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얼굴 뚫어지겠네."
"또 어떤 여자인데요? 하여튼 이놈의 인기는...."
악연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백수룡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 아니다."
차라리 여자였으면 이렇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창천검왕.'
현 무림에서 최강자를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저렇게 멀리서 쳐다보는데도 피부가 따끔따끔할 지경이었다.
'나한테서 관심 좀 꺼 줬으면 좋겠는데.'
남궁제학이 지켜본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백수룡은 최대한 행동을 조심했다.
십존쯤 되는 고수는 그 자체로 자연재해나 마찬가지.
기분을 거슬리거나 반대로 흥미를 끈다면, 지금 백수룡의 실력으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내가 역천신공을 익힌 걸 눈치챈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남궁제학은 오십 년 전 혈교와의 전쟁에도 나섰던 만큼, 혈교 무공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결론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것.
"여자가 아니면... 설마? 하긴 형님 정도 얼굴이면 성별을 가리지 않긴 하지."
"이 자식이 진짜."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악연호의 뒤통수를 후려친 후,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남궁제학의 시선은 금방 거둬졌다.
[살수들의 위치는?]
[아직 파악 중이에요.]
악연호가 뒤통수를 만지며 전음으로 대답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다른 동료들에게도 물어보자, 모두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살수들도 적을 경계하기 시작하면서 전처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 설마 이렇게 무림인이 많은 곳에서 살수들이 날뛰겠어요?]
악연호의 희망이 담긴 질문에, 백수룡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비무를 치르러 모인 혈기 넘치는 젊은 무인들과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 이곳만큼 '사고'가 나기 쉬운 곳이 또 있어?]
[끄응....]
백수룡은 표정이 썩어가는 악연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긴장 풀지 마. 놈들도 이제부터는 필사적으로 나올 테니까."
"...."
이미 흑영이 황궁에 연락을 취했다.
살수들도 그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터.
놈들은 아마 오늘 안에 공손수를 죽이려 할 것이다.
"신중하게 지켜보자고."
백수룡은 기감을 최대한 활짝 열어 놓으며, 관객석의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 놓치지 않았다.
열 개나 되는 비무대 위에서 대련 시험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비무대 중 한 곳에서 승부가 난 것이다.
"나, 남궁석 지원자 승!"
심판도 당황한 듯 승자의 이름을 말할 때 말을 더듬거렸다.
그럴 만한 것이, 신입생 지원자가 학생회 선배를 대련에서 이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학생회 간부를 상대로 말이다.
"선배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남궁석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지만, 관객들도 그 상대도 그것이 겸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졌다."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기를 내려 보는 소년은 청룡쌍걸이라 불리는 학생회의 쌍둥이 중 형이었다.
백수룡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궁석을 바라봤다.
'철저하게 준비했군.'
남궁석의 무기는 검, 그중에서도 빠르고 날카로운 쾌검을 구사했다.
반면 쌍둥이 형의 무기는 포승줄이었다.
무림인의 무기치고는 흔치 않은 무기로, 그만큼 상대하기도 무척 까다로운 무기였다.
'평소에 상대해 볼 일이 거의 없는 무기인데....'
남궁석은 여러 번 포승줄을 상대해 본 것처럼 능숙하게 대처했고, 포승줄을 조금씩 잘라내더니 결국 상대에게 접근해 검으로 어깨를 가볍게 찔렀다.
백수룡은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남궁수를 찾았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예습을 철저히 시켰나 보네."
잠시 후, 다른 비무대에서 남궁수가 가르친 다른 제자인 진진도 학생회 선배를 상대로 승리했다.
"진진 승!"
"아싸아아아!"
남궁수와 달리 정말 어렵게 승리한 진진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남궁수가 가르친 두 명 모두, 학생회 선배를 이기는 이변을 일으켰다.
관객석 곳곳에서 "역시 남궁수 선생이 가르친 아이들이야.", "괜히 일타강사가 아니라니까."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백수룡은 그 둘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그가 관심을 보이는 학생은 다른 쪽이었다.
"으아아아아!"
힘찬 함성과 함께, 커다란 덩치의 소년이 온몸으로 학생회 선배를 밀어붙였다.
소년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덩치는 이미 웬만한 어른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컸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거대한 몸은 두꺼운 근육으로 단단하게 채워져 있었다.
"크아아악! 덤벼! 피하지 말고 덤비라고!"
온몸이 멍투성이에 눈가가 찢어진 상태에서도 소년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거대한 야수처럼 움직이며 주먹을 휘둘러 상대를 짓뭉개려고 들었다.
보다 못한 심판이 비무를 멈췄다.
"야수혁 지원자! 그만! 그만!"
"으아아아아!"
심판이 뜯어말린 후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야수혁은 한참을 씩씩댔다.
백수룡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덩치에 성격.... 딱 누가 생각나는데?"
타고난 신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육체.
반면 내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내공심법 자체를 익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공손수를 노리는 살수들 때문에 신경이 온통 주변에 팔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확 들어올 만큼, 야수혁이 백수룡에게 심어 준 인상은 강렬했다.
"저 녀석...."
하지만 백수룡은 더 이상 야수혁을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공손수 지원자는 올라오시오!"
심판의 부름에 공손수가 비무대 중 한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90화. 좋은 비무였습니다"후우...."
공손수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며 비무대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백룡장 동기들 앞에서는 의연한 척했지만, 역시나 이 순간엔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많이도 왔구나.'
관객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저 중에 자신을 유심히 지켜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스치듯 바라보는 시선들 하나하나도 부담이 되었다.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심사관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공손수는 뻣뻣해지려는 다리에 힘을 줘서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그때였다.
"어? 저 어르신, 며칠 전에 여기서...."
"조막생이라는 녀석하고 싸웠던 어르신 아니야?"
"맞네. 그때 저 노인장이 이겼는데, 진 놈이 비겁하게 기습을 해가지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손수를 알아봤다.
일부는 반갑게 알은체를 해 왔다.
"어르신! 힘내십시오!"
"나이도 많으신데 대단하시지. 우리 아버지랑 비슷하신 것 같은데...."
"노인장 힘내시게! 젊은 놈들 사이에서 보란 듯이 합격해 버려!"
관객석의 중장년들, 노인들이 두 손을 모아 힘내라고 소리를 질렀다.
젊은 지원자들 사이에 유일한 노인인 공손수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투영한 것이다.
"할아부지! 힘내세요!"
어른들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었다.
"허허...."
생각지도 못한 많은 사람의 응원에, 긴장했던 공손수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났다.
주위를 쭉 둘러보던 공손수는 마지막으로 백수룡과 눈이 마주쳤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백수룡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고맙네."
작게 중얼거린 공손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비무대 위에 올라갔다.
마침 반대편에서도 상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순간 곳곳에서 감탄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영광이로군. 학생회장이 내 상대라니 말일세."
학생회장 독고준.
명실상부 현 청룡학관 제일의 후기지수.
가정교육을 무척 잘 받은 것이 분명한, 반듯한 자세의 청년이 공손수 앞에 서 있었다.
"제가 상대라서 운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반대라네."
공손수가 활짝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가 기수식을 취하며 말했다.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하네. 기왕이면 자네와 대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었다네."
그것은 진심이었다.
이왕이면 최고의 상대와 후회 없는 대련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공손수를 잠시 바라보던 독고준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어르신이 청룡학관에 입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오만하거나 예의 없는 발언이 아니었다.
독고준의 눈빛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고, 말투는 공손했다.
그래서 공손수는 저 아이의 의중이 궁금했다.
"혹 사적인 감정인가?"
"아닙니다.
"허면 어째서?"
"...냉정하게 말해서, 어르신에겐 무인으로서 더 이상 성장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공손수 혼자만이 아니었다.
가까이 있던 심사관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남궁제학과 노군상 등의 표정도 굳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공손수의 표정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그런가?"
