,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큼직한 마법진이 중앙에 설치되어 있었다.
마을 사내 하나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말 저것으로 트롤을 붙잡을 수 있는 겁니까, 마법사님?"
그러자 주민들 모두가 경외어린 시선으로 로브를 걸친 50대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 마법사, 루소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시골에서야 마법사는 무조건 굉장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그는 그리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 나이가 쉰이 넘고서야 간신히 5서클에 입문했을 정도이니까.
하긴 그런 실력이니 마물 사냥꾼들과 함께 방랑 마법사로 떠도는 것이긴 하다. 제대로 된 마법사라면 귀족의 후원을 받거나 마탑에서 연구를 하거나 하지, 굳이 이런 험한 일을 하며 떠돌이로 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티를 내 봐야 주민들을 불안하게 할 뿐. 루소는 억지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자네들은 그저 우리들이 트롤을 붙잡을 때까지 이 안에서 피신하고 있게. 금세 본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걸세."
그때였다. 회관 구석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렸다.
"트롤을 건드려서는 안 돼! 지금 큰일 날 짓을 하고 있는 거여!"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늙은 노파였다. 곁에 있던 중년 아낙이 노파를 달래며 혀를 찼다.
"아이고, 테스 할머니. 또 그 소리예요? 왜 그러세요, 트롤은 몬스터라니까요."
"아니여... 쿨럭쿨럭!"
노성을 터트리려던 노파가 헐떡대며 기침을 해 댔다. 잦은 숨을 내쉬며 노파가 울상을 한 채 중얼거렸다.
"트롤은 숲의 수호자여, 숲을 지키는 이들이란 말이여... 잘못하고 있는 것이여...."
아낙이 등을 두들기자 노파가 이내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루소를 보며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워낙 미신을 믿는 할멈이라...."
"신경 쓰지 않는다네. 잘 보살펴 드리게."
헛웃음을 흘리며 루소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마을 회관 밖에서 사냥꾼 두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육포를 질근질근 씹던 나이 든 사냥꾼이 그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준비는 확실하겠지요, 마법사 루소?"
광장에 설치된 마법진을 바라보며 루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될 거야. 만일을 대비해 3중의 결계까지 짰으니."
문득 젊은 사냥꾼 하나가 힐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굳이 이 마을에 함정을 설치해야 했습니까? 저는 마법사께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설치할 줄 알았습니다만."
대답은 루소가 아닌 늙은 사냥꾼으로부터 나왔다.
"트롤이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으니까. 만약 마을 근처에서 발견되면 우리가 설치한 함정으로 유인하기도 전에 마을을 습격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흥분한 트롤이 반드시 자신을 상처 입힌 자만을 쫓으라는 법은 없다. 도중에 다른 인간의 냄새를 맡고 발길을 돌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냥꾼이라면 모든 경우를 생각해 두어야 하는 법, 주민들도 지키고 트롤을 제대로 유인하기 위해선 이 마을에 함정을 설치하는 것이 제일 합리적이다.
선배의 가르침에 젊은 사냥꾼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아, 그렇군요."
루소가 밀림 저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런든 대장이 잘하고 있나 모르겠군. 이 마법진에 들어간 액수가 장난이 아닌데. 트롤을 잡지 못하면 대적자야, 이거."
광장의 마법진은 지름이 10미터 가까이 되는 크기다. 저것을 그리기 위해 들어간 마법 시료의 양은 무려 두 통이 넘는다. 일향초의 즙과 텐타릴 가루, 소금과 유황을 물에 개어 만드는 마법진 구축용 마력 시료는 상당한 고가의 물건, 저 마법진에 들어간 재료값만도 금화 두 닢은 족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저거 그리느라 내가 사흘 내내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걸 헛수고로 만들면 안 되지."
긴장을 풀려는 의도인지 루소가 너스레를 떨었다. 아쉽게도 그리 효과는 없었다. 노련한 늙은 사냥꾼은 어차피 크게 긴장하지 않았고, 젊은 쪽은 저 소리를 들어도 여전히 빳빳하게 긴장 중이었으니까.
우거진 밀림 저편, 푸른 열대수들이 점점 거칠게 흔들린다. 숲 위쪽이 연신 요동치며 온갖 열대의 새들이 잔뜩 날아오른다.
순간 루소가 눈을 빛냈다.
"왔다!"
동시에 마을 외곽의 나무 사이로 사냥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죽어라 달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연거푸 나무가 쓰러지며 무시무시한 포효가 들렸다.
우지끈!
거대한 그림자가 나무를 좌우로 쓰러트리며 뜨거운 햇살 아래 여실히 모습을 드러냈다. 3미터가 넘는 거체에 통나무를 연상케 하는 두꺼운 팔다리, 섬뜩하게 드러난 이빨들과 돌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진 거인이 붉은 눈을 빛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크, 아, 아!"
괴성을 토하며 거대 트롤이 손에 잡힌 나무를 통째로 들어 내던졌다. 날아간 나무가 마을을 덮치며 집 한 채가 우루루 무너져 내린다. 거치적거리는 것을 모두 박살 내며 거대 트롤은 계속 사냥꾼들을 쫓았다. 정신없이 도망쳐 광장까지 도달한 사냥꾼 중 한 명, 런든이 버럭 소리쳤다.
"마법사 루소! 빨리 마법을!"
안 그래도 루소는 이미 모든 마법 영창을 마친 후였다. 그가 허공에 손짓하며 트롤을 향해 시동어를 외쳤다.
"파이어볼!"
커다란 화염구가 이글거리며 트롤에게로 날아들었다. 폭발이 이어지며 트롤이 비명을 질러 댔다.
피부가 불타며 일그러지고, 재생력이 다시 파손된 육체를 복구하고, 그것을 화염이 또다시 불태운다. 고통 속에서 트롤의 눈동자가 더더욱 붉게 빛났다. 루소 곁에 있던 두 사냥꾼이 악을 써 가며 소리쳤다.
"이쪽이다! 이 괴물아!"
트롤이 루소 쪽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흉악한 얼굴인데 이제는 아예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일 정도다. 젊은 사냥꾼이 공포로 딱딱하게 굳었다. 거대 트롤이 두 팔을 번쩍 들고 그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 온다!"
쿵! 쿵! 쿵! 쿵!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트롤이 광장의 바닥을 깨부수며 맹렬히 돌진한다. 루소가 침착하게 수인을 맺으며 마법을 이었다.
"렌 하르 발티르 자탄! 깨어나라, 란프라우드의 족쇄여! 하늘과 땅을 죄여 그 속에 갇힌 자를 얽맬지어다!"
거대 트롤이 막 마법진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었다. 루소가 허공에 손가락질을 하며 외마디 외침을 토했다.
"케이지 오브 아케인 포스!"
파아아앗!
마법진 전체가 백열하며 빛을 뿜어냈다. 빛 속에서 수십 개의 사슬이 형성되어 트롤의 팔다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마력의 소용돌이가 트롤의 몸통을 따라 회오리치고 머리 위로 붉은 전격이 방전하며 트롤의 전신을 두들겨 댔다.
"크아아아악!"
마법진 속에서 트롤이 발버둥을 치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때마다 마법진 여기저기서 스파크가 일어나며 진의 일부가 부식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마법진에 의해 몇 배나 위력이 증폭된 봉쇄 마법이었는데도, 버티질 못하는 것이다.
루소가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런든! 나 좀 도와주게!"
"알고 있소!"
런든이 사냥꾼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냥꾼들이 미리 준비한 거대한 발리스타를 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마물 전용으로 개량된 발리스타였다. 건장한 청년 둘이서 톱니바퀴를 돌려 발리스타의 시위를 당겼다. 런든이 굵은 창을 발리스타에 재어 넣고 트롤을 겨누었다.
"간다! 괴물!"
타아앙!
발리스타가 요란한 채찍 소리를 내며 투창을 쏘아 냈다. 투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거구의 트롤에게 날아가 복부 깊숙이 박혔다. 워낙 엄청난 부상에 트롤의 힘이 빠지며 다시 마법진 안으로 갇혀 버린다. 루소가 눈을 빛냈다.
"좋아! 마지막이다!"
루소가 품속에서 작은 병을 하나 꺼냈다. 연금술사로부터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마법 독, 헤스티아의 눈물이었다. 약병을 열고 독약을 촉매로 삼아 루소가 마법을 발동시켰다.
"흩어져서 스며들며 내 적을 감싸라! 클라우드 포이즌!"
녹색의 작은 구름이 일렁이며 트롤의 사방을 뒤덮었다. 독 구름을 펼치는 마법, 클라우드 포이즌은 3서클의 비교적 저급 주문이지만 그 촉매가 되는 독약이 무엇이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갈린다. 고래조차도 마비시킬 수 있는 강력한 마법 독, 헤스티아의 눈물이 기화되어 트롤의 전신 구멍을 통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신음을 흘리며 트롤이 점차 눈을 감기 시작했다. 거구의 육체가 서서히 무너지며 결국 트롤이 쿵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쓰러졌다.
환호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잡았다!"
"으하하핫!"
"대박이다!"
2
쓰러진 트롤은 이내 거대화가 풀리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깨어나지 않도록 재차 마법 독을 주입한 뒤 사냥꾼 두 명이 트롤을 꽁꽁 묶어 마차에 실었다. 확실하게 트롤을 제압했음이 확인되자 공포에 떨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회관 밖으로 나와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
"드디어 저 괴물이 잡혔군!"
"이제는 안심하고 살 수 있겠어."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저 트롤이 나타난 이래 혹여나 나쁜 일이 생길까 다들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제부터는 밤마다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기뻐하며 런든과 그의 일행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소."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을이 구원받았어요."
하지만 모든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즐거워하는 가운데, 한 노파만이 유독 굳은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마을 최고령의 노인, 테스 할머니였다.
"잘못하고 있는 게야...."
노파가 두려움 가득 찬 눈으로 밀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수히 꺾인 나무들, 거대한 트롤이 스치고 지나간 그 파괴의 흔적을 보며 떨리는 음성을 흘렸다.
"트롤은 숲의 수호자이거늘...."
옆에 서 있단 아낙이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휴, 또 시작이시네."
테스 할머니가 왜 저러는 지는 아낙도 알고 있었다. 아낙 역시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오래된 이야기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전해져 오는 아득한 옛이야기.
그 속에서 트롤은 숲의 지킴이였고 숲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평화로운 이들이었다. 숲의 풍요로움을 수호하는 그들은 현명하고 온유한 이들로 숲 속에서 곤경에 빠진 인간을 소리 없이 구해 주는 존재였다.
아니, 대체 저기 묶여 있는 저 흉악한 괴물의 어디에 현명과 온유가 있단 말인가? 당연히 미신일 뿐인 이야기다. 호랑이나 곰 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흔한 동화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노파는 여전히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숲이 분노하고 있어...."
노파가 런든 일행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슬슬 모든 짐을 꾸리고 페룸 마을을 떠나려는 참이었다. 마을 어귀로 향하는 런든 일행의 등에 대고 노파가 칼칼한 목소리를 터트렸다.
"트롤을 건드려서는 안 돼!"
다들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짓는다. 노파가 다시 소리쳤다.
"숲의 분노가 덮칠 게야!"
마치 저주를 퍼붓는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며 외치고 또 외친다.
"숲의 분노가!"
조금 전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노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하늘을 울렸다. 헛소리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저 모습을 보니 기분이 꺼림칙하긴 했다.
애써 무시하며 런든이 고개를 저었다.
"에잉,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
☆ ☆ ☆
할라인 왕국 남부의 게테란 산맥. 그중에서도 험준하기로 이름 높은 제툰 고개.
서른 명 정도로 이루어진 사냥꾼 무리가 한 대의 마차를 호위하며 산길을 가고 있었다. 할라인 왕국 남부 밀림에서 트롤 사냥에 성공하고, 황금의 꿈을 꾸며 희희낙락하고 있는 런든 일행이었다.
앞장선 런든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 살아 있는 트롤이면 적어도 금화 천 닢은 족히 받겠지."
곁에서 걷고 있던 마법사 루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칼티잔까지만 가면 우리 팔자도 확 피는 거야."
트롤은 분명 값비싼 몬스터지만, 그것이 값어치를 다 하려면 트롤의 피를 정제할 수 있는 설비가 있는 연금술사 길드까지 가야 했다. 그곳의 연금술사들에게 생포한 트롤을 넘겨야 비로소 확실한 황금이 손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런든 일행은 칼티잔 시, 할라인 왕국의 연금술사 길드 '산타나의 눈물'의 남부 지부가 있는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를 이끌고 런든 일행은 계속 산길을 걸었다. 점점 해가 저물어 가며 어둠이 산길을 뒤덮기 시작했다.
산속의 해는 순식간에 진다. 금세 해가 떨어지는가 싶더니 좌우로 우거진 야생림이 삽시간에 짙은 그림자를 사방에 드리웠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런든이 길을 재촉했다.
"자 자, 다들 서둘러. 다음 야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험준한 제툰 고개에 대인원이 숙영을 할 수 있을 만한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제법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숙영지에 도착하기 전 해가 저물어 버린 것이다. 표정을 구기며 사냥꾼들이 하나둘 화톳불을 켰다.
새롭게 불을 밝히고 그들이 계속 산길을 걷던 중이었다.
일행 중간쯤에서 걷고 있던 젊은 사냥꾼 한 명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곁에 있던 중년 사내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나, 드렌?"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젊은 사냥꾼의 대답에 중년 사냥꾼이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은 고요했다. 그저 어둠 속에서 여러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히 울려 퍼질 뿐이다.
젊은 사냥꾼이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었다.
"기분 탓인가?"
또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중년 사냥꾼도 확실하게 소리를 들었다.
둥... 둥....
어둠 저편에서 흐릿한 울림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온다. 런든 일행의 발걸음이 멈췄다.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번엔 보다 소리가 컸다. 일행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둥! 둥! 둥!
"뭐지?"
"웬 북소리가?"
은은한 북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산속이라 소리가 반사되어 어디서 들려오는 지 알 수가 없다. 런든이 긴장하며 검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무슨 일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제일 후미에 있던 늙은 사냥꾼 하나가 풀숲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사람 하나가 통째로 수풀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으아아악!"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모두들 경악하며 수풀을 바라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냐!"
