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GADORDECLASEFDENIVELMAXI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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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제1화

1화

1월의 극도로 더운 날, 고기 타는 냄새로 가득 찬 공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니, 이 일을 설명하려면 조금, 아주 약간 되돌아가야겠군.

* * *

빌라의 계단을 밟자 딱딱, 신발 소리가 울렸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몸이 무거웠다.

"망할 야근."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2층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열었다.

좁은 신발장에는 슬리퍼 한 쌍이 끝.

그조차 근처 편의점을 다니기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의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혼자 사는 집이니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에서 밝은 빛이 찌지직거렸다.

불이 켜지나 싶더니,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

"내일, 내일 고치자...."

무거운 숨을 내쉰 다음 터덜터덜 욕실로 들어갔다.

몇 분 뒤, 잠옷 차림으로 나와서는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작은 냉장고를 열자 찬 공기와 함께 푸르스름한 빛이 얼굴을 뒤덮는다.

-우웅.

휴대폰 알람음이 근육을 긴장시켰다.

서둘러 콜라 캔을 꺼낸 뒤 몸을 돌렸다.

"이 시간에?"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휴대폰을 뒤집자 '11:47'이라는 선명한 숫자가 보였다.

이런 늦은 밤에 대체 누굴까 싶었는데, 문자 내용을 보자마자 그런 궁금증 따윈 방치해 둔 콜라의 탄산처럼 날아가 버렸다.

「일한 씨, 오늘 자료 내일까지 정리해서 보내 줘.」

정말이지.

소름 돋을 정도로 간결하고, 기분 나쁠 정도로 직설적이다.

'내일은, 1월 1일 정도는 쉬게 해 달라고.'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해 봤자 부장의 대답 같은 건 돌아오지 않는다.

쏟아지는 일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린 걸까 생각하면서도, 컴퓨터 앞에 있는 의자에 몸을 날렸다.

"후우."

일한이 몸에서 힘을 빼자 의자의 등받이가 끼익 밀렸다.

어깨를 살짝 돌리니 우드득, 하고 큰 소리가 났다.

회사에서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탓에 일한의 어깨는 항상 뭉쳐 있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등도, 허리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부장이 잔업무를 모두 넘겨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바르지 않은 자세 때문에 어깨가 좁아졌고, 그리될수록 입고 있는 옷이 괜스레 커 보였다.

스트레스와 피로로 인해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았다.

머리카락은 아무리 린스를 처발라도 푸석푸석할 뿐이다.

얼굴은, 한마디로 까칠해 보인다.

뾰족한 눈매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수험생을 연상케 했다.

건강했던 어린 시절과 변하지 않은 게 있을까?

아, 있다.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왼팔의 화상 자국. 다른 하나는 오른쪽 눈 아래의 얇고 긴 흉터.

이것들을 제외하면 모든 게 변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머리카락, 언제 자르지."

눈가를 가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옆으로 휙 넘기는 일한.

점심시간에 부장에게 맞은 정수리가 아프다.

별것도 아닌 일로 매일같이 때리니, 언젠가 사람도 죽일까 봐 겁난다.

'성격은 더러워 가지고.'

컴퓨터가 켜지기를 기다리며 콜라 캔을 땄다.

-치익.

탄산 빠지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올라왔다가 스르륵 내려갔다.

일 때문에 쌓인 피곤함도 그 거품처럼 사라졌으면 좋겠건만, 그럴 일이 있을 리가.

휴일인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일이 반복될 뿐이다.

그런 반복적인 일상이다.

일한은 콜라를 들이켠 뒤 뺨을 두어 번 때렸다.

그렇게 피로를 날리고는 컴퓨터 화면의 구석에 있는 아이콘에 시선을 보냈다.

그것의 바로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엘리멘트'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일한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그 아이콘을 클릭했고, 커다란 화면은 잠시 검은색으로 물들더니 이내 붉은 세상을 띄웠다.

붉은 세상, 이랄까. 그것은 마그마와 불기둥이 가득한 세계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접속은 해야지."

목을 기울이자 으득, 하고 뼈 소리가 났다.

"일 같은 건 잊어버리고, 오늘도 가 볼까."

엘리멘트.

네 명의 용사가 일궈 낸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설정의 게임.

여섯 개의 개성 있는 월드와 높은 자유도가 특징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임이기도 하다.

아니, 이제는 '유명했었다'라고 하는 게 맞겠지.

결제 시스템을 도입한 후로 돈에 미친 게임이 되었으니까.

아이템 풀강화나 사역마 계약에 몇천, 몇억이 무슨 말인가?

실로 어이없는 일이다.

이런 급격히 도입된 엉망진창의 시스템들 때문에 절반 이상의 유저가 게임을 접었다.

한때는 각종 SNS에서 계정 삭제 챌린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나도 그때 지워 버릴까 싶었지.'

하지만 게임이 오픈할 때부터 해 왔다는 사실과, 플레이하다 보면 풍겨 오는 기묘한 정취가 마음을 붙잡았다.

때문에 접을 수가 없었다.

일한의 생활에는 일과 게임뿐이었다. 무려 14년 동안.

방대한 세계를 몇 번이나 돌아다녔다.

모래 설원 끝자락에 있는 특이한 던전부터 멸망한 불의 마을까지,

안 가 본 곳이 없다.

게임의 메인 콘텐츠는 '길드'에 치중되어 있기에 일한처럼 월드를 탐험하는 유저는 그리 많지 않다.

'솔직히, 나만큼 구석구석까지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1년 전에 업데이트된 새로운 맵까지 정복했다.

'제일 어려운 맵이었지.'

일명 '지옥'.

마그마와 화염뿐인 데다 워낙 위험한 몬스터가 많아서 방문하는 유저가 가장 적은 곳.

하지만 일한은 매일같이 그곳에 들른다.

"여기 오는 게 유일한 낙이니까."

한창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나타난 큐브 모양의 검은 구조물.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새하얀 불꽃이 가득한 방의 중앙에는 원형 테이블이 있었다.

다양한 과자가 시선을 끌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오늘도 수고했어.」

의자에 앉아 있는 NPC.

그녀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일한은 이에 화답하듯 키보드를 두드렸다.

「안녕.」

「응, 안녕.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

지옥의 단 하나뿐인 NPC. 그게 바로 솔라다.

검은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들.

가슴께로 흘러내리는 상아색 머리카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거대한 맵에 NPC가 단 하나라니.

'정보가 공개됐을 때는 엄청난 주목을 받았지.'

한데, 막상 솔라를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찾기도 힘든 NPC의 대사는 '오늘도 수고했어', 이 하나가 전부였으니까.

그게 끝이다. 아무런 이벤트도 없고 다른 대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유저들은 솔라가 같은 말만 반복하자, 흥미를 잃고 더 이상 그녀를 찾지 않았다.

'확실히 좀 싱겁긴 해.'

그렇지 않은가?

몇 시간이나 들여서 만난 캐릭터가 한마디밖에 할 수 없다니, 가히 실망스러울 거다.

다만 일한에게는 그 한마디가, '오늘도 수고했어'라는 말이 너무나 따뜻하게 다가왔다.

퇴근 후에 그 대사를 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늘도 일 때문에 힘든가 보구나?」

조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뭐, 그렇지.」

그녀가 진짜 사람처럼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솔라, 너는 오늘 어땠는데?」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 종일 여기에 있었지. 여기 오는 사람은 너밖에 없는걸.」

일한은 멋쩍게 웃었다. 이 캐릭터를 찾아올 괴짜는 자기밖에 없다는 걸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괴짜? 아니, 이젠 아니지.'

진짜 사람처럼 말을 하고, 하소연을 들어 주고, 위로해 주는 NPC는 누구든지 찾고 싶어 할 거다.

「세상은 재밌어?」

솔라의 물음에 일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갑자기?'

당황하는 것도 잠시. 작은 웃음을 흘렸다.

「재미없어. 매일매일 반복되는 세상보다는 이 게임 속이 훨씬 좋은걸.」

화면 속 솔라는 「그렇구나.」라고 말하더니 몇 번인가 끄덕거렸다.

'이러는 건 또 처음이네.'

의아한 것도 잠시,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컴퓨터 하단으로 시선을 옮기니 숫자의 행렬이 보였다.

오전 12:32

01-01

이룰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던 1년이 이렇게 지나갔다.

'올해도 일만 하겠지.'

잡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며 멍하니 솔라를 보고 있다가, 남은 콜라를 모두 들이켰다.

"더 이상 눈뜨고 못 있겠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무겁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슬슬 자러 갈게.」

「응, 바이바이.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게임 종료.

홀린 듯 양치질을 한 일한은 녹은 버터처럼 침대에 스며들었다.

"으으, 추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그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그렇게 눕고 나서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찝찝함.

이유는 모르겠지만 끈적이는 껌이라도 밟은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빠져나왔다.

손을 더듬거려 보았지만 전신을 덮고 있던 이불은 만져지지 않았다.

"더워...."

갈라지다 못해 쉬어 버린 듯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목덜미에 맺힌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 잠옷에 스며들었다.

"난방을 너무 세게 틀었나."

전기세 걱정을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응?"

무거웠던 눈꺼풀이 한껏 가벼워지며 눈이 크게 뜨였다.

온갖 메시지부터 재난 문자까지,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쌓여 있었다.

절친이자 직장 동료인 김 대리가 몇 분 전에 보낸 메시지.

「야어디냐」

급하게 보낸 건지 띄어쓰기도 하지 않았다.

일한은 갸웃하면서도 먼저 재난 문자를 클릭했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신속히 대피하라는 내용이었는데,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디로 대피해야 하는지 쓰여 있지는 않았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난 거야?"

메시지 한 통으로는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김 대리라면 무슨 일인지 알고 있을까 싶어서 그에게 답장하려던 찰나.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

수신자를 본 일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얘가 갑자기 웬일이래?'

앨리스 아리아나.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던 미국인 친구였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국에, 아니 전 세계에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이.

김 대리를 까맣게 잊은 채 앨리스가 보낸 것을 확인했다.

「여러 나라에서 기괴한 구조물이 등장....

심지어는 화염이나 얼음, 물 등으로 뒤덮인 곳도....」

영문 모를 장문의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이 와 있었다.

「Can you see this, too?

(너도 이거 보여?)」

허공에 떠 있는 반투명한 홀로그램 창.

익숙한, 무서울 정도로 익숙한 것이었다.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어떻게 봐도 엘리멘트의 상태 창이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실이 게임으로 변했다는 거야?"

아니면 엘리멘트가 대규모 이벤트라도 진행하는 걸까?

'일단 침착하자.'

당황한 채로 뭘 하겠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흐트러진 호흡을 골랐다.

그런데 진정하려고 하면 진정할수록 점점 더워졌다.

"후, 일단 창문 좀 열까."

그리 중얼거리며 커튼을 걷었을 때.

몸이 조각상처럼 굳었다.

"어?"

눈앞의 광경에 피로 따윈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잠잠했던 심장이 과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전신으로 피를 보냈다.

"미친."

일한은 차가워진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나, 눈앞의 광경은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는 가냘픈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창문에 너머로 일그러진 세계가 비친다.

아니지, 그 광경을 일그러졌다는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지옥...."

가장 어울리는 말을 찾아냈으리라 장담한다.

하얀색으로 뒤덮인 머릿속에는 '지옥'이라는 단어만이 붉게 떠올랐다.

길거리를 뒤덮은 마그마와 불기둥으로 변해 버린 빌딩들.

그저, 그뿐이었다. 1월 1일. 회사를 쉬는 빨간날에, 눈앞의 광경이 붉게 물들었다.

심장이 뛴다.

"하아... 하아...."

호흡이 거칠어진다.

일한은 이를 꽉 깨물었다.

"진정해!"

떨리는 팔을 다른 한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아무리 봐도 엘리멘트야.'

세상이 게임에 뒤덮이고 있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도달하는 결론은 같았다.

창밖으로 익숙한 구조물들이 보였다. 솔라를 만나러 갈 때마다 봤던 구조물들이다. 이곳은 지옥.

극악의 난도를 가진 맵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더럽게 익숙한 곳이지."

왜일까. 어처구니없는 상황임이 분명한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분명 몬스터도 있을 거야.'

엘리멘트 세계관 속에는 몬스터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지옥'에도 하나 있는데, 바로──.

"솔라의 방."

공식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괴물이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분명 못 들어가는 거다.

일한은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여기서 멀진 않은 것 같아.'

솔라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자비를 결코 확신할 순 없거니와 NPC가 구현되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렇다 한들, 집에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 보자."

창밖으로 화염이 일렁인다.

"갈... 수 있나?"

그때.

-화아악!

불길이 치솟으며 빌라 전체를 덮었다.

"젠장!"

큰일이다. 나갈 길이 막혀 버렸다.

'2층보다 더 높은 곳에서 살았어야 했나?'

불길은 벽을 태우며 서서히 다가왔고, 그럴수록 머릿속은 실없는 생각으로 차올랐다.

불똥이 튀며 옷에 작은 구멍이 났다.

"이대로 타 죽는 건 썩 유쾌하지 않은데."

힘없는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을 때였다.

-띠링.

고요 속에서 울린 알람음.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바라보았으나 검은 화면 그대로다.

애초에 소리의 출처는 불 속에서 깨져 버린 휴대폰이 아니었다.

그 청량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조금 더 위쪽.

일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유일한-

레벨: 300

직업: 없음

스킬: 화염 내성(Lv. Max)

고유스킬: 없음

소속 길드: 코퀴토스」

직접 보니 알겠다. 엘리멘트의 상태 창이 확실하다.

게임 속과 조금 다른 점은 이름. 닉네임은 온데간데없고 실명이 쓰여 있다.

"레벨을 보면 게임 계정 그대로인가."

어느새 불길이 발치를 메웠지만 더 이상 뜨겁지 않았다. 식어 가는 핫팩처럼 미지근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심지어 입고 있는 옷에도 불이 붙지 않았다.

'화염 내성'이라는 글씨에 시선을 고정했다.

'불에 타 죽을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겠네.'

밀려오는 안도감을 억지로 밀어냈다. 안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야 밖에는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후우."

숨을 크게 내뱉은 뒤, 방에서 빠져나왔다.

아슬아슬 무너져 가는 계단을 밟고 1층으로 내려온 그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달렸다.

몇십, 몇백 번이나 봐 온 것들.

최단 거리는 물론이요, 괴물이 가장 적은 길까지 꿰고 있는 건 당연하다.

일한은 익숙한 구조물들을 이정표 삼아 솔라의 방이 있을 검은 벽을 찾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에서 번개인지 뭔지 모를 빛이 번쩍거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평범한 도시의 모습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지옥'은 게임 속 형태를 세세하게 갖추어 갔다.

"저건...."

경악했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괴물들이 보였으니까.

분명 있을 거라고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인간처럼 생긴 것들부터 각종 짐승을 닮은 것들.

게임 속에서 봤을 때는 그저 시스템 덩어리에 불과하던 것들이 일렁이는 화염을 두르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잔인한 사실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주치면 안 돼.'

지금 보이는 건 멀리에 있는 것들뿐이지만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야 몬스터가 가장 많은 맵이 이곳, 지옥이니까.

어디 녀석들뿐인가?

곳곳에 위험천만한 것들이 널려 있다.

'이 앞에 함정이 있었지.'

일한이 높이 점프하자 바닥이 꺼지며 마그마 구덩이가 나타났다.

'조금 더 가면 함정 두 개 더. 그다음이 도착이다.'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계속 달린다.

매일 화면 속에서 마주치는 함정을 피하고, 달리고, 피하고, 달리고.

"됐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저 멀리 검은색 구조물이 흘끔 보인다.

전신의 모든 힘을 끌어모아서 땅을 밟았다.

그렇게 3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도착했다.

달려오는 와중에 괴물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정말이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한은 심장에 손을 얹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되었을 때쯤, 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들어갈 수 있어!'

아무런 소리 없이 활짝 열린 문.

"응?"

방의 내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불꽃은 흔적조차 없었으며 원형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니까.