"재능 있고 가능성 있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들이 청룡학관의 신입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많은 나는 자격이 없단 말인가?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어야 하나?"
"...어르신은 백수룡 선생님에게 고액 과외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갑자기 백 선생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의아했지만, 사실이었기에 공손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아마도 어르신은 부자이고, 이룰 것을 다 이룬 삶을 사셨겠지요. 그 후에 눈을 돌린 것이 무공 아닙니까?"
"...."
독고준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했다.
자신의 말이 공손수에게 무례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르신에게 청룡학관 입관 시험은 유희이자 취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간절한 목표입니다."
"...자네는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모릅니다. 하지만 누가 더 간절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검을 중단으로 들어 올린 독고준의 몸에서 강렬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계속 무공을 배우고 싶으시다면 집에 고수를 초빙해서 배우십시오. 청룡학관은 취미로 무공을 배우기 위해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
"이 대련이 끝난 후에 입관을 포기하십시오."
"포기하라고?"
사실, 공손수는 입관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청룡학관에 입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황궁의 부름이 있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손수에게는 이 시험 자체가 인생의 큰 도전이었다.
"...대체 누가, 늙었다고 해서 간절하지 않다고 하더냐."
꽈악.
검 손잡이를 움켜쥔 공손수가 앞으로 반보 내디뎠다.
"네 제안은 거절하마. 나는 입관 시험에 합격해 당당히 청룡패를 얻을 것이다."
"...."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관객석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우우!"
"대체 언제 싸우는 거야!"
"빨리 좀 시작해라!"
두 사람도 더 이상 대화를 주고받을 마음은 없었다.
독고준이 검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삼 초를 양보하지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배려입니다."
며칠 전의 조막생과 같은 말이었으나, 그 무게감은 전혀 달랐다.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자세.
하지만 공손수는 굳이 빈틈을 찾으려 하지 않고 일단 거리를 좁혔다.
휘익!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공손수의 검이 정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그어졌다.
독고준은 간단하게 검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 일격을 받아쳤다.
채앵!
'단단하다.'
독고준의 검과 부딪치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단단하다. 마치 벽처럼.
그 어떤 공격으로도 흔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이 초 남았습니다."
독고준은 평온한 얼굴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 눈빛에 방심은 없었다. 스스로 이룬 검에 대한 자부심만이 있을 뿐.
"후우...."
숨을 고른 공손수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내공이라면 내가 우위일 터.'
첫 번째 공격은 상대의 성향을 탐색하기 위한 것.
진짜는 두 번째부터였다.
우우우웅!
내공이 가득 담긴 검이 부르르 떨었다.
공손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찌르기가 빛살처럼 공간을 갈랐다.
'그리 자신만만했으니 피하지 않을 테지.'
공손수의 예상대로 독고준은 피하지 않았다. 검을 들어 공손수의 검을 옆으로 쳐 냈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치며 두 사람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했다. 공격에 담긴 경력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휘리릭!
바람에 무복이 휘날리고, 바닥의 먼지가 돌풍에 휘말려 떠올랐다.
그 와중에 독고준이 말했다.
"일 초 남았습니다."
"어디 이것도 받아 보거라!"
공손수는 몸의 회전을 가속시키며 연속해서 독고준을 베었다. 회심의 공격이었다.
까가가강!
검과 검이 연달아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의 몸이 회오리바람 속에서 한동안 팽이처럼 회전했다.
그리고,
"삼 초. 끝났습니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독고준이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타닷!
하늘을 올려본 공손수는 볼 수 있었다.
독고준의 이마에 땀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는 것을.
"조심하시길."
친절하게 경고까지 해 준 후, 독고준은 정직하게 검을 아래로 내려 벴다.
공손수는 황급히 두 손으로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크윽!"
무겁다.
검이 아니라 망치를 휘두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거운 공격.
공손수는 위에서 내리찍는 검을 전력으로 밀어내며 뒤로 몸을 뺐다.
고작 일격을 막았을 뿐인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의외로군요."
독고준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일격에 상대를 주저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손수가 그걸 버텨 낸 것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공손수가 웃었다.
"죽어라 단련했다네. 취미치고는 과할 정도로 말이지."
"...."
두 번째 공격은 경고 없이 시작됐다.
독고준은 보법을 밟아 거리를 좁히며 무겁게 검을 찔렀다.
그 모습을 보며 공손수는 생각했다.
'생긴 것처럼 검도 정직한 청년이구나.'
허초도 변초도 없는 단순한 찌르기.
하지만 그 찌르기에 담긴 거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까아-앙!!
바닥에 발을 끌며 뒤로 몇 장이나 밀려난 공손수는 아슬아슬하게 비무대 끝에 발을 걸치고 버텼다.
몇 치만 더 물러났어도 장외로 끝났을 것이다.
"...또?"
독고준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두 번째 공격에는 크게 사정을 두지 않았다.
충분히 장외로 밀어낼 수 있다고 여겼는데....
비록 손바닥이 다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기는 해도, 공손수는 멀쩡히 버티고 섰다.
"허.... 대단하구나."
공손수는 찢어진 손바닥에서 흐르는 피를 바닥에 털어낸 후 다시 검을 꽉 쥐었다.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독고준을 바라봤다.
"이제야 좀 재미있어지려고 하는군."
"...."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가겠네."
하지만 이어진 싸움의 흐름도 비슷했다.
공손수가 덤벼들고, 독고준이 쳐 내고, 밀려난 공손수는 간신히 버텼다.
몇 번이나 검을 놓칠 뻔하고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공손수는 기어이 몸을 일으켜 다시 덤벼들었다.
"어째서...."
독고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공손수의 꼴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찢어질 만한 공격을 몇 번이나 받아 냈으니, 당연했다.
"포기하지 않는 겁니까?"
관객들 중 일부가 독고준의 검법을 알아보았다.
"독고구검!"
독고세가를 있게 한 검법.
무림의 호사가들이 중검(重劍)을 말할 때 늘 한 손에 꼽히는 검법으로, 경지에 이르면 상대를 무기와 함께 파괴해 버리는 강력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공손수는 그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 역시 누구보다 간절하기 때문이네."
"...."
독고준은 말문이 막혔다.
단순한 유희라고 생각했다.
저런 나이에 무공에 입문한 노인이, 무공에 진지하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겠나.
하지만 공손수의 필사적인 모습을 보자니,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까 했던 제 발언은...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으음?"
독고준은 평소 고집이 세고 벽창호 같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었다.
"괜찮네.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사과의 의미로, 최선을 다한 일검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어째 나한테 좋은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공손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으나, 이내 피식 웃고는 흔들리는 검 끝을 들어 독고준을 겨눴다.
어차피 더 이상 검을 휘두를 힘도 없었다.
공손수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오시게. 나 또한 성심성의껏 상대해 드리겠네."
고개를 끄덕인 독고준이 검을 휘둘렀다.
화아아악!
공손수는 일순간 거대한 검이 전면을 가득 채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단하구나.'
감탄을 하며 검을 휘둘렀다. 전력을 다한 검이 독고준의 검에 잡아먹히고, 조금씩 실금이 가 있던 검이 결국 두 동강 나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보였다.
쩌저적-! 까앙!
부러진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공손수는 반 토막만 남은 자신의 검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허허. 내가... 졌네."
관객석에서 어마어마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공손수의 귀에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어린 시절 그가 동경하던 청년이 자신에게 포권을 취하는 모습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좋은 비무였습니다."
"나 역시 좋은 비무였네.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게야."
공손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려는지, 세상이 뿌옇게 물들어 있었다.
그렇게 예순다섯 노인의 짧은 일탈이 끝났다.
...
[준비해라.]
살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91화. 어르신을 지켜!대련이 끝난 후, 비무대에서 내려온 공손수와 독고준은 가벼운 덕담을 나눴다.
"잘 모르고 무례하게 굴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 괜찮네."
"...."
