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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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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1

78화. 만 냥? 어림도 없지뒤로 물러났던 나는 폭발의 현장으로 돌아가, 한때 조막생이었던 존재의 흔적을 살폈다.

"미친...."

폭발이 일어난 자리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살점과 뼛조각, 핏물 외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탈혼대법(奪魂大法)이다.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마공을 주입해, 성장하면서 서서히 마인으로 각성하게 만드는 극악한 사술.

그것으로도 모자라 죽기 직전에 마지막 선천지기를 쥐어짜 폭사하도록 만들었으니, 웬만한 고수도 미리 알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장로님. 탈혼마인은 어떻게 통제합니까?

-클클. 알고 싶으냐?

비죽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마뇌의 얼굴.

그 얼굴을 짓이기고 싶었지만, 당시의 나는 무뚝뚝한 표정 속에 살기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통제할 방법이 없으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마기가 골수까지 파고든 마인은 적아를 가리지 않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지존께서 모든 마를 다스리시니, 탈혼마인들 또한 지존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할 것이다.

마뇌가 말하는 지존이란 혈마신교의 교주인 혈마를 뜻했다.

아마도 혈마에게 탈혼마인을 제압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겠지.

-하지만 항상 지존께서 나서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전쟁이 벌어지면 일선 지휘관들에게도 마인들을 통제 수단이 필요할....

-오늘따라 혀가 길구나. 그것이 왜 그리 궁금하더냐? 무림맹에 정보를 팔아넘기기라도 하려고?

광기가 일렁이는 마뇌의 눈과 시선이 마주친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클클. 농담이었다. 그래도 괜한 호기심으로 스스로 명을 단축하지 말거라. 너는 사대악인을 완성하는 데만 신경 쓰면 될 일이다.

-예.

-자, 이 안에서 근골이 있는 아이들을 추려내 보거라. 몇몇은 실험 삼아 내가 직접 가르칠 것이야.

-....

그것은 전생에 마뇌와 관련된 기억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기억 중 하나였다.

나는 죽기 전 고통에 울부짖던 조막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마뇌. 정말 네가 살아 있는 거냐? 아니면 혈교의 잔당들이 네가 남긴 유산을 이어받아 이런 짓거리를 벌이는 거냐."

조막생은 죽어 마땅한 악인이었다.

탈혼대법을 각성해 마인으로 변하지 않았더라도, 녀석은 훗날 수많은 양민을 해치는 마두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게, 녀석의 성정이 타고난 악인이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멀쩡한 어린아이를 납치해 뇌를 가르고 마공을 심어 넣어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크히히히! 죽여, 다 죽일 거야. 날 고아라고 무시한 놈들...!

고아로 자라지 않았다면, 그 녀석은 아주 평범한 운명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가정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나는 시체의 흔적을 최대한 지웠다.

찢어진 옷가지를 모아 태우고, 신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흔적도 모두 없앴다.

그 모든 작업을 끝내니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입고 온 흑의무복에 피 냄새가 진하게 배었다.

"후우.... 돌아가면 옷부터 갈아입어야겠군."

몸보다는 정신이 더 피곤했다.

나는 몸을 돌려 터덜터덜 백룡장을 향해 걸었다.

경공을 펼쳐서 빨리 갈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청천에게 혈우마공을 건넨 놈, 위지천이 가짜 무극검을 익히게 한 놈, 헌원세가에서 벌어진 광마혈사, 그리고 탈혼대법까지....'

이쯤 되면, 혈교가 다시 무림에 피바람을 몰고 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바보다.

놈들은 정체를 숨긴 채 수십 년 이상 힘을 모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겠지.

"...미치겠군."

나는 누구보다 혈교에 대해서 잘 안다.

지금도 혈교의 잔당을 찾고 있는 무림맹보다, 혈교의 후예를 자처하는 놈들보다도 잘 알 것이다.

그래서 한눈에 청천이 익힌 마공을 알아보았고, 낭인시장에서 위지열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헌원세가의 혈사에 혈교가 개입한 것도, 탈혼대법도, 오직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탈혼대법을 펼치려면 엄청난 자금과 많은 고수들이 필요해. 그걸 다 어디서 구했을까?'

자금과 고수.

따로따로 구하기도 힘들지만, 둘을 동시에 구하는 것은 몇 배로 어렵다.

정파 세력으로 치면 최소한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쯤은 되어야 그만한 여력이....

그 순간, 나는 조막생이 했던 말 중 하나를 떠올렸다.

-몰라, 모른다고! 혈교라니. 애초에 난 고아야.... 무공은 고아원에서, 그 후에 남궁세가에서 배웠어....

남궁세가(南宮世家).

오대세가의 수좌이자 천하제일검문을 말할 때 항상 첫 손에 꼽히는 명문세가.

그들이 지닌 무력은 구파일방과도 충분히 자웅을 겨룰 만큼 강하다.

'조막생이 남궁세가 근처의 고아원에서 자란 게 우연일까?'

지나친 억측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게 꿀꺽 집어삼키기엔, 남궁세가는 너무 큰 세력이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내 억측이 일부라도 맞다면....

'그 고아원이란 곳엔 언젠가 한번 가 봐야겠군.'

지금 당장은 어렵다.

입학시험도 남아 있고, 내가 갑자기 휴가를 내고 떠난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남궁수라든가.

'혈교의 뒤를 캐기엔 내 무공도 아직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정체를 놈들에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내가 무슨 의협심 가득한 협객도 아니고, 괜한 위험을 자초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번 생에서는 혈교라는 악연을 완전히 끊고 싶을 뿐이다.

"마뇌. 만약에 네가 아직 살아 있다면...."

꽈악....

나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끝장을 내주지."

다행히도,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 주었다.

* * *

"후우...."

운기조식을 끝낸 공손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시간은 꼭두새벽이었다.

아직 백룡장에서 잠에서 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르신. 조금 더 주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자신과 흑영만 빼면 말이다.

"허허. 늙어서 그런지 잠이 안 오는구나. 너야말로 나 때문에 이 새벽에 고생이구나."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살짝 투정 부리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공손수는 빙그레 웃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흑영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많아졌다.

'이것도 백 선생 덕분이로군.'

강제로 휴가를 보낸 날, 백수룡이 흑영을 만나 고민 상담을 해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사내로다.'

차마 자신의 입으로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대신 해 주었으니 말이다.

공손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중요한 날이니 오늘은 깨끗하게 목욕재계를 해야겠다."

"그러실 것 같아서 미리 따뜻한 물을 받아 놨습니다."

"허허. 네가 시집가면 내가 참으로 서운할 게야."

"예? 갑자기 시집이라니...."

"설마 안 갈 셈이었더냐."

"...생각도 해 본 적 없는데요."

공손수가 짓궂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부터 미리미리 찾아보거라. 네 인물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사내들이 줄을 설 것이다. 뭣하면 내가 중매라도 서 주랴?"

"됐으니 빨리 씻으러 가세요!"

찰싹!

등짝을 얻어맞은 공손수가 욕탕으로 들어갔다.

그가 깨끗이 목욕재계를 하는 동안, 흑영은 밖에서 호위를 섰다.

공손수는 천천히 몸을 씻으며 문밖에 있는 흑영에게 말했다.

"시간이 참으로 빠르구나. 벌써 약속한 한 달이 지나다니."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 공손수는 청룡학관 입관 시험을 치른다.

처음에는 스스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도전이라고 여겼던 일이지만, 이제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전부 한 사내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백 선생은 안 돌아왔느냐?"

"지난밤에 나가서 아직입니다."

"흐음. 분명 훌륭한 사내인데 은근히 음흉한 데가 있단 말이지. 그 야밤에 나가서 무엇을 하길래 아직도 안 들어올꼬...?"

"...한번 알아볼까요?"

"되었다. 다 큰 사내의 사생활을 침해해서야 되겠느냐. 아니면... 혹시 네가 궁금한 게냐?"

"...예?"

"오호라?"

황궁에서 수많은 암투와 권모술수를 수십 년 넘게 경험한 공손수였다.

흑영의 말투에서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너 설마...."

"아닙니다."

"허허...."

"...아닙니다."

"허허허허!"

"아니라니까요!"

욕탕에 들어와 있어서 다행이었다. 옆에 있었다면 흑영에게 등짝을 몇 번은 더 얻어맞았을 것이다.

"하아....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어차피 제가 뭐라고 말해도 놀리실 거잖아요."

"푸헐헐헐. 청춘이야. 청춘이로구나."

껄껄 웃으며 몸을 씻던 공손수가,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밀서가 도착했더구나."

"...읽어 보셨습니까?"

"보았다. 다행히 시험은 치르고 떠날 수 있을 것 같구나."

"...채비를 해 두겠습니다."

잠시 후, 목욕을 끝낸 공손수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늘만은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훈련용 회색 무복이 아닌 새하얀 무복을 입고, 이마에는 영웅건을 단단히 맸다.

마지막으로 허리춤에 검을 차고 거울을 보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흐아암-. 할아범. 일찍도 일어났네."

"좋은 아침입니다...."

그즈음 헌원강과 위지천도 일어났다. 둘 다 눈에서 눈곱을 떼지도 않고 바로 씻으러 갔다.

공손수는 홀로 마루에 나와 앉아 대문을 바라봤다.

잠시 후, 밤에 나갔던 백수룡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백 선생. 이제 오는가?"

"...어르신. 일찍 일어나셨네요."

공손수는 오늘따라 유독 피곤해 보이는 백수룡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아는 척하지 않았다.

"표정이 좋지 않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겐가?"

"...티가 많이 납니까?"

"보통 사람은 못 알아볼 것이네."

하지만 공손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을 뿐, 그가 가진 직감과 통찰력은 무학의 대종사에 못지않았다.

"고민이 있거든 말해 보게나."

"누구한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백수룡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을 뿐이었다.

"자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더 묻지는 않겠네. 그 대신...."

공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수룡에게 걸어갔다.

그는 이 능구렁이 같은 청년도 심각한 고민을 한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한 기꺼웠다.

드디어 이 청년에게 받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고작 만 냥으로는 어림도 없지.'

공손수는 백룡장을 떠나기 전에 이런 기회가 와서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내 자네의 부탁이라면, 어떤 부탁이든 한 번은 무조건 들어주겠네. 이건 내가 죽기 전까지 유효한 약속이네."

"예?"

"어르신!"

백수룡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흑영도 깜짝 놀랐으나,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 어르신. 제가 아주 곤란한 부탁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런 약속을 하십니까?"

"자네가 잘 모르나 본데, 나를 곤란하게 할 부탁은 많지 않아."

껄껄 웃은 공손수는 "그럼 그리 알게"라고 말하며 백수룡을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돌아섰다.

그리고 이제 막 씻고 나오는 헌원강과 위지천에게 웃으며 말했다.

"다 같이 아침 식사나 하자꾸나. 꼭두새벽부터 일어났더니 배가 아주 등가죽에 달라붙겠어. 허허허!"

다섯 사람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한 후, 그들은 다 함께 백룡장을 나섰다.

그것이 그들이 함께한 마지막 아침 식사였다.##79화. 저분이 왜 여기에?입관 시험 날 아침.

청룡학관 주변에는 아침부터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떡 사세요! 따끈따끈한 합격떡 사세요!"

"합격 기원 부적입니다! 시험 보러 가기 전에 주머니에 넣고 가세요!"

"총각들! 시험 보러 가기 전에 아침으로 든든~한 국밥 한 그릇 하고 가!"

도시 전체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아침을 맞이했다.

청룡학관 입관 시험 지원자들을 상대로 한 장사치들이 좌판을 벌였고, 흔치 않은 구경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나왔다.

"저길 봐! 소림이다!"

"바보야. 대머리면 다 소림인 줄 알아?"

"칫. 아니면 말고...."

"도사님! 도사님께서는 혹시 무당파에서 오셨나요?"

"크흠. 속가제자입니다만...."

자기들보다 몇 살 더 많은 젊은 무인들을 구경하려고 나선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들까지 도시를 누비며 재잘거렸다. 도시 전체가 들썩들썩 축제 분위기였다.

평소라면 무례한 질문에 눈살을 찌푸릴 무인들도 오늘만은 그냥 웃으며 넘어갔다.

상대가 무림에 무지한 아이들이기도 했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청룡학관 앞에서 언성을 높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청룡학관의 문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 앞에서 시험을 앞둔 무인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 지인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곳곳에서 비장한, 눈물 어린, 낯 뜨거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들아! 꼭 합격해야 한다!"

"아버님! 소자 합격하여 반드시 청룡패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오냐! 꼭 합격해야 한다! 너 하나 무인으로 키우겠다고 들인 돈을 생각하면.... 컥! 부, 부인!"

"당신은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요!"

아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오라버니. 이렇게 청룡학관에 가 버리시면 저는 어찌하나요...."

"연매. 울지 마시오.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소?

"소녀는 오라버니가 청룡학관의 여학생과 눈이 맞을까 걱정입니다...."

"무슨 그런 걱정을 한단 말이오.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여인을 두고 내가 왜...."

"행여 딴 년이랑 바람피우기만 하세요. 제가 손수 찢어 죽이러 가겠습니다."

"크, 크흠. 연매의 그런 화끈한 모습에 내가 반한 것이오."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철없는 연인들.

"제자야. 떨지 말고 가서 실력의 반만 보여 주고 오너라. 그럼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질 수가 없을 게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스승님!"

제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해 주는 스승까지.

신입생 지원자들의 가족, 친구, 스승, 지인들이 입관 시험이 시작되기 전에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허허. 좋구나."

청룡학관의 건너편.

비싸기로 유명한 객잔의 가장 높은 층에서 청룡학관을 내려다보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반대편에 앉은 사내가 물었다.

"무엇이 그리 좋으십니까?"

"꿈을 향해 나아가는 젊은 무인들의 얼굴이 보기 좋구나. 올해는 어떤 재능 있는 아이들이 왔을꼬."

노인네 같은 말투와 달리, 청년은 많아 봤자 이십 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객잔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했겠지만, 그들이 한 층을 통째로 전세 낸 터라 시선을 던지는 이는 없었다.

청년의 반대편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저들 중 절반은 오늘 짐을 쌀 것입니다. 남은 절반 중 또 절반은 내일 짐을 싸겠지요. 결국 남는 것은 한 줌뿐입니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낭만이라곤 없구나. 그런 현실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느냐."

"...올해 청룡학관 신입생 지원자가 역대 최대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나 쉽게 보고 지원을 했다는 뜻이지요."

"흐음."

"하지만 올해는 다를 것입니다. 제가 청룡학관을 변화시킬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청년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반대편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한순간, 그 눈빛이 소름 돋을 정도로 싸늘했다.

"그래야 할 것이다."

"...예."

남궁수는 감히 청년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드디어 청룡학관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정문 앞에 수문장처럼 꼿꼿이 서 있던 매극렴이 지원자들에게 정숙해 줄 것과 질서를 지켜 입장해 줄 것을 부탁했다.

지원자들이 청룡학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청년도 몸을 일으켰다.

"곧 시작되겠구나. 늦으면 노군상 그 늙은이가 잔소리를 할 테니, 우리도 슬슬 가자꾸나."

"예. 백부님."

청년은 뒷짐을 진 채로 객잔을 나섰다.

남궁수가 한 걸음 뒤에서 공손히 그를 수행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가르친 아이들도 입관 시험을 본다고 않았더냐. 그중 한 명은 본가의 아이로 기억하고 있다."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허허. 그래. 그래야지."

남궁수는 청년의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한 자루 검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 검의 검집에는 '창천(蒼天)'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음각돼 있었다.

무림에서 저 검을 가질 수 있는 무인은 한 명뿐이었다.

* * *

"우선 본 학관의 입관 시험에 응시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소."

단상에 올라선 노군상은 대연무장을 가득 채운 지원자들을 둘러보았다.

설렘과 두려움, 강해지겠다는 욕망과 미래에 대한 꿈으로 반짝거리는 눈빛들.

젊은 무림의 동냥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노고수는 흐뭇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외면할 생각은 없었다.

"호사가들은 말하오. 청룡학관이 오대학관 중 가장 처진다고. 실제로 우리는 십 년째 천무제에서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관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입관 시험 전에 지원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말에, 부관주가 그만하라며 전음을 보냈다.

실제로 지원자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노군상은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우리의 현 위치가 그렇소. 여러분 중에도, 백호학관이나 주작학관을 가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하향 지원을 한 이들도 있겠지."

초절정고수의 예민한 기감은 움찔하는 기척들을 놓치지 않았다.

역대 최대 지원자.

듣기에는 좋지만, 그만큼 청룡학관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군상의 기세가 일변했다.

"허나 올해는 다를 것이다."

