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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3

* * *

홀란이 설명한다.

"언젠가 너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지만…. 지금이 딱 적당하겠구나. 받거라."

아더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칼을 쥔다.

그 순간 물결 무늬가 새겨진 손잡이가 아더의 손에 촥 하고 감긴다.

너무 좋은 그립감에 아더가 눈을 치켜뜨자 홀란이 한 번 더 설명한다.

"아티펙트는 아니지만, 아주 좋은 칼이지. 운철검. 우주에서 날아온 별로 만들어진 칼이니깐."

운철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허나 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기운은 그 낯선 이름을 뒤덮기에 충분했다.

아더는 검을 바라보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오 대부님!"

"원래 네 것이었다. 감사해 할 필요는 없고, 잘 사용하거라."

"네에!"

홀란이 시선을 돌려 요넬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떠나지만, 아무쪼록 몸과 마음을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은 제가 도와드릴 테니 너무 염려 마시고."

요넬이 미소 짓는다.

옆에 있던 아더가 그런 요넬과 홀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홀란… 아니 대부님. 생각보다 좋은 분이셨네. 약속도 지키고, 선물도 주시다니.'

거기다 앞으로도 도움을 줄 확률이 높았다.

당연하지만 이 사실은 여러 의미를 시사했다.

홀란 레버쿠젠 정도 되는 사람이 도와준다면, 지금 상황에서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 될 테니 말이다.

그래서 아더가 미소 지을 때, 날카로운 시선이 뒤통수를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저번 대련에서 기절한 홀란의 손녀.

엘린 레버쿠젠이 보였다.

"흥!"

콧방귀를 뀐 그녀가 앞으로 걸어 나간다.

그 모습에 아더가 눈을 끔뻑일 때, 홀란과 레버쿠젠 가신들이 일제히 요넬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 인사에 요넬과 바이에른의 가신들 또한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좋은 모습이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공작 각하."

굽혔던 허리를 편, 홀란이 다시 아더를 바라본다.

그리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 볼 때는 조금 더 친해졌으면 하는데, 괜찮겠느냐?"

"좋아요오오!"

"나도 좋구나. 그럼 친해지고 나면, 네 비밀을 말해줄 수 있느냐?"

"그건 안 돼요오오!"

홀란이 껄껄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바이에른 저택을 나섰다.

그렇게 북부의 사자라 불리는 홀란 레버쿠젠이 자신의 전쟁터로 돌아갔을 때였다.

"억울합니다!! 제가 왜 배신…."

홀란 레버쿠젠.

그는 자신의 말을 확실히 지켰다.

기사 케딜락을 포함해, 바이에른 가문을 좀 먹던 배신자.

그들 모두가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가문에서 내쫓기기 시작했다.

명백한 증거가 있기에 발뺌도 하지 못했다.

그 탓에 바이에른 저택이 어수선해졌을 때, 아더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처리해야 했는데…. 하지만 뭐, 지금은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지.'

아직 전면으로 나서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이런 몸을 가지고 나서 봐야,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게 뻔했다.

그래서 아더는 수련에 집중했다.

마나를 모으고 고리를 엮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6개월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갔을 때였다.

아더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우웅-!

동시에 가슴팍에서 새파란 고리 하나가 번쩍였다.

그 기묘한 감각에 아더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달성했네, 1서클."

칼잡이들의 경지를 나누는 단계.

그 단계 중에서 가장 초입이라 할 수 있는 고리 하나를 마침내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아더는 슬슬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제 연기는 할 수가 없겠어. 고리가 새겨졌으니깐.'

서클을 만들지 않았을 때면 모를까.

가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제 몸의 이변을 눈치챌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아더는 몸을 일으켰다.

그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바이에른 가문을 거닐었다.

새로이 들어온 시종들이 그런 아더를 향해 정중히 인사한다.

그 인사를 일일이 받으며 걸음을 옮기던 아더는 요넬의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 후 가벼운 심호흡을 내뱉은 뒤 조심스레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허락에 아더가 방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서류를 바라보던 요넬이 깜짝 놀라 아더를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던 아더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안녕하세요, 어머니?"

이번 생과 저번 생을 합쳐 32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말을 더듬지 않고서 인사를 건넨 순간이었다.

제10화

수도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바이에른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이었다.

단 한 명뿐인 후계자라 평가받는 아더 바이에른이 마침내 병을 이겨내고 말을 더듬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게 파급력이 큰 것은 아니었지만, 바이에른 가문 자체가 워낙 명문가다 보니 자연스레 이목이 쏠렸다.

그 속에서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바이에른이 새롭게 위상을 다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사건들로 인해 사람들의 뇌리에 이 사실이 잊혀 갈 때였다.

아더 바이에른의 새로운 집사.

안나 크레프트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세안을 하고 머리를 빗은 뒤, 어젯밤 다려 놓은 정장을 갖추어 입었다.

거울을 통해 마지막 확인까지 한 안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바이에른의 저택을 지나, 뒤뜰로 향했다.

휘익-!

그 순간 귓가로 파고드는 기이한 소리.

안나는 고개를 들어 한 남자.

아니 소년을 바라보았다.

휘익-!

목검을 휘두르는 소년의 움직임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저 나이 때 소년이 휘두른 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예리함도 묻어나왔다.

그 탓에 안나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저분이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을 더듬던 소공자님이라 말하면 누가 믿을까.'

생각과 함께 안나가 아더의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릴 때였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아더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리고 텅 비어 버린 가슴팍의 고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흠… 끝나버렸네. 고리가 하나라 그런가?'

칼잡이 더 나아가, 기사라 불리는 자들은 마나를 다룬다.

그 마나는 기사들과 칼잡이들의 육체를 강화하고, 일정 수준에 이르러면 검기를 방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검기를 방출할 수 있는 서클의 기준은 5서클. 그전까지는 육체를 강화할 수 있지.'

그래서 아더는 1서클의 고리를 완성한 뒤로, 매일 같이 육체와 마나의 교감을 높이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은 마나를 쌓아 고리를 늘리는 거지만, 엄청난 영약을 먹지 않는 이상 단기간에 마나를 쌓을 수 없었다.

대신 아주 조금이지만 마나가 쌓이는 속도를 강제적으로 늘릴 방법이 존재했다.

몸 안에 쌓인 마나를 전부 소진하고 새로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비효율적이고 무식한 방법…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거라도 안 하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깐 어쩔 수 없네.'

입맛을 다신 아더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아더의 옆에서 노움과 장난을 치던 운디네가 속삭였다.

[아더, 안나가 왔어요!]

'응. 벌써 아침이 온 것 같네.'

대답에 운디네가 조심스레 조언한다.

[잠을 조금 자야 하지 않아요? 벌써 두 달째 잠을 거의 못 자고 있는데, 이러다 쓰러질까 걱정돼요.]

'괜찮아. 그리고 쓰러지면 운디네가 치료해 주면 되지.'