한 발짝 내디디자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벽도, 천장도, 바닥도 온통 새카만 공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어둡지 않다.

일한의 입술이 떨렸다.

그저 현재의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고, 믿기지 않았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점들이 던져 놓은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엉켜 버린 것이다.

'하지만.'

해야 할 건 분명했다. 무엇보다 살아야 했고, 살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곳에 온 거다.

솔라의 방에 말이다.

그런데.

"솔라?"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나 이곳에 있는 그녀가 없다.

'NPC는 구현되지 않는 건가?'

몬스터와 함정도 있는데 NPC가 없다니. 그럴 리가 없다.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의식중에 그리 간청하던 일한은 테이블 위의 무언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편지?"

평소라면 다과로 가득 차 있을 테이블에는 흰색 편지 봉투 하나가 휑하니 놓여 있었다.

진한 검은색으로 쓰여 있는 글씨를 눈으로 훑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에게, 솔라가.]

짧고 간결하지만, 자기 전에 봤던 부장님의 문자보다는 와닿는 글이었다.

'친구'라는 애매모호한 말이 쓰여 있으나, 그 단어가 칭하는 건 분명 유일한이다.

이 장소에 오는 사람은 그밖에 없으니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는 사실 아닌가.

조급한 마음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레 편지를 뜯었다.

"열쇠...."

일한은 그것을 꺼낸 뒤,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끝이야?"

별다른 설명도, 물건도 없었다. 그저 쇳덩이 한 개. 그게 끝이었다.

시선을 옮겨 열쇠를 뚫어져라 보았다.

철로 된 물건이었는데, 얼마나 오래된 건지 표면이 꺼끌꺼끌해진 것도 모자라 군데군데가 깨져 있었다.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열쇠였다.

혹시 테이블 아래 상자 같은 게 있을까 싶어 허리를 숙였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약간의 당혹함을 느끼며 편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던 찰나.

-화륵!

"응?"

새하얀 불길이 편지 봉투를 비롯해서 일한의 팔을, 몸을, 전신을 뒤덮었다.

"으아아악!!!!"

뜨겁다.

미친 듯이 뜨겁다.

화염 내성이 있을 텐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파.

죽을 만큼 아프다.

함정? 모르겠다. 게임 속에는 이런 시스템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으윽!"

비틀거리던 일한은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일렁이는 불꽃. 마치 악마가 비웃는 것만 같은 광경이다.

숨이 쉬어지질 않는다.

바닥을 구른다. 구르고, 구르고, 구르지만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그 크기를 키웠다.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

고통이 줄어든다.

"...."

1월의 극도로 더운 날, 고기 타는 냄새로 가득 찬 공간에서 그는.

유일한은 불탔다.

소사(燒死)했다.

제2화

2화

[플레이어가 사망했습니다.]

[영혼이 소멸합니다.]

[플레이어 데이터가 삭제됩니다.]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부유감.

어디인지 모를 장소에서, 눈앞에 나타난 문장들은 정신을 더욱 아릿하게 만들었다.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11% 완료.]

육체적 감각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흐릿한 광경이 보일 뿐이다.

이런 게 죽음인 걸까.

허전하게도 주마등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기억이 몽땅 날아가 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어 보자. 아직은 삶의 잔향을 즐길 수 있을 때 아닌가.

죽음에 도달하기 전까지 약간의 유예가 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데이터 다운로드 중. 12% 완료.]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기억의 시작 부분.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 하면 유치원 때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대부분'의 경우이고, 일한은 조금 다르다.

첫 기억은 장엄하고도 공포스러운 화염 속.

누군가의 등에 업혀 그곳을 빠져나간 게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소방관에게 들은 이야기로 짐작하건대 끔찍한 상황에 놓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에 불이 났다는 것.

여러 이유로 화재 진압이 늦어졌다는 것.

가족 중에 다른 생존자는 없다는 것.

그 외에도 자잘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지만 머릿속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야 집이라는 것도, 가족이라는 것도 기억에 없었으니까.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39%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38% 완료.]

병원으로 이송된 다음 날 들은 바로는 기억상실증인 모양이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산화탄소 중독과, 무너지는 잔해에 의해 뇌에 물리적 타격을 받은 게 가장 큰 이유랬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는 집도, 가족도, 기억조차도 하루아침에 모두 잃은 것이다.

며칠간 병원 침대에서 울었던 것은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빈 머릿속의 허전함이 영혼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소방관 한 명이 과자를 한가득 사 왔다. 화재 당시 구해 줬던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던 것 같은데 기억은 안 난다.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50%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50% 완료.]

며칠이나 지났을까. 한 부부가 찾아왔다.

여자도 남자도 30대 중 후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옷과 눈부신 장신구에 압도당한 채로 이야기를 들었다.

자기들을 이모와 이모부라고 소개한 그들은, 괜찮다면 함께 살자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터라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나름대로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 부부.

이모와 이모부는 친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 주었고, 그런 그들의 행동 덕에 화재의 충격도 조금씩 지워 가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두 사람의 일 때문에 미국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에서 조금 특이하지만 좋은 친구를 한 명 사귀었다. 앨리스 아리아나. 그 녀석이랑 엘리멘트를 같이 시작했었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17살이 된 직후였다.

이모와 이모부는 일 때문에 워낙 바빴다. 함께 있지 못한다고 해서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거둬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인 데다가, 외로움 정도는 게임으로 잊을 수 있었으니까.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76%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74% 완료.]

고등학교 졸업식 날.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다.

화려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첫 번째 주제는 역시 대학교.

이모와 이모부가 해외에서 일을 했기에 외국어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 영향일까, 대학교는 외국어 계열로 갔다.

두 번째는 군대.

뭐, 이건 생략하자. 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리고 자잘한 일상적 대화들.

그런데 그날,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억 잃은 소년의 희극은 또다시 비극으로 물들었다.

교통사고였다.

버스와의 충돌로 차가 세 바퀴나 굴렀다.

그리고.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마 처음이었지. 목 놓아 울었던 게.

자기도 왜 그랬는지, 당시의 기억이 없다는 버스 기사의 변명.

그딴 말에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차라리 기억상실증이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모금만을 주고 사라진 오아시스는 마음을 더욱 메마르게 했으니까.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5%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93% 완료.]

20살이 되자마자 대학교에 휴학계를 낸 뒤, 곧바로 군대에 갔다.

전역 후에는 1년인가 2년 정도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취업 준비를 했다.

그렇게 취업한 곳에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건만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망할.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6%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95% 완료.]

기억이 점점 흐릿해진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죽기 싫어.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6%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95% 완료.]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던 정신이 이제야 현실을 자각한 걸까. 극도의 공포감이 치솟았다.

무섭다. 죽는 게 무섭다.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8%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97% 완료.]

이런 게 말로인 걸까.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죽음 앞에선 다 부질없는 짓인가 보다.

아니, 세상이 미쳐 버린 김에 잘된 걸지도 모르겠다.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9%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98% 완료.]

아니, 아니야 죽기 싫어. 뭐야, 영혼 소멸이. 뭔데, 데이터 소멸이란 게.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9%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99% 완료.]

죽기... 싫다고. 누가 좀, 도와줘.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9% 완료.]

[데이터 다운로드 중. 100% 완료.]

-띠링.

['솔라의 선물' 다운로드를 완료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희미해져서 사고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손을 뻗었다.

육체는 없었지만 감각을 머릿속으로 그렸고, 빛나는 입자들이 팔을 구성했다.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99% 완료.]

손은 쭉 뻗어 나가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 창을 힘없이 눌렀다.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을 획득했습니다.]

[육체를 재구성합니다.]

[플레이어 데이터 삭제 중. 취소.]

[이전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뭐야.

[데이터를 불러오는 중. 13% 완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데이터를 불러오는 중. 50% 완료]

희미해졌던 정신이 조금씩 회복된다.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둔해졌던 뇌가, 이번에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데이터를 불러오는 중. 98% 완료]

[일부 데이터 동기화 완료.]

[인벤토리 데이터가 너무 많습니다.]

[인벤토리 데이터를 불러오는 데 실패했습니다.]

분명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긴 하는데 무슨 일인지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다.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에 의해 민첩성이 강화됩니다.]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에 의해 근력이 강화됩니다.]

뭐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유일한.]

순간, 모든 게 밝아졌다. 의식만이 존재하던 죽음의 공간에 환한 빛이 들며, 정신이 튕겨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한은 검은 방에서 눈을 떴다.

"허억.... 허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댄다.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의 고동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게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후우."

심호흡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솔라의 방.'

그저 검을 뿐인 곳. 익숙한 장소였다.

"안 죽었어? 산 건가?"

생존.

그것에 대한 희열이 물밀듯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환호를 지르며 기뻐하기보다는 현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한 번 더 심호흡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기에 마음을 진정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상태 창."

-띠링.

「-유일한-

레벨: 300

직업: 없음

스킬: 화염 내성(Lv. Max)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

누적 피로도: 0

소속 길드: 코퀴토스」

공란이었던 고유스킬 칸에 기다란 문장이 생겼다.

"이 스킬이 나를 되살린 건가?"

추측은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갔다.

고유스킬의 획득을 알리는 알람 다음에, 육체를 재구성한다는 알람이 떴었으니까 말이다.

당시 의식은 굉장히 흐릿했지만 이상하게도 알람 내용들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물론 '솔라의 선물'이라는 것도 말이다.

"솔라의 선물이라. 설마 편지에 들어 있던 게 보이지 않는 데이터 같은 거였던 건가?"

아, 편지 하니까 생각났다.

열쇠.

그래, 열쇠도 들어 있었다.

'찾았다.'

검은 바닥 위에 있는 열쇠를 집어 들자 차가운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무엇을 여는 열쇠인지는 모르지만 솔라가 준 물건인 만큼 굉장히 중요한 아이템임은 틀림없다.

"인벤토리가 있으려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태 창 위에 또 다른 홀로그램 창이 겹쳐 나타났다.

바로 인벤토리.

-띠링.

[다운로드 실패.]

"뭐야."

알람 창이 사라지고 다시 눈에 들어온 인벤토리.

수납공간이....

다 비어 있다?

없다. 그동안 모아 왔던 아이템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무려 중학생 때부터 모아 온 아이템이, 10년 이상의 시간이 사라졌다.

'잠깐, 잠깐, 이건 아니지. 돈 한 푼 안 쓰고 모아 온 건데.'

아무리 스크롤 해 봐도 보이는 건 텅 비어 버린 슬롯뿐.

'설마 인벤토리가 초기화된 상태로 시작하는 거야?'

아찔해진다. 그동안 모아 온 게 모두 증발하다니.

고유스킬을 얻고, 아이템을 잃은 상황.

몸이 부들부들 떨리지만, 이 이상 우울해져 봤자 상황이 나아지진 않는다.

"뭐, 일단 아이템이 싹 다 날아가 버렸고."

인벤토리에 열쇠를 넣은 후, 기억을 더듬었다.

아까 알람을 통해서 봤던 민첩성 강화와 근력 강화.

갑자기?

엘리멘트에서 스텟을 올릴 방법은 레벨업이나 각종 버프밖에 없다.

분명 그럴 텐데, 어째서 민첩성과 근력이 강화되었을까.

어쩌면 솔라의 선물. 그 안에 포함된 영구 버프일지도 모르겠다.

"제일 궁금한 건."

누적 피로도.

본래의 엘리멘트 게임 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스템이다. 다만, '피로도'라는 단어로 그다지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피로도가 쌓이면 불이익이 있겠지.'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는 피로도가 누적되지 않게 해야 하고, 그러면 하루의 활동량이 제한될 게 분명하다.

"무리한 활동을 하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는 건가."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이닥친 탓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일한은 숨을 내뱉으며 사념을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눈앞으로 흰색의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

당황한 일한은 앞머리를 눌렀다. 흰색으로 가려진 시야.

"에이, 설마."

머리카락 한 가닥을 뽑아서 눈앞으로 가져갔다.

상앗빛이나 잿빛을 띠는 머리카락. 푸석푸석하지 않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원래 머리카락은 당연히 검은색이었고 게임 속 캐릭터조차 흑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백발이라니.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욱 아파졌다.

"하아, 뭐, 일단 살았으니까 상관없으려나."

일한은 주위를 가볍게 훑은 뒤, 한 걸음 내디뎠다.

'언제까지나 여기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어.'

우선 지옥을 빠져나간다. 길은 정확히 알고 있기에 크게 헤맬 일은 없을 듯하다.

이미 전 세계가 엘리멘트로 변하고 있는 건 기정사실. 분명 길드도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게임 속에서 일한이 소속된 길드는 지옥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따라서 지옥을 빠져나간 다음에는 곧장 길드로 향한다.

아마 상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살고 싶어 하는 플레이어들 또한 그리 행동할 것이다.

그야 소속 길드는 게임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가 관건이네. 넉넉하게 며칠은 잡아야겠지.'

문 앞에 서자 홀로그램 창이 앞을 가로막았다.

[퇴실 시 '솔라의 방'이 소멸합니다. 나가시겠습니까? Y/N]

뭐?

사라진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으나, 불평해 봤자 없어진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일한은 고개를 돌려 방을 살폈다.

이제는 테이블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새카만 공간. 챙길 것도 없다.

솔라와 대화했던 추억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왜인지 모를 쌉쌀한 미련이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괜찮다.

애초에 솔라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왔고, 그녀는 충분히 베풀어 주었으니까.

검은 공간을 뒤로하며 밖으로 나갔다.

-화륵.

여기저기서 일렁이는 불꽃은 이곳이 지옥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늘은 무서울 정도로 잔잔하고, 피처럼 붉었다.

양옆의 반쯤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피폐한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오늘 최대한 많이 가 보자.'

그리 생각하며 세 걸음 정도 앞으로 간 순간.

"!!!"

오른쪽 건물의 잔해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검붉은 털, 짙은 회색의 송곳니, 가로로 찢어진 황색의 동공.

-크르르....

지옥의 늑대라 불리는 몬스터, 플레어 울프.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

그중 가운데에 있는 녀석이 자세를 낮추고 눈을 부라렸다.

키만 해도 5미터가 넘는 몬스터. 입에서 화염을 뿜어 대며 다가온다.

일한은 뒤쪽으로 달리려 했지만 플레어 울프가 더 빨랐다.

녀석은 지면을 박차고 거대한 몸을 띄웠다.

"큭!"

날카로운 송곳니에 비친 겁먹은 얼굴.

뒤로 쓰러지는 동시에 반사적으로 발차기를 내뻗었다.

-쾅!

엄청난 소리에 질끈 감겨 있던 일한의 눈이 뜨였다.

"이, 이게 뭐야."

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플레어 울프의 상반신이 새카맣게 타 있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생각해 낼 새도 없이 다른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녀석은 아까 일한이 도망치려던 방향을 기억해 두기라도 한 건지, 크게 점프해서 반대쪽에 착지했다.

커다란 몬스터는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기라도 하듯 이빨 사이사이로 불을 뿜어 댔다.

'젠장할.'

앞에도, 뒤에도 한 마리씩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상황.

-크르르!

검은 벽 쪽에 있던 녀석이 이를 갈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큭!"

일한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아까 전의 그 녀석은 어떻게 태워 버린 걸까.

그 녀석이 달려드는 순간에 뭘 했지?

꼴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뒤로 나자빠졌다?

아니.

발차기.

'이거다!'

확신은 없지만 모 아니면 도다.

플레어 울프가 입을 떡 벌리고 코앞까지 온 순간, 일한은 전력을 다해 발을 쭉 뻗었다.

그러자.

-콰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발에서 불기둥이 솟아났다.

화염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건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플레어 울프 한 마리.

"이게, 뭔...."

자기가 한 행동에 당황해하던 찰나,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

이 엄청난 힘은 고유스킬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플레어 울프가 이렇게 쉽게 죽는다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일한은 천천히 몸을 돌려 마지막 남은 녀석을 보았다.

동료가 죽는 걸 봐서인지, 아니면 눈앞에 있는 인간의 기백이 달라져서인지 플레어 울프는 몸을 뒤로 뺐다.

