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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023화

유골이 땅에 줄지어 놓였다.

발굴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열 구가 훌쩍 넘었고 온갖 유품도 줄줄이 딸려 나왔다.

"...."

그것들을 바라보는 메브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흙범벅이 된 해골에, 아우인 버논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아니.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곧바로 부정했지만, 이미 떠오른 생각을 떨치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어둠과 맞서다 장렬히 전사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이름 모를 마물의 양분으로, 구원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면.

혹은 어둠 속에 버려져 끝끝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라면.

'만약 그렇다면….'

까드득, 그러쥔 주먹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번졌다.

'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그녀의 눈동자가 늪에 가라앉듯 칙칙하게 일그러지던 그때.

"보면 볼수록."

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우리가 찾는 놈의 소행은 아닌 것 같은데."

퍼뜩 정신을 차린 메브가 시선을 돌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심드렁한 얼굴로, 손에 든 뭔가를 응시하는 이안.

필립이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흑마법사의 짓이 아니라고요?"

"일단 방식이 달라. 놈은 마력을 이용하지. 산 제물이 아니라."

"…그리고요?"

"이 시체들. 반 정도는 알다시피 죄인이지만, 나머지는 병사다. 아마 죄인을 호송하던 자들이겠지."

이안의 시선이 유골들을 훑었다.

"이 정도 규모의 정규군을 제물로 삼는 짓은 나 같아도 안 해. 심지어 그게 오른델의 영주군이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오른델…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안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시신을 뒤지다 찾아낸 목패였다.

반쯤 썩어 인장은 흐려졌지만, 하단의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데이브. 오른델.

차근히 확인한 필립이 읊조렸다.

"정말이군요. 정규군에게만 발급되는 신분증이 맞습니다."

"숨어 사는 흑마법사가 건드리기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상대지."

묵묵히 듣고 있던 메브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득력이 있는 말이군."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오. 아직은."

명패를 본 순간, 이안은 어렵지 않게 적당한 흉수를 떠올렸다.

그의 추론은 거기에 단서를 죄다 끼워 맞춘 것에 불과했다.

'표적 수사가 뭐 별건가.'

어차피 죽여야 할 자였으니, 틀렸다 해도 딱히 문제 되진 않으리라.

"그러니까…."

이안은 느긋하게 본론을 꺼냈다.

"직접 확인할 생각이오. 이게 사고인지, 누군가의 음모의 결과인지."

"직접 확인한다니?"

"아직 다음 계약의 목적지를 정하지 않으셨잖소."

"...!"

메브의 눈이 비로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음 계약이라니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필립을 무시한 채, 이안이 말을 이었다.

"오른델에는 분명 이들을 아는 누군가가 있겠지.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소?"

"…그래. 알았다. 그리 정하지."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은 항상 시원하시군.

덕분에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이안이 만족스럽게 목패를 품에 넣는 사이.

"계약을 또 하셨다고요, 나리?"

필립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필요한 일이었다, 필립. 보다시피, 흑마법사 말고도 배덕자들이 더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나리…."

"잡소리 그만하고 말이나 챙기러 가라, 필립."

이안이 말을 잘랐다.

"말이 죽으면 널 타고 갈 거니까."

"농담하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리."

"...."

"농담이 아니시군요. 알겠습니다."

저건 언제쯤 눈치란 게 생기려나.

이안이 필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그때.

"그… 슬슬 말씀들 다 나누신 것 같은데 말이오."

헐떡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덩이 아래, 땀 범벅이 된 미구엘이었다.

"그만 파도 되겠소? 더 파도 나오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옆에는 유골 더미가 쌓여 있었다.

일행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삽질을 계속한 결과물이었다.

이안은 메브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다시 유골들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못내 눈에 밟힌다는 듯이.

"경."

"...?"

뒤늦게 자신을 마주 보는 메브를 향해, 이안이 툭 덧붙였다.

"기도를 올려 주실 수 있겠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기도라고 하였느냐?"

"이들이 마물이 되어 되살아나도 이상하지 않잖소. 경이 안식에 들게 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소만."

"훌륭한 판단이다. 기꺼이 하지."

반색한 메브가 앞으로 나섰다.

구덩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녀가 기도문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푸른 신성력을 머금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전, 유골을 응시하던 그녀의 일그러진 눈빛을 떠올리면서.

'알기 쉬워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안이 볼 때 그건 틀림없는 광기의 징후였다.

기도를 부탁한 건 그래서였다.

신성으로 광기를 잠재우려고.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이미 균열이 일어난 이상, 아주 작은 계기로도 다시 시작되리라.

앞으로 남은 일들을 생각하면, 그런 계기는 차고도 넘쳤다.

고민에 빠진 것도 잠시.

이안의 눈동자가 평소의 냉랭한 그것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이렇게 공들인 퀘스트를 실패로 끝낼 순 없지.'

***

오염된 숲을 빠져나온 이후, 여정은 거짓말처럼 평화로워졌다.

며칠째 습격은커녕 마물과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평화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메브는 발작하듯 눈을 떴다.

그녀의 망막에, 피눈물을 흘리는 버논의 잘린 머리가 아른거렸다.

숨을 헐떡인 것도 잠시.

'이젠 이런 악몽까지 꾸는군.'

쓴웃음을 지은 메브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먹구름 낀 하늘.

마차의 떨림이 비로소 느껴졌다.

'평화가 불안하다니. 이 무슨 어리석은 조바심인가.'

메브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등받이 너머의 마부석으로 돌아갔다.

메이스를 등에 멘 익숙한 뒷모습.

'뭔가 있다면, 이안이 가장 먼저 알아챘을 것이거늘.'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보다 이안의 판단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 혼자서는 결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

필시 불안과 의문에 사로잡혀, 옳지 못한 결정을 내렸으리라.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랬듯이.

하지만 반대로, 이안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계속 증명해 왔다.

이 마차만 해도 그랬다.

짐수레에 더 가까운 이 마차는, 길가에 버려져 있던 것이었다.

미구엘은 이게 객사의 흔적이랬다.

습격이나 약탈이 휩쓸고 간 끝에 남겨진, 일종의 묘비라는 것이다.

불길하니 건들지 말자는 그의 말을 무시한 건, 당연히 이안이었다.

이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였다.

결과적으론 또 그의 말이 옳았다.

말의 부담이 줄면서 행군에도 속도가 붙었고, 일행도 교대로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니까.

메브 역시 부상의 여파를 거의 떨쳐낸 상태였다.

'이러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대의마저 저버리게 될까 두렵군. 그러니 차라리, 앞으로도 내가 아니라 이안을….'

"깨셨소?"

그때, 이안이 불쑥 내뱉었다.

메브는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었지?"

"두어 시간쯤. 적당한 때에 일어나셨소."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곧 무덤 숲에 도착할 거요."

"...!"

메브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앙상한 나무들과 그 아래로 깔린 잿빛 안개.

"언제부터….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것이냐?"

"그, 그게 말입니다…."

미구엘이 난처한 얼굴로 우물댔다.

"내가 말하지 말라 했소."

대신 답한 건 이안이었다.

그가 메브를 돌아보며 덧붙였다.

"미리 아셨다면 지금처럼 쉬지 않으셨을 거잖소."

말려 올라갔던 메브의 눈썹 끝이 다시 내려앉았다.

"…그랬군. 알았다."

그녀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또다시 미구엘의 시선을 느낀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만 힐끔대고 타라. 새꺄."

눈알 파 버리기 전에.

이안이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미구엘이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교대하고 싶어서 본 게 아니오."

"그럼 뭔데?"

머뭇거리면서도 마부석에 오른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그, 따지고 보면 말이오. 내 의뢰는 이제 완수된 것 아니오?"

"호오."

이안의 얼굴에 감탄이 번졌다.

지금 이런 말을 꺼낼 줄이야.

"여기까지 안내하는 게 의뢰였잖소. 그러니까 여기서부턴…."

"엄밀히 말하면 실패지."

"어떤 추가적인, 엉…? 실패라니?"

"약속한 시일을 지나쳤잖아?"

순간 굳어졌던 미구엘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그건 그 빌어먹을 숲에서 하루를 날려서 그런 거잖소! 그건 참작을 해 주셔야지."

"그래서 네가 살아 있는 거다. 돈을 토해내지도 않은 거고."

"...."

"뭐, 어쨌든.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안이 뒤편을 턱짓했다.

"가든지. 우린 계속 들어갈 거다. 넌 이대로 내려서 돌아 나가."

미구엘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잿빛 안개가 깔린 음산한 숲.

넷이 올 땐 별일 없었지만, 홀로 돌아갈 때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어 보이는 광경이었다.

이윽고 고삐를 고쳐 쥔 미구엘이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냥, 내가 의뢰를 충실히 완수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오. 지금부턴 의리로 가는 거요."

"그러시겠지."

어차피 못 갈 거 알고 한 말인데.

코웃음 친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하여간, 용병이란 것들의 잔머리는 하나같이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메브가 뒤이어 몸을 일으켰다.

"너도 타거라, 필립. 걸으면서 몸을 좀 풀어 두고 싶구나."

"…감사합니다, 나리."

후들대던 필립도 짐칸에 올랐다.

이안과 나란히 걷기 시작한 메브의 시선이, 이내 무릎을 스치는 안개에 고정됐다.

축축하긴커녕 화장터의 안개처럼 메마른 느낌이 드는 안개.

바스락대는 듯한 불쾌한 감촉 사이로, 오염된 마력이 전해졌다.

낯익은 감각이었다.

그녀가 가진 오염된 정수에서 번지던 것과 같았으니까.

"놈의 마력이군…."

메브는 놀라지 않았다.

이안을 믿어서 뿐만 아니라, 흑마법사의 경고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소. 놈의 마력이지."

이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미구엘이 문득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아무래도, 혼자서라도 숲을 나가는 게 맞았던 것 같소."

"그새 마음이 바뀌었냐? 정말 엄청난 의리군."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미구엘이 고개를 저었다.

"나 같은 잡졸이 끼기엔 너무 큰 판 같아서 말이오. 경험상 꼭 분수 모르고 낀 놈이 죽더란 말이지."

이안의 웃음이 짙어졌다.

주제 파악만큼은 확실한 놈이었다.

심지어 그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몰라도, 경은 절대 너랑 필립이 죽게 두지 않으실 거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떠넘길 명분이 생긴 셈이었으니까.

메브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은 내가 반드시 지킬 것이다. 여신께 맹세하지."

"맹세라고 하셨습니까…?"

어리둥절하게 되물은 미구엘의 얼굴에 이내 감격이 번졌다.

"나리께선 정말이지, 제가 아는 모든 기사를 통틀어 가장 명예로운 분이십니다."

"감사할 것 없다. 나 역시 이유가 있기에 그리하는 것이니."

"엥…? 이유라굽쇼?"

이안이 불쑥 걸음을 멈춘 건, 메브가 뭔가 말하려던 그때였다.

덜컹, 마차도 뒤이어 멈춰 섰다.

"아윽. …갑자기 왜 멈춘 겁니까?"

등받이에 머리를 박은 필립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일어섰다.

미구엘이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내가 멈춘 게 아니오."

"뭐라고요…?"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러지."

미구엘이 고삐를 찰싹 후려쳤다.

하지만 말들은 콧김을 뿜어 댈 뿐,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소용없을 거다."

이안이 저만치 앞을 응시하며 내뱉었다.

그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메브가 미간을 좁혔다.

"…불길한 마력이 느껴지는군."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불길한… 마력이라니요?"

"저기서부턴 마경이다."

대답한 건 이안이었다.

"들어가서 나온 자가 없다더니. 애초에 나올 수가 없는 거였어."

타락하거나 저주받은 땅.

완전히 어둠에 물들어 세상의 법칙마저 뒤틀린 장소들을, 이 세계에서는 마경이라 불렀다.

"마차는 두고 가야겠군."

결정을 내린 메브가 필립과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필요한 짐을 챙기거라."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그 전에 설명부터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나리? 방금 형씨가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한 것 같은데요."

"신경 쓸 거 없어."

이안이 심드렁하게 말을 잘랐다.

"흑마법사를 죽이면 사라질 테니까. 아마도."

"아니, 뭐 그런 무책임한…."

"그냥 책임지고 죽여 줄까?"

미구엘이 냉큼 몸을 돌렸다.

그사이 가방을 등에 멘 필립이 굳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각오는 했습니다만, 예상보다 더 떨리는군요."

"방심하는 것보단 낫지. 선두에 서게 될 텐데."

멈칫한 필립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선두라니요? 그게 무슨…."

그의 목소리가 이내 잦아들었다.

이안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숲에서 앞장서겠다는 자신을 향해, 꼭 그렇게 해 주리라던 이안의 눈빛이 특히.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어떻게 잊겠어?"

낯이 하얗게 질린 필립이 메브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메브가 단호하게 말했다.

"네가 내뱉은 말이니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구나, 필립. 이번 경험이 네게 교훈을 남기길 바랄 뿐이다."

미구엘이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린 건 그때였다.

망연자실한 필립과 눈이 마주친 그가, 안개 쪽을 턱짓했다.

"뭐 하쇼? 얼른 안 서고."

"...."

#024화

안개는 마경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엄청나게 자욱해졌다.

"후우… 후우…."

선두를 걷는 필립의 얼굴에는 일말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검과 방패를 바짝 치켜든 그가, 고개도 돌리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나리. 제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습니까…?"

"그래."

이안이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미구엘이 그를 곁눈질했다.

"여기서 어떻게 길을 찾으시는 거요? 사냥꾼인 나도 방향조차 모르겠소만."

"잘."

"…그게 끝이오?"

"그런데. 불만 있냐?"

이안의 시선에 재빨리 앞을 돌아본 미구엘이 중얼댔다.

"그럴 리가. 이런 비법을 맨입으로 배우려는 게 도둑 심보지. 암…."

어차피 넌 배워도 못 하거든.

속으로 읊조리며, 이안은 자욱한 안개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고 있는 건 안개에 잔뜩 섞인 오염된 마력이었다.

안개와 함께 선회하는 마력의 결이 신기루처럼 일렁였다.

이게 일종의 이정표였다.

무덤은 이 중심부에 있을 테니까.

마력의 결을 가로지르다 보면 도착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 이걸 다 유지하는 거지? 타락한다고 마력이 무한정 샘솟진 않을 텐데.'

전에는 해 본 적 없던 의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가 이런 잡생각을 할 정도로 느긋한 건, 이 숲엔 사실 위험한 마물 따윈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 죽은 숲.

물론 숲 자체가 미로인 데다, 오염된 마력이 스며들어 침입자를 끝내 죽음에 이르게 만들긴 했지만.

길을 찾는 방법을 아는 이상,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갔을 무렵.

한순간 시야가 밝아졌다.

"어…?"

어리둥절하게 멈춰 선 필립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거 설마… 도착한 겁니까?"

"아마도."

이안이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칼로 자른 듯이 끝난 안개가 잿빛 장막이 되어 펼쳐져 있었다.

필립과 미구엘이 거의 동시에 주저앉았다.

"제가 정말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루 솔라여… 감사합니다…."

"나도 댁이 해낼 줄 몰랐소. 명 짧아지는 소리가 들리네, 염병할…."

주접들 떨고 있네. 이제 시작인데.

이안은 콧방귀를 뀌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훤히 드러난 공터에 고대 요정 유적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한복판, 반파되어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훤히 드러낸 건축물이 바로, 지하 무덤의 입구였다.

"저곳인가…."

안면 가리개를 올린 채 같은 곳을 바라보던 메브가 중얼댔다.

이안과 눈빛을 교환한 그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이안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헤집었다.

지하 무덤은 게임에서 처음 등장한 본격적인 던전이었다.

그런 만큼 전형적이기도 했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거대 미로.

공략 루트도 두 갈래였다.

빙 돌아가며 중간 보스를 상대하고 흑마법사와 만나는 정석 루트.

그리고 흔히들 숏컷이라 부르는, 기본적인 트릭으로 감춰진 지름길.

게임에선 보스전을 끝내고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됐었지만, 이번엔 처음부터 지름길을 택할 생각이었다.

'안 그럴 이유가 없지.'

전리품을 놓치는 것도 아니고 추가 퀘스트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메브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그녀의 곁에 선 이안은, 계단 아래의 어둠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싸울 준비는 되셨소?"

"물론.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메브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이안이 피식댔다.

"어차피 물러설 곳도 없을 거요."

"맙소사, 루 솔라여…."

그때, 뒤에서 탄식이 이어졌다.

"허미, 시부럴. 산 넘어 산이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뒤따라온 필립과 미구엘이었다.

망연자실하기 그지없는 표정들.

이안이 무시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이제 내가 선두에 서겠소."

미구엘의 눈이 커졌다.

"엥? 이렇게 바로 가신다고? 잠깐 마음의 준비를-"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코웃음 친 이안이 보란 듯 계단에 발을 들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얼굴인 필립과 미구엘, 굳은 안색의 메브가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곧, 지하의 어둠이 일행을 삼켰다.

***

저벅, 저벅-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유독 크게 메아리쳤다.

주위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미구엘이 횃불을 켰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빛은 불과 몇 걸음 앞을 간신히 비췄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현상이었다.

이 세계의 어둠은, 그저 단순한 빛의 부재가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계단은 겉보기와 달리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었다.

무덤 자체에 어떤 영구적인 고대 마법이 깃들어 있다는 증거였다.

공간을 구부리고 휘어서, 외부에서 보는 것과 실제를 다르게 만드는.

이안이 볼 땐 그야말로 편의적인 설정이었지만, 어쨌건 이 세계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얼마든지 실존했다.

한참 이어진 침묵을 깬 건, 뜻밖에도 메브였다.

"지하에 도착하면, 잠시 기도를 올려야 할 것 같군."

무심하게 이어지던 이안의 걸음이 느려졌다.

"뭔가 문제라도 생기셨소?"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었다.

"이곳에 들어서고부터 성흔의 공명이 약해지고 있다."

"성흔…?"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메브가, 이윽고 진심임을 깨달은 듯 말했다.

"사도로 선택받은 순간 영혼에 새겨지는 낙인이다. 이를 통해 신께 감응하며, 신성을 부여받지."

그런 원리였다고…?

이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루 솔라의 성상이 뇌리를 스쳤다.

기도를 올릴 뻔했던 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이나 영혼을 저당 잡힐 뻔한 것이다.

'이 빌어먹을 세계는 신들도 통수를 치네.'

사도에 대한 실낱같은 미련조차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세계 인간들에겐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그에겐 노예 계약에 불과했다.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신성이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군. …어쩌면, 이 또한 마경의 영향인지도 모르지."

"알겠소."

이안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지만.

앞에 들은 말에 비하면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얘기였다.

애초에 신성력은 흑마법의 천적.

흑마법사가 뭔가 대비를 해 뒀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어차피 잡몹 정리에는 아무 영향 없을 텐데. 그거면 됐지, 뭐.'

보스전 때 눈치껏 빠져 주면 더 좋겠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이안이 어깨를 으쓱일 찰나, 메브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혹여 여신께서 답을 주지 않으시더라도, 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염려하지 말거라, 이안."

피식 웃은 이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런 걱정은 한 적도 없소."

계단은 퀴퀴한 공기의 맛이 입안 가득 느껴질 때쯤 끝났다.

필립과 미구엘은 당장이라도 폐소 공포증이 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공간만 넓어졌을 뿐, 어둠은 여전히 그들을 집어삼킬 것처럼 짙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어둠에 짓눌려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도를 올리셔도 될 것 같소."

주위를 훑던 이안이 말했다.

맹수의 그것처럼 일렁이는 그의 눈은, 어둠 너머를 꽤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부서진 석상의 잔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넓은 석실.

"알았다."

메브가 검을 역수로 뽑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 끝을 바닥에 찍은 그녀가 눈을 감았다.

입술만 달싹이는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니…."

횃불을 이리저리 비추던 미구엘이 중얼댔다.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그게 왜 이상합니까?"

"여기 묻힌 시체가 내가 들은 것만으로도 수백이오."

"그런데요?"

"유골이 하나도 없잖소. 댁 같으면 이런 불길한 곳에 들어와서, 시체를 깊숙이까지 가져다 버리겠소?"