함박웃음을 지은 물의 정령이 아더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 기쁨의 몸짓에 아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안나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인 안나가 기다렸다는 듯 수건을 내민다.

"감사해요, 안나."

아더의 인사에 안나가 눈치를 살폈다.

"저기 소공자님?"

"네?"

"전에도 말씀드렸던 거지만…. 저한테만큼은 말을 편히 하셔도 됩니다."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불편한가요?"

"…아닙니다. 단지 주위의 시선이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녀의 조언에 아더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그러고 보니 이상하긴 하네. 집사한테 존댓말을 쓰는 귀족이라니.'

그 속에서 자연스레 떠올렸다.

자신이 왜 누구를 만나건 존댓말을 쓰게 되었는지.

이유는 아주 단순했는데, 말실수 때문이었다.

'미쳐 있던 시절의 나는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하곤 했지.'

그래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혼자만 생각해야 할 말들을 불쑥 꺼냈고, 맥락에 어긋나는 말을 해 분위기를 깨트리기도 했다.

그 탓에 자연스레 높임말을 쓰게 된 아더였다.

'말을 높이면 적어도 무례하게는 안 보일 테니깐…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지.'

제정신으로 돌아온 지금은 굳이 높임말을할 필요가 없었다.

당장 습관을 바꾸는 건 어렵겠지만 말이다.

결정을 내린 아더가 입을 연다.

"알겠어요, 안나. 이제부터 말을 편하게 해 보도록 노력해 볼게요. 이게 습관이라 잘 안 바뀌네요."

안나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연무장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식당으로 향했다.

아침 해가 정오로 가는 시점에서, 잠들어 있던 바이에른 저택은 다시 활기를 되찾아 있었다.

그 탓에 수많은 사람이 저택을 거닐고 있었고, 그들 모두가 아더를 발견하고서 인사했다.

"소공자님을 뵙습니다."

아더는 그럴 때마다, 멈추어서 똑같이 정중히 인사했다.

어찌나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는지 공작가에 막 들어온 하녀들은 놀라 눈을 치켜뜰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안나가 나서서 상황을 중재했고, 결국 아침 식사 약속에 10분 정도 늦고 말았다.

허나 먼저 와 기다리던 요넬과 아이린은 신경 쓰지 않고 웃었다.

"어서 오너라 아더. 아침 운동은 잘했니?"

"네, 어머니."

대답에 요넬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는 미소던지, 지켜보던 안나조차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기사들이 너를 연신 칭찬하더구나. 스스로 1서클을 깨우치는 건, 천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진짜요?"

"그래서 안타깝다고 하더구나. 이런 재능을 관리해 줘야 한다면서 왜 검술 선생이 없는지도 의아해하고…."

말을 흐린 요넬이 은근슬쩍 제안한다.

"아직도 검술 선생을 들일 마음은 없는 거지?"

"네. 지금은 혼자서 조금 더 연습해 보고 싶어요."

확고한 대답에 요넬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섰을 때 가르침을 받아야 뜻이 서는 법이지. 이 어미는 항상 기다리고 있으마."

그 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은 평범한 귀족가의 식탁하고는 꽤나 거리가 멀었는데 그탓에 주위에 있던 가신들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모두가 아침 식사를 즐길 때였다.

아더가 질문한다.

"어머니. 오늘도 외출해도 될까요?"

요넬이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들이켜며 말했다.

"오늘도 말이냐? 요즘 들어 외출이 잦구나."

"바깥에 신기한 게 많더라고요.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대답에 요넬이 고민한다.

허나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이미 아더가 외출을 나선 지 한 달이 지났다.

이제 와서 막는 것도 옳지 않았고, 아더가 말을 더듬지 않은 것도 6개월이 지났으니 세상을 경험할 시기이기도 했다.

'그것을 먼저 나서서 해주었으니, 믿고 밀어줘야 한다.'

생각을 끝마친 요넬이 안나를 바라본다.

"아들을 부탁하지, 안나."

아더의 뒤를 지키던 안나가 움찔 놀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각하."

대답을 들은 요넬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더를 꽉 껴안는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보내거라. 내 사랑스러운 아들."

* * *

요넬의 허락이 떨어지고서, 아더와 안나는 곧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새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망토를 두른 아더는 안나가 건네준 중절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써야 해, 안나?"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패션입니다. 지금 공자님이 입으신 옷과 한 세트로 말이죠."

"써야 한다는 소리지?"

"안 써도 상관없지만, 얼굴을 가릴 것까지 고려하면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모자로 얼굴을 가릴 수 있다고?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말없이 뒤집어썼다.

지켜봐 온 바, 새로운 집사인 안나는 패션에 매우 신경을 썼다.

그것이 아더로서도 딱히 나쁘지 않았기에,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모자를 뒤집어쓰니 안나가 나직이 감탄한다.

"정말로 잘 어울려요, 공자님."

"고마워. 그럼 슬슬 나가 볼까?"

이 말과 함께 아더가 방 안을 나섰고, 안나가 뒤따랐다.

그렇게 바이에른 저택을 나서자 안나가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도련님?"

"매일 가던 찻집으로 가자."

대답에 안나가 앞장선다.

그 뒤를 아더가 뒤따랐다.

그 후 10분 정도 걸으니, 번화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삐이이익!

삑삑삑!

자동차 경적 소리와 구두 굽 소리가 연신 귓가로 들려왔다.

수도에서 가장 큰 번화가였는데, 안나는 긴장감을 일깨웠다.

이런 대로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생길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제 뒤를 따라나선 사람은 무려 공작가의 소공자였다.

그 신분을 생각하면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원래라면 가문의 기사들과 같이 이동해야 하는데… 도련님께서 그것만큼은 한사코 거부하니깐.'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안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린 끝에야 아더를 찻집으로 안내할 수 있었다.

"창가하고, 개인실 중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손님?"

"개인실로 주세요."

아더의대답에 웨이터가 둘을 개인실로 안내했다.

작은 방에는 제법 고급진 소파와 테이블이 있었다.

따라 들어온 웨이터가 다시 한번 질문한다.

"음료는 뭐로 드릴까요?"

"따뜻한 차로 두 잔 주세요."

아더의 말에 웨이터가 고개를 숙이며 방 안을 나선다.

그사이 안도의 한숨을 내어 쉰 안나가,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칠 때였다.

아더가 질문한다.

"피곤해 보이네. 잠시 앉아서 쉬는 게 어때?"

"어찌 제가 도련님과 같은 자리에…."

"매일 같이 앉아서, 같이 차를 마셨는데 매일 똑같은 대답을 하네. 안나는."

안나가 입을 다문다.

부끄럽게도 아더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근 한 달 동안 나온 외출에 자신은 매일 같이 아더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때아닌 여유를 부렸다.

고민하던 안나가 슬그머니 자세를 낮췄다.

"그럼 실례를…."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가져온 책을 펼쳐 들었다.

그렇게 10분, 30분,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아더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린다.

그 순간, 무료함과 졸음을 이겨내기 위해 애쓰던 안나의 시선이 흐려지고 탁자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안나가 기절을 했음을 확인한 아더가 몸을 일으켰다.

