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젠 정말 이별이로군."
도시 외곽.
공손수는 멀리까지 마중을 나온 백수룡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나 때문에 곤란한 것 아닌가? 입학식 날이라서 모두가 바쁠 텐데."
입학식만 참가하고 바로 자퇴서를 제출한 공손수와 달리, 다른 신입생들은 반을 배정받는 등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임시 강사인 백수룡도 본래는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하겠지만, 그는 태평하게 공손수를 배웅하고 있었다.
백수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관주님한테 다 허락받고 나왔습니다. 다들 바쁠 때 땡땡이치고 좋은데요?"
"쯧쯧. 그러다 다른 강사들에게 미움받으면 어쩌려고."
"미움이라면 이미 잔뜩 받고 있고요."
백수룡은 오늘 아침부터 내내 저기압이던 남궁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킥킥 웃었다.
'녀석한테서 어떤 수업을 빼앗아 올까나.'
위지천이 수석 입학을 했으니, 두 사람의 내기의 승자는 백수룡이었다.
승리의 보상은 이번 학기 남궁수의 수업 중 하나를 백수룡이 대신하는 것.
청룡학관 일타강사인 남궁수의 수업은 하나같이 인기가 많은 것들뿐이니, 무엇을 골라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무기 수업? 외공? 내공? 이왕이면 학년 공통 수업이 좋을 것 같은데....'
아직은 결정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행복한 고민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또 학생들을 괴롭힐 못된 계획을 짜고 있나 보구먼."
"아쉽네요. 그 계획에 어르신도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백수룡의 말에 공손수는 빙그레 웃었다.
몇 시진 전이었다면 저 말이 씁쓸하게 들렸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겐 새로운 목표가 생겼으니까.
"나중에 복학해서 듣겠네. 그러니 밉보여서 잘리지 말고, 오래오래 청룡학관에서 해 먹게나."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 주변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위지천은 이후 일정 때문에 학관에 남아야 했고, 헌원강은 멀리까지 마중을 나올 몸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입학식만 본 후에 다시 의원으로 보냈다.
흑영에겐 천검을 마중 나가라고 보냈다.
지금부터 늦어도 반 시진 이내에, 천검과 금의위의 병력이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래서, 흑영까지 보내고 둘이서 할 이야기라는 것이 뭔가?"
공손수의 질문에 백수룡이 빙긋 웃었다.
흑영을 보낸 것은 공손수였지만, 백수룡이 몰래 부탁했던 것이다.
"그냥 가시기 전에 이런저런 얘기나 좀 할까 해서요. 잠깐 저기 좀 앉을까요?"
관도를 빠져나가는 산길이 시작되는 곳.
두 사람은 그 앞에 마련된 작은 정자에 마주 보고 앉았다.
"한 달이 좀 넘는 시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백수룡은 준비해 온 술과 술잔을 꺼냈다. 전날 미리 사 둔 비싼 백주였다.
공손수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어. 자네가 주는 술을 다 마셔 보는군. 그동안 입에도 못 대게 하더니."
"그래서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가기 전에 한 잔 정도는 괜찮으시죠?"
한 달 만에 마셔 보는 술.
공손수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했다.
"아무렴. 마침 잔소리할 사람도 없군. 이래서 흑영을 먼저 보내라고 한 겐가?"
"겸사겸사해서요."
못된 장난을 꾸미는 두 악동처럼, 마주 보며 씩 웃은 두 사내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크흐! 좋구만."
"비싼 술이라니까요."
둘 사이에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추억이 곧 안줏거리요, 정자로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흔들리는 수풀이 가무(歌舞)였다.
잠시 풍경을 감상하던 공손수가 입을 열었다.
"선생."
"예."
"천이는 마음이 여리니 잘 지켜보게. 그 재능을 시기하는 자들이 그 아이를 깎아내리고 못살게 굴 게야."
"알겠습니다."
"강이는 의리가 깊고 마음이 강직하나 그 성정이 불같아 걱정일세. 채찍질도 좋지만 때로는 부드럽게 다독여 주게."
"명심하겠습니다."
백수룡은 공손수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수는 현 황제의 스승이었다.
무공을 가르치는 면에서는 백수룡에게 비할 바가 못 되지만, 식견이 뛰어나고 덕과 예를 가르치는 선생으로는 나라에 비교할 인물이 없었다.
"...강이에게 행여나 후유증이 남지 않아야 할 텐데."
"튼튼한 녀석이니 금방 나을 겁니다."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공손수가 백수룡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자네. 혹시 장가가고 싶은 생각은 없나?"
"콜록!"
생각지도 못했던 화제에 백수룡이 술을 뿜었다.
갑자기 장가라니.
백수룡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공손수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생각 없습니다."
"쓸데없이 눈치만 빠르긴. 우리 흑영이가 어디가 어때서."
"저쪽 의견은 물어보시긴 한 겁니까?"
거절의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공손수는 건수를 잡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닌 모양이지? 우리 애가 좋다고 하면 자네도 진지하게 한번 만나 볼 텐가?"
"아니...."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 한번 생각해 보게."
"...."
백수룡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자를 만나고, 혼례를 올린다.
전생에서는 한 번도 그려 보지 않은 미래였다.
그때는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조차 버거웠으니까.
'지금은?'
오십 년 전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평화로운 세상.
무림일통을 꿈꾸던 혈교가 멸망하고, 사파 세력 자체가 크게 위축된 태평천하.
하지만 백수룡은 이 평화가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혈교는 사라지지 않았어.'
벌써 여러 징후를 발견했다.
어쩌면 상상 이상으로 더 큰 세력을 이루었을 수도 있고, 놈들의 발호가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혈교가 다시 발호한다면....
백수룡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아직은 혼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나 보군."
백수룡의 표정을 살핀 공손수는 더 이상 권하지도, 자세히 캐묻지도 않았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술병이 비었다.
"이런. 술이 다 떨어졌군. 누구 코에 붙이라고 한 병만 사 온 겐가?"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마침 손님도 왔고요."
"손님? 천검이 벌써 온 겐가?"
백수룡은 웃으며 공손수의 어깨 너머를 보았다.
공손수도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에게 익숙한 얼굴이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원강 선배?"
그는 헌원강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헌원강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공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헌원강을 맞이했다.
"선배가 여긴 웬일인가? 몸도 성치 않으면서...."
헌원강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의원에만 있으려니까 답답해서. 그리고 할아범한테 줄 선물도 있고."
"선물?"
품에 손을 넣은 헌원강이 무언가를 꺼냈다.
공손수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이 많은 녀석 같으니....'
자신을 대신해 칼을 맞아 저리 창백한 모습이 되었는데도, 원망하기는커녕 이렇게 챙겨 준단 말인가.
"선물은 무슨 선물이란 말인가."
"지금 아니면 못 줄 것 같아서 그래."
헌원강이 품 안에서 꺼낸 물건은 검게 칠한 단도(短刀)였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밋밋한 무늬에, 어둠 속에서는 형체조차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흑색 단도.
헌원강은 해맑게 웃으며, 그것으로 공손수의 목을 찔렀다.
"호오...?"
그 순간에도 공손수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내미는 단도에는 기척도, 살기도 없었다.
그저 저것이 내게 주는 선물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까앙!
눈앞에서 칼날이 옆으로 튕겨 나가고, 방금까지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던 헌원강이 순식간에 신형을 뒤로 물렸다.
털썩.
공손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로소 조금 전에 있었던 죽음의 공포와 충격이 몰려왔다.
"왜, 왜...."
공손수는 무표정한 얼굴의 헌원강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네가 왜 나를 죽이려 한단 말이냐!"
"어르신. 진정하세요."
그 순간 백수룡이 공손수 앞을 가로막았다.
방금 헌원강의 공격을 막은 것도 바로 그였다.
"저 녀석은 헌원강이 아니에요."
"뭐라고...?"
공손수가 놀라는 가운데, 헌원강이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헌원강의 말투, 걸음걸이, 체취까지 전부 훔쳤는데요."
헌원강으로 위장한 살막의 살수, 칠살(七殺)이 물었다.
"그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 질문에 백수룡이 하얗게 웃으며 대답했다.##96화. 자기소개칠살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올 걸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대부분의 살수는 첫 공격에 암살을 실패하면 죽는다.
은신술, 암기술, 숨통을 끊기 위한 필살의 일격, 그리고 도망치기 위한 경공 정도가 살수가 익히는 무공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살수가 무서운 것은 언제 목숨을 노릴지 모르기 때문이지, 정체가 드러나 있는 살수는 그리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강호의 오래된 격언.
하지만 눈앞에 있는 상대는 살막의 살수였다.
백수룡은 상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너희가 쉽게 포기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한번 자리를 마련해 봤지."
"저런. 제가 미끼를 덥석 물어 버렸군요."
첫 공격에 실패하고 정체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칠살의 말투나 행동은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칠살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또 얼굴 때문에 들킨 줄 알았습니다. 피부를 베어낼 때 반항이 심해서 미묘한 차이가 생긴 것인가 하고...."
헌원강의 얼굴을 하고 있는 칠살의 중얼거림.
섬뜩한 상상을 해 버린 공손수가 버럭 소리쳤다.
"네 이놈! 강이를 어찌한 게냐! 설마 그 얼굴이...!"
"어르신."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뛰쳐나가려는 공손수를 백수룡은 진정시켰다.
"저놈은 헌원강에게 아무 짓도 안 했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시는지?"
칠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되지도 않는 상대의 심리전에 백수룡이 코웃음을 쳤다.
"뛰어난 살수일수록 얼굴 가죽을 벗겨내 만드는 조잡한 인피면구 따위는 쓰지 않아. 차라리 역골공을 익히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제가 헌원강을 살려 둘 이유는 되지 않을 텐데요?"
칠살이 빙긋 웃으며 묻자, 백수룡도 똑같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살려 둘 수밖에 없지. 헌원강이 멀쩡히 살아 있어야, 어르신을 죽이고 나서 그 녀석한테 죄를 뒤집어씌울 것 아니야?"
"호오...."
살행 이후의 계획까지 추리해낸 백수룡에게 칠살은 작게 감탄했다.
"혹시 과거에 살수였습니까?"
"이 정도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정도지."
"머리가 좋은 분이로군요."
"그런 말 자주 들어."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백수룡의 대답에 칠살은 조용히 웃었다.
그것은 감탄이 아닌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한 가지는 예상을 못 하신 것 같습니다."
칠살의 첫 공격에 실패하고도 이토록 여유로운 이유는 하나였다.
"살수의 본분에 충실했을 뿐, 굳이 기습이 아니더라도 저는 당신들을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습니다."
츠츠츠츳.
칠살의 몸에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었다.
"허억...!"
공손수는 칠살에게서 느껴지는 가공할 기운에 경악했다.
"살막의 살수가 왜 살수지왕(殺手之王)이라고 불리는지 아십니까?"
완전히 어둠에 뒤덮인 칠살의 몸 가운데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에서, 짙은 녹색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암습이 아니더라도 그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무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칠살의 존재감이 주변 공간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어둠이, 어느새 두 사람을 안개처럼 포위했다.
"암살은 상대를 죽이기 위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지요."
저벅, 저벅.
어둠에 휩싸인 칠살이 안개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올 때마다 안개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백수룡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잘난 척은. 남궁제학이 무서워서 이제야 나선 주제에."
"하하. 그건 인정하겠습니다."
흑림의 살수들이 공손수를 죽이기 위해 청룡학관에서 날뛴 그날, 칠살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창천검왕 남궁제학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십존은 살막의 살수 전원이 덤벼도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괴물이니까요. 하지만 백수룡 당신은 아닙니다."
칠살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당신을 지켜봤습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것에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지만, 본신의 무공은 그에 미치지 못하더군요."
"...날 관찰했나."
"흑심의 살수들이 날뛴 날, 살수들과 싸우는 모습을 봤습니다. 절정고수 초입 수준이더군요. 실력을 숨겼다면 그보다 조금 나을 수도 있겠지만...."
"...."
백수룡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긴장하고 있음을 느낀 칠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래도 당신과 나 차이엔 하늘과 땅 수준의 격차가 있다는 걸, 당신도 지금쯤은 느끼고 있을 겁니다."
츠츠츠츳...!
칠살은 감싼 어둠이 점점 짙어지고 무거워졌다.
살막의 칠살(七殺).
그 말은 곧, 무림에서 일곱 번째로 뛰어난 살수라는 의미였다.
"헉, 허억...!"
숨이 막히는지 공손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무릎이 풀렸다. 그는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칠살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말했다.
"천검이 이곳에 올 때까지 일각은 걸릴 겁니다. 저는 그 전에 공손수를 죽이고, 백수룡 당신을 흉수로 꾸민 후에 당신의 시체를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릴 계획입니다."
"이 자식이...."
이를 악문 채 일그러지는 백수룡의 표정을 바라보며, 칠살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평소처럼 조용한 살행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별미(別味).
살막의 수장인 일살은 싫어하겠지만, 가끔은 몰래 이런 식으로 청부를 처리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백 선생.... 자네만이라도... 도망...치게...."
풀썩.
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공손수가 혼절해 쓰러졌다.
기세만으로 무공을 익힌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는 고수.
그 사실만 놓고 보아도 칠살은 절정고수, 그중에서도 거의 초절정의 벽에 다다른 고수였다.
"자, 능력이 된다면 막아 보시길."
칠살의 녹색 안광을 터트리며 공손수를 향해 단도를 휘둘렀다.
휘이익!
흑색 검기가 길쭉하게 늘어나 공손수의 목을 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잔뜩 굳어 있던 백수룡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했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그가 빈정대듯 칠살에게 말했다.
"흑살마공이라. 오랜만에 보네."
"...뭐?!"
칠살의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순간, 백수룡의 몸에서 시뻘건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푸화아아아악!
그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청의무복이 찢어질 듯 세차게 펄럭거렸다.
백수룡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기가, 일대를 장악한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칠살이 휘두른 검기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무슨...!"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칠살에게, 백수룡이 한 걸음 다가가며 씩 웃었다.
"남궁제학 때문에 실력 발휘를 못한 사람이 너 하나인 줄 알았어?"
"설마...."
그날, 백수룡은 자신의 실력의 반의반도 드러내지 않았다.
"네 말대로 십존은 괴물이지. 그래서 아직 그 앞에선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거든."
스스스슷....
허공에 흩날리는 백수룡의 흑발이 끝에서부터 붉게 물들며, 피처럼 선명한 적발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동공이 붉게 물들며 시뻘건 혈기(血氣)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붉은 눈과 마주친 순간, 칠살은 맹수 앞에 선 작은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꿀꺽.
'도대체 무슨 무공이....'
칠살은 무림에 존재하는 수많은 무공을 알고 있었지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붉게 변하는 무공은 듣도 보도 못했다.
백수룡이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걸 못 알아보는 걸 보면, 넌 혈교인은 아닌 모양이네."
"혈...!"
말을 멈춘 칠살이 급히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이미 당황한 표정을 보인 이후였다.
씨익.
백수룡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해졌다.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건 또 아니라 이거지? 아무래도 심도 있는 대화가 필요하겠어."
"너... 누구냐."
칠살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 백수룡이 드러낸 기세만 보아도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이를 악무는 칠살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무언가 이상했다.
'어째서....'
저 붉은 기운이 자신의 흑살마공이 일으킨 어둠에 닿을 때마다, 어째서 어둠이 놀라 움츠러든단 말인가.
수십 년의 훈련으로 강철이 되었다고 생각한 심장이, 어째서 천적을 만난 동물처럼 미친 듯이 뛴단 말인가.
싸워 보지도 않았는데 이미 패배한 것 같은 두려운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피식 웃은 백수룡이 검을 들어 칠살을 겨눴다.
단지 그 동작만으로도 칠살은 움찔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백수룡의 두 눈에 감도는 혈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번쩍!
혈마안(血魔眼).
역천신공의 성취가 최소 5성에 이르러야 발현되는 특성이자, 그 자체로 환술로 분류되는 무공.
혈마안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공포에 빠지게 만들며, 그 성취가 높아지면 암시, 환각, 세뇌까지 할 수 있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며칠 전 흑림의 살수의 정신을 무너뜨린 것도 바로 혈마안의 효능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백룡장에서 무공이 가장 강해진 사람은 누구였을 것 같아?"
"설마...."
지난 한 달 동안, 백수룡은 공손수의 몸에 쌓여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탁기와 약기를 자신의 몸으로 흡수했다.
그 결과, 역천신공의 성취를 중성(中成)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적발과 혈마안이 바로 그 증거였다.
덜덜덜....
칠살은 심해지는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혈마안에 정면으로 노출된 탓도 있었지만, 무언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 무공은... 혈교의 것인가?"
"들어 본 적 없어?"
그 순간 무언가 번뜩 생각이 난 듯, 칠살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설마, 설마...!"
칠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피처럼 붉은 적발과 적안.
그리고 만인을 발아래에 두고 오시하는 듯한 저 광오한 존재감.