"야, 어딜 가."

제3화

3화

발치에서 화염이 요동치며 뜨거운 기운이 몸속 깊숙이 스며든다.

마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

이런 감각은 처음이지만 불꽃을 조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고 호흡을 하듯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은, 복잡한 사고를 거치지 않아도 저절로 제어됐다.

원한다면 강하게 또는 약하게.

'나름 알 것 같다.'

이런 간질간질한 촉감은 발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손.

땀으로 젖은 양손에서도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주먹을 꽉 쥐자 손가락 틈 사이사이로 희끄무레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머지않아 붉은 화염이 고개를 내밀었다.

반면에, 발치에서 일렁이던 불꽃은 조금씩 사라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호오, 양쪽에서 동시에는 불가능한 건가.'

손에서 불을 뿜으면 발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발에서 불을 뿜으면 손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는 간단한 제약.

하나,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스킬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득이니까.

손을 천천히 펴자 불꽃이 손가락을 타고 쭉 뻗어 나갔다.

도화선이 점화되듯 화염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약간 뜨겁다는 느낌은 들지만 화염 내성 덕분일지, 아니면 고유스킬 자체의 패시브인지 괴로울 정도는 아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자, 이번에는 불꽃이 주먹을 뒤덮었다.

기묘하고도 경이로운 그 광경에 일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크르르!

시선을 받은 플레어 울프가 자세를 한껏 낮추고는 목을 울렸다.

동료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탓인지 전처럼 위엄 있지는 않았다.

마치 겁을 잔뜩 먹은 사람이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네가 안 오면 이쪽에서 가도 되냐?"

새로운 스킬이 생겼으면 적어도 세 번은 써 봐야 한다.

예전부터 게임을 할 때는 그리 생각했었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늑대는 테스트의 마지막 희생양일 뿐이다.

플레어 울프는 코에서 불길을 내뿜었다.

계속해서 으르렁거리고는 있지만 좀처럼 달려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간다."

일한은 양손을 바닥에 짚었다.

-화륵!

뒤꿈치에서 화염이 작렬한다. 엄청난 양의 불이 뿜어져 나오는 그 모습은 발사 직전의 로켓을 연상케 했다.

이를 본 늑대 녀석은 화가 단단히 난 황소처럼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천천히 살핀다.

결코 조급해하지 않고 발에서 화염을 뿜어 댄다.

-카아악!!!

커다란 송곳니가 벌어진 순간.

-콰앙!

일한의 모습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다. 그는 순식간에 플레어 울프의 곁으로 이동한 것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늑대의 아가리에 팔을 넣고, 이번에는 손에서 화염을 뿜는다.

-화르륵!

플레어 울프는 당황했다. 먹잇감에 불과한 인간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입에 손을 집어넣다니.

짐승의 머리로는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 몸이 내부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것조차 말이다.

일한은 화염의 강도를 올렸다.

불꽃이 점점 더 세차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열기와 압도적인 힘은 늑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경지에 이르렀고, 결국 녀석은 눈깔을 뒤집으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후우...."

긴장감과 안도감. 두 정서는 떨리는 호흡에 섞여 퍼져나갔다.

일한은 플레어 울프의 입속에 넣었던 팔을 조심조심 빼냈다.

살짝 붉어진 손. 화상은 아니었지만 따끔거리는 통증이 있는 걸 봐서는 능력 때문인 것 같았다.

'아파라. 다음부터는 적당히 조절해서 써야겠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낸 일한은 세 구의 사체를 번갈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지옥에서 약한 축에 속하는 몬스터라 해도 결코 잡기 쉬운 몬스터는 아니다.

공격력이 높고 절대 혼자 다니지 않는 것부터가 어중간해서는 엄두도 못 낼 정도니까.

그런 몬스터가 손쉽게 쓰러졌다.

물론 쓰러뜨렸다는 건 이겼다는 거고, 그렇다는 건 살았다는 증표지만.

지금 일한에게 중요한 건 생존 여부가 아니었다.

'플레어 울프는 화염 내성 3레벨 몬스터. 그런 개체가 불탔다는 건.'

시선을 내려 불그스름해진 손을 바라본다.

"엄청난 위력이네."

화염 내성 3레벨을 뚫었다. 이는 화력이 지옥의 외곽에 있는 불과 맞먹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 정도로 태웠으면 레벨 5까지는 뚫을 수 있으려나?'

지옥에서 가장 화력이 강한 불꽃이 화염 내성 9를 뚫는 수준.

이는 엘리멘트에서 가장 강한 화력임과 동시에 화염 내성 10을 달성한 일한에게도 어느 정도의 대미지를 줄 수 있는 정도이다.

그 절반에 달하는 위력. 앞으로의 세상을 헤쳐 나가는 데 있어 강력한 검이자 방패가 되리라.

"그건 그렇고."

타는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는 사체를 내려다보았다.

"플레어 울프가 달랑 세 마리로 무리를 짓지는 않을 텐데."

무리 지어 다니는 플레어 울프의 특성상 사냥을 위해 잠시 흩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보통 그런 식으로 무리가 나눠지면 각 팀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활동한다.

'그러니까 여기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게 없지. 다른 녀석들이 오기 전에 빨리 움직일까.'

일한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함정을 피하고, 중간중간 마주친 몬스터들을 쓰러트리고.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뭔가가 이상했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숨이 안 차.'

뿐만 아니라 몸이 가벼웠다.

잔뜩 뭉쳐서 벽돌 같던 어깨는 부드러웠고, 디스크에 걸린 건가 싶던 허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반짝이는 모니터 때문에 상해 버린 눈도 렌즈를 낀 것 같았다.

매일같이 몸을 짓눌렀던 피로감마저도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몸이 재구축되었기 때문이란 것을.

'평소에 없던 근육도 조금 붙었어.'

평소의 게임이 손가락을 이용했다면, 이제는 전신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굿 스타트, 아니 베스트 스타트 그 자체.

"응?"

질주하던 일한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귀를 기울였다.

"...주세요."

목소리.

사람 목소리를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세요."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희미한 음성은 한 번 더 들려왔다.

정말이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떨림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특정한 사람을 향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저, 누구라도 좋으니까 와 달라는 신호였다.

일한은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은 탓에 정확한 위치를 판별하리란 결코 쉽지 않았으나, 몸을 돌려가며 한 걸음 내딛고 두 걸음 뒤로 가길 반복한 끝에 대략적인 방향을 알아냈다.

"...려 주세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고 심장은 걸음을 재촉하듯 빠르게 뛰었다.

-화륵!

붉은 화염이 무너져 내린 주택 위에서 춤춘다.

"살... 주세...."

따닥, 따닥, 하고 나무 타는 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아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주택가였을 그곳은 단 하나의 집만을 남겨 놓고 지옥에 삼켜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우뚱거리는 저 마지막 건물이 목소리의 발원지일 것이라고.

일렁이는 불꽃을 주저 없이 밟았다.

-탁, 타닥!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가 아래로 고꾸라지더니 검은 재와 함께 떨어졌다.

"큭!"

소화기보다도 두꺼운 나뭇가지가 덮쳐 오기 전에 자세를 낮췄다. 동시에 불을 뿜으며 도약한다.

낮은 상공을 가르며 날자, 발에서 나오는 불이 목재에 붙으며 불길이 커졌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 독극물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일한은 소매로 입가를 막은 뒤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살려 주세요...."

훨씬 희미해진 음성. 하지만 완벽하게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누가 좀, 살려 주세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몸을 움찔 떨었다.

반쯤 무너져 내린 주택. 입구 쪽 벽이 무너지면서 사람을 깔아뭉갠 것 같았다.

그 잔해의 아래에 상처투성이 팔이 뻗어 나와 있었다.

손은 바들바들 떨며 바닥을 긁어 댔다. 마치 몸을 빼내려는 것처럼.

바로 옆에 있는 벽돌 더미가 무너진 벽이 완전히 내려앉는 걸 막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에 압도당하면서도 걸음을 옮긴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발소리가 나서일까. 희미하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바닥만 긁어 대던 손이 번쩍 들리더니 일한을 향해 쭉 뻗어졌다.

"누, 누구 있죠? 도와주세요!"

여성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무너진 잔해를 들어 올리려고 손을 뻗은 그 순간, 뇌에 한 가지 문장이 떠올랐다.

'구해도 되는 걸까.'

그 문장은 흐트러지며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정말로 도와줘도 되는 걸까.

만약 그녀를 구한다면 길드까지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몬스터와 마주쳤을 때 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체력을 낭비해야 하지 않을까?

혼자라면 어찌어찌 살아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둘이라면, 다른 사람까지 지켜야 한다면 과연 무사히 길드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렇게 손을 뻗어 남을 구해 주는 행동을 감당할 수 있을까?

히어로가 아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일개 회사원이었고 지금은 특별한 능력이 생겼을 뿐인 평범한 사람이다.

구해야 할 의무 따위는 없다.

"저, 저기요...?"

이대로 지나치는 거다.

쓸데없이 체력을 뺏길 필요 따위 없다.

"구, 구해 주실 거죠? 사례는 얼마든지 할게요!"

사례? 뭘 말하는 걸까. 돈?

물론 좋지. 뭐든 살 수 있으니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엘리멘트에서 현실의 돈 같은 게 의미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 제발...."

이 사람을 구해서 얻는 이득 뭐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의미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119라도 불러 줘요...!"

119라니. 이런 상황에서 소방서가 움직일 수 있을까? 애초에 가까운 곳에 있는 소방서가 아직 남아 있기는 할까?

아무래도 이 여자는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소방서에...."

귀에 감기는 작은 목소리.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스쳤다.

어렸을 때의 기억.

불에 잡아먹힌 집 속에서, 소방관의 등에 업혀 구조되었던 기억.

그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일한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뺨을 세게 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이럴 거면 여기까지 왜 온 거야!'

히어로가 아니다.

하지만 히어로 같은 사람들에게 구원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막상 남이 도움을 요청할 때 무시한다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물론, 지금 세상은 개 같이 변해 버렸고 모르는 사람을 구해 봤자 이득이 없다.

그래도, 그런 상황이라도, 구하지 않는다면 더는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여기서 손을 뻗으면 앞으로 며칠간 육체적으로 힘들지도 모른다.

여기서 손을 내치면 평생 정신적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한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있어?

"지금부터 무너진 벽을 들어 올릴 테니까 나올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생기면 바로 움직여 주세요."

"아...."

여성의 목 막힌 소리가 들려온다.

"가, 감사합니다...."

일한은 잔해 아랫부분을 꽉 잡고 들어 올렸다.

"끄윽...!"

하지만 약간 들썩일 뿐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후우."

몬스터들을 상대했던 감각을 떠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화륵!

발치에서 피어난 화염. 조금씩 강도가 거세지더니 몸과 함께 잔해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주택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 아이가! 방에 아이가 있어요. 아이부터 구해 주세요!"

여성도 위기 상황임을 인지한 건지 다급하게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아이, 아이 먼저 구해 주세요. 제발...."

조금만 들면 잔해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일한이 망설이자, 여성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요. 저, 저는 어차피 못 살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저한테는 그 아이밖에 없어요! 무리한 요구인 걸 알지만 아이를 먼 저 구해 주세요.... 저는,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까...."

건물이 더욱 기울어졌다.

"빨리!"

일한은 들었던 잔해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금방 오겠습니다."

주택으로 들어가는 와중에, 등 뒤에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연신 들려왔다.

복도와 주방을 지나친 다음, 오른쪽 벽에 있는 문을 열자 큰 방이 나타났다.

여러 문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와 과학 프린트가 놓인 책상. 특이하게도 벽에 칠판이 달려 있었다.

문을 완전히 열어젖히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10살 초중반 정도 될까. 얼굴에 핏기가 없었지만,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다.

서둘러 등에 업고는 곧장 방을 빠져나왔다.

-치이익....

'무슨 소리지?'

주방을 지나칠 때쯤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가스가 새는 것 같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가 저릿했다.

시선을 돌리자 보이는 가스 밸브.

얇은 파이프에 난 균열에서 불길한 소음이 울리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이 거센 불길에 크게 흔들렸다.

-쩌적쩌적.

금이 가기 시작한 유리창.

"젠장!"

달린다. 미친 듯이 달린다.

그리고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콰앙!!!

"크윽!"

꽤 높이 올라왔음에도 하반신에 전해져 오는 강렬한 열기.

집은 폭발하며 돌풍을 만들어 냈고, 파편들이 곳곳으로 날아가며 지면에 닿아 있는 모든 생명을 지웠다.

상공에서 이 참상을 지켜본 일한의 얼굴이 굳었다.

제4화

4화

검은 머리카락. 약간 그을린 뺨.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쌉싸름한 맛을 느끼며 눈을 뜬 소년.

"어디...?"

바닥에 손을 짚자 딱딱하고도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거미줄로 뒤덮인 랜턴만이 작은 공간을 미약하게 비추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방이 벽으로 꽉 막혀 있다.

컨테이너, 혹은 창고로 보이는 내부에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소년이 몸을 일으키자 스르르 흘러내리는 담요. 그것을 옆으로 치운 뒤에 벽을 더듬으며 나갈 곳을 찾기 시작했다.

나갈 곳, 이라고 해 봤자 끝에 있는 문이 전부였지만.

탁, 하고 손가락에 무언가 걸린 느낌이 들었다. 소년은 눈을 크게 뜨면서 허리를 숙였다.

"쇠사슬이잖아."

갈색으로 녹슨 철 덩어리가 문에 걸려 있다.

중간부터는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상태를 보니 약간의 충격을 받아서 부러진 듯했다.

보통은 더럽다며 거리를 둘 법도 한데, 소년은 쇠사슬을 만지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산화철. 화학식 Fe2O3."

몇 번이나 봐 온 내용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파삭.

조금 힘을 가하자 부서진 쇠사슬. 바닥에 떨어지면서 큰 소리가 울렸고, 갑작스러운 소음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이내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문에 붙어서는 무게를 실었다.

끼이익, 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울리며 열린 컨테이너의 문.

작은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

몸이 굳었다.

소년이 밖을 내다보았을 때, 밖에서 또 다른 존재가 소년을 보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황색 눈동자.

사람 같기도, 원숭이 같기도 한 생명체는 이를 드러내고 웃기 시작했다.

-낄낄낄낄.

그것이 팔을 뻗어 문을 확 열어젖히자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이게.'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이다. 책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한 생명체.

소년은 사색이 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발로 지면을 밀어 댔다.

-낄낄낄.

기이하게 머리를 돌리는 괴생명체. 그것이 컨테이너에 발을 들인 순간.

-쾅!

눈앞이 밝아졌다.

반사적으로 두 눈을 감았다.

덜덜 떨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비틀거리다가 맥없이 쓰러지는 괴물이 보였다.

사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동시에 타는 냄새가 풍겼다.

"여기까지 오다니, 지독하게 끈질기네."

컨테이너 바닥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

소년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괴물의 사체를 한쪽으로 밀고 있는 남성을 보았다.

그의 옷은 곳곳이 검게 그을려 있었고, 작은 구멍이 뚫린 곳도 있었다.

재난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

충분히 놀라운 차림새지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건 다름 아닌 머리카락이었다.

달빛을 받은 머리카락은 연한 은색으로 반짝였다.

"아, 일어났구나."

일한은 넋이 나간 얼굴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저, 저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

발로 바닥을 밀어 한껏 거리를 벌린 소년이 몬스터와 일한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저 괴물은 뭐고 형은 누구예요? 여기는 어디고요? 나, 납치?"

소년의 질문에 대답 없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왔다.

밖을 한차례 살피고 문을 굳게 닫은 일한은 랜턴 옆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서 뚱뚱한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한번 소년을 보았다.

"나는 입을 세 개나 가지고 있지 않아."

"아...."

소년은 일한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다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단 저 괴물은 뭐예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핵이라도 떨어졌어요?"

"어쩌면 더 심각하지. 세계가 변했으니까."

소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엘리멘트라는 게임을 알면 좋겠는데."