"노움 씨 부탁해요."

안나의 머리 위에 있던 흑색 요정이 말없이 날개를 파닥였다.

그렇게 땅의 정령 노움의 도움으로 안나를 잠재운 아더가 소리 없이 찻집을 빠져나왔다.

웅성웅성-!

조금 전 보았던 번화가의 소음이 아더의 귓가를 때렸다.

아더는 그 거리를 매우 익숙하게 빠져나갔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으니 자동차의 경적 소리 대신 거지의 욕설이 들려왔다.

달라진 거리의 분위기에 아더가 몰래 챙겨 두었던, 가면 하나를 뒤집어썼다.

그 후 다시 걸어 나가자, 이내 한 거지가 다가와 조심스레 묻는다.

"오셨습니까?"

"네. 다들 모여 있나요?"

"전부 모여 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거지가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선다.

아더도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참을 돌고 돌던 거지는 이내 수도의 할렘이라 불리는 B-21구역, 그 구역에서 다섯번째로 규모가 큰 거지 패인 [아둔 패거리]에게 아더를 안내했다.

"고생하셨어요. 여기 팁이에요."

아더가 은화 하나를 튕겨 거지에게 건넸다.

거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길거리에 배를 내놓고 잠든 거지들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아둔 패거리의 대장.

아둔이었다.

"좋은 점심입니다. 손님."

아둔의 인사에 아더가 대답한다.

"네 좋은 점심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뭘 좀 찾으셨나요?"

* * *

아둔이 선뜻 대답하지 않고 눈을 굴린다.

그 모습에 아더가 이번에는 금화 하나를 꺼내어 아둔에게 튕겼다.

번쩍이는 금의 자태에 아둔의 입에 함박 미소가 걸렸다.

'계산 하나는 정말로 확실하신 분이군.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중얼거림과 함께 아둔은 이 기묘한 손님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쳐들어온 거였지. 우리 패거리 중 한 명이 시비를 건 탓에.'

손님은 아직 변성기가 채 가지 않은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아둔 패거리들을 단 일격에 쓰러트렸다.

그 놀라운 실력에 아둔은 납작 엎드려 목숨을 빌었고, 눈앞의 손님은 기다렸다는 듯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사람 한 명 찾아주면 용서해 드릴게요, 어때요?'

그렇게 시작된 손님과의 기묘한 인연은 무려 한 달 동안 지속되고 있었다.

손님은 찾아올 때마다, 돈을 주며 사람을 찾았고 거지들은 손님을 오기를 기다리며 최대한 그 사람을 찾았다.

'처음에는 사기를 칠까도 했지만… 그 손속을 보면 그럴 생각은 꿈에도 못 꾸지.'

아둔은 거지치고 똑똑한 자였고, 눈앞의 손님이 매우 위험한 인물인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역량을 동원해 손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힘 있는 자가 돈을 주면서 우리를 부리려 든다면… 굳이 사기를 칠 필요가 없지.'

욕심도 역량이 되었을 때나 부리는 것이다.

생각을 끝마친 아둔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드디어 찾은 것 같습니다."

대답에 아더의 눈이 치켜 떠진다.

"정말요? 지금 어디 있는데요?"

"저기 [하르던 패거리]에 몸을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손님이 말씀하신 검은 피부에 붉은 눈동자. 외양이 정확히 일치하는 남자가 하르던 패거리에 며칠 전부터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설명에 아더가 입꼬리를 올린다.

'드디어 찾았네. 흑마법사 프라킬.'

역시나 이곳 B-21 구역에서 몸을 숨기고 활동했던 모양이었다.

그 탓에 아더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그 혈통… 잘 간직하고 있어야 할 텐데. 이제부터 내가 써먹어야 하니깐.'

과거로 돌아와 두 번째로 흡수할 혈통.

그 혈통 능력은 무려 '갑옷'을 피부에 두르는 것이었다.

제11화

아더는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은 지난 삶의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변했다.

15살의 나이에 벙어리에서 벗어났으며 1서클 또한 달성했고, 몸 상태도 30살의 아더 바이에른보다 훨씬 좋았다.

허나 만족할 수 없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운 성장을 한 건 맞지만 딱 성장만 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머릿속에 든 계획 중 그 어떤 것도 실천할 수 없었다.

'당장 케딜락 같은 기사가 어머니를 암살하려 들면, 꼼짝없이 당해야 하지.'

그 탓에 아더는 계획보다 일찍 혈통을 모으고자 결단을 내렸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마나와 달리, 바이에른 혈통은 좋은 피만 흡수한다는 가정하에 훨씬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피를 어떻게 구하냐 였는데, 의외로 쉽게 해결됐어.'

두 달 전, 어머니의 권유로 보게 된 신문에 실린 기사 한 줄에서 힌트를 얻은 아더였다.

바로 B-21 구역의 골목길 사이에서 썩은 시체가 발견됐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할렘가의 으레 많은 괴담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요넬의 입에서 제국의 수색 경찰들까지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떠올릴 수 있었다.

'수도 최악의 살인마라 불리던 프라킬. 그자가 수도에 처음으로 흔적을 드러냈던 게 이때쯤이었지 아마?'

그는 상당히 독특한 혈통을 지닌 살인마였는데, 할렘가의 거지들과 왈패들을 제물로 바쳐 힘을 키운 흑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힘이 원하던 지점에 이른 순간, B-21 구역 할렘가를 넘어 시가지로까지 진출했다.

그 후 내로라하는 귀족들을 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최악의 살인마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년 뒤. 내 오른팔에 흉측한 흉터가 새겨진 순간이지.'

이 대담한 흑마법사는 바이에른 공작가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간만에 외출을 한 요넬과 과거의 아더를 습격했고, 기어코 어깨를 가로지르는 상처를 새겼다.

'다행히 뒤늦게 도착한 제국의 경찰들에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프라킬 덕에 나는 더욱 미쳐버려 그나마 하던 외출도 안 하게 됐고.'

그래서 프라킬이란 이름 세 글자는 아더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의 능력과 행적 또 한 말이다.

'그 사람 혈통… 꽤나 좋았지. 전신의 피부를 파충류의 껍질처럼 변화시켜, 기사의 검기와 마법사의 마법을 튕겨냈으니깐.'

1서클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아직 완벽한 방어 수단이 없는 아더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탓에 프라킬의 혈통을 첫 타깃으로 정한 아더는 곧바로 B-21 구역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도의 그 어떤 구역보다도 넓은 할렘가에서 외형만 아는 흑마법사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거지들을 이용한 아더였다.

제국의 수도는 대륙에서 가장 많은 인구 밀집도를 자랑했고, 그에 비례해 많은 거지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부랑자와 거지들 대다수가 이 할렘가에 모여 있었다.

거지들은 이 거리에 떠도는 소문과 정보.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맺게 된 인연이 아둔 패거리였다.

'돈을 뜯어내려다 맺게 된 기묘한 인연.'