쿵!

청룡학관주가 발을 구르자, 그를 중심으로 거센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가공할 기세에 지원자들은 솜털이 쭈뼛 솟는 것을 느꼈다. 긴장한 지원자들이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청룡학관은 백호학관이나 주작학관에 지원할 실력이 안 되는 이들의 차선책이 아니다. 너희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왔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노군상은 부리부리한 시선으로 단상 아래의 학생들을 바라봤다.

대부분은 그의 눈을 감히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으나, 그중 극히 일부는 당당히 마주 보고 있었다.

'올해는 기대해 봐도 좋겠구나.'

지원자가 많다는 것에는 장점도 있었다.

비록 한 줌뿐이긴 하나, 가릴 만한 옥석들이 보였다.

노군상은 고개를 들어 멀리 있는 강사들을 보았다.

마침 백수룡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올해 청룡학관은 다를 것이다. 우리는 천무제에서 전과 다른 결과를 낼 것이다. 나 천수관음 노군상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

노군상의 폭탄선언에 강사들이 입을 쩍 벌렸다.

"예, 예?"

"아니, 갑자기 저러시면...."

관주가 나서서 저런 말을 해 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한때는 백대고수로 손꼽혔던 천수관음이라는 별호까지 걸고!

다들 당황하는 가운데, 백수룡이 노군상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우며 씩 웃었다.

'잘하셨습니다.'

전음은 아니었지만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노군상은 백수룡과 눈을 마주치며 큭큭 웃었다.

'차마 우승할 거라는 말을 못 하겠구나. 적당히 해야 통할 것 아니냐.'

그는 천수관음이란 별호에는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그리고 강사들에게 의욕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훗날 망신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노군상은 다시 지원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니 죽을힘을 다해 주길 바란다. 청룡학관 입관 시험을 쉽게 보고 온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금방 짐을 싸야 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다행히 의도가 통한 모양이었다.

입관 시험 지원자들의 표정에 한층 더 불이 붙었다.

노군상이 지원자들을 위해 준비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선물이 더 있었다.

"청룡학관 입관 시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귀빈을 한 분 소개하겠소이다. 오늘 특별 심사관으로 함께해 주실 것이오."

특별심사관?

처음 듣는 말에 지원자들의 표정에 의문이 어렸다.

저벅. 저벅.

노군상이 단상 뒤로 물러나며, 뒤쪽에 앉아 있던 청년이 뒷짐을 진 채로 앞으로 걸어 올라왔다.

"천수관음의 이야기는 잘 들었소. 저 친구가 저리 박력 있게 구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군."

저 친구?

청년은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였다.

일흔이 넘은 노군상에게 하대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배분만 해도 최소 몇 대는 차이가 날 테니까.

...아니, 그런 일이 가능한 방법이 한 가지 있었다.

"설마...?"

"저분은...."

눈치가 빠른 이들은 경악한 얼굴로 청년과, 그 뒤에 공손히 시립한 남궁수를 바라봤다.

닮았다.

얼굴은 크게 닮지 않았지만, 분위기나 기도가 닮았다.

같은 계열의 무공을 익힌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동질감이 있었다.

그 순간 청년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인은 창천검왕이라는 분에 겨운 별호로 불리고 있는, 남궁제학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청년이 자신의 별호와 이름을 순간, 대연무장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창천검왕!"

"시, 십존!"

"세상에...."

창천검왕(蒼天劍王) 남궁제학.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열 명의 고수, 십존(十尊)의 일인.

검으로는 천하제일을 다투며, 오십 년 전 무림맹이 혈교를 무너뜨릴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었다.

그 창천검왕이 청룡학관에 오다니!

"허허. 뜨거운 환대에 어쩔 줄을 모르겠군. 허나 내 손님으로 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으니 조금만 정숙해 주시겠소?"

나직한 목소리에 항거하기 힘든 내공이 담겨 흘러나왔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떠들던 지원자들이 거짓말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청룡학관주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오게 되었소. 오늘 하루 특별심사관을 맡아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오."

남궁제학은 천무학관의 명예강사이기도 했다.

가끔 열리는 그의 수업을 듣기 위해서, 천무학관 학생들 간에 비무까지 할 정도였다.

즉, 일타강사 중의 일타강사인 것이다.

남궁제학이 빙긋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모두에게 무운을 빌겠소.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가진 실력을 다 보여 주길 바라오."

지원자들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 * *

"자네의 인기가 엄청나군.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자네가 나서게 할 것을 그랬어."

"아직 어린 학생들이 아닌가. 십존이라는 허명이 통하는 것이지."

노군상의 부러운 듯한 시선에 남궁제학이 껄껄 웃었다.

둘은 같은 시대를 함께한 무인이자 친우였다.

젊었을 적에는 종종 만나 비무도 하고, 술도 함께했었다.

세월이 흘러 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둘은 여전히 친우였다.

"초대는 했지만 정말로 올 줄은 몰랐네. 천무학관 일로 바쁘지 않나?"

"나야 바쁠 게 무에 있나. 세가의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하는데."

남궁세가는 천하제일검가이기도 하지만, 대대로 오대학관 전체에 많은 강사를 배출해 왔다.

남궁제학은 그 정점에 있었다.

"청룡학관도 언젠가 한 번은 들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마침 오랜만에 자네에게 연락이 오기도 했고."

"고맙네. 덕분에 저 아이들의 의욕이 크게 올랐어."

두 사람의 시선이 입관 시험이 시작된 대연무장을 향했다.

"하아압!"

"으랏차차!"

열두 개 조로 나뉜 지원자들이 강사들의 입회하에 외공, 내공, 체력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기합 소리에 노군상이 흐뭇하게 웃었다.

"올해의 청룡학관은 달라. 자네도 놀라게 될 것이네."

"호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여유롭게 웃는 남궁제학의 모습에, 노군상이 제안했다.

"못 믿겠다는 표정이군. 내기라도 하겠나? 나는 자네가 놀란다는 데 걸지."

"이 친구가 뭘 믿고 이리 자신만만한지 모르겠군. 좋지. 뭘 걸 텐가?"

"이 나이에 술내기 말고 할 게 더 있나?"

남궁제학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학관 학생들에게 적응된 남궁제학의 눈은 매우 높았다.

그보다 한참 떨어지는 청룡학관 지원자들의 실력이 성에 찰 리 없었다.

'이곳에서 수석을 차지할 아이도 천무학관에선 범재에 불과할 것이다.'

노군상의 자존심이 상할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원자들의 수준은 아까 대충 파악해 둔 터였다.

청룡학관은 올해도 천무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남궁제학이 편안한 마음으로 대연무장을 둘러볼 때였다.

"12조 85번 지원자!"

"예! 여기 있습니다!"

당당히 앞으로 나서는 한 노인이 눈에 띄었다.

눈처럼 새하얀 무복에 이마에 질끈 동여맨 영웅건.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노인인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데, 남궁제학은 그 얼굴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때 노인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하며 외쳤다.

"백룡장 제1기 졸업생 공손수라 하외다. 잘 부탁드리겠소!"

그 순간, 남궁제학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저분이 왜 여기에!"

시작하자마자 내기에서 져 버린 창천검왕이었다.##80화. 대체 스승이 누구야?"저분이라니? 저기 하얀 무복 입은 노인 말하는 건가? 자네가 아는 사람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군상은 저 노인의 정체를 모르는 듯했다.

"그것이...."

남궁제학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일부러 정체를 숨긴 거라면....'

함부로 정체를 알려서 노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남궁제학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내가 잘못 봤네. 돌아가신 외조부님과 닮아서 깜짝 놀랐지 뭔가."

"외조부?"

남궁제학이 대충 둘러댄 변명에, 노군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내 자네를 안 지 50년이 넘었는데, 돌아가신 외조부 얘기는 처음 듣는군."

"돌아가신 지 60년쯤 되었네. 허허허! 외조부가 나를 참 예뻐하셨는데...."

"그걸 믿으라고? 쯧. 알았네. 곡절이 있는 듯하니 내 못 들은 셈 치지."

"...고맙네."

더 이상 캐묻지 않는 노군상의 태도에 남궁제학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노군상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노군상이 능글맞게 웃으며 남궁제학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튼 내기는 내가 이겼으니 말일세. 남창에서 제일 비싼 주루를 예약할 테니 각오해야 할 게야."

"끄응.... 알았네."

남궁제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아깝지 않았으나, 내기에서 졌다는 사실이 영 찝찝했다.

하지만 천하의 창천검왕을 놀라게 할 일들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 * *

청룡학관 입관 시험은 크게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 있었다.

오전에는 지원자의 기초체력, 내공, 외공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강사들 앞에서 증명하는 시험.

오후에는 필기시험, 학생회 선배들과의 실기 대련이 준비돼 있었다.

"하아아압!"

기합을 넣으며 땅을 박찬 공손수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켰다.

휙휙휙휙!

그는 동서남북 모든 방위에 모두 검을 찔러 넣은 후, 한 마리 학처럼 우아하게 바닥에 내려섰다.

"후우우...."

천천히 심호흡을 한 공손수는 검을 천천히 검집에 넣었다.

준비해 온 마지막 초식의 시연이 모두 끝났다.

자세를 바로 한 공손수가 심사관들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이상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두 심사관의 표정은 좋은지 나쁜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앞에 놓인 종이에 무언가를 휙휙 휘갈기더니,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누었다.

공손수가 조금 초조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말했다.

"저, 심사관님. 아까 초식 하나를 중간에 깜빡 생략했는데, 기회를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펼쳐 볼 수...."

"불가합니다. 다음 지원자 올라오시오!"

"...."

자리에서 내려온 공손수는 땀이 줄줄 흐르는 이마를 소매로 닦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쉽지 않구나."

체력 시험은 간신히 턱걸이로 합격점을 넘었다.

내공은 오래전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먹어온 터라 자신이 있었다.

백 선생도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의 내공은 지원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입니다.

내공 시험은 물 항아리에 가득 찬 물을 내공으로 넘쳐흐르게 하는 것이었는데, 공손수는 보통의 학생들보다 몇 배는 많이 흘러내리게 했다.

하지만 문제는 방금 치르고 나온 마지막 외공 시험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특출한 재능이 있지 않은 한, 여러 초식의 형을 완벽하게 익히기엔 한 달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공손수는 천재가 아니었다.

'허어. 비무에서 한번 이겼다고 자만했던가.'

얼마 전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묘리를 살려 조막생과의 비무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것은 선공과 심리전이 어우러진 결과이지 공손수의 무공이 특출해서는 아니었다.

또한 백수룡이 공손수에게 가르친 검은 부드럽고 유연한 검이어서, 다른 학생들의 초식과 비교하면 다소 밋밋했다.

"끄응. 당당하게 합격하고 오겠다고 말했는데 떨어지면 부끄러워서 어쩌누.... 아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공손수는 스스로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불안한 생각을 털어냈다.

오전 시험은 이제 거의 막바지였다.

백 선생은 바쁘고, 위지천과는 조가 달라서 공손수는 한동안 혼자였다.

잠시 여유가 생긴 그는 잠시 다른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구경했다.

"하아아압!"

"타하앗!"

땀방울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는 젊은이들이 지금처럼 부러웠던 순간이 없었다.

탄력 있는 근육과 튼튼한 관절, 건강한 신체는 하늘이 내린 축복이었다.

"부럽구나. 부러워. 내 삼십 년만 젊었어도...."

잠시 후, 입관 시험을 총괄하는 매극렴이 내공을 담아 외쳤다.

"이것으로 오전 시험을 끝마치겠소! 지원자들은 한 시진 동안 휴식 후 다시 이곳에서 집합하시오!"

한 시진의 휴식이 주어졌다.

오전 시험을 끝낸 지원자들은 학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일제히 밖으로 나갔다.

공손수도 청룡학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점심은 백룡장 동기들과 모여서 함께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만나서 시험도 복기하고, 오후에 있을 실기대련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다.

[승상.]

청룡학관을 나서자마자 들려온 전음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표정이 굳은 공손수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누구...?"

전음 자체는 공손수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 어려운 기예가 아니지만, 그것이 들려오는 방향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상대가 기의 흐름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고수라는 의미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왼편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해를 끼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공손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했다. 목소리에서 무척 조심하는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가 날 부른 게요?"

공손수가 골목으로 들어서며 말을 걸자, 어둠 속에서 스르륵 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창천검왕 남궁제학이었다.

"저 남궁제학입니다. 전에 한번 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겠습니까?"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장면.

무림에서의 배분과 명성, 실력.

창천검왕이 이렇게까지 예의를 갖출 상대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 대협이셨구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까 대연무장에서도 알아뵈었는데.... 허허. 아는 척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해 주십시오."

공손수는 남궁제학의 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아는 자라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허! 정말 승상이셨군요."

오히려 남궁제학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몸이 편찮으셔서 요양 중이라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관무불가침이라는 말이 있지만, 남궁세가는 황궁에도 연줄을 대고 있었다.

그들은 막강한 무력과 자금력으로 여러 권력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공손수는 그런 남궁세가에서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였다.

'황제의 스승....'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하였으나, 공손수는 과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인 승상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는 현 황제가 어릴 때부터 이십 년 이상 보필했으며, 학문과 정신의 스승이기도 했다.

-승상은 어릴 적 돌아가신 선왕 폐하를 대신해 과인을 길러 준 마음의 어버이요. 다들 그리 아시오.

황제가 공공연한 장소에서 그리 말할 정도였으니, 공손수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운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를 시기한 정적들이 여러 번 암살을 시도했으나, 매번 살아남아 상대를 거꾸러뜨린 철혈의 재상이기도 했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모처에서 요양 중이라 들었는데....'

남궁제학의 의문 가득한 표정을 본 공손수가 허허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사실 이곳이 제 고향이지요."

"어째서 청룡학관 시험을...."

남궁제학의 질문에 공손수는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어린 시절 꿈이었지요. 죽기 전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허허. 주책인 건 알지만 너무 나무라진 마십시오."

"제가 어찌 감히 승상을 나무라겠습니까. 헌데, 실례지만 승상께서는 몸이...."

두뇌는 비상하지만 선천적으로 신체가 허약하고 탁기가 많이 쌓이는 체질이 있다.

공손수는 그런 체질이었고, 황제는 승상의 건강을 위해 직접 생사신의를 불러 침을 놓고 약을 지으라 명령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나날이 건강이 나빠져 몇 년 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들었거늘....'

저 생기로 가득한 얼굴을 보라.

앞으로 이십 년은 너끈히 정정하게 살 것 같지 않은가!

"고향이 내려오니 심신이 평화로워져서 절로 건강해지지 뭡니까. 허허허!"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남궁제학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캐물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헌데 무공은 언제부터 배우신 겁니까?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남궁세가에서...."

"허허. 운이 좋아 훌륭한 스승을 만나 배우고 있소이다."

훌륭한 스승이란 말에 남궁제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 혹시 그 스승의 이름을 알 수 있...."

그때였다.

"아 맞다니까! 아까 할아범이 저 골목으로 들어갔다고!"

"정말이에요?"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공손수가 곤란한 표정으로 남궁제학에게 말했다.

"남궁 대협. 죄송한데 자리를 좀 비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아이들은 내 신분을 모릅니다."

"...저 아이들이 누굽니까?"

"허허. 같은 스승 밑에서 무공을 배운 동기들입니다."

"예?"

"할아범!"

목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공손수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 또 뵙지요. 남궁 대협. 오늘 저를 본 것은 비밀로 해 주실 게지요?"

부드럽지만, 결코 부탁이라고 할 수 없는 눈빛에 남궁제학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 그럼 살펴 가십시오."

낯선 기척이 골목으로 들어오기 직전, 남궁제학은 공손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스르륵.

따로 은신술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남궁제학과 같은 고수에게 존재감을 감추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제학은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공손수가 말한 동기들이 누구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 청년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할아범! 역시 여기 있었네."

바로 헌원강이었다.

공손수는 벽 앞에서 바지춤을 추켜올리는 척을 하며 능청을 떨었다.

"허허. 소피가 급해서 잠깐 들어왔다. 마침 나가려던 참이었거늘."

"뭐야. 오줌 누러 온 거였어? 난 또 할아범이 골목으로 들어가 안 나와서 놀랐잖아."

"놀랄 건 또 뭐가 있느냐?"

"...조막생 같은 양아치가 또 있을지 어떻게 알아."

괜한 걱정을 했다며 입을 삐죽이는 헌원강의 등을 공손수가 껄껄 웃으며 두드렸다.

"내 원강 선배 덕분에 든든하다니까."

"젠장. 몇 번이나 말했거든. 원강이 아니라 강(强)! 외자라고!"