공손수를 바라보는 독고준의 눈빛에는 존경심마저 엿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부유한 노인의 취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부딪쳐 보면서, 공손수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저 손의 굳은살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고준은 평소에 잘 짓지 않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합격하시면, 제가 선배이니 다음부터는 말을 높이셔야 합니다."
독고준 딴에는 농담이었다.
학생회장의 농담은 썰렁하기로 유명했지만, 다행히 공손수에게는 먹힌 모양이었다.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알겠네. 내 청룡학관에 다니게 되면 꼬박꼬박 선배라 부르겠네."
그렇게 말하는 공손수의 표정은 어쩐지 조금 씁쓸해 보였지만, 독고준은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짐작했다.
"의원에게 가서 상처를 보이십시오. 큰 부상은 아니지만 빨리 치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네는?"
"괜찮습니다. 다음 대련들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손바닥이 찢어지고 의복이 엉망이 된 공손수와 비교하면 독고준은 아주 멀쩡했다.
비무 도중에 옷깃 하나 베이지 않았고, 숨도 거의 거칠어지지 않았다.
공손수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의원은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는 다음 대련을 준비해야 해서....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잠깐."
공손수는 인사한 후에 몸을 돌리려는 독고준을 불렀다.
"...늙은이의 오지랖일 수도 있네만, 내 자네에게 충고 하나만 해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다시 돌아선 독고준은 경청하겠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참으로 가정교육을 잘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며 공손수는 웃었다.
"내 무공은 잘 모르지만, 자네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네."
"...."
"뛰어난 재능에, 훌륭한 가정교육에, 그렇다고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람도 아니야. 그러니 이렇게 어린나이에 이만한 경지에 오른 것이겠지."
"과찬이십니다."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분한 칭찬에 독고준은 고개를 숙였다.
독고준은 독고세가 내에서 백 년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다.
어릴 때부터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고, 가문의 역량이 집중된 교육을 받았다.
게다가 성실하기까지 해서, 가문의 형들보다도 독고구검의 성취가 훨씬 빨랐다.
"...아마 자네는 많은 사람들에게 천재라고 불렸을 게야."
분야는 다르지만, 공손수는 천재라 불리는 청년들을 수없이 봐 왔다. 그 또한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한 천재였다.
그렇기에 해 주는 조언이었다.
"절망하지 말게나."
"...예?"
"살아가면서 자네보다 빛나는 재능이 나타날 것이야. 그 앞에서 절망하지 말게. 작아질 것도 없지. 인생은 길거든."
독고준은 공손수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저보다 뛰어난 재능은 이미 여럿 보았습니다."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는 대답에, 공손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노파심에 한 말이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아닙니다. 더욱 수련에 정진하라는 말씀으로 알고 깊이 새기겠습니다."
"허허. 바쁜 사람 시간을 너무 빼앗았군. 나는 이만 의원에게 가 보겠네."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고준은 공손수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 * *
"위지천 지원자! 올라오시오!"
공교롭게도 위지천의 대련 상대도 독고준이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위지천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마음껏 실력이 펼쳐 보도록."
"네!"
밝게 대답한 위지천이 검을 뽑아 독고준을 겨눴다.
그 검과 마주한 순간, 독고준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노력이 모조리 배신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
강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검을 마주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직접 보니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어떻게 저 나이에....'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자신의 수준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독고준은 지금껏 천재라고 불리는 동년배들을 여럿 만나 보았다.
그중 가장 뛰어난 이들은 대부분 천무학관 출신이었다.
위지천은... 그들을 떠올리게 했다.
"저, 선배님? 시작해도 될까요?"
"...아."
위지천의 말에 독고준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으득.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 피 맛이 돌자 정신이 차츰 맑아졌다.
"...봐주지 마라."
"예?"
"전력으로 덤비란 뜻이다."
"...정말 그래도 되나요?"
"...."
독고준은 검을 단단히 쥐었다.
이 대련에서 자신이 질 수도 있을까?
'어쩌면.'
하지만 독고준은 질 수 없었다.
그는 청룡학관 학생회의 학생회장이자 학관 제일의 후기지수였다.
누구에게도 그 수식어는 양보할 수 없었다.
설령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라 할지라도.
스윽.
기수식을 취한 독고준이 말했다.
"와라. 아니, 내가 먼저 가지."
독고준은 땅을 박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처음으로 힘을 아끼지 않았다. 상대가 죽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신을 집중해 단숨에 베겠다는 작정으로 휘둘렀다.
후우웅!
거력이 담긴 독고구검이 위지천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휘둘러졌다. 위지천도 그 검을 경시하지 못하고 마주 휘둘렀다.
까아앙-!!!
두 검이 충돌한 순간, 그들을 중심으로 기파가 터져 나오며 주변의 모든 잡음이 사라졌다.
* * *
"세상에...."
악연호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두 소년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악연호뿐만이 아니었다.
관중석에 있는 모두가 두 소년을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와...."
"무슨...."
다른 비무대에서 싸우고 있던 지원생과 학생들조차 싸움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심판들조차 그걸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도 독고준과 위지천을 향해 있었으니까.
까가가가각!
쉴 새 없이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비무대 바닥에는 이미 날카로운 검흔이 가득했다.
"후우...."
"하아...."
잠시 뒤로 물러나 호흡을 고른 두 소년은 동시에 기합을 지르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핫!"
"하압!"
두 소년은 막상막하의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고수들은 그들의 검술이 판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독고준의 검은 단단하고 올곧다.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검술의 형을 완벽하게 몸에 체득했기에, 어느 때라도 원하는 초식을 사용할 수 있었다.
'독고구검은 기본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검술이다.'
반면 위지천의 검은 자유롭고 유연하다.
정해진 초식으로 싸우기보다는 흐름에 몸을 맡긴다. 상대에 맞춰 대응이 변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위지천의 검은... 상대와 어우러지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악연호는 위지천의 검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독고준의 검보다 위지천의 검이 더 낫냐고 누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추구하는 검도(劍道)가 다를 뿐.
둘 중에 누가 더 나은지 그 우열은 가릴 수 없었다.
"독고준도 제법이네."
"...저게 겨우 제법이라고요?"
악연호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아마도 청룡학관 내에서 유일하게 저 대결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 백수룡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형님은 저런 천재들의 대결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요?"
"천재들? 독고준은 그냥 연습 벌레야."
냉정한 평가였다.
독고준의 실력에는 백수룡도 나름 놀라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노력에도 천재가 있다면 저 녀석도 천재겠지만."
지금은 타고난 재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머지않아 벽에 부딪칠 것이다.
'조금만 더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면 좋았겠지만.'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수는 없다.
천재라고 불릴 수 있는 재능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은 무림인들 중에서도 한 줌에 불과하며, 그 재능을 꽃피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진짜 천재라는 건 저런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지."
위지천의 재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검의 사랑을 받는 소년.
평소의 수줍은 표정은 어디로 가고, 독고준과 검을 나누는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못 말리겠구만.'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에 위지천은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반면 독고준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대결 자체는 독고준이 미세하게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형님이 보기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오늘은 독고준이 이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다음에도 독고준이 이길지는, 독고준 본인도 자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왜 살수들이 움직이지 않는 거지?'
백수룡은 위지천의 대결을 보면서도 살수들의 움직임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
'어르신이 시험을 치르는 중에, 아니면 대결이 끝난 직후에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수들에게선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공손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연신 감탄하며 위지천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흑영이 은신술을 펼치고 숨어서 호위하고 있었다.
'조만간 움직임이 있을 거야.'
백수룡은 그렇게 확신했다.
"연호야. 긴장 놓지 마라."
"네? 아, 네."
백수룡은 다른 동료들에게도 전음을 보내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는 동안 위지천과 독고준의 대결도 서서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후우.... 후...."
"하악.... 학...."
마주선 두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단정했던 무복은 엉망이 되었고, 몸 곳곳에 얕은 자상이 새겨졌다.
"지쳤나?"
"아직... 괜찮습니다!"