"어… 그러게요…?"

입을 뻐끔댄 필립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이안의 미간이 이윽고 좁아졌다.

"정말 몰라서들 묻는 거냐?"

"뭘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되묻는 필립을 보며, 이안은 정작 자신이 흑마법사에 대해 자세히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혀를 찬 그가 말했다.

"이 주문쟁이 놈은 자길 사령 술사라고 했었다."

"사령… 술사요?"

"사령술은 시체와 망령을 다루지."

"...."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흑마법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음을 전혀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저 막연하게 사악하고, 끔찍한 주문이리라 생각했을 뿐.

거의 사색이 된 미구엘이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시체를 되살리고 망령을 부리고 그런다는 말씀이시오?"

"아마도.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말도 안 돼… 그렇게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왜 숨어만 있겠소? 왕국을 몇 번은 뒤집어엎을 텐데."

"못 그럴 이유가 있겠지."

이안은 대충 어깨만 까딱였다.

짐작이 가는 부분은 있었지만.

정말이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놈의 야망은 오늘로써 막을 내릴 테니까.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덧붙이던 이안이 순간 멈칫했다.

미간을 살짝 좁힌 것도 잠시.

"그래. 올 게 왔구만."

묘하게 후련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그가, 어둠을 돌아보았다.

"뭐, 뭐가 온단 겁니까…?"

그 모습에서 오히려 불길함을 느낀 필립이 물었다.

"사실 주문쟁이 놈은 한참 전부터 우리가 오는 걸 알고 있었거든."

"예에?!"

"그런데도 너무 조용해서 슬슬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이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역시. 여기까지 무방비인 건 말이 안 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너머에서 흐릿한 빛이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린 필립과 미구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혈관에 피가 돌기 시작하듯, 보랏빛 선들이 천장과 벽면에 빼곡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그게 끝없이 이어진 문자와 기호의 집합체라는 것을 깨달은 필립이 멍하니 뇌까렸다.

"고대어…?"

"주문 회로다. 무덤의 마법 기관이 작동하기 시작한 거야."

"고대 요정의 주문이라기엔 너무… 불길하게 생겼는데요…?"

"흑마법사 손에 들어간 주문이 멀쩡하겠냐?"

"…아."

게임에서 마법 기관이 작동한 건, 던전을 반쯤 진행했을 무렵이었다.

지하 무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게임에서와 같다면,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은….

쿠르릉-

등 뒤에서 울려 퍼진 굉음에, 미구엘이 펄쩍 뛰어올랐다.

"으악?! 아니, 이런, 미친…?"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거대한 돌벽이 계단 앞에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입구를 완전히 막은 벽 한복판에, 고대어가 홀연히 떠올랐다.

유적의 타락을 증명하듯 검붉은 빛을 머금은 채로.

"이게… 대체…."

읊조린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돌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어둠 너머를 응시하고 있을 뿐.

절걱, 절그럭- 절그럭-

희미한 소음이 이어졌다.

미구엘도 비로소 이안과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주문 회로 가운데에도 여전히 어둠에 휩싸인 통로 너머.

절걱- 절그럭-

기묘한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이 구더기가 들끓듯 일렁였다.

수십 개의 보라색 안광과 함께, 살아 움직이는 해골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령술로 되살아난 망자들.

"...."

미구엘의 입이 멍하니 벌어지고, 필립도 뒤늦게 얼어붙는 가운데.

절걱, 절걱 절걱-

둑이 터지듯, 해골들이 통로를 비집고 밀려들기 시작했다.

"너희는 경을 지켜라."

내뱉은 이안이 몸을 날렸다.

"엥? 잠깐만! 형씨! 또 혼자 싸우시려고?!"

내달리는 그의 뒤통수로 미구엘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럼 너희가 싸울래?

속으로 읊조리며 홀을 가로지른 이안은, 석상의 파편을 연달아 딛고 도약했다.

쉬아악-

바람이 전신을 휘감는 사이.

마력이 아른거리는 그의 눈동자가, 눈 앞에 펼쳐진 통로를 훑었다.

복도를 가득 채우고, 그 너머까지 끝도 없이 이어진 해골들. 사이사이로 구울의 모습까지 보였다.

'존나 많긴 하네.'

단순히 숫자로만 치면 이 세계에 떨어진 이래 가장 많았다.

심지어 이게 전부도 아니었다.

기관이 작동한 이상, 무덤의 거의 모든 언데드들이 몰려오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안의 눈빛에는 그다지 위기감이 묻어 나오지 않았다.

'무장도 허접하고 자아도 확실히 없어 보이고. 고작 이런 것들한테 당하면 살아남을 자격도 없지.'

물론 지하 무덤의 위험 요소는 이게 전부가 아니지만.

길만 막으면 되는 당장은 별로 해당 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활강하듯 통로로 접어든 이안이, 그대로 메이스를 내리찍었다.

콰직!

돌진에 반응도 하지 못한 해골의 두개골이 박살 났다.

안광이 바스러지고 온몸의 뼈가 우수수 허물어질 찰나.

푸확-!

이안의 주위로 폭발하듯 돌풍이 휘몰아쳤다.

돌풍에 휩쓸린 해골들이 뼛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휘몰아치는 방벽.

발사체나 돌진을 막아 주는 이 하위 회색 마법은, 이렇게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살상력이 크진 않고, 머리를 없애지 않으면 되살아나는 이 언데드들에겐 더 그렇겠지만.

콰직-

공간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했다.

굴러가는 두개골을 짓밟으며 착지한 이안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메이스를 치켜들었다.

빠직! 빠각!

굴러다니는 머리통들이 닥치는 대로 터져 나갔다.

검이었다면 날이 몇 번은 부러졌을 마구잡이식 타격.

하지만 메이스는 부러지긴커녕 휘어지지도 않았다.

"후…."

인근의 두개골을 모조리 으깨 버린 이안이 비로소 일어섰다.

튕겨 나갔던 언데드들이 어느새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을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에 흐릿한 마력이 일렁였다.

쉬아아-

순식간에 번져나간 바람이 메이스 자루를 타고 휘몰아쳤다.

이안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크게 휘둘렀다.

콰지직-!

달려들던 것들이 포탄에 맞은 것처럼 벽에 처박혔다.

산산 조각난 뼈의 잔해와 그 사이에서 곤죽이 된 구울의 살점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루를 고쳐 쥔 이안은, 언데드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반대 방향으로도 팔을 휘둘렀다.

콰장창-!

언데드들이 또다시 벽에 처박혔다.

거대한 망치로 후려친듯한 광경.

실제로도 그랬다.

검으로 펼칠 때는 예리한 선이었던 바람 칼날이, 지금은 맹렬하게 회전하는 구체가 되어 메이스 끝에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이게 잘 먹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대응은 훨씬 간단해졌다.

콰지직-! 콰장창-!

기다렸다가 휘두르는 것의 반복.

그렇게 몇 번쯤 언데드들의 전진을 저지했을 때였다.

"...?"

언데드들이 불현듯 멈춰 섰다.

슬쩍 미간을 좁혔던 이안이, 이내 한쪽 입술을 말아 올렸다.

놈들 사이에서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이게 누구의 시선일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왜, 유물까지 챙겨올 줄 몰랐냐?"

이안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놈이 믿고 말고는 중요치 않았다.

"거기 쥐새끼처럼 숨어서 잘 보고 있어라. 이걸로 네 장난감 대가리를 다 터뜨려 줄 테니까."

어디까지나 놈을 열 받게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놈이 이성적이고 효율적인 판단을 추구할수록, 일행 중 누군가가 죽을 확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손에 든 메이스를 까딱일 찰나, 주문 회로의 빛이 출렁였다.

해골들의 안광이 타올랐다.

"제대로 빡쳤나 보네. 고맙게."

이안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리 없이 포효한 언데드들이, 들짐승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025화

"저런 미친…."

미구엘이 탄식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홀로 통로를 막아선 이안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단 하나의 언데드도 그를 지나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언제라도 휩쓸려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저건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가서 도와야 해요…!"

필립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랫입술을 질근대던 미구엘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린 나리를 지키는 게 맞소."

"하지만-"

"명령 잊었소? 우리가 낀다고 엄청난 도움이 되진 않을 거요. 차라리 뒤를 지켜서 형씨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 주는 게 낫지."

필립이 침음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를 막긴 했지만, 사실 미구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언데드는 끝이 없어 보였고, 이안이 아무리 강한들 영원히 싸울 순 없을 테니까.

미구엘은 본능적으로 발목을 까딱였다.

'시발, 여기선 안 통할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최악의 순간이 온다면 이판사판이었다.

내면의 갈등을 이어가며 이안과 메브를 번갈아 곁눈질하던 한순간.

"...!"

미구엘의 눈이 마침내 번뜩였다.

메브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갑옷 속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의 어깨가 천천히 들썩였다.

미구엘이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나리?"

메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미구엘이 말을 이었다.

"나리께서 기도에 들어가시고 나서, 주문 회로라는 게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데드들이 득시글하게 튀어나왔고요!"

"…그래서, 이안은 어디 있느냐?"

"그게 제가 드리려던 말씀입죠!"

미구엘이 통로 쪽을 가리켰다.

"언데드들을 형씨가 혼자 막고 있습니다!"

"저희는 나리를 호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필립이 거들었다.

통로를 돌아본 메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렇군."

그녀가 벌떡 일어섰다.

휙, 검이 거꾸로 회전하고, 날 윗부분이 그녀의 손아귀에 잡혔다.

"길을 뚫겠다."

철컥, 안면 가리개를 내린 메브가 질주했다.

갑옷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속도.

거꾸로 든 검을 얼굴 옆에 바싹 치켜든 그녀가, 이윽고 일갈했다.

"이안-! 길을 터라!"

이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늦으셨소."

숨찬 목소리로 내뱉은 그가 옆으로 훌쩍 물러났다.

드러난 공간으로 메브가 돌진했다.

이안을 지나치는 그녀의 전신에 희미한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그녀의 돌진은 언데드들이 가까워지자 오히려 더 빨라졌다.

콰장창-!

메브와 충돌한 해골들이 산산이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무리 한복판까지 뚫고 들어간 메브가, 거꾸로 쥔 검을 힘차게 올려 쳤다.

콰지직-

검이 만들어 낸 둔탁한 호선이 언데드들을 박살 내며 지나쳤다.

머리를 노리지 않았음에도 휩쓸린 해골들의 안광이 바스러졌다.

언데드에게 신성력은 적은 양으로도 아주 치명적이었다.

메브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휘두른 검의 원심력을 살려 몸을 회전하며 다시 한번 휘둘렀고, 치켜들었던 팔을 힘으로 멈춰 반대로도 다시 내려쳤다.

꽈직!

같은 궤적으로 이어진 두 번의 공격에 운 좋게 살아남은 구울의 머리통에는 주먹이 틀어박혔다.

언데드들도 짐승처럼 달려들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부러진 칼이나 곤봉, 손톱 따위로는 그녀의 갑옷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신성력을 아주 조금 갉아먹을 뿐.

심지어 공격한 주제에 신성력에 닿아 허물어지는 놈들도 있었다.

"볼 때마다 박탈감 오지네…."

뒤에서 지켜보던 이안이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언제 봐도 대단한 전투력.

하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메브의 몇 없는 약점 중 하나는 지구력이 부족하다는 거였고, 신성력도 여유롭진 않아 보였으니까.

빠각-!

메브가 놓친 해골의 머리통을 박살 내며, 이안이 따라붙었다.

메브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등을 맡겼다. 더불어 움직임이 훨씬 더 과감해졌다. 몇 마리를 놓치건 이안이 처리해 주리라는 확고한 믿음 덕분이었다.

전진에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었다.

통로를 지나 조금 작은 석실로.

다시 그 너머의 또 다른 석실까지.

파죽지세로 이어지던 전진이 멈춘 건,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앞에서였다.

쿠르르르-

별안간 솟아오른 석벽이 통로를 막아 버린 것이다.

"후, 후우…."

숨을 고르며 석벽에 새겨진 고대어를 응시하던 메브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제야 검을 늘어뜨린 메브가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이 이어진 언데드의 잔해들.

횃불을 든 필립과 미구엘이 그 한복판을 주춤대며 가로질렀다.

"길이 막혔다."

덤덤하게 말한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올렸다.

미구엘이 눈을 끔뻑였다.

"그럼… 갇혔단 말씀이십니까?"

"보다시피."

물주머니를 꺼내며 다가온 필립이 말했다.

"뭔가 방도가 있으신 거겠죠."

주머니를 받으며 메브가 답했다.

"방도는 없다만."

"역시 그러시… …예?"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마신 메브가 이안에게 주머니를 건넸다.

그는 이미 벽에 기대앉아, 메이스 자루에 팔을 걸치고 쉬고 있었다.

"이안이 당황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믿을 뿐이야."

이젠 보증도 서 주겠는데.

이안은 실소를 삼켰다.

흑마법사가 개 빡쳤으니 그들을 고이 굶어 죽게 놔둘 리 없다든가, 게임에서도 있었던 패턴이라든가 하는 설명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면서.

"이렇게 된 거, 좀 쉽시다."

하고 말한 게 전부였다.

고개를 끄덕인 메브가 이안의 곁에 앉았다.

"두 분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미구엘이 어물쩍 주저앉았다.

그의 곁에 앉는 필립의 얼굴에도 짙은 피로가 묻어났다.

싸우지 않았다 해서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어둠과 주문 회로의 마력은,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갉아먹었으니까.

밀려드는 언데드와 마주하는 것 역시,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마물을 상대하는 자들이 미쳐 버리거나 어둠에 물드는 경우가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수는 언제부터 그랬소?"

이안이 불쑥 물었다.

메브가 흉갑에 손을 얹었다.

오염된 정수를 품은 위치였다.

"그저 공명하고 있을 뿐이다. 성흔이 침묵하면서부터 이러더군."

"신과의 연결이 아예 끊어지셨소?"

"그래."

"그렇다면 조심하시오. 언제 경을 잠식하려 할지 모르니."

"그리하지. 염려 마라."

고개를 끄덕인 메브의 시선이, 이내 사방에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로 향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이토록 거대한 군세를 거느리고도 지하에 숨어만 있었다니."

대체 왜 다들 그딴 걸 궁금해하지.

이안은 내심 한숨 쉬면서도 입을 열었다.

"여긴 놈의 마경이잖소. 여기라서 가능한 군세일 거요. 밖에선 유지할 수 없겠지. 아직은."

어디서 이만한 마력을 끌어오는지는 둘째 치고.

안개와 언데드 군단에 마력을 공급하는 건 주문 회로가 확실했다.

듣고 있던 필립이 물었다.

"마경 자체가 흑마법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악마나 타락자가 마경을 형성하는 이유다. 거미가 거미집을 짓듯이. 자신만을 위한 작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거지."

물론 고위 타락자나 악마가 만들어 낸 마경은, 이런 지하 무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메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서 힘을 축적하고 있었던 거군. 정수를 심은 건 세상에 나올 때를 위한 안배였던 거고. …왕국을 뒤엎을 거악이 탄생할 수도 있었겠어."

솔직히, 잘 풀려도 그만한 깜냥이 되는 놈 같진 않지만.

어깨를 으쓱이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천장으로 향했다.

주문 회로를 타고 심상치 않은 마력이 밀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된 건가?

이안은 기억을 복기하며 일어섰다.

메이스를 집어 든 그가 석벽을 돌아본 순간.

"어, 어어…?!"

필립과 미구엘 쪽에서 의문성이 터져 나왔다.

이안도 그제야 등 뒤에서 응축되는 마력을 느꼈다.

주문 회로의 마력 탓에 늦게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미간이 좁아진 건,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들이 덜컥대며 진동하는 소리 때문이었다.

'저게 벌써?'

이안이 뒤를 돌아본 순간.

잔해들이 자성에 이끌리듯 뒤쪽의 통로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데 뭉친 잔해가 순식간에 통로를 가득 채웠다.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덩어리.

그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기 시작하자, 이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죽음의 찌꺼기.

말 그대로 불사의 추적자인 비정형의 마물이, 게임에서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땐 갈림길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시체가 충분히 모여서 그런 건가?'

개 같네.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저건 또 뭔 미친… 어억?!"

쿠구구구-

얼빠진 탄식을 흘리던 미구엘이 화들짝 어깨를 들썩였다.

앞길을 막았던 석벽도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너머로 일렁이는 수많은 안광.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작정을 했구만, 시발…."

메브가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저 마물은 내가 상대해야 할 것 같다, 이안."

이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라던 바였다.

"죽이려 하지 말고 저지만 하시오. 길을 뚫을 테니."

"다, 다가옵니다, 나리!"

필립의 외침이 이어졌다.

죽음의 찌꺼기가 일행을 향해 기어 오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행 쪽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위쪽의 뼈와 살점이 앞으로 쏟아지면서 이동하는 거였으니까.

저 더미에 휩쓸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메브가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너희는 대열 중앙에 있어라."

내뱉은 그녀가 돌진했다.

이안이 거의 다 내려간 벽 너머로 몸을 날린 건 거의 동시였다.

쉬아악-!

언데드들이 삽시에 가까워졌다.

가죽 갑옷을 걸친 해골 전사부터, 고대 요정 갑주를 걸친 해골 기사. 비교적 최근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구울 병사까지.

더 깊은 곳에 있어야 할 것들이 죄다 모여 있었다.

'군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이거지.'

빠각! 이안이 해골 병사의 투구를 그대로 내리쳤다.

녹슨 투구가 움푹 들어가고 그 아래의 두개골이 산산 조각났다.

놈이 허물어질 때쯤, 이안은 이미 다음 언데드를 후려치고 있었다.

체력을 아낀 덕에 그의 움직임에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거기다 이제는 머리만 박살 낼 필요도 없었다.

이안은 바람 칼날을 전신에 두른 채로 길을 뚫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 전진하던 그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경! 너무 뒤처지지 마시오!"

찌꺼기를 상대하던 메브가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녀도 저놈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전진을 늦출 뿐.

와르르르-

방해꾼이 사라진 찌꺼기가 석실을 지나쳐 통로까지 접어들었다.

뼈 더미가 허물어지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장내를 울렸다.

머리가 부서져 허물어진 언데드들은 물론, 재조립되던 놈들까지도 잔해에 덮여 사라졌다.

"히익…! 히이익…!"

"앞만 보쇼. 앞만!"

필립과 미구엘은 압박감에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무한 동력이 따로 없네.'

이안은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

슬슬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지름길로 들어서는 갈림길만 놓치지 않는다면, 흑마법사의 코앞까지 단숨에 들이닥칠 수 있으리라.

그 계획에 변수가 생긴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키히힛-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친 것이다.

잊고 있던 기억을 절로 되살아나게 만드는 섬뜩한 소리.

'아니 시발, 저건 또 왜 여기 있어?'

이안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득달같이 돌아갔다.

널찍한 석실의 천장에, 산발한 머리칼의 망령이 둥둥 떠 있었다.

뼈가 훤히 드러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망령은, 여기서 꽤 떨어진 호수에 사는 놈이었다.

남자는 홀려서 정기를 빨아먹고 여자는 호수에 가라앉혀 빙의체로 부리던, 호숫가의 망령.

저게 호수와는 관련도 없는 이곳에 와 있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저 새끼도 권속이었던 거네.'

아예 소굴로 불러들였다 이거지.

앞을 가로막는 언데드들을 후려친 이안이 다시 망령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놈은 이미 사라진 뒤.

정수리 위에서 기척이 이어졌다.

크히힛-

"...!"

이안은 반사적으로 뛰어오르며 메이스를 휘둘렀다.

메이스는 정확히 놈을 후려쳤지만, 아무런 감촉도 전해지지 않았다.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놈이니 당연했다.

그저 쫓아내려는 의도.

"이런 시부럴! 그건 또 뭐였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망령을 발견한 미구엘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이안은 미간만 찌푸릴 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에는 죽음의 찌꺼기. 앞에는 언데드의 물결. 위에는 망령까지.

별것 아닌 놈들이 한자리에 모이니, 이렇게 거슬릴 수가 없었다.

심지어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다.

크히힛-

저만치 앞쪽에 홀연히 나타난 망령이 웃음을 흘렸다.