사냥꾼들이 재빨리 검이며 석궁을 꺼내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용감한 이 몇몇이 석궁을 겨눈 채 수풀을 헤쳐 보았다.
"윽!"
"한덴 씨가...."
수풀 속에 펼쳐진 광경을 조우하는 순간, 사냥꾼 몇몇이 신음을 흘렸다. 수풀 속에 팔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동료의 시체가 있었다. 엄청난 괴력으로 사지를 비튼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허겁지겁 후미로 달려온 런든이 그 참혹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한덴? 도대체 이게 갑자기 무슨...."
바로 그때.
"으힉!"
"으아악!"
런든 바로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들을 잡아당긴 것이다. 건장한 성인 장정이 순식간에 위로 빨려 올라가 짙은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눈앞에서 동료가 '날아가 버리는' 괴상한 광경에 누군가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으히힉! 도대체 뭐야, 이건!"
후둑! 후두두둑!
머리 위, 어둠이 짙게 깔린 나무 사이로 뭔가가 요동을 치며 가지를 떨어 댔다. 나뭇잎사귀가 우수수 머리 위로 나부낀다. 그리고 곧바로 걸쭉한 액체가 비처럼 쏟아지며 두 개의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액체를 뒤집어쓴 사냥꾼 하나가 손으로 뺨을 만져 보더니 공포에 질렸다.
"으엑! 이거! 피! 피!"
떨어진 두 개의 덩어리, 그것은 방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동료의 처참한 잔해였다. 그 끔찍함에 일행 모두가 공포에 질려 패닉에 빠졌다.
"악마다!"
"악마가 나타났어!"
개중 노련한, 경험 많은 늙은 사냥꾼이 소리치며 주위를 달랬다.
"다들 정신 차려라! 마물의 습격일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
순간 휘파람 소리가 바람을 갈랐다.
휘이이익!
퍼엉!
떠들어 대던 늙은 사냥꾼의 머리통이 박살이 났다. 어디선가 두꺼운 돌덩이가 날아와 그의 머리를 정확히 명중한 것이다.
머리 잃은 시체가 피를 뿌리며 천천히 땅 위로 쓰러진다. 런든이 사방을 둘러보며 악을 써 댔다.
"다들 사방을 경계해라! 습격이다! 마차 주위로 모여!"
공포에 질린 와중에도 사냥꾼들이 질서 정연하게 마차 주위로 대열을 짰다. 동료와 등을 맞댄 채 런든이 이를 갈았다.
"젠장, 순식간에 네 명이나 잃었어!"
도대체 무슨 마물이 이렇게 은밀하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런든이 루소에게 외쳤다.
"마법사 루소! 탐지 마법을!"
"아, 알겠소!"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서 있던 루소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준비했다. 너무 긴장한 탓에 자꾸 수인이 실패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인가가 날아와 자신의 머리통을 부술지 모르니 입안이 자꾸 바짝바짝 말랐다.
"헉헉...."
간신히 마법을 완성한 루소가 눈을 감고 시동어를 외쳤다.
"디텍트 라이프 오브젝트!"
생명체의 기운을 찾는 3서클 탐지 마법이 루소를 중심으로 크게 퍼져 나갔다. 이제 살아 있는 존재라면 이 마법으로 탐지가 가능하리라. 루소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오로로로로로로!
괴이한 허밍이 어둠 속을 울려 퍼졌다. 새 소리도 맹수의 울음도 아닌 괴상한 소리였다. 가늘고 긴, 그러면서도 낮고 굵직한 느낌이 드는 이중적인 허밍. 그것이 울려 퍼지자 루소가 순간 기침을 해 댔다.
"켁! 케켁!"
"왜 그러시오, 루소?"
런든의 질문에 루소가 경악에 차 대꾸했다.
"내, 내 마법이 깨졌소!"
"뭣이?"
저 괴이한 허밍이 들리는 순간 알 수 없는 힘이 루소의 마법에 간섭하며 마력장을 무효화시켜 버린 것이다. 루소가 벌벌 떨며 고개를 사방으로 돌렸다. 공포에 젖은 루소의 머릿속에 무심코 페룸 마을의 그 노망난 노파의 외침이 떠올랐다.
-숲의 분노가 덮칠 게야! 숲의 분노가!
런든이 패닉에 빠진 루소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노성을 터트렸다.
"이봐! 루소! 정신 차려! 빨리 적의 위치를 파악하란 말이다!"
그렇게 다들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만치 나무 위에서 우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일족은 그대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거늘...."
뚜렷한 공용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것이 인간의 목에서 나온 음성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쇠를 서로 마주 비비는 듯한 거친 목소리, 마치 지옥 끝자락에서 들리는 듯한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대들은 탐욕으로 그를 해하였도다...."
섬뜩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런든이 애써 용기를 끌어 올리며 검을 뽑아 겨누었다.
"어떤 사악한 마물이 감히 세이어의 가호를 받는 인간을 해하느냐!"
휘리리릭!
바람이 불었다. 검은 그림자가 런든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동시에 채찍 같은 긴 그림자가 일행들을 덮쳐 갔다. 둔탁한 소음이 연달아 울리며 네 명의 사냥꾼이 피를 뿌리며 뒤로 날려 갔다.
"크어억!"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숲속을 뒤흔들었다.
떨어진 그림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섬뜩한 눈동자가 푸른 불꽃을 피우며 일행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화톳불 사이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둘투둘한 푸른 피부에 긴 팔다리, 매부리코에 강퍅한 인상을 지닌 괴물이었다. 채찍같이 긴 그림자의 정체는 저 괴물의 양팔이었다. 긴 양팔에 돋은 날카로운 손톱, 그것이 또다시 네 명의 동료를 앗 하는 사이에 죽여 버린 것이다.
사냥꾼 중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트롤?"
평범한 트롤이 아니었다. 일단 육체부터가 보통 트롤과 달리 굵직해 보였다.
보통 트롤들은 너무 깡말라 가느다랗다는 느낌마저 드는 반면, 저 트롤은 비록 날씬하긴 했지만 확실하게 두꺼운 근육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지독한 곱슬머리를 수십 가닥으로 땋아 허리까지 내렸고, 전신에 붉고 푸른 안료로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연하게 눈에 띠는 부분이 있었으니....
"...상아어금니다!"
나타난 저 트롤의 이빨, 코끼리의 상아처럼 길게 튀어나온 두 개의 어금니를 본 순간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외침을 들은 다른 이들도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상아어금니! 그 악마 트롤이란 말인가?"
런든이 공포에 질려 중얼거렸다.
상아어금니.
그것은 마물 사냥꾼들 사이에서 전해져 오는 일종의 미신 같은 것이었다.
인간 이상으로 영악한 지능에 마법도 통하지 않는 괴상한 술법, 신출귀몰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며 사냥꾼들을 습격하는 저 마물은 트롤의 모습을 하고 있으되 트롤과는 전혀 다른 무자비한 괴물이었다.
저 악마 때문에 무너진 연금술사 길드 지부가 스무 군데가 넘는다고 했다. 그 이름 높던 마물 사냥단, 다랄드 헌터즈가 저 트롤 하나 때문에 전멸했다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는 북부의 이름 높은 오러 능력자가 저 악마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다. 마물 사냥꾼들 중에는 저 상아어금니가 트롤로 변신한 지옥의 악마라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이들도 많았다.
둥! 둥! 둥!
그 전설 속의 악마 트롤, 상아어금니가 북소리를 내며 일행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허벅지 옆에 작은 북이 좌우로 매달려 있어 그것을 두드리는 것인데, 북소리가 사냥꾼들의 귓가에 울릴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뇌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움바트 쿠라드 랄카 랄카 라타카...."
북소리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섬뜩한 목소리가 리듬을 탄다. 사냥꾼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으아아아...."
사냥꾼들이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런든이 마차 위의 생포한 트롤과 눈앞의 상아어금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심장을 쥐고 있는 공포의 손아귀는 강력했다.
하지만 공포만큼이나 강력한 욕망, 눈앞의 황금이 어른거려 그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런든의 귓가에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탐욕이 공포를 이겼느냐? 과연 인간이로구나."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런든의 목이 밤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3
테스론과 조우한 지 일주일 후, 레펜하르트 일행은 안타레스 백왕성으로 돌아왔다.
원래 세텔라드 산맥에서 안타레스 백국이 위치한 글로텐 산맥까지 오려면 빠른 말로 쉴 새 없이 달려도 족히 한 달은 걸릴 거리다. 하지만 다이만 터미널을 이용, 새롭게 공간 포털을 활성화한 클로이 던전을 경유하니 그 시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돌아온 레펜하르트는 바로 자리 비운 동안 별일이 없었는지부터 파악했다.
일단 오크들, 글로텐 산맥과 인접한 백국령 가장자리에 새롭게 부락을 꾸린 푸른 곰 부족은 산맥을 오가며 마음껏 사냥과 채집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글로텐 산맥의 선주민들, 다른 산악 민족들과의 충돌은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언젠가는 부딪칠 일이니 지금부터 준비를 해 둘 필요는 있다. 그래서 레펜하르트는 스탈라와 그랄타에게 안타레스 백국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전달해, 만약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저 깃발을 들고 싸우라며 언질을 해 두었다.
엘프들을 위한 보금자리, 엘븐 포레스트에 또 하나의 세계수를 심는 것도 무난히 진행되었다. 레펜하르크가 창천의 지팡이, 제룬팅을 숲 한가운데 심고 세계수의 정을 일깨우니 투박한 지팡이가 이내 싹을 틔우며 거대한 떡갈나무만 한 크기로까지 자라났다.
세계수가 하나가 아니게 되니 따로 이름을 붙여 구별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근원이 된 유물의 이름을 따 단하임 일족의 세계수를 니힐렌이라 부르고, 새로운 세계수를 제룬팅이라 명명한 뒤 출장(?) 나온 단하임 일족의 엘프 몇몇이 곁에 머물며 돌보았다.
그랜드 포지의 전사들은 대부분 안타레스 백국에 남았다.
타오반 상회를 통해 대량의 곡물과 식량을 얻게 된 그랜드 포지는 당분간 전사들이 목숨 걸고 몬스터를 사냥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식량을 옮기기 위한 서른 명 정도의 드워프 전사들만 귀환하고, 나머지는 다른 안타레스 백국에 원래 거하고 있던 드워프 일족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노예 신세였던 이 드워프 일족은 이제 더 이상 안타레스 백왕성 지하가 아닌, 광산 근처에 자신만의 마을을 꾸리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을이 완성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역시 건축·건설에 도가 튼 드워프들답게 거주할 지역 정도는 이미 마련한 후였다.
전체적으로 모든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종족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고, 아직까지는 레펜하르트가 굳이 손을 보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레펜하르트의 골머리를 썩게 하고 있으니....
바로 인간에 대한 것이었다.
☆ ☆ ☆
레펜하르트가 귀환한지 스무 날째.
안타레스 백왕성의 앞뜰,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그곳에 서른 명 정도의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전원 무장을 갖춘 강인해 보이는 사내들이었다. 저마다 통일되지 않은 무기와 갑주를 걸친 이들은 연단에 오른 레펜하르트를 보며 당당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름 높은 권왕 레펜하르트 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가드윈! 권왕님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이래 봬도 바실리 왕국 북부에선 제법 명성을 쌓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신흥 귀족, 안타레스 백작 밑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없을까 싶어 모인 용병이며 전사 들이었다.
모든 검 쥔 자들의 꿈은 바로 기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가 되는 것은 그저 실력만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전통적으로 기사단을 지니고 있고, 그 속에 속하려면 실력뿐 아니라 혈통과 가문이 받쳐 줘야 한다. 신분이 비천한 이들은 아무리 실력이 있다 해도 용병이나, 마물 사냥꾼, 던전 탐사자 정도가 출세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런 평민들에게도 기사가 될 길이 가끔 열리니, 바로 이렇게 새로운 귀족이 가문을 세웠을 때였다. 빠르게 힘을 축적해야 하는 신흥 귀족가들은 비록 평민이라 해도 실력만 있으면 기사로 서임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리고 권왕 레펜하르트는 휘하에 강력한 이종족 전사들은 많이 거느리고 있지만, 인간은 별로 없었다. 소문을 들은 용병이며 전사들이 자신도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란 꿈을 꾸며 모여든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이 세워진 지도 어느덧 석 달이 넘었다. 이미 레펜하르트 일행이 자리를 비웠을 때부터 이미 상당수의 전사들이 백왕성을 찾았고, 지금도 매일 이렇게 몰려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대부분 노련한 용병들이었지만, 개중엔 세상 넓은 줄 모르는 동네 건달들도 꽤나 많았다.
"난 창 한 자루만 들면 적수가 없었소!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오!"
"난 주먹만으로도 늑대를 때려잡은 사람이오!"
사내들이 저마다 자신을 소개하며 목소리를 높이니, 백왕성의 앞뜰이 시장 바닥처럼 시끌시끌해진다. 레펜하르트 곁에 서 있던 러스가 고함을 질렀다.
"모두 조용히 하시오!"
명성이 자자한 오러 능력자, 러스가 소리치자 이내 좌중이 고요해졌다. 레펜하르트가 사내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참, 안타레스 제국 시절엔 마왕 밑에서 마졸이 될 수는 없다며 한 놈도 자발적으로 안 오더니... 지금은 저렇게 몰려드나?'
새삼 마왕과 권왕의 인기 차이를 실감하게 된다. 어쨌거나 바람직한 반응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사들이여, 이 모자란 이를 따르기 위해 모인 그 마음, 실로 감사하기 그지없소. 이것만으로도 그대들의 진심은 확인되었으니 실력을 보인다면 후하게 대우할 것이오!"
"오오오오!"
이름 높은 권왕이 자신들을 인정하는 듯 말하자 사내들이 벌써 기사라도 된 듯 환호성을 터트렸다. 물론 잘 들어 보면 결국 실력 다 확인하고 고르겠다는 소리다.
모인 이들을 살펴보며 레펜하르트가 턱을 매만졌다.
'오늘도 적당히 걸러야겠군.'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받아 줄 수는 없다. 레펜하르트가 연단 아래 서 있는 두 사람, 러스와 타시드에게 눈짓을 했다.
'적당히 패서 쓸 만한 놈들만 골라내!'