독고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위지천을 향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더 늦기 전에 승부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각자 가진 최고의 절기로 승부를 내는 건 어떤가?"
"...좋아요!"
두 사람이 동시에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우우우우웅!
잠시 후, 두 개의 검에서 검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 검기다!"
"세상에. 둘 다 저 어린 나이에...."
"청룡학관이 올해는 정말 사고를 칠 모양이야!"
검기까지 목격한 관객석은 거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점잖은 정파의 고수들도 놀라서 연신 헛기침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이유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마,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부관주의 말에 노군상과 남궁제학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 다, 두 소년의 검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두고 보세나."
"위험해 보이면 내가 나서지."
"...예."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
곽철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충분히 검기를 끌어올린 두 소년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꿀꺽.
관객들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백수룡의 긴장감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살수들이 움직인다면 지금이다.'
모두의 시선이 위지천과 독고준에게 빼앗긴 이 순간이, 살수들이 움직이기에는 최적의 순간이었다.
[살수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마.]
그의 전음에 다들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백수룡의 예상은 대부분 맞았다.
다만, 적들은 그가 상상한 것보다 더 대담했을 뿐이다.
푸화아아악!
관중석 한가운데서 비명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살인이다!"
"으아악!"
한두 곳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동시에 대여섯 곳에서 피가 솟구쳤고 비명이 잇따랐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에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도, 도망쳐!"
"사파의 자객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서로 밀고 넘어지며 일대에 혼란이 벌어졌다.
"이게 무슨!"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강사들이 상황을 진정시켜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그들 절반 이상이 무림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다.
순식간에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자, 잠깐만!"
"여러분! 제발 진정하시고...."
살수들을 경계하고 있던 임시 강사들도 그 혼란 속에서 신경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밀려드는 사람들 탓에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어르신을 지켜!"
백수룡이 고함을 질렀을 땐, 이미 수십의 살수가 공손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92화. 약간의 시간"으아아악!"
"도, 도망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사방에서 솟구치는 핏물과 날카로운 비명.
공포에 질린 관중들이 도망치기 위해 서로 밀치고 넘어지고 짓밟았다.
"진정하십시오!"
"섣불리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강사들과 무인들이 나서서 그 혼란을 수습해 보려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자들이 있었다.
"독이다! 누가 독을 풀었어!"
"관중석에 폭약이 설치돼 있다!"
음성을 변조한 살수들이 사방에서 소리를 질러대며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자신이 만들어 낸 극도의 혼란 속에서, 흑림의 삼대주는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조는 선동과 교란을 계속하라.]
[존명!]
[이조는 방해꾼들을 막아라.]
[존명!]
[삼조는 목표물을 제거하라.]
[존명!]
모든 살수들에게 명령을 내린 후, 삼대주는 홀로 움직였다. 그는 관중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우릴 공격한 놈들. 혈방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혈방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혈방의 수법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알아보니 혈방도 정체 모를 자들에게 사냥당하고 있었다.
'살막인가?'
잠시 그런 의심도 했으나 곧 가능성을 지워 버렸다.
자부심이 강한 살막은 이런 식으로 이간계를 쓰지 않는다.
살막이 자신들을 죽이기로 했다면, 지금쯤 흑림의 살수들이 모두 죽었거나 살막의 살수가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흑영이라는 호위의 짓이군. 협력자들도 제법 있고.'
여기까지 알아내는데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데려온 흑림의 살수는 반으로 줄었고, 목표물은 멀쩡히 시험을 치렀다.
평소 같았으면 일단 포기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결코 다른 놈들에게 목표물을 빼앗겨선 안 된다.
빈손으로 돌아가면 흑림주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터.
게다가 이번 청부는 피해가 크다고 순순히 물러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데려온 살수들을 전부 소모해서라도 목표물을 죽여야 한다.'
그래서 아주 대범한 계획을 꾸몄다.
공손수만 죽일 수 있다면, 이곳에 있는 인간이 몇이 죽든 황궁의 권력자들이 덮어 줄 테니까.
"으아아아! 살려 줘어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며, 삼대주는 인파에 떠밀려 공손수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 손으로 끝내주지.'
목표물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어르신을 지켜!"
멀리서 백수룡의 외침이 들린 순간, 아니 이미 그 전에 헌원강은 몸을 날렸다.
공손수 앞을 가로막은 헌원강이 소리쳤다.
"할아범! 내 뒤에 가만히 있어!"
"이게 무슨...."
"어르신."
스르륵.
은신하고 있던 흑영도 공손수 옆에 모습을 드러냈다.
숨어서 지키는 것보다 모습을 드러내는 쪽이 호위에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의 표정을 본 공손수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날 노리는 놈들이로구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느냐?"
"...."
"어째서 내게 말하지 않은 게야?"
흑영은 쇄도해 오는 살수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차후에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지금은 절 믿어 주세요."
달려오던 살수들이 일제히 암기를 뿌렸다.
흑영과 헌원강이 동시에 앞으로 나서며 암기를 쳐 냈다.
까가가강!
암기를 쳐 내기 무섭게 첫 번째 살수가 들이닥쳤다. 가늘고 기다란 창이 공손수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왔다.
"어딜!"
헌원강이 창을 위로 쳐 내고, 흑영이 빈틈이 생긴 살수의 목을 베었다.
촤아악!
눈앞에서 피가 쏟아지자 헌원강이 움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살수들은 연이어 들이닥쳤고, 막지 않으면 공손수가 죽을 것이다.
"하아아압!"
헌원강은 기합을 넣으며 맹렬하게 도를 휘둘렀다.
쏟아지는 암기들을 쳐 내고, 정 안 되는 것들은 몸으로 막았다.
푹! 푹푹푹!
헌원강의 팔다리에 몇 개의 비도와 표창이 박혔다.
그가 비틀거리는 순간, 살수 셋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할아버지!"
비무대 위에 있던 위지천이 날듯이 그들에게로 달려왔다. 위지천은 검기를 뿌려 살수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설명할 시간 없어. 일단 덤벼드는 놈들을 막아!"
흑영, 헌원강, 위지천이 세 방위에서 공손수를 보호했다.
순식간에 숫자가 불어난 살수들이 그들을 덮쳤다.
살수들은 몸을 아끼지 않았다.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몸을 던졌다.
헌원강은 이를 악물고 살수들과 맞섰다.
푸화아악!
피보라가 무복을 흠뻑 적셨다.
얼굴에 튄 피를 닦을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칼날이 상대의 살을 파고드는 감각은 끔찍하기만 했다.
"허억... 헉...."
헌원강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청룡학관 제일의 망나니라 불려왔지만, 실제로 사람을 죽여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한 번에 많은 목숨을 빼앗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지간한 강심장을 가진 어른도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상황.
그저 이를 악물고 버틸 뿐이었다.
"...선배님. 뒤로 빠지세요."
오히려 위지천은 차분해 보였다. 헌원강을 뒤로 보내고 대신 정면으로 나서서 가장 많은 살수를 상대했다.
위지천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달려오는 살수의 목을 깔끔하게 베고, 망설임 없이 심장을 찔렀다.
살수 훈련을 받은 흑영조차 소년의 냉정함에 놀랄 정도였다.
"미친...."
뒤로 물러난 헌원강은 그저 경악스러운 눈으로 위지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무공도, 경험도 부족한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선배. 괜찮은가?"
공손수가 다친 헌원강을 부축했다.
아직 살수들의 검이 그에게까지 닿지 않았지만, 공손수도 검을 빼 들고 주위를 경계했다.
헌원강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젠장. 잘난 척 나서서 도움도 안 되는 게 무슨 선배야...."
"자네가 아니었다면 자네 몸에 박힌 비수가 내 몸에 박혔겠지. 그리고 많이 말하지 말게. 아무래도 독에 중독된 것 같으니."
"독...이었구나.... 어쩐지...."
"일단 이걸 좀 먹게."
