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소식은 곧바로 가문 전체에 전해졌다.
제인 도르문트.
아더 바이에른.
갑작스럽게 성사된 두 공자의 대련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비단, 바이에른 가문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수도의 사람들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호외요 호외--!! 바이에른과 도르문트의 대련이 성사되었소!"
"무려 아더 바이에른과 제인 도르문트! 두 후계자 간의 싸움이오!"
제국의 단 하나뿐인 공작가.
신흥 강호로 떠오르는 도르문트 백작가.
어쩌면 세대교체의 첫발자국이 될 수도 있는 이 대결에 황실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그 탓에 거대한 내기판이 벌어졌고, 무지막지한 돈들이 이 두 소년의 승패에 배팅 되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배당이 높은 쪽은 아더 바이에른.
제아무리 몸을 회복했다 하지만, 상대는 제인 도르문트다.
케인 도르문트의 첫째 아들인 이안 도르문트에 비해 밀린다고는 하지만, 그도 나름 천재성을 보이는 기사 지망생.
그래서 모두가 바이에른이 성급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다.
"첩자 건으로 아무리 화가 났어도 조금 참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게 또 참아지겠소? 공작가의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불과 며칠 전까지 말을 더듬던 소공자를 결투에 내보낸다는 말이오?"
그런 상황 속에서, 대련을 하기로 한 당일이 되었을 때였다.
안나는 초조함을 숨기지 않은 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하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케인 도르문트가 바이에른 가문에 왔을 때부터 파란이 예고되었지만, 이 정도로 사태가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녀였다.
제인 도르문트와 아더 바이에른의 대련.
요넬과 아더의 다툼.
그 탓에 바이에른 가문의 분위기는 개판이 되어 버렸다.
그 뒤숭숭한 분위기에 모두가 불안에 떨었고, 그건 안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더의 집사인 만큼,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된 게 자신이 소공자를 잘 보필하지 못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그 생각을 하며 안나가 아더가 있는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였다.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소공자.
아더 바이에른이 보였다.
"…안나 왔어?"
"네, 공자님."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기지개를 켠다.
그 후 휘적휘적 걸어와 불쑥 질문했다.
"안나 물어볼 게 있어."
"…네 공자님."
"오른팔과 왼팔. 어디가 없어야 더 불편하게 느껴질까?"
안나가 눈을 끔뻑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공자님?"
"말 그대로 오른팔과 왼팔. 어느 쪽이 없는 게 더 불편하게 느껴질까?"
담담한 아더의 질문에 안나가 당황한다.
"어···. 자주 쓰는 팔이 없어야, 더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대답에 아더가 탄성을 터트렸다.
"역시 안나야. 밤새 고민해도 결정을 못 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결정이 나버렸네. 역시 오른팔로 해야겠어."
이 말과 함께 아더가 걸어 나갔고, 안나가 눈을 끔뻑이다, 뒤늦게 뒤를 따랐다.
그렇게 저택 안을 가로지른 아더는 곧바로 대련장으로 향했다.
그 순간 먼저 와 기다리던 중인 케인 도르문트와 제인 도르문트.
두 사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렀다.
'아….'
흘러나온 낮은 숨결과 함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몰라도 시야가 흔들렸다.
그 속에서 세상이 변한다.
'전생에서 매일 같이 보던 세상···. 그 세상이 다시 보이네.'
눈앞의 모든 광경이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물든다.
케인 도르문트는 그 세상에서 흉측한 괴물이 되었고, 바이에른 가신들은 예쁜 꽃이 되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아더는 웃음을 흘렸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빨간색과 파란색.
그 중간 지점에 있는 기묘한 색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평소와 다른 그 하늘을 바라보며, 아더는 중얼거렸다.
'오랜만이네, 이 세상…하지만 뭐. 나쁘지 않아."
솔직히 말해 어색했다.
정상인처럼 행동하고 정상인처럼 행동하는 게.
그런 의미에서 한 번쯤은 미친 척 사고를 저지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특히 저 두 사람 앞에서는.'
생각을 끝마친 아더는 미소 지었다.
"날씨가 너무 좋네요. 안 그래요, 케인 도르문트 백작?"
제16화
대련 당일.
케인은 제 둘째 아들 제인을 불러 조언했다.
"손속을 두지 마라."
"…?"
"가능하면 죽일 기세로 몰아붙여라. 아니···. 죽일 각오로 임하거라."
제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저야 상관없는데···. 자칫 잘못했다 일이라도 터지면 뒷감당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너는 그저 어떻게 놈의 가슴팍에 칼을 꽂을 수 있는지나 고민하거라."
제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뭐···. 알겠습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게, 그런 일 아니겠습니까?"
자신감에 찬 아들의 모습에 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인 이안과는 달리, 다소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제인은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망나니였다.
'그렇게 되도록 키웠기 때문이지···. 가끔은 앞뒤 생각 안 하고 일을 저지르는 놈이 한 명쯤 있으면 편하니깐.'
그런 것치고 검에 재능이 있어, 19살이란 나이에 2서클을 달성한 상태다.
그리고 이제 조금 있으면 3개의 고리를 엮을지도 몰랐다.
이번 대련 상대인 아더 바이에른이 한 개의 고리를 엮은 걸 고려하면,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셈.
그 탓에 케인은 승리는 물론이고, 이번 대련을 통해 아더 바이에른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수준 차이가 나는 상대하고의 대련에서···. 무언가를 숨길 수는 없겠지. 그것이 설령 바이에른의 혈통이라 할지라도.'
여기까지 생각한 케인은 저택을 나와, 바이에른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더 바이에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바이에른 가신들만이 보였다.
굳이 소란을 피울 필요가 없기에, 케인은 팔짱을 끼고서 아더를 기다렸다.
허나 지루함을 참지 못한 제인은 노골적인 도발을 시작했다.
"이 벙어리 새끼가, 감히 아버지를 기다리게 만들어?"
잘 훈련된 바이에른 가신들은 그 도발을 애써 못들은 척했다.