"어, 알아요. 옛날에 유명했던 게임이잖아요, 그거."

"다행이다. 설명이 쉽겠어."

"그 게임으로 괴물을 설명해요?"

어깨를 으쓱이고는.

"네가 궁금해하는 것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년은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리며 침묵했다.

"네 말대로, 옛날에 유명했던 게임. 엘리멘트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네?"

"게임의 지형이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게임 속 괴물들이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아마 길드나 던전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런 설명을 지금 할 필요는 없겠지."

"자, 잠깐만요."

소년은 오른팔을 쭉 뻗었다.

"그러니까 지금, 게임이 현실이 됐다는 거예요?"

"정확해."

"그걸 지금 믿으라고요?"

일한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뭐, 핵이 떨어졌고, 방금 그 괴물은 돌연변이였다. 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야?"

"그, 그런 방향이 더 믿을 만한데요."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엘리멘트 했었어?"

"엄청 옛날에요. 거의 계정만 만든 수준으로."

"그럼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소년은 말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채 고개를 기울였다.

"따라 해 봐. 상태창."

"상태창?"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겁먹은 얼굴로 몸을 한껏 빼낸 소년은 레벨이나 스킬, 피로도 등 눈앞에 나타난 것들을 읊었다.

그 모습에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보이는 것 같네. 그건 과학자들이 네 머리에 로봇을 심은 거라고 설명해 줄까?"

소년은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뻐끔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동시에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엘리멘트의 현실화. 아까 했던 말대로 네 궁금증의 절반은 해소됐을 거라 생각하는데."

"대신 그것보다 더 많은 게 궁금해졌어요."

그는 손을 허공에 휘젓거나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일한은 가방을 뒤져서 통조림 두 개를 꺼냈다.

"일단 이리로 좀 오지 그래?"

통조림은 들고 흔들자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경계심 많은 고양이처럼 아주 천천히 일한의 곁으로 다가왔다.

참치 통조림을 까서 나무젓가락과 함께 앞에 놓아 주자, '감사합니다.'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통조림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 며칠은 그런 것만 먹어야 되거든."

소년은 대답 없이 눈을 껌뻑거렸다.

"너, 이름은?"

"유진이요. 한유진."

"유일한이다."

유진이는 통조림을 깨작깨작 먹으면서 일한을 힐끔 보았다.

"형은 누구예요?"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사람."

"평범...."

한동안 이어진 침묵. 그걸 깬 건 유진이었다.

"저기, 전 왜 여기에 있죠?"

"내가 데리고 왔어. 집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거든."

"무너, 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알진 모르겠지만 엘리멘트에 지옥이라는 맵이 있어."

"그, 온통 불밖에 없는 맵이죠."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 맵이 여기에 나타났지. 하루아침에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됐어."

통조림을 들고 있던 유진의 팔이 낮게 내려갔다.

"엄마는...? 엄마도 집에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 목이 턱 막힌 기분이 들었다. 차마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짓씹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어요? 말해 주세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을 재촉했다.

"입구 쪽 벽이 무너졌는데 그 잔해에 깔려 계셨다. 빼내려고 했지만 널 먼저 구해 달라 하셨지."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난 그 말대로 방에 쓰러져 있는 널 데리고 나왔어. 그런데 주방에서 가스가 새고 있었다."

"가, 가스가요?"

"부러진 틈으로 새고 있었어. 바로 옆에 있던 창문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걸 보자마자 달려 나왔고. 그 순간, 폭발했어."

이 말을 듣자마자 유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일한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분개하거나 울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이게 정말 게임이면, 엄마도 리스폰 되지 않을까."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스폰이라.'

새하얀 화염에 삼켜져 죽은 순간, 영혼이 소멸한다는 알람과 데이터가 삭제된다는 알람이 떴었다.

그것은 분명 '죽음'을 뜻하는 것.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리스폰이라는 시스템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지만 지금 구태여 이 사실을 말하면서 유진의 정신을 나락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싶지 않다.

'애초에 나도 죽기 직전에 되살아났잖아.'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확신할 수 없다.

"형, 죽은 플레이어는 가장 가까운 길드에서 리스폰 되죠?"

일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옥...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길드가 어디예요?"

가장 가까운 길드.

일한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

"불 속성 길드, 코퀴토스."

유진은 이 말을 듣고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저는 내일 거기로 갈게요."

"저는, 이라니. 뭘 혼자 갈 것처럼 구는 거냐."

"혀, 형도 가시게요?"

"적어도 지옥에 죽치고 있을 생각은 없어. 길드에 가면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어느 정도의 안전도 보장받고. 무엇보다 소속 길드만큼 좋은 곳은 없으니까."

유진은 '소속 길드'라는 말을 입 안에서 굴렸다.

"얼음 속성 길드까지는 가기 힘들까요?"

"당연하지, 거의 반대 방향에 있으니까. 그보다 너, 얼음 속성이야?"

"네."

난처하다.

얼음 속성이라니.

엘리멘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면 누구든지 '속성'을 뽑을 것이다.

여타 게임과 다를 바 없이 속성에는 상성이 있는데, 불과 얼음은 좋은 조합이 아니다.

얼음이 불에 약할 거라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겠지만, 엘리멘트에서는 그 사고를 조금 꼬아야 한다.

얼음 속성이 불 속성에 약한 건 사실이다.

다만 어중간한 얼음 마법은 불에 닿는 순간 녹아 버리고, 그로 인해 생긴 물은 불 속성 마법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래서일까, 엘리멘트에서 불 속성 유저와 얼음 속성 유저가 파티를 맺게 되면 서로의 능력치가 미약하게 감소하는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다.

'둘이 동시에 능력을 쓰면 능력치 감소가 심해지지.'

이런 요소 때문에 게임 내에서도 두 속성의 유저가 함께 하는 걸 보기란 쉽지 않다.

이런 요소는 불과 얼음 속성뿐만 아니라 모든 속성에 적용된다.

더하여 이 시스템 때문에 하나의 거대한 길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속성별로 길드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 속성이 걱정이신 거면...."

일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유진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어, 어떻게 하죠?"

그의 눈동자는 불안한 것처럼 떨렸다.

"뭐, 같이 있는 것만으로 능력치가 대폭 깎이는 건 아니니까 딱히 상관없어. 단, 스킬은 위기 상황 빼고는 쓰지 마."

"네."

또다시 찾아온 침묵.

일한은 담요를 던져 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만 자. 심란할 거 아니야."

"형은요?"

"난 알아서 잘 거야."

유진은 날아든 담요를 품에 안았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던 그는 이내 몸을 쪼그린 채 자기 시작했다.

"후우."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일한은 마른세수를 했다.

"하루가 무슨 한 달 같냐."

그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여기가 불이 없고 몬스터가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 해서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어. 아까도 몬스터가 왔었고.'

보아하니 며칠간 다리 뻗고 자기는 그른 듯하다.

"적당히 중간중간 눈 붙이는 게 최선일 것 같네."

등을 기대고 반짝이는 랜턴을 바라보며 긴 하루를 정리했다.

* * *

아침.

해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이른 아침이다.

이른 시간부터 이동을 시작한 일한과 유진은 컨테이너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를 마주쳤다.

사람 같기도 하고 원숭이 같기도 한 얼굴에 갈색 로브를 두른 몬스터.

어젯밤 컨테이너 앞에 있던 녀석이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정식 명칭이 아닌 원숭이라고 부른다. 정식 명칭은... 뭐였더라.

아무튼, 전체적으로 원숭이를 닮았지만 허리는 곧게 펴져 있고, 얼굴은 사람과 닮은 끔찍한 몬스터다.

'현실에서 보니까 징그럽네.'

유진이는 어제 기억이 났는지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유진."

"네, 네?"

"가방 들고 있어라."

"싸우시게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착이 강한 녀석이어서 처리하지 않으면 어딜 가도 쫓아오거든."

플레어 울프에 비해서 힘은 약하지만 똑똑한 녀석이다.

밤눈이 어두운 편이기 때문에 어제는 쉽게 잡았지만, 주위가 밝은 지금은 주의해야 한다.

화염 내성은 3. 충분히 태울 수 있는 정도.

더 이상 다른 걸 생각해 봤자 시간만 끄는 짓이다.

일한은 자세를 낮추고 순식간에 도약했다.

발에서 불을 뿜으며 낮게 나는 모습을 본 유진은 입을 떡 벌렸다.

-낄낄낄.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는 원숭이. 녀석은 허리를 뒤로 꺾어 발차기를 피했다.

'원숭이는 속도가 빠른 대신에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길어.'

다음 동작이 이어지기 전에 신속히 처리한다.

일한은 허공에서 덤블링 한 다음, 원숭이의 얼굴을 잡았다.

녀석은 강하게 발버둥 쳤다.

"잘 가라."

-펑!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

이내 원숭이는 축 늘어졌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후, 하고 바람을 분 일한.

그는 몸을 돌려서 유진에게 다가갔다.

"바, 방금 불 뿜은 거 고유스킬인가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자기 생각을 확신한 유진은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뭔가, 엄청 침착해 보이네.'

적어도 며칠은 우울한 상태로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갈 길이 멀어. 빨리 움직이자."

건네줬던 가방을 가져오려 했지만.

"제가 들게요. 이런 거라도 해야죠. 짐꾼이든 뭐든, 시켜 주시기만 하면 전부 할게요."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다 인벤토리에 있으니까 상관없겠지.'

유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지옥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화염 내성이 없으면 위험해."

원숭이의 로브를 벗겨서 던져 줬다.

"화염 내성이 인챈트 된 로브니까 걸치고 있어. 3레벨 정도는 될 거야."

"형은요?"

그 순수한 물음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괜찮아. 어차피 화염 내성 만렙이니까."

"예?"

"응?"

"어?"

유진의 두 동공이 떨렸다.

"기본 스킬로 내성을 선택한 거예요? 보통은 안 그러잖아요. 아이템이 없는 극 초반엔 공격할 수단이 막대기랑 맨주먹밖에 없으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극 초반만 버티면 내성이 훨씬 나아. 공격 계열 기본 스킬은 나중에 쓸 일이 거의 없으니까."

유진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벌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처럼 생각 안 할걸요. 선택한 스킬 한 개로 평생을 써야 하는 건데."

말을 이어 가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다.

"내성은 한 속성밖에 적용 안 되니까 효율이 떨어져요. 게다가 전 속성 내성이 아니라, 불 속성 단일 내성이잖아요."

맞는 말이다.

엘리멘트에서는 계정을 생성할 때 무수한 스킬 중 하나를 선택한다.

오직 그것 하나로 살아남아야 하는 게임인 만큼 기본 스킬은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고유스킬이 아닌 이상 다른 스킬을 얻을 방법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겨우 불 속성에 대한 면역만 높여 주는 내성을 선택한다? 그런 유저가 얼마나 있을까.

"특히 불 속성은 공격력이 높은 속성이어서 대부분이 공격 스킬을 선택한다고 들었어요."

일한은 옛 기억을 끄집어내려 노력했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할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이 내성 스킬도 묘하게 끌려서 선택한 것뿐이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뭐, 결과적으로 좋으니까 상관없지 않나? 이게 없었으면 지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짓도 못 했어."

유진은 여전히 찜찜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성 만렙이 가능한 거였어요? 화염 내성 만렙을 만들려면 엄청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화염 대미지를 받아야 되는 거 아니었나?"

이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야 뭐, 200레벨 후로는 거의 지옥에만 있었으니까."

"지금 레벨은요?"

"300."

유진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거 최고 레벨이잖아요! 만렙을 지옥에서 찍은 거예요?"

300레벨을 달성한 유저는 많아도 100레벨을 오직 한 맵에서 올리는 사람은 듣도 보도 못했다.

보통은 길드 활동으로 레벨을 올리는 편이지, 사서 고생하며 맵을 탐험하거나 몬스터를 잡으면서 천천히 레벨을 올리지 않으니까.

"레, 레벨 200까지는 길드에서 찍은 거죠?"

"50레벨까지만. 여러 가지 시스템이 도입되고 나서는 길드 활동에 흥미를 잃었거든."

물론 길드 활동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았다.

게임 초창기에는 유저들 사이에서 닉네임이 거론될 정도로 수준급 성적을 거뒀었다.

길드전으로 얻은 포인트로 길드 랭크 A까지 간 적도 있다.

뭐, 지금은 안 한 지 오래돼서 F까지 떨어졌겠지.

"그럼 200레벨은 어떻게 만든 거예요?"

"다른 맵 다닌다고 바빴지."

길드가 메인 콘텐츠인 게임에서 맵만 탐험하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네.

"응?"

유진의 고개가 또다시 기울었다.

"탐험만으로 150레벨을 채울 수 있어요? 길드 활동 없이 그러려면 거의 10년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왜, 왜 웃어요?"

"그야 나, 이 게임 출시 때부터 했었는걸? 안 가 본 맵이 없어. 거의 모든 던전도 들어가 봤고."

"어어?"

들어선 안 될 정보를 들었다는 기분이 든다.

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성을 보며 생각했다.

이 더럽게 큰 월드를 전부 돌았다고?

게다가 거의 모든 던전을 탐색했다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아니, 적어도 엘리멘트 유저가 할 짓은 아니다.

길드는 개나 줘 버리고 월드를 돌아다니는 데에 10년이 넘는 시간을 쓰다니.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다.

그리고.

대단하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다며....'

제5화

5화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

무수한 별들이 검푸른 비단을 수놓은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상이 바뀌고 7일.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광경이 너무나 비일상적이었기에, 고개를 치켜든 일한은 냉소했다.

'지상은 완전 불지옥인데 하늘은 더럽게 예쁘네.'

불꽃이 밤바람에 휘날리며 하늘을 덮었다.

미쳐 버린 세상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조차 방해하는 것 같아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후우."

폐 속에 갇혀 있는 공기를 토해 내며 치켜들었던 고개를 내렸다.

시선 끝에 닿은 건 커다란 캠핑카.

도로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는데, 몇 바퀴 구르기라도 한 건지 상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아니다.

주위에 불도 거의 없고 건물의 잔해로 적당히 가려져 있으면 충분하지, 여기서 뭘 더 바라겠는가.

"유진, 오늘은 저기에서 자자."

기진맥진 허리를 푹 숙인 유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하지.'

많아 봐야 15살 정도 되는 저 아이가 종일 걸어 본 적이 있었을까?

그럴 리가. 상상도 안 되는 일이다.

"힘들지?"

"저, 전 괜찮아요!"

헐떡거리는 얼굴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데.

"정말 하나도 안 힘드니까 저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가셔도 돼요."

별로 남지도 않은 체력을 과시하려는 듯 가방을 고쳐 맸다.

"내가 힘들어서 그런다. 이 이상 못 걸어."

"아."

유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일한을 따라 캠핑카로 이동했다.

'열쇠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운전석 창문을 깨트리고 이곳저곳을 뒤지다 보니 초코바 두 개와 열쇠 다발을 찾을 수 있었다.

초코바는 약간 녹은 듯했지만, 유통기한도 많이 남았고 지겨운 통조림 대신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열쇠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네 개. 현관이라 쓰여 있는 열쇠를 집어 들고 차량 뒤쪽으로 이동했다.

열쇠를 꽂으니 찰칵, 하고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리.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자 문이 활짝 열렸다.

'엉망이지만 이 정도면 뭐, 괜찮나.'

유진을 보았을 때, 그는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 해?"

다가가서 묻자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

그 끝에 있는 것은 짙은 푸른색을 띠고 있는 원형 게이트였다.

"던전이네."

"좋은 아이템들이 있을까요?"

"흉포한 몬스터는 있겠지. 들어가고 싶은 거라면 관둬. 이 지역 던전은 난도에 비해 보상이 너무 짜니까. 클리어하는 데 시간을 쓸 바에야 한시라도 빨리 길드에 가는 게 나아."

유진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캠핑카 안으로 들어갔다.

"길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이동하자."

"알겠습니다!"