이미 며칠째 계속된 일이라 둘 다 맡겨 두라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러스와 타시드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러스가 대열 앞에 선 건장한 용병을 가리키며 검을 겨누었다.
"사이러스라 하오."
용병 사내가 송구스러워하며 검을 마주 뽑았다.
"혈풍의 페트라 하오. 이름 높은 사이러스 경을 상대하게 되어 영광이오!"
어차피 상대는 오러 유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대결은 어디까지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한 것, 페트가 긴장하며 검을 뽑았다.
"그럼 가겠소! 타아아앗!"
페트가 맹렬하게 검격을 뿌려 댄다. 물론 러스는 간단하게 모든 공격을 걷어 냈다. 대결이라기보단 거의 지도 대련이나 다름없는 이 결투를 보며 앞뜰에 모인 다른 이들이 수군거렸다.
"오늘도 잔뜩 몰려왔군."
"역시 사이러스 경은 굉장해. 어떻게 저렇게 검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지?"
그들은 이미 시험을 거친 전사들이었다.
시험에 통과해 기사 자격을 얻은 이들도 있고,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성의 경비병으로 남은 자들도 있었다. 요 며칠 사이 몰려온 무인들의 숫자는 상당해서, 현재 레펜하르트 휘하에는 이종족을 제외하고서도 기사 스무 명에 백여 명 가까운 병사가 모인 상태였다.
'물론 다 합쳐 봐야 드워프 전사 열 명만도 못한 전력이긴 하지만....'
러스와 페트의 대결을 지켜보며 레펜하르트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생과 다른 길을 가려면 인간 역시 포용해야 하는 것, 그래서 레펜하르트도 대충 쓸 만하다 싶으면 바로 바로 모인 무인들을 거두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종족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한 놈은 곤란하지.'
레펜하르트의 시선이 앞뜰 반대편, 러스처럼 모인 이들을 시험하고 있는 타시드에게로 향했다.
타시드 역시 러스처럼 간단하게 용병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대체로 타시드의 무위에 감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승복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놈들도 간혹 나왔다.
"크윽! 오크 따위가 내 실력을 가늠하겠다는 것이냐!"
쓰러진 채 고함을 지르는 거한의 모습에, 구경하고 있던 인간들이 실소하며 혀를 찼다.
"저런, 저런."
"저놈은 탈락이군."
"멍청한 놈 같으니. 아직도 타시드 님이 보통 오크처럼 보이나?"
아니나 다를까 타시드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참마도, 다카르를 들어 올렸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우우웅!
청록색의 광채가 참마도의 칼날을 가득 뒤덮는다. 오늘 모인 용병들이 기겁하며 외쳤다.
"블레이드 오러!"
"맙소사!"
"오크가 오러를 쓰다니! 정녕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반박했던 거한이 창백한 안색으로 덜덜 떨었다.
"마, 맙소사! 어떻게 오크가!"
부웅!
타시드가 참마도를 허공에 휘저었다. 블레이드 오러가 대기를 가르며 웅장한 굉음이 울린다. 사색이 되어 거한이 뒷걸음질을 쳤다.
타시드가 차갑게 뇌까렸다.
"꺼져라."
"으헤헤헥!"
가공할 살기를 정통으로 맞은 거한이 정신없이 성문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살기가 얼마나 짙고 강렬했는지 자신이 추태를 보인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잘하고 있구먼.'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렇게, 이종족에 대한 편견이 뿌리박혀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들은 타시드 선에서 적당히 걸러지고 있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뒤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 부탁한다. 나는 이만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 ☆ ☆
성안으로 들어서는 레펜하르트 곁에 한 젊은 청년이 따라붙었다.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백왕님."
"아, 아스레일 경."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청년은 아스레일 폰 케이토, 현재 레펜하르트의 휘하 기사단인 안타레스 나이츠의 단장을 맡고 있는 이였다.
"어떤가? 오늘 모인 이들 중 쓸 만한 이들이 보이던가?"
"실력이야 어차피 러스 경과 타시드 경이 걸러 내니 믿을 만하지요. 하지만 실력이 있다고 해서 기사의 자질이 있는지는 좀...."
아스레일이 창밖을 내다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안타레스 기사단에서도 몇 안 되는, 정규 기사 수행을 받은 귀족 출신의 기사였다. 실력뿐 아니라 예법과 지식 역시 갖춘 제대로 된 기사인 것이다.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게 검술 역시 대단해, 현재 안타레스 백국에서 오러 유저와 이종족을 제외하고는 최강자라 할 수 있었다. (사실 오러 유저랑 이종족 다 빼면 몇 명 남지도 않지만.)
어쨌든, 어느 곳을 가건 충분히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는 아스레일이 레펜하르트 휘하에 들어온 것은 역시 권왕의 명성 덕이었다. 기사 수행을 다니던 아스레일이 슬슬 자신이 모실 주군을 찾던 중, 타이밍 좋게 레펜하르트가 크로방스 내전으로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권왕 정도의 무인이라면 주군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아스레일은 바로 안타레스 백국으로 달려왔다. 안 그래도 제대로 된 기사가 아쉬웠던 레펜하르트 또한 기꺼이 아스레일을 받아들이고 단장의 역할까지 맡겼다. 러스는 언젠가 테네스 가문에 돌아갈 몸이라 아무래도 안타레스 나이츠에 묶어 둘 수가 없었다.
레펜하르트가 이 정도로 호의를 보이니 아스레일도 감격해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비록 만난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아스레일은 러스나 타시드 못지않은 레펜하르트의 충복이 되어 있었다.
충성 어린 얼굴로, 아스레일이 레펜하르트를 향해 조언을 건넸다.
"너무 용병 출신 기사들만 모으시면 기사단의 권위가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백왕님."
"오크는 괜찮고?"
"또, 그때의 일을 말씀하시다니...."
아스레일이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레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처음 안타레스 백국에 온 아스레일을 상대한 것이 타시드였다. 그때만 해도 아스레일은 기사인 자신을 오크와 상대하게 하는 것에 분노를 터트렸다. 비록 권왕의 휘하 이종족들이 보통 이종족들과 다르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오크를 인정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을 마주한 뒤 아스레일은 그 생각을 깔끔하게 버려야 했다.
타시드의 검은 기사 이상으로 섬세하고 강력했다. 그리고 그의 태도나 말투 역시 그가 알고 있는 오크와 전혀 달랐다. 기품 있고 세련된 말투는 엄연한 기사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이 바로 블레이드 오러!
참마도에 깃든 그 위대한 빛을 본 순간 아스레일은 모든 편견을 버리고 타시드에게 감복했다. 상대가 오크라는 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녹색 피부의 오크는 분명 존경할 만한 뛰어난 검사였던 것이다.
"타시드 경이야 기사에 걸맞은 기품과 실력이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대처럼 생각해 주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스레일처럼 귀족 출신임에도 순순히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분명 놀라운 성품이었다. 트인 생각과 넓은 사고방식을 가진, 보기 힘든 유형인 것이다.
하지만 현재 안타레스 백국에 모인 모든 인간들이 저렇진 않다. 기사들은 철저히 거르다 보니 오히려 문제가 없었지만 남은 병사들 중엔 여전히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아스레일처럼 진정으로 이종족을 인정하는 이들은 3분의 2 정도? 상당히 높은 비율이지만 그렇다 해도 남은 3분의 1은 여전히 레펜하르트가 명령했기에 이종족들을 대놓고 무시하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 깊이 납득하진 않았다.
'뭐, 나머지도 다른 오크나 드워프들과 부대끼다 보면 자연스럽게 바뀌겠지.'
아스레일이 표정을 굳히고 다시 간언을 올렸다.
"지금 안타레스 기사단은 절반 이상이 용병 출신입니다. 물론 기사다운 예법이며 태도를 제가 가르치고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용병 출신이 많으면 기사단의 분위기에 절도가 없어집니다. 조금 고려해야 할 부분이 아닐지?"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마법사인 그의 입장에서, 기사란 존재는 그저 겉멋만 잔뜩 들어 쓸데없는 허례허식만 추구하는 놈들이었다. 용병들만 모아 놓으나 기사들만 모아 놓으나 그가 보기엔 똑같았다.
'그래도 되도록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전생의 경험으로, 레펜하르트는 자신이 이 시대의 일반인들과 꽤나 거리가 있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란 걸 절실히 느꼈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실패를 딛고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기사도란 게 분명 불합리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혀 제약이 없는 용병들보다는 나으니까.'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기사 선발에 있어선 아스레일 경, 그대가 전적으로 맡게. 러스와 타시드에게도 말해 두지."
아스레일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고작 열흘 정도밖에 보지 못한 자신에게 단장의 지위는 물론이고 기사단의 인사권까지 맡기다니? 어지간히 그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백왕님의 신뢰,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감동하며 아스레일이 무릎을 꿇었다. 다시 한 번 레펜하르트를 충심으로 모셔야겠다는 다짐이 이 젊은 기사의 심장을 맹렬히 뛰게 했다.
레펜하르트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대를 믿네, 아스레일 경. 잘해 주게."
"물론입니다!"
바로 앞뜰로 달려가는 아스레일의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실실 웃었다.
"일거리 하나 줄였네."
그래도 너무 좋아하는 아스레일을 보니 살짝 미안하긴 하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그에게 안타레스 기사단은 그리 비중이 크질 않았다.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마법사 출신인 데다 이종족 병력이 있는 레펜하르트는 다른 귀족들만큼 기사들을 중시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아스레일이야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맡았다며 기뻐하겠지만 레펜하르트 입장에선 그저 수많은 처리해야 할 일거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에이, 아스레일이라면 잘할 거야. 적어도 마법사 출신인 나보다야 낫겠지.'
레펜하르트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솔직히 지금 그는 기사단의 기품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 ☆ ☆
집무실에 도착한 레펜하르트가 테이블에 앉았다. 서류를 열심히 작성하고 있던 엘프 여인 한 명이 그를 보더니 반색을 하며 말했다.
"백왕님! 왜 이제 오셨어요?"
"미안해, 플로라. 일거리 많이 밀렸어?"
플로라라 불린 엘프 여인이 커다란 서류 뭉치를 들고 와 레펜하르트 앞에 털썩 내려놓았다.
"처리해 주셔야 할 서류예요."
그녀는 차탄 공국에서 레펜하르트가 거두어 교육 시킨 여러 노예 출신 엘프 중 한 명이다. 탈카타를 비롯한 아홉 명의 오크들은 싹 다 푸른 곰 부족으로 보내 정신 교육(?)을 시켰지만 엘프들은 여전히 백왕성 내에 머물고 있었다. 아직은 마을을 꾸릴 만큼 엘프의 숫자가 많지 않은 탓이었다.
그래서 한때 노예로 지냈던 열일곱 명의 엘프 여성들, 그녀들은 지금 레펜하르트 곁에서 이런저런 행정 업무를 보조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물론 썩 실력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배움이 느린 엘프인 데다가 교육 기간도 고작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단순한 회계 정도라면 모를까 복잡한 행정 업무를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개중에는 두각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다. 플로라가 그런 케이스로, 그녀는 엘프치고는 행정에 제법 재능을 보여 레펜하르트의 비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자 자, 빨리 확인하고 사인해 주세요."
산더미 같은 서류 더미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뭔 일이 이렇게 자꾸 쌓이는 거야? 두 달 전만 해도 할 일 없어서 탱탱 놀았었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같나요? 여기 펜 있어요."
"그래...."
지친 얼굴로 레펜하르트가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타오반 상회와의 물품 거래라든가 새로 들인 인간들의 인사 행정이며 봉급 관리 등, 아무리 인구가 적은 안타레스 백국이라지만 신경 쓸 일이 꽤 많았다.
그리고 레펜하르트의 고민거리는 기사가 되겠다고 몰려든 전사나 용병들뿐만이 아니었다. 대흉년으로 인해 발생한 크로방스 왕국의 유민들, 그들 중 일부가 소문만 듣고 안타레스 백국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다.
-안타레스 백국에는 곡물이 넘쳐 난다더라.
-그곳으로 가면 매일 세 끼 빵을 먹을 수 있다더라.
원래의 겔파인 자작령, 안타레스 백국의 전신이었던 이 영지는 사실 워낙 불모지여서 농경지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소문이 퍼진 이유는 레펜하르트가 유벨 국왕군에 다량의 곡식을 공급한 이유도 있고, 또 그랜드 포지나 다른 이종족들의 식량 수급을 위해 타오반 상회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사들인 것이 알려진 탓이었다.
뜬소문만 믿고 안타레스 백국으로 흘러들어 온 유민의 숫자는 거의 천 명에 육박했다. 그리고 레펜하르트는 그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원래의 겔파인 자작령과 달리 현재 안타레스 백국에는 농경지 면적이 제법 된다. 포상으로 땅을 받을 때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 한 유벨 2세가 은근슬쩍 근처 영지를 끼워 주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 농경지는 그동안 놀고 있었다. 이종족들에겐 '제대로 된 땅'에서의 농사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푸른 곰 부족의 오크나 단하임 일족의 엘프나, 둘 다 오지에서 채집이나 수렵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 오던 이들이다.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들은 제법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환한 태양 아래서 곡식을 키운 이들이 아니라 지저 태양 마그림 아래서 순무나 감자, 버섯이며 이끼 등을 키워 본 이들이었다. 농업 지식의 종류가 전혀 달랐다.
그러므로 저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놀고 있던 토지를 내리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물론 추수 때까지 먹을 식량은 대 주어야겠지만, 현재 레펜하르트는 충분히 그럴 재력이 있다. 타오반 상회로부터 곡식을 원가에 공급받으니까. 안 그래도 워낙 퍼 가다 보니 슬슬 회주 시볼트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처리해야 할 행정 업무가 또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에휴우우...."
한숨을 쉬며 레펜하르트는 빠르게 서류를 점검하고 결재했다. 엄살 피운 것과는 달리 그의 집무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명색이 대마법사, 숫자도 강하고 속독에도 익숙한 그에게 이런 행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래서야 계속 여기에 묶여 있겠는데....'
구시렁대면서 레펜하르트는 후다닥 서류를 처리했다. 마지막 한 장을 검토하고 마저 사인하자 플로라가 서류를 몽땅 들고 나간다. 그와 교차해 시리스가 차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레펜하르트 님, 차 드세요."
"고마워, 시리스."