헌원강의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그 건방진 말투에, 숨어서 지켜보던 남궁제학이 눈을 부릅떴다.

'미친놈이구나. 삼대가 멸하고 싶지 않고서야 감히 승상에게 저리 오만불손한.... 으음?'

그 순간 남궁제학의 눈이 다른 의미로 커졌다.

가까이에서 본 헌원강의 탄탄한 육체에 절로 감탄이 나올 뻔했다.

아직 완성되려면 멀었으나, 대단한 잠재력이 느껴졌다.

'허어. 자질만 보면 천무학관에서도 찾기 힘든 아이로군.'

창천검왕 남궁제학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헌원강보다 조금 늦게, 위지천이 골목 안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그 선한 얼굴의 소년을 본 순간, 남궁제학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

아니, 실제로 벼락이 눈앞에 떨어졌어도 십존을 이처럼 놀라게 할 수는 없었다.

'어찌 이런...!'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은신이 깨져 망신을 당할 뻔했다.

위지천을 본 순간, 남궁제학은 한 자루 검을 떠올렸다.

'벌써 마음에 검을 품고 있다니.'

당장이라도 저 아이에게 검을 휘둘러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옆에 공손수만 없었다면, 분명히 그리했을 것이다.

"허허. 천이도 왔구나. 너도 나 때문에 온 게냐?"

"원강 선배님이 갑자기 먼저 뛰어가서...."

"강! 강이라고!"

"허허. 괜히 걱정을 끼쳐 미안하구나. 배가 고플 텐데 얼른 가자꾸나."

"그런데 흑영 누이는 어디 갔어요?"

"누굴 좀 만나고 오라고 보냈다. 오후 시험까진 돌아올 게야. 자자, 가자꾸나."

공손수는 두 소년의 등을 떠밀면서 서둘러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

세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나타난 남궁제학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셋이 동기라고?"

황제의 스승.

보기 힘든 재능을 가진 도객.

마음에 검을 품은 소년.

이 세 명의 스승이 한 명이란다.

"대체... 저들의 스승이 누구란 말인가."

남궁제학은 그 정체를 반드시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시각, 백수룡은 밥도 못 먹고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었다.##81화. 우리는 승상을고만고만해 보이는 나이대의 두 소년이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요!"

"웃기지 마! 네가 먼저 노려봤잖아!"

"너? 몇 살인데 반말이야, 이게!"

"열한 살이다! 넌 몇 살인데!"

우리가 오기 전에 벌써 한바탕했는지 둘 다 옷이 찢어져 있고, 입술이 터지고 얼굴에 멍까지 들었다. 객잔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너, 우리 아빠가 누군 줄 알아?"

"몰라! 그리고 우리 아빠가 더 세거든! 기다려, 우리 아빠 금방 올 테니까!"

"아닌데! 우리 아빠가 더 빨리 올 건데! 우리 형 시험 끝나면 바로 여기로 데려올 거거든!"

"우리 누나가 더 세거든!"

두 소년의 유치찬란한 대화는 기어이 아빠 엄마 형 누나까지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주변에서 느껴지는 민간인들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중재에 나섰다.

"두 사람. 일단 진정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난 정말이지 차분하게 대응하려고 했다고.

"아저씨는 빠져요!"

"사나이 대 사나이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요! 밖으로 나와! 생사결이다!"

"좋아! 내 검에는 눈이 없으니 조심하도록."

이 핏덩이들은 객잔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서, 감히 민간인들도 지켜보는 앞에서 살벌한 쇠붙이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성격이 보살이라도 이건 못 참지. 안 그래?

"형님. 참아요. 애들이잖아요...."

내 옆에서 악연호가 내 표정을 보고 말리려 들었지만, 나는 녀석의 팔을 뿌리치고 두 핏덩이를 향해 걸어갔다.

뭐 생사결? 검에는 눈이 없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희 지금 칼 뽑았지? 무림맹법 3조 5항, 시가지에서 병장기를 꺼내든 자는 무림맹에서 허가한 자격을 소지한 자에 의해 무력진압 후 관아로 이송할 수 있다. 따라서 본 강사는 너희들을 제압해 관아에 넘기겠다. 이해했나?"

"무슨...."

"뭐, 뭐라고?"

이해 못 해도 상관없었다.

두 핏덩이는 내가 무력을 행사할 명분을 줬고, 나는 기꺼이 사랑의 매를 들었다.

빠악! 빠악! 빠바박!

신명 나는 매타작에 두 핏덩이가 "악! 윽! 엑! 억!"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짧고 강렬한 훈육의 시간이 지나고, 무릎을 꿇은 두 핏덩이가 두 손을 귀 옆에 붙이고 울먹거렸다.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그때, 두 핏덩이의 아버지라는 인간들이 뒤늦게 객잔에 도착했다.

"감히 우리 아들을!"

"금쪽같은 내 새끼한테 무슨 짓이야!"

상황을 알아볼 생각도 않고, 무릎 꿇은 아들들만 본 두 중년의 사내가 눈이 뒤집혀서는 내게 달려들었다.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나는 악연호의 등을 떠밀었다.

"연호야. 저 양반들은 네가 상대해라."

목을 좌우로 꺾은 악연호가 앞으로 나서며 혀를 찼다.

"자식 교육을 이따위로 시켜 놓고.... 무림맹법 3조 5항에 의거! 당신들은 무기를 뽑았고.... 뒈졌다!"

기억이 나지 않는지 뒤는 대충 생략해 버리는 것 좀 보게. 악연호는 두 사내를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했다.

빠악! 빠바바박!

아까는 나 보고 참으라더니.... 저 녀석도 그동안 직장에서 쌓인 게 많았나 보다.

잠시 후, 우리는 두 부자를 사이좋게 포박해서 관아에 넘겼다.

청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네 명의 현행범을 인수했다. 오늘만 세 번째 보는 얼굴이었다.

"...오늘따라 자주 보는군."

"뜨내기들이 워낙 많이 모이니 사고가 끊이질 않아서 말이야. 수고해. 아마 또 올 거야."

그리고 돌아서서 관아를 나오는데, 악연호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형님. 그런데 진짜 그런 법이 있어요?"

"무슨 법?"

"무림맹법 3조 5항인가 하는 그거요. 시가지에서 무기를 뽑으면...."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악연호를 바라봤다.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디 있냐. 대충 지어낸 거지."

"...예? 왜 그런 거짓말을 해요?"

"저 핏덩이들이 그게 거짓말인 걸 어떻게 알겠냐. 일부러 겁 좀 준 거야. 그리고 주변에서 듣고 있던 다른 지원자 놈들한테도 경고가 되지 않겠냐."

"와, 하여튼 잔머리는...."

악연호는 감탄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뭘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래.

아무튼 잠시 후, 우리는 관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어디선가 고성이 들려왔다.

"뭘 꼬나봐!"

"지금 시비 거는 거냐? 한판 붙을까?"

"문답무용! 칼을 뽑아라!"

멀지 않은 곳에서 또 무림인들 간에 시비가 붙은 모양.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아무래도 오늘은 관아에 뻔질나게 드나들 것 같다.

동시에 한숨을 내쉰 우리는 소란의 근원지를 향해 경공을 펼쳤다.

* * *

사람이 많이 모이면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게다가 모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칼 찬 무림인이라면, 곳곳에서 유혈사태가 심심찮게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덕분에 지금 내가 이 고생 중이다.

입관 시험이 치러지는 동안 도시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무림맹과 관아의 병력이 다수 동원되었고, 청룡학관 임시강사들도 이 일에 동원되었다.

내가 악연호와 이인 일조를 이루어 오전 내내 순찰을 다닌 것은 그래서였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원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 형제, 친구들까지.... 하. 별의별 인간들이 사고를 다 치네요."

우리도 처음에는 문제가 일어나면 좋게좋게 말로 해결하려 했으나...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한 시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야만스러운 무림인들 때려잡는 데는 몽둥이가 제격이라니까!"

"어떤 새끼든 한 번만 걸려라! 본보기로 작살을 내줄 테니까!"

둘이서 고리눈을 하고 오전 내내 순찰을 돌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다. 당연히 우리도 지쳤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도 못 먹고 뭐 하는 짓이냐, 이게."

"맞아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도시에 사람이 워낙 많아서, 빈 객잔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리는 도시 외곽의 허름한 객잔을 찾아 겨우 들어가 앉았다.

허기를 반찬으로 소면에 만두를 와구와구 쑤셔 넣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우리는 음식을 추가로 주문한 후에야 잠시 한숨을 돌렸다.

"후우. 이제야 좀 살겠다."

"그런데 형님. 이번에 가르친 과외생은 어떨 것 같아요? 합격하면 만 냥이나 받기로 했다면서요."

악연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그렇고, 동료 선생들 중 누구도 백룡장에 와 본 적이 없었다.

흑영이 한 달 동안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어르신의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글쎄...."

나는 지금쯤 오전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공손수를 떠올렸다.

한 달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의욕만 가득할 뿐, 평생 무공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노인은 이제 무복이 제법 잘 어울렸다.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익혔다면 꽤 고수가 되었을지도.'

공손수는 허약한 신체를 타고났지만 그것을 극복할 오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가 부잣집에서 태어났거나 명문세가에서 태어났다면, 체질을 극복하고 무림에 이름을 떨칠 고수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뒤늦게라도 그의 재능을 깨워 준 것이었다.

다행히 몸 안에 영약의 약기가 가득했고, 몸 안의 탁기도 내가 제거해 줄 수 있었다.

-꼭 합격해서 청룡패를 가지고 돌아오겠네.

오늘 아침, 굳은살이 가득한 손으로 검파를 단단히 쥐며 말하던 공손수를 떠올리며 나는 웃었다.

"내 기준에선 이미 합격이야."

"...그럼 시험에서는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예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악연호를 바라봤다.

"뭔 소리야. 내 기준이 얼마나 높은데."

나는 점소이가 새로 내온 요리에 열심히 젓가락질을 뻗었다. 악연호도 질세라 젓가락 신공을 발휘했다.

"다른 한 명은요? 위지천인가. 걔에 대한 소문은 벌써 어마어마하던데."

"천이? 걔는 걱정 없지. 실력만 보면...."

틀림없는 수석이다.

아직 정서적으로 조금 불안한 면이 있지만, 그건 시간이 더 필요한 부분이다.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심마에 의한 주화입마는 어떤 일을 계기로 다시 도질 수도 있고, 극복해서 깨달음을 얻어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위지천은 지금 심마를 극복하는 과정에 있었다.

녀석의 마음속에 있는 검이 신검(新劍)이 될 수도, 잘못하면 마검(魔劍)이 될 수도 있었다.

"언젠가는 천하제일검이 될 녀석이야."

"네네. 제자 사랑이 아주 남다르십니다."

악연호는 내 말이 허풍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고 봐라, 인마. 나중에 나한테 서명 한 장만 받아 달라고 부탁하게 될 테니까.

잠시 후,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하면 대련 시험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후에 교대시켜 준다고 했으니까."

"그것도 운이 좋아야.... 음?"

그때, 나는 객잔의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흑영?'

주변에 공손수나 위지천, 헌원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흑영의 옆에는 처음 보는 사내가 말없이 걷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인상의 중년 사내였는데, 내 시선은 그의 걸음걸이와 부자연스러운 오른팔에 머물렀다.

'상당한 고수. 흑영과 같은 무공을 익혔고, 오른팔은 의수.'

나는 버릇처럼 상대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정리하고 그 주변도 살폈다.

"형님? 어딜 그렇게 봐요? 예쁜 처자라도 발견했어요? 혹시 저기 검은 옷 입은 사람?"

정확히 손가락으로 흑영을 가리키는 악연호의 촉도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자식은 진짜....

"연호야. 너 혼자 순찰 좀 돌고 있어라."

"예?"

"난 잠깐 어디 좀 갔다 와야겠다."

"갑자기 어딜요?"

흑영과 사내의 모습이 인파에 파묻히고 있었다. 나는 악연호의 어깨를 툭 치고 말했다.

"확인만 하고 금방 올게."

"땡땡이치다가 학생주임 선생님한테 걸리면.... 형님? 형님!"

나는 뒤에서 부르는 악연호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흑영과 사내의 뒤에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따라붙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불행하게도 이런 식의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지하로 연결된 건물로 들어갔다.

나는 멀리서 기척을 숨기고 그 건물을 관찰했다.

스르륵. 스르륵. 스르륵.

두 사람이 들어간 건물 주변에, 살수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서 회동이라도 하는 건가."

하나같이 상당한 경지의 살수들 십여 명이 흑영이 들어간 건물을 포위했다.

'아무리 봐도....'

내 생각에는 저들이 흑영에게 호의적일 것 같지 않았다.

* * *

"오랜만이구나."

"예. 스승님."

흑영은 탁자를 두고 마주 앉은 사내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사내는 그녀에게 무공을 가르친 스승이자, 한때 속했던 조직의 직속상관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무영(無影)이라 불렀다.

"승상께서 밀서의 내용에 대해 알려 주셨느냐?"

"어르신께서 황궁으로 가시는 동안 천영이 호위를 담당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천영(天影).

하늘의 그림자라는 뜻으로, 금의위에 속한 정보 조직이었다.

그들은 잠입, 암살, 요인 경호, 서류로 남기기 힘든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했다.

흑영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그곳 소속이었다.

"내일 바로 움직일 것이다.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네 실력이라면 어련히 깔끔히 처리했겠지. 따로 확인은 하지 않겠다."

흑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영이 피식 웃었다.

"몇 년 만에 얼굴이 좋아졌구나. 표정이 생겼어."

"...어르신 덕분입니다."

흑영은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다. 무영은 과거의 제자를 떠올리며 웃었다.

"너는 내가 키운 최고의 살수였다."

그녀는 스승을 뛰어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재능을 활용해 수많은 임무를 성공시켰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준비를 했거늘.

"지금 네 모습은 살수로서는 실격이다. 하지만 너는 더 이상 천영 소속이 아니니, 네 변화를 탓하고 싶지 않구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뎌질 줄이야."

"...예?"

그 순간, 흑영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표정을 굳혔다.

그의 스승 무영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승상을 죽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조금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82화. 눈을 감아도 되고'독!'

흑영은 방 안에 퍼진 독기를 알아차린 순간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미 미량의 독기가 체내에 침투한 뒤였다.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던 그녀의 이마에서 벌써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무영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지독한 독이지. 너라도 해약 없이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대체 왜...."

무영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역시 무뎌졌구나. 예전의 너였다면 독이 퍼지기 전에 대처했을 것이다. 내가 그리 반가웠느냐?"

"...."

흑영은 조용히 무영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살수는 그 어떤 순간에도 동요해선 안 된다.

눈앞의 사내가 그녀에게 가장 먼저 내린 가르침이었다.

"역모...입니까?"

자신을 바로 죽이지 않고 독을 풀어 제압했다.

그것은 곧 대화의 의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흑영에게도 상황을 좀 더 파악하고 독을 몰아낼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무영도 흑영의 그런 생각을 모르지 않았다.

"역모라니.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느냐. 승상을 죽이는 것이 어째서 역모가 되는 거지?"

"승상께서는 황제폐하의 스승이십니다. 폐하께서는 그분을 당신의 어버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것이 문제다."

무영은 탁자에 놓인 차를 느긋하게 마셨다.

그 동작은 얼핏 빈틈투성이처럼 보였지만, 흑영은 섣부른 도박을 하지 않았다.

"승상은 폐하께서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필하며 눈과 귀를 대신했다. 폐하를 등에 업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누렸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수많은 충신을 죽였다."

"...왜 그런 헛소리를 하십니까."

흑영은 무영의 말이 헛소리라고 단언했다.

공손수는 평생을 국가와 황제를 위해 일한 충신이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의 권력만 생각하는 인간이었다면, 오랜 황궁 생활로 심신에 병이 들어 고향으로 요양을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헛소리라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승상에게 죽은 자들 중에 충신이 단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금의위의 정보 단체인 '천영'은 황궁에서 일어나는 온갖 더러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권력자들의 실체와 그들 간의 알력다툼, 차마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지저분한 사건들.

흑영이 아는 것만 해도 진저리가 처질 정도인데, 조직의 수장인 무영이 아는 정보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승상은 무서운 권력자다. 하지만 보기 드물게 존경할 만한 권력자이기도 하지.

과거에 그렇게 말했던 무영이, 지금은 승상을 간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흑영은 이 상황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편안히 말년을 보내다 얌전히 죽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슨 말을...."

무영이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진짜라서 더욱 소름끼치는 그런 웃음.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그가 확언하듯이 말했다.