그는 오랜만의 휴식에 기뻐하며 활짝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모습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야 며칠 전에 어머니를 잃은 아이다. 저 정도로 아무렇지 않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일한은 아까 주머니에 넣었던 초코바를 꺼내서 작은 통조림과 함께 유진에게 건넸다.

"초코바? 웬 거예요?"

"운전석에서 찾았어. 약간 녹았긴 했는데, 어차피 배 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으니까 상관없겠지."

가방에서 꺼낸 짧은 양초에 불을 붙였다.

촛대 끝에서 펄럭이는 불꽃을 뚫어져라 보던 유진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불, 연소, 폭발."

나지막한 세 단어.

일한의 시선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그, 어머니 일은...."

"괜찮아요."

말을 끊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리스폰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꽉 쥐었다.

침묵으로 한층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

통조림은 조금씩 먹던 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엄마랑 별로 사이가 안 좋아요."

별다른 대꾸 없이 귀를 기울였다.

"초등학교 3학년인가. 그때부터 엄마는 '의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죠."

허탈한 웃음소리에 공기가 떨렸다.

"공부, 공부, 공부. 엄마는 저를 가두고는 공부만 시켰고... 아빠가 죽고 나서는 더 심해졌어요."

그는 끝끝내 마음속 응어리를 긁어냈다.

"엄마한테, 그 사람한테 있어서 저는 그냥 도구였던 게 아닐까요? 꿈을... 대신 이뤄 주는 도구. 난 엄마 2회차 인생이 아닌데."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눈앞의 아이가 보여 왔던 다소 냉소적인 태도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그는 이동하는 내내 즐거워 보였다. 마치 진짜 게임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책상 앞에서 온갖 수식과 문제에 머리 박고 있던 아이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이동은 '모험'으로 느껴졌을 거다.

어쩌면 당연하다.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가 속박에서 빠져나온 것과 다름없으니까.

더 이상 숫자로 가치를 판단 받지 않아도 된다는 그 해방감은 감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겠지.

한편으론 그런 속박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어머니가 좋게 보일 리 없다.

대학만을 위한 교육을 강요받아 봤자, 유진의 말대로 도구 취급받는 기분이었으리라.

더군다나 꿈을 대신 이뤄 주는 도구라.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복잡한 사정이겠지.

"엄마는 저를 사랑했을까요?"

유일한은 과거를 돌아보았다.

진짜 가족에 대한 기억은 일절 없지만 이모와 이모부의 존재는 진짜 가족 그 이상이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것들을 베풀어 주었으나, 막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나마 원했던 게 있다면.

'안전.'

이모는 유일한이 자기 언니처럼 불행한 사고에 목숨을 잃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일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고, 그런 행동에 따뜻함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사랑이다.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

"네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아이를 먼저 구해 주세요' 같은 말은 하지 않으셨겠지."

순간, 유진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난 누군가를 달래 줄 정도로 좋은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알아는 둬. 네 어머니는 아슬아슬한 순간에도 네 목숨을 우선시했다는 걸."

작은 손이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몇 번인가 목 막힌 소리를 냈다.

"엄마... 다시 볼 수 있으려나...."

그 말은 일한의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누군가는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이건 모두 엘리멘트라는 게임이 현실화되었기 때문.

이런 비극을 만들어 낸 존재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존재를 찾아내서 이 망할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설령 그게 신이라 할지라도.

예전에 생명의 은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불은 무섭지만, 누군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게 더 고통스럽거든. 그래서 불 속에 뛰어드는 거지. 이건 타인을 위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한 행동일 뿐. 너무 이기적이려나?』

이 세상이 오래 지속되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게 뻔하다.

더는, 더 이상은.

'과거의 나처럼 괴로운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좋겠어.'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그리고 그들과 함께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

'그러니까 하루빨리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이건 타인을 위한 게 아니야.

'그저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한 행동일 뿐.'

너무나 무모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이기적이려나?"

"네?"

고개를 확 들어 올린 유진은 촉촉해진 눈으로 일한을 바라보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슬슬 자. 내일도 열심히 움직여야 하니까."

가볍게 끄덕인 다음 어제처럼 몸을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는 양초 끝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꺼트렸다.

'내일쯤에는 길드에 도착하겠지.'

* * *

"이것만 넘으면 돼."

일한과 유진. 그 둘을 가로막고 있는 건 군데군데가 비어 있는 거대한 산이었다.

"드디어 지옥의 끝이네요."

유진이의 얼굴은 어제처럼 쾌활하지 않았다. 다만, 복잡했던 기분이 풀린 듯 상쾌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 산이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지."

등산할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 하나. 이 근처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빗물에 젖어서 질척거리는 흙을 밟을 일은 없다. 그 사실만으로 약간의 위안이 되었다.

"상태창."

「-유일한-

레벨: 300

직업: 없음

스킬: 화염 내성(Lv. Max)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

누적 피로도: 76

소속 길드: 코퀴토스」

'피로도가 꽤 쌓였네.'

발에서 불을 뿜으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스킬을 사용하는 것만으로 피로도가 꽤 많이 쌓인다.

확실히 첫날보다는 몸이 무겁고 어깨나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그래도 길드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빠르게 이동할까."

절반보다 약간 안 되는 높이까지 나무는커녕 풀도 안 보인다.

산불 걱정 없이 오를 수 있다.

일한은 앞서가던 유진을 둘러멘 다음, 비탈을 타고 빠르게 날아올랐다.

얼마나 갔을까.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던 유진이 어깨를 툭툭 쳤다.

"형, 잠시만요."

"응? 왜?"

"내려 주세요."

등이 훌쩍 가벼워졌다.

"무슨 일 있어?"

"아, 거기 계세요."

가방을 들고 조금 거리를 벌리더니 일한의 발치를 보며 말했다.

"발에서 불 좀 뿜어 봐요."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다.

"역시!"

유진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대체 뭔데?"

"아래!"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눈앞에 특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불이 청록색이 됐네."

분명 붉은색이었건만 짙은 초록색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 땅, 구리일 거예요."

바닥을 발로 쓱쓱 문질러 흙을 치웠다. 밖으로 드러난 지면은 붉은 광택을 내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불꽃 반응이요."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본 말이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 같은데.'

학교 실험실에서 알코올램프를 가지고 실험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정작 뭘 배웠는지는 다 잊었지만.

"특정 성분을 포함하는 물질을 불꽃에 넣으면 특유의 불꽃색이 나타나요. 구리 넣으면 청록색이 되고요."

"빨간색이랑 노란색으로도 변하지 않나?"

"아마 리튬이랑 나트륨일 거예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트륨은 위험해요. 물이랑 닿으면 폭발하니까."

"호오, 이런 거에 대해서 잘 아네."

"저는 이런 것만 봐 왔으니까요."

유진은 어스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렇고, 네 말대로 이 근처 바닥은 구리가 맞을 거야. 이 산은 광물로 이루어져 있거든. 수집가들의 천국이지."

"신기한 산이네요."

"엘리멘트에는 더 신기한 곳도 많아."

"예를 들어?"

일한은 뒤를 돌아보았고, 그의 시선을 따라간 유진이 인상을 구겼다.

화염뿐인 맵, 지옥.

정말이지 너무 신기해서 미칠 지경이다.

"인제 그만 신기해도 될 것 같아요."

"바람대로 되면 얼마나 좋아."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둘.

저 멀리 지옥의 불꽃이 춤추듯 일렁거렸다.

매일같이 솔라를 만나기 위해 마주쳤던 것들인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지겹다.

종종 만화나 게임이 현실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 떠올려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끔찍한 짓이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유진이 보였다.

그 아이 또한 지옥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천히 입을 여는 일한.

"너는 어쩌다 엘리멘트를 하게 됐어?"

게임을 그만둔 이유는 아마도 어머니 때문이겠지.

그럼 시작한 계기는 뭘까?

"삼촌이 같이 하자고 했어요."

지인의 추천으로 게임을 시작하는 건 흔한 일이다.

"재밌다면서 사 줬거든요. 뭐, 오래 하지는 않았지만."

즐거운 일이라도 생각난 건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삼촌이 엄마한테도 해 보라면서 캐릭터까지 만들어 줬는데, 엄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유진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맞아, 삼촌. 삼촌도 게임을 했어."

"소속 길드는?"

"아마 저랑 같을 거예요."

턱을 짚고 고민하다가 말했다.

"언제 한번 가 볼까."

"네? 아, 저기, 꼭 그러실 필요는...."

"딱히 너 때문이 아니야. 어차피 나는 이런저런 곳들을 돌아다닐 거니까."

지금의 참상을 만들어 낸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서.

"물론, 그전까지 꽤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겠지만."

힘차게 끄덕이는 유진. 그 모습을 보고 몸에 힘을 넣었다.

"슬슬 다시 움직이자."

스킬 덕분에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나무들이 보인 시점에서 착지. 이제부터는 걸어야 한다.

'산이 불바다가 되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걷는 고생은 둘째 치고, 오랜만에 느끼는 상쾌한 공기가 마음을 한결 진정시켜 주었다.

여기에 있다 보면 피로도가 쭉쭉 낮아질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데.

'불순물이 있네.'

선명하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제6화

6화

"부, 부장님.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은 여성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흠."

부장, 이라고 불린 남성이 눈을 얇게 떴다.

"그러도록 하지."

그는 근처에 있는 바위에 육중한 몸을 앉혔다.

불룩 튀어나온 배가 찹쌀떡처럼 축 처졌다.

여성은 힐끔힐끔 눈치를 보며, 바로 옆에 있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시뻘건 광경이 비쳤다.

'드디어 빠져나왔네.'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그야 며칠 동안 화염뿐인 공간에 있었으니까.

늑대처럼 생긴 몬스터를 마주치거나, 함정에 빠졌을 때를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처음엔 많던 인원도 이제는 둘뿐.

'부장님이 아니었으면 나도 죽을 뻔했어.'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 새벽.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연히 회사 부장님을 만났다.

회사에서 보였던 짜증 나는 모습과는 다르게 많은 도움을 줬다.

상상도 못 했지. 이런 게임을 하실 거라고는.

엘리멘트.

모를 수가 없는 게임이다. 실제로 예전에 직접 설치하기도 했다.

뭐, 캐릭터만 생성하고 안 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캐릭터라도 만들어 둔 게 어딘가 싶다.

스킬이라 부르는 마법 같은 것도 쓸 수 있고 인벤토리라는 것도 쓸 수 있으니까.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옮겨 와 품에 안았다.

'이것도 인벤토리에 들어가면 좋을 텐데.'

우울하게도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게임 속 아이템뿐.

현실의 가방이나 통조림 같은 건 들어가지 않는다.

덕분에 짐꾼 역할을 하며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있는 상황.

나름의 희소식은 부장이 말한 길드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배도 고프고, 땀 때문에 찝찝해서 샤워하고 싶다.

꼭 따뜻한 물이 아니어도 된다. 씻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

도대체 일상이 무너진 건 무엇 때문일까.

옆에 일한 선배라도 있으면 하소연이라도 했을 텐데.

슬쩍 시선을 올렸다.

'부장님한테는 말도 못 걸겠어.'

울고 싶어졌다.

피난 도중에 만난 김 대리님은 던전에서 돌아가셨고, 어느 순간부터 함께하게 된 아이들도 먹을 걸 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둘씩 사라졌다.

길드에 도착한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심란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했다.

'힘들게 입사해서 얼마 전엔 주임까지 됐는데.'

사고가 점점 복잡하게 얽혀 간다.

"은하 씨, 슬슬 다시 움직입시다."

"아, 네."

수십 개의 통조림을 넣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자 몸이 기우뚱했다.

빗장뼈 부근에서 찰랑이는 목걸이.

돌아가신 김 대리님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준 거였다.

이동 속도를 증가시켜 주는 아이템이랬나.

몬스터를 마주치면 도망갈 때 쓰라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띠며 건네줬다.

'그래 놓고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해요.'

같이 던전에 들어갔으면 도움이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아니, 분명 발목만 잡았을 거야.'

던전 앞에서 기다리는 게 정답이었겠지.

울적한 기분이 정신을 뒤덮기 시작하자,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휘젓는다.

'약해지지 말자.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는 거야.'

은하는 부장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땀을 닦은 손수건을 겉옷 안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 안에서 반짝, 하고 햇빛을 반사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손이 차가워진다.

"부장님. 그, 그거, 그 회중시계...."

멈칫하는 부장.

"김 대리님 거 아니에요?"

기분 나쁜 미소가 두 눈에 비쳤다.

"던전에서 나에게 준 걸세."

"어? 하, 하지만 그거... 아내분께 선물 받은 거라고.... 부, 분명 회사에서 목숨보다 소중한 거라고 말씀하셨었는데...."

-콰직!

나무껍질이 부서지는 소리.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목을 조이는 압박감이 위급한 상황임을 알려 주었다.

"꺽, 끄...윽...."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눈에 고인 눈물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아, 어쩔 수 없네. 미안하게 됐어, 은하 씨."

"기, 김... 대리, 끅, 님은...."

"맞아, 던전에서 죽였다. 꽤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더군. 액세서리 계열은 희귀하단 말이지."

두꺼운 손가락이 목을 파고들었다. 나무에 강하게 부딪힌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 캑, 아이들...."

"요즘 애들이 게임 많이 하는 거 알고 있잖아? 생각했던 대로 이것저것 얻어 낼 수 있었지. 그리고 사람이 많으면 더 위험해질 뿐이야."

"악, 마... 새끼...."

숨을 쉴 수가 없다.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잠깐, 내가 이렇게 힘을 뺄 필요가 없군."

목을 짓누르던 손이 없어졌다.

바닥에 맥없이 쓰러진 은하는 몸을 떨며 도망치려 했다.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계속 잊게 되네."

"!!!"

머리가 무언가에 갇혔다.

숨이 안 쉬어져. 차갑다.

정체 모를 힘에 공포심이 더욱 커져만 갔다.

"머리만 물에 갇힌 꼴이 웃기는구먼."

그의 말대로 차가운 물이 정사각형 모양을 이루고는 머리를 가두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손을 휘저었지만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목걸이를 언제 뺏으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됐어."

"끅... 꾸륵...."

숨을 쉬려 입을 벌려도 거품이 생길 뿐.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은하 씨. 나도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니까."

그가 쓰러져 있는 은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은하는 죽기 직전의 힘까지 끌어모아서 두툼한 뱃살을 찼다.

"큭!"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고장 난 오뚝이처럼 벌러덩 뒤집어진 부장.

내리막길에서 한 바퀴 구른 다음, 바위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일까, 머리를 가두고 있던 물이 형체를 유지 못 하고 흘러내렸다.

"컥, 콜록, 헉, 헉, 하아...!"

쓰러질 것 같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뒤뚱거리는 부장이 일어서는 순간 다음은 없다.

달렸다. 두려움과 울음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숨이 가빠오고 다리가 풀리는 듯했지만, 길을 찾기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힘을 쥐어 짜냈다.

반짝, 하고 빛나는 목걸이. 속도가 빨라졌다.

"누구,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주위를 살폈다. 점점 더 조급해지는 마음.

"김 대리님, 선배... 도와주세요...."

유일한.

시키는 일마다 척척 잘 해내던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침착하게 해결책을 찾았을까?

아니면 꼴사납게 울면서 도움을 구걸했을까.

"윽, 끅."

적어도 후자는 아니다.

그라면,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타개책을 찾았을 것이다.

"나, 나는 선배가 아니라고. 으윽."

그 사람이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본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겠지.

"뭐가 그리 기뻐서 눈물까지 흘립니까?"

그럼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기뻐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 보이네요."

"...어?"

"인기척의 주인이 당신일 줄은 몰랐어요. 재회의 기쁨은 뒤로 미뤄 두고, 대체 무슨 일입니까?"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눈매.

차갑고도 딱딱한 목소리.

큰 키.

'선, 배? 아니, 아니야.'

그의 머리카락이 흰색일 리는 없다.

그의 어깨가 저렇게 넓을 리도 없고, 두드러지는 근육이 있을 리도 없다.

달라, 다른 사람이다.

"유 주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선배? 선배예요?"

"그럼, 제가 당신 후배예요?"