하지만 표정이 굳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제인 도르문트가 망나니라 하지만, 지금 모욕 중인 사람은 이 집안의 소가주다.
요넬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신분인 아더를 욕하는 건, 바이에른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
그 탓에 모두가 제인 도르문트를 말없이 노려보았지만, 그럴수록 제인은 신이 나 떠들었다.
"똑같은 칼을 든다고 해서, 다 똑같은 칼이 아닌데~ 그 벙어리가 이걸 알려나 몰라~. 아니지. 병신이라서 이것도 모를려나아아아~?"
일부러 말을 늘어트린 제인이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상식에 어긋난 무례함에 뒤에 선 도르문트 가신들조차 혀를 찼다.
허나 정작 그런 아들의 망나니짓을 케인은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그 탓에 어색한 기류가 대련장에 내려앉을 때였다.
쿵-!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한 소년이 걸어 들어온다.
그 모습에 제인이 웃음을 멈추며, 놀라 중얼거렸다.
"…뭐야? 저게 그 벙어리라고?"
그 사이 케인 앞으로 다가온 아더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지도 시선을 낮추지도 않은 체 케인을 바라보았다. 이에 정신을 차린 제인이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아더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연다.
"좋은 날이네요. 안 그래요, 케인 도르문트 백작?"
* * *
"좋은 날이긴 하지. 그래서 준비는 다 됐나?"
"예. 바로 시작할까요?"
"대련 방식 정도는 상의해야지."
아더가 방긋 웃는다.
"누구 한 명 죽을 때까지 하는 거 아니었어요?"
질문에 케인의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간다.
그건 옆에 있던 제인도 다르지 않았다.
화가 난 제인이 성급히 앞으로 나섰다.
"이 새끼가 미쳤나 지금 누구···."
허나 어느 사이엔가 내밀어진 케인의 손에 입을 다물고 다시 물러났다.
"누구 한 명 죽는 건 곤란해. 이건 결투가 아니라 대련이니깐."
"아···. 그런가요? 대련에서는 누구를 죽이면 안 되는군요."
"그래. 그런 의미에서 대련의 패배는 누구 한 명이 더는 칼을 들 수 없을 때로 하는 게 어떻나?"
아더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요. 그럼 시작할까요?"
대답에 케인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왠지 모를 위화감이 저도 모르게 뒷덜미를 쓸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거지? 지금 이 상황은 전부 내가 예상한 바인데?'
해맑게 웃고 있는 아더 바이에른.
화가 잔뜩 치민 제인 도르문트.
그리고 이런 두 사람을 주목하는 100여 명에 달하는 두 가문의 가신들.
지금의 상황과 분위기, 모든 게 자신의 계획과 정확히 일치했다.
변수가 일어날 만한 요소 따위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 탓에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 스산함을 애써 떨쳐낸 케인이 중얼거렸다.
'칼 하나는 재능 있는 놈이다. 이변은 일어날 수 없어.'
그 후 몸을 돌린 케인이 관객석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제인을 향해 속삭였다.
"대련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면, 네가 평소에 눈독 들이던 영애들과 만남을 주선해 주마."
"…!"
"그 자리에서뭘 하건···. 네 뜻대로 할 수 있게 해주마."
제인이 입꼬리를 히죽히죽 올리며 소리쳤다.
"명 받들겠습니다, 아버지!"
케인이 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반대로 몸을 돌린 제인은 수도에서 가장 이름난 대장장이한테 반협박으로 빼앗아온 검을 빙빙 돌렸다.
"저런 무식한!"
한 기사가 참지 못하고, 일갈했지만 제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조금 전 아버지가 했던 말에 쏠려 있었다.
어떤 영애건 상관없다 했으니 플라티나 남작의 딸로 할까?
아니면 하이슨 자작?
두 귀족의 딸 모두 한 미모를 하니, 괴롭히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도대체 저 벙어리가 뭐라고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거지? 뭐···. 나야 좋기만 하지만. 흐흐.'
웃음을 터트린 제인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멀뚱히 선 아더를 향해 조금 전 하지 못한 도발을 시도했다.
"이봐, 벙어리."
"…."
"어떻게 해서 네가 벙어리에서 벗어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넌 벙어리다. 알았냐?"
아더가 웃었다.
"여전하시네요, 당신은."
"그럼 여전하지. 넌 달라졌고. 그러게, 왜 나아져서는 아버지의 관심을 끌어?"
제인의 시선이 낮게 가라앉는다.
"곱게 끝마칠 거라 생각하지 마라. 팔 한 짝은 가지고 갈 테니까."
경고와 함께 제인이 돌리던 검을 내려놓았고, 그걸 신호로 심판진이 다가왔다.
"두 분 모두 준비되셨습니까?"
"네."
"빨리 시작이나 해."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심판진이 물러나고, 널찍한 연무장에 두 소년이 진검을 치켜든다.
그 모습에 연무장을 지켜보는 모든 이들의 목울대가 출렁일 때였다.
제인의 호흡이 순간 늘어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를 뛰쳐나가며 아더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
지켜보던 바이에른 가신들이 놀라 입을 벌린다.
제인 도르문트, 망나니라 불리는 놈의 실력치고 군더더기 없는 도약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약만큼이나 날카로운 일격은 '살수殺手'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 탓에 참지 못한 안나가 크게 소리쳤다.
"고, 공자님--!"
그 부름에 맞추어 제인의 칼날이 아더의 오른팔로 쇄도했을 때였다.
아더의 칼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제인의 오른쪽 눈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어?"
뱉어진 탄성과 함께 제인의 몸이 앞으로 기운다.
방향을 잃은 검이 애꿎은 바닥을 내리쳤다.
"어,어?"
다시 한번 탄성을 내지른 제인이 오른쪽 눈을 더듬는다.
허나 피가 흘러내리는 눈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통과 함께 상실된 시각 속에서 제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아더 바이에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른손잡이세요? 왼손잡이세요? 아니면 둘 모두예요?"