이제는 전설 속에서나 회자되는 한 존재의 이름이 떠올랐다.
"혈마의... 무공?"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칠살을 향해, 백수룡은 검 끝을 까닥거렸다.
"언제까지 멍청하게 있을 거야? 시간이 일각밖에 없다며. 이쪽도 마찬가지라고."
일각 후엔 또 다른 십존이 이곳에 도착한다.
백수룡은 그 전에 칠살에게서 최대한의 정보를 캐낼 작정이었다.
"서로 자기소개 끝났으면 시작하자고."
"잠깐...!"
벼락처럼 신형을 날린 백수룡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서 쏟아진 핏빛 검기가 흑살마공의 어둠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 * *
"곧 도착하겠군."
천검은 무척 과묵한 사내였다.
황궁에서 이곳까지 오는 내내, 방금 한 말을 포함해 지금까지 말을 한 건 두 번에 불과했다.
첫 번째는 "출발한다."였다.
다들 천검이 과묵한 것을 알기에, 공손수를 모시러 가는 행렬 자체도 조용한 편이었다.
"음?"
선두에서 말을 몰던 천검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흑영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천검은 그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감각에 집중했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감각은, 저 멀리서 벌어지는 기의 충돌을 감지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상당한 고수로 추정되는 두 개의 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그 방향을 확인한 천검의 표정에 미미하게 굳었다.
"먼저 갈 테니 바로 따라오도록."
"예?"
자세히 물을 새도 없었다.
그다음 순간 흑영이 본 것은 자리에 혼자 남겨진 천검의 말뿐이었다.
휘익!
순식간에 풍경을 가로지르는 천검의 표정에 수심이 어렸다.
'승상께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잠시 후 천검은 기가 충돌하는 현장에 도착했다.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깔린 곳이었지만, 천검의 시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가 멈춰 선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허!"
이 과묵한 사내의 입에서 진심 어린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
콰콰콰콰콰콰!
어둠을 찢고, 한 마리의 혈룡이 하늘 위로 승천하고 있었다.##97화. 허!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도망치는 와중에, 칠살은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진심으로 이런 욕을 해 본 게 몇 년 만이던가.
살수로서 훈련을 거친 이후,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것뿐이었다.
진짜 살수란 백 개의 얼굴과 천 개의 표정을 가지고, 그것을 완벽하게 통제할 줄 아는 자다.
칠살은 지금껏 그 통제에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괴물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칠살은 힐긋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촤아아악!
핏빛 검기가 날아와 옆을 스쳤다. 거대한 나무 몇 그루가 예리하게 잘려나가 옆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적발적안의 사내가 두 눈에서 시뻘건 안광을 폭사하며 경공을 펼쳐 쫓아오고 있었다.
꿀꺽.
칠살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슬아슬하게 피하지 않았다면 다리 한쪽이 날아갈 뻔했다.
이미 날아간 오른쪽 팔처럼.
팔이 뜯겨나간 오른 어깨에서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도저히 검상(劍傷)이라고 보기 힘든, 짐승의 이빨에 뜯어 먹힌 듯한 흔적.
그동안 수많은 고수의 무공을 봤지만, 이토록 무자비한 검법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걸 검법이라고 할 수 있나?'
칠살은 자신의 오른팔을 집어삼킨 붉은 검기를 떠올렸다.
한 마리 혈룡을 떠오르게 하던 사나운 검기.
흑살마공의 어둠을 찢어발기고, 그 속에 숨어서 공격하려던 칠살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싸움이 벌어지고 고작 십여 합 만에 벌어진 일.
'...불가능한 일이다.'
백수룡은 결코 초절정 고수가 아니었다.
내공의 화후는 오히려 칠살이 더 높았고, 실전 경험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압도당했다.
흑살마공의 모든 초식이 백수룡의 검 앞에 파훼되었고, 전력을 다한 공격도 어이없게 무력화되었다.
'무공의 차이인가?'
백수룡은 과거 혈마의 무공으로 추측되는 신공을 익혔다.
그래서 저렇게 강한 것일까?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백수룡이 저토록 강한 이유는 더 근본적인 부분에 있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어. 저 괴물의 정체를....'
그야말로 불가해(不可解)한 존재.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칠살은 뒤로 돌아 전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판단은 시기적절했다.
우위에 있는 내공과 살수로서 수십 년을 단련해온 다리가 도주를 용이하게 만들었다.
팔 한쪽이 잘려나간 탓에 무게중심이 평소와 달랐지만, 오히려 몸을 더 가볍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휘익! 휙!
전력을 다한 경공에 주변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쭉쭉 밀렸다.
칠살에겐 도망쳐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일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혈마의 무공을 익힌 자가 나타나다니. 만약 살막과 혈교의 관계가 알려진다면....'
촤아아악!
그 순간 검기가 날아와 어깨를 스쳤다. 핏물이 허공으로 튀고,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등 뒤에서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도망을 쳐?"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반각도 못 돼 백수룡에게 따라잡힐 것이다.
으득!
칠살은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내공을 쥐어짜서 용천혈로 보내고, 두 다리에 힘을 줘 땅을 박찼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살수로서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이토록 초라한 최후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십존도,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기라성같은 고수도 아닌 고작해야 무명의 무공 강사에게 잡혀 죽는 최후라니.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목소리는 거의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날아온 검기가 옆구리를 스치자 푸확! 하고 피가 터졌다.
칠살은 품 안에 지니고 있던 모든 암기와 독을 던져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더 이상은....'
그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내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관복을 입은 사내는 각진 사각 턱에 무뚝뚝한 표정 인상으로, 허리춤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무공은 익힌 듯했으나 고수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순간 칠살은 퍼뜩 한 가지 계획을 떠올렸다.
'저자를 인질로 잡자.'
어쨌든 백수룡은 정파의 무인이다.
지금 뒤에서 쫓아오는 귀신같은 모습을 보고도 정파인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달리 다른 방법도 없지 않은가.
타닷!
땅을 박찬 칠살은 곧장 무표정한 사내를 덮쳤다. 저항할 시간도 없이 단숨에 목을 틀어쥘 생각이었다.
그 즉시 몸을 돌려서 인질로 내세우면, 적어도 약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인질이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방패로 쓰면 된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상처를 입혀서 던지면 최소한 망설임 정도는 보일 터.'
여러 계산이 칠살의 머릿속에서 바쁘게 돌아갈 때였다.
무뚝뚝한 표정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살수의 무공이군. 승상을 해치려고 한 놈이냐?"
"!!"
굵고 낮은 목소리와 함께, 칠살은 막대한 압력이 자신의 몸을 찍어 누르는 것을 느꼈다.
...콰아앙!
칠살의 몸이 허공에서 그대로 추락해 바닥으로 처박혔다.
"컥, 커헉...!"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칠살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늘의 뜻을 대신하여."
스르릉.
사내가 검을 뽑았다.
그의 검면에 '天儉'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서, 설마...."
뒤늦게 상대의 정체를 깨달은 칠살의 표정이 이내 체념으로 편안해졌다.
눈을 감은 칠살이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죽게 돼 영광이오."
"너를 참하겠다."
빛이 번뜩인 순간, 칠살의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의 선이 그어졌다.
푸화아아악!
반으로 갈라진 칠살의 몸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천검은 시체에겐 더 이상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칠살을 쫓아온 적발적안의 사내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놈도 살수인가?"
"...."
* * *
제자리에 멈춰선 백수룡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스스슷....
백수룡의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빠르게 제 색깔을 되찾았다.
'곤란하게 됐군.'
역천신공의 중성에 이르며 확장된 기감으로도 잡아내지 못한 기척.
그리고 검에 선명하게 새겨진 두 글자(天儉)를 본 순간 백수룡은 상대가 누군지 눈치챘다.
"혹시 천검 님이십니까?"
"그렇다."
"...."
다른 사람도 아닌 십존에게 역천신공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버리다니.
비록 천검이 정파 무림인이 아닌 황궁의 고수라고는 하지만....
"나를 아나?"
몸 전체를 관통하는 듯한 천검의 시선에, 백수룡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는 청룡학관 강사 백수룡이라 합니다. 공손수 어르신과는...."
"괴이한 무공을 익혔군."
천검은 듣지 않겠다는 딱 잘라 말했다.
그가 검을 들어 겨누자, 백수룡은 한 걸음 물러나 간격을 벌렸다.
"...흑영에게 제 얘길 듣지 못하셨습니까?"
"들었다. 허나 네가 그자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내겐 없다."
"호패라도 보여 드릴까요?"
"나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천검은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가 낮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일단 두 팔을 자르고 심문하겠다."
"전 농담을 좋아하지 않는데요."
"...."
천검은 대답 대신 가볍게 스윽 검을 휘둘렀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백수룡은 간신히 그 궤적을 읽을 수 있었다.
촤아아악!
허공을 베고 지나간 검기가 수십 자루의 나무를 베고 나서야 겨우 사그라들었다.
꿀꺽.
침을 삼킨 백수룡은 천검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제법이군."
"잠깐! 잠시만 기다리면 흑영이 와서 제 신분을 확인해 주지 않을까요?"
"...."
잠시 고민하던 천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팔을 자른 후에 기다리지."
"이런 미친...!"
우우우웅!
천검이 본격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막대한 기가 백수룡의 몸을 짓눌렀다.
"크윽...!"
십존 수준의 절대고수들은 자신의 기로 공간 자체를 지배한다.
비슷한 수준의 고수가 아닌 한, 그 안에서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백수룡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굽혀질 것 같았다.
"뭐 하는 자인지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
"...."
그 말에서, 백수룡은 천검의 진의를 조금은 읽을 수 있었다.
'내 무공을 파악하려는 거다.'
역천신공은 세상에 다시없을 괴공.
천검 정도 되는 고수가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진심으로 해칠 의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적당히 봐줄 것 같지도 않지만.'
천검이 검 끝으로 백수룡의 왼팔을 겨눴다.
"왼쪽."
왼쪽 팔을 자르겠다는 경고였다. 피해 볼 수 있으면 피해 보라는 오만한 발언.
백수룡은 울컥했지만, 현재로선 십존과의 충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점점 강해지는 압력에 힘겹게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승상부터... 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저 뒤에 쓰러져 계신...."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천검이 피식 웃었다.
"호흡이 안정적이고, 주변에는 아무런 기척도 없군."
절대고수의 가공할 기감은 이미 공손수의 위치와 안전을 확인한 후였다.
결국,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크크. 빌어먹을....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딪치는 수밖에.
백수룡은 역천신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푸화아아악!
붉게 물든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두 눈에서 시뻘건 혈기가 폭발했다.
드드드득.
짓눌리던 등이 펴지고,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던 무릎이 단단히 고정됐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천검이 나직이 탄식했다.
"...위험해 보이는 무공이군. 무슨 무공이지?"
여전히 자신을 깔아보는 듯한 천검의 말투에, 백수룡이 내공을 담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혜도 모르는 놈에겐 알려 줄 생각 없다."
"네가 내 은인이란 말이냐?"
"살수에게 당할 뻔한 어르신을 내가 몇 번이나 구했다고 생각하나! 그런 나를 핍박하는 당신이 은혜를 아는 자인가!"
"...네 말이 맞다면 그렇겠지.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지."
천검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검 끝을 움직여 한 번 더 경고했다.
"왼쪽."
백수룡도 지지 않고 천검의 오른팔을 겨눴다.
"오른쪽."
"...."
천검은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그는 처음 하려던 것보다 검에 약간 더 내공을 실었다.
콰콰콰콰콰콰콰!
천검의 몸을 중심으로 막대한 황금색 기운이 휘몰아쳤다.
동시에 백수룡의 몸에서 막대한 붉은색 공력이 분출되었다.
폭발하듯 치솟은 두 기운이 부딪치더니 서로 섞여들어 용권풍을 형성했다.
그 안에서, 두 사내의 신형이 동시에 움직였다.
동시에 찢어질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멈추세요! 그분은 어르신의 은인이에요!"
전력으로 경공을 펼쳐 온 흑영이 겁도 없이 용권풍 속으로 몸을 날렸다.
온몸에 수많은 생채기가 생겼지만 흑영은 개의치 않고 소리쳤다.
"제발 멈추세요!"
잠시 후 용권풍이 씻은 듯이 소멸했다.
그리고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천검의 검이 백수룡의 목에 닿아 있었다.
원래대로 머리색이 돌아온 백수룡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팔은 멀쩡했다.
그 모습을 본 흑영이 천검에게 소리쳤다.
"그 검 당장 내려놓으세요!"
"...그러지."
검을 내린 천검은 백수룡을 잠시 바라보다 휙 몸을 돌렸다.
"나는 승상을 뵈러 가겠다. 내상을 치료하고 따라오도록."
"...."
뒤에서 노려보는 백수룡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천검은 무시했다.
그는 조금 전 백수룡과 교환한 일검을 떠올렸다.
'오른팔을 노린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목을 노렸군.'
봐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방금의 섬뜩한 기세는 진짜였다.
그런 감정을 느껴 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천검은 백수룡이 노린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그의 오른팔 소매의 끝이 푸스스 흩어졌다.
"허!"
천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98화.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내가 아직 살아 있었나."
공손수는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떴다. 눈을 뜨니 그 앞에 천검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승상.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네의 잘못이 아닌데 어찌 사과를 하는가. 헌데 백 선생은?"
"...곧 올 것입니다."
천검의 반응이 조금 묘했지만, 공손수는 그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본 공손수가 "허어!" 하고 놀랐다.
땅이 뒤집히고 수십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제가 본 것은...."
천검은 자신이 본 것을 아는 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스승처럼 여기는 승상이기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고했다.
백수룡과 검을 겨뤘다는 말에 공손수의 표정이 굳었다.
"백 선생이 많이 다친 것은 아닌가?"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대답은 천검의 어깨 너머에서 들려왔다.
다소 창백한 안색의 백수룡과 흑영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의심 많은 어떤 분 때문에 팔 하나가 잘릴 뻔하긴 했지만요."
"확인을 위해 필요했을 뿐이다."
"제 신분이요? 아니면 무공이요?"
"...."
천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공손수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백 선생 자네도 간이 부었군. 상대가 천검인 걸 알았으면 납작 엎드려서 빌었어야지."
"말이 통할 상대였으면 그렇게 했죠.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예? 무공 좀 강하다고 은인을 핍박하고...."
"그만하지."
싸늘한 기세에 백수룡은 입을 다물었다.
공손수가 옆에 있어서 조금 면박을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천검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다.
"허허허. 내 얼굴을 봐서라도 둘 다 그만하게."
"예."
"알겠습니다."
두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흑영이 다가와 공손수를 진맥하는 동안, 두 사람은 조용히 호위 병력이 오기를 기다렸다.
"자네들. 말없이 눈싸움만 하면 내가 모를 것 같나?"
"...."
"...."
두 사내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유치함에 공손수가 클클 웃고, 흑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 후 공손수를 호위할 병력이 우르르 도착했다.
다섯 대의 마차와 금의위 최정예 고수 일백.
이것도 빠르게 오기 위해 최소화한 숫자라고 했다.
그 위용을 본 백수룡이 감탄했다.
"...어르신. 대단한 분이었네요."
"허. 그걸 이제야 알았단 말인가."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매일 흙바닥 뒹구는 모습만 보다 보니까 체감을 못 했다고 해야 하나...."
그 솔직한 말에 공손수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제법 대단한 인물이라네. 그러니 신세 질 일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게나."
"언제든 사양 않고 찾아뵙겠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씩 웃었다.
작별 인사는 이미 질리도록 했기에 더 이상 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공손수는 작별 선물을 준비했다.
"이보게 천검. 내가 부탁한 것은 가져왔나?"
"...예."
"이리 가져오게나."
천검이 마차에서 무언가를 가져오는 동안, 공손수는 뒷짐을 지고 백수룡과 대화를 나눴다.
"내 가기 전에 자네에게 줄 것이 있네."
"예? 뭘 자꾸 주신다고...."
과외비였던 만 냥도 받았고, 청룡학관에 대한 재정적 지원도 약속받았다.
'게다가 탁기랑 약기도 어마어마하게 흡수했고....'
덕분에 역천신공의 경지도 중성에 이르렀으니, 기연으로 따지자면 받은 건 이쪽이 더 많은 게 아닐까?
"그래서 받기 싫은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
"그럴 줄 알았네."
공손수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를 모시러 온 금의위 무사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의 뻔뻔한 얼굴을 바라봤다.
흑영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가렸다.
"왜 부끄러움은 제 몫일까요...."
그리고 잠시 후, 마차에서 무언가를 꺼내온 천검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청룡학관 강사 백수룡은 황제 폐하의 교지를 받들라!"
"!!"
황제 폐하의 교지라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천검의 전신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예를 갖추라!"
정신을 차린 백수룡이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백수룡이 황제 폐하의 교지를 받듭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천검이 교지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나갔다.