"승상의 병이 악화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폐하께서 총기를 되찾으셨으나, 승상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폐하께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 하셨지. 이에 많은 충신들이 승상의 복귀를 걱정하였다."

"설마...."

무영을 바라보는 흑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주 보고 있는 무영의 두 눈에서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그것은 황궁의 그림자로 활동하며 수없이 본, 권력을 향한 욕망이었다.

무영의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에는 비열한 미소가 맺혔다.

"충신들이 내게 부탁하길, 황제 폐하께서 다시 승상의 꼭두각시로 전락할까 염려된다고 하더구나."

"...폐하의 그림자가 간신들과 결탁해 권력을 탐하기로 했습니까. 그게 역모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흑영은 질문을 하며 몸 안의 독기를 한곳으로 모았다.

임시방편이었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여전히 식은땀을 흘리고 손가락을 떨었다.

무영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평생을 권력의 꼭두각시로 살아왔다. 어째서 나는 권력을 누리면 안 된다는 말이냐."

그 말에서 느껴지는 광기에 흑영은 흠칫했다.

그녀는 지금껏 무영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살수에 가장 어울리는 사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만약 이 일에 금의위 전체가 연관돼 있다면....'

소름끼치는 생각이 든 흑영은 무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서 질문했다.

"천살(天殺)께서도 이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그 말에 무용의 표정이 다소 굳었다.

"...허락이라? 너도 천살이 내 위에 있다고 생각하느냐?"

예리한 살기가 목덜미를 훑었으나, 흑영은 오히려 안심했다.

'천살은 이 일을 모른다. 즉, 금의위는 저들에게 넘어가지 않았단 거야.'

천살은 금의위의 수장이자 최고수였다.

10년 전, 환영마군과 독안마군이라는 두 악인이 있었다. 둘은 의형제로, 관아를 습격해 재물을 훔치고 황제를 모욕하는 글귀를 남기길 여러 차례 반복했다.

관의 요청을 받은 무림맹의 고수들이 두 악인을 척살하려 했지만, 두 악인의 무공이 너무나 고강해 오히려 추살대로 보낸 정파의 고수들이 몰살을 당했다.

그때 두 악인 앞에 나타난 것이 관복 차림의 한 사내였다.

-황명이다. 이 자리에서 너희를 즉참하겠다.

관복의 사내는 자신을 비웃는 환영마군과 독안마군을 십 초 만에 죽이고, 그 목을 잘라 한 달 동안 효시했다.

그 후로 사내는 천살이라 불리게 되었고,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십존의 일인이 되었다.

'천살께 이 일을 알려야 한다. 그럼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어.'

흑영은 속으로 결심하며 은밀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두 팔 정도는 이곳에 떼어 놓고 갈 각오를 했다.

최소한 그 정도의 각오 없이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테니까.

그때 무영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흑영. 너에게도 살 기회를 주마."

작은 목함이었다. 뚜껑을 열자 은은한 향이 나는 약재가 담겨 있었다.

"승상의 탕약은 매일 네가 직접 달인다고 들었다. 이것을 달여 승상에게 먹여라."

이 약재가 보약이 아니라는 것쯤은 바보도 알 수 있었다.

흑영이 얼음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제게, 어르신께 독을 먹이란 말입니까? 제 손으로 그분을 죽이라고요?"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다. 어차피 얼마 전까지 앞으로 몇 년 살지 못할 거란 소리를 듣던 노인이다. 내일 아침에 심장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지."

"...."

흑영은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목함을 바라봤다.

그녀가 고민 중이라고 생각했는지, 무영이 한결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도 승상이 너를 아끼는 것을 안다. 그러니 너는 무사히 풀려날 것이다."

"...."

"이번 일만 끝나면 네게 완전한 자유를 약속하마. 승상이 네게 부귀영화를 약속했겠지. 하지만 그것을 약속할 수 있는 이는 승상뿐만이 아니다."

무영은 또 다른 목함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안에는 시커먼 독단이 들어 있었다.

"삼켜라. 그리고 돌아가서 탕약을 달여 오늘 밤 승상에게 먹여라. 시체를 확인하면 바로 해약을 줄 것이다."

"...."

흑영은 무영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독단을 삼키는 순간, 그녀는 다시 천영이란 목줄이 매인 개가 될 것이다.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음을 택할 것이냐?"

어차피 흑영에게 다른 방법은 없기에 무영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흑영은 지금 중독된 상태인 데다가, 더 이상 과거에 그가 알던 냉혹한 살수도 아니었다.

'감정을 느끼게 된 살수는 자기 목숨을 아까워하게 되지. 흑영. 너는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영은 잘못 알고 있었다.

흑영이 감정을 느끼게 된 이유, 살수로서 무뎌진 이유가 공손수의 개인 호위가 되면서 나태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하지만 흑영은 부귀영화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지난 수년 동안 단 하루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공손수라는 노인에게 깊은 정이 생겼다.

"어르신을 배신하느니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제 공손수는 그녀에게 받들어 모셔야 할 승상이 아닌, 유일한 가족이었다.

목숨을 걸어 지켜도 아깝지 않을 가족 말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와 동시에 흑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소매에서 암기가 발출됐다.

파바바박!

암기는 둘 사이에 있던 탁자에 꽂혔다. 무영은 탁자를 세워 암기를 막음과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기습은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흑영은 당황하지 않고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갔다.

흑영의 서슬 퍼런 기세를 본 무영이 혀를 찼다.

"이게 네 대답이라니. 실망이구나."

그 순간 천장에서 네 명의 살수가 흑영에게 떨어졌고, 바닥에서 둘이 솟구쳤다.

순식간에 여섯의 살수에게 포위된 흑영은 양손에 단도를 꺼내어 쥐고, 천영의 독문무공인 암영류를 끌어올렸다.

스스스슷....

그녀의 몸이 안개에 휩싸여 사라질 듯 흐릿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살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같은 무공을 익혔고, 서로 안면도 있는 사이였다.

'천영의 정예를 모두 데려왔구나.'

놀랄 시간도 없었다. 흑영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칼날을 피하고 쳐 내기 바빴다.

까가가가강!

공손수의 개인 호위가 되기 전에도, 그녀는 무영을 제외하곤 천영에서 최고수였다. 흑영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에는 '일영(一影)'이라 불렸다.

그만큼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그녀였지만, 그녀를 포위한 살수들 역시 모두가 실력자였다.

게다가 독과 함께 준비된 함정까지.

흑영은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멀리 물러나서 지켜보고 있던 무영이 말했다.

"죽이지는 마라. 천천히 한 번 더 설득해 볼 것이다."

물론 두 번째 설득에는 고문과 미약 등이 동원될 것이다.

"쿨럭...."

흑영은 처절하게 싸웠다. 점점 늘어나는 출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독기에 피부가 시커멓게 변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었다. 활로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전장을 주시했다.

'아직 아니야.'

천영의 살수들은 지독했다. 여섯의 살수 중 셋을 죽였지만, 죽어가면서 누구 하나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독하기로는 흑영이 한 수 위였다.

"...지독한 것."

무영은 악귀처럼 싸우는 흑영의 모습에 질린 표정이었다.

승상의 개인 호위가 되어 떠난 후 무공 수련을 게을리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5년 전보다 더 강해졌다.

만약 그녀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무영은 섬뜩한 생각에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하지만 여기까지구나."

털썩.

결국 흑영의 무릎이 꺾였다. 죽은 살수의 자리는 다른 살수가 채웠고, 쌓여 가는 상처에 육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흑영의 정신은 아직 또렷했다.

'오른팔은 더 이상 못 쓴다. 그렇다면 차라리....'

흑영은 몸에서 힘을 풀었다.

무영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오른팔을 미끼 삼아 내주고 그의 목을 칠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통할지 안 통할지 모르지만....'

아니, 통해야만 한다.

최소한 무영이라도 죽여야 놈들의 계획이 일그러질 것이고, 어르신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아직 포기를 못 했구나."

하지만 무영은 흑영이 정해 놓은 사선 밖에서 멈춰 섰다. 살수의 예리한 감각이 발동한 것이다.

무영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혈도를 짚어라."

사방에서 날아온 지풍이 그녀의 마혈을 짚어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그리고 살수 한 명이 다가와 그녀를 뒤에서 제압했다.

입도 뻥긋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무영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르신....'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이제야 겨우 삶에 행복을 찾은 어르신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했다.

...겨우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더 이상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분했다.

-허허. 네가 시집가면 내가 참으로 서운할 게야.

어쩌면 그런 날이 정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이 오면, 아버지 역할을 해 달라고 졸라 볼 생각이었는데.

"...우는 거냐? 흑영 네가?"

무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해서 흘러나온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가린 탓에, 흑영은 그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어서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역시 따라오길 잘했네."

"!!"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살수들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먼저 검기가 날아왔다.

촤아아아악!

흑영을 뒤에서 제압하고 있던 살수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살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빈틈을 틈타 한 줄기 바람이 흑영에게 불어왔다.

"괜찮아?"

흑영은 자신의 앞을 막아선 사내의 등을 멍하니 올려봤다.

"누구냐!"

무영은 처음 보는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푸른 장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얼굴이 창백한 미남이었다.

그의 검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그의 푸른 장포와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사내가 삐딱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말하면 니들이 알아?"

"...밖에 살수들이 경계하고 있었을 텐데.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 백수룡은 검을 들어 무영을 겨눴다.

"당연히 다 죽이고 들어왔지."

흩어졌던 살수들이 그를 포위하며 거리를 좁혀왔지만 백수룡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는 고개만 살짝 돌려 뒤에 있는 흑영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보는 건 못 본 거로 해. 아예 눈을 감아도 되고."

"...."

흑영은 백수룡이 시키는 대로 눈을 꼭 감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백수룡의 검에 핏빛 검기가 휘몰아쳤다.##83화. 차라리 우리가무영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천영은 그가 10년 이상 키워 온 정보 조직이자 살수 조직이었다.

황궁의 조직이었기에 무림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무림의 삼대 살수 조직과 비교해서도 그 역량이 부족하지 않다고 자부해 왔다.

그런 천영의 살수들이, 단 한 명의 사내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촤아아악-!

살수 한 명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비스듬히 잘린 몸에서 내장과 피가 쏟아졌다.

퍼억!

백수룡은 그 시체를 걷어차 옆에서 덤벼든 다른 살수에게 밀었다.

시야가 가로막힌 살수의 움직임이 잠시 굳었다.

그 순간 전광석화처럼 달려든 백수룡이 시체와 살수를 함께 꿰어 버렸다.

푸욱!

배가 꿰뚫린 살수가 입술을 살짝 벌리고 독침을 쏘았다. 지독한 훈련을 받은 살수답게, 죽어가는 순간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암기를 발출한 것이다.

하지만 백수룡은 고개를 옆으로 젖히는 것으로 간단히 독침을 피했다.

동시에 검을 옆으로 당겨서 살수의 허리를 완전히 끊어내고, 몸을 돌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다른 살수를 향해 좌장을 뻗었다.

퍼어엉!

북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떨어지던 살수가 벽에 처박혔다.

백수룡은 상대가 튕겨 나가면서 손에서 놓친 검을 왼손으로 잡았다.

그가 검의 무게를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흠. 쌍검은 오랜만인데."

잠시 후, 그를 상대하는 살수들은 속으로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오랜만이라면서, 백수룡은 좌우의 구분이 의미가 없을 만큼 능숙하게 쌍검을 휘둘렀다.

핏빛 검기가 너울너울 춤을 췄다.

쌍검을 들고 검무를 추는 백수룡의 모습은 넋을 놓고 볼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검무가 이어질 때마다 누군가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코를 마비시키는 피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살수들이 잠시 공격을 멈추자, 백수룡이 웃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살수가 무서운 건 모르고 있다가 기습을 당할 때지, 미리 알고 있으면 별것 아니거든. 자, 이번엔 내가 간다."

그리고 달려드는 백수룡.

놀랍게도 그의 옷에는 아직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았다.

무영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음했다.

'저자.... 무공도 무공이지만, 살인에 익숙하다.'

어지간한 사파의 무인들도 이 정도로 시체가 쌓이고 피 냄새가 진동하면 역겨워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사내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살수들보다도 살인에 무감각하고, 검을 휘두르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히려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무영은 이를 악물며 암영류를 끌어올렸다.

더 이상 살수들을 소모시켰다가는 천영이란 조직의 존립 자체가 위험했다.

스스슷....

무영의 몸이 주변에 동화되며 서서히 흐릿해졌다. 동시에 다른 살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빈틈을 만들어라. 내가 끝내겠다.]

[[존명!]]

동귀어진을 각오한 살수들이 전후좌우, 그리고 천장에서 백수룡을 노리고 동시에 덤벼들었다.

공간이 비좁아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방해했지만 살수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은 미끼일 뿐, 마무리는 무영이 할 테니까.

푹푹푹푹!

좁은 공간에 억지로 동시에 달려든 살수들의 미간과 심장에 칼이 꽂혔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임무를 완수했다.

꽈악....

죽어가면서도 두 손으론 검날을 붙잡고, 몸으로 백수룡의 시야를 방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틈으로,

무영이 유령처럼 파고들었다.

"조심해요! 다른 살수들의 공격은 미끼예요!"

흑영이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백수룡이 살수들과 싸우는 동안 그녀도 가만히 눈만 감고 기다리지는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 스스로 혈도를 풀었다.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진짜 공격은 무영이에요!"

"늦었다."

스르륵.

흐려졌던 무영의 모습이 다시 나타난 곳은 백수룡의 등 뒤였다.

그가 백수룡의 등에 검을 꽂으며 싸늘하게 웃었다.

"끝이다."

찢어진 푸른 장포가 허공에 펄럭였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곳에 없었다.

"끝이라고?"

"!!"

눈을 부릅뜬 무영이 급히 몸을 뒤로 돌리며 왼팔을 뻗었다.

장포를 벗어던진 백수룡이 그곳에 서 있었다.

"이게 끝이지."

우드득!

백수룡은 무영의 왼팔을 잡아서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어 버렸다.

그러나 팔이 꺾였음에도 무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독기 가득한 미소가 맺혔다.

"흐흐. 걸려들었구나."

왼팔을 먼저 뻗은 것은 무영의 노림수였다. 왼팔이 꺾이는 동안, 한 박자 늦게 뻗은 오른팔이 백수룡의 가슴을 겨냥했다.

흑영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조심해요! 무영의 오른팔은...."

그 순간 무영의 오른팔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손바닥이 열리고 강침 수십 개가 발사됐다.

"어디 이것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나불대 봐라!"

이것이 무영이 가진 마지막 비장의 수!

무영은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잠시 후면 백수룡은 강침에 수십 개의 구멍이 난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다시 들려온 백수룡의 목소리는 무영을 절망에 빠뜨렸다.

"의수? 당연히 알고 있었지. 강침인 것까진 몰랐지만."

조롱 섞인 웃음소리와 함께, 백수룡의 신형이 다시 흐려졌다.

'잔상!'

파바바박!

백수룡은 잔상이 흩어지고, 잔상을 꿰뚫은 강침은 전부 벽에 틀어박혔다.

촤아아악!

무영의 옆으로 돌아선 백수룡은 무영의 의수를 어깨에서부터 베어 버렸다. 중심을 잃은 무영이 비틀거렸다.

툭.

어느새 무영의 목에 차가운 검날이 닿아 있었다.

"더 보여 줄 거 없으면 그만하지? 오후 시험 전에는 돌아가야 하거든."

그 압도적인 실력 차에, 무영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 * *

"어르신이 승상이라고?"

흑영에게 자초지종을 듣게 된 백수룡은 입을 떡 벌렸다.

공손수가 대단한 신분일 거라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승상이었을 줄이야.

승상이라면 황제를 제외하곤 이 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아닌가.

"그... 내가 한 달 동안 뭐 실수한 건 없지?"

"첫날부터 말씀드릴까요?"

"커, 커흠!"

흑영은 헛기침을 하는 백수룡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모습이 방금까지 무표정하게 살수들을 도륙하던 사내가 정말 맞나 싶었다.

하지만 흑영의 표정은 금세 다시 굳었다.

"어르신이 위험해요."

공손수를 죽이기 위해 황궁의 정보 조직이 동원되었다.

그들은 황제와 공손수가 나눈 밀서를 훔쳐보았고, 승상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간신들과 결탁했다.

'무영은 나를 회유해 어르신을 죽인 후 자연사로 위장하려고 했어. 하지만....'

황궁의 그 야차 같은 권력자들이 천영만 믿고 이만한 일을 도모했을까?

실패하면 반대로 자신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는 도박을?

흑영의 걱정은 괜한 기우가 아니었다.

"큭큭...."

포박당한 채 무릎 꿇려진 무영이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백수룡을 올려다봤다.