어쩐지 어지럽고 메스껍더라니.
헌원강은 공손수가 입안에 넣어 주는 이름 모를 환약을 삼켰다. 그러자 조금 덜 어지러워졌다.
도로 바닥에 짚으며 헌원강이 허리를 세웠다.
"후우. 좀 나아졌어."
"...체력 하나만은 정말 괴물이로군."
두 사람은 등을 맞댄 채 주위를 경계했다.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파아알!"
사방이 혼란스러웠다. 비명과 고함이 끊이지 않았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살수들은 교활하게도 공손수 한 명만을 노리지 않았다.
동시에 여러 곳에서 사람을 해쳐 혼란을 키우고 시선을 분산시켰다.
"백 선생은?"
"이곳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백수룡과 다른 강사들도 다른 살수들과 싸우느라 발이 묶여 있었다.
"죄 없는 백성들을 해치다니...!"
공손수가 두 눈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가 살수들을 향해 일갈했다.
"너희는 오늘 반드시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 내가 살아나간다면 너희는 물론이고, 너희를 사주한 자들까지 잡아 삼족을 멸할 것이다!"
공손수의 서슬 퍼런 기세에 살수들이 움찔하는 듯했다.
아니, 살수들의 눈빛과 기세가 갑자기 바뀐 것은 그 이유만이 아니었다.
'뭐지?'
헌원강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등줄기를 훑는 서늘한 감각.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네가 천이보다 나은 부분? 일단 무식한 체력하고....
갑자기 백수룡이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어김없이 위지천에게 대련으로 깨지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날.
나는 저 녀석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푸념에, 백수룡이 혀를 차며 이렇게 말했었다.
-감각이라면 네가 천이보다 낫지. 넌 본능이 짐승처럼 발달한 녀석이니까.
-...그거 나은 점 맞아요?
그리고 이 순간, 헌원강은 제 본능이 말하는 감각을 믿기로 했다.
휘익!
헌원강은 즉시 공손수를 껴안고 옆으로 굴렀다.
푸욱!
어디선가 날아온 단창이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 박혔다.
헌원강은 등 뒤에서 들려온 혀 차는 소리를 들었다.
"쯧."
'어느 틈에!'
상대가 언제 나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리에서 솟아난 듯 나타난 사내가 두 사람을 향해 유령처럼 다가왔다.
"할아버지!"
"어르신!"
깜짝 놀란 위지천과 흑영이 동시에 고함을 지르며 달려왔다.
하지만 그 앞을, 목숨을 도외시한 살수들이 막아섰다.
"저리 비켜!"
"어르시인!"
곧 위지천과 흑영의 모습이 살수들에게 포위돼 가려졌다.
삼대주는 수하들이 벌어 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신법을 펼쳐 공손수에게 쇄도했다.
"할아범! 내 뒤에 얌전히 있어!"
"선배!"
헌원강은 공손수의 앞으로 나서며 도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생존 본능이 맹렬하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고수. 나보다 한참 고수다.'
적은 살수가 아닌 순수한 무인으로서도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달한 고수였다.
손에 든 밋밋한 칼에는 묵빛 도기가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젠장...."
"...."
상대는 한마디 말조차 없었다. 말없이 접근해선 조용히 칼을 휘둘러 온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이건... 죽는다.'
헌원강은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죽음을 가까이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호흡이 느려진다. 느려지다 못해서 멈춰 버린 듯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죽음의 목젖까지 닿은 순간, 백수룡이 그의 장점이라고 말했던 본능의 감각이 세포 하나하나 올올이 깨어났다.
"!!"
시간이 다시 빨라지고, 헌원강과 삼대주의 칼을 서로를 지나쳤다.
푸화아아악!
헌원강이 가슴에서 피를 쏟으며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강아! 이노오오옴!"
그 모습을 본 공손수가 비명을 질렀다. 분노한 그가 검을 치켜들고 삼대주에게 달려들었다
"...."
미간을 찌푸린 삼대주는 피가 흐르는 팔을 지혈했다.
공격이 교차하는 마지막 순간, 저 애송이의 움직임이 급변하더니 그의 팔에 얕지 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와중에 내 공격까지 피했나.'
바닥에 쓰러진 헌원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치명상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완벽하게 숨통을 끊어 놓고 싶었지만, 지금 급한 쪽은 공손수였다.
공손수는 고개를 돌려 공손수를 바라봤다.
"이노오오옴!"
흑영과 위지천은 여전히 흑림의 살수들에게 발이 묶여 있었고, 강사들은 혼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헌원강이 목숨을 걸고 번 시간은 고작해야 찰나에 불과했다.
"우리의 승리다."
희미하게 웃은 삼대주가 칼을 공손수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헌원강이 번 찰나의 시간이 보답받았다.
"멈춰라."
거짓말처럼 공손수의 목 앞에 닿은 칼날이 멈췄다.
"...!!"
삼대주는 멈추라는 명령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거역할 수 없었을 뿐이다.
아무리 팔에 힘을 주고 밀어 넣으려고 해도, 그의 칼은 더 이상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끅, 끄윽...!"
그 대신 어마어마한 기(氣)의 압력이 그의 전신을 짓눌렀다.
으드득....
온몸이 그대로 짜부라질 것만 같았다.
"멈추라고 하였다."
"크허억!"
쿵!
결국 삼대주가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살수들도 피를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무슨...."
"갑자기 왜...."
살수들과 싸우고 있던 위지천과 흑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살수들을 바라봤다.
그러다 하늘 위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존재감을 느끼곤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내 너희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구나."
하늘 위에 고고히 선 남궁제학이, 눈부신 태양을 등진 채 지상의 살수들을 오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네에게도 말이야."
"...."
살수들을 쭉 훑은 남궁제학의 시선은 공손수의 뒤편, 자신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백수룡에게 향했다.##93화. 사람이 실수 좀 할 수 있지!커다란 혼란이 있었지만, 청룡학관의 고수들이 나서면서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살수들의 입안에 독단이 있다! 제압한 후 혈도를 짚도록!"
남궁수는 강사들을 이끌고 직접 살수들을 제압했다.
그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살수들의 팔다리가 끊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의 백의무복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남궁 선생!"
"부관주님."
"이,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허겁지겁 달려온 부관주 곽철우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그 한심한 모습에 속에서 한숨이 나왔으나, 남궁수는 티 내지 않으며 부관주를 진정시켰다.
"훈련받은 살수들입니다. 목적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짐작되는 바는 있었지만, 남궁수는 그것까지 곽철우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살수들부터 제압해야 합니다."
"그, 그래야지! 이놈드으을!"
잠시 후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다.
애초에 살수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남궁제학이 흑림의 삼대주를 제압하면서 그마저도 사기를 잃었다.
남궁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군.'
기적적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살수들의 목적이 애초에 혼란을 키우는 것이었기에, 죽이기보다는 상처를 입혀서 비명을 지르게 유도한 탓이었다.
오히려 칼에 찔려서 다친 사람보다 도망치던 중 서로 밀치고 넘어져서 다친 중상자들이 더 많았다.
"부상자들은 즉시 의원으로 옮겨야 합니다."
"다, 당장 그리하겠네."
부관주가 허겁지겁 명령을 내리러 간 사이, 남궁수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았다.
'백수룡.'
백수룡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약 반 각 전, 남궁수는 백수룡의 외침을 들었다.
-어르신을 지켜!
관중석 한가운데서 피와 비명이 시작되자마자 터져 나온 외침.
'이런 일이 터질 걸 알고 있었나?'
만약 백수룡이 이 일을 미리 알면서도 말하지 않고 방치한 거라면..., 사적인 감정과 별개로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백수룡의 외침을 들은 사람은 남궁수 혼자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백 선생. 이야기 좀 하지."
표정이 굳은 노군상과 서슬 퍼런 표정의 남궁제학이 백수룡에게 다가갔다. 그들 곁에는 공손수도 함께 있었다.
"...."