"갑진년 초이레 강서성 회창에서 태어난 백수룡은 간악한 역도들로부터 승상 공손수의 신변을 보호하여 나라에 닥친 큰 위협을 막아 내는 큰 공을 세웠다. 이에 공신교서를 내린다...."
공신교서(功臣敎書)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리는 훈장이었다.
'이걸 이렇게 막 줘도 되는 거야?'
백수룡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공신교서를 받았다.
"...이에 금전 백 냥과 삼만 평의 토지도 함께 하사하노라."
공신교지의 수여가 끝난 후, 공손수가 웃으며 말했다.
"내 폐하께 말씀드려 일부러 관직은 내리지 않았네. 권력자들이 자네를 이용하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니, 섭섭해하지 말게."
"...섭섭할 리가요."
오히려 그러한 세심한 배려에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네. 흑영아. 그것을 가져오너라."
"...예."
흑영이 한눈에 보아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목함을 가져왔다.
"열어 보게."
조심스레 목함을 열자, 손가락 굵기 정도에 길이는 한 자(30cm) 정도 되는 흑색의 막대기가 금색 비단 위에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예전에 내가 사용하던 교편일세. 한번 들어보게."
직접 들어보자, 생각 이상으로 제법 무게가 나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용 한 마리가 교편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흑룡편이라고 부르네. 예전에 혼쭐이 나셨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황제 폐하께선 지금도 이걸 보기만 하면 기겁을 하시지."
"예?"
예전에 이걸로 황제를 때렸단 말인가?
금의위 무사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지 입을 떠억 벌렸다.
공손수가 웃으며 말했다.
"현철로 만든 물건이니 어지간해서 부러지지도 않을 게야. 앞으로 자네가 쓰도록 하게."
"...이런 물건을 저한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야.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것이 맞겠지."
공손수가 생각하기에, 흑룡편의 주인이 될 사람은 백수룡이었다.
"한번 내공을 주입해 보게."
내공을 주입하자, 흑룡편 안에서 철컥 소리가 나더니 길이가 두 배로 늘어났다.
"평소에는 한 자(30cm) 정도의 길이지만, 내공을 주입하면 세 자(90cm)까지 늘릴 수 있다네."
"이건...."
정말로 무기로 써도 충분한 물건이었다.
아니, 웬만한 보검보다 훨씬 유용한 물건이었다.
"부디 유용하게 써 주길 바라네."
공손수는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의 손때가 탄 흑룡편과, 그것의 새로운 주인이 된 백수룡을 보았다.
백수룡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잘 쓰겠습니다."
"애들 쥐어패는 데만 쓰지 말고."
"감동하려는데 산통 좀 깨지 마세요."
장난스럽게 클클 웃은 공손수가 금의위 무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줄 것도 다 줬으니 정말 가야겠군. 채비를 하시게."
"예!"
순식간에 출발 준비가 끝나고, 공손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가는 백수룡의 귀에 천검의 전음이 들려왔다.
[네가 익힌 무공에 대해서는 함구하겠다. 어차피 나는 무림인이 아니고, 승상께서 너를 아끼시는 마음이 상상 이상으로 크시니.]
백수룡은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만약 천검이 역천신공에 대해서 캐묻거나 조사하려 들었다면 무척 곤란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공,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특히 고수일수록.... 그 무공을 본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충분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남궁제학 앞에서 무공을 최대한 숨긴 것이기도 하고.
천검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공손수가 마차에 올라탔다.
"고마웠네. 언젠가 또 보세나."
"황궁에서도 그동안 가르쳐 드린 거 복습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공손수는 꼭 그리하겠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의 옆에 탄 흑영도 작별인사를 건넸다.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가."
"...."
흑영의 눈빛에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백수룡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고 마차가 출발했다.
"이랴아!"
"...."
백수룡은 작아지는 마차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무렵.
다섯 대의 마차가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했던 제자가 조금 전 자신을 떠났다.
"어르신.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만 냥을 벌기 위해 시작된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공손수를 합격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노인의 어린 시절 꿈을 알게 되고, 뒤늦게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간절히 노력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었지.'
매일 함께 훈련한 헌원강과 위지천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혈교의 무공 교관이었던 시절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
이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 많은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아쉬워해 봤자 소용없지."
길게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고개를 저어 미련을 털어냈다.
그는 후회를 오래 안고 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신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생각했다.
혈교에 대한 정보를 캐내지 못하고 죽어 버린 칠살과 살막을 생각했고, 역천신공을 숨기라던 천검의 경고를 떠올렸다.
'십존이라....'
백수룡은 천검과의 대결을 떠올렸다.
아직은 아득한 격차가 느껴진 싸움이었다.
그런 천검이 십존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고 평가받는다.
황궁 최고의 실력자이기에 상징적인 의미가 큰 탓이다.
물론 천검이 절대고수임은 분명했다.
'남궁제학은 더 강하다.'
남궁제학은 현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을 논할 때도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역천신공을 목격한 사람이 천검이 아닌 남궁제학이었다면?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음에도 이런 행운이 또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적발적안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려면 역천신공을 최소 7성까지는 익혀야 한다.'
하지만 7성의 경지는 단순히 내공만 많다고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하아. 애들도 가르쳐야 하고, 무공도 더 강해져야 하고, 혈교도 신경 써야 하고.... 할 일이 산더미네."
한숨을 내쉰 백수룡은 몸을 돌려 청룡학관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수업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말이야."
청룡학관에서의 첫 학기, 그리고 첫 수업은 며칠 후에 시작된다.
앞으로 백수룡은 더 많은 학생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벌써부터 피곤하다, 피곤해...."
하지만 투덜거리는 말과 달리, 백수룡의 표정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청룡학관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 *
며칠 후.
입학식이 끝나고, 신입생들뿐만 아니라 재학생들도 속속들이 학관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학생들은 학관 곳곳 게시판에 붙은 방을 확인하기에 바빴다.
올해 수강 신청이 가능한 수업 목록이 벌써 방이 붙은 것이다.
<쾌검심화 - 남궁수>
<도법 실습 - 곽철우>
<상승 경공의 이해 - 매극렴>
...중략...
<고대무림사 - 제갈소영>
어떤 수업이냐, 어떤 강사가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학생들의 수업 선호도는 천차만별이다.
인기가 없는 수업은 강의실에 파리만 날리는 반면, 인기가 많은 과목은 학생들 간에 실제로 피 터지는 수강 신청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평가가 누적되어 강사들의 대우와 월봉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제갈소영이 누구야?"
"올해 새로 들어온 선생님이래."
"고대무림사 같은 걸 누가 듣냐...."
"예쁠까? 첫 수업만 들어 볼까?"
올해 임시 강사들 중에서 수업을 맡은 사람은 수석으로 입관한 제갈소영이 유일했다.
아니, 자세히 보면 맨 아래에 한 명이 더 적혀 있었다.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 백수룡>##99화.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청룡학관 학생식당.
"부럽다...."
"임시 강사가 첫 학기부터 수업을 맡다니...."
악연호와 명일오는 젓가락질도 멈춘 채, 반대편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부럽냐? 부러우면 너희도 잘 좀 하지 그랬냐."
백수룡이 씩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제갈소영은 그 옆에서 민망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고대무림사 - 제갈소영>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 백수룡>
오늘 아침, 네 사람은 학관 곳곳에 붙은 수강 신청 목록을 확인했다.
악연호가 분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숟가락으로 국을 휘저으며 투덜거렸다.
"제갈 소저야 입관 성적이 수석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차석은 난데. 왜 나는 수업을 안 주고 형님한테만...."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알긴 알지만요."
쩝, 입맛을 다신 악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들의 입학 성적을 두고 백수룡과 남궁수가 내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놀랍게도 그 내기의 승자가 백수룡이라는 것도 말이다.
명일오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의외로 남궁수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더군요."
바로 어제, 청룡학관의 모든 강사가 대회의실에서 모였다.
올해 첫 학기의 강의 배정을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남궁수는 백수룡과 한 내기의 내용과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자신의 수업 중 하나를 백수룡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흠흠. 그건 곤란하네. 자네들 멋대로 수업을 바꾸면 학관 입장은 뭐가 되나. 백 선생이 다시 생각을 해 보는 것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학생들과의 약속인데....
-남궁수 선생님의 수업을 임시 강사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부관주 곽철우가 은근슬쩍 두 사람의 내기를 무효화하려 시도하고, 남궁수 파벌의 강사들도 거기에 동참했다.
하지만 학관에 백수룡의 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 대 사내로 한 약속이니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조용히 있던 매극렴이 굵고 짧게 한마디를 했고.
-허허. 재미있을 것 같군. 본인들이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최근 재정 상황이 풍족해짐에 따라 혈색이 좋아진 노군상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군상이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백수룡에게 물었다.
-우리 복덩이, 아니 백 선생. 그래서 남궁 선생의 수업 중에서 어떤 것을 가져갈 텐가?
다시 현실.
악연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형님. 왜 그런 수업을 고른 거예요?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이번 학기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를 제가 맡겠습니다.
어제 회의 때 백수룡이 그렇게 말했을 때, 다들 악연호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남궁수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기까지 했다.
-기껏 준 기회를 그런 식으로 차 버리는 건가?
그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백수룡은 꿋꿋이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를 맡겠다고 말했다.
청룡학관 일타강사인 만큼, 남궁수는 혼자서 많은 수업을 담당하고 있었다.
학관 제일의 일 중독자.
남궁수의 다른 별명이기도 했다.
황금시간대와 학생들이 선호하는 수업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수업들도 있었다.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는 인기가 적은 수업 중 하나였다.
남궁수가 가르치는 수업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흥미를 가지는 학생이 그리 많지는 않은 과목.
필수 과목이라기보다는 교양 중 하나로 여겨지는, 그래서 학점이 부족한 학생들이 가볍게 듣는 과목 중 하나였다.
오히려 남궁수가 강사이기 때문에 정원이 채워지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검술이나 경공, 하다못해 외공 수업을 고르기만 했어도 좋았을 텐데...."
방금 명일오가 말한 수업들은 모두 인기가 많은 수업이었다.
남궁수의 수업이니 그것도 전부 황금시간대.
그중 하나만 제대로 맡았어도 한 학기 동안 실적을 올리는 것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수룡은 동생들의 걱정에도 의미심장하게 웃을 뿐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고른 거야."
만약 검법이나 도법, 경공, 외공 등을 고른다면 그 한 가지만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인기가 많은 대부분의 수업이 그랬다.
백수룡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눈에 딱 들어온 것이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였다.
'사파 무공의 이해라니. 뭘 가르쳐도 될 정도로 자율성이 높은 거잖아? 게다가 학년 공통 교양이기도 하고.'
학년 공통이라는 점은 매우 중요했다.
헌원강, 위지천, 그리고 가르치고 싶은 녀석들을 학년과 상관없이 데려와서 가르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게다가 야외 수업을 자주 나갈 수 있는 수업이기도 하고.'
현장 실습 등의 이유를 핑계로 야외로 나가기 쉬운 수업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백수룡의 향후 계획에서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하기야 뭐, 형님이 어련히 잘하시겠죠."
"항상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어도 결과는 좋았으니까...."
두 사람의 체념 어린 한숨에, 백수룡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칭찬이야, 욕이야?"
백수룡의 시선을 외면한 두 사람은 대화 상대를 바꿨다.
"제갈 소저도 정말 대단하세요."
"첫 학기부터 수업을 따내시다니, 역시 수석 입관자다우십니다."
"...니들, 나한테 하던 거랑은 말투부터가 다르지 않냐?"
두 남자의 칭찬에, 제갈소영은 쑥스럽게 웃으며 귀밑머리를 뒤로 넘겼다. 술만 들어가지 않으면 세상 요조숙녀가 따로 없었다.
"고대무림사는 전공자가 거의 없어서요. 전임 강사님이 올해 은퇴하시는 바람에 저는 운이 좋았죠."
"크으...."
"꼭 공부 잘하는 애들이 이렇게 겸손하더라!"
"...."
실제로 고대무림사는 거의 듣지 않는 수준을 떠나서, 학생들이 기피하는 대상 1순위였다.
피 끓는 나이에 한창 무공을 배우는 소년·소녀들에게, 얌전히 앉아서 역사 수업을 들으라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던 것이다.
"열심히 해 보려고요! 청룡학관에도 저처럼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의욕을 불태우는 제갈소영에게, 두 사내는 힘껏 박수를 치고 아부를 떨었다.
"제갈 소저라면 반드시 할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쯧쯧. 속이 뻔히 보인다, 이것들아."
백수룡은 두 사람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사실 자신이나 제갈소영이나, 학생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수업을 맡게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악연호와 명일오는 그마저도 부러운 처지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두 달쯤 남았지?"
"예...."
"어휴...."
임시 강사 기간은 석 달.
석 달이 다 지나면, 실적에 따라서 일부는 정식 강사로 채용되겠지만 나머지는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상황에서 강의를 맡느냐 맡지 못하냐는 실적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두 분, 보조 강사는 안 필요하십니까?"
명일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청룡학관의 강의는 대부분 보통 한 명의 보조 강사를 둔다.
무공 수업의 특성상 대련이나 합을 맞추는 시범이 많기 마련인데, 학생보다는 숙련된 강사와 합을 맞추는 쪽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보조 강사 역할을 보통은 임시 강사들이 맡는다.
둘 중 먼저 움직인 쪽은 악연호였다.
"수룡 형님. 제가 사파라면 정말 만나는 족족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거 아시죠? 제갈 소저. 제가 어릴 때부터 역사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뽑아만 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반드시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이것 좀 드시고요."
악연호가 자신의 고기반찬을 두 사람에게 반짝 나눠서 주며 찡긋 눈웃음을 쳤다.
한 살 많은 명일오가 한심하다는 듯 옆에서 혀를 찼다.
"쯧. 네 각오는 겨우 그 정도냐."
명일오는 품 안에 손을 넣더니, 두툼한 주머니를 두 개를 꺼내어 두 사람의 주머니에 그야말로 전광석화처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간신배처럼 몸을 낮추며 속삭였다.
"...받아 주십시오. 제 작은 성의입니다."
뇌물 증여의 현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악연호가 기함을 했다.
"아, 명 형! 뇌물은 반칙이지! 이 형 이거 선 넘네?!"
"그렇게 따지면 고기반찬은 뇌물 아니냐?"
"아니, 그거랑 주머니에 현금 찔러 넣는 거하고 같아?"
"억울하면 준비를 미리 해 왔어야지. 나는 각오를 보인 것뿐이다."
"와...!"
"저기, 죄송한데 저는 보조 강사가 딱히 필요가 없어요...."
"어휴. 조용히 밥 좀 먹자 이것들아!"
네 사람이 식당에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가운데, 돌연 새로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보게, 선생들."
목소리뿐이었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 안에 깃든 심후한 내공에 네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있고 한데, 흥겨움이 조금 과한 것 같네."
긴 수염을 정성스럽게 기른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로 서 있었다.
중년인은 소탈하게 웃으며,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젊은이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것은 보기 좋으나, 청룡학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언행은 자제해 주길 바라네."
중년인의 이름은 풍진호.
청룡학관에서 이십 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친 인기 강사이자, 남궁수 파벌의 이인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풍진호는 적으로 만들지 말도록 해라. 어떤 면에서는 남궁수보다 더 경계해야 할 자다.
백수룡은 전에 매극렴이 해 준 조언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금방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이어서 악연호, 명일오, 제갈소영도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나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풍진호는 윤기가 흐르는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수염에 대한 그의 사랑은 청룡학관에서 유명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임시 강사들을 본 풍진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자네들에게 시비를 걸러 온 것 같은가?"
"...."
남궁수를 중심으로 한 강사들의 파벌은 청룡학관에서 가장 큰 세력이다.
하지만 백수룡은 입사 시험 전부터 남궁수와 대립각을 세웠고, 덩달아 그와 친하게 지내는 세 명까지 미운털이 조금씩 박혀 있는 상황이었다.
'갑자기 왜 온 거지?'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조용히 먹을걸....'
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과 달리, 풍진호는 시비가 아니라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런 것 아니니 긴장들 풀게. 개강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강사들끼리 기 싸움 같은 쓸데없는 짓을 해서야 되겠나."
"네, 네?"
"아...."
"휴우."
백수룡을 제외한 세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그런 일이 발생하면 내가 중재할 것이니 걱정들 하지 말게. 그 말을 해 주러 왔네."
그들을 향해 빙긋 웃어 준 풍진호가 백수룡에게 말했다.
"백 선생. 나는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아주 커. 자네가 들어오면서 청룡학관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거든."
"...감사합니다."
"한 가지만 부탁하자면, 앞으로 남궁 선생과의 충돌은 자제해 주게나. 그쪽은 나도 중재하기가 힘들다네."
풍진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백수룡도 사회인의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남궁수하고야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강사와 척을 질 생각은 없었다.
특히 상대인 풍진호가 청룡학관에서 영향력이 큰 강사라면....
'경계하라고 했다고 해서, 티가 나게 멀리하는 건 바보짓이지.'
오히려 상대를 적당히 이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다.