산발한 머리카락에서 푸르스름한 마력이 안개처럼 번졌다.

언데드들의 안광에 푸른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잠시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떤 놈들이, 발작하듯 달려들었다.

더 빠르고 기민해진 움직임으로.

"염병을 떠네."

이안이 이를 갈며 달려드는 해골들을 후려쳤다.

이렇게 쳐 죽여도 찌꺼기의 덩치만 키워 줄 뿐이란 건 알지만, 다른 방법 따윈 없었다.

최대한 빨리 길을 뚫어서 이 빌어먹을 것들을 떨쳐낼 수밖에.

이안이 마력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크히힉-

저 뒤에서 망령의 웃음이 들렸다.

"...!"

뒤를 돌아본 이안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망령이 필립과 미구엘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신경이 탈 것처럼 곤두섰다.

주변의 모든 정보가 한순간에 인식됐다.

주위만 두리번대느라 이제야 망령의 존재를 눈치챈 두 놈.

얼마 없는 신성력을 쥐어짜며 찌꺼기의 전진을 늦추는 데에 여념이 없는 메브.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는 망령.

그리고 놈의 푹 파인 눈두덩이에 휘몰아치는 푸르스름한 마력까지.

단말마를 내지르려는 게 분명했다.

데미지는 물론, 지속시간이 긴 착란 상태까지 유발하던 스킬.

이안은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결론을 도출했다.

저걸 막지 못하면 필립과 미구엘은 죽는다.

"둘 다 귀 막아! 당장!"

이안의 눈동자가 붉게 타올랐다.

#026화

콰르르르-

그의 주위로 새빨간 불덩이가 연달아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형태를 갖추기가 무섭게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콰콰콰쾅! 끼아아악-!

불덩이 네 개가 연달아 망령에 부딪혀 폭발했다.

망령이 비명과 함께 증발했다.

콰광-!

빗나간 두 개는 찌꺼기를 맞췄다.

앞부분이 움푹 들어가며 뼛조각이 사방으로 튀었지만, 흘러내린 파편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를 메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

필립과 미구엘은 눈을 치켜뜬 채로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한 눈빛.

"말도 안 돼…."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안이 마법사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한 적 없었을 테니까.

"구경났냐? 정신 차려 새끼들아!"

태연하게 덧붙인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앞을 돌아보았다.

막상 마법을 쓰고 보니 속이 다 시원했기 때문이다.

"이왕 쓴 거… 제대로 쓰지 뭐."

읊조린 이안이 몸을 날렸다.

왼손 손아귀에 주먹만 한 화염구를 움켜쥔 채로.

콰직- 퍼엉!

몇 번째인지 모를 폭발이 일었다.

구울 기사가 파편이 되어 흩뿌려지고, 주위의 해골들이 우수수 튕겨 나갔다.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군.'

그 사이를 뚫고 돌진하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메브는 흑마법사의 속삭임을 다시 떠올렸다.

적색 나부랭이. 어째서 그게 이안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가.

단지 겉모습이 어울리지 않을 뿐.

식견과 지식. 안목과 통찰력. 신중하며 비밀이 많은 성격까지.

돌이켜 보면, 이안의 많은 의문스러운 부분이 마법사와 어울렸다.

물론 마법사는 온갖 음험한 소문과 비화를 몰고 다니는, 광기와 가장 인접한 존재들이었지만.

메브는 그런 뜬소문보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믿었다.

오히려 조금 안도하기까지 했다.

반드시 찾으리라 마음먹었던 적색 마법사가 이안이었다니.

'결국은 또 빚을 지게 되겠군.'

사실 빚은 지금도 지고 있었다.

품은 신성력을 다 소모할 각오까지 했건만.

이안 덕에 전진이 훨씬 빨라지면서, 찌꺼기를 막으려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놈이 전진하는 속도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빨랐지만.

그렇다고 달리는 걸 따라잡을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키이… 키이잇-

이제 메브가 신경 써야 할 적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저 분노한 망령뿐이었다.

이안의 공격이 치명적이었는지, 놈은 한동안 일행의 근처로는 다가오지도 않았다.

웃음 대신 기분 나쁜 숨소리를 토해내며 주위를 맴돌 뿐.

하지만 메브는 놈이 곧 다시 공격해 오리라 확신했다.

계속 따라오고는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달리기만 했다.

망령이 방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근처까지 다가올 테니까.

그 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찾아왔다.

키이이잇-

정수리 위에서 울리는 숨소리.

곧장 쥐고 있던 검날을 놓은 메브는, 떨어지는 검의 자루를 낚아채며 그대로 길게 올려 베었다.

번쩍! 신성력이 푸른 선을 그렸다.

선이 망령을 세로로 관통했다.

망령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툭 떨어뜨렸다.

끼아아…

산발한 머리칼을 얹은 흉측한 두개골이 비명과 함께 쪼개지고, 이윽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스러졌다.

"망령을 처리했다, 이안!"

메브가 소리쳤다.

좀 전부터 주위를 살피며 달리던 이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제부터 나를 시야에서 놓치지 마시오! 곧 갈림길이 나올 거요!"

"갈림길…? 알았다!"

대답한 메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의아해한 건, 이안이 전에도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해서였다.

이 또한 마법사가 품은 수많은 신비 중 하나인가.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의문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

이안이 후려친 구울 기사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안은 자신이 죽인 구울을 돌아보지조차 않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으깨져 널브러진 구울 기사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설마….'

놈이 걸친 갑옷의 형태가 아주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국의 친위 기사들이 착용하는 것과 똑같이 생겼으니까.

이안이 계단 앞에서 주운 목걸이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애써 잊었던 불길한 상념들이 선명하게 고개를 들었다.

'설마….'

멈춰선 메브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떨리는 손길로 시신을 붙잡았다.

갑옷의 이음매 부분에 새겨진 사슴뿔 문양.

허겁지겁 시신을 뒤적인 그녀의 손아귀에, 이윽고 부러진 목패 하나가 들려 나왔다.

흔들리는 눈으로 거기 새겨진 이름을 확인한 메브가, 비로소 고개를 떨궜다.

버논이 아니었다.

"하… 하하."

안도인지 무엇인지 모를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그 순간.

품속에서 공명하던 정수가 문득 마력을 퍼뜨렸다.

신성력을 일으키려던 메브가 순간 멈칫했다.

흑마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낯설지만 익숙한, 모순된 느낌이 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의식.

"...?!"

눈을 치켜뜬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언데드의 보랏빛 안광.

정수와 공명하는 무언가는 그 너머에 있었다.

그녀를 부르듯이.

"…경! 리우렐 경! 메브!"

마력 실린 이안의 외침이 메브의 정신을 간신히 일깨웠다.

눈을 깜빡인 메브는, 목소리가 들려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브러진 언데드의 잔해들.

그 위를 내달리는 필립과 미구엘.

그리고 그 너머의 통로 한복판, 눈을 부릅뜬 이안.

그의 외침이 이어졌다.

"조심하시오!"

"...!"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메브가 바닥을 굴렀다.

촤르르르르-

그녀가 주저앉아 있던 자리로 뼈 무더기가 쏟아졌다.

구울 기사의 시신이 그 사이로 파묻혀 사라졌다.

어느새 죽음의 찌꺼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것이다.

"나, 나리이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필립과 미구엘이, 바닥을 구르다시피 방향을 돌려 그녀 쪽으로 달려왔다.

연달아 땅을 구르며 메브는 숨을 헐떡였다.

충격을 받아서인지, 평소에는 한 몸 같던 갑옷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운 건 필립이었다.

반대쪽 팔을 부축한 미구엘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또 부상이라도 당하신 건-"

쿠구구구-

익숙한 진동이 그의 목소리를 가렸다.

필립과 미구엘, 메브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진동의 근원지 쪽으로 돌아갔다.

이안이 선 통로 앞에 석벽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비로소 메브의 눈이 커졌다.

"이안-!"

이내 이안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사라졌다.

홀연히 떠오른 검붉은 고대어.

"저런 미친, 염병할, 개 같은…!"

미구엘이 욕설을 토해내는 사이.

찌꺼기를 곁눈질하던 필립이 메브를 돌아보았다.

"나리! 이제 어떻게 할까요?"

굳어졌던 것도 잠시.

메브의 고개가 좌측으로 돌아갔다.

유일하게 남은 길.

"…따라오거라."

검을 으스러질 듯 움켜쥔 메브가, 이윽고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된 이상 갈 수밖에 없었다.

저 너머에 기다리는 게 무엇이건.

***

"뭘 봤길래 저런 거야…?"

앞을 가로막은 석벽을 응시하며,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필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서다니.

영문 모를 상황이었지만, 이안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게다가 메브라면 필립과 미구엘을 데리고도 한동안은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늦기 전에 끝내면 되겠지."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복도 너머, 낡아빠진 갑옷을 걸친 해골 기사 수십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물론 혼자가 된 지금은, 저놈들의 숫자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솨아아- 타탓!

몸을 기울였던 이안이 예고도 없이 튀어 나갔다.

카앙-!

해골 기사 하나가 내리친 검을 메이스로 빗겨 막은 이안은, 미련 없이 자루를 놔버리며 내달렸다.

좌우로 줄지어 이어진 석관들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이안의 시선이 안치실 너머의 야트막한 단상 위에 꽂혔다.

한쪽 무릎을 꿇고 검을 땅에 꽂은 요정 기사의 석상.

'게임이랑 똑같이 생겼네.'

해골 기사들을 이리저리 피해 지나친 이안이 석상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도약.

쩌억-

공중제비를 돈 이안이 석상이 내리꽂은 검의 무게추 부분을 짓밟으며 곡예하듯 착지했다.

한 박자 늦게 검이 단상 아래로 움푹 들어갔다.

철컥-! 쿠구구구-

단상이 뒤로 밀려나면서, 더 깊은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숨겨진 지름길이었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인 뒤에 출구로 사용했던 길.

달려오던 해골들이 우뚝 멈췄다.

고요하게 일렁이는 안광들.

들어오라 이거지?

이안은 보란 듯 미소 짓고는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계단은 직선으로 이어지다 꺾였다.

이안이 코너를 돌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한쪽 벽면이 사라졌다.

시야가 순식간에 트였다.

거대한 지하 동공.

'아겔 란의 국왕도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모르겠지.'

벽면을 따라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면서, 이안은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까지 빽빽하게 이어진 주문 회로.

곳곳에 솟은 굵직한 기둥은, 거대한 신전을 고스란히 지하로 옮겨 놓은 것처럼 웅장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여긴 고대 요정들이 죽음의 신을 모시던 신전이었으니까.

주문 회로가 모이는 중심부에 높이 솟아 있는 제단이 그 증거였다.

제단 위에는 반으로 부서진 석상과 온갖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유적을 타락시킨 장본인은, 바로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로브를 머리까지 덮어쓴 채.

흐르는 마력을 전신에 머금고서.

"기어코 여기까지 오다니…. 그 만용만큼은 칭찬해 주마, 적색 버러지야."

쇠를 가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보랏빛 안광을 줄기줄기 흘리면서, 흑마법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네 하찮은 잔재주가 통하리라 기대하지는…."

느긋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문득 끊겼다.

흑마법사의 안광이 흔들릴 찰나.

콰아아아아-

용의 숨결을 방불케 하는 불길이, 제단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콰르르르-

제단을 녹여 버릴 기세로 쏟아지던 불길이 한참 만에 잦아들었다.

자욱한 연기 사이, 왼손을 내뻗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손아귀의 정수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번졌다.

"학습 능력이란 게 없나…."

겪어 보고도 주절대고 지랄이야.

이안이 비웃듯 읊조릴 찰나.

"이… 노오오옴!"

제단에 덮인 연기를 뚫고 보랏빛 안광이 터져 나왔다.

"감히 또 내 말을 자르다니!"

흑마법사가 연기를 뚫고 솟구쳤다.

입고 있던 로브가 너덜너덜해지면서, 놈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그때와 같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네놈의 조잡한 주문 따윈 더는 통하지 않을 테니!"

"말 많네. 되다 만 리치 주제에."

이안이 놈을 훑으며 빈정댔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고 어깨 위에 뼈로 만들어진 팔이 하나씩 더 돋아 있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기억보단 여러모로 초라했다.

게임에서의 놈은 뼈만 남은 데다 팔도 여섯 개였고, 이마 한복판에 커다란 정수까지 박혀 있었으니까.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정곡을 찔린 듯 흑마법사가 격노했다.

제단 뒤편에서 보라색 마력이 번지더니, 그대로 흑마법사가 치켜든 마법 봉으로 빨려 들어갔다.

놈의 등 뒤로 거대한 악령이 뭉치기 시작했다.

사령 소환. 물리적 실체를 갖춘 악령 덩어리가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을 때, 이안은 이미 제단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네놈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철저하게 깨닫게 해 주마! 끝없는 고통은 그 후에 선사할지니!"

흑마법사가 마력이 맺힌 왼손을 치켜들었다.

퍼서석- 푸스스-

땅속에서 해골들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어 나왔다.

인간보다 더 크고 긴 골격.

시원 지하에 묻혀 있던 고대 요정들의 유골이었다.

순식간에 포위당한 형국이었지만.

이안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기억보다 약한 것 같은데. 변이가 덜 끝나서 그런가.'

게임 속 흑마법사는 날아다니는 데다 온갖 주문과 소환을 난사하고, 패턴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런 만큼 체력이 낮고 물리 공격에도 취약했다.

접근할 수만 있으면 의외로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여러모로 불완전한 지금은, 아마 더 쉬우리라.

"두렵나? 벌써 굳어 버리다니 애석하군. 공포는 이제 시작이거늘."

흑마법사가 마법 봉을 뻗었다.

장내의 모든 언데드가 이안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반대일걸? 새꺄."

이안의 눈동자가 다시금 붉게 달아올랐다.

손아귀의 정수가 회전하면서, 이안의 주위로 수많은 불덩어리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춤추는 불꽃.

쓰기 쉽다는 이유로 별생각 없이 2레벨이나 배운 이 하위 적색 마법은, 정수로 증폭되자 불꽃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었다.

정확한 조준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준 자체가 필요하지 않았다.

적이 모든 곳에 있었으니까.

콰과과과광-

달려들던 해골들이 불꽃에 부딪혀 터져나갔다.

후끈한 열기와 산산이 부서진 뼛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쉬학-!

그 사이로 이안이 솟구쳤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그를 보며, 흑마법사가 조소했다.

"통하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그가 보랏빛 마력을 내뿜는 마법 봉을 길게 휘둘렀다.

마력의 궤적을 따라, 울부짖는 망령들이 맺힌 장벽이 피어올랐다.

끼아아아-

장벽에서 터져 나오는 귀곡성.

이안이 땅을 향해 화염구를 내던진 건 그 직후였다.

퍼엉-!

화염구는 얼마 뿜어져 나가지 않아 폭발했다.

그 반작용으로 연기에 휩싸인 이안의 몸이 허공에서 한 번 더 솟구쳤다.

"뭣…?!"

그것까지 예상하지는 못했는지, 흑마법사가 쇳소리를 냈다.

그사이 망령 장벽을 뛰어넘은 이안이 몸을 휘돌렸다.

잿빛이 아른거리는 눈동자.

바람을 전신에 두른 채 회전하던 그의 몸이, 일순간 화살처럼 흑마법사를 향해 쏘아졌다.

어느새 이안의 오른손에 들린 새로운 메이스가 흑마법사의 머리를 향해 뻗어나갔다.

네 개의 팔로 얼굴을 가린 흑마법사가 황급히 물러났지만,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철퇴로 모여든 바람이 맹렬하게 회전했고.

콰지직-!

뼈로 만든 팔 두 개와 함께, 흑마법사의 한쪽 어깨가 통째로 박살 났다.

"키- 아아악-!"

흑마법사가 허공에서 활처럼 몸을 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제단 위를 구르며 착지한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빗나갔네. 씁."

#027화

역시 응용은 어렵다니까.

마법을 본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거나 서로 다른 속성의 마법을 섞어 쓰는 것은, 그가 망캐이기에 가능한 응용법이었다.

사실 망캐가 아니라면 연구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계속 연구하고 시도할 필요가 있었다.

실패해도 괜찮을 때 특히 더.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만한 시점이 됐을 때는, 연습할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실패는 그리 위험하지 않았다.

"네 이노오옴…! 유물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방심을 유도하다니!"

자세를 추스른 흑마법사가 울부짖었다.

다른 속성의 마법일 거란 생각은 그 역시 전혀 하지 못한 모양.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들켰네."

흑마법사의 시선이 메이스로 향할 찰나, 이안이 다시 몸을 날렸다.

바람이 그를 힘껏 떠밀었다.

"쥐새끼다운… 짓이로구나!"

흑마법사가 하나 남은 팔을 치켜들었다.

용케도 마법 봉을 놓치지는 않은 채였다.

끼아아아-!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망령 장벽이 귀곡성을 흩뿌리며 펼쳐졌다.

이번엔 아예 주위 전체를 뒤덮은 형태.

역시 두 번은 안 통하나.

입맛을 다신 이안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무리 그라도 빈틈이 없는 장막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끼아악-!

장벽이 이안을 뚫고 지나가며 저주를 흩뿌렸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원한.

그의 정신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지만, 돌진을 막는 데는 충분했다.

이안이 그대로 추락하는 사이.

고오오오-

마법 봉을 치켜든 흑마법사의 전신에 보랏빛 마력이 휘몰아쳤다.

제단 뒤편에서 다시 한번 마력의 파장이 번졌다.

사방의 주문 회로가 번뜩이고, 이안을 올려다보던 언데드들이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 사이로 무사히 착지한 이안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바로 2페이즈? 빨라서 좋네.'

촤르르르-

해골들이 조각조각 분해되어 흑마법사에게 빨려 들어갔다.

촤라락- 뼛조각들이 흑마법사의 전신에 끝도 없이 달라붙었다.

무수한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리치의 형상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놈의 약점 중 하나인 물리 방어력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방어력만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네 발버둥은 여기까지다, 적색 버러지야…. 이것이 공허의 심연에서 손에 넣은 권능이니."

공동을 웅웅 울리는 목소리.

무수한 두개골을 왕관처럼 두른 리치가, 거대해진 팔을 들었다.

"…전형적인 새끼 같으니라고."

그 손아귀에 뭉치는 사령의 덩어리를 바라보며, 이안이 피식댔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마력이 휘몰아쳤다.

"죽음이 곧 축복이리란 깨달음을 내려주마."

이안이 마법을 완성하는 것보다, 리치가 손을 내리치는 게 빨랐다.

끼아아아아-

응축된 사령이 광선처럼 뿜어져 나갔다.

이안이 그대로 옆으로 내달렸다.

콰과과과과- 끼아아아악-

쏟아진 광선이 사방으로 사령의 잔재를 흩뿌리며 그를 따라왔다.

이안은 이를 악문 채 흑마법사의 주위를 돌았다.

빙글빙글 돌면서 조금씩 간격을 좁히는 건 게임에서의 전략이었다.

직선으로 달려가면 광선을 피할 수 없었고, 기둥 뒤로 숨으면 반격의 기회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이 방식은 현실이 된 지금도 유효했다.

끼아아아-

한참 따라오던 광선이 잦아들었다.

사령의 잔재들이 천장과 벽면을 튕기며 수없이 날아들고, 흑마법사가 곧바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나도 두 번은 안 당하거든.'

이안의 눈동자에 다시 붉은 마력이 몰아쳤다.

날아드는 사령의 잔재들은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화르르륵-

덕분에 이번에는 그의 마법이 더 빨리 완성됐다.

수십 개의 불꽃이 연달아 피어올라 리치를 향해 뻗어나갔다.

콰과과광-

놈의 거대한 머리와 어깨, 가슴팍에 마구잡이로 부딪힌 불덩이들이 폭발했다.

섬광과 자욱한 연기가 놈을 휘어 감았다.

"하찮은… 주문이군."

비웃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사령이 가득 맺힌 손아귀가 연기를 가르며 뻗어 나왔다.

끼아아아악-

사령 광선.

하지만 이안은 이미 거기 없었다.