화색이 되어 레펜하르트가 찻잔을 받아 들었다. 쟁반을 가슴에 안은 채 시리스가 곁에 다가와 섰다. 차를 들이킨 뒤 레펜하르트가 다시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정말 문제네. 일거리 자체야 별것 아니지만...."
제법 뛰어나다는 플로라도 어디까지나 엘프 기준에서지, 제대로 공부한 인간 행정 관리와 비교하면 여전히 허술했다. 지금도 서류마다 간간히 오류 부분이 보이는지라 레펜하르트가 항시 최종 검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상태라면 안타레스 백왕성을 비울 수가 없겠어. 아직 마력 높이려면 이래저래 찾아가야 할 던전도 많은데. 사방신의 유물도 찾아야 하고."
레펜하르트의 전생에 대해 알고 있는 시리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예전에 제국 세우셨을 때는 누가 업무 봤었는데요?"
"그때는 내가 황궁에서 자주 나갈 일이 없었지. 재상이었던 마켈린도 있었고."
제국 시절엔 인재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땅 넓히고 마을 계속 짓다 보니 나중에 국가의 형태로까지 되어 버린 케이스였으니까. 그래서 배움이 느린 드워프와 엘프에게도 행정 업무를 익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부터 국가의 기틀을 잡아야 한다. 시간도 인재도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국가 세우면 쉬울 줄 알았는데... 이건 이것대로 또 문제점이 있구나.'
한숨 쉬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마켈린 님을 불러서 대리 좀 부탁하면 되지 않나요?"
레펜하르트가 난색을 표했다.
"그게... 제국 시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서 말이야. 지금은 오로지 인간만을 관리하는 행정 업무잖아, 이거? 엘프들 도움을 받는 정도야 괜찮지만 아예 드워프가 인간들 위에서 대리를 맡으면 문제 생기지 않을까?"
확실히 그 경우에 반감 가지는 이들이 나올 것 같았다. 안타레스 백국은 이제 겨우 시작 단계, 아직 이종족들을 너무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예전처럼 드워프나 엘프들을 인간들 위에 관리직으로 앉힐 수는 없다는 소리다.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안타레스 백국에는 인간 관리가 너무 없기는 하죠."
유민들에게 땅을 나눠 주고, 급조한 안타레스 기사단에게 그 땅을 봉토로 내려 다스리게 한다면 그럭저럭 영지의 기틀 자체는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속을 알아보면 상당히 부실하다. 귀족 출신 기사들이야 자신의 땅을 제법 잘 관리하겠지만, 용병 출신 중에는 글도 못 읽는 까막눈들이 많았다. 그래서 백왕성의 시종이었던 이를 글을 안다는 이유만으로 기사들의 행정 보좌관으로 앉히는 엽기적인 행정 처리도 해야만 했다.
"안타레스 백국이 지금 워낙 인구도 적고 초기다 보니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이지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인간들 중에서도 믿을 만한 이들을 뽑아야 한다. 그들의 실력도 검증해야 하고, 또 쓸 만한 이들을 키우기도 해야 한다.
정말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레펜하르트 혼자서 처리하려 하다간, 영영 마법을 되찾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아,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싹 맡기고 난 밖으로 좀 돌아다니고 싶은데!"
한탄하는 레펜하르트의 모습에 시리스가 뺨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럼 인간 중에서 신뢰할 만한 이가 필요하겠네요. 행정적 능력도 뛰어나야 하고... 만일의 경우 레펜하르트 님을 대신해 백왕성을 지켜야 하니 무인으로서의 재능도 있어야 하니.... 아스레일 경이라면 괜찮을까요?"
"아스레일이 괜찮은 친구긴 하지만, 그래도 백국 전체의 대리를 맡기기엔 좀 부족하지."
"그럼 딱히 인재가 없잖아요?"
말하다 말고 시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한 방에 해결하는 법이 있기는 있어. 그런데 잘될까 모르겠네."
"무슨 방법인데요?"
레펜하르트가 씨익 웃었다.
"무지하게 유능한 친구 있잖아. 너무 유능해서 죽이기 미안할 정도인 친구."
시리스가 탄성을 흘리며 손뼉을 쳤다.
"아! 그분!"
4
백왕성 한쪽에 위치한 넓은 연무장, 그곳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타앗!"
"으랏차!"
권왕 레펜하르트의 명성을 믿고 모인 전사들, 그중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은 안타레스 기사단원들이었다. 기사 서임은 받았으나 아직 봉토가 내려지지 않아 계속 백왕성에서 머물고 있었다.
"좋은 일격! 이것도 받아보게, 스탄 경!"
"알겠소! 볼드윈 경!"
상당히 무식한 인상의 거한들, 그들은 서로를 경이라 호칭하며 신을 내고 있었다. 모두 용병 출신이었다가 얼마 전 기사로 서임된지라 경의 칭호로 불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 옆에서는 귀족 출신 기사 몇 명이서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쯧쯧, 명색이 기사인 자가 저리도 체통을 지키지 못해서야...."
"이해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어찌 되었건 이제 우리는 같은 밥 먹는 한 식구이니."
"그건 그렇지."
그래도 귀족 출신치고는 다들 용병 출신 기사들에게 큰 반감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이종족을 사람 취급한다는 소문까지 듣고도 이곳에 모인 이들이었다. 거기에 타시드의 시험까지 통과한 자들이니, 아무리 귀족 출신이라도 아스레일처럼 상당히 생각이 트인 이들만 남은 것이다. 쉽게 말해 다들 성격 좋은 이들이었다.
귀족 출신의 젊은 기사 한 명이 검을 빼 들고 용병 출신 단원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청년이 가슴에 검을 올리고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용병 출신의 중년 사내가 검을 들어 겨누자 청년이 씨익 웃었다.
"아무리 단원끼리의 대련이라도 기사의 예법은 지키셔야죠?"
"그렇군, 아직 익숙지 않아서, 허허."
나이 어린 이의 충고에도 중년 사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족에 대한 소문을 듣고도 이곳으로 온 것, 타시드의 시험을 통과한 것은 용병 출신들 역시 마찬가지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이 이래저래 겹치다 보니, 안타레스 기사단은 전원이 고집은 세지 않고 성격 좋은 자들만 모이게 되었다.
탕! 타탕!
칼과 칼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기사가 대련에 임한다. 한여름의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문득 회랑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람 오늘도 어슬렁거리네?"
검은 머리의 한 사내가 산책이라도 나온 듯 회랑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그 뒤를 드워프 처녀가 조용히 따라간다.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저 사람, 누구요? 처음부터 이 성에 있던데."
"물어봤는데 시종들도 모르더군."
"딱히 하는 일도 없는 것 같고."
"항상 드워프 아가씨만 끼고 다니고."
안타레스 기사단치고, 저 흑발 사내의 정체를 궁금해 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분명 시종은 아니다.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상당히 고귀해 보인다. 그렇다고 레펜하르트 휘하의 기사나 귀족도 아닌 것 같다. 그저 가끔 모습을 드러내며 한가하게 성안을 거닐다가 슥 사라져 버리는, 실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아스레일 단장도 정체를 모르던데."
"진짜 누굴까요?"
☆ ☆ ☆
회랑을 지나치던 검은 머리의 사내가 힐끔 연무장을 바라본다. 뒤따르던 드워프 처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검을 휘두르고 싶으신가요, 기사 중의 기사, 카르사스 씨?"
"아, 그런 건 아닙니다, 틸라 양. 그냥 호기심에 잠깐 보았을 뿐."
카르사스가 온화한 눈으로 틸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틸라가 카르사스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에이, 몸이 근질근질하면 검 좀 휘둘러 보든가요."
"포로에게 함부로 무기를 줘도 되는 겁니까?"
"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배시시 웃는 틸라를 보며 카르사스도 함께 웃었다.
"하하...."
그가 이곳의 포로 생활을 한 지도 어느새 석 달째, 카르사스의 눈빛에는 더 이상 안타레스 백국에 대한 적의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는 레펜하르트를 원망하기도 했다. 자신의 꿈을 부수고,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켰으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테츠발트 경까지 죽인 원흉이 바로 레펜하르트이니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원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어디까지나 전쟁 중에, 자신이 섬기는 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비록 길이 달랐을 뿐 개인적인 원한으로 그를 적대한 것이 아니다. 전장의 원한을 계속 가지고 있을 만큼 카르사스는 속 좁은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전쟁에 패해서 목숨을 잃었을 자신을, 위험을 무릅쓰고 살려 주었으니 생명의 은인이라 여겼다.
'카르사스는 죽었다. 지금의 나는 이름 없는 사내일 뿐.'
홀가분하게 과거를 털어 버린 카르사스는 순순히 포로 생활을 즐겼다. 백왕성에 머물며 여러 이종족들과도 만났다. 자유로운 오크와 엘프, 드워프들을 만나며 그의 생각도 점점 바뀌었다.
안 그래도 사람 볼 줄 아는 안목이 뛰어난 카르사스다. 그가 만난 이종족들은 결코 노예로 지음받은 자들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긍지를 가지고 지성이 높은 이들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멍하니 바깥을 내다보는 카르사스를 향해 틸라가 물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카르사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유벨이 사실은, 굉장히 뛰어난 왕의 재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당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틸라가 깔깔 웃었다.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이 뭔데요?"
카르사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재치 있는 모습 말입니다. 제 눈앞의 여인은 분명 그런 모습을 하고 있군요."
"우와, 오글거려. 기사들은 항상 그런 식으로 말해요?"
"아마도 저만 그렇지 않을까요? 다른 기사들도 가끔 비슷한 표정 짓던데."
농을 던지는 카르사스를 보며 틸라가 빙그레 웃었다. 둘 사이에서 묘한 눈빛이 오간다. 틸라가 슬그머니 카르사스의 손을 잡았다.
"당신도 현명하고 재치 있어요. 아름다운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하는군요."
"아! 수염 기르면 멋있을지도?"
"내일부터 당장 기르겠습니다."
정색을 하는 카르사스를 보며 틸라가 다시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사스가 슬쩍 입을 열었다.
"틸라 양."
"네."
"당신들은 진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지요?"
"네, 저희 드워프들은 거짓을 구별하는 귀를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내 말의 진위도 쉽게 판가름할 수 있겠군요?"
틸라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카르사스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하면, 이 말의 진실을 판단할 수 있나요?"
틸라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장미꽃이 핀 듯 두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다.
"어, 어머...."
"곤란할까요? 역시 저는 드워프가 아니라 인간이니...."
무슨 소리냐는 듯, 틸라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인간이라든가 드워프라든가 하는 건 전혀 상관없어요!"
그리고 다시 자신이 저지른 짓을 떠올린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카르사스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틸라를 내려다봤다.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바뀌는데 실로 귀엽기 그지없었다. 평소에는 소녀 같은 외모이면서도 누님처럼 온화하게 대하더니 지금은 또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럼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별문제 없겠군요?"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인지 카르사스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 그게, 저기...."
말을 더듬던 틸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회랑 저편으로 도도도 달려갔다. 종종 걸음으로 멀어지는 틸라를 보며 카르사스가 혀를 찼다.
"아니, 나 감시 안 해요? 나 당신의 포로잖아요?"
하지만 틸라는 이미 저 멀리 사라져 버린 후. 카르사스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막상 말을 꺼내고도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귀족가 영애들을 잔뜩 만났을 때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이, 드워프 처녀에게 마음이 움직일 줄이야.
"유벨을 욕할 자격이 없었군, 나도."
☆ ☆ ☆
'아니, 쟤들이 전에 언제 저런 분위기가 됐지?'
카르사스가 서 있는 회랑의 반대편 복도, 그 코너에서 한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숨긴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막 오늘 치 업무를 끝내고 집무실을 나선 레펜하르트였다.
카르사스를 만나기 위해 오던 중이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묘해서 여태 앞에 나서질 못 했던 것이다.
'거참, 저것도 무슨 혈통인가? 사촌 형제가 나란히 드워프 여인에게 빠져 버리다니.'
카르사스도 카르사스지만, 틸라 역시 표정을 보니 싫은 눈치가 아니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남녀 관계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더니, 설마 저 두 사람이 저런 사이로까지 발전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하여튼 레펜하르트 입장에서는 실로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그가 카르사스를 찾은 이유를 생각하면 더 바랄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잘했다, 틸라! 나이스다!'
속으로 쾌재를 올린 뒤 레펜하르트가 슬쩍 회랑에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냈소?"
"아, 백왕님."
카르사스가 그를 보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마음속 깊이 승복한 터라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예를 표한 뒤 다시 허리를 펴며 카르사스가 빙그레 웃었다.
"덕분에 편안히 지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포로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군요."
"그거 다행이군요. 그런데 그 포로 생활, 슬슬 그만둘 생각 없습니까?"
"공짜 밥 그만 먹으라 이겁니까? 하긴, 요새 성내를 보니 슬슬 혼자 놀고 있기도 미안하던 참이긴 했습니다."
카르사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펜하르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도 지금 안타레스 백국의 행정적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바로 말이 통하니 좋군요."
역시 머리 좋은 놈은 상대하기 편하다. 레펜하르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카르사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꿈, 당신의 미래에 대해선 틸라 양에게 이미 들었지요."
그리고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실례지만 처음엔 제대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소리, 언제나 들었으니 전혀 실례될 것 없소. 심지어는 엘프인 시리스도 제대로 미친놈 취급했었는데, 뭘."
손을 내젓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카르사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며, 저들을 보니 내 시야가 좁았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지요. 하지만 분명 사람입니다."
그동안 이종족들을 접하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들, 그 모든 것이 혀끝에서 천천히 풀려 나온다.
"꼭 엘프나 드워프들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사람을 짐승 취급하는 문명의 끝이 좋을 리 없어요. 어째서 이렇게 철저히 감춰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은 눈빛으로 카르사스가 고개를 들어 레펜하르트를 응시했다.
"이것이 시대의 변화라면 나 역시 그 흐름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마침 기회가 되어 꺼낸 말이지만, 사실 생각 자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던 것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조만간 자신이 스스로 그를 찾았을 것이다.
카르사스가 다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명백히 주군을 대하는 태도로, 그가 단언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시켜 주시길. 시종이건 사무관이건 잘해 낼 자신이 있습니다."
레펜하르트가 활짝 웃었다.