몸에서 쭉 힘이 빠져나갔다.

"저, 저, 방금 죽을 뻔했어요. 살해당할 뻔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미.... 윽, 으으, 흑."

안도감에 휘청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마음속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과 피로가 밀려왔고, 기진맥진한 몸이 계속해서 떨렸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과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소매로 닦아냈다.

"어딨어요."

"네?"

"어디에 있냐고요, 당신 죽이려고 했던 사람."

한기가 느껴졌다. 은하는 덜덜 떨며 부장이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부, 부장님이에요."

일한은 머릿속의 무언가가 부서지는 걸 느꼈다.

'쓰레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일까지 저질러?'

어금니를 까득 깨물었다.

"유진아."

"네, 형."

"여기에 붙어 있어라."

"자, 잠깐만요, 형!"

다급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건너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유진. 성큼성큼 다가가 그가 뭘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몬스터가 이렇게 많다고?'

적게 잡아도 수십, 많게는 100마리 이상의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최근 며칠간 이 산을 넘어서 길드로 간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저 몬스터들은 산을 넘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모인 거겠지.

'여기까지 오려면 30분 정도 걸리려나.'

몸을 돌렸다.

"금방 돌아올게."

"가시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쾅! 하고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일한은 곳곳에 튀어나와 있는 나뭇가지를 피하며 은하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달렸다.

중간중간 불을 뿜으며 속도를 더했지만 나무가 많은 탓에 마음 놓고 능력을 쓸 수 없었다.

하나, 그런 사실보다는 다른 쪽에 신경이 기울어 있었다.

'벌써 PK가 일어나다니!'

플레이어 킬링(Player Killing).

게임 속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이런 일이 언젠가는 발생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이렇게 가까운 날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인간의 욕심과 충동을 과소평가한 모양이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

있는 거다, 이런 상황에 완벽하게 적응한 녀석들이.

PK 유저는 대체로 그런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을 죽일 만한 여유가 있는 거니까.

게임 속이 됐든 현실이 됐든, PK를 하는 존속들은 역겹기 짝이 없다.

남의 노력을 갈취하는 건 물론이고, 나아가 희생자들의 고통을 즐기니까.

유진과 은하를 데리고 곧장 길드로 향할 수 있었겠지만, PK 유저를 방치했다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끼리 세력을 만들게 되면 위험해.'

텃밭의 독초는 빠르게 뽑아야 하는 법.

'은하 씨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던 걸 보면 부장님은 물 속성 유저일 가능성이 높아.'

불과 물. 최악의 상황. 일이 수월하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응?"

화염을 뿜어 멀리 도약하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나무 한 그루 없이 휑한 장소.

발치에서 작열하는 불꽃이 개나리를 연상시키는 노란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일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새겨졌다.

찰나의 순간을 지나, 계속해서 이동했다.

조금 더 나아갔을 때.

"어라. 유 대리 아닌가?"

나무 사이를 서성이던 일한에게 떡개구리같이 생긴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자네 머리색이 왜 그렇게 됐나?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살아 있어서 다행이네."

대답 따윈 하지 않는다.

일한은 팔을 들어 신경을 집중했다.

손에서 뿜어져 나간 화염 기둥.

거의 동시에.

물의 화살이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치이익.

불과 물이 부딪히면서 중앙에서 치명적인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공중을 흐르며 시야를 가렸고, 부장의 형체는 흐릿하게 일렁였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으로 접근했어.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다.'

일한은 자세를 낮추고 신속하게 파고들었다.

"자네, 불 속성이군."

부장이 인벤토리에서 기다란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허공에 휘젓자 물의 장벽이 그를 감쌌다. 방패 계열 아이템이었다.

"이래서는 쉽게 다가오지도 못하겠지."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퍼졌다.

'역시 물 속성이었어.'

골치 아프다. 누적 피로도가 상당히 쌓인 지금, 첫날 같은 화력으로는 싸울 수 없다.

더군다나 상대는 플레이어. 인성은 짐승만도 못하지만 지능은 그렇지 않은 PK 플레이어다.

'지속 시간이 길지만 대기 시간도 긴 아이템이야.'

아이템은 어디까지나 아이템. 고유스킬에 견줄 만한 게 못 된다.

언젠가는 빈틈이 생길 것이고, 이 싸움에서 중한 건 그 빈틈을 파고드는 것이다.

"부장님."

"응?"

일단 시간을 끌자.

"몇 명이나 죽이셨습니까."

"어째서 여러 명을 죽였다고 확신하는 거지?"

그는 검지로 턱을 두드리다가 알겠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유은하와 만났군."

이제 와서 숨길 필요 없는 정보다.

"은하 씨 상태도 엉망이더군요."

"그 여자까지만 죽이려고 했는데 말이야."

어이가 없다.

"대답해 주시죠."

"응? 아아, 그래. 몇 명이나 죽였냐는 질문이었지."

부장은 양손을 들고 손가락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오면서 따라붙은 애새끼 네 명이랑 김 대리. 다들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던데? 이 막대도 김 대리한테 있던 걸세."

충혈된 눈에는 그간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자부심과 냉소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일한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든다.

아이들을 죽여 놓고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직장 부하를 죽여 놓고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능력의 아이템이 물 속성 전용이라서 다행이야."

부장의 이상한 한마디에 차올랐던 분노가 공중분해 됐다.

'물 속성 전용이라고?'

아니다. 저 아이템은 작년 새해에 모든 유저에게 지급한 다속성 아이템이다.

특정 속성만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아이템을 모든 유저에게 배포할 리가 없지 않은가.

'사용자의 속성에 따라 능력이 변하는 아이템인데, 모르는 걸 보면 엘리멘트를 시작한 지 1년도 안 됐군. 다른 사람한테서 뺏은 거야.'

재사용 대기 시간이 엄청나게 길다는 걸 알까?

'효율 엉망이라서 잘 안 쓰는 건데.'

옅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싸움, 속성 상성이 안 좋은 이 상황.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

제7화

7화

물의 장벽을 두른 부장. 그가 조금씩 다가왔다.

"자네를 죽인 다음 유은하를 쫓아가야겠어. 쳇, 거의 다 죽였던 건데."

치가 떨린다.

저런 사람의 부하였다는 게 부끄러워진다.

"아, 그렇지. 자네에게 재밌는 얘기를 해 주지."

스스로 시간을 끌어 준다니. 막을 이유는 없다.

"김 대리에게 칼을 꽂아 넣었을 때, 그 녀석이 뭐라 했는지 아나? 아이들과 유 주임은 건드리지 말라면서 내 발목을 잡더군."

그는 끌끌 혀를 찼다.

"회사에서부터 알아봤어. 사람이 너무 착해. 아무튼, 그 녀석에겐 감사하고 있다. 던전에서 내가 탈출할 시간을 벌어 줬으니까. 몬스터들한테 먹히는 소리가 얼마나 끔찍하던지."

먹혀?

"설마... 데빌 엔트의 던전에 들어간 겁니까?"

"으음,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미쳤다. 미친 게 분명하다.

플레이어를 포식하는 몬스터 데빌 엔트.

'집단성이랑 공격력 때문에 만렙 유저들도 거북해하는데.'

그런 곳에 들어갔다는 건 전원 무사히 돌아올 생각도 없었다는 거다.

"그런 흉포한 몬스터의 던전에는 뭐가 있을까 싶어서 들어갔는데 그다지 건질 것도 없더군. 뭐, 애초에 목적은 김 대리를 죽이고 아이템을 빼앗는 거였지만."

부장은 실실 웃었다.

"단둘이 들어간 던전에서 한 명만 돌아왔다고 해 봤자, 사고였다는 말 한마디면 해결되잖아? 유 주임도 순순히 믿어 줬고."

까득, 하고 이가 갈린다.

"아이들은, 아이들도 그런 식으로 죽인 겁니까?"

"큭큭, 10살짜리 애들이랑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져서 말이야. 애새끼들, 말은 더럽게 안 들어 처먹어."

들뜬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래서 식량을 구하러 흩어졌을 때 한 명씩 죽였지. 생각보다 쓸 만한 아이템을 많이 가지고 있더군."

눈앞에 있는 게 차마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짐승 그 이하의 존재. 끔찍하다. 이런 녀석과 같은 종족이라는 게.

"부장."

"응?"

낮게 깔린 안광이 짐승에게 고정되었다.

"죽여도 됩니까?"

"죽여? 큭, 크하하하하!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쾅!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다시 앞이 보였을 때, 눈에 비친 건 하늘. 그다음은 딱딱한 지면이었다.

"끄헉!"

얼굴이 지면에 강하게 부딪쳤다. 머릿속에서 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어, 어떻게, 분명.... 장벽이 있었을 텐데!"

"지속 시간 10분, 지났습니다."

"설마 그걸 처음부터 세고 있었던 건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잖습니까. 허락하셨으니, 죽입니다."

처음이었다.

이런 충동이.

김 대리. 회사에서 가장 든든한 동료였고,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 준 남자.

그를 죽인 존재를 용서할 수 없다.

이름 모를 아이들. 10살이면 유진이보다 어린 나이 아닌가.

무력한 아이들을 죽인 존재를 용서할 수 없다.

유 주임. 눈물 많은 후배지만 모든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런 사람을 처참하게 만든 존재를 용서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나까지 죽이려 했지.'

열매는 곤충이 먹고, 곤충은 쥐가 먹는다.

쥐는 뱀이 먹고, 뱀은 짐승에게 먹힌다.

그리고 그 짐승은 사냥꾼에게 사냥당한다.

그렇다면 그 사냥꾼은?

더욱 강한 사냥꾼에게 사냥당하는 거다.

일한은 부장의 몇 없는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치기를 반복했다.

"컥! 끄억! 그, 그만해!"

시궁창에서 기어 나온 쥐새끼 같던 얼굴이 두꺼비처럼 변했다.

"헉, 허억."

목덜미를 잡고는 옆으로 집어 던졌다.

"헐떡이는 꼴을 보니까, 이제야 돼지 새끼 같네."

"유, 유 대리. 이 개자식이! 죽여 버리겠어!"

부장이 손을 휘젓자, 지면에서 소량의 물이 흘러나왔다.

그 물은 뭉치고 뭉쳐서 정육면체 모양을 만든 다음, 일한의 머리를 가두었다.

"질식사나 해라!"

뒤뚱뒤뚱 일어난 부장은 일한을 피해 달렸다.

전속력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속도로 말이다.

'질식?'

어이가 없네.

'이런 기본 스킬로 죽을 리가 없잖아.'

정육면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치이익....

손에서 나오는 화염과 맞물려 빠르게 증발하는 액체.

지면을 박차고는 부장의 곁으로 이동했다.

"히, 히이익!"

턱살이 출렁거린다.

"모, 목숨만은 살려 줘! 뭐든, 원하는 건 뭐든지 줄게! 아이템? 말만 해! 다 털어 놓을게! 아니면 돈이 필요한 거야? 골드 가진 거 다 줄게!"

헛웃음이 나온다.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여 놓고는 자기가 죽을 때가 되니 목숨을 구걸해?

"그, 그래, 사람을 죽여서 화내는 거야? 다, 다시는 안 그럴게! 제, 제발 살려 줘!"

부장은 빌었다.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일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발치에서 화염이 일렁인다. 감정을 대변하듯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에 부장은 몸을 더욱 웅크렸다.

이 어찌나 비굴한 모습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살려 달라고?"

강하게 끄덕이는 부장.

"그런 호의를 바라시는 겁니까?"

한 번 더 끄덕였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잘도 지껄이네."

겁에 질린 숨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으윽······."

부장은 머리를 박은 채 인벤토리를 살폈다.

한참을 불안에 떨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야릇하게 웃었다.

'이게, 이게 있었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고는 몸을 확 쳐들었다.

"난 살 거야! 이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마, 유 대리!"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푸른색 구체.

"이걸 터트리면 일대는 물바다가 되겠지. 자네가 무슨 능력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불 속성에 상당히 치명적일 거야."

한심하다.

너무나 한심해서 저절로 비웃음이 나왔다.

"잘됐네. 애초에 여기서 죽일 생각도 없었어. 아래에서 올라오는 몬스터까지 일망타진하자."

"갑자기 뭘 중얼대는 거야?"

-쾅!

"!!!"

일한은 부장을 붙잡고 빠른 속도로 날았다.

"무, 무슨! 놔라! 놔!"

육중한 몸이 흔들거려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른 비행 끝에 착지한 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장소.

하지만 승리를 확신한 부장에게 그런 변화는 대수가 아니었다.

"이걸 터뜨려서 자네가 무력해지면, 이 검으로 끝을 내 주지."

그가 품속에서 검은색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걸 본 순간, 일한의 몸이 굳었다.

'저 사람이 저걸 왜?'

손에 들려 있는 단검은 분명 '그 녀석'의 물건이다.

그런데 어째서 부장이 가지고 있는 거지?

녀석이 접촉해 온 건가?

벌써 움직였다고?

말도 안 된다. 그 녀석의 검을 가지고 있다니.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녀석이 근처에서 활동했다.

'아무래도 길드에 가서 할 일이 많아진 것 같네.'

지금은 이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죽어라, 유 대리! 유일한!"

그가 푸른 구체를 지면에 던지는 순간,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최대한 빠르게, 전속력을 다해서 난다. 발이 타버릴 것처럼 뜨겁지만 참아야만 한다.

유진과 유 주임이 보이자 목청껏 외쳤다.

"나트륨! 물!"

이를 들은 유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는 은하의 옷자락을 강하게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제가 신호하면 형 꽉 잡아요. 폭발에 휘말리기 싫으면."

"폭발이라니──."

"지금!"

말을 마치지도 못한 은하는 얼떨결에 빠른 속도로 날아온 일한의 팔을 붙잡았다.

바로 아래에서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가 혀를 뻗었지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꺄아아아악!"

"형! 더 빨리!"

"하고 있어!"

세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 상공.

잠시 후.

-콰과과과광!!!!!

엄청난 폭발과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큭!"

가능한 한 멀리, 바르게 날아왔지만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상태 창을 보지 않아도 피로도가 쭉쭉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버텨라, 버텨!'

정신이 아릿해진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띠링.

[경고: 누적 피로도 99]

귓가에 울리는 알람음. 경고라는 문장에 살이 떨렸다.

'안 돼, 안 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공중이라고!'

-쾅, 콰광!

산에서 한 번 더 폭발음이 들려왔다.

엄청난 돌풍이 일한을 덮쳤다.

"크윽!"

"서, 선배! 괜찮아요?"

"안 괜찮으니까 말 걸지 마!"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의 화력이 급격하게 감소했다.

"혀, 형. 이거 착지하는 거죠?"

"추락하는 거야!!!!"

고도가 낮아지면서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할퀴었다.

─랄까. 바로 아래가 지면이었다.

"어라?"

쿵! 도 아니고, 툭, 하고 떨어졌다.

"추락이라면서요."

"착지였네."

태클 걸 기력도 없던 유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벌러덩 누웠다.

"사, 살았다."

"살았네."

"살았어요."

일한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곳을 보았다.

더 이상 산이라 부를 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산 한쪽 면을 가득 채웠던 몬스터가 이제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 위력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던 것도 아니다.

부장이 그 구체를 사용하면 완전히 젖을 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승산 있는 싸움을 기대하긴 힘들다.

그와 싸워서 이긴다고 해도 남은 체력으로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다.

"형,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예요?"

"네가 말했었잖아. 빨간색은 리튬, 노란색은 나트륨이라고. 그리고 나트륨과 물이 만났을 때 폭발이 일어난다고도 했었지."

유진이의 동공이 깊어졌다.

"바로 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이, 내 기억력이 그 정도는 아니야."

이제야 이곳에 비가 오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일이 일어나니까.'

-엘리멘트 7대 불가사의 그 세 번째, 물 속성 마법사들이 돌연사하는 광물산-의 비밀이 풀렸다.

'돌연사가 아니라 폭사였네.'

게임 내에서도 이런 고증을 살릴 줄이야.