처음부터 놈의 시야를 가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마법을 펼치자마자 직선으로 내달린 것이다.

쩍, 텅 비어 버린 정수가 쪼개지며 손에서 떨어졌다.

개 아깝네, 시발.

혀를 찬 이안이 아공간에서 새로운 정수를 꺼냈다.

"쥐새끼 같은 짓만 골라 하는군!"

리치가 그제야 이안의 위치를 눈치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쏟아지던 광선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이안이 놈의 발과 발 사이로 쑥 들어가 버린 건 그 직후였다.

"...?!"

리치의 안광이 흔들렸다.

그의 기형적인 팔은 다리 사이를 조준할 수 없을 만큼 컸고, 마법을 펼치는 동안에는 몸을 돌리는 정도밖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치직- 치지직-

이안이 고등 마법을 완성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는 의미였다.

그의 주위로 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러쥔 손아귀 사이에서 전격이 줄기줄기 피어올랐다.

파치치치칫-

전격은 순식간에 거미줄처럼 빼곡하게 번져 나갔다.

손아귀를 넘어 팔뚝까지 번개를 휘감은 듯한 형상이 된 그때.

비로소 악령 광선이 잦아들었다.

둔탁한 움직임으로 한 걸음 물러난 리치가 이안을 내려다보았다.

해골에 표정이 있을 리 없건만.

그의 얼굴에 또렷하게 새겨진 감정은, 경악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회색…?! 유물이… 아니었다고?"

이안이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

"...?!"

그제야 리치의 안광이 출렁였지만.

이안은 이미 망설임 없이, 번개가 가득 맺힌 양손을 놈의 가랑이를 향해 뻗고 있었다.

손바닥 사이의 정수에서 시리도록 푸른 빛이 터져 나왔다.

꽈릉-!

굵은 벼락이 리치를 관통했다.

콰치치치칙-

눈부신 발광이 이어졌다.

시전 시간과 마력 소모량 때문에 거의 쓸 일이 없는 중위 회색 마법, 연쇄 번개.

하지만 그만큼 공격력이 높았고, 물리 방어력을 무시하는 부가 효과까지 있었다.

정수의 증폭까지 더해지면, 전신에 뼈 껍질을 두른 흑마법사라도 충분히 튀겨 버릴 수 있으리라.

파치치칙-

리치의 전신에 맺혀 한참을 번쩍이던 전격이, 이윽고 흩어졌다.

바들대던 리치가 굳어졌다.

거대한 눈구멍과 벌어진 턱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 것도 잠시.

파스스스-

놈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

이안이 황급히 물러났다.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뼛가루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가루 더미에 파묻혔다가 솟아오른 이안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개 찝찝하네, 진짜.

얼굴만 대충 털어낸 그가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정수와 메이스를 아공간에 되돌린 그가, 검을 꺼내 들며 멈춰 섰다.

수북한 뼛가루 한복판.

흑마법사가 널브러져 있었다.

본래도 미라 같던 팔다리는 검게 타서 눌어붙었고, 눈은 익은 것처럼 하얗게 멀어 버린 채였다.

귀까지 먹지는 않았는지, 놈이 바들댔다.

"어떻게… 다른 색의 마법을…?"

입술 사이로 연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안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곧 뒈질 텐데 아직도 그딴 게 궁금하냐?"

"...."

흑마법사가 입을 뻐끔댔다.

놈의 비쩍 마른 얼굴에 비로소 공포가 번졌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진정한 불사자로 거듭날 수 있었을 텐데…. 태초의 진리가… 심연의 권능이 내 것이었거늘… 제기랄…."

몸의 뼛가루를 털며 애원인지 유언인지 모를 주절거림을 듣던 이안은, 이윽고 흑마법사의 등에 한쪽 발을 얹었다.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그가 팔을 치켜들었다.

"넌 시간이 더 있어도 불사자가 되거나, 그놈의 진리라는 걸 깨닫지도 못했을 거다. 콘라우드."

"그럴 리가 없… 네, 네놈, 내 이름을 어떻게…?"

퍼석!

검이 콘라우드의 목을 쳤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잘려나간 그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몸을 숙인 이안이 놈이 사용하던 마법 봉을 주워든 그때였다.

푸스스스-

콘라우드의 머리에서 검 보랏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번져 나온 그건, 뒤틀리고 비대해진 흑마법사의 망령이었다.

"...?"

이건 없었던 일인데?

이안이 미간을 좁힌 순간, 또 다른 변화가 일었다.

허공에 쩍, 균열이 일더니 공간이 갈라지며 구멍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너머로 보랏빛이 일렁였다.

끄- 아아아아-

콘라우드의 영혼이 끌려 들어가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고통에 찬 비명.

진공청소기처럼 콘라우드의 영혼을 빨아들인 구멍은, 나타날 때만큼이나 한순간에 사라졌다.

"…뭐야, 저거."

이안이 눈을 끔뻑였다.

공간을 찢고 영혼을 삼키는 구멍이라니.

"공허… 인 건가?"

공허, 태초의 혼돈, 심연 따위는 타락자들이 달고 사는 말이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마법 봉을 아공간에 넣으며 뼈 더미 아래로 내려갔다.

콘라우드의 수급.

영혼을 빨렸어도, 오염된 마력의 잔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증거로 써먹기엔 충분하겠지…."

준비해 둔 천 주머니에 머리를 넣은 이안이, 비로소 비틀대며 주저앉았다.

마력을 대량으로 소모한 여파가 뒤늦게 밀려들었다.

울렁거리는 속과 지끈거리는 머리.

정수로 마법을 몇 번만 더 썼더라면 마력 탈진 상태에 빠졌으리라.

"그나저나…."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이안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왜 안 꺼지지.'

주문 회로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의 언데드들이 계속 움직이고 있으리란 의미였다.

게임에선 흑마법사를 죽이면 작동이 멈추면서, 언데드들까지 싹 다 쓰러졌었건만.

"혹시…."

이안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했다.

콘라우드가 고위 마법을 쓸 때마다 번지던 마력의 파장을 떠올린 것이다.

또 쓸데없는 현실성 같은 게 생긴 건가.

'애초에 마법부터가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이안이 혀를 차며 일어섰다.

제단을 빙 돌아간 그는, 이윽고 제단 뒤편의 한복판에서 멈췄다.

제단의 옆면을 따라 새겨진 주문 회로가 모여, 원형의 빈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충분히 들어갈 크기.

마력을 끌어올린 이안이 손을 가져다 댔다.

쿠르릉-

문양이 새겨진 벽면이 움푹 들어가면서, 제단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이 계단에 들어섰다.

벽면과 천장에 새겨진 마력 회로 덕에 어둡지는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과 계단 사이의 간이 공간이 나타났다.

작은 책장. 그리고 종이와 책이 쌓인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여간 마법사란 것들은.'

이안은 무심하게 책상을 훑었다.

마법사는 저마다의 연구와 탐구를 끝없이 이어가는 족속들이었다.

이안도 몇 번인가 다른 마법사의 연구 일지를 읽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 조현병 환자의 일기 같은 느낌이었지만.

'어쨌건 나름대로 도움 되는 정보도 섞여 있긴 했었지.'

이안의 시선이 이윽고 가죽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에서 멈췄다.

연구 일지.

일지를 챙긴 이안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주문 회로의 빛이 점점 더 밝아지는 가운데, 한 평 남짓한 넓이의 밀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문 회로는 밀실 중앙의 기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1미터 정도 높이의 기둥.

그 위에 축구공만 한 보라색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이게 정수가… 맞나?'

처음 보는 거대한 크기.

기둥으로 다가서면서 이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전해지는 느낌이 오염된 마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순한 마력 같았고, 심지어 신성력 같기도 했다.

'어쨌든, 이게 동력원이긴 하겠지.'

기둥 앞에 멈춰 선 이안이 잠시 볼을 긁적였다.

'…부숴 버리긴 좀 아까운데.'

이안은 이내 자신의 저항력을 믿기로 했다.

전해지는 느낌이 타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결정에 한몫했다.

손아귀에 마력을 응집시킨 이안이 구체로 손을 뻗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손끝이 닿자, 구체 표면에 동심원이 번졌다.

이안의 손이 구체 내부로 쑥 빨려 들어간 건 그 직후였다.

"어…?"

눈을 치켜뜬 이안이 손을 빼려 한 다음 순간.

푸확-!

구체가 페인트 탄처럼 폭발하면서 그를 덮쳤다.

세상이 확 뒤집혔다.

그리고 암전.

#028화

'이게 대체 뭐야…?'

이안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했다.

불현듯 귀가 먹먹해졌다.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동시에 솟구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번졌다.

다음 순간, 별들의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우주.

이안은 그 한복판으로 떨어지면서도 솟구치고 있었다.

이안은 지금 자신의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의식만이 우주 한복판에 떨어져, 엄청난 속도로 흘러갈 뿐.

온갖 행성들이 가까워졌다가, 다음 순간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황홀하고도 공포스러운 광경.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들과 엄청나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현실감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뭐건 간에, 개 쩔긴 하네.'

이안은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 수도 없이, 그저 그 모든 것들을 마주 보았다.

저 멀리 반짝이던 별들이 형형색색의 선이 되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밀려났다.

이안은 자신이 점점 더, 끝도 없이 빨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직선이 곡선이 되고, 지금 자신이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가던 한순간.

불현듯 모든 선이 사라졌다.

대신 이안의 시야를 채운 건, 소리 없이 일렁이는 빛의 고리였다.

암흑을 머금은, 거대한 빛의 고리.

이안은 그것이 예전에 영화에서 본 무언가와 몹시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블랙홀…?'

이걸 정말 그런 단순한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경탄을 끝맺을 틈도 없이, 그는 블랙홀의 고리 앞에 도달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이런 순간까지 침착할 수는 없었다.

저 안에선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시야가 번쩍이고, 일렁이고, 다시 어두워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안은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법칙이 뒤집힌 세계.

다음 순간, 빛이 사라졌다.

대신 어둠이 내려앉았다.

새하얀 어둠.

어떤 거대한 존재의 눈동자였다.

그의 인지력으로는 형체를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

그때,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

전율. 뒤이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었다.

영원과도 같은 찰나의 순간.

모든 것이 점이 되어 멀어졌다.

시야가 다시 뒤집혔다.

"우웩…!"

처박히듯 바닥에 쓰러진 이안이 속을 게워냈다.

그의 전신에 맺힌 보라색 안개가 반짝이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현실로 돌아왔으나, 이안은 여전히 공포에 잡아 먹혀 이성을 되찾지 못했다.

모든 감각이 뒤섞여 흘러내렸다.

전신이 발작하듯 떨리는 가운데, 이안은 상태 창을 열어 정신력 수치를 마구 올렸다.

본능적인 발악에 가까운 행동.

하지만 효과가 있었다.

발작이 가라앉고, 공포가 서서히 밀려났다.

감각이 제자리를 되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만큼은 여전했다.

주문 회로가 작동을 멈추면서, 광원이 완전히 사라진 탓이었다.

"퉤. 후우, 후우…."

이안은 위액 섞인 침을 뱉으며 숨을 골랐다.

상태 창을 보니 정신력 수치가 무려 아홉 개나 올라 있었다.

포인트를 대량 소모한 셈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쓰지 않았다면 미쳐 버렸을 테니까.

어차피 필요한 능력치이기도 했고.

상태 창을 닫은 이안의 시선이, 문득 다시 어둠 한복판에 고정됐다.

새로운 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또 뭐야…?'

처음 보는, 심지어 받은 적도 없는 서브 퀘스트가 완료되어 있었다.

혼돈의 조각.

태초의 혼돈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공허로 돌려보냈다는 게 본문의 내용이었다.

보상은 혼돈의 파편.

'그 블랙홀이 공허였다고?'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럼 그 존재는… 고대신인가.'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타락자들이나 종종 언급하는 공허의 신 중 하나를 보게 될 줄이야.

'콘라우드도 이걸 봤을까? …하긴. 봤으면 살아 있을 리 없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어쨌건 보상은 있었다.

그것도 그의 몸속에.

이안은 이성이 돌아온 직후부터, 마력을 처음 느꼈을 때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몸속 어딘가에 새로운 감각 기관이 돋아난 듯한 감각.

이안은 차분히 기관을 관조했다.

심상 어딘가에 멋대로 자리 잡은 주먹만 한 덩어리.

그 내부에서, 혼돈의 조각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정순한 마력 같기도, 신성력 같기도 한 무언가.

'혼돈… 이거 설마, 혼돈력인가?'

이안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아귀가 딱 맞는 생각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혼돈력은 공허의 에너지니까.

게임에서도 극소수의 타락자나 마족들이 사용하던 힘이었고.

플레이어가 혼돈력을 손에 넣으려면, 캐릭터를 타락시켜야 했다.

'…사도 퀘스트 때도 그러더니. 정말 모든 제약이 없어진 거군.'

이안은 이내 현상을 받아들였다.

원리나 근거 따윈 중요치 않았다.

혼돈력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잘 됐지 뭐, 가뜩이나 마력도 딸리는데. 연구만 잘해서 쓰면….'

생각을 이어가던 이안의 눈썹이 문득 꿈틀댔다.

익숙한 파장이 느껴져서였다.

"메브…?"

착각이 아니었다. 신성력, 그리고 오염된 마력이 만들어 내는 파장이 피부가 오싹할 정도로 전해졌다.

다 끝난 판에, 뭔데?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이안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렸다.

빛 한 점 없는 암흑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헤집으면서.

***

일행의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간 보스, 죽음의 기사.

주문 회로의 작동이 멈춘 지금, 이만한 전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놈은 그놈뿐이었으니까.

그의 생각은 정확했다.

"...."

단지 조금 늦었을 뿐.

울부짖는 듯한 기합 소리.

이어진 신성력과 마력의 충돌을 느끼며, 이안은 통로로 들어섰다.

그의 걸음이 이내 느려졌다.

기사의 방 한복판.

두 기사가 한데 들러붙은 채로 굳어있었기 때문이다.

승자와 패자는 명확했다.

메브의 검이 죽음의 기사의 갑주를 꿰뚫고, 놈의 등 뒤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으니까.

죽음의 기사의 검은 메브의 한쪽 견갑에 박혀 있었다.

느낀 대로, 불과 몇 초 전에 결착을 맺은 모양.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쨌거나 메브가 이겼으니까.

보아하니 주문 회로가 꺼지면서, 다시 신성력을 받을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막판에 다 망치는 줄 알았네….'

생각하며, 이안이 느긋하게 장내로 들어선 그때였다.

"아… 아아…."

굳어 있던 메브가 탄식했다.

"아… 아아아악-!"

탄식은 처절한 절규로 바뀌었다.

직후,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 신성력이 폭발하듯 솟구쳐 치솟았다.

이안이 멍하니 굳어질 찰나.

콰아아아- 쩌엉!

타오르던 신성력은, 아예 빛의 기둥이 되어 메브를 집어삼켰다.

그 사이로 죽음의 기사를 움켜쥔 메브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안면 가리개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

대체 이게 뭔 상황이지.

눈을 끔뻑인 이안은, 이내 방의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필립과 미구엘이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얼빠진 표정의 미구엘과 달리, 필립은 눈물을 글썽대고 있었다.

다가오는 이안을 발견한 미구엘이 눈을 치켜떴다.

"혀, 형씨…! 기다렸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놈은 또 왜 이러고."

넋 나간 필립을 보며 미간을 좁힌 이안이 물었다.

필립은 빛의 기둥을 망연자실하게 응시하며, 우리 불쌍한 나리… 따위의 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미구엘이 우물댔다.

"그, 그게 말이오… 끄응."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전부."

"저, 나리가 죽인 기사 말이오."

"그래."

"그게… 나리의 동생이오."

"뭐…?"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털썩 주저앉은 필립이 말했다.

"용병 나리와 떨어진 후에, 저희는 반대쪽 길을 뚫었습니다. 위험했지만, 어떻게든 해냈죠. 나리께서 무리하셨습니다. 평정심을 잃으신 것처럼 보였죠. 전 그게 호프 나리와 떨어져서인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느끼고 계셨던 겁니다. 동생분께서 이곳에 있으시단 것을요."

"하…."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죽음의 기사가 버논이었다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정체였다.

"그래서."

"어쨌든 우린 여기까지 왔소. 언데드들이 물러나더군. 저 작자… 리우렐 가주가 명령한 거였소. 나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미구엘이 눈치껏 말을 받았다.

입맛을 다신 그가 빛의 기둥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나는 이제 누님보다 강해졌다고 했소. 누님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애초에 나리를 직접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경이 많이 놀라셨겠군."

"저 작자의 말에 대꾸도 못 하실 정도였소. 저자가 우릴 먼저 죽이겠다고 하니, 그제야 움직이시더군. 나 같아도 피붙이가 어둠에 물들어서 미쳐 버리면 바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요."

버논은 미친 게 아닐 테지만.

생각하며,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물론 고위 언데드로 되살아나면서 정신이 오염되긴 했으리라.

하지만 아예 없던 생각을 하게 만들지는 못할 터였다.

가지고 있던 생각을 뒤틀거나 증폭시킬 뿐.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예 다른 인격이 되긴 하겠지만.

버논이 언데드가 된 시간은, 그러기엔 너무 짧았다.

"어쨌든, 그렇게 싸움이 시작됐소. 우리 나리께서 밀리셨지. 충격도 받으셨고 신성력도 거의 없으셨으니까. 가주 저 작자는 나리를 조롱했소.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실력을 증명하려는 애송이처럼 굴었소. 그러다가…."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작자가 갑자기 그러더군. 자신의 주인이 죽었다고. 그때 우리도 알게 됐소. 형씨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걸 말이오. 그러면서 저자가 뭐라고 했는지 아시오?"

"뜸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자신을 구속하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세상으로 나가겠다 했소. 이 빌어먹을 왕국부터 불태울 거라더군. 모든 것들의 생명을 취해서, 더 강해지겠다고 말이오. 저 검은 벽 너머의 마족들처럼. 자신의 영지를 만들겠다고."

그 주인에 그 하수인이군.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야말로 헛된 꿈이었다.

분명 버논은 다른 타락자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리라.

"그래서 경이 결단을 내리셨군."

"아니오. 나리는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으셨소. 정화할 수 있다고, 저 작자를 설득하려 했지."

미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졌소. 나리의 온몸에서 신성력이 샘솟더군. 나리도 당황하신 것처럼 보였소. 단죄의 여신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거요. 그러실 만하지. 아끼는 사도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돌아왔으니."

"이런…."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차라리 메브가 자의로 버논을 죽인 것이길 바랐건만.

"저 미친 작자는 오히려 즐거워했소. 그러면서 진심으로 나리를 죽이려 했소. 전력을 다하고 싶었던 건지…. 어쨌든, 그렇게 진짜 싸움이 시작된 거요. 나리께선 거의 울부짖으셨소. 끝까지 죽이고 싶진 않으신 것 같았는데…."

미구엘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마지막엔, 저 작자가 나리의 검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뭔진 모르겠소만. 어쨌든… 그리고…."

미구엘이 빛의 기둥과 이안을 번갈아 턱짓했다.

"저렇게 되셨고, 형씨가 온 거요."

"…그랬군."

이안은 짧게 혀를 찼다.

동생을 찾지 못하면 미친 학살자가 되고, 찾으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하는 운명이라니.

이 세계가 게임이었을 때는 이런 비극적인 부분들이 재미있었지만.

현실이 된 지금까지도 즐길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세계라는 생각이 들 뿐.

그때.

푸스스…

마침내 빛의 기둥이 잦아들었다.

메브의 몸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녀의 품에 안긴 죽음의 기사, 버논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에 흐릿한 신성력을 머금은 채, 메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버논의 찌그러진 투구를 훑었다.

철컥. 안면 가리개가 떨어지고, 버논의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의 한쪽에 뼈가 드러난, 언데드 특유의 변이된 몰골.

하지만 메브는 애틋하기까지 한 손길로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안이 걸음을 옮겼다.

메브가 다가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면 가리개 너머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의뢰는 완수되었다, 이안. 감사를 표하마. 네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뜻밖에도 아주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더 함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나 홀로 해나갈 생각이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멈춰 선 이안이 물었다.