높낮이가 없는, 섬뜩한 목소리였다.
* * *
제인 도르문트.
지난 생에서 가장 많이 부딪쳤고 가장 많이 놓친 도르문트 백작가의 둘째 아들.
빌 도르문트는 아예 찾지 못해 죽이지 못했다면, 제인 도르문트는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못한 자였다.
그래서 아더는 제인 도르문트가 운이 매우 좋은 녀석이라 평가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제인 도르문트도 참 쓰레기였지.'
빌이 여동생을 노렸다면, 제인 도르문트는 가문의 재산을 노렸다.
헌데 단순히 바이에른 가의 재산만 노린 것이 아니었다.
제인은 바이에른 가신들의 재산도 같이 빼앗아 갔다.
그 탓에 바이에른에 충성했던 모든 이들이 집을 비롯한 모든 것을 빼앗겼으며, 그 중엔 가족조차 팔아넘긴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지금 이 대련을 지켜보고 있는 분들도 다수 섞여 있어… 빌이 내 여동생에게만 상처를 줬다면, 제인은 바이에른의 이름 그 자체에 상처를 준 셈이지.'
그래서 제인을 죽일 이유는 차고 넘쳤다.
문제는 어떻게 죽이냐는 것이다.
생각과 함께 아더의 칼이 움직인다.
촤악-!
그 순간 다시 한번 흩뿌려지는 피와 함께 제인이 비틀거린다.
"…끄어억."
터져 나온 신음과 함께 제인이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미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아더는 중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제인의 허벅지를 또 한 번 베어 넘겼다.
"끄아아악-!"
고통을 참지 못한 제인이 울부짖으며 핏대를 세웠다.
"도대체 왜!! 왜! 맞지 않은 것이냐!"
외침과 함께 제인이 이성을 잃고 폭주한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일격이 일정한 경로를 잃어버려 오히려 위험해졌다.
허나 아더는 그 검로들마저 예측하며 간단히 피해버렸다.
'똑같네. 검을 휘두르는 스타일이나···. 불리해지면 나오는 버릇이나···. 그때랑 지금이랑 크게 다를 게 없어.'
똑같은 검을 든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휘두르는 건 아니었다.
각자만의 스타일이 있고 버릇이 있으며 휘두르는 경로가 있었다.
그리고 제인 도르문트 또한 검을 휘두르는 중 이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묻어 나왔다.
그래서 아더는 제인의 검을 피해낼 수 있었다.
전생에서 수없이 검을 맞대 본 상대.
그 상대가 어떻게 검을 휘두를지 이미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데다가 하물며 그 경지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낮다면 피해내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그 탓에 분명 제인이 고리가 더 많았음에도, 아더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반면 아더의 검은 제인의 육체에 차곡차곡 상처를 쌓아 나갔다.
처음에 베어낸 오른쪽 눈꺼풀을 시작해, 팔과 다리.
그다음은 가슴.
전신을 칼로 난도질했고 이제는 베어내지 않은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출혈은 곧, 체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허억···."
아무리 마나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 하지만, 결국엔 인간이다.
한계 이상의 피를 흘리게 되면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인의 칼질은 처음의 기세를 잃고 허공을 베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그 횟수만큼 아더의 칼질은 또다시 제인의 몸을 베어냈다.
"…끄아아악!"
또 한 번 비명을 지른 제인이 조금 전 베인 어깨를 감싸 쥐며 처음으로 물러선다.
"너, 너 뭐야? 너 뭐냐고! 벙어리 맞아? 벙어리 아니지! 벙어리가 어떻게… 어떻게…."
공포에 질린 그 모습에 아더가 눈을 끔뻑였다.
놀랍게도 지금의 저 멘트를 미래의 제인 도르문트도 똑같이 했었다.
그 탓에 웃음을 터트린 아더가 검을 고쳐잡았다.
'항상 이때쯤 방해꾼들이 나타나 제인을 살려줬는데, 과연 이번에도 그럴까?'
문득 든 의문에 아더는 눈빛을 빛냈다.
그리고 부드럽게 검을 내질렀다.
피를 흘리던 제인 도르문트가 그 일격에 반응해 중얼거렸다.
'죽는다?'
그 순간 피 분수가 솟구쳤다.
핏방울 튀기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피 분수였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제인의 사고가 급격히 굳어버렸다.
허나 느껴지는 아픔에 현실에서 도피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리니, 있어야 할 팔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검을 쥔 인간의 손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
제인의 바지가 노랗게 물들었다.
한계를 넘어선 공포감에 사고는 물론이고 육체마저 통제를 벗어났다.
사납게 일그러진 표정이 지금 그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제인의 오른팔을 잘라낸 아더의 검이 멈추지 않고서 그의 목으로 향했다.
"…!"
그 일격에 여태 경기를 멍하니 지켜보던 바이에른 가신들과 도르문트 가신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아더의 칼을 바라보며 제인이 중얼거렸다.
'죽는다.'
생각과 함께 제인의 입이 벌어졌을 때였다.
폭음이 터져 나왔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격렬한 소리와 함께 경기에 난입한 케인 도르문트가 아더의 검을 쳐올린다.
허나 아더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켰고, 자연스럽게 검을 뻗어 케인의 목을 노렸다.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이어지는 연격에 케인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챙!!!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소음과 함께 아더의 검이 손가락 몇 마디를 두고, 케인의 검에 막힌다.
그 상태 그대로, 케인은 아더를 노려보았고, 아더는 케인을 노려보았다.
그 무언의 시선 교차 속에서 케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더가 입을 연다.
"어라?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도르문트 백작."
입가에 미소를 띤 아더가 검을 거둔다.
"제인 도르문트가 항복 선언을 안 해서 조금 손속이 과했네요. 하지만… 경기 중에 뛰어드는 건 약속에 없었으니, 이해해주실 수 있죠?"
질문에 케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줌을 지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제 아들을 바라보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끝낼 수 있는데 가지고 놀았고, 가지고 놀았기에 항복할 시간을 주지 않은 거 아닌가?"