"이제야 누군지 알아보겠군. 백수룡. 승상에게 헛바람을 넣어 무공을 가르친 무공 강사...."

"누가 헛바람을 넣었단 거야. 어르신이 먼저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했다고."

백수룡은 사실을 정정해 주었으나, 무영은 백수룡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흐흐. 설마 이 정도의 고수였을 줄이야.... 흑영만 경계한 것이 내 판단 착오였군."

"무영. 어르신을 죽이러 온 살수들은 당신들이 전부냐?"

흑영의 서슬 퍼런 눈빛에도 무영은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이 나라 권력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역시...! 누가 또 동원되었지?"

다급해진 흑영이 무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무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아남아도, 결국은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림 삼대 살수 조직이 모두 동원되었다."

"!!"

무영이 흑영에게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은, 자신의 계획을 망친 자들을 더 큰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흑영아. 내 제안을 듣는 것이 승상이 가장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무림의 살수들이 나처럼 승상을 배려할 것 같으냐.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

"내가 실패했다는 것은, 승상이 자신이 노려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큭큭. 이제 황궁의 권력자들에게도 뒤가 없어. 그들은 어떻게든 황제가 알기 전에 승상을 죽여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을 테니까...."

"...."

"이제 상황 파악이 되느냐? 내가 그들에게 붙지 않았어도 승상은 결국 죽을 운명이었다. 멍청한 년. 네년이 순순히 내 말만 들었어도...!"

빠악!

무영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백수룡이 주먹에 묻은 피를 털며 중얼거렸다.

"에이 씨, 피 묻었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무영은 백수룡을 노려보며 저주를 퍼부었다.

"곧 내가 실패한 걸 알게 된 살수 조직들이 움직일 것이다. 승상은 결코 오늘을 넘기지 못해. 그리고 그건 너희도 마찬가지다!"

무영은 미친놈처럼 키득키득 웃었더니, 갑자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곳 지부대인의 목도 날아가고 청룡학관이 불탈 것이다. 승상이 죽었으니 책임을 물어야지. 권력자들이 살수로 누굴 지목할 것 같으냐? 예순이 넘은 노인에게 무공을 가르친 놈, 그걸 받아준 학관, 그걸 방치한 관아.... 엮는 것쯤은 아주 간단한 일이야! 크하하하하!"

무영의 광소가 시체와 피로 가득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임무에 실패하고, 살길이 없음을 깨달은 그는 미쳐 버렸다.

"유언 잘 들었다."

서걱.

백수룡이 휘두른 일검에 무영의 목이 잘렸다.

"그래서."

데구루루 바닥을 구르는 목을 일별한 백수룡이 흑영에게 물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많이 심각해 보이는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승상이 죽으면 청룡학관이 불타고 관련된 자들은 전부 잡혀가 죽을 거라니.

최악의 상황이라도 한 몸 빼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의 모든 기반이 이곳에 있었다.

"...살수들로부터 어르신을 지켜야죠. 동시에 황제 폐하께 연락을 취해야 하고요."

그렇게 말한 흑영은 죽은 무영의 품을 뒤져 해독약을 찾아 삼켰다.

"관군은 믿을 수 있어?"

"이 상황이라면... 이미 저쪽에 넘어갔을 확률도 있어요."

"어르신이 숨을 만한 은신처는?"

"제가 아는 곳은 천영이 이미 다 파악하고 있어요."

백수룡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관도 믿을 수 없고, 숨을 곳도 없다 이거지. 황궁에 은밀히 연락을 취할 방법은?"

"가능해요. 하지만 저쪽에서 상황을 알아차리고 조치를 취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예요."

"얼마나?"

"길면 며칠...."

즉, 그때까진 살수들의 위협으로부터 공손수를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절망스러운 이야기였지만, 백수룡은 의외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해 보자고. 일단 여기부터 나가면서 얘기하자."

두 사람은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청룡학관 입관 시험은 중지해야겠어요. 우선 저희가 어르신의 신병을 확보하고...."

"잠깐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백수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입관 시험은 그대로 가자."

"네? 어르신을 그 많은 사람들 앞에 노출시키자고요?"

흑영이 반대했지만, 백수룡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어르신을 꽁꽁 싸매며 보호하면 살수들도 쉽게 덤비진 않을 거야. 대신 온갖 지저분한 방법을 쓰겠지."

독, 암기, 폭약, 지인을 볼모로 잡아 협박하는 등.

백수룡의 머릿속에서만 벌써 여러 가지 방법이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놈들의 선택지를 간단하게 좁혀 주는 게 나아."

그것은 흑영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백수룡이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어르신을 미끼 삼아 살수들을 끌어들이고, 우리가 놈들을 사냥하자."

그렇게 말하는 백수룡의 두 눈이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빛났다.##84화.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알겠습니다."

공손수를 미끼로 삼아 살수들을 사냥하자는 말에, 격렬하게 반대할 줄 알았던 흑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수룡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설득하기 꽤 힘들 줄 알았는데."

"어르신에겐 죄송하지만... 살수 교육을 받은 제가 생각해도, 그 방법이 지금으로선 가장 효율적이에요."

오히려 흑영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녀가 아는 백수룡은 정파인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정파 무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토록 살수들의 심리를 잘 안단 말인가.

'게다가 조금 전의 싸움에선... 무공 실력을 떠나 사람을 베는 데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어.'

여러 가지 의문이 솟구쳤으나 지금은 자세히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백수룡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학생을 가르치려면 뭐든지 잘 알아야 하는 법이거든."

"그렇게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 더 묻진 않을게요."

두 사람은 건물을 빠져나왔다.

백수룡이 안으로 진입하기 전에 주변의 살수들을 미리 처리한 터라, 주위에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저는 당장 황궁에 은밀히 연락을 취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아 볼게. 우리 둘이서 모든 살수를 모두 막는 건 아무래도 무리니까. 시간은 얼마나 있지?"

아직은 천영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다른 살수 조직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길어 봤자 한 시진. 그 안에 천영의 살수들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이 다른 살수들에게 알려질 겁니다."

즉, 한 시진 안에 공손수를 지키고 살수들을 사냥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본 백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빨리 움직이자고."

"알겠습니다. 그럼...."

곧바로 떠나려던 흑영이 멈춰서서 백수룡을 바라봤다.

"...어르신에겐 이 모든 사실을 바로 알릴까요?"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옛날 같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모든 사실을 어르신에게 고했겠지만, 지금의 흑영은 그때와 달랐다.

지금의 흑영은 단순히 공손수의 신변을 지키는 호위가 아니라, 아버지의 꿈을 응원하는 딸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대련 시험이 끝난 뒤에 말씀드릴까요?"

백수룡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고. 어르신이 안다고 뭐가 크게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당장은 시험 말고 다른 것에는 신경 쓰게 하지 말자."

그리고 어르신이 모르는 쪽이 미끼로서 움직임도 자연스러울 테고 말이야, 라고 말하며 백수룡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흑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척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백수룡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그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황궁에 연락을 취한 후에 바로 청룡학관으로 찾아가겠습니다."

흑영은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멀어졌다.

백수룡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일단... 청룡학관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부터 설득해야겠지."

그런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백수룡의 표정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상대의 반응이 벌써부터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 * *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게냐?"

매극렴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하나뿐인 외손주를 바라봤다. 그의 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이놈이 순찰 임무를 보냈더니 한 시진 가까이 늦게 와놓고는, 변명이랍시고 한다는 말이....

매극렴의 두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뭐? 승상? 살수? 청룡학관이 불타고 줄줄이 잡혀가? 네놈이 나를 놀리는 게냐!"

검만 뽑아 들지 않았을 뿐이지, 그는 앞에 있는 백수룡을 당장 찜쪄먹을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늦었으면 죄송하다고 사과부터 할 일이지. 어디서 술을 처먹고 와서 대낮부터 헛소리를 늘어놓는 게야!"

"하, 할아버님. 헛소리가 아닙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전부 사실이라고요!"

"네놈이 정녕 매운맛을 봐야...!"

당장 검을 뽑으려던 매극렴이 멈칫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백수룡의 몸에 밴 피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어서 소매 끝자락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고, 검집과 검파에 휘두른 흔적들도 보였다.

"설마...."

검객의 예리한 눈은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매극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냐?"

"전부 사실입니다. 모자라면 모자랐지, 과장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백수룡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평소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도 능글맞게 굴던 얄미운 손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매극렴은 비로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했다.

"허. 대체 무슨...."

"시간이 없습니다. 곧 살수들이 승상을 노리기 시작할 겁니다. 그 전에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

"할아버님."

백수룡의 나직한 부름에, 잠시 침묵하던 매극렴이 어렵게 입을 뗐다.

"계획이 있느냐?"

"예. 일단 사람들을 몇 명 불렀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악연호, 명일오, 제갈소영, 그리고 흑영이 도착했다.

"형님?"

"갑자기 급한 일이라고 부르시면...."

"정말 중요한 일 아니면 저 바로 돌아가야 해요. 남궁 선생님께 말도 안 하고 몰래 빠져나왔다고요."

다들 갑작스러운 호출에 불만스러워하는 가운데, 백수룡이 상황을 전달하자마자 모두 뒤집혔다.

"거짓말!"

"이런 미친...."

"노, 농담하시는 거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으나, 차분하게 설득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짝!

손뼉을 쳐서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백수룡이 빠르게 말했다.

"입관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승상을 살수들로부터 지켜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역으로 승상을 노리는 살수들을 사냥할 겁니다."

백수룡은 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 기세에 감히 토를 달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자리에는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모았습니다.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승상을, 청룡학관을 지킬 수 있습니다."

"...."

더 이상 백수룡은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에는 얄밉고 능글맞은 말과 행동으로 종종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그지만, 한 번씩 보여 주는 진지한 모습에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악연호가 자신의 창을 단단히 움켜쥐며 말했다.

"저희가 뭘 하면 돼요?"

"우선은...."

백수룡이 빠르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의 계획을 뼈대로, 종종 흑영이나 매극렴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계획을 보충해 나갔다.

그때 제갈소영이 소심하게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이면 관주님께도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백수룡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고민해 봤는데. 관주님께는 말씀드리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요?"

"그분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요. 움직였다간 적들이 바로 눈치를 챌 겁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것이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노군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청룡학관주 노군상은 분명 대단한 고수이고 평소에 백수룡에게 호의도 가지고 있지만, 백수룡은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교육과 정치는 완전히 다른 문제거든.'

게다가 위치가 위치인 만큼, 황궁의 권력자들과 끈이 닿아 있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노군상이 어떻게 나올지, 백수룡으로서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그 옆에 있던 남궁제학도 의심스럽고.'

남궁세가는 과연 이 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까?

만약 모르고 있다고 해도, 오대세가 중 누구보다 권력과 친한 가문인 그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 않을까?

지나친 추측일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지금은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소수정예가 훨씬 낫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흑영까지 그렇게 말하자 제갈소영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매극렴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여기 있는 여섯 명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의 전부로군."

"아뇨. 한 명 더 있습니다."

백수룡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한 명이 더 있다고?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누굴 말하는 게냐?"

"평소에는 좀 못 미더운 녀석이긴 한데...."

백수룡은 지금 공손수의 옆에 있을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이번 기회에 밥값이나 좀 시키려고요."

* * *

"끙...."

"원강 선배. 왜 아까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인가?"

"내, 내가 뭐. 내 표정이 어때서. 똥? 똥 마렵냐고? 안 마려운데? 화장실 안 갈 거거든?"

"...헛소리하는 걸 보니 정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겐가."

"아, 아프긴 누가 아파! 할아범 몸 걱정이나 해!"

"내 몸은 왜?"

"선배님. 정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아까 차 마시다가 뿜은 것도 수상쩍고 말이야. 선배. 우리끼리만 있으니 그냥 솔직하게 말해 보게. 조금 전부터 주위를 힐긋힐긋 둘러보는 걸 보니.... 이 안에 마음에 드는 처자라도 있나?"

짓궂게 웃으며 묻는 공손수의 말에 헌원강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무것도 아냐. 신경 끄고 둘 다 시험 걱정이나 하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사람의 말에 헌원강은 평소처럼 툴툴댔다.

하지만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다.

'갑자기 살수라니! 미쳤냐고!'

셋이서 밥을 먹고 차를 한잔하던 중이었다.

헌원강은 오후에 있을 마지막 대련 시험을 앞둔 두 사람의 긴장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들보다 먼저 청룡학관에 입관한 선배로서,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줄 생각이었다 이 말이다.

어디선가 백수룡의 전음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원강아. 어르신을 노리는 살수가 있다.]

"푸!"

그 순간 입에서 뿜어져 나온 찻물이 얼마나 힘찼는지, 찻집에 있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어르신과 천이에게는 말하지 말고, 너만 알고 있어.]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예전에 심심풀이로 본 무협 소설에서도 본 적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였다.

'설마 날 놀리려고?'

잠시 백수룡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다.

[우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살수들을 사냥할 거다. 그래서 어르신 가까이는 못 가. 살수들이 경계할 테니까. 하지만 너는 자연스럽게 어르신 옆에 있으니 살수들도 덜 경계할 거야. 청룡학관 학생이라고 해 봤자 열일곱짜리 애송이이니까.]

뭔가 불쾌한 평가가 섞여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 우리가 사전에 차단하겠지만, 만약 우리가 뚫린다면 네가 어르신을 지켜.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전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뭔가 더 지시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벌써 일다경째 아무런 말도 없었다.

"끄응...."

헌원강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이유였다.

"허허. 원강 선배가 답답한 모양이군. 밥도 든든하게 먹었고 차도 한잔했으니, 소화도 시킬 겸 주변이나 좀 둘러보다가 시험 보러 가자꾸나."

"아니, 난 별로 안 답답한데...."

공손수는 이미 휘적휘적 걸어 나가고 있었다. 헌원강이 그 옆으로 바짝 붙었다.

"으응? 왜 이리 가까이 붙나?"

"추워서 그래."

"...음?"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핑계였으나, 헌원강은 자세히 묻지 말라는 눈빛을 강하게 쏘아 보냈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세 사람은 찻집을 나와 거리로 나섰다.

청룡학관 입관 시험의 여파로 어디를 가나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그걸 본 헌원강의 표정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 최대한 사람 적은 데로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괜히 시비에 걸릴 수도 있고...."

"오늘 같은 날에 사람이 적은 곳이 어디 있다고."

"그래도 잘 찾아보면...."

"자, 우리 오늘을 즐기세! 같은 날은 두 번 오지 않는다네!"

공손수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모르는 위지천이 그 옆에서 따라 걸었고, 오만상을 찌푸린 헌원강이 두 사람보다 한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본인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헌원강과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슬금슬금 옆을 비켜서기 바빴다.##85화. 어머, 언니!"천영이 실패했습니다."

흑의무복의 사내가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감정의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실패했다고?"

앉아서 보고를 받는 이는 무림의 삼대 살수 조직 중 하나인 흑림(黑林)의 간부였다.

그에겐 이름도 별호도 없었다.

세 번째 살행대의 대주이기에 삼(三)대주라 불릴 뿐.

삼대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무영 그자, 우리는 나설 필요도 없을 거라더니.... 황궁 출신답게 입만 산 놈이었군. 흑영이라는 호위가 탈출한 것이냐? 목표물의 위치는?"

삼대주는 자신이 생각한 실패의 범위에서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수하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천영의 살수들이 몰살당했습니다. 흑영의 위치는 현재 파악되지 않으며, 목표물은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뭐?"

삼대주는 부하의 보고에 무슨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천영의 살수들이 몰살당하다니.

감히 흑림의 살수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지만, 그들도 제법 쓸 만한 살수들이 있는 조직이었다.

"무영은 지금 어디 있지?"

"다른 살수들과 함께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흑영이라는 호위 혼자서 한 짓인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시체들의 상태를 보면 한 명의 소행으로 보입니다."

"...."

삼대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임무 성공을 자신했던 천영이 실패했다.

단순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몰살을 당했다고 한다.

'흑영이라는 호위가 상상 이상의 고수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호위가 더 있었나....'

현재로선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어쩐지 임무를 맡을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삼대주는 사실 이번 의뢰에 회의적이었다.

한 나라의 승상까지 지냈던 권력자를 죽이는 일.

자칫했다가는 나라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림주님. 이 임무는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큽니다.

이곳에 오기 전, 삼대주는 흑림의 주인이자 스승이기도 한 림주에게 읍소했다.

그러나 림주는 기어이 이 의뢰를 받아들였다.

-...살막과 혈방이 수락했다. 우리만 나서지 않을 수는 없다.

살막, 흑림, 혈방.