나트륨과 물이 만나서 폭발한다는 걸 알고 있던 사람들도 이런 디테일을 살렸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겠지.

"부장님, 죽었겠죠."

은하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저런 폭발에서 살아남았을 리는 없겠죠."

직접 죽인 건 아니다. 그를 태워 버리지도 않았고, 그의 목에 칼을 꽂아 넣은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스스로가 나트륨 땅덩이 위에 물을 쏟았을 뿐이다.

자살.

그래, 이건 자살이다. 부장의 자살인 거다.

'그래도 뭔가 찝찝하네.'

분명 가치 없는 쓰레기임에도, 같은 종이어서일까. 사람의 죽음이란 게 썩 유쾌하지 않다.

'그것보다, 부장이 가지고 있던 단검.'

엘리멘트가 현실화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을 확률은 없다.

'그 녀석'은 뭘 위해 부장에게 접근한 걸까.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변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지금은 길드에 도착하는 게 먼저다.

"다들 일어나. 별로 안 남았으니까."

두 사람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좀비처럼 걷기 시작하고 10분쯤 지났을까. 거대한 건물의 앞에 도착했다.

가운데에 커다란 공원을 둔 길드는 학교처럼도 보였다.

입구에는 금발의 여성이 서 있었다. 붉은 옷을 보면 길드 직원인 듯하다. 아마 NPC겠지.

"길드 코퀴토스에 어서 오······! 잠깐, 괜찮으세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불러오겠다며 허둥지둥 내부로 달려갔다.

몇 분 뒤 다시 돌아온 그녀는 다른 동료들을 이끌고 있었다.

"아까 폭발과 관련 있는 건가?"

"잘 모르겠어."

"우리 길드 소속이야?"

"그런 것보다 안전이 우선이야."

동료들의 속닥거림의 무시하고는 청량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부상자는 저쪽 보라색 머리카락을 한 직원을 따라가 주세요! 그런데 으음, 전원 부상자인 것 같으니까 함께 이동하시죠."

인솔을 시작한 직원들. 체계가 꽤 잘 잡혀 있었다.

앞장서는 유진과 은하. 그들을 따라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의식이 몽롱해진다.

몸에서 힘이 빠지며 시야가 흔들렸다.

'잠깐, 뭐야. 나 쓰러지는 건가?'

일어나 보려 했지만, 몸이 납덩이로 변하기라도 한 건지 엄청나게 무거웠다.

"어? 선배? 선배! 왜 그래요?!"

"형! 눈 좀 떠요!"

머리가 지잉지잉 울렸다.

"어이! 사람이 쓰러졌다. 구급반을 불러! 빨리!"

"벌써 부르러 갔어!"

와, 뭐야 이거.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아.

-띠링.

[누적 피로도가 100에 도달했습니다. 페널티를 적용합니다.]

제8화

8화

몽롱한 의식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달콤하고 쌉싸름한 냄새가 코를 간질인다.

뭐랄까, 한의원에서 날 것 같은 냄새. 하지만 한약보다는 말린 과일에 가까운 향이었다.

"부상자는 이쪽에 눕혀!"

귀를 쑤시는 추상같은 목소리, 코에 몰렸던 신경이 귀로 집중되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어떻게 오는 사람마다 이렇게 심각해?"

"으아아! 바쁘다, 바빠."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일한은 살며시 눈꺼풀을 밀어냈다.

-띠링.

[페널티 '슬립'이 종료되었습니다.]

[누적 피로도가 100에서 30으로 감소합니다.]

'페널티가 슬립이었던 건가.'

과로와 비슷한 개념의 시스템인 모양.

상상처럼 엄청난 디메리트는 아니지만 전투라든지 위험한 상황에서 적용되면 치명적일 것이다.

'앞으로는 적당히 쉬면서 움직여야겠네.'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최근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야?'

무거운 상체를 겨우겨우 일으켰다.

양옆과 앞쪽에 쳐져 있는 순백의 커튼.

뒤에 있는 작은 창문으로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딱딱한 침대 위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른손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링거 줄을 따라 올라가는 시선.

그 끝에 닿은 건 붉은 액체가 아주 약간 남아 있는 유리병이었다.

피보다는 분홍색에 가까운 그 액체만이, 일한이 있는 공간에서 선명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저.... 캑, 콜록."

누군가를 불러 보려 했지만 메마른 목에서 나오는 건 잔기침뿐이었다.

잠결에 바늘이라도 삼킨 건지 혀끝부터 목구멍 안쪽까지 따가웠다.

어깨도, 다른 곳들도 전부 크고 작은 통증이 있었다.

일한은 찡그린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응?"

침대 옆의 작은 서랍장. 그 위에는 작은 종이학이 한 마리 있었다. 날개에는 검은색으로 '선배가 무사하길'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머릿속에 한 명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유 주임.'

유은하. 그녀가 왔다 간 거다.

이런 걸 만들 기력이 있는 걸 보면 멀쩡한 것 같다.

"다른 길드 사람들이 많이 오네."

커튼 밖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다들 조금씩은 다쳐서 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까 환자분들이 NPC 어쩌고저쩌고하던데."

"그게 뭔데?"

"몰라, 우리보고 그러던데?"

두 여성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이번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광물산에 몰려 있던 몬스터가 전멸했다는 거 들었어?"

"알아, 알아. 들었어. 폭발했다던데?"

"뭐 때문에 그런 건진 몰라도 몬스터가 없어져서 다행이다. 무서웠는데."

"야야, 원장님 오신다. 이럴 때가 아니야. D14에서 약재 좀 가져다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튼 열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동시에 또각또각 울리는 발소리.

곧이어.

-촤라락.

일한의 정면에 있는 커튼이 신랄하게 젖혀졌다.

"어머, 일어났네."

웨이브 진 청록색 머리카락.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 왜인지 모르게 기분 나쁜 미소.

헐렁헐렁한 가운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 여자는 느긋한 걸음으로 걸어와서는 이마와 목을 차례대로 짚었다.

"열없고, 맥박 정상이네."

오랜만에 보는 NPC다.

'50레벨쯤에 마지막으로 봤던가.'

에피오네.

코퀴토스 길드의 병원장이자, 잘 뽑힌 디자인으로 많은 유저들의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다.

"당신,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어."

"네?"

이틀? 하루도 아니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앞으로 페널티는 조심해야겠네.'

이틀이나 잠들어 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자잘한 상처들은 다 치료해 뒀으니까 신경 쓸 거 없어."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에피오네는 뱀 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 쪽은 꽤 쇼크를 받은 것 같았지만 다음 날부터 팔팔해서 퇴원시켰어. 남자애 쪽도 멀쩡해서 오늘 아침에 퇴원시켰고."

그녀는 창문을 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제일 심각해. 과로에, 영양 밸런스도 엉망이고 몸에 성한 곳이 없어. 관절도 여기저기 문제가 많고."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서늘한 공기가 불어왔다.

"그런데 최근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많이 온단 말이지. 심지어 멀리 떨어진 다른 길드 사람들도 오고 있어. 평소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상하지 않아?"

얼굴이 가깝다.

붉은 눈은 뭔가 답이 될 만한 것을 내놓으라는 듯이 강압적인 기운을 뿜어 댔다.

침착하지 못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목소리만 들어 보면 여유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지금의 상황에 꽤 당황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들도 이상해. 우릴 보고 갑자기 NPC라면서 놀라질 않나, 무서워하질 않나. 쳇, 무서워도 이쪽이 더 무섭다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엘리멘트의 NPC들은 무슨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시키고 싶지는 않다. 설명해도 안 믿을 테니까.

"저, 저기이이."

백금색 머리카락의 간호사가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침대 옆에 서 있는 에피오네에게 곤혹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뭔데?"

"저, 저쪽 환자분께서 난동을 피우셔서요."

"하아, 또 그 NPC인가 뭔가야?"

"네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눈꺼풀에 살짝 가려졌다.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서랍장을 발로 찼다.

"쳇. 대체 뭐냐고, 그게."

백금발의 간호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환자한테 D1 약재로 차를 타 줘. 거긴 내가 가 볼게."

"앗! 넵."

간호사는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달려갔다.

"병실에서 뛰지 마!"

"히익! 죄송합니다!"

"당신은 아직 봐야 할 곳이 많으니까 여기에 있어."

일한은 대답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다 눈치 보이네.'

폐에 한가득 갇혀 있던 공기를 뱉어 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보이는 건 우중충한 회백색 천장.

'전혀 모르는 언어지만 대화는 자연스럽게 가능해.'

커튼 사이로 간호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NPC가 있다.'

그녀들이 정해진 대사가 아닌 말을 하고, 진짜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NPC가 있다는 사실.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 솔라도 있을 것이다.

'그 녀석이 준 열쇠는 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

인벤토리의 첫 번째 칸을 채우고 있는 은색 열쇠.

중요한 물건 같기는 하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었기에 용도를 모르겠다.

이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알아낼 수 있으리라.

'해야 할 일은 많지만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우선 몸.

육체가 재구축되면서 근육이 붙었고 민첩성과 근력이 강화됐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월드를 탐험할수록, 다른 플레이어를 만날수록 전투를 하는 일은 빈번해질 게 뻔하다.

더 이상 손가락으로 하는 게임이 아닌 육체로 하는 게임.

한마디로, 운동을 해야 한다.

'길드에 체력 단련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육체뿐만이 아니다. 무기도 있어야 한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발차기를 하는 걸로는 단조로운 동작밖에 할 수 없어.'

고유스킬 '꺼지지 않는 불꽃'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무기와 아이템이 필요하다.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 던전 클리어는 필수적인 요소.

'퇴원하면 던전을 집중적으로 돌아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게 한 가지 있다.

쭉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녀석. 찝찝함의 근원.

바로 부장이 가지고 있던 단검.

그 물건의 원래 주인은 정식 공개도 되지 않은 캐릭터다.

그런데 어째서 그 캐릭터가 벌써 활동을 하는 걸까. 어째서 여기까지 온 걸까.

'CBT 때도 한 번밖에 못 본 캐릭턴데.'

몇 달 전에 열렸던 대규모 업데이트의 클로즈드 베타 테스트(Closed Beta Test).

굉장히 소규모로 진행됐었다.

약 열 명을 추첨하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당첨됐고, 새롭게 공개된 맵을 탐험했다.

다른 맵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암흑지대.

검은 단검의 주인은 분명 그곳에 있었다. 그것도 쉽게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에.

테스트를 실시할 때 공개된 지역이 너무나 작았고, NPC들도 거의 구현되지 않아서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검은 단검을 든 누더기의 NPC. 그것만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왜 정식 출시도 되지 않은 캐릭터의 무기가 부장에게 있었을까.'

조금 걸리는 게 있다.

CBT 당시 우연히 그 캐릭터를 찾았을 때, 그것은 「뭐든지 이루어 주겠다.」라는 대사를 했다.

호기심에 다가가 봤지만 아직 개발되지 않은 건지 특별한 이벤트는 없었다.

이제는 아니라면?

CBT 내용마저 현실화하였다면?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군.'

CBT에서 공개된 건 대규모 업데이트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만약 업데이트 내용마저 현실이 된다면 정보의 격차로 난항을 겪을지도 모른다.

업데이트 날짜는 언제였지?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 아마 1년 후일 거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암흑지대가 실체화되는 건 업데이트 날.

'그 맵에서는 게임의 현실화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으려나.'

너무 생각을 많이 한 탓일까, 두통이 슬금슬금 몰려왔다.

"후우. 걱정만 해서 문제가 해결될 일은 없으니까 이렇게 힘 빼 봐야 소용없겠지."

일하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서랍들. 아무래도 약재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아까 병원장의 말을 듣고 후다닥, 달려간 간호사는 까치발을 선 채로 팔을 쭉 뻗어 약재를 꺼내고 있었다.

닿을락 말락 하는 손.

바들바들 떠는 게 애처로워 보여서 누군가가 좀 도와줬으면 싶다.

'지쳤나.'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쭉 뻗어 위에 있는 서랍 손잡이에 검지를 걸친다.

찰랑거리는 백금색 머리카락. 아슬아슬하게 서랍을 열었다.

손잡이에 손가락이 겨우 걸칠 정도인데 안에 든 걸 꺼낼 수 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녀가 옆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간호사.

손에는 기다란 사다리가 들려 있었다.

'처음부터 가져왔으면 됐잖아.'

뭘 위해 몸을 쭉쭉 늘렸던 걸까.

일한의 시선이 텅 빈 유리병에 멈춰 섰다.

이미 분홍색 약이 보이지 않게 된 건 오래.

다른 간호사가 와서 조처를 해 줄 법도 한데 그렇기는커녕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바닥에 울리는 수많은 발소리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

슬슬 다른 유저들도 길드에 도착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부는 게임으로 변한 현실을 부정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고,

일부는 NPC들을 보고 당황했으며,

아주 소수는 꿈만 같은 세상을 마음에 들어 했다.

바로 저 사람처럼.

"에, 에피오네다. 진짜 에피오네야! 이럴 수가. 화면 너머로만 보던 캐릭터를 실제로 만나다니!"

전신에 붕대를 감은 남성이 병원장에게 달려들었다.

"드디어 만났어!"

"당신 중상이잖아!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에피오네가 쓱 피하자, 남성은 딱딱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 아파. 꿈이 아니야! 최애캐를 보다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어이어이,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는 거야. 누가 이 사람 좀 침대에 묶어 놔!"

네 명의 간호사가 몰려오더니 황홀한 표정의 남성을 질질 끌고 갔다.

"죄, 죄송해요. 병원이 소란스럽네요오."

바로 옆에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백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차, 차, 드시고 조금 쉬세요."

그녀는 찻잔을 들고 있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러다가는 부어 버릴 것 같았기에 서둘러 잔을 받아 들었다.

"휴, 오늘은 아, 안 쏟았다."

"실제로 부은 적 있구나...."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내리니 검은 수면에 비친 천장이 보인다.

찻잔 안에는 커피처럼 보이는 액체와 티백에 담긴 여러 약재들이 있었다.

커피와 비슷한 향. 하지만 커피 특유의 딱딱한 향기보다는 그을린 버터처럼 훨씬 부드러운 향이었다.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걸 천천히 한 모금 홀짝였다.

약재 특유의 씁쓸한 맛.

뒤로는 소금 향과, 그에 딸린 짠맛을 뒤덮는 설탕의 단맛.

까끌까끌한 가루만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뒤늦게 참가한 버터의 부드러움.

마지막으로 끝맛을 장식하는 미세한 시나몬 향까지.

생각했다. 지금까지 마셔 본 차 중에 최고라고.

'배고픈데.'

목구멍으로 뭐가 들어가니 배가 저릿해진다. 그야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본 걸까. 간호사는 움찔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빵도 가져다드릴까요? 그, 약재가 들어간 빵인데 마, 맛있을 거예요, 아마."

"아마?"

"마, 마마, 맛있어요!"

이렇게 불안한 단언은 처음이다. 아무튼, 뭐가 됐든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었기에 빵을 부탁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원장님께 허락받고 가져올게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또 다른 누군가가 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음, 수액 비었네."

머리카락은 다홍색. 전형적인 NPC 같은 외모였다.

능수능란하게 바늘을 빼고 소독약을 발라 줬다.

"아이리스가 뭐 잘못한 거 없죠?"

"아이리스? 아이리스라면...."

"아까 그 금발이요."

자기들끼리도 머리카락 색으로 구분하는 건가.

"어리바리해서 항상 문제를 일으키거든요."

"아직은 괜찮습니다."

여러모로 불안하긴 하지만.

"웬일이래. 평소 같았으면 차 한번 쏟고 원장님께 혼나야 되는데."

팽 하고 돌아서니 대화는 종료.

바람처럼 다가와서는 순식간에 떠나갔다.

"오, 오래 기다리셨죠!"

혼자 있을 틈 따윈 없었다. 아이리스가 곧바로 돌아왔다.

"두, 두 개 가지고 왔어요."

그녀는 접시를 내밀었다.

손바닥 정도 사이즈의 원기둥 빵. 롤케이크 축소판 같다.