그 후 아둔 패거리의 도움을 받아 프라킬을 찾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마침내 드러난 듯했다.

"손님이 말씀하신 검은 피부에 붉은 눈동자. 외양이 거의 일치하는 남자가 하르던 패거리에 며칠 전부터 머물고 있습니다."

아둔의 설명에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르던 패거리는 어디에 있죠?"

"B-21 구역의 지하도에 터를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많이 먼가요?"

"금방입니다. 10분이면 놈들의 아지트로 갈 수 있습니다."

대답에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로 1골드를 더 드릴게요. 저를 [하르던 패거리]에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하르던 패거리로 말씀입니까?"

"네. 프라킬 그분에게 볼일이 있거든요."

아둔이 눈을 굴리다 조심스레 묻는다.

"주제넘을 수 있긴 한데, 저희 아둔 패거리와 하르던 패거리는 사이가 매우 나쁩니다. 손님."

"그래서요?"

"제가 그곳으로 갔다가는 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하르던 패거리는 외부인에게 매우 민감한 거지 패라서…."

아더가 손가락을 튕겼다.

"즉, 위험하다 소리군요?"

"정확합니다! 손님의 실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하르던 패거리는 저희 패거리보다 배는 많은 숫자···."

설명을 하던 아둔의 눈앞에 2골드가 떨어졌다.

"목숨 수당이에요. 일을 끝마치면 똑같은 금액으로 한 번 더 드릴게요."

"…."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요? 아둔?"

대답에 아둔이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의 실력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거래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미 보았으니 거부할 수 없겠군요.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인 아둔이 제 부하들에게 손짓한다.

그 손짓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거지들 몇 명이 어디론가 달려 나가고, 아둔이 허리를 숙이며 말한다.

"지금 안내하면 되겠습니까?"

"예. 통금 시간이 있어서, 빨리 들어가야 하거든요."

"…통금 시간이요?"

"정확히는 어머니랑 약속한저녁 식사 시간이요. 그러니깐 최대한 빨리 안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더의 말에 아둔이 눈을 끔뻑인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는 몹시 당황했다.

'…통금? 높으신 분들의 유머인가? 아니면 귀족들만 은어?'

허나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높으신 분들의 취향은 자신과 같은 것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독특했으니.

생각을 끝마친 그는 곧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아더가 걸음을 옮기니, 조금 전 아둔의 손짓에 먼저 움직였던 거지들 몇 명이 배수로의 뚜껑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탓에 상당한 악취가 코끝을 찔러왔다.

아둔이 눈치를 보며 설명한다.

"지하도에 가기 위해서는 이 하수구가 가장 빠른 길입니다."

"좋네요. 빨리 이동하죠."

대답에 아둔이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 속에서 아더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운디네 부탁해.'

이 말에 운디네가 아더의 코끝에 걸터앉는다.

그 순간 풍겨 오던 악취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닌 운디네의 기운이 아더의 몸 전체를 감싸면서 오물 또한 신발을 제외하고는 묻지 않았다.

반면 앞장서 걷던 아둔은 하수구 특유의 악취와 오물에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걸으니, 저 멀리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들이 하르던 패거리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이 일대에서 규모로만 따지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놈들이죠."

아둔의 설명에 아더가 몸을 일으켜 거지들에게로 다가갔다.

"소, 손님?"

당황한 아둔이 소리쳤지만, 아더는 멈추지 않았다.

그 탓에 아둔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간다고? 30명이나 되는 거지 패에게?'

의문과 함께 아둔이 눈을 굴릴 때였다.

30명의 거지 앞에 선 아더가 빙그레 웃는다.

"안녕하세요? 프라킬이란 분을 뵈러 왔는데 안내해주실 수 있나요?"

* * *

뒤늦은 점심을 먹던 하르던 패거리들이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이 하수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과 생김새를 한 사내를 훑기 시작했다.

"…누구쇼? 여기 사람 같지 않은데?"

"프라킬이란 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프라킬? 프라킬이 누구요?"

"흑마법사라 설명하면 아실까요?"

아더의 질문에 거지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들은 낮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더를 쏘아보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마법사같이 대단한 분이 왜 이런 곳에 있겠슈?"

"그리고 그 흑마법사를 찾는 당신은 또 누구고?"

질문과 함께 조잡한 쇠꼬챙이를 집어 든 거지들이 은근슬쩍 원을 그린다.

아더를 중심으로 말이다.

허나 아더는 신경 쓰지 않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흑마법사니깐 이곳에 있지 않을까요? 흑마법사분들은 지하나 하수구 이런 곳을 좋아하시거든요."

대답에 한 거지가 기습적으로 쇠꼬챙이를 휘둘렀다.

제법 날카로운 일격이었지만, 예측하고 있던 아더는 허리춤에 찬 운철검으로 가볍게 튕겨냈다.

챙-!

울려 퍼지는 소음과 함께 거지들이 소리친다.

"잡아-!"

"누군지 몰라도 일단 잡아 족치고 봐!"

"그분이 알면 다 죽는다! 어서 죽여!"

외침에 아더가 탄성을 내질렀다.

'정확히 찾아왔나 보네. 저분 그분 이러는 걸 보니깐.'

생각과 함께 아더가 코끝에 앉은 운디네를 바라본다.

그 무언의 시선에 운디네가 작은 기합을 내지른다.

그 순간 거지들이 딛고 있던 발판에서 오물들이 살아 움직인다.

"어, 어?"

비명과 함께 몇몇 거지들이 넘어지고, 그 위를 아더가 덮쳤다.

운철검의 칼등으로 넘어진 한 거지의 어깨를 가볍게 부숴버린 아더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사각에서 덤벼오는 거지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그렇게 거지 두 명을 순식간에 쓰러트린 아더는 본격적으로 감각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후각 청각 시각 촉각.

미각을 제외한 네 가지의 감각을 동원해 30명의 거지들의 움직임, 방향, 숨소리.

그들이 주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고 인지한 아더가 남은 거지 패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

설마 덤벼들 줄은 몰랐던 거지들이 기세를 잃고서 당황한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은, 아더에게 있어 칼을 휘두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으아아악!"

"아이고 내 팔!"

"내 다리야!"

비명과 함께 30명의 거지 중 10명이 눈물을 쏟아낸다.

아더가 내지른 칼등에 가격당해 전부 부상을 입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그 참상에 20명의 거지는 눈을 끔뻑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서 경악했다.

"저, 저게 뭐야?"

"기사 아니야? 아니면 수색 경찰?"

수군거림과 함께 아더에게 아직 당하지 않은 거지들이 눈치를 보다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운철검을 어깨에 들쳐 멘 채 바라보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따라가면 아마 프라킬, 흑마법사가 있겠지?"

그 후 달아나는 거지들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텅 빈 원형 공간에 신음을 흘리는 10명의 거지만이 남았을 때였다.

숨어서 아더의 전투를 지켜본 아둔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진짜 기사 아니야 저거? 무슨 칼 솜씨가 마법....'