그때, 마치 백수룡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풍진호가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내 입장을 이해해 주니 고맙네. 혹 괜찮으면 오늘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하겠나? 할 이야기도 좀 있고.... 물론 내가 사겠네."
그 순간 백수룡의 눈이 반짝였다.
"마침 제가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시내에 있는 큰 기루에서 만났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복만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100화.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으하하하! 이 친구 이거 걸작이로군! 말을 어찌 이렇게 재미있게 하나!"
풍진호가 탁자를 탕탕 두드리며 박장대소했다. 술에 상당히 취한 듯 그의 얼굴이 대추처럼 붉었다.
"풍 선생님께서 잘 들어주시니 제가 더 흥이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 맞습니다. 하하하."
반대편에는 한 폭의 그림처럼 술잔을 기울이는 느긋한 표정의 백수룡과 바짝 긴장한 표정의 명일오가 앉아 있었다.
풍진호가 긴장한 명일오의 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 주며 말했다.
"자네도 백 선생처럼 편하게 마시게. 오늘은 내가 다 살 테니 돈 걱정은 하지 말고."
"괘, 괜찮습니다."
명일오는 선배 앞에서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몸을 사리려고 했지만, 백수룡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허. 일오 너 지금 풍 선생님의 호의를 무시하는 거냐? 풍 선생님이 거지로 보여?"
"예? 형님 그게 아니라...."
"아니면 빨리 마셔야지. 그리고 더 많이 마셔야지. 그래야 분위기도 살고, 풍 선생님 기분도 좋아지고, 이 자리에 우리가 온 의미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냐."
더불어 가게 매상도 팍팍 올라가고, 그 돈이 결국 백수룡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올 테고 말이다.
"백 선생 말이 맞네. 내 주머니 사정은 걱정 말게. 오늘 밤 자네들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취기가 충분히 올라야 하지 않겠나?"
"역시 풍 선생님. 그런 의미에서 술이랑 안주를 좀 더 시켜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물어보지 말고 시키게."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씨익 웃은 백수룡은 점소이를 불러 가장 비싼 술과 안주를 주문했고, 풍진호의 표정을 살짝 당황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허허.... 자네는 참 배포도 크군."
"부담스러우시면 안주는 취소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자네들에게 하룻밤 술 정도 못 살 것 같은가!"
풍진호는 쉼 없이 술을 들이켜는 한편, 자신의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십 년이나 길러온 수염은 그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동료 강사들에게 황금 열 관을 준다고 해도 자르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여러 번 있을 정도였다.
백수룡도 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이야. 풍 선생님은 수염이 참 잘 어울리십니다. 저는 수염이 잘 안 나는 체질이라 마냥 부럽습니다."
"허허! 자네도 나이가 좀 더 들면 풍성해질 것이네."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비단결 같은 것이 따로 관리도 하시나 봅니다. 선배님. 비법이 있으면 좀 알려 주십시오."
"흠흠. 사실 꾸준히 영양 관리를 해 줘야 하네. 자주 감고 말리는 것도 기본이고, 내 자주 가는 약방이 있는데...."
그렇게 한참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술병이 몇 병이나 비워진 후에야, 풍진호는 지나가듯 툭 본론을 꺼냈다.
"내가 왜 자네들만 불렀는지 짐작 가는 이유가 있나?"
지금 술자리에 있는 임시 강사는 두 명뿐이었다.
백수룡과 명일오.
풍진호는 식당에 있던 악연호와 제갈소영에게는 따로 자리를 마련하자고 말하고, 두 사람만 불러서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자신들만 이 자리에 불렀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풍진호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 하면 미안하네만, 자네들은 그다지 좋은 배경을 가지지 못한 강사들이지."
"...."
"음...."
백수룡은 가만히 듣고 있었고, 명일오는 뭔가 불만인 듯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표정을 본 풍진호가 급히 설명을 더 했다.
"명가장이 작은 문파라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제갈세가나 산동악가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
명일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풍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마찬가지네. 자네들 섬서의 풍운방이라고 들어 보았나?"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풍운방이 풍진호와 연관된 곳이라는 것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잔씩 받게."
풍진호는 두 사람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준 후에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한잔 쭉 들이켠 후 그가 말을 이었다.
"...무림에서 학관을 가장 크게 벌이는 가문이 어디인지 알고 있나?"
"남궁세가입니다."
명일오가 곧바로 대답했다. 그는 평소에 무림의 정세는 물론 학관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즉시 나온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풍진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맞네. 창천검왕을 비롯해 남궁세가의 많은 고수들이 강사 일을 하고 있지. 남궁세가에 일타강사로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만 해도 열이 넘는다는 것을 아나?"
"...그렇게 많습니까?"
백수룡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풍진호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혈교가 망한 이후, 무림은 평화로운 시기로 접어들었네. 중심을 잃은 사파의 세력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몰락하고, 정파의 협객들은 두려울 것 없이 악인들을 처단했지. 마적들도 녹림도 대부분 숨을 죽였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참 재미있지."
풍진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빛났다.
"사파가 힘을 잃으면 정파도 힘이 약해진다네. 누가 사파로부터 민초들을 구해 줄 것이며, 그 명목으로 보호비를 걷을 것인가. 한마디로...."
풍진호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즉, 수입이 줄어들었단 말일세. 정파의 이름난 문파와 가문들이 입은 타격이 가장 컸지. 그러다 눈을 돌린 것이 바로 학관이야."
"...."
"오대학관이 생겨난 것도 그때부터지. 말로는 다시 혈교가 부활했을 때를 대비해 무림의 동냥들을 양성하니 어쩌느니 했지만, 망한 혈교가 대체 왜 부활한단 말인가? 다 핑계지."
혈교에 관해선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백수룡은 일단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제 보니 하나도 안 취했군.'
풍진호가 취해 보였던 것은 겉모습일 뿐, 그는 처음부터 내공으로 취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단지 분위기를 무르익게 하려고 취한 척했을 뿐이다.
'고수다. 무공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백수룡은 풍진호를 경계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더욱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습니까?"
"결국 오대학관이 세워진 이유는 무공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야.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악 선생과 제갈 선생을 부르지 않은 것이네."
"저어, 풍 선생님. 전부 돈 때문이라는 건 지나친 해석이 아닌지...."
"남궁세가가 하는 짓을 보고도 아니라고 생각하나?"
풍진호의 눈빛이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명일오가 입을 다물었다.
"남궁세가는 시작일 뿐이네. 점잔빼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들도 점점 학관업에 뛰어들고 있지. 아닌가?"
"그건... 사실입니다."
"돈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인맥이네. 요즘 무공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학관에 다니네. 일인전승의 무공은 거의 사라지고, 체계적인 교육 방법이 발전했지. 그런데 학관을 졸업한 아이들은 어디로 가나?"
풍진호는 술로 목을 축인 후에 자문자답했다.
"수준이 더 높은 학관으로 진학하거나, 추천을 받아서 문파로 들어가네. 물론 표국이나 상단에 취업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성공은 대문파의 정식 제자가 되는 것이지."
혈교가 사라지고 무림이 태평성대에 접어들면서, 무공을 익히는 이유도 점점 변화했다.
'생각보다 시대가 많이 변했군.'
백수룡은 지금껏 무공을 잘 가르치는 것을 생각했지, 제자들의 장래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다면....
백수룡의 생각이 깊어지는데 풍진호가 말을 이었다.
"학관업이란 궁극적으로 구대문파의 배를 불리고 세력을 불리는 일이 되었네. 결국 가진 놈들이 계속 돈을 쓸어 담지."
풍진호의 입에서 냉소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전부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상상해 보지 못한 말들이었다.
'남궁수 파벌의 이인자인 줄 알았더니....'
오히려 남궁수가 속한 남궁세가에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남궁수는 이 사실을 알까?
'알 리가 없지.'
백수룡은 매극렴이 풍진호에 대해서 해 준 또 다른 말을 떠올렸다.
-남궁수 파벌이라고 불리지만, 남궁 선생은 그 중심에 있을 뿐 별다른 것은 하지 않는다. 실세는 풍진호다. 그가 여론을 만들고 강사들을 선동하지.
'고작 실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처음 봤을 때 풍진호는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은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차갑게 웃으며 눈을 빛내고 있는 이 사내는, 상상 이상으로 교활하고 야망이 있는 사내였다.
'이곳에 나랑 일오만 부른 건....'
백수룡은 풍진호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략 짐작이 되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중소 문파의 강사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보네."
"...."
꿀꺽.
명일오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이런 식으로 우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군.'
백수룡은 술잔 속의 술을 들여다보며 의뭉을 떨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안 되는군요. 저희가 힘을 합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내 자네들에게만 하는 이야기지만."
풍진호가 묘한 눈빛으로 웃었다. 그의 얼굴에서 취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청룡학관은 오래가지 못할 걸세."
"코, 콜록!"
"명 선생. 뭘 그리 놀라는가. 여기 오면서 이런저런 소문을 못 듣지 않았을 것 아닌가."
"무슨 말씀을...."
"청룡학관은 내년부터 천무제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네. 올해 초 오대학관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지."
"...."
처음 듣는 이야기에 두 사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수룡도 이런 이야기는 노군상에게도, 매극렴에게도 들어 보지 못했다.
"천무제는 거기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상징성이 매우 크지. 비록 십 년째 꼴찌라고 해도, 청룡학관이 그곳에 참가하기에 오대학관에 포함될 수 있는 거였어."
"...달리 말하면 천무제에 참가하지 못하면 청룡학관은 더 이상 오대학관에 포함되지 못한단 소리군요."
풍진호는 백수룡을 바라보며 웃었다.
"자네의 선전포고대로 우리가 올해 우승이라도 한다면 달라지겠지만.... 나는 백 선생의 당당함을 좋아하지만, 그와 별개로 매우 현실적인 인간이거든."
천무제 우승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청룡학관은 내년부터 천무제에 참가조차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무림의 후기지수들은 더 이상 청룡학관에 오지 않을 것이고, 명성과 재정이 줄어든 청룡학관은 지금의 규모를 감당하지 못해 감축을 거듭하겠지. 길어 봤자 5년.... 그 후엔 파산이야."
실로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명일오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백수룡도 술잔을 내려놓았다.
"저희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자네들과 길게 함께하고 싶기 때문이지. 앞으로 5년 동안, 내가 든든히 자네들 뒤를 봐주겠네."
"...5년 후엔?"
백수룡은 이 질문에 나올 대답이, 풍진호가 자신들을 이 자리에 부른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모든 인맥과 재산으로 새로운 학관을 세울 생각이야. 그때 자네들을 영입하고 싶다네."
"...."
"...."
하룻밤 술자리에서 듣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표정이 복잡해진 것을 본 풍진호가 껄껄 웃었다.
"이런.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졌군. 기녀들이라도 좀 불러야겠어. 내 제안은 천천히 생각해 보게."
풍진호는 누가 말리기도 전에 기녀들을 불렀다.
백수룡은 기녀들이 오기 전에 질문을 던졌다. 그는 풍진호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었다.
"저희가 내일 당장이라도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이런 이야기를 다 해 주십니까?"
백수룡의 대담한 도발에 풍진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네 같으면 임시 강사가 하는 말을 믿겠나? 아니면 이십 년 동안 학관에 헌신한 내 말을 믿겠나?"
"이십 년이나 계셨는데 왜 관주나 부관주가 아닌 겁니까?"
백수룡은 풍진호의 정치력이라면, 충분히 관주가 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꼭 무공이 강해야만 학관주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한 십 년 전까지는 그런 생각도 있었지. 그런데 그때부터 청룡학관이 내리막길을 걷더군."
풍진호가 수염을 몇 번 쓰다듬더니 독주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학관이 망하면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학관주가 첫째요, 부관주도 피할 수 없겠지. 그리고...."
누구를 말하고 싶은지 알아챈 백수룡이 대답했다.
"일타강사도 타격이 크겠죠."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군."
풍진호는 연달아 독주를 들이켰다. 그 모습은 마치 독을 몸 안에 품으려고 일부러 들이켜는 독사처럼 보였다.
"그래서 말인데."
소매로 입가의 술을 슥 닦아낸 풍진호가 말했다.
"남궁수를 청룡학관에서 쫓아낼까 하는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그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101화. 인성 나오네명일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누, 누굴 쫓아낸다고요?"
풍진호가 그의 빈 잔을 채워 주며 짓궂게 웃었다.
"다 들었으면서 어째서 되묻는 것인가."
"농담...이시죠...?"
"내가 농담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할 정도로 실없는 사람은 아닐세."
"그럼 정말로 남궁수 선생님을...."
흔들리는 눈동자와 떨리는 손.
명일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백수룡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풍 선생님. 어떻게 남궁수를 쫓아내시려는 겁니까?"
"...자네는 놀라지도 않는군. 신입이 너무 그러면 재미가 없어."
"그래서 마음에 안 드십니까?"
풍진호가 피식 웃으며 백수룡의 잔에도 술을 가득 부었다.
"천만에. 자네처럼 마음에 드는 신입은 아주 오랜만이야."
풍진호는 진심으로 백수룡이 마음에 들었다.
훤칠한 외모, 누구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당당함, 게다가 실력까지 갖춘 신입.
'이 녀석은 물건이다. 미래의 일타강사감이야.'
강사 생활만 이십 년을 해 온 그의 경험이 말해 주고 있었다.
백수룡은 어느 학관을 가더라도 인기를 끌 수 있는 강사가 될 거라고.
그러니 지금 반드시 잡아 둬야 한다고 말이다.
"당장 남궁수를 쫓아낼 생각은 아니네. 내년이나 내후년. 제 발로 청룡학관을 나가게 해야지."
그 계획에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별개로, 백수룡은 호기심이 생겼다.
"어째서 제 발로 나갑니까?"
"청룡학관의 실패에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게 모양도 좋아."
그 말에 백수룡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제가 남궁수를 잘 안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실패 좀 한다고 포기하고 도망칠 녀석으로는 안 보이던데요."
"안 나가면 나가게 만들어야지."
풍진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했다시피 나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출신들을 좋아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온갖 영약에, 벌모세수에, 고수들로부터 무공 지도를 받으며 자란 그들은 저절로 고수가 되지."
"인생이 원래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백수룡의 지적에 풍진호가 껄껄 웃었다.
"내가 그걸 모르겠나.... 모르는 건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놈들이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출발점이 다르다.
하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열심히 노력했다고, 그 노력으로 인해 강해졌다고, 너희도 열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왜 하지 않느냐고 선한 얼굴로 묻는다.
"나는 그들의 위선이 역겹다네. 누구보다 좋은 환경에서 수련해 경지를 쌓았으면서 그것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자신들 이외의 무인들을 게으르고 무지한 자들처럼 생각하면서 아닌 척 내려다보는 낯짝이 아주 역겨워."
풍진호의 눈빛은 차갑지만 내뱉는 말은 뜨거웠다.
그의 말을 들으며 명일오는 속에서 울컥하는 무언가를 느꼈다. 그 역시 중소 문파의 일원이었으니까.
반면에 백수룡은 다른 것을 느꼈다.
'열등감이군.'
풍진호의 실력은 대략 절정 초입.
충분히 고수라고 불릴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남궁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남궁수는 청룡학관에 온 지 오 년 만에 일타강사가 되었네. 실력이 좋아서?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남궁세가라는 배경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몰리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그렇군요."
백수룡은 이야기를 한번 끊어 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풍진호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그런데 저는 남궁수를 어떻게 나가게 할 것인지 여쭸는데, 다른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군요."
"이런, 내가 잠시 흥분했나 보군. 너희는 잠시 대기하거라!"
아까 풍진호가 부른 기녀들이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풍진호는 그들을 잠시 물러나게 한 다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방법이야 많지. 학관의 돈에 손을 댔다가 걸릴 수도 있고, 여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추문이 돌 수도 있고, 가르치던 학생이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지."
"그, 그건...."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이네."
풍진호는 놀라는 명일오에게 빙긋 웃어 준 다음, 백수룡이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상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자, 한잔 더 마시게."
"감사합니다."
먹이를 노리는 뱀.
백수룡이 풍진호를 보면서 떠올린 느낌이었다.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움직여야 할 순간에만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먹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구렁이.
'이런 일도 처음은 아니겠지.'
분명 남궁수 이전에도 풍진호에게 당한 강사가 있었을 것이다.
풍진호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나를 가늠하고 있나?"
"피차일반 아닙니까."
백수룡이 풍진호를 가늠하듯, 풍진호도 백수룡이란 인간을 마주하며 가늠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이용할 가치가 있는지.
손을 잡아도 될 만한 상대인지를 파악하는 시간.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더욱 적극적인 쪽은 풍진호였다.
"자네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자네와 남궁수는 이미 견원지간이 아닌가. 게다가 자네의 무공은 검법. 결국 남궁수의 자리를 빼앗아야 하지."
딱히 검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백수룡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같은 과목에 일타강사를 두 명씩이나 두지 않는다네. 천무학관이 아니고서야 말이야."