달콤하고도 씁쓸한 냄새.

거기에 섞여 들어와 코의 점막을 간질이는 고소한 향기.

더하여 약초의 단내와는 확실히 구분되는 설탕의 냄새.

밀가루의 거친 향과 버터의 부드러운 향이 절묘하게 섞이며 뇌 내에 은은한 갈색빛 그림을 그렸다.

'녹을 것 같다.'

맛있을 뿐만 아니라 따뜻하다.

일주일간 통조림만 먹다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걸 먹는 기분이다.

'이 정도면 일부러 다쳐서라도 병원에 오고 싶은데.'

입은 열심히 빵 먹는 중.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간호사 NPC 아이리스. 분명....'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병실.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 무슨 일일까요?"

불안한 듯 흔들리는 동공이 커튼으로 향했다. 그것을 살짝 젖히자.

"꺄악!"

바로 뒤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죄, 죄송해요!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아아."

각진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는 아이리스에게 시선을 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일한에게 이동한다.

아래에서 위까지 두어 번 정도 훑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길드장께서 부르십니다."

제9화

9화

"에, 어? 기, 길드장께서? 아, 안 돼요!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할 때라구요!"

아이리스의 동공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쯧."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남성.

그의 시선이 다시 일한에게로 향했다.

몇 초간 이어진 침묵. 남성이 재차 입을 열었다.

"못 들으신듯하니 다시 말씀드리죠. 길드장께서──."

"아, 그 얘긴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등을 기대고는 말했다.

"우선 자기가 누군지부터 밝혀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남성의 이마에 잔주름이 생겼다.

"크흠. 부길드장 대행, 이진우입니다."

대행? 그럼 진짜 부길드장은 아직 길드에 없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저 어딘가에서 본 얼굴이다.

'뉴스에서 봤었나.'

대기업을 물려받은 인물이라며 언론에서 떠들어 댔었지. 이름도 똑같은 걸 보니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으려나. 이젠 대기업이고 뭐고 무용지물이니까.

"유일한입니다."

"예. 길드 랭크가 F더군요."

찌릿. 따가운 시선이 박혔다.

'그야 길드에 별로 있지 않았으니까.'

몇 년 동안 길드전을 안 했는데 길드 랭크가 높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길드장께서 어째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말끝을 흐렸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아이리스는 안정을 취해야 된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리고 있지만, 길드장의 호출을 무시할 수는 없다.

뭔가 용건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게 어떤 내용이든, 무시하는 것은 썩 좋은 생각이 아니다.

"잠시 갔다 올게요."

"으, 아아, 으으. 나, 난 몰라...."

마임을 하듯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묘한 동정심을 유발한다.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침 길드도 좀 둘러보고 싶고.'

진우는 일한이 침대를 빠져나오는 걸 보고 몸을 돌렸다.

어깨에 걸쳐 있는 짧은 망토. 흰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코퀴토스의 문양의 그려져 있었다.

부길드장임을 증명해 주는 물건.

병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게 당연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의료용품을 담은 카트가 뒤로 쌩, 지나갔다.

"조심하세요~."

이번에는 차와 빵을 든 간호사들이 양옆을 지나쳐 갔다.

침대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분주한 병원.

원장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선 게 이해된다.

"칫, 언제까지 우리 길드로 사람이 몰리려는지."

이진우의 뒤를 쫓아가다가 물었다.

"세상이 여섯 개의 월드로 나눠진 겁니까?"

침묵.

무시하는 건가. 괜히 무안해진다.

"하아."

1분도 전에 했던 질문의 대답이 한숨을 따라 튀어나왔다.

"인터넷이 끊기기 직전에 뉴스를 본 이들의 말로는, 세계 곳곳에 엘리멘트의 조형물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역시.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뒤집혔다.

길드가 없는 지역의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지옥만큼 열악한 환경은 아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무사한 사람이 많진 않겠지.

"세상에 대해 아는 건 그것뿐. 여섯 개의 월드로 나누어진 건지 아닌지는 확답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부길드장께서 날아가셨으니 머지않아 알 수 있겠죠."

"날아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우의 걸음이 멈췄다.

그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침침하게 내려앉은 안광. 거기에는 왜인지 모를 우월감 비슷한 것이 담겨 있었다.

"그는 고유스킬 보유자이니 말입니다."

이번 부길드장이 고유스킬을?

전대만 해도 돈빨로 부길드장 해 먹은 사람이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

길드 활동을 하지 않은 폐해라 해야 할까.

여러 맵의 특성은 잘 알아도 현재의 길드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애초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만날 기회도 적고.

"뭘 그리 놀란 눈을 하십니까. 현대 길드장, 부길드장 모두 고유스킬을 가진 건 알고 계셨잖습니까."

몰랐는데.

"애초에 특별한 것이 없었으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었겠죠."

하긴, 맞는 말이다. 길드장과 부길드장은 정해진 주기를 따라 신청한 참가자들끼리의 결투로 진행되니까.

일대일 토너먼트식 대결에서 승리하려면 특별한 요소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나 다를 바가 없다.

그게 재력으로 얻은 아이템이 됐든, 고유스킬이 됐든 말이다.

또각또각.

적막이 찾아오고 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 위에 발소리만이 울린다.

일한은 주위를 살폈다.

곳곳에 배치된 장식품들은 불 속성 길드답지 않게 얼음과 물을 활용한 것들이었다.

어떤 곳은 벽 자체가 얼음이었다.

'저번 사고 때문에 이렇게 바꿨다 했었나.'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서 알고 있다.

불 속성 유저들끼리의 싸움. 길드 내에서 화구와 브레스가 오갔다지.

엘리멘트는 워낙 현실적인 게임이라 목조 건물 내에서 그런 짓을 해 버리면 전부 타 버리고 만다.

이는 길드도 예외가 아니다.

부지만 남기고 완벽하게 사라진 불 속성 길드.

이름하여 '코퀴토스 길드 증발 사건'. 길드원들에게 기부받은 돈으로 재건했다지, 아마.

주범 둘이 강퇴당한 건 물론이고 다른 길드의 비웃음을 산 사건이다.

이 얼음과 물 인테리어는 길드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지 않길 바라는 길드장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으리라.

눈물겹다.

'왜 이렇게 큰 거야.'

10분은 넘게 걸은 것 같은데 진우의 걸음이 멈출 기미가 안 보인다.

병원 동과 이어져 있는 본 건물.

지상 7층과 지하 3층으로 이루어진 대형 건물이다.

웬만한 고등학교를 능가하는 수준.

뭐, 큰 것은 좋지만 왜 항상 높은 사람은 최상층에 있는 걸까.

"이제 계단만 오르면 됩니다."

이후 엄청나게 걸었다.

'여기가 길드장이 있는 곳인가.'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눈앞에 있는 것은 짧은 복도.

진우가 따라오라는 듯 눈길을 보냈다.

그를 따라 직진 후 우회전하자, 드디어 보이는 문.

광택이 나는 고급스러운 목조 문이었다. 물론 군데군데 얼음 장식품이 붙어 있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인테리어 얼음은 안 녹는 걸까.'

-똑똑.

"누구인가?"

문 너머로 들려온 중저음의 목소리.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거친 음성이었다.

"이진우입니다."

"들어오도록."

"예."

이진우가 문을 열자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일한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호오, 드디어 왔군."

감탄 섞인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는 일한.

방 안의 풍경은 호화라는 말에 걸맞은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중앙의 기다란 테이블과 양옆에 자리 잡은 가죽 소파.

벽을 메운 서가에는 두꺼운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어디 그뿐인가?

테이블 너머에는 커다란 책상이 하나 있었고, 그 위는 이런저런 물건들로 가득했다.

'눈부셔.'

눈을 얇게 떴다.

정면에 있는 벽은 온통 유리로 되어 있었기에 밖에서 날아드는 햇빛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있었다.

"아, 너무 눈부신가? 이거 이거, 항상 등지고 있어서 배려하지 못했군."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누군가가 몸을 일으키자 의자에서 끼익, 하고 소리가 났다.

벽 쪽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위에서 내려오는 블라인드.

머지않아 눈 부신 태양이 가려졌다.

그제야 눈을 바로 뜰 수 있었다. 그리고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길드 코퀴토스의 최고 권력자이자 길드 랭크 S의 플레이어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는, 시간에 의해 회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기른 멋진 남성이었다.

사파이어 같은 눈은 살아온 세월을 역행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반짝였다.

그의 외모는 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냈지만, 의외였다.

'더 젊은 사람일 줄 알았는데.'

눈앞의 남자는 못 해도 50대 중반.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달랐다.

이런 생각이 간파당하기라도 한 걸까. 길드장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어서 놀랐겠지.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진 말게나. 게임을 취미 삼았던 사람일 뿐이니까. 그보다 우선 앉게."

소파에 자리 잡은 그는 맞은편을 가리켰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음, 아픈 사람에게 이 높은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큰 부상도 아니니까요."

길드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몸 상태는 자기가 판단하면 안 돼. 용건만 말하지."

꿀꺽. 과연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광물산의 폭발."

일한의 눈이 얇아졌다.

"자네가, 아니 자네들이 길드에 도착한 시간을 따졌을 때 폭발하는 타이밍과 맞아떨어져. 그 폭발이 우연은 아니었을 게지."

자네들이라니. 유진과 유 주임에 대한 것도 아는 건가.

설마 벌써 만났었나?

"산을 넘는 도중에 폭발했거나, 넘은 직후에 폭발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아. 뭔가 아는 게 있나?"

어떻게 할까.

숨길까?

길드장의 눈을 바라봤다.

순간 마음조차 꿰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내뿜는 기운은 가히 압도적이다.

한번 숨기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애초에 유진이와 유 주임에 대해 아는 걸 보면 벌써 접근해서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폭발의 원인은 나트륨과 물의 반응 같더군."

결정타다.

PK. 그래, 지금은 플레이어 킬링에 초점을 맞춰서 대화를 주도해야 할 때다.

무작정 숨기려는 순간 페이스가 말릴 게 분명하다.

"PK."

"음?"

길드장뿐만 아니라 진우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서렸다.

"물 속성 유저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이미 사람들을 죽인."

몸을 앞으로 내빼는 길드장.

"마주쳤나 보군."

"네, 제 직장 후배를 죽이기 직전까지 갔더군요."

"그래서 반대로 죽인 건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혼자 자살했을 뿐이지."

푸른 동공이 흥미롭다는 듯 일한에게 고정되었다.

"자살이라니?"

"상대방은 광물산의 윗부분에 나트륨이 깔려 있던 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거의 실성한 상태로 워터밤을 터트렸고요."

"물 속성 폭탄 아이템...."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

그 아이템의 위력이라면 나트륨이 깔린 지면을 뒤덮을 정도이고, 두 물질이 반응하며 엄청난 폭발을 만들어 냈을 테니까.

"한데, 그 폭발에서 용케 살아남았군."

산 절반을 없앨 정도의 위력이었다. 과연 어떻게 벗어났단 말인가?

'고유스킬에 대한 걸 말할까?'

아니, 혹시 모른다. 정보의 격차야말로 힘.

더하여 고유스킬이 있다는 걸 말했다간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될 게 뻔하다.

수많은 시선이 앞길에 좋은 영향만 끼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럴듯한 게 있을까?'

실제로는 1초가 흘렀지만 일한의 머릿속에선 수백 가지 상황이 스쳤다.

"아이템. 제 후배가 고속질주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걸이 형태죠."

"그렇구먼."

고속질주라. 여자와 실제로 만났을 때 목에 걸고 있긴 했었다.

상급 아이템이니까 잘만 사용하면 폭발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 여자 혼자 두 사람을 챙길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 여자는 게임을 별로 해 본 것 같지도 않았는데.

"제가 잠시 빌려서 두 사람을 데리고 달렸습니다."

길드장의 사고를 꿰뚫은 일한이 선수를 쳤다.

"호오. 굉장히 침착하고 현명한 대처일세."

두 눈으로 일한을 스캔했다.

적당히 붙은 근육을 보면 아예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황해 봤자 해결되는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자네 같은 사람이 우리 길드에 있어서 다행이야. PK 유저에 대해서는 앞으로 대책을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는 등을 뒤로 빼더니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추궁하듯 말해서 미안하네. 실은 이런 대화를 위해 부른 게 아니야. 아니, 진위 확인을 부른 건 맞지만."

"네?"

"아무튼 산의 폭발은 자네들의 행동으로 발생한 것."

또 무슨 얘길 꺼내시려고. 불안하네.

"길드 코퀴토스를 대표해서 감사한다."

길드장은 허리를 숙였다.

"감사요?"

끄덕이고는.

"실은 산에 몰린 몬스터 때문에 비상 상황이었어. 수백 마리씩이나 모이면 엄청난 위협이니까 말일세. 산을 넘어 길드로 오는 사람들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고."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길드원들을 소집해 레이드를 결행할 예정이었다네. 분명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겠지."

그런데.

"자네가 한 번에 해결한 거야. 그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고 일망타진했다는 말일세."

약간 흥분했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한다."

눈앞에서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는 권위자. 일한은 잠시 당황한 상태로 있다가 목소리를 작게 죽이며 말했다.

"저는 제가 살기 위한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자네도 살고, 모두가 살았지."

어깨를 들썩일 뿐, 딱히 더 할 말은 없다.

길드장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무언가를 꺼냈다.

"길드의 6층 방 열쇠일세. 자네와 함께 온 아이, 둘이 쓰게 될 거야."

6층. 비틀어 올라갈 뻔한 입꼬리를 억지로 고정했다.

"이런 최고급 방을 받아도 되는 겁니까?"

"자네 같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받겠나."

그는 일한의 손에 억지로 열쇠를 쑤셔 넣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오게."

-콰앙!

나름 감동적인 순간에 거칠게 열린 문.

일한도, 길드장도. 진우도 모두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 환자를 데려간 게!!!"

청록색 머리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 헐렁한 가운.

병원장 에피오네였다.

"길드장 당신이야?!"

그녀는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다가왔다.

"미안하네."

"미안이고 나발이고 내 환자는 내가 관리해!"

벽에 기대서 듣고 있던 이진우가 혀를 끌끌 찼다.

"길드장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하여간 당신들은 여러모로 예의가 부족합니다. 높은 사람을 공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이고, X랄하네."

"뭣...? 지, 지...."

에피오네는 길드장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환자 상태는 내가 판단해. 다음부터 이렇게 함부로 내 환자를 데려갔다간 안 참아. 아니, 못 참아. 후회할 정도로 깡그리 엎어 버릴 거야."

그녀는 씩씩거리면서 일한의 팔목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이런, 이런. 나중에 찾아가서 사과라도 해야겠군.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길드장은 자기가 한 말에 흠칫 놀랐다.

"벌써 이런 생활에 녹아들어 버린 건가. 열흘밖에 안 됐거늘."

굳게 닫힌 문으로 향한 시선.

표정이 한층 근엄해졌다.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내 고유스킬이 뭔지 기억하나?"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발화점(發火點)을 볼 수 있는 능력 아닙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닌가. 불이 났던 곳, 더 나아가 불이 날 곳을 인지할 수 있지. 때문인지는 몰라도 눈이 파랗게 변해 버렸고."

진우가 재촉하듯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저 남자에게서 보였네. 발화점이."

잔뜩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풀렸다. 김샜다는 표정을 짓고는 입을 연다.

"그런 건 불 속성 공격 스킬을 가진 모든 사람의 손에서 보이시잖습니까."

길드장의 입술이 순간 들썩였다.

그는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이 아니라 방금 막 준비한 멘트를 내뱉었다.

"허허, 그렇지. 내가 잠시 착각했나 보군."

깍지를 낀 채 팔꿈치를 책상 위에 올렸다. 양손에 가려진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아니, 착각일 리가 없다. 발화점은 손과 발.'

발에서 불을 뿜는 기본스킬 따위는 없다. 또한, 일한의 발화점은 아이템 이용으로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유스킬 보유자.'

확신을 머금은 채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눈여겨봐야겠군.'

제10화

10화