잠시 침묵한 메브가 말했다.

"내 동생은 배덕자들에게 죽임당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강제로 되살아나 부려지기까지 했지. 그로 인해 이 아이의 영혼은 타락했고… 끝내, 구원조차 받지 못했다."

그녀가 버논을 돌아보았다.

"나는 여신께 간청하였다. 이 아이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라고. 하지만 응답하지 않으셨다. 당연하다. 여신은 죄를 심판하는 분이시지, 구원하는 분이 아니시니까."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일렁였다.

"…하지만 내가 복수를 바란다면, 응답을 주시겠지."

"...."

이안의 눈이 검게 가라앉는 가운데, 메브가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나는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자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을 섬기는 하수인들 역시."

"그러니까…."

비로소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가 싸늘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 죽여 버릴 거란 말씀이오?"

메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전신에 맺힌 신성력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원하는 복수다, 이안."

이윽고 완전히 일어섰을 때, 그녀의 전신은 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왕국의 타락자와 하수인을 찾아내,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복수의 사도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버논에게 그리했듯.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전부."

"...."

슬쩍 눈을 감은 이안이, 피로가 묻어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허리춤의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눈을 떠 메브를 마주 본 그가, 고저 없는 말투로 내뱉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소."

#029화

순간 굳어졌던 메브가 물었다.

"안 되겠다니?"

"경과 나 사이엔, 아직 의뢰가 남아 있잖소."

"그 의뢰를 취소하겠다는 뜻이다, 이안."

이안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뢰인의 사정 때문에 받은 의뢰를 취소한 적이 없소. 의뢰를 받은 이상, 내 알 바 아니기 때문이지."

메브를 똑바로 마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일어난 일은 유감이오. 하지만 예외를 둘 수는 없소."

"...."

메브의 신성력이 흔들렸다.

이안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모양.

필립과 미구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거나 보수를 떼먹은 의뢰인을 살려 보낸 적도 없소. 그러니까 경이 계약을 파기하신다면…."

이안이 검을 고쳐 쥐었다.

"나와 싸우셔야 할 거요.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그런…."

"어려우실 것도 없잖소? 경의 말씀대로면 수많은 이들을 죽이게 되실 텐데. 거기 나 하나 추가된들 뭐가 대수겠소. 물론…."

이안의 시선이 메브를 훑었다.

깨진 견갑. 지쳐서 떨리는 손끝.

"경이 죽게 되실 수도 있겠지."

"...."

신성력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안면 가리개 너머의 눈에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살의가 번져나갔다.

이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두, 두 분, 우선 진정을-"

허둥지둥 끼어들던 필립의 입을, 미구엘이 황급히 틀어막았다.

그가 버둥대는 필립에게 제발 닥치라고 속삭이며 물러나는 사이.

메브가 버논의 가슴에 박힌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나는 오늘 이미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녀가 이안을 다시 마주 보았다.

"…한 명을 더 잃고 싶진 않군."

신성력이 사그라들었다.

메브가 검을 회수했다.

바짝 긴장했던 필립과 미구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너졌지만.

이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취소하지 않으시겠다는 거요?"

"그래. 우리의 계약은 유효하다. 하지만… 내 복수 역시 그렇다."

"경의 복수를 말릴 생각은 없소."

비로소 검을 늘어뜨리며, 이안이 덧붙였다.

"성공하실지는 모르겠소만."

"…내 방식이 틀렸다는 말이냐? 아니면, 혼자서는 힘들다는 뜻인가?"

이안은 그녀의 방식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그리고 그걸 택한 그녀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어깨를 으쓱이며.

"둘 다라고 하겠소."

하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잠시 굳어졌던 메브가 이윽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철컹, 안면 가리개가 올라갔다.

여기사의 슬픔과 피로에 찌든 얼굴이 드러났다.

"…네가 내 복수를 돕는다면?"

"그럼 얘기가 달라지겠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일행을 차례로 돌아본 그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나갑시다. 이 썩은 내 나는 지하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으니."

물론 그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부분들도 남아 있었다.

***

어느새 한밤중이었다.

미구엘은 지하 무덤의 출입구 앞에 모닥불을 피웠다.

흑마법사가 사라지면서, 역설적이게도 이곳이 밤을 보내기에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되었다.

"대단하셨소, 형씨."

나뭇가지에 꿴 육포를 불 옆에 늘어놓은 미구엘이 이안을 돌아봤다.

쉬고 있던 이안이 입만 달싹였다.

"뭔 소리냐?"

"나리를 막으신 것 말이오."

저만치, 버논의 시신을 정돈하는 둘을 돌아본 미구엘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리께서 아무리 눈이 돌았어도, 형씨까지 죽이려 들진 않으시리란 걸 알고 그러신 거잖소."

"아닌데?"

"아니긴 무슨.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 살벌한 상황에서 진짜로…."

이안의 눈을 본 미구엘이 순간 입을 뻐끔댔다.

"…진심이셨군. 그러실 수 있지."

"예외라는 건, 두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는 거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지만.

이안은 뒷말을 삼켰다.

사실 그는, 팔 하나 정도는 날려 버려서라도 메브를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녀가 복수의 사도가 되는 건 막지 못했지만.

미쳐 날뛰다가 개죽음당하는 꼴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메브가 먼저 검을 거둔 건 그로서도 의외였다.

분명 넘실거리는 증오와 광기를 느꼈고, 그걸 억누르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뭐가 한도 끝도 없으십니까?"

그때 필립이 옆에 앉았다.

"몰라도 되니까 이거나 드쇼."

미구엘이 육포를 건네는 사이, 메브가 이안의 건너편에 앉았다.

분위기가 순간 어색해졌다.

필립과 미구엘이 시선을 돌리며 육포만 질겅대는 가운데.

"괜찮으시겠소?"

이안이 침묵을 깼다.

메브가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이 말이냐?"

"복수의 사도가 되셨잖소. 많은 것이 달라지셨을 것 같소만."

"…그래."

메브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신께선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만 신성을 내려 주시겠지."

극단적인 제약.

하지만 그런 만큼, 복수에 있어서만큼은 전보다 더 강대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으리라.

'단죄의 사도로서 지켜야 할 제약도 사라졌을 테고. …정말 복수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게 된 거군.'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손으로 흑마법사를 죽이지 못한 것만큼은, 평생의 후회로 남겠지….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대의와 복수를 모두 저버렸으니."

자조적으로 읊조린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놈과의 전투는 어떻게 된 거냐?"

"평소랑 같았소. 싸웠고, 죽였지."

이안이 옆에 내려놨던 천 주머니를 그녀에게 던졌다.

"놈의 수급이오. 가지고 돌아가시면 될 거요."

"...."

메브가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든 콘라우드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여러 감정이 오가는 눈빛.

눈동자만 굴리던 필립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래서, 그… 마법으로… 죽이신 겁니까?"

왜 이 말이 안 나오나 했다.

이안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런 셈이지."

"…필립. 내가 댁을 생각해서 하는 조언인데 말이오."

혀를 찬 미구엘이 끼어들었다.

"댁은 눈치를 좀 키울 필요가 있소. 아니면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좀 하든가."

"뭐라고요…?"

"형씨가 왜 마법을 숨겼겠소? 알리고 싶지 않아서겠지? 그걸 우리를 살리려고 드러냈으면, 질문이 아니라 감사를 표해야 한다 이거요. 모르는 척도 해 주고. 눈치껏."

"...."

말문이 막힌 표정이 된 필립이, 이윽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나리.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나리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이는 그때, 메브가 천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의뢰가 완료되었으니, 보수를 지불하는 게 순서겠지."

그녀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흑마법사를 죽이면 추가 보수를 받기로 했었지. 무엇을 원하느냐?"

"흐음…."

이안은 턱을 긁적였다.

본래는 흑마법사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을 다 요구할 생각이었는데.

메브가 족족 양보해 댄 덕에, 막상 더 요구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는 없는 노릇.

이내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아서 주시오. 합당한 것으로."

"합당이라…."

잠시 고민한 메브가 일어섰다.

그리고는 허리춤에 멘 검을 검집째로 떼어 냈다.

"그럼 이 검을 받아 주겠느냐?"

필립과 미구엘은 물론, 이안까지도 순간 눈을 치켜떴다.

필립이 더듬댔다.

"나리, 그건 제국 강철로 만든 검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걸맞은 보상이 되겠지."

메브가 검을 내밀었다.

이걸 줄 줄이야.

그녀의 배포에 감탄하며, 이안은 사양하지 않고 검을 받아들었다.

이 검은 게임에선, 그녀를 죽여야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복수자의 검.

'단죄의 검이라….'

하지만 지금은 이름뿐만 아니라 능력치도 달랐다.

그때는 부서지기 직전인 데다 수리도 불가능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무엇보다, 게임에선 본 적 없던 권능까지 깃들어 있었다.

2레벨의 단죄의 일격.

24시간의 쿨타임이 있긴 했지만, 아무런 대가 없이 쓸 수 있었다.

유일 등급의 검이지만, 사실상 성물에 가까운 것이다.

게임에서 이런 게 없었던 건, 아마 무고한 자들의 피를 잔뜩 머금으면서 신성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들었다시피 제국 강철로 만들었고, 나와 오래 함께한 검이다. 이름난 명검은 아니지만, 도움이 될 거다."

"…이 검은 명검이 맞소."

자루를 쥔 이안이 가볍게 손목을 휘둘렀다.

좋은 균형감.

하지만 보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의 근력으로는 메브처럼 가볍게 휘둘러 대진 못하리라.

'최대한 적응해 보고, 정 안 되면 힘을 두어 개까진 더 찍지 뭐.'

가뜩이나 쓰는 무기마다 족족 부러뜨리는데.

이만한 명검을 오래 쓸 수 있다면, 그 정도 지출은 감수할 수 있었다.

이안이 계속 검을 관찰하는 사이.

메브가 부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미구엘을 돌아보았다.

"네게도 합당한 보상을 더 지급할 것이다, 미구엘."

"저, 정말이십니까 나으리?!"

"대신, 왕성까지 동행해 다오."

"엥…? 왕성까지요?"

눈을 치켜떴던 미구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네게도 추가로 의뢰할 것이 있다. 네가, 이곳에서의 일을 폐하께 증언할 공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

"공증…? 그, 증거가 이미 다 있지 않습니까?"

왕과 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운 듯, 미구엘이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메브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 곁에는 가신들이 있지. 그들 중에는 배덕자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반박하지 못하게 하려면, 증거뿐만 아니라 증인도 필요해. 가능하다면 많이."

"그럼 이안 형씨는…."

"나는 오른델로 간다."

"아, 그랬었지… 염병…."

앓는 소리를 낸 미구엘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없던 일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함께 가겠습니다."

"고맙군. 다소 위험한 순간들이 있더라도 염려치 마라. 너는 내가 지킬 것이니."

"위, 위험…. 에이, 뭐. 아무리 그래도 언데드가 득시글대는 무덤만 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새끼, 배포가 좀 커졌네.

검을 허리에 찬 이안이 피식대는 가운데, 메브가 이번에는 필립을 돌아보았다.

"네게도 부탁이 있다, 필립."

"예, 나리. 말씀만 하십시오."

"너는 이안과 함께 가거라."

"예…?"

필립이 황당한 듯 되물었다.

이안의 미간도 좁아지는 가운데, 메브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의뢰라고는 하나, 귀중한… 증인이자 용병인 이안을 홀로 보낼 수는 없다. 그러니 네가 이안을 보좌하고, 이안이 겪을 일의 공증인이 되어 주었으면 해."

"하, 하지만 나리. 저는 나리를 모셔야 하는데요."

"미구엘이 있잖느냐. 내 종자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미구엘?"

"물론입니다, 나리."

미구엘이 실실대며 말했다.

필립이 말문이 막힌 듯 탄식했다.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경의 뜻은 알겠소만. 이번 의뢰는 위험할 수밖에 없소. 이 녀석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소?"

"...!"

필립이 눈을 치켜뜨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어엿한 종자이며 전사다. 그만한 각오는 언제나 되어 있겠지."

"그런 일이 생겨도 원망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소."

"나리…!"

이안이 피식하는 가운데, 필립이 다시 메브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엄하게 덧붙였다.

"이안과의 여정에서 배울 것이 아주 많을 것이다, 필립. 성실히 모시고 많이 배우도록 하거라."

"…예."

필립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 표정.

나랑 둘만 남게 될 텐데 어쩌려고 저러지. 목숨이 두 개인가.

내심 코웃음 치는 이안을, 메브가 다시 바라보았다.

"이 순간부터 너는 나의 대행자다, 이안. 고대수 사건의 전모를 확실히 파헤쳐 주길 바란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와다오."

"내 걱정은 마시오. 걱정하셔야 할 것은 경 자신이오."

이안이 언제 풀어졌었냐는 듯 냉정해진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를 죽이지도, 속내를 드러내지도 마시오. 복수를 이루고자 한다면 신중해지셔야 할 거요. …적어도 내가 돌아올 때까진."

메브가 속내를 들킨 것처럼 아랫입술을 깨무는 가운데, 이안이 덧붙였다.

"살아 있으셔야, 내가 알아낸 정보의 값을 치르실 수 있지 않겠소?"

이윽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지. 네가 오기 전까지 분란을 일으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중요한 말씀은 이제 다 나누신 것 아니오?"

그런 분위기를 바꾼 건, 뜻밖에도 미구엘이었다.

"내일이면 한동안 보지 못할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그가 짐가방에서 천에 꽁꽁 싸인 통을 꺼냈다.

"어떠십니까?"

술통이었다.

그 난리를 겪고도 저게 깨지지 않은 건 둘째치고, 던전을 앞두고도 술을 챙겨온 미구엘의 정신머리에도 기가 찰 지경이었지만.

이안은 핀잔을 주는 대신, 메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메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즐기진 않지만… 오늘은 마시고 싶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함께 사선을 넘었는데, 술잔도 나누지 않고 헤어질 수는 없지요."

일행은 충분히 취해 잠들 때까지 술을 나눠 마셨다.

더는 무거운 얘기를 꺼내는 일 없이, 시시껄렁한 농담과 무용담을 주고받으면서.

#030화

말과 마차는 기적적으로 무사했다.

버논의 시신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짐 마차는 메브와 미구엘이 몰고 가기로 했다.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짐 마차에 앉은 모습은 전혀 멋지지 않았지만, 메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일행은 무덤 숲을 나와 갈림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작별은 담백했다.

"아겔 란에서 기다리마, 이안."

"또 뵙겠소."

인사는 그게 전부였다.

이안과 메브는 각각 오른델과 아겔 란 방향으로 갈라졌다.

마차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힐끔대던 필립이 말했다.

"미구엘이 과연 나리를 잘 모실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이안이 피식댔다.

"네 걱정은 안 되고?"

"물론이죠. 나리께서 부탁하셔서만이 아니라, 제게 부여된 임무인 이상 성심을 다할 겁니다."

"경을 모실 때와는 여러모로 다를 거다."

"그게 나리께서 제가 경험하길 바라시는 부분이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래,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말을 몰았다.

한동안은 성기사 덕에 편했지만.

이제 다시, 암흑시대의 본모습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밤. 어둠이 또다시 세상을 덮었다.

이안이 횃불을 켜지 못하게 한 까닭에, 필립이 점점 말의 옆구리로 바짝 붙었다.

"그래도… 횃불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안 괜찮아. 어젯밤 잊었냐?"

이안이 콧방귀를 뀌며 일축했다.

일행이 많을 때야 편하게 다녔지.

단둘인 지금 횃불을 켠다는 건, 걸어 다니는 전광판이 되겠다는 의미였다.

굶주린 마물들이 환장하는.

물론 그들이 아겔 란의 마물에게 당할 만큼 약하진 않았지만.

귀찮고 피곤한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어제만 해도,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고블린 몇 마리 덕에 잠을 설치지 않았던가.

"그렇게 어둡지도 않은데, 엄살 부리지 말고 노숙할 자리나 잘 찾아봐."

게다가 이안이 볼 땐, 이 정도면 다닐 만한 어둠이었다.

"그렇게 어둡지도 않다고요…?"

필립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달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밤.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전 주위가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

이안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주위를 훑던 그가 이윽고 턱을 긁적였다.

'혼돈력 덕분인가…?'

마력의 도움 없이도 시야가 유독 선명하긴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횃불을 켜게 할 생각은 없었다.

"걷기나 해라. 이참에 어둠이랑 좀 친해지면 되겠네."

"…예."

침묵의 전진이 이어졌다.

때때로 느껴지는 시선과 바람 소리에 간헐적으로 움찔대던 필립이, 문득 눈을 치켜떴다.

"나리. 저기, 보이십니까?"

그가 어둠 너머를 가리켰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규칙적으로 번지는 빛.

나무와 풀숲 사이에, 모닥불을 피운 이들이 있었다.

이안은 불빛 사이로 보이는 그들의 형체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성인 남자, 다섯.

"가 볼까요? 저들과 함께 보내면, 밤이 좀 편하지 않겠습니까?"

필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글쎄… 하고 중얼거리며 턱을 긁적인 이안이 그를 내려다봤다.

"네가 원한다면. 가 보지 뭐."

"잘 생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맘을 바꿀까, 필립이 걸음을 재촉했다.

모닥불이 점점 가까워지던 순간.

"멈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무에 몸을 가린 두 사내가 쇠뇌를 겨누고 있었다.

이안이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수준의 오조준이었지만, 필립은 화들짝 몸을 숙였다.

"저흰 지나가던 여행객입니다!"

"그래서?"

"함께 밤을 보낼까 하는데. 합류해도 괜찮겠습니까?"

쇠뇌를 둔 두 사내의 시선이 모닥불 쪽으로 향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홀짝이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다가오시오."

이안에게 뿌듯하게 웃어 보인 필립이 모닥불로 다가갔다.

사내들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필립의 얼굴에도 긴장이 서렸다.

쇠뇌를 겨눈 둘 뿐만 아니라, 다섯 모두가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한쪽 눈이 하얗게 멀어 있기까지 했다.

"보통 여행객이 아니시군. 앉으시오. 자리에 여유가 있으니."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본 애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말에서 내린 이안이 터덜터덜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신세 좀 지겠소."

"자리만 내드리는 건데, 별말씀을. 보아하니 용병인 모양이오."

"댁들도 그래 보이는군."

이안이 모닥불 옆에 앉았다.

애꾸가 웃음 지었다.

"이 시간에 노숙하는 이들이야, 대부분 우리처럼 칼 밥 먹고 사는 부류들이지 않겠소?"

말을 나무에 묶어 둔 필립이 이안의 옆에 앉았다.

애꾸의 호의적인 반응에 마음이 좀 놓였는지, 방패와 검을 풀어 허벅지에 기대 놓았다.

"덕분에 오늘 밤은 좀 편히 자겠군요. 감사의 의미로 먹을 것을 좀 나누겠습니다."

"거참 반가운 일이군. 잘 먹겠소."

애꾸뿐 아니라, 다른 용병들도 홀짝이던 잔을 들어 감사를 표했다.

그들을 슥 돌아본 이안이 말했다.

"힘든 의뢰였던 모양이오."

"눈썰미가 좋으시군. 맞소."

애꾸가 웃었다.

필립도 그제야 그의 팔에 감긴 붕대를 확인했다. 다른 이들도 어깨나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엄청난 마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지랄 맞았지. 루 사드에서 들었던 얘기랑은 딴판이었소."

"국경을 두 개나 넘어오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보상이 짭짤한 게 촌구석까지 오가야 해서 그런 거겠지 했는데. 염병, 낮에 기습했는데도 부하를 셋이나 잃고 겨우 잡았소. 돈값을 하는 놈이었단 얘기지."

어깨를 으쓱인 애꾸가 덧붙였다.

"어쨌건 머리가 줄었으니, 우린 돌아가면 돈방석에 앉을 거요."

용병들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걸터앉은 상자가 문득 들썩였다.

신음 같기도, 울음 같기도 한 희미한 소리가 그 안에서 번졌다.

필립의 눈이 커지는 가운데,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생포하셨나 보군."

"그게 요구 조건이었소. 저것도 고용주한테 받은 봉인함이오."

대답한 애꾸가 이안을 돌아보았다.