말을 흐린 아둔이 고민하다 눈빛을 번뜩였다.

X발?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아둔은 스스로를 냉정히 볼 줄 알았다.

별 볼 일 없는 실력을 가졌음에도 꽤나 손꼽히는 패거리를 이룰 수 있게 된 건 남들보다 빠른 눈치와 판단 덕이었다.

그리고 그 눈치와 판단이 지금의 이 상황이 기회라 말하고 있었다.

'저 손님께서 하르던 패거리를 전부 쓸어주시면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 될 수도?'

생각과 함께 입꼬리를 올린 아둔이 아더를 뛰따랐다.

그렇게 시작된 미묘한 추격전은, 가장 앞장서 달리던 하르던 패거리들이 멈추어 서고야 중단되었다.

커다란 광장에 모인 30명의 거지와 합류한 20명의 거지가 황급히 말을 전한다.

"멀뚱히 보지 말고 그분을 불러와! 침입자가 있다! 이곳 사람이 아닌 침입자야!"

상황을 모르던 30명의 거지 패들이 눈을 치켜뜬다.

그리고 몇몇이 몸을 돌려, 지하도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오두막을 향해 뛰쳐 들어간다.

그 사이 하르던 패거리들이 모인 광장에 도착한 아더가 중얼거렸다.

"오···. 정확히 찾아왔나 보네."

하수구에 저런 오두막을 짓는 취미는 아마 흑마법사를 제외하고는 드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아더는 앞을 가로막은 거지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런데 더럽게 많네. 쓰러트리지 못할 건 아니지만, 흑마법사 프라킬. 그 사람을 생각하면 힘을 아껴야 하는데….'

1년 뒤의 프라킬은 5서클 기사도 이길 정도로 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프라킬은 꽤나 독특한 혈통을 지닌 흑마법사에 불과했다.

'그래도 방심하지는 않는 게 좋은데 말이지. 마법이라는 게···. 특히 흑마법은 상식이 통용되지 않으니.'

생각과 함께 아더가 50명의 거지 패들과 프라킬을 어떻게 상대할까 고민할 때였다.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걸어 나온다.

"이게 뭔 소란이지?"

눈 밑의 다크서클과, 어깨에 두른 망토가 누가 보더라도 흑마법사의 외형이었다.

그리고 아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남자와도 그 생김새가 똑같았다.

허나 틀릴 수도 있기에, 아더는 소리쳐 물었다.

"혹시 프라킬 씨 맞나요?"

"이름이 프라킬이 맞기는 하지. 그런데 칼 든 신사님께서는 이곳에 왜 찾아온 거지? 이런 하수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 같은데?'

"…아.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당신? 나 말하는 건가?"

"에. 흑마법사 프라킬 씨. 당신에게 볼일이 있습니다."

흑마법사란 단어에 프라킬이 움찔 놀란다.

그 후 낮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더를 쏘아보며 중얼거린다.

"교회의 개인가?"

"신을 존중하지만 신은 믿지 않습니다."

"그럼 누구지? 설마 다른 학파에서 날 죽이라고 보낸 암살자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프라킬이 버럭 소리친다.

"말 돌리지 말고말해! 네 놈 정체가 뭐냐!"

외침에 놀란 거지들이 자신도 모르게 물러선다.

그 사이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데 정체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프라킬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하긴… 얼굴을 숨기려고 가면까지 쓰고 온 놈이 정체를 밝힐 리가 없지. 그럼 목적은 뭐냐?"

아더가 방긋 웃는다.

"그건 대답하기 쉽네요. 당신의 목입니다."

"뭐…?"

"정확히는 당신의 능력과 피를 원합니다. 그래서 죽어 주셔야 되겠습니다. 프라킬 씨."

프라킬이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미친놈인가?"

"종종 그런 소릴 듣고는 했죠.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말을 흐린 아더가 운철검을 뽑아 든다.

"그럼 시작할까요? 식사 시간에 늦으면 어머니한테 혼나거든요. 저는 아직 어머니한테 혼날 생각이 없답니다."

제12화

흑마법사 프라킬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네 놈이 속한 종파는 계집년이 이끄는가 보지?"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종파요? 그게 뭐예요?"

"모른 척하지 마라. [천년 마녀]가 이끄는 종파냐? 아니면 [검은 십자가]가 이끄는 종파냐?"

"흠···. 죄송하지만 둘 다 아닌데요."

대답에 프라킬이 싸늘하게 웃는다.

"대화할 마음이 없나 보군. 그럼 대화할 마음이 생기게 해줘야지."

그 웃음과 아더의 발밑에서 거센 불꽃이 피어올랐다.

프라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을 때부터, 마법이 시전되리라는 걸 예측하고 있던 아더는 가볍게 피해냈다.

'마법사와의 전투는 시간 싸움. 마법을 준비할 시간을 주면 안 돼.'

생각과 함께 아더가 고리를 진동시켰다.

그 순간 피어오르는 마나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이 전신에서 흘러넘쳤다.

육체 강화.

마나를 이용한 가장 기초적인 전투법이 시전된 것이다.

준비를 끝마친 아더는 곧바로 프라킬을 향해 뛰쳐 들었다.

프라킬도 곧바로 대응했다.

그는 눈치를 보던 거지들을 향해 거칠게 소리쳤다.

"저놈 산 채로 잡아 와! 그러지 못하면 너희는 오늘 다 죽는다!"

"네, 네?"

"네놈들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소리다. 알아듣지 못했나?"

거지들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허나 저 무자비한 흑마법사를 상대로, 항변할 용기를 가진 거지는 없었다.

결국 50명에 달하는 거지들이 아더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거지들을 향해 아더가 입을 연다.

"제 앞을 가로막으면 다 죽일 생각인데, 괜찮나요?"

"…뭐라고?"

"앞을 가로막으면 원한이 있건 없건 죽일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드릴까요?"

거지들이 눈을 끔뻑인다.

그 후 뒤늦게 아더의 말을 이해하고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X발 앞뒤로 우리를 죽인다고 지랄이네."

"그래도 칼잡이보단 마법사가 무섭지···. 그게 흑마법사라면!"

외침과 함께 거지들이 덤벼든다.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수가 많아 피해갈 수는 없을 듯했다.

'으음… 프라킬 저 사람. 아직 완전히 실력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힘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고민하던 아더는 곧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쉽게 해결하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쯤 무리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결론을 내린 아더가 칼을 휘두른다.

그 순간 앞장서 달려오던 거지들의 목이 달아난다.

"…!"

뒤따르던 거지들이 놀라 멈추어 섰다.

돌격을 멈춘 그들은, 깔끔히 목이 잘려 죽어버린 두 구의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조차 알지 못한 시체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파앗-!

피가 튀기고 목이 떨어진다.

기이한 빛을 뿜어내는 칼이 사람 목을 두부 자르듯 부드럽게 잘라냈다.

그것만 해도 문제인데, 그 속도가 너무 빨랐다.