"글쎄요···? 아직 그 정도 실력은 아니라서 모르겠는걸요?"
대답에 케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호선을 그렸으니 미소라 불려야 하는데, 그 모양새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 탓에 아더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케인 도르문트는 화가 났다.
그것도 엄청나게.
'아아···. 좋네. 전생에서도 케인 도르문트···. 의 이런 표정은 보지 못했는데.'
그 탓에 제인의 목을 베어내지 못했지만, 충분히 만족한 아더가 심판진을 바라본다.
그 무언의 압박에 정신을 차린 심판진이 대련의 승자를 선언하려는 순간이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갑작스레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깜짝 놀란 아더가 고개를 돌리니, 자리에서 들고 일어난 바이에른 가신들이 소리치는 게 보였다.
"아더, 아더, 아더!!"
제 이름을 연호하는 그들의 모습에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이긴 건 난데, 왜들 저렇게 신이 나신 거지?"
제17화
귓가로 들려오는 거친 함성에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와아아아--!!"
"미친 공자님이 제인 도르문트를 이겼어!"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겼다고!!"
"언제 저렇게 강해지신 거야? 우리 공자님 맞아!?"
기사, 집사, 하녀.
바이에른의 이름을 단 모두가 제 이름을 부르며 환호했다.
그 탓에 아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바닥에 쓰러진 제인 도르문트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환호할 거리가 아니었다.
온몸에 칼자국이 난 것도 모자라 오른팔이 잘려 오줌을 지린 그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끔찍하다 못해 처참했으니.
즉, 저렇게 기뻐하며 환호할 거리가 아니란 소리다.
'아무리 적이라도 이런 꼴로 만들면···. 보통은 환호하기보다는 겁을 먹지 않나?'
그래서 아더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이에른 가신들을 바라보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우는 것보다 웃는 게 나았고 비명보다는 환호가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환호하는 바이에른 가신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더는 케인을 바라보았다.
'오호….'
표정에서 감정이 사라진 케인의 미간은 매우 깊게 주름져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보이지 않고 있지만, 아더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케인은 조금 전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그 탓에 아더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 순간, 아더를 지켜보던 바이에른 가신들의 환호 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와아아아-!!"
승자가 내비친 자신감 가득한 미소라 생각한 것이다.
바이에른 저택이 들썩일 정도로 아더의 이름이 연호되자, 여태껏 침묵하던 케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치워라."
명령에 슬금슬금 다가오던 도르문트 기사들이 재빨리 제인을 대리고 연무장을 빠져나간다.
그것을 확인한 케인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에 맞추어 아더가 제안한다.
"제가 이긴 듯한데, 약속한 걸 들을 수 있을까요?"
"…."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이면,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케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허나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못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의 냉철한 이성은 지금도 유지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이성이 말하길, 지금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 봐야 전세를 뒤집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계산 착오군. 하지만 얻은 게 없는 건 아니다.'
중얼거림과 함께 케인이 눈빛을 빛낸다.
머릿속에서 아더 바이에른의 검술을 되새기던 그는 품속을 뒤져 책 한 권을 휙 던졌다.
"음? 이게 뭐죠?"
책을 받아 든 아더가 질문을 던졌지만, 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몸을 돌린 그는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갔고, 고요하게 침묵하던 도르문트 가신들이 뒤늦게 그를 따랐다.
그렇게 30명의 도르문트 가신들이 꼬리를 말며 저택을 빠져나가자, 바이에른 가신들의 환호 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와아아아-!
귀청이 얼얼할 정도의 환호 속에서 아더는 케인이 건네준 책을 펼쳐보다 눈을 치켜떴다.
마법이 걸린 페이지에 적힌 첫 문구가 꽤 익숙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데니안 바이에른. 바이에른 가문의 시초라 불리는 남자의 이름.'
그 탓에 책을 바라보는 아더의 눈길에 흥미가 깃들 때였다.
귓가를 때리던 환호 소리가 갑작스레 멈추었다.
그 이변에 아더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연무장에 모인 바이에른이 두 갈래로 갈라져 한 사람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더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음… .어머니?"
* * *
요넬을 뒤를 따르던 아더는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전 케인에게 통쾌하게 한 방 먹였다는 감정도, 제인의 오른팔을 베어냈다는 기쁨도 지금은 모두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단단히 화가 난 듯한 요넬의 뒷모습에 알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을 느꼈다.
'… 하지만 내 잘못이라 뭐라 할 말이 없네.'
케인을 도발했고, 멋대로 대련 약속을 잡았다.
이것만 해도 문제인데, 그 과정에서 제인을 참혹하게 썰어버렸다.
평범한 부모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기행들.
그 탓에 아더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했다 빌어야겠어. 잘못하기도 했고···.'
그 사이 요넬이 텅 빈 집무실로 들어갔다.
뒤에 선 아더도 눈치를 보다, 한 박자 늦게 요넬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
방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요넬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더를 바라보았고, 아더는 그 시선이 무서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소리 한 점 없는 침묵이 계속될 때였다.
요넬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했다.
아더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그런 요넬의 앞에 다가갔을 때였다.
요넬이 두 팔을 뻗어 갑작스레 안겨 왔다.
"…?"
갑작스러운 포옹에 아더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일 때, 요넬이 입을 열어 물었다.
"…잘못한 건 아니, 아더?"
아더가 정신을 차리고서 대답했다.
"네, 넵 어머니."
"뭘 잘못했니?"
"그… 어머니의 말을 어기고 멋대로 고집을 부린 점이요."
요넬이 아더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아더는 제 가슴팍의 상의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울고 계셔.'
생각과 함께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 때였다.
요넬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설명한다.
"그게 어째서 네 잘못이니?"
"…."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 자체가 내 잘못인데."
정신을 차린 아더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머니?"
"말 그대로란다. 이번 일에 네 잘못이 어디 있겠니?"