"아,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리고 잽싸게 품을 뒤지더니 뭔가를 건넨다. 그것을 받아 든 카르사스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 이건 안타레스 백왕의 인장 아닙니까?"
레펜하르트가 건넨 것은 안타레스 백국의 지배의 상징인 인장의 반지였던 것이다.
"이걸 왜 절 줍니까?"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뭐든지 하겠다며? 백왕 대리 좀 하시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적이었던 사람에게 함부로 넘길 물건이 아닐 텐데요?"
진심으로 승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설마 모든 권한을 통째로 넘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순간 주군을 잘못 선택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을 정도였다.
기가 막혀 카르사스가 물었다.
"제가 딴마음 먹으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레펜하르트가 씩 웃었다.
"그 인장으로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안타레스 백국 내의 '인간'들에게 한해서요. 자, 묻겠는데 댁이 딴마음 먹으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카르사스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현재 안타레스 백국의 힘이라? 이종족 빼고, 레펜하르트 일행의 전력을 다 빼고 나면....
"...별로 없네요."
남는 것은 실력보다는 성격 보고 뽑은 저 안타레스 기사단과 천 명이 넘는 굶주린 유민들뿐이다.
'다행히 생각 짧은 주군을 모신 건 아닌 것 같군.'
살짝 안도하며 카르사스가 질문을 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다른 인간들의 수준을 끌어올려 확실한 전력으로 가꾸면 어쩌실 겁니까? 그러고 딴마음을 품으면?"
확실히 카르사스에겐 그만한 능력이 있다. 그는 기대하는 눈으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가 어떤 대답을 할까? 그 대답에 따라 주군으로 모실 이 사내의 도량이 파악된다.
목숨을 위협할까?
아니면 그래 봤자라며 오만하게 대처할까?
그도 저도 아니면 절대적 신뢰를 보이며 그를 믿는다고 할까?
하지만 레펜하르트의 대답은 그 모든 것을 벗어났다.
"틸라가 울 걸, 그럼?"
"...."
잠시 카르사스는 말문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모든 예상을 뒤집는 대답이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흡족한 답변이었다.
인장을 챙기며 카르사스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승낙해 주니 실로 고맙소. 자, 그럼...."
레펜하르트가 카르사스를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집무실로 가서 인수인계를 할 셈이었다.
회랑을 나서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젠 백왕 대리로 전면에 나서야 할 텐데... 얼굴이야 바꿨으니 괜찮지만 이름도 가명을 새로 만들어야겠지?"
잠시 고민한 뒤 레펜하르트가 카르사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이러스를 줄여서 보통 러스라고 부르니까, 카르사스 줄여서 사스 어떻소?"
카르사스가 살짝 표정을 구겼다.
"...왠지 전염병 걸릴 것 같은 이름이군요. 그냥 카를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럼 카를이라 부르지. 카를 백왕 대리, 잘 좀 부탁하오."
"업무상, 백왕 대리보다는 재상의 직책이 더 어울립니다. 재상직 주시죠."
"뭐든 가져가시오. 어차피 하는 일은 같을 텐데, 뭘."
☆ ☆ ☆
안타레스 백국의 재상 자리에 앉자마자 카르사스- 이제는 카를이란 이름을 쓰는 그는 곧바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능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유능했다.
레펜하르트가 제국 황제를 했던 경험이 있긴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지배자였지 실무자가 아니었다. 나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카를이 보기에는 허점투성이였다.
재상직을 맡자마자 카를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엘프 여인들의 실력을 정확히 판단해 그에 걸맞은 업무를 맡기는 것이었다. 본인들보다도 더 정확히 실력을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니, 그것만으로도 업무 효율이 30퍼센트는 올랐다.
백국 내의 군사 조직 역시 즉각 개편했다.
원래 레펜하르트는 별생각 없이 안타레스 기사들 휘하로 인간 병사 백 명을 대충 대여섯 명씩 나눠서 편제했었다. 하지만 카를은 기사단을 별개로 두고 병사를 지휘한 경험이 있는 용병 출신 기사 두 명을 골라 훈련을 맡겼다.
병력은 모여 있어야 힘을 발휘하는 법, 한 명의 기사와 대여섯 명의 병사 집단 스무 개보다는 스무 명의 기사단과 백 명의 단일화된 병력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모인 유민들의 신상명세를 파악, 선별에 들어갔다. 행정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카를은 인간의 됨됨이와 능력을 파악하는 데 대단히 뛰어났다.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가며 쓸 만한 이를 골라 중간직에 앉히고 농민 출신은 농경지 여기저기로 보내는 등 정력적으로 일을 해 갔다.
어떨 때는 강압적으로, 어떨 때는 회유를 해 가며 놀라운 솜씨로 백국의 인간들을 관리하는데, 지켜보던 레펜하르트가 감탄을 터트릴 정도였다.
"진짜 살려 두길 잘했다니까?"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카를이 안타레스 백국의 재상을 맡게 된 지도 어느덧 한 달째, 한결 시간을 벌게 된 레펜하르트는 그동안 밀린 무술 수행이며 마법 수련에 열중했다. 러스를 상대로 그라운드 레슬링 계열도 익히고, 마나 드레인으로 흡수한 마력을 안정화시키는 등 충실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호호호, 우리 카를 씨가 많이 유능하긴 하죠."
곁에서 도끼를 휘두르던 틸라가 좋아하며 신바람을 냈다.
그녀는 지금 레펜하르트, 시리스와 함께 무술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슬슬 공식적인 연인 관계가 된 카를과 틸라였지만, 카를이 워낙 바쁘다 보니 예전처럼 언제나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틸라의 두 손을 잡고 애원하듯 말했다.
"꼭 붙잡고 있어라, 틸라. 네가 우리 백국의 희망이다."
"호호호!"
잘난 남자 친구 얻은 틸라가 자랑스레 웃음을 터트린다. 그때 연무장 한쪽에서 무엇인가를 연습하고 있던 시리스가 레펜하르트를 불렀다.
"레펜하르트 님!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어, 시리스? 준비됐어?"
레펜하르트가 바로 곁으로 달려가 시리스를 살펴보았다. 진지한 표정으로 시리스가 양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입을 열었다.
"스필 라그라 덴 필카다, 나는 어둠을 사르는 불꽃, 적을 치는 한 자루 화살. 파이어 애로우!"
화염 화살이 허공에서 생성되더니 멀리 있는 과녁에 정확히 명중했다.
화르륵!
불타는 과녁의 모습에 시리스가 신을 내며 폴짝폴짝 뛰었다.
"성공! 성공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레펜하르트가 흐뭇해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시리스!"
시간이 생긴 레펜하르트는 슬슬 시리스에게도 본격적으로 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제 겨우 한 달이지만 그녀는 이미 마력을 느끼고 움직이는 감각은 물론, 벌써 1서클 마법 대부분을 숙달하고 2서클에 도전하고 있었다.
"저 마법에 재능이 있는 걸까요?"
"있어, 걱정 말고 계속 연습해. 내가 이미 미래를 얘기해 줬잖아?"
"그렇죠? 열심히 해야지!"
실제로 전생의 그녀는 마법에 입문한 지 15년 만에 8서클의 최고위 마법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배움이 느린 엘프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인 것이다.
'사실은 재능보다는 엘류시온의 목소리랑 은의 시대 유물로 온갖 편법을 쓴 덕분이었지. 게다가 마법 이해보다는 무작정 주입식으로 지식만 익히게 해서 진도 뽑았고... 하지만 굳이 이 말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미래를 통해 재능을 확인했으니 시리스도 한 점 의심 없이 마법에 열중할 수 있었다. 마음에 의심이 없으니 마법 실력도 한층 더 빨리 오르는 것 같다. 굳이 여기서 초 칠 이유가 없으니 레펜하르트도 입을 다물었다.
'저 진도 금세 막힐 테니, 3서클 입문하면 슬슬 예전처럼 가르쳐야지.'
그렇게 스스로를 단련하고, 시리스와 틸라를 봐 주기도 하며 레펜하르트가 한창 땀을 흘릴 때였다. 플로라가 연무장에 나타나 그를 불렀다.
"레펜하르트 님! 찾으셨던 이들이 왔어요! 지금 회견실에 있습니다!"
"아, 바로 갈게!"
대충 수건으로 땀을 닦고 레펜하르트가 플로라와 함께 연무장을 떠났다.
남은 시리스와 틸라도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슬슬 늦여름이지만 여전히 햇살은 뜨거웠다. 땀을 닦으며 시리스가 틸라에게 물었다.
"카를 씨랑은 잘 지내고 있나요? 어때요, 그 사람?"
"카를 씨야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하지요. 게다가 그 사람 요즘 점점 더 멋있어져서...."
붉어진 뺨을 가리며 틸라가 머리를 도리도리 흔든다. 시리스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게 멋있는 거라니....'
덥수룩한 수염으로 얼굴 반을 덮은 현재의 카를을 생각하며 시리스는 혀를 찼다.
드워프에게 남자다움의 상징은 바로 수염과 넓은 어깨!
그래서 카를도 틸라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수염을 기른 것이다. 엘프인 시리스의 미적 관점에서 볼 때는 원숭이랑 별 차이 없어진 것 같은데, 틸라는 남자다워졌다고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뭐, 틸라 양이 좋으면 다 좋은 거겠지.'
그때 틸라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시리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시리스야말로 어때요, 요즘?"
"뭐가요?"
"뭐긴, 레펜하르트 님 말이에요. 솔직히 예전부터 대놓고 시리스를 아끼는 게 노골적으로 보였는데."
"그, 그게...."
시리스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레펜하르트가 전생의 연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상냥하다는 것 역시 잘 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입장에서 답답해 죽겠거든요? 대체 시리스는 레펜하르트 님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어진 틸라의 질문에 시리스가 우물쭈물 손가락을 꼬았다.
"우웅...."
언제나 그녀를 아껴 주고 많은 것을 주려 하는 레펜하르트.
시리스도 물론 그가 싫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랑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사랑한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레펜하르트 님은 어째 남자라기보다는 아빠 같아서...."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틸라가 잠시 후 실소를 터트렸다.
"...우와, 그 소리 레펜하르트 님에겐 절대 하지 말아요. 좌절해서 또 방구석에 틀어박힐라."
"끄응... 하지만 정말 그런 느낌인걸요?"
"아, 그건 이해가 가요. 분명히 아직 20대 청년인데 이상하게 레펜하르트 님은 노인 같은 느낌이 들죠?"
그야 머릿속이 50대이니 당연하겠지. 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틸라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단 말이지. 따지고 보면 레펜하르트 님, 한 20년 조금 넘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왜 그리 나이 든 분위기가 풍기지? 얼굴도 사실 그리 노안도 아닌데. 덩치 때문인가?"
"호호...."
시리스는 그저 웃었다.
사실을 말할 수 없으니, 그저 웃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 ☆ ☆
회견실에는 남녀 혼성으로 이루어진 다섯 명의 인간들이 레펜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그들을 내려다보자 리더로 보이는 중년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명성 높은 권왕님을 뵈어 영광입니다. 바운티 헌터, 자칼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저의 동료들입니다."
"다들 만나서 반갑소."
이들은 타오반 상회를 통해 수소문한 바운티 헌터들이었다.
예전에도 레펜하르트는 테스론에 대한 정보를 좀 얻을까 싶어 바운티 헌터를 고용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돈도 없었고, 또 그 이후 크로방스 내전에 끼느라 이래저래 바빠서 자꾸 미루었었다.
그러다 이번에 테스론에게 호되게 당한 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보를 수집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대들에게 맡기고 싶은 의뢰가 있소."
손짓을 하자 플로라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자칼 일행에게 건넸다. 서류를 훑어보며 자칼이 눈을 빛냈다.
"테스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요. 오러 능력자인데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니...."
함께 서류를 바라보던 30대 여인이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첨언했다.
"하지만 팰러딘 크리스틴과 황금기사 유서스는 유명인이네요.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자취를 추적해야겠어요."
레펜하르트가 그들에게 한 의뢰는, 테스론과 그의 일행들의 현재 삶에 대한 모든 정보였다. 어디서 살고,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교류하며 어떤 세력을 지녔는지를 모두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착수금으로 금화 백 닢을 넣었소. 일을 성공리에 끝마친다면 이만큼의 금화 자루를 다시 받게 될 것이오."
바운티 헌터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금화 이백 닢이면 어지간한 의뢰가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큰 보상이었다.
물론 자칼은 여전히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만큼 이 일이 어렵다는 반증도 되니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자칼이 넙죽 허리를 굽혔다. 물러나는 바운티 헌터들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걸로 테스론에 대한 대비도 했고....'
레펜하르트가 바로 다음 사람을 들여보내라 손짓했다. 곧이어 40대 사내 한 명이 두툼한 서류를 들고 회견실로 들어왔다.
"이번 달 정보입니다, 백왕님."
사내는 그레이드 상회 소속의 상인이었다. 레펜하르트는 타오반 상회며 그레이드 상회와 도론 상회 등, 대륙 전역에 상로가 있는 상인들에게 각지의 소문을 수집하도록 의뢰를 해 매달 이렇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륙 각지에 흩어진 이종족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수고했소."
상인이 물러가자 레펜하르트가 서류를 받아들고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냥 테스론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지. 할 일은 계속 해야지.'
소문의 경중을 가리지 말고, 특이하다 싶으면 모두 수집하라 했기에 대부분이 쓸모가 없는 정보였다. 바실리 왕국 북부에서 오우거가 나타났다든가, 그라임 왕국 북해에서 거대한 문어 괴물이 나타났다는 식의 정보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개중엔 산골 마을에서 머리가 두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났다는 황당한 소문도 있었다.
그렇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류를 읽던 중이었다.
갑자기 레펜하르트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건?"
그것은 할라인 왕국 남부 밀림에서 트롤을 사냥하던 마물 사냥꾼들의 소문이었다. 트롤을 생포해 가던 중, 전설의 마물 상아어금니에게 습격을 받아 대부분 죽음을 당하고 몇 명만이 간신히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서류에 적혀 있었다.
"상아어금니라면 옛날 아틸카의 별명이었잖아!"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전생에서 그가 아틸카를 만난 것은 안타레스 제국 건국 후였다. 그 전까지 아틸카는 정해진 장소 없이 대륙 전역을 떠돌며 인간에게 붙잡힌 동족을 구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현 시대의 아틸카가 대체 어디 있을지 레펜하르트도 짐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찾았다! 할라인 왕국 남부라고 했지? 그럼 아틸카의 성격상 그 근처의 연금술사 길드를 습격하지 않을 리가 없지."