네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지만, 기막을 펼쳐 소리를 차단했는지 청력을 집중해도 대화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노군상의 한숨과 함께 마지막 말만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지."
돌아선 노군상은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침중한 어조로 선언했다.
"입관 시험은 잠시 중지하겠소."
잠시 후 노군상이 전음으로 남궁수를 불렀다.
[남궁 선생. 관주실로 오게.]
관주실로 향하며, 남궁수는 백수룡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자가 오고 나서 학관에 바람 잘 날이 없군."
* * *
방 안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다행히도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수십 명이 크게 다쳐 의원에 실려 갔다.
다친 사람들 중에는 가슴에 커다란 자상을 입은 헌원강도 있었다.
"워낙 튼튼한 아이이니 금방 털고 일어날 겁니다."
"그래야지...."
흑영의 위로에 공손수가 초췌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사람이 지켜 준 덕분에 그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이 늙은이가 대체 뭐라고....'
관주실 안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노군상, 남궁제학, 곽철우, 남궁수.
청룡학관의 강사들과 십존의 일원이 상석에 나란히 앉았다.
공손수, 흑영, 위지천.
헌원강을 제외한 백룡장의 식구들이 반대편에 일렬로 앉았다.
악연호, 명일오, 제갈소영.
청룡학관 임시 강사들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한쪽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바라보는 중심에, 백수룡이 자세를 단정하게 하고 앉아 있었다.
분위기는 사뭇 청문회를 연상시켰다.
"...저의 판단 착오였습니다."
백수룡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는 공손수의 신분과 그를 향한 암살 시도가 있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걸 막기 위해 임시 강사들에게 도움을 청한 사실도 솔직하게 말했다.
'어설프게 거짓말한다고 속을 사람들이 아니지.'
노군상과 남궁제학이 형형한 눈빛으로 백수룡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부 다 솔직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노군상에게 미리 모든 사실을 알리지 않은 이유라든가.
"...나를 못 믿었던 게로군."
'말하지 않아도 아는군.'
백수룡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적의 연줄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인원에게만 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승상 본인에게도 알리지 않았나?"
대화에 끼어든 남궁제학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의 시선이 백수룡의 몸을 검처럼 꿰뚫을 듯했다.
'...전음을 보내면 곧바로 들키겠지.'
절세고수 앞에서 수작을 부렸다간 이 자리에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때문에 공손수와 몰래 입을 맞출 수도 없는 상황.
백수룡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대로만 말하게. 어째서 승상에게도 살수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나?"
남궁제학은 백수룡보다 한발 먼저 공손수를 구했다.
그 후로 쭉 공손수 곁을 지켰고, 공손수가 살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네."
호위 대상에게 살수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저 입에서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대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백수룡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을 미끼로 살수들을 유인할 계획이었습니다."
"허?"
"미쳤군."
"제정신인가?"
차례대로 노군상, 남궁제학, 남궁수가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라의 승상까지 지낸 인물을 미끼로 삼다니.
만약 공손수가 죽기라도 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허허...."
정작 공손수는 흑영에게 사정을 들었는지 덤덤한 표정이었다.
백수룡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적의 숫자도 알 수 없었습니다. 도망치거나 숨는다는 선택지는 오히려 적에게 유리할 것이 뻔했습니다. 차라리 대중 사이에 섞여...."
"도대체 제정신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곽철우가 백수룡에게 삿대질을 했다.
"관무불가침도 모른단 말이냐! 네가 학관을 말아 먹으려고 아주 작정을 했구나!"
"부관주. 진정하고 앉게."
노군상은 앉으라 했으나 성격이 급한 곽철우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황궁과 관련된 일이면 관아에 신고를 할 것이지, 무슨 불똥을 튀게 하려고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닥치라고 해야 알아듣겠나?"
곽철우의 발언이 선을 넘은 순간, 노군상이 은은한 살기를 드러냈다.
"앉게. 손님들도 계신 곳이네."
"제,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곽철우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더욱 싸늘해진 분위기 속에서 남궁제학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백 선생. 노관주를 믿지 않았다면 나도 믿지 않았겠군."
"...예."
"내 평생 창천검왕이라는 별호가 과분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낱 살수들과 한패로 묶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남궁제학은 딱히 기세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방 안의 무인들은 벌써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가운데 백수룡이 입을 열었다.
"한패로 묶지 않았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격언을 잊지 않았을 뿐입니다."
"자네 눈에는 이 내가, 남궁세가가 고작 돌다리로 보였단 말인가?"
남궁제학은 눈앞의 청년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딱히 내공을 끌어올리지 않아도, 어지간한 고수들도 그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곤 했다.
하지만 백수룡은 달랐다.
'내 눈을 피하지 않는군.'
타고나길 대범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간이 부은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의 기분이 영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네. 상관없는 민간인들이 여럿 다쳤어. 입관 시험은 엉망이 되었지."
"맞는 말씀입니다."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나?"
"...."
살수들이 저지른 짓이었지만, 백수룡은 이 일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다.
적들이 그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면... 더 나은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자네가 나나 노관주에게 진작 도움을 청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피해였지. 인정하나?"
"인정합니다."
백수룡은 변명을 덧붙이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다쳤다.
절체절명의 순간 남궁제학이 나서지 않았다면 공손수도 당했을지도 모른다.
'혈교였다면 책임을 지고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겠지.'
백수룡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책임? 어떻게 말인가?"
"이보게 제학. 너무 다그치지 말고...."
"군상 자네는 가만히 있게. 사람이 너무 좋으니 임시 강사가 자네 몰래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 아닌가."
"...."
남궁제학은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 백수룡을 몰아붙였다.
"자, 어떻게 책임을 질 생각인가?"
"원하신다면 강사직을 내려놓고...."
하지만 남궁제학이 기대했던 격렬한 반응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하는군!"
목소리의 주인은 공손수였다.
이 사건의 핵심인물이자 피해자가 될 뻔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치켜뜨고 남궁제학을 노려봤다.
"스, 승상?"
당황한 남궁제학이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공손수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 피해를 입은 청룡학관에 미안한 마음에 가만히 있으려고 했소. 헌데 돌아가는 꼴이 괴이쩍어서 몇 마디 해야겠군. 이 자리가 백 선생을 추궁하기 위해 모인 청문회요?"
"...."
"따질 것이 있으면 내게 따지시오. 살수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서 왔고, 백 선생은 나를 지키려고 했을 뿐이오."
"저희는 사건의 전모를 알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는 이미 다 듣지 않았소이까. 그런데도 어째서 백 선생을 핍박하는 게요?"
남궁제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겨우 대답했다.
"그는 상관에게 보고를 누락했습니다. 그로 인해 민간인의 피해가...."
공손수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백 선생의 말에는 틀린 것이 없소. 황궁에는 내 적이 많지. 그중에 무인들과 끈이 닿은 자가 한둘이겠소? 남궁세가? 나를 죽이려는 자들 중에 남궁세가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권력자가 없을 것 같소?"
"...."
남궁세가에 대한 모욕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남궁제학은 반박하지 못했다.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내 생명의 은인을 모른 척할 만큼 배은망덕하지 않소. 만약 청룡학관이 백 선생을 해고한다면, 나는 그를 황궁으로 데려가 장군으로 만들 것이오."
"예?"
황당한 소리를 낸 사람은 백수룡이었다.
편을 들어주는 건 좋은데, 갑자기 장군이라니.
남궁제학이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믿을 리가....
'믿네?'
남궁제학의 표정이 어린 당혹스러움은 공손수의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저도 몇 마디만 하겠습니다."
공손수가 잠시 말을 멈춘 틈에 흑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백 선생님이 계획을 말씀해 주셨을 때 저도 찬성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책임을 지고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저 또한 사죄의 의미로 팔 하나를 잘라 내놓겠습니다."
"무슨...."
갑자기 팔을 왜 잘라?