씁쓸히 이 말을 중얼거린 요넬이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잠을 지새우며 생각했단다. 그토록 착한 내 아들이 왜 이런 고집을 부릴까? 그것도 대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면서까지. 그러다 보니 답이 나오더구나."
"…."
"날 위해서. 나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인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더구나. 케인 그 양반이… 분명 협박을 했겠지. 대련을 하지 않으면, 네 어미를 위협하겠다… 이런 식으로 분명 너를 꼬드겼을 거야."
아더가 끔뻑이던 눈을 치켜떴다.
그건 아닌데요, 어머니?
서로 충분히 합의해서 한 대련인데?
그사이 요넬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
"너에게 기대서 숨어버린 것도 모자라···. 널 이용하려 한 이 어미를 부디 용서하거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착각을 하신 덕에 상황을 넘긴 건 좋았지만, 반대로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니 가슴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감정 사이에서 아더가 고민할 때였다.
"어?"
탄성과 함께 아더의 눈에서 무언가 흘러내린다.
따스하면서 짭쪼름한 무언가.
그것은 눈물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심장이 멎는 순간에도 나오지 않았던 분비물이었다.
그래서 아더도 놀라고 요넬도 놀라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 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요넬이었다.
"아, 아더? 왜 우는 거니?"
"…모르겠어요. 그냥 흘러나오네요?"
"이리로 오너라. 네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다고 우는 거니… 그 힘든 일을 멋지게 이겨낸 네가 뭘 잘못했다고…."
말을 흐린 요넬이 오열한다.
그 모습에 아더는 탄식을 터트렸다.
'아….'
역시 어머니가 착각을 해 상황을 넘긴 것보다, 눈물을 흘리시는 게 더 마음이 아팠다.
그 생각과 함께 아더가 다시 요넬을 껴안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아더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요넬이 대답했다.
"…아니다. 다만 이거 하나만 생각해주렴. 나는 이 세상에서 아이린과 아더. 너희 둘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네. 당연하죠. 저도 어머니가 제일 소중해요."
요넬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아더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던 중, 어느 사이엔가 흘러내리던 눈물이 멈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네…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니깐 눈물을 흘린 거야.'
중얼거림과 함께 아더가 입꼬리를 올렸다.
따끔거리는 눈가가 아프긴 했지만, 수년 만에 흘려 보는 눈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 * *
울다 지친 요넬을 잠재운 아더는 방으로 돌아왔다.
노움과 장난을 치던 운디네가 그런 아더를 반겼다.
[아더 왔어요!?]
아더가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 모습에 노움과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더…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너무 좋아 보이는데?]
"아. 제 표정이 좋아 보여요?"
[네! 평소보다 훨씬 좋아 보여요!]
운디네의 말에 아더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울었거든요."
[...?]
"그래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너무 오랜만에 흘려 보는 눈물이라 그런지 몰라도, 살아 있다는 감각이 생생하더라고요."
아더의 설명에 운디네의 표정이 모호해진다.
'… 울어서 기분이 좋다고?'
보통 눈물을 흘리면 슬퍼하는 게 정상 아닌가?
혼동을 느낀 운디네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옆에 있던 노움이 바들바들 떨었다.
'울면서 기분이… 좋아졌다고? 혹시 또 누군가를 때린 걸까?'
그래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거 아닐까?
말이 안 된다 생각하지만, 제 주인이라면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한 노움이었다.
그사이 자리에 앉은 아더가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운디네가 질문했다.
[오늘 밤은 운동하러 안 나가실 거예요?]
"응 오늘은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아더가 케인에게서 받은 책을 보여 준다.
운디네가 감탄을 터트렸다.
[진짜 낡은 책이네요? 그런데 마법이 걸린 책이에요!]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조심스레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케인 도르문트… 그 사람이 좋은 걸 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이왕 줬으니 읽어는 봐야지.'
생각과 함께 아더가 집중력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독서를 시작한 아더를 위해 두 정령이 촛불을 켠다.
화르륵-!
타오르는 촛불의 음영에 기대어 아더가 페이지를 넘긴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책을 넘기는 소리와, 간간이 흘러나오는 숨소리뿐.
그 낮지만 무거운 침묵 속에서, 페이지를 넘기는 아더의 손이 점차 빨라질 때였다.
어느 사이엔가 도달한 마지막 페이지를 바라보던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흠… 이게 뭐지?"
이 말과 함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깐···. 지금 내가 [천사]의 후손이라는 건가?"
제18화
책 속의 글귀가 살아 움직여, 아더의 시야를 빼앗았다.
[바이에른의 시초. 데니안 바이에른은 결국 천사와 결혼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 인간의 껍데기를 취한 타락한 천사와 말이다.]
글자를 보면서 넋이 나간 적이 없던 아더로서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이 기분을 즐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책에 새겨진 글자는 여기서 끝이었다.
텅 빈 페이지를 바라보던 아더는 정신을 일깨우고서 중얼거렸다.
'하필 제일 중요한 장면에서 끝나네. 마치 의도적으로 끊긴 것처럼···.'
책을 덮은 아더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구를 다시금 되짚어 보았다.
'이 책의 천사는···. 내가 아는 그 천사일까?'
던져진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천사는 상식선에서의 천사하고는 꽤 거리가 멀었다.
그 증거로 데니안 바이에른이 결혼했다는 존재는 인간이었다.
꽤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자.
그 탓에 천사라 묘사한 것은 어쩌면 비유적인 표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외모가 아름답다고 해서 천사라 부를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진짜로 천사일지도 모르겠네.'
생각과 함께 아더는 다시 고민했다.
케인은 이 책에 바이에른의 혈통과 관련된 비밀이 숨어있을 거라 했다.
그리고 그 비밀 때문에 바이에른을 노린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고.
'즉···. 케인 그 사람이 날 노리는 건, 바이에른의 핏줄이 천사라서 그런 거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가?'
가정에 아더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신을 믿지 않는 아더로서는 당연하지만 천사도 믿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정은 너무 심한 비약이었다.