조금이라도 사정거리에 들어가면, 고개를 숙이건 허리를 피하건 목이 단번에 달아났다.

그 탓에 입을 벌린 거지들이 단 1분 만에 포위망을 풀어버리고서 소리쳤다.

"X발!! 저놈도 마법사잖아!"

외침과 함께 거지들이 달아나고,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이제 시작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풀어준다고?'

그 후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중얼거렸다.

운이 좋네.

아더가 다시 앞으로 뛰쳐나갔다.

거리를 빠르게 좁혀 오는 아더의 모습에 프라킬이 혀를 찼다.

'쓸모없는 새끼들···. 일이 끝나면 반은 죽여야겠군.'

시체를 운반, 수색, 유기하기 위해 거두어들인 놈들인데 역시나 충성심이라곤 1도 없었다.

허나 예상한 바이기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프라킬은 완성된 주문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고리가 거칠게 진동했다.

쿠크크-!

소음과 함께 피어오른 어둠이 달려오는 아더를 붙잡는다.

조금 전 불꽃과는 다른 마법이었다.

그 탓에 아더는 피하는 것이 아닌, 잘라내기 위해 검을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찔러 넣었다.

쨍-!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발목을 붙잡던 어둠이 양 등분 났다.

그 덕에 다시 자유를 되찾은 아더가 고개를 들었다.

"어라? 어디 가셨지?"

이 말과 함께 몸이 기울었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거친 충격에 아더의 신체가 주르륵 밀려나 벽면에 부딪혔다.

겉으로만 봤을 때는 완벽한 유효타.

허나 프라킬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것 봐라? 반응한다고?"

그사이 조금 전 일격을 운철검으로 막아낸 아더가 눈빛을 빛낸다.

"오… 다시 보니 반갑네요. 그 갑옷, 아니 껍질이라 불러야 할까요?"

프라킬이 움찔 몸을 떤다.

그 후 혈통의 힘으로 강화한 오른팔을 은근슬쩍 뒤로 빼며 소리쳤다.

"이 능력에 대해서 안다고? 너 도대체 누구냐?"

"말씀드렸지만, 밝힐 수가 없어요. 어찌 되었건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대답과 함께 아더가 다시 뛰쳐 든다.

그 움직임에 맞추어 프라킬이 주먹을 휘두른다.

쾅쾅쾅-!

쇠와 껍질이 부딪치는 소리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이한 소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 속에서 수십 합을 교환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이 거리를 벌렸다.

그 짧은 여유를 틈타 아더는 숨을 훔쳤고 프라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고리가 한 개냐?"

"예? 제 고리요?"

"느껴지는 기운은 1서클인데, 설마 힘을 숨기고 있는 거냐?"

아더가 눈웃음을 지었다.

"아뇨, 1서클 맞습니다. 보기보다 눈치가 빠르시네요."

프라킬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후 아더를 노려보며 그 의중을 살피려 했지만, 쉽사리 되지 않았다.

쓰고 있는 가면 덕도 있었지만, 저 녀석의 목소리는 이곳에 들어와 지금까지 변화가 없었다.

높낮이의 변화가 없는 목소리에서 거짓을 구분하기란 불가능했다.

'…힘을 숨긴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정말로 1서클이라고?'

거지 50명을 물러나게 만들고, 제 일격을 막아낸 칼잡이가 고작 1서클?

상식에 어긋나도 너무 어긋났다.

그 탓에 프라킬은 진심으로 궁금해져 질문을 던졌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계속 같은 질문을 하시네. 대답해 줄 수 없다니깐···. 그리고 한눈팔아도 되나요?"

프라킬이 움찔 놀란다.

그사이 치고 들어온 아더가 프라킬의 턱을 겨냥해 검을 쳐올린다.

키키킥-!

다행히 발동된 혈통의 능력 덕에 그 일격을 막아낸 프라킬이 곧바로 반격했다.

파충류의 껍질로 뒤덮인 주먹이 대기를 가르며 쇄도했다.

그 주먹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던 아더는 입꼬리를 올렸다.

'운디네 부탁해.'

그 순간 프라킬의 신체가 기울었다.

"…!"

놀란 프라킬이 황급히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무슨 사술을 부렸는지 몰라도, 오물들이 살아 움직여 제 발목을 흔들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전투 마법사Battle Magician라서 고리가 하나였던 거였어!'

프라킬이 다시 중심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기울어진 몸이 그대로 오물 위에 내팽개쳐졌고, 그 틈을 아더는 놓치지 않았다.

쇄도한 운철검이 프라킬의 오른팔을 깔끔히 잘라냈다.

"크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분노한 프라킬이 미리 완성해 놓은 두 개의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벗어난 아더였기에 손쉽게 피해낼 수 있었다.

그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프라킬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네놈. 절대로, 곱게 죽이지 않으마."

그 순간 기이한 어둠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남아있던 거지들이 그 어둠에 기겁해 모두 달아났다.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건, 뒤에서 숨어 이 광경을 지켜보는 아둔이 유일했다.

허나 그 아둔마저도 횃불의 빛을 집어삼키는 프라킬의 어둠에 결국 자리를 뜨고 말았다.

'미, 미친! 저런 괴물들이 왜 여기 와서 난리야!'

외침과 함께 아둔마저도 사라졌을 때였다.

프라킬이 뿜어낸 어둠을 바라보던 아더가 턱을 긁적였다.

'흠···. 위험하네. 아직 마법을 즉발로 실현시킬 실력은 안 되는 것 같은데 저 갑옷이 있으면 그 시간을 벌 수가 있고….'

미래 프라킬이 악명을 떨친 데는 마법이 아니라 저 혈통 덕이 컸다.

마법과 검기를 막아주는 껍질이자 갑옷.

그 혈통이 완벽히 발현된 이상,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생각을 끝마친 아더가 질문한다.

"그런데 프라킬 씨. 당신 능력, 마법도 막아주는 거겠죠?"

"뭐?"

"당신의 그 혈통 말이에요. 마법도 막을 수 있는 거 확실하죠?"

프라킬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네놈…. 역시 다른 학파에서 보낸 암살자지?"

"다른 학파요?"

"내 혈통을 탐낸 흑마법사 학파. 거기서 네 놈이 나온 모양이로군."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그사이 멋대로 결론을 내린 프라킬이 씩 입꼬리를 올린다.

"하지만 아직 기초 마법밖에 쓸 줄 모르는 것 같군. 이제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을 거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선언과 함께 전신을 검은 껍질로 뒤덮은 프라킬이 움직인다.

그 사이 아더는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이 남의 말을 안 듣는 건 알고 있었지만, 흑마법사는 더욱 심하네···. 거기다 자기 멋대로 오해도 하고.'

그 후 조금 전 잘라낸 프라킬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아더를 향해 다가오던 프라킬이 이를 간다.

"그건 언제 주워…!"

놀란 프라킬이 입을 벌린다.

잘린 제 오른팔을 들어 올린 괴한이 난데없이 베어 물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갑자기 내 오른팔을….'