바로 회견실을 박차고 나왔다. 이 정보가 전해진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의 이야기였다. 시간이 늦으면 아틸카가 또다시 다른 지역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서둘러야 했다.
레펜하르트는 바로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여전히 마법을 연습하고 있는 시리스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시리스! 실란 불러! 러스랑 타시드도!"
제23장 상아어금니, 아틸카
1
할라인 왕국 남부의 해안 도시, 칼티잔.
역사 깊은 항구 도시인 이 칼티잔 시는 수많은 선박과 인구가 오가는 할라인 왕국의 중추 중 하나다. 선원들과 모험가들, 상인과 여행객들이 항시 상주하는, 할라인 왕국뿐 아니라 대륙 남부를 통틀어서 손꼽히는 거대한 교역 도시다.
그런 대도시이니만큼 칼티잔 시에는 온갖 세력이 밀집해 있었다.
마법학파가 건립한 마탑도 세 개나 되고 주신 세이어를 비롯, 각종 신전들의 숫자도 일곱이나 된다. 길드들의 숫자도 상당했다. 던전 탐사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모험가 길드, 마물 사냥꾼들이 모이는 헌터 길드, 각종 의뢰를 도맡아 하는 용병 길드는 물론 온갖 뛰어난 약품을 제작하는 연금술사들의 길드 역시 칼티잔 시에 지부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할라인 왕국과 그라임 왕국에 세력을 떨치고 있는 거대 연금술사 길드, 산타나의 눈물.
그 남부 지부는 칼티잔 시 서쪽에 위치한 3층 높이의 커다란 석조 저택이었다.
어지간한 귀족가를 능가하는 이 대규모 저택 곳곳에는 수많은 실험실과 약품 제조실로 가득했다. 연금술사들의 약품 조합법은 기밀 중의 기밀이니, 대부분이 공개가 되지 않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엄중히 관리되는 장소가 바로 지하실이었다.
흐릿한 화톳불 아래 커다란 지하 석실의 모습이 비친다. 각종 플라스크와 유리병, 그리고 정체 모를 파이프들이 잔뜩 비치된 석실 안에서 암울한 신음이 아우성친다.
"우우우...."
"아아...."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이들은 모두 푸른 피부에 깡마른 육체, 주걱턱을 지닌 흉악한 외모의 트롤들이었다. 열 마리의 트롤이 두꺼운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커다란 강철 우리에 갇혀 있었다.
강철 우리 사이를 오가며 트롤들의 상태를 살피던 연금술사 한 명이 문득 입을 열었다.
"3호의 상태가 조금 좋지 않은데?"
"식사량을 조금 늘리지. 최소한 한 달은 더 살려 둬야 하는데."
연금술사 중 하나가 양동이를 들고 3호라 불린 트롤에게 다가갔다.
우리에 갇힌 모든 트롤들의 입은 기구에 의해 강제로 벌려져 있고, 목구멍까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다. 연금술사가 파이프 끝에 이어진 깔때기에 양동이를 기울였다.
"옜다, 밥이다."
양동이에 담긴 것은 길드에서 나온 온갖 음식 쓰레기들이었다. 연금술사 하나가 빙그레 웃었다.
"역시 트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니까. 배탈 따위 나지 않으니 먹다 남긴 음식을 처리할 수도 있고."
"쓰레기도 처리하고 돈도 벌고. 효율적이지, 암."
썩은 오물 덩어리가 트롤의 목구멍으로 꿀럭꿀럭 넘어간다. 구역질을 느끼며 3호 트롤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아아아...."
하지만 식도와 직접 연결된 파이프를 스스로의 힘으로 빼낼 수가 없다. 굴욕감과 비참함 속에서 3호 트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아, 다른 놈들도 밥 줘야지."
연금술사들이 양동이를 들고 다른 트롤들에게 차례차례 들이부었다. 나직한 신음이 어두운 지하실을 가득 울렸다.
"우우우우...."
참지 못한 트롤 여인 하나가 눈물을 흘렸지만 연금술사들은 그저 지나칠 뿐이다. 지하실 가득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들리지 않는 비명과 절규 속에서, 연금술사들이 대화를 나눴다.
"이번 달 말까지 500병 더 납품하라는군."
"그럼 슬슬 한 마리 더 잡아야겠네."
트롤들이 갇힌 강철 우리에는 저마다 레버가 하나씩 매달려 있었다. 연금술사가 그중 하나를 골라 레버를 당겼다.
챙챙챙챙!
쇠사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트롤의 식도까지 박혀 있던 파이프가 뽑혔다. 간신히 목이 해방된 트롤이 통한의 포효를 터트리려던 차였다.
덜컹!
우리 바닥이 열리며 묶여 있던 트롤이 그 상태로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는 이미 수십 개의 칼날이 어지러이 교차한 채 무서운 속도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마법진을 설치해 만든 일명 '트롤 분해 설비'였다.
"으아아아악!"
칼날의 폭풍 속으로 트롤이 떨어지며 비명을 터트렸다. 그 비명은 이내 요란한 쇳소리 속에 묻혀 버렸다. 칼날이 트롤의 전신을 산산이 찢어발겼다.
그야말로 '회 쳐진' 트롤의 육편이 사방으로 날리는 걸 보며 연금술사들이 도로 레버를 밀었다.
"잘 처리됐네."
"그러게."
이제 저 박살 난 트롤은 정제용 설비로 향한 뒤, 체내의 모든 혈액이 남김없이 뽑힐 것이다. 트롤의 피를 한 방울이라도 더 뽑기 위해 고안해낸 이 설비라면 트롤 한 마리당 500병어치의 힐링 포션 재료를 채취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석실 한 편에 설치된 거대한 플라스크 속으로 트롤의 피가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똑, 똑, 똑....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연금술사들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트롤 살해는 몇 년째 계속해 온 일상이었다. 그들에게 이 트롤들은 어디까지나 힐링 포션을 제조하기 위한 재료의 '일부'일 뿐이다.
힐링 포션은 수많은 모험가, 여행자들이 애용하는 물건이며, 그것이 트롤의 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이가 없다.
하지만 그 힐링 포션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는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용한 결과물이라면,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거쳐서 생산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 저토록 처참하고 고통 가득한 과정일지라도 그저 힐링 포션이 예전에 비해 많이 값이 싸져서 다행이라며 좋아할 뿐이다.
문득 묶여 있는 트롤 사내와 여인을 번갈아 바라보며 연금술사가 입맛을 다셨다.
"아, 이놈들을 번식시킬 수 있으면 참 편할 텐데."
"그러게. 본부에서는 아직도 그 방법을 개발하지 못한 건가?"
트롤처럼 가치 높은 '가축'을 번식시킬 수 있다면 안정적으로 힐링 포션을 공급할 수 있으니 실로 유용할 터였다. 그래서 연금술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트롤 번식에 힘을 써 왔다. 강력한 마법이나 독으로 정신을 마비시킨 뒤 암수를 한 방에 넣고 교미시키는 시도도 수차례 해 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암컷이 새끼를 잉태하는 족족 유산해 버리는 것이다.
"분명 저것들이 야생에서 번식을 하니, 방법이 있기는 할 텐데 말이야."
"그러게. 뭔가 모자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뭔지를 모르겠어."
아무리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지만, 이 연금술사들은 저런 지독한 말을 너무도 태연하게 하고 있었다. 양심의 가책 따윈 전혀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연금술사들도 저 광경이 너무 잔인해 보인다는 것쯤은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굳이 이 설비를 극비 중의 극비로 감추겠는가? 소나 말을 죽이는 도축장도 훤히 공개되어 있는데.
짐승들을 도축하는 것과 트롤을 갈아 버리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계속 트롤을 관리하는 연금술사들이, 트롤이 평범한 짐승이 아니란 걸 모를 리가 없다. 지내다보면 자연스럽게 트롤이 사실은 인간처럼 지성을 지니고 감정을 지닌 이들이란 걸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꼴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무시한다. 뭔가 아니란 느낌을 받으면서도 애써 현실을 부인한다.
익숙함은 무섭다.
스스로에 대한 세뇌는 어느새 진실이 된다.
이제 이들에게 트롤은 원숭이처럼 인간을 닮은, 마물일 뿐이다. 결코 사악한 자들이 아니건만, 이 연금술사들은 태연하게 자신의 업무를 행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소문 사실일까?"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연금술사 하나가 동료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 런든 일행 말인가?"
남부 밀림에서 트롤 하나를 생포했다가 놓친 마물 사냥꾼들의 소문을 떠올리며 연금술사가 혀를 찼다.
"안 그래도 지부장님도 실망이 크다더군. 생생한 트롤 하나 들어온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난 상아어금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세. 그거, 진짜일까?"
"상아어금니라...."
연금술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
세상에는 미신처럼 알려진 일이지만, 적어도 트롤과 관련된 일을 하는 연금술사들에게 상아어금니는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다.
지난 10년간 수많은 연금술사 길드가 저 상아어금니의 습격을 받아 지부를 잃고 트롤들을 빼앗겼다. 산타나의 눈물 역시 그 피해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지난 4년간 세 개의 지부가 상아어금니에 의해 불타 폐허가 되었다.
체면 때문에 그 존재를 미신처럼 꾸며 내긴 했지만, 당사자인 연금술사 길드들은 저 괴물 트롤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사 하나가 부르르 떨며 말했다.
"으, 설마 이곳에도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칼티잔 시는 할라인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다. 설마 아무리 그 트롤이 신출귀몰하다지만 이런 인간들의 세상 한복판에 나타날까?
"하지만 이제까지 상아어금니가 모습을 드러내고 인근 지부들이 피해를 보지 않은 적이 없었잖아?"
"안 그래도 디플 지부장님도 꽤 걱정하시는 것 같더군. 그래서 이번에 귀한 손님도 모셨다더라."
"귀한 손님? 상아어금니를 상대할 만큼 강한 자가 칼티잔 시에 있던가?"
이야기를 들은 연금술사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들은 상아어금니의 소문 중에는 이름난 기사단 하나를 통째로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 한들 과연 그 괴물 트롤의 상대가 될 지?
"그게 말일세. 새로운 오러 능력자 카피르 경께서 이 도시에 오셨다는 소문, 혹시 들었나?"
☆ ☆ ☆
산타라의 노래 남부 지부 저택, 3층.
수많은 요리가 차려진 화려한 식탁에서 세 명의 사내가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화려한 인테리어 아래 시종들이 예를 갖추어 식사 시중을 든다. 맞은편에서 검은 로브를 입은 중늙은이가 연신 와인을 따라 주며 미소를 지었다.
"허허, 명성 높으신 카피르 경을 만나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가문의 영광은 무슨. 디플 지부장이 별 볼 일 없는 이 무부에게 너무 금칠을 하시는군."
50대의 건장한 사내가 술잔을 받아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카피르 폰 스한.
그는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강국, 할라인 왕국에서도 일곱 명밖에 없다는 오러 유저 중 하나였다. 검의 명가로 이름 높은 스한 자작가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마물 사냥과 기사 수행을 통해 실력을 쌓은 카피르는 1년 전 결국 오러를 각성해 할라인 왕국의 최강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나이에 비해서는 꽤나 늦게 오러 능력자가 된 케이스다.
디플이 곁에 앉은 동년배의 노인 두 명을 보며 마저 인사를 건넸다.
"뿐만 아니라 마법사 마룬드님과 블레이 신관님마저 왕림해 주셨으니 정말 평생에 남을 기억이 아니겠습니까?"
카피르와 함께 식사 중인 이 50대의 사내들은 스한 자작가에 소속된 7서클의 마법사 마룬드와, 카피르와 평소 친분이 있던 주신 세이어의 신관 블레이였다.
모두 젊은 시절부터 카피르와 함께 이런저런 모험을 함께 하던 이들로, 나이를 먹고 자리를 잡았음에도 여전히 젊을 적의 우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번에 칼티잔 시에 온 이유는 다들 나이도 먹었고 제자들도 키워 삶이 안정이 되니, 휴식도 취하고 바다 구경도 할 겸 여행을 온 것이다.
딱히 공무로 온 것이 아니니 그냥 조용히 구경이나 하다 가문으로 돌아갈 셈이었는데, 디플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을 초대하며 자신이 모시고 싶다고 아부를 해 댄 것이다. 공짜로 재워 주고 밥 준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어 셋 다 별생각 없이 이 저택에 묵고 있었다.
"그럼 편안히 쉬시기를.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면 시종들에게 말씀하십시오. 이 디플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 지금도 이미 지나치게 대접을 받고 있소. 불편할 리가 있나."
"다행입니다."
카피르가 고개를 젓자 디플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인 디플의 입가에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이거라면 만약 상아어금니가 이곳을 덮친다 해도 아무 문제 없겠지!'
디플은 저 전설의 트롤, 상아어금니가 얼마나 강력한 마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괴물 트롤을 확실하게 상대하려면 적어도 오러 능력자나 8서클의 대마법사는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돈 잘 버는 연금술사라 해도 저 정도의 강자를 고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존심 강한 오러 유저들은 일국의 위기에나 모습을 드러내지, 고작 용병이나 모험가처럼 의뢰를 받아 움직일 리가 없다. 8서클의 마법사 역시 오러 유저와 맞먹는 강자, 일국의 황궁 마법사 자리를 차지하거나 자신의 마탑을 세우고 떵떵거리는 이들이다.
돈으로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설사 가능하다 한들 그들에게 고작 '트롤' 따위를 상대하라고 했다간 불호성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마물에 불과한 트롤이 오러 능력자와 맞먹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는 말 따위 아무도 믿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디플이 선택한 것이 바로 '초대'였다.
카피르 일행이 칼티잔 시에 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디플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바로 달려가 명성 높으신 오러 유저를 모시고 싶다며 남부 지부로 데려와 극진한 대접을 했다.
혹시나 상아어금니가 나타난다면 기사의 명예를 염두에 둔 카피르가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래도 손해 볼 것은 없지.'
그러면 그냥 오러 유저 카피르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인맥을 쌓게 되는 것뿐이다. 밑져야 본전이다.