백수룡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흑영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 저도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갑자기 위지천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입에선 또 무슨 말이 나올지, 백수룡은 두려울 지경이었다.
"만약 백 선생님이 청룡학관을 관두시게 되면... 저도 입관을 포기할래요."
"...."
"선생님이 안 계신 청룡학관은 다니고 싶지 않아요."
할 말을 끝내고 고개를 푹 숙이는 위지천.
노군상, 남궁수, 곽철우가 동시에 반응했다.
'저런 인재를 놓친다고?!'
노군상은 고개를 홱 돌려 남궁제학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당장 백 선생에게 사과하게!]
[무, 무슨 소리인가. 내가 왜 사과를....]
[사과해 이놈아! 당장 해!]
그 쩌렁쩌렁한 전음에, 남궁제학은 자기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야 말았다.
"미, 미안하네. 방금은 내가 좀 과하게 몰아붙인 것 같군."
"...아닙니다."
기어이 남궁제학에게 사과를 받아낸 공손수가 손뼉을 짝 치더니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실수 좀 할 수 있지. 자, 이제부터 향후 대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94화. 입학식"천검이 직접 모시러 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방을 정리하고 있던 공손수는 그 말에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흑영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천검이 온다니? 폐하의 호위는 어쩌고?"
천검(天劍)은 금의위 최고수이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무인으로 손꼽히는 십걸의 일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의 곁을 항시 지키는 그림자이기도 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천검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허허. 이 늙은이가 뭐라고...."
황제의 애틋한 마음에 공손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살수들의 공격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전 승상이었던 공손수가 습격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황궁은 뒤집혔다.
듣기로는 황제가 대노하여 흉수를 찾으라고 명령했고, 벌써 관련자 몇 명이 잡혀 들어갔다고 들었다.
또한 수많은 관료들이 과거 철혈의 재상이라 불렸던 공손수의 귀환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하였다.
"...많은 관료들로부터 접촉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모두에게 똑같이 전하거라. 죄를 지은 자는 죗값을 치를 것이요, 피를 흘리게 한 자는 핏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예."
잠시 서늘한 표정을 지었던 공손수가 몸을 돌려 다시 방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짐이라, 정리하는 데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물건이라고는 갈아입을 무복 몇 벌, 즐겨 읽는 서책 몇 권, 그리고 방 안에서 휘두르던 목검 하나가 전부였다.
공손수는 손때가 묻은 목검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허허. 때가 많이도 탔구나."
"...주무실 때도 잘 놓지 않으셨으니까요."
흑영은 공손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들보다 굼뜨고 허약한 몸으로 강해지려면 남들보다 몇 배 이상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손수는 종일 검을 쥐고, 검을 휘두르고, 검을 생각했다.
궁금한 것은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스승을 찾아가 묻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청룡학관 애들이 어르신의 반만 노력했으면 천무제 우승을 밥 먹듯이 했을 텐데....
백수룡이 혀를 내두르며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서 무공을 수련했다.
지난 시간을 되새기는 공손수의 눈빛이 아련했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구나."
"...꿈을 이룬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허허. 말재주가 제법 늘었구나."
"어르신과 백 선생 사이에 있으니 안 늘 수가 있어야죠."
"요 녀석 봐라? 나중에는 나랑 대작도 하자고 하겠는걸."
"지금도 못 할 건 없죠."
"무어라? 푸하하하!"
공손수가 껄껄 웃자 흑영도 따라서 빙긋 웃었다.
그녀도 변했다.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는 날이 많아졌다.
전부 백룡장에 온 이후로 생긴 변화였다.
그녀는 백수룡에게 따로 무공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 외에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우리 둘 다 이곳에서 참 많이 배웠구나."
"...예. 그리울 것 같습니다."
공손수는 손을 뻗어 탁자 위, 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새것을 손에 쥐었다.
그것은 청룡이 똬리를 튼 모양의 손바닥만 한 옥패였다.
청룡패(靑龍牌).
청룡학관에 입학한 학생들에게만 주어지는 학생증.
어제 오후, 청룡학관 신입생 입관 시험 최종 결과가 발표되었다.
"다시 한번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아슬아슬했지. 맨 아래에 이름이 적혀 있는 줄 알았다면 밑에서부터 찾아볼 것을."
"사실 위에서부터 찾으실 때 조금 황당하긴 했어요."
"요 녀석이...."
공손수가 눈을 샐쭉하게 뜨고 째려보자, 흑영이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어쨌든 합격은 합격이죠."
비록 말석이었지만, 공손수는 청룡학관 입관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허허. 그래. 수석이든 말석이든 합격은 합격이지."
청룡패를 품 안에 넣는 것으로 짐 정리를 끝낸 공손수와 흑영은 방을 나섰다.
"떠나기 전에 백 선생을 만나서 한 번 더 인사를 해야겠구나. 이게 다 최고의 스승을 만난 덕분이니."
"...백 선생이 최고의 스승이라면, 어르신은 최고의 학생이었어요."
"할 거면 하나만 해라. 금칠했다가 놀렸다가.... 이랬다저랬다 하면 엉덩이에 뿔 난다는 말도 못 들어 봤느냐?"
"저도 마지막 날이니까 이 정도 투정은 좀 받아 주세요."
"쯧쯧. 이런 망아지를 누구한테 시집을 보낼꼬...."
두 사람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방을 나섰다.
"할아버지!"
"할아범. 왜 이렇게 늦어."
정자에 앉아 기다리던 위지천이 손을 흔들었고, 안색이 창백한 헌원강이 툴툴거렸다.
'허허. 저 녀석은 인간이 맞나 싶군.'
큰 상처를 입었던 헌원강은, 놀랍게도 며칠 만에 스스로 걸어 다닐 만큼 회복이 되었다.
공손수가 아끼지 않고 먹인 영약과 백수룡이 가르친 녹림십팔식이 자가 회복력을 끌어올린 덕분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두 사람의 눈에는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하여튼 떠나기 전에 괜찮아진 모습을 보게 돼서 다행이야.'
한 달 동안 정든 백룡장을 한번 빙 둘러본 공손수가 모두에게 말했다.
"입학식에 늦기 전에 가자꾸나."
오늘은 청룡학관 신입생 입학식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공손수는 황궁으로 돌아간다.
* * *
입학식 행사는 성대하게 차려졌다.
대연무장 한가운데 총 일백의 신입생 합격자들이 도열했다.
그 주변으로 신입생들의 부모와 지인들이 감격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얼마 전, 우리는 간악한 살수들의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여러분은 대련시험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청룡학관주 노군상에 말에 신입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시험장에서 있었던 살수들의 암살 시도는 '청룡학관 입관 시험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로 바뀌어 공표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올해 신입생들 간의 유대감을 형성했다.
"역사 속에서 사파의 도전이 계속 있어 왔지만, 항상 그래왔듯 우리는 또 이겨낼 것입니다. 청룡학관이 멸마척사의 선두에서 설 것입니다!"
노군상의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노군상이 단상에서 물러나고, 입학식 행사의 사회를 맡은 매극렴이 말했다.
"이어서 신입생 대표의 연설이 있겠습니다. 수석 입학생은 올라오시오."
잠시 후, 단상 위로 한 소년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작은 체구에 가녀린 몸.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검에 휘둘리게 생긴 모습이었지만, 그곳의 누구도 그 소년을 무시하지 못했다.
'저 녀석이 위지천....'
'독고준 선배와 호각으로 겨룬 천재.'
'저런 괴물이 나랑 동갑이라니....'
청룡학관 강사 전원 만장일치.
압도적인 성적의 수석.
신입생 동기들은 부러움과 동경과 질시의 시선으로 위지천을 바라봤다.
"그래. 지금을 실컷 즐겨라. 졸업식 연설은 반드시 내가...."
역시 만장일치로 차석을 차지한 남궁석이 경쟁심을 활활 불태우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위지천은 남궁석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눈앞이 새하얘질 지경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위지천입니다."