의문과 함께 프라킬의 뒷덜미에 한기가 스쳐 지나간다.

기이한 예감에 프라킬이 다시 아더를 향해 뛰쳐 들었다.

그사이 입술 주변에 피와 살점을 덕지덕지 묻힌 아더가 중얼거렸다.

"…으. 예상은 했지만, 역시 흑마법사의 피는 맛이 없네요. 쓰고 떫어요."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프라킬을 바라본다.

전신이 검은 껍질로 뒤덮인 프라킬은, 흑마법사라기보다는 검은 갑옷을 두른 기사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아더가 똑같이 자리에서 뛰쳐 올랐다.

그 순간 프라킬의 눈이 치켜 떠졌다.

"…!"

아더가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흑마법사지만 혈통 덕에 웬만한 기사 수련생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자랑하는 그였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칼잡이들의 싸움은, 서로를 인지하냐 인지하지 못하냐의 싸움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갑작스레 뛰어오른 저 칼잡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프라킬은 어느 사이엔가 제 가슴팍을 꿰뚫은 검을 바라보며 피를 흘렸다.

"어라? 뚫리네요? 흐음… 보니깐, 감당하지 못하는 힘이면 뚫리는 모양이네."

그 속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프라킬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껍질을 완벽히 뒤집어쓴 괴한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미친. 진짜로 내 능력을 빼앗아 갔다고?"

그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아더가 보답으로 프라킬의 가슴팍에 박아 넣은 칼을 빼 들었다.

심장을 제대로 관통당한 덕에 프라킬의 신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가 중얼거렸다.

'전설적인 흑마법사는 100번은 죽여야 한다는데, 아직 이 사람은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네.'

그렇게 전투가 끝났음을 느낀 아더는 활짝 웃었다.

"능력 잘 쓸게요, 프라킬. 좋은 곳에다 말이죠."

이 말에 죽어가던 프라킬이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 묻는다.

"도대체… 넌 누구냐? 정체가 뭐야?"

"어우 이제 지겹네요.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럼 왜 날 죽이려는 거지? 진짜 내 혈통이 목적이었나?"

질문에 아더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당신을 죽인 건, 미래에서 당신이 저를 먼저 죽이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먼저 죽이러 온 거예요. 겸사겸사 당신의 능력도 빼앗고."

프라킬이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헛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미친놈이 끝까지 거짓말을! 그따위 말을 하면 내가 믿…."

허나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사이엔가 움직인 아더의 칼이 프라킬의 목을 베어냈기 때문이었다.

툭.

프라킬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완벽히 생기를 잃었다.

그 후 찾아온 침묵 속에서, 시체가 된 프라킬을 바라보던아더가 중얼거렸다.

"결국 끝까지 대화가 안 통했네요. 그래도 덕분에 하나 배워 가요."

아더가 짧게 묵념했다.

"흑마법사하고는 대화가 안 통한다. 좋은 교훈을 얻었어요. 프라킬 씨."

제13화

프라킬의 죽음을 확인한 아더는 곧바로 그의 혈통 능력을 일으켰다.

그 순간 전신이 검은 껍질로 뒤덮이고 지쳐 있던 육체에 다시 활기가 돌았다.

그 기이한 느낌을 즐기던 아더는 가볍게 자리에서 뛰어 보았다.

마나를 사용해 몸을 강화했을 때랑 비슷한 감각이 전신에서 느껴졌다.

"오… 단순히 피부만 딱딱해진 게 아니라, 육체 능력도 같이 상승시켜 주는 건가?"

이 정도면 예상보다 훨씬 쓸 만한 혈통이었다.

그래서 아쉽기도 했다.

미래 프라킬은 이 혈통 능력으로 기사들의 검기와 마법사들의 마법을 매우 손쉽게 막아냈다.

허나 지금 프라킬의 혈통 능력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내 검에 가슴팍이 뚫린 게 그 증거. 혈통 능력이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모양이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아더였지만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사실 이번 일은 여러 행운이 따른 덕에 성공할 수 있었다.

프라킬의 방심.

끝까지 숨겨 놓았던 운디네의 능력.

그 외 여러 가지 변수.

이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전투는 꽤 치열해졌을 것이고 그 결말은 지금과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이쯤에서 만족하는 게 맞겠지.'

생각을 끝마친 아더는 프라킬의 시체를 뒤로한 채 그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귀를 긁는 경첩 소리가 들렸다.

그 속에서 아더는 긴장을 일깨웠다.

혹시 모를 '트랩'.

소위 함정 마법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집 안의 풍경은 예상과 달리 꽤 평범했다.

타오르는 모닥불.

그 모닥불 근처에 있는 침대와 책상.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 전부였다.

아더는 그것들을 휘적휘적 치우며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흑마법사의 던전에는 재미난 것들이 많다 들었는데, 별것 없네?"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조금 더 세밀히 주변을 살필 때였다.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 덜컥 걸렸다.

그 감각에 따라 허리를 숙인 아더는 오두막의 외벽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 순간 드르륵 걸리는 소리와 함께 외벽이 갈라지며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나선형 계단이었다.

"역시 흑마법사."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계단을 타고 지하로 향했다.

어떻게 이 작은 오두막에 이런 공간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란 존재는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나가니 갑작스레 시야가 넓어졌다.

그리고 그 넓은 시야로 들어온 것은 거대한 제단과 머리와 팔이 각기 잘린 시체들이었다.

"여기서 의식을 치렀나 보구나."

피가 완전히 빨려 미라가 되어버린 시체들을 바라보던 아더는 운철검을 뽑아 들었다.

사악-!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매달려 있던 시체들이 떨어져 내렸다.

아더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뉜 뒤 두 손을 모았다.

"다들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기도가 끝마친 아더는 다시 몸을 일으켜, 흑마법사의 던전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허나 오두막보다 큰 제단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탓에 아더의 걸음은 이 공간하고는 어울리지 않은 책상 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서류와 한 권의 책.

그리고 몇 가지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그 탓에 기대가 실망감으로 바뀔 때쯤, 갑작스레 마력이 느껴졌다.

"어? 이건?"

아더가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손길에 따라 반응이라도 하듯, 반지가 옅은 진동을 했다.

"설마 아티팩트인가?"

아더가 잠깐 고민하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그 순간 반지의 진동이 조금 더 강해지더니 옅은 마력이 뿜어져 나와 아더의 몸 전체를 감쌌다.

변화를 느낀 아더는 책상 위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 이거 투명 마법이잖아?"

감탄과 함께 아더가 눈빛을 빛냈다.

옅은 지식에 의하면 투명 마법은 꽤나 고난이도 마법이었다.

그래서 이런 아티팩트의 경우,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횡재했네. 이런 걸 얻을 줄이야.'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다.

미래 프라킬이 어떻게 해서 최악의 살인마가 되었는지 말이다.

'이 반지로 몸을 숨겨서 습격했구나. 나와 전투할 때 쓰지 않아서 다행이네.'