"그럼 마저 드십시오. 저는 잠시 일이 있어서...."
디플이 방을 떠나자 카피르 일행도 식사에 열중했다. 고기를 썰어 입에 가져가며 카피르가 빙그레 웃었다.
"이것 참, 저 디플이란 양반, 사람 볼 줄 아는구먼."
이들은 디플의 속내에 대해서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아어금니가 실존한다는 사실은 연금술사들 사이에서만 알려진 비밀 중의 비밀,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카피르 일행이라도 설마 저런 목적으로 자신들을 초대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흐흐, 오러에 각성하고 나니 참 세상이 바뀐 기분이란 말이야? 마룬드, 자네도 8서클에 들게 되면 내 기분을 알걸세."
짐짓 거만한 척 턱을 빼들며 카피르가 말했다. 물론 진짜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친구 앞에서 농담을 던지는 것이다.
삐친 얼굴로 마룬드가 포크로 카피르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잘났다, 정말. 아직 7서클인 인간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한심하다는 듯 블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두 사람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아이고, 지금 자네들 나이가 몇인가? 어서 밥이나 처먹게."
☆ ☆ ☆
검푸른 밤바다 수많은 선박들이 정박한 선착장 사이로 두 명의 병사가 창을 든 채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루한 지 문득 병사 한 명이 늘어져라 입을 벌린다.
"하아아암."
하품을 한 뒤 중년 병사, 스미드가 저 멀리 항만에 정박한 범선들을 바라보았다. 돛이 여러 개씩 달린 큰 배들이었다. 스미드가 문득 아련한 눈빛을 지었다.
"나도 저렇게 배나 타고 멀리 떠나 볼까?"
고참병을 향해 젊은 병사, 빈스가 물었다.
"스미드 씨도 선원에 뜻을 품은 적이 있습니까?"
"젊을 적에는. 하지만 선원들 이야기 듣고 관뒀지. 저게 좋아 보여도 막상 타면 개고생이라더라."
"그래도 봉급이 세잖습니까?"
빈스가 아쉬운 눈으로 선박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젊은 빈스에게는 술집에서 떠드는 선원들의 모험담이 꽤나 매력적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스미드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빈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 이래서 젊은 것들은. 세면 뭘 해? 가면 반은 죽어서 돌아오는데."
저런 큰 배들은 근해가 아닌 대륙 남쪽의 해안 군도까지 향하는 배들이다. 원거리를 나서는 무역선이나 어선들은 수확물도 많지만, 그만큼 위험도도 크다.
"얼마 전 자이언트 크랩 잡으러 가서 전멸한 이루만 호 이야기 못 들었어?"
"전 살아 돌아올 자신이 있어요."
"보통 그 소리 하는 놈들이 제일 먼저 죽더라."
핀잔을 던진 뒤 스미드가 창에 몸을 기대었다.
"해안 경비도 봉급 짜지 않잖아? 그저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최고라고."
"그렇지만...."
뭔가 불만스러운 듯 빈스가 표정을 구긴다.
스미드는 말없이 웃었다. 젊은이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인생의 소중함을 떠들어 봐야 먹힐 리가 없다.
'너도 나이 먹어 봐라. 내 말이 진리임을 알게 될 거다.'
그렇게 한가하게 부두를 순찰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빈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어, 갑자기 안개가 끼네요?"
스미드의 안색이 굳었다.
"어라? 안개가 낄 날씨가 아니었는데?"
해안 경비대로 잔뼈가 굵은 스미드였다. 적어도 해안가의 날씨를 파악하는 수준은 어지간한 선원 못지않은 경험을 쌓은 그였다.
그런 스미드가 보기에 오늘의 밤바다는 맑아야 했다. 밤안개는 예고 없이 끼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전조가 있다. 이렇게 느닷없이 안개가 일어 오를 리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지?"
긴장하며 스미드가 창을 고쳐 쥐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둥, 둥, 둥....
동시에 묘한 노랫가락 같은 것이 들렸다.
"어스름한 황혼의 호수, 구름의 여울로부터 검은 홍수가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스미드와 빈스는 그 노래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뭐지, 이 괴상한 소리는?"
당황하는 두 사람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날렵한 근육질 체구에 전신에 문양을 그린 트롤이 새하얀 어금니를 드러내며 안개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으에엑!"
"흐익!"
놀란 두 사람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트롤이 양손을 뻗어 두 사람의 눈앞을 흔들었다. 손가락을 연달아 튕기며 트롤이 뇌까렸다.
딱, 따닥!
"솜구름 실려 오는 양귀비의 밤."
줄 끊어진 인형처럼 두 병사가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수십 가닥의 땋은 머리칼을 흔들며 트롤이 쓰러지는 두 사람을 받아 들었다.
조심스레 병사들을 근처에 눕히며 트롤이 중얼거렸다.
"죄 없는 이들은 해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눈감아 주길 바랄 뿐."
그렇게 잠의 주술로 이들을 잠재운 뒤 트롤이 고개를 들었다.
안개가 점점 밀려가 칼티잔 시 전체를 뒤덮어 간다. 하늘을 보며 트롤이 한탄을 흘렸다.
"통곡이 암천을 떠도는구나."
둥, 둥, 둥둥둥....
트롤이 양 허벅지에 매달린 작은 북을 리드미컬하게 두드렸다. 그의 입에서 주술적 가락이 흘러나왔다.
"나는 안개, 스며드는 어둠, 바람처럼 왔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
은신의 주술을 일으켜 주변의 안개와 합일시킨 뒤 트롤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구답게 곳곳에 내려놓은 짐들이 있었다. 수많은 상자들 위에 덮인 방수포 하나를 벗겨 낸 뒤 망토 삼아 머리 위로 두른다. 그렇게 전신을 감추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자 겉보기엔 인간과 크게 차이 없어 보였다.
"일족이여,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게."
방수포를 덮은 트롤이 빠르게 걸음을 놀려 인간의 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이내 그의 모습이 자욱한 안개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소등이오! 소등이오!"
야경꾼들이 고함을 지르며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항구 도시인 칼티잔 시는 해가 져도 돌아다니는 인구가 상당하기에, 주요 거리에는 기름을 태우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다. 자정이 되자 기름을 아끼기 위해 가로등을 끄는 것이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내다보며 시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레펜하르트 님. 그 아틸카인가 하는 트롤, 대체 언제쯤 나타나는 거예요?"
그녀는 지금 창문 너머로 비치는 산타라의 눈물 남부 지부 건물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저 거대한 3층 저택은 그들이 묵고 있는 웨이스톤 여관과 정확히 대로를 마주하고 있어 이렇게 2층 창문에 서 있기만 해도 대부분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실란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무리 봐도 아무 일 안 생길 것 같은데... 확실한 거예요, 그 정보?"
레펜하르트가 혀를 차며 머리를 긁었다.
"으음, 오늘은 분명 나타날 거야, 아마... 아마도?"
묘하게 자신 없는 듯한 목소리에 타시드와 러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타시드가 슬그머니 러스에게 귓속말을 흘렸다.
'어째 은인이 이번엔 꽤나 자신 없어 하시는데?'
'그렇지? 언제나 세상만사 다 아는 것처럼 굴던 양반이 말이야.'
"어이, 다 들리거든?"
뚱한 레펜하르트의 목소리에 두 사람이 뜨끔하며 딴청을 피운다. 잘도 죽이 맞는 러스와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혀를 찼다.
'에잉, 벌써 사흘째 이러고 있으니 다들 지겨워하는 것도 어쩔 수 없나....'
일주일 전, 아틸카의 소식을 들은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동료들을 데리고 안타레스 백국을 출발했다. 물론 백왕성의 인간들에겐 영지 시찰을 다녀온다고만 알려 두었다. 테스론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의 행적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지 않았다.
할라인 왕국은 단하임 일족의 고향인 스펠라트 사막 근처에 위치하기에 티다엔 다이만 포털을 통해 금세 이동할 수 있었다. 나흘 만에 레펜하르트 일행은 상아어금니의 소문이 퍼진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칼티잔에 도착했다. 이후 연금술사 길드 근처에 여관을 잡고 계속 아틸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문제는 레펜하르트도 언제 아틸카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사흘 내내 하루 종일 여관방에 처박혀 밤새도록 저택을 감시하고 낮에 자는 생활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일행을 달래며 레펜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줘. 트롤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아틸카의 존재가 꼭 필요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시리스가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저택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러스가 칼티잔 시 전도를 펼치고 계획을 점검했다.
"일단 아틸카란 그 트롤이 나타나면 저랑 실란은 미리 성문으로 가서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타시드와 시리스는 형님과 함께 움직인다, 이거죠?"
"그래. 아무래도 아틸카 입장에서는 인간보다는, 함께 학대받는 오크나 엘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더 말 섞기 편할 테니까."
뭐, 계획이라 봐야 별로 복잡할 것도 없었다. 아틸카가 나타나면 재빨리 저택으로 달려가 트롤 구출을 돕고, 그와 함께 후딱 이 도시를 탈출하는 것이 전부다.
어깨 너머로 지도를 훔쳐보던 타시드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은인이여, 그 트롤은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시오?"
오크들도 레펜하르트와 신뢰를 쌓기 위해 한바탕 호투의 의식을 벌여야 했었다. 트롤이라고 인간인 레펜하르트를 순순히 믿어 줄 리가 없는 것이다. 지금 만약 아틸카를 만나게 된다면 전투 도중이 될 텐데, 흥분한 상태에서 과연 말이 통하기나 할지 걱정도 됐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열심히 설득하는 수밖에 없긴 해. 그래도 내가 트롤어를 할 줄 아는 데다가 타시드와 시리스를 대동할 테니까,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분명 진심이 통할 거다."
너무 낙관적인 생각처럼도 들리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아틸카는 인간을 증오하는 와중에도 죄 없는 이에게는 결코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 항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현명한 트롤이었다. 일단 트롤 구출에 도움을 준다면 비록 경계는 할지언정 대놓고 적의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 여유를 가지고 차근차근 대화하다 보면 아틸카의 혜안이 레펜하르트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아, 어쨌거나 아틸카가 나타나야 뭐가 되는데 이것 참...."
레펜하르트가 침대에 벌렁 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시리스가 문득 툴툴거렸다.
"그나저나 오늘 밤은 왜 이리 안개가 짙게 끼나 모르겠네요? 감시하기 힘들게...."
2
밤안개가 짙게 드리워진 커다란 3층 저택.
저택 주위를 길게 두른 높은 담장 아래 세 명의 보초가 한 조가 되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열심히 경계를 곤두세우며 벽을 따라 걷던 중이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그들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져 내렸다.
"하압!"
거대한 그림자가 동료를 덮친다. 쓰러진 동료가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며 피를 토한다. 다른 경비들이 당황하며 정체불명의 그림자를 향해 창을 들었다.
"뭐, 뭐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담벼락에는 혹시 모를 침입자를 대비해 뇌격이며 화염이 발동하는 온갖 함정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저 그림자는 분명 저택 부지 내로 침입했거늘 아무 마법진도 발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림자가 허리를 펴고 모습을 드러낸다. 달빛 아래 여실히 드러나는 푸른 몸체를 본 순간 경비들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으엑?"
"트롤? 왜 트롤이 여기에?"
한낱 경비병인 그들에겐 상아어금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도시 한복판에서 몬스터와 조우할 줄은 생각도 못한 경비들이 일순 굳었다.
뒤이어 아틸카의 수도가 좌우로 날아가 경비들의 목을 땄다. 피분수가 솟구치며 두 개의 머리통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후두둑!
쏟아지는 혈우 속으로 아틸카가 달려 나갔다.
'속전속결!'
아무리 기척을 죽였다지만 경비를 죽였으니 이내 들킬 터였다. 서둘러야 했다. 넓은 곳에서 인간들에게 포위를 당하면 골치 아프다. 복잡한 구조물 내에서 싸우는 것이 효율적이다.
푸른 트롤이 달빛 아래 놀라운 속도로 정원을 가로지른다. 전신을 맴도는 주술력 때문에 그 많은 방어 마법 중 어느 것 하나 발동되는 것이 없었다.
저택 현관으로 달려가며 아틸카가 괴이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호로로로로로...."
굳게 잠겨 있던 현관문이 저절로 잠금쇠가 풀리며 벌컥 열린다. 아틸카가 안으로 뛰어들자 보초를 서고 있던 경비병이 경악해 두 눈을 떴다.
"으억? 뭐야?"
그것이 그의 유언이 되었다. 아틸카의 오른손이 경비병의 목을 가볍게 비트니 비명조차 없이 절명해 버린다. 그때 저택 복도에서 순찰을 돌던 갑옷 차림의 사내 두 명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헉!"
"왔다! 상아어금니다!"
이들은 일개 경비와 달리 길드에서 정식으로 키운 전사들이었다. 당연히 상아어금니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
사내 하나가 잽싸게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퍼엉!
연기가 피어오르며 요란한 폭음이 일어난다. 연락용 폭약이었다.
이제 이걸로 저택의 모든 이들에게 침입 사실이 알려지리라.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덕에 이내 복도 여기저기서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틸카가 혀를 찼다.
"쳇, 결국 들켰나."
하지만 그리 실망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저택까지 돌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적 달성은 했다.
"오너라! 간악한 인간들아!"
아틸카가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질렀다. 물론 트롤어로 외쳤기에 인간들이 듣기엔 광포한 포효로 들릴 뿐이다.
"저 괴물을 잡아!"
"저 괴물의 목을 베는 자에게 금화 천 닢의 포상이 기다리고 있다!"
"으아아아!"
탐욕과 공포가 어우러진 채, 길드의 전사들이 창과 검을 빼 들고 아틸카에게 돌격하기 시작했다.
☆ ☆ ☆
저택 전체가 소란스럽다. 식사 중이던 카피르가 인상을 썼다.
"무슨 난리지?"
카피르가 슬쩍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아직 오러를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기감만으로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주변을 모두 인식하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대충 저택 1층에서 수많은 이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블레이도 입맛이 떨어진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디플이 들어왔다. 그가 땀을 흘리며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귀한 분을 모셨는데 하필 이런 일이...."
"대체 무슨 일이오?"
"그게, 키우고 있던 트롤 중 하나가 탈출해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상아어금니의 존재를 외부에 알릴 수는 없다. 그래서 디플은 거짓말로 이들에게 핑계를 댔다.