"남궁수가 있다고 제가 일타강사가 못 될 것 같습니까?"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로 갈 필요도 없지 않겠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군요."
백수룡이 피식 미소를 짓자, 명일오가 옆에서 전음을 보냈다.
[형님. 진심으로 풍진호와 손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백수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음을 사용하기 위해 입술을 움찔하는 순간, 풍진호가 그것을 놓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번...."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백수룡이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군."
풍진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지금은 백수룡이 콧대를 높게 세우고 있지만, 결국 자신의 품 안에 거둘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외조부 말고는 변변찮은 뒷배도 없는 놈이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는 백수룡과 공손수의 관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복잡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지금부터는 편하게 마시도록 하세. 들어오너라!"
문밖에서 물러나 대기 중이던 기녀들이 들어왔다.
풍진호는 자연스럽게 기녀 하나를 옆에 두고 몸을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수룡은 옆에 앉은 기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풍 선생님.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별건 아닙니다만."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시게."
"풍 선생님은 왜 무공을 가르치는 일을 하십니까?"
"돈 때문이네."
풍진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기녀의 젖가슴에서 시선도 돌리지 않으며 백수룡에게 물었다.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솔직해서 좋습니다."
"어차피 내 실력으로 강호에서 유명한 고수가 될 수도 없고, 무공 외엔 다른 재주도 없으니 이 일을 선택했네. 해 보니 적성에도 맞고 수입도 짭짤하더군."
고급 기루에서 마음껏 술을 마시고 기녀를 부르는 것만 보아도, 풍진호의 수입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녀를 주물러대던 풍진호가 고개를 돌려 백수룡을 바라봤다.
"반대로 묻지. 자네는 이 일을 하려는 이유가 뭔가?"
"...예전에는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혈교의 무공 교관 시절.
무인으로서 생명이나 다름없는 단전을 다쳤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서라도 반드시 쓸모를 보여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무공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
"예전에 그랬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말인가?"
"...글쎄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돈 걱정도 크게 없어졌고, 무림에서 명성을 날리는 것에도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럼 이 일을 왜 하나?"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아도, 백수룡은 정확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애들 굴리는 게 재미있어서?"
풍진호는 그 대답이 별것 아닌 것으로 들렸는지 가볍게 웃어넘겼다.
"명심하게. 돈이 있어야 고민도 할 수 있고, 선택도 할 수 있는 거라네. 그리고 자네엔 일타강사가 될 자질이 있어."
"그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푸하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아!"
껄껄 웃은 풍진호는 옆에 앉은 기녀를 확 끌어안아 무릎에 올렸다.
본격적으로 희롱이 시작되자 기녀가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대인. 저는 몸 파는 창기가 아닙니다. 술 시중만...."
"알았다. 웃돈을 얹어 주면 될 게 아니냐."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
"알았다니까."
풍진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녀의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대, 대인. 제발 이러지 마세요...."
무림인에게 겁먹은 기녀가 파들파들 몸을 떨면서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백수룡이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풍 선생님. 그 이상 하시면 좋은 자리에서 괜한 소란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흥이 달아나는군. 썩 꺼져라!"
풍진호는 기녀를 거칠게 밀어냈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 기녀가 백수룡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방에서 나갔다. 다른 기녀들도 함께 물러났다.
독주를 단숨에 들이켠 풍진호가 코웃음을 쳤다.
"흥. 어차피 물렁물렁한 몸에는 별 흥미가 없어."
풍진호는 방금 자신을 거절한 기녀 때문에 화가 나 보였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무공을 익힌 몸이 훨씬 더 안는 맛이 있지. 안 그런가?"
"...예?"
"...."
혀로 아랫입술을 핥은 풍진호의 입에서 본격적인 음담패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남자들끼리 이 정도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힌 아이들은 몸매가 달라. 유연하고 탄력이 있지. 내 이십 년 강사 생활의 몇 안 되는 즐거움이라네."
"지금 무슨 말씀을...."
"...."
"에이. 다 알면서 그러나."
백수룡은 말없이 웃으며 풍진호를 바라봤다.
그 의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한 풍진호가 흐흐 웃었다.
"역시 자네는 아는군. 하긴, 그 얼굴에 여학생이 꼬이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많이 꼬이긴 했지요."
백수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말에 풍진호가 눈을 반짝였다. 그는 백수룡의 미소가 유독 차갑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오. 비법이 있으면 좀 알려 주게. 지금껏 몇 명이나 품어 봤나?"
"...몇 명이나 품었을 것 같습니까?"
"마음만 먹었으면 기백 명도 넘을 것 같군. 부러워. 나도 자네처럼 젊고 잘생겼으면 학관의 여학생들을 실컷...."
"새끼, 이거 이제야 인성 나오네."
"응?"
갑자기 바뀐 백수룡의 말투에 풍진호가 당황했다.
피식피식 웃던 백수룡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완전히 쓰레기였구만."
중소 문파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할 때만 해도 공감은 갔다.
남궁수를 쫓아낼 계획을 이야기할 때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제거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 그건 백수룡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하는 꼴과 말을 들어 보니,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게 쓰레기라고 했나?"
"그래. 이 쓰레기야."
"아무래도 술을 과하게 마신 것...."
그 순간, 백수룡은 전광석화처럼 옆에 있는 술병을 들어 풍진호의 머리를 내리쳤다.
와장창!##102화. 재미있겠네술병이 산산조각이 나고, 풍진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졌다.
"커헉!"
쓰러진 찢어진 풍진호의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수룡이 탁자를 넘어 그에게 걸어갔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다른 술병이 들려 있었다.
"몇 명이나 품어 봤냐고?"
"이런 미친놈이...!"
풍진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백수룡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빠악!
이번에는 코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풍진호가 비틀거렸다.
백수룡은 그를 발로 걷어차 벽으로 밀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친 풍진호가 바닥에 쓰러지며 소리쳤다.
그 위에 올라탄 백수룡이 본격적인 매질을 시작했다.
빠악! 빠악! 빠바바박!
"커헉! 컥! 갑자기 왜 이러는...!"
"몰라서 물어, 이 새끼야?"
풍진호는 몸을 웅크리고 두 팔로 얼굴만 간신히 가렸다.
내공을 끌어올릴 시간도 없었다.
백수룡은 술병으로, 그릇으로, 손에 닿는 대로 잡아서 던지고 때렸다. 나중에는 그냥 주먹으로 때렸다.
"개만도 못한 새끼가, 누구를 같은 취급을 해."
백수룡은 오랜만에 제대로 화가 난 모습이었다.
사납게 웃는 그의 얼굴에 살기가 가득했다.
몸을 웅크린 풍진호는 감히 반격은 못 하고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는 거냐!"
"하? 이 새끼가 아직 덜 맞았네."
풍진호의 옷은 술과 음식, 피가 범벅이 되어 오물투성이가 되었다.
단정했던 머리는 다 풀어헤쳤고, 자랑인 수염도 엉망이 되었다.
무림의 고수들이라고 보기 어려운 개싸움.
방 안이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형님! 그만하세요!"
그때 명일오가 달려들어 백수룡의 허리를 잡고 뒤로 끌어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떨쳐내고 계속 팰 수 있었지만, 패다 보니 화가 좀 풀린 백수룡은 못 이기는 척 뒤로 물러났다.
"후우....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지저분해진 손을 탁탁 터는데, 옆에서 명일오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소리쳤다.
"형님.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너도 같이 들었잖아. 저 새끼가 뭐라고 하는지."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패면 어떡합니까.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끄으윽...."
마침 정신을 차린 풍진호가 벽에 손을 기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 뭐 이런 미친놈이...."
"미친놈? 아직 덜 맞았지?"
백수룡이 주먹을 들어 올리자 풍진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추태에 얼굴을 붉히고는 내공을 끌어올렸다.
'부지불식간에 기습을 당해서 맞은 것이지, 무공으로 겨뤄서 진 것이 아니다.'
풍진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전의 싸움은 무공 대결이 아니었다고.
절대로 자신이 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비겁한 놈. 뒷골목 파락호처럼 기습이나 하다니."
"뭐?"
그 어이없는 변명에 백수룡은 낄낄 웃었다.
가식을 완전히 걷어낸 그의 목소리가 차가운 칼날처럼 서늘했다.
"그럼 밖에 나가서 정정당당하게 붙어 볼까? 목 위에 달려 있는 그거 걸고?"
풍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런 애송이의 도발에 넘어갈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그가 나직이 말했다.
"...백수룡. 네 외조부를 믿고 이리 날뛰는 것이냐?"
검치 매극렴.
청룡학관 강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무공을 지닌 검수이자, 재학생들에겐 공포의 대상이고, 많은 졸업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스승.
학생주임 매극렴이 백수룡의 외조부라는 사실은 이제 학관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네 외조부가 너를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여기서 할아버지가 왜 나와?"
풍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는 백수룡은 매극렴을 믿고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감히 신입 강사가 자신에게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이미 관주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력과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도, 매극렴이 왜 아직도 학생주임이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나처럼 때를 기다려서? 천만에."
"흐음."
백수룡은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한 모양인데, 굳이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매극렴이 계속 학생주임으로만 남아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이유가 뭔데?"
"완고하고 엄격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지. 매극렴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
매극렴은 평생 검과 학생지도에만 몰두하며 살아온 무인이었다.
그는 학관 내의 권력이나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강사들 중에서도 매극렴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즉, 너는 줄을 잘못 잡았다는 말이지."
풍진호가 엉망으로 부은 얼굴로 흉물스럽게 웃었다.
그는 당한 것을 갚아 주기 위해 백수룡을 자극했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잘난 자존심 때문에 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은 못난 인간 아닌가? 너라고 다를 것...."
그 순간, 백수룡의 기세가 일변했다.
"...진심으로 죽고 싶다는 말이지?"
푸른 장포가 부풀어 올랐다.
방 안에 어지럽게 흩어진 술병이며 집기들이 마구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한 점으로 집중되었다.
스르릉.
백수룡은 검을 뽑아 풍진호의 미간을 겨눴다.
"어디 더 지껄여 봐."
"너, 너,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든."
저벅.
백수룡은 한 걸음 다가가자 풍진호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사나운 살기에 자기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다.
"곧 죽을 인간에게 들을 만한 건 아니잖아?"
"으으...."
풍진호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는 백수룡에게 무공으로 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정당당하게 붙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떨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털썩.
결국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수룡을 그를 내려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너 같은 쓰레기는 살아 있는 가치가 없어."
"사, 살려...."
백수룡이 성큼 다가서며 검을 휘두르려 할 때였다.
"형님."
그 앞을 막아선 명일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상은 정말 안 됩니다."
"비켜."
"강사들 간에 살인이라니요. 학관이 뒤집힐 겁니다. 형님도 쫓겨나게 될 거라고요."
"...."
"많이 화가 나신 것 압니다. 하지만 제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 주십시오. 자리에 같이 있었던 저도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명일오의 얼굴을 바라본 백수룡이 한숨을 내쉬고 검을 집어넣었다.
"...그건 생각을 못 했다."
저런 쓰레기 하나를 죽이는 건 일도 아니지만, 고작 이런 일로 앞길이 창창한 두 강사의 경력을 망칠 수는 없었다.
"허억.... 허억...."
죽다 살았다는 안도감에 풍진호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얼굴은 한순간에 십 년은 더 늙은 듯 보였다.
백수룡이 그를 보며 말했다.
"하나 말해 줄까? 당신 제안에는 처음부터 별 흥미가 없었다."
"...어째서?"
"전제부터가 틀렸거든. 청룡학관이 망할 거라니. 예산만 해도 올해부터 두 배로 늘어날 거다."
"...어째서?"
풍진호는 백수룡의 든든한 후원자인 공손수의 정체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청룡학관 내에서 그 정체를 아는 강사는 노군상, 곽철우, 남궁수뿐이었다.
"그리고 내년부터 청룡학관이 천무제에 초대받지 못할 거라고? 그래도 상관없어."
"...어째서?"
계속해서 똑같은 질문.
풍진호는 멍한 표정으로 백수룡을 올려봤다.
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을 비웃는 모습을 보았다.
"올해에 청룡학관이 우승할 텐데. 내년에 우릴 초대하지 않으면, 청룡학관이 영원히 우승자로 남을 테니까."
"하, 하하...."
풍진호는 엉망이 된 꼴로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정도가 아니라, 주제도 모르게 오만한 녀석이었군."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실상은 열등감에 찌든 추한 인간보다야 그게 낫지."
"...그래."
풍진호는 시체처럼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텅 빈 눈동자로 백수룡을 마주 보았다.
"자네.... 이제 보니 아주 대단한 고수였군. 언행에 그만한 자신감이 있는 것도 이해하겠어. 하지만 말이지...."
백수룡은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마음이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 풍진호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저 녀석 때문에라도.'
힐끗 명일오를 본 풍진호가 다시 백수룡을 바라봤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약한 인간은 약한 인간대로 방법을 강구하는 법일세. 앞으로 내 모든 능력과 인맥을 동원해서 자네를 이쪽 업계에서 매장시킬 생각인데. 어떤가? 이 자리에서 날 죽일 텐가?"
풍진호는 마치 죽여 보란 듯 백수룡을 도발했다.
잔뜩 독기가 차오른 눈빛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방금과 완전히 달라진 태도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백수룡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든가."
"...기대해도 좋네."
풍진호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에 물로 수염을 씻은 후 방을 나섰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생기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힘든 분위기에 아무도 그를 가로막지 않았다.
풍진호가 기루의 정문을 나서기 전, 백수룡이 다시 그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는 말이다.
"잠깐 기다려."
"...또 뭔가. 이제 와서 싸움을 걸려고...."
"갈 땐 가더라도 여기 술값은 계산하고 가야지."
"...."
"참, 부서진 술병이랑 그릇값도 함께 계산해 줘."
백수룡은 무복의 안주머니를 뒤집어 먼지를 탈탈 털어 보였다.
"우린 임시 강사라 벌이가 시원찮거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풍진호가 결국 품에서 전낭을 꺼냈다.
"여기 계산 좀 해 주게."
계산을 마친 풍진호가 백수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 선생. 내가 조언 하나만 해도 되겠나."
"얼마든지요."
풍진호가 계산한 액수를 본 백수룡이 흐뭇하게 웃으며 존댓말로 대답했다.
풍진호가 그 미소에 찬물을 끼얹었다.
"자네가 이번에 맡은 강의 말일세."
"...?"
"최소 수강 인원을 채우지 못하는 강의는 폐강된다네."
"...."
"간혹, 정말 간혹 그런 일도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해 주는 말일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풍진호가 기루를 나섰다.
* * *
다음 날 아침.
학관 곳곳 게시판에 붙은 수강 신청 목록에, 신규 강의 하나가 새롭게 추가되었다.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 백수룡>
<사파 무공의 분석과 현장 실습 - 풍진호>
거의 비슷한 이름의 강의.
심지어 같은 요일, 비슷한 시간대로 배정된 수업이었다.
그걸 본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뭐야. 풍 선생님 강의가 새로 나왔네?"
"어. 나 이거 들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백 선생님 강의랑 시간이 겹치는데?"
"둘 중 하나만 들으려면 풍 선생님 강의가 났지."
"근데 교양인데 큰 차이가 있나?"
"너 그거 몰라? 풍 선생님한테 찍히면...."
학생들의 반응은 당연히 둘 중 하나라면 풍진호의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날 밤 함께 있었던 명일오가 굳은 표정으로 백수룡을 돌아봤다.
"형님. 이거...."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게시판을 바라보는 백수룡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재미있겠네."##103화. 반격 (1)어찌 된 일인지, 전날 밤 풍진호와 백수룡이 크게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청룡학관 전체에 퍼졌다.
"...내가 분명 풍진호는 적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혀를 찬 매극렴이 찻잔을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 반대편에는 백수룡이 얌전히 무릎을 꿇은 채 꿍시렁거리고 있었다.
"분명 입단속을 했는데 대체 어떤 자식이 소문을...."
"조용히 해라."
"...넵."
매극렴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넌 대체 누굴 닮아서 가는 곳마다 말썽을.... 둘 다였구나."
딸과 사위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린 매극렴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청룡학관에서 삼십 년 넘게 일하면서 본 문제아들 가운데,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두 녀석이 야반도주해서 만든 결실이 바로 백수룡이었다.
"그 둘 사이에 나온 녀석이니 오죽하랴...."
"할아버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그 와중에도 백수룡은 뭐가 그리 당당한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말했다.
"그자가 하는 짓을 보셨으면 할아버님께선 아예 두 동강을 내셨을 겁니다."
그러고도 남는다 쪽에 백수룡은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
물론 매극렴은 철없는 손자를 향해 혀를 찰 뿐이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한다더냐. 좀 참고 넘어갔으면 피할 수 있는 일을...."
"아니 그 자식이...!"
"그 자식이 뭐?"
"후우. 아닙니다."
백수룡은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매극렴이 죽은 딸의 장례식에 가지 않은 일을 풍진호가 언급했다는 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 친어머니도 아니지만.'