무림 삼대 살수 조직이라 불리는 살문의 살수들이 모두 이번 일에 동원되었다.

천영이 워낙 자신한 탓에 다들 전력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전력을 보내지도 않았다.

당장 흑림만 해도 세 번째 살행대를 이끄는 자신이 직접 오지 않았던가.

-삼대주.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일이 쉽게 풀리면 조용히 있다가 보수만 받아서 돌아오면 되는 일이다.

'저도 그렇게 되길 기대했습니다만....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천영이 실패했으니, 이제 다른 살수들이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대주가 한숨을 내쉬며 수하에게 물었다.

"...준비는?"

"열 개 조 사십 명 전원, 투입 준비가 끝났습니다."

"살막과 혈방의 움직임은?"

"저희와 거의 비슷하게 정보가 들어갔을 것입니다. 혈방은 바로 움직였습니다."

혈방이 먼저 움직였단 말에 삼대주는 코웃음을 쳤다.

"혈방은 무시해도 된다. 숫자만 많지,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니까."

애초에 혈방은 밑바닥 낭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마구잡이로 살인 청부를 받아들이다가 커진 단체였다.

그들이 삼대 살수 조직으로 꼽히는 것은 그 규모가 커서일 뿐, 흑림은 혈방을 같은 살수로 취급하지 않았다.

삼대주가 신경 쓰는 것은 다른 쪽이었다.

"...살막에선 누가 왔지?"

"알려지기로는 칠살(七殺)입니다."

"칠살이라.... 거물이 왔군."

혈방을 밑바닥 낭인들이라 무시하던 삼대주였지만, 살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표정을 굳혔다.

살막(殺膜).

명실상부 무림 최강의 살수 집단.

그 인원은 모두 합쳐도 서른 남짓으로, 그 안에서도 십살(十殺)에 꼽히는 열 명의 살수는 초절정고수조차 암살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현 흑림의 림주도 과거 살막의 살수 중 한 명이었다.

"살막의 움직임은 수시로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예."

"후우...."

한숨을 내쉰 삼대주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살막(殺幕).

흑림(黑林).

혈방(血放).

무림 삼대 살수 집단이라 묶여서 불리지만, 현실은 위에 언급한 순서대로라는 것이 대부분의 무림인들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겐 기회다.'

흑림의 목표는 살막을 뛰어넘어 무림 최고의 살수 조직이 되는 것.

삼대주는 림주의 명령을 떠올렸다.

-삼대주. 계획대로 천영이 성공하면 조용히 보수만 받아서 돌아오면 된다. 하지만 그들이 실패한다면... 승상의 목을 취하는 것은 반드시 흑림이어야 한다.

상황을 보아 신중히 개입하되, 하게 된다면 제대로 하라는 것.

-결코 다른 놈들에게 목표물을 빼앗기지 마라.

의뢰인들이 이번 청부에 약속한 보수는 돈뿐만이 아니었다.

황궁의 권력자들은 흑림의 살수들에게 내려진 수배령을 모두 거둬 주기로 약속했고, 쓸 만한 위조 신분도 여럿 만들어 주기로 했다.

또한 천영이 전멸했으니,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일거리를 맡길 수도 있었다.

흑림이 승상의 목을 들고 간다면 말이다.

'결국 위험부담이 클수록 보수도 큰 법이지.'

생각을 정리한 삼대주는 무릎을 꿇고 대기 중인, 칙칙한 눈빛을 내뿜는 살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가서 승상의 목을 가져와라. 최대한 빨리."

고개를 끄덕인 살수들이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파앗! 파바밧!

같은 시각, 살막과 혈방의 살수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이호. 목표물을 확인.]

[삼호. 목표물을 확인.]

[사호. 목표물을 확인.]

차례대로 세 번의 전음이 들려왔다.

조원들의 위치를 확인한 일호는 한 명씩 모두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호. 목표물 확인. 다들 현 위치에서 대기.]

"빙탕후루 사세요! 달고 맛있는 빙탕후루 사세요~"

일호는 남자였지만 지금은 후덕한 인상의 중년 여인으로 변장해 있었다.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경계심이 덜한 법이고, 펑퍼짐한 옷을 입기에도 좋기 때문이었다. 그의 치마 속에 숨겨진 암기만 수십 개가 넘었다.

[목표물 이동. 거리를 유지하도록.]

"빙탕후루 사세요~"

일호는 작은 수레를 끌며 목표물과의 위치를 조금씩 좁혔다.

그의 지시에 4인 1조로 이루어진 살수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살수는 극도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다.

목표물은 항상 주위를 경계하기 마련이고, 그 주변에는 강한 호위들이 물샐틈없이 경계하고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목표물이 한때 승상까지 지낸 권력자라면....

"허허허! 밖에 나오니 좋구나!"

...비록 저렇게 조심성이 부족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곧바로 접근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평소의 일호였다면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승상을 목을 가져와라. 최대한 빨리.

삼대주의 명령을 떠올린 일호는 평소보다 빠르게 조원들을 움직였다.

하지만 시장통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수많은 인파에 섞여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들킬 확률은 평소보다 훨씬 적다고 판단했다.

[이호. 반각 이내에 사정거리 이내에 목표물과 접촉할 가능성 큼.]

[삼호. 저격 가능 장소에 도착.]

[사호. 예상치 못한 진상 손님과 조우. 반각 이내에 처리 후 움직이겠음.]

조원들의 전음을 모두 확인한 후, 일호는 지시를 내렸다.

[반각 후 사냥을 시작한다. 현 시각부터는 휘파람 소리로 지시하겠다.]

전음은 한 명씩 일일이 전달하고 대답을 들어야 하는 것에 반해, 단순한 명령을 전달하는 것은 휘파람이 훨씬 편했다.

휘익!

일호가 휘파람을 불자 세 명에게서 '알겠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휘익! 휘익! 휘익!

특수한 청각 훈련을 거치지 않은 민간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

기감이 예민한 무인이라면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그냥 거슬리는 소리일 뿐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운 곳에서 잘 들리지도 않는 휘파람을 신경 쓸 무인은 없을 터.'

약속된 반각이 금세 지났다. 목표물을 시야에 포착한 일호는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일호는 '대기하라.'라는 의미의 휘파람을 분 후, 목표물을 향해 수레를 밀고 나아갔다.

"빙탕후루 사세요~ 달고 맛있는 빙탕후루 있어요~"

목표물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거리에서 차력을 보여 주고 있던 이호가 입에서 칼을 꺼냈고, 건너편 건물의 창가에 서 있는 삼호가 소맷자락에서 특수 제작된 소형 쇠뇌를 꺼내 은밀히 겨눴다.

그런데 진상 손님과 실랑이 중이라던 사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상을 못 떨쳐낸 모양이군.'

일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살행이란 원래 계획대로 다 되는 경우가 더 드물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목표물과 눈을 마주쳤다.

"어르신~ 빙탕후루 하나 드셔 보세요. 아주 달고 맛있어요. 옆에 손자들도 사 주면 정말 좋아할걸요?"

"허허. 빙탕후루라. 어릴 때 참 맛있게 먹었었지."

공손수가 전낭을 꺼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일호는 입술을 살짝 모으고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휘이익-

'살행 준비.'

그 신호에 이호와 삼호가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켰다.

일호는 수레에서 빙탕후루를 꺼내며 헤실헤실 웃었다.

"산사나무 열매랑 명자나무 열매가 있는데.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당연히 둘 다 맛봐야지. 두 개씩 주시구려."

"아이구 감사해라."

빙탕후루는 나무 열매를 대나무 꼬치에 꿰어 물엿으로 굳혀서 만든 간식이다.

하지만 얇은 대나무 꼬치도 살수의 손에 들리면 무시무시한 암기가 되는 법.

"여기...."

양손에 빙탕후루를 나눠 든 일호가 눈웃음을 치며 공손수에게 다가갔다. 동시에 은밀하게 내공을 일으키고, 입술을 모아 휘파람을 불 준비를 했다.

휘....

그가 휘파람을 불면 이호가 몸을 날려 덩치가 큰 소년의 시선을 끌 것이고, 삼호가 쇠뇌를 쏘아 작은 소년을 노릴 것이다.

그렇게 두 호위의 신경이 분산된 순간, 이 얇은 대나무 꼬치가 공손수의 목을 단숨에 뚫을 것이다.

휘...이....

입술을 모은 일호가 마지막 휘파람을 불려는 순간이었다.

"어머! 복순이 언니!"

갑자기 끼어든 웬 여자가 공손수와 일호 사이를 가로막았다.

"누구...?"

맹세코 처음 보는 여자였다.

복순이라니!

일호는 그런 촌스러운 가명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일호를 덥석 안았다.

피부가 하얗고 큰 키에 호리호리한 미인이었다.

"언니! 저 옥이에요! 기억 안 나? 십 년 전에 돈 번다고 고향 떠나더니, 이런 데서...."

파바밧!

순식간에 등의 혈도를 제압당한 일호의 눈이 놀라서 부릅떠졌다. 빙탕후루가 바닥에 떨어져 흙투성이가 되었다.

다가오던 공손수가 뒤로 물러났다.

그는 두 여인(?)의 해후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허허. 옛 인연을 만난 모양이구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들 나누시게."

"어머. 감사해요, 어르신. 십 년 만에 만난 고향 언니라서요. 언니! 우리 저기 찻집으로 가자!"

"...."

일호는 갑자기 일어난 현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눈만 끔뻑거렸다. 아혈이 짚인 탓에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호는? 삼호는?'

눈동자를 굴려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정하게 팔짱을 낀, 자칭 고향 동생이라는 여자가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흑림? 혈방? 살막일 리는 없고."

"!!"

그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낮은 남자의 목소리였다.##86화. 반격잠시 후, 일호는 으슥한 골목길로 끌려들어 갔다.

골목길 안에 사라진 이호, 삼호, 사호가 기절한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앞에는 복면을 쓴 세 명의 무인이 서 있었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흑림의 살행조가 저항도 못 해 보고 무력화되었다.

일호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자신을 끌고 온 여자를 노려봤다.

아니, 상대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었다.

우드득.

여장을 하며 굽혔던 허리를 펴자 키가 훌쩍 커졌다.

찌이익!

인피면구를 떼어내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백수룡이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살수들을 본 백수룡이 복면을 쓰고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다들 수고했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시 어르신에게 가 봐."

"...."

복면인들은 악연호, 명일오, 제갈소영이었다.

세 사람은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시에 경공을 펼쳐 벽을 박차고 사라졌다.

"...쟤들 왠지 살수 놀이에 맛 들인 것 같은데."

가볍게 혀를 찬 백수룡은 다시 일호를 돌아봤다. 그가 손을 뻗어 일호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아혈 풀었으니까 이제 말해도 돼. 그렇다고 갑자기 소리 지르거나 하진 말고. 피차 선수끼리 쉽게 가자. 응?"

"...."

"살수답게 입이 무거운 친구네."

일호의 무덤덤한 반응에도 백수룡은 피식 웃었다.

"이러면 입이 좀 가벼워지려나."

우지직! 백수룡은 일호의 한쪽 어깨를 단숨에 뽑아 버렸다.

"큽!"

무릎을 꿇은 일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통에 익숙하고 인내심이 강한 살수였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은 고래고래 비명을 지를 만한 고통이었다.

"고문이... 통할 것 같나."

일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백수룡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죽여라. 날 고문해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의 비장한 태도에 백수룡은 피식 웃었다.

"죽고 싶으면 직접 혀를 깨물지, 왜 나한테 죽여 달라고 그래?"

"...."

"사실은 살고 싶지?"

일호를 빤히 바라보는 백수룡의 눈은 유리알처럼 투명했다.

스스슷....

그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맺혔다.

"난 너 같은 살수 놈들을 잘 알아. 사람을 죽이는 게 일이니까, 자신이 죽음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정말 그럴까?"

"...."

일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식 웃은 백수룡은 그의 옷을 뒤져서 수많은 암기를 찾아냈다.

그중 표창 하나를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더니, 갑자기 옆으로 던졌다.

푸욱!

기절한 채로 쓰러져 있던 사호의 미간에 표창이 틀어박혔다. 즉사였다.

놀란 일호가 몸을 움찔 떨었다. 백수룡이 그를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남의 죽음을 자주 본다고 죽음이 안 무서워질까? 아니. 죽어가는 사람의 공포에 질린 눈을 들여다볼 때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점점 커지지."

"...."

상대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뇌까지 박히는 기분.

일호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며 백수룡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런 협박이...."

백수룡이 이번에는 단검을 옆으로 던졌다.

푹!

삼호의 심장에 단검이 틀어박혔다.

푸들푸들 떨리던 삼호의 몸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뚝.... 뚝....

가슴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따라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일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꽉 악물었다.

"살수들은 훈련을 통해 감정을 죽이고, 고통에 무뎌지지.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도 무감각해진다. 그걸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했다고 착각해. 하지만 잘 봐."

"그만...!"

백수룡은 바늘처럼 얇은 금침을 이호에게 던졌다.

푹!

이번에는 한 번에 목숨을 빼앗지 않았다. 이호가 번쩍 눈을 뜨더니, 고통에 몸부림치며 두 손으로 목에 박힌 금침을 빼내려고 했다.

"컥, 커헉...!"

이호는 천천히 죽어갔다. 일호는 그 모습을 보며 덜덜덜 떨었다.

일호 앞에 쪼그려 앉은 백수룡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인간은 고통에 익숙해질 수 있을진 몰라도 죽음에는 익숙해질 수 없어. 누구든 죽음은 처음이거든."

"나, 나, 나는...."

백수룡은 검집으로 일호의 가슴을 툭 쳤다.

그러자 깜짝 놀란 일호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으허어억!"

백수룡은 창백하게 질린 일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묻지. 살고 싶어?"

"사, 살고 싶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일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사호, 삼호, 이호가 죽는 것을 보았다.

평생 살수로 살아오며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백수룡이 그에게 보여 준 공포는 차원이 달랐다.

'살고 싶어. 죽고 싶지 않아. 만약 이 남자에게 죽으면... 영혼조차 구제받지 못할 거야.'

평생을 통틀어 이토록 두려움을 느끼고, 절실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일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백수룡은 납작 엎드려 비는 일호의 어깨에서 검을 치웠다.

어느새 그의 눈에서 일렁이던 혈기도 사그라들었다.

"살고 싶으면 내 질문에 잘 대답해야 할 거야. 어디 소속이지?"

"흐, 흑림. 흑림입니다."

일호는 흑림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이야기했다.

이곳에 몇 명이나 왔고, 어떤 식으로 살행에 나서며, 책임자는 누구인지.

일개 조의 조장인 일호가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대답했다.

"아까 휘파람으로 신호를 주고받던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건...."

백수룡은 흑림의 살수들끼리만 아는 통신 수단에 대해서도 알아냈다.

'이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겠어.'

잠시 후, 아는 정보를 모두 쏟아낸 일호는 결국 탈진해서 쓰러졌다.

"...지독하군."

골목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청천이었다.

청천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시체들과 일호, 백수룡을 번갈아 바라봤다.

"원래... 살수였나?"

방금 백수룡이 보여 준 잔인한 손속과 행동을 보면, 청천이 그런 추측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백수룡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예전에 살수들도 가르쳐 봤거든."

"하...."

청천은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백수룡을 부탁한 대로 일호를 어깨에 둘러멨다.

"이 녀석은 감옥에 가둬 두면 되겠나?"

"부탁 좀 할게. 일이 마무리되면 증인이 필요할 수도 있거든."

"알겠다. 시체는 포졸들을 불러 치우게 하지."

청천은 시체들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그는 백수룡이 살인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큰 감흥이 없었다.

죽은 자들은 전부 살수였다.

사람을 죽이고 대가를 받는 것을 업으로 삼는 쓰레기들.

'동정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지.'

청천은 고개를 돌려, 일호에게서 벗겨낸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옷을 갈아입는 백수룡을 바라봤다.

"살수 사냥을 계속할 건가?"

"그래야지. 이놈들은 말로 해선 안 듣거든."

"...조금 전에 말로 한 놈 설득한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변장을 마친 백수룡이 청천을 돌아봤다. 어느새 그는 중년 여인으로 변해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아까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게다가 아까 그 방법이 모두한테 통하는 것도 아니거든."

중년의 여인이 소매에 암기를 숨기며 인심 좋게 웃었다.

"그리고 더 쉽고 빠른 방법이 있으니까."

"...."

"그럼 또 보자고."

몸을 돌린 백수룡이 골목을 빠져나가며 손을 흔들었다.

청천은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뛰어난 살수는 저 녀석일지도 모르겠군."

청천은 새삼 저 남자를 적으로 돌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백수룡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 *

흑림의 살수들은 갑자기 혼란에 빠졌다.