'하지만 고려할 가치는 있어 보이네···. 케인 도르문트. 그 사람이 바이에른을 노리는 건, 핏줄과 관련 있다, 딱 이 정도로.'
결론을 내린 아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만 해석해도 꽤나 나쁘지 않은 수확이었다.
'전생에서는 이 이유조차 밝혀내지 못했으니 말이야.'
그 후 흔들의자에 몸을 맡긴 아더는 잠든 노움과 운디네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을 밝히는 둥근 보름달과 그 보름달 주위를 수놓은 수많은 별자리.
지나치게 아름다운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아더는 다시 상념에 빠졌다.
그렇게 흔들리는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상념에 빠져있던 아더는 중얼거렸다.
"슬슬 떠날 때가 오는 것 같네."
케인 도르문트의 등장.
제인 도르문트와의 대련.
미래에는 없었던 변수들이었고, 그 탓에 상황과 흐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걸 아더는 느낄 수 있었다.
'미래가 변했단 소리.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사건이 진행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달라진 상황에서 일어날 사건들은 대화가 통할 가능성이 전무했다.
결국, 칼을 들어야 하고 힘이 필요했다.
허나 지금의 자신은 너무나도 약했다.
'제인 도르문트는···. 사실 적수라 평가하기에 민망한 실력이지. 앞으로 쓰러트려야 할 상대는 케인 도르문트, 칸 마드리드. 이 두 남자니깐.'
그뿐만이 아니라 칸 마드리드를 도와 바이에른 가문을 위협한 여러 세력.
그들과 비교해도 실력이 떨어졌다.
그 탓에 아더는 오늘의 승리를 크게 자축하지 않았다.
이겼지만, 한계를 깨달았고 부족한 점도 여러모로 많았으니.
그래서 더더욱 힘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 어떤 위험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을 말이다.
'가문의 힘을 빌릴 수도 있지만… 역시 한계가 있겠지?'
지금 당장 요넬에게 부탁해 영약을 받아 마나를 늘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영약으로 늘릴 수 있는 마나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정해진 시간 동안 최대한으로 강해지기 위해서는 바이에른 혈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바이에른 혈통을 최대한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좋은 피를 섭취해야 해. 그것도 이질적인 능력이 담긴 피로.'
그리고 그 혈통이라 불리는 피를 얻기 위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했다.
프라킬과 같은 혈통의 능력을 지닌 자를 수도에서 다시 만나기란 행운에 가까우니 말이다.
'그 혈통을 지닌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은···. 역시나 [아케인].'
더 특이한 혈통, 온갖 능력자.
더 나아가 기사와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제일로 거대한 도시.
그 도시로 가면, 전생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혈통의 능력을 섭취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생 때 그곳에서 꽤나 굴렀으니깐 어쩌면 더 좋은 능력들을 얻을지도 모르겠네.'
미래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몇 번의 사건을 통해 깨달은 바 있다.
그건 아케인으로 가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훨씬 빠르게 그리고 계획적으로 성장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빨리 저택을 떠날수록, 이득이었다.
문제는 저택을 어떻게 떠나냐는 것이었다.
'음… 이대로 도망치는 건 절대 안 되고,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5월 13일.
17번째 생일날이 불쑥 찾아왔다.
* * *
제국의 수도가 또 한 번 들썩였다.
"아니···. 진짜야? 그 제인 도르문트가 아더 바이에른에게 졌다고?"
"진짜라니깐! 그것도 한 끗 차이로 진 게 아니라, 아예 가지고 놀았다더군!"
"온몸에 칼자국을 내면서 가지고 놀았다지? 그래서 그 망나니 제인 도르문트가 오줌까지 지렸다던데!"
그 이유는 역시나, 아더 바이에른과 제인 도르문트.
두 거대 가문의 대련 때문이었다.
사실 어느 쪽이 이기건 파장이 있을 터였지만, 그 누구도 아더 바이에른의 승리를 예상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제인 도르문트의 검술 솜씨는 꽤나 정평이 나 있었다.
19살이란 나이에 2서클.
어쩌면 3서클을 바라볼지 모르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고, 그 대련 상대인 아더 바이에른은 불과 몇 달 전까지 벙어리였다.
갑작스러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더 바이에른의 승리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버렸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인 만큼 엄청난 파장이 제국 전체를 휩쓸었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평민들까지.
모두가 이 대련을 두고 떠들어 대는 것이 그 방증이었다.
심지어 황실에서조차 이 대련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 탓에 모두가 케인 도르문트.
차세대 실권자라 불리는 그가, 이번 사안을 절대로 곱게 넘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음 황태자로 유력한 2황자의 권위를 등에 업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의 입지가 이번 사건으로 처음 흔들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케인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약속되어 있던 환송식마저 취소하며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의외의 모습에 가지각색의 추측이 또 한 번 쏟아져 나올 때였다.
아더는 침대에서 일어나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더, 안녕하세요!]
[… !]
운디네와 노움의 인사에 아더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런 아더를 향해 운디네가 손짓한다.
[씻겨 드릴게요, 아더!]
작은 물보라가 허공에서 일며, 아더의 얼굴을 말끔히 씻어낸다.
잠기운을 몰아낸 아더가 기지개를 켰다.
'흠...멍하네.'
지난 며칠간, 저택을 어떻게 떠날지 고민해서인지 몰라도 매일 같이 잠을 설쳤었다.
허나 어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깊이 잠들었고, 그 덕에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아침 햇살의 따스함을 멍하니 즐길 때였다.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들어와."
안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동시에 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의 손에 웬 이상한 상자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뭐야, 안나?"
"…선물입니다. 공자님."
"선물?"
"네. 그런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최대한 고른다고 골랐는데···."
말을 흐린 안나의 모습에 아더가 눈을 치켜떴다.
"…오늘이 내 생일이던가?"
"네. 그래서 제가 어젯밤 수련은 접어두시고 일찍 들어가 주무시라 했잖아요."
이 말과 함께 안나가 살포시 웃었다.