어쨌든 이 몸을 낳아 준 어머니가 아닌가.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으면 그건 호구 등신이었다.
"...나는 네 일에 관여치 않을 것이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매극렴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러셔야 합니다."
백수룡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깟 일에 할아버님까지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 저 스스로 실력을 증명하겠습니다."
"실력을 증명하려면 우선 최소 수강 인원부터 채워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예...."
백수룡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일단 최소 수강 인원 다섯 명을 모으지 못하면 이 강의는 시작도 못 하고 폐강이다.
"풍진호는 인맥이 두루두루 넓고 정치에 도가 튼 인간이다. 게다가 강의 실력도 좋아 학생들에게 인기도 많다. 온갖 수작을 부려서 네 강의를 방해할 게다."
그런 쓰레기가 인기 강사라니.
백수룡이 나직이 탄식했다.
"안타깝게도 인성과 실력이 비례하지는 않는군요."
매극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백수룡을 째려봤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더냐?"
"아니...."
어떤 절대고수 앞에서도 말대꾸는 잘했으면서, 왜 매극렴 앞에만 서면 이렇게 작아지는 걸까?
'이게 다 죄 많은 아버지를 둔 탓이지.'
어쨌든, 당장 다음 주까지 최소 수강 인원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다섯 명을 모으는 것도 생각보다 쉽진 않을 것이다. 생각해 둔 방도가 있느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매극렴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으나, 백수룡은 자신만만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끄응. 알았다."
관여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더 묻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기에 매극렴은 가만히 차만 마셨다.
잠시 후, 차를 다 마신 백수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님.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매극렴은 백수룡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신발을 신는 외손주를 보며 그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음. 만약에 말이다. 큼, 정 내 도움이 필요하면.... 흠흠."
제대로 뒷말을 잇지 못하며 매극렴이 헛기침을 하는데, 신발을 다 신은 백수룡이 돌아서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만 퇴근해 보겠습니다."
"...내일도 늦지 말거라."
외손자의 뒷모습이 작아지는 것을 보며, 매극렴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얀 놈. 끝까지 도와달라는 말은 안 하구나."
* * *
매극렴의 거처에서 나온 백수룡은 곧장 청룡학관 교무처로 향했다.
"다섯 명? 아무것도 아니지."
백수룡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감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혈교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훨씬 좋은 상황이거든.'
혈교의 교관 시절, 백수룡은 밑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단전이 망가져서 갑자기 교관 쪽으로 진로를 튼 그를 환영해 준 교관은 아무도 없었다.
-뭐? 단전이 망가진 병신이 무공을 가르친다고?
-어이 신입. 교관이 만만해 보이나?
-너 교주님 친위대에 있을 땐 제법 기대주였다며? 여기선 그딴 거 기대하지 마라.
무시와 조롱은 일상이었고, 똑같은 실수를 해도 몇 배로 손가락질을 당했다. 가르치는 교육생들에게조차 은근히 무시를 당했다.
그래서 죽어라 노력했다.
읽을 수 있는 무공 서적은 모두 달달 외우고, 교육생 하나하나의 신체적 특징은 물론 성격까지 파악해 최적화된 교육법을 찾았다.
-미친놈....
-...잠은 자고 일하는 거냐?
-혼자서 이 많은 걸 했다고?
조롱과 무시의 시선은 점점 경악과 감탄으로 바뀌었다.
그를 질투한 교관들이 음모를 꾸미고 누명을 씌우려 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한발 먼저 움직여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고 비웃었다.
'하루하루가 외줄 타듯 짜릿한 시절이었지.'
그가 가르친 교육생들이 훗날 무림에 나가 이름을 날리는 고수가 되었을 때쯤엔, 그는 이미 혈교 최고이자 최악의 교관이라 불리고 있었다.
훗날 네 명의 사부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능력을 인정받아서였다.
"그때랑 비교하면 이 정도쯤이야...."
백수룡이 피식 웃으며 교무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일단 지금까지 몇 명이나 수강 신청을 했는지 확인해 볼까.'
교무처 직원에게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요? 잠시만요. 확인해 드릴게요. 현재 수강 인원이... 한 명이네요."
"...열한 명이요?"
"아니요. 한 명이요."
직원은 오해하지 말라며 오른손 검지를 반듯하게 세워 보였다.
백수룡은 어쩐지 가운뎃손가락처럼 보이는 그녀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한 명이라고요? 이틀 동안 수강 신청을 한 학생이 딱 한 명이라고요?"
"네. 직접 확인해 보세요."
교무처 직원은 수강 신청 현황에 적힌 서류를 내밀어 보였다.
종이의 맨 위에 <위지천>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천아...."
백수룡은 작은 감동을 받았다.
왜냐하면 위지천은 이미 백룡장에서 매일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신청했다는 건, 청룡학관에서도 자신에게 더 배우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잠깐만. 그런데...."
반대로, 똑같이 매일 가르침을 받는데 신청을 안 한 다른 놈에게는 얄미운 마음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헌원강 이 새끼가?"
아직도 위지천보다 한참 약한 주제에 감히 신청을 안 해?
오늘 퇴근하면 헌원강을 두 배로 굴려 줘야겠다고 다짐하는 백수룡이었다.
백수룡이 직원을 돌아보며 멋쩍게 웃었다.
"저 죄송한데, 사파 무공의 분석과 현장 실습은 몇 명이나 신청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
그의 미소에 얼굴을 살짝 붉힌 직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류를 찾았다.
"원래는 안 되는데.... 어디 가서 말 하시면 안 돼요."
그녀는 서류를 뒤지더니, 굳이 백수룡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그 수업은 열세 명이 신청했어요."
"...그렇군요."
이쪽은 한 명인데, 저쪽은 수강 신청 이틀 만에 최소 수강 인원의 두 배를 넘겼다.
'아무리 그래도 이상한데.'
애초에 수강 인원이 비슷할 거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쪽으로 더 많이 몰리는 게 정상.
하지만 그래도 한 명뿐이라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비인기 과목이라도 그렇지, 교양 과목이니만큼 단순히 학점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신청한 학생들이 몇 명은 있어야 했다.
즉, 저쪽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 냄새가 났다.
"감사합니다."
"뭘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교무처 직원이 새침하게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잠시 후, 교무처를 빠져나온 백수룡은 잠시 고민하다 발걸음을 돌렸다.
'일단 정보를 좀 더 수집해 봐야겠군.'
다행히도, 백수룡은 학관 내에 매우 뛰어난 정보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상당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진 백수룡은 심호흡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하곤 웬만하면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다.
잠시 후, 백수룡은 현판에 <청룡학관 학생회>라고 적힌 건물로 들어갔다.
* * *
"선생님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나서 그래요."
차가운 인상의 소녀, 하지만 그 눈빛은 묘한 열기로 이글거렸다.
백수룡은 탁자 너머 마주 앉은 소녀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물었다.
"좋지 않은 소문? 구체적으로 어떤 건데?"
"그 전에... 약속대로 머리카락부터 먼저 주세요."
범상치 않은 눈빛의 소녀, 당소소는 선금부터 확실하게 요구했다.
백수룡은 찝찝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았다.
"잠깐. 굵고 싱싱한 거로 주세요."
'싱싱한 머리카락이 왜 필요한 건데....'
그 용도가 무척 의심스럽고 궁금했지만, 돌아올 대답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백수룡은 차마 묻지 않았다.
"...여기 있다."
"후후후...."
당소소는 백수룡의 머리카락을 비단에 싸서 품 안에 넣은 후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젯밤에 선생님이 풍진호 선생님을 기습해서 만신창이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대체 어떤 놈이 퍼트린 거야? 기루 직원들은 전부 입단속을 했는데...."
"사실이에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묻는 당소소에게, 백수룡은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질문하러 온 사람은 나야. 돌고 있는 소문은 그게 전부야?"
"그것 말고도 많아요. 전에 일하던 학관에서 여학생들을 후리고 다녔다느니, 돈 많은 남자들을 후리고 다녔다느니, 색공을 익혔다느니...."
"...어째 다 비슷한 소문들이군."
"전 믿지 않아요. 선생님이 그런 분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거든요."
당소소는 위험한, 그러나 두 눈에 신뢰가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런 사람이었으면 저한테 안 걸렸을 리가 없잖아요? 전 이미 선생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만. 그만해 제발."
부르르 몸서리를 친 백수룡이 다른 질문을 했다.
"어쨌든 소문뿐이잖아. 그것만 가지고 학생들이 나를 피한다고? 오늘만 해도 딱히 그런 느낌은 없었는데...."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것인지야 뻔했다.
풍진호가 앙심을 품고 헛소문을 퍼트린 거겠지.
하지만 백수룡이 생각하기엔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문보다 중요한 건 선생님이 풍 선생님한테 찍혔다는 거예요. 풍 선생님은 주요 전공 과목도 여럿 가르치거든요. 게다가 그 뒤에는...."
"남궁수가 있다?"
당소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학관에서 남궁 선생님에게 밉보이고 제대로 된 학점을 받을 수 있는 학생은 없다고 봐도 좋아요. 풍 선생님은 그런 남궁수 선생님과 친하고요. 다른 강사님들하고도 마찬가지예요."
'정작 풍진호는 남궁수를 쫓아낼 계획인데 말이지.'
백수룡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소문에는 더 큰 소문으로 맞불을 놓는 방법도 있다.
풍진호와 남궁수 사이를 이간질해서 틀어지게 할 수도 있고, 은밀하게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수도 있다.
아니면 강의 자체를 아예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혈교에서처럼 과격한 방법은 안 되겠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한 백수룡이 다시 고개를 들어 당소소를 바라봤다.
"여기, 의뢰도 받나?"
그와 눈이 마주친 당소소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요금만 지불하신다면요."##104화. 반격 (2)필요한 정보를 몇 가지 더 얻어낸 후, 백수룡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필요한 정보는 없으세요?"
"일단은 이 정도면 충분해. 의뢰한 건 언제쯤 받아볼 수 있지?"
"내일 아침이면 정리될 거예요. 생활지도부로 갖다 드릴게요."
"그래. 그럼 그때 보자고."
당소소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일어섰다.
"아쉬워요.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지난 학기에 듣지만 않았어도 당장 수강 신청 하는 건데...."
차마 이미 들어서 다행이라는 말은 할 수 없기에, 백수룡은 가식적으로 웃어 주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어머. 잘생겼어...."
백수룡의 미소에 얼굴을 붉힌 당소소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탄했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청룡학관 학생회의 문은 늘 열려 있으니까요. 그리고 다음엔 머리카락 말고 다른 털을...."
쿵!
강하게 문을 닫고 나온 백수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악마와 거래를 하고 온 기분이군."
등줄기에 식은땀이 살짝 맺혔다.
차라리 흑림의 살수들과 다시 싸우는 게 열 배는 쉬울 것 같았다.
부르르 몸을 떤 백수룡이 중얼거렸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털 따위를 가져다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슬쩍 물어보니, 몇 개는 베개에 넣고 몇 개는 옷을 만들 때 사용할 거라고 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당가 비전의 사술 같은 건가?'
...아무튼 이해는 할 수 없지만, 고급 정보를 공짜로 얻은 것은 사실이었다.
기분이 좀 찜찜할 뿐, 백수룡이 손해를 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생님."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학생회장 독고준이 백수룡에게 다가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짐작한 듯, 독고준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회장을 대신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너도 고생이 많겠구나."
"예...."
그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독고준은 금방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풍진호 선생님과의 문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두 강사의 갈등은 학생회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모든 학생과 강사들이 힘을 모아서 천무제를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학기 초부터 파벌이 갈려 싸운다면 시작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었다.
"학생회 입장에선 두 분이 원만하게 화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소소가 백수룡에게 유용한 정보를 이것저것 건네주긴 했지만, 학생회가 둘 중 한쪽 편을 들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풍 선생님은 학생회는 물론, 동아리 연합, 졸업생 동문회, 학부모회까지 끈이 안 닿는 곳이 없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백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독고준이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화해하고 싶으신 마음이 있으시다면 학생회에서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독고준의 어깨에 손을 올린 백수룡이 피식 웃었다.
"화해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습니까."
백수룡도 독고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풍진호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틀어졌다.
설령 돌이킬 수 있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남궁수가 나아. 저런 썩은 부위는 빨리 도려내야 해.'
나름의 결심을 한 백수룡은 독고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렇다고 오래가진 않을 테니까."
당소소에게 몇 가지 정보를 얻으면서, 백수룡은 풍진호에게 반격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나에 대해 돌고 있는 소문부터 해결해야겠지.'
지금처럼 지저분한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수강생을 모으는 것은 어렵다.
그 전에 풍진호가 퍼트린 소문의 오해를 풀든가....
씨익.
"더 큰 소문으로 덮어 버리든가."
"...예? 그게 무슨...."
독고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백수룡이 그 옆을 지나갔다.
"너무 늦기 전에 수강 신청을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이미 들은 과목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
사악하게 웃는 백수룡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독고준은 조만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짐작했다.
* * *
방 안에는 중년의 남녀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풍진호는 반대편에 앉은 여성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이십 년 경력의 강사인 그가 청룡학관 내에서 이토록 행동을 조심해야 할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눈앞의 중년 여인은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는 존재였다.
촤악.
섭선을 펼쳐 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수룡이라.... 정말이지 혐오스러운 인간이네요. 어떻게 그런 인간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거죠?"
백의궁장 차림의 여인은 얼음이 묻어날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도도한 표정.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많아도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현이 어머님. 제가 강사들을 대표해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풍 선생님께서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한천빙모(寒泉氷母) 서리애.
청룡학관 학부모회의 회장으로, 개인의 무공도 고강할뿐더러 학관의 대소사에 개입할 정도로 강력한 입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 학생회장이었던 방백현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그녀가 혀를 찼다.
"학관에 그런 파렴치한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저 또한 깜빡 속을 뻔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풍진호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방금까지 그는 백수룡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음흉한 인간인지 서리애에게 설명한 참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서리애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사내들 중에 얼굴값 하지 않는 자를 찾기가 더 어렵죠. 아이들을 위해서, 학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런 자는 마땅히 쫓아내야 해요."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서리애의 단호한 말에 풍진호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그의 입가엔 미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백수룡. 이걸로 넌 끝이다.'
무림의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보통이 아니다.
자식의 출세를 위해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학관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
서리애는 그 정점에 있는 여인.
그녀의 한마디면 청룡학관에 자식을 둔 어머니들이 모두 움직일 것이다.
학관주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눈앞의 여인이었다.
"그 신입 강사에 대해서는 조만간 학부모 회의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모아서 관주님께 전달하겠어요."
"역시 신중하십시다."
말이 회의지, 결국 학부모회는 그녀가 주도하는 데로 흘러갈 것이다.
'이제 매극렴이 아니라 노군상이 나서더라도 널 구할 수 없다.'
백수룡은 평생 이쪽 업계에는 발도 못 붙이게 될 것이다.
그것뿐인가.
풍진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 백수룡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계획이었다.
'그 잘난 무공으로 평생 떠돌이 낭인으로 살게 해 주마.'
그는 입가에 맺히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서리애가 그 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편히 말씀하십시오."
잠시 뜸을 들인 서리애가 도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현이. 올해 성적도 문제없겠죠?"
"물론입니다. 무림맹 특채 전형으로 완벽하게 맞춰 준비하고 있습니다."
4학년 방백현.
작년 청룡학관 학생회장이자 서리애의 외동아들로, 상당한 실력과 재능을 갖춘 수재였다.
아들 이야기에 서리애의 얼음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온기가 돌았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하네요. 저는 풍 선생님만 믿어요."
"허허. 현이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을 정도입니다."
"과한 겸손이세요. 아직 한참 부족한 아이랍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려요."
스윽.
품에서 비단으로 된 전낭을 꺼낸 서리애가 풍진호 쪽으로 밀었다.
"소소하지만 강사님들과 술 한잔하실 정도는 될 거예요."
한눈에 보아도 상당히 두툼한 전낭.
풍진호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품 안에 넣으며 미소 지었다. 한두 번 받아 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이고. 저희 사이에 뭘 이런 걸 다...."
"저는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믿지 않는답니다. 실제로 오가는 것이 있어야 더욱 돈독해지는 것이 인간관계 아니겠어요?"
"...물론입니다."
즉, 방백현의 학점 관리를 제대로 하란 소리였다.
'무섭군.'
풍진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없이 차가운, 하지만 그 안에 뜨거운 야망이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시겠지만 우리 현이는 언젠가 무림맹주가 될 아이예요. 졸업해서 무림맹에 입맹할 때까지, 그 아이의 경력에 흠결 하나 있어선 안 돼요."
"걱정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림맹주.
정파 무림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위치.
고강한 무공만으로 닿을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인망과 정치력까지 모두 갖춰야 얻을 수 있는 지위였다.
서리애는 자신의 아들을 무림맹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풍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께도 잘 일러주세요. 특히 남궁 선생님. 벌써 제 면담을 요청을 네 번이나 거절하셨어요."