"댁은?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가는 길이셨소?"

"뭐, 그런 셈이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필립이 말했다.

"무덤 숲에서 오는 길입니다."

"무덤 숲…?"

"아, 모르시겠군요. 안개가 잔뜩 낀 숲입니다. 거기서… 음, 마물을 죽였죠."

"둘이서? 실력이 대단하신 모양이군. 하긴…."

애꾸가 이안의 허리춤을 곁눈질했다.

"차고 다니시는 검만 해도 범상치 않소."

"당연하죠. 이 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떠들려던 필립이, 이안의 서늘한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거둔 이안이 말했다.

"의뢰 보수로 받은 거요."

"호오… 그러시군. 알겠소. 이것도 인연인데, 한잔합시다."

애꾸가 부하에게 턱짓했다.

나무잔을 두 개 꺼낸 그가 술을 따라서 들고 왔다.

잔을 받아든 이안이 한 모금을 마셨다.

"좋군."

"괜찮을 거요. 우리가 딴 건 몰라도, 술에는 돈을 안 아끼거든."

용병들이 잔을 들며 웃음 지었다.

육포를 불 옆에 늘어놓은 필립도 잔을 집었다.

이안이 손을 까딱인 건 그때였다.

"잔 이리 가져와."

"예…?"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앞에 놔."

"…예."

필립이 시무룩하게 잔을 이안 앞에 내려놨다.

애꾸가 웃었다.

"부하 대접이 박하시군."

"부하는 무슨. 배울 게 많은 애송이요."

벌컥벌컥,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그가 필립의 잔을 들었다.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놈이지."

"호오. 기본이라면 무슨?"

"뭐, 간단한 것들이오. 낯선 자가 주는 음식은 받아먹지 말라던가."

"...."

애꾸의 눈매가 꿈틀거리는 가운데.

아무렇지도 않게 한 모금을 더 마신 이안이 입을 열었다.

"필립. 정면을 봐라."

이게 뭔 소린가 하는 표정이던 필립이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 보이는 둘은 네가 상대해."

"예…?"

필립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가운데.

사내들의 눈빛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잠깐 굳었던 애꾸의 얼굴에, 이윽고 웃음이 번졌다.

"둘? 으하하…. 둘만? 댁이 나머질 상대하시고?"

"그래."

애꾸를 따라 사내들도 킬킬대는 웃음을 흘렸다.

"거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왜. 못 할 것 같나?"

"당연하지."

"내가 독을 먹어서?"

애꾸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제야 필립의 얼굴에도 경악이 번졌다.

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애꾸를 돌아보았다.

"그럼 내가 왜 아직도 멀쩡한지를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약 기운이 덜 돌았나 보지. 댁이 먹은 건 코끼리도 기절시키는 독이거든."

"코끼리를 실제로 본 적은 있냐?"

"네놈은 봤고? 푸흐… 흐…?"

애꾸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지나치게 고요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지금쯤 속을 게워내거나 억지로 견디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어야 했다.

이윽고 그의 미소가 굳어질 찰나.

푸확-!

벼락같이 달려든 이안이 왼손을 올려쳤다.

거의 뽑을 일 없던 단검이 애꾸의 볼과 눈, 이마로 이어지는 붉은 호선을 그려냈다.

"아악-! 내 눈!"

이제는 장님이 된 애꾸가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눈을 치켜뜬 부하들이 뒤늦게 잔을 집어 던지며 일어섰지만.

이미 이안은 올려친 단도를 그대로 내던지고 있었다.

푸욱-!

"아악!"

한 놈의 팔뚝에 단도가 깊숙이 박혔다.

"이, 이런 시발…! 죽여!"

"뒈져라!"

남은 세 놈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공교롭게도 이안이 지목한 둘은 필립에게 달려갔다.

약해 보이는 놈부터 제거하리란 심산일 터.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놈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도약한 놈이 검을 힘껏 내리쳤다.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쩌엉-!

단죄의 검과 맞부딪힌 상대의 검이 그대로 부러졌다.

"어…?"

놈이 얼빠진 표정을 지을 찰나.

콰직!

단죄의 검이 놈의 목덜미부터 가슴팍까지 깊이 박혀 들었다.

갈라진 몸에서 한 박자 늦게 피가 솟았다.

이안은 피거품을 무는 강도를 걷어차 밀어 버리고는, 팔에 박혔던 단검을 뽑아 들고 주춤대는 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보아하니 한두 번 한 짓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까지 너희가 죽인 자들도 그렇게 말했겠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내뱉은 이안이, 놈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너는 그때 안 갔었냐?"

"이, 이런… 시바알-!"

푸욱-!

떠밀리듯 달려든 놈의 가슴 한복판에 검이 틀어박혔다.

이안이 검을 뽑자 그르륵, 하는 숨소리를 낸 놈이 허물어졌다.

이안의 몸에도 피가 튀었다.

…메브처럼 깔끔하게는 안 되는군.

생각하며, 이안은 놈이 떨어뜨린 단검을 주워들었다.

다른 두 놈과 뒤엉켜 있던 필립이 간신히 거리를 벌린 건 그때였다.

"나, 나리! 끝내셨으면 도와주십시오! 저 이러다 죽습니다!"

필립과 대치 중인 둘의 얼굴에 뒤늦게 경악이 스쳤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대장은 그렇다 쳐도, 그 짧은 사이에 동료 둘이 다 죽어 버린 것이다.

놈들을 일별한 이안이 어깨를 으쓱인 건 그 직후였다.

"싫은데?"

"...?!"

"시, 싫다니요?"

두 강도와 마찬가지로 눈을 치켜뜬 필립이 되물었다.

단죄의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이안이, 검을 회수하며 말했다.

"그 두 놈은 네가 상대하라고 했잖아."

"아니, 그, 그러긴 하셨습니다만-"

"너희 둘도 생각 잘해라. 나한테 덤벼도 죽고 도망가도 죽어. 그러니까 저 녀석과 싸워라."

"그, 그러면 살려 주는… 거요?"

두 강도 중 하나가 물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이기고 나서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나, 나리.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뒈져라아아아!"

"으아아아!"

필립의 목소리가 달려드는 두 놈의 고함에 묻혀 사라졌다.

고함과 비명. 검과 방패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물론 필립이 싫거나 죽길 바라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눈치 없고 겁도 많지만, 이 세계의 인간 중에선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의리도 있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여정 내내 놈의 뒤를 봐줘야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와 함께 하는 이상, 필립도 한 사람 몫은 해낼 수 있어야 했다.

보기보다 실력 있는 놈이니, 부상당한 허접 용병 둘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저딴 것들에게 죽는다면, 차라리 지금 죽는 게 호상이지.'

이안은 장님이 된 두목을 향해 다가갔다.

놈은 고통에 흐느끼면서도 바닥을 기어 도망치고 있었다.

푹-

놈의 손등에 단검이 박혔다.

"아아악-! 개, 개자식아!"

손목을 움켜쥔 놈이 비명을 내질렀다.

놈의 바로 앞에 선 이안이 코웃음을 쳤다.

"먼저 독을 먹인 건 넌데? 누굴 죽일 생각이었으면 네가 뒈질 각오도 했어야지."

장님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죽이, 죽이려던 게 아닙니다…! 기절만 시키려던 겁니다! 우린 그냥 물건만 털었을 거라고요!"

"그래…?"

몸을 돌린 이안이, 필립이 건넸던 술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장님의 손등에 박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으, 아악…!"

단검을 비틀자 놈이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벌어진 입에 술을 부었다.

"켁, 커억… 어억?!"

놈은 엉겁결에 삼키고 나서야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기절만 한다며? 정말 그러면 살려 주마."

"이, 이런 개 같은, 컥… 꺼억…!"

욕지거리를 토해내던 놈의 얼굴에, 이내 핏발이 돋았다.

놈은 한참 고통에 몸부림치다, 이윽고 피를 토하며 잠잠해졌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으면 고통 없이 갔을 텐데."

이안이 혀를 차며 읊조렸다.

속에서 알싸함이 느껴졌다.

꽤 강한 독이었지만, 이안의 저항력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다.

4챕터의 적들에게 살아남기 위해, 이안은 공용 스킬인 태초의 내성을 무려 3레벨이나 올렸었다.

어지간한 상태 이상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 비결이긴 했지만.

과 투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회수한 단검을 장님의 옷에 문질러 닦던 이안은, 문득 뒤에서 들려 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호오."

강도 한 놈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방패로 공격을 방어한 필립이 치명적인 반격을 선보인 것이다.

저 정돈 해야지.

이안은 모닥불 앞, 애꾸가 앉았던 돌에 걸터앉았다.

"…팝콘이 없는 게 아쉽네."

그가 앞에 놓인 육포를 느긋하게 집어 들었다.

이어지는 전투를 눈에 담으면서.

#031화

"커흑…."

단말마가 필립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품이 뜨뜻해지고, 그와 엉켜 있던 강도가 허물어졌다.

놈의 명치에 박혀 있던 검을 뽑은 필립이, 비로소 주저앉았다.

"하악… 하악…."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벅지와 볼의 화끈함이 비로소 느껴졌다.

강도들과의 전투에서 생긴 상처.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헐떡이던 필립은, 이윽고 모닥불 옆에 앉은 이안을 돌아보았다.

느긋하게 육포를 우물대던 그가 말했다.

"남자다운 얼굴이 됐군."

"대체 왜…."

필립이 맥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내뱉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경과 다닐 때랑은 다를 거라고 했잖아?"

"...."

그게 이런 식으로 다르단 얘기인 줄은 몰랐다고 토로하려던 필립은, 이내 한숨만 내쉬었다.

따지고 보면 각오했다고 말한 것도, 모닥불로 가자고 했던 것도 그였으니까.

이윽고 그가 읊조렸다.

"…어쩌면 나리께선 제가 이런 걸 경험하길 바라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국의 민낯이요."

"의미 부여하긴."

피식한 이안이 붕대와 천을 필립에게 던졌다.

"응급 처치부터 하고, 일어서라."

"뭐가… 또 남았습니까?"

"가장 중요한 게 남았지."

남은 육포를 한입에 털어 넣은 이안이 장님에게 다가갔다.

그가 시체의 장비를 하나씩 벗기고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비로소 필립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주머니를 터시는 겁니까?"

"소유권 이전이라고 하는 거다. 국경 지대에서도 많이 봤을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때는 부대로 환수했었습니다. 상대가 해적 출신 야만인들이기도 했고요."

"그럼 이참에 내 주머니 채우는 기쁨도 배우면 되겠네. 네가 죽인 놈들은 네가 털어."

"...."

필립이 입을 뻐끔댔다.

성기사의 종자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강도가 된 것 같지 않은가.

"못 하겠냐? 그럼 내가 챙기고."

능숙하게 필요한 물건을 챙긴 이안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필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또한 경험이겠죠."

대충 응급 처리를 끝낸 필립이 강도의 시체로 손을 뻗었다.

아직 따듯한 시신의 몸 이곳저곳을 뒤적인 것도 잠시.

"...!"

필립의 손에 돈주머니가 딸려 나왔다.

안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반짝이는 은화와 동화.

홀린 듯 응시하던 필립의 입꼬리가, 이윽고 슬며시 올라갔다.

주머니를 품에 챙긴 그의 손길이 바빠졌다.

열정적으로 시체를 벗겨 먹는 그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났네."

지가 기사인 것처럼 굴더니.

노획은 빠르고 순조롭게 끝났다.

주머니가 두툼해진 이안. 그리고 새 검과 단검, 장갑, 신발, 벨트를 착용한 필립이 나란히 섰다.

그들은 같은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병들이 운송하던 봉인함.

이안이 볼 때, 용병들의 실력에 비해 지나치게 좋은 봉인함이었다.

겉에 정교하게 새겨진 주문 회로.

사이 사이로 반짝이는 세공된 마석들.

'…이걸 장물아비한테 넘기는 게 돈을 더 벌었을 것 같은데.'

이안이 생각하는 사이, 필립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만 열어 보고 싶은 겁니까?"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게임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호기심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가 건너뛴 퀘스트일지도. …이왕이면 낮에 열어 보고 싶은데.'

봉인함의 고리를 쥔 이안은 슬쩍 아공간을 열었다.

하지만 자성이 밀어내는 듯한 느낌만 들 뿐, 넣어지지 않았다.

'역시, 안 되나.'

생명체를 넣으려 하면 생기는 반발력이었다.

봉인됐으니 혹시나 했건만.

어쩔 수 없지.

결정한 이안이 단검을 뽑았다.

"물러나 있어라."

"옙!"

필립이 냉큼 옆걸음질 쳤다.

단검에 마력을 흘려보낸 이안은, 상자의 이음새 부분에 박힌 마석을 힘껏 후려쳤다.

빠각!

세 번 만에 마석에 금이 갔다.

다른 마석들의 빛이 잦아들었다.

잠깐의 적막. 곧이어 봉인함의 뚜껑이 벌컥, 예고도 없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형체가 그대로 이안을 덮쳤다.

놈과 뒤엉킨 그가 바닥을 굴렀다.

쿵, 이안의 등이 나무 둥치에 부딪혀 멈췄다.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놈의 생김새를 눈에 담았다.

잿빛 머리칼과 뾰족한 귀. 검붉은 눈동자.

'요정? 이거 설마….'

이안의 눈이 가늘어질 찰나.

요정의 긴 머리칼이 망토처럼 주위를 가렸다.

동시에 놈의 입이 기괴한 각도까지 벌어졌다.

톱날 같은 이가 한가득 돋은 아가리가 가까워졌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뻗었다.

달려들던 아가리가 홱, 궤도를 틀어 검날을 깨물었다.

까득- 빠지직.

단검이 장난감처럼 부러졌다.

퉤, 부러진 날을 뱉은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놈의 인상이 순식간에 변했다.

심지어, 아름답게.

이안의 눈에 이채가 서리는 가운데, 그를 응시하던 요정이 문득 내뱉었다.

"너, 엄청 맛있는 냄새가 나네."

히죽 웃은 그녀가 이안을 밀치며 물러났다.

둥치에 등이 짓눌린 이안이 인상을 구겼다.

그 사이 공중을 핑그르 돈 요정이, 고양이 같은 자세로 봉인함 위에 착지했다.

광택 없는 잿빛 머리칼이 망토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피 때문에 미친 건 줄 알았는데… 원래 미친 년이었나.'

이안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일어섰다.

저 여자는 그가 알기로, 이 세계의 유일한 흡혈 요정이었다.

진혈을 마시는 자, 테사이아.

장차 루 사드의 뱀파이어 군주를 흡수해 진혈의 여제로 거듭나는, 꽤 비중 있는 보스 캐릭터였다.

'가만, 루 사드의 의뢰인이란 게 뱀파이어였나…?'

자세한 사연까진 알 길 없었지만.

지금 눈앞의 테사이아는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는 훨씬 야성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때, 사방의 시체를 훑어보던 테사이아가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혼자서도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는데. 어쨌든 고마워, 대신 죽여 줘서."

자루만 남은 단검을 내던지며 이안이 대꾸했다.

"평소에도 고마우면 목덜미를 뜯어 버리려고 하냐?"

"배가 고파서 그만. 사실 지금도 군침이 돌아. 하지만 보아하니…."

싱긋, 요정이 미소 지었다.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설핏 드러났다.

"넌 지금 내가 어떻게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네."

"잘 아네."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할 건지도 알고 있겠지?

이안은 속으로 뇌까리며 단죄의 검을 뽑아 들었다.

테사이아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러니까 다음을 기약할게. 또 만나. 그전에 죽지 말고."

그녀가 그대로 솟구쳤다.

잿빛 머리칼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펄럭이며 멀어졌다.

화살처럼 빠른 속도.

"...."

이안의 입가에 헛웃음이 번졌다.

튀어 버릴 줄이야.

숨을 죽이고 있던 필립이 그를 돌아본 건 그때였다.

"저거… 안 쫓아가셔도 되는 겁니까?"

"저걸 어떻게 따라가?"

이안이 검을 회수했다.

"언젠간 알아서 찾아오겠지. 선언했듯이."

"대체 뭐였을까요. 보통 요정 같진 않았습니다만."

"당연히 보통 귀쟁이가 아니지. 저년은 흡혈 귀쟁이다."

"피… 를 빨아 먹는다고요? 요정이요? 말이 됩니까?"

"원래 세상은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야, 필립."

이안은 피를 마시는 요정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게임에서 테사이아를 만난 건 다른 지역이었으니, 당연히 외지의 소문이 흘러들어온 건 줄 알았었는데.

정말로 이 촌구석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하긴, 제국을 제외하면 마물이나 마족이 숨을 만한 지역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외곽의 모든 왕국에 아겔 란만큼의 타락자들이 암약 중이리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합리적이었다.

"…그럼, 저희가 그런 엄청난 괴물을 풀어 준 거군요."

"놔둬도 어떻게든 탈출했을 거다. 애초에 이깟 용병들한테 잡힌 것도, 낮이라 그랬겠지."

이안이 주위를 돌아보았다.

"부업으로 강도질이나 하는 놈들이 운반자인데. 루 사드까지 무사히 돌아갔을 리가 없어."

"어… 그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긴 합니다만."

못내 꺼림칙한 듯 읊조린 필립이 어둠을 응시했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로도 그러는 게 좋을 거다. 마음이라도 편해야지."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거란 말씀은 아니시겠죠?"

"왜 아니겠어?"

"하… 루 솔라여…."

필립이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시체 사이에서 새 단검을 주워든 이안이 봉인함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말이나 끌고 와. 이동할 거니까."

"이렇게 바로요?"

"그럼 피 냄새 맡은 놈들이 몰려올 때까지 기다릴래?"

필립의 한숨이 깊어졌다.

여기서 멀어지려면 새벽까지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이윽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몸을 돌렸다.

그사이 봉인함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이안은, 장비를 점검하고는 안장에 올라탔다.

떠돌이 용병과 그의 종자가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싸늘하게 식은 시체들과 잦아 들어가는 모닥불만이 고요하게 일렁인 것도 잠시.

어둠 너머에서 크고 작은 안광들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를 맡은 아겔 란의 청소부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른델은 누더기로 기운 도시처럼 보였다.

고대 요정의 성을 멋대로 증축한 내성이 언덕 위에 삐죽했고, 외성 안팎으로는 주민들의 거주지가.

나무 말뚝으로 두른 울타리 너머에는 이주민들을 위해 급조한 판잣집들이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었다.

통일성이라고는 없었지만, 도시의 규모만큼은 아겔 란에 필적했다.

판자촌에 위치한 여관도, 그에 걸맞은 크기를 자랑했다.

처음에는 집이 없는 이주민들을 위한 공간이던 여관은, 지금은 돈 냄새를 맡고 모여든 용병들의 아지트였다.

급격하게 성장하는 도시에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크고 작은 일거리들이 넘쳐나는 법이었으니까.

오늘도 번 돈을 고스란히 탕진하는 자들로 왁자지껄한 가운데.

끼이이-

여관 문이 시끄럽게 열렸다.

두 사내가 장내로 들어섰다.

술을 홀짝이던 이들이 하나둘씩 그들을 곁눈질했다.

못 보던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선 주근깨 가득한 청년은 꽤 앳되어 보였지만, 험난한 여정을 해 왔음을 증명하듯 썩은 생선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뒤에 선 검은 눈의 남자는 태연해 보였지만, 베테랑 용병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묻어 나왔다.

몇몇 용병들이 그가 걸친 가죽 갑옷과 허리춤의 검을 훑는 사이.

"저 안쪽 자리가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

이안에게 속삭인 필립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태연하게 따르면서 이안이 말했다.

"꼭 구석에 앉아야겠냐?"

"그래야 싸움이 나도 뒤를 잡힐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저번에 제가 죽을 뻔했던 것, 기억 안 나십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

덤빌 테면 덤비라는 듯 장내를 훑는 필립의 모습에, 이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의심암귀의 화신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마을을 거치고, 사이사이 노숙을 반복한 결과였다.

물론, 이안이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필립의 몫을 꼬박꼬박 할당한 덕분이기도 했다.

몸에 새겨진 상처의 숫자만큼 세상에 대한 불신도 깊어진 것이다.