"창피하니깐, 지금 여시지 마시고 나중에 열어주세요. 대단한 선물은 아니니깐 기대는 하지 마시고."
고개를 끄덕인 아더가 선물 박스를 매만졌다.
이질적인 종이 질감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럼 식당으로 가실까요? 공자님?"
"…그래,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아더가 걸음을 옮겼다.
그 옆을 안나가 지켰다.
그렇게 식당으로 걸어가던 아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이에른 저택은, 긴 세월만큼이나 끝없는 증축을 해 온 덕에 수도에서 손꼽는 규모를 자랑했다.
그 탓에 제 방에서 식당으로 가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여러 시종을 매번 마주쳤다.
헌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
매일 같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시종들과 하녀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다.
그 이변을 본능적으로 눈치챈 아더가 중얼거렸다.
'뭐지? 설마 또 무슨 일이 난 건가?'
일전 도르문트 백작이 방문했을 때랑 비슷한 느낌에 아더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그 속에서 안나가 식당으로 들어서는 문의 고리를 잡으며 말한다.
"음… 공자님. 혹시나 하는 말인데 너무 기뻐서 우시면 안 돼요?"
"…? 그게 무슨 말이야 안나?"
안나가 살포시 웃는다.
그와 동시에 닫혀 있던 식당의 문이 열리고 아더의 눈이 치켜떠진다.
"서프라이즈-! 생일 축하합니다. 소공자님!"
* * *
아더가 눈을 끔뻑인다.
"소공자님 열일곱 번째 생일 축하드립니다!"
"큰 건 아니지만···. 이 시계.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열일곱 살이면 성인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건 저희 요리사들이 돈을 모아 산 넥타이입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사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선물과 축하 인사.
전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아더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처음 겪어 보는 생소한 일에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허나 바이에른 가신들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얼어붙은 아더를 바라보며 히죽히죽 웃음을 터트리는 자들도 있었다.
'이제야 좀 애다우시군.'
'그래… 이게 열일곱 살이지.'
'항상 굳어 계셔서 걱정했는데···. 이런 모습도 보일 줄 아시고 다행이야.'
그 사이 정신을 차린 아더가 대답했다.
"어···. 감사합니다?"
어딘가 애 같지 않은 구석이 있던 소공자가 당황하는 모습에, 바이에른의 가신들의 마음이 절로 푸근해졌을 때였다.
한 소녀가 아더를 향해 뛰어왔다.
"오빠!"
"아이린?"
"응응 아이린이야, 생일 축하해!"
외침과 함께 아이린이 아더를 향해 커다란 곰 인형을 건네주었다.
아더의 관점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솜덩이에 불과한 물건이었지만 아이린이 건네주니 그 의미가 무척이나 남달랐다.
"선물이야! 내가 제일 아끼는 인형이야!"
아더가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곰 인형을 받아들었다.
그 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쁘지 않네. 이 선물이 쓸모가 있건 없건.'
이래서 사람들이 선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건가?
생각과 함께 아더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걸 넘어 미소까지 지었다.
그런 아더의 표정에 모두가 흡족한 미소를 띠었을 때였다.
아더를 둘러싸고 있던 바이에른 가신들이 일제히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이변을 느낀 아더가 고개를 들자, 어느 사이엔가 다가온 요넬이 보였다.
"생일 축하해, 아들."
아더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감사해요, 어머니."
"그래···. 그럼 어떤 선물을 받을지 정했니?"
아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리고 어머니한테는 이미 선물을 받았는걸요."
그의 대답에 요넬이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 장의 편지지를 건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주고 싶은 선물이구나."
"개인적으로 주고 싶은 선물이요?"
"그렇단다. 우리 바이에른의 미래···. 그리고 아더, 너의 미래."
아더의 눈이 치켜떠진다.
동시에 요넬이 눈빛을 빛내며 아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미래를 위한 선물이···. 이 편지지에 담겨 있단다. 한 번 뜯어보겠니?"
아더의 시선이 편지지로 향했다.
그 후 밀봉된 부분을 조심스레 뜯었다가 보고는 놀라 중얼거렸다.
"어… 이건?"
제19화
아더는 눈을 끔뻑였다.
[아케인 종합대학 추천장.]
요넬이 건네준 것은 서류였다.
여러 직인이 찍힌 아주 복잡한 서류.
허나 그 의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추천서를 왜 건네주신 거지?'
생각과 함께 아더가 머뭇거릴 때였다.
요넬이 바이에른 가신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나요, 다들? 아더와···. 긴히 할 말이 있네요."
고개를 기웃거리던 바이에른 가신들이 놀라 허리를 숙였다.
그 후 칭얼거리는 아이린을 억지로 안아 들고서 후다닥 식당을 빠져나갔다.
주변의 시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한 요넬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아더를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짓는다.
"우리 아들이 이제 열일곱 살이던가?"
"네 어머니."
"많이 컸구나···. 네가 말을 더듬지 않게 된 지 1년···. 그 이후로도 시간이 제법 흘렀지?"
"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래. 그래서 나도 잘 안 믿기는구나. 널 바라본 17년이란 시간보다, 최근 1년 사이에 너무 훌쩍 커 버려서."
요넬이 턱을 괸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던 표정도 약간은 어두워졌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챈 아더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요넬이 먼저 입을 열며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앞으로 3년. 난 널 공작가의 정식 후계자로 앉힐 생각이란다."
"…네?"
"그 1년 뒤에는 네게 이 자리를 물려줄 의향도 있단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아더?"
아더가 넋을 놓고 있다, 간신히 대답한다.
"어… 네. 그런데 왜 갑자기…."
"갑자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란다. 아더. 너의 재능을 확인하고서 며칠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지."
요넬이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 준비가 끝마칠 때까지 어미가 대신 이 자리에 있을 거란다. 하지만 아더. 너는 이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란다."
웃음을 멈춘 요넬이 눈빛을 번뜩인다.