"...제가 잘 말해 놓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서리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 봐야겠어요. 반 시진 후에 현이 과외 선생님이 오시는 시간이라."
"제가 정문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풍진호는 서리애를 반보 뒤에서 수행하듯이 뒤따랐다.
그녀가 청룡학관 곳곳을 둘러보며 말했다.
"연무장이 지저분하네요. 청소를 좀 더 자주 해야겠어요."
"말해 놓겠습니다."
"연습용 무기들 정비는 제대로 하는 건가요? 아까 들러보니 창고에 녹이 슬어 있던데."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기숙사 생활에 대해 학부모회 의견을 모아 볼 생각이에요. 불편한 점은 개선을...."
"경청하겠습니다."
마님과 하인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풍진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낮췄고, 서리애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렇게 권력자에게 달라붙는 것이 풍진호가 살아남아 온 비결이었다.
두 사람이 정문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웅성웅성.
정문 주변에 꽤 많은 인파가 모여 있고, 인파 너머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여 다투고 있었다.
"비켜 주십시오. 안으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이곳은 무림맹 관할이오! 관무불가침에 따라 관부의 사람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소이다."
서리애가 눈살을 찌푸리며 풍진호에게 물었다.
"웬 소란이죠?"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풍진호는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잠시 후 누군가와 대치 중인 매극렴의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늙은이.'
매극렴을 본 순간 백수룡은 얼굴이 떠올라 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점잖게 물었다.
"학생주임 선생님. 무슨 일입니까?"
"풍 선생? 마침 잘 왔네. 당사자가 왔으니 직접 물어보면 되겠군."
"...당사자라니?"
풍진호는 고개를 돌려 매극렴과 대치한 사람을 바라봤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긴 인상의 포두가 말에 탄 채로 그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쪽이 청룡학관 강사 풍진호 씨가 맞습니까?"
"...맞는데 무슨 일이시오?"
불길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고 그 순간, 포두의 뒤에 숨어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저 사람이에요!"
뾰족한 목소리에 모두의 집중되었다.
여인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장옷을 벗었다.
"너는...."
며칠 전, 풍진호가 백수룡에게 맞은 날 기루에서 희롱했던 기녀였다.
"저 남자가 기루의 물건들을 부수고 절 때렸어요!"
"이런 미친년! 내가 널 언제 때렸단 말이냐!"
당황한 풍진호가 버럭 소리쳤다.
그 순간 청천 포두가 표정 변화 없는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서로 아는 얼굴이긴 한 모양이군."
"그, 그건...!"
한 번의 말실수로 주변의 시선들이 싸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청천은 풍진호의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말했다.
"풍진호 강사. 폭행 및 기물 파손으로 기루에서 신고가 들어왔소. 관아로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겠소."
"이건 음모요! 나는 그런 적 없소이다!"
"어라? 풍 선생님 아닙니까?"
하필이면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풍진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왔다.
백수룡이 순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어라? 당신은 그때...."
백수룡을 알아본 기녀가 반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대협! 저 기억하시죠? 그때 자리에 함께 계셨잖아요. 대협께서 그때 절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물론 다 기억난다는 듯, 백수룡이 선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억하고말고요. 며칠 전에 저 변태 자식이 소저에게 찝쩍거려서 제가 흠씬 패주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소문이 퍼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풍 선생님."
주변의 공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목소리.
인파를 헤치고 또각또각 걸어온 서리애가 풍진호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죠?"
"어, 어머님. 뭔가 오해가...."
학부모회 회장의 서슬 퍼런 추궁에, 풍진호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105화. 기대되는데"...내 자네들에게 엄중히 경고하겠네."
노군상이 내뿜는 기세에, 방 안의 공기는 숨 막힐 듯 무거웠다.
청룡학관주는 자신의 앞에 나란히 앉은 두 강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들의 기 싸움이 한 번만 더 청룡학관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로 이어진다면, 둘 다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
관아에서 포두가 출동해 청룡학관 강사를 체포해 갈 뻔했던 사건은, 뒤늦게 도착한 노군상과 난향이라는 기녀가 합의하면서 극적으로 흐지부지되었다.
정확히는 백수룡이 청천과 난향에게 전음으로 지시를 내린 것이었지만 말이다.
「오라버니. 이걸로 은혜는 갚았어요. 나중에 술 한잔하러 오세요. 그땐 제가 살게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난향이 남기고 간 쪽지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백수룡과 눈이 마주친 그녀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 떠났다.
"관주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이자가 그 기녀와 짜고 저를 모략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
"풍 선생.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풍진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으나, 노기가 충천한 노군상 앞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츠츠츠츳....
무시무시한 기운이 노군상에게서 흘러나와 풍진호를 짓눌렀다.
풍진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과, 관주님...."
"갈! 너희가 그날 기루에 있었다는 것은 확인했다. 정확한 사정은 궁금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너희가 청룡학관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것이다!"
노군상의 사자후로 새파랗게 질린 풍진호 옆에서, 백수룡은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풍진호는 그 모습이 가증스러워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함께 구설수에 휘말렸지만, 이번 사건으로 훨씬 더 손해를 본 쪽은 두말할 것 없이 풍진호였다.
풍진호에겐 이십 년간 강사 생활을 해 오며 쌓은 명예가 있었다.
반면 백수룡은 이제 막 신입 강사가 된 애송이.
경력이라고는 이제부터 시작될, 잃을 것도 없는 몸이었다.
노군상이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의 강의 계획서를 보았네. 거의 똑같은 내용에 시간대도 비슷하더군. 대체 누굴 위한 강의인가?"
"...."
노군상의 서슬 퍼런 눈빛에 두 강사는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노군상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렇게 하겠네. 자네들의 강의를 2주간 종합적으로 평가한 후, 둘 중 평가 점수가 떨어지는 쪽은 폐강하겠네."
"예?"
"관주님?"
당황한 두 강사가 눈을 부릅뜨고 노군상을 바라봤다.
그러나 노군상은 반론 따위 듣지 않겠다는 듯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폐강된 강의를 듣던 학생들은 남은 강의를 듣게 할 것이니 그리 알게. 내 결정에 불만이라도 있나?"
두 강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평가가 높은 쪽이 두 수업의 학생들을 독차지하게 된다는 이야기.
두 사람 다 이길 자신이 있었기에 대답에 망설임이 없었다.
"둘 다 내 말 명심하고, 이만 나가 보도록."
싸늘한 축객령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주실을 나오자마자 풍진호에게서 싸늘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백수룡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풍진호는 더 이상 가식적인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물론 백수룡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씨익.
"당연한 소릴. 이제부터 막 재미있어지려고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적이 된 후로 서로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한 방 먹였다고 기고만장하구나. 널 파멸시킬 방법이 소문 몇 개 내는 것이 전부인 줄 아느냐?"
"왜? 살수라도 고용하시게?"
"굳이 죽일 필요가 있을까. 평생 후회하게 해 주는 쪽이 더 내 취향인데."
"생각이 나랑 비슷하시네. 나도 편하게 끝내줄 생각은 없거든."
"이 하룻강아지가...."
두 사람의 설전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어지지 못했다.
"두 분. 관주님과 이야기는 끝나셨나요?"
복도 끝에서 학부모회 회장 서리애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도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풍진호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현이 어머님. 절 기다리셨군요. 아까 일은 제가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서리애가 볼일이 있는 쪽은 풍진호가 아니었다.
"풍 선생님. 죄송하지만 백수룡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자리를 좀 비켜 주실래요?"
"...예?"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진 풍진호가 빠르게 말했다.
"혀, 현이 어머님. 우선 제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시면...."
"죄송하지만 구차한 변명까지 들어드려야 할 만큼 제 시간이 많진 않답니다."
평소에도 차가웠지만, 지금 서리애의 말투에는 북풍한설이 몰아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그녀가 백수룡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백수룡 선생님. 잠깐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백수룡은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을 취했다.
둘 사이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 풍진호가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년이...!'
불과 한 시진 전만 해도 백수룡을 쫓아내야겠다고 말하던 서리애였다.
그랬던 그녀의 태도가 한순간에 돌변했다.
그 기녀와 백수룡이 기루에서 있었던 일을 폭로했기 때문일까?
'아니, 이 여자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아.'
서로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다.
풍진호가 어떤 인간인지,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새삼 그의 도덕성에 흠을 발견해서 이런 대우를 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다.
'내게 백수룡에게 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백수룡이라는 패가 의외로 괜찮아 보이니 한번 알아보려는 것이다.
동시에 풍진호 자신을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 정도 일도 똑바로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다는 경고.
'이 풍진호를 우습게 보는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그 사실을 깨닫자 오히려 빠르게 냉정을 되찾았다.
여기서 화를 내거나 서리애에게 매달리는 것은 최악의 수.
오히려 조용히 물러나 반격을 준비해야 할 때다.
"...현이 어머님.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풍진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후 순순히 물러났다.
서리애는 그 뒷모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백수룡을 향했다.
"올해 수석 입학한 아이의 개인 과외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위지천에 관한 이야기는 청룡학관 학부모회에서도 유명했다.
'올해 수석인 위지천이 신입 강사 백수룡의 집에서 숙식하며 무공 과외를 받았다더라.'
'예순여섯이나 된 노인을 합격시켰다더라.'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벌써 그런 소문이 자자했다.
실제로 그 후 적지 않은 개인과외 요청이 들어왔지만, 백수룡은 학관 수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했다.
"천이의 재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셔라."
백수룡의 겸손한 대답에 서리애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과한 겸손은 오히려 교만해 보인답니다. 역대 최고령 합격자를 만든 것도 재능 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실 건가요? 저는 이런 면에서는 솔직한 분이 좋아요."
"그러시다면."
그 순간, 백수룡의 입가에 맺혀 있던 반듯한 미소가 살짝 뒤틀렸다.
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치는, 보기에 따라 거만하다고도 느낄 수 있는 미소였다.
"내숭은 그만 떨겠습니다. 사실 제 능력이 뛰어나긴 합니다. 풍진호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죠."
서리애는 그의 대담한 대답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풍 선생님에겐 이십 년간 다방면으로 쌓아 온 인맥이 있어요. 강의 실력도 괜찮은 편이고요. 백 선생님껜 뭐가 있죠?"
대답이 중요한 순간.
이 대답 여하에 따라, 백수룡에 대한 학부모들의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백수룡을 바라보는 서리애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거야.'
그러나 서리애의 예상과 달리, 백수룡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뛰어난 무공, 명석한 두뇌, 화려한 언변, 훌륭한 인성, 강의에 집중하기 좋은 수려한 외모.... 더 말씀드릴까요?"
긴장은커녕 여유롭기만 한 그의 대답에, 서리애는 자기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감과 패기는 마음에 드네요. 그냥 간덩이가 부은 것 같기도 하지만...."
그녀의 칭찬인 듯 비꼬는 듯 애매한 말에, 백수룡은 씩 웃으며 말했다.
"말로 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켜보십시오. 제가 청룡학관을 바꿔 놓을 테니까요."
"흐음...."
서리애는 백수룡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청룡학관을 천무제에서 우승시키겠다고 한 발언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물론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 이후로 청룡학관에 여러 가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서리애가 입을 열었다.
"우리 현이는 4학년이라 아마 선생님께 수업을 듣진 못할 거예요."
"방백현 학생. 매우 뛰어난 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청룡학관에서 유명한 학생들의 이름 정도는 백수룡도 이제 대부분 알고 있었다.
방백현.
작년 학생회장으로, 지난해 천무제에서 청룡학관이 최소한의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방백현 덕분이라고 들었다.
아들의 이름이 나오자 서리애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언젠가 무림맹주가 될 아이랍니다. 잘 부탁드려요."
"훌륭한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백수룡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조금 당황했다.
'무림맹주라고?'
과거 사파의 정점이 혈마신교의 교주인 혈마였다면, 정파 무림의 정점은 무림맹주다.
하지만 사파와 달리 무림맹주는 무공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무공, 인망, 정치력까지 겸비되어야 올라갈 수 있는 위치.
어쩌면 사파의 지존보다 되기 어려운 것이 무림맹주였다.
'아들을 무림맹주로 만들겠다라....'
아직 방백현을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었지만, 서리애의 눈에서 느껴지는 야망은 용암처럼 뜨거웠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무림맹에 같은 학관 출신의 수하들이 많을수록, 우리 현이도 더욱 힘을 받지 않겠어요?"
청룡학관 졸업생들은 모두 미래의 무림맹주인 방백현의 수하가 될 것이다.
서리애는 수십 년 후의 미래까지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꿈꾸듯 몽롱했다.
'...괜히 찬물을 뿌릴 필요는 없겠지.'
백수룡이 부드럽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곧 청룡학관에서 큰 인물이 나오겠군요. 제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답변이었는지 서리애가 빙긋 웃었다.
"말씀만으로 감사해요. 학생들을 잘 가르쳐 주시는 것이 곧 우리 현이를 도와주는 일이랍니다."
그녀는 백수룡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 보면서, 그에 대한 평가를 끝냈다.
'젊고, 패기 넘치고, 지금까지 보여 준 실력도 괜찮고, 풍진호에게 한 방 먹인 걸 보면 여간내기도 아니야.'
그렇다고 풍진호와 완전히 척을 지면서까지 백수룡을 편들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학부모회는 두 분의 개인적인 갈등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겠어요. 부디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랄게요."
즉, 앞으로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백수룡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이 정도면 충분해.'
풍진호의 가장 강력한 연줄이었던 학부모회가 중립을 선언했다.
또한 서리애와 개인적으로 안면을 트기도 했으니, 백수룡 입장에서는 상당한 수확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몸을 돌린 서리애는 바닥을 미끄러지는 듯한 보법으로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얇은 살얼음이 맺혔다.
백수룡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보통 아줌마가 아니네."
특히 아들에 대해 말할 때 서리애의 눈빛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백수룡은 과거 저런 눈빛을 한 무인을 본 적이 있었다.
'심마(心魔)에 빠진 사람의 눈.'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눈빛만 보고 무인이 심마에 빠졌는지 정확히 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울뿐더러, 그녀의 말투나 행동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으니까.
...다만 아들을 향한 지나친 집착이 보일 뿐.
"뭐,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지."
백수룡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당장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꽉 찼으니까.
그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은 풍진호도 허튼짓을 못 하겠지.'
기녀 난향의 고발로, 백수룡에게 쏟아지던 경멸의 시선이 모두 풍진호에게로 향했다.
여기에 노군상의 엄중한 경고도 있었으니 풍진호도 한동안은 몸을 사릴 것이다.
즉, 백수룡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일단은 최소 수강 인원부터 채워야겠네."
다섯 명.
대충 숫자만 채워서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이왕 하는 것, 자신이 원하는 인재들로 수강생을 채울 생각이었다.
백수룡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다음 날 아침, 백수룡은 당소소에게 의뢰한 명단을 건네받았다.
거기에는 세 명의 이름과 백수룡에게 필요한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106화. 알긴 알죠"그렇게 됐어."
"휴...."
관주와의 면담을 다녀온 백수룡이 이야기를 끝내자, 그를 둘러싼 임시 강사 삼인방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잘 해결된 거네요."
"잘 해결돼요? 제가 보기엔 일이 더 커진 것 같은데요."
악연호의 태평한 말에 제갈소영이 큰 눈을 끔벅거렸다.
악연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일단 안 잘렸으면 된 거 아니에요? 그리고 풍진호도 한동안 허튼수작은 못 부릴 거라면서요?"
"대놓고는 못 하겠지만... 분명 물밑에서는 뭔가 손을 쓸 거야.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거든."
명일오는 풍진호가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수룡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자자,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다들 마음껏 마셔."
그의 말에 세 사람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백수룡을 바라봤다.
"술도 아니고 차 한 잔 사 주면서 생색은...."
네 사람이 모인 곳은 강사 휴게실.
점심을 먹고 잠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두 분 일로 요즘 학관 분위기가 얼마나 싸늘한지 몰라요. 다른 선생님들도 그렇고...."
제갈소영이 작은 몸을 움츠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일부 강사들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저희도 찍힌 것 같아요."
악연호. 명일오. 제갈소영.
점심을 함께 먹고 퇴근 후에도 자주 모이다 보니, 세 사람은 다른 강사들에게 '백수룡 파벌'이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 탓에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강사들은 거의 없었다.
"솔직히 여기 두 사람이야 걱정 없죠."
찻잔을 든 명일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갈세가의 딸인 제갈소영.
산동악가의 아들인 악연호.
오대세가와 그에 필적한 가문의 자식들에게 감히 누가 텃세를 부리고 시비를 걸겠는가.
'하지만 나는 사정이 달라....'
어정쩡한 가문 출신인 명일오만 만만한 상대였다.
그래서인지 남궁수 파벌의 강사들은 종종 그에게 와서 시비를 걸고, 비웃고, 임시 강사라는 이유로 아랫사람처럼 부려먹었다.