생각과 함께 씩 입꼬리를 올린 아더가 다시 책상을 뒤적였다.

허나 반지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그 탓에 몸을 돌려, 제단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서류들 사이에 놓인 책 한 권이 아더의 시선을 끌었다.

"…."

고민하던 아더는 그 책을 집어 들어 첫 장을 펼쳤다.

정갈한 필체로 시작된 첫 단어는 X발'이라는 욕설이었다.

"일기장인가?"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프라킬의 심정, 계획, 일상.

그 밖의 여러 신변잡기가 문자가 되어 아더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스승님에게서 도망쳤다. 어차피 이대로면, 평생 노예로 살다 죽을 게 뻔했으니깐.]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 스승님의 물건도 훔쳐 나왔다. 투명화 마법이 걸린 반지였다.]

[분명 추격을 해 올 것이다. 스승님은 배신자들을 절대 살려 두지 않으니깐.]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했다.]

[힘을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대가를 바치는 것이다. 모든 마법은 등가교환이니깐.]

[거지들을 노렸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라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더욱 정갈한 피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매우 독특한 피. 혈통이라 불리는 피 말이다.]

책의 내용을 살핀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프라킬이 이곳 수도로 숨어들었는지, 왜 거지들을 납치했는지 이제야 대충 감이 왔다.

"이분도 사연이 많네."

중얼거림과 함께 일기를 덮은 아더는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이용해 오두막과 던전.

프라킬의 시체까지 태워 버렸다.

화르륵-!

올라오는 매캐한 매연을 잠시 바라보던 아더는 몸을 돌렸다.

할렘가에서의 볼일은 모두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돌아온 아더는 한동안 외출하지 않고 바이에른 저택에만 머물렀다.

이전에야 새로운 혈통을 얻기 위해 무리하게 외출을 했다지만, 이제는 밖으로 나갈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남는 시간을 통해,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조금 더 마나를 빨리 쌓기 위해, 쉼 없이 훈련하고 육체의 근력을 키웠다.

'생각해 보니 운이 좋았네. 하필 돌아온 시점이 15살···. 17살이면 한참성장기에 접어들 때니깐.'

미래 아더 바이에른의 체격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허나 꾸준한 독의 복용으로 망가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17살이란 나이에 독을 완전히 치료하고, 매일 같이 체계적인 훈련을 하니 그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조금 과장 되게 말해 매일 아침마다 키가 커졌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체급은 중요하지. 특히 마나를 사용한 싸움에서는.'

그러한 작은 변화들 사이에서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여름이 다가왔는지 평소보다 습기가 가득 찬 어느 날.

아더는 평소와 같이 새벽 훈련을 끝마치고, 아침 식사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매일 같이 마주치는 시종들이 그런 아더를 향해 인사해 왔다.

그런 시종들에게 아더도 똑같이 인사하며 식당 안에 들어섰다.

먼저와 기다리던 아이린과 요넬이 꼭 붙어 속닥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을 내지 않고 들어왔던 아더는 평소와 다른 둘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린과 요넬이 뒤늦게 아더를 발견하고서 몹시 당황했다.

"어… 아들?"

"오, 오빠?"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동시에 약간의 호기심이 가슴 곳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허나 굳이 입을 열어 묻지 않았다.

수다스러운 제 여동생이 알아서 그 이유를 말해 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예측은 정확했다.

식사를 하던 아이린이 맥락 없는 질문을 던졌다.

"오빠 뭐 받고 싶은 거 있어?"

"받고 싶은 거?"

"응응!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아더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요넬과 아이린 대화하던 주제가 이것인 모양이었다.

그 사이 요넬이 한숨을 내어 쉬며 아이린을 타박했다.

"아이린···. 비밀로 하자고 금방 약속했는데,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니?"

"네, 네? 하지만 엄마···. 전 아무것도 말 안 했는데요···."

"조금 전 질문으로 다 밝힌 것이나 다름없지 않니?"

아이린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더는 그런 여동생이 너무 귀여워,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수저를 내려놓은 요넬이 아더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뭐 이렇게 된 거 직접 물어보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구나. 아더. 혹시 받고 싶은 선물이 있니?"

"선물이요, 어머니?"

"그래. 이제 조금 있으면···. 네 17살 번째 생일이잖니?"

요넬의 말에 아더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 생일이라고?'

철이 든 뒤로 생일이란 걸 챙겨 본 적 없어서, 그런 날이 다가오는지도 까맣게 잊고 지낸 아더였다.

그 탓에 대답하지 못하니 요넬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네가 원하는 어떤 것이든 이 어미가 구해다 주마. 이번 생일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매우 뜻깊은 날이니깐."

요넬의 말에 아더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선물이라···. 어렵네.'

사전적 의미로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또는 그 물건.

아더, 자신의 인생하고는 가장 관련 없었던 단어였다.

그래서 어려웠다.

'원하는 게 딱히 없는데···. 뭘 요구해야 할까?'

생각나는 게 없지는 않지만, 말하기가 조금 곤란했다.

2황자의 목이나, 아주 좋은 재능 혹은 혈통을 지닌 자의 피.

이런 걸 말했다가는 요넬이 졸도할지도 몰랐다.

'음… 그래 이건 아니야. 이건 참아야 해.'

그래서 아더의 침묵이 길어졌고, 요넬은 그 침묵을 이해해주었다.

"조금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거라. 이 어머가 무엇이든 해줄 테니."

요넬의 선언과 함께 아침 식사는 끝이 났다.

그렇게 각자의 일상을 보내기 위해 세 가족은 잠시 헤어졌고, 안나와 동행해 제 방으로 걸어가던 아더는 불쑥 질문했다.

"안나. 어떤 선물을 말해야, 어머니가 좋아할까?"

"…예?"

"어떤 선물을 말해야 어머니가 실망하지 않을까?"

안나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몹시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 공자님? 보통 선물이란 건, 주는 사람의 기분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기분이 중요하 않나요?"

"받는 사람이 원하는 게 없으면?"

"…공자님은 원하는 게 없으신가요?"

아더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탓에 안나는 또 한 번 당황했다.

무려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의 주인이, 선물을 준다는 데 원하는 게 없다니?

하지만 숙련된 집사답게 당황스러움을티 내지 않았다.

대신 아더의 입장에서 생각해 최대한 그럴싸한 답을 내놓았다.

"그럼 반대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반대로?"

"공자님이 공작 각하에게 선물을 준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그사이도착한 방 안에 들어선 아더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어머니한테 뭘 해드리면 기뻐할까? 그걸 선물로 말하면 될 듯싶은데.'

고민과 함께 다음 날이 되었을 때였다.

바이에른 저택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 탓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수련을 끝낸 아더는 집사인 안나를 통해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 순간 안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게···. 그분이 돌아오셨답니다."

"누가?"

"그분… 도르문트 백작."

아더의 눈이 치켜떠진다.

"케인 도르문트 백작. 그분이 수도로 복귀하셨답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 3시 공작가로 직접 방문하신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