"생각보다 난폭해서 소동이 좀 길어지는군요. 물론 우리 전사들이 계속 싸우고 있으니 곧 진정될 것입니다만 제법 피해가 커서...."
은근슬쩍 자신들의 힘겨움을 피력하는 디플의 모습에 카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런, 그렇다면 우리가 좀 도울 부분이 있겠소?"
"그야 오러 유저이신 카피르 경께서 나서시면 트롤 따위야 순식간에 제압이 되겠지요. 하지만 귀한 손님에게 어찌 그런 부탁을...."
신관 블레이와 마법사 마룬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레이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도 밥값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소? 허허허."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디플이 고개를 숙였다.
"명성 높은 세 분께서 마침 이 자리에 계시니 실로 하늘의 도움입니다. 감사합니다!"
☆ ☆ ☆
지하실로 향하는 저택 1층 복도, 그곳에서 지금 아비규환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압!"
밀려오는 전사들의 머리 위로 아틸카가 날아오른다. 실로 놀라운 점프력이다. 낙하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날카로운 푸른 손톱이 선두에 선 전사의 머리통을 으깨 버렸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사들이 치를 떨며 외쳤다.
"젠장!"
"빌어먹을 괴물 같으니!"
욕설을 내뱉으며 전사들은 창을 들어 아틸카의 사방을 에워쌌다. 십여 개의 창날이 일제히 아틸카를 노리고 날아왔다.
"흥!"
코웃음을 치며 아틸카는 허리를 굽혀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바닥에 양손을 짚은 채 물구나무를 서며 풍차처럼 양다리를 휘둘렀다.
부우웅!
바람이 일며 창대가 일제히 튕겨 나갔다. 아틸카의 공격이 이어졌다. 공중제비를 넘으며 드롭킥으로 왼쪽 전사의 가슴을 걷어차고 이내 한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허리를 비틀어 반대편을 두들긴다.
퍽! 퍼퍽!
춤을 추는 듯한 화려한 공격 앞에 전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다들 가격당한 가슴이며 두부頭部가 움푹 파인 것이 보나 마나 즉사였다.
죽어 간 동료들의 참상을 보며 전사들이 분노를 터트렸다.
"자, 잔인한 놈!"
"역시 마물이로구나!"
아틸카의 입에서 싸늘한 공용어가 흘러나왔다.
"우습구나. 너희들이 잔인을 논하느냐?"
항구의 병사들과 달리 이 전사들은 연금술사 길드 소속, 아틸카도 이들에겐 결코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트롤의 고혈을 짠 황금으로 봉급을 받는 자들.
"그렇다면 그 피에 물든 돈의 대가 역시 각오해야 할 터다!"
아틸카의 신형이 전사들 사이를 빠르게 누볐다. 창칼을 찔러 오는 이들을 향해 달려가며 북을 두들긴다.
둥둥둥!
독특한 가락이 그의 어금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드러난 핏줄 펄떡이니 그 짐 무거워 뒤뚱거린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전사들 몇 명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무기를 던졌다. 보이지 않는 기이한 힘이 그들의 몸을 멋대로 조종한 것이다.
"으헉!"
"으헤헥!"
"뭐냐, 이 사술은?"
당황한 전사들을 향해 아틸카의 발차기가 연달아 퍼부어진다. 연신 돌려차기를 날리며 아틸카는 무장 해제된 전사들을 걷어찼다. 킥이 명중될 때마다 철퇴로 맞은 것처럼 피부가 찢어지고 뼈가 부러져 사방으로 선혈이 튀어 오른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복도 좌우 벽이 인간의 피로 시뻘겋게 도색되었다. 시산혈해 속에서 살아남은 전사들이 공포에 질려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저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이건 미친 짓이야!"
도주하는 전사들의 등을 향해 아틸카가 양 손가락을 연달아 튕겼다.
딱! 딱! 딱! 딱!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바람의 칼날이 쏘아져 전사들의 등을 베어 냈다. 쩍 벌어진 상처를 드러내며 모든 전사들이 채 도망도 가지 못하고 죽어 갔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마흔 명이 넘는 단련된 전사들이 아틸카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 채 죽은 것이다.
자욱한 피 웅덩이 속에서 아틸카가 고개를 돌렸다. 바람을 느끼니 이내 지하로 통하는 비밀문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주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아틸카는 조심스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계단 끝에 위치한 거대한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안에서 일에 열중이던 연금술사 두 명이 멀뚱히 아틸카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뭐야?"
"트, 트롤?"
지하실이 워낙 깊숙한 곳에 위치하다 보니, 이들은 위에서 그 난리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연금술사들이 멍청한 얼굴로 아틸카를 바라보더니 발작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악!"
"사, 상아어금니!"
아틸카의 시선이 석실 안으로 향했다. 온갖 기괴한 연금술사들의 기구, 그 한쪽에 거대한 강철 우리가 줄지어 놓인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에, 실로 비참하게 묶여 있는 동족들의 모습도.
"아아...."
분노에 찬 신음이 아틸카로부터 흘러나왔다. 연금술사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뒷걸음질을 치려는 찰나.
"어림없다!"
바람이 일며 순식간에 아틸카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분노와 증오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연금술사들을 내려다본다.
"으아아아...."
공포에 질린 이들의 머리통을 커다란 푸른 손이 하나씩 붙잡았다. 트롤의 괴력이 손아귀를 타고 연금술사들의 머리통을 옥죄어 갔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연금술사들이 버둥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사, 살려...."
그 상태로 둘을 들어 올리며 아틸카가 이를 갈았다.
"고통스럽게 죽어 마땅한 자들!"
우드드득!
인간의 머리통이 두부처럼 으깨지며 뇌수를 토해 냈다. 시뻘건 혈액이 푸른 손가락을 따라 흐른다.
시체를 팽개친 뒤 아틸카는 강철 우리로 다가갔다. 어서 빨리 저들을 저 지옥으로부터 구해야 했다.
그때였다.
"뭐야? 저거 그냥 트롤이 아니잖아?"
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강렬한 기운이 아틸카의 전신을 바늘처럼 찔러 왔다. 아틸카가 긴장하며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이 정도로 강한 기운을 품는 이라니?'
세 명의 인간이 지하실 입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카피르는 긴장한 얼굴로 눈앞의 트롤을 바라보았다.
이미 이곳을 내려오며 참상을 본 터였다. 일개 트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대화를 했나 싶었는데 정작 보니 그것도 아니다.
"저거... 상아어금니잖아?"
"응? 그 마물 사냥꾼들의 미신 말이야?"
카피르의 말에 마룬드와 블레이도 인상을 쓰며 아틸카를 바라보았다.
디플은 이들을 너무 무시했다. 지금이야 자리 잡고 요직에 앉아 있지만, 젊을 적엔 대륙 각지를 떠돌며 기량을 키우고 모험을 하던 이들이었다. 상아어금니에 대한 소문도 못 들었을 정도로 경험 없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저거 진짜 있는 거였어?"
카피르가 혀를 찼다. 저 미신 속의 존재가 눈앞에 당당히 서 있는 것을 보니, 디플이 왜 굳이 자신들을 초대했는지 짐작이 갔다.
마룬드가 인상을 구기며 욕설을 뱉었다.
"으음, 어쩐지 잘 대해 준다 했다. 디플, 이 음흉한 놈 같으니."
블레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에 공짜 없다더니 맞는 말이군."
마룬드가 카피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쩔 텐가, 자네는?"
"괘씸하긴 하군. 한 소리 해야겠어. 기껏 밥 한 끼 얻어먹고 우리 셋이 힘을 쓰면 크게 적자잖아?"
블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넘어갈 수도 없지 않소?"
이용당한 기분이 더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많은 인명이 죽어 갔는데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카피르가 허리에서 커다란 브로드 소드를 뽑아 들었다. 마룬드와 블레이도 각자 마법과 기도를 준비했다.
긴장한 얼굴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아틸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강한 자들이군."
"어? 트롤이 말도 하네?"
카피르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오크나 엘프, 드워프처럼 인간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과 달리 트롤은 그저 힐링 포션의 재료로나 인식될 뿐이다. 거의 조우할 일이 없으니 대부분의 인간들이 트롤은 오우거나 놀처럼 지성이 없는 저급한 몬스터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놈일세."
혀를 내두르며 카피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허리 아래로 늘어트린 브로드 소드, 그 검날을 따라 붉은 광채가 흘러내렸다. 오러 능력자의 상징, 블레이드 오러였다.
"그럼 후딱 끝내고 디플 그 작자에게 잔소리 하러 가지!"
긴장감 없는 표정으로 카피르가 몸을 날렸다. 오러 능력자다운 스피드로, 단숨에 아틸카의 정면으로 쇄도하며 검을 내리쳤다.
"죽어라!"
순간 아틸카가 몸을 틀며 공격을 피해 냈다. 카피르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단순한 일격이지만 오러 유저가 휘두른 검이었다. 설마 트롤이 이 공격을 피할 거라곤 생각도 못한 것이다.
"어?"
아틸카가 몸을 낮게 숙이며 바닥을 쓸듯이 돌려찼다. 하체를 노리고 들어오는 킥에 카피르가 화들짝 놀라 뒤로 뛰었다. 이어서 아틸카가 몸을 비틀어 돌리며 연달아 발차기를 날렸다.
"트롤 주제에 감히 내 검을 피해?"
흥분한 카피르가 제대로 검술을 펼치며 반격에 들어갔다. 아까의 단순한 일격과는 차원이 다른 검격이 아틸카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통째로 베어 주마!"
카피르의 블레이드 오러가 아틸카의 사방을 점유하며 쇄도해 온다. 역시 오러 유저다운 공격,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궤도였다. 이대로 저 트롤의 사지를 절단하리라 카피르가 믿어 의심치 않는 순간이었다.
아틸카가 등 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블레이드 오러를 막았다.
파앙!
가로막힌 오러가 흩어지며 붉은 파문이 사방으로 퍼진다. 상황을 지켜보던 마룬드와 블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뭐야, 저거?"
붉은 블레이드 오러, 그것이 교차한 두 자루 단봉에 가로막혀 있었다.
분명 오러도 무엇도 감싸지 않은 단봉이었다. 단봉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그냥 나뭇가지 두 개를 꺾은 것처럼 보이는 조잡한 작대기에 지금 블레이드 오러가 가로막힌 것이다.
아틸카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은혜는 하해와 같아 그 누구도 해할 수 없으니!"
이 두 자루 단봉은 아틸카의 고향에 위치한 신목, '어머니 은혜'의 가지였다. 정기 가득한 나뭇가지 일부를 용서의 의식을 벌인 뒤 꺾고 나서, 천일 기도를 올리며 주술력을 깃들인 그만의 애병. 겉보기엔 조잡해도 그 위력은 이름난 명검 못지않은 것이다.
단봉 두 자루를 서로 두들기며 아틸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몸이 크게 자라 노간주나무 푸름을 띤 삼림을 발로 찼도다."
난타하는 리듬 속에 흐르는 노랫가락이 주술이 되어 전신으로 스며든다. 전신이 대자연의 정기로 가득 찬다.
기합을 터트리며 아틸카가 반격에 나섰다.
"흐아아앗!"
두 자루 단봉이 회오리치며 카피르의 좌우를 연달아 날아든다. 브로드 소드를 휘둘러 방어에 나서며 카피르가 안색을 굳혔다.
'빠, 빠르다?'
오러 유저인 그보다도 오히려 눈앞의 이 트롤이 더더욱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신체 능력이었다. 거대화한 트롤보다도 더한 괴력에 가공할 스피드, 단봉술 역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어 전신 급소를 사정없이 파고드는데 반격은 고사하고 방어하기도 버겁다.
"크윽!"
굴욕감에 이를 갈며 카피르가 뒤로 물러섰다. 일단 뒤로 물러서서 어떻게든 상황을 좀 뒤집을 필요가 있었다.
후퇴하는 카피르가 연달아 검광을 흩뿌렸다. 블레이드 오러가 채찍처럼 늘어나 뒤따르는 아틸카의 진격을 가로막았다.
쾅! 콰콰쾅!
오러의 채찍이 석실 바닥을 파헤치며 거대한 고랑을 남긴다. 순식간에 석실 바닥이 갈아엎은 밭처럼 초토화되었다. 카피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일단 거리를 벌렸으니....'
하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전진하지 못한 아틸카가 대신 두 단봉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퉁! 퉁! 퉁!
박자에 맞춰 단봉으로 바닥을 두들기며 아틸카가 괴이한 외침을 터트렸다.
"마파람에 새싹이 혀를 빼물고 자란다!"
단봉 끝에서 수십 개의 가는 넝쿨들이 돋아났다. 넝쿨이 무서운 속도로 뻗어 가며 카피르의 발치에 이르러 두 발을 얽매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되어 버렸다. 당혹해하는 카피르의 눈에,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아틸카의 모습이 보였다.
"흐라앗!"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아틸카가 좌우 단봉을 맹렬히 휘둘렀다. 두 다리가 묶여 있어 카피르로서는 도저히 방어 자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검을 들어 우측 공격을 막는 순간이었다.
"크윽!"
카피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미처 막지 못한 우측 단봉이 그의 늑골을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오러의 방어를 간단히 뚫고 육중한 타격을 입힌다. 붉은 피가 목구멍을 타고 토해졌다.
"쿠, 쿨럭!"
"카피르!"
블레이가 놀라 소리쳤다. 마룬드의 목소리가 석실 안을 가득 메웠다.
"폭염이여! 내 손에 임하라! 세상을 태우는 기둥이 되라! 플레임 스트라이크!"
보다 못한 마룬드가 손을 쓴 것이다. 강렬한 불꽃의 기둥이 아틸카를 노리고 내리꽂혔다. 후속타를 날리려던 아틸카가 혀를 차며 뒤로 피했다. 그 틈을 타 카피르가 블레이드 오러를 휘둘러 발을 묶고 있는 넝쿨을 잘랐다.
"보, 보통 마물이 아니었군!"
고통으로 인상을 쓰며 카피르가 더듬더듬 외쳤다. 블레이가 그에게 다가가 치유 주문을 쓰며 말했다.
"애당초 몬스터를 상대로 기사도를 신경 쓸 필요가 뭐 있나? 다 같이 나서서 후딱 해치워 버리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