휘익! 휙! 휘이익!

사방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본래 흑림의 살수들 사이에서만 사용하는 신호였으나, 언제부턴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은 휘파람으로 흑림의 살수들을 교란했다.

흑림의 살수들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땐, 이미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당한 후였다.

[현 위치에서 대기!]

[적들의 위치부터 파악해라!]

[당황하지 마라. 지금부터 휘파람 신호는 무시한다.]

[간격 유지. 일단 인파에 몸을 숨겨라.]

몸을 숨긴 살수들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목표물에 가까이 접근한 조는 모두 당했다.'

'이 수법.... 상대도 살수다.'

'최소한 셋 이상이야. 여러 명이 동시에 전음이 끊겼다.'

'혈방 놈들인가? 아니면 혹시 살막이....'

살수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는 훈련을 받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알 수 없는 적에 의해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면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휘잉~

그저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을 뿐인데도 몸이 움찔거렸다.

아니, 불행하게도 이번엔 가벼운 바람이 아니었다.

"잘난 척하던 흑림도 별것 아니군."

"!!"

귓가에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을 땐, 비수가 폐를 찌르고 지나간 뒤였다.

푹.

그림자는 살수의 옆을 스쳐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조만간 본 방(放)이 너희를 쓸어버릴 것이다. 지옥에서 구경하도록."

다리에 힘이 풀린 살수는 흐릿해지는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방.... 혈방(血放) 놈들이었구나!'

흑림의 살수는 쓰러지는 척하며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겼다.

놈은 자신을 끝장낸 줄 알겠지만,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폐에서 반 치 정도 옆을 찔렸다.

살수는 그것이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삼대주께 보고를....'

적의 정체를 알아냈다고 생각한 흑림의 살수는 비틀거리며 삼대주를 찾아갔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 살수가, 잠시 후 혈방의 살수에게도 말만 살짝 바꿔서 똑같은 말을 하리라는 것을.

* * *

콰앙!

일격에 탁자를 부숴 버린 삼대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두 눈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혈방 이놈들이 감히!"

그는 방금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공손수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살수들이 당했는데, 그 흉수가 혈방이라는 보고였다.

"이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공손수의 목을 먼저 취하기 위해, 삼대 살수 조직이 서로 경쟁하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공격해 올 줄이야.

이것은 흑림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평소 혈방을 몇 수 아래로 보던 흑림의 간부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놈들이 먼저 시작한 일이다. 후회하게 해 주지."

이를 부드득 간 삼대주는 대기 중인 모든 살수들을 집결시키라고 명령했다.

혈방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온 이상, 놈들을 모두 죽인 후 공손수의 목까지 취할 것이다.

삼대주가 짙은 살기를 뿌리며 말했다.

"내가 곧 갈 테니 모두에게 대기하라 일러라."

"존명!"

같은 시각, 혈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흑림 이 새끼들이 미쳤구나! 우리 애들을 건드려!"

혈방 남창 지부.

평소에는 지하 도박장으로 쓰이는 이곳에서 보고를 받은 혈방의 지부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남아 있는 애들 싹 불러! 전부 죽여 버릴라니까!"

지부장은 벽에 걸린 커다란 도끼를 꺼냈다. 그의 우락부락한 몸에는 흉터와 문신이 가득했다.

"잘난 척하던 면상을 당장 쪼개러...."

그 순간, 우당탕 소리가 나며 지상과 연결된 도박장의 문이 부서지고 무언가가 굴러떨어졌다.

도박장 바깥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문지기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기절해 있었다.

"스, 습격이다!"

"적이다!"

도박장 안의 낭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 숫자가 족히 오십 명은 되었기에, 혈방의 지부장은 의기양양하게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

"이것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들어와 이 새끼들아!"

잠시 후, 계단 위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내려왔다.

저벅. 저벅.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규칙적인 발걸음.

"너희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수염, 그와 어울리는 짙은 옥색 도포.

허리를 검처럼 꼿꼿하게 편 노인이 뒷짐을 진 채로 도박장 내부를 둘러봤다.

"혈방이라는 인간 백정의 무리더냐?"

"미친.... 저건 뭐 하는 노인네야!"

혈방의 지부장이 도끼를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삐질삐질 흐르고 있었다.

'고수다. 엄청난 고수.'

그 모습을 본 노인이 가볍게 혀를 찼다.

"다들 눈에 살기가 가득한 걸 보니, 맞나 보구나."

"이런 빌어먹을.... 쳐라!"

수십 명의 낭인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가운데, 검치 매극렴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87화. 기다리고 있었다휘익!

지붕 위에 가볍게 내려선 흑영이 백수룡의 뒷모습을 보며 보고했다.

"학생주임 매극렴이 혈방 지부로 들어갔습니다."

"탈출로는?"

백수룡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흑영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지만, 티를 내지 않으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제가 막았습니다. 주변 청소도 끝냈으니, 도박장 안쪽에 있는 자들만 처리하면 혈방에서 정보가 새어나갈 일은 없습니다."

"수고했어."

짧게 대답한 백수룡은 지상을 살폈다.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 위.

백수룡은 공손수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인파를 관찰하고 있었다. 때문에 흑영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동쪽에서 셋. 서쪽에서 둘. 남쪽에 둘... 아니 셋이군."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분석 능력이 어느 때보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백수룡은 살수들만을 정확히 찾아내 지상의 동료들에게 전음으로 위치를 알렸다.

[연호. 동쪽의 과일 가판대에 있는 노인을 잡아.]

[일오. 뒤쪽에 있는 붉은 옷의 기녀에게 접근해라.]

[소영. 십여 장 뒤쪽에 어린 남매 보이지? 말을 걸면서 잠시 시간을 끌어.]

마치 거대한 장기판 같았다.

백수룡의 지시에 따라 세 사람이 살수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시간을 지연시키고, 경로를 꼬이게 만들어 공손수에게 닿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잠시 전음을 멈춘 백수룡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손가락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흑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봇짐장수 보이지? 제법 실력이 있어 보이는데, 할 수 있겠어? 힘들 것 같으면 내가...."

"제가 가죠."

자존심이 상한 듯 흑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즉시 지붕에서 뛰어내린 흑영이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전직 천영 최고의 살수였던 이름값을 증명하듯, 흑영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상대를 처리했다.

백수룡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제법이네."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을 텐데도 흑영은 충분히 제 몫을 해 주고 있었다.

잘해 주고 있는 것은 악연호, 명일오, 제갈소영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백수룡은 흑림과 혈방 간에 이간질을 한 이후로는 직접 움직이는 것을 최소화하고, 상황을 살피고 조율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혈방엔 매극렴이 갔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고.'

혈방은 살수보다는 낭인에 가까운 사파의 무인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로, 삼대 살수 조직 중 가장 숫자가 많고 여러 도시에 지부가 설립돼 있었다.

당연히 지부의 위치는 비밀이었으나, 흑영은 예전부터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매극렴을 보냈다.

손에 쥔 패 중에서 가장 강력한 패.

전형적인 정파 무인인 매극렴이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 백정들과 만난 이상, 그의 검은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이다.

'밖에 나와 있는 혈방의 살수들은 흑림에서 처리해 줄 거고.'

흑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혈방이 자신들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드디어 삼대주의 귀에 들어갔는지, 잠시 뒤로 물러났던 흑림의 살수들이 혈방의 살수들을 찾아 죽이기 시작했다.

푹.

살수들은 대놓고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그늘진 담벼락 아래에서, 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다가 조용히 서로를 찌른다.

푹.

싸움이 끝나면 한쪽은 깊은 잠에 빠지듯 조용히 눈을 감는다.

살수에게 고통은 익숙하기에 비명은 거의 없다.

승자는 그 시체를 업거나 부축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처리한다.

'백주대낮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관아가 개입하게 된다. 일이 커지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아.'

그렇기에 이곳에서 벌어지는 살수들의 싸움은 소리 없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게 너희들의 약점이지."

도시 곳곳에서 살수들끼리 죽고 죽이며 숫자가 줄어드는 모습을, 백수룡은 감정 없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흑림의 살수들로 혈방의 살수들을 사냥하고, 그런 흑림의 살수들을 흑영과 청룡학관의 임시 강사들이 사냥한다.

혈방의 지부에는 매극렴을 보내어 추가 병력을 보내지 못하도록 틀어막는다.

과격한 낭인이 주축인 놈들이라, 어떤 과격한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혹시 모를 변수마저 최소화했다.

"일단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백수룡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직 살막이 나서지 않았어.'

살막(殺膜).

명실상부 무림 최강의 살수 집단.

어느 날 무림의 이름난 고수가 갑자기 죽었다고 알려지면, 가장 먼저 살막이 의심을 받는다.

하지만 백수룡이 살막을 경계하는 것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혈교는 사라졌는데, 살막은 남아 있단 말이지...."

무림에는 알려지지 않는 비밀 하나.

살막은 혈교에서 만든 조직이었다.

살막의 수장인 일살(一殺)은 대대로 혈교의 장로 중 한 명이었고, 오십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혈교의 구(九)장로가 바로 일살이었다.

'무림맹은 두 조직의 연관성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럼 살막은 독립적인 세력이 된 건가? 아니면....'

혈교의 유산이 살막에 남아 있는 것일까.

"...정확한 건 잡으면 알 수 있겠지."

지상을 바라보는 백수룡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이번 일은 공손수를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혈교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알아내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긴 인내심 싸움이 될 것이다.

살막은 가장 치명적인 순간까지 기다릴 테니까.

물론 백수룡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허허허허!"

공손수는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대련 시험까지 반 시진도 남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헌원강은 그 모습이 얄미워서 퉁명스레 물었다.

"할아범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대련 시험이 코앞인데 긴장도 안 돼?"

"오전 시험 때는 조금 긴장을 했다만, 지금은 괜찮구나."

공손수는 활기로 가득한 고향의 거리를 흐뭇하게 둘러봤다.

"...시간이 참으로 빠르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창밖으로만 바라보던 풍경이었다.

약해진 몸으로는 가벼운 산책 정도가 한계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리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고향이지만 낯선 곳.

어릴 적 동무들은 모두 죽었고, 알던 거리나 가게도 대부분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추억뿐.

그마저도 빛바랜 것들이라, 죽기 전까지 천천히 곱씹으며 여생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연을 얻었구나.'

잠깐의 유흥으로 시작한 무공 과외가 공손수의 남은 인생을 바꿔 놓았다.

무공을 배우면서 탁해진 몸이 깨끗해졌고, 생사신의조차 몇 년 더 살지 못하리라 말하던 육신이 몰라볼 정도로 건강해졌다.

덕분에 다시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공손수는 그 사실이 기뻤지만, 또한 아쉬웠다.

"허허. 저기도 한번 구경하러 가 보자꾸나!"

"...저길 꼭 지금 가야 해?"

어째선지 아까부터 울상인 헌원강에게 공손수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선배. 오늘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날이 온단 말인가. 계속 구시렁거릴 거면 먼저 들어가든가, 아니면 군말 없이 따라오게."

"선배님. 진짜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 힘들면 먼저 들어가세요."

"...야, 위지천. 네가 더 나빠."

"예?"

헌원강의 원망 어린 시선에 위지천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거 어서들 오래두!"

공손수의 두 사람을 이끌고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이처럼 거리에서 당과를 사 먹고, 한창때의 청년처럼 예쁘게 꾸미고 나온 처자들을 힐끔거렸다. 장년의 사내처럼 목에 힘을 뻣뻣하게 주고 걸어 다녔다.

고향에서 경험하지 못한 세월.

뒤늦게나마 그것을 흉내 내는 공손수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피었다.

"허허! 즐겁구나. 즐거워. 내 평생 오늘만큼 즐거운 나들이를 해 보진 못한 것 같구나."

"늙어서 주책은...."

헌원강은 툴툴대면서도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기감을 확장하고 있었기에, 헌원강은 주변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가오던 사람이 한 명씩 사라지고 있어.'

빙탕후루를 팔던 아줌마가 갑자기 고향 친구를 만나 끌려가고, 멀리서 눈웃음을 치며 다가오던 기녀가 갑자기 집적대는 남자 때문에 뒤로 물러났다.

길에서 울고 있던 아이가 눈물을 뚝 그치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도 보았다.

'대체...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헌원강은 피부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공손수와 위지천은 아무것도 모른다.

둘 다 살수의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아 경계심이 없는 탓이었다.

오직 헌원강만 그 사실을 알기에 내적 고통을 받고 있었다.

"허허. 저기도 가 보자꾸나."

"와! 이것도 맛있겠어요!"

"차라리 날 죽여...."

물가에 어린애 내놓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헌원강은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그렇게 반 시진이 지나자 진이 다 빠졌다.

공손수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슬슬 청룡학관으로 돌아가야겠구나. 더 놀고 싶지만 오후 시험에 늦으면 큰일이니 말이야."

"드디어... 청룡학관으로...!"

"선배. 그런데 아까부터 왜 그리 피곤해 보이나?"

"앓느니 죽어야지...."

세 사람은 청룡학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손수는 뭔가 아쉬운 듯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번에 황궁으로 올라가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의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할아범. 시험 보러 안 갈 거야?"

헌원강이 공손수의 등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재촉했다.

"허허. 가야지. 가야지...."

공손수는 억지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잠시 후, 멀리 청룡학관의 거대한 현판이 보였다.

공손수가 지나가듯 말했다.

"...너희에게만 하는 얘기다만, 나는 입관 시험에 붙어도 학관에 다니지는 못할 것 같구나."

"예?"

"그게 무슨 소리야?"

당황한 표정을 짓는 두 소년에게, 공손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입관 시험이 끝나는 즉시 다시 황궁으로 가게 되었다."

"이렇게 갑자기요?"

"아니 뭔...."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구나. 걱정하실 것 같아 몸이 건강해졌다는 소식을 전했을 뿐인데... 다시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았단다."

황제에게 불만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 늙어 퇴물이 된 늙은이를 다시 불러주시니 영광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공손수는 아쉬움을 삼키며 웃었다.

"잠시나마 즐거운 꿈을 꾸었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단다."

"...."

"...."

공손수가 한 달 동안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두 사람은 매일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런데 시험에 합격해도 청룡학관에 다닐 수 없다니.

그렇다고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크흠.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졌구나. 어서 들어가자꾸나."

청룡학관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대련 시험은 지원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관전이 허락된 터라, 수많은 인파가 청룡학관으로 몰려 무척 혼잡한 상태였다.

"젠장...."

중얼거린 헌원강이 갑자기 일행의 선두로 나서더니, 공손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할아범은 내가 꼭 지켜 줄게."

"음? 지키다니 무슨 말인가?"

"...모르면 됐어. 아니, 몰라도 돼. 할아범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시험이나 잘 보면 되는 거야."

성큼 앞으로 나선 헌원강이 내공을 끌어올려 버럭 소리쳤다.

"저리 꺼지지 못하겠냐, 이 애송이들아! 청룡학관 삼학년 선배님이 지나가시는데 감히 길을 막아? 이것들이 다 뒈지고 싶나!"

청룡학관의 망나니가 오랜만에 사나운 기세를 드러내며 사방을 휙휙 노려보자, 막혔던 길이 삽시간에 뻥 뚫렸다.

공손수는 그 모습이 황당해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구나. 그런데 선배. 이러면 나중에 백 선생에게 혼나는 것 아닌가?"

"그건... 아 몰라!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빨리 가서 준비나 하자고."

그러나 세 사람이 청룡학관 내부로 들어가기 직전, 누군가가 스윽 그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리고 있었다."##88화. 칠(七)입니다"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이가 갑자기 길을 막아선 순간, 헌원강은 즉시 도파에 손을 얹으며 맹수 같은 살기를 뿜어냈다.

그 모습에 다가오던 남궁석이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뭡니까?"

"너야말로 뭐 하는 새끼야?"

헌원강의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반응에 남궁석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유명한 망나니라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게다가....'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남궁석은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물러나 있었다.

헌원강에 대한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과 느낌이 전혀 달랐다.

숙부에게 듣기로는 재능은 있지만 태생이 게으른 놈이라고 했는데....

'게으른 무인이 이런 기도를 뿜어낼 수 있다고?'

"어이. 뭐냐니까? 귓구멍이 막혔어?"

놀란 것도 잠시, 시비를 거는 듯한 헌원강의 말투에 남궁석의 표정이 굳었다.

상대의 기세가 강하다 한들, 소년은 자존심으론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대남궁세가의 핏줄이었다.

"당신한텐 일 없습니다. 내가 볼일이 있는 사람은 당신의 뒤쪽입니다."

"...뭐?"