물론 이안의 눈엔 아직도 애송이였지만.

고작 보름여가 지났음을 감안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적어도 지금의 필립을 보면서 성기사의 종자를 떠올릴 사람은 없을 테니까.

둘은 구석의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뭘 드릴까요?"

그들을 지켜보던 여급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의욕이라고는 없는 태도에 피식대며, 이안이 물었다.

"식사로는 뭐가 괜찮지?"

"괜찮은 건 없고, 먹을 수는 있는 걸 원하시면 소시지가 좋을 거예요. 빵을 시키실 거면 스튜를 꼭 같이 시키셔야 하고요. 그래야 삼킬 수 있거든요."

"그럼 그것들 전부."

고개만 끄덕인 여급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필립이 이윽고 속삭였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쩌실 겁니까?"

"왜 자꾸 속삭이는 거냐?"

"남들이 들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들어도 상관없어. 오히려 태연해야 더 신경을 안 쓸 거다."

"…또 하나 배웠군요."

뭘 맨날 배우고 난리야.

실소한 이안이 장내를 돌아보았다.

용병으로 보이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사실 거의 전부로 보였다.

"며칠 머물면서 분위기를 좀 볼 거다. 겸사겸사, 푼돈도 벌고."

"일단은 이 사이에 섞여들겠단 말씀이시군요."

"갑자기 나타나서 실종된 병사에 대해 묻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수상하니까."

이안이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사이, 여급이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테이블에 음식이 놓였다.

여급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시지를 한 입 먹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먹을 수만 있군."

"믿으세요. 다른 건 더 별로니까."

여급의 체념 섞인 말을 들으며, 이안은 품에서 은화를 꺼냈다.

이렇게 많은 팁을 받을 줄은 몰랐는지, 여급의 눈이 커졌다.

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보아하니 일거리가 꽤 많은 모양인데. 괜찮은 의뢰를 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재빨리 은화를 품에 챙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곧바로 큰 건을 받으시면 충돌이 있을 거예요. 여긴 보기와 달리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서요. 아예 남들이 엄두도 못 낼 만큼 위험한 일이면 모를까. 작은 것부터 시작하셔야 해요."

받은 만큼의 의리가 눌러 담긴 조언.

이안이 미소 지었다.

"잘됐네. 내가 원한 게, 바로 그런 위험한 의뢰니까."

#032화

여급이 되물었다.

"…그게 아무도 완수한 적 없는 의뢰라도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시지를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쉰 여급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이 직접 현상금을 건 일이에요."

"내용은?"

"지하에 수로가 있거든요. 엄청 오래전에 요정들이 만든 거라, 아무도 전체 구조를 몰라요. 뭘 버리면 저 너머의 배수구로 빠져나가니까 그냥 쓰는 거지. 아무튼, 거기 뭐가 살아요. 가끔 하수구를 타고 그르렁대는 소리도 들리고."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은 들은 적 있어. 식인 악어."

"토벌하겠다고 들어간 사람 중에 딱 한 명만 돌아왔어요. 그 사람 덕분에 정체가 밝혀졌죠. 눈이 넷 달린 악어라던데. 사실 그게 진짜인지도 알 수 없어요. 그 사람 외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안 가시는 게 좋아요. 게다가 거길 들어가면…."

여급이 목소리를 낮췄다.

"똥물에 다리를 담그고 다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

이안과 필립의 인상이 동시에 구겨졌다.

필립과 눈빛을 교환한 이안이 물었다.

"그놈을 죽이면 어디로 가져가야 하지?"

"그냥 여기로 가져오셔도 돼요. 경비대가 찾아올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은화를 하나 더 건네며 말했다.

"침대 두 개 있는 방으로 주고, 내일 나와 이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두 벌씩 사다 줘. 돌아와서 씻을 물도 준비해 주고. 이거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정말 하시게요?"

"내일 낮에. 바로."

"…전 말렸어요. 최선을 다해서."

그들이 묵을 방을 알려 준 여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멀어졌다.

"똥물이라니… 하…."

딱딱한 빵을 스튜에 적시던 필립이 한숨 쉬었다.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어차피 내 눈엔 여기나 똥물이나 다를 것도 없어."

"지하 수로에 사는 식인 악어라니. 버차드 후작은 잘도 그런 걸 방치하고 있군요."

"병사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은 거겠지. 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많아야 백인대 한 두 부대나 지원할 거면서, 더럽게 쪼잔한 작자인 모양입니다."

"글쎄… 뭔가 생각이 있겠지."

"...?"

필립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길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대꾸도 하지 않고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내일 격하게 움직일 테니, 이런 맛대가리 없는 음식이라도 든든히 먹어 둬야 했다.

***

용병인 패튼은 늘 그렇듯,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났다.

간밤의 음주 덕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홀로 나간 그는, 평소와 달리 이른 시간부터 모여 앉은 용병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뭣들 하고 있냐?"

"엉? 내기 중이었어. 너도 낄래?"

"내기…?"

그가 테이블로 다가갔다.

"뭔 내기?"

"어젯밤에 온 놈들 말이야."

양쪽 손가락이 둘씩 없어서 육손이라 불리는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지하 수로로 들어갔다더라고."

"수로에…? 설마 둘이서 그 괴물을 잡겠단 건 아닐 테고."

"그 설마가 맞아."

"미쳤군."

패튼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급에게 손짓으로 스튜를 부탁한 그가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내기 조건이 뭔데?"

"오늘 자정까지 돌아오느냐, 마느냐."

"…너무 뻔한 조건인데."

"그래서 누가 돌아온다에 걸 건지로 얘기 중이었어."

다른 용병이 거들었다.

"돌아오면 한 놈이 판 돈을 다 먹고. 못 돌아오면 전부한테 한 잔씩 사는 거로 말이야."

"차라리 그냥 한턱 쏘는 게…."

중얼거리던 패튼이 문득 볼을 긁적였다.

때마침 여급이 스튜를 가져왔다.

접시째로 들어 입에 부으면서, 그는 어젯밤에 본 떠돌이들의 행색을 떠올렸다.

한 놈은 애송이 같았지만, 다른 한 놈은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덩치가 크거나 얼굴이 무서운 것도 아닌데도.

그래서 적당히 지켜보다가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쓸만한 인재가 필요했으니까.

"…그럼 내가 그쪽에 걸지."

이윽고 접시를 내려놓은 패튼이 말했다.

둘러앉은 용병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심이냐, 패튼?"

"그래. 살아 돌아오면 돈을 벌어서 좋고. 아니면 너희 새끼들한테 한 잔씩 사서 좋다고 하지 뭐."

패튼이 테이블에 은화를 내려놓았다.

잽싸게 챙긴 육손이가 돈을 내기용 주머니에 넣었다.

"역시 넌 괜찮은 놈이라니까."

"도련님이 아끼는 이유가 있어. 둘이 비슷하다니까?"

곳곳에서 이어지는 속 보이는 덕담에 패튼이 코웃음을 쳤다.

"작작들 해라, 새끼들아. 그딴 사탕발림은 다른 호구한테나 가서-"

쿠우웅-

패튼의 말이 멈췄다.

어딘가에서 둔중한 떨림이 번졌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하던 용병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뭐였."

구웅-

다시 한번 진동.

그들은 그제야 이 떨림이, 저 너머 어딘가의 땅속에서 번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병들이 저마다 시선을 교환할 찰나.

쿠웅- 쿠우웅- 쿠구구구-

진동이 연달아 이어졌다.

여기서 이렇게 느껴질 정도라면, 외성과 내성에선 더 선명하게 느껴질 게 분명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다시 장내가 고요해졌다.

한참을 서로 눈빛만 교환하던 중, 이윽고 육손이가 웃음을 흘렸다.

"꽤 인상적이긴 했는데. 아무래도 끝난 것 같지?"

"그렇지? 무슨 짓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콰앙-!

그때, 이번엔 아예 폭음이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지진이 난 것처럼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테이블 위의 잔들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아무도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번지는 가운데.

키아아아아아-

난생처음 들어 보는 비명이 사방에 메아리쳤다.

도시의 모든 배수구를 나팔 삼아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적막. 장내에도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여관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방금 들었어? 그거 뭐냐?!"

도시에 나가 있던 용병이었다.

그를 시작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이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삼삼오오 모여앉은 그들은, 모두 저마다가 들은 것과 본 것들을 떠들어 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망치로 지하를 다 부수고 다니는 것 같은 소리였다고. 그 미친놈들이 수로를 막아 버린 거야. 악어를 잡으려고."

"난 욕이랑 외침을 들었어. 배수구 아래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으라고 하는 걸 내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

"기름이야. 기름을 들고 가서 똥물에 불을 지른 거야. 불붙은 악어가 비명을 내지른 거지."

실체 없는 추측과 주장이 난무하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내기들이 성행하는 가운데.

끼이이이-

여관 문이 천천히 열렸다.

노을의 붉은 빛과 기다란 그림자가 장내에 드리웠다.

좌중이 삽시에 고요해졌다.

그림자를 앞세운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오물과 체액을 뒤집어쓴 이안이었다.

"...."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색이나 그에게서 풍기는 구린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품에 안고 들어온 것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장내를 돌아본 이안이, 여급을 발견하고는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던졌다.

"가서 사람을 불러 와라."

철퍽-

거대한 머리통이 여관 바닥에 널브러졌다.

소 몸통만 한 크기에, 눈이 네 개나 달린 악어의 머리였다.

"지하 수로의 괴물을 죽였으니까."

이안이 말을 맺는 사이, 뒤따라 들어온 필립도 손에 든 것을 머리통 옆에 던졌다.

그건 머리와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으로 뜯겨나간 꼬리였다.

"못 들었습니까? 경비병이든 대장이든, 불러오라고. 당장."

"네, 네엣!"

필립이 짜증스럽게 덧붙이자, 여급이 불에 덴 것처럼 여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다시금 장내에 내려앉은 적막을 깨뜨린 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패튼이었다.

"내 돈 전부 가져와, 이 새끼들아! 형씨, 고맙소! 덕분에 대박이 터졌어!"

그의 외침을 시작으로, 탄성과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사방에서 튀어 오른 용병들이 이안과 필립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한 거요? 기름. 기름이지?"

"망치로 짓이긴 것 맞소? 난 거기에 걸었거든."

"저걸 진짜 죽이다니! 정말 엄청나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쏟아지는 질문과 환호에 이안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필립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들이었지만.

적어도 똥오줌을 뒤집어쓴 상태에서 나눌 얘기는 아니었다.

슬슬 이안의 눈에 살기가 돌기 시작할 때쯤.

"작작 해, 미친놈들아! 몰골이 어떤지 안 보이냐? 내가 맥주 한 잔씩 살 테니까, 그거나 마셔!"

이안 덕에 큰돈을 딴 패튼이 용병들을 물렸다.

이안과 눈이 마주친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는 얘긴 들었소. 안에 들어가면 준비되어 있을 거요. 댁들, 구린내가 장난 아니거든."

"…물 한 통으론 어림도 없어."

"여급이 돌아오면 말해 두겠소. 덕분에 한 달은 놀고먹게 됐는데, 이 정도는 도와 드려야지."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걸음을 옮기고, 욕설을 중얼거리는 필립이 뒤를 따랐다.

악어의 머리와 꼬리를 중심으로 때 이른 술판이 벌어졌다.

그 한복판에서 복도로 들어서는 둘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고 응시하던 패튼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엄청난 놈들이 굴러들어 온 것 같은데… 도련님을 빨리 모셔 와야겠구만."

***

경비대장이 네눈박이 악어의 머리를 싣고 돌아갔다. 현상금은 사흘 내로 지급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였다.

이안은 뒷수습까지 깔끔하게 끝냈다.

악어와의 전투 중에 지하 수로가 조금, 아주 조금 파손되었으니 석공들을 파견하라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혹시라도 꼬투리를 잡힐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수 사건의 진위를 밝혀내는 것보다 오른델의 영주와 충돌할 일을 먼저 만들고 싶진 않았다.

"이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두 번은 절대 못 해요."

마주 앉은 필립이 우울한 얼굴로 중얼댔다.

앞에 놓인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동감이다."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을 세 번이나 씻고 옷도 전부 갈아입었건만.

아직도 몸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가지고 간 장비도 잘 씻어서 말려 두긴 했지만.

솔직히 완전히 깨끗해질 것 같진 않았다.

어쨌건, 그들을 향한 대우만큼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어젯밤 같은 경계의 눈빛은커녕, 다들 눈길만 스쳐도 고개를 까딱이거나 술잔을 들었다.

이안에겐 익숙한 변화였다.

용병의 세계는 처세술이나 실력이 전부니까.

이제부턴 아무도 그들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을 터였다.

혹은.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소?"

오히려 저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거나.

이안은 다가온 남자를 돌아보았다.

아까 용병들을 물렸던 인상 좋은 사내.

그의 뒤에는 꽤 곱상하게 생긴 못 보던 청년이 부하처럼 서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본론만 짧게 말한다면."

"하하. 실력만큼 성격도 시원하시군. 반갑소. 패튼이오."

웃음 지은 패튼이 빈자리에 앉았다.

"이안."

"필립입니다."

패튼의 뒤에 선 청년이 거슬린다는 듯 곁눈질한 필립도 고개를 까딱였다.

"이런 실력을 가진 분들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니. 이상하군. 혹시 출신지가 어찌 되시오?"

"늪지대."

"엥…? 하하. 말씀하고 싶지 않으신 거군. 알겠소. 그럼 전에는 어디서 활동하셨소? 실력을 봐선 분명, 어디에서건 명성을 떨치셨을 것 같은데."

"그딴 호구 조사나 할 거면-"

인상을 구기며 내뱉던 필립이, 이안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패튼을 바라보았다.

"내가 범죄자 출신이 아니라는 건, 이런 개소리를 들어 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 것 같은데. 본론이나 꺼내시오. 그쪽 말고…."

그의 시선이 패튼의 뒤에 선 청년에게로 향했다.

"할 말이 있는 당사자가, 직접."

"...!"

패튼이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필립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이안이 고개를 까딱였다.

"귀족이 왜 자유민 흉내를 내고 있소? 아니, 음지의 거물 흉내인가?"

"...?!"

그제야 필립도 눈을 치켜떴다.

공손하게 서 있던 청년이 머쓱한 웃음을 흘린 건 그때였다.

"들킬 줄은 몰랐는데. 내 연기가 그렇게 엉망이었나?"

"이런 베테랑 용병의 호위 흉내를 내고 싶으시면, 얼굴이나 손등에 흉터라도 몇 개 만드시는 게 좋을 거요."

"훌륭한 조언이지만, 그건 힘들겠군. 나름대로 이 얼굴이 재산이라서 말이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들켜 버렸군요."

패튼이 일어섰다. 청년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보아하니 처음부터 속일 수 없는 상대였던 것 같은데."

그가 자연스럽게 패튼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안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무례를 사과하지. 알다시피 용병 중에는 아주 위험한 과거를 가진 자들이 섞여 있어서 말이야. 최소한의 확인 절차가 필요했어. 나는 칼부림엔 영 젬병이거든, 하하."

귀족보다는 자유민에 가까운 말투.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오. 사과는 받아들이겠소."

"고맙군. 난 데클란 버차드라고 한다."

"버차드라면…."

필립의 입이 벌어졌다.

이안은 놀란 기색 없이 말했다.

"영주님의 아드님이시군. 귀하신 분이 우리 같은 일개 용병의 신분은 왜 확인하려 하신 거요?"

"이 도시의 용병들을 관리하는 게 내 역할이거든. 거기다 그대들은 특히 실력이 뛰어나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용병들이 득시글대는 것치곤 지나치게 평화롭더라니.

게임에서도 이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사실 스토리와 관련된 부가적인 설정에는 그가 모르거나 바뀐 부분이 더 많았다.

"소공자께서 이런 고된 일을 맡으시다니, 대단하시군요. 좀 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필립이 정중하게 말했다.

데클란이 피식댔다.

"소공자가 아니니까 맡은 거다. 난 서자거든."

"아하… 그러셨군요."

"그래서, 신분에 대한 확신은 생기셨소? 뭔가 물증이 더 필요하신가?"

이안이 느긋하게 물었다.

데클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필요하지 않은 것 같군. 물론 실력을 검증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 하는데, 괜찮겠나?"

그가 이안과 필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필립이 이안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는 보겠소."

"그래. 자네들, 내 밑에서 함께 일해 보지 않겠어?"

"...?"

#033화

데클란이 양손을 펼쳤다.

"이미 실력은 검증됐으니까, 약간의 훈련과 서약만 한다면 내 부대의 백인대장과 부관으로 임명하고 싶은데. 괜찮은 제안이지 않나?"

"용병들을 정규군으로 편성하신단 말씀이십니까?"

필립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오래 전선에 살았던 그는,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다.

데클란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솔직한 야망으로 반짝였다.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 다른 영주들은 용병을 천시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아.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은 훌륭한 전력이지. 합당한 대가와 기회만 수반된다면 말이야. 내 밑에 있으면, 공적을 올린 만큼 출세할 수 있을 거다. 물론 결코 너희를 내치지도 않을 거고."

"흐음…."

이안은 턱을 어루만졌다.

물론 제안에는 흥미가 없었다.

흥미로운 건 이자의 태도였다.

이자는 진심으로 용병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자의 방식이 성공적이라는 건, 패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의 부관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이었으니까.

"영주님은 허락은 받으신 거요?"

"물론. 할 거면 해 보라는 식이셨지. 아버님의 입장에도 손해는 아니거든. 우리를 선두에 세울 테니까."

"칼받이가 되기 딱 좋단 말씀이시군."

"부정하진 않겠어. 하지만 그런 만큼, 우리가 살아남는다면 강한 명분을 가진 세력이 될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이래 봬도, 아예 멍청하진 않거든."

데클란이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서자는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소탈한 행동부터 적당히 솔직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화법. 눈빛과 표정까지.

여러모로 촌놈치고는 인상적이었으니까.

물론 이안에겐 전혀 먹히지 않을 매력과 제안이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출세할 생각도 없었고, 곧 일어날 전쟁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속내와 달리, 이안은 담담하게 내뱉었다.

"당장은 아무런 대답도 드릴 수 없겠소."

"왜지?"

"아직 끝내지 못한 의뢰가 있기 때문이오. 앞서 받은 의뢰를 끝마치지 않은 채로 수락할 수준의 작은 제안이 아니잖소?"

"하지만 악어는 이미… 아, 그래. 애초에 오른델에 온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니었던 거군. 의뢰를 해결하러 온 거야."

말귀는 잘 알아먹어서 좋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데클란은 자신이 낚싯대를 드리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안은,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거꾸로 이자를 낚아서, 의뢰를 해결하는 데에 이용하자고.

별 관심도 없는 얘기들을 끈덕지게 들어 준 것도 그래서였다.

"내가 네 의뢰에 도움을 준다면, 내 제안을 고려해 볼 텐가?"

"생각이라면야. 사실 귀하가 도움이 되실지도 확신할 수 없소."

"너희들의 용무가 이 도시 안에 있다면, 아마 될 거야. 내성을 제외하곤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거든."

데클란이 장담하듯 말했다.

이안을 바라보는 눈길에 호의와 열망이 느껴졌다.

이안은 태연하게 그 눈을 마주 보았다.

이게 이자의 본모습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보이는 것만큼 선한 자라면 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될 테고.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모든 게 더 쉬워질 테니까.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그럼 저희의 의뢰를 노출하게 될 텐데요."

필립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특유의 고지식한 부분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아. 용병의 불문율 얘기군. 흠, 패튼?"

턱을 만지작거린 데클란이 고개를 돌렸다.

패튼이 미소 지었다.

"에, 도련님."

"미안하지만, 물러나 주겠어? 주변에 궁금해하면서 얼쩡거리는 놈들도 같이."

"예, 뭐, 그러겠습니다. 들었지? 쥐새끼들처럼 얼쩡대지 말고 다 물러나. 술이나 마시자고."

패튼이 몸을 돌렸다.

이안이 앉은 구석 자리를 중심으로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안이 데클란을 바라보았다.

"귀하가 들으시기엔 맥 빠지는 내용일 수도 있소."