어깨를 움츠리는 수줍은 소년의 인사에 누군가는 웃음을, 누군가를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매극렴이 위지천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된다."
신입생 연설.
졸업생 대표 연설과 함께, 청룡학관 재학 중에 누릴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순간 중 하나였다.
"저는... 수석이 되어서 이 자리에 서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곳에서, 위지천이 부끄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왜냐하면 다른 분께 신입생 연설을 양보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뭐?"
"무슨 소리야?"
그 말에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공손수였다.
위지천의 시선이 아까부터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아. 너 설마...."
"공손수 동기님. 올라와 주세요."
위지천의 지목에 공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위지천이 노력해서 얻은 보상을, 단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대신 받을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어르신."
어느새 다가왔는지, 백수룡이 공손수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어서 올라가세요. 저러다가 천이 얼굴 빨개지다 못해 터지겠네."
"...자넨 알고 있었나?"
백수룡이 한숨을 내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애들 마음까지 어떻게 압니까. 몰래 준비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올라가세요. 행사 길어지면 제 퇴근도 늦는다고요."
그렇게 등을 떠밀려, 공손수는 어느새 단상 위에 올라왔다. 위지천은 그에게 힘내라고 말하고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허허....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군. 학관주님. 제가 정말 이걸 대신해도 되는 겝니까?"
공손수가 노군상은 돌아보며 묻자, 노군상도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위지천 학생에게 돌아간 보상이니, 그걸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학생 마음이겠지요."
결국 공손수에게 신입생 대표 연설을 하라는 소리였다.
"허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당황했던 것도 잠시.
황제 폐하와 수많은 대신들 앞에서도 당당했던 공손수였다. 고작 수백 명 앞에서 긴장할 리가 없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차분한 시선으로 단상 아래의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공손수라 합니다. 올해 예순다섯입니다. 혹 나보다 나이가 많은 신입생이 있으면 이리 올라오십시오. 요즘은 얼굴만 보고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서 원."
공손수의 농담에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그가 마지막에 귀빈석에 있는 남궁제학을 힐끔 바라봤던 것이다.
순식간에 이목을 집중시킨 공손수가 말을 이었다.
"저는 수석이 아니라서 대단한 포부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할까 합니다. 늙은이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한 귀로 듣고 흘려도 상관없습니다."
어느새 모두가 공손수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올해 신입생 중 어쩌면 무공은 가장 약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기세가 좌중을 압도했다.
"첫째, 스스로가 다른 이보다 못하다고 해서 좌절하지 마십시오. 그럴 땐 나를 떠올리십시오. 나는 예순다섯이 되어서야 여러분과 같은 자리에 섰습니다."
공손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간 위지천을 바라봤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재능을 가진 소년.
"...세상은 불공평한 곳입니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서, 재능의 크기에 따라서, 가진 것에 따라서 인생은 거의 결정됩니다. 그걸 바꾸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요."
하지만.
공손수에겐 위지천 뒤에서 입술을 짓씹는 남궁석도, 그 뒤의 아이도, 또 그 뒤의 아이들도 모두 부러운 재능이었다.
청룡학관에 입학한 아이들 모두,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재능들이 아니겠는가.
"열심히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십시오.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공손수는 고개를 돌려 헌원강을 바라봤다.
거친 외모와 달리 정이 많은 녀석.
여전히 위지천에게 매일 대련에서 지면서도, 언젠가는 이길 거라며 아득바득 노력하는 모습은 대견하기 그지없었다.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헌원강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아마도 "망할 할아범"이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피식 웃은 공손수는 고개를 돌려 흑영을 바라봤다.
"둘째, 좋은 친구를 만나십시오. 위만 바라보고 인생을 살다 보면, 주변에 친구는 없고 적만 가득하게 됩니다."
흑영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호위 대상과 호위 무사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두 사람은 이제 친구를 넘어 가족이었다.
'이리 좋은 날에 어찌 우느냐.'
흑영에게 웃어준 공손수는 고개를 돌려 백수룡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좋은 스승을 만나십시오."
"...."
공손수가 눈매가 부드럽게 휘자, 백수룡도 기분 좋게 웃어 주었다.
"여러분의 가능성을 믿어 주는 스승을 만난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공손수도 처음에는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독고준의 말대로 가벼운 유희, 장난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자네가 그것을 진지하게 만들었지.'
학생 스스로도 믿지 않았던 가능성을 일깨우고, 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현실로 만들었다.
백수룡이 아닌 어떤 선생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자네는 최고의 스승이었네.'
'어르신은 최고의 학생이었습니다.'
말을 하거나 전음을 주고받지 않아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며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어디에 있더라도, 청룡학관 동기 여러분의 건승과 무운을 빌겠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공손수는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짝, 짝짝.
백수룡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의례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심이 담긴 박수였다.
그를 따라 흑영도, 헌원강도, 위지천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몇 사람에게서 시작된 박수는 전염되듯 주변으로 퍼져, 공손수가 단상에서 내려간 이후에도 꽤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렇게 입학식이 끝난 후, 공손수는 청룡학관에 자퇴서를 제출했다.##95화. 어떻게 아셨습니까?노군상은 공손수가 내민 자퇴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입학하자마자 자퇴라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입니다."
"허허. 제가 청룡학관에서 신기록을 여러 번 갱신하는군요."
마주 앉은 공손수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노군상은 그 웃음에 숨겨진 씁쓸함을 느끼고는 조용히 물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아쉽지요. 많이 아쉽습니다."
공손수는 자퇴서와 함께 탁자 위에 놓인 청룡패를 바라봤다.
자퇴서를 제출했으니, 청룡패도 반납해야 했다.
"허나 나라가 간신들로 인해 곪아가는 꼴을 보면서까지 무공을 수련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합니다."
공손수가 부재해 있는 동안, 황궁의 권력자들이 황제를 견제하고 게걸스럽게 권력을 탐했다.
황제는 어질고 총명하나, 닳고 닳은 권력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그것이 공손수가 황궁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였다.
"비록 저는 자퇴를 하지만, 멀리서나마 청룡학관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보탬이라면...."
공손수가 본 청룡학관은 여러 잠룡이 꿈틀대고 있는 인재의 화수분이었다.
하지만 지난 십 년간 천무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다 보니, 학생들의 자신감이 줄어들고 재정적인 지원도 점점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공손수는 이 악순환을 끊을 생각이었다.
"관주님. 올해부터 재정적인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허...."
앞으로 청룡학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다른 오대학관 이상으로 풍족해질 것이다.
공손수의 말 몇 마디면 가능한 일.
갑자기 찾아온 이 기연에 노군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허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뿐입니다. 함께 합격한 동기들이 앞으로도 청룡학관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랍니다."
"...."
잠시 공손수를 바라보던 노군상은 갑자기 공손수의 자퇴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렸다.
찌이익.
"왜...?"
"공손수 신입생."
공손수를 대하는 노군상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자네는 퇴학이 아닌 휴학으로 처리하겠네."
"예?"
노군상은 탁자 위에 놓인 청룡패를 다시 공손수에게 밀었다. 반납을 거절한 것이다.
"황궁에서의 일이 끝나면 복학하도록 하게."
"...."
"간단한 재시험 정도는 치러야 할 것이야. 몸 관리를 게을리했다간 받아 주지 않을 테니 알고 있도록."
"허허허...."
복학이라니.
지금 공손수의 나이만 해도 예순다섯이다.
오 년만 지나도 일흔, 십 년이 지나면 일흔다섯이다.
'오 년 안에 황궁의 일을 정리할 수 있을까?'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 년이 지나건 십 년이 지나건, 그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공손수는 어느새 웃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청룡패를 받아든 공손수는 그것을 품 안에 소중히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네가 돌아왔을 때의 청룡학관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걸세."
"허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공손수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몸을 돌려 관주실을 나갔다.
이날로부터 몇 년 후, 청룡학관에 전설의 복학생이 귀환하게 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