"결국, 좋든 싫든···. 네 핏줄과 이 가문을 탐내는 자들이 몰려올 것이고, 그때 가서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공작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주 좋은 선택지가 될 거야."
좋은 선택지?
요넬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아더는 숨을 참았다.
'공작가의 주인… 이건 전혀 생각 못 했는데.'
한 번도 바란 적이 없는 자리고, 한 번도 원한 적 없는 자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저번 삶의 자신은 공작가의 주인은커녕 그 후계자 자리도 지켜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런 와중에 공작가의 주인 자리를 논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
그 탓에 아더가 입을 열지 못하자, 요넬이 끊어진 설명을 다시 이어 나갔다.
"이것 또한 마찬가지란다. 아케인 종합대학···. 제국에서 난다긴다하는 대학들조차, 아케인 대학과 비교하면 한 수 접어줘야 하지."
"…."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 왕족, 귀족. 그들 모두가 모이는 곳이 이 종합대학이니깐 말이야."
아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케인 종합대학은 아더도 잘 아는 곳이었다.
제국을 비롯한 연합왕국.
더 나아가 교회와 수많은 이민 왕국이 힘을 합쳐 만든 신新도시 아케인.
그 도시의 하나뿐인 교육기관인 아케인 대학은 그 재능과 천재성은 물론이고 자격마저 갖추어야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학교를 졸업하면 당당히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 거기다 홀란 오라버니가 말씀하신 네 재능도 학교에 들어간다면 충분히 만개할 수 있을 거란다. 그곳은 최고라 불리는 교수들이 학생을 가르치니 말이야."
아더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즉… 아케인 대학교 졸업장을 따서, 공작가의 주인 자격을 증명해라 이건가.'
생각과 함께 아더가 탄성을 터트릴 때였다.
요넬이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건네온다.
"그리고 나는 아더, 네가 아케인 대학에 가 있는 동안 무너져 가는 공작 가문을 재건할 생각이란다."
"…재건이요?"
"그래. 아더, 너도 알다시피, 현재 공작가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단다. 그 이유가 뭔지 아니?"
질문에 아더가 고민했다.
그러다 요넬과 케인의 대화를 생각해내고서 탄성을 터트렸다.
"그 광물 철산인가요?"
"맞아. 광물 철산도 그중 하나지. 원래는 바이에른의 것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도르문트 백작을 비롯한 탐욕스러운 사업가 귀족들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단다."
"어째서 그렇게 된 거죠?"
"방심한 탓이지. 바이에른은 너무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 있었어.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당연하고, 익숙해져 버렸어."
요넬이 씁쓸히 중얼거린다.
"반면 도르문트 백작과 새로이 떠오르는 신흥 귀족들은 도전과 혁신을 했지. 거기서 차이가 벌어졌고,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바이에른 이름 자체를 빼앗길지도 모른단다."
아더의 눈이 커졌다.
바이에른의 이름.
그것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 이름을 빼앗긴 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죽음뿐.'
그리고 지금.
요넬은 그 이름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탓에 아더는 또 한 번 놀라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변했네? 내가 아는 어머니는 이런 분이 아닌데?'
그때 요넬이 다시 아더의 손을 잡는다.
따뜻한 온기에 아더가 정신을 차린다.
"나는 그걸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단다. 그래서 네가 이 학교에 간다는 전제하에 흔들리는 재정을 다시 바로잡고, 빼앗겼던 바이에른의 정당한 권리들을 다시 찾아올 생각이란다."
"…."
"그리고 그것을 3년 뒤, 너에게 물려줄 것이고."
아더가 침묵한다.
동시에 머릿속을 점령한 상념과 고민이 정리된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왜 아케인 대학 추천서를 건네주면서 이 자리를 만들었는지.
'어머니가 가문을 재건할 동안 나보고 대학교에 가서 가문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자격을 증명하라는 거구나.'
만약 이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아주 거대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듯했다.
케인 도르문트와 2황자 칸 마드리드.
그 두 남자와 맞서 싸울 때 아주 커다란 힘을 쥘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며칠간 고민하던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가 있었다.
'저택을 떠나 아케인으로 가서 혈통을 수집할 기회… 그 기회도 자연스레 얻을 수 있어.'
그 탓에 아더는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번 생에 많은 변화와 놀라운 일들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을 끝마친 아더가 고개를 든다.
확고한 결심이 선 요넬의 표정이 보였다.
그런 어머니를 향해 아더도 결심을 굳힌 채 대답했다.
"고마워요, 어머니."
요넬이 방긋 웃는다.
"제게 있어 최고의 생일 선물이네요. 이런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 * *
솔직히 말해 마음 한구석에서는 조금 더 바이에른 저택에 머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제야 친해진 집안의 사람들.
미소를 되찾은 어머니와 여동생.
그들과 조금 더 함께 호흡하고 싶었다.
허나 아더는 이 마음을 뒤로하고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가 결심을 섰을 때···. 응원해 줘야 좋은 아들이지.'
자신이 남아있다면, 요넬이 흔들릴지 모른다.
그건 아더 자신에게도, 요넬에게도 별로 좋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요넬의 결심이 확고히 섰을 때 바이에른 저택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아더가 결정을 내리자, 준비는 곧바로 되었다.
아케인 종합대학.
제국의 수도로부터 수백 킬로 떨어진 기회의 도시로 향할 준비가 말이다.
먼 곳으로 향하는 만큼 많은 짐이 필요했지만, 아더가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었다.
친했던 요리사.
매일 같이 눈인사를 했던 호위 기사.
그 밖의 여러 시종들.
아더는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찾아가 인사했고, 바이에른의 시종들은 그 인사를 눈물로 화답했다.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도련님."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밝은 미래만 함께하시기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더는 가슴 한구석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 고통은 생각보다 아팠고, 그 탓에 아더는 몹시 놀랐다.
가족을 제외한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택을 떠난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 더욱 진한 아쉬움이 들 때였다.
기회와 자유가 보장된 신도시.
아케인으로 떠나는 열차 앞에 바이에른의 대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