"사람의 궁금증을 자극할 줄 아는 친구로군. 말해 봐. 괜찮으니까."

"우리는 사람을 찾으러 이곳에 왔소."

이안이 품에서 반쯤 썩은 신분 패를 꺼냈다.

데클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데이브…?"

"보시다시피, 오른델의 정규군이오."

"이게 이 꼴인 걸 보니, 이자는 이미 죽었겠군."

"맞소. 이자는 죄수들을 이송하고 있었지. 이송 명령을 내린 자를 찾는 게, 의뢰의 첫 번째 목표요."

"두 번째 목표는, 이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를 알아내는 건가?"

데클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 드릴 수 없소만. 억울한 죽음이었소."

"정규군 내부에… 부패한 자들이 있다는 뜻이냐?"

"글쎄. 그건 귀하께서 더 잘 아실 것 같소만. 귀하가 보시기엔 어떻소?"

이안이 되묻자, 데클란이 볼을 긁적였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영주군의 내부 사정은 나도 잘 몰라. 그들을 지휘하는 건 형님과 아버님이니까. 그쪽이 적통이고 후계자거든."

"그러시다면… 귀하가 도움을 주실 건 없을 거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하진 않았어."

데클란이 미소 지었다. 이안이 볼 때 그건, 어떤 기회를 포착한 자의 미소였다.

그가 의욕적인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알아봐 주지. 내 개인적인 호기심도 더해졌으니까,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 주신다면야. 사양하지 않겠소."

"명령을 내린 자를 찾으면, 그 후엔 어쩔 거지?"

"그건 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아시겠지만 나는 용병이오. 용병은 의뢰를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데클란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몸에 밴 냄새를 빼면서 조금만 기다려.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올 테니까."

***

데클란이 말한 조금은, 정말 조금이었다.

다음 날, 해가 지기가 무섭게 여관을 찾아온 것이다.

이제는 이안의 지정석이나 마찬가지가 된 구석 자리에, 그가 마주 앉았다.

"나름대로 알아보니, 네 말대로 이상하더군."

용병들이 공간을 벌려 주고 입구 근처에서 떠들썩하게 떠들어 댄 덕분에, 그들의 자리는 인파 속의 밀실이나 다름없게 됐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어떤 부분이 이상하셨소?"

"데이브는 가족이 여동생뿐이더군. 그리고 그녀는 데이브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아겔 란의 감옥을 지키러 떠났다고 말이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겠지.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

데클란이 이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데이브와 함께 죄수를 이송한 병사는 총 여섯이었지. 그리고 그들 모두가 부모가 죽었거나 고아였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행방을 제대로 찾아낼 사람이 없는 자들이었단 거야. 형제나 친구들 모두, 그들이 아겔 란으로 이주했다고 알고 있더군."

이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자유민 중에서도 최하층민들.

체스에서 폰을 미끼로 쓰듯, 모든 음모의 첫 희생양은 그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송 명령을 내린 자는 누구였소?"

"브래들리라는 자야. 지휘관이자 형님의 수족이지. 나와 친하진 않아. 사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 그자는 내게 존대하는 게 싫어서, 거의 말을 걸지 않거든."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 데클란이, 이안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대화를 나눌 생각이오. 오붓하게."

"원하는 말을 끌어내기 쉽지 않을 텐데?"

이안이 단검을 뽑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건 훌륭한 대화 수단이오. 과묵한 자도 말문이 트이게 하는 마법이 걸려있소."

데클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 마법을 구경하고 싶어지는데. 끼워 주겠나?"

"안 될 것도 없소. 대화의 장을 귀하가 마련해 주신다면야."

"하… 이럴 수가. 갈수록 자네가 마음에 들고 있어. 이렇게까지 말이 잘 통하는 상대는 오랜만인데. 혹시, 귀족 출신인가?"

또 이 소리군.

실소한 이안이 말했다.

"애석하시겠지만, 아니오."

"아니. 오히려 다행이군. 알다시피 내 피의 절반은 자유민이라서 말이야. 좋아, 그럼 먼저 일어나지. 생각할 게 많아. 자리가 마련되면, 바로 사람을 보낼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데클란이 일어섰다.

"나도 자네의 이 의뢰가 어떻게 끝날지, 너무 궁금하거든."

"나도 그렇소."

해사하게 미소 지은 그가 용병들 사이로 멀어졌다.

용병들과 친구처럼 어깨동무하며 술을 사는 그를 눈에 담으면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여러 번 손 안 대고 코 푸는군."

"제가 볼 땐 나리께서 사람 부려먹는 데 도가 트신 것 같습니다만."

데클란의 자리에 앉으며 필립이 말했다.

피식한 이안이 그를 바라보았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예."

필립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실 그는, 이안의 명령으로 종일 데클란을 미행했다.

놀랍게도 필립은 미행이나 잠입 따위에 소질이 있었다.

겁 많은 성격이 이런 부분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도련님이 예상보다 일찍 오셔서 말이 끊겼습니다만. 큰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도련님이 아까 말씀하신 그대로의 동선이었고요. 겸사겸사, 저분의 평판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장족의 발전이군. 명령하지 않은 것까지 해 오다니."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른델의 백성들은 다들 저 도련님을 좋아하더라고요. 자유민의 피가 섞여서 그런 것 같다고들… 아무튼."

헛기침한 필립이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죽었다더군요. 후작이 아들로 거둬들이긴 했지만 중요한 일에 쓰지는 않고. 장남인 메이슨 대공자는 저분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다들 도련님이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배치되고, 죽어서 돌아올 거라고 걱정하더군요."

흔한 콩가루 집안이구만.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안에게, 필립이 덧붙였다.

"제가 볼 때, 저 도련님은 타락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타락했다면… 본모습을 정말 잘 감추고 있는 거겠죠."

"그래. 정말 잘 감추고 있긴 하지. 그게 혼돈이나 어둠을 숭배하는 쪽은 아닌 것 같다만. …아직까진."

이안은 앞에 놓인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일이 다 끝난 다음에도 그럴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벌써부터 코끝에, 피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았다.

***

침대에 기대앉은 이안은, 무덤에서 가져온 연구 일지를 펼쳤다.

오른델에 온 지 며칠 만에, 그는 가장 좋은 방을 쓰게 됐다.

다른 용병들과 충돌하는 일 없이 마을의 잡스러운 의뢰들을 해결해 주고, 여급과도 친해진 결과였다.

여관이나 주점에서 일하는 여급들은, 항상 이상할 정도로 이안을 편하게 여겼다.

아마도 위협적이지 않은 외모와 덤덤한 말투 덕분이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과한 호의였다.

어쨌건, 덕분에 이안은 조용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제님은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처음엔 완강하게 거부하고 분노했지만, 나는 결국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참된 진리였으니까. 내가 지금까지 진리인 줄 알았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 세계도 마찬가지다….'

콘라우드의 연구 일지는, 전형적인 정신병자의 회고록이었다.

중간중간 놈이 정리한 수식이나 마법 공식, 규칙 따위가 나열되어 있었으나, 이안이 볼 땐 말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 세계는 이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작동하는 세상이지만.

이안은 자신이 이 세계의 방식으로 마법을 배우게 되는 일은 없으리란 사실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무리 예전보다 똑똑해졌다고 해도,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할 순 없었다.

'…하긴. 이 세계 인간들에겐 스킬 포인트로 마법을 배우고, 쓰기까지 하는 내가 더 말도 안 되는 존재겠지.'

이안은 콘라우드라는 변방의 마법사가 어둠에 물들어, 비로소 인간의 굴레를 벗어가는 과정을 차근히 눈에 담았다.

예상대로 놈을 지하 무덤으로 불러들인 자는 아겔 란에 있었다.

이름이 언급되진 않지만, 이안은 그게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때가 되면, 콘라우드는 그의 첨병이자 하수인으로 세상에 나올 계획이었다.

아겔 란 왕국 전체를 마경화시키기 위해서.

끝내는 검은 벽을 세운 것과 같은 공허의 존재들을 이 땅에 강림시키는 게, 그들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신도 악마도 아닌 고대 신들에게 지배당하는 삶을 원한 것이다.

타락자들의 눈에는 그것이, 세상이 태초의 순리로 되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본래의 세상이라며 사이비의 교리로 치부했을 내용이지만.

'이 세계는 전부 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뭐가 진실인지를 알 수가 없네.'

일지의 내용이 이안을 처음 만난 부분까지 접어들었을 때였다.

"나리. 주무십니까?"

문이 열리고, 필립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가 속삭였다.

"대화의 장소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일 잘하는 양반이군."

미소 지은 이안은, 일지를 미련 없이 덮으며 일어섰다.

부하들을 어둠의 제물로 바친 자를 어르고 달랠 시간이었다.

칼과 주먹으로.

#034화

허름한 가구들이 놓인 판잣집.

"읍… 읍…."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팔다리가 결박된 브래들리가 버둥거렸다.

재갈을 물고, 먼지 덮인 주머니까지 머리에 뒤집어쓴 채였다.

"장소 선정이 훌륭하시군."

입장과 동시에 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말했다.

여긴 판자촌에서도 특히 외곽에 위치한 집이었다.

패튼과 육손이의 안내가 아니었다면 찾기도 어려웠을 만큼.

벽면에 기대 있던 데클란이 웃음 지었다.

"애석하게도 그 부분만 내가 한 게 아니야. 여긴 이자가 정부와 밀회를 즐기는 장소거든. 난 그냥 기다리기만 했지."

그가 브래들리에게 다가갔다.

브래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부터 몸부림을 멈췄다.

데클란이 주머니를 벗겼다.

"반가워. 브래들리 경."

"퉷…! 이게 무슨 짓이오? 로즈는 어디에 있지?"

재갈을 풀자, 입에 고인 침을 뱉은 브래들리가 버럭 소리쳤다.

데클란이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서 잘 자고 있겠지."

"이런 함정을 파다니… 대공자께서 알게 되시면 감당할 수 있겠소?"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야. 경은 그보다, 자신부터 걱정하는 게 좋겠군. 아쉽게도 오늘 경에게 용무가 있는 건 내가 아니거든."

"그게 무슨…."

브래들리가 그제야 이안과 필립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데클란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안이 미소 지었다.

"드디어 만나는군. 브래들리."

"…넌 누구냐? 난 널 처음 보는데."

브래들리가 눈을 부라렸다.

품에서 신분 패를 꺼내면서, 이안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맞아. 나도 널 처음 보지. 하지만 이자는 당신을 잘 안다던데?"

"무슨 헛소리…. ...!"

신분 패를 확인한 브래들리의 눈이 커졌다.

"네놈, 이걸 어디서…?"

"유령이 주던데. 원한을 풀어 달라고 말이야. 자신들을 죽이고 고대수 아래에 파묻은 자를 찾아 달라더군."

"고대수라니, 난 그딴 거 모른-"

이안이 브래들리의 각진 턱을 움켜쥐었다.

이안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무기질적인 검은 눈동자.

"경고는 이게 마지막이야. 다시 묻지."

턱을 놓은 이안이 팔걸이에 결박된 브래들리의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의 명령으로, 이자들을 제물로 바쳤지?"

"고대수? 제물? 자꾸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으아악!"

브래들리가 비명을 질렀다.

이안이 그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쥐더니 그대로 꺾어 버린 것이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이… 개새끼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이번엔 반대쪽 새끼손가락이 부러졌다.

비명을 지른 브래들리가 충혈된 눈으로 데클란을 노려보았다.

"천하고 어리석은 줄은 알았지만. 이런 개소리에 넘어가서 미친 짓을 벌이다니- 아아악!"

손가락이 또 하나 부러졌다.

고함과 비명에도 집을 찾아오는 자는 없었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도 했고.

패튼과 육손이가 패거리를 이끌고 주위를 돌면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길목을 막은 덕분이었다.

"손가락으로 끝날 거라 생각 마. 발가락, 귀, 코, 눈… 부러뜨릴 곳은 많고, 부러뜨린다고 잘리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넌 기절하지도 못할 거고, 전부 생생하게 느끼게 될 거야. 내가 보증하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한 이안이 눈물과 콧물, 침까지 흘리는 브래들리를 다시 마주 보았다.

"누구의 명령이었지?"

"…대공자."

이안이 중지를 움켜쥔 순간, 브래들리가 토하듯 내뱉었다.

"대공자께서 명령하셨소."

이안의 손길이 멈췄다.

"메이슨 버차드? 대공자가 왜 그런 명령을?"

"그건 나도 몰… 끄흐윽…!"

왼손 중지가 부러졌다. 이를 악문 채 버둥거린 브래들리가 숨을 토해냈다.

"제기랄…! 길목을 막아야 한댔소. 아겔 란에서 오른델로 향하는 길목을 하나만 막아도, 전략적인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전략적인 우위…?"

연극을 관람하듯 지켜보던 데클란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에게 닥치고 있으라는 눈빛을 보낸 이안이 말했다.

"버차드 후작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당연히… 후작 각하께서 원하신 거였소. 때가 머지않았다고 하셨지."

"때가 멀지 않았다라…."

"내가 들은 건 정말 그게 전부요. 나는 명령을 수행한 것뿐이란 말이오! 오른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그깟 천한 것들의 희생쯤, 아무것도 아니잖소!"

브래들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전쟁이 임박했기도 하고. 대업을 이루려면, 때로는 작은 희생도 필요한 법이지. 특히 그게, 독립과 건국이라면 말이야."

"이해하시는군. 제기랄… 나도 원하지는 않았소.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게 나였을 뿐이란 말이오."

"앞뒤가 딱딱 맞는 대답이군. 마치 들켰을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말이야."

이안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하긴. 너희가 타락자라는 사실을 감추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겠지."

"...!"

브래들리의 눈썹이 순간 꿈틀댔다.

설마 이런 얘기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물론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린 그가 되물었다.

"타락? 타락이라니, 이게 또 무슨 허무맹랑한… 아악!"

손가락이 여지없이 부러졌다.

"난 너희가 타락자라는 걸 이미 알고 왔어. 어설픈 연기는 그만해라. 너희 영주부터가 타락했는데, 그 장남의 심복인 네가 무고할 리가 있나. 자, 다시 시작하지."

이안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들과 함께하는 조건으로 무엇을 약속받았지? 불사? 힘? 권력?"

브래들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안이 정말 전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그의 검지를 움켜쥘 찰나, 브래들리가 문득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지? 당신 말고도 그 사실을 아는 자가 더 있나?"

"글쎄. 사실 나도 다는 몰랐어."

"뭐…?"

"내가 아는 건, 네가 모시는 대공자가 타락했으리란 사실뿐이었지. 이젠 버차드 후작도 타락자라는 게 확실해졌군."

이안이 어깨를 까딱였다.

"방금 네가 증명해 준 덕분에 말이야."

"이… 이런… 개자식이…!"

브래들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이 그의 입에 다시 재갈을 물렸다.

"협조해 준 보답으로, 이제 단숨에 보내주지.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한 번에 편히 죽고 싶다면."

"으읍…!"

이안이 단죄의 검을 뽑았다.

브래들리의 눈이 터질 것처럼 충혈될 찰나.

"잠깐 멈추지."

데클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화가 이어질수록 점점 굳어지던 그의 얼굴은, 이제는 어리둥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부터 대화의 맥락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자를 죽이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겠지만, 내게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게 순서 같은데."

브래들리의 앞을 막아선 데클란이, 웃음기 없는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고대수, 반란, 독립에 이어 타락자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이지? 아버지가 왕국에 반란을 꿈꾸고 있으며, 심지어 타락하기까지 하셨단 말이냐?"

"그렇소."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아직 귀하도 모든 혐의를 벗은 것은 아니오. 그러니까…."

이안이 문득 말을 멈췄다.

잠시 미간을 좁혔던 그의 입가에, 이윽고 옅은 실소가 스쳤다.

"그래. 약속만 받은 게 아니었군."

"뭐…?"

멍하니 되묻는 데클란의 뒤에서 빠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래들리를 구속하던 의자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뿌득, 빠득, 빠드드득-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데클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가운데, 득달같이 달려든 이안이 그를 끌어당겨 등 뒤로 내던졌다.

"도련님을 지켜라, 필립."

행동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

바닥에 자빠지려는 데클란의 팔을, 필립이 움켜쥐었다.

"제 뒤에 계십시오."

어느새 검을 뽑아 든 그가 굳은 얼굴로 내뱉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데클란의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뿌득, 빠각- 뿌드드득-

기괴한 형상으로 변이하고 있는 브래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온몸의 근육이 증식하듯 커지면서, 피부가 찢어져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브래들리의 각진 얼굴은 종양처럼 일그러지면서, 부풀어 오르는 근육 사이에 파묻히고 있었다.

갑각류의 외피 같은 돌기가 그의 어깨와 옆구리를 뚫고 돋아났다.

쉭-

변이가 한창인 놈의 머리 위로, 이안이 솟구쳤다.

그의 손에 들린 단죄의 검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콰지직-!

브래들리의 어깨에 돋은 돌기가 이안의 검을 막았다. 검은 줄기를 반 이상 파고들었지만, 아예 절단하지는 못했다.

터질 것처럼 핏발이 돋은 브래들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형편없는 일격이군… 흐… 흐흐."

저주파가 섞인 섬뜩한 목소리.

브래들리의 일그러진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이것이… 힘인가… 흐… 흐흐흐. 나는 어리석었군… 이토록 강대한 힘을 앞에 두고도 고작…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니…."

"난 투명 인간 취급이냐, 근육몬 새끼야?"

검 자루를 쥔 채 돌기에 매달려 있던 이안이 내뱉었다.

브래들리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럴 리가…. 흐흐, 움직여도 상관없다… 편히 보내줄 생각은 없으니까…."

"창의력 없는 유언이군."

자루를 움켜쥔 이안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검신을 타고 불길처럼 푸른 빛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브래들리가 눈을 치켜떴다.

놈의 눈알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신성…? 신성력이라고…?"

"그것도 진부하긴 마찬가지야."

내뱉은 이안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번- 쩍!

신성력이 섬광처럼 폭발하고, 푸른 궤적이 브래들리의 몸을 가르며 떨어졌다.

검을 내리친 이안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착지했다.

"끄… 아… 아아악...."

어깨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갈라진 브래들리가, 늘어지는 비명과 함께 좌우로 쓰러졌다.

흩뿌려진 피와 내장을 뒤집어쓴 채, 이안이 일어섰다.

그는 아직 빛을 머금은 검을 고쳐 쥐며 브래들리를 내려다보았다.

놈은 몸이 반으로 쪼개진 채로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고통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

더 덧붙이는 말은 없었다.

콰직! 콰직! 쩌억!

이안은 놈의 얼굴 근처, 뒤틀리고 비대해진 근육을 마구 내리쳤다.

신성력이 사그라들고, 검의 궤적마다 검붉은 핏물이 튀었다.

마침내 브래들리의 머리가 잘렸다.

난자된 살점 사이의 잘린 머리를 집어 든 이안이 시선을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데클란.

브래들리의 잘린 머리가 그의 발치로 굴러갔다.

"이제는 믿으시겠소?"

절대 인간의 형상은 아닌 브래들리의 머리를 응시하던 데클란이, 이윽고 다시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는… 아니… 너희들의 진짜 정체는 뭐지? 정말,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온 용병일 뿐인가?"

뭔가 말하려던 이안의 시선이 문득 필립에게로 향했다.

필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결연하게 내뱉었다.

"이건 제 역할입니다만."

"…마음대로 해라."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이안이 얼굴에 묻은 핏물을 닦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그사이, 필립이 정중하게 검을 회수하며 입을 열었다.

"늪지대의 용 사냥꾼. 발크령의 해결사. 늑대 인간과 고대수, 목 없는 기사의 참수자이며, 무덤 숲 마경의 정화자."

이안의 인상이 점점 구겨졌다.

하지만 필립은 본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희미한 미소까지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또한, 티르 엔의 사도이며 남부 국경의 집행자이자 아겔 란의 보검이신 메브 리우렐 경의 유일하며 공식적인 대행자. 이안 호프 나리입니다."

"...."

멍하니 입을 벌린 데클란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가운데.

가슴에 손을 얹은 필립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저는 나리를 모시는 종자, 필립입니다."

#03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