그 순간, 어째선지 헌원강의 표정이 더욱 야차처럼 변했다.

공손수의 앞을 가로막은 헌원강이 도를 반쯤 뽑으며 으르렁댔다.

"네가 할아범한테 무슨 볼일인데?"

"...말고 그 옆 말이요."

"위지천?"

비로소 헌원강의 표정이 조금 풀렸지만, 여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다소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위지천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예? 왜 저를...."

헌원강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우습게 되었지만, 남궁석은 개의치 않고 준비해온 선전포고를 했다.

"올해 수석은 나다."

"네?"

"조막생 따위를 이겨 놓고 벌써 수석이라도 한 것처럼 기고만장하지 말란 말이다."

"제가 언제...."

위지천의 당혹스러운 표정에, 남궁석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식을 떠는 건가, 아니면 나중에 망신당할 것에 대비해 밑밥을 깔아 두는 건가. 너도 주변에서 하는 말을 못 듣진 않았을 텐데."

"...."

남궁석의 기분은 최근 며칠 동안 최악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위지천'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지난 십 년 이내 최고의 기재라느니, 청룡학관에 잠룡이 들어왔다느니, 수석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느니.

심지어 남궁석이 존경하는 십존의 일원 남궁제학마저, 오늘 함께 점심을 먹는 중에 그 이름을 꺼냈다.

-위지천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아느냐?

'빌어먹을....'

모두의 기대와 관심을 받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대남궁세가의 핏줄.

그에 따라오는 어마어마한 기대와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을 자신은 항상 충족시켜 왔다.

비록 형들에게 순서에 밀려 청룡학관에 입관하게 되었지만, 남궁석은 오히려 이것이 기회라고 여겼었다.

-네 시대부터 청룡학관은 바뀔 것이다.

숙부인 남궁수가 그렇게 장담했고, 남궁석도 본인도 동의했다.

재능으로도 노력으로도 동년배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오대학관 중 가장 떨어진다는 청룡학관 따위에 자신의 적수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위지천이라는 눈엣가시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 기고만장한 적 없어요. 제가 당연하게 수석을 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흥."

조심스러운 위지천의 말에, 남궁석은 코웃음을 치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위지천이 자신의 선전포고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 주제 파악은 하고 있었군. 벌써 꼬리를 마는 건 좀 한심하긴 하지만...."

"하지만 그쪽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뭐?"

갑작스러운 반전 화법에 남궁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옆에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헌원강이 "이것 봐라?" 하며 킥킥 웃었고, 공손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치 중인 두 소년을 바라보며 "청춘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위지천이 남궁석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절 먼저 도발한 건 그쪽이에요. 저희 선생님이, 누가 선빵을 날리면 두 배로 갚아 주라고 하셨거든요."

"그...쪽?"

남궁석은 위지천이 하는 말의 내용보다 호칭이 더 신경이 쓰였다.

설마.

"너.... 내 이름을 모르나?"

"그리고 수석을 해서 하고 싶은 일도 생겼고요."

"너...!"

위지천은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돌렸지만, '그쪽'을 열 받게 하기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공손수가 옆에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천아. 수석을 해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물어봐도 되느냐?"

"...신입생 대표 연설이요."

"호오?"

수석을 하면 입학식 때 신입생 대표로 연설을 하게 된다.

강사들, 같은 신입생들, 재학생들, 그리고 무림의 수많은 선배들 앞에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자리.

청룡학관에 입학한 신입생 중, 단 한 명만이 설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다.

"...그 자리에서 올라가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평소 얌전한 성격의 위지천이기에,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자리에 서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이 공손수와 헌원강에겐 무척 의외였다.

물론 남궁석에겐 자신을 도발하는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아니. 넌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다. 왜냐면 신입생 연설도, 졸업생 연설도 전부 내 차지가 될 테니까."

"...졸업생 연설에는 관심 없는데요?"

"건방진 자식이...!"

두 소년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허공에서 눈빛이 부딪쳐 불꽃이 튀는 듯했다.

헌원강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남궁석에게 말했다.

"이봐. 볼일 끝났으면 길 좀 비키지? 내가 지금 좀 예민하거든?"

"당신은 빠져."

"하?"

빠지란다고 빠지면 청룡학관의 망나니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헌원강의 입에서 걸쭉한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쥐좆만 한 새끼가 하늘같은 선배님께서 말씀하시면 네, 하고 비킬 것이지 말끝마다 따박따박 말대답을 해? 네가 오늘 아주 숨지고 싶어서 작정했구나?"

웬만한 파락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건들거리는 자세하며,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눈깔에 힘을 팍 주고 사람을 내려 보는 모양새까지. 그야말로 자릿세 받으러 온 건달이었다.

"허. 뭐 이런 파락호 같은 자가...!"

어려서부터 명문가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남궁석이었다. 평생 그런 말을 처음 들어본 터라 당황해서 입이 떡 벌어졌다.

헌원강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으며 말을 늘렸다.

"파락호? 파락호오오오오?"

"다, 다가오지 마라!"

진심으로 당황한 남궁석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헌원강은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 히죽히죽 웃으며 다가갔다.

"오구오구. 어디 수석을 노리는 후배님 실력 한번 볼까? 마침 아무한테도 말 못 하는 이 내적 고통을 분출할 곳이 필요했거든? 한 놈만 걸리면 사지육신을 분리시켜 놓으려고 했단 말이지. 한 놈만.... 흐흐흐."

"미, 미친 자였나."

살짝 맛이 간 눈으로 다가오는 헌원강의 모습에 놀란 사람은 남궁석뿐만이 아니었다.

"...천아. 원강 선배가 그동안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그러게요...."

"흐흐흐. 너 일루와, 이 새끼야아!"

헌원강이 성큼성큼 걸어가 남궁석의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내공이 담긴 사자후와 함께, 두 사람 사이에 한 사람이 뚝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의 대치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이, 새로 등장한 인물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학생회장!"

"독고준이다!"

"청룡학관 학생회다!"

독고준을 필두로, 당소소, 청룡쌍걸 등의 학생회 간부들이 인파를 헤치고 나타났다.

"갑자기 웬 소란인가 해서 와 봤더니...."

독고준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헌원강을 바라봤다.

입학 동기인 이 망나니와는 삼 년간 여러 번 이런 식으로 만났다.

"헌원강. 한동안 얌전해진 것 같더니 그새 또 사고를 치는군."

"이봐. 이번엔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거든?"

"...곧 오후 시험이 시작된다. 그만하고 물러서도록. 남궁석. 너도 마찬가지다."

독고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저 망나니가 얌전히 돌아갈 리가 없었다. 어느 정도의 충돌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제압하고 상황을....'

그러나 독고준이 예상한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헌원강이 홱 돌아선 것이다.

"알았다. 할아범! 위지천! 시간 없으니까 빨리 들어가자고!"

"음?"

"예?"

"가서 준비하자고. 시험 안 볼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남궁석을 잡아먹을 듯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헌원강은 공손수와 위지천의 등을 떠밀었다.

"무슨...."

황당해하는 남궁석에게, 헌원강이 씩 웃으며 한마디를 남겼다.

"꼭 합격해라. 앞으로 자주 봐야지."

"헌원강!"

"알았어. 알았다고."

어깨를 으쓱한 헌원강은 자신을 노려보는 독고준을 스쳐 지나가며 피식 웃었다.

"그럼 이만 실례."

청룡학관 안으로 사라지는 헌원강의 뒷모습을 보며, 독고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어떤 의심이 들었다.

"설마... 우릴 불러내려고 일부러 이 소란을 일으킨 건가."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저 능글맞은 표정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회가 오면서 소란스러웠던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되었으니까.

만약 이 모든 것이 헌원강이 의도한 거라면?

'헌원강.... 확실히 변했군.'

게다가 독고준을 놀라게 한 사람은 헌원강뿐만이 아니었다.

잠깐 본 것뿐이지만, 남궁석과 위지천도 독고준을 감탄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둘 다 신입생 수준은 이미 넘었다.'

또한 위지천과 남궁석만큼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는 않지만, 올해 입관 시험에 지원한 학생들 중에는 옥석이 제법 여럿이었다.

"올해는... 확실히 달라."

독고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청룡학관의 거대한 현판을 올려보았다.

* * *

웅성웅성.

"잠시 후 대련 시험이 곧 시작될 예정이오니, 관객석에 계신 귀빈 여러분께서는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룡학관 부관주 곽철우의 목소리가 청룡학관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청룡학관 입관 시험은 그 자체로 지역 무림의 커다란 축제였다.

특히 잠시 후 시작될 대련 시험은 그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었다.

현 청룡학관 학생회 선배들과 신입생 지원자들이 맞붙는 대련 시험,

청룡학관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이 시험을 관전하기 위해 무림의 저명한 인사들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대연무장에 마련된 총 열 개의 비무대.

그 주변의 대기석에서 지원자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긴장을 풀었다.

"후우...."

"긴장돼서 미치겠다...."

"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아직은 앳된 무림의 아이들.

관객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시오. 그쪽은 입관 시험 관전이 처음이오?"

"그렇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나는 삼십 년 넘게 여길 왔거든. 딱 보면 알아."

"하하. 그렇습니까?"

옆자리의 수다스러운 노인이 말을 걸어왔음에도, 사내는 귀찮은 기색도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흔한 얼굴의 사내였다.

흥이 난 노인이 계속 떠들었다.

"내가 무공 고수는 아니지만 눈이 엄청 좋아. 딱 보면 안다니까? 저 녀석이 합격할지 떨어질지, 미래에 고수가 될지 안 될지 말이야."

"그렇군요."

돌아온 대답이 시원찮았지만, 노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낼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니까.

"다들 청룡학관이 오대학관 중에서 가장 처진다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올해부터는 다를 거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흐름이라는 것이 그렇소. 청룡이 십 년을 웅크리고 있었던 건 승천하기 위해서라 이 말이지. 내가 풍수지리도 좀 볼 줄 아는데...."

"...."

"그러니 두고 보시구랴. 올해는 청룡학관이 전 무림에 파란을 일으킬 게요."

"...흥미롭군요."

사내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다쟁이 노인은 그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래도 질색하며 자리를 떠나는 다른 놈들보다는 나았다.

"헌데 이름이 뭐요? 통성명이나 합시다."

계속 귀찮게 구는 노인의 질문에도, 사내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름은 잊었고, 동료들은 칠(七)이라고 부릅니다."

스스로를 칠(七)이라 소개한 사내는, 수많은 지원자들 중 단 한 명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공손수가 몸을 풀고 있었다.##89화. 공손수 지원자!오후 시험을 총괄하는 사람은 청룡학관 부관주인 화염도 곽철우였다.

"비무표를 받은 지원자들은 지정받은 비무대 뒤편 대기석으로 이동하시오!"

"학부모나 지인들은 관객석으로 가 주시길 바라오!"

"대련 상대는 제비뽑기를 통해 무작위로 선별되오! 물어봐도 나도 모른다고!"

"정숙! 정숙! 제발 정숙!"

엄청난 인파가 청룡학관으로 밀려들었다. 한참이나 통제를 하던 곽철우는 진이 다 빠져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대체 이럴 때 학생주임은 어딜 간 거야!"

분통이 터지는지 곽철우가 의자 팔걸이를 내리쳤다.

출입 인원 통제는 원래 학생주임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 학생주임은 아까 자신을 찾아와 한마디를 툭 남겨 놓고 가 버렸다.

-부관주. 내 볼일이 있어 좀 다녀올 테니, 대신 인원 통제 좀 해 주시게.

-...예?

학생주임이 부관주에게 반말이라니!

게다가 아랫사람 부리듯이 일을 떠맡기다니!

'대체 오대학관 중 어느 곳에서 이런 하극상이 벌어진단 말인가!'

바로 청룡학관.

학관에서 직위만 높을 뿐 짬밥으로도, 무공으로도, 무림의 배분으로도 매극렴에겐 안 되는 곽철우였다.

때문에 한마디도 따지지 못하고, 지금까지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중이었다.

곽철우가 조용히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내 언젠가 그 고약한 늙은이를 학관에서 쫓아내...."

"그거 혹시 내 얘기인가?"

"헉!"

등 뒤에서 불쑥 말을 걸어온 노군상 때문에 곽철우가 펄쩍 뛰어올랐다.

"과, 관주님!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습니까!"

"고생이 많구먼. 좀 도와줄까 해서 왔지."

"도와주긴 무슨.... 차, 창천검왕 선배님도 오셨군요."

"오랜만이네. 혹시 이 늙은이의 도움도 필요한가?"

노군상 한 명만이라면 모를까, 감히 십존의 일원인 남궁제학에게 도와달라고 할 만큼 곽철우의 간이 크진 않았다.

'늙긴 개뿔. 제일 젊게 생겨서는....'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피부에 주름 하나 없는 남궁제학의 얼굴을 잠시 부러운 시선으로 보던 곽철우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여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두 분은 편하게 관람하십시오."

"허허. 그럼 수고하시게."

"고생하시게나."

귀빈석으로 돌아온 노군상과 남궁제학은 뒷짐을 진 채로 청룡학관을 둘러봤다.

시험을 위해 마련된 열 개의 비무대.

그 주변 관중석은 이미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원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설렘, 그들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보내는 응원의 열기가 멀리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노군상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이 시기만 되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지 않나?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애송이 무인 시절 말이야."

"글쎄.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군."

남궁제학의 대답에, 노군상은 혀를 차며 친우의 젊은 얼굴을 바라봤다.

"자네는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해서 그래. 환골탈태하면서 감성이 사라졌어. 하루하루 늙어가면서 옛 추억을 곱씹는 것이 노인의 덕목이란 말일세."

"그래서 자네는 환골탈태하기 싫어?"

"제발 비결 좀 알려 주게."

두 노인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클클 웃었다.

남궁제학이 인파로 가득한 청룡학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 원래 이 정도인가?"

"아니, 올해는 유독 많은 편이네."

지난 십 년간 천무제에서 최악의 성적을 보여 준 청룡학관이었다.

때문에 입관 시험에 찾아오는 관객의 숫자도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찾아온 사람이 많았다.

노군상은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자네 때문이고."

창천검왕 남궁제학.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십존의 얼굴을 보기 위해, 수많은 무림인과 일반인들까지 찾아왔다.

실제로 두 사람을 향해 엄청난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뭔가?"

"우리가 천무제 우승 후보이기 때문 아니겠나?"

노군상은 농담을 하며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올해 천무제. 제가 책임지고 청룡학관을 우승시키겠습니다.

그날 백수룡의 선전포고는 청룡학관을 넘어 도시 전체, 그리고 무림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물론 아직까지는 어이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확실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올해 청룡학관 입관 시험을 본 지원자들 중에 유독 재능 있는 아이들이 많은 것도, 백수룡의 선전포고의 영향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노군상은 그런 생각을 남궁제학을 돌아보았다.

"두고 보시게. 올해 천무제에서 청룡학관이 일을 낼 테니까."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다고 놀려 주었겠지만, 남궁제학은 그러지 않았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더군."

"호오?"

마침 공손수 일행이 청룡학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궁제학의 시선이 차례대로 공손수, 헌원강, 위지천을 향했다.

옆에 있는 노군상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을 향했다.

"저 셋을 가르친 사람이 한 명이라던데."

"허어. 벌써 자네 귀에까지 그 녀석 이름이 들어갔나?"

"자세히는 모르니 좀 알려 주게."

"백수룡이라고, 올해 신입 강사로 들어온 친구라네. 아, 저기 있군."

노군상의 손가락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백수룡은 악연호 등 다른 임시 강사들과 함께 관객석을 돌아다니며 순찰하고 있었다.

남궁제학이 한동안 뚫어질 듯 그를 바라봤다.

"흐음.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얼굴 하나는 잘생기긴 했네만.... 한번...."

"하지 말게."

"...뭘?"

옆을 돌아보니, 표정을 굳힌 노군상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시험해 보려 하지 말게. 우리 학관 선생이야."

"흠흠. 내가 뭘 어쨌다고."

괜히 찔린 듯 남궁제학이 헛기침을 했다.

백수룡을 한번 찾아가 보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난 그저 무인으로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조금 궁금할 뿐이야."

"부탁이니 하지 말게."

"끙. 자네가 부탁까지 한다면야...."

남궁제학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노군상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다시금 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잘 생각했네. 괜히 시험해 보겠다고 나섰다가 망신당하면 자네도 이만저만 곤란하지 않겠나."

"...그거 농담인가?"

"허허허허!"

워낙에 농담과 진담을 섞어서 하는 노군상이라, 남궁제학은 그의 묘한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었다.

'저렇게 말하니 더 궁금하군.'

남궁제학의 시선은 한동안 백수룡에게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