백수룡은 표정이 어두운 명일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오야. 걱정 마라. 풍진호 주변의 썩은 놈들 다 쫓아내면 우리가 한 자리씩 차지할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 백수룡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명일오는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아까부터 뭘 읽고 계신 겁니까?"
명일오는 백수룡이 들고 있는 꽤 두꺼운 서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별건 아니고."
백수룡은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다들 궁금했는지 얼굴들이 가운데로 모였다.
"내 수업에서 가르칠 녀석들. 걔들에 관한 정보를 의뢰했거든."
네 사람이 함께 명단을 구경했다.
명단에는 총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악연호가 한 명의 이름을 손으로 찍으며 물었다.
"야수혁?"
"올해 들어온 일학년. 흑곰처럼 생긴 녀석인데 기억 안 나?"
"아! 기억나요. 덩치가 진짜 산만 하던...."
악연호가 기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시험에서 학생회 선배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야수혁이 모두에게 남긴 인상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제대로 가르치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거야. 특히 외공 쪽은 타고났어."
백수룡의 말에 동의하는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수혁 외에도 두 명의 이름이 더 적혀 있었다.
제갈소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거상웅? 여민? 이 둘은 누군가요? 여기 적혀 있는 걸 보면 뛰어난 학생들일 것 같은데...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사학년 거상웅.
이학년 여민.
백수룡은 두 이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보충반에 있는 녀석들이야. 둘 다 얼마 전에 학관으로 돌아왔다더라고."
보충학습반.
학년별로 학습 능력, 수업 태도 등에 문제가 있는 청룡학관의 문제아들을 모아 둔 반으로, 정규 수업이 끝난 후 함께 모여 부족한 공부를 하는 모임이었다.
"삼학년 대표 문제아가 헌원강이었다면, 이학년과 사학년은 이 두 녀석이지."
백수룡이 간단히 예시를 들어주자 세 사람은 혀를 찼다.
"헌원강 같은 애들이 둘이나 더...."
"둘 다 성격이 보통이 아니겠는데요."
지금까지 어떤 강사도 청룡학관의 저 문제아들을 감당하지 못해 담당을 그만두었고, 결국 보충반 자체가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다.
지난 방학 동안에는 아예 운영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백수룡이 새로운 담당이 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어차피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텐데. 아예 내 수업도 같이 듣게 하려고."
백수룡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하는 순간, 세 사람은 얼굴도 모르는 두 학생에게 애도를 보냈다.
'힘내라, 얘들아....'
'자퇴만은 하지 않아야 할 텐데....'
'괜찮...겠지?'
당소소에게 건네받은 서류에는 두 문제아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가 꽤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
그중 특이사항 부분에 적힌 내용을 본 제갈소영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박 중독? 폭식증? 도벽?"
십 대 소년소녀들에게서는 웬만해서 연관 짓기 힘든 단어가 연달아 적혀 있었다.
백수룡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아들인데 이 정도야 기본이지."
살인, 방화, 고문을 일삼던 혈교의 후기지수들을 보았던 백수룡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세 사람에겐 아니었다.
"당신, 기본의 기준이...."
"도박이랑 도벽은 학관에서 알면 최소 퇴학감 아니에요?"
"...셋 중에 헌원강이 제일 착한 애였구나."
다들 황당해서 한마디씩 했다
백수룡은 더 이상 그들이 보지 못하도록 서류를 덮었다.
탁.
"어쨌든, 여기 있는 세 명을 더해서 최소 수강 인원을 채울 거야."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백수룡이 처음으로 맡은 강의다.
단지 숫자를 채우기 위해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아서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최소한 여기 명단에 있는 이름 중 절반은 데려와서 가르칠 생각이었다.
'한 명 한 명 어떻게 꼬실지 계획도 세워 놨고.'
당소소에게 건네받은 정보가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을 확인한 백수룡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점심시간도 끝났는데 슬슬 일어나자."
"하아. 일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
"엄마 보고 싶어...."
네 사람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휴게실에서 나와 각자 일하는 곳으로 복귀하려는데, 명일오가 백수룡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
"저, 형님."
"왜?"
"...맡으신 강의 말입니다. 보조 강사는 아직 결정 안 하신 겁니까?"
"아. 그거."
청룡학관의 강의는 보통 한두 명 정도의 보조 강사를 둔다.
그리고 대부분 그 보조 강사로는 아직 담당 강의가 없는 임시 강사, 혹은 청룡학관 3~4학년이 맡는 게 일반적이었다.
간혹 외부에서 데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맡겨만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명일오의 간절한 눈빛을 본 백수룡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백수룡이 생각하는 강의에는 더 적합한 사람이 있었다.
"미안하다. 이미 생각해 둔 사람이 있어서 어렵겠다."
"...아, 그렇습니까."
명일오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금세 밝아졌다.
"괜찮습니다. 형님도 첫 강의인데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랑 하셔야죠."
"이해해 줘서 고맙다. 조만간 술이나 한잔할까?"
"하하. 좋죠."
조금 민망했는지 명일오가 대화 주제를 빠르게 돌렸다.
"그런데 그 명단에서 누구부터 데려오시려고요? 만만해 보이는 이름이 한 명도 없던데."
그 질문에 백수룡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만만한 녀석이 왜 없어? 명단에는 없지만 내 수업을 들어야 할 녀석이 한 명 더 있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 이름이 없었네요."
누군지 짐작이 간다는 듯 명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청룡학관 교무처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모양새가 조금 특이했다.
"아, 아아! 귀 잡지 마요! 내 발로 간다니까...!"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빨리 안 와?"
백수룡이 먼저 들어오고, 백수룡에게 구레나룻을 잡힌 헌원강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왔다.
"아! 아프다니까! 도망가긴 누가 도망을 간다고 그래. 끝나고 수강 신청하러 오려고 했다니까...."
헌원강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지만, 백수룡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변명이었다.
"이게 어디서 구라를. 살금살금 도망 다니면서 수강 신청 기간 끝날 때까지 버티려고 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니 그게...."
정곡을 찌르는 말에 헌원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백룡장에서 맨날 구르는데 학관에서까지 구르라고?'
속마음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오늘 저녁에 일어날 일이 두려웠기에, 헌원강은 입만 뻐끔거렸다.
백수룡이 그의 구레나룻을 냅다 잡아당겨서 수강 신청처로 향했다.
"네가 그럼 그렇지."
"악! 아프다니까!"
"사파 무공의 이해와 실전 대비 강의에 신청하러 왔습니다."
신청서는 백수룡이 대부분 작성하고, 헌원강은 거기에 지장만 찍게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헌원강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신청서를 바라봤다.
"젠장.... 내 인생이 이렇게...."
"누가 보면 고리대금업자한테 돈이라도 빌리는 줄 알겠다? 빨리 지장 안 찍어? 콱 그냥."
수강 신청을 하러 온 다른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가, 헌원강이 홱 노려보자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웃어? 선배가 웃겨?"
후배들에게 인상을 쓴 헌원강이 고개를 돌려 백수룡을 바라봤다.
"선생님. 저도 삼학년인데 애들 앞에서 체면은 좀 세워 주십쇼. 예?"
...라고 분위기를 잡아 봤지만 백수룡 앞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빠악!
헌원강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친 백수룡이 말했다.
"체면 좋아하는 놈이 지금까지 망나니로 살았냐?"
"끄응...."
헌원강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강 신청을 끝낸 두 사람은 곧바로 교무처에서 나왔다.
백수룡이 헌원강과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너 근데 거상웅이랑 친하냐?"
"상웅 선배요? 예전에 좀 어울리긴 했는데..., 친하지는 않아요."
친하지 않다는 말에 백수룡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같은 망나니인데 왜 안 친해?"
"...그 선배는 이학년 때까지만 해도 성실했어요. 지금은 좀... 사람이 이상해져서 그렇지."
이상해졌다는 말에 묘한 느낌이 있었지만, 백수룡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직접 보면서 확인하는 편이 오해가 적을 테니까.
"그런데 거상웅 선배는 왜요?"
"아까 기숙사에 찾아가 봤는데 방에 없더라고."
헌원강은 시간을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
"그 선배 지금쯤이면... 도박장에 있을 거 같은데."
백수룡은 그의 특이사항에 적혀 있던 '도박 중독', 그리고 '폭식증'을 떠올렸다.
당소소가 건네준 서류에는 거상웅에 관한 여러 정보가 있었지만, 백수룡은 단순히 그것만 믿지는 않았다.
'어떤 녀석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해야지.'
백수룡은 헌원강의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르며 말했다.
"거상웅이 있을 거라는 도박장으로 안내해라. 망나니."
"이제 망나니 아니라고...."
"그래서 어딘지 몰라?"
"...알긴 알죠."
헌원강은 꿍얼거리면서도, 자주 가본 길인 듯 익숙하게 도박장으로 백수룡을 안내했다.##107화. 거기까지"그하하하!"
호탕한 웃음이 객잔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조금 전 웃음을 터트린 목소리가 이번에는 나직하게 말했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되나?"
낮고 묵직한 저음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면 그 목소리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내는 연신 끙끙거렸다.
"끄윽...!"
사내는 꿈쩍도 안 하는 거대한 손을 붙잡고 어떻게든 넘기려 용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거상웅의 통나무 같은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흐암. 재미없네."
하품을 내쉰 거상웅이 가볍게 팔을 넘겼다.
콰앙!
두 사람이 앉은 탁자가 부서질 듯 출렁였다.
몸이 잠시 허공으로 떴다가 내려온 사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악! 뼈, 뼈가 부러졌...."
"엄살 부리지 마. 근육이 조금 놀란 것뿐이니까."
거상웅이 손을 휘휘 젓자, 구경하고 있던 사내들이 사내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닌 것처럼 익숙했다.
거상웅은 옆에 산처럼 쌓여있는 고기를 집어 먹은 다음, 으적으적 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또 없어? 내 손가락 하나만 꺾으면 은자 열 냥인데?"
거상웅은 남들의 세 배는 될 법한 두께의 검지를 까닥거렸다.
방금, 그는 손가락 하나만으로 팔씨름을 했다.
"고작해야 손가락 하나뿐인데? 사내구실 하는 놈이 이렇게 없나. 쯧쯧."
혀를 차며 하는 말에 몇 사내들이 발끈했지만, 끝내 나서는 이는 없었다.
거상웅과 팔씨름 대결을 해서 바닥을 구른 사내가 벌써 열을 넘었으니까.
인근에서 힘 좀 쓴다 하는 사내들이 저 손가락 하나를 꺾지 못했다.
"괴물 같은 놈...."
"손가락 하나로 삼십 명을 연달아 꺾는다고?"
"저 자식은 곰이랑 팔씨름을 해도 이길 놈이야."
다들 웅성거리며 경이로운 표정으로 거상웅을 바라봤다.
남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키에, 수백 근은 가뿐히 넘을 법한 어마어마한 살집.
하지만 출렁이는 살덩어리로 보이는 몸을 실제로 만져 보면 얼마나 단단한지, 칼로 찔러도 들어가기나 할까 싶을 정도였다.
"더 덤빌 사람 없어? 없나 보군. 어이 점소이! 여기 고기 좀 더 줘!"
거상웅은 탁자 옆에 쌓인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방금까지 내공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근력으로만 수십 명을 꺾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봐 상웅이."
"음? 양 선배."
예전부터 거상웅과 알고 지낸 염소수염의 사내가 다가와 반대편에 앉았다.
"요즘 도박장엔 왜 이렇게 뜸해? 종일 객잔에서 먹고 내기 팔씨름이나 하고 말이야."
거상웅은 입안의 고기를 우적우적 씹으며 대답했다.
"웬만한 도박은 이제 시시해졌든. 가끔은 이렇게 단순한 내기가 재미있어."
"이런 팔씨름이 무슨 내기야. 자네가 무조건 이기는데."
"혹시 알아? 날 이길 사람이 나타날지."
히죽 웃은 거상웅은 염소수염의 사내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도박장은 심심해지면 갈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밥 먹어야 하니까 가 봐."
거상웅이 자주 가는 도박장은 길 반대편에 있었다.
술을 한 병 시킨 염소수염의 사내는 술병을 탁자에 올려놓고 일어났다.
"여기서 괜한 짓 그만해, 같이 도박이나 하자고. 자네가 없으니 다들 재미없다고 난리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 봐."
그렇게 염소수염의 사내마저 떠나고, 거상웅이 다시 눈앞에 쌓인 음식에 집중할 때였다.
"이봐."
"...또 뭐야?"
거상웅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거상웅의 몸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신한테 팔씨름을 이기면 은자 열 냥을 준다던데."
"...호오."
흔치 않은 경험에 거상웅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에 못지않은 거구의 청년, 아니 소년이 더 어울릴 법한 앳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키가 나랑 비슷해 보이는데?"
드르륵.
거상웅은 의자를 뒤로 밀며 몸을 일으켰다.
곰처럼 커다란 두 사내가 당당히 마주 보며 서자, 주변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거상웅이 웃으며 물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름이?"
"야수혁."
짧게 대답한 야수혁은 거치적거리는 장포를 벗었다. 그러자 우람한 팔과 전신의 근육이 드러났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어마어마한 근육질 몸.
상대를 가늠해본 거상웅이 솔직하게 말하며 웃었다.
"이거, 손가락 하나로 했다간 내가 지겠는걸."
돈이 아까워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정도 되는 상대를 손가락 하나로만 상대하는 게 아쉬웠을 뿐이다.
다행히 야수혁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도 멀쩡한 손가락 부러뜨려서 병신으로 만들긴 싫고."
털썩.
야수혁은 먼저 자리에 앉더니, 허리춤의 전낭을 탁자에 통째로 올리고는 씩 웃었다.
"제대로 해 보자고. 대신 내가 이기면 은자 백 냥을 주는 건 어때? 난 여기 내 전 재산을 걸지."
"뭐? 그하하하! 좋지! 좋아!"
껄껄 웃은 거상웅이 자리에 앉았다.
두 거구의 사내가 탁자에 꽉 차도록 마주 앉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꽈악....
두 사람이 손바닥을 맞잡으며 서로의 힘을 가늠하는 가운데, 주변의 구경꾼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작할까?"
"...해 보자고."
제삼자의 시작하라는 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둘이 동시에 힘을 준 순간, 팔꿈치를 댄 탁자가 쩌저적...! 하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큽...!"
"끅...!"
두 사람의 팔 근육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핏줄이 불거졌다.
목에 핏대가 서고, 숨을 참은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를 꽉 악문 두 사람의 팔, 상체, 전선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르르르...!
두 사람이 발을 디딘 바닥이 흔들리고, 탁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결국.
쩌저저적- 우지직!
탁자가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두 사내는 동시에 팔을 풀었다.
"후우.... 후우...."
"하아.... 하아...."
두 사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서로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봤다.
먼저 호흡을 정리하고 말을 꺼낸 것은 거상웅이었다.
"무승부로 하지."
그러나 야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가 오기 전에 이미 수십 명을 이겼다고 들었어. 그러니 이건 내가 진 거야."
야수혁은 바닥에 떨어진 전낭을 주워 거상웅에게 건넸다.
거상웅은 전낭을 받아들면서도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수십 명이라고 해 봤자 간에 기별도 안 갔는데."
"상관없어. 내가 졌다고 느꼈으니 진 거야. 빌어먹을!"
야수혁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분했는지 연신 씩씩댔다.
거상웅은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조금은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예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군.'
야수혁에게서 건네받은 전낭을 열자, 다 해도 은자 한 냥조차 안 될 구리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거상웅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하하! 묵직한 줄 알았더니 빈털터리였군. 이거 한 방 먹었... 음? 청룡학관 학생이었나?"
전낭 안에 청룡패가 들어 있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상태를 보니 완전히 새것이었다.
히죽 웃은 거상웅이 청룡패를 꺼내 야수혁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거, 후배였구만."
"...당신도 청룡학관 학생이야?"
"내 청룡패를 보여 주면 선배라고 부를 거냐?"
"생각 좀 해 보고."
야수혁은 말없이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거상웅은 그것마저 마음에 드는지 그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벽으로 날아갈 힘이었지만 야수혁은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봐 후배. 고기 좋아하나?"
"당연히 좋아하지."
"그럼...."
사 줄까?
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놈의 입이 멋대로 말을 바꿨다.
"이번엔 누가 더 고기를 많이 먹는지 내기할까?"
"난 이제 한 푼도 없어."
거상웅은 돈 말고 다른 걸 걸어도 된다며 이렇게 제안했다.
"지는 쪽이 사흘간 이긴 사람 몸종이 되어 주는 건 어때?"
"...후회할 텐데?"
야수혁도 어디 가서 먹는 것으로 져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팔씨름으로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그의 승부욕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두 사람의 두 번째 내기가 성립되었다.
거상웅이 큰 소리로 점소이를 불렀다.
"이봐, 점소이! 여기 돼지 두 마리만 가져와!"
잠시 후,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각자 돼지 통구이를 한 마리씩 뜯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